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3. 현 (23/27)

23. 현

한때는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두 번째 사랑이 오기를.

만약 자신이 운이 좋다면 두 번째 사랑은 아마도 외롭지 않을 것이다… 라고, 이현은 생각했다. 또 저를 무참히 씹다 뱉은 첫사랑 보란 듯이 행복해질 수도 있을지 모른다고도.

그래서 이현은 가끔 구체적으로 이상형을 상상해 보기도 했다.

일단 상상 속의 그는 썩 나쁘지 않은 외모에 준수한 몸매를 갖추어야 한다. 외모는 어쩔 수 없는 첫째 관문이다. 자신을 지극히 사랑해 주는 마음만 있다면 외모가 마음에 차지 않아도 받아들이자고 마음먹었지만, 거듭된 하룻밤 만남으로 깨달았다. 제 눈에 외모가 차지 않는 남자들에게는 설렘은 고사하고 측은지심만 생긴다는 것을. 그래서 이현은 이상형의 첫째 조건을 최소 자기 눈에 멋져 보이는 남자로 정했다.

그리고 둘째로, 두 번째 사랑은 사랑이 이루어지는 기적을 감사할 줄 아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누군가를 좋아할 때에 상대방도 나를 좋아해 준다는 것은, 운과 공간과 시간의 차원이 합치를 이루어야만 성사될 수 있는 기적이니까. 사랑은 거저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셋째로 바라는 것은 아주 소박한 것들이었다. 선물을 주면 소중히 여기겠다고 눈을 휘며 웃고, 식사를 대접하면 고맙다며 집에 가는 정류장까지 배웅해 주기도 하는 등의…. 그러면 자신은 헤어지기가 싫어서 다시 그의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말한다. 그는 이런 법이 어딨느냐면서 다시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을 해 준다. 그렇게 배웅을 핑계로 서로의 거점을 수없이 오가며 함께 걷는 우스운 짓을 반복해도 그 행동을 비웃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했다.

또 가끔은 바라보는 눈길에 사랑스럽다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으면 좋겠다. 그런 눈빛은 받아 본 적이 없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렇게 대해 줬으면 좋겠지만 정작 그 순간이 다가오면 머쓱해서 눈을 피해 버리고 말 것 같다.

이현은 저 자신이 바라는 것이 무척 소박한 연애라고 생각했다.

길을 걸으면서 마주치는 연인들은 서로에게 다정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누군가는 저토록 쉽게 하는 것들이 왜 내게만 어려울까’ 하고 생각하는 것도 잠시, 돌이켜 보면 상상의 끄트머리에서 남자는 언제나 첫사랑 형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바람이 소박해질 수밖에 없었던 건지도 모른다.

첫사랑에게 길든 그대로 실연당한 채 외부 세계에 내던져진 이현은 너무나 좋은 먹잇감이었다. 외모는 반반한데 너무나 쉬운 남자, 어떻게 굴려도 뒤끝이 없고, 무슨 짓을 강요해도 순순히 해 주는 남자라고 소문이 났다.

반면 성적인 경험치만 누적되어 있을 뿐 감정적 손해를 재고 따질 줄 모르는 상태의 이현은 제 소문도 모른 채 무방비로 생채기를 잔뜩 입었다. 이태원에서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 누군가 제게 명함을 주고 가는 사람이 있으면 ‘혹시’ 하고 기대감을 가졌다. 그렇게 만난 남자가 제게 두 번 이상 연락을 주면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애를 썼다. 자신이 말쑥한 외국인에게 명함을 받는 것을 목격한 알바처의 매니저 형이 - 그와는 세 번 잤다 - 불편한 얼굴을 했을 때는, 혹시 제게 마음이 있어서 그런가 싶어 심장이 두근거렸다.

그러나 그저 성욕을 풀기 위해 이현을 이용하는 남자들은 금세 친절한 척을 내던졌다.

이 사람일지도 모른다.

혹시 이 사람일까.

아니면 이다음….

아무도 모르게 품은 두 번째 사랑에 대한 희미한 희망은 더한 절망으로 돌아왔다. 시간이 흐르며 이현은 왜 사람들이 원나잇스탠드를 선호하는지 깨닫기 시작했다. 두 번, 세 번씩 같은 사람과 자게 되면 저같이 멍청한 놈들은 꼭 착각하기 때문이다. 외로움에 질려서 약간만 틈을 주면 사람의 품에 파고들려는 성가신 놈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다음을 기약하지 않는 관계가 마음 편했다. 그러면 적어도 희망의 단초부터 잘라 버릴 수 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흘러 이태원 바닥에 안 잔 놈이 없어서 아르바이트 면접을 가면 그곳의 누구 하나와는 꼭 몸으로 얽힌 사이가 되어 잘리고 잘리기를 반복했을 때, 이현은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이제 절대 일로 엮이는 사람들과는 관계 맺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결정적으로 그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건 하필 늙은 남자와 모텔로 들어가는 걸 큰형에게 들켰을 때다.

그날 밤, 큰형이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제집을 찾아왔다.

‘현이 너….’

‘아, 아니야. 형.’

무엇을 부정해야 하는지도 모르면서 이현은 손사래를 쳤다.

‘나쁜 일 하니?’

‘나쁜 일?’

‘혹시 그런 사람들한테 용돈 받아?’

‘아니야! 나 그냥 나이 많은 남자가 좋아서 그래. 내가 좋아서….’

‘…….’

‘그리고 맨날 그런 남자만 만나는 건 아닌데….’

이현의 변명을 들은 형은 안심하긴커녕 도리어 어깨를 떨며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동시에 이현은 큰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바보짓이 제 인생만 갉아먹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제 멍청함이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고 있었다.

‘공부 못해도 좋으니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그렇게 바라며 키운 막내아들이 이런 식으로 살 거라곤 아무도 예상치 못했을 텐데.

자아 성찰은 이현의 전문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일은 ‘태어났으니까 사는 소년’마저 철들게 만들었다.

그래서 큰형이 찾아온 그 직후 이현은 알바 생활을 청산해 버렸다. 지긋지긋한 6번 출구 골목을 벗어나 이태원에서 자취를 감췄다.

처음으로 정장 비슷한 옷과 구두를 사 보고, 면접을 보고 직장을 잡은 것도 그때쯤. 일과 사생활을 철저히 분리하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첫사랑의 꿈을 꾸다 눈물로 뺨이 축축해진 채 잠에서 깼고, 누군가와 따뜻한 살을 맞댄 채로 자는 것이 무척 그리운 날엔 모르는 남자를 찾곤 했다.

어느 날, 귀가 후 어둑한 현관에서 이현은 문득 거울 속 자신과 마주쳤다.

저 자신과 눈이 마주친 순간 이현은 퍼뜩 놀랐다. 셔츠와 재킷을 걸친 못되게 생긴 남자가 거울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런 얼굴이니까….’

두 번째 사랑이 올 리가 없지.

남자는 무척 피로해 보였다. 더는 어린 얼굴도 아니었다.

그런 저 자신이 낯설어서 이현은 마른 손가락으로 제 얼굴을 더듬어 보았다. 왜 저렇게 사람을 노려보나 싶어 괜히 눈을 휘어 웃어 보기도 했다.

그러다 그는 문득 생각했다.

어른이 되는 것은 외로운 일이라고.

이제는 공연을 보면서 우는 일은 잘 없다. 실연을 당한 뒤 연극에 푹 빠져 있을 때는 그렇게도 눈물이 헤펐는데 이젠 그 어떤 신파를 봐도 눈물이 나지 않는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으면 건조해진다는데 저도 그런 것일까?

원나잇 상대에게 헛된 기대감을 품으며 상처받는 일도 없어졌다. 상처받지 않는 저만의 규칙을 정했기 때문이다. 일에 치이는 바람에 명절에도 집에 내려가지 못한 지 꽤 되었지만 그것 외에는 가족들을 달리 걱정시키는 일도 하지 않는다….

누구에게도 짐이 되지 않고 스스로의 삶을 건사하는 한 명의 어른.

‘다들 이렇게 사는 건가.’

눈을 끔뻑이다 천장을 바라보며 이현은 생각했다. 만약 그렇다면, 그렇대도 무척 슬플 것 같다고.

***

“그래서, 의자 등받이 위로 앉은키가 보이는데 어깨가 이렇게 떡 벌어지게 넓은 거야. 내가 가까이 가서 머리 이렇게 귀 뒤로 넘기면서 늦었죠, 죄송해요~ 하고 인사하니까 그 남자가 벌떡 일어나는데… 와… 키가 한… 188센티?”

“우와~”

“얼굴 보고 비명 지르려다 말았잖아. 진짜 완전 내 타입.”

“소개팅에서 외모 취향인 남자 만나기 쉽지 않은데.”

“그니까! 사실상 전멸이지, 전멸.”

이현은 옆자리에서 떠드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우연히 만난 남자의 외모가 완벽히 취향일 경우라. 그건 저 자신이 직면한 상황과 비슷해 궁금증을 자아냈다.

“과장님, 그래서. 잘해 볼 생각이에요?”

“일단은.”

