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2. 비디오 레코드(6권) (22/27)
  • 22. 비디오 레코드

    분장실에 앉은 석희재의 뺨에는 매끄러운 윤기가 흘렀다. 텁텁한 무대용 화장은 본래의 피부 광채를 방해한다고 느낄 정도로.

    게다가 핸드폰을 바라볼 때는 입가가 느슨한 호선을 그렸다. 아마도 저 자신조차 의식하지 못한 미소일 것이다.

    옆자리에 앉아 함께 분장을 받고 있던 유나연은 곁눈질로 그런 석희재를 유심히 바라보았다. 평소 분장과 헤어를 받을 때에는 일하는 스태프들을 존중한다고 석고상처럼 거울만 들여다보던 예의 바른 남자가, 이제 들고 있는 핸드폰에 자꾸 시선이 가는 것을 막지 못하고 3분 간격으로 고개를 아래로 떨어뜨리고 있었다.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데 여념이 없는 석희재를 보다 못한 스태프가 괜찮으니 그냥 편하게 핸드폰을 보라고 말할 정도였다.

    “머리를 자꾸 숙였다, 들었다 하면 그게 더 골치 아파. 그냥 숙이고 핸드폰 해요.”

    “아… 죄송합니다.”

    먼저 준비를 마친 유나연은 재빨리 석희재의 분장실로 향했다.

    석희재가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괜히 한 바퀴를 쭉 둘러보았으나 정갈한 분장실 안에 크게 눈에 띄는 것은 없었다.

    보통 공연이 이만큼 진행되면 분장실 안에 개별 살림이 늘어나기 마련인데, 석희재는 저와 더블을 하고 있는 다른 배우를 배려한다고 언제나 왔다 간 흔적도 없이 분장실을 깔끔히 유지했다. 그나마 달라진 건… 팬들이 넣어주는 간식을 넣어 두기 위한 미니 냉장고, 그리고 건조한 극장에서 건강 관리를 위한 가습기가 놓인 정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기다리던 남자가 들어왔다. 막 들어선 석희재는 안에 팔짱을 낀 채로 버티고 앉아 있는 유나연을 보고는 잠시 멈칫했다.

    “피디님이랑 화해했구나?”

    “…….”

    유나연의 말을 듣자마자 문을 닫기 위해 막 뒤돌아섰던 석희재의 행동이 어설프게 뚝 멈추었다.

    유나연은 눈을 가늘게 뜨며 중얼거렸다. ‘오호라.’

    그녀는 누구보다 빨리 석희재의 미묘한 변화를 알아차렸다. 석희재의 전신에서는 기묘한 활력이 넘쳤고 얼굴에는 생기가 돌았다. 물론 공연으로 인한 체력 소모는 여전히 가혹해서, 석희재는 지금도 영양제를 칵테일처럼 믹스한 수액을 맞으며 버티고 있었다. 홍삼과 마늘 진액 따위를 가방에 챙겨 다니면서 주스처럼 마시기도 했다. 이십 대 초반의 체력만 믿고 공연을 하면서도 술판을 찾아다니는 보통 남자들과는 달리 벌써 몸보신에 지극정성이다.

    아무튼 얼굴이 급속도로 좋아진 건 칼같이 건강 관리를 해서만은 아닌 것 같았다. 저 속을 숨길 줄 모르는 어설픈 반응을 보니 심증이 더욱 굳어졌다.

    “너무하다. 정말. 재결합했는데 나한테 보고도 안 하고.”

    “…….”

    “피디님 어디로 가셨는지도 안 알려 줘요? 나도 궁금한데.”

    “아, 그건… 아직 쉬고 계셔서.”

    앞의 질문은 부정하지 않고 뒤엣것만 대답하는 석희재의 머쓱한 반응을 보고 유나연은 확신했다.

    “다시 만나는 거 맞네, 맞네~”

    “…….”

    “하아… 이래서 남의 연애사는 조언을 해 주는 게 아니라니까.”

    유나연이 괜히 과장된 한숨을 흘리자 석희재가 짐짓 미안한지 눈치를 보았다. 저 무뚝뚝한 얼굴이 어쩔 줄 모르고 이쪽을 바라보는 게 우스워서 유나연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고마워요, 술 살게요.”

    “정말?”

    “네.”

    “근데 진짜 어떻게 된 거예요.”

    유나연의 말에 석희재는 소리 없는 미소를 띠고는 말을 이었다.

    “그냥… 제가 부족했던 것 같아요. 피디님을 다 이해 못 해 드렸어요. 어느 순간 상대보다 상대를 좋아하는 제 감정이 앞서서.”

    그 말을 들은 유나연은 감탄하기 이전에 약간 질린 표정을 지었다. 이게 스물두 살짜리가 할 수 있는 말인가? 싶어서. 누가 대본으로 써 준 대사라도 못 믿었을 것이다. 특히 제 주변의 남자들을 떠올리니 말도 안 된다는 생각부터 들었다.

    ‘유니콘이야, 유니콘….’

    유나연은 석희재의 팬들이 그를 칭하는 말들을 떠올렸다. ‘석희재 환상의 동물설’은 사실일지도 모른다.

    “피디님도 많이 표현해 주시고 그래서… 사랑싸움했다고 생각하고 넘어가기로 했어요.”

    “…….”

    “헤어졌던 적 없이, 그냥… 잠깐 사이가 안 좋아졌던 거라고.”

    “으, 뭐야….”

    사랑을 되찾은 연인들의 알콩달콩한 약속이 조금 간지럽기도 하고 소름 돋기도 해서 유나연은 저도 모르게 제 양팔을 감싸 안았다.

    석희재는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조금 멋쩍어하기만 하며 뒤돌아 가방을 부스럭거렸다.

    석희재가 찾던 것은 홍삼 팩이었다. 자신이 팩을 뜯는 것을 유나연이 물끄러미 바라보자, 석희재는 자기도 하나 달라는 뜻인 줄 알고 다시 부스럭거리며 새것을 내밀었다.

    유나연은 거절하지 않았다. 둘은 마주 보고 앉아 말없이 홍삼을 빨았다.

    언제 먹어도 끝 맛이 텁텁한 홍삼을 느릿느릿 먹으면서 석희재는 이걸 직접 챙겨 준 이현을 떠올렸다. 부모님이 보내 주신 건데, 자기는 집에서 쉬고 있어 괜찮으니 네가 먹으라며 양손에 묵직한 보따리를 쥐여 보냈다.

    이현이 주는 것은 하나도 거절하고 싶지 않아서 받기는 했지만 마음이 불편했다. 그는 직장에서 잘리고 혼자 어찌나 마음고생을 했는지 안 그래도 마른 몸에 살이 더 내렸다. 쉬고 있다지만 누가 봐도 당장 몸보신이 필요한 건 이현 쪽이었다. 드러난 뼈가 도드라졌고 가끔 어떤 체위에서는 뼈가 부딪혀 아파하기도 했다. 특히 갑자기 불이 붙어 급하게 바닥이나 욕실에서 몸을 겹칠 때면 벽과 바닥에 짓눌린 부분이 멍투성이였다.

    신경을 쓴다고 쓰는데도…. 행위에 몰입하면 저 역시 깜빡할 때가 잦았고, 이현은 고통에 대한 엄살이 무척 부족한 편이었다. 끝나고 지쳐 잠든 그의 벗은 몸을 들여다보다 뒤늦게 발견하는 자국들이 많았다.

    ‘홍삼은 맛이 없으니까… 꿀이 들어간 건 없나? 형 걸로도 하나 사 줘야겠다.’

    이현을 생각하니 자연스레 지난 열락의 나날들이 떠올랐다.

    어떻게 흘려보냈는지도 명료히 기억이 나지 않는 일주일간.

    제 몸의 안위와 사치에 별로 관심이 없는 이현은 이삿짐 정리가 끝나지 않은 집에서도 별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그가 이사 후 며칠을 그 휑한 집에서 보내며 꺼내 둔 짐이라고는 라면을 끓여 먹을 수 있는 냄비 하나, 그리고 바닥에 둔 채로 코드를 연결해 놓은 전자레인지뿐이었다. 침대 프레임과 매트리스도 조립이 귀찮다며 벽에 세워 놓은 그대로 두고 몸 누일 둥지 같은 이부자리 위에서만 누워 지냈다.

    그리고 자신들은 그 난잡한 둥지에서 내내 섹스만 했다.

    석희재가 어떻게 이 집에 눌어붙을까 고민하던 것이 무색하게, 이현은 통 집에 가지 않는 석희재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도리어 눈앞에서 석희재가 사라지면 안절부절못했다.

    일례로, 이현이 잠들었을 때 물과 콘돔을 사기 위해 편의점에 가느라 잠깐 집을 나선 적이 있었다. 이현은 그 잠깐 사이에 잠에서 깨어 핸드폰에 불이 나게 전화를 해 댔고, 석희재는 덩달아 큰일이라도 난 줄 알고 헐레벌떡 뛰어서 다시 집에 돌아갔다.

    그리고 벌컥 문을 열자, 불 꺼진 어둠 속에서 머쓱하게 저를 바라보던 이현이 ‘집에 간 줄 알고….’ 하며 자신 없는 목소리를 냈다. 저를 기다리던 간절한 눈이 사랑스러워서 들고 온 것들도 바닥에 내팽개치고 그대로 바닥에 밀어붙이고 말았다.

