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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매듭짓기 (20/27)
  • 20. 매듭짓기

    이현은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밤에 가까운 새벽빛이 내려앉은 방 안, 서로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운 거리에 비현실적인 조형을 가진 석희재의 얼굴이 있었다. 이현은 눈을 뜨고 나서도 한참이나 속눈썹이 축축하게 젖어 든 석희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어떤 감정을 담고 있어도 단 한 순간도 추해지지 않는 아름다운 얼굴.

    손을 들어 그 얼굴의 윤곽을 손가락의 등으로 따라 그려 보는 이현의 심장이 욱신거렸다.

    욕심이 나지 않는다면 거짓말이겠지.

    이현은 오래전의 기억을 곱씹었다.

    생일 밤, 선물처럼 이 남자가 제 눈앞에 뚝 떨어졌다. 어플로 만나는 하룻밤 상대의 수준이란 다 거기서 거기라 석희재 같은 남자가 등장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었다. 이성애자일 게 분명한 이 잘난 남자가 저처럼 닳고 닳은 남자와의 원나잇을 어떻게 생각할지 겁이 나면서도 놓치기가 싫었다. 모텔이 아닌 호텔로 이끈 것은 그저 기가 죽기 싫어서였을까, 아니면 석희재와의 첫 만남이 제게도 특별해서였을까.

    호텔 룸에 들어서자마자 덥석 아래를 입에 담으려 달려드는 저를, 석희재는 신사적인 손길로 밀어냈다. 무릎 꿇은 몸을 일으켜 키스해 주던 것이 실은 다정한 거절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럼 그렇지, 역시. 체념하면서도 입이 썼다. 잠들 때까지 나직하게 제 말에 응해 주던 목소리도 기억에 남았다. 그날도 꼭 지금처럼 먼저 눈을 떠서 석희재의 얼굴을 한참 내려다봤던 것 같다.

    좋아하는 것을 인정하고 나니 첫 만남부터 제 마음이 가리키던 방향은 너무 뻔했다.

    모든 건… 나 아닌 누구라도 이 남자와 사랑에 빠졌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스스로의 마음을 하찮게 여긴 제 탓이었다.

    이현은 한동안 묻어 두었던 과거의 일을 다시 떠올렸다.

    돌이켜 보면 자신이 가장 괴로웠을 때는 첫사랑이 자신을 온갖 괴로운 방법으로 휘두를 때가 아니라….

    다정한 순간들이었다고.

    희망을 갖게 만들고, 또 그만큼 원망하게 만든 순간들이 가장 미웠다.

    ‘너도 그랬을까.’

    이현은 석희재를 내려다보았다.

    석희재는 3년이나 남자와의 섹스에 관심을 가진 헤테로를 연기해 왔다. 그게 짝사랑을 숨기기 위한 방패인 줄도 모르고, 자신은 그저 그 거리감에 안심하면서 타인에게는 잘 보이지 않는 모습들을 잔뜩 노출했다. 그 무릎에 머리를 기댄 채로 징징대고, 술에 취해 전화를 걸고…. 질척한 밤을 보낸 후 다음 날 아침 부스스한 꼴을 하고 일어나, 돌아가려는 석희재를 붙잡아 함께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다.

    그것들이 네게는 다 희망 고문이었을까.

    이현은 무거운 한숨을 내쉬었다.

    저 역시 스스로를 속여 왔다. 보통의 원나잇 상대들과는 절대로 하지 않는 일을 하면서, 그래도 석희재는 내게 애정이 없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생각하며 조금씩 선을 넘었다. 그러면서 항상 나무젓가락을 쪼개 주는 그 친절함은 원래 그의 몸에 배어 있는 걸 거라며 애써 편한 대로 납득했다.

    그때 자고 있던 석희재의 입에서 희미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울지 마.”

    석희재를 보며 무의식적으로 내뱉은 말이 육성으로 흘러나왔다. 제 목소리가 완전히 잠겨 있어 이현은 조금 놀랐다.

    일어나자고 마음을 먹고 난 후에도 한참을 머물러있던 이현은, 방이 어슴푸레 밝아질 때에야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내려다본 제 셔츠며 슬랙스는 완전히 구겨져 있었다. 이 차림으로 침대를 차지한 게 미안해서 절로 한숨이 흘러나왔다.

    ‘끝을 내야겠지.’

    저를 위해서도, 석희재를 위해서도 완벽히 마무리를 지어야 했다.

    그는 그렇게 한참 석희재를 내려다보다가 소리 없이 방을 나섰다.

    ***

    안도감 때문인지 끝도 없이 잠이 밀려와 석희재는 간만에 수면제도 없이 푹 잤다. 평소 일어나던 시간의 알람도 듣지 못한 채로, 콜 시간이 임박한 오후 1시가 되어서야 눈을 떴다.

    석희재는 옆자리를 더듬으며 몸을 일으켰다. 이 상황에 지나치게 잘 잔 스스로에게 질리는 기분을 느끼면서, 아직 꿈과 현실의 경계에 서 있는 것 같은 멍한 정신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저만 누워 있는 휑한 침대였다. 이현을 눕힌 자리를 비워 놓고 누워 있던 것을 보니 지난 밤 그를 여기로 옮겨 준 것은 꿈이 아닌데, 그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로 석희재는 잠시 생각에 빠졌다. 꿈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여전히 머리가 멍했다.

    아직 열일곱 살인 이현이 ‘이제 일어났느냐’라며 저 방문을 열고 들어올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를 놀이터에서 껴안았던 것이 진짜 있던 일처럼 생생했다. 마치 이현의 과거 속 야구부 친구가 진짜 저가 되기라도 한 듯….

    석희재는 저 스스로를 픽 비웃었다. 내심 그 친구를 엄청 질투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이현은 씻기 위해 욕실에 있거나 아니면 뭘 주워 먹으며 거실에 있을지도 모른다.

    아, 아니다. 출근을 했겠구나.

    데뷔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보통 사람들의 생활 패턴을 감쪽같이 잊었다. 머리를 흔들어 잠을 떨쳐 낸 석희재는 비몽사몽 한 정신으로 침대에서 내려왔다. 그래도 걸음걸이가 가벼웠다. 결국 이현을 사랑하는 것이 저의 안식이었다. 잠을 자면서도 오늘 아침을 고대했다. 두 사람의 관계는 이전과는 전혀 다를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석희재는 커튼을 치고 환히 쏟아지는 햇살을 받으면서 이현에게 무슨 말로 운을 띄워야 할지를 고민했다. 극장에서 만나게 될까? 아닐 수도 있었다. 이현은 최근 극장에 잘 찾아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그의 사생활에 대한 불편한 소문이 돌고 나서는 극장 출입을 자제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여러 개의 공연을 맡는 일도 많다고 했으니 다른 작품의 사전 준비 때문에 바쁠 수도 있고….

    욕실로 가 얼굴을 씻은 석희재는 물에 젖은 제 얼굴을 거울로 꼼꼼히 살펴보았다. 푹 자서 피부가 말간 느낌이 드는 것 말고는 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간밤에 너무 울어 눈꺼풀이 조금 부었고 흰자는 충혈되어 실핏줄이 돋아나 있었다. 이현이 가장 좋아하는 것 중 하나가 제 얼굴인데 최근 완전히 끝났다고 생각해 관리에 많이 소홀했다. 나이만 믿고 나태해져서는 안 될 것이다. 석희재는 다시금 마음을 다잡았다.

    그렇게 옷을 갈아입고 나서 석희재는 극장으로 출근하기 위해 차에 올랐다. 도착 시간을 계산해 보니 늦잠을 자는 바람에 지각할 확률이 높았다. 신인인 석희재는 분장 콜이 가장 빠르기 때문에 그가 늦으면 이후 차례가 조금씩 밀려 분장 스태프들이 고생스러워진다. 걱정하며 오늘 늦을 것 같다고 미리 연락하니 다행히도 다른 배우부터 하고 있겠다며 무난한 대답이 돌아왔다.

    지각 때문에 조금 조바심이 났지만…. 그래도 안전 운전이 최우선이다. 아직 이현과 하고 싶은 일,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사고는 안 될 말이었다.

    도로를 달리면서 석희재는 이 차를 사며 바랐던 것을 떠올렸다. 우선은 옆자리에 이현을 태우는 것. 본의 아니게 그 소원을 이루기는 했지만…. 자신이 진짜 원하는 건 따로 있었다. 바로 이현이 이 차를 운전하는 것을 조수석에서 지켜보는 것이다.

    그것도 조만간 가능해질 것이다. 그는 평소 꿈꾸던 슈퍼 카의 운전대를 잡아 보며 얼마나 들뜬 표정을 할까.

    그걸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미소가 지어졌다.

    극장에 도착했을 때는 20분 정도가 지나 있었다. 분장실에 도착해 차 키를 내려놓자마자 누군가가 문을 노크했다. 대답도 듣기 전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온 것은 유나연이었다.

    “있었구나!”

    “방금 왔….”

    “왜 이렇게 늦었어요?”

    약간 숨을 헐떡이는 유나연의 표정이 이상했다. 혼이 쏙 빠진 듯했다. 그녀의 손목에는 작은 쇼핑백이 걸려 있었는데, 제 손에 뭐가 들린 줄도 모르고 열려 있는 분장실 문을 닫으려 팔을 휘둘렀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정신없어 보였다.

