chapter 16 : 반려
잠깐 눈을 붙였다 뗐을 때 눈앞에는 여전히 철창이 있었다. 나를 깨운 것은 철컹철컹, 유치장 문을 여는 소리였다. 나는 흐려졌던 정신을 바짝 세워 문 쪽을 돌아보았다.
정복 경찰관이 내가 앉은 자리 옆으로 술에 취한 남자 한 명을 새로 들여보냈다. 경찰과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제대로 듣지도 않을 말을 버럭버럭 쏟아내기 시작했다.
“이봐요, 전 진짜 아니라니까요! 아저씨들 지금 엉뚱한 사람 가둬 놓으신 거예요.”
“…….”
“씨발, 다 걔가 한 일이라고요. 아까 가져간 제 가방에 USB가 있다니까요. 그거 한 번만 봐 주세요. 거기 증거가 다 있을 겁니다.”
그 안에 무엇이 들었는지 확인해 보지도 않았으면서, 나는 아버지의 유품 상자에 들어 있던 USB를 들먹이며 악을 써 댔다.
경찰관은 내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야간근무에 피로해진 듯 시큰둥한 얼굴로 제가 끌고 온 취객을 유치장 안에 앉혀 놓고 나가려고 했다. 다급해진 나는 다른 핑계를 생각해 냈다.
“…사, 상처. 상처도 아파요. 이거, 덧나기라도 하면 책임질 겁니까?”
붕대에 감긴 팔을 휘두르자, 그는 한숨을 쉬며 유치장 밖 어딘가로 향했다. 열쇠를 가지고 와 꺼내 주길 바랐지만, 그가 가져온 것은 약과 거즈 뭉치였다. 그는 적선이라도 하는 태도로 창살 틈으로 그것들을 던져 넣었다.
“서이한 씨. 소리 지르시는 거 보니 팔팔하신 것 같은데, 혼자서 처치할 수 있죠? 조용히 좀 계세요. 더 이상 소란 피우면 공무집행방해죄로도 입건될 수 있습니다.”
그는 싸늘한 태도로 쏘아붙이고는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가 버렸다.
“씨발…!”
나는 욕을 씹어 뱉으며 거즈 뭉치를 바닥에 패대기쳤다. 방금 유치장에 들어온 남자는 술에 벌겋게 달아오른 눈으로 나를 흘겨보았다. 취객의 눈으로 보기에도 내가 수상쩍긴 했을 거다. 다 찢어지고 피로 얼룩진 티셔츠를 입고, 곳곳에 붕대를 감고 있는 몰골이었으니까.
마음 같아서는 시비라도 걸고 싶지만 여기서 말썽을 일으켰다간 정말 일이 커질 거다. 나는 한숨을 쉬며 눅눅한 콘크리트 바닥에 주저앉았다. 어쩌다 여기 들어오게 됐는지를 생각하면 저절로 이가 갈렸다.
그 애가 갇혀 있던 강원도의 별장에서, 각인 직후에 몰아치는 러트 사이클 속에서 몇 번이고 살을 섞었다. 둘 다 기진맥진해 의식을 잃을 때까지, 그야말로 발정한 동물들처럼. 마지막의 몇 번은 기억마저 어렴풋할 정도였다.
‘씨발, 적당히 하고 나갔어야 했는데. 적당히가… 될 리가 없었지만.’
그 애를 만났다는 감격과 발작적인 사이클 때문에 잊고 있었는데, 그 별장에는 보안시설이 설치되어 있었다. 거기 모여들었던 알파들이 흩어질 때 투덜거렸던 것처럼, 보안에 이상이 생기면 보안업체에서 자동으로 출동하는 시스템이었다.
화재경보를 확인하기 위해 별장에 출동한 직원들은 물바다가 된 1층에서 얻어맞은 개처럼 널브러진 이준을 발견했다. 2층 끝방에는 윤오와 내가 쓰러져 있었다.
셋 중에 제일 먼저 의식을 차린 건 이준이었다. 구급차와 경찰차가 들이닥친 상황에서, 이준은 그 상황을 모면할 좋은 변명거리를 생각해 냈던 모양이다.
황당하게도, 나는 정신을 잃고 있는 동안 ‘별장에 침입해 집을 엉망으로 만들고, 이준을 폭행한 다음 2층으로 끌고 가 윤오를 강간한 범인’으로 지목되었다.
오해하기 쉬운 상황이긴 했다. 보안업체 직원들과 뒤이어 출동한 경찰관들이 나를 보았을 때 윤오는 상처 입은 채로 팔에 수갑까지 차고 있었고, 나는 피와 온갖 체액에 범벅이 되어서 그 애를 껴안고 있었으니까.
내가 이준의 배다른 형제이고, 별장을 소유한 집안과 의절하다시피 서자라는 점도 이준의 주장을 그럴듯하게 만드는 데 한몫했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내 말은 존나 들은 척도 안 하고….’
