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2 : 미로
윤오가 사라져 버렸다는 말을 듣는 순간, 말 그대로 눈앞이 캄캄해졌다. 누군가 내 뒤통수를 세게 내리친 것처럼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나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멍청이였다. 삽질을 해 대느라 제일 중요한 시간에 아무 일도 못 했다. 다시는 그 애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찾아가고 싶고 연락하고 싶은 마음을 참았던 게 오히려 잘못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앞뒤 생각하지 않고 다시 그 애에게 매달리는 거였는데. 그 애가 나에게 질려 버린다고 해도, 그 애가 영영 사라져 버리거나 위험에 빠지는 것보다는 훨씬 나은데.
조금 전까지 나는 실연의 아픔에 징징거렸지만, 지금 느끼는 불안과 공포에 비하면 그건 그냥 견딜 만한 시련에 불과했다. 자꾸 최악의 생각만 떠올라 피를 얼어붙게 했다.
‘찾아야 해.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든….’
머릿속은 오직 그 생각으로 가득 찼지만, 어디로 가서 그 애를 찾아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단지 그 애의 잠적이 서이준과 관계되어 있을 거라는 직감만이 선명했다.
‘씨발, 걔는 하필이면 그런 새끼 눈에 띄어서….’
서둘러 집을 나서 병원에 있는 재훈에게로 갔다. 정문으로 들어선 순간 걸음을 재촉하며 후드를 더 깊게 눌러 썼다. 혹시라도 와 있을지 모르는 본가의 사람들과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병원의 분위기는 유난히 부산스러웠다. 종합 병원이라는 게 화기애애할 만한 곳은 아니긴 하지만, 사무직원들까지 굳은 얼굴로 로비를 오가는 게 심상치 않았다. 로비에 나와 있던 재훈이 나를 제 사무실로 이끌었다.
“…무슨 일 있어요? 원래 이런 분위기예요, 이 병원은?”
“원래 이렇진 않죠. 실은… 윤오 학생 어머니 문제로 일이 있어요.”
“윤오 어머니 일이요…? 돌아가신 것 때문에?”
“사망 경위에 의아한 부분이 있나 봅니다. 간호사들 사이에서 의료사고 같다는 얘기가 돌고 있어서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한 달쯤 전부터 처방도 평소랑 달랐고, 마지막 며칠 동안에는 오더도 비정상적이었다고 하던데요. 들리는 얘기가 사실이면 문제가 있는 거 같던데, 저도 차트를 본 게 아니라 모르겠어요. 심지어 일부러 잘못 처방한 게 아니냐는 이상한 말까지 나와서….”
나도 얼마 전 그 애를 집까지 업어갔던 날 그 애의 어머니와 마주친 적 있다. 오래 병치레를 한 티가 나기는 했지만, 2주도 채 되지 않아 사망할 것 같은 상태로 보이지는 않았었다.
“정말 누가 일부러 그런 거 아니에요? 윤오가 사라진 거랑 다 관련 있는 일이면….”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서이준이라면 그럴 수도 있잖아요. 그 새끼 성격 알면서 그런 소리가 나와요?”
“혹시 그런 마음을 먹었더라도, 처방이랑 오더를 건드리는 게 간단한 일은 아니라서요. 담당의가 동의해야 하는 거라.”
“여기가 서 회장 병원인데, 그게 안 되겠어요?”
“담당의가 그럴 만한 분이 아니에요. 신 교수님은….”
“일족 사람들은 결국 다 똑같다고 말했던 건 형이잖아요. 서 회장이 이사회 사람들 구워삶았을 때를 생각해 봐요.”
곰곰이 생각에 잠겼던 재훈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런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겠네요. 곧 의국 회의가 있으니까, 그때 동태를 한번 살펴보겠습니다.”
“윤오는요. 사라진 지 얼마나 됐는데요? 어디 있는지 전혀 모르는 거예요?”
“아마 일주일째일 겁니다. 하루 이틀은 그냥 집에서 쉬는 걸까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요. 병원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건 2층의 VIP 대기실로 들어가는 장면이고요.”
“VIP 대기실이라면….”
“사실상 병원장 일가의 응접실로 쓰이는 곳입니다. 아마 이준 군을 만나러 들어갔겠죠.”
그 얘길 듣는 것만으로 분노가 들끓었다.
“역시 서이준 그 새끼가 윤오를 빼돌린 게 틀림없어요. 서이준은 지금 대체 있는 건데요? 그것도 아직 몰라요?”
“별장에 있다는 건 확실합니다. 이준 군이 귀국한 후에 본가의 고용인 중 한 명이 별장으로 파견되었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서 회장 별장만 해도 세 개잖아요.”
