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 : 개화(2)
각인.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계속 바닥을 보고 이야기하던 그는, 뜻 모를 말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언제나처럼 무섭도록 깊고 검은 눈동자였다. 그러나 가만히 보고 있으면 딱딱하고 날카로운 외피 너머 무언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어설프지만, 데일 듯 뜨거운 불꽃이.
“그게 뭔데?”
그는 천천히 손을 들었다. 그의 곁에 앉을 때마다 나는 어떻게든 거리를 두어 보려고 애를 썼지만, 매번 소용없는 일이었다. 오늘도 그의 손은 내가 떨어뜨리려 애썼던 간격을 훌쩍 뛰어넘어 나를 향했다. 깨끗하고 힘센 손끝이 짚은 곳은 나의 목덜미였다.
머리칼에 반쯤 가린 그곳에는 남들은 모르는 흉터가 있다. 어린 시절, 아버지와 놀이터에 갔다가 미끄럼틀에서 떨어져 생긴 상처였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흐릿해진 것처럼,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 있는 그 상처의 존재는 거의 잊혀졌다.
상처를 만질 때마다, 나는 반사적으로 아버지를 떠올렸다. 상처 난 나를 안고 어쩔 줄 몰라 하던 그의 모습을. 빈말로라도 아이를 돌보는 데 익숙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그 장면만은 따스한 느낌이라 이상한 기분이 되곤 했다.
그러나 이한이 그 상처를 만진 순간 나는 다른 무엇도 생각할 수 없었다. 닿은 곳부터 피부의 틈새를 타고 무언가 찌르르한 느낌이 내 안으로 밀려왔다. 나른한, 현기증 같은 것이.
“알파와 오메가가 결합할 때 알파가 오메가의 목 뒤를 물면 각인이 돼.”
“…….”
“각인이 되면, 다른 알파들은 그 오메가의 페로몬에 반응하지 않아. 각인한 알파만이 느낄 수 있게 되니까. 각인한 알파의 페로몬에는 그 오메가만이 반응하게 되고.”
“그건… 짝지어진다는 뜻이잖아.”
생각지도 않았던 무거운 이야기였다. 심장은 다시 알 수 없는 박자로 뛰어오르기 시작했다. 걷잡을 수 없는 박동과 열기가 몸 안에 피어나는 것이 두려웠다. 두려워하는 게 맞는 상황이었다. 나는 다시금 그와의 거리를 벌리기 위해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그, 그런 걸 부탁할 수는 없어.”
“뭐…?”
“그렇잖아. 그런 건 네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과 해야지.”
“내 말을 뭐로 들어? 해 줄 수 있다니까. 난 집에서 정한 혼담 같은 건 신경 안 쓴다고.”
“그 얘기가 아니라, 나도 이렇게 갑자기는….”
그는 당황한 듯 보였다. 저렇게 심각한 제안을 이렇게나 불쑥 내놓으면서, 내가 거절할 거라고는, 심지어 놀랄 거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린아이처럼 제멋대로인 얼굴에 또 뾰족한 기운이 올라왔다.
“…왜? 서이준 때문이야?”
“서, 선생님 얘기가 왜 갑자기 나와?”
바로 대꾸했지만, 반사적으로 볼이 붉어졌다. 그는 한쪽 입꼬리를 일그러뜨렸다. 단순히 냉소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무서운 얼굴이었다.
“맞나 보네. 얼굴은 왜 빨개지는데?”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긴 뭐가 아냐. 그런 좆같은 시계가 무슨 보물이라고, 애지중지할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어.”
“아니라니까. 왜 그렇게 멋대로 짐작을….”
“너 혹시 지금 서이준 돌아올 날만 기다리고 있냐? 바보같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 새끼는 널 그런 식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야. 너 걔가 오메가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기나 해?”
그 말에는 조금 동요해버렸다. 늘 나에게 상냥해 보였던 이준도, 다른 알파들처럼 오메가를 우습게 여기고 있는 걸까. 내가 어렴풋이 느낀 그에 대한 의심이, 설마 맞아들어간 걸까. 동요를 들키고 싶지도 얼뜨기로 보이고 싶지도 않아서, 나는 침착한 투로 아는 체를 했다.
“알아. 나도 어제 선생님한테 들었어. 결혼하기로 정해진 사람이 있다는 거. 하지만 나랑은 상관없는 문제야. 어차피 난….”
“하, 그래서였어?”
“뭐가?”
“너 서이준 좋아하잖아.”
서이한은 자꾸 저 소리를 한다. 몇 번을 그랬듯이 이번에도 아니라고 받아치려다가 나도 모르게 머뭇거렸다. 아닌데,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자꾸 저런 소릴 들으니 생각이 흔들렸다.
나는 내 감정을 살펴보는 일이 너무도 서툴렀다. 더구나 누구를 좋아해 본 경험 같은 것도 없었다. 혹시 너무 멍청한 나머지 나도 내 마음을 모르고 있던 게 아닐까 하는 의문에, 나는 순간 주춤거렸다.
“왜 잠을 못 잔 건가 했더니, 서이준한테 정혼자가 있다고 들어서 그런 거였냐고.”
서이한의 표정은 더 싸늘해졌다. 그는 이죽거리는 눈으로 희게 질린 내 얼굴을 훑어보았다. 어제 이준의 말을 듣고 놀라기는 했었지만, 질투의 감정이라고 생각하진 않았는데. 충격을 받았던 이유가 정말 그래서였을까.
가난을 벗어나려면 몸을 파는 게 빠를 거라는 말만 지겹도록 들었던 나에게, 인생이 달라질 수 있다고 진심으로 말해 준 것은 이준이 처음이었다.
그는 나에게 빛이고 길이었으며, 나를 다른 세상으로 데려가 주기 위해 더 높고 따스한 나라에서 내려온 동아줄 같았다. 그에게 의지하고 그를 따라가면 다시 태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좋아하는 거라고?’
대학에 온 뒤로는 더 그랬다. 이한이 얼떨결에 나의 일에 개입하기 전까지, 이준은 절벽에 내몰린 내가 기댈 유일한 쉼터였다. 나는 해가 뜨기를 기다리는 밤의 사냥감처럼 이준이 한국으로 돌아올 날을 기다렸다.
이준이 오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것 같았고, 그가 옳다고 하는 것은 전부 옳은 거 같았고,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나를 위한 숭고한 희생 같았다. 그에게 무언가를 숨기고 그를 의심하는 스스로가 괴로워서 자책하기도 했다.
동경과 감사라고만 생각했던 감정인데, 갑자기 모든 게 혼란스러웠다. 이한은 멍하니 눈만 깜빡거리는 내 모습에 더 화가 난 듯 보였다. 갑작스레 각인을 해 준다는 묵직한 제안을 한 데 이어서, 그는 빈정거리는 말로 나를 마구 찔렀다.
“씨발, 대단한 순정이다, 진짜. 왜, 그 새끼가 널 좋아해 주기라도 할까 봐? 정신 차려, 이 멍청아. 뭐 그런 되지도 않을 기대를 해?”
“…아니야.”
“존나 어이가 없어서. 네가 뭘 알기나 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걔가 어떤 쓰레기인지….”
“시끄러워. 그런 거 아니라니까…!”
당혹감을 견디다 못한 나는 언성을 높였다. 내가 이준을 좋아하는지 아닌지를 왜 이렇게 캐묻는지를 알 수 없었다. 만약 내가 이준을 좋아하는 게 맞다고 하더라도, 그건 아무 소용도 의미도 없는 일이었다.
어차피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그와 나는 하늘을 나는 새와 흙더미에 파묻힌 벌레만큼이나 달랐다. 그런 마음을 품었다가는 성냥불을 쬐다 얼어 죽고 만 성냥팔이 소녀처럼 비참한 결말이 기다릴 뿐이다.
이한은 어이가 없다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불쾌함에 한껏 찌푸린 얼굴이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고질적인 자격지심이 올라왔다. 그도 내가 우스워 보이는 걸까.
남의 일에 신경 쓰지 말라고 쏘아붙이고 싶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내가 멍청하더라도, 이 상황에서 이한과 말싸움을 할 정도로 뻔뻔하진 못했다. 나는 그냥 어깨를 떨구었다.
“…집에 갈래.”
“뭐? 지금?”
“응. 몸도 안 좋고.”
“그냥 가서 어쩔 생각인데. 너, 학교는….”
“내가 알아서 할게. 위험하게 굴지 않을 거니까 걱정할 거 없어. 아…. 걱정… 안 하겠지만. 혹시 위험해져도 이제 너한테 귀찮게 굴지 않을게. 그동안 폐 많이 끼쳤어. 미안. 아, 아니. 고마워.”
되지도 않을 인사말을 주섬주섬 늘어놓고 일어서려 했다. 그러나 한 발도 딛지 못하고 팔을 붙잡혔다.
“간다니까. 이거 놔.”
“한윤오.”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닻처럼 무거웠다. 그가 부른 나의 이름이 쿠웅, 저 깊은 곳으로 추락하면서 나를 자리에 묶어 놓았다.
“손 좀, 흐, 읏….”
