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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그리고 기적에 관하여 (27/27)
  • 27. 그리고 기적에 관하여

    다가오는 명절에 이현은 석희재를 데리고 본가에 들렀다.

    집에 내려가는 건 원치 않던 일이다. 그러나 회사를 그만두었다는 사실을 부모님이 알고 계셔 댈 핑계도 없었다. 석희재를 달고 가는 건 더더욱 예상치 못했던 일이다. 명절 때는 집에 내려가야 한다고 말하니, 잠시 말이 없던 석희재가 은근히 질문을 쏟아 냈다. 가면 뭘 하는지, 시골집은 어디에 있는지, 명절 당일 외에는 뭘 하는 건지 등등. 이현은 그것을 떨어져 있어야 하는 투정으로 받아들이고 적당히 달래 주려고만 했다.

    한참 후에야 석희재가 직접적으로 ‘나도 가면 안 되나’ 하는 말을 흘렸을 때, 그래서 소스라치게 놀랐다.

    “진심이야?”

    이현은 못 믿어 재차 물었다. 일부러 낯선 이들 가득한 장소에 가서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기를 자청하는 석희재가 이상해서. 평소에도 연예인 많이 보냐며 물어 대는 제 사촌이나 조카들이 석희재를 얼마나 괴롭힐는지도 빤히 그려졌다. 그러나 섬세한 석희재는 이현이 탐탁지 않게 여긴다고 생각하고는 자신감을 잃고 순순히 물러났다.

    “하긴, 내가 끼는 것도 이상하지?”

    “아니, 그게….”

    “그냥 궁금했어. 나는 친척도 별로 없고… 명절에 가족이 모인 적이 없어서.”

    “…어머니, 아버지는?”

    “아빠는 해외에. 엄마는 스케줄.”

    “…….”

    “괜찮아. 나는 신경 쓰지 마.”

    그 태도를 보며 이현은 묘한 충격을 받았다. 과연 저 녀석은 짝사랑이 체질이구나, 하면서.

    마음이 이어진 후에도 그는 가끔 이렇게 소극적으로 굴며 이현의 주위를 맴돌았다. 마치 이현이 그어 놓은 선을 넘고 싶지 않다는 듯.

    물론 이현은 선을 그은 적 없다. 그저 제 본위로 생각했을 뿐이다. 명절에 빤한 얼굴들과 마주 보고 신변잡기를 해 대는 것은 번거롭고 귀찮은 일이라고.

    석희재가 그렇게 구는 건 하루 이틀이 아니라 별로 새삼스럽지 않았지만, 이현은 이제 그 행동이 눈에 빤히 읽히는 스스로의 시야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군말 없이 석희재를 데리고 가기로 결정했다. 석희재는 크게 표 내지 않았지만 속으로 기뻐하는 티가 났고, 당일이 점점 다가오자 크게 긴장했다. 이현의 부모님을 만나는 날을 기다리며 칼같이 몸 관리, 피부 관리를 하는 건 물론이고 내려갈 때 입을 옷을 옷장에 차곡차곡 채웠다. 거울 앞에서 단추를 채우며 이현에게 어떠냐고 꼬박꼬박 묻기도 했다. 연예인이라 협찬받을 일이 많은 데다가 자기에게 잘 어울리는 옷도 어찌나 이렇게 쏙쏙 골라오는지. 최근 반백수로 연극 제작에 몰두하며 미용실에 가는 것도 잊고 살던 이현과는 무척 상반된 삶이었다.

    그 꼴을 보고 이현의 마음은 조금 뾰족해졌다. 이사라 배우 앞에서 긴장하던 저를 보던 석희재의 마음이 이런 건가 간접 체험을 했다.

    “너, 내 앞에서 그렇게 예쁘게 좀 해 봐라.”

    “음?”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시비 걸자고 한 말이었지만 석희재는 도리어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질투해? 기쁘다.”

    뭔 말을 못 하겠네. 이현은 시비를 걸으려던 초심도 잊고 붉어진 얼굴을 돌렸다.

    “됐어… 안 해도 예뻐.”

    솔직한 표현에 감격한 석희재는 그대로 이현의 뺨을 잡아 올려 쪽쪽 거리며 마음껏 키스했다.

    연휴 첫날, 차 트렁크에 한우며 고급 수입 과일, 한약, 기름, 꿀 따위를 채운 둘은 사이좋게 번갈아 가며 운전하면서 이현의 고향 집으로 향했다.

    그렇게 도착한 지방 도시의 오래된 아파트 단지는 석희재의 상상과는 퍽 달랐다. 5층 높이까지 크게 자란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여 제법 한적하고 운치가 있었다. 석희재는 그 장소를 천천히 둘러보며 여기서 어린 시절을 보냈을 이현을 상상했다. 마침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 무리가 지나갔다. 석희재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오래 보았다.

    차에서 짐을 내린 두 사람은 복도식 아파트로 걸어 들어갔다. 낡은 복도는 사람이 많이 드나들어 반질반질 윤이 났고 햇빛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었다. 엘리베이터에서, 석희재는 이현이 여기에 올라타기를 기다려 주었다던 그의 첫사랑을 떠올렸다.

    이현은 석희재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것도 짐작하지 못한 채로, 열림 버튼을 누르는 석희재에게 고맙다는 말을 건넸다. 조용히 문이 닫히고 석희재는 이현의 옆얼굴을 보았다. 시선을 알아챈 이현은 영문도 모르고 웃으며 제 애인을 올려다보았다.

    이현의 부모님을 만난 석희재는 낯선 얼굴들에서 제가 사랑하는 사람의 얼굴을 발견했다. 그것조차 감격적이어서, 석희재는 그때 느낀 기분을 어떤 말로 표현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덕분에 부모님의 얼굴에서 쉽게 눈을 떼지 못한 채 악수를 하고, 사 온 선물을 떨리는 손으로 건네드렸다.

    21평 아파트는 사람 몇이 둘러앉으니 꽉 찬 느낌이 들어 좋았다. – 이현은 여기서 살면서 한 번도 제 방을 가져 본 적 없었다며 불평했지만 말이다. – 군데군데 놓인 가족사진을 보며 석희재는 그것들을 자세히 살피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이현의 친한 친구 명목으로 왔으니 도가 넘는 행동은 자제해야 했다.

    밤에는 근처에 사는 이현의 큰형 가족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이현은 ‘아마도 형은 알 거라고’ 석희재에게 넌지시 말을 건넸다. 덕분에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헤어지는 길, 큰형은 가게 뒤에서 이현을 붙잡고 몰래 몇 마디를 건넸다.

    무어라 말하는지 알 수가 없어서….

    멀찍이서 형제의 모습을 보던 석희재는 어쩔 수 없이 잘게 떨었다. 마치 심판을 받는 것처럼.

    그리고 큰형은 떠나가기 전에 이현의 어깨를 두어 번 건드리고는….

    석희재가 있는 쪽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막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굵은 눈물을 떨구었다던, 무뚝뚝한 중년 남자의 정중한 인사였다.

    “여기서 뭐 해?”

    형을 보내고 가볍게 달려온 이현의 앞에서 석희재는 재빨리 눈을 깜빡였다. 지금은 눈물을 보일 때가 아니었다. 가슴이 따뜻한 기운으로 꽉 차오르도록 안도했고, 뭉클했고, 지금 느낀 감정을 이현에게 전이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석희재를 이현을 꼭 끌어안았다.

    “평생 행복하게 해 줄래.”

    “뭐야.”

    이현은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우리 형이랑 똑같은 소리 하네.”

    뜻밖의 말에 석희재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현을 주시했다. ‘상대가 다르지만’ 이현은 짧게 덧붙였다.

    “형이 나보고 한눈팔지 말고, 막살지 말고, 너 상처 주지 말라던데.”

    “…….”

    “너 평생 행복하게 해 주래.”

    눈을 빠르게 깜빡였으나, 이번에는 눈가에 고이는 따뜻한 물기를 막을 수 없었다. 가까스로 눈물을 망막 위로 가두는 데에 성공한 석희재는 입술을 꾹 물었다. 그의 뺨을 어루만지며 이현이 말했다.

    “날 뭘로 보는 거야. 형은.”

    구박받고 투덜거리는 이현이 막내라는 실감이 나서 석희재는 푸시시 웃었다.

    둘은 그 뒤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면서 밤길을 산책했다. 이현이 어렸을 때 등하교 하던 길을 함께 걸었다. 크게 자란 나무뿌리가 보도블록을 뒤틀어 댄 길을. 나무들은 천장처럼 너른 가지를 뻗고 있었다. 이현은 석희재에게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팔이 부러진 장소를 알려 주었다. 자주 가던 분식집이 아직도 있다는 사실에 반가워했다. 어른들 몰래 첫 담배를 물었던 곳을 지나치기도 했다.

    담배 얘기에 석희재가 물었다.

    “형 불량 학생이었어?”

    “아니거든? 공부는 못해도 하지 말란 건 안 했는데.”

    “담배는 피웠잖아.”

    “그거는… 다 하는 거고.”

    “난 안 했어.”

    “그래 너 모범생이다!”

    이현은 네가 이겼다는 듯이 대꾸했다. 석희재는 나직하게 웃었다.

    풀벌레 소리가 들렸다. 어둠 속에서 보폭을 맞추어 걷던 두 사람의 손등이 자꾸만 스쳤다. 석희재는 이현의 손을 찾아 부드럽게 맞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잡은 손 사이로 촉촉하게 땀이 배었지만 둘 중 아무도 그 손을 놓지 않았다.

    석희재는 문득 꿈 하나를 떠올렸다.

    체육복을 자주 잊고, 험하게 놀아 자주 다치고, 대뜸 ‘너 엄청 잘생겼다’라며 말을 걸어왔을 이현이 눈앞에 선히 그려졌다. 세상에 존재하는 일이 아닌데도 그것은 마치 역사처럼 석희재의 뇌에 잔류하고 있었다.

    주홍빛 가로등 불빛이 쏟아지는 놀이터에서 둘은 발을 멈추었다. 그리고 딱 두 개 있는 그네에 나란히 앉았다. 그네가 무척 낮아서 둘 다 다리를 길게 뻗어야 했다.

