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7 : 파란(1)
노천강당에 갇혔던 다음 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꼴이 엉망이었다. 얻어 입은 옷은 형편없이 컸고, 제대로 씻지도 못한 얼굴은 거칠었다. 가방에 구겨 넣은 옷가지에서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러나 궁색한 몰골보다 내 마음을 더 불편하게 하는 건 이한에 대한 걱정이었다.
‘나가. 큰일 나기 전에 나가라고.’
나를 현관으로 내몰던 이한의 목소리가 귓가에 생생했다. 그건 목소리라기보단 신음에 가까웠다. 눈가는 붉게 물들었고, 목덜미를 따라 굵은 핏줄이 선명하게 일어나 있었다. 그는 지금쯤 혼자서 러트 사이클을 넘기고 있을 것이다. 어떤 고통일지 상상하기 어려웠다.
여러 번 그의 도움을 받았음에도, 나는 조금도 이한을 도울 수 없었다. 괴로워하는 그의 앞에서 한심할 정도로 겁에 질렸다. 억눌려 있지만 강렬하게 꿈틀거리는 페로몬이 금방이라도 나를 잡아먹을 것 같았다. 그가 윽박지르는 대로 떠밀려 나오는 게 고작이었다.
더구나, 비겁한 나는 이런 순간까지 자기 자신을 걱정했다. 나에게도 곧 히트 사이클이 찾아올 거라던 이한의 말이 마음에 맺혀서 떠나질 않았다.
본능이라는 것이 무섭게 느껴졌다. 언제까지 그 공포로부터 달아나기만 할 수는 없다는 사실이 더 무서웠다. 싱숭생숭한 기분에, 판자촌으로 향하는 계단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엄마, 저 왔어요.”
신발을 벗으며 우물우물 인사했지만, 어머니는 대답이 없었다. 외박을 한 건 난생처음이었다. 이한이 어젯밤 메시지를 보내 놓았다고는 했지만, 미리 언질도 없이 통보해 버린 셈이었다.
역시 화가 난 걸까 싶어 슬쩍 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보통은 일어나 TV를 보실 시간이지만 방 안은 고요했다. 단칸방 구석에 이부자리가 펴져 있었다.
“엄마?”
“으응…. 윤오 왔니?”
대답 소리가 가늘고 희미했다. 놀라서 방으로 뛰어들어가니, 어머니는 무기력한 얼굴로 자리에 누워 있었다.
“엄마, 괜찮아요? 어디 아프세요?”
“아니, 아니다. 그냥 피곤해서.”
고개를 젓던 어머니는 현기증이 느껴지는지 미간을 찌푸렸다. 얼굴빛이 노랗고, 손발도 부어 있었다.
“그냥 피곤한 정도가 아닌 것 같은데…. 안색이 너무 나쁘잖아요.”
“별일 아냐. 가슴이 답답해서 잠이 잘 안 와서. 종종 그러잖니.”
“많이 안 좋아요? 병원 가 볼까요?”
“병원은 무슨…. 됐다. 누워 있었더니 그래도 좀 나은 것 같아.”
“밥은 드셨어요?”
“아까 먹으려다가 속이 메슥거려서 조금만 누워 있자 하다 보니까 시간이 이렇게 됐네. 점심 되면 먹으려고 했는데.”
“점심때도 한참 전에 지났잖아요. 여태 아무것도 안 드시면 어떡해요. 속상하게….”
“알았다. 이제 뭐라도 먹으면 되지. 그나저나 잘 놀다 왔니? 옷은 왜 그래?”
아픈 몸을 하고서도 어머니는 내 걱정이 앞서는 모양이었다. 어젯밤 이한의 집에서 잤고 옷도 그에게서 빌렸다는 말에, 그녀는 눈에 띄게 안심했다.
“그래, 잘했다. 가끔 그렇게 노는 날도 있어야지.”
“엄마가 이렇게 아픈 줄 알았으면 빨리 오는 건데….”
“아유, 아픈 거 아니라니까. 엄마 신경 쓰지 말고 더 놀다 오지 그랬어?”
“그게 무슨 소리예요. 지금도 늦었는데.”
“아니다, 진짜야. 너 보고 있으면 엄마가 얼마나 안쓰러운지 알아? 젊고 건강할 때 재미있게 지내야지, 매일 그렇게 아등바등 지내는 것도 못 써. 새벽까지 일에, 공부에 쉴 틈도 없이…. 너 힘든 거 다 나 때문인데 내가 할 소린 아니지만….”
“…엄마 때문에 힘든 거 아니에요.”
홀쭉해진 어머니의 뺨을 보니 마음이 급해졌다. 부엌에 가서 냉장고를 열어 보니, 어제 저녁밥도 걸렀는지 미리 준비해 둔 음식이 거의 줄지 않은 상태였다. 요즘 들어 계속 어머니의 상태가 좋지 않은 이유가 무얼지 알 수 없었다.
냉장고의 말라비틀어진 재료들로 어떻게든 먹힐 만한 음식을 만들기 위해 고민하다가, 요리를 시작하자 나는 또 슬그머니 내 앞날을 걱정하기 시작했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어머니의 말처럼 내 고민과 고난의 대부분은 그녀의 건강 문제였다. 그사이 어머니는 더 쇠약해졌지만, 나는 지금 오히려 다른 고민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죄책감이 들어도 어쩔 수 없었다.
‘내일부터는 어쩌지….’
이한이 러트를 앓는 며칠간이 막막했다. 내 페로몬은 조만간 다시 날뛰기 시작할 테니까. 이한의 말대로 아무 데도 가지 않는 게 낫겠지만 당장 오늘 아르바이트부터 걱정이었다.
학교가 아닌 곳은 괜찮지 않을까 싶다가도, 주말 밤의 카페에서 당할 뻔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 장소들은 모두 집 근처에 모여 있어서, 이한이 종종 말했던 대로 그때 나를 덮쳤던 알파가 언제든지 반응해 올 수 있는 부근이었다.
입술을 깨물고 있는데, 방 저편에서 어머니의 밭은기침 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정신이 돌아와 다듬은 재료와 밥을 냄비에 넣었다. 보글보글, 죽이 끓어오르기 시작할 때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여보세요…?”
망설이다 조심스레 전화를 받으니, 뜻밖에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한윤오 학생 맞죠? 저, 송재훈입니다. 어제 이한이랑 같이 봤던….]
긴장해 있던 나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어제 감사했다는 인사를 마치기 무섭게, 그는 대뜸 오늘도 아르바이트를 가지 말라는 말을 했다.
“아르바이트를요? 그치만….”
[당분간 대신 갈 사람은 구해 놨으니까 걱정 마세요. 일하는 곳은 이한이한테 들었고요. 자기 괜찮아질 때까지는 학생이 집 밖으로 나오면 안 된다고 어찌나 신신당부하던지….]
솔직히 반가운 소리였다. 안도감이 들면서도 나는 습관처럼 방어적으로 굴었다.
“그냥 제가 가도 괜찮은데….”
[아니에요. 벌써 다 세팅해 놔서 못 무르는데.]
“그래도…. 제 일인데, 이렇게까지 도움을 받는 게 죄송해서요.”
[에이, 큰 도움도 아니니까 사양할 거 없어요. 아직은 이한이 말대로 조심하시는 게 좋잖아요. 방심했다 혹시 큰일이 생길 수도 있고.]
그는 내가 오메가라는 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도 일족의 사람, 알파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뒤늦게 경계심이 들려 했다. 그는 움츠러든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부드럽게 덧붙였다.
[게다가 학생, 어제 많이 아팠잖아요. 열이 몇 도까지 올라갔는지 알아요? 이럴 땐 쉬는 게 나아요. 괜찮은 거 같아도 아직도 많이 지친 상태일 테니까.]
“그래도….”
[이 기회에 휴가받았다고 생각하면 어때요? 아니면 이한이 녀석 고집에 맞춰 주는 거라고 생각해도 되고요. 그 녀석 고집이 보통이 아니라 한번 마음먹으면 아무리 뭐라고 해도 들어 먹질 않아요. 나중에 정신 차렸을 때 자기가 부탁한 대로 안 되어 있는 걸 알면 아주 저를 잡아먹으려고 들 거거든요. 저 좀 도와주세요, 정말.]
그도 이한 못지않게 고집이 센 듯했다. 쉼 없이 이어진 능란한 설득에 나는 결국 못 이기는 척 알았다고 했다. 거실에서는 다시 어머니의 기침 소리가 들렸다. 집에 머물고 있으면 어머니도 간호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아마 이한이 상태가 주말 안으로 나아지진 않을 거 같은데…. 월요일에는 강의 있죠?]
“…네.”
[수업을… 빠져야 하나….]
그는 머뭇거렸지만, 나는 차라리 그가 학교에도 가지 말라고 강하게 말해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페로몬 문제가 아니더라도 학교에 가서 학과 아이들을 만날 생각을 하면 겁이 났다.
괴롭힘당하는 것에는 단련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노천강당에서의 일은 버거운 충격이었다. 머리 위로 퍼부어지던 술 냄새, 섬뜩한 하민의 미소, 닫힌 문 너머로 들려오던 소리를 생각하면 아직도 소름이 쭈뼛거렸다.
목소리가 말라붙은 것 같은 느낌에 한참 대답할 수 없었다. 공기를 읽었는지,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다시 위로의 말을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이한이가 도와주려고 애쓰고 있으니까, 어떻게든 상황이 나아질 수 있을 거예요. 그 녀석이 말하는 건 좀 험상궂지만, 사실 속마음은….]
“…….”
[하하. 이럴 땐 보통 속마음은 상냥하다고 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그놈이 상냥하게 구는 걸 통 본 적이 없어서 그 말이 안 나오네요. 제가 거짓말을 잘 못하거든요.]
농담조의 말에 웃음이 나왔다. 상냥하게 구는 이한이라니, 생각하기 힘든 모습이긴 했다.
[덩치만 컸지, 사고방식은 어린애라고 생각하면 딱 맞아요. 사회성은 신생아 수준이나 다름없고. 계속 남하고 어울릴 생각을 안 하고 독불장군처럼 지냈거든요. 그 녀석한테도 나름대로 사정이 있기는 한데…. 워낙 제멋대로고 퉁명스러운 애라 겉으로는 마냥 거칠게만 보일 거예요.]
“…….”
[그래도 제 딴에는 학생한테 많이 신경 써 주고 있거든요. 누구한테 신경 써 주는 걸 처음 해 보는 거라 서툴러서 그렇죠. 이해해 주세요. 저도 도울 수 있는 건 도울게요.]
‘저도 알아요. 저한테 마음 써 주고 있다는 건.’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부끄러운 마음에 그냥 네, 라고만 작게 말했다. 통화를 마칠 때쯤 죽이 얼추 익었다. 불을 낮추면서, 문득 나는 아침나절 이한의 부엌에서 나던 타는 냄새를 생각했다. 죽 배달을 시켰다며 버럭버럭 악을 쓰던 모습도.
그는 혹시 내가 잠든 사이 죽을 끓여 보려던 거였을까. 매일 먹지도 못할 만큼 많은 음식을 나에게 들이대곤 했던 것처럼, 아픈 나에게 죽을 먹이고 싶었던 걸까.
코끝이 살짝 매워졌다. 내가 타인의 호의에 익숙한 사람이었다면, 그래서 남에게 따뜻해지는 방법도 잘 아는 사람이었다면, 그에게서 좀 더 쉽게 따스함을 발견할 수 있었을 텐데.
어머니는 죽을 반쯤 비우고 다시 깊게 잠들었다. 주말 동안 어머니의 상태는 좋아졌다가도 다시 나빠지곤 했다. 나는 휴가를 냈다고 핑계를 대고 모처럼 긴 시간 어머니의 곁을 지켰다. 그녀는 아픈 와중에도 내가 옆에 있는 것이 기쁜 눈치였다.
“아유, 내가 천랑대생 간호를 받고 주말 내내 웬 호사야. 이제 좀 쉬어. 내일 학교 가려면 피곤할 텐데.”
