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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8 : 파란(2) (8/18)

chapter 8 : 파란(2)

나는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그와 맞닥뜨렸다. 그는 잔뜩 상기된 얼굴로 현관문을 박차고 나오던 참이었다. 러트를 앓았던 탓인지, 며칠 만에 보는 얼굴은 더 날카롭고 어두워져 있었다.

거친 분위기에 가슴이 콩닥거리면서도 나는 그가 반가웠다. 나조차 모호다고 생각했던 감정을 그제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나는 그가 보고 싶었던 거다. 어설프게 인사를 건네자 그는 대뜸 으르렁거렸다.

“뭐야? 냄새가 왜 이래?”

첫 마디부터 당황해 버렸다. 페로몬을 완전히 닫았다고 생각했는데 냄새가 남아 있던 걸까. 마음을 가라앉히기도 전에 그는 내 팔을 강하게 당겨 집 안으로 들여놓았다.

“너… 어제 서이준 만났어?”

그 말에 그대로 몸이 굳어 버렸다. 거짓말에 서툰 내가 원망스러웠다. 그 애가 몇 번이고 부탁했던 걸 지키지 않을 뻔뻔함은 있으면서, 그걸 그 애에게 숨길 정도의 뻔뻔함까지는 없었던 모양이다.

침묵이 최선이었지만, 흔들리는 표정에 이한은 대답 없이도 나의 대답을 알아차렸다. 핏발 선 눈동자에 성성한 분노가 일었다. 내 손목을 쥔 그의 손이 격한 힘으로 떨렸다.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내 말이 우스웠어?”

“그, 그게 아니라….”

“아니긴 뭐가 아냐? 말 같지도 않았지, 아주?”

“…….”

“그 새끼랑 무슨 짓을 한 거야?”

“미안, 난 그냥….”

“씨발, 무슨 대체 짓거리를 했길래 페로몬이 이렇게 다 가라앉아 있냐고!”

“그게 아냐. 이한아. 내 말 좀….”

“시끄러워!”

공기가 무서울 정도로 팽팽했다. 나는 목이 졸린 사람처럼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위압감에 주저앉아 버릴 것 같았다. 이한은 굳어 버린 나를 침실로 잡아끌었다. 속절없이 끌려간 나는 그대로 침대 위에 내던져졌다.

그는 뭐라 말할 틈도 없이 내 몸 위로 올라탔다. 있는 힘껏 팔다리를 버둥거렸지만 당해낼 수 없었다. 힘의 차이가 평소보다 더 크게 느껴졌다. 순식간에 셔츠 단추가 모두 뜯어지고 바지 버클이 풀렸다.

이번에야말로 일이 벌어지고 말 거라는 생각에 현실감이 와락 끼쳐 왔다. 나는 얼어붙은 목소리를 억지로 끌어냈다.

“이한아, 왜 이래.”

“가만히 있어.”

“이러지 마. 싫어….”

“싫다고 말하지 마…!”

무겁고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그는 나의 두 다리 사이에 자리 잡으며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한테 싫다고 하지 마.”

“…….”

“씨발, 네가, 네가 그러면 안 된다고. 절대로 안 돼. 알아들어…?”

억지스러운 명령이지만, 한편으로는 애원처럼 들리기도 했다. 폭력적인 그 말이 왜 애틋한 느낌인지 알 수 없어서, 나는 아무 할 말이 없었다.

어느덧 침실은 묵직하고 유혹적인 나무 향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알파의 냄새가 나를 둘러싸고는 내 온몸을 핥았다. 아니, 핥는다기보다는 나를 두드리고 쥐어뜯었다. 필사적으로 닫아놓은 페로몬이 아무렇지도 않게 무너져내렸다.

“으으….”

어딜 만진 것도 아닌데 밑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이한이 속옷을 벗기며 내 다리 사이를 응시하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까지도 아래에 습기를 더했다.

그는 발가벗은 나의 다리를 열어젖혔다. 허벅지를 오므리려고 했지만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이미 그에게 복종하기 시작한 본능이, 머리보다 훨씬 똑똑한 셈이었다.

반항하는 것은 그를 더 화나게 만들기만 할 뿐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압도되는 것, 흐느끼고 괴로워하는 것뿐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내 볼기 사이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그는 불필요한 절차를 생략하고 곧장 나의 구멍에 손가락을 넣었다.

“흐읏…!”

몸의 저항감은 크지 않았다. 이미 나의 아래는 알파의 침입을 기대하며 흠뻑 젖어 있었다. 팔딱, 팔딱. 그곳의 벌름거림이 느껴졌다. 배 속에서 비어져 나온 습기가 무언가를 익사시켜 버릴 것 같았다. 아마도 이성이라든가, 자아, 자존심, 그런 것들을.

이한은 겹쳐진 두 개의 손가락으로 나의 안을 휘저었다. 거칠고 거침없는 움직임이 나를 벌리고 풀어헤쳤다. 그의 손가락에 흥건한 물이 묻어났다. 깊게 쑤셔 넣었다가 끄집어낼 때마다 새어 나온 애액이 다리와 엉덩이 사이로 구물구물 흘렀다.

