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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hapter 1 : 윤오(1)[1권] (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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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chapter 1 : 윤오(1)

서이한의 자취방 문 앞에 선 순간, 나는 내가 아주 작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대리석과 유리창으로 반짝거리는 신축 오피스텔. 나는 태어나 단 한 번도 그렇게 넓고 좋은 공간을 차지해 본 적이 없다. 그 집은 나와 어머니 둘이서 몇 년째 살고 있는 판잣집보다도 몇 배는 널찍하고 깨끗했다.

띵동. 초인종의 쇳소리도 정수리를 내리치는 것 같다. 나는 내 몸이 더욱 작게 쪼그라들어 길을 구르는 돌멩이가 되는 상상을 했다. 아니, 돌이라면 차라리 나을 것이다. 단단한 돌은 쉽사리 깨어지지도 뭉개지지도 않을 테니.

어젯밤 얻어맞은 몸이 새삼 욱신거렸다. 입안의 터진 자리에서 피 맛이 배어 나오는 것 같다. 문이 열리고 방 안으로 들어가면 내가 또 얼마나 초라해질지가 무서웠다.

그러나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와 마주친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으, 후으….”

문이 닫히기 무섭게, 서이한은 나의 등허리를 당겨 안았다. 다른 한 손은 거칠게 나의 모자를 벗겨냈다. 입술이 깊게 겹쳐지고 혓바닥이 입안으로 침입해 왔다.

작고 작게 움츠러든 나는 이제 그가 나를 문지르는 대로 흐물흐물해진다. 입안을 헤집는 감각이 명치 아래로, 더 먼 곳으로 전기처럼 퍼져나간다.

원래 입맞춤이라는 게 이런 느낌인지, 나는 모른다. 원래 이렇게 집어삼켜지는 듯한, 혀끝부터 범해지는 듯한 느낌인지를. 그저 버티고 서서 그의 입술과 혀를 받아내기에 급급할 뿐이다.

온몸을 잠식한 그 느낌에 내가 완전히 무력해지고 난 후에야 그는 입술을 떼어 냈다. 호흡을 잊고 있던 나는 뒤늦게 볼품없는 숨을 헐떡였다. 그는 싫은 것에 닿기라도 한 듯 손등으로 입술을 닦아내고는 툭, 뱉듯이 말한다.

“씨발…. 밴드가 걸리잖아.”

그제야 입의 상처가 아릿해 온다. 이미 죄라도 지은 듯 움츠러든 나에게, 그는 면박을 더 얹는다.

“코로 숨 쉬라고 했지, 내가.”

“…미안해.”

어느새 땀이 흥건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렀다. 입술을 맞대고 있는 동안 나는 오갈 데 없는 두 주먹을 꼭 움켜쥐고 있었다. 나는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이었지만, 뭐가 못마땅한지 이한의 얼굴은 한껏 샐그러져 있다.

“뭐 해? 할 거 다 했으면 나가.”

“어, 저기….”

“뭐.”

“이 정도면 오늘 페로몬은… 괜찮은 거야? 나, 새벽까지 아르바이트하는데….”

바닥에 떨어진 모자를 주우며, 우물쭈물 말을 꺼냈다. 그는 향을 맡듯이 내 귓가에서 숨을 깊게 들이켰다.

“글쎄. 키스 한 번으로 새벽까지는 가라앉을진 모르겠는데.”

“모, 모른다니.”

“너도 모르겠다며. 씨발, 너도 모르는 걸 내가 어떻게 아는데.”

퉁명스러운 태도에 움츠러들면서도 나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를 올려다보는 나의 표정은 한없이 비굴해 보였을 것이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어제의 공포는 아직도 내 안에 생생했고, 매달릴 곳은 그뿐이었다.

불편한 대치가 잠시 이어졌다. 서이한은 결국 짜증스레 한숨을 쉬었다.

“불안하면 한 발 빼고 가던가.”

“응…?”

“바지, 벗어.”

“…….”

“뭘 멍청하게 보고 있어? 빨리 벗으라니까. 너도 1교시 아냐? 강의 시작까지 40분 남았거든?”

현관에 선 채로 이 번거로운 상황을 처리할 생각인지, 그는 삐딱하게 선 채로 그 자리에 버티고 있다.

달갑지 않다. 하지만 달리 방법이 없다. 나는 구겨 쥐었던 모자를 신발장에 내려놓았다. 굳은 손으로 바지를 벗어 내렸다. 마른 다리가 초라하게 드러났다.

이한의 시선이 무심히 나의 살갗을 내리그었다. 살며시 벌어진 그의 입술 사이로 붉은 혀가 비쳤다. 그는 제 아랫입술을 혀로 가볍게 훑었다. 그것만으로 발가벗겨진 기분이 된 나는 마음속으로 의미도 없는 말을 웅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어차피, 정욕의 대상이 되는 일은 낯설지 않다. 나는 종종 그런 취급을 당했다. ‘색기’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던 어린 시절부터, 모르는 어른들에게서 그런 의미의 말을 듣곤 했으니까.

좋아서 이런 외모로 태어난 것이 아니었다. 질척한 말이든, 희롱에 가까운 눈빛이든. 나에게 그 모든 것은 고통이었다. 그런 상황에 맞닥뜨릴 때마다 나는 무시하고 회피하며 내심 상대를 비웃곤 했다. 그것이 내가 치욕으로부터 나를 지키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어디로도 달아날 수 없었다. 이것은 단지 나의 필요에 따른 일방적인 애원이었다. 치욕은 온전히 나의 몫이었다. 아니, 나는 치욕스러워할 자격도 없었다.

“언제까지 뜸만 들일 건데?”

부르는 소리에 무겁게 시선을 들어 올렸다. 붉어진 그의 눈동자는 젖은 열기와, 그만큼 짙은 경멸로 얼룩져 있었다.

그가 나를 경멸해 주는 것이 마음 편했다. 그가 나에게 주는 것이 적선이라면, 나도 불필요한 감정을 품지 않아도 될 테니. 그리고 나의 필요가 끝나면 다시 내 힘으로 일어나 진창을 걸어갈 수 있을 테니.

울지 않으려 눈을 감았다. 코끝이 아릿해져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침묵이 버석버석 공기를 겉도는 동안 머리는 아득해졌다.

* * *

이야기의 시작을 찾는다면 아마도, 열여덟 늦가을의 그날이었을 것이다.

평소처럼 남루한 날이었다. 나는 방과 후의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녹초가 된 채로 공용 욕실로 들어갔다. 칠이 다 벗겨져 물때에 얼룩진 타일, 녹이 덕지덕지 붙은 수도꼭지.

찬기만 겨우 가신 물로 몸을 씻고 눅눅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추위가 괴로워지는 계절이었지만 불평할 생각은 없었다. 새삼 불평할 의욕이 없을 정도로 가난은 오랜 시간 나의 곁에 있었다.

삶의 밑바닥에 몸을 누인 채 간신히 숨을 쉬고 있으면 때때로 크고 작은 불행이 찾아와 나를 할퀴고 지나갔다. 하나쯤 좋은 일이 생기면 앙갚음이라도 하듯 더 큰 불운이 굴러떨어졌다.

쓸 만한 선물을 받으면 도둑질을 했다는 오해로 꾸지람을 들었다. 이웃이 쓰던 자전거를 받아 기뻐하기 무섭게 넘어져 팔이 부러지기도 했다. 시급이 좋은 아르바이트 자리를 구하면 꼭 사장이나 단골손님이 내 몸을 더듬고 추파를 던졌다.

‘이제 형편이 풀리려나 보다. 우리 형편에 반장 수당이 어디야. 임대주택 그것도 아무나 갈 수 있는 거 아니라던데 제희 엄마가 좋은 분 소개해 준 덕분에 잘됐지 뭐니.’