그렇게 말하며 종이컵 안의 음료를 우아하게 호록, 빨아 마신 과장이 갑자기 목을 젖히고 크허헉, 하고 웃었다. 이현이 개인적으로 생각하기에 과장은 저렇게 조신할 때와 폭소할 때의 갭이 매력적이었다. 그러나 주변인들은 잘해 보고 싶으면 그 남자 앞에서는 당분간 절대 그렇게 웃지 말라며 충언을 해 주었다.

머쓱하게 뒷덜미를 매만지다가 이현은 생각했다.

그렇지, 첫인상이 좋아야겠지.

나는 처음부터 망친 거지.

고개가 절로 푹 수그러들었다.

지난밤 이현은 원나잇 상대로 영화배우처럼 잘생긴 남자와 마주쳤다. 바라보는 지극한 눈빛에도 사연이 있어 3초 이상 눈을 마주칠 수 없는 외모였다. 두상이며 골격이 일반인과는 전혀 달라 진짜로 연예인일 수도 있지 않을까, 잠시 생각했지만 보통 얼굴이 팔린 사람이 그런 식으로 남자를 만나고 다니지는 않으니….

어젯밤을 생각하니 얼굴이 화끈거렸다.

쓸데없이 말을 너무 많이 한 것 같다.

‘내가 생일이라고 말을 했었나? 존나 TMI다 진짜. 그냥 그런 남자랑 호텔에서 자고 싶었던 거면서.’

원나잇으로 만난 남자에게 먼저 키스해 본 것도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만난 놈들은 하나같이 키스도 더럽게 해서 이현은 관계 중 혀를 섞는 것만큼은 치가 떨리게 싫어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얼굴이 그렇게 예쁘니 키스도 달콤했다.

아… 게다가 중간에 식어 버리게 만들었고.

갑자기 펠라부터 해 버린 게 거부감을 일으켰을지도 모른다.

‘거부하던 방식도 젠틀했는데.’

그는 꺼지라거나 손으로 밀치는 법 없이 자신을 조심스레 일으켜 키스해 준 다음 말없이 침대로 데려가 눕혔다. 샤워한 남자의 몸과 머리에서는 온통 싱그럽고 상큼한 향이 났다. 다정하게 침대로 이끈 것과 달리 그는 자신에게 잠들기를 종용했다. ‘이 남자랑 자는 건 물 건너갔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순간적으로 억울함이 치밀었다.

그렇게 밤은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갔다. 이현은 제 존재가 누군가의 내면에 파란을 일으켰다는 사실도 모른 채 쿨쿨 잤고, 다음날 기계적으로 침대에서 눈을 떴다.

그러고는 출근 직전까지 잠든 남자의 얼굴을 감상했다.

남자의 외모는 워낙 희귀하게 아름다워서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정형화된 미남의 얼굴이 아닌, 어디서도 찾아보지 못한 독보적인 분위기가 있었다. 눈썹뼈와 콧대, 턱선 같은 곳은 남자다운 굴곡을 지닌 채 선명한데 전체적으로 처연하고 곱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 신기했다. 새까만 속눈썹이 길었고 살짝 벌린 입술은 계절마저 거슬러 수분을 머금어 통통하고 부드러워 보였다. 이불과 가운 안으로 살짝 드러난 쇄골이며 어깨 골격까지 화보를 보는 듯했다. 전신이 예술품이었다.

‘너는 나같이 소심한 놈한테 걸린 게 행운인 줄 알아야겠다.’

이현은 오늘부로 ‘나랑 잤던 남자’ 앨범을 만들어 이 남자의 얼굴을 찍어 저장하고 싶은 충동에 시달렸으나 관두었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사진으로 감상하고 싶을 만큼 잘생긴 남자와 만날 확률이 희박하다는 걸 알았으니까. 그 폴더에는 평생 이 남자의 사진만 남아 있을 가능성이 컸다.

심지어 자 보지도 못했고.

이런 남자는 대체 어떤 사람과 사랑에 빠질까.

어떤 얼굴을 사랑스럽다는 듯이 바라볼까.

매일 거울로 보는 게 이런 얼굴이니 눈도 높겠지.

게이는 아닌 것 같은데… 남자랑은 호기심에 해 보려던 건가.

왕자와 춤을 춰 보지도 못한 신데렐라에게 파티장을 떠날 시간이 다가왔다.

출근해야지.

이현은 옷을 갖춰 입었다. 호텔 방을 나서기 전, 하필 제 생일에 마법 같은 하룻밤을 선물해 준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소리 없이 인사했다.

‘안녕.’

속삭인 입술이 작게 움직였다.

마법에라도 걸린 것 같던 지난 밤의 감상은, 침대를 벗어나 옷을 걸치고 칼바람이 부는 회색 도시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점차 희미해졌다. 이현은 입 안으로 중얼거렸다. ‘꼭 멍청한 놈들은 희망을 가지지.’ 저 남자의 주변에는 저 얼굴에 홀려 부나방처럼 날아들어 몸과 젊음과 돈을 바치려는 이들이 셀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저는 출발선에 나란히 낄 자격도 없었다. 진심이 되어 어기적거리며 줄을 서는 순간 남자의 얼굴이 비웃음으로 비틀리는 것을 보게 될지 모른다.

‘감히 네가?’

남자의 얼굴은 어느새 첫사랑의 얼굴로 변해 있었다.

그렇게 이현은 회사에 도착해 언제나와 같은 책상 앞에 앉았다. 누군가는 이현의 옷이 어제와 똑같다는 것을 눈치챌 법한데도, 옷차림에 무신경한 자취남이어서 그런가 다들 그저 측은하게 볼 뿐이었다.

그렇게 파티션 사이에 가두어져 정신없이 업무를 처리하다 보니 어제의 우연도 별것 아닌 것처럼 느껴졌다. 가끔 좋은 일은 나쁜 꿈보다도 존재감이 약하다. 그리고 그건 그다지 특이한 일도 아니었다.

어느새 수다를 떨던 사람들도 흩어지고 사무실에는 소란한 정적만이 가득 찼다.

그때였다. 갑자기 핸드폰이 진동했다.

흘깃 시선을 주니 메시지가 와 있었다.

그걸 본 이현의 시선은 화면에 고정된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왜 조식 안 먹고 갔어?」오전 11:23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다.

‘왜 안 먹고 가긴… 출근 직전까지 거기서 뭉갰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이현은 픽 웃었다. 답장을 할까, 말까 한참을 망설이던 손은 결국에는 화면을 끄고 엎어 놓는 것을 택했다.

***

「오늘 시간 돼? 아홉 시 종각역」오후 5:19

메시지를 보내온 건 이현이 최근 만나고 있는 남자였다.

나이는 자신보다 여섯 살이 많은 서른둘, 명문대를 졸업한 대기업 회사원. 약간 허세도 있고 가끔 젠체하는 게 흠이지만…. 그래도 대학도 좋은 곳을 나왔고 실제로도 잘났으니 어쩔 수 없나, 이현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며 수긍했다. 그는 반복되는 하룻밤 만남들 사이에서 드물게 ‘정상적’으로 관계를 시작한 남자기도 했다.

정상? 비정상?

이현은 그 기준을 생각하다 순간적으로 혼란을 느꼈다.

아무튼 지금까지의 자신이 해 온 방식을 비정상으로 두면 남자가 예외인 건 맞았다. 그는 자신과 만나자마자 모텔로 직행하려 하지 않았다. 초면에 술잔을 기울이며 취미나 직장에 관해 묻는 것도 약간 특별하게 느껴졌다. 그나마 단점을 찾자면 아까도 말했듯이 잘난 척을 하거나 거들먹거릴 때를 꼽을 수 있겠다. 그러나 이현은 그것을 큰 단점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남자들은 어차피 거기서 거기고, 이현은 살아생전 제 앞에서 겸손하게 구는 남자를 본 적이 없었으니까.

오늘 만나면 세 번째 보는 것이다.

‘내일이 토요일인데, 혹시 오늘 자게 되나.’

그간 단 한 번도 베드 인하지 못했다. 그 사실은 남자에게 자신이 매력적이지 않다는 반증 같아서 자신감 하락 중이었다.

이현은 고민에 빠졌다.

첫째, 아홉 시 전에 퇴근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둘째, 시간 되냐고 물어 놓고 벌써 시간 장소를 멋대로 확정해 버린 상대방이 약간 재수 없다.

셋째로는….

‘자도, 별로 안 좋을 것 같은데.’

핸드폰을 엎어 놓으며 이현은 생각에 빠졌다.

그는 며칠 전 비현실적으로 멋진 남자와 원나잇을 하는 데 성공했다.

생일에 소공동에서 마주쳤던 남자였다. 헤어진 후 그렇게 다시 만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건 정말로 우연이었다. 하필 만난 곳이 클래식 공연장이라니, 남자는 얼굴과 어울리게 취미 생활도 고상했다.

더해서 그가 먼저 기다리겠다고 말할 줄도 몰랐고.

이번에야말로 기회를 놓치면 바보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현은 작정하고 남자를 잡아먹었다.

