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스물둘 (18/27)

18. 스물둘

석희재는 가끔 이현의 스물둘을 상상해 보곤 했었다.

지금보다 말갛고 어린 얼굴을 한 스물두 살의 이현을. 이현이 퍼즐 조각처럼 흘린 과거의 이야기로 석희재는 스물두 살 그의 그림을 맞추어 갔다.

당시 이현은 대학가 빵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었다고 한다. 그때 가장 난처했던 일은, 근처 대학의 여학생들에게 종종 대시를 받는 것이었다고. 난감할 만도 하다. 그는 중학생 때 이미 제 성적 지향을 깨달은 게이라고 했으니까.

석희재는 전공 서적을 든 여자들에게 번호를 받을 때마다 어려워하는 이현의 얼굴을 쉽게 상상할 수 있었다. 어느 대학을 다니냐는 질문에 머뭇거리며 ‘난 대학생 아닌데요’라고 답하는 난감한 표정도.

그리고 그것이 부담스러웠던 이현은 아르바이트처를 대학가에서 이태원으로 옮겼다. 석희재가 기억하기로는, 그게 정확히 스물두 살 가을께의 일이다. 그러자 이제는 나이 많은 남자들이나 외국인들이 번호를 주고 가더라고 이현은 웃으며 말했었다.

거부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이제 자연히 이현은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늦은 밤 남자들을 만나러 갔다. 만남은 너무나 쉽고 이현은 손해 볼 것이 없었다. 그때에는 그렇다고 생각했다.

고졸인 채로 아르바이트비의 반을 월세로 내며 서울살이를 연명해 가는 이현은 오해를 받기 쉬웠다. 건실한 미래 따위는 생각하지 않는, 머리 비고 답 없는 놈으로. 또 속쌍꺼풀이 드러나지 않는 찢어진 눈매에 마른 몸, 웃지 않으면 차가워 보이는 날 티 나는 인상에 골초라는 것만으로 ‘노는 놈’ 취급을 받았다.

이현은 그런 오해를 딱히 정정하려 하지도 않았고 자신을 한 번 호기심으로 깔아 보려 접근하는 남자들에게 항상 고분고분했기 때문에 어느새 섹스에 환장한 놈이 되어 있었다.

자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생각할 틈도 없이 타인의 시선을 그대로 입은 채로, 이현은 지금의 스물아홉이 되었다.

그리고 이 모든 편견 어린 과거에도 불구하고….

석희재는 이현을 좋아했다.

여자들의 대시에 그들이 상처받지 않을만한 방법으로 거절하려고 성실하게 고민하는 것도 이현의 모습이었다. 또 자신이 사람들을 기대하게 만들고 또 부응하지 못한다고 생각하자 일터를 바꿔 버린 결정도 이현이라는 사람의 일부였다.

문란하고, 유혹에 약하고, 주먹에 맞거나 발에 차이면서도 남자들과 뒹구는 면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자신이 상종하지 않으려 드는 부류의 사람인데도 좋은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제 또래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내심 거리를 두었을 텐데, 이현의 과거가 그랬다는 것만은 아무렇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람이 달리 보이거나 싫어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 만족감을 위해 본연의 모습을, 그 과거를 바꾸어 주기를 바란 적 역시.

그랬던 석희재의 머릿속에서 퍼즐 조각이 다시 맞춰지기 시작했다.

사랑에 실패한 스물두 살 이현.

고졸인 이유는, 대학 진학도 포기하고 첫사랑을 따라갔기 때문일까?

첫사랑이 서울에 있으니까 무작정 그렇게 따라와서 아르바이트로 연명하고.

스물두 살이 되어서도 제 인생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계속 그렇게 방치된 채로….

다시금 눈물이 흘러넘치는 이유는 그 나이의 이현이 겪었을 감정을 누구보다도, 아플 정도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석희재 역시 이 평생의 첫사랑을 영영 지울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

이현은 석희재의 인생을 관통하는 첫 운명이었다. 그를 부정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부정하는 일이었다. 그래서 석희재는 언젠가 이다음에,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 다른 연인을 만나도 이현만큼 강렬하게 사랑할 수는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것은 왜인지 이현을 배신하는 일 같았으니까.

그래서 자신이 그 사랑의 당사자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석희재는 이현의 첫사랑과 트라우마를 이해할 수 있었다.

동시에 심장이 저미는 것처럼 욱신거렸다. 저와 완전히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던 이현도 같은 사랑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형은… 정말, 형은.”

석희재는 고개를 떨군 채로 중얼거렸다.

형을 미워할 수도 없게 해.

많은 것들이 떠올랐다.

과거의 연인들에 대해 캐물을 때마다 그가 묵묵부답이던 것은, 그것들이 설명할 가치가 없을 만큼 하찮아서가 아니라 그저 연애 경험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연애의 증표로 커플링을 해 달라고 조르자 덜컥 문신을 해 왔던 날도 떠올랐다. 이현은 문신을 하면서 ‘기왕 첫 연애니까 몸에 새겨 두자’라고 혼자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첫사랑은 다 이런 식이냐는 제 물음 앞에서 ‘우리만 이런 것은 아니다’라고 시니컬하게 답하던 것은 자신이 싫고 성가셔서가 아니라… 스스로도 겪은 결론이 그것밖에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런 뼈아픈 실연을 겪었을 때 이현도 고작 스물두 살이었다. 지금의 저와 같은.

“미안해. 미안해….”

눈앞에서 끅끅거리며 울음을 삼키고 있는 이현이 마치 스물두 살의 어린 그처럼 보였다. 어깨를 떨며 헐떡이는 이현은 울면서 소리를 낼 줄도 몰랐다. 수도꼭지를 튼 것처럼 멈추지 않고 흘러넘치는 눈물을 틀어막기 위해 수시로 뺨을 닦을 뿐이었다.

석희재는 묻고 싶었다.

나의 스물두 살 실연 앞에는 당신이 찾아와 주었는데,

형의 스물두 살 실연에는 누가 함께 있어 주었냐고.

혹시 쭉 혼자였느냐고….

그 누구도 슬퍼할 기회조차 주지 않아서 이제 겨우 눈물을 쏟아 내는 거냐고.

“내가 처음이었어?”

“…흐윽, 윽, 으….”

“정말로 처음이라서 그랬어요?”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고개를 젓거나 흔드는 사인도 주지 않았다. 그저 울음을 삼키며 수시로 뒤돌아서려고 했다. 그때마다 석희재는 다시 이현의 어깨를 돌려세웠다. 이현은 새빨개진 얼굴을 가리려 자꾸만 고개를 떨구었다.

“나 봐요.”

“…….”

“사과를 하러 온 거라면 제발 날 봐요.”

석희재의 말에 이현이 울음을 멈추었다. 코끝이 바닥을 보고 있다가 조심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자신이 사과해도 받아 주지 않으면 어떡하면 좋을지 두려워하는 얼굴로.

두 사람은 똑같이 눈가가 눈물로 번진 채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석희재는 이현에게 호소했다. 나직한 목소리로,

“사과하기 전에, 말해 줘요.”

“…….”

“그 엄청난 첫사랑, 나한테도 얘기해 줘요.”

“…….”

“그래야 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니까….”

그 말에 이현은 한참이나 숨을 고르다가 말했다. 제법 덤덤한 목소리가 나왔다.

“첫사랑, 한심한 이야긴데.”

눈물을 훔친 이현이 고개를 저었다. ‘첫사랑’이라는 단어를 말할 때 이현은 유독 메말라 보였다. 석희재는 이현이 지금 이렇게 되기까지 제 감정을 죽이는 법을 얼마나 훈련했을지를 짐작했다.

“내 첫사랑은 네가 한 것처럼 아름답지가 못해서.”

이현이 내뱉은 말에 석희재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한다고 느꼈다.

저 역시 이현을 원망하고, 미워하고, 가끔은 신 포도처럼 깎아내리고 싶은 감정을 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몸만은 취하고 싶어 욕정 했는데….

이현은 그 모든 것을 아름답다고 포장해 준다.

석희재는 문득 궁금해졌다. 그의 눈에 대체 자신이 어떻게 보이는 것인지.

동시의 이현의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그러니까 말해 줘.”

“…….”

“형도 알잖아. 아무것도 모른 채로 남겨지는 게 얼마나 외로운지.”

그러자 이현이 소리 없는 한숨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

옆집 형, 열세 살 많은 형이었는데.

이현은 읊조리듯 말했다. 소파에 앉아 담요를 어깨에 둘렀는데도 이현의 어깨는 가끔씩 벌벌 떨렸다. 그가 추워서 떠는 게 아니라는 것을, 석희재는 담요를 가져다준 후에야 알았다.

“좋아하게 됐을 때부터 말해도 돼?”

석희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소공동 길목에서 이현을 처음 마주쳤을 때가 저에게 의미 있듯이, 이현에게도 의미 있는 순간들이 있을 테니까.

그리고 이현은 까마득한 시절을 떠올렸다. 중학교 교복을 입었던 자신의 모습을.