아래에서는 쉼 없이 습기가 찌걱거리고, 입술 사이로는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왔다. 그는 예리한 사냥꾼처럼 나의 반응을 바로바로 알아차렸다. 내가 긴장하려 할 때마다 아래의 깊은 곳을 짚어 자극하고, 두려움에 몸을 뒤척여 달아나면 달아난 만큼 뒤쫓아왔다.

“히익, 으, 으….”

밑을 쑤시는 손가락은 어느샌가 세 개로 늘어났다. 압박감보다도 묵직하게 치솟는 성감이 괴로웠다.

몰아치는 감각에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의미 없는 발버둥이었다. 이한은 무력한 거부조차 탐탁지 않았는지 눈꼬리를 치켜세웠다. 작게 욕지기를 뱉고는, 나의 위로 더 깊게 체중을 겹쳐 왔다.

원래도 달아날 공간은 없었지만, 완전히 갇힌 꼴이 되었다. 그는 제압당한 나의 턱을 움켜쥐고는 고개를 기울여 입 맞추었다. 아랫입술을 질겅거리고는 혀를 깊게 넣어 입안을 훑어댔다. 내 혀를 빨아당겨 맛보기 시작하자 나는 침도 삼킬 수 없게 되었다.

“아흣.”

“뭘 했다고 벌써 엄살인데?”

앓는 소리를 내는 나에게 그는 퉁명스레 핀잔을 주었다. 뒤를 넓히던 손가락이 빠져나갔다. 다리를 다물 틈도 없이 다리 사이로 두꺼운 허벅지가 밀려 들어왔다. 이미 딱딱하게 발기한 나의 페니스는 거칠게 비벼 오는 그의 다리에 이리저리 짓눌렸다.

지끈거리는 선단에는 체액이 방울져 있었다. 기절할 듯한 압박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한편으로 내가 어딘가로 훅 떠오르거나 저 먼 곳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아 불안해졌다.

입으로 새어 나오는 소리들은 모두 그의 입안으로 삼켜졌다. 그런데도 나는 곧 사라질 소리를 자꾸만 뱉어 그에게 밀어 넣었다. 신음을 다 삼켜 버리고 나면 그는 나를 노릴 것이다.

그랬다. 이한이 나를, 내 모든 것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게 너무도 두렵고 황홀했다.

내 마음을 알아차린 것처럼, 그는 내 입에서 입술을 떼어 목덜미를, 어깨를, 가슴을 핥아 내렸다. 유두를 물고 빨아들이다가도 갈비뼈 위에 이를 긁고, 반응을 보이는 곳마다 집요하게 혀를 굴려 댔다.

“하으, 그만, 그, 그만….”

“후….”

“아, 아아…. 제발….”

헐떡이는 나의 목소리가 부끄러웠다. 내 귀로 듣기에도 그건 밀어내는 소리가 아니라 추근대는 소리 같았다. 어설프게 만지지 말고, 더 깊게 들어와 달라는 뜻으로.

설익은 유혹에 응하듯, 이한은 옷을 벗었다. 뜨겁고 단단하게 부푼 그의 것이 내게 닿은 순간 공포도 황홀도 무서울 정도로 선명해졌다.

그는 나의 골반을 잡아 올렸다. 허리 밑에 베개를 받치자 나의 아래가 그를 향해 들렸다. 몸의 각을 맞추며, 그가 잠시 나를 보았다. 사자가 사슴의 목을 물어뜯기 전, 눈을 맞추듯이. 빛 한 점 없이 검은 두 눈이 격정으로 불타고 있었다. 완전히 각성한 알파의 눈이었다.

“이한…아….”

이번만은 그가 머뭇거려주지 않을 것임을, 기어이 나를 모두 가질 것임을 나는 알았다. 그런데도 싫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그 말을 하지 말라는 그의 명령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끄럽고 한심하게도, 싫다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달뜬 나의 몸이, 끓는 듯한 피가, 거짓을 모르는 본능이 그를 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것이 입구를 건드리는 순간 온몸이 낯선 동요로 출렁거렸다. 사지가 수축하는 것 같기도 했고 모든 게 흐물흐물해져 녹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결국, 나의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왔다.

“아아…!”

그것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방식의 고통이었다. 생살이 찢어지는 듯한 입구의 쓰라림은 부차적인 것에 불과했다. 내장이 눌리고 뼈가 벌어지는 감각에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이미 다 들어찬 내 안으로 더 깊게 제 것을 밀어 넣으려 했다. 나도 모르게 몸이 굳고 호흡이 멎었다. 매운 눈가에서 눈물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후우, 숨, 쉬어….”

이한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와 처음 키스했던 순간이 생각났다. 나는 눈물 묻은 시야로 그를 올려보았다. 일렁거리는 그의 눈도 나를 보고 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그를 향해 턱 끝을 들어 올리며 두 팔로 그를 안았다. 본능적인 매달림이었다.

