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첫 연애 (2)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실체를 알아 가는 과정은 헤어지던 순간보다도 더 괴로웠다.
자신이 아는 어른스러운 그라면 그러지 않을 거라고, 적어도 헤어진 연인에 대한 일말의 예의는 지켜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들려오는 소문들은 한결같이 석희재의 믿음을 배신하는 것이었다. 저조차도 의심하지 않았나. 자신은 사랑이라는 강력한 마취제를 맞은 건지도 모른다고. 상대방의 본모습을 알아채지 못하게 만드는 달콤한 환각에 취해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이별 후에 석희재는 일전에는 꾸지 않던 종류의 꿈을 꾸었다. 이별을 겪은 사람의 꿈은 미련을 형상화한 악몽이 아닐까 막연히 상상했었다. 그러나 꿈은 이현이 등장할 거라는 예상을 빼면 맞는 게 하나도 없었다.
꿈속에서 자신은 여러 가지 다른 말로 사랑을 표현하곤 했다. 그건 현실과 다르지 않았다.
‘형은 왜 자꾸 자기를 그렇게 깎아내려.
나 만나고 다른 사람이랑 한 번도 잔 적 없는 거 내가 아는데.
왜 자꾸 자기를 헤프다고 해.’
그렇게 말하면,
‘아니, 나는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은 아닐걸.’
이현은 부정했다.
꿈은 현실의 리플레이였다. 석희재는 과거의 미련을 정념화한 것 같은 꿈만 잔뜩 꾸었다. 깨고 나면 이현의 말이 귓가를 맴돌았다. ‘나는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다’라는. 이마에 손등을 올린 채로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다 석희재는 다시 잠들었다.
‘피디님은 진짜 어른이에요.
그래서 반했고, 그래서 같이 일하고 싶었어요….’
‘아니. 몇 번이나 말했지만 나는 그런 사람이 아닐걸.’
이현은 드물게 표정 없는 싸늘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 얼굴에 심장이 깨지는 것 같아 석희재는 충격으로 잠에서 깼다. 이것도 현실이었나? 꿈과 현실 사이에서 혼란스러웠다.
가장 괴로운 점은, 현재 이현은 스스로의 말을 행동으로 직접 증명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는 석희재의 환상을 깨부수기 위해 애를 쓰는 사람 같았다. 3개월짜리 연애가 자신에게는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는 양, 곧바로 원나잇을 하기 위해 모텔에 가는 남자. 성적으로 음흉한 마음을 품고 접근하는 남자 배우의 희롱을 알아챘으면서도 자의로 놀아나 주는 남자.
심지어 그토록 명확히 한다던 공사 구분도 집어던지고, 그는 여전히 자신을 투명 인간 취급한다.
왜? 내 얼굴이 보기 싫어서?
석희재는 괴로운 한숨을 쉬며 이불자락을 쥐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입에서 뜨거운 숨 덩어리가 쏟아져 나왔다.
‘피디님만 힘든 게 아니에요.
나도 힘들다구요.
나도 피디님 얼굴 똑바로 보기 힘들어요….’
…그래도 보고 싶다.
감히 그 이상의 다른 가능성을 바라는 것은 아니다. 그저 보고 싶을 뿐이었다. 그 끓는 갈증을 어떻게 가라앉혀야 하는지 석희재는 방법을 몰랐다.
최근 극장에서는 이현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개막 후에 피디가 항시 극장을 지키는 것은 아니라지만, 그가 자신을 피하고 있는 것만 같아 무척 괴로웠다. 이현은 무대와, 분장실로 통하는 극장의 모든 출입구와, 각 배우들의 동선에 아주 정통하다. 정해진 길로만 움직이는 자신을 피하는 것은 무척 쉬울 테다. 질척거리는 이런 마음을 알아챘기 때문일까.
아니, 그마저도 자의식과잉일지도. 그는 그저 내키는 대로 살고 있을 뿐인데.
하루, 이틀이 지나가면서 석희재의 마음속에서는 저를 조금도 배려하지 않는 이현에 대한 원망이 점점 커졌다. 지나간 사랑에 책임을 지라고 충혈된 눈으로 따져 묻고 싶었다. 저 역시 내키는 대로만 행동한다면 세상에서 가장 추해질 수 있었다.
그러다 문득 생각하기도 했다. 이현의 과거 연인들은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또 그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건지, 그의 현재가 무척 궁금했다. 일전에도 그가 어떤 연애를 하고 어떤 이별을 했을까, 그게 무척 궁금했던 적이 있었다. 결국 이현은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고 저와의 관계를 정리해 버렸지만 말이다.
그렇게 잠 못 이루는 밤이 늘어 갈수록 도리어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기 싫어졌다. 그에게 자신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우칠 때마다 더욱 그랬다. 석희재는 수면제를 먹고 늘 정해진 시간에 잤다. 입맛이 없어 식사를 부실하게 한 날이면 꼭 여러 가지 영양제를 믹스한 수액을 맞고 무대 위에 올랐다.
석희재는 한때 사랑을 탐구했던 것처럼 이별 후의 이현에 관해서도 탐구했다. 자신이 최초 이현에게 반했던 때를 떠올렸다. 억지로 파고든 그의 일터에서, 실제로 이현이 제가 꿈꾸던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도 생각해 보았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음식물을 완전히 닦아 내지 않은 싸구려 테이블에 앉아 마른안주를 집어 먹던 그의 모습이었다. 무리해서 이현의 영역 안으로 파고들었지만, 실상 현장에서는 피디인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대신 이현은 일주일 내내 여가 시간 대부분을 술자리에서 허비했다.
제 앞에서는 그 모든 것에 염증이 난 것처럼 굴었지만 실은 참을 만하던 게 아닐까. 그런 데에 안주하는 사람인 게 아니었을까….
그리고 석희재는 음악 감독이 술자리에서 대놓고 이현에게 질 낮은 시비를 걸던 모습을 떠올렸다. 음감은 회사에 대한 불만을 직접 말하지 못하는 대신 대리인인 이현을 감정의 쓰레기통 삼았다. 저를 비롯한 배우들에게는 한없이 굽실거리고 아부를 해 대던 음악 감독의 그런 모습을 보고 인격적으로 실망을 했던 기억이 난다.
그때 이현은 무어라 대응하는 대신 말없이 앉아만 있다가, 한참 후에 그 화제가 지나갔을 때에야 담배를 들고 자리를 피했을 뿐이다. 으레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따라 나갈 법한 흡연자들이 한 명도 이현을 따르지 않던 것은…. 아마도 이현이 몇 번이나 언급하던 ‘연습실 안의 서열’ 때문일 것이다.
평생 그런 취급을 받고 일하는 사람의 밑바닥이 멍들어 있지 않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겉만 멀쩡하고 속은 잔뜩 곪은 망가진 어른. ‘난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이현의 말에 공감하게 되는 과정이 서글펐다. 연민이 치밀면서도, 동시에 그런 그가 마음대로 취급할 수 있던 것은 자신뿐이었다는 사실이 비참했다.
***
“그 사람 최악인 거 알아요. 형편없는 사람인 것도 알아요.”
“…….”
“그런데 왜 그러는지 궁금해서….”
“…….”
“왜 자꾸, 나를 찾아오는지…. 혹시 조금이라도 미안한 건 아닌지. 그게 너무 알고 싶어서…. 이런 거 궁금해하는 건 이상한 거 아니죠?”
석희재는 누가 봐도 괴로운 낯빛으로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있었다. 얼굴만 보면 과음으로 인한 숙취에서 회복하지 못한 사람 같다.
그러나 유나연은 석희재가 쓸데없는 술자리와 과음을 진저리치게 싫어한다는 점, 그리고 영양제 믹스를 맞으면서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이상한 건 아닌데 궁금해해 봤자 의미가 없는 일이긴 하죠.”
“…왜요….”
“그래서 피디님이 미안하다고 했어요? 다시 만나자고 했어요? 아니잖아요.”
“…….”
석희재는 턱을 괸 채로 어딘가를 쏘아보았다. 눈가가 잠을 못 잔 사람처럼 어둡게 음영이 져 있었다. 그제야 저 피로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혹시 또 그랬어요?”
유나연은 의심스럽게 물었다. 이 피디가 새벽 2시의 구 남친이 되어 석희재의 집 앞 문을 두드리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어젯밤에도.”
석희재가 손으로 눈가를 쓸었다. 한숨도 못 잔 사람의 얼굴이었다.
“술에 잔뜩 취해서.”
“문 열어 줬어요?”
“…안 열어 줬어요.”
“잘했어요.”
안 열어 줬다는 말 앞의 침묵이 조금 거슬리기는 했지만 유나연은 일단 칭찬의 말을 건넸다. 보통 연애 상담을 해 주면 꼭 시킨 대로는 안 하고 사고를 친 다음에야 어떡하냐고 물어 화병 나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데, 석희재는 적어도 그런 타입은 아니었다. 연애가 처음이라더니 혹시라도 제가 일을 그르칠까 봐 절대로 충동적인 짓은 하지 않았다.
“…공사 구분 하기로 해 놓고, 자꾸 희재, 희재 그렇게 부르고.”
어제 일을 떠올리며 말하는 석희재의 말투가 무척 느렸다. 특히 ‘히재히재’ 하고 이현의 말투를 따라 하며 되뇌는 발음에서, 어쩔 수 없는 그의 애정이 묻어났다.
유나연은 팔짱을 낀 채로 눈썹을 누그러뜨렸다.
안타깝게도 석희재의 외사랑은 끝나지 않았다. 그는 좋아하던 사람에 대한 실망감과 그래도 좋아하는 마음이 범벅된 채 어쩔 줄을 모르는 상태였다. 어떻게든 옛 남자 친구의 행동을 희망적인 방향으로 해석하고 싶어 하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하지만 유나연이 보기에는 미래가 없는 관계였다. 석희재가 원하는 것이 그에게 다시 사랑을 받는 것이라면 더더욱.
“안 엮이는 게 최고인데 피디님은 왜 그러시는 거지….”
석희재와 이현의 짧은 연애사를 알게 된 후 유나연은 자신이 아는 이 피디와 석희재의 매몰찬 연인 이현을 일치시키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아무리 사람은 한 면만 보고는 모른다지만…. 석희재가 매달리기만 하는 을의 연애를 자처했다는 것 역시도 사람들은 짐작하지 못할 테니까.
단지 유나연이 아리송한 것은, 현재 소문에 휩싸여 사람들이 등 돌린 이현의 모습이 자신이 아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는 점이었다.
신입 컴퍼니 매니저를 덮치려고 한 이현 피디.
그 소문은 지나치게 치명적이어서 석희재마저 흔들렸다. 그러나 유나연은 한때 술자리에서 곤경에 처한 저를 도와주려고 이 피디가 저 대신 곤욕을 치렀던 일을 여전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날의 고마움은 아마도 배우 일을 하는 이상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유나연의 안에서 이현은 좋은 사람이고 또 믿을 만한 업계 선배였다. 동성애자라는 것은 이현이라는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걸 믿어요?’
그래서 그녀는 사람들에게 그렇게 묻고 싶었다.
저 자신이 사람들의 여론을 돌릴 만큼 영향력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점이 문제였지만….
아무튼 그런 이현이 얼마나 가혹한 연인이었으면 석희재조차 이현을 믿지 못하는 건가 싶었다. 공사가 매우 다른 사람일지도 모른다.
객관적으로 보자면 이현은 석희재보다 일곱 살이나 연상인 나이 29세에 성격도 제법 사교적인 타입이었다. 게다가 얼굴도 반반하고 잔정도 많았다. 심지어 석희재의 말을 들으면 이런저런 과거 경험도 넘치도록 많은 듯하다. 희망을 가지는 게 미련한 짓이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유나연은 고민 끝에 적절한 조언을 입 밖에 내기로 결심했다.
“너무 뼈아프게 듣지 마요. 냉정한 말로 희재 씨는 먹버 당한 거예요. 하도 매달리니까 떼어 놓는 게 더 귀찮아서 한 번 만나 준 거라고요. 희재 씨가 영락없이 꽝인 남자였으면 눈길도 안 줬을 테지만 슬프게도… 외모도 매력 있고 조건도 부족하지 않잖아요.”
“…….”
