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3. 타투 (13/27)
  • 13. 타투

    “형이 일 안 했으면 좋겠다.”

    석희재는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이현의 귓바퀴에 입술을 댄 채로.

    살갗을 스치는 물리적인 간지러움, 그리고 음성으로 전해지는 공기의 진동에 이현이 어깨를 움츠렸다. 오전 10시. 암막 커튼을 친 틈으로 오전의 햇살이 스며들어 왔다.

    오늘은 이현이 8일 만에 맞는 휴일이자, 공연 오픈 전의 마지막 휴일이었다. 막이 오르면 주말에도 극장 출근하는 때가 잦아 오늘처럼 통으로 일을 쉬는 날은 없다고 보면 된다고 이현은 말했다. 앞으로 극장 밖에서 만날 일이 더 드물어진다는 것을 깨달은 석희재는 함께 휴일 아침을 맞기 위해 밤중에 현의 집으로 달려왔다.

    언제나처럼 잔뜩 쌓인 빨래를 대신 돌리고, 건조기에 널어놓고, 집 여기저기에 씻지 않은 채로 널려 있는 빈 유리컵을 싹 주워 와 설거지도 마쳤다. 쓰레기를 두 봉지나 채워 가져다 버리고 청소기를 돌리고 나니 새벽 2시였다. 그리고 새벽 4시, 현은 만취한 채로 도착했다. 석희재는 현의 핸드폰을 열어 미리 약속받은 술자리 단체 인증샷을 한 장 확인했다. 참석자들의 얼굴을 전부 알아보기 힘들었지만 그중 한지우는 없었다.

    들어오자마자 구두와 양말을 아무렇게나 벗어 던진 이현은 석희재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더니 섹스하고 싶은데 만취해서 발기가 잘 되지 않는다며 석희재를 붙잡고 징징거렸다. 같은 말을 오십 번은 반복하는, 진상에 가까운 술주정인데도 석희재는 이현의 모습이 귀엽고 좋아서 입가가 자꾸만 주책맞게 풀어졌다. 풀썩 무너지는 몸이 제게 매달려 오기에 마음껏 안고 키스도 해 주었다.

    그렇게 이현을 달래 씻기고 재운 뒤 함께 맞은 소중한 아침이었다. 피곤에 절어서도 현은 습관적으로 출근 시간쯤에 눈을 떴고, 아침도 먹기 전에 대신 다른 허기를 채우려 들었다. 이불 안으로 기어들어 가 아침이라 빳빳하게 발기한 채였던 석희재의 성기를 목구멍에 닿도록 머금고 제 욕구를 채웠다.

    오전부터 삽입은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니냐는 석희재의 걱정스러운 말에도 상관없다며 기어이 석희재를 찍어 누르고 기승위로 타고 오르기도 했다. 그러고는 스트레스라도 푸는 것처럼 격렬하게 허리를 흔들어 대더니 사정 직후 완전히 지쳐 나가떨어졌다. 오르가슴에 도달하는 것만이 목적인 섹스였다.

    ‘딜도 취급’은 안 하기로 약속했지만…. 이 연애의 갑과 을을 확실히 뼈에 새긴 석희재는 약간의 원망을 순종적으로 삼켰다. 이현의 사생활은 일에 완전히 매몰당해 있다. 한창 일이 바쁠 때의 현이 얼마나 몰려 있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안쓰러운 마음이 큰 것도 사실이었다.

    다만 서로 흥분의 속도를 맞추지 않은 섹스였기 때문에 잔뜩 도발만 당하고 석희재는 그때까지도 사정하지 못한 채였다. 때문에 그는 제 위에 드러누운 이현을 껴안고 혼자 자위해야 했다. 이현은 눈을 감고 석희재의 숨소리, 심장 박동, 절정에 가까워질수록 단단히 조여지는 복근과 제 허벅지에 자꾸 마찰되는 그의 손목의 감각을 느꼈다.

    그렇게 석희재가 사정한 직후, 현은 다시 등을 돌리고 돌아누웠다. 숨을 몰아쉬며 혼자 천장을 바라보던 것도 잠시, 석희재는 얼른 일어나 휴지로 뒤처리까지 깔끔히 끝냈다. 혹 땀 때문에 피부가 질척거리면 이현이 성가셔할까 봐 적당히 땀이 식어 몸이 산뜻해졌을 때에야 조심스레 이현의 등 뒤에 달라붙었다. 그가 덮은 이불보다도 존재감 없이 다가가려 노력하며 현을 뒤에서 끌어안았다. 다행히도 현은 잠든 것처럼 미동이 없었다.

    석희재는 한참 그 등에 달라붙어 목덜미와 어깨에 조심스레 키스를 내렸다. 그가 비록 등을 돌리고 있을지라도 석희재는 애정 가득한 행복감을 만끽했다.

    둘만 있으면 이렇게 좋은데….

    “일 안 하면 좋겠다.”

    석희재는 다시 중얼거렸다. 귓가에 부스스하게 뻗친 현의 머리카락이 파르르 떨렸다.

    다시 자나?

    대답 없는 그가 궁금해졌을 때였다.

    마침 머리맡에 두었던 핸드폰의 진동이 지잉, 울렸다. 이현의 것이다.

    현이 머리맡을 더듬어 핸드폰을 손에 쥐어 들었다.

    안 자고 있었구나.

    현이 핸드폰을 들어 메시지의 주인을 확인했다. 그게 누구인지, 뒤에서 이현을 끌어안은 채로 함께 화면을 바라보고 있던 석희재 역시 알 수 있었다.

    한지우.

    그러나 이현은 답장하는 대신 그대로 화면을 꺼 버리고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석희재는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원래부터 쉴 때의 이현은 급한 회사 일이 아닌 사적인 연락에는 일절 답을 하지 않았다. 예전 파트너 시절 저도 답 없는 이현에게 애가 탄 적이 아주 많았다. 지금 한지우가 마찬가지 취급을 받는다는 게 기분 좋았다. 갑자기 현에 대해 흘러넘치는 사랑을 느낀 석희재는 다시 그를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한지우의 연락을 무시한 것이 저를 의식한 것이든, 그저 졸려서이든, 아니면 싸우고 감정 소모를 하는 게 싫어서든 간에… 뭐든 좋았다. 한지우를 무시하는 그 순간 현이 저와 얽혀 있다는 것이 좋았다. 이현은 둘만 있을 때는 충실한 연인처럼 군다.

    “무슨 소리야.”

    웅얼거리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목소리가 허스키했다. 그가 묻는 것이 아까 제 말에 대한 반응이라는 것을 깨달은 석희재는 대화를 이어 나갔다.

    “일하면 형이 자꾸 축나니까.”

    이현이 눈을 비비며 픽 웃었다. 제 말을 진지하게 듣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어차피 그를 설득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석희재는 속에 있던 말을 꺼냈다.

    “다른 사람들이랑 안 부딪치고 우리 둘이 이렇게만 평생 있게.”

    “…….”

    “갑자기 우리만 무인도 같은데 고립되어서… 평생 같이 살면 좋겠다.”

    오늘 하루 이현은 온전히 저의 것이었다. 빛마저 차단된 암실 같은 방에서 석희재는 안락한 평화를 느꼈다. 무슨 꿍꿍이인지 모를 한지우 같은 인간과 얽힐 일이 없다는 게 가장 좋았다. 이런 날이 가능하면 아주 길었으면 했다.

    쿡쿡 웃던 이현이 웬일로 맞장구를 쳤다.

    “무인도 같은데 떨어져서?”

    “응.”

    “우리 둘이 과일 따 먹고 움막 짓고 사는 거야?”

    “응. 옷도 안 입고.”

    그렇게 말하며 석희재는 이현의 맨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이현이 다시 ‘흐음….’ 하고 신음을 흘렸다. 납작한 복부로 손을 옮겨 쓰다듬다가 자연히 그 아래로 향하자 이현이 방어하듯 손목을 잡았다. 석희재의 손을 잡고 얼굴 가까이 가져와 들여다보던 현이 말했다.

    “너 손 되게 곱다.”

    “곱다고?”

    “응. 마디도 별로 없고, 하얗고, 길고… 꼭 너같이 생겼어.”

    “나같이 생긴 게 뭔데.”

    정말로 궁금해 물으니 대답 대신 엉뚱한 말이 돌아왔다.

    “넌 좆도 너같이 생겼어.”

    이현은 그렇게 말하고는 또 혼자 베개에 얼굴을 박고 쿡쿡 웃었다. 욕인지 농담인지 모를 말에 석희재는 미묘한 표정으로 그 떨리는 어깨를 바라보았다.

    “그런 게 어딨어….”

    “진짜야.”

    “그게 그거지 뭐.”

    “아냐. 네 건 특히 좀 너같이 생겼어.”

    그 말은 곧 지금까지 수많은 다른 남자의 좆을 보았다는 말처럼 들렸다. 별로 의식하고 싶지 않은 그의 과거에 석희재는 기분이 안 좋아졌다.

    그러나 관계 증진에 하등 쓸데없는 질투심은 내다 버려야 했다. 대신 지금 자신에게 허락된 행위를 만끽하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석희재는 이현을 그대로 엎드려 눕히며 등 뒤로 타고 올랐다. 언제 또 섰냐고 놀라는 이현의 뒤에서 몸을 끌어안고 천천히 성기를 꽂아 넣었다. 한 차례 삽입으로 눅진히 풀린 뒤라 진입이 어렵지 않았다.

    “으응….”

    신음하며 이현이 시트를 움켜잡았다. 아랫배가 가득 차 가볍게 헐떡였다. 삽입하는 입장에서 아까보다 수월함을 느끼는 것과 별개로 이현은 여전히 빠듯함을 느끼는 듯했다. 목덜미에 촉촉하게 땀이 스몄다.

    “내가 꽤 큰 편이야?”

    “응, 응….”

    “네가 만났던 사람 중에선? 몇 번째로?”

    “아, 몰라. 흣… 아… 좋아.”

    “전 애인들하고 비교하면?”

    “아, 뭘 물어. 좆이 다 똑같지.”

    “아니라며? 내 건 나같이 생겼다며.”

    “다 그게 그거지 뭐… 하… 읏.”

    일부러 듣고 싶은 말을 이현이 이리저리 피하는 건 명백해 보였다. 어느새 제 안을 채운 크기에 적응해 허리를 흔드는 이현의 등허리를 양손으로 눌렀다. 움직이지 못하게 하고 조금 버겁게 찍어 누르자 신음이 커졌다. ‘아파, 아파.’ 하고 엄살도 흘린다.

    그 순간 석희재는 이것이 이현이 원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내다 버리기로 한 질투심에 자극받아 또 휘둘리는 건 제 쪽이었다.

    허무함에 움직임을 멈춘 석희재를 알아챘는지, 이현이 뒤를 돌았다.

    “야. 네가 제일 커.”

    “…….”

    “진짜야. 자부심을 가져도 돼.”

    픽 웃으며 이게 네가 원하던 말 아니냐는 듯 말을 던진다.

    칭찬을 들었지만 우울했다. 석희재는 다시 이현을 꼭 끌어안았다. 전신을 맞닿게 하고 그의 피부를 느꼈다. 이현이 진저리를 칠 정도로 여러 번 키스했다. 흥분에 펄떡이는 몸을 옴짝달싹 못 하게 조여 안았다.

    얼마 전에 함께 본 영화가 떠올랐다. ‘너같이 생겼다’라는 말은 아무래도 칭찬이 아닌 것 같다. 그 영화에서 이현은 드물게 남자 주인공에게 혼을 빼앗겼다. 설마 화면 속의 배우까지 질투해야 하나 싶어서 석희재는 이현의 반응을 예의 주시했었다.

    배우가 맡은 역할은 뼈대가 굵고 거친 블루칼라 노동자였다. 어휘는 짧고 말투는 무뚝뚝했다. 섬세함이라곤 조금도 없어 보이는 타입의 마초를 보고 이현은 침을 흘릴 듯이 집중했다. 좋아? 어디가 좋아? 참지 못하고 추궁하니 저런 짧고 거친 손가락으로 안을 헤집어 주면 좋겠다 말했다.

    지나치게 솔직한 대답.

    석희재가 말이 없자 이현은 뒤늦게 눈치를 봤다. 그러다 누구에게나 성적 판타지는 있는 거라면서 뻔뻔하게 뻗대었다. 석희재는 코로 비웃어 주었다.

    물론 이현의 성적 판타지야 거칠게 당하는 것을 기본형으로 하루에도 열다섯 번씩 바뀐다. 섹스 파트너 시절의 이현은 석희재에게 그가 원하는 방식과 타입을 주문하기까지 했었다. 아무튼 현은 세상 온갖 남자들에게 다 박히고 싶어 했다. 현재 저만으로 만족해 주는 게 고마울 정도로.

    석희재가 또 삐진 것처럼 보이자 이현은 그제야 살살 달래며 이렇게 말했다. ‘쌔끈한 외국인 바이올리니스트하고 뒹굴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다’라고. 주섬주섬 내뱉는 변명에 어이없게도 기분이 풀렸다. 어느 쪽이든 제가 어필되는 면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날 석희재는 영어를 쓰면서 이현이 만족할 만큼 박아 주었다. 석희재의 의외의 영어 실력에 깜짝 놀란 현은 다른 사람에게 당하는 것 같다면서 평소보다 더 흥분했다. 신음도 후하게 흘렸다. 얼마나 만족스러웠는지 섹스 후에 석희재가 그 몸에 달라붙어 후희를 양껏 하도록 놔두기도 했다.

