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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귀소본능(5권) (16/27)

16. 귀소본능

이현은 비틀거리며 택시에서 내렸다. 내릴 때 계산을 깜빡 잊어 택시 기사에게 욕을 먹었다. 아까 포장마차에서처럼 돈 낼 건데 왜 소리 지르냐며 대들 용기는 없었다. 정말로 깜빡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이현은 꾸벅, 꾸벅 휘청거리면서도 공손하게 인사를 하고 걸음을 옮겼다.

용케도 손에 든 편의점 비닐봉지는 잃어버리지 않았다. 그의 손에는 아까 포장마차에서 나오면서 산 세 개들이 바나나 여섯 갑이 담겨 있었다. 편의점에 있는 바나나를 몽땅 쓸어 가는 술 취한 남자를 보면서 알바생이 무척 경계심 어린 표정을 짓던 것이 생각났다.

왜 사람을 그렇게 보고 그러지?

내가 범죄자도 아니고….

자신을 보던 사람들의 눈빛을 떠올리고 울컥하던 이현은 의식의 흐름으로 바지 뒷주머니를 더듬어 보았다. 거기에는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범죄의 흔적이 있었다.

그는 한숨을 쉬면서 터덜터덜 건물 입구로 들어갔다.

그러나 언제나 쉽게 지나치던 유리문 앞에서 쓱, 구둣발이 하나 나타났다. 고개를 들어 보니 경비원이었다.

“왜요?”

이현은 딸꾹질을 끅, 하며 물었다.

“여기 사는 사람 맞아요?”

뒷짐을 지고 눈을 가늘게 뜬 경비원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물어 왔다. 애초에 안 믿는다는 기색이 역력했다. 일전에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내가 백수가 됐다고 이러나? 이현은 서러워서 강하게 주장했다.

“제가 여기 끅, 몇 번이나 왔… 는데요! 저 기억 안 나요?”

“모르겠는데? 몇 호, 어느 집에 가는데.”

경비가 깐깐하게 물었다. 이현은 수그러든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친구네 집에….”

“그러니까 친구 누구.”

“석희재라고 있는데요… 연예인인데. 아세요?”

이름을 말하면서 이현은 멋쩍어했다. 연예인 이름을 대면서 친구라고 주장하는 것이 갑자기 쑥스럽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피디일 때는 연예인 인맥이 있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아 거리낄 것이 없었는데 백수가 되자 왠지 모든 게 조금 어렵다.

경비원은 이현을 다시 위아래로 신중하게 살펴보더니 안으로 들어가 어딘가로 콜을 걸었다.

그리고 그 모양을 지켜보던 이현은 갑자기 찬물을 맞은 듯 정신이 들었다. 석희재가 저를 들여보내 주지 않으면 이대로 보기 좋게 내쫓길 것이다. 경비원의 차가운 눈초리를 받으며.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보는 건 싫었다. 그런 일이 막상 닥칠 때는 자각이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그런 표정들은 뇌리에 오래 남았다.

그냥 갈까.

자신감이 없어져 슬그머니 뒷걸음질 칠 때였다. 들고 있던 비닐봉지가 무릎에 부딪쳐 바스락거렸다. 이현은 저가 낸 소리에 흠칫 놀라며 경비원을 바라보았다. 눈이 마주친 순간 딸칵, 하는 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열렸다.

“뭐 해요. 들어가요.”

“아, 예. 예….”

이현은 다시 고개를 꾸벅 숙이며 안으로 들어갔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다 뒤를 바라보니 경비원이 여전히 못마땅한 눈초리를 저를 보고 있었다. 이현은 후다닥 엘리베이터 안에 올라탔다.

익숙한 층에 도착해 이현은 석희재의 집으로 향했다. 툭, 주먹으로 때리듯 초인종을 치자 의외로 금세 문이 열렸다.

벌어지는 문틈에 정신없이 집중하던 이현은 막 드러난 시야가 하얗게 막혀 있어 조금 당황했다. 눈을 비비고 나서야 그게 석희재가 입은 흰 티셔츠의 가슴 부분이라는 것을 알았다. 고개를 들자 석희재가 저를 무감정한 얼굴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촘촘한 속눈썹이 박힌 눈이 차갑다. TV에서 볼 때는 이렇지 않았는데.

“어… 안녕.”

석희재는 여전히 한 손으로 문고리를 붙잡은 채였다. 언제든 닫을 수 있도록. 막고 서 있는 위치에서조차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기색이 느껴졌다.

“바나나 먹을래?”

이현은 엉겁결에 그렇게 물으며 비닐봉지를 바스락거렸다. 빈손으로 오지 않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석희재가 느리게 눈을 한 번 깜빡였다.

“나는 술 취하면 바나나가, 끅… 그렇게 먹고 싶더라. 많이 있어. 너도 먹을래?”

이현이 아무 말이나 주워섬기자 석희재가 나지막이 물었다.

“무슨 일이세요.”

“응?”

“지금 몇 시인지 아세요, 피디님?”

“시간….”

이현은 바지 뒷주머니를 뒤지며 주섬주섬 핸드폰을 찾았다. 하지만 하필 꺼져 있었다. 호텔에 버리고 나온 한지우가 하도 연락을 해 대는 통에 그냥 꺼 버렸던 게 기억이 났다.

이현은 고개를 들고 다시 물었다.

“야심한 밤이지? 자고 있었어?”

“…….”

“나도 졸리다….”

본능적으로 하품을 하자 석희재의 얼굴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이현은 얼른 방어적으로 말했다.

“야! 내가 재워 달라고 했냐?”

아, 차갑다. 차가워.

석희재가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이현은 즉시 뱉은 말을 후회했다.

다음 순간 석희재가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이현은 먼지가 되어 그 한숨에 날아가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반겨 줄 것을 기대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몇 마디 대화를 나눌 기회는 있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는 다들 그러니까 말이다. 누군가 대사를 하면 꼭 받아 주는 사람이 있지 않나.

하지만 할 말이 있는 이현과 달리 석희재는 통 틈을 주지 않았다. 이현은 그가 저를 여전히 문밖에 세워 두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면서 석희재의 몸 너머 집 안을 기웃거렸다. 사실 이쯤에서 석희재가 자신을 현관 안으로 인도해야 정상이었다. 석희재는 그 정도의 매너를 갖춘 남자니까 말이다.

그러나 안으로 들어가고 싶어 할수록 그의 표정이 점점 더 안 좋아지는 것 같아서, 이현은 어쩔 수 없이 문밖에서 본론을 꺼냈다.

“내가 그런 거 아니다….”

“뭐가요.”

칼처럼 답이 떨어졌다.

“셋이 하자고 내가 부른 거 아니라고.”

“…….”

“내가 아무리 응? 남자 좆을 밝혀도 그렇게 막… 어?”

이현이 큰 목소리로 외람된 단어를 입에 올린 순간 석희재가 이현의 멱살을 잡아 안으로 끌어당겼다. 셔츠 깃이 볼품없이 잡혀 목이 캑, 하고 졸렸다. 뒤에서 문이 쾅 닫혔다.

거친 행동이었지만 그의 공간 안에 받아들여졌다고 여긴 순간 이현은 갑자기 안도했다. 순간적으로 석희재가 오해를 풀고 저를 받아들였다고 착각했다.

“희재야….”

감격하며 석희재를 안아 주려 한 순간이었다. 이현은 털썩, 뒤로 밀려났다.

“술주정도 정도가 있지 무슨 짓이에요.”

“…응?”

“복도에서 이상한 소리 떠들지 말고 여기서 말해요.”

“그래….”

이현은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면서 비틀거리는 현관 바닥을 바라보았다. 갈수록 더 심하게 취기가 올랐다.

후… 하고 숨을 내쉬니 저에게도 알코올 냄새가 확 느껴졌다.

“그러니까 내가, 부른 거 아니라고.”

“…….”

“내가 쓰레기 변태 새끼는 맞지만… 섹스에 환장해서 전 애인 막 부르고 그런 놈 아니거든…. 아아아무튼 너까지 끌어들일 생각은 없었거든? 알아?”

이현은 석희재를 올려다보았다. 동요 없는 눈이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오늘 낮에 너 호텔 왔었잖아.”

“무슨 호텔요.”

“동대문 메리어트….”

“그걸 피디님이 어떻게 아세요?”

석희재의 말에 이현은 멀뚱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무언가 아귀가 맞지 않는 느낌이다.

“너 온 거를 내가 봤는데…. 잘못 봤나. 아닌데.”

“오늘 거기 있었어?”

석희재가 확 인상을 구기며 갑자기 말을 놓는다. 그가 정말 화를 내자 이현은 갑자기 혀가 뭉툭해지며 굳는 느낌이 들었다. 본의 아니게 말을 더듬게 된다.

“이, 이상하다. 하… 한지우가 그랬는데?”

“뭐라고 했는데.”

석희재가 팔짱을 낀 채로 추궁하듯 물었다. 석희재에게 이런 태도로 질문받는 것은 처음이라 무척 낯설었다. 이현은 갑자기 어디 앉고 싶어져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하지만 자신은 여전히 현관에 있었다. 바닥에라도 주저앉을까, 남의 집 현관에 앉는 건 예의인가 아닌가 골똘히 생각하면서 이현은 지친 기색으로 말했다.

“내가 있다고 하니까 네가 달려왔다고.”

“…….”

“그런데 정말로, 내가, 내가 쓰리피 하자고 한 거 아니다. 다 한지우가… 그 변태가.”

“그 사람이 그렇게 말해요?”

“…응.”

석희재는 손으로 입가를 감싸고는 잠시 말이 없었다. 그 나름대로 생각에 빠진 듯했다.

그러고는 금세 감정을 털어 낸 목소리로 깔끔하게 말했다.

“아니에요. 난 피디님 거기 있는 줄도 몰랐고, 그냥 일인 줄 알고 갔어요.”

“…….”

“그랬는데, 가서 어이없는 말을 들어서 조금 황당했던 거지.”

그 말을 듣고 다시금 꽉 쥔 주먹을 부들부들 떠는 쪽은 이현이었다.

교활한 변태 새끼. 늙은 여우.

처음부터 끝까지 자신을 떠본 거였다. 개자식, 개자식….

“아직도 그 사람 말을 믿어요?”

석희재의 말이 심장에 쐐기를 박았다. 이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그러면 저기… 내가 오해를 했나 봐.”

“…….”

“나도 네가 거기 있는 줄 모르고 간 거야.”

끅. 또 딸꾹질이 튀어나왔다. 이현은 미간을 찌푸렸다. 한지우가 약속 장소를 호텔로 잡았는데도 석희재는 경계심 없이 그를 만나러 갔다. 그건 큰 문제였다.

“저기… 앞으로는 한지우가 부르면 절대 가지 마. 끅. 그 자식 변태거든. 진짜 완전 변태야. 나는 당하는 걸 좋아하는 변태라면 그 새끼는 강간하는 걸 좋아하는 변태니까, 훨씬 위험해. 진짜 몸조심해야 돼. 특히 너. 네가 조심해야 돼! 알겠지? 둘만 만나자고 하면 절대 가지 말고 앞으로 백스테이지에서 눈도 마주치지 마.”