    또 이 집에 신고 온 게 가죽 로퍼여서 잠깐 편의점에 가는 길도 조금 불편했다고, 편의점에서 슬리퍼를 팔면 사 오려고 했는데 안 팔더라고 말했더니 그는 또 그걸 기억한 모양이었다. 석희재가 공연을 하기 위해 집을 나선 사이 이현은 산더미같이 쌓아 올려진 박스를 뒤져 슬리퍼를 찾아 놓았다.

    공연을 마치고 곧바로 이현의 집으로 돌아온 석희재는 현관에서 이현이 꺼내 놓은 슬리퍼 한 켤레를 목격할 수 있었다.

    가지 말란다, 이렇게나.

    그게 무척 뿌듯하고 좋아서 굳이 확인을 받고 싶었다.

    ‘내가 필요하다고 말해서 꺼내 놓은 거야? 짐 정리도 안 하는 사람이? 굳이 이것만….’

    그렇게 캐묻자 이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약간 후회 섞인 얼굴을 했다. 그 표정의 의미를 알아채려 가만히 바라보자 이어지는 말은 더욱 수수께끼였다.

    ‘자중해야 하는데….’

    ‘뭘?’

    이현은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다 한참 만에 툭 내뱉었다.

    ‘나는 이래서 남자들이 빨리 질리던데.’

    ‘…….’

    ‘집착… 하는 것 같다고.’

    ‘…….’

    ‘그치? 다들 그러잖아. 사람이 너무 쉬우면 매력 없다고.’

    이현은 약간 초조한 눈으로 그렇게 물어 왔다. 아니라는 대답을 듣고 싶은 모양이었다.

    동시에 그의 말을 들은 석희재의 심경은 복잡해졌다. 마음을 정하니 그게 투박할 정도로 행동에 그대로 드러나는 이현이 좋은 한편, 그간 만난 어떤 놈들에게 또 이렇게 굴었는지 알고 싶기도 하고 모르고 싶기도 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현이 표현한 ‘남자들’이라는 복수의 표현이 무척 거슬렸다.

    어쨌든 지금 그의 집착이 나를 향해 있으니, 나중에 기회가 생기면 그때 캐물어도 늦지 않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며 석희재는 그의 이마에 키스하는 것으로 질투심을 눌렀다.

    아무튼 이삿짐 정리에 관심이 없는 이현을 추슬러 최소한의 정리를 하고 인테리어에 욕심을 낸 것은 다름 아닌 석희재 쪽이었다. 그래도 집이 모양을 갖추는 진도는 퍽 느렸다. 눈만 마주치면 몸을 섞느라 하루가 바삐 갔기 때문이다. 집에 있을 때는 옷도 잘 갖춰 입지 않았고, 짐 정리를 하다가 땀 흘린 채로도 맨살을 맞붙였다.

    평생 이렇게 섹스에만 탐닉한 때가 있었던가? 이현을 만나고 그와의 관계에 익숙해지며 제법 섹스를 알 만큼 안다고 생각했던 것이 우습게 느껴질 정도였다. 좋아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고 하는 스킨십은 차원이 다른 달콤함을 안겨 주었다.

    특히 이현은 부드러운 애무에 아직 적응한 지가 얼마 안 되어서 직접 성감대를 찾아가는 재미가 있었다. 키스를 느리고 다정하게 해 주면 그것만으로도 앞을 세우곤 했다. 그의 온몸 구석구석을 혀와 손끝으로 탐구하는데도 갈증은 여전했다. 휴가를 낼 수 있는 직업이었다면 당장 그만두었을 것이다.

    ‘빨리 집에 가고 싶다….’

    어느새 유나연이 떠나고 혼자 남은 분장실에 앉아 석희재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자마자 실행에 옮겼다.

    「무ㅓ하긴 누워잇지」오후 4:57

    칼같이 답이 왔다.

    쌍자음이 다 상실된 것을 보니 옆으로 누워서 한 손으로 자판을 친 모양이었다. 그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워서 석희재는 미소 지었다.

    「사진 한 장만 보내 주면 안 돼?」오후 4:58

    「세수도 안햇어」오후 4:58

    「상관없어」오후 4:58

    「벗고잇는데」오후 4:58

    「더 좋아」오후 4:58

    그렇게 보내자마자 아니나 다를까, 이현은 옆으로 누운 채로 찍은 셀카를 보내 왔다. 석희재를 배웅한 그대로 몸을 물로만 씻어 내고 그대로 다시 이불에 파묻힌 얼굴이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눈두덩이에 남은 붓기 때문에 다 뜨이지 않은 눈매가 귀여웠다.

    ‘얼굴에 뽀뽀해 주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며 석희재는 화면에 띄워 놓은 이현의 사진을 한참 보았다.

    이현이 이 극장에 오는 것을 꺼리지만 않았더라면 함께 왔을 것이다. 밴에 태워 데리고 와서 시작 전까지는 분장실에 함께 있다가, 공연이 시작하면 자신은 무대에서, 또 그는 객석에 앉아서 같은 시간을 보내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망상했다. 요즘 종종 공연에 물이 올랐다는 소리를 듣곤 하는데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싶기도 했다. 전직 피디인 이현이 평가하는 배우로서의 자신이 궁금했다.

    더해서 이현의 실직에 그의 잘못이 없다면 좀 더 떳떳해도 상관없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형이 죄인도 아닌데.

    그렇게 생각할 때였다.

    「너도보내」오후 5:02

    이현의 메시지가 왔다. 석희재는 곧바로 셀카를 찍어서 보냈다.

    「환장하게잘생겻네」오후 5:04

    이현의 말에 석희재는 입을 가리고 쿡쿡 웃었다.

    「넌 셀카 여러장 찍고 골라본적도업지??」오후 5:04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질문에 석희재는 어리둥절해졌다.

    보통은 고르나? 궁금해져서 석희재는 도로 물었다.

    「형은?」오후 5:05

    「난 나름 다섯장중에 고른거야」오후 5:05

    그 뒤로 석희재는 다시금 몇 마디 메시지를 보냈지만 이현이 확인을 하지 않았다.

    다시 잠들었나, 생각하면서 석희재는 핸드폰을 내려놓고 마이크 테스트를 준비했다.

    ‘올라가기 전에 목소리 듣고 싶었는데.’

    석희재는 자연스레 잠에 취해 불분명해진 이현의 발음과 허스키한 목소리를 상상했다.

    그렇게 십여 분 정도가 지났을까, 이현에게서 늦은 답장이 왔다.

    「니 얼굴 보면서 한발뺏다.」오후 5:17

    “미치겠네.”

    석희재의 귀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이제 올라가야 하는데, 갑자기 이런 문자를 보내면 어쩌자는 건가. 의도치 않게 도발당해 바지 앞섶이 불편해졌다.

    발기한 것을 가라앉히기 위해 석희재는 한동안 흰 벽을 보고 선 채로 흥분을 잠재웠다.

    ***

    “다녀왔습니다.”

    석희재는 양손에 묵직한 쇼핑백을 가득 든 채로 이현의 집 현관에 들어섰다. 한 손에는 팬들에게 받은 선물들이 여러 개 걸려 있었고 다른 손에는 집에 오는 길에 가볍게 장을 본 것이 들려 있었다. 당장 필요해서 산 임시 생필품들과 마트에서 사 온 과일, 밑반찬 같은 것들이었다.

    집에는 불이 꺼져 있었다.

    쇼핑백을 내려놓은 뒤 석희재는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박스를 다 치우지 않아 약간은 난잡한 거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 안에 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잠깐 나갔나.’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석희재는 부지런히 몸을 움직여 창을 열어 환기를 시키고 여기저기 어지럽혀진 살림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의 눈에 소파 위에 이현의 지갑이 그대로 놓여 있는 것이 보였다. 지갑은 두고 핸드폰만 들고 나간 것을 보니 약속이 있거나 멀리 간 것은 아닌 듯하다.

    문득 낡은 지갑에 새삼 시선이 꽂혔다. 흔한 갈색의 가죽 반지갑 겉면은 여기저기 스크래치가 나 있었다.

    낡은 것을 보니 하나 선물을 해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석희재는 소파에 걸터앉아 그의 지갑을 손에 들고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선물을 받은 사람이 잘 쓸 수 있도록 쓸모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반지갑을 펼치자 이현의 사진이 붙은 신분증과 운전면허증이 보였다. 예전에 짝사랑할 때는 이것조차 너무 보고 싶어서 그가 잘 때 몰래 열어서 훔쳐보곤 했었다. 그때 기억이 나서 석희재는 픽 웃었다.

    ‘카드 수납은 하나, 둘, 셋… 일곱 칸, 이 정도고. 동전은 없고… 머니 클립은.’

    지갑 안쪽을 열었을 때였다. 그 안에 박혀 있는 작은 검은색 플라스틱이 눈에 띄었다.

    석희재는 그걸 조심스레 꺼내서 앞뒤로 살펴보았다.

    핸드폰 유심 칩 같기도 하고.

    ‘마이크로 SD 카드?’

    카메라 촬영 시 메모리 카드로 쓰이는 것이었다. 그게 왜 여기 있는지 궁금해하고 있을 때였다.

    바깥에서 갑자기 도어록의 비밀번호가 눌리는 소리가 들렸다. 남의 지갑을 몰래 뒤졌다는 사실에 지레 놀란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메모리 카드를 주머니에 쿡 찔러 넣고 말았다.

    “빨리 왔네?”

    “아, 응….”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이현의 목소리에 반가운 기색이 어려 있었다. 석희재는 얼른 그의 차림을 눈으로 훑었다. 무릎 나온 트레이닝복에 대충 발에 걸린 슬리퍼. 툭 튀어나온 주머니 안에 네모난 윤곽이 드러난 걸 보니 잠깐 동네 산책 겸 담배라도 태우러 다녀온 모양이다.