그는 고개를 기울여 나에게 입 맞춰 주었다. 키스는 촉촉했지만, 뿌리 끝까지 밀려 들어오는 하반신은 가혹했다. 굵직한 기둥. 내벽을 울리는 맥박. 배 속이 눌리는 느낌에 적응하기도 전에 그는 다시 밖으로 빠져나갔다. 안에 있는 것이 딸려 나가는 기분에 몸서리쳤다.

“하으읏…!”

끔찍할 정도의 이물감과 마찰감에, 호흡을 이어 가는 게 힘들었다. 그의 어깨를 쥔 손에 빠듯하게 힘이 들어갔다. 그는 다시 허리를 쳐올렸다. 그러고는 가차 없이 반복운동을 했다. 퍽, 퍽. 아래를 때리는 듯한 움직임에 나는 무력하게 흔들렸다.

처음엔 당연히 고통뿐이었다. 벌어지지 않는 곳을 억지로 벌리고 몸을 반으로 쪼갤 듯 치받아대는 일에 고통 이외의 감각이 느껴질 리 없으니까.

“윽…! 으으윽….”

“…….”

“아, 흐으으…. 흐, 으….”

그러나 내가 그 사실을 아직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 것과 상관없이, 내 몸은 이제 완전히 발현해 있었다. 막 열리기 시작한 그곳을, 그는 차곡차곡 파고들었다. 얼얼한 고통 사이로 조금씩 다른 감각이 끼어들었다. 나는 그것이 더 두려워 가늘게 흐느꼈다.

처음에는 오싹한 소름 같은 것이 몸을 스칠 뿐이었다. 전기가 오르듯 저릿한 느낌. 아리송하고 미묘한 감각이라고만 생각했지만, 오싹함은 쉬지 않고 신경을 건드렸다.

동요하기 시작한 나를 알아차린 걸까. 이한은 반복해서 같은 지점으로 찔러 들어왔다. 모호했던 그 느낌은 아슬아슬하게 이어지다 어느 순간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크게 부풀었다.

“으읏, 으…. 하, 하악…!”

안을 긁어내듯이 그가 그 지점을 노리고 깊게 박아 넣은 순간, 또렷한 쾌감이 몸을 꿰뚫었다. 눈앞에 불꽃이 튀어 오르며, 손끝 발끝이 저릿하고 무력해졌다. 지나가는 번개인 줄 알았던 감각은 사실은 나를 송두리째 삼켜 버릴 지진이고 해일이었다.

“아, 아아, 아, 이, 이상해. 나, 나, 너무… 아으윽!”

한번 느껴지기 시작한 쾌감은 잦아들지 않았다. 뒤에서 시작된 그것이 몸 곳곳으로 퍼져 가는가 싶더니 이내 사정감이 치솟았다. 나의 페니스는 두 개의 몸 사이에 짓눌려 비벼지고 있었다. 이미 터질 듯 부풀어 질척한 액을 흘려대는 상태였다.

두려워진 나는 이한을 더 바짝 붙들었다. 그는 화답하듯이, 제 것을 나의 가장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그와 동시에 이를 세워 나의 어깨를 물었다.

“윽…!”

잡아먹히는 듯한 아찔함이 오히려 쾌감을 증폭시켰다. 간들간들 한계 언저리를 넘나들던 자극이 결국 끓어 넘쳤다. 의식이 희게 번뜩이는 느낌 속에서, 나는 몸을 파득거리며 사정했다.

“하아… 아….”

앞쪽에 손도 대지 않고 사정했다는 걸 부끄러워할 힘도 없었다. 이한의 것은 여전히 내 안을 드나들고 있었다. 절정의 순간, 내벽이 반사적으로 조여들었다가 천천히 풀어졌다. 무언가를 조르듯이, 꾀어내듯이.

이한은 미간을 조이며 더운 숨을 뱉더니 두 손으로 나의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더 크게 부푼 그의 성기가 몸 안에 밀착되었다. 맞닿은 몸은 무서울 정도로 딱 들어맞았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 준비된 자리인 것처럼.

“으, 흐윽, 읏, 으…읏!”

그는 더 빠르고 강하게 내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단단한 그의 허벅지 앞이 볼기 언저리를 반복적으로 두드렸다. 한계에 다다르고도 계속 자극된 아래가 아릿해졌다.

근육이 후들거려 형태를 지탱할 수 없었다. 그의 몸 옆에서 파닥이던 발끝이 아래로 축 늘어지려 했다. 무력한 내 반응이 성에 차지 않는지, 이한은 제 것을 깊게 밀어 넣은 채로 내 두 발목을 잡아 올렸다.

발끝이 그의 어깨에 걸쳐지며, 엉덩이는 위로 들리고 상체는 반으로 접혔다. 삽입감이 무서울 정도로 깊어졌다.

