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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 방문자 (24/27)
  • 24. 방문자

    언제쯤이었더라, 이현은 어느 날 첫사랑을 다시 만날 뻔한 적이 있었다.

    아마 겨울이었던 것 같다. 공연의 철수를 앞두고 있었고.

    하나의 공연을 마무리할 때는 시작할 때만큼이나 감상적인 기분이 된다. 물론 그런 감상들이 왔다 가는 것은 아주 찰나의 일이다. 그러나 이현은 바쁜 일과 중에도, 스쳐 지나가는 그 찰나의 시점들을 대부분 명확히 기억하곤 했다. 그게 자신이 한때 꿈꾸던 극장 안에 들어왔다는 것을 자각할 수 있는 유일한 때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게 누군가에게 떠들거나 기술할 만큼 대단한 감정들도 아니었다. 막공 일주일 전쯤, 백스테이지를 걷다 문득 떠올린다. 일주일 후면 이곳을 모르는 이들에게 내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그런 생각이 들면 이현은, 미리 짐을 빼기 위해 집보다도 오래 머물던 컴퍼니 룸에 쌓인 짐을 조금씩 정리하기 시작했다. 마지막 날 허둥대다가 모자 하나를 잃어버렸던 첫 공연의 기억이 뼈저리게 남아 있던 탓이다. 그 캡 모자는 첫사랑과 그대로 끝나버릴 줄 모르던 날, 그의 집에서 아무거나 집어서 쓰고 나온 것이었다.

    아무튼 그런 식으로 제 사적인 짐들과, 사무실에서 가져다 놓은 업무 용품들을 매일 퇴근할 때마다 조금씩 집으로 들고 가다 보면 괜히 울적해지곤 했다. 홀로 불 꺼진 로비를 가로지르며 퇴근해서 그런지도 모른다. 관객으로 꽉 차 있던 대극장에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은 풍경은 마음을 이상하게 만드니까.

    그리고 막공 일주일 전쯤부터는 뒤늦게 밀려드는 배우와 스태프들의 초대 연락으로 어김없이 골머리를 앓게 마련이다. 그렇게 공연 초반에 오라 할 때는 안 오던 이들이, 꼭 좌석 없는 막주에 밀려오곤 했다. 물론 다들 미안해하고는 있어서 무어라 하지는 못하고, 최대한 유보석을 확보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렇게 찾아온 사람들과 인사를 나누다 보면 기분도 한결 나아졌다. 어떤 네트워크 안에 속해 있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서로 얼굴과 이름 정도만 아는 사이일지라도, 언젠가 함께 일을 할지도 모른다는 무언의 합의가 서로를 단단한 결속으로 묶어 준다.

    이현은 그래서 일을 좋아했다. 공통점 하나 없는 이들과 한배를 탔다는 기분이 들어서.

    또 극장 뒤의 백스테이지를 걷는 것도 좋았다. 가끔은 제게 쓸쓸한 기분을 안겨 주는 텅 빈 로비조차 좋았다. 아무도 없는 극장이라는 희귀한 장소를 매일 만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막상 공연 마지막 날이 되면 그 모든 감상은 왁자한 술판에 낭만 없이 떠밀려 간다. 쫑파티에서는 아무도 이별을 말하지 않는다. 언젠가 이 바닥을 돌고 돌다 보면 서로 다시 만날 것을 믿기 때문이다.

    그렇게 내일이 없는 이들처럼 새벽까지 술을 마시는 배우들 뒤에서 이현은 방석 여러 개를 깔아 놓고 테이블 아래 숨어 쪽잠을 잤다. 다른 이들은 공연에서 해방이지만 이현에게는 한 가지 과정이 더 남았기에. 그는 막공이 끝난 바로 다음 날 새벽부터 스트라이크1)를 해야 했다.

    그래서 막공 당일에는 항상 정신이 없다. 무언가 끝났다는 것을 느낄 틈도 없다. 때문에 후유증은 아주 나중에 찾아온다.

    …분명 첫사랑을 우연히 만난 일을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막공에 대한 감상으로 흐름이 새 버렸다. 이현은 제 산만함을 탓하면서 다시 첫사랑과의 재회를 떠올렸다.

    아무튼 그날은 정신력과 체력이 모두 소진된 날이었다. 철수 당일은 꼭 그렇게 과음에 이은 과로 때문에 만신창이가 되고 마니까. 게다가 대략 48시간 만에 돌아온 집은 유독 지저분하고 번잡해 보였다.

    ‘희재는 없네.’