어머니가 상기시켜 주지 않았더라도, 나는 일요일 오후부터 학교 생각으로 초조해졌다. 월요일 오전 강의가 하필 전공필수 과목이라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이한의 당부와 아픈 어머니를 핑계 삼아 하루만 더 집에 있을까 생각했지만 문제는 그게 끝이 아니었다. 내일을 그렇게 넘긴다 해도 그다음 날은, 또 그다음 날은 어떻게 해야 할지. 언젠가 나에게도 찾아올 사이클을 어떻게 넘길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한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지를 문득 생각하던 순간,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주말 내내 연락이 없던 이준의 메시지였다.
[윤오야. 나 이제 귀국해. 지금 뉴욕 공항이야.]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늘 오던 연락이 끊어진 게 신경 쓰이던 참이었다. 그런데 이틀 만에 온 메시지의 내용이, 갑자기 돌아온다는 말이라니. 놀라서 되물을 수밖에 없었다.
[공항이요? 지금 바로 오시는 거예요?]
[그래. 곧 비행기 타. 한국 시간으로는 내일 오전에 도착할 거야. 미리 말해 줬으면 더 좋았을 텐데, 미안해. 이틀 동안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할아버지랑 어른들 설득하느라 너한테 연락할 틈이 없었어.]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는 그가 돌아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의 말에 반가움보다는 당황스러움이 앞섰다. 하필 이런 순간에 갑작스레 귀국 소식을 듣게 되었다는 게.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그에게서 연달아 메시지가 날아왔다.
[그동안 혼자서 힘들었지? 더 빨리 돌아갔어야 했는데. 곧 가니까, 이젠 걱정할 거 없어.]
[너한테 꼭 할 말이 있어. 만날 수 있을까?]
[가능하면 내일 바로 만나고 싶은데…. 그런데 내가 시간이 많지는 않아. 오후부터는 집에 일이 있어서. 너만 괜찮다면 오전에 만나면 좋겠어. 수업이 있으니까 어려우려나?]
[내가 최대한 빨리 학교 쪽으로 갈게. 공강 때 잠깐이라도 좋으니까 만나 줘. 꼭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너한테 할 얘기가 있어서 겨우겨우 어른들 설득해서 돌아온 거거든.]
뒤이은 메시지에 갈등은 더 커졌다. 헤어지기 직전, 이준을 만나서는 안 된다던 이한의 부탁은 진지하고 간절했었다. 연락조차 하지 말라고 했었는데 이미 그의 말을 어긴 셈이었다.
웬만하면 그의 말대로 하고 싶지만 한편으로는 의구심도 있었다. 이한이 이준에 대해 왜 그렇게 나쁘게 말하는지, 나는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했다.
이준은 나에게 더없이 자상하고 친절했었다. 모든 게 뒤죽박죽이 되어 버린 지금은 나 자신도 이준에 대해 석연치 않은 기분을 느끼지만, 예전에는 그가 하는 말이라면 무엇이든 선뜻 믿어 버렸을 정도였으니까.
‘게다가 며칠 전에 왜 안 돌아오는 거냐고 화까지 냈었잖아. 그래놓고 이제 와서 나 보겠다고 멀리서 온다는 사람을 못 만난다고 하기가….’
마음이 살며시 기울려고 할 때, 다시 핸드폰 알림이 울렸다. 시계 수리점에서 온 문자였다. 수리를 맡겼던 이준의 시계가 다 고쳐져서 월요일 오전에 찾을 수 있다는 내용이었다.
시계가 있으면 페로몬에 대해서는 걱정 없이 외출할 수 있을 거다. 공교롭게도 맞아 들어간 타이밍이, 나에게는 이준을 만나야 한다는 암시처럼 느껴졌다.
이준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몰라도, 나도 그에게 묻고 싶은 말이 많았다. 오히려 지금이 기회인지도 모른다. 이한이 곁에 있으면 물어볼 기회조차 잡을 수 없을 테니까.
[그럼 학교 쪽 말고, 제가 공항 쪽으로 갈게요.]
어차피 월요일 전공 수업은 들어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알파들이 몰려있는 학교 주변보다는 내 쪽이 그를 찾아가는 게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이준은 약속 시간과 장소를 알려 주고는, 곧 비행기가 이륙한다는 메시지로 연락을 마무리했다.
덜컥 저질러 버리고 나서는 내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한이 그렇게나 말린 일을 하게 되었다는 죄책감, 페로몬에 대한 걱정, 이준과의 대화에 대한 염려까지 뒤엉켰다.
나 혼자만의 일도 복잡한데, 월요일 새벽 한바탕 소동까지 겪었다. 주말 동안 컨디션이 오락가락하던 어머니가 월요일 새벽 심하게 구토를 했다.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어머니의 등을 두드려드리며 밤을 설쳤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도 속이 불편한지 계속 뒤척거리는 모습이 보기 괴로웠다.
바뀐 처방에 적응 중인 거라고 이해하려 했지만, 아무래도 심상치 않았다. 어머니가 처음 쓰러졌을 때 이후로 이렇게 오래 몸이 안 좋았던 적이 없었다. 나는 날이 밝자마자 투병일지를 죄다 꺼내 뒤적였다.
“어머니, 오늘 병원 가시면 구토감이 계속 있는데 괜찮은 거냐고 꼭 물어보세요.”
“이제 괜찮은데….”
“괜찮다 하시지 말고 꼭 여쭤보세요. 그거 말고도 요즘 불편한 곳 다 말씀하시고요.”
“그래그래, 알았어. 걱정 말고 가렴.”
“제가 병원까지 같이 가면 좋은데….”
“애도 아니고, 병원도 혼자 못 갈까 봐.”
“아무래도 이상해서 그래요. 처방 바뀌고 나서부터 상태가 점점 나빠지는 거 같아서.”
아침부터 토악질을 한 어머니를 두고 가려니 마음이 무거웠다. 뭐라도 도움 되는 게 있을까 싶어 샅샅이 일지를 살피던 나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발견했다.
이준의 집에서 운영한다는 병원에 다닌 이후, 어머니는 계속 같은 의사에게 진료를 받았다. 그런데 얼마 전 처약이 바뀔 무렵부터 처방전에 기재된 의사의 이름이 달라져 있었다.
“왜 그러니?”
송재훈. 나도 아는 이름이었다. 그가 가문의 주치의라는 이한의 말대로라면, 동명이인이 아니라 정말 내가 아는 그 사람의 이름일지도 모른다.
“엄마. 혹시 평소에 봐 주시던 분이랑 다른 의사 선생님이 진찰해 주신 적 있어요? 젊고, 머리는 갈색이고 웃는 인상인 분이요.”
“아니, 매번 신 선생님이 봐 주시지. 왜 그러니?”
“아무래도 이상한데….”
“뭘 그렇게 보니. 의사 선생님들이 어련히 알아서 해 주셨겠어. 그것도 이준 선생님 댁 병원인데.”
“그래도요. 처방전에 이름이….”
“그건 놔두고 가 보렴. 오늘 이준 선생님 만난다면서.”
어머니는 의심스럽다는 듯 한참 처방전을 들여다보는 나를 말렸다. 그녀에게도 이준은 은인이었다. 약속이 있어 수업을 빠질 거라는 말에도 반가워하며 잘 다녀오라는 반응을 보였을 정도였다.
오래 고민할 시간이 없기는 했다. 약속 시간이 임박해서, 개운치 않은 마음으로 집을 나섰다.
수리점에 들러 다 고쳐진 시계를 찾았다. 나는 옛 친구를 만난 듯 손목을 내려보았다. 수리는 잘되어 있는 것 같았지만, 어쩐지 시계가 예전처럼 아름다워 보이지 않았다. 심란한 탓인지, 예전에는 그렇게 신기하고 아름답던 기계장치의 움직임이 냉정하게 느껴졌다.
나에게는 그 끔찍하다는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전히 페로몬을 읽는 것이 서툰 걸까. 묵직한 수리비를 치르고 나니 어쩐지 허탈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래도 이게 있으면 괜찮을 거야.’
약속 장소로 향하는 동안 심장이 불규칙하게 두근거렸다. 처음 가 보는 길이라 그런지 지하철 안의 사람들도 낯설고 어두워 보였다.
별일 없을 거라고 마음을 다독이며 페로몬을 낮게 가다듬으려 애썼다. 그런데도 불안감은 자꾸만 예민하게 곤두섰다. 불안해하면 향기가 흔들릴 거라는 생각에 더 불안해졌다.
지하철이 약속장소가 있는 역에 가까워지자, 나는 한숨을 쉬었다. 곧 이준을 만나면 까닭 없는 불안도 사라질 거다. 빨리 내리고 싶은 마음에 지하철이 멈추기 한참 전부터 문 앞에 자리를 잡고 섰다.
도착할 역의 안내방송이 나올 때, 누군가 내 옆에 와서 나란히 섰다. 묘하게 붙어 선 간격이 좁긴 했지만, 처음에는 같은 역에서 내리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이내 뒷골이 쭈뼛 일어섰다. 느낌이 아무래도 섬뜩했다.
희미하게, 비릿한 냄새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코가 아니라 본능으로 맡을 수 있는, 페로몬의 냄새.
‘안 돼. 쳐다보지 말자. 모르는 척하는 게 나아.’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하려 애쓰며 내리깔고 심호흡했다. 필사적으로 마음을 가다듬어 보려고 했다. 저 사람이 알파라고 해도, 시계가 있으니 괜찮을 거다. 가슴이 떨리는 이유는 괜히 예민해졌기 때문일 거다.
아무리 스스로를 다독여도 상황은 좋지 않게 흘러갔다. 처음에는 흘긋흘긋 나를 보던 그는 이제 노골적인 시선을 보내 오고 있었다. 눈으로 보지 않아도 나를 핥는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지하철이 멈춰 서자마자 작게 열린 문틈으로 뛰쳐나갔다. 너무 서두르면 더 이상해 보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겁을 집어먹은 몸은 머리의 통제를 듣지 않고 저절로 튀어 나갔다. 나는 빠르게 계단을 올라 개찰구로 향했다. 등 뒤에서 타다다닥,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쫓아오고 있어…!’
몸서리치던 찰나, 저편에서 마주 걸어오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기분 탓인지 그의 두 눈도 번뜩거리는 것 같았다. 아니, 기분 탓이 아니라 기묘하게 빛나는 눈동자를 분명히 보았다. 내가 오메가라는 걸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시계가 아무 소용도 없나 봐. 어떡하지?’
나는 급하게 몸을 틀어 다른 방향으로 내달렸다. 허둥거리는 사이 어설프게나마 낮춰 놓고 있던 페로몬에 대한 통제를 완전히 잃어버렸다.
동요하면 상황이 더 나빠질 뿐이란 걸 알면서도 마음은 계속 출렁거렸다. 향기는 점점 부풀고 들끓어 마구 새어 나가기 시작했다. 내가 내뿜고 있는 냄새가 민망할 정도로 달큼했다.
달리는 틈틈이 고개를 돌려 뒤쪽을 확인했다. 두 명의 알파는 계속 나를 쫓아 오고 있었다. 서로 아는 사이인지, 두 사람은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고는 들릴 듯 말 듯 험악한 말을 웅성거렸다.
후들거리는 다리를 억지로 움직였다. 지하철 입구로 뛰쳐나가 근처의 건물로 들어갔다. 이준과 만나기로 한 카페가 있는 쇼핑몰이었다.
‘어디…. 어디로 가야….’
천장이 넓고 탁 트인 건물 로비에는 드문드문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로비 너머로 몇 갈래의 통로가 있고, 미로 같은 통로마다 많은 상점들이 보였다. 나는 목적지를 확인할 겨를없이 무작정 뛰어갔다.
아무렇게나 골라잡은 방향으로 달리다가, 나는 멀리서 마주 오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서늘한 불꽃이 튀는 눈으로 나를 보는 남자. 또 다른 알파였다.
어디로도 움직일 수 없었다. 계속 앞으로 달리면 마주 오던 사람이 나에게 달려들 것 같고, 돌아서면 뒤쫓던 이들과 맞닥뜨릴 거다. 머릿속이 하얗게 질려 어디로 가는 게 나을지 판단할 수 없었다. 머뭇거리는 사이에도 포위망은 차근차근 조여 들어왔다.
몸이 덜덜 떨려 오기 시작한 순간, 누군가 나의 손목을 덥석 쥐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비명을 지르지도 못하고 커다래진 눈으로 옆을 보았다.