    “만약에 우리가 같이 학교를 다녔잖아, 그러면….”

    석희재의 말에 이현이 즉답했다.

    “진짜 안 친했겠다.”

    “진짜 그렇게 생각해?”

    “네가 나 싫어했겠지.”

    “왜?”

    “불량 학생이라고.”

    이현의 말에서 자포자기가 묻어났다. 석희재는 아까보다 조금 더 유쾌하게 웃었다.

    “왕자님이 친구 해 주면 나야 좋지. 근데 안 그랬을 것 같아.”

    이현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그네를 흔들면서 석희재는 선선히 수긍했다.

    석희재 역시 이현을 쉽게 오해했을 것이다. 십 대의 석희재는 수업 중에 태평히 자는 녀석들을 쉽게 납득하지 못했었다. 아마 퍼져 자는 이현을 보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건 비단 십 대 때의 일만은 아니었다. 대학가 빵집에서 아르바이트하던 남자가, 아무리 귀엽고 자꾸만 마음이 가도 저와 같은 대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면 그 순간에는 저 역시 놀랐을지 모른다. 한창 이태원에서 일할 때의 이현은 더더욱 그렇다. 그는 밤에 일하고 낮에 자며 아무나와 쉽게 잤다. 그건 석희재가 납득할 수 없는 삶이었다.

    게다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휘둘리고, 상처받고, 이용당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질질 끌려가는 사람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이 그런 짝사랑을 해 보기 전에는,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감정을 겪어 보기 전에는 이현이 바보 같다고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모든 과거를 품은 남자는 장래 제 옆에 있게 된다.

    그 사실 자체가 기적이었다.

    ‘사랑하는 방식’ 말고는 닮은 점이 아무것도 없는 전혀 다른 두 사람의 인생. 거기에 기적처럼 교집합이 생겼을 때에 석희재는 이현을 발견했다. 그건 정말 딱 알맞은 때였다. 그를 함부로 오해하거나 평가하기 전에 사랑에 빠져서 정말로 다행이었다.

    그리고 그의 아름다운 변화를 지켜볼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석희재는 어떤 충동에 휩싸여 그네에 앉은 채로 이현의 그넷줄을 당겼다. 훅 딸려온 이현이 이쪽을 바라보는 순간 입을 맞추었다. 말랑한 입술의 촉감이 닿고, 그네의 쇠줄 냄새가 가까이서 맡아졌다. 짧은 키스 끝에 다시 그네가 흔들리며 떨어졌다.

    석희재는 즉시 사과했다.

    “미안해.”

    “뭐가?”

    이현이 얼떨떨한 얼굴로 물었다.

    “누가 볼 수도 있었잖아.”

    “상관없어.”

    석희재는 가만히 눈을 들어 쉽게 대답한 이현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이현은 어느 한 점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을 알아채고 석희재 역시 고개를 돌렸지만 밤눈이 어두운 그에게 보이는 것은 없었다. 석희재는 이현이 무엇을 보는 것인지 궁금해하며 다시 그의 옆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나도 사실 내 마음을 잘 모르겠다. 들키기를 바라고 있는지도 모르고.”

    “…….”

    “그런 각오 없으면 너 데려오지도 않았고….”

    그렇게 말한 이현은 그네에서 벌떡 일어났다. 석희재는 제게 다가오는 이현을 올려다보았다.

    이현은 그대로 선 채로 허리를 숙여 석희재의 입술에 다시 입을 맞추었다. 한 치의 주저 없는 행동이었다. 가로등 불빛을 등진 이현의 표정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무척 진지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석희재의 뺨과 목을 감싼 이현의 손에서 철 냄새가 났다. 그마저도 달콤했다. 석희재는 순순히 눈을 감았다.

    “나도 미안.”

    입술이 떨어지자마자 이현이 사과했다.

    “너 연예인인 거 알면서….”

    석희재는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무 키스하고 싶었어.”

    “…….”

    “누가 봐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어. 무책임하지?”

    저를 내려다보는 이현의 눈동자가 맑았다.

    “아니, 기쁘다.”

    석희재는 웃어 보였다.

    마침 석희재의 시야 안에 이현의 등 뒤 너머, 가로등 바깥 어둠으로 사라지는 한 인영이 들어왔다. 석희재는 이현이 보고 있던 어둠 속에 누가 있었는지를 비로소 알아챘다.

    꿈의 방해자. 그가 누구인지 추측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연예인 석희재의 직업을 끔찍이 존중하는 이현이 갑자기 제게 키스를 한 이유를, 석희재는 이해할 수 있었다. 이현은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방해받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뭉클한 감격이 밀려왔다.

    야구부 친구의 키스를 첫사랑에게 들킬까 봐 두려워하며 밀쳐 냈던 소년은 어느새 이토록 자랐다.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을 거야.’

    한때 석희재의 꿈속 예언처럼, 아무도 그들을 방해하지 않았다.

    ‘나를 사랑하게 될 거야.’

    석희재는 제 꿈이 현실이 되는 순간을 목격했다.

    말에는 힘이 있다. 석희재는 빙긋이 웃었다.

    “사랑해, 희재야.”

    이현은 끝끝내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한때의 첫사랑을 냉정히 퇴장시켰다.

    대신 이현은 석희재의 이마에 다시 한번 다정한 키스를 내렸다. 자신이 쟁취한 진짜 사랑을 존중하는 키스를.

    ***

    ‘사람의 운명은 생활 반경 2km에 있다.’

    스물둘이었을 것이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 이현은 운명이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구나, 그렇게 생각했다.

    결혼한 후 함께 수십 년을 무난히 살아오신 부모님은 동네에서 함께 자란 소꿉친구였다. 큰형 역시 고등학교 동창과 결혼했다. 운명은 제 언저리에 있다. 자신이 옆집 형처럼 쓰레기 같은 남자에게 사랑에 빠진 것도, 따지고 보면 그리 대단한 이유가 있어서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게 무척 허탈했다. 그 모든 게 한계 안에서 생긴 일이라고 생각하면 운명이라는 것이 하찮게 보였다. 동시에 사랑도 대단치 않은 것처럼 느껴졌다.

    결국 모두가 자기 한계 안에서 일어나는 빤한 일들을 기적이라 합리화하고 사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별것 아닌 제 인생을 납득해야만 하니까.

    우물 안 개구리가 따로 없다.

    회의감이 이현을 사로잡았다.

    그것을 깨달았을 때 이현은 혼자 술을 마시고 울었다. 고작 첫사랑으로 그런 남자를 고른 제 자신이 보잘것없다는 생각이 들어서. 제 운명은 딱 제 수준인 것만 같아서.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다 아는데도 그가 잊히지 않는 것이 갑갑해서.

    혼자인 밤들은 지독하게 길었다. 자신이 어떻게 몸을 굴리던 첫사랑에게는 아무런 타격을 주지 못한다는 것이 분하고 괴로웠다. 끝으로 치달을수록 함께 있는 건 죽도록 괴로웠지만 혼자라서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것보다 나은 것 같았다.

    멀리서 비상 상황을 알리는 등이 깜빡였다. 얼마 후 닥칠 실연을 알리는 경고 등이었다.

    “뭘 봐.”

    건물의 턱에 앉아 있던 이현은, 저를 빤히 바라보는 누군가를 향해 툭 내뱉었다. 인적이 드문 인도에는 가로등 불빛도 닿지 않았다. 다만 가끔씩 눈물에 젖은 이현의 축축한 뺨이 밤거리를 스치는 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에 반짝일 뿐이었다. 군에서 제대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짧은 머리 때문에 새하얀 목덜미가 춥게 드러났다.

    이현은 잔뜩 날을 세우고 상대를 노려보았다.

    “뭘 보냐고.”

    “…….”

    “안 꺼져?”

    저를 빤히 보는 어린애 앞에서 젖은 눈가를 닦아 내지 않는 것이 이현의 남은 자존심이었다. 눈을 매섭게 뜨고 위협을 해도 고개를 돌리지 않는 교복 입은 녀석이 짜증이 나서, 이현은 입술을 씹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제는 별 조그만 것까지 자신을 우습게 보는 것 같아 기분이 더러웠다.

    “길에서 소주 마셔도 돼요?”

    심지어 말을 건다. 이현은 무시했다.

    녀석이 한 번 더 캐물었다.

    “불법 아니에요?”

    “몰라, 씨발. 불법 같으면 경찰 불러.”

    그렇게 윽박지르고는 이현은 다시 고개를 돌렸다. 보는 사람이 있으니 눈물도 멎어 버렸다. 긴 소매로 턱을 괴는 척하면서 이현은 아직 젖어 있는 눈가를 닦았다.

    “집이 어디세요?”

    교복 소년이 가까이 다가왔다.

    “얼른 들어가세요. 밖에서 자면 추워요.”

    “노숙자 아니거든?”

    이현은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반쯤 남은 소주병도 그 자리에 두고.

    오지랖도 넓은 놈이었다.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 이현은 에이, 하고 짜증을 내며 뒤돌았다.

    그리고 우습게도 이현이 일어나 등을 보이자마자 녀석의 관심은 멎었다. 따라오지도 않았고 더는 말을 걸지도 않았다. 그저 정말로 길에서 사람이 얼어 죽을까 봐 걱정한 모양이다.

    이현은 터벅터벅 걸었다. 찬바람에 드러난 맨발목이 아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교복 입은 녀석이 자리에 남은 소주병을 쳐다보고 있었다. 직접 주워서 버릴지 망설이는 꼴이 빤히 보였다. 미성년자라 술병에 손을 대는 게 꺼려지는 모양이었다. 소주병을 무슨 사제 폭탄이라도 다루는 양 굴고 있었다.

    결국 이현은 다시 길을 되돌아갔다. 길에 쓰레기를 무단 투기하는 것도 마음에 걸려서. 남자에게 까이고, 길거리에 주저앉아 소주나 까는 인생이었지만 어린애에게 저가 그렇게 엉망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이현은 녀석이 보는 앞에서 바닥에 놓인 소주병을 낚아채고는 하수구에 남은 술을 쏟아 버렸다.

    “이건 내가 가지고 간다. 됐지?”

    “…….”

    “너 이제 가.”

    이현은 매몰차게 말했다.