“하으윽…!”

이한은 페이스를 올려 촘촘하게 허리를 놀리기 시작했다. 달구어진 쇠로 몸을 들쑤시는 듯한 느낌이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더 무서운 것은, 맥이 다 빠져 징징 울리기만 했던 아래가 어느새 새로이 찌릿함을 느끼고 있었다는 점이다.

슬그머니 부풀어 오른 쾌감이 또 나를 잠식했다. 내벽을 긁어 올리던 느낌은 순식간에 등줄기를 지나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몸이 멋대로 들썩거렸다. 나는 박자에 맞추어 허리를 그에게 올려붙이고 있었다. 그가 나를 삼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를 삼켜 버릴 것처럼.

다시 찾아온 절정에 히끅히끅 숨이 넘어갔다. 그가 미간에 깊게 주름을 잡은 채로 내 몸 안에 박혀 있던 제 것을 끄집어냈다. 애액과 함께 빠져나가는 느낌이 아쉬워 나는 한숨을 뱉었다.

그는 제 것을 회음 언저리에 대고 몇 번 마찰시켰다. 뜨거워진 그것이 진득한 정액을 내뿜었다.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페로몬이 나에게 들이부어졌다.

“읏, 후우….”

“하아, 하아….”

격정의 여운이 짙게 내려앉았다. 겨우 끝났다는 느낌에 몸이 떨려 왔다. 그는 깊은숨을 뱉고 어깨에 걸쳤던 발목을 내려 주었다.

호흡을 정리하지 못한 그대로, 그는 나의 위에 제 가슴을 반쯤 겹쳐 드러누웠다. 나를 사납게 몰아붙이던 그의 몸은 팽팽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열기도 무게감도 싫지만은 않았다.

머리가 멍해서, 생각이라는 걸 하기 어려웠다. 그저 자극을 받아들이고 있을 뿐이었다. 나를 둘러싼 온갖 향기와 소리에 젖어 들었다.

땀 냄새와 정액 냄새, 자욱한 페로몬 향기. 그가 숨을 고르는 소리, 가슴팍이 부풀었다가 다시 가라앉으며 나를 건드리는 감촉. 숨소리와 심장 소리.

‘심장… 뛰고 있네.’

나는 아주 당연하고 시시한 문장을 되뇌었다. 이한의 호흡과 심장 박동이 조금씩 차분해져 가는 게 새삼 신기했다.

일어난 일의 의미에 관해 생각하기 시작한 건 더 한참 후의 일이었다. 제대로 된 생각도 아니고, 어렴풋한 마침표와 물음표였다. 결국 해 버렸다는 느낌이 확실할 뿐,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그가 나에게 쏟아부은 것은 단지 분노인지, 방금의 행위에 다른 의미가 있었는지, 앞으로 나는,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그런 것들은 모두 희미하기만 했다.

몸을 움직일 힘이 생기자 고개를 들어 벽시계를 확인하려 했지만 곧바로 가로막혔다. 가만히 누워 있던 이한이 갑자기 내 입술을 베어 물었다. 예고도 없이 난폭한 기세로 핥고 빨아들였다.

마치 여태까지 아무 일도 없다는 듯한, 이제부터 모든 게 새롭게 시작된다는 것을 알리는 듯한 격정적인 키스였다.

“아, 잠깐….”

입술이 잠시 떨어진 틈에 나는 그를 진정시켜 보려 했다. 무력한 손으로 그의 어깨를 밀었지만, 그는 조금도 떠밀리지 않고 내 몸을 붙잡아 뒤집어 버렸다.

침대에 엎드린 나의 등 위로 그가 올라탔다. 그의 성기는 다시 우뚝하니 일어서 있었다. 열기로 뭉쳐진 빳빳한 살덩이가 엉덩이에 닿았다. 생생하고, 섬뜩한 느낌.

“이한아, 잠깐만….”

“안 돼.”

그는 더운 몸을 나에게로 기울였다. 바닥을 짚은 내 오른쪽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치고는, 손가락 틈새로 무엇도 빠져나갈 수 없게끔 단단히 깍지를 꼈다.

“아무 데도 못 가. 너.”

화인처럼 뜨거운 그의 입술이 등줄기를 어루만졌다. 어깨부터 허리 부근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와 귓가로 옮겨갔다. 간지럽고 따스한 느낌에 굳어 있던 몸이 조금씩 풀어졌다. 그는 나의 귓가에 숨을, 마음을 불어넣듯이 속삭였다.

“아무 데도 안 보낼 거야.”

나는 그제야 이한이 나에게 품고 있던 격정의 정체가 무엇인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제멋대로인 소유욕. 어린애 같은 질투,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느샌가 바다처럼 깊어진 애정.

파도치는 감정 앞에 마주 선 나는 어느 때보다도 큰 두려움을 느꼈다. 이상하게도, 꼭 그만큼의 안도감도 함께 겹쳐졌다.

