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4 : 구원
서울을 떠난 지 두어 시간 남짓. 어느새 해가 저물었다. 고속도로를 벗어난 뒤 줄곧 낯설고 험한 산길이 이어졌다. 운전이 서툰 나는 구불구불한 도로를 따라 핸들을 이리저리 꺾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안 그래도 어두운 길 위로 추적추적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순식간에 굵직해져 시야를 가렸다. 속도가 더뎌지다 보니 납골당 운영시간도 거의 다 끝나가고 있었다. 짜증과 초조함이 성마르게 올라왔다.
넓지도 않은 땅덩어리에서 200km 남짓을 이동하는 게 이렇게 번거로운 일일 줄은 몰랐다. 고작 운전 따위로 진을 빼고 있는 자기 자신도 한심했다. 마음만 급하고 되는 일이 없었다.
‘그러게, 진작부터 운전하고 다녔으면 이럴 때 좀 애를 덜 먹을 거 아니야. 재훈이 형은 왜 차를 사겠다는 걸 말려서는….’
순간 재훈에 대한 불평을 떠올렸던 나는 다음 순간 마음을 고쳐먹었다. 감사실에 갇혔다던 그의 다급한 목소리가 떠올라서였다. 서 회장이 기를 쓰고 덤빈 모양이니 그도 지금 갖은 고초를 겪고 있을 거다.
그 애, 윤오를 생각하면 더 그랬다. 그 애가 사라진 지도 일주일째라고 했다. 어디서 무슨 일을 겪고 있을지 모를 그 애를 생각하면 빗속을 운전하는 것쯤은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 나는 핸들을 꽉 움켜쥐고 차창을 때리는 빗물 너머를 응시했다.
속이 다 뒤집히긴 했지만 서이준과의 통화에서 아무 소득도 없었던 건 아니다. 서이준의 킬킬거리는 웃음 너머로 희미하게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지리산 쪽 별장은 바다와 접해있지 않았고 당장 제주도로 건너가기는 어려웠다. 남은 선택지는 강원도 별장이었다. 그 집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절벽 위에 있었다.
더구나 마침 서울에서 그 별장까지 가는 길목에는 아버지의 납골당이 있었다. ‘그 사람이 그곳에 가 보라고 알려 주는 것 같았다’라고 하면 너무 거창하게 들리겠지만, 강원도 별장에 먼저 가 보겠다고 정한 이유 중엔 분명 그 납골당도 있었다.
‘여기인가….’
빗길을 한참 달려 산 중턱에 자리한 허름한 납골당에 도착했다. 차를 세우고 건물 안에 들어가는 순간 퀴퀴한 분위기에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찡그려졌다.
납골당이 다 그런 건지는 몰라도 음침하고 음울한 느낌마저 드는 곳이었다. 시설은 낡아빠졌고 벽과 바닥에서는 눅눅한 곰팡이 냄새가 올라왔다. 한때는 애첩이었다는 사람을 이런 구석진 곳에 묻어 놓다니 서 회장도 대단한 악취미였다.
처음에는 비평이라도 하러 온 사람처럼 납골당의 구석구석을 뜯어보았지만, 어느 사이 그럴 기분도 사라졌다. 안내 직원을 따라 이동하던 나는 새장처럼 빼곡한 봉안당 사이의 복도로 접어들었다. 죽음이 잠든 곳이라서일까. 그곳은 어둡고 차분하고 이상한 공간이었다.
그리고 복도의 맨 끝에서, 나는 마침내 여섯 살의 그날 이후 처음으로 다시 그 사람과 마주했다.
“여기입니다. 나오실 때 접수처에 알려 주시면 됩니다.”
직원이 자리로 돌아가자 아무도 없는 방에 나만 남겨졌다. 나는 상자 같기도 하고 관 같기도 한 그 황량한 공간을 마주 보고 있었다.
그 사람은 한 뼘만큼의 작고 네모진 공간에 잠들어 있었다. 꽃과 사진 따위로 장식된 다른 이들의 봉안당과는 달리, 그의 자리에는 유골함과 유품 상자만이 덩그러니 놓여있었다. 유골함에 새겨진 이름이 아니면 거기 들어있는 것이 그의 뼈를 태운 가루라는 것조차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사람은 정말… 죽어서까지 사람 신경을 긁네.’
애써 투덜거려 보았지만 자꾸 기분이 가라앉았다. 건조한 침묵 속에서, 나는 그가 정말로 세상에서 사라진 존재라는 것을 조금씩 실감하고 있었다.
그가 죽었다는 건 몇 년 전부터 알고 있던 사실이고, 그 사실을 의심한 적도 잊어 본 적도 없는데 왜 갑자기 이런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허무함과 당혹감 사이로 천천히 불분명한 슬픔이 뒤섞였다.
빈정거리고 비꼬느라 바빠서, 그의 죽음조차도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모양이다. 나는 아직도 그가 나를 찾아와 주지 않는다며 투정 부리는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었던 걸까.
유쾌한 느낌은 아니었다. 나는 늘 그렇듯 이름 모를 감정에서 달아나고 싶었지만, 한편으로는 언제까지 외면할 수만은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 여기까지 왔으니까… 열어 봐야지.’
나는 재훈의 사무실에서 챙겨온 사진 액자를 꺼냈다. 뒷면에 붙은 작은 열쇠로 봉안당의 문을 열자 유리 벽 너머의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재훈이 최근에도 찾아와 정리해 두었는지, 봉안당 안은 티끌 하나 없이 잘 정리되어 있었다. 검은색 유품 상자는 재훈이 가지고 있던 액자처럼 깨끗하게 반짝거렸다.
그러나 그것은 고작 손바닥 두 개쯤 되는 크기에, 무게도 얼마 되지 않았다. 이 세상에 분명히 존재했던 한 사람이 사라졌는데, 남은 것이 이 작은 상자뿐이었다. 그게 그가 평생을 구르고 구르다가 고통스럽게 죽어 가면서 남겨 놓은 전부였다.
‘하긴, 그 사람이 뭐 남겨 놓을 만한 걸 갖고 있었을 리가 없지….’
나에게 전해 오던 편지에서, 그는 종종 ‘서 회장님이 모든 것을 준비해 주어서 나는 신경 쓸 것 없이 편하게 지내고 있다’라고 했다.
달리 말하자면, 서 회장이 그에게 무언가를 소유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나를 떠난 후 그 사람은 죽는 날까지 그렇게 가진 것 하나 없이, 정해진 거처도 없이 서 회장이 시키는 대로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나는 결국 분노를 느꼈다. 어쩌면 습관이나 관성 같은 분노였다. 그 사람은 왜 그렇게 바보같이 살고, 왜 그렇게 허무하고 멍청하게 죽어 버렸을까. 죽고 나서도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이 멍청한 공간에서, 이런 멍청한 상자를 끌어안고.
부아가 치밀어올랐지만, 성질을 부릴 시간조차 없었다. 나는 그 상자 안에 어떤 쓰레기가 들어있든 신경 쓰지 않고 재훈이 부탁한 USB만 챙겨 그 자리를 떠날 생각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상자를 열어젖힌 나는 그대로 굳은 듯 멍해져 버렸다. 상자 안에 들어있는 것은 내 예상 그대로 보잘것없는 것들이었다. 서른아홉 살의 남자가 때 이른 죽음을 맞으면서 유품으로 남겨 놓을 만한 물건치고도 너무나 초라한 잡동사니들.
그런데 제일 위에 놓인 것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이건….’
거기에는 열 장 정도 되는 나의 사진들이 있었다. 사진 속의 나는 일곱 살 때부터 열일곱까지, 매해 조금씩 자라나고 또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다.
