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11 : 함정(2) (11/18)

chapter 11 : 함정(2)

불투명한 창문 틈으로 흘러들어오는 빛에 눈을 떴다. 흰 이불과 흰 베개, 흐린 빛에도 유난스레 반짝이는 흰 벽.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부질없는 생각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아직 여기 갇혀 있다는 절망과. 아직은 히트가 시작되지 않았다는 안도감.

자다가 눈물을 흘렸던 건지, 베개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꿈에 어머니가 보였던 탓인가보다. 끔찍하게 가위눌렸던 어제보다는 괜찮은 꿈이었는데. 잠결이라고는 해도 눈물이 너무 헤펐다. 마음이 약해져 버린 모양이다.

이곳에 온 지 나흘째였다.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나는 관자놀이가 욱신거리는 느낌에 머리를 짚었다. 약의 부작용과 공포감 탓인지 뇌를 짓이기는 듯 극심한 두통이 계속되고 있었다.

‘빨리 약을….’

꾸물거릴 시간이 없었다. 페로몬은 처음 이곳에 왔을 때보다 더 격렬하게 꿈틀거리는 중이었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들고 젖은 베갯잇 아래를 더듬거렸다. 숨겨 둔 알약을 꺼내며, 습관처럼 남은 약의 숫자를 확인했다. 이제 열하나. 5일분이 조금 넘게 남았다.

납작한 한 알을 반으로 쪼개어 삼켰다. 약 기운이 돌기 시작하자 미식거리는 구토감과 함께 몸이 늘어졌다. 나는 다시 몸을 늘어뜨리고 멍해졌다. 이곳에 온 뒤 늘 무기력한 상태였다.

처음의 하루 이틀은 나름대로 분주했다. 탈출할 방법을 찾기 위해 어떻게든 문과 창문을 뜯어내 보려고도 하고, 여기서 할 수 있는 일에 대해 쉬지 않고 생각했다. 그러나 어설픈 시도는 모두 실패로 돌아갔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제대로 된 계획은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무서운 현실을 애써 모른 척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나갈 방법 같은 건 없고, 나에게 남은 길은 몰래 약을 삼키며 언젠가 다가올 히트를 미루는 일뿐이고, 그마저도 언젠가는 끝나버릴 거라는 사실을.

‘꿈속에 엄마… 괜찮아 보였지.’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어서인지 생각만 자꾸 많아졌다. 나는 꿈에 보았던, 평온하게 미소 짓는 어머니를 되새겨 보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중환자실에서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좋은 꿈이었겠지. 설마 상태가 더 나빠지지는 않았을 거야. 지금쯤 의식이 돌아오셨을지도 몰라. 깨어났는데 내가 없으면 걱정하실 텐데….’

하필 이럴 때 소식조차 모른다는 게 괴로웠다. 곁을 지킨다고 해서 어머니의 상태가 나아지지는 않았겠지만, 아무것도 아는 게 없으니 불안을 가눌 수 없었다.

‘…이한이는 잘 있을까.’

다른 무언가를 고민하다가도, 나는 또 이렇게 불쑥불쑥 이한을 생각했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의 일들을 하나하나 다시 짚어보다가, 마지막에는 그 날 병원 주차장에서, 그에게 다시 보지 말자고 말했던 순간을 떠올리곤 했다.

가슴이 쥐어뜯기는 듯한 괴로움에 신음하면서도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런 선택을 한 것도, 그런 말을 한 것도 다 나이니 누굴 원망할 수도 없지만, 감정을 자각한 순간이 하필 그런 말을 한 직후라는 게 얄궂고도 가혹했다.

그게 마지막일 줄 알았다면 말이라도 곱게 할 걸 그랬지. 고마웠다고 말하긴 했지만, 좀 더 솔직하게 마음을 열어 보일 걸 그랬지 싶다가도, 그 후 곧바로 여기에 끌려왔으니 모질게 굴길 잘한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걱정까지 끼칠 면목은 없으니까.

신변을 정리하기라도 한 것처럼, 학교도 아르바이트도 다 내 손으로 그만둔 상태였다. 내가 잠시 안 보인다고 해도 이상하게 생각할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아마 이한도 그렇겠지.

‘그래…. 날 금방 잊을 거야. 차라리 그게 나은 거겠지.’

어쩌면 이한은 내가 사라졌다는 것조차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는 곧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예전의 삶으로 돌아갈 것이다. 내가 번거롭게 굴기 전, 늑대처럼 고고하게 살아가던 시절의 생활로.

나에게 보여 주었던 감정의 불꽃들은, 그 황홀한 열기는 아마도 머지않아 사그라들 거다. 그게 다행스러우면서도 서글프다고 생각하다가, 나는 으레 자기 자신을 책망했다.

나는 왜 그렇게 멍청했을까. 그 애가 서툴게 나를 감싸 안으려고 하는 것을 왜 몰라주었을까. 내 가슴을 흔드는 감정을 왜 외면하려고만 했을까. 다시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텐데.

‘다시 만날 수 있을까. 마음을 전하는 것까진 무리라고 해도, 그냥 멀리서 보는 것만이라도 좋을 텐데.’

그랬다. 생각의 끝은 매번 보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아직 피워 보지도 못한 애정과 그리움이 가슴 가득 남아 있었다. 그 애의 무뚝뚝하고 반듯한 얼굴이, 깊게 울리는 목소리가, 아찔한 향기가 눈앞에 떠오를 듯 선명하다가도 뿌옇게 흐려지곤 했다.

나는 흐려지는 그의 잔상을 필사적으로 붙잡은 채로 덧없는 희망을 끙끙 앓고 있었다. 혹시라도 이곳을 빠져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다시 이한을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이뤄지지 않을 듯한 소망임을 알면서도 나는 그 생각을 오래도록 만지작거렸다. 그를 생각하면, 모든 걸 포기하고 싶다가도 다시금 포기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곤 했다. 나는 그렇게 그곳을 버티고 있었다.

‘아, 8시….’

문득 시계를 본 나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하루 세 번 매일 정해진 시간, 오 실장은 죄수에게 식사를 배급하는 교도관처럼 식판과 갈아입을 옷을 들고 방을 찾아왔다.

