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5 : 각인
내일이 오는 것을 바라지 않아도, 언제나 때가 되면 해는 떠오르고 또 저문다. 오늘만큼 그 사실이 잔인하게 느껴진 적이 없었다. 역겹도록 흰 천장이 나를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타는 듯한 시간 속에 재가 되어 버린 나는 습관처럼 손을 베개 밑으로 밀어 넣었다.
마지막 억제제는 이제 겨우 반 조각. 차마 한 번에 삼킬 수 없어서 자그만 알약 조각을 다시 반으로 쪼갰다. 금가루라도 삼킨 것처럼, 나는 약을 혀 위에 올리고 찬찬히 녹였다.
온종일 내가 한 일이라곤 침대에 늘어져 있던 게 전부였지만, 아래층은 내내 부산스러웠다. 오 실장의 말대로 손님 맞을 준비를 하는 듯 복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다 어느 순간 뚝 끊어졌다.
아침 식사를 가져왔던 오 실장은 저녁때가 다가오도록 방으로 오지 않고 있다. 고용인들이 떠난 집에는 아마 나와 지호, 그리고 이준뿐일 것이다. 무감각해진 심장으로 까만 절망이 스며들었다.
‘정확히 어떤 손님들이 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정신이 똑바로 박힌 새끼들은 아닐 거야.’
오 실장의 말을 되짚어 보는 동안, 찾아올 손님들에 대한 공포감은 점점 부풀었다. 희고 날카로운 침묵 속에서, 고통은 무력해진 나를 할퀴고 지나갔다.
몇 번이나 얻어맞은 얼굴은 부어올랐고, 목이 졸린 자리도 욱신거렸다, 다친 발은 아물고 있는지 덧나고 있는지 모르게 통증이 이어지고 있었다.
무엇보다 괴로운 것은 그득하게 부풀어 올라 출렁이는 페로몬이었다. 몸을 끓이는 열기 속에서 나는 괴롭게 호흡했다. 약 기운이 돌기를 기다렸지만 먹은 양이 적어서인지 영 기미가 없었다. 초조함에 몸을 옹송그리는데, 문득 옆방에서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흐으, 흐…. 싫어요.”
지호의 목소리다. 아침부터 옆방에서 그의 우는 소리가 들려온 것은 몇 번 있던 일이지만, 오늘은 뭔가 느낌이 달랐다. 지호는 교태라고는 조금도 없이 절박한 목소리로 울부짖었다.
“제발, 제발, 안 돼요….”
“이게, 얌전히 못 있어?”
“싫어요, 제발, 약은…. 아악…!”
비명에 이어 몸싸움하는 듯한, 아니 일방적으로 한쪽을 때리고 밀치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한참 푸닥거리를 한 이준은 오히려 제가 신물이 난다는 듯 말했다.
“후우…. 왜 이렇게 말귀를 못 알아들어? 너한테도 먹는 편이 나으니까 이러는 거 아니야.”
“시, 싫어요. 약은, 절대로….”
“네가 맨정신에 버틸 수 있을 것 같아? 내가 이거 하루 이틀 해 보는 것도 아니고, 약 먹고도 못 하겠다고 난리 피우는 애들이 태반이야. 한 번 흥이 깨지면 오늘 모임은 끝이라고.”
“하, 할 수 있….”
“너같이 근성 없는 애들 말을 어떻게 믿지? 오늘 세팅한 게 얼마짜리 모임인지나 알아? 네까짓 게 몇 년 동안 휴일 없이 몸 팔아도 못 갚을 돈이야. 너 때문에 망치면 책임질 수 있어?”
“…….”
“그렇게 기겁할 거 없잖아. 나쁜 물건은 아니야. 중독성도 없고, 무슨 일을 당하든 꿈꾸는 것처럼 즐겁게 넘길 수 있다고.”
“그, 그래도….”
“뭐…. 사실 중독성이 아예 없는 건 아닌데, 어차피 상관없는 거 아냐? 한두 번 먹는다고 바로 맛이 가는 것도 아니고. 너 같은 애들이 평소에 구할 수도 없는 비싼 약인데.”
태연한 이준의 말에 지호는 겁에 질려 애원했다.
“아, 안 돼요. 그런 건…. 차라리, 그냥….”
“…….”
“그냥 할게요. 반항하지 않을게요.”
“…할 수 있겠어? 다른 오메가가 보는 앞에서도 못 한다고 징징거리던 녀석이.”
“그, 그땐 마음의 준비가 안 돼서…. 각오하면, 할 수 있어요.”
“…….”
“정말이에요. 잘할게요. 제, 제발… 부탁드려요.”
“그래…? 흐음….”
이준은 특유의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거드름을 피웠다.
“하긴. 그런 취향도 있긴 하지. 맨정신으로 버티는 모습을 보는 게 더 좋다는 고객들도 있으니까.”
“…….”
“그래, 할 수 있으면 해봐.”
“네, 할게요. 할 수 있어요.”
“믿어 주는 거니까, 더 정신 차리고 해야 하는 건 알지?”
“…네. 괜찮을 거예요. 비, 비슷한 건… 해 본 적 있으니까.”
“그래? 다행이네. 후후….”
“…….”
“참, 오늘 올 손님은 아홉 명이야.”
즐거워하는 듯한 이준의 말의 끝으로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지호는 넋이 빠져 아무 말도 못 하는 듯했다. 그도 나와 같은 것을 두려워했을 것이다. 아홉 명의 손님이 누구일지, 무얼 하려 이 깊은 산속으로 찾아오는 것일지.
차라리 두 눈을 붙이고 잠을 청해 보려 했지만 정신은 갈수록 또렷해졌다. 두려움에 더더욱 출렁거리는 페로몬이 자꾸만 나를 깨웠다.
약을 먹은 지 2시간이 채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창문 너머에서 문득 낯선 소리가 들렸다. 정원으로 차가 들어오는 소리였다. 한두 대가 아닌지 웅웅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왔나 봐.’
공포감이 바짝 일어나면서, 본능도 덩달아 들썩거리기 시작했다. 턱밑까지 치밀어 오르던 그것은 끓기 시작한 수면처럼 파르르, 떨렸다. 무엇인가가 나에게 불을 붙이는 느낌에, 아랫배가 쑤시고 발끝이 조여들었다.
나는 허둥지둥 베개 밑의 알약을 찾았다. 남은 알약은 고작 1/4알. 정량에도, 평소에 먹던 분량에도 터무니없이 모자란 약이었다. 이걸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알 수 없으니, 한계까지는 참다가 먹으려고 했었다.
내 한계가 어디인지, 초조한 탓에 판단이 되질 않았다. 알약 부스러기를 손에 쥐고 덜덜 떨고 있는데 문 너머에서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서경제약에서 개최하는 모임에 대해서 말씀은 많이 들었는데…. 실제로 참여해 본 건 처음이네요. 기대됩니다.”
낯선 남자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목 뒤쪽의 근육이 뻣뻣하게 굳었다. ‘손님’들이 2층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박 이사님이 처음이시라고요? 의외입니다.”
“업무가 워낙 바쁘셔서 그러셨겠지요. 이제라도 찾아주셔서 다행입니다.”
“아마 전무님도 취향에 맞으실 겁니다. 이준 군이 나이는 어려도 센스가 괜찮은 편이거든요.”
멀리서 들리던 목소리는 구둣발 소리와 함께 조금씩 가까워졌다. 더 무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나는 손바닥 안의 약을 입안에 그대로 털어 넣었다.
“오늘도 상등품으로 준비했습니다. 얼굴도, 몸도 괜찮은 오메가를 찾아서요. 머리는 좀 비어 있지만 말입니다.”
손님을 맞이하는 이준은 평소보다도 더 정중하고 차분한 목소리였다.
“오메가치고 머리 안 빈 애도 있습니까? 머리로 씹질할 것도 아니고…. 오늘 약은 뭘 사용할 예정이죠?”
“그게, 그냥 해보겠다더군요. 잘 버틸 수 있다고 큰소리를 치던데,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당돌하네요. 그것도 좋죠. 전 약도 안 먹었는데 흥분해서 눈이 뒤집힌 걸 보는 게 재밌더라고요.”
“약 없이 하면 그런 맛이 있죠. 반항하고 괴로워하는 걸 보는 것도 즐겁고.”
“그러실 수도 있을 것 같아 고집을 부리게 내버려 두었습니다. 여차하면 바로 주사할 수 있게 약도 준비했고요.”
“그럼 바로 시작하는 겁니까? 2층에서?”
“아, 본격적인 모임은 1층 거실에서 시작할 예정입니다만…. 그 전에 보여드릴 녀석이 한 명 더 있습니다.”
숨죽여 그들의 대화를 엿듣던 나는, 이준이 나에 대해 말하고 있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내 심장 소리는 그들의 발소리만큼 크게 울리기 시작했다.
“한 명 더? 오늘은 오메가가 둘이나 들어옵니까?”
“오늘 바로 쓸 아이는 아니고요. 기억하시죠, 예전에 서 회장님이 종종 보내드리곤 했던….”
“아아, 서경제약 전속 오메가. 그 사람 쓸 만했었죠. 막판에는 맛이 간 것처럼 보이긴 했었지만.”
“하, 제가 맛을 봤을 때는 이미 막판이었나 봅니다. 명성이 자자해서 기대했었는데, 산 송장 같은 게 찾아와서 솔직히 실망했었거든요. 그러더니 얼마 못 가서 죽었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그럼, 서경제약에서 또 그런 오메가를 들이는 겁니까?”