학원 건물 안으로 막 들어섰을 때였다. 저 멀리 엘리베이터가 닫히고 있었다.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마구 휘날리며 뛰어갔지만 이미 늦은 것 같았다.

그렇게 세 걸음 정도 남기고 닫히는 문을 바라보고 있을 때, 거짓말처럼 다시 문이 열렸다.

이현은 입을 벌린 채로 안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러자 꽉 찬 엘리베이터의 안으로부터 출발을 늦어지게 만든 이현을 향해 친절하지 못한 눈초리가 쏟아졌다.

‘현이네?’

그때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있던 누군가가 말했다. ‘형’이었다.

엘리베이터 안에 억지로 올라탄 이현은 눈치를 보며 자리를 잡았다. 형이 조금 비켜서 주어 다행히 그쪽에 설 수 있었다. 형은 핏줄 선 손등으로 닫힘 버튼을 누르고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덕분에 교복 셔츠 한 장만 두고 팔이 찰싹 붙어 체온이 그대로 전해졌다. 형에게서는 아주 좋은 냄새 - 아마도 향수 냄새 - 가 났다.

자신에게서는 어떤 냄새가 날지 궁금했다. 뛰어오는 바람에 정수리에서 열이 나고 있는 것이 조금 부끄러웠다. 그래도 이현은 맞닿은 팔로 형의 따스한 체온을 느끼는 것이 좋았다. 심장이 쿵쿵거렸고….

‘학원비를 엉뚱한 데다 쏟아붓는 거 아닌가 몰라. 쟤가 가서 공부는 할까?’

‘왜요. 현이 학원 열심히 다니던데요.’

‘가기야 열심히 가지. 친구들 다 거기 있으니까. 실컷 놀다가 수업 때는 책만 펴 놓고 졸고 있으니 그렇지.’

집에 돌아오자마자 형 앞에서 저를 구박하는 어머니 때문에 현은 부끄러워 얼굴이 새빨개졌다. 그러자 형은 제 편을 들어 주면서 신경 쓰지 말라는 듯 큰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 잠깐의 손길이 너무 좋아서 몸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였다. 잠자기 전에도 계속 생각이 났다.

그리고 그 잠깐의 순간들이 사랑이라고 자각하게 된 순간은 조금 더 뒤였다.

그때는 그냥 ‘형’이 여자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자신이 아는 것보다 더 다정한 목소리를 내면,

‘여자 친구에게는 저런 말투로 이야기를 하는구나.

나한테도 저렇게 말해 줬으면 좋겠다.’

그렇게만 생각했을 뿐이다.

태어나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설렘 앞에서 이현은 무척 들떴다. 이루어지지 못할 관계라는 데에서 오는 괴로움이나 짝사랑의 고통을 알기보다 그저 순수하게 사랑의 기쁨에 젖어 있었다. 그저 형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하면 헤실헤실 웃음이 나는 것도 신기했고, 진부한 말이지만 온 세상이 반짝거리는 총천연색으로 보이는 것도 좋았다. 그때는 지루한 수업 시간에 노트에다가 형의 이름 세자를 공들여 써 내려가는 것마저 재미있었다.

그러나 그 감정을 누군가에게 설핏 흘릴 때마다 이현의 사랑은 소꿉장난 취급을 받았다. 상대가 열세 살이 많다고 말하면 혹시 선생님을 좋아하는 거냐며 놀림당하기 일쑤였다.

옆집 형, 이현보다 13살이나 많은 진짜 어른.

천방지축이던 자신에게 어른의 감정을 알려 준 멋지고 상냥하고 다정한 그 형. 이현은 형에게 좋은 수식어는 다 가져다 붙였다. 다행히 아주 어릴 적부터 알아 온 형 역시도 저를 졸졸 따라다니는 이현을 무척 귀여워해 주었다. 그때쯤부터 이현은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하고 야생마처럼 뛰어다니다가도, 형이 나타나면 머리를 곱게 빗고 의젓한 척을 했다.

생각해 보면 짝사랑을 하던 내내 행복했던 것은, 천지 분간 못하고 그저 들뜨기만 했던 그때뿐인듯하다.

그리고 이듬해.

형은 이현에게 그와 결혼할 예정이던 여자 친구가 성가시다고 토로해 왔다.

‘너도 남자니까 하는 얘긴데.’

그렇게 시작한 이야기는 이현이 상상하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섹스가 재미없어.’

‘…….’

‘섹스’라는 단어를 거침없이 입에 올리는 형 때문에 이현만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귀가 시뻘게진 채로, 표정은 무뚝뚝하게 얼어선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몰랐다.

그러나 형은 이현의 반응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짜증 섞인 얼굴로 말을 이어 갔다.

‘착하고 예쁘고 아… 다 좋은데 재미가 없어. 넣고 흔들고 싸고, 끝. 알지?’

이현은 아무것도 모르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다들 이러고들 사는 거겠지?’

형이 스스로 납득하며 결론을 내렸다. 이현은 어설프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의 이현은 그저 형을 좋아하는 마음에 심취해 있었을 뿐이지 그의 옆자리를 꿰차고 싶다거나, 고백하고 싶다는 마음은 가져 본 적도 없었다. 가끔 형과 입술을 비비고 꼭 끌어안는 꿈을 꾼 적이 있기는 했지만 꿈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리고 당시의 이현에게는 묘하게 불편하고 간지러운 관계의 친구가 한 명 있었다. 초면일 때부터 이미 수상할 정도로 제게 친한 척 굴던 야구부 소년. 항상 교실 가장 뒷자리에서 잠을 자던 녀석은 어쩌다 깨서 이현과 눈이 마주치면 졸린 눈을 접고 바보처럼 웃어 보였다. 게다가 이름도 알려 준 적 없는데 이미 이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교집합이 조금도 없는데도 둘은 빠르게 가까워졌다.

이현이 ‘좋아하는 사람’에 대한 감정을 처음으로 이야기해 본 것도 그 친구였다.

‘열세 살이나 많으면 그건 좋아하는 게 아닌데.’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아무튼 아니야.’

‘네가 어떻게 알아?’

‘선생님 좋아하는 거지, 너? 그거 다 착각이다.’

무심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녀석의 얼굴에 짜증이 어려 있어 이현은 순간적으로 욱하는 감정이 치밀었다. 심장이 뛰는 감각은 진짜인데, 뭘 안다고 자기는 좋아하는 사람도 없으면서 그걸 부정해 대는 놈이 짜증이 났다.

이현은 그 애와 그때 딱 한 번 싸워 봤다. 사과해 온 것은 이현이 아닌 친구 쪽으로부터였다. 제가 먼저 사과하지 못한 것이 미안해서 이현은 그 뒤로는 그 애와 단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다.

그 친구는 이현을 마치 제 남동생처럼 다루었다. 이현이 차도 쪽으로 걷다가 옆에 오토바이라도 쌩 지나가면 가방끈을 휙 당겼고, 그러면 이현은 맥없이 안으로 끌려갔다가 목이 졸려 캑 소리가 났다. 아프다고 화를 내도 반응 않는 녀석은 마치 바위 같았다.

같이 햄버거를 먹으러 갈 때도 그랬다. 이현은 눈앞에 누가 있는지도 모르고 햄버거를 정신없이 먹곤 했는데,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면 말 없는 바위처럼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녀석과 눈이 마주치곤 했다.

내가 그렇게 돼지같이 먹었냐고, 왜 그렇게 쳐다보냐고 부끄럽게 중얼거리면 아무 말 없이 감자튀김을 쓱 내밀던 그 친구.

그 관계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이 든 것은 한참 친해지고 난 뒤였다.

녀석이 저를 잘 챙겨 주는 이유는 자신이 바짝 말라서 그런 거라고, 이현은 생각해 왔었다. 그러니까 남동생처럼 챙겨 주는 걸 거라고.

하지만 잘 생각해 보면 남동생이 아니라 꼭 여자아이를 대하는 것 같았다. 이현의 형들은 단 한 번도 막냇동생 이현을 그렇게 곱게 다뤄 준 적이 없었으니까.

고등학생이 되며 다른 학교가 되었는데도 둘은 자주 만났고, 그 친구는 연습을 마치고 언제나 학원 앞으로 이현을 데리러 왔다. 학교에서 학원을 거쳐 다시 제집으로 돌아가는 루트가 녀석에게는 멀리 돌아가는 길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데리러 오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이현은 그런 사실을 이제야 떠올리는 제 무심함에 혀를 내둘렀다.

그날도 그 친구는 이현을 데리러 왔다. 여름으로 접어드는 밤공기가 축축했고 이현은 뒷덜미에서 몰래 땀을 흘리고 있었다. 허공에서 가끔 촉촉한 이현의 손등과 건조한 그 애의 손등이 스쳤다. 이상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형 말고 남자면 그냥 좋은가 보다.’

미친 게 틀림없었다….

제 성 지향성을 깨달을락 말락 하는 기로 앞에 서자 혼란스러워졌다. 그렇게 이현이 혼자만의 혼란으로 말이 없어졌을 때였다.