오늘도 어김없었다. 시계의 짧은 바늘이 숫자 8에 닿자, 그는 정갈하고 풍성하게 차려진 아침 식사를 나에게 가져왔다. 그는 내가 식사를 마칠 때까지 조용히 문가를 지키고 서 있다. 내가 제대로 밥을 먹는지를 감시하려는 의도였다.

표정을 일그러뜨리지 않으려 애쓰면서 수저를 들었다. 억제제의 부작용으로 구토감이 있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다. 이준의 얘기대로라면 오 실장은 베타일 거다. 페로몬을 감지하지 못한다고 들었지만, 이상한 기색을 보이면 히트가 가까워졌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도 있었다.

“…….”

“…….”

꾸역꾸역 밥을 먹는 동안 방 안에는 침묵만 가득했다. 이곳에 온 뒤 나를 대하는 오 실장의 태도는 내내 정중하고도 사무적이었다. 볼 때마다 지긋지긋할 정도로 험한 말을 늘어놓던 사람과 동일인이 맞는지가 의심될 정도였다.

이곳에서 그가 나에게 말을 붙인 것은 고작 두 번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가져다준 밥을 깨작거리기만 하다가 수저를 내려놓았을 때 ‘다 먹어야 한다고 지시받았다’라고 하던 한마디.

그리고 그 밥을 억지로 입 안에 욱여넣다가 화장실에 달려가 먹은 것을 게워내는 나를 보고 질렸다는 표정으로 ‘이럴 거면 차라리 먹지를 말던가….’ 하고 중얼거렸던 말. 딱 그 두 번을 끝으로, 그는 정말이지 나에게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나도 굳이 그에게 말을 걸지는 않는다. 밥을 먹는 것만도 버거운 일이었다. 속이 메슥거려 입맛은 전혀 없지만, 의구심을 사지 않을 정도로는 먹어야 한다는 생각에 수저를 놀렸다.

‘그리고, 먹지 않으면 또 난리가 날 테니까….’

이준은 처음 여기 온 날 이후 내 방을 찾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집 안 어딘가에 머물러 있는 건지, 가끔 방 밖에서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곤 했다. 가장 크게 들리는 건 목청을 높여 고용인으로 보이는 여자를 다그치는 소리였다.

그는 대단치 않은 일로 그녀에게 이런저런 트집을 잡았다. 내가 밥을 제대로 먹지 않을 때는 그걸 이유로 폭언을 해 댔다. 대놓고 욕을 섞는 건 아니지만, 귀가 화끈거릴 만큼 모욕적인 언사에 듣는 내가 괴로울 정도였다.

‘돈 받으셨으면 제대로 일합시다, 여사님. 여기 와 있다고 휴가라도 받은 줄 아시나? 이런 변변치 않은 걸 만드니까 애가 먹는 시늉만 하다 내놓는 거 아니에요. 몇십 년을 음식만 하셨으면서 이거 하나 똑바로 못해요?’

그게 싫어서 어떻게든 좀 더 먹어 보려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억지로 밀어 넣고 다시 토해 버릴지를 고민하다가, 결국 포기했다. 체력이 바닥나서 뭘 먹는 것도 고역인데, 먹은 걸 토해 낼 엄두는 나지 않았다.

수저를 내려놓는 소리에 저만치에서 지켜보고 있던 오 실장이 다가왔다. 식판에 남은 음식을 확인하고 탐탁지 않다는 표정을 짓던 그가 문득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보았다.

시선이 길어지자 견딜 수 없이 불편해졌다. 뭐라 할 말이라도 있는 듯한 태도에 바짝 긴장했지만, 그는 결국 아무 말 없이 방을 나섰다.

발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얕은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오 실장이 방을 다녀갈 때마다 습관처럼 뒤따라가 방문을 확인하곤 했다. 실수로 잠겼던 문을 열어놓지 않았을까 하는 기대였다.

‘오늘도 분명 잠겨 있겠지만….’

매번 헛걸음을 반복하면서도 나는 기대를 버리지 못했다. 메마른 입술을 애써 축이며 문고리를 잡았다.

찰칵.

그러나 생각과는 달리, 문에서는 잠금쇠가 풀리는 경쾌한 소리가 들렸다. 문고리가 옆으로 돌아가는 것에 놀라 비명을 지를 뻔했다. 손에 힘이 풀려 한 번 문고리를 놓쳤다가, 호흡을 다듬고 다시 끝까지 잡아 돌렸다.

몇백 번을 시도해도 한 번도 열리지 않던 그 문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게 밀렸다. 오 실장은 문을 잠그지 않고 나간 것이다.

‘어떡하지? 왜 갑자기….’

바라던 일이지만, 막상 문이 열리자 나는 당황했다. 이게 실수인지 함정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갈팡질팡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나 오래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혹시 이게 함정이라도 멍하니 갇혀 있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니까.

어쨌든 나는 나가야 했다.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베갯잇에 숨겼던 알약의 절반 정도를 옷 주머니에 챙겨 넣었다. 긴 심호흡 끝에 다시 문을 열고 처음 보는 복도로 몸을 내밀었다.

길고 어두운 복도의 양옆으로 굳게 닫힌 방문이 줄지어 서 있었다. 복도의 끝에는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나무 계단이 있었다.

다시 걸음을 떼려던 차에 아래층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두 사람이 대화를 나누는 소리 같기도 했다. 혹여 이준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주춤거리는 다리를 다독였다.

‘괜찮아. 여차하면 다시 방 안으로 뛰어들어가면 그만이니까….’

나는 계단 쪽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에그, 또 반도 안 먹었네…. 입에 안 맞았나?”

웅얼웅얼 들려오는 것은 중년 여성의 목소리였다. 이준에게서 종종 면박을 듣던 고용인이다.

“국이 맛있게 잘됐는데. 실장님은 어땠어요? 젊은 사람들 먹기는 좀 싱거운가?”

“맛있어요. 근데 걔한테 지금 맛이 문제겠어요?”