정신을 차렸을 때는 구급대원들이 윤오를 들것에 실어 내보내고 있었다. 눈이 돌아 버린 나는 당신들은 누구길래 그 애에게 손을 대냐고 난리를 피웠다. 지금 생각하면 현명한 행동은 아니었다. 망나니 같은 내 태도는 누가 보기에도 전형적인 범인처럼 보였을 테니까.
그들은 나를 들짐승 취급하며 2층의 그 방 침대 위에서 칼에 찔리고 철심에 관통된 상처를 치료했다. 입원할 필요는 없다는 말에 나는 곧장 그 애가 이송된 병원으로 가겠다고 했지만, 그들은 나에게 대뜸 수갑을 채웠다. 그대로 경찰서로 연행된 나는 터무니없는 조사를 받았다.
‘본가의 별장에는 왜 갑자기 침입한 겁니까? 평소에 서이준 씨랑 사이가 좋지 않았다고 하던데, 맞나요?’
‘사람을 찾으러 갔다고요? 한윤오? 서이한 씨가 강간한 그 피해자 말입니까?’
‘이상한 말씀 하시네, 침입한 게 아니면, 왜 담을 넘어서 들어간 겁니까? 별장을 관리하던 서이준 씨랑 가족 아닙니까? 아무 문제 없는 상황이면 연락하고 찾아가는 게 정상이죠.’
‘한윤오 군이 차고 있던 수갑은 어디서 구한 겁니까?’
아무리 아니라고 대답하고 그걸 나한테 왜 묻냐고 화를 내도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서이준이 별장에 감금해 놓은 사람을 구하러 간 거라고, 그동안 그 새끼와 서 회장이 했던 악행을 구구절절 늘어놓아도 돌아오는 건 미친 사람을 보는 듯한 싸늘한 시선뿐이었다.
답답함에 가슴을 치는 나에게, 서이준에게서 잘못된 사전정보를 들은 경찰관은 이준의 얼굴을 폭행한 구체적인 방법과 그 애를 ‘강간’한 구체적인 방법을 캐묻기까지 했다.
‘씨발, 아니라니까! 그놈의 강간 소리 좀 그만하라고요…!’
버럭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 철제 의자를 뒤집어엎자 조사는 그걸로 종료되었다. 나는 경찰서 지하에 있는 유치장에 밀어 넣어졌고, 하루가 꼬박 지나도록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서이준에 대한 짜증보다, 그 애에 대한 걱정으로 숨이 넘어갈 것 같았다. 쇠약해진 몸이 잘못되기라도 했을까 봐 애가 탔다. 아픈 애에게 너무 심하게 밀어붙였다는 생각도 들었다.
신경 쓰이는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지금 어디 있을지. 지금은 정신을 차렸을지. 다친 발은 제대로 치료받았을지. 정신을 차렸다면, 내가 곁에 없는 걸 보고 걱정하고 있지는 않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다는 소식 듣고 충격을 받지는 않았을지.
빨리 여기서 나가 그 애의 곁에 있고 싶은 마음뿐인데, 혹시라도 이대로 영영 누명을 써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될까 봐 초조해졌다.
‘그럴 리는 없어. 그 애가 깨어나면 내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해 줄 테니까. 아니, 그렇지만 혹시라도 서이준 그 새끼가 또 이상한 수를 쓰면….’
서이준이라면 그럴 수도 있다. 이미 반쯤은 제 잘못을 나에게 뒤집어씌운 상황이니까. 마지막으로 본 서이준의 모습을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별장 앞에서 내가 발광을 하며 경찰차에 강제로 태워지는 동안, 이준은 경찰관들의 보호를 받으며 유유자적 제 차로 이동했다. 뻔뻔스럽게도 선량한 피해자를 연기하는 모습이었다. 저를 보고 악에 받쳐 소리를 지르는 나를 흘긋 보고 비웃기까지 했다.
‘사람을 끌고 가서 가둬 놓은 새끼는 따로 있는데 내가 언제까지 여기 있어야 하는 거지….’
머리를 쥐어뜯어 봐도 여길 빠져나갈 마땅한 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소지품도 다 빼앗기고, 무슨 말을 해도 믿어 주지 않으니 아무런 방법이 없었다.
평소 같으면 재훈이 어떻게든 소식을 듣고 찾아올 거라고 믿었을 거다. 경찰관이 체포 사실을 통지받을 가족의 연락처를 묻길래 재훈의 번호를 알려 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여태 소식이 없는 걸 보면, 그도 곤란한 상황에 처한 것 같았다. 감사실에 끌려간 채로 여태 빠져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딱 하나 있던 기댈 곳이 사라졌다는 생각이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2층 끝 방에서 그 애를 만났을 때는 이제 모든 게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는데, 별로 그렇지도 않았던 걸까. 비아냥거리던 이준의 말이 자꾸만 귀를 맴돌았다.
