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 창문 위의 작은 점 (12/27)
  • 12. 창문 위의 작은 점

    월요일 오후 3시.

    도산공원 근처의 한적한 카페 한구석, 마스크와 모자를 눌러쓴 장신의 남자가 한 명 앉아 있었다. 기다란 다리가 테이블 바깥으로 삐죽 튀어나왔다. 테이블 위에 놓인 커피는 다 마신 지 오래라, 희미한 갈색 액체가 가득 찬 얼음 사이로 고여 떨어졌다. 내내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걸 보니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하다. 상대가 늦는 걸까? 다시 음료를 한 잔 더 주문하러 간다.

    ‘연예인 맞지?’

    ‘그런데 누군지 모르겠네.’

    ‘말이나 걸어 볼까.’

    ‘그냥 놔둬. 누군지 알지도 못하는데.’

    ‘왜? 원래 무명일 때 알아봐 주면 좋아해.’

    근처 테이블에 앉아 있던 이들이 남자를 흘끔거렸다. 안 그래도 연예인들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는 도산공원 근처였다. 신체 조건만으로도 특히나 눈에 띄는 남자는 얼굴을 다 가리고 있어도 감출 수 없이 잘생겼다. 우스운 말이지만 드러난 뼈대와 모자를 눌러쓴 작은 두상이 이 남자는 필히 잘생겼다고 외치고 있었다.

    그렇게 들어온 지 30분이 지나도록 혼자인 남자에게 관심이 모아졌다가 흩어지기를 반복했다.

    남자, 석희재는 의자를 밀고 일어나 다시 카운터로 갔다. 다시금 시선이 모였다. 그러나 그는 제 등에 쏟아지는 시선을 알아보지 못한 척했다. 아마도 그러도록 무의식중에 훈련되었다. 주목받는 것에 예민한 성격이었다면 버틸 수 없는 외견을 타고났기 때문이다.

    어릴 때는 ‘사람들이 왜 나를 쳐다보나’ 궁금해하던 때도 있었다. 사람들은 제 등 뒤에 불이라도 난 것처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시선은 화상처럼 달라붙었고, 그것이 싫었던 석희재는 시선을 즐기는 대신 제 뚜렷한 존재감을 희석시키는 데에 집중했다. 본인이 생각하기에 제 어머니와 가장 닮지 않은 부분이었다.

    카운터 앞에 선 석희재는 메뉴판을 한참 바라보다가 이내 결정을 내렸다.

    “탄산수 하나 주세요.”

    마스크를 내린 순간 주문을 받던 직원의 동공이 잠시 흔들렸다. 석희재는 자신이 범죄자처럼 보인 것인가, 우려하면서 안심하라는 뜻으로 모자를 벗었다.

    직원은 이내 평정을 찾고 발랄한 목소리로 답하며 얼음 컵도 필요하냐고 물어왔다. 석희재는 얌전히 ‘네.’ 하고 답했다.

    잠시 기다리자 카페 직원이 얼음 컵과 함께 마카롱 하나를 내주었다.

    “저, 이건 안 시켰는데요.”

    “서비스입니다. 손님!”

    석희재는 머뭇대며 트레이를 들고 돌아섰다. 가끔 영문을 모르고 서비스를 후하게 받는 일이 적지 않았다. 짧은 시간에 음료를 두 번이나 시켜서 그런가 보다. 그렇게 납득한 석희재는 무던히 받아 들고 제 자리로 돌아왔다. 이번에는 아까 커피처럼 얼른 비워 버리지 않고 천천히 마셨다.

    다시 핸드폰 시간을 확인해 본다. 겨우 10분가량이 지나 있었다.

    “후….”

    긴 한숨을 내쉰 석희재는 다시 모자를 눌러썼다. 그러고는 근처에 비치된 잡지를 가져왔다. 무료하게 페이지를 넘겨 보지만 잠시 뒤에 있을 데이트 때문에 설레서 글자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애인’이 언제쯤 올지 기약이 없어 더 두근거렸다.

    아무 생각 없이 넘기던 페이지에서 ‘도산공원 핫 플레이스’라는 글자를 발견한 석희재는 그걸 주의 깊게 보았다. 기억해 놓으려고 핸드폰으로 촬영도 했다.

    이현에게서 갑자기 연락이 온 것은 어젯밤이었다.

    혼자서 잠드는 것이 적응이 안 되어 이불을 뒤척이던 새벽 한 시경.

    「내일 만날까?」오전 1:06

    석희재는 핸드폰 액정을 괜히 엄지손가락으로 문질렀다. 보는 순간 입가가 풀어졌다. 어젯밤 이 문자를 받던 순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이현은 별거 아닌 문자 하나로도 자기 기분을 대번에 하늘 끝까지 치솟게 만든다. 방금 전까지 어떤 상태였던지 상관없이…. 순식간에 제 기분을 바꿔 놓는다.

    이불을 껴안은 채로 뒤돌아 누우면서 석희재는 금세 답을 찍어 보냈다. ‘내가 형 집으로 갈게’라고.

    그러고는 답이 오기도 전에 마음이 급해져 전화를 걸었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잠시 후 순순히 전화를 받아 든 이현의 목소리는 잠들기 직전의 자신과는 달리 무척 명료했다. 수화기를 통해 오늘 이현을 제게서 빼앗아 간 장본인들, 조연출들의 쾌활한 목소리와 술자리에서의 소음이 동시에 섞여 들어왔다. 이어서 문을 열고 바깥에 나온 듯 주변의 소리가 바뀌었다. ‘잠깐만’. 이현의 말 이후 이어진 침묵으로 미루어 석희재는 그가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 동작이 하나하나 눈에 그려졌다.

    ‘보고 싶다.’

    뜬금없는 석희재의 말에 이현은 나직하게 웃더니 말을 이었다.

    - 나 내일 결혼식 있거든. 도산공원 근처에서.

    그리고 또 침묵이 이어졌다. 이현이 담뱃불을 깊게 빨아들이는 숨소리를 주의 깊게 들으면서 석희재는 작은 의문을 가졌다.

    월요일에도 결혼식을 하나.

    - 끝나고 볼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통화는 거기서 끝났다. 누군가가 이현을 찾으러 바깥으로 나왔기 때문이다.

    40초도 되지 않는 짧은 통화가 아쉬웠지만 그래도 내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석희재는 미련을 삼켰다. 제안에 응한 뒤로는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아서 이불을 젖히고 일어나 방을 이유 없이 돌아다녔다.

    아무리 생각해도 핑계 같았다. 월요일에 결혼식이 있다는 게. 그리고 굳이 집 근처로 온다는 것도 수상했다. 만나고 싶은데 부끄러워서 이것저것 말도 안 되는 이유를 주워다 붙인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래서 더 잠들 수가 없었다. 주방에 나가 꺼진 불을 켜고 괜히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하다가 우유도 한 잔 따라 마셨다. 선명한 데피를 위해 늦은 밤에는 수분 섭취를 금하라던 피티 트레이너의 말이 생각났다. 제 몸에 홀린 듯한 표정을 짓던 이현을 떠올린 석희재는 아닌 밤중에 버피를 세 세트 뛰었다. 그 후에는 옷장에서 내일 입을 옷을 골랐다.

    석희재는 어젯밤 자신이 했던 행동들을 돌이켜 보며 말없이 앉아 있었다. 이현이 그런 제 바보 같은 모습을 몰랐으면 했다.

    그나저나 언제 오는 거지.

    이현이 저와 낮 데이트를 하고 싶어 귀여운 핑계를 붙였을 거라는 망상은 점차 희미해졌다. 이제 석희재는 인터넷에서 결혼식 식순 따위를 검색해 보며 이현의 도착 시간을 점쳤다. 한 번도 결혼식에 참석해 본 적 없기에 현장 상황을 추측하는 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증인들의 말은 전부 달랐다. 30분부터 2시간까지 대중이 없었다. 30분…. 석희재는 희망을 가져 보았다.

    그러나 이현이 도착한 것은 4시가 지나서였다.

    석희재가 카페에 들어온 지 한 시간 이십 분 후.

    그 사이 ‘혹시 연예인 아니세요?’ 하고 물어보는 무리가 두 팀이나 지나갔다. 딱 말라 죽고 싶은 심정일 때에 이현이 유리문을 밀고 겸연쩍은 표정으로 들어왔다.

    “미안. 기다렸지.”

    “…….”

    소매에 재킷을 걸친 이현이 대번에 석희재를 찾아 걸어오며 말했다. 가볍게 뛰는 듯한 발걸음이었다. 얼굴에는 미안한 기색이 어렸으나 웃고 있다. 사과하는 목소리가 산뜻했다.

    석희재는 인사도 잊고 의자를 끌어당겨 앉는 이현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빈틈없이 단추를 채운 데다 넥타이까지 맨 차림이 좋았기 때문이다. 그 얼굴을 보자 너무 늦었다고 투덜거리고 싶은 마음이 쏙 들어갔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야. 삼십 분밖에….”

    “삼십 분?”

    이현이 헥, 하는 소리를 내며 놀란 얼굴을 했다. 석희재도 같이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아… 그냥 집에 있다가 내가 부르면 나오지. 뭘 미리 나왔어.”

    한 시간 이십 분을 기다렸다고 하면 이현이 저를 바보처럼 볼 것 같아 30분으로 줄였는데도 그는 황당한 표정을 짓는다. 사실을 알려 주면 어떤 표정을 할지 짐작도 안 갔다.

    그때 이현은 목이 말랐는지 김이 다 빠진 탄산수가 가득 담긴 컵에 손을 뻗었다. 얼음이 다 녹아 컵 표면에 물방울이 송골송골한데, 고작 30분을 기다렸다는 석희재의 말에 의심이 없다.

    “…근데 월요일에도 결혼식을 해? 식이 왜 이렇게 길어?”

    석희재는 제 목소리가 너무 불퉁하게 들리지 않았으면, 하고 바라며 물었다. 그런데도 투정처럼 들렸는지 컵을 입에 가져다 댄 채로 이현이 웃었다.

    “몰랐구나. 우리 업계는 다 월요일에 결혼하지. 식이 긴 이유는 축가를 뮤지컬로 해서… 오늘 특히 난장판이더라. 신랑, 신부에 주례까지 난입해서.”

    조금 전의 난장판을 떠올리는 이현의 눈빛이 조금 멍했다. 얼마나 난장판이길래? 석희재는 뮤지컬 배우들의 결혼식에 대해 약한 흥미를 가졌다.

    “아무튼 월요일이 공연 없는 날이라 대부분 쉬니까….”

    “그런데 왜 형은 안 쉬어?”

    “그건 나도 미스터리야.”

    이현이 짜증을 내며 미간을 구겼다. 탕 소리를 내며 테이블 위에 내려놓는 손짓이 거칠었다.