    솔직하지나 말지.

    애가 타고, 밉고, 또 사랑스럽기도 해서 자연히 허리 짓이 거칠어졌다. 꽉 안으니 자극당할 때마다 펄떡이는 몸이 더 잘 느껴졌다. 사정할 때까지 그를 그렇게 가둔 채로 두 사람은 나란히 절정에 다다랐다. 성기로 빠듯하게 찬 내부가 정액에 적셔지고, 틈 없는 안에서 액이 비어져 나왔다.

    한참 숨을 몰아쉬던 이현이 제 목덜미를 얽은 석희재의 팔을 치워 내며 말했다.

    “샤워만 간단히 하고 올게.”

    현은 일어나 벗은 채로 욕실로 향했다. 석희재는 그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같이 씻어도 되는데.”

    “빨리 나올게.”

    이현은 웃으며 안을 향했다.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 건 나뿐인가….

    한 몸이 되고 싶다.

    잠시 후 석희재가 갈아 놓은 깨끗한 시트로 이현이 다시 올라와 누웠다. 아침을 건너뛰고 점심은 상의 없이 배달 음식이었다. 휴일인데 다른 계획은 없고, 그냥 한껏 게으름 피우고만 싶은 모양이다.

    이렇게 쉬는 거,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는데.

    시간은 덧없이 흘러갔다. 이래서야 평범한 날들과 다를 게 없었다. 석희재는 초조함을 아쉽게 삼켰다. 바깥에서 데이트하고 싶은데 말을 꺼내기가 어려웠다. 그마저도 현에게 부담일까 봐.

    그래도 오후 늦게가 되면 바깥에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고 싶어 할지 모른다. 석희재는 기다려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현재 현은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연예 가십을 핸드폰으로 훑어보는 데 정신이 없었다. 그런 그를 바라보다 석희재는 입을 열었다.

    “있잖아. 자고 나서.”

    “응.”

    “형이 나를 안고 달라붙으면 귀엽겠다.”

    “뭐 어떻게. 이렇게?”

    이현은 시선을 핸드폰에 고정한 채로 머리를 성의 없이 석희재의 가슴팍에 올려 두었다.

    “응… 막 키스하고 그랬으면 좋겠어. 떨어지기 싫은 것처럼.”

    “그건 네가 잘하는 건데.”

    “형도 그랬으면 좋겠어.”

    그 말에 현이 고개를 들어 석희재에 턱에 쪽, 가벼운 키스를 했다. 이어 부스스 미소 짓는다.

    석희재는 현의 이마에 다시금 조용히 입술을 묻었다.

    ***

    ‘나는 나를 어디까지 바꿔야 할까.’

    D-day 14. 연습실에 회전 무대가 들어왔다. 처음 연습실에 들어올 때만 해도 휑하니 간이 책상과 접이식 의자만 있던 곳에 지질한 살림들과 대도구가 쌓이기 시작했다. 나무 바닥에는 동선을 외우기 위한 색색의 스티커 표시가 무한대로 늘어나고 있었다.

    쉬는 시간, 석희재는 무대의 상수와 하수를 그리며 자신이 서야 할 위치의 동선을 가늠해 보았다. 소대에서 걸어 나간다고 상상하면서 뒷짐을 진 채로 연습실의 마킹 위를 천천히 돌아다녔다. 대사나 노래 대신 제게 훨씬 익숙한 바이올린 연주로 대신한다지만 이건 보통의 클래식 공연과는 전혀 다른 등장과 퇴장이 존재했다. 조명의 위치도 정확히 외워 놔야만 했다.

    연출은 이 공연에 석희재 같은 비 배우 출신의 인물들을 몇 배치해 놓았다. 악기 연주자뿐만 아니라 마임과 무용으로 대사 연기를 대신하는 댄서들도 몇 명이 더 있다. 처음엔 다들 초면이었을 텐데 이제는 다들 생사고락을 같이 한 사람들처럼 잘 어울리고 있었다. 저만 빼고.

    ‘그건 희재 씨가 술을 싫어해서 그래. 술자리를 피하는 티가 나니까 다들 부를까? 하다가도 하지 말자, 그렇게 되는 거지.’

    유나연은 그렇게 말했다. 석희재는 픽 웃었다,

    싫어하는 정도는 아닌데.

    하지만 즐기지 않는 것도 맞다. 그런 데에 가서 시간을 죽여야 하는 이유를 모르겠다. 연습 초반에 친목에 불이 붙을 때 몇 번 따라간 적이 있지만 그건 그 자리에 이현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서 내내 현이 무얼 하는지, 누구와 대화를 나누는지, 언제 일어나는지에만 촉을 기울였다.

    그래서 더 재미가 없었던 걸까. 다른 사람들도 대화를 이어 가기는커녕 재밌는 농담 한두 마디 할 줄도 모르고, 주는 술이나 축내는 저를 반길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다. 솔직히 말하자. 술이 싫다고.

    석희재는 끄트머리가 지저분하게 물든 종이테이프 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바닥을 향해 눈을 내리깔았다. 이현의 일과 중 가장 많은 시간을 뺏는 건 일이었고, 그다음은 술자리였다. 아는 사람은 왜 그렇게 많고 부르는 사람은 또 왜 그렇게 많은지.

    자정쯤에 일어난다는 약속을 지킨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갑자기 누구 대표님이 오셔서, 차기작 하기로 한 배우의 매니저가 와서, 투자자가 와서…. 그러다 보면 새벽 두 시, 세 시… 술자리는 언제 끝난다는 기약도 없이 늘어났다.

    비즈니스를 하려면 일과 시간에 정식으로 약속을 잡는 게 맞지 않나? 술에 취해 오가는 말들이 명료할 리가 없다. 석희재는 그 비효율을 탓했다. 반면 사귀기 전에 자신이 현과 정식으로 진행했던 몇 번의 미팅들은 지나치게 빨리 끝났다. 할 말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마저도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이 일하는 시간 중 일부라도 독차지하고 싶었기에 자진해 캐스팅에 응했고, 그의 잠자는 시간이라도 갖고 싶어서 애인 자리까지 꿰찼는데도 무언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갈증은 커져만 갔다.

    석희재는 짧은 한숨을 쉬었다. 애인을 빼앗아 가는 술자리가 미친 듯이 싫지만 차마 그를 탓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는 무의식적으로 모든 술자리를 보이콧하고 있었다. 외로운 혼자만의 보복. 그래서 고립되는 것은 저뿐일지라도, 애초에 이현 때문에 시작한 일이니 다른 사람과의 관계는 크게 중요치 않다고 합리화하며.

    ‘그래도 둘 중 하나라도 덜 바빠야지. 그래야 만나지.’

    눈가를 긴 손가락으로 꾹 누르고 있을 때였다. 지금 들릴 리가 없는 반가운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이건 누가 사다 놓은 거예요?”

    석희재는 소리가 난 쪽으로 등을 홱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현이 연습실 구석 정수기 근처에 서 있었다. 꽤 멀리 있는데도 목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콕 박혔다.

    마침 현의 곁에 있는 건 반갑게도 유나연이었다. 석희재는 그쪽으로 민첩하게 향했다.

    “아, 피디님! 그거 텀블러랑 개인 컵 가지고 다니는 선배들이 설거지하고 말릴 데가 없다고 그래서… 우리끼리 돈 모아서 샀어요.”

    “그래요? 나한테 말을 하지. 영수증 있으면 주세요.”

    “이거 진짜 싼 거라서 얼마 안 했는데. 괜찮아요.”

    석희재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뒤에 소리 없이 가서 섰다. 그제야 석희재는 오늘 이현이 입고 온 것이 제가 선물한 카디건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걸 알자마자 좋아서 심장이 쿵쿵 뛰어 댔다. 당장 껴안아 주고 싶었다.

    얼마 전에 편집숍을 지나가다가 이 카디건이 자꾸 눈에 밟혔고 충동적으로 들어가서 사 버렸다. 이번에도 한도가 가장 높은 엄마 카드로…. 이현은 막상 받을 당시에는 또 뭐 이렇게 비싼 것을 사 왔냐고 투덜투덜하면서, 가져가서 반품하라는 미운 소리만 해 댔다. 석희재는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고는 옷은 놔둔 채 그가 환불하지 못하게 영수증만 들고 도망쳤다.

    그리고 며칠이 지났을까, 결국 이현이 별수 없이 그 옷을 입어 준 것이다.

    “옷 예뻐요.”

    석희재는 뒤에서 이현의 어깨에 한 손을 가만히 올려놓으며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순간 현이 파드득 놀라며 뒤를 돌았다. 뒷덜미를 손으로 방어하듯 감쌌다.

    “아… 아. 깜짝이야. 희재구나.”

    “…….”

    “언제 왔어?”

    반가워하기는커녕 숨넘어갈 듯 놀라는 모습에 조금 기분이 상했다. 약간 숨이 닿은 것만으로도 과민하게 굴다니…. 그리고 또 언제 오기는. 연습실 한가운데 서 있었는데 못 본 것이 더 이상하다. 반대였다면 자신은 이현부터 바로 알아봤을 텐데.

    석희재가 가만히 있으니 유나연이 얼른 말의 공백 사이를 메꿨다.

    “맞다, 피디님 희재 좀 꼬셔봐 주심 안 돼요?”

    “네? 제가 뭘….”

    “술자리 같은 데 진짜 한 번도 안 오거든요. 오늘 경철이 생일이라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은데….”

    “아… 맞다.”

    이현이 부스스 웃으며 석희재를 턱으로 가리켰다.

    “지금 가자고 해 봐요. 나연 씨가.”

    “저는 백 번도 더 얘기했죠. 근데 고집 세요. 그래도 희재 씨가 피디님 말은 듣는 거 같길래요.”

    그 말에 이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굳었다. 석희재는 둘만 남았을 경우 이현이 제게 하게 될 잔소리를 예감했다. 다른 사람들과 잘 지내라, 나만 특별취급하지 마라, 등등. 이현이 석희재를 떨떠름한 얼굴로 올려다보며 말했다.

    “희재야. 갈래?”

    “안 가요.”

    불퉁하게 대답하자 유나연은 거 보라는 듯이 상심한 표정을 지었다. 석희재는 하고 싶은 말을 속으로만 꾹 눌러 삼켰다. 둘 중에 한 명이라도 한가해야 볼 시간이 나죠, 라고.

    ***

    연습이 끝나고 돌아가는 길, 석희재는 집에 내린 다음 옷을 갈아입고 도시락통에 이것저것 음식을 챙겨 이현의 집으로 향했다. 현의 집에 너무 자주 가면 박 팀장에게 이상한 오해를 살 것 같아 요즘에는 이렇게 몰래 움직이고 있었다. 조만간 차가 생기면 이런 번거로움도 없어질 것이다.

    석희재가 샤워를 마치고 옷을 고심해서 골라 입은 후, 몸에 향수까지 뿌렸을 때였다. 이현에게 전화가 왔다. 오늘도 술을 마시게 되었다고. 아까 낮에 유나연이 말한 ‘경철의 생일파티’를 빌미로 한 술자리에 붙잡혔다고 했다.

    - 미안해. 제작사에서 한 명은 가야 그래도 배우들이 안 섭섭해하지. 생일 케이크만 사주고 금방 들어갈게.

    금방 들어온다는 말을 오늘은 지킬까.

    또 덧없는 기대를 가져 본다.

    그렇게 채비를 마치고 살짝 젖은 머리카락으로 택시에 올랐을 때였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 왔다. 석희재는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면 무조건 거부했기에 처음에는 보지도 않고 끊었다.

    그러나 연달아 세 번이 더 걸려 왔을 때는 의아해서 받을 수밖에 없었다.

    - 희재 너 여자 친구 생겼니?

    건너편에서 들려온 건 어머니의 목소리였다. 인사도 하지 않고 대뜸 본론부터 꺼내는 화법이라니. 석희재는 잠시 말을 잃었다.

    - 전에 말했던 그 애야? 맞지? 3년 동안 짝사랑했다던.

    대답 않고 있으니 기정사실화했는지 흥분한 목소리 톤이 높아졌다.

    - 엄마가 너희 공연하는 애들 사진 다 찾아봤거든? 근데 너보다 예쁜 애는 하나도 없던데? 아! 그래. 성희! 성희 좀 괜찮고 유나연? 걔도 예쁘더라. 근데 아들 눈이 어디 달렸어? 3년이나 매달릴 급은 하나도 없던데? 왜 3년을 찌질하게….

    “엄마.”

    보자 보자 하니까.

    석희재는 인상을 쓰며 어머니의 말을 끊었다. 제 부모가 제가 혐오하는 종류의 말을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 싫어서 더욱 강한 단어로 비난했다.

    “진짜… 그렇게, 천박… 하게 말하지 좀 마.”

    - 뭐? 천박?

    “외모로 사람 줄 세우지 말라고.”

    석희재의 무뚝뚝한 말투에도 전혀 대미지를 입지 않았는지 그녀는 큰 소리로 웃었다. 오히려 ‘진짜 심각하네, 아들 진심이네.’ 하면서 유쾌해했다.

    - 알았어. 알았어. 너무 신기해서 엄마가 주책 좀 떨었어. 그나저나 너 연애 처음 하는 거 아니니? 엄마도 소개해 주면 안 돼? 나 진짜 잘해 줄 자신 있는데.