    “손에 가방….”

    “으앗!”

    석희재가 그걸 지적하기도 전에 반쯤 벌어진 종이 가방 안에서 잡동사니가 후드득 굴러떨어졌다. 유나연이 질겁하며 그걸 주워 담았다.

    “미안해요! 내 정신 좀 봐.”

    “주워 드릴게요.”

    “아니,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라….”

    그러나 바닥을 구르던 물건을 하나, 둘 줍던 석희재의 표정 역시 굳어 들어갔다. 그러고는 곧 유나연처럼 낯빛이 금세 창백해졌다.

    석희재가 손에 든 것은 다름 아닌 제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작은 온습도계, 립밤, 수선을 미루고 있던 시곗줄 같은 것들….

    이현의 집에 하나둘씩 놓고 갔던 자신의 흔적들.

    “이게 왜….”

    나연 씨한테 있어요.

    묻기도 전에 유나연이 석희재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빨리! 방금 나 이거 이 피디님이 주고 갔단 말이에요. 분장실에 큰 가방 몇 개 더 있어. 옷가지랑 그런 거….”

    “네?”

    “근데 지금 그거 챙길 때가 아니라, 아니 대체 오늘 왜 이렇게 늦었어요? 희재 씨 아직 출근 안 했다니까 나 주고 갔다고요!”

    “네?”

    유나연을 따라 출연자 전용 출입구로 뛰면서 석희재는 같이 헐떡거렸다. ‘네?’ 하는 덧없는 물음만 기계처럼 반복하는 머릿속이 어지러웠다.

    이걸 왜 갑자기 돌려준단 말인가. 꼭 완전히 선을 긋는 것처럼….

    설마,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자면서도 오늘 아침을 고대하던 저와는 달리, 이현은 전혀 다른 결정을 내렸을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겁이 나서 다리가 풀리려 했다.

    “간 지 얼마 안 됐어요. 내가 피디님 살살 유인해서 자기 분장실까지 갔는데 웬일로 희재 씨가 안 오는 거야. 평생 지각도 안 하던 사람이 왜 오늘 하필… 빨리 쫓아가요!”

    “잠시, 잠시만….”

    막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석희재는 휘청거리며 벽을 짚었다. 유나연이 발을 동동 구르며 말했다.

    “대체 무슨 일 있었어요? 둘이 어제 만났던 거 맞죠?”

    “맞아요, 그런데….”

    “차 몰고 오신 것 같지는 않던데, 아직 정류장에 있거나 택시 잡고 계실 수도 있으니까…. 빨리!”

    그녀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석희재는 거리로 내달렸다.

    가장 가까운 버스 정류장, 이현이 습관처럼 택시를 잡곤 하는 그 차도까지 미친 듯이 뛰었다. 사람들이 이목이 모였지만 눈치채지 못했고, 주변의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헉, 헉, 숨을 몰아쉬는 제 호흡 소리만이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왜? 왜, 이 짐을 돌려주고 갔을까.

    왜 쫓기는 사람처럼 얼굴도 보지 않고 떠나 버렸을까.

    마지막으로 유나연을 따라 분장실에 기웃거린 건… 충동적으로 내 얼굴을 한 번 보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나는 그 마지막 미련을 붙잡아야 했는데도, 내가 너무 늦어 버려서….

    석희재는 텅 빈 도롯가에 멈춰 섰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거기에 이현을 닮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행인들이 저를 흘끔거리는 것도 눈치채지 못하고 석희재는 급히 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연결이 되지 않았다.

    다급한 마음에 석희재는 전화번호부를 훑었다. 그의 눈에 이현의 회사 내선 번호가 눈에 띄었다. ‘이현 피디입니다’라고 전화를 받는 사무적인 목소리가 궁금했지만, 공사 구분에 철저한 그의 성격 때문에 정작 사귈 때에는 한 번도 걸어 보지 못했던 번호였다.

    석희재는 주저 없이 그 번호를 눌렀다.

    하지만 들려온 것은 생소한 여자의 목소리였다.

    - 홍보 팀 신아름입니다.

    내선을 잘못 눌렀나, 생각하면서도 석희재는 침착하게 말했다.

    “저… 석희재입니다.”

    - 네?

    뜬금없이 걸려 온 전화에 여자는 당황스러운 물음으로 답했다. 그건 배우가 회사로 직접, 그것도 팀 막내에게 전화하는 일이 드물기 때문이었지만 석희재는 자신이 당당하게 이름 석 자만 이야기해서 그런 줄 알고 낯부끄러워하며 설명을 덧붙였다.

    “배우인데요. 지금 공연하는 배우, 석희재.”

    - 아! 배우님 무슨 일로 전화 주셨어요?

    그 사이에도 도로에는 택시들이 잠시 정차했다가 사람을 내려놓고 떠났다. 버스 정류장에서는 사람들이 오르내렸다. 석희재는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입을 열었다.

    “이 피디님은 혹시 외근 중이세요?”

    - 네?

    “제작 팀 이현 피디님이요. 방금 극장에 왔다가 가셨는데….”

    - 피디님… 이요? 극장에요?

    말끝을 흐리는 여자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석희재는 불길한 기분에 마른침을 삼켰다.

    - 피디님 저번 달에 퇴사하셨는데요.

    ***

    만나기는 만났겠지? 그러니까 이렇게 늦는 거겠지.

    이야기가 길어지나… 무슨 얘기 하는지 궁금한데.

    유나연은 뛰쳐나간 석희재를 대신해 그의 분장실을 지키고 있었다. 접이식 의자에 걸터앉아 남의 연애사에 대한 호기심으로 시간을 죽이던 중, 분장실 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희재는 아직 안 왔네? 조금 늦는다더니.”

    문을 연 것은 분장 스태프였다. 안을 한 번 기웃거린 스태프는 찾는 이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다시 돌아나가려 했다. 유나연은 벌떡 일어나며 석희재가 두고 간 가방과 차 키를 가리켰다.

    “아, 오기는 왔어요. 그런데….”

    “잠깐 나갔구나? 그럼 오면 불러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다시 분장실 문이 닫혔다. 유나연은 석희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 나이에는 연애사가 목숨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알지만, 그러니 존중해 주고 싶었지만…. 거기 몰두하다가 일터에 있는 사람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은 석희재도 원하는 바가 아닐 것이다.

    “뭐야, 안 받아.”

    연달아 세 번을 걸어 봤지만 한 번은 통화 중이었고, 뒤의 두 번은 받지 않았다. 이상하다고 여긴 유나연은 극장을 나서 직접 석희재를 찾으러 갔다. 이현 피디와 만났더라도 공연이 있으니 멀리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근처 카페나 길목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가능성이 컸다.

    유나연은 극장 백스테이지를 찾아왔던 이현의 모습을 떠올렸다. 일하다 들른 사람 같지 않게 청바지에 티셔츠 차림인 데다가 얼굴에는 마스크까지 끼고 있었다. 여기에 자신이 들른 것을 사람들이 알아보지 않기를 원한다는 양.

    하지만 유나연이 생각하기엔 그 차림이 오히려 더욱 눈에 띄었다. 일단 길쭉하고 호리호리한 체형만으로도 이 피디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고, 마스크를 쓰고 극장 뒷문의 전용 출입구로 드나드니 혹 공연에 출연 중인 배우인가 싶어 이목을 모았던 것이다.

    그렇게 저 혼자서만 눈에 안 띄는 줄 알고 머뭇거리며 백스테이지로 들어온 이 피디는 유나연을 보자마자 살았다는 얼굴로 팔을 붙잡아 왔다.

    ‘이거 희재 건데 돌려주려고요. 걔 지금 있어요?’

    ‘아, 분장실에 있을 텐데…. 잠시만요. 피디님.’

    자신이 이현과 석희재의 연애사를 안다는 것을 티 낼 수 없는 유나연은 지극히 당황하면서도 평정을 가장하고 그의 발을 묶어 놓았다. 하지만 이현은 잠시도 안절부절못하면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극장에서 뛰쳐나가려 들었다. 꼭 여기서 원수를 마주칠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나는 게 아니라 밀폐된 극장 백스테이지에서 만나기 마련이다. -

    아무튼 헤어진 연인 사이에 서로의 소지품을 정리한다? 그건 절대 좋은 시그널이 아니었다. 지금까지는 서로 간의 감정적 갑을 관계를 재정립하는 묘한 기 싸움에 가까웠다. 그러나 어느 한쪽이 정말 끝내버리기를 원한다면 그만큼 무의미한 싸움도 없다.

    ‘아쉬운 쪽이 죽자 사자 매달려야지 뭐.’

    부디 석희재가 이현을 붙잡아 건설적인 대화를 하고 있기를 바라며 유나연은 골목 여기저기를 쑤시고 다녔다.

    그러던 그녀의 눈에 저 멀리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는 사람의 모습이 들어왔다.

    “왜 혼자 저러고 있어?”

    그녀는 정류장으로 후다닥 달려갔다.

    “희재 씨?”

    널찍한 어깨를 처연히 축 늘어뜨리고 구부정하게 앉아 있는 것은 석희재였다. 그는 유나연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겨우 힘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가가 붉은 것을 보고 유나연은 그가 이미 버스를 놓쳤다는 것을 알았다.