‘아직도 그 선생님 좋아해?’

친구의 질문이 불쑥 저를 찔렀다. 이현은 실제 바늘에 찔린 것처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당연하지!’

‘…….’

‘너는 좋아하는 마음이 그렇게 쉽게 없어지냐?’

‘…….’

‘나는 좀 일편단심이거든.’

이현은 먼 풍경을 바라보며 멋있게 답했다. 그러나 친구는 코웃음 쳤고, 아무 대답을 안 했다.

둘은 그날따라 대화가 적었다. 이현은 그게 이 관계를 이상한 쪽으로 의식하고 있는 제 탓이라고 생각했다. 무슨 말이라도 꺼내야 한다고 생각해 마구 떠들어 댔지만 그럴수록 친구는 도리어 말이 없어졌다. 결국에는 이현도 시무룩해져 입을 다물었다.

집에 다 왔을 때였다.

단지 구석 어둑한 곳에 들어서자마자,

‘싫으면 때려.’

그렇게 말한 친구는 이현에게 성큼 다가왔다.

‘너를 어떻게 때려. 너 나보다 세잖…!’

말을 끝내기도 전에 친구가 현을 와락 안았다. 숨이 턱, 막힐 것처럼 거세게. 이현의 마른 몸은 운동부인 친구의 몸 안에서 힘없이 바르작댔다.

‘야….’

나오려고 용을 쓸수록 안는 힘은 강해지기만 했다.

결국 빠져나오는 것을 포기한 이현은 꽉 끌어안긴 채로 고개를 들었다. 목 말고는 저가 움직일 수 있는 부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늘에 별 몇 개가 반짝였는데 이현은 그중에 금성을 찾을 수 있었다.

그 애는 이현의 몸을 자꾸만 고쳐 안았다. 뒷덜미는 물론이고 등까지 땀이 촉촉했고 그건 그 애도 마찬가지였다. 연습을 마치고 온 녀석에게서는 체취가 풍겼는데, 그건 꼭 엄마가 양배추를 삶을 때 부엌에서 풍기던 달짝지근한 냄새와도 닮아 있었다. 별로 싫지 않았기에 이현은 계속 안겨 있었다.

포옹한 채로 녀석이 말했다.

‘네가 때리면, 너한텐 그냥 맞을 건데.’

‘…….’

‘싫으면 때리라고 했잖아.’

‘…….’

‘왜 안 때리냐?’

이현은 그 애가 한 말들을 아직까지도, 스물아홉이 되어서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여전히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하는 저 스스로에게 놀랐다.

아마도 누군가에게 방해받지만 않았더라면 그날 분명 무슨 일이 일어났을 것이다. 파르르 떨리는 눈꺼풀이나 제 등을 꽉 끌어안은 팔, 조금 목이 멘 것 같은 목소리가 아직도 생각이 나곤 했다.

나중에 생각해 보니 그 애는 아마도 키스를 하려고 했던 거 같다고, 이현은 석희재에게 나지막이 읊조렸다.

결과적으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아파트 단지 안, 어둑한 곳으로 담배를 피우러 온 ‘형’에게 친구와 끌어안고 있던 것을 들켰기 때문이다.

심장이 쿵, 떨어진 이현 앞에서 형은 이채를 띤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너 남자 좋아하냐?’

친구가 돌아가고 나서 형은 현의 방으로 찾아왔다. 자신이 남자라면 다 좋아하는 게이가 아닌지 의심하기 시작한 데다, 친구와 어떤 선을 넘으려고 했던 것 자체가 두려웠던 이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식은땀만 흘렸다. 형은 퍽 충격받은 눈치였고 가끔 한숨을 쉬며 이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너 어쩔래.’ 그렇게 눈으로 말하는 듯했다.

형은 그렇게 한참을 벌벌 떠는 이현을 한심한 눈으로 보다가 돌아갔다.

남자를 좋아하기 때문에 경멸당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짝사랑하는 사람이 제게 실망한 것 같아 이현은 밤새 울었다. 천둥벌거숭이처럼 사랑 앞에서 그저 들떠 있던 이현의 사랑은 그때부터 아주 조금씩 철이 들기 시작했다.

그 뒤로 이현은 친구에게서 오는 연락을 전부 무시했다. 친구와 그런 행동을 쉽게 하려던 자기 자신이 이상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형을 좋아한다고 해 놓고 포옹에 설레던 제 마음이 왠지 값싸게 느껴졌다. 그래도 그 애는 몇 주나 꾸준히 이현의 학원 앞으로 찾아왔다.

마지막으로 찾아왔던 날은 비 오는 날이었다. 어떻게 행동하는 게 맞는 일인지 모른 채로, 이현은 비를 맞으며 자신을 뚫어져라 노려보는 그 애의 눈이 무서워서 도망쳐 버렸다. 그 뒤로 그 애는 단 한 번도 찾아오지 않았다.

길에서 마주친 그 애와 서로 모르는 사람처럼 스쳐 지나갈 수 있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말이었다. 자신이 도망쳐 놓고도, 이현은 저를 무시하는 그 애를 떠올리며 가끔씩 울컥 가슴이 아플 때가 있었다.

“어쩌면 나도 조금 달라질 수 있지 않았을까.”

“…….”

“내 심장을 미칠 듯이 뛰게 하고, 밤새 가슴앓이하며 울게 만든 상대는 아니라도. 적당한 설렘으로 연애에 임하고, 그렇게 첫 연애를 해 봤다면 내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지도 모르겠다고….”

“…….”

“넌 어떻게 생각해. 그것도 진짜 사랑 같아?”

이현의 물음에 석희재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이현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그 애와는 아무 사이도 아닌 것으로 끝나는 게 맞았다. 약간의 설렘과 저를 좋아하는 마음에 보답해 주고 싶은 초조함, 그리고 동정심 같은 것으로 연애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몇 주 뒤.

‘걔 파혼한다더라. 결혼 코앞에 두고… 걔네 어머니가 아주 마음고생이 말이 아니야. 에휴, 불효자식.’

형이 여자 친구와 파혼한다고 했다.

이현은 내색도 못한 채로 큰 충격을 받았다.

동시에 그 말에 조금이나마 안심하는 자기 자신이 무척 싫어졌다. 형의 여자 친구는 오며 가며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는데, 자신이 형의 옆집 동생이라 하니 무척 상냥하게 대해 주었다. 여자를 좋아했다면 아마도 저런 사람을 좋아했으리라고 생각할 만큼 좋은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불행에 안도하는 자기 자신이 싫어서 이현은 스스로를 미워했다.

동시에 형과는 아주 친한 사이로 돌아갔다. 예전처럼.

결혼 자금 대신 여행을 다녀왔다는 형은 이현에게 면세점에서 산 초콜릿 박스를 내밀었고, 이현은 하필이면 먹어서 없어지는 선물을 받은 걸 안타까워했다. 평생 품에 끌어안고 있고 싶은데 그러면 초콜릿은 썩어 버릴 테니까.

겉으로만 보아서 형은 파혼이라는 굴곡을 겪은 사람처럼은 보이지 않게 쾌활했다. 그리고 이현을 보면서도 ‘예전에 그 친구와 어떻게 됐느냐’라는 말은 꺼내지 않았다. 그저 밤중에 이현의 집에 불쑥 찾아와 침대에서 빈둥대던 현과 게임을 하다 갔고, 가끔은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 가지고 당구장으로 오라며 심부름을 시키곤 했다. 현이 툴툴대면서도 부탁받은 물건들을 봉지에 달랑달랑 담아 가면 보상처럼 담배를 한 개비씩 쓱 꺼내 주었다. 호기심에 눈을 빛내던 현은 당구장 구석에서 남은 탕수육을 얻어먹고 그렇게 담배를 배웠다.

왜 잘해 주지?

너무 설렌다.

설레 죽을 것 같아….

당시 이현의 일기장엔 그런 말들뿐이었다.

정확히 같이 무얼 했고, 어떤 말을 해 주었다는 말도 없었다. 당연했다. 그냥 형이 해 주는 모든 게 좋았으니까.

파혼한 형은 독립해서 춘천을 떠나 서울에 오피스텔을 얻었다. 거기를 많은 여자가 드나든다는 건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자신은 주말마다 형의 부모님이 들려 주신 반찬을 싸 들고 그를 찾아갔기 때문이다. 지칠 줄도 모르고.

가끔 형이 심부름시키는 목록 중에 콘돔이 있을 때가 있었다. 고등학생이 술과 담배는 못 사지만 콘돔은 살 수 있다는 것을 이현은 그때 처음 알았다. 후드 티의 줄을 당겨 눈과 코만 내놓고, 모자를 푹 눌러쓴 채로 계산을 하는 순간이 미치도록 부끄러웠다. 형의 오피스텔 근처에서 그의 상대들과 마주치는 것은 더더욱 부끄러웠다.

형이 불특정 다수의 여자와 잔다는 것은 의외로 아무렇지 않았다. 좋아하는 마음에 조금도 생채기를 내지 못했다는 소리다. 아마 처음부터 여자 친구가 있던 사람을 좋아해서 단련이 된 걸 거라고, 이현은 생각했다. 특별하지 않은 사람들이 무수히 많아 봤자 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일 뿐이다.