대답하는 것은, 오 실장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지금 나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도 안색이 안 좋았어요? 들어갈 때 언뜻 보기에도 아주 볼이 헬쓱하더라고. 팔다리도 부서질 것같이 가느다래서는.”

“안색이야 뭐, 계속 죽상이죠.”

“어쩌나…. 먹는 거라도 제대로 먹어야 할 텐데. 맨날 이렇게 먹는 시늉만 하다 말아서 되겠나.”

“입맛이 있으면 이상한 거죠. 난데없이 사람을 끌고 와서 가둬 놓고 밥만 들이댄다고 그게 들어갈 리가 있어요?”

“하긴, 그건 그래. 아이고, 이준 도련님을 누가 말리겠어.”

대화의 내용을 보니 이준이 지금 집에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용기를 내 계단을 하나 내려갔다. 몸을 낮추니 난간 틈새로 커다랗고 깨끗한 거실이 보였다. 두 사람은 거실과 부엌의 경계에서 내가 먹던 식판을 보며 이야기를 주고받는 중이었다.

“그래도 살 사람은 살아야지. 저러다 큰일 나면 어떡해? 오 실장님, 그 학생이 뭐 좋아하는지 알아요?”

“그걸 제가 어떻게 알아요? 저도 잘 모르는 애라니까요.”

“점심에는 수프라도 끓여 볼까…. 재료가 있었나? 어디 보자….”

“아주머니. 벌써 점심 걱정할 때가 아니라, 청소하셔야죠. 어제 그 도련님인가 하는 새끼가 다용도실 정리해 놓으라고 난리 피웠잖아요.”

“아, 내 정신 좀 봐. 그런데 지난 밤에 서울로 가신 거 아니에요? 보통은 그러면 다음 날 오후나 되어야 오시는데….”

이준이 서울로 갔다는 말에 겨우 진정시킨 가슴이 또 달음박질치기 시작했다.

“또 무슨 변덕을 부릴 줄 알고요. 좋은 용건으로 간 것도 아닌데 놀다 올 기분이 나겠어요?”

“하기는 또 그렇네요. 거기부터 치워 놓는 게 나으려나?”

“빨리 가 봐요. 도와드릴 테니까.”

오 실장의 채근에, 아주머니는 부엌 안쪽으로 향했다.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기면 집 밖으로 나가야겠다는 생각으로 손바닥에 땀이 스미던 때였다. 짧게 한숨을 뱉은 오 실장이 갑자기 휙 고개를 돌렸다.

들킨 걸까, 하는 생각에 눈앞이 하얗게 흐려졌지만, 그는 내가 있는 계단 쪽을 올려보지 않았다. 의식적이다 싶을 정도로 눈을 살짝 내리깐 채로 거실의 끝을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닿은 곳에는 대리석으로 장식된 커다란 출입문이 있었다.

‘저기가… 문….’

이내 오 실장은 아주머니를 따라 부엌으로 들어갔다. 거실에는 아무도 없고, 이준은 서울로 외출했다. 지금은 다시 없을 기회였다. 실패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긴장감은 한계까지 당겨졌다.

살금살금 발을 떼었다. 무릎이 후들거려 조용히 걷는 게 평소보다 몇 배는 더 힘들었다. 계단을 내려가 거실을 가로지르기까지, 실제로는 얼마 되지 않을 거리가 별과 별의 사이만큼 멀게 느껴졌다.

마침내 현관에 다다른 나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또 조용히 문을 닫았다. 맨발이라는 것도 잊고 나는 허겁지겁 현관 밖으로 튀어 나갔다. 밖이다. 흰 방에 갇혀서 내내 그려왔던 집 밖의 공간. 찬 공기가 뺨에 닿자 작은 전율이 일었다.

‘…여기가 대체 어디지?’

나는 섣부르게 자유를 얻었다는 희망과 이제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부풀었지만 곧바로 다시 가라앉았다. 주위를 자세히 본 순간 나는 하얗게 얼어붙었다.

그 집은 바다가 보이는 절벽 위에 있었다. 눈앞은 온통 하늘색과 초록색이었다. 잔디밭과 관목으로 된 정원의 가장자리에는 절벽을 따라 야트막한 울타리가 있을 뿐 제대로 된 담장도 없었다.

너무도 탁 트인, 그래서 폐소감에 질려 버릴 것 같은 풍경이었다. 담이 없으니 쉽게 달아날 수 있을 거라고 낙관할 때가 아니었다. 오히려….

‘아무도 안 오는… 못 오는 곳이라 담을 만들 필요도 없던 거겠지.’

별장이라는 말에 서울이 아닐 거라고 짐작은 했지만 이렇게까지 고립된 공간일 줄은 생각도 못 했다. 나는 얼이 빠진 채로 절벽의 울타리 앞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발아래로 짙푸른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깎아지른 듯한 암벽을 보면, 지대가 꽤 높은 곳인 듯했다. 반대편에 길이 있다고 해도, 맨발로 산을 내려가는 게 가능하긴 할까. 내려가면, 어딘가 도움을 청할 곳이 있을까. 일렁이는 바다를 보며, 나는 답이 없는 의문들을 떠올렸다.

‘다 틀린 걸지도 몰라…. 혹시 여기가 아무도 없는 무인도라면 어쩌지.’

바람 소리와 파도 소리가 철썩철썩, 나를 두드렸다. 그 소리는 금방이라도 절벽을 타고 올라와 나를 휩쓸어 갈 것 같았다. 살면서 힘겹지 않을 때보다 힘겨울 때가 더 많았지만, 정작 죽음을 생각해 본 적은 많지 않았다. 나는 늘 악착같이 살 방법에 대해서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왜일까. 끝을 알 수 없는 그 바다를 바라보며, 나는 어느 때보다 더 강하고 선명하게 죽음을 생각했다. 저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다고. 내가 자유로워질 방법이 그것뿐일 거라는 예감 때문이었을까.

‘…안 돼. 아직은 아니야.’

그러나, 나는 끝끝내 절벽 아래로 몸을 던져 버리지 못했다. 나를 유혹하는 듯한 파도를 보며 몇 번이나 발걸음을 달싹이면서도 결국은 다 놓아 버릴 수 없었다.