    “피디님 갔어요?”

    “…….”

    “말해 봐. 진짜 끝났어요?”

    “…….”

    “여지도 없이 끝난 거야?”

    석희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답답해진 유나연이 그의 멱살을 잡고 일으킬 뻔했을 때였다.

    “없었어요.”

    “…응?”

    “없었다고요. 못 만났어요.”

    “그럼 왜 한 시간이나 혼자 여기….”

    유나연은 석희재의 유약한 멘탈에 새삼 기겁했다. 쫓아간 상대가 없다는 사실만으로 여기 주저앉아 버렸단 말인가? 일단 극장으로 돌아가자며 그를 이끌자 석희재는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질질 끌려왔다. 그러면서도 가끔 숨을 몰아쉬고, 큰 손으로 눈가를 가리며 고개를 후드득 떨어뜨렸다.

    “나연 씨도 알았어요? 형….”

    “네?”

    “현이 형 그만둔 거 알았어요?”

    “무슨 소리예요?”

    “퇴사했대요. 저번 달에.”

    “완전 처음 듣는 얘기….”

    이번에는 유나연마저 발목이 묶였다.

    “뭐야. 그런 말 없었잖아요.”

    “…….”

    “그럼 설마….”

    그녀는 개막 직전의 아웃팅 사건에 대해 떠올렸다. 새로 들어온 컴퍼니 매니저와 이 피디가 사적인 문제로 엮여 소란을 일으켰던 것도. 그래서 이 피디 대신 다른 직원들이 돌아가면서 컴퍼니 룸을 지키던 것은 그저 소란을 잠재우기 위한 회사 측의 임시 조치라고 생각했다. 원래도 바쁜 사람이니까, 그래도 함께 공연을 만든 사람이니 끝날 때쯤에는 다시 얼굴을 비추겠지. 그렇게 믿으며.

    “그만둔 게 아니고 잘린 건가….”

    유나연의 말에 석희재는 괴로운 얼굴로 고개를 돌렸다. 꾹 다문 입술이 울음을 삼키고 있다는 것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래도 이건 너무… 너무 그렇잖아.”

    “…….”

    “공지도 없었고 인사도 못 드렸는데? 어디 가신다는 얘기도 못 들었는데….”

    유나연은 황당함에 말을 끝맺지 못했다.

    석희재에게 혹독한 연인이었을지언정 이현은 좋은 피디였다. 극장에서는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이현의 사생활에 대해 좋지 않은 소문이 돌 때에도, 유나연은 눈살이 찌푸려지는 지저분한 일화들을 믿지 않았다.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아니까.

    그래서 극장에 초대받지 못한 사람처럼 그렇게 몰래….

    “형 찾으러 가고 싶어요.”

    석희재가 입술을 꾹 깨물며 말했다. 이미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는 눈이었다. 좌절감 가득한 석희재의 눈을 응시하며 유나연은 고개를 저었다.

    “안 되는 거 알잖아요.”

    “…….”

    “이제 분장 받고 공연 올라가야죠.”

    “…….”

    “무대 끝나고, 그리고 또 시간 있을 거예요. 그때 연락해 봐요. 집으로 찾아가도 좋고…. 응? 마음은 알겠지만, 사람이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져 버리는 거 아니니까.”

    유나연은 석희재를 달래 가며 그렇게 다시 극장으로 돌아갔다.

    석희재는 공연 전부터 비정상적으로 식은땀을 흘려 댔고 결국 공연 도중 탈수 증세를 일으켰다. 급하게 수액을 들고 달려온 매니저는 무슨 일이냐고 물었지만 언제나 그랬듯이 석희재는 묵묵부답이었다. 유나연은 석희재가 혼자 분장실에 틀어박힐 때마다 계속 이현과 연락을 시도했을 거라는 것, 그리고 그 모든 시도가 전부 무산되었다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석희재는 그날 공연을 끝까지 마쳤다. 다만 마지막 신을 끝내자마자 탈진하는 바람에 커튼콜에는 올라가지 못했다. 커튼콜, 석희재의 차례에 비어 있던 중앙 자리에는 핀 조명만 쏘아졌다. 석희재가 마지막 연주를 마치고 조명이 완전히 암전되기도 전 바닥에 털썩 쓰러져 버리는 것을 목격했던 관객들은 그 빈자리에 박수를 보냈다.

    컨디션 문제로 팬과의 만남도 접은 석희재는 병원으로 향했다. 깊은 새벽, 혼자 일어나 걸을 수 있을 만큼 나아지자 부득불 병원을 나서 이현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면서 석희재는 제가 생각하기에도 저 자신이 과하다고 생각했다. 말마따나 연기처럼 홀연히 사라진 것도 아닌데, 멀쩡히 살아 있는 사람인데, 심지어 얼마 전까지는 제집으로 찾아오던 그를 내치기까지 했는데…. 이토록 초조한 이유가 설명이 안 되었다.

    석희재에게 사랑은 병이었다. 다 되었다고 생각한 순간 손에서 빠져나가려 하니 미칠 것 같았다. 꿈은 현실과 반대라더니, 사랑해 주겠다는 약속은 영영 그럴 일은 없을 거라는 반어법의 저주였을지도 모른다.

    수년을 방문해서 길목 구석구석이 익숙한 이현의 집에 도착해 석희재는 벨을 눌렀다. 집 안쪽에 벨이 울리는 소리가 공허하게 울렸다.

    왠지 모르게 그 울림이 무척 생소하게 느껴졌다. 석희재는 한동안 거기 서서 계속해서 벨을 눌렀다.

    “형, 거기 있는 거 다 알아.”

    삼십 분, 한 시간… 석희재는 문을 쾅쾅 두드려 댔다. 벨을 누르다가 문을 두드리기를 반복하니 옆 건물 윗집 어딘가에서 창문으로 석희재를 내려다보다가 신경질적으로 문을 닫아 버렸다.

    “그만 무시하고 나와.”

    무시당한다고밖에 여길 수 없는 상황이었다. 석희재는 입술을 깨물며 다시 문을 두드려 댔다. 주먹에 힘이 실렸다. 안쪽에서 또다시 공허한 울림이 번졌다.

    그때였다.

    “아니, 이 밤중에… 뉘신데 와서 난리요?”

    한옥 집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낯선 노인이었다. 주인집과 마당이 연결되어 있다 보니 종종 주인 누나와 마주치곤 했는데, 눈앞의 사람은 처음 보았다. 석희재는 조금 놀라며 노인을 응시했다.

    “저… 누구시죠?”

    “이 집주인이지.”

    “여기 집주인은 여자분이었던 것 같은데….”

    “아, 그건 우리 딸.”

    석희재는 아, 하고 짧게 납득했다. 그때 노인이 불쑥 가까이 오더니 석희재를 가늘어진 눈초리로 응시했다. 내 정체를 알려 주었으니 이제 네 정체를 알려 줄 차례라는 듯이.

    “아무튼 여기서 뭘 하는 건지 모르겠네. 이 집은 오늘 짐 뺐는데.”

    “…네?”

    “이사 갔다고요. 안에 아무도 없어.”

    “…….”

    “그런데 빚쟁이야? 이 친구한테 원수졌어? 무슨 사람을 그렇게 독하게 찾아.”

    뜻밖의 말에 머리가 어질했다.

    석희재의 황망한 표정을 본 집주인은 그가 제 말을 믿지 못한다고 느꼈는지 열쇠를 가져와 문을 열어 안을 보여 주기까지 했다.

    안은 가구가 완전히 빠져 텅 비어 있었다. 그제야 묘하게 생소하던 그 공허한 울림이 이해가 갔다. 바닥에는 이삿짐을 급히 옮겼는지 발자국이 찍혀 있었고 남은 것은 바닥을 굴러다니는 영수증뿐이었다.

    눈으로 확인한 광경이 도무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이 안에서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사랑을 나누었는데…. 그 추억까지도 폐허가 된 것만 같았다.

    “아….”

    한계에 도달한 정신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석희재의 육체가 허물어졌다. 기다란 몸이 휘청이자마자 노인이 ‘어이쿠’ 소리를 내며 석희재에게 다가왔다.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그를 물리면서 석희재는 벽에 손을 짚었다. 전혀 안 괜찮아 보인다며 노인은 기어이 석희재를 부축해 주었다.

    이럴 것까지는 없잖아?

    이럴 것까지는….

    어떻게 나한테 이렇게까지.

    석희재의 가린 눈에서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석희재는 저를 부축한 노인을 등지면서 뒤돌았다. 휘청이며 다시 가로등이 켜진 밤거리로 나섰다. 고개를 들자 눈물로 어룽진 시야 때문에 가로등 빛이 사방으로 번지며 황홀한 빛을 뿌려 댔다.

    석희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이현의 행동은 저를 천국으로 잠시 이끌었다가 바닥으로 내리꽂는 듯했다.

    ‘포기도 못 하게 해 놓고 도망을 쳤겠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이를 갈았다. 붉게 충혈된 눈에서 이전에는 없던 기이한 광채가 돌았다. 사랑하니까 존중해 주려고 했는데, 존중할 수도 없게 만든다. 이딴 식으로 멋대로 굴면 자신도 멋대로 굴 수밖에 없었다.

    나름대로 끝을 내 보려고 이렇게 나온 거면….

