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시츠프로브1)
석희재의 성급한 고백으로부터 약 네 시간 후.
이현은 연습실 한 귀퉁이 앉아 연출에게 인사를 건네고 있는 석희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멀리 떨어져 있는데도 석희재는 뒷모습 실루엣만으로도 독보적으로 눈에 띄었다. 만약 제가 석희재의 얼굴을 모르는, 지나치는 행인 1이었더라도 스쳐 지나가는 그의 뒷모습만 보고 무조건 잘생겼으리라고 확신했을 것이다.
희재네 부모님은 아셨을까. 예쁘게 낳아 놓은 아들이 키까지 저만치 크리라는 걸.
저런 자식 있으면 안 먹어도 배부르겠다…. 이현은 상념에 젖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건 연출도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만사가 건조한 그가 석희재를 붙잡고 드물게 말이 많았다. 그럴 만도 한 것이, 아파서 병원에 입원했다는 공지가 뜬 직후였다. 그런데도 바로 다음 날 참관을 하러 왔다. 제 연습 일도 아닌 날. 기특하고 예뻐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애정이 눈에 묻어났다.
이현은 알고 있었다. 연출도 저만큼이나 얼굴을 밝힌다는 걸.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자신은 잘생긴 남자를 보면 자고 싶어 하고, 연출은 무대 위에 세운다는 점일까. 속되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제 목적과 달리 연출은 심미안을 예술로 승화시킨다. 그런 점에서 그는 존경받아 마땅했다.
아무튼 연출은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무대 위를 장식할 그 어떤 요소보다도 석희재가 가장 아름다운 소품이 되리라는 걸. 층층이 공들여 쌓아 올린 파르페 꼭대기에 올린 새빨간 체리처럼 말이다.
그나저나… 쟤가 연기를 하나?
아직 한 번도 못 봤는데.
따로 보컬 수업에 들어가 있는 것도 아니고… 넘버는 어떻게 소화하는 거지.
석희재는 이현이 아는 이들 중 가장 정적인 사람이었다. 도무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연습실에는 성실하게 꼬박꼬박 오는데 언제까지 지금처럼 구경만 할 건지도 의문이었다. 연출은 석희재를 정말로 얼굴만 팔아먹는 역으로 쓸 건가, 걱정도 됐다. 무대 위는 장난이 아니다. 그저 CF 스타로만 남는다면야 상관없지만 아무튼 실력을 갖춰야 했다.
마침 그때, 겨우 연출과 떨어진 석희재가 이쪽을 한번 바라보았다. 집채만 한 파란색 의상 박스들 사이에 앉아 있던 이현은 고개만 한번 까딱했다. 먼저 가 있으라는 뜻이었다. 자투리 시간을 이용해 남은 배우들의 의상 피팅을 진행하려면 아직 한 시간은 더 남았다. 석희재는 이현이 눈에 보이는 곳에 있고 싶어 했지만 그러지 말라고 한 건 저였다. 어제까지 환자였으니 조금이라도 쉬는 게 좋을 것이다.
미련을 진득하게 남기며 석희재가 멀어진 직후 이현은 일에 몰두했다. 대부분 마무리를 하고 저녁 도시락이 들어올 때쯤 한지우가 이현을 붙잡았다.
“현아. 저녁 먹고 가.”
“전 괜찮습니다.”
“왜? 밥은 먹고 다녀야지.”
“사무실 빨리 들어가 봐야 돼서요.”
그러자 한지우는 가져가서 먹으라며 이현의 손에 도시락 하나를 들려 주었다. 감사합니다, 하고 중얼거리며 꾸벅 고개를 숙이면서 이현은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에 혼자 푸시시 웃었다. 제작사가 산 돈으로 배우들에게 밥을 주는데, 그걸 도로 주면서 배우가 생색을 낸다?
뭔가 이상하지만 아무튼 이것도 호의였다. 웃고 있는 이현의 얼굴을 한지우 역시 웃는 낯으로 샅샅이 훑었다.
“잘 먹을게요. 선배.”
“응, 밥은 챙겨 먹어야지. 잘 들어가. 나중에 술 한번 먹자.”
예, 하고 다시 한번 고개를 꾸벅 숙였다.
연습실에서 나오자마자 아주 가까운 자리에 대놓은 밴이 곧바로 보였다. 까맣게 선팅된 차 안은 보이지 않았지만 곧바로 석희재가 문을 열고 나왔다. 안쪽에서는 이제나저제나 저를 기다리고 있던 모양이다.
“다시 타. 들어가.”
“왜? 이제 가는 거 아니야?”
“맞아. 근데 난 다시 회사로… 박 팀장님. 안녕하세요.”
운전석에서 어제도 본 박 팀장이 따라 내렸다. 원래 이렇게 자주 보는 사이가 아니었는데 요즘 석희재 덕분에 자주 본다.
“피디님, 희재랑 저녁 드신다면서요. 안 그래도 저희가 한번 대접하려고 했는데 희재가 부득불 저는 필요 없다고 해서 법카만 줬습니다.”
“아, 그러셨어요? 팀장님도 같이 가면 좋은데.”
인사치레일 뿐인데 석희재가 눈을 부릅떴다. 빈말이라도 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이었다.
다행히 박 팀장은 사람 좋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닙니다. 저도 일찍 퇴근하면 좋고요.”
이현은 석희재를 돌아보며 금시초문의 사실을 물었다.
“우리가 저녁을 먹기로 했구나…?”
석희재는 본격적인 연인 흉내를 내기로 마음먹은 모양이었다. 박 팀장을 흘끔 쳐다본 석희재가 말을 높였다.
“왜 다시 회사 가세요? 오늘은 현장에서 바로 퇴근하신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렇긴 한데 차가 회사 차라서 가져다 놔야 돼.”
“그럼 그거 같이 타고 가요.”
“왜 굳이…?”
회사 차는 좁고 더럽다. 갖은 살림살이로 가득한 데다 별로 쾌적하지 못하다. 내부 좌석을 싹 걷어 내고 리무진처럼 개조한 신형 밴에 비할 바 아니었다. 만약 지금 제가 회사 차만 끌고 오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저 밴에 한 번이라도 더 얻어 타 보고 싶어서 안달이었을 텐데.
이현은 굳이 불편을 감수하는 석희재가 이해 안 됐다.
“차라리 어디서 만날지 정하고 희재 너는 거기까지 밴 타고 와. 그게 나을 것 같은데.”
“같이 가요.”
“차 회사에 두고 나면 또 택시 타야 하는데?”
“상관없어요.”
“저 차 좁고 짐도 많고 안에 더러워.”
“괜찮아요.”
“주차도 너무 멀리 했는데….”
결국 이현이 졌다. 이유 없는 고집에 이길 수가 없었다.
박 팀장은 밴을 타고 홀로 떠났고, 두 사람은 내리막길을 한참 걸어 이현의 회사 차에 올랐다. 차의 허름한 외양을 보고도 석희재는 별생각이 없어 보였다. 석희재가 올라타 앉은 조수석 안전벨트의 올이 풀려 있는 걸 보고 괜히 안절부절못한 쪽은 이현이었다.
“그럼 일단 회사로 간다.”
이현은 부드럽게 주차된 차를 빼냈다. 음악이라도 틀면 좋겠지만 이 연식 오래된 차에서는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그렇게 한참 운전을 하던 중.
“희재야.”
아까부터 옆얼굴이 따갑도록 떨어지는 시선이 신경 쓰이던 이현은 노란불에 맞추어 브레이크를 밟았다. 횡단보도 앞에 차가 섰다.
“왜 자꾸 그렇게 봐?”
눈이 마주치자마자 석희재가 뜨끔 하면서 고개를 정면으로 슬그머니 돌렸다. 그 행동에서 사뭇 당황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아닌 척은 또 왜 해?”
이현이 웃으며 가볍게 중얼거리자 석희재는 이번에는 큰 손으로 제 입술과 턱 반쯤을 가렸다. 뭔가 숨기고 싶다는 뜻이었다. 입술을 덮은 손 위로 드러난 옆얼굴의 선이 새삼 기가 막혔다.
저렇게 생겼으면서 다른 사람 얼굴에 넋을 놓는 게 신기하다.
이현은 멋쩍게 생각하며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사람들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신호가 바뀌고 다시 차를 출발시킨 후에야, 옆에서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운전하는 거 신기해서.”
“…….”
“멋있어.”
기대하지 않았던 솔직한 고백에 도리어 당황한 것은 이쪽이다. 이현은 입술 안쪽을 살짝 깨물었다. 혹시 놀리고 있는 건데 제가 잘못 알아들었나 싶기도 했다. 현재 타고 있는 차는 이현이 만약 돈을 주고 진짜 제 차를 사게 된다면 절대로 고르지 않을 촌스러운 은색이었다. 뭐가 멋있다는 건지 모를 일이다.
“운전하는 거 처음 봐.”
“아… 그랬나?”
“응. 궁금했어.”
이현은 할 말이 없어져 정면만 바라보았다.
석희재가 제 궁궐 같은 밴을 두고 굳이 제가 운전하는 차에 오른 이유가 그것인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차에 오르기 전에 벌였던 짧은 실랑이가 떠올랐다.
“운전하는 거 보려고 굳이 이 차 탔어?”
“…….”
“이게 뭐 별거라고….”
이현은 머쓱하게 말하며 헛기침을 했다. ‘앞으로 실컷 봐라.’라고 진짜 속마음을 덧붙일까 싶었지만, 왠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무언가 근질거려 도무지 말이 나오지 않았다. 다시금 느끼지만 저는 연애의 달콤한 기분을 즐기는 데에는 정말로 소질이 없었다.
빈속에 커피를 들이부은 느낌과도 비슷했다. 아마도 연애 초기의 설렘으로 추정되나, 이현은 불편하기만 했다. 다른 이들은 이런 걸 정말 즐기나? 알 수 없다.
퇴근 시간과 겹쳐 남산 근처 정체가 무척 심했다. 빨간 브레이크등이 시야를 어지러이 장식했고, 막 해가 지는 새파란 청남 빛 하늘 위로 희미한 주홍빛 석양이 구름의 윤곽을 그리고 있었다.
“꼭 멀리 있는 경치라서 못 보는 건 아니거든. 아주 가까이 있는데도 절대로 못 보는 경치가 있어. 나한테는 형이 그래.”
“…….”
“그러니까 계속 봐도 되지?”
이현은 빨리 대답하지 못했다. 제게는 아무 의미도 없는 일상적인 행위가 석희재에게는 무척 보고 싶었던 광경이다. 순간적으로 서로 가진 감정의 무게 차가 느껴졌다.
이현은 차창을 열었다. 약간 열린 창틈으로 밤공기와 함께 아카시아 꽃향기가 훅 끼쳤다. 변한 계절의 색이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운전을 안 해 봐서 모르는데.”
“응.”
“핸들 잡은 손 만져 봐도 돼?”
“…….”
“그래도 사고 안 나?”
이번에야말로 진짜 말문이 막혔다. 귀가 확 뜨거워졌다. 이제 석희재를 바라보지 못하는 건 이현 쪽이었다. 아마도 녀석의 목소리가 지나치게 진지하기 때문이라고, 이현은 생각했다. 이현은 정말로 연애가 가져다주는 달콤한 감각에 면역이 없었다. 옷자락 안에 숨은 팔뚝에는 두드러기가 나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현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퍽 가라앉은 목소리가 나왔다.
“운전은 한 손으로만 할 수도 있어….”
그리고 이현은 더 자세한 설명 없이 오른팔을 좌석 사이로 내렸다. 왼손으로는 핸들을 불안하지 않게 단단히 잡았다.
이윽고 석희재의 긴 손가락이 이현의 손을 감아 왔다. 약간 촉촉한 이현의 손바닥과 달리 석희재의 손은 따뜻하고 건조했다. 손 전체를 쥐듯이 감더니 손목을 검지와 엄지로 천천히 어루만진다. 손바닥을 천천히 쓸고 나서야 사이사이 손가락을 끼웠다.
애무 같은 몸짓에도 면역이 없다. 이현은 또 한 번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단단히 얽은 손과 달리 이현은 정면을, 석희재는 반대편 창가를 응시하고 있었다. 손바닥 사이에 점점 땀이 찼다. 핸들을 잡은 왼손도 함께 더워지는 것 같았다. 상대방의 손에 땀이 차면 잡고 있기 싫을 것 같은데도 석희재는 단단히 깍지 낀 손을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놓지 않았다.