그의 손을 뿌리칠 수 없었다. 팔을 잡은 힘 때문이 아니었다. 사슴이 사자를 알아보듯, 배운 적 없이도 선명하게 느낄 수 있다. 이한이 제 페로몬을 열었다는 것을. 누군가 내 정수리에 전류를 들이부은 것처럼 전신에 소름이 올라왔다.
흥분에 허덕이던 여태까지의 모든 순간에도, 이한은 늘 자신을 억누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는 어느 때보다도 강하고 거세게 나에게 밀려오고 있었다.
오롯이 드러난 늑대의 본성. 나는 기운이나 진동 같은 것으로만 느껴 오던 페로몬을 이제야 비로소 향기로 인식했다. 서늘하고도 묵직한 나무 향이 순식간에 나를 옭아맸다.
몸이 굳어 발을 뗄 수도 주저앉을 수도 없었다. 저릿해지는 고개를 힘겹게 돌렸다. 그는 검푸른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나는 달아나고 싶은 기분을 모두 끌어모아 말했다.
“놔, 놔줘….”
그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내 팔을 당겼다. 나는 밀짚으로 만들어진 사람처럼 힘없이 침대 위로 무너졌다. 필사적인 버둥거림은 너무도 쉽게 가로막혔다. 바지와 속옷이 벗겨져 이리저리 날아갔다. 골반을 잡아 들어 내 밑을 확인한 그가 피식, 웃었다.
“젖었네.”
하반신의 본능은 민망할 만큼 솔직했다. 앞쪽은 바짝 일어났고, 아래는 축축하게 젖어 버렸다. 몸 안에서 팔딱팔딱 맥이 뛰어오르고, 내벽을 따라 물기가 비어져 나오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츠리려 했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나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내가 그랬지. 너. 페로몬에 면역이 너무 없어.”
“그만, 그, 그만….”
“뭘 그만하라는 거야?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냉랭한 목소리에 아무 대꾸할 말이 없었다. 차라리 내 몸을 만져 준다면 그의 핑계를 댈 수 있었겠지만, 허벅지를 누른 두 손은 조금도 안쪽으로 들어와 주지 않았다. 고작해야 시선뿐이었다. 그는 가만히 나를 내려다보았다. 벌어진 다리 한가운데에 있는, 음습한 나의 입구를.
시선이라는 게 그렇게 무겁고 끈끈할 수 있을 줄은 몰랐다. 그것은 손길보다도, 향기보다도 더 깊게 나를 충동질했다. 눈길이 길어질수록 날뛰는 본능을 감추기 힘들어졌다.
엉덩이와 허벅지가 부들부들 떨리고, 몸 안은 더 축축해져 갔다. 그러고 싶지 않은데 구멍이 마음대로 꿈틀, 꿈틀 움직였다. 나를 보던 이한의 눈이 비웃듯 가늘어지자, 넘쳐흐를 듯하던 체액이 결국 주르르, 구멍 밖으로 흘러나왔다. 그저 그가 보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그렇게.
“흐으….”
덥고 찐득한 애액이 구물구물 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간지러운 느낌에 몸이 더 달아올랐다. 당황해 버린 나는 벽이 무너진 것처럼 페로몬을 내뿜었다. 다리 사이에서, 입술과 코에서, 온몸의 땀구멍에서도. 내 모든 곳에서 진득한 향이 새어 나오는 게 느껴졌다.
“…오메가 냄새.”
그가 낮게 중얼거린 말은 비웃음도, 빈정거림도 아니었다. 그의 목소리는 무서울 정도로 뜨거운 욕정에 끓고 있었다.
이한이 뱉은 호흡이 나의 피부를 어루만졌다. 그가 나를 향해 고개를 기울이자, 내 몸은 기대감에 들썩였다. 안쪽으로 들어와 줄 알았던 그의 입술이 나의 무릎에 닿았다. 지그시 닿는 감촉에 나는 참았던 신음을 뱉고 말았다.
“아, 아아….”
이한도 상기된 얼굴이었다. 어금니를 악무는지 목 근육이 선명하게 일어나는 것이 보였다. 내 몸을 쥔 손에도 바짝 힘이 들어갔다. 당장이라도 무슨 일을 저지를 듯한 그의 표정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뭐, 뭘 하려는… 읏, 거야.”
“말했잖아. 각인하겠다고.”
“싫어. 흐으, 왜, 억지로….”
“구멍은 씨발, 존나 벌름거리면서, 뭐가 억지로라는 거야?”
“그건, 아, 히익…!”
그는 거침없이 내 다리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손끝이 골 사이를 긁어 대자 성감은 기다렸다는 듯 격렬하게 곤두섰다. 저항할 힘이, 아니 생각조차 없는 나를, 그도 느꼈을 것이다. 그는 더 짙고 집요하게 나의 입구를 어루만졌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그곳은 알파의 접촉을 기대하고, 환영하고 있었다. 체액을 줄줄 흘리며 옴찔거리는 모양을 그에게 남김없이 내보였다. 수치심과 당혹감, 두려움. 그리고 그만큼이나 커다란 흥분이 마구 뒤엉켰다.
“그러지… 마. 하지… 하윽…!”
거부의 말은 무의미했다. 그는 길고 억센 손가락을 구멍 안으로 쑤셔 넣었다. 깊게 파고든 그의 손가락은 내벽을 멋대로 훑었다. 두 손가락이 서로 교차하듯 움직이며 안을 벌리고 문질러 댔다.
거친 손놀림에 허리가 움찔움찔 튀어 올랐다. 분명 고통스러웠지만, 오메가의 몸은 무자비한 고통마저도 쾌감으로 뒤바꾸어 받아들였다.
어디서 스며 나온 것인지 모를 습기가 흥건하게 나를 적셨다. 찌걱거리던 소리는 이내 찰박이는 듯한 소리로 바뀌었다. 괴로움에 끙끙거리던 신음에도 어느덧 달큼한 기운이 묻어났다.
“흐, 아아….”
입술을 깨물던 나는 결국 민망할 정도로 큰 교성을 흘렸다. 내가 뱉은 소리에 내가 놀라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이한은 뭐가 못마땅한지 미간을 찌푸렸다.
“힘 좀 빼 봐.”
“으, 뭘… 어떻게….”
“좁아. 이대로는 못 한다고.”
“안 하면… 되잖, 아. 아…!”
그는 단번에 나의 몸을 뒤집고는 골반을 추켜들었다. 안 그래도 그를 향해 열려 있던 나의 아래는 더 노골적으로 벌려졌다. 등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근육이 수축했다.
젖은 둔부에 그의 숨결이 닿은 순간, 나는 본능적으로 그가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알아차렸다. 알고도 믿고 싶지 않았다. 설마, 그런 곳에 입을 대려는 건….
“놔, 안 돼, 으, 하… 으읏!”
그는 두 손으로 내 엉덩이를 열어 쥐었다. 뜨거운 그의 입술이 나의 입구를 스치는가 싶더니 곧바로 혀가 닿아 왔다. 축축하고 미끈한 그의 혀가 회음을 핥아 올렸다가, 골 사이를 이리저리 쓸어 댔다.
“그만, 아으…응, 싫어, 흐윽, 그마안….”
나는 그가 곧장 구멍을 핥을 거라는 생각에 몸을 굳혔지만, 그는 그 주변만을 지분거렸다. 집요하게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서도, 가장 예민한 곳은 약이라도 올리듯 스쳐 가기만 했다.
아주 모순된 감정이 몸 안에서 들끓었다. 소름이 빼곡히 돋을 정도의 거부감과 동시에, 짜증이 날 정도로 애타는 기분이. 그의 혀가 바로 옆을 지날 때마다 구멍이 저절로 뻐끔거렸다. 마치 이곳도 핥고 빨아 달라고 유혹하듯이.
“흐으, 응, 으으….”
우는 소리를 내던 나는 결국 충동을 이기지 못했다. 구멍 어귀를 한참 서성거리던 그의 입술이 또다시 그곳을 지나쳐 회음으로 향하는 순간, 나는 허리를 꿈틀거려 그의 입술 쪽으로 입구를 가져갔다.
항복을 외친 것이나 다름없는 몸부림이었다. 비참하거나 부끄럽다는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그곳에 닿아 주지 않는다면 나는 소리 내 애원이라도 하고 싶었다.
모든 것을 놓아 버린 나의 모습을 보고, 그는 들릴 듯 말 듯 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그것은 만족의 웃음이었다. 이한은 정말로 나를 삼켜 버릴 작정이었고, 내가 삼켜지면서도 기꺼이 저를 찾는다는 사실에 즐거워했다.
그는 결국 그곳에 짧게 쪽, 입을 맞춰 주었다. 성급하게 탄성을 지르는 나의 몸을 감싸 쥐더니, 뾰족하게 세운 혀가 곧장 입구를 눌렀다. 톡톡, 타진하듯 나를 두드리던 살덩이가 빠듯한 곳을 비집고 들어왔다.
“아, 하으읏…!”
예민해진 신경을 타고 소름이 올라왔다. 참으려 해도 목 안쪽에서부터 정제되지 않은 소리가 터져 나왔다. 풀려나기 시작한 신음은 날뛰듯이 점점 커졌다.