“내 생각엔 술에 취하니까 뭔가 동하기도 하고, 둘이 또 그건 잘 맞았다니까.”
그 대목에서 석희재의 뺨과 귀가 붉어졌다. 연애 상담을 하면서 그래도 ‘그런 쪽’으로는 만족시켜 줬던 것 같았다고 한 마디 흘린 것을 이런 식으로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연애도, 연애 상담도 해 본 적이 없는 석희재는 인제 와서 자신이 너무 많은 것을 말한 게 아닌가 후회했다.
“그러니까 그냥 하룻밤 자고 싶어서 찾아왔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그게 사실이었기 때문에 석희재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면 유나연은 석희재의 반응을 보려고 눈을 굴렸다. 지나치게 상처받지는 않았을까 걱정하는 눈초리였다.
“그런 경우에….”
한참 후 석희재의 입술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유나연은 귀를 기울였다.
“혹시, 자면….”
“…….”
“어떻게 돼요?”
“으이구.”
유나연은 곧바로 탄식했다. 석희재가 그렇게라도 전 연인을 취하고 싶어 하는 미련이 보였기 때문이고, 또 그의 미련이 거기서 끝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안 되는 거 알아요.”
유나연의 반응을 듣자마자 석희재가 도로 자신 없는 목소리로 눈을 내리깔았다.
유나연은 울화통이 터지는 속을 부여잡고 외쳤다.
“아니, 왜 안 돼요. 하고 싶은 대로 해 봐요. 다 해 봐, 해 보라구. 후유증만 더 길어지지. 이별의 특효약은 안 보고, 안 엮이고, 그냥 빨리 잊는 수밖에 없어요. 그래 봤자 본인만 괴롭지 뭐.”
“…….”
“그런 말이 있어요. 학대받은 아이가 가장 원하는 건 부모의 사랑이라고. 하지만 슬프게도 그 희망을 내려놔야지만 학대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하거든요. 내가 보기엔 희재 씨도 똑같아요. 그렇게 학대당하고도 아직도 사랑받기를 원하는 거예요. 하지만 끝까지 착취당하기만 할걸요.”
다시 사랑받고 싶은 희망을 버려야지만 행복해질 수 있다.
무척 역설적인 말이었다.
그건 과거 어머니가 제게 해 준 말을 떠올리게 하는 부분이 있었다. 어머니는 석희재에게 성공하라고 말했다. 누구나 탐낼 만한 사람이 되어서, 그렇게 과거의 연인이 미련을 갖게 만들어서 제게 매달리는 그 사람을 다시 비웃어 주라며.
어머니는 그 감각이 무척 통쾌하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정말로?
석희재는 어머니에게 다시 묻고 싶었다. 그때에 정말로 남은 게 복수심밖에 없었느냐고. 또, 정말로 통쾌하기만 했느냐고….
왜냐하면 자신은 아무리 골몰해 봐도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주고 싶은 그 감각이 잘 상상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리어 이현이 제게 그렇게 매달리면 자신은 무척 슬플 것 같았다.
만약 그에게 정말로 미련이 남은 거라면…. 왜 사람들은 소중한 것을 잃고 나서야 깨닫게 될까. 자신이 사랑하는 이현은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었지만, 결국 그 역시 보통 사람과 다르지 않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면 무척 허무할지도 모른다.
비슷한 때에 석희재의 어머니는 저와 같은 길을 걷기 시작한 아들을 비로소 인정해 주기 시작했다. 2억이 넘는 스포츠카, 연간 억대의 회원권 가격을 지불해야 하는 스파와 피부과, 업계 인맥 같은 것들을 안겨다 주느라 무척 들떠 보였다.
석희재가 가장 만족한 것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친구처럼 안부를 물어오는 어머니의 메시지들이었지만.
슬프게도 석희재는 데뷔를 하고 나서야 어머니의 인생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 인생에는 너무나 많은 우선순위가 있었다. 가족이란, 그녀가 후원하는 유기견 보호 단체보다도 뒷순위였다. 어머니는 스스로의 의지로 가정을 꾸리고 싶어 하거나 가족의 테두리 안에서 행복을 찾는 부류의 사람은 아니었다.
그럼 자신은 무엇의 부산물이었을까.
“왜 이렇게 늦게 끝났어?”
“팬들이 많았어.”
어머니의 차 조수석에 올라타자마자 차가 출발했다.
석희재는 멀어지는 창밖으로 시선을 주었다. 한 남자가 여전히 주차장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 한 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서 있는 호리호리한 그림자. 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어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사인을 받기 위해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사인을 해 주었지만, 그 줄의 가장 끝에 서 있었던 남자에게는 해 주지 않았다. 팬들에게는 모두 공평하게 대하려고 노력했으나 그 남자만은 예외다. 개인적인 감정이라고 해석해도 무방했다. 원망이든, 미련이든…. 잘 표현할 수 없는 불편한 감정이 남아 있는 것은 사실이었으니까.
대체 무슨 할 말이 남아서.
‘혹시나, 혹시나… 미련이 남은 게 아닐까요.’
‘그럼 더더욱 예전으로 쉽게 돌아가서는 안 돼요.’
‘…….’
‘사랑받고 싶은 거잖아요. 희재 씨는.’
유나연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석희재는 보편적인 연애에 있어 자신이 지나치게 미숙하다는 것을 인정했다. 심지어 주변의 부정적인 예견은 전부 다 들어맞았고 자신의 근거 없는 긍정은 틀렸다. 그건 석희재가 유나연의 조언을 귀담아듣게 만드는 계기가 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을 완전히 떨치기는 힘이 들어서, 석희재는 차가 주차장을 완전히 빠져나가 안쪽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도 차창 밖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안전벨트 해. 소리 나잖아.”
“아.”
어머니의 말에 석희재는 고개를 숙이며 잊고 있던 안전벨트를 채웠다.
석희재의 옆모습을 길게 바라보던 어머니가 문득 말했다.
“남자인 줄은 몰랐네.”
불쑥 찔러 오는 말에 멈칫한 석희재는 바로 그 말을 부정했다.
“아니야.”
“뭐가 아닌데?”
“애인 남자 아니라고.”
“내가 언제 애인 얘기했어?”
완전히 휘말리는 기분이었다. 그럼 뭐가 남자라는 거였는데? 석희재는 굳은 얼굴로 남몰래 등에서 식은땀을 흘려 댔다.
하지만 이미 아들의 감정을 뻔히 들여다본 어머니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너 너무 눈이 낮다. 저런 사람한테 그렇게 매달렸어?”
“…….”
“무슨 일해, 저 사람? 너보다 나이 많지? 원래 게이래?”
“…….”
“어디서 본 것 같은데. 누구더라… 신인 배우는 아닌 것 같고. 무명인가?”
“그게 왜 궁금해.”
뒤늦게라도 어머니의 호기심을 말려 보려고 석희재는 차 문 위에 붙은 손잡이를 괜히 꽉 쥐었다. 석희재의 타는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녀는 기억을 더듬다가 박 팀장에게 물어봐야겠다는 말까지 했다.
“끝났어.”
“응?”
“헤어졌다고.”
“뭐?”
“그러니까 그만….”
“와, 더 흥미진진하다. 헤어졌는데 왜 널 찾아와? 못 헤어지겠대? 네가 깠니? 곡기를 끊고, 보고 싶다고 징징대고, 차를 뽑고 난리를 치더니 결국 너희들도 헤어졌구나.”
역효과였다. 석희재는 고개를 창밖으로 돌리며 더 이상의 정보를 주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혹시 쟤가 사진이나 동영상 같은 걸로 협박하려고 들면 엄마한테 말해. 내가 또 그런 쪽으로는 워낙 정통하잖아. 자랑은 아니지만.”
“그런….”
그런 사람은 아니라고 말하려다가 석희재는 차라리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저들 관계가 남들 눈에는 어떻게 보이는지 지나치게 노골적으로 듣는 바람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한참 후, 차가 한강 변을 따라 달리기 시작했을 때 석희재는 차창을 조금 열었다. 두 사람은 청담에 위치한 어머니의 단골 가게에 가서 함께 늦은 저녁을 먹기로 한 참이었다. 이대로라면 제 옛 연애에 대한 화제가 계속될 것을 알았기에 그냥 이대로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다.
“내 사생활 캐지 마. 그러면 그냥 집에 갈 거야.”
“어휴, 무섭다 무서워.”
바람이 석희재의 머리카락을 스치고 지나갔다. 강변을 수놓은 금빛 점들을 바라보며 그는 상념에 잠겼다. 어머니와 함께 다른 여타의 모자지간처럼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누는 이 상황이 새삼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평생 불가능할 줄 알았던, 가족의 테두리 안에 그녀를 묶어 두는 것도 어느 정도 성공했는지도 모른다. 오른손에 끼운 반지는 어머니는 물론이고, 아버지도 가지고 있었다. 다들 하고 다니는지는 의문이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현을 얻고 싶어서 뛰어든 일인데 그를 제외한 모든 것을 얻었다. 그 이유만으로도 석희재는 이현과 했던 연애가 나쁘다고 결론지을 수 없었다.
어쩌면 그는 계기였으니까. 제 인생의 궤도를 틀어 준….
“성공해서 복수하라고 했잖아.”
석희재의 말에 어머니가 바로 대답했다. ‘응.’ 오래전의 나누었던 대화를 또렷이 기억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면 그 뒤에는 어떻게 돼?”
“…….”
“짝사랑을 들키면 실연이라며. 복수 다음에는 뭐가 남는지 궁금해.”
“글쎄….”
연애에 있어서는 항상 명쾌하게 답을 하던 그녀는 그 대목에서만 말을 멈추었다.
한참 후 어머니의 입에서 대답이 흘러나왔다.
“나는 일단 네가 남았고.”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어머니의 옆얼굴을 응시했다. 픽, 비웃듯이 내뱉은 말을 농담처럼 포장했지만 그 안에 뼈가 담겨 있었다.
그 순간 석희재는 처음으로 알게 됐다.
그녀의 길고 긴 사랑 역시 아직도 현재진행 중이라는 것을.
***
결국 아무도 답은 모르는 것이다.
찰나의 판단들이 가까운 미래에 영향을 끼칠 뿐.
- 만나고 싶은데, 시간 돼?
전화를 통해 나지막이 흘러나오는 이현의 목소리는 저가 기억하던 것보다 낮고 허스키했다. 일할 때의 목소리였다. 한때 완전히 반했던 목소리에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긴장하며 등을 세웠다.
저 아닌 다른 사람들은 이 감정의 끝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막연히 의지했었다. 그러나 결국 유나연도 당사자는 아니고, 어머니 역시 아직도 과거에 끌려다니는 미숙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러면 내 미래는 어떻게 될까….
“무슨 일이세요?”
석희재는 긴장을 억누르고 물었다. 다시금 수화기 건너편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공연하고 관련된 건 아니고.
눈을 내리깔며 답하는 이현의 얼굴이 눈에 선히 그려졌다. 그 말은 피디로서 건네는 공적인 제안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갑자기 제어할 수 없이 심장이 뛰었다.
이현이 제안한 시간은 목요일 오후 한 시였다. 오후 2시 콜인 석희재의 스케줄을 고려한 것이 분명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그는 한 시간 안에 모든 이야기를 끝낼 작정인 것 같았다.
“좋아요.”
-그럼 그때 보자.
그리고 전화가 뚝, 끊어졌다. 석희재는 전화를 끊고 나서도 핸드폰 화면을 한동안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제법 길었던 것 같은데 고작 18초간의 통화였다.
그 직후부터 생각이 너무 많아져 괴로웠다. 그 와중에도 석희재는 점심 약속이 아닌 것을 조금 아쉬워했다. 또 한 시간 이내에 끝낼 수 있는 이야기가 뭘까 궁금해 참을 수가 없었다. 그가 자신을 휘두를 때마다 습관처럼 긴장하고, 기대하고, 설렌다는 사실을 유나연이 알면 실망할 것 같아서 그는 감정을 꾹 눌러 삼켰다. 대신에 보고는 했다.
“왜 이러실까요.”
“글쎄, 사과라도 하시려고 그러나….”