“그런 셈이죠. 아직 첫 번째 히트도 안 온 풋내기라 이 자리에서 직접 응대해드릴 수는 없지만….”
“히트도 아직이라고요? 몇 살이길래?”
“발현이 드물게 늦은 편이거든요. 아무튼 보시면 만족하실 겁니다.”
끼이익, 문고리를 돌리는 소리가 평소보다 몇 배로 오싹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정신을 집중해 페로몬을 누르는 것뿐이었다. 약 기운이 빨리 나타나 주기를 바라면서.
이준의 안내에 따라 ‘손님’들은 하나하나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들은 하나같이 고급스러운 정장을 입고 정중한 말투와 태도를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을 둘러싼 공기는 저열한 흥분에 일렁이고 있었다. 좁은 공간 안에 모여든 알파들의 냄새에 현기증이 날 지경이었다.
남자들은 하나둘 나에게 다가오더니 이내 내가 앉은 침대를 둘러싸고 나를 구경했다. 나는 꼼짝도 하지 못하고, 발끝을 당겨 몸을 웅크리는 게 고작이었다
“호오…. 괜찮은데요.”
“아직 어려 보이는데. 미성년자는 아니죠?”
“네. 스무 살입니다.”
“딱 좋네요. 전의 그 오메가도 그 무렵부터 서 회장님 일을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드물게 미인이군요. 오메가는 늦게 발현하는 쪽이 미인일 확률이 높은가?”
섬뜩한 말을 주고받던 남자들 중 한 명이 나에게 손을 뻗어 왔다. 깨끗하게 정돈된 손끝이 갈퀴처럼 보였다. 소스라쳐 고개를 뒤로 빼려 했지만, 곁에 서 있던 이준이 나의 머리칼을 움켜쥐었다.
뺨에 닿는 남자의 손가락은 차가웠지만, 이상한 열기로 이글거렸다. 뒤이어 수많은 손가락이 내 머리를, 어깨를, 코끝과 입술을 스쳐 갔다. 수많은 뱀이 나를 핥는 듯한 느낌에 소름이 돋았다.
나를 보는 스무 개의 눈동자는 모두 기묘한 표정을 띠고 있었다. 모두가 기분 나쁜 가면을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의식은 있는데, 악몽 속에 빠진 듯 몽롱한 불쾌감이 들었다.
그대로 범해질 것만 같은 공포감에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다. 언뜻언뜻 나를 만지는 사이, 그들의 페로몬 더 검고 짙게 흘러나왔다. 커다란 향기의 물결이 이리저리 공기를 뒤덮어 갔다.
“젊어서 그런가… 피부가 매끄럽네요.”
그들 중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남자가 내 턱을 감싸 쥐고 흡족한 듯 중얼거렸다. 그는 주름진 손을 내게로 더 깊게 밀어 넣었다. 목을 타고 흘러 내려와 셔츠 속으로 기어들어 가는 손가락에 몸부림치려던 차에, 이준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희롱을 저지당한 남자는 불쾌하다는 듯 이준을 노려보았다. 방 안에는 흐르던 흥분은 뚝 끊어지고, 돌연 긴장감이 팽팽해졌다.
틀어진 공기를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닌지, 다른 손님들도 동요하는 표정으로 이준을 바라보았다. 이준은 저를 노려보는 남자에게 태연하게 생긋, 웃어 보였다.
“실례합니다. 보시다시피 이 녀석이 아직 길이 덜 들어서요.”
“…….”
“얌전해 보이지만 의외로 버릇이 나빠서 말이죠. 조금만 겁을 줘도 알파를 물어 버립니다. 이사님을 다치게 만드는 건 곤란한 일이니까요.”
“…문다고?”
“네. 여기, 보이시죠?”
이준이 제 입술의 상처를 가리키자, 알파들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무리 그래도 알파 체면이 있지, 오메가한테 물린 겁니까, 이준 군?”
“보기보다 드센 녀석인가 보네. 그걸 그냥 뒀습니까?”
“당연히 본보기를 보여 줬지요. 걱정 마십시오. 곧 히트 사이클도 시작될 거고, 고객님들께 선보이기 전까지는 얌전해지게끔 버릇을 고쳐 놓을 테니까요.”
그들 사이의 긴장감은 다시 거리낌 없는 흥분으로 바뀌었다. 그들은 나에게서 손을 떼고 즐거운 듯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하긴, 이준 군 솜씨면 믿을 만하니까요.”
“종종 그런 경우가 있긴 하죠. 저도 지난번 러트 때 산 렌트보이가 꽤나 버릇없이 굴어서 혼을 내준 적이 있습니다.”
“얼마 전 이 전무님 댁에서 남창 하나가 실려 나갔다는 얘기가 있더니, 그래서였나 보군요?”
“아아, 뭐…. 별일도 아닌데, 관리업체에서 소송을 한다 뭐다 난리를 치더군요.”
“요즘 렌트보이 업체들 기강이 영 엉망이에요. 오메가 장사에 상도덕까지 바라는 건 무리인가 싶긴 해도.”
“러트 때마다 불러 주니 아주 자기들이 갑인 줄 안다니까. 하하하.”
방을 나서며, 그들은 아무 재미도 없는 말들로 웃음을 터뜨렸다. 모두가 떠나고 문을 닫기 전, 이준은 고개를 돌려 싸늘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겁에 질린 나는 있는 힘껏 페로몬을 눌러 삼켰다.
밖으로 나간 그들은 지호가 있는 옆방으로 향했다. 웃음소리는 더 왁자하고 지저분하게 들려왔다. 그들이 지호의 몸과 페로몬에 대해 적나라한 말을 떠들어 대는 동안, 지호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말소리와 발소리는 다시 점점 멀어지더니 1층으로 사라졌다. 지호도 함께 끌려 내려가는 듯했다. 대화는 거의 들려오지 않게 되었지만, 들리지 않아도 그들이 뭘 하고 있는지는 느낄 수 있었다.
아래층에서는 열 명의 알파가 한 명의 오메가를 삼키려 하고 있었다. 앞다투어 내뿜어진 그들의 페로몬은 내가 있는 2층으로 스멀스멀 흘러왔다. 어느 때보다도 짙고 뻑뻑한 냄새에 숨을 쉬는 게 괴로울 정도였다.
난잡한 향기는 누구의 것인지도 구분할 수 없이 엉켜 있었다. 그것은 검은 늪처럼, 내 발밑을 향해 고여 들어 왔다.
‘안 돼, 지금은, 제발….’
나는 이불 속에 파고든 채로 이를 악물었다. 지금 히트 사이클이 오는 것만은 피하고 싶었다. 영영 미룰 수는 없다고 해도, 이렇게 많은 알파들의 가까이에서 발정해 버리는 건 상상도 하기 싫었다.
괜찮을 거라고, 약을 먹은 지 얼마 안 되었으니 참을 수 있다고 생각하려 애썼지만 조금도 괜찮지 않았다. 용량에서 한참 모자라는 약 기운으로는 한껏 자극된 충동을 누를 수 없었다.
헐떡헐떡 차오르는 호흡 속에서 한계가 머지않았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달아오른 몸을 크게 뒤척거린 순간, 갈급하고 뜨거운 덩어리가 몸 안에서 치밀어올랐다.
“아….”
견디다 못한 신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려고 했다. 나는 누가 들을까 놀라 제 입을 틀어막았다. 손끝에 닿은 뺨이 불덩이처럼 뜨거웠다.
달아오른 몸은 멋대로 뒤틀리고, 그렇게 몸이 들썩일 때마다 피부를 스치는 시트의 감촉에 더 괴로워졌다. 내게서 내뿜어지는 달큼한 냄새에 구역질이 날 것 같았다. 언제 발기한 건지 모르게 눈치 없는 아랫도리는 고개를 치켜들고 있었다.
달아오른 몸도 힘들었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것은 공포감이었다. 내가 그들의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것처럼, 그들도 나의 냄새를 알아차릴 거라는 생각에 두려웠다.
‘어쩌지, 숨어야 해. 어디로든….’
숨을 곳이라고 해 봐야, 늘 몸을 식히는 화장실밖에 없었다. 쇠사슬 때문에 문을 닫을 수도 없어 아무 의미도 없는 짓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상처 입은 짐승이 제 둥지를 찾아가듯 그곳으로 향했다. 다친 발이 욱신거리고 다리가 떨려서 걸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침대에서 바닥으로 주저앉아 개처럼 네발로 기어야 했다. 다 닫히지도 않는 문을 억지로 밀어놓고는, 구석에 몸을 웅크렸다.
서늘한 타일 위에 피부를 붙이니 열기가 가라앉았지만, 일시적인 방편일 뿐이었다. 머지않아 히트가 시작되리라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얕은 호흡이 타일 위에 서글픈 입김을 그렸다. 내 몸을 더 이상 내 마음대로 가눌 수 없다는 게 비참했다. 발정을 앞두었다기보다는 죽음을 앞둔 기분이었다. 나는 무력하게 타일 바닥에 몸을 늘어뜨렸다. 이제는, 이제는 다 놓아 버리고 싶었지만.
“흑….”
새삼스레 눈물이 솟았다. 삶에 미련이 없다고 생각했는데도, 아직도 억울하고 안타까운 게 남아 있었다. 끝의 끝까지 내몰리자 더욱 그랬다. 마지막 순간, 내 머릿속은 온통 이한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찼다.
