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chapter 2 : 윤오(2) (2/18)

chapter 2 : 윤오(2)

“야, 한윤오.”

목요일 오후의 교양강의. 수업이 끝나기 무섭게, 앞쪽에 앉아 있던 동기 둘이 뒤를 돌아보며 히죽거렸다. 나는 그들의 말을 못 들은 척 표정을 다잡으며 귀에 고장 난 이어폰을 꽂아 넣었다.

“저 또라이 새끼가, 사람 말을 씹고 지랄이야.”

“야, 귓구멍에 좆이라도 처박고 다니냐? 야!”

곱아들려는 어깨를 억지로 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의실 복도를 빠져나온 순간 낄낄거리는 소리와 욕지거리, 경멸의 눈초리들이 쏟아졌다. 나는 주먹을 꼭 쥐고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나를 쫓아 달려드는 발소리가 들렸다. 토끼몰이의 시작이었다.

따돌림을 당해 본 경험은 예전에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는 제법 심하게. 내가 다녔던 학교는 소위 ‘학군이 좋지 않은’ 곳이었지만, 거기서도 판자촌에 사는 아이들은 드물었다. 오물 같은 소문까지 뒤집어쓴 나는 공공연한 혐오의 대상이었다.

익숙한 일이라도, 동경하던 대학에서까지 그게 반복되리라고는 생각 못 했다. 심지어 여태 겪은 것보다 훨씬 집요하고 질 나쁜 따돌림이었다. 과 동기들은 남자든 여자든, 일반고 출신이든 천랑재단 출신이든 상관없이 모두 나를 무시하거나 멸시했다.

일반고 출신들이 내게서 등을 돌린 이유는 납득할 만했다. 동기 중 한 명이 내가 수능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모양이다.

‘쟤, 대체 뭐야? 신입생인 척하는 또라이 아냐?’

원칙적으로, 재단 출신이 아닌 사람이 수능 성적 없이 천랑대에 진학할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처음에 그들은 나를 미치광이로 생각했지만, 행정실의 신입생 명단에 내 이름이 있다는 걸 확인하자 내가 부정입학을 했다고 수군거렸다. 특혜를 받은 건 사실이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재단 출신들이 나를 못살게 구는 이유는 ‘냄새’였다. 내가 나타나면, 그들은 저 멀리서부터 웃음과 경멸을 담아 속삭였다.

‘야, 저기 냄새나는 애 지나간다.’

내 코로는 도저히 문제의 냄새를 맡을 수 없었지만, 학교에서 마주친 사람이 흠칫 나를 피해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학과 애들이 괜한 트집을 잡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피가 나도록 몸을 문질러 닦는 버릇이 생겼다.

따돌림의 방식은 다양했다. 나는 학과의 모든 모임과 연락망에서 배제되었고, 중요한 공지사항도 전달받지 못했다. 복도를 지나갈 때 수군거리거나 차갑게 노려보는 것은 비교적 얌전한 짓이었다.

오늘처럼 재단 출신 남자애들이 대놓고 다가올 땐 신경을 바짝 곤두세워야 했다. 어깨를 치고 지나거나, 몸을 툭툭 건드리는 정도에서 끝나면 다행이지만 공연한 시비를 걸어 엉뚱한 곳으로 끌고 가려 할 때도 많았다.

나에게 드잡이를 하는 아이들의 배후에는 김하민이 있었다. 처음으로 나에게 냄새가 난다고 말했던 아이다. 푸닥거리가 한창일 때, 그는 꼭 저만치에서 팔짱을 끼고 서 있었다. 나에게 시비를 건 녀석들은 상황이 종결되면 맡아놓은 칭찬을 찾으러 가듯 그에게로 달려가곤 했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하민은 상큼하게 웃었다. 천사 같은 미소지만 눈으로는 서늘하게 속삭였다.

‘이래도? 이래도 버틸 거야?’

그는 왜 그토록 나를 증오하는 걸까. 그를 볼 때면 가슴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윘다. 스트레스 탓인지 입학 이후 계속 미열에 시달리고 있었다. 우습게도, 열에 발갛게 달아오른 나를 보며 어머니는 칭찬의 말을 했다.

‘우리 아들. 대학에 가더니 안 그래도 예쁜 얼굴에 꽃이 핀 것 같네. 엄마가 아무것도 못 해줬는데, 그렇게 좋은 학교에 가고…. 어쩜 이렇게 기특할까.’

오직 나만이 삶의 기쁨이고 희망인 어머니에게는 결코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꽃이 아니라 환영받지 못할 곳에 뿌리를 붙이려 발버둥 치는 잡초라고.

“이 새끼 어디 갔어?”

“이 쥐 새끼 같은 게 또 사라졌네.”

“씨발….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공강 시간마다 시비를 걸러 다가오는 아이들을 피해 몸을 숨겨야 했다. 인적 드문 서고, 노천강당의 대기실, 인문대 폐강의실 같은 곳들로. 오늘의 은신처는 도서관 화장실이었다. 몸을 웅크리고 숨을 죽이니 녀석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차피 다음 강의 대국이야. F 맞기 싫음 기어들어 오겠지. 제까짓 게 도망가 봤자 별수 있어?”

“그 새끼 이러다 자퇴해 버리는 거 아냐? 시시하게.”

“왜? 너 걔 그만둘까 봐 걱정되냐? 신경 쓰이나 봐?”

“돌았냐? 그런 걸레 썩는 냄새 나는 새끼를 누가….”

봉변을 피하려고 발버둥을 쳐 봐도 악순환이 심해질 뿐이었다. 숨바꼭질을 하는 동안 약이 오른 녀석들은 나를 찾아내는 순간 더 혹독하게 굴었고, 나는 점점 더 좁고 후미진 곳을 찾아내야 했다.

차가운 타일 벽에 몸을 붙이고 있자니 처량한 처지에 헛웃음이 나왔다. 다른 아이들 같으면 휴학이나 자퇴를 고민했겠지만, 나는 그럴 수 없었다.

휴학을 하면 장학금을 받을 수 없게 된다. 자퇴는 더 복잡한 문제였다. 학교를 그만두면 꼼짝없이 진학을 포기하고 일을 해야 했다. 내게는 일 년을 낭비할 여유가 없으니까.

나는 주먹을 꼭 쥐고 마음을 다잡았다. 버텨야 한다. 지금을 견디는 것으로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버티는 게 맞다. 저들은 곧 흥미를 잃을 것이다. 학창 시절에도 그랬다.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으면 따돌림은 제풀에 잠잠해지곤 했다.

‘시간이 지나면 다 괜찮아질 거야. 선생님만 오면, 모든 게 지금보단 나을 거야.’

나는 습관처럼 손목에 걸친 시계를 확인했다. 째깍, 째깍. 태엽의 움직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지난 며칠간 이준이 준 시계는 나에게 나침반 노릇을 했다. 모든 걸 놓아 버리고 싶어질 때에도 손목을 내려다보면 마음이 진정되곤 했다.

뉴욕은 지금 새벽 12시 45분. 이준이 진작 잠들었을 시간이라는 걸 알면서도 나는 미련처럼 그와의 메시지창을 확인했다.

한국에 있을 때도 그 정도로 자주 연락을 주고받지는 않았는데, 그는 왜 그런지 일상을 보고하고, 보고받듯 매일 새벽 메시지를 보내왔다.

[어제 미드타운이스트에 있는 중고서점에서 『멋진 신세계』 초판본을 봤어. 신기하지? 너무 비쌀 것 같아서 얼만지도 못 물어보겠더라.]

[뉴욕은 3월에도 춥고 우중충해. 거긴 봄 날씨 같아? 학교가 언덕에 있어서 다른 곳보다 춥긴 할 거야.]

[할아버지 댁 근처에 백부님이 운영하는 연구소가 있는데, 여기서 지내는 동안 연구실 하나를 써도 된다고 하셨어. 백부님도 신약 개발에 관심이 많으시거든.]

[과외 학생은 잘 따라오고 있어? 윤오처럼 성실한 학생이면 좋겠는데.]

학교에서의 따돌림에 관해서는 그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사정을 알지도 못하는 그가 나를 위로해 줄 리 없지만, 그럼에도 나는 그의 연락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가 보내오는 따뜻한 말들은 나에게 그 자체로 위안이었다. 그와 연락할 수 있는 시간이 밤의 3시간 남짓이라는 게 아쉽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준의 메시지들을 되짚어 보는 사이 괴로운 공강 시간은 끝나갔다. 이제 곧 대학국어 강의라 과 동기들이 모두 한 강의실로 모이게 된다. 월요일 오전의 전공 강의와 지금이 가장 큰 고비였다. 한데 모인 아이들은 더 가혹하고 난폭해지곤 했으니까.

강의실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 중 내 편은 아무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거라곤 날 건드릴 만한 시간이 없도록 타이밍을 맞춰 강의실에 드나드는 것 정도였다. 강의가 시작된 직후에 들어갔다 끝나기 3, 4분 전쯤 빠져나가는 식이었다.

나는 몇 번이나 시간을 가늠해 본 후 출발했다. 강의실에 숨어들어간 것이 3시 2분. 계산한 시간이었지만, 하필 교수님이 늦었는지 강의는 아직 시작되지 않은 채였다. 구석 자리에 몸을 숨겨도 소용없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나를 뒤쫓았던 두 녀석이 다가왔다.

“이게 누구야. 한윤오 아냐.”

“어차피 여기로 기어들어 올 걸 아깐 뭘 그렇게 기를 쓰고 튄 거냐? 이 멍청한 새끼가.”

“왜 남의 말을 씹고 그래? 사람 서운하게. 응?”

“야, 왜 그랬는지 말을 해 보라고.”

잔뜩 움츠러든 나는 안 하느니만 못한 대답을 했다.

“…미안. 못 들어서.”

“구라치지 마, 씨발 새끼야. 눈 마주치는 거 다 봤는데.”

“이게 사람 개무시하네. 아오, 그냥 확….”

한 녀석이 때릴 듯이 손을 들어 올리자, 나는 반사적으로 뒤로 몸을 기울였다. 그 순간 다른 녀석이 내가 앉은 의자 다리를 걷어찼다. 기우뚱, 중심을 잃은 나는 의자 채로 넘어졌다. 쿵, 바닥에 몸이 부딪치는 소리에 이어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너무 당황스러워 순간 아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버둥거리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을 때는 교수님이 도착해 있었다. 모두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반듯한 자세로 교탁 쪽을 바라보고 있다.

서러움이 울컥거리고, 바닥에 부딪친 팔목이 뒤늦게 시큰거렸다. 나는 또 감정을 무시하고 강의에 집중하려 애썼다.

이 강의만 넘기면 이번 주의 고통은 대부분 끝난다. 서둘러 강의실을 빠져나가기만 한다면 더 이상의 소란은 없을 거다. 그러고 나면 금요일이, 주말이 찾아오니까 충분히 참을 수 있다.

강의가 마무리될 때쯤, 나는 나갈 타이밍을 재기 위해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그제서야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걸 발견했다. 3시쯤 시작한 강의가 거의 끝나가는데, 시침은 여전히 3시 부근을 가리키고 있었다.

‘왜 멈춰 있지? 고장 난 건가? 아까 바닥에 부딪쳐서…?’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강의실 밖으로 나와 발을 동동 구르다 화장실로 들어갔다. 시계를 풀어 흔들어도 보고, 태엽도 감아 보았지만 시계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푸르게 멍이 올라온 팔보다 돌아가지 않는 시계가 더 아팠다. 온갖 시달림에도 보름 너머 울지 않고 버텼는데, 이번에야말로 주저앉아 엉엉 울어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곧 수업이 끝나고 아이들이 나올 시간이었다. 누군가 나를 쫓아와 흰소리를 하기 전에 이 건물을 떠나야 하지만, 힘이 빠진 내 몸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귓가에 저벅저벅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또 누가 날 괴롭히려 드는 걸까 싶어 어깨를 움츠리는데, 뜻밖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 시계, 뭐야?”

유달리 커다랗고 어두운 그림자. 서이한이 나의 곁에 바짝 다가서며 물었다. 막막하고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나는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오래간만이라고 생각했다. 서이한이 나에게 말을 건 것은 OT 이후로 처음이었다.

나에게 말을 걸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는 다른 아이들과도 크게 교류하지 않는 것 같았다. 말하자면 철저한 방관자의 위치에 있던 셈이지만, 그가 아이들의 토끼몰이에 끼어들지 않는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감지덕지했다.

그는 언제나 무리에서 외따로 떨어진 늑대처럼 고고하고 강인해 보였다. 스치듯 그와 마주칠 때마다 나는 오금이 저릴 듯 그에게 압도되곤 했다. 그가 마음먹고 나를 위협하려 들었다면 등교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오늘도 그랬다. 곧잘 입는 어두운색의 트랙슈트와 후드, 그늘이 짙게 드리워진 콧날. 가만히 서 있을 뿐인데도 기운이 서늘해 보였다.

안 그래도 시계가 고장 나 정신없는데, 그가 불쑥 나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아무 대답도 못 하는 사이 이한은 시계를 가로채 갔다. 뒤늦게 팔을 뻗었지만 그는 끄떡도 하지 않고 빼앗아간 시계를 자세히 뜯어보았다.

“왜 그래? 돌려줘.”

“뭐 이딴 걸 가지고 다녀?”

“고장 나서 잠깐 멈춘 거야. 빨리. 달라니까.”

날이 선 얼굴이 나를 노려보았다. 불편하고 익숙한 상황이었다. 누가 나에게 선물을 주면 나는 기쁜 만큼 걱정이 되곤 했다. 몇몇 어른들은 그걸 보고 어디서 난 물건인지를 묻기도 전에 도둑질은 나쁜 거라는 훈계부터 늘어놓았으니까.

그도 내가 형편에 맞지 않게 좋은 물건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는 걸까. 지레 주눅이 든 나는 묻지도 않은 변명을 했다.