가족사진에 나를 끼워 넣는 것조차 꺼리던 본가의 사람들은 일 년에 한두 번씩 굳이 나를 불러 사진 몇 장을 찍어 가곤 했다. 처음에는 멋모르고 그들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었던 나는 곧 그렇게 찍은 사진이 그 사람에게 보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진을 찍고 나면, 그 사람에게서 오는 다음번의 편지에는 언제나 나의 사진을 보았다는 말과 함께 기특하게도 잘 자라고 있는 나에 대한 칭찬이 쓰여 있었으니까.
어린 나는 그게 불만이었다. 겨우 사진 한 장을 가지고 나에게 대단한 관심이라도 있는 척 호들갑을 떠는 것이 못마땅했다.
‘어차피 보러 오지도 않을 거면서.’
그런 생각으로 나는 어른들이 내게 카메라를 들이댈 때마다 사진을 찍지 않겠다며 난리를 피웠고, 억지로 끌려와 자세를 잡고 나서도 끝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 탓에, 사진 속 나는 하나같이 부루퉁한 표정으로 카메라도 제대로 쳐다보지 않고 있다. 누가 봐도 철부지 애새끼의 못난 모습이다. 그런데 그게 뭐 대단한 얼굴이라고 얼마나 자주 들여다보았는지 사진마다 모서리가 다 닳고 헤져 있었다.
‘이 사람은, 이 사람은 대체….’
그 아래에는 더 시답지 않은 것들이 놓여 있었다. 아무렇게나 휘갈긴 낙서 종이, 키가 들쭉날쭉한 꼬마 색연필, 벌레를 잡는 데 쓰던 새총, 알록달록한 유리구슬.
그와 함께 살던 시절 내가 가지고 놀았던 물건들이었다. 어린 나에게는 소중한 보물이었지만, 어른의 눈으로 보기에는 쓰레기나 다름없는 것들이었다.
괴팍한 서 회장이 그가 이런 잡동사니를 십 년 너머 가지고 다니도록 내버려 두었다는 게 의아했다. 아니, 어쩌면 그 사람은 이 초라한 상자를 지켜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걸까.
‘이따위 게 다 뭐라고.’
자조하려 애썼지만, 그걸 본 순간 나에게도 잊혀지고 빛바랜 기억들이 한 번에 밀려왔다. 흑백이던 시간들에 색깔을 칠해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와 떨어지던 날 내 마음속 무엇인가가 산산조각 나 좀처럼 자라나지 못했던 것처럼, 그의 시계도 나와 헤어진 그 날 멈춰 버렸다는 것을.
그를 무시하고 미워하는 것으로 그리움을 지워 버린 비겁한 나와는 달리, 그는 길고 긴 시간 나를 고스란히 그리워하고 사랑해 왔던 거다.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갑자기 코끝이 아플 정도로 저려 왔다. 그가 이 세상에 태어나 무엇도 남기지 못한 채로 허무하게 가 버렸다는 것은 불평만 많은 나의 착각에 불과했다. 그는, 바로 여기에 나를 남겨 주었으니까.
눈물을 참는 것이 힘겨워 이를 악물었다. 부끄러움에 쫓기느라 여태 실컷 울어 보지도 못했지만, 이제 와 눈물 흘리기에는 너무 부끄러웠다.
몇 번이나 두 손으로 마른 뺨을 쓸어내리다가, 유골함에 새겨진 그의 이름을 보며 겨우겨우 마음을 가라앉혔다. 너무 늦어 버렸지만, 마음속으로 나지막이 그를 부를 수 있게 될 때까지.
‘…아버지, 저 왔어요. 오래간만이에요.’
마음 안으로 하는 인사조차, 나는 멋없게 굴었다. 고맙다거나 미안하다거나 그런 말도 못 한 채, 나는 상자의 가장 밑바닥을 확인했다. 거기에는 재훈이 말했던 USB가 들어 있었다.
그걸 만지작거리다가, 나는 마음을 바꿔 유품 상자를 통째로 가방에 챙겨 넣었다. 그가 남긴 것들은 모두 나의 것이니 내가 짊어지고 간직하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납골당 건물 밖으로 나가자 어느샌가 비는 그쳐 있었다. 하늘은 빛 한 점 없이 어두웠지만, 공기는 더없이 맑았다. 산자락의 선득한 바람이 풀과 흙냄새를 이끌어와 나의 뺨을 어루만졌다. 정신이 날카롭게 일어나 피로도 사라져 버렸다.
나는 더 이상 여섯 살의 어린아이가 아니었다. 이번만은 무슨 일이 있어도 소중한 것을 지켜내겠다고 다짐했다.
납골당에서 서 회장의 별장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지만, 도로의 상태는 더 나빠졌다. 능선을 굽이굽이 돌아 간신히 산 하나를 넘어가니 다시 비포장도로가 나왔다. 어린 시절의 여름에 이곳으로 갈 때도 길이 엉망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달라진 게 하나도 없었다.
별장을 물바다로 만들었던 소동 이후 서 회장 일가가 여름 휴가 때 이곳을 찾는 일은 없었다. 대신 그 뒤의 몇 년 동안, 서 회장은 그 별장을 비밀스럽고 위험한 일을 벌이는 장소로 애용했다.
인적 드문 장소에 있는 데다 교통이 불편한 위치라는 것도 그런 일을 할 때는 장점이었을 것이다. 서이준이 종종 수상쩍은 핑계를 대며 본가를 떠나 있을 때도 이곳에 와 있었던 걸지 모르겠다.
‘거의 다 온 것 같은데….’
주위의 풍경은 갈수록 한산해졌다. 길옆으로 민가가 드문드문 이어지다가 그마저도 끊어졌다. 이내 무성한 풀숲 사이로 외길이 나왔다. 그 길을 따라가면 별장이 있는 산이 나온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을 따라가던 나는 길 끝에 거의 다다라 눈앞에 나타난 풍경에 흠칫 놀랐다. 여태까지는 기억하던 길의 모습 그대로였지만, 산의 입구에 전에 없던 커다란 담장이 설치되어 있었다. 입구의 조명을 받아 회색의 우중충한 담장이 음산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담장의 가운데의 커다란 철문은 굳게 닫혀 있었고, 문 부근에는 차량용 인터폰과 CCTV로 보이는 동그란 물체까지 있었다. 낭패였다. 집에 순순히 들여 보내 주지 않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산에 발을 디디는 것부터 막힐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차라리 차를 놓고 담을 넘어서 올라가는 게 낫겠는데. 안에서 출입 차량을 확인하고 있을 테니까….’
끙끙거리며 길옆 진창의 나무 뒤쪽에 세워 두는 동안 차는 엉망으로 긁히고 더러워졌다. 재훈에게 잔소리를 들을 일이 좀 신경 쓰였지만, 일단은 풀숲 사이로 몸을 숨긴 채 CCTV의 사각으로 이동했다.
의심도 많고 구린 구석도 많다 보니, 서 회장은 본가에서도 보안시설에 꽤나 꼼꼼하게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이곳의 철문과 담장에는 분명 보안 장치가 설치되어 있을 것이다.
섣불리 무언가를 건드렸다가 경보가 울릴 수 있다는 생각에 곧바로 담장을 넘지 못하고 주춤거리고 있을 때였다. 저 멀리 등 뒤에서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나는 얼른 풀숲으로 몸을 숨겼다. 이준이 온 걸까, 생각했지만 다가오고 있는 것은 이준의 차가 아니었다. 처음 보는 검은색 외제 차였다.
‘손님이라도 오는 건가…?’
그 생각을 떠올린 순간, 나는 저 위의 별장에 손님을 맞이할 누군가도 있으리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마도, 서이준일 것이다. 그 애가 있는 곳으로 바로 찾아왔다는 생각에 예리한 긴장감으로 소름이 쭈뼛 일어났다.
