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10 : 함정(1)
병원으로 뛰어들어온 후 몹시 많은 말들을 들었지만 마음속까지 와닿는 것은 없었다. 어머니가 의식이 없는 상태로 중환자실에 있다는 말만 확실히 이해했을 뿐, 나머지는 귀에서 윙윙 울리다가 머릿속에서 스르륵 빠져나가 버리는 느낌이었다.
‘골든 타임이란 게 있습니다. 의식을 잃은 후에 곧바로 병원에 왔으면 좋았을걸, 안타깝네요.’
‘깨어날 가능성이요? 전혀 없는 건 아니긴 하죠. 그런데 깨어나더라도 한동안은 중환자실에 있어야 할 거고, 편마비가 올 수도 있어요.’
‘혈압이 너무 낮아서 24시간 투석 진행하고 있어요. 언제 일반 투석으로 전환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네요. 수치가 너무 안 좋아서.’
‘이거요? 연명 치료 거부 동의서요. 무의미한 연명 치료를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쓰시는 거예요.’
‘네. 보통은 다들 하세요. 치료비 문제도 있잖으니까.’
‘혹시 아버지는 어디 계세요? 아…. 그럼 학생 말고 다른 자녀분은 없어요? 할머니, 할아버지도 안 계시고…. 곤란하네. 직계 친족 두 명이 필요한데….’
‘김 선생님, 이 환자분 DNR 동의권자가 한 명뿐인데요. 이런 케이스는 Full code로 보내야 하나요? 환자분이 수급자라 비용 문제가 만만치 않을 거 같은데.’
‘학생. 일단 여기 서명해 주세요. 빨리요. 참, 나중에 원무과에서 정산하기 전에 수급자라고 말해 주세요. 부끄럽다고 얼버무리지 말고 꼭 얘기해야 해요.’
중환자실 면회는 하루에 두 번씩만 가능하다고 했다. 면회 시간을 기다리는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쥐어뜯고 깨물어 댄 손톱 주변에 벌겋게 피가 맺혔다. 그때는 쓰러진 엄마를 눈으로 확인하지 못해서인지, 미칠 듯한 초조함 이외의 다른 감정이 느껴지지 않았다.
아주 멍청하게도, 나는 내가 들은 말들이 현실이 아닐 수도 있다고 기대했다. 아니면 적어도 들은 말처럼 심각한 상황이 아닐 수도 있다고. 기다리던 면회 시간, 굳게 닫혀 있던 유리문이 열리고 병상에 누운 어머니의 모습을 눈으로 보기 전까지는.
‘아….’
어머니는 나를 보고 있지 않았다. 감은 두 눈은 천장을 향해 있었고, 어제까지만 해도 다정하게 나를 배웅하던 손은 침대 위로 축 늘어져 있었다. 살갗은 생기라고는 한 점 없이 거무죽죽했다.
코와 입, 팔과 다리에 거미줄 같은 관이 꽂혀 있는 것은 오히려 무섭지 않게 느껴졌다. 그 무심한 관들만이, 그녀가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을 나에게 알려 주고 있었기 때문에.
30여 분의 면회 시간 동안 나는 눈을 감은 어머니에게 어떠한 말을 건네지도, 그녀를 만져 보지도 못했다. 다시 대기실로 나와서야 뒤늦게 밀려드는 감정에 몸서리쳤다.
생사의 경계에 서 있을 어머니에 대한 안쓰러움, 그녀를 방치해 버렸다는 미안함, 정말로 가족을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감. 복잡하게 똘똘 뭉친 감정들은 금방이라도 나를 집어삼킬 것 같았다. 눈물을 뚝뚝 떨구고 있다가, 또 갑자기 퍼뜩 현실감이 들었다.
‘병원비… 병원비는 어쩌지. 더 빚을 낼 방법도 없는데….’
냉혹한 현실에 잠시 감정의 물결마저 잦아들었다. 상황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여태까지 생긴 병원비만 해도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금액일 게 분명했다.
일이 잘 풀리더라도 어머니는 긴 시간을 중환자실과 집중치료실을 오가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해서라도 어머니를 살릴 수 있다면 다행이겠지만, 비용에 관해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곧 과외 아르바이트에 가야 하는 시간이었지만, 몸이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병원비에 보탬이 되려면 당장 일어나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렇게 발버둥 쳐봤자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아 무력해졌다.
더구나 잠깐이라도 어머니 곁을 떠나는 게 무서웠다. 내가 여기 있어 봤자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건 잘 알지만, 그녀의 곁을 떠나 있는 사이 이런 일이 생겨 버렸다는 생각에 병원 밖을 나서는 게 내키지 않았다.
“윤오야.”
갈피를 잡지 못하고 대기실 의자에 몸을 웅크리고 있을 때였다. 귀에 익은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느샌가 다가온 이준이 내가 앉은 의자 앞에 서 있었다. “선생님.” 그를 부르는 나의 한 마디는 잔뜩 갈라져 있었다.
“왜 여기서 이러고 있어?”
“선생님, 저, 저…. 어머니가….”
지금의 상황을 말로 표현하려 하자, 눌러 놓았던 감정들이 말보다도 먼저 꿈틀거렸다. 울지 않으려고 이를 악무느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래. 들었어. 많이 놀랐지?”
“…….”
“…할 얘기가 있어. 여기선 좀 그런데. 잠깐 자리 옮길 수 있을까?”
그는 평소보다도 더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나를 쓰다듬었다. 거기에 위로를 받으면서도, 나는 내가 붙잡을 수 있는 마지막 구명줄이 바로 이준이 될 거라는 걸 직감했다.
그래서, 그의 뒤를 따라 병원 위층으로 올라가는 마음이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그게 어떤 제안을 하더라도 내가 거부할 수 없을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이준은 나를 VIP 대기실로 안내했다. 그곳의 공기는 고요하고 따스했다. 잔잔한 음악이 흘러나오고, 가구와 샹들리에는 고급스럽게 반짝였다.
그가 누군가를 호출하자, 정장을 입은 사람이 따스하고 향긋한 차를 가져왔다. 아비규환이 펼쳐지고 있는 아래층과는 사뭇 다른, 우아하기까지 한 분위기였다.
어머니가 쓰러진 이후로, 나는 가난에 대해 더 잘 알게 되었다. 아프고 죽는 문제는 부자이든 가난한 사람이든 누구에게나 똑같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누군가의 죽음은 좀 더 처참하고, 누군가에게는 더 많은 기회와 존엄이 제공되었다.
“차 좀 마셔. 추워 보인다.”
이준은 덜덜 떨고 있는 나에게 차를 권했다. 그는 눈썹 끝을 살짝 늘어뜨리고 차를 삼키는 나를 응시했다. 호들갑스레 나를 동정하지도, 섣부르게 나를 향한 제 감정을 드러내지도 않는 눈이었다. 어쩐지 얼굴을 마주치는 게 힘들어서 찻잔만 만지작거렸다.
“신 선생님한테서 어머니 일은 들었어. 상황이 좋지는 않은 것 같더라.”
“…….”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야. 깨어나실 가능성이 있다고 하니까. 중환자실에 한참 계셔야 하지만, 견뎌 내실 수 있을 거야.”
그는 같은 의미의 말을 조금 더 희망적으로 들리게끔 표현하는 능력이 있었다. 마음이 채 누그러지기도 전에, 그는 곧이어 무거운 얘길 꺼냈다. 나를 살짝 들어 올렸다가 더 깊은 곳으로 끌어 내리기라도 하려는 것처럼.
“문제는… 치료비일 것 같은데. 치료 기간이 얼마나 길어질지 알 수 없으니까. 퇴원 후에도 한동안은 간병이 필요할 거고.”
“…….”
“신 선생님 말씀으로는 문제가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않는 이상은 언젠가 같은 일이 반복될 수도 있대. 비용 문제는 앞으로 더 커질 수도 있다고 걱정하시던데.”
“…선생님. 하고 싶은 말씀이 뭐예요?”
그가 조곤조곤 짚어 주는 것들은, 이미 나도 걱정하고 있던 문제들이었다. 그렇지만 다른 사람의 목소리를 빌려 들으니 답이 없는 상황이라는 게 더욱더 실감 나는 것 같았다.
날카로워진 마음이 그대로 목소리로 드러났다. 그의 말을 자르고 들어간 나의 질문에, 그는 뜻밖이라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유쾌한 기분은 아닌지 그의 미간이 딱딱하게 경직되어 있었다. 내 말에 놀란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죄, 죄송해요…. 다른 뜻은 아니라….”
우물우물 움츠러드는 태도를 보인 후에야 그는 굳었던 표정을 풀었다. 곱고 매끈한 손이 테이블을 건너와 나의 두 손을 다정하게 붙잡았다.
“알아.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넌 지금 도움이 필요한 상태라는 거야. 그건 너도 알지?”
“…….”
“그래…. 너무 걱정할 거 없어. 내가 널 도와줄 수 있으니까. 병원비 문제도 그렇고, 앞으로 어머니의 치료나, 간병 문제도.”
여기까지는 솔직히, 내가 예상했던 제안이었다. 그러나 그는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내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했다.
“그리고, 윤오야. 어머니가 회복하시고 나면 곧바로 이식 수술을 받으실 수 있게 준비하는 것도 가능해.”
“이식은, 대기 순서가….”
“그거 말고도 기증자를 연결할 방법은 얼마든지 있거든. 비용도 많이 들고 합법적인 것도 아니라서 그렇지.”
“…….”
“내가 다 준비해 줄 수 있어. 네가, 원하기만 하면.”
믿기 힘들 정도로 솔깃한 이야기였다. 어머니의 투병이 시작된 날부터 이식 수술이 필요하다는 말을 계속 들어왔으니까.
나는 강렬한 유혹과 함께 데자뷔를 느꼈다. 수능을 보지 못한 나에게 이준이 진학을 도와주겠다고 말했을 때도 꼭 지금과 같았다.
절망하고 있는 나에게 이준이 다가와, 도저히 불가능하게 들리는 일을 아무렇지도 해 주겠다고 말하는 상황. 믿기 힘들 정도로 자애로운 표정으로 나를 내려다보는 이준의 모습과, 그 앞에 작고도 무력해지는 나의 기분까지도 그때 그대로였다.
그때는 믿기 힘들 정도로 놀랍고도 기뻤지만, 사실 그 제안은 내가 받아들여서는 안 되는 것이었는지 모른다. 대학에 다니지 않았다면 오메가가 되는 것만은 피할 수 있었을지 모르니까.
등 뒤에 절벽을 둔 상황인데도, 나는 주춤주춤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었다. 이번은 어떨지 알 수 없어서. 이 요행을 받아들이는 것이 나에게 인생을 되돌릴 기회일지, 아니면 또 다른 파국으로 이어지는 함정일지 모르겠다는 두려운 마음에.
“선생님이 원하시는 건 뭔데요?”
“…….”
“아, 그, 그러니까, 제 말은….”
그러고는 또다시 내가 뱉어 놓은 말에 스스로 당황했다. 흥정을 하는 말처럼, 그를 깔보는 말처럼 들렸을까 봐 걱정되었다.
나를 살릴 수도, 절벽 앞에 내버려 두고 떠나 버릴 수도 있는 남자의 비위를 거스르는 건 어리석은 일이다. 다시 할 말을 고르느라 쩔쩔매는 나를 보며 그는 여유 있게 웃었다.
“그래. 중요한 얘기야. 내가 아무것도 바라지 않고 그런 일까지 감수할 리는 없으니까. 역시 윤오는 똑똑해.”
“…….”
“바라는 거… 맞아, 물론 있지.”
내 손 위에 겹쳐진 그의 손이 가만가만 손등을 쓰다듬었다. 매끄러운 손끝이 손등 위와 손목의 뼈, 손가락이 시작되는 틈새를 간지럽히듯 지나갔다.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입술을 뗀 그는 아주 이상한 말을 했다.
“네가 내 아이를 낳아 줬으면 좋겠어.”
지극히 일상적이고 평온한 말투였다. 귀담아듣지 않으면 점심 메뉴를 고르거나, 날씨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고 착각해 버릴 정도로. 뜬금없는 이야기에 처음엔 그가 농담을 했다고 생각했다. 상황에 맞지 않게 웃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그의 표정은 진심을 띄고 있었다.
갈 곳을 잃고 질려 버린 나는 찬찬히 그의 말을 다시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는 말은 아니었다. 부탁을 할 만한 문제도 아니고, 상대가 고교 시절 공부를 가르쳐 주던 남자애라면 더더욱 기묘한 말이었다.
그러나 전혀 불가능한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오메가니까. 지금도 내 아랫배 어딘가에는 아이를 품어 낳을 수 있는 자리가 무르익어 가고 있을 테니까.
그런 현실성이 더 오싹하게 느껴져서, 나는 어깨를 작게 떨었다. 나도 모르게 그의 말을 덜 거부감 드는 문장으로 바꾸어 되물었다.
“결혼하자는… 말씀이신가요?”
“뭐, 결국은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이준은 내 손을 만지작거리며 빙글빙글 웃었다.
