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6 : 필연
한윤오가 나의 인생에 끼어든 이후, 나에게는 한심한 변화가 생겼다. 시간이 전보다 더디게 흐르고, 멀쩡하게 있다가도 이유 없이 멍해지곤 했다.
‘저기, 서이한.’
우물쭈물 나를 부르는 그 애의 목소리를, 그때마다 내 이름의 글자 하나하나가 유난스레 귀를 간질이는 느낌을 떠올렸다.
혼자 방에 있으면 한 번씩 텅 빈 현관을 바라보게 되었다. 사실 그건 빈 현관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남은 그 애의 잔상을 되새기는 일이었다. 작게 움츠린 어깨, 처연한 긴 목 위로 기울여진 얼굴의 선, 인형처럼 촘촘하고 보드라운 속눈썹 같은 것들을.
그러다 초인종이 울리면, 약속을 정하지 않은 때라도 반사적으로 그 애가 온 걸까, 생각했다. 쿵쿵거리는 심장은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했다.
그 애가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주말의 오후에도 그랬다. 그 애가 지금 올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초인종 소리를 듣자마자 되지도 않을 기대를 품었다.
“아…. 형이네요.”
기대와는 달리, 문밖에 서 있는 것은 재훈이었다. 실망한 표정을 숨기지 못하자 그는 서운하다는 듯 투덜거렸다.
“그 표정은 뭡니까? 아까운 주말 시간까지 내서 챙겨 주러 왔는데 반가워하지는 못할망정….”
“아뇨, 그냥 생각할 게 있어서요. 무슨 일이에요?”
“또 정 없이 그러시네요. 볼일 없으면 못 옵니까?”
“…여태까지 용건 없이 집에 찾아온 적 있어요?”
“음…. 없긴 하네요. 오늘 용건은 이거. 받아요.”
그는 너스레를 떨며 들고 있던 약 봉투를 건넸다.
“뭐예요? 수면제? 웬일이에요, 그렇게 졸라도 안 주더니.”
“수면제는 무슨. 요샌 잘 잔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럼 뭔데요?”
“러트 억제제예요. 사이클 얼마 안 남았죠? 지난달에 새로 출시된 제품인데 이건 들을까 싶어서.”
“신약이에요? 서경제약 거?”
“아뇨, 다른 회사 제품입니다. 페로몬 억제 기전 자체는 기존 제품이랑 유사한데 복용 방법이 좀 다릅니다.”
그는 관심도 없는 약의 원리와 복용법을 줄줄 설명했다. 나는 들은 체 만 체하며 봉투를 찬장 깊은 곳으로 밀어 넣었다.
“안 먹을 생각이군요? 너무 티 낸다. 갖다 준 사람 앞에서 그러는 거, 예의가 아닌데요.”
“쓰레기통에 안 넣은 거로 예절은 충분히 차렸어요. 결국 지난번 약이랑 크게 다를 것 없다는 거잖아요. 먹어 봤자 두통만 심해질 것 같은데.”
“뭐, 근본적으로 다르진 않죠.”
“요새 같은 세상에 쓸 만한 억제제 하나 만드는 게 그렇게 힘든 일입니까?”
“러트 억제제는 개발 유인이 거의 없어서 연구가 잘 안 이루어지는 거 알잖아요. 알파들은 대부분 힘들게 약을 먹는 것보단 파트너랑 사이클을 보내는 걸 선호하니까.”
“그렇다고 히트 억제제를 제대로 만드는 것도 아니잖아요. 말이 제약회사지, 씨발, 최음제 만드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서는.”
습관처럼 서 회장의 회사에 대해 이죽거리다가 문득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윤오는 아직 첫 히트를 겪지 않았다. 평상시의 페로몬도 가누질 못해 쩔쩔매고 있는데, 그 애가 이대로 사이클을 맞게 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다급하게 물었다.
“…혹시 히트 억제제도 가져올 수 있어요?”
“그걸 왜 찾아요?”
“그냥, 궁금해서요.”
“어렵습니다. 오메가용 억제제는 더 철저하게 관리 되거든요. 가문 소속으로 등록된 오메가가 아닌 이상 제대로 된 약을 구할 방법은 거의 없어요.”
재훈의 말에 걱정은 더 부풀었다. 그 애의 사이클이 내 손 닿는 근처에 있을 때 시작된다면 그나마 낫지만, 엉뚱한 곳에서 터져 버린다면 끔찍한 일이 생겨 버릴 거다.
달고 유혹적인 내음을 줄줄 뿜어내며 괴로워하는 그 애의 모습이, 알파들이 눈이 뒤집어진 채로 달려드는 장면이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아 소름이 돋았다.
“그럼, 억제제를 못 먹는 오메가들은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나처럼 약이 안 듣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잖아요. 아니면, 혹시 가문의 보호를 못 받는 오메가가 있다든가 하면.”
“…그런 경우에는 각인을 하는 게 평온하게 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입니다. 사실 억제제가 잘 듣는 오메가들도 각인 없이 평온하게 살기는 어렵지만.”
“각인…? 그게 진짜로 되는 거였어요? 도시전설 같은 거 아니에요?”
“그럼요. 하려고만 하면 할 수 있죠.”
“누가 실제로 했다는 얘기는 들어 본 적 없는데.”
“오메가에게 구속되고 싶어 하는 알파는 거의 없으니까요. 알파 쪽은 예정된 혼담도 깨야 하니까, 가문에서도 일족의 사회에서도 완전히 배제될 각오가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고요.”
재훈은 씁쓸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그는 나를 낳은 그 오메가를 생각하고 있었을 거다. 누군가 그에게 각인을 해 주었더라면 그의 인생은 조금 나아졌을까.
“어떻게 해요? 정말로 목을 물어서?”
“그렇죠.”
“사이클이 왔을 때?”
“그건 상관없습니다. 주기가 아니더라도 각인을 시작하면 사이클이 시작되거든요.”
엉뚱한 생각이 스멀스멀 내 안에서 피어났다. 각인에 관해 이야기할수록, 내 머릿속은 온통 그 애의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 애의 목을 물어뜯는 나의 모습을 상상하기까지 했다.
언뜻 말도 안 되는 생각 같지만, 곰곰이 생각하면 꼭 그렇게 터무니없는 일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 애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평온한 삶을 마다할 이유가 없을 거다.
더구나 나는 애초에 집안의 검은 양 같은 존재다. 꼴도 보기 싫은 서씨 일가에 ‘덜 떨어진 둘째 아들이 오메가와 각인한 집’이라는 낙인을 찍어 줄 수 있다면, 나로서는 오히려 반가운 일이다.
“왜 갑자기 각인 얘긴 묻는 거예요? 관심 가는 오메가라도 생겼나 보죠?”
그만 이것저것 캐물었더니, 낌새를 차린 재훈이 짓궂은 표정을 짓기 시작했다. 당황한 나는 발끈해 버렸다.
“네? 밥 잘 먹고 무슨 헛소리예요, 이 아저씨가?”
“부끄러워하지 말고 얘기해 보시죠.”
“이상한 얘기할 거면 가세요.”
“에이, 저한테까지 뭘 숨기고 그래요. 아기 때부터 업어서 재워 주기까지 한 사람인데.”
“아, 그런 얘기 할 거면 가시라니까요.”
느물거리는 재훈의 대답에, 나는 아예 그의 어깨를 밀어 현관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실실 웃으며 뒷걸음질 치던 그는 귀가 번쩍 뜨이는 얘길 꺼냈다.
“아직 용건 다 안 끝났는데. 같은 과 학생 얘기, 알아봐 달라고 했잖아요.”
그 애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번에도 티를 내고 싶지는 않았지만, 나는 반사적으로 그를 밀던 손을 멈추었다. 뒤늦게 심드렁한 척 되물었지만 말투는 형편없게 어색했다.
“아…. 네. 물어봤던 것 같기도 하고….”
“네, 그랬죠.”
“흠, 흠…. 뭐, 말해 줄 거라도 있어요?”
“특이한 점이 많은 친구던데요. 수능을 안 봤다고 하고.”
“…그걸 정보라고 가져온 겁니까? 우리 과 애들도 다 아는 얘기거든요?”
“재단 출신도 아닌데 수능 성적도 없이 어떻게 천랑대에 입학한 건지는 궁금하지 않나 봅니다?”
나는 결국 꼬리를 내리는 표정을 지었다. 재훈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으며 설명을 시작했다.
“한윤오 군은 명목상으로 재단 출신 학생들과 동일하게 특별전형 합격자로 분류되어 있었습니다. 다만 보통의 특별전형과는 완전히 다른 입학 절차를 거친 것 같아요. 입학 기준이 되었던 건 내신 성적과 면접인데, 재단 이사회 임원들 몇몇이 면접위원으로 참여했더군요.”
“이사회에서 면접도 봐요?”
“원래는 아니고, 그때가 유일했습니다. 서 회장님도 윤오 군의 면접위원이었어요. 작년 말에 갑자기 특별 면접 일정이 잡혀서 이상한 절차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바로 한윤오 군의 면접이었던 모양입니다.”
천랑재단을 구성하는 법인 이사회는 일족의 대표기관으로, 일족의 가장 더러운 뒷일들을 비밀리에 처리하는 곳이나 다름없었다.
서 회장은 일족에서 자기 명성을 높일 수 있는 자리라면 어디든지 악착같이 끼어들었다. 이사회의 일원이 되기 위해 그가 온갖 패악을 부렸던 걸 생각하면 지금도 치가 떨렸다.
그런 재단 이사회에서 직접 참여한 면접이라니, 듣기만 해도 불쾌해지는 얘기였다. 그 뱀 같은 서 회장이, 그 못지않게 너저분한 일족의 소위 ‘윗사람’들이 그 애를 봤다는 사실만으로도 속이 끓었다.
“재작년부터 재단에서 나가는 장학금을 받아서, 입학 전부터 재단과 인연이 있다는 명목으로 특별 면접을 진행했던 것 같습니다. 장학금은 이준 군의 추천으로 결정된 거고요.”
“서이준….”
“이한 군 얘기 대로 이준 군과는 난월동 공부방 봉사 때문에 알게 된 걸로 보입니다.”
“그 새끼, 처음부터 노리고 간 거 아니에요?”
“글쎄요. 그때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모두 근신 처분을 받았으니까요. 근신으로 끝내는 게 맞는 사건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건 별개의 문제죠.”
“…….”
“아, 그런데 봉사할 장소는 이준 군이 직접 선택했다고 알고 있어요. 다른 학생들은 모두 자택에서 가까운 곳이나 재단 소속 단체를 골랐는데 이준 군만 난월동으로 간다고 담당 기사분이 투덜거렸거든요.”
“듣기만 해도 수상하네요.”
“이사회의 생각은 달랐던 거 같은데요. 진심으로 봉사하는 자세라면서 칭찬이 자자했다고 들었습니다. 허울뿐인 반성이 아니라 진지하게 봉사하면서 가여운 학생을 구제해 줬다고 하면서요.”
언뜻 듣기에는 예의 바른 말투였지만, 재훈의 목소리에는 빈정거리는 기운이 감돌았다.
본가의 사람들은 그를 충성스럽고 입이 무거운 타입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사람이 단호하지 못하고 무른 게 유일한 단점이라는 평가였다. ‘상종 못 할 더러운 핏줄’을 타고난 나에게 재훈이 유달리 신경을 써 주는 것도, 그런 무른 구석의 일부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재훈은 서 회장과 본가의 사람들을 조금도 좋아하지 않는다. 나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그들을 경멸하고 있다. 나에게 잘해 준다는 점보다도, 사실은 그게 내가 그를 신뢰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혹시 한윤오 군의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알고 있습니까?”
재훈의 물음에 기억을 더듬어 보았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몸이 아픈 어머니와 함께 산다는 얘긴 들었지만, 아버지 얘긴 듣지 못했다.
“몰라요. 그런 얘길 할 사이도 아니고.”
“친한 거 아니에요?”
“아뇨, 그 애는….”
말이 나오려다 목구멍에서 멈칫거렸다.
“그 애는 날 싫어할걸요.”
늘 생각했던 말이었다. 누구라도 그 애와 내가 함께 있는 순간을, 그 애의 경직된 태도와 겁먹은 표정을 보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 애는 날 싫어하고 있다고.