어젯밤의 기억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로로 쭉 찢어진 눈매가 아래로 축 허물어졌다. 남자는 정갈한 인상과 섹스 어필이 공존하는 외모였다. 몸의 골격도 무척 예뻤다. 그렇게 능숙하게 생겨서는 서툴게 구는 것도 미친 듯이 매력적이었다.

역시 남자는 처음인 것 같았고, 예상대로….

‘원래 스트레이트인 것 같았지.’

얼굴에 묻은 파우더 자국이나 풍기는 향수 냄새로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잘난 남자가 게이일 확률은 더더욱 희박하기 때문에 그 점은 별로 실망스럽지도 않았다. 그냥 자신이 ‘첫 상대’는 아닐지라도 ‘첫 남자’인 것만으로도 영광이다.

그 아쉬울 것 없는 남자가 왜 남자랑 자 보고 싶어 했을까.

고민하던 이현은 상상력의 한계를 느끼고 곧 생각을 접었다.

아무튼 너무나 황홀한 밤을 경험한 것은 그 자체로 좋았지만, 돌이켜 보면 곤란한 일이었다. 거기에 맞춰 눈이 높아져서는 곤란하니까 말이다.

그래서 이현은 현재 제게 주어진 상황에 충실하기로 했다.

하룻밤 환상에 홀려 있다가 그나마 제게 친절한, 현실적인 상대를 놓친다면 그만큼 바보 같은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 사람만큼 제게 배려심 있게 대해 주는 남자도 없었다. 이현은 머리를 긁적이며 문자를 보냈다.

「열 시는 안 돼요?」오후 5:25

이현은 답을 찍어 보냈다. 그러나 상대방은 확인하고도 답을 주지 않았다. 그게 이현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너무 늦는데...」오후 5:43

한참 후에 그에게서 온 답장에 이현은 결국 김 실장 - 당시 그녀는 피디였다 - 에게 가서 주말 출근을 할 테니 오늘 조금 일찍 들어가도 되냐고 물었다. 물론 퇴근 시간을 훌쩍 넘긴 시간에 가면서도 ‘조금 일찍’이라는 부사를 쓰는 모순을, 이 사무실 안에서 이상하게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이른 퇴근을 요청하는 이현의 목소리는 염소처럼 기어들어 갔고, 김 실장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오늘 일을 다 쳐 내고 주말에 쉬는 게 좋지 않겠느냐고. 그렇게 넌지시 말했지만 이현이 곤란해하니 결국에는 허락해 주었다.

그래도 마지막까지 손볼 게 많아, 이현이 사무실을 나선 시간은 저녁 8시 50분이었다.

‘늦었다.’

이현은 사무실 문을 나서자마자 달려 동숭 언덕길을 뛰어 내려갔다. 다행히 지하철 출구 앞에 기다리고 있던 택시를 바로 잡아탔지만 금요일 밤의 종로는 교통 체증이 엄청났다. 꾸역꾸역 움직이다가 멀미가 나도록 브레이크를 콱 밟는 노년의 운전기사. 이현은 그의 뒷모습을 괜히 원망스레 한 번 바라보고, 마침 신호에 걸려 횡단보도에 쏟아져 나오는 사람들을 차창 밖으로 한 번 바라보았다.

9시 정각. 지각 확정이다.

이현은 택시 등받이에 나태하게 기대며 모든 것을 포기했다. 종각에 도착하는 예정 시간은 9시 20분이었다. 이현은 마음을 졸이며 이십 분 늦을 것 같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천천히 와~」오후 9:03

그 대답에 안도한 것도 잠시.

이현은 먼저 도착한 종각에서 상대를 한 시간이나 더 기다려야 했다.

열 시에 마감한 카페에서 어쩔 수 없이 밀려 나와 사거리에서 찬 바람을 삼십 분이나 맞고 있으려니 기침이 났다. 남자는 술이 거나하게 취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네가 늦게 온대서 나도 한잔했다. 그냥 일 다 보고 나오지.’ 뒤늦게 그렇게 말하는 남자에게 이현은 무어라 할 수가 없었다. 뒤이어 많이 기다렸느냐고 묻는 목소리가 다정했기 때문이다.

그날 이현은 그 남자와 처음으로 잤다.

그러고는 상대의 작은 좆에 실망했다.

섹스는 불만족스러웠다. 그나마 상대가 만족한 것 같아 다행스럽기는 했다. 그는 미친 듯이 흥분했고, 저보다 능숙한 이현에게 그간 얼마나 걸레같이 놀았냐며 욕을 섞어 말했다. 그게 흥분감을 돋우려는 상스러운 말이라는 걸 알지만 사실을 적시당한 이현은 기분이 상했다. 한두 번 당한 취급도 아닌데 울적해졌다.

걸레인 건 사실이지만 대놓고 걸레라고 하니까 기분 나쁘네.

겨우 두 번 사정하고 지쳐 나가떨어진 남자를 등지고 이현은 혼자 모텔을 나섰다. 밤바람을 맞으며 담배를 피우자 갑작스러운 허기가 몰려왔다. 그제야 저녁을 걸렀다는 것이 생각났다. 만약 남자와 시간을 제대로 맞추어 만났다면 그와 함께 술을 마시고 안주로 배를 채울 수 있었을지 모른다. 그런 걸 생각하니 왠지 마음이 허했다.

어느새 또 누군가에게 기대해 버렸고, 그 상대가 기대하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허무감이 밀려오는 것이었지만….

이현은 그런 제 마음을 부정했다.

‘나도 정상적인 연애 한 번 해 보고 싶다.’

담배를 비벼 끈 이현은 다시 모텔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고는 코를 골고 있는 남자의 몸 옆에 살을 붙이고 누웠다. 사무직인 남자는 그간 몸 관리에 소홀했는지 옷을 벗기니 지방과 술배가 두둑해 별로 보기 좋지 않았다. 이현이 기대어 오자 그가 귀찮다는 듯이 팔을 휘적거렸다.

사귀자고 말해도 되나.

그런데 이런 남자랑 하는 연애가 재밌을까.

난 속궁합도 중요한데… 그런 거부터 따지는 내가 이상한 거겠지.

이만한 사람도 없으니 그냥 만날까.

그런 생각을 하다 이현은 잠들었다.

하필 꿈에는 얼마 전 잤던 배우처럼 멋진 그 남자가 등장했다.

같이 뒹구는 꿈이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둘은 멀찍이 떨어져 선 채로 서로를 지켜보기만 했다. 아니, 조금 정정하자면 이현은 그가 자신을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는지 몰라 시선을 피한 채로 서성여 댔고, 꿈속의 남자만이 이현을 말없이 관찰했다.

가끔 눈이 마주치면 제 밑바닥까지 들여다보는 듯한 시선에 괜히 소름이 오소소 돋았다.

‘그 사람도 나를 걸레 같다고 생각했을까….’

눈물이 찔끔 흘렀다.

상대방의 진짜 생각을 알게 되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이현은 남자와의 만남이 단 하루였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서글퍼했다.

다음 날 눈을 떠보니 저보다 출근이 이른 남자는 이미 자리를 비운 채였다.

그리고 얼마 후, 이현은 그 대기업 남자도 지금까지 만났던 놈팡이들과 별로 다를 바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한 번 몸을 텄더니 그 뒤로는 매번 모텔에서만 만나려 들었던 것이다.

그와의 섹스가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었던 이현은 점점 그 만남에도 흥미를 잃어 갔다. 야근하고 심신이 지친 채로 남만 좋은 일을 하자니 성격도 나빠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점차 무신경해지고 지쳐 가던 이현을 알아챈 남자는, 급기야 본색을 드러내며 이현을 깎아내리기에 이르렀다.

“너 첫 경험이 언제냐?”

사정 직후였다.

남자는 헐떡이다 축 늘어졌고 이현은 땀을 흘린 채로 제 몸에 들러붙는 남자의 몸을 떨쳐 내며 느리게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벗은 채로 손을 더듬어 담뱃갑을 찾았다. 섹스 직후 담배를 찾는 제 행동이 어떻게 보일 줄 알면서도. 그냥 그렇게 무신경하게 굴고 싶어서.

“나?”

그 질문의 의도를 알 것 같아 대답하기 싫었 싫었다. 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침묵으로 답을 어림짐작한 남자는 비난 섞인 어조로 말했다.

“뻔하지 뭐. 발랑 까져서.”

이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범죄를 저지른 것도 아니고 첫 경험 나이로 비난당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무나하고 놀아난 것도 아니고 좋아하던 사람과 했던 건데….

그렇게 입 안에서만 반박할 때였다.

“그래서 대학도 못 갔어? 남자들한테 몸 대 주면서 노느라고?”

이현은 말없이 가만히 뒤돌아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가 ‘째려보지 말라’며 면박을 주었다. ‘성격 나쁜 걸 티 내지 말라’고도 했다.

그 뒤로 그는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남자와 잤는지를 꼬치꼬치 캐물었다. 물으면서 실시간으로 기분이 나빠지는 것이 보이는데 왜 캐묻는지 모르겠다.

이현은 파국이 눈앞에 왔다는 것을 알았다.