그 말에 석희재는 고개를 뚝 떨어뜨렸다. 그렇다면 나가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을 정리한 이현이 이성적으로 내뱉는 사과는 둘의 완전한 종결을 의미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괴롭고 실망스러울지라도 질척여 주는 것이 더 좋다. 석희재는 금세 초조해졌다.
그리고 그런 그의 기분을 알아챈 유나연이 가늘어진 눈을 하고 충고를 주었다.
“아무튼 희재 씨도 너무 앞서나가지 말고,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
“사실 헤어진 사이에 안 보는 게 제일 좋지만 이번엔 그래도 만나는 게 괜찮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희재 씨도 피디님한테 인간적으로 실망하고 싶지 않은 거 알아서예요.”
“…….”
“자기 구 남친이 쓰레기였다는 거 깨닫는 순간 자기한테도 대미지가 오거든.”
맞는 말이었다.
이현과 만나기로 한 전날, 이현의 회사 측과 제 소속사 사람들의 회식이 있었다. 박 팀장은 석희재에게 네가 올 필요까지는 없다고 말했지만 석희재는 혹시 그 자리에 이현도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며 참석을 결정했다. 다른 사람들을 방패 삼아 이현의 심중을 추측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현은 그 자리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실망한 석희재는 예의 바르게 얼굴만 비추고 금세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와서는 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긴장이 수면제를 이겼다.
억지로 눈을 감고 오지 않는 잠을 쫓아 뒤척이다 겨우 세 시간을 잤다. 아침에는 숍에 가서 머리를 만졌다. 메이크업이 필요하냐길래 고개를 젓고 회사 미팅이라고 했더니, 티 나지 않을 정도로만 눈썹과 입술을 다듬어 주었다.
약속 장소에는 십오 분 전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로 안을 들여다보며 이현이 언제 등장할지를 기다렸다.
약속 시간 오 분 전, 저 멀리 인도에서 이현이 등장했다.
그는 눈에 익숙한 슬랙스와 셔츠 차림이었다. 웃지 않을 때 특히 날카로워 보이는 무심한 얼굴에는 과중한 업무로 인한 약간의 피로가 얹혀 있었다. 다행히도 어제는 과음하지 않았는지, 눈가나 턱선을 조금 통통하게 만들던 붓기를 찾아볼 수 없었다. 도리어 그새 좀 더 살이 내린 것 같다. 셔츠 너머로도 마른 몸의 태가 보였다.
살짝 부스스하고 버석한 머리카락은 여전했다. 이현은 약속 장소인 카페에 들어가기 전, 건물 뒤편 구석에서 담배를 피웠다. 그가 한 개비를 다 태우고 꽁초를 밟아 끄는 것까지 보고 나서야 석희재도 차에서 내렸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석희재는 출입구와 거리가 있는 자리에 현이 조금 느슨하게 앉은 것을 발견했다. 허리가 낮은 자세 덕에 길고 마른 다리가 테이블 아래로 툭 튀어나와 있었다. 대학로 카페에서 만났던 첫 미팅 때처럼 차려입었지만 포즈는 그렇지가 않았다. 오늘의 만남이 공과 사, 어느 쪽에 치우쳐져 있는 것인지 점점 더 알기 어려워졌다.
이현은 내내 창밖에 시선을 고정한 채였다. 그 옆모습이 퍽 무료해 보였다. 표정만으로는 무슨 생각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석희재는 그가 무슨 의도로 저를 불렀는지 더욱 긴장하기 시작했다.
“피디님.”
가볍게 불러서 그의 시선이 제게 향하도록 하며 석희재는 의자를 끌어 앉았다. 맞은편에 사람이 나타나자 그가 바로 앉은 자세를 고친다. 올려다보는 얼굴이 조금 멍했다.
“아… 저쪽에서 오는 줄 알았는데.”
이현이 방금까지 보던 창밖을 가리켰다. 주차장이 위치한 곳이었다. 하지만 주차에 미숙한 석희재는 입구에서 발레파킹을 맡겼다. 그런 것까지 말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서 입을 다물었다. 긴장했을 때는 말을 줄이는 편이 낫다. 3년간 진심을 효과적으로 숨기고 짝사랑을 유지하던 방법이다.
대낮의 카페에서는 이현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도 섬세하게 들여다보였다. 그게 새삼스러웠다. 지난 몇 회의 마주침은 전부 깊은 밤이었다. 광량이 적은 현관문이나, 빛이 아예 들지 않던 주차장에서 만났었다. 야맹증이 있는 석희재에게는 오후의 일광으로 채색한 이현의 얼굴이 무척 오랜만이었다.
생각보다도 무기력한 얼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에게 독설을 듣고 헤어짐을 직감하던 때에, 두 사람이 이야기하던 곳이 암전된 극장 객석이 아니라 오늘처럼 대낮의 카페였다면 자신은 조금 다른 판단을 내리지 않았을까.
제 상처보다 이현의 무기력에 연민을 느껴서, 결국 저만 소모되더라도 그의 곁에 남는 쪽을 택하지 않았을까 하는.
석희재가 그토록 샅샅이 그의 얼굴을 들여다볼 수 있던 것은 이현이 눈을 내리깔았기 때문이다. 계속 침묵만 이어질 것 같아서 석희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일로 부르셨어요.”
“아… 너 얼굴 좋아 보인다. 공연 잘하고 있지? 컨디션은 괜찮고?”
이현에게서는 성대를 많이 쓰지 않은 사람 특유의 가라앉은 목소리가 났다. 하필 말끝의 목소리가 갈라지며 튀어서 이현은 한 손을 입가에 가져가 헛기침했다.
“…안부가 궁금해서 연락하신 건 아니잖아요?”
“응….”
이현이 멋쩍게 대답했다. 괜히 톡 쏘아 놓고 석희재는 즉시 후회했다. 그런 게 인제 와서 왜 궁금하냐는 원망이 튀어나와 버렸다. 괜찮은 척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하고 있는지, 모르면서. 뜨거운 무언가가 목울대로 넘어와 고개를 숙여 삼켰다.
“본론부터 얘기할게.”
‘본론’. 그 단어에 심장이 크게 두근댔다.
“다른 게 아니라, 되게 좋은 제안이 들어와서.”
“제안이요?”
감정을 숨기기 위해 석희재는 도리어 무뚝뚝하게 되물었다. 자신은 어느새 양 팔짱을 단단히 끼고 있었다. 이건 상대에게 마음을 다치고 싶지 않다는 무의식의 발현이었다.
“응. 의류 홍보 건인데.”
“…….”
“특정 브랜드 옷 3회 시착 시 현금 천오백만 원. 보통은 스케줄 끼고 들어가는데 뮤지컬 배우는 출퇴근길에만 입어 줘도 상관없대.”
참담했다.
이럴 거라고 예상했으면서. 공적인 관계로 남기로 약속하고 종결을 선언해 버린 사이에서, 게다가 2시 콜을 한 시간 앞두고 잡은 약속이 크게 의미가 없을 거라는 것도 알면서… 다 알면서 무언가의 기대를 하고 온 저 자신에게 질려 버렸다. 스스로에게 혐오감이 들 정도였다. 숍에서 만지고 온 머리부터 신경 써서 고른 구두 따위를 신은 발끝까지, 전부 다 수치스러워 어딘가로 숨어 버리고 싶었다.
석희재는 팔짱을 낀 손을 풀어 입가를 가리듯 턱을 괴었다. 그것이 제안을 탐탁지 않게 여기는 행동이라고 생각했는지 이현이 급히 덧붙였다.
“회사 끼고 들어가면 회사에 수수료 떼이잖아. 네가 직접 하면 너한테 바로 현금 천오백을….”
“현금 천오백?”
석희재는 이현의 말을 끊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이 제안이 제게 정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들고 온 걸까? 헤어진 사이에 아직 굳지도 않은 관계를 뒤흔들어 가며 찾아올 만큼?
그럴 수도 있었다. 그건 그의 연봉 절반에 해당하는 돈이었으니까.
눈이 마주쳤다. 석희재는 차분히 숨을 고르고 답했다.
“그거 하면 피디님한테는 얼마 떨어져요?”
“뭐?”
“제안은 감사하지만, 저는 그 돈 별로 아쉽지가 않네요.”
“아… 그래?”
“네. 그런 거 회사 몰래 할 만큼 궁하지가 않아서.”
석희재는 눈을 내리깔았다. 이현이 말문이 막힌 듯 다시 창밖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그는 바보가 아니다. 석희재가 에둘러 표현한 금전적 격차를 짚어 낸 것이 분명했다.
“그 얘기 하려고 부르신 거면, 가 볼게요.”
“…….”
“좀 더 생산적인 이야기일 줄 알았어요.”
“그럼 거절이야?”
“네.”
그렇게 말하고 석희재는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간단한 소지품을 챙기며 확인한 시간은 1시 8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8분이라는 시간마저 비참했다. 그러고 보니 둘 다 음료도 시키지 않았다. 보통은 업무 미팅을 요청한 쪽에서 음료를 산다. 하지만 이현이 카운터에도 가지 않은 것은 이 자리가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시간보다도 짧을 거라는 사실을 미리 알고 있어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그냥 빨리 이곳을 떠나고만 싶었다. 인사도 건네고 싶지 않았다.
석희재가 몸을 막 일으키려고 했을 때였다.
“천오백이 안 아쉬운 애가 스폰은 왜 해?”
“……?”
“아, 받고 있으니 안 아쉬운 건가.”
스폰?
이현이 짓씹듯 뱉어 낸 말에 석희재가 눈썹을 치켜떴다.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요.”
“시침 떼지 마. 내가 봤어.”
“무슨….”
조금 머뭇거리던 이현의 입에서 뜻밖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이사라 씨….”
어머니의 차를 타고 돌아갔던 때, 운전석에 앉아 있던 어머니를 본 모양이다. 기가 차서 석희재는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온 헛웃음을 숨기지 않았다. 이현은 왠지 붉어진 눈을 하고 있었다.
사람을 몰라도 너무 모르는 거 아닌가.
자신이 3년을 지고지순하게 바친 마음을 믿어 주었다면 저런 의심은 하지도 않았을 텐데.
석희재는 자신들이 대낮에 이야기를 나누었다면 이별까지 가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을 취소했다. 이토록 믿음 없는 관계라면 어차피 오래가지 못했을 것이다.
“그건.”
질 나쁜 오해에 석희재는 반사적으로 해명하려 했다. 하지만 어이없이 오명을 뒤집어쓴 것이 갑자기 급격한 피로감으로 다가왔다. 커플링 때처럼 사실을 말할까, 싶다가도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랐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좀 나아요?”
석희재는 물었다. 이현이 굳은 얼굴로 저를 바라보았다.
“사귀는 내내 소홀했지만 나만 쓰레기는 아니다, 그런 소리예요?”
“…….”
“그럼 그냥 그렇게 믿어요.”
석희재는 그 길로 자리를 박차고 나와 버렸다. 유리문을 밀자마자 우습게도 뒤에서 따라오는 이현이 문에 비쳤다. 석희재는 입술을 깨물며 문을 밀어젖혔다.
“희재야.”
“건드리지 마요.”
“잠시만….”
이현이 따라 나오며 석희재의 상완을 붙들었다. 간다는 말에 왜 이제야 저를 붙잡는지 모르겠다. 그 손길마저 성가시고 원망스러워서 석희재는 매몰차게 이현을 떼어 냈다.
“그렇게 가는 게 어딨어?”
마치 제 탓을 하는 것 같은 이현의 말에 석희재는 울컥하여 뒤돌았다.
“제안하신 거, 안 한다구요. 얘기 끝났잖아요. 다른 배우들 찾아보세요.”
“너 아니면 안 되는데….”
제 팔을 붙잡은 이현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끝까지 그 얘기다. 석희재는 그 손을 질린 듯이 툭 털어 내며 물었다.
“왜요. 이거 하면 피디님한테 대체 얼마 떨어지는데요.”
“…….”
“그렇게 돈이 필요하세요? 하필 저한테 이럴 만큼?”
“그래, 씨발… 돈 필요하다.”
이현이 메마른 입술로 툭 내뱉었다.
다시금 그의 무기력이 보였다. 석희재는 이현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샅샅이 관찰했다. 그가 혹시나 일을 핑계로 저와 무언가의 끈을 이어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아닌지, 아니면 그냥 저를 이용하는 것인지.