아마도 저는 그보다 오래갈 테니 자신이 조금은 더 특별하다고, 그렇게 믿었던 것 같다.

형의 집에서 나오는 ‘남자’를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런 꼬마애랑도 자? 완전 쓰레기네.’

이현은 어안이 벙벙한 채로 현관에 서 있었다. 형은 쓰레기라는 말을 듣고도 유쾌하게 웃었다. 상반신을 벗은 남자는 이현을 대놓고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침실로 들어갔다.

‘이제 가. 잔돈은 네가 챙겨.’

형이 큰 손으로 이현의 머리카락을 쓱 쓰다듬어 주었다. 언젠가처럼. 그냥 친구 사이겠지. 이현은 애써 그렇게 생각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저 역시 너무나도 잘 알았다. 그날의 심부름 목록에도 콘돔이 있었으니까.

집에 돌아오는 길에는 치미는 울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런 걸로 실연의 감정을 느낀다면 아주 오래전에 골백번도 더 느꼈어야 했으니까. 저에게 남자인 친구와의 관계를 캐묻던 형의 한심한 눈빛도 생각이 나서 서러웠다.

완전히 불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가능성을 닫아 버렸던 때가 행복한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자마자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의 박탈감이 몰려왔다. 이현은 버스 정류장과 아파트 단지, 놀이터, 그리고 엘리베이터와 집으로 돌아오는 복도마다 형과의 추억이 묻어 있어 형에 관한 생각으로부터 도망치지도 못했다. 이현은 헐떡이며 울고 절망했다.

‘아, 근데 남자는 안 되겠더라.’

주말이 되어 집으로 내려온 형이 이현의 귀에 소곤거렸다.

두 사람의 사이에는 갈비찜과 옥돔구이, 갓김치가 놓여 있었다. 아주머니가 상을 차리며 ‘현이도 집에 있으면 불러 오라’고 해서 막 밥을 얻어먹으러 온 참이었다. 제가 좋아하는 반찬을 한가득 입에 넣었던 이현은 캑, 하며 거실에 있는 아주머니를 저도 모르게 쳐다보았다. 형이 큰 손으로 이현의 조그마한 머리통을 저에게 돌려놓았다.

‘벗겨 놓으니까 식어. 남자 목소리로 아양 떠는 것도 싫고….’

‘그, 그래서… 안 했어?’

‘못 했지. 안 서니까.’

집에 돌아온 이현은 방문을 닫고 거울 앞에 섰다. 거울을 보자마자 제 입술에 밥풀이 하나 묻어 있는 것을 보고 괜히 깜짝 놀랐다.

‘형은 알려 주지도 않고.’

이런 얼굴을 보여 주었다고 생각하니 부끄러워져 이현은 손등으로 입술을 거칠게 닦아 냈다. 그러고는 입고 있던 후드 티를 벗어 버렸다. 머리카락이 함께 딸려 나와 부스스하게 뻗쳤다.

거울 앞에 선 이현은 제 상반신을 꼼꼼히 살펴보았다.

‘나도 형이 보기엔 역겨울까?’

이현은 손으로 제 벗은 몸을 감추듯이 감싸고는 괜히 팔을 문질렀다. 피부는 흠 없이 희고 몸은 아직 골격이 다 자라지 않아 굴곡 없이 마르기만 했다. 그나마 가슴이 판판한 것과 어깨가 적당히 벌어진 것만이 소년의 몸인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자니까 당연히 역겨울 것이다. 이현은 자신이 친구와 끌어안고 있던 것을 들켰던 날, 형이 저를 바라보던 표정을 여전히 기억했다. 혐오스럽다는 듯, 혹은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던 그 표정.

생각해 보니 울화가 치밀었다. 자기도 남자와 자려고 했으면서. 미수에 그쳤지만 아무튼 똑같은 욕망을 가졌으면서 자기만 경멸당한 것이 서러웠다. 좋아하는 마음과,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이 항상 옳은 인물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은 별개의 일이다.

그때부터 그걸 알았던 이현은 석희재가 자신을 어떻게 판단해 왔을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나중에… 결국 내가 먼저, 나로 시험해 보라고 했어.”

“…….”

“그때도 경멸하는 눈으로 날 보면 나도 형을 같이 경멸해 주려고… 그런데.”

그쯤에서 석희재는 이현의 말을 듣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아주 자연스러운 방어 기제였다. 제 얼굴을 보지 않는 이현이 떠올리는 과거의 기억이 상처투성이라는 것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으니까. 그리고 그것이 저마저 상처입힐 것이 두려웠다.

“나보고 몸이 제법 가늘다고.”

“…….”

“피부는 괜찮은 것 같다고.”

“…….”

“얼굴만 안 보면 할 수도 있을 것 같다고….”

“…….”

“나는 그게, 형이 우리 엄마한테 죄책감을 느껴서 그런다고 생각했어. 동생처럼 챙겨 주던 옆집 애를 깔아 눕힐 때 우리 엄마 생각이 나면 안 설까 봐 그런다고. 나는 그랬거든, 형이 좋은데 형이 파혼한 걸로 우시던 옆집 아주머니 생각하면 나도 슬퍼져서.”

그런데 아니었지.

그냥 남자 얼굴을 보는 게 싫었던 거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성인이 되자마자 이현은 형을 따라 서울로 상경했다. 대학은 애초부터 갈 생각이 없어 미련도 없었다. 그렇게 형의 집을 줄기차게 들락거리던 어느 날, 형과 첫 경험을 했다.

그토록 기다리던 첫 관계였건만, 당시를 묘사하는 이현의 말은 무척 짧았다. 아팠고 또 무섭기만 했다고. 그리고 누구나 다 처음은 아프다기에 그게 당연한 줄로 알았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이현은 당시 아르바이트하던 칵테일바의 친구들과 어울려 놀다가 포르노를 보게 되었다. 어쩌다 게이 포르노까지 틀게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친구들은 남자 둘이 얽힌 섬네일을 볼 때부터 헛구역질을 하며 토하려고 들었다. 그리고 그렇게 비명을 지르는 원숭이 같은 놈들 사이에서 이현만 연기할 수가 없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동영상의 제목은… ‘스트레이트인 룸메이트가 나를 덮쳤다.’ 헤테로에게 덮쳐져 아무렇게나 ‘사용’ 당하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판타지겠지만 이현에게는 현실이었다.

그리고 그 영상의 마지막, 탑은 사정한 후 지쳐서 바텀의 몸 위에 털썩 누웠다. 그게 두 사람이 몸을 붙인 것의 전부였다. 3초간 짧게 끌어안고 곧바로 몸을 일으키는 남자의 모습을 보면서 이현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게 바로 형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현은 입술을 깨물며 눈물을 찍어 냈다.

세상에 포르노를 보면서 우는 정신 나간 놈이 있다고 놀림 받았지만 마음을 추스를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이현은 형에게 또 할 수 있겠느냐고 물어봤다.

혹시 이다음에는 더 길게 안아 줄까 봐.

이제 이현은 저를 위한 콘돔을 사 들고 형의 오피스텔에 드나들기 시작했다. 이현이 그곳에 자주 간다는 것을 알게 된 형네 아주머니는 두 사람분의 반찬을 챙겨 주셨다. 나쁜 버릇이 든 이현은 이제 콘돔보다 김치 냄새 나는 쇼핑백을 부끄러워했다.

지금 생각하면 철없는 짓이지만 형의 침대에 벗은 몸으로 누워 있거나 나란히 담배를 피우러 갈 때에는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취했던 것 같다. 또래보다 앞서 나간 것만 같은 기분 말이다.

너무나도 능숙한 형 앞에서 자신은 언제나 끌려가기만 했지만 그래도 점차 행위에 익숙해져 가며 이현은 스스로 조금씩 느끼는 법을 깨우치고 있었다. 어느새 삽입으로 흥분하게 되었다는 뜻이다. 전희도, 다정한 애무도 없는 관계에서도 알아서 절정에 다다를 만큼 몸은 착실히 적응했다. 형의 체온을 가만히 느끼거나, 형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거나, 아니면 그저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걸어 주는 것이 섹스보다 좋았던 때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런 때가 까마득했다.

그러나 이현에게 그 뒤의 과정은 짝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처절하게 버려지는 과정에 가까웠다.

그걸 인지한 처음은 어쩌다 신음 소리를 냈을 때였다.

‘남자인 티를 내면 식으니까’라는 이유로 형은 이현이 행위 도중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했다. 가끔은 입에 속옷을 물려 놓을 때도 있었다. 신음 소리를 내는 것을 선호하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소리를 냈다고 뺨을 맞을 줄은 몰랐다.

짝! 소리와 함께 뺨이 불타는 듯한 감각이 전해졌다. 이현은 새빨개진 뺨을 붙잡고 잠시 어리둥절한 채로 형을 올려다봤다. 골까지 흔들려 정신이 없는 상태에서 머리카락을 콱 붙잡혔다.