“세 개 중 어딘지까지는…. 알아보려고 애를 썼는데, 고용인들 입단속을 단단히 시켜 놓은 것 같아요. 애초에 별장으로 파견되었다는 얘기도 실수로 나온 말이라서요. 지금으로서는 하나하나 찾아볼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씨발, 어느 세월에.”
“그나마 국내에 있다는 게 다행이긴 하죠. 외국으로 떠나 버리면 정말로 손 쓸 수 없으니까.”
“…그 별장들, 어디 있는 건지는 정확히 알아요? 두 군데는 가 보긴 했는데 너무 어릴 때 갔던 거라.”
“지금 주소를 보내드리겠습니다.”
이준이 보내 준 별장의 위치를 확인한 나는 곧바로 인상을 썼다. 세 개의 별장은 서울에서 멀찍이 흩어져 있었고, 하나는 심지어 제주도에 있었다.
“뭐 이렇게 좆같이 떨어져 있고 난리지…. 형 같으면 누굴 숨겨 놓을 때 어디로 가 있을 것 같아요? 역시 제주도인가….”
“배나 비행기를 타면 아무래도 흔적이 남으니까요. 강원도 별장이 제일 인적 드문 곳에 있긴 한데요.”
강원도 별장이라면 나도 그나마 아는 곳이었다. 어린 시절 몇 해 정도 여름을 거기서 보냈다. 나는 여행에 따라가고 싶지 않다고 우겼지만, 서 회장은 본가에 나만 남겨두면 무슨 천박한 사고를 칠지 모른다며 억지로 나를 끌고 갔다.
고립된 공간에서 더운 여름 내내 시달림을 당하다 폭발해 버린 나는 ‘사고라면 여기서도 칠 수 있다는 걸 보여 줘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서 회장의 골프채로 부엌에 있던 화재경보기를 깨 버렸다. 스프링클러가 터지는 바람에 그 잘난 별장은 물바다가 되었다.
물에 잠긴 별장을 수리하느라 그해 여름 여행은 예정보다 빨리 마무리되었고, 나는 그 후의 여름 여행에서 면제될 수 있었다. 물론 화재경보기를 깨트린 바로 그 골프채로 뼈가 부러지도록 얻어맞기는 했지만.
씁쓸한 기억을 되짚는 동안, 재훈은 책상에서 쇼핑백 하나를 가져왔다.
“이거, 이한 군 거예요.”
“제 거요? 이게 무슨… 아, 아….”
쇼핑백 안에는 곱게 접힌 옷가지가 들어 있었다. 잘 입던 옷이 아니라 기억이 한 박자 늦게 올라왔다. 그 애가 노천강당에 갇혔던 날 빌려주었던 옷이다.
“윤오 군이 접수처에 제 이름을 대고 맡겼다고 하더라고요. 사라져 버리기 직전에요.”
재훈의 이야기에 나는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무슨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손끝으로 쇼핑백 모서리만 구겨 댔다. 고작해야 옷 한 벌인데, 그 애의 마지막 흔적이라는 생각에 그게 너무 무겁고 크게 느껴졌다.
왜 굳이 이런 걸 놓고 갔는지, 작별인사라도 하고 싶었던 건지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당장이라도 이 옷을 꺼내 희미하게 남았을지도 모르는 그 애의 향기를 맡고 싶어졌다.
‘고작 이런 게 작별인사라니….’
다시 나를 보지 않겠다고 말하던 그 애의 얼굴이 생각났다. 지난 며칠간 체념하려 애썼던 것처럼, 정말 그 애를 포기해야 하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니. 인사가 아니라 구조신호일지도 모르잖아. 빨리 자길 찾아내 달라는 뜻으로 맡기고 간 걸지도….’
그 생각에는 아무런 근거도 없었다. 나는 이런 순간까지 내가 편해지기 위해 멋대로 착각 중인 것 같기도 했다. 재훈은 초조한 숨을 애써 삼키는 나에게 말했다.
“바로 별장으로 가 봐야겠어요. 셋 중 어디든.”
“대중교통으로 갈 만한 데가 아닌데…. 이한 군 의견이 그러면 같이 가죠. 의국 회의 끝나고 바로 출발하면 한 군데는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럼 그동안 여기저기 찾아다녀 볼게요. 학교라든가, 알바하던 곳 같은데. 뭐라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러시죠. 저도 의국 회의에서 조금이라도 관련될 만한 얘기가 있는지 신경 써서 듣겠습니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학교로 갔다. 그 애의 흔적이라도 찾아보려고 미친 듯이 학교를 헤집고 다녔지만 아무 소득도 없었다. 남의 눈에 띄지 않게 악착같이 숨어지내던 녀석이니, 학교에 그 애의 행방에 관한 단서가 있을 리 없었다.