“그리고 자꾸 말끝마다 피디님, 피디님 좀 하지 마.”
그럼 피디님이 아니면 뭐라고 부르라는 소린지. 먼저 공사 구분 하자고 칼같이 선을 그은 건 그쪽이면서.
“나 지금 회사… 후우, 아니다.”
이현은 무언가를 말하려다가 한숨을 내뱉고는 삼켜 버렸다. 그러더니 뛰쳐나와 석희재를 붙잡았던 것이 무색하게, 혼자 주차장 구석으로 걸음을 옮기더니 또 담배를 꺼냈다.
그의 뒷모습을 보는 석희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들어오기 전에 피운 것을 아는데 고작 십여 분만에 또 담배를 문다. 좀 줄였으면 좋겠다고 사귈 때 그렇게 말을 해 댔는데, 역시 제 부탁은 아무런 효력이 없었던 모양이다.
그대로 그냥 돌아서면 됐을 것이다.
담배가 줄기는커녕 더 늘어나 버린 한심한 그를 남겨 두고.
의류 홍보비로 떨어지는 수수료 몇십만 원을 먹겠다고 구 남친에게 찾아와 뻔뻔하게 부탁하는 염치없는 남자를 두고.
그러면 짝사랑할 때의 아름다운 기억으로 연명하며 그래도 첫사랑의 추억을 지킬 수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지독한 미련이 제 안의 무언가를 충동질했다. 이것이 추억을 더럽히는 최악의 형태가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석희재는 이현의 등에 말을 걸고 말았다.
“피디님, 돈 필요해요?”
인간적으로 실망을 하고, 다시는 상종하고 싶지 않다는 기분을 느끼면서도 어째서 아직도 그와 몸을 섞고 싶은 욕구가 남아 있을까?
석희재는 담배 연기를 뱉으며 제 물음에 뒤를 도는 이현을 조금 핏발 선 눈으로 바라보았다.
단추를 두어 개 푼 셔츠 깃 안쪽의 목덜미에 시선이 간다. 돈이 필요하다고 욕설을 내뱉는 건조하고 메마른 입술에도. 버석한 머리카락 아래 두피와 가까운 모발은 의외로 아기처럼 부드럽던 것이 기억이 난다. 그의 맨 등에 손을 얹었을 때 느껴지던, 애무에 흥분할 적마다 등 근육이 조여지던 감촉도 방금 만진 듯이 선연했다.
저 옷을 벗기고 그 아래의 맨피부를 함부로 만지고 싶다. 입술을 깨물고 안쪽 혀의 맛을 보고 싶다. 그를 꼭 한 번 끌어안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몸으로 얽어맨 채 그 안쪽에 깊이 사정할 기회가 딱 한 번 주어진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다.
“돈 드릴게요.”
제안을 건네면서 석희재는 자기혐오를 느꼈다.
이현은 의혹과 희망이 반쯤 섞인 얼굴로 이쪽을 빤히 보고 있었다.
“홍보, 할게요. 대신.”
운을 떼자마자 이현은 장초를 과감히 버리고 구둣발로 비벼 꺼 버린다. 그러더니 헛기침을 한 번 하고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가 몰고 온, 담배 연기가 섞인 바람에 석희재는 조금 눈살을 찌푸리며 뒤로 물러섰다. 안 보는 새 더욱 골초가 되어 버린 그에 대한 원망을 이번에는 숨기지 않았다.
“나랑 자요.”
“…….”
“돈은 수수료보다는 많이 줄 수 있어요.”
이현의 눈이 조금 커졌다. 그게 긍정적인 의미가 아니라는 건 눈을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순간 석희재는 반사적으로 자기합리화를 해 댔다. 나를 스폰 해서 몸 파는 사람으로 격하시켜 놓고, 내 순결에 대해서 어차피 믿음 따위 없었으면서…. 그렇게 놀란 눈을 할 것까지 있나, 하면서. 동시에 욕구를 합리화하기 위해 상대를 깎아내리는 스스로가 싫어졌다. 저 역시 이현만큼이나 인간적인, 너무나도 인간적인 보통의 인간이라는 것이 더더욱 깊은 자기혐오로 되돌아왔다.
입술 안쪽을 씹으며 석희재는 물었다.
“왜요. 꺼려져요?”
“아니….”
“얼굴에 써 있는데 뭘.”
차라리 경멸받고 싶다.
석희재는 이현이 제 제안을 무시해 주길 바랐다. 그래도 한때 애인이었던 사람에게 지금 몸을 팔라는 말을 하는 거냐고 냉정하게 쏘아붙이기를 바랐다. 동시에 제 진심을 파고들어서, 그렇게 해서라도 나와 자고 싶은 거냐며 제안의 본질을 비웃어 주길 바랐다.
그가 그렇게 나왔으면 자신도 쉽게 받아쳤을 것이다. 당신도 나를 그 정도 수준으로 생각한 거 아니냐며.
그러나 이현은 석희재가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기도 전에 ‘좋아’ 하고 짧게 대답했다.
“얼마 줄 건데?”
“…….”
“흥정은 나중에 해. 저게 네 차지?”
그러더니 석희재의 대답도 듣지 않고 주차장 한편에 놓인 차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조수석 옆자리에 서서 이현은 잠시 허리에 양손을 얹은 채로 땅바닥을 바라보았다.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는 것 같기도 했고, 몰래 저를 저주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차로 걸어가 문을 열었다. 석희재는 조수석에 올라타는 순간, 이현이 제 눈가에 손등을 가져다 대는 것을 보았다. 시동을 걸며 이현의 옆모습에서 눈물기 같은 것을 찾았으나, 앞쪽에 시선을 고정한 얼굴에서 그가 기대하던 것은 보이지 않았다.
***
정신적인 사랑과 육체적인 사랑을 분리하려고 애써 노력해 본다.
한때 석희재는 그 두 가지 중 하나가 부족하면 진짜 사랑이 아니라고 믿었다. 성욕만 남은 관계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일 수 있는 것인지도 의문이었다. 두 가지를 분리하는 것은 그 정도로 어려운 일이었지만 이현은 원래부터 그게 가능한 부류의 사람이었다. 그런 점에서마저 서로가 다르다는 것을 느낀다.
정신적인 사랑을 나누고 서로 영혼의 빈 부분을 채워 줄 가능성이 아예 사라져 버렸다면… 그러면 육체적 관계라도 나누고 싶다고 생각했다.
욕망은 더럽고 구차하다. 석희재는 오늘 이현과 자고 나서 내일 자신이 곧바로 후회할 거라는 사실을 알았다. 하지만 이현이 수락함과 동시에, 쾌락에 젖어 달뜬 소리를 내는 그의 얼굴을 상상했다. 그것만으로도 아래가 욱신거렸다. 치미는 욕구에도 석희재는 스스로를 경멸했다.
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이현이 분장실을 거부했기 때문에 둘은 모텔로 향했다. 문제는 운전대를 잡은 석희재가 단 한 번도 모텔을 이용해 본 적이 없어 어디로 가야 할지 조금 헤맸다는 점이다. 그런 석희재를 알아챈 이현은 ‘이 근처에 괜찮은 데 있어’라고 말하고는 익숙하게 진입로와 주차장 입구를 설명했다.
그것마저 이현의 난잡한 과거를 떠올리게 만들어 석희재는 신물을 삼켰다.
“방 잡으면 메시지 보낼 테니까 차 안에 있어.”
“…….”
“넌 얼굴 보이면 안 되잖아.”
그렇게 말하고 이현은 차 문을 탁, 소리 나게 닫았다.
가림막이 쳐진 모텔 주차장과 안쪽의 좁은 입구, 그 모든 것이 석희재에게는 생소한데 이현에게는 아닌 것 같았다. 석희재는 그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501호」오후 1:30
짧은 메시지를 받고 방에 들어섰다. 석희재는 현관에 서서 안을 둘러보았다. 창도 없는 모텔 방 안에는 형광등 불빛만 쏟아지고 있었고, 낭만적이지 못한 조명 아래에서 이현은 벌써부터 주저 없이 셔츠를 벗고 있었다.
드러난 맨 등은 저가 기억하는 것보다 말랐다. 당장 가서 끌어안고 마음껏 목덜미를 빨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석희재는 현관에 오도카니 서 있었다.
그러고는 사랑을 숨기던 때, 섹스 파트너 시절의 기억을 불러내려 노력했다. 왜 그랬냐면, 저와 달리 이현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기 때문이다.
“불….”
이현이 상체를 벗은 채로 돌아보았다. 여전히 멀거니 서 있는 석희재가 불을 꺼 줄 생각이 없어 보이자 그 곁에 있는 스위치 불을 직접 끄기 위해 다가왔다.
“켜고 해요.”
“…….”
거절에 이현은 조금 머쓱해하며 다시 뒤돌았다.
석희재는 저 초라한 몸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해 봤다. 몸을 키워서가 아니라 말라서 복근이 드러난 가는 허리, 앙상해 보이는 긴 팔, 뼈가 두드러진 목덜미 같은 곳들을. 그리고 세간의 기준으로 아름답고 잘 가꿔진 몸이라고 칭송받는 육체에 비해 저 몸은 얼마나 매력적이지 못한가 생각해 보려고 무척이나 노력했다.
그러나 노력이 필요하다는 부분부터 글렀다. 드러난 맨피부 아무 곳에나 입술을 미끄러뜨리며 살 냄새를 맡고 싶었다. 허리나 가슴 따위를 어루만지면 반사적으로 흠칫거리는 몸의 반응이 미친 듯이 그리웠다.
석희재는 이현에게 빠르게 걸어가 그를 엎드려 눕혔다. 이현에게서 짧은 비명이 터졌다. 석희재는 앞을 돌아보려고 하는 이현의 등을 손으로 꽉 내리눌렀다. 이미 앞은 터질 듯이 발기해있었다. 삽입을 서두른 이유는 그렇게 이현을 정신없이 흔들어 놔야만 그의 등에 마음껏 키스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석희재는 감정을 숨기는 방식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3년간 선을 지키는 이현의 곁을 맴돌며 훈련한 결과다.
“아…!”
바지를 벗겨 엉덩이만 드러나게 한 뒤 석희재는 급히 제 바지 버클을 풀었다. 지퍼를 내리고 튕겨 나온 것을 드러난 엉덩이 사이에 문질렀다. 이미 흥분으로 젖은 앞을 미끄러뜨리며 단단히 닫힌 입구에 꾹 누르자 이현이 바르작거리며 앞으로 기어가려 했다.
“잠깐, 나 조금 풀고… 아니, 내가 입으로 먼저 해 줄게.”
석희재는 입술을 씹었다. 뭐든 쉬운 그가 미웠다. 표정을 볼 자신이 없어 석희재는 앞을 보려고 애쓰는 이현의 등을 다시 내리눌렀다.
이현은 끙끙대다 한참 후에 맥없이 엎드리며 겨우 포기했다. 석희재는 제 아래 깔린 이현을 샅샅이 관찰했다. 등허리를 움직일 수 없게 그의 등을 억지로 내리누른 제 손등에 핏줄이 드러나 있었다. 손길이 제법 강압적인데도, 무성의하게 스치는 손길에도 이현은 허리를 떨었다. 참는 신음을 냈다. 석희재는 그가 다소 폭력적인 관계를 선호하는 타입임을 기억해 냈다.
“때리는 건 안 해 줘요. 그건 내 취향이 아니니까.”
“…흐읏….”
“그 대신 힘 풀어요.”
단단히 여문 분홍빛 입구는 여간해서 열리지 않았다. 한 손으로 엉덩이를 잡아 벌린 채, 꽉 물린 연약한 살결에 프리컴을 질질 흘리는 귀두를 문지르면서 석희재는 다시 한번 말했다.
“힘 빼라구요. 다치게 하기 싫어요.”
“아, 잠깐. 잠깐만… 희재야.”
이현이 손으로 시트를 몇 번 내리치며 덧없이 퍼덕였다. 별로 섹시하지 않은 행동이었다. 그런 이현을 바라보며 석희재는 의문에 휩싸였다.
대체 왜?