“우리 집 사정 얘기했던 거, 기억하지? 정혼자가 있다는 것도. 지금 상황이 좋지는 않아. 너한테 말해 줬을 때보다 더 나빠졌다고 해야 하나…. 일이 좀 있었거든. 혼담을 무르려고 하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상대방 집 쪽에서 언짢아하고 있다는 얘기가 들려와서 말이야.”
“…….”
“사실… 혼담이 있던 그 사람이 조건만 보면 나한테는 과분한 상대거든. 집안도 그쪽이 우리보다 여러모로 수준이 높다고 해야 하나…. 그래도 집안 어른들을 겨우 설득시킨 참이었는데 일이 복잡해졌어. 어른들은 내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그런 집안이랑 척을 지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시는 거 같아. 어차피 그분들한테 결혼은 가문의 문제니까.”
“…….”
“할아버지가 다시 마음을 바꾸려고 하시고 있어. 당장 결혼 날짜를 잡으라고 펄펄 뛰시는데…. 이대로 가다간 두어 달 뒤에 그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 상황이야. 하…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결혼이라니…. 너도 내가 그런 일을 당하는 건 원하지 않잖아. 그렇지?”
아무 대답도 못 하고 멍하니 있는 사이, 그의 설득은 계속되었다. 확신에 찬 이준의 목소리는 전에 없이 집요했다.
“너도 나와 함께하는 편이 나을 거야. 더구나 이런 상황에서는. 네가 지금 얼마나 힘든 상황인지, 내가 너한테 뭘 해 줄 수 있는지는 지난번에 충분히 설명해 줬잖아. 윤오는 똑똑하니까, 제대로 알아들은 거 맞지?”
“…….”
“우리는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너도 내가 싫지 않다는 거고, 같이 지내는 동안에는 언제나 날 잘 따라 줬었잖아. 당장은 날 사랑한다는 실감이 들지 않더라도, 조금만 마음을 열어 주면 너도 날 좋아하게 될 거라고 생각해.”
“선생님….”
“난 널 처음 만났을 때부터 늘 이렇게 하고 싶었고. 네가 있을 자리도 준비했어.”
“선생님. 저는….”
입술도 손바닥도 바싹 메말랐다. 거절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도저히 당장 그러겠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왜. 이번에도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야?”
그 말이 무겁게 느껴졌다. 며칠 전에도 그의 질문 앞에 대답할 시간을 유예받았던 탓일까. 나는 이준의 기분을 거스르지 않을 만한 조용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장 대답을 내놓으라고 하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그는 이번에도 순순히 납득해 주었다.
“그래. 이 자리에서 바로 결정할 만한 일이 아니긴 하지.”
“…….”
“지난번에도 말했지만, 너무 늦지 않게 대답해 줘. 난 그때부터 쭉 기다리고 있는 셈이니까.”
그러나 단호하게 덧붙이는 말은 잊지 않았다. 덫의 경계를 선명히 하는 듯한 말이었다. 딱 얼어붙기 직전까지만 냉한 빛으로 나를 쏘아보다가, 내가 미안한 표정을 짓자 생긋 미소를 지어 보였다.
“자, 오늘 내가 해야 할 얘긴 다 끝난 거 같은데. 윤오 너는 할 말 없어?”
묻고 싶은 말이 많은데도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 괜찮아요.”
“그래. 어머니 면회 기다리는 중이었나? 아, 오전 타임은 지나간 것 같네. 다음 면회는 저녁이지? 집에 갈 거야? 바래다줄까?”
“아뇨, 병원에 있으려고요.”
“그래? 왜? 불편할 텐데…. 아, 어머니가 걱정되어서 그런가 보구나. 그럼 여기 있을래? 이 정도면 그럭저럭 지낼 만할 거야. 저 안쪽에 눈 붙일 공간이랑 씻을 곳도 있거든. 차 한 잔 더 내 오라고 할까? 이따 식사도 가져다 달라고 부탁드리고.”
“아뇨, 저, 그냥 아까 아래층 대기실에 있을게요.”
“…….”
“여, 여기 있기 왠지 죄송스러워서요. 그쪽이 어머니랑 더 가깝기도 하고….”
그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더 크게 미소 지었다.
“그래. 윤오는 여전하구나.”
그는 나의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말을 남기고 돌아갔다. 깊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마치고, 나는 터덜터덜 1층으로 돌아갔다.
삼키기 힘든 고민을 품은 채로, 딱딱하고 차가운 중환자실 대기 의자에 앉았다. 꿈이라면 빨리 깨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무감각해진 내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제 아이를 낳아 달라니. 그가 나한테 그런 제안을 했다는 사실 자체를 믿기 어려웠다.
그러나 모르는 척한다고 해서 바뀌는 것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라는 걸, 도망칠 수만은 없다는 걸 마음 깊은 곳에서는 느끼고 있었다.
‘선택…. 나한테 선택권이 있나…?’
사실, 해야 하는 결정은 뻔했다. 답은 이미 정해져 있고, 나는 잠시 고민하는 시늉이라도 하고 싶어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는지도 모른다.
나를 비웃던 사람들의 말대로 어울리지 않게 고상을 떨고 싶었던 건지, 그 많은 일을 겪고도 미적거리는 버릇을 버리지 못한 건지.
어차피 그의 말을 받아들이는 것 말고는 이 상황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에 무언가가 맺힌 것처럼 결정이 내려지지 않았다. 명치에 뭉친 그것이 무엇인지 선명하게 알아차리는 순간 모든 걸 돌이킬 수 없게 될 것 같았다.
‘이럴 때가 아니야. 당장 아르바이트는 어쩌지….’
나는 감정을 묻어 두고 당장 정리해야 할 일부터 생각했다. 어차피 당분간은 제대로 일 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에 아르바이트하던 곳들에 하나하나 전화를 걸었다.
아르바이트를 그만두겠다는 말에, 당연히 책망의 말들이 이어졌다. 불필요한 걱정을 받는 것보단 차라리 익숙한 비난을 받는 게 마음 편해서 자세한 이유는 말하지 않았다.
막 핸드폰을 집어넣으려던 차에, 메시지 알림이 울었다. 이한의 연락이었다. 할 말이 있으니 만나자는 말이 언뜻 보여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궁금했지만, 궁금해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무슨 말을 듣든 아무 의미 없을 것이다. 차라리 듣지 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답장하지 않았는데도, 그는 나의 뒤를 쫓듯 계속 연락을 보내 왔다.
‘아… 왜 하필 이럴 때….’
처음 만났을 때, 가느다란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던 나에게 그는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며 매몰차게 굴었었다. 그런 그가 지금에 와서는 왜, 꼭 이런 순간에 나를 봐야겠다는 걸까.
원망스러운데도 마음이 흔들렸다. 그의 말이 아니라도, 나는 아까부터 자꾸 그의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무심하고 건조한, 곧고 반듯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그를.
‘보고 싶긴… 하지만.’
무심결에 떠올린 문장을 중얼거리다가, 소스라쳐 고개를 저었다. 지금 그를 생각할 이유가 없었다. 생각해서는 안 되었다. 어머니가 의식을 잃어 가는 순간,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었다. 지금 내가 이한을 보고 싶어 한다는 건 너무도 뻔뻔스러운 일이다.
더구나 이준의 말을 받아들인다면 앞으로 이한을 볼 수 없게 될 거다. 이준의 이야기가 화제에 오를 때마다 그는 격렬하게 화를 냈었다. 내가 이준의 곁에 있기로, 심지어 그의 아이까지 낳기로 한다면 그는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
‘…경멸당하겠지, 분명히.’
목이 말라 죽어 버릴 듯한 초조함 속에서 어머니의 다음 면회 시간만 기다렸다. 그러나 정작 면회 시간에도 어머니를 볼 수는 없었다. 집중치료실에서 투석이 진행된다는 이유로 면회가 허락되지 않았다.
차도가 있는지를 물었지만 그다지 달라진 점이 없다는 대답만 돌아왔다. 변한 것이 없는데도, 나는 새삼스레 절벽으로 한 걸음 더 떠밀린 것처럼 막막해졌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기분에 차고 눅눅한 대기실의 한구석에서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나를 밟고 지나갔다. 나는 끔찍할 정도로 거대한 생각들에 짓눌려 있었다. 그 무겁고 무서운 생각들은 내가 결정을 내릴 때까지 계속 부풀어 오르고 단단해질 작정인 것 같았다.
‘이식 수술 받게 해 준다는 말, 진짜일까.’
이준이 치료비 남짓이나 쥐여 주고 비슷한 요구를 했다고 해도, 나는 그의 말을 받아들일지를 진지하게 고민했을 것이다.
그러나 보여 준 패는 내 예상보다도 훨씬 좋았다. 진위를 의심스럽게 할 정도로 굉장한 제안이었다. 불법적인 수를 써서라도 어머니의 이식 대기 순서를 당길 수만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여러 번이다. 아마도 이준은 그런 일을 저지를 만한 힘이 있을 거다.
‘차라리 운이 좋은 걸지도…. 이런 밑바닥 인생을 가져가는 값치고는 후하게 쳐 준 거니까.’
나는 좋게 생각해 보려고 노력했다. 어쩌면 오메가로 발현할 때부터 나는 이렇게 될 운명이었는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이 기괴해진 몸뚱이를 필요로 한다면 필요대로 쓰이는 편이 나은 일일 거다. 더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미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이준의 말이니까.
그의 마음이 바뀌기 전에, 지금이라도 당장 전화를 걸어 그런 말을 해 주어 고맙다고, 그의 뜻대로 따르겠다고 말하는 게 맞다. 어머니를 살리고 나도 살 방법은 그것뿐이었다.
그의 말대로 나는 늘 그를 의지했고, 그가 싫은 것도 아니다. 알량한 감정이 뭐가 문제일까. 그가 마음을 열기를 바란다면 마음을 열면 되는 거고, 그를 사랑하기를 바란다면 사랑하도록 노력하면 그만이다.
무거운 생각에 눌려 납작해진 나는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 버렸다. 새벽이 밝아 오는 게 두려웠다. 다시 떠오른 아침 해가 나를 비추는 게 부끄러워서. 마음속 끝의 끝까지 떠밀린 후에야 결정을 내렸다.
이준의 말을, 받아들이겠다고.
하루를 시작할 시간이었다. 나는 대기실에 딸린 작은 화장실에서 얼굴을 씻었다. 거울 안의 내 모습이 초라했다. 안색은 어둡고, 머리며 옷매무새도 엉망이었다.
우울감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다. 이럴 때 감상에 젖거나 자신을 동정하는 것은 아무 의미도 없다. 그저 모든 걸 더 비참하게 만들 뿐이다.
다행히도, 나는 무감해지는 일에 익숙했다. 내 기분을, 마음속의 목소리를 무시하는 일은 내 특기나 다름없었다. 우선은 이준에게 나의 결정을 알려야 했다. 핸드폰을 들고,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선생님.”
통화연결음이 끝난 뒤에 짧은 정적이 유독 묵직했다. 나는 꿈에서 깨어나듯 이준을 불렀다. 그는 즐겁게 들릴 정도로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윤오야.]
“저, 선생님께 할 말이 있어요.”
[그래. 좋은 소식이겠지?]
그에게는, 이게 좋은 소식일까. 나도 그렇게 생각해 보려 했다. 어차피 그를 따르기로 했다면 좋은 소식이라고 생각하는 게 나에게도 좋은 일이다. 서둘러 대답하려 했지만 어쩐지 말이 목에 걸려서 말이 느릿해졌다. 억지로 억지로, 나는 대답했다.
“…네.”
[다행이네. 학교는 어떻게 할 거야?]
“그만둘게요. 오늘이라도.”
[그래. 그게 좋겠다. 결정해 줘서 고마워. 내가 오후에 병원으로 갈게. 그때 더 자세히 얘기하자.]
“네. 선생님. 기다릴게요.”
할 수 있는 최대한 순종적으로 대답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자괴감이 끼어들 틈이 없도록, 머릿속 가득 앞으로 할 일에 대해서만 골몰했다.
오전 면회가 끝나면 학교에 가서 자퇴서를 내고 집에 다녀와야지, 청소도 하고 짐도 챙겨야 하니까. 자퇴서는 어디에 내면 될까, 다른 절차는 필요 없을까, 집을 정리하고 돌아오면 몇 시쯤이 될까, 하고.
이준에게 해야 할 말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그동안 머뭇거리는 모습으로 그를 언짢게 했으니, 이왕 그를 따르기로 했다면 밝게 웃으며 받아들이는 게 좋을 것이다. 거울을 보며 웃는 표정도 연습했지만, 표정은 어색하기만 했다. 애교도 주변머리도 없는 자신이 한심했다.
‘엄마. 다 잘될 거예요.’
오전 면회 시간에는 다행히 어머니의 얼굴을 볼 수 있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말없이 누워 있을 뿐이었다. 그녀에게 아무 말도 건네지 못하는 것은 나도 마찬가지였다.
마음속으로는 덧없는 희망을 읊조렸지만, 그게 진실인지도 진심인지도 알 수 없어서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다시 대기실로 돌아와 의자에 놓아둔 백팩을 집어 들었다. 몇 년째 들고 다니는 싸구려 백팩은 내 소지품 중에서도 유난히 낡고 초라한 물건이었다. 어머니는 이걸 볼 때마다 대학 입학할 때 가방이라도 새로 사 줬어야 했는데, 하고 안타까워하곤 했다.