죽음이 무서워서는 아니었을 거다. 죽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은 거의 없지만, 죽는 게 무섭다는 생각은 더더욱 해 본 적이 없었다. 나에게 치가 떨리도록 무서운 것은 언제나 삶이었다.

다만, 나에게 미련이 남아 있다는 건 확실했다. 하고 싶은 일이 남아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여전히 보고 싶은 사람들이 남아 있었다. 어떻게든 단 한 번이라도 다시 만나고픈 사람들이.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말자. 누가 날 여기로 데려왔으니까 어쨌든 나갈 길도 있겠지.’

나는 마음을 다잡고 등을 돌려 정원을 탐색했다. 건물을 빙 둘러 현관문의 반대편까지 왔을 때, 빽빽하게 펼쳐진 숲과 덤불이 보였다. 그리고 검고 무상한 숲 사이로 차 한 대가 지나다닐 수 있을 너비의 듯한 가느다란 흙길도 보였다.

역시 생각한 것처럼 길이 있었다. 산이 험하고 높아도, 저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분명 산 아래에 닿을 것이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길을 향해 나아갔다.

그러나 얄궂은 희망만큼 절망이 뒤따라오는 내 인생의 법칙은 그런 절박한 순간에조차 마찬가지였다. 길을 따라 채 몇 걸음을 걷기도 전에 나는 희미하고도 섬뜩한 소리를 들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였다. 바퀴가 흙길을 긁는 평범한 소리가 나를 할퀴는 것처럼 무서워 심장이 쿵, 쿵 주저앉았다.

‘이준이 벌써 돌아온 건가…?’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 길을 따라 그대로 내려갔다가는 산을 오르는 차와 정면에서 마주칠 것이다. 그건 나를 붙잡아 다시 그 감옥 같은 2층의 방에 밀어 넣어 달라고 애원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길은 갈림길도 없이 곧고 가느다랗기만 했다. 뒤를 돌아보면 황량한 정원과 이층집이 서 있고, 길의 옆에는 숲이 울창했다. 검은 숲은 깊고도 음습해 보였다. 뾰족한 가지들이 흙길과 정원을 향해 들쭉날쭉 자라나 있었다.

머뭇거리는 사이 자동차 소리는 이미 무섭도록 가까워져 있었다. 더 깊게 고민할 시간이 없었다. 일단 숲에 몸을 숨기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사람이 다닐 만한 길인지는 모르겠지만 저 숲을 따라 내려간다면 어떻게든 산 아래 닿을 수 있을 거다.

나는 나무의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방향을 잡기 위해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순간, 자동차 엔진 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유달리 크게 느껴지는 그 소리가 나의 귀 바로 옆을, 내 등을 마구 두드리는 것 같았다.

겁을 집어먹은 나는 일단 길에서 멀어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마구 내달렸다. 부드러웠던 정원의 잔디밭과 달리, 숲의 바닥은 이끼와 돌과 나무뿌리로 들쭉날쭉했다. 그늘과 빛이 마구 일렁거려 발밑을 제대로 볼 수도 없었다.

“윽…!”

방향도 모르고 마구잡이로 나아가던 나의 왼발 아래 날카로운 통증이 훅, 찔러 들어왔다. 나는 숨죽인 비명을 삼키며 주저앉았다.

“흐, 아아….”

다시 일어나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주저앉아 발바닥을 살펴보니 제법 굵직한 나뭇가지가 박혀 있었다. 발에 묻은 흙과 낙엽 부스러기 사이로 검붉은 피가 엉겨 붙어 있었다.

생각보다 상처가 깊었지만, 고통보다도 공포감이 훨씬 컸다. 이준이 집에 도착하기 전에, 내가 사라진 것을 발견하고 찾으러 나오기 전에 최대한 멀리 달아나야 했다. 발바닥을 파고든 나뭇가지를 쥐고 이를 꾹 악물었다.

깊게 박힌 나뭇가지를 잡아 빼자 벌어진 상처에서 피가 왈칵왈칵 흘러나왔다. 이 발로 걸을 수 있을까. 산 아래까지 내려가려면 얼마를 걸어야 할지 막막했지만 고민할 틈도 없었다.

일단 상처를 묶어야 한다는 생각에 힘겹게 티셔츠 자락을 찢었다. 간신히 뜯어낸 흰 천 조각으로 피를 닦던 나는 위화감에 멈칫했다.

어느샌가 자동차 소리가 멈춰 있었다. 들려오는 것은 바람 소리와 낙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뿐이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하고 오싹해진 순간, 다른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저벅, 저벅. 누군가가 수풀을 헤치고 걸어오는 소리가.

‘달아나야 해. 달아나야….’

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돌아서서 나를 뒤쫓는 이를 확인한 순간 몸이 굳어 버릴 거라는 걸 알았으니까. 심지어 그를 보지 않았음에도 나는 이미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을 정도로 얼어 버렸다. 주저앉은 채로 바닥을 짚었다. 있는 힘을 다 짜내어 네발로 기어가기 시작했다.

그런 한심한 몸부림으로 정말로 그에게서 달아날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아니면 그저 닥쳐올 재앙을 조금이라도 뒤로 미루고 싶었던 건지는 모르겠다. 위기감에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

무심한 발소리는 짐승처럼 몸부림치는 나를 성큼성큼 따라잡았다. 작게 비웃는 소리가 들렸던 것 같지만 그것도 확실하지 않았다. 다음 순간 내 발을 움켜쥐는 커다란 손에 소스라쳐 비명을 지른 기억뿐이다.

“아악…!”

그 손은 아무 말도 없이 내 발을 뒤로 잡아끌었다. 나는 엎드린 채로 주르르, 그 손이 당기는 대로 딸려갔다. 나는 저항보다는 발작에 가까울 정도로 두서없이 발버둥 쳤다. 나무뿌리, 풀 포기, 낙엽까지 손에 잡히는 것은 닥치는 대로 움켜쥐었지만 역부족이었다.