‘씨발, 추하게 소리 내지 말라고. 흥 다 깨지니까.’

‘혀, 형….’

그러나 흥이 깨진다는 말과는 다르게 그날따라 형은 더더욱 흥분한 것 같았다. 아니, 더없이 흥분한 게 맞았다. 형은 이현의 머리카락을 함부로 쥐어 잡아당기고, 컥 소리를 내며 젖혀진 목을 졸랐다. 이현의 얼굴이 새빨개지는데도 일부러 베개로 코와 입을 틀어막고 숨을 못 쉬게 괴롭혀 댔다. 격한 삽입으로 부딪치듯 마찰하는 살이 까슬하도록 아픈데도 이현은 그만두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형이 미친 듯이 흥분해 제게 달려드는 것이 충격이었고….

또 아픈데도 왠지 희열을 느꼈다. 진짜로 그가 자신을 원하는 것만 같아서.

사정 직후의 3초간의 포옹, 그것보다 더 강렬한 방식으로 확인한 자신의 필요성이었다.

그날 이현은 결국 피를 보았다. 뒤가 찢어진 건 첫 관계 이후로는 처음이었다. 샤워하면서 물과 섞여 흘러나오는 선홍색 핏물이 멈추지 않아 무척 당황했다.

‘아프기만 했던 건 아니지?’

집에 가기 위해 현관에 선 이현에게 형이 물었다. 눈이 팅팅 붓고 입술은 하도 깨물어 울혈이 든 얼굴로 이현은 답을 고민했다.

아프긴 아팠는데…. 그래도, 괜찮다고 말할까. 형이니까.

그 순간 형의 얼굴이 성큼 다가왔다. 숨소리가 닿을 만큼. 그러자 어쩔 줄 모르고 심장이 요동쳤다. 반사적으로 감긴 이현의 눈꺼풀에 쪽, 소리 나게 키스를 해 준 형은 커다란 손으로 이현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나도 좋았어.’

‘…….’

‘다음에 또 하자?’

짧은 키스에 심장이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속도로 빠르게 뛰었다. 현관 밖으로 부드럽게 내쫓긴 뒤에도 흥분이 가시지 않아서 이현은 제집까지 미친 듯이 달렸다. 폐가 터질 것 같은 기분으로 하늘을 올려다봤다. 여느 날처럼 별이 반짝이고 있었다. 이현은 헤매는 눈으로 그중에서 금성을 찾아냈다. 언어로 바꿀 수 없는 감정이 소용돌이쳤다.

‘아마 이제부터 시작인가 봐.’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아질 거 같아. 왠지 기분이 그냥 그래.

그리고 형은 정말로 그 뒤로 다른 사람들과 만나는 일을 뚝 멈췄다. 그때까지도 이현은 가끔씩 형의 오피스텔에 여전히 드나들던 다른 여자들의 흔적을 보며 우울해하곤 했다. 그러나 어느 시점 이후로는 아무도 오지 않았다. 확실했다. 이제 형의 오피스텔에 드나드는 것은 저뿐이었다. 그게 이현의 희망에 좀 더 불을 붙였다.

또 조금 더 시간이 흐른 후 이현은 형이 파혼에 이른 여자 친구에 대해 했던 말을 다시금 이해하게 됐다. ‘섹스’에 대해 노골적으로 타인과 이야기해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라서,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던 말을.

‘섹스가 재미없어. 알지? 넣고 흔들고 싸고 끝.’

그냥 하는 섹스가 재미없다고 한 건 이런 의미였다. 형은 때려야 흥분하는 사람이었다. 특히 맞다가 지쳐 정신이 나간 이현이 빌고 울 때면 아래가 불뚝 서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러다 무릎으로 기면서 다가가 빨아 주면 그렇게 좋아할 수가 없었다.

…라고.

이현은 그저 형의 욕망에 대해서 말했지만 석희재는 그 과정까지 가는 길이 결코 순탄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추측했다. 형이 지나치게 폭력적으로 굴 때에 이현은 분명 기대보다 두려움이 더 커서 울음을 터뜨렸을 것이다.

그러면 그 짐승 같은 인간은 얄팍한 죄책감으로 사탕을 하나씩 물려 주었을 테고.

그러다 결국 이현이라는 사람은 통증의 크기와 애정의 크기를 같은 것으로 치환하게 되고 말았다고.

그 모든 것을 덤덤한 말투로 말하는 이현은 무력해 보였다. 동시에 석희재는 다정한 섹스에서 무척 느꼈던 이현을 떠올렸다. 석희재는 보이지 않는 쪽의 입술을 지긋이 씹었다. 눈가는 뜨겁고 심장은 고통스럽게 맥박쳤다.

“내가 어느 날 물어봤어. 우리는 무슨 사이냐고.”

“…….”

“바보 같지. 내가 섹파한테 그런 말 들으면 도망치고 싶었을 것 같은데….”

“…….”

“형은 특별한 사이라고 해 주더라고.”

석희재는 그 말의 행간을 읽어 냈다. 당연하게도 석희재의 생각은 이현과는 많이 달랐다. 그 개자식은 그저 편리한 성욕 처리 상대의 마음을 이용해 좀 더 즐기고 싶었을 뿐이다.

반면 이현은 어땠던가. 그는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관계에서 물러나려고 했다. 석희재가 아무 예고도 없이 배우 신분으로 그의 일터로 쳐들어간 날부터 당장 차갑게 선을 그었다. 희망 고문이 제일 나쁘다는 것을 아는 사람의 행동이었다.

그때 아무 여지를 남기지 않으려던 이현이 너무나도 냉정해 석희재의 가슴에는 아무도 모르는 멍이 들었었다.

그리고 이제야 혼자 앓았던 마음의 멍이 겨우 씻겨 내려간다.

이현이 다 말하지 않은, 본인조차 자각하지 못한 말들이 겨우 바깥으로 흘러나옴과 동시에….

“사실 난 우리가 사귀는 거 아니냐고 물어보고 싶었거든. 아닌 거 알면서도, 그냥….”

“…….”

“지금이라면 그런 속 보이는 말은 절대 안 꺼냈을 텐데.”

“…….”

“왜냐하면 그럼 조금 더 오래갔을 테니까…. 미련하지.”

그런 이현의 물음에 성가심을 느꼈는지 형은 관계에 변주를 주고자 했다.

형의 오피스텔로 찾아간 날, 이현은 형과 함께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처음 보는 형의 친구와 마주쳤다.

거실에 앉아 있던 남자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현관에 선 채로 생각에 빠졌던 이현은 금세 기억해 냈다. 형의 심부름으로 들렀던 당구장에서 몇 번 마주쳤던 남자였다. 항상 당구장에 여자 친구를 데리고 오던 사람인데, 자신이 형을 기다리며 옆에서 남은 탕수육을 먹을 때 그 여자 친구는 제 옆에서 무료하게 핸드폰을 보던 게 기억이 났다. 여자 친구를 앉혀 두고 당구 삼매경인 형들을 보면서 여자 친구분이 삐지면 어쩌나 제가 되려 조마조마했었다.

‘왔냐? 들어와.’

형이 얼굴도 보지 않고 인사했다. 반면 형의 친구가 저를 빤히 훑어보았다. 그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현은 얼른 들어가는 대신 형의 어머니가 손에 들려 주신 반찬통을 들고 현관에 불퉁한 표정으로 서 있기만 했다. 도착하면 당연히 형과 둘이서만 시간을 보낼 줄로 알았는데 뜻밖의 방해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것이다.

형의 어머니에게 받아 본 반찬통들을 냉장고에 정리하면서, 이현은 슬쩍 친구는 언제 돌아가느냐고 물었다.

‘아, 오늘 같이 술 마시기로 했는데.’

‘…….’

‘괜찮지?’

‘술? 그럼 나는 그냥 집에 가?’

이현은 조급한 마음으로 그렇게 되물었다. 그러자 형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왜? 너도 마셔.’

‘…….’

형과 단둘이면 더 좋았겠지만 그래도 일탈의 기회를 얻었다는 사실에 이현은 침묵으로 수긍했다. 당사자인 저를 두고 어떤 계획이 오가는지도 모른 채. 말없이 삐진 표정으로 냉장고 앞에 주저앉은 이현을 향해 씩 웃은 형은 다시 거실로 떠났다.

상황이 조금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안 때는 이미 늦은 뒤였다. 얻어 마신 맥주와 소주에 조금씩 긴장이 풀려 갈 때 제 옆에 앉아 있던 형의 친구가 은근슬쩍 몸을 붙여 왔다. 어깨를 껴안고 팔을 주무르기도 했고 괜히 허벅지에 손을 올리기도 했다. 이현은 순진하게도, 그에게는 여자 친구가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믿었다. 그냥 주사가 스킨십인 사람이라고만 생각했다.