2년 전, 어머니는 다니던 공장에서 좋은 보직을 받았고 임대주택에 입주할 수 있게 되었다는 소식을 전했다. 흐뭇하게 미소 짓던 어머니는 그로부터 불과 며칠 뒤 일터에서 의식을 잃었다.

치료 시기를 놓친 만성 신부전에 몇 가지 합병증으로 입원한 사이 어머니는 해고되었다. 사기를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도 입원 기간 중이었다. 사기꾼들이 가져간 임대주택 보증금 명목의 돈은 우리의 전 재산에 가까웠다.

작은 행복이, 더 큰 불행을. 그것은 확고한 법칙이었다. 여덟 살의 크리스마스이브에 처음으로 선물을 사 오셨던 아버지가 다음 날 차디찬 한강 물에 몸을 던진 이후, 법칙은 한 치의 예외도 없이 유지되었다.

집을 잃고 거리에 나앉을 위기에 처한 어머니와 내가 우연히 이 쪽방촌에 살 곳을 얻게 되었을 때도, 안도하던 나는 습관처럼 다음의 불행을 기다렸다. 집에 욕실이 사라진 것이 불행의 전부였다면 좋았겠지만, 세상의 법칙이라는 게 그렇지 않았다.

“여어, 예쁜이.”

욕실 밖을 나섰을 때, 누군가 나에게 말을 걸었다. 씻을 순서를 기다리는 여자들과 농을 지껄이던 그 남자는 나에게 떨어진 많은 불행 중 한 조각 같은 존재였다.

판자촌의 절반 정도를 관리하는 사람. 이름도 모르고, 이웃 여자들이 ‘오 실장’이라 부르기에 오 씨구나 짐작할 뿐이었다. 나는 남자의 말을 못 들은 척했지만 몇 걸음 못가 손목을 붙잡혔다.

“놔주세요. 세 드리는 날은 아직 멀었잖아요.”

힘껏 손을 뿌리치자 그는 내 저항이 우습다는 듯 낄낄거렸다.

“알어, 알어. 누가 돈 달래? 인사 좀 하고 살자, 누가 잡아먹어?”

“…….”

“새끼, 꼬나보기는. 너 그럼 더 꼴리는 거 몰라?”

침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이 퀴퀴한 쪽방촌에라도 눌러앉아야 하는 신세라 차마 그러지는 못했다. 할 수 있는 가장 차가운 표정으로 노려보아도 그는 끈덕지게 말을 붙여 왔다.

“어머니 수술하신다며?”

“…별일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돈은 있고? 형이 용돈 좀 줘?”

“이러지 마세요!”

그가 내 엉덩이 쪽으로 손을 뻗자 나는 악을 쓰며 뒷걸음질 쳤다. 욕실 앞의 아가씨들은 구경거리라도 생긴 듯 내 쪽을 흘긋거렸다.

“뭘 질겁을 해. 누가 꽁으로 씹 뜨재?”

“…….”

“농담이야, 새꺄. 난 상품은 안 건드려. 그건 양아치들이나 하는 짓이고.”

누가 봐도 양아치 같은 그의 말에 몇몇 여자들이 키들거렸다. 그는 고개를 돌려 그녀들에게 입을 다물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처음 이곳에 오게 될 때는 알지 못했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근처의 홍등가에서 몸을 파는 일을 했다. 여자든 남자든, 늙거나 병들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늙거나 병든 사람들도 몸이 성하던 시절엔 홍등가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았더라도 어차피 나와 엄마에게 달리 갈 곳은 없었으니, 불평할 일은 아니었다.

말이 좋아 관리인이지, 오 실장은 사실상 포주 노릇을 했다. 그는 나를 처음 본 날부터 줄기차게 저와 함께 일할 것을 권했다. 너는 잘 팔릴 것이라며 조롱 같은 말을 칭찬처럼 떠들었다.

‘팔 수 있는 걸 왜 안 팔아?’

너무도 당연한 진리를 이야기하는 말투였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는 않지만, 어쩌면 그 가벼운 말이 진리인지도 모른다.

나는 늘 가난한 동네에 살았고 나의 이웃들은 늘 제가 지닌 것을 헐값에라도 팔고 싶어 했다. 제 몸뚱어리, 신념, 자존심, 행복까지도. 그럼에도 그들의 주머니가 늘 가벼운 것은 슬프고 이상한 일이었다.

“더 하실 말씀 없으면 갈게요.”

“저 멍청한 새끼가, 대가리가 안 돌아가? 편하게 살 수 있는데 왜 헛고생을 하는지 모르겠네, 진짜.”

윽박지르는 소리를 뒤로하고 집을 향해 걸었다. 나는 싫은 말을 떨구어내듯 더러운 수건으로 귀 언저리를 털었다. 화가 났던 것은 아니다. 너무도 익숙한 상황이 지긋지긋했던 것뿐이다. 나에게 그런 제안을 했던 것이 오 실장뿐인 것도 아니었다.

집창촌의 쪽방으로 이사 오기 전에도, 나는 이미 그런 세상을 살고 있었다. 모두가 나를 향해 더러운 혀와 손짓을 날름거리는 세상을.

대단한 이야기도 아니고, 그냥 구질구질한 경험담들이다. 낡은 옷을 입고 밤길을 걷고 있으면 으레 누군가 추근거리곤 했다. 나 같은 아이는 얼마에 살 수 있냐는 질문을 들은 것도 여러 번이다.

아르바이트하던 곳의 사장님들 중 호시탐탐 나를 만질 기회를 노리던 사람도 많았다. 그들은 더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말로 나를 꾀었다.

고등학교에 진학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무렵, 같은 반 아이는 나에게 제가 하고 있는 ‘고수익 아르바이트’를 추천했다. 제 딴에는 호의였을 제안을 거절당하자, 그는 눈에 띄게 불쾌해했다.

‘넌 좆도 없는 게 왜 고상한 척이야?’

얼마 후 내가 몸을 팔고 다닌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살고 있는 동네가 그런 탓에 소문은 곧 기정사실화되었다. 아니라고 변명하는 것보다 체념하는 게 더 쉬웠다.

전부터 부실했던 친구 관계는 그 무렵부터 완전히 엉망이 되었다. 학교의 선생님들까지 소문을 믿기 시작한 건 좀 곤란했다. 남는 문제집을 나눠주던 선생님 한두 분도 나에게 거리를 두었으니까. 간신히 상위권을 유지하던 성적까지 들쭉날쭉해졌다.

‘하긴. 성적이 좋아 봐야 뭐 해. 학교를 끝까지 다닐지도 모르는 일인데….’

나는 발끝을 툭툭, 걷어차듯 걸으며 쓰게 웃었다. 투석 때문에 혈관과 심장이 약해진 어머니는 얼마 전 수술을 받았고, 안 그래도 턱 끝까지 쌓여 있던 빚은 더 불어났다.

의사의 표현에 의하면 ‘복잡한 수술도 아니고 큰돈이 드는 수술도 아닌’ 그것은 우리에게 지붕 위로 떨어진 운석 같은 재난이었다.

앞으로의 일은 뻔했다. 투석 기간이 길어질수록 크고 작은 수술은 몇 번이고 반복될 것이고, 이자를 가리기도 급급한 빚은 손 쓸 수 없이 늘어 갈 것이다.

완치를 위해서는 이식을 받는 수밖에 없었다. 이식수술 비용은 더 막막했지만, 빚을 내서라도 수술만 받을 수 있다면 당장 받고 싶었다. 그러나 내 신장은 조건이 맞지 않고 기증자를 기다리는 순번도 까마득히 많이 남아 있었다.

‘그래. 학교는… 그만두는 게 낫겠지. 어차피 대학 갈 돈도 없고, 학교에 다니면서는 아르바이트를 더 늘리기도 어려우니까….’