억지로 들어간 학교를 이렇게 금방 그만둘 줄 알았다면, 어머니도 새 가방을 사지 않길 잘한 일이었다고 하실까. 아니면 그저 날 가여워하실까.
불필요한 감상을 묻기 위해 학교로 향하기 위해 막 걸음을 디뎠을 때였다. 다시 핸드폰 알람이 울었다. 이한의 문자였다.
[나 지금 병원 주차장에 있어. 미안해. 꼭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올 때까지 기다릴게. 계속 기다릴 테니까, 늦게라도 꼭 와줘.]
겨우 가라앉혔던 마음에 일렁일렁 물결이 일었다. 감정을 추스르려 애썼지만 말을 듣지 않았다. 핸드폰만 움켜쥔 채로 그 자리에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여전히 그가 보고 싶었고, 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서 달아나고 싶기도 했지만, 지금이 아니면 못 볼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보고 싶은 마음이 앞설 수밖에 없었다. 보고 싶고, 봐야 했다.
병동 밖으로 나가 몇 걸음을 걷기도 전에 그가 나에게 다가왔다. 그 애답지 않게 순하게 가라앉은 눈이 나를 응시했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망설이는데 그 애는 생각지도 않던 한마디를 던졌다.
“밥은 먹었어?”
그러고 보니 어제는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 이준과 이야기할 때 마신 차 한 모금이 전부였다. 구역질 나는 현기증이 마음의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허기에 지친 탓일지도 모른다.
그의 질문에 왈칵 설움이 밀려드는 걸 보면, 나는 저 아이의 끼니 타박을 꽤나 좋아했던 것 같다. 늘 무섭고 버겁다며 투덜거렸지만 거기에 마음 한 조각을 기대고 있던 모양이다.
“넌 계속 병원에 있었던 거야? 잠은 제대로 잤어? 잠깐씩이라도 눈 붙여야지. 큰일 나면 어쩌려고. 뭐 필요한 건 없어? 가져다줄까?”
다그치는 말투지만, 저것이 다정한 질문임을 나는 안다. 서툰 다정함이 태풍처럼, 태풍을 타고 날아오는 비수처럼 나를 때렸다. 그는 늘 저렇게 사나운 목소리였다. 예전에 언젠가는, 그가 조금만이라도 다정하게 굴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 있었다.
제 마음 하나 어쩌지를 못하는 주제에, 그게 얼마나 어리석은 바람이었는지. 나를 밀어내려던 그의 첫 태도가 맞는 거였다. 그가 늘 나에게 따스했다면 나는 벌써 다 무너졌을 것이다. 다 녹아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을지 모른다.
지금도, 마음을 다 굳혔다고 생각한 이 순간조차도 나는 흐물흐물 무너져내릴 것 같았다. 동요를 들키지 않으려 냉정하게 대꾸했다. 그는 당황한 듯 주춤거리다가, 전에 없이 기죽은 목소리로 그랬다.
“미안해. 정말로…. 나 때문이잖아, 이게 다. 내가 그냥… 널 보내 줬으면, 이럴 일도….”
“…별로. 네 잘못이라곤 생각 안 해. 네 집에서 바로 나오지 않은 건 내 의지도 있었으니까. 너 때문이 아니야. 나 때문이지.”
그 말은 오기도 배려도 아닌 그냥 진심이었다. 그날 새벽의 어느 순간, 나는 생각했었다. 일어날 수 있다고,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그러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고 그대로 그의 품 안에 누워 있었다.
거기 있는 게 좋아서. 다 물어뜯겨 너덜너덜해진 채로도 살을 맞댄 채로 함께 누워 있는 게 어쩐지 편안해서, 더 오래, 할 수 있다면 언제까지나 거기 푹 잠겨 있고 싶어서.
그가 보내 주지 않아 못 갔던 게 아니라, 내가 가지 않은 거였다. 결국 이 모든 지옥도는 나 때문이다. 나 하나 굴러떨어지면 될 것을 어머니의 생명까지 위태롭게 만들었다.
“서이준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 넌 걜 믿고 있겠지만, 그 새끼는 네가 생각하는 거랑 전혀 다른 사람이야.”
미안하다는 말이 용건의 전부가 아니었는지, 그 애는 주저하면서도 이준에 대한 말을 이어 나갔다. 그 말이 달갑지 않았다. 간신히 움켜쥐고 있던 기분이 다시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드물게도, 나는 내 감정의 색깔을 바로 구분해 냈다. 그건 분노였다. 분노의 이유도 알 수 있었다. 이한이 터무니없는 말로 내가 믿는 사람을 헐뜯고 있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라서. 나도 혼자 생각하던, 찜찜해하고 있던 의문을 그가 건드렸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깜깜하고 막막했다. 언제부터인가 이준을 볼 때마다 마음이 편치 않고 떠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의 상황 때문에 생긴 자격지심인지, 그가 정말 나를 어디론가 내몰고 있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이한이 괜한 말을 한 게 아닌데도, 나는 괜스레 가시를 세워 쏘아붙였다.
“알아. 선생님이 내가 옛날에 생각했던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믿을 수 있는 말만 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 그치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내 귀로 듣기에도 내가 뱉은 말이 엉성했다. 나는 제가 구르게 될 곳이 어떤 진흙밭인지도 제대로 확인해 보지 않고 몸을 내던지겠다는 멍청이였다.
그가 화를 내는 것도 당연했다. 진심이냐고, 그는 언성을 높여 물었다. 그가 나에게 소리를 지른 것은 자주 있던 일이지만, 어느 순간도 지금처럼 비참하지는 않았다. 비참한 만큼 더욱 분노가 치밀어 올라서 나는 도리어 싸늘하게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든 말든, 믿든 안 믿든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홀로 다시 한 가지 사실을 마음에 새겼다. 그와 나는 이제, 서로가 무엇을 하든 신경 쓸 필요도 없고 신경 써서도 안 되는 사이가 된다는 걸.
그런 것에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어머니의 생명이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나는 이제 여태까지 생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가야 하고, 그게 온전한 자의에 따른 선택인지도 분명하지 않았다.
고작 알게 된 지 한 달 남짓 된 동기 남자아이를 못 보게 되는 것 따위는, 나에게 아무 일도 아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 이한의 앞에, 다시 못 볼 사람 앞에 서 있는 게 너무도 괴로웠다. 무력해진 땅바닥이 결국은 모래알처럼 파스스 무너져내렸다. 나는 그렇게 갈라진 틈으로 굴러떨어졌다. 잔인한 틈바구니가 나를 잘근잘근 짓씹고 으깨 버리는 것 같았다.
이렇게까지 괴로울 이유가 무엇일까. 어설프게나마 그와 몸을 섞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미안하다’라는 이한의 말처럼 그에 대한 원망이 남아 있기 때문일까. 혹시, 어쩌면….
‘…어차피 이유가 뭐가 중요해.’
다른 무엇이 어떻든, 지금 나에게 선택지는 하나뿐이었다. 해야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다른 방법이 있으면 네가 말해 보던가.”
그렇게 위악을 부리면서, 나는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내 안에 남은 것이 무엇이든, 이한과 나의 기이했던 인연은 이제 끝이라고.
조금이라도 좋은 표정을 지어 보려고 했지만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다시 보지 않겠다고 말하는 게 너무 힘들어서 다른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목소리가 떨렸는지, 떨리지 않았는지.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들켰는지, 들키지 않았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동안 고마웠어, 정말로. 너한테는 늘 고마웠어. 그럼… 안녕.”
돌아서서 걸어 나오면서, 그가 나를 붙잡지 않을지를 걱정했다. 어쩌면 걱정이 아니라 기대였는지 모른다. 그가 몇 번이나 나를 헤어나올 수 없는 궁지에서 구해 주었던 것처럼, 다시 구원해 주기를.
그러나, 그 애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여태까지 나의 투정을 받아 준 것만도 너무 고마운 일이었다. 나를 아껴 주는 마음에 기대어서, 길고도 처절한 민폐를 끼쳐 버렸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괜한 화풀이였다는 게 미안했다.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애가 나의 뒷모습을 보지 못할 병원 밖까지 걸어 나온 후에야, 나는 힘겨운 걸음을 멈출 수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땅을 딛고 서서, 괜히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보았다.
‘울지 말자. 울면 더 힘들어. 제발, 제발….’
자칫 고개를 숙였다간 눈 안 가득 고여 든 눈물이 아래로 떨어질 것 같았다. 한 방울이라도 눈물을 떨구었다간 둑이 무너진 것처럼 그대로 주저앉아 오열하게 될까 봐, 해일처럼 몰아치는 격렬한 슬픔이 나를 뒤덮어 버릴까 봐 두려웠다. 슬퍼할 자격도 없는 주제에, 염치도 없이.
몸을 움직여 할 일이 있다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나는 울컥울컥 차오르는 무언가를 삼키며 그길로 학교로 향했다.
커다란 정문 밑을 지나는 순간, 어쩔 수 없이 묘한 감상이 들었다. 다시 이곳에 올 수 있을까, 아쉬움 비슷한 질문을 떠올리다 지워 버렸다. 애초에 내 힘으로, 정상적인 방법으로 들어간 곳도 아니었다. 나에게는 맞지 않는 옷이었다.
진학을 꿈꿀 때 품었던, ‘나도 노력하면 언젠가는 평범하게라도 살 수 있을 거다’라는 희망이 안쓰러울 뿐이다.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악착같이 그곳에 붙어 있던 것도 그런 기대 때문이었지만, 이제 와서 생각하면 다 소용없는 몸부림이었다.
‘…마지막 날에야 겨우 여기가 편해 보이네.’
늘 오던 학과 건물이 낯설게 느껴졌다. 누군가와 마주칠까 봐 초조해하지 않고 와 본 게 처음이라서일까. 헛된 희망만큼이나 그 시절의 공포도 헛되게 느껴져서, 쓴웃음을 지었다.
행정실에서 절차를 확인하고, 자퇴서를 받아 지도 교수님의 사무실로 갔다. 난생처음 보는 교수님은 내가 내민 종이를 보고 왜 학교를 그만두는지를 물었다.
달리 할 말이 없어 형편이 어려워서요, 하고 대답했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더 이상의 질문 없이 도장을 찍어 주었다.
서류 한 장을 제출하자 허무한 끝이었다. 이곳에 남기 위해 버티는 시간은 그토록 길고 고단했지만, 놓아 버리는 것은 생각보다 간단했다. 집에 가기 위해 걸음을 돌리는데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늘 나를 가위눌리게 하던 가볍고 서늘한 소리.
“한윤오.”
고개를 돌리니 김하민이 있었다. 어찌 된 일인지 늘 부속품처럼 거느리고 다니던 알파들 없이 홀로 있는 모습이었다. 다 내려놓기로 마음먹어서일까, 오늘만은 그가 무섭지 않았다. 심지어 반갑기까지 했다.
왠지 그에게는 말해 줘야 할 것 같았다. 이제 더는 학교에 오지 않을 거라고. 그가 늘 바라던 것이니 웃으며 이야기할까 싶었지만, 도저히 미소가 지어지지 않았다. 나는 어색하게 인사했다.
“안녕.”
“…….”
“나, 학교 그만둘 거야. 아니, 그만뒀어. 방금 자퇴서 내고 나오는 길이거든.”
“그래?”
왜, 가 아니라 무덤덤한 그래, 라는 말. 전 같으면 비웃음으로 들렸을 그 말이 뾰족하게 들리지 않았다.
“응. 그렇게 됐어.”
멋없는 대답을 듣고 나서도 어쩐지 그는 움직이지 않았다. 꽃처럼 화사한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인문대 폐 강의실에서 마주쳤을 때의 일이 생각났다. 그리고 문득 깨달았다.
“지난번엔 고마웠어.”
여태 나의 문제에 정신이 팔려 있어서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 하민은 나를 감싸 주었던 거였다. 장승우가 나의 향기를 알아차리려던 순간, 하민은 일부러 더 짙게 페로몬을 열었다. 그가 나를 가려 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정체를 들켜 버렸을 것이다.
내 딴에는 용기를 낸 말에 그는 웃지도 대답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아무도 없는 복도에 서서 서로를 마주 보고 있었다. 나는 그의 침묵이 불편하지 않았다.
“잘 지내. 난 가 볼게.”
키도 체구도 나이도, 어쩌면 입장도 비슷한 또래의 남자아이에게, 나는 인사를 건넸다. 정글에 홀로 남아 야생과 싸워야 하는 동지에게 보내는 작별처럼.
그는 나의 동지였던 적은 없지만, 내가 그에게 연민과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 알면 그는 그저 가소로워하겠지만. 그의 안녕을 바라는 마음은 진심이었다.
그는 마주 인사하는 대신 주머니를 뒤적여 무언가를 꺼냈다. 그러곤 알약이 한 움큼 든 약 봉투를 내 손에 쥐여 주었다.
“너 줄게. 가져가.”
“이게 뭔데…?”
“히트 억제제.”
그의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그가 준 봉투를 다시 보았다. 이한은 ‘사이클을 억제하는 약이 있다’라는 말을 한 적 있었다. 그걸 구하기 어렵다는 이야기도.
