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3 : 이한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기다리는 그 시간 동안은, 내 인생의 주인이 그 누군가로 바뀐 듯한 기분이 된다. 혼자가 익숙한 나는 그게 낯설고 불편했다.
월요일 아침, 눈이 떠진 탓에 일찍 등교 준비를 마쳤다. 약속 시간이 다가오자 신경은 점점 팽팽하게 당겨졌다. 담배 생각이 간절했지만, 곧 도착할 그 애 때문에 밖에 나갈 수 없다는 게 짜증스러웠다. 물이 끓기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나는 현관을 쏘아보고 있었다.
띵동.
초인종 소리가 유달리 컸다. 문을 열면, 그 앞에 한윤오가 서 있다. 얼음 여왕의 키스를 받은 아이처럼 파리한 얼굴이다. 아직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험한 짓이라도 당한 것처럼 이미 겁에 질려 있는 표정. 저 표정이 오히려 사람을 부추긴다는 걸 모르는 걸까.
“으, 후으….”
우악스레 그 애의 팔을 당겼다. 가벼운 몸은 너무도 쉽게 감겨들었다. 안는 감촉이 품에 착 달라붙는 것과는 달리, 그 애의 키스는 형편없이 서툴렀다.
몇 번 입술을 겹쳐 봤지만 나아지는 건 전혀 없었다. 입술을 빨고 있어도 끈적한 갈증이 느껴지는 건 엉망인 그 애의 솜씨 탓일 거다.
어설프게 나를 따라붙는 그 애의 혓바닥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말캉한 입안 곳곳이 어제의 상처로 찢겨 있다. 어루만져 주기는커녕, 나는 집요하게 상처가 있는 곳을 골라 핥아 내렸다. 그 애는 날갯죽지를 찔린 아기 새처럼 어깨를 파닥거렸다.
도무지 분이 풀리지 않았다. 고작해야 어설픈 입맞춤에 피가 더워지고, 갈증은 점점 더 심해지기만 했다. 마음만 먹으면 터트려 삼켜 버릴 수 있는, 그러나 결코 삼켜서는 안 되는 무언가를 입에 넣고 굴리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핥고 물어뜯어도 감질나는 기분은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나는 화풀이처럼 거칠게 입술을 떼어 내고 그 애를 노려보았다. 밴드니 호흡이니 괜한 트집을 잡는 나에게, 그 애는 숨도 다 고르지 못한 채 웅얼거렸다.
“…미안해.”
또다. 저 굳은 얼굴. 나는 저 얼굴이 거슬려서 도무지 참을 수가 없다. 언뜻 보기에는 애처롭게 주눅 든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도도한 얼굴이다. 그 애도 나처럼, 마음 깊은 곳으로부터 저를 숙이는 방법을 모르는 모양이다.
처연하게 가라앉아 있다가도, 이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눈을 반짝거리는. 저를 도우려는 나의 말에는 오히려 왈칵 눈꼬리를 치켜들고 되받아치는. 화가 나서 조금만 이를 드러내면 금세 내가 뭘 잘못하기라도 한 것처럼, 원망스럽다는 듯 나를 보는 저 얼굴.
“할 거 다 했으면 나가.”
계속 달아나고 싶은 표정을 지어 놓고, 그 애는 정작 가라는 말에 멈칫거렸다.
“이 정도면 오늘 페로몬은… 괜찮은 거야? 나, 새벽까지 아르바이트하는데….”
기어이 도발까지 한다. 뭘 몰라서 그러는 거라지만 그 애는 좀 심하게 구는 중이었다.
본능이라는 것은 정직하고 단순했다. 그 애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그 애의 페로몬은 그 애가 내 집에 발을 들인 순간부터 쉬지 않고 나를 유혹하고 있었다.
깨물린 사과의 단면에서 배어 나오는 듯한 달콤하고 아릿한 향기. 들쑤셔진 충동을 견디기 힘들었다. 나는 고개를 기울이고 들개처럼 코를 킁킁거리며 페로몬을 맡는 시늉을 했다.
“글쎄. 키스 한 번으로 새벽까지는 가라앉을진 모르겠는데.”
의뭉을 떠는 말에 그 애는 동요했다.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떨림이 욕정과 심술을 더 부추겼다.
“불안하면 한 발 빼고 가던가.”
“응…?”
“바지, 벗어.”
흔들리던 그 애의 눈동자는 이내 체념하는 빛이 되었다. 그 애는 머뭇머뭇 청바지의 버클을 풀었다. 낡은 바지가 구겨져 내렸다.
뼈가 뾰족하도록 메마른 다리를 눈으로 훑었다. 훑는다기보단 차라리 핥는 듯한 시선이었다. 머릿속엔 오직 어디까지 그 애를 만져도 될지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그 애는 한참 동안 제 속옷을 벗지 않고 만지작거리며 시간을 끌었다. 참다못해 한 걸음 다가서자 그 애는 슬쩍 뒤로 물러섰다. 사람 돌게 만들 때는 언제고, 다시 새침한 태도였다.
“저…. 이런 건, 아무래도….”
“새벽까지 일한다며. 더 하자고 할 땐 언제고.”
“…….”
“내일 아침까지는 눌러 놔야 할 거 아냐. 여기 다시 올 때까지.”
“그, 그래도, 여기서, 이렇게는….”
“씨발, 가지가지 하네. 그럼 뭐. 침대에라도 데려다 달라고?”
거부의 말에 분노부터 치밀었다. 한 손은 그 애의 팔목을 틀어쥐고, 다른 손은 그 애의 다리 사이로 가져갔다. 속옷 위로 윤곽이 드러난 페니스를 거칠게 움켜쥐었다. 애무도, ‘성적 접촉’도 아니라 그냥 괴롭힘에 가까운 움직임이었다.
“으윽…!”
“아니면, 듣기 좋은 말이라도 해 달라는 거야, 뭐야?”
“크… 으으….”
“입장을 반대로 생각하는 거 아냐? 꼬시는 말을 하려면 네 쪽이 나한테 해야 하는 걸 텐데.”
나는 가차 없이 꾸욱꾸욱, 그 애의 중심을 잡아 비틀었다. 꽤나 고통스러울 텐데도, 자존심이 센 그 애는 애원하지도 비위를 맞춰 주지도 않았다. 작은 입술을 꼭 깨물고 억지로 신음을 참다가 끝내 눈물을 터뜨렸을 뿐이다. 꽃이 툭, 하고 꺾여 떨어지는 것처럼.
“으…윽, 흐으윽….”
이 방에 들어온 뒤 내 몸에 손끝도 대지 않고 꼿꼿하게 서 있었던 그 애는 그제야 쓰러지듯 나에게 기대 왔다. 가슴팍부터 허벅지까지가 바들바들 떨리는 걸 보면 기댔다기보단 그냥 중심을 잃은 걸지도 모른다.
나는 못마땅한 건지 만족한 건지 모를 기분으로 혀를 찼다. 사타구니를 짓이기던 손을 떼어 내자, 애매하게 발기한 그 애의 것이 보였다. 이 와중에도 묘한 흥분을 느끼는 스스로가 짐승 같았다.
눈물을 한껏 머금은 그 애의 눈동자가 나를 바라본다. 안도하는 것 같기도 하고, 불안해 보이기도 한다. 더 짓눌러 버리고 싶지만, 그랬다간 멈추고 싶지 않게 될 거다.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냈다. 한 개비를 입에 물다가, 집 안에서 피울 수는 없다는 걸 떠올리고 필터 끝만 잘근거렸다.
“하여간, 분위기 거지같이 만드는 데는 뭐 있다니까….”
“…….”
“흥이 깨졌어. 나와.”
우는 그 애를 혼자 내버려 두고 밖으로 나왔다. 화풀이를 한 셈이지만 기분은 조금도 후련해지지 않았다. 나는 누구에게 하는 건지 모를 욕지기를 속으로 되풀이했다.
금방 뒤따라올 줄 알았는데, 엘리베이터를 두 번 내려보내도록 그 애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초조하게 물어뜯은 필터가 다 뜯어져 너덜너덜해졌다.
다시 가서 데리고 나와야겠다고 생각할 때에야 그 애는 눈가와 코끝이 발그레한 채로 복도에 나왔다. 눈물을 훔치다 나왔을까. 아니면 쥐어뜯긴 성기를 가라앉히는 데 시간이 필요했을까. 미안한 기분에 더 퉁명스레 물었다.
“뭘 꾸물거려?”
“…미안,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어.”
별로 그 애를 기다렸던 건 아니라고 스스로를 기만하면서, 나는 엉망이 된 담배를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너, 강의 끝나고 집에 가는 길에 여기 들러.”
“왜…? 아직 부족…해?”
“…밖에서 또 무슨 짓을 당해도 상관없으면 마음대로 하던가.”
원래 말본새가 사나운 편이지만, 그 애의 앞에서는 더 꼬인 말만 뱉게 되었다. 더구나 사실도 아니었다. 그 애의 페로몬은 내일 아침까지 아무 문제 없을 정도로 다 가라앉았다.
그 애의 입술이 달싹, 달싹. 꽃잎처럼 흔들렸다. 아주 상냥하고 나약한 말이, 나에게 의지해 주는 예쁜 말이 흘러나오면 어울릴 것 같은 보드라운 입술. 그러나 정작 그 애가 하는 것은 기대와는 달리 늘 뻣뻣하고 애교 없는 말들이다.
“강의 끝나면 바로 과외 가고, 그다음엔 새벽까지 아르바이트가 있어. 시간 간격이 30분 정도씩밖에 안 돼서….”
“하, 뭘 얼마나 길게 할 작정이길래.”
곧이곧대로 제 하루를 보고하는 게 아니꼬웠다. 한껏 냉소한 말에 그 애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그럼 그냥 과외 끝나고 내가 여기로 올게.”
“아르바이트란 건 뭔데?”
“…PC방.”
“학교 쪽?”
“집 쪽인데.”
“혹시 어제 그 카페 근처야?”
태평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이 어이없었다. 그 애는, 어젯밤에 저를 덮친 알파의 주변을 계속 얼쩡거리겠다는 터무니없는 말을 하고 있었다. 알파라는 게 얼마나 삐뚤어진 존재인지. 눈앞에서 먹잇감을 놓친 알파가 얼마나 집요해질 수 있는지 모르는 모양이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막막해서 설명을 포기했다. 어차피 내 말이라면 콩으로 메주를 쑨대도 믿지 않을 애니까.
“내가 그쪽으로 갈게.”
“PC방에? 왜…?”
호위를 자처한 셈이었지만, 그 애는 고마워하기는커녕 이해가 안 간다는 눈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간다면 가는 줄 알아.”
짜증스레 대꾸하며 엘리베이터에 탔다. 1층에 내려선 시간은 1교시 시작 25분 전. 다행히 한 대를 피울 시간 정도는 되었다. 담배가 말려 죽을 지경이었던 나는 공동현관 앞 흡연 구역에 멈춰 섰다.
“학교 안 갈 거야?”
골목을 향해 걸음을 디디던 그 애가 나를 돌아보았다. 초봄의 아침 공기 속, 그 애의 비스듬한 얼굴이 금방이라도 햇살에 바스러질 듯 시리고 여렸다.
사실은 부드럽게 대답하고 싶었지만 나는 또 짜증을 부렸다. 다정하게 굴었다간 자칫 무엇인가가 영영 돌이킬 수 없이 잘못될 것 같아서.
“미쳤어? 애들한테 같이 다니는 걸 보여서 어쩌려고? 차라리 오메가로 발현했다고 대자보를 붙이지그래?”
학교의 애들은 안 그래도 그 애의 꼬투리를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다. 무언가 달라졌다는 걸 들켜서 위험해지는 건 내가 아니라 그 애 쪽이다. 맞는 말을 하는데도 그 애는 샐쭉한 표정으로 돌아섰다.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참고, 그 애가 멀어져가는 꼴을 지켜보았다. 그 애를 이루는 모든 것들이 신경을 건드리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마음에 들지 않는 건 저 뒷모습이다. 심장을 긁고 지나가는, 길고 가느다란 그림자.
일진이 사나운 하루가 되려는지, 담배 맛이 유달리 썼다. 저런 덜 떨어진 오메가 따위에게 신경을 쓰는 게 아니었다.
그래. 덜떨어진 오메가. 처음 그 애를 봤을 때부터, 나는 그렇게 생각했다. 어디서 갑자기 저런 덜떨어진 오메가가 나타났지, 하고.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뒤섞인 하늘이 희었다.
* * *
머릿속이 아주 뿌연 날이었다. 며칠째 잠을 설치다가 아침부터 병원을 찾았지만 밉살맞은 주치의는 말을 듣지 않았다. 진료실에 앉자마자 수면제를 찾는 나에게, 재훈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됩니다. 수면제에 내성 생기려고 해서 끊은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약을 달래요?”
“씨발…. 그렇게 말할 줄 알았어요. 괜히 왔네.”
“말 좀 예쁘게 하세요. 누누이 말하지만, 수면제에 의존할 게 아니라 규칙적이 생활패턴이 중요하다니까요.”
“잠을 못 자는데 어떻게 규칙적으로 생활해요? 전에 먹던 약이 내성 때문에 안 되는 거면 다른 약을 주던가요.”
“다른 약도 비슷해요. 게다가 알파들이 먹어도 되는 약이 한정되어 있다는 거 알잖아요.”
“그놈의 좆같은 페로몬….”
“쓰읍, 말 좀.”
“하… 진짜.”
“…다음 러트도 혼자 보낼 겁니까?”
“이제 그런 문제까지 간섭해요? 왜요. 회장님이 또 오메가 렌트보이라도 보내 주신답니까?”
투덜거리는 나를 타이르듯, 그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잔소리가 골치 아파도 재훈에게 정말로 대들 생각 같은 건 없었다.
재훈의 아버지는 본가의 운전기사였다. 재훈은 대학 시절 본가에 딸린 별채에서 생활했고, 의대를 졸업하고 의사가 된 이후로는 자연스레 가문의 주치의 겸 서 회장의 비서가 되었다. 나의 생부, 서 회장은 그런 재훈을 대단히 흡족하게 여겼다.
