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꿈속에서
석희재는 잠든 이현의 얼굴을 보고 있었다.
이현은 거짓말처럼 평온하게 잠에 빠졌다. 소파에 머리를 기댄 채로 스르륵 미끄러졌다. 석희재는 그를 담요와 함께 안아 들어 침대로 옮겼다. 조심스럽게 내려놓으니 이현은 잠결에 꿈틀거리다가 베개를 찾아 고개를 파묻고는 도로 잠이 들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석희재의 마음은 감격에 차서 조금 울렁거렸다.
그의 얼굴을 자세히 보고 싶어서 석희재는 침대 아래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아래에서 올려다보는 이현의 감은 눈은 웃는 것처럼 슬며시 휘어져 있었다. 마음먹으면 누구보다도 차가운 표정을 연기할 수 있는 이현의 잠든 얼굴은 이렇게나 아기 같다. 한 번도 상처받아 본 적 없는 이처럼.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손을 뻗어 이현의 이마 위에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가만히 넘겨주었다. 그가 이 깊은 밤에 제 침대 위에 누워 있는 것이 꿈만 같았다. 덕분에 저 역시 잠이 몰려오는데 잘 수가 없었다.
이대로 이현을 지켜보라면 평생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다. 그의 얼굴을 보고 있으니 심장에 칼을 찌르는 것 같았던 그의 말도, 무심하고 차가운 얼굴로 몇 번이고 저를 선 밖으로 내쳤던 것도 기억나지 않았다.
언제나 과거는 씻겨 내려간다. 매 순간 다시 샘솟는 사랑하는 마음에 의해.
이현 스스로조차 이해하지 못한 과거의 그를 석희재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마도 그에게도 이런 사랑의 법칙이 작용했을 테니까. 이 불가해한 동력으로 다시 사랑하고, 또 사랑했을 것이다.
같은 사람.
같은 방식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
그 사랑이 제가 아는 다른 누군가에게 향했다는 것은 사무치도록 질투 나지만 어쩌면 늦게 도달한 제 잘못이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이현을 빨리 발견했다면, 어린 이현을 만나 사랑할 수 있었다면….
또한 그런 사람이라서 안심이 됐다. 이현과 저는 본질적으로 같은 사람이라는 확신도.
석희재는 이현의 이마에 조심스레 키스를 내렸다. 그러고는 소리도 나지 않게 조심스레 그의 곁에 마주 보는 방향으로 누웠다. 같은 이불을 덮고, 가까운 곳에서 그가 내쉰 달콤한 숨을 받아 마시다가 천천히 잠들었다.
그렇게 이마를 맞댄 채로 석희재는 제 학창시절의 꿈을 꾸었다.
지금보다 훨씬 말주변이 없고 낯을 가리던 자신은 친구가 별로 없었다. 성격은 어둡고, 사람에게 접근하는 방식을 몰랐기 때문이다. 특히 다른 아이들이 무심결에 가족 이야기를 주고받을 때는 할 말이 없어 눈을 내리깔곤 했다. 평범한 가족이 없다는 사실에 석희재는 스스로를 비정상이라 느꼈고, 특히 어머니를 숨겨야 한다는 사실은 그의 입에 자물쇠를 걸었다.
기실 청결한 흰 피부에 왕자님 같은 외모를 가진 석희재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들끓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석희재의 관심을 얻고 싶은 마음이 앞서 나가 이상한 방식으로 주의를 끌기 일쑤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너무나 완벽한 외모를 가진 석희재가 그 차분하고 주의 깊은 눈으로 상대를 관찰하면, 고작 열대여섯 살밖에 되지 않은 또래의 아이들은 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 얼어붙어 버리기 일쑤였으니까. 그건 현대판 메두사인 석희재가 거는 이상한 마법이었다.
게다가 언제나 상대방의 반응을 관찰하고 배려하는 석희재는 저를 향한 관심과 접근에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아무튼 아이인 자신의 욕망보다 부모님의 상황을 배려할 만큼 일찍 철이 들어 버린 석희재가 또래의 아이들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학교 수업이 끝나면 바이올린 개인 레슨에 이어지는 선행 학습 과외들로 하루가 꽉 차 다른 친구들과 어울릴 시간이 없었다.