그는 파닥이는 나의 허리를 단단한 힘으로 쥐었다. 뜨거운 혀끝은 주저 없이 나를 범했다. 가장 음습하고 깊은 부분으로 혀를 밀어 넣고 훑어내기를 반복하는 그 행위를, 나는 범한다고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이미 흥건하던 아래에서 쉼 없이 애액이 새어 나왔다. 그는 제 타액과 뒤범벅된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게 빨아들였다. 그가 삼키지 못한 것들은 허벅지를 타고 주르르 흘러내렸다. 게걸스럽고 습한 소리가 우리 둘 사이를 오고 갔다.
“아응, 으, 하….”
이한은 나를 내리누르고, 내 본능의 가장 밑바닥까지 거리낌 없이 쥐고 흔들었다. 원한다면, 아니 심지어 원하지 않더라도, 그는 간단히 나를 취하고 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너무도 무력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베개에 고개를 처박은 채로 손 안에 감기는 시트를 쥐어뜯는 일뿐이었다.
그를 어쩌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내 안의 쾌감조차도 통제할 수 없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 같은 기분이었다. 치욕적이어야 할 이 순간에, 나는 무서울 정도로 격렬한 쾌감을 느꼈다. 쾌감은 나를 하늘로 붕 띄우고, 다시 저 밑까지 처박아 조각조각 쪼갰다.
“아, 안 돼….”
그 말조차 투정처럼, 아찔함을 표현하는 찬사처럼 들렸을 것이다. 쾌감이 아프도록 서글펐다. 본능적인 짜릿함조차도 나를 비참하게 만든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어느 때고 운명은 나의 편인 적이 없었지만, 이런 절벽에까지 떠밀릴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이렇게 물어뜯기고 파헤쳐지기 위해 세상에 내려온 존재일까.
원망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파닥이던 상체를 축 늘어뜨렸다. 복잡하게 꼬여 버린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흑….”
모든 것이 뒤섞인 눈물이 두 눈 가득 차올랐다. 흐느끼는 소리에, 그는 아래를 지분거리던 입술을 멈추었다. 그가 들어주었다는 것을 알아차린 순간, 눈물은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흑…. 흐윽, 흐어엉….”
나는 온몸을 들썩이며 울부짖었다. 내 모습이 얼마나 흉할지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차피 그의 앞에서 헐벗고 초라한 몰골로 목놓아 울어 버린 게 처음도 아니었으니까.
그가 내 등 뒤에서 고개를 드는 것이 느껴졌다. 엉덩이를 강하게 움켜쥐었던 손도 떨어져 나갔다. 내가 울음을 그치기를 기다리는 듯, 짜증스러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울음이 길어지자 결국 그는 나의 등 위로 상체를 겹쳤다. 귓가에 뜻 모를 숨결이 닿은 순간, 그가 말했던 ‘각인’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등을 눌린 채로 간신히 팔을 들어 올렸다. 뒷덜미를 손으로 덮으며 필사적으로 고개를 저었다.
“시, 싫어…. 흐윽, 그, 그건, 그건….”
그는 납작 엎드린 채로 떨고 있는 내 몸을 다시 바로 뒤집었다. 나는 목 뒤를 양손으로 감싸서 가린 채 그를 올려보았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얼굴을 일그러뜨린 그를 본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난폭하게 화가 나 있을 줄만 알았는데, 오히려 상처 입은 표정 같기도 했다.
그 표정에 어쩐지 마음이 울렁거리면서도, 금방이라도 그가 나를 억지로 가져 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오버하기는…. 울지 마. 그냥 좀 본 거야. 상처가 있길래.”
“흑, 으…. 흐으윽….”
“씨발, 울지 좀 말라니까.”
“윽, 으으…. 흑….”
“그리고 어차피 지금 물어 봤자 소용도 없어. 남의 말을 뭐로 들어? 할 때 물어야 각인이 되는 거라고.”
그는 억눌린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울고 싶지 않은데 그칠 수가 없었다. 미간을 좁히고 한참이나 나를 노려보던 그가, 문득 물었다.
“…내가 그렇게 끔찍해?”
뜻밖의 질문이었다. 내가 그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따위는 그에게 아무 문제도 아닐 줄 알았는데.
지금 내가 몸서리치는 것은 싫고 좋고의 문제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어느 누구라도 갑자기 지금 당장 평생의 짝을 선택해야 한다는 말을 들으면, 더군다나 돌이킬 수도 없는 일이라고 하면 놀라 머뭇거릴 수밖에 없을 거다.
‘끔찍할 리가… 없잖아.’
대답을 잃고 훌쩍이면서도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의 앞에서 나는 늘 압도되고 겁을 먹었지만, 그를 끔찍하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오히려 나의 본능은 언제나 그를 원했다. 그것이 알파와 오메가의 섭리이기 때문인지,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몰라도, 아주 기묘한 형태로 내가 그에게 끌리고 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울음으로 호흡이 가득 차서 나는 그저 헐떡일 뿐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흥분의 잔열은 이 와중에도 나를 달구고 있었다. 그것은 이한도 마찬가지였다.
“하….”
이한은 붉은 열기로 뺨을 물들인 채 나를 바라보았다. 아무리 기다려도 내가 대답해 주지 않을 거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는 말없이 한숨을 쉬고는 그는 제 바지를 아래로 끌어 내렸다. 빳빳하게 부푼 그의 성기가 곧장 튀어나왔다. 그것을 보는 순간 나는 우는 것도 잠시 잊을 정도로 위압 당했다. 아무리 보아도 적응되지 않는 물건이었다.
잡아먹힐 거야. 나는 직감적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등으로 기어 주춤주춤 뒤로 달아나려 했다. 그러나 나는 이미 사로잡힌 사냥감이었다. 그는 손쉽게 나의 뒤통수를 움켜쥐어 나를 제압했다. 덜덜 떨고 있는 내 얼굴을 천천히 그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빨아.”
매정하고도 오만한 목소리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갑작스러운 이야기가 얼떨떨했지만, 다른 선택지가 있는지 확인할 상황이 아니었다. 입으로 해 주는 정도에서 멈출 수 있다면 나에게는 오히려 자비로운 일이다. 나는 순순히 그의 손아귀에 이끌려 고개를 기울였다.
가까워진 그의 성기에서 유혹적인 나무 내음이 났다. 그것은 곧게 고개를 치켜들고, 사나운 핏줄을 부풀렸다. 나는 무릎을 꿇고, 낮게 엎드린 자세로 그것에 입을 맞추었다.
비릿하고 씁쓸한 맛이 거북하다고 생각할 틈도 없었다. 다만 방법을 몰라 막막하기만 했다. 거뭇한 음모 사이로 기둥을 쥐었다. 입술을 열어 귀두를 감싸자 벌써부터 빠듯한 느낌이었다. 입속에 다 들어갈 리 없다는 생각으로 머뭇거리자 그는 내 뒤통수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이 세우지 말고, 목구멍 열어.”
지시는 명확했지만, 나는 바로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도움을 청하듯이, 그의 것을 입에 문 채로 그를 올려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그는 짜증스레 미간을 찌푸렸다. 머리채를 쥔 그의 손이 내 고개를 아래쪽으로 훅, 끌어당겼다.
“웁…!”
목구멍으로 단단하고 뜨거운 것이 밀려들어 왔다. 반사적으로 혀뿌리를 낮추자, 그는 생겨난 공간만큼 더 깊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쪼아 붙이는 듯한 움직임에 따라, 흉포한 그의 것이 입안을 난도질했다.
갈 곳 없는 손을 그의 허벅지 위에 얹었다. 눈시울이 벌겋게 익고, 눈물이 저절로 튀어나왔다. 입가가 아릿하고 호흡은 어지럽다. 목젖을 때리는 듯한 고통에도 울 수 없었다. 비명이나 신음 따위가 흘러나올 공간 없이 목구멍까지 가득 찼다.
“후우….”
질척이는 마찰음 사이로 이한의 호흡이 들렸다. 쾌감이 묻어나는, 열기 어린 숨이었다. 그가 쥐고 흔드는 대로 허덕거리면서도, 나는 궁금했다. 나에게는 고통스러운 행위가 그에게는 쾌락인 걸까. 그는 지금 만족하고 있는 걸까.
그 생각에, 가슴의 밑바닥이 찌르르 울렸다. 사실 나에게도 그 순간이 온전히 고통뿐인 것은 아니었다. 호흡과 감각을 모두 빼앗긴 기분이 까닭도 없이 아찔했다. 가팔라진 둘의 호흡이 순서도 없이 뒤엉켰다.
머릿속이 어딘가 뒤틀어진 것이 틀림없다. 그렇지 않고서야 고통이 이토록 짜릿하게 느껴질 리 없다. 정신을 놓아 버릴 것 같다고 생각하던 차에, 그가 짙고 축축한 숨을 뱉었다.
“읏….”
그는 내 입에 처박혀 있던 제 성기를 끄집어냈다. 한계까지 부풀어 평소보다도 굵직하게 몸집을 키운 기둥이 눈앞에 또렷이 드러났다. 타액이 젖은 핏줄이 번들거리고, 귀두 끝에는 말간 물이 맺혀 있었다. 그가 나를 만진 것도 아닌데, 현기증에 까무러칠 것 같았다.