    “과일 사 왔어? 이거 먹자.”

    이현은 쭈그려 앉은 채로 석희재가 들고 온 종이 봉투와 비닐봉지 안을 뒤적였다. 팔이 움직일 때마다 등 위로 안쓰럽도록 도드라진 날개뼈도 바쁘게 움직인다. 비닐봉지 안에서 자두 하나를 꺼낸 이현은 씻지도 않은 과일을 베어 물었다.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며 석희재가 말했다.

    “씻어서 먹지. 내가 잘라 줄게.”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자두 한쪽도 네 조각으로 잘라 접시 위에 장식처럼 올려 오는 석희재의 쓸데없이 예쁜 습관을 떠올린 탓이다. 뭐든 생긴 것처럼 하려는 고집이 있는 건 귀여웠지만, 이현은 한 입 거리 과일을 굳이 공들여 칼질하고 설거짓거리를 만드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됐어. 그냥 먹을래. 배도 고프고.”

    “혹시 저녁 안 먹었어?”

    “응….”

    “끼니 잘 챙기라고 했잖아요.”

    석희재는 저도 같이 무릎을 굽혀 이현을 등 뒤에서 안았다. 이런 잔소리는 싫지 않았는지 이현이 유순하게 몸을 기대어 왔다. 석희재는 고개를 숙여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바깥의 선선한 저녁 바람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석희재는 이현의 손을 쥐고 들어 올려 그의 손가락 사이를 코끝으로 건드렸다. 손에 묻은 희미한 담배 냄새를 맡으려 한다는 사실을 알아챈 이현이 급히 손을 뺐다.

    “왜.”

    낭만을 깨는 급한 동작에 석희재가 불퉁하게 물었다.

    “담배 냄새 나. 손 씻고 올게.”

    그러고는 말리기도 전에 후다닥 일어나 화장실로 향했다. 곧 향긋한 핸드 솝으로 손을 씻고 나온 이현은 싱크대에서 과일을 벅벅 씻기 시작했다.

    ‘난 좋은데.’

    석희재는 머쓱하게 그를 올려다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말로 이현의 체취가 묻은 것이면 다 좋았다. 이현이 저 오래 입어서 무릎이 튀어나온 트레이닝복을 벗어 놓으면, 가끔 들어 올려 발목 부분에 코를 대어 본다는 걸 알까. 들키면 등을 얻어맞을지도 모르겠다. 알아 온 햇수는 3년 반이나 되었지만 진짜 서로의 모습을 드러낸 지는 얼마 안 되어 그런지 아직은 잘 보이고 싶었다.

    “내가 할게.”

    석희재는 얼른 일어나 이현의 곁에 가서 섰다. 그러나 하도 키가 커서 서 있기만 해도 거슬린다며 도로 내쫓기고 말았다.

    ***

    주머니 속 SD 카드를 꺼내게 된 건 정말 우연이었다. 사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석희재는 자신이 이현의 물건을 몰래 챙겼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에 녹화된 것이 무엇이라도 그의 동의 없이 몰래 볼 생각은 결단코 없었다.

    그날 석희재는 방송사의 미팅이 끝난 직후 스태프로부터 작은 짐벌 카메라 하나를 지급받았다. 스케줄 중에 자연스럽게 일상생활을 촬영한 것이 클립으로 쓰일 거라고 했다. 손안에 쏙 들어오는 크기의 기계는 얼핏 봐서는 카메라 같지도 않았다. ‘요즘 물건’에 감탄하면서 석희재는 기기를 이리저리 탐구했다.

    간단한 작동법을 들으며 막 전원을 켰을 때였다.

    “저… 녹화가 안 되는 것 같은데요.”

    석희재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곁에 있던 스태프에게 말했다. 그리고 화들짝 놀란 초면의 스태프는 갑자기 제게 말을 걸어온 배우의 나직한 음성에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아, 아, 안 되나요? 저 한번만 주시겠어요?”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건네받은 기기를 이리저리 작동시켰다. 그러고는 이유가 궁금해 몸을 기울인 석희재 때문에 더더욱 당황하며 저도 모르게 몸을 뒤로 물렸다. 예고 없이 쓱 다가온 얼굴에 심장이 일차로 쿵, 떨어졌고 흘끔 곁을 보자 차분한 눈빛이 제 손을 - 정확히는 기기 화면을 - 주시하고 있다는 걸 알자 갑자기 수전증이라도 온 듯 미친 듯이 손이 떨려 왔다. 게다가 눈썹의 결이 보일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되자 향수 냄새까지 맡아졌다.

    “요, 용량이 없나 봐요.”

    “용량?”

    “메모리 카드 가져올게요!”

    벌떡 일어난 스태프는 혹여 석희재가 말이라도 붙일세라 쌩하고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직업적 품위를 지키기 위해 도망친 것일 뿐이었지만, 그 이유를 알 리 없는 석희재는 의문이 남은 얼굴로 멀어지는 스태프의 등을 바라보았다.

    다시 혼자가 된 석희재는 주변을 눈으로 훑었다. 모두 바빠 보였고 제가 말을 걸 만한 사람은 없어 보였다.

    기다리자.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등받이에 등을 기댔을 때였다. 문득 자신이 가지고 있는 메모리 카드가 하나 떠올랐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그건 지금 석희재의 바지 주머니에 있었다. 몇 개 안 되는 옷가지를 이현의 집에 두고 다니느라 옷차림에 중복이 많은 요즘이었다.

    주머니를 더듬어 메모리 카드를 꺼낸 석희재는 방금 받은 짐벌 카메라에 그것을 꽂아 보았다. 사이즈가 딱 맞았다. 재생화면을 확인하자 곧바로 화면 가득 이현의 얼굴이 떴다.

    괜히 놀라서 석희재는 주변을 한 번 둘러보고 그것을 다시 재생시켰다.

    화면 안에는 조금 수척한 얼굴의 이현이 있었다. 정확히는 화면에서 조금 빗나간 초점으로, 무언가 조작에 여념이 없는 얼굴로. 그의 얼굴이 조금 낯설었다. 석희재가 아는 이현보다 훨씬 웃음기가 없고 냉정한 얼굴이었다.

    조작을 끝낸 그는 조심스럽게 기기를 어딘가에 고정하더니 뒤로 몇 걸음을 걸어갔다. 얼마 정도의 화각을 촬영할 수 있는지 테스트해 보는 것 같았다.

    “배우님, 메모리 카드 가지고 왔어요. 이걸로 쓰시면 돼요.”

    “아….”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석희재와 스태프의 눈이 마주쳤다. 석희재는 방금까지 보던 화면을 얼른 중지시키고 새것을 받았다.

    “이 부분 누르시면 넣을 수 있거든요.”

    “감사합니다.”

    잠시 후, 다시 미팅이 시작되었다.

    테이블 앞에 앉았지만 석희재의 머릿속은 방금까지 보던 화면으로 가득 차 있었다. 프로그램 구성이 인쇄된 종이 위에서 가만히 펜을 굴리며 석희재는 아까 전 잠깐 보았던 이현의 무표정한 얼굴을 떠올렸다. 지루한 시간에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보낼 수 있는 건 좋았지만…. 왜 그런 촬영이 필요했을까를 생각하게 된다. 영상의 목적이 무척 궁금했다. 게다가 자신이 모르는 이현의 얼굴은….

    미팅이 끝난 후 석희재는 매니저가 권하는 점심 식사도 물리고 밴에 틀어박혔다. 아까 빼놓았던 메모리 카드를 다시 짐벌 카메라에 끼우고, 이번에는 큰 화면으로 보기 위해 핸드폰에 연결했다.

    녹화된 영상은 단 두 개였다. 아까 석희재가 확인했던, 촬영이 잘 되는지 보기 위해 시범으로 녹화한 것. 그리고 두 번째는….

    ***

    「희재. 이제 공연 시작이지? 올라가기 전에 도라지즙 먹고 분장실에 가습기 꼭 틀어~~ 귀찮다고 빼먹지 말고...」오후 7:43

    메시지를 입력한 이현은 전송을 누르고는 다시 깊이 담배를 빨았다. 석희재는 오늘따라 답이 늦었다. 공연 외에도 방송국 스케줄이 있다더니 바쁜 모양이었다. 현관문 턱에 주저앉아 밤 풍경을 내려다보는 이현의 곁에는 집 근처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캔이 두 개 굴러다니고 있었다.

    착실하게 일상을 살고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가는 ‘애인’과 다르게 이현은 아직도 조금 방황 중이었다. 본인은 자각 못 하는 초조함에 마음이 잠식된 채로 이다음에 가야 할 길을 자꾸만 미루고 있었다. 기실 누군가에 의해 오랜 기간 깎여 나간 자존감과 상처받은 마음이 쉬이 회복될 리 없었다. 게다가 그는 마음의 공허한 부분을 제대로 된 자아로 채워 넣지 못하고 사회적인 인정 욕구로 대체하며 미친 듯이 일을 해 왔다. 그 직장마저도 타의에 의해 송두리째 빼앗긴 뒤에 허무함이 찾아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도 이현은 그 이유를 저의 부족함에서 찾았다. 누가 봐도 잘난 애인, 그보다 7살이나 많은 연상, 서른을 앞둔 나이에 무직자라는 점이 스스로의 발목을 잡았다.

    나이도, 재산도, 외모도 탁월한 점이 없으니 열심히라도 살아야 하는데.

    아니면 번듯한 직장이라도 다니든가….