눈앞으로 다가올 본능의 파도 앞에서 그를 떠올리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의미 없는 망상임을 알면서도 나는 부질없는 망상을 반복했다.
그가 나를 구하러 와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다가, 그가 나타나 주기만 한다면 나를 구하러 오는 게 아니라 무너뜨리러 오는 것이라도 좋겠다고도 생각했다. 어차피 무너질 수밖에 없는 삶이라면, 누군가가 나를 무너뜨린다면, 부디 그였으면 좋겠다고.
착각이겠지만, 지저분한 페로몬 사이로 다시 그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묵직하고 진득한 나무 향이 멀지 않은 곳까지 다가온 것만 같았다.
‘보고 싶어. 보고 싶어….’
그리움이 원망스러웠다. 포기하고 싶은데, 더 버틸 힘이 없는데 그가 보고 싶다는 마음이 무엇도 포기할 수 없게 만들어 버리는 게. 나는 누운 채로 이를 악물었다. 마지막 남은 힘으로 폭발 직전의 페로몬을 움켜쥐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바닥의 타일이 냉기를 잃고 뜨겁게 물들었을 무렵이었다. 가물가물 잠이 들 뻔했던 나는 희미한 진동과 소리에 눈을 떴다.
그것은 알파의 발소리였다. 누군가가 2층으로 올라와 내가 있는 복도 끝 방으로 다가오는 고 있었다. 나른해졌던 근육이 바짝 수축했다. 나는 무거운 몸을 일으켜 화장실 문 앞으로 옮겨 앉았다. 있는 힘껏 문을 밀어붙이는 동안에도 무심한 발자국은 점점 가까워졌다.
‘싫어….’
낯선 알파가 나를 만지고 범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깃덩어리처럼 짓눌리고 파헤쳐질 거라는 생각에 머리가 빙빙 돌았다. 극한의 공포감으로 페로몬까지 순간 얼어붙을 정도였다.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문고리를 움켜쥔 채로 허공을 향해 고개를 젓는 것뿐이었다. 눈을 질끈 감고 마음속으로 필사적인 혼잣말을 했다.
‘싫어. 절대로 싫어. 제발, 제발 도와줘. 누구라도….’
간절한 외침이 무색하게, 철컥,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으로 들어온 누군가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그가 방이 비었다고 생각하고 그대로 돌아가 버리길 바랐지만, 화장실을 향해 길게 늘어진 쇠사슬을 보지 못할 리는 없었다.
발소리는 이제 아주 가까이 다가왔다. 손이 덜덜 떨리고, 두 뺨 위로 뜨거운 눈물이 마구 흘러내렸다. 발소리의 주인이 화장실 문을 쥐고 당기는 순간 비명을 지를 뻔했다. 그러나 그럴 힘조차 없어 가냘프게 중얼거리는 게 고작이었다.
“싫어요. 아, 안 돼, 제발….”
나의 애원을 들어줄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문 너머의 알파에게 간청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초라한 나의 말에 문을 당기던 힘이 사라졌다. 놀란 마음으로 긴장을 풀지 못하는 나를, 그가 불렀다.
“윤오야.”
믿을 수 없었지만, 그건 이한의 목소리였다. 도저히 잊을 리도, 잘못 들을 리도 없는 목소리. 다시금 그의 향기도 느껴졌다. 단번에 그를 알아보았지만 스스로를 의심했다.
환영에 시달리는 중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그랬으니까, 잠결에도 늘 그의 꿈을 꾸다가, 그리던 이한의 모습에 울고 웃고 가위눌리던 끝에 깨어나 그 모든 게 꿈이었다는 사실에 허무해서 울곤 했으니까.
아닐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너무도 그리던 향기와 목소리에 문고리를 잡은 손에 점점 힘이 풀렸다. 꼴깍꼴깍, 안으로 눈물을 삼키며 숨을 죽이는 사이, 그가 다시 나를 불렀다.
“나야. 나 왔어…. 윤오야.”
아아. 다시 들어도 분명한 이한의 목소리였다. 환청이라고 해도 저항할 수 없었다. 목소리 들은 것만으로 모든 것이 바스러질 것 같은 느낌에, 나는 문을 밀던 손을 놓았다.
스르르, 벌어진 문틈 사이로 피 묻은 손이 들어온 순간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나는 이내 그것이 이한의 손이라는 것 알아차렸다. 조금씩 열리는 문 너머로 강인한 팔과 어깨가,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보였다.
그는 울고 있었다. 우는 모습이 낯설어서, 역시 이건 꿈일 거라고 생각했다. 열기에 녹아 버린 머릿속이, 가장 큰 절망을 맞이할 내가 가여워 환상을 보여 주는 중이라고.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손을 뻗어 나를 만졌다. 젖고 부어오른 나의 볼을, 수갑에 묶인 손목을, 붕대를 묶은 발을 더듬는 손끝이 잘게 떨렸다.
“왜 이래. 너. 다친 거야? 아파? 누가 널 이렇게….”
그렇게 말하는 그의 상태가 오히려 더 엉망이었다. 나를 만지는 손에도, 뺨과 가슴팍에도 채 아물지도 않은 상처가 가득했다. 옷은 다 찢어지고 흙과 피로 얼룩져 있었다. 게다가 물에 빠진 사람처럼 온몸이 젖은 채였다. 머리칼 끝과 옷자락에서 뚝뚝 물방울이 떨어졌다.
“너는 왜 이래…? 왜 흠뻑 젖어서….”
“…….”
“이 피는 다 뭐야. 응? 언제 이렇게 다쳤어…?”
상처 입은 그 모습이 행여나 유달리 생생한 환영은 아닌지 만져서 확인해 보고 싶으면서도, 피부가 닿으면 다친 그가 아플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는 제게 닿지 못하고 서성거리는 나의 손가락을 붙잡았다. 손끝에 제 입술이 닿도록 느리게 나를 이끌어 주었다. 깃털이 닿는 것처럼 살며시, 아주 소중한 것에 입 맞추듯이.
눈물 섞인 입술은 차갑지만 한편으로 따뜻했다. 감촉, 체온, 눈빛. 모든 것은 분명한 밀도와 온기를 가지고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이한이, 이한이 나의 눈앞에 있었다.
그도 제 눈앞의 내가 믿기지 않는 듯 벅찬 표정이었다. 평소처럼 조금은 무심하지만, 울음기가 묻어나는 말투로 그가 말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여기 오다가 일이 좀 있었어.”
이한은 홀린 듯이 내 손을 움켜쥐고 주물거리다가 내 손에 피가 옮겨 묻은 것을 보고 흠칫 놀랐다. 제 티셔츠 자락을 쥐고는 내 손을 닦아주었지만, 너덜너덜한 그의 티셔츠는 이미 핏물에 얼룩진 상태였다.
“이, 이거 내 피 아니야. 나는 괜찮은데….”
덩달아 놀란 내가 어물어물 말하는 동안에도 그의 셔츠 자락은 더 붉게 물들고 있었다. 나는 조심스레 그의 손등 아래 손을 대고 상처 난 손바닥을 확인했다.
“왜 이렇게 많이 다쳤어…?”
“…….”
“파, 팔에도…. 어디에 찔린 거야? 계속 피가 나잖아.”
“…별거 아니라니까.”
그는 멋쩍게 손을 잡아 빼 제 등 뒤로 숨겼다. 그제야 정신이 든 나는 아래층에 자욱하던 알파들의 페로몬이 사라졌다는 걸 눈치챘다.
“아래층에 알파들이 많이 있었는데…. 서이준도… 있었고. 그 사람들이 너한테 이런 거야? 그 사람들은 지금 다 어디에….”
“그놈들은 다 돌아갔어. 그리고 서이준은… 네가 신경 쓸 거 없어. 일단 빨리 나가자. 네가 이런 데 있는 거 싫어.”
“으…응.”
“잠깐만, 아…. 이러면 너도 젖는데.”
그는 나를 부축하려다 말고 젖은 제 옷을 쥐어짜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여기서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다리에 힘이 들어간 나는 스스로 몸을 일으켰다. 철그렁, 한 걸음을 떼기도 전에 지긋지긋한 쇠사슬의 마찰음이 들렸다.
“젖는 건 상관없는데, 이게….”
내 말에 그는 골똘한 표정으로 쇠사슬을 당겨 보고, 수갑의 이음새를 확인했다. 내 손목을 이리저리 살피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며칠째 수갑에 쓸려서 짓무른 손목의 상처를 본 모양이다.
“씨발, 그 개같은 자식이….”
“…….”
“미안. 더 빨리 왔어야 했는데…. 그 새끼가 널 어디에 숨겨놓은 건지 알 수가 없어서. 아니, 그래도 내가 머저리 같이 며칠을 집에 틀어박혀 있지만 않았으면 더 빨리 찾을 수 있었을 텐데. 어, 그게, 그러니까….”
격분하던 그는 슬그머니 내 손을 놓고 우물쭈물했다. 긴장감으로 사나워 보이던 표정도 낮게 움츠러들었다.
“어, 저기…. 나, 내가 와도… 괜찮은 거지?”
그가 왜 그러는지 너무 잘 알아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는 내가 헤어질 때 했던 모질고 매정한 말을 신경 쓰고 있는 거다.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뭐라도 아는 것처럼 떠들어 댄 말들로, 그는 며칠이나 앓고 괴로워했을까.
미안하고 무안해서, 겨우 닿았다 떨어진 체온이 서글퍼서.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마음만 졸이는 사이, 그는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주눅 든 말을 늘어놓았다.