“이, 이거… 너한테도 필요한 거 아니야?”
“혹시 무슨 일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해서 예전부터 조금씩 모아 놨던 거야. 많이는 못 모았어. 사이클이 한 번 오면 길게 가는 편이라….”
“…….”
“뭐 해? 멀뚱멀뚱 보지 말고 가져가.”
뜻밖의 상황에 나는 알약과 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재촉을 해 봐도 내가 어쩔 줄 몰라 하자, 그는 피식 웃음 지었다.
“독약 아니거든? 가져가라니까. 난 다음 주기 때 다시 배급받으면 그만이야.”
“그래도….”
“아무래도 나보다 네 팔자가 더 사나운 것 같아. 널 생각하면 내 꼬라지도 좀 덜 좆같이 느껴지거든. 그게 고마워서 주는 거라고 하면, 기분 나빠할 거야?”
“…….”
“아껴 먹어. 넌 보급받을 방법도 없을 테니까. 정량은 6시간마다 한 알씩이지만, 넌 내성이 없어서 그것보다 좀 적게 먹어도 어느 정도는 괜찮을 거야.”
톡 쏘는 듯한 그의 말투가 이번만은 따스하게 들렸다. 그가 나를 위로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고마워.”
하민은 내가 외투 주머니에 약 봉투를 찔러넣고 나서야 인사를 건넸다.
“그럼, 잘 버텨 봐. 어디로 가려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다시 대답할 말을 고민하는 사이 그는 휙, 돌아서 가 버렸다. 평소처럼 가뿐하고 아름다운 걸음걸이였다. 내가 어디로 가려는 것인지 모르는 것은 그뿐만이 아니라 나도 마찬가지였다. 달아난 곳 끝에 낙원이 있을지, 다른 지옥이 나를 기다릴지조차.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길게 느껴졌다. 늘 걷던 좁고 가느다란 계단이, 거미줄 같은 골목이 몇 배로 늘어난 듯 아득했다. 몇 번을 주저앉을 뻔하며 도착한 집에는 냉기가 가득했다. 늘 있던 사람이 그 자리에 있지 않다는 것을 집도 아는 듯이.
어머니가 급하게 병원으로 실려 나간 흔적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옷가지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고 이불도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다. 한숨을 쉬며 부엌을 보니, 식탁 위는 깨끗했다. 냉장고에는 내가 준비했던 음식들이 줄지도 않고 남아 있었다.
‘뭐라도 먹어야 하는데….’
학교에서 출발할 때까지만 해도 집에서 끼니를 때우고 오겠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냉장고에 그득히 남겨진 음식을 보자 오히려 식욕이 사라져 버렸다. 무감정해지려 애쓴 탓에 감각까지 굳어 버린 걸까. 음식들을 버리는 게 나을지 남겨 둘지를 생각하다 냉장고 문을 닫았다.
바닥에 어질러진 것들을 치우고 짐가방에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이준이 날 언제 어디로 데려갈 예정인지는 모르지만, 병원에서 적어도 며칠은 보내게 될 거라는 생각이었다.
한창 가방을 꾸리고 있는데 현관문이 덜그럭거리기 시작했다. 집을 찾아올 사람이 없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순간 어머니가 돌아온 걸까, 하고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거칠게 열어 젖혀진 문 앞에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 서 있었다.
“너… 뭐 하는 거야, 지금?”
오 실장은 스페어 키를 손에 든 채로 신발도 벗지 않은 채 방 안에 들어왔다. 그 얼굴을 보자 나는 더 놀라 심장이 후들거렸다. 그가 시비를 거는 것은 시도 때도 없었지만, 이렇게 구둣발로 집에 들어오기까지 한 건 처음이었다.
뭐 하는 짓이냐고 화를 내려다, 문득 어제가 월세 내는 날이었다는 걸 떠올렸다. 평소에는 혹시라도 트집이 잡힐까 득달같이 신경을 써 왔는데, 상황이 이렇다 보니 깜빡 잊고 말았다. 당황해서 멈칫거리는 사이 그는 내가 들고 있던 짐가방을 빼앗아 들었다.
“이건 또 뭐야. 너, 어딜 가려고?”
“저, 저기….”
“어? 이 덜떨어진 새끼가, 겁도 없이 어디로 갈 생각이냐고!”
월세를 내지 않고 달아나려는 걸로 오해라도 한 걸까. 죄송하다고 운을 떼려는데, 그는 다짜고짜 빼앗은 가방을 바닥에 내던졌다.
이리저리 흩어진 세면도구와 옷가지들을 발로 걷어차더니 애먼 서랍장까지 뒤집어엎었다. 너무 갑작스럽게 행패를 당하니 화가 난다기보단 겁부터 났다.
“잠깐만요. 왜, 왜….”
“씨팔, 이 새끼가… 이 멍청한 새끼가!”
“월세는 제가 죄송해요. 이러지 마세요.”
“네가 기어이 지랄이지. 어?”
“멀리 가는 거 아니에요. 그냥, 잠깐 병원에….”
“병원? 이 새끼가 진짜 제정신이야?”
왜 그런지 그는 병원에 간다는 말에 더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오 실장은 푸닥거리를 멈추고 나를 노려보았다. 분노로 희번덕거리는 눈동자에 몸이 굳었다. 숨을 몰아쉬던 그는 내 팔목을 붙잡았다.
“이리 와, 너. 당장, 당장 따라와.”
“왜 이러세요?”
“오라면 오지, 씨발, 잔말이 많아?”
“죄송해요. 날짜를 깜빡했어요. 곧 드릴 테니까….”
“지금 그게 중요해? 말로 하니까 못 알아듣지?”
그는 무시무시한 힘으로 나를 잡아끌었다.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나는 꼼짝없이 맨발로 대문 밖까지 끌려나갔다.
“놔주세요. 이것 놓고….”
“씹새끼가, 꾸물거리지 마. 지금도 늦었다고.”
“하, 하루… 늦은 건데….”
“입 다물어. 닥치고 따라오기나 하라니까!”
그는 내 말을 듣지도 않고 계단이 있는 쪽으로 나를 끌고 가려 했다. 계단 아래에는 그의 까만 차가 주차되어 있을 것이다.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다급해진 나는 안간힘을 썼다. 담장이든 전봇대든, 손에 잡히는 것은 뭐든 붙들고 버티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버둥거리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자, 그는 주저앉은 내 팔을 질질 끌고가려 했다.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바닥에 팔다리가 마구 긁혔다.
“아악! 놔주세요. 제발, 제발….”
“이런 씨발…. 늦었다고! 늦었단 말이야! 이 멍청한 새끼가, 제대로 걷지도 못해?”
그는 핏발 선 목소리로 나를 다그쳤다. 악에 받친 모습은 궁지에 몰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늘 하던 푸닥거리와는 무언가 달랐다. 그러나 도살장의 짐승처럼 끌려가며 비명을 지르기 바빴던 나는 미처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오 실장이 나에게 시비를 거는 것은 하루건너 한 번쯤 벌어지는 흔한 일이었다. 집들이 다닥다닥 붙은 판자촌이니 큰 소리가 나면 모두가 들을 수 있지만, 이웃의 사람들은 늘 내가 겪는 수난을 구경할 뿐 끼어들어 말려 주는 법이 없었다.
그러나 오 실장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그녀들도 알아차린 듯했다. 소동이 길어지자, 출근 준비를 하던 이웃의 여자들이 하나둘 골목으로 나왔다. 처음에는 멀찍이서 상황을 지켜보다가 하나둘 우리에게 달려들었다.
“오 실장님, 그만 놔 주세요. 이러다 애 잡겠어요!”
그녀들이 내 다른 쪽 팔과 몸을 잡아당기자, 오 실장은 내 머리채를 쥐고 흔들어 댔다. 양쪽에서 붙들린 티셔츠가 엉망으로 늘어나고 찢어졌다. 말리는 사람이 더 늘어나도 오 실장은 악착같이 나를 쥐고 있었다. 참다못한 이웃 여자들은 그에게 따지듯 쏘아붙였다.
“아우, 대낮부터 무슨 난리야, 이게. 작작 좀 해요, 제발.”
“이번엔 또 뭐가 문제예요? 월세 때문에 그래요? 돈도 좋지만 사람이 인정이 있어야지.”
“그 얘기 못 들으셨어요? 얘 어머니 엊그제 병원에 실려 가셨어요.”
오 실장은 그 말에 눈 하나 꿈쩍하지 않고, 오히려 그녀들에게도 핏대를 세워 악을 썼다.
“아무것도 모르는 잡년들이 왜 지랄들이야? 돈이 문제야? 내가 지금 돈이 문제라서 이러는 거 같냐고!”
오 실장의 말에 모두는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의 인생에서 가장 큰 문제는 오직 돈이었다.
오 실장이 이 구질구질한 동네에서 하루가 멀다고 드잡이를 해 대는 것도, 눈송이처럼 희고 젊고 아름다운 그녀들이 이곳에서 불평과 한숨으로 하루를 삭이고 있는 것도, 나를 따라붙던 지긋지긋한 불운도, 어머니의 고통도, 내 손을 떠나 버린 내 운명도 전부 돈 때문이었으니까.
오 실장은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씩씩거렸다. 그에게 유리한 상황은 아니었다. 이미 동네의 거의 모든 사람들이 집 밖으로 나와 우리를 지켜 보고 있었다.
오 실장의 끄나풀들도 계단 위로 올라왔지만. 그를 돕기는커녕 그의 폭주가 의아하고 난감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싸늘한 침묵 속에서, 오 실장은 한숨을 쉬고는 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씨발, 말을 말자.”
그는 결국 나를 움켜쥐었던 손을 놓았다. 오 실장이 물러나자, 드잡이를 막아섰던 이웃들이 다가와 나를 일으켜 주었다. 바닥에 굴리고 쓸린 맨발과 팔다리 곳곳에 피가 흐르고 있었다. 입안에도 비리고 역한 피 맛이 맺혀 있었다.
그녀들은 내 머리와 옷을 정리해 주며 위로의 말을 건넸다. 오 실장은 원래 이상한 사람이니 신경 쓰지 말라거나 어머니가 곧 나으실 거라는 다정한 말들. 애써 고맙다고 말하고 집으로 돌아왔지만 떨림이 멈추질 않았다. 당혹감과 공포감, 수치심이 내 몸을 계속 흔들었다.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 뭉치 위에 몸을 웅크렸다. 울지는 않았다. 울어 봤자 아무 소용도 없으니까. 심호흡을 하면서, 필사적으로 해야 할 일과 정리할 물건들을 생각했다.
‘상처가 심하진 않지만 약은 좀 발라야 할 것 같은데…. 집에 약이 있었나? 조금만 진정되고 나면 일어나야지. 옷도 갈아입고…. 역시 억지로라도 뭘 먹는 게 나을까? 집을 오래 비울 수도 있으니까, 청소도 다시 해야 해. 병원에 한참 있으려면 담요라도 가져가는 게 나을까.’
그렇게 숨을 고른 나는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생각했던 일들을 처리했다. 손발을 부지런하게 놀리는 게 마음 편했다. 힘에 부쳐 부들거리다가도, 한숨 한 번을 뱉고는 다시 움직였다.
괜찮아. 이 정도는 아무렇지 않아. 더 힘든 일도 잘 버텼는데, 다 끝난 것도 아닌데 괴로워할 필요 없어. 최면처럼 중얼거리면서.
엉망으로 흐트러진 물건들을 정리하던 나는 멈칫거렸다. 낡은 옷가지 사이에, 저 혼자 멀끔한 옷 한 벌이 섞여 있었다. 눈에 익은 옷이다. 노천강당에 갇혔던 날, 이한에게서 빌렸던 옷.
‘아….’
진작 돌려주었어야 했는데 깜빡 잊고 그러지 못했던 모양이다. 잊으려면 영영 잊을 것이지, 왜 하필 저게 지금 내 눈에 뜨인 걸까. 못 본 척해 보려 했지만 손이 멋대로 그 옷을 들어 올렸다.
희미하게 그의 향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머리로는 내려놓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옷자락에 가만히 뺨을 기대었다. 흐려져 가는 향기에, 거기 묻어 있는 기억에 나를 기대듯이.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 빈 머릿속에서 갑자기 눈물이 흘러나왔다. 울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흐윽, 윽…. 흐흑….”
눈물은 속절없이, 쉼 없이 쏟아져 내렸다. 손으로 가려 보아도, 숨을 삼켜 봐도 울음은 삼켜지지 않았다. 나는 형편없이 무너져내린 채로 이유도 모르고 오열했다.
깊은 오후가 되어서야, 나는 겉으로나마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 실컷 울고 후련해졌다기보단, 그냥 더 울 힘이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긴 티셔츠와 긴 바지로 팔다리의 상처를 가리고, 청소를 마친 집을 살펴보았다. 어쩐지 한동안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느낌에 흐트러진 곳이 없는지 여러 번 확인했다.
1시간쯤 뒤에 병원에 도착할 거라는 이준의 메시지가 왔다. 나도 출발해야 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가방을 확인하며, 바닥에 놓인 이한의 옷을 바라보았다.
