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공사 구분
‘왜 갑자기 타투할 생각을 했어? 이것도 형이 연애하면 하고 싶었던 거야?’
석희재는 이현에게 물어 놓고 정작 답할 틈을 주지 않았다. 쉴 새 없이 그에게 입을 맞췄다. 양손으로 사랑스러운 뺨을 감싸듯 쥐고 촉, 촉 소리를 내며 입가와 콧잔등, 눈 아래 같은 곳을 입술로 한참 더듬었다. 입을 벌리면 좋은 틈을 찾았다는 듯이 파고들어 입을 맞추었다. 석희재가 일부러 그런다는 것을 알고 이현은 소리 죽여 웃었다.
한참 후, 키스의 비가 잦아든 후에야 이현은 이렇게 대답했다.
‘이게 네가 제일 걱정하는 거잖아. 내가 몸 굴리고 다니는 거. 그럴 일은 없을 것 같지만… 만약에 내가 술에 잔뜩 취해서 누군지 분간도 못 하고 다른 남자랑 모텔이라도 들어갔다 쳐. 그럼 상대가 이게 뭐냐고 묻겠지? 그럼 난 애인 이름이라고 대답할 거야.’
애인 이름.
석희재는 그 달콤한 단어를 여러 번 곱씹었다. 그때에 현이 눈을 마주쳐 오며 물었다.
‘희재야. 우리가 커플링은 못 해도 이걸로 안 될까?’
지난밤, 이현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석희재는 슬며시 웃었다.
‘그 상황까지 가서도 안 되는 건데, 바보.’
브러시가 눈꺼풀을 스치고 가서 석희재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가만히 눈을 감았다. 앞이마를 가리지 않도록 넘긴 머리카락에 스프레이가 닿았다. 어젯밤을 추억하는 석희재가 현재 앉아 있는 곳은 연습실의 구석. 분장실이 따로 없어 노출된 곳에서 간단한 메이크업을 받고 있던 석희재의 앞으로, 한 무리의 앙상블이 동선을 따라 우르르 달려나갔다.
테크 리허설을 위해 딱 하나씩만 존재하는 대도구와 무대 장치는 이미 전부 극장으로 옮겨진 상태였다. 석희재의 가까운 곳에 선 조연출은 현재 거의 완성된 공연의 러닝타임과 각 넘버의 시각을 정확하게 기록하기 위해 스톱워치로 분초를 쟀다.
‘그래서, 모텔까지는 가겠다는 소리야?’
‘어?’
‘다른 남자 앞에서 옷 벗고 다리 벌리겠다는 소리냐고.’
관계를 맺기 직전이 아니면 볼 일이 없는 타투였다. ‘그래서 다른 남자랑 모텔을 들어가기는 할 모양인가 보다’라고 추궁해 대자 이현은 당황한 듯 말을 잇지 못했다. 물론 못 믿어서 따져 물은 것은 아니다. 당황하는 얼굴이 좋아서 그랬다. 어제 대화를 떠올리며 석희재는 소리 없이 웃었다.
아무튼 현은 극단적인 부분이 있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다. 사람과 사람이 관계를 맺는 방식에는 섹스만 있는 것이 아닌데 이현은 꼭 그것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군다.
제 기준으로 말할 것 같으면 같은 자리에서 술을 마시고, 맞닿은 무릎을 스치고, 같은 컵으로 물을 마시고… 그런 사소한 스킨십도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자신이 그런 사소한 순간에 이현에게 사랑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니 가능하면 거기까지 가는 과정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자신이 과민한 것인지 아니면 적당히 상식선인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래도 이것이 이현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노력이라는 것을 알았다. 석희재는 무릎 위에 올려 둔 손을 가볍게 주먹 쥐었다. 신뢰를 주려고 노력한 그 마음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
그리고 부위도.
지나치게 섹시하고.
“턱 조금만 들어 보세요.”
석희재는 분장 스태프가 시킨 대로 고개를 조금 들었다. 어젯밤을 상상하며 차분히 눈을 감은 채로.
어제 그 ‘증표’를 자세히 보기 위해 현의 한쪽 다리를 어깨에 걸친 채로 타투를 보면서 삽입했다. 자극을 줄 때마다 불끈, 근육이 도드라지는 안쪽 허벅지는 날씬하고 탄력 있었다. 의도적으로 상처를 낸 타투 주변으로 발갛게 일어난 살도 자극적이었다. 거기에 직접 입을 맞추고 싶었지만 아물 때까지는 금지라고 했다. 통증을 즐기는 현은 석희재가 손으로 애타게 타투의 상처 주변을 어루만질 때 너무 느낀 나머지 안을 조이고는 했다.
석희재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다 좋은데 부드러운 허벅지 안쪽을 타투이스트가 골몰하듯 오래 들여다보았을 것을 상상하니 그것만큼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두 번 다시 마주칠 일이 없을 테니까. 과민하게 굴지 말자.
석희재는 어른스럽게 마음을 다잡았다.
일전에 현이 피어싱을 해 보고 싶다고 했을 때는 놀란 나머지 말문이 막힌 적이 있는데, 어쩌면 그것도 해 봐도 좋을 것 같다. 남들에게 쉽게 보이지 않는 곳, 저만 볼 수 있는 곳에 말이다. 예전에 놀기 좋아하는 친구들이 말하길, 연인 관계도 잠자리를 너무 오래 가지면 고루하고 뻔해진다고 하던데 상대가 이현이면 절대 질릴 일이 없을 것 같았다. 타투든, 피어싱이든, 이현이 원하는 대로 타락하게 두면 얼마나 더 섹시해질지 기대가 됐다.
“얼굴 살짝만 이쪽으로 돌려 보세요.”
분장 스태프의 목소리에 석희재는 고개를 돌렸다. 눈을 반쯤 뜬 채로 내리깔았지만 미묘하게 초점이 나갔다. 몸은 여기에 있을지언정 머릿속은 현으로 꽉 차 아무 데도 보고 있지 않았던 것이다.
오늘 메이크업을 받는 이유는 짤막한 인터뷰가 있기 때문이다. 뮤지컬 전문 잡지의 기자 한 명이 사전에 몇 명을 지목해 인터뷰를 요청했는데 그중에 석희재도 끼어 있었다. 기자는 조금 전에 연습실에 도착해서 미리 인사를 건네며, 석희재의 소속사가 까다로워서 허가가 안 날 줄 알았는데 응해 줘서 고맙다며 무척 기뻐했다. 앞으로는 매체에서 더 많은 활동을 할 텐데 이럴 때 아니면 언제 자기와 인터뷰를 해 주겠느냐며 마구 띄워 주기도 했다.
이 제안이 이현의 회사 홍보 팀을 통해 들어왔을 당시, 박 팀장은 인지도는 낮고 쓸데없이 노출되는 정보는 많다며 굳이 하지 않아도 좋다고 말했다. 사진 촬영이 포함이라 메이크업과 의상까지 신경 써야 하니 피곤하지 않겠냐고도 넌지시 거절을 유도했다.
하지만 석희재는 쉽게 인터뷰를 마음먹었다. 그 이유는 이현의 집에서 이 잡지의 제목을 보았기 때문이다. 사무실로 몇 부씩 정기 배송을 받고 있다는 그 잡지를 이현은 무의식적으로 한 개씩 챙겨 와서 집에다가 놔두곤 했다. 이현의 집에서 혼자 기다리다가 할 일이 없을 때면 석희재는 잡지를 하나씩 꺼내서 읽었다. 서적이 별로 없는 이현의 집에 그나마 대본 다음으로 많은 것이 이 잡지였다. 자신이 나온 기사가 담긴 잡지가 이현이 집 책장 어딘가에 꽂힌다고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왜 그렇게 웃어요.”
불쑥 끼어든 것은 유나연의 목소리였다. 석희재는 반짝, 눈을 떴다.
“네?”
고개를 돌리며 대답하는 석희재 때문에 분장 스태프의 손이 잠시 멈추었다. 조각상처럼 비현실적인 외모의 남자가 눈을 뜨고 움직이는 순간에, 저도 모르게 브러시를 떨어뜨릴 뻔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프로 정신을 발휘했다. 붓을 다잡고 마지막으로 넓게 루스 파우더를 탁탁 털 듯이 발라 주었다.
“기분 좋은 일 있어요?”
“제가요?”
“은은하게 웃고 있길래.”
“아… 제가요?”
석희재는 내심 당황하면서 손을 들어 턱을 가렸다. 그러나 방금 메이크업을 받았다는 것을 깨닫고는 도로 손을 내렸다.
“뭐야, 뭐야. 아. 나 뭔지 알아. 이 표정은 데이트한 표정이야. 맞죠?”
“…음.”
“맞잖아. 희재 씨 최근에 애인 바쁘다고 우울해했잖아요. 오늘은 갑자기 얼굴이 확 폈네.”
“네… 맞아요. 애인한테 선물 받았어요.”
석희재는 커플링 대신이라며 타투를 해 가지고 온 이현을 떠올리며 수줍게 말했다. 유나연은 의외라는 듯이 말했다.
“엄청 제멋대로인 것 같더니 선물은 또 챙겨 준다. 그거 받고 다 풀렸어요?”
“…별로 화났던 적도 없는데.”
유나연은 혀를 찼다. 연애를 시작한 직후 석희재가 어떤 마음고생을 했는지 간접적으로, 또 직접적으로 들어온 그녀는 ‘이래서 연애 상담은 다 헛짓거리다’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리고 제멋대로라고 하지 마세요. 제 애인 착해요.”
“아… 예, 예. 그렇습죠.”
유나연은 과장되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했다.
조금 뒤, 연습실 입구에서 홍보 팀 직원 하나가 석희재를 향해 손짓했다. 인터뷰할 차례라는 것 같았다. 석희재는 유나연에게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는 조금 상기된 얼굴로 빠르게 걸어 나갔다. 확실히 걸음걸이가 활기차다. 그 뒷모습을 보며 유나연은 ‘좋을 때다’ 중얼거렸다.
“하긴, 저런 애가 매달리는데 누가 안 흔들리고 배겨.”
의자에 기대어 다리를 흔들면서 유나연은 머릿속으로 콧대 높고 도도한 연상의 여인을 그려 보았다. 인생에 일뿐이라는 커리어 우먼의 외모가 궁금해 죽겠는데 석희재는 유나연이 단순히 호기심으로 캐묻는다는 것을 알고는 절대로 쉽게 사진을 보여 주지 않았다. 그게 참 묘했다. 자랑하고 싶어 죽을 것 같은 얼굴로 그런다는 게.
“매일 이 피디님이랑만 놀더니 연애는 언제 하는 거야. 재주도 좋다.”
***
“이현. 거기 서 봐.”
같은 시간, 이현은 대표 사무실에 불려 들어가 있었다.
이현은 대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에 섰다. 대표는 이현을 세워 둔 채로 책상 위의 계약서를 뒤적이고, 핸드폰으로 누군가와 한 통화를 끝낸 후, 알 수 없는 상대에게 욕을 했다. 욕이 제법 살벌해 듣기가 불편했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라 이현은 투명 인간이 된 채로 묵묵히 기다렸다.
“너 요즘 일 설렁설렁한다?”
이현은 깜짝 놀라 허리를 곧추세웠다. 반사적으로 ‘예? 제가요?’ 하고 되묻는 말이 튀어나왔다.
“연습실 자주 비워서 스태프가 컴퍼니 찾게 하지 말라고 했지. 사고는 꼭 자리 비울 때 터진다고.”
“무슨 일 있었어요?”
이현은 내심 철렁하여 되물었다.
“한지우가 어제 나한테 전화를 몇 번이나….”
“선배가요?”
“왜 나한테까지 연락이 오게 만드냐는 말이야.”
“아… 죄송합니다.”
물론 연습실을 비울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하지만 이현은 변명하는 대신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기가 죽은 것처럼. 대표가 저의 그런 모습을 선호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실장 허락도 없이 석희재의 병원으로 뛰쳐나간 일이 켕기기도 했고….
이현은 입술을 사리물었다. 역시 공사 구분을 못하고 있다. 벌써부터 석희재를 일보다 우선으로 두고 있지 않은가.
“그리고 너 요즘 배우들이랑 술 먹으면서 무슨 얘기하고 다니냐?”
“네?”
이현은 눈을 크게 뜨며 대표를 바라보았다.
“배우들 술자리에 다 낀다며?”
정말로 변명하고 싶다. 하지만 이현은 꾹 참았다.
이 일을 하며 이현이 가진 혼자만의 자부심이 하나 있다면, 그건 그가 피디를 맡은 공연에서는 배우들끼리만 파는 단톡방이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현이 피디인 공연에서 대부분의 배우들은 불안감이나 우려를 이현과 공유하고 싶어 했다. 그건 피디로서 차라리 복이었다.
반대로 배우들 사이에서 누적되는 불만을 방치하고 피디조차 그걸 모르면 언젠가는 사고가 터지게 마련이다. 심각한 경우는 공연의 질이 하락하는 것을 관객이 눈치채기도 하고.
그러니 배우가 회사에 가지는 불만이 커지기 전에 자신이 중간에서 중재하고 윤활유를 칠하는 것도 어느 정도는 필요한 일이었다. 하지만 대표 앞에서 이런 변명은 통하지 않을 테니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또, 석희재, 그거 거물로 클 거 같으니까 걔한테는 병문안까지 가서 살랑대고? 야, 안목 좀 키워라.”
“…오해십니다….”
“내가 수없이 말했지? 배우들하고 적당히 거리를 두라고. 그것들은 자기들밖에 모르는 족속들이야. 지금도 앙상블 두 놈이 선입금 지급 밀렸다고 아주 속을 썩여. 지급 밀리면 툭 하면 공연 안 하겠다 협박이나 하고….”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돈을 안 주면 공연을 못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자기 자신은… 배우에게 물든 것인가? 이건 그냥 상식인 것 같은데….
심지어 대표는 현금이 돌지 않을 때면 목소리가 크지 않은 앙상블들부터 지급을 미루곤 했다. 완전 상습범이고, 너무 야비한 짓이었다. 이현도 이 회사에 오기 전 작은 규모의 연극 제작사에서 월급이 밀리는 바람에 3개월을 월세도 못 내고 힘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때는 원나잇 하러 모텔 갈 돈도 없었지….’
지금은 사정이 나아졌지만 다른 희생자들이 생겼다. 이현은 피디인 제가 꼬박꼬박 월급을 받을 때 교통비도 받지 못했던 예전 공연의 어셔와 음향 오퍼들을 떠올렸다. 결국 회사는 아무것도 주지 않았고 이현은 제 월급을 떼어 그들에게 현금을 나눠 주었다.
“대답 안 해?”
“아, 죄송합니다. 새겨듣겠습니다.”
이현은 영혼 없이 답했다.
“사적으로 믿고 잘해 줄 필요 하나도 없다. 이거야. 배우들이랑은 무조건 비즈니스야.”
“아, 네… 그냥 고충 들어주고 그럽니다. 배우들끼리만 불만이 쌓이면 그것도 문제라….”
“그럴 때는 나를 불러야지.”
이현은 그저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좀 이따 컴매 뽑을 거니까 면접 봐라.”
“오늘요?”
“어. 이따 세 시에 오기로 했어.”
상의도 없이 갑작스러운 면접. 그러나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기에 이현은 일단 알겠다고 대답하며 가장 중요한 것을 물었다.
“월급은 어떻게 할까요.”
“월 80으로 해.”
저 양심 없는 새끼.
이현은 입을 다물고 대표를 노려보았다.
그러고는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대표님, 그래도 대극장인데 소극장보다는 조금 더 줘야….”
“배곯으면서 할 생각 없으면 관두라고 해. 할 놈 널렸으니까.”
항상 똑같이 마무리되는 대화 끝에 이현은 허무하게 ‘네’라고 대답하고는 사무실을 나섰다.
이현은 사무실의 제자리로 돌아갔다. 계약서 작성을 위해 사무실에 들렀던 배우 하나가 ‘닭장인 줄 알았다’라고 말하던 사무실 풍경이 새삼 갑갑하게 느껴졌다. 최근 극장과 연습실 등 바깥으로만 나다녀 책상에 앉는 것이 오랜만이라 더 그런지도 모르겠다. 이현은 대표에게 받아 온 오후 면접자의 서류를 책상 위에 턱, 올려놓은 채로 재킷을 벗어 의자에 걸었다.
맞은 편의 시선을 느낀 이현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김 실장이 저를 빤히 보고 있었다.
“예…? 왜요?”
이현은 어리숙하게 되물었다.
“이 피디. 대표님이 뭐라셔?”
“아… 컴매 면접 있다고, 또….”
“또?”
그 대화가 주가 아니었을 거라는 사실을 짐작한 눈치다. 이현은 축약해서 말했다.
“그냥. 열심히 하라고 하시던데요.”
“으이구. 저 인간.”
김 실장이 대표 사무실을 향해 쏘아보는 눈길을 보냈다. 자신이 하고 싶은 행동을 대신 해 주는 김 실장을 보며 이현은 너무 좋아하는 티를 내지 않으려고 괜히 헛기침했다.
“하나밖에 없는 제작 피디를 아끼지는 못할망정 구박해서 어쩌자는 거야? 이 피디 갑자기 관둬 봐. 물 먹는 건 본인일 거면서.”
이건 이현이 인간적으로 김 실장을 조금은 믿을 수 있는 이유 중 하나였다. 대표를 싫어하는 게 저 하나만이 아니라는 것만으로 위안이 된다. 예전 상사였던 이사는 대표의 앞잡이이자 오른팔이었기에 함께 일하기가 심적으로 퍽 괴로웠다.
“별말씀 안 하셨어요.”
“괜히 저러는 거야. 친구도 없는 인간이… 어디서 이 피디 연애한다는 소문 주워들었나 보더라고.”
“그런 소문이 돌아요?”
이현의 심장이 철렁했다. 단 한 번 긍정한 적이 없는데 이미 기정사실화되었나 보다.
“신경 쓰지 마. 사람들 원래 남 이야기 좋아하잖아. 아무튼 대표가 나한테도 와서 찔러 보던데. 이 피디 결혼할 거 같냐고.”
“세상에.”
어이가 없어서 이현은 저도 모르게 바람 빠지는 듯한 코웃음을 쳤다.
자주 있는 이야기다. 제작 팀 생활을 오래 한 피디들이 회사에서 독립하는 계기는 보통 결혼이었다. 적당히 연차가 쌓이면 돈을 스스로 굴릴 수 있는 안정적인 환경을 찾아 나서며 제작사를 차리는 것이다. 이현은 결혼한 뒤 연락이 뜸해진 몇몇 선배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들 대부분이 지금은 아동극 제작사를 하고 있었다. 아기를 낳고 나면 역시 그쪽 타깃이 끌리는 모양인지.
나도 아동극이나 하고 싶다. 아기들이나 잔뜩 보게.