“쉬잇, 윤오야, 이쪽.”
나를 붙잡은 것은 다행히도, 이준이었다.
안도할 틈도 없었다. 나를 뒤쫓는 발소리가 바짝 다가서 있었다. 이준은 가까운 화장실로 나를 잡아끌었다. 출입문을 닫자 밖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이쪽이야! 저기, 화장실로 들어갔어!”
소름이 돋아올랐다. 난감한 표정을 짓던 이준은 다시 나를 이끌고 좁은 용변 칸 안으로 들어갔다. 한 평도 안 되는 네모진 공간에서, 인사도 제대로 나누지 못한 그와 나는 밀착되어 있었다. 재회하는 자리치고는 너무 좁고 옹색했다.
이준은 어둠 속에서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나처럼 상냥한 태도였지만, 두 눈은 알 수 없는 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내 손목을 잡은 순간, 나는 그가 알파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에게서 늘 느껴지던 좋은 향기의 정체는 페로몬이었던 걸지도 모르겠다. 두렵고 혼란스러운 기분에 그를 바로 보기가 힘들었다. 고개를 막 떨구려던 차에, 그가 조심스러운 손길로 내 턱을 쥐었다.
“미안, 이런 곳에서.”
다정하게 속삭이고는, 그는 고개를 기울여 나에게 다가왔다. 눈도 채 감지 못한 사이에 촉촉하고 매끄러운 입술이 겹쳐졌다.
갑작스러운 키스였지만, 의미는 분명했다.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버린 페로몬을 가라앉히려면 알파와의 접촉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나는 함정에 빠진 사람이 하늘에서 내려온 밧줄을 붙잡듯이 그를 받아들였다.
천천히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감싸는 듯한 혀끝이 밀려 들어왔다. 이한이 나에게 퍼붓던, 삼켜지는 듯한 입맞춤과는 전혀 달랐다. 뭉근하고 미끌미끌한 간지러움이 낯설었다.
“으음….”
들끓던 페로몬은 이내 착 가라앉았다. 나를 쫓던 알파들은 화장실 안쪽까지 들어와 웅성거렸지만 내가 풍기던 냄새가 사라지자 단념한 눈치였다. 그들은 투덜거리며 자리를 떠났다.
상황이 마무리되고도 나는 민망함에 한참 고개를 들지 못했다. 미처 진정되지 않은 커다란 심장 소리가 이준에게까지 들릴까 봐 겁이 났다.
불편한 공기 속에서 바닥만 내려보는데, 하얗고 정갈한 무언가가 불쑥 시야를 뚫고 들어왔다. 이준의 손수건이었다. 그는 땀에 젖은 나의 이마를 부드럽게 닦아 주었다. 너무 긴장해서 땀을 흘린 줄도 모르고 있었다.
쑥스러운 기분에 몸은 더 뻣뻣해졌지만, 그는 부드럽게 나의 이마를 밀어 자연스레 고개를 들도록 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나는 고해성사라도 하듯 불쑥 말해 버렸다.
“죄, 죄송해요, 선생님. 선물로 주신 시계를 망가뜨렸어요. 수리점에 맡겼다가 오늘 찾아왔는데, 뭔가 건드려졌는지 그… 소용이 없어서….”
“아아, 시계.”
그는 내내 감싸 쥐고 있던 내 손목을 들어 올렸다. 째깍째깍. 부지런한 초침 소리가 공기를 쪼듯이 울려 퍼졌다.
“괜찮아. 원래 예민한 물건이라 조금만 잘못 건드려도 고장 나 버리거든. 그래서였구나. 향기가 사라졌어, 이거.”
“…….”
“나야말로 미안해. 이런 식으로 인사할 마음은 없었는데, 이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아서.”
손목을 쥐었던 그의 손이 스르르, 손바닥을 타고 내려왔다. 그는 손가락 사이에 깍지를 끼고 내 손을 맞잡았다. 목소리도 표정도 깃털처럼 상냥했지만 나는 왠지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여기서 얘기할 건 아니지? 나가자. 가서 따뜻한 거라도 마시면 좀 나아질 거야.”
그가 이끄는 대로, 약속장소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높은 천장, 반짝이는 통유리창 한가득 햇살이 쏟아져 들어오는 곳이었다. 이런 장소에 손님으로 앉아 보는 게 처음이라 나는 어색함에 몸 둘 바를 몰랐다.
반면 이준은 여유 있고 느긋했다. 조금 피로해 보였지만, 조금 전 장시간 비행을 마친 상태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정돈된 모습이었다.
주문한 차가 나오자 그는 내 앞에 잔을 놓아준 뒤 제 몫의 잔을 들고 커피 향기를 맡았다. 햇살 속에 앉은 이준을 보며, 나는 그가 세상에서 가장 반짝이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시간들을 떠올렸다.
“잘 지냈어?”
“…네.”
“그래. 많은 일이 있었겠다. 시계는….”
“죄송해요. 갑자기 넘어지는 바람에 고장 났어요. 그래도 다 고쳤어요. 냄새는 사라졌지만, 다른 데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아요. 시간은 잘 가고 있고….”
방금의 소동 덕분에 ‘오메가가 되었다’라는 가장 머쓱한 말은 안 해도 되는 셈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안절부절못하며 제 발 저린 도둑처럼 변명을 늘어놓았다.
“그건 괜찮아. 시계 수리하는 데 꽤 걸렸을 텐데, 그동안은 어떻게 지냈던 건지 궁금해서. 오늘 같은 일이 계속 있었던 건 아닌지 걱정도 되고.”
“그, 그게….”
저금 전에 그가 나에게 해 주었던 그 방법대로, 아니 대부분의 경우 훨씬 더 짙은 방법으로 이한이 나를 가라앉혀 주었다고 말하기는 어려웠다.
부끄러운 것은 둘째치고, 가능하면 나는 오늘 그와의 대화에서 이한의 이름이 아예 언급되지 않기를 바랐다. 내가 지금 이렇게 이준과 마주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이한이 불같이 화를 낼 게 뻔한데, 뻔뻔스럽게 이준과 그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거짓말이 서툰 나는 저편으로 눈을 돌린 채 대답했다.
“별로 문제는 없었어요. 페로몬 닫는 방법을 배워서…. 오늘은 그냥… 시계가 있어서 방심했던 것 같아요.”
“배워? 누구한테?”
“…친구한테서요.”
“그래? 친구가 생겼구나. 잘됐네. 경제학과 신입생 중에 오메가가 있던가?”
‘친구’라는 건 사실 이한을 염두에 둔 단어였다. 그러나 이준은 알파와 오메가가 친구가 될 리는 없다는 듯 되물었다. 대답하기가 더 난감해졌다.
같은 과에 오메가가 있기는 했지만, 김하민은 나와 친구라고 할 만한 사이가 전혀 아니었다. 앙숙이라고 부르기에도 너무 일방적인 관계니까. 그러나 고민해 봐도 달리 할 말이 없었다. 하나의 거짓말이 다른 거짓말을 쌓는 느낌으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다. 학교에도 잘 적응했나 보네. 혹시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봐 계속 걱정했는데…. 그럼 지금 네가 어떤 상태인지는 아는 거지? 오메가에 대한 얘기는 그 친구한테 들은 거야?”
“네…. 일족에 대한 것도, 대충은….”
“그래.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갑자기 모든 게 바뀌어 버려서 당황했을 텐데, 잘 버텼어. 많이 무서웠지? 몸은 괜찮아?”
그 말에 지난 한 달간 있었던 다사다난한 일들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눈물이 나오려 해서, 나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눈물을 흘려 버리고 나면, 우는 데 정신이 팔려 묻고 싶던 질문도 제대로 못 할 것 같았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그에게 물었다.
“저… 선생님은 전부터 알고 계셨어요? 제가 오메가가 될 거라는 거.”
“굳이 말하자면… 그렇지.”
“언제부터요?”
그 말에 이준은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이내 매끄러운 미소를 지었다.
“말로 하긴 어렵지만… 널 처음 봤을 때부터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어.”
“…….”
“그렇지만 확신할 순 없으니까 말해 줄 순 없었어. 괜한 얘길 했다 혹시 내 착각이라면 널 더 혼란스럽게 할 것 같기도 했고, 일족의 정체는 외부에 절대 발설하면 안 되는 거라서. 언젠가 발현할 때가 되면 다 얘기해 주고, 널 보호해 주겠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다 보니 아무것도 말 못 한 상태로 출국하게 되는 바람에….”
“…….”
“시계 하나 놓고 널 방치해 버린 셈이었잖아. 뉴욕에 있는 동안 너무 미안하고 괴로웠어. 어떻게 지내는지, 큰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궁금하고 답답한데 너는 정작 중요한 얘기는 아무것도 안 해 주고…. 최대한 빨리 돌아오는 게 답이라고 생각했지만 상황이 좀처럼 정리가 안 됐어. 미안해.”
잔을 내려놓은 그의 손이 테이블을 가로질러 다가오더니 나의 손등 위로 겹쳐졌다. 당연하다는 듯, 다시 그가 나의 손을 잡았다. 어색하고 불편한 기분에 나는 그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는 게 어려웠거든. 뉴욕에 정혼자가 있다는 얘기 기억해?”
“…네.”
“우리 일족이 조금 특이한 상황이잖아. 그래서인지 어른들은 가문이 유지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셔. 다들 일찍부터 혼담이 있는 것도 그런 이유고. 할아버지는 내가 당장이라도 결혼해서 아이까지 낳길 바라실 정도니까.”
“…….”
“여태까지는 그런 얘기가 나올 때마다 학교에 다녀야 한다고 핑계를 대면서 미뤄 왔거든. 아마 이번에도 비슷하게 둘러대다 돌아왔으면 더 빨리 귀국할 수 있었을 거야. 그치만 그래 봐야 같은 일이 반복될 뿐일 거 같아서, 이번 학기를 쉬는 한이 있더라도 확실히 해 두고 싶었어.”
“…….”
“난 어렸을 때부터 마음에도 없이 어른들이 정한 사람이랑 결혼하는 건 납득할 수 없었어. 계속, 내 곁에 둘 사람은 내 손으로 찾고 싶다고 생각해 왔거든.”
“…….”
“…내가 널 마음에 두고 있는 거, 알았지?”
당황한 나는 그의 손 안에서 손을 빼 보려 했지만, 그는 단단한 힘으로 나를 놓지 않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네가 오메가인 것 같다는 생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어. 그런데 점점, 일족이니, 알파나 오메가, 그런 걸 떠나서 그냥 네가 좋아졌어. 안쓰러울 정도로 힘든 상황인데, 무너지지 않고 열심히 지내는 걸 보면 기특하고 예뻐서.”
어루만지는 듯한 목소리가 부끄러웠다. 고백한 건 이준인데 애먼 내 얼굴이 붉어져 버렸다. 당황스러웠지만 사실 많이 놀란 건 아니었다. 고백을 받아 본 경험은 종종 있었고, 이준은 나에게 긴 시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친절했으니까.
나는 몇 번쯤, 저런 방향의 ‘좋아한다는 것’ 이외에는 이준의 친절을 설명할 말이 없다고 느꼈었다. 남자끼리니까, 입장이 워낙 다르니까 그럴 리 없다고 애써 생각을 덮어 왔을 뿐.
그에게 정혼자가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충격을 받았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인지 모른다. ‘나를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하는, 얄밉고도 오만한 생각 때문인지도.
은인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두고 내심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게 부끄러워, 붉어진 얼굴은 더 화끈거렸다. 그는 고개를 떨군 나의 앞에서 매끄럽게 말을 늘어놓았다.
“며칠 연락이 안 됐던 건 어른들이랑 얘기하느라 그랬던 거야. 어른들이 결정한 사람이랑 결혼할 수 없다고 말씀드렸거든. 그랬더니 다들 난리를 피우시는 바람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어.”
“…….”
“처음엔 길길이 화를 내셨지만…. 뭐, 그 정도야 예상했던 일이니까. 그래도 열심히 설득했더니 반쯤은 이해해 주신 것 같아. 할아버지가 널 한번 봐야겠다고 하시더라.”
“…네?”
귀로 들어오는 말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었다. 이준이 나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은 것만도 버거운 일인데, 그는 어른들이니, 설득이니 더욱 버거운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늘어놓고 있었다.