주절주절 저가 뭐라는지도 모르면서 떠들어 댄 이현은 어느 순간 말을 멈추었다. 상대에게서 반응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낯익은 듯 낯선 눈으로, 석희재가 저를 관찰하듯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는 가끔 자신을 저렇게 보곤 했다. 확실한 건 근래에는 저런 눈으로 본 적이 없다는 것이다. 정확히는 연애 중에는… 속내를 벗겨 내려는 듯, 일방적으로 간파당하는 그 눈빛이 영 불편했다.

석희재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그게 내가 항상 하던 말이잖아요.”

“…응… 응?”

“아무튼… 그 호텔에 있었구나.”

“…….”

“한지우 선배 만나러?”

억누른 그의 목소리 아래 희미한 감정이 일렁이는 것 같았다. 왠지 조금만 더 손을 뻗으면 그 감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만 같다. 그것이 분노가 아니기만을 바라며 이현은 석희재를 다시 올려다보았다.

그때 석희재의 희고 큰 손이 불쑥 눈앞에 다가왔다. 반사적으로 눈을 깜빡인 이현은 석희재가 제 뺨에 손등을 가만히 댔다는 것을 알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이렇게는 못 때리겠더라고.”

“…….”

“그래서, 좋았어요?”

심장이 쿵 떨어졌다.

아니야, 이현은 입 안으로 웅얼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는 뭔가 오해하고 있었다. 자신이 제 의지로 한지우와 자러 갔다고…. 아니, 제 의지였던 건 사실이지만 이유가 있는 일이었다. 무슨 일이 이렇게 꼬이지? 이현은 다급하게 외쳤다.

“안 좋았어. 끝까지 안 갔어! 나 그 새끼 역겨워. 그런 변태랑은 안 잘 거야. 정말이야. 삽입 안 했는데… 증거도 있어…. 끅. 보여 줄까?”

이현이 제 바지 뒷주머니에 손을 대고 더듬었을 때였다. 갑자기 어깨가 붙잡혀 그는 선 채로 휘청였다. 눈 깜빡할 사이에 자신은 다시 현관문 바깥으로 밀려나고 있었다. 정말 순식간이었다.

“내가… 그걸 왜 봐야 되는데.”

정말 화가 나면 목소리가 이렇게나 낮아지는구나. 붙잡힌 어깨가 욱신거렸다. 이현은 눈을 깜빡이며 떠듬떠듬 입을 열었다.

“…희재야! 잠깐만… 내가 설명할 수 있어. 다 설명해 줄게.”

“가요. 제발.”

완전히 밀쳐져 복도에 서게 된 이현은 휘청거리며 문틈에 매달렸다. 술에 취해 악력이 형편없는 손을 석희재가 부드럽게 떼어 냈다.

그러면서 다시 냉정한 얼굴로 말한다.

“더는 나한테 밑바닥 보여 주지 마요.”

“…….”

“그럴수록 우리가 얼마나 다른 사람인지만 알게 되니까.”

쾅!

문이 닫혔다.

이현은 굳게 닫힌 문을 바라보았다.

‘내가 그걸 왜 봐야 되는데.’

잘 흥분하지 않는 석희재가 분노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희재야….”

이현은 안을 향해 허약하게 외쳤다.

“희재야! 아… 미치겠네. 희재야.”

한지우 얘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니었는데…. 그 망할 인간 때문에 또 화나게 만들어 버렸다. 이현은 솟구치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현관문에 발길질했다. 쾅! 발끝이 아릿해지도록 차고 나서야 자신이 애꿎은 석희재의 현관문에 분노를 투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뇌세포가 수천 마리 죽어서 그런지 자꾸 바보 같은 짓을 한다.

“병신… 아, 희재야! 미안…! 너한테 화낸 거 아니야.”

이현은 현관문을 주먹으로 쾅쾅 두드렸다. 하지만 문은 두 번 다시 열리지 않았다.

한지우 얘기 따위를 하러 온 게 아니었다.

그냥 화내지 말라는 얘기를 하러 온 건데.

네가 분노로 마음을 멍들일 필요는 없다고.

하지만 또 화나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

이현은 한참이나 그 현관문 앞에 주저앉아 있다가 느지막이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엘리베이터 안에 달린 거울로 뒤늦게 제 몰골을 보았다. 엘리베이터의 노골적인 형광등 조명을 받은 제 얼굴이 무척 추했다. 이현은 한숨을 내쉬었다. 맞아서 부은 뺨에 찢어진 입술, 광대와 턱에는 멍의 흔적도 있었다.

다른 사람이라, 다른 사람…. 석희재의 말 중 한 단어가 깊게 심장에 와서 박혔다.

인격과 성품, 혹은 재산이나 직업.

그런 것들 말고도 내가 또 못 가진 게 있나.

술기운 안에서 헤엄치면서도 이현은 의외로 정답을 찾았다. 그건 살아온 방식의 문제였다. 7년이나 인생을 앞선 만큼, 자신은 내내 스스로를 더럽혀 왔다. 혹은 그 이상을.

석희재처럼 순백의 마음으로 상대에게 투신하는 것은 이미 불가능하도록 말이다.

석희재는 그 극복할 수 없는 차이를 깨닫고야 만 것 같다. 어쩌면 이현 스스로가 저 자신에 대해 깨닫는 것보다 더 빨리.

***

“씨발, 돌았구나. 진짜.”

잠에서 깨어난 이현이 현실을 자각하고 내뱉은 첫 마디였다.

제법 험악하게 말했지만 쪽팔림에 죽고 싶은 나머지 목소리에 물기가 서렸다. 심지어 자신은 신도 벗지 않은 채 현관 턱에 발목을 걸고서, 주방과 이어지는 통로쯤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술김에도 신발을 신고 집 안에 들어오지 말아야 한다는 자각만은 있었던 모양이다. 이현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옆으로 굴렀다. ‘아흑’. 허약하게 앓는 것 같은 신음 소리가 그 입에서 흘러나왔다.

차라리 완전히 필름이라도 끊겼으면 좋았을 것을… 쓸데없이 술이 세서 필름도 잘 안 끊긴다.

자살이나 하러 가자.

마음을 먹으며 상체를 일으켰을 때였다. 골이 흔들리는 숙취와 함께 손끝에 바스락거리는 비닐봉지가 걸렸다. 어제 편의점에서 쓸어 온 바나나였다. 들춰 보니 밤새 후숙되어 맛있는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 하지만 숙취에 잔뜩 시달리는 이현에게는 그저 역할 뿐이었다.

“바나나, 잘 먹지도 않는데.”

이현은 툭, 한숨을 내쉬었다. 석희재가 좋아하는 과일 중 하나가 바나나였다.

“무슨 생각이었냐.”

이현은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로 불분명한 곳에 초점을 두고 괜히 앞을 쏘아보았다. 바나나를 싸 들고 찾아갔다는 것 자체가 너무나 속 보이는 일이었다. 그냥, 술김에, 생각이 나서…. 어떤 이유를 가져다 붙여도 해석이 한 방향으로 흘렀다.

미련.

다시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공기 중에 흩어지는 호흡에서도 술 냄새가 났다. 제가 맡아도 이 정도인데 석희재에게는 더 심하게 느껴졌을 것이다.

합칠 생각은 없다. 상대를 휘두르고 싶은 생각도 없었다. 그저 술이 사람을 이상하게 만드는 것뿐이다.

사과를… 해야 하나.

생각에 잠겨 있던 이현은 거세게 머리를 털었다. 그거야말로 안 될 일이었다.

석희재의 선명한 분노가 떠올랐다. 변명이고 나발이고, 그를 들쑤셔 놓는 것보다는 입 닥치고 사라지는 게 나았다. 어제 자신이 구질구질하게 굴지만 않았다면 그대로 연 없이 깔끔하게 헤어졌을 것이다. 심지어 직장에서 잘리기까지 했으니 이제 둘 사이에는 접점조차 없었다. 실연의 아픔을 가장 빨리 치료하는 특효약은 서로 잊고 잊혀지는 것이라는 사실을, 이현은 경험으로 잘 알고 있었다.

순간 이현은 입술을 잘근 씹었다. 석희재 때문에 저를 가지고 장난질을 친 한지우가 떠올라서. 그 큰 손으로 뺨을 얻어맞은 자리가 여전히 저릿했다. 이제 극장의 백스테이지에는 한지우와 석희재만이 남겨졌다. 한지우 같은 능구렁이를 상대하기에 석희재는 지나치게 요령이 없었다. 하지만 어쩌나. 자신에게는 아무런 권한이 없다. 이현은 모든 게 다 제 손을 떠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아….”

어제도 이렇게 생각했으면 좀 좋아.

이현은 석희재의 차가운 눈을 떨쳐 내려 노력했다. 떠올릴 때마다 혀를 깍 깨물고 싶었다.

핸드폰을 켜 보니 셀 수 없는 부재중 통화와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가득했다. 한지우는 물론, 김 실장을 비롯해 아직 이현이 그만둔 것을 모르는 외주처나 스태프들의 연락도 제법 보였다.

피디를 갈아 치우고 그 자리에 한지우의 끄나풀인 컴퍼니 매니저 따위를 앉혀 놓았으니 일이 제대로 돌아갈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대표에게는 전화 한 통 없었다. 그게 이현을 더 울컥하게 만들었다.

어쩌라고. 알아서들 해 보라지.

이현은 다시 핸드폰을 꺼 버렸다. 그저 극장과 엮여 있는 모든 사람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그래서 이현은 당분간 그냥 이렇게 투명 인간처럼 살자고 생각했다.

…라고 다짐한 지 3일도 되지 않아서 이현은 다시 사고를 쳤다.

“어? 너 그때 걔 아니야?”

“그때 걔?”

“맞지? 야, 반갑다.”

이현은 풀린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말을 건 상대는 반쯤은 반갑다는 듯이, 또 반쯤은 어이없다는 얼굴로 혀를 차면서 이현의 맞은편에 앉았다. 드르륵, 플라스틱 의자가 시멘트 바닥에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이현은 울컥 짜증을 냈다.

“왜 앉냐?”

“혼자 아니었어? 누구 있어?”

그렇게 물으며 맞은편에 앉은 남자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혼자면 꼭 자리를 내줘야 하나. 버티고 앉은 남자의 얼굴은 제법 미끈했다. 단순한 셔츠 차림인데 운동을 제법 했는지 은근히 드러나는 핏이 괜찮았다.

습관적으로 남자를 스캔한 이현의 미간이 불쾌하게 좁아졌다. 그는 이런 부류를 좋아하지 않았다. 외모에 꽤 자신이 있어 어디서나 자신이 먹힐 것이라고 확신하는 부류 말이다.

좆같은 남자의 자신감….

석희재처럼 생기면 또 몰라.

지나치게 눈이 높아져 눈앞의 남자가 도무지 사람처럼 보이지가 않았다. 평면 위에 선과 점을 아무렇게나 찍어 놓은 것 같다.

“와, 네가 이거 혼자 다 마신 거야?”

“…….”

“술 이렇게 잘하는지 몰랐는데.”

테이블 위에는 소주 공병 세 병, 그리고 삼 분의 일 가량이 남아 찰랑대는 네 병째의 소주가 있었다. 가끔 소주가 질리면 소맥도 말아 먹어 바닥에는 맥주병도 즐비했다.

“너 그날 그렇게 그냥 가고 얼마나 아쉬웠는데…. 우리 그때 잘 맞지 않았어? 나 너 좀 찾아다녔다. 나도 그런 적이 처음이라.”