이현은 일하면서 딱 한 번 아동극 담당을 맡은 적이 있었다. 매 회마다 어린이집 선생님들을 따라 줄을 맞춰 오종종히 걸어 들어오던 네다섯 살쯤 되는 아기 관객들. 상상치 못한 대목에서 떠나가라 울고 공연이 끝날 때쯤에는 체력이 다해 졸고 있던 아기들을 떠올리며 이현은 잠시 행복해했다.
“아니지?”
김 실장의 목소리가 이현을 현실로 잡아챘다.
“절대 아닙니다. 저 그럴 깜냥도 안 돼요. 결혼은 무슨….”
이현은 단호하게 말했다.
“다행이다. 이 피디 결혼 계획 있다고 그러면 나 배신감 느낄 뻔했어. 나까지 감쪽같이 속인 줄 알고.”
“그나저나 왜 갑자기 그런 소문이 돌죠?”
그러자 김 실장이 다시 빤히 바라보았다. 눈동자 너머 심중을 바라보려는 듯 캐내는 눈이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압도당해서 눈을 떨구고 이마를 긁적였다.
“흠… 진짜 아니야?”
“독립… 안 하고, 결혼도 안 해요. 아니, 못해요.”
“그게 아니라 연애 말야. 연애한다고 다 결혼하는 것도 아니잖아. 믿어 줄 테니까 솔직히 말해 봐.”
“전 한 번도 긍정한 적이 없는데 왜….”
난처하게 미간을 찌푸리자 김 실장이 말을 이었다.
“우리 회사가 사람을 너무 굴리잖아. 사생활이라고는 요만큼도 없고. 이봐, 이봐. 이 멀쩡한 여자들도 전부 솔로고.”
김 실장이 별안간 사무실을 향해 삿대질하자 파티션 사이에서 숨죽인 웃음소리가 쿡쿡 터졌다.
“그런데 최근에 자기가 사생활이 조금 생기기는 했잖아. 그건 인정하지?”
그 말에 이현은 그저 웃었다.
“아… 누구나 조금 숨 돌릴 틈은 필요하잖아요. 실장님. 꼭 연애가 아니더라도.”
“그래. 그렇긴 한데… 보통 자기를 위해서는 시간을 안 내던 워커 홀릭들도 사랑을 하면 시간이 나더라고?”
“흠….”
이 이상 추궁당하면 뭔가를 들키고 말 것 같아서 이현은 식은땀을 흘리며 어설프게 시선을 돌렸다. 김 실장도 일단은 덮어 주겠다는 듯이 몸을 돌렸다.
“아무튼 급한 나이도 아니고. 결혼은 나중에 해. 내가 먼저 가야 하니까.”
“안 하시는 거면서.”
“아부하긴….”
눈을 흘긴 김 실장이 달력에 시선을 주었다.
“아 참 내일부터 테크네. 이 피디 얼굴 더 못 보겠다.”
“그렇죠.”
“장치부터 들어가나?”
김 실장의 질문에 이현은 메모해 두었던 스케줄을 넘기며 대답했다.
“아뇨. 오전 6시에 조명 먼저 들어가고.”
“아니 왜 그렇게 일러?”
“조명 다음에 회전 무대 들어가야 하는데 설치가 2시 전에 끝나야 한대요. 무감님도 그때 오실 거라서.”
“그럼 자기 내일은 6시까지 극장 가야겠다.”
“네.”
“그러면, 사무실 다시 오지 말고 극장에서 바로 퇴근해. 사무실 안 들러도 되니까.”
그 말에 이현은 소리 없이 웃었다. 양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아….’ 하고 괜히 신음을 냈다. 극장에서 바로 집으로 간다 해도, 아주 일러 봤자 테크를 마친 밤 열 시 이후다. 그마저도 무대감독이 시간을 끌면 끄는 대로 퇴근이 늦어지기 일쑤였다.
벌써부터 몰려오는 피곤함에 기지개를 켜면서 이현은 ‘알겠습니다’ 하고 답했다.
***
테크 리허설은 총 3일간 이어진다.
「나 집에 못 들어갈지도 몰라... 가도 잠만 잘 거고」오후 8:41
「그러니까 안 와도 돼」오후 8:41
석희재는 이현이 보낸 문자를 보고 있었다. 많이 아쉽기는 했지만 미리 말해 준 것만으로 석희재는 조금의 불만도 갖지 않았다.
예전에도 종종 이런 시가가 찾아오곤 했다. 현이 지나치게 바빠 두문불출하던 때가. 가끔 만나 몸이나 섞던 때에는 별안간 연락이 끊어지면 그저 기다려야 했다. 이대로 영영 멀어지는 건 아닌지 노심초사하면서.
서로의 스케줄을 공유하게 되고 집의 비밀번호를 알게 된 후에야 석희재는 이현이 왜 간혹 없는 사람처럼 사라져 버리는지 알게 되었다. 일단 극장으로 들어가면 제작사 측은 그때부터 극장 측에 매일매일의 대관료를 지불해야 한다. 그러나 리허설 기간은 관객에게 입장료를 뽑을 수 없기에 무조건 손실이 나는 구조가 된다. 그러므로 관객이 들지 않는 대관 일수를 최대한 줄이기 위해 항상 테크 일정을 무리하게 잡는 것이다.
극장 입성 후 단 며칠 만에 공연을 원하는 구상까지 끌어올리기 위해 모든 파트가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한다. 잠은 모자라고 연출부를 비롯한 모두의 예민함은 최고조가 된다. 그때의 현은 집에서 잘 시간도 없는지, 겨우 옷만 갈아입고 도로 극장으로 향하곤 했다. 그 시기가 돌아온 것이다.
‘그러니까 안 와도 돼.’
이건 저를 거부하는 말이 아니다. 아마 제 애인은 곧 무대에 오를 배우를 배려해 더 환경이 좋은 자택에서 쉬라는 의도로 이렇게 말한 것일 거다…. 석희재는 그렇게 해석했다.
하지만 석희재는 보란 듯 이현의 말을 어기고 스케줄이 끝나면 무조건 이현의 집으로 향했다. 이현의 얼굴이 최고의 피로 해소제니까. 하루 종일 보고 싶은 것을 꾹 참고 핸드폰 속 사진이나 만지작거리다 보면 잠든 얼굴이라도 보고 싶어졌다.
그러나 테크 3일간 이현은 단 한 번 집에 왔다. 그마저도 석희재가 잠이 든 사이에.
이현이 집에 도착한 것은 새벽 3시가 지난 시각이었다.
조명이 연출의 생각과 완전히 달랐는지 수정하는 데 무척 오래 걸렸다. 이현은 극장 객석에 앉아 졸면서 그저 종료만을 기다렸다. 끝난 건 새벽 2시 40분. 내일도 오전 7시부터 시작이라 잘 수 있는 건 고작 서너 시간뿐이었다.
“어.”
침실로 들어선 이현은 제 침대 위에 누군가 누워 있는 것을 발견했다. 깜짝 놀라 불을 켜 본다.
“뭐야… 안 와도 된다니까.”
거기에는 석희재가 곱게 누워 자고 있었다. 이미 푹 잠든 지 꽤 되었는지, 눈이 부실 텐데도 미동도 없이 새근새근 잠을 잔다.
이현은 다시 불을 끄고 어둠 속에서 주섬주섬 옷을 갈아입었다. 그러고는 석희재의 곁에 조심스럽게 누웠다. 낡은 침대 매트리스가 삐걱거렸다. 오전 여섯 시 반으로 핸드폰 알람을 맞추려다가 이현은 옆을 슥 돌아보았다.
그럼 자다가 애가 깰 텐데.
안 그래도 요즘 피곤해 보이는구먼….
이현은 석희재의 이마에 가만히 뽀뽀를 해 주고 도로 거실로 나왔다. 머리맡에 알람을 맞춘 핸드폰을 올려 두고 소파에 웅크린 채로 잠이 들었다. 석희재의 잠을 깨우기는 싫지만 알람 없이 일어날 자신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몇 시간 후, 알람이 울리고 3초 만에 번쩍 눈을 떴다. 이현은 다시 소리 없이 채비를 마치고 집을 나섰다.
석희재는 도어록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뒤늦게 잠에서 깼다. 눈을 비비면서 일어나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이현의 방 안에 있는 것은 저뿐이었다.
‘꿈이었나.’
꿈에서 이현의 손길을 느낀 것 같았다. 그가 잘 자라며 이마에 키스도 해 주었다. 너무 보고 싶은 나머지 현실성 없는 꿈을 꾸었는지도 모른다. 석희재는 조용히 그 감촉을 상상하면서 이마를 문질러 보다가 다시 잠들었다.
***
그리고 두 사람이 겨우 마주칠 수 있던 것은 이틀 후, 드레스 리허설 첫날이었다.
「형 어디야? 나는 극장」오후 1:27
극장에 도착하자마자 석희재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가만히 앉아 답을 기다리는 대신 이현을 직접 찾아 나서기로 마음을 먹었다.
어딨을까? 석희재는 과거, 어머니의 리허설을 참관했던 기억을 더듬으며 이현이 있을 만한 곳을 추리했다. 가장 먼저는 객석을 쭉 둘러보았다. 천오백 명을 수용하는 넓고 촘촘한 붉은 객석은 광활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 사이사이에는 오늘 리허설 차례가 아닌 배우들과 취재를 위해 초대받은 기자들, 그리고 기록 영상을 촬영하기 위한 외주 스태프들이 듬성듬성 앉은 채였다. 연출부를 비롯한 감독들 대부분은 객석 가운데 세팅된 테크에 몰려 있었다.
그 와중에 리허설 촬영을 온 사진작가 조 실장이 석희재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새 그를 잊어버린 석희재는 ‘누구지’ 하며 눈을 찌푸렸다.
어쨌든 그 사이에 이현은 없었다.
그러면 그다음으로 가능성이 있는 곳은 백스테이지다. 석희재는 객석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객석 사이를 걸어가 긴 다리를 이용해 성큼, 무대 위로 올라갔다. 무대 위에는 마침 첫 번째 드레스 리허설 출연자로 배정된 배우들이 의상을 걸친 채로 마이크 테스트 중이었다. 배우와 스태프들 사이를 가로지르며 석희재는 상수 쪽의 소대로 향했다. 백스테이지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은 무대의 소대를 통하는 것이니까.
“어?”
아니나 다를까 석희재의 예상은 적중했다. 소대 뒤 어둑한 곳에서 반가운 목소리가 들린 것이다.
“희재?”
석희재는 목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두리번거렸다. 밤눈이 어두워 이현을 금세 찾을 수가 없었다. 소리는 배경 막 뒤에서 들려왔다. 철근이 얽힌 통로 사이를 뚫어져라 바라보자 그 안에 웅크리고 있던 인영이 살짝 걸어 나왔다.
“형!”
이현을 발견한 기쁨에 석희재는 감격했다.
쉿, 이현이 손가락을 입술에 가져다 대며 천천히 걸어왔다.
가까이서 본 이현은 처음 보는 옷을 입고 있었다. 검은 후드 티와 검은 바지, 그리고 검은색 모자. 온통 검은색 일색이었다. 눈에 띄면 안 되기 때문에 보통 상주 스태프들은 검은 옷을 고수했다. 이현도 일부러 갈아입은 모양이었다.
“옷 귀엽다.”
석희재는 평소에 이현이 잘 입지 않는 캐주얼한 후드 티를 보고 그렇게 말했다. 검은색 캡 모자까지 더해져 이현은 평소보다 훨씬 어려 보였다. 꼭 대학생 같았다. ‘이런 것 좀 자주 입었으면 좋겠다.’ 석희재가 몰래 바랄 때였다.
“이게? 너도 갖고 싶으면 하나 줄게.”
이현은 그렇게 말하며 뒤돌았다. 후드 티의 등 쪽에는 공연명이 적혀 있었다. 아마도 무대 크루를 위해 지급된 옷인 듯했다.
“응, 갖고 싶다. 커플 티 하게.”
“이따 컴퍼니 룸에서 받….”
거의 동시에 나온 말에 이현이 말문이 막힌 듯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더니 피식 웃는다. 제 말이 현을 웃게 만들었다는 사실에 석희재는 조금 들떴다.
챙 아래에 드러난 현의 얼굴이 무대 쪽에서 새어 들어오는 조명 덕분에 하얗게 빛났다.
“형….”
석희재는 한 걸음 다가갔다. 오랜만이라 안아 보고 싶었다.
그러나 이현은 뻗은 팔이 닿기도 전에 슬쩍 뒷걸음질 쳤다.
“나 이틀 동안 못 씻어서, 안 돼. 머리도 못 감았어.”
“못 씻었어? 왜? 이 극장 분장실에 샤워실 있을 텐데….”
“너 잘 안다? 여기 와 본 적 있어?”
이현은 대답하는 대신 의외의 포인트에서 놀란 얼굴을 했다. 석희재는 약간의 낭패감을 느꼈다. 어머니를 보러 극장 백스테이지에 종종 들르곤 했었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석희재가 말을 고르는 사이에, 이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다행히도 크게 궁금한 것은 아니었던 듯하다.
“맞아. 샤워실 있는데 하필 수도 배관이 터져 가지고. 그래도 공연 시작하면 배우들은 써야 될 거 아냐. 급하게 공사하느라고 지금 샤워실이 막혀 있어.”
“아….”
“오늘은 집에 들어가야겠다. 씻기라도 해야지.”
그렇게 말하며 이현이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 석희재는 뒤를 슬쩍 돌아보고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이현을 끌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이현은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꿈틀거리는 이현을 강하게 끌어안고 석희재는 일부러 그의 목덜미에 코를 박았다. 그리운 체취가 가득했다. 높은 콧대가 비벼지자 이현이 몸을 움츠렸다.
“간지러워….”
“좋아… 살 것 같다.”
“아, 간지럽다고. 숨 너무 크게 쉬지 마.”
“왜? 느껴서 그래?”
“아니… 이 녀석이?”
“냄새 좋은데 왜.”
“…변태 다 됐네.”
이현은 그렇게 말하며 석희재의 뒤통수를 아프지 않게 손가락으로 꿍, 박았다. 그 손길에 충격받은 석희재는 원망스럽게 고개를 들었다.
이런 식으로 꿀밤 때리는 거 싫다고 말한 적 있는 것 같은데….
그 사이에 이현은 쓱 품에서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석희재를 먼저 지나쳤다.
“여기 말고.”
“…….”
“분장실에서.”
석희재는 벌써 훌쩍 저 앞으로 걸어가고 있는 이현의 뒷모습을 눈만 깜빡이며 바라보았다.
상수 쪽 소대를 통해 백스테이지로 통하는 문을 지나면, 어둑한 무대 위 장막은 꿈이었던 것처럼 시야가 눈부시게 밝아진다. 인공적인 형광등 빛이 가득한 분장실 복도를 지나 이현이 다다른 곳은 복도 끝의 컴퍼니 룸이었다. 출구와 가장 가까우며 가장 고립된 위치에 있는 방이기도 했다.
현이 먼저 들어간 직후 석희재는 복도를 한 번 가볍게 둘러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샤워를 못 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현이 닫힌 문 앞에 서 있던 석희재 앞으로 불쑥 다가왔다.
사람들에게는 각자의 사적인 영역이 있다. 친근한 사이에서 대화하기 적당한 거리는 약 30cm에서 50cm 내외.
그러나 현은 단 10cm의 여백도 두지 않고 가까이 붙어 섰다.
키스라도 해 주려는 걸까, 석희재의 심장이 기대감으로 크게 뛴 순간 현은 몸을 슬쩍 숙여 문고리로 손을 뻗었다. 퉁, 하는 철제 음이 들렸다. 제 등 뒤에서 완전히 문을 걸어 잠그는 현의 손동작을 보면서 석희재는 조금 머쓱해졌다.
“삽입은 좀 그러니까 입으로 해 줄게.”
다시 심장이 쿵 떨어졌다. 캡이 앞으로 향해 있던 모자를 빠르게 고쳐 쓰며 이현은 무릎을 꿇었다. 저돌적인 유혹에 몸이 문으로 쿵, 밀렸다. 그러나 바지 지퍼가 완전히 내려가기 전에 이현은 석희재에게 양 뺨이 붙잡혀 질질 끌어올려졌다.
“입으로 말고….”
뺨이 밀려 입술이 벌어진 이현이 의문을 담은 눈길을 보냈다. 석희재는 그 입술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말했다.
“나도 만지고 싶어.”
“아.”
이현이 씩 웃으며 목덜미에 매달려 왔다.
석희재는 고개를 비틀며 그간 그리웠던 이현의 입술에 깊이 입을 맞췄다. 간단한 세안이나 양치 같은 것은 관객용의 로비 화장실을 이용하는 모양인지 입 안쪽에서 약한 민트 향이 났다. 그것마저 저를 위해 준비된 것 같아 무척 기뻤다.
고작 며칠을 보지 못했을 뿐인데 무척 오랜만인 것 같았고, 그만큼 갈증이 났다. 뺨을 감싼 채 엄지손가락으로 더듬어 본 입술부터 혀로 닿은 젖어 있는 점막까지 어느 한 곳 부드럽지 않은 곳이 없었다. 너무나 연약하고 부드러운 살결이었다. 사람의 몸에 이토록 달콤한 부분이 있다는 사실에 새삼스레 놀라면서 석희재는 키스에 빠져들었다. 깊이 입술을 겹치자 높은 콧대가 이현의 뺨을 쿡 찔렀다. 석희재가 안달할 때마다 이현은 일부러 목을 울리며 신음했다.
“음, 음….”
키스로 신음하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석희재는 가끔씩 입술을 떼고 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깐 입술이 떨어진 사이에도 이현은 안타깝다는 듯 석희재의 입술을 핥았다. 의도한 행동에 또다시 몸이 떨렸다.
이현은 경험이 많은 만큼 지나치게 노련하고, 저 자신은 그만큼 흥분하지 않았으면서도 습관적으로 상대를 돋우려 한다. 석희재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오래 학습한 어떤 다른 이들 덕분에….
알면서도, 알기 때문에 석희재는 쉽게 이성이 마비되는 감각을 겪고 만다. 또한 이제는 저만 독점하고 싶은 상대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충동질 당하고 만다.
“아… 아파!”
“형, 형….”
분장대 테이블에 밀어붙여진 현이 작게 신음했다. 홀리는 기분이다. 모자 아래 드러난 머리카락과 귓바퀴를 만져 보다가 석희재는 다시 갈급하게 입을 맞추었다. 이현의 넉넉한 후드 티 안에 쉽게 손을 넣고 목덜미를 빨았다. 좋아하는 체취가 가득했다. 쇄골을 핥으면서 석희재는 이현의 벗은 몸을 보고 싶어 안달했다. 자꾸만 옷을 끌어 올리자 이현이 난감해했다.
“왜? 보여 줘.”
“못 씻었다니까….”
“그게 좋은 거라니까.”
“…네가 핥으면 샤워해야 하잖아.”