    남자애는 중학생 정도로 보였다. 교복 위에 푹신해 보이는 값비싼 오리털 점퍼를 입고 있었고, 어깨에는 악기가 들어있는 가방을 멨다.

    저를 빤히 올려다보는 눈에 이현은 몇 마디를 더 주절댔다.

    “술 취한 사람한테 막 말 걸지 말고.”

    “…….”

    “조그만 게 사람 무서운지도 모르고.”

    “…….”

    “여기가 어딘지 알고.”

    이현의 말은 점차 투덜거림이 되었다. 서울에서 산 지 벌써 3년째라 이제는 그도 제법 서울 지리를 알았다. 여기는 북창동, 룸살롱과 밤 영업이 횡행하는 곳이다. 물론 이현은 그런 가게가 어떤 간판을 달고 있는지, 아니면 간판이 없는지, 어떻게 출입하는지도 알지 못하지만 교복 입은 어린애가 나다닐 곳이 아니라는 것만은 알았다.

    “학교가 근처인데요.”

    “누가 물어봤어?”

    이현은 버럭 화를 냈다. 그런데도 남자애는 겁먹는 기색이 없었다. 까만 눈으로 이현을 계속 뚫어져라 바라보았을 뿐이다. 주의 깊게 관찰하듯이.

    그러더니 한참 후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갈게요.”

    가던가 말던가. 이현은 담배를 꺼냈다.

    “이제 안 우시니까.”

    “뭐….”

    입에 간신히 걸렸던 담배가 떨어져 이현은 파드득 놀랐다. 떨어지는 담배를 잡기 위해 가슴, 배를 차례로 움켜쥐었지만 결국 담배는 발치에 떨어지고 말았다. 이현이 수선을 피우는 동안 악기를 멘 남자애는 그대로 어둠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참나….”

    애초부터 그렇게 빤히 본 이유는 노숙자 같아서, 길에서 술을 마셔서가 아니라 울고 있어서였나.

    밤눈도 좋네. 우는 건 어떻게 알았을까.

    이렇게 어두운데….

    아닌가, 내가 너무 눈에 띄었나.

    이현은 머쓱하게 생각하면서, 새것인 채로 버려진 장초를 아쉽게 발끝으로 굴려 보았다.

    교복 소년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아도 이제는 아무도 없었다.

    후에 이현은 그 잘생긴 남자애가 했던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됐다. 건너편 동네인 정동에 예술 중학교가 있었던 것이다.

    대로를 두고 동네의 분위기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크게 바뀌었다. 노란 은행나무가 길 전체를 물들이는 고즈넉한 길에는 성당과, 붉은 벽돌로 지어진 아파트와, 미술관과, 궁의 옛터 같은 것들이 있었다.

    그걸 보면서 이현은 운명도 거기서 거기일 것이라는 자신의 회의감을 조금 수정했다. 조그만 구역 안에 이토록 다채로운 모습이 있다면 다양한 운명과 교집합을 이룰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

    운명은 반경 2km 이내에 있다.

    얼마 뒤 이현은 첫사랑으로부터 완전히 차였다. 충격 속에서 교복 입은 소년과의 만남은 까맣게 잊혀졌다. 그는 그 뒤로도 남자들과 쉽게 잤다. 사소한 깨달음은 그의 인생을 뒤흔들지 못했다. 일탈은 어느새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이현은 ‘운명은 반경 2km 이내에 있다’라는 말은 즉, 그만큼 사람이 쉽게 바뀌지는 않는다는 소리라고 해석했다. 사는 방식, 환경, 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기적을 만날 일도 없다.

    그래도… 이렇게 많은 사람을 만나다 보면.

    혹시나 자신과 전혀 다른, 운명의 상대가 제 앞에 나타날지도 모른다. 물론 그런 희망이 마음속에 잠자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비웃음이나 살 것을 안다. 그래서 이현은 잘 숨겼다. 마음이 가는 남자가 나타나도 혹시 당신이 나의 백마 탄 왕자님이냐며 섣불리 묻지 않고.

    너무나 잘 숨겨서 어느샌가 저 자신도 잊을 정도로.

    ‘많이 기다렸지.’

    그리고 새까만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가볍게 제 앞에 달려와서 선 남자를 보았을 때, 이현은 무척 놀랐다. 제 생활 반경 2km 안에 이런 남자도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어서.

    ‘자리 옮기자.’

    그렇게 말하며 제 팔을 끌어당겨 횡단보도를 다급히 건너던 석희재.

    마침 그날의 그 길 앞에서 첫 만남을 회상하던 이현은 저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당겨 미소 지었다.

    자신이 그날 잘 남자가 쓰레기였을 확률.

    그 쓰레기들의 대화를 석희재가 들었을 확률.

    석희재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자신을 먼저 찾아냈을 확률….

    기적 말고는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더해서, 운명은 반경 2km 안에 있다던 말의 진실을 이제야 알겠다.

    그건 별 볼 일 없는 연을 운명으로 치환하는 합리화 따위가 아니다.

    반경 2km라는 확률 자체가 기적이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은 지구에 태어날 확률.

    그와 동시대에 태어나 살아가고 있을 확률.

    70억 명 인구 중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 줄 확률.

    그렇게 단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게 될 확률.

    덧붙여 이현에게는 이중 가장 마지막, 두 사람이 서로를 마주 보게 될 확률이 가장 기적 같은 일처럼 여겨졌다. 혹시나 나이를 들킬까 신변을 완전히 숨기고 더해서 감정까지 감쪽같이 숨겼던 석희재와, 첫사랑의 그늘에 휩싸여 회의감에만 빠져 있던 자신. 그 두 사람이 서로의 실체를 알고, 마주 보고, 그 모습까지 사랑하게 된 과정이….

    기적이 아니라면 달리 무슨 말로.

    “많이 기다렸지.”

    귓가를 울리는 나직한 목소리에 이현은 고개를 돌렸다.

    석희재가 왔다. 횡단보도의 푸른 신호와 멀리 빛나는 간판 불빛, 금빛 루미나리에의 현란한 광원을 등지며.

    새까만 머리카락이 가볍게 바람에 흩날리는 모습이 전과 다름없었다. 아름다운 밤거리보다도 또렷하고 인상적인 얼굴을 보면서 이현은 생각했다. 아마 자신은 석희재를 본 첫날, 첫눈에 빠져 버린 게 맞다고.

    “왜 뛰어왔어.”

    “저기서 골목 꺾는데, 형이 보였어. 보이는데 어떻게 안 뛰어?”

    내용만 보면 능청스러운 소리를 무척 진지하게 말하는 건 석희재의 특기다.

    그 때문에 이현은 소리 내어 웃었다.

    저 역시 처음 만나던 때와 다름없이 그를 보면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가자.”

    횡단보도의 신호등이 바뀌었다. 눈발에 젖어 물든 도로 위를 점점이 비춘다. 석희재는 손을 뻗어 이현의 팔꿈치를 가볍게 잡아 이끌었다.

    푸른 잎을 떨군 나무들은 대신 환한 불빛 전구의 옷을 입었다. 시간이 흐르고, 다시 겨울이 오고, 두 사람은 여전히 처음 만났던 그 장소에서 다시 만난다. 인생을 장식하는 많은 아무날들이 생일이거나 기념일인 것처럼 시간을 보냈다. 거리 위로 함께 걷는 두 사람의 등이 다정했다. 빛무리 속으로 멀어지는 대화 소리가 도란도란 거리에 남았다.

    <끝>

    후일담

    석희재 첫 주연 연극의 티켓 오픈 이십 분 전.

    스트링컴퍼니의 사무실에서 이현과 신아름은 마지막 보도 자료를 점검하고 있었다.

    “진짜로 프로필 사진 하나만 넣어요?”

    “응. ‘주연 석희재의 프로필 사진이 공개됐다’라고만 나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얼마 전 신아름은 전 직장이던 라인컴퍼니에서 퇴사하여 이현의 회사로 이직했다. 현재 직원은 이현과 신아름, 단 두 명. 대표가 피디 겸 소극장 오퍼를 겸하고 한 명뿐인 직원이 홍보 마케팅과 티켓을 함께 맡는다. 말도 안 되게 초라한 시작이었지만 신아름은 이현을 무한히 신뢰했다. 최초에는 단발성 프로젝트라고 했던 것이 어엿한 회사로 탈바꿈한 이유가 바로 신아름의 합류 때문이었기에.

    이현은 멀쩡한 직장을 박차고 나온 과거 동료 직원을 단기 계약직이나 아르바이트생으로 쓰는 것에 상당한 죄책감을 가졌다. 덕분에 사업자 등록부터 사무실 임대까지 하게 되어 나가는 돈도 많아지고 일도 커졌지만, 이현은 신아름의 앞에서는 불안감을 티 내지 않았다. 대신 이번 공연이 잘 되면 얼른 직원을 충원하고 회계팀 직원을 뽑아서 회사 꼴을 갖추겠다고 약속해 주었다.

    둘의 전 직장이던 라인컴퍼니나 지금의 스트링컴퍼니나 모두 같은 대학로이긴 해도 사무실의 풍경은 사뭇 달랐다. 번듯한 건물의 한 층을 전부 다 쓰던 라인컴퍼니와 다르게 이들의 새 사무실은 대학로의 작은 빌딩, 꼭대기 층의 임대 매물을 다시 반으로 쪼갠 곳이었다.

    책상이 고작 3개 들어가는 이 협소한 공간은 무척 휑했다. 손님맞이 겸 미팅을 위한 작은 소파 테이블 세트, 그리고 업무를 위한 널찍한 책상 하나. 그나마 있는 가구도 전부 다른 공연장에서 버린 폐가구를 이현이 직접 주워 온 것이었다.

    이현은 주워온 가구를 쓰게 하는 걸 미안해했지만 반대로 신아름은 이현이 생활비는 있는 건지 싶어 걱정스럽기만 하다.

    “그럼 보도 자료 릴리즈 하면서 티켓 오픈 후에 풀어 달라고 요청할게요.”

    “응.”

    모니터에는 석희재의 프로필 사진이 띄워져 있었다. 이현은 마지막으로 자료 내용을 눈으로 꼼꼼하게 훑었다. 신아름은 의자에 앉은 채, 서서 몸을 수그린 이현을 살짝 올려다보았다. 일하는 이현의 눈에는 빈틈이 없었지만 그의 외양은 지난 몇 달 사이 많이 바뀌었다.

