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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순간들 (26/27)

26. 순간들

언제나 불이 붙는 건 순식간이다. 이번에는 차 안이었다. 대화를 대신하는 듯한 다정하고 부드러운 키스 사이에 이내 헐떡이는 호흡이 섞이기 시작했다. 이현은 손을 뻗어 석희재의 드러난 목덜미를 노골적으로 문질렀다. 목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옴폭 파인 골을 쓰다듬자 입술 사이에서 낮은 신음이 흘렀다.

이내 이현은 손을 그의 티셔츠 안으로 미끄러뜨리고 고운 살결 아래 근육을 손바닥으로 진득하게 어루만졌다. 입술이 떨어진 사이 두 눈이 마주쳤다. 노려보는 듯한 석희재의 새까만 눈이 성욕으로 끓고 있다. 이현은 오싹한 기분을 느꼈다.

“집에 가서….”

그 눈과 다르게 석희재가 갈라진 목소리로 애써 침착하게 말하는 순간, 이현은 일부러 발기한 그의 중심을 꾹 문질렀다. 입술을 깨문 석희재가 팔을 움직여 이현의 허리를 낚아채며 제게 끌어당기려 했다. 장소가 좁아 마음대로 되지 않는데도 힘이 막무가내다. 이현이 손을 올려 둔, 팔부터 이어지는 등의 큰 근육이 뚜렷하게 섰다. 노골적인 근육의 움직임에 이현 역시 전에 없이 흥분하고 말았다. 최근 등과 어깨가 더 커졌다고 생각한 것은 착각이 아니었나 보다.

“잠깐만, 잠깐. 벗어봐.”

떼면 달라붙고, 다시 떼어 내면 또 달라붙는 석희재의 입술을 겨우 떨어뜨린 후 이현은 석희재의 티셔츠를 급히 벗겼다. 이현의 의도를 알아챈 석희재는 스스로 양팔을 들어 티셔츠를 벗었다. 좁은 차 천장에 석희재가 손등을 쿵 박았다. 아팠을 것 같은데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다시 이현의 허리를 애타게 끌어안았다. 제 허벅지 위에 기어이 이현을 올려놓고 싶은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망할 스포츠카는 천장이 워낙 낮아 그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사이드 채웠어?”

“했어.”

입술이 닿은 채로 석희재가 다소 불퉁하게 대답했다. 욕구로 눈앞이 어지러운데 제정신을 챙기고 있는 이현이 조금 원망스러운 듯한 말투였다.

“가만히 좀 있어 봐. 내가 건너갈게.”

이현은 석희재를 밀어붙여 그가 운전석 등받이에 완전히 기대게 만들었다. 겨우 한숨을 내쉬며 석희재는 차 시트를 최대한 뒤로 밀어서 눕혔다. 이현은 왼 다리를 뻗어 운전석으로 넘어가면서 남은 공간을 가늠해 보았다.

“근데 이게 되려나.”

“그러니까 집에 가서 하자고 했잖아.”

“원래 좁은 게 좋은 거거든. 특히 스포츠카는….”

“해 본 적 있는 사람처럼 말하네?”

괜히 뜨끔하여 이현은 차창 앞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마주 보고 앉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였기에 나란히 앞을 본 채 겹쳐 앉은 자세였다. 석희재의 가슴에 닿도록 등을 기대자마자 그의 손이 주저 없이 앞으로 다가오더니 이현의 바지 벨트를 보지도 않고 능숙하게 풀었다. 바지와 속옷을 허벅지에 걸기 위해 힘으로 내리는 손길이 석희재답지 않게 억세게 느껴져 더 흥분됐다. 다정한 것도 좋지만 역시 막 다뤄 주는 게 취향인 건 어쩔 수 없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맨살에 외부의 공기가 닿는 느낌마저 묘했다.

“음….”

일부러 발기한 위로 주저앉으면서 이현은 신음을 흘렸다. 맞닿은 불룩한 곳이 뜨거웠다. 노골적으로 허리를 흔들자 석희재가 셔츠가 형편없이 구겨지도록 마른 허리를 꽉 붙잡아 왔다.

“해 본 적 있어?”

본인도 급할 텐데, 석희재는 끝끝내 참아 내면서 이를 악물고 물었다. 쉽게 넘어 가주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은 잠시 갈등했다. 솔직하게 대답하는 것이 좋은가, 아니면….

“내 대답 감당할 자신은 있어서 묻냐?”

“뭐?”

“막말로, 웬만한 차에서는 다 해 봤고. 용달 트럭에서도 해 봤다고 하면… 읍!”

커다란 손이 밉살맞은 입을 틀어막았다. 이미 앞이 젖은 미끈한 성기가 골을 타고 미끄러졌다. 진입을 위해 아무렇게나 뒤를 잡아 벌리는 손에 이현은 어쩔 줄 모르고 손을 더듬거리며 핸들을 꽉 쥐었다. 끔뻑이는 뒤가 노출되는 감각 때문에 머리가 열로 어지러웠다.

“흣….”

삽입 당하는 것과 동시에 목덜미 뒤로 거칠고 더운 숨이 쏟아졌다. 깊은 곳까지 대번에 쑥 밀고 들어오는 느낌에 이현은 의미 없이 도망치려 했다가 천장에 머리를 박을 뻔했다. 그러나 도망도 무색하게 이내 석희재에게 허리가 붙들려 다시 푹 주저앉혀졌다.

“아! 너무 깊어.”

동시에 아무래도 뒤를 조이는 운동은 소용이 없었나 보다고, 이현은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라서 이내 이현은 핸들을 꽉 쥔 손을 덜덜 떨면서 자꾸만 앞으로 무너졌다. 석희재는 그런 이현을 안아 들어 제게 기대게 만들었다. 석희재의 가슴 위로 길게 늘어지자 열이 펄펄 나는 피부가 그대로 느껴졌다. 열기로 전신이 녹아나는 듯했다. 이건 아마도 질투를 어쩔 줄 모르는 연하 애인이 체온으로 뿜어 대는 분노일 것이다. 그 열감마저 기꺼웠다.

좁은 차내에 두 사람의 노골적인 헐떡임이 가득 찼다. 워낙 차체가 낮은 차라, 이렇게 미친 듯이 흔들리다가 바닥에 닿는 프레임이 상하지는 않을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다. 삽입했을 때부터 옴짝달싹 못 하게 된 이현과 다르게, 석희재는 이현의 체중을 온전히 몸 위에 올리고도 용케도 허리를 썼다. 한 팔로 단단히 시트를 받치고, 다른 팔로는 이현의 허리와 가슴까지 꽉 얽어맨 후 허벅지까지 들썩이며 어렵지 않게 허리 짓을 했다. 웬만한 코어 힘으로는 안 되는 동작에 이현은 금세 황홀해졌다.

“흐윽… 희재야, 나, 죽을, 죽을 것 같아. 조금만 천천히….”

아무리 사정해도 석희재는 입술을 굳게 깨물고 이현을 퍽퍽 쳐올렸다. 물론 말로는 죽을 것 같다고 애걸 중이었지만 기실 이현은 무아지경 속에서 헤엄치고 있었고, 석희재가 너무나 사랑스러워 미칠 것 같았다. 이만큼 몰아붙일 수 있는 남자도 없을 것이다. 마주 보고 있었다면 개처럼 귓불과 입술을 빨아 주었을 텐데, 이 자세로는 불가능해서 이현은 어쩔 수 없이 석희재의 손가락이라도 빨았다. 동시에 석희재는 자신을 불 지르는 이현의 행위에 울고 싶어졌다.

“헉, 형은… 진짜. 나는, 너 때문에….”

진짜. 미치겠다. 너 때문에….

석희재답지 않게 짧은 어휘가 무의미하게 반복되었다. 이런 기분에는 욕을 해야 하는데, 욕도 못하니 ‘진짜’만 몇 번이나 연발했다. 그 음절 사이에도 신음이 가득했다.

사정에 달하는 순간까지도 템포는 전혀 느려지지 않았고, 도리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빨라졌다. 어느 순간 이현은 이제 진짜 버티기 힘들다고 생각했다. 이 이상 가면 미쳐 버릴지도 몰랐다. 정신을 놓기 전에 브레이크를 밟아야 할 것 같은 지점을 넘어서까지도 깊은 곳을 자극당하는 바람에 결국 이현은 눈물을 터뜨렸다. 사정의 순간을 조절할 수 없었다. 차 안이라는 것도 잊고 시트와 옷을 더럽혀 버리고 말았다.

“하아, 학… 내가, 내가 그만하라고 했잖아.”

이현의 호흡은 비정상적으로 색색거리고 있었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것은 정액이 튄 핸들이었다. 귓바퀴가 새빨개진 이현은 석희재의 허벅지를 힘 풀린 주먹으로 퍽퍽 때렸다. 석희재는 반성하기는커녕 도리어 이현을 등 뒤에서 꼬옥 안아 왔다. 그 때문에 사정의 여운이 남은 뒤가 다시 자극당해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 튀었어. 어떡할 거야.”

“혀엉. 너무 좋다.”

석희재는 동문서답을 했다. 긴 한숨을 쉬는 그의 중얼거림에 이현은 전투력을 상실해 버렸다. 안에 파고들어 있는 석희재의 것은 여전히 단단했다. 그래, 네 차지. 내 차냐…. 이 상태로 두 번째 레이스가 또 있을지 모른다. 석희재는 한 번으로 끝낸 적이 없었으니까

이현은 여전히 흥분의 잔열로 벌벌 떨리는 몸을 석희재에게 편히 기댔다.

“가죽 시트 따로 옵션 한 거 아니야?”

“맞아.”

“비싼 걸 이렇게 쓰면 어떡해.”

“나 차 바꿀래.”

석희재가 또 동문서답을 했다. 이현은 무슨 소리냐는 듯 뒤에 시선을 주었다.

“형 말대로 좁아서 좋은데, 그래도 불편해. 뒷좌석도 없고.”

“야, 너.”

“차 살 때는 왜 여기서 할 거라는 생각을 못 했지? 내가 생각이 짧았어.”

그렇게 말하며 애교 있게 뒷덜미에 입술을 맞추는 녀석에게 무어라 할 수 있을까.

“그래. 마세라티는 별로야.”

아무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석희재가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이 차 싫어?”

“이거 돈 많은 양아치들이 좋아하는 차야.”

“그래?”

“응. 너랑 별로 안 어울려.”

“몰랐어.”

선선히 수긍한 석희재가 무심하게 되받아쳤다.

“난 형이랑 어울릴 것 같아서 산 건데.”

“뭐?”

이현이 당황하며 석희재를 돌아보았다. 석희재는 친절히 설명을 덧붙였다.

“나 차 잘 모르잖아. 그냥 생긴 거 보고 골랐어.”

그 말은 곧, 이현이 저 스스로를 날 티 나는 양아치처럼 생겼다고 인정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문이 막힌 이현이 그저 입만 뻐끔거리고 있자 석희재가 웃음을 탁 터뜨렸다.

“멋있다는 소리야.”

“웃기지 마.”

“왜. 형이 이 차 몰면 진짜 섹시할 거 같은데.”

“아씨, 됐어. 팔아 버려.”

이현의 반응을 보고 석희재는 즐거워하며 소리 내어 웃었다. 그 해맑은 얼굴을 보며 이현은 난감한 채로 생각했다. 일곱 살이나 어린 애인이 어느새 자신을 놀려먹는 법을 습득해 버린 것 같다고. 하지만 잔뜩 놀림당한다 해도, 별로 부끄럽지도 않고 기분이 나쁘지도 않았다. 그냥 아이처럼 웃는 석희재가 즐거워 보여 좋았다.

***

“희재야, 이건 아니지.”

박 팀장이 사람 좋은 얼굴을 드물게 찌푸리며 말했다.

“너 지금 들어오는 콜이 얼마나 많은데. 일정 쪼이고 쪼여서 걸러 낸 것들 들어가도 아쉬울 판에 갑자기 연말을 통으로 비워 달라는 게 말이 돼?”

“네. 아, 그리고 아시죠. 연극이니까 연습 기간 두 달도 잡아야 돼요.”

말이 되냐는 물음에 석희재는 눈 하나 깜빡 안 했다. 이미 설득이 통하지 않는 태도에 박 팀장은 이마를 짚었다.

이번 뮤지컬이 끝난 직후 줄줄이 대어가 물려 있었다. 지금 검토하는 것 중 회사에서 절대로 놓치지 말아야 한다고 정해 놓은 것이, 국제 영화제 수상 경력이 있는 영화감독의 새 시나리오와 히트작만 쏟아 내는 스타 작가의 미공개 드라마 시놉시스였다. 심지어 둘 다 감독과 작가가 직접 제안을 줬다.

갓 이름을 알린 신인에게 일이 끊이지 않고 들어오는 것도 복 받은 일인데, 이 정도 건수라면 다른 모든 스케줄을 미루더라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했다.

“희재야. 네 마음은 알겠는데….”

“대본 읽어 봤어요. 내용 좋아요. 작품성도 있고요.”

“지금 중요한 건 작품성보다 화제성이야.”

“그리고 제가 주연이에요.”

“이런 소극장 연극 주연보다는 최 감독 영화 조연이 훨씬 낫지. 너 칸 안 가고 싶어?”

“…또 기회가 있지 않을까요.”

새까만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대답하는 석희재가 지나치게 태연해 보여 박 팀장은 속이 탔다.

“희재야! 그 기회가 쉽게 오는 줄 알아? 이런 건 네가 얼마나 열심히 하는지보다 운이 더 중요해! 왜 굴러들어 온 복을 발로 차?”

“안 되면 어쩔 수 없고요.”

그렇게 말하며 석희재는 느릿하게 의자에 등을 기댔다. 그 모습만 보아도 석희재가 전혀 초조해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박 팀장은 이미 설득할 필요도 없이 석희재가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부러 한숨을 소리 나게 내뱉은 박 팀장이 말했다.

“연극 어느 회사 건데.”

“제작사는… 아직.”

“뭐? 대본 봤다며.”

“네. 대본만 봤어요.”

“대본 누가 줬는데.”

그 말에 석희재는 작게 헛기침을 하며 뜸을 들였다. 괜히 자세를 고쳐 앉은 석희재는 느릿하게 답했다.

“…아는 PD님이.”

정보를 가능한 한 축소해서 내뱉은 대답이었다. 그 말을 듣고 겨우 잃어버린 퍼즐 조각을 끼워 맞춘 박 팀장이 잠시 넋이 나갔다가 입을 일자로 만들며 꾹 다물었다. 화를 억누르는 얼굴이었다.

“희재.”

단호하게 이름을 부르는 음성에 석희재는 최대한 태연하려고 노력하며 그의 눈치를 보았다. 스스로가 뻔뻔해지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혹여나 이현에게 화살이 돌아가게 되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서.

“그러니까 제작사도 없고, 이 피디는 대본만 들고 있고. 아직 대관도 안 했을 테고, 너 말고 누구누구 나오는지도 모르는 거지.”

“…….”

“네가 제일 큰 카드겠네?”

석희재는 고개만 끄덕였다.

‘욕하고 싶으신 표정이네.’

“그분은 참… 너 잘되라는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러시면 안 되지. 피디님이 너 잡고 물고 늘어졌….”

“피디님은 그러신 적 없어요.”

석희재는 담담하게 박 팀장의 말을 잘랐다.

“형도 어렵게 제안한 거예요. 아직도 저한테 미안해하고 있고요.”

박 팀장은 침묵했다.

사실 박 팀장은 일찌감치 눈치를 챘다. 석희재의 24시간을 모조리 알고 있는 매니저로서 모를 수가 없었다.

석희재는 언젠가부터 스케줄이 끝나면 잠을 자기에도 모자란 시간에 무조건 가회동으로 향했다. 픽 쓰러질 것 같은 몰골을 하고서도 이현을 만나러 갔다. 친한 형과 술 한 잔 기울인다기에는 지나치게 잦은 빈도였다. 게다가 박 팀장은 가끔, 아니 꽤나 빈번히 석희재를 픽업하기 위해 이현의 집이 있는 가회동으로 가야 했다. 현관문을 나서는 석희재의 얼굴은 항상 말갛고 상쾌했으며 그의 손에는 누군가 들려 준 것 같은 배즙이나 홍삼 정과가 들려 있었다. 마치 내조라도 받고 있는 것처럼.

결정적으로 박 팀장은 현관 안에 선 기다란 그림자가 석희재의 뺨에 키스를 해 주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었다. 게다가, 이현이 게이라는 소문이 한 번 수면 위로 떠올랐었다. 추론은 너무나도 쉬웠다.

박 팀장이 알고 있던 ‘이 PD’와 ‘석희재와 목하 열애 중인 업계 바깥의 이현’의 갭이 너무나도 커서 당황스러울 때가 종종 있었으나…. 언제부터인지는 몰라도 석희재는 이현에게 완전히 넘어간 것이 틀림없었다.

‘대체 왜?’

박 팀장은 혼란을 느꼈다. 그에게 이현은 수많은 거래처 직원 중 하나일 뿐이었다. 어머니 앞에서도 감정적으로 군 적이 없던 석희재의 이성을 흐리게 만들 정도로 유일하고 독특한 인물인가, 그는 도무지 납득이 어려웠다. 소속 배우의 사생활은 캐묻지 않고 도리어 감춰 주는 것이 제 본분이라고 생각해 왔던 박 팀장은 처음으로 그 철칙을 깨고 싶어졌다.

“희재야. 나 너 같은 애들 많이 봤다. 근데 분명히 후회해.”

“왜요. 헤어져서요?”

“그래. 연애라는 게 다 한때인 거고. 어차피 나중에는,”

“저는 나중에도 안 헤어질 건데.”

석희재의 막연한 말에 박 팀장은 할 말을 잃었다.

“너 생각이 너무 어리다.”

그리고 박 팀장의 말에 석희재는 속으로만 조심스레 생각했다. ‘꼰대 같은 발언’이라고.

물론 석희재도 알고 있었다. 제 발언은 사랑이 전부인 줄로만 아는 철없는 스물두 살짜리가 제 애인을 싸고도는 말로 들리리라는 것을.

석희재는 그냥 눈을 내리깔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침묵이 이어지자 박 팀장은 공연히 미안해했다.

“기분 상했니?”

“괜찮아요. 전 실제로 어리니까요.”

석희재가 고분고분 대답하자 박 팀장은 난처해하며 제 배우를 달래려 들었다. 그가 그렇게 나올 줄 알았기에 석희재는 조금 더 시무룩한 척을 했다.

“제가 왜 배우가 됐는지 아세요?”

“글쎄? 이유가 있나. 하고 싶은데, 할 수 있으니까 한 거 아니야?”

석희재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순전히 이현에게 접근하고 싶어서, 그의 바운더리 안에 들어가고 싶어서 데뷔를 결정했다. 회사 사람들이 데뷔의 이유로 알고 있는 ’어머니의 인정‘ 같은 것은 오히려 부차적인 문제였다.

석희재는 새삼 올봄의 일을 떠올렸다. 그때 상사병을 끙끙 앓던 자신은 이현이 제게 찾아와 무릎 꿇고 배역을 부탁하는 상상을 해 댔었다. 그런 그에게 이현의 부탁은 그 어떤 대단한 시나리오보다도 더 엄청난 기회였다.

이현과 함께 일할 수 있는 기회, 또 그의 마음을 살 수 있는 기회.

“피디님이랑 일하고 싶어서예요.”

“에이.”

박 팀장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 말을 믿지 않는 티가 역력했다.

“말이 되냐.”

“왜 말이 안 돼요.”

“알았다. 그렇다고 해. 그럼 이제 너도 시야를 좀 넓혀 봐. 괜찮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뻔한 설득의 말도 잊은 채 석희재는 그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여전히 그는 이런 반응에 사소하게 충격받곤 했다.

사랑이 대체 어떤 식이어야 진지하게 여겨질는지 모를 일이다. 자신이 처음 이현과 만났을 때처럼 아무것도 아니었다면, 일곱 살 연상인 누군가를 동경하고 짝사랑하는 걸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데뷔를 마음먹고 신인 배우로서의 커리어를 시작하는 순간 세상이 전복하는 것에 비견할 만한 충격이 덮쳤다. 저에 대한 평가는 나날이 달라져 갔다.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석희재에게 어울릴 만한 급의 인물들을 짝지어 주려 들었다.