몸이 핥아지는 사람의 고충을 생각해 본 적 없던 석희재의 말문이 잠시 막혔다.
“적당히 핥아야지.”
“…….”
석희재는 귀가 더워지는 것을 느꼈다. 부끄러움을 가리기 위해 일단 이현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으나, 제 상기된 얼굴이 뻔히 보였는지 현이 얄밉게 쿡쿡 소리 없이 웃었다. 그러면서 바지 아래로 분명히 형체가 잡힌 곳을 노리고 허리를 앞뒤로 흔들어 자극해 댔다.
저만큼 흥분하지 않았으면서 의도적으로 야한 행동을 해 대는 애인이 조금 원망스러워졌다.
“어… 잘 참네.”
“후우…”
“놔 봐. 만져 줄게.”
석희재는 제 바지로 뻗어 오는 이현의 손길을 물리치고 자신이 먼저 이현의 바지 안으로 손을 넣었다. 허리가 고무줄로 된 트레이닝복이라 난이도가 낮았다. 당황하는 이현의 얼굴을 모른 척하며 속옷으로 손을 넣고 크게 주물러 주었다. 여유로운 척하지만 그 역시 잔뜩 흥분해 있었다. 갑자기 사랑스러움을 느껴서 석희재는 키스를 여러 번 퍼붓고 그의 바지를 내렸다.
“잠깐.”
이현이 손을 내려 옷을 벗기려는 손을 막았다. 흥분을 꾹 눌러 참은 석희재는 그저 시선으로 물음을 던졌다.
“먼저 해 줄게.”
“나도 만져 주고 싶어.”
“아… 나만 흥분하는 거 별로야.”
그렇게 말하는 이현의 얼굴은 조금 심드렁했다. 그러니까 그의 말뜻은, 상대를 공략하고 밀어붙이는 쪽이 좋지 일방적으로 애무를 당하는 건 흥미 없다는 소리였다. 일전에도 귀에 못이 박히게 들었던 그의 취향이다. 하지만 석희재는 다른 이들과 똑같은 방법을 반복하고 싶지는 않았다.
“형, 타투 많이 아물었어?”
갑자기 화제를 바꾸자 이현이 의아한 눈초리를 했다.
“타투?”
“조금만 옷 내려 주면 안 돼? 보고 싶어.”
“아… 그래.”
이현은 귀를 만지작거리다가 스스로 바지를 내렸다.
먹혔다. 석희재의 심장이 두근두근했다. 가끔 어떤 목소리로, 어떤 표정으로 졸라 대면 이현은 누그러진 얼굴로 청을 들어주고는 했다.
“이제 아프진 않지?”
“응.”
석희재는 이현의 드러난 허벅지 위, 딱지가 앉아 빠르게 아물고 있는 타투를 손가락으로 여러 번 살살 쓰다듬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입을 맞추자 이현이 경계심이 풀린 얼굴로 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석희재는 아까보다 훨씬 수월하게 이현의 것을 애무해 줄 수 있었다.
“아, 흣….”
조금 거친 듯한 손길로, 다정한 키스를 함께 해 주면서.
“읏… 으음… 흑, 희재야. 아….”
다행스럽게도 이현은 쉽게 흥분에 몸을 맡겼다. 이현이 절정에 다다르기 전, 석희재는 제 바지도 내리고 두 성기를 함께 비볐다. 분장실 테이블에 완전히 걸터앉은 이현의 다리를 들어 올려 바지 사이로 드러난 회음에 제 성기를 마찰시켰다. 절정에 다다를수록 석희재는 삽입하는 흉내를 냈다. 아래를 단단히 붙이고 강한 힘으로 치받자 이현이 더욱 흥분했다. 안쪽 허벅지가 덜덜 떨리는 것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읏, 희재, 야, 아, 흐윽!”
“현아, 흣, 이현….”
이름을 부르는 사이사이 석희재는 이현에게 아주 여러 번 입을 맞췄다. 쪽, 쪽 소리가 나는 귀여운 키스와 달리 옴짝달싹 못하게 허벅지를 모아 잡고 허리를 부딪치자 현이 도리질을 쳤다. 분장실 거울이 힘을 못 이기고 덜컹덜컹 소리를 냈다.
“아… 아! 희재… 야!”
사정하는 순간 이현은 석희재의 등을 할퀴듯이 그러쥐었다. 석희재 역시 그 아귀힘에 전율하면서 절정에 다다랐다.
“헉… 헉….”
부둥켜안은 채로 숨을 몰아쉬었다. 진정하는 데에도 퍽 오래 걸렸다. 그걸로 미루어 석희재는 자신이 지나치게 흥분했다는 것을 알았다. 삽입도 없었는데.
잠시 후 이현이 석희재의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여운으로 아직도 떠는 등을 살살 어루만져 주기도 했다. 이제 정신 차리고 일어나라는 뜻이다.
“희재야. 여기, 분장실 서랍 안에 물티슈 있거든.”
“형….”
“옷에 묻겠다. 내가 닦아 줄게.”
아무래도 일을 하던 중이라서 그런지 이현은 뒤처리도 서둘렀다. 후희는 사치였다. 직후, 석희재는 이현이 닦아 줄 때 다시 단단해지는 기둥 때문에 곤란함을 느꼈다. 하지만 눈치로 봐서 두 번째는 정말로 허락해 주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에 참아야 했다.
더 힘들었던 건 스스로 제 아래를 닦아 내는 이현의 모습을 봤을 때였다. 생각지도 못한 시각적 자극에 또다시 아래가 불끈거렸다. 성기에서 심장이라도 뛰는 듯한 감각에 석희재는 잠시 벽에 이마를 대고 섰다. 혼자 심호흡을 반복하는 석희재의 뒷모습을 보며 이현이 소리 내어 웃었다.
“언제 호출할지 모르니까… 미안.”
“괜찮아. 형 탓도 아닌데….”
이현은 작은 매트리스 위에 주저앉으며 제 옆자리를 손바닥으로 탁탁 두들겼다.
“우리 나가지 말고 여기 있자. 리허설은 모니터로 보면 돼.”
이현이 티브이의 전원을 켜자 화면 안에서 무대 위의 모습이 흘러나왔다. 한창 1막을 진행하는 중이었다.
“형. 어제는 여기서 잤어?”
“응.”
“이불도 없는데?”
“어쩔 수 없지. 극장 의자보다는 나으니까.”
매트리스는 비닐도 벗기지 않은 새것이었다. 금방 사서 그런 줄 알았더니 사기는 3년 전에 샀는데 구두쇠인 대표가 세탁이 번거롭다며 비닐이 찢어질 때까지 이대로 쓰라고 했단다. 이현이 투덜댔다. 석희재는 비닐 위에서 바스락거리며 불편하게 잠들었을 이현을 상상하고는 울적해졌다.
“내가 새로 사 줄게. 그냥 비닐은 뜯어 버리면 안 돼?”
진심이었는데, 이현은 진지하게 듣지 않는 모양새였다.
“알잖아. 나 아무 데서나 잘 자는 거.”
“그래도… 리허설 내내 계속 이렇게 바빠?”
“아마도? 컴매 뽑아 놨으면 퇴근이라도 했을 텐데.”
“컴매가 뭐야?”
“컴퍼니 매니저.”
컴퍼니 매니저는 또 뭘까. 극장 살림이나 경영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던 석희재는 조금 더 자세한 설명을 기대했다.
“면접 세 번인가 봤는데 셋 다 안 한다 그러더라.”
이현이 피곤한 얼굴로 눈을 비볐다. 그러더니 마침 생각났다는 듯이 말을 보탰다.
“맞다. 희재야. 너 주변에 알바 필요한 친구 없어? 성격 좋고 싹싹한. 월 백만 원 정도 줄 거고.”
사실 대표는 백만 원에 합의하지 않았지만 이현은 올려 말했다. 나머지는 제가 메꾸거나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으로.
“무슨 일인데?”
“컴퍼니 매니저는 그러니까, 배우랑 같이 극장 콜 시간에 출근해서 여기 지키는 건데 일단 할 일이… 공연 끝나면 세탁물들 세탁소에 보내기. 밥차나 서포트, 도시락 들어오는 거 챙기기. 배우들 초대권 요청 티켓 팀에 전달하고, 분장실마다 비품 떨어지면 챙겨 주고.”
“음….”
“아, 쉽게 말하면 내 부하 직원 같은 거야. 내 일 좀 도와줄 사람.”
“그거 하면 형이랑 같이 일해?”
“아무래도 그렇지.”
“…….”
침묵하는 석희재의 무뚝뚝한 얼굴. 고개를 기울여 그 표정을 들여다본 이현이 픽 웃었다.
“왜, 네가 하고 싶냐?”
“응… 배우 말고 그거나 할걸.”
“웃기지 말고, 진짜.”
“농담 아닌데.”
잠시 후, 이현은 무대 감독의 호출을 받았다. 1막이 끝난 직후 2막 시작 전에 막간 회의가 있는 모양이었다. 컴퍼니 룸을 나서기 전에 석희재는 이현으로부터 비닐에 포장된 새 후드 티를 하나 받았다. 어깨 때문에 가장 큰 사이즈가 낫겠다고, 이현보다 두 사이즈나 큰 것이었다.
함께 컴퍼니 룸을 나선 순간, 기다란 복도 저편에서 정적을 깨는 소음이 들려왔다. 1막에 출연한 배우들이 의상을 입고 마이크를 찬 채로 무리 지어 걸어오고 있었다. 막 무대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기운이 다르다. 공간을 넓게 쓰던 습관이 남아서 그런지 보폭도 크고 목소리도 평소보다 훨씬 커진다. 그런 이들이 잔뜩 모여 있으니 에너지가 남달랐다.
석희재는 누구보다도 빨리 그중에서 한지우를 발견했다. 저도 모르게 이현을 숨기듯 섰지만 당연하게도 완전히 가리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어, 현이랑 후배님. 둘이 뭐 했어?”
그 말에 석희재는 흠칫 굳었다. 저지른 일이 있으니 찔리는 것이다.
같이 있네, 도 아니고 뭐 했어. 미묘한 말이었다. 앞으로 나선 것은 석희재보다는 조금은 노련한 이현 쪽이었다.
“아, 컴매 뽑으려고 희재한테 물어봤어요. 저는 주변에 알바할 만한 대학생이 있을 나이대가 아니잖아요.”
제법 그럴듯한 변명을 하며 이현이 멋쩍게 웃자 한지우는 짐짓 진지한 얼굴로 성큼 다가왔다.
“컴매 필요해? 우리 아직도 컴매가 없었나? 아… 진짜 그러네.”
그렇게 다가온 한지우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이현을 낚아채 갔다. 친근한 척 어깨에 팔을 올린 것이 거슬렸다. 뒤에 선 석희재를 의식한 듯이 이현이 간격을 벌리며 말했다.
“선배, 저 안 씻었는데요.”
“어디 보자. 아무 냄새 안 나는데?”
과장한 태도로 목덜미에 불쑥 고개를 기울여 킁킁거리는 모습에 이현은 어설피 웃었다. 두 사람은 극장 뒷문 출입구로 함께 사라졌다. 한지우의 성량 좋은 목소리가 복도에 왕왕 울리다 완전히 끊겼다. 그들이 사라질 때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석희재는 표정 관리에 완전히 실패했다.
***
한지우와 그렇게 사라진 뒤로 이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석희재는 혼자서 컴퍼니 룸에 앉아 모니터로 2막을 지켜보며 애인을 기다리다가, 조금 전에 다시 로비를 통해 객석으로 들어와 무료하게 공연을 감상하던 중이었다.
웬만한 배우와 스태프들이 객석 여기저기에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었으나 그중에 이현은 없었다. 딱 한 가지 위안이 되는 것은 한지우가 2막을 위해 무대 위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그 둘이 같이 있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한 석희재는 약한 안도감을 느꼈다.
「피곤하면 먼저 집으로 가」오후 9:41
드레스 리허설이 거의 다 끝나가는 중이었다. 객석에 느슨하게 기대어 앉아 있던 석희재는 도착한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현에게 온 것이었다.
끝날 때가 다 되어 온 연락에 석희재는 방금 전까지의 기분도 잊고 그저 반가워했다. 자세를 조금 고쳐앉으며 얼른 답장을 보냈다.
「왜? 늦게 끝나?」오후 9:41
하지만 그에 대한 답은 오지 않았다.
석희재는 몸을 낮춰 객석 사이를 빠져나왔다. 기다란 사이 복도를 지나쳐 로비 출입구 문을 열었다. 완전히 빛을 차단하는 묵직한 문을 두 번 열고 나가자 환한 로비가 눈에 들어왔다. 다리 길이 때문에 낮은 의자에 몸을 구겨 넣고 있어서인지 온몸이 찌뿌둥했다.
석희재는 전화를 걸어 보았다. 이현은 받지 않았다.
미간이 찌푸려졌다.
「많이 바빠? 오늘도 집에 못 와?」오후 9:49
「로비에서 좀 기다릴게」오후 9:49
「많이 늦는 거 아니면 같이 들어가자」오후 9:49
상대가 읽지 않는 메시지를 뚫어져라 보면서 석희재는 로비 벤치에 앉았다. 컴퍼니 룸과 다르게 로비 모니터는 꺼져 있었다. 무척 적막했다.
다시 객석 안으로 향하자 커튼콜 음악이 들려왔다. 객석 조명까지 환하게 불이 들어왔다. 수십 명에 이르는 스태프들과 다른 배우들이 무대 위, 오늘의 배우들을 보면서 박수를 쳤다. 석희재도 기계적으로 박수를 보냈다. 근처에 서 있던 조연출이 무대 감독에게 전체 러닝타임을 보고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조명 감독이 큐 사이에 빠져 있던 조명을 발견한 듯했다.
리허설이 끝난 직후 더 분주해지는 스태프들을 뒤로하고 석희재는 다시 백스테이지로 향했다. 손에는 아까 현에게 받은 후드 티와 오늘 가져온 백팩이 들려 있었다.
이현을 찾아 고개를 두리번거렸지만 다가온 것은 반갑지 않은 사람이었다.
“연애 상담 안 해 줘도 알아서 척척 잘하는 후배님.”
한지우가 어깨를 두드리며 싱긋 웃었다. 알아듣기 어려운 인사였다.
“안녕하세요.”
그게 무슨 말이냐, 어디서 뭘 들은 거냐 따져 묻고 싶었지만…. 석희재는 언제나 그와 저의 사이를 신경 쓰던 이현을 떠올리면서 공손히 눈을 내리깔았다.
“누구한테 들으셨어요?”
“들어야 아나? 딱 보면 알죠.”
다 알고 있다는 듯이 말하는 그가 미심쩍었지만 그래도 석희재는 대단치 않게 넘겼다. 제 인간관계가 좁아서 그렇지 저가 연애 중인 걸 아는 사람이 이미 몇 된다. 일단 유나연이 있다. 소문을 딱히 단속하지 않았으니 날개 달린 것처럼 퍼져 나갔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그가 어떻게 알게 됐는지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석희재는 공연 직후의 소란스러운 분장실 복도를 이유 없이 한 번 둘러보았다. 자리를 피하고 싶다는 뉘앙스였다.
딱히 싫어하는 티는 내지 않았지만 살갑게 굴 자신도 없었다. 이현은 ‘형님, 형님.’ 하며 조금 더 아부해야 한다고 했던가. 하지만 그런 식으로 행동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으니 차라리 자리를 피하는 게 나을 듯하다.
“선배님, 그럼 저는 가 보겠습니다.”
그때였다. 미소 띤 얼굴로 친절하게 석희재의 등을 두드리며 한지우가 말했다.
“현이는 오늘 집에 못 가.”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
석희재는 뒤돌았다.
분장을 지워 내 화장기 없는 맨얼굴에 화려한 의상을 걸친 한지우는 묘하게 비일상적인 분위기를 내뿜었다. 그의 입에서 맥락 없이 나온 이현의 이름 역시 그랬다.
뭔가를 알아서 이러는 게 아닐 거라고 상식적인 수준의 추측을 해 보지만, 심장이 왠지 불길하게 뛰었다.
“네… 저도 알아요.”
석희재는 애써 고분고분 답했다. 자신이 핸드폰을 못 보던 사이 이현에게 답이 와 있을 거라고 믿으며.
“그래요? 내가 괜히 말했네.”
“…….”
“모를 것 같아서 알려 준 건데.”
“…….”
“그럼 조심해서 가요. 내일은 후배님 차례네. 리허설 잘 볼게요.”
그리고 한지우는 주연 배우 분장실로 사라졌다.
그가 문을 닫고 들어간 분장실 안에서 왁자지껄한 웃음이 터졌다. 먼저 안에 들어가 있던 다른 배우들과 농담을 나누는 모양이었다. 석희재는 가방끈을 꼭 쥐었다. 싫어하는 사람이 웃는 소리가 이토록 듣기 싫을 줄은 몰랐다.
현을 빨리 보고 싶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석희재는 핸드폰을 급히 다시 확인했다.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백스테이지를 완전히 빠져나오기 전에 컴퍼니 룸에 한 번 더 들렀다. 그곳 역시 텅 비어 아무도 없었다.
아까 이현은 한지우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을까? 석희재가 판단하기에 그 두 사람은 사적인 대화가 길게 가능한 사이는 아니었다. 공통점도 없고 성향도 완전히 다르다. 한지우가 왜 하필 이현에게 끌렸는지는 의문이지만 아무튼 몸정 이상의 친분을 쌓기는 어려워 보인다는 소리다.
몸정이라….
그 부분에 관해서는 이현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약속해 준 것이 있으니까.
석희재는 그렇게 생각하며 극장을 나섰다. 한지우와 다시 마주치고 싶지 않았기에 극장 내에서 이현을 기다리는 것은 꺼려졌다. 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차에 올라탄 석희재는 박 팀장에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주차장에서 죽치고 있다가 삼십 분 후에야 겨우 출발했다. 그때까지도 이현은 아무런 답이 없었다.
제집에서 씻고 간단히 다시 외출할 채비를 마친 석희재는 택시를 타고 이현의 집으로 향했다. 최근 박 팀장이 자신과 이현 사이의 지나친 친분을 이상하게 여기기 시작했다. 덕분에 이런 수고를 더한 것이다.
이현의 집에 도착한 석희재는 언제나처럼 그가 돌보지 못한 집을 치우고는 그를 기다렸다. 새벽 한 시, 그리고 두 시가 넘어가자 지나친 기다림이 약간의 짜증으로, 또 걱정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연락 한 통 주지 않는 그가 야속했다가 진짜 사고라도 당한 게 아닌가 싶어 끔찍한 기분에 시달렸다.