검은 차의 운전자는 철문 앞에 차를 세우고 길가에 설치된 초인종을 눌렀다. 잠시 뒤 철문이 활짝 열렸다가 그 차가 문을 통과하자마자 닫혀 버렸다.
곧이어 또 다른 자동차 소리가 들렸다. 커다란 차 한 대가 다가오는 게 보이고, 저 멀리 길을 따라 차 두어 대가 뒤따라오고 있었다.
철문 앞에 다다른 차들은 차례차례 줄지어 섰다. 느리게 여닫히기를 반복하던 철문은 이내 끼이익, 긁는 듯한 소리와 함께 더 높이 밀려 올라가 완전히 열렸다. 손님을 맞기 위해 보안 장치를 잠시 해제해 버린 것 같았다.
‘지금이다.’
잠입할 기회를 포착할 나는 담장으로 다가가 높이를 재어 보았다. 콘크리트로 된 담장은 아슬아슬하게 손가락 끝을 걸 수 있는 높이였다. 손이 닿아도 경고음 들리지 않는 것을 확인한 순간, 충분히 넘어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다시 길 쪽을 돌아보았다. 저 멀리에서 차 한 대가 더 다가오고 있었다. 아직은 담을 넘을 시간이 있었다. 나는 도움닫기를 하고 위로 높게 뛰어올랐다. 손바닥을 담장 안 깊숙한 곳에 걸치는 데 성공한 순간, 칼로 찌르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윽…!”
손가락에 날카롭고 굵은 무언가가 파고들었다. 높은 담의 윗면에 무언가 날카로운 것이 놓여있던 모양이다. 피부가 찢기고 뚫리는 통증에 주춤거렸지만, 다시 이를 악물고 담장을 더 단단히 붙잡았다.
손바닥이 갈기갈기 찢어지더라도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 타이밍을 놓치면 별장으로 올라갈 길이 영영 막혀 버릴지도 모른다.
담벼락을 발로 긁어 몸을 끌어 올리려고 했지만 걸음은 자꾸 헛돌았다. 담은 비에 젖어 미끄럽고, 고통으로 둔해진 근육이 제대로 말을 듣지 않았다. 한쪽 다리를 끌어 올리는 데 생각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무릎을 담 끝에 걸쳐 올린 다음 더 안쪽을 붙잡기 위해 담 위를 짚었던 손을 떼어 냈다. 손바닥에 박혀 있던 무언가가 빠져나가면서, 찐득한 피가 울컥울컥 뿜어 나왔다.
‘씨발, 번거롭게….’
엄살을 부릴 때가 아니었다. 묵직한 격통을 무시하고 몸을 바짝 끌어 올렸다. 담장 위에 반쯤 상체를 걸치고 나서야 뭐가 내 손을 찌른 것인지 보였다. 담장 위에는 손바닥쯤은 간단히 관통해버릴 수 있을 정도로 뾰족하고 굵직한 철심이 솟아 있었다.
담을 넘어가는 동안 가시가 내게 닿지 않도록 신경을 썼지만, 어쩔 수 없이 걸려든 바늘 끝이 옷을 찢고 그 안의 살을 긁었다. 나는 신음을 꾹꾹 삼키며 담 아래로 뛰어내렸다.
나는 호흡이 흐트러진 채로 몸을 굴려 눈앞의 숲에 몸을 숨겼다. 마지막 손님인지, 세단 한 대가 들어오고 난 후 철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뒤늦게 내 몸을 내려다보았다. 철심이 박혔던 손바닥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곳곳에 뚫리고 눌려 살이 벌어지고 뭉그러진 상처가 보였다. 제법 끔찍한 모습이었지만, 머리가 고통으로 마비된 탓인지 별다른 감흥은 없었다.
피를 더 흘리는 건 좋지 않겠다는 생각에 이미 너덜너덜해진 티셔츠 자락을 죽, 잡아 찢었다. 두 손을 다 묶기엔 모자라서, 상처가 더 심한 왼손만 대충 묶었다. 오른손의 피는 티셔츠의 가슴팍 부분에 슥슥 닦았다.
“후….”
나는 그제야 길게 숨을 뱉었다. 들키지 않고 담장을 통과하는 데 성공했다는 생각에 가슴이 쿵쾅거렸다. 조명이 사라진 산길은 칠흑같이 어두웠다. 핸드폰 플래시를 켜자 희미하게 숲 가운데의 흙길이 보였다. 비에 젖어 질퍽해진 길 위에는 타이어 자국이 어지러웠다.
내가 본 것만 해도 예닐곱 대의 고급 차가 지나갔다. 서 회장이나 이준이 사람을 불러 모으는 이유는 보통 입에 담기 꺼림칙할 정도로 지저분한 용건이 있어서다. 불쾌한 예감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재작년의 사건에서 이준이 뿌렸던 약에 관해 무용담이라도 되는 듯 떠벌리던 서 회장의 말이 떠올랐다. 바로 얼마 전 이준에 뉴욕에서 벌인 일에 대해 재훈이 했던 말도. 분노와 걱정에 심장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섬뜩한 상상을 떨치려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 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 내가 막아야 해.’
저 길을 따라 올라가면 산의 정상에 별장이 있다. 길을 따라 빠르게 걸었지만, 갈 길이 멀기만 했다. 꽤 높기도 하지만 가파른 능선을 둘러 올라가야 해서 차를 타고 가기도 한참 걸리는 곳이었다.
무성한 숲 사이로 가느다랗게 난 길을 따라가다 보면 뱀의 목구멍으로 기어들어 가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진척한 흙길은 어린 날의 기억처럼, 기억보다도 더 길게 이어졌다.
‘무사해야 해. 조금만 기다려줘. 조금만….’
어두침침한 산길을 얼마를 걸었을까. 길게 이어진 숲길 끝에 다시 어슴푸레한 조명 빛이 보였다. 별장이 있는 정상에 가까워진 듯했다. 어른거리는 빛줄기를 바라보며, 깊은 그리움과 날이 선 긴장감이 교차했다. 무성한 숲이 멈추자 성의 없이 구색만 갖춘 정원이 모습을 드러냈다.
별장은 깎아지른 듯한 절벽 앞에 서 있었다. 기억하는 그대로, 정갈하지만 불쾌한 외양이다. 지독하게 폐쇄적인 곳에 자리한 것도 모자라, 진입로에서 등을 돌리고 절벽을 바라보는 구조였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어린 나는 저 집의 검은 지붕이 서 회장의 뒷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내 아버지의 목을 조르고 피를 삼키는, 악마 같은 뒷모습.
이제는 저 검게 반짝이는 지붕이 서이준의 뒷모습으로 보였다. 목을 졸리고 있는 것이 그 애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입술이 말랐다.
별장의 건물 너머로 줄지어 주차된 검은 차들이 보였다. 어차피 현관은 닫혀 있을 거라는 생각에 건물을 빙 둘러 뒤편으로 향했다. 창문은 대부분 굳게 닫힌 커튼으로 가려져 있었다.
‘씨발, 꽁꽁 숨어서 대체 뭘 하고 있길래….’
한참을 두리번거린 끝에, 거실 쪽의 커튼 하나가 반쯤 열린 것을 발견하고 몸을 낮추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심장이 부풀어 오른 것처럼 거세게 박동했다.
긴장감 탓만은 아니었다. 정원에 발을 들일 때부터 저 집에서 이상한 기운이 공기를 타고 흘러나오는 게 느껴졌다. 음습하고 흉포한 냄새.
건물 앞에 다다른 나는 잘게 눈을 깜빡이며 창문을 들여다보았다. 천장이 높은 거실에는 열 명 남짓의 남자들이 있었다. 대부분은 거실의 가운데 부근에 둥글게 모여 서 있고, 한둘은 조금 떨어진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들 사이에서 나는 곧 서이준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는 상기된 얼굴로 자신만만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여전히 악마 같은 모습이었다.
‘뭐야, 설마….’