이현은 누구보다도 이런 생리를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끝끝내 자신감을 가지지 못하던 것도 가슴 아플 정도로 이해가 되었다.

하지만 석희재는 여전히 이현을 사랑하는 스무살 그때의 마음 그대로 제자리에 서 있었다.

어찌 보면 이현이 석희재의 중심을 붙잡아 주는 추였다.

아무튼 석희재는 더 이상 어리다거나, 시야가 좁다든가 하는 일방적인 말을 듣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여기서 화제를 마무리 짓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팀장님. 참 이상한 게….”

“…….”

“결혼한 사람에게는 이혼을 전제로 이야기하면 무례한 거잖아요.”

“…….”

“그런데 왜 연애는 아닐까요.”

석희재에 말에 박 팀장은 잠시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의 눈이 짧게 마주쳤다. 석희재의 눈이 조금 전과는 달리 단단했기에 박 팀장은 조금 멈칫했다. 잠시 후 그는 석희재가 에둘러 ‘무례하다’고 말한 것을 알아들었는지 이내 사과했다.

“방금 한 말들은, 사과할게. 내가 선을 넘었다.”

“…감사합니다.”

석희재는 조금 안도했다.

“그럼 이해해 주시는 거죠. 저 연극하는 거.”

딱 좋은 타이밍에 쐐기를 박자 박 팀장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석희재는 무언을 수긍의 의미로 알아들었다.

애초에 ‘허락’이 아니라 ‘이해’를 구하는 것이었다. 석희재는 박 팀장에게 ‘작품 검토에 있어서는 배우의 의사를 일 순위로 한다’라는 계약 조건을 굳이 상기시키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둘 사이는 비즈니스 관계가 맞지만 왜인지 계약서에 관한 이야기를 꺼내면 관계가 경직되고 만다. 함께 일하는 사람과 불편해지고 싶지는 않았다. 그게 제 안에 남아 있는 유교적인 부분 때문일지라도… 그쪽이 훨씬 마음이 편했기 때문이다.

원하는 것을 얻어 내고 마음이 너그러워진 석희재는 더욱 유순한 어조로 말했다.

“제가 무작정 고집부리는 건 아니에요.”

“이미 충분히 부렸거든.”

박 팀장이 한숨을 쉬었다. 석희재는 작게 미소 지었다.

“영화감독님이나, 드라마 작가님이나. 직접 제안 주셨다면서요. 그러면 협상의 여지가 조금이나마 생긴 거 아닐까요. 영화 같은 건 제 촬영을 전반, 아니면 후반 일정으로 몰아서 찍는다거나….”

박 팀장은 석희재의 배짱에 짧게 혀를 찼다. 이치에 맞는 말이지만 어느 누구도 그렇게는 생각하지는 않는다. 간절할수록 말이다.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의 태도가 도리어 석희재에게 여유를 가져다주었다.

“그리고 드라마는 아직 편성도 안 된 거니. 운 나쁘게 셋 다 겹칠 가능성은 희박할 것 같고요.”

“…….”

“또 무엇보다도… 그런 배역은 저 아니더라도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많을 테지만.”

“…….”

“피디님 대본은 아니에요.”

“…….”

“저는 저 아니면 안 되는 일을 하고 싶어요.”

결국 박 팀장은 완전히 항복했다. 애초에 제 뜻대로 되리라고 생각은 했던 석희재 역시 매니저의 허가가 떨어진 순간만큼은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럼 나도 대본 한 부 보내 줘라. 어떤 건지 보기나 하게.”

“…마음에 드실걸요.”

석희재는 씩 웃으며 간만에 제 나이다워 보이는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며칠 후, 대본을 검토한 박 팀장이 혀를 내두르며 전화를 걸어왔다. ‘마음에 드실걸요’라고 말한 순간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했던 석희재는 안절부절못하는 박 팀장의 반응을 그저 즐겼다. ‘이 역할은 안 되겠다’, ‘너 진심이냐.’ 하며 박 팀장은 어쩔 줄을 몰랐다.

- 너 진짜 겁도 없다. 이런 역은 데뷔하고 한 십오 년 차에, 연기파 배우로 자리 잡은 다음에 이미지 변신을 꾀할 때 해야 되는 거 아니냐?

“음, 십오 년 후에 하면 덜 예쁠 것 같은데요.”

석희재는 꿋꿋이 제 의견을 밀어붙였다.

- 농담이야, 진심이야? 아무리 마이너 해도 이건 안 돼. 여장이라니…. 너무 리스크가 크잖아!

박 팀장은 이미지 소모가 빠를 것이고, 이런 연기는 아무리 잘해도 본전이라며 한숨을 푹푹 쉬었다.

물론 석희재 역시 최초 대본을 읽었을 때 적잖은 충격을 받았었다.

그가 맡은 역은 범죄자이자 마약 중독자, 지독한 알코올 중독에 성 도착증을 가진 인물이었다.

만약 사람의 인생을 그래프 위에 뿌려 놓을 수 있다면 석희재와 완벽히 대척점에 있는, ‘이해할 수 없는 삶을 사는 인물’이라 말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석희재는 이현의 선택을 믿었다. 이현은 본능적인 감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그가 아무 이유 없이 이 대본을 고르지는 않았을 거라고 믿었다. 이현은 석희재의 매력이나 셀링 포인트를 본능적으로 잡아 낼 줄 알았다.

더해서 석희재는 이현이 사랑하는 자신이 그저 잘생기기만 한, 지루한 미남이 아니라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조금 덜 다듬어진 듯한 거친 면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건 회사와 자본의 힘으로 잘 포장하면 쉽게 극복할 것이다.

이현은 흰 종이 위에 늘어놓은 단조로운 글자를 가지고 가장 섹시한 구상을 해낼 줄 아는 사람이다- 라고 말하는 것은 다소 젠틀한 은유이다.

속된 말로 이현은 어떻게 하면 꼴리는지를 무척 잘 알고 있었다.

“힐도 신어야 한다고?”

둘만의 대본 리딩 직후 이현은 이미지를 보고 싶다며 소품까지 가져왔다. 난색을 표하는 석희재의 앞에서 이현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좀 우스울 것 같은데.”

“신어 봐. 사이즈 맞아.”

이현은 석희재에 앞에 거대한 사이즈의 힐을 내밀었다. 새빨간 에나멜 힐에서는 싸구려 광택이 났다. 그가 시킨 대로 시험 삼아 발을 넣어 보자 흰 발등 위로 핏줄이 튀어나와 조금 우스꽝스러웠다. 아무리 피부가 희게 곱게 생겼다고 해도 분명한 남자의 발과 발목이다.

그러나 이현은 그게 좋은 거라면서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어차피 아무도 너한테 진짜 여자 같은 모습은 기대 안 하거든.”

“그럼?”

“그냥 남자가 힐을 신은 게 보고 싶은 거야.”

그렇게 말한 이현은 그대로 석희재의 앞에 무릎을 꿇고 드러난 발목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애무와도 닮은 듯한 갑작스러운 스킨십에 석희재는 마른침을 삼켰다.

한쪽 무릎을 꿇어앉은 이현이 꽤나 정중한 자세로 석희재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게 왜, 왜 보고 싶어?”

눈이 마주친 순간 석희재는 얼떨떨한 얼굴로 조금 멍청하게 물었다.

이현이 삭 입술을 말아 올리며 미소 지었다.

“꼴리니까.”

그 말에 심장이 세차게 두근거리는 것도 잠시, 석희재는 순식간에 이현에게 덮쳐졌다. 힐을 신고 걷는 것에 전혀 트레이닝이 되지 않은 석희재는, 음성이 되어 나오지 않는 짧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졌다. 겨우 소파를 팔로 짚은 채 주저앉자, 한술 더 떠서 이현은 석희재의 입술에 번지도록 립스틱을 죽 그었다.

“뭐야?”

석희재는 다시 한번 멍청하게 물었다. 더러워진 뺨을 붙잡자 손끝에 빨간 립스틱이 묻어났다. 이현은 석희재의 몸 위에 올라타 다리로 단단히 허리를 옭아매고 있었다. 립스틱을 이리저리 살펴보던 이현이 답했다.

“음, 이건 하지 말까.”

“…형.”

“너는 원래 입술 색이 더 예뻐.”

그렇게 말하며 이현이 허리를 굽혔다. 눈앞으로 그림자가 드리워지며 제법 진지한 눈빛의 이현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고개를 기울이며 곧바로 깊은 각도로 입을 맞춰 왔다. 그는 아마도 마지막까지 눈을 뜨고 있었던 것 같다. 순순히 입을 벌리자마자 입천장을 노골적으로 쓸어 가는 뾰족한 혀끝에 석희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기습적인 자극에 절로 몸이 떨려 왔던 것이다.

동시에 이현이 입 안으로 쿡쿡 웃는 것이 느껴졌다. 그가 제 몸을 타고 있어 도무지 반응을 숨길 수가 없었다. 이제는 더 이상 첫 경험을 할 때처럼 서툴지도 않은데 별안간 그때가 떠올라 석희재는 부끄러움을 느꼈다.

이현은 석희재의 목덜미부터 턱까지 크게 쥐고 열렬히 입을 맞췄다. 호흡까지 모조리 앗아 가는 키스였다. 키스 도중 이현은 엄지로 석희재의 뺨을 험하게 문질렀다.

“형, 손 더러워져.”

키스 사이 잠깐 호흡을 보충하기 위해 입술이 떨어졌을 때 석희재는 숨을 헐떡이며 급히 말했다. 이현은 여전히 아주 가까운 곳에서 제 얼굴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석희재는 이현의 팔을 다정히 어루만지며 쓸어내리다가 그의 손을 쥐어 확인했다. 아니나 다를까 이현의 손가락에 덕지덕지 붉은 물이 들어 있었다.

“더 더러워져도 상관없어.”

“응?”

“묻는 게 땀이나 정액이라도 상관없을 정도로… 섞이고 싶을 때가 있잖아.”

이현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는 설탕으로 구운 도자기 같은 흰 뺨에 얼룩이 지자 더 흥분된다며 다시금 깊이 키스해 왔다. 혀를 내어 접촉하는 마찰이 평소보다 더 노골적이었다.

석희재 역시 이현이 말하는 감각을 알았다. 제 경우에는 특히 미친 듯이 몸이 달아오른 첫 번째 사정 후에 꼭 그런 기분이 된다. 서로의 몸에 진득하게 배어난 땀의 마찰이 도리어 기꺼워지는 순간이.

“으음….”

이현은 키스의 틈에도 석희재의 단단한 목덜미와 뺨을 끊임없이 어루만졌다. 동시에 탄탄한 배 아래로 엉덩이를 느리게 움직였다. 현이 일부러 신음을 내고 있다는 걸 아는데도 흥분이 되었다. 그가 이런 식으로 키스해 주는 것은 오랜만이어서 석희재는 금세 어쩔 줄 모르고 달아올랐다.

발기한 둔덕 위를 올라타 일부러 느리게 아래를 문지르던 이현은 평상시보다 더 크게 흥분해 있었다. 원래도 밝히는 남자지만, 그가 밑바닥 성욕까지 드러낼 때는 석희재가 감당이 되지 않을 정도로 행위가 노골적인 모양이 된다. 사랑하는 현의 그런 모습은 여전히 볼 때마다 낯설었지만, 동시에 지극히 설레기도 했다.

이현은 어느새 옷을 벗고 날씬한 맨다리로 석희재의 몸통을 꽉 조이고 있었다. 석희재는 땀에 젖어 반들거리는 빛을 내는 이현의 허벅지를 정신없이 훔쳐보다 그 위에 뜨거운 손을 얹었다.

“읏….”

석희재는 입술을 깨물었다. 천이 몇 겹 덜어졌다고 아까보다 닿은 곳의 체온이 더 분명하게 느껴졌다. 더운 습기가 면 사이로 배어드는 듯도 하다.

이현은 일부러 보란 듯이 제 엉덩이를 벌려 틈에 끼운 채로 허리를 흔들었다. 삽입 직전의 마찰을 흉내 낸 움직임을, 석희재는 뚫어져라 주시했다. 석희재는 붉게 물든 눈을 하고 허벅지를 쓸던 손을 그의 등허리 뒤로 가져갔다. 엉덩이 중앙부를 꽉 쥐자 이현이 일부러 낮은 신음을 흘렸다. 뒤가 한껏 벌어졌을 것이다. 다른 손을 가져가 슬쩍 깊은 곳에 손가락을 묻어 보았다. 손끝에 촉촉한 입구가 단 한 마디 꽂히는 것만으로도 석희재는 아플 정도로 발기해 버렸다.

“표정 좋아.”

“혀엉….”

“형, 말고.”

이현이 엄격한 표정을 지어 석희재는 안달이 났다. 그러나 이현이 원하는 것이 당장 그를 힘으로 뒤집어 버리고 박아 주는 것은 아닐 것 같아서, 겨우 욕구를 억눌렀다. 땀이 맺힌 관자놀이를 쓱, 손등으로 닦으며 차분히 되물었다.

“그럼?”

석희재는 이현이 꾸미는 장면을 알고 싶었다. 이건 이현이 자신에게 때려 주기를 주문하던 때처럼 일방적인 요구도 아니었고, 자신이 이현을 낯선 방식으로 다정하게 안아 울리는 것과도 달랐다. 각자의 취향이 아닌, 서로를 향해 발동한 새로운 합치라고 봐도 좋을 것이었다. 석희재의 가슴이 기대감으로 두근거렸다.

“‘개자식아, 벌려.’”

충격받은 석희재의 입이 벌어졌다.

“라고 말해 봐.”

그러나 덧붙여진 이현의 말에, 겨우 그것이 대본 속의 제 역이 할 법한 대사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럼 벌려 줄게.”

석희재는 이현에게 간청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동시에 욕을 하고 싶기도 했다. 막 지독한 대본을 읽다 와서 그 배역에 약간은 물들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전혀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분노가 치밀었다. 석희재는 그것이 ‘분노’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목덜미까지 열이 오르는 게 성욕 때문이라고는 생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현을 어떻게 하고 싶어 미칠 것 같은 감정만 남는다면, 그래서 그렇게 행동해 버리고 만다면… 그건 너무나 짐승 같으니까.

“젖었네?”

이현이 슬쩍 아래를 짓누르며 말했다. 석희재가 질금 흘린 프리컴의 흔적을 말하는 것이었다.

“…나 넣고 싶어.”

석희재는 간절하게 말했다. 이현의 뒤에 닿은 손가락 끝이 딱 한 마디 정도만 애타게 들어갔다. 그 손목을 탁, 때리며 이현이 고개를 저었다. 원망스러워 욕이 치밀었다. 석희재는 눈썹을 누그러뜨리는 대신 치켜올린 채 짓씹듯 내뱉었다.

“…개자식아.”

“하하!”

“뒤나 벌려.”

그 순간 석희재는 이현에게 단숨에 멱살을 잡혀 허공으로 반쯤 딸려 올라갔다.

웃음기를 싹 지운 이현은 정색한 얼굴이었다.

아직 경험이 일천한 석희재는 이현의 아래서 작살을 맞은 사슴이라도 된 듯 헐떡이며 그를 올려다볼 수밖에 없었다.

‘설마 내가 진짜로 욕을 해서?’

일을 저지른 어린아이의 마음으로 두근거리는 석희재에게, 이현은 나직하게 속삭였다.

“네가 이렇게 끝까지 몰려서, 엉망이 된 모습을 어디 가서 볼 수 있겠어.”

“…….”

“내 상상이 맞았어. 이건 연극이어야만 돼. 화면 같은 걸 거치지 말고 두 눈으로 봐야 된다고.”

“…….”

“희재야. 너 지금 진짜 꼴려.”

그러면서 이현은 잇새로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올려다본 그의 검은 동공이 흥분으로 확장되어 있었다. 자신만 흥분한 것이 아니다. 이현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인 것이 바로 지금의 제 꼴이었다. 이현은 힐이 반쯤 걸린 흰 발목과 아무렇게나 벌어진 셔츠의 틈, 땀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립스틱이 번진 뺨을 차례로 훑었다.

“끝내줄 거야.”

이현은 중얼거렸다. 아마 그가 말한 것은 대중에게 제 이런 모습을 보여 주는 순간을 예고한 것일 테다. 그 순간 석희재는 조금 다른 것을 생각했다. 이현에게 섹시하게 보인다면 다른 이들의 눈에도 틀림없이 그럴 거라고. 그리고 지금부터 아마 끝내주게 섹시한 섹스를 하게 될 거라고도….

이현은 제 주문에 응한 석희재의 바지를 그제야 벗겨 주었다. 전희도 필요 없도록 달아오른 것은 석희재뿐만이 아닌지, 이현은 배에 닿도록 빳빳한 각도를 그리고 있는 석희재의 것을 대충 손으로 두어 번 거세게 주무르더니 그대로 제 뒤에 꽂았다. 좁은 입구를 파고들어 안까지 쑥 미끄러졌을 때 석희재는 사정할 뻔했다. 막 허리를 움직이려는 이현의 어깨를 콱, 붙잡고 감은 눈을 파르르 떨었다.

“멈춰.”

“응?”

“지금 움직이면… 나 가.”

가도 상관없지 않나. 이현이 중얼거렸다. 그러면서 움직이지 말아 달라는 요구를 무시하고 도리어 뒤를 조였다. 석희재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면서 반대로 이현의 뒤를 양손으로 콱 잡아 벌렸다. 허공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멈춰 있던 그 순간 성감대가 아닌 곳까지 죄다 저려 올 지경이었다.

석희재가 얕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하고부터는 이현이 헐떡거리기 시작했다. 뒤를 조일 수도 없이 벌어진 채로 큰 것이 파고들었다가 찰박이며 빠져나가는 감각이 기묘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 손, 하지… 마. 제발.”

“왜? 난 이게 더 좋은데. 삽입도 쉽고….”

그 말에 이현은 귀를 붉히며 석희재의 어깨에 이마를 쿵, 박듯이 가져다 댔다. 물론 그런 의도는 아니겠지만, 마치 ‘뒤가 헐렁하다’고 말하는 것 같아 뼈아팠다. 사실 뒤를 조이겠다고 용을 써도 이미 빠듯한 질량감 때문에 잔뜩 벌어져 있는 터라 무의미했다.

결국 이현은 다시금 눈앞에 있는 남자의 얼굴에 집중하기로 마음먹었다. 그 곱상하게 잘생긴 얼굴에는 어울리지 않는 붉은 화장의 잔해가 남아 있었고, 이를 꽉 물어 턱에는 힘이 잔뜩 들어갔다. 어딘가 망가진 것 같은 거칠어진 모습이 무척 섹시했다. 그 너머를 보고 싶어질 정도로.

“음… 잠시만.”

이현은 제 허리를 쥐고 있던 석희재의 손을 떼어 냈다. 허리에 붉은 손자국이 남을 정도로 꽉 쥐었던 악력은 손짓 한 번에 순순히 떨어져 나갔다. 그런 석희재를 흘끔 바라본 이현은 자세를 바꾸어 뒤돌아 앉았다. 석희재는 등을 보인 이현에게 약간의 아쉬움을 느끼며 그의 등을 어루만졌다. 이현은 석희재의 성기를 쥐고 제게는 보이지도 않을 뒷구멍에 능숙하게 조준하더니 커다란 것을 무리 없이 삼켰다. 석희재는 제 바로 눈앞에서 그의 작은 엉덩이와 늘씬한 허리로 완전히 사라지는 거대한 성기를 바라볼 수 있었다.

흠뻑 젖어 번들거리는 핏줄 선 성기가 이현의 순결해 보이는 흰 허리로 꿀럭, 꿀럭 몸을 숨겼다. 등줄기가 옴폭 파인 흰 등은 그간의 수많은 경험은 짐작할 수 없이 희고 깨끗해서, 마치 자신이 이현에게 몹쓸 짓을 하는 것처럼만 보였다. 새삼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하아….”

그렇게 완전히 석희재의 치골 위로 내려앉은 이현은 예상과 달리 괴로워하기는커녕 충만한 한숨을 내쉬었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이현의 등허리를 살살 더듬었다. 이현은 그 손길에도 아랑곳 않고 석희재의 양 허벅지를 짚으며 엉덩이를 치켜올렸다. 그리고는 다시 깊숙하게 삼키기를 반복했다. 철퍽, 철퍽, 속도가 점점 빨라지자 결합도 덩달아 깊어졌다.