한지우의 말이 틀리기를 바랐지만 이현은 정말로 그날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
드레스 리허설 둘째 날, 오늘은 드디어 석희재가 무대에 오르는 날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석희재는 어떤 기대감을 품고 이날을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답지 않게 긴장도 했다. 아무리 이현 때문에 시작한 일이라 해도 인생의 큰 변곡점이 생기는 순간이라 심중이 복잡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현이 집에 돌아오면 제 기분이 어떤지 털어놓고 싶었다. 형이 보는 앞이니까 정말 잘하고 싶다고, 또 형이 내 모습을 보며 조금이라도 반했으면 좋겠다고 솔직하게 말하고 싶었다. 실제로 이현은 시츠프로브 당시 바이올린을 켜는 절 보고는 한지우도 나 몰라라 하고 저에게만 집중해 준 적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그 기분 좋은 기대감은 어젯밤 산산조각이 났다. 석희재는 밤새 주인 없는 집에서 걱정과 원망으로 제대로 잠도 자지 못했다.
설렘이 거세되자 이제 남은 것은 불편한 긴장감뿐이었다.
결국 석희재는 박 팀장이 저를 데리러 오기 전 이현의 머리카락도 보지 못하고 아침 일찍 제 자택으로 돌아갔다. 다시 침대에 누워 자는 척을 하면서, 왜 이런 짓까지 하고 있는지 약한 허무함에 시달렸다. 박 팀장을 만났을 때 석희재는 밤새 잠을 못 이뤄 신경이 예민했고, 이현을 만나지 못한 탈력감을 온몸에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박 팀장은 그것을 단순히 피로감으로 이해한 듯했다.
“조금 더 자면 좋은데, 미안하다. 희재야. 그래도 오늘 영상이랑 사진이랑 촬영 팀이 많이 들어오니까 예쁘게 하고 가면 좋잖아. 가서 메이크업 받으면서 좀 자.”
“…극장에도 분장 팀 있잖아요.”
“그래도 숍에 가서 받는 게 퀄리티가 낫지.”
석희재는 소리 없이 한숨을 쉬었다. 콜보다 더 이른 시간에 집을 나서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공식적인 촬영은 없지만 추후 홍보용으로 쓰일 기록 영상과 사진 촬영이 있다는 이유로 회사는 숍 스케줄을 잡았다.
조금 더 완벽한 상태로 저를 포장해서 세상에 내놓고 싶어 하는 것은 회사의 의견이었고, 다행스럽게도 회사는 그런 류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대중교통으로 출근하고, 외부 인터뷰조차 극장 분장 팀에게 부탁하는 소속 없는 배우들을 생각하면 이런 걸로 피곤하다고 말하는 건 아주 배부른 소리라는 걸 안다.
메이크업을 받고 머리를 만지면서 석희재는 다시 이현에게 연락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지?」오전 8:57
「연락 한 통만 줘」오전 8:57
「걱정돼」오전 9:05
입술 안쪽을 천천히 깨물던 석희재는 이어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전화가 뚝 끊어졌다.
“하….”
한숨을 내쉬자 머리를 만져 주던 스태프의 말수가 눈에 띄게 줄었다. 석희재는 바닥을 응시한 채로 생각했다.
내가 너무 보채는 건가?
그래도 연락 정도는 해 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궁금해하는 게 잘못은 아니잖아.
석희재는 기시감을 느꼈다. 일전에도 몇 번 이런 기분에 시달렸던 적이 있던 것 같다. 바쁘다는 이유로 집에 들어오지 않는 이현과, 그를 기약 없이 기다려야 했던 저 자신. 인이 박이도록 익숙한 상황이었지만 그래서 더 싫었다.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원점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이해를 못 하겠어.’
때문에 숍을 떠나 극장으로 향할 때 석희재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매니저인 박 팀장마저 석희재의 눈치를 볼 정도로. 일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좀 깐깐했을 뿐 막상 시작한 이후에는 불평불만 없던 석희재가 그토록 화가 난 것은 그 역시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이유를 추측할 수도 없었다. 박 팀장은 그저 ‘중요한 스케줄을 앞둔 연예인 특유의 과민함’이라고 넘겨 버렸다.
팔짱을 낀 채로 말없이 창밖을 응시하는 석희재의 얼굴에는 무섭도록 표정이 없었다.
“저기 이 피디님 아닌가.”
주차하던 박 팀장의 목소리에 석희재는 반사적으로 스르륵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극장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디요?”
“저기. 아, 넌 안 보이겠구나. 사이드미러로 봤거든.”
석희재는 완전히 고개를 틀어 뒤편을 보려고 했다. 그러나 차의 각이 바뀌며 이현이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곳은 더더욱 멀어지고 말았다.
“내려서 인사드려… 어?”
사이드 브레이크를 채우던 박 팀장의 목소리가 미묘했다. 그는 허허, 하고 털털한 목소리로 웃더니 내릴 채비를 하던 석희재를 저지시켰다.
“잠깐만, 조금만 있어 봐라. 희재야.”
“네?”
“지금 나가면 안 될 것 같다.”
그 말에 석희재는 무심코 창으로 시선을 돌렸다.
거기에는 정말로 어젯밤부터 간절히 기다리던 이현이 서 있었다. 석희재는 일단 그가 다친 데가 없어 보인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물론 사지가 저렇게 멀쩡한데 연락을 못 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은 하지만… 아무튼 그런 것은 나중 문제로 넘기며.
그런데 이현은 혼자가 아니었다. 곁에 누군가가 서 있었다. 차에 가린 누군가의 모습은 얼마 지나지 않아 드러났다.
한지우였다.
그가 언제나처럼 이현의 어깨를 감쌌다. 그러더니 퍽 친근하게 귀엣말을 해 댄다.
왜?
왜 저 둘이 같이 있지?
어제는 왜 안 들어왔고….
한지우는 어떻게 형이 안 들어갈 줄 알았던 거지.
석희재가 제 안에서 울컥, 치미는 질투를 인지하기도 전이었다. 상상보다 더한 일이 일어났다. 한지우가 이현의 귓바퀴를 깨물었던 것이다. 이어 드러난 목덜미에 입을 맞추었다. 아주 오래도록. 한때 저가 이현의 목에 키스 마크를 남기던 것처럼, 그게 어떤 의미인지 꼭 아는 것처럼.
이현은 거부도 하지 않았다.
그건 너무 비현실적인 광경이라 석희재는 제 눈으로 본 것이 진짜인지 믿을 수가 없었다.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아니야. 내가 잘못 봤어.
질투에 미쳐 가나?
석희재는 좌석에 얌전히 돌아앉으며 심호흡을 했다. 그렇게 믿고 싶지 않은 풍경을 부정할 때였다. 박 팀장이 눈치 없이 쐐기를 박았다.
“어이쿠, 방금 그건 못 본 척 해 드려야겠다.”
“…….”
“우리는 좀 이따 나가자. 그리고 희재야. 일하다 보면 은근히 많이 마주친다. 너무 이상하게 보지 말고 신기해하지도 마. 이 피디님이 저런 줄은 나도 몰랐지만… 희재야?”
애인이 다른 남자에게 희롱당하고 있는데,
마치 타인처럼 무심하게 등을 돌려야 하는 기분이란.
순간이 영원 같았다. 체온이 뚝, 뚝 떨어지는 몸의 변화가 직접 느껴질 정도였다. 석희재는 창백하게 질린 손톱 끝을 바라보다가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지우와 이현은 함께 출연자 전용 출입구로 사라졌다. 끝까지 붙어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따끔하게 박혔다. 주차장에 들어와 있는 이 밴이 누구 것인지 알면서도 이현은 고개 한 번 돌리지 않았다.
석희재는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연결음이 들리기도 전에 전화가 끊겼다. 차단되었다는 소리다.
“희재야. 그런데 너도 알았어?”
“…….”
“몰랐구나.”
석희재의 굳은 얼굴을 보며 눈치를 살핀 박 팀장은 혼자 결론을 내렸다. 친하게 지내던 피디의 사생활을 엿보고 충격받은 모양이라고.
“분장 안 받아도 되니까 밴에서 좀 쉴래? 마이크 테스트 할 때 부를게.”
석희재는 대답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박 팀장은 먼저 차에서 내렸다. 탁, 운전석의 문이 닫히고 석희재는 정적 속에 혼자 남겨졌다.
변명도 하지 않은 이현의 갑작스러운 외박. 게다가 그는 연락까지 차단했다.
석희재는 자신이 이현에게 무슨 잘못이라도 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혹시라도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일이 있는지.
너무 연락을 많이 했나. 하지만 그마저도 귀찮아할까 봐 많이 참았다가 보낸 것이다. 그리고 언제나 그 정도는 했던 것 같다. 특별히 질려 할 이유가 없었다.
잡히는 게 없었기 때문에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그러나 생각할수록 더더욱 혼란스러워졌다. 헤어지기 직전까지는 제법 분위기가 좋았다. 아직도 그와 나누던 달콤한 입맞춤의 감각이 선연하다.
샤워를 못 했다고 난감해하던 이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싫은데 계속 엉겨 붙어서 그랬을까? 하지만 자신이 달라붙는 게 정말 싫었다면 그는 딱 잘라 냈을 것이다. 흥분을 삼키며 유사 섹스를 충동질하던 얼굴이나, 제 몸에 옷을 꼼꼼히 대어 보며 스태프 복의 사이즈를 측정해 주던 집중한 얼굴도 떠올랐다.
좋았는데, 좋았던 것 같은데….
정처 없이 헤매던 눈동자를 거두고, 석희재는 문득 밴 안의 거울을 올려 제 얼굴을 꼼꼼히 관찰했다. 이마를 가리지 않게 자연스럽게 넘겨서 스프레이를 뿌려 고정한 앞머리 아래로 아주 익숙한 제 얼굴이 보였다. 피부는 흠결 없이 희고 눈가와 입에는 붉은 혈색이 돌았다.
나쁘지는 않지만, 메이크업을 마친 상태의 얼굴이라 그런지도 모르겠다. 오늘만큼 예쁘지 않은 얼굴로 잔뜩 흥분해서 이현에게 달려들던 제 모습이 추해 보였던 건 아닌지 걱정이 되었다. 권태기가 오면 아주 사소한 모습에도 정이 떨어진다고 들었다. 하다못해 먹는 모습만으로도.
권태기?
문득 떠올린 단어에 석희재의 마음이 금세 무거워졌다. 하지만 그것도 잘 납득이 안 되었다. 이현은 속마음을 꾸며 내지 못하는 사람이다. 그의 마음이 식어 가고 있다면 자신이 가장 먼저 알았을 것이다.
‘이유라도 말해 주지….’
석희재는 위축되어서 다시 생각에 잠겼다. 이현에게 메시지를 남기려다가 그를 더 질리게 만들까 봐 그만두었다.
참으면 된다. 이현이 저를 떠올릴 여유가 생길 때까지. 그는 충동적이지만 책임감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성가시게 하지 않고 기다리다 보면 언제 무시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다가올 것이고, 걱정이 무색하게 제 행동의 이유를 설명해 줄 것이다. 지금까지 언제나 그랬듯이 말이다.
그 사이 석희재는 이미 일어난 일, 한지우의 도를 넘은 희롱에 대해서는 함부로 추측하지 않으려고 애썼다. 지난밤 두 사람이 함께 있었을지 모른다는 사실도 넘겨짚지 않으려고 했다. 무언가 말 못 할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사랑에 있어서 언제나 약자인 석희재는 그렇게 현재 상황을 합리화했다.
박 팀장은 약 40분 후에 전화를 걸어왔다. 리허설 전에 연출 노트가 있다고 했다. 석희재는 먹먹한 마음을 삼켜 붉어진 눈가를 한 채 출연자 입구로 향했다.
***
“희재는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이네. 긴장했어?”
노트를 마친 연출이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가 딱 저를 짚어 낸 순간 모이는 시선에 석희재는 내심 흠칫했다. 연출 나름의 편애였지만, 실제로 컨디션이 좋지 않았던 석희재는 그것을 사실 적시라고 생각했다. ‘죄송합니다’라고 사과를 했더니 연출은 너털웃음을 지으며 사라졌다.
1막 리허설을 위해 모두 소대로 흩어지던 와중에 유나연 역시 무슨 일이 있느냐고 걱정스럽게 물어 왔다. 석희재는 의아해졌다.
“그게 티가 나요?”
“응. 이렇게 긴장한 거 처음 봐요. 얼굴이 창백하잖아. 리허설 가지고 이렇게 떨면 개막날은 어떻게 하려고 그래.”
“…그게 아니라.”
말을 다 하기도 전에 곁으로 누군가 유령처럼 쓱 지나쳐 갔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그 누군가를 시선으로 쫓았다.
무대 위 조명이 푸르스름하게 새어든 소대 위에서 석희재를 지나친 것은 분명 이현이었다. 밤눈이 어두웠지만 하도 간절해서인지 모자 아래 드러난 흰 턱선만으로 알았다. 그도 분명 저를 보았을 텐데 이현은 그림자도 남기지 않고 백스테이지로 빠르게 걸어갔다. 마치 도망이라도 치는 것처럼.
그뿐만이 아니었다. 분명 같은 공간에 있는데도 이현은 제게 알은체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의상을 갈아입고 마이크를 체크할 때에도, 인터미션 중 좁은 복도에서 정면으로 마주쳤을 때도. 심지어 무대 위에 올라 스태프들이 듬성듬성 앉은 객석에서 이현을 발견했을 때도 그는 석희재의 눈을 피했다.
무슨 정신인지 모르고 리허설을 마쳤다.
그때 겨우 확신했다. 이현은 자신을 피하고 있었다.
대체 왜?
커튼콜을 마치고도 음악은 오래도록 이어졌다. 관객들이 퇴장할 때에 흘러나오는 음악이 백스테이지까지 흘러들어 왔다. ‘수고하셨습니다!’ 공연을 마친 직후의 활기도 계단으로 거슬러 올라왔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경계와도 같은 소란 속에서, 석희재는 터벅터벅,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분장실로 향하던 중, 석희재는 복도 여기저기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배우와 앙상블들을 눈여겨보았다. 혹시나 어딘가에 이현이 끼어 있을까 봐. 그러나 찾는 이는 보이지 않았고, 가끔 눈이 마주치는 이들이 가볍게 묵례를 했을 뿐이다.
수고했다거나 잘했다며 살가운 인사를 건네는 이들은 없었다.
이현과의 관계에 집중해 다른 배우들과의 사교에 소홀한 탓이다. 반면, 석희재는 반사적으로 어제 한지우를 반기던 동료 배우들의 반응을 떠올랐다. 한 번도 아쉽다고 생각해 본 적 없던 이들의 성의 없는 인사가 새삼 사무치는 이유는… 외롭기 때문이 아닐까. 이현에게서 줄곧 무시당한 것이 석희재를 약하게 만들었다.
석희재는 배정받은 분장실로 들어갔다. 겨우 혼자가 되자 털썩 주저앉아서 참았던 한숨을 깊이 내쉬었다.
“하아….”
분장실 거울 안에 얼빠진 표정의 남자가 하나 보였다. 그저 주인의 처분만 처량히 기다리고 있는 개 같다.
「나 리허설 끝났어」오후 5:25
「형이 보기에는 어때? 형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오후 5:27
몇 번이나 쓰고 지우고, 쓰고 지우고를 반복한 메시지였다. ‘오늘 형 집에 가서 기다려도 돼?’라고 쓰고 있는 그 사이에 연출이 들어와서 격려를 하고 나갔다. 동선은 깔끔하지만 약간 외운 것처럼 움직이는 느낌이 있으니 조금 더 자연스러워졌으면 좋겠다는 노트였다. 석희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 연출과 배턴 터치를 하며 들어온 것은 박 팀장이었다.
“수고했다. 희재야. 동선이 하도 바뀌어서 걱정했는데 깔끔하더라. 오늘 것도 캠으로 찍어 놨어. 가져가서 집에서 한 번 체크해 봐.”
석희재는 박 팀장이 내민 캠코더를 묵묵히 받아 들었다.
“약속은 따로 없지?”
박 팀장이 시끌벅적한 복도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에게서 동료 배우들과 여간해서는 어울리지 않는 석희재를 우려하는 표정이 살짝 엿보였다.
“잘됐네. 피곤할 테니까 얼른 가자.”
“…….”
“공연하면서 술통에 빠지면 답 없어. 한 번 가면 계속 끌려다니고, 아주 골치 아파. 친구 많은 게 대수냐. 연예인이 성공하면 할수록 애매하게 친한 친구들은 독이 돼. 자기들 아쉬울 때 욕이나 하고 말야.”
이현이 말해 준 적이 있다. 공연이 끝나고 분장실에 드나드는 이들로 배우의 인맥과 현재 위치를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다고. 오늘 석희재의 분장실을 방문한 건 연출뿐이었다. 배우들 사이에서 인망은 꽝이라는 소리다.
그도 그럴 것이 연출과 제작사가 대형 신인인 석희재를 싸고돈다는 말이 하도 파다했다. 그건 이제 소문이 아니라 기정사실처럼 받아들여졌다. CF로 눈도장부터 찍은 걸 보면 대단한 인물이 스폰서로 붙어 있다는 소문도 돌았고, 곧 매체로 활동 영역을 옮길 게 분명한 석희재에게 벽을 느끼는 이들도 많았다. 거기에 불을 붙인 건 석희재 역시 대놓고 연출이나 이 피디같이 ‘득 되는 인물’들 하고만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점이었다. 요령이 부족한 석희재는 그런 식으로 오해를 쌓아 가고 있었다.
“희재 씨 아직 안 갔어요?”
그때 분장실 안으로 누군가 빼꼼 얼굴을 내밀었다. 유나연이었다.
박 팀장은 인맥 따위 연예인의 성공에 별 도움이 안 된다고 말했으면서도 퍽 반갑게 그녀를 맞이했다.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던 석희재가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박 팀장이 저는 밴에 있겠다며 둘만 남기고 자리를 떴다.
“계속 표정이 안 좋아서 신경 쓰이더라고요. 다 같이 기분전환… 술 마시러 안 갈래요?”
유나연이 잔을 꺾는 제스처를 하며 물었다. 석희재는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항상 신경 써주시는데 죄송해요. 그런데 오늘은 정말… 기분이 아니에요.”
“그럴 줄 알았어요. 그래도 물어보지도 않으면 좀 그렇잖아.”
“저 리허설 못했죠.”
“아니? 잘하던데 뭐. 무대에 익숙하지 않아서 그렇지. 그 정도면 엄청 잘했어요. 원래 첫공 때는 완성도가 잘 안 나와요.”
“엉망이었어요.”
“아니라니까. 나 신인 때는 더 했어.”
친절한 위로에 마음이 약해진다. 석희재는 누구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었다. 이 갑갑한 마음을.
“왜 컨디션 안 좋은지 듣고 비웃지 마세요.”
“헉… 뭔데요?”
유나연이 눈을 크게 뜨며 의자를 들고 왔다. 접이식 의자를 등받이가 앞으로 가게 거꾸로 펴서 팔을 기대고 앉는다. 운을 떼놓고도 석희재는 한참 더 갈등했다.
결국 정보를 거르고 거르고 걸러서 말해 본다.
“어제부터 애인이 연락이 안 돼요.”