지고지순한 애정 표현이다.
손을 이 지경으로 애틋하게 잡는 사람은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현은 애무에 가까운 손짓에 깊게 감명받았다.
그러나 지고지순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도 잠시. 어두컴컴한 주차장에 도착해 차를 세우고 시동을 완전히 끄자마자 어둠 속에서 석희재가 잡은 손을 강하게 당겼다. 속절없이 끌려간 어깨를 붙잡혀 숨 막힐 듯 깊은 키스를 당했다. 키스를 당하리라고 생각지도 못한 데다 호흡이 모조리 먹혀 숨이 찼다.
이번 것은 밴에서 꽃다발을 함께 씹은 서툰 입맞춤과는 완전히 달랐다. 입술이 부풀 때까지 아프게 씹혔다. 뺨을 붙잡힌 채 혀가 거세게 빨아당겼다. 성급한 키스였다.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헐떡이는 숨소리마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허억… 잠깐, 너 급해.”
“운전 중이라 참은 거야.”
“아….”
잠깐 입술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다시 뒷덜미가 잡혀 당겨졌다. ‘형 얼굴 보면 키스하고 싶을까 봐 보지도 못했어.’ 입술을 맞댄 채로 속삭였다.
가쁜 호흡과 함께 끝을 모르고 내달리던 흥분을 겨우 먼저 가라앉힌 쪽은 이현이었다. 목덜미를 어루만지던 석희재의 손이 옷자락 안으로 파고들 때 벼락같이 정신이 들었다. 회사 차에서 이러고 싶지 않았다.
“너… 손만 잡는다더니.”
이현은 제 뺨을 감싼 석희재의 손을 어루만지며 살짝 노려보았다. 긴 눈이 가늘게 뜨이며 웃는 듯한 묘한 인상을 남겼다. 석희재는 당장이라도 덮치고 싶은 애인의 얼굴을 보면서 완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갈증이 났다.
“그런 말은 한 적 없는데.”
“기다려. 퇴근하고 올 테니까.”
옷자락을 탁, 털어 낸 이현이 깔끔하게 운전석을 빠져나갔다.
아직도 쿵쾅대는 심장과 함께 넋을 놓은 석희재는 운전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키스의 잔열만을 선명하게 남기고 이현은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졌다. 인지하기 무섭게 약간의 허무함이 찾아왔다.
그러나 잠시 뒤 조수석 창문을 가볍게 톡톡 치는 소리가 났다. 고개를 돌리자 차 뒤로 돌아 조수석 문 옆으로 다가온 이현이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멍하니 올려다보자 손수 문을 열어 준다.
“뭐 해? 안 내리고.”
무심한 에스코트였다. 석희재는 그 별것 아닌 모습에 다시 한번 단단히 반해 버렸다.
이현은 차 키를 반납하고 오겠다고 회사 건물로 올라갔다. 오후 8시. 사무실이 위치한 건물의 모든 층은 여전히 불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5분 후. 경비실 앞을 지나치며 고개를 꾸벅 숙인 이현이 유리문을 밀고 밖으로 나왔다. 기다리던 석희재를 향해 씩 웃었다. 고작 5분 만의 재회인데 가슴이 뛰었다.
이현이 오후 8시쯤 퇴근하는 날은 일 년에 한두 번 될까 말까다. 혹시 저 때문에 오늘 무리해서 이른 퇴근을 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진짜로 그런 거라면 굉장히 행복하겠다. 석희재는 행복한 착각에 머무르고 싶어 웬일로 일찍 퇴근했냐고 굳이 묻지 않기로 마음을 정했다.
평일 8시면 대학로 대부분의 극장에서 모든 공연이 시작된다. 두 사람은 묘하게 잠잠해진 거리를 빠져나갔다. 식당 안쪽은 한 차례 몰려 들어왔다가 공연 시작에 맞춰 빠져나간 자리를 치우는 알바생들로 분주해 보였다. 지나치는 카페 역시 빈자리가 많았다.
대로변으로 나왔지만 택시가 잘 잡히지 않았다.
“택시 잡힐 때까지 일단 걸을까.”
이현의 집까지는 택시를 타면 7분, 자전거로는 20분, 걸어서는 35분이 걸린다. 걸어가는 길은 창경궁과 종묘 사이 돌담길로 인적이 드물고 꽤나 운치가 있었다. 술에 취해 떡이 된 이현을 업은 채로 오가던 그 길이다.
석희재는 이대로 함께 집까지 걸어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했다.
이현은 가방도 없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인도를 걸었다. 두 사람 다 택시를 잡는 데는 별로 의지가 없었다. 이현은 매번 한발 늦게 저들 앞을 지나치는 택시를 보고 ‘저게 빈 차였나?’ 중얼거렸고, 석희재는 같이 걷는 것이 좋아서 택시를 잡으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이화사거리에서 아트센터 건물을 끼고 오른쪽으로 돌았다. 인적 드문 도보를 걷다 보면 울창한 플라타너스가 자란 궁의 돌담길이 나온다. 왼쪽 종묘는 낮은 산으로 가려져 있어 숲길을 걷는 느낌도 났다.
둘은 깨진 보도블록 틈으로 풀과 이끼가 자란 오래된 도보를 걸었다. 차들은 빠른 속도로 곁을 스쳐 지나갔다. 주황색 가로등 빛이 나뭇잎에 가려져 밤 그늘을 만들었다. 야맹증 덕에 다른 이들보다 주변을 훨씬 어둡게 보는 석희재는 착각에 휩싸였다. 아무도 보지 못할 거라고.
그래서 조심스레 가까이 붙어 걸었다. 흔들리는 손등을 이현의 손에 스쳤다. 세 번 닿았을 때도 이현이 별말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손을 감싸 쥐었다. 거기부터 동맥이 펌프질을 하는 것 같았다.
창덕궁 돈화문에 다다를 때까지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었다.
나무 그림자가 거두어지고 탁 트인 정경이 눈앞에 펼쳐졌을 때에야 석희재는 조심스럽게 손을 거두었다. 그러고는 횡단보도의 신호가 바뀌기를 기다리고 있는 이현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현은 손을 잡은 적도 없는 사람처럼 태연했다. 시선을 느낀 그가 고개를 들고 손가락으로 편의점을 가리켰다.
“들렀다 가자.”
편의점에 들어서자마자 석희재는 이현이 저녁을 먹지 않은 것이 생각이 나서 도시락 코너로 갔다. 먹을 것을 고르다 보니 자신도 허기가 졌다.
양손에 이것저것 고르고 진열대 틈바구니에 있을 이현을 찾아 나섰다. 그런데 그는 콘돔 코너 앞에 고심하는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석희재를 흘끔 보더니 말도 없이 콘돔만 계산하고 유유히 나갔다.
“비닐봉지에 담아 드릴까요?”
판매대 앞에 먹을 것을 종류별로 와르르 쏟아 놓는 석희재를 보고 계산원이 물었다. 석희재는 ‘네.’ 하고 대답하며 문밖으로 나가는 이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이현은 그새 담배를 빼어 물고 있었다.
물론 남자 둘이 편의점에 나란히 들어와서 대화를 나누며 콘돔을 사는 건 오해를 사기 쉬웠다. 이현이 저를 모른 척하는 이유를 알면서도 석희재는 헛헛한 마음에 시달렸다.
석희재가 계산을 마치고 나오는 것을 본 이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담배를 껐다. 그러고는 몇 걸음 앞서 걸었다. 뒤를 조용히 따라가는 석희재도 굳이 그 간격을 좁히지 않았다.
다시 골목 안으로 한 번 우회한 후, 인적이 없을 때에야 이현이 뒤를 돌아보았다. 습관처럼 미소 짓는다.
도어록의 비밀번호가 눌리고 이현이 문을 열었다. 그가 먼저 현관에 들어서고 신을 다 벗기도 전에 석희재는 좁은 현관에 들어섰다. 천천히 저항을 받으며 닫히는 문을 강제로 당겨 닫았다. 서둘러 신을 벗는 이현을 돌려세우고 성급히 입술을 찾았다. 문이 완전히 닫히고 삑삑, 찰칵. 도어록이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하아, 으음….”
부드러운 입술을 잘근 씹어 무니 이현의 눈이 스르르 감겼다. 촉촉한 안은 언제나 그렇듯이 저항 없이 벌어졌다.
몸의 교류를 전제로만 하면 이현은 애정 표현에 쉽게 너그러워졌다. 허락 없이 키스하면 왜 그러냐는 소리를 듣지만 ‘하자고.’ 그렇게 유혹하면 의심 없이 몸을 내주었다.
그건 석희재가 혹독한 짝사랑을 3년이나 버티게 만든 것이기도 했다. 이현이 원나잇으로 애정 관계의 유사함을 느끼는 것처럼 석희재는 이런 이현의 습관을 이용해 그간의 짝사랑을 혼자 하는 연애로 기꺼이 착각해 왔다.
전하고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어.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게. 형은 책임도, 의무도 질 필요 없어.
그냥 예전으로 돌아가자.
그렇게 이현을 안심시켜 놓고, 정작 변하지 않을 관계에 마음을 또 시달리게 둔다.
석희재는 스스로를 비웃어 줬다. 배부른 소리다.
“형. 같이 씻을까?”
“너도 알지만 우리 집 욕실은 좁아.”
“상관없어.”
좁으면 그만큼 달라붙어 있을 수 있으니까.
그러나 본심을 숨기는데 익숙한 석희재는 습관처럼 뒷말을 삼켰다.
석희재는 제 앞에서 주저 없이 옷가지를 벗어 내는 이현을 바라보았다. 이현은 가만히 앉아 있는 석희재가 왜 그러는지 조금의 의아함도 갖지 않고 그저 장난스러운 얼굴로 석희재의 옷을 가슴까지 들어 올렸다.
“와….”
그러고는 공연을 앞두어 몸을 다듬는다고 꾸준하게 운동한 결과를 보고는 감탄했다. 특히 그새 보기 좋게 자리잡힌 대흉근을 보면서 대놓고 군침을 삼켰다. 제 벗은 몸을 보고 눈빛이 변하는 이현을 보면서 석희재는 픽 웃었다.
“이런 몸 좋아하는 줄 알면 진즉 할걸. 더 키워?”
“아니, 지금이 딱 좋아.”
이현은 노골적인 눈빛을 거두지 못하고 가슴팍과 복부를 훑었다. 석희재는 더 자세히 보라고 아예 옷을 벗어 던졌다. 팔을 들어 목덜미 위로 니트를 벗어 빼내는 느린 동작에 보이지 않던 근육이 드러났다.
이현이 저를 보는 눈은 흡사 포르노라도 관람하는 듯했다. 때문에 석희재도 고개를 숙여 드러난 제 몸을 바라보았다. 이현 때문에 며칠 앓느라고 아무것도 못 먹어 그런지 안 그래도 없던 지방이 쏙 빠져 데피니션이 선명해졌다. 이현은 그게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석희재는 이현이 보이는 열렬한 반응에 내심 놀랐고, 또 앞으로도 혹독하게 체중 관리를 유지할 필요성을 느꼈다. 또한 기념비적인 연애 첫날의 첫 관계를 완벽하게 준비된 상태로 맞을 수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아… 진짜 완벽하다, 진짜….”
그렇게 말하면서 이현은 저도 모르게 만져 보고 싶은 부분을 자꾸만 슬쩍슬쩍 스쳤다. 탄력이 더해진 매끄러운 어린 피부는 불 꺼진 집안에서도 윤기가 도는 게 보일 정도였다.
“사진 찍어도 돼?”
뜬금없는 이현의 물음에 석희재는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사진?”
“응….”
“왜?”
“그, 그냥 갖고 있으려고.”
“직접 보면 되잖아. 왜?”
석희재는 이현의 의도를 알 것 같으면서도 자꾸 물었다. 찍어 놓고 외로울 때마다 반찬 삼겠다는 의도가 분명했다.
“아니, 그냥 갖고 싶다고…. 한 장만.”
“싫어. 혹시 유출되면 어떻게 해. 회사에서 그런 거 제일 조심하라고 했어.”
“야.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여?”
이현이 크게 억울해했다.
“얼굴 아니고 목 아래로 찍으면 되잖아!”
“그건 더 싫어.”
