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3 : 나락 (13/18)

chapter 13 : 나락

실패로 돌아가 버린 탈출 시도는 나에게 처참한 것들만을 남겼다. 욱신거리는 발의 상처, 짐승이 된 기분을 느끼게 하는 팔목의 쇠줄, 절반으로 줄어 버린 억제제까지.

혹시 몰라 주머니에 가지고 나갔던 알약은 모두 잃어버렸다. 미친 듯이 몸부림친 데다가 거꾸로 들려 질질 끌려오기까지 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베개 밑에 숨겨둔 나머지 알약을 들키지 않은 것만도 다행이었다.

또 무겁게 하루가 시작되었다. 눈을 뜨자마자 억제제 한 알을 절반으로 쪼개 삼켰다. 쓴맛이 감도는 약을 삼키면, 흘러넘치기 직전까지 넘실거리던 페로몬은 차츰 가라앉는다. 남은 약은 세 알. 고작해야 하루 하고 반을 버틸 분량이었다.

유일한 바람은 약이 다 떨어지기 전에 이번 주기가 끝나는 거였지만, 그런 희망은 서서히 말라붙어 갔다. 첫 번째 히트는 끔찍할 정도로 길고 강하게 온다던 이한의 그대로, 내 몸은 통 가라앉을 기미가 없었다. 하루 사이에 상황이 달라질 리는 없다.

한 번에 먹는 양을 반으로 줄여 보았자 하루를 더 벌 뿐이었다. 이제 와서 섣불리 약을 줄이기에는 페로몬이 위험할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용량을 줄이면 약효가 어떻게 변할지, 이미 내성이 생긴 건 아닐지를 고민하던 나는 문득 허무해졌다.

‘이런 고민이, 무슨 의미가 있긴 할까…?’

언제부턴가 나는 나에게 내려질 처형만을 기다리는 죄수가 된 기분이었다. 재앙은 느리게, 그러나 쉼 없이 팔을 묶인 나에게 걸어오는 중이었다. 늪처럼 검고 깊고 질퍽한, 발버둥 쳐 봐도 평생을 벗어날 수 없는 재앙이.

생각을 그만두고 드러누웠다. 움직일 때마다 들려오는 쇠사슬 소리가 싫어서, 나는 거의 온종일 미동도 없이 납작하게 누워서 지내게 되었다. 누워서 바라본 흰 천장은 티끌 한 점 없이 텅 비어 있었다. 네모진 흰 바탕에, 빛과 어둠의 경계만이 길게 드리워져 있다.

그걸 계속 바라보고 있으면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이미 미쳐 가는 중이거나, 미쳐 버렸는지도 모른다. 검은 그늘과 하얀빛의 선명한 경계는 때때로 흐려졌다가, 푸르게 빛나다가, 그 절벽에서 바라보았던 바다처럼 출렁거렸다.

그때의 파도 소리가, 바람 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아 숨을 죽이면 기분 나쁜 목소리가 나에게 무언가를 속삭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들릴 듯 들리지 않는, 형태가 잡히지 않는 환청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결국 나는 한 가지 생각에 사로잡혔다.

‘그때, 뛰어내렸어야 했는데.’

그 좁고도 한없이 흰 방 안에서, 나는 자꾸만 죽음을 생각했다. 처음에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나는 영영 이곳에서 나갈 수 없고, 이준에게 이루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일을 당하고 말 거라는 생각 때문에. 두려움은 마음의 저 밑에서 검은 아가리를 벌리고 나를 노렸다.

그것을 겨우 뛰어넘는다고 해도 달라질 것은 없었다. 나를 잡아당기는 늪은 두려움만이 아니었다. 어머니의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나는 바닥이 없는 죄책감에 시달렸다.

‘네 엄마, 너 때문에 죽은 거라고.’

이준의 날카로운 말이 아직도 귀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그 말을 모두 믿었던 건 아니다. 어머니를 죽인 건 내가 아니라 이준이니까.

어머니에게 잘못된 약을 먹이도록 하고, 안 그래도 약하던 몸을 급격히 병들게 만들고, 결국 쓰러진 그녀를 살려 주겠다며 나를 기만하기까지 했던 건 모두 그였으니까.

‘그래. 날 원망하는 게 더 쉬운 방법이라면 그렇게 해. 그렇지만 넌 얼마나 깨끗한데?’

비열하게 이죽거리는 이준의 목소리에, 내 심장은 더 무너져내렸다. 엄마의 죽음이 이준 때문이라고 해도, 내가 결백하다고 할 수 있을까.

어머니의 죽음을 전해 듣기 전에도 나는 이미 괴로워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쓰러졌던 날, 제때 집에 돌아가 쓰러진 어머니를 병원에 데려가지 못했다는 생각 때문에.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 아이를 낳으라는 이준의 말을 따르겠다고 다짐했을 때, 나는 분명 어머니를 살릴 방법은 이것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 나는 결국 그를 거절해 버렸다.

할 수 없다고, 그의 말을 따를 수 없다고 그에게 말했을 때 내 머릿속에 어머니의 안위에 대한 대책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내 안에 막 피어난 사랑에 벅차서, 어머니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그래, 네 선택이었잖아. 어머니를 살릴 방법이 그것뿐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렇게 하지 않았던 건 바로 너야.’

이건 그냥 다 허깨비 같은 망상이다. 그가 그런 말을 한 적 없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무시해 보려 애쓰는데도, 머릿속을 떠도는 이준의 목소리는 조곤조곤 쉬지 않고 속삭였다. 그럴 때면 나는 이를 악물고 귀를 틀어막았다.

‘아니야. 어차피 내가 무슨 선택을 하든 어머니를 살려 줄 생각은 없었잖아.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내 탓이 아니라고.’

필사적인 변명에, 기어이 눈앞에 떠오른 이준의 얼굴이 활짝 웃었다. 겁에 질려 도리질하면, 그 미소는 더 끔찍하게 일그러졌다.

‘너도 알잖아. 적어도 마지막 그 순간에는, 넌 다른 건 아무 상관 없었던 거야. 어머니가 어떻게 되든, 치료를 받든 못 받든, 그러다 결국 죽어 버리든 상관없었다는 거지. 그런 네가 나를 원망할 수 있어? 어떻게?’

궁지에 몰린 나는 그의 허상을 향해, 결국은 허공을 향해 소리쳤다.

“아니야!”

날카로운 목소리에 지레 놀란 나는 호흡을 몰아쉬었다. 텅 빈 방에는 아무도, 아무것도 없었다. 내 목소리의 메아리뿐이었다.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 어색하게 느껴졌다. 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내가 낸 소리가 내 귀에 들려오는 것이 이상했다. 눈꺼풀이 깜빡이는 것도,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것도, 모든 것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마저도 죄스럽게 느껴졌다.

삼킬 수 없는 커다란 눈물 덩어리가 목구멍을 치고 올라와 입천장을 아릿하게 두드렸다. 우는 것조차 뻔뻔스러워서 울고 싶지 않은데. 이를 악물어도 결국 눈물은 흘러내렸다. 바로 누운 눈꼬리를 따라서, 귓가로. 머리카락 사이로.

“흑… 흐흑….”

끓어오르는 울음에 온몸이 울컥거렸다. 가슴 아래 어딘가가 찢어져 버린 듯 격렬한 통증이 느껴졌다. 손을 들어 명치 위로 가져가자, 다시 그 소리가 들렸다. 찰그락, 찰그락. 쇠사슬이 부딪치는 작고도 섬뜩한 소리.

고통에 신음하며, 나는 그 차가운 사슬을 내려다보았다. 나에게 들러붙은 이 줄은 결국 내 생명을 옭아매고 갉아먹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다면 차라리 빨리 끝내 버리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두 손으로 쇠사슬을 쥐었다. 이걸로 내 목을 조를 수 있을지, 그러면 죽어 버릴 수 있을지를 생각하던 때였다.

“뭐 하는 짓이야?”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오 실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기겁하며 식판을 내려놓고는 내가 누운 침대 쪽으로 달려들었다.

“너 또 뭘 하려고….”

그는 쇠사슬을 쥔 내 주먹을 억지로 잡아 벌렸다. 무슨 이상한 생각을 했냐는 듯 나를 쏘아보는 그의 얼굴도 멀쩡한 모양새는 아니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며칠을 앓아누웠어야 할 정도로 호되게 얻어맞았으니까.

이준에게 맞은 눈가와 입가가 찢어져 피딱지가 엉겨 붙었고, 피가 나지 않은 곳에는 이틀 사이 더 불긋하고 흉한 멍이 올라와 있었다.

그는 여전히 매일 나에게 식사를 가져왔다. 이미 이준은 그에 대한 신뢰를 잃었을 것이 분명한데도, 굳이 이런 처참한 모습으로. 그건 이준이 나에게 보내는 경고 같기도 했다. 아마도 이런 의미일 것이다.

‘이 사람을 밟아 버린 것처럼, 난 언제든 너를 짓뭉개 버릴 수 있어. 내가 널 관대하게 대해줄 때 마음을 똑바로 먹는 게 좋을 거야.’

탈출하려던 시도가 저지된 뒤 불과 한두 시간 후에도, 오 실장은 식판을 들고 이 방으로 왔다. 걸음걸이는 절뚝거렸고, 한쪽 눈이 퉁퉁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한 상태였다. 입안에 자꾸 피가 고이는지 우물거리다 삼키기를 반복했다.

절망의 끝까지 떠밀려 있던 나는 그 모습에 완전히 넋을 잃어버렸다. 기억이 흐릿하지만, 아마 나는 충동적으로 식판 위에 놓인 포크로 내 두 눈을 찌르려고 했던 것 같다. 그가 기겁한 얼굴로 포크를 빼앗으며 했던 말은 선명하게 생각난다.

‘너 미쳤어, 진짜? 씨발, 이것도 그냥 짧은 수갑으로 바꿔 줬으면 좋겠어? 이 사슬이 긴 게 그나마 고마운 일인 줄 알아. 침대에 누워서 똥오줌이라도 지려 봐야 정신을 차릴 거냐고. 어?’

그때 그가 나를 말리지 않았더라면 나는 눈이 멀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어설프게 쇠사슬로 제 목을 조르려고 시도해 보았자 죽지도 못하고 다치기만 해서 여러 사람을 곤란하게 했을 거다.

오 실장이 나에게서 빼앗아 간 쇠사슬을 신경질적으로 내팽개쳤다. 그날 이후 그는 다시 나에게 으르렁거리곤 했다. 예전처럼 말씨는 사납고 눈빛은 험악했지만, 나는 이제 그가 무섭거나 혐오스럽지만은 않았다.

“헛짓거리하지 말고 밥이나 먹어. 오늘은 제발 먹는 시늉이라도 하라고.”

그는 곱게 끓인 죽 그릇을 나에게 내밀었다. 내가 다시 자해할까 봐 걱정해서인지, 그날 이후 나에게 내어지는 식판 위에는 끝이 무딘 나무 식기가 놓이기 시작했다.

식기의 모양이 어떻든 상관없었다. 식기를 주지 않아도, 아예 밥을 주지 않아도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 뒤로 나는 거의 아무것도 먹지 않고 있으니까.

식사 시간마다 오 실장은 뭐라도 먹으며 어르고 윽박지르기를 반복했고, 쟁반 위에는 어떻게든 나에게 뭐라도 먹여 보려고 애쓴 흔적이 역력한 음식들이 올라왔다.

이준에게 시달리고 있을 사람들의 성의를 봐서라도 조금이라도 먹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괜한 반항이 아니라 정말로, 입맛이 없고 토기만 올라와서 무엇도 먹히질 않았다.

먹지 않겠다고 말하는 대신, 나는 손끝으로 그릇을 살짝 밀어놓았다. 그걸 본 오 실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한바탕 욕지기를 퍼부을 기세로 어깨를 들어 올리던 그는 다음 순간 멈칫거렸다.

“아, 하아응….”

다시, 벽 너머에서 녹아내릴 듯한 교성이 들려왔다.

“아, 씨발…. 저것들이 아침부터 진짜….”

민망한 소리에, 오 실장은 얼굴을 붉히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의 중얼거림에 대답이라도 하듯, 옆 방의 소리는 더 크고 요란하고 질척하게 들려왔다.