    첫째로, 이현은 더 이상 정장과 구두를 입지 않는다. 스태프용 후드티 – 그조차도 수년 전 다른 공연에서 엠디로 팔다 남은 것 – 에 청바지 차림으로 출근하곤 했다. 하나뿐인 직원에게도 자유롭게 입고 다니라고 하여 신아름 역시 요즘에는 기자 미팅이 있는 날만 아니면 편한 차림으로 일하고 있었다.

    둘째로, 머리가 많이 길어졌다. 산뜻한 길이의 머리가 어느 순간 광대와 뺨보다 더 길어지더니 이제는 묶일 정도가 됐다. 평소에는 머리를 넘겨 모자를 뒤집어쓰고 다니던 그는, 신아름이 묶는 법을 가르쳐 준 이후에는 묶고 다닐 때가 많아졌다.

    ‘머리 왜 안 자르세요?’

    일전에 한 번 직접 물어본 적도 있었다.

    ‘아, 안 가 버릇하니까 귀찮아서… 보기 싫지?’

    이현은 멋쩍게 답하며 머리카락을 손으로 슥슥 쓸어넘겼다. 신아름은 고개를 저었다. 그저 원판이 되는 얼굴이면 뭐든 괜찮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다.

    ‘괜찮아요. 나쁘지는 않아요. 근데 일부러 기르시는 거예요?’

    ‘그건 아니고….’

    좋아하더라고.

    얼버무리며 답하는 이현의 말을 들은 신아름은 잠깐 의문을 가졌다. 누가 좋아하는 거지? 하며.

    그러다 곧 잊어버렸다. 중요한 일도 아니었기에.

    아무튼 겉모습은 대학생만큼이나 무척 캐주얼해진 이현은 한 회사의 대표라기보다 신인 배우처럼 보였다. 낮에는 알바로 연명하고 밤에는 연극에 출연하는, 가난하고 열정 있는 신인 배우 말이다.

    “좋아, 이대로 보내자.”

    “네, 저 그런데….”

    신아름이 말을 흐리자 모니터에 박혀 있던 이현의 눈이 신아름에게로 향했다.

    “응?”

    “사진을 티켓 오픈 후에 푸는 게…. 진짜 맞는 걸까요?”

    아직까지 남아 있던 약간의 의문이었다. 불안을 털기 위해 그녀는 실례를 무릅쓰고 이의를 제기했다.

    “원래 티켓 오픈 전에 자료 왕창 뿌리잖아요. 근데 우리는 오픈 전 홍보가 덜된 것 같아서…. 전 사실 사람들이 오늘 티켓팅인 거 잊었을까 봐 걱정돼요. 아침에라도 뿌릴걸….”

    “…….”

    “프로필 사진이 좀 아까우면, 진즉에 연습실 사진 같은 거라도 뿌려야 했나 싶어요.”

    “연습실 사진은 내가 많이 찍어 뒀으니까, 오픈한 다음에 뿌리자.”

    이현은 그렇게 말하며 신아름의 어깨를 토닥였다.

    신아름의 말대로 원래 대부분의 공연 기획사들은 티켓 오픈 직전까지 홍보에 총력을 기울이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이현은 ‘석희재 주연 캐스팅’ 외에는 최소한의 정보만 제공했다.

    대표의 판단에 따르기는 하지만 막상 오픈 일이 다가오니 신아름의 입장에선 잊혀졌을까 봐 초조한 마음이 들었던 것이다. 제가 맡은 업무적 책임을 다 못했을까 봐 두렵기도 했다.

    그런 불안을 달래주듯 이현이 입을 열었다.

    “우리는 석희재가 제일 큰 카드고, 사실 이거밖에 없잖아.”

    “…….”

    “뭐라도 하고 싶은 마음은 이해하는데 우리가 석희재로 뭘 한다고 너무 남발하면 역효과 나. 1차 오픈에서는 기대할 만한 게 석희재 팬덤 화력밖에 없으니…. 그렇다고 희재가 아직 우리 다 캐리할 만큼 큰 배우도 아니고.”

    별로 부담 지우고 싶지 않더라고. 이현은 혼잣말처럼 중얼거리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니까 1차 오픈 때는 희재 화제성만 확인한다고 생각하고, 천천히 가자. 그리고 공연 한 달도 더 남았는데 벌써부터 다 보여 주면 2차, 3차 티켓 오픈 때는 약발 떨어져.”

    “그렇…겠죠?”

    “그럼. 그리고 볼만하면 소문나게 되어 있어. 우리만 잘하면….”

    “…….”

    “잘 안 되어도 홍보 탓은 절대 안 할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현이 씩 웃어서 신아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앞에서 섣부른 불안을 내비친 것이 조금 미안했다.

    홍보는 어디까지나 부스터 같은 것이었다. 결국 공연의 질이 좋은 것이 최우선이다. 실제로 이현이 매일 연습실을 오가며 공연 퀄리티를 위해 무척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신아름은 그와 스태프들을 믿기로 했다.

    “그럼 나 잠깐 밖에 나갔다 올게.”

    “네네.”

    “아, 보도 자료는 아직 보내지 말아 봐.”

    “왜요?”

    “엠바고 어기는 언론사 꼭 있더라? 차라리 티켓 오픈하고 바로 릴리즈하는 게 나을지도.”

    “알겠습니다.”

    신아름이 대답하자 사무실의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이내 탕, 하고 공허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신아름은 닫힌 문을 잠시 보다가 모니터로 고개를 돌리고 릴리즈할 언론사의 명단을 다시 한 번 체크했다.

    “후우….”

    복도로 나선 이현은 그제야 소리 없는 한숨을 내뱉었다. 침착한 표정과 달리, 문고리에 걸린 손가락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지나치게 긴장했는지 심장이 뻐근했다. 이현은 왼쪽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누르며 미간을 찡그렸다.

    잠시 후 티켓 오픈에서 곧 최초의 판매량이 판가름 난다. 모든 배우와 스태프가 모인 상견례 때도, 첫 연습 날도 이렇게 떨리지는 않았다.

    겨우 시작일 뿐인데 대중의 평가를 받게 된다고 생각하니 속이 울렁거렸다. 동시에 회사를 차리기 위해 빌린 대출금과 앞으로의 경상비가 머리를 어지럽혔다.

    그래도 하나뿐인 직원 앞에서 불안감을 티 낼 수 없어서 이현은 괜찮은 척했다. 바지 주머니를 더듬은 이현은 곧장 옥상으로 향했다.

    ‘줄이겠다고 약속했는데.’

    담뱃갑으로 손이 갈 때마다 말없이 울적한 표정을 짓곤 하는 연인의 얼굴이 떠올랐다.

    요즘에는 심지어 극약 처방을 하겠다며 이현이 담배를 피울 때마다 저도 한 개비씩 뽑아 들고 따라나오기 일쑤다. 이현이 싫어하는 게 뭔지 귀신같이 알아챈 모양이다. 이현은 석희재가 그 아기같이 깨끗한 폐를 왜 자진해서 더럽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저러다 습관이 들어 사진이라도 찍히면 어쩌나 걱정스럽기도 했다.

    물론 담배는 개인의 기호이지만, 팬들은 바른 생활 이미지를 가지고 있는 석희재를 자랑스러워하는 편이었다. 이현은 저 때문에 석희재가 그 스스로를 바꿔 버리기를 원치 않았다.

    아무튼 그렇게 석희재의 흡연을 말리며 실랑이를 하던 때, 석희재는 딱 한 마디로 이현의 입을 다물게 만들었다.

    ‘형보다 내 마음이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걸.’

    그 말이 정곡을 ‘콕’ 찔렀다.

    아직 금연은 시작하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 이현은 담배 한 대를 물 때마다 습관적으로 석희재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 게다가 지금처럼 석희재의 감시가 없을 때마저도 이처럼 안절부절못하는 둥, 어느새 이현은 석희재에게 완전히 길들여졌다.

    미스터리였다. 석희재는 대놓고 비난하거나 여러 번 쪼아서 사람을 들들 볶는 타입이 아닌데도 자신이 자발적으로 이렇게 되었다는 게….

    ‘보고 싶네.’

    이현은 옥상 난간에 팔을 기대며 대학로 길거리로 시선을 내렸다.

    좁은 길을 비집고 느리게 움직이는 차들, 두세 명씩 무리 지어 오가는 사람들. 자주 들르는 국숫집의 간판과 건물 앞에 빼곡하게 세워진 공연의 배너들.

    한때 대극장 뮤지컬을 하면서 잠시 떠나 있던 대학로 골목이 무척 정겹게 느껴졌다.

    대박은 바라지 않았다. 다만 앞으로도 이 풍경을 바라보면서 오래오래 일하고 싶었다.

    이현은 문득 핸드폰 시계를 보았다. 티켓 오픈이 15분 앞으로 다가왔다.

    ‘진짜로 로또도 필요 없으니까, 제발 이 일 계속할 수 있게만 해 주십시오.’

    이현은 가볍게 두 손을 모으고 눈을 뜬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미풍이 그의 이마를 가볍게 쓸고 지나갔다. 오랜만에 미세먼지 없이 맑은 하늘 위로 구름이 층층이 덧그려졌다.

    종교가 없는 이현은 최근 이름이 불분명한 신에게 기도하는 버릇이 생겼다.

    최선을 다해 살아도 인력으로 어찌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잃고 싶지 않은 것이 생길 때에 이런 마음이 더욱 간절해진다는 것을. 사랑하는 풍경, 사랑하는 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

    ‘아아, 그리고 하나만 더. 우리 희재 아프지 않게 해 주시고요.’

    부디 오래오래 바뀌지 않고 이 순간이 지속되기를 바라며. 이현은 손을 모았다.

    ***

    오후 2시.

    정각을 알리는 알람이 울렸다.

    “들어간다.”

    나직한 목소리, 그리고….

    “씨발, 이선좌!”

    곧바로 짧고 강렬한 욕설이 터져 나왔다.

    “침착해. 침착해.”

    “얘들아. 근데 서버 이상하지 않아? 버벅이는 거 같은데?”