“아,”

이현은 잔을 테이블 위에 딱 내려놓았다. 여전히 남자는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가 하는 말로 두 사람의 전사1)를 재빨리 알아챈 이현은 무턱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모! 저 계산해 주세요.”

그래. 이제 과거가 발목을 붙잡을 때도 됐지. 그렇게 난잡하게 살았는데 여태 잤던 남자와 우연히 마주친 적이 없던 게 기적이다.

휘청거리며 지갑에서 돈을 꺼내자 이모가 혀를 찼다.

“남은 거 싸 줘?”

“…네….”

이현은 조금 갈등하다가 백수인 제 처지를 떠올려서 싸 달라고 말했다.

첫 방문 때의 저를 우동 진상으로 기억하던 이모도, 웬 놈팡이가 매일 같이 와서 혼자 술을 마시고 가니 제법 측은해 보였던 모양이다. 아니면 그냥 매상을 잘 올려 줘서 조금 고객 관리를 하는 것이든가.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판단이었다. 남은 음식을 포장하는 사이에 그 존재를 완전히 잊고 있던 과거의 남자가 다시 추근거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모는 아무것도 모르고 그 남자의 손에 음식을 포장한 비닐봉지를 들려 주면서 친구를 집에 잘 데려다주라며 부탁하기까지 했다. 취해서 휘청거리며 남자에게 속절없이 끌려가던 이현은 놓으라고 대차게 버둥거리다가 잠시 필름이 끊겼다.

‘아니, 웬일로 필름이 다 끊기지. 신기하네. 뇌로 가는 혈류량이 모자랐나. 아니면 나이 탓인가.’

술에 취한 채로 하등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이현은 눈을 깜빡거렸다. 현실 인식이 느렸다. 한참 후에야 이현은 자신이 싸구려 모텔 침대에 누워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전등갓 안쪽으로 백열등의 흐릿한 윤곽과 함께 점점이 벌레 사체들이 보였다. 제 발로는 걸어 들어오지 않을 만큼 위생이 걱정되는 곳에 누워 있자니 토기가 올라왔다. 남자는 벌써 제 바지를 벗기고 있었다.

“씨발, 나 모텔에서 안 해.”

이현은 남자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그의 가슴팍을 퍽! 발로 찼다. 제법 아팠을 것이다. 그러자 그때까지 젠틀한 척이라도 하던 남자의 눈빛이 변했다. 몸을 가누지 못하는 이현을 강간하려 들었다. 결국 억지로 이현의 다리를 벌린 남자는 노골적인 백열등 불빛 아래서 선명한 문신 자국을 발견했다.

“하. 정착했다 이거냐? 그래서 못 대 주겠다?”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그냥 모텔이 싫다고 한 거지.

하지만 이현이 오류를 지적하기도 전에 남자는 혼자 열을 내기 시작했다. 제대로 잘못 걸린 것 같다는 생각이 든 건 그다음 순간이었다.

“너 담배 빵 좋아하잖아.”

“뭐?”

“그때도 나한테 해 달라고 졸랐지. 여기다 해 줄게.”

아, 빨리 기억해 냈어야 하는데.

이현의 입술에서 순간 핏기가 가셨다. 담배 빵이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드디어 기억이 났다.

남자가 질 나쁜 웃음을 지었다. 잊고 있던 과거를 떠오르게 만드는 웃음. 그는 제 첫사랑의 친구 중 한 명이었다.

멍한 머리를 억지로 일깨우는 강렬한 충격이 다가왔다.

“아악!”

불에 덴 고통에 이현의 눈가에 확 눈물이 고였다. 입술이 덜덜 떨리고 단번에 술이 깼다. 통증 때문에 온 힘을 다해 몸부림치는 이현 때문에 남자는 허술하게 나가떨어졌다. 지리멸렬한 몸싸움이 이어졌다. 어떻게 도망쳤는지는 기억이 안 난다.

정신을 차렸을 때 이현은 또다시 석희재의 집 앞에 가 있었다.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는 며칠 전의 약속을 깨고. 그저 서러운 마음을 달래고 싶어서.

술은 망각의 힘을 휘둘러 이현의 머릿속에서 불편한 것들만 거두어갔다. 헤어졌다는 사실, 독설로 상처 준 기억, 배려 없는 행동, 그리고 며칠 전 성가시게 굴었던 것까지 모두 잊어버리고, 이현은 그저 3년간 석희재의 안온한 품에서 잠들었던 것만 떠올리고는 위로를 바라며 그 집에 찾아갔다.

“희재야…!”

이현은 그 문에 힘없이 기댄 채로 문을 쾅쾅 두드려 댔다. 가끔 바지에 스치듯이 화상 자국이 닿을 때마다 쓰라려서 미칠 것 같았다. 석희재가 이 타투를 얼마나 소중하게 여겼는지가 떠올랐다. 같이 속상해해 줄 것만 같았다.

“희재야. 없어…? 자? 희재야!”

이현은 핸드폰을 들어 무작정 석희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공교롭게도 시간이 새벽 2시였다. 자신이 한때 ‘이런 찌질한 놈이 다 있나’ 하고 혀를 차던 새벽 두 시의 구 남친과 소름 돋게 똑같은 짓을 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이, 이현은 석희재가 전화를 받기만을 기다렸다.

안에서 희미하게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이현은 문에 바싹 붙었다.

“희재야. 안에 있지?”

그것도 매우 가까운 곳에서 들린다.

제 착각이 아니라면 석희재는 현관, 혹은 그 어디 아주 가까운 곳에 있었다. 문을 열어 주려 나온 게 분명했다.

“어….”

하지만 문이 열릴 것을 기대하고 문고리를 철컥철컥 돌려 봐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부질없이 문을 돌리고, 당기고, 돌리고, 당기고를 반복하던 이현은 어느새 완전히 지쳐 버렸다. 최근 출근도 하지 않고 집 안에서만 빈둥대니 체력이 급격하게 줄어 버린 것 같다. 벽에 등을 댄 채로 이현은 스르륵 주저앉았다.

그리고 잠시 후,

철컥.

문이 열렸다.

“…형?”

귀에 익은 목소리에 이현은 고개를 들었다. 안에서 놀란 눈을 한 석희재가 나왔다. 아직 잠이 남은 눈에 새까만 머리카락은 허공으로 조금 뻗쳐 있다. 정든 모습을 이현은 한참 올려다보았다. 석희재는 인사도 건네지 않고 가만히 있는 이현을 보고는 적잖이 당황한 얼굴로 문을 완전히 열고 현관 밖으로 나왔다. 석희재가 슬리퍼조차 신지 않은 맨발이라는 것을 알고 이현은 푸시시 웃어 버렸다.

그렇게 놀란 티를 다 내면 어떡하냐.

“이렇게 갑자기… 일어나, 형.”

석희재가 양팔을 뻗어 주저앉은 이현의 겨드랑이 사이에 받쳤다. 그러고는 아주 쉽게 이현을 일으켰다. 다음 순간 석희재의 가슴에 기대며 이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한숨이 흘러나왔다. 형, 이라고 부르는 그 작은 변화에 왠지 지나치게 마음이 놓였던 것이다.

이제 피디님이라고 딱 잘라서 안 부르네.

조금… 아주 조금은 화가 풀렸나.

석희재는 이현을 현관으로 부축해 들어갔다. 고작 몇 걸음 안짝인데도 이현이 신발 같은 것을 잘못 밟고 발목을 접질릴까 봐 걸음걸이가 조심스러웠다. 이현은 습관적으로 한숨을 쉬려다가 술 냄새가 진동할까 봐 얼른 그만두었다.

그러나 석희재는 그런 것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이 이현을 가만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현관의 자동 센서 등이 꺼졌을 때, 아주 조용히 그 입술을 머금었다.

눈물이 날 정도로 부드럽고 따스한 키스였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제게 이런 식으로 키스해 주었던 남자는 석희재뿐이었다.

이현은 묻고 싶었다.

왜 갑자기 키스해 줘?

내가 너무 취해서?

그래서 기억 못 할까 봐 몰래 해 보는 거야?

그럼 계속 존나 취한 척할게….

입술이 조금 떨어졌을 때였다. 이현은 취기를 빌미로 슬쩍 진심을 말했다.

“희재야. 나랑 하자.”

“…….”

“우리 자자.”

“…….”

“너랑 자고 싶어.”

석희재는 이현의 옷을 조심스레 벗겼다. 함부로 굴지 않는 다정한 손으로.

나신이 된 이현의 보잘것없는 몸을 품평하지 않는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허벅지 안쪽, 문신 가까운 곳의 짓무른 화상 흉터를 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우는 거 보려고 온 거 아닌데.”

“…….”

“그래도 스치면 쓰라리니까…. 여기 안 닿게 뒤로 하자. 응?”

석희재가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맺힌 눈가가 슬픔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형. 왜 이렇게 살아.”

그의 말에, 또 표정에 이현은 심장이 저미는 통증을 느꼈다.

안 그래도 후회 많은 과거를 헤집는 단 한 마디가 가슴을 찔렀다.

“제발 더는 자기 자신을 버리지 말고, 쓰레기처럼 굴지도 말고.”

“…….”

“그냥 사랑받고 살면 안 돼?”

그리고 쾅,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

이현은 눈을 끔뻑끔뻑하며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시야로 빛이 들어왔지만 현실을 인지하는 것이 느렸다. 가장 먼저 연회색으로 칠한 건물의 복도가 보였다.

“희재야.”

이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분명히 방금 전까지 석희재와 한 침대에 누워 있었는데, 자신은 여전히 차가운 복도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었다.

“희재야?”

부질없는 이름을 연달아 불러 보던 이현은 잠시 후에야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어디부터 꿈이었던 거지.’

자신이 그린 꿈의 조각을 가까스로 건져 낸 이현은 망연자실해졌다. 알코올 냄새가 진동하는 한숨을 푹푹 쉬었다.

그리고 잠시 후, 주민 신고가 들어왔다면서 경찰 두 명이 이현의 앞에 등장했다. 순찰을 온 경찰들은 만취한 이현을 양쪽에서 억지로 일으킨 후 경찰서로 끌고 갔다.

***

“그 연예인 사는 집에 가서 그 소동을 피우면 어떻게 해. 그 얌전한 청년이 오죽하면 신고를 했겠어. 멀쩡해 보이고 직업도 있는 것 같은데 왜 그렇게 살아요? 사생 팬, 뭐 그런 건가?”

지난밤 들었던 경찰의 말에서 이현은 자신을 신고한 것이 석희재임을 유추해 냈다. 숙취에 절여진 머리가 멍했다.

야, 석희재. 너 너무하다. 진짜.

나를 경찰에 신고하냐…? 어떻게?

너 그렇게 독한 줄 몰랐다.

사실은 미련 남은 거 다 알어. 그거 헤어진다고 단번에 감정이 없어지는 거 아니거든.

근데 어떻게 그래?

“으응… 끄응….”

이현은 꿍얼꿍얼 입 안에서만 흘러나오는 불분명한 신음으로 잠꼬대를 해 댔다. 석희재의 슬픔으로 일그러진 눈과 원망을 억누른 목소리가 눈앞에 그려질 때마다 미간을 구기며 고개를 내젓기도 했다.