쓸데없는 저항이 번거로웠던 걸까. 나를 끌고 가던 그는 내 발바닥을 더 높게 들어 올리더니 손톱 끝을 상처의 한가운데로 찔러넣었다.

“악! 흐으으….”

“시끄러워.”

피부가 꿰뚫리는 감각에 저절로 비명이 튀어나왔다. 이준의 단호한 제지에 입술을 꼭 다물자 이제는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흉하게 버둥거리던 나는 곧 모든 전의를 잃고 몸을 축 늘어뜨렸다.

이준은 힘이 풀린 나를 질질 끌고 숲의 가장자리까지 나왔다. 그는 잔디밭 위에서 나를 뒤집어 위쪽을 보게 했다. 나는 흙과 나뭇잎과 눈물로 범벅이 된 비참한 꼴이었다.

반면 나를 포획한 이준은 너무도 크고 어두워 보였다. 태양이 머리 뒤에 걸린 탓에 그의 얼굴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었다. 그는 나에게 붙은 나뭇잎들을 툭툭, 털어냈다. 사냥한 고깃덩이에 묻은 먼지를 털듯 매정한 태도였다.

“쓰읍. 지저분하게….”

손에 묻은 피 때문에 흙과 티끌들이 엉겨 붙자, 그는 짜증스레 내 티셔츠의 그나마 깨끗한 부분에 제 손바닥을 비벼 닦았다. 그나마 손을 댈 수 있을 정도로 내 몰골이 정리된 후에야 나를 안아 들었다.

나는 줄에 널린 빨래처럼 그의 어깨에 걸쳐진 채로 다시 그 집의 2층으로 올려졌다. 고용인 아주머니는 문이 열리는 소리에 뛰어나왔다가 나를 보고 경악한 표정을 지었다.

며칠간 정성스레 제대로 먹지도 않는 내 밥을 지어 올린 그녀는, 도망치려는 나를 막지 못했다는 이유로 또다시 호된 꾸지람을 들을 것이다. 짧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의 처지를 걱정하고 있을 상황은 아니었다.

2층의 끝방에 도달한 이준은 희게 정돈된 침대 위로 나를 내동댕이쳤다.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뺨으로 손바닥이 날아왔다.

“윽…!”

내 발에서 흘러나온 검붉은 피가 그의 손에 거쳐 다시 내 얼굴에 묻었다. 그걸로 끝일 거라고는 나도 생각하지 않았다. 연달아 서너 대 따귀를 때린 다음, 그는 침대 아래로 굴러떨어진 나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분하고 두렵고 서글펐지만 한 마디도 할 수 없었다. 귓가에 윙윙, 시끄러운 이명만 요란했다. 나는 그저 그의 처분을 기다리는 무력한 심경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분노에 이글거리는 눈으로 나를 노려보던 그는 문 쪽을 바라보며 소리쳤다.

“오 실장!”

부르는 소리에도 아무 대답이 없자 그는 신경질적으로 몇 번을 더 외쳤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고 긴장한 표정의 오 실장이 들어왔다.

이준은 내 멱살을 놓더니 다짜고짜 그에게 주먹을 날렸다. 저항도 못 하고 턱과 볼을 얻어맞은 오 실장은 신음을 뱉으며 몸을 숙였다. 그 정도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이준은 다리를 들어 그의 배를 걷어찼다. 오 실장이 바닥에 쓰러지자 기다렸다는 듯 마구 짓밟고 걷어차 댔다.

“똑바로, 감시하라고 했지. 응? 하던 일 다, 빼 주고, 놀고먹고 있으면서… 후, 딱 그거 하나 하라고, 했어.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해?”

“윽, 죄송, 합… 으윽!”

“이 돼먹지 못한 자식이…. 너 일부러, 그랬지? 일부러 그런 게, 아니면 이럴 리가 없어. 응? 왜. 내가 못마땅해? 계속 날 엿 먹일, 하아… 기회만 보고 있던 거 아냐?”

“아뇨, 으, 아닙니… 읏, 다….”

“꼴에, 자존심이라도 상했나 봐? 새파랗게, 후…. 어린놈, 밑 닦아 주고 있으려니까 죽을 맛이야? 왜 시키는 일도 똑바로, 못하냐고. 버러지 같은 새끼가!”

퍽, 퍽. 둔탁한 타격음과 살이 다져지는 듯한 소리가 끔찍했다. 맞고 있는 것이 그 지긋지긋한 오 실장이라고 해도, 그 모습을 차마 그냥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나는 무릎으로 기어가 이준을 붙잡았다.

“죄송해요. 선생님, 죄송해요. 제 잘못이에요. 제가 잘못한 거니까…. 이제 안 그럴게요. 도망치지 않을게요. 제발 그만….”

구겨지다시피 몸을 웅크린 채로 바닥에 늘어 붙어 있던 오 실장은 놀란 듯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얼떨결에 끼어들어 버린 나도 놀라고 얼떨떨하긴 마찬가지였다.

이준은 잠시 멈칫거리다가, 짜증스러운 숨을 몰아쉬더니 결국 한 번 더 오 실장의 옆구리를 내리밟았다.

“윽…!”

“엄살떨지 말고 일어나. 나가서 수갑이나 가져와, 새끼야.”

이준은 오 실장의 가슴 언저리를 발로 툭툭, 밀어냈다. 비척비척 일어나는 오 실장을 경멸스럽다는 듯 노려보다가 휙,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수갑이라는 말에 놀라 굳어 버린 내 표정에,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죽이 끌어올렸다.

“윤오야.”

“…….”

“왜 나를 화나게 만들어? 다른 건 다 괜찮은데, 여기서 나가지는 말라고 했잖아. 똑똑한 애가 왜 사람 말을 못 알아듣냐고. 이 정도면 못 알아듣는 게 아니라 나를 무시하는 거 아닌가?”

“죄, 죄송…해요….”

“너한테 자상하게 대해 주려고 내가 얼마나 애쓰고 있는지 알아? 왜 이런 험한 꼴을 보이게 만드는 거야?”