“선물 받은 거야. 돌려줘.”

“선물? 누가 준 건데.”

“…서이준 선배.”

“서이준?”

“그래. 빨리 줘.”

그가 시계를 쥔 손에 힘을 푼 사이 시계를 끄집어냈다. 다시 들여다봐도 여전히 시계는 멈춰 있다. 어깨를 축 늘어뜨리는 나의 옆에서, 그는 신경질적으로 손을 씻었다.

“이걸 서이준이 줬다는 거지. 씨발, 그 새끼라면 그럴 만도 하네.”

“너, 그 사람 알아?”

“…형이야.”

“형? 정말? 친형?”

남의 신상을 캐묻는 일 같은 건 생전 해 본 일이 없으면서도, 나는 반가운 마음에 오지랖을 부렸다. 그와 이준이 닮아 보였던 내 짐작이 맞았던 게 신기해서였을까.

“그럼 너는 거기 안 갔어? 미국 할아버지 댁에 가족들 다 모인 거 아니야?”

“그 사람들이 뭘 하든 나랑 무슨 상관이야? 그 집구석에 신경 끈 지 오래됐어.”

“그치만, 형제…라고….”

“이복형제야. 됐어?”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지만 나는 당황해 버렸다.

“아, 그, 그런….”

“…….”

“…미안해.”

나를 노려보는 그의 눈 속에 선명한 혐오가 어려 있었다. 견디기 힘들다는 듯, 그의 가슴팍이 천천히, 그러나 눈에 보일 정도로 오르내렸다.

“너도, 존나 알 만하다. 진짜.”

“…….”

“그거, 찰 거면 똑바로나 차고 있어.”

그는 씹어뱉는 투로 말하고는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냉소적인 마지막 말이 가시 같았다. 날 알지도 못하면서 알 만하다는 말은 뭐고, 실컷 비아냥거려 놓고는 시계를 똑바로 차고 있으라는 말은 또 뭔지.

매도당하는 일에는 익숙한데. 여태껏 있던 일들에 비하면 큰일도 아닌데. 시계 때문에 마음이 약해져서인지 억울함이 와락, 치솟았다. 앞에서는 제대로 대꾸조차 못 했으면서 혼자 품은 설움이 좀처럼 가셔지질 않았다.

이한과 마주친 뒤로 얼굴에 더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머리가 자꾸 흐려져 과외 학생을 가르치는 것도 힘들었다.

‘왜 이렇게 몸이 노곤하지…. 봄이라 그런가.’

과외를 마치고 야간 아르바이트에 갈 때까지 잠깐 뜨는 시간에 근처의 시계 수리점으로 찾아갔다. 간단히 고칠 수 있기를 바랐지만, 기계식 제품이라 수리가 쉽지 않다고 했다. 기간도 2주 남짓 걸리고 수리비도 20만 원은 될 거라는 말에 맥이 탁 막혔다.

어머니의 한 달 투석 비용과 맞먹는 돈이었다. 포기하는 게 정답인데도 자꾸만 마음이 달싹거렸다. 생각해 보겠다고 말하고 나와서는 새벽이 깊도록 고민했다. 전 같았으면 고민해 볼 여지조차 없을 정도로 부담스러운 돈이었다. 그렇지만….

‘아예 불가능한 건 아니잖아. 과외는 시급도 세고, 카페 아르바이트비도 곧 들어올 거고….’

그 정도 사치는 부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자꾸만 자괴감이 끼어들었다. 갈팡질팡한 마음으로 일어나 공용 욕실에서 몸을 씻으니 자괴감은 더 생생해졌다. 찬기와 곰팡이로 가득 찬 욕실에서 벌벌 떨고 있는 주제에, 분수에 맞지도 않는 시계라니.

예전에 아르바이트했던 가게의 사장이 했던 말이 생각났다. 스폰을 해 주겠다는 제안을 거절당하자, 그는 내가 별종이라도 되는 양 이죽거렸다.

‘너 같은 애들은 답이 없어. 못 살면 머리를 써서 잘살아 볼 생각을 해야지, 평생 궁상만 떨고 있을 거야? 하긴, 애초에 그렇게 의욕이 없으니까 가난하게 사는 거지.’

다른 부분은 동의할 수 없지만, 답이 없다는 비아냥만큼은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 생각이 제대로 박혀 있다면 그 돈을 들여 시계를 고칠 게 아니라, 그 시계를 팔든 일을 하든 해서 하루라도 빨리 이곳에서 나가는 데에 신경을 쓰는 게 맞다.

그렇지만… 시계를 포기할 순 없었다. 이걸 볼 때마다 떠올리던 이준의 말이 계속 마음을 맴돌았다.

‘너에게는 여기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자리가 있어.’

그 말은 나에게,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갈 수 있다는 약속 같은 거였다. 더구나 머지않아 이준이 귀국할 것이다. 선물 받은 시계를 곧바로 망가뜨린 한심한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결국 시계를 고치기로 마음을 먹고 나서, 욕실 거울에 낀 수증기를 엄지손가락으로 걷어냈다. 추위에 경직된 나의 얼굴이 보였다. 유약할 정도로 선이 가늘고, 쓸데없이 곱상한 얼굴. 나는 이 얼굴을 좋아하지 않는다. 이걸 이유로 겪지 않아도 될 일을 너무 많이 겪었기 때문에.

‘왠지… 오늘따라 얼굴에 혈색이 있네.’

매일 보는 얼굴에서 문득 위화감을 느꼈다. 피부는 평소처럼 창백하지만, 뺨과 입술이 발그레한 게 어딘가 인상이 달라진 것 같다. 어머니가 했던 말처럼 얼굴에 화사한 꽃이 피어난 것 같았다.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금요일이라 기분이 조금 좋은 거려니, 하고. 경제학과 동기들은 대부분 금요일 수업이 없어서, 금요일만큼은 괴로운 숨바꼭질을 하지 않아도 된다.

강의는 오전뿐이고, 아르바이트 일정도 늦은 오후부터다. 금요일의 캠퍼스에서는 나도 책을 읽고 볕도 쬐며 보통의 대학생처럼 느긋한 기분을 누릴 수 있다. 수리점에 시계를 맡기고 학교로 가는 발걸음이 모처럼 가벼웠다. 매일 타는 지하철도 왠지 새로웠다.

그렇게 들떠 있던 탓에, 나는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지하철 같은 칸의 저편에서 누군가가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렸을 때 이미 시선의 주인은 옆에 가까이 다가서 있었다.

“저, 저기, 학생….”

끈적하고 음습한, 잘 아는 종류의 시선이다. 더듬더듬 말을 걸어 온 것은 정장을 차려입은 40대 후반쯤의 남자였다. 미처 피할 틈도 없이, 그는 강한 힘으로 덥석, 나의 손목을 틀어쥐었다.

“…네?”

“학생. 왜 이러는 거야. 몸이 안 좋아…?”

몸이 안 좋아 보이는 것은 오히려 그 남자 쪽이었다. 그는 어깨가 크게 들썩거릴 정도로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경계하는 표정을 숨기지 않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아뇨, 괜찮습니다.”

“학생. 이러고 다니다가 정말, 후, 큰일 나.”

“무슨… 말씀을….”

“아직, 조절을 잘, 못하는 거야? 으음, 후…. 내가 도와줄게, 그럼. 응?”

“…….”

“넌 예쁘고, 순진한 애 같으니까…. 내가… 부드럽게….”

헐떡거리며, 그는 제 넥타이 매듭을 뒤틀어 느슨하게 했다. 목울대가 꿈틀거릴 정도로 침을 꿀꺽, 삼키더니 혀를 내어 제 입술을 축였다. 송곳니가 유난히 뾰족해 보였다.

그제야 깨달았다. 나를 탐내는 그의 눈은 사람의 눈빛과는 조금 달랐다. 그보다 훨씬 난폭한 야생을 품고 있다. OT의 의무실에서 몸 위에 올라탔던 동기 녀석처럼.

붙잡힌 손목에서부터 구물구물 소름이 돋아올랐다. 있는 힘껏 잡힌 손을 뿌리치고 남자의 가슴을 밀쳐냈다. 상대가 주춤하는 사이 뒤돌아서 지하철의 옆 칸으로 달려갔다.

“학생, 학생…!”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짐승의 헐떡임 같았다. 사람들 사이를 헤치고 열차 두 칸을 넘어갔다. 열차는 곧 천랑대입구역에 도착했다. 지하철에서 내려 쉬지 않고 달려 학교 방향의 출구로 빠져나왔다. 혹시 그 남자가 따라 내렸다고 해도, 교내로 가는 셔틀에 타면 더 이상 쫓아오지 못할 것 같았다.

금요일이라 다행히 셔틀 정류장에는 줄이 길지 않았다. 걸음을 재촉하던 나는 다시 뒤에서 손목을 붙잡혔다. 화들짝 뒤를 돌아보니, 나를 붙잡은 것은 아까 그 남자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너, 천랑대생이야?”

볼 캡을 쓰고 백팩을 멘 평범한 대학생의 옷차림. 점퍼에 쓰인 글씨를 보면 천랑대 학생인 것 같았다. 그렇지만 안도하기는 일렀다. 그의 상태도 조금 이상했다.

“…왜 그러세요?”

“어느 과? 몇 학번?”

“그, 그게….”

“후우, 천랑고 출신은 아니지? 처음 보는 얼굴인데? 그럼… 하아, 어떻게….”

역시나 그는 이내 진득한 숨을 몰아쉬기 시작했다. 주춤거리며 뒷걸음질 치다 발이 걸려 휘청거렸다. 중심을 잃고 넘어지기 직전, 이번에는 누군가가 나의 어깻죽지를 껴안듯 휘감았다.

뒤를 돌아볼 틈조차 없었다. 나를 붙든 사람은 내 겨드랑이 아래 손을 넣어 내 몸을 일으키더니 뒤에서 몸을 바짝 가져다 붙였다. 엉덩이에 단단한 것이 스치는 느낌에 소스라쳤다.

“놔, 놔주세요…!”

등 뒤의 남자는 내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고 혀를 내어 내 귀를 핥았다. 벌레가 기어오르는 듯 오싹했다. 발버둥 쳐 몸을 떼어 냈지만 그는 나의 반대쪽 손목을 붙잡았다. 난데없이 낯선 남자들에게 양팔을 붙잡힌 꼴이 되었다. 덫에 걸린 기분이었다.

“이건 또 뭐야? 씨발, 따먹어 달라고 발악하는 것도 아니고.”

내 귀를 핥은 남자는 난잡하게 이죽거렸다. 그는 질척한 눈으로도 내 얼굴과 몸을 이리저리 훑어 댔다.

“놔주세요. 제, 제발…. 이것 좀….”

떨리는 목소리를 끄집어내 애원했지만, 그 자리의 누구도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내 손을 잡은 두 남자는 서로를 노려보며 마주 서 있었다.

대치가 이어지던 차에, 저만치 셔틀 줄 근처에 서 있던 다른 남자 셋이 가까이 다가왔다. 도와주거나 말려 주려는 사람인지 모른다고 기대했지만 상황은 더 나빠졌다. 새로 다가온 이들은 내 귀를 핥은 남자와 일행인 듯 보였다.

“누구? 너 아는 애야? 씨발, 이런 게 어디서 갑자기 튀어나왔지?”

“히튼가? 아닌 거 같지? 히트도 아닌데 뭘 이렇게 줄줄 흘리고 다녀?”

“덜떨어진 앤가 보지. 아님 발정이 단단히 났던가.”

“몰라, 하, 러트도 얼마 안 남았는데 꼴려 뒈지겠네, 진짜.”

저들끼리 뭉쳐 기세가 등등해진 그들은 먹잇감을 앞에 둔 도깨비처럼 수군거렸다. 거친 숨소리, 코를 킁킁거리는 소리가 어지럽게 뒤엉켰다.

“후, 얘 쫄아서 쳐다보는 것 좀 봐. 씨발, 장난 아니네.”

“야.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응?”

“그래. 너네 집이 이 근천가? 내 방이 더 가깝나?”

“빨리 아무 데라도 들어가자. 길바닥에서 싸겠다고, 씨발.”

“하아, 그래. 나도 못 참겠어. 저거 모텔 아냐?”

먼저 내 손목을 잡은 남자는 수적 열세에 주춤거리다가 이내 손을 놓고 물러섰다. 나를 차지한 남자들은 만족한 듯 미소를 흘리며 눈을 더욱 번뜩였다. 여덟 개의 눈동자에서 형형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혹시 꿈이 아닐까, 나는 간절하게 생각했다. 지금의 상황은 나의 해묵은 두려움을 노골적인 형태로 뭉쳐놓은 악몽 같았다.

저 패거리들에게 순순히 끌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끌려간 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실은, 굉장히 끔찍하고 선명한 예감이 들었다. 상상만으로 구토감이 치밀어오를 정도로.

손을 뿌리치고 죽도록 달아나면 벗어날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달리기는 잘하는 편이었지만 자신이 없었다. 손목을 틀어쥔 손은 간단히 뿌리쳐지지 않을 정도로 강했고, 이미 겁을 먹은 내 다리는 후들거렸다.

‘누가… 아무라도 도움을….’

지푸라기라도 잡는 기분으로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간절함에 입술이 말랐지만, 거리의 사람들은 대부분 무심하게 나를 스쳐 지나갈 뿐이었다.

유심히 이쪽을 보는 몇몇 사람들의 눈에서는 하나같이 기묘한 빛이 흘렀다. 그들은 나를 둘러싼 남자들과 동류였다. 금방이라도 다들 이빨을 드러내고 나에게 다가와 온몸을 물어뜯을 것 같았다.