서 회장은 분에 넘치는 가문의 여자와 결혼해 ‘서경제약’을 물려받았다. 서경제약은 평범한 제약회사처럼 억제제와 상비약을 만드는 회사였지만, 서 회장이 실권을 잡은 후 회사의 가장 큰 수입원은 일족들 사이에 거래되는 최음제가 되었다.
서 회장은 수상쩍은 약을 팔아 번 돈으로 매춘이나 사설 도박장 사업을 굴렸다. 말은 기업인이지만, 실상은 깡패나 다름없는 놈이었다.
‘얌전히 굴지 못하겠으면 제발 가만히라도 있어라. 이제 우리 가문도 품격을 생각할 때니까 말이다.’
내가 눈에 거스르는 짓을 할 때마다 서 회장은 매번 거드름을 피우는 듯한 말로 타이르려 들었다. 품격이라니, 웃기지도 않는 일이었다.
서 회장은 일족 내부에서 공공연히 졸부 취급을 받는 게 못마땅했는지 점점 명성까지 탐하기 시작했다. 망해 가는 병원을 인수해 병원장 직함을 달더니, 천랑 사학재단의 이사회까지 진출했다. 재훈은 그 모든 과정에서 서 회장의 손발이 되어 큰 역할을 했다.
본가의 신뢰를 받는 그가 방패막이 노릇을 해 주었기 때문에, 나는 형식적으로나마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여섯 살 때 본가로 끌려들어가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던 나에게 큰형 역할을 해 준 것도, 이 년 전 소동을 일으키며 집을 나왔을 때 뒷수습을 해 준 것도 모두 그였다. 짜증은 나지만 고마운 사람이라는 걸 부인할 수 없다.
“페로몬의 불균형도 수면의 질에 영향을 주니까요. 억지로 버티기만 하니 몸이 남아날 리가 있습니까?”
“억제제가 안 듣는데 어떡해요, 그럼.”
“…제대로 된 짝을 만나라고 하면, 안 듣겠죠?”
되지도 않을 소리에 짜증이 치밀어올랐다. 담배가 든 주머니를 뒤적거리자 재훈은 가차 없는 손길로 내 손등을 내리쳤다.
“아! 말로 해요, 좀.”
“건물 내에서는 금연입니다.”
“그럼 나가서 피울게요.”
“그것도 안 돼요. 흡연은 불면증에 안 좋습니다.”
“하….”
“오늘 OT죠? 태워다 줄게요.”
“뭘 태워다 줘요? 일 안 하세요?”
“잠깐 다녀오죠, 뭐.”
“그러게 내가 차 사고 싶다는 건 왜 말렸어요? 괜히 형만 번거롭잖아요.”
“내가 말했죠. 이한 군 성질머리 보면 적어도 스물다섯 살 될 때까지는 운전 안 하는 게 좋을 것 같다니까요.”
“씨발, 애 취급은 가지가지로 한다니까.”
“말 좀, 제발. 그리고 애 취급하는 거 아닙니다. 안 태워다 주면 다른 데로 내뺄 것 같아서 그래요.”
속마음을 들킨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재훈이 등을 떠밀지 않았다면 OT에 갈 생각 따위, 아니 애초에 대학에 갈 생각 따위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애 취급 하는 게 아니라고 해 놓고서는, 차에 타기 무섭게 재훈은 학부모 같은 오지랖을 부렸다.
“같은 과에 누가 갔었죠? 3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도 좀 있습니까?”
“같은 반이었던 애들이 있긴 해요. 친구는 아니지만.”
“다행이군요.”
“다행은 무슨. 진학하는 오메가가 전교에 딱 한 명인데 하필 우리 과에 걸렸단 말이에요.”
“오메가가 뭐 어때서요?”
“싫어요.”
딱 잘라 대답하는 말에, 재훈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괜히 라디오 버튼을 건드리고, 코끝을 만지작거리며 딴청을 피우다가 슬그머니 질문했다.
“…아버지 때문에?”
재훈은 서 회장에 대해 묻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서 회장을 결코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는 것처럼, 재훈도 나의 앞에서는 그를 ‘회장님’으로 불렀다. 재훈이 조심스레 언급한 ‘아버지’는 나를 낳은 오메가를 의미하는 거였다. 이야기하고 싶지도 않은 그 사람.
나는 그에 대한 기억을 가슴의 밑바닥으로 꾹꾹 밀어 넣으며 거칠게 대답했다.
“기억도 안 나는 사람이 뭘 어쨌다고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이해가 안 되니까. 이해 못 할 것들은 어떻게 좋아합니까?”
“오메가인 게 문제가 아니라, 타인을 이해하기 어려운 건 원래 당연한 일입니다.”
“아뇨, 알파는 이해할 수 있죠. 알파들이 하는 짓거리는 뒤죽박죽인 것 같아도 결국 그냥 다 제 좆대로 구는 거니까.”
“하, 일리는 있네요. 그치만 이해가 된다고 해서 알파들을 좋아하는 것도 아니지 않아요?”
“당연하죠. 알파는 인간말종 이기주의자들이에요. 날 포함해서.”
나는 거리낌 없이 빈정거렸다. 집에서 내놓은 자식인 나는 세상에서도 내놓아진 사람 같았다. 꼴리는 대로 으르렁거리는 나를 누구도 좋아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적대감 따위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래 살아온 것은 아니지만 살아 볼수록 세상은 거지 같고, 거지 같은 세상을 살 만하게 해 줄 존재 따위도 없었다. 멍청하게 몰려다니는 일족의 애들은 신물이 날 만큼 지긋지긋했고, 그렇다고 일족 밖의 아이들과 어울릴 마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재훈은 늘 그런 나를 걱정했다. 타인에게 호감은 몰라도 최소한의 관심 정도는 가져야 한다고 잔소리를 해 댔지만 나는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오늘도 그가 같은 말을 반복하려던 찰나, 다행히 차가 학교 정문 근처에 다다랐다. 한숨을 쉰 그는 천랑대 정문을 흘긋거리며 물었다.
“집합장소가 어디죠? 잔디밭? 경제학과 쪽?”
“그냥 여기 내려 주세요.”
“정문부터 걷긴 멀 텐데요. 천랑대 3대 바보 중 하나가 택시 타고 정문에 내리는 사람인 거 알아요?”
“애새끼같이 보호자 차 얻어타고 온 게 쪽팔려서 그러잖아요.”
“애 취급하는 거 아니라니까요. 아무튼, 잘 다녀오세요. 제대로 출발했는지도 확인해 볼 거니까 땡땡이치면 안 됩니다.”
애 취급하는 거 아니라면서, 재훈은 차에 내릴 때까지 잔소리를 했다. 예리한 말이긴 했다. 정문을 보자마자 학교 근처의 자취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졌으니까.
천랑성을 형상화했다는 커다란 정문은 흉물스럽고, 경제학과 건물까지는 재훈의 말대로 걸어서 한참 가야 했다.
툴툴거리며 걷던 나는 문득 몇 발짝을 앞서 걷는 남자애를 발견했다. 정문부터 경제학과까지 걸어가려는 ‘천랑대 3대 바보’가 나뿐인 건 아닌 듯했다.
낡은 외투를 입고 커다랗고 낡은 가방을 등에 짊어진 아이. 그 애의 뒷모습을 본 순간, 나는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처음 보는 오메가다.’
머리보다는 본능에 의해 떠오른 생각이었다. 흐릿하지만 발현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오메가의 풋내가 느껴졌다.
‘저건 또 뭐야? 어디서 저런 게 나타났지?’
이상한 일이었다. 랑족 출신들은 싫든 좋든 모두 재단의 학교에 다닌다. 대학까지 들어와 갑자기 새로운 일족의 아이가 튀어나왔을 리가 없었다.
어릴 때부터 오메가로 발현될 기미가 뚜렷한 애들을 아예 학교를 보내지 않는 경우가 있다고는 들었다. 그러나 그런 아이라면 뒤늦게 대학에 올 리는 없었다. 멀쩡하게 중,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오메가로 발현된 애들조차 진학을 포기하기 일쑤니까.
내가 수상쩍다는 눈으로 뒤에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그 애는 힘없는 걸음걸이로 학과 건물로 향했다. 가느다란 뒷모습이 계속 눈앞을 맴돌았다. 풋내치고는 제법 달싹한 향기, 희게 드러난 뒷목, 여린 어깨.
저 녀석은 여태 어디 숨어 있다가 이제 와 알파 소굴에 기어들어 온 걸까. 본의 아니게 남의 뒤를 따라 걷고 있는 탓인지, 자꾸 음습한 상상이 들었다. 어쩌면 저 아이는 가문에 의해서나 오메가 애호가에 의해 남몰래 키워지다, 그들의 변덕으로 뒤늦게 세상에 내놓아진 것 같았다.
‘꼴이 저게 뭐야? 어떤 좀생이 변태 새끼가 키우다 내보낸 건지 몰라도, 대학까지 보내 줄 거면 제대로 된 옷이라도 입혀 줄 것이지 웬 누더기 같은 걸….’
몸의 태는 우아해 보였지만, 옷차림은 눈에 띌 정도로 후줄근했다. 남루한 꼴이 거슬려서인지 페로몬 사이로 악취가 스며오는 느낌이었다.
밤을 하얗게 새운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 왔다. 그 애가 학과 건물에 다다를 무렵, 나는 그 애에게서 신경을 끄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누구와도 가까워질 마음은 없지만, 특히나 저렇게 골치 아파 보이는 녀석과 엮여서 좋을 리 없다.
집합 장소에 다다라, 나는 곧 쓸데없는 행사에 참가한 것을 후회했다. 그 나물에 그 밥 같은 아이들은 매일 똑같은 개소리를 시시덕거려 댔다. 버스에서는 자는 척 눈을 감고 있다가, 숙소의 배정된 방으로 올라갔다.
도착하자마자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하며 방구석에 몸을 구기고 앉아 있었다. 누군가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뜻밖의 낭패감을 느꼈다.
‘왜 하필….’
그 골치 아파 보이는 녀석이 같은 방으로 들어왔다. 싫은 느낌에 표정을 굳혔는데도, 그 애는 눈치도 없는지 곧장 내 옆으로 와 앉았다. 심지어 뚫어지도록 나를 바라보기까지 했다.
깊게 반짝이는 눈길을 피해 시선을 떨구었다. 그 애의 가슴에 붙은 이름표에 눈이 닿았다. 한윤오. 그 애의 이름이었다. 기억할 필요도 없으니 기억하지 않으려고 해도 소용없었다. 그 세 글자가 뇌리에 콱콱 박히는 것 같았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땐 눈치채지 못했는데, 그 애에게서는 뭐라 말할 수 없이 끔찍한 냄새가 났다. 일족이라면 누구나 진저리를 칠 만한 역겨운 냄새였다. 영문을 모르고 인상을 쓰던 나는 곧 그 애가 왜 그런 냄새를 뒤집어쓰고 있는지 눈치챘다.
‘얠 가둬 놓고 키우던 새끼가 누군지는 몰라도, 아주 멍청한 놈은 아니었나 보네. 이 정도 악취면 얘가 오메가인지도 모르고 넘어가는 애들도 있겠는데.’
그 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한 표정이었다. 민망할 정도의 악취는 곱상한 얼굴과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뒷모습만 봐도 몸의 태가 단정해 보인다 싶었는데, 코앞에서 보니 확실히 오메가치고도 눈에 띄는 외모였다.
투명한 피부와 찰랑이는 갈색 머리칼. 유난스레 길고 촘촘한 속눈썹과 오똑한 콧등. 깊은 눈망울은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처럼 촉촉하고 연약했지만, 꽃잎을 꾹 눌러놓은 듯 굳게 다문 입술은 고집스러워 보이기도 했다.
시선이 붙들린 것처럼 그 애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예쁜 얼굴에 약한 편은 아니고, 오히려 오메가 특유의 색기는 질색하는 편인데도. 무례할 정도로 빤히 보다가 다른 아이들이 방으로 들어오는 소리에 겨우 시선을 거둘 수 있었다.
‘또 그 지긋지긋한 새끼들이네.’
방에 몰려든 것은 김하민과 그 패거리들이었다. 안 그래도 꼴 보기 싫은 놈들인데, 그놈들에 주눅 든 그 애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짜증은 더 커졌다. 벌써부터 무언가 말려 버린 듯한 느낌에 속이 부글부글 끓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그 애에게 시비를 걸든 낄낄거리는 새끼들에게 주먹을 꽂든 사고를 치게 될 것 같았다. 꺼림칙한 예감에, 나는 도망치듯 방 밖으로 나왔다.
그래놓고도 오후 일정 내내 홀린 것처럼 계속 눈으로 그 애를 쫓았다는 게 정말 한심한 일이었다. 변명하자면 OT 일정은 너무도 지루했고, 그 애는 묘하게 사람 눈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애쓴다, 아주.’
그 애는 어떻게든 일반고 출신 아이들에게 섞여 보려 노력하고 있었다. 어리바리해 보이는 것치곤 괜찮은 전략이었다. 재단 아이들에게 정체를 들킨다면 순식간에 사냥감 신세가 되겠지만, 페로몬을 못 느끼는 유인원족 사람은 그 애에게 묻은 악취를 맡지 못할 테니까.
그러나 필사적인 노력에도 그 애는 끝내 아이들 사이에 섞이지 못했다. 저녁을 먹을 무렵에는 완전히 외톨이가 되어 있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양새를 보니 상심이 큰 듯했다.
지루하고 불편한 일과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갔다. 방의 공기도 불편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김하민과 그 추종자들은 나와 거리를 두고 반대편 벽 부근에 모여 앉아 있었다. 술이 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시덕거림이 이어졌다.
“이 방엔 선배 누가 오는 거지?”
“만만한 사람 들어오면 좋겠다. 베타 선배도 몇 명 있는 것 같던데.”