‘네가 오늘 혹시 그 녀석을 여기서 데려간다고 쳐.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냐고.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어.’
객기와 발악처럼 들렸던 그 말이, 어쩌면 사실일 수도 있다. 내가 그 별장에서 간신히 그 애를 붙잡았더라도, 본가의 힘을 등에 업은 이준은 앞으로도 언제든지 제 마음대로 그 애와 나의 인생을 휘둘러 버릴지 모른다.
어둡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해도 생각은 자꾸만 어두워졌다. 밤이 지나고 슬슬 해가 떠오를 시간이었지만, 퀴퀴한 지하의 유치장에는 빛 한 점 들어오지 않았다.
방금 유치장에 들어온 술 취한 남자는 이미 바닥에 드러누워 코를 골고 있었다. 나는 무기력하게 콘크리트 벽에 몸을 기대었다. 도저히 잠이 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아침이 찾아올 때쯤 잠깐 잠이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침부터 경찰서는 시끄러웠다. 무슨 사고가 터진 건지는 몰라도 위층에서 웅성거리는 소리와 우르르 몰려나가는 발소리가 부산스러웠다.
‘멍청한 새끼들이…. 무슨 일로 바쁜 건지는 몰라도, 억울한 사람부터 꺼내 줘야 하는 거 아닌가?’
투덜거리는 말을 삼키고 있을 때였다. 지하로 내려오는 계단에서 저벅저벅 발소리가 다가왔다. 어제 나를 조사했던 경찰관이었다. 내가 죄인인 것처럼 몰아붙이던 그의 모습을 생각하면 그에게는 뭐라 하소연해 봐도 소용없을 것 같았다.
쳇, 하고 혀를 차며 고개를 돌리는데 갑자기 유치장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고는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까지.
“저기, 서이한 씨.”
뜻밖의 상황에 고개를 돌리니, 그는 뭐라 말할 수 없이 겸연쩍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어, 저기…. 서이한 씨에 대해서는, 석방 지휘가 내려와서요.”
“…네?”
“흠, 흠. 그렇게 됐습니다. 나머지 부분에 대해서는 혐의점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서이준 씨에 대한 상해 사건은 피의자로서 수사가 진행될 거고요.”
“…….”
“그리고… 서경제약과 서이준 씨 사건 관련해서는 참고인 조사가 있을 테니까, 협조 부탁드립니다.”
갑작스러운 이야기를 이해하기 힘들었다. 그는 뜬금없는 이야기를 하며 가져갔던 내 가방을 건네주었다.
“서경제약과 서이준 사건이요?”
“네. 지금은 귀가하시면 됩니다. 위에 손님이 와 있던데요.”
아무튼 돌아가도 된다는 말에, 나는 상황이 바뀌기 전에 빠져나갈 생각으로 부리나케 계단을 올라갔다. 경찰서 밖으로 나가자 경찰관이 말했던 ‘손님’이 보였다. 다름 아닌 재훈이었다.
“저런…. 다쳤다고 듣긴 했지만 대체 꼴이 이게 뭡니까?”
재훈은 내 얼굴을 확인하기 무섭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명 나는 거지 같은 몰골이었지만, 그렇게 잔소리하는 그도 얼굴이 핼쑥해져 있었다.
“아니, 형 얼굴도 만만치 않은데…. 그보다 어떻게 갑자기 나타난 거예요?”
“이런 데 숨어 있는다고 제가 못 찾아낼 줄 알았어요?”
“늦었잖아요. 날 이 시골 경찰서에 36시간이나 처박아 놓는 걸 봐서는 서 회장의 비밀 감옥에라도 갇혀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떠드는 모습을 보니 머리랑 혀끝은 무사하신 모양이네요. 유치장이 눈 붙이기에 나쁜 환경은 아니었나 보죠? 아, 두부라도 챙겨왔어야 했는데.”
평소처럼 한 마디도 지지 않는 걸 보니 그도 무사한 건 마찬가지인 모양이었다. 재훈과 내가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는 동안에도 경찰서는 계속 부산스러운 분위기였다.
출동을 나가는 것으로 보이는 차 몇 대가 빠르게 정문을 빠져나갔고, 여기저기서 무전 소리도 들렸다. 우리의 곁을 스쳐 차로 향하는 경찰관 둘이 나누는 대화 한 토막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럼 지금 서울까지 압수수색 나가야 합니까? 1호차에 기름이 충분히 있을지….”
“야, 말귀를 못 알아들어? 서 회장 자택이랑 서경병원 쪽은 관할청에서 영장 받아서 나갈 거고, 우리는 그 별장 CCTV 따러 가는 거라고.”