에이 씨… 알았어. 알았어! 나도 미안하다고.

좋은 애인이 못 되어 준 건 미안해.

나도 뭐… 해 봤어야 알지.

그래도 너도 내 입장 좀 생각해 주라.

너는 안 그래도 존재 자체가 부담스러운 앤데….

아니, 다 네 잘못이라는 게 아니라.

아휴.

“훙….”

이현은 기묘한 신음을 내면서 눈을 떴다.

꿈의 마지막 자락에 보이던 것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로 어둠 속에서 울고 있는 석희재의 얼굴이었다. 본 적 없는 광경인데도 이현은 그게 언제인지 알 수 있었다. 불 꺼진 극장 안에서 말다툼을 할 때다.

그때 희재가 그렇게 심하게 울었었나, 잘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즉시 이현은 스스로 답을 찾았다. 생각이 나지 않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그때는 둘 다 시야를 가리기 위해 만든 완벽한 어둠, 즉 암전 속에 있었으니까.

그때 석희재의 얼굴을 보고 말했다면 뭔가 바뀌었을까.

부스스 눈을 뜨니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쇠창살과 눈을 찌르는 형광등의 불빛, 그리고 제 앞을 오락가락 바쁘게 오가는 경찰 몇 명이었다. 자신은 철창 안에 갇힌 채로 딱딱한 바닥을 매트리스 삼아 대자로 누워 편하게도 자고 있었다.

꿈지럭 일어나 눈을 뜨자 마침 책상에 앉아 저를 한심하게 보는 경찰 한 명과 눈이 마주쳤다. 객관적으로 무표정에 가까웠지만 이현이 받아들이기에는 분명 그랬다.

“잘도 자네.”

중년의 경찰이 혀를 찼다.

“제가 왜 여기에….”

이현은 덜컹 내려앉는 가슴을 옴켜쥐며 조심스레 물었다. 범죄 이력을 쌓아 가고 있는 요즘이라 켕기는 것이 무척 많았다.

“집 주소 부르래도 계속 쫓겨 나온 그 집 주소만 대니까 그렇지.”

“…….”

“술 처먹고 맨날 그 집 가서 문 두들기고 난동 부렸다며? 연예인 스토커야? 멀쩡하게 생겨 가지고. 한심한 놈.”

경찰이 언성을 높이며 책상을 탁탁, 때렸다. 이현은 벙벙해졌다. 자신이 석희재의 집 주소를 불러 댔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만약 정말 그랬다면 경찰 말대로 미친 스토커가 따로 없었다.

“어흠….”

그는 괜히 입 앞에 주먹을 모으고 헛기침을 했다. 막 자고 일어나 입 안이 까슬하게 느껴지는 것과 별개로, 이 험한 곳에서 얼마나 잘 잤는지 며칠 전과 다르게 숙취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현은 머쓱함을 느꼈다. 역시 귀하게 살 팔자는 아닌 모양이다.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가 엄청 오던데.”

“예?”

“시끄러워서 내가 대신 받았다. 이제 올 때 됐는데?”

그 말만 남기고 중년의 경찰은 자리에서 쓱 일어났다.

이현은 그가 자신을 피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러나 시야 밖으로 사라진 경찰은 술 취해 제집도 못 찾는 취객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바쁜 일이 있을 뿐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제 피해 의식이었다.

그나저나 좀 꺼내 주고 나가지.

출입구와 가까운 밖을 오가는 사람들이 가끔 쇠창살 안의 이현을 흘끔댔다. 이현은 괜히 자세를 단정히 하고 뒤돌아 앉았다. 쪽팔려서 미칠 지경이었다.

‘진짜 술을 끊든지 해야지.’

안 그러면 모르는 새 습관이 될지도 모른다. 그것만은 막아야 했다….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스스로의 사회적 존엄성을 말살하는 일이었다.

‘그나저나 아침 댓바람부터 전화를 했다는 건 도대체 누굴까….’

이현의 머릿속에 자연스레 석희재 이름 세 글자가 스쳐 지나갔다.

혹시 내가 경찰한테 잡혀갔다는 걸 뒤늦게 알았나.

그래서 놀라서 전화했나?

그렇게 생각하며 이현은 주머니 어딘가에 들어 있을 핸드폰을 찾아 품을 뒤적였다. 그때였다. 경찰서 문이 열리고 바깥의 활기찬 소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동시에 문을 밀고 들어온 발소리도. 출근 시간이 한창인 오전의 활기에 어울리는 빠른 걸음이었다. 또각, 또각. 발걸음은 유치장 앞에서 뚝 멈추었다.

“이 피디.”

등이 쭈뼛서는 목소리에 이현은 흠칫했다. 그건 내심 기대하던 석희재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대신 이 쪽팔린 모습을 들키고 싶지 않은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실장님….”

돌아본 뒤에는 김 실장이 서 있었다.

자신이 이현의 상사라며 찾아와 준 김 실장 덕분에 이현은 가벼운 훈방 조치만 받고 풀려날 수 있었다. 김 실장의 증명으로 신원 조회 따위나, 조서를 쓰는 일도 없이 ‘다시는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한 마디 훈계만 받고 서를 나섰다. 아마 직장인 신분임을 증명하지 못했다면 더 큰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그래서 이현은 곧바로 떠나지 못했다. 마음 같아서는 문을 열고 나오자마자 김 실장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 도망치듯 갈 길 가려고 했는데, 역시나 생각대로 안 됐다. 그녀가 왜 자꾸 전화하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이 피디, 뭐 먹고 싶어?”

아직도 피디라고 부르는 이유도.

“아무거나요.”

그리고 5분 후 이현은 무거운 걸음걸이로 그녀를 따라가 프랜차이즈 카페에 앉아 있었다. 뜨거운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마자 해장국 생각이 간절해졌다. 이현은 곧바로 후회했다.

아무거나 말고 해장국이라고 대답할걸….

먹히지 않는 커피잔을 내려놓자 김 실장이 팔짱을 끼고 물어왔다.

“이 피디 뭐야? 회사 박차고 나가길래 믿는 구석 있는 줄 알았더니, 무슨 사고를 치고 다니길래 경찰이 전화를 받아?”

“사고 같은 거 아니고 그냥 술에 취해서….”

“일할 때도 술독에 빠져 살았는데 그만둬도 또 술이야? 자기도 징하다.”

“…….”

“그래서 요즘은 뭐해. 정말로 다른 일 알아봐?”

이현은 머뭇거렸다.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기가 힘들었다. 정말로 업계를 떠나고 싶은가? 아직 그것도 결정하지 못했다. 모든 커리어를 버리고 제로베이스로 되돌아가는 건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여태껏 살면서 공연 말고 다른 일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다.

주저하는 이현의 표정을 본 김 실장이 누그러진 목소리로 설득을 해 왔다.

“지금 극장 개판이야. 도무지 수습이 안 돼. 배우들 불만은 커지지, 백스테이지 관리가 안 되니까 스케줄 변경이 밥 먹듯이 일어나지, 티켓 팀은 매번 변경 때문에 콜백 하느라 다른 일을 못 할 정도야.”

“…컴퍼니 매니저 있잖아요.”

“아, 그 일 못하는 친구.”

김 실장이 말을 툭 던졌다.

“잘렸어.”

“네?”

“맨날 컴퍼니 룸에서 잠이나 퍼 자다가 잘렸지.”

“누가 잘라요?”

“대표님이.”

의외의 소식에 이현은 말문을 잃었다. 바로 그 틈을 파고들며 김 실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 피디. 대표님도 많이 후회하셔.”

“…….”

“피디가 자기 일 잘할 때는 다들 몰라. 무슨 일 하는지조차 모르잖아. 자기 나가고 극장 뒤집어지니까 이제 대표님도 좀 아시더라고.”

“…….”

“그래서 대표님이 은근슬쩍 자꾸 물어보시더라. 이 피디 어느 회사로 이직했는지 아느냐고.”

이현은 김 실장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녀가 중간 관리자로서 얼마나 큰 고충을 겪는지 안다. 하지만 지금까지 항상 이런 식으로 저 아닌 다른 사람의 사정만 헤아리다가 이 지경이 됐다.

“그런데 왜 대표님은….”

“응?”

“저한테 전화 안 하세요?”

“그건….”

이현은 드러나지 않은 입술 안쪽을 잘근, 씹었다.

“원래 그런 말 잘 못 하시는 성격이잖아, 나이 먹으면 사람 잘 안 바뀌기도 하고.”

“그래도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다…. 그런 말은 당사자에게 직접 해야 되는 거 아닙니까?”

“…….”

“다 그려져요. 대표님은 미안하다는 말 절대 안 할 거예요. 제가 당장 사무실 들어가면 못 본 척하면서 자리 피할 테고, 술에 취해서 겨우 그때 좀 심했지, 하면서 은근슬쩍 넘어가려 들고, 그래도 너도 잘못한 게 있다면서 도리어 큰소리칠 걸요. 그런 거 지긋지긋해요.”

“이 피디….”

“대표님이 진짜 제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면 직접 전화 주시겠죠.”

“…….”

“그때까지 안 돌아가요.”

본인이 깨달아야만 한다. 그러지 않으면 이전과 같은 일이 반복될 것이다. ‘너 따위 없어도 회사는 굴러간다’라는 마음을 가진 대표 밑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설령 자신이 회사에 투자한 시간이 전부 다 무색해지더라도….

전부 다.

그 순간 이현은 벼락을 맞은 것처럼 번뜩이는 깨달음을 얻었다.

“씨발….”

그는 손으로 눈가를 짚으며 한숨을 쉬듯 욕지거리를 뱉었다.

왜 인간은 역지사지를 할 수 있는 걸까.

차라리 끝까지 모르고 파렴치했다면 마음만은 편했을 텐데.

비겁자라고 욕하는 상대가 하는 짓을 저 자신도 누군가에게 그대로 하고 있었다. 바로 석희재에게 말이다.

제정신일 때는 석희재를 마주 보는 게 불편해 그를 투명 인간 취급하며 피했다. 술에 취했을 때에만 상대방과 대화를 시도했다. 게다가 너도 잘못이 있지 않으냐며 인과를 따지고 드는 것까지. 석희재는 그 모든 면면을 참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제야 석희재가 차가운 눈을 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현은 팍 쪼그라들어서 어딘가로 사라지고 싶었다. 자신이 대표를 보는 마음으로 석희재가 자신을 봤다고 생각하니 치욕스러웠다.

이현은 거세게 고개를 털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배우들은 잘 지내요?”

“배우 누구?”

“한지우 선배나, 희재도 그렇고….”

“와, 자기 정말 업계 뜨려고 했구나. 그렇게 친하게 지냈던 배우들하고도 연락을 싹 끊었어?”

그건 아니다. 김 실장의 추측과는 반대로 지저분하게 얽히고 있었다면 모를까….

이현은 술에 취해 찾아갔던 석희재의 얼굴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야위었었나? 운동을 꾸준히 해서 몸은 좋아진 것 같던데….

안 그래도 석희재는 개막 전에 큰 심적 부담감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제는 공연 루틴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겠지만, 그는 마음고생이 몸으로도 나타나는 타입이었다. 실연의 아픔 때문에 혹 체력에도 문제가 생겼을까 봐 걱정스러웠다.