    둘은 함께 카페에서 나왔다. 결혼식에서 뭘 얻어먹고 나온 이현과 달리 석희재는 점심부터 굶은 상태였다. 그 말을 들은 이현은 더욱 미안해했다.

    두 사람은 천천히 걸어 공원 길가의 작은 레스토랑에 들어갔다. 이현은 몰랐지만 석희재가 미리 알아 둔 곳이었다. 메뉴판을 보고 커피가 만 원이라는 사실에 놀란 이현은 아무것도 먹지 않으려고 했고, 석희재는 그런 애인을 달래 메인부터 디저트까지 이것저것 시켰다. 둘은 여느 때처럼 계산대 앞에서 저가 내겠다는 실랑이를 벌였다. 그러나 적게 먹은 데다 영수증에 찍힌 가격에 압도된 이현은 다른 때보다 소극적이었다. 덕분에 이번에는 석희재가 쉽사리 카드를 낼 수 있었다.

    “내가 진짜 낼 수도 있거든? 낼 수 있긴 한데…. 월급의 10분의 1을 한 번에 긁는 건 좀 그래. 야, 아무튼 잘 먹었다. 난 별로 안 먹었지만….”

    이현이 멋쩍게 주워섬기는 변명이 하나같이 귀여워 석희재는 당장 그의 손을 잡고 싶어졌다. 심장이 간질거리고 빈손을 어쩌질 못해 안달이 났다.

    주머니에 손을 쿡 찔러 넣고 주변을 돌아보니 골목 안으로 슬슬 밀고 들어오는 차 한 대, 그걸 피해 도롯가에 붙어 걷는 행인 두 명이 보였다. 좁은 골목길에 빠듯하게 주차된 수입차들을 보며 석희재는 문득 차를 갖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느긋한 식사를 마치고 나니 할 것이 없어 둘은 주변을 산책했다. 해가 지지 않았는데도 가로등에 하나, 둘 이른 불이 켜졌다. 길을 걷던 이현은 눈에 띈 편집숍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무릎까지 굽히고 디스플레이 된 흰 운동화를 오래도록 보았다. 안에 들어가 보자고 말한 쪽은 석희재였다. 이현은 이상하게도 머뭇거렸다.

    석희재와 직원의 추천으로 이현은 결국 운동화를 신어 보고 거울에 비춰 보기까지 했다. 가격 표시가 없는 신발을 신어 보는 것이 꺼려졌던 그는 끝까지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잘 어울린다.”

    석희재는 그렇게 말하고 매장 점원을 이끌며 카운터로 향했다.

    운동화 뒤축에 손을 건 채로 이현은 그 뒷모습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무어라 속삭이는지 완벽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새 상품 있어요?’라고 묻는 것만은 또렷이 귀에 박혔다. 설마 사 주려고 하나, 석희재의 등을 가늘게 뜬 눈으로 바라보며 이현은 원래 신고 왔던 구두에 발을 넣었다.

    아니나 다를까, 석희재가 납작한 카드지갑을 꺼내 드는 모습이 보였다.

    이현은 혀를 찼다. 당장 말릴까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러면 말없이 실망한 표정을 지을 게 눈에 선히 그려졌다. 게다가 신발이 정말로 마음에 들었기에 말리고 싶은 의지가 더 약해졌다.

    문득 이현은 고개를 들어 실내를 둘러보았다. 3층 높이까지 천장이 탁 트여 있다. 거기에 티 하나 없는 깔끔한 흰색으로 마감한 세련된 건물 내부, 명품 로고가 붙은 소품들, 저들 말고는 사람 하나 찾아볼 수 없는 썰렁한 매장…. 평생 이런 곳에 제 발로 걸어 들어갈 일이 없던 이현은 분위기에 압도당해 살짝 위축된 상태였다. 포장 중인 점원에게 대뜸 다가가 환불을 해 달라고 말하기도 어렵게 느껴졌다.

    ‘그래. 삼십만 원 안쪽이면 그냥 받고, 나중에 비슷한 금액대로 나도 선물 해 주자.’

    그건 이현에게는 큰 결심이었다. 삼십만 원이면 그의 월급의 10분의 1보다도 훨씬 더 많았던 것이다.

    “더 둘러보시겠어요?”

    매장 직원이 거대한 쇼핑백을 석희재의 손에 들려 주며 물었다. 석희재는 이현을 바라보았고,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나가는 길까지 깍듯한 응대를 받았다.

    매장 문이 닫혔다.

    그제야 석희재가 수줍게 말했다.

    “선물이야….”

    “잠깐, 이게 얼마지?”

    이현은 석희재는 안중에도 없는 양, 문에서 빠르게 멀어지며 쇼핑백 안에 손을 넣고 휘적여 댔다. 석희재는 그 뒷모습을 말없이 바라보며 뒤따랐다. 태그에 붙은 가격을 보았는지 이현이 불시에 휘청거렸다. 130만 원! 가격을 외치는 목소리가 비명과도 같았다. 석희재는 당장 환불하자며 돌아가려는 이현의 팔과 손목을 붙잡고 버텨야 했다.

    “백삼십만 원이 땅 파서 나오냐! 넌 이 돈을 막 쓰고 다녀?”

    “아니, 나한테도 비싸. 나도 이만한 거 충동구매 못 해.”

    “그러니까 환불하자고. 내가 백삼십만 원을 어떻게 밟고 다녀?”

    “왜 못해? 밟으라고 만든 신발인데.”

    “내가 이 돈 있으면….”

    “형. 내 얘기 좀 들어 봐. 일단 이리 와 봐. 이거 진짜 형한테 잘 어울리고….”

    처음에는 이현의 과감한 언행에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석희재는 금방 페이스를 찾았다. 이현을 살살 달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다시 돌아가기 어렵도록 팔을 붙잡고 멀리멀리 걸었다. 끌려가는 사이 이현의 눈썹이 난감하게 누그러졌다.

    “형. 이게 13만 원이라고 생각해 봐. 살 거야, 안 살 거야.”

    “사….”

    이현의 목소리가 작았다. 아무래도 저도 퍽 갖고 싶었던 모양이다. 신어 볼 때부터 얼굴에 이미 ‘갖고 싶다’라고 쓰여 있었다.

    이현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건대, 이 정도면 거의 다 됐다고 볼 수 있다.

    물론 130만 원을 불시에 긁는 게 제게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주는 용돈이 든 체크 카드가 있고, 어머니가 준 신용 카드가 있다. 보통 후자는 정말 급한 일이 아니고서야 절대 쓰지 않는다. 조금 전에는 용돈 잔액이 모자라 어쩔 수 없이 신용 카드를 꺼내 들었다. 한도가 기억나지 않아 결제가 안 될까 봐 짧은 사이 조마조마했었다.

    만약 이걸로 어머니에게 싫은 소리를 듣더라도, 조만간 제 몫의 페이를 회사로부터 정산받게 된다. 그러면 제 돈으로 충분히 갚아 줄 수 있었다.

    “그럼, 내가 사 줘서 공짜인 건데 왜 안 돼.”

    “이게 왜 공짜야, 130만 원이지.”

    “그래도 예쁘지?”

    “응….”

    “마음에 들긴 하지?”

    이현은 대답 대신 떠나온 건물을 바라보았다. 지금이라도 환불할까, 하는 표정이다. 석희재는 일부러 그 턱을 잡고 돌려 저를 보게 만들었다.

    자포자기한 목소리로 이현이 말했다.

    “네가 이거 결제할 줄 알았어. 알았는데…. 그냥 받고, 나도 비슷하게 선물 하나 해 주려고 했지.”

    “…정말?”

    예상치 못한 대답에 석희재의 눈이 크게 뜨였다. 발걸음도 딱 멈췄다.

    “내가 너한테 백삼십만 원짜리 선물 해 주려면 나 적금 깨야 돼.”

    “형.”

    석희재는 감격하여 저도 모르게 이현을 콱 껴안았다. 안고 나서는 저도 놀랄 정도였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대로변이라지만 옆 차도를 쌩쌩 지나치는 차들이 적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갑자기 포옹을 당한 이현은 안긴 채로 뒷걸음질을 쳤다.

    예전에 이현은 그런 말을 했었다. 연애할 시간도, 여력도 없으니 자신은 연애를 해서는 안 된다고.

    그건 받은 만큼 주고 싶다는 말이었다. 자신은 짝사랑하던 중에도 그 마음이 무척 사랑스러워서 몰래 어쩔 줄을 몰랐다. 이제 그 사랑스러운 마음이 저를 향하나 보다.

    “나… 안 줘도 돼. 진짜 안 줘도 돼. 왜냐하면 형은 다 해 줬으니까.”

    “내가 뭘….”

    “내 고백 받아 줬잖아.”

    조금 고개를 떼고 석희재는 이현을 내려다보았다. 이제 슬슬 떨어져야겠다고 생각했는지 석희재의 양팔을 조금 밀어내던 이현은 그 눈빛에 붙잡혔다.

    석희재는 문득 치미는 궁금증에 시달렸다.

    형과 연애를 했던 다른 사람들도 이런 감정을 느꼈을까?

    애인에게는 무척 성실한 사람이니까 분명 그랬을 것이다.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 나에게도 이 정도니까. 자기가 원해서 했던 연애에서는 당연히 작은 애정 표현에도 다 보답하려고 노력했겠지. 분명 그랬겠지….

    제 안에 있는 줄도 몰랐던 질투심이 울컥, 목 끝까지 솟구쳤다. 석희재는 엉뚱한 방향으로 튀려는 그 마음을 내리눌렀다.

    조금 시간이 걸릴 뿐이다. 이현은 제 방식대로 노력하고 있었다.

    마음의 크기가 같아지기를 바라는 것은 아직 어불성설이다. 이건 장기전이었다. 3년간 한 번도 지치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자신 있었다. 이렇게만 간다면.

    그러니까….

    “형은 앞으로도 받아 주기만 하면 돼.”

    “…….”

    “그러기만 하면 돼.”

    “…….”

    “내가 주는 것만 말리지 말고. 그냥 허락해 주면 돼.”

    석희재는 말을 잃은 이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저를 올려다보는 그의 표정은 해석하기 어려웠다. 가슴 벅차거나 설레는 감정은 아니고, 이해할 수 없는 크기의 애정 앞에서 말문이 막힌 것처럼 보였다. 혹은 길 한 가운데서 석희재가 갑자기 저에게 키스하려 들진 않을까 두려워하는 얼굴처럼 보이기도 했다.

    확실히 그럴 차례이긴 하지.

    석희재는 고개를 들고 멀리서 다가오는 빈 택시를 향해 손을 들었다. 단둘만 있을 공간이 필요했다. 아까부터 그의 손을 잡고, 포옹하고, 키스하고 싶던 저에게도. 주변 풍경을 너무나 의식하는 이현에게도. 숨을 곳은 필요했다.