아무리 잘 아는 사실이라도 입 밖으로 뱉고 나니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애써 덤덤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재훈은 또 마음속을 읽어내는 것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보았다. 변명이랍시고 덧붙인 말이 더 궁색하게 들렸을 거다.
“싫어하든 말든 난 상관없지만요, 당연히.”
“뭐…. 그렇군요. 별일은 없죠, 요새? 학교생활은 어때요?”
“별일 있을 게 뭐가 있어요. 맨날 똑같지.”
“그래도 새내긴데. 그나마 그때가 재미있을 때예요. 연애 같은 건 안 합니까?”
“하, 별 이상한 걸 물어보시네, 이 아저씨가.”
“그렇잖아요. 몇 년 동안 애먹이던 불면증도 갑자기 나았다고 하고, 표정도 뭔가 들떠 보이고.”
불면증 이야기에 나는 또 뜨끔했다. 요즘 수면 패턴이 나아진 건 사실이었다. 그 애와 살이 닿은 날이면 거짓말처럼 깊게 잘 수 있었다. 밤새 잘 자고 맑아진 머리로 다음 날 내내 쓸데없는 생각을 하게 된 게 새로운 문제였지만.
“병이 나은 거 가지고도 잔소리예요?”
“잔소리가 아니라, 궁금해서 그러죠. 저야 늘 이한 군 컨디션에 신경을 쓰고 있으니까.”
“궁금할 것도 많네요, 진짜.”
“아니면 혹시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생겼다던가….”
그가 정말 하고 묻고 싶은 질문은 ‘그 애를 좋아하냐’였을 거다. 능구렁이 같은 말투에 짜증이 치밀었다. 잡아뗄 말을 생각했지만 재훈은 이미 확신하고 있는 눈치니, 어설프게 말해 봤자 꼬투리만 잡힐 것 같았다. 나는 대신 다른 걸 물었다.
“…좋아하는 게 어떤 건데요?”
“…….”
“누굴 좋아했을 때 말이에요. 그때는 어떻게 알 수 있었어요? 그러니까,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걸.”
나도 아주 바보는 아니니까, 내가 그 애에게 안달복달하는 이유가 그런 감정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해 보았다. 문제는, 내가 누굴 좋아한다는 게 어떤 일인지를 잘 모른다는 거였다.
때가 되면 정해진 짝과 맺어지는 일은 주위에서 많이 보았다. 필요와 탐욕에 의해 남을 휘두르는 일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좋아한다는 감정만큼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겪어 본 적도, 눈앞에서 본 적도 없고, 여태까지는 궁금하지도 않았던 일이었다.
타인에게 사랑이라고 부를 만한 순수한 감정을 가져 본 사람은, 내가 아는 이들 중에 재훈이 유일했다. 그래서 그에게 묻고 싶었다. 거지 같기도 하고 묘하게 달큼한 것 같기도 한 이 어지러운 기분이, 정말 그런 마음이 맞는지를.
“…그런 얘길 왜 진작에 혼기를 놓친 노총각에게 물어보는 겁니까? 전 이제 더 이상 혼담도 안 들어와요.”
예상 못 한 질문이었는지, 재훈은 살짝 당황한 투로 말을 얼버무렸다.
“결혼을 못 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잖아요. 혼담도 안 들어온 게 아니라 깨 버린 거고.”
재훈에게도 거의 태어났을 때부터 정해진 혼약이 있었지만 그는 완강하게 약혼을 거부했다. 대학을 졸업할 무렵 새로 오갔던 혼담도 마찬가지였다.
호인 취급을 받던 그가 부모님에게 대든 것은 그 두 번이 유일했다. 고용인으로 부리기에는 결혼을 안 하는 편이 더 좋다고 생각한 서 회장이 중재해 주지 않았다면, 그는 가문과 의절했을지도 모른다.
“우리 사이에 숨길 것도 없다고 했잖아요. 말해 보시죠.”
“글쎄요,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
“거짓말.”
그는 늘 이런 화제를 피하고 싶어 했다. 적당히 모른 척해 줄 수도 있는 일이지만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나는 그가 오래도록 마음에 품은 사람이 누구인지 알고 있다. 솔직히, 나만 부끄러운 마음을 들켜 버린 게 싫어 그의 마음을 들먹거린 것도 있었었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서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아직도 좋아하는 거, 다 아는데. 이해 안 되는 취향이지만.”
비아냥거리는 듯한 나의 말에 재훈은 웃었다. 빵 터진 것처럼 소리 내 웃더니, 손을 뻗어 올려 내 머리를 쓱쓱 쓰다듬기까지 했다.
“아, 왜 이래요, 진짜.”
“아니, 엉뚱한 소릴 하길래. 제 취향이 뭐가 어때서요?”
“일단 살아 있는 사람을 좋아하려고 노력해 봐요. 아직 앞날이 창창한데.”
“애늙은이 같은 말도 하네, 이제. 못 당하겠네요, 정말.”
말과는 달리, 그는 여유 있는 어른의 표정을 되찾았다. 어른인 척하는 게 아니라 진짜 어른의 모습 같아서 짜증 났다. 갑자기 어린애가 되어 버린 기분이 부끄러워 말을 돌렸다.
“그런데 그 애 아버지 얘긴 왜 물어본 거예요?”
“글쎄요. 아직 확실한 건 아니라.”
“뭔데 그래요?”
“말해 줄 수 있을 때가 되면 얘기하겠습니다. 곧 저녁 시간인데. 밥 먹으러 갈까요?”
수상한 대답이지만, 캐물을 시간이 없었다.
“아니요, 저 갈 데 있어요.”
“약속?”
“음…. 약속이라기보단.”
그 애는 주말마다 오후부터 밤까지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했다. 아침에 가라앉힌 페로몬은 아직 괜찮을 시간이지만, 자꾸 눈에 밟혀서 찾아가려던 참이었다.
내버려 두면 또 밥도 안 먹고 혼자 궁상을 떨고 있을 게 뻔했다. 몸도 약해 보이는 주제에 무슨 배짱으로 자꾸 끼니를 거르는지 모를 일이다.
말라비틀어진 몸에 가시 같은 팔다리를 보면 견딜 수가 없어서 자꾸 뭐라도 먹으라고 윽박지르게 됐다. 기죽은 얼굴로 깨작깨작 먹는 꼴을 보고 있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 같다가도 다시 조바심이 나곤 했다. 출렁거리는 감정에 머리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근데 오늘은 뭘 먹이지….’
고기 같은 걸 먹이고 싶지만, 지난번에 보니 많이 먹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초밥은 좀 더 잘 먹을까 싶기도 하고, 고르기도 귀찮은데 그냥 둘 다 사갈까 싶기도 했다. 이것저것 사 가 봤자 그 애는 얼마 먹지도 못할 게 틀림없는데도, 나는 진지하게 메뉴를 고민했다.
보통 성인 남자 둘이라면 거뜬히 먹을 양인데, 그 애는 매번 내가 말도 안 되는 음식을 차려놓은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이걸 어떻게 다 먹어, 하며 새침하게 쳐다보는 꼴이라니.
답답하고 짜증 나지만, 뭘 잘 먹지도 못하는 어설픈 모양새가 귀엽기도 했다. 샐쭉한 눈매와 입술이 떠올라 광대가 실룩거리려고 했다. 표정이 풀어지려던 찰나, 재훈이 여전히 옆에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 흠칫했다. 뒤늦게 얼굴을 가다듬었지만 그는 아예 함박웃음을 짓고 있다.
“혹시 그 친구 만나러 가세요?”
“…휴일에 누굴 만나는지까지 다 보고해야 됩니까?”
“아뇨, 뭘 보고 씩이나. 그냥 모처럼 기분 좋아 보이는 거 같은데 무슨 일일까 궁금해서 그러죠.”
“기분이 좋기는 누가 좋아요? 잔소리꾼이 주말에 집까지 찾아와서 얼쩡거리니까 정신 사나워 죽겠는데.”
“또, 서운하게 그런다. 알았어요. 잔소리꾼은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느 쪽으로 가요? 태워다 줄까요?”
“아, 됐어요. 가 보세요, 그만.”
“이제 다 컸네요, 정말.”
“키는 진작부터 제가 더 컸거든요?”
끈질기게 따라붙으려는 걸 두 팔로 밀어 쫓아냈지만, 재훈은 끝까지 흐뭇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사춘기 아들의 첫사랑을 지켜보는 아버지라도 되는 것처럼 징그러운 눈빛이었다.
그 뒤에 있었던 일들을 알게 된다면, 재훈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그날 이야기했던 ‘각인’을 내가 아무 계획도 없이 덜컥 그 애에게 제안해 버렸다는 걸 알게 된다면. 선심 쓰듯 한 말에, 그 애가 조금도 안도하지 않고 오히려 겁에 질려 버렸고, 꼴사납게 거절당한 것도 모자라 만우절 장난이었다고 불쌍한 거짓말까지 한 걸 알게 된다면.
그래놓고 갇혀 있다는 그 애의 연락을 받자마자 자존심을 챙길 생각조차 못 하고 허겁지겁 그 애가 있는 곳까지 달려왔다는 걸 알게 된다면 말이다.
비웃을 수도 있고, 오히려 더 흐뭇해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다.
‘씨발. 이럴 땐 어떻게 위로를 해 줘야 하지? 뭘 해야 얘가 진정되는 거지…?’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무대 뒤의 대기실에서 울고 있는 그 애를 안고 있는 동안 나는 영혼이 쏙 빠져나간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우는 게 꼴 보기 싫고 우는 소리를 듣기도 싫어서 입술이 마르고 손에 땀이 차올랐다.
뭐라도 해 주고픈 마음이었지만, 아무리 고민해 봐도 울음을 그치게 할 만한 좋은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멍청하게 입술만 물어뜯던 나는 그냥 그 애를 마주 안았다.
내 앞에서 이렇게 울음을 터뜨릴 때마다 그 애는 어린아이처럼 무방비하고 나약해 보였다. 안 그래도 가느다란 몸이 부들부들 흔들리는 게 금방이라도 부서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정말로 아이를 안은 듯 조심스레 그의 잔등을 쓸어내렸다. 손길이 더 따뜻하고 부드럽게 느껴질 방법을 심각하게 고민했다. 몇 시간 전에는 싫다는 그 애의 입에 억지로 페니스를 쑤셔 넣었던 주제에, 웃기지도 않은 변덕이었다.
‘울지 마. 제발, 울지 말라고….’
마음속으로 필사적으로 중얼거리는 동안, 그 애는 잠자코 나에게 안겨 있었다. 마른 몸이 평소보다 더 작고 가냘프게 느껴졌다. 이 아이는 왜 이렇게 작은 걸까, 왜 이렇게 작은 아이가, 왜 이렇게까지 상처받은 걸까.
상처받은 건 그 애인데, 그 애의 상처가 내 상처인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내 마음이 아팠다. 마음이 아니라 몸이 아픈 것 같기도 했다. 울음소리가 나를 쿡쿡 찔러서 명치가 뻐근한 것 같고 살이 아리는 것 같고 폐가 쥐어뜯기는 것 같았다.
우리는 서로가 서로의 어린아이인 것처럼 아무 말도 없이 마주 댄 몸을 부둥켜안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그 대기실은 태어나기 이전의 공간처럼 어둡고 축축했다.
나의 품 안에서 그 애가 울고 있는 것이, 그리고 그 울음이 조금씩 잦아 들어가는 것이 낯설고 벅찼다. 고요한 불안과 안도감에 마음이 떨렸다.
그 애의 울음이 가라앉는 데 한참이 걸렸다. 흐느낌이 잦아든 뒤로도 그 애의 등은 여전히 가늘게 떨렸다. 젖은 몸으로 이런 곳에 있기에는 너무 추운 날씨였다.
“다 울었어?”
“응….”
“그럼 나가자. 어디 따뜻한 데로, 아니, 일단 갈아입을 옷부터….”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내밀었지만 그 애는 머뭇머뭇 고개를 저었다. 울어 버린 게 부끄러운지 눈도 마주치지 못한 채로, 또 습관처럼 나를 밀어내는 말을 했다.
“아냐. 너 먼저가. 이 옷만 좀 빌릴게. 이거면 괜찮아.”
울음과 추위에 갈라지고 떨리는 목소리였다. 하나도 괜찮아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괜찮다고 우겨 대는 걸 보니 짜증이 치솟았다.