“어떤 아인지 궁금하다고 하시더라고. 확답을 주신 건 아니지만, 직접 보시고 괜찮은 사람이라면 받아들일 수도 있다는 입장인 것 같아.”
“제 얘길 했어요? 어른들한테요? 저… 남자잖아요. 집안 형편도 그렇고, 게다가 오메가…인데….”
눈치가 빠른 편은 아니지만, 일족 사이에서 오메가의 취급이 좋지 않다는 건 분명해 보였다. 더구나 이준의 집 같은 명문가에서 느끼기에 나 같은 애는 그저 난감한 존재일 거다.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는 나의 앞에서 이준은 잔잔하게 미소 지었다.
“성별이나 집안 같은 게 뭐가 중요해? 그냥 네가 어떤 사람인지 있는 그대로 설명했어. 너는 내 곁에 있을 만한 사람이고, 나에게는 네가 필요하다고 말이야.”
“…….”
“우리 집안 어른들이 조금 보수적이긴 하지만, 그렇게 꽉 막힌 분들은 아니야. 실은 이한이를 낳은 분도 오메가인데, 이한이도 차별 없이 본가에서 같이 자랐거든. 다른 가문에서는 드문 일이야, 그거.”
나는 이준의 말과 이한의 태도가 서로 맞아들지 않는다고 느꼈다. 저를 낳은 아버지에 대해 침울하게 이야기하던, 그리고 이준에 대해 언급할 때마다 거칠게 으르렁거리던 이한을 생각하면.
“너한테 아무 상의도 없이 어른들하고의 얘기부터 진행해 버린 건 미안해. 대체 누구 때문에 혼담을 거부하는 거냐고 물어보시는데 감추고 있을 수만은 없어서. 그래도 결국 널 데려오라고까지 하셨으니까…. 다행이지, 정말.”
그의 뜻은 단호하고도 선명해 보였다. 그의 말은 조곤조곤 부드럽게 나를 밀어붙이고 있었다. 그는 손을 들어 올려 굳어 버린 듯 앉아 있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이 촉촉하고 나긋했다.
“그거 알아? 네가 날 의지해 줄 때마다, 하나도 귀찮지 않고 기쁘기만 했어. 너에게 특별한 사람이 된 것 같아서. 너도 나한테 그런 쪽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짐작한 건, 그냥 내 욕심일 수도 있지만….”
“…….”
“어때? 넌 날 어떻게 생각해?”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피했지만, 그는 눈을 돌려 버린 나를 무안할 정도로 빤히 바라보았다. 집요한 눈빛이 공기를 타고 피부로 스며들어 왔다.
“얘기하기가 어려워서 그래? 대답해 줘.”
“…….”
“싫은 건 아니잖아. 그렇지?”
“싫은 건… 아니지만….”
“그럼?”
말문이 막혀 버렸다. 심지어 고백의 말을 들은 이후에도, 그가 이렇게 물을 때까지 나는 그에 대한 나의 감정에 대해서는 그다지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문제인데도.
“…모르겠어요.”
한참 뜸을 들이다 꺼낸 말이라는 게 고작 얼버무림이었다. 멍청하게 들리더라도 나에게는 그게 할 수 있는 것 중 제일 나은 대답이었다.
도저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준의 얼굴을 보면 그를 향한 내 감정이 명확해질 거라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한이 나에게 이준을 좋아하는 게 아니냐며 이죽거렸을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 오히려 모든 게 더 흐려졌다.
“그래…?”
내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이준의 눈매가 살며시 찌푸려졌다. 긴장감에 촉각이 곤두선 나는 분위기의 흐름을 예민하게 받아들였다. 그는 화가 났거나, 실망했거나, 둘 다인 것 같았다. 초조해진 나는 주눅이 들어 버렸다.
이준은 한 번도 나에게 화를 낸 적 없었다. 늘 자상하던 목소리가, 친절하던 몸짓이 분노로 뒤바뀐다면 그는 그 누구보다 무서운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벌 받을 일을 앞둔 어린아이처럼 손톱만 만지작거렸다. 숨 막히는 정적이 이어지던 끝에, 그는 표정을 조금 누그러뜨렸다.
“흐음. 맞아. 내 얘기가 너무 갑작스러웠겠지.”
“…….”
“시간을 좀 줄 테니까 생각해 볼래?”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너무도 긴장했던 나머지, 대답할 시간을 주었다는 것만으로도 그가 자비롭게 느껴졌다. 그러나 아주 마음을 놓을 수는 없었다. 이준은 부드럽지만 엄격한 목소리로 더 난감한 이야기를 덧붙였다.
“시간이 많지는 않아. 귀국할 때 최대한 빨리 뉴욕으로 돌아가기로 약속했거든. 할아버지가 널 보여 주고 제대로 어른들을 납득시키든지 아니면 예정된 혼담을 빨리 진행하라고 하셨어.”
“…….”
“이번 학기를 휴학해 버려서, 학교 핑계로 일을 미룰 수도 없는 상황이거든. 조만간 결론을 내야 해.”
“…그럼 제가 뉴욕으로 가야 한다는 뜻이에요?”
“날 받아 줄 생각이라면, 그랬으면 좋겠는데. 왜? 그건 어려워?”
“어…. 혹시… 가게 되면 거기 얼마나 있어야 하는데요?”
“글쎄, 시간은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 할아버지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신 분은 아니라서 말이야.”
“가, 갈지 안 갈지 아직 말씀드릴 수는 없지만… 일단 어머니를 혼자 둘 수는 없어요. 요새 상태가 더 안 좋아지셨어요. 그리고 학교도 가야 하는데, 결석이 너무 길어지면….”
그는 우물거리는 내 말이 답답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쉬었다. 제 손바닥 안에 갇힌 내 손을 꼭 움켜쥔 채로, 그가 다정하게 말했다.
“윤오야. 네 마음만 정해지면, 그런 사소한 건 중요하지 않아. 어머니도 네 간호 같은 건 필요 없게 내가 다 알아서 처리해 줄 거고, 학교도, 오래 결석해야 하면 이번 학기는 쉬면 되니까. 아, 첫 학기엔 휴학이 안 되던가? 그럼 그냥 그만둬도 되고.”
“학교를 그만둬요? 그치만….”
“네가 내 마음을 받아들인다는 건, 이제부터는 네가 굳이 힘들게 일할 필요도 공부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야. 물론 정 네가 원한다면 널 다시 학교에 입학시키는 것 정도는 간단하게 할 수 있겠지만….”
그의 자상한 눈빛은 따뜻하게 나를 녹이곤 했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두 눈의 온기가 무섭도록 이글거려서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어느 순간 그와 나를 둘러싼 공기에서 매큼한 향이 묻어나고 있었다. 은근하지만 목을 조르듯 또렷한 알파의 페로몬. 이준의 향기였다.
갑자기 앉아 있는 것조차 힘겹게 느껴졌다. 향기는 거역할 수 없는 최면 같았고, 미소 띤 얼굴은 나에게 ‘싫다’라는 선택지는 없다고 속삭이는 것 같았다.
목이 말라붙는 느낌에 커피잔에 입술을 대었다. 쓰디쓴 커피는 이미 차게 식어 있었다. 오한이 돋아 몸을 떠는 모습이 어설퍼 보였는지 이준은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렇게 얼어 있어? 누가 보면 내가 너 겁이라도 준 줄 알겠다.”
“아, 아니에요. 그냥, 놀라서….”
“놀랄 만한 상황이긴 하지. 안 그래도 아까 그 알파들 때문에 놀랐을 텐데. 너 정말 큰일 날 뻔한 거 알지? 아까도 느꼈겠지만, 오메가로 사는 건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야.”
“…….”
“윤오야. 난 널 돕고 싶은 거야. 내가 그랬잖아. 너에게는 여기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자리가 있다고.”
그가 되새긴 것은 대학에 온 뒤로 나를 지탱해 주던 말이었다. 그 가슴 벅차던 말이, 오늘은 조금 다른 의미로 들렸다. 마음이 무거워 겨우 입술을 떼었다.
“…언제까지 대답해 드려야 해요?”
“아아, 재촉하는 건 아냐. 너에게도 중요한 문제니까, 시간은 충분히 줘야지.”
“…….”
“그치만 머지않아 대답해 줄 거라고 생각해. 윤오는 똑똑하니까. 그렇지?”
“…그럴게요.”
“그래. 이해해 줘서 고마워. 아…. 참, 이한이 말이야.”
떠밀리듯 고개를 끄덕이던 나는 이한의 이름이 언급되자 흠칫 놀랐다.
“너랑 친한 것 같더라.”
“…네?”
“왜 비밀로 했어? 이한이 소식 알게 되면 나한테도 전해 주기로 했잖아.”
안 그래도 움츠러들었던 나의 어깨는 더 작아졌다. 표정의 동요를 감출 수 없어서 커피잔을 들어 얼굴을 반쯤 가렸다.
“…별로 친한 건 아니에요.”
“그래…? 실은 우리 집 고용인 중 한 명이 이한이랑 네가 같이 있는 걸 봤다고 해서.”
어디서 무슨 모습을 본 거지, 하는 생각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빳빳해진 머리로 기억을 되짚다가, 재훈의 이름을 생각해 냈다.
“혹시 송재훈… 선생님이요?”
“아, 그분.”
이준은 미묘한 말투로 중얼거리며 환하게 웃었다.
“맞아, 그 사람. 우리 집안 주치의셔. 이한이랑 특히 가까운 분이지.”
유달리 환한 미소였다. 예전 같으면 눈부심에 감탄해 버렸을 것 같은, 맑고 밝은 미소. 그 미소를 바라보며, 나는 도리어 마음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깨달았다. 내가 더는 예전처럼 그를 완전히 믿고 있지는 않다는 것을. 이 자리가 계속 불편했던 건 그런 이유였다. 나의 빛이고 태양이던 그를, 이제는 돌이킬 수 없이 의심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달라져 버린 현실에 마음이 무거웠지만, 머릿속으로는 얄팍한 계산을 굴리고 있었다. 그는 어디까지를 알고 있고, 나는 어디까지 얘기를 해야 할까.
분명한 건, 내가 지금 이한의 부탁을 너무 많이 어기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준과 만나지 말라고 그렇게나 간곡히 말했었는데, 나는 그가 앓고 있는 틈을 타 몰래 이 자리에 나왔다.
이준이 이미 모든 걸 안다고 하더라도, 그냥 나를 손바닥 위에 놓고 굴리고 있는 거라고 하더라도,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날은 그냥 급하게 도움받을 일이 있어서 그랬어요. 별로 말씀드릴 만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추궁이 이어질까 봐 겁이 났지만, 이준은 더 이상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얼굴 가득 예의 그 선량한 미소를 지은 채로 시간을 확인했을 뿐이다.
“이제 슬슬 가 봐야겠다. 더 얘기하면 좋겠지만, 참석해야 하는 오찬이 있어서.”
점심이 가까워져 있었다. 오후 강의까지는 시간이 아직 남았지만 이대로 학교에 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준의 입맞춤으로 페로몬이 잠잠해진 상태였다.
“네. 저도 학교 가 볼게요.”
“지금? 하여튼, 윤오는 너무 성실하다니까.”
과장된 칭찬이 오늘따라 쑥스러웠다. 빨리 자리를 피하고 싶은 기분에 자리에서 일어나다가 문득 질문거리를 떠올렸다.
“참, 송재훈 선생님… 선생님 댁 주치의라는 그분이요. 어머니 처방전에 그분 이름이 있었어요.”
“…그래?”
“네. 오늘 확인할 게 있어서 봤더니 얼마 전부터 처방전의 의사 이름이 그분으로 바뀌어 있었더라고요. 그런데 어머니 말씀이 진찰해 주시는 담당 선생님이 바뀐 건 아니라고 하셔서, 혹시 왜 그런 건가 하고….”
그 말에 이준의 눈동자는 짧지만 아주 커다랗게 흔들거렸다. 그러나 내가 눈을 깜빡였다 다시 떴을 때, 그는 평소대로의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었다.
“글쎄…. 아마 결재 과정의 문제 아닐까? 송재훈 선생님도 내과 소속이거든. 나도 의국 내부 사정은 자세히 모르지만….”
“그래요?”