‘이놈도 아니었나 봐.’

저보다 여섯 살이나 많아 연상다운 여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착각이었다. 나이는 노력이 아니라 거저 얻어지는 것일 뿐인데, 자꾸만 나이 많은 이들은 무언가 다를 거라고 기대하고 만다.

결국 ‘지금 회사도 몸 팔아서 들어간 거 아니냐’는 말을 들었을 때 이현은 참지 못하고 남자에게 주먹을 내지르고 말았다. 그 뒤로 돌변한 남자는 테이블을 이현을 향해 엎어 버리고, 무거운 테이블에 얻어맞아 주저앉은 이현에게 깨진 유리 잔해를 휘두르며 소리를 질렀다. 경찰을 부른다고 신고 전화를 하자 그건 무서웠는지 그제야 옷을 주워 입고 욕을 퍼부으며 도망갔다.

이현은 작은 좆이 콤플렉스였던 찌질이를 그렇게 떠나보냈다. 그런 놈에게 아주 약간 기대를 가졌었다는 것조차 수치스러웠다.

***

‘또 그 남자네.’

이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한쪽으로 기울이며 꿈속의 남자를 조심스레 관찰했다. 꿈에 등장하면 언제나 말없이 저를 바라보던 그는, 오늘은 웬일인지 고개를 조금 숙인 채로 바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제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자 이현은 그제야 마음을 놓고 그의 얼굴을 감상했다.

착각인지 몰라도 처음 꿈에 등장했을 때보다는 좀 더 가까워진 것 같다. 섬세하게 잘생긴 얼굴이 그 전보다 약간은 더 잘 보이는 듯했다.

원래 저렇게 잘 생겼었나.

저 정도는 아니었었나….

아니면 실물이 더 나았나?

만난 지가 조금 되어 실제로 받았던 인상이 가물가물했다. 꿈이니까 지금 보는 얼굴은 더욱 미화된 것일 수도 있겠다. 남자를 처음 목격한 순간 느꼈던 감각이 너무나도 충격적이어서 뇌의 작용으로 어떤 환상을 만들어 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현실에 없는 환상.

그 순간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아래 밤처럼 새까만 눈이 저를 응시했다.

이현은 흠칫 굳어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메두사.’

이현은 문득, 눈을 마주친 사람을 돌로 만들어 버린다는 여신의 이름을 떠올렸다.

동시에 왜 그런 신화가 생겨났는지 알겠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메두사는 엄청난 미인이었을 것이다. 당당히 두 눈을 마주 볼 수 없을 만큼.

그리고 구전으로 떠도는 이미지와 달리 처연하고, 사연이 있는 듯한 물먹은 눈빛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녀가 한 일은 그저 상대를 이해하고 싶어 저런 눈으로 깊게 관찰했을 뿐.

저런 사려 깊은 눈빛으로 응시당하는 것을 참을 수 없는 건 내면이 추잡하고 과거가 더러운 이들밖에 없을 것이다.

마치 자신처럼 말이다.

‘도대체 몇 명의 꿈에 나타나고 있을까. 저 죄 많은 남자는.’

이현은 요즘 좋아하는 연예인이 생겼다며 설레어 밤잠을 못 이룬다던 대학생 알바생을 떠올렸다. 그때는 참 귀엽다고 웃고 넘겼지만 이제는 그게 드문 일이 아닌 것을 알겠다. 외모나 본인이 가진 매력만으로 누군가의 무의식에 침투할 수 있는 사람이 정말로 실존하기는 하는 것이다.

그가 꿈에 나타난 다음 날에는 잠에서 깨어나고도 한참 멍했다. 정말로 메두사의 저주에 걸려 뇌가 돌이라도 되어 버린 것처럼.

무척 울적해 보이던 남자의 숙인 얼굴이 수시로 떠올랐다.

왜 그렇게 우울한 얼굴이었을까….

‘전화해서 너 왜 자꾸 내 꿈에 나오냐고 따지면.’

미친놈 취급받겠지.

이현은 쿡쿡 웃었다. 바짓단 아래 숨겨진 종아리에는 며칠 전 모텔에서 테이블에 깔리느라 생긴 붉고 푸른 피멍이 들어 있었다. 바지를 걷어 올리면 누구든지 헛숨을 삼킬 만큼 요란하게도 남았다.

인생이 희극 같았다. 남자에게 그렇게 당하고도 또 남자에게 환장하는 자신이 우습기만 했다. 만약 자신을 주인공으로 한 연극이 있다면 관객들은 손가락질하며 ‘세상에 저런 멍청한 놈이 다 있다’고 비웃어 댈 게 분명했다. 잘못된 선택을 하니 이런 꼴을 당하는 것이다. 누구도 탓할 수 없었고, 관객들 역시 자신을 손가락질할 게 분명했다.

씁쓸해졌다.

아무튼 그 개자식에 대해서는 다시 떠올리기만 해도 절로 욕이 나왔다. 가끔 있다. 몸싸움을 시작하면 손에 잡히는 건 뭐든 들고 마구 휘두르는 놈들이. 정정당당한 주먹질에 자신 없어서 반칙을 쓰는 개새끼들이다.

이현은 멍든 다리를 바지 위로 살살 문질러 보았다.

사람에게는 사실 제 수준에 맞는 일만 일어난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새끼도 제 수준은 아니었다.

명문대, 대기업, 고연봉, 수입차… 그 남자가 가진 조건들은 저보다 훨씬 나았다.

‘그럼 내 수준은 어디일까….’

이현은 한없이 가라앉았다.

일은 고되고, 직장에서는 막내로 이리저리 치이고, 봉급은 노동 시간에 비해 너무 적었다. 그 나쁜 새끼는 ‘네가 고졸이라서 그런 일을 하는 것’이라며 이현을 쉽게 깎아내렸다. 부정할 수 없는 것이 더 자존심 상했다.

그런 저가 겪은 최근의 좋은 일은 그 몸 좋고 예쁜 남자와 하룻밤을 보낸 것뿐이었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울분에 차서 키보드를 쾅쾅 내리치듯 타이핑해 댔다.

씨발, 그 남자랑 자고 아무랑도 자지 말걸.

황홀한 섹스였는데, 좆 작은 놈한테 더럽혀졌잖아.

그걸 인생 마지막 섹스로 했어야 하는데!

우울감 때문인지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이현을 사로잡았다. 평생 외톨이로 지낼 자신도 없으면서 그렇게 실현 가능성 없는 다짐을 할 정도로.

가만, 그 남자의 연락처가 남아 있었다.

이현은 ‘조식’으로 메시지 함을 검색해 남자의 번호를 쉽게 찾아냈다. 연락을 해 볼까, 말까 순간적으로 엄청난 갈등이 찾아왔다.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충동적으로 이미 메시지를 보낸 후였다.

“헉.”

이현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놀랐다. 자신이 종종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행동하고 생각한다는 것은 알지만… 또 저질러 버렸다.

「왜 조식 안 먹고 갔어?」오전 11:23

「오늘 뭐 해?」오후 5:31

연결되지 않는 대화 사이에는 꽤 기나긴 텀이 존재했다. 그 날짜의 간격을 보던 이현은 갑자기 무척 초조해져서 입술을 자근자근 깨물기 시작했다. 이걸 보고 ‘흥’ 하고 내려놓는 남자의 얼굴을 생각하면 심장이 졸아붙었다.

결국 제 발 저린 이현은 저가 먼저 거절을 해 버렸다. 약 이십 분 만에.

「바빠?ㅎㅎ 그럼 나중에 보자~」오후 5:53

“윽, 찌질해….”

여유를 가장한 문자가 무척 한심해 보였다.

이건 차라리 보내지 말걸.

하지만 씹히는 것보다는 먼저 거절하는 쪽이 덜 무섭다.

그렇게 이현이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제 방어적인 성격을 탓하고 있을 때였다. 파티션 벽을 누군가 쿵쿵 두드렸다.

“현아, 여섯 시 미팅.”

“아….”

“너 자료 인쇄했어?”

“아뇨! 아직….”

파티션을 두드렸던 이사가 불만스러운 얼굴을 했다. ‘쓸모없다’는 듯한 얼굴에 또 심장이 졸아붙었다.

“지금 바로 해서 들어가겠습니다.”

이사는 대답 없이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며 그 문을 불만스럽게 쾅 닫았다. 아직 말단인 이현은 마른침을 삼키고 손을 빠르게 움직여 회의 자료를 출력했다. 그러고는 벌떡 일어나 막 용지를 뽑아내기 시작한 프린터기로 달려갔다. 꿈속의 남자에게서 전화가 오고 있는 줄도 모르고.

***

‘석희재’

남자는 이름도 예쁘다. 부모님이 세상에서 제일 고급스럽고 우아한 이름을 붙여 주려고 고심 끝에 정한 이름인 게 분명했다. 남자인 것이 분명하면서도 어딘가 곱고 단정하며, 처연한 이미지가 있는 그에게 무척 잘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그와는 ‘가끔’ 만나기로 했다. 이현은 그가 귀찮아 하지 않을 만한 ‘가끔’의 빈도를 계산해서 그에게 연락했다.