“근데 아까 그 냄새 나는 앤 어디 갔지?”
“그러고 보니 안 보이네. 토꼈나?”
“그 냄새는 대체 뭐야? 생각만 해도 토 쏠리네, 씨발.”
“날 때부터 등신이던지 뭘 잘못 건드린 거겠지.”
“원래 베타인데 가짜 호르몬제 같은 걸로 억지로 발현시켜 보려다가 좆된 케이스 아냐? 가끔 그런 사기에 속는 놈들 있다던데.”
“아, 나 친척 중에도 있었어. 페로몬이 어떻게 된 건진 몰라도 아주 썩은 내가 나더라고.”
“걘 뭐 하다가 갑자기 나타난 거야? 다른 방 애들도 다 처음 보는 애라던데.”
“애가 변변치 않으니까 어느 가문에서 숨겨 두고 있었겠지, 뭐”
“걔, 한 씨였나? 혹시 한성기업 사생아 아냐?”
위장막 탓인지 아무도 그 애의 정체를 알아차리지 못한 듯했다. 그들은 멋대로 수군거리면서도 나를 흘긋거렸다. 내가 무언가 정보를 주지 않을지 기대하는 눈빛이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할 생각이 없었다. 그 애가 오메가라는 걸 알려 봤자 지저분한 소동이 일어날 뿐이니까.
대화가 소득 없이 헛돌자 아이들은 화제를 슬금슬금 옮겨 갔다. 그 방에는 여섯 명의 알파와 한 명의 오메가가 있었다. 무료해진 늑대들은 익숙한 먹잇감을 씹고 싶어 했다.
무리의 여왕벌처럼 군림하고 있다 해도, 김하민은 결국 오메가였다.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뺨이 벌겋게 달아오른 한 녀석이 지분거리며 운을 뗐다.
“오늘 재미있겠다. 지난번에 하민이 취했을 때도 진짜 쩔었는데.”
“백일주 마셨을 때지? 씨발, 나 그때 러트 사이클 망가져서 수능도 못 볼 뻔했잖아.”
“그때 옥상 우리가 어질러 놓은 거 선생님들도 모르는 것 같았지? 알고도 봐준 건가?”
“야, 그만해, 좀. 이 새끼는 그때 일 얘기만 들어도 질질 싼다고.”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속에서, 김하민은 대답 없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옆에 앉은 장승우는 여지없이 라이터를 들이밀었다. 고개를 뻗어 불을 받은 하민은 장승우의 얼굴 위로 담배 연기를 내뿜었다. 손마디로 그의 턱을 은근히 쓸어내리며, 하민은 속닥거렸다.
“왜 시시하게 굴고 그래, 다들. 오늘만 날인 것도 아닌데.”
느리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지만, 그건 미소가 아니었다. 속을 알 수 없는 뱀 같은 녀석이다. 못마땅한 기분이 표정으로 드러났는지, 하민은 불쑥 내게로 화살을 돌렸다.
“서이한 넌, 또 분위기 깰 거면 그냥 지금 나가지 그래?”
그 말에, 나머지 아이들도 모두 고개를 돌려 나를 보았다. 방의 공기는 이미 너저분하게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본능적인 거부감과 욕지기가 속에서 득시글거렸다. 이곳에 더 머무를 이유는 없었다. 대학 생활도 고교 시절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걸 확인하는 데는 한나절이면 충분했다.
돌아갈 생각으로 가방을 들고 복도로 한 발을 내딛는 순간, 하필이면 그 덜떨어진 오메가와 마주쳤다.
“아, 저기….”
그 애는 도움이라도 청하는 듯한 눈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작은 머리통에 들어찬 생각이 눈동자로 다 새어 나오는 것 같았다. 처음 만난 사람에게 저렇게 솔직한 눈을 보여 주다니, 제정신인가 싶었다.
랑족의 사회는 좁고 폐쇄적이다. 언제 어떻게 엮일지 모르는 타인과 대놓고 반목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속내를 드러내고 싶어 하는 사람도 없다. 본능의 영역을 벗어나면 모두들 가면을 쓰는 일에 익숙했다. 꼴리는 대로 행동하는 나 같은 별종은 드문 존재였다.
이 멍청한 녀석이 저 방의 질척하고 더러운 공기에 섞여든다고 생각하니 짜증이 치밀었다. 그러다 문득, 그런 걸 신경 쓰고 있는 내가 낯설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나한테 너무 가까이 오지 마.”
그 말은 진심이었다. 위험해 보이는 아이라고 생각했다. 서울로 돌아가는 그 밤 내내, 나는 그 애와 어떤 식으로든 얽히지 않는 편이 좋겠다고 다짐했었다. 그 다짐이 그토록 쉽게 무너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 * *
‘지겹지도 않나.’
학생 식당에서 한바탕의 소란이 들려왔을 때,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식판에 막 밥을 받을 즈음 한윤오가 식당 입구로 들어왔다. 얼굴을 가려 보려는지 모자를 깊게 눌러쓴 채였다. 저편에 밥을 먹고 있던 몇몇이 그 애를 가리키며 무언가를 수군거렸다.
나는 점심을 먹는 것도 잊고 구석의 테이블에서 그 상황을 지켜보았다. 그 애가 밥을 받아 배식대에서 돌아서는 순간, 수군거리던 아이들이 갑자기 그 애의 뒤로 달려들어 등을 밀쳤다. 영문을 모르고 떠밀린 그 애가 풀썩, 앞으로 쓰러졌다.
“아, 미안. 미처 못 봤네.”
그 애가 들고 있던 식판의 음식들이 바닥에 그대로 엎어졌다. 식기와 국그릇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데굴데굴 굴러갔다. 그 애에게 부딪쳤던 아이들은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사과 같지 않은 사과를 하더니, 목적을 달성한 듯 히죽거리며 김하민에게 달려갔다.
“쟤 표정 봤어? 존나 웃겨.”
“꼴 좋네. 이제 당분간 여기 올 생각 못 하겠지?”
신이 나서 속닥거리는 소리를, 그 애도 들었을 것이다. 그 애는 떨어진 음식을 주워 담고 휴지를 가져다 바닥을 닦았다. 누구 하나 도와주거나 말을 거는 사람은 없었다.
그 애의 귓불과 뒷목이 당혹감에 붉게 물들었다가 하얗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더러워진 제 옷을 수습할 생각도 못 하는 것 같았다.
‘대학교에까지 와서 이 짓거릴 봐야 하나…?’
이런 식의 괴롭힘은 재단 내에서 흔한 일이었다.
일족의 사람들은 정체를 숨기고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내부자들끼리 교류하고, 내부자들끼리 결혼해 아이를 낳아 왔다.
오랜 세월 얽혀 온 집단 내에서 근친교접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꽤 복잡한 계산이 필요했다. 일족의 모두는 거의 태어나면서부터 암묵적으로 짝지어지고, 나이가 차면 그대로 맺어졌다. 대부분의 정혼은 남자 알파와 여자 알파, 남자 베타와 여자 베타 사이에 이루어졌다.
인척 관계가 엉망으로 꼬이는 걸 막기 위해 짝 이외에는 연애도 성적인 접촉도 허락되지 않았다. 일족 외부인들과의 만남도 당연히 금기였다. 비밀이 누설될 수도 있고, 유인원족과의 혼혈은 죄악시되었기 때문에.
일족을 지킨다는 명분하에, 랑족의 아이들은 어린 시절부터 짜증 나는 지침들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주입받았다.
‘그 가문은 유력가니까 그 집 애들과는 잘 지내는 게 좋아.’
‘그 여자애는 네 형이랑 혼약이 있을 예정이다. 단념하렴.’
‘그 집 사람들 함부로 대하지 마라. 네 다음 대에서 혼담이 있을 수도 있어.’
듣기만 해도 갑갑한 환경에 어울리지 않게, 일족의 아이들은, 특히나 알파들은 하나같이 이기적이고 공격적이었다. 억눌린 야성이 폭발해 버리지 않기 위해서는 적절한 화풀이 대상이 필요했다.
그렇기에 ‘그럴 만한 아이’에 대한 괴롭힘은, 큰 사고를 치지 않는 한 그럭저럭 용인되는 편이었다. 먹잇감 되는 것은 주로 랑족답지 않게 나약하거나 내성적인 아이, 출신이 별난 아이. 그리고, 오메가.
‘그래, 저 애는… 완전히 교집합이지.’
한윤오는 누가 봐도 괴롭히기 딱 좋은 먹잇감이었다. 가만히 놔둬도 먹이사슬의 밑바닥으로 떨어졌을 그 애를 더 깊은 수렁에 처박고 있는 것은 김하민이었다.
그는 제 주변의 알파들을 이용해 그 애를 있는 힘껏 못살게 굴었다. 김하민의 패거리들은 그것을 ‘그저 덜 떨어진 수컷에 대한 오메가의 거부감’ 정도로 여기고 있었지만, 나는 묘한 예감이 들었다. 하민도 나처럼, 그 애의 정체에 대해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일 그렇다면 같은 오메가인 그 애를, 그는 왜 그리 끈질기게 내치려 드는 걸까.
사람들은 나를 되어 먹지 못한 별종 취급하지만, 김하민이야말로 진짜 이상한 녀석이었다. 고1 겨울. 학교에서 일괄적인 형질검사가 진행된 후 뜻밖에도 그가 오메가로 판정되었을 때, 모두는 뒤에서 쑥덕거렸다.
‘김하민이 오메가래? 별일이네.’
‘난 전부터 걔 좀 그래 보이더라.’
‘왜, 꼴리냐?’
‘씨팔, 개소리는. 무슨 상관이야. 어차피 이제 코빼기도 안 보일 텐데.’
‘하긴. 걔도 학교 그만두겠지?’
오메가로 판정된 아이가 진학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교칙이 있는 것도 아닌데 열에 아홉쯤은 그랬다. 스스로 그만두지 않으면 학교에서 먼저 자퇴를 권하는 경우도 많았다. 오메가가 대학을 나와도 제대로 된 직업을 갖기 어렵다는 이유도 있지만, 더 큰 문제가 있었다.
거의 매년, 오메가로 판정된 아이가 동급생들에게 윤간을 당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막 발현될 무렵의 알파들은 짐승과 다를 것 없었다. 삐뚤어진 욕구는 끓고 끓다가 혼담에서 배제되는 오메가에게 퍼부어지곤 했다.
주변의 예상과는 달리, 김하민은 학교를 그만두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보통의 오메가들과 다른 방식으로 제 운명에 대응했다.
그는 저를 향해 달려드는 알파들을 마다하지 않았다. 아니, 그저 마다하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그들을 꾀어내고 조련하기까지 했다. 나를 제외한 전교의 알파들은 이내 그를 추종하게 되었다. 심지어는 선생님들도 그의 존재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눈에 크게 띄는 일은 벌이지 마라. 알았지?’
김하민과 그 패거리들이 벌이는 문란한 행각들에 대해, 선생님들의 입장은 딱 그 정도였다. 교내에서 집단적인 성관계가 벌어지더라도 서로가 동의한 이상 윤간이라고 부를 수는 없었고, 아무리 부적절한 추문도 중범죄보단 나았으니까.
김하민은 알파 무리에 둘러싸여 늘 키들키들 웃으며 다녔다. 앞에서는 하인이라도 된 듯 떠받드는 알파들이 뒤에서는 저를 벗겨 먹을 궁리만 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지, 알고도 그러는지.
오늘따라 더욱 요사스럽고 의기양양하게 웃으며, 김하민은 제 패거리들과 함께 식당을 빠져나갔다. 그 애는 주변을 다 정리하고도 김하민과 마주칠까 걱정되는지 한참을 일어나지 못하고 꾸물거렸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애에게 패악을 부리는 김하민도, 막 발현이 시작된 불안한 시기에 굳이 학교로 기어 나와 맞지 않아도 될 매를 벌고 다니는 한윤오도.
‘역시, 오메가 같은 건 지긋지긋해.’
입맛이 사라졌다. 손도 대지 않은 밥을 쏟아 버리고 학생회관 밖으로 나가 담배를 물었다. 3월의 공기는 아직 겨울이나 다름없을 정도로 쌀쌀했다. 겨울이 오든 봄이 오든 무감한 나지만, 시간이 빨리 지나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그 애가 모두의 악다구니에 금세 나가떨어질 줄 알았다. 다들 저렇게 못살게 구는 걸 보니 그 애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포기할 거고, 그 애가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면 신경 쓸 일도 없을 거라고. 그게 얼마나 헛된 착각이었는지는 미처 몰랐다.
* * *
‘이한아. 본가에서는 어른들께 예의 바르게 굴어야 해. 자기 전에는 꼭 양치하고, 밥 먹을 때는 얌전히 자리에 앉아 있고.’
여섯 살의 어느 날. 나를 낳은 그 사람은 나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혔다. 노상 흙투성이로 장난을 치고 다니던 나에게는 견딜 수 없이 어색한 일이었다. 꼼꼼히 빗어 정돈한 머리도, 목 끝까지 단추를 잠근 셔츠도 불편했다.
‘서 회장님… 아버지는, 좋은 분이야. 이한이에게 아주 잘해 주실 거야.’
‘…….’
‘집이 아주 커다랗고 멋지대. 신기한 물건들도 많고. 착하게 지내고 있으면 아빠가 곧 이한이 보러 갈게. 영영 헤어지는 거 아니니까 괜찮아.’
‘…….’
‘이한아. 아빠 봐야지.’
‘…싫어.’
‘응? 아빠 보고 웃어 줘야지.’
투정을 부리고 싶었지만, 차마 그럴 수가 없었다. 나를 바라보는 그가 몹시 침통한 표정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대로 억지로라도 웃어야 할지, 웃지 않는 게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웃으면 그대로 그가 울어 버릴 것 같기도 했고, 슬픈 표정을 지으면 그것이 그를 더 슬프게 만들 것 같기도 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그냥 고개를 숙였다.