그는 성급한 손길로 제 기둥을 두어 번 훑어 올렸다. 그것은 위협적으로 꺼떡거리더니 이내 정액을 내쏘았다. 찐득하고 희뿌연 체액이 나의 얼굴에 끼얹어졌다. 풋풋하고 쿰쿰한 정액의 향이 훅 끼쳐 왔다. 더 짙어진 페로몬도 함께.
반사적으로 떨구어지려는 내 턱을, 그는 단단히 쥐어 들어 올렸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내 뺨에 묻은 정액을 넓게 쓸었다. 그의 향기를 넓게 문질러 펴 바르는 듯이. 짐승에게 마킹 당하는 듯한 느낌이었다.
불쾌해야 할 상황이지만, 그 묘한 행동이 이상할 정도로 싫지 않았다. 오히려 잔잔하고도 강렬한 흥분을 느꼈다. 그가 그것을 삼키라고 했다면 나는 아무 망설임 없이 삼켜냈을 것이다.
“하아, 하….”
이한은 여전히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을 가리려는 듯 그는 나에게로 고개를 숙였다. 땀에 젖은 이마에 그의 입술이 닿았다. 용암 같은 격정 속에서도 나는 내내 긴장으로 빙하처럼 얼어붙어 있었다. 그 더운 입술이 닿고서야 나는 녹아내렸다.
나는 그의 어깨 위로 지친 고개를 떨구었다. 그의 한 손이 나의 등을 감싸고, 한 손은 몸 앞으로 파고들어 나의 성기를 쥐었다. 나도 미처 몰랐지만, 그의 손이 닿자마자 당기는 느낌이 드는 것을 보면 한참 전부터 발기해 있던 모양이었다. 손바닥의 열기만으로 사정할 것 같았다.
“으, 하으으….”
그는 느긋하게 내 것을 쓸어올리고 내렸다. 비밀스러운 부분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왠지 부드럽게 느껴졌다. 늘어지는 신음이 어리광처럼 들릴까 두려웠다. 괴로운 만큼 기분 좋다는 걸, 그가 만져 주는 것을 내가 기뻐하고 있다는 걸 들킬 것 같았다.
나는 부끄러울 정도로 빨리 절정에 다다랐다. 체액과 함께 눈물도 쏟아졌다. 그의 어깨에 젖은 눈가를 묻고 눈을 감았다.
* * *
무너지듯 잠을 잤다. 밤을 지새운 피로를 메울 만큼 달콤한 잠을.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희고 깨끗한 이한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낯선 침대에, 혼자가 아니었다. 이한이 등 뒤에서 나를 안고 잠들어 있었다. ‘접촉’을 마치고 함께 잠드는 것이 이제는 새삼스러운 것도 없는 일이지만, 나는 매번 당황해했다.
이번에는 더욱 그랬다. 타인의 침실에 누워 있는 상황도, 깨끗하고 부드러운 침구와 등에 닿은 타인의 맨 살갗도 낯설어서. 그는 옷을 입지 않은 채 그대로 쓰러져 잠들었던 모양이다. 얼마나 잠들어 있던 건지, 어쩌다가 잠들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얼굴에 묻었던 찐득한 정액이 사라진 걸 보면 그가 잠들기 전 내 얼굴을 닦아 주었을 것 같긴 한데. 품 안을 벗어나고 싶어 이리저리 몸을 뒤척여 봐도, 나를 안은 팔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어떡해. 깊게 잠들었나 봐….’
나보고 말라비틀어졌다고 투덜거릴 때는 언제고, 지금은 또 뭐가 마음에 든다고 이렇게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두어 놨는지 모르겠다.
아무래도 손에 닿는 게 뭐든 안고 자 버리는 습관이 있는 모양이다. 비죽이 심술이 올라왔다. 가벼운 습관처럼 이러는 거래도, 안긴 쪽의 입장에서는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요란한 숨소리가 그에게까지 들릴까 봐 호흡을 가만히 낮추었다. 그러자 느리고 고른 그의 호흡 소리가 들렸다. 내가 숨을 내쉬자 이내 그도 호흡을 뱉었다. 다시 숨을 들이켜자 그도 뒤따라 호흡했다.
그것뿐인데, 호흡 이외의 다른 것도, 마음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무언가까지 서로 뒤섞이는 듯한 느낌에 부끄럽고 나른해졌다.
다시 잠들어 버릴 것 같아서 눈을 비비다가, 문득 벽시계를 보았다. 강의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꿈에서 깬 것처럼 화들짝 그의 팔을 두드렸다.
“서이한. 일어나.”
조심스레 부르자 그는 꾸물꾸물 움직이기 시작했다. 팔이 느슨해진 틈을 타 몸을 일으켰다. 돌아보니, 그는 귀찮다는 듯 눈을 감은 채로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또 화를 낼까 무서웠지만 그냥 둘 수는 없으니 이불 위를 톡톡 두드렸다.
“학교 가야지. 이따 교필도 있잖아.”
“안 가.”
그는 툭, 던지듯 말하며 내 팔을 잡아끌었다. 간신히 일으켰던 몸이 다시 침대로 눕혀졌다. 커다란 손이 내 몸을 감싸 안았다.
“왜, 왜 이래….”
“가만히 있어 봐. 추워.”
얼굴이 훅 붉어졌다. 목덜미까지 빨개져 버리지 않았을지,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리지 않을지. 그런 것이 신경 쓰여서 나는 모기처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자고 일어나서 그렇잖아. 옷도… 안 입었고.”
사람의 살은 어째서 이렇게 따뜻한 걸까. 귓가에 들려오는 고르고 차분한 숨소리도, 맞닿은 가슴의 고동도 온기를 더하는 것 같았다. 외롭다고 생각한 적은 거의 없는데. 그 온기 탓인지 내가 늘 외로웠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남의 두 팔 아래서 안온함을 느끼는 내가 신기했다. 가만히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면 언제까지라도 여기 있어도 괜찮을지 모른다는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나는 부푼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결국 착각은 착각일 뿐이라는 걸 나는 잘 알고 있었다. 여태까지 내 인생은 그런 법칙이 지배해 왔으니까. 여름 볕에 나온 눈사람처럼 온기가 두려워졌다.
“놔줘.”
“아, 왜.”
“중간부터라도 들으려면 지금 출발해야 해.”
“싫어.”
말로 해도 듣질 않고, 팔을 아래 갇힌 몸을 빼내려 꼼질거려도 꿈쩍도 하지 않는다. 그는 종종 이렇게 엉뚱한 고집을 피운다. 모든 것이 짜증 나고 불편하고, 세상 무엇에도 관심 없다는 표정을 짓고 있다가도 불쑥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으려 한다.
“너도 수업 가야 하잖아.”
“안 간다니까.”
“수업인데 가야지. 너 오늘 오전 강의도 빠진 거 아냐? 자꾸 결석하면….”
“오늘 만우절이라 어차피 수업도 제대로 안 해. 가 봤자 정신만 사나워.”
“뭐? 그런 게 어딨어. 중간고사도 얼마 안 남았는데.”
“우리 학교 애들 원래 그런 거에 목숨 걸어. 기회만 잡으면 별것도 아닌 일로 존나 생난리를 치는데 짜증 나 죽겠다고.”
만우절. 벌써 4월이었다. 기대했던 대학 생활이, 3월 한 달이 참으로 험난하게 넘어갔다. 더 울적한 건 앞으로 상황이 나아질 것 같지도 않다는 점이었다.
“…오늘이 만우절이구나. 몰랐네.”
“만우절이 며칠인지 몰라? 너 진짜 바보야?”
“아니. 아는데…. 그런 거 신경 안 쓰고 지내니까.”
생활에 찌들다 보면 만우절은커녕 내 생일조차 의식하지 못하고 지나갈 때도 있었다. 내 표정이 어두워졌는지, 이한은 나를 물끄러미 보았다. 드물게도 눈치를 보는 듯한 표정이다. 입술을 우물거리던 그는 툭 던지듯 말했다.
“그래, 만우절이야. 다들 아무 이유 없이 좆같은 장난을 치는 날이라고. 그러니까….”
“…….”
“아까 그건 그냥 장난이야.”
“응?”
“…아까 각인해 주겠다고 한 거, 그거 만우절 장난이었다고.”
그는 한쪽 입꼬리를 비죽이 들어 올려 웃었지만, 눈동자는 거의 웃고 있지 않았다. 뭐가 진심이고 뭐가 농담인지 알 수 없었다. 째깍째깍. 시계 소리 속에서 그 까만 눈을 바라보다가, 깨달았다. 그가 제 말이 농담이었다고 결정한 이상 나도 그렇게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는 걸.
“무슨 그런 장난을 쳐, 너는?”
나는 아주 어색하게 웃었다. 그는 내 눈을 피하듯이 와락, 나를 안았다. 평소처럼 무신경하고 불친절한 목소리로 이죽거렸다.
“왜, 안 돼? 내 맘이야.”
귀에 닿은 너른 가슴팍은 빠른 심장 박동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으스러뜨릴 듯 나를 껴안는 강한 힘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던 찰나, 그가 가볍게 나의 귀를 깨물었다.
“아, 가, 간지러워.”
“장난인데 뭐 어때.”
“핫, 야, 아아, 그만, 그만….”