젤을 쓰지 않아도, 콘돔이 없어도…. 아무리 급히 삽입해도 이현은 언제나 뒤로 능숙하게 받아 냈었다. 지금만 이토록 저를 거부하는 이유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석희재가 다다를 수 있는 결론은 그가 이 관계를 거부하고 있다는 사실 뿐이었다.
“나, 나 지금 너무 긴장해서.”
“…….”
“입으로 먼저 한 번 빼 줄게. 응?”
하악, 하고 몰아쉬는 이현의 숨소리가 기이했다.
“미안한데 얼굴 별로 보고 싶지 않아서요.”
“헉, 허억….”
“내가 왜 그러는지 알면 조금만 존중해 주세요.”
“…읏, 하악….”
“모르면 어쩔 수 없고요.”
이현은 빌어도 석희재가 놔줄 생각이 없다는 걸 곧 깨달은 것 같았다. 시트를 꽉 그러쥐며 색색, 큰 숨소리가 나도록 심호흡했다. 이현의 목덜미와 귀는 이상할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이현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석희재는 몸을 조금 내리고는 그의 귀에 중얼거렸다. ‘넣을래요.’ 이현의 등이 움찔거렸다.
고개를 숙이자 눈앞에 작고 예쁜 귀가 보였다. 다정한 애무는 마음을 들키는 지름길이라는 걸 알면서도 석희재는 그 귀를 핥고 싶은 충동을 참지 못했다. 뜨겁게 달아오른 붉은 귀는 무척 따뜻할 것 같았다.
결국 석희재는 참지 못하고 혀를 내어 그의 귀를 핥았다. 흐윽, 이현이 울먹이는 신음을 냈다. 부드러운 귓불과 귀 뒤의 연약한 피부도 핥았다. 이현의 냄새가 많이 묻어나는 곳이라 한 번 입술을 댔다가 한참이나 코를 박고 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그의 귀 뒤쪽과 목덜미를 핥는 사이 이현이 긴장을 풀었다. 꾹, 가볍게 누르는 힘과 함께 부드럽게 진입했다. 귀두를 밀어 넣자 굵은 기둥이 빨려 들어가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응… 응.”
이현이 짧은 호흡을 반복했다. 석희재는 스르륵 감았던 눈을 떴다. 벌써부터 쾌락이 스며든 이현의 옆얼굴을 관찰하다가 뿌리 끝까지 단번에 밀어 넣었다.
“아… 아, 으, 응… 희재야.”
이현이 등을 움찔거리며 몸을 낮추었다. 조금 전 긴장했다고 말하던 것이 무색하게, 자연히 엉덩이만 들어 올린 꼴을 하고 시트에 얼굴을 비비며 신음한다. 석희재는 이현의 상기된 뺨을 보며 의심했다. 그가 이렇게 된 게 한때 그가 미칠 듯이 숭배하던 제 좆 때문이 아닌가 하고.
다시 퍽, 박아 넣으니 이현이 성대를 긁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 좋아, 흣… 희재야. 더 세게….”
반응이, 지나치게 쉬웠다. 그것이 단숨에 뇌를 끓게 만들었다.
헤어진 사이라는 것도 잊고, 돈이 필요하다며 욕지거리를 내뱉던 것도 잊고 그저 동물적인 반응을 보이는 이현이 너무 쉬워서 환멸이 났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이 분노인지, 성욕인지 구분하지 못한 채 석희재는 그의 등을 양손으로 꽉 눌렀다.
그가 느낄 새도 없이 거세게 삽입했다. 흰 엉덩이를 일부러 비참한 기분이 들 만큼 활짝 벌려 열고, 단숨에 뺐다가 한계까지 깊이 박아 넣었다. 그때에 이현은 신음 대신 윽, 하고 이와 이가 부딪치는 소리를 냈다. 그가 턱을 세게 무는 것이 뒤에서도 보였다.
그래도 석희재는 조금도 그를 배려하지 않고 음낭이 회음에 부딪치도록 매번 깊게 안을 뚫었다. 벅찼을 것이다. 안이 메말라 있어 마찰 때문에 아팠을 것이다.
“아, 앗, 희재야. 아, 아, 흑… 좀, 너무 빨라!”
이현의 목소리가 이명과 함께 들려왔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더 소중히 여겨 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기만 하던 순애의 상대다. 그에게서 쾌락만 취하고 있는 지금이 꿈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그러나 동시에 미칠 듯이 흥분한 것 역시 사실이었다.
무엇이 진짜 나의 욕망이었을까.
이현을 아끼고 싶던 것? 아니면 망치고 싶던 것?
“허억….”
석희재는 제 욕망을 조절하는 법을 잊어버렸다. 더는 여유를 가장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친 호흡이 쏟아졌다. 눈앞이 흐리고, 저가 몰아쉬는 숨소리마저 귀마개를 낀 듯이 둔하게 들려왔다.
퍽, 하고 둔부에 맨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들리도록 세게 삽입하자 제 턱 끝에서 뚝 떨어진 땀이 이현의 등골을 적셨다. 석희재는 자신이 귓가에서 이명이 울릴 정도로 이 가혹한 섹스에 집중하고 있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머리끝까지 오른 열기에 뇌가 녹을 것처럼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저 너무나, 너무나 오랜만이어서. 그래서 이토록 흥분했다고….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다.
“좋아, 씨발… 미칠 것 같아.”
이현이 성대를 긁으며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의 내용과는 달리 무척 지친 듯한 목소리였다.
“일부러, 그러는 거죠.”
석희재는 훅, 뱉어지는 한숨을 참으며 끊어 말했다.
남자를 흥분하게 만드는 이현의 방식이다. 저와 헤어지고 다른 남자와 잘 때도 이랬을까? 아무 좆이나 뒤를 채워 주면 좋다고, 그렇게 흥분해서는 아무에게나 좋다고 쉽게 신음했을까?
추억이 더럽혀져 간다.
이현과 처음 잘 때, 그는 자신을 무척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았었다. 섹스 경험이 단 한 번도 없는 석희재가 마음에 찰 리 없는데 ‘좋아’라고 신음했다. 그땐 그게 자신이 정말로, 조금이나마 쓸모가 있어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최악은 아니었을 거라고… 그렇게 희망했다.
하지만 그날 호텔로 끌어들인 게 누구였든지 이현은 좋다고 말했을 것이다. 이렇게 아파하면서도.
결국 과격한 섹스에 먼저 항복한 쪽은 이현이었다. 그는 좋다고 말하기를 관두고 간혹 아프다고 중얼거렸다. ‘희재야, 아파.’ 말하는 목소리가 무척 작았다. 반항하지는 않았다. 그저 쉰 목소리로 지친 듯이 말했을 뿐이다. 쓰라리다며, 조금만 천천히 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의 사정을 봐주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원래도 뒤로 쾌락을 좇는 방식에 무척 익숙해서, 깊은 곳을 찔리면 바로 앞을 세우곤 했다. 그 예민한 곳을 쉬지 않고 자극당했으니 지칠 만도 했다.
“아아!”
예고도 없이 쑥 성기를 빼내고 그를 돌려 눕혔다. 마주 보게 된 이현의 눈가에서는 눈물이 비치고 있었다.
“읏….”
이현은 입술을 씹으며 손등으로 눈가를 가렸다. 옆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남자의 아래에 깔린 상태로 자신을 완전히 숨길 수 없다는 것은 그도 잘 알 터였다. 입술은 얼마나 씹어 댔는지 그새 새빨갛게 부어올라 있었고, 가슴팍 바로 위까지 분홍빛이 돌고 있었다.
그가 그런 얼굴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석희재는 잠시 멈칫거렸다. 눈을 부릅뜬 채로 이현이 정말로 아픈 것인가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가 일부러 고통스러운 섹스를 주도할 때에도 이런 얼굴이었던 것을 기억해 낸다.
자신이 마음을 접으려고 노력한 뒤에야 이현을 만족시킬 수 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다리 더 벌려요.”
이현은 손으로 채 가리지 못한 턱을 덜덜 떨면서도 허벅지를 열었다. 양옆으로 활짝 벌려 마른 허벅지를 보여 주는 자세는 객관적으로 예쁘지가 못했다. 석희재는 일부러 그 모습을 한참 내려다보았다.
문신이 아직도 거기 있었다.
“이게….”
벌린 다리 사이로 파고들면서 석희재는 문신을 손끝으로 쓸어 보았다.
충동적인 만큼 별로 의미가 없다는 것도, 내가 알았어야 했는데.
다시금 문신을 엄지손가락으로 꾹 누르자 그의 안쪽 근육이 멈칫 떨렸다. 이현이 고개를 모로 저으며 입술을 깨무는 것을 보면서 석희재는 다시 허리를 겹쳤다. 문신 옆에 작게 부어오른 물집 같은 것이 있다는 사실은 조금 늦게 알았다. 그게 이름 끄트머리를 조금 침범한 것이 신경 쓰였다.
“지우려고 했어요?”
꾹, 짓누르듯 삽입하자 이현이 고개를 저었다. 물음에 대한 답이라기보다는 배 속을 빠듯하게 채우는 것의 존재감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같았다.
“흣, 아….”
“손 좀 치워 보세요.”
하지만 이현은 끝끝내 눈을 가린 손등을 치우지 않았다. 쾌락만 남은 관계에 환멸감을 느꼈지만, 이왕이면 석희재는 그의 느끼는 얼굴이 보고 싶었다. 실제로 본 지가 너무 오래되었고 앞으로도 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열에 달뜬 듯한 얼굴을.
“피디님.”
석희재는 다시 몸을 조금 뒤로 물렸다가 체중을 실어 위에서 아래로 쿡, 찔러 눌렀다. 허리가 둥글게 말린 자세가 힘겨운지 이현이 신음을 흘렸다. 몸을 굽히자 자연히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의 귀 옆에 팔을 받치며 석희재는 그의 손목을 가볍게 쥐었다. 떼어내 보려고 조금 잡아당겼지만 이현이 완강하게 반항했다. 오기가 생겨 치워 버리자 이제는 눈을 감아 버린다.
때문에 저도 모르게 묻고 말았다.
“왜 내 얼굴 안 봐요.”
“…….”
감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그제야 석희재는 그가 얼굴을 가리려던 것이 아니라 단순히 저를 보고 싶지 않았던 것임을 깨달았다.
이제 입술을 깨무는 쪽은 저였다. 석희재는 양팔을 그의 얼굴 옆에 단단히 받치고 다시금 빠르게 삽입했다. 쿵, 쿵 위에서 아래로 내려찍는 듯한 삽입에 이현은 힘겹게 신음을 내뱉었다. 아까부터 쓰리다고 호소했던 아래쪽은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계속되는 마찰과, 얻어맞는 듯한 타격으로 말 그대로 너덜너덜해졌다. 간혹 허벅지 위쪽으로 그의 마른 엉덩이뼈가 느껴질 정도였다.
절정의 끝에서, 석희재는 소원하던 대로 그의 안쪽에 깊이 사정했다. 이현은 눈을 감은 채로 느끼는 곳에 쏘아질 때마다 눈꺼풀을 떨었다.
사정은 길었다. 이현과 달리 석희재는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의 섹스를 상상도 하지 못하는 부류의 인간이었기 때문에. 오랜만의 사정이라 정액의 양도 많았다. 안을 가득 뜨끈하게 채운 정액은 더는 담을 곳이 없자 비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현의 안에서 최대한 천천히 빠져나오자 다물린 입구 사이로 주르륵, 정액이 쏟아졌다. 그걸 오래도록 지켜보면서 석희재는 마른침을 삼켰다.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
석희재는 빈약한 디자인의 벽시계를 올려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사정한 직후라는 것이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차분했다. 머리카락이 흐트러지고 목덜미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지 않았다면 그가 체력을 꽤나 썼다는 것을 아무도 몰랐을 것이다.
허리를 조금 물려 그의 사이에서 빠져나오자, 이현이 바로 옆으로 힘없이 돌아누웠다. 그러고는 제 몸을 가리듯이 웅크렸다.
“이제 콜 시간이에요. 가야 해요.”
“…그래, 가.”
석희재는 잠시 머뭇댔다.
“이따….”
자신이 무슨 제안을 하든, 이현이 아직도 미련이 남았느냐고 차갑게 일갈하는 모습부터 그려져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분장실로 와요.”