그는 내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나를 껴안았다. 가늘고 연약한 팔, 매끄러운 피부. 어린 눈으로도 나는 늘 그가 가슴 벅찰 만큼 아름답다고 생각했었다.
그날의 그는 더욱 아름다웠다. 새파랗게 질린 얼굴은 유리로 빚은 인형이나 도자기처럼 선명하고 섬세했다. 너무도 아름다워 무서운 기분이 들 정도로.
‘…잘 가, 아들.’
이내 본가에서 온 사람이 도착하자 그는 나를 품에서 놓았다. 나는 처음 본 어른들의 손에 넘겨져 대문을 나섰다. 그의 가느다란 몸이 대문 밖으로 기울어져 나를 배웅했다. 점점 멀어져 작아지던 그가 보이지 않게 될 때까지, 그 아름다운 얼굴은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모퉁이를 돌아 마침내 우리가 서로의 시야에서 사라졌을 때, 그의 가냘픈 울음소리를 들었다. 그것은 그와 나뿐이던 여섯 살의 우주가 붕괴하는 소리였다.
‘…안 갈래요.’
‘네?’
‘나 거기 안 가요. 아빠한테 갈래요. 네?’
‘안 됩니다, 도련님.’
‘놔, 이거 놔요. 놔…!’
‘도련님!’
‘아빠! 아빠…!’
나는 억센 남자의 손 안에서 미친 듯이 버둥거렸다. 무력감과 고통과 슬픔이 나를 찢어 버리는 것 같았다. 이윽고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는다는 것을 느끼면, 나는 알게 된다. 꿈이구나. 나는 또 그날의 꿈을 꾸고 있구나.
“으, 으으…!”
여러 차례 꾼 꿈인데도, 나는 매번 땀으로 흠뻑 젖을 정도로 괴로워하며 눈을 떴다. 눈앞에 있는 것은 눈물에 어른거리던 집 앞 골목이 아닌, 적막한 천장이다. 새벽까지 불면에 시달리다 겨우 잠들어 꾼 꿈이라는 게 이거라니. 쓴웃음을 지었다.
나를 낳은 오메가. 몇 장면 남지 않은 유년의 기억 속 그는 나에게 언제나 다정하고 상냥했다. 유달리 짓궂던 내가 무슨 사고를 쳐도, 그는 나에게 화를 내는 법이 없었다.
나는 아마도 그를 사랑했을 것이다. 확실하진 않다. 말라붙은 감정을 감별하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일이다. 사랑했다고 하더라도 별 의미는 없다. 그 작은 집을 떠나 넓고도 싸늘한 본가에 집어넣어진 후로, 나는 그를 증오하려고, 적어도 그의 존재를 무시하려 애써 왔으니까.
‘왜 여태 이런 꿈을…. 기억도 제대로 안 나는 사람인데.’
꿈속의 그날 이후 나는 그를 다시는 본 일이 없었다. 그는 제가 낳은 어린아이를 낯선 집에 맡기고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얼굴조차 잊으려 노력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거울 속 나의 눈매를 볼 때마다 싫어도 그를 떠올리게 되었다. 검은 눈동자와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가 그를 닮았다. 미간을 찌푸리는 습관은 그래서였다. 얼굴에 남은 그의 흔적을 지우고 싶어서.
나는 본가에 온 뒤에야 알게 되었다. 나를 낳은 그 사람이 일족의 사람들에게 악명높은 존재라는 것을. 랑족 사람들은 나를 그렇게 불렀다.
‘그 오메가가 낳았다는, 서 회장님 댁 첩의 자식’.
부유한 알파가 혼외자를 두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었다. 그 혼외자가 오메가에게서 낳은 아이라는 것도, 그리 드물지는 않았다. 오메가는 그런 쪽으로는 제법 쓸모있는 존재이니까.
호사가들이 나에 대해 떠들어 대기 좋아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나를 낳은 것이, 바로 ‘그 오메가’라서.
‘그 오메가’. 출신도, 가문에 대해서도 알려진 바 없는 서 회장의 애첩. 서 회장이 시키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낯선 이와 살을 섞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아름답고, 요사하고, 더러운 오메가.
‘저놈이 첩의 자식이라고? 그것도 분에 넘치는 얘기다. 기껏해야 창부의 자식이지.’
본가의 사람들은 쉼 없이 수군거리며 그 사실을 나에게 상기시켰다. 혹시라도 내가 그걸 깜빡할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으면 천박한 핏줄이라 제대로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말을 들었고, 뭐라도 하기 시작하면 행동거지도 말투도 마뜩잖다며 면박을 주었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두를 미워하고 으르렁거리는 일뿐이었다. 어차피 이런 나를 사랑하는 사람 같은 것은 세상에 없으니까.
거울 속 내 얼굴을 노려보다,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새삼스럽지도 않은 꿈의 잔상이 유난히 길었다. 학교에 갈 생각을 하니 머리가 더 아파 왔다.
‘씨발…. 그 새끼는 대체 언제까지 학교에 붙어 있을 작정인 거야?’
그랬다. 한윤오는 내 예상보다 훨씬 오래 버티고 있었다. 달려드는 알파들을 따돌리고 숨어 버리는, 오메가답지 않은 짓까지 했다. 그의 정체를 누군가의 애첩쯤으로 짐작했던 내게는 신기하고도 당혹스러운 일이었다. 새장 속의 새 치고는 제법 근성이 있는 걸까.
쓸모없는 그 근성은 그 애를 표적으로 삼은 알파들의 심기를 들쑤시고 있었다. 속을 모를 녀석이었다. 잡히기 어려운 사냥감을 볼수록 끓어오르는 알파의 승부욕을 도리어 자극하는 이유가 뭔지.
“어딨어? 또 허탕 친 거야?”
“하, 쥐새끼 같은 게 내빼기만 존나 잘하네.”
“이 쪼다 새끼가, 오메가 하나 못 조져서 며칠째 쩔쩔매는 거야, 대체?”
대학국어 시간을 앞두고 학과 아이들은 모두 같은 강의실로 모여들었다. 또 그 애를 놓쳐 버린 녀석들이 투덜거리고 있었다. 그 애의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골치가 아파 왔다. 입학 이후 불면증이 계속 심해지고 있는 건 다 그 애 때문인 것 같았다.
그 애는 강의 시작 시간을 조금 넘겨 강의실로 들어왔다. 웅성거리던 강의실에는 일순 짧은 침묵이 흘렀다. 이를 갈던 알파들은 곧장 그 애에게 다가섰다.
왜 자길 무시한 거냐며 빈정거리더니 이내 그 애가 앉은 의자를 걷어차 버렸다. 가벼운 몸이 의자와 함께 옆으로 넘어갔다. 쿵, 소리에 이어 강의실 가득 모두의 웃음소리가 쏟아졌다.
환멸이 느껴졌다. 화풀이를 마친 후 의기양양해진 알파들도, 즐거운 구경거리라도 난 듯 웃는 아이들도, 말 한마디 못 하고 잠자코 수업을 듣는 그 애까지.
‘신경 끄자. 제발…. 꺼야… 하는데….’
나는 왠지 마음에 걸리는 기분에 강의 시간 동안 몇 번이나 눈을 돌려 그 애를 확인했다. 핏기없는 얼굴로 앉아 있던 그 애는 강의가 거의 끝날 무렵 갑자기 제 손목을 내려다보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넘어지면서 다친 건지, 손목을 움켜쥐고 강의실 밖으로 뛰쳐나가기까지 했다.
부러진 거면 저렇게 손목을 덜렁거리고 돌아다니다가 상처가 덧나 버릴 텐데, 역시나 생각이라곤 없는 녀석이다. 신경 끄자고 염불을 외우면서도, 나는 그 애의 뒤를 쫓아 화장실로 갔다.
그 애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세면대 앞에 서 있었다. 가만 보니, 그 애가 들여다보는 것은 손목이 아니라 손목시계였다. 나에게는 꽤나 낯익은 시계.
“…이 시계, 뭐야?”
그건 나를 낳은 오메가가 지니고 있던 것과 같은 모양의 시계였다.
다시 보아도 확실했다. 몇 안 되는 그의 사진들 속에서, 그는 하나같이 그 시계를 차고 있었다. 놀란 나는 그 애가 들고 있는 시계를 가로챘다. 그게 오메가의 페로몬을 가리던 위장막이었던 모양인지, 그 시계에서는 뭐라 말할 수 없이 역겨운 냄새가 났다.
“돌려줘. 선물 받은 거란 말야.”
그 애는 다급하고 애처롭게 손을 내밀었다. 냄새나는 시계가 몸에서 떨어지자, 잠깐이나마 그 애가 지닌 본래의 향기가 느껴졌다. 달콤한 향이 반쯤 무르익은 채로, 무방비하게.
흐려지려는 이성을 움켜쥐고, 나는 의심을 곤두세웠다. 애송이 같은 녀석이 왜 어울리지도 않는 시계를 차고 있을까.
단지 모양이 같은 시계일 수도 있지만, 자꾸 지저분한 생각이 들었다. 일족의 사람들은 ‘그 오메가’가 사라진 후 다른 오메가가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을 거라고 추측하곤 했다. 설마 이 녀석이 ‘그다음’인 건 아니겠지, 생각하며 숨을 고르고 물었다.
“선물? 누구한테.”
“…서이준 선배한테.”
그 애가 머뭇거리며 꺼낸 이름은 뜻밖이면서도, 또 그럴 만한 인물이었다. 역겨운 기분은 더 심해졌다. 둘이 대체 무슨 관계길래 이런 시계를 채운 걸까 싶어서.
그 애는 내가 시계를 들고 있는 동안 생명줄이라도 빼앗긴 듯 안절부절못하다가, 그것을 되찾자 눈에 띄게 안심했다. 끔찍한 냄새가 나는 것을 애지중지하는 꼴이 아니꼬웠다. 제 정체를 가릴 갑옷이어서 그런 건지, 애인에게서 받은 물건이라서인지.
“이걸 서이준이 줬다는 거지. 씨발, 그 새끼라면 그럴 만도 하네.”
“너, 그 사람 알아?”
“형이야.”
“형? 정말? 친형?”
순진한 반문에 의아함을 느꼈다. 일족의 사람들은 대부분 내 이름을 알았다. 더구나, 서이준에게서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게 이상했다.
“그럼 너는 거기 안 갔어? 미국 할아버지 댁에 가족들이 다 모였다고….”
“그 사람들이 뭘 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 집구석에 신경 끈 지 오래됐어.”
“그치만, 형제…라고….”
“이복형제야. 됐어?”
진심으로 당황한 듯한 표정이다. 그 ‘이복형제’란 새끼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이 정도로 일족의 사회와 단절되어 살던 아이를 시계 하나 채워 학교에 던져 놓다니.
그 애는 또 순순히 미안하다고 말하며, 심지어 걱정이 담긴 눈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뱀을 걱정하는 흰 생쥐 같은 모습에 기가 찼다.
그러나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었다. 서이준이 이 아이에게 무슨 일을 하든, 나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는 일이니까. 나는 마음을 다잡고 얼굴을 굳혔다.
“너도, 존나 알 만하다. 진짜. 그거, 찰 거면 똑바로나 차고 있어.”
그렇게 말하고 돌아서는 순간에도, 나는 그 애와 얽히지 말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 생각이 반복되는 것 자체가 이미 얽히기 시작했다는 의미라는 것을 알지 못한 채로.
* * *
[이한아.
봄이구나. 나는 한 달 전쯤 교토에 도착했다.
십 년 전, 너를 본가로 보내고 이곳에 왔을 때와 같은 집에서 지내고 있다. 창을 열면 정원의 벚나무가 보이는 집이다. 밤이면 검은 하늘에 벚꽃 잎이 별처럼 흐드러진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면 슬퍼질 때가 있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각나서일지도 모르지.
네 사진을 전달받을 때마다 놀라게 된다. 기억 속 너는 언제나 여섯 살배기 어린아이인데, 언제 그렇게 자라났는지. 이제는 나보다도 키가 크겠구나. 어떤 목소리일지, 웃고 움직이는 모습은 어떨지 궁금해지곤 한다.
얼마 전 회장님의 요청이 있어서 새로 사진을 찍었다. 십 년 전에도 찾았던 사진관의 주인은 내 모습이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며 신기해했다. 나는 이렇게나 지치고 낡아 있는데 말이다.
내가 늙지 못했다면, 그건 어른의 몫을 다 하지 못했기 때문일 거다. 낳은 아이를 길러 품어 주지도 못하는 어른이 어디 있겠니.
너는 나를 잊었을지도 모르겠구나. 그러지 말아 달라고 말할 수도 없는 입장이라서, 그게 더 미안하다. 망설이다 사진을 동봉한다. 불쾌하다면 버려도 괜찮다.
다시 편지할 수 있으면 좋겠구나. 잘 지내기 바란다.]
한숨을 쉬며 편지를 덮었다. 사진으로 그의 시계를 확인하려던 거였는데, 무심결에 편지까지 다시 읽고 말았다. 낡아 바스락거리는 편지지. 또박또박 써 내려간 글씨체에서 무력한 체념이 느껴졌다.
그는 종종 편지를 보내 왔지만, 모두 빼앗기거나 짜증을 이기지 못해 찢어 버리고 남은 것은 삼 년 전의 저 편지뿐이다. 유서조차 남기지 않은 그의 마지막 필적이었다.
그는 편지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나는 그가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잘 알고 있었다. 그의 행적에 대해서는 주위에서 귀가 따가울 정도로 떠들어 댔기 때문에.
그는 사망하기 직전까지도 서 회장의 지시에 따라 전국 각지의, 때로는 다른 나라의 알파들을 만났다. 밀회인지 접대인지 모를 일에 정신이 팔려 하나뿐인 제 아들을 보러올 틈조차 없었던 것이다.
‘속을 모를 사람이야, 진짜….’
이 사진은 아마도 서 회장이 그를 다른 누군가에게 ‘선보이기’ 위해 촬영한 걸 거다. 그런 사진을, 제 손으로 아들에게 보내는 건 무슨 심보였을까.