    일자리를 구한다고 마음의 틈이 메꿔지는 것이 아닌데 이현은 그 외에는 방법을 알지 못했다.

    오늘 그는 다른 기획사에서 계약직 PD 직을 제안받은 참이었다. 원래 가장 잘하던 일이고 자신 있는 일이기도 했지만 몇 개월 한정이라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 업계에 있는 한 한지우나 전 회사 대표 같은 이들과 마주칠 일이 생기는 것도 부담이었다. 그럼에도 미련이 생기는 이유는, 자신이 PD였을 때 석희재가 저에게 반했기 때문이다.

    ‘희재도 아직 스물둘이라 그렇지. 내가 최고인 줄 아는 것도 한때일 텐데.’

    이현은 고개를 푹 수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이런 초라함을 함께 있으며 살을 섞을 때는 느끼지 못한다. 현실과 괴리되어 빛도 들지 않는 어두운 방에서 서로에게만 집중하다 보면 머리 아픈 일은 잊을 수 있었다. 그래서 더더욱 미친 듯이 섹스에 몰두하는지도 모르겠다. 그 짓을 할 때만큼은 석희재가 저밖에 없다는 듯이 매달려 오니까.

    그러나 석희재가 집을 나가고 혼자가 되면, 도피했던 것 이상으로 허무함이 밀려왔다. 특히나 석희재가 향하는 데가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곳이라는 사실이 더 그렇게 만들었다.

    질투하는 것은 아니다. 열등감도 아니다.

    이현은 턱을 괸 채 발치에 흩어진 꽁초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냥 아무것도 아닌 자기 자신이 싫어질 뿐이다.

    ‘또 이런다.’

    이현은 간지러운 눈가를 손으로 비비며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면 맹목적으로 되어버리고 마는 이유는 저 자신을 사랑하지 못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중심이 없으니 쉽게 휘둘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 사랑을 지속시키기 위해서라도 빨리 자기 자신을 되찾아야 했다.

    아무튼 이현은 노력하고 있었다. 더 나아지기 위해.

    다만 오래 사랑받으려면 더 잘해야 한다는 강박 때문에 쉽게 걸음을 내디딜 수 없을 뿐이다.

    지이이잉-

    핸드폰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이현은 석희재에게서 답장이 온 줄 알고 얼른 핸드폰을 확인했다.

    「이 피디 이사 갔어?」오후 10:56

    “아, 씨… 괜히 확인했네.”

    메시지를 읽어 버려 못 봤다는 핑계도 댈 수 없게 됐다.

    「어디야? 나와봐」오후 10:56

    한지우였다.

    가겠냐?

    이현은 메시지를 무시하며 핸드폰을 엎어 놓았다. 그러나 생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고 애를 써 봐도 좀처럼 한지우가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다.

    사람을 개새끼 부르듯 아무 때나 오라 가라 하고.

    그나저나 왜 집까지 찾아왔을까.

    역시 복수인가….

    그것도 ‘나와 봐’라니.

    이현은 모골이 송연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자신이 이 근처에 여전히 머무르고 있다는 것을 확신해야만 할 수 있는 말이었다. 동시에 자신이 그에게 입힌 상해도 떠올랐다. 그때의 박치기를 떠올리면 아직도 이마가 얼얼한 것만 같다. 그때 뇌가 흔들려서 지능이 약간 떨어졌대도 납득할 만큼.

    지이이잉, 지이이잉.

    이어서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 핸드폰의 진동 소리에 반응하도록 설계된 현대인이 규칙적인 진동을 무시하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다. 이현은 반응코자 하는 본능을 무시한 채로 불안정하게 다리를 달달 떨었다.

    귀동냥으로 주워듣기를, 한지우가 끼고 무대에 오른 특수 제작 마스크는 기천만 원을 호가하는 것이라고 했다. 절대 안정을 취해야 하는데 그럴만한 스케줄이 아니었으니 의료 기술의 힘을 빌린 것이다. 코뼈가 부러졌으니 걸을 때마다 골이 흔들리고, 타고 있는 차가 과속 방지 턱을 밟기만 해도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그런데 매일 얼굴 위에 분장하고 무대 위를 뛰어다녀야 했다니…. 그 고충이 절로 그려졌다. 한때는 그게 약간 통쾌하기도 했지만 지금은 불안하기만 하다.

    세 번째 전화가 걸려 올 때였다. 왜인지 언덕 저 아래서 뚜벅, 뚜벅 걸어오는 낯선 박자의 걸음걸이가 들려오는 것 같아 이현은 부리나케 집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다른 건 무섭지 않은데 돈은 무서웠다. 네가 입힌 부상이니 치료비로 보상하라고 한지우에게 멱살이라도 잡힌다면….

    ‘아, 안 돼… 집 보증금 만든다고 대출금도 생겼는데.’

    마른침을 삼킨 이현의 머릿속에 퍼뜩 지나치는 것이 있었다.

    메모리 카드.

    그 안에 한지우를 협박할 만한 게 들어 있었다.

    배우 생명이 끝날 만한 비디오를 동의 없이 촬영해 놓고 그걸로 협박한다는 것이 이현의 도덕심에 영 거슬렸지만 방법이 없었다.

    ‘정말로 공개할 것도 아니고 그냥, 그냥… 나를 보호하기 위한 거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집안에 들어선 이현은 잠깐 허공을 본 채로 멈췄다. 한동안 그 존재 자체를 잊고 있던 메모리 카드가 어딨는지 기억해 내려니 뇌가 정지했던 것이다. 그래도 다행히도 금세 있던 곳을 떠올렸다.

    이현은 어딘가에 내던졌던 제 반지갑 사이를 꼼꼼하게 뒤졌다.

    “음?”

    머니 클립을 펼치자마자 들어 있어야 할 메모리 카드가 보이지 않았다. 이현은 지갑 안의 모든 것들, 지폐와 카드, 동전, 영수증 따위를 모조리 빼서 뒤집어 보았다.

    “없네….”

    들고 다니다가 빠졌나.

    딱 빠지기 쉬울 만큼 작긴 했다. 이현은 한숨을 쉬며 앞으로 풀썩 엎어졌다.

    되는 게 하나도 없네, 씨발.

    “이 피디. 문 좀 열어 봐.”

    순간 바깥에서 젠틀하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 이현은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한지우의 목소리였다.

    ***

    석희재는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거기에 온 정신을 빼앗긴 와중에도 밴의 안쪽, 간이침대로 향해 커튼을 쳤다. 갑작스럽게 밴으로 매니저나 스태프가 들이닥쳐 누군가에게 이 화면을 들킬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석희재는 다시 화면을 조작해 영상의 처음으로 갔다. 호텔 방이었다. 화면이 반쯤 가려진 것은 이현이 그 앞에 서 있기 때문이다. 마디가 분명하지 않은 날씬한 손가락이 화면에 어른거렸다. 그 안에 담긴 또 다른 남자… 한지우가 침대에 느슨히 앉아 허벅지를 양쪽으로 벌렸다. 노골적으로 욕망을 드러내는 가감 없는 행동에 석희재는 역함을 느꼈다.

    더 참담한 것은 그런 한지우의 앞으로 다가가는 이현은 이미 상의를 탈의한 채였다는 것이다. 주저 없이 남자의 다리 사이에 무릎을 꿇고, 저는 안중에 없이 담배를 문 남자의 것을 입에 머금는 그가 낯설었다.

    내가 이걸 왜 보고 있지?

    뱃속이 홧홧하게 타는 듯했다. 심장 박동이 미친 듯이 빨라졌다. 갑자기 달리기라도 하지 않고서는 참을 수 없을 만큼 갑갑한 속이 마구 뒤채였다. 엄청난 스트레스로 인해 실제로도 위가 아프기 시작했다.

    이것은 자신과 관계가 없을 때의 이현이다.

    또 자신이 그를 모를 때의 삶이었다.

    저와 만나기 전에, 그리고 파트너 관계를 유지하던 초반까지도 항상 이런 식으로 남자들과 밤을 보냈다는 걸 아는데도…. 아는 것과 눈으로 확인하는 것은 전혀 달랐다.

    “……!”

    그때였다. 화면 안의 한지우가 이현의 머리채를 함부로 움켜잡았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허리를 세우며 눈을 부릅떴다.

    음소거가 된 영상이라고 생각했는데 그저 오디오 기능이 좋지 않을 뿐이었나보다. 목구멍에 억지로 남자 좆을 처박게 된 이현이 괴롭게 컥컥거리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침대에 힘없이 내던져진 그의 팔다리가 의미 없이 버둥거리고 있었다. 슬픈 것은, 이현은 적극적으로 반항하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바르작거리는 팔은 한지우의 몸에 닿지도 않았고, 억지로 당하는데도 어떻게든 받아들이려 애쓰고 있었다.

    그걸 보던 석희재의 눈이 열기로 뜨거워졌다. 눈물인지 분노인지 모르는 것 때문에 시야가 흐렸다. 차라리 구강성교를 할 때가 나았지, 이어서 두 사람이 이마를 붙이고 서로 속삭일 때에는 절로 더운 한숨이 나왔다.

    형에게 이걸…

    내가 봤다고 말해야 하나.

    내가 모를 때 형의 사생활이니까 모른 척 넘어가 줘야 하나.

    하지만 한지우는… 그 자식은.

    석희재는 한지우와의 불편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동대문의 어느 호텔에서 너도 혹시 ‘그쪽’이지 않냐고 물어왔던 한지우.

    그는 분명히 자신에게 그런 쪽의 관심이 있어 보였다. 이제까지는 이현을 노리는 줄 알았는데, 무척 가벼운 관심으로 저를 찔러 온다는 것 자체에 아연했었다.