    문을 열자마자 이현은 한숨을 쉬었다. 미리 철수 스케줄을 말해 놓았으니까 당연히 안 올 거라는 것을 알았는데도… 습관처럼 그를 찾게 된다. 최근에는 언질 없이 찾아오는 일이 늘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이현은 현관에 가방을 던지듯이 내려놓고 소파로 다가가며 옷가지를 벗어 던졌다. 씻고 침대에서 자고 싶었지만 그럴 만한 여유도, 체력도 없었다. 대충 소파에 구겨지듯 몸을 묻은 이현은 그대로 눈을 감았다.

    연애를 안 해서 얼마나 다행인가….

    이현은 생각했다. 내일 쉬는 날이라고 데이트를 하자고 졸라 대는 상대가 없어서 참 다행이라고. 그냥 이대로 세상이 끝날 때까지 자고만 싶었다.

    멋대로 굴고 싶을 때가 이렇게나 많으니, 제게 연애란 역시 불가능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합리화를 해 대던 이현은 한참을 자다가 생소한 시간에 눈을 떴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것은 집 안 전체에 석양이 내리고 있는 풍경이었다. 이현은 잠이 덜 깬 채로 소파에 기대어 주홍빛이 비스듬히 가득한 방 안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기묘한 적막이 집 안에 가득했다. 멀리 수도꼭지에서 똑, 하고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현은 침대에서 겨우 몸을 일으켰다. 뒤늦게 찾아온 근육통이 허리와 허벅지를 뻐근하게 만들었다. 물소리를 들으니 목이 말라, 냉장고에서 물병을 꺼내 그대로 입 안에 들이부었다. 식도와 위장의 길을 따라 흐르는 찬물이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그 적막 사이에 그저 서 있었다. 석양을 본다는 것은 지금까지 이현의 인생에서 없는 시간이었다. 문득 이현은 거울을 바라보았다. 목이 조금 늘어난 면 티셔츠를 입은 제 얼굴이 보였다. 지치고 푸석한 낯이다. 매일 보는 자신의 얼굴에서는 변화를 찾기 어려웠다.

    나가 볼까.

    이현은 마음을 먹고 다리에 바지를 꿰어 넣었다. 바깥에서 산책하며 지는 해를 보고 싶었다. 언덕에 올라가면 풍경이 좋을 것 같았다.

    그렇게 생각하며 문을 열었을 때였다. 이현은 골목 끝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었다.

    뚜벅, 뚜벅. 느리고 규칙적인 걸음걸이였다.

    ‘이 시간에 누가….’

    왠지 그 손님은 골목길의 끝인 이 집으로 오고 있는 것만 같다. 그냥 그런 예감이 들었다. 이현은 닫힌 현관과 골목 끝을 번갈아 바라보다 다시 문 안으로 들어갔다.

    이현이 황급히 집에 들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걸음은 딱 현관문 앞에서 멈추었다. 이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현관에 시선을 꽂은 채 눈도 깜빡이지 않았다.

    벨을 누르는 대신, 잠시 머뭇거리던 손이 문을 두드렸다.

    똑똑.

    이현은 현관문 가까이 다가갔다.

    낯선 시간에 찾아온 사람.

    남자의 구둣발 소리.

    그리고 응답이 없자 가볍게 도어록을 밀어 올리는 손짓과 천천히 버튼을 누르는 손가락.

    ‘혹시, 혹시….’

    이현은 첫사랑과 헤어진 이후에도 단 한 번도 이사하지 않았다. 도어록의 비밀번호도 바꾸지 않았다.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였다.

    이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목이 메도록 기다렸던 때인데도 왜인지 그는 고개를 저으면서 뒷걸음질 쳤다.

    다시 와 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이 문을 열고 그간 미안했다고, 무척 보고 싶었다고….

    아무리 생각해도 날 받아 줄 사람은 너밖에 없는 것 같다고 말해 주기를 얼마나 기다렸는데….

    왜 하필 지금이야.

    형 없이도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한 지금이냐고.

    이현은 색색대는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첫사랑이 보고 싶기도 하고, 보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를 보면 지금까지 잘 참았던 것들이 단숨에 허물어질 것 같아 무서웠다. 동시에 마음만 먹으면 자신을 순식간에 열일곱, 혹은 스물둘로 만들어 버리는 그의 존재가 막막하게만 느껴졌다.

    “허억….”

    도어록이 닫히고 문고리가 돌아갔다. 이렇게 무서울 줄 알았다면 바꿔 둘걸. 하지만 이미 때를 놓쳤다. 이현은 바닥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보고 싶지 않았다. 보고 싶던 때는 이미 지났다.

    “가….”