그는 떨고 있는 나를 일으켜 침대에 앉혔다. 머지않아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오 실장이 철컹거리는 소리와 함께 방으로 돌아왔다. 그의 손에는 긴 사슬이 달린 수갑이 들려 있었다.

“후우…. 이러지 않으려고 했다고, 나는 정말.”

이준은 오 실장에게서 수갑을 넘겨받으며, 웃음을 참을 수 없다는 듯 큭큭거렸다. 한참을 그렇게 기괴하게 웃던 그는 갑자기 다시 평소대로의 단정하고 친절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오 실장님. 수고하셨어요. 나가 보시죠.”

오 실장의 얼굴은 피 얼룩으로 가득했다. 한쪽 눈두덩이는 주먹만큼 부풀었고, 입술도 두어 군데 터져 있었다. 그런 그에게, 이준은 갑자기 깍듯한, 그래서 더 무서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그러고는 화사하게 미소 지으며 나를 돌아보았다.

“윤오야, 손.”

연인에게 반지라도 끼워 주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의 손에는 차가운 수갑이 들려 있었다. 의미 없는 저항인 걸 알면서도 나는 두 손을 등 뒤로 감추었다. 버티려고 했지만 덜덜 떨리는 팔에는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왼팔을 가져가 수갑을 채웠다. 팔목에 닿는 차가운 감촉, 금속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늘어뜨린 쇠사슬의 반대편에는 무거운 자물쇠가 달려 있었다. 이준은 나긋한 손길로 쇠사슬을 갈무리하고는 자물쇠를 침대 헤드의 창살에 걸었다. 반짝이는 사슬이 철그렁거리며 내려앉았다.

“예쁘네. 손목이 가늘어서 그런가?”

“…….”

“그때 그 시계보다는 이쪽이 너한테 더 잘 어울리는 거 같은데. 네 생각은 어때?”

그는 수갑에 묶인 나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끔찍한 무언가가 닿는 느낌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내 표정을 읽었을 텐데도, 그는 오히려 보란 듯이 진득하게 입술을 대었다.

“저런…. 아프지?”

그는 새삼스럽게 부어오른 내 뺨과 발의 상처를 어루만졌다. 자신이 때리고 자신이 깊게 쑤셔 놓은 자리를. 겨우 피가 굳어 엉겨 붙은 발바닥의 상처에 그의 손이 닿자 쓰라린 통증이 밀려왔다.

“네가 이해해야 해. 안 그래도 네 히트가 늦어져서 신경이 곤두서 있었단 말이야. 가만히 있어도 널 보면 짜증이 나는데, 이런 짓까지 하면 안 되는 거잖아.”

“…….”

“아무래도 이상해. 왜 이렇게 히트가 안 오지? 너도 이상하지 않아? 여기 올 때까지만 해도 분명히 곧 시작할 것 같은 상태였는데…. 환경이 너무 편해져서 그런가?”

저리고 아린 고통 사이로 긴장감이 다시 파고들었다. 약이 있다는 걸 들키는 것만은 피해야 했다. 시선이 흔들리는 걸 들킬까 봐 고개를 떨구었지만, 그는 손을 들어 올려 내 턱을 붙잡았다. 핥는 듯한 시선이 내 눈과 목덜미를 지나갔다.

“빨리 히트가 시작돼야 너도 쓸데없는 생각 안 들고, 나도 편할 텐데….”

“…….”

“심한 짓은 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이러면 나도 다른 수단을 쓸 수밖에 없어. 더 기다리긴 힘들거든. 이해하지?”

뜻 모를 말을 하며 웃던 이준은 고용인 아주머니에게 구급상자를 가져오도록 했다. 사색이 된 얼굴로 구급상자를 들고 온 그녀는 엉망이 된 내 모습을 보고 더 하얗게 질려 버렸다.

이준은 소꿉장난이라도 하듯 흥겨운 표정으로 그녀가 놓고 간 구급상자를 열었다. 발의 상처에 소독약을 들이붓자, 관통된 상처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며 타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흐으읍…!”

너무도 심한 고통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는 내가 고통에 움찔거리는 것조차 탐탁지 않다는 듯 내 발을 단단히 틀어쥐고 거즈를 대었다.

처치를 마친 뒤, 그는 주머니에서 흰 손수건을 꺼내 제 손을 거칠게 닦았다. 피 묻은 손수건을 구깃구깃 뭉쳐져 방구석으로 내던졌다. 나를 보는 눈에서는 서늘한 광기가 튀어 오르는데 목소리는 은근하고도 살가웠다.

“왜 그런 거야?”

“…….”

“말을 해 봐. 사람이 이상한 일을 할 땐 보통 이유가 있어서 그런 거잖아. 왜 달아나려고 한 거야?”

그가 던진 질문이야말로 아주 이상한 소리였다. 사람을 붙잡아 가두고, 히트가 시작되는 대로 차마 입에 담지 못할 참혹한 짓들을 나에게 저지를 것이라고 말해 놓고는 그 지옥에서 달아나려는 내 행동이 상식 밖이라는 태도였다.

그가 나를 이 자리에서 때려 죽여 버릴 수 있도록 그를 도발하고 반항하고 싶은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지저분하도록 지독하고 질긴 내 마음은 아직도 체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나는 그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을 말을 고민했다.

“어머니가….”

“어머니?”

“어머니가 보고 싶어서요.”

“…….”

“아프시니까, 위독하셨으니까…. 소, 소식이라도 알고 싶어서….”

넋두리 같은 말은 진심이었지만, 한편으로 나는 이준도 사람이라면 그 말에 마음이 약해지지 않을지를 기대했다. 멍청하게도, 나는 그를 너무 얕보았던 거다.

그는 내 말에 눈썹을 크게 들어 올리며 밝은 표정을 지었다. 대단한 자랑거리라도 전하듯 반갑게 입을 열었다.

“아, 소식. 그래. 마침 얘기 잘 꺼냈어. 오늘 그래서 병원에 다녀왔던 거거든. 너한테도 말해 줘야지.”

“…….”

“너희 어머니, 어젯밤에 돌아가셨어.”