“아아, 서경제약 사건은 서울에서 수사하는 겁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그런 큰 사건을 이런 시골에 맡기겠어? 우린 그냥 증거나 확보해서 어제 입건한 그 사건이랑 같이 넘기면 돼. 사건명 쓸데없는 건 좀 정리해서 보내고. 안 그래도 애먼 사람 체포했다고 감찰받을 상황이니까.”
차를 타고 멀어지는 그들을 보며 나는 잠시 얼이 빠졌다. 역시나 이해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밤을 새운 탓에 지끈지끈 울리는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지금 저거, 본가랑 병원을 압수수색 한다는 얘기 맞죠? 어떻게 된 거예요?”
“일단 가면서 알려드릴게요. 자, 혹시나 해서 여벌 옷을 가져와 봤는데 안 가져왔음 큰일 날 뻔했네요.”
재훈은 낯선 차로 향하며 나에게 갈아입을 옷을 건네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때 옷 한 벌 가져가지 않았나요? 윤오 군이 맡겼던 거. 그건 어디 두고 누더기를 입고 다니는 거예요?”
“그 옷은, 형 차에 두고….”
“아, 맞다. 제 차는 또 어디다 버려둔 겁니까?”
재훈은 차에 대한 애착이 상당한 편이었다. 제 차가 지금 산길 옆의 진흙 구덩이에 처박힌 채로 있다는 걸 알면 그는 기함할 것이다. 나뭇가지와 돌부리에 온통 긁혀 있는 걸 보면 잔소리를 듣는 거로 끝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조수석에 올라타며 은근슬쩍 말을 돌렸다.
“야아, 차 좋은 거 빌리셨네.”
재훈은 옷을 갈아입는 나를 보고 피식 웃었다.
“빨리 갈아입어요. 일단 윤오 학생 있는 쪽으로 가 보고, 차는 그다음에 찾죠.”
“윤오…!”
나도 모르게 버럭, 소리를 지른 나는 제 목소리가 새삼스러워 얼굴을 붉혔다.
“걔, 지금 어디 있어요? 무사한 거 맞죠?”
“이 근처 병원에 입원해 있어요. 구급대원이 가까운 쪽으로.”
“입원? 아직 많이 아프대요? 깨어나긴 한 거예요?”
“네. 1시간 전쯤에 확인한 걸로는 의식은 없지만 상태는 안정되었다고 하던데요.”
“그럼 걘 지금 혼자 그 병원에 있는 거예요?”
“일단 그 병원에 일족 출신인 동기가 한 명 있어서 잘 봐 달라고 말해 뒀습니다.”
“아…. 위험할 것 같은데. 뭐 해요, 빨리 안 가고. 서이준이 또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이준 군은 오늘 아침 출국한 것 같던데요.”
급한 마음에 발을 구르던 나는 뜻밖의 말에 멈칫했다.
“출국…이요? 어디로요?”
“아무래도 연고가 있는 뉴욕일 것 같은데, 정확히는 모릅니다. 출국 금지 명령이 나오기 전에 급하게 나간 거라서요. 다들 증거가 될 만한 걸 정리하는 중이라 어수선한 분위기였습니다. 덕분에 저도 빠져나오긴 했지만.”
“출국 금지 명령은 또 뭐고, 증거는… 무슨…. 하루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
재훈은 차를 출발시키며 한숨을 쉬었다.
“맞네요. 하루 사이에. 잘된 일이긴 한데, 제가 몇 년 동안 애먹었던 게 이렇게 순식간에 정리되니까 얼떨떨하기도 하고….”
“아, 그러니까 뭐냐고요.”
“오 실장이라고 있죠. 이한 군이 난월동 지역 관리자라고 했던, 서 회장 수하의 사람이요.”
“그 새끼가 또 무슨 사고라도 쳤어요?”
그가 난월동 판자촌에서 윤오의 머리채를 잡았다던 이야기를 떠올린 나는 용건을 듣기 전부터 발끈했다.
“사고를 크게 치긴 쳤죠. 엊그제까지는 이준 군 지시로 그 별장에서 윤오 군을 감시하고 있었던 모양인데, 무슨 마음을 먹은 건지 어제 갑자기 경찰에 자수해 버렸어요.”
“네…?”
“어제 이준 군이 별장에서 접대 모임을 한다고 고용인들을 다 내보냈었대요. 오 실장 그 사람이 그 사이에 서울로 올라와서 경찰서로 들어가 버렸다고 하더군요. 그동안 서 회장이랑 이준 군 밑에 있으면서 확보한 자료들이랑 대화 녹취 파일까지 들고서요.”
“아니, 왜 갑자기 그런….”