    이현의 입에서 쇠약한 목소리가 나왔다. 그는 바닥에 웅크려 부들부들 떨었다.

    그렇게 내쳐지고 난 뒤 그를 만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재회를 꿈꾼 적은 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자신이 찾아가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이 바랐던 상황은… 그래, 아주 멀리서 스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횡단보도 맞은편 정도의 거리를 두고 어떻게 사는지 그 삶을 추측해 볼 수 있을 만큼의 거리에서, 그냥 스쳐 가고 싶었을 뿐이다.

    이렇게 찾아와서 자신을 뒤흔들기를 원한 것이 아니다.

    이현은 눈을 질끈 감고 힘겹게 말했다.

    “가. 난 형 안 보고 싶어.”

    “…….”

    “제발 가… 내가, 내가….”

    “…….”

    “내가 얼마나 아팠는지 알면….”

    문이 열리는 순간, 이현은 이상한 숨소리를 내며 입술을 꾹 깨물었다. 순간 저도 모르게 의지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이 입에서 튀어나왔다.

    “희재야, 흐윽… 희재야.”

    그때였다.

    저 멀리 골목 끝에서, 아니 꿈의 경계선에서 누군가 저벅저벅 걸어왔다. 다급한 발소리였다. 처음에는 빠르게 걷던 그 걸음은 가까이 다가올수록 달리기에 가까워졌다. 그리고 대뜸 문이 벌컥 열렸다.

    청량한 공기가 밀려 들어왔다.

    헉, 헉. 밭은 숨소리가 정수리 위로 쏟아졌다.

    구둣발이 이현의 눈 바로 앞에 섰다.

    그러더니 막 당도한 남자는 무릎을 털썩 꿇고 이현의 앞에 마주 앉았다. 지저분한 현관 바닥에 스스럼없이 닿은 무릎 위로 고급 양복의 옷감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그가 허리를 숙이자 이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아 버리고 말았다.

    그때 남자가 나직한 목소리로 저를 불렀다.

    ‘현아.’

    낯설고도 익숙한 음성.

    이현은 눈을 깜빡였다.

    ‘현아….’

    분명 아는 목소리인데 무척 생소하게 들렸다.

    이유를 궁금해하며 이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아… 나직한 목소리로 제게 다정히 말하는 남자의 눈이 새까맣게 맑았다.

    그의 화장한 듯 붉은 눈가와 촘촘한 속눈썹에는 먹먹한 눈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아름다운 눈이었다.

    이현의 입이 믿을 수 없이 천천히 벌어졌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이 알되,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는 언제나 제 꿈의 언저리에서 저를 맴돌던 남자.

    이현의 아픈 과거를 마주할 때마다 슬픈 눈으로 바라보던 남자였으며,

    모든 것을 알고 난 후에도 변함없이 이현을 사랑할 미래의 그였다.

    한 마디로, 꿈을 방문한 기적이었다.

    ‘현아, 가라고 해 줘서 고마워.’

    ‘…….’

    ‘그 사랑을 끝내 줘서 고마워.’

    석희재가 말했다.

    순간 이현은 자신이 첫사랑에게 무슨 말을 내뱉었는지 느리게 자각했다. 찾아오면, 그러기만 해 주면 울면서 바닥에 엎드려 반겼을 첫사랑에게…. 자신은 가라고 말했다. 그가 제 인생을 다시 휘두르지 않기를 바랐다. 더 이상은 정말로 첫사랑을 다시는 보고 싶지 않았다.

    이현이 멍하니 벌어진 입술을 하자 사려 깊은 눈이 다정히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자신을 관찰해 주던 눈이었다.

    이제야 알았다. 자신이 한심하게 놀아나도 그 눈이 저를 비난하지 않았던 이유를. 또 바보 같은 짓을 해도 이해한다는 듯이 바라봐 주었던 이유를…. 그건 3년 내내 무심한 가면을 쓰고 있던 석희재의 속마음이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는 악몽을 꾸지도 말고.’

    ‘혼자 우는 일도 없이….’

    ‘사랑만 받고 살아.’

    역시 눈앞의 남자는 심장까지 아름다움으로 빚은 게 틀림없었다.

    마치 비현실의 현신처럼.

    그를 체온으로 느끼고 싶어 이현은 당장 석희재에게 와락 안겼다.

    그 순간 어른이 된 석희재는 열아홉 살 소년처럼 기뻐하며 이현을 꼭 안아 주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사랑하는 상대에게 어리광부려 본 적 없던 이현은 마치 조르듯이 그를 더 세게, 거세게 끌어안았다. 석희재의 품은 단단해서 이현이 아무리 매달려도 흔들리는 법이 없었다.