“좋아? 여기?”

“아응, 맞, 아요…. 흐응, 아, 아아, 좋아….”

“후, 그래. 잘하고 있어. 착하지….”

“아으, 하, 하아앙, 더, 더어….”

두 사람의 음성은 바로 귀 옆에서 들리는 듯 적나라했다. 오 실장은 눈 둘 곳을 몰라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나로서도 그가 방에 있을 때 이런 상황이 펼쳐지는 건 곤란했다. 떨리는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나가 주세요.”

“뭐?”

“밥, 제대로 먹을 테니까… 잠깐만 나가 있어 주세요. 저, 저거… 끝날 때까지만.”

“야, 너….”

“…….”

“하…. 알았어. 이상한 짓 하기만 해 봐, 진짜.”

오 실장은 의심스럽다는 표정이었지만, 마침 난감했기 때문인지 투덜거리며 방을 빠져나갔다. 나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다친 발이 바닥에 닿자 상처를 칼로 쑤시는 듯한 고통이 느껴졌지만 꾸물거릴 틈이 없었다.

‘고맙게도’ 긴 사슬을 줄줄 끌고 화장실로 들어가 반쯤 문을 닫았다. 주저앉아 서늘한 타일 벽에 뺨을 기대고 열기를 식혔다.

베타인 오 실장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옆방 벽 너머에서 새어 들어오고 있는 것은 소리만이 아니라는 것을. 소리보다 더 끈적하고 음습하게, 그들의 페로몬이 흘러들어오고 있었다는 것을.

거리낌 없이 내뿜어진 알파와 오메가의 향기는 아무렇게나 뒤엉켜 있었다. 공기가 두렵고 역겨웠다. 서로를 핥듯이, 잡아먹을 듯이 꿈틀거리는 향기에 휩쓸려 버릴 것 같았다.

‘안 돼, 안 돼….’

숨 쉬는 것만으로도 속이 일렁거렸다. 들이마신 타인의 향기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본능의 영역으로 넘어와 나를 두드리고 흔들었다. 아랫배에서 구물구물 괴로운 기운이 올라왔다.

이럴 때마다 씹어 댄 입술은 하도 시달린 나머지 안쪽의 모양이 일그러진 상태였다. 버텨야 하는데, 저건 나를 꾀어내기 위한 덫이고 도발일 뿐인데. 몸이 머리의 말을 듣질 않았다. 나는 또다시 너무도 쉽게 동요해 버렸다.

* * *

그랬다. 벽 너머의 페로몬은 그저, 이준의 도발이었다. 나의 히트가 더딘 것을 불평하며 ‘다른 수단을 쓸 수밖에 없다’라고 했던 이준은 탈출 소동이 있던 다음 날 아침 내 방을 찾아왔다. 손에는 정체불명의 상자를 들고, 등 뒤에는 처음 보는 남자를 동행한 채로.

“윤오야. 잘 잤어?”

아침 햇살만큼이나 따사로운 목소리였다. 그 섬뜩한 온기가 내 마음을 얼어붙게 했다.

나는 바로 전날 이 집에서 달아나려 했고, 그러다 그에게 끌려와 따귀를 얻어맞았으며, 자해 소동으로 난리를 피우기까지 했지만 그는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한 태도였다. 최선을 다한 내 발버둥이 그에게 조금의 흠집도 내지 못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듯이.

이준은 다정하게 내 이름을 부르며 늘 앉던 침대 옆 의자에 앉았다. 겁부터 먹은 나는 침대 모서리로 슬슬 몸을 피했지만, 그는 개 목줄을 다루듯 수갑에 달린 사슬을 거칠게 잡아당겼다. 힘없는 손목은 간단히 그에게로 딸려갔다.

그는 말없이 수갑을 찬 손목을 움켜쥐고는 나의 옷 소매를 걷어 올렸다. 불길한 예감에 손을 잡아 빼 봐도 허사였다. 헐렁한 옷자락은 순식간에 팔꿈치 위까지 접혀 올라갔다. 그는 다른 손으로 들고 온 상자를 열었다. 안에는 주사기와 작은 약병이 들어있었다.

“그, 그게 뭐예요? 뭐 하려는 거예요…?”

이준은 주사기를 쥐더니 병 안의 약물을 주사기로 빨아들였다. 뾰족한 주삿바늘 끝에서 투명한 약물 방울이 튀어 오를 때까지 실린더를 밀어 올린 다음, 나를 보며 활짝 미소 지었다.

“왜? 아아, 이거? 걱정하지 마. 이상한 주사 아니야.”

기쁜 듯이 웃는 그의 표정에, 나는 그가 이한의 아버지에 관해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온갖 약물에 시달렸고, 결국 그가 개발한 약물에 죽어 갔다는 이야기를. 공포감에 온몸의 털이 쭈뼛 일어났다.

“아, 안 돼요. 그건….”

“이상한 거 아니라니까. 설마 내 말을 못 믿는 거야, 지금?”

“싫어요. 무, 무슨 약이든 싫어요. 놔주세요, 제발.”

“가만히 좀 있어 봐. 위험하게 왜 이래?”

“이거 놔요! 싫다니까요. 읏….”

이준은 한쪽 팔로 내 몸을 고정하려고 했지만, 나는 그의 뿌리치기 위해 미친 듯이 몸부림치고 있었다. 이준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주사기를 내려놓고 내 뺨을 때렸다. 철썩. 살을 내리긋는 날카로운 소리가 방을 울렸다.

이준의 뒤에 서 있던 남자는 놀라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스무 살이나 되었을까 싶은 앳된 얼굴과 가녀린 체구의 남자였다. 그는 방에 들어와 처음 나를 본 순간부터 긴장한 상태였다.

그럴 만도 했다. 이곳은 폐쇄병동처럼 온통 새하얀 방이었고, 나는 흰옷을 입은 채로 손목에는 수갑을 차고 있었다. 발을 감싼 붕대에는 검붉은 피가 스며들어 있고, 퉁퉁 부어오른 얼굴에는 맞은 흔적이 역력했다. 나는 영락없이 죄수이자, 환자이자, 피해자의 몰골이었다.

낯선 사람의 눈에 내가 어떻게 비칠지까지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나는 얼굴을 얻어맞은 고통도 거의 느끼지 못한 채로 온 힘을 다해 저항했다. 결국 채 아물지 않은 뺨으로 따귀가 대여섯 대 더 날아왔다.

“윤오야. 왜 그렇게, 말귀를 못 알아, 후, 들어? 가만히 있으라니까.”

“윽! 으윽…!”

“손님 앞에서 이게, 무슨 부끄러운, 꼴이냐고. 응…?”

두 뺨이 떨어질 듯 얼얼하게 달아올랐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끝끝내 몸을 뒤틀었다. 이준은 기계적으로 내 볼에 손바닥을 내리치며 오히려 나를 책망하는 말을 했다. 제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나를 노려보던 끝에, 그는 저를 뒤따라온 남자에게 명령을 내렸다.

“지호 씨, 팔 좀.”

“네…?”

“잠깐 이 사람 팔 좀 붙잡아 봐요.”

그가 주저하며 어물어물 눈동자만 굴려대자, 이준은 날카롭게 다그쳤다.

“귀먹었어요? 팔, 잡으라니까. 빨리!”

화들짝 놀란 그는 얼떨결에 내 쪽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애원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까맣고 동그란 그의 눈동자는 망설이는 빛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러나 잠깐의 침묵 끝에, 그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내 팔을 잡았다. 그가 원망스럽지는 않았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이 방 안에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것은 그도, 나도 아니니까.

그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나를 붙들고 있는 동안, 이준은 여유로운 표정으로 주사기를 꺼내 들었다. 푹, 팔뚝에 예리한 주삿바늘이 꽂히는 느낌이 기묘하리만치 생생했다. 혈관을 타고 정체 모를 약물이 역류하는 느낌도.

“안 돼, 으, 흐으읍….”

나는 발작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까무러칠 듯한 공포감에 근육이 뻣뻣하게 수축했다. 주사약을 다 밀어 넣은 이준이 나를 보고 피식 웃은 뒤에야, 나는 내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윤오야. 뭘 이런 걸로 울고 그래…?”

“흐윽, 으, 윽….”

“당황스럽다, 정말. 주사가 무서워? 어린애도 아니고.”

“흐… 흐으윽.”

자각한 순간 눈물은 쉴 새 없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매 맞은 뺨 위로 더운 눈물이 닿는 느낌이 화끈거렸다. 이준은 상자 안에 주사기와 약병을 정돈하며 살갑게 말했다. 내 뺨을 때리고 억지로 주사를 놓는 따위는 한 적도 없다는 듯이.

“왜 그래. 괜찮아, 윤오야. 이거 정말로 이상한 약 아니야. 음… 말하자면, 영양제 같은 거지.”

“으으….”

“유해한 성분은 하나도 없어. 그냥 히트 사이클을 촉진시키는 효과가 있을 뿐이야.”

“윽, 끄윽, 흐으윽….”

“많이 놀랐나 보네. 저런… 가엾기도 하지. 진작 촉진제라고 말해 줄 걸 그랬나 보다.”

히트 사이클을 촉진시키는 약이라는 말이, 나에게 독약을 주사했다는 말처럼 무섭게 느껴졌다. 이준은 나긋나긋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는 진저리치는 나를 알아차리고도 그저 나를 조롱하고 싶은 듯 보였다.

나를 향해 가면처럼 자상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이준은 제 뒤에 선 남자에게 차갑게 쏘아붙였다.

“지호 씨. 언제까지 잡고 있을 작정이에요?”

얼이 빠진 표정으로 내 팔을 꽉 움켜쥐고 있던 남자는 그제야 손을 놓았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는 그를, 이준이 턱 끝으로 가리켰다.

“윤오야. 인사해. 이쪽은 지호 씨. 널 위해 모셔온 분이지.”

나는 여전히 눈물을 뚝뚝 흘리는 채로 다시 그를 보았다. 처음 만난 남자이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오메가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지호와 나는 덫 안으로 몰린 두 마리의 토끼처럼 붉어진 눈으로 마주해 있었다.

‘날 위해’ 오메가를 불렀다는 게 대체 무슨 뜻일지를 생각하던 참이었다. 이준은 불쑥 손을 뻗어 지호의 몸을 감싸 안았다. 그의 허리를 제 몸쪽으로 당기는가 싶더니 아예 제 허벅지 위에 그를 앉혔다.

당황해서 꿈틀거리는 그의 몸을 꽉 붙든 채로 가슴팍과 옆구리를 지분거렸다. 매정하게 면박을 줄 때는 언제고, 갑자기 야릇한 태도였다.

굉장히 노골적이면서도, 또 굉장히 무성의한 손길이었다. 그걸 보고 있으니 부끄럽거나 민망하다기보다는 불쾌한 기분이 들었다. 사람을 만지는 손길이 아니라 닳아빠진 물건을 주무르는 손길 같아서.

“지호 씨는… 뭐라고 설명하는 게 좋을까. 그래, 직업적으로 성적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사람이야. 윤오 넌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아도 잘 알지? 난월동에는 그런 분들이 많이 있었을 테니까.”

이준의 손이 슬금슬금 지호의 티셔츠 안을 파고들었다. 당황한 지호가 움찔거렸지만, 이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의 맨살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얇은 옷자락 아래 꿈틀거리는 이준이 손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것은 오메가의 몸을 타고 올라가는 뱀의 윤곽 같았다.

이준의 손가락은 꽤 긴 시간 동안 지호의 가슴 언저리에 머물렀다. 옷 위로 보이는 손의 윤곽이 야릇했다. 손마디가 뾰족하게 불툭거리기도 하고 손끝이 빙글빙글 돌아가기도 했다.

집요한 애무에 지호의 얼굴은 조금씩 붉게 달아올랐다. 끙끙거리며 버티던 그는 결국 휘청이듯 뒤로 고개를 젖혀 이준에게 몸을 기대었다.

“하으읏….”