“…거긴 못 들어가.”
“…….”
“또 하고 싶은 거면 내가….”
이현은 아주 느리게 말했다.
“네 집으로 가도 되고.”
그 말을 들은 석희재의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이현이 제 제안을 받아들여 줬다는 것이 놀라웠고, 분장실보다는 당연히 제집이 훨씬 더 좋았기 때문이다.
오늘 밤도 볼 수 있다.
믿기지 않는 상황에 심장이 죄는 듯했다. 또 몸을 섞고, 이현이 떠나고 나면 그의 체취가 남은 이불에서 잠들 수도 있을 것이다.
“…수수료를 얼마나 받길래 그래요?”
“…….”
“궁금해서. 아니… 돈 때문만은 아닌가.”
석희재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새 눈이 부었다.
“그래.”
짧은 대답에 석희재는 수긍했다. 이현은 워낙 섹스를 좋아했다. 또 저와 헤어지면 가장 그리울 것은 제 물건이라고 대놓고 말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돈 때문에 이러진 않지.”
그리고 이현은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다.
무어라 더 말을 이어 갈 줄 알았지만 대답은 거기서 끝이었다.
석희재는 바지를 올리고 다시 벨트를 조여 맸다. 애초에 옷을 벗지 않아 그걸로 나갈 채비는 끝이었다. 시계를 본 석희재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아무래도 샤워는 분장실에 가서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이따 봐요.”
***
내가 아무리 궁해도 돈 받고 한 적은 없었는데.
그 녀석이랑 살을 맞대고 싶다고, 몸을 팔았네.
‘수수료를 얼마나 받길래 그래요.’
이현은 눈을 깜빡였다. 눈앞에 모텔 벽의 벽지가 보였다.
바보같이, 자신은 인생에서 정말로 필요한 사람과의 애정 관계를 늘 망쳐 버리고 만다.
첫 번째는 너무 기대하고 앞서가서.
두 번째는 너무 기대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나머지… 마음을 너무 뒤늦게 알아서 비극이다.
‘미친… 극단적인 놈. 하나만 해라.’
이현은 다시 눈을 감았다. 눈가에 눈물이 핑 고였다.
첫사랑을 끝낸 날, 형 때문에 우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말하고는 그 뒤로 정말로 한 번도 울지 않았다. 알고 보니 그건 털어 버렸기 때문이 아니라 묻어 버렸기 때문이었다. 첫사랑이 남긴 상흔은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었다. 이제 와 그 과거 때문에 다시 울게 될 줄 알았더라면….
그가 원망스러웠다. 제게 지나치게 깊은 각인을 새긴 첫사랑이.
남자가 제 얼굴에 이불이나 베개를 덮어씌우거나, 저를 엎드리게 한 채로 박는 것이 싫었다. 얼굴을 가린 그것들 때문에 종종 과호흡이 왔고 질식할 뻔한 적도 있었다. 그게 이런 순간에 트라우마로 돌아올 줄은 몰랐다. 석희재가 제 얼굴을 보지 않으려 할 때 순간적으로 그때의 기억이 떠올랐다.
첫사랑이 제게 사정하고 몸 위에 엎어져서 가쁜 숨을 내쉬는 찰나를 좋아했었다. 몸을 맞대는 것 자체가 꺼림칙하다는 듯이, 뒷구멍에 욕구만 풀어 대던 남자도 사정 직후에는 저도 모르게 힘이 풀리는지 이현의 위로 엎어지곤 했으니까. 그러다 몇 초 후에는 벌떡 일어나 버렸지만.
그래도 자신은 3초가 될까 말까 한 그 순간이 너무 짜릿하고 좋았다. 그래서 자꾸 몸을 내주었던 것 같다. 그때만큼은 꼭 자신을 안아 주는 것 같아서.
반대로 오늘 석희재는 한 번 저를 안아 주지도 않았다. 제 위로 쓰러지는 일도 없었다. 젊어서 그런가 봐. 허릿심이 좋아서. 상황에 맞지 않는 농담을 떠올리고 이현은 누운 채로 실없이 웃었다.
한때 저를 사랑하고 아끼고, 또 숭배하는 눈으로 바라보던 석희재의 차가운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짝사랑은 진짜 힘든 거구나.
이걸 모르는 새 또 시작할 줄이야.
이현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7년간의 첫사랑이 평생의 사랑인 줄 알았다. 그렇게 마음에 묻은 추억을 안고 살다가 이 지경이 되었다.
그래도 두 번째는 실패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지금 이현에게 있어서 성공이 딱히 석희재와의 재결합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은 것뿐이었다.
석희재가 상처를 받았다면 그 상처를 지워 주는 게 맞았다. 또 자신도 늦었지만 고백해야 했다.
내가 너무 늦게 알았다고, 미련한 첫사랑 때문에 그랬다고.
또 너는 충분히 최선을 다했고 덕분에 나도 행복했었다고….
그러니까 멍청한 건, 일생 두 번째 사랑이 있을 거라는 사실을 부정해 온 자신뿐이라고.
***
남들 앞에서 우는 데에 엄청난 용기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극장에서 흘러나오는 광고의 10초를 보고 울기도 하고, 감성을 건드리는 멜로드라마에 눈시울을 쉽게 적시기도 하지만 그런 핑계 없이 그저 자신이 울고 싶을 때에는 도리어 솔직해지지 못하는 사람들.
이현 역시 그랬다.
그는 모텔의 대실 시간을 꽉 채워 쉬다가 나왔다. 그저 누워 있는 것 같았지만 머릿속으로는 석희재에게 할 말을 정리하는 중이었다. 석희재가 받은 상처를 위로해 주기 위해서는 자신의 바보 같은 부분을 설명해야 했으니까. 그게 뭐라고, 잊었던 과거를 발굴해 내는 것 자체로 자꾸 눈물이 났다. 아무도 관심이 없을…. 심지어는 그 사랑을 받았던 사람조차도 관심이 없던 제 하찮은 감정이 뭐라고.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 내며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니 그것마저 변명처럼 느껴졌다. 이현은 사과하면서 변명을 덧붙이는 이들을 좋아하지 않았다. 저 자신이 그러는 것도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밑도 끝도 없이 ‘미안하다’라는 말만 하는 게 정말 맞는 걸까.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요.
그렇게 말하는 석희재가 눈앞에 그려졌다.
만약 과거의 그가, 저의 첫사랑이 자신에게 미안하다는 말이라도 해 주었다면 지금은 마음이 조금 괜찮았을까… 모르겠다. 이현은 눈을 꽉 감았다.
왜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
날 좋을 대로 실컷 이용해 놓고.
내가 형의 화풀이 상대였다는 걸 인정하는 거밖에 더 돼?
꼴도 보기 싫으니까 제발 가. 사람 더 비참하게 만들지 말고.
그렇게 울며 외쳐 보기라도 했으면 조금은 마음이 풀렸을까?
아닐 것 같았다. 미처 깨닫지 못한 원망스러움만 배가 되었을 것이다. 석희재의 원망만 키우는 일인지도 모르겠다.
침대에서 일어난 이현은 부은 눈을 확인하고 길게 한숨을 쉬었다. 간단히 샤워하면서 뒤에 남은 정액을 손가락으로 긁어 냈다. 젤도 쓰지 않은 뒤가 잔뜩 아렸지만 다행히 피를 보진 않았다. 남자의 물건을 받는 데 지나치게 익숙한 뒤는 다소 붓기만 했을 뿐이었다.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을 맞으면서 이현은 생각했다. 원체 다정한 놈인 석희재는 이번에야말로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고. 하지만 자신은 그저 좋기만 했다. 도리어 여전히 다정하게 굴었다면 눈물을 보였을 것이다. 그건 정말 안 될 말이었다.
머리를 말리고 옷을 걸친 다음 이현은 모텔에서 나왔다. 대낮인데도 모텔에는 차가 빼곡했다. 모텔과 어울리지 않던 석희재의 스포츠카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을 각각의 커플들을 생각하니 괜히 마음이 헛헛해졌다.
이현은 주차장에서 담배를 내리 두 개비를 연달아 피우고 자리를 떴다. 수입이 없는 지갑 사정을 고려해서 택시를 타는 대신 버스에 올랐다. 회사 막내 시절에도 틈을 내서 남자들과 뒹굴고 극장으로 향하곤 했기 때문에 버스 노선은 제법 빠삭하게 알았다. 어딜 갈 때마다 버스 노선을 검색하는 것이 일이던 어렸을 때와 달리, 자신은 어느새 이렇게나 서울 지리에 익숙해졌다. 자주 들르는 모텔과 극장, 잠만 자는 집, 이렇게 세 군데의 목적지에 한정해서였지만.
동시에 이현은 자신이 언제부터 제 인생을 망가뜨리기 시작했는지를 생각해 보았다.
역시 첫사랑이 실패하고 난 뒤부터였다.
언젠가 첫사랑보다 더 멋진 외모와 아름다운 영혼을 가진 남자가 네가 꿈꾸던 사랑을 퍼부어 줄 거라고, 누군가 알려 주었다면 조신하게 기다렸을 텐데…. 이현은 창틀에 팔을 기대며 실없이 피식 웃었다.
아무나와 자니까 험하게 당했던 것이다. 그렇게 싸게 굴었으니 남자들도 자신을 먹고 버리는 쓰레기처럼 대했던 것이다. 그 취급에 결국 익숙해지지도 못했다는 점이 제일 멍청했다.
자신은 문란한 게이가 아니라 그저 저 자신을 망치는 찌질이였을 뿐이다.
버스에서 내린 이현이 도착한 곳은 극장 근처였다. 관계자들과 마주칠까 봐 가까운 곳으로는 가지 못하고 인적 드문 곳의 카페로 들어갔다. 음료를 주문하면서 들여다본 쇼케이스 안에는 케이크 몇 가지와 함께 색색의 마카롱이 있었다. 얼마 전 맛있게 먹었던 마카롱 생각이 나서 커피와 함께 주문했다. 앉은 자리에서 마카롱을 네 개나 먹었다.
카페에 앉아서 이현은 극장 안의 풍경을 상상했다. 일을 그만두게 되었지만 여전히 이현의 생체 시계는 극장 백스테이지의 시계와 동일하게 흘러갔다. 덕분에 그는 공연을 준비 중인 사람들의 모습을 쉽게 연상할 수 있었다. 지금쯤 석희재는 분장과 헤어를 다 받고 저녁을 먹으러 갔을 것이다. 잠시 후부터는 마이크 테스트를 할 거고…. 그 뒤에는 의상을 갖춰 입고 무대에 오르겠지.
분장실에선 보통 뭘 할까.
거기부터는 상상이 막혔다. 정작 공연이 시작한 후에는 분장실 안의 석희재를 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게 이토록 아쉬울 줄은 몰랐다. 또 기회가 있을 때 석희재의 바이올린 연주를 많이 못 본 것도 아쉬웠다. 물론 지금도 돈을 주면 볼 수야 있겠지만….
거기까지 생각한 이현은 뭔가에 홀린 듯이 극장 로비로 들어갔다. 이미 공연이 시작하고 삼십 분이 지난 후라, 지연 관객 한 명조차 남아 있지 않은 너른 로비는 텅 비어 한산했다. 조금 머뭇거리며 매표소로 다가가자 막 오늘의 정산을 하던 외주 티켓 팀 직원들과 눈이 마주쳤다.
이현이 걱정했던 것과 다르게 티켓 팀 직원들은 만면에 미소를 띠며 반겨 주었다.
극장 바깥의 살림을 도맡는 티켓 팀은 다른 스태프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백스테이지 안쪽에 들어오는 일에 익숙지 않은 편이다. 그래서 피디였을 때의 이현은 극장으로 들어오는 서포트나 밥차, 커피차 같은 것들이 있으면 티켓 팀도 쓸 수 있게 꼬박꼬박 챙겨 주거나, 백스테이지 안으로 들어가기를 머뭇대는 직원들 대신 먹을 것을 날라다 준 적이 많아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피디님을 너무 오랜만에 뵙는다며 반갑게 인사하는 직원들에게 이현은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인수인계가 개판이고 외주 티켓 팀 직원 보기를 뭐 같이 아는 회사답게 자신의 퇴사조차 공지하지 않은 모양이었다.