    “사랑만 받고….”

    석희재의 목소리가 귓가에 숨과 함께 나직하게 쏟아졌다.

    “사랑….”

    중얼거리며 이현은 눈물로 달라붙은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현실의 공기가 느껴졌다. 꿈의 적막과 다른 사소한 소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창밖의 아이들이 하교하는 소리, 시계의 초침 소리, 방 바깥에 틀어 놓은 티브이의 소음. 그리고 사위에는 비현실적인 주홍빛 석양이 가득했다. 언젠가 스트라이크를 끝내고 집에 돌아와 혼자 깨어났던 날처럼.

    그날은 혼자였지만 지금은 아니다.

    이내 모든 것은 과거가 되었고 내 곁에는 석희재가 있다.

    그 순간 지나쳤던 감정의 편린들이 밀물처럼 이현의 심장을 적셨다. 물살을 일으켜 수면 아래 늪을 한바탕 휘저었다. 그렇게 되살아난 기억들은 이현을 아프게 만들었다.

    “난 멍청해.”

    잠에서 깨자마자 이현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악몽을 꾸던 입술이 내뱉는 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석희재는 거기 제 입술을 닿게 한 채로 살래살래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왜 그렇게 생각해.”

    “나 되게 한심하지.”

    “안 그래.”

    “너는….”

    이현은 석희재의 앞머리를 조심조심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너는 웬만해선 후회할 일을 만들지 않는 부류인 것 같은데, 나는 아니니까.”

    “…….”

    “내가 조금 더 내 감정에 솔직했다면.”

    “…….”

    “한 번 표현이라도 했다면….”

    “…….”

    “내 첫사랑이 그 꼴이 아니었다면.”

    조금 더 일찍 사랑하고 사랑받았을까.

    지난 과거를 되짚으면 그런 후회가 몰려왔다. 서럽고 후회스러워 이현은 그렇게 아프게 중얼거렸다.

    그리고 석희재는 조심스레 반짝이는 눈으로 이현의 이야기를 귀담아들었다. 그 모든 것이 석희재에게는 사랑 고백처럼 들리기만 했기 때문이다.

    “넌 아무렇지도 않아?”

    이현이 불쑥 물었다. 석희재는 가벼운 의문을 담고 이현의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나 때문에 3년이나 혼자 가슴앓이한 거, 아무렇지도 않냐고.”

    석희재는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순간적으로 그 얼굴에 홀린 이현은 살짝 올라간 석희재의 입꼬리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무렇지도 않아.”

    진심으로 석희재는 이현을 짝사랑하는 일이 행복했다. 지난날 서툴렀던 자신이 무리하게 이현을 밀어붙인 일로, 그가 과거와 직면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진통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면서 석희재는 얼마 전의 사랑스러운 꿈을 떠올렸다.

    “그리고 난… 괜찮아. 약속을 받았거든.”

    “…….”

    “엄청 귀여운 열일곱 살짜리 남자애가 날 평생 사랑해 주겠다던데.”

    “…뭐?”

    순간 이현의 미간에 주름이 팍 잡혔다. 그 얼굴을 본 석희재는 더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찰나지만 이현이 질투를 한다고 생각하니 기쁘기도 하고, 그 대상이 어린 자신이라고 생각하니 우습기도 했던 것이다.

    베개에 얼굴을 묻고 어깨를 떨며 웃던 석희재를 의심스레 보던 이현이 입을 열었다.

    “혹시 그건가?”

    “……?”

    “그날 있잖아, 나 첫사랑 얘기하고 밤샌 날 아침에….”

    이현이 긴가민가하는 얼굴로 석희재를 흘끔 보았다.

    동시에, 그게 저만 아는 암호 같은 꿈이라 생각했던 석희재는 확연히 놀란 얼굴로 이현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뒤척이면서 하도 끙끙대길래.”

    “…….”

    “잠꼬대하는 줄 알고 받아 준 건데…”

    “…진짜 형이 대답했어?”

    “아니 근데 내가 왜 열일곱 살이야? 너 그런 꿈 꾸냐?”

    멋쩍었는지 이현이 금세 화제를 바꾸며 농담조로 시비를 걸어왔다. 동시에, 그날의 대화가 신기루가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석희재의 심장은 미친 듯 떨리기 시작했다.

    석희재는 제 취향을 의심하기 시작한 이현을 꽉 끌어안고 그 새초롬한 눈꺼풀에 마구 입을 맞추었다. 이현은 간지러워하면서도 석희재의 품을 벗어나지 않았다. 대신 얌전히 석희재의 어깨에 턱을 기대었다. 마치 그 꿈에서처럼.