    ***

    피부 위에 달라붙은 땀이 금세 식었다. 격한 행위 중 이현의 살결은 촉촉하게 밴 땀으로 쉽게 무르익었다. 그러나 두어 차례 절정에 이르고 그 흥분이 가시기도 전에 그 피부는 금세 다시 보송해졌다. 이제는 다소 건조하게 느껴지는 피부에 입술을 묻으며 석희재는 이유를 궁금해했다.

    방의 온습도가 달라져서일 것이다. 오래된 구옥을 개조한 이현의 1층 자취방은 한겨울에도 습도가 높았다. 석희재의 방 안은 그와 달리 사시사철 쾌적하다. 그 차이를 새삼 깨달았다.

    “간지러워.”

    석희재의 입술이 어깨선을 따라 한참을 배회했을 때였다. 이현이 조금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석희재는 몸을 물리고 일으켜 앉는 이현의 등을 바라보았다. 오목하게 파인 등줄기가 유연하게 구부러지고 침대를 한 팔로 받침과 동시에 견갑골 사이 세밀한 근육이 섰다. 잘 단련해서라기보다는 지나치게 말라 체지방이 없기 때문에 드러나는 생활 근육이었다. 방금 전 이현이 간지럽다고 떨쳐 냈는데도 다시 들러붙고 싶었다. 석희재는 비스듬히 누운 채로 턱을 괴었다. 저 등을 보는 것만으로도 자위할 수 있다.

    다시 은근히 힘을 받기 시작하는 아래를 무시하며 베개에 고개를 묻었다. 그 사이 이현은 허리를 굽히더니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제 옷가지 사이를 들췄다. 담배를 찾는 모양이었다. 석희재는 뒤돌아 앉은 그를 마음껏 관찰했다. 생소한 각도에서 빛을 받는 나체를 샅샅이 훑었다. 굽어서 도드라진 목뼈와 허리를 굽혀도 납작한 아랫배 같은 곳들을.

    담뱃갑과 라이터를 찾은 이현은 옷도 걸치지 않고 일어나려 했다. 방과 이어진 통창으로 내다보이는 외부 테라스로 향하려는 것 같았다.

    석희재는 그의 팔목을 잡았다. 이현이 뒤를 돌아보며 멈칫하자 그의 허리에 팔을 감았다.

    “그냥 안에서 피워도 돼.”

    “뭐? 안 되지….”

    “그냥 여기서 피워.”

    “방 안에서?”

    “응.”

    “부모님 집 아니야?”

    “신경 안 써도 돼.”

    이현은 비흡연자의 방 안에서 흡연한다는 사실이 썩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석희재는 고집을 부렸다. 아직도 섹스의 여운이 남았는데 그가 침대를 떠나는 건 싫었다.

    잠시 후 이현은 석희재에게 설득당했다. 그 역시 바깥에 나가는 게 번거로웠던 것이다. 담배 한 개비를 손가락 사이에 낀 채로 이현이 침대에 털썩, 드러누웠다. 베개 위로 흩어진 머리카락이 부스스했다. 석희재는 얼른 그의 살에 몸을 맞대었다.

    “재떨이도 없잖아.”

    생각해 보니 속았다는 듯 이현이 중얼거렸다. 석희재는 머리맡에 있던 물컵을 찾아 남은 미지근한 물을 쭉 따라 마시고는 완전히 비워 건넸다.

    “여기다 해.”

    “나한테 자꾸 비매너 짓만 시키네.”

    “이게 왜 비매너야?”

    “그럼 아냐?”

    “다 벗고 바깥에 나가는 게 더 비매너야….”

    아무리 어둑한 밤중이라 해도 누군가 이현의 벗은 몸을 보는 건 싫었다. 석희재는 그렇게 말하며 이현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애인은 천장을 향해 흰 연기를 뿜었다.

    석희재는 다시 눈을 감고 이현의 어깨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붓질을 하듯이 입술로 쓰다듬었다. 이현은 이번에는 간지럽다고 떨쳐 내는 대신에 가끔 자극을 참을 수 없을 때만 어깨를 제 쪽으로 말았다.

    “또 하고 싶냐?”

    이현의 물음에 석희재는 천천히 눈을 뜨고 그를 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택시 안에서부터 몰래 손을 잡고 있었다.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급하게 키스했다. 이현은 당황하기는커녕 기쁘게 키스에 응해 왔다. 어디로 가는 거냐고 목적지도 묻지 않았으니 아마 이렇게 될 줄을 예상하고 있던 듯하다. 덕분에 만지고 싶었던 살결을 실컷 더듬으며 현관에서부터 얽혀 들어왔다. 아마 이현은 아직도 집의 구조를 모를 게 분명했다.

    언젠가 그를 집에 초대하게 된다면… 집을 예쁘게 치워 인테리어 화보에 나오는 것처럼 잘 꾸며 놓고 여기저기 소개해 주고 싶었다. 그다음에는 직접 만든 요리를 대접하고 함께 이현이 좋아하는 영화를 밤새 보려고 했다. 언젠가 올지도 모르는 그날을 기다리며 디렉터스 컷과 배우 코멘터리가 붙은 DVD도 일찍이 구해 놓았었다.

    그 언젠가의 바람은 산산조각이 난 셈이다. 어느새 저 역시 이현의 방식에 물든 것일지도 모른다. 석희재는 저가 우스워서 피식 웃었다.

    예정된 데이트는 이다음에 하지 뭐.

    “흐음….”

    이현은 뜻 모르게 웃는 석희재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석희재의 말을 불신하는 티가 역력했다.

    이내 이현이 이불 안에서 손을 더듬어 왔다. 판판한 아랫배를 지나기도 전에 발기한 것이 손끝에 닿았다. 그 순간 서로 눈이 마주쳤다.

    “하나도 안 죽었네. 입으로 해 줄까?”

    이현이 이불 안으로 고개를 파묻었다. 석희재는 그를 붙잡아 끌어냈다. 이현의 얼굴에 ‘왜?’라고 써 있었다.

    “한 발 빼. 아직 한참 모자라면서.”

    “신경 쓰지 마. 원래 그래.”

    “뭐?”

    “…항상 이렇다고.”

    그 말을 듣고 난 이현은 한참 후에야 허,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그럼 너는 네가 만족할 때까지는 해 본 적 없다는 말?”

    “그런 건 아닌데.”

    이현과의 섹스가 불만족스러울 리 없었다. 아무것도 모르던 상태로 동정을 바치던 때부터 그의 취향에 맞춰 내키지 않은 매를 때릴 때마저도. 섹스란 어떤 것인가 탐구하고 타인의 취향을 공부하면서 도리어 석희재는 섹스의 방식이나 사정의 횟수는 중요치 않다는 걸 알게 됐다. 그저 상대가 이현이라는 것만 중요했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이현이 제게서 쾌락을 찾는다는 사실만으로도 석희재는 정신적 쾌감을 얻었다. 그건 직접 그의 안에 사정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물론 석희재 역시 그저 섹스라면 눈이 뒤집히는 일반적인 남자들 사이에서 이런 논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같은 남자인 데다가 실제로 하반신의 욕구에 충실하게 살아온 이현이 이런 주장을 믿어 줄지는 모르겠다.

    “그래. 한창 팔팔할 때라 이거지.”

    석희재는 머쓱하게 제 귀를 만졌다. 잔뜩 로맨티시스트인 척했지만 사정 직후 다시 힘을 받는 것도, 몇 번 가지고는 성욕이 쉽게 가라앉지 않는 것도, 이현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달래는 것도 사실이다. 남들은 어떤지 알 수 없는 부분이라 조금 더 의기소침해졌다.

    “그럼 형이 예전에 사귀던 사람들은….”

    “…….”

    “어땠는데?”

    이현은 천장을 본 채로 눈을 굴렸다. 과거의 인물들을 떠올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는 말이 없다가 다시 담뱃갑을 더듬었다. 석희재는 그에게 손수 붙을 붙여 주었다. 흘끔 닿았던 시선이 금세 떨어졌다. 석희재는 그를 안은 채로 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이현은 침묵을 고수했다.

    처음에는 잠자리에서의 저가 과거 이현의 연애 상대에 비해 얼마나 비교 우위에 있는지 가늠해 보려고 했건만, 질문의 의도가 점차 틀어졌다. 석희재는 점차 이현의 과거, 그 자체에 파고들고 있었다.

    “나이가 다 형보다 많았어? 대략 얼마나 많은데?”

    “…그걸 평균치를 내라고?”

    평균을 낼 만큼 상대가 많았나? 그걸 떠올리자 약간 끔찍한 기분이 들었다.

    이현의 취향이 연상인 것은 안다. 그래도 만약 제가 유일한 연하라면 기쁠 것 같았다. 그럼 자신이 그의 취향을 깬 유일한 사람이라는 소리가 되니까. 반대로 그렇기 때문에 그가 저에게 별로 적극적이지 않은 거라 생각하면 가슴이 갑갑해졌다.

    “아무튼 대부분 나이가 많았지?”

    “음….”

    “첫 연애는 언제 했어?”

    “…….”

    “고등학생… 때는 아니지? 그때 연상 만나면 원조교제야.”

    “이게 못 하는 말이.”

    “혹시 마흔 넘는 사람도 있었어?”

    “…….”

    “그렇게 나이가 많은데 때리는 걸 좋아해?”

    석희재에게는 이해 불가한 영역이었다. 이현이 맞는 걸 좋아하는 취향이라 그런 상대들만을 만나 왔을 거라는 가정은 이미 깨졌다. 그는 그저 익숙해진 것일 뿐이다. 그러면 문제는 상대들이었다는 소리였다. 게다가 이현은 열 살 터울이 훌쩍 넘는 이들을 좋아했다. 저와 처음 만났을 때 이현은 26살이었으니까, 그보다 어렸을 때 마흔이 넘는 늙은 여우들을 만나 보았대도 이상할 건 없었다.

    질문할수록 석희재는 그만 멈춰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상상만으로도 심장이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이런 질문에 이현이 솔직히 답해 준다면 잠깐의 궁금증은 풀리겠지만, 자신은 아마 그 답을 오래오래 곱씹게 될 것이다. 이현의 과거를 감당하지 못하는 쪽은 제 쪽일지도 모른다.

    이럴 줄 알고 일부러 궁금증을 억눌렀던 것인데…. 저도 모르게 물 흐르듯 말을 꺼냈다.

    아무리 가볍게 물어도 절대 가벼워질 수 없는 질문들.

    질투심에 추한 모습을 보이느니 모르는 게 나았다.