모든 것을 체념해 버리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또 다른 누군가가 내게 달려들었다. 단단한 어깨가 가슴팍에 쿵, 부딪치더니 이내 나의 허리를 훌쩍 안아 들었다. 무력하게 허공으로 들어 올려진 나는 팔다리를 휘적거렸다.

“사, 살려….”

“가만히 있어.”

왈칵, 눈물이 솟아오르려다 멈추었다. 무뚝뚝하고 낮은 목소리가 귀에 익었다. 단단하고 넓은 어깨, 내 등을 감싼 강인한 팔.

“서이한…?”

“제정신이야? 씨발, 대체 왜 이러고 돌아다녀?”

이한은 우악스레 다그치고는 나를 안은 채로 곧장 달아나기 시작했다. 나를 둘러싸고 있던 남자들은 얼떨결에 사냥감을 놓친 꼴이 되어 우리를 뒤쫓아왔다.

이한의 어깨 위에 매달린 나에게는 고스란히 보였다. 우리를 쫓는 그들의 흉포한 표정이, 핏발 서린 눈동자가. 나도 모르게 이한의 목을 팔로 꽉 감싸 안았다. 눈을 감고, 그의 어깨 위에 고개를 묻었다. 붙잡을 것이라곤 그뿐이었다.

이한은 나를 들쳐 맨 채로도 뒤를 쫓는 이들보다 더 빨리 달렸다. 그는 순식간에 횡단보도를 건너 반대편의 골목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패거리를 따돌리려는 듯 모퉁이를 몇 번이고 빙빙 돌면서도 크게 지친 기색이 없었다.

높고 깨끗한 오피스텔 건물 앞에 이르러, 그는 나를 팽개치듯 내려놓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윽박지르는 그의 목소리에 다시 심장이 움츠러들었다.

“미쳤어? 씨발, 온 동네 알파들 죄다 발광하는 꼴 보고 싶어서 이래?”

“…….”

“시계는 어디 두고 이 꼴로 기어 나온 거야?”

“고, 고장 나서… 수리 맡겼어. 그런데 시계는 왜….”

“이 멍청한 새끼가 겁도 없이….”

이한은 숨을 몰아쉬며 유리로 된 공동현관문을 열었다.

“뭘 멍하니 있어? 빨리 들어와.”

“…….”

“안 들려? 아까 그 새끼들한테 끌려가고 싶어서 환장했어?”

후들거리는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팔을 거칠게 잡아챘다. 멍든 자리를 붙들려 아릿한 통증이 느껴졌다. 그는 계단 뒤쪽의 사각으로 나를 데려갔다. 문이 닫히는 걸 보고 반쯤 정신이 돌아온 나는 홀린 듯 질문을 쏟아내었다.

“아까 그 사람들, 뭐야? 너 아는 사람들이야?”

“너한테 붙어먹으려던 새끼들이 누군지를 왜 나한테 물어?”

“왜, 왜 다들 그렇게….”

“왜는. 네 냄새 때문에 눈깔 뒤집힌 거 아냐.”

“내가, 뭘….”

“오메가가 대체 무슨 정신머리로 이러고 돌아다니는 거야? 험한 꼴 당하고 싶어서 안달이라도 난 거냐고!”

“오메가…?”

“그래. 으, 페로몬, 후우…. 빨리 못 닫아? 씨발. 이래서 오메가는….”

“그게… 무슨….”

“하…. 흘리는 게 아니라 아주 내뿜고 있네, 이 덜떨어진 새끼가.”

내가 아무 대답도 못 하는 사이, 그는 목을 길게 빼고 다시 한번 현관 밖의 동태를 확인했다. 골목에서는 아무런 인기척도 들려오지 않았다. 나를 둘러쌌던 남자들을 따돌리는 데 성공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조금도 진정되지 않았다. 이젠 또 무슨 냄새가 문제라는 걸까. 어제까지는 악취라도 맡은 듯 다들 나를 꺼려했으면서, 오늘은 또 세상이 뒤집힌 것처럼 내 냄새를 뒤쫓아 달려드는 건 무슨 일인지. 넋을 놓고 있는 나에게, 이한은 신물이 난다는 듯 중얼거렸다.

“사람이 말을 하면, 하는 듣는 척이라도, 후우…. 해 봐.”

“어떻게 하라는 건지… 모르겠어.”

“빨리 갈무리하고 너 갈 길 가라고. 내 근처에 얼쩡거리지 말고.”

그가 다시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눌러 쓴 후드 아래로도 확실히 보였다. 나를 통째로 꿰뚫어 버릴 듯이 강렬한 짐승의 안광이.

“네 역겨운 암컷 냄새 더 이상 못 맡아 주겠으니까.”

말로는 가라고 하면서도, 그는 나무줄기 같은 손가락으로 내 팔을 더 강하게 옭아매었다. 경멸의 눈빛 너머로 알 수 없는 열기가 끓고 있었다. 그 열기가 그와 나 사이의 공기를 다 태울 것 같았다. 본능적인 두려움에 나는 그에게서 손목을 잡아 빼려 했다.

“아, 아파. 이거 좀 놔줘….”

“…….”

“놔줘. 응?”

“사람 약 올리는 것도 아니고…. 말귀 못 알아들어? 닫아. 쳐 닫으라고, 씨발!”

그는 목에 핏대가 올라올 정도로 언성을 높였다. 영문도 모른 채 몰아붙여진 나는 몸을 떨었다. 연달아 뺨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불행에도 불운에도 익숙하다고 생각했지만, 하루 이틀 사이에 너무도 많은 일이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도 받아들일 수도 없는 일들이.

“…몰라.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뭐…?”

“모른다니까. 내가 어떻게 알아들어? 오메가니, 알파니, 그런 거 다 처음 듣는 얘기야.”

“…….”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나는 나한테서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건지도 모르겠는데, 다들 수군거리고, 밀치고, 이제 사냥이라도 하는 것처럼 쫓아오기까지 하고.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나에게 일어났던 일들 중 이한의 잘못으로 인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걸 잘 알면서도, 나는 화풀이처럼 그에게 악을 썼다.

두 눈 가득 뜨거운 눈물이 차올랐다. 울지 않기 위해 눈을 크게 뜨고 천천히 숨을 쉬었다. 눈물이 어른거려 시야가 흐릿했지만, 그가 동요하고 있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아무것도… 몰라?”

억눌려있던 그의 숨결이 차츰차츰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내가 마실 호흡까지 그가 모두 삼키고 있는 것처럼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 대체 뭔데? 씨발,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건데?”

“…….”

“랑족이 아니었어? 유인원족이야, 그럼?”

“…그것도 무슨 말인지 몰라.”

“아니, 아니…. 그럴 리가. 이 냄새는….”

홀린 듯 속삭이는 이한의 눈동자 속에서 무엇인가 탁, 하고 끊어졌다. 그는 아무런 예고도 없이 나의 뒤통수를 거칠게 그러쥐었다. 머리채를 쥔 손을 끌어 내리자 턱이 위로 들려졌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얼굴은 얼음조각처럼 차갑고 아름답고, 그만큼이나 날카로웠다.

위압감에 신음조차 제대로 뱉지 못했다. 그의 눈동자에서 튀어 오르는 불티가 눈을 멀게 만들 것 같았다. 그는 내 광대뼈 위로 우뚝한 코끝을 스쳐 귓가로 가져갔다. 스으으읍. 그가 숨 을 들이켜는 소리가 선연했다.

“흐으, 흐으… 흐읍.”

나는 거칠어진 숨을 가리지 못했다. 그가 나를 한입에 삼켜버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호흡이 흔들렸다. 저 오만하고 단정한 입술이, 나를 흔적도 남기지 않고 집어삼켜 버릴 것만 같았다.

“한윤오.”

그는 다시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었다. 그는 나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지만 여태 부르지는 않았을 뿐이라는 듯이, 이한은 자연스럽고 또렷하게 나를 호명했다.

“지금 이 냄새… 안 느껴져? 아주 진동을 하는데.”

그는 낮게 그르렁거렸다. 그 목소리가, 팽팽히 당겨진 긴장감이 공기를 긁고 내 심장을 두드렸다.

“이대로 다시 나가면, 아까 그런 새끼들이 수도 없이 덤벼들 거야.”

“…….”

“이 냄새, 내가 없애 줄까?”

축축한 유혹 같은 한마디였다. 나는 그게 무슨 의미인지도 정확히 모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홀린 듯이, 이끌리듯이.

그는 머리칼을 쥐었던 손을 놓고, 멍든 내 팔을 잡아끌었다. 아프다고 말할 틈도 없이 엘리베이터에 태워졌다. 엘리베이터가 9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우리는 누가 더하달 것도 없이 숨을 헐떡였다. 호흡과 호흡 사이가 너무도 다급해서 기절해 버릴 것 같았다.

띠잉, 하고, 엘리베이터의 도착음이 의식을 두드렸다. 몸이 떨려 몇 걸음을 걷는 것도 힘들었다. 이한은 휘청이는 나를 아무렇게나 잡아끌더니 집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읏…!”

어떻게든 중심을 잡아 보려 했지만 그의 움직임이 더 빨랐다. 벗겨진 백팩은 저만치 날아갔고, 나는 현관의 거울 앞으로 떠밀렸다. 퇴로가 차단된 나의 앞에, 그가 바짝 다가왔다.

몸 사이의 간격은 점점 좁아지다 이내 사라졌다. 이한의 두꺼운 허벅지가 나의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다리 안쪽, 그의 중심에서 무언가 딱딱한 것이 닿았다.

강렬한 공포가 등줄기를 스쳤다. 저항해야 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나는 급류에 휩쓸린 것처럼 흥분된 공기 안에서 무력했다. 그의 두 팔 사이에 무력하게 갇혀 있을 뿐.

그가 다시 고개를 기울여 다가왔다. 흐트러진 호흡이 서로에게 엉겨 붙었다. 턱없이 모자란 숨을 크게 삼키기 위해 입술 새를 살짝 떨어뜨리는 순간이었다.

“으읍.”

이한은 내 아래턱을 끌어당기고는 입술 위에 입술을, 아니 이빨을 묻었다. 아주 가까워진 그의 눈동자. 치아가 아랫입술을 잘근거리는 날카로운 느낌. 모든 것이 생경했다.

나는 두려움에 눈을 감아 버렸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그는 입을 다문 나의 양 볼을 거칠게 잡아 눌렀다. 억지로 벌어진 입안으로 더운 혀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그는 혀끝을 목구멍까지 박아넣을 기세로 밀어붙였다. 성기를 삽입하듯 혓바닥으로 내 입안을 헤집고 희롱했다. 고개를 저을 수도 없게 얼굴을 붙잡혔다.

점막에 점막이 문질러지는 낯선 감각. 나는 찌릿하고 질척한 그것이 쾌감인지 불쾌감인지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뭔지도 모르는 기분에 몸이 떨렸다.

“윽, 흐윽….”

붙잡힌 온몸 위에 그의 몸이 비벼졌다. 뜨겁고 딱딱한 그의 성기까지. 정신없이 혀와 입술을 빨리는 와중에도 그게 점점 부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멍해져 버린 나는 어느 순간부터 호흡을 뱉지 못하고 안으로 삼키고만 있었다. 끊어질 듯 뒤로 넘어가는 숨을 알아채고 이한이 입술을 떼었다. 나는 폐로 처음 호흡해 보는 갓난아기처럼 숨을 몰아쉬었다.

“뭘 끅끅거려? 코로 숨 쉴 줄 몰라?”

“하으, 허어억….”

“혀 내밀어.”

그는 씹어뱉듯 말했다. 싸늘한 말투가 데일 듯이 뜨거웠다. 얼이 빠진 내가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는 거칠게 나의 턱을 쥐었다.

“혀 내밀라고, 씨발. 시체에 키스하는 것 같아서 기분 더러우니까.”

“흐…으….”

“빨리 시키는 대로 해. 아님, 더 심한 꼴 당하고 싶어?”

저항할 엄두가 나지 않아 혀끝을 조금 내밀었다. 그는 그 위로 제 혓바닥을 질척하게 문지르고는 나의 혀를 감아 당겼다. 나는 그가 휘감는 대로 이리저리 휩쓸려 다녔다.

키스를 하고 있다는 의식조차 들지 않았다. 입을 맞추고 있다기보단, 덫 안에 갇혀 목을 물어뜯기는 짐승이 된 것 같았다.

인중부터 턱까지 타액으로 범벅이 되는 사이 호흡은 다시 바닥났다. 눈앞이 아득하게 흐릿해졌다. 고개가 휘늘거리기 시작하자 이한은 신경질적으로 나의 머리채를 잡아 뒤로 당겼다.

“씨발, 숨 좀!”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나는 꼴사나울 정도로 심하게 숨을 헐떡였다. 차라리 그냥 쓰러지고 싶었지만, 그가 몸을 받치고 있어 마음대로 무너질 수도 없었다. 덜덜 떨리는 다리가 그의 다리에 휘감겼다. 열기에 일렁이는 눈이 나를 노려보는가 싶더니, 그는 이를 세워 다가왔다.

입술을 물어뜯길 것 같다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지만, 깨물린 곳은 귓바퀴였다. 얼굴 전체로 소름이 퍼져 가는 기분이 묘했다. 이내 축축한 혀가 귀를 핥아 내리자 나도 모르게 입술 사이로 신음이 새어 나갔다.

“하으읏.”

내가 뱉은 야릇한 소리에 내가 놀라 몸서리쳤다. 이한은 나의 귀를 빨고 혀끝으로 굴리며, 동시에 손으로 등허리를 지분거렸다. 익숙지 않은 느낌이 여기저기서 밀려왔다. 몸이 붕 뜨는 것 같다가도 바닥도 없이 훅 꺼지는 것 같았다.

납작한 배와 가슴 위를 더듬던 그의 손이 바지춤에 닿았다. 버클을 푸는 느낌에 기겁해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는 너무도 간단히 나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렸다.

“싫어, 시… 싫어.”