다른 남자들도 서이준 못지않게 섬뜩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들 모두가 알파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득시글거리는 그들의 페로몬이 아까부터 내 신경을 긁고 있었으니까.
보기 좋은 꼴들은 아니었다. 옷을 제대로 입은 사람도 있지만, 바지를 반쯤 내리거나 상의를 벗은 사람도 있었다. 어디에서 어떤 차림을 하고 있든, 그들은 모두 한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방 한가운데를 내려다보는 듯한 즐거운 시선이었다.
사람들의 몸에 가려, 그들이 응시하고 있는 지점이 바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눈이 벌겋게 된 한 남자가 손을 뻗어 시커먼 무언가를 움켜쥐고 들어 올릴 때까지는.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숨을 삼키며 그것을 바라보았다. 남자가 거칠게 그러쥔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의 뒤통수였다.
‘……!’
그들이 붙들고 있는 것이 그 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순간 눈앞이 도는 것 같았다. 창문을 깨뜨려 버릴 생각으로 주먹을 움켜쥐었지만. 이내 그 애의 향기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렸다.
머리채를 잡힌 남자는 사람들에 둘러싸인 채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오메가로 보이는 작고 가느다란 몸집. 아무것도 몸에 걸치지 않았는지 흰 등줄기가 언뜻언뜻 보였다. 저항하고 싶어 하는 눈치였지만, 완전히 사로잡혀 제대로 고개를 젓지도 못했다.
오메가 하나를 제물 삼아 둘러싼 알파들은 제각각의 방식으로 흥분을 내뿜었다. 냉소하는 놈도 있고. 벌겋게 달아오른 눈과 몸을 감추지 못하고 날뛰는 놈들도 있었다.
머리채를 움켜쥔 남자는 쓰러지려는 오메가의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남자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사로잡은 머리통을 제 성기 쪽으로 당겨 붙였다. 창 너머까지 지저분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 하하하…. 이 녀석 좀 보시죠.”
“이봐, 똑바로 물어야지.”
“제가 좀 해 볼까요? 이런 녀석들은 거칠게 다뤄 주는 게 낫거든요.”
나이를 먹어도 오메가를 희롱하는 알파들의 꼴은 비슷비슷한 모양이었다. 남자가 과시적인 몸짓으로 오메가의 얼굴을 향해 허리를 놀리는 동안, 다른 알파들도 하나둘 손을 내뻗었다. 그들은 흐느적거리는 오메가의 몸을 앞다투어 쓸고 주물러 댔다.
작은 몸에 달라붙은 열 몇 개의 손이 마치 연체동물의 질척한 촉수 같았다. 하나같이 집요하고도 무성의한 손길들이었다. 제 손에 닿은 것이 어떻게 비명 지르고 흐느끼는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태도였다.
흥이 오른 알파 두 명이 바지를 내리며 오메가에게 다가갔다. 한 남자는 힘 없는 오메가의 손을 들어 제 성기를 잡도록 했다. 그는 학습된 것처럼 반사적으로 알파의 페니스를 쥐고 흔들었다.
다른 남자는 좆질을 할 작정인지 아래로 늘어진 오메가의 허리를 추켜올렸다. 둔부 사이로 손을 가져가 헤집어 벌려 놓고는 고개를 돌려 구경꾼들을 불러 모았다.
“좋아서 벌름거리고 있는데요, 이거.”
“볼만하네. 후…. 감촉은 어떤가?”
“향기가 마음에 드네요. 전에 불렀던 애보다 나은 거 같은데.”
가까이 와 자세히 그를 들여다보는 알파들은 물론이고, 의자에 앉은 놈들도 정신없이 흥분한 눈치였다. 하나둘 제 성기를 끄집어내 자위하기 시작하는 모습이 참혹하고 역겨웠다.
구토감이 이는 것을 참으며 거실을 샅샅이 훑어보아도 그 애의 모습을 찾을 수 없었다. 맥이 풀리는 마음을 다잡았다. 별장은 넓고, 저 안 어딘가에 그 애가 있을지 모른다. 더구나 저런 장면을 모른 척 내버려 두고 갈 수는 없었다.
당장 안으로 들어가 저 난장판을 뒤집어엎고 싶었지만, 거실에 모여 있는 건 눈이 돌아간 열 명의 알파였다. 대책 없이 움직이는 건 자살행위에 불과할 거다.
‘어딘가에 들어갈 구석이 있을 텐데….’
치밀어오르는 분노를 가라앉히려 애쓰며 건물 외벽을 따라 걸었다. 창문이 열린 곳이 있다면 어떻게든 안으로 들어갈 생각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더듬어 별장의 내부 구조를 떠올렸다. 1층에는 거실과 부엌, 서 회장의 서재와 응접실이 있었다.
건물의 모퉁이를 돈 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부엌으로 보이는 곳의 창문 하나가 열려 있었다. 고용인들이 환기를 위해 종종 열어 두던 손바닥만 한 창이 있었다. 거길 통해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정도의 크기는 아니었다. 다만 짚이는 게 있었다.
‘화재경보기…. 그때 그 화재경보기가 분명히, 부엌에 있었는데.’
발소리를 죽여 열린 창문으로 다가갔다. 부엌에는 아무도 없고, 누가 차려놓은 건지 모를 음식들만 식탁 위에 그득했다. 그리고 기억한 그대로 어린 시절과 비슷한 모양의 화재경보기가 식탁 너머로 보였다.
이제 목표물은 정해졌고, 방법이 문제였다. 창문 너머로 손을 뻗어 봤자 닿을 리 없고, 긴 막대 같은 걸 밀어 넣어도 덮개를 깰 만큼 강하게 타격하는 건 무리였다.
입술을 뜯으며 고민하던 나는 순간 무언가를 떠올렸다. 아버지의 유품 상자에는 내가 어린 시절 가지고 놀던 새총이 들어 있었다. 터무니없는 생각 같지만….
‘아니, 아주 터무니없는 건 아닐지도 몰라. 덮개를 깨뜨리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나는 등에 지고 있던 가방을 내려 새총을 꺼냈다. 오래된 장난감이지만 고무밴드까지 멀쩡한 상태였다. 작은 돌을 걸고 밴드에 걸고 당겨 보니 제법 강하게 돌이 내쏘아졌다.
‘거리가 멀리는 않은데…. 최대한 세게 당기면 저기까지 닿을지도….’
두어 번 더 연습 삼아 거리를 가늠해 본 다음, 적당한 크기의 날카로운 돌을 주워서 창문 안쪽을 겨누었다. 있는 힘껏 밴드를 당기니 상처 난 자리가 짓이겨졌다. 겨우 아물던 살이 다시 벌어져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지만 무시했다.
처음의 한 발은 덮개의 아래쪽으로 빗맞았다. 탕, 빈 벽에 돌이 부딪치는 소리에 심장 철렁했다. 기척을 들켰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잠시 숨을 죽었다. 그러나 누구도 부엌에서 들리는 작은 소리 따위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들 사이의 소음에 소리가 묻혀 버린 것 같기도 했다.
거실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들은 그사이 더 질척해져 있었다. 윽박지르고 비아냥거리는 말들, 웃음소리와 흥분에 찬 탄성, 신음과 한숨, 살을 때리고 문지르는 마찰음. 모두는 난장판에 열중해 있었다.
‘빨리, 빨리….’
덩달아 조급해진 마음에 손가락이 떨려 왔다. 나는 호흡을 정돈하고 다시 한 발을 당겼다. 두 번째 돌은 경보기 덮개의 가장자리에 부딪쳤다. 투웅, 유리 덮개는 흔들거렸지만 깨지지는 않았다. 초조하게 마른침을 삼켰다.