    그 사람은 남자라면 아무나 좋은 것일까?

    게이들은 다 그런 것이고?

    약한 환멸감이 들 때였다.

    그때까지 조용하던 화면 안에서 갑자기 음량이 치솟았다. 한지우가 이현의 뺨을 무섭게 내리치는 모습이 보였다.

    오디오가 희미한 영상 안에서도 공기를 할퀴는 듯한 찢어지는 소리가 선명하게 전해졌다. 그건 이현의 뺨이 찢어지는 소리였다.

    세 대,

    네 대,

    다섯 대….

    어느새 석희재는 제가 맞는 것처럼 어깨를 흠칫거리며 떨고 있었다. 작은 화면으로도 이현의 얼굴이 퉁퉁 부어오른 것이 보였다. 석희재의 숨이 가빠졌다.

    시체처럼 축 늘어지는 이현을 버려두고 한지우는 화면 밖으로 사라졌다.

    “씨발… 개자식….”

    배우지도 않은 욕이 자연스레 입에서 터져 나왔다. 석희재는 충혈된 눈으로 화면 안을 저주하듯 노려보았다.

    이건 퍽 오래전의 일일 것이다. 이현의 뺨은 이제 다 나아 예쁜 살굿빛을 내고 있다는 걸 아는데, 지금 그의 얼굴에는 흉도 상처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아는데도 용서할 수 없었다.

    “형, 혀엉….”

    석희재는 가슴이 끔찍하게 아파서 울고 말았다. 한지우에게 맞은 이현이 시체처럼 죽은 듯이 누워 있는 게 너무 무서웠다.

    그렇게 숨 쉬는 것도 잊은 채로 죽은 듯 누워 있는 이현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화장실에서 물이 쏟아지는 소리가 들려오자마자 이현은 힘겹게 팔로 몸을 받치고 일어났다. 그러고는 거의 구르듯이 침대에서 내려와 테이블로 기어 왔다. 떨리는 손으로 지갑과 옷을 챙기는 모습이 마지막이었다.

    그 뒤로는 암전. 문이 닫히고 어딘가로 달려가는 소리.

    영상은 거기서 끝이었다.

    ***

    사람은 초라함을 숨기기 위해 보통 가면을 쓴다. 이현 역시 그랬다. 그는 언젠가 빈털터리인 채로 석희재와의 의류 홍보 미팅을 가던 때처럼 옷으로 자기 자신을 무장했다. 석희재의 기획사에 면접을 보러 갔을 때 입었던 옷들이 다행히 아직 각이 사라지지 않은 채로 걸려 있었다.

    한지우는 현재 이현의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부담스러워하는 그를 위해 이현이 지시한 장소는 정독 도서관이었다. 건물을 따라 안쪽으로 쭉 들어가면 등나무가 드리워진 벤치가 있다고. 거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곧 나가겠다고 대답하고 말았다.

    “하….”

    거울을 보던 이현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한지우는 억대 소송에 걸리고 싶은 게 아니라면 순순히 나와서 이야기나 나누자고 말했다. 이야기? 불신의 눈을 하고 현관문의 틈으로 그를 내다보니 그 잘난 낯짝이 어느새 싹 나아 있었다. 과연, 컨디션이 회복되자마자 저를 제압하러 찾아온 듯하다.

    아무튼 그와 석희재를 마주치게 만들 수는 없었기에 이현은 터덜터덜 집 밖으로 나섰다. 맨발에 신은 구두가 뒤축을 아프게 했다.

    “이 피디 얼굴 좋아졌네?”

    “본론부터 말하세요.”

    이현은 벤치 위에 털썩 앉아 다리를 꼬며 그렇게 말했다. 오랜만에 보는 한지우는 전혀 섹시하지 않고 원수 같았다. 제 인생에 석희재라는 존재가 없었다면 ‘개처럼 처맞는 취향의 섹스’를 해 줄 남자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만….

    아… 나는 정말 엉망이었구나.

    갑작스러운 자괴감에 휩싸여 이현은 담배를 찾았다.

    “내가 현이 때문에 고생을 좀 했잖아.”

    “…….”

    “아, 나도 불 좀.”

    이현은 라이터를 건넸다. 그러나 한지우는 고약하게도 가까이 다가와 이현의 담배 끄트머리에서 불씨를 빨아 갔다. 이현은 가만히 고개를 들어 그를 노려보았다. 빨간 불빛이 서로의 얼굴 사이에서 타올랐다가 사라졌다.

    “좀 억울하더라고?”

    “주고받은 거 아닌가요?”

    이현은 그의 매서운 손바닥으로 골이 흔들리도록 얻어맞았던 것을 떠올렸다. 한지우가 피식 웃었다.

    “현이랑 나랑 상황이 같나.”

    “…….”

    “내 얼굴은 돈이 되는데.”

    이현은 속으로만 부글부글 끓었다. 맞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손해 배상을 청구한다면 자신은 신체적인 것뿐만 아니라 활동에 대한 부분까지 물어 주어야 할지도 몰랐다.

    “저 돈 없어요.”

    이현이 툭 내뱉자 한지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난 돈 많아.”

    “그래서?”

    “이 피디 주머니 털어 갈 생각은 없다는 소리.”

    “소송 거신다면서요?”

    이현의 물음에 한지우가 으음,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건 돈 때문이 아니라, 네 인생 주저앉히려고.”

    “개새끼.”

    이현이 짓씹듯이 내뱉자 한지우가 손을 까닥였다. 그 손짓의 의미를 알 수 없었던 이현은 삐딱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너 성격 나오니까 약간 내 취향이다?”

    그의 말에 이현은 팔짱을 풀고 저도 모르게 소름이 돋은 팔을 쓰다듬었다.

    전부터 확신했지만 이 자식은 변태였다. 그것도 상대를 억누르고 제압해서 억지로 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제 와 순종적으로 구는 건 또 자존심이 용납하지 않아서 이현은 주먹만 쥐었다 폈다 했다.

    “한 번 해. 그걸로 퉁치자.”

    “…….”

    “알잖아. 이 피디 뒷구멍에 이만큼 값 쳐 주는 사람도 없는 거.”

    그렇게 말하며 한지우는 유쾌하다는 듯 하하하! 하고 웃었다.

    “아니면 나한테 15억짜리 소송 걸려 보든가.”

    “…….”

    “내 밑에서 예쁘게 울면 없던 일로 해 줄게.”

    이현은 상대를 당장 죽이겠다는 눈으로 노려보았다.

    “못 믿겠으면 계약서 쓰든가.”

    한지우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새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현은 전혀 못 믿을 놈이 말하는 모양새를 노려보았다.

    “골라. 계약서 쓰고 한 번 대 줄지, 15억 소송 걸릴지.”

    얼굴로 담배 연기가 날아왔다. 기분이 가라앉은 이현은 입술을 짓씹었다. 그러고는 아주 짧게 씹어뱉듯 내뱉었다. ‘전자.’

    눈앞이 팽팽 돌았다. 지금부터 벌어질 일이 실감이 나지 않아서 그렇다.

    “잘 생각했어.”

    한지우가 씩 웃었다. 동시에 이현은 잃어버린 메모리 카드를 떠올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이 상황에서 나도 그걸 휘두르며 받아쳐 줬어야 하는데, 하며.

    이현, 네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뭐.

    아, 젠장. 희재는 어쩌지….

    이현은 절로 앓는 소리가 나오려는 입을 틀어막았다. 곤란해하는 티를 내면 한지우는 반대로 즐거워할 테니.

    “계약서는 어떻게 쓸까? 응?”

    한지우는 뻔뻔하게 이현의 곁에 와 앉았다. 싫은 놈과 나란히 앉게 되니 표정 관리가 안 되어 속이 뒤집히려고 했다. 그런 이현의 반응은 아랑곳 않고 한지우는 상체를 구부정하게 숙인 얼굴을 들여다보려고 했다. 어깨를 감싸듯 팔을 올리고 입을 가린 손을 괜히 툭툭 건드렸다.

    별것 아닌 터치도 기분 나쁜 이유는 그가 벌써 제 육체를 감정 없는 인형 다루듯 하기 때문일 것이다. 혹은 목줄에 걸려 도망갈 수도 없는 무력한 개를 발끝으로 자꾸 차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문득 불길한 예감에 몸이 오싹해졌다.

    한지우가 원하는 건 그냥 섹스가 아니라는 위기감이 몰려왔기 때문이다. 그가 분명 자신을 엉망으로 만들고 급기야 망쳐 버릴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주먹 넣어도 돼?”

    그때 별안간 풀숲이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현은 바람마저 스산하다고 생각하며 괜히 뒤를 돌아보았다.

    ‘설마 누가 듣는 건 아니겠지.’

    한지우는 반응 없는 이현을 흔들어 댔다.

    “어차피 해 본 적 있잖아. 보통 놀던 게 아닌 것 같은데. 그치?”

    그렇게 말하며 한지우는 부러 제 주먹 쥔 손의 두께를 보여 주었다. 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이 개새끼는 그냥 넣는 데서 끝내지 않고 안쪽에 주먹질을 해 댈 것만 같다.

    그러더니 그는 별안간 반응 없던 이현의 턱을 잡아 올렸다.

    “헉….”

    입술을 비집고 함부로 엄지손가락을 밀어 넣는 바람에 저도 모르게 입을 벌렸다. 한지우가 제 엄지손가락으로 안쪽 볼의 연한 점막을 힘주어 문질러 댔다. 얼마 정도의 악력을 버티는지 테스트라도 하듯이.