“네 말을 무시해서 여기 찾아온 건 아니야. 너는 날 안 본다고… 했었지만. 그래도 찾지 않으면 네가 위험해질 것 같아서. 아, 호… 혹시 지금 이 상황이 네가 선택한 거면, 네가 원한 거라면…. 내가 간섭할 수는… 없겠지만….”
말끝이 점점 안으로 먹어들어가더니, 그는 깊게 한숨 내쉬었다. 종종 보았던 습관대로 뒷머리를 푸르르, 흩어 버리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안 되겠어. 네가 이러고 있는 건 도저히 내가 못 보겠어.”
“…….”
“네가 다시 나를 안 보겠다고 했던 말도, 안 될 것 같아. 너를 계속 안 보고는 도저히… 내가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 미안해.”
“…….”
“내가… 잘할 거니까. 네가 싫다는 거 억지로 하지 않을 거고, 네가 나 불편해하지도 무서워하지도 않을 수 있게 노력할 테니까….”
“…….”
“그냥 널 볼 수 있게, 옆에 있을 수 있게만 해 주면… 안 될까…?”
다정하고 안쓰러운 말이 내게는 화살 같았다. 몇백 개의, 몇천 개의 화살이 나에게로 날아와 심장에 구멍을 내는 것 같았다. 마음이 너무 아파서, 입을 열면 곧바로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나는 한참이나 그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는 나의 침묵과 눈물 고인 눈동자를 거부의 의미로 오해한 것 같았다. 그의 얼굴에 드리운 초조하고 애타는 빛이 점점 짙어지더니, 곧 무릎이라도 꿇을 듯이 몸을 움찔거렸다.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 답답했다. 돌이켜보면 나는 언제나 그랬다. 해야 할 말을 해야 할 순간에 제대로 하는 적이 드물었다. 아니, 솔직한 마음속의 이야기를 제대로 뱉어 본 적이 거의 없었다.
괴로운 일이 많아 마음이 작게 쪼그라들었다는 것도, 누구와 깊게 닿아본 적 없어서 나와 남의 감정을 헤아릴 줄 모른다는 것도 다 핑계일 뿐이다. 어린아이도 아닌 주제에, 하지 말았어야 할 가시 돋친 말들은 잘만 쏟아내었던 주제에.
“…이한아.”
나는 떨리는 마음으로 그를 마주 보았다. 검고 깊은, 늘 심술궂고 속을 알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니 연약하리만치 솔직한 이한의 눈동자를.
계속 도망칠 수는 없다. 말로 빚어지지 않으면 마음이 닿지 않으니까. 방법을 모르더라도, 표현이 서툴더라도 지금은 말해야 할 시간이었다. 갇힌 방 안에서 괴로워하며 단 한 번이라도 말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애타게 소망하던 말을, 그에게 전할 시간이었다.
“보고 싶었어.”
가장 먼저 넘쳐 흐른 것은 결국 그 말이었다. 언제나 마음 안을 맴맴 돌기만 하던 말.
“미안해. 나 너무 뻔뻔스럽지. 다시 안 볼 거라고, 괜히 못되게 굴어 놓고…. 근데 여기 끌려와서 갇혀 있는 동안 계속, 한 번만이라도 널 다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 네가, 네가 와 줘서, 나는….”
“…….”
“내가 잘 몰랐어. 너는 계속 다정했는데도, 내가 그 마음을 받을 줄도 몰랐어. 아무것도 제대로 아는 게 없었어. 네 마음도, 내 마음도….”
“…….”
“내가 너무 서툴러서, 바보 같아서… 몰랐어. 내가 널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있었어.”
촉촉하게 젖은 그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느릿느릿 눈을 깜빡이던 그가 나의 어깨를 꽉 움켜쥐었다. 아릿한 현기증이 일었다. 그의 손이 떨리는 건지 내 몸이 떨리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지금… 뭐라고 한 거야?”
“…….”
“다, 다시 한번 말해 줘. 내가 들은 게 맞는지….”
“…….”
“아, 아니야. 아니야. 다시 말하지 마.”
그는 붙잡은 어깨를 당겨 나를 꽉 끌어안았다. 흠뻑 젖은 옷이 차게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더운 체온으로, 나를 부수고 녹여 버릴 듯 강한 힘으로.
“다시 말하지 마, 그냥. 나는 내가 들은 게 맞다고 생각할 거니까.”
“…….”
“잘못 말한 거여도 소용없어. 이제는 취소 못 해. 나는, 나는… 계속 그렇게 생각할 거야.”
그는 고집 센 어린아이처럼 서툴게 중얼거렸다. 그의 목소리에는 조심스러운 환희와 그만큼의 불안감이 가득했다. 그마저도 미안해서 나는 손을 들어 그를 마주 안았다.
“…잘못 들은 거 아니야. 잘못 말한 것도 아니고.”
“…….”
“계속 이렇게 말하고 싶다고 생각했어. 네가 보고 싶을 때마다 계속….”
“…….”
“너한테 그렇게 상처 준 주제에,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너무 염치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알게 되니까 마음이, 자꾸, 너무 많이 선명해져서… 흡….”
중언부언 이어지던 말은 그대로 끊어졌다. 그는 나에게로 고개를 깊게 기울었다. 입술 위로 포개지는 그의 입술이 뜨거웠다. 뜨겁고, 달았다.
그와 입맞춤을 할 때마다, 그에게 잡아먹히는 듯한 기분이라고 생각했었다. 닿은 곳으로부터 그가 나를 잘근잘근 씹어 삼키는 느낌이라고.
오늘은 그게 싫지 않았다. 이대로 그에게 푹 잠겨 들고 나면 겪어 보지도 알지도 못하는 세계로 빠져 버릴 거라는 두려움까지도 모두, 벅차도록 좋았다.
입술이 몇 번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하는 동안 잠시 가라앉았던 페로몬은 다시 끓어올랐다. 자각하기 시작한 순간에는 이미 늦어 버렸다. 둑이 터진 것처럼, 몸은 빠르게 변화했다.
코에 스미는 이한의 냄새가 갑자기 너무도 강렬하게 느껴졌다. 가까이 다가온 알파를 부르듯이, 내게서도 습한 향기가 내뿜어졌다. 아랫배는 뭉친 것처럼 뻐근하고 손끝 발끝이 저릿거렸다. 사이클이 코앞에 와 있었다.
“읏….”
놀라고 당황한 나는 그에게서 얼른 입술을 떼어 냈다. 그도 진동하는 단내를 느꼈을 것이다. 그는 나를 품에서 놓지 않은 채로 목덜미 부근에서 나의 향기를 들이마셨다. 간지러운 호흡이 훅, 뒷덜미에 끼쳐 왔다.
작게 몸서리치는 사이, 감각은 더 예민하게 곤두섰다. 그의 안에서도 울컥울컥 향기가 물결치는 게 느꼈다. 더 깊게 안기고 싶은 마음이 무서워서 겨우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는 머뭇거리면서도 나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더운 숨, 달아오른 눈가, 푸르게 빛나는 눈동자. 언젠가처럼, 그는 혀를 붉게 내어 제 입술을 훑었다. 꿀꺽, 목울대를 크게 움직이며 흥분을 삼키고는 애써 침착한 투로 물었다.
“괘, 괜찮…아?”
고개를 끄덕였지만, 전혀 괜찮지 않았다. 그에게서 옮겨붙은 옷의 물기가 몸 안으로 스미는 것 같았다. 몸의 습기가 구물구물 차오르다 못해 온몸이 물이 되어 뚝뚝, 아래로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아니, 온몸이 끈적한 물을 내뿜는 성기가 되어 버린 느낌이었다.
“이, 일단 빨리 여기서 나가자.”
이한은 내 손목에 매달린 수갑과 씨름하기 시작했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 몸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본능의 끝부분이 바짝바짝 메말라 타오르는 것처럼 간지러웠다.
발기되기 시작한 앞을 가리기 위해 몸을 살짝 웅크렸다. 그러나 이한은 눈으로 보지 않아도 내 상태를 읽었을 것이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고 있는 그가, 공기를 진동시킬 정도로 격한 흥분을 품고 있다는 걸 나도 알 수 있었으니까.
수갑을 만지작거리는 그의 손은 성급하게 헛돌다가, 조금씩 머뭇거리더니 이내 멈추어 버렸다. 그의 머리칼에서 아래로 떨어진 물방울이 똑, 타일 위에 작은 동그라미를 그렸다.
내게는 그 물방울이 바닥에 닿는 순간 산산이 공기 속으로 흩어져 버리는 것처럼 보였다. 임계점을 넘어 파스스, 증발해 버리는 물방울.
“읏…. 아, 아아….”
그때, 수갑을 쥔 그의 손가락이 나의 손목에 닿았다. 알파가 만진 곳으로부터 오싹하고 짜릿한 기운이 시작되었다. 며칠을 억지로 잠겨 있던 본능은 짓눌린 풍선이 펑, 터지는 것처럼 폭발했다.
내 몸 안에 다 담을 수도 없게 뿜어져 나온 페로몬이 공기를 달게 적셨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눈앞이 희게 흩어졌다.
히트가 시작되었다.
주춤거리던 나는 타일 벽에 등을 기대었다. 차가운 감촉에 파르르, 몸이 떨렸다. 제풀에 자극당한 아래가 축축하게 젖어드는 게 느껴졌다.
“나, 나….”