“음, 흐응… 아아….”

“흣… 윽.”

만족스럽고 느린 신음을 내뱉는 이현과 다르게 석희재는 머리가 지끈거리도록 신음을 눌러 참았다. 그가 충동질하는 대로 신음을 내뱉었다간 목이 쉬어 버릴 것이다. 심지어 이현은 완전히 석희재의 것을 삼켰을 때, 꾹 눌러앉으며 음모가 제 아래에 닿도록 비비기까지 했다. 혼자 노는 것이 꼭 저를 딜도로 쓰는 것 같았다.

숨을 몰아쉬면서 석희재는 관자놀이에 핏줄이 서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화가 나서가 아니라, 흥분을 참기 위해서. 한때 이현에게 사람을 딜도로 쓰면 안 된다고 충고했던 장본인은 이 시점에서 이런 식이라면 평생 이현에게 ‘사용’당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하고 만다.

사실 그 차이를 나누는 것은 사랑에 대한 확신뿐이었다.

“으음, 희재야. 더 빨리… 빨리, 하고 싶은데. 나 이제 다리에 힘이….”

그렇게 말하며 이현은 석희재의 위로 푹 주저앉았다. 무리한 것은 사실이었는지 그의 허벅지가 가늘게 벌벌 떨리고 있었다. 돌아보는 긴 눈매까지 묵직하게 석희재의 심장을 때렸다.

결국 끝 간 데 없이 충동질당한 석희재는 어느 순간 눈앞이 새까맣게 물드는 기분을 느끼며 급하게 상반신을 일으켰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현이 제 아래 엎어져 울고 있었다. 아마도 방금 전의 그 감각이 바로 사람들이 핀이 나간다, 이성의 끈이 끊어진다고 표현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라고 석희재는 희미한 이성으로 생각했다.

“읏, 희… 재. 희재야, 희재야!”

이현이 저를 부르는 신음이 다급해졌다. 뒤가 격렬하게 맞부딪쳤다. 이현의 엉덩이가 마찰에 새빨갛게 물들도록. 이현이 말했던 ‘섞이고 싶은 감각’을 전신으로 느끼며 석희재는 이현의 상반신을 단단히 몇 번이나 고쳐 안았다. 그의 목덜미에 애타게 코를 파묻고 신음을 참지 않았다. 석희재가 배 속부터 끓는 신음을 내뱉으면 이현의 목덜미에 오소소 솜털이 섰다.

이현의 울음 섞인 신음마저 의도된 것이라는 것을 아는데도, 그런데도 그런 사람이라 더 좋았다. 이현이 이런 섹스를 할 수 있는 남자라서 좋았고 자신에게 평생 불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영역의 쾌락을 알려 주어서 좋았다. 자신이 모르던 본능을 일깨워 주어 좋았고, 없던 모습을 끌어내 주어 고마웠다.

“원래 외모랑은 조금 상반된, 그런 게 있어야 사람이 매력적이거든.”

진탕 몸을 섞은 뒤에 나른해진 채로 얽혀서 이현은 담배를 입에 물었다. 소다 맛 아이스크림의 향이 공기 중에 달콤하게 퍼졌다. 석희재는 그가 뿜어내는 연기마저 사랑스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바로 앞에 있는 이현의 어깨에 입술을 묻고 쪽, 짧게 키스했다.

이현이 손에 들고 있는 전자 담배는 최근 석희재가 준 선물이었다. 섹스 후 담배를 태우기 위해 금세 침대를 벗어나는 애인이 아쉬워서 새로 장만한 것이다. 새집으로 이사 오며 희게 도배한 벽을 담배 연기로 더럽히기 싫어하는 이현은 이 선물을 제법 애용하고 있었다.

“예상되는 거랑 다른 매력과 마주칠 때….”

“나는 어떻게 예상되는데?”

석희재는 이현의 평이 궁금해 새삼 캐물었다. 이현은 석희재를 흘끔 바라보더니 뺨을 다정히 어루만졌다.

“도시의 엘리트처럼 보이지.”

“나 엘리트 아닌데.”

“음. 대학 나왔잖아.”

아무 말이나 하는 이현이 귀여워 석희재는 소리 없이 웃었다.

“아무튼. 그런데 사실 사람 외모와 성격이 일치하지 않잖아. 정치가의 얼굴을 한 살인자도 있는 거고, 조폭 두목의 얼굴을 한 신부님이 있을 수도 있는 거….”

“맞아. 형도 의외로 귀엽고.”

그 말에 이현이 홱 고개를 돌렸다. ‘귀엽다의 반대가 뭔데’라고 따져 묻는 듯한 눈을 모른 척하며 석희재는 이현의 머리카락에 입술을 묻었다. 이렇게 귀엽게 반응할 줄 알고 일부러 한 말이니까.

“내 생각에 네 안에는 너도 모르는 모습이 많이 있어.”

석희재는 수긍했다. 지금까지 어머니와 같은 타인의 노골적인 욕망을 우선시하며 살아온 것이 사실이니까. 영향이 있었을 것이다. 스스로도 자신은 별로 취향이 없다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취향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

“그래서 나는 네가 모르는 너를 많이 발굴하고 싶거든.”

이현의 결론은 깔끔했다. 석희재는 깊은 신뢰로 고개를 끄덕였다.

“난 너 믿어.”

스스로가 유일하다고 느낀 것도 이현을 사랑하고 나서부터다. 그를 사랑하면서 지금의 자신으로 완성되어 왔다. 아마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래서 석희재는 박 팀장을 말로 설득하는 것은 조금 뒤로 미루었다. 그는 비교하자면 ‘지루한 미남 석희재’를 가늘고 길게 셀링 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니까. 엔터계에서 일한다는 것을 제외하면 무척 평범한 남자인 박 팀장에게 이현만큼의 상상력을 요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상이 가능하다면… 그것도 좀 꺼려지는 일이었고.

어차피 직접 보지 않으면 모른다. 그러니 박 팀장도 보고 나서 판단해야 할 것이다.

석희재는 이현이 변주해 낼 자기 자신의 또 다른 모습들을 무척 기대했다.

자신은 평생 이현의 재료로 쓰일 것이고,

이현은 평생 자신을 주연으로 쓸 것이다.

그 무엇보다 의미 있는 일이었다. 완벽한 조각이었다.

***

이현은 직접 몰고 온 마세라티를 주차장에 그려진 흰색의 사각 박스 안에 단번에 꽂아 넣었다. 빠르고 과감한 핸들링, 부드러운 속도 조절, 그리고 마지막에 살짝 핸들을 풀어 주며 각도를 맞추는 것까지, 선과 완벽한 평행을 이루는 흠잡을 데 없는 주차였다.

이어 시동을 끈 차 바깥으로 청바지에 감싸인 길고 늘씬한 다리가 빠져나왔다. 멋진 것은 딱 거기까지로, 몸을 엉거주춤 바깥으로 뺄 때에 머리에 푹 눌러쓴 캡 모자가 차 천장에 걸려 뒤로 휙 넘어갔다. 게다가 생각보다 낮은 차체 때문에 다리를 펴고 일어날 때 무릎에 부하가 걸렸다. ‘아이고, 내 도가니.’ 속으로만 끙, 하고 앓으면서 이현은 차 문을 탁 닫았다. 나와서 확인해 봐도 역시 약간의 오차도 없이 주차가 잘 되었다.

“이걸 희재가 봤어야 되는데.”

이현은 아쉽게 중얼거리며 반쯤 벗겨진 모자를 다시 눌러썼다. ‘형이 이 차를 모는 게 보고 싶다’고 귀여운 소리를 해 대던 애인은 새벽 댓바람부터 웹 드라마 추가 촬영에 끌려갔다. 콜 시간이 다가왔으니 아마 잠시 후 회사 밴에 실려서 이곳으로 올 것이다.

그가 도착한 곳은 공연 종료 2주를 남긴 극장의 주차장이었다. 이현은 출연자들이 드나드는 뒷문을 보고 짧은 한숨을 내쉬고는, 주차장을 성큼 가로질러 그곳으로 다가갔다.

‘형은 죄인이 아니잖아. 못 올 이유가 없어.’

석희재는 이현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당연한 소리를.

이현은 분장실로 이어지는 철문을 어깨부터 팔꿈치까지를 붙여 힘있게 밀어젖혔다. 물림이 뻑뻑해 힘으로 열어야 할 때가 많은 문이었다.

분장실로 이어지는 긴 복도 안쪽은 아직 한가했다. 마침 정수기를 갈고 있던 앙상블 한 명이 이현을 발견하고 눈을 크게 떴다. ‘피디님, 안녕하세요!’ 밝게 인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현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컴퍼니 룸으로 향했다. 마주침은 쉽고 짧았다. 중간중간 마주친 이현을 반기는 사람들의 태도는 딱 거기까지였다.

아무튼 석희재는 이현이 극장에 오지 않았던 이유를 무어라 생각했는지 몰라도 위로하려 애썼다.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귀여운 놈. 이현은 속으로만 생각하며 입술을 축였다. 제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다정하게 말하던 석희재의 눈에 아마도 자신은 상처받은 어린 양처럼 보였나 보다. 석희재 앞에서 눈물을 한두 번 짠 게 아니었으니 그의 눈에 이현이 불면 날아갈 민들레 홀씨처럼 보일 법도 했다.

하지만 이현이 생각하기에 회사에서 잘린 건 상처받을 일이 아니라 분노해야 할 일이었다.

그리고 오지 못한 건 다른 이유보다도 그냥 오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의 정체에 대해 파고들어 본 적은 없으나 80% 정도가 울분과 짜증이라는 것만은 알았다. 하지만 석희재는 ‘가녀린 마음에 상처를 입은 것’으로 오독한 모양이다.

그래도 그가 끼고 있는 색안경이 나쁘지는 않았다. 누군가에게 한없이 나약하고 귀중한 존재로 보이는 경험은 난생처음이라 묘하게 설레기도 했다.

게다가 남의 회사, 그것도 기밀이 오가는 출입 제한 구역에 목적 없이 오가는 것도 처음 해보는 일이고….

심지어 이제는 본격적으로 제 공연을 올릴 마음을 먹고 있었으니 이현의 신분은 산업 스파이가 맞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은 차 키를 흔들며 보무도 당당하게 컴퍼니 룸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컴퍼니 룸 특유의 냄새가 났다. 모든 극장의 백스테이지는 신기하게도 같은 냄새를 가지고 있었다.

허리에 손을 짚고 내부를 한 바퀴 둘러본 이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막내 때부터 컴퍼니 룸에 가지고 다니며 애용하던 매트리스였다. - 회사에서 사 준 것이라 개인적으로 챙기지는 않았다. - 그다음으로는 키만 한 높이로 쌓여 있는 가두 부착용 포스터가 보였다. 이현은 그중 석희재의 것을 찾았다. 실물보다 더 큰 석희재의 얼굴이 선명한 화질로 담겨 있었다. 샤픈을 얼마나 먹였는지 속눈썹의 결이 다 보였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물욕이 생겨 대여섯 장을 더 집어서 둘둘 말아 고무줄을 끼웠다. 집에 가서 붙여 놓으려고.

그때였다. 컴퍼니 룸의 문에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울렸다.

“피디님… 아니,”

문을 열며 들어온 것은 신아름이었다. 이현은 뭔가를 들킨 사람처럼 놀라며 뒤돌았다.

“이제 뭐라고 불러야 돼요. 제작자 선배님? 대표님?”

“에이. 사업자도 안 냈는데 무슨 대표야.”

신아름이 이현의 손에 말린 포스터를 자꾸 보려고 해서 이현은 신경이 쓰였다.

“그냥 오빠라고 해.”

이현이 툭 던진 말에 신아름은 입을 턱, 가리며 놀랐다. 그 얼굴에 이현의 눈도 덩달아 조금 커졌다. 이현은 자신이 짐작하지 못한 부분에서 어떤 무례를 범했는지 고민하며 뒤늦게 쩔쩔맸다.

“미안. 내가 오빠 소리 듣고 싶어서 그런 거는 아니고….”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 피디님은 제가 입사할 때부터 피디님이었는데 막 부른다니까 적응이 안 돼서….”

“아, 그런 거야? 불러… 부르면 되지, 뭐.”

이현은 멋쩍게 모자를 고쳐 썼다. 생각해 보면 자신도 막내 시절에는 배우들을 직접 컨트롤하고 굵직한 직함을 가진 관계자들과 미팅을 하러 나가는 피디들을 까마득한 존재로 봤던 것 같다. 너무 바쁘고 힘들어 여기까지 오는 과정은 눈에 보이지 않았는데 어느새 자신이 그 자리에 있다는 것이 여전히 실감 나지 않았다.

사실 이 일이 대단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그땐 왜 그렇게 특별하게 보였을까.

이현은 그 이유를 요즘에야 깨달아 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남이 시킨 일이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물론 충분한 책임감을 가지고 일했지만 한 공연이 올라가고 나면 무대 위에서 지워지고 마는 제 존재에 허무함도 많이 느꼈다.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돌아가는 과정에서 그동안의 이현은 윤활유 역할을 했다. 사이사이 스며들어 모든 것이 움직이도록 도와주고 난 후, 흘러 사라져 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자신은 기름때만 잔뜩 낀 폐기물이 된 것만 같았다.

“그럼 음, 이, 이현 오빠-.”

“아! 어색하다, 어색해.”

신아름의 부름에 이현은 저부터가 어색함을 참지 못하고 몸부림을 쳤다. 주변에 어린 여자 동생들을 둘 만한 환경에 처해 본 적이 없어 오빠 소리가 영 이상하게 들렸다. 이현의 반응에 도리어 즐거워진 신아름이 큰 소리로 웃으며 ‘오빠!’ 하고 또 한 번 외쳤을 때였다.

벌컥, 문이 열렸다.

“두 분 뭐해요?”

문 끄트머리에 닿을 정도로 장신을 뽐내는 존재감이 문가에서 어른거렸다. 문을 등 뒤로 닫으며 컴퍼니 룸으로 들어온 것은 석희재였다.

이현은 새벽에 밴으로 실려 갈 때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석희재를 저도 모르게 촉촉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새까만 머리카락의 윤기가 잘 보이도록 흐르듯이 세팅한 머리와, 메이크업의 흔적이 남은 얼굴이 마음에 들었다. 가까이 가니 훅 끼치는 시원한 향수 냄새도 풍겼다. 석희재가 직업 연예인으로서의 스스로를 아직 낯설어하는 것과 달리, 이현은 석희재의 그런 모습을 무척 좋아했다.

“빨리 왔네? 늦을지도 모른다더니.”

이현이 실실 웃으며 가까이 다가가는 사이에 신아름은 조용히 컴퍼니 룸을 나갔다. 예의 바르게 석희재에게 고개를 숙이며. 이현에게 살갑게 대했던 것과 달리 아직 어려운 배우 상대로는 공적인 거리감을 지키는 태도였다.

석희재는 그녀의 정수리에 잠시 시선을 주다가 함께 고개를 숙였다. 문이 닫혔다.

“희재야.”

둘만 남게 되자 이현이 석희재에게 폭 안겨 왔다. 캡 모자의 끄트머리가 석희재의 턱을 건드려 석희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형이 데려간다는 직원이 저분이야?”

“응. 아름이.”

“정해졌어? 퇴사하셨어?”

“그건 아닌데 다음 달 중에? 작품 하면 홍마 도맡아 할 거야. 앞으로 친하게 지내.”

“…….”

석희재가 대답을 하지 않자 이현이 목덜미에 쪽, 소리 나게 키스를 해 왔다. 향수 냄새가 좋다며 코를 박았다. 애교 섞인 몸짓에 저도 모르게 누그러든 석희재는 허공만 보았다.

조금 전, 분장실 복도를 걸어가던 중 컴퍼니 룸에서 남녀의 간지러운 대화 소리가 들려 혹시나 하며 문을 열었었다. ‘오빠’라고 부르는 소리에 왜 그렇게 울컥했는지 모르겠다. 이현은 게이이고, 둘 사이는 대표와 직원이고, 제 질투가 온당하지 못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니까 사람이 감정적인 동물인 것이다. 석희재는 그렇게 합리화를 했다.

“직원들이 계속 오빠… 형, 그렇게 부르게 둘 거야?”

“응?”

“직함 만들어서 대접 좀 받아.”

이현은 여전히 석희재의 허리를 양팔로 묶듯이 매달려 가슴팍을 붙인 채였다. 그래서 더 단호하게 말할 수 없었던 석희재는 제 본심을 가까스로 포장해 그렇게 말했다.

“대접 안 받아도 괜찮아.”

“…….”

“직함이 중요한가. 내 공연이라는 게 중요하지.”

“…….”

“내가 요즘 그런 걸 느꼈다. 내 인생에 요즘같이 행복한 때가 없어. 다 네 덕분이야. 희재야.”

그렇게 말하는 이현은 진심으로 뿌듯해 보였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말이지만 석희재는 애가 탔다.

“그러니까 이젠 너도 나 형이라고 불러. 연습실에서건, 분장실에서건.”

그 순간 석희재는 퍼뜩 알아차렸다. 자신이 ‘오빠’ 소리에 특히 예민해진 이유를.

지금까지 이현은 모두에게 공평하게 공사 구분을 해 왔다. 상대가 누구든 간에 일터에서는 철저히 간격을 지켰던 것이다. 하지만 앞으로 본인의 공연을 하게 될 이현은, 판에 박힌 영업이 아닌 마음으로 사람을 대하게 될 것이다. 스스로 벽을 허물기 위해 준비하는 이현의 모습이 대견하기도 했지만….

“나는 원래 그렇게 불렀는데?”

석희재는 불만스럽게 말했다.

“그건 그렇네.”

‘내가 다른 사람들이랑 같아?’라는 말을 하려던 찰나, 이현은 석희재에게 가볍게 입술만 가져다 붙이는 키스를 하고는 떨어졌다.

“이제 슬슬 사람들 좀 왔겠지? 넌 분장 받고 있어. 나 한 바퀴 돌면서 인사 좀 하고 올게.”

그러고는 홀가분한 걸음으로 컴퍼니 룸을 나섰다.

석희재는 이현의 뒤를 눈으로 좇았다. 질투는 차치하고, 오랜만에 등장한 백스테이지에서 혹 그가 마음 다치는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분위기는 석희재의 예상과는 퍽 달랐다. 긴 복도 사이사이 열려 있는 분장실, 가발을 진열해 두는 공간, 정수기 앞. 사람이 모이는 곳이라면 이현은 어디든 들어가 태연히 인사를 건네고 대화에 끼어들었다. 오명을 뒤집어쓰고 이곳을 떠났던 이현을 걱정하는 석희재의 마음과는 달리, 많은 이들이 이현을 전과 다름없는 모습으로 대했다.

그 모습이 석희재에게는 퍽 별나게 다가왔다.

“이 피디가 대표되면 나도 캐스팅해 주나?”

“아이, 선배님은 오디션도 없이 무조건.”

이현이 건조하게 입바른 말을 하자 웃음소리가 터졌다. 이현은 씩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하고 사람들 사이를 빠져나왔다.

동시에 석희재는 작은 깨달음을 하나 얻었다.

어쩌면 이현의 철저한 공사 구분법이 그를 보호해 줬을지도 모르겠다고.

그가 언제나 거리감을 유지하며 함부로 선을 넘지 않았기에 타인도 그 선을 지켜 주는 것이다. 서로 감정적으로 얽매이지 않았을 때에 도리어 이현은 사건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었다. 한때 그 틈에 파고들지 못해 원망하고 좌절했던 적도 있었지만…. 석희재는 인정했다. 적어도 백스테이지에서만큼은 이현의 처신법이 현명했다고.

그것을 부수고 들어가려던 제 존재에 이현은 얼마나 당황했을까?

석희재는 배우로서 진행했던 최초의 미팅을 떠올리며 잠시 귀를 붉혔다. 그날 이현의 굳은 표정과 태도를 아직도 생생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때 저는 그런 이현을 보며 당황하기만 했다. 그가 얼마나 놀랐을지, 무슨 마음이었을지 짐작도 하지 못한 채로.

모든 게 미숙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받아들이고, 상처받고, 변화하고, 다시 이 자리로 돌아왔다.

잠시 과거를 되새기며 석희재는 종이컵의 끄트머리를 씹었다. 안도감이 차올랐다.

“피디님 얼굴 좋아지셨다.”

