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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사랑하는 (25/27)
  • 25. 사랑하는

    석희재는 생긴 것과 달리 애교가 많다, 라고 이현은 생각했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지극히 상대적인 기준에 의한 것이었다. 지난 3년간 석희재는 제 나이를 숨기기 위해 지극히 말을 아끼거나 무게를 잡았고, 이현의 취향인 ‘연상’에 부합하려고 애를 썼다. 이제 그런 노력들을 버리고 나니 본래 나이다운 순간이 드러나는 것이다.

    그건 겉으로 드러나는 애교도 아니고 의도한 행동들도 아니었지만 이현은 석희재를 시도 때도 없이 귀엽게 여겼다.

    이를테면 이런 때에.

    “나 일어나기 싫다.”

    이현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은 석희재가 완전히 가라앉은 낮은 목소리로 덤덤히 말했다. 무척 성실한 타입인 석희재에게서 듣기 어려운 말이었다.

    이현은 그런 석희재의 잠투정이 귀엽다고 생각하면서 그의 결 좋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헤집었다.

    “왜. 오늘 스케줄 많아?”

    “응… 네 개, 아니 다섯 개? 새벽에 끝나.”

    그러더니 석희재는 스케줄 생각을 떨치듯 머리를 흔들어 대더니 이내 이현의 허리를 꽉 끌어안았다. 그러자 지난 밤 몸을 섞은 뒤 그대로 잠들었던 맨살이 애달프게 닿았다. 석희재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는 이현의 입가가 저절로 헤실헤실 벌어졌다.

    “형이 가라고 해 줘.”

    “…….”

    “등 떠밀고 혼내 줘….”

    이현은 으음… 하고 자신 없이 신음했다. 약간의 어리광이 섞인 석희재의 말투와 달리, 성대를 긁는 듯한 목소리는 무척 섹시했기 때문이다. 등허리가 징- 하고 울렸기에 이현은 석희재의 품 안에서 괜히 몸을 뒤척였다.

    이대로 침대 위, 둘만의 세계에 가만히 고립되고 싶은 것은 이현 역시 바라는 바였다. 그래서인지 섣불리 ‘어서 일어나라’고 석희재의 등을 떠밀 수가 없었다.

    석희재의 등만 만지작거리고 있자 그가 다시 불쑥 투정을 부렸다.

    “운동도 가기 싫다.”

    이현은 또 소리 없이 함박웃음을 지었다. 떨어지기 싫다고 칭얼- 이현의 눈에만 그렇게 보인다 -대는 석희재의 모습이 귀여웠다. 뭉그적거리는 희재가 게을러 보이거나 한심하지 않은 이유는 외모 탓도 있지만 이런 행동 하나하나가 전부 제게 환장한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운동 안 가면 너랑 두 시간은 더 있을 수 있는데.”

    그렇게 말하며 석희재가 눈을 들었다. 이현은 갈등했다.

    ‘두 시간….’

    섹스를 한다면 원 없이 질펀하게 뒹굴 수 있는 시간이었다. 이현의 갈등을 알아챈 석희재가 상체를 조금 일으키며 비스듬히 누웠다. 팔로 턱을 괴자, 운동으로 가꾼 상박과 팔의 근육이 자연스럽게 드러났다.

    이현은 그 몸을 보면서 석희재가 아직도 자라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저 역시 스물두 살까지 키가 컸다. 석희재도 아직 스물둘이었다. 게다가 키뿐만 아니라 골격도 점점 더 남자다워지는 것 같다. 눈썹뼈와 턱선, 더 커진 어깨 같은 것들이 그렇다.

    그 얼굴에 남은 소년미가 사라질까 아쉬웠던 이현이 석희재의 얼굴에 조심스레 손을 가져다 댈 때였다.

    “내가 생각해 봤는데.”

    석희재가 진지하게 운을 떼며 눈을 내리깔았다.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이현은 귀를 기울였다.

    “섹스도 운동이 되는 것 같아.”

    “이것 봐라?”

    진지한 자세로 맹랑한 말을 한다. 그러니까 운동을 안 하겠다는 뻔뻔한 논리였다. 하지만 석희재가 받는 개인 PT는 회당 40만 원에 육박했고 당일 환불도 안 된다. 그런 점을 내세우며 이현이 혀를 차기 무섭게 석희재는 다시 이현을 깔아 눕히려 했다. 반항할 틈도 없이 그의 몸에 깔린 이현은 속절없이 버둥거렸다. 너무나 쉽게 제압당해 뺨과 귓가, 목덜미와 가슴팍에 키스를 받았다.

    “한 번만 해.”

    “한 번으로 안 끝나잖아!”

    “진짜 한 번.”

    “지금 몇 신데? 야, 너 이십 분 안에 나가야 돼. 이십 분 안에 안 끝나잖아!”

    “앞으로 열두 시간 동안 얼굴도 못 보고, 자는 것까지 더하면 스무 시간은 참아야 하는데.”

    그렇게 말하며 석희재는 이현의 뺨을 엄지손가락으로 애틋하게 만지작거렸다.

    “안에… 들어가고 싶어.”

    속삭이는 말에 이현의 귀가 확 달아올랐다.

    “진짜 잠깐이라도.”

    석희재와 눈이 마주친 이현의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열렬히 저를 원하는 까만 눈을 밀어내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그, 그럼… 잠깐 넣기만 해. 잠깐만이야.”

    “알았어.”

    석희재는 이현의 귓바퀴에 쪽, 키스하면서 급히 몸을 겹쳤다. 이미 입구를 꾸욱, 누르고 있던 귀두가 너무나도 쉽게 침입했다.

    “흐응….”

    이현은 석희재의 어깨를 밀어내면서도 양 무릎을 벌려 주며 고개를 젖혔다.

    그리고 이렇게 나른하게 신음하는 이현의 이런 모습을 보면 석희재는 혼란스러워진다. 이현 본인의 진짜 의지는 밀어내는 손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삽입이 수월하도록 도와주는 그의 하체에 있는 것인가.

    둘 다인가?

    만약 그렇다면 천재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현은 남자를 설레게 하는 일에는 타고났다- 라고 석희재는 무심결에 생각했다. 이현이 석희재가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만큼이나 개인적인 판단이었다.

    “…….”

    그렇게 석희재가 고심하고 있을 때였다. 이현이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기울였다. 깨문 입술 사이로 뽀얀 상아질의 이가 보였다. 잇새로 신음이 흘러나왔다.

    “흐읏….”

    이현은 느낄 때 신음을 숨기지 않는다. 석희재가 좋아하는 점이었다. 누군가는 이현의 이런 점이 싸게 보인다고 뺨을 때렸다는데, 물론 석희재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나 사랑스러운데….

    석희재는 두근거려 하면서 이현을 더 깊이 끌어안았다.

    “형 너무, 좋아. 따뜻해… 흣….”

    아주 깊숙이, 내벽의 끄트머리에 틀어막혀 더는 들어갈 수 없을 지경까지 파묻고 석희재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현의 가슴팍이 오르락내리락하는 움직임과 안이 감싸 안는 맥이 비슷했다.

    전신이 온수에 푹 잠긴 듯한 기분 좋은 온도와 압박감에 석희재는 나직한 신음을 흘렸다.

    “후우… 이 정도가 딱 좋은 것 같아.”

    “응, 흣… 뭐가?”

    “형 안이 너무 좁아서 아플 때도 있었는데. 갈수록 조금 편해지는 것 같… 아!”

    석희재의 말을 듣자마자 이현은 화들짝 놀라면서 상체를 일으켰다. 그가 크게 움직이는 바람에 결합부가 단숨에 튕겨 나왔다. 쑥 빠져나온 순간 크게 자극당한 석희재는 어쩔 줄을 몰랐다.

    “야… 됐어. 이제 넣었으니까 됐지. 빨리 빼고 가.”

    “…너무해.”

    이현은 갑작스레 먹던 것을 뺏겨도 사람을 곱게 흘기는 정도의 반항밖에 못 하는 석희재의 등과 어깨를 철썩철썩 때렸다. 그러고는 서둘러 욕실로 떠밀어 넣었다. 석희재는 마지막까지 붉어진 눈으로 이현을 아쉽게 바라보다 문을 닫았다.

    탁.

    문이 닫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안에서 물이 쏴- 하고 쏟아지는 소리가 났다. 이현은 문에 기대어 한숨을 쉬었다.

    ‘아, 씹… 미치겠네. 하다 말아서 나도 영….’

    흥분의 잔열감이 남은 안쪽이 움찔움찔 저절로 떨리고 있었다. 아쉬웠지만, 그래도 단숨에 번쩍 정신을 들게 할 만큼 석희재의 말은 이현에게 충격적이었다.

    ‘늘어났다고? 그니까 그거 나보고 헐렁하다고 말하는 거지.’

    생각해 보면 최초에 석희재의 것을 받을 때는 토할 정도로 압박감이 들었고 폐가 짓눌리는 것 같아 숨쉬기조차 어려웠었다. 하지만 요즘에는 그 정도는 아니었다. 물론 여전히 빠듯하다는 느낌은 있지만 뭔가 잘못될 것 같아 겁에 질리지도 않았고 무리하다가 피를 보는 일도 없어졌다.

    이현은 문에 머리를 찧으며 부정했다.

    ‘어제 세 번이나 안에 싸서 그래… 그래서….’

    어제 해서 벌어진 거야.

    아흑, 이현은 입술을 깨물며 제 과거를 떠올렸다. 원나잇 상대들과 보낸 수많은 밤과 그 헛된 만남들을 후회했다. 남자들과 미친 듯 놀아난 건 사실이니 닳고 닳은 몸과 제 업보를 부정할 수만은 없었다.

    달칵.

    예상치 못한 순간에 문이 열렸다. 이현은 허둥거리다 바닥에 코부터 박을 뻔했으나, 석희재가 받아 주어 다행히 꼴사납게 넘어지는 것만은 면했다.

    석희재는 당황하면서도 물기 남은 손으로 이현의 팔을 가볍게 문질렀다.

    “나 기다렸어?”

    “아. 응, 미안해서, 저기… 입으로 해 주려고.”

    “됐어. 형 생각하면서 혼자 뺐어.”

    “…….”

    애인을 두고 자위하게 만든 것이 미안해서 이현은 머리를 말리는 석희재에게 차가운 우유도 떠다 주고 식빵도 가져다주었다. 마트에서 파는 푸석한 싸구려 식빵이라 면목이 없었지만 석희재는 그것만으로도 무척 행복해하는 것 같았다. 갑작스레 밀쳐지는 것으로 끝나 버린 섹스에 대한 앙금은 남지 않은 모양이다.