“아, 뭐야. 그런 거야?”
딱 스물두 살이 할 법한 고민이라고 생각했는지 유나연이 눈을 흘겼다. 대수롭지 않게 넘기는 유나연의 반응에 석희재는 고개를 떨궜다.
“…저도 알아요. 한심한 거.”
“아니… 아니, 내 말은… 그래! 아, 뭐 충분히 풀죽을 수 있지.”
“사실은.”
석희재는 갈등하며 입술을 축였다.
“다른 남자랑 있었던 것 같아요.”
유나연이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경악한 얼굴이다. ‘미친 거 아냐!’ 그 표정에 석희재는 다시 이현의 편을 들고 싶어졌다.
“정확한 건 아니에요. 그냥 추측이에요. 제가 질투심이 많아서….”
자세한 정황을 캐물은 유나연이 간단히 결론을 내렸다.
“그 사람 쓰레기야.”
팔짱을 끼고 단호하게 내뱉는 말에 석희재는 울컥했다.
“희재 씨가 그 사람 너무 좋아하니까 변호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는데 그래도 너무한 건 너무한 거. 솔직히 나는 희재 씨 볼지도 모르는 앞에서 딴 남자랑 스킨십 한 거에서 게임 끝이라고 봐요. 완전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희재 씨가 그렇게 싫어하는 사람이랑.”
“…….”
“희재 씨 질투심이 많은 게 아니라 촉이 좋은 건데? 이렇게 될 거 같으니까 계속 주의를 줬겠지. 그런데도 붙어먹은 거 아니에요.”
석희재는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현을 향한 비난을 들을수록 그녀에게 괜히 털어놓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함부로 추측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던 너무나 쉬운 결론이 유나연의 입을 통해 나왔다. 그녀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는 자신이 싫었다.
유나연의 추궁에 석희재는 지푸라기 잡는 심정으로 한 가지 희망에 매달려 보았다.
“어젯밤에 같이 있었다는 보장은 없어요.”
“예?”
그녀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 있는지 아직 제대로 들은 게 아니니까. 나는… 내 애인 배신 안 해요. 나 아니면 누가 믿어 줘요.”
“미치겠네. 지금 희재 씨가 배신당한 거거든요.”
“…….”
“그 사람은 막 흘리고 다니는데 희재 씨는 상상만으로도 배신을 못 하겠어?”
유나연이 천장을 보며 가슴을 쿵, 쳤을 때였다. 바깥에서 분장실을 똑똑,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고 안으로 고개를 들이민 건 다른 앙상블 배우였다. ‘나연아, 지금 이동한대.’ 그녀가 합류하자고 말했던 술자리인 모양이었다. 유나연은 마지막까지 다시 물었다.
“희재 씨도 가자. 이런 날은 술 푸면서 잊어야 돼.”
석희재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 가서 직접… 직접 얘기 좀 해 보려고.”
유나연은 ‘아이고!’ 앓는 소리를 내며 분장실 바깥으로 나갔다.
석희재는 다시 적막 속에 혼자 남겨졌다.
복도를 통해 빠져나가는 배우들의 발걸음 소리, 저들끼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퇴근하는 분장 스태프들의 말소리…. 복도가 완전히 조용해졌을 때 석희재는 겨우 바깥으로 나왔다. 텅 빈 백스테이지를 거슬러 올라갔다. 계단을 저벅저벅 밟고 올라가 소대로 향했다. 객석까지 전부 불이 환하게 들어와 있어 소대 역시 희미하게 밝았다. 어제 이현과 우연히 마주친 배경지 뒤의 철골 구조물 안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도 없었다.
그날도 석희재는 집에 돌아간 직후 도로 택시를 타고 나와 이현의 집으로 향했다. 그의 집 안에서 고립된 채로 쓸쓸히 이현을 기다렸다.
이현은 그날 밤도 돌아오지 않았다.
혼자 이현의 냄새가 묻어 있는 침대 위에서, 석희재는 나쁜 생각을 떨쳐 내려 노력했다.
나는 형 배신 안 해.
모두가 형을 문란하게 보고 함부로 대했다고 했지.
그 사람들은 형을 사랑하지 않아서 그런 거야.
나는 정말로 형을 사랑하니까…. 상상으로도 형을 배신하지 않을 거야.
아무도 그를 모른다. 이현을 제대로 아는 사람은 저뿐이었다. 그와 바라 마지않던 연인 사이가 되면서 주는 것과 보답받는 것의 격차로 괴로운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석희재는 순간순간에 이현의 진심을 분명히 느꼈다. 두 사람은 나아지고 있었다. 석희재는 제 진심을 시험받는 가장 괴로운 순간에도 그렇게 믿었다.
***
결국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한 채로 드레스 리허설이 종료되었다.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수고하셨습니다. 내일 첫공인 분들은 컨디션 관리 잘하시고요. 오늘 술은 조금 자제하시고.”
연출의 말에 무대와 객석에서 왁자지껄 웃음이 터졌다.
“시파티는 첫공이 끝난 직후입니다. 장소 공지는 그날 할게요.”
그리고 마이크를 끈 연출이 곁에 서 있는 사람에게 몸을 기울였다. 실루엣만 봐도 알 수 있었다. 테크 뒤에 연출과 나란히 서 있는 것은 이현이었다.
석희재는 멀어서 보이지 않는 이현의 얼굴을 한참이나 살폈다. 눌러쓴 모자 아래 얼굴이 얼마나 피곤에 절어 있는지, 입술을 가리듯 턱을 넓게 괸 손마디마저 바싹 마른 것 같다.
세어 보니 나흘이나 이현과 강제로 연락이 끊겼다. 그래도 간혹 분주한 소대에서, 분장실 복도에서 그와 마주칠 때가 있었다. 그의 등을 하염없이 쫓는 제 시선을 그가 몰랐을 리 없다. 그러나 이현은 데면데면한 남처럼 굴었다.
하루아침에 돌변한 애인. 강제적인 연락 두절에 숫제 투명 인간 취급까지…. 믿어지지 않는 상황에 석희재는 문득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다고 생각했다.
참담한 순간이 몇 있었다.
어제는 로비에서 포토월 설치를 하고 있던 이현과 마주쳤다. 근처의 카페에 들리느라 출연자 출입구가 아닌 로비 엘리베이터로 올라온 덕분에 그와 마주칠 수 있었다.
‘형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뜻밖의 행운에 우뚝 발걸음이 멈추었다. 다가갈까, 말까. 망설이다가 석희재는 조심스레 이현에게 다가갔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전부 이현의 회사 직원들이라는 것을 알아챘기 때문이다. 적어도 그들은 석희재와 이현이 친분이 있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상해 보이지 않을 것 같았다.
높은 천장에서 쏟아지는 한낮의 햇살에 이현은 눈부신 표정을 지었다.
‘…피디님.’
몇 걸음 떨어져 선 채로 나지막이 부르자 이현이 천천히 몸을 돌렸다.
‘안녕하세요.’
이현은 석희재를 물끄러미 보다가 아주 짧은 인사를 건넸다.
‘수고 많아요.’
그러고는 포토월에 혼자 매달려 있는 막내 직원에게로 다가갔다. 인사와 함께 만남의 마무리를 지어 버리는 말이었다. 석희재는 이렇게 끝인가, 싶어서 잠시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석희재를 더 의식해 준 것은 이현보다는 곁에 있던 홍보 팀 직원들이었다. 그들은 무척 반가워하며 석희재를 둘러쌌다. 드레스 리허설 잘 보았다고, 사진이 너무 잘 나와서 프로그램 북에 넣을 사진을 셀렉 하기가 너무 힘들다고 짧은 사이 많은 말을 쏟아 냈다. 그 뒤로 이현은 제게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혹시라도 포토월 설치를 마치면 제게 와 주지 않을까 싶어서 한참 직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며 거기 서 있었지만 이현은 끝까지 일에만 매진했다. 정말로 극장 안으로 들어가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을 때 석희재는 다시 카페로 가서 사람 수만큼 커피를 사 왔다. 이현 것만 더 비싼 것으로 사 왔는데 그는 그것을 막내에게 넘겼다.
또 한 번의 참담했던 순간은 백스테이지에서였다. 이현은 소대에서 무전을 들고 서 있었다. 주변에 사람이 조금 있었지만 그래도 어둑하니 잠시 대화를 나누어도 아무도 집중하지 않을 것 같았다. 슬쩍 다가가서 겨우 한 마디를 건넸다.
‘형, 나랑 얘기 좀 해.’
이현의 어깨가 움찔, 하는 것이 보였다. 그가 뒤를 돌아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 순간, 마침 검은 옷을 입은 남자 크루 두 명이 옆을 스쳐 지나갔다. 순간적으로 크루들과 눈이 마주쳤다. 그러나 저를 훑는 눈길은 그다지 친절하지 않았다. 묘하게 적대적이기도 했다.
이현 외의 관계는 나 몰라라 한 덕분에 외톨이였던 석희재는 그 시선에 위축되었다. 뒤로 사라지는 크루들이 킥킥대는 것이 저를 비웃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저도 모르게 사람들에게 걸리적거리지 않는 그림자 안으로 기다란 몸을 숨겼다.
자신이 그렇게 겁쟁이처럼 군 직후였다. 설상가상으로 한지우가 나타났다. 그는 저와 달리 거리낌 없이 이현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감싸 안고 고개를 기울이며 무어라고 다정한 척 말을 건넸다. 두 사람은 비어 있는 무대 위로 나가 객석으로 향했다.
권태기.
다시 그 단어가 머리를 비집고 들어왔다. 석희재는 소리 없이 그 단어를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권태기라는 게 그렇게 빨리 오나.
“아니? 보통은 천천히 식죠. 감정이 변하는 걸 확실히 자각하는 사람이 더 드물걸.”
석희재의 의문에 답해 준 것은 다름 아닌 유나연이었다. 그들은 사람이 빠진 빈 객석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럼, 왜….”
유나연은 팔짱을 낀 채로 객석 천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근데 이런 경우는 있죠. 다른 사람하고 바람났을 때. 이때는 빨리 알겠지.”
“…….”
“이게 진짜 설렘이구나, 진짜 내 가슴을 뛰게 하는 게 뭔지 알았다! 하고 홀려 버리면 지금 애인한테 지켜야 될 예의까지 싹 까먹어 버리는 거죠. 믿기지 않지만 그런 사람들 은근히 많아요.”
석희재는 턱을 괸 채 말없이 바닥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처음부터 한지우에게 말을 걸어 보고 싶어 하며 그를 훔쳐보던 이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저는 속물이라 탑 연예인들을 밝힌다고 솔직하게 말하던 것도. 한때 머릿속에서 싹 지워 버렸다고 생각한 장면도 떠올랐다. 제 애무를 받으며 한지우의 이름을 중얼거리던 이현.
그가 마침내 제 판타지를 현실화시키는 데 성공했다면?
그런 이현의 앞에서 제 사랑 고백들이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주먹이 꽉 쥐어졌다.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었을까? 사랑은 강력한 마취제다. 자신은 이현을 더 사랑하기 위해 많은 것들을 잊은 척했다.
만약, 지금까지 자신이 누렸던 달콤한 행복이 진실이 아니라면. 그저 사랑에 마취되어 보았던 혼자만의 환각에 지나지 않은 거라면….
***
“희재야. 내일은 콜 시간 맞춰 올 필요 없고, 첫공 시작 전에만 오면 된다. 커튼콜 끝날 때까지 앉아 있을 필요는 없어. 객석 조명 들어오기 전에 뒷문으로 나가면 돼. 알았지?”
박 팀장의 짧은 브리핑에 석희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밴에서 내리기 전에 박 팀장이 작은 약봉지를 건넸다.
“수면제 처방받았거든. 요즘 잠 잘 못 자겠다며. 두 알만 먹고 자면 돼.”
“네. 감사해요.”
밴에서 내리자 차가 곧 출발했다. 석희재는 가방을 어깨에 둘러메고는 표정 없는 얼굴로 집으로 향했다.
오늘은 이현의 집에 가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없었다. 자신이 그의 허락 없이 거길 드나들어도 되는 사람인지 분간하기 어려워졌다. 매일 자신이 들어가 앉아 있어 이현이 편하게 쉬지 못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성가신 사람으로 여겨지는 것도 싫었다. 이현에 대한 사랑과 믿음은 변하지 않았지만 지속적으로 이현에게 무시당하니 마음에 멍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익숙한 층의 버튼을 눌렀다. 거울 속의 제 매력 없는 얼굴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잠시 눈을 감고 거울에 머리를 기대어 본다. 잠시 후 다시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석희재는 복도를 따라 걸었다. 발걸음 소리에 따라 작은 에코가 만들어졌다.
코너를 따라 돌았을 때에 석희재는 제집 앞에 있는 누군가를 발견했다.
문에 등을 기대어 쭈그려 앉은 채로 모자를 푹 눌러쓴 남자.
발걸음 소리를 듣고는 고개를 든다. 눈이 가려져 흰 턱선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가 석희재를 발견하고는 자리를 털며 일어났다.
“…형.”
석희재는 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형!”
그러고는 달려들며 그를 껴안아 버렸다. 힘없이 뒤로 밀린 이현의 등이 문에 쿵, 부딪쳤다. 석희재는 황급히 그의 드러난 귀와 턱에 키스했다. 모자챙이 이마를 찔러 고개를 많이 기울여야 했다.
“형, 너무 보고 싶었어. 혹시 우리 계속 엇갈린 거야? 형은 우리 집에 왔었구나. 나는 그것도 모르고.”
이현은 미소 지으며 말없이 현관문을 두드렸다.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는 제스처였다. 석희재는 이현을 품에 안은 채로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좀처럼 떨어지려고 하지를 않아 움직이는 팔이 어설펐다. 열리는 문 안으로 이동해 들어가 서는 것도 그랬다.
석희재는 현관에서 허리를 굽혀 신을 벗고 있는 이현을 다시 일으켜 와락 끌어안았다.
“…뭐야.”
“잠깐만 이러고 있자.”
“나 샤워 좀 하고.”
“싫어. 형 냄새가 날아가잖아.”
“…….”
“나흘 치 안고 있을 거야.”
조용히 심장이 뛰었다. 이성적으로 사리 분별이 되지 않았다.
석희재는 품 안에 쏙 들어오는 이현의 마른 몸판을 여러 번 쓰다듬었다. 모양 좋은 귀에 입을 맞추고 약간 버석하게 잡히는 뒷머리도 마음껏 만졌다. 그러다 보니 이현이 나흘 내내 제 연락을 무시한 것, 사람들 앞에서 알은척도 해 주지 않은 것, 내내 집을 비운 것, 그리고 한지우와 보란 듯 붙어 있던 것까지. 전부 다 괜찮아졌다. 마법처럼….
이 순간을 온전히 보존할 수만 있다면, 그에게 아무것도 따져 묻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석희재는 이성적으로 생각했다. 정말은 괜찮지 않다고.
이 잠깐의 포옹이 마취제 역할을 하는 것일 뿐이다.
“진짜 너무하다. 이현.”
석희재는 느리고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목멘 소리가 났다.
“우냐?”
원망 섞인 말을 이현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그의 말에 석희재는 눈을 깜빡였다. 눈가가 조금 덥기는 했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나 오래 못 있어.”
이현이 석희재를 가볍게 밀어냈다. 어쩔 수 없이 떨어지면서 석희재는 다시금 이현을 배려하는 말을 했다.
“알아. 형 바쁘잖아.”
“씻고, 잠깐만 너랑 있다가 갈래.”
“그래.”
석희재를 덩그러니 세워 놓고 이현은 욕실로 들어갔다. 샤워하는 물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석희재는 안정을 찾았다. 무엇부터 물어볼까, 생각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제법 오래 걸렸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달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이현이 커다란 타월을 몸에 두르고 나왔다. 그러더니 석희재의 앞으로 걸어와 그대로 허벅지 위에 올라탔다. 석희재는 조금 당황했다. 남은 이야기가 있는 것 같은데 이현은 모른 척 제 목덜미에 입술을 묻는다.
“…피곤하지 않아?”
“그렇긴 한데….”
“하고 싶어?”
석희재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제 아래를 더듬는 이현의 손목을 쥐어 올리면서.
이현은 짧은 한숨을 내쉬더니, ‘그래’ 하고 답했다. 그의 얼굴을 잠깐 스친 성가신 빛에 심장이 욱신거렸다. 성가신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이미 그렇게 된지도 모르겠다.
“형, 그전에 우리 얘기할 거 있잖아.”
“…….”
“연락은 왜 안 됐어?”
“핸드폰 잃어버렸어.”
이현이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기며 말했다. 앞머리에 매달려 있던 물이 뚝, 뚝 떨어지며 석희재의 옷을 적셨다. 믿기 힘든 말이지만, 석희재는 일단 수긍했다.
“하나 다시 사 줄까?”
“…….”
“우리 커플 폰 하자. 응? 그냥 이참에.”
원망을 누르며 일부러 이현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이현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어 떨쳐 냈다.
“그건 내가 알아서 할게.”
“…….”
무안해진 석희재가 입을 다문 바람에 두 사람은 정적에 휩싸였다.
이현이 다시 석희재에게 달라붙어 꿈지럭거렸다. 턱선을 핥고, 목덜미에 입술을 스치며 쇄골을 빨았다. 석희재는 맥없이 밀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천장을 바라본 채로 애무에 집중한 이현의 등에 손을 얹었다.
그와 다시 이야기를 나누는 많은 장면을 상상했지만 이런 식으로 아예 없던 일 취급하며 넘어갈 줄은 몰랐다. 물론 이런 부분까지 이현의 성격이기는 하다. 그는 인간관계에서 문제가 생기면 해결하기보다 도피하려 했고, 남이 그것을 문제 삼으면 짜증을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성격을 다 알면서도 물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 내가 얼마나 전화 많이 걸었는지… 어떤 메시지 보냈는지 하나도 못 봤겠네.”
“음… 하아, 응….”
“다행이다.”
다시 제 바지를 벗기려는 이현을 어루만지며 석희재는 대답했다.
“알았으면 형은 나한테 엄청 미안해하고 있었을 테니까.”
“…….”
“그래도 잃어버렸다고 말은 해 주지. 말할 틈이 없던 것도 아닌데.”
이현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완전히 흥이 깨진 얼굴로.
그 눈에 도리어 제 심장이 철렁했다. 석희재는 침착한 눈으로 이현을 살폈다. 어째서 그가 저보다 더 피로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석희재는 이해하지 못했다.
먼저 눈을 피한 것은 이현이었다. 그는 다시 일어나며 허리 아래로 떨어진 타월을 도로 몸에 감았다.
“계속 이럴 거면 나 가는 게 낫겠다.”
“형.”
“나 너무 피곤해서… 너한테 위로받고 싶었는데.”
“…….”
“말싸움하면 기 빨려.”