    그때 담배를 끈 이현이 석희재를 바라보며 돌아누웠다. 그러더니 손을 들어 석희재의 입술을 검지로 가볍게 톡톡 때렸다. 꼭 어린애를 어르는 듯한 제스처였다. 석희재는 제 고민이 가벼운 것으로 치부되는 느낌에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목소리만 깔면 다냐. 물어보는 게 하나같이….”

    “…하나같이 뭐.”

    석희재는 그의 손목을 잡고 떼어 냈다. 그러면서 이현의 손목을 잡고 탈탈 흔들었다.

    “저번부터 자꾸 이러지 마.”

    “내가 뭘 그래?”

    “내가 형한테 고백했을 때도 꿀밤… 때렸잖아. 그때 솔직히, 좋으니까 그냥 넘어갔지. 맞았을 때 놀랐어.”

    “그래?”

    이현이 실실 웃었다. 그런 걸 마음에 품고 있는 게 연하 티가 난다는 증거라고 그 눈에 쓰여 있었다. 석희재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이현이 천장을 바라보며 누웠다.

    “아닌데. 이런 거 내 버릇인데.”

    “정말?”

    “응. 아마도.”

    친한 사람들한테만 하는 버릇.

    그렇게 중얼거린 이현이 눈을 스르르 감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그가 눈꺼풀 너머 다른 이를 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석희재는 괜히 초조해졌다. 섣부른 심문으로 과거의 기억을 깨운 것 같아서 싫었다.

    그는 트레이닝복 바지에 다리를 꿰고 일어났다. 이현은 한쪽 눈만 가늘게 뜬 채로 석희재의 하는 양을 바라보다가 다시 베개에 고개를 붙였다. 석희재는 수건에 따뜻한 물을 적셔 와서 이현의 몸을 닦아 주었다. ‘뭘 이렇게까지’ 하면서도 이현은 말리지 않았다. 석희재는 방 안에 클래식 음악을 틀고, 주홍빛이 도는 할로겐 조명을 밝혔다.

    침대 발치에 낮은 서랍장과 함께 투명한 유리 가벽이 세워진 현대적인 인테리어, 세련된 조명과 수납을 전부 안으로 숨긴 결벽적인 흰 벽. 모두 입지가 환상적인 한강 변의 오래된 아파트를 싹 리모델링한 흔적들이었다. 이현은 군데군데 큰 잎 그림자를 드리운 생소한 수입 식물에 시선을 주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눈이 가닿은 곳은 그 방과 그림같이 잘 어울리는 석희재의 존재였다.

    “희귀종.”

    이현이 무의식적으로 툭 말을 던졌다. 석희재는 무슨 뜻이냐는 듯 고개를 들었다.

    “너 말이야.”

    저가 특별하다는 말인가. 석희재는 좋은 쪽으로 착각하고 싶었다.

    “나중에 누가 데려갈지, 와이프는 진짜 좋겠네….”

    이현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주어는 없었지만 석희재는 그 말뜻을 금세 알아차렸다.

    “누가 좋아?”

    그리고 석희재가 그 말을 지적하기 전부터 이현의 얼굴은 약간 굳어 있었다. 말을 뱉은 직후 제 실수를 직감한 눈치였다.

    그 말인즉슨, 석희재의 추측이 틀리지 않았다는 소리다.

    “그런 말을 왜 지금 하는데?”

    “…….”

    “우리가 헤어진다는 소리야?”

    석희재는 굳은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그러면 이현이 사과를 하거나, 당황해서 말실수를 하거나 그럴 줄 알았다. 하지만 이현은 고개를 수그리더니 제 손바닥을 보며 말했다.

    “끝은 있지.”

    “…….”

    “나도 다… 끝났으니까 지금 너랑 있잖아.”

    이치에 맞는 소리인데도 선선히 받아들이기 거북한 말이었다.

    석희재는 이현의 안에서 체념 비슷한 것을 읽었다. 어쩌면 그의 저런 주관은 자신이 그를 사랑하기 전부터 시작되었을지 모른다는 불안한 예감.

    “희재야. 이리와. 표정이 왜 그래.”

    “아니, 형이….”

    “내가 말실수했어. 미안해.”

    이현은 넉살 좋게 말하며 석희재의 팔목을 잡아당겼다. 그러고는 너른 등에 손을 얹고 도닥였다. 어린애 다루듯 하지 말라고 말했는데도 또 이런 식이다.

    “나는 진짜 나중을 말한 거야. 한 십 년 후에 있잖아. 아니 넌 어리니까 십오 년 후일 수도 있겠다. 그때는 결혼도 하고 그럴 거 아니냐. 그때 얘기한 거야. 다른 뜻이 아니라….”

    난 그것도 싫은데.

    그때도 형이랑 같이 있을 건데?

    “형, 내가 형한테 고백 받아 줘서 고맙다고…. 그걸로 다 됐다고 말한 지 얼마나 됐다고.”

    “아, 그래그래. 내가 미안해.”

    “왜 나를 욕심 많은 사람으로 만들어. 내가 뭘 했다고.”

    “맞아….”

    3년을 변치 않고 좋아했으니 3년 더.

    그렇게 자신만만했던 자신을 보기 좋게 비웃듯이 이현은 훨씬 더 미래를 말했다.

    이현에게 안겨 있는데도 왜인지 그가 멀게 느껴져, 석희재는 그를 강하게 그러안았다.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고 있는 줄 알았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안개 속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순조롭게 달리던 도로에서 불시에 과속방지턱을 덜컥 밟은 느낌이었다.

    이현이 그저 어른이어서, 타인과의 거리감을 잘 조절할 줄 아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그의 내면에는 예감한 것보다 더 강력한 불신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관계의 지속성에 대해.

    아마도 그때 결심했던 것 같다. 자신이 질투를 감당할 수 없을지라도 언젠가는 그의 과거를 꼭 알아야겠다고.

    ***

    “여자 친구 생겼죠.”

    삐걱하며, 살짝 의자가 기울어지는 소리. 그 뒤에 바로 귀에 꽂힌 말.

    석희재는 방금까지 열중하던 핸드폰 화면에 목을 고정한 채로 눈만 옆으로 굴렸다. 제게 말을 건 것인지 확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선을 조금 이동하자마자 바로 눈이 마주쳤다. 연습실에서 종종 가까이 있는 앙상블 배우 유나연이었다.

    그녀가 고개를 살짝 숙인 채로 석희재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떻게 알았을까. 손가락이 멈췄다.

    “여자 친구… 아니고.”

    석희재는 어설프게 부정하며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자신이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를 현이 읽었다는 표시가 떴다. 하지만 아직 답이 없었다. 사무실에 있을 때의 애인은 대답이 늦다. 그런 점마저도 일에 열중하는 어른 같아서 좋았다.

    석희재는 솔직하게 말할까, 말까. 잠시 고민했다. 그러다 자신은 거리낄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요.”

    “역시.”

    유나연은 ‘빙고’ 하면서 손가락을 탁 튕기더니 의자에 풀썩 등을 기댔다. 다시금 접이식 의자가 삐걱이는 소리가 났다.

    눈앞에서는 마침 한지우의 넘버가 한창이었다. 성량이 좋은 그의 목소리가 높은 층고를 꽉 메웠다.

    연습실의 의자는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런이 진행되면서 자신의 출연 텀을 인지한 배우와 앙상블들은 슬슬 요령을 부리기 시작했다. 현재, 대부분의 남자 배우들은 담배를 피우러 몰려 나간 참이었다. 일부 남아 있는 배우들도 석희재와는 멀리 떨어진 채다. 일전에 같은 공연에 출연했던 경험이 있는 이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친목이 형성됐고 시간이 지나며 그게 굳어졌다.

    반대로 석희재는 연습실 안 인간관계 흐름에 대해 전혀 감을 잡지 못하고 홀로 외딴섬처럼 남겨졌다. 지난번 시츠 때 캐스팅의 이유를 실력으로 증명하기는 했지만… 석희재가 정통 뮤지컬 배우의 커리어를 밟지 않을 거라는 것을 예상한 이들은 앞에서는 예의는 차려도 곁은 잘 주지 않았다.

    첫 무대에 이름 있는 배역을 꿰찬 신인, 데뷔하자마자 곧바로 매체나 CF에도 얼굴을 비추고 있는 이질적인 존재.

    덕분에 석희재는 안 그래도 부족한 사교성을 발휘할 틈도 없이 무언가 설명하기 어려운 공기 안에 격리되어 갔다.

    개중 유나연은 그나마 석희재가 혼자 겉돌지 않도록 신경 써 주는 사람이었다. 대놓고 챙겨 주지는 않아도 은근한 배려가 눈에 보였다. 지금처럼 괜히 비어 있는 옆자리에 와서 앉아 주는 것도 그렇고.

    “어떻게 알았어요?”

    석희재는 면목 없이 목덜미를 매만지며 슬그머니 물었다. 어느 부분에서 티가 나는지 궁금했다.

    “첫 번째, 핸드폰.”

    “핸드폰?”

    “하루 종일 메시지 하기 바쁘다, 그것도 절대 안 그러던 사람이? 썸 아니면 여자 친구지 뭐.”

    그냥 수긍하기에는 빈약한 이유였다. 석희재의 시선을 느꼈는지 유나연이 말을 보탰다.

    “그리고 두 번째, 착장. 이거 봐. 누가 연습실에 이렇게 입고 와요.”

    “…….”

    “원래 이렇게 안 입었잖아. 누구 보여 주고 싶은 거 아니에요?”

    유나연은 손을 뻗어 석희재의 흰 셔츠 어깨 끄트머리를 검지와 엄지로 콕 집었다. 마치 꼬집어 비틀 듯이.

    낯이 홧홧해졌다. 애인 유무를 넘어서 착장이 바뀐 이유까지 정확히 집어 냈기 때문이다. 셔츠를 고집하게 된 것은 첫째로 이렇게 입는 것을 현이 좋아하기 때문이다. 직접적으로 이게 좋다고 말해 준 적은 없지만 매번 눈빛이 달랐다.

    둘째로는… 조금이라도 나이 들어 보이고 싶어서였다. 사귀기 시작한 이후로 현은 가끔 석희재를 아기 취급했다. 뭘 해도 말끝마다 ‘어려서 그런가’ 하는 중얼거림이 붙었다. 3년간 파트너로 지냈을 때는 나이 같은 건 관심도 없고 전혀 의식도 안 했으면서, 이제는 틈만 나면 7살 차이를 들먹였다.

    연애 경험이 없는 건 사실이니까 별로 부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원래 이현의 취향이 연상, 그것도 열 살 이상 차이가 족히 나는 지독한 연상들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이유도 모르게 초조해질 때가 있었다.

    “오늘도 데이트하죠? 그래서 이렇게 입고 왔고.”

    “…네.”

    “내가 언제부터 사귀기 시작했는지 맞혀 볼까?”

    “…….”

    “분명히 연습 중에 생겼는데. 음… 시츠 직전에?”