“추워서 말도 제대로 안 나오면서 뭐라는 거야? 지금도 봐, 너 계속 덜덜 떨고 있다고.”
“같이 나가면 안 돼. 애들이 보잖아.”
“씨발, 남이야 보든 말든. 그딴 게 무슨 상관이야?”
“과 애들이 오늘 내가 너 사는 건물에서 나오는 걸 봤어. 이상하게 생각하는 눈치였어.”
“뭐…?”
“네 집에서 나온 거 아니라고 우겨 봤는데, 믿는 것 같지는 않아서….”
“하, 그 벌레 같은 새끼들은 진짜, 안 기어 다니는 데가 없네….”
그런 이유라면 그 애가 답답하게 구는 것도 이해는 되었다. 하이에나 같은 학교의 알파들은 머리는 멍청해도 눈치는 쓸데없이 빨랐다. 그 애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들키기라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미안해. 갑자기 거기서 튀어나올 줄은 몰랐어.”
“미안하긴 네가 왜 또 미안해?”
주눅 든 모습에 왈칵 언성이 높아져 버렸다. 그 애의 얼굴은 더 얼어붙었다. 안 그래도 추위에 파랗게 질린 게 위태로워 보이는데, 그 애는 초조한 내 맘도 모르고 자꾸 손사래를 쳤다.
“그냥 너 먼저 가. 난 나중에 나갈게.”
“야. 밖은 더 추워. 감기 걸리고 싶어서 환장했어?”
“집이 먼 것도 아닌데….”
“멀긴 뭐가 안 멀어. 택시 탈 것도 아니잖아. 이렇게 다 젖어 가지고 뭐, 셔틀 타고 지하철이라도 타고 갈 거야?”
“…….”
“대책이 없으면 그냥 입을 다물고 있어.”
지겨운 잔소리꾼이긴 하지만, 생각나는 사람이 재훈뿐이었다. 메시지를 보내려다 급한 마음에 바로 전화를 걸었다.
웬일로 전화를 했냐며 너스레를 떠는 재훈에게 당장 갈아입을 옷을 들고 학교로 데리러 오라고 닦달을 했다. 불안한 눈빛으로 나를 지켜보던 그 애는 통화가 끝나자마자 물었다.
“…다른 사람 부른 거야? 누구?”
“아는 형, 음…. 아저씨인가. 아무튼, 금방 올 거야. 근처 병원에 있거든.”
“병원? 그 사람도 알파…야?”
윤오는 일족의 누군가가 온다는 사실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 애가 대학에 들어온 뒤 겪었던 일을 생각하면 그럴 만도 했다. 재훈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 나는 잠시 단어를 골랐다.
“이름은 송재훈이고, 의사야. 본가의 주치의. 나한텐 가족보다 가까우니까… 믿어도 되는 사람이야.”
그 애는 불안한 기색을 누그러뜨리고 작게 몸을 웅크렸다. 자세히 보니 몰골이 형편없었다. 머리도 젖어 있고 얼굴도 부었고 술 냄새가 진동했다.
엉망이 된 꼴을 보고 있자니 불쾌감이 치솟았다. 사실은 이 감정이 분노나 짜증이 아니라 걱정되는 마음이라는 건 이제 어렴풋이 아는데도, 성질머리가 삐뚤어진 나는 퉁명스러운 말밖에 하지 못했다.
“술독에 빠졌냐? 얼마나 마신 거야, 대낮부터.”
그 애는 억울하다는 듯 입술부터 내밀며 우물거렸다.
“…마셔서 이렇게 된 거 아니야.”
“하긴. 정수리로 술을 먹을 리도 없고.”
“…….”
“그럼 왜 이렇게 홀딱 젖은 건데? 이 술 냄새는 뭐고.”
말하고 싶지 않다는 태도였지만, 나는 계속 그 애를 노려보았다. 결국 그 애는 시선을 이기지 못하고 대답했다.
“술을… 끼얹었어. 머리부터.”
“뭐? 어떤 미친 새끼가 그딴 짓을 해?”
“…….”
“안 들려? 대답하라고. 누가 그랬냐고 묻잖아!”
“…누가 그랬는지가 뭐가 중요해?”
“씨발, 중요한지 안 중요한지는 내가 따질 테니까 얘기하라고. 김하민이야?”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을 뿐, 아니라고 말을 못 하는 걸 보니 내 짐작이 맞는 모양이었다.
“맞나 보네. 맞으면 맞다고 하면 되지 왜 말을 못 해? 등신이야?”
“…….”
“씨발, 그 새끼들 지금 어디 갔어?”
“괜찮아. 나는 이제 괜찮으니까….”
“괜찮긴 뭐가 괜찮아? 이런 꼴을 해서는….”
“소, 소리 좀 지르지 마. 머리 울려….”
그 애는 계속 몸을 떨고 있었다. 저를 괴롭히던 과 애들만큼이나 나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쓰러운 마음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해는 완전히 저물었고, 그늘진 대기실에는 온기 한 점이 없었다. 급한 마음에 얇은 웃옷을 벗어 그 애에게 덮어 주긴 했지만 그 정도로 가려질 추위가 아니었다.
기다림이 초조한 나머지 신경질이 났다. 코앞에 있는 병원에서 여기까지 오는 데 이렇게나 꾸물거리는 재훈이 못마땅했다.
못마땅한 건 나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왜 하필 이런 옷을 입고 나왔는지, 저지 집업 아래 입은 거라곤 겨우 티셔츠 한 겹이었다. 이걸 벗어 준다고 하면 질색하겠지. 두꺼운 외투를 입고 올걸. 아니면 다른 옷이라도 더 걸치고 올걸. 후회에 한숨이 나왔다.
‘이것도 불편해하려나….’
달리 방법이 없어서, 나는 조심스레 그 애의 옆에 바짝 붙어 앉았다. 거부할 줄 알았던 그 애는 뜻밖에도 잠자코 온기를 나누어 받았다. 어깨부터 팔꿈치까지가 지그시 밀착되었다. 그게 견딜 수 없이 간지러워서 차라리 아까처럼 끌어안고 싶다고 생각했다.
알 수 없는 조바심에 입술이 말라 갈 무렵 재훈이 도착했다. 마음 같아선 번쩍 안아서 잔디밭을 가로지르고 싶었지만, 그 애가 한사코 거부하는 바람에 내가 먼저 차에 올라탔다. 재훈은 나를 보자마자 잔소리를 퍼부었다.
“이제 대놓고 기사 취급이에요? 아니, 이 날씨에 왜 반팔을 입고 다니는 겁니까?”
“가만히 있어 봐요. 한 명 더 탈 거니까.”
나는 조수석 창문에 코를 박고 노천강당 쪽을 바라보았다. 그 짧은 거리를 오는 동안 그 애는 몇 번이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게 더 눈에 띈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었다.
“시, 실례합니다. 죄송해요.”
그 애는 죄지은 사람처럼 우물쭈물하며 뒷좌석에 올라탔다. 재훈은 물에 빠진 생쥐 같은 그 애의 모습에 놀란 표정이었다.
“괜찮으세요? 왜 그렇게 흠뻑 젖어서….”
“됐으니까 옷이나 빨리 내놔요.”
나의 재촉에, 재훈은 난감한 표정으로 쇼핑백에서 옷가지를 꺼냈다.
“친구분이 입을 거라고 말해 줬으면 차라리 제 옷을 가져왔을 텐데…. 이한 군 입을 건 줄 알고 본가에 있던 이한 군 옷을 가져왔어요. 많이 클 것 같은데.”
“으…. 알았어요. 그거라도 줘요. 뭘 변태같이 계속 쳐다보고 있어요? 이쪽 봐요, 이쪽. 애 옷 갈아입어야 되잖아요.”
재훈은 옷을 건네면서도 심각한 표정으로 그 애를 훑어보고 있었다. 왈칵 심술이 솟은 나는 재훈의 턱을 잡아 앞쪽을 보게 했다. 아무리 재훈이라도 그 애에게 시선을 묻히는 건 싫었다.
“저…. 제 옷이 젖어서, 차 시트가 더러워진 것 같은데….”
옷을 다 갈아입은 그 애는 축축해진 자리에 쩔쩔맸다. 재훈이 가져온 옷은 그 애는 두 사이즈쯤 컸다. 내 옷을 입고 있는 그 애를 보고 있으니 기분이 이상했다.
어른 옷을 뒤집어쓴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가엾기도 하고, 그 와중에도 티셔츠의 목선이 깊게 내려오고 머리칼은 젖은 게 곱고 야살스러웠다. 발긋해진 볼 때문인지 얼굴이 평소보다 나른해 보였다.
“괜찮습니다. 그보다 열 있는 거 아니에요? 얼굴이 빨간데.”
은근한 눈길로 그 애를 보던 나는 재훈의 말에 흠칫 놀랐다. 듣고 보니 그 애의 어깨가 계속 떨리고 있었다. 몸이 다 젖은 채로 냉골에 있었으니 탈이 날 만도 했다.
“아뇨, 저 괜찮아요. 오늘 감사했습니다. 옷은 바로 세탁해서 돌려드릴게요.”
누가 봐도 아픈 것 같은 목소리와 얼굴로 그 애는 또 궁상을 떨었다. 주섬주섬 젖은 제 옷을 챙기더니 차에서 내리려고 했다. 황당해서 붙잡은 손목이 뜨끈뜨끈했다.
“야, 미쳤어? 어딜 가려고?”
“…아르바이트 갈 시간이잖아.”
“뭐? 그런 거 신경 쓸 때야? 몸 걱정이나 해.”
“괜찮은데, 아….”
억지로 팔을 끌어당겨 이마에 손을 짚어 보았다. 데일 것같이 뜨거웠다.
“불덩이잖아. 넌 어떻게 된 애가 자기 몸 상태도 몰라?”
안 그래도 보기 안쓰러운데 아프기까지 한 걸 보니 화를 참을 수 없었다. 스스로가 한심하다는 생각 때문에 목소리가 더 사나워졌다.
내내 딱 붙어 있었는데도 놓고 왜 애가 열이 나는 줄도 모르고 있었는지. 애송이도 아니고 몸이 닿았다는 데 정신이 팔렸던 것 같다. 차에 타서도 볼이 붉은 게 예쁘다고만 생각했지, 상태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채지 못했다.
“추워서 잠깐 그런 건데, 괜찮은데….”
“괜찮기는, 너 요즘 안 그래도 되게 상태 안 좋을 텐데….”
발현되기 시작할 무렵의 알파와 오메가의 신체는 극도로 불안정했다. 별거 아닌 피로나 가벼운 감기에도 크게 앓곤 했다. 보통은 그때를 넘기면 그만이지만, 드물게 위험해지는 경우도 있었다.
조바심에 쏘아붙이다가, 재훈이 있다는 걸 생각하고 말을 멈추었다. 재훈도 그 애가 오메가라는 걸 눈치챘을지가 신경 쓰였다.
“아무튼, 알바 같은 소리 하지 말고 지금 당장 집으로 가.”
“괜찮다니까. 열은 그냥 해열제 먹으면….”
“귀가 먹은 거야, 머리가 돈 거야? 모르면 그냥 시키는 대로 해, 제발. 너 이제 약도 아무거나 먹으면 큰일 나.”
“오늘 과외도 빠졌는데, PC방까지 펑크내면, 흠, 으, 콜록….”
쉰 목소리로 빽빽 고집을 피우더니 기어이 기침을 시작했다. 캑캑거리는 모습에 화가 치솟았다.
“미련한 것도 정도가 있지, 목소리도 제대로 안 나오면서 알바는 무슨 알바야? 정 그러면 내가 오늘 대신 일할 사람 찾아줄게. 그럼 됐지?”
“대신이라니, 누굴….”
“아,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형, 빨리 출발해요. 얘네 집이 어디냐면…. 아냐. 얘네 집 너무 멀어. 내 방으로 가 주세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그 애는 열이 펄펄 나는 채로도 손사래를 쳤다.
“뭐…? 왜 네 방에… 큿, 콜록….”
“너희 동네에 계단 존나 많잖아. 이 상태로 거기 올라갈 수 있겠어? 골목 좁아서 집 앞까지는 차도 못 올라가는데 어쩌려고?”
“…….”
“일단 가까운 데로 가. 거기서 좀 나으면 집으로 가고. 여기 상태 봐 줄 사람도 있으니까 그게 나아. 이 사람, 이렇게 보여도 의사야.”