이번에도 이준은 아주 평온하고 태연한 목소리였다. 말의 내용과 말투가 조금도 어울리지 않아서 나는 그 말을 곧바로 이해할 수 없었다.

“…네?”

“못 알아들어? 죽었다니까.”

“네? 어, 어머니가…요?”

그는 즐거워하는 것 같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버벅거리는 내가 답답하다는 투였다.

“뭘 그렇게 놀라고 있어? 며칠 못 버틸 상태라는 거 눈치 못 채고 있었나? 설마 이식이니 뭐니, 내가 했던 말들을 다 믿은 건 아니지?”

“…….”

“그건 그냥, 그렇게 말하면 마지막에라도 네가 숙이고 들어오는지 보려고 되는 대로 말해 본 거야.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얘길 진심으로 할 리가 있어? 다 썩은 몸뚱이에 이식은 무슨….”

“왜…. 어머니가 왜….”

나는 모욕적인 말에 모욕감을 느낄 정신조차 없었다. 넋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나에게, 그는 퉁명스레 대답했다.

“왜냐니. 너 때문이잖아.”

“뭐라고요?”

“네 엄마, 너 때문에 죽은 거야.”

“…….”

“그러게 살살 구슬려 줄 때 적당히 넘어오지 그랬어? 네가 되지도 않게 자꾸 튕기니까 나도 조바심이 났다고.”

“…….”

“너같이 고상한 척하는 애들은 꼭 가족을 살릴 수 있다고 하면 뭐든 하겠다고 덤벼들잖아. 안 그래? 네 엄마가 다 죽어 가는데 내가 나타나서 살릴 수 있다고 하면 아무리 너라도 고분고분해지겠지 싶었어. 마지막에라도 얌전하게 굴면 좀 덜 거칠게 다뤄 줄 생각도 있었는데, 네가 그렇게 멍청할 줄은….”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저 깊은 곳으로부터 천천히 치밀어 올라왔다. 깊고 격렬한 감정에 온몸이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이준은 일그러진 내 표정이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런 표정 지을 거 없어. 어차피 내가 손을 안 썼어도 오래는 못 살 사람이었잖아. 길어야 삼 년쯤 앞당긴 거려나?”

“…….”

“오히려 내가 너랑 네 엄마를 도와준 걸 수도 있어. 넌 감당도 못 하던 짐 더미에서 해방된 거고, 그 사람은 오래 고통만 받다 갈 걸 짧게 끝낼 수 있었고. 안 그래?”

저 말은 이준이 어머니의 죽음에 개입했다는 뜻이었다. 간신히 정신을 움켜쥔 채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이… 당신이 그런 거예요? 어머니한테 무슨 짓을 했길래….”

“음…. 간단해. 쓰면 안 되는 약을 쓴 거지. 많이는 아니고, 티가 나지 않을 만큼 조금씩. 이래서 내가 연구를 좋아한다니까. 약이라는 게 참 신기하거든. 사람을 살릴 수도 있는데 또 단숨에 죽여 버릴 수도 있고. 아니면 서서히 말려 죽일 수도 있고….”

끔찍한 일을 자랑거리라도 되는 양 떠들어 대는 모습에 숨이 막혔다. 나는 입만 벌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리스크가 있는 일이긴 했지. 병원에서 치료받던 환자가 죽는다는 게 달가운 일은 아니니까. 그런데 송재훈 그 사람까지 엮어서 보낼 방법이란 얘기에 아버지도 찬성해 주시더라.”

“…….”

“송재훈… 그 은혜도 모르고 키워 준 주인을 무는 개새끼 말이지. 똑똑한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제 목에 칼이 들어온 줄도 모르고 있는 거 같던데. 심지어 눈치 없는 너조차도 처방전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는데 말이야.”

재훈을 헐뜯던 그는 이제 눈을 돌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빈정거렸다.

“네가 뜬금없이 처방전 얘길 했을 때는 좀 뜨끔했는데. 그 뒤로는 또 별말이 없더라고. 서이한 그 새끼랑 붙어먹느라 엄마 일에는 신경 쓸 틈도 없었나 봐?”

“으…읏!”

그 말에 심장을 태우던 불길은 더 거세게 불타올랐다. 내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나는 묶이지 않은 팔을 휘두르며 그에게 다가섰다.

쿵, 있는 힘껏 그의 가슴을 내리쳤지만 그는 스치는 바람만큼도 타격을 입지 않은 듯했다. 기운 빠진 내 몸은 종잇장처럼 휘청거리기만 했다. 그는 허공을 휘적거리는 내 오른팔을 간단히 붙들었다.

“왜 나한테 이래? 너 때문이라고. 모르겠어? 이건 다 네 잘못이야. 네가 날 화나게 만들었잖아.”

말도 안 되는 억지에 할 말을 잃었지만, 그는 오히려 나를 나무라는 태도였다.

“아니, 화가 났다고 할 것까진 없겠네. 그럴 만한 일도 아니니까. 뭐라고 해야 할까…. 네가… 그래. 네가 나를 불쾌하게 만들었어. 말했잖아, 너한테 실망했다고.”

“…….”

“좀 궁금하긴 하네. 왜 하필 서이한이었어? 내가 들여보내 준 학교에서, 내가 제일 경멸하는 그 새끼랑 붙어먹다니…. 그렇게까지 멋대로 굴면 안 되는 거 아닌가? 사람이 눈치가 있어야지. 네가 그런 짓을 하면 내가 불쾌할 거라고는 생각 못 했어? 그게 나한테 얼마나 짜증스러운 일일지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냐고.”

그의 입에서 이한의 이름이 언급될 때마다, 나는 마음의 밑바닥이 휘청거리는 것 같은 분노를 느꼈다. 가장 소중하고 비밀스러운 무언가에 더러움이 묻는 것 같은.

“그래. 사람이니까 흔들릴 수도 있지. 넌 순진한 애니까…. 그래도 너한텐 기회가 있었잖아. 내가 기회를 줬었지. 나한테 그 새끼에 대해서 얘기할 시간이, 충분히 있었다고.”

“…….”

“네가… 네가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 있어? 이런 식으로, 하필이면 내 기분이 제일 더러워지는 방법으로 나를 배신해? 감히 네가…?”