이준은 항복의 콧소리를 흘리는 지호에게 눈길도 주지 않은 채로 그를 어루만지며 말을 이어 나갔다.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어. 사실 난 렌트보이를 사는 걸 별로 좋아하진 않거든. 누구랑 뭘 했을지 모르는 사람이랑 그런다는 게 좀 꺼림칙한 일이잖아?”

“…….”

“그런데 이번엔 너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촉진제를 놓긴 했지만, 이건 그냥 보조적인 역할 정도밖에 안 되니까. 그거 알아? 발현을 촉진시키는 제일 좋은 방법은 알파의 페로몬에 노출시키는 거야. 그중에서도 오메가와 접촉할 때 나오는 페로몬이 제일 효과적이지.”

“…….”

“물론 내가 널 안는 게 제일 간단한 방법이겠지만…. 아, 놀랄 거 없어. 약속했잖아, 우리. 네가 먼저 너를 원할 때까지는 너에게 손대지 않기로. 약속은 당연히 지켜야지. 그래서 지호 씨를 부른 거야. 너한테 내 페로몬을 보내 주려면 나도 접촉할 오메가가 필요하니까.”

이준은 제 품에 파고든 지호의 고개를 돌려 저를 마주 보게 했다. 살짝 입을 벌리고 그에게 다가가는 이준의 모습은 먹잇감을 앞에 둔 포식자처럼 보였다.

그는 거리낌 없이 지호에게 키스했다. 한 손으로는 티셔츠 안 여기저기를 어루만지면서, 뒤통수를 쥔 다른 손을 당겨 깊게 입술을 겹쳤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할 때마다 혀가 비벼지는 모양이 여과 없이 보였다. 질척이는 마찰음 사이로, 그는 내내 두 눈을 뜨고 있었다. 기묘한 안광이 나를 꿰뚫어 버릴 듯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어느샌가 이준과 지호의 향기가 흘러나와 있었다. 나도 모르게 아랫배에 싸르르한 진동이 느껴졌다. 또 그 참혹한 본능이 문제였다. 코앞에서 들이붓는 자극 앞에 나는 속절없이 흔들렸다.

알파의 페로몬이 발현을 촉진시킨다는 이준의 말은 사실인 것 같았다. 그에게 흥분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고, 내 눈앞에서 이런 짓을 한다는 게 괴롭기만 했는데도 페로몬이 덩달아 들썩였다.

페로몬을 틀어막는 게 힘겨웠다. 눈을 돌리고 싶었지만, 얽어진 그의 시선이 나를 마비시킨 것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제발…. 제발 그만….’

입맞춤을 당하는 게 나인 것처럼, 나는 초조하게 생각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시간이 끔찍하게 길었다. 마침내 지호에게서 입술을 떼어 낸 이준은 돌연 거추장스럽다는 듯 그의 가슴을 툭, 쳐서 밀어냈다.

바지 주머니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 타액에 번들거리는 제 입술을 닦았다. 그는 또 손수건을 아무렇게나 구겨 침대 옆 쓰레기통으로 던져 넣었다.

이준은 지호를 제법 여유 있는 시간 동안 빌려 왔다면서, 나의 사이클이 올 때까지 그가 나의 옆방에서 머물 거라며 나의 발현을 ‘도와줄’ 거라고 설명했다.

이준이 상품을 다루듯 저에 대한 이야기를 지껄이는 동안 지호는 고개를 떨구고 얌전히 서 있었다. 이준이 방을 떠나려 일어나 등을 돌린 후에야, 그는 조심스레 나를 흘긋거렸다. 아무 말도 없었지만, 눈동자는 이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미안해요.’

그가 나에게 미안해야 한다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낯선 이에게 제 치부를 드러내야 하는 그의 모습이 마음에 걸렸다. 안쓰럽다기보다는 슬펐다. 그의 모습이 곧 나의 모습인 것 같아서, 감히 동정할 수는 없었다.

* * *

그 뒤로 꼬박 하루가 지나도록, 벽 너머의 방에서는 온갖 소리가 넘어왔다. 시도 때도 들려오는 교성과 침대가 덜컹거리는 소리, 이준이 투덜거리거나 윽박지르는 소리, 안쓰러울 정도로 교태를 부리는 지호의 목소리.

그때마다 풍겨 오는 페로몬을 견디기 위해, 나는 옆방에서 그나마 멀리 떨어져 있는 화장실에 몸을 숨기곤 했다. 찬기 어린 타일에 몸을 붙이고 체온과 감각을 떨어뜨리려 애쓰는 게 고작이었다.

귀를 틀어막고, 최대한 천천히 숨을 쉬어도 본능을 둘러싼 벽은 조금씩 닳아 없어지고 있었다. 한계가 머지않은 느낌이 무서웠다.

뜨거워진 의식은 이내 흐느적거리기 시작했다. 눈을 감고 코를 틀어막아도 공기 가득 들어찬 그들의 향기는 너무 또렷했다. 나를 소름 끼치게 만드는 이준의 향기는 끔찍했지만, 눈을 감고 있으면 어쩐지 이한의 것과 닮게 느껴졌다.

그 향기 속에서 눈을 감으면 나를 안던 이한이 떠올랐다. 무심하게 나를 감싸는 커다란 손, 등줄기를 울리던 목소리, 뜨거운 입술과 눈. 그 모든 것이 그대로 내 안의 어딘가에 새겨져 있었다. 나는 또 허락되지 않은 문장을 입 안으로 품었다.

‘보고 싶어….’

내 몸을 멋대로 저며대는 정욕만큼이나 괴로운 것은 그리움이었다. 삶에 대한 미련조차 잃었음도 나는 여전히 그가, 이한이 보고 싶었다.

코너에 떠밀린 그리움은 결코 수줍지도 조심스럽지도 않았다. 그것은 염치도 모르고 적당히 봐주는 방법도 모르는 건달처럼 아무 때나 불쑥 나를 찾아와 마음속을 엉망으로 뒤집어놓았다.

모든 것이 모순투성이였다. 다시는 보지 말자고 제 입으로 말해 놓고 뒤늦게 이토록 그를 그리워하는 것도, 죽고 싶다고 간절히 생각하다가도 또 불쑥, 한 번이라도 그를 다시 보고 싶다고, 그를 볼 수 있다면 이 끔찍한 시간도 견뎌 낼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는 것도.

지금도 그랬다. 그를 생각해 보아야 좋을 게 하나도 없고, 이미 끓어 넘칠 듯한 본능을 더 위태롭게 만들 뿐인데도 나는 떠올라 버린 이한을 지워 버릴 수 없었다.

수렁에 빠진 것처럼, 수렁 안으로 헤엄쳐 들어가는 것처럼 그 체온을, 그 품의 감촉을 되새겼다. 기억 속에 남은 이한의 흔적을 탐닉하던 나는 문득 선명해진 감각을 깨닫고 소스라쳤다.

‘향기가… 가까워진 건가?’

몸이 달아오른 탓일까. 나에게 닿는 페로몬의 향이 더 진해졌다. 멀리서 스며오던 냄새는 어느샌가 코앞을 질퍽거렸다. 기분 탓인지 벽 너머에서가 아니라 바로 곁에서 풍겨 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라 향기는 실제로 가까워져 있었다. 짙어진 향기를 맡지 않기 위해 숨을 죽이던 찰나, 이준과 지호의 목소리가 다가왔다. 방문 바로 너머에서 실랑이를 하는 듯 격한 소리가 들려오는가 싶더니 이내 벌컥, 방문이 열렸다.

옷차림이 흐트러진 이준과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지호가 방으로 들어왔다. 이준은 무언가에 심사가 뒤틀린 듯한 표정으로 지호의 머리채를 손에 쥔 채로 빠르게 걸었다. 지호는 그의 뒤에서 중심도 제대로 잡지 못하고 비틀비틀 끌려 들어오고 있었다.

“뭐야, 한윤오. 어디 있어?”

이준은 끌고 온 지호를 침대 쪽으로 내동댕이치고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사슬의 한쪽 끝이 화장실로 향하고 있다는 것을 발견한 그는 곧바로 화장실 문을 열어젖혔다. 문틈 새로 상황을 훔쳐보던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또 달아난 줄 알고 놀랐잖아.”

기겁한 나와는 달리, 그는 기쁘게 웃었다. 표정과 말투는 부드러웠지만 내 셔츠의 목 부분을 붙잡고 끌어당기는 손길은 거칠었다.

주저앉아 있던 나는 제대로 일어서지도 못한 채로 화장실 밖으로 끌려 나왔다. 욱신거리는 왼발을 질질 끌고 침대에서 한 발짝쯤 떨어진 바닥까지 기어갔다. 그사이 침대에서 일어나 방 밖으로 나가려던 지호는 다시 이준에게 머리채를 붙잡혔다.

“아악…!”

“이게, 어딜 도망가려고….”

“이것 좀, 놔요, 악, 아윽…!”

“얌전히 있어. 머리 가죽이 다 벗겨지고 싶은 게 아니면 얌전히 있으라고!”

“흐…으….”

“후, 뭐가 불만이야, 대체?”

“싫어요, 여기서, 여기서 그러는 건….”

“하, 요즘 렌트보이들은 장소도 가리나?”

“그래도… 이런 조건은 말한 적 없으시잖아요.”

“프로면 프로답게 굴어. 넌 평소 몸값의 두 배를 받았고 뭐든 하겠다고 약속했어.”

이준은 싸늘하게 말하며 머리채를 잡은 그대로 그를 다시 내던졌다. 금방이라도 몸 어딘가를 내리칠 것처럼 높게 손을 들어 올리자, 침대 위에 주저앉은 지호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어깨를 움츠렸다. 몸을 떨며 저를 올려다보는 모습에, 이준은 킬킬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아니야, 안 때려. 말했잖아. 맞을 짓을 안 하면 안 때릴 거라고. 왜 겁부터 먹고 그래?”

“…….”

“뭘 그렇게 호들갑이야? 부끄럽게 생각할 거 없어. 이게 네 일이잖아. 난 그냥 클라이언트로서, 의뢰했던 일을 해 달라고 요구하는 거야.”

이준은 바지를 반쯤 내리며 지호의 등 뒤에 바짝 붙어 앉았다. 그의 어깨 위로 팔을 둘러 안아 웅크린 몸을 곧게 펴도록 하더니, 턱을 강하게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가냘프고 연약해 보이는 지호의 몸에는 참혹한 흔적들이 가득했다. 붉은 손자국과 물어뜯긴 잇자국, 크고 작은 멍까지. 똑바로 바라보기 힘들 정도로 참혹한 얼룩들이었다.

이준은 제가 남긴 생채기들이 자랑스럽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 앞에 껴안은 지호의 몸을 돌려 내 쪽을 보게끔 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지호는 얼굴을 붉히며 손으로 제 몸을 가리려고 했다.

이준은 지호의 저항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지호를 단단히 붙잡은 채로 제 페로몬을 활짝 열어젖혔다. 포악할 정도로 짙은 향기가 내뿜어졌다.

“잠깐만요, 잠깐….”

“이러면 재미없지. 하려면 제대로 해.”

“그래도, 아… 으흑….”

숨이 막힐 듯한 알파의 향기에 지호는 괴로워했다. 흥분했다기보다는 겁에 질린 표정이었지만, 그의 성기는 곧바로 단단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 괴리가 더욱 괴로웠는지 그는 조금씩 흐느끼기 시작했다.

“뭘 빼고 그래. 이 정도는 너한테 아무것도 아니지 않나? 더 지저분한 짓도 많이 해 봤을 텐데.”

“잠깐, 흐윽, 흐….”

“누가 보고 있는 쪽이 더 좋다는 애들도 있는데, 넌 아닌가 봐? 그래도 같은 오메가끼린데 뭐 어때.”

“아으, 아, 아아….”

“그래, 오메가끼리 서로 도와야지. 너도 알 거 아니야. 지금 저 애가 어떤 상태인지.”

“하읏…!”

이준은 나를 향해 기괴한 시선을 보내며 지호의 페니스를 손에 쥐었다. 이미 젖어 있는 성기의 끝단을 찌걱찌걱 짓누르고는 기둥을 마구 쓸어대기 시작했다. 지호는 깊게 입술을 깨물었지만 신음이 터져 나오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움찔거리며 저항하던 그의 다리는 이내 움직임을 멈추었다. 몸을 늘어뜨리고, 이준이 주는 자극에 따라 움찔움찔 떠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었다.

