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9 : 함락
“아니, 아직 아니야. 한윤오.”
까무룩 의식이 넘어가려는 그 애를 흔들어 깨웠다. 힘없이 축 늘어진 그 애는 매만지고 입을 맞춰도 일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내버려 두어도 좋을 텐데, 흉하게 솟은 심술은 이대로 멈추지 말라고 나를 충동질했다.
나는 몸 안에 흘러넘치는 페로몬을 열었다. 알파의 페로몬을 받는 데 익숙하지 않은 그 애는 나의 향기가 각성제라도 되는 양 파스스 눈을 떴다.
“흐으으….”
“정신 차려.”
“이제, 흐윽, 으, 제발…. 이, 이한…아.”
반쯤 정신을 차린 그 애는 넋두리처럼 중얼거렸다. 조심스럽지 못한 말이었다. 쾌감에 짓눌려 다 쉬어 버린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부르는 건 나에겐 단지 도발로 들렸다. 간절한 애원을 모른 척하고, 힘이 다 풀린 두 다리를 벌려 자리 잡았다.
충혈된 유두를 주무르고 귓불을 깨물면, 진저리치는 목소리와는 달리 몸은 정직하게 반응했다.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한 그 애의 페니스 끝에는 프리컴인지 정액인지 모를 맑은 물기가 맺히기 시작했다.
여러 차례 배출해 버린 탓인지 그 애는 성기에 손끝만 닿아도 예민하게 발버둥 쳤다. 지금도, 발기하는 감각이 괴로운지 아랫배를 웅크리고 있다. 울고 싶다는 표정이었지만 몸 안의 수분이 다 쥐어 짜인 듯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아… 아아….”
체력의 한계를 넘긴 지 오래인 듯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게 몇 번째인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으니까. 한 손으로 다 꼽을 수 있을 정도인지, 다른 손이 필요한지조차.
쓰러지려는 애를 억지로 깨워 엉겨붙고 들쑤셔 댄 것만도 이미 두어 번이었다. 그 애는 탈진하기 직전의 상태로 질질 끌려오고 있었다. 그 애가 괴로워할수록 나는 더 끈질기게 그 애를 물어뜯고 파헤쳤다.
처음의 한두 번은 분풀이였다. 나와의 약속을 어기고 이준의 냄새를 묻혀 온 그 애를 확인한 순간 도무지 참을 수 없는 분노가 타올랐다. 정신이 무너져 버릴 듯한 불꽃에 휩싸여 정신없이 그 애를 범했다.
터져 버릴 듯한 화를 삭일 수 있으면 아무래도 좋았다. 그 애가 싫다고 하든, 눈물을 흘리든 상관없었다. 오히려 난폭한 정욕이 더 피를 끓게 했다.
그러나 한심하게도 어느 순간 분노는 흐려지고 겁이 나기 시작했다. 억지로 밀어붙인 나를, 그 애가 증오하고 경멸할 거라는 생각 때문에 초조해졌다. 정신이 제대로 붙은 사람이라면 그 즈음에 폭주를 멈추고 그 애에게 사과했을 거다.
‘씨발… 어차피 다 틀린 거잖아.’
그러나 나는 머릿속 어딘가가 부서져 버린 미친놈이었다. 사과는커녕, 오히려 더 모질고 질척하게 굴었다. 돌이킬 수 없는 일이라면 차라리 그 애의 모든 곳에 나를 새겨 놓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게, 어디로도 가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고 나서는 나조차도 이해 못 할 열기가 이어졌다. 분이 풀릴 때도 되었는데, 사납게 불붙은 페로몬이 가라앉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태어나서 겪어 본 어떤 러트도 이렇게까지 뜨겁지는 않았었다.
내가 내뿜은 불꽃은 공기를 다 태우고 도로 나에게 달라붙었다. 뼈와 피가 붉게 물들고, 충동에 뇌가 녹아 버렸다. 몸이 펄펄 끓기만 하고 지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 애가 몇 번이고 멈춰 달라고 했지만, 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더 거칠게 날뛰어 댔다.
“하으으, 아, 제발, 제발… 응?”
그 애는 울 힘도 없는지 헐떡이기만 했다. ‘제발’이라는 말은 그만두라는 뜻이었겠지만, 나에게는 그 말조차 유혹처럼 들렸다. 제발 나를 끝내 달라고. 마지막 한 방울까지 나를 쥐어짜고 들이마셔 달라고.
지분거리는 손길이 멈추지 않자, 그 애는 결국 네발로 기어 달아났다. 멀리 가지도 못하고 침대 머리 쪽으로 올라간 게 고작이었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그 거리를 가는 것도 힘겨운 듯 가느다란 몸이 바들바들 떨렸다.
필사적인 저항이 오히려 나를 자극했다. 나에게서 달아나려 한다는 게 화가 났고, 달아나 봤자 쉽게 사로잡힐 거라는 사실이 흡족했다.
“윽!”
한 줌도 되지 않을 그 애의 발목을 움켜쥐었다. 아래로 잡아당기자, 버둥거린 보람도 없이 그 애는 나의 바로 앞까지 죽 끌려왔다. 연약한 다리는 간단한 손짓만으로 넓게 벌어졌다.
나는 더운 입술을 감쳐물며 그곳을 응시했다. 지독하게 시달린 입구는 피처럼 붉게 부어 올라있었다. 연거푸 마찰 당하고 두드려진 엉덩이의 피부도 매 맞은 듯 붉었다. 안쓰러운 모양새에 동정심이 일기는커녕 더 구미가 당겼다. 머리가 핑 돌고, 아랫배가 쑤실 정도로 흥분해 버렸다.
다시 짐승처럼 부풀어 오른 페니스를 그 애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구멍에 선단을 맞추자 그 애의 몸이 반사적으로 진동했다.
무어라 말을 할 듯 어깨를 달싹였지만 나는 그 애가 입술을 떼기도 전에 깊게 삽입해 버렸다. 어차피 이야기를 듣는다고 해도 그 애의 뜻대로 해 줄 생각은 없었으니까.
“흐으으….”
그 애는 무력한 신음을 흘렸다. 신음이라기보다는, 칼에 찔린 사냥감의 폐부에서 새어 나오는 바람 소리 같기도 했다. 안쓰러움을 모른 체하며 나는 더욱 무자비하게 몸을 밀어붙였다.