    ‘아무튼 순하다니까.‘

    그것조차 미안해서 이현은 석희재의 옷 단추도 꼼꼼하게 채워 주고 양말도 직접 신겨 주려 했다. 스스로 해도 된다며 말리던 석희재는 이현이 고집을 부리자 어쩔 수 없이 소파에 앉아 발을 뻗었다.

    이현은 소파 아래 무릎 꿇은 채 석희재의 하얗고 깨끗한 발을 어루만졌다. 물끄러미 보고 있자니 괜히 입에 넣어 보고 싶어졌다. 충동적으로 몸을 굽혀 잘생긴 발가락 끝을 이로 한 번 앙 깨물자 석희재가 입을 벌리며 화들짝 놀랐다. 속옷을 입히는 것처럼 천천히 양말을 신겨 주자 목덜미까지 새빨개졌다. 반응이 재밌어서 이현은 저도 모르게 양말 아래 감춰진 날씬하고 섹시한 발목을 은근히 만지며 희롱을 했다.

    그러자 석희재가 어두운 얼굴로 무겁게 말했다.

    “형.”

    “응?”

    “나 지금 처음으로 은퇴 충동 들었어…. 다 때려치우게 만들고 싶은 거면.”

    “앗….”

    “나 배우 생활 접게 하고 싶은 거면.”

    “아니야! 미안해!”

    화가 났다기보다는 울적해 보이는 석희재에게 이현은 또다시 헐레벌떡 사과했다.

    결국 석희재가 현관에 선 것은 목표 시간을 10분 넘겼을 때였다.

    “그럼 잘 갔다 와.”

    “응… 형. 나 혼자 있을 때 전화.”

    “알았어. 꼭 받을게.”

    “영상 통화로.”

    “알았다니까.”

    “내가 할 때 꼭 받아야 돼. 나는 형 전화 받기 힘드니까….”

    “알았어, 알았어.”

    스태프나 매니저가 있거나 주변에 카메라가 돌아갈 때 석희재는 이현의 전화를 받을 수 없다. 때문에 석희재는 자신이 걸 때에 이현이 연락을 받는 것에 집착했다.

    “이제 진짜 가야지.”

    이현이 통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석희재 대신 현관문의 잠금을 해제했다. 그러자 그 순간 석희재가 이현을 덥석 안았다.

    “…스케줄 같이 가면 안 되나.”

    “어휴.”

    이 어리광 덩어리. 이현은 석희재에게 안긴 채로 그를 올려다보며 또 비실비실 웃었다.

    ***

    딱 3개월만 더 놀까.

    석희재가 없는 집 안에서 이현은 갈등했다.

    구직은 쉽지 않고, 피디 TO는 전무하다시피 하고, 이미 경력이 있는 이상 완전히 다른 업계로 빠지는 것도 애매했다. 잘 나가는 연예인의 백수 남친 지위를 누리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이현은 흔들렸다. 게다가 그건 실제로 무척 흔한 일이었다. 사생활이 자유롭지 못하고 운용할 수 있는 시간조차 무척 한정적인 연예인들은, 애인이 일반인인 경우에 그들을 동반한 채로 스케줄을 하곤 했다.

    게다가 석희재의 밴은 무척 쾌적하고 넓었다.

    ‘아직 그 안에서 못 해 본 플레이가 너무 많은데….’

    이현의 눈이 아련해졌다.

    하지만 놀고자 하는 욕망을 가로막는 것은 통장에 남은 현금이었다. 관리비, 월세, 통신료, 적금 등으로 숨만 쉬는데 드는 비용이 술술 빠져나가고 있었다. 석희재가 데이트 비용은 흔쾌히 감당한다 해도, 이런 것까지 부탁하기에는… 자신이 너무 찌질하게 느껴졌다.

    조금 뒤척이던 이현에게 별안간 전화가 걸려 왔다. 어머니였다.

    “응, 엄마. 왜?”

    - 현아, 엄마가 배즙 보냈다? 이번에는 쌓아 놓지만 말고 꼭 먹어?

    “언제 보냈어?”

    - 저번 주에.

    “온 거 없는데?”

    눈썹을 치켜뜨고 곰곰이 생각하던 이현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아! 엄마, 나 이사했어. 주소 바뀌었는데!”

    그렇게 말하며 이현은 껴입을 옷을 찾았다. 길 건너 옛집에 한 번 가 보아야겠다고 생각하며. 동시에 이현은 의아해했다. 택배가 왔으면 전 집주인이 받아 주었을 텐데 아무런 연락이 오지 않았다.

    - 그려? 아이구, 괜찮어. 회사로 보냈어.

    “아, 엄마!”

    이현의 얼굴이 새파래졌다.

    “회사로 보내면 어떻게 해!”

    왜 그러냐고 캐묻는 어머니 앞에서 이현은 결국 실토할 수밖에 없었다. 회사에서 잘린 지 조금 되었다고 말이다. 어쩌다 잘렸느냐고 묻는 어머니 앞에서 최대한 축약한 이야기를 하자 어머니는 드물게 노발대발했다. 세상천지에 그런 망할 종자들이 어디에 있느냐며 손에 쥔 무언가를 붕붕 휘둘러 댔다. 핸드폰 너머로도 뒤집개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엄마 그래서… 나 돈 좀 빌려줘….”

    욕을 먹으면서도 이현은 꿋꿋이 말했다.

    “백만 원만 빌려줘.”

    - 적금 깨.

    단호한 어머니 앞에 이현은 태연하게 고백했다. 특히나 혹할 만한 화제로.

    “엄마. 진지하게 들어 보세요. 사실 엄청 예쁜 애인이 생겼는데… 나 쪽박인 거 알면 도망갈 거 같아.”

    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어머니의 목소리 톤이 갑자기 바뀌었다. 금세 솔깃해하셨다. 철들기가 요원해 보이는 집안의 막내가 혹시나 며느리를 데려오나 싶으셨던 것이다. 이현이 특히 외모 칭찬을 침이 마르도록 하자 무척 궁금한 눈치였다.

    - 어쩌다 분에 넘치게 예쁜 아가 눈에 네가 들어갔댜.

    “그러니까. 엄마가 생각해도 기적이지.”

    동시에 이현은 제 가족과 만나는 석희재를 떠올려 보았다. 저도 모르게 미소가 실실 나왔다.

    사실 커밍아웃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너는 왜 장가도 안 가느냐고 볶으면 그때 실토할까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게다가 여태 미혼인 셋째 형이라는 방패가 있어 아직은 버틸 만했다.

    하지만 미래의 제 인생에는 결혼도, 자식도 없을 테니, 언젠가는 혼자인 이유를 말해야 하지 않을까.

    딱 그 정도의 얄팍한 계획뿐.

    그러나 석희재가 제 인생에 끼어들자 조금 생각이 달라졌다. 보는 이의 말문을 막히게 만들고 괜히 고개를 조아리게 되는 석희재의 제왕적 외모 앞에서 남자라는 성별은 도리어 사소한 문제가 되어 버리고 만다. 이현은 장담했다. 제 가족들은 처음 만나 보는 연예인 앞에서 도리어 허둥댈 거라고. 당황해하는 가족들의 얼굴을 그리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행복한 망상과 별개로 돈을 얻어 내는 데는 실패했다. 이현은 풀이 죽어 전화를 끊어야 했다.

    - 우리 집이 돈 자랑할 만한 집도 아니고, 돈 때문에 버림받을 정도면 그냥 사귀다 마는 게 나아. 이쁜 며느리 나야 좋지만 네 분수에 맞는 사람 만나야지, 현아.

    그건 너무나 맞는 말이었다. 게다가 실제로 석희재가 돈 때문에 저를 버릴 인물도 아니어서 이현은 곧 시무룩해졌다. 이건 그냥 제 자존심의 문제일 뿐이었다.

    이현은 시계를 흘끔거렸다. 아무튼 회사에 가서 어머니가 보내 준 배즙을 찾아와야 할 것 같다. 대표가 회사에 없을 시간을 가늠해 오후 5시경으로 정했다.

    ‘어떡하지. 계약직 피디 자리라도 없나?’

    그전까지 이현은 구직 사이트와 아래를 조이는 케겔 운동법 따위를 검색하며 시간을 흘려보냈다.

    ***

    “어어, 아름아. 나 지금 다 왔어. 대표님 가셨어?”

    - 아, 네! 조금 전에 나가셨어요.

    조금 전? 이현은 빌딩 안으로 들어서며 황급히 엘리베이터의 층수를 확인했다. 시선을 주기 무섭게 경쾌한 알람이 울리고 문이 덜컹, 움직였다. 이현은 생각할 새도 없이 민첩하게 계단을 훌쩍 뛰어 올라갔다. 아니나 다를까 열린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나서는 대표의 뒷모습이 보였다.

    ‘하마터면 마주칠 뻔했다.’

    심장이 벌렁거려 이현은 잠시 가슴께를 손으로 꾹 눌렀다. 아직 마주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가능하면 평생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에게는 인정받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냥 멀리 떨어져서 이런 식으로 사람을 하나둘 잃고 자멸하는 것을 지켜보고 싶었다.

    대표는 그간 회사에 헌신했던 자신을 한순간 감정으로 너무나 쉽게 내쳐 버렸다. 밉고 원망스러웠지만 이현은 적어도 최소한의 자기보호를 할 줄 알았다. 우울을 곱씹는 대신 고개를 돌려 버리기를 택한 것이다. 아무튼 회피 스킬은 만렙이었다.

    이현은 계단을 올라선 김에 층계를 밟고 4층 사무실까지 걸어 올라갔다. 수년간 드나들어 무척 익숙한 문을 아주 조심스레 밀어 보자 변한 것 하나 없는 사무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원래의 제 자리에는 못 보던 짐들이 놓여 있었다. 아마도 자신의 공석을 대신하기 위한 계약직 PD의 짐일 것이다. 그 자리는 현재 비어 있었고 - 피디는 극장에 있을 가능성이 높다 - 마케팅 팀은 회의가 있는지 전원 자리를 비웠다.

    이현은 조심스레 신아름에게 다가가 어깨를 두드렸다.

    “헉, 피디님.”

    “지금 바빠?”

    “아, 아뇨. 오늘 무두절이에요.”

    그렇게 말하며 신아름이 활짝 웃었다. ‘무두절’은 우두머리 없는 날이라는 뜻의, 직장인 최고의 명절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이현은 신아름이 미리 챙겨 놓은 배즙을 한 손에 들었다. 생각보다 무거워서 절로 몸이 휘청였다.

    “그럼 잠깐 내려가자. 커피 사 줄게.”