그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선은 나를 벗기고 어루만지는 듯 뜨겁고, 표정은 당장이라도 나에게 달려들 듯 날이 서 있었다.
그러나 그는 힘겹게 충동을 내리누르고 있었다. 이를 악물면서도, 내가 원하지 않는 일은, 나를 해치는 일은 결코 하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하는 눈이었다. 나는 강렬한 정염과 동시에 눈물이 날 것 같은 안도감을 느꼈다.
길고 긴 길을 걸어온 끝에, 나는 이제야 겨우 스러져 기댈 수 있는 자리에 찾아온 것이다. 가슴 안을 벅차오르는 많은 것들에, 더는 제대로 된 생각을 이어 갈 수 없었다.
“못… 참겠어. 흐, 으….”
“…….”
“안아 줘. 그, 그냥, 여기서….”
부끄러운 말을 입에 담으면서도 나는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다. 오로지 그와 닿고 싶다는 생각으로, 더 깊고 진하게 나를 만져 주었으면 하는 생각으로 가득했다.
이한의 눈동자 안에 휘몰아치는 격랑이 보였다. 깊게 입술을 깨무는 모습마저 유혹으로 느껴졌다. 다시 조르는 말을 하려던 찰나 그의 팔이 내 몸을 파고들었다. 한 팔은 등을 둘러 안고 다른 팔은 무릎 아래를 받쳐 훌쩍, 위로 들어 올렸다.
그에게 안겨 침대로 가는 동안 나는 그의 가슴과 등과 어깨에 정신없이 살을 비비적거렸다. 데일 듯 뜨거운 그의 몸이 나를 식혀 주기라도 하는 것처럼.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그는 내가 유리 세공품이라도 되는 것처럼 조심스레 침대에 내려놓았다. 한계에 다다른 나에게는 그 짧은 순간이 짜증스러울 정도로 길게 느껴졌다.
“빨리. 응…?”
갈급한 욕구를 조금도 숨길 수 없었다. 나의 위로 몸을 겹치는 그의 눈동자도 성급한 빛으로 가득했다. 나는 기쁘게 두 팔을 들어 나를 삼킬 그 빛을 맞이했다. 내가 늘 두려워하던 포식자의 강인하고 잔혹한 눈빛을.
그는 나에게 입맞춤의 비를 내렸다. 귓가와 콧잔등, 볼을 지나 피부가 여린 목선까지. 나를 모두 핥아 내릴 듯하던 그의 입술에 맥이 피어오르는 목의 가운데 부근에 문득 멈추었다.
지그시 한 자리에 멈추어 버린 온기에 조바심이 나려다가, 문득 깨달았다. 그의 입술이 지금 나의 박동을 읽어 내리고 있다는 것을. 내 향기를 확인하듯이, 심장이 제대로 뛰고 있다는 것을 음미하듯이.
“윤오야….”
나를 부르는 소리가 애달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내가 그랬던 것처럼 그도 나를 그리워하고 있었을까. 나를 보지 않고는 견딜 수 없다는 조금 전의 말처럼. 내게 닿을 수 있을지 아닐지 막막하기만 한 시간 속을 헤매고 있었을까.
몸을 붙이고 있지만 더 가까이 닿고 싶은 마음에, 나는 그의 어깨를 안아 당겼다. 그는 제품에 파고든 나에게 더 짙게 입술을 부볐다. 턱 끝을 따라 다시 올라온 입술이 나의 입술에 닿았다.
포개어진 입술은 약속된 것처럼 꼭 맞아 들었다. 갈증에 시달리던 나는 기다렸다는 듯 키스에 열중했다. 나를 애무하는 그의 혀와 입술을 두서없이 핥고 빨아들였다.
깊게 물린 입술이 살짝 떨어질 때마다 그와 내가 미처 삼키지 못한 신음과 타액이 흘러내렸다. 나는 그렇게 떼어진 잠깐의 순간도 아쉬워 다시 그를 뒤쫓아가 더 진하게 혀를 얽어 댔다.
“하, 하으으.”
“…….”
“응, 으읏, 이한…아….”
아득한 흥분이 쉬지 않고 출렁거렸다. 파도 같은 열기에 휩쓸려 머릿속으로 어떤 문장도 만들 수 없게 되었다. 그의 향기가 너무 좋아서 호흡이 멈춰 버릴 것 같았다.
두서없이 구는 것은 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급한 손길로 내 옷 속을 더듬거렸다. 젖은 옷을 가슴께까지 걷어 올렸다가 이내 찢듯이 셔츠 단추를 뜯어냈다.
거칠고 거침없는 태도에 공기는 더 끓어올랐다. 손도 대지 않은 유두가 팽팽하게 일어나 있었다. 그가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짓누르자 더욱 피가 몰린 그곳은 예민하게 곤두섰다.
“흐읏!”
초라하고 메말라 버린 몸의 모든 곳에 그의 손끝과 입술이 달려들었다. 가슴의 돌기와 갈비뼈가 올록볼록 드러난 흉곽으로, 상처 입은 손목과 뺨으로, 뼈가 뾰족한 어깨와 곳곳의 마디로.
혈기를 잃었던 나의 몸은 그가 빨아들여 생긴 울혈과 그에게서 묻은 피 얼룩으로 붉게 물들었다. 정신없이 얼룩진 내 몸의 흔적들마저 나를 자극했다. 흥분을 이기지 못한 그가 송곳니를 세워 피부를 잘근거릴 때는 전율마저 일었다.
남김없이 나를 더듬어 내려간 그의 손이 나의 바지춤에 닿았다. 축축하게 젖은 바지를 벗겨내는 게 답답하리만치 오래 걸렸다. 신음하다 못해 흐느끼던 나는 몸을 뒤척여 그를 재촉했다.
몸에 달라붙었던 천 조각이 사라지자, 볼품없는 두 다리가 그의 앞에 그대로 드러났다. 빳빳하게 발기한 앞쪽의 성기와 액을 흥건하게 머금은 뒤쪽의 성기도.
그의 손이 나의 둔부에 닿는 순간, 나는 감전된 듯한 느낌에 몸을 떨었다. 이미 비어져 나와 있던 물기가 골 사이로 주르르 흘러내렸다. 미끌거리는 입구 안으로, 그가 손가락 찔러넣었다.
“흐읍…!”
나는 노골적인 환희의 탄성을 질렀다. 고통이 앞섰던 지난번과는 전혀 달랐다. 이물감이나 저항감 같은 것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뭐라도 쑤셔 넣어 달라고 난리를 피우던 그곳은 기쁘게 벌름거렸다. 딱히 기분 좋은 지점에 닿은 것도 아닌데 벌써부터 흥분감이 치솟았다. 안을 벌리고 넓히는 손길에 응답하듯 밑은 더 젖어 갔다.
잠시 그의 손가락을 느끼던 나는 점점 더 짐승처럼 헐떡이기 시작했다. 잠깐의 갈증이 가시는가 싶더니 바닷물을 마신 것처럼 더욱 괴로워졌다. 성에 차지 않는 기분에 목이 마르고 뺨이 후끈거렸다. 성급한 내벽은 더 굵고 거칠고 짙은 것이 밀려 들어오기를 바라며 펄떡거렸다.
“아응, 으, 흐응, 빨리….”
나는 노골적으로 그를 재촉했다. 평소 같으면 상상도 못 할 말들이 입술 새로 줄줄 새어나는데도 알아채지도 못했다.
“아, 하으으…. 더, 더어….”
“…….”
“그냥, 아아, 해 줘. 이대로…도, 괜찮아. 응…? 아아….”
허공을 휘젓던 나의 손이 이한의 어깨 위에 내려앉았다. 단단한 그의 몸은 흥분으로 예리하게 달구어져 있었다. 다급한 것은 마찬가지인지, 그의 눈에도 핏발이 형형했다.
흘긋, 눈길을 돌려 아래를 훑어보는 표정이 뜨거웠다. 그는 고개를 일으켜 나에게 다가왔다. 금방이라도 나를 씹어 삼킬 듯했던 입술은, 그러나 꽃잎처럼 부드럽게 입 맞추었다.
“안 돼. 아프면…. 제대로 안 하면, 아프니까….”
그도 힘겹게 참는 목소리였다. 달래는 말과 함께, 몸 안으로 손가락 하나가 더 들어왔다. 무언가가 녹아내릴 것 같아 몸이 떨렸다. 밑이 헤집어 벌려지고, 차곡차곡 이완되는 느낌이 여전히 낯설었다.
감각의 홍수 속에서, 나는 나를 이루는 무언가가 통째로 뒤흔들리는 소리를 들었다. 아주 오랫동안, 어쩌면 평생을 틀어 잠겨 있던 내 안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다 풀어지고 흐트러질 것 같았다.
“으, 하으, 아아!”
간헐적으로 뱉는 비음에 흥분과 욕정이 남김없이 드러나 있었다. 나는 그가 주는 자극이 기뻐 몸을 떨면서도 그다음의 자극을 쫓아 허덕였다. 어쩔 줄 몰라 끙끙거리던 나는 다시 그의 볼을 매만졌다.
내 마음을 읽었는지, 그는 다시 입술을 겹쳐 주었다. 이번에는 좀 더 깊고 진하게. 입안으로 침입한 그의 혀가 성기처럼 느껴졌다. 어린아이에게 사탕을 물려 주었을 때처럼, 나는 쉼 없이 그의 혀를 빨아들였다.