“절차적으로 필요하니까 그렇게 했겠지. 어머님이 진찰 오는 선생님들을 다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고. 투석 환자는 잠드는 경우도 많잖아.”
“아….”
“윤오가 굳이 신경 쓸 문제는 아닌 것 같아. 그보다, 어머니 건강은 요즘 어떠셔? 아까 언뜻 상태가 나쁘다고 했잖아.”
“처방이 바뀌면서 적응하느라 그러시는지 힘들어하세요.”
“저런. 많이 안 좋으셔?”
“…네. 식사도 잘 못하시고, 체력도 많이 떨어지신 것 같아요.”
“투석을 꽤 오래 하셨지? 이식 대기 순서가 빨리 와야 할 텐데. 얼마나 남았어?”
“아직 많이 남았어요. 얼마 전 확인했을 때도 이 년 이상 기다려야 할 거라고 하셨거든요.”
“그래. 너무 마음 쓰지 마. 다 잘될 거야.”
해맑은 긍정의 말에는 동의하기 어려웠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차로 바래다주겠다는 그의 말을 거절하고 지하철을 탔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다. 복잡한 마음을 빨리 가라앉히고 싶었다.
학교로 향하는 내내 오늘 들었던 이야기와 나에게 있었던 일들을 되짚어 보았지만, 결국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았다. 답도 없는 고민만 자꾸 튀어 올라서, 차라리 이준을 만나지 말 걸 그랬다는 후회까지 들었다.
고민이 너무 무거웠던 나머지 역에 다다랐을 때는 결국 탈진한 것처럼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나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발을 질질 끌며 걸었다. 그러다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이한의 집으로 가는 골목 어귀에 서 있었다.
‘내가 왜 여기에….’
낯익은 길에 깜짝 놀라 걸음을 멈추었다. 눈치 없는 발이 엉뚱한 곳으로 향해 버렸다. 괜히 이 근처를 어슬렁거리다가 만우절 때처럼 남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곤란해질 텐데.
빨리 셔틀 정류장 쪽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한참을 못 박힌 듯 그곳에 서서 골목 안쪽을 바라보았다. 닻을 맨 것처럼 계속 마음이 그리로 기울어서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속도 없이, 자꾸 그에게로 가고 싶어졌다. 앓고 있을 그가 걱정되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보고… 싶은 건가?’
터무니없는 생각이었다. 아무 연락도 없는 걸 보면, 그는 아직 사이클이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이한을 만나는 건 사자의 입속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사슴이 되는 꼴이었다.
그가 보고 싶다는 마음도 이상했다. 그를 마지막으로 본 게 고작 3일 전이었다. 남을 그리워한 일이 거의 없었던 나는 아리송해졌다. 3일이면, 누군가가 그리워질 만한 시간인 걸까? 거의 매일 보던 사람이 갑자기 보이지 않으니까 금세 그런 맘이 든 걸까?
자기 자신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입술에 이준의 감촉이 남아 있는 채로 계속 이한을 생각하고 있는 것도 한심했다. 너무 많은 일에 지쳐서 마음이 고장 났는지도 모른다. 나는 꼬여 버린 생각을 풀지 못한 채로 무거운 발걸음을 돌렸다.
‘안 되겠어. 어디 가서 눈이라도 붙이자.’
오후 강의 시간까지는 몇십 분 정도 남아 있었다. 나는 학교에 도착하자마자 인문대의 폐건물로 향했다. 경제학과 건물에서 언덕으로 한참을 올라가면 있는, 곧 철거를 앞둔 작은 건물이다.
낡고 음침한 곳이지만 나에게는 소중한 은신처였다. 공강이 길어질 때마다 그곳의 1층 복도 끝, 가장 어두운 강의실로 숨어들어 시간을 보내곤 했다.
차가운 의자에 앉자마자 피로감이 몰려왔다. 딱딱하게 굳은 어깨와 등이 욱신거렸다. 새벽잠을 설치고 아침부터 바짝 긴장한 채로 추격전을 벌이기까지 했으니 몸이 남아날 리 없었다.
책상에 엎드려 눈을 감았지만 너무 피곤해서인지 오히려 정신이 말똥해졌다. 오라는 잠은 오지 않고, 조금 전 이준에게서 들은 말들이 달각달각 머릿속을 굴러다녔다.
늘 아름답게 반짝거린다고 생각했던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계속 함께하자는 말을 들었지만 기쁘지 않았다. 부담감이라기보다는 어딘가 찜찜하고, 서운하기까지 한 기분이었다.
‘너에게는 여기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자리가 있거든.’
문득, 오랜 시간 나에게 희망이 되어 주었던 이준의 말을 떠올렸다. 그 말이 내 맘을 울렸던 건, 그 말이 나에게 희망을 주었기 때문이다. 나를 팔지 않아도, 내 힘으로 내 삶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그 모든 게 헛된 꿈이었던 것 같다. 오메가인 나는, 페로몬에 휘청거리며 알파에게 물어뜯기거나, 알파에게 기대어서 살 수밖에 없는 모양이다.
‘네가 내 말을 받아들인다는 건, 이제부터는 네가 굳이 힘들게 일할 필요도 공부할 필요도 없다는 뜻이야.’
오늘 그는 예전과는 전혀 다른 말을 했다. 그에게는 어쩌면 자상함이었을 그 말이, 나는 반갑지도 고맙지도 않았다. 오히려 배신이라도 당한 느낌에 야속하고 서운했었다.
그 말은 결국 그에게 나를 내놓으라는 뜻이었다. 그러기만 한다면, 내가 아무 노력도 하지 않아도 그는 나를 안전하고 편안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그만은 나를 탐내고 원하는 시선으로 보지 않는다고 생각했었지만 그렇지 않았던 거다. 그가 나에게 제안하고 있는 것은 결국 내가 지겹도록 들어왔던 것과 비슷한 거래였다. 형태가 조금 덜 노골적이고, 조건이 훨씬 더 좋아 보인다는 점이 다를 뿐.
‘그래. 그게 꼭… 나쁜 일만은 아닐 수도 있지.’
지쳐 버린 나는 체념처럼 생각했다. 팔 수 있는 것을 왜 팔지 않느냐는 오 실장의 말이 맞았다. 그리고 어차피 팔아야 한다면, 좋은 값이라도 받는 게 나은 일일 거지도 모른다.
심지어 나조차도 이준의 모습을 처음 보았을 때 그렇게 생각했었다. 저렇게 귀티 나는 사람이라면 환멸조차 생기지 않을 만큼 비싼 값에 나를 사 주지 않을까 하고. 이제 와 보니 첫인상에 떠올린 생각이 정답이었던 거다.
손익을 따져 본다면 받아야 할 제안이지만 선뜻 그러겠다고 결정할 수가 않았다. 그러고 싶지 않은 것 같긴 한데, 마음이 술렁거려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언제나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일에 서툴렀다. 늘 들여다보고 헤아릴 것도 없이 좁고 짓눌린 마음으로 살아왔으니까.
나는 그를 의심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좋아하고 있는 걸까. 지금은 아니라고 해도, 그를 좋아하게 될 수 있을까. 어차피 거래라면, 그런 것들이 중요하긴 한 걸까.
‘그럼… 어떻게 하는 게 맞는 거지…?’
내가 무얼 원하는지 알 수 없다면, 맞는 길로라도 가고 싶었다. 그가 말했던 ‘너무 늦지 않은 시간’ 안에 결정을 내려야 한다는 사실에 초조해졌다.
팔 위에서 이리저리 뒤척이던 볼이 문득 손목시계에 닿았다. 물끄러미 그것을 보았다. 나는 늘 이 시계가 더 넓은 세상으로 나를 이끌어 줄 이정표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이건 오히려 내가 더 깊은 늪으로 떨어지게 된다는 복선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되찾고 싶던 시계가 갑자기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나는 화풀이라도 하듯 시계를 풀어 버렸다. 어차피 이준이 묻혀 놨다는 냄새는 사라졌으니, 아무 소용도 없는 물건이었다. 시계를 가방 깊숙이 밀어 넣던 차에, 강의실 복도에서 말소리가 들려왔다.
“아, 좀, 하으, 너무한 거 아냐? 어제도… 했으면서.”
예상 못 한 상황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여태껏 이곳에 다른 사람이 찾아온 적은 없었다. 인기척이 들린다는 것만도 기겁할 일인데, 목소리의 주인은 한 명이 아니었다. 게다가 둘 다 내가 아는 목소리였다.
“후…. 네가 꼴리게 쳐다봤잖아.”
“하, 미친 새끼. 대낮부터….”
내가 가장 두려워하고, 지금 절대로 만나고 싶지 않은 두 사람, 김하민과 장승우가 흥분한 듯한 말투로 끈적한 소리를 주고받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나는 호흡을 죽였다. 두 사람이 다른 강의실로 들어가 주기를 바랐지만, 엇박자를 딛는 발소리와 뒤엉키는 목소리는 점점 가깝게 들려왔다. 철컥, 강의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에 심장이 발끝으로 굴러떨어지는 것 같았다.
“아읏, 야, 여기 강의실 아니야?”
“아무도 안 와, 폐건물인데 뭐. 하, 후우….”
두 사람은 입술과 팔다리를 얽은 채로 강의실에 들어오더니 강단 위로 올라갔다. 비명을 참으며 허겁지겁 책상 뒤로 몸을 숨기고 그들의 동태를 살폈다. 다행히도 둘은 정신없이 서로에게 들러붙느라 나에게는 신경 쓰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승우는 거침없는 손길로 하민을 교단 위에 눕혔다. 가냘픈 몸 위에 올라타더니 두 손으로 하민의 몸을 더듬었다. 하민은 옷가지가 여기저기로 날아가 금세 발가벗겨졌다.
“하으, 읏….”
“으, 씨발….”
승우는 하얗게 드러난 살갗을 마구 빨아들였다. 입술이며 가슴, 사타구니 언저리까지 두서없이 물어뜯는 모습이 성급해 보였다. 바지 지퍼를 내린 그가 한 손으로 주머니를 뒤적여 콘돔을 꺼냈다.
더는 지켜보기 힘들었다. 얼른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았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의실 안의 모든 공기가 외설적으로 물들었다. 살과 점막이 스치는 소리, 호흡 섞인 교성이 괴로웠다. 무엇보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은 발정한 알파와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아, 안 돼. 지금은….’
당황한 탓인지, 겨우 몇십 분 전에 가라앉혀 두었던 내 페로몬도 덩달아 흔들리기 시작했다. 오늘 하루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던 계산이 어긋나 버렸다. 근처에 알파가 있으면 휩쓸려 버릴 거라던 이한의 말 그대로였다.
지금 들키는 것만은 곤란했다. 둘이 정사를 벌이려던 강의실에 숨어 있었다는 사실은 둘째치고, 내가 오메가라는 사실까지 꼼짝없이 드러나고 말 거다.
입술을 깨물고 숨을 죽여 봐도 페로몬은 말을 듣지 않았다. 널뛰는 충동에 온몸의 핏줄이 저절로 벌름거렸다. 다리 사이에서 축축한 습기까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하, 너, 오늘따라 냄새 더 좋은데? 뭔가 달라진 것 같다?”
낌새를 읽은 걸까. 장승우는 헐떡거리며 하민에게 물었다.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던졌을 질문에 피가 마르는 것 같았다. 나는 황급히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장승우가 알아차렸다면, 분명 하민도 내 기척을 눈치챘을 것이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리가 빙빙 돌던 차에 하민은 칭얼거리듯 대답했다.
“으, 흣, 평소랑… 똑같은데 뭐가.”
나는 짧게 안도했지만, 장승우는 계속 코를 킁킁거려댔다.
“후으, 흐…. 하, 아무래도 뭔가, 다른데…. 아, 미치겠네.”
“하응, 네가 발정, 이 단단히… 났나 보지.”
“발정이 단단히 난 건 너잖아, 씹걸레 새끼가.”
“하으, 아앗…!”
“후, 안 그래? 어제만 해도 몇 명이랑, 으, 붙어먹은, 건데?”
“쓸데없는, 하으, 말, 집어치워….”
“어디 한번 말해 보라고. 너, 어제 나랑 하고 나서도, 또… 읏.”
“…똑바로 하기나 해. 응?”