유나연이었다. 석희재는 기대고 있던 분장실 문에서 등을 뗐다.

“요즘에 대관처 알아보신다는데 진짜예요?”

“맞아요.”

“잘됐으면 좋겠다.”

“그렇게 되게 해야죠.”

“뭐야? 소극장 300석 정도는 무조건 채워 줄 수 있다는 자신감인가.”

유나연이 괜히 빙글빙글 웃으며 석희재를 놀려 댔다. 석희재는 말없이 다시 종이컵에 입술을 붙였다. 그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유나연은 석희재의 팔뚝을 찰싹 때렸다. 예고 없이 얻어맞은 석희재는 휘청였다.

2주 전부터 풀린 웹 드라마 때문인지 갑자기 아이돌 못지않은 거대 팬덤이 붙는 상황이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타깃층에서의 인지도를 얻게 되니 그 체감이 엄청났다. 며칠 전에는 공연 후 퇴근길에 갑자기 수백 명이 몰려 주차장이 아수라장이었다. 항상 이삼십 명, 많아도 오십 명 정도에서 그치던 줄이 폭발적으로 느는 바람에, 매니저가 양해를 구하며 밴을 타고 빠져나가야 했다. 개막 이후 퇴근길 인사를 못 한 건 그날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공연 종료도 얼마 남지 않아 석희재의 회차마다 매진 사례가 이어졌다. ‘한 번 간 공연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석희재의 바이올린 연주를 생 귀로 들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라며 2층의 구석 자리까지 싹 다 팔렸다. 총막은 물론이고 평일 낮 공연마저 표를 구하기 어려워졌다. 더해서 꽉 찬 객석 덕분에 배우들 역시 사기가 올랐다. 의외로 분장실의 배우들은 그날그날 객석의 반응에 많이 휩쓸리는 편이다. 다행히 좋은 에너지를 받아 최근 팀 분위기가 무척 훈훈했다.

“그래도 인기라는 게 있다가도 없고, 그런 거라던데요. 연말까지는 반년은 남았으니까. 그전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거고….”

“겸손하기는.”

“극장 사이즈를 늘리기는 할 건가 봐요. 요즘 600석 중극장 알아보고 계세요.”

“정말? 여자 배우는 안 필요해요? 나도 잘할 수 있는데!”

유나연의 말에 석희재는 나직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 순간 복도 끝 계단에서 이현이 다시 모습을 나타냈다. 눈이 마주치자 이현이 씩 웃었다. 복도 끝, 계단 위쪽, 소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는 주연 배우들의 분장실이 몰려 있다. 한지우의 분장실도 그쪽이었다. 이현은 결국 그에게도 인사를 돌리고 온 것이다. 아까처럼 태연하게 허리를 굽히며 인사하는 이현과, 그 앞에서 제 약점이 찍힌 메모리 카드를 상기하며 뻣뻣하게 굳어 있을 한지우를 상상하니….

웃음이 났다. 석희재는 한지우와 대면한 이현을 상상하면서도 웃을 수 있는 스스로가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이현이 하면 모든 일이 그렇다. 그는 모든 일을 쉽게 풀어 버린다. 엉킨 실타래를 가위로 대범하게 뚝 끊어 잘라 버리듯이. 그 역시 석희재에게는 없는 면모였다.

“아, 인사하면서 끝까지 눈을 안 쳐다보더라.”

이현이 투덜거리며 다가왔다. 곁에 있는 유나연에게도 ‘안녕하세요’ 하고 웃으며 인사를 건넨다.

“내가 허리는 숙여도 목은 안 숙여서 그런가. 이렇게 뻣뻣하게 고개를 쳐들었더니.”

석희재는 웃음기가 남은 눈으로 되물었다.

“그리고?”

“오디션 보러 오시라고 했는데, 오실까? 흠… 안 올 거 같지? 가정 폭력범 역할 같은 거 잘 어울릴 거 같은데.”

의도가 숨은 말에 석희재는 겨우 웃음을 참았다. 곁에서 유나연이 이때다 하고 끼어들었다.

“피디님, 제가 할 만한 역할은 없나요?”

“어. 진심이에요? 연극도 관심 있어요? 뮤지컬이랑은 페이가 많이 다른데.”

“그럼요. 피디님!”

“일단 대본 한 번 읽어 보실래요? 아, 그리고 이제 피디 아니에요….”

“아니면 대표님?”

“에이 대표님은 무슨….”

자연스럽게 전화번호를 주고받는 두 사람의 곁에서 석희재는 또다시 무의식적으로 종이컵을 자근자근 씹었다. 이현을 ‘오빠’라고 부를 사람들이 또 하나 늘어난 것 같아서.

***

이현은 얼마 전에 현관 가까이에 방치되어 있던 마지막 이삿짐 박스를 열었다. 실은 그대로 잃어버린대도 알아채지 못했을 세세한 잔살림들이었다. 박스 가장 밑바닥에 깔렸던 전 회사의 클리어 파일을 책장 아무 곳에나 꽂아 넣으니 공식적인 짐 정리가 끝났다. 이제는 더 꺼내고 비울 것이 남지 않았다.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석희재가 없는 빈집이 새삼스러워 이현은 집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실은 반년이고 일 년이고 방치할 수도 있었던 이삿짐을 이토록 빠르게 정리하기까지는 석희재의 공이 혁혁했다. 게다가 제집인데도 어딘가 낯설었다. 소파 커버며 화초, 커튼 색 같은 것들을 석희재가 골랐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집의 많은 부분이 석희재의 취향이었다.

어느새 그와는 반 동거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현은 석희재가 몰래 제집에 스며든 사실을 전혀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다만 조금 다른 관점에서 석희재가 별난 놈이라고 생각했다.

몇 번 들렀던 석희재의 집에 있는 침대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푹신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솜털에 푹 파묻히는 듯했고, 이불은 체온만으로 따뜻해져서 추운 날에도 전기장판 같은 것이 필요 없을 것 같았다. 그런 집을 놔두고 석희재는 피곤에 절어 휘청이면서도 굳이 이 집에 기어들어 와 불쌍하게 몸을 구기고 잤다….

‘새우잠이 취향인가.’

그럴 리가.

아무튼 그게 신경 쓰였던 이현은 나름 서프라이즈 선물이라고 그날 새 침대 프레임을 주문했다. 나갈 돈이 많은 미래 사업자에게는 무척 큰 지출이었다. 결제 직전 손이 머뭇거릴 때에 그를 단호하게 만든 것은, 어깨를 잔뜩 구기고 태아처럼 웅크려 있거나 발목이 매트리스 바깥으로 삐져나가 있던 석희재의 모습이었다. 결국 이현은 마음 굳게 먹고 백이십만 원짜리 새 침대를 샀다.

“왜 쓸모없는 데 돈을 썼어?”

“뭐?”

그러나 집에 돌아온 석희재는 그 소식에 전혀 기뻐하지 않았다.

“그런 건 필요 없으니까 형 피자나 사 먹어!”

삐진 건지 다정한 건지 알 수 없는 일갈이 돌아왔다.

이현은 왠지 쓸쓸한 기분으로 - 반쯤은 안도하면서 - 오늘의 거대 지출을 취소했다.

한참 착잡해 보이던 석희재는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야 조심스럽게 속마음을 내비쳤다.

“내가 성가셔?”

가까운 곳에 있던 얼굴이 힘없이 물었다. 이현은 몰려오는 잠을 밀어내고 눈을 떴다.

“응?”

“내가 이렇게 붙어 자는 게 성가시냐고.”

“음… 아니? 내가 언제….”

제 가슴을 끌어안은 석희재의 손을 찾아 다정히 맞잡으면서 이현은 묵직한 눈을 깜빡였다.

귀여운 놈.

“난 큰 침대 필요 없는데…”

“희재야.”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슨 생각이긴… 내가 언제나 그랬듯이 아무 생각 없었지.”

“나가라고 돌려 말하는 줄 알았어.”

“아냐. 그런데 너 인형 안고 자는 버릇 있어?”

이현의 뜬금없는 물음에 석희재가 눈을 부릅떴다.

“아니?”

“아니면 아닌 거지. 뭘 정색을.”

“어릴 때도 그런 버릇 없었거든.”

“알았어, 알았어.”

“난 항상 이렇게.”

그러면서 석희재는 양손을 가슴 위에 맞잡고 정자세로 누웠다. 이현은 수긍했다. 석희재는 혼자 자게 놔두면 관에 들어가 누운 뱀파이어처럼 가슴에 다소곳이 양손을 올리고 잔다. 처음 그렇게 자는 걸 보고는 그것조차 너무 석희재다워서 얼마나 놀랐는지.

“그런 건 왜 물어?”

“그게….”

아무튼 연하는 연하인 게, 어린 취급을 받으면 다른 것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구나.

라고 말하면 석희재는 억울해 기절하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이현은 속으로만 몰래 생각했다.

“그럼 네가 끌어안고 자는 건 나뿐인가 봐.”

대신 이현이 빙글빙글 웃으며 내뱉은 말에 석희재는 귀를 붉혔다. 아까부터 이어진 대화의 맥락을 이해한 석희재는 그 해석이 싫지 않았는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희재의 매끈하고 뜨끈한 귓바퀴를 매만지면서 이현은 말했다.

“나가라고 산 거 아니거든.”

“그럼?”

“넌 내 마음을 그렇게 모르냐? 그냥 너 불편할까 봐 그런 건데.”

그랬어? 하고 석희재가 누그러진 얼굴로 미소 지었다. 살짝 감격이 차오른 그 얼굴을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카메라 CF였나, 강화마루 CF였나.

“안 불편해. 형이랑 자면….”

그렇게 말하며 석희재는 이현을 꼭 끌어안았다. 팔을 지나 등까지 어루만지는 부드러운 손길, 이어서 틈 없이 맞물리는 포옹의 힘이 무척 따스했다.

“근데 침대까지 사려고 했던 거면.”

“응?”

“나 이 집에서 계속 살아도 되는 거야?”

“상관없는데… 안 좁아?”

“난 좁은 게 좋아. 어디서든 형이 보이니까.”

이번에는 이현의 귀가 확 붉어졌다. 배워서 하는 말이 아니면 대단하다고 이현은 또 몰래 생각했다.

그렇게 미래에 대한 그림이 구체적으로 되어 갈 때쯤 이현은 ‘복수 상대 리스트’를 만들었다. 첫째로 가장 먼저 대표의 이름을 적었고, 둘째로 한지우의 이름을 적었다. 살면서 장기적인 복수를 꿈 꿀만큼 분노를 오래 품어 본 적 없던 성격이기에 이현에게 그런 리스트가 생긴 것은 무척 별난 일이었다.

“어떻게 복수하고 싶은데?”

석희재의 물음에 이현은 고개를 천천히 저었다. 잘 모르겠다는 제스처였다. 그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머리카락이 비벼지는 벗은 팔뚝 안쪽이 간지러워 석희재는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아, 힘주지 말아 봐. 딱딱해.”

이현이 뒤통수로 근육이 솟은 팔 안쪽을 가볍게 두드리며 불만을 표시했다.

“간지러워서 그래.”

“그거 성감대라는 소린데….”

석희재는 잠시 침묵하면서, 어떻게 해도 생각이 그런 쪽으로 흐르는 것도 재주라고 생각했다. 단단한 팔 안쪽의 긴장을 풀어 주듯 이현이 손끝으로 그림을 그리며 간질여 댔다.

“예전에는 이 정도가 아니었는데.”

“몸 키우는 거 싫어?”

“아니, 좋아.”

그렇게 말하며 이현은 마주 보는 각도로 돌아누웠다. 얼굴이 가까워지는 것만으로 좋아서 석희재의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졌다.

최근 두 사람은 집에서 옷을 입을 때보다 나체인 경우가 더 많았다. 하필 신혼처럼 불탈 때에 각자가 서로 무척 바쁜 것이 아쉬웠다. 남은 시간을 벗고 뒹구는 데 모조리 할애해도 모자랐다. 그러나 그래서 더더욱 맞붙어 있는 시간이 각별하고 따스했다.

서로 공유한 시간, 그 시기의 행동들을 추적하거나 아직 서로를 만나기 전의 사건들을 떠들 때에도 둘의 맨살 어딘가는 꼭 맞닿은 채였다. 덕분에 침대 시트와 이부자리에는 보디로션 향이 섞인 체취가 더욱 쉽게 배어들었다.

이현이 조금 전 끊겼던 화제에 다시 답했다.

“복수는… 방법론보다는, 잊어버리지 않으려고 적은 거야.”

“…….”

“아마 나는 금방 잊어. 그런데 내가 상처받은 걸로 슬퍼하는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건 이현이 스스로를 바꾸려는 이유가 석희재 때문이라는 소리였다. 이현이 툭 내뱉은 말에 심장이 울렁거려서, 석희재는 이현의 머리카락에 살짝 입을 맞췄다.

“그 회사 문 닫는다면서.”

“응.”

한때 몸담았던 회사가 사라지는데도 이현은 도리어 홀가분한 듯했다. 추억에 잠긴 건 당시의 이현을 지극히 사랑하던 석희재뿐인지도 모른다.

석희재의 말 없는 얼굴을 보던 이현이 말을 덧붙였다.

“근데 회사는 망해도 대표는 안 망한다?”

이현의 말이 마음에 들지 않아 석희재는 인상을 썼다. 더 속 시원한 권선징악의 결말을 바라는 눈치였다. 그의 결 좋은 눈썹을 손으로 꾹꾹, 눌러 펴 주며 이현은 웃었다.

“얼마나 교활한 사람인데. 이렇게 되기 전에 돈도 미리 다 빼돌렸을걸. 그래도… 내가 독립한 것만으로 반은 복수 성공이야. 앞에 이사님들이나 피디님들 줄줄이 나갈 때마다 그랬거든. 배신자라고, 키워 놨더니 나가서 자기가 가르쳐 준 거 그대로 빼먹어서 한다고. 은혜를 모르는 것들이라고… 헛소리. 언제 은혜가 오가는 관계였나? 돈이 오가는 관계였지.”

이현이 시니컬하게 말했다.

“그리고 지금 떵떵거리는 꼰대들 어차피 나보다 빨리 늙어. 그러니까 언젠가는 내가 앞질러.”

“형….”

믿음직스러운 말에 석희재는 또 한 번 반한 모양이다. 그 예쁜 눈이 초롱초롱한 물기를 담고 그윽해지는 것을 보며 이현은 시원하게 웃었다. 석희재는 저가 다 뿌듯해서 이현을 한 번 꼭 끌어안았다.

“그럼 한지우는?”

안은 채로 어깨에 입술을 묻은 석희재가 우물거리며 물었다.

“아… 그런 사람은 제 버릇 개 못 주고 패망하게 되어 있어.”

“흠.”

여전히 뭔가 모자란다고 생각하며, 석희재는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이현의 복수 리스트를 가만 살펴보았다.

두 명에서 더 늘어나는 일은 없을까.

한동안 이현의 메모를 들여다보던 석희재는 머뭇거리다 입을 뗐다.

“그 사람 이름은 안 적어?”

“누구?”

“첫사랑.”

이현은 답이 없었다.

석희재는 방 천장을 응시하는 이현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무슨 표정인지 읽기 힘들었다. 그래도 예전처럼 그의 표정 하나에 일희일비하는 일은 없어졌다. 이현이 읽기 힘든 표정을 할 때는 대부분 그 자신조차 제 생각을 알 수 없을 때라는 것을, 이제는 알아서이다.

그래도 석희재는 이현의 머릿속이 궁금했다. 그는 이런 면에는 둔감해서 섬세한 감정의 실마리들을 잡지 못하고 자신을 방치하곤 하니까…. 가능하다면 자신이 먼저 들여다보고 상처에서 차단해 주고 싶었다.

그건 그렇고 첫사랑의 화제가 나오자마자 말이 없어진 것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석희재는 이현의 어깨를 흔들며 조금 퉁명스레 내뱉었다.

“왜 말이 없어. 설마 그 사람 생각해?”

쿡 찌르자 이현이 티 나게 놀라며 돌아보았다.

“아니? 아닌데….”

“연기도 못하면서.”

“…….”

“난 거짓말이 더 싫어.”

“미안.”

석희재는 안기려는 이현의 팔을 피했다. 장난삼아 한 행동이었지만 이현은 석희재의 표정을 살피다가 무의식적으로 제 입술을 물었다. 뭔가 오해를 샀을까 봐 제법 눈치를 보는 얼굴이다.

물론 그의 과거가 잘못은 아니다. 오히려 좋다, 싫다를 따지자면, 석희재는 한 사람에게 미련할 정도의 순정을 바칠 줄 알았던 그의 과거마저 사랑스럽게 느꼈다.

당장이라도 끌어안아 주고 싶은 것을 참으며 석희재는 슬쩍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렸다. 흥, 하는 듯한 태도에 이현이 다시 들러붙으려 했다. 단단한 팔을 양손으로 쥐고 매달렸다.

“희재야….”

말끝을 늘이는 목소리가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 인정도 부정도 못 한 채 초조해하는 얼굴에 심장이 간질거렸다.

아… 괴롭히는 게 즐거워지면 안 되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석희재는 물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 사진 없어?”

“뭐? 누구.”

“형 첫사랑.”

“그걸 봐서 뭐 해?”

이현이 난처하게 얼굴을 찌푸렸다. 석희재는 그제야 이현의 얼굴을 돌아보며 말했다.

“얼굴을 봐야 안심이 될 것 같아.”

“왜.”

“그냥… 이겼다고 생각하고 싶어서.”

석희재의 덤덤한 말투에 이현은 끝내 웃음을 터뜨렸다.

***

Q.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예중, 예고, 음대 코스를 밟았다. 꽤 특이한 이력인데 바이올리니스트가 될 생각은 없었나? 클래식계의 아이돌이 됐을 법도 한데.

A. 나는 실력이 그다지 출중한 편이 아니다. 나 같은 게 연주자가 되는 건 기만이다. 오케스트라 같은 곳에 속해 소소하게 연주를 계속할 수는 있었겠지만….

Q. 지나친 겸손이다.

A. 예체능계에 있다 보면 시간이 갈수록 누가 정말 뛰어난지 가리는 분별력만 늘어나게 된다. 그건 조금 괴로운 일이다.

Q. 그럼 배우로 진로를 튼 건 반대로 자신감의 발로였나?

A. 아, 그렇게 해석이 될 줄은 몰랐다. 그런 건 아니다. 이 일을 해야만 독특한 계기가 있었다.

Q. 그 이유가 무척 궁금한데.

A. 짝사랑을 오래 했다. 좋아하는 사람이 하는 일, 그러니까 이쪽 업계를 선망하는 마음이 있었다. 앞뒤 재지 않고 무턱대고 뛰어들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척 무모한 일이었는데 후회는 하지 않는다. 그렇게라도 교집합을 만드는 데는 성공했으니까.

Q. 확실히 무모한 면이 있다. 좋아하는 사람과 엮이고 싶어서 연예계에 뛰어들다니… 배우가 되면서 사생활 같은 것들을 버려야 했을 텐데. 등가교환 할 가치가 있었는지.

A. 그때는 내 삶이나 미래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Q. 그렇게 로맨티시스트일 줄 몰랐다. 이 인터뷰가 나가도 상관없나? 팬들이 술렁일 텐데.

A. 사랑을 빼면 나라는 사람은 완성되지 않는다. 그 사람이 나를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없다. 그러니까 부정하고 싶지 않다.

Q. 말하는 걸로 봐선 현재진행형인 것 같다.

A.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언젠가 그 사람의 사랑이 식어 나를 떠난다 해도 나는 사랑했던 기억을 가지고 평생 행복할 수 있을 거다. 남은 시간은 다시 그 사람을 짝사랑하며 보내도 좋을 것 같다.

Q. 세상에. 그 상대는 이런 고백을 받아 본 적이 있는지.

A. 알아주었으면 해서 하는 말이다.

석희재의 인터뷰는 큰 반향을 일으켰다. 누군가는 열광했고 누군가는 괜히 허탈해했다. 그 외모와 그 목소리에 짝사랑을 오래 했다는 것은 그의 존재감에 끝내주는 사연을 더했다. 말도 안 되는 순정 만화급 설정이었다.

팬들은 석희재가 사용한 워딩을 하나하나 파고들며 짝사랑과 석희재의 현재 관계를 추측하는데 열을 올렸다.

팩트. 석희재는 여전히 상대를 사랑한다.