석희재는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야말로 ‘몸만 원한다’는 이야기로 들렸으니까.
“애인끼리 그런 것도 못 하냐?”
급기야 이현이 제 입으로 ‘애인’이라는 방패를 내세우며 투덜거렸지만 석희재는 끝까지 그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애인이라도 사진은 안 돼.”
“되게 비싼 몸이네….”
“맞아. 나 비싸.”
“…….”
“그래도 애인한테는 노 개런티로 대줄 테니까, 그냥 꼴릴 때마다 불러.”
몸이 달 때는 그냥 저를 부르면 된다. 불러 주기를 원했다. 한낮이나 깊은 새벽도 상관없다. 장소도 가리지 않고 달려가 만나 줄 것이다. 제 몸을 보고 싶다는 애인 앞에서 벗어 보이는 게 어려울 리가 없었다.
그리고 석희재의 대범한 언어 사용에 얼굴을 붉힌 것은 이현 쪽이었다.
“…사람이 좀 상스러워졌네?”
***
“으음….”
물기를 머금은 피부가 촉촉했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살이 젖은 피부에 감겼다. 비누 거품으로 한 번 문지른 피부가 부드럽게 마찰하는 것만으로 자극에 약한 이현은 금세 신음을 흘렸다. 뒤에서 끌어안은 채로 젖은 피부를 문지르며 귓바퀴와 뺨, 그리고 목덜미와 어깨까지 수없이 키스했다. 엉덩이 골을 타고 미끄러뜨린 손가락이 회음을 더듬자 이현이 신음을 뱉으며 뒤로 손을 뻗었다. 이미 빳빳하게 발기한 물건을 손으로 함부로 더듬어 와 헛숨을 삼켜야 했다.
“빨리 넣고 싶어.”
“하아, 잠깐 기다려 봐.”
꾹 쥐며 위아래로 문지르고는 자꾸만 제 입구에 성급히 가져다 댔다. 미끄러진 성기가 튕겨 나오자 이현은 안달 난 신음을 뱉었다. 젖은 점막이 가져다주는 자극에 벌써 정신을 못 차리는 모양새였다.
입구에 맞춘 귀두는 쉽게 진입하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졌다. 꽤 오랜만이라 진입이 쉽지 않았다. 안달 나 있는 애인이 사랑스러웠지만 뒤를 풀어 주는 게 먼저였다. 물론 관계가 잦을 때는 가끔 풀어 주는 게 필요 없을 정도로 쉬울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해당되지 않았다.
엄지손가락을 꾹, 찔러 넣자 이현이 타일을 양손으로 짚으며 입술을 물었다. 엄지 한 마디가 들어갔을 뿐인데 조이는 압박감이 상당했다.
물이 타고 흐르는 등줄기에 입술을 묻으면서 석희재가 중얼거렸다.
“진짜 아무랑도 안 했나 봐.”
“으음….”
손가락을 넣은 채로 한 바퀴 비틀자 쉽게 신음이 흘렀다. 엄지손가락의 도드라진 뼈가 좋은 곳을 긁을 때마다 가볍게 할딱이기도 했다. 허벅지 안쪽 근육이 바들바들 떨리는 게 눈에 선명히 보였다.
“진짜 좁아.”
“하윽….”
“처음 하는 것처럼….”
말을 내뱉고 석희재는 혼자 굳었다. 이현도 진짜 첫 경험이 있었을 것이다. 그가 모르는 시절의 이야기다.
석희재는 절로 질투심이 끓어오르는 가정을 애써 지우며 엄지와 검지를 깊이 넣었다. 이러면 깊숙이 넣었을 때 손가락의 굵기보다 넓어져 안을 쉽게 풀어 줄 수 있다. 손가락 전체로 입구 주변을 자극할 수 있기에 이현이 많이 느끼기도 했다. 마치 악기를 다루듯, 석희재가 스스로 터득한 방법 중 하나였다.
“안 닿아. 이제 그건 그만해… 얼른 다 넣어줘.”
“후… 조금만 더.”
“…흣….”
“아프게 하기 싫어서 그래.”
“아… 진짜.”
나는 너무 굶었다고. 이현이 한숨 쉬듯 말했다.
“진짜로? 형 딜도 많잖아.”
“아… 안 했어. 안 했다고.”
이현이 부끄러운 말은 그만하고 닥치라는 듯이 고개를 흔들었다.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에서 물이 튀었다.
“왜?”
“몰라, 그냥….”
물론 굳이 말로 확인받지 않아도 손가락을 넣어 본 지금 그의 말이 진짜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왜 안 했을까? 역시 내가 해 주는 것이 좋았었나?
아무래도 그건가 보다. 석희재는 행복한 착각 속에 머무르고 싶었다. 그래서 더는 묻지 않았다.
그러면서 그의 울컥이는 목울대를 더듬으며 고개를 돌리게 했다. 혀를 섞으며 야한 방법으로 키스하자 더는 조르는 것을 그만두고 신음을 내뱉는다. 평소보다 훨씬 잘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오늘은 이현이 아무리 졸라도 제 방식대로 섹스할 예정이었다. 상대가 고통에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제 취향이 아니었다. 그저 쾌감에 울게 하고 싶었다. 물론 이현이 아픈 것을 좋아하는 것을 모르는 바는 아니다. 하지만 첫 삽입도 녹을 듯이 달콤할 수 있다는 걸 알려 주고 싶었다.
애무는 진득하고 길었다. 뒤도 질릴 만큼 풀었다. 자극에 약한 이현의 몸 곳곳은 손을 많이 탄 부분마다 울긋불긋해질 정도였다.
그리고 잠시 후, 석희재가 추구하는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는지 이현은 한 팔을 뒤로 돌려 제 손가락을 함께 뒤에 꽂았다. 부드러운 내벽 안에서 움직이는 두 손가락이 윤활유를 타고 겹쳐졌다. 서로 다른 각도에서 꽂힌 손가락 때문에 한껏 벌어진 안쪽은 분홍색이었다.
“너, 진짜….”
입술을 짓씹는 석희재의 말을 못 들은 척하며 이현은 신음했다. 스스로 힘을 풀고 벌리는 것에 익숙한 그도 여러 개의 손가락은 힘겨웠는지 안쪽이 쓸릴 때마다 등 근육이 솟아올랐다. 석희재가 손가락을 뽑아내는 순간 이현의 허리가 풀리며 앞으로 무너졌다.
벌어진 안쪽을 두꺼운 귀두가 꾹, 파고들었다. 그다음은 주저 없이 꾸역꾸역 먹혀들어 갔다. 내내 허전했던 안쪽을 채워 주는 질량감에 이현은 바들바들 떨었다. 다 넣기도 전에 그의 손이 다시 황급히 뒤를 향했다. 석희재의 판판한 아랫배를 손끝으로 부질없이 밀어냈다.
“아, 잠깐. 천천히… 천천히!”
“왜. 아파?”
움직임을 강제로 멈추는 손짓에 석희재는 미간을 구기며 겨우 멈췄다. 이현은 거의 흐느끼듯 말했다.
“나 너무 느껴서… 바로 갈 것 같아. 조금만 기다렸다가….”
“…….”
“으응, 좋아… 응….”
그렇게 말하며 덜덜 떨던 이현이 뒤를 조였다. 석희재는 헉, 하고 숨을 뱉었다.
천천히 하라는 말과는 달리 재촉하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혹시 저를 충동질하는 고의적 행동이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현의 반응이 이상했다. 고의라기보다는 마치 사정 직후처럼 멋대로 안쪽이 조여 대는 걸 제어할 수 없는 것처럼 보였다. 뒤가 제멋대로 조일 때마다 견갑골도 함께 움찔거렸다.
“형, 혹시 지금 느꼈어?”
“흐윽….”
“그냥 넣어 주기만 했는데? 정말?”
이현은 잔열감에 벌벌 떨며 잘 모르겠다고 뭉개진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네가 애무를 너무 길게 해서 그렇잖아’, 하고 원망하기도 했다.
석희재는 흥분에 반쯤 마비된 머리를 어렵게 굴렸다. 사정없이 뒤로만 오르가슴을 느끼는 경우도 종종 있다고 했다. 하지만 아무리 오랜만이어도 그렇지… 안을 채워 주기만 해도 좋아서 절정에 이르다니. 그것도 발음이 뭉개질 정도로 흥분하면서.
정말로 단속이 어려운 몸이었다.
석희재는 이현이 정신을 못 차리는 사이에 그의 목덜미 뒷부분을 깊이 빨아들였다. 불긋한 울혈이 올라오도록 말이다. 이현이 자주 입는 셔츠의 깃 안쪽에 남겨 보통 사람들은 잘 보지 못할 법한 위치였다. 그러나 이현보다 키가 큰 사람이 혹시나 음심을 가지고 내려다보면 눈에 띄는 곳이기도 했다.
목에 내리는 키스가 길어지자 이현은 응응, 신음하면서 스스로 고개를 돌렸다. 먼저 입술에 키스해 달라고 조르는 행동은 무의식적으로 나온 것이었다. 석희재는 그의 뺨을 손으로 감싸며 기쁘게 입을 맞춰 주었다. 가까워진 몸의 거리에 따라 자연히 결합이 깊어졌다.
“보지 마… 보지 말고 계속해.”
이현의 젖은 등이 파들파들 떨렸다. 자신의 흥분을 타인이 관찰하는 것이 퍽 불편한 눈치였다.
“왜 예쁜데.”
“흣, 보지 말라고….”
“애인 사이인데 뭐….”
석희재는 용기 내어 부러 중얼거렸다. 괜찮다고 토닥이며 등줄기를 따라 조심스레 키스도 했다.
그 말이 다행히도 설득력을 가졌는지 이현은 그 뒤로 보지 말라는 요구는 하지 않았다. 대신 타일을 짚은 그의 손이 의미 없이 쥐어졌다, 펴지기를 반복했다. 그게 부끄럽고 또 곤란한 티를 잔뜩 내고 있어 귀여웠다.
“움직일게.”
촉, 젖은 소리를 내며 키스하고는 아주 느린 속도로 허리를 물렸다. 귀두와 성기의 굴곡이나 두드러진 혈관의 모양마저 느껴질 정도로 느리게. 점막을 미끄러지듯 긁는 자극에 이현은 간신히 가라앉혔던 사정감을 다시 충동질 당해 벌벌 떨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도 아닌데 쾌감에 어쩔 줄 몰라 하는 이현의 반응이 석희재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 젖은 목덜미를 핥으면서 석희재는 물건을 다시 느리게 진입했다.
삽입이 깊고 속도가 느릴수록 이현의 신음 안에는 울음이 섞였다. ‘제발, 제발’ 하고 덧없는 사정을 해 댔다. 그 목소리가 애절해서 석희재는 흥분감을 억누르기가 어려웠다. 가장 예민한 피부를 안쪽 점막으로 꼼꼼히 핥아 주는 듯한 기분에 조금이라도 집중력을 놓으면 곧 사정해 버릴 것 같았다. 얼굴선을 타고 흐르는 물에 땀이 섞였다.
때문에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또 늦추었다. 그렇게 십수 번을 반복했을 때 급기야 울음을 머금은 이현이 잇새로 욕했다.
“씨팔, 너 일부러 그러지. 일부러… 아흣.”
이현을 괴롭힐 생각은 추호도 없었던 석희재는 조금 당황했다. 아껴 주고 싶어서 그런 건데.
굳이 더 힘든 쪽을 따질 생각은 없었지만 괴로운 정도로 치면 저 역시 비할 바가 아니었다. 그간 이현과의 자극적인 섹스로 단련해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아까 이현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 그가 뒤를 마구 조여 댈 때 저 역시 벌써 사정해 버렸을 게 분명하다.
“아니야.”
석희재는 나직하게 중얼거리고는 입술을 꾹 물었다. 이현의 귓가와 뺨에 입 맞추고 갈비뼈가 도드라진 상체를 어루만졌다. 심한 자극에 거의 울고 있던 이현이 짜증을 내며 그 손을 쳐 냈다. 톡, 하고 손등만 긁고 떨어지는 힘없고 허무한 손짓이었다.
“야. 자세 바꿔. 너 누워. 내가 올라갈래.”
이현이 이를 악물고 제법 단호하게 말했다. 눈가에는 눈물을 그렁그렁 달고 숨을 학학대면서 말한 탓에 전혀 위협적이지 못했다.