    완전히 잘못 짚었어.

    그렇게 전에 없던 집착과 열망에 속을 끓이면서, 빈사의 백조는 휘청이며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독하게 결심한 것이 무색하게 석희재는 며칠간 앓아눕느라 이현을 찾아다니지 못했다. 정신적 고통이 금세 육체로 전이되는 그 번거로운 체질 때문이었다. 공연을 이어 가는 것만 해도 힘에 부쳤다.

    상사병으로 끙끙 앓던 적은 많았지만 그때와 지금이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이번에는 분노가 한 스푼 섞였다는 점이다. 이현이 너무 밉고 야속해서 석희재는 억울한 나머지 꿈에서도 이불을 차며 울었다.

    그리고 이현을 다시 붙잡으면 이번에야말로 두 번 다시 도망치지 못하게 물리적 속박을 가하리라 위험한 마음도 먹어 보았다.

    왜냐하면 마음이 통하는 건 두 번째니까. 어찌 됐든 일단은 보이는 데에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그렇게 이를 갈던 석희재에게 완전히 뜻밖인 곳에서 실마리가 잡혔다.

    - 희재야. 네 구 남친이 여기 찾아왔는데.

    “뭐?”

    전화를 걸어온 것은 다름 아닌 어머니였다. 황당해하는 석희재에게 어머니가 말했다.

    - 면접 보러 왔다는데? 어떡할까. 얘 아직도 너한테 질척대니? 완전 스토커 아니야? 위쪽에 아는 인맥 있는데 얘 접근 금지랑 이것저것 가중 먹여서 아예 빨간 줄 그어 버릴까? 그렇게 빵에 보내 버리면….

    제 어머니가 진심이라는 것을 안 석희재는 단호하게 말했다.

    “됐어. 기다려. 아무것도 하지 마요.”

    - 그럼 어떻게 하라고. 놔둬?

    “내가 갈게요.”

    - 네가 직접 오게? 이런 애들은 말로 안 통해! 그럴 필요 없….

    “묻는 거만 대답해. 지금 거기 있는 거 맞아?”

    - 얘 좀 봐? 응, 지금 대기 중인데….

    오케이, 짧게 대답한 석희재가 말했다.

    “그럼 의자에 묶어 놔.”

    석희재는 이불을 걷어차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환자복을 벗어 던지고 대강 옷을 주워 입고는 미친 듯이 내달려 택시를 잡아탔다.

    ***

    석희재와 그의 어머니가 소속되어 있는 연예 기획사의 사무실은 선정릉역 근처로, 다행히도 집에서 멀지 않았다. 택시를 잡아탄 석희재는 겨우 몇 분 사이에도 핏발 선 눈으로 초조하게 창문 바깥을 바라보았다. 전화 끄트머리에 어머니가 폭소하던 것이 영 거슬렸다. 제 말을 농담으로 듣는 것 같았다.

    석희재는 창 하나 뚫리지 않은 철벽같은 건물 앞에서 내렸다. 짙은 회색 벽의 구조적인 건축물은 한 바퀴를 쭉 돌아보아도 입구를 찾기 어려웠고 얼핏 보아서는 회사 건물처럼 보이지도 않았다. 문과 담이 구분 가지 않는 단단한 철문 옆에, 사명이 음각으로 새겨진 손바닥만 한 구리색 간판이 붙어 있을 뿐.

    ‘대체 여기에 왜, 무슨 속셈으로.’

    석희재는 벌써 붉어진 입술을 씹으며 문을 밀고 들어갔다.

    견고하고 삭막한 성벽으로 쌓아 올려진 건물의 안쪽은 놀랍게도 별세계다. 외부인의 시선조차 허락하지 않는 높은 담 안에는 푸릇하고 싱그러운 식물들이 키 크게 자라 있었다. 담벼락을 타고 흘러내린 물이 끝없이 인공적인 폭포 소리를 자아냈고, 떨어진 물은 건물 안쪽을 빙 두른 해자로 이어졌다.

    들어오는 순간 외부와 완전히 유리된 기분이 드는 것은 나름 계산된 것이었다. 환상을 파는 것이 직업인 이들은 구름 위에 사는 것 같은 느낌을 주어야 한다는 건물주 - 석희재의 어머니 - 의 철학이 담겨 있는 공간이었다. 그런 그녀의 의도 덕에 이곳에 업무적인 이유 등으로 방문한 이들은 입구부터 절로 경직된 모습을 보이곤 했다.

    물론 석희재는 그런 식으로 타인에게 제 사는 방식을 전시하는 어머니의 방식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무튼 석희재에게는 매우 익숙한 공간이었다. 어머니와 지금처럼 교류가 없을 적에도, 어떻게든 그녀와 교집합을 만들고자 바이올린 연습실이 없다는 핑계를 대며 여기를 질리도록 찾아왔었으니까. 석희재는 습기와 이끼가 내려앉은 돌바닥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중정 안쪽의 유리문 앞에서 지문을 찍었다. 그러자 소음도 없이 문이 열리고 마치 세련된 미술관처럼 생긴 로비의 리셉션이 나타났다.

    리셉션에서 누군가 제게 인사를 하는 것도 보는 둥 마는 둥 하며 석희재는 냅다 로비를 가로질러 엘리베이터를 탔다.

    그리고 그렇게 면접실에 도착하면….

    석희재는 문이 반대편 벽에 부딪치도록 쾅, 밀어 열었다.

    “어어?”

    멍청한 표정을 한 이현이 의자에 묶인 채로 얼빠진 소리를 냈다.

    드물게 타이까지 한 셔츠 차림에, 팔을 뒤로 둘러 칭칭 묶는 바람에 벌어진 채로 잔뜩 구겨진 재킷. 앉은 자세가 불편했는지 다리를 벌리고는 어떻게든 편한 자세를 취해 보려고 몸이 느슨해져 있었다. 석희재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풀어져 있던 몸이 바짝 긴장한다.

    “네가 왜 갑자기…?”

    이현은 묶인 채 다리로 바닥을 딛고 일어나려 했다. 등허리에 의자를 맨 것 같은 엉거주춤한 자세로 이동을 시도한다.

    그 어처구니없는 행동에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픽,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어딜 가려고?”

    “…….”

    “도망갈 수 있겠어요?”

    그러자 이현이 금세 체념하고 다시 의자 위에 주저앉았다. 그러고는 중얼거린다.

    “아, 이게 아닌데….”

    아니긴 뭐가 아니야.

    저와는 달리 태평해 보이는 이현을 보자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석희재는 자신이 감정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쏘아붙이고 싶은 것을 참을 수가 없었다.

    “사람을 바보 취급해도 유분수지… 기껏 사라져 놓고 이렇게 잡히면 내가 화가 나요, 안 나요.”

    석희재는 낮은 목소리로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하며 이현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저가 듣기에도 제 목소리가 퍽 음산했다.

    앞에 우뚝 서자 이현이 마른침을 삼키며 저를 올려다보았다. 그 시선이 해석할 수 없이 난해했다. 가까이서 보니 면접이랍시고 제법 차분하게 정돈한 머리카락이 삐죽거리고 있었다. 묶일 때 제법 난동을 부린 모양이었다.

    “면접 보러 온 건데, 나는….”

    이현이 고개를 조아리며 중얼거렸다. 석희재는 가까이 있던 의자를 덜커덩, 끌어와 그의 앞에 털썩 마주 앉았다.

    “잘됐네요. 나하고 면접 봐요.”

    “…….”

    이현의 당혹스러운 시선이 저를 향했다. 동시에 석희재는 귀를 거슬리게 만드는 문밖의 작은 수선을 감지했다. 저건 분명히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엿듣고 싶어 안달 난 어머니, 혹은 그의 첩자들일 것이다.

    답지 않게 짜증이 치밀었다.

    석희재는 팔짱을 낀 채로 슥 몸을 기울였다. 얼굴이 가까워지자 주눅 든 얼굴의 이현이 대뜸 물었다.

    “화났냐?”

    그걸 말이라고 하나?

    석희재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리고 나지막이 끓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딴 식으로 끝내기 있어요?”

    “왜 화를 내….”

    “안 나게 생겼어요? 적어도 말은 해 줘야 할 거 아니에요.”

    “…….”

    “내가 성가셔요? 말해 봐요.”

    “성가시긴, 나는.”

    “그러면 전화는 왜 안 받아요.”

    끝까지 변명만 해 대는 그가 야속해서 결국 묻고 말았다. 그런 것부터 묻는 자신이 조금 지질하게 여겨졌지만 지난 며칠간 가장 속을 끓여 댔던 문제라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현은 머쓱하게 답했다.

    “핸드폰 요금 미납해서… 끊겨 가지고.”

    “뭐?”

    믿기지도 않는 변명에 석희재는 눈살을 찌푸렸다.

    “진짜야. 나 관리비 같은 거 잘 밀리는 거 알잖아.”

    “…….”

    “내가 4달을 미납했더라고, 하… 하하. 얼마 전만 해도 수신은 됐는데 수신 발신이 다 막혔네?”

    “…….”

    “전화했냐? 진짜 몰랐어.”

    “…….”

    “공연 잘하길래, 그냥 잘 있는 줄.”

    이현이 눈치를 보며 고개를 수그렸다. 석희재는 이를 갈았다.