    ***

    신아름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건대 회사는 거의 망해 가고 있었다. 이현은 이 회사가 간판만 남기고 레퍼토리 몇 개만 굴리며 실컷 삐걱이다가 결국 몇 년 후 새 작품은 아무것도 올리지 못하고 해체될 거라고 짐작했다. 이 대학로에서는 너무나 흔해서 별로 비참하지도 않은 끝이었다. 겉으로는 단단해 보이던 공연기획사들도 일 년 장사를 말아먹으면 한순간 이런 식의 종말을 겪는다.

    그 안에서 저 역시 최대한 공연의 수명을 늘리려고 애를 쓰던 때가 있었지만…. 어차피 한 사람의 노력으로 구제가 되는 일은 아니다.

    “스태프들 월급은 툭하면 밀리지, 투자금 끌어 쓴 걸로 사업이나 벌이고 정작 공연에 들이는 돈은 줄이고….”

    “…….”

    “그런 회사는 빨리 망해야지.”

    이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냉소적으로 말했다가 아차 싶어 앞을 보았다. 신아름은 울적한 얼굴이었다.

    “아니 너까지 망하라는 게 아니라…!”

    “감사해요. 그런 뜻 아니신 거 알아요. 그냥… 피디님 말이 맞는 거 같아서요.”

    그러면서 신아름이 고백한 내용은 가히 충격적이었다.

    “저 지난달 월급 못 받았어요.”

    대표가 생각하는 중요도는 배우 다음으로 직원, 그다음으로 외주계약자, 그다음이 알바들이었다. 알바는 원래도 밥 먹듯이 급여가 밀렸다. 이현이 없는 사이 계약한 스태프들의 지급을 밀리는 걸 넘어 이제 정규직 직원들까지 밀리기 시작했다는 뜻이었다.

    이현은 정색했다.

    “뒤도 안 돌아보고 나와야겠는데?”

    “이번 달에도 안 주시면 저는 진짜 빨리 알바라도 해야 해요.”

    “너도 자취하지, 참.”

    이현은 고개를 아래로 꺾으며 한숨을 푹 쉬었다. 제 코가 석 자지만 공연계에는 이런 친구들이 차고 넘쳤다.

    “그래서 김 실장님이 연락 안 했구나….”

    다시 돌아오라고 갖가지로 저를 설득하던 김 실장은 어느 순간 보채는 것을 뚝 끊었다. 새로 사람을 구해서 그렇겠거니, 하면서도 조금 쓸쓸해했었는데 그런 이유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월급을 줄 수 없으니 면목이 없어 연락도 못 했던 거다.

    “피디님. 회사라는 게요. 항상 정상인은 도망가고 이상한 사람만 남는 거 같아요.”

    “응?”

    다소 신랄한 말에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김 실장님 그만두신대요. 대표님이랑 싸워서요.”

    “아….”

    그 정도면 오래 버티셨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입맛이 썼다.

    “저 사수 언니도 그만두고 워홀 간다고 하셨어요….”

    “…….”

    “월급 밀린 게 큰가 봐요. 이번 달, 다음 달 합치면 사람 한 번에 다섯이나 나가요.”

    “난리 났네.”

    “저도 그냥 빨리 그만두는 게 답일까요?”

    이현은 신아름과 눈을 마주쳤다.

    최대한 빨리 도망치라는 말을 하고 싶으면서도 못 말리는 이유는, 공연이 좋아서 붙어 있는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너는 제일 좋아하는 공연이 뭔데?”

    “저는 음… 지금 하는 게 제일 좋아요.”

    “<기적에 관하여>.”

    두 사람이 동시에 제목을 말했다. 석희재의 데뷔작이자, 회사로서는 3년 만에 흥행시킨 오리지널 공연이었다. 잘 만지면 레퍼토리로 정착시킬 수도 있겠지만 듣자 하니 요원한 일 같았다.

    “일단은 밀린 월급은 주실 거야. ‘기적’이 잘 됐잖아. 반년간 경상비는 나오겠지. 그런데 그 뒤는….”

    이현은 말끝을 흐렸다.

    석희재의 데뷔작이 초연으로 남을 수도 있다. 물론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잦은 레퍼토리가 공연의 수명을 단축시키기도 하니까. 초연만 남기고 다시는 올라오지 않는 전설적인 공연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

    이현은 무심코 극장의 가장 뒷줄에서 바라보았던 꿈결 같은 무대의 조명들, 스모그가 만들어 내는 비현실적인 광경과, 그 가운데 서서 핀 조명을 눈부시게 받은 석희재의 흰 피부 같은 것을 떠올렸다.

    아마 그리워하게 될 것 같다. 하지만 과거로 남아서 더 아름다워지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이현은 그런 점까지 더해서 공연을 좋아했다.

    역시 공연을 계속하고 싶다.

    그런 결론을 내린 순간 이현은 고개를 들었다.

    거기에는 저와 같은 마음을 가졌을 후배가 막막한 눈을 하고 있었다. 무언가 약속해 주고 싶어져 이현은 입술을 축였다.

    “아름아….”

    “네?”

    신아름에게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너무 충동적인 결심이라 스스로의 의지조차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건 생각보다 행동이 빠른 이현에게는 드문 일이었다.

    또 자신이 과연 할 수 있을지, 의심도 발목을 붙잡았다.

    난 혁명가는 못 되는데.

    “아니. 먹어. 먹고 힘내라고.”

    이현은 배즙 보따리를 풀어 신아름에게 하나를 내밀었다. 저 역시 한 봉을 뜯어 다 마신 얼음 컵에 부었다. 얼음을 타니 조금 먹을 만한 것 같기도 하고….

    창밖을 멍하니 보던 이현은 문득 무언가 생각난 듯이 입을 열었다.

    “요즘 기 작가님 뭐하시지?”

    “기 작가님이요?”

    “응. 작년 전까지 우리랑 작업 많이 하시던. 대표님이랑 싸우고 완전히 갈라졌잖아.”

    “헉. 정말요? 몰랐어요.”

    “정확히는 싸운 건 아니고. 대표님이 선을 넘고, 넘어서 작가님이 정당하게 화를 내신 건데. 대표님은 싸웠다고 생각하는 거지.”

    “그래서 우리랑 안 하시는구나….”

    놀라 중얼거리는 신아름의 앞에서 이현은 빠르게 연락처를 훑어보았다.

    “회사 가서 이거 하나만 확인해 줄래? 기 작가님 번호 아직도 이거 쓰시는지.”

    ***

    「작가님, 저 이현PD입니다. 드릴 말씀 있어서 연락드렸습니다.」오후 4:20

    이현은 대학로 여기저기를 쏘다니다 해가 지고 나서야 집으로 터덜터덜 돌아갔다. 한 손에는 배즙을 든 채로. 만나는 이들마다 나누어 주었는데 여전히 묵직했다.

    쓱 훑어본 핸드폰에 마지막으로 연락을 준 것은 신아름이었다. 석희재는 전화하면 받으라고 신신당부를 하더니 한 통도 연락하지 않았다. 무척 바쁜 모양이다. 기 작가에게서도 답은 오지 않았다.

    그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이현은 오늘 대학로에 나간 김에 근처에서 공연 중이던 절친한 배우 몇몇과 만났고, 친한 직원이 많았던 홍보 대행사 사무실에 방문하기도 했다. 이현의 소문이 돌았을 텐데도 대부분 내색하지 않고 반가워했다. 그런 태도에 이현은 도리어 가슴이 트이는 것을 느꼈다. 공연의 아름다운 순간들이 과거가 되듯이, 비참한 일들도 공평하게 과거가 된다. 언제나 그랬듯이.

    ‘그나저나 기 작가님이 답을 안 주면 그다음에는 어디로….’

    그때였다. 주머니에서 지잉, 하고 진동이 울렸다.

    이현은 무심결에 화면을 확인했다가 그대로 우뚝 멈춰 서고 말았다. 그를 뒤따라오던 중학생이 이현의 등에 이마를 쿵 부딪혀 아! 하며 이마를 쓰다듬었다.

    “아저씨 뭐예요!”

    항의하는 중학생의 외침에도 이현은 반응하지 않았다.

    입/출금 통지 대한은행 입금 생활비 5,000,000

    “일십백천만… 일십백천만 십만 백만… 오백만 원? 오백만 원?”

    이현은 몇 번이나 0을 다시 셌다. 오백만 원이 믿기지 않아 집에 가는 길 편의점에서 보리차 한 병을 샀다. 오백만 원에 살짝 생채기가 났다. 이제 499만 얼마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현관문을 탁 닫자마자 너무 좋아서 침대에 뛰어들어 굴렀다. 그러고는 감격에 차서 전화를 걸었다. 부스스한 머리가 허공에 살포시 떴다.

    “엄마! 엄마 나 진짜 성공해서 효도할게요.”

    수화기 건너편에서 뭔 소리냐는 듯한 뚱한 반응이 돌아왔다.

    “엄마밖에 없어.”

    - 그러니까 왜 그러는데, 갑자기.

    “오늘 배즙도 찾아왔고, 돈도 받았어…. 엄마가 생활비 넣어 줬잖아.”

    한 번도 이만큼의 금액을 받아 본 적 없어서 가슴이 뭉클했다. 역시 백수 된 아들에게 마음이 쓰이셨던 거다.

    하지만 어머니는 무슨 소리냐며 도리어 캐물었다.

    - 안 보냈는데?

    “안 보냈다고?”

    이현은 이제 얼마를 받았냐고 추궁하는 어머니를 피해 전화를 얼른 끊었다. 그럼 아버진가, 싶기도 했지만 아닐 것 같았다. 아버지는 은행 업무를 혼자 보실 줄 모른다.

    그럼 이건 퇴직금인가?

    이현은 아리송한 채로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회사가 퇴직금을 줄 리 없는데.

    출처 알기 전에 써 버릴까.

    그럼 안 갚아도 될지도….

    아닌가. 이런 거 막 쓰면 구속당하나?

    이현은 생각을 포기했다. 넣어 준 사람이 연락을 하겠지 싶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석희재는 4시에 가까운 시각에 집에 돌아왔다. 혹시 잠든 이현이 깰까 봐 도어록 버튼도 조심스레 누르던 석희재는 방의 불이 켜져 있는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란 눈치였다.

    “왜 아직 안 자고 있었어.”

    이현을 발견한 그의 눈에 행복감이 넘실거렸다. 이현은 소파에 뺨을 기대어 나른히 앉은 채로 석희재를 올려다보았다.

    “너 기다리고 있었어.”

    “정말?”

    “아까 피자를 시켰는데… 식었어. 먹을래?”

    석희재는 대답 대신 성큼성큼 다가왔다. 장신의 그림자가 머리 위에 드리워지기 무섭게 이현은 그대로 끌어안겼다. 석희재의 판판한 배에 뺨이 닿고 쇄골에 벨트의 금속이 부딪쳤지만 싫지 않았다. 이현은 팔을 둘러 석희재의 허리를 단단히 얽었다.