“싫어.”
석희재는 고개를 저으며 뒤돌아보려던 이현을 도로 뒤집어 벽에 기대게 했다. 읏, 소리를 내며 이현은 벽에 찰싹 들러붙었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면 제 허리 위에 올라타서는 또 자해에 가까운 섹스를 하려 들 것이다. 저 혼자 뒤를 퍽퍽 박으며 울다 끝날 게 분명했다. 그렇게 하면 파트너 시절과 진배없는 모양새가 된다.
석희재는 연인이 된 후의 첫 번째 섹스를 절대 그렇게 끝내고 싶지 않았다.
한 가지 시험해 볼 것이 있기도 했고.
“왜…? 왜? 왜 싫은데?”
이현의 목소리에는 절망감이 서려 있었다. 할딱이며 묻는 이현에게 석희재는 그간 생각하던 것을 조심스레 입 밖에 냈다.
“사람을 딜도로 쓰면 안 돼.”
“아, 뭐? 내가 언제… 아!”
“난 이제… 흣, 애인… 이잖아.”
석희재는 속으로만 흥, 하면서 이현이 변명을 할 틈도 주지 않고 쿡 박아 넣었다. 과한 자극에 이현의 무릎이 꺾였다. 덜덜 떨며 주저앉는 그를 받아 들고 석희재는 그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그의 안락한 내부에 몸을 파묻고 충만한 행복감을 느꼈다. 지금 이 순간이 너무나도 만족스러웠다.
몸은 가끔 표정보다도 많은 말을 한다. 석희재의 작은 행동에 이현이 반응하는 모습은 다채롭고도 섬세하게 전해져 왔다. 그건 바이올린의 현을 다룰 때와도 공통점이 있었다. 건반 같은 악기와 다르게 현은 손가락의 아주 섬세한 힘에도 민감하게 반응하니까.
석희재는 물기를 머금고 가닥가닥 갈라진 이현의 머리카락을 애틋하게 쓰다듬으며 깊은 안쪽까지 다시 침입했다. 장골에 눌려 도드라진 위 엉덩이는 꽤 외설스럽게 느껴진다. 잠시 이현의 등허리를 감상하던 석희재는 이내 애인의 목과 가슴을 양팔로 완전히 끌어안고 품에 가두었다.
더는 붙을 틈도 없이 잔뜩 밀착해 전신으로 상대의 고동을 느낀다. 잠에 푹 빠진 이현을 몰래 안아 본 적은 많았지만 섹스 도중에 이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이현은 왜 이러냐며 저를 밀어내지 않았다. ‘연인’이라는 이유로.
“형. 너무 좋다.”
석희재는 환희에 찼다. 한 몸처럼 결합해 그의 가장 깊은 안쪽, 아무도 닿지 못한 곳에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이 기뻤다.
“으음… 아….”
팔 안에 가둬 안은 이현이 신음하며 고개를 젖혔다. 물줄기가 가슴팍으로 튀어 피부에서 반짝반짝 빛이 났다. 한계까지 삽입된 채로 다시 안쪽 깊은 곳을 꾹 누르자 이현이 제 입술을 콱 물었다. 느끼는 곳을 찔러 누른 게 분명했다. 이현은 몸을 바들바들 떨면서 어떻게든 떨림을 진정시키려고 노력하고 있었다.
“희, 희재야.”
“응?”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석희재는 부드럽게 응답했다.
“또 올 거 같아. 뒤로… 흣, 나 이거 힘들어.”
“…또 올 거 같다고?”
“응. 희재야… 희재야. 제발….”
잠시 뒤로 몸을 물리자 이현이 애타게 손을 내려 석희재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가지 말라는 건지, 아니면 밀어내는 건지 모호한 손동작이었다. 조금 빼냈다가 다시 꽂아 넣을 때는 이현의 전신이 들릴 정도였다. 제가 심하게 삽입한 건 아니다. 자극이 두려웠던 이현이 부질없이 도망치려 했기 때문이다. 그가 하윽, 신음을 내쉬며 괴로워했다.
힘을 잃고 꺾이는 무릎부터 떨어지려는 이현을 팔로 단단하게 받쳐 안았다. 목덜미가 젖혀져 석희재의 어깨에 뒤통수가 닿았다. 선 채로 몸무게 전부 석희재에게 기대게 된 이현은 결국 손등으로 눈가를 닦아 내고 있었다.
눈에 물이 들어갔나. 석희재는 염려스럽게 이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눈자위가 울음기 섞인 것처럼 붉었다.
“힘들어….”
이현이 저를 안은 석희재의 손목을 꽉 쥐었다.
원래 이현은 선 채로 당하는 걸 좋아했다. - 물론 강제성이 있다면 체위를 가리지 않고 좋아하기는 했다. - 특히 옷을 입은 채로 벽에 밀쳐져 덮쳐지는 상황극은 이현이 선호하는 것 중 하나였다. 석희재 역시 몇 번 그 어설픈 역할극에 어울려 준 적이 있었다.
서서 하면 좋다고 허리에 다리를 감으면서 냉큼 올라타야 할 사람이 기진맥진한 게 의아했다. 감은 눈가에 촉, 키스를 내리자 이현이 지친 고개를 돌렸다.
“나… 오, 올 것 같다니까.”
“그래. 안 움직이고 있어.”
“씨발… 키스했잖아.”
키스가 왜? 의문에 빠진 순간 이현은 그 스스로 예고했던 대로 또다시 뒤로만 갔다. 물이 가득 담긴 컵에 떨어뜨린 한 방울 때문에 전체가 넘쳐 흐르듯 약한 자극에도 쉽게 절정에 다다랐다.
그 뒤로 세 번, 네 번째 드라이 오르가슴의 간격은 더 좁았다. 사정하지 못한 앞쪽은 물을 흘려 댔다. 앞과 뒤가 질퍽하게 젖으며 전신에 울긋불긋 열꽃이 핀 몸이 사랑스러웠다. 가장 사랑스러운 점은 석희재가 제 방식대로 해도 절대 만류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결국 이현은 완전히 백기를 들었다. 목이 푹 쉬어 신음 소리가 마구 갈라졌고 어느 순간 눈도 뜨지 못했다. 아무리 일으켜 봐도 벽에 등을 기대고 주르륵 미끄러지기만 했다. 손 하나 까딱하지 못하는 이현이 허리를 세우고 앉아 있기도 힘들어해서 석희재는 커다란 마른 수건으로 그를 감아 바깥으로 나왔다. 건조하고 서늘한 공기가 덜 마른 피부를 휘감았지만 흥분이 가시질 않았다.
눕혀 놓고 앞을 조금 만져 주는 것만으로 이현은 쉽게 사정했다. ‘열다섯으로 돌아간 느낌이야.’ 첫 몽정 때처럼 무력해진 것 같다며 이현은 체념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는 아직 한 번도 안 했지?”
석희재가 말없이 끄덕였다. 팔로 침대를 짚으며 이현의 위로 올라온 그가 스스로의 성기를 주무르면서 안쪽을 들여다보려 했다. 이현은 피곤해 죽을 지경임에도 스스럼없이 다리를 벌려 주었다.
엄지손가락을 한 번 꾹, 꽂아 넣듯이 눌러 본 석희재는 어둠 속에서 이현의 반응을 관찰했다. 이대로 넣어도 될지 고민하는 눈이었다. 이현은 속으로만 혀를 찼다. 손목만큼 두꺼운 것이 꽂혔던 아래에 손가락을 넣는다고 아플 리 없지 않은가.
“으응….”
그래도 이현은 일부러 느끼는 소리를 내며 뒤를 조였다.
“어… 아파?”
“아프진 않아, 흐음….”
그 말에 석희재는 안도하면서 충분히 넓혀진 안으로 성기를 침입시켰다. 아주 느리게, 하지만 멈추지 않고 길게….
아, 진짜 너무 좋다.
안을 벌려 열면서 진입하는 묵직한 질량감에 이현은 나체를 뒤틀었다. 석희재가 그런 제 반응을 샅샅이 살피는 게 느껴졌다. 입술을 깨물자 그러지 말라고 손가락을 조심조심 대어 준다.
‘형, 딜도 많잖아.’, 라고 했던가? 문득 이현은 방 어딘가에 처박혀 있을 장난감들을 떠올렸다. 언젠가 그걸 발견한 석희재가 그 무뚝뚝한 얼굴 위에 경악을 떠올렸던 것이 생각이 났다. 이걸 진짜 쓰는 거냐고도 재차 물었다.
그때 이현은 답지 않게 약간의 부끄러움을 느꼈었다. 원나잇 상대로 만나 볼 거 다 본 사이임에도 퍽 당당하지 못했다. 왜냐하면 그때는 석희재가 ‘밝히는 게이’의 실체를 보고 경악하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완벽하게 잘난 헤테로의 앞에서 평생 기죽어 살았던 자신은 순간 몹시 지질해졌다.
그래서 얼버무리고 다시 처박아 두었다. 쓰긴 쓰지. 하지만….
전부 다 한 번씩 몸에 넣어 본 것들이기는 했어도 근 몇 년 동안은 쓰질 않았다. 앞으로도 쓸 일은 없을 것 같았다. 먼지가 쌓여 가던 그것들을 3년 차 섹스 파트너의 부재에도 굳이 꺼낼 생각이 들지 않았던 이유는, 체온을 품은 사람의 살이 얼마나 좋은지 알았기 때문이다. 석희재는 넣고 싸는 것보다 다른 것에 열중하는 타입이었고 가끔 이현은 그가 만난 여자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게다가 솔직히 저가 자 본 모든 남자를 늘어놓고 비교해 봐도 석희재만 한 크기, 경도, 빛깔, 그리고 지속 시간까지 이만큼 마음에 드는 건 없었다.
나중에 헤어지면 아까워서 어떻게 하지?
내가 평생 이런 남자를 또 만날 수 있을까.
혹시 헤어질지도 모르니까 그 전에 좆이라도 석고로 떠 놓을까?
“무슨 생각해?”
석희재가 애정을 담은 목소리로 물어왔다.
“응?”
“집중 못 하는 것 같아서….”
그 말에 이현의 귀가 확 붉어졌다.
아, 내가 또 사람을 딜도 취급하고 있다니! 그걸 깨닫고 이현은 죄책감을 느꼈다. 아까 석희재의 입으로 직접 지적당하지 않았으면 자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현은 얼버무렸다.
“응… 네 생각.”
그 말에 석희재가 감격 어린 얼굴을 했다. 안에 품은 그의 물건은 달콤한 얼굴과 다르게 자아가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꿈틀거렸다. 배 안쪽을 얻어맞아 이현은 헛숨을 삼켰다. 갑자기 가해지는 자극에 좀 놀랐다.
이런 걸로 흥분하는구나.
“…기쁘다.”
석희재의 대답이 또 양심을 쿡쿡 찔렀다. 이현은 제 목덜미에 입술을 파묻고 핥는 석희재의 뒷머리를 착하게 쓰다듬었다.
석희재는 여전히 지나치게 느린 출입을 반복하고 있었다. 어떻게 보면 다정했지만 어떤 의미에서는 제일 집요한 놈이었다. 물론 몸 전체를 따뜻한 물에 담가 천천히 끓어오르게 만드는 기분이 싫지는 않았다. 언제 사정감이 닥칠지 몰라 조바심이 나기도 했다.
방금 전 욕실에서 괴롭혀졌던 것에 대한 앙심도 남았고, 또 딜도 취급에 대해 미안한 마음도 있어서 이현은 봉사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무래도 석희재의 취향은 부드럽고 다정한 섹스인 모양이다. 상대방을 녹진녹진 녹여 버리는 것이 녀석의 기쁨인 듯했다. 특히 상대방이 잔뜩 느껴 흐트러지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티가 났다.
‘나랑은 감성이 좀 다른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삽입이 빨라질수록 이현은 일부러 쾌락에 정신을 놓고 신음했다. 성기가 빠듯이 꽂힌 입구를 스스로 일부러 벌리며 더 넣어 달라고 재촉했다. 천박한 반응에 석희재의 표정이 굳어 들어갔다. 아차, 이게 아닌가. 너무 오버했다고 생각한 이현은 방향을 바꿔 ‘너밖에 없다’라며, 네 물건이 고파 어쩔 줄 모르겠다고 흐느꼈다.