이한은 손끝으로 나의 옆구리와 등허리를 간지럽히고, 입이 닿는 곳을 아무렇게나 깨물어 댔다. 키득키득, 그의 짓궂은 웃음과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내 웃음소리가 뒤섞였다. 간지러움에 발버둥 치던 나는 겨우 그의 품 안을 빠져나왔다.
왜 그래, 하고 핀잔을 주려 그를 돌아보았다가 멈칫했다. 장난스러운 목소리와 몸짓과는 달리, 그의 얼굴에는 조금의 장난기도 없었다. 나를 억지로 범하려 할 때처럼 일그러진 표정이었다. 마치, 금방이라도 울어 버릴 듯이.
“…가려면 가.”
“응…?”
“학교, 갈 거라며.”
그렇게 말하는 그의 표정에는 여전히 울적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말은 또렷했지만, 거기에 숨겨진 마음을 읽기는 어려웠다.
정말 가도 될지, 눈앞에서 사라져 주는 게 나을지, 아니면 무어라 말을 건네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시무룩한 얼굴을 마주 보고만 있는데, 그는 꾹꾹 누르듯이 다시 말했다.
“가라니까.”
툭 뱉은 말이 어쩐지 안쓰럽게 느껴졌다. 내가 조금이라도 더 살가운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물러서는 대신 그를 안아 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에게는 살가움도, 용기도, 남을 안아 줄 여유도 없었다. 솔직히 말해 껴안고 싶은 마음이 컸지만, 오히려 면박만 들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고민하다 타이밍을 놓쳤다.
행간을 읽을 힘이 없으면, 지시받은 그대로 움직이는 수밖에 없었다. 학교에 가기 위해 옷을 추스르고, 바닥에 내팽개쳐진 가방을 주워든 후에도 미련이 남아 머뭇거렸다. 이한은 시큰둥한 얼굴을 하고도 거실로 배웅을 나왔다.
‘또 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왠지 자신이 없었다. 또 보자는 말이 또 나를 도와 달라는 뻔뻔스러운 말로 들릴까 봐. ‘안녕’이라고 말하기로 마음먹고 있을 때,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나, 곧 러트야. 아마 다음 주쯤 시작될 거 같은데.”
“러트? 러트 사이클?”
“그래. 사이클 오면 며칠 정도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니까 그렇게 알아.”
“며칠이나…? 힘들겠다. 아, 그래도 억제제가 있다고 했지?”
“난 약 먹어도 잘 안 들어. 그냥 버티는 수밖에 없어. 그리고 지금 그게 문제야? 그렇게 상황 파악이 안 돼, 너는?”
“…그럼 뭐가 문젠데?”
“너 말이야. 네가 문제라고. 아무 도움도 안 되는 걱정 듣자고 한 소린 줄 알아?”
“…….”
“나랑 며칠 못 만나게 되면 어떻게 지낼지 대책은 있어? 그사이에 닫는 방법을 제대로 배우든 뭐든, 빨리 무슨 수를 내야 하는 거 아냐?”
그러고 보니 나는 그가 없이는 생활을 유지할 방법이 없었다. 페로몬을 갈무리하지 못하는 이상 학교에 가는 것도 일하는 것도 무리였다. 새삼, 내가 이한에게 얼마나 의존하고 있는지를 실감했다. 심각해진 내 표정이 못마땅했는지, 그는 휙휙 손사래를 쳤다.
“지금 여기 죽치고 있어 봤자 뭐가 해결돼? 방법은 나중에 생각해 볼 테니까. 일단 가. 갈 거면 빨리 가라고.”
“아, 알았어.”
“…….”
“…또 봐.”
어쨌거나 그는 여전히 나의 일을 신경 쓰고 있는 모양이다. 다시 보자고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에, 용기 낸 인사를 남기고 그의 집을 나섰다.
혼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러고 보면 이 집을 나설 때는 늘 이한과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왔었다. 그는 건물 입구에 이르러 늘 나를 먼저 보내고 저 혼자 흡연 구역으로 가 버리곤 했다.
건물 밖으로 나서면서 습관처럼 흘긋 흡연 구역 쪽을 보았다. 제가 내뿜은 담배 연기를 올려다보는 이한의 옆얼굴을 생각했다. 담배를 피우는 그의 모습은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은 다 그래 보이는지, 아니면 그냥 이한이 쓸쓸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그때였다.
“어…? 이게 누구야.”
귀에 익은, 달갑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다. 골목 끝에서 같은 과 아이들이 다가오고 있었다. 하필이면 동기들 중에서도 나를 가장 지독하게 괴롭혀대는 몇 명과 김하민이었다.
못 들은 척 달아나기에는 너무 정면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그들은 순식간에 가까이 다가오더니 나를 둥그렇게 둘러쌌다. 먹잇감의 상태를 살피듯 뾰족한 눈으로 여기저기를 뜯어보는 통에 꼼짝도 할 수 없었다. 한 녀석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가 왜 여깄지? 얘 이쪽 사나?”
너무 당황한 나머지 제대로 반응할 수 없었다. 이한의 오피스텔 건물은 학교 아이들이 자취를 많이 하는 지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었다.
‘지긋지긋한 학교 애들이랑 마주치는 것보단 좀 멀어도 여기가 낫다’라던 이한의 심술궂은 설명처럼, 매일같이 등교 시간에 여길 드나들어도 아는 얼굴을 본 적은 없었다.
이 아이들은 강의가 아직 다 끝나지 않았을 시간인데 왜 뜬금없는 곳을 어슬렁거리고 있는 걸까. 심지어 손에는 술병이 든 편의점 봉투를 들고 있었다. 오늘은 만우절이라 수업도 제대로 하지 않을 거라던 이한의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아니, 얘 거기 살잖아. 난월동 달동네.”
“아아, 어쩐지 빈티가 줄줄 흐르더라.”
“근데 그건 네가 어떻게 알아? 너 이 새끼한테 관심 있냐?”
“씨발, 돌았냐? 그냥 들은 거거든? 일반고 출신 애들이 그러던데.”
“난월동이면 그, 집창촌 있는 동네 아냐? 사는 것도 꼭 자기처럼 지저분한 데 사네.”
“이 새끼도 일족 출신 아니야? 어떻게 일족 사람이 그딴 데 살 수가 있어? 집이 망했나?”
“얘한테 났던 썩은 냄새, 페로몬이 아니라 그냥 구정물 냄새였던 거 아냐?”
학교의 아이들은 종종 대놓고 나의 코앞에서 입에 담지 못할 험담을 하곤 한다. 투명 인간이나, 인간의 언어를 모르는 외계인을 대하는 태도였다. 그래도 그 정도는 참을 만했다. 가난을 물어뜯는 말은 어릴 때부터 지겹도록 들어왔으니까.
“잠깐. 아까 얘, 저기서 나오는 거 같았는데. 저거 서이한 사는 건물 아냐?”
그러나 뒤이은 수군거림에는 당황을 숨길 수 없었다. 이한의 보호를 받는 모습을 들키기라도 하면, 일족의 아이들은 내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알아차릴지도 모른다. 나를 일족의 일원으로 추측한 그들은 안 그래도 나의 정체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이한이 학교에서 나를 모른 체하는 것은 그런 이유였다. 학교의 모두가 나에게 달려들기 시작하면 그조차도 손을 쓸 수 없게 되니까.
“얘 혹시 서이한 만나고 온 건가? 존나 신기한 조합이네.”
“엮을 걸 엮어. 다른 데 볼일이 있었겠지.”
“아니, 여기 살지도 않는 애가 뜬금없이 돌아다니고 있잖아.”
“그러게. 이쪽 골목에 뭐가 있는 것도 아닌데.”
“어, 이 새끼 좀 봐. 얼굴 빨개졌는데. 진짜 뭐 있나?”
나는 흔들리는 표정을 어쩌지 못하고 눈을 굴렸다. 나의 동요를 알아챈 그들은 본격적으로 취조를 시작했다.
“야, 너 저기서 나온 거 맞아? 서이한 만난 거 맞냐고.”
“…….”
“씨발, 이 새끼가 사람 말 또 무시하네.”
“좋게좋게 말하니까 그런 거 아냐. 몇 대 처맞아야 대답이 나올 거 같은데.”
“…저, 저기서 나온 거 아니야.”
목소리를 한참 가다듬고 대답했지만, 불행히도 나는 거짓말을 잘 못하는 편이었다.
“하, 얘 구라치는 거 존나 티 나네. 진짜 수상한데.”
“아, 아니라니까.”
“대답하는 것도 등신 같기는…. 얘 원래 말도 더듬었었나?”
“몰라. 평소엔 말 못 하는 사람처럼 계속 입을 처닫고 있으니까. 길게 얘기하는 걸 본 적이 있어야지.”
잡아떼는 것이 통할 분위기가 아니었다. 나는 어설프게 부정하는 것보다 입을 꼭 다무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했다. 몇 번 더 이어진 질문에 대답하지 않자, 한 녀석이 짜증스레 손바닥으로 내 등을 퍽, 내리쳤다.
“아, 이 쪼다 새끼가 또 쓸데없이 버티고 앉아 있네. 내가 아까 분명히 봤는데.”
“너 왜 말을 안 해? 똑바로 대답해 보라고.”
“그러고 보니까 태형이가 난월역 근처에서 얘랑 서이한이 같이 지나가는 거 봤다고 하지 않았어? 그땐 그게 무슨 개소린가 했는데.”