분위기가 막 험악해지려던 찰나, 하민은 톡 쏘아붙였다. 앙칼진 말투와는 달리 목소리는 유달리 달콤하고 야릇했다. 나까지 유혹되어 버릴 것 같다고 생각하던 순간, 현기증이 날 정도로 진한 향기가 풍겨 왔다.
나 아닌 오메가의 페로몬을 처음 맡아 본 나지만, 하민이 제 페로몬을 활짝 열었다는 걸 곧바로 알 수 있었다. 짙고 뻑뻑한 오메가의 페로몬에 공기마저 무거운 느낌이었다.
투덜거리던 승우는 더 이상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거칠고 조급한 숨을 뱉으며, 오로지 하민을 탐하는 데에만 모든 정신을 쏟는 듯했다. 낡은 교단은 부서질 듯 삐걱거렸다. 짐승이 교미하는 듯한 신음과 숨소리가 들려왔다.
“아윽, 하, 하앗.”
“아, 씨발. 크읍…!”
나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귀조차 틀어막지 못하고 그 소리를 고스란히 듣고 있었다. 고통스러운 시간은 실제보다도 훨씬 길게 느껴졌다.
남의 정사를 듣게 된 것이 부끄럽다거나 불편한 정도가 아니었다. 마치 하민이 아니라 내가 교단 위에 드러누운 제물이 되어 범해지고 물어뜯기고 있는 것처럼 괴로웠다. 사지가 아릿하고 배 속이 쪼개지는 것 같았다. 자꾸 펄떡거리는 본능을 부여잡는 것도 고역이었다.
“하아, 하, 아아아….”
“으, 후…!”
거친 호흡은 차츰차츰 절정으로 치달았다. 진득한 단말마가 터져 나온 후, 강의실 안은 거짓말처럼 고요해졌다. 지친 숨을 가다듬는 소리만이 드문드문 이어지던 끝에 승우가 중얼거렸다.
“하…. 장난 아니네.”
“…….”
“존나 좋았다, 그치.”
“으윽….”
“냄새, 오늘따라 더 좋은 거 맞는 거 같은데. 응?”
그는 만족한 듯한 목소리였다. 쪽, 쪽. 살갗에 입술이 닿는 소리가 몇 번 들렸다. 지분거리는 그와는 달리, 하민은 태도는 냉랭하기만 했다.
“하으…. 죽겠네. 비켜 봐, 좀. 귀찮게 들러붙지 말고.”
“얘 또 시작이네.”
“또 시작이긴 뭐가? 할 거 다 했으면 귀찮게 굴지 말고 나가.”
“분위기 좋았는데 왜 갑자기 이래. 진짜? 나갈 거면 같이 나가던지.”
“같이는 무슨, 대낮부터 붙어먹었다고 광고하고 싶어? 먼저 가. 난 담배 한 대 피우고 나갈 테니까.”
“와, 진짜….”
“아, 참. 내가 누구랑 하든 말든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이지? 또 오지랖 부리면 이제 너랑은 안 할 거니까 그렇게 알아.”
“…하.”
장승우는 기가 찬다는 듯 숨을 뱉었다. 옷을 주워입는 소리가 들리고 나서, 그는 비아냥거리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여튼, 제정신이 아니야, 너는.”
“그걸 이제 알았어?”
“야, 너….”
“3시 수업이라며. 안 가?”
태연하게 쏘아붙이는 하민의 말에, 승우는 할 말을 잃은 것 같았다. 저벅저벅, 들어올 때와는 달리 길게 늘어지는 발소리가 천천히 멀어져 갔다. 오금을 저리게 하던 알파의 냄새도 사라졌다. 남은 것은 허무한 정적과 텁텁한 담배 향기뿐이었다.
천만다행이었다. 승우가 내 존재를 알아차렸다면 그냥 넘어가진 않았을 거다. 긴장이 풀려 몸이 떨렸지만 안도의 한숨도 쉴 수 없었다. 하민이 나가면 나도 곧바로 강의실을 빠져나가겠다고 생각하던 때였다.
“왜 계속 기어 나와?”
하민이 뱉은 말에 소스라쳤지만, 처음에는 나에게 하는 말이 아닐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숨을 더 낮게 죽이고 몸을 웅크리자, 그는 콕 짚어 나를 불렀다.
“응? 한윤오.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뻔했다. 긴장감은 순식간에 바짝 끌어당겨졌다. 너무도 팽팽해서 금방이라도 탁, 하고 끊어져 공기를 무너뜨릴 것 같았다. 달아나고 싶었지만 달아날 곳도 없고, 모른 척 버틸 상황도 아니었다. 나는 주저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하민은 발가벗은 채로 강단 위에 아무렇게나 앉아 있었다. 나를 지옥으로 데려가러 온 악마를 보는 듯한 마음으로,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희고 가는 몸 여기저기에는 야릇한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이빨 자국과 키스마크, 손자국들이 흰 눈 위를 밟고 지나간 여러 사람의 발자국처럼 보였다. 방금 생긴 것과 오래된 것, 짙고 옅은 것들이 빼곡했다.
“왜 대답이 없어? 내 말 못 들었어? 왜 계속 학교로 기어 나오냐고 묻잖아, 지금.”
그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나를 보았다. 뿌옇게 내뿜은 담배 연기 너머로 눈이 마주쳤다. 목소리는 평소처럼 높고 뾰족했지만 분위기가 평소와는 달랐다.
거느리고 다니던 알파 무리가 없어서인지, 옷을 입지 않고 있어서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를 보는 내 마음이 유달리 지치고 슬퍼서인지.
“그 정도로 멍청한 애야, 너? 눈치를 줘도 들은 척을 안 하길래 한번은 대놓고 말했잖아. 다시 여기 오지 말라고.”
“…….”
“사람이 그 정도로 말을 하면 좀 들어먹어야 하는 거 아냐?”
“…왜?”
그의 예쁜 얼굴이, 오늘은 알 수 없이 슬퍼 보였다. 여전히 그가 두려워 목소리를 떨면서도 늘 궁금했던 질문을 꺼낼 수 있었던 건 그런 이유였다.
“왜 그렇게 날 싫어해?”
“싫어해? 내가, 널?”
“…….”
“하, 하하…. 뭐, 그럴 수도 있겠네.”
그는 까르르 소리를 높여 웃었다. 껍데기뿐인 웃음소리에는 표독스러움도 즐거움도 없었다. 한참 이어지던 웃음소리가 뚝 끊긴 뒤, 그는 뜬금없이 물었다.
“너 말이야, 불행이 뭔지 잘 알지?”
“…….”
“많이 겪어 봤으니까 잘 알 거 아냐. 불행이 어떤 식으로 찾아오는 건지. 그건… 그래, 자연재해 같은 거잖아.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져 버리는 거.”
“…….”
“보니까, 좆같은 일은 내가 뭘 잘못해서 생기는 게 아니라, 말 그대로 그냥 일어나는 거더라고. 왜 나에게 이런 일이 생겼는지 아무리 고민해도 답이 안 나와. 차라리 이유라도 있으면 발버둥이라도 칠 텐데, 그게 아니니까 더 미쳐 버리는 거지.”
그는 한숨 같은 말을 쏟아내었다. 하민은 언제나 나에게 악마같은 존재였지만 위악을 벗고 내 앞에 앉은 그는 그저 남자애였다. 또래보다도 작고 가녀린, 쉼 없이 물어뜯기고 겹겹이 상처 입은 남자애.
그의 몸은 그 많은 한숨을 담기에 너무도 작아 보였다. 나를 오금 저리게 하고 가위눌리게 하던, 그림자도 똑바로 보기 어렵던 저 아이가 이렇게나 작았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너 되게 이상한 앤 거 알아? 세상일 다 체념한 것처럼 맥없이 구는데, 또 가만히 보면 자기 혼자 이 악물고 버티고 있더라. 네가 왜 그러는지 알아. 너 청승 떠는 척은 혼자 다 하면서 사실 아무것도 포기하기 싫은 거잖아.”
“…….”
“그거, 보고 있으면 진짜 짜증 나거든. 역겹고, 구질구질해서 견딜 수가 없다고.”
공격적인 말도, 어쩌면 흐느낌처럼 들렸다. 그 자그마한 남자애는 거울을 보는 듯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왜냐하면… 나도 그러니까. 될 일이 있고 안 될 일이 있는데. 앞뒤 구분 못 하고 바보같이 뻗대는 거, 너나 나나 똑같다고.”
“…….”
“네가 오메가라는 걸 알았을 때, 기분이 어땠어?”
짧게 입술을 달싹였지만, 딱히 내 대답이 듣고 싶은 건 아닌 듯 보였다. 그는 허탈한 웃음을 키득거렸다.
“난… 후후. 정말 꿈에도 예상 못 했거든. 부모님도 두 분 다 알파고, 아무런 징후도 없었는데…. 판정 결과를 들고 집에 갔더니, 부모님이 나보다 더 크게 우시더라. 자기들이 나를 잘못 낳아서 이렇게 된 거라면서, 미안하다고 하셨어.”
“…….”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오메가가 되었다는 것만으로, 나는 하루아침에 잘못 태어난 애가 돼 버렸다는 뜻이야.”
그는 교탁에 비스듬히 어깨를 기댄 채 길게 담배 연기를 뿜었다.
“그래도 우리 부모님은 인정 있는 분들이셔. 아마 날 사랑하시는 거겠지. 자식이 오메가로 판정되면 가문의 수치라고 내치는 사람들도 많거든. 그분들은 그냥… 날 걱정하셨던 거야. 나한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뻔했으니까.”
“…….”
“그래, 넌 영문도 몰랐던 눈치지만, 난 오메가가 된 애들이 겪는 일에 대해서 다 알고 있었어. 전부터 본 것도 들은 것도 많았거든. 그게 나한테 일어날 거라고는 생각도 안 했을 뿐이지.”
“…….”
“부모님이 그러시더라. 학교를 그만두라고. 아무도 만나지 않고, 아무것도 하지 않고 죽은 듯이 지내면 큰 사고는 안 생길 거라고. 처음엔 나도 그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했어. 피해자나 먹잇감이 되는 것보단 그냥 하는 일 없는 등신이 되는 게 나으니까. 하고 싶던 일이 뭐였든, 무슨 공부를 하고 무슨 직업을 갖고 싶었든 이제부턴 포기하는 수밖에 없다고.”
하민은 오랜 울분을 삼키듯 울컥거리는 호흡을 가다듬었다. 할 말을 잃은 나는 가만히 그의 말을 기다렸다.
“아는데, 그게 더 쉬운 일이라는 거 나도 다 아는데…. 씨발, 내 성질머리가 더러워서 말이야. 억울해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더라고. 내가 왜? 왜 나만 그래야 하는데?”
“…….”
“그래서, 결심한 거야. 오메가가 되었으면, 오메가로 살면 되는 거라고. 잡아먹히고 싶지 않으면, 내가 먼저 먹이를 내어주면 그만이라고. 내가 원해서, 좋아서 한 일이면 나는 피해자가 되지도 먹잇감이 되지도 않는 거니까. 뭐, 까짓거 나도 즐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
“그거면 된 거라고, 정말로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했거든.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고, 하고 싶었던 건 다 하면서 살 거라고. 그건 아주….”
잠시 말을 멈추었던 그는 다시 쿡쿡쿡, 웃음을 터뜨렸다.
“하…. 정말 멍청한 결정이었어.”
그는 신경질적으로 남은 담배를 태워버렸다. 연기를 뱉는 간격이 빠르고 급해졌다.
“이렇게 좆같은 일인 줄 알았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을걸. 그 개같은 새끼들, 예전엔 다 내 친구들이었다는 거 알아? 시간 장소 구분 못 하고 껄떡거리는 새끼들도, 술 취한 날 눕혀놓고 누가 먼저 할지 가위바위보를 하는 새끼들도 전엔 그냥 다 내 친구들이었어.”
“…….”
“더 좆같은 건 말이야, 만약에 오메가로 발현되지 않았다면, 난 틀림없이 걔네들 중 한 명이 되었을 거라는 거지. 너같이 만만한 애를 깔아 눕혀 놓고, 옷을 찢어발기면서 좋다고 낄낄거리고 있는 개새끼 중에 한 명이었을 거라고.”