그 말에 석희재는 돌변해서 이현을 잔뜩 물고 빨았다.
“진짜 나밖에 없어? 응?”
“응, 희재야. 아… 너무 좋아. 응, 너밖에 없어.”
“형, 형… 다시 말해 줘.”
“난 너 밖에… 아! 아, 아읏. 흑. 응, 으응….”
미칠 듯이 짝사랑하던 상대가 저를 갈구한다는 사실에는 인내의 제왕 석희재마저 도리가 없었다. 이현의 오금을 양손으로 잡아 올리고 빠르게 처넣었다. 무섭게 집중한, 쾌락이 번진 연하 애인의 얼굴이 그제야 제 나이로 보였다.
그래. 섹스는 나만 정신 놓으면 재미없지.
“허억….”
절정에 다다른 석희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항상 차분하고 침착한, 곱게 잘생긴 얼굴이 한순간에 흐트러지는 걸 보며 이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한 정신적 고양감을 느꼈다.
안쪽에 따뜻한 감각이 퍼졌다. 내부는 석희재의 체온으로 잔뜩 물들였다. 안에 싸는 건 주저하는 녀석인데 이번에는 빼낼 정신도 없었다는 소리다. 그것까지 마음에 들었다.
이현은 그제야 사 온 콘돔이 현관 바닥에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현은 석희재의 뺨을 양손으로 가져와 깊이 입을 맞췄다.
***
석희재는 제 곁에서 잠든 이현의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만가만 문질러 보고 있었다.
완전히 지쳤으면서도 이현은 언제나 그랬듯이 쉽게 다리를 열어 주었다. 힘들다면서 섹스는 절대 거부하지 않는다. 그런 점이 사랑스럽고, 저를 안심하게 만들고, 또 불안하게 했다.
그래도 오늘은 깊이 포옹하거나 행위 도중 사랑스럽게 어루만져도 괜찮았다. 석희재가 한때 예상한 대로 애정 표현을 이상하게 여기거나 떨쳐 내는 일은 없었다. 애인이라는 이름이 준 해방감은 기대보다 더 컸다. 이현이 자각할는지 모르겠지만 이건 엄청난 변화였다. 얼마 전만 해도 그런 건 이현이 잠들었거나 만취한 상태에서만 허락되는 행동이었으니까.
또… 몰래 하는 애정 표현마저 평생 다시는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휩싸이기도 했었고.
“이상한 사람.”
석희재는 중얼거렸다.
한때 그는 성벽이 조금 특이한 이현을 이해하고 싶어서 여러 방면으로 공부를 해 본 적이 있었다. 덕분에 고통이 동반되지 않으면 성적 자극을 잘 느끼지 못하는 취향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과거의 이현은 마조히스트로 추측되는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 살갗이 철썩 부딪칠 정도로 아픈 삽입만 고집하고, 강제성을 가지고 몰아붙이는 행위에서 크게 흥분하고… 또 가끔은 억지로 때려 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으니까.
석희재는 이것이 궁금했다. 이현이 그 외의 방식으로는 아예 느끼지 못하는 것인지.
“아니잖아.”
하지만 오늘 확신했다. 느리고 다정한 삽입에 이현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예쁘게 울었고 많이 느꼈다. 단지 오랜만의 관계여서만은 아닌 듯했다.
석희재는 문득 자신의 처음을 떠올렸다.
당시 동정이었던 자신은 이현의 안에 넣자마자 사정해 버린 전적이 있었다. 처음이니까 어쩔 수 없다고 스스로를 달랬지만 지금 생각해도 눈앞이 깜깜해질 정도로 우습고 부끄러운 시작이었다. 넣는 순간 싸 버렸다는 걸 안 순간 이현의 얼굴에 떠오르던 황당한 빛을 생각하면 아직도 웃음이 났다.
그리고 기시감이 들었다.
어쩌면 오늘의 이현도 마찬가지일지 모른다는.
길고 긴 애무, 배려받는 손짓, 삽입보다 더 잦은 키스.
그런 게 처음이라 그 역시 넣자마자 느낀 게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슬픈 일이다.
“형도 다정한 거 좋아하면서.”
석희재는 이현의 머리카락을 조심조심 매만졌다. 애정을 숨길 수 없는 손짓이었다.
‘누가 형 취향을 이렇게 만들었어?’
소리 내어 말하지 않은 속마음에 눈시울이 더워졌다.
***
이현은 감겨 있던 눈가를 스르르 밀어 올렸다. 생소하고 차가운 푸른 빛이 방 안을 채우고 있었다.
소리 없이 눈을 깜빡이던 이현은 뒤늦게 지금 시각을 깨달았다. 동이 트고 있었다. 동시에 위가 아플 정도의 허기도 느껴졌다. 아무래도 잠을 깨운 것은 극심한 허기였던 모양이다.
너무 일찍 일어났다.
“음….”
앓는 소리와 함께 누운 채로 기지개를 피자 살갗에 시원한 촉감의 이불이 감겨 왔다. 몸에 닿는 감각이 꽤 쾌적했다. 이현은 자기 직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석희재와 어둠 속에서 살을 맞대고 호흡을 나누던 강렬한 장면만 머리에 맴돈다. 손을 들어 뻑뻑한 눈가를 비비니 그제야 옆에서 기척이 났다.
“미안. 깼어?”
석희재는 이현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누워 있었다. 그가 수긍의 의미로 고개만 작게 끄덕였다. 이현은 다시 눈을 비볐다.
“더 자.”
“형은?”
저를 응시하는 석희재의 눈이 맑았다. 어리고 건강해서 그런지 자고 난 직후의 피로감도 느끼지 않는 모양이다.
이현은 그가 밤새 저를 들여다보았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한 채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을 젖히며 일어나자 벗은 피부에 에어컨의 찬 공기가 닿아 왔다. 석희재의 시선이 따라왔다.
“배고파서. 뭐 좀 먹으려고.”
“일어날 거야?”
“먹고 생각할래.”
그렇게 말하며 이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5시. 곁에서 석희재도 몸을 일으켰다. 트레이닝복 바지만 걸친 채로 방문을 열고 나갔다.
그 뒷모습을 보면서 이현도 옷을 찾았다. 침대 근처에 바닥에 허물처럼 뭉쳐 놓은 제 몫의 바지가 있었다. 한 3일 전부터 여기 있던 것 같은데. 이현은 멋쩍어하면서 바지를 다리에 꿰었다. 아무리 더 잘 보이려는 노력은 필요 없는 사이라지만 새삼 게으르고 추한 모습은 다 보여 준다 싶었다.
너무 흐트러져 있었다. 입맛이 썼다. 연애의 시작인데 너무 무드가 없었다. 그럴듯한 한 끼 식사는커녕 매번 하던 것처럼 정신을 놓고 침대에서 뒹굴기나 했다.
언젠가 연애를 시작하게 되면 상대가 누구든 좀 좋은 것만 보여 주고 추한 부분은 숨길 줄 알았는데…. 이현은 한숨을 쉬었다. 그러면서 나름대로 걱정도 했었다. 혼자 내키는 대로 지낸 지가 너무 오래되어 누군가에게 자신의 속을 드러내고 보여 주는 것 자체가 어렵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시점에서는 전부 다 김칫국이 됐지만.
‘저 녀석이랑 연애하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버린 인연도 다시 보자.’ 석희재와 파트너 관계도 끝났다고 생각한 시점에 본 운세에서는 그렇게 말했다. 마치 현재를 예언하는 문구 같았다.
마침 생각나는 것이 있어서 이현은 새삼스레 이불을 퍽퍽 더듬어 봤다. 어제까지 느끼던 것과 감촉이 퍽 색달랐다. 안에 하고 그냥 자면 무의식 중 정액을 흘려 시트를 더럽히게 마련이다. 콘돔 없이 하면 할 때야 좋지만 뒤처리가 너무 번거롭고 싫었는데 오늘은 벌써 석희재가 바꿔 놓은 듯했다.
부지런하네. 설마 몸도 닦아 줬을까?
먼저 방문을 열고 나갔던 석희재가 바깥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전자레인지를 돌리는 소리도.
잠시 후에 석희재가 다시 돌아왔다. 물컵과 함께 편의점 도시락을 쟁반에 받쳐 든 채였다. 1년 전에 쓴 게 마지막이라 이현은 존재마저 잊었던 쟁반인데 대체 어디서 찾았는지 모르겠다. 꽤 살뜰했다.
“아까 사 온 거야. 이거라도 먹어.”
석희재는 궁색한 차림을 미안해하며 침대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뭐든 반가운지라 이현은 군말 없이 편의점 도시락을 뜯었다. 그제야 생각이 나는 게 있었다.
“아, 나 도시락 받았는데 차에 두고 왔다.”
“무슨 도시락?”
“연습실 도시락. 가져가서 먹으라고 지우 선배가 하나 챙겨 줬는데.”
“…….”
“웃기지. 우리 회사에서 산 건데 받는 사람이 준 사람을 챙겨 줘. 하하….”
웃은 건 이현뿐이었다. 침묵이 멋쩍어 이현은 얼음을 가득 채운 컵에 담긴 녹차를 꿀꺽 마셨다. 석희재가 되물어 왔다.
“한지우가?”
“응… 다 쉬었겠다.”
한지우, 라고 선배 이름을 막 부르는 게 조금 거슬렸지만 이현은 그냥 넘어가려 했다.
“그 사람이 형을 왜 챙겨?”
하지만 이어진 말은 희미한 적의를 담고 있었다. 이현은 나무젓가락을 쥔 채로 음식을 우물거리며 석희재의 가라앉은 눈을 가만 바라보았다.
“질투해?”
툭, 내뱉은 말에 석희재는 부정하지 않았다.
“거기서 썩게 내버려 둬.”
“너 은근히 질투 많구나.”
그 말에는 입술을 깨문다. 이현은 소리 없이 웃었다.
“많은지 안 많은지는 몰라. 이건 반의반도 안 드러낸 거야.”
“그래?”
“그런데도 많다고 하면 어떻게 해.”
“너도 먹어.”
대수롭지 않게 화제를 돌려 버리는 이현의 화법에 석희재는 마지못해 젓가락을 뜯었다. 하지만 대화가 덜 마무리되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음식을 넘기는 속도가 지나치게 느렸다. 그러고는 끝내 다시 화제를 물었다.
“앞으로 그 자식이 주는 거 받지 마.”
“야.”
“애인인데, 이 정도는 말해도 되는 거 아니야?”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게 아니라.”
“그럼.”
“그 자식이 뭐냐. 선배님이라 해야지.”
그 말에 석희재는 짧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푹 숙였다.
“괜히 감정적으로 굴지 말고 선배랑 잘 지내.”
“…….”
“너 그러는 거 다 티 나. 지우 선배 눈치 얼마나 빠른데.”
연인 관계는 한때일지 몰라도 이쪽 업계 내의 인맥은 평생이다. 죽을 때까지도 끝나지 않는다. 그리고 그게 바로 이현이 일적으로 만난 사람들과 절대 몸을 섞지 않는 이유였다.
가혹할 정도로 긴 인연 속에서 인간관계를 먼저 망칠 이유가 없었다.
“선배 눈 밖에 나서 좋을 거 없어. 몇 달을 한 공간에 붙어 있을 건데 불편해지면 주변 사람들도 힘들어져. 잘만 하면 되게 관대한 선배니까 잘해. 연예인들 까탈 심할 땐 얼마나 심한데… 한 만큼 돌려주는 사람도 잘 없다. 보통은 누르려고 하지.”
“…….”
“남들처럼 아부할 필요까지는 없고. 가끔 형님, 하면서 술 사 달라고 그러면 좋아하지. 너 안 그래도 연출님이 편애해서 사람들한테 잘해야 돼. 그래야 눈밖에 안 난다?”
“…….”
“다들 어른들이니까 상식적으로 행동할 거라고 믿고 안심하지 마. 어느 정도 나이 먹으면 선생님이 있는 것도 아니고, 제어하는 사람이 없어서 더 교활하고 유치하게 군다고.”
이현은 많은 사람이 군집하는 곳, 특히 연예계의 서열과 권력 관계를 싫을 정도로 잘 알았다. 저 역시 피라미드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던 사람이니까. 이제는 PD라는 직급이 어느 정도 보호해 주기는 했지만 그래도 본질적으로 달라지는 건 없었다.
좋게 타일렀으나 표정만 봐도 석희재가 납득을 어려워한다는 건 느껴졌다.