    내려다보는 눈길은 정상이 아니었다.

    이현은 연예인인 그의 신분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합의하에 가진 관계에서도 자신이 가진 폭력성을 함부로 드러낼 수 없었을 그의 이미지도 함께. 한지우는 젠틀함으로 정평이 난 사람이고 이현 역시 초반에는 그의 그런 점에 반했었다.

    문득 밝히지 않은 채로 묻혀 버린 그의 파혼에 대한 연유도 추측해 보게 된다. 이현의 첫사랑도 꼭 같은 이유로 평범한 섹스는 재미없다며 파혼을 했었다. 이름부터 취향까지 한지우는 첫사랑을 떠올리게 했다.

    이 남자는 고삐가 풀린 상태에서 과연 제게 무슨 짓을 하려 들까?

    강압적인 관계에 무척 익숙해졌다고 생각하는데도 상상이 안 되어 두려웠다. 제 반대편 팔뚝을 안은 채로 슬슬 주무르면서 쓰다듬는 손길도 역했다.

    그리고 그 모든 과거의 굴레에서 도망치고 싶은 것은 진심이었다.

    “놔요. 아직 사인 안 했어요.”

    한지우는 비싸게 군다며 투덜거렸다. 고개를 숙인 이현은 바지 안쪽에 감춰진 문신을 떠올리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이건 어떻게 가려야 하지.

    두 번째 촬영은 가능할까?

    무모한 시도일지도 모른다. 그의 약점을 잡는 것 이상으로 몸이 상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엄습해 왔다. 한지우에게 얌전한 방식으로 몸을 바치는 것은 불가능할 거라는 예상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다치거나 흔적이 남으면 그만큼 석희재를 속이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게 다 나을 때까지 못 보는 것도 싫었다.

    무엇보다도…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데.

    이유도 제대로 말해 주지 않고 잠수를 타거나, 혹은 이 일 모두를 들키게 된다면 그대로 끝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이현은 이미 자신에게 실망한 석희재를 본 적이 있었다. 그걸 떠올리는 것만으로 몸이 굳었다. 완전히 상심해서 저를 떠나는 석희재를 떠올린 이현의 안색은 한지우에게 피스트 퍽을 당하는 것을 상상할 때보다도 창백해졌다.

    “지금 할까?”

    “뭐?”

    조용한 사위를 두리번거리는 한지우를 본 이현은 얼이 빠져 되물었다.

    “밖이 좀 그러면.”

    “…….”

    “밑에 내 밴도 있고.”

    그렇게 말하며 한지우는 몸을 일으켰다. 이현은 앞서 걸어가는 그를 허둥거리며 붙잡으려 했다. 공연이 끝나고 석희재가 돌아올 시간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를 이 좁은 동네에서 활개 치도록 놔두었다가는 석희재와 딱 마주치게 될지도 모른다. 그건 피하고 싶었다.

    “아, 잠깐….”

    그때였다.

    이현이 몸을 일으키자마자 갑자기 등나무 기둥 뒤에서 벼락같이 기다란 그림자 하나가 뛰쳐나왔다.

    뻑!

    사람의 뼈와 뼈가 부딪치는 강렬한 소리.

    직후 한지우가 바닥에 풀썩 쓰러졌다. 맞지도 않은 이현도 풀썩 주저앉은 채로 잠시 넋이 나갔다. 갑자기 튀어나온 침입자에 놀란 나머지 뒷걸음질 치다가 제풀에 넘어졌기 때문이다.

    “희… 재….”

    이현의 입술 사이에서 신음 같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헉, 헉 숨을 몰아쉬고 있는 기다란 인영이 이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나찰 같은 얼굴의 석희재가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

    집에 돌아오는 길, 석희재는 이현의 옛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앞에서 밴을 한 대 보았다. 이 동네에서 보기 드문 차였다. 그것도 무척 수상한 위치에 세워져 있었다. 저 안쪽 작은 골목으로 향할 때면 대부분 이 근처에 차를 세우게 된다. 저 역시 밴에 탄 채로 이 집 앞을 빈번히 드나들었기에 알고 있었다.

    게다가 가까이에서 본 밴은 눈에 익었다. 그게 극장 주차장에서 종종 보던 것이라는 것을 알자마자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한지우의 것이었다. 설마 이현을 만나러 왔을까, 허겁지겁 도착한 집에 이현이 없었다. 게다가 거울 옆에 트레이닝복까지 벗어 놓았다….

    그걸 보자마자 석희재는 식은땀을 흘리며 집을 뛰쳐나와 무작정 동네를 쑤시고 다녔다.

    저 역시 배우였기에 추측이 쉬웠다. 두 사람이 만약 만났다면 카페나 술집이 아니라 인적 드문 곳으로 향했을 것이다. 밴은 아직 옛 골목 앞에 있으니 차를 타고 멀리 가지는 못했을 것이고.

    석희재는 입술을 짓씹으며 자신이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장소를 뒤졌다.

    가끔 이현과 산책을 하던 길을 습관적으로 쫓던 석희재는 어둠에 휩싸인 등나무 벤치 아래서 수상한 목소리를 들었다. 어둠에 눈에 익지 않아 가까이, 더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등나무 기둥에 몸을 숨겨 기대자마자 싫은 놈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주먹 넣어도 돼?”

    주먹?

    그 말을 듣자마자 눈앞이 깜깜해지며 다리가 휘청 풀리려 했다.

    주먹을 어디에 넣지?

    현기증이 났다. 동시에 석희재는 한지우에게 무력하게 뺨을 얻어맞던 이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어쩌다 두 사람이 여기에 숨어들어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가,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것은 이현의 마음이었다.

    사람 습관은 못 버린다고.

    설마 내 방식은 성에 차지 않아서….

    숨이 가빠 왔다. 자신이 과연 이성적인 흐름의 사고를 하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석희재는 그 와중에 멀리서 비춘 가로등 빛에 의지해 이현의 옷차림을 인지할 수 있었다. 석희재는 이현이 옷을 고른 모양새에도 상처를 받았다. 저를 만날 때처럼 ‘예쁘고 반듯하게’ 차려입고 한지우를 만난 게 이해가 안 되었다. 생각이 거기 닿자마자 눈이 돌아갔다. 재고 따질 것도 없이 뛰쳐나가 한지우의 낯짝에 주먹을 내질렀다.

    뻑!

    제대로 주먹이 들어갔다. 동시에 손등이 무척 욱신거렸다.

    “희… 재….”

    등 뒤에서 놀란 이현의 중얼거림이 들려왔다. 석희재는 원망 섞인 눈으로 이현을 돌아보았다.

    ***

    “네가 왜 여기에….”

    “…내가.”

    석희재는 후, 한숨을 쉰 후 머리를 뒤로 쓸어 넘겼다. 다 낫지 않은 곳을 또 얻어맞아 쓰러진 한지우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석희재는 길게 누운 한지우의 다리를 성가시다는 듯 발로 차며 이현에게로 넘어왔다.

    갑갑할 정도로 예의가 바르고 타인을 존중하는 석희재가, 아무리 감정이 안 좋다 한들 선배 배우를 발로 차는 것을 보고 이현은 내심 놀랐다. 저에게 성큼 다가온 석희재가 제 셔츠 멱살을 잡고 일으켜 올릴 때는 더욱더 놀랐다.

    “희재야. 너 사람을 패, 패면….”

    “그게 중요해?”

    석희재의 미간이 곱게 구겨졌다. 이현을 일으키느라 손등에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방금 전 한지우를 치면서 석희재의 손등에도 실금이 갔고, 그 여파로 벌써 손이 퉁퉁 부어오르기 시작했지만 둘 다 알아채지 못했다. 석희재는 분노로 이성을 잃어서, 이현은 그의 처음 보는 모습에 놀라서.

    이현이 눈이 쓰러진 한지우에게 흘끔 향하자마자 석희재가 저를 보라는 듯이 다시 추켜세웠다.

    “말해 봐요. 내가 사람을 때린 게 나빠?”

    “아니.”

    “설마 저 자식 걱정해?”

    ‘조용히 좀 말해!’

    이현은 버럭! 속삭였다. 그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서 꾹 눌러 참는 석희재의 관자놀이에 힘줄이 돋았다.

    석희재의 추측과 달리 이현이 한지우를 흘끔거리는 이유는 조금 달랐다. 그는 지금이라도 각목이나 쇠파이프를 찾아와 한지우의 머리를 때려야 하나 고민 중이었다. 그가 단기 기억 상실증에라도 걸리면 석희재에게 얻어맞은 것을 잊지 않을까 싶어서. 꿈틀거리는 한지우가 완전히 정신을 잃지 않은 것 같아 약간 초조했다.

    석희재 미친놈.

    당장 이번 주에도 한지우랑 공연을 서는 스케줄이 있을 텐데.

    폭력 사건에 연루되면 어쩌려고….

    그 시선을 오해한 석희재는 이를 까득, 깨물더니 이현을 붙잡고 질질 끌고 갔다. 그때까지도 이현은 한지우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그게 석희재를 미치게 하는지도 모르고.

    한지우의 시체- 이현의 희망 사항 -에서 적당히 멀어진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뗐다.

    “나는 형한테 뭐야?”

    “제정신이냐?”

    두 사람은 서로를 노려보았다. 이현은 여태 제 멱살을 잡고 있던 석희재의 손을 탁! 하고 털어 냈다. 그 손길에 상처받은 석희재가 끓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정신? 그래, 나 제정신 아냐.”