    “악! 미쳐. 새로고침 할 때마다 우수수 빠진다.”

    피씨방에 일렬로 앉아 있는 사람들의 면면에 푸른 모니터의 빛이 쏟아졌다. 그들은 해커 뺨치는 집중한 얼굴로 피씨와 모바일을 동시에 굴리며 마우스를 광클릭했다.

    오늘 그들의 목적은 바로 티켓팅. 배우 석희재가 처음으로 주연을 맡은 연극 공연의 예매가 이제 막 시작된 참이었다.

    그때였다.

    “대박! 얘들아 내가 해냈다!”

    맨 끄트머리 자리에서 환희에 찬 소리가 흘러나왔다.

    “뭐?”

    “나 1열 잡았어!”

    “네 자리 연석?”

    “어! 아, 나 손 떨려.”

    “하나님 아버지 제발 결제창 뜨게 해 주세요.”

    잠시 후 그들의 유일한 희망이 결제창까지 무사히 도달했다. 15초간의 로딩에 얼마나 마음 졸였는지, 결제에 성공했다는 소식에 다들 한숨을 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들은 이제 1열 아닌 뒷자리라도 사수하기 위해 서둘러 다시 손을 움직였다. 그러나 그새 좌석 창에는 하얗게 눈이 내려 있었다.

    “미쳤다. 왜 이래? 지금 주말 완전 매진 맞지.”

    “어. 평일 좌석도 미친듯이 나가는 것 같은데….”

    “안 되겠다. 남은 거라도 줍자.”

    잔여 좌석이 하나도 남지 않았을 때, 시간은 이제 막 2시 7분을 지나고 있었다. 10분도 안 되어 모든 게 끝나 버렸다.

    누군가 깊은 피씨방 의자에 털썩 등을 묻으며 말했다.

    “와, 빡셀 줄은 알았는데 이렇게 빡셀 줄은 몰랐어.”

    “그나마 중극장으로 급하게 바꿔서 이 정도지, 원래대로 그 쪼그만 극장에서 했었어 봐.”

    “그럼 거기에 내 자리는 없었을지도….”

    “아니, 근데 회사는 무슨 정신으로 처음에 극장을 거기로 잡은 거래?”

    “석희재를 과소평가한 거지, 뭐. 계자들 감 없는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 정도면 세종에서 했어도 다 나갔겠다.”

    이번 공연에서 첫 연극 데뷔를 한 것은 석희재뿐만이 아니다. 이 연극을 제작하는 제작사 역시 대학로에 처음으로 얼굴을 내민, 완전한 신생 회사였다. 석희재의 팬들은 그의 배우가 선택한 ‘스트링컴퍼니’라는 듣도 보도 못한 사명을 가진 회사에 미심쩍은 시선을 던졌다. 석희재의 차기작이 좀 더 그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는 것이기를 바라는 팬들의 눈에는 어딘가 불안하고 성에 차지 않는 선택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웹상에서부터 알음알음 뒷소문이 퍼지고 있었다.

    [히재 차기작 연극 제작하는 사람]

    이현피디라는데?

    벌써부터 망조짐보인다

    └ 이현 피디가 누구임?

    └ 기적 메인 제작피디

    └ 아 헐 회사차렸구나

    └ 나 잘 모르는데 왜 망해ㅠㅠ? 이현이라는 사람 마이너스의 손이야??

    └ 아니 걍 둘이 친해… 인맥빨로 캐스팅했다는 의심이…

    [솔직히 팬들은 이런 글 싫어하는 거 아는데]

    차기작으로 연극하는 거 별로인 사람은 나뿐인가.

    영화 대본도 쌓여있다는데… 넘 아까워.

    연극하는 이유? 이현이랑 친해서… 그거밖에 모르겠어서 힘 빠짐ㅎ

    나만 걱정스러운 건가

    내가 희재를 가까이서 보는 건 좋은데

    그거랑 별개로 더 떴으면 해서.

    └ 석희재 더 못 뜰 거라고 생각하는 건 너밖에 없을 듯

    └ ㅇㄱㄹㅇ이십대 배우 중에서 지금 석희재만큼 인지도 화제성 있는 사람 또 있나??

    └ 이미 결정된 건데 초 치지는 말자ㅠㅠ

    └ 희재가 하고 싶은거 하는 거지…

    └ 뭔상관이야ㅋㅋ히재가 마음 편한 사람하고 일하고 싶은가 보지~~~

    [근데 연기력 논란 잠재우는데는 연극이 직빵이야.]

    솔직히 히재가 여태까지 연기력을 제대로 증명한 적이 있나? 없잖아.

    여태 가벼운 웹드하고 씨엡만 찍었고, 팬 입장에서는 뭘 해도 얼굴만 화제되니까 속상한 것도 있었고.

    그래서 난 연극이 이미지 변신에 좋을 거라고 생각하거든?

    연기력으로 유명한 영화배우들 찾아보면 죄다 대학로 극단 출신이고…

    지금 연뮤판에 있는 배우들도 제대로 된 정극 대본 나오면 욕심내면서 오디션 한 번씩 다 본다잖아.

    잘만하면 이다음부터 들어오는 시나리오의 급이 달라질 거라고 장담해.

    └ 맞아. 난 웹드 보고도 깜짝 놀랐는데 연기 잘해서ㅠㅠ 입덕하기 전에는 진짜 얼굴만 믿고 발연기하는 배우일 줄… 얼굴에 묻혀서 평가절하 당하는 거 넘 속상해. 이번에는 좀 강렬한 연기 해봤으면 좋겠다… 희재 잘할 것 같은데

    └ 궁금하면 원작 찾아봐 강렬해도 너무 강렬함ㅋㅋ

      └ 원작 어디서 봐?

       └ 해외도서관 같은데 DVD로 기록 영상 볼 수 있는 거 잇어

       └ 감사감사

        └ 헉… 히재가 이런 걸 한다고?

         └ 그치 너무 세지ㅠ ㅠ 나도 본문은 동감하는데 좀 걱정돼

          └ 아니 난 걱정이 아니고… 너무 좋아서 ㅇㅠㅇ

           └ 아….

    [근데 갑자기 친분 얘긴 왜 나온 거야?]

    회사끼리 딜이 있을 수도 있고

    말마따나 돈 몇십억 받고 콜 한 거면 어쩌려고.

    꼭 돈이 아니더라도 히재가 자발적으로 선택한 거일 수도 있는데…

    글구 나는 자꾸 주변 지인 얘기 나오는 거 별로야ㅠㅠ

    └ 첫글이 대놓고 어그로였어

    └ 그니까… 울배우 이현이랑 친한 거 다들 아는데 자기만 대단한 거 아는 거처럼;;

    └ 망하라고 고사지내러 온 것도 아니고

    오프라인에서 매일 거래가 이루어지는 공연의 특성상, 스트링컴퍼니의 대표 이현의 얼굴은 관객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편이었다. 내부 체계가 엉망인 라인컴퍼니에서 그나마 일을 하던 피디였다는 평, 인상이 차가워서 걱정했는데 의외로 친절하더라는 평 등등….

    돌이켜 보면 그래도 관객들 사이에서는 제법 인망 있는 피디였다. 그러나 아직 제작자로서의 능력은 검증된바 없기에 퇴사 후에는 ‘얼굴 반반한 피디’라는 평밖에 남지 않았다.

    게다가 얼굴이 팔려 있다는 점은 이현에게는 도리어 독이 될 수도 있었다. 이현은 종종 석희재 만큼이나 도마 위에 자주 올라 마구 해체되곤 했다.

    [이현피디 실제로 본 적 있다]

    아트플렉스 1층 카페에서 봤는데

    옆자리에 음감이랑 앉아있더라.

    근데 한 시간 동안 담배 세 번 피러 나감ㅋㅋ

    안 그렇게 생겨서 골초였다니.

    히재는 비흡연자 맞지??

    └ 그 업계에 골초 많더라 일이 빡세서 그런가

    └ ㅇㅇ 히재는 비흡연자

    └ 술도 잘 안 함!

    └ 나도 이현 그 근처에서 본 적 있는데ㅋㅋ 자주 가나봐

    └ 사무실이 바로 옆일걸???

    └ 대학로 공연 회전문 돌면서 이현 한번도 못 본사람 있으면 그게 더 이상하겠다ㅋㅋ

    [근데 이현 잘생기지 않았어?]

    가끔 왜 배우하지? 싶은 생각이 드는 배우들보다 훨씬 나은 거 같은…

    └ 팩폭ㅋㅋ

    └ ㅇㅇ개잘생겼어

    └ 정석 배우상은 아닌데 확실히 수요 있을 상

    └ 나 이 바닥 모를 때 배운 줄 알고ㅋㅋ 같이 간 친구한테 저 사람 누구냐고ㅋㅋㅋ 어느 공연 나오는지 물어봤다가 비웃음 당한 적 있잖아

    └ 앗 나둥;;

    └ 진짜로 가끔… 회전문 돌다가 이현으로 타깃 잡았던 사람들도 있다는 카더라가.

    아직 연극의 베일이 벗겨지지 않은 시점이어서 이리저리 도는 말만 많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팬들은 석희재의 차기작이 잘되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좋아하는 배우의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다는 설렘과 기대감, 그리고 약간의 불안감과 긴장을 안고.

    그리고 바로 오늘, 팬들은 각자의 마음속에 도사리고 있던 약간의 불안감을 티켓팅으로 조금이나마 덜었다. 석희재의 티켓 파워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짜릿한 일이었다.

    티켓팅을 위해 극장과 가까운 대학로의 한 피씨방에 모였던 네 명의 팬도 가벼운 마음으로 피씨방을 나섰다.

    “어? 이거 뭐야.”

    “응?”

    “희재 새 프로필 사진, 허억….”

    티켓팅 매진 기사가 나는 사이에, 기다렸다는 듯이 새로운 보도 자료가 떴다. 신작의 새 포스터와 석희재의 프로필 사진이었다. 사진 밑에는 ‘자료 제공-스트링컴퍼니’라는 작은 글씨가 붙어있었다.

    “미친… 너무 잘생겼어.”

    “헉… 헉… 호흡 곤란 와.”