    석희재가 고개를 숙여 이현의 살랑거리는 정수리에 조심스럽게 입을 맞췄다. 이어서 꾹, 꾹, 몇 번이나 힘주어 입술을 누르고는 겨우 이현을 내려다보았다.

    “갑자기 웬 피자야.”

    “먹고 싶더라고.”

    “사치했네?”

    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통장의 잔액을 떠올렸다. 스크래치가 좀 더 커졌지만 티도 나지 않았다.

    “배고프지? 너도 얼른 먹어.”

    “나 오늘 뭐 먹었는지 알면 놀랄걸.”

    “왜. 좋은 거 먹어서?”

    “아니. 형편없어서. 김밥 한 줄, 햄버거 하나 먹었어.”

    이현은 대신 질겁하며 피자를 데웠다. 전자레인지의 시간을 세팅하고 그 앞에 기대어 서서 석희재를 바라보았다.

    석희재는 조금 지쳐 보였지만 그에게서는 오늘 하루 열심히 활동한 사람 특유의 활력이 느껴졌다. 육체적 피로와 별개로 공연이나 촬영 현장에는 아드레날린이 넘치게 마련이니. 이현은 석희재의 얼굴에 남은 메이크업의 흔적을 저도 모르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연예인의 껍질을 채 벗지 못한 모습이 이현에게는 묘하게 다가왔다.

    셔츠 손목의 단추를 톡, 톡 풀어내며 소매를 걷어붙인 석희재가 콜라를 따랐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현이 입을 열었다.

    “희재야.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아냐. 피자 먹으면 돼.”

    “그게 아니라….”

    이현은 멋쩍게 말했다.

    “데이트, 하자고….”

    이현이 말을 끝맺기 무섭게 석희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컵을 입술에 댄 채로 눈이 휘어지는 모습은 꽃이 피는 듯하다. 그 얼굴에 새삼스레 시선이 못 박혔을 때 ‘땡!’ 전자레인지의 작동이 멈추었다. 이현은 그 음을 듣지 못했다.

    “갑자기?”

    “…….”

    “아, 싫다는 게 아니고 웬일인가 해서….”

    석희재는 멈춰 있는 이현의 얼굴을 살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표정을 읽을 수 없이 조금 샐쭉한 얼굴에 시선만이 몽롱했다. 이현은 반대로 석희재가 왜 제게 다가오는지 몰라 그를 맹한 눈으로 올려다보았다. 가까이 다가오니 향수와 헤어 제품, 화장품의 잔여물이 섞인 냄새가 확 끼쳤다. 그 인공적이고 비싼 향이 석희재에게 소름 끼치도록 잘 어울렸다.

    ‘당장 벗기고 싶다.’

    욕망에 충실한 이현이 저도 모르게 석희재의 목덜미에 손을 뻗었을 때였다. 손짓을 미처 알아채지 못한 석희재는 쑥 허리를 굽혀 전자레인지에서 제 몫의 피자를 꺼냈다. 그제야 석희재가 다가온 이유를 알아챈 이현은 멋쩍어져서 괜히 부산스럽게 그를 따라갔다.

    얼마나 허기가 졌는지 석희재는 걸어가면서 벌써 피자를 입에 물었다.

    “형! 이거 맛있어.”

    “다행이네.”

    “메뉴 이름이 뭐야?”

    “…….”

    돌아보며 묻는데 피자 CF인 줄 알았다. 이현은 다시 약간 몽롱해졌다. 석희재의 나직한 발성과 느릿한 말투를 거치니 드라마 속에 피자 PPL을 어색하게 끼워 넣은 듯한 그림이 된다. 역시 일상을 비일상으로 만드는 것은 석희재의 특기였다.

    “형?”

    이현이 왜 답이 없나 슬쩍 눈치를 살피다 파르르 흔들리는 눈동자마저 없었으면 지나치게 비인간적으로 보였을지 모른다. 3년간 이런 귀여운 모습은 철저히 숨겨 왔다니 생각할수록 억울하다.

    이현은 딴생각을 그만두고 묻는 말에 대답했다.

    “맛있지? 토핑을 엄청 넣어서 그래.”

    “어떻게?”

    “내 자취 노하운데…. 일단 소스를 많이 발라 달라고 해. 그리고 엑스트라 치즈를 넣어. 두 번.”

    “응. 그리고?”

    서둘러 소파에 앉은 석희재는 핸드폰을 켜 갑자기 이현의 말을 메모하기 시작했다. 자신이 만든 피자의 조합이 그렇게나 인상적인가 싶어 이현은 기분이 좋아졌다.

    “비프, 소시지, 햄 추가.”

    “형 진짜 사치스럽게 먹었다. 그렇게 시킨 건 처음 보는 것 같아.”

    왠지 석희재가 더 행복해하는 것 같다면 착각일까. 아무튼 퍽 사치스러운 피자라는 평가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500만 원이라는 공돈이 아니었다면 적당히 소박한 슈퍼 슈프림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토핑으로만 팔천 원 돈이 빠져나가는 짓은 평소라면 하지 않는다. 이현은 귓바퀴를 머쓱하게 매만졌다.

    “뭘 적기까지 해? 다음에 내가 또 시켜 줄게.”

    “응? 아니, 나는 형 입맛 기억해 놓으려고.”

    석희재는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치우고 제 곁에 앉은 이현의 등 뒤로 길게 팔을 둘렀다. 무심하고도 일상적인 동작인데 이현은 괜히 두근댔다. 왜일까, 이현은 이유를 알고 있었다. 그건 오늘따라 석희재에게서 연예인의 향기가 물씬 풍기기 때문이다. 석희재가 허기진 채로 오지만 않았다면 곧바로 깔아 눕히고 잡아먹었을지도 모른다.

    이 속물… 이현은 스스로의 욕구를 몰래 욕했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석희재는 다소 수줍어하며 말했다.

    “원래는 집에 가면 자기 전에 노트에 적었거든.”

    “내 입맛을?”

    “그냥, 형이 한 말은 다… 기억나는 대로.”

    “…….”

    “근데 요즘에는 집에 안 가니까.”

    이현이 말이 없자 석희재는 제 행동이 이상하게 보일까 봐 걱정한 모양인지, 말하면서 흘끔 이현의 표정을 살폈다.

    “이상해?”

    “…….”

    “난 잘 몰라. 누구 좋아하는 건 이게 처음이니까… 이상해?”

    재차 묻는 석희재의 목소리가 자신이 없는 것 같아서 이현은 간신히 고개를 저었다.

    “싫으면 안 할게.”

    “아니, 싫은 건 아니고. 언제부터 적었어?”

    “우리 처음 만난 날부터….”

    이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렇다면 자신은 기억도 못 하는 바보 같은 발언을 석희재는 얼마나 수집했다는 말일까.

    “왜 그래. 역시 이상해?”

    석희재는 혹여나 이현이 자신을 꺼림칙해할까 봐, 그 생각을 막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꿈지럭대며 이현에게 행동으로 애교를 부렸다. 끌어안은 반대쪽 팔을 쓰다듬고 허리를 굽혀 몸을 축소해서 이현의 어깨에 뺨을 기댄다.

    “3년을 그랬다고? 어, 엄청 많겠네? 그렇게 적은 거 다시 봐?”

    “응. 자주 봐. 재밌어.”

    재밌다고? 이현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다음에 가져와라.”

    “그래.”

    석희재는 이현의 의도도 모르고 순순히 답했다. 가지고 오면 한 장씩 엄격히 검사한 다음 두 눈 뜨고 못 볼 말들은 찢어 버려야겠다. 아니면 통째로 불태우거나…. 하지만 석희재가 노트를 끌어안고 눈물을 뚝뚝 흘리는 상상을 했더니 그것도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형, 아까 나 뭐 먹고 싶은지 물어봤잖아.”

    이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꿈에도 모르고 석희재는 피곤한 눈을 비비며 스르르 몸을 숙였다. 이현의 허벅지를 베고 누워 느릿하게 눈을 뜨고 올려다보았다. 형광등 빛을 직광으로 받고도 그 얼굴에는 결점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난 상관없어. 형이 좋아하는 거 먹자.”

    “그런 게 어디 있냐. 나는 네 취향 알지도 못해.”

    툭 내뱉은 말에 석희재의 눈이 다시 휘었다. 석희재는 오늘 여러 번 행복해 보인다.

    함께 보낸 지난 3년을 반추하고, 혹은 그보다 더 오래 묵은 과거를 꺼내며 서로의 생채기를 어루만졌으나 여전히 모르는 것이 가득했다. 그런 사소한 것을 알아가려는 시도가 석희재는 생소하면서도 좋은가보다.

    “네가 한 번도 말해 준 적 없잖아. 콧대 높은 척 굴면서… 물어보면 매번 질문으로 되받아치고.”

    “그랬나?”

    “시침 떼지 말고.”

    이현의 말에 석희재가 쿡쿡 웃었다.

    “나 잘 몰라, 내 취향.”

    “그래?”

    “응… 난 항상 형 보면서 놀랐는데. 먹어 본 것도 많고 맛있는 것도 많이 알고.”

    이현이 눈으로만 ‘내가 뭘?’ 하고 묻자 석희재는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말했다.

    “곱창도 형이랑 처음 먹어 봤지, 순댓국도 처음 먹어 봤고, 포장마차도 처음 가 봤고…. 막걸리도 형이랑 처음 먹었어. 아, 뼈 해장국이랑 감자탕도. 그리고 껍데기, 곰장어도 맛있었고….”

    아, 이놈 처음 만날 때 스무 살이었지.

    이현은 잠시 현타를 겪었다. 석희재의 입에서 나오는 음식의 퍼레이드가 지극히 서민적이라 낯이 화끈거렸다. 생각해 보면 그전까지 석희재는 가정부가 차려 주는 집밥이나 급식만 먹으며 곱게 자랐을 것이다. 그런 석희재가 가진 경험의 폭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형이랑 먹은 건 다 맛있었어.”

    이럴 때는 또 절대 ‘너’라고 안 하고 형, 형 하면서 귀여운 척을 한다. 이현은 괜히 할 말을 잃고 흥, 하며 눈을 피했다.

    “그런데 가 보고 싶은 데는 있어.”

    “어디?”

    이현은 시선을 내려 석희재를 바라보았다.

    “홍대 같은 데, 연남동에 그 잔디 있는….”

    이현은 대뜸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야. 거기 볼 거 하나도 없이 사람만 바글바글해.”

    “그럼… 낙산공원?”

    “다리 아프게 거길 왜 올라가.”

    “이, 익선동인가…?”

    “비싸기만 하고 볼 거 없을 텐데.”