“왜 그랬는지는 저도 모르죠. 아무튼 상황이 순식간에 뒤집어졌습니다. 별장에서 있었던 일들만 해도 혐의가 꽤 되는 모양인데, 서경제약의 비리에 대해서까지 다 진술할 예정인가 봐요. 가지고 있던 자료도 방대한 모양이라, 제가 수집했던 증거들과 합치면 무리 없이 진실이 밝혀질 것 같습니다.”
“…….”
“서 회장도 이번에는 빠져나가기 어려울 겁니다. 오 실장 쪽에 변호사를 선임해 주고 오느라 여기 오는 게 좀 늦어졌네요.”
그의 말 그대로, 통쾌하고도 갑작스러운 이야기였다. 서 회장이 한 방 먹었다는 게 기쁘지만, 나는 한편 ‘별장에서의 혐의’라는 말에 그 애가 그곳에서 어떤 모진 일을 겪었을지가 신경 쓰였다.
서 회장에게 복수하려던 오랜 염원이 해결된 셈인데도 재훈의 표정이 밝지만은 않은 것도 신경 쓰였다. 잠시 말없이 운전만 하던 그는 머뭇머뭇 운을 띄웠다.
“저기, 윤오 학생이 입원한 병원에 있다는 제 동기가 한 얘긴데요.”
“…뭔데요?”
“그게….”
“아, 오늘따라 왜 이래요? 빨리 말해요.”
“윤오 학생에게 아무래도 각인…이 되어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사이클이 왔었던 것 같은데, 몸이 극도로 쇠약해져서 그런지 다행히 임신은 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
“그런 생각은 안 하고 싶지만 만에 하나… 별장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싶어서요. 저도 자료를 직접 본 건 아닌데 변호사 얘기로는 오 실장이 자백한 서이준 군 혐의 중에 성 관련 내용도 있다고 해서….”
“아, 아아아….”
재훈은 그 애에게 각인한 사람이 이준이 아닐지 걱정하는 눈치였다. 나는 사고 친 사실을 부모에게 고백하는 기분이 되었다.
“어…. 괜찮아요.”
“아뇨, 각인을 한 게 맞다면, 한 번 이어진 건 둘 중 하나가 죽을 때까지 해소할 수 없기 때문에….”
“괘, 괜찮다니까요. 그… 제가… 한 거예요. 각인.”
그 말에 재훈은 사거리의 적신호를 못 보고 지나칠 뻔하다 뒤늦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사고 친 미성년 자녀를 바라보는 학부모의 얼굴로 나를 노려보았다.
“이한 군 어제 강원도 별장 2층에서 체포된 거 아니었어요?”
“…그랬죠.”
“경찰은 1층에서 이준 군의 진술을 받았다는 건데, 그럼 이준 군은 계속 별장 1층에 있었다는 얘기고.”
“…….”
“와…. 그 상황에 그럴 생각이 들었어요? 이한 군이 성폭력 혐의로 체포되었다길래 어떻게 그런 오해를 받을 수 있나 이해가 안 됐었는데.”
“그게… 걔가 갑자기 히트가 오는 바람에…. 그리고 서이준 그 새끼는 기절해있었거든요?”
“기절이요? 왜요?”
“그냥… 몇 대 때리니까 쓰러지던데….”
“…이준 군에 대한 상해 혐의도 오해는 아니었나 보군요?”
“아, 아까 저 풀어 주던 경찰관도 그러던데요. 그 부분은 계속 수사할 거니까 협조해 달라고….”
나를 보는 재훈의 눈이 더 뾰족해졌다. 억울해진 나는 목소리를 높였다.
“아니,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했다는 거예요? 말로 비키라고 하면 그 새끼가 고분고분 비켜줄 줄 알았어요?”
“뭐, 어느 정도 충돌이 있을 거라고는 예상했습니다. 형사사건화 되지 않길 바라긴 했는데…. 이한 군이 지나친 폭력을 행사한 게 아니면 좋겠네요.”
“지나친 폭력이요? 하, 완전 정당방위였거든요? 서이준 그 새끼는 칼까지 들고 있었다고요. 여기 이 상처 안 보여요?”
“…그래요?”
“그 정도도 정말 많이 봐준 거예요. 그 새끼가 아버지 얘기까지 들먹거리면서 찌를 테면 찔러 보라고 지랄하는데….”
나는 얼떨결에 그 사람을 ‘아버지’라고 불렀다가, 문득 부끄러워져 입을 다물었다. 차 안에는 잠시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재훈은 한참 만에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럴 때는 참기 힘들어도 참는 게 맞죠. 잘한 겁니다. 그런 사람 때문에 굳이 이한 군 손을 더럽힐 필요는 없으니까.”
여러모로 쑥스러워진 나는 말을 돌려 버렸다.
“맞다. 납골당에 있던 USB 찾아 놨어요.”
“아, 감사합니다. 거기… 가셨군요.”
“…네. 그리고 거기 있던 유품 상자도 가져왔어요.”