이렇게 보여도? 재훈은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리며 나를 흘겨보았다.
“가자니까요. 내 방으로.”
어깨를 으쓱, 해 보이자 재훈은 못마땅한 얼굴로 차를 출발시켰다. 그 애는 기운이 없는지 체념한 건지 멍한 얼굴로 뒷좌석 시트에 푹 파묻혀 있었다. 나는 그 애에게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쟤, 야간에 PC방 아르바이트하거든요. 오늘 거기 대신 보낼 사람도 알아봐 줘요.”
“아…. 혹시 지난주부터 11시부터 2시까지 손님 안 들어가게 손봐 달라고 했던 그 PC방인가요?”
“아, 좀. 쟤 듣겠어요. 조용히 해요, 제발.”
“이렇게 다방면으로 부려 먹을 거면 말이라도 듣기 좋게 해 주는 게 어때요?”
“네. 존경하는 송 선생님은 이 시대의 명의십니다. 제 은인이시고요. 이 정도면 됐습니까?”
재훈의 불평을 비아냥으로 뭉개 버리며, 백미러로 뒷좌석을 보았다. 속닥거리는 말이 들리지도 않는지, 그 애는 흐린 눈을 느리게 눈을 깜빡이고 있었다. 악착같이 나가겠다고 우기더니 그새 의식이 늘어지는 모양이었다.
“쟤, 많이 아픈 것 같죠? 집에 약이 있었나…. 병원으로 가는 게 나을까요?”
“글쎄요. 상비약은 있을 텐데. 근데 비도 안 왔는데 어쩌다 저렇게 젖은 거예요?”
“애들이 술을 뿌렸나 봐요.”
“네? 어떻게 그런….”
“낮술을 하려면 곱게 할 것이지, 그 좆같은 개새끼들이….”
“말 좀 곱게 하시지.”
“말이 곱게 나가겠어요, 지금?”
“그건… 그렇죠.”
“마음 같아서는…. 하, 씨발.”
“…오메가에게 일어나는 일들은 예나 지금이나 비슷하군요. 대체 왜들 그러는지.”
재훈이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말에 마음이 뜨끔해졌다. 감추고 말고 할 것도 없이, 재훈은 그 애의 정체를 바로 알아본 모양이었다.
멀지도 않은 자취방으로 이동하는 동안 그 애의 상태는 점점 나빠졌다. 주차장에 차를 세웠을 때는 열이 펄펄 끓는 채로 축 늘어져 있었다. 몸을 가눌 힘도 없는지 평소처럼 새침을 떨거나 발버둥 치지도 않고 얌전히 안겨서 방까지 올라왔다.
급한 대로 집에 있던 약 중에 오메가가 먹어도 괜찮은 것들을 골라 먹였다. 알약을 겨우 삼킨 그 애는 그대로 잠들어 버렸다. 해열제 덕인지 열은 가라앉았지만 얼굴빛이 파리했다. 숨소리도 가냘프고 위태롭게 들렸다.
크게 탈이라도 난 걸까 봐 불안해진 나는 아르바이트 대타를 구하느라 이리저리 전화를 거는 재훈을 채근했다.
“얘, 왜 이러는 거예요? 자세히 살펴봐요, 좀.”
“특별한 이상은 없는 것 같아요. 일단 쉬어야죠.”
“이상이 없기는 뭐가 없어요? 안색이 이 모양인데. 그 새끼들이 뭐 이상한 약이라도 먹인 거 아니에요? 병원 데려가야 하는 게 낫지 않겠어요?”
“발현한 지 얼마 안 된 거 아닙니까? 아직 첫 번째 사이클 오기 전이죠?”
“…….”
“그 시기에는 흔한 증상이에요. 더구나 이 날씨에 젖은 채로 갇혀 있었으니….”
“씨발…. 누군 발현 안 해 본 줄 알아요? 난 이렇게까지 아픈 적은 없었다고요.”
“이한 군이랑 이 친구를 비교하면 안 되죠. 골격 자체가 다른데.”
“아, 그건 알겠으니까 뭐라도 해 봐요. 의사잖아요.”
“뭐, 이렇게 보여도 의사긴 하죠.”
“속 좁게 말꼬리 잡지 말고요.”
“의사로서 얘기하면, 지금은 지켜보는 게 최선입니다. 약 먹고 안정 취한 지도 얼마 안 되었잖아요.”
“…….”
“뭘 그렇게 노려보고 있어요? 여기서 떠드는 게 더 안 좋으니까, 할 말 있으면 나가서 얘기하죠.”
그는 미적거리는 나를 끌고 침실 밖으로 나왔다. 잠깐의 어색한 침묵이 지나고, 나는 마음에 걸려있던 질문을 던졌다.
“…어떻게 알았어요?”
“뭘요?”
“저 애가 오메가라는 거요. 혹시 만나기 전부터 알았어요?”
“짐작은 했죠.”
“뒷조사를 어디까지 했길래….”
“각인에 대해 궁금해하던 거, 저 학생 때문 아니었습니까?”
마음을 읽힌 기분에, 손 쓸 틈도 없이 얼굴이 붉어져 버렸다.
“그런 거 아니거든요?”
“아니에요?”
“…알 거 없어요. 그런데 쟤… 그냥 딱 보기에도 오메가 같던가요?”
“그렇게 생각하고 봐서 그런지 몰라도 그랬던 거 같은데요. 왜요?”
“학교 애들은 아직 쟤가 오메가라는 걸 몰라요. 앞으로도 몰랐으면 좋겠는데….”
“…어떻게 그럴 수가 있죠? 아무리 감춰도 조금은 티가 났을 텐데.”
“쟤가 시계를 차고 있었거든요. 서이준이 준 건데, 거기 되게 이상한 냄새를 묻혀 놔서 애들은 그게 쟤 냄새인 줄 알았던 것 같아요.”
“시계?”
“네. 서 회장이 그 사람한테 줬던 거랑 똑같은 모양이에요. 모양만 같은 건지, 정말 그 시계인지는 모르지만.”
재훈의 표정이 굳었다. ‘그 사람’에 대한 이야기만 나오면, 그는 이렇게 정색을 하곤 한다.
“…그 시계, 지금 어디 있습니까?”
“저 멍청이가 고장 나서 수리 맡겼다고 하던데요. 그래서 요새 저까지 정신이 하나도 없어요. 쟤, 아직 페로몬 갈무리도 제대로 못 하거든요. 그런 주제에 함부로 나다니면서 남 곤란하게 만드는 짓만 골라서 하고….”
투덜거리다가 그만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할 뻔했다. 그러나 재훈은 내 시시콜콜한 대답은 제대로 듣지도 않는 눈치였다.
“정말, 정말로 같은 시계예요?”
“가까이서 본 건 딱 한 번이었지만 내 눈에는 비슷해 보였어요.”
“…예감이 좋지 않은데. 현수 씨 때랑 너무 비슷한 것 같아요.”
현수. 그건 나를 낳은 오메가의 이름이었다. 나도 그 애를 보며 몇 번 생각한 적은 있었다. 보는 사람을 화나게 만드는 처량한 모양새가, 나를 낳은 오메가와 비슷하다고. 그러나 닳고 닳은 남자와 그 애를 나란히 놓는 건 아무래도 불쾌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저 학생, 혹시 이준 군이 현수 씨처럼 일부러….”
“씨발, 순진한 애한테 할 소리가 있고 안 할 소리가 있지. 쟤, 아무것도 몰라요. 심지어 일족 출신도 아니고.”
“일족 출신이 아니라고요?”
“그래요, 쟨 자기가 오메가인 줄도 몰랐어요. 쟤 입장에선 그냥 난데없이 봉변당하고 있는 거라고요. 그런 사람이랑 비교하지 마세요.”
“그런 사람이라니, 무슨….”
“솔직히 그렇잖아요. 나도 들은 얘기가 있는데, 그 사람이 어떻게 굴러먹고 하고 다녔는지 모르는 것도 아니고.”
내가 씹어뱉은 말에 재훈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나였다면 이미 눈앞의 사람에게 주먹을 날리고도 남았을 정도로 깊게 분노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는 나를 때리는 대신 주먹을 굳게 쥐었다. 천천히 심호흡하고는, 다시 입을 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이한 군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됩니다.”
공기가 팽팽해질 정도의 기세였다. 한발 물러설 법도 한데, 남는 건 치기와 욱하는 성질뿐인 나는 고집스레 되받아쳤다.
“아뇨. 나야말로 그런 얘기할 자격이 있는 거 아닙니까? 난 그냥 재미 삼아 험담하는 거도 아니거든요. 나한테는 이런 얘기 하나도 재미없거든요.”
“…….”
“그 사람이 그러고 나다니는 동안 낯선 집에 내팽개쳐진 건 나라고요. 뭐, 뒤늦게 원망하려는 건 아니에요. 그럴 만한 기대가 있는 사이도 아니고. 그냥, 그 애는 그 사람이랑 다르다고….”
“현수 씨도 일족 출신이 아니었습니다. 자기가 오메가인 줄도 모르고 살다가, 서 회장을 만나고 발현이 시작되었다고 들었거든요.”
그 사람의 출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건 처음이라, 나는 멈칫거렸다.
“일족 출신이 아닌 오메가가… 그렇게 많을 리가….”
“오메가가 낳는 사생아들이 다 어디로 갈 거라고 생각합니까? 한 해에도 셀 수 없는 아이들이 버려지고, 그런 애들은 대부분 일족 바깥의 기관에서 자라게 되죠. 그 아이들이 오메가로 발현되기도 하고, 그 애들이 낳은 자식이 다시 발현되는 경우까지 있으니까 이한 군이 예상하는 것보다 그런 사람들은 더 많을 겁니다.”
“…….”
“드물게 알파로 발현된 아이들에게는 재단 쪽에서 직접 접촉하기도 하지만 오메가의 경우는… 그냥 내버려 둡니다. 내버려 두면, 어떻게든 쓸모가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이해가 되는 말이었다. 일족의 모두가 그 사람의 과거를 알지 못했던 것도, 아무리 오메가라지만 누구 하나 그를 감싸주려 하지 않은 것도, 어느 가문의 소속도 아니라면 그럴 수 있는 이야기다.
“서 회장은 현수 씨가 발현되리라는 걸 알고 그 사람에게 접근했습니다. 회사를 위해 그가 필요했으니까요. 가난하고, 의지할 곳 없는 오메가가.”
“…….”
“이한 군의 말대로 서경제약의 수입은 대부분 최음제에서 나옵니다. 그중에서도 일족 내부에서의 매출은 경쟁사보다 월등히 많고요. 후발주자인 서경제약이 어떻게 그 자리까지 올라갔는지 아세요? 서 회장은 VIP 고객에게 제품을 보낼 때 약만 보내지 않습니다. 그걸 사용할 수 있는 상대방까지 함께 보내죠.”
“…….”
“…그게 현수 씨의 역할이었습니다.”
서 회장이 제 애첩을 그런 식으로 사용했다는 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타인의 입을 통해 부모에 대한 그런 이야기를 듣는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보다 그를 입에 올리는 재훈의 표정이 훨씬 괴로워 보여서,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알파들이 오메가를 길들이는 데 쓰는 수법이 그렇죠. 처음에는 사랑한다는 말로, 도와 달라는 말로 꼬드기다가 나중에는 아무것도 선택할 수 없는 상황으로 몰아붙이고, 강요하고…. 그래서 이한 군이 태어났을 때, 그 사람은 안심했습니다. 이제 다시는 그런 일을 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
“그거 알아요? 서 회장이 이한 군을 자기 호적에 넣어 준 건 현수 씨를 배려해서가 아니었어요. 그냥 현수 씨한테 쓸모가 남았다고 생각했던 겁니다. 그 사람이 그 일을 하지 않게 된 후로 경쟁사에서 더 강력하고 중독적인 신약을 개발 중이라는 소식이 들려왔고, 고객을 뺏길 상황이 되자 서 회장은 현수 씨를 다시 불러들였거든요.”
“…….”
“자기 아이까지 낳은 사람에게, 다시 그런 짓을…. 아니, 오히려 일을 시키기는 더 쉬워졌겠죠. 협박할 수단이 하나 더 생긴 거니까.”
떨리는 목소리로 끔찍한 이야기를 늘어놓은 재훈은, 뒤이어 더 믿기 힘든 말을 이어 갔다.