“연습실이나 극장 안에서는 나보다 다른 배우 스태프들을 우선으로 치는 거야. 알았어?”
“…난….”
“우린 밖에서 만날 수 있잖아.”
단둘만의 시간이 허락된다는 사실에 석희재는 약간 기분이 풀린 것 같았다. 그제야 겨우 ‘알았어.’ 하고 작게 대답했다.
이현은 편의점 도시락 하나를 빠르게 비웠다. 다 먹어도 허기가 졌다. 차에 두고 온 연습실 도시락이 조금 아쉬워졌다. 찬의 구성이나 양이나, 그쪽이 편의점 도시락보다는 훨씬 낫다. 하지만 잊지 않고 챙겨 와서 먹었다면 석희재는 단단히 삐졌을 것이다. 지금처럼 단순한 실랑이로 끝나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얼른 먹어.”
“응.”
이현의 말에 석희재는 가시 부스러기가 돋아난 나무젓가락을 한 손에 쥐었다. 그러고는 창에서 들어오는 여명을 등진 채로 느리게 밥을 주워 먹었다. 너저분한 살림이 가득한, 혼자 사는 남자의 궁상맞은 집 안에서 석희재의 존재만이 비현실적이었다.
이현은 턱을 괴고 가만히 앉아 있다가 석희재의 밥을 귀퉁이부터 빼앗아 먹었다.
그런 이현에게 뭐라고 하기는커녕, 석희재는 도시락을 제 쪽으로 밀어 주고는 깔끔히 입을 닦는다.
“형 다 먹어.”
“그래도 돼?”
“뭐 더 사 올까?”
“됐어.”
그렇게 말한 것치고 이현은 남은 것을 허겁지겁 먹어 치웠다. 그동안 석희재는 이현이 밥을 다 집어삼키는 걸 바라보고 있었다. 다 먹어갈 때쯤에야 그 시선을 인지한 이현은 자신이 너무 아귀처럼 먹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간 후회하면서 이현은 단단해진 윗배를 손으로 문질렀다. 복근이 훌륭히 드러나는 석희재마저 새 모이만큼 밥을 먹었는데… 나잇살이 쪄도 제가 더 먼저 찔 텐데 주제를 몰랐다. 이현은 뒤늦게 걱정하면서 납작한 배를 가리려고 늘어진 티셔츠를 주워 입었다. 석희재는 영문도 모르고 춥냐고 물어왔다.
사이좋게 양치를 하고 다시 침대에 누웠을 때였다. 석희재가 무언가 주저하는 기색으로 말을 붙였다.
“형.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지금? 출근 전까지 두 시간만 더 자면….”
“아니, 그거 말고….”
“응?”
“못 해 봤는데, 하고 싶은 거.”
갑자기 소원을 묻는 석희재 때문에 이현은 생각에 잠겼다.
눈을 마주친 채로 베개를 끌어와 다시 비스듬히 누웠다. 먹고 바로 누웠다는 사실에 살짝 죄책감이 들었으나 그 사실을 모른 척하고 싶을 만큼 몸이 안락했고 또 기분이 좋았다. 이대로라면 금방 잠들 수 있을 것 같았다.
“음….”
이현은 눈을 깜빡이며 ‘하고 싶은 거라….’ 하고 중얼거렸다. 석희재는 퍽 집중한 얼굴로 이현의 곁에 따라서 비스듬히 누웠다.
“피어싱.”
“피어싱?”
“응. 혀에다가.”
그렇게 말하고 이현은 제 혓바닥 가운데를 내밀어 보여 주었다. 석희재가 의문에 휩싸인 얼굴로 이현을 바라보았다.
“여기 하면, 펠라 할 때 받는 사람 기분 좋대. 살짝 긁히는 느낌 나서.”
“…….”
“해 줄 때 느낌도 짜릿할 것 같아. 그런데 회사 때문에 못 하겠지.”
“…….”
“아쉽다. 어릴 때 해 보는 거였는데….”
이현의 말에 석희재가 갑자기 베개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쉬었다. 어쩐지 허탈한 느낌으로. 아, 내가 또 너무 솔직했나. 하지만 이현은 약간 억울해졌다. ‘자기가 물어봐 놓고 저런다’ 하며.
다시 고개를 든 석희재가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넘겼다. 그게 꼭 답답한 심정을 표출하는 것 같아 약간 말문이 막혔다.
“아니, 나는.”
“…….”
“애인 생기면 같이 하고 싶은 거 없냐고… 그거 물어본 거였는데.”
아. 이현은 짧은 대답과 함께 굳어 버렸다.
아니, 그럼 그렇게 물어보지.
헷갈리잖아…. 흠흠, 이현은 헛기침했다.
둘 사이에 잠시 정적이 찾아왔다. 인제 와서 ‘그러니까 너를 위해서 하고 싶었던 거다’라고 우기며 궤변을 늘어놓는 것도 이상해 보였다.
이현은 퍽 상심한 듯 보이는 석희재에게 물었다.
“그럼 너는?”
“음?”
“너는 뭐 하고 싶은 거 없었어?”
그 말에 살짝 시무룩해졌던 석희재가 생각에 잠겼다. 뒤이어 나온 말은 평범하기 그지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냥… 같이 영화 보고.”
“영화관 데이트?”
데이트라고 말하자 석희재가 쑥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응. 드라이브도 하고, 또….”
“또?”
“커플링도 맞추고 싶고….”
“에이. 그건 안 되지.”
“…….”
“아니, 내 말은 넌 보는 눈이 많아서 안 될 거라고. 팬들이 물어보면 뭐라고 할 거야.”
“물어보는 사람 없는데.”
“지금은 안 꼈으니까 당연히 안 물어보지.”
“대답 안 할 거야.”
“그런 문제가 아니야.”
아무튼 석희재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제 기대와 어긋나면 퍽 실망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 바람에 도리어 식은땀을 흘리게 되는 것은 이현이었다. 덕분에 석희재의 작은 요구들 정도는 들어줘야겠다고, 모르는 사이 마음을 먹어 버리게 된다.
“영화관? 드라이브? 그 정도는 뭐….”
“정말?”
석희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솔직한 표현에 이현은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말하는 것들이 참 아기자기하네.
이십 대 초반에는 그런 게 하고 싶구나. 생각해 보면 저 역시 그랬기에 새삼 공감이 갔다. 손만 잡고 걸어 다녀도 좋은 게 그맘때니까.
이현은 뒷머리에 팔을 겹친 채로 천장을 바라보았다. 석희재의 나이쯤의 저를 떠올려 본다. 또, 가끔 적선처럼 주어지던 다정한 손짓도 떠올려 본다. 그런 걸로도 충분히 행복했었다. 그 이상의 것을 받았다면 심장이 터져 버렸을지도.
“너도 그래?”
뜬금없는 물음에 석희재가 ‘응?’ 하고 물었다.
“데이트하면 심장 터질 것 같냐?”
“아직 안 해 봐서 모르겠는데.”
해 보면 그땐 알겠지.
중얼거리는 석희재의 말에는 억누른 기대감이 담겨 있었다. 이현은 픽 웃었다. 확실히 석희재는 자신과는 달랐다. 하긴, ‘데이트해 주세요, 제발 한 번만요.’ 하고 조르는 모습이 어울리지 않기는 하다.
“자자. 난 자야겠다.”
“두 시간 있다가 깨워 주면 돼?”
“그래…. 넌 안 잘 거야?”
“잠 다 깼어.”
석희재가 팔을 뻗고 이현의 고개를 억지로 가져갔다. 베개 대신 제 팔을 쓰라는 소리였다. 이현은 쿡쿡 웃으며 일부러 뒤통수를 그 팔에 아프게 짓눌렀다. 석희재는 꿈지럭대는 머리통을 짓궂게 꽉 끌어안았다.
“너 근데, 연기 잘해?”
잠이 몰려오기 직전이었다. 이현은 문득 생각난 것을 어물거리며 물었다.
“무슨 연기.”
“너도 오늘 콜이잖아. 맨날 가는데… 연습하는 건 한 번도 못 봐서….”
“…….”
“발 연기 하다가 너 때문에 환불 사태 나면 어떻게 해…”
이현의 섣부른 걱정에 석희재가 퉁명스레 말했다.
“왜 형은 내가 연기 천재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
“아니, 연습하는 거 한 번도 못 봤으니까….”
“시츠 때 오지?”
시츠프로브. 그건 오케스트라와 배우들이 처음으로 합을 맞춰 보는 날이었다. 얼마 남지 않았다.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보면 알아.”
뭘 보면 안다는 걸까. 이현은 호기심을 다 지우지 못한 채로 그 품에 안겨서 가물가물 잠에 빠졌다.
***
‘시츠 때 오지? 보면 알아.’
장담하는 석희재의 음성이 머리에 아른아른 떠돌았다. 사위가 어두운 방 안에서 푸른 여명에 휩싸여 귓가에 속삭이는 목소리는 아무리 곱씹어 봐도 환상 같았다. 분명히 있었던 일임에도 불구하고 꿈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뭘까. 직후에 다시 잠들었기 때문에? 한밤중 홀로 잠에서 깨어나도 곁에서 식사를 챙겨 주는 이의 존재가 믿어지지 않아서?
이유는 여럿 있었지만 아마도 연인이라는 존재가 제 인생에 이렇게 불쑥 튀어나올 줄 몰랐기 때문이다. 어제와 오늘이 가장 다른 이유는 아마도 그것일 터였다.
이현은 그렇게 자각 없이 종종 넋을 놓았다. 가끔 이유도 없이 손이 멈췄다.
그는 현재 시츠프로브의 마지막 조율 중이었다. 음악감독에게 최종 악보를 컨펌받고 그날 참가 배우의 매니저들에게 촬영 허가를 받는다. 시츠 때 기록 영상 외에도 지상파 매체 촬영도 들어오는 데다가 웬일로 사진작가 조 실장이 홍보용 사진 촬영을 직접 오겠다고 전해 왔다. 메인 포스터 촬영만 본인이 하는 사람이 웬일로. 그는 보통 번거로운 데다 대접 못 받는 출장 작업은 죄다 어시에게 맡기곤 했다.
아무래도 잿밥에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이현은 타당한 추론을 해 냈다. 석희재에게 유독 친밀하게 굴던 그날의 조 실장이 떠올랐다. 석희재의 어깨 위로 친근한 척 얽던 태닝 된 팔도 떠올랐다.
억지로 생각을 떨쳐 내고 이현은 얼른 일을 마무리 지었다. 속도를 낼 필요가 있었다.
“피디님, 저희 저녁으로 쌀국수 먹으려고요. 어떠세요?”
조르르 달려와 파티션 너머에서 묻는 이는 티켓 팀 직원이었다. 이현은 난처한 얼굴로 소리를 죽이며 말했다.
“나 오늘 저녁 약속 있어 가지고…. 나 빼놓고 먹어요.”
“아, 정말요? 혹시 다시 사무실 들어오세요?”
“아마도? 봐서.”
“네. 알겠습니다.”
발랄하게 말하며 뛰어간 직원이 마지막으로 사무실 문을 나섰다. ‘피디님은 저녁 약속 있으시대요.’ 멀어지는 목소리와 함께 복도 저편에서 웅성거리는 기척들도 사라졌다.
잠시 뒤에 이현 역시 자리를 정리했다. 혹시 사무실에 돌아올 일이 생길지 모르니 컴퓨터는 끄지 않았다. 대본과 청테이프 따위가 조잡하게 들어있는 가방을 드는 대신 이현은 지갑만 들었다. 그렇게 빈손으로 사무실을 나섰다.
안쪽으로 진입하는 차들을 피해 이현은 도롯가에 붙어 내리막길을 걸었다. 저 아래쪽으로 1번 출구가 보였다. 석희재는 1번 출구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겠다고 했다.
막상 도착했는데도 석희재는 얼른 눈에 띄지 않았다. 어딜 가도 시선이 모이는 녀석이 보이질 않아서 이현은 그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러나 핸드폰을 꺼내자마자 뒤에서 누군가가 어깨를 톡 건드렸다.
뒤를 돌아본 이현의 시선이 훤칠한 인영의 턱쯤에 닿았다가 다시 얼른 위로 향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반 이상 덮은 사람이 서 있었다. 속눈썹이 촘촘히 박힌 깊은 눈이 이현을 내려다보았다.