“맞네. 그때도 둘이 붙어 다니고 있었던 건가 보네.”
“야, 사람이 물어보면 대답을 해야 할 거 아냐.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일 사람 개무시하면서 성질 긁을 거냐고.”
그들은 뭐가 재미있는지 키득거리다가도 돌연 위협적으로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죄를 지은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릴없이 눈동자만 굴리다가, 한 발짝 뒤 편에 서 있는 김하민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오늘도 귀여운 얼굴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끝이 살짝 말려 올라간 도톰한 입술, 분홍빛 뺨. 그러나 커다랗고 동그란 눈동자 안에는 다 타고 남은 재처럼, 매캐한 잔향이 어려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자연스럽게 알 수 있었다. 김하민이 오메가라는걸. 알파들과의 사이에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를 읽은 건지, 아니면 본능적으로 동족을 알아본 건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다만, 후자라면 그도 나를 알아차렸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나를 두렵게 했다. 누구보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내 약점을 쥐고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묘한 눈으로 나를 보던 하민은 갑자기 화사하게 미소 지었다. 그만큼이나 화사한 손길로 옆에 선 아이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언제까지 여기서 이러고 있을 거야? 나 슬슬 지루한데.”
“아, 아니, 가야지, 하민아. 가고 싶으면 얼른 가자.”
“음…. 우리끼리 갈 게 아니라 쟤도 데려가면 재미있을 것 같지 않아?”
“쟤를?”
“응. 나 쟤 술 마시는 거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그가 던진 말에 나머지 아이들은 허둥거리듯 그의 눈치를 보았다. 하민은 스스럼없이 나에게 말을 걸었다.
“야, 한윤오. 우리 지금 낮술 하러 학교 노천강당으로 가는 길이거든. 이 근처를 다 뒤졌는데 낮에 마실 만한 가게가 없더라고.”
“…….”
“그렇게 뻣뻣하게 쳐다보지 말고, 너도 같이 가자. 어차피 할 일도 없잖아. 그치?”
또랑또랑한 목소리에 매서운 기운이 숨겨져 있었다. 권유의 형식을 하고 있지만, 명령이나 다름없는 말이었다. 거절의 말을 하는 게 무서웠지만, 순순히 따라갔다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생각에 나는 무의미한 저항을 했다.
“…싫어.”
“싫어? 하, 얘 웃기네.”
“…….”
“너, 과 모임에도 계속 안 나왔지? 우릴 무시하는 것도 아니고. 대체 왜 그러는 거야?”
그는 햇살처럼 환하게 웃었다. 예쁜 얼굴로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면서. 모임에 나가지 않은 게 아니라 나갈 수 없었던 것이고, 가장 큰 이유가 자기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을 텐데 말이다.
“가자면 가는 거야.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어차피 내 대답을 들을 생각이 없었는지, 그는 뭐라 말을 하기도 전에 돌아섰다. 다른 아이들은 명령을 수행하는 심복처럼 나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그의 뒤를 따랐다.
두 다리로 걷고는 있지만 억지로 끌려가는 자세였다. 그 꼴로 셔틀을 타고, 정문에서 가장 먼 정류장에 내릴 때까지 아무도 나에게 간섭해 주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데리고 학교 안쪽의 노천강당으로 향했다.
인적 드문 잔디밭의 가장 깊은 곳에 자리한 노천강당은 진작부터 원래의 목적대로 사용되는 일이 거의 없는 장소였다. 무성한 잡초, 녹슨 난간, 선득한 공기가 황량한 곳.
처음 와 보는 장소는 아니었다. 이곳의 무대 뒤에 남의 눈을 피해 숨어 있기 딱 좋은 대기실이 있어서 학기 초에는 동기들을 피해 몸을 숨기기 위해 몇 번 여기 왔었다. 인문대 폐건물의 빈 강의실로 주요 은신처를 바꾸고 발길을 끊게 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시계가 고장 나기 며칠 전의 일이었다. 그날, 나는 긴 공강을 버티기 위해 잔디밭을 가로질러 노천강당으로 향했다. 아름드리나무 옆을 지날 때 뜻밖의 인기척을 발견했다. 빈 무대 위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어… 저 사람… 왜 저러지?’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는 예닐곱의 남자들은 지나칠 정도로 즐거워 보였다. 딱 한 사람만 빼고. 무대의 가운데 몸을 웅크리고 있는 작고 가냘픈 남자의 모습이 심상치 않았다.
흐느적거리는 몸 위에는 외투도 걸치지 않았고, 입고 있는 셔츠는 단추가 다 풀어진 상태였다. 그를 둘러싼 남자들은 험악한 소리로 그를 비아냥거리고 윽박질렀다.
‘뭐야, 이 새끼 벌써 취했어? 별로 마시지도 않았는데 시시하게.’
‘얘 완전 맛이 간 거 같은데. 눈 풀린 것 좀 봐 봐.’
‘정신을 못 차리네, 야, 씨발. 똑바로 앉아 보라고. 벌써 눕냐?’
‘야야, 왜 그래. 내버려 둬. 편하게 하라고 알아서 자세부터 잡아 주나 본데.’
‘그래. 이제 술 말고 다른 거 먹고 싶나 보지. 싫은 척 내숭은 혼자 다 떨면서 은근히 밝힌다니까, 얘도.’
그때 누군가가 웅크린 남자의 머리채를 붙잡고 거칠게 바닥으로 처박았다. 붙잡힌 남자는 만취한 건지 제대로 저항도 못 하고 허공에 손을 휘적거리기만 했다. 자리에 있는 누구도 그것을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모두는 폭력의 순간을 재미로, 자극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웃음소리 속에서 남자들은 하나둘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들의 음험한 표정이 멀리까지도 보였다.
더 볼 수가 없어서, 몸을 떨며 뒤돌아섰다. 저 상황에 휘말리면 안 된다는 생각뿐이었다. 멀어져 가는 나의 귓가에 체념하는 듯한, 애원하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었다.
‘알았으니까, 천천히, 한 명씩만….’
그 뒤로 종종 그 일을 떠올렸지만, 애써 심각하게 여기지 않으려 했다. 친구들끼리 티격태격거리는 장면을 오해한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으로 그를 돕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외면하고 있었다.
오메가로 발현되고 나서야 확실히 알았다. 그날 내가 보았던 장면이, 여러 명의 알파들이 한 명의 오메가를 에워싸고 잔인하게 물어뜯는 상황이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오메가와 같은 자리에 앉아 있다. 상황이 비슷한 결말로 치달아가지는 않을까 두려움에 숨죽여 떠는 채로.
“와, 이거 엄살 장난 아니네. 빼지 말고 제대로 마셔, 새꺄.”
옆에 앉은 아이는 나에게 억지로 술을 들이대며 으름장을 놓았다. 나는 주량이라는 개념조차 없을 정도로 술을 마셔 본 적이 없었다. 마실 줄도 모르는 술을 몇 모금 넘기고 나니 목구멍 안쪽에서 불덩이 같은 것이 올라왔다.
마시고 싶지는 않았지만, 성화를 이기지 못해 잔에 입을 대는 시늉을 했다. 제대로 삼키지 않고 잔을 내려놓으려 하자 그는 곧장 손가락 끝으로 내 이마를 투욱, 밀었다.
“대놓고 농땡이치냐? 이 새끼가 예절이 없어, 예절이.”
그는 내가 쥔 술잔을 마주 쥐고는 나의 턱밑에 거칠게 치받았다. 넘쳐흐른 술이 코와 입안으로 밀려들어 왔다.
“쿨럭, 크윽….”
사레가 들려 한참 기침을 했다. 볼이 뜨거워지고 머리가 빙빙 돌았다. 아이들은 그런 내가 우습다는 듯 낄낄거렸다. 두 손으로 땅을 짚고 꾸역꾸역 구토감을 삼킬 때였다.
“흐응, 간지러워….”
가까이에서 교태로운 음성이 들렸다. 술기운에 더욱 촉촉해진 하민의 목소리였다. 그는 한 녀석의 무릎 위에 앉아 그 품 안에 파묻히다시피 안겨 있었다.
“간지러워? 하…. 이래도, 간지럽기만 해?”
“후후… 읏….”
“너 냄새 장난 아니야, 지금.”
이름도 가물가물한 동기 녀석은 하민의 목덜미에 입술을 부비고 있었다. 옆에 앉은 다른 아이도 손을 뻗어 하민의 무릎부터 허벅지까지를 어루만지는 중이었다. 술에 취해 흐려진 머릿속으로도 위화감을 느꼈다.
‘어…. 김하민 조금 전에는 저쪽 자리에서 장승우랑 키스하고 있었던 것 같은데….’
아리송한 기분에 느리게 눈을 깜빡이는 사이 나의 앞에 장승우가 와서 앉았다. 반사적으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는 재단 출신 아이들 중에서도 가장 혹독하게 나를 괴롭혔다.
더구나 무엇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이미 삐딱한 표정이었다. 그는 종이컵에 그득하게 소주를 따르고는 대뜸 나에게 내밀었다.
“마셔.”
도저히 못 마실 양이었다. 안 그래도 술기운에 메슥거리던 터라 차마 잔을 바로 받지 못했다. 꾸물거리는 나를 보고 그는 인상을 썼다.