“말을 듣지 않으면 널 건드리겠다는 말에 현수 씨는 쉽게 겁을 먹었고, 점점 더 심한 일을 당하게 됐습니다. 나도 그 사람이 죽은 후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마지막의 몇 년 동안, 현수 씨는 서 회장의 영업수단이고… 마루타였어요.”
“…….”
“비공개 시험 데이터에 의하면, 안전성이 확보되지 않은 약물들이 테스트 삼아 한 명의 오메가에게 투여되었더군요. 그게 아마… 현수 씨였겠죠.”
믿기 힘든 이야기였지만, 서 회장은 충분히 그런 일을 벌일 만한 사람이었다. 그 사람의 사인을 전해 들었을 때 짧게나마 그런 생각이 내 머리를 스치기도 했다.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며 모르는 척 외면해 왔을 뿐이다.
재훈은 숨을 가다듬으며 흥분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할 말을 가다듬는 표정이 힘겨워 보였다.
“…이한 군이 힘들지 않았다는 게 아닙니다. 현수 씨가 어리석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고. 지금이라도 그만두자고, 모든 걸 돌이킬 수 있다고 내가 아무리 말해도 그 사람은 끝까지 들어주지 않았습니다.”
“…….”
“각인에 관해 물었죠? 맞아요. 억지로라도 목을 물어 버리고 싶었던 게 여러 번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현수 씨는… 서 회장의 말을 듣는 게 이한 군을 지키는 유일한 길이라고 생각했어요.”
“…….”
“내가 아무리 이해하고 감싸 주겠다고 해도, 다 버릴 수 있다고 이야기해도, 그 사람은… 어쩌면 그냥, 내가 미덥지 못했던 걸지도 모르죠. 그래서 결국, 그렇게….”
그는 마흔이 채 되지 않아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일족 내부에는 자살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사인은 약물중독이었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열여덟 살 초여름의 저녁 식탁에서였다. 서 회장은 대수롭지 않다는 말투로 그 이야기를 했다. 형언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녹지 않은 마음속의 응어리가 강제로 부서져 버린 것 같은. 좋은 기분은 절대로 아니었고, 입안이 따끔거릴 정도의 분노가 느껴졌지만 슬프다기에는 미묘했다.
식탁에 앉은 모두가 내 쪽을 바라보았다. 걱정해서가 아니라, 내가 받은 충격을 구경하고 싶어서였을 거다. 그래서, 오직 나만이 그 순간 재훈의 표정을 보았다. 그의 얼굴이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려 버린 것을 보고, 나는 서 회장의 말이 사실이라는 알았다.
‘번거롭게 됐어.’
서 회장은 그가 폐기물이라도 되는 듯한 투로 말했다.
‘처리하실 일이 많겠군요.’
잠깐 사이 얼굴을 가다듬은 재훈은 떨림 한 점 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오만하고 멍청한 본가의 사람들은 재훈의 태도에서 적의를 읽지 못했지만, 나는 그날 늘 알고 싶던 의문 하나를 확신하게 되었다.
그가 나에게 잘해 주었던 이유가, 내가 사랑하는 사람의 아이였기 때문이라는 것을.
재훈은, 처음 만난 순간부터 다른 알파의 아이를 품고 있던 사람을, 그리고 언제나 끔찍할 정도로 다른 사람의 소유였던 사람을 한결같이 사랑해 왔던 것이다. 심지어는 그가 죽어 없어진 지금까지도.
그 사실이 나에게는 조금도 거북스럽지 않았다. 나에 대한 헌신에 납득할 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에 오히려 안도감이 느껴질 정도였다. 나는 서 회장도, 나를 낳은 그 사람의 마음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에 대한 재훈의 감정이 진실하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한 군은, 이한 군이 그렇게 말하는 건….”
“알았어요.”
“…….”
“미안해요. 형 앞에서 그런 말 하는 게 아니었어.”
나를 잘 아는 그는, 그 사과가 진심이라는 걸 알았을 것이다. 일단은 입을 다물었지만, 재훈은 그답지 않게 길게 동요했다. 그는 몇 번이나 몸을 떨며 한숨을 쉬다가, 감정을 다 추스르지 못한 목소리로 한 가지 사실을 더 고백했다.
“내가 그림자만 봐도 치가 떨리는 그 사람 밑에 있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합니까…?”
“…….”
“처음에 서 회장의 비서가 되었을 땐 앙갚음을 해 주는 건 시간 문제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리로 굴러가는 거나 다름없는 회사니까, 증거를 모아 폭로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그럼 지금이라도….”
“생각처럼 쉬운 일은 아닙니다. 자금 흐름도 부리는 사람들도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 결정적인 증거는 다 숨겨져 있어요. 꼭, 연결고리가 끊어진 것처럼…. 수집할 수 있는 건 다 수집해 놓고는 있는데, 하…. 누구 하나 서 회장에게서 등을 돌려주는 사람이라도 있다면 좋을 텐데 그럴 리도 없고.”
“아….”
“제일 먼저 확보해 놓은 건 현수 씨한테 약물을 처방했던 내역과 실험 데이터들인데…. 아시잖아요. 수사기관에서 보기에, 일족이 쓰는 약물은 유해해 보이지도 않는다는 거.”
페로몬이 없는 외부인들은 일족이 쓰는 약물이 알파나 오메가에게 어떤 영향을 주는지 분석할 수 없었다. 오메가에 대한 범죄가 대부분 흐지부지되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답답하고… 제가 너무 무력한 것 같아서….”
한숨으로 긴 이야기를 마친 재훈은 나에게로 손을 뻗었다. 그는 내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말없이 눈을 맞춰 왔다. 나를 낳은 그 사람과 꼭 닮은 눈매를.
이렇게 애틋한 눈으로 날 볼 때마다, 나는 그가 아버지 같다고 느꼈다. 누가 봐도 서씨 일가의 핏줄을 타고난 외모만 봐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철없던 시절에는 그가 나의 아버지였다면 좋겠다고 상상하기도 했었다.
한참 동안 나를 손으로, 눈으로 어루만지던 그는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슬픔을 가슴 깊게 내리누른 건지, 곧 평소의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왔다.
“…죄송합니다. 지금 한 말은 잊어 주세요. 제가 회장님 자제분께 못 하는 소리가 없네요, 그쵸?”
감상에 젖으려던 나는 홀딱 깨는 기분에 진저리를 쳤다.
“자제분은 무슨…. 다시는 그딴 소리 하지 마세요.”
“왜요, 맞는 말인데.”
“그만하라니까요. 아무튼…. 난 그 집에 불을 지르든 회사 주식을 휴짓조각으로 만들든 다 찬성이니까, 도와줄 일 있으면 말하기나 해요.”
해묵은 상처를 가슴에 한가득 품고 있을 재훈은 오히려 나를 안쓰러워하는 표정을 지었다.
“…미안합니다. 이한 군을 끼어들이고 싶은 것도 아니고, 이런 얘기는 뭐라도 확실하게 해볼 만할 때 알려 주려고 했는데 괜한 말을 했어요.”
“…….”
“그냥 답답해서요. 같은 일이 반복되는 것만은 막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질 않아서.”
“반복은 무슨…. 그런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세요. 누가 가만히 앉아서 당하기만 할 거 같아요?”
“그래요. 이한 군이 저보다는 훨씬 잘 해낼 겁니다.”
재훈은 어른스레 미소 지었지만 나는 내심 머쓱해졌다. 아무것도 할 수 없어 무력하다는 말은 내 쪽에 훨씬 어울리는 말일 텐데, 밑도 끝도 없는 허세였다.
그러는 사이 시간이 꽤 지나 있었다. 침실 문을 열어 보니 그 애는 여전히 잠든 채였다. 열은 가라앉았고 혈색도 나아진 상태였다.
“…괜찮은 건가요?”
“많이 나아졌네요. 그래도 오늘은 이대로 푹 자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윤오 학생 집에도 알려드리는 게 낫지 않을까요? 벌써 시간이 많이 늦은 것 같은데요.”
“아, 내가 연락해 볼게요.”
나는 벗어 둔 그 애의 옷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음침하게도, 나는 그 애의 핸드폰 잠금번호를 어깨너머로 훔쳐본 적이 있었다.
잠금을 해제하고 ‘어머니’로 저장된 번호로 그 애인 척 ‘친구 집에서 자고 가겠다’라고 메시지를 보내자, 지켜보던 재훈이 조용히 히죽거렸다. 도둑질을 들킨 기분에 찔려서 버럭거렸다.
“…어쩔 수 없거든요? 비상시니까.”
“누가 뭐랍니까?”
재훈에게 나가라고 소리를 지르려던 차에, 그 애의 어머니가 답장을 보내왔다.
그래, 재밌게 놀다 오렴. 별거 아닌 대답이 다정하게 느껴졌다. 나는 겪어 보지 못한, 부모님과의 평범한 대화였기 때문일까. 그 애를 업고 집까지 올라갔던 날 보았던 그 애의 어머니를 생각하다가, 문득 질문했다.
“그런데 전에 얘 아버지 얘긴 왜 물은 거예요?”
“아…. 윤오 학생에 대해 조사하다가, 이준 군이 회사의 임상시험 지원자들 인적 사항을 조회한 내역을 확인했습니다. 지원자 중에 윤오 군 아버지도 있더군요.”
“임상시험이요…?”
“실험 자체는 특이한 게 아니었습니다. 평범한 상비약 출시 전에 거쳐야 하는 절차였으니까요. 그런데 윤오 군 아버지에 대한 파일에 일족의 유전적 특성을 보인다는 기록이 있었습니다.”
나는 그 애를 업고 집까지 올라갔던 날을 다시 기억했다. 한눈에 다 들어오는 자그마한 집에 오로지 그 애와 어머니 단둘인 것처럼 보였다. 일족의 피를 물려준 아버지가 함께 살고 있지 않으니, 그 애가 자신이 오메가라는 몰랐던 것도 무리는 아닐 것 같았다.
“그럼 윤오는 아버지 쪽 혈통 때문에 발현된 건가요? 서이준 그 새끼는 윤오가 혼혈이라는 걸 알고 접근했다는 뜻이에요?”
“이준 군이 그 데이터를 열람한 흔적이 있긴 했습니다.”
“하…. 그거였네. 또라이 같은 새끼. 그 새끼는 그런 걸 왜 마음대로 봐요? 그것도 불법 아닙니까?”
“불법이죠. 그런데 그런 사소한 걸 문제 삼아 봐야 별 타격도 없을 겁니다. 그리고 엄밀히 말하면 제가 이준 군의 데이터 열람 내역을 확인한 것도 합법은 아니라서.”
“아…. 하긴.”
“윤오 학생은 이준 군이랑 많이 가까운 사이인가요?”
“…몰라요. 그건 또 왜요?”
나는 서툴게 시치미를 뗐다. 그냥 가까운 정도가 아니라, 그 애가 이준을 좋아하는 것 같다는 말은 도저히 하고 싶지 않았다.
‘이준이 널 좋아할 리 없다’는 내 말에 그 애가 얼마나 비참한 표정을 지었었는지, 그리고 그걸 본 내가 얼마나 분노했는지, 발끈해서 그 애를 억지로 덮치려고 들었던 내 모습이 얼마나 꼴사납고 비굴했는지도.
“윤오 학생 어머니, 저희 병원 환자인 것 같던데요.”
“네. 신장이 안 좋다고 들었어요.”
“그럼 신 선생님 담당 환자일까요? VIP 환자로 등록되어 있어서 정보 조회가 전혀 안 되어서요.”
“VIP요? 그럴 만한 집은….”
“오너 일가나 측근은 VIP로 분류되어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준 군이 그렇게 처리한 것 같아서, 둘이 어떤 사이인가 하고요.”
‘측근’, ‘사이’ 같은 말에 또 짜증이 치솟았다. 서이준을 생각하니 두통이 오는 것 같아서, 뒤통수의 머리칼을 아무렇게나 흐트러뜨렸다.
“…그 새끼가 대체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네요.”
“일단은 조심하는 편이 좋을 것 같긴 합니다.”
“조심하라고 매일 말해도 쟤가 안 들어먹으니까 문제죠. 고집은 더럽게 세 가지고. 서 회장이나 그 아들놈이나 똑같이 뱀 같은 새끼들인데….”
“누가 들으면 이한 군은 서 회장님 아드님이 아닌 줄 알겠는데요.”