    석희재의 말에 이현은 고개를 돌리며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쉬었다. 그게 자신을 한심한 놈 취급하는 것 같아 석희재는 울컥, 서러움을 삼켰다.

    “너 네가 배우라는 자각이 없어? 어떻게 선빵을 치냐. 한지우한테 고소당해서 사회면에 이름 올릴래? 커리어 완전 망칠 일 있어?”

    “형은 내가 중요해. 배우인 내가 중요해?”

    날카로운 질문에 이현은 움찔했다. 그런 방식으로는 생각해 본 적 없는데, 그저 걱정스러웠을 뿐인데 석희재는 상처받은 것 같았다.

    “내 커리어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형부터 나한테 설명해.”

    석희재의 말에 이현이 눈을 들었다. 그 눈빛이 날카로웠다. 난생처음으로 사람을 때려 보았는데, 위기에서 구해 준 왕자님 대접까지는 아니라도 이런 취급을 받을 줄은 몰라서 석희재는 더더욱 슬픔을 느꼈다.

    “형….”

    “…….”

    “형 한지우랑… 저 새끼랑 무슨 일 있었잖아.”

    결국 오늘 영상에서 본 내용을 입 밖에 내자 이현의 손이 움칠 떨린다.

    “형 맞은 거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닌데… 그런데도 아무렇지 않아?”

    그 순간 이현의 안색이 아까와는 비할 수도 없이 창백해졌다.

    이현의 입에서 쉰 듯한 목소리가 나왔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아.”

    “…….”

    “…너 설마 봤어?”

    이현은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석희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그 물먹은 눈동자가 물음에 수긍하고 있었다.

    순간 이현은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앞으로 허물어지다 겨우 무릎을 짚었다.

    그 쓰레기 같은 취급을 보다니.

    너무나 수치스러워서 이현은 그 자리에서 혀를 깨물고 싶어졌다.

    아무것도 아닌 이들에게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받는 건 상관없다. 그러나 석희재에게만은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았다. 가진 것 하나 없이 몸으로 때워야 하는 제 진짜 모습을 하필이면 석희재가 봐 버렸다는 사실에 이현은 그냥 땅으로 꺼져 버리고 싶었다.

    “그런 취급 받고도….”

    “닥쳐.”

    그 순간 이현의 입에서 나온 험한 말에 석희재의 눈이 흔들렸다.

    “그걸 네가 왜 갖고 있어. 내가 진짜 그것 때문에!”

    이현은 격양된 감정을 억지로 푹, 꺾어 버리고는 다시 담담히 말했다.

    “줘.”

    “…….”

    “메모리 카드 내놓으라고.”

    그의 말을 거스를 수가 없어 석희재는 주머니에서 작은 카메라를 꺼냈다.

    이현은 메모리 카드를 낚아채듯 가져갔다. 순간 그에게 미움을 산 것 같아 석희재의 어깨가 흠칫 놀랐다. 이현의 눈이 그런 그에게 잠시 머물렀다가 흘기듯이 돌아섰다. 쭉 찢어진 긴 눈매 때문에 그렇게 보였을 뿐이지만. 아무튼 마음이 작아진 석희재는 이현이 저를 못마땅해한다고 느꼈다. 한숨을 폭 내쉬고는 한지우에게로 걸어가는 이현을 차마 붙잡지 못한 건 그런 이유 때문이다.

    메모리 카드를 쥔 손은 주머니에 찔러 넣고 털레털레 걸어가는 이현의 뒷모습은 반은 체념한 사람 같기도 하고 반은 건달 같기도 했다. 이현이 제게서 등을 돌리자마자 석희재는 기가 죽어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직후 이현의 행동은 일사천리였다. 이현은 한지우의 팔을 제 어깨에 걸쳐 끙, 하고 그를 부축해 일으켰다. 피 묻은 얼굴을 손으로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한지우가 벤치에 기대어 앉게 만들고는 더러워진 옷을 탁탁 털었다.

    두 사람의 꼴을 이해할 수 없어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석희재를 향해 이현이 말했다.

    “가서 얼음하고 티슈 좀 사 와.”

    “…왜?”

    “지혈하게.”

    그렇게 말하며 이현은 자꾸 고개를 숙이려 드는 한지우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밀어 하늘을 보게 만들었다. 석희재는 억울해하면서 터덜터덜 어둠 속을 빠져나갔다. 마지막으로 뒤돌아보았을 때 이현은 한지우의 뺨을 가볍게 흔들며 ‘정신 들어?’ 하고 묻고 있었다. 이현이 한지우에게 말을 놓는 것은 마음속에서 반항심이 치솟을 때 한정이었지만, 생각이 많아진 석희재에게는 그것조차 섭섭하게만 들렸다.

    그리고 동시에 석희재의 뒷모습이 저 멀리 가로등 불빛 바깥으로 사라지자마자 이현은 메모리 카드를 그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이게 뭔 줄 아냐?”

    한지우가 형형한 눈으로 이현을 슥 올려다보았다. 복수의 시간이 오자 왠지 짜릿한 기분이 들어 이현은 픽 웃었다.

    “내가 네 좆 빨아 주는 영상.”

    “……!”

    “네가 나 개처럼 패는 것도 찍혔어.”

    한지우는 대답 대신 목 안으로 신음을 흘렸다. 이현은 미간을 구기며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코와 입 안쪽이 부어 말을 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진짜 제대로 때렸구나.

    뭘 알고 조준한 건지, 아닌지는 몰라도… 한 대만 더 맞았으면 위험할 뻔했다. 이현은 이미 사라진 석희재의 분노한 얼굴을 떠올리며 살짝 몸서리쳤다. 얌전한 도련님인 줄로만 알았는데 사람을 팰 때는 고삐 풀린 야수가 따로 없었다.

    “소송 걸래요? 걸어 보세요.”

    “…흣….”

    “내가 증거 제출할게요.”

    “…이… 개자식들.”

    한지우의 입에서 발음이 퍽 뭉개져 나왔다. 오늘 공연이 없었으니 내일은 있을 텐데, 당장 노래는 어떻게 하나 싶다.

    “못 믿으시면 내가 직접 파일 보내 드리고.”

    한지우가 부릅뜬 눈으로 저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저를 깔아 눕히고 싶은데 그러지 못해서 울분에 찬 눈이었다. 제멋대로 날뛰고 싶은 것을 눌러 참는 표정.

    그걸 보자마자 이현은 제가 이겼다는 것을 알았다.

    승리감을 느낀 것은 잠깐이었다. 안도할 새도 없이 금세 씁쓸한 감정이 차올랐다.

    무력해진 한지우는 더 이상 멋져 보이지도 않았고, 그렇게 밉지도 않았다. 그저 발정 난 한 남자로 보일 뿐이었다.

    첫사랑 형의 이런 모습을 보았다면 제 환상을 좀 더 빨리 부술 수 있었을까. 지난날 자신의 잘못된 선택과 미련함이 여기까지 일을 끌고 왔다.

    이현은 고개를 푹 숙이며 한숨을 쉬었다.

    “그니까 작작 더럽게 놀지. 이런 거 찍힐 수 있다는 생각 한 번도 안 해 봤나?”

    “…….”

    “아님 이런 짓까지 한 게 나밖에 없나? 그것도 기분 더럽네….”

    “…….”

    “놀 거면 목적을 확실히 하든가…. 괜히 사람 착각하게 만들면서 다가오는 건, 너무 비열하잖아.”

    괜히 목이 메는 이유는 한때 한지우에게 조금이라도 환상을 가졌던 스스로를 인정하는 것이 힘들었기 때문이다. 과거의 그림자에 휘둘린 멍청한 저 자신을 떠올리다가, 이현은 제 행동의 원인을 어렴풋이 깨달았다.

    아, 그래서.

    몸 정을 감정으로 연결시키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건 저 자신이 이미 그런 상황에 너무나 상처를 받아서였다.

    가지고 놀 거면 그냥 그러겠다고 선언이라도 하지.

    왜 다들 한 번 깔아 눕혀 보고 싶은 거면서 괜히 친절하게 굴까.

    나 같은 놈은 마음이 헤퍼서 금세 속아 넘어가는데….

    그리고 가장 짜증 나는 점은….

    “야, 근데 개자식아. 너 때문에 씨발… 나 처맞는 꼴을 쟤가 봤잖아.”

    다시 생각해도 쥐구멍에 숨고 싶었다. 석희재 앞에서는 누구보다 당당한 연인이 되어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었는데 가장 추잡한 치부를 들켜 버리고 말았다. 맞은 것보다도 그게 제일 싫었다.

    “나한테 측은지심이 있는 게 다행인 줄 알아.”

    이현은 훅, 한숨을 불며 한지우를 윽박질렀다. 그의 멱살을 잡고 얼굴을 가까이 끌어올려 으르렁댔다. 그 순간 이현은 보기 싫은 것을 목격하고 말았다. 욕을 먹으며 멱살잡이를 당한 한지우가 앞을 세우고 있었던 것이다. 불룩한 앞섶을 보자마자 이현은 으아악! 발작하듯 비명을 지르며 멱살을 놓았다.

    “헉… 헉….”

    이현은 약간 멀찍이 떨어져서 숨을 몰아쉬었다.

    ‘진심인가. 욕 들어 처먹고 세우다니 이 새끼 진짜 또라이다….’

    어렵게 놀란 가슴을 진정시킬 때였다. 마침 저 멀리 가로등 불빛 아래 늘씬한 인영이 나타났다.