    석희재는 반응도 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그러고는 유나연이 신기라도 있는 게 아닌가 의심했다.

    “맞구나? 나 촉 대박이죠? 맞아. 딱 그때부터 이랬거든.”

    유나연이 즐거워하며 다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석희재는 의미 없이 연습실 안을 둘러보았다. 그러고 보니 대부분 몸을 써야 하는 출연 배우들은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연습실에 올 때가 많았다. 확실히 석희재의 옷에서 위화감을 느낄 만했다.

    “하아. 다들 연애한다. 나만 애인 없어.”

    푸념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석희재는 유나연의 옆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왜 없어요.”

    “왜 없긴. 아무도 나한테 관심 없으니까 그렇죠.”

    “인기 많으실 것 같은데….”

    그 말에 유나연이 흥, 코로 웃었다.

    “어디 가서 그런 입바른 말 하지 마요. 남들은 착각한다. 특히 착각할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들은….”

    진심으로 한 말이었는데…. 석희재는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사교성이 부족한 만큼 연애에 대한 상식도 부족한 편일지 몰랐다.

    연습실 한가운데를 팔짱 낀 상태로 바라보던 유나연이 말했다.

    “희재 씨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접근하는 남자들이 있긴 있지. 내가 상대가 별로 마음에 안 들어서 그렇지… 난 눈치가 너무 빨라서, 누가 좀 다른 의미로 접근하면 경계심이 먼저 들거든요.”

    “다른 의미로?”

    “누가 봐도 흑심을 품고 다가오는 그런 거? 연애하려면 물론 흑심과 질척거림이 필요하긴 한데, 왜 그렇게 그게 징그러운지 모르겠어요.”

    그녀의 말에서 석희재는 왜인지 예전의 이현을 떠올렸다. 자신이 직접 고백하기 전의 이현 말이다.

    파트너로서 몸은 쉽게 열면서도 애정 섞인 관계는 거부했었다. 그런 현의 앞에서 자신 역시 사랑을 숨기는 법에 가장 먼저 익숙해졌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쓰고 애정을 드러내면 이현은 귀신같이 알아채고 선을 그었다. 그런 그에게서 아예 튕겨 나가지 않으려고 애를 쓰며 ‘거리 조절’에 유념했다.

    그러고 보니 문득 그 이유가 알고 싶어졌다. 왜 거리 조절을 하려고 하는지를. ‘촉이 좋은’ 유나연은 이현의 심리 상태를 알려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아무튼 완전 신기하다. 여자 친구랑 어떻게 만났어요? 희재 씨 왠지 눈이 낮지는 않을 것 같은데. 대시 받았어요? 같은 업계 사람?”

    다시금 삐거덕, 소리를 내며 의자가 기울어졌다. 유나연이 호기심을 숨기지 못한 얼굴로 저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석희재는 조금 갈등하면서 핸드폰 액정을 밝혔다. 그러나 여전히 새로 온 메시지는 없었다. 이따가 미팅이 연달아 3개라고 했으니 아마 지금부터 퇴근 때까지 연락이 안 될 가능성이 컸다.

    “저… 여쭤보고 싶은 게 있는데요.”

    ***

    “7살 연상? 연예인도 아니고 회사원? 세상에. 어쩌다 만났대? 생각보다 취향이 소박하네요?”

    유나연은 석희재의 대략적인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다. 원래도 배우답게 모션과 표정이 큰 편이었지만 이번에는 약간의 꾸밈도 없이 진짜로 놀랐다는 티가 났다. 무엇이 소박하고 또 무엇이 그렇게 의외인가 싶어서 석희재는 이현을 머릿속으로 떠올려 보았다.

    이현의 취향이 연상이라면 석희재의 취향은 이현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이현의 얼굴 외에 사람의 미추를 굳이 분류하거나, 어떤 모습이 섹시하다고 여긴 기억 자체가 희미했다. 그래도 원래부터 차가운 인상과 긴 눈매가 매력적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기는 하다. 웃을 때는 봉숭아 꽃잎이 탁 터지듯이 화사해지면 더욱 좋았고….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요. 보여 주면 안 돼요?”

    그 말에 석희재는 입술을 깨물었다. 핸드폰 사진첩에 이현의 얼굴이 한가득이었다. 함께 식사할 때 메뉴가 나오기 전 핸드폰을 보는 그를 찍기도 하고, 커피를 마시다 잔을 내려놓고 테이블 위에 올려 둔 손만 찍은 것도 있었다. 그럴 때면 이현은 저를 ‘뭐 하냐?’라는 눈으로 바라보기는 했지만 말린 적은 없다. 정확히는 저가 뭘 하고 있는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깨어 있을 때는 물론이고 자고 있는 그의 모습을 오목조목 담기도 했다. 막 자고 일어나서 붓기 있는 얼굴은 화면 안에서 더욱 살이 올라 보여 귀여웠고, 피로에 절어 턱선이 날카로워지면 그것도 좋았다. 키스를 마친 후의 입술은 붉어서 예뻤고 담배를 문 입술도 심장을 빠르게 뛰게 했다. 매일, 매 순간 그의 모습이 다채로워 다양하게도 찍었다.

    남이 봐도 예쁘다고 해 줄 얼굴이 사진첩 안에 무척 많았다. 석희재는 유나연에게 이현의 모습을 자랑하고 싶어 잠깐 안달이 났다. 하지만 이현은 자신이 연애 중이라는 걸 알리고 싶어 하지 않았다. 허락을 받은 적 없으니 남에서 섣불리 보여 줄 수 있을 리 만무하다. 석희재는 핸드폰을 쥐었다.

    “그건 안 돼요. 근데 예뻐요. 진짜 엄청 예쁘고….”

    “아아. 그렇겠지. 완전 미인이겠지.”

    “사귀는 거 비밀로 하기로 해서 보여 주면 안 될 것 같아요.”

    “나참. 7살 연상 누나한테 꽉 잡혀 사는구나. 진짜 회사원은 맞아요? 배우 준비 중이거나 연습생, 뭐 그런 친구라서 못 보여 주는 거 아니고?”

    “아니에요.”

    잠깐 말을 멈췄던 석희재는 다시 입을 열었다. 질문은 유나연만 하고 있었다. 애초에 궁금한 게 있어서 부른 건 저였는데.

    “제가 궁금한 건….”

    “응. 말해 봐요.”

    석희재는 유나연을 바라보았다. 턱을 괴고 들을 준비가 된 그녀가 앞에 있는데도 잘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석희재는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가끔 저더러 아내한테 잘할 것 같다고 말하거든요. 나중에 결혼할 사람이 누군지 궁금하다고 한 적도 있고….”

    “으잉?”

    유나연의 눈이 커졌다. 턱을 괸 손은 미끄러졌다. 석희재는 초조한 기분이 되어 입술을 축였다.

    “말실수라면서 사과하긴 했는데, 절 덜 좋아하는 건지.”

    “아, 그건….”

    “아니면 예전에 안 사귈 때도 가끔 그런 말 했었는데 그냥 입버릇인 건지….”

    “…….”

    “그때 앞으로는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넘어갔는데, 화를 냈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어요.”

    유나연이 눈을 찡그렸다. 어쩐지 동정심을 담은 눈이었다.

    “화났구나.”

    “…….”

    “그런데 화를 못 냈구나?”

    그 말에 석희재는 약한 충격을 받았다. 자신이 현을 향해 화가 날 리 없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다.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사귀는 거 맞죠? 혼자만의 착각… 그런 거 아니고?”

    “아닌데요.”

    석희재는 제법 예민해져서 받아쳤다. 그 파르르하는 반응에 유나연이 멋쩍게 혀를 차며 말을 이었다.

    “그럼 뭐 일단… 나이가 좀 있으시니까, 결혼 생각이 있는 건 아닐까요?”

    “결혼…요? 누구랑요?”

    “모르지 뭐. 근데 여자 친구분에 비해 희재 씨가 좀 어리잖아. 그분은 일반인이기도 하고, 희재 씨는 계속 연예계 활동하면 서른 중반… 중반이 뭐야. 느긋하게 후반 다 되어서 결혼할 수도 있잖아. 한지우 선배도 아직 미혼인데요. 아무튼 둘이 연애만 하다가 적당히 사그라들 거라고 믿는 게 아닐까?”

    석희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이현의 결혼에 대해서는 생각도 해 본 적 없었다. 그는 남자를 좋아했고, 일전에도 몇 번이나 자신은 평생 독신일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말했다. 외롭게 늙어 죽지 않으려면 취미가 많아야 한다거나, 혹은.

    ‘쉰쯤 먹으면 어디 가서 섹파도 찾기 힘들겠지? 야, 그때까지 네가 나 만나 주면 안 되냐. 응?’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헤헤와 흐흐 가운데의 멋쩍고 불분명한 웃음소리를 흘리며.

    그리고 그때의 석희재는… 앞으로 이십 년은 더 만나준다는 그 말에 숨이 가빠올 지경으로 설레서, 목메는 것을 꾹 삼키며 ‘그러지 뭐’ 하고 답했었다. 짝사랑하던 때의 이야기다.

    “아니에요. 아닐 거예요. 결혼 생각은 없다고 했는데….”

    “그건 모르는 일이죠. 반대로 희재 씨는 지금 결혼하자면 할 수 있구요?”

    그 물음에 석희재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답했다.

    “네.”

    “어머, 웬일이야. 진짜 지금 당장 하자고 해도? 유부남 되면서 억대 광고 계약 막 날아가도 상관없어요?”

    “상관없어요.”

    애초에 이현 때문에 시작한 일이니 그만 얻을 수 있다면 상관없다. 법적으로 서로를 완벽히 속박할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동시에 석희재는 이현과 자신 사이에 그런 증명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에 무척 울적해졌다. 자신이 여자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른다. 아, 그러면 애초에 이현과 몸으로라도 엮이는 게 불가능했을까….

    석희재의 시든 얼굴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유나연이 다시 입을 열었다.

    “내 말 나쁘게 듣지 말아요. 진심인 거 아니까요. 그리고 희재 씨가 진심인 건 여자 친구도 알 거예요. 아는데…. 신뢰가 부족한 거죠. 말뿐인 게 아닐까 생각하는 거예요.”

    “말뿐인 거 아닙니다.”

    석희재의 단호한 말에 유나연은 피식 웃었다.

    “희재 씨를 못 믿는 게 아니라 시간을 못 믿는 거라구요.”

    끝은 있지.

    이현의 중얼거림이 떠올랐다.

    “희재 씨 마음, 자기 마음, 상황, 현실. 그런 게 미래에는 변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

    “그나저나 되게 겁 많은 사람이다. 나이 좀 있는 커리어 우먼인 줄 알았더니. 하긴, 그 나이면 연애의 끝을 몇 번 봤겠죠. 그리고 나 같아도 나보다 일곱 살 어린 중딩이 절절 매달리면 요게 뭘 몰라서 이러는구나, 엄마가 해 준 따뜻한 밥 먹고 나한테 이러는 거 아니다, 하고 꿀밤 먹여 돌려보냈겠다….”

