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 낙차 (15/27)

15. 낙차

“설마 그만둘 생각하는 거 아니지?”

김 실장이 단둘이 점심을 먹자고 할 때부터 이 얘기를 꺼낼 줄 알았다. 밥술을 뜨던 이현의 손이 태연한 척도 못 하고 허공에서 멈칫했다.

“생각은 해 본 모양이네.”

“…….”

김 실장이 투덜거리며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겼다.

그제야 이현은 생각에 잠겼다. 생각을… 해 본 적이나 있나.

본 공연의 개막 직전은 끔찍하게 바쁘다. 개막 이후 일주일 역시 그렇다. 마치 매일 첫 공연을 올리듯이 배우들의 무대 동선과 조명의 큐, 오케스트라의 빠르기가 수정되고 예민한 연출은 아침부터 리허설처럼 테크를 돌린다. 백여 명이 넘는 배우와 스태프가 일사불란하게 디테일을 숙지하고 수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현 역시 거기에 매몰된 채로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었다. 그런데 저 말고 주변인들은 자신이 업계를 떠날 가능성까지 떠올릴 정도라니, 스스로가 처한 현실에 여전히 적응하지 못하던 이현은 김 실장의 우려에 도리어 약한 충격을 받았다.

“아뇨. 사실 너무 바빠서….”

솔직하게 답했다. 그러자 개막 전후의 혼란을 아는 김 실장이 깔끔하게 공감을 해 준다.

“혼이 나가 있었다는 소리구만.”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에 일어나는 사건 사고가 하도 많아 24시간은 36시간, 혹은 그 이상처럼 느껴졌고 고작 3일 전의 일도 까마득했다. 확실히 앞으로 계속 이 일을 할 수 있을지 없을지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 것조차 사치였다.

그리고 아마 그건 저에게만 해당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벌써 그 정도로 소문이 짜하면 백스테이지 분위기 장난 아니겠던데…. 일을 어떻게 했어?”

“…일단 다들 바쁘니까요.”

대표도, 연출과 조연출도, 음감과 무감을 비롯해 안무가나 의상, 분장의 헤드들까지도 일단 ‘바쁘니까’ 누군가의 사적인 흠결은 뒷전으로 치워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말을 전달하는 방식에서, 또 눈빛에서 전과 다른 거리감이 분명히 느껴졌다. 평소에도 잘 맞지 않는다고 생각하던 음감이나 사진작가 조 실장에게 대놓고 경멸당하는 것도 자존심이 상했지만, 인간적으로 꽤 가깝다고 여겼던 연출에게 거리감을 느끼는 건 가슴 아팠다.

“고생스럽겠다.”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저를 둘러싼 상황이 너무나 비현실적이라 그런지 아직 실감도 나지 않았다.

“그냥 눈 딱 감고 무시해 버려. 이 바닥에 성소수자가 한둘인가.”

“…….”

“조 실장은 완전히 대놓고 티 내잖아.”

“그건 그분이 특이하신 거죠.”

“그리고 또 얼마 전에… 누구더라. 자기 고정민 배우 알지?”

“아.”

이현은 얼마 전 업계를 떠들썩하게 달구었던 이름을 떠올렸다.

“정확히 무슨 일인데요? 저 잘 몰라 가지고….”

“몰랐어? 하긴 사무실 들어올 틈이 없으니. 그렇~게 여자 팬들한테 사적으로 흘리더니 뒤로는 몰래 다른 신인 남자 배우 덮친 게 걸려서…. 질이 나빴던 게, 그 신인 배우 캐스팅 뒤 봐주겠다고 꼬셔 놓고 그런 거라 욕 많이 먹었지. 한밤중에 경찰 부르고 난리였잖아.”

“팬들하고도 염문이 있었어요? 몰랐네요.”

“선을 넘는 경우가 약간 있었어. 그때부터 싹수가 노랗다 했지만. 아무튼 그래 놓고도 뻔뻔히 얼굴 들고 다니는데 뭐. 이 피디가 못할 게 뭐야.”

“저 관둘까 봐 그러시는 거죠?”

이현의 말을 김 실장은 부정하지 않았다. 이현이 그만두면 당장 그 자리를 메꿀 만한 새 피디를 구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까. 제작 팀 경력이 있는 김 실장이 당장 실무 공백을 채우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그만둘 생각은 아직 해 본 적 없어요. 제 의지로는… 아직. 다른 사람들 의견은 모르겠지만.”

김 실장이 한숨을 쉬었다. 이현의 말에 담긴 함의가 무엇인지 안 탓이다. 이 일을 계속하고 말고는 본인의 의지도 중요하지만 대표의 결정도 무시할 수 없었다.

“…대표님은 별말 없으세요?”

이현이 조심스레 묻자마자 김 실장이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 꼰대가 이성적으로 하는 말이 얼마나 되겠니. 다 술주정이랑 매한가지지 뭐.”

저 없는 사이에 대표가 사무실에 어떤 식으로 떠들어 댔을지 알 것 같아 이현도 고개를 수그렸다. 오랜만에 사무실 출근을 했을 때 저를 향하던 모두의 낯선 침묵이 누구 때문인지 알고 나니 가슴이 켕겼다.

“그래도 본업만 잘하면 사람들은 쉬쉬해. 자기도 그냥 버텨. 일은 잘하잖아.”

“…….”

“그리고 자신감을 가져. 이 피디가 내가 아는 게이 중에 제일 예뻐.”

어이없는 칭찬에 이현은 픽 웃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제 나이 먹어서 ‘덜’ 예쁘다고 구박 아닌 구박을 해 댔으면서.

“그거보다 앞에 하신 말씀이 더 좋아요.”

본업만 잘하면 쉬쉬한다는 말.

그건 현재 일밖에 남지 않은 이현에게 위로처럼 들렸다.

식사를 마치고 나오는 길, 김 실장은 법인 카드가 아닌 개인 카드로 계산했다. 요즘 더더욱 좀팽이처럼 구는 대표가 같은 직원에게 식사를 사 준다는 이유로 법인 카드를 썼다는 걸 알면 생트집을 잡을 거라면서. 이현도 그 말에는 동의하는 바였다. 특히 상대가 저라면 길길이 날뛸 것이 분명했다.

“잘 먹었습니다.”

“뭘 이런 거 가지구. 이 피디. 됐고, 나중에 나한테만 남자 친구 살짝 소개해 줘.”

“아….”

이현은 눈을 굴렸다. 어제 막 헤어진 ‘남자 친구’의 얼굴이 머릿속을 스쳤다.

순간 남자 친구라는 명칭이 무척 생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은 석희재의 이름과 그런 낯간지러운 칭호 사이에 등호를 놓을 생각을 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무척 새삼스러웠다.

그러나 그 침묵의 간극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김 실장은 ‘있는 걸 부정은 안 하네?’ 하더니 씩 웃었다. 점심시간은 십 분 정도가 남았고 그건 직장 상사에게 구구절절하며 사적인 연애사를 읊기에는 무척 촉박한 시간이었다. 하지만 ‘헤어졌다’라고 말하면 언제, 어쩌다, 왜라는 질문이 줄줄 쏟아져 나올 것을 알아서 이현은 그저 입을 다물기를 택했다.

“아 참. 새로 온 컴매는 어때? 이름이 뭐더라.”

“정… 정 뭐였는데.”

이현이 머뭇거리자 김 실장이 웃음을 터뜨렸다. 앞으로 딱 붙어서 일을 가르칠 부하 직원 이름도 몰라서야 되겠느냐면서. 이현은 멋쩍게 귓바퀴를 매만졌다.

안 그래도 이름을 세 번이나 물었는데 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았다. 지나치게 평범한 이름이었다는 것만 떠오를 뿐.

한지우의 추천으로 들어온 스물두 살의 체대생은 컴매보다는 매니저 타입이었다. 즉, 머리보다는 몸을 잘 쓰게 생겼다는 소리다.

“음… 우직한 것 같더라고요.”

“얼른 잘 가르쳐서 극장 붙박이 시켜 놔. 이 피디가 극장 안 나가도 되게.”

“그래야죠.”

이제 정말로 가려던 김 실장이 갑자기 뒤를 홱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눈을 가늘게 뜨고는 이현을 괜히 흘기며 물었다.

“…이 피디 취향은 아니고?”

“아, 실장님.”

이현은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다. 김 실장이 사뭇 즐거워하며 되묻는다.

“왜? 난 그런 데 편견 없어.”

이현은 쓰게 웃었다.

“연하는 취향이 아니라.”

센스 있는 답변이라고 생각했는지 김 실장은 깔깔 웃었다. 그러고는 사무실에 들어오는 것이 꺼려질 이현을 위한 작은 배려를 베풀었다. 바로 극장으로 들어갔다고 말을 해 둘 테니 사무실에 굳이 들르지 않아도 된다면서. 사소한 배려지만 무척 고마웠다.

그리고 그녀는 동숭 방향의 야트막한 언덕길로 사라졌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그래도 제 성 지향성을 가볍게 농담처럼 받아넘겨 주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어 다행이라고. 적어도 저 정도의 반응이라도 보여 준 것은 김 실장이 처음이었다.

아, 아닌가.

이현의 걸음이 순간 멈칫했다.

아니다. 남자에게 박혀서 신음을 흘리는 남자를 처음 보고도 질색하지 않던 사람이 적어도 한 명은 더 있었다. 이현은 석희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한 일이다. 게이도 아닌 남자의 바지를 벗겨 대뜸 성기를 빨다니. 구둣발로 채여도 이상할 것 없는 짓이었다. 그런 짓을 했는데도 생일이라는 말에 도리어 위로해 주기까지 했지. 김 실장이 잠깐 뒷말로 올렸던 고정민 배우나 저나 하는 짓은 진배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생각할수록 최악이었다. 첫 만남부터.

제 밑바닥을 다 보여 줬고 타인에게 가장 들키기 싫은 추한 부분을 드러내며 시작한 관계였다. 그러니까 파국에 다다르는 것도 당연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이현은 아직 실감도 나지 않는 이별을 합리화부터 하고 있었다.

택시를 잡고 극장으로 향하면서 이현은 한숨과 함께 습관이 된 캡 모자를 눌러썼다. 사람과 시선을 피하는 데는 이게 최고다. 사무실에 들어가는 것은 피했지만 극장에 가는 것은 피할 수가 없었다.

***

피디라는 직업은 공연이 올라가면 없는 사람이 된다. 모든 과정에 연계되어 있지만 어디에도 드러나지 않는다. 사실 공연이 만들어지는 도중 피디의 존재감이 작아야 일이 잘되어 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가 있었다. 공은 창작자들에게 돌아가고 이현은 백스테이지의 어둠 속에 남았다.

복도에서 오가는 공연 직전의 분주함을 등지고 이현은 새로 온 컴매와 함께 컴퍼니 룸에 단둘이 앉아 있었다. 홍보 팀이 막 인쇄소에서 도착한 프로그램 북을 배우들에게 나누어 달라고 해서 수량을 체크 중이었다.

“피디님은 말이 별로 없으시네요.”

새로 온 컴매가 먼저 운을 띄웠다. 이현은 ‘그런 편인가 봐요‘ 하고 약한 긍정을 했다. 제 소문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 사람을 대하는 것이 어려웠다.

분장실마다 들어가야 할 수량을 체크하면서 이현은 일부러 석희재 몫의 프로그램 북을 컴매에게 넘겼다. 서로 마주치거나 의식할 만한 일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이 목록대로 분장실에 넣어 드리는데, 가능하면 배우분들 계실 때 넣어 주세요. 새로 온 컴매라고 인사드리고 배우분들한테 눈도장 한 번씩 찍어요.”

“안 계시면 그냥 나옵니까?”

살짝 사투리가 섞인 억양이 묻어 나왔다. 지방 출신인 모양이다. 이현은 무심코 뒤돌았다. 빤히 바라보던 컴매와 눈이 마주쳤다. 한지우의 친한 동생이라고 들었는데 상당히 다른 부류의 사람처럼 보인다. 대놓고 배우 우라를 뿌리고 다니는 한지우와 달리 퍽 투박한 구석이 있었다.

어쩌다 알게 됐을까?