    “그걸 말이라고….”

    불시에 석희재는 이현의 집 식탁에 고스란히 쌓이기만 하던 각종 관리비 고지서를 떠올렸다. 도시가스를 습관적으로 연체시키던 것도. 석희재는 이현을 만나기 전까지 가스비를 3달 연체하면 가스가 끊긴다는 사실을 몰랐었다. 그리고 이현의 집은 기가 막히게 규칙적으로 3달 주기로 가스가 끊기곤 했다. 그걸로 ‘올해도 몇 분기가 지나갔구나’ 하고 셈하던 스스로가 기억이 났다.

    “진짜야. 그런데 4달 치 현금 갑자기 내기 부담스러워서….”

    “그럼 이사는?”

    “음….”

    이현은 뜸을 들였다.

    핸드폰이 정지되었다는 사실을 믿어 줄까 말까 하던 찰나에 그가 제대로 변명을 하지 못하자 석희재의 안에서는 다시 의심이 머리를 치켜들었다.

    “이사는, 왜.”

    단호하게 채근하자 이현이 마른 입술을 여러 번 축였다.

    머뭇거리던 이현은 한참 만에 입을 열었다.

    “거기는 내가 상경해서 쭉 살던 곳이야. 9년 동안.”

    “…….”

    “그리고 내가 이사를 안 갔던 이유는 딱 한 가지… 혀, 형이 언젠가 찾아올까 봐, 였어.”

    ‘형’을 입에 올리는 것만으로도 이현의 눈가가 반질거렸다. 석희재는 왜인지 그가 울 준비를 하고 있다고 느꼈다. 동시에 제 질문이 그의 어떤 역린을 건드린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이현은 울지 않았다.

    단지 천천히 고개를 들고 석희재의 얼굴을 살필 뿐이었다.

    “나는 그 현관에 서 있으면 너무 많은 게 생각나.”

    “…….”

    “근데 그냥, 이제 미련도 버릴 때가 된 것 같아서.”

    “…그런데 그렇게 갑작스럽게?”

    “알잖아. 나 좀 충동적인 거.”

    “…….”

    “번호도… 바꿔 버리고 싶고.”

    그렇게 말하고 이현은 고개를 수그렸다.

    ‘끝을 내야겠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가 현관을 긁기만 해도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문으로 달려가던 때가 있었다. 인지하지 못했으나 자신은 내내 과거에 묶여 있었다. 정확히는 누군가에게 길들여졌던 과거에 자신을 그저 방치했다.

    깨달음은 갑작스러웠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다가 이현은 지난 9년간 한 번도 바꾸지 않은 그 번호가 누군가의 생일이라는 사실을 떠올렸다.

    제 일상을 당연하게 차지하고 있는 그 그림자를 떨쳐 내고 싶었다. 미련하게 끌어안고 있던 과거의 추억들을 싹둑 잘라 버리고 싶었다.

    동시에 겁도 났다. 갑자기 오늘 당장 ‘형’이 이곳에 나타날까 봐. 그를 평생 기다릴 거라 생각했는데, 마음의 방향이 바뀌자마자 만나는 것이 두려워졌다. 그가 제 일상에 쳐들어와 훼방 놓지 않기를 바랐다.

    그래서 단숨에 제 모든 과거를 청산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게 전부 정리를 하고,

    조금만 당당해져서….

    이현은 조심스레 고개를 들었다.

    화장한 것처럼 눈가가 발그스레한 석희재가 눈앞에 있었다.

    급하게 달려왔는지 새까만 머리카락이 이마 위에 아무렇게나 헝클어졌다. 자기는 모르는 것 같았지만 하얀 셔츠의 단추는 한 칸씩 밀린 채였다. 별문제는 아니다. 다들 석희재의 얼굴만 보느라고 그가 옷을 저따위로 입었다는 건 아무도 몰랐을 테니까. 저조차 방금 전에 살짝 드러난 쇄골을 훔쳐보고서야 뭔가의 언밸런스를 감지하지 않았던가.

    이현은 속으로만 슬며시 미소 지었다. 저런 인간적인 부분조차 없었다면, 누군가의 환상을 빚어 놓은 듯한 이 비현실적인 인물이 ‘사랑이 필요한 인간’이라는 것도 망각하고 살았을지 모른다.

    “왜 이렇게 갑자기 나타났어.”

    “…….”

    “나한테 시간을 조금만 주지.”

    백마 탄 왕자님이 손을 내밀어 주는 것도 누군가의 판타지겠지만….

    이현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고 싶었다.

    객관적으로 석희재와 비교했을 땐 한참 모자란 급이라도, 적어도 저만은 그의 앞에서 당당함을 느낄 수 있도록.

    “너한테 떳떳하지 못한 과거도 좀 정리하고.”

    “…….”

    “불명예스럽게 퇴직한 전 직장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좋은 일자리도 찾고….”

    “…….”

    “그렇게 해서 내가 데이트 비용 정도는 건사해야지 면목이 서지.”

    “…….”

    “나도 나잇값 좀 하자….”

    그리고.

    이현은 맥없이 덧붙였다.

    “그래야 너도 스폰 정리하라고.”

    “…….”

    “요구라도 할 수 있으니까….”

    이현은 말문이 막혀 창백해진 석희재를 흘끔 바라보았다. 길고 모양 좋은 손가락이 턱을 괸 채로 살짝 벌린 입술을 가리고 있었다. 기가 막힐 때 습관적으로 나오는 제스처였다.

    역시, 의자에 묶인 채로 이런 꼴로 말해서인지 조금도 감동받은 표정이 아니었다. 하기야 자신이 계획한 그림의 20%도 완성하지 못했잖은가. 그의 앞에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짠! 하고 나타나려 한 제 계획이 틀어졌다는 사실에 이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동시에 석희재의 표정이 드라마틱하게 일그러졌다. 턱을 괸 손가락도 접혀 꽉 주먹을 쥔 모양새가 된다.

    평소에는 무뚝뚝하기 그지없는, 변화가 전무한 그 얼굴이 다채로운 빛으로 물드는 것을 보면서 이현은 살짝 주눅이 들었다.

    “스폰 아니야.”

    이가 맞물려 까득거리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이현은 의심하면서 석희재를 흘끔 보았다.

    스폰이 아니라면 사람 가리기로 유명한 콧대 높은 연예 기획사가 외모 말고는 아무것도 보장되지 않은 신인 배우와 덜컥 계약할 이유가 뭔데.

    물론 외모가 국보급이긴 하지만….

    “…아니야?”

    의혹을 깔끔히 지우지 못한 채 묻자 석희재가 형형한 눈빛으로 노려보며 대답했다.

    “그래. 그리고 다음부턴….”

    “…….”

    “말 좀… 하고 가.”

    갑자기 석희재가 흐흑, 흐느끼면서 고개를 떨구어 이현은 깜짝 놀랐다. 화를 내는 줄로만 알았는데 조용히 울음을 터뜨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찌할 바를 모르겠는데- 안다 해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 설상가상으로 석희재는 정수리만 보인 채로 코를 길게 훌쩍인다. 눈가에 가져다 댄 흰 손등에는 푸른 핏줄이 불뚝 서 있는데도, 무슨 조화인지 눈물을 참는 모습이 가냘프게 보였다.

    “희재야….”

    “이제 지겨워. 진짜… 끝났구나, 생각하고 놀라는 것도 지겹다고.”

    “아니, 희재야.”

    이현은 의자를 엉거주춤 소라게처럼 등허리에 진 채로 다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달래 주고 싶은데 팔이 묶여서 영 불편했다.

    “나도 걱정했거든? 몰래 공연 보러 자주 갔는데 너 멀쩡하던데….”

    “거짓말.”

    석희재가 붉어진 눈을 들었다.

    “멀쩡하기는. 쓰러져서 커튼콜도 못 했어, 나.”

    “뭐? 아니, 내가 안 간 날인가… 너 진짜 쓰러졌었어?”

    “그래.”

    짓씹듯이 대답하고 석희재는 다시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러고는 감정 조절이 되지 않는 스스로가 질린다는 듯이 하소연했다.

    “제발. 나 이러고 싶지 않아. 얼마나 힘들었는지 형 앞에서 징징거리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석희재는 숙인 얼굴 아래 기도하듯 양손을 모으고는 심호흡하기 시작했다. 그건 정말로 아이처럼 울어버리고 싶은 것을 필사적으로 참는 것 같았다.

    이상하게도….

    그 얼굴을 보자 이현은 왠지 안심이 됐다.

    순간 왠지 주책맞게 저마저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그래서 이현은 히죽히죽 웃으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었다.

    ‘시발… 팔이 묶여서 얼굴을 가릴 수가 없네.‘

    “왜 웃어?”

    이현의 얼굴을 본 석희재가 날카로운 눈을 들고 물었다. 아직 속에 앙금이 남은 모양이다.

    이현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어? 우는 거 보니까 아직 내가 좋구나 싶어 가지고.”

    “…그런 말이 나와!”