이현은 숨죽인 채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한지우 선배는 어디서 폭력 사태에 휘말렸는지 부상을 입었고…. 지금 특수 제작 마스크 끼고 공연해. 사유를 밝히지를 않아서 팬들이 걱정 많이 하더라.”

“…….”

“그리고 희재 씨는 흠….”

팔짱을 낀 김 실장이 눈을 가늘게 떴다. 이현은 두근대는 심장을 안고 귀를 기울였다. 별다른 특이 사항을 떠올리지 못했는지 그녀가 ‘뭐 특별한 게 있나?’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아, 맞다.”

“네?”

“요즘 연애한다던데.”

“네?”

“얼마 전에 커플링 맞췄다고 보여 주더라고.”

“…네???”

이현은 기계처럼 똑같은 어조로 ‘네?’만을 반복했다.

***

이현은 한낮에 집으로 돌아왔다. 허벅지가 계속 쓰라렸지만 은밀한 부위에 입은 상처를 의사에게 보여 줄 자신이 없었기 때문에 혼자 약국에서 화상 처치에 필요한 것들을 샀다. 비닐봉지를 바스락거리며 들고 와 어수선한 집에 들어앉아서 욱신거리는 환부에 약을 바르고 있으니 제 존재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이현은 ‘희재’라는 이름 끝부분이 흐려진 것을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형은 이렇게 문신 막 하는 사람이야?’

석희재의 질문이 떠올랐다. 어린 나이치고 다소 보수적인 성격과 취향을 가진 연하의 남자 친구는, 간혹 이현이 그의 기준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하면 그런 식으로 직접적으로 물어오곤 했다. 아마 상대를 이해하고 싶어서 그랬을 것이다.

‘혹시 내가 안 보이는 데에 또 어디 문신해 둔 거 아니야?’

석희재는 그렇게 물었다. 조심스럽게 물으면서도 의심의 눈초리를 다 걷어 내지 못하는 것이 이현의 눈에는 보였었다. 어디 한번 찾아보라며 호기롭게 말하자 석희재는 집중한 눈으로 벗은 몸 이곳저곳을 탐구해 댔다. 어찌나 검사가 꼼꼼한지 아랫입술을 까뒤집어 안쪽에 잉크의 흔적이 없나 살펴보았고, 귀 뒤나 두피 사이도 촘촘히 훑었다. 발가락 사이사이 같은 곳을 더듬는 것은 차라리 괜찮았다. 손가락이 은밀한 곳마저 더듬어 벌리려고 할 때, 제가 몸을 굽히며 폭소했던 것이 기억났다.

‘야, 여기다 했으면 타투이스트한테 대 줬다는 소리밖에 더 돼?’

그 말에 석희재는 머쓱한 손을 치웠다. 이현은 담배를 찾아 입에 물며 답했다.

‘문신은 진짜 처음이야.’

이현의 고백에 석희재는 의문에 휩싸여 물었다.

‘어떻게 내 이름이 처음일 수가 있어?’

뭐라고 답했더라. 그 질문에.

기억이 잘 안 났다. 담배를 빠느라 질문이 있었다는 것 자체를 잊어버려서 답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사실 피어싱이나 문신이나, 몸에 흉을 남기는 것 자체를 주저한 적은 없었다. 그저 그런 액션을 할 만한 계기가 없었을 뿐이지.

증명이 필요하다고 했지, 너는.

아마도 결속을 느끼고 싶어서?

혹은 영원의 증표를 갖고 싶어서….

아무튼 여기 어떤 형태로든 영원이 남았다. 이현은 다치지 않은 부분의 문신을 손끝으로 문질러 보았다.

커플링을 할 만큼 각별한 사이의 애인이 생길 리가 없잖은가.

생각은 다시 석희재에게로 가서 고였다. 김 실장의 말을 듣고 한동안 당황을 떨치지 못했던 이현은 그런 결론을 내렸다. 모든 경우의 수와 갖가지의 가능성을 다 부정하고 나서 다다른 결론이었다.

김 실장은 애초에 극장에 자주 들르는 사람이 아니다. 배우들과 사적으로 많이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고. 오류 가득한 소문을 접한 게 틀림없었다. 석희재는 그런 녀석이 아니다. 보여 주기식의 커플링을 끼고, 누군가를 잊기 위해 새 사람을 만나는….

‘걔가 나한테 얼마나 지고지순했는데.’

미련이 그렇게 쉽게 떨궈질 리 없다. 경험담이었다. 첫사랑은 평생 가슴에 남는다. 어떤 형태로든.

그렇게 이현은 석희재의 마음이 제게서 떠나가는 것,

그리고 그가 저에게서 스스로 해방되고자 하는 가능성을 자각 없이 배제했다.

이현의 생각은 하루가 저물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혼자 햇반을 데워 부실한 반찬과 함께 먹는 생존형 저녁 식사 중에도, 또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으로 대충 거품을 내 기계적인 샤워를 하는 중에도, 아무렇게나 뭉쳐 놓은 이불을 펼쳐 안으로 들어갈 때까지도 계속되었다. 무의식중에 석희재 생각만 24시간을 했다.

자리에 누운 이현은 항상 석희재가 눕던 방향을 등지고 돌아누웠다. 거기가 비어 있는 것이 적응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

하지만 주황색 할로겐 등이 켜진 방 안은 곳곳이 지뢰였다. 이현은 한숨 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너무 갑작스럽게 헤어진 게 문제인가. 집 안에는 석희재가 두고 간 물건이 너무 많았다. 차라리 다른 놈들처럼 그걸 돌려받겠다고 찾아오면 만날 구실이라도 있었을 텐데, 석희재는 자잘한 소품이 없다고 당장 생활에 불편을 느낄 만큼 가난하지도 않았다.

헤어진 후에 왜 자신만 찌질하고 석희재는 아직도 고고한가…. 더 좋아하는 쪽은 석희재였던 것 같은데. 이별 후 삶의 모양을 결정하는 요소에도 재산 유무가 그렇게 중요하게 작용하는지는 몰랐다. 이현은 박탈감에 시달렸다.

아무튼 그런 유복한 석희재의 사정 덕분에 이현의 집 안에는 석희재가 두고 간 물건이 아주 많았다. 한편에는 그가 벗어 놓고 곱게 접어 둔 잠옷 대용의 트레이닝복이 있었고, 공연 개막 전까지 닳도록 체크했을 악보와 제본된 대본도 놓여 있었다. 그걸 들추면 석희재의 필체와 노력한 흔적들을 볼 수 있을 테지만 왠지 상상만 해도 가슴이 갑갑해서 이현은 그것을 보기를 미뤘다. 호기심이 자신을 죽일 것만 같았다.

‘형, 혹시 토끼 키우고 싶은 생각 없어?’

‘갑자기 웬 토끼야.’

‘스태프 중에 한 분이 토끼 기르는데 새끼를 많이 낳았대. 사진 보니까 귀여워서….’

‘나 하나 건사하기도 바쁜데 어떻게 동물을 키우냐?’

‘우리 둘이 돌아가면서 돌보면 되지.’

‘아, 싫어. 싫어. 안 돼, 못해.’

‘왜… 내가 잘 돌봐 줄게.’

그때 토끼를 데려왔으면 석희재는 그 때문에라도 제집에 오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던 이현은 불현듯 어떤 사실을 떠올렸다. 한지우 일로 말싸움을 하다가 감정이 상한 직후에 석희재가 그 이야기를 꺼냈다는 것을.

그는 언제나 자신과 매개를 만들고 싶어 전전긍긍했던 건지도.

“씨발, 토끼야….”

이현은 저도 모르게 훌쩍이며 이불로 눈가를 찍었다.

끄트머리에 그가 한 생각은 석희재의 얼굴이 보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깨와 등에 닿아 있는 이불자락이 석희재의 손길인 줄 알고 흠칫하기도 했다.

‘보고 싶다’라는 말의 의미는 석희재의 잘 조형된 얼굴을 눈앞에 두고 감상하고 싶다는 뜻만은 아니었다. 그저 그 얼굴을 보고 싶은 거라면 사실 TV만 틀어도 된다. 공연 개막 후 화보 촬영한 결과물도 우르르 쏟아지고 있어 가장 최근의 모습이 궁금하다면 그런 것으로 확인해도 됐다.

석희재는 최근 염색을 했다. 빛을 반사할 정도로 새까만 머리가 짙고 부드러운 고동색으로 빠졌다. 큰 변화도 아니고 단순히 모발의 톤이 달라졌을 뿐인데 이현은 그것이 무척 낯설다고 느꼈다. 또 조금 아쉽다고도 생각했다. 이현은 석희재의 까만 눈과 까만 머리카락을 좋아했다. 자신이 그렇게 말했다면 ‘과거의’ 석희재는 염색할 생각은 고이 접었을 것이다.

그렇게 인터넷에 떠도는 석희재의 사진을 본 채로 눈을 마주치고 있으면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현실에서는 사람의 눈을 이만큼이나 빤히 바라보지 못한다. 매끈한 뺨 언저리를 손끝으로 긁어 볼 수도 없다. 그건 결례가 되는 일이니까.

물론 한 침대에 마주 보고 누워 수 시간씩 서로의 눈을 바라보던 때도 있었다. 간혹 내키는 대로 키스를 나누고 서로의 몸을 어루만지기도 했다. 그때가 막막할 정도로 멀게 느껴졌다

만나서 이야기해야 한다.

저에 대한 오해도 풀었으면 했고, 그래서 그 마음에 든 멍도 치유했으면 했다.

단 제정신으로.

그건 정말 어려운 일이었다. 전화를 걸까 말까, 고작 그런 걸로도 지나치게 많이 고민했는데 실제로 만남을 요청하는 건 거의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그래도 만나야 하는 이유는…. 그렇게 오랜 기간 살을 맞붙이고 지냈는데도, 목소리만으로 석희재의 진심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웠기 때문이다.

인제 와서 솔직히 말하지만 이현은 늦은 밤, 공연이 끝나고 그가 혼자 남는 시간을 계산해 전화를 걸어 본 적이 있었다.

- 여보세요.

‘…….’

- 누구세요. 말씀하세요.

‘…….’

- 끊습니다.

지극히 사무적인 목소리에 갑자기 용기가 사라져 이현은 저 먼저 전화를 뚝 끊어 버렸다. 핸드폰이 아닌 집 전화로 걸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제발 그냥 기자 혹은 팬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라면서, 수치심에 이불 안에서 괜히 아악! 소리를 내며 뒹굴었다.

석희재는 보통 얼굴로 드러내는 감정의 진폭이 크지 않았고, 목소리는 더욱 그랬다. 만약 전화 상대가 저라는 것을 밝혔을 때.

‘그래서요. 왜 전화하셨어요.’

그런 무뚝뚝한 대답만 돌려주는 상대의 앞에서 무슨 반응을 끌어내 보려고 애를 쓰는 건 불가능할 것 같았다. 또 얼굴을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는 이유는…. 이현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렸다. 술 취해서 그 집에 두 번이나 찾아갔는데도 석희재의 얼굴이 희미했기 때문이다.

관계가 나아지거나 오해를 풀거나,

혹은 석희재의 심중을 알아내거나… 그러기는커녕 저의 진상력만 보여 주고 끝났다.

다시는 술 안 먹어.