원래 잘생긴 사람들은 제게 어떤 감정을 가지고 질척여 대는 이들을 누구보다 빨리 눈치채기 마련이다. 그러니 되도록 건조하게 구는 편이 좋을 것이다. 그래야지 원할 때에 얼마든지 불러낼 수 있는 편리한 파트너로 여겨지게 마련이다. 그리고 그런 건 이현이 지금까지 인이 박이도록 익숙하게 해 온 일이라 별로 어렵지 않았다.

원나잇으로 시작했으니 섹스 파트너 이상으로 발전시킬 가능성은 없겠지만.

‘정신 차려.’

자신이 또 어느새 헛된 희망을 품었다는 것을 알아챈 이현은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박았다.

‘그냥 너무 잘생겨서 그래. 내가 그런 남자랑 언제 또 잘 수 있을지 모르니까.’

반복해서 상처를 받아 굳은살이 단단히 박인 마음은 무의식적인 방어 기제를 발동시켰다. 이 순간 미약하게 피어나는 희망을 차단하기 위해 자연히 석희재의 차가운 얼굴을 불러냈던 것이다.

‘솔직히 말하면, 한 번도 안 가 봤어.’

‘그러니까 나랑 저런 데 갈 생각은 하지도 마.’

모텔 앞에서 그가 했던 말을 떠올린 이현의 얼굴에서는 차츰 표정이 사라졌다.

그 말을 할 때의 석희재는 무척 짜증스러워 보였다. 평상시 젠틀하던 남자가 그렇게 인상을 싹 굳히니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확실히 기분이 나빠 보였는데, 대체 어느 포인트에서 기분이 나빠진 건지 알 수 없어서 이현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무튼 모텔 같은 곳은 어울리지 않는다고 막연히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싫어했던 모양이다. 이현은 그의 앞에서 요즘에는 모텔도 나름 좋아졌다며 헛소리를 더 늘어놓지 않은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하….”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현재 자신의 월급이 백칠십이었다. 한 번 만날 때마다 기십만 원씩 호텔비를 지불하는 건 너무나 출혈이 컸다. 물론 석희재가 평소 차고 다니는 시계나 지갑, 신발 같은 것들을 보면 그가 잘 산다는 것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티를 낼 수가 없었다. 그의 돈에 기생할 염치도 없고, 그런 속마음을 들키면 더는 안 만나 줄 것 같아 이현은 칼 같은 더치페이를 시행하고 있었다.

하지만 남자와의 섹스에 미쳐 월세까지 까먹으며 재산을 탕진할 수는 없다.

결국 집으로 부르는 수밖에 없나.

이현은 생활감이 가득한 집안을 떨떠름한 얼굴로 한 바퀴 둘러보았다. 이곳에 처음 왔을 때 석희재가 기묘한 표정으로 집 구석구석을 둘러보던 표정을 잊을 수가 없었다.

꼭 ‘서민들은 이런 곳에 사나’ 하는 표정이었지.

“에휴, 모르겠다. 구질구질하다고 생각하면 더는 안 오겠지….”

제 팔에 고개를 파묻은 이현은 문득 생각했다.

자신은 석희재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그 이름 석 자를 제외하고는.

사는 곳도, 나이도, 직업도… 그냥 추정할 뿐이다. 아무 생각 없이 신상을 떠들고 마는 자신과 달리 석희재는 무척 철저했다. 가끔 질문을 던지면 도로 질문으로 받아치고는 했다. 그 대화 패턴에 맹꽁이같이 속아 넘어간 자신은 다시 쓸데없는 이야기를 나불거리고, 결국 석희재는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다. 그 패턴을 겨우 알아챈 게 최근이었다.

진짜 연예인이라면 차라리 납득할 텐데.

그런 것도 아니고….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겠다는 무언의 선언이었다. 그게 맞는 것이고, 석희재 쪽이 현명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현의 기대감은 시시각각 허물어져 갔다.

‘진심인 여자 친구가 있을지도 모르고.’

웃을 기분이 아니면서도 이현은 저도 모르게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특히 스트레이트들이 그렇다. 미래는 여자와 꿈꾸면서 자신과는 현재의 성욕 처리만 하는 개새끼들이 도처에 깔렸다. 스트레이트는 지뢰나 다름없었다.

그러니 자신과의 외도를 더 꼭꼭 숨기는 것일 수도 있을 테고….

이현은 습관적으로 석희재를 신 포도 취급했다. 왜냐하면 그의 마모된 마음은 이미 너무 많이 쓸려 나가서 조금만 건드려도 참을 수 없이 따끔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마치 얼기설기 찢겨져 나간 피부 아래 뼈와 근육이 드러난 것처럼, 찬바람만 불어도 상처가 아렸다.

자신이 누군가에게 무가치한 인간이라는 것을 피부로 느끼는 순간을 더 견뎌 낼 수 있을까?

이현의 대답은 ‘아니요’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오늘도 올 수 있어?」8:23PM

「오늘 괜히 혼자 있기 싫다ㅎㅎ」8:23PM

「바빠?」9:11PM

「일 늦게 끝나는구나. 피곤하겠다 잘자~」11:45PM

이현이 저녁나절에 보낸 메시지를 전부 확인하고도, 석희재는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짐작 가는 이유는 없었다.

없었기에 더 두려웠던 것 같다.

이름 석 자와 핸드폰 번호 말고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은 남자. 만약 그가 작정하고 자신에게 거리를 둔다면 이현에게는 그를 찾아낼 수 있는 방법이 아무것도 없었다.

이렇게 끝인가?

그래도 우린 많은 이야기를 한 것 같은데.

나는 우리가 섹스 말고도 많은 걸 나눈 것 같은데….

다른 남자들과 헤어질 때처럼 맞거나, 폭언을 듣거나, 이유를 알고 차인 것이 아니어서 이현은 더욱 크게 당황했다. 석희재는 마지막 날까지 그저 젠틀하기만 했다. 도무지 영문을 모르는 이현은 갑갑한 마음으로 가끔 포털에 ‘석희재’를 쳐보기도 했다. 그가 혹시 무명의 연예인이라면, 그러면 기사 같은 것으로 소식을 찾아볼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한 번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남자는 꿈에도 다시 찾아와 주지 않았다.

***

“그래서, 요즘 만나는 친구는 없고?”

셋째 형의 질문에 이현은 무심코 석희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없다, 고 바로 대답했어야 하는데. 머뭇거리는 사이 형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있어? 웬일이냐.”

“아이… 없어.”

“뭐 하는 친군데?”

표정만 봐도 속을 알아서인지 셋째 형은 이현의 어쭙잖은 거짓말에 속지 않았다. 이현은 눈을 피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형제 중 그나마 나이 터울이 적고 아직 미혼인 셋째 형은 일 때문에 서울에 올라올 때마다 막냇동생을 챙겨 댔다. 짝사랑에 정신이 팔려 있던 이십 대 초반에는 그게 그저 간섭으로 느껴지기만 했었는데 요즘에는 별로 싫지가 않다.

특히 예전에는 침대에 첫사랑과 함께 나체로 누워 있다가 친형의 전화를 받거나, 정사의 흔적이 남은 몸 위에 아무 옷이나 주워 입고 나가 형이 사 주는 밥을 먹고 있으면 심장이 쿡쿡 쑤셔 오곤 했었다.

하지만 이젠 그 비밀스러운 짝사랑을 끝내서 그런가, 외로워서 그런가… 이런 관심이 고맙기만 하다.

“어떤 여자냐니까?”

이현은 셋째 형의 눈치를 흘끔 보았다. 과묵한 첫째 형은 자신이 우연히 목격한 사실을 그 누구에게도 - 심지어는 이현 본인에게도 - 다시는 꺼내지 않았다. 셋째 형이 무얼 짐작하거나 알고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이현은 형의 질문에 답하는 것은 건너뛰었다. 석희재와 자신은 세간의 기준으로 ‘만나는 사이’라고는 할 수 없기 때문에.

대신 다른 것을 물어보았다.

“형. 저기… 확 차이나는 사람하고 사귀면, 사귀어도 금방 헤어지지?”

“뭐? 그래? 얼마나 어마어마한 여자길래.”

“생기기도 이쁘게 생겼고.”

“뭐 외모가 단가. 너도 별로 안 꿀린다.”

“형이 실제로 못 봐서 그래. 연예인같이 예뻐. 그리고 집도 잘 사는 것 같고….”

이현이 말끝을 흐리자마자 셋째 형은 인상을 팍 쓰며 미간을 구겼다.

“뭐 돈 가지고 사람 급을 나누는 것도 아니고. 기죽을 필요 없지.”

“…….”

“말하는 거 보니까 사귄 지 얼마 안 된 모양이네.”

“아니야, 안 사귀어.”

“그래?”

“사귀자는 말도 안 하던데.”

“이런 지질한 놈, 그건 네가 먼저 해야지!”

“…도망갈 거 같아.”

“이 답답한 놈…. 얼마나 됐는데? 형이 조언을 해 줄게. 근데 내 경험상 딱 간질간질해지고 두 달 넘어가면 확률이 팍….”