‘돌려줘야겠지…. 직접 줄 수는 없으니까, 어디에라도 맡겨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며, 옷을 곱게 접어 봉투에 넣고 나서도 나는 망설였다. 잠시동안, 그 옷을 그냥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걸까, 하고 엉뚱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병원에 도착해서 원무과에 재훈의 이름을 대고 옷을 맡겼다. 빌렸던 옷을 돌려준 것뿐인데 왜 이렇게 허전한 기분이 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흐릿하게 온기가 느껴지던 봉투가 내 손을 떠나자, 나는 미련을 기댈 곳이 어디에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기에, 나는 착각했었다. 미련 같은 것은 없다고. 이준을 따라갈 마음의 준비가 다 되었다고. 병원에 도착했다는 이준의 연락에, 2층의 VIP 대기실로 올라갈 때까지만 해도 분명 덤덤한 기분이었다.
“왔구나.”
대기실의 분위기는 여전히 고상했고, 이준은 늘 그렇듯 부드럽고 깨끗한 얼굴이었다. 그는 밴드가 덕지덕지 붙은 내 얼굴과 팔다리를 훑어보았지만, 거기에 대해 무어라 말하지는 않았다. 단지 나에게 인사를 건네고, 누군가를 호출해 차를 가져오도록 했다.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은 건 언제부터였을까. 갑자기 이상할 정도로 심장이 빠르게 뛰는 기분에 나는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몰래 숨을 가라앉히려 했지만 가슴이 들썩이는 게 눈으로도 보였을 거다. 이준은 초조해하는 나의 기색을 읽은 듯했다.
“긴장되니?”
“…네.”
“뭘 긴장을 하고 그래. 차라도 좀 마셔.”
따스한 차는 어제와 같은 향기였지만, 굳어 버린 마음 탓인지 아무런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억지로 한 모금을 삼키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할 얘기가 있다고 했지?”
그는 자상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나는 하려던, 해야 하는 대답을 꺼내놓기로 마음먹었다.
“네…. 선생님, 저요.”
말끝이 흉하게 떨렸다. 듣기 좋은 목소리가 아니었다. 이준이 듣기에는 더 거슬릴 거다. 사지에라도 끌려가는 듯한 목소리로 저를 따라가겠다고 말하면, 당연히 그는 언짢아할 거다.
오전에 연습했던 대로 웃는 얼굴로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가늘게 떨리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미소 비슷한 것을 짓는 데 겨우 성공한 순간, 갑자기 뺨을 따라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 저기, 저….”
서둘러 한 방울을 훔쳐냈지만,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닦아서 가릴 수 없을 정도로 굵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나는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통제되지 않는 것은 눈물샘뿐만 아니라 머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떻게든 상황을 수습해야 하는데, 나는 자꾸 엉뚱한 생각만 들었다. 꽉 막혀 버린 머릿속에서 그 생각은 갈 곳도 없이 마구 부풀기만 했다. 고장 난 기계처럼 버벅거리던 나는 결국 저 깊은 곳에서부터 넘쳐흐른 말을 뱉고 말았다.
“저, 자, 잠깐만 원무과에 다녀올게요.”
“원무과?”
“네. 아까, 아까 맡긴 물건이 있는데…. 아무래도 다시 찾아와야 할 것 같아요.”
황당한 소리였다. 이제 보지 않기로 한 사람의 옷가지가 무슨 의미일까. 터무니없는 말인 걸 알면서도, 나는 그걸 되찾아오고 싶은 생각에 사로잡혀 자신을 가누지 못할 지경이었다. 되찾지 못하면 숨이 멎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애가 닳았다.
어쩌면 나는 그냥 옷이 아니라, 그 옷에 담긴 다른 무엇을 되찾고 싶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게 더 어리석었다. 이제 와서 왜, 무얼 어쩌려고.
“아뇨, 아니, 그게 아니라….”
이미 꼬여 버린 말은 수습되지 않았다. 갈피를 잃은 입술의 양옆으로 눈물이 주룩주룩 흘러내렸다. 제풀에 말문이 막혀 버린 나는 황망하게 이준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무 말도 없이 나를 마주했다.
속을 알 수 없는 그의 눈동자가 거울처럼 나의 모습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초라하고, 어리석은 나를.
바보같이, 정말로 바보같이 나는, 그제야 내 마음이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를 알았다. 내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않고 살아와서, 내버려 둔 마음이 어디로 뿌리내리고 가지를 뻗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겨우 바라본 순간, 마음속의 감정은 숨김없이 제 모습을 드러내었다. 물방울 같은 입자로 차곡, 차곡 쌓인 그것은 어느새 손 닿지 않는 곳에 거대하게 자리 잡은 늪이 되어 있었다.
“…안 될 것 같아요.”
“응?”
나는 무언가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었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아주 맑았다. 내 평생 이렇게 감정이 맑고 또렷했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안 되겠어요. 선생님이 말씀하셨던 거, 저…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죄송해요.”
나는 그제야 알게 되었다. 내가 이준과 함께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을. 도저히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그것이 나에게 주어진 것 중 가장 나은 선택이더라도, 아무리 노력한다고 해도 갈 수 있는 길이 아니라는 것을.
내가 곁에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노력하고 애쓰지 않아도 이끌리고 있는, 어쩌면 이미 사무치도록 사랑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이한이기 때문에.
왜 몰랐을까. 이렇게나 강렬한 마음을, 왜 여태 알아차리지 못했던 걸까.
하루 너머, 아니 어쩌면 그 이전의 긴 시간을 꼬박 앓듯이 고민하며 결정한 일들이, 내가 지금 어떤 상황에 처해 있고, 지금의 선택에 따라 앞으로 일어날지에 관한 궁리가, 자신에 대한 구질구질하고 처절한 설득마저도 한순간에 모두 무의미해질 정도로 깊고 큰 마음인데, 왜.
뒤늦게 알게 되었지만, 그만큼 감정의 색깔은 선명했다. 비로소 해방된 마음속의 파도가 쉼 없이 출렁거렸다. 깊고 격렬한 일렁임에 몸이 떨릴 정도였다.
‘어떡해. 왜 이렇게 늦게….’
떨림이 가라앉지 않은 채로, 나는 다시 두려움에 사로잡혔다. 이제 막 눈을 뜬 낯선 감정도 두려웠지만, 그만큼이나 눈앞에 앉은 남자의 말을 거절해 버렸다는 사실도 두려웠다.
이준으로서는 당황스러울 것이다. 좋은 소식이 있다며 저를 부른 내가 돌연 마음을 바꾸어 안 된다고 해 버렸으니까. 더구나 나를 돕겠다던 그의 말은 한 선심 쓴 제안이었을 거다. 불같이 화를 내더라도, 소리를 지르거나 뺨을 때리더라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이준은 화를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평소보다도 부드럽게, 환하게 웃었다. 그의 눈동자가 밝고도 형형한 빛으로 반짝였다. 언젠가 본 적 있는 눈빛이었다. 왠지 섬뜩한 느낌에, 사과의 말을 생각하던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렇구나.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
나직한 말에도, 실망한 기색은 없었다. 이준은 목소리는 덤덤하지만 단단했다. 그의 목소리에 어려있는 기묘한 확신에, 나는 기억해 냈다.
분명, 합격을 축하하며 나에게 ‘나에게 여기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자리가 있다’라고 말할 때도 그는 분명 저런 눈을 하고 있었다.
“괜찮아. 어차피 난 상관없거든.”
“네…?”
그는 입꼬리를 매끄럽고도 길게 끌어 올려 커다랗게 웃었다. 문득 코끝에 그의 향기가 닿으며 오싹하게 소름이 돋았다. 머리가 무겁다고 느낀 순간 눈앞이 흔들렸다.
무언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아릿한 현기증이 나를 덮쳤다. 시야가 빙글빙글 돌더니 이내 무너져내렸다.
“오늘 네가 어떻게 대답할지는, 처음부터 나한테 아무 상관도 없었다고.”
상냥하고도 싸늘한 한마디를 마지막으로, 기억이 끊어졌다.
* * *
다음 순간 눈을 떴을 때는 머리 위에 모르는 천장이 있었다. 관자놀이가 뚫어질 듯 지끈거려 앞을 보는 것도 힘겨웠다. 몇 번 눈을 깜빡거리자 조금씩 시야가 또렷해졌다.
나는 아무도 없는 낯선 방에 누워 있었다. 밝고 환하지만, 묘한 한기가 도는 방이었다. 천장도 벽도 새하얀 넓은 공간에는 내가 누운 침대와 의자 하나만이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벽에는 시침과 분침뿐인 시계가 걸려 있었다. 시간은 오후 4시. 침대 옆의 조그맣고 불투명한 창문에서는 굴절되고 흐려진 오후의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꿈인가…? 아냐, 꿈이 아닌데. 여긴 어디지? 내가 왜 이런 곳에….’
좋지 않은 느낌에 머리칼이 쭈뼛 일어섰다. 나는 무거운 몸을 느리게 일으켰다. 두 발이 바닥에 닿자 다리가 휘청거렸다. 맞은편에 보이는 두 개의 문 앞으로 꾸역꾸역 걸어갔다.
한쪽 문 너머에는 무서울 정도로 희고 청결한 화장실이 있었다. 다른 쪽 문은 출입문인 것 같았지만, 단단히 잠겨 열리지 않았다. 똑똑, 두드려 보아도 문 너머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떨리는 입술을 조심스레 열었다.
“…누구 없어요?”
메아리쳐 돌아오는 내 목소리가 어쩐지 무섭게 느껴졌다. 무겁게 잠긴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 올려 외쳤다.
“여기요, 아무도 안 계세요?”
어디에서도 대답은 없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텅 빈 방에는 초침 소리뿐이었다. 날이 선 공포감에 의식이 또렷해졌다. 쾅쾅, 더 큰 힘으로 문을 두드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두통이 욱신거리는 것도 잊고 문고리를 잡고 힘껏 흔들었다.
필사적인 노력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어딘지도 모를 곳에 갇혀 버렸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어디라도 도움을 청해야 해…. 핸드폰. 핸드폰이 어디 있지?’
주머니를 뒤적여 봐도 핸드폰이 보이지 않았다. 집에서 챙겨나온 가방도 사라져 있었다. 아무것도 없는 방을 빙글빙글 돌던 나는 창문이라도 열어 봐야겠다는 생각에 침대 위로 뛰어 올라갔다.
굳게 닫힌 창에는 아예 잠금장치가 없었다. 창틀을 쥐고 씨름하다가 주먹을 쥐고 유리창 가운데를 내리쳤지만 깨지기는커녕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소용없다는 걸 알면서도 패닉해 버린 나는 미친 듯이 창문을 두드렸다. 쾅, 쾅. 주먹이 짓뭉개질 정도로 내리치던 차에, 갑자기 방문이 열렸다. 놀라 바라본 곳에는 낯익은 얼굴이 있었다.
“다, 당신이….”
“…….”
“당신이 이런 거예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오 실장이었다. 그는 방의 벽처럼 새하얀 옷가지를 손에 들고 있었다. 다짜고짜 내 머리채를 쥐고 나를 어딘가로 끌고 가려 했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덜컥 겁부터 났다.
“왜 이러는 거예요? 왜, 왜 나를….”
“…….”
“나갈래요. 내보내 주세요. 지, 지금 어머니는….”
아무렇게나 넋두리를 뱉던 입술에 ‘어머니’라는 말이 오르자, 생각은 자연스레 기억의 마지막으로 이어졌다. 의식이 끊어진 순간은 분명, 병원의 VIP 대기실에서 이준과 이야기를 나누던 때였다.
어쩌다 여기 오게 된 건지, 왜 갑자기 오 실장이 나타난 건지 도무지 기억을 연결해 낼 수 없었다. 끔찍한 미로에 빠진 기분이었다.
문가에 선 오 실장은 입술 안으로 작게 욕지기를 웅얼거렸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깊게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단순한 짜증 같기도 했지만, 어쩐지 난감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비참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두서없는 내 질문에 대답해 주지 않았다. 사실 대답할 필요가 없기도 했다. 곧이어 반쯤 닫혔던 문이 다시 활짝 열리며 또 한 명의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으니까.
오 실장의 뒤에 선 사람을 본 순간, 내 심장은 더 깊은 곳으로 철렁 내려앉았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목소리까지 얼어붙어 버렸다.
“소리가 들려서 와 봤더니…. 뭐예요, 오 실장님. 의식이 돌아오면 바로 알려 달라고 말씀드렸는데, 왜 멍하니 서서 잡담하고 계신 거죠? 일 똑바로 안 하실 겁니까?”
그를 본 오 실장은 적잖이 당황한 태도로 두 손을 모으고 고개를 숙였다. 완전히 복종하는 몸짓이었다. 예의라고는 전혀 모르는 듯 행동하던 오 실장이 그런 자세를 취할 수 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죄, 죄송합니다. 저도 방금 확인해서요.”
그는 오 실장의 말을 들은 체도 않고 침대 쪽으로 다가왔다. 놀라서 입도 제대로 다물지 못한 나에게로.
“윤오야. 일어났어?”
다정하고 자상한 질문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꼼짝할 수 없었다. 한참 놀란 눈만 깜빡거리다 겨우 목소리를 꺼냈다.
“…선생님.”