“장난해요? 그딴 사람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 한 번도 없어요.”
“네, 그러시겠죠.”
재훈은 가볍게 대답하며 웃었지만, 미소가 어색했다. 짧게 한숨을 쉬던 그는, 말을 망설이듯 입술을 몇 번 달싹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현수 씨는요?”
“뭐가요?”
“서 회장은 아버지로 생각한 적 없다면, 현수 씨는 어떻습니까?”
서 회장을 가리킬 때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나는 그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호칭 없이 얼버무리거나 ‘그 사람’으로 부르곤 했다. 재훈이 그걸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나는 재훈 앞에서 그를 한 번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았다.
“…모르겠어요.”
짙고 무거운 침묵 끝에 나는 입을 열었다. 한두 달 전에 나에게 같은 걸 물었다면, 나는 여백 없이 바로 ‘아버지라고 생각한 적 없다’라고 대꾸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늘만은 그 질문이 무겁게 마음에 내려앉았다.
“솔직히 말하면….”
“…….”
“여태까진 서 회장에 대한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그런 사람이 애초에 내 인생에 없었던 것처럼 지우려고 노력했으니까.”
“…….”
“그런데. 요즘… 그 사람이 나오는 꿈을 몇 번 꿨거든요. 어렸을 때 꿈이요. 그래서인지, 이 녀석 때문인지 좀 싱숭생숭해서…. 그런 생각을 하긴 했어요. 적어도… 그 작은 집에 그 사람이랑 둘이 같이 살았던 시절에는 내가 나름대로 사랑받았던 거 같다고.”
한참 고민한 것 치곤 무심한 대답에, 재훈은 입술을 감쳐물었다. 붉게 달아오른 눈가에는 그의 죽음에 관해 이야기할 때도 참았던 눈물이 고여 있었다.
재훈의 얼굴 위로, 그 남자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 같았다. 나를 보내던 슬픈 얼굴과, 정원의 푸름 속에서 햇살처럼 웃던 아름다운 얼굴이. 울먹임을 삼킨 재훈도 이내 환하게 미소지었다.
“…맞아요. 그건 제가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차마 똑바로 볼 수 없어서, 나는 고개를 돌리며 투덜거렸다.
“…그걸 왜 형이 보장해요?”
“그때는 제가 옆에서 지켜봤으니까요. 기저귀 갈아 주고 목욕시켜 준 것도 여러 번인데.”
“아, 또 시작이네. 그놈의 기저귀 타령.”
“그 조그맣던 아기가 이렇게 커다래져서 시건방을 떨고 있다니, 감개가 무량하네요. 그러고 보니 진짜 이상한데요. 서 회장도 현수 씨도 아버지로 생각하지 않으면, 이한 군은 무슨, 알에서 태어나기라도 한 겁니까? 건국 설화 주인공도 아니고.”
어이없지만 예리한 지적에 웃음이 나왔다. 굳이 말하자면 당신을 아버지처럼 생각했노라고, 더 오글거리는 말은 접어 두었다.
재훈이 돌아가자 집은 다시 적막함으로 가득 찼다. 나는 침실로 돌아와 나의 침대에 잠든 그 애를 바라보았다. 약간 땀에 젖은 이마. 지친 눈꺼풀. 나약하고 사랑스럽게 이어지는 호흡.
저 작은 몸으로 말도 안 되는 수모를 버텼을 그 애를 생각하니 새삼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나는 조심스레 그 애의 얼굴을, 이불 밖으로 드러난 손과 발을 살펴보았다. 맞은 흔적인지 뺨에 붉은 기가 있는 걸 보고 작게 욕을 뱉었다.
‘혹시 다른 일도 있었던 거 아니야? 혹시 누가 건드리기라도 했으면….’
이불을 걷고 몸을 샅샅이 조사해 보고 싶은 마음이 불쑥 치솟았다. 오전에 억지로라도 각인해 버릴 걸 그랬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재훈의 말대로 평온하게 살 방법은 각인뿐인데, 이 멍청한 녀석은 왜 내 말을 거절한 걸까.
사실 오늘 일만이 문제는 아니다. 오메가로 살아가다 보면 언제든 그 애에게 비슷한 일이 벌어질 수 있을 거다. 일족의 사회에 대해 잘 모르고, 페로몬 관리도 안 되고, 억제제도 구하지 못하는 처지니까. 더구나 꿍꿍이를 모를 서이준까지 이 애에게 손을 뻗으려 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 한구석에, 문득 ‘내가 미덥지 못했던 거다’라던 재훈의 말이 떠올랐다. 이 애도 그런 걸 거다. 밉게 굴고 매번 화부터 냈으니 내가 못 미덥고 싫을 거다.
‘씨발…. 성질 좀 죽일걸.’
이 애를 처음 만났던 때로 시간을 돌리고 싶었지만, 다시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그 애의 호감을 얻어낼 자신까지는 없었다. 적어도 미움받는 신세라도 면하고 싶은데 방법을 모르겠다.
미움을 받는 건 늘 있던 일이지만, 남의 마음을 돌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애초에 노력한다고 해서 나를 좋아할 사람 따위 세상에 없는 것 같았으니까.
‘쟤는 어린 애가 왜 저렇게 눈빛이 음침하고 불경스럽지? 천박한 출생은 어쩔 수 없다니까.’
‘우리 이준이가 입었을 땐 의젓하고 품위 있어 보였는데, 같은 옷을 입어도 어쩜 이렇게 태가 안 나나 몰라.’
‘꺅! 뭐야? 아휴, 놀랐잖아. 얘는 무슨 기척도 없이 서 있어, 기분 나쁘게?’
‘너 내가 내 방 근처에 얼쩡거리지 말라고 했지? 아침부터 재수가 없으려니까…. 아, 짜증 나. 오늘도 일진 사납겠네.’
귀가 따갑도록 익숙했던 멸시의 말들이 떠오르면서, 다시 울컥 심술이 돋아올랐다. 그런 구박을 들던 끝에 나는 언제부턴가 그들의 비위를 맞추는 것을 포기했다. 천덕꾸러기에게는 천덕꾸러기의 방식이 있는 법이다.
착하게 굴고 남의 마음에 들어 보려 애써 봐야 돌아오는 말은 같으니 노력하는 건 손해였다. 그들이 수군거리는 말보다 일부러 더 모질고 사납게 굴었다. 원하는 것이 있으면 빼앗아버리거나, 빼앗을 수 없는 것이라면 포기하고 별것도 아니라고 비웃어 버렸다.
‘그래. 빼앗으면 그만이잖아. 지금이라도….’
나는 더운 눈으로 그 애를 응시했다. 간단히 빼앗을 수 있는 것, 그리고 결코 포기하기는 싫은 것이 눈앞에 있었다. 평소에도 그렇지만, 힘없이 잠든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더라도 그 애는 저항도 못 하고 당할 거다.
뱃속에 흉한 탐욕이 들끓었지만, 한편으로 탐욕을 포장하려 애썼다. 그렇게라도 내 것으로 만들어 버리는 편이 이 아이에게도 좋은 일일 거라고.
잠든 그 애의 손을 꽉, 움켜쥐었다. 부서질 듯한 손목이 손 안에 감겨 왔다. 죄책감과 욕망 사이에 갈팡질팡하며 애꿎은 입술만 씹고 있는데, 그 애가 갑자기 몸을 뒤척였다. 꿈을 꾸는지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가, 이내 오물오물 미소 지었다. 들릴 듯 말 듯 어눌한 잠꼬대를 했다.
“…이한.”
“…….”
“이한아…. 고마워….”
투명한 목소리에 정신이 화들짝 돌아왔다. 자는 애를 상대로 했던 생각이 문득 부끄러워졌다. 이래서야 그 애의 말처럼, 다른 더러운 알파들이랑 다를 게 없었다.
붙잡았던 그 애의 손을 놓으려다, 미련이 남아 다시 꼭 쥐었다. 보드랍고 따스한 손이 기분 좋았다. 나는 충동을 삼키며 조심스레 그 애의 옆에 누웠다. 매일 눕는 침대가 좁고도 넓게 느껴졌다. 기분이 조금씩 누그러들면서, 몸도 마음도 따뜻해졌다.
‘따뜻해서 그랬나 봐. 얘 옆에 있으면 늘 잠이 잘 왔던 게.’
싱숭생숭한 하루였지만 나는 태평스러울 정도로 깊게 잤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그 애가 여전히 품 안에 있었다. 살며시 풀어지기 시작한 단내와, 촉촉한 땀내음이 향긋했다. 기쁨에 가슴이 뻐근해진 나는 한참 그 애의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 애가 어제 내내 제대로 밥도 먹지 못했을 거라는 게 떠올랐다. 오전 나절에는 여기 붙잡혀 있었고, 여길 나가자마자 곧바로 과 애들에게 끌려가 억지로 술을 마시고 쓰러져 버렸으니 뭘 먹을 틈이 없었을 거다.
먹을 것을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 자리에서 부엌으로 뛰어들었다. 기운도 없고 속도 좋지 않을 테니 죽 같은 걸 먹여야 할 것 같았다.
‘죽… 사야 하나? 집에서 만들 수 있는 건가? 생전 죽 같은 걸 먹어 봤어야 알지….’
마음만 급해서 쌀을 뒤적거리다 또 햇반을 들고 허둥거렸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냄비를 죄다 꺼내 놓으며 부엌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무작정 햇반에 물을 부어 불 위에 올려놓고 뒤늦게 인터넷으로 레시피를 검색했다.
맨밥만으로는 영양이 부족할 것 같은데 집에는 마땅한 재료도 없었다. 야채니 계란이니 하는 건 당연히 없고, 찬장에는 정체불명의 참치통조림이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이건 언제 사 놨던 거지? 재훈이 형이 놓고 갔나? 유통기한은 괜찮은 건가?’
참치캔을 이리저리 돌려보는데 갑자기 매캐한 냄새가 느껴졌다. 죽을 태운 건지, 냄비 밑을 저어보니 햇반 알갱이가 까맣게 눌어붙어 있었다. 망연자실한 기분에 냄비 바닥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갑자기 그 애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지금 몇 시야?”
“으앗, 와, 와악!”
혼자서 법석을 떨고 있던 나는 도둑질이라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비명을 질렀다. 그 애는 내 소리에 화들짝 놀라 뒷걸음질 쳤다.
“아, 까, 깜짝이야….”
민망한 와중에도, 커다란 내 옷을 걸친 모습이 귀여워 보였다. 방금 일어났는지 머리엔 까치집이 앉았고 눈두덩이는 살짝 부어 있었다.
“이, 일어났어?”
“뭐 하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야.”
“탄 냄새 나는 거 같은데….”
“아,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진짜. 저기 가서 앉아 있어.”
잠이 덜 깬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그 애는 거실 창 너머가 환하게 밝아 있는 걸 발견했다.
“어…? 지금 아침이야? 나 어제 밤새 여기서 잔 거야?”
“그래. 깨울 수도 없이 깊게 잠들어서.”
“어떡해. 집에 얘기도 못 했는데…. 내 핸드폰 어디 있어? 지금이라도 엄마한테 연락드려야….”
나는 어쩔 줄을 몰라 하는 그 애에게 핸드폰을 건네주었다.
“여기. 부모님 문제는 신경 쓸 거 없어. 내가 어제 너인 척하고 연락해 놨으니까.”
“…내 핸드폰으로?”
“걱정 마. 다른 건 안 봤어.”
“잠겨 있었는데…. 어떻게 열었어?”
나는 그 애의 질문을 애써 무시했다. 어제 그 핸드폰을 열어보았을 때 이준과의 카톡도 뒤져볼 걸 그랬다고 오히려 더 음흉한 생각을 했다. 의심스럽다는 듯 나를 흘겨보던 그 애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더 허둥거렸다.
“자, 잠깐. 오늘 금요일이지? 오전 강의 있는데. 지금 안 나가면 늦는데….”
“야, 그냥 쉬어. 몸 상태가 그런데 어딜 가.”
“금요일 강의 지난번에도 한 번 빠졌단 말야.”
“세 번까진 빠져도 돼. 죽이라도 먹고 가.”
“죽?”
“그래. 배달. 버, 벌써 주문했어.”
“괜찮은데….”
“넌 그놈의 괜찮다는 소리 좀 하지 마.”
“괜찮으니까 괜찮다고 하지.”
“죽, 금방 올 거거든? 먹고 가야 돼.”