정장을 입고 반듯하게 앉은 남자의 사진. 그는 스물한 살에 나를 낳았다. 그렇게 보이지는 않지만, 사진 속 그의 모습은 30대 후반 정도였을 거다. 꽤나 지쳐 보이지만, 유년의 기억 그대로 아름다운 얼굴. 그를 생각하면 늘 마음속에 깊은 웅덩이가 생기는 것 같다.
찌꺼기 같은 기억들을 떨쳐내려 고개를 저으며 집을 나섰다. 금요일에도 학교에 가야 하는 게 번거롭지만, 학과 애들이 없으니 보기 싫은 얼굴들과 덜 마주칠 수 있었다.
‘오늘도 제대로 못 잤어. 강의만 끝나면 재훈이 형한테 가 봐야지….’
이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수면제를 처방받아 오겠다고 다짐하던 때였다. 건물 밖으로 발을 디딘 순간, 지독한 단내가 감각을 자극했다. 알파라면 싫어도 본능으로 알 수밖에 없는 냄새. 오메가의 페로몬이었다. 떠오르는 것은 한 사람뿐이었다. 한윤오.
‘그 덜떨어진 녀석이, 기어이…!’
얽히지 않겠다던 다짐이 무색하게, 발걸음이 저절로 그쪽을 향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이미 그 애의 허리를 낚아채 집을 향해 되돌아 달리는 중이었다. 황당할 만큼 가벼운 몸이었다.
그 애는 들어 올리는 대로, 뿌리치는 대로 무력하게 이끌려왔다. 파르르, 떨리는 눈동자, 웅크린 어깨. 선명한 향기가 애처롭고도 유혹적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서, 먹잇감을 빼앗긴 알파들의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그 애의 페로몬이 근방의 모든 알파들을 자극하고 있을 것이다. 가느다랗고 납작해진 이성을 간신히 움켜쥔 채로 건물 안으로 그 애를 밀어 넣었다.
“아까 그 사람들, 뭐야? 왜 다들 그렇게….”
잡아먹어 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향을 풍기면서, 그 애는 결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눈물을 그렁거리는 꼴이 사람을 아주 미치게 만들었다.
여태껏 맡아 본 오메가의 페로몬은 대부분 실수로 새어 나온 것에 불과했고,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느껴진 것은 처음이었다.
의절하기 몇 달 전, 서 회장은 러트를 앓고 있는 나의 침실로 몸을 파는 오메가를 보낸 적이 있었다. 그때 헐벗은 채로 나에게 달라붙어 오던 오메가도 이런 느낌은 아니었다. 이렇게 강한 유혹이었다면 화를 내며 그를 쫓아 버릴 게 아니라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안아 버렸을 거다.
온몸의 신경이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경험하지 못한 맹렬한 욕정 앞에 겁이 났다. 겁이 많은 개가 크게 짖는 것처럼, 나는 도리어 이를 악물고 험한 말을 퍼부어댔다.
“빨리 갈무리하고 갈 길 가. 다 가라앉고 나면 내 눈앞에서 꺼지라고. 네 역겨운 암컷 냄새 더 이상 못 맡아 주겠으니까.”
밀어내는 말을 하면서도, 나는 그 애의 손목을 꽉 틀어쥐고 있었다. 사실 가라는 것은 말뿐이고, 놓아줄 마음 같은 것은 없었는지도 모른다.
“아, 아파, 놔줘. 응?”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말귀를 못 알아 처먹어? 닫아. 쳐 닫으라고, 씨발!”
손을 잡아빼려는 그 애의 태도에 충동은 더 들쑤셔졌다. 내가 저를 물어뜯어 삼켜 버리고 싶어 한다는 걸 모르는지, 그 애는 바락바락 악을 썼다. 궁지에 몰린 짐승의 울부짖음처럼.
“오메가니 알파니, 그런 거 다 처음 듣는 얘기야. 다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안쓰러운 목소리로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했다. 아무것도 모른다니. 오메가의 향기를 내뿜으면서 늑대의 일족이 아니라니. 그런 경우도 있을 수 있나?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생각을 정리할 수 없을 정도로 이미 몸이 동한 상태였다. 팔딱, 팔딱. 그 애의 흰 목 위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져 보였다. 맥이 울리는 고동을 따라 향기가 퍼져 갔다. 공기와 호흡이 온통 그 애의 냄새로 자욱했다.
단내에 목이 말랐다. 이 갈증을 어떻게 해야 씻어 버릴 수 있을까. 저 붉고 더운 입술에 입을 맞추면 될까. 저 목덜미를 물어뜯으면. 입술에 닿는 피부를 모두 빨아들이고, 손에 닿는 것은 모두 움켜쥐고. 그래, 그의 몸속 가장 깊은 곳까지 내 몸을 밀어 넣으면.
‘그냥, 그냥 이대로….’
등줄기에 오싹오싹 소름이 올라오며, 머릿속이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찼다. 그 애의 작은 뒤통수를 움켜쥐었다. 붙잡힌 얼굴은 겁에 질린 표정이었다. 상관없었다. 그냥, 모든 것을 짓이겨 삼켜 버리고 싶었다.
이 아이의 페로몬을 맡은 순간 망설임도 없이 달려갔던 건 무슨 이유였을까. 그를 돕기 위해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누구보다도 먼저 사냥감을 낚아채려는 늑대의 본능이었을지도 모른다.
“한윤오.”
포식자의 부름에 응하는 것은 피식자의 섭리다. 이름을 부르자, 그 애의 투명한 눈동자 안에 내 모습이 가득 찼다.
“이 냄새, 내가 없애 줄까?”
상대의 목을 물기 위해 먼저 어금니를 드러낸 것은 나였다. 그러나 사로잡았다기보다는 차라리 사로잡힌 기분이 들었다. 절벽 밖으로 발을 딛는 듯한 아찔함이었다.
넘실거리는 본능을 가눌 수 없었다. 정신없이 집으로 들이닥쳐 현관에서부터 그 애에게 달려들었다. 입술을 깨물고 자그마한 치아와 혓바닥을 핥아 내렸다. 입 맞추는 법조차 모르는지 그 애는 그저 얼어붙어 있었다. 호흡을 잊은 몸이 품 안에서 자꾸만 휘늘어졌다.
“씨발, 숨 좀!”
나는 입안에 파묻었던 그 애의 입술을 내뱉었다. 꽃잎처럼 붉은 입술이 급하게 산소를 들이켰다. 눈물을 글썽이며 헐떡이는 모습이다.
무너진 그 애의 얼굴에 내 안에서도 무엇인가가 와르르, 무너졌다. 부끄러움도 모르고 모조리 흘려 내버린 페로몬이 그 애의 냄새에 섞여들어 갔다. 충동은 더욱 부추겨졌다. 더, 조금 더….
옷가지를 벗겨내자 맨살이 드러났다. 손에 쥔 자리가 곧바로 붉게 물드는 흰 피부. 눈이 돌아 버려서 자리를 옮길 여유조차 없었다. 가붓한 몸을 신발장 위에 앉히고 가냘픈 발목을 들어 올렸다.
뼈와 가죽뿐일 거라고 생각했지만 엉덩이는 봉긋하게 쥘 만한 것이 있었다. 다시 한번 충동이 들썩였다. 다리를 잡아 벌리고 나서는 뜻밖의 이유로 주춤거렸다. 그곳은 내가 알고 있던 오메가의 것과는 달랐다. 젖어 있지도 이완되어 있지도 않았다.
“너, 여기….”
흥분이 덜 된 상태로 보이진 않았다. 페니스는 바짝 일어나 있고 향은 데일 듯 농익었다. 그런데도 아래가 단단히 다물려 있는 이유가 무엇인지.
애가 타서 페로몬을 더 풀어내 봐도, 회음을 손으로 문질러 봐도 반응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단순히 긴장해서 굳어 있는 정도가 아니었다. 몸의 변화보다 페로몬의 발현이 더 빨랐던 걸까.
조금 당황했지만, 이대로도 못 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남자 알파끼리나 베타끼리도, 일족의 사람이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하는 일이니까. 흥분감은 더 견디기 힘들 정도로 당겨졌으니, 억지로라도 아래를 풀고 해 버리면 그만이다.
혀로 입술을 축이며, 손끝으로 꾹, 꾹 구멍의 주름을 눌렀다. 윤활제가 될 만한 게 있을지를 생각하던 찰나, 그 애가 몸을 부들부들 들썩였다.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그 애는 갑자기 울음을 터뜨렸다. 그것도 아주 목을 놓아.
“제발, 만지지, 마. 응? 흐윽, 흐어어엉….”
울 수도 있다고는 생각했지만, 저렇게 어린아이처럼 울 줄은 몰랐다. 뇌가 흥분으로 녹아 버리기 직전이었던 나는 얼이 빠졌다. 이렇게나 농염한 향을 뿜어내면서, 색기 한 점 없이 엉엉 울어 버리는 건 무슨 심보인지.
그 애를 이곳에 끌고 들어올 때까지만 해도, 그가 운다고 해서 멈춰 줄 작정은 아니었다. 솔직히 우는 쪽이 더 꼴릴 것 같다는 생각까지 했다. 그런데 막상 우는 모습을 보니 도저히, 마음대로 밀어붙일 수가 없었다.
한숨이 저절로 나왔다. 두 뼘이 채 안 되는 신발장 상판 위에 아슬아슬하게 놓여 있던 몸을 일으켜 바로 앉혀 주었다.
그 애는 떨리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나른하게 상기된 뺨, 짙은 향기를 하고서도 눈은 말갛기만 했다. 자신이 눈앞의 사람을 유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는 눈빛이었다.
‘씨발. 저 눈은 뭐야. 장난하냐고.’
어떤 알파라도 그 애를 보면, 물어뜯고 싶다고 느낄 것이다. 그 애에게는 포식자의 구미를 당기게 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너무도 달콤해 보이는 데다, 손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 같은 먹잇감.
그게 나에게는 위험한 함정처럼 느껴졌다. 몇 번이나 건드리면 안 되는 아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본능은 이성의 말을 잘 듣지 않았고 결국 여기까지 끌려와 버렸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애의 여린 턱을 붙잡았다. 중력에 이끌리듯 입을 맞추었다. 차라리 뿌리쳐 주면 좋을 텐데 그 애는 피어나는 꽃처럼 스르르 입을 벌렸다.
달고 더운 점막과 타액을 훑고 문질렀다. 그 애가 아주 서툴게 키스에 응했기 때문이었을까. 입술을 겹칠수록 무언가가 맞아들어 가는 듯한 느낌이 간지러웠다. 연인이 있어 본 적도 없으면서, 나는 그 입맞춤이 연인 사이의 키스 같다고 생각했다.
길고도 짧았던 키스에 그 애는 겨우 울음을 그쳤다. 또 숨 쉬는 걸 잊었는지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숨을 몰아쉬어 댔다. 나는 촉촉해진 그 애의 입술을 매만지며 물었다.
“코로 숨 쉬는 건 왜 못 하는 건데?”
“…안 해 봤으니까.”
“뭘?”
“키스를.”
왜? 라는 의문과 함께 서이준이 떠올랐다. 입맞춤도 해 보지 않은 아이에게 그 새끼는 뭐하러 이상한 냄새를 묻혀 놓은 걸까. 그가 이 애에게 시계를 채우는 장면을 상상하자, 겨우 가라앉았던 심술이 다시 들끓었다.
“하, 씨발….”
인내심의 한계는 딱 거기까지였다. 나는 바지를 벗어 내렸다.
“그, 그만…. 왜 그러는데….”
“너 그 냄새. 없애 달라며. 지워야지.”
비겁한 대답이었다. 내 피를 온통 새빨갛게 물들인 충동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애에게 바짝 다가서자, 동요한 페로몬이 다시 흐드러졌다. 역시나 구미를 당기는 사냥감이다.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핥으면 어떤 맛일지 궁금했다. 몸의 다른 부분이 어떤 감촉인지도. 다시 입을 맞추고 싶었다.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그 애가 괴로워할 만한 곳을 핥고 빨아들이고 싶었다.
아니, 실은, 울건 애원하건, 발목을 들어 올려 덜 여문 그곳에 그대로 삽입해 버리고 싶었다.
“마, 만지지 말라니까…!”
그 애는 잔뜩 겁을 집어먹은 얼굴이었다. 내가 짐승 같아 보인다고 생각했겠지만, 음습한 생각들에 비해서는 최대한 신사적으로 움직이는 중이었다. 내 머릿속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면 그 애는 네발로 기어서라도 달아났을지 모른다.
경직된 반응과는 달리 그 애도 몸은 달뜬 상태였다. 옅은 체모 사이로 성기가 빳빳하게 고개를 들고 있었다. 한참을 발기해 있었으니 괴로울 만도 한데, 긴장 때문에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눈치였다. 감싸 쥐는 순간 그 애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나는 짙어진 향기를 깊게 들이마셨다.
“너도, 해.”
그러나, 키스가 서툴렀던 것처럼 그 애는 손길도 엉망이었다. 다그치는 말에 떠밀려 내 것을 쥐기는 했는데 덜덜 떨리는 손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다. 우습지만 그 정도 접촉에 나는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조바심을 견딜 수 없었다. 먹고 싶던 사탕에 겨우 혀끝을 대 본 어린애처럼. 나는 굳어 버린 그 애의 손을 치우고 두 개의 성기를 모아쥐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프리컴이 뒤엉켜 적셨다.
아래위로 손을 흔들자, 여리고 뜨거운 표피가 손바닥에 엉겨 붙었다. 귀두와 기둥 사이의 틈이 번갈아 맞물리면서 긁는 듯한 자극이 전해졌다. 뾰족한 쾌감이 아랫배에서부터 차곡차곡 밀려왔다.
“이, 이거, 이상해. 아, 하읏, 그만, 아, 으으, 그마안….”