    무심결에 거절하고 나니 뒤늦게 석희재의 시무룩한 얼굴이 보였다. 이현은 다급히 말을 주워섬겼다.

    “아, 아냐. 어디든 네가 가고 싶으면 가는 거지. 그런데 사람 많고 이런 데를 네가 아무리 가리고 가도 눈에 띄니까… 귀찮을까 봐 그랬지.”

    이현은 얼른 말을 어물어물 주워섬겼다. 물론 이현 역시도 서울 이곳저곳 핫하다고 소문난 곳들을 신나서 쏘다니던 때가 있었다. 그 시기를 지나 깨달은 것은, 어디든 소문난 곳들은 대부분 복잡하고 정신없고 물가는 비싸고 정작 컨셉은 다 거기서 거기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 한 말인데 석희재에게는 조금 다른 뉘앙스로 들렸을 수 있겠다.

    “네가 가고 싶으면 당연히 가는….”

    이현이 쩔쩔매고 있을 때 석희재가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형은 많이 놀러 다녔나 봐.”

    “아, 나는.”

    “나는 사람들이 쳐다봐도, 불편해도 상관없어. 그냥 형이랑 안 가 본 데 가고 싶은 건데….”

    “가, 가자. 가가! 나 가기 싫다고 한 적은 없다.”

    이현이 그렇게 어른 후에도 석희재는 한동안 조금 뚱해 있었다. 그 많은 데이트 스폿은 대체 누구와 갔는지 캐묻지 못해 살짝 골이 난 얼굴이었다.

    그리고 나란히 잠자리에 들기 전, 석희재는 말갛게 씻은 얼굴을 핸드폰 불빛에 비추어 가며 한참 맛집을 검색했다.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았는지 석희재가 이현에게 보여 준 곳은 그리스 음식점이었다.

    “그리스 음식 먹어 봤어?”

    “안 먹어 본 거 같은데.”

    “잘됐다. 그럴 거 같았어. 그럼 우리 여기 가자.”

    잠결에 가물가물한 눈으로 이현은 흔쾌히 그러자고 답했다. 석희재는 기뻐하며 이현의 뺨에 쪽, 귀여운 키스를 했다.

    다음 날, 석희재가 고른 레스토랑을 보고 이현은 뒤늦게 난감한 기분에 휩싸였다.

    ‘하필 여기야.’

    석희재가 지정한 식당의 위치가 곤란했다. 그곳은 한때 이현이 질리도록 드나들었던 이태원 6번 출구, 온갖 라운지 클럽과 칵테일바가 위치한 골목의 한가운데였던 것이다.

    ***

    그리스 음식에 알레르기가 있다고 할까.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상상하다가 이현은 곧 체념해 버렸다. 지금까지 자신이 한 말을 노트에 전부 적어 놨다는데, 어쭙잖은 거짓말을 했다가는 노트를 낱낱이 뒤져 본 석희재가 ‘형은 알레르기 같은 거 하나도 없는 건강체라고 나한테 1년 7개월 전에 자랑한 적이 있어’ 하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솔직하게 다른 데에 가자고 다시 말해 볼까 생각도 했지만… 그러면 또다시 석희재를 예민하게 만들어 버릴 것 같다.

    이현은 한숨을 푹푹 쉬었다. 자신과 달리 책잡힐 일 하나도 없는 연하 애인은 너무 잘났고 심지어 질투심도 제법 있는 것 같다.

    아, 너무 쫄린다. 진짜.

    나는 안 그래도 과거가 더러운데….

    불안감에 괜히 다리를 경박하게 떨게 된다. 공돈이 생기자마자 석희재를 조금이나마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을 뿐인데, 이런 장벽과 마주할 줄이야.

    그러나 몇 분 후 이현은 복잡한 생각의 실타래를 툭 끊어 버렸다.

    ‘그래, 뭘 알고 그런 건 아닐 거야.’

    이현답게 그의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는 마음을 편하게 먹어 버렸다. 자신이 너무 앞서 나가 생각하는 게 틀림없다고. 이태원 한가운데서 과거 원나잇 상대들과 마주할 가능성이… 없지는 않지만 그렇게 높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곳에 발을 끊은 지 5년이 다 되어 간다. 저처럼 떠난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많은 게 물갈이되지 않았을까? 그 동네만 시간이 멈춰 있을 리가….

    “어, 현이 아니냐. 너 진짜 오랜만이다. 누구 만나러 왔어?”

    아, 씨발 내가 너무 가볍게 생각했구나.

    오판이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골목길 안으로 진입하기 무섭게 누군가 걸걸한 목소리로 이현을 붙들었던 것이다. 그 목소리는 골목길 코너의 개방형 칵테일바에서 흘러나왔다. 마침 노천에서 술 마시기 좋은 날씨라 1층의 바들이 전부 개방된 것 또한 그의 불운이었다.

    “누가 형 부른 거 아니야?”

    모른 척 지나치려는 이현 대신 석희재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흘끔 가게로 시선을 준 순간 이현은 저도 모르게 거기 시선을 붙들려 버렸다. 반곱슬 머리를 젖은 듯이 세팅한, 검은 앞치마를 한 남자의 낯이 익었다. 불을 끄면 더 기억이 잘 날지도 모른다. 암막 커튼을 친 그의 캄캄한 자취방에서 종종 뒹굴곤 했으니까.

    “형! 형! 무승이 형! 누구 온 줄 알아?”

    심지어 그 남자는 골목으로 뛰어나와 이현을 붙들고는 맞은편 가게의 2층을 향해 목청을 높였다. 검은 마스크를 한 석희재가 함께 시선을 들어 2층을 올려다본 순간 이현의 심장이 졸아붙었다.

    “새끼, 호들갑은.”

    활짝 열린 테라스로 성큼 몸을 내민 것은 라운지 바의 매니저였다.

    그를 보자마자 귓가가 확 뜨거워지는 것은 절대 좋아서가 아니다. 세 번 잤기 때문도 아니고. 설마 그가 제게 호감이 있는 건가, 하며 쓸데없이 설레던 때의 쪽팔린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현을 발견한 슈트 차림의 남자가 씩 웃었다.

    “와, 이게 누구야. ”

    석희재는 말없이 테라스 위의 남자를 한 번 보고, 그다음에는 이현의 팔을 붙들고 있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앞치마를 한 남자가 이현의 팔을 함부로 매만지는 것과 그 팔 위로 화려한 문신이 수놓아진 것을 유심히 보았다.

    문신을 타고 올라간 석희재의 시선이 이내 이현과 마주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이현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한 석희재의 얼굴에서는 그림자에 가린 새까만 눈만 보였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잘 알 수 없었다.

    가늘어진 눈으로 테라스에 기대어 아래를 바라보던 매니저가 몸을 돌린 건 그 순간이었다. 그가 1층으로 내려올 것을 눈치챈 이현은 다급하게 붙잡힌 팔을 빼냈다. 어떻게든 여길 빨리 빠져나가는 게 상책이었다.

    “놓으라고.”

    “왜? 약속 있냐?”

    “어. 늦었어. 가야 돼.”

    이현의 마음도 모르고 문신남은 이현의 팔뚝을 쓰다듬으며 다소 진득하게 주물렀다. 한때 몸을 섞은 적 있는 사이에서 자각 없이 드러내는 친밀감이었다. 잤던 놈과 안 잤던 놈 사이의 간극을 너무나 잘 아는 이현은 석희재가 그것을 눈치챌까 싶어 무척 초조했다.

    “이따 술 마실 거지? 여기로 와. 테이블 줄게.”

    가겠냐. 그렇게 생각한 이현이 다소 부자연스럽게 홱 팔을 빼내고 돌아서려는 찰나, 석희재가 마스크 위에 손가락을 걸고 슬쩍 내렸다. 그 작은 행위에 이현은 크게 당황했다. 심지어 여태껏 이현의 그림자처럼 물러서 있었으면서, 저도 이야기에 끼워 달라는 듯이 한 걸음 나서기까지 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로 작은 얼굴을 감쌌던 석희재가 마스크를 내리고 흰 얼굴을 드러내는 순간 문신남의 시선이 석희재에게 꽂혔다. 문신남의 입에서 작은 탄성이 터졌다. ‘와우.’

    석희재는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형 친구분이야?”

    이현의 입이 망연하게 벌어졌다. 그 표정을 보고 석희재는 자신이 잘못 끼어들었나 걱정하며 조금 눈치를 보았다.

    제 발 저렸던 이현과 다르게, 기실 석희재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상태였다. 그저 순진하게 이런 것 따위로 감탄하고 있었다.

    ‘형한테 이런 친구들도 있구나.’

    이현이 제 나이 때 이태원에서 아르바이트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자신의 빈약한 상상에 비할 바 없이 다양한 경험을 했을지 모른다. 십 대다운 쓸데없는 호기심이나 모험심이 지극히 적었던 석희재는 지금까지 제법 협소한 세계에서 살아왔고, 그런 그에게 온몸에 문신을 그리는 이들은 그저 낯설기만 했던 것이다.

    이현이 제 몸에 타투를 새기고 왔을 때 ‘형은 문신 막 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던 것 역시 같은 맥락이었다. 다소 보수적인 석희재에게는 문신이라는 행위가 넘을 수 없는 벽처럼만 느껴졌고, 이처럼 다양한 인간관계를 가지고 있는 이현이 대단하게 보이기도 했다.

    “그냥 가자.”

    “왜? 나 형 친구분들 처음 봐. 인사할래.”

    석희재는 무척 순수한 의도로 말한 것이었지만 이현은 급격히 입 안이 마르는 것을 느꼈다. 도리어 헷갈리기까지 했다. 지나치게 초조한 상태인 이현에게는 석희재의 말이 의중을 알 수 없이 들렸다.

    “친구 아냐, 씨발.”

    단호하게 내뱉은 이현의 말을 들은 문신남의 얼굴에 대놓고 섭섭한 기색이 비쳤다. 동시에 1층 출입구에서 매니저가 나타났다. 밤 영업에 어울리는 날 티 나는 슈트를 펄럭거리며 다가오고 있었다.

    이현은 입술을 씹으며 석희재의 가슴을 손바닥으로 퍽, 치듯이 붙잡으며 억지로 돌려세우려 했다. 그러나 그보다 더 빨리 다가온 매니저가 이현의 엉덩이 한 짝을 한 번 꽉 쥐었다. 엉덩이보다도 더 안과 밑, 부드러운 어딘가에 손가락이 파고드는 위치였다.

    언젠가는 일상적인 인사였던 것이 지금은 분명한 희롱이었다. 이현은 귀가 벌게져 뒤를 돌아보았다. 동시에 그의 손목을 손날로 잘라 버리듯 쳐냈다.

    “이현. 너 왜 내 연락 씹냐? 내가 얼마나 전화를 했는데. 새벽 두 시마다.”