    석희재는 침묵했다. 죽었다 깨어나도 제 어머니의 말을 곧이곧대로 신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저가 데뷔를 마음먹기 전까지는 이런 식으로 친근하게 전화해 주는 일도 없었다. 평생 타인보다 못한 사람처럼 굴었으면서 이제야 엄마 노릇을 하는 건가 싶어 원망도 솟아났다.

    그렇지만 제 어머니의 정체를 알고 놀랄 이현의 반응은 조금 궁금하기도 했다. 적어도 겉으로나마 어머니를 싫어하는 업계인은 보지 못했으니까… 특히나 유명세에 약한 이현이라면, 보는 눈이 대번에 달라질지도 모른다.

    “…근데 어떻게 알았어?”

    석희재의 말에 어머니는 모르는 게 바보라는 듯 코웃음을 쳤다.

    - 갑자기 카드로 몇백만 원어치 명품 막 긁었잖아. 평생 그런 거 관심도 없던 애가. 그리고 너, 결정적으로 박 팀장한테 차 추천해 달라고 했다며. 회사에서 밴도 해 줬는데 네가 차를 갖고 싶은 이유가 뭐겠어? 딱 하나밖에 없지.

    “…….”

    어머니는 계속 상대가 누구냐며 추궁해 댔다. 난 연애 상담도 해 주었는데 넌 왜 말을 안 해 주냐며 퍽 섭섭해하기도 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석희재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누군가에게라도 털어놓고 싶은 마음과, 이 관계를 비밀로 지키기를 원하는 이현의 마음이 복잡하게 얽혔다.

    결국 이현을 지키자는 마음 쪽이 이겼다. 석희재는 상대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흘리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대신 어머니에게 면목 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 데뷔하면 차 해 준다 했잖아… 얼마짜리까지 사도 돼?”

    ***

    현이 돌아오면 한 번 물어봐야겠다.

    두어 시간 동안 작은 핸드폰 화면 안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한대에 가까운 정보를 흡수하던 석희재는 그런 결론을 내렸다.

    “하아….”

    이건 차에 대해 무지한 사람이 함부로 정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석희재가 막연하게 바라는 기준은 그저 튼튼했으면 좋겠다는 것뿐. 게다가 돈의 제약까지 사라지니 선택지가 너무 많아 고를 수가 없었다. 적어도 면허가 있고 실제로 운전이 능숙한 쪽이 고르는 게 훨씬 나을 것 같았다. 차를 사고 싶다는 생각이 든 이유도 애인 때문이었으니까…. 이현의 취향대로 사는 게 좋으면 좋았지 나쁠 리가 없었다.

    ‘네 차 사는데 왜 나한테 물어.’

    이현의 난감한 표정이 눈앞에 그려졌다. 석희재는 눈을 감고 픽 웃었다. 그에게 너무나 익숙해진 바람에 이제는 그가 어떤 말을 할지도 뻔히 그려졌다.

    왜긴 왜야. 형이 자주 운전할 거니까 그렇지.

    그렇게 말하면서 조심스레 키스하면 좋은 티를 못 숨기면서 ‘나를 기사로 부려 먹겠다는 속셈 아니냐’ 운운할 게 틀림없다. 그래도 좋았다. 값비싼 수입차의 액셀을 밟아 보면서 들뜬 표정을 못 숨기는 얼굴도 귀여울 것 같았다.

    석희재는 엎드린 몸을 일으키면서 안고 있던 쿠션을 소파에 세워 놓았다. 뻑뻑한 눈가를 주무르는 동안 뻣뻣하게 굳은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문득 디지털 시계에 시선이 닿았다. 새벽 한 시.

    한숨이 탁 터져 나왔다. 자정까진 온다더니.

    석희재는 주저하지 않고 메시지를 찍어 보냈다. ‘언제 와?’ 잠시 화면을 노려봐도 답이 없었다. 이러는 게 한두 번인가. 이제는 익숙하다. 보채는 것 같을까 봐 석희재는 다시 메시지를 보내는 대신에 흑백 영화를 틀어 놓고 소파에 느슨하게 앉아 화면을 바라보았다. 시간은 아주 느리게 갔다.

    삼십 분 후. 석희재는 다시 메시지를 보냈다.

    「아직 안 일어났어?」오전 1:33

    「어디야?」오전 1:33

    「많이 취했으면 데리러 갈게」오전 1:34

    여전히 답이 없었다. 한참 고민하던 끝에 석희재는 유나연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늘 앙상블 최경철 배우의 생일이라 시간이 되는 대부분의 배우들은 거기에 모여 있을 것이었다. 잠깐의 수화연결음 끝에 유나연은 금세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목소리의 톤이 평소보다 훨씬 높았다. 술기운이 오른 듯했다.

    “갑자기 전화해서 미안해요.”

    - 아냐. 나는 괜찮아. 잠깐만, 여기 시끄럽죠? 나가서 받을게. 아, 다들 조용히! 소란 떨지 말고 가만 앉아 계세요~ 남자 친구 아닙니다. 썸도 아니고요~

    석희재는 픽 웃었다. 확실히 발음이 많이 꼬여 있었다. 구연동화 하듯 과장된 말투로 건넨 마지막 몇 문장은 함께한 술자리의 다른 이들에게 건넨 말일 것이다. 남자 친구도 아닌데 왜 전화를 피해서 받느냐는 야유가 쏟아졌다. 유나연은 대답도 없이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안의 소란이 순식간에 멀어진다.

    애인은 답도 없는데 친절한 타인은 금세 전화를 받아 준다. 그 간극이 조금 씁쓸했다.

    - 전화 왜 했어요? 아, 알았다! 오고 싶구나? 에에이, 내가 후회할 줄 알았다. 진작에 아까 불렀을 때 오지.

    술에 취한 유나연은 말이 빨랐다. 석희재가 끼어들 틈도 없이 혼자서 대화를 죽죽 이어 갔다.

    - 근데 아깝다! 이제 슬슬 파장인데….

    “끝나가요?”

    문득 반가운 말이 들렸다. 석희재는 반색했다.

    - 응응. 2차 갈 사람은 가고, 아닌 사람은 집에 가고. 난 이제 집에 갈 거야. 조금 더 마실 수 있지만….

    덕분에 석희재는 이현이 일어나지 못한 이유를 넘겨짚었다. 적당히 자정쯤 일어나려던 그를 다들 붙잡았을 것이다. 어차피 이제 자신들도 곧 가야 한다며, 조금만 앉아 있다가 다 같이 일어나자고 졸랐을 것이다.

    대학로 술자리는 인맥과 인맥의 끝나지 않는 연쇄작용이다. 한 번 인사만 하고 스쳐 지나가기 일쑤인 지인들이 자꾸만 술자리로 불려 온다. 말 한마디 섞어 본 적 없는, 이름도 희미한 지인의 지인들까지 엮여 하룻밤 새 절친이 되기도 한다.

    그렇게 많은 이들과 엮여도 이현의 존재보다 가치 있는 사람을 만날 리 만무하다. 때문에 석희재가 그 시간들을 무척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것과 달리, 놀랍게도 이현은 그런 산발적인 만남을 즐기는 편이었다. 몰려드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앉으며 시계를 들여다보는 이현의 얼굴도 그려졌다. 우습게도 그런 걸 상상하는 것만으로 마음이 풀렸다.

    - 그런데 왜 전화했어요?

    술에 취했는데도 유나연은 용케 용건으로 돌아왔다. 석희재는 ‘아’ 하고 짧게 반응하고서, 전화했던 목적을 떠올렸다.

    “피디님 거기 계시는지 궁금해서.”

    - 피디님? 희재 씨는 진짜 피디님 껌딱지다.

    “그런 거 아니에요.”

    석희재는 나직하게 웃었다. 그 비슷한 거라도 되어서 실제로 달라붙어 있으면 좋겠다는 우스운 생각이 들었다.

    그는 고민하다가 말을 이어 갔다.

    “피디님이랑 둘이 만나기로 했는데… 너무 안 끝나서요. 기다리고 있어요.”

    - 아… 정말요? 둘이 약속 있었어요?

    “네. 제가 선약이에요.”

    - 진짜? 어….

    유나연이 의아한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미묘한 분위기를 읽은 석희재는 ‘왜요?’ 하고 되물었다.

    - 피디님 너무 취했는데?

    ***

    곧 파장이라는 말만 믿고 기다렸으나 이현은 그 뒤로도 한참을 돌아오지 않았다. 딱히 집에서 기다리는 이가 없다는 유나연도 1차를 끝으로 집으로 돌아갔는데, 이현은 저가 기다리는 걸 알면서도 오지 않는다.

    새벽 2시 50분쯤 되었을 때 석희재의 기분은 완전히 가라앉은 상태였다. 심지어 제가 보낸 메시지들을 읽은 흔적이 있는데도 답은 없었다.

    절로 깊은 한숨이 나왔다.

    ‘쓸데없는 술자리가 너무 많아.’

    진심으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90년대에 짓고 단 한 번 리모델링도 안 한 낡은 실내에서, 다리 높이가 맞지 않아 흔들리는 싸구려 의자 위에 앉아서…. 씻기는 했는지 의심이 가는 그릇에 올려진 마른 과자 따위를 집어 먹는 이현의 모습이 그려졌다.

    그렇게 시간을 축내는 것도 존중해 줘야 하는 걸까?

    왜 그딴 식으로 일할까.

    석희재는 이현의 월급을 얼마 전에 알았다. 240만 원. 생각보다 적은 액수에 놀라는 석희재의 앞에서 이현은 그게 이 업계의 최고 수준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다른 회사에는 저보다 직급이 높은 이사나 실장들도 그와 비슷하게 받거나, 혹은 낮게 받는 사람도 허다하다며. 이현의 노동 강도를 아는 석희재는 그 돈이 너무 적다고 생각했다. 그는 더 많이 받아야 했다.

    노동 강도에 비해 턱없이 적은 돈을 받으면서 일상을 낭비한다. 소중한 하루하루가 덧없이 흘러갔다.

    언제까지 체력이 받쳐 줄 줄 알고….

    화가 나서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아팠다. 사랑에 있어 고지식한 석희재는 자신은 이현을 미워할 수 없을 거라고 굳게 믿었다. 스스로에게 거의 최면을 건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극심한 인지 부조화가 찾아왔다.

    세상의 수많은 연애가 비이성적이고 불공평하지만, 불우하게도 석희재는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그렇게만 유지되다가 끝나 버리는 ‘실패한 관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또한 그의 안에는 연애에 대한 냉소가 존재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석희재에게 연애란 짝사랑의 성공적인 종착지였고, 언젠가 꼭 쟁취하고 싶었던 열매였으니. 지금은 아닐지라도, 미래에는 분명히 나아진다고만 믿었다. 일종의 순진함이었다.

    그러니까 그는 누군가에게 실망하고 관계가 파국으로 가는 과정을 한 번도 그려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특히 사랑에 있어서는.

    새벽 네 시.

    석희재는 결국 참지 못하고 전화를 걸어 보았다.

    연결이 되었다. 그는 심호흡하며 무엇부터 물어볼지 고심했다.

    실내인지 바깥인지 분간할 수 없는 작은 소음이 흘러들어 오다가 아무 말도 없이 전화가 뚝 끊겼다.

    그 순간 머리에서 핀이 나간 석희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무작정 현관을 나서며 다시 전화를 걸었다. 두 번째 전화는 아예 연결도 되지 않았다.

    “왜 안 받아!”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안내 음성이 흘러나오는 순간 석희재는 자각도 없이 외쳤다. 아무도 없는 공허한 밤거리에서 제 목소리는 지나치게 또렷이 들렸다.

    석희재는 제가 외쳐 놓고 도리어 스스로에게 깜짝 놀랐다. 격양된 제 목소리가 낯설고 당황스러웠다. 그러나 여전히 혀뿌리 어딘가에 콱 막힌 것 같은 뜨거운 울화가 남아 있었다.

    그때였다. 저 멀리 골목 끝, 가로등 언저리에 벽에 손을 댄 채 허리를 숙이고 있는 남자가 보였다.

    그는 곧 앞으로 고꾸라질 듯 허리를 숙이더니 무릎을 꺾고 주저앉았다.

    이현이었다.

    “형!”

    석희재는 순식간에 창백해져 재빨리 달려갔다. 달려가 보니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벽에 손을 짚고 겨우 버티고 있는 건 그토록 기다리던 이현이 맞았다.

    “왜 그래. 어디 아파? 일어나 봐.”

    “…흐으….”

    “그러니까 왜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마셨어!”

    “…….”

    “일어나. 나한테 기대. 빨리 집에 가자… 응?”

    원망하고, 채근하고, 설득하는 목소리는 정신없이 톤이 달라졌다. 타인에게 그런 식으로 애절하게 말해 본 적이 없었기에 제 목소리가 무척 낯설었다.

    이현을 억지로 부축해 서게 했지만 그는 다리가 완전히 풀려 거의 걷지 못했다. 뱃속이 까맣게 타는 듯했다. 문자 그대로 속이 썩는 느낌이었다. 유나연의 증언으로 미루어 보면 그는 이미 한 시쯤에 만취해 있었다. 지금은 4시다. 원래 이렇게 무절제하게 술을 먹는 사람이 아닌데 무언가 이상했다.

    “나… 나….”

    현이 창백한 얼굴로 겨우 중얼거렸다. 석희재는 고개를 기울여 그의 말을 듣기 위해 집중했다.

    “토할 것 같아요….”

    “씨발….”