“일… 년?”

이현이 애매하게 대답하자 셋째 형은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는 재주도 좋다며, 졸업하자마자 서울로 냉큼 금방 올라가더니 여자 낚으려고 올라간 거냐며 농담을 했는데 지금은 그 여자가 널 가지고 노는 거라고 진심으로 화를 냈다. 어디 사는 뭐 하는 여자냐기에 사는 곳도, 뭐 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고 말하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급기야 셋째 형은 석희재 유부녀설을 내세웠다. 그렇게까지 신상 정보를 숨긴다면 유부녀일 가능성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 말을 부정하려던 이현의 눈이 순간적으로 흔들렸다.

“이거 봐라? 이놈 표정 보니 짚이는 데가 있는 모양이네.”

이현은 지난여름을 떠올렸다. 이유 없이 연락이 끊기고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던 때를. 그 잘난 남자의 인간관계 중 자신이 위치한 곳을 잊을 뻔했다. 바보같이 그렇게 일방적으로 잘려 나가고 나서야 정신이 들었었다. 그렇게 한순간에 팽개쳐지다니. 자신은 남자가 가진 것들 중 최후 순위가 아닐까, 짐작은 했었지만 피부로 느끼는 것은 생각보다도 훨씬 비참했다.

그런데 그게 외도를 들켜서였다면?

몇 달 후 석희재는 잠적한 적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나타났다. 옷을 벗고 나서 확인한 몸에 살이 쏙 내렸길래 깜짝 놀라 집안에 우환이라도 있냐고 물었는데도 석희재는 속 시원히 이유를 이야기해 주지 않았다. 그저 섹스에 집중했을 뿐.

“그런 건 너한테 의도가 없어도 다른 사람한테 상처를 줄 수가 있다니까.”

“…….”

“그러지는 말아야지.”

맞는 말이었다.

일전에도 몇 번 그런 경험이 있었다. 하룻밤 잤던 남자가 실은 십 년이나 만난 스테디 한 파트너가 있는 유명한 커플이었다거나, 나이 지긋한 중년의 신사에게 저와 나이 차이가 별로 나지 않는 자식이 있었다거나 하는. 자신이 아무 생각 없이 행하는 일이 누군가를 다치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알기까지 이현은 몇 번의 소란을 겪어야 했다.

“얼른 끝내. 그런 건.”

“…….”

“우리 집 막내가 뭐가 부족한 게 있다고 그런 짓을 하고 있어.”

셋째 형이 혀를 찼다. 이현은 피식 웃기만 했다.

그건, ‘우리 집 막내’가 남자를 좋아하는 놈이라 그래.

아직 꺼내지 못한 비밀이다. 이현은 시골집으로 내려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돌아서는 형의 등에 손을 흔들어 주며 씁쓸하게 웃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이름에 형을 불러세웠다.

“형, 저기.”

“어?”

“지우 형님, 요즘 뭐 하는지 알아?”

이현의 입에서 나온 옆집 형의 이름에 셋째 형은 잠시 허공에 시선을 주었다. 그게 누군지 얼른 떠오르지 않는 모양이었다.

“아! 옆집 형님.”

이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네가 더 잘 알지 않겠냐? 그 형 서울 가신 지 오래됐잖아. 너도 잘 따르더니.”

“…….”

“요즘 안 만나는구나. 글쎄. 결혼하면 우리도 소식 들었을 텐데…. 아직도 조용히 사는가 보다.”

“그래.”

대화는 거기서 끝이었다. 이현은 차창 가에 서서 좌석에 앉은 형에게 손을 흔들었고, 형은 얼른 들어가라며 시큰둥한 얼굴로 이현을 파리 쫓듯이 보내 버렸다.

지우 형….

다 잊었다고 생각한 사람을 다시 떠올리자 그 얼굴과 이름과 체온., 미소와 목소리까지 단번에 생생하게 살아났다. 거의 척수 반사에 가까웠다. 이현은 훅, 하고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그를 떠올린다고 곧바로 눈물짓는 일은 없어졌지만, 이름도 희미해질 만큼의 완전한 과거가 될 날은 아직도 먼 듯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현은 드물게 진지한 생각에 잠겼다.

정말로 석희재와 끝내야 하나?

이현의 뇌에는 수많은 자아가 존재했지만 대체로 나약하고 탐욕스럽고 이기적인 놈이 주도권을 행사하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결론을 내려니 자꾸만 의견이 치우쳐졌다.

나와 급이 다른 그런 남자를 만나는 건 인생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설령 유부남이고 나랑 바람을 피우는 거더라도, 난 몰랐다고 잡아뗄 수도 있고.

관계의 끝을 석희재가 말할 때까지 모른 척해도 되잖아.

그러니까 조금만 더 즐기자.

그리고….

‘진짜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이현은 순간적으로 저릿해진 왼쪽 가슴을 손바닥으로 슬슬 문질렀다. 한 번 자신을 다 바치는 진짜 사랑을 해 보아서 그런가 두 번째 사랑은 어렵게 느껴지기만 했다. 그때와 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강렬한 경험이 인생에 또 찾아올까? 별로 확신이 없었다.

그날 밤, 혼자 잠들기 무섭게 꿈에 또 석희재가 나왔다.

만나면 몸을 섞기 바쁜 현실과 다르게 꿈에서는 별일이 없다. 그는 그저 자신을 빤히 바라보기만 하고 자신은 어쩔 줄 모르며 머쓱함을 느낄 뿐이다.

꿈은 현실과는 반대라더니, 과연.

그래도 이제는 저 시선에 조금 익숙해져서 그가 저를 바라보면 자신 역시 눈을 마주치곤 한다. 딱히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고 저 희귀한 미모를 감상하다 보면 눈 건강에 좋을 것 같아서이다.

여신은 제 저주에 걸려들지 않는 인간을 어떻게 생각하려나.

관대한 석희재는 눈을 맞추는 것이 그렇게 싫지는 않은 모양이다. 한참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으니 석희재가 슬프게 미소 지었다.

***

퇴근길, 집으로 돌아가는 이현의 손에는 여느 때와 다름없이 편의점 도시락이 담긴 비닐봉지가 걸려 있었다. 아무렇게나 드는 바람에 밥과 반찬은 한쪽으로 기울어 질질 새고 있고, 같이 담은 콜라는 잠시 후의 폭발을 기대하며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그걸 휘적휘적 흔들면서 이현은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하아….”

꿈은 현실과 반대일 수도 있지만….

무의식의 발현이기도 하다.

석희재의 꿈을 이토록 많이 꾸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나.

갑자기 극심한 허기가 찾아와 생각이 멈추었다. 위가 졸아붙는 기분에 이현은 ‘윽….’ 하고 나직한 신음을 내뱉었다. 마치 위벽끼리 서로 달라붙어 버린 느낌이다. 생각해 보니 점심은 컵라면이었고 저녁은 삼각 김밥으로 때웠다. 말도 안 되는 일이다. 이십 대 후반이면 아직 철근도 씹어 먹을 나이인데…! 그래도 중간중간 허기질 때마다 열심히 믹스 커피와 과자를 주워 먹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속이 니글거렸다.

공연 두 개가 겹쳐 지난 두 달간 삶이 만신창이였다. 제대로 된 끼니는 접대할 때만 먹어 보았고, 늦은 퇴근 시간은 신기록을 격파했다. 얼마 전에는 새벽 6시에 퇴근하기도 했다.

그날 해를 보고 퇴근하며 너무 어이가 없고 허탈한 나머지 이현은 함께 퇴근하던 김 실장을 붙잡고 실성한 듯 웃었다. - 김 실장은 억울해서 술이라도 마셔야겠다며 이현을 끌고 24시간 순댓국 집에 갔다. 정말 대단한 여자다. - 주 7일 근무 중인데 대휴는 꿈도 못 꾸었다. 말도 안 했는데, 회계 팀에서는 너무나 당연하게 대휴 대신 수당으로 급여를 계산해 놓았다고 한다.

분기마다 경영난을 겪는 누군가의 자살 소식과 과로사 소식이 번갈아 들리는 업계다. 직장 생활을 시작하기 전에는 이렇게 장례식에 많이 가 본 일이 없었다. 내일은 좀 더 나아질 거라는 희망으로 일하지만…. 이현 역시 이 철벽처럼 견고한 시스템의 정체를 눈치채 가고 있었다. 혁명이 아니면 바뀌는 것은 불가능했다.

과연 누가 혁명을 일으키려나.

시스템 안에 갇힌 제 미래를 애써 모른 척하며 이현은 부지런히 집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내려다본 현관에 낯익은 신발이 있었다. 석희재의 것이었다.

오늘 일어난 일 중 가장 좋은 일이다. 이현의 지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꿈에 석희재가 왜 그렇게 많이 나오는가.

결론을 내리기는 무척 쉬웠다. 그건 ‘석희재가 특별한 인간’이기 때문이다. 물론 저 말고 모든 이에게.