“형.”
마스크로 막힌 안쪽에서 먹힌 목소리가 났다.
“아… 어딨었어?”
석희재가 마스크를 살짝 내리며 말했다.
“저쪽.”
사람이 많이 오가는 인도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간 차의 뒤쪽이었다. 어두워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곳에 유령처럼 숨어서 고요히 선 채로 저를 기다리고 있었을 모습을 생각하자마자 별것도 아닌데 웃음이 났다. 이현은 가벼운 웃음을 터뜨렸고, 석희재는 저를 보자마자 웃는 이현의 얼굴을 꽤 오래 응시했다.
“쌀국수 먹을래?”
아까 티켓 팀 직원에게 저녁 메뉴명을 듣자마자 그때부터 쌀국수가 먹고 싶었던 이현이 물었다. 일방적인 메뉴 선정에 석희재는 한 번 거절도 없이 이현을 따랐다. 이현은 회사 사람들이 즐겨 찾는 식당을 피해 일부러 조금 먼 곳으로 갔다.
주문을 마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좁은 테이블 위에 쌀국수에 분짜, 볶음밥까지 그릇 네 개가 가득 올려졌다.
이현은 식사하는 도중에도 핸드폰을 자주 확인했다. 그건 딱히 식사가 무료하거나, 할 말이 없어서는 아니었다. 사귀기 전에도 종종 보던 모습으로, 이현은 언제나 저를 찾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시달렸다.
메시지가 쉴 새 없이 도착해 액정이 반짝거렸다. 그나마 이현은 자기만의 기준이 있는지 핸드폰을 엎어 놓은 채로 5분에 한 번 꼴로만 확인하고 있었다. 가끔은 전화도 걸려 왔다. 그럴 때마다 이현은 목소리를 낮추고 ‘식사 중이라서 이따가 전화 드릴게요’라고 답했다.
그가 둘만의 저녁 식사를 위해 나름대로 정리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니 불만을 가질 수도 없었다.
“바쁜가 봐.”
석희재는 걱정을 담아 물었다. 그러나 이현은 지적당했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급히 얼버무렸다.
“아, 미안. 나오기 직전에 시츠 일정표 뿌리고 왔어. 사람들이 이제 막 확인하나 봐.”
“…….”
“이제 핸드폰 안 볼게.”
석희재는 몰래 한숨 쉬었다. 이현의 손이 어쩐지 가볍다 했다. 대부분의 짐이 여전히 사무실에 있고 언제든 사무실로 돌아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걸, 예전에는 몰랐다. 그는 다른 직장인들처럼 퇴근을 해도 한 것이 아니었다. 가까운 예로 제 매니저인 박 팀장처럼.
석희재는 그의 앞으로 그릇을 밀어 주었다.
“다 식었겠다. 이거부터 먹어.”
“식어도 맛있는데? 괜찮아.”
이현의 그릇 안에 담긴 음식은 거의 줄지 않았다.
이렇게 바빠서야. 석희재는 제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오늘은 함께 저녁을 먹고, 가능하면 같이 영화를 보고, 밤늦게 같이 집으로 돌아가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직 동의는 구하지 않았지만 밤 데이트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어 잔뜩 설레서 왔다.
희망이 줄어들고 있었다.
“너는 왜 안 먹어?”
“난 이제 배불러.”
“어휴. 넌 입이 짧아서 어떡하냐?”
그럴 리가. 이현이 잔뜩 바쁘고 정신없을 때 이미 많이 먹었다. 그걸 증명하듯 석희재 몫의 그릇은 싹 비어 있었다.
그러나 석희재는 이현의 말을 부정하는 대신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 계산대 앞에서 잠시 실랑이가 있었다. 석희재가 자연스레 계산하려 카드를 꺼내는 것을 말리면서, 이현은 무드도 없이 ‘반반씩 카드로 되죠.’라고 물었다. 석희재는 물러나지 않고 제가 사고 싶다고 우겼다. 짧은 시간 안에 각기 다른 주장을 펼치는 두 사람 앞에서 계산원은 난처해했다.
“그럼 영화를 형이 내.”
석희재는 슬쩍 희망 사항을 끼워 넣어 보았다.
“영화…? 우리 영화 보냐?”
이현이 되물었지만 석희재는 답하지 않았다. 결국 계산원은 아까부터 계속 카드를 내밀고 있는 석희재의 것을 받아 들었다.
간다는 건지, 아닌지.
석희재가 번화가 사이 극장으로 발을 옮기자 이현이 느린 걸음으로 따라왔다. 뒤를 돌아보니 그새 또 핸드폰을 보고 있다. 안 되겠다고,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야 된다고 할까 봐 조마조마했다. 심지어 이현은 이제 제자리에 우뚝 멈춰서서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심장이 졸아들었다.
잠시 뒤, 주머니에 핸드폰을 넣은 이현이 성큼 다가왔다.
“에이. 모르겠다. 핸드폰 꺼 놓지 뭐.”
“…영화 볼 거야?”
“보자며.”
그렇게 말하고 빌딩 안으로 이현이 먼저 들어갔다. 그 뒷모습을 얼떨떨한 얼굴로 바라보던 석희재는 그의 뒤를 급하게 따랐다. 흔들리는 유리문을 잡아 주는 이현의 손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
두 사람은 고작 일주일 사이에 현재 걸려 있는 개봉작을 다 봤다. 이현은 석희재가 그렇게 열렬하게 영화를 좋아하는지는 몰랐기 때문에 내심 놀랐다. 석희재는 영화에 한 맺힌 사람처럼 틈만 나면 이현을 데리고 영화관에 갔고, 다음 날이 쉬는 날이었던 토요일 저녁에는 무비 올나이트로 밤새 영화 3편을 내리 보기까지 했다. - 물론 이현은 중간에 잤다. -
그건 석희재의 초조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혹시라도 한씨 성을 가진 누군가가 이현에게 ‘영화 보자’ 하고 제안하면 ‘아, 저 그거 봤는데요.’라는 대답을 하기를 기대하면서. 그걸 꿈에도 모르는 이현은 영화관 데이트도 그럭저럭 좋다며 나름의 적응 과정을 거치는 중이었다.
오늘도 영화 보려고 하려나? 이제 개봉작은 볼 게 없는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이현은 핸드폰 액정을 바라보았다. 다시 초성으로 돌아간 석희재의 번호가 거기에 있었다. 이현은 몰래 쿡쿡 웃었다.
‘이건 싫어.’
[ㅇㅇ] 이라고 새로 저장한 이름에 석희재는 뚜렷한 거부반응을 보였다.
‘왜. 이름 세 자는 싫다며. 좀 특별하게 써달라며.’
‘그럼 그냥 애인이라고 써.’
‘에이. 안 되지.’
애인의 초성인 이응이응이라고 설명해 줘도 석희재의 부루퉁한 표정은 풀리지 않았다.
애인이라고 저장하라니…. 그건 대놓고 애인이 생겼다고 광고하는 꼴이다. 이현은 자신이 연애 중이라는 사실을 동네방네 떠들 생각이 절대로 없었다. 생각만 해도 소름이 돋았다. ‘이 PD 애인 생겼어?’라는 질문을 반복해 듣게 될 것이다. 특히 집요하게 굴 몇몇이 곧바로 떠올랐다.
밤낮도 없이 고락을 함께하는 수십 명의 직원과 수백에 이르는 극장 상주 스태프들에게 소문이 퍼지는 건 삽시간이다. 저에게는 안 그래도 아슬아슬한 비밀이 많았다. 조금이라도 추측 가능한 단서를 흘렸을 때의 파급력 역시 무시무시했다.
석희재도 마찬가지일 거라 생각했는데 반대로 그는 퍽 섭섭해했다. 택시에서 먼저 내려 헤어질 때까지 눈에 묘한 미련과 원망이 넘실댔다.
‘응응이 뭐야. 응응이….’
힘없이 중얼거리는 석희재의 목소리를 떠올리니 다시 큿, 하고 웃음이 터졌다. 그저 무뚝뚝한 줄만 알았는데 석희재는 의외로 표정이 다채로웠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석희재가 바란 건 이름 뒤에 의미불명의, 두 사람만 알 법한 작은 이모티콘이 하나 붙는 것 정도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뭐가 어울리려나? 우리 사이에.
이현은 수백 개의 이모티콘을 꼼꼼히 뒤져 보았다. 이모티콘 중 필름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이현은 영화를 좋아했다. 그러나 이렇게 소화 불량이 될 때까지 본 적은 없었다. 최근 석희재와 함께 본 영화들 중 제목과 내용을 매치시키지 못하는 게 대부분이었고, 내용도 흐릿했다. ‘걔가… 걔를 배신해서 걔한테 들켜 가지고 죽었나?’ 어제 본 영화 내용도 기억이 안 났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영화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함께 영화관에 가는 것 자체는 정말로 나쁘지 않았다.
그중 가장 놀랐을 때는 영화관 스크린에서 석희재의 얼굴을 보았을 때였다. 영화 시작 전 흘러나오는 광고의 러시 중, 매우 익숙한 얼굴이 스크린에 가득 찼다. 그 순간 이현은 ‘헛’ 하고 숨을 들이켰다.
CF 촬영을 했다는 말은 들었지만 그게 통신사 CF였을 줄이야. 정말 큰 걸 물었다.
이현은 그제야 왜 석희재가 요즘 얼굴을 가리고 다니기 시작했는지 겨우 이해했다.
언젠가 불 꺼진 방에서 새벽빛을 등진 채로 저를 바라보던 말 없는 눈길이 스크린에 가득했다. 착각인지는 몰라도… 석희재의 얼굴이 정면으로 저를 바라볼 때는 객석 전체가 묘하게 조용해졌다. 심장을 두드려 패는 미모에 다들 얻어맞아 졸도한 것처럼.
‘야… CF 찍었다고 말 안 했잖아.’
‘그때 우리 사이 안 좋아서….’
그렇게 말하던 석희재는 도리어 면목 없어 하며 이현의 어깨에 고개를 숙이듯이 기댔다. 숨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하고 어리광부리는 것 같기도 한 몸짓이었다. 일방적인 섹스 파트너 종결 선언을 ‘사이가 좋지 않았다’라고 에둘러 표현하는 석희재의 마음이란….
그를 미루어 생각해 보는 이현의 심장도 덩달아 울렁거렸다.
이현의 눈치를 보던 석희재는, 이어서 낯선 애교를 부리듯 고개를 숙인 채 이현의 손등에 입술을 묻었다. 아직 주변이 밝았기에 이현은 깜짝 놀라 손을 파드득 빼냈다. 석희재는 다시 손을 잡으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조금 미안해졌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불이 완전히 꺼지고 나서야 이현은 마음을 놓았다. 그제야 완전히 숨었다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깜깜한 사위는 아늑한 기분을 주었고, 가끔 옆을 바라보면 스크린 불빛에 드러난 석희재의 얼굴이 있었다. 고집스럽게 앞만 바라보는 우수에 찬 눈가와 빛에 빛나는 매끄러운 피부도.
한참을 바라보면 눈길을 느낀 석희재가 고개를 돌리며 몰래 잡은 손을 꽉 쥐어 오곤 했다. 애틋한 눈이었다. 애무라도 하듯 손바닥을 스치며 일부러 야릇하게 어루만지면 얼어붙어 버리는 눈빛도 마음에 들었다.
그렇게 손을 희롱하다 보면 석희재가 또다시 어깨에 이마를 스르르 기대 왔다.
‘왜? 졸려?’
음성 없이 속삭이자 석희재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섰어.’
그러면 말문이 막혀 버리는 쪽은 이현이었다.
다시 손을 빼내어도 이제 석희재가 강제로 붙들었다. 그러고 보니 아까 어깨에 기대던 건 그만하라며 어깨를 꾹 누르는 항의의 뜻이었는지도 모른다. 충동질 당한 흥분을 어쩔 줄 몰라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음… 그때 진짜 좋았는데. 물론 공공장소에서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었지만… 약 1% 정도.