애원해 보아도 아무 소용도 없었다. 그는 셔틀 앞의 남자들에게서 나를 끄집어낼 때처럼 손쉽게 나를 안아 올렸다. 두 다리가 바닥에서 들리자 무릎에 걸쳐져 있던 바지가 발목까지 흘러내렸다.

이한은 맞은편의 야트막한 신발장 위에 나를 앉혔다. 아니, 신발장의 상판 위에 내 몸을 쑤셔 박았다. 둥글게 말린 등이 벽과 신발장의 틈새에 애매하게 걸쳐졌다. 신발이 벗겨지고 두 발목이 위로 들렸다. 아랫도리가 그의 앞에 훤히 드러난 자세였다.

분명히 싫다는 마음뿐이었는데, 나는 어느샌가 발기한 상태였다. 고개를 까딱까딱 치켜든 나의 성기는 이미 축축한 체액까지 흘리고 있었다. 이한은 나의 다리를 잡아 벌리고는 두 다리 사이를 집요하게 훑어보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내보인 적 없던 깊숙한 곳을.

지하철의 남자가 나의 뒤를 쫓던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나는 모든 것이 죽도록 두려웠지만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끔찍한 악몽처럼 느껴졌었다.

그러나 나의 밑을 물끄러미 들여다보는 동기 남자애의 얼굴은 악몽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생생한 현실감이 가시처럼 나를 파고들었다. 겪어 본 적 없는 수치심에 신경이 기묘하게 팔딱거렸다.

“너, 여기….”

내가 여자인 줄 안 것도 아닐 텐데, 그는 내 몸이 의아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그의 손이 엉덩이 가운데 부분으로 다가왔다. 부풀어 오른 수치심이 펑, 터지기 직전이었다. 나는 뒤집힌 딱정벌레 같은 자세로 다리와 허리를 뒤틀어댔다.

이한은 한 팔로 내 오금을 짓눌러 어설픈 저항을 제압해 버렸다. 아무렇지 않은 손길이 나의 회음부를 아래로, 또 위로 쓸어내렸다. 움찔움찔 떨리는 피부를 꾹꾹 누르고 비벼댔다.

손이 닿은 부분에서 구물구물 이상한 감각이 올라왔다. 신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힘껏 깨물어야 했다.

“으, 흐으으….”

“페로몬은, 분명 오메가인데. 여기는 왜 아직….”

그는 기어이 단단히 다물린 아래의 구멍에 손을 대었다. 투박한 손끝이 주름을 매만지듯이 둥그렇게, 그곳을 맴돌았다. 찌릿한 느낌과, 그보다 더 큰 치욕감에 머리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나는 미친 듯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으, 싫어. 마, 만지지 마….”

“너 대체, 정체가 뭐야…?”

뜬금없고도 깊숙한 질문에, 나도 궁금해졌다. 나는 왜, 어떤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길래 이토록 검고 깊은 진창을 굴러야 할까. 이 지긋지긋한 불행과 고통에 과연 끝이 있을까. 끝이 없다면 내가 버텨야 하는 이유는 무얼까. 이 세상에는 불행하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도 있는 걸까.

결국은 감정의 한계에 도달하고 말았다. 참았던 울음이 명치에서부터 왈칵 치솟아 올라왔다.

“몰라, 흐으, 모르겠다고.”

“뭐…?”

“나도 몰라. 응? 이제 다, 읏, 모르겠어….”

“…….”

“흐어엉, 싫어. 싫단 말이야. 흐윽, 그, 그러니까 제발, 만지지, 마. 응? 흐윽….”

몸이 반쯤 거꾸로 처박혀서 엉덩이를 치켜든 채로, 나는 어린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내 모습이 흉할 거라고 생각할 여유조차 없었다.

그냥, 모든 게 다 무섭고 서러웠다. 오늘 있었던 모든 일들이, 아니 눈앞의 무뚝뚝하고 무심한 남자애를 처음 만난 무렵부터 나에게 휘몰아친 일들이 다 버겁기만 해서, 눈물이 멋대로 쏟아져 내렸다.

“흑, 흐읏, 싫어. 흐윽, 제발, 흐어엉….”

내 꼴이 보기 싫었는지 불쌍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이한은 나를 들쑤시던 손길을 멈추었다. 다리를 누르고 있던 팔을 풀고, 내 몸을 일으켜 똑바로 앉혀 주었다. 나는 신발장 위에 앉은 자세로도 한참을 훌쩍거렸다.

그는 짜증스레 나를 내려보았다. 한숨을 푹푹 쉬고, 난감하다는 듯 뒤통수를 긁어 댔다.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그가 또 화를 낼지 모른다는 생각에 겁이 났지만, 어딘가가 고장 난 것처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그 두려움까지도 서러워져 눈물이 더 흘러내렸다.

“씨발….”

그는 작게 욕을 중얼거리고는 두 손으로 내 뺨을 감쌌다. 입술이 다가오자, 학습된 것처럼 나의 입술이 벌어졌다. 뜨거운 그의 혀가 치열과 볼 안쪽의 여린 살을, 입천장과 말캉한 혓바닥을, 그리고 다시 입술 위를 훑었다.

그러는 사이 울음이 잦아들었다. 나는 그제야 이한의 입술이 부드럽다는 것을 느꼈다. 촉촉하고 짭짜레한 내 눈물의 맛도.

그는 잠잠해진 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짜증스러운 표정이지만, 나에게 한 줌의 연민을 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엄지손가락이 꾸욱, 나의 입술 위를 눌렀다. 손가락이 불씨처럼 뜨거워 신음을 뱉을 뻔했다.

“코로 숨 쉬는 건 왜 못 하는 건데.”

“안 해 봤으니까.”

“뭘.”

“…키스를.”

“…….”

“…….”

“하….”

그러고 보니 첫키스였다. 눈꼬리에 고여 있던 마지막 눈물이 또르르, 굴러떨어졌다. 그 순간 이한의 표정에서 연민보다 짜증의 비율이 높아졌다. 그는 갑자기 제 바지춤으로 손을 가져갔다. 겨우 진정되었던 심장이 마구 후들거렸다.

“그, 그만 좀…. 왜 그러는데….”

“너 그 냄새. 없애 달라며. 지워야지.”

그는 귀찮은 벌레라도 잡는 듯한 투로 이야기하며 제 아랫도리를 벗어 버렸다. 속옷을 내리자 딱딱하게 일어서 있던 페니스가 투욱, 비어져 나왔다. 동성의 성기를 보는 것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게 이토록 위협적으로 느껴졌던 적은 없었다.

체구에 비해서도 유별나 보이는 크기, 기둥 위로 툭 불거진 핏줄 같은 것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또렷하게 보였다. 무엇보다도 공기를 타고 전해지는 수컷의 냄새가 두려웠다. 넋을 놓고 있는 사이, 그는 나의 한쪽 무릎을 들어 올리고 다리 사이로 바짝 다가섰다.

“시, 싫어, 하지 마.”

“내가 뭘 할 줄 알고 벌써부터 지랄이야?”

“…….”

“오버하지 마. 진짜로 하는 것도 아니니까.”

“으읏, 마, 만지지 말라니까…!”

그는 내 말을 들은 체도 않고 나의 성기를 손에 쥐었다. 한참 동안 아플 정도로 팽팽하게 발기해 있던 그것을. 그렇게 깊은 곳에 타인의 손길이 닿는 것은 처음이었다. 즉각적이고 찌릿한 느낌에 몸이 떨렸다. 나는 고개를 저을 뿐 그를 뿌리치지 못했다.

그는 내 것을 쥔 손을 규칙적으로 흔들며 더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곤 자신의 빳빳한 성기를 나에게 붙이며, 나직하게 명령했다.

“너도, 해.”

그게 무슨 말인지는 곧바로 알아들었지만, 차마 시키는 대로 할 엄두가 나지 않아 머뭇거렸다. 참다못한 그는 내 손을 잡아끌었다. 내 손바닥을 억지로 펴고는 그의 것을 움켜쥐도록 했다.

손 안에 닿자, 그것이 주는 위협은 더 또렷해졌다. 살짝 겉도는 포피 아래 꿈틀거리는 단단한 살덩이가 느껴졌다. 가볍게 쥐고 있는 것만으로 현기증이 날 것 같았다.

그동안에도 그는 착실하게 내 것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오싹거리는 성감에 안 그래도 꾸물거리던 내 손은 더욱 굼떠졌다. 어설프게 손에 쥐고만 있을 뿐 제 것을 제대로 자극하지 못하자, 그는 퉁명스레 투덜거렸다.

“똑바로 좀 해 봐…. 응?”

“하으, 으, 어떻게, 하는 건지….”

“혼자 할 때처럼 해 보라고.”

당혹감에 입술을 깨물었다. 나에게 자위는 배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행위였다. 집의 더러운 화장실, 혹은 공용 욕실에서 다급하게, 최대한 빨리 해결해야 하는 번거로운 행위. 자신 있는 일도 아니고 달가운 일도 아닌데, 재촉까지 받자 더 막막해서 손이 굳어 버렸다.

이한은 결국 답답하다는 듯 혀를 차며 내 손을 밀어냈다. 그는 터질 듯 단단해진 나의 성기를 제 페니스 옆으로 가져와 두 사람의 것을 한 손에 모아쥐었다.

프리컴으로 축축해진 귀두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러 댄 다음, 그것을 윤활제 삼아 겹쳐진 두 기둥을 위아래로 쓸어내렸다.

“흐, 하으….”

“…….”

“이, 이상해. 그만….”

“…후우.”

“이, 이거, 이상해. 하읏, 그만, 아, 으으, 그마안….”

맞닿은 여린 살들이 비벼지는 느낌, 질척거리는 감촉, 길고 단단한 손가락의 악력. 모든 것이 견딜 수 없을 만큼 자극적이었다. 사정감이 빠르게 벅차올랐지만, 정말 이상한 건 그게 아니었다.

더 깊은 곳에서 무언가 꿈틀거리는 듯한, 넘실거리고 꿈틀거리다가 이내 다 무너져내리고 또 부풀어 오를 것 같은 감각이 몸 안에 득시글거렸다.

형언할 수 없는 그 느낌은 순식간에 곳곳으로 퍼져 갔다. 신경과 핏줄을 타고 내 머리 위부터 발가락 끝까지. 나는 금방이라도 기절해 버릴 듯 흐느꼈다.

“제발, 아, 흐윽…!”

힘없이 떨리는 몸을 이한의 가슴팍에 기대었다. 나를 몰아붙이는 것도 그였지만, 매달릴 곳도 그뿐이었다.

그는 나의 귓가에 입 맞추었다. 귓바퀴를 잘근거리는 치아가 단단하고 날카로웠다. 귀를 물렸을 뿐인데, 모조리 잡아먹히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공포가 성감을 흩어 버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부추겼다.

“싫어, 으, 나, 나올 것 같아. 그만…. 으, 흐읏!”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애의 손에 사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가 하고 싶지 않다고 해서 참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해일을 참아낼 수 없는 것처럼. 나는 가파르게 치고 올라간 감각의 끝에서 무너지듯 정액을 토했다. 자괴감을 느낄 여력이 없을 정도로 빠르게 정신이 흐려졌다.

가물거리는 눈을 내리감으며, 나는 시계의 초침 소리를 들었다. 가냘프고도 또렷하던, 그 손목시계의 소리.

복잡하게 뒤얽어진 태엽은 서로에게 물고 물리며 윤무를 춘다. 같은 곳을 맴도는 듯하지만, 시간은 돌이킬 수 없이 흘러간다. 이미 변화하기 시작한 것들은 무엇도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두려운 예감에 사로잡힌 채로 나는 의식을 놓아 버렸다.

* * *

정신을 차렸을 때 나는 낯선 거실의 소파에 누워 있었다. 천장이 높고 깨끗하고, 타인의 호흡 소리가 들렸다.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기억해 낸 것은 그다음이었다. 화들짝 놀라 확인하니 다행히 바지를 입은 채였다. 의식을 잃기 직전 사정했던 것 같은데, 옷이 더럽혀져 있지도 않았다.

다음 순간 나의 무릎 부근에 머리를 기댄 서이한이 보였다. 그는 바닥에 앉은 채로 내가 누운 소파에 상체를 기울이고 있었다. 눈을 감고, 숨소리가 고른 것을 보면 잠들어 있는 것 같았다.

섬뜩했던 소동의 한가운데서 나에게 윽박지르던 그 애가 너무도 태연하게 자고 있는 모습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경계심을 놓지 않은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누군가가 자는 모습을 그렇게 자세히 본 건 처음이었다. 심술궂고 무서운 애라고만 생각했는데, 무방비하게 눈을 감은 얼굴을 보면 반듯하고 깨끗한 얼굴이다.

‘잠든 모습은 누구라도 아이 같은 걸까….’

그가 들으면 질색할 문장을 떠올리던 차에 그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입안으로 웅얼웅얼 잠꼬대를 하고는 미간을 찡그렸다. 나쁜 꿈을 꾸는지 감은 눈꼬리에 눈물이 고였다. 깨워야 할까 싶어 반쯤 몸을 일으키는데 그가 작게 속삭였다.

“아빠….”

뜻밖에도 연약한 말에 뭐라 말할 수 없이 마음이 울컥했다. 나도 모르게 그의 눈가에 손을 가져갔다. 손끝에 따스한 눈물방울이 닿은 순간, 그가 눈을 떴다.

“……!”

소스라쳐 뒤로 당기려던 내 손을 그가 붙잡았다. 순하게 잠들었던 얼굴은 어디 가고, 다시 원래의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그는 영역을 침범당한 짐승처럼 으르렁거렸다.

“너 뭐 해, 지금?”

“…미, 미안. 자는 데 불편해 보이길래.”

잠결에라도 우는 모습을 봤다고 하면 언짢아할 것 같아 나는 얼버무렸다. 그는 그 말에도 인상을 찌푸렸다.