쓸모없는 궁금증을 내다 버린 이현은 먼저 눈을 피하면서 대답했다.

“네, 일단은. 그래도 오늘 안에는 다 드려요. 우선순위 알려 줄게요. 첫째, 가능한 계실 때 인사드리면 좋다. 둘째, 안 계시면 오시는 시간 잘 계산해서 드린다. 셋째. 그래도 공연 끝나기 전에는 다 드린다. 아, 그리고 분장실 문 노크 없이 벌컥 열지 말고요. 민감한 배우들 있으니까.”

“끝날 때까지 못 만나면 어떡합니까?”

알아서, 융통성 있게 좀.

이현은 그렇게 말하는 대신 ‘커튼콜 끝난 이후에도 없으면 빈 분장실에라도 놓고 가라’고 말했다. 그러고는 조용히 컴퍼니 룸에서 나왔다. 누군가와 같이 있는 것이 불편했다.

이현은 극장 뒤편의 출연자 출입구로 나와 로비로 걸어 들어갔다. 수많은 관객이 극장 안에 빠짐없이 들어찬 덕에 로비는 텅 비어 있었다. 발걸음 소리가 높은 천장에 공허하게 울렸다. 오늘의 티켓과 매출을 정리하는 티켓 팀에게 지금 들어가겠다고 말했더니 어셔가 타이밍을 맞추어 조용히 뒷문을 열어 준다.

이현은 객석의 가장 뒷줄에 소리 없이 앉았다. 마침 암전으로 어두워진 무대 위에 불꽃처럼 연기가 피어오르고 한 인물의 머리 위로 핀 조명이 떨어졌다.

석희재였다.

같은 배역을 맡은 다른 배우와 다르게 모든 대사를 마임과 바이올린 연주로 소화하는 석희재의 특별한 롤은 연출의 지휘 아래 탄생한 것이었다. 뮤지컬에 맞는 발성과 딕션이 약점이 된다면 과감히 제하고 장점을 극대화하는 쪽으로. 수많은 공연을 봐 온 이현에게도 석희재의 연기는 특별하게 여겨지는 부분이 있었다. 사랑을 언어 없이 전달하자 도리어 설득력이 생겼다.

이미 대형 CF로 얼굴을 알린 석희재의 첫 공연이 올라가자마자 그는 단숨에 주목을 받았다. 언론이 알아보기 전에 관객이, 관객이 알아보기 전에 마니아 팬층이, 그리고 팬이 생기기 이전에는 이미 연출이 알아보았던 것이다. 그건 누구라도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다만 얼마나 폭발적으로 터지느냐, 가 문제였지.

티켓 매출은 나날이 순조롭게 붙고 있었다.

아마 이 공연은 성공할 것이다. 석희재라는 스타를 만들어 내고.

문득 배우로서 자신을 대해 달라는 석희재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본업… 잘하네.’

바로 어제 일도 무척 멀게 느껴지는 그 얼굴에 이현은 입술을 씹었다. 오늘은 마주치지 않고 넘어갔다. 그러나 앞으로도 쭉 그럴 수는 없을 것이다.

‘본업만 잘하면 되지.’

김 실장의 말이 떠올랐다. 이현 역시 그 말을 믿고 싶었다.

하지만 피디직은 본업을 잘하고 있음을 증명하기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다. 없는 사람이 될수록 일을 잘하는 피디라는 소리니까. 증명 자체가 모순이었다.

극장, 이 무대의 뒤가 좋아서 일을 시작했지만 남은 게 뭐가 있는지….

커튼콜이 울리고 1층의 관객은 전원 기립했다. 1열부터 파도처럼 올라오는 기립 박수의 진열 속에서 이현은 끝끝내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객석의 가장 뒷자리에 앉아서 무표정하게 무대를 바라보는 이현을 주목한 이 역시 아무도 없었다.

이현은 언제나 그랬듯, 개막 직후의 무기력에 빠져 있었다.

***

출근한 지 딱 3일째부터 컴매는 요령을 피우기 시작했다.

“열한 시에 가란다고 진짜 딱 열한 시에 퇴근하냐.”

제 말로 뱉은 모순에 이현은 잠시 어처구니를 잃었다. 퇴근 시간을 지키는 건 상식이다. 자신이 비상식적인 업계에 지나치게 익숙해졌을 뿐.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산더미 같은 세탁물을 보며 이현은 한숨을 쉬었다. 오늘 당장 세탁소에 맡기지 않으면 다음 주 공연에 쓸 수 없다는 걸 미리 일러 놓았는데도….

이현은 또다시 한숨을 쉬며 아무렇게나 쌓인 의상들을 커다란 비닐에 몽땅 쓸어 담았다. 총 6봉지가 나왔다. 묵직한 비닐을 한 손으로 들어 복도로 끌어내면서 다른 손으로는 세탁소에 전화를 걸었다. 연결이 되자마자 사장님의 푸념이 쏟아진다. 열 시 삼십 분에 맞추어 극장에 왔는데 연락도 닿지 않고 출연자 출입구도 닫혀 있어 세탁물을 수거해 갈 수가 없었다고 한다.

사장님이 거짓말을 한 게 아니라면 결론은 딱 하나였다. 컴매가 거짓말을 하고 약속한 시간보다 더 일찍 퇴근했을 가능성.

‘싫은 소리 또 해야겠네.’

이래서 사람을 가르치는 것도 스트레스다. 당장 전화를 할까 하다가 이현은 끙끙대며 제 몸보다 큰 세탁물 봉투 여섯 개를 겨우 복도로 끄집어냈다. 며칠 사이 무섭게 기온이 올라가 그것만으로도 등에 제법 땀이 고였다.

“현아. 도와줄까?”

낮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뒤에서 삐죽 끼어들었다. 한지우였다.

이현은 턱의 땀을 훔치며 뒤돌았다.

“아뇨. 다했습니다.”

“이거 밖으로 다 꺼내야 되는 거 아니야?”

“맞아요. 이따가 세탁소 사장님 오시면 같이 하면 돼요.”

“내가 도와줄게.”

이현이 만류하기도 전에 한지우는 세탁물을 질질 끌면서 복도를 앞질러 나갔다. 뭐가 그렇게 기분 좋은지 뮤지컬의 넘버까지 흥얼거리면서.

‘저거 저렇게 들면 안 되는데….’

복도 바닥에 마찰된 비닐이 쓸려서 터지고 있었다. 저러면 의상이 쉽게 쏟아지게 된다. 하지만 도와주는 이에게 군소리하기가 싫어서 이현은 그냥 조용히 뒤를 따랐다.

“현아. 끝나고 뭐 해?”

“집에 가야죠.”

“잘됐다. 나랑 술이나 마시자.”

한지우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탁, 하고 선명하게 분장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무의식적으로 눈길이 간 곳에는 공교롭게도 석희재가 서 있었다.

‘아직 안 갔구나.’

막 나와서 문을 닫은 그 얼굴은 수분을 머금어 말끔했고, 앞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은 젖어 있었다. 공연 직후 분장실에서 샤워까지 마친 모양이었다.

눈이 마주쳤으니 인사라도 해야 하나 싶었다.

‘투명 인간 취급하지 마세요.’

석희재의 마지막 당부가 귓가에 울렸다. 하지만 자연스러운 타이밍을 놓쳐 조금 망설이는 찰나 한지우가 재차 말을 걸었다.

“응? 가자.”

“아, 저… 약속 있는데.”

“핑계를 댈 거면 좀 성의있게 대든가. 조금 전엔 집에 간다며.”

이현은 순간적으로 크게 당황해서 아무 대답도 못 했다.

“그럼 가는 걸로 안다? 차 빼고 있을게.”

“선배!”

거절의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한지우는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마침 타이밍 좋게 세탁소 사장님에게 도착했다는 전화가 걸려 왔다. 이현은 다시 허둥지둥 한 손으로는 전화를 받들고 한 손으로는 세탁물을 들며 문을 나섰다.

사장님께 의상 꾸러미를 건넨 뒤 다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였다.

“어….”

분장실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큰 세탁물 봉투 두 개를 양손에 든 석희재와 마주쳤다. 그는 사연 있는 고양이처럼 저를 가만히 쳐다보더니 이내 눈을 내리깔았다. 손이 없는 석희재를 위해 어정쩡하게 뒷문을 열어 주자 그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몸을 낮추고 뒷문을 빠져나갔다.

덕분에 세탁물 전부를 수월하게 꺼내 놓고 사장님을 배웅할 수 있었다. 세탁소 차가 빠지자 주차장 저쪽에서 반짝이는 불빛으로 벽이 이지러졌다. 한지우의 레인지 로버가 비상등을 깜빡였다.

“안 가세요?”

석희재가 조용히 물어 왔다. 한지우의 차를 바라보는 석희재의 얼굴에서는 어떤 동요도 찾아볼 수 없었다. 가지 말라고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읽히는 건… 착각인가. 한지우와 얽히는 걸 무척 싫어하던 석희재에게 습관적인 죄책감을 느꼈던 잔여물이 무의식에 남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기다리시는 것 같은데.”

“…….”

“얼른 가세요.”

“넌?”

이현은 말을 내뱉고 그 불명확한 질문에 즉시 후회했다. 정말로 가도 ‘넌’ 상관없겠냐고, 내가 가면 ‘넌’ 어떤 기분이 되겠느냐고 이제 와 묻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일인지 뒤늦게 인지했기 때문이다.

석희재가 이제야 천천히 이현을 내려다본다.

“제가 껴도 되는 건지는.”

“…….”

“몰랐는데요.”

석희재의 이성적인 대답에 이현은 도리어 정신이 들었다. 하마터면 잠깐 분위기만 맞춰 주다가 일어나겠다는 변명을 할 뻔했다.

하지만 이제 둘 사이에 어울리는 건 그것보다는 다른 말일 것이다.

“아, 그래요. 도와줘서 고마워요.”

“…….”

“피곤할 텐데 배우님도 얼른 들어가요.”

한지우의 차 뒤에서는 박 팀장이 끌고 온 석희재의 밴이 출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현은 석희재의 팔을 한 번 툭 치고는 한지우의 차로 뛰어갔다.

***

“새로 온 컴매는 어때?”

“아직 좀… 적응 기간이 필요할 것 같던데요.”

눈가를 쓸며 한숨 쉬는 이현의 말에 한지우가 웃음을 터뜨렸다.

“네가 그렇게 말할 정도면 어지간히 일 못하나 보다.”

“그 정도는 아니에요.”

“하나를 가르치면 딱 하나만 알더라고. 그게 단점이지.”

이현은 피식,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테이블에 팔꿈치를 기대었다.

언제 집에 갈 수 있을까. 식사 대용으로 시킨 안주는 좀처럼 바닥을 보이지 않았다. 들어와 앉자마자 한지우는 배가 고프다면서 이것저것 시켰는데, 그 역시 배고픈 사람치고 먹지는 않았다. 덕분에 사치스러운 상은 그냥저냥 식어 가고만 있었다.

왜인지 이 식사도, 앞의 스몰 토크도 뭔가를 위한 쓸모없는 장식처럼 느껴졌다. 대부분의 술자리가 의미 없는 시간 죽이기나 마찬가지지만 오늘 유독 그런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이현은 침묵을 불편하게 느끼면서 안주를 덧없이 깨작거렸다. 입에 포크를 넣으려 고개를 들자, 한지우가 턱을 든 채로 전자 담배의 연기를 길게 뱉어 내면서 시선을 마주쳐 왔다. 연기가 제 쪽으로 불어와 이현은 불편감을 느꼈다. 그러나 미간을 찌푸리는 대신 괜스레 앞머리를 만지작거리며 자연스럽게 몸을 틀었다. 피하거나 거리감을 유지하고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하면 그가 친절함을 걷어치우고 돌변해 버리는 순간을 몇 번 마주했기 때문이다.

역시 연예인과의 친분은 까다롭다. 좋아하는 배우와 사적으로 친해진다는 기분에 취했을 때는 인지하지 못했던 불편한 순간이 늘어나고 있었다.