“씨발, 마시라고.”
“미안. 잠깐만….”
“이 등신 새끼가, 분위기 거지 같이 만드네, 진짜.”
험악한 목소리에 아무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껄끄러운 침묵의 틈에서, 하민은 방울 소리처럼 까르르 웃었다.
“아, 아하하. 하응, 너무 그러지 마. 응…?”
하민은 제가 깔고 앉은 녀석과 끈적하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지고 점막이 비벼지는 질척한 소리가 들렸다.
키스가 이어지는 동안에도, 옆에 앉은 다른 아이는 하민의 몸을 계속 만지작거렸다. 이제는 아예 두 손이 티셔츠 앞뒤로 파고들어 있었다. 하민은 답례라도 하듯 손을 뻗어 나긋나긋 그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중이었다.
모두는 술을 마시는 척하면서도 그곳을 곁눈질했다. 기운을 읽는 게 서툰 나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 자리에 앉은 모든 알파의 페로몬이 날뛰고 있다는 것을.
‘이게… 무슨….’
그들 사이에는 언제나 미묘한 공기가 흐르곤 했다. 하민이 있을 때와 없을 때 아이들의 분위기가 달라진다는 것도, 때때로 느껴지는 팽팽한 긴장감에 성적인 뉘앙스가 있다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나 눈앞에서, 어렴풋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외설적이고 구체적인 형태로 그들의 뒤엉킴을 본 것은 충격적이었다.
제각각의 향기는 서로를 삼키듯 얽히고 섞였다. 찐득해진 그것은 짐승의 아가리처럼 헐떡이고 있었다. 무엇이라도 삼키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이.
그 열기가 나를 향한 것이 아님에도, 나는 금방이라도 휩쓸려 버릴 것 같은 기분에 초조해졌다. 언제 먹잇감이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설익은 본능은 오히려 꿈틀거렸다. 이한과의 접촉으로 페로몬을 다 쏟아 버리지 않았다면 진작 그들에게 정체를 들켜 버렸을지도 모른다.
초조함과 경악 속에서도 나는 사로잡힌 것처럼 하민이 있는 쪽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넋을 놓다가 그만 승우에게 반응할 타이밍을 한참 놓치고 말았다.
“이 새끼가…. 너, 귀먹었어? 내 말이 말 같지도 않아?”
아차, 하고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는 손을 들어 나의 뺨을 내리쳤다. 고개가 깊게 기울어지고 볼이 화끈거렸다. 몇몇이 나를 보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아프고 굴욕적인 기분이었다. 그러나 버거운 술보다는 이미 몇 번이나 당해 본 폭력과 모욕이 쉬웠다. 얼얼한 뺨을 감싸 쥐고도, 나는 저 술은 이제 먹지 않아도 되는 걸까, 짧게 안심했다.
승우는 분이 풀리지 않은 눈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시선을 피하다가 하민과 눈이 마주쳤다.
술기운과 열기에 달아오른 눈, 웃는지 우는지 모를 붉은 입술. 평소보다도 요사스럽고, 평소보다도 불가사의한 얼굴이 두려웠다. 나를 바라보던 하민은 갑자기 저에게 들러붙은 두 사람의 손길을 뿌리쳐 냈다.
“이거 놔.”
“응? 왜 그래?”
“아, 싫어. 놓으라니까. 안 할래.”
앙칼지게 손사래를 친 하민은 갑자기 녀석의 무릎에서 내려앉았다. 당장이라도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일을 벌일 기세였던 둘은 김이 샌 눈치였다. 목덜미가 벌게진 채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갑자기 뭐가 문제야, 또?”
짜증스러운 물음에, 하민은 내 쪽으로 턱짓을 했다.
“쟤가 보고 있어서 안 되겠어.”
그 한마디에 모든 시선의 화살표가 나를 향했다. 나는 붉어진 얼굴을 떨구었다. 홍조 탓인지 취기가 더 독하게 올라오는 것 같았다.
“씨발…. 뭘 훔쳐보고 지랄이야?”
“변태 아냐, 저거? 모처럼 끼워 줬더니 분위기 잡치고 앉아 있네.”
하민을 만지던 녀석들은 나에게 욕을 퍼붓기 시작했다. 다른 아이들도 하나둘 나에게 서슬 퍼런 말을 던졌다.
“야, 안 들려? 뭘 훔쳐보고 있냐고, 이 더러운 새끼가.”
“왜? 너도 끼고 싶어? 좆까고 있네.”
“이 씹새끼가. 꼴리냐? 얘 좀 봐. 눈이 맛 갔는데?”
“얘 지금 선 거 아냐? 너 싸겠다, 아주?”
그들은 나의 주변으로 둥그렇게 모여들었다. 험악하게 인상을 쓴 채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손을 뻗어 툭툭 내 어깨를 건드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두드리는 듯하던 손짓은 이내 나를 밀치듯이, 뒤흔들듯이 격해졌다.
달아올랐던 공기는 일순 난폭하게 들끓었다. 알파들은 일제히 나에게 난폭한 이빨을 드러냈다. 내가 바닥으로 쓰러지면 본격적인 린치가 시작될 게 분명했다.
“잠깐만.”
새침한 하민의 한 마디에, 나를 내리치던 손들이 일제히 멈추었다. 넘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고 버티던 나는 살며시 고개를 들었다.
하민은 자리에서 일어나 발소리를 내지 않는 고양이처럼 사뿐사뿐 나에게로 다가왔다. 나른하고도 예쁜 몸짓이었다. 햇살을 등지고 선 그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그는 그림자 속에서 가면처럼 웃었다.
“다들 왜 그래. 불쌍한 애한테.”
느릿한 목소리에 담긴 것이, 연민이었는지 경멸이었는지. 그는 나의 바로 앞으로 와 앉았다.
“저런…. 꼴이 이게 뭐야, 윤오야.”
하민은 부드러운 손길로 나의 턱을 잡아 올렸다. 이마 앞으로 흐트러진 나의 머리칼을 상냥하게 걷어 올려 주고는 두 눈을 맞추었다.
“아직도 모르겠어? 나는 네가….”
곱게 말려 올라간 입꼬리와는 달리 서늘한 눈이었다. 그는 바닥에 놓여 있던 커다란 술병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직 손도 대지 않았던 술병 뚜껑을 열더니, 내 머리 위에서 술병을 그대로 뒤집었다.
“내 눈앞에서 안 보였으면 좋겠어, 다시는.”
정수리에서부터 알싸한 물줄기가 쏟아져 내렸다. 나는 얼굴로 퍼부어진 술을 피하지도 못하고 두 눈만 질끈 감았다. 얼굴과 목을 타고 마구 흘러내린 술이 윗옷을 흠뻑 적셨다.
머리끝부터 손끝 발끝까지 꽁꽁 얼어붙은 것처럼 한기가 돌았다. 차가운 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싸늘했던 것은 하민의 목소리였다.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란 것은 나만이 아닌 듯했다. 노천강당에는 순간 적막이 감돌았다. 모두를 얼이 빠지게 만든 것도, 그 분위기를 다시 반전시킨 것도 하민이었다. 그가 쿵, 바닥에 빈 술병을 내려놓으며 아이들을 향해 돌아서자, 모두는 거리낌 없이 나를 비웃기 시작했다.
“하하, 얘 좀 봐. 존나 웃겨.”
“술 안 먹고 빼더니 꼴좋다, 새꺄.”
“볼만하네, 진짜. 야, 핸드폰 좀 줘 봐. 사진이나 찍어 놓자.”
시끄러운 웃음소리도 역겨운 알코올 향도 버거웠다. 지독한 현기증 속에서 나는 그저 숨을 허덕이며 앉아 있었다.
“얘는 대체 뭐야? 술도 안 먹고, 변태같이 훔쳐보기나 하고.”
“하민아. 얘 내보낼까?”
“그래, 하는 일도 없는데 꺼지라고 하자.”
“야, 너 분위기 못 맞출 거면 꺼져, 그냥.”
“이 새끼가 또 들은 척도 안 하네.”
“안 들려? 꺼지라고. 당장 나가라니까.”
웅성거림은 나를 밖으로 내모는 쪽으로 흘러갔다. 빨리 나가고 싶은 마음은 나도 굴뚝같았다. 여기 있다 더 험한 꼴을 보느니 쫓겨나는 쪽이 훨씬 나을 테니까.
나는 일어나 보려 바닥을 짚고 버둥거렸지만 취기에 사지를 가눌 수가 없었다. 몸을 들어 올리려다가도 눈앞이 빙글빙글 돌아 자꾸 주저앉았다.
“야, 일어나려면 제대로 일어나던가. 뭐 하는 거야, 지금?”
“얘 걷지도 못하는데? 그냥 여기 구석에 눕혀 놓을까?”
“하민이가 보기 싫다잖아. 밖으로 내보내.”
결국 보다 못한 몇 명이 나에게 달려들었다. 나는 그곳에 처음 올 때처럼 그들에게 억지로 질질 끌려갔다. 다른 점이 있다면, 올 때는 제 발로 걷는 시늉이라도 했지만 나갈 때는 다리가 후들거려 걸음을 제대로 딛지도 못하고 있다는 거였다.
“씨발, 존나 축축해. 야! 똑바로 걸어 보라고.”