집안을 굴러다니는 불운이 밤톨만 했을 시절, 나는 내가 멀쩡한 어른으로 자라나 제 몫의 돈을 버는 것으로 그 불운을 치워 버릴 수 있다고 믿었다. 그 밤톨이 기어이 운석이 되어 버린 열여덟 살까지도 미련인지 관성인지 나는 그 믿음을 계속 쥔 채 학업을 놓지 못했던 것이다.

터덜터덜 걸으며 책가방에 넣어 둔 자퇴서를 생각하던 때였다. 집 앞 골목에 서 있던 사회복지사가 나를 불렀다.

“윤오 학생!”

“복지사님, 퇴근 아직 안 하셨어요?”

“좋은 소식이 있어요. 빨리 이리 와 봐요.”

어머니의 급여 문제로 찾아온 걸까 했는데 그녀는 뜻밖에도 나를 복지관으로 잡아끌었다. 복지관 건물에는 그날따라 유난히 어린애들이 많았다. 대학생들이 공부방을 연 모양이었다.

판자촌에는 저들의 인생에 남아도는 무언가를 베풀고자 하는 사람들이 종종 찾아온다. 연탄 봉사라든가, 사랑의 김장 담그기, 그런 겸연쩍은 이름으로. 그중 공부방 봉사는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명문대생들의 연례행사였다.

복지사는 기쁨에 들뜬 표정으로 봉사를 온 대학생에게 내 공부를 부탁했다고 이야기했다. 말릴 틈도 없이, 그녀는 젊은 남자 하나를 내 앞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윤오는 정말 똑똑한 친구예요. 환경이 조금만 좋았더라면 천랑대 진학도 가능했을 텐데…. 선생님이 좀 도와주세요.”

아마도 천랑대에 다니고 있을 사람에게 그런 식으로 나를 소개하는 게 부끄러웠다. 낡은 목욕용품 가방을 등 뒤로 감추던 차에, 낮고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윤오 학생. 맞지요?”

눈앞의 남자는 나에게 선하게 웃어 보였다. 그게 서이준과의 첫 만남이었다.

그날 그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이준은 내가 태어나 만난 모든 사람 중 가장 반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부유함의 세계에 관해 전혀 모르는 나조차도 그가 귀하게 자랐다는 걸 한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정돈된 머리카락, 깨끗한 피부와 가지런한 눈썹. 콧대와 턱선은 단단했지만 호선을 그리는 눈꼬리와 입매 때문인지 부드러운 인상이었다. 값진 옷가지는 타고 난 껍데기인 양 그에게 잘 어울렸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뭐라 말할 수 없이 좋은 향기가 풍겨 왔다. 방금 씻었는데도 내가 너무 지저분해 보일 거라는 생각에 얼굴이 붉어졌다.

“이거 한번 풀어 볼래요?”

그는 준비해 온 문제지를 나에게 내밀었다. 문제를 푸는 동안 그가 나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단지 바라볼 뿐인데 눈빛이 내 숨줄을 죄는 것 같아 문제에 집중할 수 없었다. 시선이 집요할 뿐 노골적이지는 않아서, 쳐다보지 말아 달라고 하기도 어려웠다.

뜻 모를 공기가 초조했던 나머지, 나는 평소엔 결코 하지 않던 멍청한 생각까지 해 버렸다.

‘그래. 저런 사람이라면 나를 환멸조차 생기지 않을 만큼 비싼 값에 사 줄지도 몰라.’

그러나 부끄럽게도, 이준은 나의 예상과 완전히 다른 제안을 했다. 내가 풀어 놓은 문제들을 찬찬히 훑어본 그는 매주 개인 교습을 해 주겠다는 믿기 힘든 말을 했다.

“저 대학 안 갈 건데요.”

나는 갑작스러운 요행에 방어적으로 대응했다. 자신의 힘으로 가난의 구덩이를 기어 나오는 것이 오랜 꿈이었는데도 괜한 내숭을 부렸다. 되바라져 보일 거절에도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복지사님께 들었어요. 가정형편 때문에 고등학교도 그만둘까 고민하고 있다고.”

“…….”

“오늘 처음 본 사람이 이런 말 하는 게 주제넘은 조언일 수도 있지만…. 당장은 부담스럽더라도 대학은 가는 편이 좋아요. 더구나 이렇게 소질이 있으면.”

그는 차분한 목소리로, 고등학교를 중퇴한 경우와 대학을 나온 경우에 얻을 수 있는 일자리에 차이가 있다고 설명했다.

“몇 년의 투자로 인생이 전혀 달라질 수 있어요. 천랑대를 졸업하면 어렵지 않게 천랑기업 계열사에 채용될 수도 있고.”

“…제가 어떻게 천랑대에 가요?”

“갈 수 있어요. 도와줄게요.”

누구도 나에게 그런 식으로 미래를 확신해 준 적이 없었다. 공부를 곧잘 한다는 이야기는 종종 들었지만 그뿐이었다. 이준의 목소리는 곧고 단단했다. 미소는 잔잔했지만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그는 태어나 단 한 번도 실패를 경험해 보지 못했을지 모른다. 나에게는 일상과 같은 좌절과 체념이, 그에게는 상상을 통해 학습해야 할 미지의 영역이었을 거다.

“학비가 걱정이겠지만 재단에 장학 제도가 잘되어 있어요. 이런 상황이면 당연히 혜택을 받을 수 있을 거예요. 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장학금도 있었던 것 같은데…. 잠시만요. 확인해 볼게요.”

그의 태도는 산뜻하기만 할 뿐 끈적한 기운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시선 끝이 길었던 탓에 애먼 오해를 한 걸까. 순간이나마 그에게 나를 팔 생각을 했다는 것에 미안한 기분마저 들었다.

잠깐의 설득 끝에 나는 그의 제안을 수락했다. 그가 비춘 희망은 거부할 수 없을 정도로 유혹적이었다. 시궁창의 한가운데서 잠깐 맛본 그것이 어찌나 벅찼는지. 집으로 돌아와 잠들 때까지도 심장이 저릿거렸다.

확신에 찬 그의 말대로, 적당히 상위권 수준이던 나의 성적은 개인 교습을 받은 지 몇 달이 지나자 천랑대 진학을 노려볼 만큼 향상되었다.

그가 지닌 확신은 나에게도 옮아 붙었다. 나는 조금씩 대학 생활을 기대하게 되었다. 새로운 곳에서의 새로운 삶을 생각하면 매일의 지난함이 견딜 만해지곤 했다. 학교에서 겪는 따돌림도, 오 실장과 그 끄나풀들이 뱉는 희롱의 말도 상처가 되지 않았다.

그와 공부하게 된 것은 나에게 일어난 가장 커다란 행운이었다. 언젠가 더 큰 불운이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시달리면서도, 나는 내게 떨어진 행운을 허무하게 바스러뜨릴 수는 없다는 마음으로 더 악착같이 공부했다.

그러나 법칙에 예외는 없는 듯 보였다. 필사적으로 준비했던 수능 시험날 아침, 판자촌의 버려진 고물상에서 화재가 발생했다. 불길이 시작된 곳은 내가 사는 단칸방에서 멀지 않았다.

그래도 나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날 20여 가구가 집을 잃고 추위 속에 거리에 나 앉는 신세가 되었지만, 우리 집에는 재와 그을음이 빼곡히 쏟아졌을 뿐 불이 옮겨붙지는 않았다.

일대의 교통이 마비되어 수능시험장에 제시간에 도착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사소한 불행에 불과했을 거다. 나는 입실조차 하지 못하고, 고사장 철문 밖에 한참을 황망하게 서 있다 집으로 돌아왔다.