깊게 쑤셔 박고 싶은 마음에 그 애의 어깨를 움켜쥐고 박자에 맞추어 뒤로 당겼다. 길이 든 몸은 나를 빨아들이듯 휘감았다. 밀착된 내벽을 가르고 들어가는 감각, 아랫배에 여린 둔부에 살갗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감각.
모든 것이 미칠 듯 자극적이었지만, 나는 그 모든 게 황홀하면서도 짜증스러웠다. 아무리 몰아쳐도 성에 차지 않아서.
찌푸린 눈으로 그 애를 내려보았다. 잘록하게 들어간 허리, 뼈가 톡 튀어나온 마른 등, 부서질 듯 자그마한 어깨. 아, 그리고, 유난히 하얀 저 목덜미.
그 애의 목덜미에는 상처가 있었다. 머리칼에 가려져 남들은 보지 못할 작은 상처가, 이 자세에서는 또렷이 보였다. 살이 찢어져 피가 흘렀던 자리의 흔적. 하필이면 딱 그 자리에 상처가 있다는 게, 나를 더 돌아 버리게 만들었다.
‘그냥, 그냥 이대로….’
구멍 뚫린 그릇에 물을 붓는 것처럼, 아무래도 충족감이 들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그 애가 나의 현관에 발을 들일 때부터, 나는 그 애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각인해 버리고 싶었다.
기회는 수도 없이 있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바로 지금도, 나는 저 하얀 목에 송곳니를 박아넣고 그 애가 영원히 나에게만 발정하도록 구속해 버릴 수 있었다. 그러면 조금은 속이 시원해질 것 같았다. 죽을 것 같은 이 갈증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각인은 싫다고 울먹거리던 그 애의 모습을 생각하면, 제 목덜미를 덮었던 가시같이 가녀린 손가락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이를 악물고 쓴 침만 삼키며 충동의 극단을 눌렀다.
‘으, 씨발….’
본가 사람들은 오메가의 피가 섞인 내가 제대로 된 가문의 일원이 아니라고 손가락질했다. 우성 알파로 판정되었더라도 천박한 혈통은 어쩔 수 없다는 비아냥이었다.
헛소리라고 생각했던 그 말이, 어떤 의미에서는 맞았던 셈이다. 내가 제대로 된 늑대라면, 사냥을 즐기는 냉혹한 짐승이었다면 나는 결코 망설이지 않았을 것이다. 먹이를 궁지로 몰아넣은 순간 숨통을 끊고 마음껏 취해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욕심에 들떠 그 애를 쥐고 흔들어 놓고도 마지막 순간에 와서는 지지부진하게 머뭇거렸다. 기껏 사로잡은 먹잇감을 삼키지도 못하고 산 채로 질겅거리기만 하는 꼴이었다.
그 애가 바라는 대로 너그럽게 그 애를 놓아주지도, 내가 바라는 대로 그 애를 속박해 버리지도 못한 채로 서성거리고만 있었다. 누구도 승리하지 못하는, 서로 고통스러운 대치가 몇 시간째였다.
“아윽! 으….”
나는 신경질적으로 그 애의 몸 안에 내 것을 쑤셔 넣었다가 끄집어내기를 반복했다. 쿵, 쿵. 윽, 윽. 도살장에서 들리는 듯한 소리가 반복되었다.
처박힐 때마다 늦은 신음을 흘리던 그 애는 어느 순간 아무런 반응도 하지 않았다. 반쯤 머리가 돈 나는 그 애의 몸이 휘늘어지고 있다는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로 미친 듯이 허리를 털어 댔다.
“하아….”
몰려오는 절정감에 깊이 박혀 있던 성기를 뽑아냈다. 오직 관성 같은 본능으로 몸을 움직였다. 움직임을 잃은 볼기 사이에 탐욕스러운 아랫도리를 끼워 넣고 손으로 비벼 정액을 짜냈다.
몸 안에 사정하면 안 된다는 의식은 있었던 주제에, 나는 축 처진 그 애의 모습에서 아무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다.
여러 번 맞이했지만, 배출하는 감각은 여전히 아찔했다. 허무할 정도로 정직한 쾌감이 몸을 훑고 지나갔다. 거친 호흡을 씹어 삼키며 내뱉어 놓은 것들을 휴지로 훔쳐냈다.
‘음…?’
그 애를 내려다본 것은 그다음이었다. 그 애는 엎드린 자세로 미동조차 없었다. 잠이 든 걸까 생각했지만 느낌이 좀 달랐다. 흐물거리는 몸이 바닥에 착 달라붙어 있다.
이상한 낌새에 조심스레 그 애의 몸을 뒤집어 보았다. 두 눈을 감은 그 애는 고요했다. 놀란 마음에 허둥지둥 그 애의 코 밑에 귀를 가져다 댔다. 호흡이 너무 가냘파서 내 숨소리를 한껏 낮추어야 들을 수 있을 정도였다.
손으로 뺨을 건드리고 손발을 주물러보아도, 그 애는 움찔거리지조차 않았다. 의식을 놓은 지도 한참 된 모양이었다. 무리는 아니었다. 나조차도 괴로울 정도로 진이 빠졌는데, 작고 연약한 그 애가 버텨내기는 힘들었을 거다.
실은 한참 전부터 위태로운 상태였다.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아니, 멈추고 싶지 않았다. 그러다 결국 의식도 없는 애를 붙들고 저 혼자 난리를 피우고 있었던 거다.
‘씨발… 짐승이나 다름없잖아.’
나는 황망하게 그 애를 바라보았다. 어두운 침실에서도 파리하게 빛나는 피부. 투명하리만치 희던 살갗은 온통 험악한 잇자국과 입술 자국으로 얼룩져 있었다. 수척한 얼굴에는 피로가 그득했다.
억지로 발기하고 배출하기를 반복했던 성기는 힘을 잃고 늘어져 있었다. 아랫배에는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게 말라붙은 정액과 체액이 희끗희끗했다.
누구라도 지금 그 애를 본다면 눈살을 찌푸렸을 것이다. 여리고 아름다운 몸은 참혹한 흔적들로 얼룩져 있었다. 그건 모두 내가 씹고 짓이기고 토해 놓은 것들이었다. 나는 퍼뜩 깨달았다. 이렇게나 작은 아이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굴었던 건지를.
‘내가 진짜 무슨 짓을 한 거지….’