“…….”
“이것도 형 드려야 되는 건 아니죠?”
“…아니죠. 그건 이한 군 거니까요.”
“네, 뭐…. 저기, 근데 그 애 임신…은 아니라는 거죠?”
계속 쑥스러워서 말을 더 돌린다는 게, 훨씬 쑥스러운 화제를 꺼내 버렸다. 그럴 생각은 아니었는데 본능인지 뭔지 아쉬운 듯한 말투로 질문이 나왔다. 재훈은 질색하며 나를 노려보았다.
“네. 이한 군은 진짜, 자기 몸 하나 제대로 못 챙기면서 무슨 소릴…. 둘이 합의해서 그러는 걸 제가 말릴 수는 없지만, 그런 건 이왕이면 좀 더 준비된 상태에서 해야… 아, 아니, 잠시만요. 각인, 윤오 학생 동의하에 했던 건 맞죠?”
그 말에 날 뭘로 보냐고 소리를 지르려다가, 순간 멈칫거렸다. 정신없이 그 애를 안고 목을 물었던 건 기억하는데, 심지어 노팅했던 감각까지도 생생한데 너무 흥분했던 탓인지 사이사이에 무슨 말을 나누었는지는 기억이 흐릿했다.
‘동의…했겠지? 설마, 싫다는 애한테 다짜고짜 그랬을 리가. 그치만 전부터 계속 억지로라도 각인해 버리고 싶다고는 생각했었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 기억을 더듬는 나를 보며 재훈은 더더욱 질색했다.
“이한 군. 멋대로 그랬던 거면 그거야말로 범죄예요!”
“나도 알거든요? 동의…했을 거예요. 아마도.”
“아마도?”
“구, 구체적으로는 기억이 안 나서 그래요. 구체적으로는.”
재훈이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흘겨보는 동안, 차는 그 애가 있다는 병원에 도착했다. 재훈은 그 애의 병실을 찾아 뛰어들려는 나를 로비에 앉히고는 상황을 알아보겠다며 안으로 들어갔다. 재훈이 다시 로비로 돌아올 때까지의 십여 분이 몇 시간처럼 길었다.
“다행이네요. 윤오 학생, 조금 전에 의식이 돌아왔다고 합니다.”
그 애가 깨어났다는 재훈의 말에 내 심장은 어이없을 정도로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감추려 애쓰며 물었다.
“아픈 데는 없대요? 상태는 괜찮은 거예요?”
“다리 상처가 크고 워낙 쇠약해져 있어서 장기간 입원이 필요할 것 같긴 한데, 생명에는 지장이 없대요.”
그 말에 피가 엉겨 붙어 있던 그 애의 붕대 감긴 발이 떠올랐다. 내가 폭주해 버린 게 상처에 안 좋았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럼 일단 지금 면회는 되는 거죠? 몇 층에 있는데요?”
“잠시만요. 지금은 몇 가지 간단한 검사를 진행 중인 것 같아요. 어, 그리고… 아직은 충격이 있을 수 있으니까, 윤오 군이 괴로워할 만한 이야기는 하지 않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별장에서 있었던 일을 묻는다거나… 뭐 그런 거요.”
내심 그 애가 별장에서 무슨 일을 겪었을지 궁금해했던 나는 발끈해서 고개를 저었다.
“다, 당연히 그런 말은 안 하죠. 누가 바본 줄 알아요?”
“다행이네요. 같이 올라가 보죠.”
입원실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나는 그 애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를 고민했다. 몇 초 전까지만 해도 그 애를 만나면 마냥 좋을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재훈의 경고 탓인지 머리가 복잡해졌다.
“저기, 윤오 있잖아요. 어머니 얘기도 당분간 모르는 게 나을까요?”
“아…. 그건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떻게요?”
“별장에서 이준 군에게 들은 모양이에요. 담당의가 긴장을 풀어 주려고 저를 안다는 말을 했더니, 어머니가 돌아가신 게 사실인지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더군요.”
그 애의 어머니가 쓰러지시던 날, 나는 그 애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 애는 어머니가 쓰러진 게 내 잘못이 아니라고 했었지만, 결과가 이렇게 되었으니 역시 날 원망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에 힘이 풀렸다.
엘리베이터는 그 애의 입원실이 있는 층에 멈춰 섰다. 내가 선뜻 내리지 않고 머뭇거리자, 재훈은 내 어깨를 톡톡, 두드려 당겼다.
“뭐 해요? 각인까지 했으면서, 얼른 가서 옆에 있어 줘야죠.”
“그게….”
“윤오 군이 깨어나자마자 이한 군부터 찾았대요. 지금 병원으로 오고 있다고 했더니 눈에 띄게 안심했다고 들었어요.”