단칸방의 공기는 매캐했지만 여전히 눅눅하고 싸늘했다. 화마도 해묵은 습기와 한기를 어쩌지 못했던 모양이다. 눈물짓는 어머니의 곁에 늘어져 있다가 오후 즈음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집이 엉망이잖아. 바닥을 다 닦으면 걸레를 빨아서 한 번 더 닦아야겠다. 집 안을 웬만큼 수습하면 집 앞 골목도 쓸어야 할 텐데.’

무거운 기분이 나를 잠식하려 할 때면, 나는 습관처럼 감정의 움직임을 모른 체하고 몸을 움직이곤 한다. 우울해지지 않으려면 머릿속으로 부지런히 앞으로 할 일을 계산해야 한다. 그렇게 재가 가라앉은 집 안을 청소하며 검댕투성이가 되었을 때, 그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윤오, 시험 잘 봤지?]

괜찮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려 애쓰고 있었다. 되지도 않을 형편에 대입을 준비한 건 철모르는 치기고 무리한 꿈에 불과했으니까.

사정이 있어서 시험 보러 못 갔어요.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최대한 밝게 대답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입안이 울먹임으로 가득 차서 생각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호흡을 가다듬은 다음에는 엉뚱한 말이 튀어나와 버렸다.

“선생님, 죄송해요. 많이 가르쳐 주셨는데, 정말 죄송해요….”

그 말을 겨우 꺼내고 나는 하염없이 울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날 이후 그렇게 울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일 년 남짓의 헛된 희망이 그것으로 마무리되었다면, 차라리 나았을까.

그러나 나의 밑바닥은 그곳이 아니었다. 생각조차 못 했던 길이 불쑥, 내 앞에 펼쳐졌다.

며칠이 지난 후 이준은 우리 집으로 왔다. 복지관의 공부방에서만 만났던 그가 거미줄 같은 판자촌의 골목을 헤치고 직접 찾아온 것이다. 언제 무너져도 놀랍지 않을 작은 집에, 누가 보기에도 고상하고 귀티 나 보이는 그가 앉아 있는 모양이 아주 이상해 보였다.

그리고 궁색함을 부끄러워할 틈도 없이, 그는 더더욱 이상한 말을 꺼냈다.

“윤오야. 너 대학 갈 수 있어. 천랑대에 가고 싶다고 했지? 내가 도와줄게.”

나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차마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묻지도 못하는 나에게, 이준은 놀랍게도 수능 최저조건이 없는 천랑대 특별전형에 응시할 수 있도록 해 주겠다고 했다.

천랑대 정원의 절반 이상을 뽑는 특별전형은 천랑재단 소속 고등학교 졸업생을 위한 전형으로, 타학교 소속은 응시 자격 자체가 없었다.

“사실 내가 천랑재단 이사장님을 잘 알아. 네 장학금 신청할 때도 도움을 부탁드렸었고. 재단 장학생 선정 조건이 워낙 까다로웠잖아. 1년간 성실하게 자격 유지했고 성적도 향상되었다고 말씀드렸더니, 재단 출신이 아니더라도 면접 기회를 주시겠다고 했어. 경제학과 지망했던 것 맞지?”

“그, 그래도… 어떻게 그런….”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는 내가 잘 아니까. 이대로는 내가 마음 아파서 안 되겠어. 대신, 합격하더라도 다른 학생들에게는 입학절차에 대해서 비밀로 해야 해. 그럴 수 있지?”

수상쩍을 정도로 과분한 제안이었다. 궁지에 몰려있던 나에게는 그의 말이 벼랑 끝에서 내려온 생명줄처럼 느껴졌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 생각해 보기도 전에 나는 이미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극도의 긴장감 속에 면접을 보았다. 면접관들이 준비해 간 서류들보다 나의 얼굴과 몸 구석구석을 훑어봤던 것 같았지만, 기분 탓일 거라고만 생각했다. 그들이 나의 무엇을 좋게 보았는지 몰라도 나는 대학에 합격했다. 그것도 전액 장학금을 받기로 하는 조건으로.

소식을 전해 들은 이준은 어머니만큼이나 기뻐했다. 2월의 어느 날, 그는 합격을 축하한다며 나를 번화가로 데리고 나갔다. 종종 지나던 길이지만 그와 나란히 걷는 것만으로 거리에 화사한 빛이 가득했다. 지나는 사람들의 표정마저 따스하게 느껴졌다.

처음 보는 호사스러운 음식으로 저녁을 먹은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라운지 바로 향했다. 음악도 조명도 머리가 어지럽도록 달착지근했다. 그가 주문해 준 길고 복잡한 이름의 술도.

“어…? 이거, 술이에요? 달아요.”

몇 번 홀짝이자 금세 두 볼이 발갛게 되었다. 그는 내 촌스러운 반응을 비웃지 않고, 다만 이름 모를 술처럼 달콤하게 미소 지었다.

나는 술기운에 몽롱해진 눈으로 그를 보았다. 한 번도 쬐어보지 못한 햇살 같아서, 일 년 남짓 매주 만나 공부를 배우면서도 차마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던 그의 얼굴을.

그는 아름답고 건강한 사람이었다. 원래대로라면 결코 나와 마주칠 일이 없었을, 다른 세계의 사람.

종종, 그가 반짝거려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 정체 모를 빛은 구질구질한 판자촌의 풍경과 그의 모습이 대비된 착시일 거라고 짐작했었다.

그러나 내 생각이 틀렸다. 번듯하고 넓은 공간, 수많은 사람 속에서도 반짝임은 여전했다. 아니, 그와 잘 어울리는 공간 속에서 그는 더욱 환하고 찬란해 보였다. 취기가 오른 김에, 나는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선생님. 뭐 하나 여쭤봐도 돼요?”

“뭔데, 윤오야?”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오래도록 내 안에 있던 질문이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다. 나는 그에게서 무언가를 받을 때마다 그가 나에게 무엇을 원하고 있지 않은지에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나를 보는 그에게서 탐욕의 기운을 읽은 적은 없었다.

부잣집 도련님의 변덕이라기엔 너무도 긴 시간 많은 일이 있었다. 그는 일 년도 넘게 판자촌의 복지관을 찾아와 나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었다.

천랑재단의 장학금을 신청할 수 있도록 연결해 준 것도, 그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병원에서 어머니가 더 편하게 치료받을 수 있도록 배려해 준 것도 모두 그였다. 그는 대입을 포기해야 했던 나에게 불가능한 길을 열 어주기까지 했다.

나는 그의 행동을 ‘헌신’이라는 주제넘은 단어로밖에 설명할 수 없었다. 저토록 빛나는 사람이, 어째서 이렇게나 보잘것없는 나에게.

“…윤오야.”

이준은 지그시 나를 바라보았다. 언제나 웃음기로 살풋 휘어져 있던 안경 너머의 눈이, 그 순간만큼은 형형하게 번뜩였다. 늘 그에게서 느껴지던 좋은 향기도 베일 듯 선명했다.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어. 너는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지만… 너에게는 여기보다 훨씬 더 잘 어울리는 자리가 있거든.”

처음 만난 날처럼 확신에 찬 목소리였다. 어른어른한 머릿속에서 그 말이 물결쳤다. 더 나은 미래가 있을 거라는 도장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것도 내가 아는 가장 빛나는 사람에게서.

표정도 마음도 속절없이 풀어졌다. 배시시, 미소 짓는 나를 보며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금, 웃은 거지?”

장난스러운 말에 놀라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노,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거 아냐. 웃는 거 처음 봐서, 신기해서.”

“처음… 봤어요? 아닐 것 같은데….”

“진짜야. 웃을 줄 모르는 건가 했어. 음…. 아니, 사실 그럴 리는 없으니까 그냥 내가 많이 불편한 걸까 서운하기도 했지.”

“…불편했던 건 아닌데.”

나는 손등으로 더운 뺨을 꾹꾹, 눌렀다. 내 표정이 이상할 것 같아 걱정되었지만, 달뜬 기운이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런데 날 계속 선생님이라고 부를 거야?”