    “…질투 나요.”

    “응? 뭐가?”

    석희재는 제 손을 흑단처럼 까만 머리카락 속에 파묻고 헝클어뜨렸다.

    “처음이 있었겠죠. 맹목적인 사랑이요. 처음에는 누구나 그러잖아요. 그게 내가 아닌 게… 질투 나서 죽을 것 같아요.”

    “…….”

    “그런 거, 알고 나면 독이 될까요.”

    “독?”

    “네. 좋아하는 마음에.”

    그게 궁금했다. 알게 되면 질투를 제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예 눈 감아 버리려고 했다. 평정심을 흐트러뜨리는 것에서는 아예 눈을 돌려 버리는 게 그동안 석희재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이현보다 알고 싶은 것은 없었다. 그의 모든 것을 알지 못하고 어떤 부분은 모른 채 남겨 놓는다는 것이 무척 쓸쓸했다. 그것도 한때의 타인은 알던 것을, 그를 지금 가장 사랑하는 저가 모른다는 것은.

    그때 유나연이 난데없이 석희재의 팔을 툭 때렸다.

    “에이, 숙맥처럼 굴지 마요. 맨날 이러더라. 무슨 대사 치는 것처럼 말을 해.”

    석희재는 눈을 깜빡이며 되물었다.

    “네??”

    “알면서 왜 그래. 연애에서 제일 금기시 되는 질문이 그거잖아. 구 남친, 구 여친! 파고들다 보면 백퍼 싸운다고요.”

    금시초문이라는 석희재의 표정에 유나연의 눈이 그 어느 때보다도 커졌다.

    “헉… 설마 진짜로?”

    석희재는 대답하지 못하고 귀만 붉히면서 눈을 내리깔았다. 연애가 처음인 게 부끄러운 적은 없었다. 상대가 이현이라 그저 기쁘기만 했다.

    그러나 연애 자체가 처음인 저는 짐작하지 못하는 어떤 숙맥 같은 부분을, 혹 지금 유나연처럼 이현이 알면서도 봐주고 있을까 봐 덜컥 심장이 졸아붙었다.

    “앞으로도 좀 물어볼게요.”

    “…….”

    “모르는 게 많아서요.”

    석희재가 악수를 청하듯 손을 내밀었다. 유나연은 어이없어하면서도 그 손을 맞잡았다. 연습실 안, 석희재의 유일한 동맹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

    “애인 생겼니?”

    뜬금없이 쿡 찔러 들어오는 질문에 이현의 동공이 초점을 잡지 못하고 흔들렸다. 어설프게 시선을 옮기는 단 몇 초 사이, 시야 안으로 한지우의 씩 웃는 얼굴이 들어왔다. 질문에 대한 답을 이미 확신한 표정이다.

    “아… 아뇨. 없어요.”

    “흠.”

    한지우는 연습실 탕비실의 문을 가로막듯 기대어 서 있었다. 그를 제치고 나갈 용기가 없던 이현은 주저하다가 뒤돌아 안쪽의 분리수거 통으로 향했다. 쓰레기통이나 비우자는 심정으로.

    “못 사귀죠. 시간도 없고.”

    “이 PD 바쁜 거야 내가 알지.”

    꽉 찬 쓰레기봉투의 입구를 꽉 여미면서 이현은 일단 부정을 해 봤다. 회사에서도 그렇고 마주치는 사람마다 이런 말을 하는 걸 보면 어딘가 티가 나긴 나는 모양이다. 대체 어떻게들 눈치채는지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지만 말이다.

    그나저나 희재는 어디 갔지. 점심시간 내내 뵈지도 않고….

    오전 중, 이현은 갑작스레 연습실에 들렀다가 오라는 지령을 받았다. 대표님이 바이블을 찾는데 그게 연습실에 있었다. 성가신 일이지만 깜짝 방문에 석희재가 좋아할 걸 생각하니 괜히 흐뭇해져서 도착하자마자 녀석의 모습을 찾았다. 하지만 한참을 기다려도 도무지 나타나질 않아서 잡일이나 하던 차였다.

    “그런데 다들 연애는 하더라. 아무리 바빠도.”

    “전 그런 재주 없어요.”

    “흠….”

    눈을 가늘게 뜬 한지우의 얼굴에 의심이 가득했다. 그만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 회사 사람들도 이현의 애인 유무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현은 그게 진지한 관심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저 역시 남의 신변잡기는 흥미진진하게 듣지만 그것도 그때뿐, 남은 남일 뿐이다. 단순히 흥밋거리로 추궁하는 것이다. 인정했다가는 주말에 뭐 했어요? 여자 친구랑 데이트했어요? 우리 첫공 때 소개해 줄 거야? 사사건건 화제를 끌고 나와 괴롭혀 대겠지. 인정을 아예 안 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입을 다물어 버리면 금세 흥미를 잃는다.

    이현은 무릎보다 훨씬 위까지 올라오는 대용량 쓰레기봉투를 양팔에 하나씩 들고 휘청이며 일어났다. 한지우가 얼른 다가왔다.

    “어? 이리 줘.”

    “괜찮아요. 별로 안 무거워요.”

    “당연히 도와줘야지.”

    손가락에 걸린 쓰레기봉투 한 포대를 말릴 틈도 없이 빼앗겼다. 기온이 점차 올라가면서 어느새 짧아진 옷 소매 아래로 단단한 팔뚝이 드러났다. 시선이 가는 것은 본능이다. 이현은 다시 땅을 바라보며 묵묵히 한지우의 뒤를 따랐다.

    연습실로 나오자마자 한지우는 영 딴 방향으로 몸을 틀었다.

    “선배. 그쪽 아니고 저쪽이요.”

    “어? 어. 맞다.”

    앞서서 걷던 한지우가 소탈하게 웃으며 이현이 말한 쪽으로 뒤돌았다. 길도 모르면서, 슬리퍼를 찍찍 끌며 당당히 걷던 뒷모습이 우스워서 이현도 따라 웃었다.

    한지우가 또다시 입을 열었다.

    “요즘 연습실 왜 자주 안 와? 연애하느라 바쁜가?”

    “아… 아니라니까요. 사무실에서 할 일이 많아서 그래요.”

    “앞으로도 이렇게 가끔 오나?”

    “그렇죠? 그래도 공연 시작하면 극장에서 살아요.”

    “하… 그때만 기다려야겠네. 현이 일 열심히 하나, 안 하나 감시해야지.”

    “선배는 제가 눈에 안 보이면 노는 줄 아세요?”

    “애인 부자지?”

    “아, 선배님….”

    한지우는 이현의 지친 말투를 듣는 둥 마는 둥 하며 쓰레기장 한편에 봉투를 쌓아 올렸다. 쓰레기를 버린 후 근처에서 자연스럽게 담배를 무는 한지우를 따라 이현도 제 몫의 담배를 찾았다.

    그 사이 한지우가 라이터를 켜 불을 붙여 주려 하기에 이현은 조금 놀라서 몸을 물렸다. 사람에게는 퍼스널 스페이스라는 것이 있다. 가끔 한지우는 그 공간을 훅 넘어 들어 온다.

    당황이 드러났는지 한지우가 툭, 말을 뱉었다.

    “불편해?”

    내려다보는 눈은 표정이 없어 정색에 가까웠다.

    대놓고 거절하는 것도 이상해 이현은 어색하게 웃고는 고개를 기울였다. 가까이서 본 한지우의 손은 생각보다 거칠고 피부색이 짙었다. 진짜 남자의 손이다.

    같은 때, 한지우의 시선은 이현의 귀 뒤쪽 목덜미에 닿았다. 벌레에 물렸다고 보기에는 꽤 넓은 부위에 걸친 울혈 위에.

    연기를 빨아들이며 눈을 든 순간 서로 눈이 마주쳤다.

    불을 붙인 후 이현은 의식적으로 한 걸음 떨어져서 바람의 방향을 읽으며 담배 연기가 그에게 가지 않도록 조절했다.

    한지우는 다시 씩, 의식한 미소를 지었다. 이현도 그냥 따라 웃었다. 이럴 때 그가 연예인으로 오래 살아온 사람이라는 것을 느낀다. 자기 호의가 무시당하는 것 같을 때 가장 예민하게 군다.

    하지만 문제는 저에게 있는지도 모른다. 생각보다 친절하네, 라고 느끼는 것부터 연예인들에게 편견이 있다는 소리니까. 눈치 빠른 사람이니 훨씬 일찍부터 알아챘을지도.

    진짜 순수하게 형, 동생으로 지내고 싶어 하는 건지도 모르는데.

    제 뒷덜미를 만지작거리던 이현이 먼저 물었다.

    “요즘에 주변에서 그런 얘기 많이 듣긴 하는데요.”

    “응? 뭐가.”

    “연애하는 것 같다고요. 근데 진짜 아니에요.”

    “알았어. 믿어 줄게.”

    한지우가 크게 웃었다. 그 웃는 모습에 이현은 마음을 놓았다.

    “선배도 힘드셨겠어요.”

    “뭐가?”

    “고작 저도 사람들이 떠보는 거에 스트레스 받는데 선배는 수십, 수백 명이 묻고 또 기사에도 나고 그러니까….”

    과거 파혼 이야기를 에둘러 말하는 이현을 보며 한지우가 너그럽게 웃었다.

    “아, 그거 짜증 나지.”

    “…….”

    “근데 현이가 물어보는 건 괜찮은데? 네가 남은 아니잖아.”

    조금 전에 남은 남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던 속마음을 한지우가 알 리 없다. 그러나 왜인지 마음을 속속들이 들킨 것 같아 이현은 얼른 대답을 못 했다.

    “들어가자.”

    꽁초를 발로 비벼 끄고 나서 한지우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고는 목덜미 뒤로 팔을 크게 둘러 어깨동무를 해 왔다.

    그에게 뒷덜미를 잡힌 기분으로 끌려가듯이 걷다 보니 맞닿은 목의 살결에 타인의 체온이 진득하게 달라붙어 왔다. 단단한 팔근육과 생각보다 거칠었던 남자 같은 손이 머릿속에 잔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현은 한때 그가 제 이상형이었다는 것을 잊으려고 노력했다. 이래서 멀리서만 보는 게 좋았는데… 의식하면 그때부터 어색해진다. 이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저가 유독 본능이 앞선 게이인 것을 저주했다.

    - 형!

    그때 어디선가 낯익은 외침이 들려왔다.

    이현은 한지우의 팔에 꿰인 채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지우의 발걸음 역시 자연스레 멈추었다.