-그래서 상대는 누구?

-고백한 전적은 있을까?

-그런데 어쩐지 이 인터뷰에서는 실패의 냄새가 난다.

-그렇다면 석희재가 눈에 차지 않을 만큼의 거물은 대체 누구인가.

자연히 사람들은 연예인을 상대로 점찍었다. 대선배 여배우들은 이제 막 인지도를 올리고 있는 새파란 신인 석희재가 눈에 차지 않을 가능성이 농후하니.

그리고 잡지를 넘겨 보던 이현은 석희재의 인터뷰를 보고 귀를 빨갛게 물들였다.

‘알아주었으면 해서’라니.

석희재는 지면에다가 공개적으로 자신을 사랑한다고 떠들어 댔다. 잡지 화보들이 으레 그렇듯, 한 면은 석희재의 얼굴로 꽉 찼고, 다른 한 면은 인터뷰 텍스트로 꽉 찼다. 메이크업 담당이 수시로 만져 주었을 검은 머리카락이 이마 위를 자연스럽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현은 석희재의 표정 아래 자신만 아는 내밀한 얼굴을 발견했다. 공인의 얼굴 아래서 사적인 감정을 읽어 내는 경험은 무척 희소한 일이었다.

사진작가는 무어라고 주문하면서 이 사진을 찍었을까? 혹시, 인터뷰에서 언급했던 좋아하는 사람을 떠올려 보라고 했을까? 가능성이 있었다. 이현에게 석희재의 얼굴은 너무 익숙해서, 그는 제 애인의 모든 표정을 다 알았다. 이건 열에 들떠 자신을 꼭 끌어안기 직전의 표정과 비슷하다.

‘이런 야한 표정을 오피셜리 공개하다니….’

남들이 보기에는 조금 애절하고 촉촉한 눈빛이었을 뿐인데, 그걸 보던 이현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랐다. 이현은 석희재가 인쇄된 면에 올려 둔 손바닥을 저도 모르게 그러쥐었다. ‘와작’ 종이가 구겨지는 소리가 날 때에 이현은 아차, 하며 주변을 돌아보았다. 이대로 이것만 찢어서 훔쳐 갈 뻔했다. 여긴 카페였다. 잡지는 공용이었고.

이현은 잡지를 탁, 소리 나게 접었다.

이러나저러나 화제성은 끌어올릴 수 있을 테지 – 이건 석희재를 캐스팅한 제작자의 마음,

반대로 애인으로서는 걱정스러웠다. 고작 저를 감동시키기 위해 이런 일을 하는 건가 싶어서. 안 그래도 뜨기 시작하면서 주변 관계자들과 간접 인맥들이 귀찮게 굴고 있을 텐데, 석희재의 사생활에 촉각을 기울이고 예의 주시하는 이들이 늘어나게 생겼다.

‘팬심 있는 관계자가 제일 무서운 건데.’

그들은 관계자이기 때문에 자신이 팬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하고 팬들조차 자정하는 일을 도리어 나서서 저지르곤 한다. 예를 들면 인맥 이용해서 공사 구분 없이 접근하기, 상대를 평가할 때 사적인 감정 섞기- 이건 좋은 평가든, 나쁜 평가든 둘 다 도움이 안 된다. -, 선을 그어 밀어내면 갑자기 돌변해 공적으로 피해 주기 등등.

안 그래도 업계 미숙아인 석희재가 얼마나 맛있는 먹잇감일지….

“하아….”

이현은 할 수 있는 한 잔뜩 한숨을 쉬었다.

이런 소린 왜 했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지만 정작 집에 돌아온 석희재를 마주하는 순간 자신은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말을 해 봤자 아마도 그냥….

‘내가 그렇게 좋아서 어떡하니 너는.’

최대한 퉁명스럽게 시나리오를 돌려 본 게 그 정도였다. 자신이 그런 말을 하는 순간 ‘봤어?’ 하고 활짝 웃는 석희재의 얼굴이 자연히 그려졌다. 그러면 자신은 더더욱 아무 말도 못 하게 된다. 찐하게 키스나 해 주겠지 뭐.

그리고….

내가 먼저 식기는 왜 식어.

너는 꼭 내가 찰 거라고 생각하는 버릇이 있더라.

아, 억울하네. 요전에도 차였던 건 난데!

그리고 생각해 봐. 더 초조한 게 나지, 너겠냐.

너는 창창한 스물둘이고, 나는 스물아홉이고.

너는 날고 기는 사람들이랑 일하는데 나는 이렇게 맨날 혼자 카페에서 백수 짓이나 하고….

그리고 너는 얼굴이 석희재고 나는 그냥 이현이잖아.

상식이 있어 봐라.

“하아….”

이현은 양손을 모아쥔 위로 이마를 갖다 붙였다. 어느 순간 석희재가 눈에 씐 콩깍지를 벗고 자유의 몸이 되어 날아가면 어떡하나 사서 걱정을 시작한 것이다. 선녀는 날개옷을 빼앗으면 된다지만 석희재에게서는 뭘 빼앗아야 하나.

“저기요.”

테이블을 단호하게 툭툭 두드리는 손길에 이현은 멍하니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조금 뾰로통한 얼굴의 학생이 두 명 서 있었다. 교복 차림이었다.

“응?”

응, 과 엉? 사이의 맹한 발음으로 되묻자마자 뾰족한 목소리가 날아왔다.

“아저씨. 잡지 안 보실 거면 제자리에 갖다 꽂아 놓으셔야 되는 거 아니에요? 이거 공용이잖아요.”

“맞아요. 보지도 않으면서 왜 혼자 가지고 있어요? 한참 동안.”

“아, 미안… 미안하다. 가져가.”

이현은 얼떨떨해져서 학생들에게 잡지를 건넸다. 홱, 빼앗아 가는 손길이 매몰찼다.

“빨리, 빨리 석희재부터 찾아.”

“꺄! 여기 있다. 어떡해. 사진 미쳤어, 미쳤어.”

“아씨, 근데 이거 구겨졌어. 누가 뜯어 가려고 했나 봐.”

저들 자리로 돌아가 호들갑 떠는 학생들을 보던 이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고 말았다. 석희재의 가치를 알아주는 이들을 보고 있자니 제 어깨까지 으쓱해졌다.

‘희재 보고 싶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현은 조금 망설이다가 핸드폰을 들었다.

「너 셀카 한 ㅈ…」

까지 쓰던 이현은 메시지를 쭉 지워 버렸다. 그러고는 가방을 들고 카페를 나섰다.

사석의 석희재도 좋지만 오늘은 왠지 일하는 석희재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현은 극장으로 향했다. <기적에 관하여> 공연 종료까지 일주일, 그 무대 위에 선 석희재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는 건 앞으로 고작 8회차밖에 남지 않았다. 그 모습을 가능한 눈에 많이 담아 두고 싶었다.

“과장님. 저 지금 극장 가는데요. 오늘 혹시 좌석 있어요?”

공연업에 종사한 이후로 단 한 번도 제 돈 주고 공연을 본 적 없는 이현은, 모든 공연이 공짜인 줄 아는 나쁜 물이 들어 있었다. 티켓 팀 직원들, 혹은 타 기획사에 다니는 인맥을 통해 매번 초대권으로 공연을 보는 게 당연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현은 곧 난관에 처했다.

“아… 오늘 것도 매진이야?”

어쩌나, 가도 자리가 없으면 가는 의미가 없다. 이현이 우뚝 서서 오는 택시를 잡을까 말까 고민할 때였다.

- 와요. 피디님. 유보석 빼 줄 테니까….

“유보석? 그거 갑작스런 VVIP 방문을 대비해서 남기는 거 아니에요? 뭐 대통령이나, 서울시장이나.”

수화기 너머에서 깔깔 웃는 과장님이 ‘그러니까 와요’라고 말했다. 이현은 마침 제 앞으로 다가오는 택시를 잡았다.

***

그리고 그날 공연이 종료되기 전, 연예 기사를 전문으로 내는 언론사 한 곳에서 특종을 터뜨렸다. 바로 석희재의 스캔들이었다.

홀로 4칸짜리 유보석 중 복도 끄트머리에 외따로 앉아 있던 이현은 인터미션 때부터 이상한 술렁임을 감지했다. 매진된 좌석에 뿔뿔이 흩어져 앉은, 동행으로 보이는 관객들이 서로의 좌석에 찾아가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를 나누고, 인터넷 기사를 보여 주고 읽으며 몰입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현은 그것이 석희재 때문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다른 공연에 뭐 사고 났나?’

아무것도 몰랐던 이현은 무대 위의 석희재를 팬심으로 바라보며 공연을 즐겼다. 커튼콜에 기립 박수까지 친 후 여운을 가득 안고 일어났다. 매번 객석 제일 끝자락이나 크게 치우친 사이드에서 보고는 했는데 오늘은 유보석이라 지나치게 눈 호강을 했다.

이대로 집으로 가서 희재를 기다릴까, 아니면 분장실에 들러 인사를 하고 갈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막 객석 복도 앞쪽에서 걸어가는 여자들의 목소리가 이현의 귀에 꽂혔다.

“미쳤나 봐. 말이 돼, 이게?”

“나 완전 멘붕이다. 아….”

“기사 보지 말걸. 인터미션 때 기사 봐서 2막 집중 못 했어.”

“기사 뜬 거 석희재는 봤으려나?”

“안 본 거 같지?”

“나도 안 봤다에 동의… 기사 몰라서 오늘 레전 찍은 듯.”

석희재, 멘붕, 기사. 불길한 조합의 단어가 귀에 쏙쏙 꽂혔다. 표정이 굳은 이현은 바로 그 자리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포털에 석희재의 이름을 치기 무섭게 작성 5분 전, 7분 전의 기사들이 줄줄이 떴다.

[석희재, 22살 연상의 여배우 이사라와 ‘밀회’의 순간]

[대박 신인, 만들어진 신인? 같은 소속사 선후배 사이….]

[다시 조명되는 석희재의 ‘짝사랑’]

하필 석희재가 얼마 전 고백했던 ‘짝사랑’에 관련된 인터뷰와 스캔들의 내용이 절묘하게 맞물렸다. 누가 저 희귀하게 잘난 남자를 짝사랑하게 만드는가, 상대방이 이사라라면 수긍이 어렵지 않았다. 그만큼 그녀는 넘볼 수 없는 업계 커리어를 가지고 있었고, 그 화려한 커리어를 납득할 수밖에 없는 실력도 지녔다. 게다가 지금까지 개인적인 애정사 문제로는 잡음이 없던 그녀였다.

석희재의 스캔들 상대가 업계 선배인 대배우라는 사실에 아찔해하는 사람도 많았지만, 도리어 애송이 배우가 이사라의 상대로 거론되는 것이 과분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이현은 로비 의자에 앉은 채 기사와 댓글 반응을 한참 보았다. 심장이 철렁 떨어지는 말들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지금까지 이미지가 좋았던 것은 그나마 인지도가 약해서였는지, 대중 인지도가 하늘을 치솟는 대배우와 엮이자 반응이 그전과는 천차만별이었다. 특히 성 상납이나 스폰으로 엮는 성희롱 같은 것은 두 눈 뜨고 보기 힘들었다. 기사를 열 개 정도 보았을 때쯤에 이현은 손끝을 잘근잘근 깨물고 있었다.

이현은 프로그램과 엠디 판매가 마무리될 때쯤에 짧은 한숨을 내뱉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연이 끝난 후 극장과 로비 여기저기서 웅성이던 반응만 보아도 석희재의 팬들이 어떤 심정일지는 추측이 어렵지 않았다.

“피디님. 석희재 배우 오늘 퇴근길 안 한다고 공지 떴대요.”

이현이 일어나는 것을 본 티켓 팀 외주 직원이 멀리서 운을 뗐다. 조금이기는 하지만 아직 로비에 관객들이 남아 ‘석희재’라는 이름이 불리자마자 이쪽으로 시선이 모이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게다가 마침 로비 층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는데도, 그 앞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은 그것을 타지 않았다. 도리어 이쪽을 흘끔대며 저들끼리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데 정신이 팔린 척한다. ‘관계자’로 추정되는 이들이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호기심이 돋은 모양이었다.

이현은 난감한 표정을 티 내지 않으려 제법 노력했다. – 하지만 무척 티가 났다 – 티켓 팀 직원 한 명이 말을 걸었다.

“어디… 아픈가 보죠?”

“어머. 피디님 설마 모르세요? 희재 씨랑 친하잖아요.”

“음….”

턱을 가볍게 쓰다듬으며 이현은 애매하게 웃었다. 이런 때에 가장 할 필요가 없는 말을 하셨다. 시선이 한층 더 따가워졌다.

티켓 팀은 아무래도 분장실 출입에 제한이 있고 배우와 거리가 가장 멀다 보니 관객과 비슷한 류의 호기심을 드러내는 경우가 잦았다.

“분장실은 안 들렀다 가세요?”

“아, 음….”

그게 큰 흠은 아니지만 오늘만큼은 번거롭게 느껴졌다.

원래대로라면 들렀을 것이다. 분장실에. 그러면 자신이 여기에 온 지도 몰랐을 석희재는 깜짝 방문에 무척 기뻐했을 것이다. 그 표정이 눈에 훤히 그려졌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기사로 혼란에 빠져 있을 분장실에 발을 들이고 싶지 않았다. 석희재는 집에서 봐도 충분하니까….

“저, 이현 PD님 맞으시죠?”

아니나 다를까, 아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다 그냥 보냈던 무리가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이현은 흠칫, 하면서 눌러쓴 캡 모자 아래로 시선을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확실히 저를 알아본 표정에 나는 이현이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어졌다.

“맞으시죠? 실례되는 건 알지만 이것 좀 전달해 주실 수 있을까요?”

“아….”

이현은 그녀들이 건네준 작은 쇼핑백과 꽃다발, 손편지를 엉겁결에 받아 들었다.

“직접 드리고 싶었는데 퇴근길에 안 나오신다고 해서요… 공연이 일주일도 안 남았는데 앞으로는 이렇게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아예 없을까 봐 너무 아쉬워요. 그리고 오늘 기사 때문에 배우님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

“어….”

“힘내라고 좀 전해 주세요. 그리고 응원한다고요.”

계속 말다운 말을 하지 못하고 버벅이는 사이 이현의 손목에는 차곡차곡 선물이 걸렸다. 품에는 꽃이 망가지지 않게 꽃다발도 안았다. 팬들의 기대감을 안고 이현은 어쩔 수 없이 분장실로 향하는 계단으로 삐걱이며 걸어갔다.

철문이 닫히고 적막한 복도에 서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니, 이걸 내가 주는 것도 좀 그렇지 않냐 이거야….”

기만이다, 기만.

심장이 쿡쿡 쑤셨다. 아까부터 기사를 보며 심장 떨어지는 기분을 느끼던 것도 같은 이치였다.

이현은 꽃다발의 비닐 부분 안쪽이 습기로 뽀얘진 것을 발견했다. 제 손에서 배어난 땀 때문이었다. 웃기지도 않게 손이 가늘게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긴 한숨을 쉬어 본다. 스캔들의 상대가 ‘이사라’에서 ‘이현’이 된다고 반응이 더 유할 리 없다. 도리어 차가우면 차가웠지.

이현은 어느새 그 기사의 대상에 자신을 비추어 보고 있었다. 차라리 이사라 씨는 사실이 아니기라도 하지, 누구와 견주어도 손색없을 만큼 빛나는 인생을 살기라도 했지. 하지만 자신은… 저가 그런 식으로 기사화되어 까발려진다면? 상상하기도 싫었다. (현)백수, 고졸, 빚은 없지만 재산도 없음, 더해서 그다지 깨끗하지도, 순정적이지도 않은 과거.

게다가 충실한 팬들은 저리도 석희재를 걱정한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지, 누구와 만나든지, 어떤 사랑을 하든지 본인이 상처받지 않기를 일 순위로 바란다. 그러나 그녀들이 만약 자신이 석희재의 애인이라는 것을 알아챈다면? 그러고도 방금 전처럼 친절하게 말을 걸었을까?

“계세요.”

이현은 석희재의 분장실 앞에서 노크 대신 음성을 높였다. 문이 활짝 열리자마자 보인 것은 젖은 머리끝에서 물을 뚝뚝 흘리고 있는 석희재였다.

“와, 형이다! 웬일이야. 꿈이야?”

막 씻은 모양이다. 약간 감격한 것 같았고, 눈동자가 행복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석희재는 이현이 손이 없는 것을 보고는 팔뚝을 붙잡아 안쪽으로 쉽게 끌어당겼다. 등 뒤에서 문이 닫히자마자 석희재는 이현을 꽃다발째로 껴안고 이마에 키스 두 번을 한 다음 이마를 맞대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누가 봐도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다. 이현으로 말할 것 같으면, 오늘 낮에 잡지에서 본 청초한 얼굴이 꽃처럼 흐드러지는 것을 보고 머리가 새하얘진 참이다. 정말이지 짜릿한 얼굴이었다.

“흠흠….”

그때 분장실 안쪽에서 헛기침 소리가 들려 이현은 파드득 놀랐다. 안에 있는 것은 박 팀장이었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80도나 굽히며 인사했다.

“어… 계셨네요. 음… 고생 많으십니다.”

석희재가 하도 근심이 없어 보여 이현은 자신이 다 면목이 없었다. 스캔들이 터진 배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일 아니라는 듯 해맑은 배우를 데리고 있는 매니저의 심정이 어떨까. 심지어 자신은 (현)애인이었다. 박 팀장의 끓는 속이 어쩔 수 없이 공감이 된다.

“희재야. 이건 다 팬들이 주신 거.”

“아, 정말? 팬들이 형을 기억하는구나.”

“그러게 말이야.”

이현은 박 팀장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러고는 그의 심각한 내면에 공감하고자 했다.

“회사 입장에서는 걱정되시겠어요.”

석희재도, 이사라도 같은 회사 소속 배우다. 두 상품에 다 흠이 나길 원할 리가 없었다.

“그러게 말입니다. 사실이 아니니까 그냥 넘기자고 하기에는 파급력이 너무 커요.”

“기사 장난 아니던데요.”

“이제 사라 씨 설득할 일만 남았는데….”

“설득하지 마세요. 그냥 놔둬요.”

끼어든 목소리는 석희재의 것이었다. 그 목소리가 꽤나 냉담해 이현은 몰래 놀랐다. 갑자기 분장실 안이 정적으로 가득 찼다.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고도 석희재는 아랑곳 않고 거울 앞에서 머리를 말리는 데 여념이 없었다.

“약속하긴 했지만, 시점은 약속한 적 없잖아요.”

“…….”

“돌아가신 후에 밝히신다고 해도 뭐… 전 안 말려요.”

차분히 내뱉는 말은 어조와 달리 제법 단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희재야….”

이현은 조그맣게 말려 보았다.

“왜? 난 좋아. 형이랑 마음껏 다녀도 아무도 의심 안 하겠다.”

수건을 의자 등받이에 털썩 걸어 놓고 뒤돌아선 석희재는 와서 보란 듯이 이현의 어깨를 한 번 꽉 끌어안았다.

“그리고 소문이 싫은 건 그게 진짜일 때뿐이야. 사실이 아니니까 난 아무렇지도 않아.”

이현은 아무렇지 않다고 제 입으로 말하는 석희재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석희재를 집에 데려다주기 위해 자리를 지키던 박 팀장은, ‘피디님이 오셨으니 저는 가 볼까요’ 하면서 이현에게 차 키를 넘기고 먼저 떠났다. 그가 석희재의 귀가 장소와 내일 픽업 장소를 묻지도 않는 것 때문에 이현은 괜히 얼굴을 붉혀야 했다.

많은 이들과 마주치면 괜히 성가신 일이 생길까 봐, 박 팀장은 일부러 석희재에게 극장에서 최대한 늦게 나가라고 언질을 준 모양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이 극장을 나선 것은 자정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주차장은 텅 비었고, 홍보용 배너가 나부끼는 가로등 아래에는 사람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차 안에는 라디오가 소곤거리는 듯한 음량으로 조그맣게 틀어져 있었다. 석희재는 오늘따라 턱을 괴고 창밖을 길게 바라본다. 이현은 운전하면서도 틈틈이 그런 석희재의 옆모습을 흘끔거렸다.

“희재야. 기사 댓글 같은 거 보지 마. 쓰레기 같은 소리 많더라.”