얼굴을 양손으로 감싼 채 이현은 다짐했다. 그리고 내일 눈을 뜨면 제정신으로 석희재를 찾아가기로 결심했다.

***

한번 신고를 받고 경찰에게 끌려나갔던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함부로 석희재에 집에 발을 들일 생각은 들지 않았다. 경비의 차가운 눈초리도 떠올랐다. 그렇다고 한지우를 비롯해 저에게 거리감을 두던 스태프들이 우글우글한 극장으로 찾아가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고.

이현은 모자를 눌러쓴 채 석희재가 사는 고급 오피스텔의 출입문이 정면으로 보이는 카페에 앉아 버텼다. 콜이 2시니까 다른 스케줄이 없다면 그전에는 무조건 나올 것이다. 오늘 안 보인다면 내일, 내일도 만나기에 실패한다면 모레 오면 된다.

구 남친이 연예인이라는 것은 그래서 편리하고 또 그래서 기묘했다. 상대방의 스케줄을 마음만 먹으면 알아낼 수 있으니….

게다가 현재 이현의 곁에는 비슷한 목적으로 여기를 찾아온 것 같은 여학생들이 심심찮게 보였다. 이건 여기 도착하기 전까지는 상상도 못 한 일이었다. 심지어 콜 시간이 가까워지자 팬들은 점점 더 늘어났다. 점점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처럼 느껴져 이현은 몸을 뒤틀었다. 이 친구들을 제치고 석희재에게 다가가 알은척하는 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어? 나왔다, 나왔다! 저 밴 아니야?”

“아! 오늘은 왜 밴 타고 나와?”

“빨리빨리!”

“차 타고 나왔잖아. 빨리 붙어!”

눈 깜짝할 사이에 우르르 학생들이 빠져나가고 이현은 혼자가 되었다. 멍한 채로 유리 밖을 바라보고 있자, 아침부터 자릿값을 낸다고 커피를 석 잔이나 시킨 이현에게 카페 주인이 다시 한번 다가왔다.

“추가 주문하시겠어요?”

결국 그토록 가기 싫던 극장에 왔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건, 자신은 이 극장의 구조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는 점이었다. 보통 배우들이 쓰는 동선도 잘 알고 있었고, 한지우를 비롯한 마주치기 싫은 사람들이 떠나가는 것을 지켜볼 수 있는 사각지대도 알았다. 기둥 뒤에 몸을 숨긴 이현은 한지우와 석희재가 비슷한 순간에 나오지 않기만을 바라며 거기에 기댔다.

이렇게 해서까지 만나고 싶었던 이유가 뭐더라.

하루 종일 한 사람을 기다리는 데에만 시간을 보냈더니 정신적으로 지쳐 버렸다. 이현은 주저앉은 채 마스크 위로 눈을 가만히 깜빡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분이 나빠 보이는 한지우가 마스크를 낀 채로 성큼성큼 걸어 나왔다. 컨디션이 별로였던 것 같아 도리어 제 기분이 좋아졌다.

그리고 우애가 좋아 보이는 남자 앙상블들 - 이현을 대놓고 멀리했던 이들 - 과, 그래도 막판까지 저를 조금은 살갑게 대해 주었던 여자 배우 몇몇이 걸어 나왔다. 하지만 아직도 석희재는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거의 모든 배우가 퇴근했을 때쯤에 의외의 인물들이 극장에서 나왔다. 김 실장과 홍보 팀 막내 신아름이었다. 피디와 컴매의 공백을 기존 직원들이 당직으로 채우는 모양이었다. 돌아갈 마음은 없지만 어쩔 수 없이 미안해졌다. 이현의 공백은 결국 죄 없는 이들이 채워 넣고 있었다.

끼익.

다시금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이현은 다시 몸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막 나온 사람은 아직 문가에 서 있는지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터벅, 터벅, 터벅.

그리고 이어지는 귀에 익은 발소리.

사람 모습을 보기 전에도 이현은 걸음 소리만으로 왜인지 그것이 석희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규칙적이고 단정한 발걸음이었다.

딱 세 걸음을 걷고 나서 석희재는 자리에서 멈추었다.

“거기서 뭐 해요.”

이현은 흠칫 놀랐다. 어떻게 저를 발견할 수 있나 싶어서.

애초에 여기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바라보지 않았다면 찾아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현은 천천히 일어났다. 오래 굽히고 있던 무릎에서 삐걱이는 진동이 전해졌다. 조금 이상한 것은 이쪽으로 고개를 향하면서도 석희재는 영 다른 곳에 시선을 주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현이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을 때에야 눈이 마주쳤다.

“희재야.”

“극장에 볼일 있으세요.”

끝을 올리지 않는 석희재 특유의 차분한 물음이었다.

‘아니, 나는 너에게 볼일이.’

그 말 한 마디가 잘 안 나와서 괜히 마른침을 삼킬 때였다. 이현이 대답이 없자 석희재는 시선을 피하지 않은 채로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는 곧바로 뒤돌았다.

뒤돌아선 석희재의 손가락에는 정말로 은빛 반지 하나가 눈에 띄게 빛나고 있었다.

“희재야!”

다시 석희재가 뒤돌기도 전에 이현은 준비되지 않은 물음을 내뱉고 말았다.

“너 그 바, 반지 뭐야?”

아. 이 말을 하려던 게 아니었는데.

석희재가 눈에 띄게 불편해하는 얼굴로 저를 돌아보았다. 그 얼굴을 보자마자 제 조급함이 또 뭔가를 그르쳤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왜요?”

그가 손등을 보이며 손을 든다. 석희재의 얼굴에 드러난 불편감을 의식하면서도 그 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등 뒤 가로등 빛을 역광으로 받은 석희재의 오른손 약지에는 심플한 링이 빛나고 있었다. 장식이 많지 않은 단순한 디자인이지만 커팅 된 모양이나 빛을 반사하는 질감이 무척 고급스러웠다. 석희재의 손에 끼워져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이게 왜 궁금해요?”

석희재가 다시 물었다.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는 방식. 아주 익숙한 석희재의 화술이었다. 이현은 종종 그런 것이 힘들었다. 저도 모르는 제 안의 답을 캐내려는 것 같아서.

“커플링….”

이현의 입에서 나온 단어 단위의 문자에 석희재는 희한한 것을 본다는 듯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커플링?”

잘라 내듯 던지는 말에 도리어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다. 이제 와 이성을 찾은 이현은 차마 ‘커플링은 나랑 하고 싶어 했던 거 아니냐’라고 물을 수가 없었다.

간혹 그런 사람들이 있다. 연애하면 응당 따라오는 행위들이 그리워서 감정 이전에 관계를 약속하려는 성급한 이들이. 이현은 혹시 석희재도 그랬던 게 아닌가 슬쩍 의심해 보았다. 커플링이 하고 싶어서, 함께 영화를 보고 싶어서, 약속 없는 저녁 혼자 먹는 식사를 피하고 싶어서.

한창 일할 때의 자신은 그런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는데. 결국 그게 저와는 잘 안 되어서 헤어지자고 한 것인가, 하는 막막한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가능해진 지금은….

“그게 궁금해서 말 걸었어요?”

석희재가 무뚝뚝한 말투로 되물었다. 이제는 어이없다는 최소한의 감정 표현도 하지 않는다. 그 태도에 왠지 가슴이 저려서 이현은 대화의 진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 주고받기의 식의 대답을 툭 건넸다.

“그게 뭐….”

“…….”

“좀 궁금해하는 것도 안 돼?”

“하….”

석희재가 허공을 보며 기가 찬 한숨을 쉬었다. 역광으로 쏟아진 가로등 빛 때문에 그 눈에 황당하다는 이채가 도는 것만 같다.

석희재의 반응 정도는 이끌어 냈지만 또 자신이 뭔가 핀트 나간 짓을 했다는 것만은 알겠다.

“피디님.”

석희재가 성큼 이현의 앞으로 걸어왔다. 바라던 것인데 바라지 않던 것이기도 하다. 이현은 조금 움츠러들었으나 석희재를 당당하게 올려다보려고 노력했다.

“다른 건 궁금한 적 없어요?”

“…….”

“투명 인간 취급을 해 대고.”

이현은 석희재가 울컥, 형체 없는 무언가를 삼키는 것을 바라보았다. 잠시 숨을 고른 석희재가 다시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이름뿐인 관계여도 좋으니까 곁에 있게만 해 달라… 빌고, 피디님 집에서 혼자 밤새 기다리고, 그럴 때는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궁금해한 적 있어요?”

“희재야. 그때는, 저기… 내가….”

“그런데 ‘커플링’?”

다시금 어이없다는 말투가 혼잣말처럼 흘러나왔다. 말문이 턱 막혔다.

“우리 헤어졌어요.”

있을 때 잘하지 그랬어….

진부한 노래 가사가 뇌리에 메아리쳤다. 이현은 사고가 정지한 채로 ‘있을 때 잘하지’라고 외치는 제 머릿속의 음성을 듣고 있었다.

그 멍한 얼굴을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다는 듯이 헤아리던 석희재가 한 단어, 한 단어를 누르며 말했다.

“그 뒤로 제가 피디님이 누구와 자러 다니는지… 물어본 적 있어요?”

“…….”

“물어보지 않은 이유는, 그럴 사이가 아니어서예요.”

석희재는 그렇게 말하고 뒤돌았다. 이현은 그 뒷모습을 보고 있다가 ‘희재야….’ 하고 힘없이 불렀다. 멈추리라고는 기대도 하지 않았건만 석희재는 그 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가 돌아보았다.

“다시 말해 보세요.”

“…….”

“이게 왜 궁금해졌어요?”

그리고 딱 3초간 이현을 응시하더니 석희재는 한숨을 쉬며 다시 등을 돌렸다. 땅바닥을 향해 고개를 떨구는 것은 마치 체념처럼 보였다. 답이 없는 저를 포기한다는 듯….

이현도 알았다. 석희재가 원하는 답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이다.

하지만 인제 와서 ‘다른 사람에게 가지 마’, 그따위 말을 하는 건 지나치게 추하지 않은가.

그깟 자존심이 뭐라고.

그러나 잔뜩 너덜너덜해진 이현에게 남은 것은 자존심뿐이었다. 그래서 버리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렇게 거절하고 거절했던 커플링을 고작 다른 사람과 맞췄다는 이유로 이 밤중에 와서 캐묻는 짓이 지나치게 구차하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다. 땅으로 꺼지고 싶은 기분이 들수록 이현은 정답에서 멀어졌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그냥 조금 더 질척하게 굴어 볼까…. 그렇게 마음먹고 실행하기에는 눈앞의 석희재가 너무 차가웠다. 게다가 말 몇 마디로 돌릴 수 있는 상황이 아닌지도 모른다.

석희재는 출입구 앞쪽 주차장 뒷길로 빠져나갔다. 거기에서 멈추어 저를 기다리고 있던 팬들에게 사인을 해 주기 시작했다. 이현은 다시 기둥 그림자 뒤에 서서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석희재는 팬의 말을 듣기 위해 고개를 숙여 눈을 응시했고, 종이에 사인을 적으면서도 상대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가끔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대목에서는 조금 웃음을 터뜨리기도 했다. 간혹 편지나 선물을 주는 이들이 있었는데 사인의 줄이 끝나갈 때쯤에는 더 들 수 없을 정도로 가짓수가 많아졌다. 그러나 석희재는 받은 것들을 함부로 바닥에 내려놓지도 않았다.