    그리고 매니저가 낮은 목소리로 낄낄댔다. 일부러 이러는 거다. 씹새끼! 이현은 다급하게 고개를 돌려 석희재를 바라보았다.

    그새 석희재의 눈빛이 싹 바뀌었다.

    그제야 이현은 석희재가 지금까지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음을 알았다. 그는 정말로 이들이 제 친구들인 줄 알고 소개받고 싶었던 것이다. 이현은 속으로만 탄식했다.

    “가자, 희재야. 내가 다 설명할게.”

    “이현 절절매는 꼴을 다 보네. 작업 중인가?”

    빈정대는 매니저와 다르게 문신남은 초면에 지나치게 호전적으로 된 석희재의 얼굴을 눈치채고 슬슬 물러났다.

    “형. 형. 현이가 종적을 감춘 이유가 있었나 봐.”

    “그러니까. 특기 좀 발휘했나 본대.”

    “근데 어디서 본 거 같다? 낯짝이 지나치게 반반해.”

    “현이가 이걸 좀 밝히긴 하지.”

    등 뒤에서 중얼거리는 둘. 아무 말 없이 기분이 영하로 가라앉고 있는 듯한 석희재.

    이현은 탁 한숨을 쉬었다. 이제 와 허둥거려 봤자 들킬 것은 다 들켰고, 과거를 바꾸지도 못한다.

    이현은 더 이상 대거리를 하는 대신 뒤돌아서며 석희재를 끌어당겼다.

    “형.”

    바닥을 단단히 디딘 석희재는 쉽게 끌려오지 않았다. 그는 무언가를 묻고 싶은 것 같기도 했고, 참는 것 같기도 했고, 혼란스러운 것 같기도 했다.

    “왜 그냥 가.”

    “그럼.”

    이현의 말에 석희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더니 이현을 뿌리치고 뒤돌아 두 남자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대놓고 빈정거리던 두 사람은 석희재가 저들에게 다가올 줄은 몰랐는지 조금 당황한 눈치였다.

    앞에 당도한 석희재는 대뜸 말했다.

    “사과하세요.”

    “뭘?”

    “함부로 만진 거 사과하세요.”

    나 참, 매니저가 별 웃기는 놈을 다 본다는 듯이 혀를 찼다. 문신남만 눈치를 보고 매니저의 팔을 툭툭 쳐 댔다. 석희재는 그들을 가라앉은 눈으로 노려보더니 마스크를 완전히 빼서 귀에 걸고 푹 눌러쓰고 있는 모자를 벗었다. 진지한 이야기를 건넬 때는 진지한 태도로 말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행한 것이었으나 대놓고 제 외모를 드러낸 석희재의 행동은 그들에게 전혀 다른 의도로 다가왔다. 모자를 벗어 내자 허공에 팔랑이던 결 좋은 머리카락이 사뿐 안착했다. 가볍게 머리를 흔들어 정리한 석희재가 담담하게 시선을 마주했다.

    순식간에 두 남자는 외모로 서열 정리를 당한 기분을 느꼈다.

    “남의 애인, 함부로 만지셨잖아요.”

    석희재가 한 자 한 자 힘을 주어 말했다. 차분한 눈이지만 이글이글 끓고 있었다.

    “사과하세요.”

    이가 까득, 갈리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동시에 이현은 어쩔 줄을 몰랐다. 연예인의 본분을 잊고 대낮에 커밍아웃하는 석희재라니.

    “희재야….”

    “형, 연예인이고 커리어고 그런 소리 할 거면 말리지 마.”

    하려던 말을 정확하게 틀어막는 바람에 이현은 입도 벙긋하지 못하고 물러났다.

    그리고 그때까지 생각에 잠겨 있던 문신남은 ‘연예인’이라는 소리에 CF에서 보았던 남자와 눈앞의 남자를 일치시켰다. 웬만큼 장신인 이들도 시선을 올려야 할 정도로 훌쩍 큰 키, 담담하고 청명한 눈빛이 불쾌한 감정을 안고 사람을 벌레 보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문신남은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는 일견 상식적으로 보이는 석희재의 눈깔이 이미 맛이 갔다는 것을 알아채고 제 잘못이 아니라는 듯 슬그머니 뒤로 빠졌다.

    “‘이번에는’ 사회면에 올라가는 일이 있더라도 사과받아야겠어.”

    석희재가 주먹을 꾹 쥐는 순간 이현과 문신남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덩달아 ‘사회면’ 운운에 잠시 어깨를 뻗대고 허세를 부리던 매니저도 ‘별거 아니다, 평범한 인사였다, 자주 그랬다’라는 변명을 늘어놓다가… 그 모든 말이 석희재를 더 화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늦게 꼬리를 내렸다.

    “앞으로는 아무 데나 손버릇 나쁜 거 티 내지 마세요. 그러다 칼 맞을 수 있어요.”

    사과받은 석희재는 그렇게 조용히 충고했다. 그 자리에 있는 사람 모두가 흠칫 굳었다. 칼을 휘두르고 싶은 장본인이 누구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현은 어색한 분위기를 풀기 위해 뒤늦게 끼어들었다.

    “저기… 얘가 연애 처음 하거든. 일편단심이고. 나밖에 몰라서 많이 진지해.”

    그건 언제든 회까닥 돌아 버릴 수 있다는 뜻으로 들렸다. 문신남이 어색하게 말을 받았다.

    “어어, 현이 너 행복하겠다… 내 말은, 잘됐다고. 알지?”

    ‘평생 사귀어~’ 어색하게 중얼거리며 문신남이 이현의 어깨를 격려했다. 그리고 석희재가 그것조차 불쾌하게 쳐다보자, 얼른 옷자락을 툭툭 손으로 건드리며 먼지를 털어 주는 척했다. 매니저는 곁에서 라운지 클럽에도 놀러 오라는 둥, 연예인 DC를 해 주겠다는 둥 비굴한 내용의 말을 허세를 섞어 이야기하더니 쓱 자취를 감췄다.

    이후 레스토랑까지 걸어가는 도보 7분가량, 이현은 몇몇 사람들과 더 마주쳤다. 그때마다 석희재는 접근하는 이들을 눈에 칼을 품고 쳐다보며 ‘내가 이현 애인이다’라는 티를 숨기지 않았다.

    몇 시간 후 이태원 터줏대감들 사이에 어느 날 훌쩍 종적을 감추었던 ‘걸레 이현’의 근황이 퍼지는 것은 금방이었다. 누군가는 과거가 난잡한 남자가 새 출발을 한 것을 질투했고, 누군가는 이현과 잤던 것을 훈장 삼아 이 틈에 떠들어 댔다.

    그리고 아주 일부는 항상 정붙일 곳을 찾아 헤매는 것 같이 보이던, 제법 귀염성이 있던 당시의 이현을 놓친 것을 아쉬워했다. 이현이 들었다면 코웃음 칠 일이었다. 쉽게 줄 때는 진지하게 생각지 않다가 남의 떡이 되니 안타까운 모양이라고.

    물론 그들 중 이현이 추억할 만한 사람은 조금도 없었다.

    ***

    “형, 나 기분이 안 좋아.”

    “…….”

    “토할 것 같기도 하고….”

    그 말대로 석희재는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 서빙된 물을 몇 잔째 마셨다. 이현은 맞은 편에 앉아 죄인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석희재가 고른 레스토랑은 지중해 분위기로 꾸며낸 인테리어가 예뻤고, 사람도 많지 않아 한적한 데다가 두 사람이 안내받은 창가에는 빛도 잘 들었다. 제 난잡한 과거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일만 없었다면 무척 기분 좋은 데이트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석희재의 앞에서 이현은 쩔쩔맸다.

    “그 사람들이랑 잔 거지?”

    “…응.”

    “혹시 더 있어?”

    “아마….”

    “‘아마’가 뭐예요.”

    석희재가 미간을 찌푸렸다.

    이현은 콧잔등이 땀으로 더워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들었다. 석희재는 눈을 내리깐 채로 유리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뽀득뽀득 밀고 있었다.

    “자기가 한 일인데 왜 기억을 못 해.”

    맞는 말이다. 애매하게 대답한 것은 과거를 축소하고 싶은 죄책감의 발로였을 뿐이다.

    창밖을 바라보던 석희재가 무심코 자기 가슴을 지그시 눌렀다.

    “형, 나 이상해. 심장이, 쿨럭. 너무 빨리 뛰어.”

    석희재는 말 중간에 호흡을 삼키며 큽, 쿨럭, 하고 기침을 했다. 맥이 비정상적으로 뛰고 있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화병인가 봐.”

    “그래? 무, 물 좀 더 마실래?”

    “그리고 자꾸 상상돼.”

    “뭐가?”

    “좋았어?”

    “…아니, 아… 나는 기억도 안 나.”

    “좋았어, 싫었어?”

    “…….”

    “싫으면 안 했을 거 아니야. 뭐가 좋았던 거지?”

    집요하게 물어 대서 이현은 저도 모르게 신음을 흘렸다.

    조금이나마 과거를 축소해서 덜 문란하게 보일 것인가. - 의미 없는 일이었다.

    아니면 솔직하게 과거를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것인가.

    기로에서 갈등하던 이현은 일단은 수긍했다. 제 과거를 밝힐 때마다 남자들에게서 하찮고 쉬운 취급을 받았던 이현에게는 그것조차 어려운 일이었다.

    심지어 눈앞의 남자를 지극히 사랑하게 되어 더 그렇다. 이현은 이제 등에서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다.

    석희재마저 저를 걸레 취급하면 진짜 죽어 버리고 싶을 것 같다.

    “그러니까. 뭐가 좋았던 거지.”

    이현은 후회스럽게 중얼거리며 양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나는 그냥… 혼자 자기 싫었던 것 같고.”

    “…….”

    “걸레 취급하던 놈들도 꼬실 때는 조금이라도 친절하게 해 주는 게 좋았고…”

    “…….”

    “몰라, 중독이었나 봐.”

    얼굴을 가린 이현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것을 지켜보던 석희재는 이현의 손을 가져가 잡았다. 그는 비참함을 깨닫는 것이 늦다. 몸 정을 마음으로 착각하던 시절을 이제 와 입에 담는 건 이현에게도 괴로워 보였다. 조심스럽게 쥐는 손이 따뜻해서 이현은 떨구었던 고개를 들 수 있었다.

    “나도 내가 이해가 안 돼. 확실한 거 하나는, 누가 꿈에 나와서 미래에 널 만날 거라고 말해 줬으면 나도 깨끗하게 살았을 텐데….”

    “아… 내가 잘못했네.”

    석희재가 맥락 없이 탄식했다. 그의 말에 이현은 눈치를 살폈다.