이준은 지호의 무력한 모습이 마음에 드는지 쿡쿡, 웃고는 그의 귀에 속삭였다.

“저 애 말이야, 어때? 같은 오메가가 보기에도 예쁘지 않아? 오메가는 수도 없이 봤지만, 쟤만큼 쓸모 있어 보이는 애도 드물단 말이지.”

“으응, 흐, 흐윽….”

“그런데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여태 첫 히트도 안 왔다고, 저런 애가. 쟤한테서 나는 풋내를 맡을 때마다 짜증 나서 돌아 버릴 것 같아. 내가 난폭한 사람이 아니라, 쟤가 사람을 돌게 만드는 거잖아. 그게 내 잘못이야…?”

“흐… 아, 아응….”

“나도 다 좋게 좋게 해결하고 싶어. 그래서 이러고 있는 거라고. 너 같은 돌대가리도 다 알아듣게 설명해 줬잖아. 널 부른 이유가 뭔지.”

“하… 으으.”

“제대로 좀 해 봐. 응? 분위기 파악이 그렇게 안 돼? 네가 날 만족 못 시키니까, 쟤도 사이클이 올 기미가 안 보이는 거 아냐.”

“윽…!”

이준은 지호의 성기를 쥐어뜯듯 거칠게 흔들었다. 조금의 애정도 없는, 아니 최소한의 배려조차 없는 움직임이었다. 정작 지호가 곧 절정에 다다를 듯 하반신을 파득거리는 순간, 그는 지호의 성기에서 손을 떼어 그의 두 무릎 아래를 잡았다.

“아…!”

이준이 그의 오금을 높게 들어 올리자, 지호의 하반신이 나를 향해 활짝 벌어졌다. 그는 다리를 닫아 보려 필사적으로 몸을 비틀었지만 팔다리를 붙잡힌 상태로는 역부족이었다.

잔뜩 발기해서 까딱이는 지호의 페니스 아래로 습기 찬 입구가 보였다. 구멍에서 새어 나온 반투명한 액체가 다리 안쪽의 여린 살을 온통 축축하게 만들었다. 이준의 손가락이 그의 다리 사이로 기어들어 가는 것을 보며, 더는 견딜 수 없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아니, 윤오야. 여기 봐야지.”

어린아이를 나무라는 듯한 말투였지만, 이준의 목소리에는 섬뜩한 살기가 묻어 있었다. 움찔 놀라 반사적으로 눈을 떴을 때, 그의 손가락 세 개가 지호의 구멍 안에 깊게 들어가 있었다.

손가락이 갈고리처럼 안을 할퀴고 나올 때마다 그곳에서는 찐득한 애액이 비어져 나왔다. 농염하고 끈적한 오메가의 향기도.

나는 결국 다시 눈을 감았지만, 온갖 소리가 계속 나를 괴롭혔다. 물기 어린 곳을 찌걱찌걱 들쑤시고 열어젖히는 소리, 살이 스치고 점막을 누르는 소리, 탁한 숨소리와 신음 소리. 이준이 옷을 벗는 듯한 기척이 들려오더니, 이내 지호는 힘겹게 끙끙거렸다.

“흐으, 싫어요. 이건….”

“넌 좀, 닥치고 있어. 윤오야, 보라니까.”

“아윽, 아직, 아직은…. 읏, 안, 풀렸… 히익!”

“안 풀리긴 무슨, 아무렇게나 쑤셔 박아도 젖어서 줄줄 싸는 주제에…. 후, 읏….”

“아! 아악! 흐…윽! 아윽…!”

부글부글 끓는 듯한 페로몬 속에서 퍽, 퍽. 몸이 맞붙는 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더 깊게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아도 그들이 살을 섞는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아서, 계속 소름이 끼쳐 왔다.

“윤오, 눈 떠.”

이준은 싸늘하게 나를 불렀다. 지호가 토하듯 내지르는 신음 사이로 이준은 쉼 없이 나에게 음험한 말을 건네왔다

“헉, 으으….”

“후, 후우…. 뭐 하는, 짓이야, 한윤오…. 눈 떠야지.”

“아악! 하으, 응, 읏….!”

“눈 떠서, 자세히 보고 싶잖아…. 후…. 네 냄새 다 느껴지거든?

“흐으읏, 읏, 하으.”

“지금쯤, 하아, 윤오 너도… 근질근질할 텐데. 응…?”

온갖 소리가 뒤섞여 울리는 가운데서도 서늘한 그의 음성만은 선명했다. 비아냥거리는 말에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지만,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내가 아무리 이 상황이 역겹고 괴롭게 생각한다고 해도, 페로몬은 그저 본능에 따라 부풀고 달아오르고 있었으니까.

내가 짐승이 되어 버렸다는 사실을 서글프게 실감했다. 주기가 오면 발정할 수밖에 없는, 발정하게 되면 오로지 본능과 욕구로 가득 차게 되는 존재를 짐승이 아니면 뭐라고 불러야 할까.

두 사람의 페로몬은 자욱하게 방을 메우고 있었다. 철썩, 하고 그들의 살갗이 붙었다가 떨어질 때마다 감은 눈꺼풀 너머에서 불꽃이 튀는 것이 느껴졌다. 그렇게 연거푸 폭발하는 불꽃 앞에서, 나는 기름 덩어리를 품에 안은 기분이었다.

억지로 눌러놓은 발정이 금방이라도 폭발해 버릴 것처럼 쾅, 쾅 이성을 두드렸다. 눈을 감고 숨을 고르다가, 도저히 진정되지 않는 충동에 귀까지 틀어막았다.

“하, 버티지 마. 뭘 그렇게, 고집을 부려…?”

“하윽, 으으.”

“그럴 거 없어, 윤오야. 후우…. 그냥, 내려놔…. 하아, 어차피, 소용없는 거, 알잖아.”

“아, 하앗! 으, 으으… 흐읏.”

아무리 힘껏 귀를 막아도 소리는 가려지지 않았다. 뇌가 녹는 기분에 몸이 마구 떨렸다. 나는 앉은 자세로 슬금슬금 뒤로 기어갔다. 고작 방의 반대쪽 모퉁이까지밖에 도망갈 수 없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그에게서 조금이라도 벗어나고 싶은 기분에 몸이 저절로 움직였다.

이준도 그 초라한 꼴을 보았을 것이다. 화를 낼 줄 알았던 그는 갑자기 쿡쿡쿡, 소리 내어 웃음을 터뜨렸다. 광기 어린 웃음소리에 몸이 굳은 순간 수갑에 묶인 오른팔이 갑자기 당겨졌다.

“으윽…!”

눈을 감은 채로 한쪽 팔이 당겨지자, 나는 중심을 잃어버렸다. 몸이 앞으로 확 고꾸라지면서 반사적으로 눈이 떠졌다.

그는 지호에게 들러붙어 거칠게 허리를 짓찧는 중이었다. 한 손으로는 엎드린 지호의 팔을 뒤로 붙잡고, 한 손으로는 나를 묶은 사슬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는 반쯤 엎어지고 반쯤 무릎 꿇은 자세로 그에게로 끌려갔다. 버티려고 했지만 널브러진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래, 그대로 와. 윤오야. 후우….”

“으윽, 으….”

“이리 오라니까. 그냥, 나한테 오면 된다고. 응?”

그는 네발로 기어서 끌려오는 나를 보고 킬킬거렸다. 환영이라도 하는 듯 과장되게 내 쪽으로 손을 뻗더니, 억센 손가락으로 내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후, 크큭…. 자, 봐. 똑똑히 봐야지.”

“으윽….”

“잘 보고, 배워 두라고. 알겠어…? 이게, 오메가가 해야 하는 일이야. 하아, 나는, 애초에 네가 있어야 할 자리에, 올 수 있게 너를, 후…. 이끌어 주는 것뿐이라고.”

이준은 내 얼굴을 제 쪽으로 가까이 당겨 뒤엉킨 그들을 보게 했다. 몸을 곧게 편 이준의 앞에서, 지호는 상체를 낮게 수그리고 엉덩이를 치켜든 자세였다. 앞뒤로 정신없이 흔들리는 그의 하얀 몸은 땀과 체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작은 몸을 향해서, 이준은 우악스레 허리를 치받아 댔다. 쿵, 쿵. 매질하듯 부딪치며 골 사이로 성기가 꿰어 들어갈 때마다 지호는 고통인지 환희인지 모를 비명을 마구 터뜨렸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정사라기보단 사냥감을 도살하는 현장이나, 아주 외설적이고 끔찍한 형태의 고문 같았다. 보는 것만으로 괴로운 기분에 얼굴이 찌푸려졌다.

“크, 크큭…. 왜, 그런 표정이지? 후우…. 생각보다 시시해서 실망했나? 뭘 얼마나 기대했던, 거야? 네 거만은 못 할, 수도 있겠지만… 이 친구도, 뒷구멍은 그럭저럭 쓸 만한 편인데.”

이준은 지호의 팔을 놓고 그의 둔부로 손을 가져갔다. 엉덩이를 잡아 벌리자, 붉게 부어오른 그의 입구가 이준의 성기를 물고 있는 장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준은 거침없는 태도로 제 것을 뿌리 끝까지 박아 넣었다 잡아 빼기를 반복했다. 이준이 안을 가르고 드나들 때마다 그곳에서는 찐득한 물기가 새어 나왔다.

눈으로 확인한 순간, 그들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페로몬의 향기는 더 짙게 와닿았다. 모든 감각이 날카롭게 곤두섰다. 눈에 보이는 모양도 귀에 들리는 소리도, 내 몸에 붉게 돌고 있는 맥박까지도 기이할 정도로 또렷하게 느껴졌다.

머리는 그저 괴로울 뿐인지만, 홀려버린 본능은 고개를 쳐들고 일어나 어딘가로 향하려 했다. 더 보고 있다가는 무언가가 돌이킬 수 없이 고장 나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나는 다시 눈을 감았다.

“눈 떠, 한윤오.”

“윽. 으…. 싫어요.”

“눈 뜨라니까. 후우, 이러면 안 되지. 너, 보라고 하는, 거잖아.”

“싫어요. 싫… 아악!”

머리채를 쥔 이준의 손에 거칠게 힘이 들어갔다. 고개가 뒤로 꺾여지고 눈가에서 저절로 눈물이 튀어나왔다. 이를 악물고 우는 내 모습이 즐거웠던 걸까. 키득거리는 이준의 웃음소리가 한참 이어졌다. 웃음기 어린 목소리가 나를 어르듯이 속삭였다.

“익숙해져야지, 언제까지 뻣뻣하게 있을 거야? 말했잖아. 난 얌전하게 구는 쪽이 더 좋다고.”

“…….”

“되지도 않게, 도도하게 굴기는…. 후, 후우…. 그래. 넌 원래 좀 새침한 편이었지. 특별히, 연습할 기회를 줄게. 말했던 대로, 너한테는 잘해 주고 싶으니까.”

이준은 머리칼을 쥐어뜯던 손가락에서 갑자기 힘을 풀고는 머리칼 사이로 손끝을 스며 왔다. 그 은근하고 구물구물한 느낌이 뺨을 맞는 것만큼이나 싫었다.

“눈 떠. 마지막 경고니까.”

겁먹은 내 눈꺼풀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속눈썹에 눈물이 가득 엉겨 붙어 눈을 뜨는 것이 힘겨웠다. 물기에 얼룩진 사위 너머로, 이준은 미소 짓고 있었다. 늘 그랬듯이 역겹도록 상냥하게.

“키스해 봐, 지금 나한테.”

“읏….”

“하려면 똑바로 해. 무슨 말인지 알지? 큭…. 쿠쿡….”

“…….”

“너 하는 걸, 봐서 마음에 들면, 후, 끝날 때까지 눈 정도는… 감고 있게 해 줄 테니까.”

그는 지호의 몸에 성기를 박아 넣는 동시에 흥분에 붉게 달아오른 비열한 눈동자로 나를 핥고 있었다. 기묘하게 번뜩이는 안광에 나는 감추기 힘든 혐오감을 느꼈다.