나는 뻔뻔스레 거짓말을 하며 그 애의 손목을 잡아 소파에 앉혔다. 평소 같으면 더 고집을 피울 텐데, 몸이 아파 마음도 약해졌는지 그 애는 고분고분 앉았다.
진작 배달시킬 걸 그랬다는 생각으로 어플을 뒤적거리다가, 왠지 흐뭇한 마음에 입꼬리가 달싹거렸다. 그 애가 여기 오래오래 있다 갔으면 좋을 것 같았다. 할 수만 있으면 주말 내내 여기 있다가 가면 좋겠다고 주책없는 생각을 했다.
괜스레 들뜬 나는 생전 쓰지도 않는 담요를 소파 위에 펼쳐놓으며 부산스럽게 굴었다.
“자, 여기 앉아 있어. 아니다, 누워, 편하게.”
“누, 눕기는 무슨. 이제 일어났는데….”
“힘도 없는 게 뭘 버티고 있어? 너 어제 열이 얼마나 났었는지 알아? 미련 그만 떨고 얌전히 누워 있어. 이럴 땐 좀 누워야 회복되는 거야.”
“…알았어. 그럼 옷이라도 내 걸로 갈아입을래. 내 옷 어딨어?”
“아….”
나는 난감한 눈으로 거실 구석에 놓인 그 애의 옷가지를 바라보았다. 세탁은커녕, 술에 쩔어 구깃구깃하게 뭉쳐진 채로 아침까지 팽개쳐 두었다.
“…저 옷 술 냄새날걸? 그냥 그거 입고 있어.”
그 애는 작게 한숨을 쉬고는 소파 위에 몸을 말고 둥글게 누웠다. 자리도 넓은데, 몸을 작게 웅크리는 것이 습관인 모양이었다. 큰 옷 탓인지 오늘따라 몸집이 더 자그마해 보였다. 내 집에서 내 옷을 입고 있는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다.
부엌으로 돌아간 나는 그 애가 볼까 얼른 타 버린 냄비를 정리했다. 눈에 뭐가 씐 것도 아닌데 왜 할 줄도 모르는 요리를 해 보려고 난리를 피웠던 건지 모르겠다.
주문한 죽이 도착해서 식탁에 나란히 앉으니 묘한 기분은 더 부풀었다. 사연이야 어찌 됐건 같은 집에서 밤을 보내고 아침을 먹는 상황이니까. 나는 결국 참지 못하고 말해 버렸다.
“너, 오늘 아무 데도 가지 마.”
“…넌 왜 나만 보면 계속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하는 거야?”
그 애는 새침하게 대꾸했다. 듣고 보니 맞는 말 같아 머쓱해진 나는 그릇에 내 몫의 죽을 덜어 그 애에게 내밀었다.
“내가 언제 그랬냐? 자, 이것도 먹어.”
“먹고 있는데…. 봐봐. 맨날 그러잖아. 아무것도 하지 말고 집에만 있으라고 하고, 밥만 많이 먹으라고 하고….”
“야. 네가 보는 사람 짜증 나게 깨작거리고 있으니까 그렇잖아. 지금도 봐. 이것도 먹으라니까.”
“내 것도 많아.”
“이게 뭐가 많아? 그냥 죽이잖아. 죽은 그냥 들이마시면 되는 거 아냐? 너 어제 점심 저녁도 안 먹은 거 메우려면 지금 두세 끼만큼은 먹어야 하거든? 빨리 먹어. 맨날 굶으니까 위가 쪼그라들어서 못 먹는 거잖아.”
그 애는 성화에 못 이겨 두 볼 가득 죽을 욱여넣고 열심히 삼켰다. 앓느라 배가 고팠는지, 죽이 입에 맞는지는 몰라도 평소보다는 잘 먹는 모습이 흡족했다. 그러나 기분이 좋은 것도 잠깐이었다. 다 먹은 그릇을 정리하기 무섭게 그 애는 제 옷가지를 챙겨 들었다.
“어디 가게?”
“집에.”
“왜 또.”
“내가 내 집 간다는데 왜…. 말도 없이 외박했는데 들어가 봐야지.”
“오늘 그냥 여기 있으라니까.”
“그러니까 왜? 나 아르바이트 가야 하는데.”
“하여튼, 맨날 그놈의 망할 아르바이트….”
어떻게든 그 애를 더 오래 머무르게 할 핑계가 있을지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뒷덜미가 뜨거워지면서 하반신이 훅 달아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읏….”
와다닥, 벽을 넘어 터져 나오려는 페로몬을 간신히 붙잡았다. 순식간에 배 속이 부글거리고 핏줄이 팔딱거리기 시작했다. 러트의 징조였다. 주기가 아직 며칠 남았다고 생각했던 나는 당황한 나머지 그대로 페로몬에 휩쓸렸다.
“…왜 그래?”
그 애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호흡은 더 뜨거워졌다. 얄팍해진 이성을 움켜쥐고 찬장을 뒤졌다. 찬장 구석에는 며칠 전 재훈이 주고 간 억제제를 찾아냈다. 약이 제대로 듣는 경우는 드물었지만, 몇 분이라도 늦출 수는 있을 것이다. 물도 없이 급하게 알약을 삼켰다.
“너, 빨리 가. 나가.”
“괜찮아? 어디 아픈 거야?”
그 애는 눈치도 없이 가까이 다가오려 했다. 붙잡는데도 가 버리려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 꾸물거리는 심보가 얄미웠다. 제 딴에는 나를 부축하려는지 내 쪽으로 손을 뻗어 오기까지 했다. 이를 악물고 그 애의 손을 뿌리쳤다.
놀라서 나를 올려보는 눈과 마주치자 내 안의 본능은 더욱 요동치기 시작했다. 검고 축축한 생각이 금방이라도 내 머리를 가득 채울 것 같았다.
사실은 예전부터 하고 싶었지만, 차마 저지르지 못해 참았던 일들을 생각했다. 예쁜 몸을 감싼 옷가지들을 갈기갈기 찢고 살을 맞대고 싶다거나, 아무리 울고 애원하더라도 놓아주지 않고 며칠이고 그 애를 범하고 싶다고.
“후…. 러트야.”
간신히 쥐어 짜낸 대답에, 그 애는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괜찮아? 많이 아픈 거야?”
러트가 왔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아직도 못 알아듣는 걸까. 급한 마음에 억지로 밀쳐서라도 쫓아내려다가 그냥 주먹을 움켜쥐었다. 어떤 방식으로든 그 애의 몸에 손이 닿으면 충동을 꺾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나가. 큰일 나기 전에.”
그 애는 그제야 주춤주춤 현관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고양이를 걱정하는 생쥐처럼 자꾸만 나를 돌아보았다. 방 안으로 몸을 피하려다가, 나는 다급하게 다시 그 애를 불렀다.
“한윤오.”
“으, 응.”
“너…. 나 러트 끝날 때까지는 정말 아무 데도 가지 마. 길어야 3, 4일이니까,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집에만 있어.”
“어떻게 집에만….”
“씨발, 잔소리할 시간 없어. 봉변당하고 싶은 거 아니면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하라고.”
“…….”
“혹시 서이준이 귀국해도 절대로 만나지 마. 아니, 아예 연락도 하지 마. 알아들어?”
나는 거칠어진 목소리로 으르렁거렸지만, 마지막 말은 사실 부탁에 가까웠다. 그 애는 드물게도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애의 눈동자는 좁아지는 문틈 사이로 길게 나를 바라보았다. 걱정과 두려움이 섞인 눈빛으로.
쿵, 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간신히 가로막고 있던 본능의 해일 앞에 무너졌다. 그렇게 며칠을 끙끙 앓았다.
짐승처럼 신음하며 몸을 웅크리고 있다가, 드물게 제정신이 돌아올 때마다 그 애를 걱정했다. 그 애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였다. 잠깐 손을 놓은 사이 그 애가 멀리 달아날 것 같다는 생각에 두려웠다. 러트의 고통만큼이나 그 두려움이 힘겨웠다.
‘제발. 제발 거기 그대로 있어, 한윤오….’
점멸하는 의식 속에서, 나는 드문드문 꿈을 꾸었다. 마지막으로 꾸었던 꿈은 어린 시절의 어느 날이었다. 나는 몇 년이나 가지 않았던 본가의 2층 복도에 서 있었다. 모든 것이 크고 넓고 높고 번쩍거렸다.
그곳에 온 지 몇 달이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이었다. 나는 아직 비아냥과 냉대에 익숙해지지 못했다. 내가 무얼 잘못해서 혼나는 거라고, 착하게 지내면 모든 게 좋아질 거라고 믿던 시절이었다.
아침부터 혹독하게 이어지는 과외 수업이 끝나면 나는 넓고 낯선 집에 그대로 방치되었다. 아무것도 없는 방에 혼자 누워 있다가, 견딜 수 없이 지겨워지면 숨죽여 복도로 빠져나오곤 했다. 2층 안쪽 볕이 가장 잘 드는 넓은 방은 이준의 것이었다.
‘언제든지 내 방에 놀러 와도 돼.’
처음 만났던 날, 이준은 상냥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텅 빈 내 방과는 달리 그의 방에는 신기하고 재미있는 물건들이 많아 보였지만, 어린 마음에도 그의 말을 믿으면 안 될 것 같아 계속 망설였었다.
그날은 본가에 손님들이 잔뜩 찾아왔었다. 1층에서 들려오는 이야기 소리에 내 발소리가 묻힐 것 같았다. 나는 용기를 내 조심스레 이준의 방으로 들어갔다.
그 방에는 책장을 빼곡히 채운 책들과 처음 보는 장난감들이 있었다. 넋을 놓고 안을 둘러보던 나는 커다랗고 섬세한 로봇 모형을 발견했다. 손을 뻗어 막 그것을 집어 들었을 때였다.
‘여기서 뭐 해?’
이준이었다. 그는 아주 부드럽게 웃고 있었다. 모임을 위해 정장을 차려입고 나비넥타이까지 맨 채였다. 고상한 체하는 태도까지 더해져, 고작 세 살 위의 그가 커다란 어른처럼 보였다.
‘미, 미안. 마음대로 만져서.’
‘그거, 마음에 들어?’
그는 내 손에 들린 로봇을 향해 턱짓했다.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그래? 네 오메가 어머니는 이런 장난감도 제대로 안 사 줬나 보네.’
억울한 말이었다. 그 사람은 나를 떠나보낼 때 커다란 가방 가득 내가 좋아하던 옷과 장난감과 책들을 챙겨 주었다. 이 집에 오자마자 ‘격에 맞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모든 소지품을 빼앗겼을 뿐이다. 게다가 호칭도 잘못되었다.
‘어머니 아니야. 아빠야.’
‘낳아 준 사람이면 어머니가 맞지 않나?’
‘아빤데….’
‘음…. 이상하네. 오메가들은 역시 잘 모르겠다니까.’
그의 태도는 여전히 부드러웠지만, 싸늘한 중얼거림에 나는 공기가 문득 불편해졌다.
‘그 사람, 보고 싶어?’
‘응.’
‘너 설마, 그 사람이 널 데리러 올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지?’
‘…아빠, 올 거야.’
‘저런, 어른들이 말하는 거 못 들었어? 그 사람은 바빠.’
‘…….’
‘다들 그러던데,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지저분한 짓을 하고 있다고.’
‘아니야!’
발끈하면서 소리를 지르느라, 나는 이준의 로봇을 너무 꽉 움켜쥐었다. 로봇의 한쪽 팔다리가 몸통에서 떼어져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본가에 온 뒤 나는 유리컵을 깨거나 열을 맞춰 정리된 장식품을 흐트러뜨릴 때마다 호되게 혼이 나곤 했었다. 이번에도 꾸지람을 들을 거라는 생각에 반사적으로 몸이 굳었다.
‘미, 미안해….’
‘괜찮아. 자, 여기.’
이준은 바닥에 흩어진 부품을 주워 나에게 건네주었다. 어쩐지 즐거워하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는 매끄러운 입꼬리를 높게 들어 올린 채로 속삭였다.
‘기다려도 어차피 안 올 거야. 네 엄마는.’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
‘당연히 잘 알지. 더러운 오메가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뻔하니까. 아마 그 사람은 너랑 있는 거보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한테 다리를 벌리는 걸 더 좋아할걸?’