그 말에 울컥 원망이 치솟았다. 목소리도 높이지 않고 일방적으로 몰아붙이지도 않았다. 며칠간의 이해할 수 없는 행적을 캐물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대로 얌전한 딜도 행세를 해 주지 않았다고 이현은 금세 성가신 티를 낸다. 적어도 연인이라면,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러지 마. 내가 형을 얼마나 기다렸는데 어떻게 이렇게 잔인해.”
“…….”
“내가 얼마나 속 태웠는지 형은 모르지. 모르니까 이렇게 구는 거지?”
“다 알지.”
이현은 툭 내뱉었다. 석희재는 눈을 깜빡였다.
“그렇게 다 티 나게 쳐다보는데 누가 모르냐. 다 알아.”
이현의 눈빛이 석희재를 할퀴고 지나갔다. 그 말의 내용만큼은 평소 이현이 할 법한 것이었다. 그러나 날카로운 눈빛과 퉁명스러운 어투 때문에 곧이곧대로 들리지 않았다.
“아는데 왜 그래?”
“…….”
“아는데 왜 내가 보는 앞에서 한지우, 선배랑….”
이현이 석희재의 말을 뚝 잘랐다.
“너도 알면서 왜 그래?”
그의 말투가 무척 짜증스러웠다. 석희재는 하려던 말을 전부 잊어버렸다.
“공사 구분은 하자고 했잖아.”
“…….”
“남들 앞에서는 절대 비밀이니까 티 내지 말라고 하지 않았어? 짝사랑도 몰래 했으니까 숨기는 건 자신 있다며. 너 절대 못 숨기던데…. 약속 어긴 건 너야.”
“…….”
“네 눈엔 나밖에 안 보이냐? 일에 집중을 좀 해.”
단어 한 마디, 한 마디에 마음이 무너졌다.
이현의 말은 전부 다 사실이었다. 리허설도 어떻게 끝마쳤는지보다는 이현이 어떻게 봐주었는지가 궁금했고, 외톨이가 되어 분장실에 혼자 남겨져도 이현과 단둘이 집에 갈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전부 다 이현을 위해서 시작한 일이니까 말이다.
그런데 그는 자신보다 일을 우선시해야 한다고 말한다. 망치로 머리를 세게 맞은 느낌이었다.
“…형 눈에는 내가 그렇게 보였구나.”
석희재는 힘들게 말을 이었다.
갑작스럽게 공격적이 되다 못해 사귀기 전으로 돌아간 이현이 낯설었다. 아니, 이 거리감이 낯설다기보다는 지나치게 익숙해서 무서웠다.
“미안해.”
“…….”
“미안해, 형… 내가.”
석희재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한참 말을 골랐다. 이현 역시 머리를 감싼 채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말싸움에 큰 피로감을 느끼는 듯했다. 그가 이런 식의 갈등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점과, 권태기라는 단어가 다시 한번 머리를 스치고 갔다.
석희재는 겁을 먹고 그를 침대 위로 이끌었다. 자고 생각하라면서 내일의 콜 시간을 묻고 알람을 맞춰 주었다. 석희재의 행동을 눈을 굴려 가며 살피던 이현은 무슨 말을 하려다가 이내 입을 다물었다.
한때 이현은 꼭 이런 식으로 굴다가 이별의 가능성을 입에 올린 적이 있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그때 이현은 술에 취해 있었고 지금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더 끔찍했다.
“얼른 자요.”
석희재는 그의 등을 토닥이며 속삭였다. 베개에 얼굴을 묻은 이현은 생각보다 금세 잠들었다.
잠을 자는 이현은 꿈처럼 사랑스럽다.
그날 밤 석희재는 처방받은 수면제도 먹지 않았다. 현실에서 완전히 멀어져 푹 잠에 빠지면 그만큼 이현도 멀어질 것 같아서. 제가 보지 못한 사이에 이현은 이해 불가능한 벽을 세우고 왔다. 눈을 깜빡, 하는 순간에도 멀어질 것 같아 무서웠다.
그래서 석희재는 밤새 가물가물 졸린 눈을 한 채 손등으로 이현의 뺨을 수없이 쓰다듬었다.
그리고 얼마 후, 석희재는 이현이 날을 세운 이유를 어렴풋이 짚어 낼 수 있었다.
“이현 피디 있잖아. 게이라면서.”
누군가 툭 던진 말에 석희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도 알고 있었어?”
“누가… 누가 그래요?”
석희재는 어렵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현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하던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끝마저 잘게 떨렸다.
“희재씨는 소식 못 들었어?”
석희재에게 말을 건 남자는 가벼운 가십을 소비하듯 이현의 이야기를 쉽게 입에 올렸다. 게다가 그 얼굴에 혐오를 전혀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게이래. 며칠 동안 그걸로 완전히 뒤집어졌었잖아. 으, 소름 돋는다. 어쩐지 나를 그렇게 흘끔흘끔 쳐다보더니. 씨발, 설마….”
“…….”
“표정 봐. 진짜 몰랐나 보네?”
“…….”
“여기 혼자서 섬에 사는 사람이 있었구만.”
그 말에 충격받은 눈을 숨길 수가 없었다.
***
시파티를 위해 공연팀이 전세를 낸 고깃집 안에는 관계자들과 배우만으로 자리가 꽉 차 있었다. 백여 명이 넘는 사람들이 한껏 목소리를 높이며 여기저기서 기세 좋게 구호를 외치고 요란하게 떠들었다. 소음에 약한 석희재는 자리 한 번 옮기지 않고 묵묵히 주어진 잔을 비웠다. 술에 취한 이들이 내뱉는 고성에 귀가 먹먹하게 울렸다.
마침 딸랑이는 종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다. 드나드는 이들에게 시선을 주는 척하며 석희재는 슬쩍 뒤돌았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티 좀 내지 말라던 이현의 차가운 말투가 떠올라서.
대놓고 보는 것도 허락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다. 짧은 사이 이현의 모습을 얼른 훑고 석희재는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이현은 배우들과 멀리 떨어진 구석 자리, 제작사 직원들이 한데 모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테이블 가장 구석에 앉아 벽에 어깨를 기댄 그의 손에는 구형 핸드폰이 들려 있다. 잃어버린 핸드폰 대신 급히 마련한 것이다.
첫 상견례 때부터 느낀 것이지만 그는 메인 피디인데도 존재감이 약했다. 모든 인물과 이슈의 중심에 있으면서도 막상 무대 위에서는 완벽히 없는 사람이 된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오늘은 특히 더하다는 생각이 들면, 착각일까.
하다못해 이현은 고깃집 밖으로 담배 한 대 피우러 나가지도 않았다. 그 틈을 노려 자신이 따라 나올 것을 경계라도 하는 것처럼….
“희재는 담배 안 피우지?”
“네. 비흡연자입니다.”
석희재는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투자자가 따라 주는 술을 받았다. 나이 먹은 남자는 자기소개에 성의가 없었다. 씹어뱉는 어물어물한 발음으로 말하는 게 이성길인지, 이선일인지 헷갈렸다. 물론 중요한 문제는 아니다. 별로 기억할 필요는 없을 테니까.
“어머니가 잘 키우셨네.”
“…….”
“얼굴도 많이 닮았고.”
그 말에 석희재는 눈썹을 드러나지 않게 치켜올렸다. 제 어머니가 누군지 알고 있다는 뜻을 담은 말이었다.
하지만 그가 알든지 말든지 관심이 없어서 석희재는 ‘어머니가 누구인지 아시냐’고 묻는 대신 받은 술을 넘겼다.
화제가 맥없이 끊겼다. 곁에서 석희재 대신 안절부절못하던 대표가 말을 이었다.
“그쵸? 희재 얘가 인물 괜찮죠. 외모만큼 의리도 조금 더 있으면 앞으로 우리랑 공연 계속해 줄 텐데…. 아무리 봐도 공연 몇 번 안 하고 드라마나 영화 찍으러 갈 거 같네. 그렇지? 희재야.”
“…….”
“데뷔를 여기서 한 의리가 있으니까 그래도 5년에 한 번은, 응? 무대 복귀로 기사 나면 얼마나 그게 또 아름다워.”
석희재는 왜인지 비굴하게 들리는 대표의 말을 한 귀로 흘려 넘겼다. 언제 봤다고 친한 척인지 잘 모르겠다.
어쩌다 보니 석희재의 테이블에는 제작사 대표, 투자자, 타 제작사의 이사 등등 꼰대들만 가득했다. 공연을 만들기 위한 노력이 진행되는 순간에는 한 번도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던 ‘의사결정권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렇게 된 이유에 대해 석희재는 아마 자신이 그동안 배우들과 어울리는 데 소홀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했다. 여기 들어오자마자 어떤 테이블에 끼어야 할지 몰라 멀거니 서 있던 자신을 불러 준 곳으로 아무 생각 없이 와서 앉았는데…. 생각이 짧았다.
“아무튼 공연 앞두고 안팎으로 하도 시끄러워 가지고 걱정이었는데 말입니다. 첫 공연 딱, 올라가니까 됐구나! 싶어서 내가 안도감이 오더라니까.”
“안팎으로 뭘 시끄러워?”
투자자의 지나가는 듯한 물음에 대표가 성가시다는 표정으로 혀를 찼다.
“별거 아니긴 한데, 직원 사생활 가지고 좀 문제가 있었습니다.”
직원 사생활. 그 일이 안 그래도 바쁜 이현을 힘들게 했던 걸까.
드물게 궁금증이 생긴 석희재는 대표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베일에 싸인 연예인의 사생활도 아니고, 일개 직원 문제라는 말에 투자자는 흥미를 잃었다.
“아, 나 무슨 얘긴지 들었어요.”
“…….”
“이현 피디 있잖아. 게이라면서.”
누군가 툭 던진 말에 석희재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너도 알고 있었어?”
질문을 던진 사람이 석희재를 찌르듯이 바라보았다. 아, 누군지 기억이 났다. 사진작가 조 실장이었다.
모르는 이가 불쑥 던진 가장 친밀한 이의 비밀에 석희재는 눈을 깜빡이며 조 실장을 바라보았다.
“누가… 누가 그래요?”
석희재는 어렵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현이 가장 피하고 싶어 하던 일이 생겼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손끝마저 잘게 떨렸다.
“희재씨는 소식 못 들었어?”
조 실장은 가벼운 가십을 소비하듯 쉽게 이현의 이야기를 입에 올렸다. 게다가 그 얼굴에 혐오를 전혀 숨기지 않고 드러낸다.
“게이래. 며칠 동안 그걸로 완전히 뒤집어졌었잖아. 으, 소름 돋는다. 어쩐지 나를 그렇게 흘끔흘끔 쳐다보더니. 씨발, 설마….”
“…….”
“표정 봐. 진짜 몰랐나 보네?”
“…….”
“여기 혼자서 섬에 사는 사람이 있었구만.”
그렇게 말을 던져 놓고 조 실장은 왠지 통쾌하다는 얼굴로 술을 들이켰다. 그 옆에서 벌게진 얼굴의 대표는 제 직원이 낯부끄럽다는 듯이 혀를 차며 시선을 피한다.
“완전 뒤통수 세게 맞았지. 자기는 절대 그쪽 아닌 척했거든. 딱 잡아떼면서 재수 없게 굴더니, 나 참….”
“…….”
“희재 씨 충격받았어?”
술잔을 쥐던 조 실장의 손이 멈칫했다. 안색이 창백해진 석희재의 반응에 도리어 놀란 듯했다.
“속인 건 그 사람인데 왜 자기가 충격받아.”
“이거, 피디님이 직접 말하지는 않았을 거 아니에요.”
“아….”
“그럼 아웃팅 아닙니까?”
석희재는 치미는 화를 억누르며 말했다. 화가 날 때에 목소리는 도리어 침착해진다. 그래도 눈과 목이 홧홧해지는 기운을 참을 수는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안줏거리로 내뱉은 화제에 격하게 화내는 석희재를 보고 놀랐는지 대표가 성의 없이 말렸다. 마셔, 일단 시원하게 한 잔 마셔. 그러면서 따르는 술잔을, 석희재는 손을 내밀어 거절했다. 투자자는 의외라는 얼굴로 저를 비스듬히 보고 있었다.
‘이미 다들 아는데 뭐….’ 조 실장은 회피하고 싶다는 듯이 무책임한 말을 내뱉는다.
이제 와 소문의 근원지를 찾는 건 무의미하다는 소리였다. 석희재는 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그 길로 시파티 장소를 나와 버렸다.
***
극장에서 일하는 이들을 피해서 찾아온 곳이 다시 극장이라는 사실은 아이러니하다.
극장은 완벽한 적막 속에 잠겨 있었다.
공연이 끝난 후 조명을 점검하던 이들도, 대도구를 손보던 크루들도, 객석 통로를 돌아다니며 분실물을 줍던 어셔들까지 모두 시파티를 위해 자리를 비운 덕이다. 사람이 완전히 빠져 버린 극장은 기이한 분위기를 풍겼다.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비밀스러운 이야기를 나누기에는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었다.
석희재는 로비를 통해 지문 인식이 걸려 있는 출연자 출입구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극장 객석으로 향하는 비상계단으로 올라가 문을 밀어젖혔다. 원래는 닫아 두어야 맞지만 이 극장의 객석 연결 계단 문은 잠겨 있던 적이 없다. 예전 어머니의 공연 리허설 때 알게 된 사실이다.
들어가서 등 뒤로 문을 닫자 빛이 완전히 차단된 극장 안이 칠흑 같은 어둠으로 물들었다.
석희재는 벽을 더듬어 가며 객석 의자를 찾았다. 의자에 앉고 나니 완벽한 암전이 찾아왔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점차 시야에 사물의 형체가 어슴푸레 들어오기 시작했다. 까마득히 높은 천장과 무대의 구조물,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며 정렬한 의자들.
그리고 멀리서 작은 발소리도 들려왔다.
석희재는 눈을 감았다. 저와 같은 길을 따라 걷는 이의 발소리에, 어쩔 수 없이 설렘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작은 에코를 울리는 발소리가 점차 가까워진다. 계단을 천천히 걸어 올라온 그가 바지 주머니에서 짤랑이는 열쇠를 꺼냈다. 그러나 문고리를 돌려 보더니 곧 열쇠가 필요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다시 주머니에 챙겼다.
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복도에서 새어 들어오는 나약한 빛이 석희재의 얼굴을 날카롭게 사선으로 그었다.
“여기야.”
이현은 어렵지 않게 석희재를 찾아 곁으로 왔다. 한 칸을 띄워서 앉기에 석희재는 다시 일어나 그의 바로 옆자리에 붙어 앉았다. 이현은 피하지 않았다. 이 정도만으로도 석희재는 안도했다.
“고기 냄새 날 텐데.”
“상관없어.”
석희재는 이현의 어깨에 뺨을 기대고 그리운 체취를 크게 들이마셨다.
어떻게 그를 위로할 수 있을까?
석희재는 한참 고민하다가 질책도, 추궁도 아닌 말을 꺼냈다.
“나한테도 얘기해 주지.”
“…….”
“내가 왜 제일 늦게 알아야 돼.”
그건 약간의 투정이었다.
사실 이미 소문은 드레스 리허설 기간부터 짜하게 퍼져 있었던 모양이다. 사람들과 별로 소통하지 않고 그저 이현이 저를 무시하는 상황에만 집중했던 석희재는 알 길이 없었을 뿐이다. 석희재는 그마저도 자기 잘못처럼 느꼈다. 게다가 이현이 자신을 피했던 이유는, 저까지 소문에 엮이는 걸 원치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왜 형만 아프려고 해.”
석희재의 말을 듣던 이현이 천장으로 고개를 꺾었다. 그의 표정이 읽히지 않아 석희재는 약간의 초조함을 느꼈다.
“알면.”
이현이 담담한 말투로 툭 내뱉었다.
“알면 뭐.”
“…….”
“어떻게 해 주려고.”
그 말에 석희재는 기대고 있던 얼굴을 조금 떨어뜨렸다. 무심한 말투와 자포자기한 듯한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힘든 거 나한테 털어놓고….”
“그럼 뭐 해결이 돼?”
이현이 고개를 저어 머리카락을 털면서 가볍게 말했다. 그 담담한 말투에 석희재의 말문이 막혔다.
석희재는 이현이 충격에 휩싸여 있을 줄 알았다. 어쩔 줄을 모르고 절망하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런 그를 위로하고, 지난 며칠간 홀로 투쟁했을 그에게 힘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이현은 이미 무언가를 완전히 정리해 버린 듯하다. 혹은 정신적으로 완전히 탈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내가 솔직하게 말하면.”
“…….”
“그러니까 당분간 거리를 두자. 우리 집에 오지도 말고, 연락도 하지 마. 그러면 네가 받아들였을까?”
“…….”
“나는 너 달래느라고 더 정신없었을 것 같은데.”
공격을 받으면 사람은 방어적으로 되어 버린다. 이현의 적대감이 자신에게 향할 줄은 꿈에도 몰랐던 석희재는 변명이 하고 싶어졌다. 혹은 항의라도.
그러나 무슨 말을 하는 게 옳은지 몰라 입을 벙긋거리는 사이에 이현의 말이 이어졌다.
“연락… 계속 못 한 건, 핸드폰 잃어버렸는데 그게 혹시 누구 손에 들어간 걸까 봐. 내가 제정신이 아니었어. 잠도 잘 못 잤고…. 그제 다시 개통하고 메시지는 읽었는데, 물론 너 안심시키려고 읽은 척은 해 줄 수 있었는데….”
석희재는 이현이 자신을 달래는 것조차 부담으로 느꼈다는 사실을 싫을 정도로 깊이 이해해 버렸다. 실제로 당시의 자신은 이현을 잔뜩 원망하고 있지 않았나.
“나도 뭐라고 운을 떼야 할지 감당도 안 되고.”
“…….”
“이건 내가 잠수 탄 이유.”
깔끔하게 상황을 설명하는 이현을 보면서 석희재는 무언가를 짐작해 냈다. 이현이 원하는 것이 그저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은 것이었다면, 제가 건넸을 위로는 그저 어리광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에게 나는 의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형, 내가 부담이 돼?”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무언의 긍정이었다.
“형….”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깊이 숨을 몰아쉬며 이현의 손을 찾아 잡았다. 그의 손이 온기 없이 차가웠다.
“형, 미안해.”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그래도, 우리 같이 힘들자. 내가 대신, 형 사랑하는 만큼 형 대신….”
그 순간 이현이 피식 웃었다. 그 얼굴에 석희재는, 그의 안에서 무언가 한계를 초과하는 변화가 이미 일어났음을 직감했다.
“넌 밝힐 수 있어?”
“…뭐?”
“그러면 회사에 허락받고 와.”
“…….”
“나랑 사귀는 거 회사에 허락받고 오면, 그럼.”
이현은 말을 끝맺는 대신 깊은 한숨을 쉬며 얼굴을 손바닥에 묻었다. 석희재는 비정상적으로 차분하게 보였던 이현이, 실은 극도로 신경질적인 상태라는 것을 깨닫고는 충격받았다.