    연습실 건물 뒤편에서 모습을 드러낸 것은 예상대로 석희재였다. 이쪽으로 빠른 걸음으로 달려오는 석희재의 뒤에 앙상블 배우가 하나 더 있었다.

    “형? 온다는 연락 없었잖아. 왜….”

    석희재는 달려오느라 헐떡헐떡한 숨소리로 물었다. 그 뒤에 엉겁결에 같이 달려서 따라오던 배우, 유나연도 숨을 고르며 인사를 했다.

    “피디님, 안녕하세요.”

    “아, 오랜만에 보네… 둘이 같이 점심 먹었어요?”

    사람이 넷이나 있는데 석희재가 워낙 저만 뚫어져라 봐서 이현은 민망해졌다. 정확히는 한지우와 저를 수없이 오가는 시선이 노골적이었다.

    이현은 난감해하면서 앞으로 나섰다. 석희재는 남들이 이현을 자신과 같은 시선으로 보다 못해 탐낼 거라는 망상이 심했다. 그가 대선배와 척지기를 원치 않았던 이현은 목에 감겼던 선배의 팔을 풀고 얼른 석희재의 등을 두들겨 돌려세웠다.

    “희재야. 먼저 들어가 있어.”

    “언제 왔어?”

    “얼마 안 됐어. 얼른.”

    “형은…?”

    “좀 이따 들어갈게. 선배랑 얘기 좀 하고.”

    돌아보는 석희재의 발걸음이 무거웠다. 발이 잘 떨어지지 않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한지우를 향해 어렵게 고개를 숙인 석희재의 뒤에서, 유나연도 민망하게 웃으며 다시 묵례했다.

    둘의 모습이 연습실 안쪽으로 자취를 감추고 얼마 지나지 않아 셔츠 재킷에 넣어 놓았던 핸드폰이 미친 듯이 진동해 댔다. 석희재가 틀림없었다.

    얘가 왜 이러나….

    이현은 종료 버튼을 한 번 눌러 진동을 멈추게 했다.

    “희재가 너 되게 따르지?”

    한지우가 불쑥 물었다.

    “아… 그렇죠. 쟤가 약간 저한테 집착해요. 예전부터 아는 사이여서. 오, 오늘은 제가 연습실 못 간다고 미리 말해 놨었는데 갑자기 와서 놀랐나 봐요.”

    없던 사실을 꾸며 말하면서 이현은 저가 듣기에도 말이 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생각보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다. 흥밋거리 이상으로 추궁하는 사람은 없다는 소리다. 그리고 대번에 남자와 남자가 그렇고 그런 사이라고 예측할 리가 만무했다.

    제 연기력은 젬병이지만 그래도 이현은 세간의 상식을 믿었다.

    “이야. 좋겠다. 둘이 친해서.”

    한지우가 제법 산뜻하게 상황을 정리해 줬다. 조금 전의 일을 털어 내는 듯한 농담 섞인 말투에 이현은 약간의 고마움까지 느꼈다.

    “저기, 선배… 그래서 드리는 말씀인데.”

    “응?”

    “희재가 낯도 많이 가리고 아직 이쪽을 잘 몰라요. 아직 친한 배우도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좀 잘 못 어울리고 어긋나는 일 하고 그러면 선배가 도와주세요.”

    “당연하지. 나 희재 좋아해.”

    “다행이다.”

    “또 현이가 부탁하니까 그냥 넘어갈 수가 없네.”

    이현은 안도감을 느끼며 ‘감사해요’라고 중얼거렸다. 한지우의 크고 거친 손이 머리카락을 쓱 쓰다듬었다. 꼭 막냇동생에게 그리하듯이.

    워낙 연예인으로 오래 살아온 사람이라 가끔 마음의 벽을 느낄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인 건 분명해 보였다. 이현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한지우와 처음 만났을 때의 좋은 기억이 각인처럼 박혀 그걸 지우고 싶지 않았다. 이현은 안도감을 느끼며 수선스러운 심장을 진정시켰다.

    ***

    타이밍이 안 맞았다. 이현은 다시 연습실에 돌아가기도 전에 호출을 받고 극장에 불려 갔다. 때문에 석희재와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모든 연습이 끝난 후였다.

    제법 성실한 연인으로서 다시 연습실에 못 들어가게 되었다고, 끝나고 보자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석희재로부터는 읽었다는 표식만 있고 답이 없었다. 그 때문에 이현은 석희재의 기분이 틀어졌다는 것을 짐작했다.

    나보고 어쩌라고! 이현은 황당함을 느꼈다. 어차피 연습실에 돌아가 봤자 잠깐 눈인사만 하고 떠났어야 했다. 남들 앞에서 좋은 티도 못 내니까 별거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끝나고 보면 되는 거 아닌가, 좋게좋게 생각했는데….

    어이가 없었지만 7살이나 연하니까 이해해 줘야 했다.

    그리고 이현은 어른답게 져 주자고 생각했다. 열한 시가 다된 늦은 밤. 피로한 몸을 끌고 도착한 남산 연습실 앞에는 밴 하나가 외로이 남아 있었다. 이현은 석희재의 밴 문을 열어 올라타며 물었다.

    “아, 뭐야. 표정 왜 그래애.”

    석희재를 보자마자 이현은 괜히 장난스럽게 말했다. 가죽 시트에 무릎을 대자마자 뒤에서 스르륵, 밴의 문이 닫혔다. 석희재는 고집스레 팔짱을 낀 채 창문을 보고 있었다.

    “희재야. 삐졌냐?”

    이현이 석희재의 흰 뺨을 손가락으로 쿡 찔렀을 때였다. 운전석에서 제삼자의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이 PD님. 사무실 갔다가 다시 오셨다면서요?”

    “아, 팀장님. 계셨어요?”

    이현은 화들짝 놀라며 앞을 바라보았다. 방금 전 자기 목소리가 지나치게 애교 있게 들리지는 않았을지 얼떨떨하게 점검해 봤다. 그러나 박 팀장은 그저 푸근한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약속 있다고 들어가지고요, 피디님 회사 쪽으로 제가 모시러 가려다가 길 엇갈릴까 봐 기다렸습니다.”

    “아, 잘하셨어요. 오늘 갑자기 제가 희재랑 얘기할 일이 좀 생겨서….”

    이현이 덧없는 변명을 하는 사이 시동을 건 차가 부드럽게 출발했다. 이현은 석희재의 옆자리에 털썩 앉아 옆을 흘끔 바라보았다.

    “피곤해?”

    “…….”

    “연습 힘들었지? 오늘 빡셌다더라. 저기… 우리 술 마시지 말고 그… 그냥 쉴까?”

    “나 집에 가라는 소리야?”

    석희재가 나직하게 말했다. 내리깐 눈에서 원망이 비쳤다.

    이현은 백미러를 흘끔 보았다. 박 팀장이 이 대화에 귀를 쫑긋 기울이는 것이 보였다. 물론 그는 신인 배우가 피디에게 말실수하지는 않을지 듣고 있는 것일 테다. 그래도 이현은 전전긍긍했다.

    “그게 아니고….”

    애초에 석희재가 설명해 두었는지 밴은 이현의 집 근처로 향했다. 시간이 늦어 남산부터 북촌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침묵의 20여 분간, 이현은 숨이 모자라는 듯한 기분에 시달렸다.

    차가 커서 집 바로 앞 골목까지 들어가지 못했기에 둘은 미리 내렸다. 박 팀장은 석희재를 향해 ‘내일 오전 치과, 피부과 잊지 말라’고 한 마디 당부하고는 도로 차를 몰고 사라졌다.

    둘만 남으면 석희재가 입을 열까 했는데 그는 여전히 대화를 거부하고 있었다. 아무도 없는 골목 안에서 주변을 쭈뼛 둘러본 이현은 석희재의 손을 스치듯 슬쩍 잡았다. 그 순간 석희재가 걸음을 뚝 멈추며 하늘을 향해 고개를 꺾었다. 한숨도 흘러나왔다.

    그 사이 이현은 번개같이 몸을 기울였다. 석희재의 턱에 스치듯 쪽 소리 나는 짧은 입맞춤을 했다. 놀란 석희재는 골목 주변을 급히 살피느라 한 박자 늦게 이현을 보았다. 이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제 그만 삐져.”

    “…….”

    “아이고, 연하 데리고 살기 힘들다.”

    이현의 중얼거림에 석희재는 진짜로 예민해졌다. 웬만해서는 미동 없는 눈썹이 꿈틀했다. 무어라 항변하고 싶어 하는 표정이 다이내믹해 이현은 그것을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형은…!”

    홱 돌아서며 감정을 터뜨리자 이현은 도리어 팔짱을 척 끼고 되물었다.

    “그래. 왜 삐졌는지 들어나 보자.”

    “…형은.”

    이현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저는 잘못 없다는 당당한 태도.

    석희재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한 번 크게 쓸어내렸다.

    “…형은 몰라.”

    “뭐를?”

    “내 마음.”

    진심으로 한 말인데 이현은 순정만화 대사 같다며 크게 웃었다. 그가 이 갈등을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아 싸움으로 번지지 않는 것을 다행스럽게 여겨야 하는지, 아니면 속상해해야 하는지 알 수 없어서 석희재는 침묵했다.

    아까 낮에 먼저 쫓기듯 연습실로 들어간 직후, 석희재는 이현이 언제 들어올까 이제나저제나 하며 기다려야 했다. 그러나 그는 장장 세 시간 동안 감감무소식이었다. 한지우랑 단둘이 있다는 걸 알고 있어서 석희재는 속이 까맣게 탔다.

    그리고 일찌감치 이현을 사무실로 떠나보내고도 바깥에서 잔뜩 게으름을 피운 한지우가 혼자 연습실에 돌아오기 전까지 석희재는 온갖 망상을 해야 했다. 속이 갑갑해 빈속에 찬물을 얼마나 부어 댔는지 모른다.

    설상가상으로 돌아온 한지우는 석희재를 긁는 소리를 했다.

    ‘현이 다시 회사 갔어.’

    ‘…….’

    ‘아니, 기다리는 것 같길래.’

    씩 웃은 한지우는 이내 석희재가 듣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해 댔다.

    ‘아, 이 PD 애인 없다네?’

    ‘…….’

    ‘넌 알지? 진짜인지, 아닌지.’

    그의 물음에 석희재는 힘들게 고개를 저었다. ‘저도 몰라요.’ 하고.

    현이 연애 사실을 밝히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걸 알지만 한지우에게만은 예외였으면 했다. 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그가 질척거리는 걸 보고 싶지 않았다.

    자연히 원망은 모두에게 공평한 침묵을 지키는 현에게로 향했다.