요즘 그는 이렇게 언질 없이 찾아오곤 한다. 잠이 몹시 절실할 때도 있었지만 그게 싫지 않았다. 다만 이 난잡한 집 안을 못 참겠는지 쓰레기를 줍거나 어질러진 옷들을 전부 다 세탁 바구니에 넣어 버리는데, 그때마다 이현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따로 빨아야 하는 양말, 니트류, 수건까지 한 데 돌려 버리는 건 전부 다 쓰레기나 다름없다는 비공식적 언질일 것이다.

“뭐야. 말하고 오지.”

이현은 비닐봉지를 식탁 위에 올려 두며 풀어진 얼굴로 말했다.

그래도 스테디 한 섹스 파트너를 가지는 건 좋은 점이 더 많았다. 만난 지 일 년 반, 두 사람은 어느 정도 서로가 있는 생활에 익숙해져 가는 중이었다. 이현은 이제 더 이상 원나잇 파트너를 찾지 않았다. 누군가를 찾는 것도 에너지가 필요한 일이고, 그의 현실이 그마저도 불가능할 정도로 그를 완전히 소모시키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더 큰 이유는….

만약 다른 이를 만난다 해도 석희재에게 맞춰진 눈이 다른 남자에게 적응할 수 있을 리 없었다.

어느 순간 이현은 인정했다. 이것은 감정적 피로감 없이 달콤함만 착취하는 유사 연애에 가깝다는 것을. 너무나 편리해서 후폭풍은 생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약속 없다고 하지 않았나.”

석희재의 음성이 퍽 차갑다.

“뭐. 오늘?”

“주말에.”

“아, 약속은 없는데 출근을 했지.”

“…….”

이현이 실실 웃으며 다가가자 석희재는 가라앉은 눈으로 가만히 노려보았다. 꿈에서의 구슬픈 눈빛과는 퍽 달랐다.

그가 자신을 그런 눈으로 보는 게 싫고 미안해서 이현은 그에게 다가가 목덜미에 매달리며 물었다.

“혹시 어제도 왔었어?”

“…….”

“말을 하고 오지… 나 이틀 동안 모텔에서 잤는데.”

“모텔?”

제 등에 손을 올려놓은 석희재의 손에 반사적으로 힘이 들어갔다. 이현은 그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며 고개를 저었다.

“퇴근을 새벽에 해서 회사 근처에서 잔 거야.”

“…….”

“진짜야. 혼자 잤어.”

석희재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불신의 뜻을 읽고 이현은 눈을 내리깔았다. 지난여름, 석희재와 연락이 닿지 않던 기간에 이현은 습관처럼 다른 남자들과 잤다.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석희재는 지금처럼 퍽 불쾌해했다. 그러고는 이렇게 물었다.

‘성병 같은 거… 안 무서워?’

지금처럼 한 사람과의 관계에 정착한 이유는 이런 것도 있었다. 하룻밤짜리들보다 만날 가치가 있는 남자가 이현의 습관을 불편해했기 때문에.

이현은 여전히 굳은 표정인 석희재의 눈썹을 문지르며 물었다.

“병 옮을까 걱정해?”

“…….”

“걱정하지 마. 나 주기적으로 검사해. 깨끗하고….”

못 믿을 만한 이야기라는 건 알고 있다. 누구나 제 과거를 알면 그 정조 관념과 모럴을 불신한다. 석희재 직전에 만났던 대기업 남자도 과거를 알자마자 돌변했고, 그 전에 무수히 만났던 다른 이들도 그랬다. 저를 올라타서 헐떡거리던 건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싸고 나면 벌레 보듯 떨어져 나갔다. 그게 무척이나 평범한 자신을 상식의 세계와 갈라 버리는 기묘한 벽이라는 사실을, 이현도 어느새 깨닫게 됐다.

수많은 경험으로 함부로 과거를 드러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배웠고 조신하게 굴어야 오래간다는 것도 알았다. 하지만 석희재에게는 거짓말도 할 수 없다. 처음부터 ‘그런 식’으로 만났기 때문에.

“그리고 못 믿겠으면 손가락 넣어 보면 되잖아.”

이현은 석희재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벌어져 있는지, 아닌지….”

그 말에 석희재가 무섭게 반응했다. 이현 역시 허기도 잊어버리고 열이 오르는 몸으로 석희재를 꽉 끌어안았다.

이렇게 아직은 제 몸이 필요하다는 듯한 반응을 보일 때마다 안도하고 만다. 아직은 유예 기간이 조금 남았구나, 하면서.

***

“요즘 만나는 건 나밖에 없지?”

석희재는 종종 확인하듯이 그렇게 물어 왔다. 그러면 이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성적으로 문란한 남자를 꺼린다는 건 그간의 반응으로 충분히 학습했으니까.

“어.”

괜히 신경질이 나 싹 굳은 얼굴로 불퉁하게 내뱉자마자 석희재가 제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제는 저 압도적인 외모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건만, 그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저렇게 바라보면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하게 된다.

꿈속의 남자와 달리 현실의 석희재는 그리 달콤하지만은 않다. 남자와 뒹굴면서도 문란한 게이는 싫다? 사람을 가리는 듯한 석희재의 태도가 가끔은 짜증이 났지만…. 그는 충분히 가려도 된다.

“나 때문에 다른 남자랑 못 자서 억울해?”

“그런 건 아닌데….”

이현은 석희재를 다시 응시했다.

“못생기고 좆 작은 놈들하고 백 번 할 바에 너랑 한 번 하는 게 훨씬 짜릿하지.”

스스럼없는 말에 석희재는 침묵하다가 앉아 있던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올려다보며 어디 가느냐고 묻자 석희재가 눈도 마주치지 않고 퉁명스레 내뱉었다.

“맥주 더 사 오게.”

“맥주? 있어. 저기 박스에. 아… 시원한 거 사려고?”

“…….”

“같이 가.”

이현은 제 곁을 훌쩍 지나쳐 버리는 석희재를 허둥거리며 따라갔다. 자신의 발언이 스물하나 석희재의 가슴에 어떤 파란을 일으켰는지도 모르고.

제법 차갑게 돌아선 석희재는 단지 나비 수십 마리를 삼킨 것처럼 속이 간지러워 도무지 표정 관리를 할 수 없었을 뿐이다. 그는 제 등 뒤에서 슬리퍼를 끌며 나오는 이현의 발소리에도 가슴 설레 했다. 지나치게 솔직할 수 있는 건 그만큼 마음이 가볍다는 반증 같아 마음이 아리기도 했지만… 가끔 이렇게 희망이 보이는 날이 있다.

‘그러니까 만난 남자들 중엔 내가 제일 괜찮다는 거지’

끝이 보이지 않는 짝사랑 속에서 그렇게 희망을 한 조각 얻는 날도 있기에 석희재는 힘든 줄도 모르고 다시 사랑할 동력을 얻었다. 그건 이현이 부리는 마법이었다.

가회동은 아홉 시만 넘어가면 인적이 뚝 끊겨 동네 전체가 정적에 휩싸인다. 저 뒤쪽 재동초교 사거리 근처의 술집과, 저 앞에 편의점이 불을 밝히고 있는 것을 빼면 사위도 깜깜했다. 석희재를 따라서 얼른 곁으로 다가온 이현은 무심결에 석희재의 트레이닝복 주머니에 제 손을 쿡 찔러 넣었다.

“뭐야.”

석희재가 괜히 무뚝뚝하게 말했다. 그는 그것을 이현이 손이 시릴 때의 습관으로 알고 있었지만 사실 이현에게는 그런 습관 따위 없다. 이현은 그저 석희재가 화가 난 것 같으면 이런 방식으로 다가가며 괜히 치대고 싶어졌던 것이다. 거기에 더해 이현은 손을 넣은 주머니를 안으로 쭉 밀어 넣어 고의가 아닌 척 성기를 툭툭 손등으로 건드려 댔다.

석희재는 그 자리에서 우뚝 멈춰 이현을 노려보았고, 이현은 그를 마주 보며 실실 웃었다. 석희재의 귀와 목덜미는 새빨개졌지만 다행히도 밤의 베일이 그의 얼굴 위에 수줍게 드리워져 있었다.

이현은 석희재가 차라리 이런 식으로 화를 내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짜증이 나는 이유를 알고 있을 때는 타인이 무섭지 않았다. 반대로 조금 전처럼 이유를 알 수 없는 순간 석희재의 눈빛이 가라앉는 것은 피하고 싶었다. 갈등 상황은 미리 차단하고 싶었다. 진지해지고 싶지 않았다. 더는… 석희재를 실망시키거나 화내게 만들고 싶지도 않았고.

맥주와 음료수, 서로가 좋아하는 안줏거리를 사 들고 서로 계산하겠다고 잠시 옥신각신하다가 나란히 집으로 돌아오는 길, 이현은 평화를 느꼈던 것 같기도 하다. 외로운 밤에 혼자가 아니라서 좋았다. 달빛에 가까워질수록 층층이 밝아지는 구름층을 손으로 가리키고 ‘저기 봐, 예쁘다.’라고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있어서 좋았다.

그런 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이라고 깨달을 법했는데.