“하…. 대꼬챙이 같은 게 은근 무겁네, 이거. 얘 어디까지 데려다줘야 해?”
“어? 저기 저 문 뭐야? 골방 같은 건가?”
“잘됐다. 저것 좀 열어 봐.”
나를 내다 버릴 곳을 찾아 두리번거리던 그들은 무대 뒤의 대기실을 발견했다. 나는 번거로운 짐 더미처럼 대기실 안에 내동댕이쳐졌다. 쿵,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고는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소리가 멀어져 갔다.
나는 먼지 쌓인 콘크리트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눅눅한 바닥에서 찬 기운이 올라왔다. 숨을 고르며 숙취를 가라앉혀 보려고 했다. 홀로 남겨졌다는 기분도, 코를 찌르는 퀘퀘한 내음도 익숙한 것이었지만 나는 여전히 공포감에 사로잡혀 있었다.
나를 가장 힘겹게 하는 것은 무대 위에서 들려오는 거북한 소리들이었다. 웃음소리, 고통스러운 듯한 신음, 흥분된 호흡, 그 사이로 섞여드는 습한 마찰음. 나는 작게 몸을 웅크리고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싫어. 제발….’
그 소리를 듣고 있는 것만으로, 나는 아이들의 손이 나에게 달려들어 나를 할퀴고 어루만지는 듯한 괴로움을 느꼈다. 있는 힘껏 틀어막아도, 온갖 소리는 끈질기게 귓속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내가 어떤 야수의 무리 사이에 끼어들게 되었는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오메가인 아이들은 보통 학교에 다니지 않는다던 이한의 말이 과장이 아니라는 것도. 이곳은 출구 없는 지옥이었다.
내 안에 흐르는 오메가의 피는 더욱 짙어질 것이다. 답도 없는 의문이 쏟아졌다. 이곳에서, 내가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언제까지 사람들의 눈을 피할 수 있을까. 이곳이 아닌 어디라도, 내가 괜찮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 어떻게 되는 걸까.
엄습하는 공포감으로부터 도피하듯 의식을 놓았던 것 같다. 눈을 뜨자, 머리를 쪼개는 듯한 숙취와 두통이 몰려왔다. 어느새 주변에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손바닥만 한 창문 너머의 하늘이 어둑했다.
‘몇 시지?’
그 문장이 머리에 떠오르자마자 화들짝 놀랐다. 핸드폰을 확인하니 과외 시간이 다 지나갔고, 과외 학생에게서 부재중 전화까지 와 있었다. 어지러운 와중에도 나는 꾸역꾸역 사과의 메시지를 보냈다.
다행히 PC방 아르바이트 시간은 아직 넘기지 않았다. 집에 들러 젖은 옷을 갈아입을 시간이 있을지를 생각하며 대기실 출입문까지 비척비척 걸었다.
문고리를 밀고, 다시 당겨 보았지만 당황스럽게도 문이 열리지 않았다. 아무리 애를 써도 잠금쇠를 걸어 놓았는지 철컥거리기만 할 뿐 도저히 열리지 않았다.
‘갇힌 거야…?’
문을 두드려 봐도 밖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다. 정적 속에 쾅, 쾅. 쇳소리만 울려 퍼졌다. 김하민과 그 패거리들은 내가 잠든 사이 이곳을 떠난 모양이었다. 그들이 남아 있다 해도 나를 꺼내 주진 않았겠지만.
노천강당은 인적 드문 잔디밭의 가장 깊은 구석에 있었다. 더구나 그 늦은 시간에 무대 뒤의 대기실 근처를 우연히 지나갈 사람이 있을 리 없었다.
다른 출입구가 없나 두리번거렸지만 사방은 벽뿐이었다. 딱 하나 있는 창문은 머리도 빠져나가지 못할 만큼 작고 너무 높은 곳에 있었다.
혼자 이곳을 빠져나갈 방법은 없어 보였다. 한참 갇혀 있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나는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생각나는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도와줘.]
다짜고짜 이한에게 메시지를 보내 놓고 나는 곧 후회했다. 아무 맥락도 없는 소릴 해 버린 데다, 이미 미안한 게 많은 그에게 또 손을 벌리기 염치없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미안’이라고 다시 메시지를 입력하고 있을 때였다.
[무슨 일인데?]
굼뜬 나의 손가락보다 이한의 답장이 더 빨랐다. 어쩌면 좋을지를 몰라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과 여기로 와 달라는 말을 번갈아 지웠다가 다시 썼다.
[씨발, 또 뭔데 말이 없어.]
재촉하는 말에 안 그래도 놀라고 지친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손이 떨려서 답장이 더 늦어졌다.
[갇혀 있어. 학교 노천강당 대기실에.]
[뭐? 그런 덴 대체 왜 가있어?]
[과 애들 술 마시는 데 끌려오는 바람에.]
[미쳤어? 이 새끼가 겁도 없이, 거기가 어디라고 따라가? 너 그런 자리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나 알아?]
따라간 게 아니라 끌려간 거라고 다시 강조하고 싶었지만, 굳이 비참한 말을 반복할 틈이 없었다. 그는 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다시 나를 채근했다.
[무슨 짓을 당한 건데? 빨리 말해. 얼버무릴 생각 하지 말고 전부 다 말해.]
그의 질문에, 방금 겪은 일들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눈물이 나려는 걸 꾹 참고 적당히 대답했다.
[그냥, 갇혔어.]
[진짜 가지가지 한다, 너. 어디라고?]
[노천강당 대기실.]
[씨발, 거긴 또 어디야…?]
[학교 제일 안쪽에, 잔디밭에 있는 강당 있잖아.]
[아무튼 알았어. 갈 테니까 기다려.]
퉁명스러운 답장을 보자 안도감이 들었다. 사납게 투덜거리면서도, 이한은 또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그가 모질고 두렵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겉으로 무어라 투덜거리든 그가 결국 행동으로는 나를 도와주리라는 것을.
그건 아주 서툰 방식의 상냥함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도 그에게 하지 않아도 될 투정을 부리게 되는 걸지도. 밀어내고 거리를 두다가도 결국 그를 찾게 되는 건, 나 역시도 아주 서툰 방식으로 그에게 의지하고 있다는 의미일 수도 있다.
작은 창밖의 해는 빠르게 저물었다. 창고 안이 어둠으로 가득 차자, 콘크리트 바닥에서 더욱더 차가운 기운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술독에 빠진 생쥐 같은 몸이 덜덜 떨렸다. 추위 탓인지, 겨우 가라앉혔던 설움이 다시 일어났다.
‘뭘 이런 걸로 호들갑이야. 더 심한 일도 많이 겪어 봤는데….’
평소 같으면 삼키고 넘어갈 일이었다. 울 일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하염없이 이한을 기다리는 동안 자꾸만 코끝이 시큰해졌다.
그가 곧 온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서글픔이 함께 느껴졌다. 이내 기다림도 공포감도 나아지리라는 걸 알면서도, 밀려오는 감정을 막을 길이 없었다. 나는 그가 내 곁에 와 주어야만 끝날 것 같은 감정의 파도 속에서 일렁거렸다.
나는 정적 속에서 춥고 작은 내 몸뚱어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무방비하게 풀어 헤쳐지는 마음을 느끼며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기댄다는 일이 사람을 이렇게 연약하게 만드는구나, 하고.
철컥철컥, 문이 흔들리는 소리에 심장도 흔들렸다. 무겁게 닫혔던 문이 열리자, 어둠 속에서도 선명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보는 내가 마음 아플 정도로 일그러진 얼굴이었다.
“너… 꼴이 이게 뭐야?”
일어나려다 힘없이 다시 주저앉는 나의 팔을, 그가 굳게 붙잡았다.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괜찮다고 웃어 보이려고 했는데, 오히려 눈물이 날 것 같아서 입술을 꼭 다물었다.
“씨발, 다 젖었잖아. 이러고 있는 거였으면 옷이라도 가져다 달라고 말을 하던가.”
허둥거리던 이한은 제 저지 집업을 벗어 내 어깨 위에 덮어 주었다. 내가 아는, 익숙한 그의 냄새가 묻어 왔다. 참으려고 했는데 눈물이 찔끔 새어 나왔다.
우는 얼굴을 가리려고, 아니, 실은 그의 체온에 더 깊게 기대고 싶어서, 나는 두 팔을 들어 와락 그를 끌어안았다. 명치부터 목구멍까지가 울먹임으로 따끔거려서, 한 마디를 뱉는 게 너무 힘겨웠다.
“고마워.”
“…….”
“흑, 와 줘서, 와 줘서… 고마워.”
그러고 나서는 해일 같은 울음이 밀려 나왔다. 엉엉 우느라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그는 당황한 듯한 태도로 내 어깨를 만지작거리다가 머뭇머뭇 내 등 뒤로 손을 둘렀다. 커다랗고 단단한 손이 등줄기를 찬찬히 쓸어내렸다. 그것이 더 서러워 울음이 그치지 않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그의 품이 따뜻했다. 온기가 내 안의 서러움을 다 누그러뜨려 줄 것 같아서, 그에게 안겨 실컷 울고 나면 모든 게 괜찮아질 것 같아서 나는 한참을 그렇게 목을 놓아 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