가장 어려운 것은 그에게는 제가 사적으로 편한 동생일지 몰라도, 제게는 한지우가 비즈니스 관계를 이어 가야 하는 회사의 주요 배우라는 사실이다.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

음, 이런 것도… 불편하고.

“폐 끼치면 안 되죠. 집에 가서 잘게요.”

이현은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며 피곤한 티를 냈다.

“그럼 어디 들러서 쉬다 갈까?”

쉬다 간다는 단어의 함의를 떠올린 이현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부정하면서 손을 멈추었다. 이 시점에는 필요 없는 불편한 고집이었다. 그렇다고 애써 배려라고 해석하기에도 무리가 있었다.

조금 전부터 자신을 위협하던 불편감의 정체를 깨달은 이현의 얼굴이 설핏 굳었다. 농담으로 넘길 타이밍을 찾기도 전에 한지우가 몸을 기울였다.

“내가 이 피디랑 자고 싶어서 그래.”

“하.”

이현은 어이없는 한숨을 숨기지 않았다.

“소문 같은 거 신경 안 쓰시는 줄 알았는데요.”

“…벌써 눈빛이 공격적이네. 그거 섹시하다.”

“선배 여자 좋아하시잖아요.”

“현이는 예외지.”

“호기심으로 그러시는 거면 좀 그래요. 전 같이 일하는 사람하고는.”

절대….

말을 채 끝맺지 못한 채로 이현은 스스로를 한심하게 여겼다. 일을 하며 지켜 온 철칙 그 첫 번째를 석희재라는 변수로 너무 쉽게 깨 버렸기 때문에.

“아….”

그리고.

이현은 양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간 지겹도록 반복해 온 석희재의 경고와 그의 불안이, 그저 석희재의 주관적인 감정에서만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막 깨달은 탓이다.

석희재 앞에서 한지우를 두둔했던 지난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현, 이 미친놈 나가 죽어라.

“선배 이렇게 가볍게 행동하는 분 아니잖아요. 갑자기 왜….”

“너야말로 그렇게 진지한 애 아니잖아.”

“예?”

“설마 되게 지고지순한 타입인가?”

이현은 혼란을 숨기지 못했다. 제 진짜 모습을 들켜서만은 아니다. 다른 사람의 가면을 뒤집어쓴 것 같은 한지우 때문이었다.

소문이 퍼진 직후에도 그는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굴었고, 어쩌다 딱 한 마디 답답함을 토로했을 때도 그저 어깨를 두드리며 침묵으로 격려해 주었다.

3개월 전.

딱 3개월 전이었다면 설렜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위협처럼 느껴질 뿐이다. 그가 여우가 아닌 하이에나처럼 보였다.

“젠장, 까였네.”

한지우는 다시 전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목소리에는 조금의 안타까운 빛도 없었다. 이대로 순순히 물러나는 것인 줄로 믿기에는 불길하도록.

***

모르는 번호로 연락이 왔다. 잠결에 그 메시지를 열어 보았을 때는 왜인지 희재라고 생각해 버렸다.

「오늘 보면 좋겠는데」오전 2:21

하지만 기대와 가능성은 분리해야 하는 것이다. 이현은 잠결에 그런 결론을 내렸다. 그 ‘기대‘가 무엇을 뜻하는지는 의식하지도 못한 채로.

「왜」오전 2:25

성의 없는 단문에 상대는 즉시 답을 보내 왔다.

「목적이 그거 말고 또 있냐ㅋㅋ」오전 2:25

예전에 관계를 가지던 파트너 중 하나인지도 모른다. 왠지 경박해 보이는 답변에 마음이 동해서 이현은 느리게 옷을 주워 입었다.

새벽 세 시.

반쯤 뜬 눈을 하고 약속 장소로 나가는 와중에 그의 정신은 점점 깨어났다. 근 열흘간 아무와도 자지 않았고 오랜 이상형이 대놓고 던진 원나잇 제안은 단칼에 쳐내 버렸다. 성욕마저 거세될 정도의 스트레스에 휩싸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도 하나뿐이었다. 좀 더럽고 과격하고 질척한 상대가 필요했다.

“아, 씨발… 나한테 대체 왜 이러는데!”

그러나 약속 장소에 도착한 후 상대의 얼굴을 확인한 이현은 욕지거리를 내뱉고 말았다.

거기 서 있던 것은 가장 반갑지 않은 인물이었기 때문에.

“왜요. 내가 마음에 안 들어요?”

새로 온 컴퍼니 매니저였다.

“말이라고 하냐?”

이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몇 걸음 가기도 전에 손목이 잡혔다. 억지로 돌려세우는 힘이 상당했다.

“놔라?”

이현이 손목을 흔들었다. 돌덩이 같은 팔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유흥가 주변이었고 근처에 나다니는 행인도 많은데 컴매는 그래서인지 도리어 거침이 없었다. 그의 계산대로, 남자가 남자에게 끌려가 험한 일을 당한다고는 생각지도 못한 행인들은 몸싸움이 일어나는 줄로만 알고 슬슬 자리를 피했다.

결국 컴매에게 몇 걸음 질질 끌려가던 이현은 특효약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다다랐다. 저를 끌고 가면서 모텔이라도 찾는지 경계심을 풀고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컴매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일부러 중지를 세워 가격한 주먹에 빡! 하는 타격음과 함께 손등이 얼얼하게 아팠다.

“악!”

관자놀이에 정확하게 주먹을 얻어맞은 컴매는 비틀거리며 바닥에 쓰러졌다. 잘 들어갔지만 잘못 때렸다. 실금이라도 갔는지 즉시 부어오르기 시작한 얼얼한 손등을 털면서 이현이 말했다.

“일한 지 얼마 안 된 거 같아서 말해 줄게요. 이런 식으로 행동하는 거 아니에요.”

“씨… 발.”

“업계에서 계속 일할 거면 더 그렇고, 아니라도 안 돼요.”

“남자한테 뒤 대 주는 놈한테 그런 말 듣고 싶지 않은데요.”

“뭐? 이 새끼가… 내가 어이가 없어서.”

컴매가 일어나더니 이현을 다시 덮쳐 왔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성적인 함의는 없었다. 얻어맞은 게 억울하니 한 대는 때려야겠다는 적개심만 느껴졌다.

대신 아까 맞은 게 제법 아팠던지 거리를 가늠하며 야비하게 발차기를 해 댄다. 맷집도 저보다 약하고 몸싸움을 해 본 적도 별로 없어 보여 그다지 위협적이지는 않았지만 짜증 나게 리치가 안 됐다. 체대생 출신인 컴매는 이현보다 신체 조건이 우월하고 다리가 길었다. 대충 허벅지를 몇 대 맞아 주던 이현은 독이 올라 외쳤다.

“그래. 내 꼴 나니까 이러지 말라고! 너 내일 극장에서 나 어떻게 볼래?”

“전 상관없는데요? 누가 피디님 얘기 믿어 줄 것 같아요?”

“너 그러다 잘린다?”

“자르라 그래! 몇 푼이나 한다고.”

그렇게 우스꽝스럽게 티격태격하다가 중간에 경찰차가 왔다. 지나가던 무고한 시민이 신고한 모양이었다. 먼저 친 게 저였기 때문에 경찰에게 걸리면 불리하다는 판단을 내린 이현은 그냥 냅다 뛰어서 도망쳤다.

종로 3가에서 골목길을 통해 종각까지 내려갔다가 다시 창덕궁까지. 미친 듯이 달리던 이현은 집 근처 골목에 들어가서야 멈추었다. 주변에는 경찰차 소리는커녕 사람의 발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헉헉, 숨을 몰아쉬며 무릎을 짚자마자 진한 현타가 찾아왔다.

“인생 추해….”

남자와 자겠다고 밤중에 주섬주섬 나갔다가 폭력 사태나 일으키고 오다니….

터덜터덜 집에 돌아온 이현은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내일 극장에서 마주칠 컴매를 생각하니 끔찍했다. 오늘 일로 말 안 듣고 반항하며 막 나가도 문제고, 그만둬도 문제였다.

[퇴사하겠습니다. 사유 : 이현PD의 폭력]

그랬다가는 대표에게 미친 듯이 깨질 것이다. 근심스러워 잠도 오지 않았다. 이현은 일단 내일 아침에 컴매를 제게 소개해 준 한지우에게 연락을 해 봐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컴매가 원래 그런 쪽 성향이 있는지, 싸가지가 원래 그렇게 없는지, 무슨 일을 하다 온 놈팡이인지 그 역사라도 알고 싶어서.

그러나 전화를 받은 한지우의 대응은 김이 빠질 정도였다. 싸늘한 목소리와 함께 상상도 못 한 대답이 돌아왔다.

- 아. 얘기 들었어.

“들으셨다고요?”

- 유감이다? 나는 까 놓고 연하는 꼬시고.

“예?”

- 연하가 취향이었으면 말을 하지.

이게 뭐야!

따라가기 벅찰 정도로 휙휙 바뀌는 상황에 이현은 속으로 절규했다.

전화는 한지우 쪽에서 먼저 끊었다. 이현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끊겨 버린 전화를 붙잡고 있을 뿐이었다.

그 직후, 이현을 주인공으로 한 불미스러운 소문이 하나 더해졌다. 그가 새로 온 컴매를 덮쳤다가 까였다는 소문이었다.

***

석희재는 한때 어머니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성공하라고.

‘성공해서, 가장 높은 데까지 올라가. 그 사람이 내가 대어를 놓쳤구나, 하고 아까워하도록. 높은 데 올라가면 세상이 달리 보이지. 그럼 달라진 시각으로 객관적으로 그 사람을 볼 수 있어. 잘 해체해 보면 네가 그만한 감정을 투자할 만한 사람도 아니었을걸. 그리고 한 번 다시 만나 봐. 찰 때는 그렇게 차갑더니 성공하고 나면 갑자기 공손해지는 태도가 참 우스워.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얼쩡거리는 그 사람을 보면 없던 정도 다 떨어지지. 그때 신나게 비웃어 주면 돼.’

‘…….’

‘왜? 너도 복수하게 될걸.’

‘…….’

‘넌 나 닮아서 뒤끝이 길어.’

뒤끝이 길다는 말은 즉, 사랑의 후유증이 길다는 말이 아니었을까. 당시에는 독하게만 들려 부정하고 싶었던 어머니의 말이 이제는 조금 와닿는다.

여전히 꿈에는 이현이 나왔다. 그리고 꿈속에서 그는 퍽 다정한 연인이 되어 주었다. 그건 석희재가 수면제를 찾아 가면서 일부러 잠들기 위해 노력하는 이유였다.

꿈속의 그가 사랑스러운 만큼, 새로 눈을 뜨고 맞이한 현실에서 느끼는 절망의 낙차는 나날이 커졌다.

마음이 식는 순간 제 모습이 무척 하찮아 보일 거라던 이현의 말이 마치 예언처럼 동시에 떠올랐다. 한때는 그게 이현이 진짜 사랑받는 기분을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어머니도, 이현도 같은 말을 하는 것을 보면 그건 아마도 사랑의 공식일지 모른다.

“희재 씨. 밥 같이 먹을까?”

공연 전의 저녁 식사 시간이었다. 오랜만에 도시락 대신 밥차가 들어와 따뜻한 식사를 할 수 있었다. 유나연은 제 몫의 식판을 들고는 석희재의 분장실 문 안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석희재는 말없이 접이식 의자를 하나 펴 주었다. 둘은 앞머리에 집게 핀을 꽂은 채로 화장대 거울 앞에 나란히 앉았다. 상대방의 것까지 나무젓가락을 쪼개 주는 건 3년간 몸에 배어 버린 버릇이었다. 유나연은 퍽 감동하면서 ‘아무에게나 이런 친절 베풀지 마라’는 조언을 했다.

적이 주저하던 유나연이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오지랖 부리는 거면 말해 줘요.”

석희재는 대답 대신 거울을 통해 유나연을 바라보았다. 시선을 마주치자마자 그녀가 눈을 내리깔았다. 애초에 목적 없이 그냥 밥이나 먹자고 분장실에 찾아온 것만은 아닐 것이다.

“이 피디님이 신입 컴매하고 밤중에 그… 소문 들었어요?”