그중 누군가 반지를 손으로 가리켰다. 석희재는 이현에게 그랬던 것처럼 손등을 들어서 반지를 보여 주고는 무어라 말했다. 이현이 숨은 쪽에서는 석희재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대신 팬이 ‘아아’ 하고 뭔가 수긍하는 듯한 반응을 하는 것이 보였을 뿐이다.

그 행동에 이현은 스륵, 일어나 고개를 숙이고 걸어가 사인 줄의 끝에 섰다.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향해 팬들의 의아한 시선이 쏟아졌다. 석희재는 이현이 다가온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결코 시선을 주지 않았다. 왠지 민망함에 주춤주춤 원 밖에서 팔짱을 끼고 있으려니 한 팬이 말을 걸어왔다.

“저… 혹시 피디님 아니세요?”

“아! 피디님 맞으시네.”

“혹시 배우님 가셔야 돼요?”

“어… 아니, 그건 아니고요.”

쏟아지는 질문에 이현은 헛기침했다. 그냥 조용히 기다리다가 제일 마지막에 석희재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이상하게 주목을 모으게 됐다. 깊이 생각하지 않고 모습을 드러내 버린 이현은 저를 돌아보는 팬들을 보고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당황하고 말았다. 개중에는 이현의 눈에도 익은 골수팬들이 있었던 것이다. 연습 때부터 꾸준히 커피차며 서포트를 넣어오던 팬도 보였다. 그들 대부분이 이현과 직접 접촉을 했던 사이였다.

이현은 제 존재감이 석희재를 또 불편하게 만든다는 것을 알고 그저 손사래를 치며 모자를 더 눌러썼다.

“피디님도 이거 드세요. 집에서 구워 왔어요.”

한 팬이 손에 친절하게 쥐여 준 비닐봉지 안에는 마카롱이 들어 있었다. 석희재가 저를 흘끗 쏘아보았다. 옆얼굴이 따가워서 이현은 거절하려고 했다.

“전에 친절하게 해 주셔서 너무 감사했어요. 요즘은 왜 안 보이세요?”

“아… 그건, 저 과자 안 먹어요. 이거 쟤 주세요.”

혹시 자기 팬의 선물을 눈엣가시인 저가 가로챈다고 생각할까 봐 이현은 석희재의 눈치를 보며 도로 돌려주었다. 팬이 “배우님은 드렸어요” 하며 웃는다. 어쩔 수 없이 이현은 한 손에 마카롱을 들고 한 손은 주머니에 꽂은 채로 벽에 가서 붙어 섰다. 그러고는 괜히 계획에도 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현이 석희재를 데리러 온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짐작한 팬들은 다시 석희재에게로 향했다.

‘아… 밉보이고 걸리적거리고 소득은 없고. 미치겠네.’

멀찍이 떨어져 담배를 다 피우고도 뭔가 허해서 이현은 벽을 보며 마카롱을 까먹었다.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는 대부분의 팬이 흩어지고 있었다. 석희재는 공손하게 인사하며 다시 주차장으로 들어갔다. 내가 있는 걸 봤으면서! 그 모습을 보고 당황한 이현은 석희재의 뒤를 쫓았다.

“희재야!”

“…….”

“이제 가?”

석희재가 말없이 이현을 내려다보았다.

“설마 사인받고 싶으세요?”

“…그게 아니….”

사인을 만들었나. 개막 전만 해도 ‘사인이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라고 말했었는데. 그새 만들었다는 사인이 궁금해서 말이 멈췄다.

사인받을까 말까. 이현은 석희재의 눈치를 봤다.

“…….”

석희재는 갑자기 말을 멈춘 이현을 향해 약간의 인내심을 더 발휘하다가 뒤돌았다.

“가야 해요. 기다리고 계세요.”

석희재가 공적인 거리감을 지키며 묵례를 했다. 정말로 가겠다는 뜻이었다. 석희재가 돌아본 곳에는 처음 보는 미끈한 차체가 있었다. 그건 밴도 아니고 일전에 석희재가 한 번 끌고 왔던 스포츠카도 아니었다.

혹시 반지의 주인인가 싶어서 이현의 심장이 불길하게 박동했다.

“너한테 할 말이 있는데.”

“…….”

“어, 어떻게 하면 들어줘?”

“저는 언제든지.”

석희재가 천천히 눈을 깜빡이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든지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는 건 피디님 쪽인 것 같은데요.”

아니잖아. 넌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거잖아.

하지만 반박하기에는 주제가 안 되었고, 석희재가 원하는 답을 찾기에는 마음이 조급했다. 속마음 밑바닥에 가라앉은 흙탕물을 뒤져 뭔가를 건져 내기에는 무척 촉박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반지는… 그런 의미 아니에요.”

“…….”

“가족하고 맞춘 거예요.”

석희재가 피로하다는 듯이 말했다.

가족?

이전까지는 석희재의 입에서 단 한 번도 ‘가족’을 언급하는 것을 듣지 못했던 이현은 의문에 휩싸였다. 동시에 더더욱 믿을 수가 없게 됐다. 그러나 석희재는 더 미룰 수 없다는 듯이 차에 올랐다.

그런데 뒷좌석이 아니고 조수석을 열고 올라탄다.

그 순간 이현은 본의 아니게 안에 탄 사람의 실루엣을 보았다. 운전대를 잡은 소녀처럼 가녀린 팔목에 화려한 장신구들이 채워져 있었다. 석희재는 아무렇지 않게 조수석에 올라타 운전석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본인은 자각이 없는 것 같았지만 그 사소한 행동거지에서 무척 가까운 사람을 대하는 태가 났다.

“미안. 너무 늦었지.”

그리고 문이 탁 닫혔다. 왜인지는 몰라도 석희재가 말을 놓는 여자가 있다는 것조차 충격이라 이현은 그 자리에서 굳어 버렸다.

게다가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운전석에 앉은 것은 저도 얼굴을 아는 매우 유명한 연예인이었다. 업계 뒷소문에 밝은 이현이 알기로는, 계절별로 아들뻘 나이의 연하남들을 키 링처럼 갈아치운다는….

희재, 스폰….

스폰….

스폰 받나?

아, 안 돼….

충격에 휩싸인 이현은 생각마저 버벅였다.

이현의 머릿속에서 우르르 꽝꽝, 천지가 개벽하는 뇌우가 울렸다.

***

연상이 좋다고 했었지.

그래서인가.

이현은 누운 채로 자리에서 뒤척였다. 움직일 때마다 식은땀이 공기에 닿아 몸서리가 쳐졌다.

집으로 돌아온 후 내리 잤다. 아마도 열두 시간가량, 혹은 그 이상을. 간간이 눈을 뜨기는 했지만 아무 연락도 없는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베개에 머리를 묻고 까무룩 잠들기 일쑤였다. 결국 해가 지고 나서야 완전히 눈을 떴다. 폐인처럼 자다가 하루를 꼬박 날렸다는 것, 그리고 석희재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는 것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방이 더운 것 같아 선풍기라도 틀기 위해 몸을 일으키니 목을 타고 식은땀이 흘렸다. 입은 바짝 마르고 기력이 하나도 없었다.

‘스폰이라니….’

이현의 얼굴이 고약하게 구겨졌다. 그는 약한 구역감까지 느꼈다. 24시간 가까이 굶어 강렬한 허기가 겹치는 바람에 속이 더 좋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아귀가 들어맞았다. 아무리 외모가 비상해도 그렇지, 연기 경험도 없는데 대형 기획사와 덜컥 계약을 맺고 데뷔 전부터 통신사나 아파트 따위의 CF를 쉽게 따냈다. 그리고 얼마 전 보았던 그 차, 그건 무턱대고 질러 댈 수 있는 가격이 아니었다. 아직 정산금이 나오지 않았을 텐데 본인 돈으로 사기에도,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도 과했다. 스무 살 넘어서 사는 첫차가 뚜껑 열리는 마세라티라니….

이현의 머릿속에서 ‘석희재의 숨겨진 스폰서 이사라’라는 가정이 기정사실화되어 갈 때쯤이었다. 석희재의 집을 떠올린 얼굴이 창백해졌다.

혹시 그 집도?

“아….”

뒤로 털썩 넘어가며 이현은 도로 누웠다.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자신은 결단코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남에게 그런 기준을 댈 주제도 못 됐다.

하지만 석희재가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모르겠다. 모로 봐도 완벽할 정도로 순수했던 남자에게 흠이 생기는 게 싫어서인지, 아니면 저 때문에 업계에 뛰어들었다는 석희재가 이쪽 물이 들어 버리는 게 싫어서인지….

언제부터? 언제부터 그 여자와 그런 관계였을까.

만약 저와 만나던 도중이라면 무척 싫을 것 같다. 또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 배신감이 들었다.

“으….”

이현은 꽉 죄는 듯한 위를 부여잡고 옆으로 굴렀다. 위벽을 할퀴는 듯한 통증이 찾아왔다. 일시적인 위경련이었다. 일을 시작하고 얼마 안 되어 과음할 때마다 종종 이런 때가 생겼다. 하지만 이번에는 술도 마시지 않았는데 숨도 못 쉬게 위가 아팠다. 한동안 몸을 웅크린 채로 누워 있어야 했다.

한 차례 통증이 가신 후에야 이현은 빈속이 문제라는 결론을 내렸다. 살기 위해 밥을 먹었다. 그러고는 다 먹은 식기를 치울 기력도 없어 어질러진 식탁을 그냥 뒤로하고 몸을 일으켰다. 시야가 휘청였다.

설마 잤을까.

석희재는 믿지만 그 여자는 못 믿는다. 이현은 어렵지 않게 그릴 수 있었다. 어둠 속에서 눈을 내리깔고 여자의 희롱을 받는 석희재의 모습을. 상상 속의 석희재는 명백한 유혹의 말에 눈도 깜빡하지 않았다. 그저 그 관찰하고 숙고하는 눈으로 상대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노력할 뿐이었다. 상대가 어떤 취향, 어떤 성벽을 가지고 있든 당황조차 하지도 않고.

이 순간만큼은 석희재가 예의 바른 인간이라는 게 싫었다. 이현은 집 안을 한 번 휘 둘러보았다. 석희재는 제 수준과 맞지 않는 이따위 더러운 집마저 비웃은 적이 없다. 보통 남자들이라면 기함할 정도의 변태적 성벽을 가진 저를 보고도 손가락질하지 않았다. 도리어 제가 크게 놀라면 그 반응이 상대를 다치게 할까 봐 감정을 숨기는 부류의 사람이었다.

“자의식과잉도 정도가 있지….”

이현은 무거운 한숨을 쉬었다. 뜨거운 응어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기억을 더듬어 보면 석희재와 저의 첫 만남은 처음부터 제대로 된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유명 연예인과의 만남이 그보다 더 나쁠 거라고 굳이 상상하는 건 주제를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현은 상상했다. 석희재가, 저 아닌 다른 사람의 유혹은 미간을 찡그리며 뿌리치기를.