“자고 있었다고? 내가?”

“응.”

“…….”

“저기, 손…. 놔줘. 아파.”

그는 의아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노려보았다. 놓아 달라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지 손목을 움켜쥔 손에는 더 바짝 힘이 들어갔다.

뭐가 그렇게 의아한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것이 의문투성이인 건 오히려 내 쪽이었다. 많은 물음표들이 입안을 맴돌다가, 하필 제일 얼뜨기 같은 질문이 튀어 나가 버렸다.

“너, 나한테… 왜 그랬어?”

“뭐가.”

“왜, 왜 나를….”

제대로 따질 생각이었지만, 내 몸을 거칠게 만지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그만 얼굴을 붉히고 말았다. 그가 기가 찬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게 더 부끄러웠다. 그는 시시한 것을 손에서 내려놓듯 내 손목을 휙, 뿌리쳤다.

“네가 없애 달라며, 냄새.”

“그게 무슨….”

“알파와 오메가가 성적 접촉을 하고 나면 잠시 동안 페로몬이 가라앉아. 닫는 방법도 모르는 거 같은데 그럼 나보고 어쩌라고.”

“오메가니, 알파니 그런 게 다 무슨 말이야? 나한테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너한테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왜 나한테 와서 물어?”

“너, 넌 다 아는 거 아냐? 방금 네 입으로 페로몬이 가라앉았다고 말해 놓고….”

“아니, 너 같은 앤 본 적도 없어. 처음 봤을 땐 그냥 발현이 늦은 오메가인가 생각했는데 애초에 일족 출신도 아니라는 거잖아.”

“…방금 한 말도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그는 노골적으로 한심하다는 눈빛을 했다. 머쓱하더라도 어쩔 수 없었다. 지금 나에게는 이상하고 곤란한 일이 일어나고 있는데, 사실을 확인해 줄 사람은 이한뿐이었다.

난감할 때의 버릇인지, 그는 손을 들어 뒷머리를 푸르르, 헝클어뜨리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거실 한편의 책장을 뒤적이던 그는 조그만 책 하나를 건넸다.

“난 이런 거 설명하는 데 소질 없어. 그냥 이걸 읽어.”

『랑족의 성(性)』. 이상한 제목이었다.

“이게 뭔데?”

“성교육 시간에 받은 책.”

설명을 듣고 나니 더 이상했지만, 일단 첫 페이지를 폈다.

[먼 옛날, 초원에 가장 빛나는 천랑의 별은 두 발 달린 늑대의 차지였습니다. 용맹하고 사냥에 능한 무리는 ‘랑’. 비겁하나 간교한 무리는 ‘패’라고 불리웠습니다.

아둔한 유인원족들이 수적 우위로 세상의 패권을 차지한 가운데, 네발 늑대들은 짐승의 틀을 벗지 못했고, 패족은 얕은꾀로 자멸의 길의 걸었습니다. 오로지 랑의 일족만이 긍지를 지키며 위대한 늑대의 피를 이어 가고 있습니다.]

“이건….”

“아, 그건 쓸모없는 얘기고. 그 뒤쪽을 봐.”

[-알파의 성.

*랑족의 80%는 2차 성징 무렵 ‘알파’로 발현합니다. 알파는 우수하고 위대한 랑족의 유전적 특성을 그대로 보여 주는 성별입니다.

*감춰지지 않은 페로몬은 다른 알파와 오메가의 폭력성, 불필요한 충동을 자극할 수 있습니다. 페로몬을 관리하는 것은 알파의 에티켓입니다.

*알파에게는 4개월에 한 번 ‘러트 사이클’로 불리우는 가임기가 찾아옵니다. 러트 사이클의 유의사항에 대해서는 8페이지를 참조하세요.

-베타의 성

*랑족의 20%는 페로몬을 배출하거나 타인의 페로몬을 감지하는 특성이 없이 유인원족과 동안한 가임기를 가집니다. 이들을 ‘베타’라 부릅니다.

*베타 또한 위대한 랑족의 일원입니다. 베타로 발현되더라도 늑대의 긍지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오메가의 성

*랑족과 달리, 패족은 남, 여 구분 없이 임신과 출산이 가능했습니다. 패족의 멸망 전 이루어진 이종교배의 흔적으로, 랑족 남성의 극소수는 패족과 같은 성적 특성을 가진 ‘오메가’로 발현합니다.

*오메가의 페로몬은 알파의 충동을 자극합니다. 무방비한 상태에서 오메가와 마주치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오메가는 4개월에 한 번 ‘히트 사이클’로 불리는 가임기를 가집니다. 가임기의 오메가는 성적 욕망에 가득 차 있고, 평상시보다 더 위험한 농도의 페로몬을 분출하므로 각별한 관리가 필요합니다.]

눈으로는 글씨를 읽고 머리로는 읽은 글씨의 뜻을 이해했지만, 전혀 와닿지 않는 이야기였다. 나는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이게 무슨 말이야?”

“한글 못 읽어? 읽은 그대로잖아.”

“랑족…이라는 건…. 그럼, 아까 봤던 그 사람들은….”

“천랑 재단은 랑족의 재단이야. 보안 때문인지 뭔지, 일족 애들 전부를 같은 학교에 밀어 넣어 버리거든. 재단 출신 애들은 대부분 알파야. 나도 그렇고.”

“그럼 넌, 늑대…야?”

그러고 보면 애가 쓸쓸한 늑대 같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내 질문에 그는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지었다.

“뭐? 멍청하긴. 대체 뭘 읽은 거야?”

“그치만 여기 첫 페이지에….”

“그럼 단군의 자손들은 다 곰이겠냐? 알파도 기본적으로는 유인원족과 같은 인간이야. 페로몬이랑 러트 사이클이 있을 뿐이고.”

“…….”

“정말 몰랐어? 네가 오메가로 발현하고 있다는 거.”

덤덤한 그의 질문을 듣자, 오늘의 소동을 겪으며 어렴풋이 품었던 의문이 또렷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에 나는 어물어물 되물었다.

“내가… 오메가라고?”

“그래.”

“아, 아까 여기 분명히, 오메가는 남자도… 임신할 수 있다고….”

“…….”

“말이 돼? 어떻게 그런….”

“…16페이지.”

책장을 넘겨 보니 오메가의 성기를 그린 구조도가 나왔다. 2차 성징 무렵 직장과 연결된 자궁이 생겨난다는 내용에, 나는 새파랗게 질렸다.

“말도 안 돼. 내 몸에 이런 게 있을 리 없어.”

“그래. 아직 몸은 그대로인 것 같더라. 발현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가.”

나의 다리 사이를 들여다보던 이한의 모습이 떠올랐다. 다시 발가벗겨진 듯한 기분에 얼굴이 뜨거워졌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잖아. 난 이런 얘긴 처음 들어. 내 주변엔 아무도…. 그, 그래, 우리 어머니는 그냥 평범한 사람이고, 아버지는….”

유년의 기억 몇 개를 빼면, 아버지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게 없었다. 어머니와 나는 그가 애초에 존재하지 않던 사람인 양 잊고 지내왔다. 설마 하는 마음에 말끝을 흐리는 나에게, 이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그건 나도 모르겠고, 넌 틀림없이 오메가야. 아까 근처에 있던 알파들은 다 네 냄새에 눈이 뒤집혔을걸.”

그는 사실을 이야기하는 투였지만, 사형 집행이라도 당한 기분에 괜히 그가 원망스러워졌다. 한참을 손톱 끝만 쥐어뜯던 나는 뾰족한 목소리를 꺼냈다.

“…그래서야?”

“뭐가.”

“나한테 오메가 냄새가 나서 다들 그렇게 못되게 굴었던 거냐고.”

그간 속에 짓물러 있던 마음이 터져 나온 질문이지만, 이한은 피식 웃을 뿐이다.

“무슨 헛소리야. 네가 오메가라는 걸 알았으면 다들 널 가만뒀겠어?”

“가만 안 두면 어떡하는데?”

“머리가 안 돌아가? 아까 그 꼴을 당할 뻔하고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오메가 같은 건 좆대로 굴려도 된다고 생각하는 알파들이 널리고 널렸다고. 아까 너처럼 페로몬까지 질질 흘리고 있으면, 꼼짝없이 당하고도 항의도 못 해. 덮친 알파 쪽이 오히려 피해자라고 우길걸.”

“…그럼 여태껏은 다들 몰랐다는 거야? 내가 오메가…라는 걸?”

“그래.”

“왜? 넌 처음 봤을 때부터 알았다는 거잖아.”

“서이준이 준 시계.”

“…그게 왜.”

그가 아주 험악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나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찼던 손목을 등 뒤로 감추었다.

“근데 서이준 그 새끼는 왜 너한테 아무 얘기도 안 해 준 거야? 씨발, 자기 애인이 뭣도 모르고 돌아다니다 험한 꼴 당해도 상관없단 건가?”

“뭐…? 갑자기 무슨 소리야? 나, 난 선생님 애인이 아냐. 그리고 선생님은….”

“선생님? 아아. 서이준이 그 봉사활동 간 데서 만난 거구나, 너?”

빈정거리는 말투. 어제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도 그는 저런 목소리로 ‘너도 알 만하다.’라는 말을 했었다. 지레짐작과 열등감으로 명치가 화끈거렸다.

“그래. 나 사람들이 봉사 오는 그런 동네 살아. 그래서, 우스워?”

“…너야말로 갑자기 왜 난리야? 누가 뭐래?”

심드렁한 대꾸를 듣자 더욱 민망해졌다. 허공에 대고 총질을 한 기분이다. 발끈하는 편도, 쓸데없는 말을 나불대는 편도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감정이 알 수 없이 출렁거린다.

“왜 네가 지랄이야? 이상한 건 네가 아니라 서이준이라고. 씨발, 애인도 아닌 사람한테 그딴 시계를 채우면 더 문제 아냐? 더구나 근신하러 가서 만난 애한테.”

“아까부터 시계는 왜 자꾸 들먹거리는데?”

“다른 애들이 네가 오메가라는 걸 몰랐던 이유가 뭐냐며? 그 시계에서 나는 거지 같은 냄새 때문이잖아.”

“시계에서 나는 냄새…?”

“그래. 서이준이 묻혀 놓은 건가 보지. 그런 악질 취미를 가진 새끼들이 있어. 마킹하는 것도 아니고, 페로몬 묻힌 물건을 오메가에게 선물하는 알파들. 허울만 선물이지, 사실은 개한테 채우는 목줄이나 다름없는 거라고.”

“…….”

“게다가 심지어 네 시계에서 났던 건 그냥 서이준 냄새도 아니었어. 자기 페로몬에 뭘 섞어놓은 건지, 네 냄새까지 다 묻혀 버릴 만큼 더러운 악취가 진동했다고.”

“…….”

“뭘 멍청하게 쳐다봐? 아직도 못 알아듣겠어? 애들이 널 못 잡아먹어서 안달 났던 이유가, 서이준이 준 그 시계 때문이라니까.”

믿기 힘든 말이었다. 기댈 곳 하나 없이 막막하던 나를 지켜 주던 시계가 그런 물건이었다는 게. 당황한 나는 어떻게든 들은 이야기를 좋은 쪽으로 해석해 보려 했다.

“…그럼 그 시계가 있어서 여태까지 내가 오메가라는 걸 다들 몰랐다는 거잖아. 선생님 덕분에.”

“뭐? 덕분…에?”

“오늘 같은 일을 당하느니 이상한 애 취급받는 게 나아. 날 걱정해서 주신 거겠지.”

내 말에 이한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찼다.

“하, 말귀를 못 알아듣는 것도 정도가 있지. 너 진짜 멍청하구나? 아니면 순정에 눈이 확 돌았던지.”

“그게 무슨 말이야?”

“그 새끼 좋아해서 그러는 거 아냐, 너.”

“뭐…? 아니야, 그런 거.”

황당한 질문이었다. 이준에 대해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그러나, 그 황당한 질문에 내 얼굴이 붉어져 버렸다는 게 더 황당했다. 못마땅하다는 듯 노려보는 이한의 시선에서 달아나기 위해, 나는 말을 돌렸다.

“네 말이 무슨 뜻인지는 알겠어. 전부 믿기는 힘들지만…. 그, 그게, 널 못 믿겠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게 너무… 갑작스러워서….”

갑작스럽고, 무서운 일이 너무 많았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조금 전 나를 헤집고 밀어붙였던 이한조차도 두려웠다. 그 일을 생각하면 다시 몸이 떨려 올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는 비록 괴롭고 거친 방식이라고는 해도 나에게 도움을 주었던 셈이다. 나는 떨림을 다잡으며 태연한 표정을 지어 보려 애썼다.

“어쨌든… 고마웠어. 신세 져서 미안. 다음에 꼭 갚을게.”

불편함에 이리저리 굴러가던 시선이 벽시계에 닿았다. 훌쩍 오후가 되어 있었다. 오전 강의를 통째로 날려 버렸다는 생각과 함께 현실의 문제들이 와르르, 떠올랐다.

곧 과외 시간이었다. 가능하면 과외를 하러 가기 전에 강의 자료를 챙기러 학교에 가 보고도 싶었다. 현관 언저리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진 가방이 보였다.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는데, 그는 대뜸 나의 손목을 붙잡았다.

“가긴 어딜 가?”

“여기 계속 있을 순 없잖… 읏.”

그는 다른 손을 뻗어 나의 목덜미를 움켜쥐었다. 고개가 그의 쪽으로 당겨지는 짧은 시간, 나는 어딘가를 깨물리거나 입맞춤을 당할 거라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는 나에게 닿지 않은 채로 내 귓가에서 깊게 숨을 들이켰다. 어쩐지 그게 더 간지러워서 피부를 따라 잘게 소름이 일었다.

“아직은 괜찮네.”

“…뭐가.”