석희재는 제 주변에 사람이 없는 이유를 자신의 성격 탓으로 돌렸다.
외로웠나?
아마 그랬던 것 같다.
비슷한 시기, 성악을 전공하던 제 친구 주성우는 다른 학교 여자아이와 연애를 시작했다. 덕분에 안 그래도 친구가 없던 석희재는 조금 더 외로워졌다. 친구가 전달하는 타인의 연애 이야기를 들으면서 석희재 역시 자신에게도 그런 상대가 생기기를 몰래 바라곤 했다.
잠들기 전에 전화로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죽이고, 가끔 쪽지를 써서 수업 중에 몰래 교환하고, 아무에게도 말한 적 없던 제 이상한 가정사에 대해서 털어놓을 수 있는….
그렇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를 꺼내면, 상상 속의 여자 친구는 저를 조금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고 ‘많이 외로웠겠다’라며 위로해 주었다.
이상하게 그런 상상을 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편안해졌다.
그 시기 석희재가 즐기던 일탈이라고는 수업 중인 선생님의 목소리에서 조용히 시선을 돌려 창밖을 바라보는 것뿐이었다. 그날도 석희재는 상상 속의 여자 친구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망상을 하고 있었다. 하굣길에 같이 손을 잡고 맛있는 걸 먹으러 가는 상상. 저 운동장을 가로질러 후문의 버스 정류장에 가서 함께 버스를 타고 몇 정거장 떨어진 레스토랑으로 간다. 제가 자랑할 만한 건 용돈을 또래들보다 좀 더 넉넉하게 타는 것뿐이니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었다. 그러면 여자 친구는 교복을 입고 입장해도 되냐며 귀여운 걱정을 하고 자신은 괜찮다면서 손을 잡고 당당하게 이끌어 준다.
그렇게 수업에 집중하지 못한 채로 멍하니 운동장에서 움직이는 작은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을 때였다.
석희재의 눈에 엄청나게 뛰어다니는 남자애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체육 시간인지 그 아이는 체육복을 입고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몇 배로 바쁘게 움직이며 골대 사이를 이쪽저쪽 정신없이 달렸다. 좀 요령을 피우면 좋을 텐데도 그저 공을 쫓아다니는 것에만 급급해 보였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땀에 젖어 이마에 가닥가닥 붙어 있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열이 올라 새빨개진 입술은 꼭 정신없이 노느라 빨개진 고양이의 분홍색 코 같았다. 아마도 꽉 쥔 주먹도 촉촉할 것이다.
그러다 그 아이는 헤딩을 하려는지 공중에 뜬 공을 미친 듯이 쫓아갔다. 순간 석희재는 눈을 크게 떴다. 공을 쫓느라 바로 앞 화단 턱도 보지 못한 녀석이 그 자리에서 다리가 걸려 대차게 넘어졌던 것이다. 잔디밭에 풀썩 쓰러지는 녀석은 코가 깨졌을 게 분명했다.
덜컹,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한 석희재의 의자가 흔들렸다.
‘석희재?’
선생님이 제 이름을 불러 석희재는 겨우 앞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니?’
아무 일도 아니라고 말하며 고개를 숙인 석희재의 귀가 빨갰다. 하필 선생님의 눈에 띄는 바람에 자리에서 일어나 정해 주신 부분을 읽어야 했다.
다시 창밖을 보았을 때는 이미 운동장이 한가해진 뒤였다. 교실 안에 종이 쳤다. 정신없이 뛰어다니던 녀석의 모습도 찾을 수 없었다.
석희재는 왠지 모를 아쉬움을 느꼈다.
그리고 얼마 후, 석희재는 복도에서 친구들과 떠들며 지나가던 남자아이 하나를 발견했다. 조금 부스스한 머리카락에 체육복 차림, 멀리서 볼 때 상상한 것과는 다르게 쌍꺼풀 없는 날카로운 인상이 제 예상과는 퍽 달랐다. 순간 제가 생각하던 사람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으나 한쪽 코에 휴지를 틀어막은 걸 보니 그 애가 맞는 것 같았다. 공을 쫓는데 정신이 팔려 앞도 보지 않고 달리던 그 애. 앞으로 넘어져서 코가 깨진 장난꾸러기의 흔적이었다.