이현이 가장 낮은 등급의 표를 사서 들어가겠다고 주섬주섬 지갑을 꺼내자 직원들이 강하게 만류하며 그냥 들어가시라고 권했다. 심지어 지연 입장을 위해 어셔까지 불러오려 했다. 이현은 수고스럽게 그러지 않아도 된다며 알아서 암전 시간을 계산해 극장 안으로 들어섰다.
무거운 문을 한 번 밀고 들어가면 카펫이 깔린 중문이 나오고, 문을 한 번 더 열고 들어가면 객석이 쫙 깔린 극장 내부가 펼쳐진다.
이현은 조심스레 비어 있는 객석의 가장 뒷열, 가장자리에 앉았다. 어슴푸레 밝혀지는 조명만 보고도 이현은 그것이 몇 번째 넘버인지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무대를 보면서 이현은 아주 오랜만에 잊고 있던 것을 기억해 냈다.
왜 공연을 좋아했는지….
또, 왜 저 무대 위를 동경했는지를.
관객으로 돌아가고 나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저기 매몰되어 있을 때는 바쁘고 힘들어서 잊고 있었던 한때의 꿈들.
‘형 때문에 우는 건 오늘이 마지막이야.’
그리고 자신은 대신 극장에 와서 많이도 울었던 것 같다.
아무도 자신이 우는 것을 보지 못하는 것이 제일 좋았다. 울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고 핑계를 댈 수 있는 것도 좋았다.
그렇게 같은 공연을 열다섯 번째 보았을 때, 집에 와서 검색한 공연명 밑에는 입사 지원 공고가 떠 있었다. 첫 면접을 보러 간 자리에는 당시 제작팀 PD이던 김 실장이 있었고, 그녀는 자신을 단번에 알아보았다. ‘이 공연에 미쳐서 회전문을 돌고 있는 남자 관객이 하나 있다’라며. 회전문이 뭔지도 몰랐고, 자신이 모르는 새 유명해져 있던 것도 몰랐던 이현은 아무튼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무대 위 저 멀리 석희재가 등장했다.
이현은 그 모습을 깊이 응시했다.
뛰듯이 걸어 나온 그는 정확한 자리에 서서 머리 위에 쏟아지는 핀 조명을 받고 있었다. 긴 팔다리 덕분에 가볍게 걷는 동작마저 우아하게 보였다. 간혹 외모와 프러포션이 끝내주게 좋아도 몸을 잘 못 쓰는 배우들이 있는데 석희재는 타고난 것 같았다. 시선 처리나 상대 배우와의 호흡을 재는 타이밍도 좋았다.
이현은 숨죽이고 석희재를 지켜보았다. 분석은 의미 없는 일이었다. 석희재는 그저 존재 자체로 빛나고 있었다.
언젠가의 꿈처럼 멀었다. 무대 위가. 또 그 무대 위의 석희재가.
눈도 깜짝이지 않고 무대를 뚫어져라 응시하는 이현의 부은 눈도 반짝거렸다.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이현은 초봄쯤의 기억을 하나 떠올렸다. 제게 차인 뒤 드러누웠다는 석희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 너무나 미안해서 어떻게든 찾아가 보고 싶었는데 왠지 용기가 안 났다. 그래서 의상 피팅을 핑계로 석희재의 병실까지 찾아갔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이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때와 꼭 같은 게, 자신은 통 발전이 없었다. 이번에도 솔직해지지 못해서 알량한 구실을 붙이고 나왔다. 네가 좋아서 자고 싶었던 거라고 분명하게 말하지도 못했다.
이어서 저 무대 위에서 석희재를 마주치던 순간도 떠올렸다. 무대에서 새어 들어오는 조명을 등진 채로 석희재는 저를 향해 환히 미소 지었다. 그의 그런 모습은 그때가 마지막이었다. 그 특별한 얼굴을 귀하게 여겨야 했다는 것을 너무 뒤늦게 알았다.
이현은 또 극장 리허설 기간 중 느꼈던 막막한 어둠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온통 검은색 일색인 옷을 입고 누구에게도 보이지 않는 소대 뒤, 돈을 주고 팔지도 않는 가장 가외의 좌석에 구겨져 앉아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던 때를. 그때 자신은 석희재의 외로움을 알면서도 감당하기 어렵다며 무시했다. 스스로의 비극에 매몰되어 그걸 걷어차 버린 것은 저 자신이었다.
헤어지는 날까지 석희재는 제게 기회를 아주 많이 줬다. 그는 자신이 손을 잡아 주길 원했을 것이다. 그 시그널을 알아채지 못하고 그저 섹스만 하려 했다. 병신같이, 지금까지 만났던 남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러면 화를 풀어줄 줄 알고….
젠장, 사랑도 받아본 적이 있어야 익숙해지지.
이현은 스스로를 비난했다.
그러나 저와 달리 석희재는 사랑받아야 한다. 받을 자격이 있으니까.
마침 귀로 폭포수가 떨어지는 듯한 박수 소리가 쏟아져 들어왔다. 무대 위의 석희재를 향해서였다. 커튼콜의 순서였으니 이제 객석 불이 켜질 차례다.
이현은 어둠이 걷히기 전까지만 실컷 울다가 극장을 나왔다.
***
커튼콜까지 보고 나왔다간 다른 이들과 마주칠 것이 분명했기에 이현은 남들보다 조금 빨리 객석에서 나왔다. 혹시 제 눈이 퉁퉁 부은 것을 티켓 팀 직원들이 볼까 봐 괜히 서둘러 로비를 가로질렀지만, 다행히도 한 명만을 남기고 전부 퇴근한 뒤였다. 모니터를 보는 데 여념이 없는 직원 하나를 등지고 이현은 가볍게 뛰어서 극장을 나왔다.
계단을 내려와 아름다운 빛을 내뿜는 웅장한 극장을 잠시 올려다보던 이현은 버스 정류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석희재는 여기에 있지만 그를 기다렸다가 같이 가는 것도 이상하다 싶어서….
석희재의 집 근처에 도착해서는 편의점에서 얼음 컵과 캔 맥주 하나를 샀다. 노상에 주저앉아 훌쩍이며 얼음으로 눈의 붓기를 빼고 맥주를 비웠다. 술기운으로 만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캔 맥주 하나쯤이야, 간에 기별도 가지 않는다. 그래도 술 덕분에 울적한 기분이 많이 가셔서 다행이었다.
“좋아.”
도로 반사경에 제 얼굴을 이리저리 비춰 본 이현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눈의 붓기는 확연히 가라앉아 있었다. 울었던 티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석희재의 오피스텔 앞으로 향한 그는 아뿔싸, 눈에 익은 경비원과 딱 마주치고 말았다. 경비원은 ‘집 주인이 안에 없다’라는 이유로 깐깐하게 굴면서 이현의 입장을 튕겨 냈다. 복도 문 앞에서 기다리려던 계획이 틀어졌다.
멀리 가기도 애매해서 이현은 오피스텔 앞 조경 바위에 걸터앉아 있었다. 그러자 경비원이 괜히 거기까지 쫓아 나와 이현의 앞을 왔다 갔다 했다. 기회만 되면 꼬투리를 잡아 쫓아내고 싶은 눈치였다. 이현은 석희재가 올 때까지만 참자며 계속 눈을 피했다.
“안 들어가고 뭐해요.”
눈앞에 불쑥 석희재가 나타났을 때 이현의 머리는 다시 새하얗게 비워졌다.
반가운 것보다도, 아까 한참 준비했던 모든 말들이 싹 날아가 무척 당황스러웠다.
“어….”
이현은 대답을 망설이며 괜히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경비원이 일을 열심히 하더라고, 그렇게 말할까 말까 고민하면서 경비의 모습을 찾았지만 그는 어느새 슬그머니 사라진 채였다.
“진짜 올 줄 몰랐어요.”
“…….”
그 말에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서 입을 다물었다.
오지 않는 게 나은 거였나.
제 존재 자체가 그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까 봐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석희재는 이현이 보는 앞에서 몇 걸음을 걸어갔다. 석희재의 뺨은 가로등 빛 따위를 받고도 희게 빛났다. 극장에서 씻고 왔는지 아직 젖은 채인 머리카락 끝이 가닥져 있는 것도 섹시해 보였다. 가장 믿기지 않는 것은, 아까 그 무대 위에서 그토록 빛나던 석희재가 지금 제 눈앞에만 있다는 점이었다. 그게 새삼스러웠다.
“뭐해요. 안 들어가고.”
석희재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이현은 얼른 몸을 일으켰다. 찬 바위 위에 오래 앉아 있어 엉덩이가 배겼다.
성큼 저를 앞서 걸어가는 석희재를 따라가면서 이현은 문득 쓱, 경비 초소 안쪽을 살폈다. 자리에 앉아 있던 경비원이 티가 나게 눈을 피했다. 그게 왠지 우스워서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는데,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던 석희재가 이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왜 웃느냐는 듯이.
고개를 떨어뜨리고 이현은 헛기침하며 다시 표정을 숨겼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이현은 석희재를 따라 어색한 침묵이 흐르는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고층을 누르는 석희재의 손톱이 핏기 없이 창백했다. 꼭 아픈 사람처럼.
그러고 보니 핏기 없는 입술도 그렇고 몸이 안 좋은 건지도 모른다. 체력이 아무리 좋아도 개막을 하고 나면 스스로 컨디션 조절을 할 줄 몰라 애를 먹는 신인 배우들이 종종 있다. 석희재도 그런 상태인지 모른다.
자신도 막내 시절에는 ‘목에 레몬이 좋다더라’는 대표의 말 한마디에 배우들을 위해 레몬을 몇 킬로씩 절여 청으로 만들어 분장실에 가져다 놓거나, 타지에서 직장 생활하는 막내아들을 걱정해 부모님이 보내 주신 홍삼까지 배우들에게 갖다 바치며 그들의 체력에 신경을 썼다.
흔적도 남지 않는 노력이었다. PD라는 존재는 겉으로 드러나지 않고 사람들이 찾지 않아야 제 할 일을 잘하고 있는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덕분에 그 노력들이 무색하게 이현의 노고는 공연이 시작되고 나면 금세 잊혀졌다.
정작 자신은 일에 치이는 바람에 살이 쭉쭉 내리고, 인생 첫 공연을 시작한 석희재에게는 괜찮냐고 한 마디도 묻지 못했는데.
일에서 벗어나고 나니 그제야 그 모든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석희재가 문을 열고 안으로 먼저 들어섰다. 그를 따라 현관에 발을 들였다가 이현은 움직이지 않는 석희재의 등에 머리를 박았다. 멋쩍어진 이현이 이마를 문지르며 석희재가 먼저 신을 벗고 안으로 들어가기를 기다렸지만, 그는 주홍빛 센서 등이 꺼질 때까지도 움직이지 않았다.
완전한 어둠이 몰려왔다. 기시감이 들었다.
이현은 석희재의 등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런 암전 속에서 이야기를 나누었던 기억이 떠올랐다.
‘이렇게 어두워서 좋았던 적이 없는데.’
이현은 불편할 정도로 가까운 간격을 벌리기 위해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렇게 문간에 기대어 선 채로 이현은 머릿속의 지도를 더듬어 보았다. 석희재와 한 번 더 자겠다는 명분으로 여기 찾아온 것이기는 했지만, 자신의 목적은 그것이 아니었다. 제 경험에 비추어 봤을 때 이미 미래가 없는 관계에서 떠올릴 만한 추억을, 그것도 감정을 누적시킬 만한 일을 더 만드는 것은 좋지 않았다.
괴로워도 독하게 끊어 내는 편이 낫다. 희망 고문으로 너덜너덜해진 만큼 사랑은 원망으로 치환되기 마련이니.
그러니 자신은 지금 이 현관에서 물러나야 했다.
술에 취해 막무가내로 찾아왔던 때처럼. 또 석희재가 현관에 선을 긋고 자신을 더는 안으로 들이지 않았던 것처럼.