남의 손이 닿는 것조차 처음인지, 그 애는 어쩔 줄 몰라 하며 헐떡였다. 몸을 마구 뒤틀어대는 꼴이 야릇했다. 의미도 없이 도리질을 하던 그 애는 결국 나의 가슴에 상체를 기대었다.
품 안에 감기는 가느다란 몸. 목덜미를 물어뜯고 싶다는 충동을 삼키며 나는 그 애의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아, 흐윽…!”
파드득, 몸을 떨며 그 애가 먼저 사정했다. 끈적한 체액이 둘의 성기 위로 끼얹어졌다. 단내에 숨이 막힐 지경이었다. 뒤따라 도달하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절정이 유난히 높고 아득했다.
“후우….”
쾌감의 여운까지 지독했다. 입을 맞추고 싶은 마음을 견딜 수 없었다. 고개를 붙잡아 눈을 마주 보았다. 다 풀어진 얼굴로 간신히 눈을 뜨고 있던 그 애는 곧 까무룩 의식을 놓았다. 종잇장처럼 흐느적거리는 몸이 나의 위로 무너졌다.
늘어진 그 애를 소파에 데려와 눕혔다. 집까지 안고 올 때도 느꼈지만, 한심할 정도로 가벼운 몸이었다. 어디가 잘못된 건 아닐까 싶어 살펴보았지만 그 애는 멀쩡했다. 잔잔한 숨소리를 들으면 기절했다기보단 잠든 것 같았다. 페로몬은 깨끗이 가라앉아 있었다.
‘씨발, 뭐야….’
짜증이 치밀었다. 나는 아직 엉망이었다. 몸은 아직 들떴고, 아랫도리는 발가벗었고, 체온은 뜨거웠다. 한 번의 사정으로 끝날 상황이 아니었다. 오히려 애매하게 들쑤셔져서 괴롭기만 했다.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이 상황에서 멋대로 잠들어 버리다니.
억지로 깨우기엔 그 애가 너무 작고 나약해 보였다. 낡고 바랜 티셔츠 아래로는 하늘하늘한 흰 다리가 축 늘어져 있었다. 아까부터, 저 발목이 눈에 거슬렸다. 흰 양말 위로 뾰족하게 올라온 발목. 한 손 안에 여유 있게 들어와서, 힘을 주면 그대로 바스러질 듯하던.
잠시 주춤했던 아래에 도로 피가 모이기 시작했다. 시체에 키스하는 것 같다고 악담을 퍼부었던 주제에 의식도 없는 아이를 보고 혼자 발기하는 꼴이 웃겼다.
다른 생각을 하려 애써 봐도 충동이 진정되지 않았다. 내 몸에서 흘러넘친 페로몬에 내가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결국 그의 발치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이런 뼈밖에 안 남은 몸이 뭐가 꼴릴 게 있다고.’
고개를 기울여 앙상한 다리에 뺨을 대었다. 기가 찰 뿐이지만, 손은 이미 아래로 내려가 성기를 쥐고는 성마르게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손바닥의 마찰보다도 습기 찬 정액의 풋내와 날카로운 무릎뼈의 모양 같은 오묘한 것들이 나를 자극했다. 자위에 이토록 열중한 것은 오래간만이었다.
머지않아 짙고 찐득한 정액이 바닥에 흩뿌려졌다. 정신이 맑아지고 나서야,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화들짝, 그 애의 다리에 닿아 있던 입술을 떼어 냈다.
사정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나는 애원이라도 하듯 무릎 꿇은 자세로 그 애의 발등에 입 맞추고 말았을 것이다.
‘내가 드디어 돌아 버린 건가….’
아무리 생각해도 엉망진창이었다. 다시 몸이 동할까 무서워 그 애의 옷을 바로 입혔다. 어질러진 집을 정리하고 몸을 씻어 봐도 엉망인 현실이 나아지는 건 아니었다.
거실로 나와 보니 여전히 그 애는 나의 소파에 잠들어 있었다. 오직 나 혼자뿐이던 나의 방에서, 아무렇지 않게 타인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게 너무도 이상해서, 그 애의 잠든 얼굴을 내려보았다. 위태롭게 젖은 뺨, 그 위로 드리운 속눈썹의 그림자. 몇 번이나 짓씹어 버린 입술에 피가 맺혔다.
눈에 새겨지는 것은 마음에도 쉽게 새겨져 버린다. 그것을 알면서도 나는 계속 볼 수밖에 없었다. 더 가까이 보기 위해 그 애의 곁에 자리 잡고 앉기까지 했다.
그 난리를 피워 놓고 저렇게 곤히 잘 수가 있다니.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새근새근. 고른 숨소리를 듣는 동안 내 마음도 가라앉았다. 스르르, 눈이 내리 감겼다.
* * *
감았던 눈을 뜨니, 나는 유년의 작은 집에 있었다. 산수유나무, 해바라기, 목화씨가 자라던 작은 정원. 유치원도 다니지 않고 외출도 거의 하지 않던 나에게 그 정원은 유일한 놀이터였다.
나는 매일 온 정원을 헤집어놓을 듯 까불거리며 다녔다. 내가 새총과 잠자리채로 벌레를 잡거나 흙을 파헤치는 동안, 나를 낳은 그 남자는 정원을 가꾸거나 그늘에서 책을 읽었다. 이따금 아주 부드러운 미소로 나를 바라보면서.
그 미소가 좋아서, 나는 시답지 않은 것들을 선물이라고 주워 모아 그에게 가져다주곤 했다. 모양이 좋은 잎사귀, 붉은 열매, 굴러다니던 유리구슬 같은 것은 그래도 애교스러웠다. 때로는 다리가 많은 벌레나 반 토막 난 지렁이 따위를 가져다줄 때도 있었다.
‘아빠 주는 거야? 고마워, 이한아.’
그는 내가 주는 게 무엇이든지 기쁘게 받아들곤 했다. 쓰레기나 다름없는 것들이 정말 보물이라도 되는 양 따스한 목소리로 웃어 주었다. 그가 내 뺨을 쓰다듬으면 가슴이 얼마나 벅찼는지. 나는 얼마나 오래 그 기분을 까맣게 잊고 있었는지.
아아. 그래. 기억도 않던 일이 이렇게 생생한 걸 보면, 지금 이것도 꿈인 게 분명하다.
“……!”
얼굴에 닿는 손끝에 놀라 눈을 떴다. 흐려진 시야에 희고 고운 얼굴이 보였다. 어린 날의 그 사람이 눈앞에 나타났다는 착각에 나는 소스라쳤다.
다시 눈을 깜빡여 보니 내 얼굴을 어루만진 것은 그 사람이 아니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는 그 애였다.
“너 뭐 해, 지금?”
놀란 마음을 감추려, 나는 되레 더 험악하게 물었다. 그 애는 잔뜩 움츠러든 채로 우물우물거렸다.
“…미, 미안. 자는 데 불편해 보이길래.”
“자고 있었다고? 내가?”
무슨 수를 써도 밤잠조차 이루지 못해 애를 먹은 지 오래였다. 그런 내가 대낮에 소파에서, 그것도 남이 있는 곁에서 잠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심지어 짧지만 제법 깊게 잤던 모양이었다. 눈을 떴을 때 이렇게 개운한 느낌이 든 건 오랜만이었다. 머리는 전에 없이 맑았지만,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정리되지 않은 표정으로 그 애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푹 잠이 들었던 거지? 설마 이 애 때문인가?’
“손…. 놔줘. 아파.”
그 애가 웅얼거리지 않았다면 터무니없는 말을 해 버렸을 거다. 여기 다시 누워서 눈을 감아 보라거나, 오늘 여기서 자고 가라는 것 같은 이상한 말을.
남의 속도 모르고, 한윤오는 밉살스럽고 멍청하게 굴었다. 나에게 도움을 청하면 간단할 상황인데 뻗대고 있질 않나, 분위기 파악도 못 하고 서이준의 편을 드는 게 황당했다.
그러나 더 멍청하고 황당한 것은 나였다. 주말 내내 그 애가 괘씸하다는 생각에 이를 갈고 집에서 내쫓았다가도, 우는 목소리로 걸려온 전화 한 통에 정신없이 뛰쳐나갔다. 그 애가 나의 무엇도 아닌데, 그 애를 덮치려 드는 알파를 보고 눈을 뒤집고 날뛰기까지 했다.
그 애를 억지로 집까지 바래다준 밤, 나는 덩그러니 뜬 달을 핑계로 허름한 담벼락에 기대 한참 동안 담배를 피웠다. 길들여진 사냥개처럼 골목을 지키다 그 애의 집 전등이 꺼지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집으로 돌아왔다. 철저하게 휘둘려지는 기분이었다.
구겨진 외투를 벗어 던지다가, 문득 테이블 위에 두었던 책을 발견했다. 『랑족의 성』. 그 책을 읽던 그 애의 표정만큼이나 멍청한 책이다. 찢어 버릴 생각으로 책 가운데를 펼쳤다가 무심결에 한 문장을 읽고 말았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오메가와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불친절하고 불쾌한 설명이다. 좋아서 스스로를 내던지고 있는 게 아니었다. 필사적으로 주의했고, 휩쓸리면 안 된다고 생각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도 속수무책이었다.
* * *
다시금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익숙한 집 앞 흡연 구역이 유난히 좁고 칙칙하게 느껴졌다. 먼저 쫓아 보낸 그 애는 지금쯤 셔틀에 올라탔을 거다. 바로 출발하지 않으면 지각할 게 뻔했지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월요일 오전 강의가 전공 수업이라는 게 못마땅했다. 학과 애들이 그 애를 들볶는 꼴을 일주일의 첫머리부터 봐야한다니. 다 태운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물어뜯으며 그냥 강의에 빠질지를 고민하던 순간, 재훈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학교는 잘 다니고 있습니까?]
짠 듯한 타이밍이었다. 해보지도 못한 일탈을 들킨 기분에 담뱃불을 비벼 껐다.
[네. 이렇게 매주 물어보지 않으셔도 되잖아요.]
[졸업 때까지는 약속대로 성실하게 지내는지 확인할 겁니다. 그게 독립을 도와드린 조건이니까. 별일은 없죠?]
지긋지긋한 잔소리.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나는 셔틀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아무 일도 없다고만 대꾸하고 대화를 접으려다, 몇 글자를 다시 보냈다.
[근데 서이준이 외국에 있다고 들었는데, 맞나요?]
[네. 2월 말부터 뉴욕에 가 있습니다. 이준 군 이야기를 궁금해하다니 드문 일이네요.]
[뭐, 그냥. 그런데 저희 과에 한윤오라는 애가 있거든요.]
[동급생에 관해 얘기하는 건 더 오랜만이고요. 역시 무슨 일이 있는 거군요?]
이 사람은 쓸데없이 눈치가 빨라서 부담스럽다. 셔틀에 올라타며 후드를 눈썹 아래까지 푹 눌러썼다.
[별일 없다니까요. 암튼 걔에 대해 좀 알아봐 주세요. 서이준이 근신 처분받았을 때 일 년 정도 난월동에서 봉사했잖아요. 그때 알게 된 애 같던데.]
[공부방 봉사 말이군요. 알아볼 수는 있을 것 같은데, 왜 그러시죠?]
[서이준 그 녀석이 또 뭔가 꾸미고 있는 것 같아서요.]
[그 녀석이라니. 형님을 그런 식으로 말하면 안 되죠.]
나로서는, ‘그 새끼’라고 하지 않은 것이 최대한 순화시킨 표현이었다. 그는 보호자다운 잔소리를 늘어놓으면서도 한편,
[서 회장님과 이준 군에게는 비밀로 하고 알아봐야겠죠?]
속내를 읽은 듯 물어 온다. 이럴 때는 또 눈치가 빠른 게 쓸모 있게 느껴진다.
[당연하죠. 가능하면 제가 뭔가 알아보고 있다는 자체를 알아채지 못하게끔 해 주세요.]
그러겠다는 대답에 안심하고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으려다, 문득 질문을 하나 더 던졌다.
[혹시 예전에 살던 집 마당에 산수유랑 목화송이가 있었나요?]
[맞아요. 산수유 묘목은 제가 심었습니다. 그게 기억나나요?]
[그냥, 오늘 그런 꿈을 꿔서요. 형도 그 집에 온 적 있어요? 몰랐네요.]
[이한 군이 다섯 살 때 기숙학교에 입학했으니까요. 그전에, 이한 군이 기억도 못 할 만큼 아기였을 무렵엔 종종 갔습니다.]
[…왠지 기분 나쁜 얘기네요.]
[처음 만났을 때 이한 군은 아직 배 속에 있었다고 하면, 더 기분 나빠하겠는데요.]
그의 이야기를 바꾸어 말하면, 나를 낳은 그 사람이 재훈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이미 다른 알파의 아이를 몸에 품고 있었다는 뜻이다. 그것이 재훈에게 어떤 의미였을지를 생각하면 기분이 묘해지곤 한다.
[네. 기분 나쁘니까 그 얘긴 그만하죠. 부탁한 일이나 잘 알아봐 주세요.]
[이한 군이 먼저 물어봤잖아요. 연장자를 심부름꾼 취급하고.]
[해결사라고 해드릴게요. 심부름꾼이라고 하면 좀 버릇없는 것 같고.]
[말을 바꾼다고 없던 버릇이 생기나요? 아무튼 성실하게 생활해 주세요. 더 이상 사고 치면 해결사도 수습해 주기 어렵습니다.]
실없는 대화를 더 주고받는 사이 셔틀은 학생회관 앞에 도착했다. 핸드폰을 주머니에 쑤셔 넣고 학과 건물로 향했다. 월요일이 싫다는 투덜거림은 괜한 트집이 아니었다. 건물에 들어서자마자 짜증 나는 장면을 보게 되었으니까.
강의실 앞 복도의 작은 틈바구니에서 그 애를 발견했다. 그 애는 몸을 한껏 웅크리고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무슨 속셈인지 알 것 같았다. 그 애는 전공이나 교필 강의 때마다 어딘가에 숨어 있다가 교수님의 뒤를 바짝 쫓아 강의실로 들어오곤 했다.