뒤늦은 자괴감이 몰려왔다. 제가 저지른 일에 제가 당황하는 꼴이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수건에 물을 적셔와 그 애를 정성껏 닦아 주었다.
내가 남긴 흔적들은 얼룩처럼 사라지지 않았지만, 덕지덕지 묻은 체액이라도 걷어내고 나니 그나마 모양새가 나아졌다.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작은 몸을 가렸다. 한참을 초조하게 지켜보니 숨소리도 조금은 안정되어 갔다.
나는 염치없게도 잠든 그 애의 얼굴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애잔하고 애틋하고, 가엾고 귀여운 모습이었다. 가슴 벅찬 느낌에, 나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내가 그 애를 소중하게 생각한다는 것을.
‘상처 주려고 했던 건… 아닌데….’
영영 뿌리쳐지고 말 거라는 생각에 덜컥 겁이 났다. 나는 엄마에게 달라붙는 어린애처럼 그 애의 옆에 누웠다. 상처 입은 작은 몸을 하염없이 끌어안고 있었다. 맞닿은 살갗으로 내 감정이 스며들어 그 애에게 전해지길 바라는 것처럼.
그 애의 숨소리가 조용조용 이어지는 게 미칠 듯이 불안하고 애틋했다. 가만히 그 호흡을 따라 하다 보면 내 호흡도 아주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막 세상에 태어난 애송이처럼 생각했다. 이게 소중하다는 기분이구나. 소중하다는 게 이렇게 낯설고 간지럽고 벅찬 기분이구나.
무언가가 소중하다고 생각한 적이 언제였나 싶었다. 아주 오래전, 나를 낳은 그 사람과 단둘이 살던 어린 시절에는 모든 게 소중했었다. 풀벌레도, 작은 사탕도, 마당에서 주운 낙엽과 돌멩이까지도. 이제 와 생각하면, 그건 그가 나를 소중히 대해 줬기 때문이었다.
유년이 끝나고 그와 떨어져 사는 시간 동안은 대부분의 사람이 나를 소중히 대해 주지 않았고, 아무것도 나에게 소중하지 않았다. 지금 하나뿐인 소중한 것을 품에 안고서도 나는 행복하다기보다는 괴로웠다. 지긋지긋하던 재훈의 잔소리가 생각났다.
‘그렇게 아무랑도 안 어울리고 지내면 후회하게 될걸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열고 가까워지는 것도 연습이 필요한 일인데.’
‘나중에 좋아하는 사람, 소중한 사람이라도 생기면 그땐 어쩌려고 그래요?’
그가 그런 말을 할 때마다 나는 헛소리 말라며 손사래를 치곤 했다. 어차피 이 좁은 일족의 사회에서 내가 평생 만날 사람들은 모두 쓰레기 같은 인간 말종일 거고, 누군가 좋아지는 일 따위 생길 리 없다고.
큰소리를 쳤던 내가, 지금 무슨 꼴이 되었는지. 소중한 걸 어떻게 소중하게 대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고, 삐뚤어진 마음만 앞서서 이렇게 엉망으로 망가뜨렸다는 게 한심했다.
길고도 한심한 상념이 끝날 무렵, 그 애는 잠에서 깨는 기색이었다. 새근새근 고르게 이어지던 숨이 흩어지고, 어깨도 등줄기도 부자연스럽게 꼼질거렸다. 정신을 차린 그 애가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긴장했다.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가슴만 세차게 뛰었다.
“…….”
“…….”
긴장된 침묵이 꽤나 길게 이어졌지만, 그 애는 나의 곁에 그대로 있었다. 진이 빠져 움직일 힘이 없을 뿐일 수도 있지만, 내 품에 얌전히 안겨 있다는 게 기뻤다. 망설이다가, 용기를 내어 팔베개도 해주었다. 잠자코 내 팔에 머리를 기댄 모양이 어린아이같이 예뻐 보였다.
사실은 말해 주고 싶었다. 너 참 예쁘다고. 아무 이유도 없이 입 맞춰 주고 싶을 만큼, 그런데 그럴 수 없다는 이유로 괜한 심술이 솟아오를 만큼 예쁘다고, 정말로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갑자기 그런 소릴 하면 그 애가 겁을 먹을 것 같았다. 용기가 없는 나는 물을 마시겠냐고 물었다. 뻔뻔한 욕심이래도, 그 애가 더는 나를 두려워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표정도 목소리도 최대한 부드럽게 보이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
가녀린 목소리가 잔뜩 쉬어 있었다. 소스라치게 놀라 “아파?”하고 물었다. 웃기는 소리였다. 안 그래도 내내 골골거리는 애한테 그 난리를 쳐 놓았으니 아프지 않을 리가 있을까. 더구나 아프게 만든 장본인이 그런 걸 묻다니.
“아니, 미안. 아프겠지….”
멍청한 소리만 잔뜩 늘어놓고 나니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고개를 웅크리고 그 애의 어깨에 입 맞추었다. 한참 만에 다시 입을 대 본 그 애의 살갗에서 좋은 향기가 났다.
나는 무의식중에 그 애의 몸에 이리저리 입술을 문질러 댔다. 딱히 무슨 짓을 하려던 것은 아니고, 그저 불안하고 애타는 기분에 홀린 사람처럼 그랬다.
가만히 늘어져 있던 그 애는 입술이 목덜미에 닿자 화들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그건 조금 억울했다. 처음 삽입한 순간에 물어 버릴 수도 있었지만 꾹꾹 참아 왔던 건데.
“각인하려는 거 아닌데.”
그 애는 변명 같은 내 말을 비웃지 않았다. “알아.” 하고 한숨처럼 대답하고는 뜻밖에도 조곤조곤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 애는 목의 상처와 제 아버지에 관해 말해 주었다. 계속 그 상처를 물어뜯어 버리고 싶다고 생각하던 나의 앞에서, 그 애의 태도는 너무도 태연하고 무심했다. 그 애가 마음의 가장 연약한 곳을 드러내는 것이 안쓰럽고 무서웠다.
사람들이 생태계의 포식자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사실이 있다. 흔히 사로잡기 까다로운 먹이를 고르는 쪽이 더 훌륭한 포식자라고 오해하곤 한다.