    “라마즈 호흡을 해.”

    “와, 근데 보정 하나도 안 했나 봐. 일부러 그랬겠지? 근데 너무 잘생겼어.”

    신작의 그로테스크한 느낌을 담은, 생동하는 감정이 오롯이 담긴 석희재의 민낯이었다. 정면을 노려보는 시선이 인상적이었다.

    정확히 감정을 헤아릴 수 없는 이유는 눈빛은 분노한 듯 보였으나 망막에는 곧 눈물을 쏟아낼 것처럼 물기가 어려 있기 때문이었다. 거기에 입가와 턱은 길고 모양 좋은 손으로 크게 가렸다. 표정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눈밖에 없는데도 거기에서 모든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가 범죄자라 해도 그의 사연을 안다면 연민할 수밖에 없을 것 같은 눈빛이었다.

    친절하고 온화한, 무해한 이미지의 미남이 보여 준 백팔십도 달라진 모습에 팬들은 충격을 금치 못했다. 핸드폰 안에 담긴 사진을 저장해 확대해 보며 액정을 더듬었다.

    “와아… 잘 보면 속눈썹도 셀 수 있겠다. 오늘 밤에 세 봐야지.”

    “우리 희재… 손톱 반달이 뚜렷한 걸 보니 건강한가 보다….”

    잠시 후, 스트링컴퍼니는 SNS를 통해 방금 보도 자료로 공개된 프로필 사진을 출력용 해상도 버전으로도 공유했다. 마치 팬심을 꿰뚫어 본 듯한 선물이었다.

    “나 아까 말 취소.”

    이를 확인한 한 명의 팬이 뜬금없이 걸음을 멈추고 손을 들었다.

    “뭐?”

    “계자들 감 없다고 한 거….”

    “아, 맞다 그랬지.”

    “취소할래. 적어도 이현은 뭔가 안다.”

    “동의.”

    “나도 동의.”

    “아이 어그리.”

    ***

    오후 2시 10분.

    “형. 이따 연습… 어,”

    스트링컴퍼니의 사무실 문이 벌컥 열렸다. 인기척에 뒤를 돌아본 신아름은 예기치 못했던 사람의 모습에 화들짝 놀랐다.

    “헉, 배우님. 웬일이세요?”

    등장한 것은 다름 아닌 석희재였다. 사무실에도 자주 오고 연습실에서도 종종 보는 사이라 그 얼굴에 익숙해질 법도 한데, 여전히 놀라운 외모였다.

    연예인은 실제로 보면 화면과 달라 실망하는 경우도 많은데 석희재는 아니었다. 게다가 키 때문인지 존재감도 엄청났다. - 최근에는 몸을 제법 키워서 더더욱 - 도대체 데뷔 전에 어떻게 일반인으로 살 수 있었는지 이해불가할 정도다. ‘석희재는 실물이 더 압도적이다’라는 평이 따라붙는 이유가 있었다.

    “안녕하세요.”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치자 석희재가 다가오며 예의 바르게 고개를 숙였다. 모자를 벗으니 그 사이로 세팅하지 않은 머리카락이 자르르 떨어졌다. 얼굴에도 아무것도 바르지 않았는지 메이크업 없이 수수한 얼굴이 무척 청순해 보였다.

    신아름은 자기도 모르게 말을 조금 더듬으며 입을 열었다.

    “이, 일찍 오셨네요. 오늘 연습 네 시부터인데….”

    “아, 저 연습하기 전에 형이랑 식사하려고.”

    식사라고 하기엔 너무 일찍 왔는데? 혼란스러워하면서 신아름은 일단 축하의 말을 건넸다.

    “맞다, 배우님. 1차 오픈 완전 매진됐어요. 축하드려요.”

    “아, 저도 주변에서 연락을 줘서….”

    석희재는 아직도 간헐적으로 진동이 울리고 있는 핸드폰을 보여 주며 웃었다. 아까부터 들리던 진동 소리가 이거였구나, 생각하면서 신아름은 석희재의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화면에는 계속해서 메시지의 알림과 전화 알림이 번갈아 들어오고 있었다.

    “덕분에 알았어요.”

    “우와 연예인 핸드폰은 다 이래요? 엄청 나네요.”

    “그래서 불편해요.”

    “평소에 꼭 받아야 되는 연락은 어떻게 받으세요?”

    “그러니까 말이에요.”

    석희재는 일상의 불편함을 토로하면서도 부드럽게 웃었다. 눈이 휘어지며 만드는 눈웃음이 예술품 같았다. 어쩔 수 없이 심장이 반응했다. 신아름은 차분함을 유지하려 노력하면서 속으로만 생각했다.

    ‘진짜… 결혼은 무리다. 잘생겨도 적당히 잘생긴 사람이랑 해야지. 매일 이런 얼굴 보고 살다간 심부전 올지도.’

    다소 엉뚱한 방법으로 현실감을 찾는 신아름의 속을 짐작하지 못한 채로, 석희재가 사무실 안을 두리번거렸다.

    “그나저나, 형은 어디 있어요?”

    “피디님 잠깐 나가셨어요. 전화해 볼까요?”

    그렇게 말하며 신아름은 핸드폰 연락처를 찾았다. 일 때문에 자주 통화를 하는 사이이기 때문에 이현의 이름은 항상 최근 기록에 있다.

    그 순간 석희재의 시선이 아주 짧게 신아름의 핸드폰 화면에 닿았다.

    “근데….”

    “네?”

    연결음이 들리는 와중에 석희재가 물었다.

    “오빠라고 저장하셨어요?”

    동시에 건너편에서 이현의 응답이 들려왔다. 덕분에 신아름은 석희재의 목소리에 담긴 미묘한 질투의 기색을 전혀 읽지 못했다.

    “피디님, 사무실에 지금….”

    - 어, 나 지금 들어가.

    그 말과 함께 사무실의 문이 벌컥 열렸다. 문조차 조신하게 열고 들어오던 석희재와는 달리 요란한 등장이었다.

    “어? 희재 와 있었네.”

    “형이랑 같이 점심 먹으려고. 아직 안 먹었지?”

    “나 배 안 고픈데…. 어? 잠깐만. 아름이가 나한테 전화를….”

    석희재에게 거의 안긴 채로 떠밀리며 이현은 뒷걸음질 쳤다. 석희재의 어깨 너머로 고개를 내민 이현이 다급히 물었다.

    “아름아. 나한테 뭐 볼 일 있어서 전화한 거 아니야?”

    “아, 괜찮아요!”

    어차피 대표님 찾으려고 전화한 거였어요- 라고 말을 덧붙이기도 전에 두 사람은 복도 바깥으로 사라졌다. 탕,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닫히고, 다시 혼자 남은 신아름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

    공연이 시작되기 전, 평일 낮의 대학로는 비교적 한가하다. 여타의 번화가들과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적지 않은 수의 배우나 스태프들이 저마다의 일상을 살며 거리를 활보한다는 점일까.

    잠시 사무실에서 나와 미팅 하러 가는 제작사 직원들, 한창 연습에 돌입해 연습실로 출근하는 운동복 차림의 배우들, 느지막이 출근해 길거리를 어슬렁거리는 중년의 원로들과 대표들까지….

    발 넓은 관계자라면 좁은 대학로 골목을 걷는 와중에 아는 얼굴을 십수 번씩 마주치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그만큼 종사자가 많은 거리라 그런지, 기대치 않고 이 거리를 들른 팬들조차 크고 작은 이벤트를 겪을 수 있기도 하다.

    예를 들면 바로 지금처럼, 막 티켓팅을 끝낸 팬들이 카페로 들어서는 석희재를 목격한다든가 하는.

    “와, 대박. 잠깐 문 쪽 봐.”

    “어? 헉… 희재다.”

    처음에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오는 남자가 심상치 않게 훤칠해 자연히 시선이 갔다. 그 남자가 제 배우라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테이블에서는 작은 소란이 일었다. 소리 없이 발을 구르고, 어쩔 줄 몰라 입을 틀어막았다.

    “어떡해. 옷 너무 예쁘게 입었어.”

    석희재는 편한 트레이닝 바지에 흰 면 티셔츠 차림이었다. 거기에 모자를 깊이 눌러썼다. 연예인 석희재에게서는 쉽게 볼 수 없는 차림으로 거리를 활보하는 자연스러운 모습에 팬들은 ‘계를 탔다’고 행복해했다. 또한 ‘자연인 석희재를 실물로 본 오늘을 기념일로 지정하자’고 속삭였다.

    “야, 근데 너무 쳐다보지 말자. 나 방금 이현이랑 눈 마주쳤어.”

    “나두… 째려봤어.”

    “이현은 원래 그렇게 생겼어.”

    “아무튼 불편해할라. 딴 거 하는 척하자.”

    “아아~ 저 사람이 이현 피디야? 나는 처음 봐.”

    “그런 거 같은데? 근데 둘이 진짜 친하구나.”

    옷차림이 비교적 가벼워 보이는 석희재와 다르게 이현은 후드티 위에 얇은 점퍼를 하나 걸쳤다. 게다가 붉은색 머플러로 목을 갑갑해 보일 정도로 칭칭 두르고 있었다. 둘만 보면 지금이 무슨 계절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함께 들어선 두 사람은 바깥 유리를 통해서는 보이지 않는 실내 깊숙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잠시 뒤, 석희재가 직접 주문을 하러 나왔다. 팬들은 석희재의 사적인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각자 명상을 하듯 가만히 숨을 죽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하나랑… 저는 라테 따뜻한 걸로 주세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 뜨거운 라테 한 잔 맞으세요? 또 필요한 건 없으세요?”

    “네, 음…. 아. 케이크도 하나 주세요.”

    허리까지 숙이고 진열된 케이크를 유심히 관찰하던 석희재가 고른 것은 딸기가 들어간 생크림 케이크였다. 팬들은 가슴 깊이 석희재의 취향을 메모했다. 그리고 석희재가 결제를 마치고 제자리로 돌아가 보이지 않게 되었을 때, 같은 케이크를 추가로 주문하며 행복해했다.

    “희재 입맛 너무 귀엽다.”

    “케이크 한참 보는 거 봤어?”

    “우리 연습실 서포트로 생크림 케이크 넣어 볼까?”