이한은 그가 이미 허물어뜨린 나의 아래로 다시 꿰뚫고 들어왔다. 두어 번 길을 트듯 움직인 그는 다시 몰아치는 듯 허리를 밀어붙였다.

“아윽…!”

그만해 달라고 말했더라도 아무 소용없었을 거다. 이한뿐만 아니라, 내 몸도 내 말을 듣지 않았다. 한 번의 정사로 벌어지고 헐어 버린 구멍은 그를 쉽게 받아들였다. 따뜻하게 꿈틀거리는 내벽이 기쁜 듯이 알파의 성기를 움켜쥐었다.

반항을 포기한 나는 붙잡히지 않은 한 손으로 시트를 긁었다. 그러나 이한은 그런 움직임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반대쪽 손으로도 깍지를 쥐고는 바닥에 내리눌렀다. 간단히 온몸을 포박당한 나는 덫에 걸린 짐승처럼 파닥거렸다.

“으, 아읏…! 하아.”

그는 나를 외워 둔 것처럼 뒤집힌 방향으로도 같은 지점을 노렸다. 묵직한 성기가 예민한 곳을 찌르고 밀어 올리고 긁어 댔다. 조금 전 그랬듯이, 고통에 신음하던 나는 점차 질척하게 흐느꼈다. 더 깊은 곳에서, 쾌감이 움트고 있었다.

“으…흣, 윤오야….”

“으으… 읏, 아윽, 으으….”

“한, 윤오, 후우, 후….”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에, 흥분은 더 뜨겁게 달아올랐다. 곧바로 사정할 것 같은 느낌에 이를 악물었다. 감각이 제어되지 않았다. 나도 결국은 그를 불렀다. 마치 오래 그리던 연인의 이름인 것처럼 목을 놓아서.

“이한아, 이한….”

그것은 나에게 궁지에 몰린 애원이었지만, 그에게는 불붙은 격정에 들이붓는 기폭제였던 모양이다.

그가 내 손을 잠시 놓은 순간, 나는 그가 곧 멈춰 줄 거라고 착각했다. 그러나 그는 그만둘 생각이 없었다. 강한 손이 나의 골반을 들어 올렸다. 널브러진 채로 엉덩이만 높게 치켜든 흉한 자세가 되었다. 수치심을 느끼지도 못했다. 이한은 나에게 그런 걸 느낄 틈을 주지 않았다.

“이한… 흐, 앗…. 아아아…!”

그는 움켜쥔 나에게 쉼 없이 성기를 처박아 댔다. 애액이 흥건해진 그곳에서 부글부글한 소리가 들렸다. 살갗에 살갗이 닿는 소리도 요란했다. 그러나 그 민망한 소리를 다 뒤덮어 버린 것은 나의 울부짖음이었다.

“하, 아읏…! 하응, 아, 아아!”

어느샌가 나는 노골적인 교성을 내지르고 있었다. 배 속이 꽉 들어차 아래가 터져 버릴 것 같다고 생각하면서도, 본능은 그가 주는 쾌감을 착실하게 집어삼켰다. 염치도 없이 더 큰 절정을 원한다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하아, 하…. 한윤오.”

그리고 이한은 결코 가라앉지 않을 열기로 나에게 부딪쳐 오고 있었다. 그가 내 이름을 뱉을 때마다 나는 그대로 미쳐 죽어 버릴 것 같았다.

젖은 손길로 내 등허리를 어루만지던 그가 내 팔을 쥐었다. 팔꿈치를 뒤로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양 팔목을 붙잡았다. 팔이 당겨지면서 그대로 상체가 들렸다.

“하으윽!”

팔목은 붙든 손과 연거푸 나를 때리는 접합부 외에는 어디 하나 기댈 곳이 없었다. 체중이 뒤로 쏠린 탓에 결합이 더 깊게 느껴졌다. 그가 더욱 거세게 허리를 놀리는 동안, 다시 발기한 나의 페니스는 저 혼자 허공을 꺼떡거렸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나는 그가 어서 나를 절정까지 끌어 올려 주길 바랐다. 도달하고 싶다는 강렬한 욕망에 사로잡혀 부끄러움도 잊고 그를 졸랐다.

“사정, 으, 하, 할 것 같아…. 아아, 싸고… 싶어.”

“…….”

“흐으, 여기, 윽, 만져 줘. 하아아, 여, 여기….”

이한은 고꾸라지려는 내 가슴팍을 손으로 받쳤다. 다른 한 손은 내 허리를 감싸고 들어와 성기를 움켜쥐었다. 애타던 감각이 너무도 간단히 고조되었다. 나는 뒤에서 치받쳐 흔들리는 채로 정액을 픽픽 내쏘았다.

끔찍하게 높은 곳으로 떠오르는 것 같은 느낌에 진저리쳤다. 너무도 아득해서, 차라리 무너지고 싶었다. 그러나 몸을 둘러싼 그의 팔은 결코 나를 놔주지 않았다.