그러나 타인의 목을 물어뜯을 때는 무는 쪽도 언제나 자신의 손발 정도는 내어놓을 각오를 해야 한다. 그렇기에 사냥을 잘한다는 것은 결국 손쉬운 먹잇감을 잘 고른다는 의미이다. 능숙한 포식자는 손쉬운 피식자를 한눈에 알아본다.
나는 언제나 그 애가 스스로 제 목을 내어놓은 손쉬운 사냥감 같다고 생각했다. 거짓말처럼 쉽고 먹음직스러워 보여서 오히려 함정처럼 느껴질 정도라고. 그러나 정신을 차리고 보니 덫 안에 들어있는 것은 오로지 나였다.
‘언제 이렇게 돼 버렸지….’
어쩌면 우리 둘 사이에서 처음부터 나는 사냥하는 쪽이 아니라 사냥을 당하는 쪽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리기만 해 보였던 그 애는 피식자가 아니라 포식자였을지도.
평범한 포식자는 제 손발을 내놓고 피식자의 목을 물어뜯는 방식으로 사냥한다. 그렇다면 애초에 제 목을 내어놓은 포식자라면 어떨까. 그런 포식자의 눈앞에 선 피식자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삼켜지게 될 운명인 걸까.
“나,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런 얘기 처음 해 봐. 근데 왠지 말하고 싶었어….”
그 애는 작게 속삭이며 스르르 잠들었다. 다시 품속으로 파고드는 몸을 안고서, 나는 마음 깊이 그 애에게 항복했다. 이제 나는 이 아이의 뜻을 거슬러서는 살 수 없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밤이 깊을 때까지 나는 그 애가 나에게 꺼내 준 비밀을, 작은 상처에 맺힌 사연을 곱씹었다. 그리고 품 안에 잠든 아이에게 들리지도 않을 말을 속삭였다.
나도 나를 낳은 이를 증오하고 사랑하였다고. 여섯 살 때 헤어진 이후로는 낯선 본가에서 자라며 다시는 그 사람을 만나지 못했다고. 본가의 사람들은 누구도 나를 사랑하지 않았고, 나는 사실 언제나 외로워하면서 나를 낳은 아빠를 그리워하면서 보냈다고.
하얗게 동이 터오도록 그 애를 안고 있었다. 나는 뜬 눈으로 그 애의 팔과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마음을 노곤하게 하는 달콤한 향기는 그대로였지만 쉽사리 잠이 오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독백이, 가슴에 닿은 체온이 벅차서.
‘…차라리 시간이 멈추면 좋겠다.’
불안하고 일그러진 행복이 곧 끝나 버릴 것임을, 나는 본능으로 느꼈던 거다. 햇살이 환해졌을 때, 그 애의 핸드폰이 울었다. 어쩐지 섬뜩하게 들리는 소리였다. 기분 나쁜 예감에 그 애를 더 꽉 끌어안았다.
“받지 마. 그냥 아무 데도 가지 마. 여기 있어. 응?”
말도 안 되는 억지였다. 그 애는 동그랗게 뜬 눈으로 나를 보았다. 맑은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부끄러워졌다. 그러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자꾸 그 애에게는 억지를 쓰게 됐다. 다가서고 싶은 마음만 앞서고 방법은 몰라서.
그 애는 속을 모를 표정으로 물끄러미 나를 보았다. 그러고는 천천히 고개를 기울여 나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꽃잎처럼 부드럽고 태양처럼 따뜻했다. 거북해하거나 조급한 기색도 없이, 다정하고 느긋한 입맞춤이었다.
고작 가벼운 키스 한 번에 진짜 연인이라도 된 느낌이었다.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짧은 순간 많은 생각을 했다.
그 애와 내가, 의지할 곳 없이 갑자기 발현된 오메가와 더러운 가문의 천덕꾸러기 알파가 아니라, 그냥 평범한 대학생으로 만났다면 어땠을까. 우리는 영영 가까워지지 않은 채로 지냈을까, 어쩌면 친구가 되었을까.
‘아니, 그랬다고 해도 나는 이 애를 좋아하게 됐을 거야.’
터무니없고 달콤한 꿈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아무런 위협도 불안도 없는 어딘가에서, 그 애와 평범하게 시간을 보내는 꿈. 함께 밥을 먹고, 햇빛 쏟아지는 거리에서 손을 잡고 걷기도 하고. 듣기만 해도 하품이 나올 것 같은 시시한 일과를 나누는 꿈을.
그러나 꿈은 꿈일 뿐, 현실은 차가웠다. 그 애는 결국 내 품을 벗어나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네? 네, 네에….”
몇 번의 대답을 반복하는 동안 조그만 어깨 끝은 점점 아래로 내려갔다. 전화를 끊은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 애는 아무 말도 없이 흩어진 옷가지를 주워입고 밖으로 나가 버리려고 했다.
“어디가?”
그 애의 몸은 종이 인형처럼 하늘하늘 흔들렸다. 빠르게 눈을 깜빡이는 표정이 위태로워 보였다.
“어, 어머니가… 쓰러지셨대.”
“뭐? 지금…?”
“언제 쓰러졌는지는 몰라. 복지사님이 오늘 아침 일찍 발견했대. 병원에 계신다고….”
“…….”
“이거 놔. 빨리 가야 해.”
굳은 얼굴이 위태로워 보였다. 보내 주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지만 혼자 보내기도 싫었다. 나는 급하게 옷을 걸치며 택시로 바래다주겠다고 고집을 피웠다. 그 애는 실랑이할 기운이 없는지 다행히도 내 고집을 받아 주었다.
“서경병원으로 가 주세요.”
그 애가 말한 목적지는 서 회장이 운영하는 병원이었다. 평소에는 불쾌하고 껄끄러워 얼씬도 안 하는 곳이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 애는 택시 안에서 핏기없는 입술만 물어뜯고 있었다. 그 애가 금방이라도 쓰러져 버릴 것 같아서, 나도 진정이 되질 않았다. 아무 기운도 없어 보이던 그 애는 병원 앞 택시 정류장에 차가 멈추자마자 무서운 속도로 뛰어나갔다. 허둥지둥 택시비를 치르고 따라 내렸다.
“한윤오. 나도 같이 가.”
달리던 그 애는 멈칫, 뒤를 돌아보았다. 창백한 얼굴이 차갑게 찌푸려져 있었다. 아주 이상한 말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그 애는 늘 나를 밀어냈지만, 이렇게 단호하고 선명하게 나를 거절했던 적은 없었다. 멈칫거리는 사이, 그 애는 돌아서서 병원 건물 안으로 뛰어들었다.