“그럼, 뭐라고 불러요?”

“글쎄. 편한 대로. 그치만 이제 선생님은 아니잖아.”

“…선배님이라고 부르기는 부끄러운데.”

“아니면, 형이라고 부르는 건 어때?”

“그건 더 부끄러워요.”

“뭐가 부끄러워. 불러 봐, 한번.”

나는 고개를 저었지만, 이준은 그렇게 부를 때까지 집에 보내주지 않을 기세였다. 한참을 버틴 끝에 귀 끝까지 새빨개진 채로 이준이 형. 하고 겨우 말했다. 간지러운 수줍음에 처음 마셔 본 칵테일의 취기까지 더해졌다. 기분 좋은 현기증이 온몸에 퍼졌다.

마을버스 정류장에서 내려 까마득한 언덕을 오르는 귀갓길. 그날만은 오래된 가로등의 깜빡임이 봄 하늘의 풍등처럼 이채로웠다. 마음이 들떠 추위도 느껴지지 않았다.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어리석게도, 그날의 나는 희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내 인생을 지배하던 법칙이 손바닥을 뒤집듯 달라질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가 내 가슴을 부풀게 했다. 여태까지의 불행은 앞으로의 나날을 위한 것이 아닐까, 건방진 생각까지 했다.

그래, 희망. 절망에 무던해지려 그렇게도 노력했지만 여전히 내 마음은 희망을 꿈꾸었다. 희망에 무지했던 나는 알지 못했다. 때로는 희망이 절망보다도 더 지독하게 인생을 짓무르게 만든다는 것을.

* * *

예상은 했지만, 대학에 간다는 것은 막연한 상상보다 훨씬 현실적인 일이었다. 앞으로는 급식도 교복도 없으니 지출이 늘어날 거라는 생각에 초조해졌다. 입학을 열흘 남짓 앞두고 단기 아르바이트로 한창 바쁘던 때였다.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녹초가 되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판자촌 계단의 초입에서 커다란 그림자를 본 나는 그야말로 소스라쳤다.

“으앗…!”

키가 큰 그림자는 손을 쑥 내밀어 얼음을 밟고 미끄러지려 하는 나를 붙잡았다. 놀라 뿌리치기 직전에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고 안심했다. 이준은 얼이 빠진 나를 부축해 바로 세워 주었다.

“윤오야. 뭘 그렇게 놀라. 괜찮아…?”

“죄, 죄송해요. 선생님. 다른 사람인 줄 알고….”

어디서 나의 대학 진학 소식을 들은 것인지 몰라도, 오 실장은 그 며칠 틈만 나면 찾아와 시비를 걸곤 했다.

헛바람이 들어 월세를 밀리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둥, 집이 낡았으니 허물어 버리는 게 좋겠다는 둥 여러 핑계를 대다가, 결국 주제넘게 대학에 갈 생각은 말고 몸이나 팔라는 말로 결론을 짓고는 했다.

왜 하필 이준을 오 실장 같은 사람으로 착각했는지 모르겠다. 민망해진 나는 고개를 떨구고 가만히 있었다. 이준은 가만히 나를 훑어보다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손에 묻은 흙을 닦아 주었다.

그는 시리도록 하얗고 네 귀가 반듯하게 접힌 손수건을 항상 가지고 다녔다. 손수건에서도 좋은 향기가 나는 것 같아, 나는 얼굴을 붉혔다.

“살이 더 빠진 것 같은데. 어디 아픈 거 아냐?”

“아니에요. 그대로인데.”

“정말?”

표정을 감추는 것은 나의 특기였다. 태연하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의심스럽다는 듯 덧붙였다.

“무슨 일 있으면 알려 줘. 형이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울 테니까. 알았지?”

다시 고개를 끄덕였지만, 구질구질한 사연을 그에게 말할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그는 아마도 제가 봉사하러 온 판자촌이 집창촌이나 다름없다는 것조차 모르고 있을 것이다.

“아르바이트하고 오는 길이야?”

“네. 무슨 일로 오신 거예요?”

“꼭 무슨 일이 있어야 보러 올 수 있는 거야?”

내가 성인이 되어서인지, 그에게 마음을 열었다는 걸 알아채서인지는 몰라도, 이준의 태도는 부쩍 친근해졌다. 용건 없이 메시지를 보내올 때도 있고 한번은 약속을 잡아 함께 외출하기도 했었다.

나도 전보다 훨씬 그를 가깝게 느끼고 있었지만, 사람을 대하는 것이 서툰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사근사근 건네진 말에 나는 당황해서 허둥거렸다.

“어, 어, 그건….”

“하하, 뭘 그렇게 놀라. 음…. 사실 일이 있긴 해. 한동안 못 볼 것 같아서 인사하려고 왔어.”

“어디… 가세요?”

“미국에 계신 할아버지가 몸이 안 좋으시대서 한 달쯤 있다 와야 할 것 같아. 개강하면 학교 안내도 해 주려고 했는데, 어쩌지?”

그 말에 얼떨떨하고 아쉬운 기분이 들었다. 굳이 말하자면 서운함 같았지만, 그걸 표현해도 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많이 편찮으신 거예요?”

“아마 큰일은 아닐 거야. 타국에 있는 게 쓸쓸하신지 가끔 그런 식으로 친척들을 다 불러모으실 때가 있거든. 적당히 있다 돌아와야지. 이번 학기 등록도 했고. 다음 주 출국인데 그땐 너 OT가 있을 때라서 오늘 왔어.”

“어…. 저, OT는 안 갈 것 같아요.”

“그래? 왜?”

OT뿐만 아니라 나는 학창 시절 내내 수학여행도 수련회도 가 본 적이 없었다. 돈도 없고, 그런 데 돈을 써도 된다는 마음의 여유도 없었으니까. 그는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일 테니 얼버무렸다.

“그냥, 바쁘기도 하고….”

“가야지. 그래야 적응하기 쉬워. 내가 비용도 내놨는데.”

“네?”

“집행부에 물어봤더니 아직 네 이름으로 입금이 안 됐다길래 내가 대신 납부했어.”

스스럼없는 그의 말에 뒷덜미가 훅 붉어졌다. 대놓고 적선을 받은 느낌에 발가벗겨진 것 같으면서도, 이제 와 10만 원 남짓한 돈에 새삼스럽게 구는 자신이 우스웠다. 여태껏 그에게서 돈으로 환산할 수도 없는 많은 것을 받았으면서도 말이다.

무례하게 굴지 않기 위해 단어를 고르는 사이, 그는 나의 떨떠름한 표정을 알아차렸다.

“혹시 기분 나쁜 거면 미안. 난 그냥, 네가 잘 적응했으면 해서 그랬어. 재단 출신 애들이 많아서 그런지 우리 학교 분위기가 조금 특이하거든. 나 때문에 입학한 건데 네가 곤란해지는 건 싫으니까.”

“…….”

“…내가 생각이 짧았나 보다.”

“아니에요. 자꾸 신세를 지는 게 좀 그래서….”

“그냥 주는 거 아니야. 나중에 다 갚아야 해, 너.”

그가 아주 부드럽게 웃었기 때문에,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에게서 받은 걸 어떻게 다 갚을지, 까마득함을 느끼는 사이 이준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럼 이거 주는 것도 싫어할 거야?”

“이게 뭐예요?”

“입학 선물.”

네모난 상자 안에는 손목시계가 들어 있었다. 검은 가죽 밴드, 은색의 시계판으로 된 아름다운 시계였다. 시계판의 작은 구멍 너머로 복잡하고 섬세한 기계장치의 움직임이 보였다.

“선물이라니…. 전에 저녁도 사 주셨잖아요.”

“그건 그거고. 항상 몸에 지니고 있을 만한 걸 선물하고 싶었어.”