아이들 사이에서는 뜻밖의 소문이 무성했다. 그 애가 자퇴했다는 말이었다. 모두는 ‘그렇게 시달렸으니 학교에 그만둔 것도 당연하다’하고 비웃으면서도, 내심 물어뜯기 좋은 상대가 사라진 것을 아쉬워하는 눈치였다.
자퇴라니.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집에만 처박혀 있으라고 아무리 뜯어말려도 학교에는 가야 한다고 고집을 부렸던 녀석인데.
놀라서 무작정 행정실로 찾아가 소문이 사실인지를 캐물었다. 개인정보라 알려 줄 수 없다는 직원의 말에 나는 확인해 줄 때까지 나가지 않겠다고 생떼를 부렸다. 직원은 마지못해 자퇴한 게 맞다고 대답해 주었다.
“진짜요? 언제요?”
“며칠 전에 자퇴서 접수하고 갔어요.”
“…왜요? 왜 자퇴한 건데요?”
“그건 저도 모르죠. 알아도 말씀 못 드리고. 원래 재학 여부도 말해드리면 안 되는데, 하도 물어보시니까….”
너무도 허탈한 나머지 머쓱함을 느낄 겨를도 없었다. 그 길로 학교를 나가 그 애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곳까지 모두 돌아보았지만, 소득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혹시 이상한 낌새라도 없었는지를 물었지만 ‘자꾸 대타를 보내더니 갑자기 그만뒀다’라는 불평만 돌아왔다. 야간 아르바이트를 하던 PC방의 사장님은 오히려 그 애의 소식을 되물었다.
“윤오 학생이 요새 표정이 안 좋더라고. 무슨 일 있는 거 같아서 영 신경 쓰이네. 학생은 친구니까 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친구. 그 애가 말했을 때는 조금 서운하게 느껴졌던 그 단어가, 이제 와서는 안타까웠다. 차라리 우리가 친구였다면 이렇게까지 막막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짧은 시간이나마 가까이 붙어 지냈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그 애에 대해 아는 게 거의 없었다. 출신 학교만 겨우 알고, 가까이 지내는 동창생이 있는지는 몰랐다. 어딘가 훌쩍 떠나 있을 만한 곳이 있는지도, 누구에게 뭘 물어보아야 그 애에 관해 알아낼 수 있는지도 몰랐다.
내가 아는 그 애는, 그저 눈앞에 보이던 그대로의 모습뿐이다. 늘 조금은 예민하고 그늘진 표정.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가녀린 몸을 바지런히 움직이고, 뭘 맛있게 먹을 줄도, 마음 놓고 웃을 줄도 모르는 것 같은 그 모습 말이다.
뭘 좋아하는지, 어딜 가고 싶은지, 뭐가 힘들고 뭐가 기쁜지, 그런 것들은 전혀 알지도 못하고, 알려고 한 적도 없었던 것 같다. 내 고집만 세우고 가까이 품고 싶다는 마음만 앞섰다. 후회가 치밀어 이를 악물었다.
‘눈앞에 나타나기만 해 봐. 머리부터 발끝까지, 머릿속에 든 생각까지 전부 다 외워서 다시 사라져 버려도 금방 찾을 수 있게 할 거니까. 아니, 아주 내 옆에서 한 발짝도 못 벗어나게 할 거니까.’
그러나, 혼자 으르렁거려 봐야 아무 의미도 없는 독백이었다. 이미 손에서 놓쳐 버린 그 애가 안타까워 다 지나간 일을 곱씹고 있을 뿐이었다. PC방 건물을 나서며, 나는 신경질적으로 핸드폰을 확인했다.
‘재훈이 형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의국 회의인지 뭔지가 길어지고 있는지 예상했던 시간을 훨씬 넘기도록 연락이 없었다. 가슴이 너무 답답해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기가 힘들었다. 어차피 또 헛걸음을 치게 될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애가 살던 동네로 갔다.
익숙하고 가파른 계단을 디디자, 늦은 밤 억지로 그 애를 바래다주던 시간들이 생각났다. 그 애에게는 고역이었을지 모르는 그 시간도 나에게는 추억이었나 보다. 자박자박, 조심스러운 그 애의 발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 기분이 울컥거렸다.
구불구불 골목을 지나 그 애의 집 근처 모퉁이를 돌자, 낯선 남자들의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그들은 그 애의 집에서 짐을 꺼내는 중이었다. 옷 몇 벌, 그릇 몇 장 따위의 단출한 세간살이들이 실려 나오고 있었다.
혹시라도 주변에 그 애가 와 있는 걸까 싶어 열심히 두리번거렸지만, 그 애는 보이지 않았다. 더구나 평범하게 이사를 하는 상황 같지도 않았다. 험악하게 생긴 남자들이 구둣발로 집 안을 드나들었다. 제대로 정리되지도 내다 버리듯 트럭 위로 집어 던졌다.