더 이상 꾸물거리면 누군가 눈치챌지도 모른다. 마지막 기회라는 마음으로, 나는 조준을 마친 뒤 고무밴드를 최대한 뒤로 당겼다가 놓았다. 일직선을 그리며 날아간 돌이 탕, 덮개의 한가운데에 꽂히는 순간.
‘됐다…!’
쏴아아아. 세차게 쏟아지는 물줄기 소리와 함께 귀를 찢을 듯한 경보음이 울리기 시작했다. 거실에 있던 알파들은 당황한 듯 허둥거렸다. 욕지기와 웅성거리는 말들에 이어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고개를 뻗어 건물 모퉁이 너머를 훔쳐보았다. 물에 빠진 쥐처럼 흠뻑 젖은 남자들이 하나둘 현관 밖으로 달려 나왔다. 허우대는 하나같이 멀쩡해서는 우스꽝스러운 꼴들이었다.
채 추스르지 못한 바지 지퍼를 주섬주섬 올리는 남자는 그나마 나은 상태고, 셔츠만 입은 채로 다리 사이에 발기한 성기를 꺼떡거리는 놈, 아예 벌거벗은 놈도 있었다. 사색이 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던 남자들은 이내 정말 불이 난 게 아니라는 걸 깨닫고 투덜거렸다.
“뭐야, 불 난 거 아니었습니까? 멀쩡한 거 같은데?”
“씨발…. 시계 새로 산 건데 다 젖었잖아.”
“뭐 이런 경우가…. 아, 바지도 놓고 나왔네. 잠시만요.”
“서이준 군,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이렇게 황당한 일은 정말 난생처음이네요.”
허둥지둥 나오던 이준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에서도 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앞다투어 달려드는 손님들 앞에, 그는 얼이 빠진 표정을 지었다.
“부, 불이 난 것 같진 않은데…. 스프링클러 이상인 것 같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곧 고치면 되니까….”
“뭐요? 사람을 이 꼴로 만들어 놓고 뭘 더 기다리라고.”
“하…. 짜증 나네, 사람을 여기까지 불러내서 이게 대체 뭐 하는 짓입니까?”
“어…. 그게…. 이, 일단 2층 응접실로 가시죠. 2층은 화재경보기가 별도로 설치되어 있으니까 젖지 않았을 겁니다. 갈아입을 옷은 바로 준비해드리겠습니다.”
“아, 이 사이렌 소리부터 좀 어떻게 해 봐요. 고막 나가겠네.”
“어디서 이거 듣고 찾아오는 거 아니에요? 신고가 들어간다거나….”
“그건 곤란한데요. 보안을 보장하셨으니까 이런 모임에 온 건데.”
“아닙니다. 민가에서 멀리 떨어진 곳이라…. 경보도 지금 바로 손보겠습니다.”
“이 집, 보안 시스템 작동하는 거 같던데. 이런 상황 생기면 자동으로 업체에서 출동하지 않나요?”
한 남자의 지적에, 손님들은 모두 동요했다. 그들은 값비싼 차를 끌고 다니고 칼 같은 정장 차림을 한 알파들이었다. 이런 난잡한 유흥거리는 그들에게 숨기고 싶은 치부일 테니, 일이 커지길 바라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거다.
제일 앞장서서 투덜거리던 남자 한 명은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허둥지둥 옷을 꿰어입기 시작했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이사회 선거가 코 앞이라, 곤란한 일에 엮일 타이밍이 아니라서요.”
그 남자의 말에 분위기는 상황의 정리하는 쪽으로 쏠렸다. 모두는 옷을 가지러 집 안으로 들어가거나 매무새를 정리하며 제 차로 돌아가려고 했다.
“저도 돌아가는 게 낫겠네요. 제기랄, 이게 무슨 꼴인지…. 시트도 엉망이 되겠는데.”
“죄송합니다, 이 전무님. 잠시만요. 잠시만….”
“저도 갑니다. 이준 군. 손님 대접 한번 요란하게 하시네요.”
“오늘 이런 식으로 절 대우하신 건 서 회장님 통해서 책임을 물을 테니까. 그런 줄 아세요.”
“박 이사님. 김 전무님. 죄송합니다. 그러지 마시고, 잠시만 시간을 주시면….”
쓸데없는 대화에 귀 기울일 때가 아니었다. 나는 몸을 낮추고 다시 건물 뒤로 돌아갔다. 이번에는 좀 더 커다란 돌을 주워들었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부터 하고 싶던 대로, 나는 제일 커다란 창문에 돌을 던졌다.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별장의 창문이 깨어졌다. 음험하고 더러운 향기가 벌어진 유리 조각 틈으로 새어 나왔다. 손을 넣어 잠금쇠를 풀고, 거실 안으로 들어갔다.
스프링클러에서는 아직도 핏, 핏 소리를 내며 물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바닥에는 발목까지 물이 차올라 있었다. 물바다가 된 거실 가운데에는 헐벗은 오메가 있었다. 콩벌레처럼 몸을 둥글게 말고 주저앉은 채로.
‘다들 쟤를 저 상태로 내버려 두고 간 건가…?’
가까이 가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 파리한 피부에는 이빨 자국과 멍 자국이 셀 수없이 많았다. 등 위에는 채찍 같은 것으로 내리친 듯한 길고 붉게 부어오른 자국까지 선명했다.
천장에서 쏟아지는 차디찬 물줄기가 엉망이 된 몸을 마구 두드렸다. 웅크려 앉은 그의 다리 주위는 그에게서 흘러내린 피와 체액으로 불투명했다.
그는 뒤통수 쪽에 버클이 달린 검은 안대를 쓰고 있었다. 어떻게든 버클을 풀어 보려는지 그는 머리를 두 손으로 감싼 채 끙끙거리고 있었다.
그는 영문을 모르고 폭포 같은 물줄기 속에서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버클을 풀어 주기 위해 머리 뒤로 손을 갖다 대자, 그는 소스라쳐 중심을 잃고 물 바닥으로 엎어졌다.
“죄,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다시는 마음대로 풀지 않을게요….”
아마도 그는 나를 조금 전 거실에 있던 알파들 중 하나로 착각한 모양이다. 기분 좋은 오해는 아니지만, 공포감에 질려 마구 중얼거리는 소리를 듣고 있으니 불쾌한 기분조차 들지 않았다.
바닥에 처박혀 버둥거리는 남자를 부축해서 일으켰다. 안대 아래로 보이는 얼굴에도 폭력의 흔적이 역력했다. 피 맺히고 긁힌 뺨 위에 눈물인지 천장에서 떨어진 물인지 모를 것이 얼룩져 있었다.
내 또래쯤으로 보이는 작고 무력한 얼굴 위로 문득 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처연하고 무력한 채로 애써 가시를 세우던 그 애의 모습도.
“…괜찮아요. 저, 그 사람들 아니에요.”
“…….”
“도와드릴게요.”
먹먹한 기분에 괜스레 내 목소리가 떨렸다. 나는 그가 씨름하고 있던 버클을 풀어 주었다. 안대를 벗은 그는 초점이 흐려진 눈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부, 불 난 거…. 아니에요?”
얼이 빠져 있을 만도 했다. 그의 입장에서는 안대가 채워진 채로 험한 꼴을 당하다 갑자기 울린 화재경보음과 함께 모두가 사라져 버린 상황이었으니까.
“아니에요. 괜찮으니까 옷 입고 빨리 나가요.”
“…….”
“여기서 나가서, 다신 오지 마세요. 서이준이 불러서 여기 왔던 거죠? 다시는 그 사람이랑 얽힐 생각도 하지 말고요. 그 새끼 제정신 아니니까.”
이제 겨우 말을 알아듣기 시작한 그 오메가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엎드린 자세로 바닥을 더듬거렸다. 제 옷을 찾고 있는 눈치였지만, 바로 앞에 있는 것조차 못 보고 찰박찰박 헤매기만 했다.