“냄새 말야. 근데 곧 다시 새어 나올 것 같은데. 어딜 겁도 없이 쏘다니겠단 거야? 닫는 방법도 모른다면서.”

“시계가 있으면 괜찮은 거 아니야? 2주 뒤면 다시 찾아올 수 있어.”

“2주? 제정신이야? 제대로 한 것도 아닌데, 아까 그걸로 2주씩이나 페로몬이 잠잠해질 것 같아? 길어야 내일까질 걸.”

“…그게 제대로가 아니면 뭐가 제대론데.”

“삽입한 것도 아니잖아.”

수시로 음담패설에 노출되어 있던 탓에, 남자끼리도 그런 일이 가능하다는 것 정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사실이 오늘만큼 공격적으로 느껴진 적은 없었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조금 전 본 책에서 보았던 오메가의 성기 그림이 떠올랐다.

“무, 무, 무슨, 그런 말도 안 되는…. 싫어. 절대로, 그런 건….”

미친 듯이 고개를 젓는 나의 모습이 아니꼬웠는지, 그는 숱이 짙은 눈썹을 찡그렸다.

“존나 어이없네. 기겁하고 싶은 게 누군데?”

“…….”

“누군 뭐, 좋아서 해 준 건 알아? 씨발, 아직도 여물지도 않은 오메가를, 내가 미쳤다고….”

그가 건조하게 말했던 ‘성적 접촉’이라는 것이, 나에게는 오랜 공포의 대상이었다. 누군가에게 억지로 몸을 보이고, 만져지는 일 따위 결코 겪고 싶지 않았다. 이미 그런 치욕을 억누르고 있던 나는 ‘여물지 않은 오메가’라는 말에 발끈했다. 딱히 무르익고 싶은 것도 아닌데.

“좋아서 했던 게 아니라고? 너 아까 흥분했었잖아. 여물지도 않은 오메가한테.”

“뭐? 씨발, 그럼 코앞에서 페로몬을 내뿜는데, 고자가 아닌 이상 반응할 수밖에 없는 거 아냐?”

“지금 네 얘기, 네가 말했던 알파들이랑 비슷하게 들리는 건 알아? 아무 설명도 없이 날 만져 놓고, 네가 피해자인 것처럼 말하고 있잖아.”

“씨발, 내가 왜 도와주고도 그딴 소릴 들어야 되는데?”

그의 눈에서 퍼릇한 불꽃이 튀었다. 사납게 내쏘는 말에 입을 다물었다.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지금 나는 정체도 모를 궁지에 내몰렸고, 도움을 요청할 곳도 그뿐이라는 걸. 나는 치떴던 눈꼬리를 내려놓았다.

“…네 말이 맞아. 미안해.”

“…….”

“일단 오늘은 괜찮다는 거지? 난 갈게.”

“내 말 못 알아들어? 아무렇게나 나다니다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아르바이트 가야 해. 어차피 여기서 계속 살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하긴 무식한 새끼들이 용감하지.”

이한은 제 뒷머리를 다시 푸르르, 흐트러뜨리고는 다시 나에게 손을 내밀었다.

“핸드폰.”

“응?”

“핸드폰 내놓으라고.”

영문도 모르고 핸드폰을 건네니, 그는 무뚝뚝한 얼굴로 제 번호를 입력했다.

“아까같이 일이 터지면 연락해도 돼. 대신 조건이 있어.”

“…….”

“오늘 일, 서이준한텐 말하지 마.”

“선생님한테? 왜…?”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해. 그 새끼한테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 모르니까. 네가 발현하기 시작했고, 날 안다는 것도 다 비밀로 해.”

또 저, 심술궂은 표정. 까만 눈동자가 암상스러워 보인다.

“…왜 자꾸 선생님에 대해서 나쁘게 말해?”

“네가 그 새끼에 대해 뭘 알아? 속이 시커먼 새끼야. 상종 안 하는 편이 나은 놈이니까, 제대로 아는 것도 없으면 그냥 시키는 대로나 하라고.”

뭘 아냐는 그 말이 뾰족했다. 이준에 대해 모든 걸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것도 모르는 건 아니다. 나는 분명히 알고 있다. 부족할 것 없는 그가 어울리지도 않는 가난의 영역에 내려와 오랜 시간 헌신을 베풀었다는 것을.

적어도 나에게, 이준은 그렇게 아무렇게나 경멸당할 대상은 아니었다. 나는 반항심을 참지 못하고 대꾸했다.

“싫어.”

내 말에 그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

“내, 내가 선생님에 대해 잘 모르는 게 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따지면 난 너에 대해선 더 아무것도 몰라. 왜 그렇게 명령하는 것처럼….”

“너 지금 나한테 도움받는 입장 아니야?”

“…….”

“부탁을 해도 모자랄 판에, 이게 무슨 태도냐고, 지금.”

“…도와 달라고 한 적도 없잖아.”

나는 괜한 자존심에 오기를 부렸다. 잠시 굳은 얼굴로 나를 노려보던 그는 작게 혀를 차고는 핸드폰을 내 가슴에 밀치듯이 가져다 붙였다.

“바보 같은 게…. 맘대로 해, 그럼. 어차피 내가 신경 쓸 일 아니니까.”

“…….”

“가. 꺼지려면 빨리 꺼지라고. 씨발, 아침부터 재수 더럽게 없네.”

그는 내 팔을 잡아채 현관으로 끌어당겼다. 문을 열고 어깨를 밀치자 나는 종잇장처럼 나가떨어졌다. 그는 가방을 집어 던지고 문을 닫았다.

화를 내는 그를 원망할 수는 없었다. 심술궂더라도 그는 나에게 나름의 호의를 베풀려고 했고, 거기에 뾰족하게 답한 것은 내 쪽이다. 후회와 자책, 혼란과 두려움이 머리 위로 쏟아졌다. 울지 않으려고 호흡을 다잡았다. 주먹을 꼭 쥐고 굳게 닫힌 문 앞에서 돌아섰다.

* * *

그날 내내, 누군가가 나를 스쳐 지날 때마다 흠칫 놀라 눈치를 살폈다. 거리의 모든 사람들이 금방이라도 으르렁거리며 나에게 덤벼들 것 같았다. 과외 수업에도 전혀 집중할 수 없었고, PC방에서도 계속 자잘한 실수를 해 댔다.

시간은 지독하게 느리게, 그러나 어떻게든 흘러갔다. 12시를 넘어가면 내가 일하는 PC방에는 손님이 뜸해진다. 구석에 있던 마지막 손님 하나가 정산을 하고 돌아간 뒤 카운터 위에 무너지듯 엎드렸다.

눈을 감으니 그때의 감각이 한꺼번에 되돌아왔다. 낯선 이들의 흉포한 눈빛, 으르렁거리는 호흡이 새겨진 듯 생생했다. 움츠러든 근육이 여태 펴지지 않은 것 같았다.

팔의 소름을 쓸어내리며 스스로를 다독이던 차에 핸드폰 알림음이 들렸다. 늘 비슷한 시간에 오는 이준의 메시지였다.

[윤오, 오늘도 잘 지냈어? 아르바이트 중?]

그의 인사는 여상히 다정했다.

[네. 곧 마감이에요.]

[금요일에도 고생이네. 오늘은 과외 학생이 잘 따라왔어?]

[많이 좋아졌어요. 저, 여쭤볼 게 있는데요.]

[어떤 건데?]

메시지를 입력하던 나는 이한의 말을 떠올리고 멈칫거렸다. 이준의 꿍꿍이를 알 수 없으니, 그에게는 있었던 일을 비밀로 하라던 말. 이상한 소리였다. 이준에게 꿍꿍이라는 게 있을 리도 없고, 나 같은 게 꿍꿍이의 대상이 될 리도 없는데.

그러나 막상 털어놓으려고 해도, 뭐라 말을 해야 할지도 애매했다. 시계를 고장 낸 건 당연히 비밀로 할 생각이었고, 나머지 일은 어디부터 어디까지가 진짜인지 조자 알 수 없는 상태였으니까.

[저…. 저희 과에 서이한이라는 애가 있어요.]

결국 애매하게 운을 띄웠다. 전송 버튼을 누르고도 떠보는 말처럼 들릴까 걱정이 앞섰다.

[이한이가 경제학과 입학했던가? 내 동생이야. 이복동생이지만.]

조마조마한 마음이 무색하게 그는 선뜻 대답했다. 대답할 말을 찾기도 전에 또다시 메시지가 왔다.

[한이는 잘 지내고 있어? 사실 교류가 끊어진 지 좀 됐거든.]

터놓고 이야기는 투가, 꿍꿍이를 숨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친한 건 아니라서요.]

[그렇구나. 혹시 어떻게 지내는지 알게 되면 전해 줄 수 있어? 집에서도 다들 걱정하시는데 내가 직접 연락하면 피해 버려서.]

그의 살가운 말은 이준을 헐뜯던 이한의 태도와는 대조적이었다. 이한의 말은 어쩌면 배다른 형에 대한 심술 같은 것일지 모른다. 부잣집이라도 사연은 있을 테니까.

나는 ‘그 집에 신경 끈 지 오래다’라던 이한의 퉁명스런 표정과, 잠결에 ‘아빠’를 부르며 눈물을 글썽이던 모습을 떠올렸다.

[그럴게요. 말씀드릴 만한 걸 알게 되면요.]

[고마워. 형제 사이가 이렇다는 게 부끄럽네. 집에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

[아니에요. 괜히 개인적인 문제를 여쭤본 것 같아서 죄송해요.]

[그래. 아, 그런데 혹시라도 그 애한테 날 안다고는 하지 마. 그러다 너까지 미움받으면 어떡해.]

미움은 이미 받고 있다. 싸늘하던 이한의 마지막 표정을 떠올리며, 나는 홀로 한숨을 쉬었다. 아무것도 털어놓지는 못했지만 이준과 이야기한 것만으로 기분이 맑아지는 느낌이었다. 나는 서둘러 마감정산을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어차피 아리송하고 답도 없는 이야기를 해 봐야 마음만 답답해질 뿐이었다. 나는 그저 빨리 이준의 일상이 듣고 싶었다.

[조심할게요. 어제 뮤지컬은 재미있으셨어요?]

고단한 하루의 끝. 시린 가로등 불 속을 타박타박 걷는 동안, 나는 그가 지구 반대편에서 전해 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을 좋아했다.

요트 위에서 바라보는 해수면의 반짝임, 자그마한 갤러리의 먼지 내음, 그가 연구소에서 탐독한다는 방대한 전공 서적에 관한 이야기들.

그의 말들은 나의 하루에서 맛볼 수 있는 모든 것 중 가장 눈부신 것이었다. 나에게는 아무 의미 없는 환상에 불과하더라도, 내게는 그 빛이 위안이었다.

짧고도 긴 귀갓길을 다 걸어내고 나면, 내게 남는 것은 어둡고 냉랭한 현실뿐이니까. 갈수록 수치가 나빠져 가는 어머니의 투병 일지와, 빚과 병원비로만 가득한 가계부를 기록하고 기절하듯 잠들어야 하니까.

* * *

주말, 판자촌의 사람들은 당분간 오 실장의 패거리가 자리를 비울 거라는 소식에 들떠 있었다. 내게도 희소식이었지만, 이틀 내내 시끄러운 술판이 벌어져 잠을 잘 수 없었다.

사실 이웃들의 소리가 아니었더라도 제대로 잠을 자지는 못했을 것이다. 내 신경은 잘 갈린 칼날처럼 뾰족해져 있었다. 언제 또 다른 위협이 닥칠지 모른다는 공포감에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일요일 밤, 부풀어 오른 초조함은 가슴을 가득 채웠다. 주말 저녁마다 일하는 카페에서 밀려드는 주문을 정신없이 쳐내면서도, 머리로는 복잡한 셈을 따져보았다.

‘주말 동안 아무 일도 없었으니까 괜찮은 거 아니야…? 서이한 말 대로라면 지금쯤 그 페로몬, 다시 새어 나오고 있을 것 같은데.’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안심하긴 일렀다. 랑족의 아이들은 모두 천랑재단의 학교에 다닌다고 하니, 전체 인구 중 알파의 비율은 0.01%도 되지 않을 것이다. 이 주말에 마주치지 않았다고 해서,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다.

이한의 말 대로라면, 반면 교내에서는, 절반 가까이의 학생이 알파일 거다. 페로몬을 숨기는 방법을 익히거나, 다른 방법으로 냄새를 가리지 않는 이상 나는 정상적으로 학교에 다닐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학교는 어쩌지? 시계를 찾을 때까지 학교를 쉬어야 하나? 수업을 그렇게 빠질 순 없을 텐데…. 장학금은…? 시계 수리가 2주 안에 안 될지도 모르잖아. 학교 말고 다른 곳에서 그런 사람들이랑 마주칠 수도 있고….’

머리가 아파 왔다. 이 모든 가정은 어디까지나, 서이한의 말이 사실이라는 걸 전제로 했다. 막막해진 나는 그의 말과 금요일의 경험을 의심해 보고 있었다.

어쩌면 이한은 엉뚱한 거짓말로 겁을 준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나는 그날 기괴한 꿈을 꾼 걸 수도 있다. 놀란 마음에 기억을 과장했는지도.

아무리 애타게 바라더라도, 생각만으로는 무엇도 해결되지 않았다. 월요일 등교 시간까지 채 12시간도 남지 않았다는 게 초조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세 잔이랑, 따뜻한 라떼 한 잔이요. 레귤러 사이즈로.”

“라떼는 샷 추가 해 주세요.”

내가 일하는 카페는 사무실 밀집 지역에 위치해 있었다. 주말 저녁의 손님들은 주로 주말 근무를 하는 직장인들이다. 그들은 보통 음료를 기다리는 잠깐동안 갖은 푸념을 늘어놓는다. 마감시간 무렵 찾아온 일행도 비슷한 부류였다.