‘저 사람들, 혹시 아무도 없는 사이에 멋대로 방을 빼고 있는 걸까? 씨발, 누구 마음대로….’
발끈하는 기분에 주먹을 꽉 쥐었다. 나서서 한마디 해 주려던 차에, 뒤에서 누군가 톡톡, 내 등을 두드렸다. 돌아보니 허술한 옷차림에 잠이 덜 깬 얼굴을 한 여자가 서 있었다.
“아, 맞네. 그때 그 키 큰 오빠다.”
“…네?”
“며칠 전에 윤오 업고 여기 지나갔던 거, 오빠 맞죠?”
나보다 나이가 어린 것 같지도 않은데 왜 처음 보는 사람을 대뜸 오빠라고 부르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녀가 그 애의 얘기를 한 것에 귀가 솔깃해 그런 걸 지적할 겨를이 없었다.
“맞아요. 혹시 지금….”
“윤오 어디 갔는지 알아요?”
내가 막 물으려던 질문이 나에게 돌아와 당황하는 사이 그녀는 더 황당한 소리를 했다.
“윤오, 진짜로 집세 떼어먹고 도망간 거예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걔, 요 며칠 완전 잠수 탔거든요. 듣기로는 엊그젠가, 어머니도 돌아가셨다는데 병원에도 안 나타났대요. 아니, 제 엄마라면 아주 끔찍하던 앤데 무슨 사고라도 난 게 아니고서야 그럴 리 없지 않아요? 아님 빚이 감당 안 되니까 독한 마음먹고 도망친 거던지요.”
“…도망간 건 아닐 것 같은데요.”
“그쵸? 저도 그럴 것 같긴 한데, 다들 이렇다저렇다 말만 많고 제대로 소식을 아는 사람이 없어요. 집에서 나가는 걸 본 사람은 있다는데, 그 뒤로 어떻게 됐는지는 아무도 모른다니까요. 오빠는 알 줄 알았는데….”
“…저도 몰라요. 집을 나가는 걸 누가 봤대요? 언제요? 어디로 갔어요?”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죠. 그냥 사라져 버렸대요. 이번 달 집세를 밀린 건 알아요. 일주일 전인가, 오 실장… 여기 관리하는 아저씨가 신발도 못 신은 애 머리채를 끌고 나와서 아주 동네 떠나가라 난리를 피웠거든요. 윤오가 그날로 가방 챙겨서 나갔다고 하던데.”
“뭐라고요? 머리채…? 오 실장? 그게 누군데요? 누구길래 함부로 사람 머리채를 끌고….”
애먼 사람을 붙들고 성질을 부리던 나는 순간 멈칫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오 실장’이 있다는 게 떠올랐다. 서 회장이 남몰래 더러운 일을 처리할 때 쓰던 반건달이 그런 직함으로 불리웠던 것 같다. 내가 본가를 나오기 직전에는 분명, 이준의 방에도 드나들었던 사람이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짐을 나르는 사람들을 자세히 뜯어 보았다. 가만 보니 저들도 낯이 익었다. 서 회장이 오 실장을 통해서 종종 쓰던 용역 깡패들이었다.
‘여기도 서경제약에서 관리하는 구역이었던 건가?’
뜻밖의 소식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일단 서 회장의 부하들에게 눈에 띄는 게 좋을 리 없겠다는 생각에 담장 아래로 몸을 낮추었다. 그녀는 해맑은 얼굴로 나를 따라 숨는 시늉을 하며 계속 말을 붙였다.
“오빠, 돈 많은가보다, 그쵸? 옷도 좋은 거 입었네. 이따 시간 있으면 저 밑에 가게 놀러 와요. 내가 잘해 줄게.”
뜬금없이 한다는 게 되지도 않을 호객행위였다. 무시하고 지나가려다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어서 다시 물었다.
“저기, 그 가게…라는 데 말이에요. 주인이 누군지 알아요?”
“주인? 아마 오 실장일걸요? 그건 왜요?”
“아닐 것 같은데….”
“아닌가? 요 며칠 오 실장님도 안 보이긴 했거든요. 그래도 지난달까지 월급은 꼬박꼬박 오 실장이 주셨어요. 우리 같은 사람들이야 월급 주는 사람이 사장이지, 뭐.”
“그 사람 말고, 더 높아 보이는 사람은 혹시 없어요?”
“글쎄요…. 아, 작년인가 젊은 오빠가 한 번 왔었는데. 뭐 하는 사람인지는 몰라도 오 실장이 엄청 굽신거렸거든요.”
“젊은 사람이요?”
“혹시 그 사람이 사장인가? 한 스무 살이나 됐을까 싶었는데. 세상에 젊고 잘생기고 돈 많은 사람이 많은가 보네요. 어…?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오빠랑 좀 닮은 것 같아요.”