어설프게 들린 몸 뒤쪽으로 그가 제 몸을 붙였다. 나를 꿰뚫는 박자는 더 빠르고 다급해졌다. 절정으로 닿으려는 재고 다급한 몸놀림. 앞으로 쓰러지는 걸 제지당한 나는 차라리 뒤로 몸을 기울여 그에게 어깨를 기댔다.

내 볼에 닿은 그의 옆얼굴이 뜨거웠다. 이한은 나의 귓가에 입을 맞추고, 나도 모르게 흐른 눈물을 삼켜 주었다.

“하아, 하….”

열에 벌게진 그의 눈은 무서울 정도로 나에게 집중해 있었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함께 그의 성기가 내 안에서 빠져나왔다. 그는 밀착된 나의 골 사이로 사납게 부푼 제 것을 마구 비볐다. 그의 목에서 울리는 탄성이 나를 자극했다. 그가 토정하는 순간, 나도 함께 아찔해졌다.

그는 그제야 나를 침대에 내려 주었다. 그리고 나의 등 뒤로 제 가슴을 겹쳐 누웠다. 빠듯할 정도의 무게감과 더운 체온. 공기 가득 흘러넘친 열기.

몽롱해진 탓인지 나는 아주아주 이상한 생각을 했다. 그의 품 안에서 이대로 내 모든 게 녹아 없어질 것 같다고, 그래도 괜찮을 것 같다고.

* * *

‘아, 언제까지….’

그러나 그의 품에서 녹아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섣부른 오만이었다는 것을, 나는 오래지 않아 깨달았다.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그는 나를 정말로 녹여 버릴 듯 들이닥쳐 왔다. 뜨겁게 달아오른 몸을 몇 번이나 겹쳐 왔다.

차라리 기절해 버리는 게 나을 것 같아 의식을 놓기도 했지만, 이한은 그때마다 자비 없이 나를 깨웠다. 집요하고 끈적하게 나를 매만지고는 벌어지다 못해 헐어 버린 아래로 침입해 왔다.

더는 못 하겠다고 애원도 해 보고, 네발로 기어 침대 모서리로 달아나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그는 난폭할 정도로 끈질겼고, 자꾸만 반복되는 섹스는 탈진할 정도로 힘에 부쳤다.

“아윽, 하, 하앗!”

그러나, 일방적인 관계만은 아니었다. 강제로 들이 부어지는 것이라도 그가 나에게 준 것이 쾌감이었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었다.

나를 할퀴는 모든 몸짓이 고통스럽고 기분 좋았다. 아니, 고통스러울 정도로 기분 좋았다. 고통의 끝은 쾌락의 끝에 맞닿아 있었다. 번갈아 절정을 맞는 동안에도 강렬한 쾌감의 밀도는 식지 않았다. 마지막에는 아직 섹스가 끝나지 않았을 때 잠들어 버렸던 것 같다.

그렇게 잠시 의식을 잃었던 나는 그의 팔 안에서 다시 눈을 떴다. 기진맥진하다 못해 온몸의 피가 희게 바래어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얼마나… 잠들었던 거지….’

시간 감각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지금이 몇 시인지, 아직 화요일이긴 한지, 하루가 넘어가 버렸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실 그런 것들이 별로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는 나를 놓지 않을 것이고 나는 저항할 수 없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고요함 속에 하나둘 감각이 깨어났다. 침실이 어둑해서 보이는 것은 거의 없이 감촉뿐이었다. 깨끗하게 서걱거리는 이불과 등 뒤에 닿은 사람의 촉촉한 피부. 몸 여기저기서 비명을 보내 오는 아릿한 통증.

내가 깨어난 걸 눈치챘는지 그의 몸이 살짝 움찔거렸다. 다시 덮쳐 오면 이젠 정말 못 버틸 것 같다는 생각에 몸이 굳었다. 그러나, 그의 태도는 뜻밖에도 부드러웠다. 아프도록 물고 빨고 쑤셔 댈 때는 언제고, 유리그릇이라도 다루듯이 조심조심 몸을 기울여 팔베개를 해 주었다.

“물 마실래?”

말투도 사근사근했다. 외려 주눅 든 것처럼 들릴 정도로. 잘못을 저질러 놓고는 남의 눈치를 보는 어린아이 같았다. 그러고 보니 그새 나를 닦아 놓았는지 군데군데 말라붙고 축축했던 꿉꿉함이 사라져 있었다.

“아니….”

목소리가 사정없이 갈라져 있어서, 말을 하면서 나도 놀랐다. 그렇게나 악을 썼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아파?”

“…….”

“아니, 미안. 아프겠지….”

당연한 얘기를 묻더니 제풀에 기가 죽었다. 어이가 없어서 웃고 싶었지만, 웃을 기운도 없었다. 그는 축 늘어진 나를 껴안았다. 더운 체온만 꾸역꾸역 전해 오다가, 나의 어깨에 지그시 입술을 대었다.