그 꼴 같지 않은 작전에 어찌나 몰입했는지, 그 애는 내가 멀찍이서 지켜보고 있다는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숨어 보려는 노력이 무색하게, 한 무리의 아이들이 그 애를 발견했다. 일행 중 한 명이 그 애의 뒤로 다가와 퍽, 소리가 나도록 어깨를 부딪쳤다. 그 애의 손에 들려있던 프린트물이 나풀나풀 바닥으로 쏟아졌다. 나머지 아이들은 흩어진 종이를 마구 밟고 지나갔다.
‘아…!’
나는 비명을 지를 뻔했지만, 그 애는 저를 치고 간 녀석에게도 종이를 밟고 지나간 녀석들에게도 아무 말도 못 했다. 그저 놀라서 얼어붙은 얼굴로 종이를 주워 모으기에 바빴다.
‘아니, 저 새끼는 대체 뭐야? 내가 도와주려고 할 때는 바락바락 잘도 대들어 놓고 이럴 땐 왜 가만히 있는 건데?’
어젯밤에도 그랬다. 그 순간을 생각하면 까닭 모를 분노가 치밀어오른다. 역겨운 페로몬을 내뿜던 낯선 알파. 그의 몸 아래 널브러져 있던 그 애의 마른 팔다리. 피맺힌 뺨.
억울한 일을 당하면 되갚아주는 게 당연하다. 제힘만으로는 부족하더라도, 내가 그의 목줄을 틀어쥐고 상대의 처분을 물었을 땐 당연히 복수를 바랐어야 한다.
그런데도 그 애는 넋이 빠진 것처럼 고개를 젓기만 했다. 그를 그냥 보내 주라고 오히려 애원하기까지 했다. 그 더러운 알파만큼이나 그 애의 무른 모습이 불쾌했다. 저 멍청한 새끼가. 어디까지 사람 신경을 긁을 작정인지.
어금니를 굳게 물고 강의실로 들어갔다. 조금 전 그 애의 어깨를 치고 지나간 녀석의 앞자리로 향했다. 의자에 앉으며 가방을 벗는 척 그의 얼굴을 후려쳤다.
“아, 실수했네.”
일부러 빈정거리듯 말했지만, 얼굴을 맞은 녀석은 괜찮다며 오히려 미소 지었다. 눈에는 짜증이 가득한데 억지로 웃는 꼴이 우스웠다. 패악질도 상대를 봐 가며 부린다는 생각에 아니꼬워졌지만, 그 애가 당하는 꼴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때보다는 확실히 기분이 나아졌다.
수업이 시작되기 전, 나는 곁눈질로 가방 안을 들여다보았다. 어젯밤 그 알파는 멍청하게도 카페 안에 사원증을 흘리고 갔다. 곧바로 그의 뒤를 쫓고 싶었지만, 당한 녀석이 내버려 두라고 고집을 피웠으니 참았었다.
그렇지만, 역시 이대로 넘어가는 건 좀 아닌 것 같았다. 사원증을 그 애에게 맡기지 않은 게 잘한 일이었다. 그 알파의 사진과 이름을 확인하며, 나는 묘한 흥분감을 느꼈다. 그 애는 어떨지 몰라도 나는 참는 것보다 앙갚음해 주는 쪽이 취향에 맞으니까.
* * *
자신이 이타적인 편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알파들이 흔히 그렇듯이, 내게는 손톱만큼의 이타심도 없다.
살면서 크고 작은 사고를 쳐 본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남을 위해 도를 넘는 짓을 해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무언가 사고를 쳤다면 그건 그냥 내 멋대로 행동한 결과였을 뿐이다.
그렇기에 오늘 그 뒷골목에서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머리가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강의가 끝나자마자 그 애가 일하던 카페 건물 앞으로 간 나는 잠복이라도 하듯 그 알파를 기다렸다. 퇴근 시간 무렵이 되자 그는 정장 차림의 사람들과 함께 빌딩 밖으로 걸어 나왔다. 뒤쫓아가 사원증에 적혀 있던 이름을 부르고, 돌아보는 그를 보며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잠깐 얘기 좀 하시죠?”
그렇게 인적 드문 골목으로 그를 이끌 때까지는 어느 정도 이성이 남아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는 어떻게 할 계획이었더라. 분명 아침까지만 해도, 다시는 그 애의 곁에 얼씬거리지 말라고 적당히 겁이나 줄 생각이었다. 내가 당한 것도 아닌 일에 그 이상 나서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
그런데 한번 신경에 틀어박힌 그 애가 빠져나가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나는 오후 내내 홀린 사람처럼 그 애를 주시했다. 동선이 겹치지 않는데도 굳이 그림자 속에 몸을 숨겨 가며 뒤를 쫓아다녔다.
‘어이가 없네. 학교에 이렇게 인적 드문 곳이 많았단 말이야?’
그 애는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점심을 굶고, 화장실에 틀어박혀 몇십 분을 보내기도 하고, 철거 예정인 옛 강의동에 숨어서 공강을 버티기도 했다.
그 한심한 꼴을 보고 있으면 누구라도 부아가 치밀어 오를 거다. 도화선이 짧은 나는 더 그랬다. 차곡차곡 쌓인 갑갑함에 눈이 돌아 버렸던 모양이다.
어느샌가 나는 그 뒷골목에서 쓰러진 그 남자를 주먹으로 두들겨 패고 있었다. 기억이 잠시 끊어졌다 이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갑자기 그렇게 되어 있었다. 나도 두어 대 맞았던 건지, 입술이 터져 혀끝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관성처럼 남자의 얼굴을 짓이기면서도, 나는 내가 저지른 짓에 경악했다. 누굴 때리고 있다는 거야 그렇다 치더라도, 그 애를 위해 굳이 이렇게까지 한다는 걸 이해할 수 없어서.
“으, 으윽, 그만, 자, 잘못… 으헉, 했, 으니까….”
얼마를 때린 건지 주먹이 뻐근할 정도였다. 남자는 코피를 줄줄 쏟으면서 힘겹게 애원했다. 더 때렸다가는 정말 사달이 날 것 같아 일단 주먹을 멈추었다. 그는 몸을 퍼덕여 뒤로 물러나더니 도망칠 기운도 없는지 그대로 무릎을 꿇고 빌기 시작했다.
두 손을 몸 앞으로 모아 흉하게 비벼 대는 모양이 벌레 같았다. 비굴해진 꼴을 보니 희열이 올라왔다. 사실, 어제 카페의 창고에서 그를 봤을 때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다. 그 심약한 그 애의 말을 듣는 게 아니었다.
한참을 빌던 그는 캑캑거리며 피 섞인 침을 뱉었다. 더 이상 사고를 치면 수습해 줄 수 없다는 재훈의 말이 떠올랐다. 이 정도면 사고 친 게 맞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상관은 없었다. 사고 치는 걸 무서워했다면 여태 이러고 살지도 않았을 테니까.
나는 가타부타 말도 없이 피 묻은 손을 티셔츠에 문질러 닦았다. 침묵에 더 쫄아붙은 건지, 남자는 정신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려댔다.
“미, 미안합니다. 제가 실수했어요.”
“…무슨 실수를 한 것 같은데?”
“저는 그냥…. 죄, 죄송합니다. 서 회장님 댁에서 관리하는 오메가인 줄 몰랐습니다.”
그 말에 겨우 가라앉으려던 분노가 다시 치솟았다. 나는 발을 들어 남자의 가슴을 걷어찼다. ‘서 회장님 댁에서 관리하는 오메가’. 그건 사람들이 나를 낳은 이를 부르는 멸칭이었다.
나조차도 그 애가 ‘그 사람의 다음’일지도 모른다고 의심했었고, 지금도 그 의심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지만 남의 입으로 그런 소리를 들으니 머리가 도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씨발 새끼가…. 뭐라고?”
“아니, 아닙니다. 흐, 크억…!”
발로 걷어차자, 겨우 앉아 있던 남자의 몸이 바닥으로 완전히 넘어갔다. 드러누운 가슴을 두어 번 더 짓밟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와 라이터를 꺼냈다. 그의 얼굴 바로 앞에서 담배에 불을 붙이자, 남자는 겁에 질린 눈으로 나를 올려보았다.
담배를 쥔 손을 그의 얼굴로 가져갔다. 남자는 기겁하며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려 했다. 나는 발로 그의 한쪽 팔꿈치를 밟고, 왼손으로는 다른 쪽 손목을 쥐었다.
“똑바로 대, 개새끼야.”
미친 듯이 고개를 젓던 남자는 제 코앞까지 담뱃불이 다가가자 얼어붙어 버렸다. 나는 미동도 없이 그의 눈앞에 담뱃불을 들이댔다. 마음 같아서는 눈알을 지져 버리고 싶었지만, 그랬다간 수습이고 뭐고 안 될 거라는 생각으로 충동을 내리눌렀다.
남자에게는 억겁처럼 느껴질 만큼 시간을 끌다가, 나는 톡톡, 손끝으로 담뱃대를 두드렸다. 반쯤 타들어 간 잿가루가 그의 콧등으로 쏟아졌다. 불기운이 남아서인지 지레 겁을 먹은 남자는 소스라쳤다.
“아, 아악…!”
“안 해, 새끼야. 쫄기는….”
“으, 흐으으….”
담배를 거두자 오줌이라도 쌀 것처럼 축 늘어지는 꼴이 볼만했다. 나는 아무 말도 못 지껄이는 그의 입술 사이로 잘난 사원증을 쑤셔 넣었다.
“아저씨.”
“으으….”
“이봐요. 사람이 말을 하면 대꾸를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네, 네에….”
“오늘은 이걸로 봐줄 테니까, 다시는 걔한테 신경 쓰지 마세요. 근처에 얼쩡거리지도 말고, 이상한 소리 지껄이지도 말고. 뭐 하는 앤지 궁금해하지도 마시라고요. 알아들어요?”
“네, 그, 그럼요. 다시는, 절대로….”
“약속 지키는 편이 좋을 거예요. 다시 엉뚱한 짓 하시면 그땐 이 정도로 안 끝날 테니까.”
남자는 고장 난 인형처럼 미친 듯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멍청하고 비겁한 모습이었다. 나는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골목을 빠져나왔다.
후련하긴 한데, 난감하기도 했다. 자꾸 엉뚱한 짓을 해 대는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었다. 피로한 도시에는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얼굴 위에 겉도는 분칠처럼, 얄팍하고 요란한 불빛들이 어지러웠다.
문득, 아침부터 날 괴롭히던 갈증이 생생해졌다. 목이 마르고, 가슴이 답답한 기분. 이건 모두 그 애 때문에 생긴 짜증이었다.
그 애가 일한다는 PC방은 바로 근처에 있었다. PC방에 찾아가겠다고 한 가장 큰 이유는 저 알파 때문이었으니, 이제는 딱히 거기 갈 필요도 없는 셈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당연하다는 듯 그쪽으로 향했다.
‘내가 맛이 갔던지, 여우에 홀린 게 분명해.’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그 애가 영영 내 눈앞에서 사라지기를 바라던 나는 이제, 그 애를 봐야만 직성이 풀리겠다는 마음이었다. 그 맥없고 처연한 얼굴을 보아야만 그 애에게서 비롯된 짜증이 가라앉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PC방이 있는 그 건물은 금방이라도 썩어 무너질 것 같았다. 눅눅한 벽은 얼룩덜룩하고 어디선가 퀴퀴한 냄새도 났다. 3층 복도에 허름한 PC방이 보이긴 했는데, 조명이 어두침침해서 영업 중인 건지 아닌지도 구별이 안 될 지경이었다.
미심쩍은 기분으로 문을 여니 다행히 카운터에 그 애가 있었다. 나는 반갑고 찡한 기분이었는데, 그 애는 나를 보고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란 얼굴을 했다. 뭘 그렇게 보냐고 짜증을 내려던 차에 그 애가 카운터 밖으로 뛰어나왔다.
“너, 얼굴이 왜 이래?”
입술이 터진 걸 보고 놀란 모양이었다. 동그랗게 눈을 뜬 시선에 머쓱해졌다. 상처 난 입술을 가리려 깊게 감쳐물고, 피 얼룩이 묻은 손을 점퍼 주머니에 찔러넣었다.
“별로.”
“다친 것 같은데, 별로는 무슨…. 어, 옷에 이거, 피야?”
“…내 피는 아냐.”
“뭐…? 너 대체 뭘 하고 다니는 거야?”
뭘 하다 온 건지 솔직하게 말할 생각은 물론 없었다. 입을 꾹 다문 내 앞에서 그 애는 눈에 띄게 허둥거렸다. 험한 꼴로 들이닥친 내가 무섭긴 한데 그냥 내버려 둘 수는 없는 모양이었다.
“마, 많이 다신 거 같은데. 치료를…. 아, 나 바르려고 가져온 약 있어. 밴드도.”
“됐어. 신경 쓰지 마.”
“되긴 뭐가 됐어? 있어 봐. 얼굴인데, 덧나기라도 하면 어떡해.”
그 애는 연고와 밴드를 가져와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이런 식의 걱정을 받는 것이 낯설다 못해 불편했다. 시선을 피하려 대놓고 고개를 돌렸는데도 목을 빼고 나의 얼굴을 유심히 뜯어보았다. 제 말대로 하는 시늉이라도 보일 때까지 물러서지 않을 기세다.
대충 입술 언저리에 약을 펴 바르고 아무 데나 밴드를 붙였다. 이런 걸 못 견디는 타입인지, 그 애는 삐뚜름한 밴드를 보고 초조한 얼굴을 했다.
“거기가 아닌데…. 저쪽에 거울 있어. 보고 제대로 붙여.”
“됐어. 별것도 아닌데.”
“아니, 전혀 엉뚱한 데 붙어 있잖아. 좀 더 왼쪽이야.”
“귀찮아. 내버려 둬.”
“아, 정말….”