습관처럼 대답할 말을 궁리했지만 머리가 제대로 돌아갈 리 없었다. 나는 그저 생각을 멈춰 버렸다. 이 상황에서, 어떻게 말해야 그의 신경을 덜 거스를 수 있을지를 고민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살고 싶다는 미련도 없는데, 혐오와 분노를 감출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웃기지 말아요.”

궁지에 몰린 생쥐가 고양이를 무는 것처럼, 나는 어울리지도 않은 발악을 했다. 가까이 다가온 그의 얼굴에 힘껏 침을 뱉어 버렸다.

“악, 으… 씨발!”

자신만만하게 웃던 이준은 얼굴이 일순 일그러졌다. 그는 하던 짓을 멈추고 허둥지둥 바지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제대로 생각한 다음 저지른 행동은 아니었지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피부가 벗겨질 기세로 얼굴을 문질러 대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속이 시원하다는 생각까지 했다.

패닉에 빠져 정신없이 얼굴을 닦던 그는 한 박자 늦게 나를 노려보았다. 그와 눈이 마주쳤을 때, 나는 비릿하게 웃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의 환희는 아주 짧게 끝났다. 흥분이 사라진 이준의 눈동자에는 분노만이 번뜩거렸다.

“이 미친 새끼가 진짜…!”

그는 제 앞에서 어정쩡하게 몸을 웅크린 지호를 걷어차 버리고는, 침대에서 내려와 나에게 달려들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으로 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이, 이런 더러운 오메가 새끼가…. 오냐오냐해 줬더니 주제를 모르고 덤벼?”

목을 조르는 강한 힘에 호흡은 순식간에 조여들었다. 짓눌린 목덜미에서 불로 지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으…윽….”

“네가 죽고 싶어서 아주 발악을 하는구나? 왜, 못 죽일까 봐? 너 같은 거 하나 여기서 죽는다고 누가 신경이나 쓸 것 같아?”

“켁, 흐윽….”

“내가 마음만 먹으면, 너 같은 건…. 너 따위 오메가 하나쯤 쥐도 새도 모르게 없애 버리는 건 아무 일도 아니라고!”

꼴깍꼴깍 안으로 숨을 삼키는 동안 얼굴은 타는 듯이 붉어졌다. 목구멍부터 머릿속의 가장 깊은 곳까지 불길이 끓어올라 펑 터져 버릴 것 같았다. 죽고 싶다던 체념도 잊고 본능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이준의 손은 목을 옭아맨 올무처럼 떨어져 나가질 않았다.

“그, 그만하세요. 도련님.”

겨우 몸을 일으킨 지호가 놀라서 달려왔다.

“넌 가만히 있어! 남창 새끼가, 낄 데 안 낄 데도 구분 못 해?”

“아아, 어떡해. 도련님, 제발….”

“저리 가라! 씨발, 너도 뒈지고 싶냐고!”

“그냥 제가 더 잘할게요. 안 빼고, 내숭 안 떨고 시키는 건 다 할게요. 제발 그만, 제발, 아아….”

지호는 가느다란 온몸을 이준의 팔에 걸어 매달리다시피 당겨 보려 했지만, 이준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계속해서 내 숨통을 움켜쥐었다. 발을 동동 구르던 지호는 알몸으로 방을 뛰쳐나갔다.

“크…으으….”

쥐어짠 호흡은 이제 거의 바닥났다. 눈동자에 핏발이 올라 사위가 흐려졌다. 고통스러워하는 내 두 눈을, 이준은 뚫어질 듯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눈동자에는 형언할 수 없는 복잡한 빛이 어려 있었다. 분노와 희열이, 짜증과 통쾌함이, 알 수 없는 두려움까지도.

고통의 끝자락에서, 나는 차라리 그가 마지막 두려움을 넘어 나를 아예 끝내 버리기를 바랐다. 앞으로 길게 이어져야 할 악몽 같은 나날을 끝마쳐 주기를. 생의 마지막에 본 것이 그의 얼굴이 되는 것만은 싫다는 생각에 두 눈을 질끈 감던 순간, 벌컥,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련님…!”

방 안으로 뛰어들어온 것은 오 실장이었다. 그는 사색이 된 얼굴로 곧장 이준과 나 사이에 달려들었다. 그가 이준의 손목을 쥐고 힘을 주어 비틀자, 내 목을 조르던 두 손 중 하나가 떨어져 나갔다. 이준은 목덜미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고함을 질렀다.

“놔. 이거 안 놔?”

“안 됩니다. 도련님. 이러다 정말 큰일 나십니다.”

“씨발, 놓으라고! 이 양아치 같은 새끼야. 죽고 싶어? 놓으라니까!”

“죄송합니다. 그래도….”

오 실장이 제 손을 내게서 떼어 내려 하자, 이준은 어깨와 팔을 이리저리 뒤틀며 버텼다. 그가 발악을 하는 동안 나는 그의 손아귀에 매달린 종이 인형처럼 흐늘거렸다. 오 실장은 결국 이준의 나머지 손목도 움켜쥐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몸부림을 쳐 이준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왔다.

“욱…. 크윽, 켁, 켁…. 콜록….”

정리되지 않은 호흡과 기침이 마구 치밀어올랐다. 먹은 것이 없어 나올 것도 없는데, 나는 바닥을 짚고 헛구역질을 해 댔다. 어깨 위쪽이 온통 화상을 입은 것처럼 화끈거리고 따끔거려서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나를 놓친 이준은 분이 풀리지 않는지 오 실장에게 양 손목을 잡힌 채로도 숨을 몰아쉬며 으르렁거렸다. 다시 나에게 달려들려다가, 꿈쩍도 하지 않고 제 팔을 잡고 있는 오 실장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네가 정말 미쳤구나? 아주 맛이 갔어…. 그렇지?”

“…….”

“미쳐도 곱게 미쳐야지, 위아래 구분이 안 돼? 지금 똥오줌도 못 가리는 거냐고!”

오 실장은 이준의 호흡이 가라앉을 때까지 그의 손을 놓지 않았다. 이준은 금방이라도 며칠 전처럼 주먹을 날리거나 발길질을 할 것 같은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격노가 한풀 가라앉고 오 실장의 손을 뿌리치고 난 뒤에도 한참 동안을.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한 공기 속에서, 오 실장은 다시 공손하게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일그러진 채로 이글거리던 이준의 얼굴은 돌연 차게 가라앉았다. 그는 흐트러진 제 옷매무새를 가다듬으며 매끄럽게 웃었다.

“후…. 그래요. 오 실장님이 왜 이러시는지 알 것 같네요. 제가 도량이 좁았습니다. 좋은 윗사람이 되려면 아랫사람들 바라는 일을 잘 헤아려야 하는데, 제 불찰이네요.”

“…….”

“저 애를 마음에 두고 계신 거죠, 오 실장님? 오랫동안 그랬잖아요.”

이준이 턱 끝으로 나를 가리키자, 오 실장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이준은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그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연심이야 제가 간섭할 일이 아니지만…. 그래도 이건 좀 아닌 것 같은데요. 지금 여기는 오 실장님 직장입니다. 일하면서 무슨, 호위무사가 된 기분이라도 즐기고 계신 겁니까?”

“…아닙니다.”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사람을 바보로 보십니까? 전부터 심상치 않다고 생각했어요. 안 그런 척하면서, 그동안 저 애를 사사건건 싸고돌았잖습니까. 위험하고 불필요한 계획이라고, 저에게 그만두자고 한 게 몇 번이었죠?”

“…….”

“처음으로 저 녀석을 보고 왔을 때는 그러셨죠. 아무래도 발현하지 않을 것 같으니까 다른 오메가를 찾아보자고. 페로몬 냄새도 못 맡는 사람이 무슨 엉뚱한 소릴 하는 건가 싶었는데, 그냥 내가 저 앨 갖는다는 게 못마땅했던 거 아닌가요?”

“그런… 건….”

“아, 혹시 첫눈에 반하셨던 겁니까? 오 실장님, 보기보다 로맨틱한 분이었네요. 미처 몰랐습니다.”

“아닙니다, 정말 아닙니다. 죄송합니다.”

“아뇨, 그럴 만하죠. 예쁘잖아, 한윤오. 베타들도 눈은 있는데, 예쁜 건 예뻐 보이겠지. 뭘 그렇게 고개 숙이고 그래요? 죄도 아니잖아요. 사람이 마음 가면 누굴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

“봐요, 자. 저 녀석, 지금 아주 예쁜데요. 눈은 벌겋고 얼굴은 하얗게 질려서. 그렇죠?”

이준은 제가 소유한 물건을 남에게 내보이는 듯한 투였다. 나에게 값을 매기고 나를 흥정하듯이, 이준이 빈정거렸다.

“저 애, 갖고 싶어요?”

그 말에, 오 실장은 입술을 깊게 물었다. 고개를 떨군 그의 뺨이 붉어져 있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한참 만에 돌아온 대답에, 이준은 묘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오 실장의 옆을 스쳐 나에게 다가왔다. 겨우 숨을 고르고 정신을 수습한 나는 가까워진 그의 얼굴에 몸서리쳤다. 어디로 달아날 틈도 없이 다시 머리채를 붙잡혔다.

힘이 다 빠진 나는 동물의 사체처럼 질질 끌려 침대 위로 내던져졌다. 이준은 양손으로 내 셔츠 자락을 잡더니 단숨에 단추를 풀어 내렸다. 놀란 내가 팔다리를 버둥거리자 그는 가차 없이 따귀를 올려붙였다.

“윽…!”

떠밀린 얼굴이 왼쪽으로 깊게 돌아갔다. 힘겹게 눈을 깜빡여 초점을 맞춰 보니 시선이 닿은 곳에 오 실장이 서 있었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로 눈만 슬쩍 들어 나를 보고 있었다. 손등에 핏줄이 선명해지도록 주먹을 꾹, 쥐었다 펴는 것이 보였다. 이준에게도 그 손이 보였을 것이다. 이준은 눈썹 끝을 치켜들며 다시 물었다.

“오 실장님. 정말입니까?”

“…네.”

“이 앨 좋아하는 것도, 갖고 싶은 것도 아니라는 거죠? 그럼 내가 지금, 오 실장님 보는 앞에서 얘한테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겠네요. 그렇죠?”

“싫…!”

“한윤오. 입 다물어, 너는.”

이준은 기겁해서 고개 젓는 나의 두 뺨을 엄지와 중지로 거칠게 움켜쥐었다. 그의 손바닥 안에 갇힌 입술이 뭉그러지고 틀어막혔다. 나는 간절하게 눈을 굴려 오 실장을 바라보았다.

절박한 나머지, 늘 증오스럽던 오 실장이 기댈 언덕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러나 오 실장은 살기등등한 이준의 앞에서 섣불리 움직이지도 대답하지도 못하고 있었다.

“응? 대답해 봐요. 오 실장님. 내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 인형 같은 입술에 입을 맞추고 온몸을 게걸스럽게 핥아도, 약에 취한 얠 붙들고 밑이 다 찢어질 때까지 내 좆을 박아 넣어도 오 실장님은 아무렇지도 않을 거라는 말씀이잖아요.”

끔찍한 추궁 앞에, 오 실장의 고개는 더 깊게 수그러졌다. 그는 아주 가느다랗게 한숨을 뱉더니 겨우 입술을 떼었다.

“네. 편하신 대로….”

누가 듣기에도 고통스럽게 들리는 목소리에 차게 굳어 있던 이준의 얼굴은 다시 꿈틀거렸다.

“풉…. 큭, 푸하핫….”

양쪽 입꼬리를 쭉 찢어 올린 그는 가슴이 들썩거릴 정도로 커다랗게 웃어 댔다. 비열한 비웃음이었다.

“아, 하하…. 이거 재미있네요. 의외로 거짓말이 서툰가 봐요. 오 실장님.”

“거짓말 아닙….”