혼자 남겨진 나는 미친놈처럼 병원 주차장을 서성거렸다. 하얗게 질린 그 애의 얼굴이 머리에 맴돌았다. 걱정을 주체할 수 없어서, 결국 재훈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오 어머니가 쓰러지신 게 맞느냐, 상태가 어떤 거냐, 지금 윤오는 어디에 있냐며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질문을 쏟아내었다.
상황을 알아보고 연락해 주겠다며 재훈이 전화를 끊은 뒤 나는 더 초조해졌다. 한심하게도, 병원으로 뛰어들어가 그 애의 이름을 고래고래 외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려야 했다. 한참 뒤 걸려 온 전화를 받자마자 나는 욕을 뱉어버렸다.
“씨발, 형 여기서 일하는 거 맞긴 해요? 내가 뭐 복잡한 거 물어봤다고 알아보는 데 그렇게 오래 걸려요?”
[좀 진정해 봐요. 전에도 얘기했잖아요. 윤오 학생 어머니가 VIP로 분류되어서 정보 조회가 잘 안 돼요. 저도 물어물어 확인했습니다.]
“뭐예요? 뭐가 문젠데요?”
[일단 윤오 학생 어머니가 지금 여기 입원 중인 건 맞는 것 같습니다. 중환자실에 있고요.]
“중환자실…? 그럼 많이 안 좋은 거 아니에요?”
[좋은 상황은 아니죠. 뇌경색으로 쓰러져서 의식이 없는 상태로 이송됐어요.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라고 들었습니다. 윤오 학생한테도 무슨 일 있었던 거 아닌가요? 보호자한테 연락이 안 돼서 애먹고 있는 것 같던데.]
“그게…. 그… 아, 어쨌거나 지금은 왔잖아요.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애 어머니, 진짜 심각한 상황은 아니죠? 깨어나실 수 있는 거죠?”
[글쎄요. 제 환자가 아니라 저도 확실히는…. 그런데 쓰러지고 시간이 좀 지난 후에 발견되셨다고 들었습니다. 처치가 좀 더 빨리 됐으면 좋았을 텐데 그게 아쉽네요.]
재훈의 이야기에 가슴이 철렁했다. 그 애가 병원으로 따라 들어가려는 나를 왜 그렇게 싸늘하게 노려보았는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입술이 바짝 마르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기분이었다.
[그래도 희망을 가져 봐야죠. 담당의가 신 선생님인데, 믿을 만한 분이고 실력도 좋으세요.]
“네.”
[그런데 어제는 내내 뭘 한 거예요? 러트가 그렇게 길었을 리도 없고.]
“그냥… 집에 있었어요. 왜요?”
[이준 군 움직임이 아무래도 심상치 않아서 알려 주려고 했는데, 도무지 연락이 안 돼서요.]
안 그래도 심란한데 못마땅한 이름까지 들으니 속이 뒤집힐 것 같았다. 나는 주머니 속의 담뱃갑을 구깃거리며 물었다.
“서이준이 또 무슨 짓을 했길래요?”
[이준 군이 뉴욕에 있을 때 사건이 있었다는 얘길 들었거든요. 회원제 클럽에서 윤간 사건이 발생했다는데, 피해자가 아무래도 오메가인 것 같아요. 이준 군이랑 친분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연루되어 있고 약물이 사용된 정황도 있고요.]
“그럼….”
[아무래도 재작년 그 사건이랑 비슷한 것 같죠?]
재작년, 일족 사회는 천랑대생들 사이에 발생한 윤간 사건으로 떠들썩했었다. 스무 살 언저리의 아이들 사이에서 종종 일어나는 일이지만, 그 사건은 피해자인 오메가 쪽도 유력가의 자제였기 때문에 문제가 커졌다.
재단 이사회는 드물게 가해자들과 이준에게 근신 처분을 결정했다. 가해자들이 사용한 오메가용 최음제가 이준이 가져다준 것이었기 때문에, 윤간에 직접적으로 끼어들지 않았던 이준도 같이 처분을 받게 되었다.
서경제약에서 개발 중인 약물을 더 강력하고 위험하게 변형하는 것은 이준의 공공연한 취미였다. 이전에 있었던 비슷한 사건들에서도 약물의 출처가 이준이라는 소문이 파다했기 때문에, 서 회장의 힘으로도 사건을 묻을 수 없었다.
“그 변태 같은 새끼가 또….”
더러운 사건이었지만, 그도 서 회장도 그 일을 부끄러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심지어 서 회장은 ‘이준이 만든 약물이 너무 효과가 좋아서 일이 커졌다’라며 그 일을 홍보 수단처럼 떠들고 다녔다. 서 회장과 이준의 비열한 얼굴을 떠올리며, 나는 작게 몸서리쳤다.
[그때 사건 이후로 꽤 오래 자중한다 싶긴 했었죠.]
“애초에 외국에 나간 거 자체가 그런 목적이었던 거 아니에요?”
[할아버님의 호출이 있던 건 맞습니다. 나간 김에 그동안 실험실에서 쌓아 놓은 데이터를 확인해 보고 싶었을 수도 있지만요.]
“…그 새끼, 지금 어디 있어요?”
[엊그제 귀국한 건 맞는데… 그런데 그 뒤로 통 보지 못했어요. 본가가 아니라 다른 곳에 머무는 것 같습니다. 이번 학기는 휴학했다고 하고요.]
“씨발…. 또 어디서 무슨 사고 치고 있을 거 같은데.”
[글쎄요. 아마 별장 중 한 군데에 있을 것 같긴 한데,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서이준은 분명 귀국 후에 그 애를 만났다. 다짜고짜 화풀이만 할 게 아니라 그 애에게 그때의 상황을 제대로 확인하고 이준에 대해 좀 더 분명히 경고했어야 했다. 시간이 그렇게 많았는데, 괜한 성질을 부리느라 기회를 다 놓쳐 버렸다는 게 후회스러웠다.
[그런데 아까부터 왜 계속 주차장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거예요? 걱정되는 마음은 알겠지만… 그럴 거면 차라리 안으로 들어와서 윤오 군이랑 같이 대기실에 있어 주든지요.]