칭얼거림이 잦아든 사이 그는 손가락을 깊게 밀어 넣었다 빼기를 반복했다. 더듬어 가던 손끝이 안쪽의 예민한 곳을 스친 순간, 나는 곧바로 몸서리쳤다.
“아, 하악…!”
그가 닿은 자리에 뜨겁고 들큼한 불꽃이 터지는 것 같았다. 작열하는 불꽃이 나를 지지고 그을렸다. 괴로움에 몸부림치던 나는 더듬더듬 내 페니스로 손을 가져갔다. 사정해 버리고 나면 이 열기가, 산채로 나를 태워 죽일 듯한 불꽃이 가라앉을 것 같았다.
터질 듯 부푼 성기의 끝에서 프리컴이 축축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손바닥을 적실 정도로 흥건하게 흥분했으니 금방 도달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절정의 문턱에서 자꾸 느낌이 흩어지기만 했다.
아프다 싶을 정도로 강하게 표피를 문질러 대도 괴로운 느낌은 더 심해지기만 할 뿐 가라앉을 줄은 몰랐다. 이걸로는 도저히 사정할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에 갈급함은 더 커졌다.
“아으으, 흐, 이…한, 아아….”
“…….”
“나, 나 좀, 하읏, 나 좀 어떻게….”
견디다 못한 내가 결국 칭얼거리자, 그도 이제 한계라는 듯 얕은 한숨을 쉬었다. 어쩌면 그건 한숨이라기보단 으르렁거리는 울부짖음 같았다.
그는 깊게 박아 넣었던 손가락을 끄집어내고는, 숨을 고르며 내 다리 사이에 자리 잡았다. 그가 제 바지를 반쯤 내리는 짧은 시간 동안에도 애가 탄 나는 발끝을 그의 몸 옆에서 동동거렸다.
“아프면 얘기해야 해. 응? 아프면….”
간신히 상냥한 말을 웅얼거렸지만, 이한의 표정은 이미 사나운 짐승 같았다. 그는 흉흉하게 부푼 성기를 내 둔부에 가져다 붙였다. 아우성치던 구멍은 그가 닿는 순간 벌름거리기 시작했다.
곧바로 밀어 넣기에는 버거운 크기였지만, 나도 그도 뜸을 들일 여유는 없었다. 내 허벅지를 붙잡고 각을 맞춘 그는 그대로 제 것을 박아 넣었다.
“으윽. 흐으으….”
알파의 살덩이가 내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고작 그 한 번에, 같은 곳을 맴돌기만 하던 성감은 단번에 한계까지 치솟았다. 몸 안에 품고 있기에는 너무 강렬한 느낌에 아랫배가 덜덜 떨렸다.
무서워진 나는 손버릇 나쁜 어린아이처럼 다시 내 성기를 향해 손을 가져가려 했다. 그러나 이한은 다그치듯 나를 가로막았다.
“안 돼.”
“으으… 아, 으읏…!”
이한은 나의 양손을 모아쥐고는 머리 위로 내리눌렀다. 좌절된 절정이 짜증스러웠지만, 길게 불평할 여력이 없었다. 곧게 세운 그의 허리가 쿵, 다시 나를 밀어붙였다. 밑이 녹아 버릴 듯한 쾌감이 섬뜩하게 밀려왔다.
“하윽!”
이내 생각조차도 모두 짓뭉개져 사라졌다. 오로지 내 안을 드나드는 이한의 것만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배 속의 맥박이, 간지러운 열기가 두려울 정도로 나를 압도했다. 쾌감과, 고통과, 쾌감의 연속이었다.
“윽, 하악, 아…!”
굵직한 것이 안을 긁으며 빠져나갈 때는 내벽이 몸 밖으로 쏟아져 버리는 기분이었다. 썰물 같은 아찔함에 바르르 떨다 보면 이한은 단단한 몸으로 다시 부딪쳐 왔다.
퍽, 퍽, 간격을 좁혀 들어오는 박자에 따라 나는 정신없이 흔들렸다. 그의 두 팔 아래에서 활짝 벌어진 다리가 파닥거리고, 끈끈한 체액이 이리저리 튀어 올랐다.
내가 흐느끼는 만큼, 그의 눈도 격정에 불타오르고 있었다. 나는 덫 안의 사냥감처럼 생각했다. 제 입술을 짓씹고 있는 그의 송곳니가, 나를 아무렇게나 물어뜯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아, 아아, 흐으으…!”
“…….”
“아아, 제발….”
사정 직전의 짜릿함이 끔찍할 정도로 길었다. 나는 달그락달그락, 신경을 긁는 소리를 내며 정점으로 치달아가는 롤러코스터에 영원히 묶여 있는 기분이었다.
몇 번이나 그에게 붙들린 손목을 잡아빼려 했지만 그는 내가 쉽게 절정에 도달하는 것을 허락해 주지 않았다. 답답함과 아득함에 입안이 달게 말라붙는 사이, 쾌감은, 그러나 차츰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윽, 아아….”
“…….”
“아읏! 이, 한…아아.”
“아파…?”
“미칠, 것 같아…. 하으, 응….”
“후우, 후….”
“이상…해, 읏, 아, 좋아…. 아! 아아…. 어떡해… 아아…!”
나도 모르게 ‘좋아’라는 말을 뱉은 순간 그는 어느 때보다 더 깊고 강하게 제 것을 나에게 박아 넣었다. 울컥 치솟은 사정감에 나는 무너져내렸다.
시야가 하얗게 바랜 채로, 바짝 일어선 성기의 끝에서 정액을 뿜어내기 시작했다. 하반신의 모든 근육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밑을 파고들던 움직임을 잠시 멈추고 그곳을 응시했다.
시선의 열기가 따가웠지만 부끄럽다고 느낄 수도 없었다. 나는 마침내 저 높은 곳에서 내던져진 듯한 아찔함에 사로잡혀 있었다.
이한은 사정을 반쯤 마친 내 것을 손에 쥐고는 체액을 쥐어짜내 듯 위로 훑어 올렸다. 제 손으로 흘러내린 정액을 붉은 입술로 가져가 핥았다. 몽롱한 기분에 휩싸인 채, 만족스럽다는 듯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하아….”
열기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방금 절정을 맞았던 내가 그랬으니, 그는 당연히 더 뜨거웠다. 그는 호흡을 가다듬을 틈도 주지 않고 제 몸으로 나의 몸을 완전히 뒤덮었다. 더운 볼을 내 뺨에 부비다가, 어깨 위에 입술을 묻은 채로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아, 으… 으윽!”
그의 성기가 몸속 깊은 곳을 마구 찔러 댔다. 굵직한 귀두가 스팟을 건드리다 못해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사정 직후의 예민해진 몸에 지나친 자극이 가해졌다.
나는 쉼 없이 신음하고 비명 질렀지만, 본능은 수치스러움도 ‘지나친 자극’이라는 말의 의미도 모르는 듯 그를 더 들쑤셨다.
향기는 알파의 무자비한 침입에 더 농밀하게 뭉쳐졌고, 그의 성기에 바짝 달라붙은 내벽은 그가 잠시 떨어지는 것도 싫다는 듯 그를 따라 딸려 나갔다가 다시 밀려 들어오기 무섭게 그것을 휘감아 댔다.
“윤오, 야, 후우….”
“아윽, 읏! 하읏.”
“윤오야, 으, 윤오….”
이한은 나의 이름을 더듬고 더듬었다. 거칠고 무자비한 아래의 움직임과는 달리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는 솜사탕처럼 부드러웠다.
쾌감에 헐떡이면서도, 뜻 모를 눈물이 흘러나왔다. 나는 짓눌린 손가락 끝을 까딱였다. 그는 손목을 내리눌렀던 손을 떼어서 내 손을 잡아 주었다. 손가락 사이로 스며들어오는 그의 손가락이 기뻤다.
깍지 낀 두 손을 맞잡은 채로 그는 속도를 올렸다. 그가 나에게 와 부딪칠 때마다 습하게 철퍽이는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나는 그 속도에 맞추어 젖은 목소리를 내질렀다.
이한이 나에게 퍼부어 대는 것을 고통스럽게, 그러나 황홀하게 받아들였다. 무의식중에 허리를 가까이 들어 올려 그에게 더 가까이 붙이기까지 했다.
발기가 풀린 지 얼마 되지도 않아, 나의 페니스는 다시 완전히 부풀었다. 두 몸 사이에 비벼지는 감촉, 아래에서 마구 올라오는 쾌감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하으, 하, 나, 나 또….”
“…….”
“읏, 가, 갈 것 같아. 아…!”
“후우… 읏….”
칭얼거리는 듯한 나의 말에, 그는 대답 대신 농밀한 숨을 뱉었다. 그도 이제 한계였다. 깊숙이 나를 긁고 지나간 그가 제 것을 끄집어내더니 내 배 위에 사정했다. 몸 위로 흩뿌려진 둘의 정액이 불분명하게 뒤섞였다. 끈적끈적한 향기도.
“하으으, 하….”
한바탕의 폭풍 끝에서, 나는 숨을 뱉으며 바르르 진동했다. 연달아 두 번이나 절정에 도달해 버린 몸은 피로에 빠져드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뒤늦게 곳곳이 쓰리고 욱신거렸다. 애초에 아무런 힘도 없던 몸이 벌어지고 흔들리고 쥐어짜여졌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옆으로 웅크린 나의 등 뒤에, 이한은 제 몸을 누였다. 그에게서 포근한 냄새와 아직 다 잦아들지 않은 심장의 격동이 느껴졌다. 언제 이를 드러낼지 모르는 짐승처럼 들끓는 기운을 하고서도, 그는 상냥한 손길로 나를 폭 감싸 안았다.