내 앞에 선 것은 다름 아닌 이준이었다. 그는 낯선 장소에서, 그와는 결코 섞일 수 있다고 생각도 하지 않았던 사람인 오 실장을 곁에 두고 서 있었다. 경악한 나를 보며 그가 부드럽게 웃었다. 기억 속 마지막 모습처럼.
“정신이 드나 보네. 괜찮아? 생각보다 한참 깨어나질 않아서 걱정했어.”
“…….”
“약을 많이 넣은 것도 아닌데 성분이 너랑 안 맞았는지…. 아니, 이 경우에는 너무 잘 맞았다고 하는 게 맞나?”
차를 마시고 기억을 잃었던 게 약 때문이었을까. 이준은 나에게 약을 먹여 이곳으로 데려온 것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숨김없이 드러냈다.
오히려 그래서, 나는 사실을 곧바로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왜 이런 짓을 한 거냐고 물으려다 도저히 대답을 들을 엄두가 나지 않는 기분에 다른 걸 물었다.
“…여기가 어디예요?”
“우리 집 별장이야. 앞으로 네가 지낼 곳.”
별장이라면, 서울이 아닌 걸까. 나는 얼마나 정신을 잃고 있었고, 얼마나 멀리까지 끌려온 걸까.
넋이 나간 나와는 달리, 이준은 몹시 태연하고 차분했다. 그는 정돈된 몸짓으로 침대 옆의 의자에 앉았다. 차마 그를 마주 볼 수 없어 이리저리 배회하던 나의 시선이 문가에 서 있는 오 실장에게 닿았다. 나는 여전히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저 사람… 선생님이 왜 저 사람과 있어요?”
“아, 오 실장 말이구나. 오 실장님, 잠깐 이리 와 봐요.”
그가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오 실장은 군말 없이 다가왔다. 이준은 앉은 채로 오 실장의 등을 툭툭, 두드렸다. 만만한 아랫사람을 부리는 듯, 익숙하고도 오만한 태도였다.
“참, 소개할 필요까진 없나? 너랑도 안면은 있을 텐데, 그렇지? 오 실장님은, 음… 우리 집을 위해서 일해 주시는 분이야. 큰일을 맡고 계시지. 오 실장님이 없으면 난월동 지역 관리가 안 되니까.”
“난월동 지역… 관리…요?”
내 말은 사실 질문이라기보다는, 그의 말꼬리 끝을 되풀이한 것에 불과했다. 이준은 고장 난 기계 같은 나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돌연 고개를 돌려 제가 가까이 부른 오 실장을 나무랐다.
“오 실장님. 오늘 좀 눈치가 없으시네요. 언제까지 듣고 있을 작정입니까? 놓고 나가시죠.”
그 말에 오 실장은 손에 든 옷을 이준에게 건넸다. 오 실장은 이준의 눈치를 보면서도 조심스레 나를 흘긋거렸다. 전에 없이 불안하고 초조해 보이는 시선이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표정이었지만, 그는 결국 조용히 방을 나갔다.
방에 둘만 남자, 이준은 짜증스러운 얼굴로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들었다. 그가 항상 들고 다니는, 눈처럼 희고 네 귀퉁이가 깨끗하게 접힌 손수건. 나는 늘 그 손수건이 그의 성품처럼 단정하고 상냥하다고 생각했었다.
이준은 티 없이 청결한 손수건으로 제 오른손을 닦았다. 오 실장의 등에 닿았던 손이었다. 더러운 것이라도 묻은 듯, 손바닥부터 손가락 틈새까지 신경질적으로 문질러 댔다.
손을 다 닦은 이준은 다시 고개를 들어 미소를 지었다. 언제 짜증을 부렸냐는 듯 빙글빙글, 매끄러운 미소였다.
평소와 똑같은 미소에, 나는 확실히 알게 되었다. 그는 내가 생각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나를 말리던 이한의 말이 옳았다는 것을.
반듯하게 접은 손수건을 다시 주머니로 밀어 넣으며, 이준은 설명을 늘어놓았다.
“난월동에 관해서 물었지? 그래. 이제 너도 우리 가문에 대해 잘 아는 편이 좋겠다. 우리 아버지가 제약회사를 운영하신다는 건 알고 있을 거고…. 서경제약이 의외로 사업 분야가 넓거든. 난월동은 우리 회사에서 부수입 삼아 관리하는 곳들 중 하나야.”
나는 그의 말을 전혀 알아듣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내가 그의 말을 이해하든 말든 그다지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쾌활하게 떠들었다.
“처음에 아버지가 나한테 그 구질구질한 동네 관리를 맡겼을 땐 솔직히 좀 실망했지만… 생각보다는 쓸모있는 곳이긴 했어. 그쪽에서 들어오는 수입도 꽤 되는 편이고. 아, 물론 그 판자촌에서 다달이 들어오는 월세야 푼돈이고, 그 밑에 집창촌에서 들어오는 매출 말이지.”
“…….”
“그리고… 새로 개발한 최음제 중에 성분이 애매한 것들을 시험해 보기도 좋았고, 너한테 자연스럽게 접근할 수도 있었고….”
“저한테 접근이라니, 왜… 어떻게….”
나는 더듬더듬 문장 같지도 않은 말을 되물었다. 그는 잠시 말을 멈추고 나를 보았다. 안쓰럽고 하잖은 것을 내려다보는 시선이었다.
“너희 어머니는 말야. 뭐랄까 너보다 훨씬, 음…. 나이 드신 분께 이런 표현은 좀 그렇지만, 다루기 쉬운 분이었는데.”
불쑥 던져진 어머니에 대한 언급에, 나는 반사적으로 눈썹을 찌푸렸다. 그는 특유의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거리낌 없이 말했다.
“경계심이란 게 아예 없으신가 봐. 보통 아무리 돈이 궁하더라도 그런 사람들이 권하는 곳에 덥석 들어가서 살겠다고 하진 않잖아? 오 실장에게 고맙다고 아주 절이라도 할 기세였다던데. 하긴 그렇게 생각이 없으니 그 나이 먹도록 그렇게 구질구질하게 살았겠지.”
나는 종종 난월동에 살게 된 것이 좋은 우연이었는지, 나쁜 우연이었는지를 고민하곤 했다. 그러나 이제 와서 보니 그것은 아무 우연도 아니었던 모양이다. 우연이 아니라, 그냥 덫이었는지도.
난월동으로 이사할 무렵, 어머니와 나는 최악의 낭떠러지 아래로 굴러떨어진 상태였다. 갑자기 쓰러져 해고당한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치료와 관리가 필요한 지병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고, 얼마 되지도 않던 전 재산을 잃고 살던 집에서도 나와야 하는 형편이었다.
퇴원할 때 병원비는 치를 수 있을지, 퇴원한 뒤에는 어디로 가서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고 있을 때 한 무리의 남자들이 병실로 들이닥쳤다. 사채업자 또는 건달, 혹은 사채업자이자 건달쯤으로 보이는 험악한 인상의 사람들.
‘아줌마, 장유진 알지? 그 여자 어디다 숨겼어요?’
환자와 가족들로 이미 그득하던 10인실에서, 그들은 어떤 여자를 찾으며 난동을 피웠다. 나는 그들이 그녀의 이름도 몰랐고, 어머니는 이름과 연락처를 겨우 아는 정도였다.
그녀는 몇 달 정도 어머니와 같은 공장 같은 조에서 근무하던 사람이었다. 더 좋은 일자리를 찾았다며 그녀가 떠난 뒤 공장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녀가 사창가에서 일한다는 소문이 돌았다고 했다.
‘그래. 그년이 우리 가게에서 일하다가 도망쳤는데 핸드폰에 아줌마 번호가 있더라고. 숨길 생각 하지 말고 아는 대로 부는 게 신상에 좋을 거예요, 아줌마. 안 그래도 몸도 성치 않아 보이시는데.’
무리의 우두머리 격으로 보이던 남자는 오 실장이라고 제 호칭을 밝혔다. 그는 없는 말이라도 지어내서 자백하고 싶을 정도로 혹독하게 어머니와 나를 추궁했지만, 당연히 우리는 아무것도 알려 줄 것이 없었다.
오 실장은 그냥 돌아가지 않고 엉뚱하고도 적절한 제안을 했다. 조금 전까지 쥐 잡듯 몰아세우던 우리에게 돌연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듣자 하니 아줌마랑 아드님이 갈 데이 없나 본데, 그 여자 살던 방에 들어가는 거 어때요? 서울에서 그거보다 싼 집 찾기 어려울걸. 우리도 당장 받던 월세가 끊기게 생겨서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라고.’
살 곳이 급했던 어머니는 신기할 정도로 낮은 월세와 보증금 액수에 혹해 그의 말을 바로 받아들였다. 그곳이 어디에 있는 어떤 방인지, 혹시라도 일이 틀어졌을 경우 그들이 우리에게 무슨 짓을 할지 같은 것은 제대로 생각해 보지도 않은 채로.
궁지에 몰린 그 선택이, 이제 와 어머니를 욕보일 이유가 되는 걸까. 혼란과 당혹감으로 빙빙 돌던 머릿속에서 천천히 분노가 솟아올랐다. 입술을 꾹꾹 깨무는 나를 보며, 그는 어깨를 으쓱거렸다.
“오해는 하지 마. 딱히 네 어머니를 욕하는 건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난월동 같은 하층민 구역을 관리한 게 나한테도 아무 의미 없는 일만은 아니었다는 거지.”
“…….”
“덕분에 저런 난잡한 인간이랑 엮인 게 불쾌하긴 하지만…. 그래도 오 실장이 일은 잘해. 그러니까 그 사람한테 널 지켜보고 있으라고 부탁한 거지.”
“선생님이… 오 실장님한테요?”
“그래. 네가 좀 버거웠을지도 모르겠다. 적당히 몰아세워달라고는 했는데, 듣기로는 내 예상보다 훨씬 심하게 굴었던 모양이더라고. 하여튼, 천박한 성분은 어쩔 수 없다니까.”
“…….”
“아, 그래도 오해는 하지 마. 수능 날 화재 사고는 오 실장이 멋대로 한 거 아니야. 그 정도 일까지 내 허락 없이 할 정도로 재량이 많진 않거든, 그 사람.”
“…….”
“그건 내 계획대로였어.”
멍하니 입을 벌렸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만 하, 하고 불분명한 숨을 뱉었을 뿐이다. 감정을 삼키지 못하는 나의 표정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작은 코웃음을 흘렸다.
“내가 그랬다는 거, 설마 모르고 있었어? 의외로 눈치가 없구나?”
나는 아직도 수능 시험장에 들어가지 못했던 순간과 그에게 전화를 걸어 시험을 보지 못했다고 말하며 울음을 터뜨린 순간이 생생했다.
그리고 그것이 제 일인 양 호들갑스레 위로와 걱정의 말을 건네다가 며칠 뒤 구원자처럼 나타난 그가 대학에 갈 수 있다고, 보내 주겠다고 말하던 순간도.
그건 마치 허허벌판의 깊숙한 구멍에 빠져 있는 나에게 까마득한 하늘로부터 내려진 밧줄 같은 말이었다.
그는 지금, 아무렇지도 않게 그게 가짜였다고 말하고 있었다. 거기 기대고 매달리기 위해 발버둥 쳤던 내 시간들도 모두 가짜였다고.
“워낙 감쪽같이 처리되긴 했지. 가볍게 빈집만 태울 생각이었는데 노숙자 하나가 불구가 돼 버리는 바람에 당황하긴 했지만…. 뭐, 그런 거 하나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신경 쓸 사람은 없으니까.”
가슴이 뻐근하리만치 분노가 차올랐다. 오히려 그래서, 나는 화를 내지도 못했다. 부들부들 떨며 넋두리처럼 중얼거렸을 뿐이다.
“왜, 왜….”
그는 손을 들어 나에게 가져왔다. 흠칫 놀라 고개를 뒤로 빼려 했지만, 그가 나에게 닿는 것이 먼저였다. 나긋하게 나의 뺨을 매만지고 흐트러진 머리칼을 뒤로 쓸어넘기는, 단정하고 냉혹한 손. 달콤한 말과 목소리.
“네가 필요했으니까.”
누가 들으면 고백이라고 생각했을 그 말에, 나는 공포감을 느꼈다. 아주 본능적이고 압도적인 종류의 공포감을. 나를 어루만지는 그의 손길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사로잡은 사냥감을 다루듯이.
“굴에 사는 짐승을 사냥하는 제일 쉬운 방법이 뭔지 알아? 굴에 불을 피워 연기를 밀어 넣는 거야. 매운 연기에 시달린 짐승은 빛과 신선한 공기를 쫓아 밖으로 뛰쳐나오게 되어있거든. 거기에 제 목을 조일 올무가 있는지도 모르고.”
“…….”
“네가 그렇게 악착같이 버틸 줄은 몰랐어. 집구석도 그렇고 학교에서도 기댈 데가 없을 게 뻔하니까 조금만 몰아붙여도 바로 내 쪽으로 넘어올 줄 알았는데. 보통 애들은 뒤에서 그 절반 정도만 손봐 줘도 내가 구원자라도 되는 것처럼 매달리는데 말이지.”
볼을 툭툭, 건드리던 그의 손이 결국 거칠게 턱을 붙들었다.