    석희재가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로 이쪽으로 힘없이 걸어오고 있었다. 걸음걸이가 무척 처연했다. 휭, 바람이 불어 석희재의 머리카락을 흐트러뜨렸다. 그 모든 게 그림 같았지만 이현은 한지우와 둘이 있는 것이 소름 끼쳐서 괜히 발을 동동거리며 석희재가 빨리 걸어오기만을 바랐다.

    “사 왔어.”

    석희재는 이현의 앞에 비닐봉지를 내밀었다. 그 안을 살펴본 이현은 석희재에게 지시했다.

    “잘했어. 가서 지혈해 드려.”

    “뭐?”

    석희재는 다소 충격받은 표정으로 이현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자신에게 그런 짓을 시킬 수 있느냐는 얼굴이었다.

    “네가 때렸으니까 네가 닦아 드리라고.”

    “…….”

    논리적이었지만 수긍할 수 없는 말에 석희재가 묵묵부답으로 서 있자 이현은 가까이 가서 석희재의 귀에 속삭였다.

    ‘앞으로 영영 안 볼 거냐? 연기 잘하잖아. 가서 반성하는 척해.’

    ‘…….’

    ‘하면 집에 가서 빨아 줄게.’

    석희재는 이현의 속삭임이 남아 화끈거리는 귀를 덥석 가리듯이 쥐었다. 그러고는 물끄러미 이현의 담담한 표정을 내려다보았다. 장난기 하나 없는 이현의 얼굴은 다소 복잡해 보였다.

    “…….”

    절대로 그의 제안에 혹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냥 그의 의견을 존중하고 싶었을 뿐이다. 석희재는 이현을 길게 돌아보며 뒤돌았다.

    그러고는 비닐봉지를 부스럭대며 한지우의 앞에 가서 섰다. 이현이 시킨 대로 물티슈에 얼음 조각을 덜어 내고 한지우의 코 위에 소중하게 얹었다. 한지우가 기가 차다는 듯 올려보았지만 입을 꾹 다물고 피를 닦아 드렸다.

    “선배님, 죄송합니다. 잘못했습니다. 제가 눈에 뵈는 게 없어서.”

    석희재가 기계처럼 사과의 말을 읊조리자 한지우가 황당하다는 듯이 웅얼거렸다.

    “…너네… 뭐냐?”

    석희재는 곧바로 눈을 치켜떴다.

    “제가 피디님 짝사랑해요.”

    “…….”

    “선배님도… 선배님이 좋아하는 사람한테 누가 주먹, 넣는다 그러면 화나실 거잖아요.”

    방금까지 로봇 같던 석희재의 목소리는 ‘주먹’ 부분에서 감정이 실렸다. 성의 없는 석희재의 손을 치우며 먼 곳을 바라보았고, 이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매니저를 부르는 것 같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이현은 저도 모르게 정지한 채로 석희재의 말을 곱씹고 있었다.

    제가 피디님 짝사랑해요, 라고 말하는 석희재의 목소리가 귓가에 여러 번 울렸다.

    그 말이 가슴에 오래 남았다.

    자신이 어떤 오해들을 석희재를 위해 뒤집어쓰려고 했던 것처럼, 그 역시도 자신이 벌인 감정싸움에 이현이 빚지는 느낌을 받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하는 건지도 모른다.

    한지우는 떠났다. 인기척 없는 어둠 속에서 석희재가 사 온 얼음 컵이 빠르게 녹았다. 각 얼음들이 달그락거리며 가라앉는 소리를 냈다.

    석희재는 그곳으로 걸어가 얼음 컵에 담긴 물을 바닥에 뿌렸다. 젖은 휴지와 쓰레기는 봉지에 담았다.

    뒷정리를 모두 끝내고도 석희재는 어떤 얼굴로 뒤돌아야 할지를 몰랐다.

    아까처럼 이현이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어쩌나, 그는 그것만이 걱정이었다.

    “…너 남자한테 관심 없다고 말했었잖아.”

    “…어?”

    이현의 목소리에 석희재는 뒤돌았다. 고개를 수그리고 있어 이현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한지우한테… 남자한테는 관심 없다고.”

    “…….”

    “그런데 그렇게 말해 버리면 어떻게 해.”

    “…뭐?”

    “남자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어떡하냐고. 이다음부터 저 새끼가 너한테 질척대면 어쩌려고….”

    이현의 목소리가 흔들리는 것 같아 석희재는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설마 하며 급히 뺨을 붙잡고 얼굴을 들어 올리니 그는 약하게 울먹이고 있었다. 우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하는 이현은 잡힌 얼굴을 홱 빼내고 훌쩍였다.

    석희재는 미간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뭐가 중요해.”

    “…….”

    “그리고 그걸 형이 어떻게 알아.”

    “…들었으니까.”

    “…….”

    “한지우가 너 호텔에 오라고 한 날, 나는 나만 부른 줄 알고 갔어. 갔는데…. 네가 거기 있었어. 한지우는, 내가 쓰리썸 하자고 한 것처럼, 그때 그 자식이 그렇게 거짓말을 해서….”

    “…….”

    “나는 그래서 네가 나한테 더 화가 난 줄 알고… 그리고 선배는 석희재도 아니고 누가 나 따위한테 공들이겠느냐고.”

    이현의 말에는 두서가 없었다. 누군가에게 쏟아 내고 싶은 것과 말하고 싶지 않은 것들, 석희재를 위해 숨기고 싶은 사실과 저를 보호하기 위해 비밀에 부치고 싶던 것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맺힌 응어리를 풀고 싶은 마음이 한데 뒤섞였기 때문이다.

    이현은 주저하다가 중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영상에 찍힌 날이 그날이야.”

    “…….”

    “잊어 주라. 좋은 일도 아니고….”

    이현은 그렇게 툭 내뱉었다. 수치스러워 어쩔 줄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리고 사건의 흐름을 느리게 이해한 순간 석희재는 이현을 꽉 끌어안았다.

    저와 헤어진 후, 자기편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은 이현은 어떻게든 혼자 상황을 감내해 보려고 발버둥 쳤을 것이다. 한지우와 억지로 맺은 관계, 그리고 그 흔적이 남은 메모리 카드가 필요했던 이유도 전부 이해할 수 있었다.

    유나연이 말했었다. ‘그 헛소문들을 믿느냐’라고. 그게 진실이었다. 제 가치를 짓밟히고 자존심은 넝마가 되어 뺨까지 얻어맞은 이현의 마음이 정상일 리 없었다. 석희재는 멍든 부위를 어루만지듯이 이현의 등, 심장 부근을 여러 번 쓰다듬었다.

    “내가 그 영상 본 거 싫어요?”

    “싫어.”

    “왜….”

    “병신같잖아….”

    “그게 왜 병신이야.”

    “…….”

    “형이 자기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한 일인데 왜. 형은 자랑스러워해야 해. 또 아무도 다치게 만들지 않았잖아.”

    그는 부끄럽다고 말하지만, 석희재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식으로라도 들키지 않았다면 아마 평생 숨겼을 테니.

    몸의 상처는 낫는다. 그러나 마음의 상처는 낫지 않는다. 그렇게 말할 줄 아는 사람이 왜 자신의 괴로움은 가볍게 치부할까?

    석희재는 이제야 이현이 사랑하는 방식을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주 약간은….

    “형은 왜 나만 걱정해.”

    부드럽게 껴안고 속삭이자 손안에 움켜쥔 이현의 날개뼈가 크게 부풀었다 가라앉았다.

    “내가 아직 어려서… 형을 자꾸 한 박자 늦게 이해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석희재는 이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이현의 숨소리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형이 아프면 나도 아파.”

    세상 모두가 이현을 하찮게 여기고 손가락질한다 해도 저만은 이현의 편이 돼 줄 것이다. 자신마저 등져 버리면 이 외로운 사람은 자신이 외로운지도 모르고, 망가져 가는지도 모른 채 소모되고 만다.

    “내가 내 감정을 앞세우다 형을 외롭게 만들게 하지 말아 줘.”

    등나무 아래 바람이 불었다. 이현은 석희재의 품 안에서 눈을 질끈 감고 많은 말을 삼켰다. 추하고 못난 모습을 보여도 그것마저 사랑으로 감싸 안아 주는 사람이 있다. 누군가의 앞에서 이렇게 흉하게 우는 얼굴은 보이고 싶지 않은데 석희재는 그 얼굴마저 새롭다는 눈으로 자꾸만 들여다보려 한다. 그 모든 게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위로받고 싶은 것도 사실이었다. 많이 아팠다고…. 호텔 방에서 도망칠 때는 다리가 풀릴 정도로 겁이 났다고. 한지우의 앞에서는 덤덤한 척했지만 사실 그날 일은 트라우마가 될 만큼 힘들어서 영상도 여태껏 다시 돌려 보지 못한 거였다고 털어놓고 싶었다.

    그 모든 것을 입 밖에 내기도 전에 석희재는 앞서 저를 위로해 주었다.

    “나는 형만 생각하고 형은 내 생각만 하고.”

    “…….”

    “우리 서로 사랑하는 거 맞잖아요.”

    “흐으으….”

    이현은 수긍하고도 싶고, 석희재보다 어른스럽게 그를 위로해 주고도 싶었으나 치미는 감정 때문에 둘 다 실패했다. 대신 석희재의 목을 조르듯이 그의 목덜미에 억세게 와락 매달렸다.

    그리고 석희재는 목을 졸려 캑캑대면서도, 이현의 우는 얼굴을 처음으로 미소 지은 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자꾸만 웃음이 났다. 방금까지 한지우를 건달같이 협박하던 사람은 어디로 가고, 눈앞에 남은 것은 생각이 표정에 그대로 드러나는 소년 시절의 그였기에.

    <6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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