그는 아주 즐겁다는 듯이, 그는 양쪽 입꼬리를 찢으며 환히 웃었다.
어린 나는 그의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그 사람을, 그때는 나의 모든 우주이던 존재를 모욕하고 있다는 것은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겪어 보지 못한 커다란 분노를 느꼈다. 머리부터 명치까지가 단번에 둘로 쪼개어지는 것 같은 분노. 생생하게 돌아오는 그 날의 감정에, 나는 소스라쳐 깨어났다.
* * *
“으으….”
눈을 뜨고 나서도 더러운 기분을 떨칠 수 없었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몽롱한 의식 속에서 한참이나 치를 떨며 숨을 몰아쉬었다. 오랫동안 애써 잊고 있던 기억이었다. 기억해 봤자 좋을 것이 없는 일이기에.
그날, 나는 분을 이기지 못하고 이준의 로봇을 바닥에 내던졌다. 조각난 로봇의 부품들을 미친 듯이 발로 짓밟다가 부들부들 떨며 이준을 노려보았다.
그 사람은 본가에 가면 예절 바르게 굴어야 몇 번이나 당부했었다. 서 회장도 나에게 이준은 형이고 장자이니 그에 맞게 깍듯이 대우해 주어야 한다고 했었다. 그런 말들을 떠올리며 분노를 찍어누르는 나를 보며, 이준은 즐겁다는 듯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하, 하하…. 너 진짜 웃긴다. 지금 뭐 하는 거야? 정신 나간 사람처럼.’
악마의 웃음소리가 꼭 그랬을 것이다. 나는 결국 분노를 참지 못하고 있는 힘껏 고함을 지르며 그에게 달려들었다. 나보다 키가 한 뼘이나 크던 그의 팔에 가로막혀 제대로 때려 보지도 못하고 허우적거리고 있을 때, 소동을 들은 어른들이 2층으로 뛰어올라 왔다.
그들은 나를 이준에게서 떼어 내 바닥에 내동댕이쳤다. 이준의 어머니는 제 자식에게 독거미라도 달라붙은 것처럼 새파랗게 분노하며 내 따귀를 내리쳤다.
‘이 천박한 녀석이…. 너, 우리 아들에게 대체 무슨 짓이야?’
‘형이 우리 아빠를 욕했단 말이에요!’
나는 그 집에 와서 처음으로 큰 소리를 내어 울부짖었다. 그가 했던 더러운 말들을 그대로 들려주었지만, 이준의 말이 문제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는 눈치였다. 모두는 그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했던 거다.
집안의 사람들은 나의 무례하고 폭력적인 행동이 지저분한 핏줄 탓이라고 했다. 안 그래도 더러운 오메가의 아이를 집에 들였다고 사람들이 수군거리고 있는데, 하필 손님들이 와 있을 때 그 난리를 피워서 가문의 이름에 먹칠이 될 거라고도 걱정했다.
손님들이 돌아가고 난 뒤, 나는 서 회장의 방으로 끌려가 골프채로 뼈가 부러지기 직전까지 맞았다. 그러고 나서도 3일간 방에 갇혀 밥도 먹지 못하는 벌을 받았다. 배고픔을 못 이겨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싹싹 빈 후에야 다시 식탁에 앉을 수 있었다.
가족들과 고용인들은 팔에 빼곡히 멍이 들고 입술이 터진 나를 경멸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손이 덜덜 떨릴 정도로 배가 고팠던 나는 그런 눈빛쯤은 신경 쓰지 않았다. 내가 정말 화가 났던 것은 막 밥을 먹으려던 순간, 이준이 활짝 웃으며 내 옆에 앉았을 때였다.
‘이게 그렇게 갖고 싶었어? 가져, 난 필요 없거든.’
그는 내가 다 부쉈던 제 로봇에 붕대를 덕지덕지 감아 내밀었다. 온통 붕대로 뒤덮인 로봇의 얼굴 부분에는 섬뜩하고 기괴한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언뜻 듣기에는 친절하지만, 명백히 비아냥거리는 말에 나는 다시 폭발했다. 나는 이준에게서 로봇을 빼앗아 집어던졌다. 그의 멱살을 잡아보려 달려들었지만 곧바로 서 회장에게 붙잡혀서 방으로 끌려갔다.
끔찍한 체벌이 다시 이어졌고, 결국은 오른팔이 부러졌다. 겨우 끝났던 근신은 더 길게 이어졌다.
‘그 사람은 너랑 있는 거보다 이름도 모르는 남자한테 다리를 벌리는 걸 더 좋아할걸?’
기진맥진한 채로 방에 갇혀 지내는 동안, 이준의 말이 자꾸만 떠올랐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분명 그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준은 틈날 때마다 나에게 비슷한 소리를 반복했다. 분노했던 나는 어느샌가 조금씩 그 말을 진실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변명하자면, 어린 나에게 세상을 달리 볼 방법은 없었다. 이준뿐만 아니라, 일족 사람들은 대부분 그 사람을 그렇게 취급했으니까. 내가 아니라고 악을 써 봐도 들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더구나 헤어질 때의 약속과는 달리 그는 단 한 번도 나를 보러 오지 않았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고작 편지를 보내 왔지만, 편지에 쓰여 있는 것과는 달리 그 후로도 그를 만나는 일은 없었다.
‘…거짓말쟁이.’
나는 그 사람을 그리워하고 또 그리워했다. 너무도 큰 그리움은 어느 순간 작은 내 마음을 가득 채우고도 흘러넘쳐 버렸다.
도저히 적응할 수 없는 생활 속에서 고통받으며, 넘쳐흐른 그리움은 이내 배신감으로, 증오와 분노로 색을 바꿨다. 사무치게 그리워하는 것보다는 그를 원망하고 매도하는 게 더 쉽게 느껴졌다.
그랬다. 나는 그를 원망해 왔다. 그는 모르는 사람이나 다름없고 나는 그를 모두 잊었다고, 낳아 준 것 이외에는 나와 아무 접점도 없으니 원망할 것도 없다고 우기면서도, 실은 내내 애처럼 그를 원망하고 미워했던 것이다.
‘거짓말쟁이. 애초에 보러 올 생각도 없었어. 마음대로 나다니려고 날 이런 곳에 버리고 간 거야.’
조금만 더 생각하면 그의 선택이 나를 지키기 위한 거였다는 걸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 몫의 고통이 세상의 전부인 줄 아는 이기적인 나는 긴 시간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어쩌면 반쯤은 알면서도 모르는 척했던 건지도 모른다. 나 때문에 그가 더 큰 고통을 받았던 죄책감으로부터 자유롭기 위해서. 뻔뻔스럽게도, 나는 너무도 명백한 진실에서 눈을 돌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후우….”
한참 만에 침대에서 일어난 나는 한숨을 쉬며 마른 뺨을 쓸어내렸다. 기분은 무겁게 가라앉았고, 몸은 탈진한 뒤처럼 녹진해져 있었다. 하반신을 들쑤시던 페로몬이 잠잠해진 걸 보면 러트가 끝난 모양이었다.
주기가 흐트러져서인지 드물게 강한 발정을 겪었다. 첫 러트 이후로 이렇게 심하게 앓아 본 건 처음인 것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 나는 곧바로 그 애를 떠올렸다. 그 눈치 없고 고집만 센 녀석이 그사이 무슨 일을 저질렀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침대 위를 더듬어 핸드폰부터 찾았다. 전원이 나가 있던 전화를 켜 보니 재훈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몸은 좀 괜찮습니까? 지금 연락해도 못 볼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최대한 빨리 알려 줘야 할 것 같아서 보냅니다. 오늘 오전에 이준 군이 귀국했어요.]
어제 온 메시지였다. 서이준이 한국에 온 뒤 꼬박 하루가 지났다는 뜻이었다. 그 소식에 눈앞이 빙빙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애가 이준을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의심과 걱정이 머릿속을 새하얗게 물들었다.
무어라 생각을 정리하기도 전에, 손가락이 멋대로 움직여 그 애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애는 다행히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것만으로는 안심할 수 없었다. 나는 취조라도 하듯 따져 물었다.
“어디야?”
[학교 가고 있어. 너는 괜찮아?]
“지금 네가 내 걱정할 때야?”
[러트…였잖아. 이제 끝난 거야?]
“씨발…. 지금 그게 문제냐고. 너 혹시…. 아냐. 전화로 얘기할 때가 아냐. 빨리 여기로 와. 내 방으로.”
[지금? 무슨 일인데?]
“오라면 올 것이지 쓸데없이 말이 많아? 쫑알거릴 시간이 있으면 빨리 오기나 하라고.”
다짜고짜 소리를 지르는 나에게, 그 애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알았다고 대답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 미친 사람처럼 거실을 빙빙 돌았다. 그 애의 집에서 내 방까지는 20분도 채 걸리지 않는 거리지만, 나에게는 그 시간이 러트로 앓던 며칠보다도 길게 느껴졌다.
초조함과 다급함이 내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그 애는 서이준을 만났을까. 만났다면, 서이준이 그 애를 가만히 두었을 리 없다. 혹시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생겨 버린 건 아닐까.
큰일이 있었다면 그 애가 태연하게 여기 오겠다고 대답할 리 없다고 자신을 진정시키려 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 애에 대한 걱정과 이준에 대한 해묵은 증오심이 뒤섞이고, 거기에 기분 나쁜 예감까지 더해져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 지금 그 녀석, 페로몬 다 흘리고 다니고 있을 텐데.’
입안이 다 말라붙던 차에 퍼뜩 또 다른 걱정이 떠올랐다. 그 애는 며칠이나 내 손이 닿지 않는 곳에 있었다. 지금쯤 단내를 풀풀 풍기고 있을 녀석을 알파들이 득시글거리는 학교 근처로 불러내다니.
질투에 눈이 멀어 생각이 너무 짧았다. 꼼짝 말고 집에 있으라고 한 다음 내가 그 애에게로 갔어야 했다. 나는 욕지기를 중얼거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지금이라도 데리러 가야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음이 급해서 신발에 발을 꿰어 넣는 것도 힘들었다. 허둥거리며 현관문을 열었을 때, 마침 그 애가 복도를 걸어오고 있었다.
“어…? 아, 안녕.”
정신없이 뛰쳐나온 내 모습에 놀랐는지, 그 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며칠 사이 조금 더 마른 것 같기는 해도 내가 기억하던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깎아 놓은 듯 섬세하고 오밀조밀한 얼굴도, 단정한 몸의 모양도.
어두운 표정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반가워하는 듯한 눈치였다. 그러나 태평하게 마주 반가워할 때가 아니었다. 무언가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뭐야? 냄새가 왜 이래?”
내 걱정과는 달리, 그 애에게서는 아무런 향도 나지 않았다. 어찌 된 일인지, 페로몬이 완전히 닫혀 있는 상태였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를 깨닫는 순간 심장이 쿵 주저앉았다.
“아, 이건….”
“씨발, 뭐냐고, 너.”
그 애는 태연히 미소 비슷한 것을 지으며 나에게 뭔가 말을 하려 했다. 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고 그 애의 손목을 당겨 현관 안으로 밀어 넣었다. 가느다란 몸이 훅 딸려 들어와 내 곁을 스칠 때, 나는 형언하지 못할 역겨운 기분에 미간을 찌푸렸다.
내 신경이 그렇게까지 곤두섰던 것은 단지 그 애의 향기가 가라앉아 있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단내가 사라진 자리에 희미하게 다른 향이 묻어 있었다.
흔적만 겨우 남은 냄새이더라도 내가 그걸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나에게는 가장 혐오스러운 냄새이자, 그럼에도 부인할 수 없이 나의 것과 닮은 페로몬. 그 애에게서 이준의 냄새가 느껴졌다.
손목을 부러뜨릴 듯 움켜쥐고 그 애를 노려보았다. 그 애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그러면서도 겁에 질려 나를 보았다. 원망스러우리만치 그 예쁜 얼굴이 가증스럽게 느껴졌다.
나는 결국 어린 시절에서 조금도 나아진 것이 없었다. 여전히 내 마음의 그릇은 손바닥만큼 작았고, 걱정과 질투는 쉽게 흘러넘쳐 분노로 변해 버렸다. 흥건해진 분노에 쭈뼛, 머리칼이 서는 느낌이었다. 감정을 조금도 가누지 못한 채로, 짙고 붉은 숨을 뱉으며 물었다.
“너… 어제 서이준 만났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