한곳에 머물던 입술은 조금씩 주변을 문질렀다. 지분거리는 키스는 아니었다. 짐승이 상처 입은 제 친구를 핥아 주는 듯한, 아기가 엄마 젖을 찾아 입술을 뻐끔거리는 듯한 단순하고도 본능적인 움직임이었다.

이리저리 오가던 그의 입술이 뒷덜미에 닿자, 나는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다. 그는 덩달아 놀라면서도 볼멘소리를 했다.

“각인하려는 거 아닌데.”

발뺌하는 말은 아니었다. 긴 시간 그렇게 혹독하게 굴면서도, 그는 다행히 단 한 번도 내 목을 물려고 하거나 몸 안에 사정해 버리지 않았다.

“알아. 그냥….”

“…….”

“상처가 신경 쓰여서.”

“아, 상처… 있더라.”

그는 맥없이 중얼거리며 내 뒷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오래전 피가 흘렀을 그 자리는 살이 아물고 차올라 요철만 남아 있다. 불룩하게 부푼 살갗 위로, 건조한 손가락이 닿았다.

느릿한 손길에 지친 몸이 노곤해졌다. 근육이 풀어지면서 마음도 느슨해진 모양이었다. 나는, 잘 나오지도 않는 목소리로,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했다.

“그거, 옛날에 아버지가 미끄럼틀 태워 주셨을 때 생긴 상처야.”

“…아버지?”

“응. 아버지랑 기억이 별로 없는데… 그때 일은 기억나. 상처 때문에 그런가.”

“아버지, 지금은 안 계셔?”

“돌아가셨어.”

할 말을 잃었는지, 그 애는 갈 곳을 잃은 손으로 나를 매만졌다. 안마라도 하듯 어깨부터 팔까지를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헐어 버린 피부가 따끔거렸지만, 손이 닿는 느낌이 싫지 않아서 나는 잠자코 있었다. 눈이 녹은 것처럼 쓸모없는 말들이 마음에서 흘러내렸다.

“보통 말하는 좋은 아버지는 아니었을 거야. 늘 나랑 놀 틈도 없이 닥치는 대로 일을 했거든. 잠들기 전에 얼굴을 볼 수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았을 정도로. 근데 그래도 형편은 나아지지 않더라고. 우리 집은 계속 가난했거든. 아주 어릴 땐 우리 집이 평범한 수준은 된다고 착각하고 있었으니까, 그나마 괜찮았던 거 같기도 한데….”

“…….”

“그러다가… 일곱 살 때였나, 부모님이 자꾸 큰 소리로 다투기 시작하는 거야. 나중에 듣기론 아버지 실수로 빚이 몇 배로 불어났다고 하더라고. 아버지는 그걸 수습해 보려고 미친 듯이 뛰어다녔던 것 같아. 안 그래도 못 보는 날이 많았는데, 하루걸러 하루씩 외박을 하더니 나중엔 일주일에 한 번 얼굴 보기도 어려울 정도가 됐었어.”

“…….”

“어머니도 일을 나가기 시작해서, 그때부터는 집에 혼자 남겨질 때가 많았어. 크리스마스이브에도 혼자 방에 웅크리고 있다 겨우 잠이 들었어. 그때 엄청 서러웠는데…. 춥고, 배도 고프고…. 근데 어렴풋이 잠이 깼을 때, 아버지가 집에 와 계신 거야. 한참 내 머리를 쓰다듬더니 선물을 주시더라.”

“…….”

“아직도 기억나. 그때 그 몽롱한 느낌이랑, 아버지의 표정이랑, 선물로 받은 장난감의 감촉까지 전부 다…. 빨간색 장난감 자동차였어. 손바닥만 한 거.”

그날의 추위가 살갗에 스며드는 것 같아서, 나는 작게 몸을 움츠리고 이한의 품 안으로 더 깊게 파고들었다.

“그리고 아버지는 곧바로 나가 버렸지만, 난 정말 신났었어. 크리스마스에 선물을 받아 본 게 처음이라서…. 며칠 동안 손에서 놓지 않고 계속 가지고 놀았어. 근데 그 자동차, 그 뒤론 어디 갔는지도 몰라. 버렸을 수도 있지. 집에 큰일이 있어서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었거든. 아버지가 그날 이후로 집에 들어오지 않았어. 아무리 찾아도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았어.”

“…….”

“새해가 밝고 나서도 한참 뒤에 장례식이 있었어. 엄마는 끝까지 말 안 해 줬지만 나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대충 알았어. 남이 떠드는 말이 귀에 들리니까. 사람들 말이, 아버지가 크리스마스이브에 한강 다리에서 뛰어내렸다고 하는 거야. 겨울이라 시신을 건지는 데 오래 걸렸다고 하더라. 강물이 녹고 살얼음 위로 떠오를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고.”

말없이 나를 껴안고 쓰다듬는 이한의 팔 안에서, 나는 아주 작고 나약해져 버렸다. 남에게 속내를 보이는 걸 늘 두려워하는 나였지만, 이 순간만큼은 그래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미 발가벗겨지고 파헤쳐진 탓인지, 부끄럽지도 슬프지도 않았다. 차라리 후련한 기분이었다.