피부가 꽤 부드럽다거나 생긴 거와 다르게 고분고분하다는 칭찬을 해 주는 것도 어색하게만 느껴졌다. 떨어져 앉고 싶었지만 사람이 셋이라 자리를 옮길 곳도 마땅치가 앉았다. 이현은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형과 눈이 마주쳤다. 형이 제 상황을 알아주기를 바랐지만 형은 눈을 내리깐 채로 술잔만 비울 뿐이었다.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는데 저만 예민하게 구는 것 같아 이현은 머쓱함을 느꼈다. 자신이 형을 좋아해서 다른 사람의 터치에 민감하게 반응하나 보다고 생각하며 형의 친구가 들러붙을 때마다 소극적으로 몸을 피하기만 했다.

섞어 마신 술에 머리가 아파 소파에 머리를 기댔을 때였다.

‘어지러워?’

형이 물었다.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형이 성큼 일어나 어딘가로 향하는 것을 보면서 이현은 형이 두통약을 가지러 간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물이라도 한 잔 따라 주거나….

그러면서 천장에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갑자기 후드 티 안으로 들어와 함부로 가슴팍을 더듬어 대는 타인의 손길. 불쾌감에 소름이 돋아 이현은 상체를 벌떡 일으키려 했다.

‘뭐예요!’

하지만 항의하는 제 혀는 완전히 풀려 있었다. 저가 듣기에도 맥이 없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술기운에 휘청이던 몸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뒤집힌 시야보다 충격적인 것은 순식간에 저를 올라탄 형의 친구였다. 눈이 마주쳤을 때 이현은 덜컥 겁을 먹었다. 강간을 앞두고 비틀린 흥분으로 이성을 상실한 남자의 눈에서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낀 것이다.

그럼에도 이현은 당장 제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랐고, 남자가 제게 손을 뻗을 때도 그저 ‘맞는다’라고만 생각했다.

이현은 숨넘어가는 소리를 내며 반사적으로 양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소리는 예상치도 못한 곳에서 들려왔다. 바지 버클이 풀리고, 지퍼를 다 내리지도 않은 채로 마른 몸에 헐렁하게 걸쳐져 있던 청바지가 쑥 벗겨져 내려갔다.

‘형… 형!’

이현은 엎드려 외치며 막 침실에서 나온 형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저를 빤히 바라보는 형의 얼굴에서 놀라움이나 걱정스러운 기색은 찾아 볼 수 없었다. 그저 무심한 눈으로….

‘아, 현아. 셋이 하는 것도 괜찮지?’

라고 물었을 뿐이다.

형의 화법에 의하면 그건 물음도 아니었다. 요청도 아니었고. 그냥 그렇게 하겠다는 선언이었다.

형의 손에는 두통약이나 물이 아니라 콘돔 박스가 들려 있었다. 그걸 보는 순간 이현은 방어할 의지조차 상실했다. 형이 동의했다는 충격, 그리고….

‘원래 여자 끼고도 자주 했는데. 요즘은 네가 내 ‘그거’니까.’

‘…형?’

원래 다들 그런다는 말에 이현은 혼란을 겪었다. 물론 상식적으로 그런 게 ‘보통’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형은 조금 특이한 사람이니까. 그럴지도 모른다고 납득해 버렸다. 독특한 섹스 취향만큼이나 세간의 상식과 다른 방식으로 놀아 왔을지도 모르고….

무엇보다도 형의 제안을 거절하면 다시는 여기 오지 못하게 될까 봐 두려웠던 것 같다.

‘야, 어때?’

‘괜찮은데? 벗겨도 별로 거부감도 안 느껴지고.’

‘이상하게 꼴리지?’

‘어. 여자 옷 같은 거 입혀 본 적 있어?’

‘뭐야. 넌 그런 취향이냐?’

두 사람은 이현을 두고 낄낄거리며 대화를 나누었다. 자신도 당사자인데 묘하게 배제되는 기분이 기묘했다.

‘먼저 해.’

형의 말이 떨어지는 순간 이현의 입에서 비정상적인 호흡이 흘러나왔다.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고 식은땀이 흘렀다.

‘얘 완전 긴장했나 봐. 뒤가 너무 빡빡한데. 원래 이러냐?’

‘아, 남자는 원래 좀 그래. 미리 풀어 줘야 하더라.’

‘젤을 쓰면 되나?’

‘근데 얘 알아서 풀고 왔을 텐데.’

중얼거린 형은 피우던 담배를 눌러 끄고 가까이 다가왔다. 낯선 남자에게 손가락으로 뒤가 쑤셔지던 이현은 떨리는 눈으로 형을 올려보았다. 싫다는 말이 목 끝까지 치밀었다. 그때 픽 웃은 형이 이현의 턱을 잡고 천천히 고개를 내렸다. 그러고는 긴장한 현에게 입을 맞추었다.

부드럽게 입술이 닿았다. 그다음으로는 혀가 파고들었다.

잠든 형의 얼굴에 몰래 입술을 맞춰 본 적은 있지만 혀를 섞는 방식의 키스는 처음 해 본 것이었다. 놀랍게도 이현은 그 순간 모든 긴장을 잊었다. 등이 떨릴 정도로 흥분해 버렸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받는 키스는 너무나 황홀해서 그대로 몸이 녹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생각해 보니까 섹스는 자주 해도 그런 식의 키스는 처음 해 봤거든?”

첫 키스를 떠올리는 이현의 뺨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석희재는 아연한 기분에 휩싸였다.

“형 키스 되게 잘하더라.”

“…그게.”

석희재는 겨우 한 마디를 뱉었다.

“그게 다야…?”

이현은 머쓱하게 덧붙였다.

“…이래서 인기가 많았구나?”

“…….”

“그리고 또… 첫 키스를 정말 잘하는 사람이랑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이현의 말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가 표현하지 않은, 너무나 많은 것들이 석희재의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석희재는 이현 대신 울고 싶어졌다.

이현은 제 첫 키스가 얼마나 좋았는지는 공들여 설명하더니 이후 행위에 대해서는 무척 간략하게 말했다. 셋이 할 거라는 설명과는 다르게 형의 친구가 자신을 일방적으로 강간하는 데서 끝났다고. 제 위에서 헉헉대는 남자가 너무 싫어서 헛구역질하다가 정말로 토해 버렸고, 제게 펠라티오를 시키던 형은 그 뒤로 질색하면서 근처도 오지 않았던 게 가슴 아팠다고 말했다.

남자는 빨리 사정했다. 아마 채 5분도 안 되었을 거라고, 이현은 이제 와 희미한 비소를 지었다.

자신이 바닥에 쓰러진 채로 죽은 듯이 누워 있을 때, 형은 친구와 함께 담배를 피우러 나가 버렸다. 한참 후 어렵게 몸을 일으킨 이현은 걸레를 찾아와 제가 토한 것들을 모두 닦아 냈다. 그때 조금 울었던 것 같다.

세수와 양치를 해서 더러워진 자국을 지워 낸 이현은 내킨 김에 몸까지 씻었다. 그때까지도 형은 돌아오지 않은 채였다. 이현은 형의 침실에 놔두었던 잠옷용의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소파에 앉았다. 무릎을 감싸 안고 적막한 방에서 방금 일어났던 일을 되짚어 보았다.

무척 이상한 일이 벌어졌지만 의외로 침착한 기분이 들었다.

다친 곳도 없었고 생각해 보면 그렇게 아프지도 않았다. 아마도 좆이 작아서였을 것이다.

토사물을 전부 닦아 내고 탈취제를 뿌리니 지옥 같던 공간도 제법 깨끗하고 쾌적하게 느껴졌다. 샤워해서 그런지 별로 더럽다는 느낌도 없었다.

방금 토했던 것도 잊고 이현은 과자 봉지에 남은 것들을 집어먹었다.

그렇게 빈집에 혼자 있다가 동이 텄다. 어차피 술 때문에 당장은 집에도 갈 수 없었다. 이현은 여명이 밝아 오는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형은 아침 9시가 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그를 보자마자 침착하던 현은 다시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마도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아서 겁이 났던 것 같다.

‘형, 왜 이제 왔어….’

이현은 형에게 매달렸다. 형에게서는 술 냄새가 진동했다. 그렇게 친구와 다시 나선 뒤 2차라도 간 모양이었다. 그렇게 밤새 술을 진탕 마신 뒤 아침에 해장국까지 먹고 들어오는 것이 정해진 루트였다.

깨끗해진 집과 깨끗하게 씻은 이현을 관대하게 안아 주면서 형은 빙긋 웃었다. 이현의 등을 두드려 주기도 했다. 서러워진 이현은 결국 제 속마음을 털어놓고야 말았다.

‘형, 흐윽, 나, 나… 다른 사람이랑 하는 거 싫어.’

‘그래….’

‘형이 좋아. 형하고 하는 것만 좋아… 흐으, 어어….’

형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웃었다.

‘나 좋아해?’라고 말하며.

그 순간 이현은 깨달았다. 이게 자신의 첫 고백이라는 것을.