    욕이 나왔다.

    “웃. 진짜, 토… 해요….”

    심지어 현은 저를 밀쳐 내기까지 했다. 제대로 서지도 못하면서. 어찌나 완강하게 떨쳐 내는지 석희재는 휘청거리며 허망하게 밀려났다.

    “저리 가세요… 웨엑….”

    벽을 짚고 이현이 헛구역질을 해 댔다. 술 먹고 이만큼 인사불성이 된 것도 별로 본 적 없지만, 저 정도로 속이 뒤집힌 것도 처음 본다. 게다가 자꾸 존댓말을 쓰는 것도 이상했다.

    “나 누군지 알아봐?”

    “흐….”

    이현이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러더니 또 구역질을 시작했다. 그 모습이 한심스럽고 안타까웠다.

    석희재는 이현의 손목을 억지로 끌어당겼다. 길에서 이러지 말고 얼른 집으로 가자고 다시 보챘다. 하지만 술에 취한 이현은 유달리 고집이 셌다. 이유도 없이 집에 가기를 완강히 거부하며 좀처럼 일어나질 않았다.

    석희재는 화가 머리끝까지 났다. 자정부터 지금까지 네 시간을 내리 무시당한 것 하며, 중요치도 않은 술자리가 저보다 우선인 것 하며, 자기 몸을 돌보지 않는 것도….

    그리고 이것이 앞으로 계속될 거라는 것도. 전부 다 끔찍하게 싫었다.

    “…짜증 나.”

    짓씹듯이 내뱉은 말은 분명 이현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제 감정을 뱉어 낸 것뿐인데.

    그 말을 듣자마자 이현은 갑자기 얌전해졌다. 토하겠다고 뻗대지도 않고 꼬인 발음으로 존댓말을 하지도 않았다.

    순식간에 완전히 기가 죽어 잠잠해졌다.

    “형?”

    “…….”

    “형….”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백한 얼굴로 숨을 몰아쉴 뿐이다. 석희재는 이현을 도닥여 다시 일으켜 세웠다. 믿기지 않게 수월했다.

    “형, 형.”

    석희재는 이현을 돌려세워 저를 보게 만들고는 조심스레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하지만 현은 어깨를 움츠리더니 고개를 수그렸다. 저를 알아보기는 하는지도 모르겠는데 눈도 마주쳐 주지 않아 갑갑했다.

    석희재는 고개를 기울여 현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의 이름을 다정히 불렀다. 앞이마를 가리며 흘러내린 버석한 머리카락을 손으로 넘겨 주려 했다.

    “현아.”

    하지만 이현이 보인 반응은 석희재의 기대와는 퍽 다른 것이었다. 이마에 손이 닿기도 전에 그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돌렸다.

    “형?”

    “…….”

    “형… 왜 그래. 나 형한테 짜증 낸 거 아니야.”

    “…….”

    “미안해. 내가 실수했어. 난 그냥 너무… 속이 상해서.”

    현의 양어깨를 잡은 채로 석희재는 그가 제 마음을 곡해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간절하게 말했다. 한 번 말실수로 제 진심을 오해받았을까 봐 두려웠다.

    이현을 반쯤 업듯이 부축해 집에 들어온 다음 석희재는 그의 재킷을 벗겼다. 조금이라도 편안함을 느끼도록 셔츠의 단추를 몇 개 풀어 주었다. 현은 인형처럼 이끌리기만 했다.

    “왜 늦게 왔는지 물어봐도 돼?”

    이현은 대답 대신 손으로 입을 턱, 가리고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제 질문에 대답을 못해 주겠다는 뜻처럼 읽혔지만… 실은 그게 아닌 걸 안다. 이현의 낯빛은 완전히 희게 질려 있었고 금방이라도 속을 게워 낼 것처럼 보였다. 당장 토하고 싶은 게 분명한데 식은땀을 흘리면서 참고 있었다.

    한숨을 쉰 석희재는 그를 이끌어 화장실로 향했다. 등을 두드려 줘도 망설이는 듯하던 이현은 잠시 후 우욱, 하고는 속을 게워 냈다. 헉헉, 몰아쉬는 숨소리와 함께 코를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다. 물때가 낀 화장실 벽을 바라보면서 석희재는 한숨을 쉬었다.

    ‘이 세상에서 알코올이 사라졌으면 좋겠다.’

    인삼주 두 잔의 기운을 빌려 이현에게 키스했을 때에 ‘술이 좋은 것’이라는 결론을 냈던 것과 다르게 이제는 술이 원수 같기만 했다. 내장까지 쏟을 기세로 웩웩거리고 있는 현을 보니 더 그랬다.

    “왜 이렇게 술을 마셔. 속상하게.”

    “…하아….”

    “정 마시고 싶으면 나랑 마셔.”

    “술… 씨발.”

    혼잣말이나 다름없던 말에 이현이 대답을 해서 석희재는 흠칫 놀랐다.

    이현이 턱을 쓱 훔치더니 날카롭게 말했다.

    “안 마셔.”

    한 번 속을 비우니 이제 조금 정신이 들었는지 이현은 초점 잡힌 눈으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변기를 양손으로 잡은 채로 허리를 숙이고 한참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현의 입가에서 위액 섞인 침이 흘렀다. 그걸 들여다보려 하자 이현은 얼굴을 붉히며 석희재를 밀어냈다. 그러고는 혼자 비틀거리며 세면대로 가서 입과 얼굴을 씻었다.

    “나 좀 씻게. 나가.”

    석희재는 도로 허무하게 욕실 밖으로 밀려났다. 조그맣게 열린 문틈으로 옷가지가 풀썩, 풀썩 성의 없이 내던져졌다. 그걸 한 장, 한 장 주워서 정리하고 있는데 안에서는 한참이나 물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잠시 후 다시 토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당탕, 넘어지고 미끄러지는 소리도 났다. 참다못한 석희재가 문 안으로 고개를 밀어 넣었을 때 현은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아무렇게나 휘저은 샤워 호스가 꿈틀대다 문 바깥으로 찬물을 쫙 뿌렸다. 엉겁결에 찬물로 얻어맞은 석희재는 말없이 욕실 문을 걸어 잠갔다.

    새벽 다섯 시.

    혼자 앉아서 이현을 기다리고 있는 제 꼴이 처량했다.

    적당한 시간에 돌아왔다면 무슨 차를 좋아하냐고, 드림 카는 무엇이냐고 물어보려 했다. 그리고 서프라이즈로 조만간 운전대를 잡아 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말한 뒤 반응을 보고 싶었다. 갑작스러운 이벤트에 이현이 흥분하면 그 얼굴에 잔뜩 입을 맞춰 주려 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제 존재마저 짐인 것처럼 대한다. 이현을 저 상태로 몰아넣은 건 자신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나는 말렸는데. 안 갔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빨리 오라고 한 죄밖에 없는데….’

    원망스럽고 속이 상해서 석희재는 한동안 벽만 바라보고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이현은 한참 후에야 욕실에서 나왔다. 나체에 수건만 두른 채였다. 석희재는 팔짱을 낀 채로 이현을 삐딱하게 올려다봤다. 머리에서 물을 뚝뚝 흘리며 나온 이현은 얼굴도 한 번 보지 않고 석희재의 앞을 가로질렀다. 그대로 침실로 향한 뒤 매트리스 위에 풀썩 누워 버렸다.

    팔을 뻗은 채 시체처럼 맥없이 누워 있는 이현을 보며 석희재는 생각했다.

    형의 하루는 이대로 끝인가?

    내 하루는 기다리다가 끝났고?

    석희재는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형. 지금 몇 신줄 알아?”

    “…….”

    “내가 너 몇 시간이나 기다렸는 줄 알아?”

    원망스러운 마음에 음산한 목소리가 나왔다. 감정적으로 구는 저 자신이 싫지만 이 정도도 표현하지 못하면 그건 애인 사이도 아니다.

    “카톡 읽었으면서 답은 왜 안 보내?”

    “…….”

    “전화는 왜 끊어 버렸는데.”

    이현이 팔을 들어 대강 휘적거렸다. 이리 오라는 건지, 성가시니까 그만하라는 건지 알 수 없는 사인이었다.

    석희재는 울컥, 치미는 숨을 삼켰다.

    “말을 해.”

    “…물….”

    “하.”

    이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이 어이없어서 석희재는 코웃음 쳤다. 그러면서도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했다. 감정이 실려 발소리가 쿵쿵 났다. 큰 컵에다가 냉수를 콸콸 따라서 현에게 가져가며 저도 한 모금을 마셨다.

    “자.”

    이현은 코를 훌쩍이며 일어나 손을 더듬거려 컵을 받아 갔다. 위가 뒤집히도록 역류를 겪는 바람에 체력이 다한 듯 잔뜩 지쳐 보였고, 눈자위와 코가 심하게 운 사람처럼 붉었다. 꿀꺽, 꿀꺽 물이 끝도 없이 들어갔다. 그걸 보는 석희재의 눈썹이 저도 모르게 누그러졌다.

    얼마나 목이 말랐으면.

    싹 비운 컵을 도로 받아서 한 잔을 더 가져다주니 그것마저 단숨에 비워 버리고 이현은 다시 드러누웠다. 이번에는 천장을 바라본 채였다.

    “자자.”

    눈을 감은 이현이 말했다. 석희재 역시 잠기운에 눈가가 무거웠지만 이대로 자고 싶은 생각은 들지 않았다.

    “술 먹인 거 누구야?”

    “…….”

    “원래 이렇게 안 마시잖아. 누구야. 투자자야?”

    “…형이.”

    “형?”

    석희재의 입술이 비틀렸다.

    “형 누구!”

    이현이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등을 보이며 돌아누웠다. 석희재가 이렇게 감정적으로 나올 줄 알았다는 듯이.

    네가 이러니까 말하기 싫었다니까. 꼭 그렇게 말하는 듯한 저 행동이 미웠다.

    “…지우 형이.”

    이현의 말에 석희재는 욕 대신 크게 심호흡했다.

    이현은 그냥 의미 없이 시간을 죽인 것이 아니라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방식으로 거기 있었다. 석희재의 흉곽이 흥분으로 크게 오르내렸다.

    “나만 취한 거 아니고, 형도 취했거든.”

    주먹다짐을 한다면 공평한 게 낫겠지만 술은 아닌데. 이현은 그걸 변명이랍시고 하고 있다. 그 말이 더 속을 긁었다.

    석희재는 도리어 무뚝뚝하게 물었다.

    “그래서?”

    “형이 그렇게 마시는데 어떻게 나만 빼….”

    “언제부터 형이야?”

    “…….”

    이현은 허를 찔린 듯 아무 말이 없었다.

    얼마 전까지 그나마 ‘선배’라고 꼬박꼬박 호칭을 붙여 대더니 이제는 형이란다. 석희재가 혼자 전전긍긍하는 사이 한지우는 이현과의 사이를 성큼 좁혀 가고 있었다. 임자 있는 사람은 안 건드린다는 남자가 애인이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도 그 짓거리를 한다. 이현이 둘의 관계를 밝히지 않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이제부터 형이라고 부르래? 너는 그냥 좋아서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하기로 했고?”

    “…….”

    “내 마음은 조금도 생각 안 하지.”

    “…….”

    “내가 한지우 싫어하는 거… 네 눈에 아무리 유치해 보이고 마음에 안 들어도, 알면 그냥… 그냥 안 하면 안 돼? 응? 조금만 거리 두는 거, 그것도 그렇게 어려워? 못하겠어?”

    “…….”

    “그것도 못 하면 나는 너한테 뭐야.”

    정말 화가 나면 목소리에서 감정이 없어지는구나.

    그건 석희재 본인마저 몰랐던 스스로가 화를 내는 방식이었다.

    싸늘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를 인지한 듯 이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처럼 기가 죽은 모습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형, 형. 이현! 나 좀 봐.”

    “…….”

    “뭐라고 아무 말이나 좀 해 봐.”

    “…….”

    “그냥 놔두면 잊고 적당히 넘어가겠지, 하지 말고!”

    무언가 속에서 폭발하는 느낌에 마지막 말은 비명이라도 지르는 것 같았다. 물리적으로 숨이 찼다. 달리지도 않았는데 마라톤이라도 한 사람처럼 폐가 조여드는 느낌이 들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 형 때문에 성격 이상해지는 것 같아.”

    나는 나를 얼마나 바꿔야 할까.

    석희재가 비정상적으로 박동하는 제 가슴을 문지르며 헐떡였다. 사랑하는 사람을 미워할 수 있다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순진한 뇌는 인지 부조화를 겪었다. 애인은 서로에게 가장 충실한 존재라고, 그렇게 되기 위해 함께 노력할 거라고 믿었던 환상이 깨지자 심장이 대신 아팠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에게 소리를 지르고, 다그치고, 화를 내고.

    연애 전에는 상상도 해 보지 못했다. 나는 나를 어디까지 바꾸게 될까? 눈앞이 아득했다.

    이현은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이 화제에서 도피하고 싶은 듯 ‘머리 아파’라며 작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맥락에 맞지 않는 말을 웅얼댔다. ‘나는….’

    “나는 이렇게 될 줄 알았어.”

    “뭐?”

    “다 나한테 질려. 나는… 너도 이렇게 될 줄 알았어.”

    “형!”

    잠시 멍해졌던 석희재는 무릎걸음으로 이현에게 엉금엉금 기어갔다. 그러고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붙잡는 것처럼 허우적대며 이현을 꽉 끌어안았다. 그의 머리를 안고 등을 여러 번 어루만졌다.