인상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그녀가 본 젊은 남자는 아마 이준일 거다. 이름도 듣기 싫은 녀석이지만 피가 섞이다 보니 그와 닮았다는 얘기를 종종 들었다. 닮았다는 소릴 듣는 게 싫어서 늘 생글거리는 그 새끼와 달리 얼굴을 찌푸리고 있느라 인상이 사나워졌을 정도다.
오 실장이 서 회장뿐만 아니라 이준의 지시도 받고 있다는 것이나, 이쪽이 서경제약의 영역이라는 건 재훈에게서도 듣지 못했던 정보다. 이것도 윤오의 실종과 관련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마음이 더 급해졌다.
“알겠어요. 고마워요. 전 가 볼게요.”
“에이, 곧 오픈 시간인데 놀다 가지.”
“제가 좀 급해서요. 아…. 혹시 가게에서 약 같은 거 주면 절대 먹지 마세요.”
“약…? 잠깐만, 오빠. 그게 무슨 소리예요? 먹으면 안 되는 거야, 그거? 이상한 약이었어요?”
여자는 사색이 되어 나를 붙잡았다. 홍등가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약물에 중독시켜 영영 빠져나갈 수 없게 하는 것은 서 회장이 즐겨 쓰는 수법이었다. 동정심이 들었지만,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아, 아무튼 이제부터라도 절대 먹지 마요. 전 얘기 했어요.”
도망치듯 난월동을 떠나며, 재훈에게 전화를 했다. 벌써 늦은 오후였다. 아직도 회의 중이라기엔 시간이 너무 많이 흘렀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상한 느낌에 한 번 더 전화를 걸었을 때 겨우 연결이 되었다.
[이한 군.]
어쩐지 심각하고 다급한 목소리였다.
“왜 전화도 안 받아요? 아직도 회의 중인 것도 아닐 텐데.”
[…곤란하게 됐습니다. 지금 감사실이에요.]
“감사실이요? 왜 갑자기?”
[그게… 이한 군 말대로 윤오 학생 어머니 처방이 고의로 잘못 나간 거 같습니다.]
“그쵸? 그거 봐요, 내가 뭐라고….”
[그 일로 지금 제가 추궁을 당하고 있어요.]
“형이 왜요?”
[문제가 있는 처방과 오더 모두, 기록상으로는 제 이름으로 나간 걸로 처리되어 있어서요.]
황당한 소식에 나는 잠시 할 말을 잃었다.
[한 달쯤 전에 절차상 필요한 게 있다고 해서 결제 권한을 원무과 쪽과 공유했던 적이 있거든요. 하…. 신 교수님이 이런 일에 협조하실 줄은….]
“아니, 그런 걸 누명 씌우는 게 가능해요? 담당의가 멀쩡하게 따로 있는데….”
[의국 내부에서는 이미 말을 다 맞췄어요. 작정하고 덤벼드는 거라는 느낌이 들 정도로. 처방 부분만 문제 삼는 게 아닐 겁니다. 얘기하는 걸 보면 제가 임상 실험이나 과거의 처방 내역을 조회한 것도 다 확인한 것 같아요.]
“그 새끼들이 왜 갑자기 그러는 거죠?”
[글쎄요…. 서 회장도 바보는 아니니까, 제가 자기 뒤를 캐고 있다는 걸 눈치챌 때도 됐죠. 아마 여태까지 내부 고발자들이나 서 회장 눈 밖에 났던 사람들이랑 비슷한 수순으로 처리될 겁니다. 하…. 어디까지 뒤집어씌울지 감도 안 오네요.]
“일단 무조건 아니라고 해요. 아니, 이럴 게 아니라 바로 변호사라도 선임해서….”
[그럴 분위기가 아니에요. 지금 감사팀 사람들이 자인서 양식 가져온다고 자리 잠시 비운 사이에 전화하는 겁니다.]
“자인서라니, 형이 한 게 뭐가 있다고….”
[내가 안 했다는 건 그 사람들도 아마 알 거예요. 그치만 다 인정한다고 자필 서명 할 때까지 여기서 안 내보내 줄걸요.]
서 회장이 막 나가려고 마음먹었을 때는 깡패나 다름없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누명만 씌우려는 게 아니라 다른 무서운 짓을 저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등골이 서늘해졌다.
“감사실이라는 게 어디는 건데요? 말이 안 통하면 차라리 그냥 도망쳐 버리는 게 낫지 않아요? 혼자 나오기 어려우면 저라도 그리 가 볼까요?”
[말씀이라도 고맙네요. 근데 제가 일 처리를 잘못한 거니까, 이쪽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이한 군은 가야 할 데가 있잖아요.]
그 말에 당장이라도 병원으로 달려갈 듯 들썩이던 걸음이 멈췄다. 맞는 말이었다. 재훈의 사정이 아무리 급하더라도 나는 윤오를 찾으러 가야 했다. 미안함에 말을 잃은 나에게 그가 물었다.