    이현의 말에 폭발한 석희재가 급기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본 이현은 뒤늦게 ‘아뿔싸’ 하고 흠칫 놀랐다. 석희재는 감정을 속으로 삭이는 편이라 바깥으로 폭발시키는 방법을 잘 모른다. 그런 석희재가 참다 참다 뒤로 꼴까닥 넘어가 버릴까 봐 이현은 다시 소라게처럼 엉거주춤 그의 곁에 다가갔다. 무릎을 붙이고 팔을 비비며 어설픈 위로를 해 댔다. 묶인 팔은 언제 풀어 줄 건지 고민하면서.

    ***

    이현이 새로 이사를 간 집은 원래 살던 데에서 도보로 십 분 떨어진 곳이었다. 그러니까 석희재가 멘탈이 털린 채로 텅 빈 옛집 앞을 휘청이며 떠나고 있을 때, 이현은 고작 십 분 떨어진 새집의 폐허가 된 짐 더미 위에서 졸고 있었다는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바로 앞 골목이라고?”

    “어, 가회동은 매물이 별로 없어서 집이 나오면 바로바로 빠지는데… 그 길목은 북촌이 내려다보여서, 예전부터 눈여겨보고 있었거든. 잘됐다 싶어서….”

    그리고 극장으로 굳이 찾아와 짐을 돌려주고 간 건 혹시나 정리 중에 석희재의 짐을 잊어버릴까 봐 그런 것이었다고 말했다. 더 있고 싶어도 그러지 못했던 이유는? 이삿짐 트럭이 도착했기 때문에.

    그러면 나는 그날 버스 정류장에 왜 한 시간 동안 주저앉아 있었던 거지.

    허망한 기분에 석희재는 이현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신이 예민한 것인지 아니면 이현의 배려가 부족한 것인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매번 극장에 꼬박꼬박 찾아오기까지 했다니. 연기처럼 사라져 버린 이현을 향해 석희재가 마음속의 분노를 활활 태우는 동안 실은 무대와 객석 가장 뒤, 몇백 미터의 거리를 두고 한 공간에 있었던 것이다. 석희재는 머리가 어질해졌다.

    “기다려라… 내가 준비를 하겠다, 한 마디는 해 줬어도 됐잖아.”

    “…그동안 네가 찬바람이 쌩쌩 불어서. 기다려 줄지 자신도 없었고.”

    그렇게 말하며 이현은 석희재를 흘끔 보았다.

    “너 차가울 때 진짜 무섭거든. 술기운 아니면 제대로 보기 힘들 정도로…. 너는 모르지? 나 엄청 용기 낸 거다.”

    “…….”

    “근데 진상 떨면 정만 떨어질까 봐, 그래서 그랬어. 적어도 일터에서 마주치면 그런 얼굴은 안 할 테니까.”

    자신이 무서워서 술에 취해서만 찾아올 수 있었다는, 또 한때는 누구보다 칼같이 공사 구분을 하던 사람이 공적으로라도 저와 마주치고 싶어 했다는 그 모순이 불쌍하고도 애틋했다.

    “그럼 공연은 왜 보러 왔는데?”

    “…보고 싶었으니까. 얼굴.”

    이현이 머쓱하게 말했다.

    석희재는 ‘보고 싶었다’라는 말에 그만 사고가 정지하고 말았다.

    고개를 숙인 채로 가만히 있다가, 잠시 후 손등으로 눈가를 쓱, 훔쳐 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현의 뒤로 돌아가 묶인 끈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묶여 있을 때는 몰랐는데 끈의 재질이 제법 거칠었다. 창고에 있던 로프는 군데군데 곰팡이도 피어 있었다. 제가 묶어 놓으라고 지시해 놓고, 더해서 오는 길에는 ‘설마 내 말을 농담으로 듣고 묶지 않았으면 어쩌나’ 하고 걱정하던 것도 잊어버린 채 석희재는 이현을 강제로 묶어 놓은 이들에게 슬그머니 화가 나기 시작했다. 이현의 손가락 끝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팔이 뒤로 꺾인 채 같은 자세를 오래 유지한 탓이다.

    로프가 후드득, 아래로 떨어지자마자 이현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저린 팔을 주무르며 제 앞으로 돌아와 선 석희재를 향해 그저 웃어 보였다.

    이현은 언제나 이랬을 것이다. 함부로 취급당하거나 쓰레기 취급을 받더라도 모든 게 끝나면 그저 ‘끝났다’ 하고 안도하며. 그가 지난 일을 흘려보내는 방식을 알게 되니 석희재는 그의 인내심이 싫어졌다.

    “다음부터는 반항 좀 해.”

    “네가 묶으라고 한 거 아냐?”

    “뭐?”

    이현이 정답을 말하자 석희재는 당황해 눈이 흔들렸다.

    “나한테 사적인 원한을 가질 만한 사람이 이 회사에 너 말고 누가 있어.”

    “…….”

    “직접 찾아올 줄은 몰랐지만….”

    저린 팔을 툭툭 털어 낸 이현이 석희재가 무슨 변명을 하기도 전에 앞으로 불쑥 가까이 다가왔다. 손을 뻗으면 확 안아 버릴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거리에 석희재는 조금 긴장해 버렸다.

    아직 묻고 싶은 것도 많고 해야 할 말도 많은데 이현이 제 셔츠에 손을 올리는 순간 석희재는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말았다. 심지어 이현은 잠겨 있던 첫 단추를 무심한 손길로 툭, 풀어내기까지 했다.

    툭, 툭….

    단추가 눈 깜짝할 사이에 풀렸다. 이현이 갑자기 제 옷을 벗기려 들어 석희재는 내심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싫지 않았다. 누가 엿보고 있더라도 뿌리치기 싫을 만큼.

    ‘형 너무 대담해….’

    그렇게 생각하며 석희재가 귀를 붉히고 있을 때였다. 이현은 하나하나 풀어낸 단추를 팔락, 가볍게 펼치더니 다시 밑에서부터 단추를 채워 주기 시작했다.

    “몸 좋아졌다?”

    “……?”

    “너 단추 하나씩 다 밀렸어.”

    저가 너무 앞질러 갔다는 것을 알고 석희재의 머리가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그때였다. 바깥에서 똑똑,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슬며시 열린 문 바깥으로 두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홱 돌아갔다.

    그 사이로 얼굴을 보인 것은 이현을 이곳으로 안내해 준 리셉션의 직원이었다. 그녀는 불시에 제게 모인 시선을 조금 부담스러워하면서 두 사람에게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얘기 끝나셨으면, 잠깐 보자고 하시는데요.”

    ***

    ‘매달리는 쪽이 내 아들이었다니.’

    그 사실에 석희재의 어머니, 사라 씨는 큰 충격을 받았다. 누가 봐도 석희재는 잔뜩 울고 난 얼굴이었다. 눈과 코끝이 빨갰다. 반면 그 옆에 앉은 턱이 날렵한 남자는 제법 덤덤했다. 아무리 봐도 평범하기만 한데 저 남자를 ‘묶어 놓고서라도’ 만나고 싶었던 건가. 그녀는 이해하기 힘들었다. 엿들은 안쪽의 대화로 그간 두 사람 사이의 사건들을 추론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그리고 석희재는 제 어머니의 표정을 아주 쉽게 알 수 있었다. 이마에 ‘이해 불가’라고 대놓고 써 있었다. 그 빤한 표정을 알면서도 석희재는 일부러 불퉁한 얼굴로 옆자리에 앉은 이현의 손을 보란 듯이 꽉 잡았다. 아직도 눈앞의 유명 연예인이 석희재의 비공식적 후원자라고 생각하고 있는 이현은, 어쩔 줄을 모르고 그 손을 꿈지럭거리며 빼려고 덧없는 노력을 해 보았다. 하지만 조금 꿈틀거릴 때마다 그 배의 악력으로 쥐어 와 금세 포기하고 말았다.

    “둘이 어떻게 만났는지는 둘째 치고…. 그러면 그쪽은 사내 연애를 하겠다고 여기 면접을 보러 온 거네요?”

    어머니의 첫 질문이 이현을 향하기 무섭게 석희재는 반대로 어머니를 쏘아붙였다.

    “내가 사내 연애를 하든, 사외 연애를 하든. 지금 저 스폰 받는다고 의심받고 있는데 그것부터 해결해 주시죠.”

    그 말에 다시 어머니의 시선이 저를 향했다.

    석희재는 나직하게 말했다.

    “내가 말할 수도 있는데 기회를 드리는 거예요.”

    “…….”

    “저는 이만하면 엄… 그쪽 의견을 많이 존중해 드린 것 같은데요.”

    “…….”

    “그리고 나 데뷔하면 소원 들어주기로 했잖아.”

    그 이야기를 이 타이밍에 꺼낼 줄은 몰랐는지 어머니는 당황한 표정을 했다.

    석희재가 오래 소망했던 한 가지 소원, 그것은 바로 그녀가 자신이 친자임을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일이 쉽지 않을 거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석희재 역시 그녀가 바라는 때를 기다려 줄 용의가 있었다. 아마도 어머니의 삶의 방식상, 그녀가 원하는 좋은 때란 석희재가 성공한 배우가 되어 어디 내놓아도 자랑스러울 만한 명성을 쌓은 뒤였을 것이다. 사실이 밝혀진 뒤 자연히 딸려 올 싱글 맘이라는 꼬리표가 무색하도록, 그녀의 연예계 인생에 꽤 보기 좋은 액세서리의 역할이 더 커질 때에.