“하…. 이게 몇 시간 째야? 죽겠네, 진짜. 내가 갈 때 가더라도 김 과장 모가지는 따고 간다.”

“거래처가 발주 미스 낸 걸 대체 왜 우리보고 커버하라는 거예요?”

“뭐가 뭐겠어. 또 그놈의 과잉 충성이지. 우리 이러다 또 밤새는 거 아냐?”

사원증을 보니 카페 건물 위에 있는 회사의 직원들 같았다. 다들 격정적으로 불만을 늘어놓았지만, 딱 한 사람은 무거운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뒤늦게 그의 안색을 알아챈 동료들이 걱정의 말을 건넸다.

“어? 박 대리 표정이 갑자기 너무 안 좋은데. 어디 아파?”

“…괜찮습니다.”

“괜찮긴요. 지금 식은땀 흘리시는 거 아니에요?”

“박 대리가 어제도 철야했거든요, 선배님.”

“주문하신 음료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박 대리, 아프면 일찍 들어가. 응?”

그렇게 한 무리의 손님들이 빠져나가자 다시 손을 놀릴 틈이 생겼다. 나는 카운터에 놓은 경제 수학 교과서를 다시 펼쳤다. 야간 아르바이트는 과외보다 시급이 낮지만, 손님이 뜸할 때 공부할 수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

형편이 이렇다 보니 이준을 만나기 전까지는 학업에 소홀할 때도 많았다. 다른 아이들에 비해 기본기가 부족하니 더 많이 공부하지 않으면 뒤처져 버릴 거라는 생각에 일터에서도 짬을 내 책을 붙잡곤 했다.

그러나 심란한 와중에 글자가 제대로 눈에 들어올 리 없었다. 아리송한 문장을 반복해서 읽고 있을 때, 카페 유리문에 매달린 풍경이 딸랑, 딸랑, 울렸다.

“어서 오세요.”

“…….”

“어…. 다시 오셨네요.”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방금 전 다녀간 회사원 손님들 중 하나였다. 안색이 좋지 않다고 다른 일행이 걱정해 주었던 남자. 그는 저만치에서도 보일 만큼 숨을 거세게 몰아쉬다가 뜬금없는 말을 했다. 웅얼거리는 듯한, 으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돈이 필요해서 이러는 거니, 너?”

“…네?”

“왜 이러고 있어. 후…. 억제제 살 형편이 안되는 거야?”

자세히 보니 그 사람은 아픈 게 아니었다. 눈동자에서 퍼릇한 빛에 내뿜고,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금요일의 지하철역에서 나를 끌고 가려던 이들과 꼭 같은 눈빛과 표정. 먹이를 발견하고 되돌아온 포식자의 모습이었다.

페로몬을 읽는 방법 같은 것은 모르지만, 나는 직감할 수 있었다. 고립된 공간에서, 알파와 정면으로 마주쳐 버렸다는 것을.

저벅, 저벅. 빈 공간을 울리는 발소리에 호흡이 조여들었다. 달아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몸이 떨려 핸드폰을 쥐고 자리에서 일어난 게 고작이었다.

“필요하면, 줄게, 돈…. 너 같은 애는 한 번에 얼마지?”

간혹 듣던 이야기지만, 저 말이 이토록 소름 끼치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필요 없어요.”

“후우…. 아님, 용돈이라도 줘?”

그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다. 곁눈질로 달아날 곳이 있는지를 확인했지만, 출입구는 그의 등 뒤쪽에 있다.

“아뇨. 괜찮아요. 괜찮으니까….”

“뭘 빼고 그래…? 너도 안달 나 있는 거 아냐. 질질 흘리는 거 보니까.”

“아니라니까요. 그런 얘기 하실 거면 그냥 가 주세요….”

“뭐? 좆도 아닌 게….”

“죄송해요, 죄송하지만….”

“반반하다고 비싸게 구는 거야, 지금? 후우…. 너도 내가 우스워?”

“…….”

“하아, 하…. 잘됐네. 그래, 돈 받고 하는 게 싫으면 그냥 하던가, 씨발!”

그는 카운터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윽박지르는 목소리에 움찔, 온몸의 근육이 경련했다. 뒷걸음질 치던 등에 창고의 문의 손잡이가 닿았다. 나는 덫 안으로 뛰어드는 쥐새끼처럼 창고 안으로 몸을 밀어 넣었다. 손이 자꾸 헛돌아서 간신히 문을 잠갔다.

“야, 이게, 어딜 기어들어가. 너 안 나와?”

“가, 가 주세요. 나가세요.”

“네가 뭔데 손님을 오라 가라야? 씨발, 오메가면 오메가답게 얌전히 다리나 벌릴 것이지.”

“아, 안 나가시면 신고할 거예요. 경찰 부를 거예요.”

“경찰? 내가 뭘 했다고 경찰을 불러?”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쓴 침을 삼켰다. 전에도 이런 일을 겪은 적 있었다. 지금처럼 심각한 위협은 아니었지만, 손님이 매일 찾아와 추근거렸던 적도 있고, 가게에 버티고 앉아서 ‘2차’를 나가 주지 않으면 집에 가지 않겠다던 사람도 있었다.

경찰에 신고를 안 해 본 건 아니었지만, 결과는 매번 비슷했다. 현장에 누가 나와 준 적은 한 번도 없고, ‘실질적인 피해가 없으니 할 수 있는 게 없다’라고 하거나, 심하면 ‘여학생도 아니고 남자가 너무 예민하다’라는 말을 들었다.

손님들은 저를 신고했다는 사실에 더 격하게 반응했고, 결국 내가 해고되는 수순이었다.

남들이 보기엔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일 거다. 그가 알파이고, 내가 오메가라는 사실을 제외하면 그는 그저 ‘짓궂은 농담을 하는 손님’쯤으로 보일 거다.

그의 말이 농담이 아니라는 걸 생생하게 느끼고 있는 것은 오직 그와 나뿐이다. 나를 정말 삼켜 버릴 마음으로 다가오고 있는 그와, 본능으로 궁지에 몰렸다는 걸 알아차린 나뿐.

‘어떡해. 어떡하지….’

핸드폰만 만지작거리는 사이 상황은 더 나빠졌다. 처음에는 노크처럼 툭, 툭 문을 건드리던 그는 이제 아예 문을 부수어 버릴 듯 거칠게 두드려 댔다. 한 평이나 될까 싶은 좁고 어두운 창고에 문 두드리는 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나는 물품 선반 사이의 가장 깊은 구석으로 몸을 숨겼지만 미봉책일 뿐이었다. 문밖의 남자는 영영 물러서지 않을 기세였다. 어쩌면 정말 문을 부숴 버릴지도 몰랐다.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해야 한다고 생각한 순간, 제일 먼저 떠오른 것은 이한의 얼굴이었다. 염치없는 간절함이었다.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얼굴은 문밖으로 나를 밀쳐내던 싸늘한 표정이었으니까. 그러나 그 이외에는 다른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다행히 핸드폰에 그의 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통화버튼을 누르는 것조차도 힘들었다. 제발 받아 줘, 제발.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여보세요.]

시큰둥하고 불친절한 목소리가, 내게는 구원 같았다. 울음부터 터뜨리지 않으려고 애쓰면서 입술을 떼었다.

“도, 도와줘. 서이한, 미안한데, 나, 나 좀….”

[뭐?]

“미안해. 정말 미안해. 지금 여기, 아, 알파인 것 같은 사람이….”

문밖의 그 남자는 수화기 너머에까지 들릴 정도로 크게 욕지기를 뱉어 댔다.

“야! 이거 열라니까! 뭘 꾸물거려? 이까짓 문, 내가 못 부술 것 같아? 좆같은 새끼가, 뒈져 버릴 줄 알아, 씨발!”

독기, 아니 살기가 생생한 목소리에 몸이 덜덜 떨렸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당장이라도 나를 산산이 쥐어뜯을 것 같았다. 와 주겠다는 대답도 못 들은 채로 정신없이 카페의 위치부터 말했다. 꼭 와 달라는 말을 하려던 차에 밖에서 쾅, 하고 커다란 소리가 들렸다.

소스라치게 놀란 나는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손에서 미끄러진 핸드폰은 선반 사이의 가느다란 틈으로 굴러떨어졌다. 당황해서 굳어 버린 사이 쾅, 쾅, 소리는 더 크게 문을 뒤흔들었다. 남자가 단단한 무언가로 문을 내리치고 있는 듯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바닥을 더듬거렸지만 도저히 핸드폰을 찾을 수 없었다. 완전히 침착함을 잃어버린 나는 문을 부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경련하듯 몸을 움찔거렸다.

“흐, 으으….”

쾅, 쾅, 타격음 사이로 가느다랗게, 찍, 찌직. 나무판이 갈라지는 소리가 섞이기 시작했다. 손끝에 겨우 핸드폰이 닿았을 때는 이미 전화가 끊어져 있었다. 모든 게 끝났다는 절망감 속에 이내 쩌적, 빙판이 무너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잠금쇠가 통째로 떨어져 나간 문 너머로 남자가 보였다. 그는 너덜너덜해진 나무 의자를 등 뒤로 던지고는 반으로 쪼개진 문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후, 후우…. 하, 하하….”

문을 열어젖힌 그가 창고 안으로 걸어들어왔다.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 광기 어린 눈동자. 나는 주저앉은 채로 기어가듯 몸을 뒤로 물렸지만 달아날 곳은 없었다. 등에는 곧 막다른 벽이 닿았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는 거침없이 나의 발목을 붙잡아 끌어당겼다.

“놔, 놔…!”

벗어나 보려 마구 발버둥 쳤지만, 그 바람에 오히려 몸이 뒤로 넘어가 누운 자세가 되었다. 쿵, 머리가 바닥에 닿자 까무러칠듯한 위기감이 덮쳐 왔다. 나는 지푸라기를 잡듯 철제 선반의 다리를 붙잡았다. 날카로운 끄트머리에 손이 베어 피가 나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제 뜻대로 내가 끌려오지 않자, 남자는 잡고 있던 발목을 집어 던지고 나의 허리에 올라탔다. 나는 발에 밟힌 벌레처럼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는 그런 나의 저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윽!”

위에서 아래로, 주먹이 날아왔다. 볼인지 턱인지 모를 곳을 얻어맞는 순간 눈앞에 섬광이 번쩍거렸다. 턱뼈가 뒤틀어지는 듯한, 뇌가 흔들리는 듯한 느낌이었다. 저항도 하지 못하고 연달아 두 대를 더 맞았다.

퍽, 퍽. 고기를 다지는 듯한 소리를 들으며 주먹이 날아오는 대로 고개를 이리저리 흔들었다. 귀에는 이명이 울리고, 고통에 몸이 축 늘어졌다.

“하아, 그러게 얌전히 대 주면, 곱게 끝날 일을….”

그가 벨트를 푸는 소리가 달각달각, 고막을 긁었다. 공포와 긴장으로 신경이 팽팽해졌다. 손을 버둥거려 남자의 손을 밀어내 보려고 했지만, 남자는 간단하게 나의 바지를 벗겨냈다. 그는 강한 힘으로 나의 다리를 잡아 벌렸다. 벌어진 밑을 훑어보더니 마뜩잖다는 듯 중얼거렸다.

“뭐야, 왜 안 젖어 있어? 오메가 아니었어, 너?”

굳어 버린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는 아무래도 좋다는 듯 제 손바닥에 침을 퉤, 뱉었다. 우악스러운 손이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몸 위에 올라탄 남자의 무게보다 더 무겁게, 무력감과 공포가 나를 짓눌렀다. 견디지 못하고 눈을 질끈 감아 버렸던 순간이었다.

“아악…!”

내 위에 올라탄 남자가 옆으로 크게 휘청거렸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영문을 모르던 차에, 뒤이어 누군가가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이건 또 뭐야.”

귀에 익은 목소리에 가느다랗게 눈을 떴다. 남자는 난데없이 나타난 그에게 머리채를 붙잡혀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이한이었다. 그가, 와 주었다.

“씨발, 넌 뭔데 갑자기….”

남자는 머리를 붙들린 채로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얻어맞고 겁탈당할 뻔한 것만큼이나 지금의 상황도 현실감이 없어서, 나는 멍하니 널브러져 있었다. 이한은 까만 눈동자를 기울여 나를 내려보았다. 입술에는 피가 맺히고, 아래는 발가벗겨진 모습을.

“뭐냐고. 이거 놓… 윽!”

이한의 시선이 남자에게로 돌아갔다. 이한은 손바닥을 크게 휘둘러 남자의 뺨을 내리쳤다. 남자가 얼이 빠진 사이 머리채를 쥐었던 반대 손을 풀고 곧바로 한 대 더, 그리고 또다시, 또다시.

짝, 하는 파열음이 아니라, 힘이 실려 퍽, 퍽 때리는 둔탁한 소리였다. 순식간에 예닐곱 대를 얻어맞은 남자는 비틀거렸다. 이한은 남자의 멱살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으으. 뭐야. 너 누군데 이런….”

“더 때려?”

“뭐?”

“너 말고. 야, 이 새끼 더 때리냐고.”

이한의 표정이 잘 갈린 칼날처럼 선뜩했다. 겨우 정신이 돌아온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시, 싫어.”

“그래? 그럼. 경찰에 넘겨?”

“아니, 그냥… 갔으면 좋겠어.”

“뭐? 왜?”

“빨리, 빨리 갔으면 좋겠어. 싫어…. 이름이랑 회사는 아니까, 그냥….”

그 남자가 눈앞에 있다는 것 자체가 내게는 공포였다. 이런 일이 다른 누군가에게 알려진다는 것도 수치스러웠다. 나는 발작적으로 도리질했다. 길게 한숨을 쉰 이한은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한 손으로 그의 볼을 툭, 툭, 두드리며 멱살 쥔 손을 밀어붙였다.