첫술을 입에 넣어 가져가려던 석희재는 젓가락으로 입술을 찌르고 찰기 없는 밥풀을 후드득 흘렸다. 답지 않게 얼빠진 행동을 유나연이 빤히 바라보았다. 당황을 애써 숨긴 얼굴로 침착하게 물티슈로 떨어진 밥풀을 줍고 있으려니 유나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몰랐구나. 은근히 못 숨긴다니까.”

“밤중에… 왜요?”

“피디님이 억지로 어떻게 하려고 했대. 컴매는 윗사람이니까 어쩔 줄을 몰랐나 봐. 그래서 그만둬야겠다고 회사에다 말을 했다는데….”

유나연은 말을 채 맺지 않고 다시 거울을 통해 석희재를 바라보았다. 벌써 입맛이 뚝 떨어진 표정을 한 석희재는 어딘가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지만 그 어느 곳도 보고 있지 않았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제가 뭘요.”

“아무 남자랑 염문을 뿌리고 다니잖아.”

“그게 저랑 무슨 상관….”

“둘이 죽고 못 살게 친했으면서.”

“…….”

석희재는 문득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친 유나연은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갑자기 하루아침에 남처럼 구는 게 더 이상해요.”

“…….”

“회사원, 일곱 살 연상, 3년 동안 짝사랑해서 업계에 들어올 결심하게 만든 사람 이현 피디님 아니에요?”

석희재는 대답 없이 입과 턱을 한 번에 손으로 괴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속마음을 숨기는 데는 도가 텄지만, 도리어 거기에 급급해 헤어진 연인과 새로 관계 설정을 하고 그것을 전시하는 데는 실패했다. 석희재는 마음속으로 그것도 이별을 겪어 봤어야지 숙련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닌가 합리화를 해 보았다. 지금은 실연의 상처를 추스르고 간신히 일상생활을 영위하는 데만도 힘에 부쳤다.

“맞구나.”

“아니에요.”

“헤어진 마당에 무슨 예의를 지켜.”

“…….”

“사람들이 희재 씨 여자 친구 혹시 첫공에 오냐고 몇 번이나 물어봤는데… 공연은커녕 리허설까지 다 본 사람이었을 줄이야.”

유나연은 조금 투덜대면서 도시락을 비웠다. 도무지 뭘 먹을 생각이 들지 않던 석희재는 제 앞에 놓인 생수병만 축냈다.

“다른 사람도 알까요?”

“글쎄요. 희재 씨는 워낙에 자기 사생활 얘기 잘 안 하잖아요. 웬만큼 관심 있는 사람 아니면 절대 모를걸요.”

“소문내지 마세요.”

“희재 씨 애인하고 헤어졌다는 얘기도 아직 아무한테도 안 했다, 나는.”

유나연은 그렇게 제 무거운 입에 대한 자신감을 보였다.

아무튼 들켰다는 충격이 가시자마자 다시 저를 사로잡는 것은 이현이 새 남자에 관한 이야기였다. 컴퍼니 매니저는 피디의 직속 부하 직원이나 다름없는 데다 가장 오랜 시간을 붙어 있게 되는 사람이라고 했다. 실제로 대부분의 배우가 무대 위에 있을 때, 이현은 문을 닫아건 컴퍼니 룸 안에 컴매와 단둘이 남겨지게 된다.

싫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석희재는 몇 번 마주쳤던 컴매의 외양을 떠올려보았다.

“새로 온 컴매 그 사람이죠. 덩치 있고, 좀 가무잡잡한 피부에….”

“네. 맞아요.”

이현은 그런 타입을 좋아했다. 무식하고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은, 또 육체적으로 저를 완벽히 제압해 줄 것 같은…. 하지만 컴매가 게이 같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목이 타다 못해 입이 마르는 기분이 들었다. 저와 헤어진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벌써 아무나와 그럴 기분이 들었다는 사실에 눈앞이 깜깜했다. 이별로 밑바닥을 친 줄 알았는데 그보다 더 바닥이 있었다.

“덮쳤다고요.”

“컴매 말로는 그랬대요.”

이현이 무의식적으로 꺼낸 과거 이야기가 떠올랐다. 이제껏 원나잇을 시도하면 발에 차이거나 얻어맞는 경우도 다분했다고. 남자가 그런 짓을 하면 대부분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겠느냐는 자조적인 목소리도 뇌리를 떠돌았다.

이래서 그런 거였나. 상대방의 의사를 알기 전에 욕구가 앞서서….

하지만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혹은 그저 제가 믿고 싶지 않은 것인지도 불분명했다.

왜 그런 식으로 굴면서 스스로를 망치지?

그렇게 석희재가 팔짱을 낀 채로 허공에 시선을 헤매고 있을 때였다. 유나연은 충격에 빠져 있는 석희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

컴퍼니 매니저가 대표에게 어떻게 읍소를 했는지는 몰라도 뒷일은 더욱 기가 막히게 돌아갔다. 컴매는 그만두지 않았다. 아니, 그다음 날에는 더욱 당당하게 백스테이지를 활보하고 돌아다녔다. 설상가상으로 한지우까지 이현을 투명 인간 보듯 했다. 순식간에 너무나 노골적으로 바뀌어 버린 그 태도가 황당해서, 이현은 목숨같이 소중히 여기던 본업에 집중하는 데도 애를 먹었다.

그러던 이현이 더는 못 버티겠다고 생각한 순간이 있었다. 그때 이현은 지독한 모멸감을 느꼈다. 사람들의 경멸하는 시선을 온몸으로 받아 내는 순간 따위는 댈 것도 아니었다.

바로 대표가 피디인 자신을 건너뛰고 컴매에게 직접 지시를 내릴 때.

“오늘 촬영 카메라가 들어갔어요? 이걸 왜 저한테 말을 안 하셨죠?”

가장 뒷줄 좌석 몇 군데가 뒤늦게 홀드 되어 있었다. 문제는 카메라 주변에 팔린 좌석들이 있었다는 점이다. 결국 1막 이후 인터미션에서 카메라 불빛과 소음 때문에 클레임이 들어왔고, 뒤늦게 촬영용 카메라가 들어갔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이현은 부리나케 티켓 팀으로 뛰어갔다.

티켓 팀으로부터 돌아온 말에 이현은 넋을 놓아 버렸다.

“아까 컴퍼니 매니저가 와서 오늘 지상파에서 촬영 있을 거라고 좌석 달라고 하셔서요. 급하게 들어가야 하니까…. 저도 안 되는 건 알지만 앞줄을 드릴 수는 없어서, 일단 드렸는데….”

지상파에서 나오는 촬영 팀은 하나같이 극장 매너가 꽝이다. 클레임이 고작 이만큼 들어온 것도 용했다. 이현은 데스크에 팔꿈치를 기대며 고개를 수그렸다.

“…촬영하려면 극장에 허가를 먼저 받아야 되거든요. 그 주변에 팔린 좌석은 적어도 하루 전에는 콜백 해야 하고… 촬영 카메라가 들어갈 거면 삼각대 때문에 맨 뒷줄 2열을 다 닫아야….”

이현은 한숨 쉬었다. 말해 봤자 늦은 일이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자료를 다 확보한 카메라는 벌써 철수한 뒤였다. 애초에 1막만 찍을 거였으면 드레스 리허설 때 찍어 놓은 기록 영상을 보내 주었어도 되는 일이었다.

이현은 어째서 아는 게 하나도 없는 컴매가 독단적으로 이렇게 일을 칠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마음 같아서는 드잡이질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의 멱살을 섣불리 잡기 전에 이현은 이유를 알았다. ‘대표 지시’. 컴매는 대표의 지시대로 했다면서 이현 대신 현장을 들쑤시고 다녔다. 그뿐만 아니라 피디가 컨트롤해야 할 주요 업무는 어느새 이현을 무시한 채 컴매 위주로 돌아가고 있었고, 이현은 극장에 처박혀 컴매가 저지른 일의 뒷수습을 하거나 몸 쓰는 일을 하는 처지가 되었다.

뒷사정을 알게 된 이현은 완전한 허탈감에 빠져서 대표를 찾아갔다.

처음 몇 마디만 이성적으로 했을 뿐 그다음부터는 쪽팔릴 만큼 감정적으로 되어서 ‘어떻게 저한테 이러실 수 있냐‘라는, 신파 소설 같은 대사를 내뱉었다. 열정 페이의 끝이란 항상 이런 식이다. 감정적 보상을 바라게 된다.

그 직후 이현은 대표에게 뺨을 얻어맞았다.

“안 그래도 바빠 죽겠는데 넌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네 밥그릇만 중요하냐!”

대화는 일방적으로 끊겼다.

쾅!

바깥으로 내쫓기고 문이 닫혔다.

“씨발….”

대표 사무실을 나오며 이현은 얼얼한 뺨을 쥐었다. 아무리 맞는 걸 좋아하기로서니 이런 식을 원한 건 아니었는데.

“환장하겠네.”

무섭도록 정적으로 가득 찬 사무실 안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마저 멈춰 있었다. 모두 이렇게 숨죽인 채로 대표 사무실 안에서 울려 퍼지는 제 비참한 곡소리를 들었을 거라고 생각하니 쪽팔려 당장 뒤지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이현은 즉시 김 실장에게 걸어갔다.

“실장님, 저 그만두겠습니다.”

이현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무실 안 여기저기서 키보드 두드리는 소리가 타다닥, 타다닥 요란하게 이어졌다. 보지 않아도 이 초유의 사태에 대해 메신저로 떠들고 있는 게 분명했다. 제 등 뒤로 바늘처럼 꽂혀 오는 작은 소음조차 참을 수 없게 된 이현은 울컥 움직이는 목울대를 참아 넘기며 말했다.

“다시 대표님 못 볼 것 같아요. 사무실에 있는 제 짐은 택배로 보내 주세요.”

“안 돼. 이 피디… 우리 나가서 얘기해.”

“피디요? 제가 피디예요? 이제 이 컴매라고 부르세요.”

“알았어. 나 자기 무슨 기분인지 알아. 조금만 진정해 봐.”

씩씩대며 김 실장에게 등을 떠밀려 사무실을 나왔다.

김 실장은 차분히 이현을 설득했지만 결국 요점은 참고 버티라는 것이었다. 대표도 하루 이틀 저러다 말 것이다, 일과 성적 취향은 상관이 없다는 걸 앞으로 증명해 보이면 된다 등등. 조목조목 맞는 말이었지만 이현은 그 말을 듣고 있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팽글팽글 도는 것 같았다.

“실장님, 저는 이미 좆 됐어요.”

“이 피디. 여기 나가면 어디로 가려고.”

“모르겠어요. 여기저기 컴퍼니 매니저나 하면서 떠돌아다니면 굶지는 않겠죠.”

“이 피디….”

그리고 이현은 김 실장을 등지고는 빠른 걸음으로 자리를 떴다. 충분히 쫓아올 수 있는 거리였지만 그녀는 이현을 붙잡지 않았다.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붙잡아도 더 나은 대우를 보장해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이현도 그런 식으로 많은 부하 직원들과 계약직 스태프를 떠나보냈다. 다들 한 번 정도 붙잡아 줄 걸 그랬나. 안 잡으니까 이건 이거대로 기분이 되게 그렇네.

대낮의 대학로를 활보하는 행인들이 이현의 곁을 스쳐 갔다. 최근 극장으로만 출근하느라 셔츠에 슬랙스 대신 티셔츠에 낡은 셔츠를 걸친 이현은 자신이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모르면서 터덜터덜 언덕길을 걸어 내려갔다.

그만둘 거니까… 극장에는 안 가도 되고.

오늘 서포트 들어올 거 있는데, 컴매 새끼 분명히 일 거지같이 하겠지.

그래. 그런 거 이제 내가 다 상관할 바는 아닌데….

입술을 꾹 깨문 이현은 택시를 불러세웠다. 자신을 좆 되게 만든 상대에게 마지막으로 할 말이 있었다.

***

“야. 내가 한 번 대 주면 되냐?”

독이 오른 이현이 말했다.

이현의 부름을 받고 주차장으로 어슬렁 걸어 나온 한지우는 대뜸 날아온 막말에 어이없다는 듯이 혀를 찼다. 그 모습에 꽉 쥔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이현은 나직하게 말했다.