우리는 땀과 정액, 그의 상처에서 흐른 피와 내게서 흘러나온 애액으로 질척해진 몸을 서로 붙였다. 그가 따뜻하고 조심스럽게 나를 쓰다듬었다. 상처 입은 커다란 손이 안타깝고 사랑스러웠다.
안도감에 마음은 녹아내리는 것 같고, 몸은 탈력감에 손 하나 까딱하기 힘든 상태였다. 나는 서둘러 일어나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고도 생각하면서도, 이대로 그에게 안겨 잠들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어… 나 왜….’
생각의 방향은 두 가지였지만, 본능은 달랐다. 해소된 줄 알았던 그것이 다시 꿈틀댈 거라고는 당연히 예상하지 못했다. 힘이 다 풀린 하반신에서 다시 발정의 기미를 느꼈을 때, 나는 당황해 버렸다.
착각일 거라고 무시하려 했지만, 불행히도 착각이 아니었다. 발작처럼 아래가 끓어오르고 벌름거리는 이 느낌은 조금 전과 같았다. 아니, 전보다 무자비하고 크게 부풀어 모든 것을 엉망으로 만들어 버릴 것 같았다.
더 끌어낼 기력조차 없는데, 이성과 본능이 이렇게 통하지 않을 수 있는 걸까. 향을 눌러보려고 했지만, 이미 벽이 무너져 버린 듯 마음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흐…음….”
한번 충동이 당겨지기 시작하니 걷잡을 수 없었다. 등에 닿은 그의 가슴팍마저 자극으로 느껴졌다. 숨죽인 호흡 속에서 아랫배가 살살 뭉쳐 오기 시작했다. 기척을 숨기려고 해 봐도, 등 뒤에서 나를 안은 이한에게 숨길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느새 나는 다시 아래를 세운 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멋대로 동해 버린 몸이 수치스러웠다. 발정 난 짐승이 된다는 게 이런 의미구나 싶어서.
“어…. 저기….”
슬며시 입술을 뗀 나는 차마 다음 말을 할 수 없었다. 이런 곳에서, 이런 상황에, 상처투성이로 피를 흘리는 사람에게 다시 안아 달라는 말을 해야 하다니. 부끄럽고 두려운 기분에 말 대신 눈물부터 뜨겁게 올라왔다.
“아아, 나 왜 이러지….”
푸념처럼 훌쩍이는 나를, 이한은 더 깊게 껴안았다.
“괜찮아.”
“이거… 원래 이런 거야…? 나, 나 자꾸, 또….”
“…몰라. 나도 사이클에 누구랑 같이 있어 본 적이 없어서.”
“…….”
“그치만 며칠씩 앓기도 하니까. 이상한 일 아니야. 괜찮아. 후….”
나를 달래는 목소리도 조금씩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토닥이는 뉘앙스가 조금씩 은근해졌다. 축축한 피부 위를 차츰차츰 더듬어 가던 그의 손끝은 끈적하다 못해 거칠게 나를 만졌다.
“하으으….”
피부 위를 간질이는 감각에 정신이 팔린 사이, 어느새 나는 침대 위에 엎드린 자세가 되어 있었다. 나의 등줄기를 쓸어내리던 그가 내 허리를 들어 올렸다. 젖은 둔부에 뜨거운 그의 허벅지가 붙었다. 맨살에 맨살이 닿는 느낌만으로 가 버릴 것 같았다.
“아아, 아…. 빨리….”
보채는 말을 할 때 그는 이미 내 골 사이로 제 것을 밀어 넣고 있었다. 벌어지고 헤어진 밑은 전보다 훨씬 수월하게 그를 받아들였다.
“으, 으읏, 학….”
그는 내 골반을 꽉 움켜쥔 채로 몰아붙이듯 움직였다. 돌처럼 딱딱한 살덩이는 전보다도 훨씬 거침없이 내 몸을 치받아댔다. 이한은 빠르게 몸을 놀리면서도 매번 나의 감각점을 건드렸다.
온몸이 훅훅 떠밀릴 정도로 강한 허리 짓이었지만, 더는 그 행위가 고통스럽지 않았다. 고통이 사라진 자리에는 쾌감만이 남았다. 뇌가 흐물흐물 곤죽이 되어 버리는 듯한 쾌감만이.
온몸이 흔들릴 때마다 사위가 빙빙 도는 느낌에 차라리 두 눈을 감았다. 어깨 아래를 짚고 버티던 팔은 이내 무너져 내렸다.
나는 아래로 처박힌 뺨을 시트 위에 비볐다. 시트는 그의 옷에서 옮은 습기인지 우리가 흘린 체액인지 모를 것에 이미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내가 눈물을 흘리고 있는 건지 아닌지도 구분하기 어려웠다.
“하윽! 으응, 읏.”
“후….”
“으흣, 아, 아윽!”
목구멍에서 짐승 같은 울부짖음이 터져 나왔던 걸 보면 아마도 나는 울고 있었던 것 같다. 아득하게 허공을 떠도는 의식 속에서도 나는 자꾸만 의문을 품었다.
알파와 닿는 것이 발정을 해소하는 방법이 맞기는 한 걸까. 가라앉을 줄 모르고 거세게 타오르기만 하는 충동은 언제야 끝나는 걸까.
이한은 상체를 들어 올린 채로 나의 아랫배 밑으로 손을 받치고 제 것을 쑤셔 박아 댔다. 그가 뱉는 숨결이 나의 등 위로 간질간질 부서져 내렸다. 닿을 듯 닿지 않는 체온에 애가 탄 나는 울먹이며 말했다.
“흐으, 아, 안아 줘….”
그는 아무 대답도 없이 몇 번이고 내 안을 찔러 들어왔다. 어깨를 붙잡아 뒤로 강하게 당기는 손길에 삽입감이 무서울 정도로 깊어졌다. 몸이 둘로 갈라져 버릴 것 같은 느낌에 몸서리쳤다.
“아윽, 아, 하악!”
참지 못한 나는 바닥에 파묻힌 고개를 마구 내저었다. 그는 손을 내려 나의 머리를, 목덜미를 감싸 쥐었다. 난폭하지만 두렵지 않은 손길이었다.
정신없이 허리를 들썩이면서도, 나는 그가 나의 목덜미를, 머리칼과 목의 경계선 부근에 자리한 작은 상처를 만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기민한 본능은 그가 말해 주었던 단어 하나를 기억해 냈다.
각인, 이라는 말을.
그 단어가 머리를 스친 순간 섬뜩한 열기가 나를 훑고 지나갔다. 알파와 오메가가 오로지 서로에게만 발정하도록 구속시킨다는, 그 행위.
전율에 떨고 있는 나에게로, 이한은 드디어 몸을 기울여 주었다. 내 등 위로 제 가슴을 포개고, 시트를 움켜쥔 내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치자 우리는 빈틈없이 연결되었다. 기다리던 자극이, 완전히 나를 누르는 무게감이 기분 좋았다.
그는 뜨끈한 입술을 내 어깨뼈에 대었다. 닿은 곳부터 전류가 신경을 타고 흘렀다. 그는 심술궂을 정도로 같은 자리에 키스를 퍼부었다. 뼈 위를 얄팍하게 감싼 피부를 핥고 빨아들이다가 이를 세워 나를 물었다.
“아아, 아…. 흐읏…!”
그는 내 몸의 가장 깊은 곳으로 그의 것을 박아 넣었다. 뿌리 끝까지 틀어박히는 감각에 눈앞에 번개가 번뜩였다. 나는 소리조차 지르지 못하고 짓눌린 어깨만 움틀거렸다.
젖은 피부는 질척한 소리를 내며 미끄러졌고, 맥박과 호흡이 어지럽게 뒤엉켰다. 나는 쾌감에 관통당한 채로 밀착된 무게 아래 이리저리 흔들렸다.
나의 것은 터질 듯 발기한 채로 우리 둘의 아래에서 짓눌리고 있었다. 뒤로 저만치 허리를 물렸던 그가 다시 한번 빠르고 강하게 찔러 들어오자, 나는 쾌감을 이기지 못하고 사정했다. 몸을 꿰뚫는 듯 아찔한 절정감에 반사적으로 아래가 조여들었다.
“후, 읏.”
이한은 억눌린 신음을 뱉으면서도 몸을 멈추지 않았다. 하반신은 쉼 없이 나를 두드렸고, 날을 세운 송곳니는 계속 내 어깨를 잘근거렸다.
아득한 나른함 속에서 나는 계속 흔들리기만 했다. 비슷한 곳을 맴도는 그의 입술이 어쩐지 불안하고 신경질적이라고 느끼던 찰나, 그는 갑자기 더 크고 거친 움직임으로 나를 파고들었다.
“하으, 으…. 이한….”
예민해진 감각이 괴롭게 울부짖었다. 소스라쳐 그의 이름을 부르자, 어깨를 서성거리던 그의 입술이 조금 더 안쪽으로 옮겨가 이내 목덜미를 스쳤다. 처음에는, 가볍게 닿았다 떨어지는 입맞춤이었다.
“흐으응….”
순응하는 듯한 나의 한숨에, 그는 나의 상처 위에 입술을 가져왔다. 오래전 아물어 닫힌 살갗의 틈새로, 무언가 뜨겁고도 격렬한 것이 새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이한의 충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내 목을 물어 버리고 싶어 하는 중이었다. 그것은 분명, 나를 소유하려는 마음일 것이다. 집요하고도 은근한 소유욕이 나를 향하고 있다는 게 짜릿했다. 명치가 뻐근하리만치 만족스러웠다.