“아니, 씨발. 됐어. 그런 짓 하지 마.”
“…….”
“막 개막한 공연에 재 뿌리지 말고, 회사에 민폐 끼치지 말고, 팬들하고 대중한테 실망감 주지 말고… 절대 그러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
어떻게 하라는 건지 알 수 없어서 석희재는 그의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겨우 정답에 가까울지도 모르는 말을 찾았다.
“나는 언제나 형이 최우선이야.”
“…….”
“다른 건 다 형을 얻기 위한 수단이야. 알지? 난 포기하는 거 하나도 안 무서워.”
“…그런 부분이… 부담된다는 거야.”
그 말은 석희재의 말문을 다시 막히게 했다.
‘나는 나를 어디까지 바꿔야 할까.’
그것은 저 역시 종종 생각하던 것이었다. 이현을 사랑하면서, 그를 얻기 위해서 석희재는 제 주변 환경, 가족과의 관계, 성격, 성적인 취향, 사소한 습관까지 모두 그에게 맞춰 왔다. 그러면서도 제 안에 피어났던 의문을 이현 역시 들여다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날 그렇게까지 사랑해 달라고 내가 너한테 부탁한 적은 없잖아.”
짧은 한숨을 내쉰 이현이 이마를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이현은 아까부터 저를 보고 있지 않다. 앞 좌석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을 쏟아 내고 있었다. 석희재가 쏟아붓던 사랑이 행복하거나 달콤한 것이 아니라 제 목을 죄는 것이었다고 토로하며.
석희재는 저를 보지 않는 이현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현은 별안간 피식, 웃음을 흘렸다. 이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되게 자주 생각한 건데.”
“…….”
“그날 있잖아.”
“…….”
“우리 처음 만난 날. 아마 넌 거기 서 있던 게 누구든 사랑에 빠졌을 거야. 다른 사람이면… 나보다 나았을지도 모르지.”
이현의 말에 석희재는 흔들리는 눈을 숨기지 못했다.
나는… 그 순간을,
운명이라고 생각했는데.
이현의 말을 듣고 난 석희재가 할 수 있는 일은 힘없는 부정뿐이었다.
“…아니야.”
석희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이현이 다시 픽,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냈다.
“왜 아니야. 맞지.”
“…….”
“널 비난하는 게 아니라….”
이현은 작게 한숨을 쉬며 말을 멈추었다.
“난 모든 남자한테 그런 식으로 굴어. 왜냐하면 다들 익숙하니까. 하룻밤 원하는 걸 주고받고, 그리고 다음 날 모르는 사이처럼 헤어지는 데 이력이 난 사람들끼리는 오해하지 않으니까.”
“…….”
“네가 스무 살짜리 동정인 줄 알았다면 그런 짓 안 했을 거란 소리야.”
물기로 반들거리는 석희재의 검은 눈동자가 이현의 반응을 힘없이 쫓았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이현은 그렇게 말하며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그가 정말로 후회하고 있는 것처럼 보여서 석희재는 그 와중에도 죄책감을 느꼈다.
그러나 이현의 말에 상처 입었다는 것을 드러내면, 그것마저 그가 부담스러워할 것 같았다. 그래서 고개를 숙였다.
동시에 그런 식으로 사랑할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저주했다. 이현의 말마따나 ‘어쩌다 이렇게까지 사랑하게 되었는지’ 제 사랑의 역사를 멍하니 되짚었다.
한지우처럼, 혹은 이현을 쓰고 버리듯이 굴었던 과거의 남자들처럼 저 역시 가볍게… 아주 가볍게 이현을 사랑했다면 이런 비극은 일어나지 않았을까.
“항상 그런 식이었어?”
석희재의 물음에 이현이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무슨 뜻이냐고 되묻는 차가운 눈빛이 어둠 속인 데도 그려지는 듯했다.
“형 과거에 나 같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어?”
“…….”
“사실 나는, 이런 것밖에 몰라. 형 말대로 내가 지나치게… 부담을 주는 타입일지도 몰라. 그런데 어떻게 해.”
“…….”
“그만큼 사랑할 만한 사람이었는데, 어떻게 가벼워져.”
진심을 눌러 담은 고백에도 이현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보였대도, 눈빛마저 차단할 만큼 깜깜한 곳 안에서는 그의 표정을 알아볼 수 없다.
“글러먹은 놈 구제하려고 노력하지마.”
“…….”
“별로 그러지 않아도 돼.”
이현이 석희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단호한 눈에서 석희재는 이현의 뿌리 깊은 불신을 엿보았다.
석희재에 대한 불신이 아닌, 어쩌면 자기자신에 대한 불신.
이미 감지한 적이 있었다. 석희재가 모르는 이현의 과거에 그를 이렇게 만든 어떤 계기가 있을 거라고.
석희재는 이현의 벽을 찾아내서 부수고, 또 치유해주고,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다.
그러나 이현 역시 그걸 원할까?
석희재는 탈력감을 느꼈다. 그는 석희재가 말한 것은 정답이 아니라는 듯 이해하기를 부정하는 것 같았다.
석희재는 가만히 숨을 삼키고 벌린 입으로 숨결을 내뱉었다. 그건 소리 없는 울음과 닮아 있었다. 이현을 관찰하던 고개를 돌리고, 앞 객석 의자에 한 팔을 걸친 채로 석희재는 눈을 내리깔았다. 목이 꽉 메어 와 입으로 숨을 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내 노력의 방향이 잘못됐다는 말이구나.”
“무슨 노력.”
암흑 속에서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데….”
“왜. 말해 봐.”
이현이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는 소리가 났다. 그는 무엇이든지 쉽게 묻고 쉽게 추궁한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단순하다. 무슨 말을 들어도 그는 상처받지 않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덜 사랑하기 때문이고.
비참한 기분으로 석희재는 입을 열었다.
“유명한 연예인들에게 끌린다고 해서 데뷔하기로 마음먹었고.”
그 전에 얼마나 많은 데뷔 제안을 거절해 왔는지 석희재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연예인이 되면 어머니가 저를 동등하게 바라봐 줄 거라는 걸 알면서도, 그런 조건 없이 어머니가 저를 사랑하고 또 인정해 주기를 바라면서 혼자만의 줄다리기를 해 왔던 지난날에 대해서도.
“그리고.”
이현의 무뚝뚝한 말투가 공기를 할퀴는 듯했다.
“피디가 되면 연애할 틈이 날지도 모른다고 해서 기다렸어….”
“또?”
석희재는 고개를 들었다. 제 표정이 그에게 명확히 보이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에 조금 안도하면서. 이현은 이토록 냉정한데 저 혼자 울먹거리는 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난 여기.”
석희재는 손을 뻗어 이현의 관자놀이와 뺨 부근에 손등을 가져다 댔다. 익숙한 감촉의 머리카락과 매끈한 피부가 손등에 닿았다. 억지로 행한 폭력을 기억하는 석희재의 손이 조금 떨렸다.
“때려달라고 할 때마다 울고 싶었어. 아프게 하는 거 정말 싫었거든.”
“…….”
“나는 형을 위해서 너무 많은 걸 바꿨어.”
“…….”
“내가 다 실패했던 건 인정해. 내가 방향 설정을 잘못했다는 건…, 그런 건 내가 형 일터로 쳐들어가던 날에 이미 짐작했어.”
“…….”
“그런데 형을 덜 사랑했어야 하는지는 몰랐어.”
그 순간 석희재는 깨달았다. 3년간의 짝사랑이 마치 꿈처럼, 유사 연애처럼 행복하기만 했던 이유는 그것이 바로 서로 상처 주지 않고 상처받지 않는 적당한 거리감을 지켰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 거리를 좁히기를 원하던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환상에 젖어 이현의 영역 안을 ‘침범’했다.
팔짱을 낀 채로 묵묵히 듣고만 있던 이현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럼 피차일반이라고 치자.”
그 말이 의문을 자아냈다.
피차일반? 석희재가 고개를 들어 다시 이현의 얼굴을 살폈을 때였다.
“한지우 선배가….”
그의 입에서 맥락 없이 튀어나온 이름에 심장이 철렁했다.
“내가 남자랑 자는 거 이미 알고 있었다더라.”
“뭐?”
“선배도 알 정도면 소문이 번지는 것도 당연한데, 나도 조심성이 없었고….”
이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석희재는 주먹을 억세게 쥐었다.
“그 인간이야?”
“뭐가?”
“형 게이라고 동네방네 소문내고 다닌 거 그 인간이냐고.”
“그럴 리가.”
“왜 아니라고 생각해?”
“소문 도는데 예전하고 똑같이 대해 준 건 선배밖에 없었으니까.”
이현이 덤덤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건 석희재를 순간 격양되게 만들었다. 그 정도는 저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 자식은 형한테 관심이 있으니까…!”
“아니라니까. 과민하게 굴지 마.”
석희재가 격양된 목소리로 답하자 이현이 도리어 차분하게 지적했다. 쉽게 감정적으로 되는 것을 질책하듯.
석희재를 순식간에 잠재운 것은 이현의 차가운 눈이었다. 이현이 하도 침착해서 석희재는 제가 비상식적인 말이라도 한 건 아닌지 혼란스러워졌다.
하지만 아직도 이현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대던 한지우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예전하고 똑같이 대해 줘서, 그래서 주차장에서 버젓이 목에 키스를 했나? 심지어 자신을 타박하면서도 ‘한지우는 그럴 리 없다’라고 신뢰하고 두둔하는 이현의 말도 기가 막혔다.
“원래 선배는 사람 잘 챙겨.”
이현의 말에 석희재의 입에서 작은 탄식이 터졌다. 지난날에도 한지우를 수없이 두둔하던 이현의 말이, 이번에는 제게 치명타였다.
“나한테 친근하게 굴면 어떤 오해 받을지, 다 알면서도 그러는 거야.”
“하….”
석희재는 부정하며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한지우는 이 극장 안에서 서열의 꼭대기에 있었다. 아무도 그의 행동에 의문을 제기하거나 그의 이미지를 해하려 들지 않는다. 한지우의 행동은 이현을 향한 배려 따위가 아니다. 그건 그냥 그가 가진 권력 때문에 할 수 있는 행동이었고, 그리고….
“진짜 몰라?”
석희재는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이현을 향한 저열한 호기심 때문이고.
“…한지우 남자랑도 자.”
“…….”
“그래서 파혼당한 거고.”
지금까지 석희재는 이 증언이 이현과 한지우의 거리감을 좁히기는커녕, 급속도로 가깝게 만들까 봐 말하기를 저어해 왔다.
하지만 너무 늦게 말한 나머지 이현이 한지우를 더 신뢰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여우 같은 남자가 어떤 교활한 방식으로 스스로를 포장했을지 모르는 일이니까.
석희재는 울고 싶은 심정으로 말했다. 제 목소리가 너무 처절하고 궁색하게 들리지 않기만을 바라며.
“…그 사람은 아무나 가볍게 건드려. 나한테 그렇게 말했어. 형을 어떻게 구슬렸는지 모르겠지만 난 원래 알고 있었어. 그 인간이 어떤 흑심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러니까 네 말은, 그 사람이 못 믿을 사람이다.”
“…….”
“그래서 소문을 냈다 이거냐?”
이현의 말투가 덤덤했다. 석희재는 굳은 얼굴로 그의 목소리를 들었다.
이현은 한지우의 성벽에 크게 충격받지도 않은 것 같았다. 그 순간 석희재는 이현이 이미 모든 걸 알고 있고, 또 그래도 상관없을 만큼 한지우에게 마음이 기울었을 가능성에 대해서 생각했다.
지금까지 들었던 그 어떤 말보다 끔찍한 가능성이었다.
“아니지.”
이현은 잘라 말했다.
“애초에 원인 제공은 내가 했지. 아니, 정확히는 우리가.”
“…….”
“네가 나 몰래 남긴 키스 마크 때문에.”
그렇게 말하며 이현은 비스듬히 목을 보였다. 석희재가 키스 마크를 남기곤 했던 부위를.
“내가 공사 구분을 못 한 거고. 그래서 이 사달이 났고.”
이현이 석희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 말에 석희재의 동공은 정처 없이 흔들렸다. 이현이 제게 보이던 적대감의 원인을 이제야 알았다.
그 순간 숨이 턱 막히는 듯했다.
“형은 그럼 지금….”
석희재는 말을 다 끝맺지 못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나 때문이라는 거네.”
이것이 이현이 ‘피차일반’이라는 말을 꺼낸 이유였다. 애정의 크기가 차이 나는 연애를 하며 석희재가 괴로워했던 것만큼, 이현 역시 그 부담스러운 연애를 받아들였다가 아웃팅까지 이르렀으니 서로 감수하자는.
이미 한지우에게 마음이 기울었을 가능성?
그딴 문제가 아니었다.
애초에 이현의 안에서 저 자신이 한지우보다 조금이라도 나았던 적이 있는지조차 의문이었다.
3년간 음흉하게 마음과, 나이와, 사생활을 숨기며 주변을 맴돌았던 취향 아닌 새파란 어린애. 반대로 그의 이상형에 완벽히 부합하는 대선배 배우.
석희재는 헛웃음을 흘렸다. 애인이 되었으나 진짜 신뢰는 한 조각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이 뼈저리게 다가왔다. 신뢰 또한…. 그러니 이현은 지금 아웃팅으로 인한 스트레스의 원인을 저로 지목하는 것이다. 한지우가 아니라.
그래서 이토록 차가웠구나.
연애를 시작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도 없었을 거라고 믿고 있는 걸까.
도달한 결론이 참혹해서 석희재는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이 연애가 형에게 부담만 되었다면….
만약 시간을 돌릴 수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서 나같이 성가신 놈은 지울 수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어?’
그러나 더 이상 난도질당할 곳도 없는 심장이 그 대답을 감당하지 못할까 봐 석희재는 직접적으로는 묻지 못했다.
대신 다른 가능성을 물었다.
“그날, 우리 처음 만난 날.”
겨우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석희재는 이현의 얼굴을 샅샅이 눈에 담으려고 했다. 그러나 이현은 갑자기 다른 화제로 돌아간 석희재를 무감정한 얼굴로 바라볼 뿐이었다.
“이현이라는 사람이 실제로 만나야 했던 사람은 내가 아냐.”
“그래. 그런 것 같더라.”
“…남자 셋이 ‘이현’을 윤간하려고 했었어.”
다리를 반대 방향으로 꼬던 이현의 동작이 딱 멈추었다.
마음이 아팠지만 석희재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누가 나를 쳐서 이어폰이 빠졌는데, 마침 그 사람들이 ‘현이’를 윤간할 거라는 말을 길거리에서 떠들었어. 그래서 뒤를 미행하다가 내가 먼저 뛰어간 거야. 구해 주고 싶었거든.”
“…….”
“지금 내가 이러는 것보다…. 그게 나았을 거라고 생각해?”
“…….”
“그 사람들이 날 치지 않아서, 내 이어폰이 빠지지 않아서, 내가 타인의 일에 무관심해서…. 그냥 그렇게 우리가 만난 적도 없이 스쳤다면.”
이현은 한참 대답이 없었다.
잠시 후에 그의 입에서 작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건 한 번만 당하면 되니까.”
그 말에 어떻게 반응했어야 하는지, 석희재는 그때에도, 이후에도 아주 오랫동안 답을 찾지 못했다.
대화가 끊기고 한참 후, 이현은 일어나서 객석을 떠났다.
“간다.”
작은 철 마찰음을 내며 열렸던 문이 닫혔다. 객석에 새어 들어왔던 외부의 빛도 찰나에 끊겼다. 암전된 극장 안에는 석희재 혼자 남겨졌다. 멀리 로비를 따라 걸어 나가는 이현의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석희재는 무대 위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고, 또 손바닥으로 닦아 냈다. 뺨이 척척하게 젖어 들고 옷자락이 젖어 들 때까지 소리도 없이.
***
내가 형을 좋아하는 것만큼 형이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다.
내가 사라지면 숨이 막힐 정도로, 형이 나를 그리워해 줬으면 좋겠다.
형이 나를 사랑해 줬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런 날이 영영 오지 않을 것 같아서,
가끔은….
***
석희재는 이현이 떠나고 나서도 아주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야 일어날 수 있었다. 그마저도 제 의지가 아니라 박 팀장의 호출 때문이었다.
- 술자리에 너무 오래 있을 필요 없어. 인사드려야 할 분들한테 다 했으면, 이제 집에 가자. 희재야.
그래… 집에 가야지.
환한 복도로 나서자마자 속이 울렁거려 석희재는 비틀거리며 벽에 기댔다. 갑자기 눈앞으로 쏟아진 빛 때문에 현기증이 났다.
그는 벽에 기대서 방금 전의 대화가 꿈이 아닌가 생각했다. 사물을 분별할 수 없는 어둠 속에서 이어진 대화는 꿈처럼 비현실적이었다.
그러나 도피하듯 제 둥지에 숨어들어 공연 없는 월요일을 보내고 자신의 첫 공연일이 다가왔을 때, 석희재는 현실을 다시 직시해야만 했다. 오후 2시, 콜 시간에 맞춰 출근한 백스테이지에서 하필이면 정통으로 이현과 맞닥뜨렸다. 놀란 것은 저뿐이고 이현은 어김없이 저를 투명 인간처럼 대했다.
동시에 배우, 스태프들 사이에서 이현이 받는 눈총이나 조롱 또한 느껴졌다. 이현은 겉으로나마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그 속이 멀쩡할 리 없다. 그러나 제게 위로할 자격이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게 문제였다. 아무것도 매듭짓지 못했다.
그러나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지 알 수 없다는 것 또한 여전했다.
연애의 시작에 제 의지가 작용하지 않았듯이 끝내는 것도 마찬가지인 것처럼 느껴졌다. 단순한 이야기였다. 연애의 주도권은 언제나 이현에게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현은 제 인생에서 석희재가 없어도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선언해 놓고는 정작 끝내자는 말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석희재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그저 자기 존재감을 죽였다.
“어디 아파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분장을 맡은 스태프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석희재는 대답 없이 고개만 저었다. 그러나 곁에서 지켜보던 박 팀장은 석희재보다도 분장 스태프의 말에 더 신뢰감을 느꼈는지 그 길로 나가 스포츠 드링크나 비타민 따위를 잔뜩 사 왔다. 석희재는 조금 긴장했을 뿐이라며, 누워 있으면 괜찮을 거라고 사람들의 걱정을 뿌리쳤다.
창백한 얼굴로 분장실 한구석 소파에 길게 누우면서 석희재는 생각했다. 차라리 무시당하는 게 나은지도 모르겠다고. 그리고 이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트라우마를 겪은 것처럼 뛰는 심장 위에 가만히 한 손을 올리고, 천장을 뜬 눈으로 바라본 채로 생각했다. 막상 그가 저를 찾는 것을 상상하면 공포심마저 들었다.
계속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이별이라.