그 애의 옆에 있어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아무리 뻔뻔한 나라도 그러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 애의 어머니가 너무 늦게 발견되었다는 말에, 나는 죄책감과 후회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모든 게 다 내 잘못이었다. 억지로 붙잡아두지 않고 보내 주었다면. 그 애는 집으로 돌아가 어머니 곁에 있었을 거다. 나 때문에 그 애가 하나뿐인 가족을 잃게 될지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나는 겁 많은 개처럼 오히려 으르렁거렸다.
“내가 뭘 하든 무슨 상관인데요? 그리고 내가 주차장에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아요? 어디서 훔쳐보고 있길래.”
[훔쳐보긴 무슨. 사무실 창문으로 훤히 다 보이는데요. 게다가 거기 계시다가 서 회장님 눈에 뜨일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조금 있다 방문 일정이 있어서.]
재훈이 나를 볼 수 있다는 건 어쩌면 그 애도 이 병원 어딘가에서 나를 보고 있을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그 애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보고 싶지 않은 사람이 다름 아닌 나일 거다.
역시 집으로 돌아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여기서 계속 서성거리고 있다가 그 애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엄청난 민폐가 되어 버릴 테니까. 안 그래도 힘들어하고 있을 애를 더 괴롭히고 싶지 않았다.
“…한윤오 걔, 지금 병원 안에 있는 건 맞죠?”
[그럴걸요? 아까 DNR 동의서 받는다는 것 같던데.]
“그럼 전 일단 집에 갈 테니까, 걔가 병원 밖으로 나오는지 안 나오는지만 좀 확인해 줘요.”
[회장님 의전 때문에 좀…. 직접 연락하면 되지 않나요?]
“후…. 그냥 내가 알아서 할게요.”
직접 연락할 수 없는 사정을 차마 말할 수 없어서 그냥 조용히 돌아왔다. 집에 와서도 마음은 계속 병원에 있었다.
속이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재훈의 말이 다 맞았다. 삐뚤어진 성질머리를 고치지 않고 멋대로 살다가, 결국 가장 소중한 걸 망쳐 버렸다. 그 애가 나를 영영 용서해 주지 않는다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그 애가 지금 얼마나 막막하고 겁이 날지를 생각하면 가슴이 조각조각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 애는 내가 저를 걱정하는 것조차 싫어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걱정을 멈출 수가 없었다.
앉지도 못하고 주차장에서처럼 계속 거실을 서성거리며 머리를 쥐어뜯다 보니 다른 걱정까지 스멀스멀 올라왔다.
‘혹시, 계속 병원에 있다가 서 회장이나 서이준 그 새끼가 무슨 짓을 하기라도 하면 어떡하지.’
병원은 서 회장과 이준의 영역이었다. 그들은 언제든지 그 애에게 시커먼 손을 뻗칠 수 있을 거다. 그 애는 이준의 지저분한 행적에 대해서도, 그가 자신을 노릴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전혀 모르고 있는 눈치였다. 안다면 그런 놈을 좋아할 리 없을 테니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마음이 다급해졌다. 그 애가 있는 곳으로 가서 어떻게든 얘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외투를 집어 들다가도, 싸늘했던 그 애의 눈빛을 생각하며 멈칫거렸다. 일단 연락부터 해야겠다는 생각에, 한참을 썼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메시지를 보냈다.
[미안해. 내가 다 잘못했어. 꼭 할 얘기가 있어. 한 번만 얼굴 보고 얘기할 수 있게 해 줘.]
초라한 한마디를 보내 놓고 나니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리는 것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손에 잡히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들었다.
메시지의 ‘1’ 표시가 사라진 것을 보고 심장이 떨렸지만, 그뿐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답장은 오지 않았다. 메시지를 읽고도 답을 하지 않는 사람의 마음은 한가지로밖에 해석할 수 없다. 대답하기 싫다는, 나랑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그걸 잘 알면서도 나는 미련을 떨었다.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만나 달라고, 중요한 얘기라고 두어 번 더 연락했지만 그 뒤로는 확인조차 해주지 않았다.
울리지 않는 핸드폰을 붙들고 밤을 지새웠다. 갑갑한 기다림에 잔뜩 약이 오른 나는 아침이 밝자마자 집을 나섰다. 억지로 밀어붙이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것도 다 잊어버리고 무작정 병원으로 향했다.
‘미움받아도 할 수 없어. 서이준 그 새끼가 허튼짓을 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으니까.’
들끓는 마음으로 병원에 왔지만, 뾰족한 수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애가 병원에 있기는 한지, 넓은 병원 어디에 있는지도 알 길이 없었다. 집으로 찾아갈까 하다가 그건 더 안 될 것 같아서, 하염없이 주차장을 서성거렸다. 답장도 주지 않는 그 애에게 또 메시지를 보냈다.
[나 지금 병원 주차장에 있어. 미안해. 꼭 할 말이 있어서 그래. 올 때까지 기다릴게. 계속 기다릴 테니까, 늦게라도 꼭 와 줘.]
스토커가 된 기분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후드를 눌러쓴 채로 병원 주차장을 빙빙 돌며 병동을 올려다보는 내 모습은 누가 봐도 스토커 같았다. 두어 시간을 그러고 있으니 경비원이 나를 이상하게 쳐다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뾰족한 시선을 피해 흡연 구역에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입이 쓰던 참이었다. 피우기 시작하니 멈출 수가 없어서 한 갑을 다 태웠다. 돛대를 입에 물고도 성에 차지 않았다.
다 틀렸다는 마음과 혹시 모른다는 마음 사이를 미친 듯이 오락가락하던 때였다. 병동 입구에서 언뜻 희고 고운 얼굴이 보였다. 그 애가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었다.
돛대를 비벼 끄고 뛰어갔다. 그 애와 눈이 마주치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그 애는 그 어느 때보다도 수척해 보였다. 머리는 부스스하고, 옷을 갈아입을 정신도 없었는지 전날의 옷차림 그대로였다.
가장 슬픈 건 표정이었다. 그 애는 언제나 처연해 보였지만, 이렇게까지 체념하는 표정이었던 적은 없었다. 두 볼은 모든 것을 내려놓은 듯 착 가라앉았고 눈동자는 메말라 있었다. 걱정되는 마음에 불쑥 말이 나왔다.
“밥은 먹었어?”