“담배 집어 넣어. 여기 흡연 금지야.”

“참나.”

한지우는 보란 듯이 이현의 말을 무시하고는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니까 눈치 빠르게 굴면 좀 좋아.”

“소문낸 거 너지.”

“무슨 소문?”

“대표하고 이간질한 것도 너지.”

“공사 구분이 하도 철저하시다길래.”

“…….”

“공적으로 만날 일을 없애면 될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한지우가 씩 웃었다.

“씨발 새끼!”

이현은 참지 못하고 다급한 주먹을 날렸다. 한지우는 상반신을 기울여 가까스로 피했지만 담배를 놓쳤다. 떨어진 꽁초를 본 한지우는 제법 열 받아 보였다. 고작 그런 걸로 말이다. 자신은 일자리를 잃었는데.

“야… 배우 얼굴을 때리면 안 되지. 현이 너 나랑 몸 말고 소송으로 얽히고 싶어?”

“이 개… 개… 개….”

“왜? 개새끼라고 불러 봐. 나 욕먹는 거 좋아해.”

한지우가 하하! 웃었다. 저 새끼는 싸이코패스다. 또한 변태 새끼였다. 이성의 끈이 끊겨 버린 이현이 다시 얼굴을 노리며 달려들자 한지우는 도리어 즐거워하며 한 대를 얻어맞고는 이현의 몸을 결박하려 들었다. 이현은 칼을 들고 오지 않은 것을 분통 터져 하면서 이 몸싸움조차도 전희로 여기는 듯한 한지우에게 치를 떨었다. 붙잡고 자꾸 몸을 더듬어 댄다.

나는 왜 항상 개새끼들에게 속지? 몇 번을 그렇게 당하고도, 몇 번을….

그때였다. 주차장 멀리서 차체가 낮은 스포츠카 하나가 굴러 들어왔다. 처음 보는 차였다.

“어? 왜 안 멈춰. 어어?”

차는 예상한 곳에서 멈추거나 커브를 돌지 않고 아슬아슬한 근거리까지 다가와서 두 사람이 몸을 피했을 때에야 멈추었다.

차창을 내린 안에서 지금 이 순간 별로 만나고 싶지 않은 얼굴이 드러났다.

“희재… 야.”

차창이 소리 없이 내려갔다. 운전대를 잡은 채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흰 얼굴은 거친 운전 솜씨와 달리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차 샀네… 언제 샀나.

이현은 그 틈에도 정신없이 시선을 헤매며 차종을 알아맞혔다. 마세라티였다. 저 차를 살 재력이 있다면 절대 안 고를 차였지만 한 번쯤 몰아 보고는 싶은 그런 차였다.

“두 분 싸우시는 것 같아서.”

석희재가 먼저 입을 열었다. 한지우는 이현의 뒤에서 일부러 엉겨 붙으며 몸을 끌어안고 말했다.

“싸우기는. 우리 사이좋아. 애정 표현을 좀 격하게 해서 그렇지.”

“놔….”

이현은 끓는 듯한 목소리로 조용히 뇌까렸다. 그러나 한지우는 한술을 더 떴다.

“왜. 이 피디가 먼저 나한테 대 준다고 찾아온 거잖아.”

그리고 한지우가 하하하! 웃었다. 석희재는 지나치게 큰 충격을 받았는지 그 얼굴에 미동도 없었다. 순간 이현은 이성적인 판단을 내릴 틈도 없이 한지우의 정강이를 향해 뒷발을 차며 발길질했다. 그러나 보지 않고 찬 발은 스치듯 닿을 뿐 명중하지 못했고 도리어 휘청거리다 몸이 붙잡혔다.

“아!”

한지우가 이현을 돌려세우며 끌어안아서, 이현은 빠져나오려 몸을 한 번 강하게 흔들어 봤다. 그러나 붙잡힌 손목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엄청난 힘의 차이에 식은땀이 흘렀다. 체급 차이도 있겠지만 한지우에게는 이상한 요령이 있었다. 남자의 몸을 제압하는 요령이.

“놔요….”

이현은 입술을 씹었다. 등 뒤의 석희재가 유독 조용한 것이 이상했다. 금세 차 문을 열고 나와 ‘혀엉. 한지우랑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요.’ 하면서 눈물을 뚝뚝 흘리고 울 것만 같았다.

애초에 석희재가 차를 운전하면서 아슬아슬하게 가까이 붙은 이유부터가… 질투가 아닌가. 두 사람이 얽혀 있는 모습을 보고 순간적으로 돌진한 게 분명했다. 이별을 한다고 마음이 그 순간 완전히 접히는 것은 아니다. 석희재 역시 끝냈지만, 내면에서는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게 분명했다.

“왜 그래. 어디 아파?”

한지우가 능청맞게 물었다. 이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한지우를 노려보았다. 제 손목을 꽉 쥐어서 틀어 버린 한지우의 악력이 엄청났다.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은 강도 때문에 무척 고통스러웠다. 살갗이 비틀리는 감각을 보건대 이 정도면 실시간으로 멍이 들고 있을 것이다.

제힘으로 빠져나올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현은 저도 모르게 뒤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를 계산하고 예상하며 한 행동은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행위에 가까웠다.

하지만 돌아서 마주친 석희재의 얼굴을 본 이현은 멈칫 굳어 버렸다.

그 가라앉은 눈 안에서 질투로 끓는 빛 따위는 찾을 수 없었다.

“피디님. 남자들하고… 그러신다는 소문 진짜인가 봐요.”

“…….”

“…일터에서도 그러시는 줄은 몰랐는데요.”

올려다보는 눈이 무척 냉정했다. 목소리 역시 감정이라고는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얼굴은 처음 보는 것이라 심장이 철렁했다.

무엇보다도 그 말의 내용이 저를 뜨끔하게 만들었다.

‘난 같이 일하는 사람하고는 절대 안 자.’

바로 그 말로, 이현은 석희재를 밀쳐 냈다. 또, 석희재가 불안에 떨 때마다 자신은 공사 구분은 확실히 한다고 몇 번이나 강조하지 않았나.

찬물이 끼얹어진 듯한 분위기를 깨며 한지우가 쿡쿡 웃었다.

“후배님은 몰랐구나. 모르니 충격이 크겠죠.”

“…….”

“이 피디가 이상하게 나한테만 까다로워. 다른 남자들한테는 안 그랬으면서. 왜, 우리 정 매니저하고도. 응?”

교활한 한지우는 요즘 도는 소문을 슬쩍 언급했다. 이현은 말문을 잃어버렸다. 남자에게 엉망으로 당할 생각으로 원나잇 하러 나갔던 건 사실이지만 컴매인 줄 알았다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변명이 구차했다. 무엇보다도 석희재가 제 변명을 들을 생각이 있는지도 의문이고.

석희재는 입술을 사리물더니 앞쪽 차창에 시선을 고정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소리 없이 꽉 다문 턱과, 울컥하는 감정을 눌러 삼키는 것이 보였다. 예전에는 그것이 미련과 질투를 삭이는 것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그저 분노처럼만 보인다.

혹은 잘못된 상대에게 공을 들인 허탈함.

차창이 올라갔다. 차 바퀴가 다시 스르르 굴러가기 시작했다.

이현은 멍하니 차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석희재는 비어 있는 곳에 주차했다. 운전이 미숙한지 몇 번에 걸쳐서 네모 칸 안에 반듯하게 차를 넣어 놓았다.

시동이 꺼지고도 석희재는 한참을 내리지 않았다.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서야 차 문을 닫고 이쪽으로 다가온 석희재는, 두 사람에게 가벼운 묵례만 하고는 출입구로 들어가 버렸다. 시선도 마주치지 않았다. 그저 얽히기 싫다는 감정만 전해져 왔다.

***

미련이 앙금으로 화하는 순간은 언제일까.

자신이 사랑했던 사람이 그만한 가치가 없다는 걸 알아챌 때?

석희재는 바보가 아니다. 그래서 이현은 언젠가 그가 자신의 초라한 정체를 알아챌 것이라고 예측했었다. 사귈 때에는 물론, 심심풀이 섹스 파트너였을 때에도. 어느 날 옷을 벗은 제 모습이 석희재의 눈에 차지 않거나, 그가 남자와 자는 것에 흥미가 식어 버리면 금세 만난 적도 없던 것처럼 남이 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타인이 된 두 사람은 겉모습만 봐도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딱히 접점도 없기 때문에 금세 다른 세상 사람이 되어 버린다.

그게 씁쓸해서 그토록 기대를 갖지 않으려 훈련을 했던 것인데….

변치 않게 쏟아지는 애정에 샤워를 하듯 저 역시 어느새 물씬 젖어 버린 모양이다. 언제나 준비해 왔던 끝이 정작 현실로 다가오니 조금 얼떨떨했다. 애초에 석희재를 밀어내고 밀어냈던 이유는 이 끝에서 석희재가 보게 될 진짜 현실이 두려워서였다.

현재 이현이 가진 재산은 보증금 4000만 원의 월세방과 1000만 원짜리 적금 두 개. 게이인 제 인생에 결혼이나 가정을 꾸린다는 선택지는 없었지만 만약 하고 싶대도 불가능한 스펙이었다. 그나마 이 바닥에서 구른 경력으로 그럴듯한 이름의 명함 하나 가지고 있었는데 그마저도 한순간에 휴지 조각이 됐다.

스물아홉, 그토록 열심히 일궈 온 삶인데 남은 것이 미치도록 초라했다.

일에 모든 것을 다 빨리고 껍데기만 남은 느낌이었다.

이현은 소파도 아닌 바닥에 등을 대고 드러누웠다. 문득 석희재의 감정 없는 눈이 떠올랐다. 그 얼굴이 담아 내는 표정이 다채롭다고 생각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이현은 그 얼굴을 떨쳐 내기 위해 눈을 감았다. 샤워하고 싶은데 일어날 기력도 없었다. 하루가 지나치게 긴 느낌이 들었다.

그래도 회사 안 가도 되네.

이현은 눈을 비비며 생각했다. 그럼 이제 뭐 하지.

눈을 가늘게 뜨니 바로 앞에 꽉 들어차 벌어진 입구로 흘러넘치고 있는 쓰레기가 보였다. 바닥에 한두 가지 떨어진 잡동사니와 옷가지, 가방 같은 것도 거슬렸다. 집을 잘 돌보지 못하니 상태가 쾌적하지 못했다. 치우고 싶었지만 그런 데 아까운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 않아 이현은 눈을 돌리기를 택했다.

이현은 리모컨을 가져와 TV를 틀었다.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화면을 보았다. 흘러나오는 광고가 하나같이 처음 보는 것들이라 저도 모르게 정신없이 집중했다. 시즌마다 반복되는 광고에 익숙해질 시간조차 없어서, 이현은 영화관에 가면 광고를 보는 시간도 좋아하는 편이었다. 사람들 아이디어가 기가 막히다고 항상 감탄하며 광고를 보았다.

그러던 이현의 망막에 우연히 석희재가 비쳤다.

‘저런 건 또 언제 찍었대.’

감성적인 톤의 풍경과 함께 석희재가 화면에 담겼다. 바람에 흩날리는 머리카락, 감았다 느리게 눈을 뜨는 얼굴. 전신, 바스트, 클로즈업, 익스트림 클로즈업. 고작 15초 안에 광고는 피사체의 다양한 모습을 욱여넣었다. 광고 끝에 카메라가 나온 것으로 겨우 카메라 광고였다는 걸 알아차렸다. 석희재의 얼굴만 보느라고 그 손에 카메라가 들려 있었다는 것도 몰랐다.

‘카메라가 아니라 석희재 광고네.’

이현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생각하고 보니 그것도 말이 되는 것 같다. 석희재와의 계약을 성사시킨 모든 광고주가 어느 날 갑자기 툭 튀어나온 이 아름다운 남자를 제발 알아봐 달라고 전 국민에게 광고하지 못해 안달 난 것 같았다.