나비 날개처럼 가벼운 마음은 재훈의 한마디에 또 팔랑거렸다. 나는 한달음에 입원실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 병원복을 입고 침대에 앉은 그 애가 보였다. 파리한 모습에 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손으로 코끝만 부비는 사이 재훈이 먼저 살갑게 그 애에게 말을 붙였다.
“윤오 학생, 괜찮아요? 많이 걱정했는데.”
“감사합니다. 저, 괜찮아요.”
“다행이에요. 아무 걱정하지 말고 일단 푹 쉬어요. 내가 담당의한테 잘 말해 놓을게요.”
그 애는 수척했지만 얼굴빛은 전보다 한결 밝았다. 수줍게 웃는 얼굴이 꽃처럼 예뻤다. 빨리 둘이 있고 싶은데, 재훈이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걸 보니 갑자기 애가 탔다. 나는 재훈의 어깨를 쿡쿡 찔렀다.
“뭘 수다를 떨고 있어요? 애 피곤하게. 나가 있어요.”
“나가라고요? 난 어디 가서 있으라는 겁니까?”
“여기 친구분도 있다면서요. 가서 얘기 나누세요.”
“아니, 걔야 근무 시간인데 일하고 있겠죠.”
“참,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요? 서울에 뭐 준비하고 있다면서요. 복잡하게 들리던데. 저흰 괜찮으니까 얼른 가 보세요. 참, 이거, USB 드릴게요.”
“와…. 진심이에요? 새벽부터 유치장에 갇혀 있다는 사람 꺼내 주러 이 산골짜기까지 왔는데, 이렇게 바로 쫓아낸다고요?”
“뭐…. 쫓아낸다기보다는…. 흠, 흠.”
진심으로 어이없다는 듯 한참 나를 노려보던 재훈은 결국 한숨을 쉬며 항복선언을 했다.
“알았어요. 그럼 이한 군은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그럼요.”
“퇴원할 때까지? 꽤 길어질 수도 있다던데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해 보지 않았던 나는 고개를 돌려 그 애의 눈치를 보았다. 그 애는 얼떨떨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었다. 아무튼 싫다는 표정은 아닌 것 같고, 지갑은 있으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사면 되겠지 싶었다.
“네, 여기서 쭉 지내면서 제가 다 알아서 할게요. 가 보셔도 돼요.”
“하…. 입만 살아 가지고. 아무튼 가라니까 갈게요, 그럼. 참, 제 차 키도 주셔야죠.”
“어…. 차… 빌리셨는데 형 차까지 필요한가요?”
“렌트카는 여기서 반납하기로 했죠. 차 찾아가야 하니까.”
지은 죄가 많은 나는 엉뚱한 소릴 지껄이다가 결국 주섬주섬 가방에서 재훈의 차 키를 꺼냈다.
“차는 어디 둔 거예요?”
“그게…. 별장 있는 산 입구에 산을 둘러싸고 담장이 생겼거든요? 그 담장 주변에 있을 거예요. 풀숲 우거진 데 숨겨놨는데…. 아, 이거 누르면 소리 들리니까 찾을 수 있죠?”
“뭐라고요?”
“차가 좀 긁혔어요. 그래도 괜찮죠? 나도 무사하고 쟤도 무사하잖아요.”
재훈은 얼이 빠져 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래서 머리 검은 짐승은 키우는 게 아니라는 거군요. 아무튼 가 볼게요. 윤오 군 간호 잘해 줘요.”
등을 떠밀어 재훈을 내보내고 나자, 1인실에는 나와 그 애만이 남았다. 둘만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법석을 떨어 놓긴 했는데, 막상 주위가 조용해지니 조금 전 했던 고민이 다시 떠올랐다.
‘무슨 말을 해야 하지…?’
그 애도 어색한 기분인지, 병원 침대에 비스듬히 기대어 앉아 제 손끝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뻣뻣하게 다가가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냥 꼭 안아 버리고 싶은데. 그러면 놀라겠지? 아직은 충격이 있을 수 있다고 했으니까…. 아니, 충격이 있으니까 더 안아 줘야 하나? 아닌가? 의사 선생님한테 얘 껴안아도 되냐고 물어보기라도 해야 하나? 하, 씨발. 내가 무슨 멍청한 생각을….’
침묵이 길어지자 그 애는 불안한 듯 커다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렸다. 나만큼이나 필사적으로 할 말을 생각하는 듯 보이던 그 애가 겨우 입을 열었다.
“너… 유치장에 있었다며.”
“뭐? 누가 그래.”
“여기 병원 의사 선생님이.”
재훈의 동기라더니, 그도 재훈처럼 입이 가벼운 모양이었다. 당황하는 나를 보며 그 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야?”
“맞아. 근데 두부는 됐어, 오래 있었던 것도 아니고.”