석희재 성격에 그럴 리가 없다는 걸 상상하니 또다시 속이 말도 안 되게 쓰렸다. 밥을 먹었는데도 속이 쓰린 게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이현은 침대에 가서 누웠다. 석희재가 언젠가 어울리는 짝을 만나기를 바라긴 했지만 이런 식은 아니었다. 꼭 석희재만큼 순수하고 상대에게 일편단심인, 예쁘고 흠잡을 데 없는 제 또래를 만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정말로 그런 사람과 만난다는 소식이 들렸다면 그때라고 충격이 덜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이현은 자신이 얼마나 순진한 환상 속에서 석희재를 떠나보냈는지를 깨달았다. 이전까지 자신이 상상하던 두 사람의 후일담은 이런 식이었다. 대략 3년 후, 이제는 접점도 없어 희미한 과거의 인연이 사랑을 새로 찾았다는 이야기를 업계 지인을 통해 간접적으로, 혹은 기사를 통해 듣게 될 거라고.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상상 속 최선의 시나리오일 뿐이었다. 이현 스스로가 가장 덜 다치는 방향의 시나리오 말이다.

현실은 많이 달랐다. 더 이상 저를 배려할 필요가 없는 석희재가 앞으로 무슨 일이든 할 수 있다는 걸 알아야 했는데.

“으음….”

이현은 낮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감았다. 자신이 끙끙 앓고 있는 것도 모르고.

그저 오늘 컨디션이 이상하게 별로라면서 홍삼을 짜 먹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석희재가 제게 해 주던 것처럼 다른 사람을 안는 것을 떠올리기도 했다. 당장 오늘 밤도 그러고 있을지 모른다. 저를 쓰다듬어 주던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다정하게 입 맞출 것이다. 그저 흥분에 쫓겨 손을 떨던 갓 열아홉 살의 동정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제법 쌓인 경험치로 능숙하게 다른 사람과 몸을 섞을 것이다. 석희재의 처음이 자신이라는 만족감보다도 제게서 배운 방식을 다른 이와 나눌 거라는 사실이 더 사무쳤다. 속이 홧홧하게 타들어 갔다.

싫다….

이현은 눈물지었다. 훌쩍, 코를 훔치는 순간 익숙한 상실감이 찾아왔다.

상실감이라.

첫사랑이 끝났다는 것을 알았을 때도 꼭 이랬는데. 엎드려서 베개에 얼굴을 묻고 소리 없이 울었었다. 개새끼에게 마음을 준 게 서럽고, 사람 보는 눈이 없던 자신이 미친 듯이 싫고, 그런데도 아직도 좋은 것이 기가 막혀서…. 그러나 그보다도 끝나지 않은 마음 때문에 울었다. 또, 앞으로 한 줌의 추억에 매달려 살아갈 자신이 막막해서 울었다. 마치 지금처럼.

아마도 그때 자신은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던 것 같다. 그럴만한 일이었다. 자그마치 7년을 짝사랑했다. 그것도 인생 최초였다. 그 강렬한 첫사랑이 끝 사랑일 거라고 정해 두고 혼자 많이도 술을 마셨다. 술에 진탕 취해 찾아갔다가 내쳐지기를 반복하기도 했다. 다시는 이런 강렬한 사랑은 제 인생에 없을 거라며 스스로 과거에 지배당하기를 자처하면서.

이현은 누운 채로 눈을 깜빡였다. 그때와 지금, 자신이 하는 행동이 소름 끼치도록 비슷했다. 불길한 깨달음이 뒤늦게 찾아왔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두 번째 사랑이 왔다가 지나갔을 가능성 말이다.

***

순정은 다 개새끼에게 주고, 몰래 시작된 마음이 얼마나 자랐는지 눈치도 못 챘던 거면 어떡하지.

마른 입술을 축이며 이현은 옷을 주워 입었다. 오랜만의 외출에 청바지 아닌 슬랙스를 챙겨 입자 허리가 헐거웠다. 체중을 재 보니 3kg이 빠져 있었다. 이현은 거울 속의 더 빈약해진 뺨과 목덜미를 바라보면서 벨트를 한 번 더 조였다.

며칠 전 신아름에게 전화가 왔다. 업계와 회사 사람들의 연락은 무작정 피하던 이현이지만 그녀의 전화에는 응답할 수밖에 없었다. 도움을 요청하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고, 아직 홍보 팀 막내인 그녀가 회사 입장에서 저를 이용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피디님, 살 빠지셨어요? 더 멋있어지셨어요.”

“마음고생을 해서 그런가.”

“왜요? 아직 이직을 못 하셨어요? 실은 벌써 어디 스카우트되셨을 줄 알았어요.”

“스카우트….”

신아름의 말에 이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사회 초년생인 그녀가 하는 말이 영 판타지 같기만 했다. 그런 일이 일어나면 얼마나 좋을까, 하며. 실상은 멀쩡한 사회인인 척 옷을 갖춰 입고 대낮의 카페에 앉아 있으니 어색한 나머지 초조한 기분까지 드는데 말이다.

“다 그렇게 소문났던데요. 다른 데서 연봉 두 배 불러서 안 오시는 거라고요. 피디님 일 잘하시잖아요.”

이상하다. 내가 한창 공연 중이던 한지우 코를 무너뜨린… 세상에 존재해서는 안 될 피디라는 게 아직도 소문이 안 났나.

어리둥절하게 생각하던 이현은 동시에 지난 얼마간 자신의 시간이 멈춰 있었음을 깨달았다. 아직도 제 손에 있는 한지우의 폭행 영상, 새 일자리를 구하려고 잡아 놓았던 몇 개의 미팅, 그리고 다른 업계로의 이직을 생각하며 그쪽 종사자들과 잡아 놓았던 술자리들을 전부 잊고 있었다. 당장 내야 하는 월세와 적금 등을 생각하면 멍하니 있을 때가 아니었는데.

이유는 하나다. 끝난 인연 때문에 뒤늦게 마음이 수선해서다.

이렇게 사로잡혀 있었는데도 몰랐다니.

그러고 보니 이번 주면 카드값이며 적금, 보험, 각종 공과금이 빠져나간다. 월급도 안 들어오는데 현금 융통이 될지 모르겠다. 석희재에게 정신이 팔려서 제일 중요한 것들마저 잊고 있었다.

일단 이현은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이 업계는 대표도 내 연봉 두 배는 못 받아.”

“아무튼 일 안 하신다니까 좀 마음이 놓여요.”

“그게 왜?”

“돈이 아쉽지 않으면 안 하실 거 같아서….”

“나 돈 벌어야 돼. 뭔데?”

이현의 말에 신아름이 얼른 반가운 얼굴을 했다.

“최근에 막 의류 홍보 회사 입사한 친구한테 연락이 왔는데요. 석희재 배우님한테 협찬하고 싶대요. 그런데 아무래도 연결된 인맥이 없으니까 저한테 물어보더라고요. 요즘 같이 공연하지 않냐고.”

“…희재?”

이현은 다소 곤란하게 중얼거렸다.

“소속사 쪽에다 물어보면 되지 않나….”

“그 회사가 워낙 깐깐하잖아요.”

“아니면 스타일리스트한테….”

“석희재 배우님은 신인이셔서 아직 전담 스타일리스트가 없나 봐요.”

“…….”

“그래서 피디님이 배우님이랑 많이 친하시니까… 한 번 물어보겠다고는 했는데, 안 될까요? 어려울까요?”

“…….”

“이제 막 입사해서, 되게 잘하고 싶나 봐요. 제 친구는.”

이현은 테이블을 내려다보면서 난감함에 턱을 매만졌다. 그 모습을 본 신아름이 마음 졸이는 것이 제게까지 느껴졌다. 저라는 인간은 원래도 다른 사람의 사정을 고려하다가 손해를 보기 일쑤였지만 이번에는 그것 때문에 주저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가장 문제 되는 점은 석희재와의 사적인 사정이었고….

“안… 안 될 가능성도 큰데.”

“3건에 천오백만 원 준대요.”

“응?”

“그 브랜드 옷 3번 입어 주면 천오백만 원, 수수료는 흥정하기 나름이래요.”

정말로, 결단코 돈 때문에 승낙한 것이 아니다. 타이밍이 조금 그렇게 보일 수는 있지만 아무튼 돈 때문은 아니라고, 이현은 마음속으로 석희재에게 외쳤다.

어쨌든 결론적으로 이현은 승낙했다. 그저 이 기회를 빌미로 석희재와 만날 명분을 만들 수 있을까, 싶어서.

‘저는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이현은 석희재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점차 마음이 무거워졌다. 석희재의 차분하고 차가운 눈빛이 떠올라 걸음이 무의식적으로 느려졌다. 일부러 의식하지 않으면 몇 걸음마다 발이 멈추기 일쑤였다.

업무로 핑계를 만들어서 보자고 한 것 자체를 마음에 안 들어 하면 어쩌나.

공적인 일을 빌미 삼아 사적으로 질척거려도 되나. 그건 내가 제일 싫어한다고 그 애 앞에서 강조하던 일인데.

그렇게 다 내던진 채 한 번만 기회를 달라고 말하면 정말 기회를 줄까.

만약에 안 된다고 하면 난 또 이 모든 걸 후회하게 되는 거 아닌가….

원하는 답이 있는 것 같은데, 그 답이 미래에 대한 것이 아니라 그저 과거에 대한 사과라면 어쩌지.

답을 추궁하는 석희재 앞에서 내 용기가 먼저 고갈되면 어쩌지.

더 추한 모습 만들지 말고, 안 좋은 추억을 누적시키지 말고 그냥 잊혀지는 게 나은 것 아닌가.

생각해 보면 두 번 다시 사적으로 만나지 않겠다고 선언한 쪽도 석희재였다.

자신이 찾아갔을 때 석희재가 보일 반응을 생각하면 공포심으로 심장이 마구 뛰다가, 까이는 것을 상상하면 다시 싸늘하게 식기를 반복했다. 냉탕과 온탕에 번갈아 몸을 담그는 기분이었다.

그렇게 벼랑 끝에 선 채로 이현은 혼자만의 망상을 반복하는 것으로 마음을 달랬다. 저 스스로가 덜 다치는, 자신에게 관대한 시나리오를 버릇처럼 쓰면서. 언제나 그 점이 문제였다. 첫 짝사랑이 7년이나 간 이유도 다 이런 버릇 때문이었다. 스스로가 스스로를 희망 고문했기 때문에. 그 덕에 힘든 와중 그나마 숨통이 트였지만, 그 때문에 일찍이 끝냈어야 할 미련 덩어리를 사랑으로 포장해 7년이나 질질 끌어갔다.

아무튼 이현은 그 버릇이 자신을 망쳐 왔다는 것을 알면서도, 망상 끝에 석희재와의 재결합을 꿈꾸기까지 했다.

그 상상 속에서, 아쉽게도 다소 보수적인 석희재는 연인과 스폰 관계를 양립시킬 수 없다는 입장을 보였다. 석희재의 성격으로 보면 그럴 법도 하다. 그러나 고작 그런 것으로 석희재를 놓친다고 생각하면 저는 애가 탔다. 혹시 그런 이유로 거절당한다면 이현은 제 과거가 더 복잡하다며,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다’라고 말하기로 마음먹었다. 제 성격에 그게 진짜로 가능한지 아닌지는 논외로 치고….

이현은 그렇게 혼자 헛물을 켜다가, 결국 석희재에게 전화를 걸었다.

- 석희재입니다.

언제나처럼 나직하고 흔들림 없는 목소리가 전화를 받았다.

<5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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