그러지 않아도 충분히 이목을 모을 만한 외모인데 화면은 석희재라는 인물의 매력적인 생김새를 표현하려고 있는 힘껏 노력했다. 특히 눈을 클로즈업할 때가 가장 인상 깊었다. 화면은 그가 얼마나 맑고 검은 눈동자를 가졌는지를 담았다. 저 정도면 전 국민이 석희재의 속눈썹이 몇 올인지 세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저도 못 세어 봤는데 말이다. 시선을 옮길 때 고개가 조금 기울어지는 습관적인 각도와 미소를 짓는 입술의 모양도 이현이 예상한 그대로 담겼다.

지나치게 익숙해진 사람의 얼굴이 화면 안에 생소한 방식으로 가득했다.

호기심이 들어 이현은 석희재의 광고를 검색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프레임 단위로 그 얼굴을 캡처한 이미지가 넘쳐났다. 가치 있는 것을 알아보기는 쉽다. 저 말고도 석희재의 얼굴에 매료된 이들이 차고 넘치게 많았다.

이현은 한숨을 쉬며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석희재는 돈을 쏟아붓는 악기를 전공하고도 자신은 탑이 될만한 실력은 아니라고 겸손하게 말했다. 이현은 재능과 밥벌이를 연계하려 아등바등하지 않고 그것을 언제고 그냥 취미로 내려놓을 수 있을 만한 그의 재력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석희재가 부모님 없이 혼자 살던 집의 위치와 규모도 한 번 떠올려 본다. 평생 한 번도 양문형 냉장고를 가져 본 적 없던 이현은, 석희재가 다 채우지도 못할 거면서 그걸 산 게 그저 신기하다고만 생각했었다.

이현은 평생 자신이 가질 수 있는 좁은 공간 안에 욕구를 맞추고 살았다. 누군가는 집을 고를 때 돈으로 고민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금 늦게 알았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현은 석희재의 스물아홉, 그의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7년 후지만 떠올리기가 어렵지 않았다. 지금은 조금 과하게 느껴지는 고가의 시계 브랜드도 그 나이면 손목에 어울리는 무게가 되어 있을 것이다. 벌써부터 화제성이 굉장하니 배우로서 앞날이 창창했다. 특히 스물아홉이면 남자 배우로서 최대의 전성기였다.

그 나이면 연애도 적당히 해 봤겠지. 석희재는 두 번째 연애에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물론, 첫 번째 연애가 실패한 것도 석희재의 탓은 아니다. 상대만 제대로 만났다면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았을 텐데….

결국 예상했던 대로 자신이 그의 유일한 인생의 오점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

석희재의 스물아홉에 두 사람의 격차는 더욱더 크게 벌어질 것이다. 그때가 되고 철이 들어 제 위치를 자각한 석희재는 제 인생과 통 어울리지 않는 첫사랑을 지우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격에 맞는 상대를 만나 예쁘게 사랑을 완성하면 한때 별것도 아닌 초라한 남자에게 집착하고 매달렸다는 것은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을지도. 그리고 이현은 ‘내가 한때 저런 남자랑 자 봤다니’ 하면서 가끔 스스로에게 일어났던 일이 믿기지 않는다고 생각할 것이고.

그러다 제일 크고 예쁘게 생긴 딜도를 사서 석희재를 떠올리며 자위나 하겠지.

이현은 팔에 고개를 묻고 쿡쿡 웃었다. 갑자기 뒤가 근질거렸다.

하지만 이럴 때 자위를 하거나 남자와 자면 사정 후에 급격히 우울해진다. 특히 공연 개막 직후, 무기력에 빠져 있을 때가 가장 위험하다. 과격한 행위가 더 심해지고 결국 뒤가 헐어 버릴 때까지 상대에게 조르고 매달린다.

생각해 보면 석희재는 3년이 넘게 이런 시기마저 참을성을 가지고 함께 보내 주었다.

그런 모습까지 다 보였던 상대가 하필이면 석희재인가. 이현은 다시 시무룩해졌다.

석희재의 스물아홉과 자신의 서른여섯. 그 격차가 씁쓸하게 여겨지면서도, 이현은 석희재가 7년 후, 자신의 서른여섯을 모를 거라는 사실이 무척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나의 서른여섯이라….

석희재의 스물아홉과 달리 잘 그려지지가 않았다. 이현은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

물론 백수가 된 이현이 삽질만 하고 있던 것은 아니다. 그는 나름의 복수극을 계획하고 있었다.

전화를 걸자 매너 있는 중저음의 목소리가 울렸다.

- 여보세요.

상대가 전화를 받자마자 이현은 으드득, 이를 갈며 말했다.

“나랑 자자. 씨발 새끼야.”

한지우가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이 정말로 즐겁게 웃었다. 어깨까지 떨며 웃는 그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진짜 정성껏 빨아 줄게.”

- 하하하하!

펠라를 해 주는 척하면서 이로 음낭을 콱 씹어 버려야겠다. 웃음소리를 듣고 방금 떠오른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그게 복수극의 하이라이트는 아니다.

일단은 하자는 대로 해 줄 요량이었다. 한지우가 어떤 변태 짓을 요구하든 간에. 그렇게 그가 원하는 방식대로 섹스하고, 그가 제 위에서 정신없이 헉헉대며 허리를 흔들고 싸는 순간을 녹화할 생각이었다. 그리고 언론사에 뿌려 버리겠다. 제 커리어를 망쳤으면 그 자식도 그래야만 하니까.

공교롭게도 정정당당하게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권력과 서열 차가 엄청난 데다가 이제 자신은 피디도 뭣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공적인 영역 안에서 그를 흠집 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계란으로 바위 치기다. 심지어 업계 밖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얼마 전에 인터넷 익명게시판에 한지우를 소심하게 비방하는 글을 하나 썼는데 욕만 잔뜩 먹었고 다음 날 관리자에 의해 삭제당했다.

[한지우 말인데요...

연기력 좀 딸리지 않나요?

뮤지컬에서만 탑이지.

영화는 다 말아먹엇죠.

안 되는건 그만할때도 됐는데 말입니다.. 흠

여턴 감독들이 왜 자꾸 써주는지....

사생활도 별로라더군요.....

사실 제가 개인적으로 좀 아는데

궁금하면 댓글 달아주세요]

└ 어그로

└ 죠죠충 꺼져

└ 여기도 망했네 어그로 날뛰는 거 보니

세상은 한지우의 편이었다. 태어나서 한 번도 팬이란 걸 가져 본 적 없던 이현은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게다가 인터넷에 게시해 본 생애 첫 글이 삭제되어 버려 이현은 용기를 잃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며 이현이 침울해졌을 때였다. 한지우가 수화기 건너에서 무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 현아. 다 좋은데… 좀 식는다.

“…뭐?”

- 아니, 나는 좀 어수룩하면서도 순진하고…. 그러면서 뒤로는 남자 맛 좀 보고 다닌 현이가 좋았던 거거든? 근데 자꾸 들이대니까 그런 매력이 좀 떨어지잖아.

울분이 터져 또 욕이 나오려고 했다. 그러나 한지우는 그런 반응을 기대했다는 듯이 또다시 즐거워했다. 이현은 이러다가 복수를 하기도 전에 자신이 먼저 고혈압으로 죽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무튼 한지우 쪽에서 스케줄을 확인해 보고 연락을 주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된 걸까?

며칠간 계획했던 일을 저지르고 나니 고요가 찾아왔다.

“…….”

그러나 잠시 후 이현은 갑자기 이성적으로 되어서 과연 자신이 하려는 일이 실현 가능한 일인지 따져 보기 시작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극장에 간 이후 사람과 만나지 않았다. 전 회사에서 걸려 온 연락은 전부 다 차단했다. 그렇게 불도 켜지 않은 방구석에서 스스로를 고립시킨 채 음침하게 복수극의 시나리오를 짰다.

그러다 정신을 차려 보니 자신은 예전이라면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일을 벌이려 하고 있었다. 자각도 못 한 사이에 벌컥 범죄의 영역으로 넘어가 버렸다. 이현은 순간이나마 자신이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을 믿지 못했다.

이현은 괜히 손톱을 물어뜯었다. 그러다가 한참이나 ‘성행위 몰카’에 대한 형량과 판례를 검색해 보았다. 한편으로는 범죄를 저지르기 전에 이미 심약해져서 이러고 있는 것 자체가 일의 실패를 예견하는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일은 진짜 미쳐 있어야만 가능한 것인지도.

그리고 이 며칠간은 심적으로 완전히 핀치에 몰렸던 것 같다. 이현은 눈을 감싸며 생각했다.

‘그만둘까.’

그때였다.

「내일모레 저녁 10시.」오후 11:44

한지우에게 메시지가 왔다. 이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이현은 일어나 욕실로 갔다. 거울을 보니 그 안에 제 모습이 비쳤다. 세수를 안 해 얼굴이 조금 꾀죄죄하고 집에 있는 동안 배달 음식이나 라면 따위나 먹었더니 얼굴이 부어 있었다. 머리카락은 아무렇게나 말려 결이 이 방향 저 방향으로 뻗쳤다.

할 수 있을까? 그냥 한지우 좋은 일만 하고 끝나는 것은 아닐까.

자는 건 어렵지 않다. 마음 없는 섹스는 이미 지겹도록 했다. 아무 좆이나 드나들었던 구멍에 좆이 하나 더 추가될 뿐이다.

하지만 왜인지 예전으로 돌아간다는 생각에 마음에 구멍이 난 듯 허했다. 모두가 미래로 가고 있는데 저만 아무나와 자던 과거로 회귀해서인지도 모른다.

***

이현은 모자를 눌러쓰고 약속한 장소로 나갔다.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느라 씻기 귀찮으면 그냥 자고 옷도 갈아입지 않는 한심한 생활을 했는데 오늘 약속을 위해 오랜만에 몸을 씻었다. 뒤도 깨끗하게 씻어 냈다. 그러면서 이 모든 준비 과정 자체가 싫은 놈과의 섹스 때문이라는 생각에 또다시 진한 현자 타임을 겪어야만 했다.

옷을 갖춰 입고 이현은 집을 나섰다. 한지우가 말한 장소는 동대문에 있는 한 호텔의 와인바였다. 대학로에서 일하며 근처를 몇 번 지나치기는 했지만, 안에 들어가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운동화에 캡 모자를 눌러쓴 차림의 이현은 로비에 들어서며 조금 주눅이 들었다. 다행히도 정장을 갖춰 입은 직원은 의상에 대해 별말을 하지 않았다.

“예약자분 성함이….”

“한지우로 찾아봐 주세요.”

“예약자분 성함이 없는데요. 성함이 맞으십니까?”

“아, 없나요? 그러면.”

이름이 알려진 연예인인 그가 제 이름으로 예약을 할 가능성은 적을 거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이현은 다시 말을 골랐다.

“이현, 아니면….”

한지우의 매니저 이름이 뭐였더라? 고민할 때였다.

데스크 저 뒤, 마치 도서관의 서고처럼 생긴 와인 진열장 틈 사이에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찾았어요. 일행이 저 안에 있네요.”

“네. 좋은 시간 되십시오.”

이현은 가볍게 묵례를 하며 안으로 들어갔다. 천장까지 높게 와인 저장고가 닿아 있었다. 병의 틈 사이사이로 한지우의 얼굴을 보았었다. 와인을 고르는 중인지도 모르겠다. 앉아 있을 만한 테이블을 찾아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였다.

이현은 발을 뚝 멈추었다.

한지우의 맞은편에서 여기서 보리라고 예상하지 못했던 남자의 얼굴을 발견한 탓이다.

“…래서, 싫다는 거야?”

한지우의 말을 듣고 있는 상대는 석희재였다.

세 명이 만나는 자리라고는 언질도 없었기 때문에 이현은 적잖이 당황했다. 게다가 한지우와 만나려는 목적이 워낙 불량했던지라, 이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숨겼다.

두 사람의 분위기가 퍽 심각했다. 특히 전면으로 보이는 석희재의 얼굴이 무척 단단히 굳어 있었다. 정말로 화가 나면 저런 표정을 짓는구나 싶었다. 이현은 내심 놀라면서 모자를 더 푹 눌러쓰고 석희재의 시야에서 벗어나도록 몸을 숨겼다.