“…이거 찾아요?”
나는 발아래 놓인 그의 바지를 주워 건넸다. 그는 물이 뚝뚝 떨어지는 옷을 받아들고 어물어물 고맙다고 말했다.
손이 떨려 바지에 다리를 제대로 꿰지도 못하는 모습이 안쓰러웠다. 옷을 다 입기를 기다려주고 싶었지만, 급한 마음에 도저히 그럴 수 없어서 바로 물었다.
“이 집에, 그쪽 말고 다른 오메가 있지 않아요?”
“…….”
“여기서 다른 오메가 본 적 있는지 묻는 거예요. 하얗고 예쁘게 생긴 남자앤데.”
“…….”
“저기요, 제 말 안 들려요?”
그는 넋이 나간 채로 한참을 대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목소리 높이자, 그는 화들짝 놀랐다가 눈을 빠르게 깜빡거리며 되물었다.
“모, 못 들었어요. 죄송해요. 뭐라고… 말씀….”
“여기 있는 다른 남자애 못 봤냐고요.”
“아…. 그 오메가.”
멍한 대답에 귀가 번쩍 뜨였다.
“네, 걔. 그 오메가요. 어디에 있어요?”
“2층에….”
“2층?”
“네. 2층 끝방.”
그는 힘겹게 정신을 추스르며 대답했다. 뭐라 더 말을 붙이려다 그만두었다. 어쩌면 그에게는 저를 물어뜯던 알파들과 내가 다르지 않아 보일지도 모른다. 애매하게 위로하느니 그냥 내버려 두는 편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물 고인 바닥을 헤치며 계단 쪽으로 걸음을 재촉하는데, 문득 발끝에 흰 천 조각이 걸렸다. 방금 그 오메가의 티셔츠일 거라는 생각에 주워들어 뒤를 돌아보려던 순간이었다.
“안 돼…!”
애처롭고 다급한 그 오메가의 목소리가 물줄기를 뚫고 들려왔다. 머리가 뭘 인식하기 전에, 반사적으로 손을 들어 올려 나를 내리치려던 팔을 붙잡았다.
“너, 너…. 네가 기어이….”
분노에 차 두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는 서이준이었다. 늘 얄미우리만치 정돈되어 있던 모습은 어디로 가고, 물에 흠뻑 젖어 초라한 몰골이었다. 등 뒤에서 찌르려고 했는지 오른손에 들린 과도가 나의 코앞까지 와 있었다.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읏… 알아…?”
“…….”
“후…. 추잡한 버릇을 못 고치고, 감히…. 네까짓 게 감히!”
그는 악다구니를 쓰며 칼을 들이밀어 댔다. 칼날이 나에게 닿기 전 간신히 그의 팔목을 붙잡았다. 공격이 가로막힌 이준은 두 손을 겹쳐 더 강하게 칼을 내리눌렀다.
“크윽….”
“여기가 어디라고, 기어들어 와서…. 죽고 싶어서, 후, 발악을 하지, 아주?”
네 개의 손이 팽팽하게 뒤엉켜 있었지만, 나에게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그를 붙잡았을 때 칼날은 이미 나에게로 기울어 있었다. 내 팔에 조금이라도 힘이 빠지면 바로 나를 찌를 듯한 기세였다.
이준은 자신만만한 눈으로 이죽거렸다. 그를 도발하는 게 좋은 선택은 아니지만, 나는 적의를 참지 못하고 이빨을 드러냈다.
“네가, 후… 와 보라며.”
“뭐…?”
조금 전까지 나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애를 구하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서이준에 대해서는, 장애물이 되면 치워 버려야겠다는 마음 정도밖에 없었다.
그러나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 그와 대치한 순간 어쩔 수 없이 분노가 타올랐다. 금방이라도 나를 찌를 듯한 칼날 앞에서조차 가라앉을 줄 모르는 강렬한 분노가.
“네가 그랬잖아. 읏,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올 테면 와 보라고. 그래서… 왔는데, 뭐가 문제라는 거지?”
“이익…. 이 새끼가 진짜…!”
독이 오른 이준은 안간힘을 쓰며 칼을 든 손을 미친 듯이 뒤흔들었다. 버티기 위해 힘을 쓰는 동안 손바닥의 상처는 붉게 벌어져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제 손에 옮겨 묻은 핏물을 본 이준의 눈이 비열하게 번뜩였다. 그는 나의 약점을 찾듯이 손가락으로 내 손바닥을 더듬어 올라갔다. 자잘한 상처들을 긁고 쥐어뜯던 끝에, 그는 내 왼손의 가장 큰 상처 안으로 제 손가락을 찔러넣었다.
“크으윽…!”
괴로워하는 내 표정에, 이준은 기다렸다는 듯 손톱을 세워 깊숙이 상처를 헤집어 댔다. 간신히 엉겨 붙었던 피딱지가 떨어져 나가고, 벌어진 피부가 뭉개지고 너덜너덜해졌다.
맞손은 손의 틈새로 찐득한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이준은 거침없이 살갗을 긁어내리며 미소 지었다.
“으윽, 으….”
“놔, 쓸데없이 애쓰지 말고.”
“크… 흐읏.”
“지독한 새끼…. 뭘 이를 악물고 있어? 응?”
“…….”
“넌, 그 눈빛이 문제야. 후…. 좆도 아닌 주제에, 사람을 깔보는 눈을 하고….”
날카로운 손톱 끝이 근육을 뚫고 그대로 손바닥을 관통해 버릴 것 같았다. 아릿한 통증에 손아귀의 힘이 점점 풀어졌다. 이준은 칼끝은 점점 나에게 다가왔다.
“피는 역시, 후우, 못 속인다니까…. 보기만 해도 기분이 더러워지는 게, 그 오메가랑… 똑같아. 읏…! 너 같은 건 집에 들여놓지 말던가, 진작 없애 버렸어야 해.”
“…….”
“사사건건 사람 신경을 거슬리게 만들더니, 후…… 결국 날 이렇게 개망신을 줘? 돼 먹지 못한 새끼가 말야. 그래, 내가 다시는 날뛰지 못하게 해 줄게. 크…. 크큭….”
입을 쭉 찢으며 웃는 그의 눈동자에는 섬뜩한 핏발이 서려 있었다. 그의 일그러진 눈동자에 그만큼이나 일그러진 내 얼굴이 비쳤다. 코앞까지 다가온 칼날이 나에게 닿기 직전이었다.
“아윽!”
이준은 갑자기 비명을 지르면서 몸을 뒤틀었다. 상처를 파고들던 손이 느슨해진 틈을 타 그를 뿌리쳐 냈다.
인상을 찌푸린 이준은 왼손으로 제 오른쪽 팔뚝을 짚으며 비틀비틀 뒷걸음질 쳤다. 그제야 이준의 등 뒤에 달라붙었던 오메가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제가 한 짓에 놀라 하얗게 질린 얼굴로 덜덜 떨고 있었다. 이준은 폭발 직전의 괴물처럼 이글거리는 표정으로 돌아섰다.
“씨발, 물어…?”
“흐으, 흐….”
“시궁창 쥐 같은 게, 눈에 뵈는 게 없지…?”
“아악…!”
그 오메가는 혼란을 틈타 이준의 팔을 물어뜯은 모양이었다. 이준은 칼날을 높이 세우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가 가냘픈 비명을 지르는 순간, 나는 다급하게 이준을 팔을 붙들었다.
“이 천박한 새끼들이 쌍으로 진짜…. 놔! 이거 못 놔?”
나는 발악을 하는 이준의 팔을 잡은 채로 바닥에 앉은 오메가에게 말했다.
“나가요.”
“…….”
“가요! 빨리. 도망치라니까요!”
그는 넋이 나간 채로 고개 끄덕이더니 엉거주춤 일어났다. 달아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준은 마구 고함을 질렀다.