하민은 다 타들어 가 필터만 남은 담배를 바닥에 눌러 껐다. 울고 있는 걸까 생각했지만, 메마른 눈가에는 눈물 한 점 보이지 않았다. 불티가 사라진 후에도 필터가 다 헤어지도록 꾹꾹, 짓눌러 댔다. 그러고는 오랜 친구에게 말을 걸듯 무심한 말투로 내게 물었다.
“…넌 어디서 왔어? 우리 일족이 뭔지 알기는 해?”
“조금은…. 늑대 일족이라고.”
“그래. 오메가는 다리가 두 개뿐인 절름발이 늑대야.”
“…….”
“그런데 그건 알파도 마찬가지거든. 걔네들도 다 혼자서는 완전할 수 없는 한심한 새끼들이야. 오메가를 더러운 돌연변이 취급하면서도 뒤로는 정신 못 차리고 엉겨붙는 게 꼴사납지 않아?”
“…….”
“하나부터 열까지 다 좆같아도 어쩔 수 없어. 나는 일족의 일원으로 태어났고, 어차피 내 힘으로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으니까. 모든 걸 포기하거나, 이 거지 같은 늪에서 허우적거리면서 살 수밖에 없다고.”
“…….”
“그치만, 너는 선택할 수 있었잖아. 왜 내빼지 않고 여기 남은 거야?”
“선택…? 내가… 뭘?”
하민은 옷을 주워입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익숙한지 느릿하고 권태로운 동작이었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초조해질 때쯤, 티셔츠를 걸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 봤을 때는 완전히 발현되지 않았었잖아, 너. 그래서 내가 계속 여기 오지 말라고 말했던 거야.”
“여기 오는 게… 왜?”
“학교에 다니지만 않았으면 지금보단 나았을 거잖아. 발현이 멈췄을 수도 있고, 적어도 속도라도 늦어졌을 거고.”
“학교가 발현이랑 상관있는 거야?”
“알파와 오메가가 가까이 있으면 페로몬 때문에 발현이 촉진되니까. 우리나라에 이 학교만큼 알파들이 모여 있는 곳이 또 어디 있겠어?”
“…….”
“…모르고 있었어?”
망연한 나의 표정을 보며, 하민은 쓰게 웃었다. 옷을 다 입은 그는 톡톡, 가볍게 손을 두드려 구겨진 티셔츠 자락을 곧게 폈다.
“어쩔 수 없지. 안 됐지만 이제 돌이킬 수도 없을 것 같은데.”
“…….”
“음…. 아니, 이런 말은 좀 그렇다. 내가 누굴 동정할 입장도 아니고.”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 그는 내가 알던 원래의 표정으로 되돌아가 있었다. 얄미울 정도로 상큼하고 발랄한 얼굴. 그는 발소리를 내지 않고 사뿐사뿐 나에게 걸어왔다.
그에게서 아찔한 향기가 풍겨 나왔다. 나는 멍해진 채로 그 냄새를 삼켰다. 썩은 꽃의 냄새가 이렇게 아프고 아름다울까, 하고.
“멍청한 거야, 용감한 거야? 이래서 어떻게 버텨 내려고 그래?”
“응?”
“너 지금 다 페로몬 다 흘리고 있잖아. 여기 좆밥 오메가가 있다고 교내 방송이라도 하지그래, 왜?”
“아….”
“정신 좀 차려. 내가 알파였으면 벌써 네 뒷구멍부터 따고 있었을걸.”
그의 향기에 정신 팔려서, 내 페로몬이 새어 나가는 줄도 모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당황한 내 모습을 보고 하민은 붉은 입꼬리를 끌어 올려 유혹처럼 웃었다. 그는 붉어진 나의 뺨을 감싸 쥐었다가, 엄지손가락을 내 입술에 꾸욱, 내리눌렀다.
입 모양은 여전히 미소 짓는 채였지만, 그의 눈빛은 순식간에 차가워졌다. 주변의 공기까지 얼려 버릴 정도로. 그건 말하자면, 마음을 닫는 표정이었다. 머리를 어지럽히던 그의 냄새도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이렇게 하는 거야. 알겠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한이 아무리 설명해도 아리송하기만 했던 ‘닫는 방법’이라는 것을, 나는 그제야 완전히 알 수 있었다.
멍해진 내 표정을 보며, 하민은 뜻 모를 미소를 지었다. 그의 맑고 어두운 눈동자 안에는 여러 가지 감정들이 깊고 진득하게 엉켜 있었다. 동정과 연민, 회한과 자괴감, 그럼에도 꼿꼿한 의지까지.
“한 가지만 더 얘기할게. 아무도 믿지 마.”
“…….”
“알파들은 다 똑같아. 오메가가 믿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자기 자신뿐이야.”
그는 나에게서 손을 떼고 돌아섰다. 가벼운 발소리가 멀어지다 이내 사라져 버렸다. 텅 빈 강의실에 혼자 남겨져 있으니, 꿈이라도 꾼 듯한 기분이었다.
나는 천천히 숨을 가라앉히고, 페로몬을 닫았다. 늘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단내가 깨끗이 사라졌다. 한 번 익히고 나니 의외로 간단한 일이었다. 그동안 왜 이걸 배우지 못해 그렇게나 애를 먹었는지 이해가 되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골칫덩어리였던 페로몬 문제가 해결된 셈이었지만, 나는 오후 강의에 집중할 수 없었다. 그렇게 기를 써서 학교에 다니려고 했던 게 오히려 상황을 나쁘게 만들었다니, 안간힘을 쓰던 날들이 다 허무하게 느껴졌다. 나는 철저하게 아무것도 모르는 멍청이였다.
수업이 끝날 무렵 재훈에게서 연락이 왔다. 학교에 갔었는지, 외출하지는 않았는지 묻는 말에 나도 모르게 집에만 있었다고 거짓말을 했다. 그는 안심하는 티를 내며 오늘도 과외와 PC방 아르바이트 대타를 구해 두었다고 했다.
어머니의 처방전에 관해 묻고 싶었지만, 나를 돕겠다며 애쓰는 사람에게 따지는 것처럼 보일까 봐 그만두었다. 어쩌면 이준의 말대로 병원에서 그를 보지 못했다는 어머니의 기억이 잘못된 걸지도 모른다.
곧이어 이준도 메시지를 보내 왔다. 수업이 끝났냐는 메시지에 뭐라고 답할지 고민하다 그냥 답장하지 않고 창을 닫아 버렸다. 결국은 아무것도 정리되지 않은 채로 도피하듯 집에 돌아갔다. 갑갑하고 남루한 집이 피난처처럼 느껴진 것도 오랜만이었다.
“어째 이렇게 일찍 왔어? 오늘도 휴가니?”
어머니는 평안하고 밝은 표정으로 나를 반겼다. 투석을 받고 온 날은 지쳐 있을 때가 많은데, 아침과는 달리 생기 있는 모습에 마음이 놓였다. 휴가를 받아 아르바이트를 쉰다는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어영부영 말을 돌렸다.
“어…. 그게…. 네. 병원은 잘 다녀오셨어요? 별일은 없었죠?”
“매일 가는 병원에 일은 무슨. 다 괜찮대. 오후 나절부터 몸도 아주 가벼워. 약 바꾼 게 한참 애를 먹이더니 이제야 적응이 됐나 보다.”
“그러게요. 안색이 좋아 보여요. 새벽에는 걱정 많이 했었는데…. 저녁 아직 안 드셨죠?”
냉장고 문을 열다가 아차, 혀를 찼다. 전에 만들어 놓았던 음식이 다 떨어진 상태였다. 어제 잠이 들 때까지는 아침에 반찬거리를 만들어 냉장고를 채워 놓겠다고 생각했는데, 소동이 있던 통에 깜빡 잊었던 모양이다.
“정신이 없어서 아무것도 안 해 놨네요. 점심에는 뭐 드셨어요? 밥도 제대로 못 드신 거 아니에요?”
“얘는, 어린애도 아니고 집에 있는 사람이 점심 한 끼도 알아서 못 챙겨 먹었을까 봐. 모처럼 일찍 들어왔는데 거기서 그러지 말고 앉아서 쉬어. 엄마가 저녁 할게.”
“제가 얼른 할게요. 피곤하실 텐데 쉬세요.”
“아직 시간도 이른데 내가 쉬엄쉬엄하면 되지.”
“그러다 또 탈이라도 나면 어떡해요.”
“밥하는 게 뭐가 대수라고. 잔칫상 차려 주겠다는 거 아니야. 밥만 안치고 간단하게…. 아, 계란말이 해 줄까? 너 그거 좋아하잖아.”
“괜찮은데….”
“아니다. 오늘은 정말 움직일 만해서 그래. 사람이 너무 누워만 있어도 못 쓰잖아. 그리고 너랑 같이 저녁 먹을 기회가 어디 흔하니? 주말 내내 둘이 집에 있으면서도 누워서 끙끙 앓느라 밥 한 끼도 못 해 먹여서 엄마가 얼마나 속상했는데.”
부엌으로 다가오는 어머니의 걸음이 절뚝거렸다. 요즘 들어 어머니는 다리가 저리고 무력할 때가 많았다. 그 모습에 나는 오히려 그녀를 말릴 수 없었다.
저 불편한 걸음걸이로 긴 계단을 혼자 내려가 병원에 다녀왔을 텐데, 손바닥만 한 집 안에서 고작 세 걸음 남짓을 못 걷게 할 면목이 없었다.
어머니는 쌀을 씻어 밥솥에 올리고 계란을 곱게 풀었다. 달구어진 프라이팬에 치이익, 계란이 익는 소리가 정겨웠다. 내가 계란말이를 좋아했던가. 나는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지만, 어머니가 그리 말하는 걸 보면 어렸을 때는 좋아했던 모양이다.
지금 내가 계란에 대해 가지고 있는 감흥이라고는, 가난과 제한된 식단 탓에 수를 세어 가며 먹는 음식이라는 것뿐이었다. 계란뿐만이 아니라 다른 음식도 나에게는 다 비슷했다. 끼니를 넘기는 일이 기쁨이라기보단, 그저 고단한 생존의 문제라서.
“오랜만인데 맛살이라도 넣어 줬으면 좋았을걸.”
그러나 저녁을 준비하는 어머니는 고단한 기색 없이 즐거워 보였다. 어머니에게 나는 여전히 계란말이를 좋아하던 어린아이인지도 모른다.
어릴 때는 분명 좋아하는 것도 하고 싶은 일도 것도 지금보단 많았었다. 그 시절에는 해가 저물 무렵이면 허기에 동동거렸고, 퇴근한 어머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식사를 기다리곤 했다.
그때 어머니는 지금보다 훨씬 넓은 부엌에서도 아주아주 커다래 보였다. 고소한 밥 냄새를 맡으며 그녀의 둥근 어깨를 보고 있으면 배는 주렸어도 마음은 편안했었다.
오랜만에 부엌에 선 어머니의 어깨는 그때보다 훨씬 작고 굽어 있었다. 내가 자란 만큼 그녀는 움츠러든 모양이었다. 코끝이 찡해서 나는 자꾸 그녀에게서 눈을 돌려 다른 곳을 보았다.
초라하고 따뜻한 저녁 밥상에는 예전과 같은 모양으로 예쁘게 구워진 계란말이가 올라갔다. 어머니는 자꾸 내 밥 위에 계란을 얹어 주었다. 지금은 그다지 계란말이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말은 감추고, 그냥 손사래를 쳤다.
“엄마 더 드세요. 저 벌써 많이 먹었는데.”
“엄마도 많이 먹었어. 이거 보렴. 밥도 거의 다 먹었다.”
“오늘은 입맛이 좀 있으신가 봐요.”
“그러게. 아들이랑 같이 상에 앉아서 그런가?”
그녀는 마냥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바라보았다. 자랑스러운 아들을 바라보는 눈빛에 죄책감이 앞섰다. 문득 하민의 말이 떠올랐다. 오메가로 태어난 것만으로 갑자기 잘못 태어난 아이가 되어 버렸다던 말이.
나도 그런 존재였다. 남자의 몸인데도 아이를 낳을 수 있고, 수시로 발정하는 오메가. 내가 그런 이상한 존재로 변해 버렸다는 걸, 어머니는 까맣게 모르고 있다. 언제까지 그녀에게 모든 일을 숨길 수 있을까. 이한과의 ‘접촉’과 이준의 제안에 대해 알게 된다면, 그녀는 어떤 생각을 할까.