석희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끝나지 않은 감정을 품고 어떻게 연애를 끝내야 하는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전에는, 이별이란 서로 가진 마음이 다 마모되었을 때 찾아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다. 그런 순수한 발상이 도리어 그를 좀먹었다. 이별의 유예 기간이라는 것을 겪어 보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기 때문에.
“희재야. 너 왜 식은땀까지 흘리냐.”
“…….”
“리허설 때 잘했잖아. 그렇게만 하면 돼.”
박 팀장의 말에 석희재는 턱 아래 목덜미를 만져 보았다. 실제로 손등에 촉촉하고 차가운 땀이 묻어났다.
하기야, 두 다리로 멀쩡히 극장까지 출근해 앉아 있는 게 기적인가. 이현에 한해 보잘것없는 멘탈이 버티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러나,
‘막 개막한 공연에 재 뿌리지 말고, 회사에 민폐 끼치지 말고, 팬들하고 대중한테 실망감 주지 말고…. 절대 그러지 말고 그냥 가만히 있어.’
이현의 말이 수시로 떠올라 이대로 도망칠 수조차 없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
이현을 위해서 바꾼 모든 것들이 그저 그를 앓는 것조차 버겁게 했다. 게다가 수많은 사람과 특정 장소에서 한시에 만나기로 한 약속은 절대 어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배우가 되기로 한 이상 책임을 다해야 했다. 자신이 사랑하던 이현의 모습 또한 그랬으므로….
‘난 혁명가는 못 돼.’
‘…….’
‘자존심도 없고 비굴해.’
‘…….’
‘그래도 인내심은 조금 있어.’
‘…….’
‘좋아하는 일을 계속할 만큼의 인내심은….’
한때 이현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었던 말이 생각났다.
그는 아마도 버틸 것이다. 조롱과 눈총을 견디며.
저 역시 그럴 것이고.
석희재는 상체를 겨우 일으키며 말했다.
“팀장님. 수면제 좀 가져다주실래요? 좀 자고 일어나면 괜찮을 것 같아요. 마이크 테스트 전까지….”
“그때까지 쭉 잔다고?”
“네.”
“그럼 저녁은.”
저녁 공연의 컨디션을 걱정하는 매니저의 눈초리에 석희재는 식사 대신 수액을 맞기로 했다.
그리고는 무사히 무대 위에 올라 모두의 환호 속에서 데뷔 공연을 마쳤다.
***
석희재는 수천 번도 더 드나들어 익숙한 집의 문 앞에 서 있었다.
비밀번호를 이미 알고 있는 도어록 위에 손을 올렸다가, 잠시 후 스스로 문을 여는 대신 벨을 눌렀다.
벨 소리가 원래 이랬었나.
무척 낯선 음이었다.
벨을 누르고도 안에서는 즉시 사람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분주한 걸음걸이가 문 안쪽에서 들려왔다. 보지 않아도 그의 모습이 그려져 석희재는 픽 웃었다. 이현은 샤워를 마친 직후 아마도 최소한의 옷가지만 걸치고 있었을 것이다. 이름 모를 손님을 맞기 위해 허겁지겁 옷가지를 주워 입는 모습이 그려졌다.
문이 벌컥 열렸다.
“어.”
방문객을 확인한 이현의 얼굴에 짧은 당황이 서렸다. 예상대로 그의 머리카락은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웬일이야.”
이현의 물음도 낯설었다. 이런 물음을 들은 것도, 거기에 답한 것도 너무 예전이었다.
“내 공연 봤어?”
석희재의 말을 들은 이현은 난해한 표정이었다.
그는 문을 열어둔 채로 뒤돌았다. 석희재는 안으로 따라 들어가 현관에 서서 문을 닫았다. 어두운 바깥에 있을 때와 다르게 주홍색 등이 그의 시야로 쏟아졌다. 제법 현실적인 광량이다. 무대 위는 그렇지 않았다.
무대에 올랐을 때, 리허설이 아닌 진짜 무대의 조명 광량이 그토록 센지 석희재는 알지 못했다. 눈이 부신 조명 아래 홀로 서 있다가 불이 꺼지면 자신이 알던 것보다 훨씬 짙은 어둠이 찾아왔다.
소대에 선 채 석희재는 가끔 부질없이 시선으로 객석을 훑었다. 어딘가에 앉아서 저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는 이현을 찾아. 그러나 천오백 명이 꽉 들어찬 객석은 너무 많은 사람의 호흡으로 가득 차 있어 가장 익숙한 숨소리를 쫓는 것도 불가능했다.
“피곤할 텐데 왜. 집에서 쉬지.”
“보고 싶어서.”
툭 내뱉은 석희재의 말에 이현의 행동이 잠시 멈추었다. 석희재는 그 모습에 말없이 시선을 주었다.
정말로 그것뿐이었다. 보고 싶어서.
저 입이 원망스러운 말을 하여 저를 상처입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차가운 눈빛에 아무 방어도 하지 못한 채 심장에 생채기를 입는다고 해도. 여전히 그는 눈물 나게 사랑스러웠다. 목이 메도록 보고 싶었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들어와. 왜 계속 서 있어.”
이현의 허락이 떨어진 후에야 석희재는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갔다. TV에서는 이미 여러 번 본 적 있던 흑백 영화가 또 흘러나왔다. 석희재는 소파의 끄트머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봉지 그대로 놓인 과자와 역시 마찬가지로 담긴 채로 비닐 포장만 벗긴 롤케이크가 있었다. 케이크에는 이현이 플라스틱 포크로 조금 파먹은 흔적이 있었다.
석희재가 그걸 보는 사이에 이현이 냉장고에서 맥주를 한 캔 꺼내 왔다. 예상대로 이현은 전과 마찬가지로 건네기 전에 캔을 따서 주었다.
“고마워.”
이현에게 그걸 받아 들며 석희재가 말했다. 이현은 가볍게 손을 내젓고는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모든 게 한결같았다.
마치 그를 짝사랑하던 때처럼….
의외로 함께 있는 시간은 평화로웠다. 대사마저 다 외워 버린 흑백 영화 속에서 익숙한 노래가 흘러나왔다. 이현은 다 마신 맥주캔을 구겨 휴지통으로 던졌고, 캔은 모서리를 맞고 튕겨 나왔다. 언제나 그렇듯이 이현은 그것을 얼른 줍지 않고 소파에 느슨히 늘어져 앉아 있었다. 잠시 후에는 석희재도 다 마신 맥주를 휴지통에 조준해 던져 넣었다. 딱 맞게 명중해 들어가자 이현이 하는 수없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다시 맥주 두 캔을 꺼내 오며 제) 조준을 실패한 캔을 주워다 휴지통에 얌전히 넣었다.
미련.
석희재는 한 단어를 떠올렸다.
이현에게 이대로 스며들고 싶은 것은 미련 때문이다.
두 번째 캔을 비운 후 이현은 캔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테이블에 올려 두고는 아무렇지 않게 석희재에게 몸을 겹쳤다. 약간의 취기에 뺨이 달아오른 채로. 목덜미에 기대어 숨을 빨아들인다. 그의 차갑고 날씬한 손이 석희재의 셔츠 틈으로 비집고 들어왔다. 그 애무의 순서마저 익숙한 것이었다.
그렇게 이현에게 밀려 소파에 맥없이 목을 기대면서….
석희재는 눈물을 흘렸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제 몸을 탐하려는 순간이 왜인지 다른 것보다도 훨씬 더 사무쳤다.
이대로 상관없다는 건가?
미련.
미련이란 희망의 또 다른 표현인지도 모른다.
남은 미련을 산산이 조각내는 비참함이 몰려왔다.
앞으로 둘 사이는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것이고, 이현은 바꿀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흐, 윽….”
호흡에서 이질감을 느끼고 이현이 고개를 들었다. 석희재는 고개를 돌리며 그의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나 떨어지는 눈물은 속수무책이었다.
너 정말 어리구나.
참 감정적이다.
왜 이런 걸로 울고 그래.
어른스럽지 못하게….
이현의 속마음이 귀에 들리는 듯했다. 언제나 그랬다. 사랑에 있어서 자신은 미숙아였고 이현은 이미 모든 것을 경험한 어른이었다.
석희재는 그의 시선 앞에서 헐떡이며 젖은 눈으로 힘없이 변명했다.
“난 처음이니까.”
“…….”
“처음이니까 봐줘. 난 정말, 이럴 때는, 아무것도….”
“…….”
“…미안해.”
이현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죄로 석희재는 사죄했다. 울음에 가까운 호흡이 흘러나올 것만 같아 석희재는 대신 입을 틀어막았다. 입을 막은 오른손 위로 눈물이 새어 들었다.
짝사랑을 할 때에는 그토록 좋았던 순간들이 이제는 왜 상처가 될까.
의문에 휩싸인 채로 석희재는 자신의 과실을 찾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자신이 꿈꾸던 것과는 다른 모양의 연애였다.
“형. 원래 첫 연애는 다 이래?”
“…….”
“나는 물어볼 사람이 형밖에 없어.”
“…….”
“스무 살 이후로 나한테는 애인도, 친구도, 형제도 다 형이었어.”
“…….”
“이런 걸 알려 줄 사람이 없었어.”
이현은 느리게 움직였다. 겹쳐 있던 몸을 떼어 내고는 옆자리에 풀썩 앉았다.
한참 후, 그의 입에서 조금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글쎄. 다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
“확실한 거 하나는, 우리가 특별한 건 아니라는 거야.”
그 말에 석희재는 고개를 숙였다.
그에게는 이것조차 지나가는 일일 뿐이라는 걸 증명하는 확실한 한 마디였다. 지나치게 뚜렷한 감정의 차이 앞에서 눈물조차 멎었다.
석희재는 겨우 말을 뱉었다.
“…비참해.”
이렇게는 더 버틸 자신이 없었다.
늦은 한숨이 터져 나왔다. 이현에게서였다.
그는 두 무릎을 소파 위로 끌어 올리고는 등받이에 기댄 채로 구겨져 있었다. 지친 듯 눈가를 가린 손가락 사이로 아무렇게나 헝클어뜨린 머리카락이 비죽 튀어나왔다. 헐벗은 상반신 때문에 갈비뼈가 드러나도록 마른 옆구리가 보였다.
순간 시야 안에 들어온 이현의 모습이 지나치게 지치고 초라해 보여 석희재는 그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이 연애로 소모되고 있는 것은 저뿐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난 연애 같은 거 못 하는 사람이라고….”
“…….”
“이렇게 될 줄 알았어. 상처만 주게 될 줄 알았다고.”
“…….”
“이런 꼴 보기 전에 끝내자고 했잖아.”
그는 죄책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한때는 그 죄책감마저 기뻤던 적이 있다. 사랑이 아니라면 동정이라도 받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동정심은 상대를 비참하게 할 뿐이라는 걸.
TV에서 흘러나오는 빛이 이지러지며 이현의 몸 위를 음영으로 수놓았다. 석희재는 작게 훌쩍이는 소리를 들었다. 영화의 볼륨에 휩쓸려 지나갔지만 분명 그것은 이현이 낸 소리였다. 그러나 이현은 눈물을 닦아 내는 시늉도 하지 않고 그저 충혈된 눈으로 앞을 쏘아볼 뿐이었다.
다른 건 다 필요 없으니 이 사람 하나만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그 상상 속에서 자신은 언제나 주는 사람이었다. 그를 풍요롭게 만들 자신이 있었다. 사랑에 대해 냉소적이던 그를 다른 사람으로 만들 수 있을 거라며 감히 오만한 상상을 했다.
하지만 지금 이현은 어떤가.
그는 가해자가 되어 있었다. 게다가 한 번도 보여 주지 않았던 초라한 모습으로 숨죽여 울고 있었다.
석희재는 멍하니, 완전히 망가져 버린 제 연애에 대해 생각했다. 또한 자신이 망친 이현의 현실에 대해서 생각했다. 끝까지 받는 사랑을 만류하던 그를 흔들어 댄 제 지난 행동에 대해서도.
우스운 건 결국 저였다. 이런 결과도 예상하지 못하고 그저 내 사랑이 이길 거라며 달려들던 과거의 자신은, 이현에게 얼마나 애송이처럼 보였을까.
곧 자신이 내릴 판단이 맞는지 아닌지 정확한 판단을 하지 못한 채로 석희재는 떠듬떠듬 입을 벌렸다.
“그 말이 맞아.”
“…….”
“처음부터 형이 옳았어.”
“…….”
“인연이 아닌 걸 되게 하려니까…. 힘들었던 거구나.”
이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TV에서 흘러나온 웃음소리가 터졌다. 제 우스운 꼴을 조롱하는 것 같아서 석희재는 새삼 스스로가 꼴좋다고 생각했다.
“우리 헤어지는 게 맞겠지?”
맑은 눈물이 석희재의 망막에 가득 고였다. 이현의 확인을 받기 전에 제 말의 모순을 깨달았다.
‘헤어지다’라는 말은 이 관계와 영 어울리지 않았다.
자신만 끝내면 되는 거였다.
서글픈 깨달음을 품은 채로도 석희재는 이 상황에 쉽사리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앞으로 인생에서 이현을 없는 사람처럼 덜어 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공포심이 먼저 몰려왔다. 자신이 없었다.
먼저 몸을 일으킨 쪽은 이현이었다. 그가 너저분하게 흩어진 술자리를 치우기에 석희재도 기계적으로 그를 도왔다.
제 눈가에도, 이현의 눈가에도 눈물로 붉게 달구어진 자욱이 남아 있었다. 서로의 얼굴에 남은 흔적을 모른 척하며 일상적인 행동을 행하는 것이 우스웠다. 현실의 모든 장면이 드라마 같지는 않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된다.
“잘 거야?”
“그래야지.”
“혼자?”
이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나를 얼마나 쓰레기로 보는 거냐.”
“…그런 게 아니라.”
더 이상 이 집에 남아 있을 이유를 찾지 못했을 때에 석희재는 몸을 일으켰다.
석희재는 현관에 서서 괜스레 집 안을 한 번 둘러보았다. 자신이 이현의 인생에서 꺼져 주면 그는 이제 더 이상 의리를 지킬 필요도 없다. 이 집에는 저 말고 다른 남자들이 드나들기 시작할 것이다. 이현을 소중히 다뤄 줄 줄 모르는 남자들이. 이현의 연락처에는 예전처럼 하룻밤 즐거움을 위해 초성으로만 저장한 남자들이 늘어날 것이다.
이현은 그런 인생을 더 만족스러워할지도 모른다. 이현을 가장 사랑해줄 수 있는 건 저 자신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건만, 감정적으로 깊이 얽히기를 거부해왔던 이현에게 자신은 최악의 상대일 뿐이었다. 그런 그의 벽을 깨고자 했던 건 지나친 오만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아마도 이현은 먼저 끝내자는 말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질척이는 감정만 걷어 낸다면 이 관계는 더 길어질지도 모른다. 그에게 있어서 저만큼 익숙하고 잘 맞는 데다 순종적인 상대는 없을 테니까.
하지만 그것 때문에라도 더는 지속할 수 없었다. 언제나 이현이 손꼽아 기다리는 운명의 대체품으로 지낼 수는 없었다. 이 연애의 역사에서 이현을 일방적인 가해자로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더 질질 끌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했어?”
석희재의 맥락 없는 물음에 이현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내가 형 인생에 끼어들어서… 그래도 없었던 것보다는 행복한 게 더 컸다고 말해 줘.”
구걸하듯 묻자 이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 미련 가질 거잖아.”
“…….”
“지금은 아무 말도 안 하는 게 나을 것 같다.”
때론 친절한 정답이 더 냉정하다.
석희재는 고개를 수그렸다.
“…다시 여기 올 일 없을 것 같아.”
“그래.”
이별을 간접적으로 표현한 말에 이현은 선뜻 수긍했다.
석희재는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이현이 습관처럼 팔짱을 낀 채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별은 그에게 아무런 대미지도 입히지 못한 것만 같다.
“그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 하니까….”
“…….”
“오기가 생기네.”
제법 독하게 말한 것과 달리 석희재는 가만히 숨을 몰아쉬었다. 무감정을 표방한 눈조차도 동공이 물기로 반질거려 그저 애틋해 보이는 것은 모르고.
“나도 괜찮아질 거야.”
“그래.”
“형이 말한 대로 아무에게도 민폐 끼치지 않고, 실망시키지 않고 해내려고.”
“…잘 생각했어.”
“공사 구분 확실히 할 테니까… 피디님도 앞으로는.”
“…….”
“저 투명 인간 취급하지 마세요.”
석희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토록 부정했던 미래가 반복 재생되는 듯했다.
“알겠어요.”
“…….”
“이제 가세요. 배우님.”
석희재는 깔끔하게 대답하는 이현을 한없이 내려다보았다. 좀처럼 떠날 생각을 하지 않는 석희재 대신 이현이 손을 뻗어 문을 열었다.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와 함께 밤바람이 문틈 사이로 불어왔다.
“피곤할 텐데 컨디션 관리 잘하시고.”
“…….”
“택시 잡아 드릴까요.”
석희재는 고개를 저었다. 열린 문을 등으로 밀며 미련 가득한 뒷걸음질로 걸었다. 이현의 눈에 어떤 감정이 남아 있지는 않은지 한참을 들여다보며.
그러나 석희재가 완전히 문밖으로 나갔을 때 그는 신사적인 손길로 문을 닫아걸었을 뿐이다. 아주 조용히 문이 닫혔다.
석희재는 닫힌 문 앞에서 서성이며 울었다.
잠시 후 석희재는 홀로 밤거리를 걸어 나왔다. 노란 가로등이 켜진 조용한 사이 골목을 지나, 차들이 쌩쌩 달리는 대로변의 횡단보도를 걸었다. 종각의 밤거리를 터덜터덜 걷던 중에 빈 택시를 수없이 마주쳤지만 딱히 잡아야겠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목적지는 집이 아니었다. 하지만 어디로 가고 싶은지도 알 수 없었다.
‘내가 형 인생에 끼어들어서… 그래도 없었던 것보다는 행복한 게 더 컸다고 말해 줘.’
마지막에 그렇게 묻고 싶었던 이유를 이제야 알 것 같다.
그를 좋아하면서 그래도 행복함이 더 컸더라고 믿고 싶은 것은 제 쪽이었다.
소공동 골목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 한 명에게 덧없이 사랑이 빠졌다. 남자를 사랑하게 될 줄도 모른 채로 3년을 매 순간 중독되기만 하며 행복한 짝사랑에 취해 있었다. 첫사랑의 상대가 이현이라는 사실에 그저 감복하면서. 게다가 기적처럼 고백이 성사된 이후 3개월의 연애 기간은 말 그대로 꿈만 같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게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었다.
3년의 짝사랑이자 첫사랑, 그리고 고작 3개월 지속된 연애의 진심을 지키고 싶어서 석희재는 이 관계를 먼저 그만두기로 했다. 그것이 아무리 두드려도 답을 주지 않는 상대를 증오하지 않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