“아니, 예의 차릴 거 없어요. 어차피 이 자리에서 얠 어쩌겠다는 말은 그냥 해 본 소리니까. 내가 그렇게 의지가 약한 사람으로 보입니까? 얘기했었잖아요, 첫 번째 사이클이 오기 전까지는 이 애한테 손댈 생각 없다고. 난 무슨 일이 있어도 이 도도한 녀석이 스스로 다리를 벌리고 애원하는 꼴이 보고 싶단 말입니다. 아직도 그 생각은 그대로입니다.”

“…….”

“그리고 방금 말했었죠. 좋은 윗사람이 되려면 아랫사람이 바라는 걸 잘 알아야 하는 법이라고. 이래 보여도 저는 오 실장님께 좋은 윗사람이 되고 싶거든요. 부하 직원의 오랜 소망을 너그럽게 이뤄줄 수 있는, 그런 윗사람 말입니다.”

이준은 여유롭고도 오만한 태도로 미소 지었다.

“오 실장님의 마음을 확인하고 나니까 마침 좋은 생각이 떠올랐는데… 어떠세요?”

불길한 느낌에 머리칼이 쭈뼛 일어섰다. 궤변을 늘어놓는 이준의 얼굴은 먹이사슬의 꼭대기에 있는 짐승처럼 보였다. 제가 사로잡아 굴복시킨 먹이를, 재미 삼아 무리의 동료에게 던져주려고 하는 늑대의 얼굴.

“제가 지금 왜 이렇게 예민해졌는지 오 실장님도 잘 아시잖아요. 이 까다로운 녀석이 영 말썽을 부려서 말입니다. 여태 안 히트가 안 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는데…. 주사까지 놓고, 취미에도 없는 오메가 렌트보이까지 불렀는데 도무지 들어먹질 않네요.”

“…….”

“전 지금 한계입니다. 아무리 저라도, 이대로라면 얼마 못 가 참을성이 바닥나게 될 것 같다는 얘기예요. 그렇게 되는 걸 바라는 건 아니시죠?”

“…….”

“그래서 제가 한 가지 부탁을 하려고 합니다. 오 실장님께도 나쁜 얘기는 아닐 거예요. 아시죠? 아무리 베타라도 그 정도 상식은 있을 테니까. 발현을 촉진하는 제일 좋은 방법이… 성행위라는 거 말입니다.”

입술을 짓뭉개던 이준의 손이 스르르 풀어져 나의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다른 손은 옷자락 사이로 드러난 내 상체를 쓸어내렸다. 벌레 같은 손가락이 내 몸 위를 기어가는 느낌에 목이 졸렸을 때처럼 숨이 막혔다.

“하고 싶으면 하세요, 이 녀석이랑.

“도련님.”

“아니, 해 주시죠. 지금 바로, 여기서.”

“저, 저는….”

“토를 달아도 된다고 한 적은 없는데요. 이건 명령입니다.”

당황한 오 실장의 눈이 커다랗게 흔들렸지만, 이준은 단호했다. 그는 칼로 자른 듯 예리하게 명령하며 이준은 나를 내려보았다.

차디찬 시선이 지옥의 밑바닥까지 나를 가라앉히는 닻처럼 투욱, 나의 뺨 위로 떨어졌다. 나는 하얗게 질린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극도의 공포감 앞에 목소리가 얼어붙어 ‘싫다’라는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저런…. 윤오야. 왜 그런 표정이야? 오 실장이 싫어서? 뭐…. 저런 사람이랑 붙어먹으려니 거부감이 드는 거야 이해는 가지만.”

“…….”

”그런데 아무리 그래도 내가 뭘 시켰을 때 그런 표정을 지으면 안 되지. 넌 나의 오메가잖아. 내가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거야. 네가 언제 어디서 누구와 무엇을 할지를 결정하는 사람은, 이제부터 네가 아니라 나라고.”

“…….”

“하…. 말을 못 알아듣네. 조금 있으면 아주 울겠다, 너? 처음도 아니면서 뭘 그렇게 빼? 서이한이랑은….”

그는 새삼 분노가 차오른다는 듯 어금니를 악물었다. 숨을 고른 뒤 얼굴에는 미소가 돌아왔지만, 턱을 어루만지던 손에는 다시 아플 만큼 힘이 들어가 있었다.

“그래, 서이한 같은 그 쓰레기한테도 다리를 벌렸으면서, 오 실장이랑은 안 될 이유가 뭐야?”

“…….”

“왜? 서이한 그 새끼가 너한테 특별하기라도 한가? 그러면 안 되지. 너한테 특별한 건 나뿐이어야 해.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지?”

“…….”

“그러니까, 그만 뻣뻣하게 굴고 말 들어. 이 예쁜 얼굴에 더 흠집 나고 싶지 않으면. 봐주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대로라면 버릇을 고쳐 놔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드니까.”

아래턱을 꾹 누르는 그의 엄지손가락이, 나에게 노예의 낙인을 찍는 것 같았다. 그의 말에 나의 가슴은 바닥도 없는 까마득한 아래로 주저앉았다.

이죽거리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이한의 이름을, 나와 이한 사이의 일을 이야기한다는 게 괴로웠다. 그러나 더욱 공포스러운 것은 그가 지금 진심이라는 사실이었다.

이준은 오 실장의 충성심을 떠보기 위해 나를 미끼로 던진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그가 나를 망가뜨려 주길 바라고 있는 거다.

이준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이준이 벌려 놓은 학대극의 주인공이었고, 그는 나의 고통을 관찰하고 싶어 했다. 그는 나의 눈동자에 피어난 절망을 즐겁게 음미했다.

“쉬…. 그래. 걱정 마. 금방 끝날 거야….”

나의 턱에서 떼어진 그의 손가락이 내 뺨을 느리게 쓸고 지나갔다. 그리고 나를 곱게 가다듬어 정돈하듯, 땀에 젖어 앞이마에 들러붙은 머리칼을 꼼꼼하게 뒤로 넘겨 주었다. 그가 지나가는 자리마다 잔털이 일어나 피부에 소름을 새겼다.

그는 침대에서 일어나 손에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듯 탁탁, 털어 냈다. 오 실장에게로 다가간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콘돔을 꺼내 들었다.

“여기요, 실장님.”

“저, 도련님….”

“거절은 안 듣겠습니다. 명령이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

“혹시 콘돔을 쓰는 게 아쉬우신 건가요? 되도록 편의를 봐 드리고 싶지만, 이건 저도 양보하기 어렵습니다. 겨우 데려온 오메가인데, 제가 맛보기도 전에 엉뚱한 씨로 임신이라도 해 버리면 우리 셋 다 곤란해지지 않겠어요?”

“…….”

“아, 아니면 제가 여기 있어서 불편하십니까? 하긴. 그렇게 오래 마음에 품고 있던 사람이면 남들 보는 앞에서 그러기가 어려울 수도 있겠네요. 죄송합니다. 제가 눈치가 없었군요.”

그는 주저하는 오 실장의 손에 억지로 콘돔을 쥐여 주고는 성큼성큼 방문으로 향했다.

“두 분 시간 보낼 수 있게 자리를 피해드리죠. 문 앞에 있을 테니까 엉뚱한 생각은 마시고요.”

문을 닫기 직전, 그는 반쯤 열린 문틈으로 특유의 친절하고 상냥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준이 나가 버린 하얀 방에는 또다시 차게 얼어붙은 침묵만이 남았다. 아무 말 없는 두 사람 사이에 시계 초침 소리만 째깍째깍 흘러갔다.

나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오 실장을 곁눈질했다. 그는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못 박힌 채로 서 있었다. 고개는 더 깊게 떨구어져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초조함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나는 오 실장이 이대로 아무 짓도 하지 않은 채 적당한 시간 넘긴 뒤 밖으로 나가 이준에게 나와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것처럼 거짓으로 보고해 주길 바랐다.

그는 정말 그럴 작정인 것 같기도 했다. 한참 만에 고개를 든 그는 시간을 재려는지 벽에 걸린 시계부터 확인했다. 내 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벽을 보고 있는 그의 뒷모습에 안도감을 느낄 때였다.

“흠, 흠.”

그때. 문 너머에서 작게 헛기침 소리가 들렸다. 이준이었다. 그 소리에 신경이 퍼뜩 곤두섰다. 이준은 분명 일부러 기침 소리를 냈을 것이다.

자신이 여전히 문밖에 서 있음을 나와 오 실장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 그리고, 그의 소리가 나에게 들리는 것처럼 방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그가 듣고 있다고 경고하기 위해서.

머리가 복잡해졌다. 오 실장이 어떻게 이 순간을 넘길 작정인지, 이준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으면 그가 또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무력하게 몸을 떠는 사이. 입안으로 욕을 웅얼거리던 오 실장이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나를 향해서 한 걸음을 떼는 것을 보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어떻게든 그 자리를 모면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혀라도 깨물까? 그런다고 죽을 수는 없겠지만….’

어린 시절 옆집에 살던 누나가 그런 방법으로 자살을 시도했다가 실패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매일 밤마다 술에 취한 아버지에게 심하게 폭행을 당했고, 그날도 아버지에게 몇십 분쯤을 슬리퍼로 맞던 중 있는 힘껏 제 혀를 깨물어 버렸다고 했다.

다음 날 시퍼렇게 멍이 든 얼굴로 집 앞에서 마주친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피만 많이 흘렸을 뿐 생명에는 조금도 지장이 없었다고.

아버지는 잠시 놀랐지만, 지혈이 다 된 후에는 쓸데없는 짓을 했다는 이유로 슬리퍼가 아니라 혁대로 때리기 시작하더라며, 혹시 죽고 싶어지더라도 혀는 깨물지 말라고 나에게 알려 주었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다가오는 오 실장을 보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젓는 것뿐이었다. 오 실장은 연민에 젖은 표정이었지만,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다. 침대 바로 옆으로 온 그는 벌어진 내 셔츠 자락을 손에 쥐었다. 놀란 나는 팔을 휘적이며 소리를 질렀다.

“싫어요, 제발…!”

오 실장은 동요하지 않고, 검지를 들어 제 입술 앞으로 세웠다. 긴장감에 정신까지 뻣뻣하게 경직되어 버린 탓에, 그의 입 모양을 알아차리는 데 한참이 걸렸다.

‘진짜로 안 할 거니까. 하는 척만.’

그 문장을 읽은 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불안과 긴장감을 다 떨칠 수는 없었다. 머릿속에는 늘 잔인하리만치 나를 괴롭히던 오 실장의 모습과, 내 목을 조르던 이준을 보고 놀라 달려오던 그의 모습이 번갈아 겹쳐졌다.

그는 굳어 있는 나의 위로 몸을 기울였다. 그의 얼굴을 이렇게 가까이에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늘 험악하게 난장을 부리던 그가 난감한 듯한, 조금은 부끄러운 듯한 표정으로 나를 똑바로 보지 못하는 게 이상했다. 내리깐 눈동자의 깊은 곳에는 희미한 열기가 일렁거리고 있었다.

그는 주저하며 내 바지춤에 손을 대었다. 순간 소스라친 내가 몸을 파득거리자, 오 실장은 미안하다는 눈짓을 보냈다. 나는 떨림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눈을 돌려 닫힌 방문 쪽을 보았다.

‘할 수 없어. 안 벗고 있으면 이상하게 생각할 테니까.’

어차피 이준은 상황이 마무리되면 방으로 들어와 나를 감시할 거다. 눈속임이 어설펐다간 괜한 화만 부를 것이다. 나는 이를 악물고 내 손으로 직접 아랫도리를 벗어 내렸다. 이곳에 온 뒤로 더 말라붙어 앙상해진 다리가 드러났다.

볼 것도 없는 몸을 흘긋거리며, 오 실장은 얼굴을 조금 붉혔다. 늑대를 피하려고 하이에나에게 목줄을 내맡긴 기분이었다. 그러나 다른 방법은 없었다.

나는 차라리 눈을 감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같은 생각을 했는지, 오 실장의 손이 감은 나의 두 눈 위를 덮었다. 암전된 시야에는 다시금 소리와 감촉, 냄새뿐이었다.