    지금까지 그녀는 외부 세계에서 항상 석희재가 친자임을 부정해 왔고, 석희재 자신조차도 그녀의 인생을 위해서는 그게 맞다고 생각해 왔다. 가끔 스태프들에게 어머니가 갈아치우는 연하의 토이 보이 취급을 받아도 그러려니 했었다. 그렇게 수모와 외로움을 삭이면서도, 빛나야만 하는 사람의 인생을 자신이 해치면 안 된다고 믿었다.

    하지만 당장 쟁취하고 싶은 것이 바로 옆에 있으니 마음가짐이 달라진다. 이현이 저를 잠시라도 오해하는 건 원치 않았다.

    석희재는 드디어 어머니 앞에서 이기적으로 굴 마음이 들었다.

    “어서요.”

    “너랑 내가 스폰이라고 오해해? 우리 그런 거 아니에요.”

    어머니가 여유롭게 웃는 모습에 석희재는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저런 식으로 사람을 구슬리려고.

    “아, 그렇죠? 제가 무례한 추측을….”

    “무례하기는. 그런 오해 많이 받아서 괜찮아요. 아무튼 희재는 내가 어릴 때부터 눈여겨보던 아이여서 그때부터 회사에 들어왔으면 좋겠다고 제안을 참 많이 했는데….”

    “와… 어릴 때부터요?”

    옆자리의 이현을 돌아보니 벌써 표정이 풀어져 있다. 헤실거리는 모양을 보니 저 애매한 설명에 이미 넘어갈 준비가 끝난 것 같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좋아지는 것과 반대로 석희재의 기분은 점차 가라앉기 시작했다.

    생각해 보니 이현은 외모, 유명세, 연상에 약하다. 어머니는 그 삼박자를 다 갖추고 있었다.

    이현이 제 어머니를 좋아하게 될 가능성은 - 물론 현은 게이니까 성애적으로는 불가능하겠지만 아무튼 - 조금도 상상하고 싶지 않았던 석희재의 마음 밑바닥에서부터 투쟁 심리가 치밀었다.

    석희재는 이현의 손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테이블을 탕! 내려쳤다.

    “말 돌리지 말고.”

    “…….”

    “빨리 인정해 줘요.”

    그리고 석희재의 얼굴을 보고는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예감이 들었는지, 어머니의 표정이 다시 뻣뻣하게 굳었다.

    “약속 못 지킬 것 같으면 지금 계약 다 무르고요.”

    ***

    “와… 친어머니라고? 와….”

    이현은 유리 건물의 중정을 빠져나오면서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로비까지 둘을 배웅한 어머니는 만들어진 미소를 지은 채 이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이현은 허리를 굽히며 몇 번이나 인사를 했다. 정말로 친모라는 것을 알자마자 잘 보이고 싶어진 듯하다.

    “그러고 보니까 닮은 데가 있는 것 같아.”

    가만 놔두면 인사를 열 번은 더 할 것 같다. 석희재는 이현의 손목을 확 잡아 이끌며 바깥으로 나섰다.

    “우리 엄마랑 친하게 지낼 생각 마.”

    “왜. 사이 안 좋냐?”

    “그게 아니라, 그냥….”

    “…….”

    “엄마 같은 사람하고는, 어느 정도 거리감이 있는 게 제일 좋아.”

    이현은 석희재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그를 따랐다. 두 사람은 회사 건물을 나서자마자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를 가자고 정하지도 않았는데 자연스레 이현이 살던 동네로 향했다.

    차가 둘러둘러 가는 동안 석희재는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 했다.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던.

    거리가 있을 때에는 누구보다 상냥하다. 언제나 달콤한 모습만을 보여 준다.

    하지만 어느 선 안으로 들어가면 그녀의 인간관계가 조금 비정상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그녀의 선 안에는, 아무도 모르는 연예인의 내밀한 부분을 본다는 사실에 취해 버린 이들 빼고는 무엇도 존재하지 않는다.

    석희재에게 있어 그의 어머니는 어떤 특권 의식을 가지고 산 지 너무 오래되어서 보통 사람들처럼 관계 맺는 방법을 잊어버린 사람이었다. 가족에게도 진짜 자기 자신을 보여 주는 법을 잊어버렸고, 애초에 그런 적이 있는지도 잘 모르겠다….

    그리고 이현은 석희재의 말을 들으며 이름 하나를 떠올렸다. ‘한지우’. 연예인으로 산 지 너무 오래되어 일반적인 관계 맺기가 불가능해진 사람. 한지우의 사적인 영역으로 들어갈 때에 이현은 지금 석희재가 설명한 것 같은 위화감을 정확하게 느꼈었다.

    하지만 석희재의 앞에서 이현은 그 이름을 함부로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이제는 정말 떨쳐 내고 싶기도 했고.

    그래서 그저 공감하는 말을 흘렸다.

    “뭔지 알 것 같다.”

    “…정말?”

    “응, 나 연예인 많이 보잖아.”

    택시 바깥으로 플라타너스가 울창하게 자라 있는 풍경이 보였다. 대학로의 서울대병원 인근이라는 것을 알아챈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이 이쯤에서 내리자는 말을 내뱉었다. 이현은 재킷을 팔에 걸치고, 석희재는 주머니에 있던 마스크를 얼굴에 쓴 채로 창덕궁 돌담길을 따라 걸었다. 쏟아지는 오후의 햇빛이 나뭇잎 사이로 비쳐 들어왔다. 나무뿌리에 뒤틀린 보도블록을 걷는 사이 빛이 주홍빛으로 저물어 갔다. 해가 지고 있었다.

    “나는 너 데뷔한 직후에 너도 그렇게 돼 버리는 거 아닌가, 가끔 생각한 적 있었어.”

    “…….”

    “그러면 조금 외로울 것 같다.”

    석희재는 이현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은 반면교사가 있으니 절대로 그러지 않으리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마스크를 내리는 찰나.

    “너는 많이 외로웠겠다.”

    이현이 그렇게 석희재의 상처를 먼저 어루만져 주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가족이 그러니….”

    그리고 자신이 외로웠다는 것을 알아주었다는 것만으로 석희재는 갑자기 이현을 끌어안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걸음이 우뚝 멈추었다. 이현은 몇 걸음 앞서 나가 뒤를 돌아보았다.

    “왜.”

    선선히 돌아보는 이현의 얼굴에 석희재는 가만히 말을 삼켰다. 그에게는 아무것도 아닌 대답이, 그 목소리와 저를 돌아보는 표정까지 왜인지 뇌리에 깊게 박혔다. 도로변 옆으로는 차들이 느린 속도로 굴러가고 있었다. 타인의 시선에서 자유롭지 못한 곳에서 그를 끌어안는 대신, 석희재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바람이 불었다. 플라타너스의 잎사귀들이 몸을 비비며 빗소리를 내고, 바람에 흔들린 머리카락이 얼굴을 간지럽히고 지나갔다. 석희재는 주홍빛 일광으로 뺨을 물들인 이현의 얼굴과 이 일상의 순간을 오래 기억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석희재는 천천히 눈으로 이현의 얼굴을 사진 찍었다. 이현은 또 그런 눈으로 본다며 픽 웃었다.

    “그래서 명절에 매일 우리 집에 왔구나.”

    “…….”

    “석희재 생각해 보니까 엄청 꼬시기 쉬운 애였네.”

    이현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면서 혼자 웃었다. 그러면서 이현은 불현듯 오래전의 일을 떠올렸다.

    석희재와 고정적인 섹스 파트너 관계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당시 이현은 그가 언제쯤 남자와의 섹스에 질리게 될까, 자주 생각하곤 했었다. 빠지는 데 없이 잘난 남자가 자기를 별식으로 여겨 주는 것은 고마웠지만, 주제에도 맞지 않게 너무 미남을 만나려니 감당이 안 된다고나 할까, 부담스러울 때가 있었던 것이다.

    예를 들자면 한밤중에 불도 켜지 않은 식탁에 앉아 냉장고에서 반찬통을 그대로 꺼내 먹고 있다가 갑자기 들어온 석희재와 마주치거나 했을 때. 바깥의 겨울바람을 몰고 온 코트 차림의 도시 남자 앞에서 저는 반나체에 트레이닝복 차림인 게 그렇게 당혹스러울 수가 없었다. 글라스에 샴페인만 따라 마실 것 같은 외모의 남자가 반찬통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손이 멈췄다.

    어머니가 보내 주신 황금색, 진달래색 보따리에 싼 반찬통을 여는 손을 말없이 보던 그 당시의 석희재 - 겨우 스무살 - 의 눈에 쫄았던 기억도 났다.

    그때는 석희재가 그런 집 반찬을 좋아하는 게 의외라고 생각했었다. 특히 전이나 산적 같은 명절 음식을 싸 오면 ‘이런 건 처음 먹어 본다’라며 차게 식은 것도 아랑곳 않고 덥석덥석 잘도 집어 먹었다. 어머니가 손이 큰 탓에 항상 이현 혼자 다 먹기에는 과분했기에 석희재에게 김치 같은 것을 덜어준 적도 있었다.

    그때는 까다롭게 생겨서는, 잠자리 상대를 가리지 않는 섹스 취향만큼이나 먹성도 좋다고만 생각했다. 이현은 다시 뒤를 바라보았다. 마스크를 고정하고 있는 말 없는 얼굴이 이제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저를 만나기 전까지 매번 혼자였을 석희재를 떠올리니 왠지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다.