그는 결국 주춤주춤 손을 뻗어 내가 붙인 밴드를 떼어 입술의 상처 위로 옮겨붙였다. 손끝이 조심스레 윗입술에 닿았다. 접촉이라고도 부르기도 애매한, 작은 스침이었다.
고작 그것에 나는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페로몬을 스르르 흘려 버렸다. 코끝에 닿는 제 냄새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어릴 때도 별로 하지 않던 터무니없는 실수였다.
유혹하는 것으로 오해받아도 할 말이 없는 상황이었다. 더 우습게도, 페로몬을 맡지 못하는 그 애는 내가 무슨 실수를 했는지조차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무런 동요도 없이 밴드의 모양에만 열중해 있었다. 얼굴이 붉어질 것 같은 느낌에 그 애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씨발, 내버려 두라니까.”
그 애는 얼어 버린 표정으로 물러섰다. 딱히 겁을 주려던 건 아닌데. 한숨을 쉬고 키오스크 앞으로 갔다.
“너 몇 시까지 일해?”
“왜?”
“그냥 대답해. 몇 시까지 일하냐고.”
“…2시.”
“존나 늦게까지 일하네.”
투덜거리며 그 애의 퇴근 시간에 맞춰 4시간을 선불 결제했다.
“4시간이나 여기서 뭐 하게?”
가볍게 묻는 말에 말문이 턱 막혔다. 그냥 널 기다릴 생각이었다고는 할 수도 없고. 내가 평소에 컴퓨터로 뭘 하더라?
“…나 주식 해.”
“밤에도 거래가 돼?”
실수에 실수가 거듭되었다. 솔직한 이야기만큼은 절대로 하고 싶지 않았던 나는 엉뚱한 변명을 했다.
“미국 주식… 해.”
“…….”
“뭘 쳐다봐? 한다면 하는 줄 알아.”
의아하다는 듯 쳐다보는 눈을 피해 구석 자리로 들어가 앉았다. 씨발. 내가 생각해도 황당한 개소리였다. 뜬금없이 밤늦은 시간에 옷에 피를 묻히고 나타나 한다는 소리가 주식이라니. 차라리 게임을 한다고 할걸. 쪽팔림에 머리를 쥐어뜯었다.
어쨌거나 PC방에서 4시간이나 죽치고 있으려면 뭐라도 하는 시늉을 해야 했다. 나는 관심도 없는 뉴욕 증시 차트를 모니터에 띄워 둔 채로 슬금슬금 눈을 돌려 PC방 내부와 그 애를 훔쳐보았다.
40개쯤 되는 좌석 중에 고작 너덧 자리가 차 있을 뿐이었다. 손님이 없는 이유는 뻔해 보였다. 조명은 어둡고 시설은 남루했으니까. PC의 성능도 시원치 않았고, 삐걱거리는 의자에서는 오래 스며든 담배 냄새와 습기 내음이 났다.
그 애는 을씨년스러운 가게에서 꽤나 열심히 일했다. 손님이 떠날 때마다 정산을 하고, 빈자리는 곧바로 청소했다.
손이 비는 사이사이에는 카운터에서 전공 책을 보는 것 같았다. 피로에 찌든 눈을 부비며 무언가를 열심히 끄적이기까지 했다. 이 난리 속에서 공부를 하고 있는 모습이 어이없었다.
‘쟤는 뭘 저렇게… 아등바등 열심히 살지?’
사자가 사슴을 바라보듯 오만한 마음이라 해도 나로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나라면 그런 시달림을 받아 가며 굳이 학교에서 버티지 않았을 거다. 어제 그런 일을 당해 놓고 그 알파가 있는 근처에서 이렇게 얼쩡거리고 있다는 것도 말도 안 되는 일이고.
그 애는 생활을 위해 아르바이트를 해야 한다고 했었다. 좁은 계단과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던 그 애의 동네를 떠올렸다.
형편이 많이 안 좋은 걸까? 가난을 경험하지 못했고, 남의 살림살이에 관심을 가져 본 적도 없었던 나는 그게 어느 정도로 어렵고 불편한 일인지 감도 오지 않았다.
‘돈이 얼마나 없길래 그러지? 그냥 내가 도와준다고 하면 안 되나?’
나는 섣불리 떠오른 의문을 접어 넣었다. 자존심 강한 그 애의 성격에 섣불리 오지랖을 부리면 화만 돋울 거다. 페로몬을 가라앉혀 달라고 말할 때 그 애가 얼마나 비참한 표정을 지었는지를 생각하면 그건 정말 뻔한 일이었다.
오지랖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그 애를 도와줄 방법을 고민하던 나는 위화감을 느끼고 생각을 멈추었다. 남을 돕는 걸 좋아하는 편도 아닌데,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한편으로는 궁금했다.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는 이유로 꼬박꼬박 ‘선생님’으로 불리는 서이준은, 그 애에게 ‘도움받아도 괜찮은 사람’인지가.
‘서이준이랑 대체 무슨 관계길래….’
애인이 아니라 말하면서도, 이준의 이름을 말하며 볼을 발그레하게 물들이던 그 애의 얼굴도 떠올렸다. 그건 마치 첫사랑을 그리는 풋내기 같은 표정이었다.
불툭, 심술이 또 올라오려던 참이었다. 책을 들여다보던 그 애가 갑자기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화면을 들여다보는 눈에 촉촉한 반가움과 설렘이 선명했다.
어디서 연락이 온 건지, 그 애는 가느다란 손끝을 부지런히 놀려 메시지를 입력했다. 상대가 서이준일 거라는 생각에 들끓던 짜증이 펑 터져 버렸다. 나는 다짜고짜 바탕화면의 직원호출 버튼을 클릭했다.
“왜?”
그 애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나의 자리로 왔다. 홧김에 부른 거라 딱히 용건은 없었다. 눈을 꿈뻑거리다 또 황당한 말을 던졌다.
“배고파.”
스스로 듣기에도 또라이 같은 말이었지만, 나는 오히려 더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저녁 안 먹었어? 밥도 안 먹고 여태 뭘 하고 다녔길래….”
“그건 너 알 바 아니라니까.”
“그래도…. 어? 너 손은 또 왜 그래?”
그 애는 또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내 손을 쳐다보았다. 피 얼룩은 휴지로 훔쳐냈지만, 손등이 붓기 시작한 걸 알아본 모양이다. 나는 마우스를 쥐고 있던 손을 몸 가까이로 당겼다.
“이건 내버려 둬. 배고프다니까. 여긴 뭐 먹을 것도 안 팔아? 요샌 PC방에서 별거 다 팔지 않아?”
“과자랑 컵라면 정도는 있는데….”
“뭐야, 그게. 요새도 이런 구식 PC방이 있어?”
고집이 나 못지않은지, 그 애는 내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내 손만 쳐다봤다.
“근데 손, 다친 거 아니야? 부었잖아, 여기.”
결국 그 애가 내 손 위로 손가락을 가져오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입술도 빨고 서로 성기를 비벼 주기까지 했는데, 고작해야 손끝이 닿는 게 뭐 대수라고.
“씨발, 이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말라고. 사람 말을 뭐로 들어?”
버럭, 높아진 목소리에 그 애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별말은 없었지만, 뾰로통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면 기분이 언짢은 모양이었다. 이대로 가다간 그 애가 카운터로 돌아가 다시 서이준과 연락해 버릴 거라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그럼 컵라면이라도 줘.”
결국 또 아무 말이나 해 버렸다. 그 애는 불만스레 입술을 삐죽이다 카운터로 향했다. 조그만 뒷모습을 보며, 나는 속으로 이제부턴 말을 지껄이기 전에 생각을 좀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아니면 아예 닥치고 있든가.
“원래 이런 건 손님들이 알아서 하는 건데.”
얼떨결에 컵라면에 물을 받아 온 그 애는 불만스레 조잘거렸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는 대신 막무가내로 그 애를 잡아끌었다.
“가져왔음 됐잖아. 여기 앉아.”
“왜? 나 일하는 중인데….”
곧바로 돌아서려고 하는 모습에 기분이 상했다. 대뜸 ‘왜’냐고 묻는 건 그렇다 쳐도, 새침을 떨며 일 타령을 하는 게 얄미웠다. 조금 전까지 서이준이랑 시시덕거리던 걸 분명히 봤는데, 왜 갑자기 바쁜 척을 하는지 모를 일이다.
괜스레 인상을 쓰고 노려보자, 그 애는 내가 의아하고 불편한지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제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소맷부리 아래의 팔목은 앙상하고, 꼬물꼬물 움직이는 손가락은 가시처럼 가느다랗다. 원래도 저렇게 말랐었는지, 원래도 마른 게 내 눈에 이렇게 거슬렸었는지 모르겠다. 너무 위태로워 보여서 뭐라도 먹여야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녁은 먹은 건가? 컵라면을 나눠 먹자고 하면 좀 그렇겠지. 하나 더 가져오라고 할까? 아님 어디서 뭘 좀 사 오는 게 낫나?’
엉뚱한 생각을 하는 사이 침묵이 너무 길어졌다. 그 애가 카운터로 돌아가지 못하게 하려면 무슨 말이든 해야 하는데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분명 조금 전에 아무 말이나 지껄이지 않겠다고 다짐했으면서, 나는 또 불쑥 입을 열었다.
“너, 지금 냄새나.”
“응…?”
“페로몬 말이야. 지금 일이 문제야? 줄줄 흘리고 있으면서.”
물론 그건 완전히 거짓말이었다. 페로몬의 분출은 어느 정도 성욕에 비례한다. 그런 쪽엔 담백한 편인지, 그 애는 오전의 입맞춤으로 완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줄줄 흘리고 있는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정말? 벌써…?”
하얗게 질려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 애를 옆자리 의자에 잡아 앉혔다. 손목을 당기자, 그 애는 바퀴 달린 의자 채로 도르르 나에게 굴러왔다. 무릎이 서로 번갈아 맞물린 가까운 거리. 내 시커먼 속을 읽었는지, 그 애는 당황한 표정으로 볼을 붉혔다.
“왜 그래. 저기 손님 있는데….”
“한 명뿐이잖아.”
“그래도….”
“그 사람, 자고 있던데.”
고집스레 그 애에게 얼굴을 들이밀며 자그마한 뒤통수를 감싸 쥐었다. 그 애는 망설이는 표정을 지었지만, 배회하던 속눈썹은 결국 찬찬히 내리 감겼다.
다 여물지도 않은 오메가, 낡고 어두침침한 PC방 구석 자리. 가까이 다가온 얼굴은, 키스를 기다린다기보단 교통사고를 앞둔 것처럼 바짝 긴장한 표정.
무엇 하나 동할 이유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나는, 마음속에서 폭발할 듯한 무언가를 겨우 붙잡은 채로 그 애에게 입 맞추었다.
그 애의 입술을 몇 번쯤 머금었지만, 어떤 맛이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하지 못하는 쪽에 가깝다. 그 애에게 키스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화가 나 있었고, 겁에 질려 움츠러든 그 애를 마구잡이로 몰아붙였던 게 기억의 전부였다.
‘씨발. 안달 난 애새끼도 아니고….’
이번만큼은 느긋하게 굴어 보려고 노력했다. 두 입술 사이로 작은 입술을 겹쳐 물었다가 가볍게 빨아들였다. 혀를 깊게 밀어 넣자 달큰한 타액의 맛에 두 사람의 피 맛이 섞였다.
이런 맛이었구나, 생각했지만, 나는 금세 지금의 감각을 잊고 이 입술을 다시 맛보고 싶어질 게 분명했다. 나를 괴롭히는 갈증도 언제 가라앉았냐는 듯 또 부풀어 오르는 중이니까.
촉, 습한 파열음과 함께 입술을 떨어뜨렸다. 아쉽다고 생각했지만, 그 애는 이미 호흡이 달려 몽롱해진 얼굴이었다. 아무리 얘기해도 키스할 때 숨 쉬는 방법을 익히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역시나 얄밉게도, 그 애는 입맞춤이 끝나자마자 볼 일을 다 본 사람처럼 곧장 일어나려 했다. 호흡도 못 가다듬고 서두른다 싶더니 의자의 반동에 무릎이 걸려 휘청거렸다. 앞으로 넘어지려던 그 애의 손이 콩, 나의 무릎 위를 짚었다.
“미, 미안.”
그 애는 제풀에 놀라 또 얼른 손을 떼어가 버리려고 했다. 나는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그 애의 손등 위에 나의 손바닥을 내려 덮었다. 차갑고 따뜻한 두 손이 포개어졌다.
쿵, 쿵. 손바닥에 심장이 달린 것도 아닌데, 고동 소리가 너무 시끄러웠다. 그 애는 놀란 눈으로 나를 보았다. 새초롬히 끝이 올라간 눈꼬리와 입맞춤에 젖어 물기를 머금은 입술이 청초했다.
감겨드는 시선 속에서, 나는 나도 모르게 눈빛에 달큰하고 진득한 무언가를 실어 보냈던 것 같다. 그 애가 알아차리지는 못했더라도.
“저기, 손님이….”
“알아.”
“…….”
“나머지는 이따가.”
애는 눈에 띄게 안심하다가, 이내 나머지는 또 무어냐는 듯 표정을 샐그러뜨렸다. 그게 예쁘고도 못마땅했다. 밉살스레 굴지 못하도록, 다시 얇은 뼈대를 틀어쥐고 호흡을 빼앗고 싶기도 했다.
아니 실은, 다정하게 입 맞추고 싶었다. 지쳐 보이는 이마와 여린 뺨에. 동그란 콧방울과 찬 손등에.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고 알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던 감정이 불편하고 간지러웠다. 며칠 동안 있었던 많은 일들에, 일그러졌지만 단순했던 나의 세상은 어느새 복잡해져 있었다.
손을 놓아주자 그 애는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멀어졌다. 나는 카운터로 돌아가는 그 애의 가느다란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멀미가 날 것 같은 기분에 괜한 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빈 웃음으로도 시끄러운 속내를 가릴 수가 없었다.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것을, 더는 외면하기 어려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