    “완전 좋은 생각.”

    반면, 이현과 석희재의 테이블 위에 놓인 딸기 생크림 케이크는 팬들의 기대와는 다르게 석희재는 맛도 보지 않았다. 이현이 단 세 입만에 케이크를 먹어치웠기 때문이다.

    마지막 남은 작은 끄트머리를 접시에 묻은 생크림과 함께 긁어먹던 이현이 투덜거렸다.

    “아름이가 둔해서 망정이지, 너 자꾸 목에다 자국 남길래?”

    “미안해….”

    이현의 다그침에 석희재는 조용히 속삭였다. 진실하게 참회하는 목소리였다.

    “나도 너무 놀랐어. 진짜로 기억이 안 나.”

    조금 전, 석희재는 이현과 함께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이현의 목덜미에 제가 남긴 흔적을 알아차렸다. 정면에서 살짝 뒤쪽이라 이현은 미처 보지 못했던 것 같다. 석희재는 그걸 가리기 위해 직접 제 셔츠를 벗어 머플러 대용으로 그의 목에 감아 주기까지 했다.

    “됐다. 일부러 그런 거 아니면.”

    이현이 작은 한숨을 쉬었다.

    “응… 아마 내가 정신이 나갔었나 봐. 아마… 형이 너무 예뻐서?”

    이현은 더는 단호해지지 못하고 거기서 잔소리를 그쳤다. 그러자 석희재가 타이밍을 놓친 말을 꺼냈다.

    “케이크 하나 더 사 올까?”

    “음….”

    그제야 케이크를 저 혼자 끝내 버렸다는 사실을 눈치챈 이현이 멋쩍게 포크를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다.

    “배 안 고프다고 한 사람치곤 너무 잘 먹는데.”

    “이상하네. 진짜 안 고팠는데.”

    이현의 아무것도 아닌 말에 석희재가 턱을 괴며 푸스스 웃었다. 동시에 수백, 수천 번도 더 본 석희재의 웃는 얼굴에 이현은 순간적으로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조금 더 깊이 이현 쪽으로 몸을 기울인 석희재가 속삭였다.

    “완전 매진이래. 축하해, 형.”

    그말에 이현은 부드럽게 미소지었다.

    “내가 축하받을 일이냐. 다 네 덕이지. 뭐….”

    “태연한 척은. 어제 잠도 못 잤으면서.”

    걸렸구나. 이현은 침음했다.

    지난밤 둘은 밤이 깊도록 사랑을 나누었다. 알몸으로 엉켜서 따스한 피부를 겹치고, 서로를 어루만지며 그보다 더 오래 후희를 나누었다.

    먼저 잠에 빠진 석희재 곁에서 이현은 선잠을 자다 깨다 했다. 그러다가 완전히 깨서 다시 잠들지 못했다. 바깥이 푸르게 밝아 올 때까지 몇 번이나 창밖과 석희재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혹시나 짐이 될까 싶은 마음, 석희재의 커리어에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 조금 더 오래 일을 하고 싶은 마음….

    인생에서 생각이 이토록 많은 적은 처음인 것 같았다.

    “오늘부터는 잘 자겠네.”

    석희재의 말에 이현은 픽 웃어 버렸다.

    잘 자는 게 대수인가? 이현은 갑자기 성큼 꿈을 이루었다. 큰 욕심 내지 말고 딱 경상비만 벌자, 잘 안 되더라도 공연이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 길게 보고 버티자…라고 어젯밤 결론을 내린 것이 우습게, 1차 오픈으로 목표치가 달성되어 버렸다.

    이현은 1차 오픈 시 실 좌석 판매율 50%를 달성하는 것을 최상의 시나리오라고 봤다. 원래 계획에서 극장 규모를 3배나 키웠기 때문에 그것도 아슬아슬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현재로서는 정확히 얼마의 순익이 남는지도 알 수 없었다. 매진은 꿈도 꾸지 않았기에 도리어 계산도 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 태연할 수 있는 것은 실감이 안 나기 때문이다. 이현은 여전히 얼떨떨하기만 했다.

    “내 덕이라고 칭찬 좀 해 줘.”

    웃기만 하는 이현을 지그시 보던 석희재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현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해 줘….”

    앞에 몇 마디를 빙빙 돌려 말한 게 이 때문이었나보다. 칭찬 한마디가 듣고 싶어서.

    재차 보채는 말에 이현은 큰 소리로 웃어 버렸다.

    “이리와 봐.”

    웃음을 그친 이현은 몸을 기울여 석희재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석희재가 궁금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을 때, 그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래. 어리고 잘 나가고 잘생기고… 거기 큰 애인 덕 좀 봤다.’

    별거 아닌 말에 석희재의 귀가 확 달아올랐다. 깨끗한 귓바퀴가 삽시간에 옅은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기쁜 마음으로 석희재가 고른 딸기 생크림 케이크를 나눠 먹고 있던 팬들은 믿기지 않는 소리를 들었다. 석희재와 이현이 앉아 있는 구석 자리에서였다.

    “아아악!”

    분명 석희재의 목소리였지만 그가 비명을 지를 리 없기에 믿어지지 않았다. 짧고 굵은 비명은 그걸로 끝이었다. 팬들은 서로의 눈만 바라보다가 잘못 들었겠거니, 하고 한 귀로 흘렸다.

    “근데, 피디랑 미팅하는데 희재가 사네?”

    잠시 끊겼던 이야기가 계속되었다.

    “어? 그러게. 아, 생각해 보니까 이현 이제 피디 아니잖아. 회사 차렸잖아.”

    “맞네. 대표인데 희재가 사네?”

    “보통 법카 같은 거 있지 않나.”

    “너무 친해서 그런 것도 안 하나 봐.”

    “하아. 이건 희재가 사회생활을 잘하는 건지, 호구인 건지.”

    그들은 수다를 떨면서도 가끔씩 포털이나 SNS에 ‘석희재’를 검색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새로운 기사나 대중의 반응이 있는지를 실시간으로 찾아보았던 것이다.

    “응…? 이거 뭐야.”

    “뭐가?”

    “희재가 맡은 역 있잖아. 주인공 이름이 ‘이현’이래.”

    “허얼….”

    “어디 나왔어?”

    “예매처 상세 페이지에 업데이트 됐네?”

    “뭐야. 원작 이름도 그거야?”

    “그럴 리가. 한국판으로 로컬라이징 하면서 이름 바꾼 거 같은데.”

    “하필 이현이지? 우연이라고 말하기엔 찝찝한 것이….”

    팬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런저런 추측을 해 보았다. 이현이 굉장한 나르시시스트라는 가설, 석희재를 제 페르소나로 내세워 자아실현을 하는 것이라는 가설 등등이 대두되었다. 그 이름을 지은 것이 석희재라는 것은 꿈에도 모른 채.

    잠시 후, 그들의 테이블 곁을 두 남자가 지나쳤다. 이현과 석희재였다. 다정히 들어올 때와는 달리 따로 온 사람처럼 간격을 두고 나가는 두 사람에게 어쩔 수 없이 팬들의 시선이 흘끔흘끔 모였다.

    이현이 ‘잘 먹었습니다’하고 꾸벅, 인사까지 하며 카페를 나서는 반면, 그 뒤를 따르는 석희재는 아무 말이 없었다. 조금 이상한 점은 석희재가 한쪽 귀를 손으로 꼭 감싸고 있었다는 점이다.

    카페를 나선 두 사람은 보는 눈을 피해 언덕길을 올랐다. 석희재는 제 앞을 휘적휘적 걷는 이현의 등을 원망스럽게 바라보며 그를 따랐다. 그다지 멀지 않은 길을 가는 사이에도 이현은 적지 않은 스태프들과, 타 회사의 직원들, 그리고 배우들과 마주쳤다. 반갑게 인사를 하고 서로 근황을 물었다. 여섯 번이나 그걸 반복한 후에야 겨우 낙산공원에 닿았다.

    이현은 인적 없는 곳에 도달해 한 바위를 두드렸다. 와서 앉으라는 소리였다.

    석희재는 그런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일단은 그가 시킨 대로 하기로 했다. 잠자코 그가 가리킨 곳에 가서 앉았다.

    “너 진짜… 이렇게 사고 칠래?”

    이현 스스로가 자각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는 가끔 선생님처럼 군다. 꿀밤을 때리기도 하고 조금 전처럼 귀를 꽉 틀어쥐기도 했다. 석희재는 이현이 그의 형들에게 그런 형벌을 실컷 당하면서 자란 게 분명하다고 단정 지었다. 그렇다면, 관대한 자신이 이해해 주어야 할 것이다.

    물론 이현이 가끔 어린 동생처럼 대해 주는 것이 항상 싫은 것만은 아니다. 가끔 이현은 석희재를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바라보기도 했다. 그럴 때 이현의 눈에서는 사랑이 자글자글 쏟아졌다. 귀여워 죽겠다는 듯이 보는 그의 얼굴이 더 사랑스럽다는 것은 모르고.

    아무튼… 그래도 이런 식으로 물리적 응징을 당하는 건 싫었다.

    “이게 왜 사곤데?”

    석희재는 목소리에서 미처 억울한 기색을 다 억누르지 못했다. 아까 이현이 억세게 잡아당긴 귀가 아직도 욱신거려, 귀를 감싼 채로 따져 물었다.

    “하, 당당하네?”

    이현이 팔짱을 꼈다.

    조금 전의 상황은 이렇다. 석희재의 귓가에 고백을 속삭이고 고개를 물리던 순간, 이현은 그의 귀 뒤에서 이상한 흔적을 발견했다. 작은 점 같기도 하고 어쩌다 달라붙은 먼지 같기도 한.

    ‘뭐가 붙었… 어?’

    떼어 주려 손으로 슥 문질러도 흔적은 여전했다. 손끝에는 아무것도 묻어나지 않았다.

    ‘이게 뭐야?’

    이내 그것이 문신이라는 것을 알아챈 이현은 눈이 뒤집혔다. ‘이 자식이’하며 다짜고짜 석희재의 귀를 틀어쥐고 잡아당겼다. 덕분에 석희재는 방어할 시간조차 없이 ‘아아악!’ 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고.

    “아문 거 보니 좀 됐나 보다? 잘도 숨겼네.”