    “내가 형 꿈에 찾아가는 걸 잊어서.”

    석희재가 미소 지으며 중얼거리는 말에 이현은 왈칵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웃어 버렸다. 뭐야, 하면서 손을 빼려고 들자 석희재는 도리어 테이블 위로 손을 꼭 잡았다.

    “농담 아니야.”

    “응.”

    “나 아직도 미칠 것 같아.”

    “응….”

    “알고 있는 거랑 보는 거랑 다르구나.”

    “미안.”

    “지금 내가 간신히 제정신인 이유는 형이 나 만난 뒤로는 나밖에 없었다는 걸 아니까 그런 거야.”

    석희재의 말에 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야, 그건 당연한 거야. 너랑 자고 나서 다른 남자들이랑 뒹구는 게 구역질 나기 시작했다고.”

    이현의 솔직한 말에 석희재는 불시에 터진 미소를 참지 못하고 입꼬리를 끌어당겼다. 그러더니 주변을 쓱 둘러보고는, 테이블 뒤의 기둥에 시야가 가려지는 것을 알고 이현의 옆자리로 옮겨 와 앉았다.

    “왜. 내 좆이 제일 예쁘게 생겨서?”

    석희재는 한때 이현이 했던 말을 번복하며 되물었다. 이현은 또 함박웃음을 터뜨렸다. 그 뒤에도 석희재는 계속 자신의 유일무이함을 확인받으려 했다. 이현은 제 인생에 석희재가 얼마나 드물고, 얼마나 희귀한 ‘기적 같은’ 존재였는지 쉽게 수긍했다.

    음식이 서빙된 뒤에도 그 화제는 멈추지 않았다. 특히 석희재는 이미 지나간 과거 대신 불분명한 미래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나 두 눈 뜨고 살아 있는 동안, 형 만약에 다른 남자랑 바람나면….”

    “에이. 그런 일 없어.”

    “왜 장담해? 나보다 더 잘생기고 어리고, 거기… 큰 남자 나타나면 흔들릴 수도 있잖아.”

    “그런 남자가 세상에 어디 있냐?”

    “아무튼. 있다 쳐.”

    “없어.”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이현이 말을 쳐 냈다. 그러자 석희재는 이현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나직이 말했다.

    “형은 생각 좀 하고 말해.”

    “뭐!”

    허를 찔린 이현은 기가 막히고 억울해져서 저도 모르게 외쳤다. 석희재가 최고라고 떠받들어 주는 말이었는데도 혼이 나서 더욱 그랬다.

    “아무튼… 그럼 그날부터 형은….”

    “…….”

    “존중받지 못할 줄 알아.”

    한참 뜸을 들이던 석희재가 고르는 단어가 우스워서 이현은 쿡쿡 웃었다. 석희재는 제법 눈에 힘을 줬다.

    “왜 웃어? 진심인데. 묶어서 집에 가둬 놓을 거야.”

    그 말에 이현의 눈이 조금 크게 뜨였다.

    “버리는 게 아니고?”

    “왜 버려?”

    석희재는 고개를 들고 이현을 곧게 바라보았다. 그 새까만 눈에 의아함이 가득 차 있었다. 그쪽으로 튀는 생각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아… 이현은 머쓱하게 뒷덜미를 매만졌다. 석희재는 무심결에 증언하고 있었다. 이현의 문란한 행동과 제 사랑에는 상관관계가 없다고.

    그건 지금까지 자신의 행실 때문에 사랑받지 못했다고 여겼던 이현에게는 다소 충격적인 논리기도 했다.

    ***

    레스토랑을 나서며 계산대 앞에서 옥신각신하는 것까지 본래대로 평화로웠다. 석희재는 이현보다 몇 걸음 앞서 계산대로 걸어갔고, 당연히 저가 계산을 할 줄로 믿고 있던 이현은 석희재가 카드를 내미는 것을 보고 뒤늦게 놀라 부랴부랴 다가왔다. 석희재를 밀쳐 내면서 이현은 급히 제 카드를 꺼냈다.

    “이걸로 해 주세요.”

    맥없이 밀려난 석희재는 이현이 왜 그러는지 다 알면서도 뻔뻔하게 섭섭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이현은 그런 석희재를 무시하면서 영수증을 받았다. 동시에 핸드폰 위로 잔액의 알림이 떴다. 이백팔십 얼마. 여전히 마음이 든든했다.

    “내가 사 주고 싶었는데. 내가 먹고 싶은 거였으니까.”

    “…….”

    “나도 돈 있는데.”

    석희재는 계단을 내려가면서도 미련을 놓지 못했다. 나직이 꿍얼대는 소리가 이현의 귀에는 칭얼거리는 것처럼 들렸다.

    “됐어. 내가 거지냐.”

    “거지라서 사 주고 싶은 거 아니거든.”

    한 마디도 지지 않는 석희재를, 이현은 싫지 않은 눈으로 흘겼다.

    “그리고 돈 아껴야 되는 건 맞잖아.”

    “어허.”

    현실을 직시 당하자 이현은 괜히 쯧, 하고 혀를 차며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구직 중. 고정적 수입 없음. 혼자 살며 다달이 나가는데 드는 기본 비용 등등. 이현의 상황을 석희재는 싫을 정도로 잘 알았다. 이현이 식탁 위에 쌓아 두는 각종 관리비와 말일 기한의 영수증을 혼자 꼼꼼히 챙겨보고 종종 메시지로 이건 납부했느냐, 미납되면 연체료를 내야 한다 참견까지 하는 수준이었으니 말 다했다.

    뭘 걱정하고 있는지는 알겠지만….

    내 주머니에 오백… 아니, 이백만 원이 있다는 건 모르지.

    그새 훅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넉넉한 잔액을 생각하며 이현은 무심하게 말했다.

    “거지도 자존심이 있다.”

    그렇게만 대꾸하며 다시 걸음을 옮겼다. 문득 제 발이 눈에 띄어 덧붙여 중얼거렸다.

    “형이 너 명품 신발 사 줄 돈 정도는 있다 이 말이야.”

    지금 이현이 신은 것은 바로 일전에 석희재를 따라 들어간 편집숍에서 선물 받은 신발이었다. 아무 데나 잘 어울리고 착화감도 좋아서 몇 달 동안 이 신발을 발에 문신한 듯 신고 있었다. 생각해 보니 술에 취해 석희재의 집에 가서 진상을 부릴 때도 이 신발, 한지우를 따라 호텔에 간 날도 이 신발이었다. 괜히 낯이 화끈거렸다.

    “희재야. 신발 사 줄까?”

    “형 관리비나 내.”

    “…….”

    오백만 원을 받은 직후 지금까지 관리비를 낼 생각은 안중에도 없었던 이현은 다시 카운트를 얻어맞았다.

    “흠… 아무튼 너 지나가는 거지들 함부로 거지 취급하면 안 돼. 로또 맞은 거지일 수도 있으니까.”

    석희재가 나지막이 쿡쿡 웃는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야….’ 하면서 말을 길게 끄는 목소리 에는 참지 못한 웃음기가 배어 있었다.

    진짜 모르나?

    석희재는 웃음기를 지우고 이현의 곁에 나란히 가서 섰다. 그러자 이현이 제 신발을 흘끔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석희재가 신은 로퍼의 발등에는 명품 브랜드를 상징하는 깔끔한 금장 장식이 달려 있었다. 기백만 원짜리 로퍼를 슬리퍼처럼 편하게 신어 대서 부드러운 가죽 위로는 자연스러운 주름이 잔뜩 잡혀 있는 채였다.

    이현이 허공을 주시하며 짧은 한숨을 내뱉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빤했다. 석희재가 감동하려면 얼마나 좋은 물건을 사다 바쳐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안 해 줘도 돼.”

    석희재는 선수를 쳤다.

    “형 편의점 도시락 말고 맛있는 거 많이 사 먹고, 일이만 원 아낄 궁리하지 말고…. 집에 있으면서 기분 전환하고 싶으면 카페도 가고 그러면서….”

    “너지.”

    이현이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은 채로 대뜸 석희재의 앞을 막아섰다. 실마리를 잡아챈 탐정 같은 눈매가 제법 날카로웠다.

    “나한테 입금한 거 너지.”

    석희재는 눈만 천천히 깜빡였다.

    “그래. 이상하다 했다.”

    “…….”

    “내 돈 금같이 여기고 한 푼 못 쓰게 하던 애가 왜 비싼 레스토랑 골라 왔는지….”

    “그건 어차피 내가 내려고 해서 그런 거고.”

    “아니, 그러면 나 돈 없는 거 아는데 왜 일이만 원 아끼지 말고 막 먹으래?”

    “형이 방금 그랬잖아. 거지가 다 같은 거지가 아니고 로또 맞은 거지일 수도 있으니까 무시하지 말라며?”

    석희재가 시침을 뚝 떼고 말하자 이현은 조금 혼란스러운 듯했다.

    그 얼굴을 살펴보며 석희재는 다소 심각한 얼굴로 조심스레 물었다.

    “형. 혹시 진짜 로또 됐어?”

    “어? 아니….”

    “아, 미안… 이런 거 아는 척하면 안 되는 거지?”

    “그게….”

    “아무튼 축하해!”

    “…….”

    “우리 형 인생 폈네.”

    석희재는 무어라 한 소리 듣기 전에 일부러 방긋 웃으며 이현을 얼싸안았다. 꽉 안은 채 몸을 이리저리 흔들자 이현은 품 안에 안겨 맥없이 흔들렸다. 사고가 정지한 것 같은 그 맹한 얼굴이 무척 우스워서, 지금 웃으면 들킨다는 걸 아는데도 참을 수가 없었다.

    결국 석희재는 이현의 어깨에 이마를 기댄 채로 큭, 하고 어렵게 참던 웃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그 순간 이현이 석희재의 가슴을 확 밀쳤다.

    “뭐야, 너 맞잖아!”

    더는 버티기가 어려웠다. 촬영이면 NG고 무대 위면 사고였다. 그래도 참을 수가 없어 석희재는 무릎을 짚고 배를 잡아 가며 웃었다.

    “와. 너 무서운 애다. 시침 떼는 거 봐. 진짜 헷갈릴 뻔했어.”

    “언제 넣어 줬는데 그걸 이제 알아? 형도 참 형이다.”

    “사고면 은행에서 연락 올 줄 알았지!”

    “계속 모르는 거 같으면 그다음에는 오천만 원 넣어 보려고 했는데.”

    ‘오천만 원’에 이현은 어지럽다는 듯이 관자놀이를 짚었다.

    “머리 아퍼.”

    이현의 은행 하루 이체 한도가 오백만 원이었다. 석희재가 하는 말은 모조리 서민에게 위화감을 조성해서 더는 버틸 수 없었다.

    “농담이야.”