    이런 말을 지금 이 시점에 듣게 되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했다.

    “형한테 질린 거 아니야. 하나도 안 질렸어. 아직도 내 눈에는 너무 예쁜데?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해?”

    “미안해. 내가 한심한 놈이지 너는 아닌데. 내가 괜히 너까지 같이 끌어들여서….”

    “…형.”

    “나랑 하니까 연애가… 되게 구질구질하지. 짜증 나겠다, 너도. 주변에 잘나고 좋은 사람… 다 뿌리치고 왜 나한테 꽂혀서. 안 해도 되는 고생을, 하고….”

    이현의 얼굴이 다시 속을 게워 내고 싶은 것처럼 창백해졌다.

    석희재는 긴장해 굳은 채로 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현이 자기 자신을 깎아내리는 말을 하는 것은 한두 번 듣는 게 아니었지만 오늘은 유독 마음이 아프고 듣기가 싫다.

    “망했어. 이건 망한 연애야. 처음부터….”

    “…….”

    “추한 모습을 다 보이고 시작하는 연애가 잘 될 리가….”

    끅, 하고 이현이 딸꾹질을 했다. 무어라 부정하고 싶었지만 석희재의 입은 쉬이 떨어지지 못했다. 아니라고, 우리 연애는 완벽하다고, 도무지 시치미를 뗄 수가 없었다. 방금 전 잔뜩 화를 내고 너 때문에 내 성격이 이상해지지 않았냐며 윽박질렀던 장본인이 저 자신이었으니까.

    하지만 형은 추했던 적이 없는데?

    의미 없는 술자리에서 오래 버티고, 마구 토하고, 다른 남자와 재미를 본다 해도…. 나는 다 괜찮은데. 그런 모습들마저, 추한 게 아니라 나는 형이 너무 좋아서…. 그래서 화가 나는 건데.

    석희재가 제 진심을 어떻게 언어로 전달하면 좋을지 고심할 때였다.

    이현이 희재야, 희재야, 희재야. 이름을 자꾸만 부르면서 석희재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게 뭐라고 가슴이 뭉클해졌다. 고작 그 작은 행동만으로 마음이 살살 녹아서 석희재는 이현 때문에 가슴앓이하던 것을 순식간에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

    저를 무생물 취급하며 내내 기다리게 한 것도, 한지우를 형이라고 불러 댄 것도 다 아무렇지 않아졌다. 이런 마법을 걸 수 있는 건 세상에 이현 한 명뿐이다.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도대체 뭐가 사랑인데.

    석희재의 애정이 쉽게 차올라 다시 넘실댔다. 그는 마법에 걸린 바보가 되어 제게 안긴 이현의 젖어 있는 정수리에 입을 맞추려 했다.

    그때 이현의 입에서 믿기지 않는 말이 흘러나왔다.

    “우리 지금이라도….”

    “…….”

    “없던 일로 할까?”

    이현의 숨이 셔츠 너머에서 간질거렸다. 석희재의 눈은 크게 뜨인 채로 굳어 버렸다.

    “응? 아직 좋을 때….”

    “…….”

    “다 없던 일로 하고, 그냥… 원래대로 돌아갈래?”

    “…….”

    “가끔 자는 친구 사이, 그 정도가 딱 좋은 거 같은데. 나는…. 그럼 구질구질하지도 않고.”

    그 말을 받아들이기까지가 무척 오래 걸렸다.

    음성이 귀를 타고, 뇌에 전달되고, 그 맥락을 파악하기까지 하도 멀어서 마치 영원 같았다. 느리게 눈을 깜빡인 석희재는 그 직후 엄청난 공포심에 휩싸였다.

    한참 후에야 석희재는 겨우 말을 내뱉을 수 있었다.

    “형… 너무 취했다.”

    석희재는 이현을 도로 눕히고 그 가슴 위에 이불을 덮어 주었다.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자자.”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 없던 일로 취급하는 것밖에는 몰랐다.

    “내일 출근 몇 시야? 내가.”

    “…….”

    “내가, 알람 맞춰 줄게.”

    초라하게 목이 메었다. 호흡이 목에 걸려 평범한 말조차 하기가 어려웠다. 알람을 설정하기 위해 핸드폰을 잡은 손은 벌벌 떨리고 있었다.

    무서워서 다시 이현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했기에 그가 눈을 감았는지, 아니면 아직 저를 바라보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눈을 마주치고 조금 전의 그가 제정신으로, 또 명료한 이성을 갖춘 채로 그 말을 했다는 걸 알게 되면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래서 모른 척했다.

    ***

    눈을 떴을 때 침대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거실에서 기척과 함께 형광등 빛이 들어오는 걸 보니 현이 출근 준비를 하는 모양이다. 눈가가 뻑뻑하고 덥게 느껴졌다. 몇 번 눈을 깜빡이면서, 석희재는 저가 이현보다 늦게 일어난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몸을 일으켰을 때 확실히 몸 상태가 나쁘다는 걸 알았다.

    “후….”

    내쉰 숨이 뜨거웠다. 열 몸살이라도 걸린 것처럼.

    “일어났어?”

    거실에서 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 뜬 석희재는 팔로 바닥을 지탱한 채로 목소리를 냈다. 코와 목 사이 어딘가가 부은 것처럼 불편한 느낌이 들었다.

    “…응.”

    푹 잠긴 목소리를 가다듬으려 침을 삼키자 바늘로 수없이 찌르는 듯이 통증이 왔다.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후 1시였다. 비현실적인 시간에 석희재의 심장이 철렁, 떨어졌다.

    “형! 출근….”

    깜짝 놀라서 벌떡 일어나 거실로 나가니 이현은 출근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개수대 앞을 느긋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가스레인지 위에서는 무언가가 보글보글 끓어 댔다. 김치찌개 냄새였다. 석희재가 자는 동안 배달을 시킨 듯 식탁 위에는 종이봉투와 플라스틱 그릇이 널려 있었다.

    “아, 나 어제 시달린 거 김 실장님이 들었나 봐.”

    “…….”

    “바로 연습실로 출근하라고 해서 2시 콜 맞춰 가려고.”

    석희재는 식탁으로 천천히 다가가 의자를 끌어당기고는 그 자리에 털썩 앉았다. 열로 뻑뻑한 눈으로 얇은 티셔츠를 걸친 이현의 등을 물끄러미 보았다. 식사를 부산스럽게 챙기는 행동에 도드라진 날개뼈와 마른 등의 굴곡이 드러났다.

    “이거 먹고, 같이 가자. 너도 2시 콜이지?”

    “…응.”

    이현의 목소리는 무척 태연했다. 어제 일은 아무것도 기억 못 하는 것처럼.

    진짜 기억 못 하는 건가.

    석희재의 까만 눈이 이현의 등을 따라 움직였다. 하지만 어제 술에 취해 나눈 대화를 다시 들쑤시고 싶지도 않았다. 그가 한순간이라도 두 사람의 끝을 상상해 보았다는 사실 자체를 가능하면 지워 버리고 싶다.

    석희재는 대답 대신 고개를 천천히 숙이고 들리지 않게 한숨을 내쉬었다. 코를 통해 흘러나오는 숨이 무척 뜨거웠다. 마른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면서, 석희재는 자신이 왜 아픈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그러다가 다시 의자를 밀고 일어나 이현을 도왔다. 그는 설거지를 싫어해서 냄비 그대로 식탁에 올려놓으려고 했다. 현이 상을 차리게 놔두면 그는 밥을 햇반 용기에 담긴 그대로 먹고, 물도 플라스틱 통에 담긴 채로 마시곤 한다.

    “줘. 그릇에 담게.”

    “그냥 먹자.”

    “설거지 내가 하면 되잖아.”

    그러면 이현은 순순히 물러났다. 찬장에서 그릇을 꺼내려는 순간 이현과 살이 스쳤다. 닿은 이현의 피부가 차갑게 느껴지는 것은 그만큼 자신이 열이 심하다는 뜻일 거다.

    그런데도 이현은 눈치채지 못했다.

    마주 보고 앉아 밥술을 뜨면서도 석희재는 먹는 것보다 이현의 표정과 행동에 더 주의를 기울였다. 그의 생각, 속마음, 어제의 기억 모든 게 궁금했다.

    ‘우리 지금이라도 없던 일로 할까.’

    목소리가 귀에서 윙윙 돌았다. 그동안 이현은 생각보다 관대한 연인이 되어 주었다. 제 마음에 안 드는 애인의 습관을 지적 질하고 고치려 드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 태도에 그저 안도하던 자신이 바보 같았다. 저 머릿속에는 ‘이별’의 가능성이 자라고 있었다. 그걸 감쪽같이 감추었다는 데에 깊은 배신감과 공포감이 동시에 들었다.

    대체 언제부터?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아니면 혹, 처음부터?

    추궁하고 따져 묻고 설득하고 매달리고 싶었지만 함부로 자극도 할 수 없다. 건드리는 순간 금이 간 창문은 깨져 버릴 테니까.

    “왜 이렇게 못 먹어.”

    “음… 먹고 있어.”

    김치찌개 안에 든 두부만 몇 개 집어먹은 게 다였다. 열 때문인지 입맛도 돌지 않았고 삼킬 때마다 목이 아파서 고역이었다. 그래도 이현이 걱정할까 봐 석희재는 밥을 크게 떴다.

    “여기 별로야? 난 맛있던데…. 술 많이 먹으면 여기 김치찌개 생각나더라.”

    “속은 좀 괜찮아?”

    “피곤하긴 한데, 숙취는 별로 없네. 소주로만 달려서 그런가?”

    이현의 말에 석희재는 픽 웃었다. 그런가아, 하는 말투가 귀여워서. 중증이다.

    일찌감치 그릇을 싹 비우고 찌개도 몇 번 더 덜어 먹은 이현은 석희재가 느리게 밥술을 뜨는 양을 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너….”

    이현이 느리게 운을 뗀 순간 석희재의 심장이 쿵쿵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설마 어제의 화제를 이어 갈까 봐 겁이 난 탓이다.

    “나한테, 혹시….”

    “…….”

    “어? 벌레.”

    하던 말을 멈춘 이현은 갑자기 벌떡 일어나 느린 속도로 날아다니던 초파리를 향해 손을 휘둘렀다. 의외로 명중했는지 벌레가 바닥으로 추락했다. 느린 궤적을 좇던 이현은 휴지를 가져와 시체가 있던 부분을 닦아 냈다.

    그리고 다시 돌아와 앉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까 꺼내려고 했던 말이 뭐였는지 석희재는 영영 알 수 없었다. 앞으로도 몰랐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석희재는 문득 떠오른 것을 불쑥 말했다.

    “내가 사람이라 다행이야.”

    “뭐?”

    “그냥, 갑자기… 덕분에 형이랑 말도 통하고,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밥도 먹고, 사귀기도 하고.”

    “뭐야.”

    “…개미였으면 눌러 죽였을 거잖아.”

    이현은 웃기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이 픽픽 웃었다.

    “싱거운 놈.”

    “진심인데.”

    석희재는 무거운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쿨럭, 기침이 나왔다.

    벌레나 나나 다른 게 뭐가 있지. 굳이 주먹을 휘두를 필요 없이 이현은 말 한마디로 자신을 너무 쉽게 죽일 수 있다.

    ***

    ‘현아, 내가 편해?’

    술잔을 내밀면서 한지우가 그렇게 말했다. 웃음기를 싹 거둔 얼굴로.

    처음 보는 표정은 아니다. 일전에는 담뱃불을 붙여 주며 이런 얼굴을 했었다.

    그때는 불편하냐고 물었지.

    대표, 투자자, 선배 배우…. 이런 식으로 구는 이들에게 익숙한 이현은 당황하지 않고 저 역시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웠다. 그러나 너무 비굴하게 굴면 도리어 기분 상해한다. 어디까지나 적당히 예의를 지키면서 나는 당신의 권위에 복종하겠다는 얼굴을 해야 한다. 이현은 순순히 잔을 받았다. 쉬지 않고 일곱 잔째였다.

    ‘죄송합니다. 선배.’

    ‘형이라고 하랬잖아.’

    웃으며 뺨을 검지로 톡 건드리는 손에 이현은 속없이 웃어 보였다. 그가 당장 대표에게 가서 ‘나 당신네 피디 때문에 일 못 하겠어’라고 말하면 자신은 이보다 더 심하게 다칠 수도 있다. 사회적으로, 또 물리적으로. 자존심을 대신 바치는 게 나았다.

    ‘현이 너, 주량이 괜찮다?’

    ‘한 병이 한계예요.’

    ‘거짓말 마. 전에 그렇게 마시고 두 발로 걸어가는 거 다 봤어.’

    ‘…….’

    ‘내가 어렵지?’

    이현은 눈을 내리깔고 테이블을 응시한 채로 고개를 저었다.

    ‘다들 그래.’

    ‘…….’

    ‘그냥 나를 어려워해.’

    담배를 물고, 같은 위치에 앉아 있는데도 그는 사람을 쉽게 내려다본다. 그러면서도 사람 좋게 웃는 얼굴을 지을 수 있다.

    실망했나? 아니다. 그냥 좋은 사람이었던 그에 대한 환상이 깨져서 아픈 거다. 그리고 이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내민 작은 친절에 너무 쉽게 감동했던 과거의 자신이 씁쓸했다. 고작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누른 채 제가 뛰어와 타기를 기다려 준 걸로 오랫동안 환상을 품을 만큼. 그만큼 사람대접이 고팠구나, 하고….