    “형이 나한테 관심이 없는 거겠지.”

    석희재는 눈길을 슬쩍 돌리며 투덜거렸다. 말문이 막혀 어버버거리던 이현이 화제를 돌려 공격했다.

    “배우가 어떻게 타투를 하냐?”

    “걱정하지 마. 여기 절대 안 보여.”

    석희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절대가 어딨어. 너 요즘 사진들이 얼마나 고화질인 줄 알아? 그리고 팬들이 정면 얼굴만 찍는 게 아냐!”

    “분장하고 무대 올라가면 돼.”

    “널 보는 눈이 한두 개가 아닌데 어떻게 계속 가려! 공연 끝나고 씻다가 지워지면?”

    “…형, 이건 바이올린의 ‘현’이야.”

    “뭐?”

    빈틈없이 대답하던 석희재가 갑자기 딴소리를 했다. 이현은 눈썹을 찌푸렸다.

    “남들이 물어보면 난 그렇게 대답할 거야.”

    “…….”

    “형 만나기 전에 내 인생에서 그나마 의미가 있던 게 바이올린이었어. 그렇게 오래 할 줄은 몰랐거든.”

    “…….”

    “만난 다음에는 당연히 형이고.”

    “…….”

    “나는 그게 운명같아서, 중의적인 의미를 넣어서, 나도 생각 많이 하고 한 건데….”

    이현이 쉽사리 말문을 잇지 못했던 이유는 석희재의 말이 일리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석희재가 상처받은 얼굴을 했기 때문이다.

    이현이 열을 내던 것도 어디까지나 ‘연예인으로서의 석희재’를 걱정해서 그렇다. 그걸로 애인 석희재가 이토록 시무룩해하니 이현도 어쩔 줄을 몰랐다.

    “아니, 나는 너보고 뭐라고 한 게 아니라. 말을 좀….”

    이현이 딴 데를 보며 쩔쩔매자 석희재가 곧바로 반박해 왔다.

    “계속 뭐라고 했으면서.”

    “내 말은, 미리 상의하고 하면 덧나?”

    “형도 상의 안 하고 했었잖아.”

    맞는 말이라 할 말이 없어졌다. 이현이 입만 뻐끔거리자 석희재가 눈을 내리깔면서 말했다. 마지막 회심의 일격이었다.

    “나는 형이 타투 해 왔을 때 기뻤는데, 형은 안 기쁜가 봐.”

    “야, 나는….”

    “내가 연예인이라서 형한테 도움을 줄 수 있는 건 좋은데, 가끔은 형이 연예인인 나만 걱정한다고 느껴질 때가 있어….”

    “그럴 리가 있냐.”

    이현의 눈꼬리가 누그러졌다. 석희재는 이현의 반응을 진지하게 살폈다.

    이쯤이면 다되었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럼 다 지우고 그것만 생각해 봐.”

    석희재가 몸을 기울이며 이현을 진지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집중하면서 석희재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 몸에 누군가의 이름이 평생 남아. 그게 형 이름이야.”

    “…….”

    “살면서 만약, 절대 그럴 리 없을 거지만 내가 다른 누군가를 만난다 해도, 잠시 형에게 소홀해질 때가 온다고 하더라도…. 평생 형 이름이 나와 함께 할 거야.”

    “…….”

    “이거 하나만 대답해 줘.”

    “…….”

    “기뻐, 안 기뻐?”

    거기에 이현은 뭐라고 할 수 없는 반응을 보였다.

    무척 복잡미묘한 표정이었다. 긍정적인 표정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정적인 것도 아닌, 만 가지 생각과 만 가지 감정이 교차하는 표정. 이현은 무언가를 눌러 참는 것 같기도 했고, 지난날들을 짚어 보는 것 같기도 했다.

    이내 석희재가 아닌 다른 곳에 시선을 돌린 이현의 목울대가 가끔씩 울컥였다. 마른 입술 사이로는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은 한숨이 흘렀다.

    석희재는 알고 있었다. 이현이 이런 표정을 할 것이라고.

    또 이 질문에 이현이 바로 대답하지 못할 거라는 것도 짐작했다.

    이현에게 있어 ‘영원’이라는 단어는 단순히 기쁨으로 치환되는 것이 아니니까.

    그것은 그가 살아온 전체를 보상받는 일이었다.

    이현은 ‘영원한 사랑’을 믿지 못했다. 그의 깊은 불신은 석희재의 사랑이 부족하기 때문이 아니다. 이현은 석희재를 사랑했다. 아주 많이, 그리고 깊이. 제 방식대로….

    또한 이현이 사랑을 믿지 못하는 이유는 석희재를 못 믿어서가 아니다. 이현 스스로가 자신은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것을 믿지 못하기 때문이다.

    석희재는 이현에게 걸린 저주를 풀려면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았다. 아마도 온 평생을 걸어야 할지도 모른다. 이현의 불신은 ‘사랑은 영원하다’는 순수한 이상과 ‘나를 영원히 사랑해 줄 사람은 없다’라는 회의감이 부딪치며 탄생한 것이니까.

    영원을 증명하려면 결국 시간이 필요하다.

    석희재는 언제나처럼 차분한 눈으로 이현을 관찰했다.

    “있잖아, 세상에 영원한 건 없다지만, 내 생각엔 있어.”

    이현의 표정을 보며 석희재는 어쩌면 자신이 대답에 근접했다고 느꼈다.

    “죽을 때, 그러니까 우리 눈이 감길 때까지 지속되는 게 있으면 영원한 거지?”

    “…….”

    “내가 영원으로 보답해 줄게.”

    “…….”

    “그런데 나는 내 미래를 미리 보여 줄 수가 없어서, 대신 여기 새겼어.”

    석희재가 제 귀를 가리켰다. 이현의 망막에 물기가 맺혔다.

    이어서 이현은 고개를 깊이 떨구었다. 그러고는 석희재의 어깨에 이마를 살짝 기댔다.

    마치 작은 새가 내려앉은 것 같은, 아주 연약한 무게감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접촉이 석희재를 전율하게 했다.

    이현의 입에서 아주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뻐.”

    환희가 몸을 감쌌다. 석희재는 이현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고개 좀 들어 봐.”

    “아, 진짜. 너 꼭 내가 우는 꼴을 봐야겠냐.”

    석희재는 투덜거리는 이현의 어깨를 말없이 끌어안았다.

    “든든해 보이고 싶었는데.”

    “충분히 든든해.”

    “왜 네 앞에서는 자꾸 바보 같아지지.”

    “바보 같은 거 아니거든… 인간미라고 하는 건데.”

    “귀 꼬집어서 미안. 아팠지.”

    “…미안하면 형도 대.”

    분위기를 푸는 석희재의 말에 이현은 겨우 높은 소리로 웃었다. 눈꼬리에 매달린 눈물을 매단 채로.

    이현이 웃는 동안 석희재는 그의 귀를 틀어쥐는 대신 말없이 그 얼굴을 오래도록 지켜보았다. 처음부터 지금까지, 언제나 시선을 빼앗는 옆모습이었다.

    “나는 가끔 놀래.”

    이현이 눈가를 슥, 훔치고는 어느새 멀쩡히 돌아온 얼굴로 말했다. 석희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어떻게 그렇게 대본 라인 치듯이 말을 잘하는지….”

    “응?”

    석희재가 눈을 조금 크게 뜨자 이현이 웃었다.

    “아니, 이건 농담이고.”

    “…….”

    “진짜로 신기해. 네 그 확신이 어디서 나오는지….”

    “…….”

    “이건 엄청 긴 레이스잖아. 내가 매몰찼던 적도 있고, 무심했던 적도 있고, 찌질하게 굴었던 적도 있지. 그런데 어떻게 그 마라톤 같은 경주에서 너만은 한결같을 수가 있는지… 그게 놀랍거든. 심지어 너는 항상 전력 질주를 하는 것 같아.”

    “…….”

    “어떻게 그런 사랑을 할 수가 있는지….”

    말하면서 이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석희재를 돌아보았다.

    “너한테는 사랑이 대체 뭔지.”

    곡선을 그리는 그의 입술에 키스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면서, 석희재는 생각했다. 아직 이현이 모르는 것이 있다고.

    석희재의 노트에는, 스무 살 어느 날 깨달았던 사랑의 정의가 적혀 있다.

    ‘사랑이란… 이현.’

    그의 존재가 곧 사랑의 정의였다. 그가 아니면 성립하지 않는다.

    이현을 만나지 못했다면 석희재는 사랑이란 초능력처럼 증명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석희재는 대답을 기다리는 이현의 말간 얼굴을 지켜보았다. 너무 귀해서 어딘가 보관해 놓고 가끔 들여다보고 싶은 얼굴이었다. 행복으로 가득 찬 얼굴.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차오른 얼굴.

    이다음에도 이현의 이런 얼굴을 보고 싶어서, 석희재는 이번 대답은 조금 나중으로 미루기로 했다.

    “음… 나중에 알려줄게.”

    “나중 언제?”

    “글쎄. 첫 공연 하고 나면?”

    “뭐야….”

    이현이 실없다며 웃었다.

    바람이 길게 자란 그의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지나갔다. 저 멀리 낮게 자리한 도시가 내려다보였다. 석희재는 이 순간의 공기, 온도와 습도, 바람의 방향, 그리고 눈앞에 펼쳐진 풍광과 이현의 체온을 기억했다.

    이현 덕분에 사랑할 수밖에 없는 공간이 하나 더 생겼다.

    “왜 웃어?”

    이현이 물었다. 내가 웃고 있었구나, 새삼 깨달으면서 석희재는 고개를 저었다.

    “행복해서.”

    ‘사랑’이 묻는다.

    사랑이 대체 무엇이냐고.

    그 물음이 석희재에게는 무척 재밌게 느껴졌다.

    아… 아마도.

    아마도 그는 저 자신의 모습을 본 적이 없어 모르는가 보다, 석희재는 생각했다.

    또한 다짐했다.

    사랑이 제 모습을 볼 수 있게 내가 거울이 되어 비춰 주어야겠다고.

    그가 사랑의 정체를 깨닫게 되는 날에는, 오늘보다 더한 환희의 얼굴을 하겠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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