    “아무튼 너 사람 그렇게 함부로 믿지 마. 막말로 내가 오천만 원 들고 튀면 어떡하려고 그래.”

    “형은 고작 오천만 원에 도망갈 거야?”

    “…….”

    이현은 말문이 막혀 입을 다물었다. 그 의도가 아니었는데 석희재와는 또 포인트가 다르다.

    “내 생각은 그래. 돈이 뭐라고. 있으면 있는 거고, 없으면 마는 거지. 형이 돈 부족해서 마음 불편하고 먹고 싶은데 참고 그런 거 상상만 해도 싫어. 제발 제일 좋은 거만 먹고 사치 좀 했으면 좋겠어.”

    “…….”

    “화난 건 아니지?”

    조심스럽게 물어오는 석희재에게 이현은 얼른 대답하지 못했다. 그의 말대로 받은 당일 사실을 알았다면 속이 복잡했을 것도 같다. 그깟 돈이 뭐라고, 아무도 의도하지 않았건만 혼자 자존심을 다쳤을지도 모른다.

    현은 목이 멨다. 석희재가 자신을 바라보는 눈은, 그 모든 것들을 일순간 마법처럼 아무것도 아니게 만들었다.

    “화 안 났어….”

    “다행이다.”

    “너한테 화를 어떻게 내냐.”

    이현의 말에 석희재가 겨우 가슴을 펴고 웃었다.

    “너한테 화를 낸다…? 그럼 그 사람이 사이코패스야.”

    이현의 말에 석희재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웃었다. 한때 이현에게 들었던 차가운 말은 벌써 다 잊어버린 얼굴로.

    그러면서 석희재는 행복감에 질식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주고 싶은 만큼 마음껏 주는 것이 허락된 것만으로도 기쁜데, 사랑을 받는 기분이란 숨도 못 쉴 정도로 벅차고 좋았다. 마약을 하면 이럴까 싶을 정도로 숨이 가빠 오는 동시에 활력이 돈다. 심장 박동수가 대번에 껑충 뛰었다.

    ‘오늘 청심환 안 먹고는 못 자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석희재는 한 번 크게 심호흡했다. 이현을 보기 위해 살짝 챙을 들어 올렸던 모자를 다시 꾹 눌러썼다.

    입가에 주먹을 가져다 대고 헛기침을 큼, 한 석희재는 작은 소망을 하나 더 끼워 넣었다.

    “그래서 말인데… 형.”

    “응.”

    “우리 회사로 오면 안 돼? 연봉 진짜 높게 쳐 줄 텐데.”

    이현은 방금 전 석희재 때문에 찡해진 코를 훌쩍이며, 뒷덜미를 머쓱하게 매만졌다.

    “고민을 안 해 봤던 건 아닌데.”

    “엔터계에 다시 없을 연봉.”

    석희재의 말에 이현은 실없이 웃었다. 이현의 웃음소리에 석희재는 희망을 느꼈는지 조금 더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시작했다.

    “응? 그렇게 해서 같이 사무실도 출퇴근하고, 스케줄도 같이 다니고… 집도 합치고.”

    그의 말에 이현은 석희재와 함께 하는 미래를 그려 보았다. 상상은 전혀 어렵지 않았다. 석희재는 이제 매일같이 이현의 집으로 퇴근하는 것과, 거의 동거 수준으로 함께하는 것을 매니저인 박 팀장에게 숨기지도 않았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까지 둘의 비밀을 알고 있다.

    이처럼 모든 것을 알고 있고, 그러면서도 모른 척해 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공과 사의 구별이 희미한 채로 일하는 것은 무척 마음이 편할지도 모른다.

    “고민을 좀….”

    “고민이 필요한 일이야?”

    그 물음은 ‘고민 따위는 필요 없지 않냐는’ 뉘앙스로 들렸다. 이현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석희재는 다시 토를 달지 않았다.

    가로수가 울창하게 자라 어둑한 그림자를 드리우는 길을 걸으며, 어느새 석희재는 티 위에 걸치고 있던 셔츠를 벗었다. 이현의 걸음이 느려졌다. 대화가 끊긴 뒤로, 이제 석희재의 눈치를 살피는 것은 이현 쪽이었다.

    목표하는 것을 이루려면 시간이 필요했다.

    석희재는 실패가 어려울 만큼 모든 것이 완벽하게 다 갖춰진 채로 시작했다. 그런 행운이 자신에게도 따를 거라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현이 생각하기에 자신은 눈에 띄는 특기가 있는 것도 아니었고, 상황이 받쳐 주는 것도 아니어서 앞으로 시도할 수 번의 노력이 실패로 돌아갈지도 몰랐다.

    그때까지 석희재를 설득할 수 있을까?

    그에게 이런 자신을 버텨 달라고,

    또 함께 인내해 달라고 말하는 것이 염치없는 일은 아닐까?

    쉬운 길을 놔두고 돌아가려는 제 결정 앞에서 이현은 여러 번 머뭇거렸다.

    “희재야. 나 말하고 싶은 게 있는데.”

    “응.”

    선선히 대답하는 석희재는 바닥을 보며 걷고 있었다. 대답이 수월하게 나온 것과 달리 그가 조금 삐져 있다는 걸 알아서 손이 덜덜 떨렸다.

    이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경리단으로 이어지는 길을 쭉 걷다 보니 어느새 녹사평 근처였다. 담벼락을 타고 자란 푸른 수목이 바람결에 흔들리는 소리가 났다. 빨갛고 노란 등을 켠 차들은 빠른 속도로 달렸다. 나뭇잎 사이로 보이는 노란 등이 켜진 이국적인 창문들이 먼 풍경으로 보였다.

    “부탁인데… 거절해도 되거든.”

    “뭔데?”

    “이건 내가 네 애인으로서, 애인이라는 지위를 이용해서 사적으로 부탁하는 거야…. 절대로 공적인 거 아니니까 회사에 들고 가지 말고.”

    “응, 뭔데.”

    석희재가 모자를 벗었다. 그러자 머리카락이 바람결에 살랑였다. 더웠는지 모자를 반쯤 접어 턱 아래에 대고 흔들고 있었다.

    이현은 그 제스처를 해석하려 애썼다. 긍정적인지 아닌지, 아직은 의중을 알 수가 없었다. 왜냐하면 석희재는 언제나 이현의 말을 진지한 태도로 유심히 듣기 때문이다. 싫은 제안도 단칼에 거절하는 법은 잘 없다.

    하지만 이제는 무턱대고 부탁할 수가 없었다. 석희재의 머리에 ‘싫다’거나 ‘거추장스럽다’는 감정이 스치는 것조차 무섭기 때문이다.

    “돈은 많이 못 줘.”

    “응?”

    석희재의 눈이 커졌다.

    “싫을 수도 있어…. 그런데 네가 했으면 좋겠어.”

    “뭐가.”

    “하고 싶은 대본이 있는데.”

    이현은 한 번 심호흡했다. 나뭇잎들이 바람에 몸을 요란하게 부딪치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렸다. 덕분에 목소리를 키워야 했다.

    “내용이 조금 마이너 해서 걱정스럽긴 해도, 내가 본 대본 중에 라이선스 안 팔린 건 그거밖에 없어서… 네가 준 오백만 원 중에 이백만 원은 벌써 기 작가님한테 각색료로 드렸어.”

    사실을 털어놓으며 이현은 무척 생소한 기분을 느꼈다. 막연하게 상상만 하던 과정을 입 밖으로 꺼내니 왜인지는 몰라도 계획이 더 구체적으로 되는 것만 같았다. 확정도 되지 않은 프로젝트에 큰돈을 이체할 때까지만 해도 잘하는 짓인가, 우려스러웠는데 말이다.

    “아직 연출은 없어. 투자도 못 끌어왔고… 근데 네가 해 주면.”

    “…….”

    “네 이름 팔면 투자비 좀 끌어올 수 있을 것 같은데.”

    동시에 막연하던 것이 곧 이루어질 것 같다는, 밑도 끝도 없이 대담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형.”

    석희재가 여전히 크게 뜨인 눈으로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이현은 초조하게 그 대답을 기다렸다.

    “형 공연 올리는데 나 없이 하려고 했었어?”

    “희재야….”

    “당연히 같이해야지.”

    어이없을 정도로 수월한 대답에 이현은 석희재의 허리를 와락 끌어안았다. 따뜻한 가슴이 맞닿았다.

    두 사람의 반짝이는 눈이 어둠 속에서 마주쳤다.

    “망할 수도 있는데?”

    “그럴 일 없어.”

    “넌 몰라서 그래. 진짜 괜찮은 대본 수십 개 쥐고도 빚 수억, 수십억 지는 대표들이 얼마나 많은데. 여기서 잘나간다 하는 대표들 전부 다 빚더미에 앉아 있는 거 모르지?”

    “형은 빚 안 져. 잘 될 거야.”

    “잘 돼도, 한 번으로 끝날 수도 있어. 이 판에 있는 내내 시험대 위에 있는 거야.”

    “할 수 있어, 잘할 거야.”

    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희재야. 내가 할 공연은 네가 상상하는 거랑 많이 달라.”

    “…….”

    “대극장 뮤지컬 아니야. 소극장 연극이고. 너 진짜 돈 없는 공연들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모르지. 의상은 제일 싸게 해서 싼 티 나고, 조금만 심하게 움직이면 터지고… 무대는 삐거덕거리고, 대도구 고장 나면 배우들이 직접 망치질해야 하고, 인건비 부족해서 음향, 조명 오퍼에 하우스 어셔까지 한 명이 다 해. 삼백 석짜리 소극장도 못 채워서 매회 텅텅 비고, 배우들 사기 떨어지고, 페이 제때 못 나가고.”

    “…….”

    “그렇게 열심히 했는데도 제작비도 못 뽑아서, 스태프들한테 돈 주려면 집 보증금 다 빼서 갚아야 할지도 몰라.”

    이현의 말을 듣던 석희재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그래도, 그렇대도 하고 싶은 거잖아.”

    석희재의 말 한마디에 이현은 왈칵 감정이 북받쳤다.

    그래도 하고 싶다.

    그게 진실이었다.

    하면 안 되는 수십, 수백 가지 이유를 대면서도 하고자 하는 이유를 그것 말고는 설명하지 못하겠다.

    “형은 할 수 있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 석희재의 손 아래서 이현은 고개를 거세게 끄덕였다.

    성공이든 실패든,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상관없었다. 하고 말 것이다. 하고 싶으니까.

    어쩌면 그저 그런 어른.

    그저 그런 인생….

    그렇게 남을 수 있던 인생의 방향이 마법처럼 바뀌는 날이었다.

    사랑하는 사람.

    사랑하는 일.

    사랑하는 인생이 아니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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