“아저씨. 가세요.”

“…….”

“곱게 보내드릴 때 그냥 가시라고. 응?”

이한은 어금니를 꾹 물고 낮게 말했다. 그의 눈동자 속에 은빛의 푸른 섬광이 끓어올랐다. 따귀를 맞을 때까지만 해도 전의가 남아 있는 듯 보였던 남자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주춤주춤, 물러서던 남자는 귀신에 홀린 것처럼 뒤돌아서 달아났다.

남자는 사라졌지만, 이한은 여전히 무엇인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아니, 남자를 볼 때보다도 얼굴이 더 일그러져있다.

“씨발. 너는, 진짜….”

그는 허리를 숙여 내 어깨를 감싸 안듯 들어 올렸다. 찢겨진 입술 위로 그의 입술이 맞물렸다. 미처 감지 못한 시선이 그대로 얽어 들어갔다. 검푸른 안광이 핏줄을 타고 거꾸로 몸 안으로 파고들어 오는 것 같았다.

무심하지만, 뜨거운 키스였다. 그의 혀끝이 아릿한 입술과 입안의 터진 곳을 가만가만 훑고 지나갔다. 그가 나를 매만진 후에야 나는 내가 상처 입었다는 것을 알았다. 괴로울 정도로 내 몸을 두드리던 떨림이 가만히 가라앉았다가, 이내 규칙적인 형태로 일렁거렸다.

“후우….”

그리고 입술을 떼어 낸 그의 눈은, 어쩐지 괴로운 듯한 표정이었다. 상처 입은 것은 난데, 왜 그가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모를 일이었다.

“옷이나 제대로 입어.”

이한은 핀잔 같은 한마디를 던지고는 창고 밖으로 나갔다. 커다란 그림자가 사라지고 난 후에야, 나는 악몽에서 깨어나듯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는 선반에서 쏟아진 물건들과 나의 허연 다리가 아무렇게나 널브러져 있었다.

말을 듣지 않는 몸을 재촉해 옷을 입었다. 밖으로 나가니, 이한은 사라져 있었다. 텅 빈 카페가 어쩐지 평소보다도 넓고 적막해 보였다.

눈가에 남은 눈물을 훔치고 거울을 보았다. 엉망으로 으스러지고 짓이겨져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모양새가 나았다. 뺨이 벌겋게 붓고 입술에 피가 맺혀 있을 뿐이었다.

이 정도면 큰일도 아니라고. 상처는 모자를 눌러써서 가릴 수 있을 거라고. 그런 생각으로 마음을 다독여도 온 팔에 성성한 소름이 가라앉질 않았다.

“아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난데없이.”

의자와 창고 문이 부서졌다고 연락하자 사장님은 곧 가게로 찾아왔다. 면박을 퍼부어 댈 기세로 들이닥치다가 내 얼굴을 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같은 건물 회사에 다니는 손님이 소동을 일으켰다는 말에 그는 더 난감한 얼굴을 했다. 그 회사의 직원들은 카페의 주요 고객이었다.

“멀쩡한 사람이 왜 이런 짓을…. 혹시 학생이 시비 걸었어요? 손님이 술이라도 드셨나?”

자세한 이야기를 할 순 없었다. 폭행 신고를 하겠냐는 그의 질문에 고개를 저었다. 일이 너무 커지는 걸 원하지 않았는지, 그는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부서진 비품들을 살펴본 다음 나에게 넌지시 말했다.

“저기, 학생. 아무래도 오늘까지만 일하는 게 좋겠어. 학생도 다시 그 손님이랑 마주치는 건 불편할 거 아니야. 그렇지?”

그는 포스기에서 지폐 몇 장을 꺼내주었다.

“자, 여기. 오늘까지 일한 알바비. 약값이라도 하라고 특별히 하루치 정도 더 넣었어.”

“…….”

“학생 책임 물을 생각 없으니까, 그건 안심하고. 뭘 이런 거로 그렇게 얼어 있고 그래? 젊었을 땐 이런저런 일 다 생기는 거야. 넋을 놓고 있지 말고 얼른 들어가 봐.”

그는 위로라도 하듯 나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이런 식으로 정리되리라고 예상은 했지만 마음이 쓰라렸다. 그 와중에도 지폐를 꼭 움켜쥐는 자신이 더 한심했다.

하릴없이 카페 밖으로 걸음을 디뎠다. 냉기 서린 밤공기가 목덜미를 할퀴었다. 다시 눈물이 날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을 때, 가로수 아래 담배를 피우고 있던 이한과 마주쳤다.

그는 길에서 스친 타인을 보듯 덤덤한 눈으로 나를 보았다. 그의 발아래 쌓여 있는 담배꽁초들이 없었다면 나는 그가 날 기다렸다는 것도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담배 한 개비를 사이에 끼운, 마디가 굵은 손가락. 그가 저 손으로 나를 도와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을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다. 이번에야말로, 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고마워.”

“…….”

“인제 어쩌지, 나는….”

코끝이 맵게 당겼다. 한심하게도, 누군가가 나를 안아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생 그런 위로를 받은 적도 없었음에도. 차마 그런 말을 할 수 없으니, 둘 곳 없는 손끝을 바르작거리며 눈물을 참았다.

“미안한데, 나 좀 도와줘.”

“…뭘.”

“페로몬을 닫는다는 거,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 줄 수 있어?”

“지금은 안 돼.”

“아까 키스…해서 그런 거야? 가라앉아서?”

“그것도 그렇고, 너 아까 아무 반응도 없었잖아.”

“뭐?”

“안 서 있던데. 네 거.”

얻어맞아 늘어진 사람을 보고, 그런 걸 확인하고 있었던 걸까? 그에게 의지하려고 마음먹었던 나는 어이가 없어졌다.

“…그럼 내가 그 상황에서 흥분이라도 해야 했다는 거야?”

“누가 변태 또라인 줄 알아? 너 아까 창고 안에서 아무 냄새도 못 맡았던 거 아냐?”

“…….”

“아까 거기 내가 들어갔을 때 이미 그 변태 새끼 페로몬이 자욱했어. 그 뒤엔 내 냄새도 섞였고. 정상적인 오메가라면 싫어도 몸이 반응했을걸.”

“…그래서 뭐가 어쨌다는 거야?”

“머리가 안 돌아가? 맡을 줄도 모르는 냄새를 어떻게 열고 닫으려고.”

“그, 그럼…. 어떻게 해야 맡을 수 있는데, 그건?”

“나도 모르지. 보통은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일이니까.”

“…….”

“그러니까 쓸데없이 싸돌아다니지 말고 그냥 집에 들어가 있어. 학교도 가지 말고, 네 냄새를 네 코로 맡을 수 있을 때까지만이라도 꼼짝 말고 틀어박혀 있으라고.”

“그, 그치만….”

“…….”

“학교에 안 갈 순 없어. 게다가 아르바이트도 해야 하고. 돈을 벌지 않으면 생활이….”

어둡고 거칠거칠한 침묵이 이어졌다. 무력하게 입을 다문 나에게, 이한은 툭, 던지듯 말을 뱉었다.

“그럼 당분간은 주기적으로 가라앉히는 수밖에 없겠네.”

“…너랑?”

“뭐, 나 말고 비벼 볼 다른 알파가 있으면 마음대로 해 보든가.”

다른 알파라니. 그런 게 있을 리가 없다. 나는 순간 이준도 알파일까, 하는 의문을 떠올렸지만, 지금 그런 질문을 하면 안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난감해한다는 것을 알아챈 그는 담배꽁초를 집어던졌다.

“씨발. 뭘 그렇게 봐? 좆같은 건 나도 마찬가지거든?”

달리 답이 없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주말 내내 셈을 해 보았지만, 지금의 생활을 유지할 방법은 그가 말한 ‘성적 접촉’뿐이었다. 나는 찬찬히 고개를 떨구었다.

“맞아. 저기, 그럼… 부탁할게.”

“…….”

“말려들게 해서 미안해. 내가 닫는 방법이라는 걸 배울 수 있을 때까지만….”

어둠 덕에 낯빛을 가릴 수 있어 다행이었다. 새빨개진 뺨을 들켰다면 수치심은 더 커졌을 거다. 그렇게나 발버둥 쳤지만 결국 어설픈 남창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비참했다. 아니, 현실은 내 쪽이 무일푼으로 그의 몸을 사겠다고 우기는 꼴이라는 게 더더욱 비참했다.

그는 달갑지 않다는 태도로 나의 제안을 수락했다. 대화를 나누는 내내 그는 무표정에 가까운 얼굴이었다. 그가 쓸모없는 상냥함을 베풀지 않은 덕에 나의 비참함이 조금이나마 줄어들었는지 모른다.

당장 내일 등굣길부터 그의 집에 들르기로 했다. 만날 시간을 정하고 나서, 그는 반쯤 타들어 간 담배를 비벼 껐다.

“…그럼 내일 봐.”

인사를 하고, 등을 돌렸다. 눈물이 많은 편도 아닌데 요즘 들어 자꾸 콧날이 시큰거린다. 오늘은 정말 울지 않고는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집에 갈 때까지 실컷 울어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큰길을 지나면 판자촌으로 가는 어두운 골목이다. 어차피 그 길은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눈물과 회한으로 찌들어 있다. 내가 그 길을 울며 걷는다고 해도 신경 쓸 사람 따위는 없을 것이다.

“…왜 자꾸 따라와?”

“나도 이쪽 방향이야.”

인사를 하고 나서도 이한은 반걸음쯤 뒤에서 자꾸 나를 뒤쫓아왔다. 그의 집은 학교에서 가까운 지하철역 근처였다. 일단 방향이 같긴 하니까 잠자코 있었다. 귀찮은 동행을 떨어내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그런데 무슨 생각인지 골목까지 쫓아 들어왔다. 더는 못 참겠다는 생각에 왈칵 짜증을 내며 물었다.

“천랑대입구역은 저쪽이야. 왜 여기까지 오는데?”

“산책.”

뚱한 대답에 기가 찼다.

“이 시간에?”

“난 원래 밤에 운동해.”

“굳이 여기서?”

“좋은데. 계단도 많고.”

비꼬는 건지 진심인지 알 수 없는 말투다. 판자촌의 초입부터는 좁고 가파른 계단이 시작된다. 커다란 그의 그림자가 몇 단의 계단을 기우뚱 뒤덮었다.

얼었다 녹기를 반복한 한겨울 눈처럼, 계단의 곁으로는 판잣집들이 두서없이 눌어붙어 있다. 서울의 한 자락에 있지만, 이곳은 도시와 도시 사이의 틈바구니다. 떠밀려 굴러떨어진 벼랑 아래다.

“…이런 곳이 다 있네.”

구질구질한 동네에 산다는 티를 냈더니 구경이라도 하고 싶었던 걸까. 날카로운 시선이 나의 남루함을 꿰뚫는 것 같았다. 날렵한 그의 실루엣은 이곳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이준처럼, 그도 나와는 다른 세계를 살아왔다. 서울에 이런 곳이 있다는 것조차 모를 정도로.

습관적인 부끄러움을 느끼다가, 이내 체념했다. 이제 와서 되지도 않을 고상을 떨어 무엇할까. 맨몸을 내보이고, 남자에게 겁탈을 당할 뻔한 모습까지 보인 사람. 내일부터는 좋든 싫든 살을 부벼야 할 사람에게.

내가 계단을 오르자 그는 또 반걸음 뒤떨어져 나를 따랐다. 우리는 말없이 계단을 오르고 손금처럼 복잡한 골목을 지났다. 힘이 풀린 다리가 무거웠지만, 머지않아 집에 도착했다. 페인트칠이 반쯤 벗겨진 대문 앞에 선 순간, 나는 깨달았다.

처음 생각했던 것처럼 울면서 계단을 올랐다면, 무력한 몸은 얼마 걷지도 못하고 그대로 까부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가 있어 무너지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는 집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가로등을 등지고 서서 담배 한 개비를 꺼냈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자, 턱짓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달.”

“응?”

“달 보면서 담배 피우는 거, 좋아하거든.”

무심한 말에 나는 생각했다. 저 애도, 좋아하는 게 있구나.

바보 같은 생각이지만 그랬다. 늘 찌푸리고 있거나 시큰둥한 표정이던 그가 무얼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신기했다.

그를 따라 하늘을 올려보았다. 검은 하늘 가운데 원형에 가까운 달이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면 나도 종종 이곳에서 달을 바라보곤 했다.

새벽까지 일을 하고 돌아오는 길, 계단을 지나 집까지 향하는 이 골목에서. 그것이 청승이었는지, 그처럼 달을 보는 일을 좋아해서였는지는 모르지만.

햇빛은 결코 공평하게 주어지는 재화가 아니다. 응달진 판자촌의 사람들은 한낮에도 어둠과 한기를 품고 살아야 한다. 그러나 달빛만은, 저 쓸모도 없이 무심하기만 한 달빛만은 이곳에서도 온전히 누릴 수 있다.

‘그래…. 뭘 어쩌겠어.’

내일이 오는 게 두렵다는 마음을 달의 저편으로 묻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냐고 운명을 원망하는 것도, 그럴 여력이 있는 사람이나 할 수 있는 일이다.

끝을 알 수 없는 불행이 뒤쫓아오더라도 나는 살아가야 한다. 살아가기 위해서는 움직여야 한다. 지쳤더라도, 아무 힘이 없어도, 억지로라도.

나는 다시 땅으로 고개를 떨구었다. 그 애 쪽을 바라보았지만, 그 애는 계속 달을 바라보았다. 서늘한 달빛이 잘 짜여진 옆얼굴 위에 드리웠다.

잘 가. 오늘은 고마웠어. 앞으로도 부탁할게. 결코 나를 돌아보지 않는 그에게 마음속으로 속삭이고, 유달리 긴 하루를 접어 넣기 위해 낡은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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