    하지만 또 이렇게 곁에서 화를 풀어 주려고 노력하는 걸 보면 사랑스럽다. 어떻게 하면 가장 현명한 대처가 될지 저도 몰라서 석희재는 갑갑해졌다. 이럴 때 그가 좋아하는 ‘연상’답게 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게다가 아무리 노력한들 그에게는 ‘역시 연하’ 취급을 받는다. 복장이 터졌다.

    “형, 나랑 커플링 해.”

    떼쓰는 듯한 요구가 입에서 튀어나왔다. 이현이 놀란 얼굴을 한다. 또 애 취급을 받는다고 해도 이것만은 관철하고 싶었다.

    “커플링?”

    “응.”

    “요즘 애들도 그런 거에 의미부여를 하나? 안 그러지 않아? 희한하네.”

    현이 은근슬쩍 화제를 돌리려 했다. 석희재는 다시 힘주어 강조해 말했다.

    “나 형이랑 커플링 맞추고 싶어.”

    “안 되지.”

    이현은 너무나 쉽게 내뱉었다. 석희재의 진지한 감정을 가볍게 웃으며 넘기려 하던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은 태도였다. 그러고는 미소를 지은 채로 등을 돌렸다. 잡았던 손도 놓고서는 골목 끝의 제집으로 한 걸음, 발을 뗐다.

    석희재는 그가 제 말을 깔끔히 무시하고는 등을 보였다는 사실에 약한 충격을 받았다.

    방금 전까지 무척이나 말랑말랑하게 굴던 사람이 표정도 바꾸지 않고 제안을 거절한다. 약간의 머뭇거림도 없이. 무언가 심상치 않은 기색을 느낀 석희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도 모르고 돌이 되었다.

    “왜… 왜 안 돼?”

    얼른 몇 걸음을 따라가서 붙잡았다. 이번에 현은 눈도 마주쳐 주지 않았다.

    “이 얘기는 그만하자.”

    “형….”

    “아이… 피곤하게 굴지 말고.”

    피곤하다는 말이 심장을 찔러 석희재는 다시 발이 멈추었다. 이현은 석희재의 상태가 어떤지는 괘념치 않는다는 듯 등을 보이며 먼저 현관으로 성큼 다가갔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는 이현의 등을 보면서 석희재는 기시감을 느꼈다. 등줄기가 차가워지는 감각이었다.

    저의 애인은 생각보다 너그러웠다. 많이 노력했고, 애정 표현도 후했다. 게다가 웬만해서는 화를 내지 않았다. 그 모든 게 사랑의 일부라고 생각해 왔다.

    그러나 반대로 그는 저를 설득하려고 하지도 않는다. 서로를 칭하는 호칭은 바뀌었지만 관계의 모양은 전혀 바뀌지 않았다. 처음부터 너와 나는 여기에 각자의 공간에 서 있어야 한다는 듯이 선을 그어 놓았다.

    그런 그의 앞에서 선을 넘고자 하는 제 요구는 그저 고집일 뿐이다. 제 마음이 얼마나 간절한지는 문제도 아닌 것이다.

    문이 닫히기 직전에야 이현은 석희재가 따라오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챘다. 이현이 손으로 안에서 문을 받친 채 뒤를 돌았다. 열린 문 사이로 뒤를 돌아본 날렵한 콧대마저 냉정해 보였다.

    “희재야.”

    “…….”

    “화 풀리면 들어와?”

    - 탁.

    그리고 문이 닫혔다. 삐삐삐, 소리와 도어록이 잠기는 소리.

    석희재는 멍하니 문을 바라보았다. 이현의 등은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네 고집, 네가 떼쓰는 것, 전부 다 철없는 요구에 불과하다고. 그러고는 그런 감정적인 말은 듣지 않을 테니 알아서 어른처럼 화를 삭이고 오라는 냉정한 명령을 내렸다.

    석희재는 고개를 숙였다. 한숨이 파르르 떨리며 쏟아졌다.

    골목길에 덩그러니 남겨진 채로 석희재는 잠시간 이현의 말을 따르려 노력했다. 느린 심호흡을 하며 감정을 다스렸다. 화를 가라앉혔다. 그러나 애초에 화를 제대로 내지도 않았는데 무엇을 가라앉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직 질투심도 가라앉히지 못했다. 머리가 핑 도는 것 같았다.

    이현의 요구는… 그가 원하는 것은.

    예전처럼 편한 사이.

    번거로운 요구는 일절 하지도 않고, 서로를 속박하지도 않는 사이.

    그렇게 감정적으로 질척거리지 않는 사이….

    애인이 되기 전, 자신이 약속한 것들이기도 했다.

    석희재는 뚜벅뚜벅 걸어 현관 앞에 섰다. 도어록의 비밀번호를 누르고 문을 열었다. 현은 막 세수를 마친 얼굴로 욕실에서 나왔다. 얼굴에는 약한 반가움이 드리워 있었다.

    그 앞에서 석희재는 불쑥 말했다.

    “그럼 난… 형이 다른 놈이랑 붙어서 썸이라도 타면 계속 그거 보고만 있어야 돼? 속만 태우면서?”

    이현의 눈이 가라앉았다. 조금 전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 기력이 빠진 얼굴이었다. 그 지친 얼굴만 봐도 심장이 뜨끔했다.

    “그런 일 없어.”

    “한지우가….”

    “지우 선배.”

    “한지우 선배랑 아까 붙어 있었어. 그놈이 형을 꽉 안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이현 쪽이 한숨을 쉬었다. 털썩 소파에 앉는 순간 석희재의 마음 한구석도 풀썩 무너졌다.

    “…정말 그게 다야? 그다음에도 거기서 끝날 것 같아?”

    최악이다.

    이제 약간의 미소도 없는 이현의 얼굴을 보며 석희재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현은 석희재를 보지 않은 채로 정면 벽에 시선을 고정했다. 그 무표정한 눈을 보며 석희재는 방금 말을 후회했다.

    “네가 나 못 믿는 거 이해해. 내가 워낙에 헤펐냐.”

    “…….”

    “그런데 내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했지? 한두 번 했으면… 이제 그만하고 싶은데.”

    현은 그대로 얼굴을 숙였다. 지친 한숨을 보란 듯이 쉬며, 손을 머리카락 사이에 찔러 넣은 채로 제 열 오르는 귀를 주물러 댔다.

    “너랑 싸우기 싫어. 난 이런 분위기 진짜 싫어.”

    “…….”

    “희재야. 네가 그러지 않았어? 우리 예전하고 크게 변하는 거 없을 거라고. 사귀기까지 하는데 우리가 왜 화를 내야 돼. 그냥 금방 풀고 넘어가면 안 돼? 내가 진짜 잘못한 거면 사과할게.”

    “내 말은….”

    “근데 내가 어떻게 더 노력해야 돼? 내가 선배랑 단둘이 남았을 때 선배한테 뭐라고 했는지는 알아? 너 좀 잘 챙겨 달라고 부탁했어. 그리고 바로 회사 갔다. 네가 상상하는 그런 일 없었어. 아무 데나 막 흘리고 그러지 않는다고!”

    “…….”

    “내가 뭘 잘못했는지 설명해 봐.”

    속사포처럼 터져 나온 현의 말에, 석희재는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이현의 잘못은….

    없다.

    그는 자신을 ‘덜’ 좋아할 뿐이다.

    ‘사귄다’라는 말의 환상에 빠져 자꾸만 착각하게 된다. 우리 둘은 아마도 서로에게 같은 것을 바랄 거라고. 그렇게 언젠가 같은 궤도에 오를 수 있을 거라고.

    저를 올려다보는 현의 차가운 눈에 심장이 저몄다. 하고 싶은 말을 전부 삼키고 석희재는 한숨 소리도 죽였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전부 다 할 수 있지만 자신은 아니다. 애초에 동등하지 않았으니까.

    그걸 다 알고 시작했으니까….

    “형은 잘못… 한 거 없어.”

    주먹을 말아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석희재는 입술을 씹었다.

    “내가 모순적이었어. 맞아… 형은 노력했어. 받기만 하면 된다고 말하고는, 해 달라고 졸랐네.”

    “…….”

    “내 마음이 생각처럼 안 돼서.”

    거기까지 말하고 석희재는 기가 죽은 채로 이현의 앞으로 다가갔다. 무얼 하려나, 하는 표정으로 굳어서 저를 올려다보는 이현의 앞에 천천히 무릎 꿇었다. 눈을 맞추고, 현의 이마에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한 번 손으로 넘겨주었다. 부드러운 손길에 현의 눈도 누그러졌다. 석희재는 그의 무릎에 천천히 머리를 기댔다. 그러고는 그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저항 없이 안겨 오는 마른 몸에 그저 감사해야 했다. 이렇게 안고 싶어도 안지 못할 때가 있었다. 언제나 그 절망적인 때를 생각하고 또 생각해야 한다. 그때에 비해서 나는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비교하면서.

    “형….”

    “응.”

    석희재는 갈라져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이 메었지만 현의 다리에 입술을 파묻고 웅얼거리는 바람에 그런 기색이 지워졌으니 괜찮다.

    “…그래도 깎아내리는 말은 안 했으면 좋겠어.”

    “…….”

    “헤펐다느니… 그런 소리 들으면, 마음이 안 좋아. 형은 3년 넘게 나만 만났잖아. 내가 다 아는데… 왜 그렇게 아픈 소릴 해.”

    한참 후, 현의 손이 석희재의 등에 내려와 천천히 어루만졌다. 위로해 주는 손길이었다.

    동정마저 달콤하다고, 석희재는 생각했다.

    사귀는 걸로 모든 걸 다 얻었다고 생각했던 건 제 착각이다.

    기본적으로 그의 감정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래도 상관없다고 말한 건 저였다. 따져 물을 수도 없다.

    ‘화가 났구나?

    근데 못 냈구나.’

    유나연의 말이 귀에서 맴돌았다. 당연하지, 현에게 화를 낼 수 있을 리가 없다. 그건 제 마음의 문제이기도 했지만 둘 사이의 무언의 법칙이니까. 그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어디까지나 그가 허락하는 선 안에서만 감정을 표현해야 했다.

    왜냐하면 이현에게 이것은 ‘연애 놀이’니까. 저만큼 무겁고 간절한 것이 아닌, 피로감만 느끼면 언제든 가볍게 발을 뺄 수 있는 놀이.

    처음부터 유리창에는 작은 점이 달라붙어 있었다. 날벌레이거나, 날아와 붙은 민들레 홀씨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손으로 날려 떼어 내려고 다가가 가까이서 보니 그건 창에 단단히 박힌 총알이었다. 작은 균열이 총알로부터 복잡한 그림을 그리며 퍼져 나가고 있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 잘못하다가는 한순간에 파삭 깨져 버릴까 봐, 석희재는 거기에 섣불리 손도 대지 못했다.

    그럼 나는 계속 창 너머로만 그를 바라봐야 하나?

    아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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