나는 입술을 살짝 떼었다가 도로 굳게 다물었다. 영영 비밀로 할 수는 없다고 해도,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었다.
‘내 일이 아니어도 힘드실 테니까….’
젊었을 때는 곱고 희었을 어머니의 손은 어느덧 안쓰러울 정도로 거칠고 푸석푸석해져 있었다. 숟가락을 쥔 것조차 지쳐 보일 정도로.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로 어머니는 생계를 위해 익숙지 않은 잡일에 시달렸다. 종일 몸을 혹사해 가며 일해도 벌이는 시원치 않았고, 집으로 돌아와 살림살이를 정돈한 뒤에는 밤이 깊도록 부업까지 해야 했다.
오메가가 되기 전에도, 나는 이미 그녀에게 번거로운 존재였을 것이다. 어린 나를 데리고 아등바등 살아가는 어머니를 두고 이웃 사람들은 수군거렸었다.
‘윤오 엄마는 얼굴도 곱고 나이도 어린데 왜 저렇게 궁상을 떨어? 적당한 재취 자리라도 얻어서 들어갈 것이지.’
‘암만 고와도 애 딸린 여자 데려갈 남자가 흔한가, 뭐.’
‘아니, 찾으려면 짝이야 있겠지. 철물점 하는 김 씨 있잖아요. 그이가 윤오 엄마한테 마음에 있어서 슬쩍 떠봤더니 재혼 생각 없다고 딱 잡아뗐대요. 자식한테 상처 주기 싫다나, 뭐라나.’
‘하이고, 아직 배가 불렀나 보네. 목구멍이 포도청이면 상처가 뭐 대수겠어? 하긴, 자기 팔자 자기가 꼬겠다는데 누가 말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짐짝이 된 기분에 죄스러워졌다. 어머니는 기회가 될 때마다 나에게 ‘둘이서 잘 살아가자’, ‘엄마는 너만 있으면 된다’라고 말했지만, 원죄 같은 죄책감은 덜어지지 않았다.
내가 없었다면 어머니는 다른 사람을 만났을 수도 있고, 혼자 살아갔더라도 형편이 훨씬 나았을 거다. 가난한 살림에 벌어먹일 입이 하나 더 있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는 나도 잘 아니까.
여유가 있었다면 생업에 쫓겨 치료 시기를 놓치는 일도 없었을 거고, 이렇게까지 건강이 나빠지지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새삼 사무쳤다. 해야 하는 많은 말을 삼키고, 나는 어린 시절부터 여러 번 반복했던 말을 다시 해 버렸다.
“엄마. 미안해요.”
“왜 또 그래? 무슨 일 있어?”
“…그냥, 다.”
“싱겁기는.”
“그렇잖아요. 낳아 준 데다 이만큼 키워 주기까지 했으면 됐지, 형편도 안 되는데 대학 간다고 고집 피우고. 엄마가 이렇게 아픈데. 빨리 일해서 돈이라도 버는 게 나을 텐데….”
“됐다. 돈이야 나중에 벌면 되지. 엄마가 너한테 돈 맡겨 놓은 것도 아니고. 너 대학 붙었을 때 내가 얼마나 좋아했는지 다 잊어버렸니?”
“그리고… 내 신장이 엄마한테 맞았으면 좋았을 거잖아요. 그럼 이렇게 힘들게 병원 다니면서 투석 안 해도 됐을 거고.”
“얘는, 무슨 그런 소리를 해?”
“…속상해서. 힘들게 키워 주셨는데 은혜도 못 갚는 것 같아서요.”
그녀는 눈썹 끝을 아래로 늘어뜨리고는, 마지막 남은 계란말이 하나를 다시 내 수저 위로 올렸다.
“은혜 같은 게 어디 있어. 네가 태어난 게 엄마한테는 제일 큰 선물이었는데.”
“…….”
“이렇게 착하고 잘난 아들이 또 어디 있니. 엄마는 너만 보면 밥 안 먹어도 배부르고 아픈 것도 다 까먹어. 살면서 이런 일 저런 일 다 겪었지만, 혹시 누가 시간을 되돌려준다고 해도 너 낳기 전으로는 절대 안 돌릴 거다. 무슨 일이 있어도 네가 내 아들이었으면 싶어서.”
“…….”
“이런 소리 하면 네가 싫다고 하려나? 하긴. 우리 아들이 뭐가 부족하다고 이런 엄마 밑에서 또 그 지긋지긋한 궁상을 떨어야겠어? 잘사는 집에, 아니 평범한 집에라도 태어났으면 더 좋은 거 먹고 입고 예쁜 것만 보고 살았을 텐데.”
“아니, 아니에요.”
나는 늘 애교도 말수도 없는 아들이었다. 기쁜 일이 드무니 제대로 웃는 법도 몰랐고, 힘든 일은 일일이 셀 수 없이 많아서 하소연하기보단 속으로 삼키는 게 편했다.
그렇지만 지금은 마음을 이야기할 시간이었다. 아무리 둔한 나라도 그건 알 수 있었다. 젓가락을 깨작거리다가, 눈도 마주치지 않은 채로 웅얼거렸다.
“나도 엄마 아들이라서 좋아요. 다시 고를 수 있어도 엄마 아들로 태어날래.”
뭐 그리 어려운 말이라고, 그 한마디를 하는 데 용기를 끌어내야 했다. 어머니는 내 붉어진 볼을 보며 애틋한 미소를 지었다.
“…엄마 주책 다 맞춰 주고, 우리 아들 착하기도 하지.”
“…….”
“네가 이해해라. 부모 욕심이 그렇게 미련스럽지 뭐냐.”
“…….”
“안 먹고 뭐 하니. 밥 다 식겠다. 응?”
울음이 와락 쏟아질까 봐 나는 아주 천천히 고개를 움직여 밥을 먹었다. 어머니도 코끝이 시큰한지 그 뒤로는 아무 말이 없었다. 뜨끈한 침묵 속에서 식사가 길게 이어졌다.
허기는 진작에 사라졌지만, 나는 엄마가 퍼 준 고봉밥을 한 톨도 남기지 않고 다 먹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러고 싶은 기분이라서.
잠자리에 들 무렵 이준에게서 또 메시지가 왔다. 낮의 문자에 답하지 않은 걸 책망하는 기색 하나 없이, 오히려 평소보다도 사근사근한 말투였다.
그 상냥함이 갑자기 두려워졌다. 먹이를 이미 덫에 몰아넣은 포식자의 여유 같았다. 나는 이번에도 그에게 답장하지 않고 눈을 붙였다.
‘결정을 내릴 때까지는 이게 나아. 이야기를 나눴다가는 휩쓸려 버릴 수도 있으니까….’
고민이 많아서인지 다음 날은 아침 일찍 눈이 떠졌다. 머리는 어지럽지만 기계적으로 몸을 움직였다. 집을 정리하고, 냉장고 가득 어머니가 드실 음식을 만들었다. 학교에 갈지를 망설이다 일단 씻기 위해 공용 욕실로 향했다.
추위는 많이 가셨지만, 여전히 찬물이 닿으면 몸이 곱아들었다. 어깨를 둥그렇게 움츠리다가 문득 뽀얗게 김이 서린 욕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을 보았다.
창백하고 빼빼 마른 모습이다. 나는 늘 내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오메가로 발현하면서 얼굴도 몸도 더 유약하고 가냘파진 게 못마땅했다. 무리 중에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아야 한다면, 나라도 나를 고를 것 같았다.
불행에 대해 잘 알지 않냐고, 하민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늘 내가 불행에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겪어도 겪어도 불행은 모질고 버겁기만 했다. 한참을 삼켰는데 아직도 온 바닥에 흥건한 불행에 문득문득 소스라치곤 했다.
‘그 애도 그랬겠지….’
그 역시도 나처럼 발버둥 쳐도 제자리걸음인 현실을 원망하고, 절망하기를 수도 없이 반복했을 거다. 그럼에도 그는 결국 오메가로 살아가겠다고 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고 자조하면서도, 그는 단단하게 현실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마찬가지로, 나도 나로 살 수밖에 없다. 내가 정말로 잘못 태어난 아이라고 해도 다른 사람으로 살아갈 수는 없으니까.
어제의 저녁 식탁을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내가 태어난 게 가장 큰 선물이었다는 어머니의 말을 되새겼다.
습관처럼 세게 피부를 문지르다가, 이제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손을 멈추었다. 숨을 고르며 페로몬을 단단히 걸어 잠갔다. 내게서 더는 아무 냄새도 느껴지지 않았다. 물소리가 멈추자 추위에 떨리던 몸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등이 곧게 펴지면서 머리가 선명해졌다.
‘그래. 어쩌면, 어쩌면…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을지도 몰라.’
페로몬을 닫을 수 있다는 건, 그걸 눌러 줄 누군가가 없더라도 생활할 수 있다는 뜻이다. 어떻게든 히트 사이클을 넘길 수만 있다면 예전처럼 지내는 것도 가능할지 모른다. 방법은 아직 까마득하지만 갈 수 있는 데까지는 가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내 앞에 놓인 길이 어떤 시궁창이라고 해도, 내 발로 디딜 수 있는 곳까지는 걷고 싶은 기분이었다.
나는 결심했다. 이준에 대한 내 감정이 어떻든, 학교를 그만두라는 말은 거절해야겠다고. 그가 주었던 시계도 되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가방을 꾸리고, 어머니의 약 봉투도 가지런히 정리했다.
“엄마, 다녀올게요.”
느지막이 일어나 헝클어진 머리 묶고 있던 어머니는 내 말에 활짝 웃었다.
“그래. 오늘도 일찍 오니?”
“아뇨, 휴가 끝났어요. 밥이랑 약 잘 챙겨 드세요.”
“잘 다녀오렴, 우리 아들.”
들어가 쉬시라고 말렸지만, 어머니는 굳이 판잣집 문 앞까지 나를 마중했다. 배웅받는 게 쑥스러워, 나는 제대로 인사도 못 하고 허둥지둥 고개를 돌렸다.
어머니의 상태가 나아지면 나에게 일어난 일들에 대해 알려드리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놀라시겠지만, 어떻게든 이해해 주실 것 같았다. 어머니는 늘 내 편이었으니까. 어쩌면 고생했다는 말로 나를 위로해 주실지도 모른다.
상상만으로 위안을 받으며 계단을 반쯤 내려갔을 때, 핸드폰 벨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순간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며칠이나 연락이 없던 이한의 전화였다.
“너 괜찮아? 러트…였잖아. 이제 끝난 거야?”
속도 없이 반가운 기분이 앞섰다. 그러나 이한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날이 선 목소리였다.
[쫑알거릴 시간이 있으면 빨리 오기나 하라고. 오라면 올 것이지 쓸데없이 말이 많아?]
예상치 못한 호출이었다. 이유를 듣지도 못하고, 주눅 든 채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뭐가 또 그를 그렇게 화나게 만든 걸까. 이준을 만나 버렸으니, 그를 화나게 할 만한 일은 이미 저질러 놓은 셈이다. 찔리는 구석이 있다 보니 발걸음이 가볍지 못했다.
나도 그에게 전할 말이 있기는 했다. 이제 혼자서도 페로몬을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고, 억지로 ‘접촉’해 주지 않다고 된다고 말하면 그는 뭐라고 말할까. 답답한 나를 보지 않아도 되는 것이 홀가분하다고 할까, 아니면….
‘그럼… 이제 우리는….’
오피스텔 건물 앞에 다다르자, 나는 문득 이제 그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게 되는 건지가 궁금해졌다.
이곳에 처음 왔던 날 이후로 정신없이 휘몰아쳤던 수많은 사건이 머릿속을 지나갔다. 벅차고 고단했던 일들만큼, 그와 나 사이의 감정도 복잡하고 두서없이 자라났다. 한마디로 이름 붙이기 어려울 정도로.
나는 그렇게 때아닌 감상에 젖어 있었다. 어리석은 일이었다. 아무것도 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으니까. 늘 그래왔듯이, 아니 여태까지보다 더 혹독하고 험난하게,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내 손을 벗어나 멋대로 흘러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