마음속의 분노는 커다란 불기둥을 이루었지만, 내게는 무엇도 태울 것이 없었다. 그저 불타고 불탄 내 마음이 회색 재로 되돌아갈 뿐이었다. 그런 나의 앞에서 이준은 오히려 언성을 높였다.

“한참을 뻣뻣하게 굴다가 이제 겨우 조금 말을 듣는다 싶었는데…. 주인한테 살랑거리는 강아지처럼 날 쳐다봤었잖아, 너. 진흙 구덩이에 있던 너를 알아봐 준 게 나잖아. 널 구원하고, 널 그 구질구질하고 보잘것없는 인생에서 꺼내 주려고 한 유일한 사람이, 바로 나였다고!”

그는 무례한 짓이라도 당한 듯한 태도였다. 길바닥에 나앉을 뻔한 아이에게 좋은 일을 해 주려다 뿌리쳐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진심으로 그가 나에게 마련해 준 ‘자리’가 내가 살아온 삶보다 낫다고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언제고 나를 둘러싼 구렁텅이를 좋아한 적이 없다. 거기서 벗어나는 것만이 나의 목표였고 바람이었다. 그래서였을까. 나조차 나의 삶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이런 식으로 나의 모든 것을 부정당하는 결말을 맞게 된 걸까.

더 슬픈 것은, 이준의 말대로 나는 정말 그가 나의 구원이라고 생각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다 허물어진 나의 마음은 그가 말을 뱉는 대로 조각조각 갈라지고 찢어졌다.

눈시울이 한없이 뜨거워졌다. 피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이라고 생각하던 찰나, 그의 얼굴이 나에게로 깊게 기울어졌다. 뭐라 반응할 틈도 없이 갑작스레 입술이 닿았다.

“으읍…!”

볼을 짓누르는 손가락에 억지로 입이 벌어졌다. 뱀처럼 꿈틀거리는 혀가 내 입술 사이로 기어들어 왔다. 게걸스럽게 빨아들이고 핥는 감각이 축축했다. 구토감과 소름이 숨통을 틀어막는 느낌이었다.

나는 견딜 수 없는 역겨움에 몸서리쳤다. 깊게 뒤엉켰던 입술의 결합이 살짝 가벼워지는 순간, 이를 세워 그의 입술을 물어뜯어 버렸다.

“악…!”

화들짝 나에게서 떨어져 나간 이준은 곧바로 내 뺨을 내리쳤다. 이미 붉게 부어 있던 얼굴이 찢어질 듯 아려 왔다.

“읏….”

“하아, 하…. 이 천박한 새끼가…!”

고통보다 더 괴로운 것은 당장이라도 내 머리를 산산이 터뜨릴 것 같은 분노였다. 그러나 한 손은 수갑에, 한 손은 그의 손에 붙들린 나는 몸부림조차 칠 수 없었다. 그저 그를 노려보는 것밖에는.

“이제 진짜 암캐처럼 입질까지 한다 이거지?”

그는 오히려 이 상황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처음에는 목의 근육이 불뚝 솟을 정도로 이를 악물고 인상을 썼지만, 그의 입가에는 서서히 섬뜩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마침내 입꼬리가 활짝 일어났을 때, 그는 손을 들어 피 맺힌 제 입술을 만지작거렸다.

“그래…. 모처럼 좋은 눈이네. 여기 와서는 내내 인형처럼 맥없이 늘어져 있더니, 이제야 나를 똑바로 볼 생각이 들었나 보지.”

흡족하게 웃던 그는 돌연 내 머리채를 틀어쥐었다. 무자비한 손길에 뒤통수가 아래로 끌어 내려졌다. 턱이 들려 저절로 벌어진 입술 사이를, 그는 조롱하듯 손끝으로 두드렸다.

“가끔은 이런 것도 귀엽긴 한데, 자주 이러면 곤란해. 난 좀 더 얌전한 타입을 좋아하거든.”

“…….”

“왜 이렇게 고집을 피우지? 어려울 것 없다니까. 그 똑똑한 머리로 잘 생각해 봐. 이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하는 게 맞을지.”

“…….”

“모르는 거야, 싫은 거야? 후후…. 그래. 입을 다물고 싶으면 그러던지. 넌 어차피 생각이란 걸 할 필요가 없어. 히트가 시작되면 안달 나는 건 네 쪽이 될 테니까.”

입술이 닿을 듯 말 듯한 곳에서 조롱의 말을 속삭이던 그는 내 머리를 내려놓았다. 주머니에서 또 하나의 손수건을 꺼내어 슥슥, 제 손을 문질러 닦고는 그대로 방을 떠났다.

다시금 방문이 쿵, 닫혔다. 이제 저 문은 실수로라도 열린 채로 방치되는 일이 없을 것이다. 이 방에서 탈출할 유일한 방법이 사라져버린 거다.

애매한 희망이 무너진 것에 좌절할 기운도 없었다. 나는 부들부들 떨면서 침대로 기어 올라갔다. 분노의 대상이 사라지자, 나에게 남은 것은 오로지 슬픔과 절망뿐이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다. 임종조차 지키지 못했다. 위태롭게 삐걱거리면서도 늘 내 삶을 지탱하던 하나의 축이, 기어이 붕괴해 버렸다. 세상의 한 귀퉁이가 쿠웅, 주저앉는 느낌에 하염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흑… 으윽….”

뺨을 훔치려고 손을 드는 순간, 철컹이는 쇠사슬 소리가 귀를 긁었다. 나는 황망한 표정으로 구속된 나의 손목과, 단단히 잠긴 쇠사슬 끝의 자물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가슴 깊이 후회했다. 나는 조금 전의 그 절벽에서 뛰어내려 내 삶을 끝내 버렸어야 했다.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좋은 선택이라는 걸 왜 몰랐을까.

나는 늘 내가 희망을 믿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그건 기만적인 자조에 불과했다. 또 그 미련하고 잔인한 희망에 매달리느라, 나는 다시 스스로를 더욱 잔인한 궁지로 밀어 넣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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