그러곤 내 말에 스스로 부끄러워졌다. 상황에 맞지 않게 또 밥 타령이라니. 얼굴이 새빨개져서 허둥거리다가, 겨우 다시 해야 할 말을 생각해 냈다.
“어머니는… 어떠셔?”
“아직 의식이 없으셔.”
“…넌 계속 병원에 있었던 거야? 잠은 제대로 잤어?”
눈을 떨구는 그 애의 모습에 마음이 울렁거렸다. 내가 왈가왈부할 때가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멋대로 걱정하는 말들이 이어졌다.
“잠깐씩이라도 눈 붙여야지. 큰일 나면 어쩌려고. 뭐 필요한 건 없어? 가져다줄까?”
“…할 말이라는 게 그거야?”
쌀쌀맞은 말투는 아니었다. 그냥 기운이 다 빠져 새하얗게 표백된 듯한 목소리였다. 그러나 걱정이 길었던 나는 지레 겁을 먹었다. 꾸지람을 들은 애새끼처럼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기까지 했다.
“그게… 아니라….”
“…….”
“미안해, 정말로…. 나 때문이잖아. 이게 다. 내가 그냥… 널 보내 줬으면, 이럴 일도….”
그 애는 긴 속눈썹을 느리게 깜빡거렸다. 섬세한 눈매에는 짙은 그늘이 드리워 있었다. 오똑한 코끝도, 작고 또렷한 입술도 그대로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아픈 걸까.
빠짐없이 입 맞추고 맛보았다고 생각했지만, 보고 있어도 사무치게 그리운 기분이 드는 걸 보면 내 몸부림은 다 부질없는 일이었나 보다.
“…별로. 네 잘못이라곤 생각 안 해.”
“그래도….”
“네 집에서 바로 나오지 않은 건 내 의지도 있었으니까. 너 때문이 아니야. 나 때문이지.”
그날 밤, 분명 그 애는 계속 그만해 달라고 했고, 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집요하게 들러붙었었다. 그런데도 그 애가 저렇게 말하는 이유는 무얼까. 벌써 나를 용서한 걸까. 아니면, 원망할 기분도 안 들 만큼 이제 나를 놓아 버린 걸까.
차라리 울면서 화를 내 주면, 때리고 욕이라도 퍼부어 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궁지에 몰린 기분으로 더듬더듬 다음 용건을 꺼냈다.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아무튼, 서이준 말이야. 걔에 대해서 할 말이 있어. 네가 꼭 들어야 해.”
이준의 이름을 입에 올리자, 그 애는 그나마 동요하는 표정이 되었다. 그 애의 꿈틀거리는 눈썹이 초조하고 불안했다.
“그 새끼, 믿으면 안 돼. 서이준은 네가 생각하는 거랑 전혀 다른 사람이야. 걘 사실….”
“알아.”
“어…?”
지쳐 있던 탓인지, 그 애는 유달리 연약해 보였다. 몸과 얼굴의 선은 금방이라도 흩어져 버릴 것처럼 가늘기만 했다. 너무도 연약한 그가, 너무도 쉽게 나를 망가뜨릴 것 같았다.
“나도 다 안다고. 선생님이 내가 옛날에 생각했던 것처럼 좋은 사람이 아닐 수도 있고, 믿을 수 있는 말만 하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
“…….”
“그치만… 그게 무슨 상관이야?”
뜻밖의 반응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가, 다음 순간 답답한 마음에 화가 치밀어올랐다. 화를 낼 상황은 아니지만, 나도 모르게 발끈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무슨 상관이냐니…. 너, 그 새끼가 그렇게 좋아? 어떤 개새끼여도 상관없을 만큼?”
“…….”
“대체 무슨 소릴 들었길래 그래? 걔가 대체 뭐라고 꼬드겼길래, 왜….”
“내가 왜 그걸 너한테 얘기해 줘야 해?”
피로한 그 애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높낮이가 적었다. 그 애는 단조로운 톤으로, 그러나 또박또박 힘을 주어 말했다.
“내가 그 사람을 좋아하든 말든, 믿든 안 믿든 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투명하고 무감한 표정이었다. 욱하는 마음에 괜한 소릴 하는 것 같지도 않았다. 맞는 말이었다. 내가 뭐라고 그 애의 일에 간섭할 수 있겠는가.
몇 주 정도 그 애를 돕기는 했지만, 이제 와 보면 그건 돕는다는 명분으로 내 욕심을 채운 거였다. 그 애를 만지면서 나는 흥분하고 만족하고 행복했으니까. 예리한 말에 심장 한가운데가 찢어져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는 마음으로 다급하게 소리쳤다.
“왜 말을 못 알아들어? 그 새끼랑 같이 있으면 네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고!”
그 말에 그 애는 핏기없는 얼굴로 입술을 감쳐물었다. 그 애는 남에게 화내는 방법도 제대로 모르는 것 같았다. 걸핏하면 남을 할퀴는 나와는 달리, 그 애는 모든 걸 제 안으로 묻어 버리는 게 익숙할 거다.
두 눈동자 안에 격렬한 감정을 품은 듯 보이면서도, 그 애는 그걸 바로 터뜨리지 않고 숨을 정돈했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래서?”
“…….”
“다른 방법이 있으면 네가 말해 보든가.”
그 애가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가 원하는 건 분명했다. 그 애가 나에게 기대고 의지해 주는 것. 그렇게만 해 준다면 나는 어떤 무엇으로부터든 그 애를 지켜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기대어 주지 않더라도 나는 그 애를 지키고 싶었다. 다치지 않게, 아무도 그 애를 상처 줄 수 없도록 하고 싶었다. 그러나 차마 그 말을 할 순 없었다.
‘내가 다 망쳐 버렸는데… 뭘 지켜 주겠다는 거야, 이제 와서.’
차게 가라앉은 그 애의 마음은 너무 멀어 보였다. 나는 재훈이 나를 낳은 그 사람을 언급하며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가 재훈에게 기대지 못한 건 결국 자신이 미덥지 못한 거였을 거라는 말.
그 말의 뜻이 이제야 나에게 생생하게 다가왔다. 그러나 나는 재훈보다도 훨씬 섣부르고 멍청하고 오만했다. 이제 다 틀렸다는 무력감에 넋을 놓은 사이, 그 애는 나직하게 말을 이어 갔다.
“네가 나한테 할 말이 있다고 했을 때, 그냥 안 듣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 그런데도 지금 여기 나온 건… 인사라도 하고 싶어서야.”