회로가 꼬여서 아무 말이나 막 튀어나왔다. ‘미친, 두부 같은 소리 하네.’ 나는 입속으로 혀를 꾹꾹 깨물며 나는 말을 돌리기 위해 무난한 질문을 꺼냈다. 조금 전 재훈이 했던 말의 반복이나 다름없지만, 그 애가 걱정되는 건 진심이었으니까.
“몸은 괜찮아?”
“응…. 피곤하긴 한데 약 때문인지 아픈 데는 없어.”
“금방 나을 거야. 내가 간호해 줄게.”
“정말 여기 있을 거야? 갑갑할 텐데. 너 학교도 가야 하고….”
그 애는 제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작게 중얼거렸다. 또 이렇게 조금만 다가서면 뒷걸음질 치는구나 싶어서 서운할 뻔했는데, 가만히 보니 그 애의 얼굴은 밀어내는 말과는 달랐다.
조심스럽게 반짝이는 눈이 나를 흘긋흘긋 바라보고 있었다. 그 빛을 본 순간 알 수 있었다. 수줍어서 말은 못 하지만, 그 애도 앞으로의 시간에 희망을 품고 있다는걸. 나는 신이 나서 한술 더 뜨기 시작했다.
“괜찮아. 학교야 뭐, 출결 체크 하는 과목은 이미 F 거의 확정이고.”
“그, 그러면 안 되는 거 아니야?”
“괜찮다니까. 너 금방 낫겠지만 한참 더 여기서 쉬어도 돼. 퇴원하고 서울 가면 같이 살자.”
또, 입이 방정이었다. 맥락도 없이 갑자기 던져진 나의 선언에, 그 애의 두 눈이 동그래졌다.
“같이…?”
나는 잠시, 뭐라 핑계를 댈지를 고민했다. 그 애의 집이 이미 정리되었다거나, 그 애를 혼자 두기 걱정된다는 말 같은 건 상처를 건드리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어차피 중요한 건 핑계가 아니라 마음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정말로 하고 싶었던 말은.
“난 너랑 같이 있고 싶어. 왜냐하면, 우리는, 우리는 이제….”
그토록 내가 바랐던 대로, 우리는 영원히 짝지어진 사이니까. 낯부끄러운 뒤의 문장을 입안으로 삼키며, 물끄러미 그 애를 바라보았다. 그 애의 두 볼은 여리고 사랑스러운 홍조를 띠고 있었다. 햇살 아래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아지랑이처럼 간지럽고 몽롱한 표정이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별장의 2층으로 그 애를 구하러 갔던 순간. 흥분의 잔열로 온통 흐릿하고 뒤죽박죽이지만, 그 애가 했던 말만큼은 마음에 남아 있다. 그 애는 눈물 고인 눈으로 나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나를 좋아한다고.
그 사실을 다시 떠올린 나도 그 애처럼 얼굴을 붉혔다. 아니, 훨씬 더 새빨개졌다. 얼굴빛을 숨기려 고개를 떨구었지만 한참을 그러고 있어도 벌겋게 달아오른 볼은 식을 줄을 몰랐다. 숨만 씩씩 몰아쉬는 나에게, 그 애는 조심스레 다시 말을 붙였다.
“있잖아, 나 물어보고 싶던 말 있는데.”
“뭔데? 아무거나 물어봐. 아무거나.”
아직도 붉어진 얼굴을 어쩌지 못하면서, 나는 말로만 큰소리였다. 그 애는 장난기가 살포시 묻어나는 목소리로 물었다.
“…달 보면서 담배 피우는 거, 정말 좋아해?”
훅 들어온 질문에 나는 아예 목덜미까지 붉어져 버렸다.
“아니, 그냥 그건….”
“…….”
“하, 넌 뭘 그런 걸 물어보냐?”
사실 달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고. 그저 네 곁에 있고 싶었다고. 그 애는 그런 내 마음을 아는 것처럼 미소 짓고 있었다. 괜스레 툴툴거리던 나는 겨우 표정을 가다듬었다.
“나도 하고 싶던 말 있는데.”
“뭔데?”
“너… 예뻐. 너무너무.”
고작 그 말이 하고 싶어서, 그런데 고작 그 말도 하지 못해서 나는 마음이 아팠었다. 그 멋없는 말 한마디에, 그 애는 꽃이 피어나듯 환하게 웃었다. 가늘게 휘어진 눈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너무도 사랑스러웠다.
가슴 가득 뿌듯하게 벅차오르는 마음을 가눌 수 없어서, 나도 결국 웃고 말았다. 이제야 비로소 서로를 마주 보며 미소 지을 수 있게 되었다. 그것만으로도 꿈같은 행복을 손에 넣은 기분이었다.
우리는 그렇게 한참을 서로 말없이 바라보며 서로의 두 눈에 기쁘게 서로를 새겨넣었다. 언제까지라도 함께하겠다는 약속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