“그래도… 이렇게 좋은 걸….”

“그냥 내 욕심으로 주는 거라고 생각하고 받아 주면 안 될까? 이거, 그렇게 비싼 건 아니야.”

이준은 덥석, 내 손을 잡아 올렸다. 뜻밖의 접촉에 심장이 쿵, 울렸다. 그는 고장 난 인형처럼 덜그럭거리는 내 손목에 시계를 채웠다.

“예쁘다. 손목이 가늘어서 잘 어울릴 거라고 생각했어.”

째깍째깍, 정갈한 시계 초침 소리가 맥박 위를 걸어갔다. 그는 비싼 것이 아니라고 말했지만, 그 시계는 아마도 내가 지닌 모든 것을 합친 것보다도 더 값진 물건이었을 것이다.

난감한 얼굴로 그를 올려보았지만 그는 또 웃고만 있었다. 매끄러운 미소를 보니 차마 호의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감사합니다.”

뭐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맥없이 웅얼거렸다. 솔직히 싫은 기분은 아니었다. 고개를 제대로 들지 못하는 나를 보며 그는 즐거워했다.

“받아 줘서 다행이다. 계속 차고 있어야 해. 알았지?”

“네. 잘 간직할게요.”

“그럼 이만 가 볼게. OT 재미있게 다녀와.”

“형…도 잘 다녀오세요.”

돌아서서 몇 걸음 걷던 그는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윤오야.”

“네?”

“혹시 아프거나, 힘든 일이 있으면 꼭 알려 줘야 해. 알았지?”

그의 마지막 말도, 시계만큼이나 어색했다. 누구도 그렇게 나의 안녕을 염려해 준 적이 없었으니까. 나는 이준의 그림자가 얼음 절벽 같은 계단을 내려가는 것을 지켜보았다.

그의 선물이 불편하고 부담스러웠지만, 그만큼 마음이 들떴다. 기뻤던 것 같기도 하다. 기쁜 마음이 부끄럽게 느껴지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당연하다는 듯 적선과 동정을 요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이유 없이 타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사람은 없다는 걸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런데도 나답지 않게 덜컥, 값비싼 시계를 받아 버린 건 물건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늘 몸에 지닐 것을 선물하고 싶었다는 그의 말이 따스해서였던 것 같다.

나는 손목에 자리 잡은 시계를 내려보았다. 째깍거리는 소리가 봄 나비의 날갯짓처럼 우아했다. 빙글빙글 도는 시계의 기계장치가 나를 이곳이 아닌 어딘가로 데려가 줄 것 같았다. 회중시계를 든 토끼를 따라 이상한 나라로 흘러간 앨리스처럼.

* * *

손과 입술이 부르트도록 아르바이트에 매진하던 나는 OT 당일에야 처음으로 학교에 와 보았다. 멀리서도 눈에 띄는 정문과 깨끗하고 커다란 건물들, 너른 잔디밭이 낯설었다. 대학에 왔다는 설렘보다도 긴장이 앞섰다.

다른 아이들은 앞선 행사에서 서로 낯을 익혔을 거라는 생각에 더 초조해졌다. 적응에 도움이 될 거라는 이유로 이준이 보내 준 곳이니 억지로라도 아이들과 어울려야 한다고 다짐했다.

선배들이 나눠주는 이름표를 가슴에 붙이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친해질 만한 애가 있을까 탐색하던 차에 저편에 서 있는 아이가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체구에 결 좋은 갈색 머리를 한 남자애였다. 코끝도 눈도 동그란 인상이 귀여워 보여서, 말을 걸어 볼까 하고 한 발짝 다가섰다. 그쪽도 곧 나를 발견했다. 그는 나를 보자마자 예쁘장한 얼굴을 득달같이 찡그리고는 내 얼굴을 빤히 응시했다.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오지 못할, 와서는 안 될 곳에 왔다는 듯 싸늘한 말투였다. 그 순간 저 너머에서 하민아, 김하민, 하고 그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무어라 더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그는 뾰족한 시선만 남기고 돌아서서 멀어져 갔다.

명백한 적의에 머릿속이 하얗게 질렸다. 얼이 빠져 있는데, 반대편에서 다른 아이가 다가왔다.

“야, 너도 재단 출신 아니지? 그럼 이쪽으로 와.”

“재단 출신…?”

“쟤네들처럼 천랑고나 천랑여고 나온 애들 말야. 저쪽에 말 걸어 봐야 소용없어. 어차피 자기들끼리만 놀더라.”

그는 턱짓으로 조금 전의 그 예쁜 아이가 끼어든 무리를 가리켰다. 신입생의 절반 남짓을 차지하는 그들은 이미 서로를 잘 알고 있는지 듯 가슴에 이름표를 붙이지 않은 채로 왁자하게 떠들어 대고 있었다.

명문 사립학교 출신들답게 다들 번듯한 외모와 체형,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뭉쳐 있는 분위기가 어쩐지 거칠고 음습해 보이기도 했다.

“뭐 해? 저쪽 버스 타러 가자.”

나머지 무리에 나를 데려다준 아이 덕분에, 나는 일반고 출신 아이들 틈에 섞여 버스를 탔다. 주변에 앉은 애들과 몇 마디를 나누는 데 성공하자 마음이 놓였다. 다행히도 모두는 원하던 대학에 입학한 것에 들떠 서로에게 친절한 상태였다.

그때까지는 그럭저럭 순조로웠다. 일이 틀어지기 시작한 것은 숙소에 도착해 방을 배정받았을 때부터였다.

방문을 열자 한구석에 앉은 커다란 그림자가 보였다. 등을 곧게 편 자세로 앉아 있지만, 시큰둥한 표정 탓에 삐딱해 보이는 남자애였다. 다음 순간 가슴에 붙은 이름표를 확인한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서이한. 그 애의 이름이었다.

그 이름표를 보자마자 나는 이준의 이름을 떠올렸다. 성도 같고 이름 중 한 글자까지 겹치는 건 간단한 우연은 아닐 것 같았다. 가만히 보니 반듯하고 짙은 눈썹, 우뚝한 콧대와 턱선이 이준과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치켜올라간 눈매. 굳게 닫힌 입술. 예민하고 퉁명스러운 표정 때문에 분위기는 전혀 달랐지만, 그 역시도 귀티가 묻어나는 미남이었다.

‘약학과 서이준을 아냐고 대뜸 물으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어색하지만 자기소개를 먼저 하는 편이 나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 지나칠 정도로 그 애를 빤히 바라보고 말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동자가 스윽, 굴러와 나를 보았다.

그토록 깊은 눈은 처음이었다. 머루알같이 검고, 푸르도록 경계가 선명한 눈동자. 말없이 바라보고 있을 뿐인데, 눈동자가 쿵, 하고 나에게 낙인을 찍는 것 같았다.

서늘한 기운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나를 환영하지 않는 것은 이 아이도 마찬가지라는 걸.

적막 속에서 방문이 다시 열렸다. 왁자한 말소리와 함께 예닐곱의 아이들이 들어왔다.

“아, 넘어지겠어, 그만 좀 해.”

“이 새끼, 대낮부터 존나 껄떡거리네. 러트냐?”

“하, 씨발, 그러게. 사이클 아직 먼 줄 알았는데 당겨졌나? 좆됐네. 약도 안 가져왔는데.”

“뭐 어때, 하민이 있는데. 마침 같은 방이고….”

뜻 모를 말들 사이에 버스 앞에서 마주쳤던 남자애의 이름이 들렸다. 그 조그맣고 귀여운 아이, 하민은 다른 남자애의 품에 깊게 안긴 채로 방에 들어왔다. 친구들끼리의 스킨십이라기엔 꽤나 끈적한 느낌이었다.