“생각할수록 진짜…. 사람이 일 년이나 공을 들였으면 성의를 봐서라도 그런 식으로 뻣뻣하게 굴면 안 되는 거 아냐? 지독한 애라고는 생각했었지만, 제법이야, 정말. 이렇게까지 사람을 열받게 만들 줄이야….”
“…….”
“뭘 믿고 그런 거야? 시궁창 쥐처럼 근근히 사는 주제에…. 가진 게 없으면 남한테 빌붙는 거라도 잘해야 되는 거 아니야? 오메가면 오메가답게 고분고분한 맛이 있어야지. 하, 그래. 고작해야 오메가 주제에. 더러운 오메가 주제에…!”
그는 목을 조르듯이 내 턱을 움켜쥐고 흔들었다. 우악스러운 그의 손보다도 나를 깊게 짓누르는 것은 배신감이었다. 믿었던 사람이, 한때는 나의 유일한 안식처였던 사람이 나에게 덫을 놓고, 가지고 놀다가 끝끝내 모욕하고 있다.
그 사실에 숨이 막히고 머릿속이 터져 버릴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침을 뱉고 그의 멱살을 쥐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분노가 아무 의미도 없다는 걸, 나는 너무 잘 알았다. 우울이 나를 구해주지 못하는 것처럼, 분노도 그랬으니까.
그의 말대로 나는 시궁창 쥐나 다름없는 신세였다. 느리고 굼뜨더라도, 시궁창 쥐의 비굴한 본성이 나에게도 있었다. 다급해진 나는 감정을 숙이고 애원하는 쪽을 택했다. 이준이 나의 목줄을 틀어쥐고 있는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그것뿐일 것 같았다.
“자, 잘못했어요.”
“…….”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선생님. 제가 잘못 생각했어요. 선생님 뜻대로 할게요. 시키시는 대로 할 테니까, 내보내 주세요. 제가 여기 있으면, 어머니는…. 지금 어머니가….”
불행히도, 마음만 앞섰을 뿐 나의 연기력은 한심한 수준이었다. 어설프고 설익은 애원에 이준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짧게나마, 그의 마음을 움직인 걸까 기대했지만 그는 이내 커다랗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하…. 아, 미안. 웃겨서. 크, 크크큭….”
그는 아마도 나에게서 그가 말했던 사냥의 한 장면을 보았을 것이다. 연기로 가득 찬 굴속에서 올무가 놓인 밖으로 달려나가는 어리석은 짐승의 모습을.
“윤오야. 그렇게 말하면 내가 뭐, 마음을 바꾸기라도 할 줄 알았어? 너는 정말,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다니까.”
“…….”
“내가 지금 너한테 이 얘길 다 해 주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그리고 겨우 너 같은 거 하나 갖겠다고 그렇게 한참 동안 번거롭게 공을 들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싸늘한 그의 말은, 결코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의미였다.
그는 턱을 쥐었던 엄지손가락을 슬슬 끌어 올려 나의 아랫입술을 짓이겼다. 포악하고 강한 힘이 나를 눌렀다. 최후의 발악까지 밟혀 버린 나는 결국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노려보았다. 이준은 원망 어린 시선 따위 아랑곳하지 않고 웃었다.
“참. 그것도 오 실장이었어. 서이한과 네가 가까워 보인다고 알려 준 사람. 밤마다 걔가 널 바래다줬다고 하던데.”
그는 불경스러운 짐승을 부르는 듯한 태도로 이한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동요하지 않으려고 해도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형편없이 흔들리는 내 눈동자는 습기까지 머금으려 했다.
“둘이 뭐, 연애라도 했나 봐? 오늘 아침에는 병원에서 아주 눈물의 이별을 했다면서? 그래놓고 내 앞에서는 시키는 대로 못 하겠다고 내빼는 심보는 또 뭐야? 응?”
태연한 척하는 말투였지만, 이준의 표정은 전에 없이 날이 서 있었다. 아랫입술을 누르는 이준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 혀끝에서 피 맛이 느껴지고, 짓눌린 입술이 그대로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살이 잘리는 듯한 고통이 차라리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눈시울과 코끝이 붉어지기 시작한 걸 아픔 탓으로 숨길 수 있을 테니까.
“참,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이 많다니까. 도도한 척, 비싼 척은 혼자 다 하던 둘이 붙어먹을 거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말이지.”
“…….”
“서이한. 하…. 그 쓸모없는 자식이 멋대로 나다니게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는데. 하다 하다 이런 일에까지 나한테 엿을 먹일 줄 누가 알았겠어? 제까짓 것도 알파라고, 괜찮은 오메가를 보니 탐이 났나 보지?”
“…….”
“윤오 너한테도 실망했어. 취향은 멀쩡하려나 싶었는데, 구정물에 너무 오래 잠겨 있었더니 악취에 끌리기라도 했나? 밑바닥 근성이라는 게 이런 건가? 서이한 걔도 출신이 아주 지저분하거든. 너 혹시 알기나 해? 그 새끼를 낳은 게 어떤 사람인지?”
분노에 차서 이를 갈던 이준은 또 돌연 히죽히죽 웃기 시작했다. 그는 나를 짓이겨대던 엄지손가락을 들어 희롱하듯 입술 위를 톡톡, 두드렸다.
“내가 재미있는 얘기 하나 해줄까? 우리 아버지한테는 남자 오메가 애첩이 있었어.”
“…….”
“고상한 취미는 아니긴 한데, 아버지가 이유도 없이 그러실 분은 아니거든. 그 사람은… 그래. 네가 쉽게 알아들을 수 있게 표현하자면, 제법 쓸모있는 사람이었어.”
그가 하려는 것은 아마도, 이한의 오메가 아버지에 관한 이야기일 거다. 이한이 떨리는 목소리로, 나에게 터놓았던 말했던 바로 그 이야기. 징그러운 이준의 미소 위로 덤덤하고도 수줍었던 이한의 모습이 겹쳐 보였다.
“난 전공도 이렇고, 연구하는 걸 좋아하지만 사실 제약회사라는 게 사업적으로는 그렇게 재미 볼 만한 분야가 아니거든. 수입 약 떼어다 파는 건 마진이 별로고, 투자한 만큼 연구 결과가 나올지도 알 수 없고, 임상시험이니 신약 허가니 이래저래 번거로운 일만 많고…. 생각해 봐. 기껏 돈 들여서 회사까지 세웠는데,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게으름뱅이들한테 월급 주고 나서 남는 것도 없으면, 말도 안 되는 거 아니야?”
“…….”
“다행히 우리 아버지는 수완이 좋은 분이거든. 내 아버지라서 그런 게 아니라, 정말 인간 대 인간으로 존경할 만한 사업가라고. 아버지가 서경제약을 운영하면서부터는 회사에서도 훨씬 수익성 있는 약물에 연구 역량을 집중하기 시작했어. 우리가 잘 만드는 건… 음, 쉽게 표현하자면 일족 사람들을 위한 최음제 같은 거야.”
이야기의 첫머리를 들었을 뿐인데, 때 이른 구토감이 몰려왔다. 더러운 말을 하면서 으스대는 표정을 짓는 이준의 표정 때문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왜? 듣기 거북한가? 다 수요가 있어서 하는 비즈니스야. 일족 사람들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라고. 우리가 얼마나 피곤할지 제대로 생각이나 해 본 적 있어? 아무것도 모르면서 사사건건 간섭만 하려 드는 외부인들한테 정체도 감춰야지. 멍청한 베타들에 인간 같지도 않은 오메가들까지 이끌어가면서 일족을 번성시켜야지.”
“…….”
“사람은 스트레스가 쌓이면 풀어 줘야 하는 거잖아. 그런 즐거움이라도 있어야 하지 않겠어? 그런데 유인원족의 약물은 우리 페로몬에 아무 영향도 못 주니까, 일족 내부에서 직접 만드는 수밖에 없다고. 그래서 아버지는 아주 좋은 약을 만들었어. 그리고 약을 만들었으면, 잘 팔아야 하는 거잖아. 우리는 자선사업가가 아니니까. 여기부터가 정말 재미있는 이야기야. 아버지는 정말 수완이 좋은 분이라니까.”
이준은 거리낌이 이한의 아버지를 영업에 ‘사용’한 방식에 관한 이야기했다. ‘그 사람은 아버지가 지정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든 다리를 벌렸다’라는 끔찍한 문장이, 제 가문의 자랑스러운 역사라도 되는 듯 의기양양한 태도였다.
그게 그저 흘러간 옛일에 관한 말이 아니라 나에 대한 경고 같아 듣기 괴로웠다. 할 수만 있다면 그의 입을 틀어막아 버리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것도 효과적인 영업이긴 했지만 내가 보이기에 그 사람의 쓸모는 그것 말고도 더 있을 것 같았거든. 아버지가 사업가라면 나는 연구자니까 말이야.”
“…….”
“보통 일족 내부에서 만드는 오메가용 최음제들은 임상시험을 거치지 않았어. 절차도 번거롭고, 마땅한 피실험자를 구하기도 어려우니까. 연구하는 입장에서는 이게 영 아쉬운 일이란 말야. 나는 늘 생각했거든. 위험성을 확인할 적당한 피실험자만 있다면, 획기적인 성능의 약을 만들 수 있을 거라고.”
“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럼….”
넋이 풀려 중얼거리는 나의 말에 그는 개인교습을 해 주던 시절 내가 정답을 맞혔을 때처럼 활짝 미소 지었다.
“맞아. 괜찮은 아이디어지? 그 사람보다 더 좋은 피실험체는 없었어. 보통 오메가들은 의지가 약해서 조금만 위험해져도 달아나 버리는데, 그 사람은 아버지한테 완전히 길들어서 시키는 건 다 했으니까. 나쁘지 않은 일이잖아, 솔직히. 그 사람도 죽기 직전까지 자기 쓸모를 다 한 셈이고, 우리도 괜찮은 약을 만들 수 있었고.”
“…….”
“음…. 그 사람이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먹은 게 아마… 내가 만든 약이었을걸? 아직도 모르겠어. 성분이 문제였는지, 분량이 많았는지…. 모처럼 만든 약인데 그건 찜찜해서 여태 고객들에게 안 내보내고 있단 말이지.”
“…….”
“어쩌면 약은 정상이고, 그 사람이 문제였을 수도 있지. 십몇 년 동안 최음제를 하도 먹어서 나중엔 보통 약으로는 끄떡도 안 할 지경이었으니까. 내버려 뒀어도 얼마 못 살고 죽긴 했을 거야, 그 사람.”
“…….”
“하…. 오메가라는 족속들이 그렇게 미련해. 서이한을 들먹거리기만 하면, 그 사람은 제 눈알이라도 뽑아서 줄 기세였다니까. 새끼를 낳았다고 제 딴에는 부성애라도 있었는지….”
한껏 비아냥거린 이준은 이제 키득키득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다.
“진짜 웃기지도 않아. 하긴, 나에게도 나쁘지 않은 일이긴 하지. 너도 내 아이를 낳고 나면, 내가 시키는 건 뭐든 하게 된다는 뜻이니까. 그렇지?”
그는 웃음기가 득시글거리는 눈을 들어 나를 보았다. 더 이상 말하지 말라고 애원하고 싶었지만, 겁을 삼키고 굳어 버린 혀가, 목소리가 도무지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턱을 쥔 그의 손을 뿌리치는 것처럼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순순히 손을 놓더니, 내 발버둥이 우습다는 듯 큭큭거리며 웃었다.
“뭘 그렇게 겁을 먹어? 그럴 거 없어. 너도 알잖아. 내가 관대한 편이라는 거.”
한참을 웃던 그는 숨을 고르듯이 천천히 호흡했다. 늘 그의 표정을 가리고 있던 허울 좋은 가면은 온데간데없었다. 입술은 미소 짓고 있지만, 눈은 기이한 욕망과 분노로 빛나고 있었다. 늑대라기보다는, 욕망과 탐욕에 이글거리는 야차 같은 모습이었다.
“그래, 처음에는… 너한테 그렇게 위험한 짓까지는 시키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거든. 그런데 요즘엔 조금, 생각이 바뀌려고 하는 중이야. 솔직히 좋은 기분은 아니라서 말이지. 그렇잖아. 하필 서이한이라니….”
“…….”
“네가 날 이렇게까지 짜증 나게 만들 줄은 몰랐거든. 후…. 너희 같은 사람들에게 바보 취급당하는 게 얼마나 치욕적일지, 이해할 수 있겠어? 또 이렇게 더러운 기분이 되느니 그냥 쓸모가 있는 만큼은 전부 다 써 주는 게 맞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고….”
나는 앉은 채로 주춤주춤 뒤로 물러났다. 어떻게든 달아나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움직임은 너무도 무력했다. 벌벌 떨리는 등은 금세 좁은 침대의 끝에 다다라 머리 위의 철제 프레임에 부딪쳤다.
“저런…. 너무 걱정은 하지 마. 앞으로 시간은 많으니까, 이제부터 잘하면 돼. 잘 생각하는 게 좋을 거야. 정말 심한 짓을 당하고 싶은 게 아니라면….”