“야! 거기 서, 씨발, 너 거기 못 서?”
붙잡힌 팔을 떼어 내려 안간힘을 썼지만, 나는 그 오메가가 현관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이준을 놓지 않았다.
“서이한. 넌 또 뭐야?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으아아아!”
그가 마구 휘두른 칼끝에 뺨과 어깻죽지가 긁혔다. 온몸은 이미 상처투성이였다. 곤죽이 되어 버린 왼손은 물론이고, 오른손을 감쌌던 티셔츠 조각은 안에서 흘러나온 피에 붉게 물든 지 오래였다.
몸을 맞부딪치거나 손아귀에 힘을 줄 때마다, 바닥에 고인 물에 무겁고 진득한 핏방울이 떨어졌다. 물 위에 붉고 둥근 파문이 일어났다가, 머리 위에서 쏟아지는 물줄기에 뒤섞여 흩어졌다.
아릿한 통증이 쉼 없이 나를 할퀴었다. 그 모든 고통보다도 더 격렬하게 내 의식을 잡아당기고 있는 것은 분노였다. 나는 다 찢긴 손바닥으로 이준의 손목을 비틀었다. 이준은 칼자루를 놓지 않으려 부들부들 떨면서 이를 악물었다.
“씨발, 너, 너…. 그깟 오메가 하나 때문에 이 난리야? 알파 새끼가… 부끄럽지도 않아?”
“하, 그게 네가 나한테 할 소리야…?”
“너랑 내가, 같아…?”
“뭐…?”
“너는 감당도 못 할, 거면서 나대고 있는, 거잖아 지금. 여기서 이런 짓을 하고 나가면, 뒷일은 어쩔 작정이지…?”
“씨발, 네가 무슨 상관인데.”
“역시 넌 실패작이야. 누가… 오메가가 낳은 자식, 아니랄까 봐… 윽…!”
그가 지껄이는 말에, 명치 아래에서부터 울컥거리던 감정이 폭발했다. 그것은 단순히 분노라기에는 너무도 해묵은 감정이었다. 계속 내 안에 끓고 있었지만 한 번도 넘쳐흐른 적은 없던.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내 안에 차곡차곡 쌓여 온 응어리였다.
마침내 폭발한 감정은 깊은 울화를 기폭제 삼아 무섭게 일어났다. 가슴 안에 불기둥이 일어나서, 내가 뱉은 더운 호흡에 젖은 공기가 타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반쯤 눈이 돌아간 채로 이준의 목을 팔로 휘감았다. 꿈틀거리는 몸을 붙들고, 팔의 근육이 터져나가도록 있는 힘껏 그의 목을 내리눌렀다.
“으…허, 크어억….”
이준의 목구멍에서 숨이 넘어가는 듯 기묘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한참을 그러고 있던 끝에, 버둥거리던 그의 몸이 갑자기 아래로 축 늘어지는 게 느껴졌다.
‘설마… 죽은 건가…?’
머리를 스친 생각에 목을 조르던 팔에 반사적으로 힘이 풀어졌다. 그 순간, 의식을 잃은 척 하고 있던 서이준은 손을 들어 내 팔에 칼을 깊게 찔러 넣었다.
“크윽!”
팔에 꽂힌 칼날의 감촉이 소름 끼치도록 서늘했다. 살과 근육이 찢기는 느낌에 고통스러운신음이 터져 나왔다. 이준은 그 틈을 타 미친 듯이 몸부림쳐 내 팔을 뿌리쳤다. 그러나 그게 최후의 발악이었는지, 그는 기침을 토하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켁, 쿨럭, 으, 으헉…!”
일단 칼을 뽑아내야 한다는 생각에 다른 손으로 칼자루를 쥐었다. 그 손도 이미 핏물에 얼룩져 있던 탓일까. 물에 젖어 미끌거려야 할 칼자루가 어쩐지 손바닥 아래 착 달라붙는 기분이었다.
눈을 돌려 이준을 바라보았다. 늘 위에서 나를 내려다보던 그가, 무릎을 꿇고 바닥에 두 손을 짚은 채로 토악질 같은 기침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는 올무에 걸린 초식동물처럼 작고 무력해 보였다.
‘지금이라면….’
나는 불쑥, 엉뚱한 생각을 떠올렸다. 내 안의 해묵은 응어리를 풀어 버리는 것은 너무도 간단한 일이었다. 지금이라면, 그가 나를 노렸던 것처럼, 무방비하게 등을 돌린 그에게 칼을 꽂아 넣으면. 그러면, 그러면….
나는 칼자루를 더 깊게 쥐고 팔에서 뽑아내었다. 갈라진 살갗에서 울컥울컥 피가 뿜어져 나왔다. 뽑혀 나온 칼날 끝에서 검붉은 핏방울이 튀어 올랐다. 공중으로 흩어진 핏방울은 쏟아지는 물줄기 사이로 어지럽게 반사되었다.
“읏….”
흥건한 피비린내 속에서 짐승 같은 본능이 날뛰기 시작했다. 날카로운 통증에 흥분은 더 거세졌다. 그에게 품었던 적의는, 너무도 쉽게 살의로 색깔을 바꾸어 버릴 것 같았다.
찰박, 찰박. 나는 홀린 듯이 물 위를 디뎌 웅크린 그에게 다가갔다. 오랜 긴장 상태 속에서 예민해진 머릿속은 이미 그를 베고 찌르고 난도질하는 상상을 하고 있었다. 섬뜩한 상상의 사이사이로, 기억에 가라앉아있던 수많은 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분노와, 치욕과, 원망의 순간들이.
‘그 사람은 너랑 있는 거보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한테 다리를 벌리는 걸 더 좋아할걸?’
‘재미있네. 날 죽이러 오겠다는 거지? 올 테면 와 보던가. 기다리고 있을게’
‘역시 넌 실패작이야. 누가 오메가가 낳은 자식 아니랄까 봐.’
입술 위로 흘러내리는 피 섞인 물줄기의 맛이 비릿했다. 나는 칼날이 그를 향하도록 손에 쥔 칼자루의 방향을 돌렸다. 웅크린 그의 고개를 들게 한 후, 턱밑에 깊게 손을 넣어 목을 틀어쥐었다.
“크, 크윽….”
이준은 호흡이 달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신음했다. 채 진정되지 않은 기침을 뱉지도 삼키지도 못하면서, 두 눈만은 치켜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손 안의 칼자루를 만지작거리면서, 다시금 나는 사냥감을 코앞에 둔 늑대가 된 기분이었다.
어쩌면 어린 시절부터 수십 번을 상상하던 장면이다. 그 지옥 같은 본가의 저택으로 끌려 들어갔던 그 시절부터, 나는 늘 그가 사라져 버리기를, 내 손으로 그를 없애 버릴 기회가 있기를 바랐으니까.
모든 조건은 갖추어졌다. 상대의 목덜미를 움켜쥐었고, 무기까지 준비되었으니 이제 찌르기만 하면 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머리가 자꾸 헛도는 느낌이었다.
‘왜. 그냥, 하면 되는데, 왜….’
이준에 대한 연민 따위 조금도 없는데. 왜 망설여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칼을 쥔 주먹에 바짝 힘을 주었다가 이내 풀어내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이준의 호흡은 차츰 정돈되어 갔다. 그는 뱀 같은 눈동자를 굴려 비어 버린 내 표정을, 멈춰 버린 손을 훑고는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후…. 그래. 해 봐, 어디.”
“…….”
“안, 들려? 흐…. 찔러… 보라고.”
내가 멈칫하자, 그는 큭큭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그는 짓눌린 얼굴로 비열하게 속삭였다.
“너는, 읏…. 못 해. 죽었다 깨어나도 못 한다고. 그게… 너와 나의, 차이야. 후후… 윽. 하…. 왜, 그런지… 알려 줘? 으윽…! 켁, 흐, 크윽.”