[혹시 오늘 무슨 소식이라도 더 알아낸 건 없나요?]
“참, 중요한 얘기일진 모르겠지만 난월동 일대 홍등가 있죠? 거기가 서경제약이 관리하는 구역이었던 것 같아요.”
[네? 처음 듣는 이야기인데….]
“그 동네에서 일하는 여자가, 오 실장이 관리자라고 했어요. 그리고 작년에 서이준도 그쪽으로 찾아왔었다 하고요.”
[오 실장 팀에서 들어오는 돈은 사설 카지노 관련 자금으로 보였는데…. 잠깐, 잠시만요….]
생각을 정리하는지 한참 말이 없던 재훈은 무언가 깨달았다는 듯 툭 한숨을 터뜨렸다.
[하, 자금 흐름이 제가 생각했던 거랑은 다르게 연결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아무튼 도움 되는 정본가요?”
[…네. 자료를 대조해 봐야 더 확실하긴 한데, 계속 앞뒤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던 증거들이 그 상황이라면 설명이 될 것 같아요. 제가 여기 붙잡힌 꼴이라, 이미 늦었을지도 모르겠지만….]
잠시 말을 멈추었던 재훈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선명해진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할 수 있는 건 해봐야겠죠. 이한 군. 부탁이 있어요.]
재훈이 나에게 무언갈 부탁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동시에 느껴지는 희망과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켰다.
“뭔데요?”
[일단, 별장으로 갈 때 제 차를 가져가셔도 좋아요. 오늘 차를 집에 두고 오길 잘했네요.]
그건 솔깃한 이야기였다. 서 회장의 별장은 하나같이 교통이 불편한 곳에 있어서 차 없이 가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재훈은 면허를 딴 후 바로 차를 사려 하는 나를 ‘이한 군 성격에 운전은 안 된다’라며 뜯어말렸었다.
“…뭘 얼마나 시키려고 차를 내준다고 해요?”
[하하. 그렇게 엄청난 건 아니고요. 일단 제집에서 물건 몇 가지만 챙겨 주세요. 서 회장이 제 집도 수색하려고 들 것 같아서요.]
“또?”
[그리고… 별장 가는 길에 현수 씨 납골당에 들러주셨으면 좋겠습니다.]
“…….”
[납골당, 어디 있는지는 알죠?]
화장한 그의 유골은 서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있었다. 그곳을 찾는 이는 아마 재훈뿐일 거다. 나조차 한 번도 가지 않았으니까. 늘 가야 한다는 생각과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교차했던 장소였다. 이런 상황에 떠밀리듯 가게 된 것이 얄궂었지만, 마다할 때가 아니었다.
“…알아요.”
[다행이네요. 거기 가면 유골함 옆에 작은 유품 상자가 있을 텐데, 그 안에 USB가 들어있어요. 제가 모은 증거들 중 제일 예민한 부분이 거기 있습니다. 서 회장 쪽은 모르고 있을 거 같지만 혹시 모르니 확보해 두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네. 집에서는 뭘 가져가면 되는데요?”
[서재 책상 맨 아래 서랍에 파란색 서류 파일이 있을 겁니다. 그거랑, 또… 사진 액자…가 있는데.]
머뭇거리는 꼴을 보니, 그게 무슨 사진인지는 뻔했다. 새삼 내숭이다 싶어 그를 재촉했다.
“난 상관없으니까 빨리 어디 있는지나 말해요.”
[…네. 액자는 그 책상 제일 위 서랍에 있습니다. 그것도 챙겨 주시고, 납골당 봉안당은 그 액자 뒤에 붙어있는 열쇠로 여시면 됩니다. 차 키는 책상 위에 있고, 차는 지하 2층에 있습니다.]
“알았어요.”
[서 회장 쪽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으니까 조심해요. 위험하다 싶으면 무리는 하지 말고.]
“형이나 조심해요.”
좀 더 살갑게 인사할 수도 있을 텐데, 급한 마음에 퉁명스레 말을 던지고 그의 집으로 향했다. 재훈의 오피스텔은 본가 부근의 구시가지에 있었다. 그의 성격대로 깨끗하게 정리된 집이었다. 그가 말한 바로 그 자리에서 차 키와 파일을 챙기고, 책상 제일 위 서랍을 열었다.
‘아….’
예상했던 대로, 거기 놓인 것은 나를 낳은 그 사람의 사진이었다. 싱그러우리만치 젊은, 거의 내 또래로밖에 보이지 않는 그가 어린 나를 안고 있었다. 꿈에서 본 모습과 꼭 같은 얼굴이었다. 다만 깊은 슬픔에 잠겨 있던 꿈속의 그와 달리, 사진 속 그는 환하게 미소 짓고 있었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서너 살쯤의 나는 그야말로 기쁨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그건 누가 보더라도 아름답고, 찬란하고, 행복한 순간이었다.