    ‘현아, 너 애인 없지.’

    평소 같으면 ‘예’ 했을 텐데 대답이 나오지 않았다. 석희재의 얼굴이 생각난 탓이다. 커플링을 하자고 졸라 대는 의도가 참 투명했지. 평생 혼자였던 저에게 갑자기 누군가가 진심이 되어 들러붙을까 봐 겁을 먹었다.

    쓸데없는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연애 중인 것을 밝히기 싫다고 하며 대강 떨쳐 내면 그 무뚝뚝한 얼굴에 원망을 예쁜 분처럼 묻히고 저를 바라보는 석희재. 석희재는 그런 얼굴도 예쁘고 잘났다.

    그래서 긍정도 부정도 하기 싫어 묵묵히 있었다.

    ‘안 쓸쓸해?’

    ‘쓸쓸할 틈이 없죠.’

    ‘왜?’

    ‘…바쁘니까요.’

    ‘그래도 바빠 죽겠다면서 다들 뒤로는 연애하고 그러더라.’

    ‘연애할 시간도… 없죠.’

    ‘아아, 그래서?’

    한지우의 말투는 미묘한 함의를 담고 있었다. 그래서? 그 순간 옆 테이블에서 폭소가 터지며 술자리의 소란이 한 바탕 커졌다. 그때 한지우가 목소리를 조금도 낮추지 않고 의연하게 말했다.

    ‘그래서 섹스만 하는구나.’

    ‘네?’

    이현은 웃지 않은 채로 싸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들었다.

    그 얼굴에 한지우가 돌연 흥미롭다는 얼굴을 한다. 이현이 사생활을 불쑥 침범당하는 그의 말에 불쾌감을 느끼는 찰나, 한지우는 도리어 테이블 너머로 쓱, 하고 상체를 가까이 기울였다.

    ‘여기.’

    손톱이 짧고 마디가 굵어, 인상과는 다르게 거칠고 남자답다고 생각한 손이 이현의 목덜미 뒤쪽을 쿡 찔렀다. 검지로 톡, 건드리는 것이 아니라 묻어 있는 잼이라도 닦아 내듯이 진득한 손길이다. 셔츠 안쪽 살갗을 누르는 손가락의 압력에 이현의 등줄기에는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거기 뭐가 달라붙어 있는지도 모르면서 이현은 황급히 손을 들어 제 목을 가렸다. 눈이 마주쳤다.

    알고 이러는 건가.

    ‘전부터 거슬리더라. 흐려지나 싶으면 또 생기던데.’

    ‘…….’

    ‘나니까 조용히 말해 주지… 너 잘못하면 이상한 소문 돌아.’

    ‘…….’

    ‘단속 좀 시켜.’

    ***

    함께 택시를 타고 연습실로 향하던 길, 다 도착해 내리기도 전에 석희재는 이상 반응을 보였다. 그 때문에 왜 다 보이는 데에다가 키스 마크를 남겼느냐고 추궁할 틈도 없었다. 석희재는 타자마자 뒷좌석에 목을 기대고 죽은 듯이 눈을 감더니만 대화를 차단하는 것처럼 침묵을 지켰다. 그러다 차가 큰 커브를 돌 때 그 고개가 힘없이 툭 떨어졌다. 이현은 애꿎은 택시 기사 아저씨에게 운전 좀 살살 하시라고 고함을 쳤다.

    그러나 석희재의 떨어진 고개는 다시 들릴 줄을 몰랐다.

    “자냐?”

    이현은 석희재의 어깨를 살살 흔들어 보았다. 그러나 대답 대신 ‘으음’ 하는 신음만 흘러나왔다. 그 뺨을 톡, 건드려 본 이현은 관자놀이가 이상할 정도로 촉촉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석희재는 식은땀을 잔뜩 흘리고 있었다. 깜짝 놀라 잡은 손이 무척 뜨거웠다.

    언제부터? 언제부터 이렇게 상태가 안 좋았는데 꾸역꾸역 밥을 욱여넣고, 고집스레 설거지는 또 하고.

    결국 이현은 박 팀장을 호출했다. 석희재는 열이 펄펄 끓는 몸을 이끌고 휘청이며 병원으로 실려 갔다.

    “어제 뭐 하셨어요?”

    “예?”

    박 팀장의 질문에 이현은 입을 뻐끔거렸다. 항상 깍듯하게 예의를 갖추던 매니저의 목소리에서 아주 약한 원망이 읽혔다. ‘피디님을 믿었는데.’ 귀한 배우의 컨디션을 망쳤다는 질책이 보였다.

    저도 모르겠는데요. 알코올에 절어서 들어온 건 저였는데 왜 희재가 저러는지.

    마음이 무거워져서 이현은 한동안 석희재가 사라진 차의 뒤꽁무니를 바라보았다. 연습실로 도로 들어가야 하는데 발걸음이 통 떨어지지 않았다. 안에서 한지우를 비롯한 배우들과 부대끼는 것도 싫었고….

    그냥 이대로 병원에 따라가서 희재나 보고 있으면 안 되나, 하는 무책임한 생각도 들었다.

    「실장님. 배우 하나 쓰러져서 병원 들렀다 오겠습니다.」오후 2:28

    결국 수십 분 후, 문자 하나만을 남기고 이현은 석희재를 따라나섰다.

    본래대로라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외근이었다. 그러나 최근 기이한 분위기를 내뿜는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누군가는 이현의 공석과, 그 이유를 금세 눈치챘다. 배우를 따라나서던 피디의 다급한 발걸음을 날카롭게 주시하던 한 쌍의 눈동자는, 한참 후에야 시선을 거두었다.

    ***

    이현이 병원에 도착했을 때 석희재는 한 팔에 수액을 맞으며 미음을 먹고 있었다. 문을 벌컥 연 순간 마침 숟가락을 입가에 가져다 대는 참이었다. 마주친 얼굴이 해쓱하고 눈가가 붉었다. 그보다 신경 쓰이는 건 그다지 반가워 보이지 않는 얼굴이라는 점이었다. 급하게 도착한 이현의 걸음이 금세 머쓱해졌다. 괜히 주변을 둘러보며 가까이 다가갔다.

    석희재가 다시 천천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별로 먹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입을 닦는다.

    “…박 팀장님은? 웬 죽이야. 김치찌개 잘 먹어 놓고선.”

    “팀장님은 가셨고, 먹은 건 다 토했어.”

    “뭐?”

    깜짝 놀란 이현의 걸음이 멈추었다. 남에게 일어난 일을 말하는 것처럼 석희재의 말투가 덤덤했다.

    “이따 저녁 연습 가야 되니까 뭐라도 먹으래.”

    “그래? 쉬는 게 낫지 않나….”

    이현은 말을 끌며 의자를 당겨 와 앉았다. 석희재는 별로 줄지도 않은 그릇을 치우더니 이불을 덮고 자리에 누워 버렸다. 이현을 보지 않은 채로 등을 돌렸다.

    그리고 이현은 양손을 무릎 위에 올린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제 뭘 해야 하나 생각을 해 보았다. 사실 아까 병원에 간다고 문자를 보냈지만 김 실장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그녀는 연습실에 붙어 있는 게 낫지 않겠느냐고 은근히 권해 왔다. 김 실장은 애초에 부하직원을 강제하는 타입이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현이 알아서 어련히 잘하리라는 것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가야 될 텐데.

    하지만 비죽 높은 어깨를 불편하게 구긴 채로 등을 돌리고 있는 석희재를 보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어디가 아픈 건데.”

    “고열.”

    말이 짧다. 어딘가 심기가 틀어진 게 분명하다.

    “그래? 열이 왜 났지. 감기 기운 있어?”

    이현은 몸을 일으켜 손바닥을 석희재의 머리에 가져다 대 보았다. 다가오는 이현을 향해 경계심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던 것과는 달리, 석희재는 그 손길에 얼굴을 얌전히 맡겼다. 눈을 사르르 감기도 했다. 이마와 뺨을 더듬거리던 이현의 손을 느끼던 석희재가 어느 순간 그 손을 꼭 붙들어 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눈을 천천히 떴다.

    “의심 가는 증상이 없어서… 스트레스 때문이 아니냐던데.”

    “스트레스? 연습이 그렇게 힘들어?”

    데뷔 직전, 중압감에 눌려 체력적, 정신적으로 한계에 다다른 신인 배우들을 적지 않게 본다. 석희재는 대답 대신 이현의 손바닥에 입술을 묻었다. 촉촉한 숨이 닿은 손바닥이 간질간질했다. 석희재는 일부러 그 안에서 체취를 들이마시며 숨을 크게 쉬더니 노려보듯 시선을 고정하고 속삭였다.

    “하게 되면 좋을 줄만 알았어.”

    “원래 다들 그래.”

    “혼자 할 때보다 더 힘들 줄은 상상도 못 했어….”

    불쌍한 녀석. 이현은 눈썹을 떨어뜨렸다. 연예인이 된다는 건 직업적으로 연기를 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일이다. 그리고 석희재는 불우하게도 ‘연예인’으로 소비 당하기 쉬운 재료를 빠짐없이 갖췄다. 일반인이었을 시절에도 이 외모 때문에 적지 않게 관심에 시달렸을 텐데…. 데뷔를 하고 나면 모두가 그를 평가할 권리라도 분양받은 것처럼 거리낌 없이 석희재라는 인물을 도마 위에 올려 뼛속까지 해체하려 들 것이다. 아마도 대중뿐만 아니라 동료라고 믿었던 스태프와 배우들까지 전부.

    그러나 연예인으로서 겪는 갖가지 중압감은 앞으로 계속 지고 가야 할 문제다. 문득 이현은 연예인으로 너무 오래 산 인물 하나를 떠올렸다. 한지우.

    석희재도 언젠가 한지우처럼 될까? 아니면 일반인 석희재와 연예인 석희재의 자아를 완벽히 분리할 수 있게 될까.

    점차 연예인으로서의 생활에 익숙해지는 석희재의 곁에 제가 또 얼마나 오래 머물러 있을 수 있을까? 이현은 생각해 보았다. 차라리 한지우처럼 서열이 확실한 축이 나을지도.

    절친한 동갑내기 친구인 줄 알았던 뮤지컬 배우 하나는 이현과 다투다 ‘종이 쪼가리나 만지는 주제에’라고 이현의 일을 깎아내렸고, 노래가 부족해 뮤지컬에 두려움을 가졌던 동료 연극배우 하나는 이현이 대극장 뮤지컬의 피디가 되자마자 보란 듯이 남들 앞에서 이현을 따돌렸다. 대표, 연출, 배우 등 아무에게도 그러지 못하면서 저에게만. 진짜 마음을 나눴다고 생각해도 어느 순간 분명한 선 긋기가 존재했다.

    이현은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뭐가 그렇게 힘든데. 형한테 다 말해 봐.”

    “당사자가 그래 봤자….”

    “당사자?”

    “형이 어제.”

    “……?”

    “어제 나한테….”

    석희재는 입술을 깨물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이현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없던 일로 하자고 그랬잖아.”

    “뭘 없던 일로 해?”

    그 말에 석희재가 홱 고개를 돌리며 이현과 눈을 마주쳤다. 빤히 바라보는 눈빛이 이현의 얼굴과 팔짱을 낀 구부정한 자세를 한참 수색했다.

    “아… 일 얘기가 아니야?”

    대치 끝에 이현은 자기가 석희재의 고민을 영 헛짚었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동시에 석희재는 이현이 어제의 대화를 정말로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고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석희재는 잠시 식식대다가 붉어진 눈가를 하고 입을 열었다. 이현은 석희재의 풀어진 셔츠 앞섶 사이로 보이는 가슴팍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헤어, 지… 자고 했잖아.”

    “응?”

    “사귀는 거, 없던 일로 하자고 했잖아.”

    “내가?”

    석희재는 그 무서운 말에 차마 긍정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수그렸다.

    이제 당황한 쪽은 이현이 되었다. 어쩌다 그 과정까지 갔는지 생각도 나지 않았다. 싸운 기억은 없는데. 제 밤 생활에 관심을 보이고, 배려 없이 술을 강요하던 한지우 때문에 기분이 가라앉아 잔뜩 예민해진 채로 집에 갔던 것만은 기억이 난다.

    “그것 때문에 열날 정도로 아픈 거야?”

    “몰라.”

    퉁명스러운 말이 툭 떨어졌다.

    “혼자 할 때보다 지금이 더 힘들다는 건 또 뭐야.”

    이현은 중얼거리면서 잠시 석희재가 기억이 소멸된 저를 속이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해 보았다. 하지만 그럴 이유도 없거니와….

    ‘끝은 있지.’

    그게 자신의 지론이었다.

    언젠가 그 끝이 부자연스럽거나 강제적인 형태로 다가오지 않기만을 소망할 뿐이다, 서로 마주 잡은 손을 천천히 부드럽게 놓는 것처럼 끝나면 더 바랄 게 없겠다. 석희재와 이현은 환경도, 특기도, 성격도, 미래도 전혀 달랐으므로 삐걱이며 함께 하더라도 언젠가 먼 미래에 헤어지게 되리라는 것이 이현의 예상이었다.

    이현은 멋쩍게 제 귀를 만지작댔다.

    그래도 그걸 입 밖에 냈다니.