아끼고 아끼던 좋아한다는 말을 이런 식으로 꺼내고 싶지는 않았다. 더 낭만적인 상황에서 형의 마음을 조금만 더 얻은 다음에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뱉은 말에 실려 좋아하는 감정이 폭포처럼 쏟아졌다. 도무지 고백을 참을 수가 없었다. 흔들리는 눈으로 이현은 응. 형이 좋아. 형만 좋아, 그 말만 무수히 반복해서 말했다. 형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로 그의 가슴에 얼굴을 파묻었다가, 다시 고개를 들어 형의 얼굴을 보았다가를 반복하면서.

형은 ‘그래, 그래.’ 중얼거리며 이현의 동그란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자신이 서러워하고 엉엉 울수록 도리어 다정해지는 형이 신기해서 이현은 제 마음을 주체하지 못했다.

‘현이가 날 이렇게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허엉, 누, 누가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이랑 자. 흐윽.’

‘그래. 형이 미안해.’

그러면서 형은 이현을 번쩍 들어 안아 침실로 갔다. 이현은 그의 목덜미를 놓치면 추락할 것처럼 꽉 끌어안았다. 그날은 잠들기 직전까지 그의 품 안에 안겨 있을 수 있었다. 형은 이제껏 마음을 몰라 줘서 미안하다며 눈을 마주치고 젖은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 주기도 했다.

나중에 술이 깨고 난 후 이현은 형의 마음을 덧없이 추측해 보았다. 저를 안고 눈물을 닦아 주고 미안하다고 사과해 주던 형의 마음을.

혹시 죄책감이 동정심을 이끌어 낸 걸까.

‘아마도 미안해서 잘해 주나 보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형이 제게 죄책감을 느낄수록 마음의 빚도 누적될 테니. 제게 미안해하고, 또 미안해하다가 너무나 미안해지면 언젠가는 제 옆에 영원히 있기로 마음을 먹게 될지도 모른다. 이현만큼 잘 참고, 유용하며, 자신을 사랑해 주는 사람은 없다고 생각하게 될 거다.

그런 식의 관계가 지리멸렬하게 이어졌다. 이현의 스물두 살까지.

겨우 서울살이에 적응해 갈 즈음에 이현은 형이 저 몰래 다른 여자를 만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 친구들에게는 결혼할 사람이라고 소개했다는 소문까지 함께였다.

전신이 창백해진 채로 ‘나는 형에게 뭐냐’라고 울고 매달렸지만, 형은 결혼할 나이가 되었는데 애인의 흔적조차 없으면 주변에서 귀찮아한다는 변명만을 내뱉었다. 형의 그 말 때문에 남자인 데다가 남 앞에 떳떳하게 나설 수 없는 이현은 죄인이 되었다.

우는 이현을 달래 주면서도, 형은 ‘연인 사이’라는 단 한 마디를 해 주지 않았다.

자신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아마 앞으로도 평생 형의 애인이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서 이현은 많이 울었다.

‘형은 내 인생에서 가장 특별한 사람인데, 나 역시 형에게 그럴까.’

아니, 라는 즉답이 나온 순간 이현은 충동적으로 입대 신청을 했다.

난생처음으로 먼저 형을 등져 본 것이었는데 후회는 저만 했다. 아무것도 아니어도 좋으니 옆에만 있을걸, 하는 마음과 그랬다가는 더더욱 괴로웠으리라는 가정 사이에서 치열하게 싸우며 지옥 같은 하루하루를 보냈다.

군대에 간 후 이현의 몸은 더 다부져졌다. 성인이 된 뒤로도 키가 자랐고, 군대에서 규칙적인 생활을 하자 원래도 팔다리가 긴 골격 위로 겨우 근육이 붙기 시작했다. 이현은 이제 제 몸에서 찾아볼 수 없는 소년의 흔적을 추적하며 가끔 아쉬워했다. 빈말로도 안아 주고 싶다거나 보호 본능이 드는 몸은 아니었다. 형이 저를 귀여워해 줄 때와 같은 모습은 아니라는 소리다.

휴가를 나온 이현의 짧게 깎은 머리를 보고 형은 완전히 실망한 얼굴을 했다. 왜인지 그럴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정말 무심해진 형의 얼굴을 보자 이현은 더욱더 작아졌다. 눈치가 보여 밥도 조금만 먹었다. 동시에 내심 충동적으로 군대에 간 제 결정을 후회했다. 이렇게 빨리 나이가 들 줄 알았다면 조금이라도 어릴 때 형의 곁에 붙어 있었어야 했는데, 하며.

밥을 다 먹자마자 형은 모텔에 가자고 제안했다. 혹시 오늘 같이 자게 되나, 기대하며 형을 만나러 온 것은 사실이었지만 왠지 그것만이 목적인 것처럼 구는 형을 보니 무척 서러워졌다.

형은 피부가 조금 그을린 데다 골격이 자란 이현의 몸이 이제 더 이상 예쁘지 않다고 말했다. 그나마 만질 만하던 피부마저 거칠어졌다고 씹어뱉듯이 중얼거렸고, 행위 중에는 정말로 ‘남자’가 되었다면서 욕을 퍼부었다. 그게 섹스 중 흥분을 돋우기 위한 형의 취향이라는 걸 알면서도 왠지 형이 진짜로 제 몸을 혐오하는 것 같아서, 욕설 한 마디마다 이현의 심장은 쿵, 쿵… 하고, 저 밑바닥으로 떨어졌다.

이현이 제 몸을 싫어하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이었다. 제대하고 난 뒤에도 이현은 다시 머리가 길고 살이 더 빠질 때까지 형의 앞에 나타나지 못했다. 한참 만에 다시 만났을 때에야 형은 아직도 고등학생 같다며 부드럽게 미소 지었고 이현은 그 말투에 안도감을 느꼈다. 아직은 내가 쓸모가 있구나, 라고 생각하며.

하지만 여전히 자신은 역겨운 사내새끼일 뿐이었다. 어릴 때만큼 예쁘지도 않은. 그래서 이현은 제 존재 자체에 죄책감을 느끼며 형에게 모든 것을 다 맞춰 주었다. 그 사이에서 자기 자신은 점점 지워져 갔다. 그런데도 한 톨의 다정함을 얻어 내는 것은 갈수록 더 어려워지기만 했다.

지나치게 쉬운 상대가 되면 사람들은 존중해 줄 필요마저 잊는다는 것을 너무 늦게 알았다.

어느 순간 이현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완전히 소모되어 버렸다. 저를 떨쳐 내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한 형의 곁에서 눈치를 보는 것은 에너지 소모가 극심한 일이라, 이현은 쉽게 지치곤 했다. 형과 헤어지면 표정도 지워진 채로 무기력에 빠졌고, 형 말고는 서울에 아는 이도 없어 방에 쿡 틀어박혀 있기 일쑤였다. 약속 없는 날의 외출이라고는 번화가의 카페에 가서 혼자 앉아 지나다니는 사람을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그때마다 이현은 형을 좋아하는 마음을 떠올리려고 애를 써봤다. 그와 함께하면서 쌓았던 좋은 기억들.

하지만 형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던 때의 그 설렘은 너무나 까마득해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순간 이현은 크게 겁을 먹었다. 좋았던 기억은 이토록 선명한데, 도무지 설레지 않았다. 도리어 그 좋은 기억들의 꼬리를 물고 덮쳐 오는 나쁜 기억과 울컥 치미는 원망 때문에 더더욱 괴롭기만 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던 것 같다.

좋아하는 마음이 퇴색할 수 있다는 가능성.

상대를 원망하는 마음이 커지고 커지다 결국 사랑마저 변해 버릴 가능성을 말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순결하고, 고결하고 오로지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으로만 가득할 것 같다는 환상이 깨진 첫 순간에, 이현은 형에게 고백하던 날보다 더 많이 울었다. 숙인 고개 아래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재능 없고 열정 없는 제 평생에 이만큼 몰두해 본 건 사랑뿐이었다. 가치 없는 사람인 제 안에서 그나마 빛나던 것이 ‘사랑하는 마음’뿐이라, 평생 그것을 소중하게 지키고 싶었다. 그러나 이젠 그것조차 잃어버린 것 같았다. 저도 모르는 새에.

그때 아마도 제 내면에서 무언가가 깨져 나간 것 같다고, 이현은 생각했다.

***

“그 괴로움을 너무 잘 알아서.”

“…….”

“나는 너한테 미안해.”

이현은 이제 눈물이 완전히 마른 눈으로 석희재에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석희재는 약간의 붉은 기만 남은 이현의 얼굴을 축축한 시선으로 더듬었다. 그 모든 일이 이현에게는 지나치게 옛날 일이어서 그는 완전히 무뎌진 것 같았다. 제게 일어났던 일을 말하며 이현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스스로에게는 동정심도 없는 것 같았다.

울고 있는 것은 석희재뿐이었다.

제 커다란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로 석희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자신을 깎아 내고 깎아 내다 못해 완전히 풍화된, 메마른 사막 같은 이현의 마음이 보였다. 사랑 대신 원망이 샘솟을까 두려워 차라리 제 마음을 비워 버리기를 택한 남자.