“…나, 다른 사람 앞에서 이런 얘기 처음 해 봐.”

“…….”

“근데 왠지 말하고 싶었어….”

무언가를 비워낸 마음이 잔잔하고 평화로웠다. 제 아버지가 오메가라는 말을 했을 때, 이한도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는 그날 그의 모습을 떠올렸다. 내내 날카롭고 사나우면서도, 울 것 같은 눈을 했던 그늘진 얼굴을.

그날 상처 입은 것은 나뿐만이 아니라 그도 마찬가지였는지 모른다. 어쩌면, 오늘도 그랬는지도.

그는 더운 입술을 나의 귓가에 대고 있었다. 머리칼을 간질이는 숨결이 자장가보다 따뜻했다. 지친 몸은 곧 나른해졌다. 거짓말처럼 잠이 쏟아졌다. 기억은 나지 않지만, 좋은 꿈을 꾸었던 것 같다.

드문드문 정신이 들었다가 다시 잠들기를 반복했다. 적막한 침실이 조금씩 밝아 오는 게 느껴졌다. 잠에 깨어날 때마다 그는 나의 등 뒤에 몸을 붙이고 있었다. 그의 손은 나를 감싸 안고 있다가 한 번씩 부드럽게 팔과 어깨를 어루만졌다.

내게 닿은 그의 손끝에서 뜨끈한 무언가가 나에게로 스며들어오는 것 같았다. 늘 심술궂어 보이던 길쭉한 손마디가 이 순간만큼은 상냥하게 느껴졌다.

‘집에… 가야 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그저 늘어져 있었다. 마음을 놓고 있을 상황이 아닌데도 흐물흐물 마음이 놓였다. 힘이 없었는지, 정신이 나른했는지.

어쩌면 그냥 그 순간이 기분 좋아서였는지도 모르겠다. 누군가와 맨살을 마주 대고 있는 느낌이, 상처를 한 조각씩 나누어 가진 사람과 말없이 같은 공간을 누리고 있는 것이.

그렇게 이따금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며 그 시간을 음미했다. 달콤한 밤이 영영 끝나지 않기를 바랐지만 결국은 날이 밝았다. 가물가물 의식과 무의식의 경계에 잠겨 있던 나를 완전히 일으킨 것은 전화벨 소리였다. 유난히 높고 위태롭게 들리던 소리.

‘저거, 내 핸드폰 같은데.’

이미 해가 높게 떠오른 건지, 침실에는 햇살이 한가득 들어차 있었다. 여전히 이한은 등 뒤에서 나를 안고 있었다.

어렴풋한 기억에, 어제 그가 나를 붙잡고 있을 때도 여러 번 핸드폰이 울었던 것 같다. 급한 연락일지도 모른다는 느낌에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이한이 나를 품 안으로 깊게 당겼다.

“나, 전화….”

“받지 마.”

“…….”

“그냥 아무 데도 가지 마. 여기 있어. 응?”

종종 그러듯이, 그는 이유도 없이 억지를 썼다. 나는 힘이 다 빠진 몸을 뒤척여 그를 향해 돌아누웠다. 마주 본 이한의 얼굴은 부루퉁했다. 커다란 덩치와는 달리 떼를 쓰는 어린아이 같은 표정이었다.

그를 동정할 입장이 아닌 주제에, 나는 안쓰러운 기분이 되었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기울여 그의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입맞춤 자체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함께 밤을 보낸 연인에게 보내는 듯한 키스였다. 입술을 떼는 순간 내가 한 짓에 놀라 멈칫거렸을 뿐이다.

“…그래도 전화는 받아야지.”

변명처럼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제 와서 그런 걸 신경 쓰는 게 웃긴 일이지만,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라는 게 부끄러워 꾸물거렸다.

핸드폰은 침실 입구 즈음에 팽개쳐진 외투 주머니에 들어 있었다. 그사이 전화벨은 끊어져 있었다. 확인해 보니, 조금 전의 것 말고도 부재중 전화가 네 번이나 와 있었다.

같은 번호의 전화가 세 통이었다. 종종 집에 찾아오는 사회복지사의 번호였다. 그것보다 한참 앞서 와 있는 전화 한 통은, 어제저녁 엄마에게서 걸려온 거였다. 어쩐지 좋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일단 방금 벨을 울렸던 사회복지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신호음 채 한 번이 울리기 전에 바로 전화를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다급한 목소리가 불안감을 키웠다.

[윤오 학생, 지금 어디예요? 아아…. 대체 왜 그렇게 전화를 안 받은 거예요?]

“네? 어, 어어…. 왜 그러세요?”

뒤이은 말에, 시야가 하얗게 흐려졌다.

[어머니가 쓰러지셨어요. 지금 의식이 없는 상태예요. 빨리 병원으로 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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