    자꾸 끝을 준비하는 이유는 그만큼 두렵기 때문이다. 아픈 곳을 자꾸 만져서 고통에 무뎌지는 것처럼 평소에 철저히 준비해야 마지막이 두렵지 않을 거라고, 이현은 믿고 있었다.

    아마도 어젯밤 술에 취한 자신은 지나치게 솔직했나 보다. 깊은 관계를 맺는 것을 지극히 두려워하는 한심한 속내가 툭, 튀어나와 버린 것을 보면. 애정 관계에 서툰 게 이런 데서 티가 난다. 일전에도 그래서 실수를 했었지. 석희재에게 ‘어떤 여자가 너랑 결혼할지 상대가 부럽다’라는 식의 말을 했다가 그를 화나게 만들고 말았다.

    나름대로 칭찬이었는데, 그런 걸 칭찬이랍시고 해서는 안 된다는 걸 몰랐다.

    아무리 연애에 서투르다 해도 이 나이 먹고 서툴면 그건 귀엽지도 않고….

    이현은 고개를 들었다.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미안하다. 기억 못 하는 것도 미안해.”

    “…….”

    “아까 그래서 집에서 표정이 그랬구나.”

    “…….”

    “체할 기분인 것도 모르고.”

    “…….”

    “형이 미안해. 응?”

    거기까지 말하고 이현은 고개를 들었다. 석희재가 저를 묵묵히 바라보고 있었다.

    잘한 사과인지 제가 한 말을 되짚어 보고 있을 때 석희재가 조금 옆으로 비켜 앉았다. 아무렇게나 흘러내린 이불을 치우고는 제 옆자리를 톡톡 두들긴다.

    “여기 앉아.”

    이현은 그가 시키는 대로 했다. 침대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석희재가 뒤에서부터 조심스레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턱을 올려놓았다. 앞가슴을 조용히 토닥인다. 위로하는 듯한 몸짓인데 도리어 석희재가 위로받고 싶어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현은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놔두었다.

    “다 좋은데, 미안하다는 말 너무 그렇게 하지 마. 좋아하는 사이에 굳이 사과하고 용서받고 그러는 건 이상해. 그러니까 내 말은, 그냥 이렇게 안고 있으면 다 풀리니까….”

    석희재가 차분한 말투로 횡설수설하는 것이 느껴져서 이현은 픽 웃었다. 예전에는 진지하게 하는 말을 다 듣고 있었는데 이제는 조금 익숙해졌다고 이 일관된 톤 안에서도 감정의 진폭이 느껴진다.

    “그럼 사과도 하지 말까?”

    “아니. 해야지. 근데 한 번만 해.”

    “그래. 미안해.”

    “사과는 아까 했잖아. 자꾸 하지 말라니까….”

    석희재의 낮은 목소리가 숫제 보채는 것처럼 들려 이현은 다시 웃어 버리고 말았다.

    “사과하지 말고 약속을 해 줘.”

    “약속? 무슨 약속.”

    “다시는 그런 말 하지 말기.”

    차분한 중저음의 목소리와 어울리지 않는 깜찍함이었다. 지나치게 귀여워서 이현은 등을 수그리고 오소소 소름이 돋는 등을 떨었다.

    그 사이에 이현이 숙여서 드러난 뒷덜미를 조용히 관찰하던 석희재가 조심스레 거기 입술을 묻었다. 아, 이런 때구나. 이럴 때마다 몰래 열심히 흔적을 남겨 놓은 것이다. 저도 남자라고… 독점욕이 있어서.

    이현은 팔을 뒤로 돌려 석희재의 뒤통수를 일부러 팍 잡아당겼다. 불시에 입술에 이를 부딪친 석희재가 읍, 하며 짧은 비명을 흘렸다.

    “알았어. 다시는 안 그럴게.”

    “…….”

    “헤어짐을 상정하는 말을 하지 말라는 거지?”

    “…응.”

    둘은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유치한 행위였지만 석희재는 그게 정말로 두 사람의 앞날에 도움이 될 거라고 믿는 것 같았다.

    그 후, 두 사람은 병실 문을 걸어 잠그고 좁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웠다.

    “…좋다.”

    석희재는 이현을 끌어안고 행복감에 취했다. 형이 와 줘서 다 나았다며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했다. 당장 일어나 연습실로 가도 되겠다고 제법 허세를 부렸다. 그래도 수액은 다 맞으라고 구박하면서도 이현은 연습실 따위 내팽개치고 병원에 오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분에 넘치게 잘난 연하의 애인에게 끌어안겨 일을 나 몰라라 하는 기분이 지나치게 달콤했다. 원래 자신은 절제도 모르고 자제심도 부족한 종류의 사람이다. 누가 좋다, 예쁘다 한없이 칭찬하면 속없이 이끌릴 줄 알았다. 공사 구분 따위 못하고 이렇게 휩쓸릴 줄….

    이현은 한숨을 쉬며 석희재를 끌어안았다. 여기서 하고 싶은데…. 아팠던 애고, 열도 있으니까 그건 안 되겠지. 이현은 덤덤하게 생각하면서 혀를 섞는 키스로만 적당히 만족했다. 아쉬운 딥 키스를 마친 후에도 입술을 핥던 석희재가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현아.”

    “음….”

    “현아.”

    “응.”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진대. 원래 싸우고 그러면서 더 애틋해지고. 우리도 사랑싸움이란 걸 해 보네?”

    이현은 쿡쿡 웃었다.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고 석희재가 ‘현아’라고 부르는 것이 꼭 형아, 형아, 해 대는 어린애 같았기 때문이다.

    “형아, 하는 거 같다. 너.”

    석희재는 상상도 못 했다는 듯이 멈칫 굳어 버렸다. 그러더니 이내 얼굴을 싹 굳히고 또박또박 말했다.

    “아니야. 형아, 아니고 현아.”

    “…크큭….”

    “잘 들어. 현, 아.”

    “…….”

    “현아, 라고.”

    엄숙한 목소리로 그걸 굳이 교정하는 게 더 어린애 같다. 이현은 참지 못하고 폭소했다. 석희재는 안절부절못하다가 그저 이현을 꽉 끌어안았다. 웃음을 잠재우려는 듯이.

    몸을 뒤흔들던 폭소가 겨우 소강상태에 접어든 후, 이현은 그 품 안에서 꿈지럭거리다 말했다.

    “다음 주부터 테크네.”

    “그게 뭐야?”

    “테크 리허설.”

    무대 장치와 조명, 영상 효과 등을 미리 설치해 리허설을 돌려 보는 3일간의 테크 리허설이 끝나면, 곧바로 배우들이 직접 의상을 입고 무대 위에서 런을 도는 드레스 리허설이 시작된다. 극장 입성이라는 뜻이다.

    이현은 석희재의 품으로 파고들면서 속삭였다.

    “극장 가면 분장실에서도 할 수 있겠다.”

    “…….”

    “내 꿈이었는데….”

    그 순간 저를 안은 석희재의 팔에 힘이 들어갔다. 설마 하며 슬쩍 손등으로 스쳐 본 아래는 벌써 뜨겁게 힘을 받았다. 이십 대 초반의 성욕이란 대단하다. 말 한마디에 이렇게 서다니… 대체 얼마나 상상력이 풍부한 걸까?

    아팠으니까 하루만 아껴 주려고 했는데 이러면 또 참기가 힘들다.

    이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히 단정히 옷매무새를 만지고 재킷의 주름을 털자 석희재의 애틋한 시선이 따라왔다. ‘어디 가?’라고 묻는 눈이었다.

    “화장실.”

    “…갔다….”

    와, 라고 석희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현이 말했다.

    “…갈 건데 같이 갈래?”

    석희재는 대답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수액이 꽂힌 팔을 내려다보더니 링거가 걸린 거치대를 굴리며 조용한 복도를 가로질러 이현을 따라왔다.

    인적이 드문 화장실의 가장 넓은 칸 안에 들어간 후 이현은 석희재를 변기 위에 앉히고 황급히 벨트를 풀고 지퍼를 내렸다. 남자 지퍼를 내려 주는 걸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니니 조급해하면서도 손동작에는 머뭇거림이 없다. 손가락을 입에 넣어 빨아 적시고, 급하게 안을 넓힌 후 입술을 깨물며 올라탔다. 입구로 바로 진입하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지는 젖은 귀두 때문에 앓는 소리가 났다.

    삽입한 직후에는 마른 감이 있는 내벽이 딸려 올라가는 느낌이 왔다. 마찰을 무시한 급한 삽입에 뭔가 툭, 여린 근육이 뚫리는 소리가 났다. 이현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뱃속부터 깊은 한숨이 올라왔다.

    “좋아….”

    이현은 부들부들 떨며 중얼거렸다.

    “나도 좋아.”

    “으응, 좋아….”

    “형이 좋은 만큼… 흣, 나도 좋아.”

    석희재는 조용히 숨을 몰아쉬다가 주삿바늘이 꽂히지 않은 팔로 이현의 목덜미를 급하게 잡고 키스해 왔다. 옷을 갖춰 입은 채인 석희재는 어떻게든 이현의 맨살에 닿고 싶은지 셔츠 안으로 손을 넣어 등을 넓게 어루만졌다. 발목까지 바지가 떨어져 드러난 허벅지를 쓸기도 했다. 이현은 그 손길을 느끼며 정신없이 아래를 조였다. 충동적인 섹스에 미칠 듯한 충만감이 들었다.

    어쩌다 얻게 된 ‘진짜 애인’은 추잡할 정도로 밝혀도 뺨을 때리거나 상스러운 말로 상처 주지 않는다. 그래서 좋은 건 쾌락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 아마도 그래서 이토록 느끼는 거라고….

    “응, 희재야. 희재야….”

    이현은 생각했다. 그러나 생각도 잠깐이고, 그저 쾌락에 사로잡혀 빠르게 허리를 흔들었다. 퍽, 퍽 아래가 맞부딪치고 유일하게 드러난 맨살이 마찰할 때마다 안이 녹는 듯했다. 아무리 말라도 남자의 체중인데 석희재는 이현이 중심을 잡을 수 있게 단단히 받치고 있었다. 등허리를 꾹 누르듯이 안은 그의 팔에서는 어느새 주삿바늘이 뽑혀 피가 튀어 있었다.

    사정의 여운을 즐기기도 전에 화장실에서 급하게 뒤처리를 하는 둥 마는 둥 하고 나올 수밖에 없던 이유는 갑자기 전화가 걸려 왔기 때문이다. 김 실장이었다.

    그녀는 이현에게 아직도 병원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건 달리 말하면 빨리 연습실로 돌아가라는 말이었다. 아래에 석희재의 정액을 담은 채로 이현은 제법 사무적인 목소리로 답했다.

    “나 가야 되나 보다.”

    전화를 끊고 나서 이현은 한숨을 쉬었다. 석희재는 농담으로라도 가지 말라고 어리광은 부리지 않았다. 대신 이따 집에서 보자고 말해 왔다. ‘오늘은 술 마시지 말고.’ 이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한번 깊게 입을 맞추었다.

    혼자서 병원을 나서는 길, 바람이 불었다. 잎사귀들이 몸을 부딪치는 소리가 그를 덮쳤다.

    이현은 바람이 닿고 지나간 제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그는 석희재가 몰래 키스 마크를 남기던 마음을 생각해 보았다. 한지우의 말을 들은 직후에는 그저 당황스러워 앞으로는 이런 짓 하지 말라고 질타할 생각이었는데… 한 마디 추궁도 못 했다. 그럴 생각이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제 말 한마디에 죽네 사네 오락가락하는 녀석을 흔들 수가 없었다. 왜 허락도 없이 이런 짓을 했냐고 물어도 이유 역시 무척 싱거울 것이다.

    ‘좋아서 그랬어.’

    커플링 혹은 목 뒤에 남긴 키스 마크.

    이현은 석희재가 집착하던 것들을 떠올렸다.

    ‘녀석은 증표가 필요한 건가.’

    바람이 불었다. 바람이 뺨을 스친다는 구실로 이현은 충동적인 결심을 했다.

    그날 저녁, 이현은 업무를 마치자마자 근처의 타투숍을 찾아갔다. 그리고 허벅지 안쪽에 희재의 이름을 새겼다.

    ***

    시술은 10분도 걸리지 않았다. 스펠링을 적어 달라고 하여 ‘heejae’라고 한 번 써서 주었다가 그 스펠링이 맞는지 확신할 수 없어서 한글로 하겠다고 했다. ‘정말이세요?’ 한글로 하는 경우는 드물다면서 타투이스트가 물었다. 고개를 끄덕이고 또 부위를 말했을 때 타투이스트가 또 한 번 물었다. ‘정말이세요?’라고.

    자리에 누우면서 이현은 이 순간이 믿기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피어싱을 해 보고 싶었던 적은 있으나 타투에는 거리낌이 있었다. 몸에 새길 만큼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도 별로 없었고, 다른 사람도 아닌 자신이 하게 될 줄은 상상도 못 했었다.

    타투이스트는 경험이 쌓인 만큼 충동적으로 숍에 들르는 손님들, 또 그들이 보이는 머뭇거림을 잘 캐치하는 편인 것 같았다. 적극적으로 말리지는 않았으나 이현이 마음을 바꾸면 빨리 접을 수 있게 틈틈이 의사를 묻는 것을 잊지 않았다.

    “진짜 하실 거죠?”

    그가 마지막으로 물었을 때 이현은 석희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표정 변화가 크지 않은 그 얼굴이 순식간에 놀라움으로 물드는 광경을 보는 건 왠지 짜릿할 것 같았다.