하민이 방의 한쪽 구석에 앉기 무섭게 나머지 아이들은 그의 외투와 가방을 대신 정리해 주었다. 담배와 라이터를 가져다 놓는 손길이 일사불란했다.

“하, 씨발. 창문 좀 열어 봐.”

하민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두엇이 일어나 창문과 출입문을 반쯤 열었다. 쌀쌀한 바람이 들어오자 그는 춥다며 투덜거렸고 아이들은 또 군말 없이 다시 외투를 가져와 그에게 입혔다.

그들은 하민을 둘러싼 꿀벌들처럼 굴었다. 아무래도 분위기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나는 말 없이 상황을 주시했다. 그때 갑자기 처음 방 안에 있던 커다란 남자애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이한, 어디 가?”

“도저히 못 참겠어서.”

퉁명스러운 대답에 하민은 깔깔거리며 웃기 시작했다. 천사 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요사스러운 웃음소리였다.

“아하하, 진짜 웃겨. 하여간 서이한, 쓸데없이 솔직하다니까.”

또렷하고 높은 목소리가 콕콕, 귀를 찌르는 것 같았다. 그의 웃음이 벽에 금을 그어 버린 것처럼, 모두는 키득키득 웃어 대기 시작했다. 말없이 방을 나서는 이한과, 영문을 모르는 나를 제외한 모두가.

“하…. 나 담배 좀 피워도 되지?”

실컷 웃고 난 하민은 바닥에 놓인 담뱃갑을 주워들었다. 곁에 앉은 아이가 익숙한 손동작으로 그가 입에 문 담배에 불을 붙여 주었다. 하민은 길게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비로소 나를 보았다. 냉랭한 눈빛. 더 또렷해진 적의를 담아서, 그가 나를 불렀다.

“야, 너 말이야.”

“…나?”

“그래, 너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

노골적인 모욕이 나에게 던져졌다. 오늘 처음 만난 사람에게서 그런 말을 들을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하는 사이, 이제는 벽이 무너진 것처럼 모두 큰 소리로 웃어 댔다.

“하민아, 그렇게 대놓고 말하면 어떡해?”

“어차피 다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잖아. 안 그래?”

“그건 그래. 씨발, 쟤 얼굴 좀 봐. 진짜 놀랐나 본데?”

“쟨 자기한테서 무슨 냄새가 나는지도 모르나 봐. 맛이 완전히 갔나?”

빙글빙글 냉소하는 얼굴들, 속삭이는 뜻 모를 말들, 차가운 눈동자들. 나는 너무 놀라 자리를 피할 생각도 못 하고 나에게 쏟아지는 비웃음을 고스란히 받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장면이 나쁜 꿈의 한 조각 같다고 생각하면서.

단체 일정이 진행된다는 방송에 아이들이 방에서 몰려나간 후에야 나는 정신을 차렸다. 얼떨떨한 상태로 강당으로 내려갔다.

같은 방 아이들을 피해 다른 무리에 섞여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어찌 된 일인지, 모든 사람이 슬금슬금 나를 피했다. 버스에서 호의적으로 대화를 나누었던 아이들도, 선배들도 마찬가지였다.

말을 걸어 봐도 약속이라도 한 듯 못 들은 척하고, 저편에서 자기들끼리 무언가를 수군거리며 매서운 눈으로 나를 훑어보았다.

‘뭐야. 왜….’

유령 취급에 시달린 끝에 저녁을 먹을 때쯤부터는 누군가와 어울리려 노력하는 걸 포기했다. 내가 배식대에 다가가는 순간 들쥐라도 나타난 것처럼 근처에 있던 아이들이 반으로 갈라졌으니까.

이상한 일이었다. 사교성이 좋은 편은 아니지만 이렇게 빨리 모두가 내쳐지는 상황은 처음이었다.

지옥같이 길게 느껴지던 오후 일정이 끝나자, 입실 시간이 되었다. 배정받은 방 앞에 서자 가슴은 더 답답해졌다. 방문 너머에서 들려오는 커다란 웃음소리에 들어갈 엄두가 나지 않아 문고리만 노려보았다.

‘너한테서 이상한 냄새 나.’

비수 같던 말과 차가운 얼굴들을 떠올렸다. 나는 소맷자락을 당겨 코를 킁킁거렸다. 음습한 판자촌에서는 몸을 깨끗이 닦는 일도 빨래를 말리는 일도 사치였다. 퀴퀴한 티를 없애려 애를 써도 화창한 곳의 햇볕 내음은 따라갈 수 없었다.

그들은 나에게서 지하계급의 냄새를 맡았는지도 모른다. 그 형편에 왜 굳이 대학을 가려 하냐고, 수도 없이 들었던 말처럼 이곳은 정말 나와 어울리지 않는 곳일까. 명치에서부터 왈칵 울음이 밀려들던 차에 방문이 벌컥 열렸다. 나는 휘청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아….”

방 밖으로 나온 것은 서이한이었다. 나란히 맞닥뜨리니 무서울 정도로 몸집이 커 보였다. 희미한 담배 냄새와 굳은 표정도 위압적이었다. 아예 방을 떠나려는 건지, 그는 외투를 입고 짐가방을 어깨 위에 걸쳐 들고 있었다.

저 방을 빠져나오고 싶은 마음은 나도 굴뚝같았다. 무심결에 저기, 하고 그를 불렀다. 지나쳐가려던 그는 부르는 말에 멈춰서 나를 내려보았다. 또 그 눈이다. 검고 추운 늪 같은 눈.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그는 단호하게 말했다.

“너, 나한테 너무 가까이 오지 마.”

명백히 선을 긋는 듯한 그 한마디를 남기고는 짐가방을 들고 저벅저벅 멀어져갔다. 그가 나의 기댈 구석이었던 것도 아닌데, 얄팍한 절망감이 느껴졌다. 이제야말로 정말 외톨이가 되었다는 느낌이었다.

선배들은 술과 안주 상자를 들고 복도를 오갔다. 이 상황에서 술자리에 끼어 봤자 좋은 꼴을 보지 못할 것 같았다.

갈 곳을 찾아 헤매던 끝에 다행히 의무실을 발견했다. 의무실의 딱딱한 침대 위에 몸을 웅크리고 누웠다. 막막한 기분에 핸드폰을 확인하니, 이준에게서 연락이 와 있었다.

[OT는 재미있어? 난 지금 막 할아버지 댁에 도착했어.]

그가 무얼 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 한마디에 마음이 놓였다. 다만 대답할 말을 고르기 힘들었다. 재미있다고 대답할 수도 없고, 재미없다고 대답해서 괜한 신경을 쓰게 만들고 싶지도 않아서 화제를 돌렸다.

[할아버지는 괜찮으세요?]

[팔뼈에 금이 가셨는데, 큰일은 아닌 것 같아. 내일 같이 미술품 경매에 가자고 하시는 걸 보면 엄살인 것 같기도 하고.]

판자촌의 노인들은 늙은 몸으로 일하다 종종 골절상을 입었고, 다친 노인들은 대부분 누운 자리에서 다음 계절을 넘기지 못했다. 노후 대비는커녕 하루하루 끼니를 때우기도 어려운 형편에 부상을 입는다는 것은 그런 의미였다.

부유한 사람의 노년은 내가 아는 노년의 모습과는 전혀 다를 것이다. 뭐라 할 말을 찾지 못하던 차에 그가 콕 짚어 물어 왔다.

[별일 없지?]

솔직하게 말하는 대신 나는 그냥 얼버무렸다.

[네. 피곤하실 텐데, 쉬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래. 한창 놀고 있을 땐데 방해되겠다. 다시 연락할게.]

핸드폰을 내려놓으니 다시 정적뿐이었다. 밤이 너무 길 것 같다는 걱정이 들었다. 이준에게서 받은 손목시계를 만지작거리며, 언제쯤 방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내일은 어쩌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설핏 잠이 들었다.