한때는 의문이었다. 이현은 왜 자기 자신을 아끼지 않는지, 왜 스스로에게 약간의 여유나 사치도 허락하지 않는지, 왜 사랑에 저토록 냉담한지…. 그리고 왜 제 삶은 없이 일에만 매진했는지 이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변명으로 들리겠지만, 그래서 너와 사귀기 싫었던 것 같아.”

“…….”

“그날 윤간당하는 게 낫다고 말한 건….”

이현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내리깐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러면 나는 아무도 다치게 할 수 없으니까.”

“…….”

“마음 없는 남자들이랑 자는 거 나한테는 별거 아니야. 실제로 당한 적도 있는데 괜찮았잖아. 몸은 씻어 내면 되고, 다친 건 언젠가는 낫고….”

이현의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그는 천천히 소파에 머리를 기울였다.

“그런데, 마음은 안 나아.”

이현의 졸린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평생 아무에게도 하지 않았던 고백을 마친 그는 무척 지쳐 보였다.

“그러니까 나는….”

“…….”

“나는 나 때문에 상처받는 사람을 감당할 수가 없어.”

“…….”

“받은 사랑을 돌려주지 못하는 건 세상에서 제일 잔인한 짓이잖아.”

***

이현은 잠들기 직전 석희재의 우는 얼굴을 봤다. 그 사랑스럽고 다정한 얼굴이, 결국 아무도 미워하지 못하는 아기 심장처럼 말랑한 마음이 저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것 같았다. 쏟아지는 잠을 떨쳐 내려 노력해 봤지만 그 안온한 분위기에서 도무지 거부할 수가 없었다. 사랑이란 신기한 것이다. 이토록 재미없는 이야기를 인내심을 발휘해 듣게 만들다니….

석희재가 흘러내린 담요를 제 어깨에 다시 끌어올려 주는 것을 보면서 이현은 완전히 잠에 빠졌다.

과거 일을 난생처음으로 입 밖에 냈기 때문인지 이현의 꿈에서는 잊은 지 오래된 과거의 조각이 다시 이어지고 있었다.

형을 흔들고 싶어서 저 역시 다른 남자를 만나 봤다. 그가 조금이나마 후회하기를 바라면서. 그리고 그 뒤로 수없이 좌절했다. 그 모든 게 자신을 부식시키는 짓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면서도 이현은 형이 아주 약간의 미련이라도 보여 주기를 바랐다.

내가 필요하다고 먼저 말해 준다면, 그러면 얼마나 행복할까 상상하면서….

그러나 이현이 도달한 결론은 단 하나뿐이었다.

끝을 말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일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지 않으면 이 마음이 완전히 썩어 문드러질 때까지 끌려다니기만 할 것이다. 제 안에 남은 첫사랑을 보존하기 위해 이현은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여러 번 상상하고 수없이 각오했지만 끝을 입 밖에 내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했다. 쉽지 않았다.

이현은 그의 집으로 향했다. 익숙한 골목길을 걸어, 북촌의 한 주택으로 향했다. 인적이 드물었던 윤보선길에는 어느새 식당과 카페가 가득했다. 여기가 이렇게 될 만큼 시간이 많이 흘렀구나. 이현은 새삼스럽게 생각하며 돌길을 걸었다.

‘형은 한 번이라도…. 단 한 순간이라도 내게 진심인 적이 있었어?’

‘야. 새삼 왜 그러냐.’

‘…….’

‘너 네가 사내새끼라는 자각은 있어?’

비웃는 얼굴에 독이 올랐다. 이현은 울분에 차서 말했다.

‘그 사내새끼랑 몇 년이나 뒹굴었잖아. 나랑 별짓 다 한 게 형이야.’

‘…….’

‘대답해. 나는 진짜로 아무것도 아니었어?’

‘…….’

‘대답하라고. 나쁜 자식아!’

얼굴이 새빨개지도록 울면서 대들었다. 우스운 것은, 콧물을 훔치면서도 그의 눈에 제가 못생겨 보일까 봐 걱정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 번도 주인을 물지 않았던 개가 발광하자 그제야 형의 본색이 드러났다. 아주 조금, 조금 원망을 내보였을 뿐인데 이현은 형에게 흠씬 두들겨 맞았다. 다시는 주제도 모르고 기어오르지 말라고 ‘훈육’당했다.

그때 깨달았다. 관계가 끝물로 갈수록 섹스 중의 폭력이 더 심해지던 것은 그저 행위를 위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자신에게 질려서.

그걸 알았을 때 의외로 충격받지는 않았다. 아마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현은 그저 자조했다.

나는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인간을 좋아한 거냐.

추억에 대한 일말의 예의도 없는 남자를 골랐다.

내 주제에 뻔하지 뭐….

기나긴 외사랑에 낭만적인 끝 같은 건 없었다. 게이가 스트레이트에게 매달리면 결국 그런 식으로 꼴좋게 차이는 것이다. 지금이라면 제발 그러지 말라고, 그런다고 저 사람이 바뀔 것 같으냐고 저 자신을 타일렀을 텐데 스물두 살의 이현은 그걸 몰랐다. 맞아서 부어오른 얼굴로 코피를 쏟으면서도 형에게 또다시 매달렸다. 지난 시간을 아무 의미 없는 일로 만들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며 이렇게는 끝내지 말자고 빌었다.

내쳐지고, 내쳐지고… 또 내쳐지면서도.

몇 번이고 다시 찾아왔다. 이 집을.

이현은 두려운 마음으로 도착한 집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벌써부터 그와 마주하는 것이 두려워 딸꾹질이 나려고 했다. 벨을 누르기 전에도 한참을 망설였다.

가장 대면하기 무서운 것은 그의 차가운 눈이다.

자신을 무감정하게 보는 그 얼어붙은 눈.

겨우 결심이 서고 벨을 누르자 안에서 기척이 들렸다. 심장이 더욱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누구세요.’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긴장으로 의도치 않은 마른침이 넘어갔다.

‘…….’

그리고 안에서 문을 연 사람과 마주친 순간, 이현은 헛숨을 들이켰다.

문 뒤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저 자신이었다.

석희재를 보는 차가운 눈.

그 순간 이현은 자신이 석희재의 시선으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묘한 꿈이었다. 감정마저 전이된 듯한 꿈.

자신의 표정 없는 차가운 얼굴과 마주친 순간 가슴이 저릿해졌다. 긴장으로 혀가 뻣뻣하게 굳어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익숙한 감각이다.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준비했던 수많은 말이 무색하게 일순 바보가 되고 만다.

너도 그랬구나.

꿈에서 석희재의 시선으로 제 모습을 보면서 이현은 괴로워했다.

석희재가 느꼈을 매 순간의 통증에 공감하며 꿈에서도 울었다.

‘…이제 다시 여기 오는 일은 없을 것 같아.’

언젠가 들었던 말이었다. 석희재가 자신에게 끝을 고하던 순간, 그는 스스로 마지막을 말하며 얼마나 참담한 심정이었나. 저 역시 경험했기에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현은… 저 바보천치는 조금의 고민도 없이 즉답했다. ‘그래’라고.

주저 없는 대답에 가슴이 천 갈래 만 갈래로 찢어지는 듯했다. 이현은 자신을 향해 외쳤다. 들릴 리가 없는데도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외쳤다.

병신아, 그따위 일자리는 곧 제일 의미 없는 방법으로 잃게 돼.

온갖 치욕을 다 당하면서.

넌 네가 봤던 무수한 선배들처럼 그냥 쓰다 버린 패가 되는 거야.

언제까지 그런 식으로 널 조금도 소중하게 여기지 않는 데 매달리다가….

그렇게 매달리다가….

그러나 석희재의 몸을 입은 이현의 외침은 덧없이 속으로 먹혀 들어갔다.

이현은 여름날 제게 키스를 할지도 몰랐던 동갑내기 야구부 남자애를 떠올렸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도 가지 않겠다고 선언한 뒤, 형을 따라 겁도 없이 서울로 훌쩍 떠난 저 때문에 울던 부모님도 떠올렸다.

이태원에서 남자와 원나잇을 하다가 큰형에게 딱 걸렸던 날, 무뚝뚝하던 형이 폭음하고 제 앞에서 울던 것도.

미련한 첫사랑에 투신하다가 저가 울린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 목록 중에 석희재도 있었음은 물론이다.

‘이제 가세요, 배우님.’

‘…….’

‘피곤할 텐데 컨디션 관리 잘하시고, 택시 잡아 드릴까요.’

이제 이현은 피로한 얼굴로 말하며 문을 닫으려 했다. 저 멍청이가 영영 끝을 내려 하고 있었다.

그때 이현은 깨달았다. 이것은 과거의 일이다.

그리고 지나간 과거는 수정할 수 없다.

문이 닫혔다.

이현은 석희재가 그 문 앞에서 한참을 서성이며 울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잠시 후 석희재는 눈물 젖은 속눈썹을 한 채 터덜터덜 골목길을 빠져나갔다. 그와 함께 울면서 이현은 계속 뒤를 돌아보았다. 닫힌 문이 열리는 일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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