***

함께 한 지 2년째. 석희재가 찾아와 섹스하지 않고 돌아가는 밤의 빈도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현이나 석희재나, 두 사람 모두 그것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되기까지가 무척 자연스러웠기 때문이다. 석희재는 이현과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무얼 해도 좋았고, 이현은 가족이나 고향 친구들에게도 공유하지 못하던 자신의 가장 내밀한 부분을 알고 있는 석희재가 무척 편해졌다.

“이거 봐라. 드디어 나도 대본 좀 읽어 보래.”

언젠가부터 이현은 집까지 종종 두꺼운 스프링 제본의 대본을 들고 돌아왔다.

“내 의견도 반영해 줄지 그건 모르겠는데…. 아무튼 작품 회의 들어가는 건 처음이야.”

이현은 제법 들떠 그렇게 말했다. 그러면서 이현이 늘어놓은 대본은 총 여섯 개나 됐다.

“언제까지 읽어야 돼?”

석희재가 물었다. 이현은 머쓱하게 대답했다.

“내일.”

“…….”

“나는 사무실에 진득하게 앉아서 대본을 읽을 만한 여유가 없어서….”

“여섯 개를 내일 아침까지 다 읽을 수 있어?”

“사실 나도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

“그래도 회의 가서 아무 말도 못 하는 건 싫어. 남들이 어디가 좋다고 하면 그게 왜 좋은 건지는 알고 싶거든.”

그건 오늘 대본을 보며 밤을 새우겠다는 이현의 의지를 보여 주는 말이었고, 다시 말해 섹스는 물 건너갔다는 소리기도 했다.

이현은 답이 없는 석희재가 집에 돌아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씻기 위해 욕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젖은 머리를 말리며 나왔을 때, 이미 돌아갔을 줄 알았던 석희재는 테이블 앞에 앉아서 대본을 분류하고 있었다.

“뭐 해?”

“세 개는 내가 읽고 정리해 줄게. 너도 세 개만 읽어.”

“진짜야?”

이현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석희재는 대답 대신 이현의 앞에 대본을 들이밀며 물었다.

“너 이런 거 읽는 거 좋아해?”

“아니. 읽는 것보다는 보는 게 좋은데….”

“그래도 해 봐야지.”

“…….”

“넌 좋아해?”

이번에는 이현이 석희재에게 물었다. 석희재는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모르겠어. 안 해 봐서.”

‘모르겠어’라고 하는데도 말투가 차분해서인지 왠지 맡겨도 되겠다는 신뢰감이 생겼다.

“아무튼 고맙다. 도와준다니… 생각도 못 했는데.”

이현의 감사 표시에 석희재가 눈을 내리깔며 조용히 말했다..

“회의 들어가는 건 처음이라며.”

“어… 나도 내가 좋아하는 공연 해 보고 싶어.”

“…….”

“가끔 그런 공연들 있거든. 미칠 것처럼 가슴 두근거리게 하는. 관객이 돼서 열 번, 아니 오십 번을 봐도 매번 새로운 그런 공연.”

두 사람은 사이좋게 소파에 나란히 앉아 커피를 타 놓고 대본을 읽었다. 이현은 곧 침대로 자리를 옮겨 게으른 자세로 누워 읽기 시작했으나, 석희재는 식탁으로 자리를 옮겨 밑줄을 치고 메모까지 하며 대본을 분석했다.

이현은 학생 때부터 뭔가를 읽는 것을 즐기는 편은 아니었으나, 대사를 연극 무대 위에 옮겨 상상하는 것에는 탁월한 재능이 있었다. 그리고 석희재는 원래부터 필기의 신이었다. 두 사람은 각자에게 맞는 방식으로 대본을 읽으며 밤을 보냈다.

중간에 이현이 연극 속에 등장하는 노래라며 음악을 틀었다. 적막 속에 석희재가 필기하던 소리만 들리던 방에 곧 선율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건 석희재에게도 익숙한 노래였다.

꿈결 같은 현악 연주와 하프 소리, 상냥하게 귀에 와 닿는 소프라노의 목소리….

저와는 환경도, 취향도 퍽 다른 이현과 함께 이런 음악을 들을 날이 올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던 석희재는 문득 읽던 것을 멈추고 방의 풍경을 바라보았다.

침대 위에 느슨하게 누워 반만 뜬 눈을 깜빡이는 이현의 모습과 그의 얼굴을 비추는 주홍색 할로겐등.

막 새벽 3시를 지나가고 있는 시곗바늘.

널어놓은 빨래에서 풍겨 오는 포근한 섬유유연제의 냄새.

그리고 방 안을 가득 채운 <오펜바흐의 뱃노래>.

석희재가 아는 한 가장 평화로운 광경이었다. 그는 눈으로 필름을 기록하듯 오늘 밤의 풍경을 오롯이 뇌에 담았다. 그는 자신이 이현을 사랑하는 이 한 페이지를 영영 잊지 못할 거라고 믿었다.

짝사랑이 전혀 괴롭지 않았던 이유는 그 때문이다. 하필 소공로에서 마주친 것이 이현이었기 때문에, 이현을 사랑했기 때문에 석희재의 짝사랑은 그 누구보다 충만한 기억들로 채색되었다.

***

두 사람이 만나는 곳은 이현의 집, 아니면 호텔로 한정되어 있었다. 특히 석희재는 처음 만났던 그 호텔을 선호했다. 아니, 선호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곳만을 지겹게 고집했다. 이현이 한때 석희재가 혹시 그 호텔의 상속자가 아닌가 의심할 정도로….

아무튼 호텔 조식을 좋아하는 이현은 이왕 돈을 쓰는 김에 다른 5성급 호텔도 돌아다니며 겸사겸사 호캉스를 즐기고 싶었지만, 장소 선정이야 돈을 내는 사람 마음이니 크게 참견할 수도 없었다.

‘취향 참 고집스럽단 말이야. 이쯤 되면 집에도 부를 법한데….’

이현은 프런트 로비를 지나쳐 곧바로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석희재는 먼저 도착해 있을 것이다.

층수가 표지되지 않은 엘리베이터를 의미 없이 올려다보며 이현은 생각에 빠졌다. 그가 느끼기에 둘은 제법 친한 사이였다. 석희재도 그것을 부정하지는 못할 것이다. 특히 자신이 게이라는 것, 또 어떤 성적 취향을 가졌는지를 아무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었던 이현은 석희재에게 깊은 유대감을 느꼈다. 오랜 친구나 한 핏줄에게도 느끼지 못하는 것을 일개 섹스 파트너에게 느낀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지만….

엘리베이터 바깥으로 보이는 풍경을 바라보며 이현은 새삼 자신이 얼마나 쉬운 인간인가 생각해 보았다.

자신은 틈만 나면 의지하려 든다. 틈만 나면 누군가의 품으로 파고들고 싶어 한다.

그렇게 언제나 누군가를 찾아다녔던 스스로가 비참하고 싫었다. 물론 지금은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지만…. 최초 석희재에게 익숙해지는 과정도 아무렇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드러내지 않는 석희재에게 있어, 자신이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지를 생각하면 쉽게 외로워지곤 했으니.

그래도 결국 안정을 찾았다. 석희재의 판단이 현명했다. 그가 아무것도 밝히지 않고,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안정적인 평행선을 이룰 수 있었다. 이현은 그의 의도를 조금 늦게 깨달았다. 다치지 않으면서 관계를 지속하는 방식이 여기에 있었다.

창밖에는 언젠가 석희재를 처음 만났던 때처럼 황금빛 전구가 가득 달린 꽃나무들이 휘황찬란하게 빛났다. 연말이 다가오는 풍경이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가슴 위를 손바닥으로 탁, 짚었다.

만약 종교가 있어 기도하는 습관이 있었다면 저도 모르게 손을 모아 쥐었을지도 모르겠다.

‘가능하면 오래오래….’

이 관계가 평탄하게 지속되기를.

갑자기 사고가 나거나, 어느 날 마주한 중대한 사건들 때문에 인생의 궤도를 수정해야 할 일이 생기지 않기를.

그렇게 아무런 전환점도 맞지 않은 채로 이대로 오래오래, 무탈하게….

곧 엘리베이터가 열리고 이현은 복도로 나섰다. 석희재가 기다리는 방으로 향했다.

어느 겨울 그런 소망을 가졌던 것은 그 관계를 한순간에 잃어버리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물론 살을 맞대는 사이란 아무것도 보장해 주지 않는다. 첫사랑과의 경험에서 그걸 알았다.

언젠가 ‘사귀자’는 고백 한 마디를 간절하게 바란 적도 있었지만, 사랑 고백을 듣는다 해도 대체 그런 약속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말은 증거가 되지 못한다. 약속은 깨면 없어지고….

심지어 사랑의 감정에도 기한이 있다. 자신이 첫사랑을 죽을 것처럼 사랑했지만 그것 역시 끝나 버린 것처럼. 서로를 서로의 삶에서 떼어 버리고 나면 유일한 진실 같았던 감정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어진다.

그러니까 이현은 석희재와는 아무런 약속도 하고 싶지 않았다.

관계를 맺으면 분명히 이별이 따라오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냥 이대로 오래오래….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만을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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