    “기억나? 내가 형한테 말했잖아. 난 짝사랑하는 내내 형이 있어서 행복했다고.”

    “…….”

    “그건 진심이었어.”

    “…그래, 네 말이 맞다. 네 사랑이 이겼네.”

    이현은 석희재가 한 말 하나하나를 다 기억하고 있었다. 그것마저 뿌듯해서 석희재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가실 줄을 몰랐다.

    아니지. 석희재가 중얼거렸다.

    “상대가 얼굴 밝히는 이현이잖아.”

    “…….”

    “그럼 처음부터 이길 수밖에 없었던 건데….”

    간지러운 말에 이현의 귀가 점점 빨갛게 물들어 갔다.

    “뭐야… 잘생긴 거는 알고 있었네.”

    “그러면 별로야?”

    “아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지….”

    순순하게 답하는 이현의 눈매가 평소와 달리 조금 처져 있었다. 그를 꽉 끌어안고 석희재는 좋아서 몸부림쳤다.

    동시에 석희재에게 안겨 흔들리며 이현은 생각했다. 석희재는 뻐겨도 귀엽고 잘난 척을 해도 납득이 간다고. 이현은 이게 제 눈에 뭐가 씌어서 그런가, 아니면 객관적 사실인가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리고 석희재는 기대를 버리는 데 익숙해져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마저 억눌렀던, 그러나 누구보다도 사랑받고 싶었을 남자를 차분히 내려다보았다.

    “그냥… 형은 그동안 악몽을 꾼 거라고 생각해.”

    “…….”

    “아주 긴 악몽.”

    “…그래.”

    이현은 다 가신 눈물을 마지막으로 훌쩍였다.

    이현은 제 등을 천천히 도닥이는 석희재의 손이 따스하다고 생각했다. 석희재는 제 목을 강하게 옭아맨 이현의 마른 팔이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다.

    지난 긴 밤, 둘은 3년간 서로가 품은 마음을 부정하거나 혹은 내뱉지 못한 채 엇갈렸던 것들을 이야기하다가 잠이 들었다. 어렴풋이 그것을 기억해 낸 이현은 어디까지가 서로 나눈 대화이고 어디부터 꿈이었는지를 더듬어 보았다.

    석희재에게 원나잇에 키스한 남자는 네가 처음이라는 말을 했던 것은 기억이 난다. 또, 3년간 그렇게 무심하게 굴다 하루아침에 모습을 바꾸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닌가 의심스럽지 않겠느냐고도 말했고. 그리고….

    “막공 때 쓸쓸했다고도 말했어.”

    “뭐야, 그럼 다 했네….”

    이현은 피식 웃으며 석희재의 가슴에 파고들었다.

    한참 후, 이현의 귓바퀴를 만지작거리던 석희재가 머뭇거리다 물었다.

    “그래서, 첫사랑은 대체 언제 만난 건데? 스트라이크 끝나고? 집으로 찾아왔어?”

    “내가 그 얘기도 했어?”

    응, 석희재가 중얼거리며 말했다.

    “거기부터 형이 잠들었어.”

    이현은 눈을 깜빡였다. 꿈과 현실의 경계가 불분명했다.

    아마도 이건 첫사랑이 등장하는 마지막 악몽이었을 것이다.

    이현은 석희재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러자 석희재가 왜 그렇게 보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입을 꾹 다물고 이현을 마주 보았다.

    사랑스러운 ‘꿈의 찬탈자’는 제가 이현의 꿈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모르는지, 치미는 궁금증을 억누른 얼굴로 얌전히 이현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이현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만난 적 없어.”

    “…….”

    “스친 적은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랬대도, 잊었어.”

    이현은 눈을 감으며 지난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누군가 문을 두드렸었다. 그러나 그 누군가는 결국 현관문을 열어 보지 않고 돌아섰다.

    그래서 여전히 이현은 그날의 방문자가 누구인지 모른다.

    택배 기사님이었을지도 모르지.

    주인집 누나였을 수도 있고.

    그리고 첫사랑이었대도….

    의미 없는 일이다. 과거가 되어 버렸으니.

    게다가 그 꿈에 석희재가 등장한 이상 그건 더는 악몽도 아니었다. 굳이 분류하자면 길몽에 가깝겠다. 석희재가 제 인생에 저벅저벅 걸어 들어오는 순간을 의미하는 꿈이 아닌가.

    ‘어차피 꿈보다 해몽이라지.’

    그렇게 생각하며 이현은 제 꿈의 방문자를 끌어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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