가만가만 입술을 부비던 그는 치아의 날카로운 단면으로 내 목덜미를 긁었다. 나는 감전된 듯한 흥분감에 몸을 떨었지만, 그는 제풀에 놀란 듯 내게서 입술을 떼어 냈다.
“하아, 읏…. 아, 안 되겠어. 이러고, 있으면 자꾸….”
“응…?”
“차라리 자세를 바꾸는 게….”
그는 다시 내 골반을 쥐고 몸을 뒤집으려 했다. 화들짝 놀란 나는 시트를 움켜쥐었던 손을 뒤로 뻗어 그의 손목을 잡았다.
“…해도, 하읏, 괜…아.”
머리가 결정을 내리기 전에, 입술이 먼저 대답을 골랐다. 입안으로 웅얼거린 문장에, 그는 동요하며 되물었다.
“…뭐라고?”
“가, 각인…해도, 하아, 괜찮, 아.”
용기를 낸 말이라고 생각했지만, 막상 뱉고 보니 그 말은 충분한 진심이 아니었다. 본능의 끝에 내몰린 순간까지 스스로를 부인하는 꼴이 우스웠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를 추슬러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해, 해 줘…. 읏, 네가, 해 줬으면… 좋겠어.”
“…….”
“여기, 하악, 여, 여기… 물어, 줘…흐읍…!”
나는 수갑에 묶인 손을 위로 올려 목 뒤의 상처를 더듬어 보였다.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한은 내 손을 잡아채 포박하듯 등 위로 내리눌렀다.
“후우, 진심…이야? 너, 그게 뭔지, 제대로….”
“알아.”
“…….”
“하아, 네가, 했던 말… 으읏, 기억하고, 있어. 빨리, 아윽, 빠, 빨리….”
나는 사로잡힌 채로 그에게 급소를 내보인 꼴이었다. 그런데도,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나는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그를 재촉해 댔다. 어서 이를 세워 나를 물어 달라고.
이를 악물고 있는 듯 팽팽해진 그의 입술이 나의 목덜미 위를 쓸었다. 피부 위에 무언가를 새기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금방이라도 선을 넘어 버릴 듯 당겨진 긴장감 속에서, 그는 머뭇거리며 말했다.
“지, 지금… 각인하면, 후… 나도 바로, 러트가 시작돼.”
“아응, 읏, 아, 아아.”
“한참 동안, 못, 읏, 멈출 거야. 그래도, 후, 괜찮겠어…?”
세 번을 사정하고도 끈질긴 본능은 다시 굼질거리기 시작했다. 나는 어차피 나의 발정도 한참동안 멈추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걸 직감했다. 다정한 배려가 답답하기만 했다. 그의 마지막 말은 경고라기보다는 유혹처럼 느껴졌다.
“해 줘….”
신음 사이로 겨우 뱉은 한마디에, 나를 붙든 그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쩐지 시간이 멈춘 것 같은 느낌이었다. 기묘한 감각들이 느리고도 선명했다.
가파른 속도로 나를 드나드는 그의 성기와, 등을 짓누른 손, 목덜미 위로 내리쬐는 호흡,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날카롭고 단단한 송곳니의 감촉.
그리고 기어이 그가 깊게 목덜미를 물어 내가 그의 것임을 낙인찍은 순간, 그 모든 감각과 감정들은 혈관을 타고 저 먼 곳까지 퍼져 나갔다.
“으읏…!”
이한은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은 채로 나를 무너뜨릴 기세로 허리를 치받아 댔다. 본능은 다시 붉게 달구어지기 시작했다. 여러 번 되풀이된 쾌감이라고 생각했지만, 여태까지와는 또 다른 짜릿함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내 몸 안에 들어온 이한의 성기가 어느 때보다도 크고 뜨겁게 느껴졌다. 충분히 풀어지고 헤어진 아래가 꽉 들어차다 못해 빡빡하게 조여들 정도로.
“하읍, 하, 이, 이거 왜….”
“…….”
“아윽, 아, 아….”
기분 탓이 아니라, 그의 것은 조금씩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내벽을 꽉 채운 뜨거운 것이 나를 터뜨릴 것 같았다. 촘촘한 허리 짓으로 내 안으로 마구 짓이기던 이한은 흉물스럽게 커진 그것을 더 깊게 박아 넣었다.
“흐으으….”
움직임을 멈춘 그는 두 팔로 제 밑에 깔린 나를 꽉 끌어안았다. 나를 으스러뜨릴 듯 강인한 힘이었다. 불에 달군 것처럼 뜨겁게 팽창했던 그의 것은 내 안에서 절정을 맞이했다.
그는 오랜 시간에 걸쳐 울컥울컥 토정했다. 그에게서 흘러나온 뜨거운 체액이 내 몸속에서 출렁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느끼는 흥분과 격정이 그대로 스며드는 것 같았다.
“흑….”
불쑥, 눈물이 치밀어올랐다. 젖은 숨을 삼키는 소리에 놀란 이한은 화들짝 내 몸을 뒤집었다. 여전히 흥분에 푹 절여진 얼굴을 하고서도, 그는 걱정스레 나를 내려보았다.
“아, 아팠지….”
“읏… 흐으….”
“일부러 그런 게 아니라 원래, 각인을 하면….”
“흑, 아, 아니야.”
“…….”
“그냥, 으…. 나는, 그냥….”
아무 말도 할 수 없어서, 나는 두 팔을 들어 그의 등을 끌어당겼다. 그가 나를 안아 주었던 것처럼 품 안에 있는 힘껏 그를 담았다. 두 개의 심장은 발을 맞추듯 비슷한 속도로 찬찬히 잦아들었다. 이유 없이 흐르던 눈물도, 조금씩.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호흡이 가라앉은 후에도 나는 한참 그를 껴안고 있었다. 할 수 있다면 영원히 그렇게 살을 맞대고 있고픈 마음이었다. 지그시 그의 어깨에 볼을 기댄 채, 뜻도 모를 말을 중얼거렸다.
“…따뜻해.”
그는 고개를 돌려 나의 귓가에, 볼에 입 맞추었다. 그러다 다시 입술 위에 입술이 닿았다. 상처 입은 새가 서로의 날갯죽지를 감싸는 것처럼 포근한 입맞춤이었다.
입술이 잠시라도 떨어지는 순간에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다시 고개를 내밀어 서로의 입술을 찾았다. 몇 번을 그렇게 입맞춤을 나누는 사이, 향기는 다시 달큰해졌다.
“후우….”
진득하게 혀를 섞고 난 후, 그는 한숨을 뱉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마주친 눈동자는 또다시 퍼릇한 불길을 품고 있었다. 사나운 불길이 그의 눈빛과 체온과 호흡, 향기까지 휘감았다.
그는 뜨거운 손으로 내 뺨을 쓸어내렸다. 찌릿한 손끝은 가슴을 지나, 배를 따라 무릎으로 이어졌다. 지그시 누르는 손길에 무릎이 벌어지자, 입구 언저리에 고여 있던 정액이 골을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아…!”
새삼 부끄러운 기분에 밑을 가리려고 했지만, 그는 단호하게 내 손을 붙잡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눈동자는 고요하고도 강렬했다. 오만한 미소가 잘 어울릴 것 같은 포식자의 입술. 그러나 그는 고개를 깊게 숙여 붕대를 감은 나의 발등에, 가장 낮고 상처 입은 곳에 입 맞추었다.
“어떡하지….”
그의 목소리는 두려움과 흥분에 젖어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이 나의 발을 들어 올렸다.
“하아, 어떡해. 가라앉지 않을 것 같아, 영영….”
그는 갈구하듯, 애원하듯 나를 보았다. 거역할 수 없는 무언가 앞에 선 저 표정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나도 그랬으니까.
그가 나의 이름을 처음으로 불렀을 때부터, 나는 그의 앞에서 늘 그런 감정이었다. 한없이 무력하면서도 가슴이 터져 버릴 듯 달뜨고 벅차올라서, 무엇도 온전히 내 뜻대로 할 수 없었다.
그제야 나는 이해하게 되었다. 내가 그에게 무너져내린 그 속도와 밀도대로, 그도 나에게 무너져내리고 있었다는 것을. 나를 뒤흔들었던 그가 나에게 흔들리고 있었음을. 그와 나는 이제 다리가 두 개뿐인 늑대들처럼, 서로에게 기울어진 채로 함께 걸어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괜찮아.”
나는 선명한 해방감과 안도감을, 어쩌면 정복감을 느꼈다. 나는 두 팔과 다리로 그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영영 가라앉지 않아도, 이제, 이제는 다 괜찮아….”
눈물을 글썽이는 이한을 보며, 나는 울지 않았다. 품 안에 파고드는 그를, 그의 짙은 향기를 받아들였다. 해방된 불꽃이 그와 나를 모두 태워 버릴 때까지, 그는 나를, 나는 그를 안고 또 안았다. 우리를 옥죄던 모든 상황도, 시간의 흐름조차 까맣게 잊은 채로.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는 격정 속에서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이제야 내 밑바닥의 가장 깊은 곳에 닿은 것이라고. 비로소 발이 땅에 닿은 듯한 기분이, 비로소 짝지어진 이에게, 나의 사람에게 닿은 기분이 황홀하고도 아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