“…응. 고마워.”

“그리고 어머니는… 그냥 네가 밝혀 버리면 안 되는 거야? 계약 문제야?”

그 말에 석희재가 입가를 끌어올렸다. 창밖을 보고 있어 표정이 보이지 않았는데도 이현은 그의 얼굴을 상상할 수 있었다. 냉소적인 얼굴. 아마도 자신에게는 보여 주고 싶어 하지 않는….

“형, 내가 그걸 지금 터뜨리면 나는….”

“…….”

“무엇 때문에 22년을 엄마가 있는데도 없다고 생각하면서 포기하고 버텼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게 돼.”

“…….”

“사실 키가 훌쩍 큰 뒤로는 내내 엄마 토이 보이로 오해당했어. 이런 것도 익숙해.”

“…….”

“난 기다리고 있어.”

석희재가 뚜렷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이현은 그가 무엇을 기다리는 것인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그건 단어로는 명료히 정의 내릴 수 없는 것이다. 신뢰, 믿음, 인정, 이해…. 이현은 식도가 저리듯이 꽉 막히는 기분에 마른침을 삼켰다.

“이상하지. 난 어른이 되어 가고 있는데 왜….”

“…….”

“엄마의 젊은 시절을 따라잡고 있는데, 같은 직업을 갖기까지 했는데 그때의 엄마가 이해되기는커녕 점점 더… 미워지는지.”

석희재는 마지막 ‘미워진다’는 단어를 목이 멘 듯한 소리로 말했다. 가슴이 미어질 때 내는 소리였다.

이현은 왠지 답을 알 것 같았다.

“아마 너무 사랑해서 그런 감정이 드는 거야.”

순간 차가 고가를 타며 공중으로 시야가 향했다. 차체가 가볍게 날아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고, 빠른 속도로 좌우를 지나치는 주황색 지시선들, 멀리 낮게 내려다보이는 강변의 불빛들이 눈에 밟혔다.

“먼 미래에, 수십 년 후에 어머니 돌아가시고 나서 밝혀져도 상관없다고 했지.”

“…….”

“석희재 되게 착하다. 평생 기다릴 수도 있다는 말이네.”

이현이 그렇게 말했을 때 석희재가 이쪽을 천천히 바라보았다.

“하나만 물어볼게. 나한테도 그런 기분을 느꼈어?”

“…….”

“만약에 그렇다고 하면 난 기쁠 것 같은데….”

하필 고가였고, 전방주시를 해야 하는 상황이라 그 표정을 볼 수 없는 게 아쉬웠다.

집에 도착할 때까지 석희재는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대신 조용한 도로로 접어들고, 집 골목길에 들어서자 손등으로 코를 슬쩍 훔쳤다. 이현이 주차를 마치고 안전벨트를 풀었을 때였다. 석희재는 먼저 조수석 쪽 문을 벌컥 열고 내렸다. 그러고는 보닛 앞을 저벅저벅 걸어 돌아와 운전석을 벌컥 열고 채 나오지도 못한 이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현은 왜 그러냐고 묻지 않았다. 그냥 이게 석희재가 하고 싶은 일의 전부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사람의 감정은 모두 말로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내내 석희재가 하고 싶었던 행동은 이현을 온 힘으로 끌어안는 것이었다.

석희재에게 꽉 안긴 채로 이현은 중얼거렸다.

“희재야. 내가 기사를 봤더니, 진짜 너무 살벌하더라.”

“…….”

“사라 배우님은 그렇다 쳐도, 만약에 내가 그 상대였으면… 엄청나게 까였겠지.”

“…….”

“특히 잘난 데도 없고, 그것도 남자, 심지어 네 짝사랑을 본체만체. 과거도 지저분하지, 주제에 너를 상처 주고, 거듭 실수하고…. 만약에 네 팬이 우리 역사를 알면 내가 엄청 밉지 않을까.”

“아니야! 형은, 그런 거….”

석희재가 부정하기 위해 참기 힘든 호흡을 터뜨렸을 때 이현은 거기서 울음기를 읽었다. 이현은 그제야 자신이 내내 짐작하던 사실이 맞다고 확신했다. 석희재는 상처받지 않은 적 없다. 어머니의 한 발 뒤에서 그녀를 이해하기 위해 이해받고 싶은 마음을 억눌렀던 어린아이는 여전히 상처투성이다. 어른이 되어서도 아이의 마음이 튀어나오는 것을, 이현은 이해할 수 있었다. 어린 시절은 단 한 번뿐이니까.

석희재는 어머니와 비슷한 나이의 어른이 되어 가며, 사랑하는 어머니가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선택을 하는 것을 보고 상처받고, 상처받기를 반복해서….

“그래서 내 말은, 들어 봐.”

이현은 제 어깨를 아플 정도의 악력으로 쥐고 있는 석희재를 조금 떼어 내 얼굴을 보려고 했다. 눈물로 얼룩진 뺨을 보여 주지 않으려고 애를 쓰던 왕자님은 고개를 푹 숙였다. 흐트러져 내려온 촉촉한 앞머리 아래 코가 빨갰다.

“나중에 우리 스캔들 날 때를 대비해서.”

“…….”

“내가 한자리하는 인간이 되어야겠다…. 그런 생각을 했다고.”

“…….”

“내 사진 털리는 거 부끄럽지 않게 피부과도 다니고, 운동도 해서 좀 그럴듯하게. 응? 봉사 활동도 할까. 연탄 나르는 사진도 많이 찍어 놓고. 요즘 사람들 인성 많이 따지잖아.”

그렇게 말하며 이현은 헤죽 웃었다.

“뭐야.”

감동받을 줄 알았는데 석희재는 정색했다. 코를 훌쩍이며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그러나 잠시 후 이현은 석희재의 입술이 꾹 다물려 있는 것을 보고 그 표정의 진위를 알아챘다. 이건 분명 울다 웃으면 추할까 봐 억지로 참고 있는 것이다.

석희재를 웃기기 위해 이현은 덥석 그의 옆구리를 간질이려 했다. 그러나 벼락같이 손목이 잡혔다.

“형은 진짜 일 초만 진지해.”

“뭐래.”

이현은 울컥했다. 분장실에 오기 전에 혼자 복도를 걷다가 나름대로 고민의 시간을 일 초 이상 가졌었는데 말이다. 꽃다발 포장에 습기가 고일 정도로 손에서 땀을 흘려 댔는데…. 그런 것도 모르고.

“좋다는 소리야.”

“됐어.”

이현은 팔을 홱 쳐내고 먼저 현관 안으로 들어섰다. 뒤따라 들어오는 석희재가 그를 등 뒤에서 덥석 끌어안았다. 또 쳐 낼까 하다가도 이현은 그냥 안겨 있었다.

“진짜야. 우리 둘이 성격이 비슷했어 봐. 그럼 인생이 철학서가 돼.”

석희재의 객관화가 우스워서 이현은 쿡쿡 웃었다.

“지금은 뭔데.”

“잘 모르겠지만 내가 로맨스 할게, 형이 시트콤 해.”

“음….”

싫지 않은 비유였다. 이현은 제 앞가슴을 끌어안은 석희재의 손가락을 매만지다 물었다.

“그럼 사라 씨는?”

“엄마는… 오페라. 굴곡이 있으니까.”

“박 팀장님은?”

“신문 사설.”

“한지우는?”

“전래 동화.”

“뭐? 너무 귀여운 거 아냐?”

이현은 의외의 장르에 화들짝 놀라며 되물었다.

“그게 아니라. 전래동화는 권선징악이잖아.”

한지우 망했으면….

석희재는 덧붙여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제 인생은 철학서라던 남자치고는 괜찮은 유머였다. 본인은 유머라고 생각도 못 했는지 폭소를 터뜨리는 이현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지만 말이다.

***

석희재 보고 기사 댓글 같은 건 보지 말라고 해 놓고 그날 밤, 정작 이현은 댓글을 보며 타는 속으로 초조하게 밤을 지새웠다. 핸드폰을 바라보는 데 여념이 없는 현을 물끄러미 보다가 먼저 잠든 것은 석희재였다. 그는 또 뱀파이어처럼 가슴 위에 양손을 가지런히 올린 채 쿨쿨 자고 있었다. 마음이 편하다는 소리다.

한참 후, 선잠이 들었던 석희재가 잠결에 부스스하게 눈을 떴다.

“…왜 안 자?”

얼른 잠들지 않는 이현이 의아한 모양이었다. 목소리도 완전히 가라앉은 채였다. 이현은 그제야 핸드폰에서 고개를 들었다. 석희재는 핸드폰 화면에서 쏘아 대는 흰 불빛에 비친 이현의 얼굴이 눈이 부셔 살짝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응. 뭐 좀 보느라.”

“얼른 자.”

그렇게 말하며 석희재는 이현을 제 가까이로 끌어당겨 안았다. 인상을 쓰고 있어 나름대로 남자다워 보이는 얼굴은 실은 하품을 참는 것이다. 이현은 그런 석희재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잠시 핸드폰의 화면을 껐다가도, 그의 호흡이 다시 고른 숨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도로 기사 댓글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세상이 잠든 시간인데도 인터넷 안의 반응은 요란했다.

최초 소스는 공신력이 부족한 매체에서 흘린 지라시성 기사였지만 거기에 갖가지 소스가 덕지덕지 붙으며 기정사실화되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허튼소리, 뜬소문이라고 믿고 싶은 사람들마저 돌려세운 것은 자정 가까이에 풀린 사진 한 장이었다. 현재 석희재가 출연 중인 공연의 극장 주차장에서 함께 찍힌 두 사람, 올린 이에 따르면 둘은 같은 차를 타고 떠났다고 한다.

이제 막 몸집을 불리기 시작한 팬덤의 혼란도 느껴졌다. 이 모든 것이 한순간 해프닝이길 바라던 이들도 부인할 수 없는 분명한 증거가 뜨자마자 이해를 포기한 듯했다. 석희재의 말대로 전부 사실이 아니니까 괜찮아야 하는데도 이현은 괜찮지 않았다.

사람들은 사실도 아닌 기사 한 줄로 석희재의 인생 자체를 곡해해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의 잘못은 자신이 부모를 선택할 수 없었다는 사실밖에 없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석희재가 그녀를 의도적으로 선택했으리라고 믿고 있다. 두 사람이 모자지간이라는 사실이 삭제되자, 석희재가 그녀 옆을 맴돌던 이유가 왜곡될 수밖에 없던 것이다.

자신이 아는 석희재와 전혀 다른 인간이 인터넷 안에만 달리 존재하는 것 같았다. 지금 난도질당하는 것은 가상의 인물이다. 실제 석희재가 들어야 하는 비난이 아니다…. 그걸 알면서도 이현은 체할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석희재의 얼굴을 보자 더더욱 마음이 좋지 않았다. 이현은 한참을 뒤척였다.

그건 이현에게는 드물고도 이상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그는 지금까지 비난과 억측 따위는 무시하는 인생을 살아왔으니까. 그런 성격이 아니었다면 이미 끝난 첫사랑을 질질 끌고 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첫사랑의 친구들은 물론이고 사랑을 받는 상대방까지도 이현의 짝사랑을 폄하했다. 남의 시선을 신경 쓰는 타입이었다면 그 사랑은 도리어 빨리 시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못해서 이현은 그들이 자신을 취급하는 방식에 지치지도 않았다. 그는 언제나 타인의 비평을 귀에 담아 둔 적이 없었고 들어도 쉽게 잊었다.

그래서 이현은 그것이 자신의 천성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건 제게만 통하는 공식이었나보다. 석희재를 향한 비난에는 도무지 의연할 수가 없었다.

아무 말이나 쏟아 내는 이들을 향해 삿대질하고 싶었다. 너희들은 아무것도 모른다고. 또, 이 남자는 외모만 고결한 것이 아니라고. 당신들이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속이 깊고, 마음이 관대하고 순하며, 지고지순하고, 올바르고, 꺾이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증언하고 싶었다.

사랑과 연애가 인생의 우선순위에서 먼 인간들조차 석희재의 열정 어린 사랑과 정면충돌하면 마음이 녹아 버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저 역시 그랬으니까. 제 인생에 첫사랑을 이기는 두 번째 사랑은 없으리라고 스스로를 틀에 가둬 놓았던 자신마저 석희재에게 물들어 버리지 않았는가.

석희재는 제 인기에 대해 믿기지 않을 정도로 겸손한 태도를 취하지만, 이현은 처음부터 지금까지 그와 같은 인간이 사랑을 받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한 겹 스크린 너머보다 실제로 부딪치고 말을 해 보고, 함께 지내보았을 때 더 매력적인 사람이니까. 석희재는 저 자신이 무색무취라고 주장했으나, 실상 그는 쉽게 물들지 않는 순백색이다.

갑갑한 속으로 뒤척이면서 이현은 아픈 명치를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체한 것 같기도 하고 무언가 뭉친 것 같은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한국인의 토착병이라는 ‘화병’이었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어쨌든 이 소란은 소속사 오피셜이 뜨는 내일 오전이나 되어야 진화할 수 있다. 혹은 석희재의 어머니의 결정에 따라 이대로 유야무야 넘어갈 수도 있었다. 그 사실들이 이현을 무척 초조하게 만들었다.

이현은 다시 석희재에게 시선을 주었다. 눈을 내리깔아 촘촘히 아래로 쳐진 속눈썹 아래로 흰 뺨이 비쳤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의 어머니는 석희재의 자는 모습을 이렇게 지켜봐 준 적이 있을까? 혼자 잠든 아이보다 제 인생의 사건들이 훨씬 더 우선이었던 사람의 지금 마음은 어떨까….

‘내가 만나 볼까.’

충동이 이현을 사로잡았다. 이현은 눈만 굴려 석희재를 흘끔 바라보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석희재는 이현과 어머니가 만나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았다.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 몰래 만나지 뭐.’

이현은 손쉽게 생각해 버렸다. 그리고 생각이 거기에 다다르자 왜인지 마음이 편해져 버렸다. 뚜렷한 구상이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답이 없는데도 결심만으로 갑자기 기분이 나아지는 건 퍽 저답다고 생각하며 이현은 눈을 감았다. 잠이 가물가물 몰려왔다.

그냥, 이대로도 괜찮다며 여기 멈춰 설 작정인 것 같은 석희재를 위해 뭐라도 하고 싶었을 뿐이다.

삶과 시간은 컨베이어 벨트 같은 것이다. 멈춰 있다고 생각할 때도 시간은 속절없이 흐른다. 뒤돌아보았을 때, 인생의 어떤 기로들, 분기점들은 이미 저 멀리 뒤에 있을 수도 있다. 한참 지나친 후에 뒤돌아 달려가기 위해서는 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하다.

게다가 두 사람 다 등을 돌리고 있으면 다시 만날 수 없으니까. 시간에 따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멀어지기만 할 뿐이니까….

늦었다고, 망쳤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누구 한쪽은 포기하지 말고 뒤를 돌아봐야 했다.

석희재와 자신도 그랬으니.

***

석희재가 특종을 접한 건 막 공연이 끝난 직후였다.

그는 분장실에 틀어박혀 바깥 복도 쪽 소란이 한차례 가라앉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석희재는 연주를 하기 때문에 마이크를 뺨 대신 목에 찬다. 테이프를 붙인 마이크를 툭, 툭 떼어 내면서 의상을 벗었다.

공연 직후의 분장실은 배우를 찾아온 관계자와 친인척, 혹은 간접적인 인맥을 통해 눈도장을 찍으러 온 이들로 넘쳐난다. 특히 지금은 막공 주라 방문객이 쏟아지는 상황이었다. 다른 이를 찾아왔을 이들이 분장실 복도를 노골적으로 스캔하며 배우들을 구경하는 것도 조금 꺼려져서, 석희재는 보통 이 타이밍에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편이었다.

관객이 다 빠졌을 때쯤을 계산해 석희재는 무대 위로 나갔다. 아이러니하게도 관객이 다 빠진 극장의 무대 위가 가장 한적하다. 아직 오케스트라 피트 아래서는 단원들이 짐 정리 중이었지만, 아무튼 조용하게 쉬기에는 좋은 공간이었다.

그는 오케스트라 피트 끄트머리쯤 무대에 발을 걸치고 걸터앉았다.

그때였다.

“희재 씨.”

누군가 저를 불러 석희재는 음성이 들린 쪽으로 고개를 내렸다. 한 단 아래 앉아 있던 오케스트라 단원 중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석희재는 그 사람의 표정이 무척 활기 넘친다고 느꼈다. 어떤 강렬한 에너지와 호기심이 결합된, 어째서인지 무척 인상적인….

“몰랐어요. 어떻게 그렇게 감쪽같이 속여요?”

“……?”

석희재는 그제야 눈을 조금 크게 뜨며 몸을 기울였다. 더 자세히 말해 달라는 제스처였다. 현재 그가 맡은 배역은 대사가 없어서, 그는 이상하게도 무대 영역 안에 있을 때는 음성을 내지 않는 버릇이 들었다. 그리고 모두가 그 무의식적인 습관에 익숙해졌다. 오케 단원 역시 말하지 않는 석희재에게 익숙해져 있어 얼른 그의 의도를 알아채고 말을 덧붙였다.

“아직도 시치미를 떼네? 이사라 배우님!”

“…….”

“나 완전 그분 팬인데. 어쩐지. 내가 희재 씨 팬이 된 이유가 있었다니까.”

그 순간 석희재는 멈칫 굳었다. 흔들리는 눈동자를 알아채지 못한 그녀는 석희재가 여전히 연기한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어제까지 난리였는데 욕하던 사람들 진짜 뻘쭘하겠더라. 사실 말도 안 되는 일이었는데. 그쵸?”

그녀는 오케 단톡방에 온갖 추측이 난무할 때도 자신은 한 마디도 보태지 않았다며 팬심을 어필했다.

석희재는 가까스로 묵례를 하고는 얼른 몸을 일으켜 상수 소대로 뛰어갔다. 하필 핸드폰을 두고 왔다. 조명이 들지 않는 소대는 순간적으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깜깜해졌다가 다시 분장실로 이어지는 문턱을 지나는 순간 눈부시게 밝아진다.

밝은 복도를 가로질러 서둘러 분장실에 들어가기 전까지 석희재는 사람들에게 몇 번이나 붙잡혔다. 면목 없이 웃으며 인사를 건네거나 등을 두드리는 그 제스처가 무엇을 뜻하는지 석희재도 모르지는 않았다. 술자리는 절대 피한다거나, 인맥을 확장 시키는 데는 전혀 관심이 없다거나 하는 자신의 그간 행동은 그저 낯을 가리는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은 아마 맞물려 터진 사건과 제 행실을 교묘히 엮었을 것이다. 또 ‘어쩐지’라는 말로 너무나 많은 추측을 정당화했을 것이다.

그러나 진실이 밝혀진 것이라면 단숨에 바뀐 그들의 태도도 이해가 된다. 억측을 민망해하는 듯한 웃음, 업계 최고 커리어를 가진 배우와 보통 인맥이 아닌 혈연으로 묶여 있는 석희재를 향한 약간의 아부 같은 것들.

무대에서 분장실로 오는 짧은 사이 석희재는 사람들의 표정에서 온갖 천태만상을 다 보았다. 환멸감은 들지 않았다. 그저 그런 얼굴들조차 어쩐지 무척 인상적이었다.

석희재는 숨을 몰아쉬며 분장실의 문을 닫았다.

[배우 이사라, 충격 고백.]

[이사라, 석희재. 어디가 닮았나?]

[이사라, 싱글 맘으로 살았던 지난 세월]

[이사라, 석희재. 연기력은 모전자전?]

석희재는 조용한 분장실 안에서 기사의 헤드라인을 쭉 훑었다. 기사들을 맨 위에서부터 차례차례 눌러 보았는데 사실 별 내용은 없었다. 어머니가 오피셜로 고백한 내용을 앵무새처럼 받아적어 다시 퍼뜨리고 있었을 뿐이다.

기다리던 일이 드디어 일어났다.

석희재는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기쁜지, 생각보다는 차분한 건지, 흥분되는 건지, 울고 싶은 건지, 아니면 참을 만한 건지…. 제 기분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어머니가 자신을 싱글 맘이라고 칭한 것에 화가 나지는 않았다는 것이다. 물론 그건 명백한 거짓말이다. 그러나 석희재는 회사와 어머니가 한참 상의하고 골라냈을 오피셜 기사의 단어들을, 떨리는 손으로 저도 모르게 쓰다듬었다.