그리고,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아무도 없네. 그냥 들어가도 되나?”

“씨발, 이런 데 콘돔이 있겠냐고.”

“혹시 모르잖아. 거기 서랍 좀 봐봐, 새꺄.”

술기운이 묻어나는 목소리들이 잠을 깨웠다. 나는 정신은 가물가물 돌아왔지만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운 상태였다.

어두운 의무실에 누군가 들어와 있었다. 인기척을 낼까 하다, 어차피 침대에 커튼이 쳐져 있어 보이지 않을 테니 그냥 가만히 있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호흡을 낮추었다. 그러나 상황은 예상 밖으로 흘러갔다.

“…이게 무슨 냄새야?”

“헐. 그러게. 뭐가 썩었나?”

“쪼다 새끼, 벌써 흥분했냐? 질질 흘리고 지랄이야.”

“장난해? 이 지독한 게 내 냄새겠냐? 씨발. 저기 누구 있는 거 아냐?”

핸드폰 플래시 불빛이 침대 커튼 너머에 어른거린다 싶더니, 그들은 곧장 커튼을 열어젖혔다.

얼굴에 정면으로 불빛이 내쏘아져 눈을 뜰 수 없었다. 헤드라이트를 정면으로 본 초식동물의 기분이었다.

“어후, 이거 얘 냄새야?”

“우리 방 앤데. 왜 여기 누워 있지?”

“뭐야, 이거? 얼굴은 예쁘게 생겼는데 냄새는 씨발이네.”

“…야, 너 얘 붙잡아 봐. 뭐 좀 확인해 보자.”

엇, 하는 사이 한 녀석에게 양팔을 잡혀 두 팔이 머리 위로 끌어 올려졌다. 한 녀석은 침대에 올라와 나의 티셔츠를 들쳤다. 한순간에 포박당해 남의 몸에 깔린 꼴이 되었다.

“읏…. 뭐 하는 짓이야!”

위에 올라탄 녀석의 무게, 손가락이 꿈틀꿈틀 피부에 닿는 감촉, 코를 킁킁거리는 소리가 섬뜩했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건지 머리로 이해하기 전에 소름이 먼저 올라왔다.

어깨를 힘껏 버둥거리자 내 몸 위에 올라탄 녀석이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렸다. 플래시 불빛이 침입자의 얼굴을 아래에서 위로 비추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손끝 발끝까지의 모든 근육이 얼어붙었다.

“야, 있어, 있어! 옆 방 애한테 빌렸으니까 빨리 와!”

다행히 그때, 복도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두 녀석은 아쉬운 듯 혀를 차며 의무실 밖으로 나갔다. 말소리와 발소리가 점점 멀어져갔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굳어 버린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문을 잠그고 침대로 돌아와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본 두 개의 눈동자에는 기묘한 빛이 형형했다. 그 안에는 날것의 욕망이 성성하게 날름거리고 있었다. 잘못 본 거라고, 불빛 탓이었을 거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나를 덮쳐 오던 표정과 눈빛은 사람의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그래. 그들은 마치, 굶주린 짐승 같았다.

* * *

뜬눈으로 밤을 지새고, 새벽녘의 어스름을 틈타 방으로 갔다. 모두가 곯아떨어진 것을 보고 조심조심 몸을 씻었다. 문가에 앉아 웅크린 자세로 아침까지 버텼다.

피로가 몰려와야 할 상황이지만, 긴장감에 의식은 칼날처럼 더 날카로워졌다. 팽팽한 머릿속으로 의무실의 침대 위에 올라탔던 녀석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두워서 자세히 보지 못했지만, 낮에 배정된 방에서 보았던 녀석들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긴 새벽 끝에 창밖이 밝아 오고, 조식 시간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들렸다. 잠들어 있던 아이들은 하나둘 눈을 떴다. 예상대로 그들 사이에서 침입자의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어제 하민의 담배에 불을 붙여 주던 녀석이다.

가만히 있어도 미움받는 중이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미움받는 입장이니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겠다는 생각도 있었다. 곧장 방을 가로질러 그에게 다가갔다. 하품을 하던 녀석은 내가 가까워지자 인상부터 찡그렸다.

“어제 그거, 너 맞지?”

“뭐?”

“맞잖아. 대체 뭘 하려고 그랬던 건데?”

그런 취급을 자주 받은 탓에 내가 예민한 것도 있겠지만, 나는 그들에게서 음흉한 느낌을 받았다. 그때 누가 의무실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른다.

아이들은 조금씩 웅성거렸다. 쟤 왜 저래? 수군대는 소리도 들렸다. 최대한 단호한 목소리를 내 보았지만, 그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피식거렸다.

“난 또 뭐라고. 장난 좀 친 거 가지고 왜 지랄이야? 아침부터 재수 없게. 넌 냄새 관리나 똑바로 해.”

“나한테 무슨 냄새가 난다는 거야, 어제부터?”

그 질문에 또다시 방의 모두가 웃기 시작했다. 호기는 금세 쭈그러들고, 결국 주눅이 들어 버렸다.

“씨발, 말 같지도 않은 소리 할 거면 찌그러져 있으라고. 네가 오메가도 아니고, 남자끼리 그런 거로 유난 떨기는.”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오메가’라는 단어가 사립학교 아이들끼리 쓰는 은어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게 뭐냐고 묻고 싶었지만, 그러다 더 큰 비웃음을 사게 될 것 같아 망설이던 찰나. 무언가가 날아와 뺨에 부딪쳤다.

“입 좀 다물어. 시끄러워서 잠도 못 자겠잖아!”

이불에서 몸을 일으킨 하민이 나의 얼굴을 향해 담뱃갑을 던졌다. 가벼운 물건이라 아프지는 않았지만, 모멸감 탓인지 뺨이 불에 데인 듯 화끈거렸다. 더 커진 웃음소리가 쿡쿡 나를 찔러 댔다.

그는 거리낌 없이 나를 노려보았다. 잠에서 막 깨어난 탓인지, 그는 어제보다도 더 요염해 보였다. 물기를 머금은 꽃잎 같은 얼굴이 짜증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표정이 나에게 똑똑하게 말해 주었다. 여긴 네가 있을 자리가 아니라고.

나는 떠밀리듯 가방을 챙겼다. 방을 박차고 나왔지만 갈 곳이 없었다. 어제 듣기에 일찍 집에 가려는 몇몇은 짝을 지어 택시를 타고 터미널로 간다고 했고, 부모님이 데리러 온다는 아이도 있었지만 나는 그럴 수 없다. 차비도 없고, 지금쯤 병원에서 투석을 하고 있을 어머니가 나를 데리러 올 리도 없으니까.

‘…어차피 하루만 버티면 돼.’

결국 나는 찜찜한 기억이 남은 어제의 의무실로 향했다. 담요를 뒤집어쓰고 딱딱한 침대 위에 틀어박혀 그 날을 넘겼다. 추위와 허기보다도 복도를 오가는 아이들의 웃음소리가 힘들었다. 인생은 공평하지 않다는, 이미 뼈저리게 알고 있던 사실이 다시 나를 괴롭혔다.

우울을 무시하기 위해, 나는 습관처럼 앞으로의 일을 생각했다. 오늘 밤만 지나면 내일이 올 거고, 준비된 버스에 타기만 하면 OT는 끝나니까 다 괜찮을 거라고.

입학 전까지 빽빽하게 잡아놓은 아르바이트를 하다 보면 이런 배부른 우울감쯤은 잊힐 거고, 학기가 시작되면 넓은 캠퍼스에 뿔뿔이 흩어져 강의를 들을 테니 지금보다 상황이 나아질 거라고.

그 순간의 고달픔이 더 큰 고난의 예고편이라는 걸, 그때의 나는 조금도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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