나는 조심스레 액자를 집어 들었다. 얼마나 많이 만졌는지 귀퉁이가 다 닳아 있었다. 그러나 때 묻은 구석 없이 깨끗하게 반짝거리는 걸 보면, 재훈이 그 사진을 더없이 소중하게 여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마음이 일렁거렸지만, 감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다. 챙긴 물건들을 가방에 집어넣고 곧장 집을 나섰다. 복도로 나가 몇 걸음을 떼었을 때, 복도 끝의 엘리베이터에서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내리는 게 보였다.
‘하, 타이밍도 진짜….’
싸늘한 느낌에 얼른 후드를 낮게 눌러 썼지만, 그는 이미 나를 눈여겨본 듯했다. 하나의 통로로 된 복도에는 갈림길도 비상구도 없었다. 남자의 등 뒤에 있는 엘리베이터가 유일한 퇴로였다.
고개를 숙이고 걸음을 재촉했다. 남자는 내 얼굴을 자세히 보기 위해 흘긋흘긋 눈빛을 보냈다. 그러다 그의 바로 옆을 스쳐 가는 순간 한 손으로 내 어깨를 짚었다.
“서이한 도련님…?”
역시, 서 회장이 보낸 남자였다. 그걸 확인한 순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움직였다. 어깨에 닿은 남자의 팔목을 휙, 붙잡아 당겼다. 무방비하게 딸려오는 그의 얼굴 가운데를 팔꿈치로 찍어 버렸다.
“크윽!”
남자가 반사적으로 제 얼굴을 감싸 쥐는 사이, 빠르게 엘리베이터로 뛰어들었다. 간발의 차로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일단 그를 따돌렸지만 경계를 풀 수는 없었다. 한 놈만 왔을 리 없다는 생각에, 지하 주차장에서 재훈의 차를 찾아 타면서도 계속 신경을 곤두세웠다.
내 명의로 되어 있던 차명 주식과 재산을 멋대로 처분해 버리고 집을 나왔을 때도 서 회장은 나에게 한동안 미행을 붙였다. 도망치는 건 꽤 익숙한 일이지만, 익숙지도 않은 운전을 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게 신경 쓰였다.
‘하…. 이 동네 길도 진짜 좆같은데.’
그러나 투덜거리거나 머뭇거릴 시간은 없었다. 곧바로 시동을 걸고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건물 밖으로 나오기 무섭게 도롯가에 서 있던 까만 차가 바짝 뒤쫓아오는 걸 보고 운전대를 더 꽉 움켜쥐었다.
차선과 골목이 복잡해서 초보자가 운전하기 좋은 곳은 아니었지만, 본가 부근이라 신호 체계와 길을 파악하고 있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일부러 대로변을 벗어나 복잡하고 좁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모퉁이를 돌고 돌다가 신호가 바뀔 타이밍에 맞추어 아슬아슬하게 다음 블록으로 넘어가기를 반복하는 사이 뒤를 쫓던 차는 나를 놓쳐 버렸다.
“후….”
검은 차가 사라진 걸 확인한 후, 차를 잠시 멈추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지도에 표시한 별장의 위치를 확인하자 갑갑한 마음이 더 커졌다. 납골당도 들러야 하니 오늘은 부지런히 달려도 한 군데밖에 가 볼 수 없을 것이다.
서이준은 무언가 꿍꿍이가 있어서 그 애를 데려갔을 거다. 시간이 지체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아니, 이미 너무 지체되어 버린 상황이다. 마음은 급한데 갈 길이 막막했다.
‘어딜 먼저 가야 하지…? 이런 일로 도박을 걸고 싶진 않은데, 확실한 방법이…. 씨발, 어디 물어볼 데도 없고.’
너무도 간절했던 나머지, 내 머릿속에는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엉뚱한 생각이 떠올랐다. 모르는 건 아는 사람에게 물어봐야 하고, 지금 그 애의 행방을 알 만한 사람은 딱 한 명뿐이었다. 서이준.
그에게 연락해 본다는 건 정말 미친 생각이었다. 그러나 어차피 초조함에 말라 죽을 거라면 못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이준이 똑바로 대답하지 않더라도 단서가 될 말을 들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다행히 차단 연락처 목록에 그의 번호가 있었다. 연락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절대 하지 않기 위해서 등록한 번호였다. 관자놀이에 총을 겨누는 기분으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신호음이 채 몇 번 울리지 않았을 때 역겨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니, 이게 누구야. 아우님이 전화를 다 주시고.]
분노가 치솟았지만 흥분하지 않으려 애썼다. 작은 단서라도 건지려면 침착해야 했다.
“너 지금 어디야?”