[…저는 직업적 배우이자 어머니로서…

…또 여자의 몸으로 연예계에서…

…이 사실이 밝혀졌을 때의 파장…

…극한의 두려움 속에서도 더 이상 아이를 상처 주고 싶지 않아…]

석희재는 도리어 어머니를 연민했다.

아이를 혼자 키우는 여자의 지위를 드러내 동정 여론을 모아야만 하는 그녀의 인생이 안쓰러웠다. 자신이 그녀의 아들임을 드러내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소중하게 여겼던 것 중 일부를 파괴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건 석희재가 제 존재를 인정받고 싶은 것과 별개로 정말로 하고 싶지 않은 일이었다. 모순이지만, 진심이었다.

아무튼 이건 어머니가 자기 스스로를 보호하는 최소한의 방법일 것이다.

석희재는 핸드폰을 분장실 화장대에 엎어 놓았다. 접이식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천천히 등을 기대며 방금 제 인생에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보았다.

생의 드라마틱한 순간은 사실 정적 속에서 맞이할 때가 많다. 여기에는 오케스트라도, 특수 효과도 없고, 조명 대신 눈에 보이는 것은 분장실의 미색 천장뿐이었다.

-지이이잉. 지이이잉.

진동 소리가 귀를 나직하게 괴롭혔다. 석희재는 손을 뻗어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이현]

석희재는 빙긋이 미소 지었다. 훗날 추억하고 기념할 만한 순간에 들린 것은 아름다운 음악이 아니라 진동 소리지만 이걸로 족했다. 이거면 충분했다.

게다가 이현의 목소리를 제 인생의 배경음으로 듣게 된 것이 마음에 들었다.

아니, 그는 음악이나 조명 따위가 아니다.

함께 무대 위에 올라온 상대역이었다.

- 나야.

석희재는 숨을 한 번 크게 고르고 대답했다.

***

- 보여 주고 싶은 게 있는데.

이현은 통화 첫 마디에 그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피곤하지 않으면 와 달라고, 그러고는 이어서 장소를 말했다. 석희재는 방금 전 기사로 인해 부풀어 오른 마음을 한 차례 삼켜 차분하게 내려보내고 이현의 말을 주의 깊게 들었다. 생의 하이라이트 앞에서도 이현이 말하고자 하는 것들의 경중을 추려 냈던 것이다.

“나는 당연히 가지.”

석희재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짐작하던 화제가 아니어도 기분이 좋은 이유는 이현이 만나자고 했기 때문이다.

- 고마워.

“항상 같이 있는데 새삼….”

- 아, 그리고 기사 봤다.

석희재는 입꼬리를 끌어 미소 지었다.

“나는 방금 봤어. 형은 나보다 먼저 봤네?”

- 그렇지. 넌 공연하고 있었으니까… 기분이 어때?

그 말에 석희재는 조금 더 느긋하게 등을 눌러앉았다. 접이식 의자가 끼익- 소리를 내며 뒤로 기울어졌다. 분장실 천장을 바라보며 석희재는 다시 느린 숨을 쉬었다.

“이상해. 어제까지도 나는 내 인생을 살고 있었는데….”

- …….

“지금부터가 진짜 같아.”

시인 같은 말을 한다며 이현은 호탕하게 웃었다. 골목길에 있는지 길거리로 번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근처를 느리게 스치는 차의 배기음이 들려왔다.

석희재는 지갑과 차 키 등 소지품을 가볍게 챙기고 분장실을 나섰다. 만날 사람이 기다리고 있는데 더 이상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아직 북적이는 분장실을 벗어나니 극장 앞 퇴근길에 취재진이 깔려 있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으로 당황한 석희재의 시야에, 막 주차장으로 천천히 들어서고 있는 밴이 포착되었다. 오늘은 이다음 스케줄이 없어서 곧바로 혼자 귀가였는데, 박 팀장이 예정에 없이 저를 픽업하러 왔다. 과연, 이런 건 연륜이라고 볼 수 있었다.

석희재는 고개를 숙이고 팬과 기자들, 그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든 관객들에게 양해를 구하며 인파를 빠져나왔다. 그러고는 긴 다리로 단숨에 밴에 올라탔다.

“감사해요. 꼼짝없이 붙잡힐 뻔했어요.”

“이런 날은 절대 혼자 집에 못 가지.”

“알아 둘게요.”

고분고분한 석희재의 대답에 박 팀장이 피식 웃었다. 좁은 도로를 벗어나자마자 차에 속도가 붙었다. 석희재는 집 대신 이현이 말한 장소를 말했다.

“대학로로 가자고? 거기 길이 좁아서 밴은 못 들어갈 텐데.”

“초입에 내려 주세요.”

“알았어, 그럼.”

석희재는 멀어지는 극장을 차창 밖으로 바라보다가 물었다.

“어머니는 괜찮으세요?”

“아, 사실 그게….”

박 팀장이 조금 난감한 기색으로 말끝을 흐렸다. 긍정적인 반응이 아니었다. 석희재는 조용히 다음 말을 기다리며 운전 중인 그를 주시했다.

그때였다. 석희재의 주머니에서 진동음이 울렸다. 이현이라고 생각하며 확인한 화면에는 어머니의 이름이 떠 있었다.

「진짜 보통 아니구나? 네 남친」오후 11:31

석희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어머니가 현을 ‘남친’이라는 칭호로 선선히 불러 준 게 처음이라 미심쩍었고, 무슨 일이 있었기에 ‘보통 아니다’라는 표현이 나왔는지 궁금했다.

왜인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집 아닌 바깥에서 보자고 말한 이현의 제안까지 무언가의 징조처럼 느껴질 지경으로.

그와 동시에 말을 끌던 박 팀장이 입을 열었다.

“오피셜 기사 뜨기 전에 그… 이 피디님이 회사에 찾아와서.”

“네?”

심장이 철렁했다. 누구보다도 익숙한 이름과 익숙한 장소지만 두 개의 조합이 낯설었다. 저를 제외하고 이현이 그 장소에 갈 이유가 뭐가 있단 말인가.

“좀, 상황이 그랬어. 얘기는 직접 들어.”

그의 말에 석희재는 심장이 철렁해서 박 팀장을 채근했다. 지금 가는 곳에 기다리고 있는 사람이 이현이니 최대한 빨리 가 달라고. 그래도 회사에서 제법 지위가 있는 팀장급 매니저를 로드처럼 쓴다는 자각은 있어서 공손하게 부탁했다.

멀리 혜화역 지하철 출구가 보일 때쯤에 차가 멈추었다. 유동인구가 많은 곳에서 쓸데없는 이목을 모으지 않기 위함이다. 석희재는 짧게 감사 인사를 전하고 차에서 뛰어내려 마로니에 공원으로 달려갔다. 울창한 나무가 가로등 불빛을 차단하는 것도 잠깐이고, 저 너머 골목길은 아직 불빛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쭉 가다가 세 번째 골목길에서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간 다음, 또 한 번 왼쪽으로 돈다. 이현의 자취를 쫓아 수없이 드나들던 대학로인데도, 이 골목은 한 번도 들어와 본 적 없었다.

빌딩을 끼고 돌자 곧바로 가로등 아래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이현이 보였다. 먼저 그를 발견한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마치 핀 조명처럼, 수직으로 떨어진 빛을 받은 이현의 실루엣이 그림 같았다.

“형.”

나직한 부름에 이현이 이쪽을 돌아보았다. 한쪽 뺨이 희게 빛났다. 석희재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빨리 왔네.”

“밟았어.”

“너 초보가 속도 내면….”

“박 팀장님이.”

살짝 가파른 경사를 올라 이현에게 다가가며 석희재는 다정하게 웃었다. 제 반응을 짐작하고 반전을 끼워 넣은 석희재의 대화법에 이현은 괜히 눈을 흘겼다. 그게 답지 않게 새치름해 보여 석희재도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러나 미소를 띠고 있었던 석희재의 얼굴은, 가까이에 다가와 이현의 얼굴과 마주하는 순간 삽시간에 굳어 들어갔다. 그 변화가 지나치게 드라마틱하여 이현조차 잠시 굳을 정도로.

“얼굴에 상처 뭐야?”

“아….”

이현은 손을 들어 올려 손등으로 뒤늦게 제 뺨을 가려 보았다.

“어디서 뭐 하다가 다쳤어.”

추궁하는 석희재의 눈빛이 매서웠다. 그는 이현에게 코가 닿을 정도로 바짝 다가서서 그의 얼굴을 찬찬히 살폈다. 그리고 뺨을 스치는 손길조차 아플까 봐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그 손이 벌벌 떨리고 있지 않았다면 화가 난 줄 알았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현의 상처는 심각했다. 그의 얼굴은 광대부터 눈가까지 검 붉은색으로 크게 멍들어 있었다. 죽은 색인 부분은 앞으로 시꺼멓게 멍들어 갈 것이 뻔했다.

“형, 혹시….”

물어보는 석희재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는 방금 전 여기 도착하기 전에 박 팀장과 나누었던 대화를 되새겼다. 저 몰래 회사에 찾아갔다던 이현, ‘네 남친 보통이 아니더라’고 말하는 어머니의 문자, 상황이 좀 그랬다고 얼버무리던 박 팀장의 말….

그리고 왠지 위로가 필요하다는 듯이 저를 올려다보는 이현의 눈동자까지.

“우리 엄마랑 만났어?”

“그걸, 어떻게….”

이현은 수긍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석희재의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맞았어?”

“뭐?”

이현은 화들짝 놀라며 반문했다.

“야! 내가 누구한테 맞고 다닐 사람으로 보여?”

“잘 맞고 다니잖아. 내가 본 것만 해도 분기마다, 읍.”

부정하지 못한 이현은 석희재의 입을 틀어막고는 또다시 한숨지었다. 그러기가 무섭게 석희재는 제 입을 가린 이현의 손바닥에 일부러 입술을 쪽, 하고 붙였다가 떼어 냈다. 석희재를 올려다보는 이현의 눈동자가 예상치 못한 키스에 작게 흔들렸다. 결국 석희재의 입을 막았던 이현의 손은 키스 한 번에 강제성을 잃고 흐물흐물 떨어졌다.

“아니, 하… 이건.”

정말 말하고 싶지 않다는 듯이 주저하다 말했다.

“다친 건 그거랑 아무 상관없어.”

“그럼 회사는 왜 왔어.”

“그걸 어떻게 알아?”

“회사에는 내 편이 많아.”

“…….”

“보는 눈도 많고.”

‘딱히 형이 고백하지 않아도 뒤를 캐면 다 알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직접 듣고 싶다’고 주장하는 석희재의 말에 이현은 결국 졌다. 애초에 석희재의 얼굴을 마주 보면 지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이현이 털어놓은 전말은 이랬다. 루머 앞에서 자신을 보호할 생각도 하지 않는 석희재를 위해 뭔가를 해 주고 싶었다고, 그래서 자신이 이사라 씨를 설득해 볼까 싶었다고….

그리고 이쯤에서 석희재의 안색은 새파래졌다. 그가 예측한 시나리오와 거의 같은 방향으로 흘러갔기 때문이다.

<이현은 홀로 제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 어머니는 설득당하기는커녕 네가 내 아들을 게이로 만들었다며 호통을 치고, 온갖 모진 말과 핍박 끝에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은 이현은 끝내 뺨을 얻어맞는데….>

“형…”

석희재가 떨리는 손으로 이현의 양 뺨을 소중히 감쌌다. 이현은 눈을 가늘게 뜨며 석희재를 바라보았다.

“뺨만 맞은 거 맞아?”

“응?”

“물 끼얹고, 돈다발로 때리고 그런 건 안 했어?”

“너 무슨 상상하냐?”

이현은 석희재의 뇌에서 아침 드라마급 망상이 펼쳐지고 있음을 쉽게 추측했다. 왜인지는 몰라도 뺨의 상처와 만남을 연관시킨 모양이었다. 이현은 픽 웃었다. 모자지간의 골이 깊어지기 전에 얼른 풀어 줘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아니야. 그런 거.”

“…그럼?”

“언성 높이지도 않았고, 손 올린 적은 더더욱 없고.”

“…….”

“난 그냥 약간… 용기를 드렸지.”

그 사실이 밝혀진다고 당신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원래부터 당신 편이 아니었을 거라고 말이야.

그리고….

이렇게 말씀드렸어.

‘당신도 사람이잖아요.

사람은 살면서 얼마든지 바보 같은 짓을 할 수 있어요.

게다가 보통은 바보 같은 짓을 하고 아주 가끔 괜찮은 짓을 하는 저 같은 사람도 있으니까, 사실 그건 별로 흠도 아닙니다.

음… 제가 생각하는 최고의 바보짓은요.

그건 석희재를 3년이나 만나면서 걔가 제게 질려 떠나갈 날만 기다렸던 거고요.

제일 잘한 짓은 술에 취해서 그 애 집 앞에 찾아가 진상 부린 겁니다.

맞아요. 보통 사람들은 반대로 생각하겠죠.

어차피 내 것이 안 될 사람에게는 쿨한 척 거리를 두는 게 그나마 이성적인 거라고,

또 그게 자존심이라도 챙길 수 있는 방법이라고.

그리고 취해서 희재한테 못 보일 꼴을 보이고 경찰한테 질질 끌려갔던 걸 후회하겠죠?

근데 저는 아닌 것 같더라고요.

마지막까지 쿨한 척했으면 석희재를 잃었을 테니까요.

그리고 생각해 보면 배우님 실수는 실수도 아닙니다.

아들이 석희재잖아요.

아, 제 말은.

그냥, 제 생각엔 너무 아름다운 실수 같아서요….’

***

착각인지, 그렇게 말했을 때 그녀의 눈가에 물기가 고인 것 같았다.

그 표정을 보며 이현은 잠시 말을 잃었다. 첫째로는 울리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무척 당황해서. 둘째로는 그녀의 눈 아래 점막이 촉촉하고 물기 있어 보이는 것이 석희재가 처연할 때의 눈과 닮았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모자지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실감한 적이 없었는데 이런 순간에 느끼게 되는 것이 신기하다고, 이현은 생각했다.

그러나 이현의 망상을 깨듯이 그녀는 뒤이어 소리 없이 짧은 웃음을 흘렸다. 눈물의 기운은 순식간에 싹 가시고 장난스러운 미소만이 남았다. 그녀는 대스타의 눈물 앞에서 순간적으로 안절부절못하던 이현을 귀여운 듯 바라보았다.

이현이 사람을 울리지는 않았다는 안도감과 왠지 모를 아쉬움 사이에서 잠시 허우적대고 있을 때였다. 그녀가 입을 열었다. ‘희재가 바라던 대로’ 될 거라고. 또, 이런 대답이 듣고 싶어 자신을 설득하러 온 게 아니냐고.

원하던 답을 듣자마자 이현의 얼굴에는 어쩔 수 없이 미소가 번졌다. 조금 얼떨떨한 듯이 웃고 있는 이현 앞에서 그녀는 먼저 등을 돌렸다.

‘가 봐요.’

이현은 허리를 몇 번이나 숙이며 그녀의 앞에서 물러났다. 창가에 선 채로 저를 등진 그녀를 바라보며 다소 황송하게 뒷걸음질 쳤다. 덕분에 떨어진 유리문과의 거리를 재지 못해 이현은 있는 그대로 제 체중을 유리문에 박았다. 하필 가장 먼저 닿은 곳이 광대 부근이라 얼굴로 충격이 고스란히 전해졌다.

신음도 흘리지 못하고 윽, 하며 제자리에서 무릎이 꺾인 이현을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멀리 복도에서 이쪽으로 걸어오던 박 팀장이었다. 이어 이사라 역시 굉음에 놀라며 뒤돌았다. 이현은 아픔보다도 쪽팔림이 커서 그저 그곳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박 팀장의 부축도 만류하고 후다닥 그 자리를 떠났다. 그 뒤로 제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아서 이현은 현재 제 얼굴에 그려진 멍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도 몰랐다.

좋아하는 배우, 제법 멋진 대화, 대미를 장식한 쪽팔린 마지막….

이현은 가능하면 가장 마지막 것은 지우고 싶었다. 때문에 석희재가 저음의 목소리로 칭얼거려도 입을 꾹 다물고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다.

현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아마도 이사라가 운 것은 사실이었을 것이다.

그저 어떤 이들은 남들 앞에서 우는 데 많은 용기가 필요할 뿐이다.

눈물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법을 잊은 지 너무 오래되어, 그녀는 자신이 원치 않을 때 나오는 눈물을 보다 빨리, 또 능숙하게 숨기는 법에 익숙했다. ‘눈물은 약점’이라고 체득해 버린 어른의 비극이었다.

그래도 그녀가 이현의 말에 어떤 울림을 느꼈던 것은 사실이라서, 이사라는 그 시점 이후부터 석희재와 이현에 대한 평가를 조금 달리 평가하기로 했다.

제 아들은 퍽 괜찮은 남자와 좋은 연애를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고.

많이 걱정받고, 위로받고, 또 사랑받고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한때는 생각보다 눈이 낮은 것 같아 걱정스럽던 제 아들이 실제로는 저와는 닮지 않아서,

아니, 많이 달라서 그 점은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역시 남자는 외모보다는 내면인가.’

그렇게 생각하며 그녀는 눈물기를 털어 냈다. 제 외모에 별 불만 없는 이현과, 이현이 세상에서 제일 예쁜 석희재가 들었다면 천인공노할 만한 발언이었다.

***

“너는 왜 울어?”

그 시점, 석희재는 이현이 제 어머니에게 부탁했다는 말을 들으며 눈물을 글썽이고 있었다. 이현은 기가 막혀 목소리를 높였다. 석희재는 크고 모양 좋은 손으로 눈꺼풀 아래를 꾹 누르며 눈물을 훔쳤다. 이사라는 울지 않았지만 석희재는 어려서 그런지 잘 울었다. 눈 밑 점막을 촉촉하게 만든 물기가 아래 속눈썹을 젖게 만들고, 눈의 음영이 그윽해지는 것을 보며 이현은 입을 멍하니 벌렸다.

석희재가 제 입술을 꾹 깨물고는 울먹울먹하며 말했다.

“몰라. 형이 한 말 감동적이야.”

“좀… 너무 대사 같지 않냐.”

‘아름다운 실수’를 떠올리며 이현은 제 팔을 감싸 안았다. 돌이켜보니 제 발언이 팔에 소름이 오소소 돋을 정도로 낯간지러웠던 것이다. 하지만 석희재는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도리어 지난 과거를 몇 마디로 압축한 이현의 정리에 파도치듯 밀려오는 감정을 어쩔 줄을 몰랐다.

“진짜 멋있는 사람, 읏….”

석희재는 뭐라고 말하려다 치미는 눈물을 삼켰다. 덕분에 말이 끊겼고, 동시에 그는 손목 소매를 끌어올려 눈을 가렸다. 눈을 틀어막은 그 꼴을 보고 당황한 이현은 극장 빌딩 안으로 석희재를 황급히 이끌었다.

“뭐가 그렇게 슬픈데?”

“슬픈 게 아니라… 형 원래 연예인 혐오증 있잖아.”

“내가? 아니야. 안 싫어해.”

이현이 퍼뜩 놀라며 답했다. 석희재는 가만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말은, 원래는 같은 사람으로 안 봤다는 소리야. 미운 것만 혐오가 아니라, 선망이 지나치거나 다른 인류라고 분리해서 생각하는 것도 포함되는 거야.”

“…….”

“형이 항상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연예인으로 오래 살면 변한다’였잖아. 그런데 형이 우리 엄마보고 당신도 사람이라고 한 게 난 좀… 신기해.”

“…….”

“그래도 난 안 변할래.”

석희재가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아들은 이현은 손을 뻗어 그의 등을 살짝 토닥였다.

“바보야. 너는 이러나저러나 상관없어.”

그리고 자연스레 가까워진 뺨에 짧게 입술을 붙였다.

“그런 생각이 든 것도 너 덕분인데.”

감격한 석희재는 무의식적으로 이현을 끌어안으려 했다. 그러나 이현은 석희재가 정면에 서기 전에 휙 돌아섰다. 부끄러운 건지, 애타게 만들고 싶다는 건지…. 석희재는 그를 한 번 안아 보려다가 머쓱해하며 그의 뒤를 따랐다. 대신 빌딩 깊숙한 안으로 진입하자마자 뒤에서 끌어안았는데, 이번에는 밀려나지 않았다.