인형처럼 예쁜 그 애의 얼굴은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소름 끼치도록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어린 시절, 나를 보내던 날의 그 사람처럼.
“이제 못 볼 것 같아. 아니, 나 이제 너 안 볼 거야. 그동안 고마웠어, 정말로. 너한테는 늘 고마웠어.”
“…….”
“그럼… 안녕.”
안녕. 태어나 수백 번, 수천 번은 들었을 그 말이 꼭 사형선고처럼 들렸다. 무덤덤한 인사를 남기고 돌아서는 그 애의 모습이 느리게 보였다. 타박, 타박. 힘없는 발자국마다 모든 세상이 무너져내렸다.
어린 시절의 그 날처럼, 나의 우주는 다시 처참하게 붕괴했다. 나는 그때보다도 더 작고 무력했다. 그 날의 어린 나는 아빠에게 돌아가겠다고 소리 지르며 발버둥 치기라도 했었지만, 그 애가 멀어지는 동안 나는 그저 멍하게 서 있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미안해. 다 내가 잘못했어. 내가 뭐든 해 볼게. 가지 마. 제발 가지만 말아 줘.’
피 끓는 문장이 명치를 두드렸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못하고 속에서 타들어 가기만 했다.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가냘픈 뒷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세상이 끝나 버리는 순간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어떻게 집으로 돌아왔는지, 그 뒤로 시간이 어떻게 흘렀는지도 흐릿하다. 울었던 것 같기도 하고, 너무 황망해서 눈물조차 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실연이었다. 제대로 사랑했던 적도 없는데 이런 표현은 너무도 과분하지만, 심장이 쥐어뜯기는 듯한 느낌을 나는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해가 떠도 밤인 것 같고, 눈을 뜨고 있어도 악몽 속인 것 같았다.
그 애가 겪고 있을 고통, 그 애에게 닥쳐올지 모르는 위험. 그 모든 것이 걱정되어 미칠 것 같다가도, 나에게는 그걸 걱정할 자격조차 없다는 생각에 애가 끓었다. 모든 게 원망스러웠다. 서이준, 본가의 사람들, 지긋지긋한 일족의 모두, 하다못해 알파와 오메가의 섭리까지.
‘누굴 원망하겠어….’
가장 좆같은 건 물론 나 자신이었다. 자책감이 너무 커서 가슴 안의 구덩이로 온몸이 빨려 들어갈 것 같았다. 나는 하나부터 열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게 잘못된 새끼였다.
실타래처럼 멋대로 뒤엉킨 생각들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이럴 거면 차라리 재훈에게 그 애가 잘 있는지를 알아봐 달라고 할까, 그러느니 그냥 미친 척하고 그 애에게 연락해 볼까, 다짜고짜 찾아가 무릎이라도 꿇고 아무 말이라도 애원해 볼까, 고민했다.
해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 애는 이제 나를 못 본다고 했다. 못 보는 게 아니더라도 안 보겠다고. 나 혼자 그 애를 그리워하는 것조차도 그 애에게는 부담일지 모른다.
‘포기하는 수밖에 없어.’
그 애의 말대로, 그 애가 누굴 사랑하고 어떤 위험에 빠지든지, 이제는 내가 막아 줄 자격이 없었다. 쓰리고 뼈 아파도 눈을 감아 버려야 했다.
체념하려 애쓰다가도 눈치를 모르는 그리움이 튀어나왔다. 사무치게 그 애가 보고 싶었다. 그린 듯이 고운 눈과 발그레한 입술이, 가느다랗고 하늘하늘한 몸이, 몇 번 보지도 못한 예쁜 미소가.
그리움이 지나쳐 그 애의 꿈을 꾸었다. 처음에는 꿈에서라도 그 애를 볼 수 있는 게 좋았지만, 나는 이내 그 애가 울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픈 눈물이 그 애의 뺨으로 쉴 새 없이 굴러떨어져 바닥을 적시고는 강처럼 흘러넘쳤다.
나는 그 애의 눈물로 된 강물에 빠져 무력하게 허우적거렸다. 숨이 꽉 막히더니 이내 폐에 가득 짭짤하고 매운 눈물이 들어찼다. 온몸의 핏줄이 터져 버릴 듯 아렸다.
고통에 허덕거리면서도, 나는 우는 그 애를 안아 줘야 한다는 생각으로 발버둥 쳤다. 그러나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무리 사지를 파닥여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목구멍 안으로 마구 비명을 질러 대다가, 땀과 눈물에 흠뻑 젖어 잠에서 깨어났다.
“하아, 하….”
꿈의 고통이 기묘하리만치 생생했다. 물에 빠져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고통보다도 더 괴로웠던 것은 그 애가 울고 있다는, 내가 그걸 위로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저릿한 심장을 움켜쥐고 있다가, 문득 깨달았다. 안 되겠다고, 도저히 이건 안 되겠다고. 나는 그 애를 포기할 수 없다고. 포기하는 게 맞더라도, 그게 그 애가 원하는 일이라도 도저히 그것만은 할 수 없었다.
‘포기하지 않을 거야. 못 하겠어.’
한심하게도 제자리로 돌아와 버린 내가 싫지만 나는 이런 순간까지 삐뚤어진 인간이었다. 멋대로 정해 버리고 나니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욱신거리는 정신을 가다듬고 눈을 떴다. 침대에 누운 채로 손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았다. 한참 나가 있던 전원을 켜 보니 부재중 전화가 잔뜩 쌓여 있었다. 대부분 재훈의 전화였다.
일상적인 잔소리라기엔 횟수가 너무 많았다. 불안해진 마음에 전화해 보려던 차에 그쪽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 왔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다그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이한 군. 대체 왜 전화를 안 받는 겁니까?]
“…집에 있었어요.”
[하…. 지금 태연할 땝니까? 이한 군이 집에 틀어박혀 있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나 알아요?]
“왜… 그러는데요?”
[윤오 학생 어머니가 돌아가셨습니다. 어젯밤에요.]
놀란 마음을 추스르기도 전에 이어진 다음 말에, 나의 세상은 다시 한번 무너져내렸다.
“그리고 윤오 학생은 어디로 갔는지 도저히 연락이 안 닿는 상태입니다. 벌써 며칠째 행방불명이라고요.”
<2권 끝. 다음 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