왠지 반가워서 석희재는 무의식적으로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너….’
걸음을 멈춘 녀석이 ‘뭐야?’ 하는 눈으로 저를 흘깃 올려다보았다. 외꺼풀인 눈이 쭉 찢어져 꼭 노려보는 것 같았다.
원체 사람에게 먼저 말을 거는 법이 없는 석희재는 금세 귀가 빨개졌다. 자신답지 않은 행동을 했다는 생각에 약간 후회하기도 했다.
내가 왜 그랬지.
그리고 다시 지나치려 할 때였다.
‘와, 너 엄청 멋있다.’
체육복을 입은 그 애가 갑자기 웃음을 탁 터뜨렸다. 순식간에 변한 그 애의 인상에 석희재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티 없이 웃는 얼굴은 꼭 석류알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자신이 한 것은 그저 모르는 사람에게 말을 건 것뿐이었는데 둘은 금세 친해졌다. 그건 전부 다 그 애의 성격 덕분이었다. 그 천방지축인 남자애는 아무 때나 석희재의 교실로 찾아와 뒷문을 벌컥 열고 제 이름을 불렀다. 그러면 교실 안의 이목이 모이는 것을 즐기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게 성큼 들어와 핸드폰이 있냐고 물어봐서 번호를 따 갔다. 단 한 번도 남의 반 교실 안을 멋대로 휘저어 본 적 없던 석희재에게는 그 녀석이 정말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러더니 뜬금없이 그날 새벽에 앞자리가 010이 아닌 유선 전화 번호로 시작하는 집 전화로 전화가 걸려 왔다. 엄마가 밤에는 핸드폰을 빼앗아 가서 어쩔 수 없다고 투덜거리며. 지금도 몰래 건 거라고 졸린 목소리로 자냐고 물어왔다. 얼결에 잠이 깼지만 하나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렇게 석희재는 그 애의 전화를 받기 위해 종종 새벽에 일어났다. 거실에서 몰래 전화하느라 숨죽인 그 애의 목소리를 들으며 쿡쿡 웃었다.
그 제멋대로인 녀석에게 석희재만 맞춰 준 것은 아니었다. 학교를 마치면 바이올린 레슨이 있다고 했더니, 그 애는 대담하게도 학원을 빼는 희생을 하고 석희재의 집으로 놀러 왔다. 그러고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서 레슨을 받는 모습을 구경했다. 교수님이 돌아가신 후에 저도 바이올린을 연주해 보고 싶다기에 석희재가 활을 긋는 법을 가르쳐 주었지만, 아무리 가르쳐 줘도 그 애는 바이올린에서 깔끔한 소리를 내지 못했다.
어느 날 석희재는 궁금했던 그 애의 손바닥을 만져 보았다. 꽉 쥔 주먹을 억지로 벌려 손바닥을 엄지손가락으로 슥 문지르자 녀석은 또 ‘뭐야?’ 하는 눈으로 석희재를 바라보았다. 한때는 그 눈이 노려보는 것 같았지만 이제는 아무 생각 없는 눈이라는 걸 알아서 석희재는 그저 미소 지었다.
만져 본 손바닥은 생각보다 건조했다. 그러나 더운 여름날이 되자 상상했던 것처럼 촉촉해졌다. 그 애는 잡은 손바닥을 간질이는 석희재를 성가셔 하면서도 잡힌 손을 놓지는 않았다.
석희재는 가끔 수업 중에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교과서에 적은 다음, 반듯하게 접어 그 애의 주머니에 쿡 찔러넣었다. 그다음 쉬는 시간에 그 애가 돌려준 쪽지 안에는 흘려 쓴 글씨로 ‘바보, 메롱.’ 따위의 답만 적혀 있었지만 그래도 좋았다. 석희재는 그걸 전부 모았다. 언젠가 여자 친구가 생기면 가 보고 싶었던 레스토랑에 데리고 간 것도 그 애였다. 녀석은 문 앞까지 가서 ‘이런 데 교복 입고 들어가도 돼?’라며 귀여운 소리를 해 댔다.