    “형은 괜찮아?”

    “뭐가.”

    다시 걷기 시작한 이현을 따라 석희재도 그 뒤를 따라 걸었다.

    “혼자 짐 정리하면서, 괜찮았어?”

    “…….”

    “아까 말했잖아. 거기에 있으면 너무 많은 게 기억이 난다고….”

    이현의 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별거 없어. 그냥….”

    “…….”

    “더 일찍 정리했어야 한다고만 생각했지.”

    정말일까. 지금처럼 덤덤한 표정으로 과거를 전부 처분했을까? 석희재는 궁금했다. 이현의 모든 과거가. 그 각각의 사건과 흐름이 아닌, 매 순간 이현이 느꼈을 감정이 낱낱이 궁금했다.

    그 집은 아마도 자신이 모르던 이현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첫사랑에 돌진하던 이현의 마음과 개자식의 개짓거리 같은 것들을.

    “사실 나는 아쉬워.”

    석희재는 중얼거렸다.

    “나한테 거기서 만든 기억들은 좋은 것밖에 없거든.”

    그렇게 말하며 석희재는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모든 곳에 이현과 함께 만든 추억이 묻어 있었다. 이곳은 자신이 짝사랑을 한창 숨기고 있을 때, 술에 잔뜩 취한 이현을 업고 몰래 설레 하며 가던 길이기도 했다. 처음 사귀기로 하고 나서 함께 그의 집으로 돌아가던 날도 꼭 이렇게 걸었다.

    이현의 집 역시 마찬가지였다. 집에 들어서자마자 급하게 몸을 맞추던 현관과, 따뜻한 허벅지에 머리를 기대고 영화를 보던 소파, 머리맡에 제본한 대본집이 굴러다니던 따스한 침실까지… 일방적인 기억이지만 하나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넌 어떻게 그러냐.”

    이현의 한숨 섞인 말에 석희재는 고개를 들었다.

    “내가 얼마나 못나게 굴었는데… 다 잊었어?”

    “응?”

    “거기서 추한 모습, 못된 모습 다 보였는데도 어떻게….”

    등을 보인 이현의 팔이 한 번 얼굴께로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그 작은 동작이 의미하는 바가 불길하게 느껴져서 석희재는 성큼성큼 걸어 이현의 앞을 막아섰다.

    “너는 어떻게 그럴 수 있어?”

    현의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석희재는 당황해서 이현의 양어깨를 어쩔 줄 모르고 조심스레 어루만졌다.

    “아마도 네가 아름다운 사람이라서 그런 것 같아.”

    “…….”

    “네 사랑은 어떻게 그렇게 올곧고 순수하냐.”

    “…….”

    “나 따위가 시험을 해도 흔들리질 않아.”

    다시금 플라타너스 나뭇잎이 바람에 몸을 부딪친다. 쏴아- 시원한 소리와 함께 아직 초록빛인 나뭇잎들이 발치를 건드리고 굴러갔다.

    “난 못 그랬어.”

    “…….”

    “나는 멍청하고 어설프고 병신같은 짓만 반복했어.”

    “…….”

    “내 첫사랑은 병신같았다고.”

    “…….”

    “근데 넌 어떻게 그래?”

    이현이 내뱉는 말이 석희재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그가 가진 뿌리 깊은 자괴감과 스스로를 사랑하지 못하는 마음이 믿기지 않아서 석희재는 괴로웠다. 묶였던 팔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주무르던 이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꿈속에서 공을 쫓아 달리다가 화단에 엎어져 코가 깨지고도 벌떡 일어나던 소년 시절의 모습 또한.

    몸의 상처는 언젠가는 낫지만 마음의 상처는 남는다는 이현이 말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동시에 석희재는 이현을 천천히 병들게 만든 그 첫사랑을 용서할 수 없어졌다.

    그는 강하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야.”

    “…….”

    “그건 네 잘못 아니야. 그냥 넌 상대를 잘못 고른 거야.”

    “…….”

    “알겠어? 형은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야.”

    석희재는 고개 숙인 이현의 뺨을 어루만졌다. 건조한 손바닥에 스치는 그의 뺨은 많은 험한 일을 겪고도 여전히 부드러웠다.

    “말했지. 나는 짝사랑을 하는 동안에도 행복했다고.”

    “…….”

    “이제 알았다.”

    “…….”

    “내 짝사랑이 행복했던 건 상대가 이현이라서 그랬던 거야.”

    도로의 차들은 빨간 브레이크 등을 점점이 켜며 느릿느릿 굴러갔다. 석희재는 이현의 어깨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해가 지고 퇴근 시간이 되자 꽉 막힌 도로는 차량의 느린 행진으로 빨갛고 노랗게 물들었다.

    어두워질수록 밤의 불빛들은 선명해졌으나 석희재는 도리어 그 어둠에 안도하면서 돌담 벽으로 숨어들었다.

    그러고는 아까부터 안아 주고 싶었던 이현의 등에 양팔을 안았다. 가슴이 맞닿는 순간에는 미치도록 충만한 기분을 느꼈다.

    따뜻해.

    “네가 나한테 이러는 게 말도 안 돼….”

    “…….”

    “말도 안 된다고.”

    이현은 안겨서도 울먹였다. 얼굴을 가릴 수 있게 되니 도리어 숨죽여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이다. 이제는 그의 그런 성격을 알아서, 석희재는 이현의 얼굴을 억지로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내가 네 첫사랑과 첫 연애를 망쳤어.”

    “…….”

    “잘 생각해 봐. 네 인생에 나만 오점인 거야.”

    “아니. 내 인생의 좋은 건 다 형이 얻어다 준 건데.”

    석희재는 정말로 그렇게 믿었다. 자신은 이현의 존재로 데뷔를 마음먹었다. 최초에는 그게 제 희생이라고 생각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어머니와의 관계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덩달아 돈과 인기는 물론이고 사람들이 저 자신을 필요로 하는 기분까지 알게 되었다.

    게다가 이 연애로 빈털터리가 되어 버린 이현과 달리 저는 잃은 게 하나도 없었다.

    이현은 연애에서조차 배우를 빛내기 위해서 노력하고 퇴장한 무대 뒤의 스태프 같다. 그게 너무나 안타까워서 석희재는 저만이라도 그의 희생과 노고를 알아주고 싶었다.

    “게이라는 소문 돌 때 일부러 나 모른 척한 거, 나한테 피해 안 주려고 한 거잖아.”

    “…….”

    “회사 잘리고도 배우들한테 말 안 한 거…. 개막 중인 공연에 소란 일으키기 싫어서 그런 거고.”

    석희재는 귀동냥으로 그간 업계에 있던 많은 일화를 얻어들었다. 피디가 되면 배우들과 가장 가까운 위치라는 권력을 이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현처럼 욕심 없는 피디는 극히 드문 편이다. 이현의 전 직장 역시 한 번 이사 직함까지 달았던 피디가 인맥과 라이선스를 들고 날라 파산 위기에 처했던 적이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간 피디가 교묘하게 선동질을 해서, 한동안 많은 배우가 이현의 제작사와 척을 졌다고 한다. 다시 지금처럼 회복하기까지는 이현 같은 직원들의 노력이 있었고.

    그렇게 열심히 일한 그를 한순간에 내친 회사에 배신감을 느끼고 반감을 가질 만한 데도….

    이현은 그저 당연하다는 투로 대꾸할 뿐이다.

    “병신같은 일은 비일비재해. 나도 원망 많이 들었어.”

    “…….”

    “아무리 완벽해 보이는 공연도 무대 뒤는 죄다 엉망이야. 배우들끼리는 신경전을 벌이고, 페이는 밀리고, 스태프는 일주일마다 갈려 나가도…. 무대 위에서만 완벽하면 돼.”

    “…….”

    “그리고 그 무대 위에 네가 있었잖아.”

    올려다보는 이현의 눈이 물기를 담고 반짝 빛났다.

    석희재는 조심스레 손을 들어 그의 눈두덩이를 매만져 보았다. 따뜻하고 보드라웠다.

    지금 당장 그의 입에 입 맞추고 싶었다.

    “솔직히 말할까.”

    석희재는 나지막이 속삭였다.

    “나는 형의 사정을 들으면서 미칠 듯이 슬프고 가여운데도….”

    “…….”

    “다행이라고 생각했어.”

    석희재는 이현의 멍든 명치 부근을 어루만졌다. 마치 달래 주는 것처럼. 첫사랑에게 혹독한 취급을 받고도 지칠 줄 모르고 사랑이 샘솟던 그 가슴을. 그리고 사람들의 오해 속에서 발길질 당한 돌부리처럼 패여 나가도 여전히 무대를 존중하는 이 마음을….

    “왜냐하면….”

    석희재는 까만 눈으로 이현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응시했다.

    “나만 형의 구원이었으면 좋겠거든.”

    “…….”

    “이래도 내 사랑이 올곧고 순수해?”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석희재가 하고 싶었던 만큼 그의 가슴을 꽉 안아 왔다. 가슴 벅찬 기분으로 폐가 부풀고 흉곽이 꽉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현을 안은 채로 석희재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사랑하는 사람의 습관처럼 시선으로 금성을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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