옷자락이 스치는 소리와 콘돔 포장지를 뜯는 듯한 소리가 부스럭거리더니 곧 뜨끈한 체온이 느껴졌다. 맨살이 드러난 허벅지 위로 그의 피부가 닿았다. 아주 가까운 곳에서 꿀꺽, 침을 넘기는 소리와 숨죽여 신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흐으….”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깨달은 순간 어쩔 수 없이 소름이 오싹 돋았다. 그는 축축한 호흡을 뱉으며 제 손을 아래위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손등이 나에게 살짝살짝 닿았다 떨어지기를 반복했다. 그는 반쯤 헐벗은 내 몸 위에 올라타 수음을 하는 중이었다.

오 실장은 일부러 몸을 들썩여 끼익, 끼익. 침대가 흔들리는 소리가 나도록 했다. 이준을 속이기에는 좋은 방법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그 소리마저도 끔찍한 비명 소리처럼 느껴졌다.

가장 경멸하던 사람이 나의 위에 있다. 괴롭지만 몸부림쳐서 뿌리칠 수도 없다. 얄궂게도, 나와 살을 맞대고 제 성기를 문지르며 섹스하는 흉내를 내주고 있는 것이 그에게는 마음 쓴 배려였을 것이다. 아니, 이 상황을 이루고 있는 어느 무엇도 얄궂지 않았다. 그저 참담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이를 악물고 이 상황이 끝나기를 바라는 것뿐이었다. 극도의 긴장감과 비참함, 초조함이 뒤섞여 나는 어느샌가 울기 시작했다. 잇새로 가누지 못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흑, 흐윽…. 윽….”

꽤 길게 느껴지던 시간이 지나갔다.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오 실장은 수음이 끝날 무렵에야 억눌린 호흡을 뱉었다. 내 눈 위를 덮은 그의 손에 날카롭게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음…. 으, 후우….”

나는 그제야 그도 나처럼 이를 악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숨죽여 절정을 맞이한 그의 몸이 짧게 이완되었다. 그는 제 옷을 추슬러 입은 다음 나에게서 물러났다.

오 실장이 내 눈을 덮고 있던 손을 떼어 내자, 그의 손바닥 안에 흥건하게 갇혀 있던 눈물들이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우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눈물을 다 삼키는 것은 무리였다.

그는 뭐라 말을 할 듯 입술을 달싹이다 그냥 쓰디쓴 한숨만 쉬며 고개를 돌렸다. 사용한 콘돔을 일부러 잘 보이는 바닥에 내던진 다음 방문을 열었다. 끝났습니다, 하고 저를 부르는 소리에 이준은 방 안으로 들어왔다.

“흐음…. 어떠셨습니까?”

그는 검열관이라도 된 듯 차가운 눈으로 방 안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헐벗은 나의 몸과 눈물로 흥건한 뺨, 묶인 채로 바닥에 버려진 콘돔, 공기 중에 남아 있는 희미한 정액의 냄새와 기묘하고 뒤틀린 흥분의 잔열까지. 모든 것을 차례차례 확인한 이준은 나에게로 걸어왔다.

오만한 두 눈에는 무어라 이름 붙일 수 없는 빛이 흐르고 있었다. 나를 의심하는 기색은 없었지만, 유쾌해 보이는 표정은 아니었다.

굳이 표현하자면, 오히려 나를 원망하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패악을 부리는 대로 다 맞춰 주었는데 무엇이 불만일까. 그에게 다시 침을 뱉어 버리고 싶은 것은 나인데.

한참 나를 쏘아보던 그는 나의 턱을 들어 올려 입술을 겹쳐 왔다. 놀라 흠칫거리는 나를 꽉 붙들고 입안을 깊게 애무했다. 진저리가 쳐졌지만, 뿌리칠 기운조차 없었다. 나는 인형처럼 아무 반응도 하지 않고 그 순간을 견뎠다.

짧은 입맞춤이 끝나고, 이준은 오 실장에게로 몸을 돌렸다. 그는 격렬한 짜증을 숨기지 않은 채로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죄인의 태도로 고개를 못 드는 오 실장을 한참을 노려보더니, 끝내 그의 턱으로 주먹을 날렸다. 오 실장의 무릎이 휘청거릴 정도로 강하게.

“…방 좀 치워 두세요. 더러우니까.”

이준은 무덤덤한 말을 남기고 나가 버렸다. 방의 공기는 안도감인지 참담함인지 모를 것에 착잡하게 가라앉았다.

내가 몸을 떨며 바지를 입는 동안 오 실장은 이준의 지시대로 방을 정리했다. 콘돔을 줍고, 제 입술에서 터져나와 바닥에 흘러내린 피를 닦고는 말없이 방을 떠났다.

다시 혼자 남겨진 나는 지친 몸을 침대 위에 늘어뜨렸다. 풀어진 셔츠 단추를 느릿느릿 잠그다가, 습관처럼 죽음을 생각했다.

셔츠를 벗어서 찢어 버리면 목을 매달 올가미처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빌어먹도록 하얗고 정갈한 방에는 줄을 매달 만한 자리조차 없었다.

‘머리가 아파서 이제 울지도 못하겠어….’

코끝이 맵게 당기고 목구멍이 뻑뻑했지만, 나는 그냥 작게 몸을 웅크렸다. 작고 작게 몸을 말아 넣어 그대로 먼지가 되어서 사라져 버리면 좋겠다고 공상하다가, 탈진하듯 잠들어 버렸다.

나는 기억도 나지 않는 꿈에 가위눌렸다. 검고 찐득한 꿈은 절벽 아래의 바다처럼 출렁거리며 나를 따라왔다. 그것은 내 발치 아래에서 작고 깊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벗어나 보려고 몸을 버둥거려도 늪에 빠진 것처럼 조금도 나아갈 수 없었다. 찐득한 악몽은 기어이 내 몸을 타고 올라와 나의 온몸을 삼켰다. 내 눈과 코와 입안으로 끔찍한 것이 흘러들었다. 공기가 다 사라진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까무러칠 듯 끙끙거리던 나를 깨운 것은 오 실장이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니 놀란 얼굴로 나를 붙잡아 흔들고 있는 그가 보였다.

“으, 흐으….”

“왜 그래, 너?”

나는 좁고 퀴퀴한 판자촌에 살던 시절에도, 나는 곧장 가위에 눌리곤 했다. 현실은 고단했었지만, 악몽에서 깨어날 때마다 꿈이라서 다행이라고 안심하곤 했다.

그러나 요즘은 잠에서 깨어나 현실을 확인하는 매일 아침이 괴로웠다. 나쁜 꿈을 꾸었을수록 더더욱 그랬다. 아무리 끔찍한 꿈도 나를 정말로 집어삼켜 주지 않는다는 것이 절망스러웠다.

“뭐야. 무슨 꿈을 꿨길래 땀을 이렇게….”

식판과 갈아입을 새 옷을 손에 든 오 실장은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도 나보다 나을 것은 없어 보였다. 안 그래도 처참한 흉터들 사이에, 방금 얻어맞은 입술에 피맺힌 상처가 더해져 있었다.

모두 나 때문에, 어쩌면 나를 위해 생긴 상처들이다. 나를 감싼 타인의 고통 앞에 짧은 미안함을 느끼다가, 문득 그를 보며 비아냥거리던 이준의 말을 떠올렸다.

‘저 애를 마음에 두고 계신 거죠, 오 실장님? 오랫동안 그랬잖아요.’

그 말에 오 실장의 눈빛은 휘청거렸다. 아니라고 고개를 젓던 말에는 아무런 설득력도 없었다. 정말일까. 그렇게나 모질게 나를 몰아세웠던 그가 속으로는 그런 마음을 품고 있었을까.

사실, 그런 건 떠올리지 않는 편이 더 나았다. 때로는 모르는 게 좋은 일들도 있으니까. 그가 나에 대해 품고 있는 감정이 무엇인지는 내가 알 필요도 없고 알아서도 안 되는 문제였다. 그게 그를 위한 최소한의 예의였다.

그러나 그런 따지기에 나는 너무 깊숙한 궁지에 몰려 있었다. 나는 목에 올무를 건 채로 숨이 끊어질 날만을 기다리는 신세였다. 예의는 사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일 뿐, 사로잡힌 사냥감에게 예의를 바라는 것은 너무도 가혹한 일이었다.

본능적으로 교활한 수를 떠올랐다. 그가 나에게 마음을 품고 있다면, 그 마음에 기대어서라도 이 늪에서 달아나고 싶다는.

“…오 실장님.”

그를 부르는 나의 목소리는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그는 내 눈을 피했지만, 나는 개의치 않고 계속 말했다.

“오 실장님. 저요, 부탁이 있어요.”

“…이러지 마. 뭔지 몰라도 아무튼 안 되니까, 차라리 말을 하지 말라고.”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허둥거리던 그는 침대 위에 식판을 내려놓고 돌아서서 가 버리려 했다. 구차하고 염치없게도, 나는 그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놀라 돌아보는 그에게 다짜고짜 말을 퍼부었다.

“손목에 이것 좀 풀어 주세요. 이따 나가실 때도 좋고, 아니면 저녁에도 괜찮아요. 그리고 저 방문 좀 열어 놔 주세요.”

“왜, 왜 이래…? 이거 놔.”

“부탁이에요. 잠깐이면 돼요. 그때처럼 다시 문고리 잠금만 풀어 주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네…?”

오 실장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짐작대로, 전에 문이 잠겨 있지 않았던 것도 그가 했던 일이 맞았다. 나는 약해진 틈을 파고들듯이 두 손으로 그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손바닥에 닿은 그의 피부가 뜨겁고, 맥박은 거칠었다.

“제발, 부탁이에요. 한 번만… 딱 한 번만요.”

“야, 너는 진짜….”

“죄송해요. 그런데 저는, 저한테는 정말 이 방법밖에 없어요. 부탁드릴 사람이 오 실장님밖에 없어서 그래요.”

“…문을 열어 놓으면 뭐. 여기서 도망이라도 갈 수 있을 거 같아? 그 새끼 어차피 당분간은 이 집 안 비울 거야.”

“알아요….”

“알긴 뭘 알아. 발이 그렇게 넝마가 되어 가지고, 신발도 없이 저 산길을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냐고. 또 그렇게 개 끌려오듯 끌려오고 싶어? 이번엔 다른 쪽 다리까지 아작 나고 싶냔 말야!”

“…….”

“아니, 다시 도망치다 걸리면 끌려오고 자시고 할 것도 없이 너도나도 그냥 죽은 목숨이야. 그러니까 엉뚱한 소리 하지 말고 빨리 밥이나….”

“저, 도망가려고 하는 거 아니에요.”

“…….”

“멀리까지 갈 생각 없어요. 시간도 많이 필요 없어요. 그냥 정원까지만 나가면 돼요. 이번에는 실수하지 않을게요. 집 밖으로만 나가면, 이 앞에 바로 보이는 절벽에서 뛰어내리려고 그래요.”

질렸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던 오 실장의 얼굴이 파랗게 가라앉았다. 나는 그의 표정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홀린 듯이 말을 늘어놓았다.

“저 하나 죽으면 끝나는 일이잖아요. 저도 그게 더 편할 것 같아요. 이제 더는 안 될 것 같은데, 더 버틸 수가 없는데…. 아무리 고민해도 이 안에서는 저 혼자 죽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아서 그래요. 도저히, 제 손으로는….”

“…….”

“죄송해요. 정말 죄송해요. 한 번만 부탁드려요. 네? 오 실장님….”

몸에는 아무 힘도 없었지만, 나는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다. 며칠을 계속 생각해 왔던 일이었으니까. 그가 이 제안을 거절하면, 나는 그에게 그냥 이 자리에서 나를 죽여 달라고 부탁할 생각이었다. 이번에는 저항하지 않을 테니까 이준이 했던 것처럼 내 숨통을 조여 달라고.

오 실장은 읽을 수 없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조금 전 수음하고 난 후 울고 있는 나를 바라볼 때도, 그는 지금과 비슷한 표정이었다. 처음에는 그가 화를 내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나를 안쓰러워하거나, 저 자신을 안쓰러워하고 있다고.

그는 내 부탁을 받아 주지도 비웃지도 않은 채로 가만히 나를 바라보았다. 출렁거리는 눈동자와 메마른 입술. 한참 만에 돌아온 대답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안 돼. 그렇게는 못 하겠어.”