[네가 아니라, 형이라고 불러야지.]
“지랄하지 말고.”
[안부가 궁금해? 나야 잘 지내지. 요새는 아주, 이렇게 좋을 수 있나 싶을 정도야. 넌 잘 지내고 있나?]
“누가 그딴 얘기 하재? 지금 어디냐고 묻잖아.”
[너야말로 어디야? 아버지가 네 버릇을 고쳐 놔야 한다고 벼르시던데.]
“…….”
[아버지도 참 상냥하시지. 어차피 구제불능이라고,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고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
그의 말대로, 사람은 고쳐지지 않는다. 흥분하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마음속으로 되뇌었지만 결국 나는 욕지기를 뱉고 말았다.
“이 씹새끼가, 말 돌리지 말라니까. 한윤오 어디 있어?”
[그걸 왜 나한테 물어?]
“네가 숨겼잖아. 네가 데리고 있으면서. 한윤오 어디 있냐고, 지금!”
[그러니까 묻는 거야. 내가 숨겼다고 생각하면서, 그걸 나한테 대놓고 물어보는 거냐고. 크큭….]
이준은 악을 쓰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즐겁게 키득거렸다. 누가 봐도 내 쪽이 초라한 패배자였다. 나는 자괴감을 들키지 않으려 더 거칠게 으르렁거렸다.
“개수작 부리지 마.”
[민망해서 그러지. 상식적으로 말이 되는 짓이야?]
“네가 그동안 저지른 짓을 생각해 봐. 너 같은 새끼가 상식을 따져?”
[불리한 입장일 때 땐 신중하게 굴어야지. 이렇게 처음부터 네 패를 다 까고 난리 피워 봐야 원하는 걸 얻을 수 있을 거 같아?]
“협상도 말이 통하는 상대일 때 얘기지. 인간 같지도 않은 새끼한테 무슨….”
[인간 같지도 않은? 풉….]
이준은 이제 아예 크게 소리 내어 나를 비웃기 시작했다. 사람을 깔보는 듯한 기분 나쁜 웃음소리는 여전했다.
[하…. 재미있네. 잡종 주제에 건방진 소릴 하고. 원숭이에게 훈계를 들으면 이런 기분이려나? 그런데 맞는 말이긴 해. 네가 어떻게 꼬드겨도 어차피 난 넘어갈 생각 없었거든. 내가 왜 순순히 너한테 그걸 말해 주겠어? 포기해, 그냥.]
“이 개새끼가….”
[나한테 이럴 정도면 걔가 꽤 마음에 들었나 봐? 뭐…. 쓸 만해 보이긴 해. 너같이 멍청한 애들은 그렇게 쓸 만한 걸 옆에 두고도 굴리는 방법을 모르겠지만.]
“뭐? 쓸 만해?”
[그래. 쓸 만한데 아깝잖아. 걔는 내가 데리고 있는 편이 나아. 네가 먹었던 걸 손대려니 기분은 좀 찝찝하지만…. 뭐, 할 수 없지. 형제끼리 오메가를 돌려쓰는 게 드문 일도 아니고.]
그는 오메가를 마루타나 정액받이쯤으로 생각했다. 남들 앞에서는 위선을 떠느라 그 생각을 입에 올리지 않았지만 내 앞에서는 늘 거리낌 없이 더러운 말을 지껄였다.
수도 없이 겪어온 도발이었다. 어린 시절에는 그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리거나 물건을 부수며 난동을 피우곤 했지만, 나중에는 무의미한 헛소리 취급하며 무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번만은 그럴 수 없었다. 그 애를. 나에게는 단 하나뿐인 소중한 사람을 그 더러운 입에 올리는 것을 도저히 견딜 수 없었다. 분노로 눈앞이 하얗게 빙빙 돌았다.
“너… 씨발…. 너 진짜 내가 죽여 버릴 거야.”
[죽여 버린다고? 네가? 나를?]
“그래.”
[하, 하하. 어디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 개새끼가… 두고 봐, 너. 씨발, 내가…!”
[큭…후, 하하, 하…. 아, 재미있네…. 음… 그래. 날 죽이러 오겠다는 거지? 올 테면 와 보던가. 기다리고 있을게.]
경쾌한 한마디를 끝으로 그는 전화를 끊었다. 분노와 무력감에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손에 닿는 무엇이든 집어던지고, 찢고, 부숴 버리고 싶었다. 운전대를 으스러지도록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었다.
“으… 으….”
그러나 혼자 날뛰어 봤자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게는 분노에 잡아먹혀 있을 시간도 없으니까. 이를 악물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후….”
안으로 화를 삼키고, 어느새 해가 기울어 가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이 순간에도 그 애는 위협과 위험 속에 놓여 있을지 모른다. 갈 길을 몰라도 나는 가야 했다. 그 애에게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