내가 달아난 만큼 간격을 좁히듯이, 그는 의자에서 몸을 일으켜 침대 한 귀퉁이에 앉았다. 호흡이 닿을 만큼 가까워지자 온몸의 털이 곤두섰다. ‘이제부터 잘하라는’ 말의 의미가 무엇이든, 나는 도저히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 사람을 처음 봤을 때부터 늘 나에게도 그런 오메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거든. 처음 본 순간부터 확신했어. 너야말로 내 계획에 꼭 필요한 완벽한 오메가라는 걸. 봐, 이 투명하고 하얀 피부, 긴 속눈썹, 붉은 입술…. 무엇보다, 이 냄새.”
그는 홀린 듯한 눈으로 나에게로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기분 나쁜 호흡이 내 귓가에 닿는 순간 저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으….”
“후…. 지금도 이렇게 축축한 냄새를 풍기고 있는데, 발현이 완전히 끝나면 어떻게 될지 기대되지 않아?”
“그만하세요…!”
견디지 못한 나는 침대에서 일어나 몸을 피하려고 했다. 소용없는 반항이 오히려 그를 자극했던 걸까. 이준은 내 어깨를 강하게 붙잡았다. 반항해 보려는 버둥거림이 무색하게, 그는 간단히 나를 침대 위로 쓰러뜨렸다.
손목이 하나하나 붙잡혀 내리눌리자 꼼짝할 수 없게 되었다. 어느새 내 위에 올라탄 그의 얼굴이 기괴한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예고도 없이 입술이 닿았다.
“으윽…!”
이준은 내 입술을 삼키면서 내가 내뱉은 탄성도 함께 삼켜 버렸다. 난폭하게 입술을 깨물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제 혀를 밀어 넣었다. 축축하고 미끈한 그의 혓바닥이 나의 혀 위로 엉겨 붙었다.
싫었다. 그저 ‘싫다’라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로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다. 그가 닿은 모든 피부와 점막 위로 다리 많은 벌레가 기어 다니는 것 같아서 견딜 수가 없었다.
있는 힘껏 고개와 몸을 벗어나려 했지만, 그는 네 몸으로 나를 누르고 내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멋대로 흘러나온 눈물이 눈꼬리에서 아래로 흘러내려 갔다. 눈물에 얼룩진 시야에 그의 두 눈이 보였다.
그는 내 입안을 질척하게 핥으며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부릅뜬 두 눈으로, 저로 인해 내가 괴로워하며 흐느끼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차마 마주 볼 수 없어서,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도 싫어서 차라리 정신을 놓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과 그랬다가는 무슨 일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 사이를 갈팡질팡거리던 차에 그가 입술을 아래로 스멀스멀 옮겨가기 시작했다.
내 턱을 지분거리던 그의 입술은 느릿느릿 목덜미로 향했다. 뜨끈한 혀가 목을 핥는 감촉이 너무 생생했다. 자꾸만 돋아오르는 소름 때문에 어깨부터 목덜미까지가 굳어 버렸다.
짐승의 사체처럼 경직된 나의 목 위로, 그가 콧등을 부볐다. 그는 내 목덜미에 대고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몇 번이고, 괴로울 만큼 오래, 나의 냄새를 모두 빼앗아가 버릴 것처럼. 더는 견딜 수 없었다. 나는 떨리는 목소리로 흐느꼈다.
“시, 싫어요….”
그는 내 말을 들은 척도 하지 않고 혀를 넓게 펴서 내 목울대 위를 핥아 올렸다. 뒤통수를 쥐고 있던 손은 더듬더듬, 가슴을 지나 배를 타고 내려왔다.
티셔츠 밑을 들어 올린 그가 나의 맨살을 만졌다. 아랫배를 더듬거리는 손길이 금방이라도 더 깊숙한 곳으로 파고들 것 같았다. 나는 경련하듯 몸을 파닥이며 더 크고 비참하게 애원했다.
“제발, 싫어요. 으으, 흐으…. 제발….”
“…풉.”
짧게 숨을 터뜨리는 것 같은 소리가 들리더니, 몸에서 그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이내 키들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레 눈을 떠보니 그는 상체를 일으켜 미친 듯이 웃고 있었다.
“흣, 크크큭…. 큭, 하하, 아…. 정말 재밌다니까, 너는.”
재미있는 일도 없는데, 뭐가 좋다고 웃는지, 넋이 빠진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그가 나를 비웃는 중이라는 것도 조금 후에야 알았다. 한참을 웃어 댄 그는 눈가를 비비며 웃음기가 남은 목소리로 말했다.
“윤오야, 왜 그래? 그냥 장난친 거야. 많이 놀랐나 봐? 후후후….”
그는 한숨 비슷한 걸 내뱉고는 제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조금 전까지 으르렁거리며 멸시의 말을 하고, 억지로 나를 덮치려 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산뜻한 태도였다. 갑자기 돌변한 모습이 더 무섭게 느껴졌다.
“저런…. 내 말을 못 믿나 보다. 진짜야. 지금 당장은 너한테 손댈 생각 없어. 싫다고 하는데 억지로 할 생각도 없고.”
“…….”
“물론 싫다는 상대에게 더 불타오르는 변태 같은 새끼들도 있긴 하지. 난 다행히 그런 취향은 아니거든. 그렇게 저급하고 자존심 상하는 짓 같은 건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마.”
그는 생글거렸지만, 나는 마음을 놓을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그의 눈은 여전히 먹이를 탐색하는 포식자의 눈빛으로 나를 훑고 있었다. 거울 같은 눈동자에 비친 내 모습은 형편없이 겁에 질려 있었다.
“첫 번째 히트 사이클, 아직 안 왔지?”
“…….”
“그런데 이제 거의 다 무르익은 것 같은데. 아마 머지않았을 거야. 고작해야 며칠…? 그래. 이건 그냥 시간 문제야. 그 정도야 충분히 기다릴 수 있어. 일 년을 공들였는데 며칠이 문제겠어?”
“…….”
“생각해 봐. 사이클이 오기만 하면, 너는 내가 싫다고 해도 날 원하게 될 거야. 해 달라고, 입 맞추고 깊게 박아 달라고 애원하게 될걸. 늘 인형처럼 새침을 떨던 이 입술로 말이야. 아주 볼만하겠지? 그게 어떤 느낌일지 너도 궁금하지 않아?”
“…….”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때까지는, 네가 미쳐 버릴 정도로 나를 원할 때까지는 손도 대지 않을 테니까.”
연인에게 사랑을 속삭이듯 상냥하고 사근사근한 말투는, 광기 어린 흉포함의 다른 형태일 뿐이었다. 계속된 긴장과 공포감에 나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빳빳하게 굳은 채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나에게, 그는 꽤나 그럴싸한 연민의 눈빛을 보내 왔다.
“저런. 많이 놀랐구나? 그럴 거 없어. 그래도 넌 운이 좋은 편이야. 오메가들의 인생은 다 비슷비슷하거든. 오갈 데 없이 떠돌면서 잡놈들에게 몸을 파는 렌트보이보다는, 나처럼 확실하고 고정적인 스폰서가 있는 쪽이 낫지 않겠어?”
“…….”
“게다가… 오메가로 발현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네 인생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의 말은 내가 결국 언젠가는 굴러떨어져야 할 진흙탕에 도달했을 뿐이라는 뜻이었다. 이 정도로 몸이 굳지 않았더라면, 나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거나 화를 낼 수 있었을까. 아니면 그저 체념했을까. 이준은 아무 말도 못 하는 내 모습이 흡족한지, 선선히 웃었다.
“지금만 해도, 봐. 네가 살던 그 불결한 동네보다는 여기가 훨씬 깨끗하고 넓잖아. 언젠가 더 언젠가 상황이 정리되면 좀 더 괜찮은 곳으로 옮겨 주겠지만, 여기도 지낼 만할 거야. 하고 싶은 건 다 해도 괜찮아. 여기서 나갈 생각만 하지 않는다면 말이지.”
“…….”
“식사랑 갈아입을 옷은 오 실장 통해서 들여보내 줄게. 혹시 부탁할 일이 있으면 그 사람 통해서 적당히 처리하도록 해. 혹시 그 작자가 널 어떻게 할까 봐 걱정할 필요는 없어. 그 사람은 베타고, 내가 시키는 건 뭐든 하는 사람이니까. 자, 일단 그 냄새 나는 옷은 이걸로 갈아입어.”
그는 오 실장이 놓고 간 옷 나에게 억지로 쥐여 주다가 못마땅하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가축을 다루는 듯한 태도로 내 팔다리를 만지고 몸 곳곳을 살펴보며 중얼거렸다.
“음…. 저런. 옷이 좀 크겠는데. 너무 말랐잖아. 원래 팔목이 이렇게 가시같이 뾰족했었나? 이래서야 임신할 수 있을지 모르겠는데. 아주머니께 식사 준비에 신경 써 달라고 말해야겠다.”
“…….”
“올라오는 음식은 다 먹도록 해. 제대로 안 먹는다 싶으면 강제로 식욕을 끌어 올리는 약을 먹일 거니까. 그거보단 스스로 먹는 게 너한테도 나을 거야.”
상냥하게 윽박지르는 말에 내가 흠칫거리자, 그는 기르는 강아지를 쓰다듬듯 친절하게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윤오야. 내가 그랬었지. 우리는 잘 지낼 수 있을 거라고.”
“…….”
“아직도 나는 그렇게 생각해. 날 무서워할 아무런 이유가 없어. 모든 건 너 하기에 달렸으니까. 너만 잘하면, 우리는 여전히 잘 지낼 수 있을 거야.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아듣겠지? 믿고 있을게. 나를 다시 실망시키지는 마.”
마지막 인사는 섬뜩한 당부의 말이었다. 대답하지 않는 나를 두고, 그는 방을 나갔다. 쿵, 문이 닫히자 다시 새하얀 방에는 나 혼자뿐이었다.
나는 한참이나 꼼짝도 하지 않고 그가 나를 놓아둔 자리에 그대로 있었다. 현실이 나에게 스며들기를 거부하는 것처럼, 얼어붙은 채로 그렇게.
안 그래도 지쳐 있던 머리는 받아들이기 힘든 말들을 소화하지 못했다. 아닐 거라고, 이건 그냥 나쁜 꿈이라고 의미도 없는 부정을 반복하고 있었다.
텅 빈 방에는 초침 소리와 내 맥박 소리만 울렸다. 불협화음처럼 번갈아 허공을 두드리는 리듬을 듣고 있던 나는 조금씩 맥이 빨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공기가 문득 더워졌다고 생각한 순간 싸르르, 아랫배가 울렸다.
‘설마….’
낯선 감각을 모른 척했다. 계속 긴장했던 탓에 배가 아픈 걸 거라고 생각했다. 지친 몸을 침대에 누이곤 작게 웅크려 봐도 불편하고 묘한 감각은 가시지 않았다. 그것은 뒤척거리는 동안 더 부풀고 짙어졌다. 페로몬을 닫는 게 점점 힘들게 느껴졌다.
‘아아. 왜 하필 이럴 때….’
쿵, 쿵. 맥박은 위험하리만치 치솟아 있었다. 코끝에 단내가 묻어나기 시작한 게 기분 탓인지, 정말 향기가 새어 나오는 건지 불분명했다.
배운 적은 없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게 히트의 전조증상이라는 걸. 어찌할 바를 몰라 두 다리를 바짝 붙였지만, 살끼리 닿는 감촉에 오싹 소름이 돋아올랐다. 신음을 뱉을 뻔한 입을 틀어막았다. 호흡과 소리를 삼키며, 나를 다그치던 이한의 말을 떠올렸다.
‘첫 히트는 구역질 날 정도로 길고 세게 와.’
그리고 광기 어린 눈을 번뜩이던 이준의 말도.
‘너도 내 아이를 낳고 나면, 내가 시키는 건 뭐든 하게 될 테니까.’
소스라친 나는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거기에는 하민에게 받았던 약 봉투가 들어 있었다. 급한 마음에 물도 없이 알약 하나를 꿀꺽, 삼켰다. 약효가 발정을 가라앉혀 주기를 초조하게 기다렸다.
다행히 격하게 박동하던 심장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정신을 차릴 수 있게 되자마자, 봉투에 남은 억제제의 개수를 세어 보았다.
스무 개가 채 되지 않는 알약. 하민은 6시간마다 한 알이 정량이라고 했었다. 5일도 버티지 못하는 숫자라는 걸 계산한 순간, 나는 방금 귀한 약 한 알을 다 삼켜 버린 것을 후회했다.
정해진 분량의 절반씩만 먹는다고 해도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열흘이었다. 빠듯한 숫자만큼 턱 끝까지 다가온 위기감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이클이 어떻게 진행되고 어떻게 끝나는지에 대해, 나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열흘간 약을 먹고 버티면 이번 사이클은 그대로 넘기게 되는 걸까. 아니면 약이 떨어지는 대로 곧 히트가 시작되는 걸까.
어느 쪽이든, 영영 사이클이 오지 않게 버틸 수는 없을 것이다. 운이 좋아 이번을 넘기더라도, 주기는 다시 찾아올 테니까. 이준의 뜻대로 그의 노예가 될 생각이 아니라면 나는 최대한 빨리, 아마도 열흘 안에는 이곳에서 나가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