겨우 한마디를 뱉은 뒤 입을 다문 그는 상처 입은 늑대처럼 보였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나는 알았다. 그가 슬퍼하고 있다는 것을. 내가 그에게 얼마나 잔인한 말을 한 것인지를.

미안하다는 말로 방금 던진 이야기를 무르려다 그냥 잠자코 있었다.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도 없고. 값싼 동정이 그에게는 더 상처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었다. 오 실장도 잠시 말이 없었다. 침통한 침묵이 뾰족하고 무거웠다.

“후우…. 씨발.”

그는 마른세수를 한 다음 짧게 혀를 찼다. 바로 방을 나가 버릴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안주머니를 뒤적였다.

“…이거라도 피울래?”

그가 나에게 건넨 것은 담배 한 개비였다. 상황에 맞지 않게 실없는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처량할 정도로 하얗고 가느다란 담배가 꼭 사형수에게 주는 마지막 선물 같아서.

딱히 피워 보고 싶은 마음도 없고, 예의를 차리기에도 한참 늦은 타이밍이었지만 못 피울 것도 없겠다 싶었다.

고개를 끄덕이자, 오 실장을 나에게 담배를 물리고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었다. 그가 제 몫의 담배를 채 꺼내 물기도 전에, 나는 콜록콜록 기침을 토했다.

피울 줄도 모르는 담배 연기를 성급하게 빨아들인 탓이었다. 켁켁거리는 내 모습이 너무도 상투적이라서, 그 상황에서도 그게 조금 부끄러웠다.

“쿨럭, 큭, 후, 후우우….”

오 실장은 아무 말 없이 밋밋한 손길로 내 등을 두드렸다. 연기가 섞여 지독한 기침이었다. 구역질이 자꾸 치밀어 올라서, 진정하는 데 꽤 긴 시간이 걸렸다. 말없이 담배만 뻑뻑 피워 대던 오 실장은 넋두리처럼 웅얼거렸다.

“그러게 내가, 대학 같은 거 다니지 말라고 했잖아.”

“…….”

“아니, 아니다. 후…. 말을 말아야지. 이제 와서 뭐….”

그는 분명 몇 번이나 나에게 대학에 가지 말라고 말했었다. 하민이 나를 가혹하게 따돌리며 학교를 그만두게 만들려 했던 것처럼. 모질게만 들리던 그 말들이 어떤 의미였는지, 그때의 나는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허탈해하거나 후회할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대답 없이 다시 담배를 입에 물었다. 한번 호되게 데여 놓고도 정신을 못 차린 나는 매캐한 담배 연기를 다시 들이마셨다.

쓰고 역했지만 이번에는 토해 내지 않고 견딜 만했다. 목구멍부터 폐 깊은 곳까지가 따끔거리는 느낌이 들더니 이내 머리가 쨍하고 울렸다.

몸은 물 먹인 솜처럼 무거운데, 정신만 바짝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머리가 맑아진다고 해서 딱히 할 일도 생각할 거리도 없지만, 나는 꾸역꾸역 다시 연기를 삼키고 뱉었다.

“빨리 밥이나 먹어. 이렇게 안 먹다 너 정말 죽어 버릴 수도….”

오 실장은 끝까지 다 타들어 간 꽁초를 비벼 끄고는 담배 한 대를 더 꺼내 물었다. 습관처럼 핀잔을 주다가, 조금 전 내가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게 해 달라고 했던 것을 떠올렸는지 말을 멈추었다.

죽겠다는 애에게 밥을 권해 봐야 뭐 좋은 일이 있을까 싶었겠지만, 그는 굳이 식판을 들어서 내 무릎 위에 내려놓았다.

“아무튼, 조금이라도 먹어. 내일은 뭘 제대로 못 먹게 될지도 모르니까.”

그 말이 무엇이든, 좋은 의미는 아닐 것 같아 그를 올려보았다. 그는 뿌연 담배 연기 사이로 또 내 눈을 피하며 머뭇거렸다.

“…서이준이, 나랑 아주머니는 내일 오후부터 이 집에서 나가 있으라고 했어. 저녁에 손님이 오실 거라고.”

“…….”

“정확히 어떤 손님이 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정신이 똑바로 박힌 새끼들은 아닐 거야. 서이준이 별장에 누굴 부른다는 건, 그런 놈들이 이런 데 와서 하는 짓은 보통….”

“…….”

“하… 씨발…. 내가 할 소린 아니긴 한데, 넌 왜 하필 그딴 새끼한테 걸려서…. 응? 왜 하필 네가….”

그는 아픔도 느끼지 못하는 것처럼 다 뜯어지고 찢어진 입술을 깊게 깨물고는 넋두리를 들어놓았다.

“그 새끼는 진짜, 악마 같은 놈이야. 그러니까 아까같이 그렇게 뻗대지 말고 요령 있게 좀 굴란 말이야. 하여튼 지독해 가지고…. 목숨이 여러 개 있는 것도 아니면서 왜 그러는 거야, 대체?”

“…….”

“그나마 그 새끼가 예쁘게 봐주고 있는 걸 고맙게 생각해. 다른 애들 같았으면 진작에 사달이 났을 거야. 불구가 되는 약을 먹이든, 아니면 아예 정말로 죽여 버리든….”

“…….”

“아직도 모르겠어? 그 새끼가 겁주는 거, 말로만 나불거리는 게 아니라고. 내 눈으로 직접 본 것만도 여러 번이고, 들은 얘기는 더 많아. 그래…. 전에도 너 같은 오메가가 있었다고 들었어. 서 회장… 그 새끼 아버지가 데려왔던 사람인데, 죽을 때까지 심하게 굴려지면서 말도 못 할 일을 당했었다고. 그러다 결국….”

그가 말하는 오메가는 아마도 이한의 아버지일 것이다. 이한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던 이준의 잔인한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오히려 오 실장의 걱정이 원망스러워졌다.

이준의 냉혹함을 다 알면서, 나도 곧 말도 못 할 일을 당했다는 그 오메가처럼 되어 버릴 수 있다는 걸 뻔히 알면서, 왜 죽겠다는 나를 말리는 걸까. 차라리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는 내 마음을 모르는 걸까.

따져 묻고 싶었지만, 애먼 사람에게 화를 낼 수는 없었다. 내가 이렇게 된 것이 오 실장 때문인 것도 아니니까. 나는 그냥 서툴게 맛도 모르는 담배만 피웠다. 그런 나를 착잡하게 바라보던 오 실장은 머뭇머뭇 어렵게 말을 꺼냈다.

“다른 건 몰라도 임신은… 하지 마. 그 새끼 애는 절대로 낳으면 안 돼.”

“…….”

“다들 그랬어. 전에 서 회장의 밑에 있었다는 그 오메가도, 아이만 낳지 않았으면 중간에 빠져나갈 수 있었을 거라고. 그 새끼가 무슨 말로 꼬드겨도 임신하면 안 돼. 애까지 낳고 나면 그땐 정말 돌이킬 수 없으니까. 약 같은 건 내가 어떻게든 마련해 볼게. 그러니까….”

위로라기에는 너무도 참혹한 말이었다. 오 실장은 반쯤 넋이 나간 채로 두서없이 중얼거렸다. 담배를 든 손가락이 가늘게 떨리는 게, 어쩐지 나약해 보이기까지 했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 같던 그가.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에게는 피도 눈물도 없는 냉혈한일 그가 저런 모습을 보이는 게 이상했다. 그가 어울리지 않게 내보인 마음의 밑바닥 때문에 내가 떨어진 구렁텅이의 끔찍함이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담배를 다 피운 뒤 오 실장은 다시 한번 밥을 먹으라고 했지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윽박지를 듯 이를 악물었다가 그저 한숨을 쉬었다.

“하…. 그래. 어쩌겠어. 마음대로 해.”

그는 긴 한숨만 남기고 방을 떠났다. 혼자 남겨진 나는 물속으로 잠기듯이 다시 무기력하게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오 실장이 말했던 것처럼, 왜 하필 이준이 나를 선택했는지,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를 잠시 생각했다. 어차피 무의미한 생각이다. 그런 의문에 답이 있을 리 없었으니까. 하민이 말했던 것처럼, 불행은 자연재해처럼 아무 이유도 없이 그저 일어나는 법이다.

오랜 불행으로 그 사실을 자연스럽게 습득하고 있었던 걸까. 나에게 언제나 불행은 ‘왜’가 아닌 ‘어떻게’의 문제였다. 그것을 견디는 요령은 갈수록 능숙해졌다.

불행이 찾아올 때면 나는 그냥 인생의 밑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숨을 삼키고 그 순간을 참곤 했다. 불행의 폭풍이 끝나면 다시 일어나 폐허를 걸어갈 수 있도록 견뎌 내곤 했다.

‘이제는 어쩌지….’

습관처럼 생각했지만, 이제는 아무 의미도 없는 문장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거대하고 강렬한 불행 앞에 놓여 있지만, 지금 나에게는 엎드릴 밑바닥조차 없었다. 남은 것은 걸음도 디뎌지지 않는 무저갱이었다. 여기야말로 나의 지옥인 모양이다.

아득한 기분 속에서, 나는 내 손과 입술과 옷자락에 남은 담배 냄새를 맡았다. 자연스레 이한의 모습이 떠올랐다. 나에게 이한의 냄새는 그 진득한 나무 향만큼이나, 옅게 배인 담배 향기라서.

소리도 잠든 새벽, PC방부터 판잣집까지의 구불구불한 길을 배웅해 줄 때도 그랬다. 그는 내가 집 안에 들어간 뒤에도 달을 보며 담배를 피운다는 말로 한참 야트막한 담장 너머를 지켰다. 우연히 맞닥뜨릴 때면 그의 발밑에는 구깃한 담배꽁초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물끄러미 하늘을 바라보던 반듯하고 강인한 옆얼굴을 생각했다. 트랙 슈트의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손을 찔러 넣은 삐딱한 자세도, 무덤덤해 보이지만 조금은 어린아이 같던 표정도, 까만 밤하늘을 따라 하얗게 흩어지던 담배 연기도.

‘달 보면서 담배 피우는 거, 좋아하거든.’

그 말은 정말이었을까. 어쩌면 그는 그냥, 달을 핑계 삼아 내 곁을 지켜 주려 했던 건 아니었을까. 그가 나를 소중하게 대해 주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바보 같은 내 곁을.

그는 지금도 달을 보며 담배를 피우고 있을까. 혹시 달을 보며 한 번쯤 나를 생각해 주지는 않을까. 만약 그가 내 생각을 해 준다 해도, 그는 내가 지금 여기 달도 하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를 생각하고 있다는 것은 영영 모를 것이다. 다행인 일이지만, 속도 없이 서글퍼졌다.

‘이한아.’

마음속으로 그를 부르자 수면에 퍼져 나가는 메아리처럼 마음이 일렁거렸다. 그러고 나면 꼭 그림자처럼 뒤따라오는 말이 있었다.

‘이한아, 보고 싶어.’

끝까지 미련한 미련이었다. 이제는 그 미련마저 포기해야 한다고 머리로는 생각하면서도, 나는 끝내 그러지 못했다. 그리워하는 것을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한 것만으로, 살점이 떨어져 나가는 것처럼 깊은 곳이 아려 왔다.

죽고 싶다고 생각할 때도, 그 소망이 간절하기만 할 뿐 마음이 괴로운 건 아니었는데. 지금은 길지도 않은 기억이 내게 남긴 모든 것들이 손톱을 세워 마음 안쪽을 서럽게 할퀴어 댔다.

마지막으로 본 그의 모습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에게 투정만 부리고, 따스하게 대해 주지 못했던 내 잘못들도. 아직 그에게 하지 못한 많은 말들, 아마도 영영 언어로 빚어지지 못할 이야기들도 사무쳤다.

‘보고 싶어. 미안해. 너무 많이, 보고 싶어.’

나는 결국 그리움을 가누지 못하고 아무에게도 들리지 않을 혼잣말을 마음으로 새겼다. 금방이라도 가루가루 부서져 내릴 듯한 가슴을 눌러 안고, 그의 품에 안기듯이 담배 향기 속에 잠긴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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