발끈한 나는 그의 목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지만, 여전히 칼끝은 멈칫거렸다. 이준의 웃음소리가 귓가를 긁어 댔다.
“크, 크큭…. 이렇다니, 까, 넌 안 돼. 반쪽, 짜리… 알파라는 게… 쿨럭, 그렇지. 혈통은, 어쩔 수 없는 거야.”
“…….”
“크억, 쿨럭…. 알아, 들어? 너 같은 건 결국, 윽…. 패배자라고. 큭큭….”
반쪽짜리 알파, 패배자. 천박한 혈통. 그건 언제나 나에게 굴레 같은 말이었다. 사실이 아니라고 그의 말을 가로막으려 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쩌면 부인할 수 없는 말인지도 모른다. 나는 늘 사냥에 실패한 포식자였다. 그 애의 앞에서도, 그렇게나 증오하던 서이준의 목을 손에 움켜쥔 지금도. 대답을 잃은 나를 보며 서이준은 더 신이 나서 비아냥거렸다.
“후우, 만약에 네가, 오늘 운 좋게, 으읏, 나한테 엿 먹인다고, 해도… 내가 그 수모를 겪고, 윽, 가만히 있을, 줄 알아…? 그리고 네가 오늘 혹시, 후…. 그 녀석을 여기서 데려간다고, 쳐…. 그런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냐고.”
“…….”
“아무것도, 달라지는 건… 없어. 읏, 걔네들은 어차피 밑바닥, 인생이야. 네가 정의의 사도 흉내를, 내든 말든… 크읏….”
“뭐…?”
“한윤오도, 그 천박한 렌트보이도…. 그래, 널 낳은 오메가도. 결국은 다, 마찬가지 아냐? 더러운 인생이고, 아무 가치도, 흐으… 없는, 개죽음이라고. 크큭… 으흐윽!”
그의 마지막 말에 눈이 돌아 버린 나는 그의 목을 힘껏 그러쥐었다. 숨이 틀어막힌 이준은 핏발 서린 눈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나는 칼을 높게 치켜들고 그를 내려보았다.
입으로 기세등등한 말을 떠들어 댔던 것과는 달리 그의 눈에는 본능적인 공포감이 가득했다. 힘이 빠져 버린 몸은 부들부들 떨렸고, 얼굴은 붉게 물들었다가 다시 푸르게 질렸다. 무력하고, 초라하고, 추악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나는 문득 허무해졌다. 이게 그들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하던 순혈 알파의 밑바닥일까. 온전한 포식자의 모습이라는 게 고작 이런 것일까 싶은 생각에. 겨우 저런 이들에게 시달린 것으로 괴로워하고 자책하던 어린 시절의 기억이 부끄러워질 지경이었다.
“후….”
한숨을 뱉으며 쥐고 있던 칼날을 집어 던졌다. 고작 이 순간의 격분에 인생을 내버리고 싶지는 않았다.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누군가가 지금의 나를 비웃는다고 해도, 이것이 나의 실패라고 해도. 이런 방식의 사냥 따위 하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고통 속에서 지키고자 했던 것은, 오로지 나의 삶이었으니까, 절대 그것만은 버릴 수 없었다.
철퍽, 얇은 물 위로 칼날이 가라앉는 소리에, 이준은 섣부른 웃음을 흘렸다. 이번에는 나도 마주 웃었다. 그가 왜 승리한 듯한 표정을 짓는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칼로 숨을 끊어 놓지는 않을 거라도, 얌전히 놓아줄 마음은 없었기 때문에.
“거봐. 역시 넌… 으윽!”
나는 그의 얼굴을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그동안의 울분 그대로 깊고 강하게. 저만치 돌아간 그의 고개를 다시 붙잡아 올려서 한 대 더, 또 더. 여러 번 때릴 필요도 없었다. 대여섯 대 턱을 맞은 그는 그대로 기절해 버렸다.
맥없이 늘어진 몸에서 손을 떼자 그의 몸은 물 바닥 위로 힘없이 쓰러졌다. 늘 멀끔한 척하던 그의 얼굴이 엉망이 되었다. 입술이 터지고 뺨이 부어오른 꼴이 볼만했다.
콧등을 짓밟아 부러뜨리고 싶은 충동을 느꼈지만, 여기서 더 시간을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이곳에 온 이유는 정해져 있었으니까. 2층으로, 애타게 찾아 헤맨 그 애에게로 가야 했다.
이준에게서 뒤돌아선 순간, 스프링클러의 물줄기가 어느 사이 멈추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갑자기 조용해진 공기 속에서 나는 꿈에서 깨어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긴장감에 조여들었던 심장은 다른 이름의 박동으로 뛰어올랐다. 나무 계단 위로 발 모양의 물 자국이 새겨지고, 그 옆으로 손을 따라 흘러내린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속이 울렁거려. 아니, 머리가 빙빙 도는 거 같은데.’
몇 걸음이면 닿을 곳에 그토록 그리던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가슴이 터질 듯 벅차올랐다. 한편, 혹시라도 여기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친 듯이 두려워졌다.
상처투성이인 몸보다 널뛰는 감정이 더 욱신거리는 게 이상했다. 모든 게 나에게는 낯선 일이었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는다는 게 이렇게 어지러운 일인지 미처 모르고 있었다.
어두침침한 2층의 복도가 유달리 길게 느껴졌다. 그 애가 있다는 2층의 끝방은 어린 시절의 여름 내가 이 집에 올 때마다 지냈던 곳이었다. 가장 초라하고, 텅 비어 있고, 제대로 된 창문조차 없지만 되도록 방 밖으로 나다니지 말라는 뜻인지 작은 화장실이 딸려 있던 작은 방.
문 앞에 도착해 길게 심호흡을 했다. 방문을 열자 보이는 것은 온통 하얀 벽과 침대였다. 이불은 흐트러져있지만, 방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기가… 아니었나?’
순간 당황한 나의 코끝에 익숙한 냄새가 닿았다. 과일주처럼 달고 농밀한 페로몬이었다. 그사이 그 애의 냄새는 더 무르익어 있었다. 억누르려 애쓰는 듯하지만, 향기는 희미하고도 강렬하게 새어 나왔다.
방 안을 두리번거리던 나는 침대 헤드에 걸려 있는 쇠사슬을 발견했다. 기다란 쇠사슬은 반쯤 닫힌 화장실 문으로 이어져 있었다. 심장은 다시 걷잡을 수 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화장실로 다가가 문고리를 잡았다. 문틈 사이로 쇠사슬이 끼어 있어 잠겨 있을 리도 없는데 문이 당겨지지 않았다. 안쪽에서 문을 잡고 있구나, 생각한 순간 가냘픈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안 돼….”
그 애의 목소리였다. 다 쉬어 버리고 갈라져 있었지만, 한시도 잊은 적 없는 목소리다. 일렁거리던 감정이 한꺼번에 일어나, 손끝이 떨려 왔다.
“싫어요. 아, 안 돼, 제발….”
그 애는 안쪽에서 문을 붙들고 필사적으로 애원하고 있었다. 이내 그 애가 훌쩍훌쩍 흐느끼기 시작하자, 내 눈 속에서도 피처럼 짙은 눈물이 끓어올랐다. 꿈에서 우는 그 애를 봤을 때처럼, 폐에 물이 찬 듯 가슴이 아려 와 목소리를 내는 것도 힘들었다.
“…윤오야.”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 애의 울음이 멈칫거렸다. 숨을 가다듬고 그 애에게 말했다. 이곳으로 출발한 뒤 계속 하고 싶었던, 아니 그 애가 사라져 버린 그 날 이후 계속 하고 싶었던 말을.
“나야. 나 왔어…. 윤오야.”
<3권 끝.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