    그건 이현이 익숙해진 다른 고통과는 조금 다르게 심장을 쥐어짰다. 맞기 전에, 심한 일을 당하기 전에, 자신을 쓰레기처럼 굴리는 남자 앞에서 방어할 옷가지 하나 없이 벗은 몸으로 엎드린 기분과도 비슷했다. 다가올 폭력이 무서워 식은땀을 흘리며 조여드는 심장.

    이미 중독된 그런 긴장감들과 어쩌면 비슷한 색의 기대감.

    그런 것들을 떠올리며 이현은 눈을 감았다.

    “네. 하세요.”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현은 왼쪽 심장 위를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뭐 이 정도면 안심하겠지.

    ***

    석희재의 몸은 단단하고 따뜻하다. 멀리서 언뜻 보면 호리호리 말라 보이지만 이렇게 안겨 있으면 은근히 뼈대가 굵다는 걸 알게 된다. 손도, 어깨도 평균보다 훨씬 크고 듬직하다. 짧은 기간에 제법 보기 좋게 몸을 만든 걸 보면 힘도 타고났다는 소리다. 지금도 석희재는 이현을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적당히 기분 좋은 힘으로 당겨 안았다. 희미하게 근육이 갈라진 모양이 보이는 팔에는 안긴 상대가 불편하지 않도록 한 배려가 담겨 있다.

    석희재가 숨을 쉴 때마다 뒷덜미에 숨이 닿았다. 숨이 후끈할 정도로 따뜻했다. 잠들면 체온이 올라가는 강아지처럼 석희재는 노곤할 때면 온몸이 따뜻해졌다.

    “자?”

    석희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마를 비비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흩어져 목이 간지러웠다.

    “피곤해?”

    “조금.”

    공연 개막이 코앞으로 다가온 요즘 석희재의 스케줄은 저만큼이나 꽉 차 있었다. 오전 일찍부터 운동 두 시간 반, 이어서 별도로 받는 바이올린 레슨, 피부과와 치과 등의 병원 투어, 거기에다가 오후와 저녁에 안배된 런 연습에는 본인이 런을 도는 날이 아니더라도 꼬박꼬박 참여해서 바뀐 동선을 그날마다 액션캠으로 녹화해 온다.

    이현이 평범하게 열한 시쯤 야근을 마치고 돌아오면 석희재는 당일 녹화한 캠을 보며 동선과 조명의 위치를 외우거나 개인적으로 바이올린 연습을 하고 있었다. 그 외에 홍보 팀을 통해 들어오는 매체 인터뷰와 비공식적인 광고와 화보 촬영도 잦았다.

    “할래?”

    이현은 뒤를 향해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석희재가 대답 대신 이마에 소리 없이 입을 맞추었다.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피곤하면 그냥 이러고 있든가.”

    이현은 아직 들키지 않은 흔적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나 이런 거 했다’ 하고, 쉽게 말할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왠지 머뭇거리게 된다. 이유는 모르겠다.

    허벅지 안쪽 여린 살에 새긴 타투는 생각보다 큰 후유증을 남겼다. 가벼운 마음으로 시술한 것과 달리 관리는 은근히 까다로웠다. 씻는 것도 조심해야 하고, 무엇보다도 술과 운동 금지였다. 이현은 요 며칠 한약을 먹는다는 핑계로 술자리를 피했다. 덕분에 귀가가 빨라졌지만 반대로 지난 며칠간 석희재가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덕분에 3일을 보여 주지도 못하고 관리에만 힘을 썼다.

    이현은 의식하면 아직도 욱신거리는 허벅지 안쪽을 떠올렸다. 그래도 이제 딱지가 앉았다.

    “하고 싶어.”

    석희재가 조용히 속삭였다. 귓가에 닿는 속삭임이 간지러워 이현은 웃으며 몸을 움츠렸다. 석희재가 다소 부끄러워하며 웅얼거렸다.

    “왜 굳이 물어.”

    “…….”

    “항상 하고는 싶지….”

    고개를 돌려 확인한 석희재의 얼굴은 부끄러움에 약간 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성욕이 순수한 진심보다 앞서는 것처럼 보일까 봐 우려하는 얼굴이다.

    석희재는 오해받는 것을 두려워했다. 밝히는 건 금기처럼 여겼고, 가끔 지나치게 궁합이 좋은 날 흥분해서 이현을 몰아붙였다고 느끼면 죄책감을 보이곤 했다.

    플라토닉과 아가페적인 사랑에 환상을 가진, 다소 보수적인 연애관의 석희재. 그 눈에 그간의 저는 어떻게 보였을까?

    잊고 살던 수치심이 살아났지만 이현은 무의미한 망상을 털어 냈다. 이불 아래로 파고 들어가며 석희재의 트레이닝복 바지를 벗겼다. 손바닥에 힘을 줘 몇 번 크게 주무르자 시동을 걸 필요도 없이 성기가 몸집을 키웠다. 단단한 것에 절로 엉덩이가 바짝 조여졌다. 그걸 입에 머금기도 전에 석희재는 이현을 내리눌렀다. 그러고는 다시 이마부터 천천히 키스하기 시작했다. 경건하고 다정한 입맞춤. 눈가와 콧대, 입술과 턱을 그리듯이 더듬는 착한 방식.

    쇄골에 진하게 입을 맞추면서 석희재가 눈을 들었다. 마주친 까만 눈은 꿈틀거리는 정욕을 억누르고 있었다. 본능을 억누르며 정석적인 애무를 하는 고집스러움도 석희재답다. 이현은 석희재가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놔두었다. 천천히 가슴을 타고, 세로로 긴 줄이 그어진 근육의 길을 따라 입술을 내리다 보면 어딘가에 시선이 닿을 것을 알기 때문이다.

    꼼꼼한 애무, 그리고 허리를 강한 악력으로 붙든 석희재의 양손에 이현은 신음하며 몸을 틀었다. 어느새 저 역시 잔뜩 흥분해 앞이 불룩했다. 석희재는 주저 없이 속옷을 벗긴 후 이현의 흥분을 입 안에 머금고 깊숙이 빨았다.

    “읍, 으음… 하아.”

    입 안에 깊이 넣었다가 목젖을 건드릴 때쯤 길게 뱉어 낸다. 타액으로 잔뜩 젖은 성기가 쑥 빠져나왔다. 석희재는 괴롭게 마른침을 삼키면서 젖은 성기를 뚫어져라 보며 손바닥으로 문질러 주었다.

    입으로 빨지 않을 때에도 손이 쉬지 않는 이유는 이현이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키스하는 법을 현에게 배운 것처럼 펠라티오 역시 현이 하는 것을 그대로 한다. 성욕을 드러내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면서도 사랑하는 연인에게 배웠으니 의심 없이 따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수치스러운 행위라도. 또 지나치게 남창 같은 방식이라도.

    이현은 입술을 꾹 깨문 채로 젖은 눈을 하고 석희재를 내려다보았다. 평생 남자의 것을 빨 일이 없어 보이는 귀한 외모가 거리낌 없이 봉사하고 있었다. 다시 눈을 마주치며 안쪽 깊이 머금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익숙해졌는지 목 안쪽까지 깊이 받아들인다. 허리를 움직이고 싶어져 이현은 이불을 강하게 그러쥐었다.

    “움직여.”

    “하아….”

    “움직여도 돼.”

    “…읏. 말, 하지 마.”

    “형이 나한테 흥분했으면 좋겠어.”

    일부러 입 안에 머금은 채로 말하는 게 분명했다. 자극에 약한 귀두를 혀로 스치고 이로 긁는 자극에 현은 앓는 소리를 내며 상체를 더 일으켰다. 석희재의 새까만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지나친 자극에 손이 벌벌 떨렸다.

    “흐으, 응… 아… 희재야. 읏.”

    참을 수 없이 허리 짓을 하니 목젖을 잘못 건드렸는지 오심을 느낀 석희재의 눈시울이 훅 붉어졌다. 그런데도 끈질기게 달라붙어 삼킨다. 그가 자신의 것을 빨아 주고 있는데도 이현은 자신이 잡아먹히고 있다고 느꼈다.

    석희재는 그렇게 한참 이현의 것을 빨다가 흥분으로 단단해진 음낭과 회음까지 전부 혀로 적셨다.

    이런 건 가르쳐 준 적 없는데….

    이현이 다시 등을 붙이고 털썩, 누워 버렸을 때였다. 바지와 속옷을 전부 내리고 양 허벅지를 벌리며 그 사이에 자리 잡은 석희재의 행동이 잠시 멈추었다. 숨을 몰아쉬던 이현은 그 정적을 해석했다.

    봤구나.

    “이게 뭐야?”

    석희재의 손가락이 슬쩍 닿았다. 딱지가 앉은 상처 위를 손톱으로 긁는 바람에 생각지도 못한 통증에 공격당한 이현은 윽, 하고 먹히는 비명을 질렀다.

    “아파?”

    “아… 건드리지 마. 아직 덜 아물었어.”

    “이게 뭔데? 어쩌다 여길 다쳤어?”

    석희재가 아래로 고개를 기울였다. 숙인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석희재는 자세히 보겠다며 핸드폰 손전등을 가지고 와 밝혔다. 방 안이 어둑했기 때문에 야맹증이 있는 석희재는 그 형체를 금세 알아볼 수 없었던 것이다.

    치부를 밝은 빛 아래에 드러냈다는 수치심도 잠깐, 이현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었다.

    “형.”

    석희재가 멍하니 얼굴을 들었다. 손전등의 플래시가 제 눈을 스치고 가 이현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희재야. 이걸로 됐지.

    조금은 안심되지?

    네가 그렇게 원하던 증표.

    하지만 이상하게 말이 나오지 않았다. 괜한 짓을 했다는 반응이 오면 어떡하나. 순간적으로 마음이 작아졌다. 게다가 감동적인 깜짝 선물이라기에는… 상황이 조금 추했다. 허벅지를 잔뜩 벌리고 아래를 드러낸 채로 누워 있는 제 몸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상대가 원하는 선물인지도 별로 확신이 없었다. 이현은 주섬주섬 몸을 일으켰다.

    “아, 이거….”

    “혀, 엉….”

    석희재의 턱이 희미하게 떨리더니 이내 이현을 덮치듯이 와락 안았다. 이현은 천장을 보며 무게에 깔려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사랑해.”

    생소한 발음이었다.

    그건 석희재에게도 처음 듣는 말이었다.

    그러고 보니 석희재는 왜 지금까지 사랑한다고 말하지 않았을까.

    이현은 ‘사랑해’라는 발음을 소리 없이 혀로 굴려 보았다.

    “사랑해, 너무… 너무 사랑해.”

    너른 어깨가 아이처럼 떨렸다. 오른쪽 어깨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와 이현은 흠칫 놀랐다. 석희재는 울고 있었다.

    “뭘 울고 그래….”

    “나는, 나는….”

    석희재가 주먹으로 눈가를 꾹 누르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는 떨리는 호흡을 뱉으며 이현의 입술에 소리 없이 입을 맞추었다. 더없이 소중하게. 가까이서 본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입술이 살짝 맞닿은 채로 석희재가 중얼거렸다.

    “이제 무서워.”

    “뭐가.”

    “이보다 더 진심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다음이 있는 게.”

    그리고 마주친 눈은 그보다 더 절절할 수 없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는, 그 흔한 비유가 이토록 와 닿은 것도 처음이었다.

    아무렇게나 던져져 천장을 비춘 핸드폰의 플래시 때문에 석희재의 눈에 고인 눈물이 반짝였다. 이현은 순간 그 빛에 홀렸다. 만지고 싶어졌다. 물기 어린 점막과 예쁘게 반들거리는 검은 눈동자. 평소에는 빛도 번지지 않는 새까만 눈동자에서 촘촘한 홍채….

    그저 눈빛에 압도당해 이현은 말문을 잃었다.

    “내가 형에게 이 정도 의미는 된다고, 착각해도 되지.”

    “…….”

    “똑같이 사랑해 달라고는 말 안 해.”

    사랑해.

    난생처음 들어 보는 그 말을 들었을 때 잠시 이현의 말문이 막혔던 것을 꿰뚫는 듯한 발언이었다.

    그간 사랑한다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한 건 대답을 돌려받지 못할 것이 두려워서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제는 대답 따위 상관없다는 듯이 석희재는 단단한 눈을 하고 있었다. 이현을 한참 응시하던 눈을 내리깔고 석희재는 다시금 손등으로 눈가를 털어 냈다. 반짝이며 고여 있던 눈물이 흩어졌다. 훌쩍이는 모습은 어린 소년 같았고, 젖어서 가닥가닥 뭉친 속눈썹은 화장이라도 한 것처럼 진하고 예뻤다.

    “나는 평생 누군가에게 내 애정을 보답받길 바랐나 봐.”

    “…….”

    “그걸 지금 알았어. 그런 거 상관없다는 거 이제야 알았어.”

    “…….”

    “형을 사랑하게 해 줘서 고마워.”

    석희재는 다시금 불가해할 정도의 애정 어린 말을 한다.

    이현은 이게 제가 바라던 상황인지, 아닌지 분간할 수가 없어졌다. 그저 울 줄은 몰랐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어리숙한 손으로 석희재의 눈물을 닦아 주려 했다. 석희재는 그 손을 붙잡고 손가락의 마디마다 입을 맞추었다. 지극히 경건하게.

    <4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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