어느 여름밤, 석희재는 그 애의 학원이 끝나기를 기다리며 건물 앞에 서 있었다. 그 애가 좋아하는 초콜릿 우유를 두 개 사서 한 손에 들고.
정해진 시간에 건물에서 나온 그 애는 함께 우르르 쏟아져 나온 친구들과 쉽게 헤어지고는 제게 달려왔다. 그것만으로도 무척 고마웠다.
이렇게 계속 걷다가….
걷다가 그 애의 집 앞에 도착하면.
왠지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려 참을 수가 없었다. 가로등이 고요히 빛을 뿜어내는 놀이터에 다 와서 석희재는 그 애에게 초콜릿 우유를 주고 나란히 그네에 앉았다. 석희재는 다리가 길어 그네가 불편했다. 그런데 그 애는 제 마음도 모르고 미친 듯이 그네를 탔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이 허공에 방방 뜨도록.
‘제발 가만히 좀 있어 봐.’
‘왜?’
‘그냥….’
‘너 할 말 있지.’
석희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자신이 하고 싶은 게 말인지 행동인지도 몰랐으니까.
…싫으면 때려.
그리고 꿈속에서, 석희재는 이현을 꽉 끌어안았다.
털썩, 이현은 들고 있던 가방도 떨어뜨리고 강하게 딸려 왔다. 두려운 마음으로 억지로 끌어안았으나 그 애, 열일곱 살 이현은 석희재의 예상과 달리 포옹을 거부하지 않았다. 저를 밀어내거나 빠져나가려는 몸짓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어깨에 기대 조용히 숨만 쉬고 있었을 뿐이다.
좌절당한 사랑에 멍이 들기 전, 순수하기만 하던 열일곱 살 소년은 그렇게 석희재의 품 안에 가만히 안겨 있다가….
별을 보기 위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작은 행동에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어느 때고 금성을 찾기 위해 별을 쫓던 어린 이현이 사랑스러워서….
석희재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이 꿈에서는 그 형이 찾아오지 않을 거고, 아무도 우리를 방해하지 않을 거야.
그러면 너의 첫사랑은 망가지지도 않을 거고, 너는 상처받지도 않을 거야.
그렇게 순수한 채로 있다가,
나를 사랑하게 될 거야.
나를….
“나를 사랑해 줘.”
석희재는 불가해한 표정을 짓고 있는 어린 이현의 어깨를 양손으로 붙잡고 말했다.
가능하다면 그의 과거를 지우고 싶었다. 상대에게 이용만 당한 그건 사랑이 아니라고 부정하고 싶었다. 석희재는 이현의 가슴이 상처로 멍들기 전 이 시점에서 그의 궤도를 자신에게로 틀어 버리고, 그렇게 그 첫사랑의 기억을 자신으로 채워 넣고 싶었다.
두 사람의 머리 위에 무수하게 뜬 별이 반짝반짝 빛났다. 우주 모형 속에라도 들어온 것처럼 온통 점점이 빛나는 하늘을 바라보는 이현의 눈도 물먹은 것처럼 빛이 났다.
그러니까 이건 꿈이었다.
석희재가 염원하던 꿈.
자신은 외롭지 않고 이현은 상처받지 않는.
꿈이라는 것을 자각하자마자 석희재는 양 뺨을 눈물로 축축하게 물들였다. 꿈에서나마 마주한 어린 이현이 눈물 나게 사랑스러워서, 빨리 태어나지 못한 것이 한이 되어서, 그리고 이 아름다운 꿈에서 곧 깰 것이 무척 아쉬워서.
석희재의 눈앞으로 이현의 손이 머뭇대며 다가왔다.
그러고는 눈물로 어룽진 석희재의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내 주며 말했다.
“응, 그럴게.”
“…진짜야?”
“응, 내가 너를 사랑해 줄게.”
“…….”
“그러니까 울지 마.”
이현이 위로하듯 석희재의 목에 매달려 왔다. 같은 열일곱 살 적에는 키 차이가 더 나던 두 사람은 그대로 다시 깊은 포옹을 했다. 스물두 살에 혼자 울던 이현을 안아 주고 싶었던 석희재는 그보다 어린 이현에게 위로받고 있었다.
석희재는 이현의 교복 자락을 눈물로 적시며 그 작은 몸을 더 꽉 끌어안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