“누구 있으면 어쩌려고?”

그렇게 말하며 이현이 팔로 뒤를 툭 건들며 석희재를 쳤다. 물론 아프기는커녕 느낌도 나지 않았기에 석희재는 그 말을 ‘여기는 아무도 없다’는 뜻으로 받아들였다. 고개를 숙여 목덜미에 입술을 묻자 이현이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하도 달라붙었더니 걷는 보폭이 불편했지만 둘 다 떨어지려고도 하지 않았다.

“발 조심해. 턱 있어.”

이현을 따라 다다른 곳은 작은 오퍼실이었다. 처음 들어와 보는 공간을 두리번거리고 있으니 이현이 익숙하게 조명 큐를 눌렀다. 아마도 이전 대관작 공연의 사이클에 맞춰 기록해 두었을 조명이 빠른 속도로 변화했다. 극에 맞춰 세팅된 조명이라 그런지 빈 무대 위에 조명만 내려앉는데도 스토리가 그려지는 것 같았다. 인물들의 동선도 절로 그려졌다.

그 광경이 이채로워 석희재는 무대에 시선을 빼앗겼다.

“급하게 대관처를 찾기가 어려웠는데, 다행히….”

“…….”

“대대관이 됐거든.”

“대대관이 뭐야?”

“빌려 놓은 걸 또 빌리는 거. 여기 극장주한테 제작사가 장기 대관하고, 나는 그 제작사한테 빌리고.”

“그래도 돼? 불법 아니야?”

석희재는 심각한 얼굴로 물었다. 이현이 웃음을 터뜨렸다.

“허다한 일인데 뭐. 안 되는 거면 다 잡혀가야지.”

“아무튼 괜찮다는 거지?”

“응.”

석희재의 심장이 불시에 뛰었다.

그건 이현의 첫 공연이자 석희재의 다음 작품이 올라갈 장소가 이곳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석희재는 유리에 가까이 다가가서 무대와 객석을 내려다보았다. 객석 1열은 손을 뻗으면 무대 위에 올려 둘 수 있을 정도로 가까웠고, 객석의 틈은 좁았다. 객석과 무대 사이 오케스트라 피트가 있어 거리가 먼 대극장과는 전혀 다른 구조였다. 무대에 서면 오퍼실에서 큐를 누르는 흰 손등이 보일 것처럼 폭이 가깝기도 했다.

“가까워.”

“뭐가?”

“그냥, 전부 다.”

“음… 좁은 공간의 이점이 있지. 사람들은 여기 와서 석희재를 최대한 가까이서 봐야 하니까.”

그건 석희재에게 칭찬으로 들렸다. 심장이 괜히 두근거리기도 했다. 남들 앞에 저를 ‘전시’하는 것을 꺼리지 않는 이현이 섹시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는 정말 질투심 한 조각 없는 건지 궁금하기도 했다.

석희재는 무대에 시선을 주고 있는 이현의 옆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희재야. 난 이 조명 세팅만 봐도 이게 어떤 공연인지 안다.”

이현의 시선은 무대 위에 못 박힌 채였다

석희재는 모르지만, 이건 스물두 살 이현이 제 눈물의 명분을 만들러 왔던 공연이었다.

상수에서 밤 그늘 속 달빛처럼 드리우는 조명, 동시에 퍼지는 스모그와 몽환적인 간접 조명들. 특수 효과를 쓸 수 없는 작은 극장에서는 조명으로 대부분의 암시와 효과를 메우기 마련이다. 거기에 매료된 이현은 한때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때 본 공연이 너무 좋아서, 내가 나중에 직업을 가지게 된다면 빛을 만지는 일을 하고 싶다고….”

객석 조명을 내려 안을 어둡게 만든 이현이 석희재를 돌아보았다.

“그런데 조명을 하려면 제작이 제일 가깝다길래 제작 팀으로 들어갔는데.”

“…….”

“어쩌다 보니까 그거랑은 점점 멀어지더라고.”

“…….”

“아닌가?”

이현이 제 말을 미심쩍어하며 씩 웃었다.

“더 반짝거리는 걸 만지고 있으니까 된 건가.”

그렇게 말한 이현의 손가락 등이 석희재의 뺨을 살짝 스쳤다. ‘반짝거리는 것’이 저라는 것을 겨우 알아챈 석희재의 귀가 확 붉어졌다. 부지불식간에 이현이 깊이 키스해 왔다. 젖은 소리를 내며 열리는 입술에 석희재를 파르르 눈꼬리를 내렸다. 힘줄이 우뚝 선 손으로 이현을 아프지 않게 끌어안으려고 노력했다. 이현의 노골적인 키스와는 다르게, 석희재는 부드러운 새 깃털이 상하지 않게 다루듯 현의 등과 어깨를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형 눈에는 내가 반짝거려?”

“누구 눈에든 그렇지.”

“형한테 더 특별했으면 좋겠어.”

“음.”

입술을 붙인 채로 이현은 웃었다.

“인건비 아껴야 되니까 공연 오퍼는 내가 볼 거고.”

영 딴말을 하는 이현이 야속해 석희재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물론 귀엽다고 생각한다. 이 밤중에 극장을 얻었다는 소식을 전하고 싶어 당장 저를 불러낸 것 하며, 조명 큐를 만지작대면서 공연에 대한 열정을 불태우는 것도, 전부 다….

하지만 질투해 주면 좋으련만. 퇴근길에 저를 둘러싼 팬들을 보고 아무 생각도 안 드는 건가, 이 남자는. 객석과 무대가 닿을 만큼 저토록 가까운데 도리어 그게 셀링 포인트라고 흥분하는 애인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나는 형이 남들 앞에서 옷 벗고… 몸 보여 주고. 그러면 싫을 것 같은데.”

“응?”

“형은 괜찮은가 봐. 내가 스트립쇼를 해도.”

“아니.”

코웃음을 친 이현이 이어 말했다.

“왠지… 부정은 못 하겠는데 일단, 네가 하는 건 스트립쇼가 아니고 예술이고.”

이번에는 석희재가 코웃음을 쳤다. 이현이 안긴 채로 발끈했다.

“아, 어떡하냐? 내 뇌가 그런 걸….”

“알긴 알아?”

“기 작가님이 해 주신 각색 읽어 봤는데 하… 난 진짜 안 될 놈이야. 로맨스 부분은 아무리 읽어도 얘네 언제 잘까 그런 생각밖에 안 들더라고. 작가하고 연출은 예술을 하는데 나는 왜 포르노밖에 못 할까….”

자포자기한 이현의 말에 결국 석희재가 먼저 졌다. 웃음을 터뜨리고 만 것이다.

석희재는 이현을 꽉 끌어안았다. 그의 팔뚝에 숨이 막힌 이현은 먹는 소리로 불분명하게 말했다.

“너 바보 아니냐? 내가 오퍼 하는 게 왜겠어. 너 보고 싶어 그런 건데.”

“응?”

석희재는 ‘보고 싶다’는 말에 귀신같이 반응하며 이현을 조금 떨어뜨리고 그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오퍼 하면 120분 내내 무대 뚫어져라 보고 있어야 되는 거… 모르지?”

“…….”

“배우들은 잘 모르더라. 네가 숨을 언제 쉬는지, 어떤 속도로 대사를 치는지. 전부 체크하면서 다음 큐를 눌러야 되는 게 소극장 오퍼야.”

“…….”

“넌 극장에 있는데 나 혼자 집에 있는 것도 싫고. 네가 그날 어떤 모습이었고 관객들은 어떻게 반응했는지 나도 다 알고 싶어서….”

“…….”

“그리고 사람들은 무대 위의 사람에게 손 못 대.”

이현의 선명한 목울대가 도드라졌다. 그 모습을 본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따라서 마른침을 삼켰다.

“널 만질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지.”

이현의 손끝이 석희재의 목을 따라 길게 쓸었다. 성적인 뉘앙스를 풍기는 손길에 석희재는 미간을 찌푸렸다. 아래가 욱신거려서이다. 이현의 꿈을 이룰 장소에서 이런 불경한 짓을 저질러도 되는지, 생각이 많아진 석희재가 잠시 주저할 때였다.

“희재야.”

“응?”

“아무도 없는 오퍼실에서 하는 게 내 꿈이었는데.”

이어진 이현의 말에 석희재는 더는 참지 않고 달려들었다. 석희재의 긴 다리에 걸린 접이식 의자가 우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풀썩 밀쳐진 이현의 등에 닿은 조명 큐들이 밀리며 어지럽게 객석을 밝혔다. 갑자기 들어온 불에 놀란 석희재가 고개를 쳐들었다. 그것도 잠시, 그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 이현의 목덜미를 빨았다. 아주 이현의 마음에 쏙 들게.

제 목덜미와 가슴에 흔적을 새기는 데 여념이 없는 석희재의 정수리를 보며 이현은 생각했다. 아마도 오퍼실을 드나들 때마다 이 기억이 떠오를 거라고. 어떤 이들은 사람이 들어가 있는지도 모르는 이 작은 공간에 갇혀서도 자신은 몰래 히죽댈 수 있을 것이다. 무대 위의 석희재가 돌변해 제게 달려들던 순간을 생각하면서.

그리고 이런 기억은 비단 오퍼실에만 한정되지는 않을 것이다.

이현은 믿었다. 함께 공연을 만들어 가면 오래전 여기에서 울었던 기억은 다 씻겨 나가게 될 거라고. 뺨을 적셨던 눈물 대신 환희와 열정으로 이곳을 추억하게 될 거라고.

그러니까 석희재의 커튼콜을 보게 되면, 그때는 많이 울어도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때는 누가 볼까 객석 조명이 켜지기 전에 황급히 눈물을 닦아 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제작자가 운다’는 걸로 누군가 흉을 볼지도 몰랐지만…. 그런 건 상관없었다. 살다 보면 얼마든지 보여도 상관없는, 들켜야 가치 있는 눈물도 있는 법이니까.

***

석희재의 데뷔작 <기적에 관하여>는 마지막 주말 4회차 완전 매진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단순하게는 한 공연이 시작되고 끝났을 뿐이다. 특히 이현은 이 업계에 들어온 후 18개 공연의 개막과 종료를 경험했다. 새삼스러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심지어 그는 공연 종료가 되었을 때 그 팀의 일원도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 공연이 진행되는 사이 석희재와 이현은 지난 생의 하이라이트를 전부 압축한 것만큼의 변화를 겪었다. 덕분에 <기적의 관하여>가 초연되던 나날은 추억의 한 페이지가 되어 그들의 마음에 꽂혔다.

이현은 특별히 그 페이지의 귀퉁이를 접어 놓았다.

***

몇 달 사이 석희재는 익숙해지리라고 생각지 못했던 것에 아주 자연스럽게 적응했다. 한때 저를 분장해 주는 이들에게 실례일까 봐 항상 등이 꼿꼿하던 신인 배우는 이제 메이크업을 받으며 가끔 졸기도 한다. 퇴근길 길게 늘어선 팬들에게 하나하나 눈을 맞춰 주며 인사를 하던 것도 이제는 불가능한 일이 됐다. 막공 날 줄을 선 사람 모두에게 사인을 해 주다가는 쫑파티에 참석도 못 하고 날이 샐 지경이라 결국 석희재는 전체 인사로 대신하고 매니저와 경호원의 보호 아래 자리를 떠야 했다. 그의 그런 행동에 감히 아쉬워하는 사람도 없을 만큼 그날 그를 둘러싼 인파란 대단했다.

게다가 대중의 주목만 받는 것도 아니었다. 배우 이사라와의 혈연이 밝혀지며 석희재에게는 업계 콜이 쇄도했다. 막 주목받기 시작한, 아는 사람만 알던 보물 같은 신인에서, 일을 가려 해야 하는 배우로의 전환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빨랐다. 석희재는 저를 둘러싼 소란이 팽창하던 때만큼 빨리 가라앉을 거라고 예상했지만… 물론 그렇게 생각하는 건 석희재밖에 없었다. 그가 올라탄 파도는 너무 거대해서 끝이 보이지 않았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 한다는 업계 이론에 따라 석희재는 24시간을 누구보다도 밀도 있게 쪼개어 썼다. 물론 석희재는 피곤에 전 채로도 이현과 함께할 연극에 소홀하지 않았다.

대극장과 소극장은 진행 방식이 아예 달라서 석희재에게는 태반이 신기한 일이었다.

그 중 석희재가 가장 즐겁게 여겼던 건, 작가가 석희재에게 그가 맡을 배역의 네이밍을 맡겼던 일이었다. 영국에서 사 온 대본의 배경을 한국으로 로컬라이징하며 등장인물 전원이 한국 이름을 새로 가져야 했던 것이다.

“희재 씨 배역이니까. 딱 맞는 이름 붙여 주고 싶은데. 평소에 예명하면 이 이름 하고 싶었다, 그런 거 없어요? 원래 이름도 멋지긴 하지만.”

고민은 짧았다. 다만 입 밖에 뱉는 순간은 왜인지 약간 주저되었다.

석희재는 작게 헛기침을 한 후 말했다.

“현, 이요.”

“현?”

기 작가는 이름의 스토리를 파악하고 싶어 눈을 크게 떴고, 책상 끄트머리에 앉아 대본을 보고 있던 이현은 사레가 들려 대단한 기침을 했다. 석희재는 눈을 내리깐 채로 살짝 땀이 배어난 손가락을 대본에 문지르며 수줍게 말했다.

“제가 바이올린 전공을 했어요.”

“아, 그렇지. 근데?”

“‘현’이라는 건 저한테 항상 특별하고 의미 있는 거여서….”

“아아, 그렇게 좋은 뜻이.”

기 작가는 선뜻 대본에 ‘현’이라는 글자를 크게 적었다. 주연 배우의 이름 옆이었다.

“성은? 석 씨니까 그대로 석현으로 할까요? 난 그것도 좋아.”

“음….”

석희재가 주저하는 사이 이현이 의자를 등으로 밀어내고 일어나 조용히 나가 버렸다. 눈치 빠른 기 작가가 혹여나 무언가를 짐작할까 봐 두려웠던 것이다. 혹은 부끄러움을 이기지 못해서. 석희재는 바깥으로 나간 이현의 모습을 상상하며 미소 지었다. 그는 바깥에서 의미 없는 손부채질을 하다가 곧 담배를 한 개비 물 것이다.

석희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이런 면에서는 이현보다는 저가 좀 더 철면피였다.

“이 씨가 좋은데요.”

“이 씨? 그럼 이현?”

“네.”

“이… 현? 입에 붙고 좋네.”

금세 익숙한 누군가를 떠올린 기 작가가 골똘히 생각하다 고개를 흔들었다. 머리에 떠오른 누군가를 털어 내듯.

쉽게 작가 컨펌을 받은 석희재는 조용한 환희에 찼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현으로 불러 준다는 생각을 하면 그 자체로 기뻤던 것이다.

다만 이현은 조금 다르게 받아들인 것 같았다.

“야. 성 도착증 환자에 범죄자인데 왜 내 이름을 붙여?”

“아… 그렇게 되나.”

“그렇지!”

막 흥분하려는 이현 앞에서 석희재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는 그냥 형 이름으로 살아 보고 싶어서.”

미안해. 거기까지는 생각 못 했어.

진중한 석희재의 대답에 이현은 한 방 먹었다는 듯 입만 뻐끔거리다가 맥없이 물러났다. 그렇게 몇 걸음 물러나 석희재를 의심의 눈초리로 위아래로 훑는다. 물러나기는 물러났는데 여전히 의심하는 모양새였다.

그 태도가 귀여워 보여서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환히 웃어 버렸고, 결국 이현에게 저를 놀려 먹었다는 혹독한 오해를 사고 등을 퍽퍽 맞았다.

이왕 맞은 김에 석희재는 솔직히 고백했다.

“근데 사실 형 성적 취향도 주인공에 못지않거든….”

“야, 너…!”

부정하지 못한 이현은 시뻘게진 얼굴로 부들부들 떨었다.

그밖에도 사소한 사건이 많았다.

초보 운전 석희재는 운전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사고를 냈다.

“형… 나 큰일 났어. 어, 어떻게 해? 큰일 났어….”

차 사고를 냈다는 석희재의 말에 이현은 심장이 철렁, 하고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순간 석희재의 이름으로 뒤덮일 인터넷 기사들이 떠올랐다. 그가 낸 사고의 경중에 따라 활동이 어려워질 수도 있었다. 눈앞이 깜깜한 채로 이현은 어렵게 말을 이었다. 저까지 떨면 석희재는 패닉에 빠질 것 같아 애써 목소리를 다잡으며.

“차 안에서 나오지 마. 근처니까… 앉아 있어. 고개 숙이고 있고. 내가 갈 테니까.”

그리고 이현은 연습실에서 뛰쳐나왔다. 석희재의 차가 있다는 곳으로 전력 질주를 하며 오만 생각을 다 했다. 설마 사람이라도 쳤다면…. 안색이 파랗게 질리고 이가 악물렸다. 이현은 범법이라는 것을 알지만 사고 크기에 따라 자신이 뒤집어쓸 생각도 했다.

도착한 석희재의 차 앞에서 이현은 다리가 풀리듯이 주저앉았다. 보닛을 짚은 덕에 가까스로 꼴불견인 꼴을 보이지 않고 기듯이 조수석에 올라타 앉을 수 있었다.

“뭐야. 어떻게 된 거야. 다친 데 없어?”

헉헉 숨을 몰아쉬며 이현은 석희재의 손을 붙들었다. 석희재는 창백한 안색으로 손가락으로 차창 밖을 가리켰다.

“저기… 저거.”

“응?”

“내가 긁은 거야.”

그가 가리킨 흰색 차에는 아니나 다를까, 길게 마세라티의 푸른색 칠이 남아 있었다.

“어, 어떻게 해? 형… 나 그냥 가면 뺑소니야?”

이현은 핑 도는 머리를 짚었다. 눈앞이 아찔했다. 동시에 안도감이 몰려와 쓰러지듯 뒷좌석에 등을 기댔다.

“…뺑소니는 사람이 타야 뺑소니지. 저건 주차된 차잖아.”

“정말?”

석희재는 일곱 살이라는 나이 차이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원숙하고, 사려 깊은, 이 나라에 드물기 그지없는 철든 이십 대지만 어쩔 수 없이 애티가 나는 때가 있었다.

“하아….”

이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최악의 상상까지 했다가 그 상황에서 빠져나와 그런지 갑자기 전신에 엔도르핀이 돌았다. 이현은 손에 고개를 묻은 채로 쿡쿡 웃었다. 석희재는 이현이 미친 줄 알고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형….”

이현은 생각했다. 이 녀석은 번거로운데, 반대로 전혀 번거롭지 않다고.

게다가 가끔은 애처럼 구니 얼마나 귀여운지 모르겠다.

이현은 말없이 손짓해 석희재를 운전석에서 치웠다. 그러고는 골목길에 석희재를 멀거니 세워 두고 차를 능숙하게 빼냈다. 차주가 확인할 수 있도록 제 전화번호까지 남기고 있자 어느새 뒤에 와서 석희재가 섰다. 퍽 소극적인 태도로.

주차 미숙자로서 자신감을 상실한 석희재는 함께 걸어서 연습실로 가는 동안 헛소리를 했다.

“차가 너무 커서 그런 거 같아. 바꿀래.”

“아니, 얼마 전에는 차가 작아서 큰 걸로 바꿔야겠다며?”

“바꿀래. 모닝으로….”

이현은 황당해졌다. 얼마 전까지는 카섹스를 하기 위해 차도 큰 걸로 바꾸겠다던 녀석이 갑자기 모닝 타령을 하니 어이가 없었다. 둘은 송백당 연습실로 올라가는 긴 골목 내내 실랑이했다.

이현은 너는 모닝에 타면 정수리가 닿는다, 탈 때마다 몸 구겨서 타야 한다, 너에게 어울리는 건 중대형 세단이다 등등을 주장하며 결사반대했다.

연습실에 도착할 때쯤에는 ‘뭐 그것도 네가 타면 귀엽겠다’ 하고 수긍해 버렸지만 말이다.

이 또한 추억의 페이지에 꽂혔다. 이현은 내내 시무룩하던 석희재의 얼굴을 생각하며 그 페이지의 귀퉁이도 접어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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