“그냥 가시라고요.”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가 석희재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일전에 제게 화를 내던 것은 화도 아니었다. 이현은 멍하니 입을 벌렸다.

“저 남자한테 관심 없습니다.”

…??

듣고 있던 이현은 관자놀이가 띵, 울리는 기분을 느꼈다. 맥락을 잡을 수 없는 대화였다. 석희재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혐오감이 느껴지기까지 했다.

“이 피디랑 만나던 거 아니었어?”

그러자 석희재가 어이없다는 듯이 픽, 하고 비웃는 소리를 낸다.

“그런 적 없어요.”

“이상하네. 내 촉이 틀린 적이 없는데.”

“…각별히 친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런 사이 아닙니다.”

“흠….”

“착각하신 거라면 불쾌합니다.”

“그랬군요.”

한지우가 갑자기 정상인 같은 목소리를 냈다. 그것마저 토할 것처럼 싫어서 이현은 미간을 구겼다.

“내가 영 잘못 짚었네. 나는 또 후배님도 그쪽인 줄 알고 약간의 기대감을 가졌는데…. 안심해요.”

“…….”

“예전에도 말했듯이 애인 있는 사람이나 생각 없는 상대한테까지 질척대고 그러지 않으니까.”

“…….”

“아쉽네. 오랜만에 정말 마음에 들었는데.”

그 뒤로 대화는 끊겼다. 헤어지는 인사조차 없었다.

대신 저 멀리 뚜벅뚜벅 걸어 나가는 석희재의 뒷모습이 보였다. 그는 벌써 문으로 빠져나가고 있었다. 살짝 고개를 숙인 채로 빠르게 걸어 나가는 얼굴에는 질렸다는 기색이 가득했다.

이현은 멍해져서 그 표정을 보다가 겨우 남은 인물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이 장소에 있는 석희재의 존재보다도 충격적인 것은 한지우의 의도였다.

‘설마 내가 아니라 처음부터 희재를 노린 거였나?’

황당함과 충격이 뒤섞여 입술이 덜덜 떨렸다.

이현도 목격한 적이 있었다. 포스터 촬영장에서 이미 게이로 소문이 파다하고 또 그것을 드러내는 것을 개의치 않던 사진작가 조 실장이 대놓고 석희재에게 플러팅 하던 것을. 그뿐만 아니라 그 현장에 있던 모든 사람은 석희재를 향해 황홀한 눈빛을 숨기지 못했었다. 저렇게까지 섹스 어필을 할 수 있다는 건 대단하구나, 이현은 조금 감탄하기까지 했었고.

“후배님 엄청 도도하시네.”

진열장 안을 걸어 나오며 한지우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이현은 그를 잔뜩 노려보았다. 그러나 한지우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태연하게 손을 흔들었다. 이미 이현이 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는 눈치였다.

“쟤를… 왜 불렀어?”

“어?”

걸음을 멈춘 한지우가 씩 웃었다.

“아니, 셋이 하면 좋잖아.”

“…뭐?”

“까였지만.”

이현은 입술을 피가 나도록 씹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하늘이 빙글 도는 것 같았다. 미친놈이 뭐라는 거야.

“진짜 셋이 하는 게 목적이야? 아니면 희재가 목적이야?”

“이 피디. 객관적으로 생각을 해 봐. 둘 중에 누가 더 공들일 가치가 있는지….”

“…….”

“다들 석희재 같은 놈 깔아 보고 싶어 하겠지.”

“이, 미, 미친….”

“누가 이 피디한테 공들여.”

“개자식!”

“아, 이제는 피디가 아니구나.”

죽도록 싫은 놈에게 휘둘려도 정도가 있었다. 비참하고 짜증이 나서 기력이 다 빨렸다. 이현은 테이블을 짚으며 의자 위에 쓰러지듯 주저앉았다.

한 변태 새끼의 가벼운 장난질에 제 인생이 피폐해졌다고 생각하니 머리가 어지러웠다. 게다가 처음부터 간을 보던 쪽이 석희재였다면, 그렇게 석희재를 타깃으로 하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면 한지우가 자꾸 저를 자극한 것도 말이 됐다. 사랑에 빠진 석희재는 지나치게 읽기 쉬웠으니까. 저 혼자 방어하는 건 의미가 없었던 셈이다. 바리케이드는 쳐도 모두가 눈독을 들이던 존재인 석희재가 쳐야 했다.

게다가 그 석희재를 업계로 끌어들인 계기는 저였다. 그러니까 모든 일이 저로 인해 촉발된 것이다.

이현은 자신이 언제부터 실수한 것인지 하나씩 짚어 보았다.

지나치게 말이 없고 배려심이 강하던 섹스 파트너의 숨어 있던 진심을 미리 알아보지 못한 점.

그가 사랑에 빠지도록 방치하고 결국 저를 따라 업계에 투신하도록 만든 점.

지나치게 매력적인 상대에게 꼬이는 벌들이 저에게도 독침을 쏴 댈 것을 예상하지 못한 점….

“이렇게 된 거 꿩 대신 닭이라고, 우리 올라갈까?”

이현은 충혈된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눈이 마주친 한지우가 의자를 느리게 끌어당겨 앉으며 일부러 하체를 테이블 아래에 붙였다. 불거진 아래를 숨기기 위함이다. 남자의 불룩한 앞섶만 봐도 뒤가 쑤시던 이현은 처음으로 남자의 욕망에 역겨움을 느꼈다. 비참하고 또 비참했다.

***

룸에 들어서자마자 등 뒤로 문이 부드럽게 닫혔다. 나뭇결이 만져지는 문에 손가락을 가볍게 짚은 채로 이현은 마른침을 삼켰다. 한지우는 지체 없이 침대로 향하며 셔츠의 단추를 풀고 있었다.

“뭐 해. 안 벗어?”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대답 없는 이현에게 묻는다.

“꼴에 벗겨 줬으면 좋겠어?”

“아니, 준비를 먼저….”

“하고 왔을 거 아냐.”

빤히 바라보는 눈에 고개를 숙였다. 제 행동이 한지우의 예상 안에 있었다는 사실조차 싫었다.

내가 지금 여기에 있는 게… 맞나.

이현은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려고 노력하다가 몇 초 후에 그 노력을 때려치웠다. 그는 순발력이 없는 편이었다. 핀치에 몰리거나 시급한 과제를 두고 이성적으로 행동해 보려고 노력하다가 도리어 안 하는 게 더 나았을 만한 짓이나 하곤 했다. 지금도 그런 상태였다. 뇌에 손을 넣고 한바탕 엉망으로 휘저은 것처럼 정신이 없었다. 석희재의 질린 표정, 혐오감이 어린 눈과 창백한 뺨이 뇌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따라갔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그거야말로 충동적인 생각이었다.

따라가서 뭘 하려고…. 조심스럽게 한숨을 내뱉은 이현은 이내 마음을 다잡고 뒷주머니에서 가죽 지갑을 꺼냈다. 그걸 최대한 자연스럽게 텔레비전 앞의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눈치를 보며 옷을 벗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충동적으로 행동하는 것보다는 계획한 대로 행동하는 게 나았다. 이현은 현재의 자신보다 지난 며칠 동안 치밀하게 생각하고 결론을 내렸던 어제의 자신을 믿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가죽 지갑의 틈새에는 작은 카메라가 숨겨져 있었다. 범죄에 한 발을 내디딘 이현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남자와 자는 것이 이토록 마음에 걸렸던 적이 없다. 무엇이 자신을 이렇게 불편하게 하는지 모른 채로 이현은 셔츠만 벗고는 떨리는 손을 등 뒤로 숨겼다. 어색한 공기에 피부에 소름이 돋았다. 맞거나 발로 차이거나, 심한 꼴을 당하고 몸이 상하는 것도 두려웠던 적이 없는데 도대체 무엇이.

“와서 빨아 봐. 정성껏 빨아 준다며.”

“…….”

“이 피디 펠라 실력 좀 보게.”

구두도 벗지 않은 채로 침대에 앉아서 한지우가 불량하게 다리를 벌렸다. 이현은 무기력하게 다가가 그 사이에 무릎을 꿇고 주저앉았다. 질린 얼굴로 여기를 떠난 석희재 말고, 그냥 여기에 온 목적만 생각하기로 했다.

지퍼를 내리자 한지우가 전자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 무신경한 동작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이현은 다시 고개를 숙였다.

허벅지에 손을 걸치자 단단한 안쪽 근육이 만져졌다. 지퍼를 내리고 속옷 안의 물건을 꺼내자마자 풍겨 오는 수컷 냄새에 반사적으로 입 안에 침이 고이고 턱이 욱신거렸다. 처음 이현은 그게 자신이 남자의 것을 너무 빨고 싶어서 그렇다고 착각했다. 아마도 너무 오랜만이어서….

하지만 잠시 후에 그것이 치밀어오르는 구토감을 참으려는 생리적인 거부감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석희재의 예쁜 좆에 너무 익숙해진 모양이다. 색깔이 짙고 냄새도 다른 것을 눈앞에 두니 불현듯 삼키지 못할 것 같다는 두려움이 들었다. 조금 머뭇거리면서 단단하게 발기한 한지우의 것을 기계적으로 주물럭거리자 한지우가 ‘성의 있게 좀 하라’고 면박을 주었다. 갑자기 심장이 제어 불가능할 정도로 빨리 뛰어 이현은 쿨럭, 기침을 내뱉었다.

혀를 내어 아주 조금만 핥자 혈관이 불뚝거리며 튀어 올랐다. 이현은 흠칫 놀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한지우가 냉정한 눈으로 저를 관찰하고 있었다.

“왜 처음처럼 굴어?”

“그런 게 아니라.”

“그럼. 커서 다 못 삼킬 것 같아?”

그의 얼굴에 씩 미소가 떠오르는 것은 순간이었다. 한지우의 커다란 손이 이현의 머리카락을 잡아채어 억지로 중심에 짓눌렀다. 입을 다물고 도리질을 치던 이현은 그의 좆이 입술과 뺨에 비벼지는 것을 참지 못하고 구역질을 했다. 어쩔 수 없이 벌어진 입술 사이로 그의 것이 함부로 침입했다. 의지를 배반하고 갑자기 벌어진 마른 입술이 터졌다. 한지우의 것은 입천장을 긁으며 목구멍까지 쑥 들어갔다. 본능적으로 목구멍을 열며 눈을 부릅뜬 이현을 보면서 한지우가 중얼거렸다. ‘생각보다 더 헤프네.’

“욱… 으웁… 우….”

“더 열어.”

그래도 성에 안 차는지 한지우는 전자 담배를 던지듯 내려놓고는 이현의 머리통을 우악스럽게 붙잡은 채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것을 머금은 채로 몸이 홱 돌려져 어느새 이현은 침대 매트리스에 뒤통수를 기대고 있었다. 뒤로 머리를 물릴 수도 없게 된 상태에서 한지우가 허리 짓을 하기 시작했다. 구역질과 함께 끈적하고 맑은 침이 흘러나왔다. 숨을 제대로 쉬지 못해 충혈된 눈가에는 생리적인 눈물이 고여 흐르기 시작했다.

“이런 거 좋아하지? 응?”

“우읍, 하악… 학, 욱….”

“보통은 그만하라고 빌고 비는데 이 피디는 잘 참네. 익숙한가 봐.”

흉물스러운 성기가 입에서 잠시 빠져나갔을 때 이현은 모자란 호흡을 위해 정신없이 숨을 들이마셨다. 입가에 잔뜩 흐른 침을 닦고 싶어 손등으로 훔치려 했다. 그러나 한지우는 그 손을 쳐 내고 숨을 몰아쉬는 입술에 다시 좆을 처박았다. 숨을 쉬고 싶어 꽉 조이는 목울대를 손등으로 토닥이며 빠는 힘이 좋다고 칭찬을 했다.

잠시 후 이현은 다시 머리카락을 붙잡혀 침대 위로 질질 끌려갔다. 힘없이 테이블로 시선을 돌리자 저만 볼 수 있는 각도에서 가죽 지갑 사이 희미한 빨간 불이 반짝였다.