새삼 이현은 석희재가 저와 비교해 얼마나 현명하게 처신할 줄 아는 사람인지에 대해 감탄했다. 바보 같은 저는 그렇게는 행동하지 못했을 것이다. 완전히 끝낸 뒤에도 미련을 품고 매일 밤 상대의 꿈을 꾸었었다. 만약 저였다면, 꿈에만 등장하던 첫사랑이 직접 찾아왔다는 것만으로도 기뻐서 바닥에 엎드려 울었을 것이다. 그리고 어서 들어오라며 야식을 차려다 주고, 또 몸도 주고…. ‘이제 다시 만날 수 있는 걸까.’ 그런 헛된 미래나 꿈꿨을 텐데.
‘한심한 놈.’
소리 없는 한숨을 쉰 이현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었다.
아무튼 지금은 알아서 물러날 때였다.
사위가 어두운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현은 바로 지금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지은 죄가 많은 쪽이 책임을 져야 하니까.
“희재….”
입을 막 열었을 때였다. 동시에 석희재가 뒤돌았다.
그가 들고 있던 가방이 바닥으로 툭, 떨어지는 순간 센서 등에 다시 불이 들어왔다. 갑자기 밝아진 시야로 석희재의 얼굴을 확인하기도 전에 그가 손을 뻗어 왔다. 얼굴로 다가오는 손에 이현은 반사적으로 목을 움츠렸으나, 석희재는 단순히 이현의 눈을 가렸을 뿐이었다.
“저기.”
의도를 알 수 없는 동작에 이현은 혀를 내어 입술을 축였다. 다시 밝아진 조명 아래에서, 저는 석희재의 얼굴을 보지 못하고 그만 자신을 관찰할 수 있다는 것은 퍽 초조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석희재의 손이 냉골처럼 차가웠다.
“내 얼굴 보기 싫잖아요.”
“…….”
“이러면 되는 거죠.”
말을 잃은 이현이 저도 모르게 입술을 벌렸을 때였다. 그는 자신의 입술로 뭔가 따스한 공기가 흩어지는 것을 느꼈다. 꼭 누군가의 숨결 같은. 동시에 콧등을 스치는 간지러운 머리카락도 느꼈다. 마치 석희재가 키스를 시도하기라도 한 것처럼….
이현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 보아도 입술에 닿는 것은 없었고, 눈을 가린 석희재의 손은 여전히 무척 차가웠다.
착각도 정도가 있지.
심호흡한 이현은 석희재의 손을 치우기 위해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그러나 석희재는 순순히 치워 줄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그대로 다시 센서 등이 꺼졌다. 주변이 더 깊은 어둠으로 잠기는 것이 가려진 시야로도 느껴졌다.
결국 이현은 석희재의 손목을 붙잡았던 손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면 석희재의 상처가 치유되는지 그 정확한 방법은 모를지라도, 무슨 말부터 운을 떼야 할지는 정해 놨기 때문에 실행에 옮기는 것은 쉬웠다.
“내가 생각을 많이 해 봤는데….”
“…….”
“의류 홍보, 그거 안 해 줘도 돼.”
“…….”
“갑자기 접근한 방법이 나빴지. 최악이었어. 너는 할 생각도 없었는데 내가 구질구질하게 매달려서… 그래서, 그랬다는 거 알아.”
“…….”
“나는 그냥 너랑….”
마지막으로 자고 싶어서 그랬던 건데.
그 말이 가장 어려웠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자신의 제일 추한 욕망을 스스로 인정하고 또 상대에게 고백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또 경멸받을 것이 두려웠다. 그런 면에서 제 눈을 가린 석희재의 손은 본의 아닌 배려에 가까웠다. 눈을 가린 손이 없었다면 조금 생겨난 용기조차 사그라들었을 것이다.
게다가 석희재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면 자신은 또 계획에 없는 바보 같은 말을 해 댈지도 몰랐다. 언제나 그랬다. 석희재의 얼굴은, 호소하는 듯한 그 눈은 이현에게 마법이나 다름없었다.
생각해 보면 그의 얼굴은 언제나 이현을 충동질했다.
소공동 골목에서 처음 만난 날 모텔이 아닌 호텔로 직행한 것도, 그의 실제 나이를 알고 나서도 제대로 화내지 못했던 것도, 사적으로 얽히고 싶다며 한 번도 허락한 적 없는 선 안으로 쳐들어온 석희재를 끝끝내 내치지 못한 것도, 사랑의 증거가 필요하다며 매달리는 그의 이름을 몸에 새긴 이유도.
아마 전부….
충동이라지만 진심이었다. 하나하나 돌이켜 보면 그렇게 뻔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도 여태 부정해 온 스스로가 기가 막히게 느껴진다.
이현은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는 그냥 마지막으로 너랑 한 번 자고 싶어서.”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석희재의 억누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니까 내 몸만 필요하다고.”
“…….”
“그 말을 하는 거예요?”
예상했던 반응이다. 눈을 가린 석희재의 손에 감정 실린 악력이 들어가는 것이 그대로 느껴졌다. 밀어낸 손에 머리가 눌려 뒤통수가 문에 콕, 닿았다.
“3년 내내 나를 딜도 취급해 놓고 아직도.”
“…….”
“마지막이라는 건 또 무슨 소린데?”
이현은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그 순간 각도를 벗어난 석희재의 손이 의외로 쉽게 떨어져 나갔다.
고개를 드니 거기에는 붉어진 눈시울을 한 석희재가 형형한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것은 예상했던 것이기도 하고, 예상하지 못했던 것이기도 했다.
이현은 멍하니 생각했다.
‘너 아직도 나를 좋아하는구나’라고.
당연한 일이었다. 진심이었던 만큼 쉽게 떨칠 리 없다는 걸 잘 안다.
석희재의 새까만 눈에 물기가 어룽거렸다. 항상 신기하게 보곤 했던 그의 긴 아래 속눈썹도 촉촉하게 젖어 들어갔다.
그런 석희재에게서 이현은 오래전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짝사랑 상대의 비참한 취급을 견디면서도 곁에 남았던 것은 끝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지금의 석희재가 ‘마지막’이라는 말에 감정적으로 반응한 것처럼.
사랑이란 왜 항상 이런 식이어야만 할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가서도 끝이 아니기를 바라고 만다. 저 역시 그랬다. 심지어 자신은 끝이 없기를 바란 나머지 평생을 그 사람 하나만 가슴에 품을 줄로 알고 살았다. 이십 년 후, 사십 년 후, 아니 죽기 전에 다시 찾아와도 늦지 않았다고 해 줄 테니까, 언제든 그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바라면서.
이현은 무의식적으로 석희재의 어깨를 다정히 어루만졌다. 고개를 숙인 석희재는 그 손길을 피하지 않았다. 석희재는 죄가 없다. 그는 첫사랑 상대를 멍청한 놈으로 택한 나머지 일생 겪지 않아도 될 감정적 고문을 당했을 뿐이다.
“울지 마, 희재야.”
이현의 말이 떨어진 순간 석희재는 신호라도 떨어진 듯 도리어 눈물을 후드득 떨구었다. 숙인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과 얼굴에 가져다 대는 창백한 손등이 안쓰러웠다.
아는데도 여기서 끝을 고해야 하는 이유는….
한때의 순수한 애정은 변질되기 때문이다. 애증이 되고 만다.
“너도 알고 있잖아. 이 이상 얽히면 서로에게 좋을 리 없다는 거.”
“…흐윽.”
석희재가 흐느끼며 고개를 푹 숙였다.
이현은 변질된 사랑으로 가장 괴로워하는 것은 그 사랑을 잃은 쪽이 아닌, 하고 있는 당사자라는 것도 너무나 잘 알았다. 사랑으로 충만하던 가슴이 원망으로 멍들어 가는 동안 사람은 망가져 버린다.
석희재는 그런 고통을 몰랐으면 좋겠다. 나이도 어리고 기회도 많고 얼굴도 예쁘니까, 잘 털어 내면 언제든지 좋은 사람으로 상처를 치유해 줄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난 절대 널 이용하려고 그랬던 게 아냐.”
“…….”
“그냥 내가 멍청한 놈이라서.”
이현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생각해 봐. 어느… 어느 날 갑자기 내 눈앞에 너무 잘난 남자가 기적처럼 떨어졌는데.”
“…….”
“아마도 첫눈에 마음에 들었던 것 같은데. 그런… 그런 완벽한 사람이 나를 사랑해 줄 리가 없다는 걸 알고 있어서,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기 전에 마음속으로 선을 그었나 봐.”
이현의 말에 석희재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 일그러진 눈에 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 고백에 대한 의심인지 아니면 자신이 허비한 지난 시간에 대한 원망인지는 아직 잘 알 수가 없었다.
“나도 짝사랑이자 첫사랑을 좀 혹독하게 했거든.”
“…….”
“어릴 때 만나서 스물두 살까지, 그 사람한테만 매어 있었고….”
그쯤 말하다가 이현은 말을 멈추었다. 제 과거사를 고해성사하며 자기 치유의 시간을 갖자고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더 자세히 말하다가는, 저마저 울고 만다. 곧 죽어도 그 모습을 보이기는 싫었다. 벌써부터 과거에 대한 한으로 코끝이 찡해져 와서, 이현은 고개를 저어 대며 머리를 털었다.
“아무튼 다시 누군가를 깊게 좋아하는 게 너무 아프고 무서워서…. 평생 그런 경험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았거든.”
“…….”
“그게 나 스스로를 세뇌한 거라는 것도 이제 알았지만, 여전히 무서운 것도 마찬가지라.”
“…….”
“사랑이라는 감정은 아직도 나한테 트라우마야.”
이현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그래도 여전히 석희재의 눈을 보지 못한 채로 말했다.
“공사 구분을 확실히 하자는 건 핑계였을 뿐이야. 나는 아마 아무도….”
“…….”
“아무와도.”
자신의 가장 바보 같은 점은, 그러면서도 어쩌면 내게도 운명 같은 사랑이 찾아올지 모른다고 내심 바라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상상 속 운명의 모습은 언제나 첫사랑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게 극단적 반대편에 있는 석희재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외면해 왔다.
그러니까 석희재는 희생당한 것이다.
다른 사람이 쑥대밭으로 망가뜨려 놓고 간 황폐한 밭에 싹이 자랄 리 없는데 석희재는 밤낮으로 공을 들였다. 언젠가 사랑이 자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그리고 이현은 한 사람에게 첫사랑의 기억이 얼마나 강렬한지 너무나도 잘 알았다. 자신에게 이 아름다운 남자의 스무 살 첫사랑을 망칠 권리는 없었다. 또한 두려웠다. 자신이 첫사랑을 원망하는 만큼 석희재의 가슴도 이미 황폐해졌을까 봐.
“미안해.”
이상하게도 잘 참았던 눈물이 그 말과 함께 쏟아져 나오려 했다. 이현은 눈을 질끈 감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기 위해 대신 숨을 참았다. 새빨개진 얼굴은 앞으로 쏟아진 머리카락에 가려졌다. 그러나 조만간 숨을 몰아쉬는 순간 훌쩍이는 소리로 들킬 수밖에 없었다.
석희재가 다급한 손으로 이현의 얼굴을 들어 올리려 했다. 이현은 고개를 저으며 그 손길을 거부했다. 이런 순간에 우는 꼴을 보이는 건 최악이었다.
“네 첫사랑을, 내가, 흐윽… 망쳐서 미안해.”
창백한 석희재의 얼굴이 시야 안에서 일그러졌다.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이 흘러넘쳤기 때문이었다.
“형…?”
그리고 그가 ‘형’이라고 자신을 불러 주는 순간, 애써 억눌러 오던 서러움이 터져 버렸다. 끝끝내 석희재 당사자에게만은 말할 리 없다고 생각했던 변명을 입 밖으로 꺼내고 말았다.
이거 봐.
또 희재 얼굴 보니까 계획에 없던 소릴 하게 되잖아.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변명하고 싶어서, 혹은 이해받고 싶어서.
“내가 자, 잘했어야 했는데.”
“…….”
“나도, 나도 처음이라서 그랬어.”
“…….”
“나도 연애를 해 본 건 처음이라….”
나이 스물아홉이나 먹고 미숙한 건 귀엽지도 않은데.
말을 꺼낸 즉시 이현은 후회했다. 입술을 깨물며 윽, 윽, 하고 흘러나오는 울음을 씹어 삼켰다. 센서 등이 켜졌다, 꺼졌다 하는 현관에서 이현은 한참을 흐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