이현은 곧 넝마처럼 내던져져 그가 무릎으로 걸어와 제 배 위에 털썩 주저앉는 것을 올려다보았다.

“반항을 제대로 안 하니까 안 꼴리잖아.”

이현은 눈동자만 굴려 한지우를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는 게 무엇인지 생각할 머리도 없었다.

“생긴 게 영… 마음에 안 차서 그런가.”

하긴, 석희재가 눈에 들어왔는데 저로 만족이 될 리가. 이현은 순간 픽 비웃는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자 한지우가 뺨을 기분 나쁘게 툭, 툭 때렸다.

그 행동에 괜히 분이 치밀어 이현은 불쑥, 예정에 없던 질문을 꺼냈다.

“뭐 하나만 물어볼게요.”

말을 하려고 성대를 울리자마자 목이 시큰거려 이현은 큼, 하고 헛기침을 했다. 목구멍이 마구 긁혀서 안쪽이 상처가 난 것 같았다. 그새 목이 확 쉬었다.

“뭔데?”

“희재한테, 내가 셋이 하자고… 그러고 싶어 한다고 말하면서 불렀어요?”

“그게 왜 궁금해?”

“…….”

“석희재한테 아직 잘 보이고 싶어?”

이현은 고개를 돌렸다. 아차 싶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한때 감정적으로 엮였다는 것을 들켜서는 안 된다. 뒤늦게 거기에 생각이 미쳤다.

“글쎄. 이 피디도 같이 있다고 하니까 뛰어오긴 하더라만.”

이현은 보이지 않는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괜한 원망으로 숨이 가빠졌다. 자신도 뭔가를 내주며 그의 약점을 취한다는 생각이었지만, 그 사이에 석희재의 감정까지 담보 잡을 계획은 없었다.

교활한 여우 새끼. 그냥은 안 당하네.

이현은 한지우를 노려보았다. 그 독이 오른 얼굴을 보면서 한지우가 입술을 혀로 핥았다. 순간 이현의 등에 소름이 돋았다.

이 새끼는 역시 변태가 틀림없었다. 특히 아주 위험한 종류의 변태였다. 남자를 힘으로 굴복시키고 마운팅 하듯 강간하는 것을 즐기는 부류의…. 이현은 한지우 같은 타입을 질릴 정도로 잘 알았다. 하필 마음을 줬던 인간이 그런 부류였으니까.

그런 한지우가 석희재를 눈독 들였다는 사실을 떠올리자 더더욱 소름이 돋았다.

“나도 하나만 물어보자.”

한지우가 이현의 다리를 벌리며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삽입할 곳에 침으로 젖은 성기를 노골적으로 문지르며 흉곽을 큰 손으로 일부러 짓누른다. 명치가 꽉 눌려 이현은 고통스러워하며 숨을 몰아쉬었다.

“진짜로 석희재랑 아무 사이도 아니야?”

“…아닌… 데요.”

“정말로 그냥 선후배 사이라고?”

“그래, 손, 치워… 숨 막혀!”

“한 번도 안 잤어? 둘이?”

“몇 번을 말해!”

“흠.”

한지우는 미덥지 않다는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이현을 내려다보았다. 이현은 이를 갈며 짜증스럽게 말했다.

“나 같은 게 석희재 눈에… 차겠냐?”

그러자 한지우는 ‘아’ 하고 짧게 깨달음의 소리를 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로 납득하는 게 더 자존심 상했다.

“됐어. 그럼.”

그리고 이현은 한지우가 자신의 바지를 벗기는 것을 무기력하게 지켜보았다. 그러다가 불현듯 펄쩍 뛰듯이 부자연스럽게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씨발, 문신!

이미 피부의 일부가 되어 잊고 있었던 석희재의 이름. 그걸 보이는 순간 한지우에게 둘 사이를 들키게 될 게 틀림없었다. 딱 잡아뗀다고 해도 의심을 사기에는 충분했다.

갑자기 일어나 제 몸을 방어하려 드는 이현을 보고 한지우가 성가시다는 얼굴을 했다.

“뭐야. 왜 그래?”

“생각해 보니까 아… 안 되겠어.”

“뭐?”

“아직 대낮이고.”

“장난해?”

“불이라도 끄고 해, 그럼. 커튼도 치고.”

한지우가 비웃었다.

“왜?”

“씨발, 내가 낯을 좀 가려.”

“웃기지도 않아서.”

이현의 반항을 웃어넘기며 한지우는 힘으로 제압하려 들었다. 묵직한 무게에 깔린 채로 이현은 있는 힘껏 반항했으나 역부족이었다. 일전에도 느꼈지만 체급 차이도 있는 데다가 자신이 짓눌린 상태라 지나치게 불리했다. 심지어 지금은 몸에 숨겨야 할 약점까지 있었다.

“놔, 놓으라고!”

하지만 깔린 남자가 반항하는 게 취향인지 한지우는 되려 흥분하기 시작했다. 진짜로 이 상황을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에 이현은 겁에 질리기 시작했다.

벼랑 끝에 몰린 이현은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없는 짓을 저질렀다. 머리를 번쩍 들어 한지우의 코에 퍽! 박치기를 한 것이다.

“아, 씨발… 머리 아파.”

뇌가 약하게 흔들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무식한 박치기였다. 어지러운 시야를 털어 낸 이현은 한지우가 입과 코를 막고 물러나는 것을 목격했다. 고개를 숙인 그의 손 아래로 시뻘건 피가 뚝뚝 흘러내리고 있었다.

와, 큰일 났다. 코뼈 부러지는 소리 들렸는데.

진짜 부러졌으면 내일부터 무대는 어떻게 서지.

습관적으로 피디다운 걱정을 하던 이현은 희번덕 살기가 빛나는 한지우의 눈을 보고 정신을 차렸다. 남 걱정을 할 때가 아니었다.

어어? 하는 순간 그에게 다시 머리채를 잡혔다. 한지우의 매서운 손이 시야 안으로 날아왔다. 연달아 같은 쪽으로만 뺨을 다섯 대나 맞았다. 이번에는 착각이 아니었다. 정말로 뇌가 흔들렸다.

“씨발 새끼야. 재미없는 짓 하지 마.”

이현은 시체처럼 시트 위에 풀썩 쓰러졌다. 눈앞이 가물가물해 까딱하는 순간 곧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한지우는 허약한 숨만 색색 내뱉는 이현을 노려보더니 욕을 하며 화장실로 사라졌다. 문이 쾅 닫히고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코피를 멎게 하려는 모양이다. 안에서 험악한 욕지기가 들려왔다.

그리고 죽은 척하던 이현은 화장실 문이 닫히는 순간 다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병신…. 내가 얼마나 맷집이 좋은데.’

기절한 줄 알았겠지?

이현은 맥없이 히죽거리며 테이블 위의 가죽 지갑을 챙겼다. 바닥에 흐트러진 제 옷가지를 줍고는 룸을 나섰다.

문이 닫히기 직전 화장실의 물소리가 뚝, 끊기는 소리가 들렸다. 엉덩이를 차인 말처럼 깜짝 놀라 복도를 달려가다 잠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았지만, 다행히도 한지우가 쫓아오기 전에 얼른 기어서 스태프 전용 계단으로 몸을 숨길 수 있었다. 이현은 몇 층을 내려가 계단에 웅크린 채로 앉았다. 아주 조금만 쉬다가 일어나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깐 사이에 지나치게 긴장했었는지 갑자기 무척 졸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긴장이 풀려서 그런 것일 테다.

이현은 한참 후에야 겨우 자리를 털고 일어나 호텔 밖으로 도망칠 수 있었다.

***

이현은 집에 돌아가는 대신 괜히 거리를 쏘다녔다. 사람들이 제 몰골을 보고 흠칫거리며 피하는 게 느껴져서 조금 위축되었다. 그러다 해가 지자 배가 출출해서 한 포장마차에 틀어박혔다. 이런 상황에서도 본능적으로 허기를 느낀다는 게 우스웠다. 자신은 영 비극이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것 같았다.

“이모, 저 우동 한 그릇… 더, 주세요!”

“학생. 앞에 우동 잔뜩 남아서 불어 터지고 있는데 또 시켜? 있는 거부터 먹어!”

“에이씨… 식었단 말이에요.”

“아이구, 진상이네 진상이야.”

포장마차 이모는 복장 터지는 소리를 냈다. 갑자기 기가 죽어서 이현은 빨간 우동 그릇 안을 들여다보았다. 흰 면이 불어서 그릇 안에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벌써 우동만 세 그릇째다. 이모가 진상이라고 할 만도 했다.

“돈 낼 건데 왜 진상이야, 내가… 끅. 달라면 주지 막 소리 지르고….”

“시끄러워, 학생!”

작게 중얼거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모의 일갈이 날아왔다. 이현은 아까보다 더 기가 죽어 스푼으로 우동 국물을 떠먹었다. 술에 취한 손이 헛손질했다. 국물을 주르륵 흘리면서 겨우 입술만 적시고 한숨을 쉬었다.

희재… 상처받은 것 같았는데.

쫓아가서 말해 줄 걸 그랬나.

넌 그냥 운이 나쁜 거라고.

그가 저에 대해 실망하는 건 괜찮았다. 제 실체를 안다면 당연한 일이니까. 애초부터 저와는 격이 안 맞는 남자였다.

하지만 그러니까, 그렇기 때문에 제 존재가 그를 상처입히는 건 안 될 일처럼 느껴졌다.

이현은 아까 석희재의 표정을 곱씹었다. 오해를 벗고 싶거나 변명하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가 무엇을 상상하든 자신은 이미 그 이상의 쓰레기일 테니까. 아무나랑 막 뒹구는 건 기본이고 이미 쓰리피도 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런 적 없는 깨끗한 사람인 척하는 건 왠지 석희재를 기만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넌 그냥 운이 나빴던 거야.

하필 그날 거기 서 있던 게 나라서….

운이 나쁜 게 네 잘못은 아니거든.

그건 정말 그냥 운이 나쁜 거라서….

이현은 눈을 느리게 끔뻑이며 생각했다. 취해서 그런지 혼자 하는 생각마저 어눌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아니면 아까 한지우의 코뼈를 부러뜨리면서 제 뇌세포가 몇천만 개 정도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씨발, 내 뇌세포….”

이현은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가치 있는 사람에게 반하는 건 무척 쉬운 일이다. 누구든 눈이 있다면 석희재가 얼마나 가치 있는지 알아볼 수 있다. 외면뿐인가, 반하게 되면 그다음으로는 그의 내면이 얼마나 올곧은지도 알게 될 것이다. 연출과 조 실장은 물론이고 한지우 변태 새끼도 알아보았으니까….

이현의 안에서 한지우의 풀 네임은 어느새 ‘한지우 변태 새끼’가 되었다. 하지만 이현은 동시에 한지우와 저가 무엇이 다른지 잘 모르겠다고도 생각했다. 자신도 이미 훌륭한 변태 새끼였다.

반면 석희재는 가치 없는 것도 돌보고 아낄 줄 알았다. 그 마음은 숭고하기까지 했다. 하필이면 자신이 그의 첫 상대인 게 죄악처럼 느껴졌다.

“그러니까 넌 그냥 운이 나쁜 거라고, 어?”

“어이구… 취했으면 조용히 집에 들어가지.”

허공에 대고 혼잣말하는 이현의 귀에 이모의 구박이 들려왔다. 순간적으로 여기가 포장마차라는 것을 도로 깨달은 이현은 외쳤다.

“이모. 우동 하나 더 주세요…!”

“저 진상! 있는 거나 먹어!”

“차가워서 먹기 싫어요….”

이현은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따뜻한 우동을 먹고 싶은데 왜 안 내어 주는지 이해가 안 갔다. 백수인 걸 알아챘나? 그런가보다.

이현은 뒤적거리며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돈 있어요. 돈 있는데… 제가 백수지만….”

“아니, 잘 봐. 학생. 우동만 세 그릇이잖아, 벌써! 먹지도 않을 거 왜 자꾸 시켜?”

“식어서 먹기 싫단 말이에요. 흑… 흐으… 어엉….”

“아니, 울긴 왜 울어? 환장하겄네. 이리 내놔! 데워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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