두 사람은 영화 중간에 차례로 자리를 떠 화장실로 향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오는 사람이 없나 확인한 후 가장 안쪽 칸 안에 함께 들어갔다. 석희재가 문을 닫아거는 사이 이현은 급하게 바지만 벗어 내렸다. 엉덩이를 쥐고 벌리자 뒤에서 석희재가 거칠게 심호흡을 하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철컥 소리와 함께 차가운 벨트가 꼬리뼈에 닿고, 예고도 없이 삽입 당했다. 안쪽이 쩍 갈라지는 듯했다. 이현이 좋아하는 종류의 고통이었다. 발끝이 저렸다.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마른 살 안쪽을 파고드는 흉기에 통증을 느낀 것도 잠시, 프리컴으로 젖어 들어 물을 잔뜩 흘리는 성기가 적당히 윤활제 역할을 해 주었다. 퍽, 소리를 내며 세차게 처박힐 때 이현은 힘겹게 손을 뻗어 물을 내렸다. 헉헉거리는 숨소리를 꾹 참고 사람의 기척이 들리면 키스로 서로의 입을 막았다. 배 안쪽 느끼는 지점이 짓뭉개질 때는 도무지 제 발로 서 있기가 어려웠다. 잔뜩 흥분한 석희재는 일전의 섹스와 달리 완전히 여유를 잃은 것 같았다. 황홀했다.
모니터를 앞에 둔 채로 초점이 나간 이현은 대차게 딴생각 중이었다. ‘이러니 영화 내용이 기억이 안 나지.’ 아무튼 그의 머릿속에는 두 사람이 함께 본 수많은 영화의 내용보다, 섹스의 기억이 가장 강렬하고도 소중하게 남아 있었다.
“요즘 영화 뭐가 재밌어요?”
“잘 모르겠네. 나도 본 지 좀 돼서. 마지막으로 영화관 간 게 반년 전인가.”
“이 PD님이 영화 좋아하지 않아?”
파티션 너머에서 문득 제 이름이 들려 이현은 석희재의 생각을 떨쳐 내고 고개를 내밀었다. 사무실 가운데 조그만 테이블에 모여앉은 홍보 팀 3명이 서로 머리를 맞대고 간이 회의 중이었다.
“영화는 왜요?”
이현의 물음에 홍보 팀 막내 신아름이 냉큼 답했다.
“개봉작 있으면 우리 거랑 좀 묶어 보게요.”
“아, 예능 내보내려고? 작가랑 연락이 됐어요?”
“이제 해 봐야 돼요.”
“음….”
뻑뻑하게 뒤로 젖혀지는 사무실 의자를 등의 무게로 밀면서 이현은 생각에 잠겼다. 지상파 프로그램 중 별다른 공통점도 없는 이들을 네 명씩 묶어 게스트로 부르는 토크쇼가 있다. TV를 볼 시간이 없는 이현도 최근 화제 된 게스트들을 알고 있을 정도니 홍보 화제성은 제법 괜찮은 프로라고 말할 수 있었다.
“요즘 영화… 국내 개봉작이 은근히 없던데.”
이현은 석희재와 섭렵한 최근 개봉작을 하나하나 짚어 봤다. 뭘 봤냐는 질문에 손가락을 접으며 제목을 말하자 금세 직원들의 눈초리가 미묘해졌다.
“그렇게 바쁜데 영화는 언제 저렇게 챙겨 봤대?”
“그러고 보니까 요즘에 좀 이상하지 않아요?”
“맞아. 맨날 밥도 따로 먹구.”
“지갑만 챙겨서 허겁지겁 나가구….”
“얼굴도 예뻐지고….”
“저건 분명히….”
그들의 의견이 모일 때쯤 이현은 도리어 미간을 구겼다.
“아니에요.”
“찔리나 봐. 우리가 뭐라고 했는데 아니래?”
“아, 진짜 아니에요.”
“진짜 연애하는 거 아니에요?”
“아니라니깐.”
“그럼 썸?”
“아~ 아냐.”
이현은 손을 휘저으며 다시 모니터로 얼굴을 향했다. 강하게 부정하는 걸 보니 더 수상하다며 들으란 듯이 쑥덕이고 있었다.
이현은 초조해졌다. 아니라는 강한 증거를 하나 제시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자신은 말을 꾸며 내거나 연기를 하는데 영 소질이 없었다. 말이 길어지면 곤란해지는 것은 항상 자신 쪽이 된다. 그것을 알고 있는 이현은 그냥 꿀 먹은 벙어리가 되기를 택했다.
“그럼 영화 말고 드라마나 컴백하는 가수 쪽으로 찾아볼까?”
“그게 나을지도요.”
“영화는 빨리 컨택 안 되면 관에서 내려가 버릴 수도 있으니까.”
“맞아. 맞아.”
회의가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돌아갔을 때였다. 문득 궁금증이 든 이현이 파티션 너머로 다시 고개를 내밀었다.
“근데 우리 쪽에서는 누가 나가요?”
“토크쇼 나갈 짬이 되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화제성을 적당히 갖춘 프로그램에 나갈 급이 되면서도 유들유들하게 홍보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라. 딱히 떠오르는 건 한 명 정도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배우나 이현이 떠올린 배우나 같은 사람인 모양이었다.
“한지우 선배하고.”
홍보 팀장이 펜을 돌리며 말했다.
“역시.”
납득한 이현이 모니터 쪽으로 고개를 돌리기 무섭게 등 뒤에서 익숙한 이름이 들려왔다.
“희재 씨도 생각 중이에요.”
“희재요? 석희재요?”
깜짝 놀라 이현이 되묻자 홍보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요즘 기세 장난 아냐. CF 봤어요?”
“와, 저 봤어요. 잘생긴 줄은 알았는데 진짜 저렇게 잘생겼었나 싶더라.”
“난 꿈에도 나왔잖아. 진짜 맹세코 석희재한테 별 관심 없었는데 꿈꾸고 나니까 급 결혼 생각이….”
“급기야 미쳤구나.”
“아, 그런데 무슨 느낌인지 알겠다….”
재잘재잘 떠드는 목소리들 사이에 이현이 난처한 목소리로 말했다.
“예능을 내보낸다고요? 걔가 말주변이 썩 좋은 것 같지는 않았는데….”
“에이. 그런 건 편집이 다 해 주지.”
그러면서 홍보 팀장의 열렬한 주장이 이어졌다. 연극, 뮤지컬로 커리어를 시작했지만 지금은 훌륭한 매체 배우가 되어 극장에서 보기 어려워진 스타들의 이름을 줄줄 읊으면서, 석희재도 언제 그렇게 될지 모르니 ‘우리 배우’일 때 실컷 홍보에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 주된 논리였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납득할 만한 주장이다. 이현은 입을 다물었다.
그때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ㅇㅇ]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따로 약속을 잡은 적은 없었다. 곧 점심시간인데 설마 또 회사 근처에 와 있는 건가 싶었다.
이현은 핸드폰을 챙겨 든 후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전화를 받으며 문으로 향하는 이현을 향해 직원들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저저저! 저거 봐…. 수상하지.”
“밖에서 전화 받는 걸 한 번을 못 봤는데.”
“애인 맞다니까.”
평소에도 놀리는 맛이 있는 이현을 주시하던 직원들이 또 짓궂게 굴었다. 덕분에 이현은 전화를 받아 들고도 아무 말도 못 하고 뻣뻣이 굳었다. 건너편에서는 석희재가 아무 말도 없는 이현을 향해 ‘여보세요? 형? 형.’ 하고 말을 걸어 댔다.
“아무튼 다들 조용히 해. 피디님 애인하고 통화하잖아.”
결국 이현은 항복한 말투로 이실직고하고 말았다.
“애인 아니거든요! 희재예요. 석희재.”
***
애인 아니거든요!
희재예요. 석희재.
아까 핸드폰 너머에서 들려온 말이 여전히 석희재의 귓가에서 메아리치고 있었다. 애인 사이인 걸 시원하게 밝힐 수 있는 관계도 아니니 당연한 일이라고는 생각하지만….
‘상처야….’
약간의 대미지는 입었다.
석희재는 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현에게 식기를 세팅해 주면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현은 핸드폰에 코를 박을 기세로 딴청을 피우고 있다. 역시 연기에는 소질이 전혀 없었다. 아이돌 같은 얼굴만 믿고 연기에 도전했다가는 발 연기의 아이콘이 되었을 것이다.
“희재 씨, 근데 웬일로 대학로까지 왔어요. 인터뷰 있어요?”
석희재에게 말을 걸어온 것은 일전에도 몇 번 본 적이 있던 컴퍼니의 홍보 팀장이었다. 석희재는 고개를 저었다.
“일 때문에 온 건 아니고요.”
석희재는 말을 이으며 이현을 다시 응시했다. 마침 근처에 있으니 점심을 사 주고 싶다는 말에 이현은 왜인지 지친 듯한 표정으로 홍보 팀 직원 3명을 이끌고 우르르 나타났다.
사귄 지 겨우 일주일 만에 그만 좀 하라는 티를 이렇게 내나.
하지만 이현과 사적으로 만나 데이트 기분을 낼 수 있는 시간은 식사 시간밖에 없었다. 24시간 보고 있어도 아쉬운지라 그와 떨어져 있을 때면 애가 닳았다. 덕분에 석희재는 자력에 이끌리듯 매일 이현의 회사 근처로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현은 갑작스러운 석희재의 호출을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저녁을 먹자면 먹고, 영화를 보자면 보았다. 그러나 퇴근 시간 이후에 불러내면 세 번 중 두 번은 다시 사무실로 돌아가곤 했다.
‘형, 일 안 끝난 거였어?’
‘응. 마무리해야 될 게 있어서. 먼저 우리 집에 가 있어도 돼.’
그러면 바쁜 그의 시간을 빼앗았다는 죄책감에 뒤늦게 후회하게 되는 쪽은 석희재였다.
이현이 회사로 돌아가면 석희재는 먼저 이현의 집에 가서 가볍게 집 정리를 하며 그의 퇴근을 기다렸다. 술자리는 확연히 줄었지만 언제나 퇴근이 늦었으며, 돌아온 이현은 겨우 씻고 지쳐 잠들기 일쑤였다. 그렇게 잠든 그를 바라보며 석희재 역시 하루를 마무리하곤 했다.
그게 힘에 부쳐서… 이제 다시는 회사에 있을 때 찾아오지 말라는 말을 이런 식으로 하는 건지도.
그래도 석희재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냥 피디님이랑 점심 먹고 싶어서 왔어요.”
이현은 맥없이 밑반찬만 주워 먹고 있었다. ‘오~’ 하는 반응은 다른 직원들에게서 나왔다.
“아, 두 분 친하다고 하셨죠.”
막내 신아름이 박수를 짝, 쳤다.
“나도 들었던 것 같아. 희재 씨 이 PD님 추천으로 이쪽 들어왔다고.”
“생각보다 더 친하구나? 사석에서는 형, 동생 해요?”
아니요. 희재야, 현아. 하죠.
애인이니까.
석희재는 속으로만 대답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현아’ 하고 불러 본 적도 없다는 게 심장을 따끔 찔렀다. 오늘 밤에는 꼭 ‘현아’하고 불러 보리라 마음을 먹어 보았다.
그때 홍보 팀장이 말을 꺼냈다.
“그럼 피디님이 희재 씨 꼬셔 주면 되겠다.”
“맞네, 맞네. 둘이 친하니까.”
형이 나를 꼬셔 주다니? 그 단어가 괜히 반가웠던 석희재는 고개를 들고 주변을 차분히 관찰했다. 저 말고는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기인지 벌써 납득하는 얼굴이었다. 불편한 낯을 한 건 이현뿐이었다.
“아… 안 돼. 얘 말주변 별로 없어요.”
“그런 건 다 편집해 준다니까.”
“좋게 해 준다는 보장도 없잖아요.”
무슨 이야기인지는 몰라도 방송과 관계된 것인가 보다. 궁금해하던 차에 마침 음식이 나와 대화의 맥이 끊겼다.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그릇을 받아서 자리에 돌린 후 석희재는 이현이 자신을 ‘꼬셔’ 주기를 아주 약간 기대했다.
하지만 직후 이현에게서 나온 대답은 영 거슬리는 것이었다.
“그냥 하려던 대로 지우 선배 컨택 하세요.”
석희재는 눈썹을 치켜올렸다. 테이블 아래 내려놓았던 손이 꽉 쥐어졌다. 드물게 불편한 심기가 드러나는 얼굴이지만 본인은 자각도 못 했다.
“에이. 식는다, 식어.”
“진짜 재미없다. 이 피디님.”
투덜거리는 것도 잠시, 곧 화제가 다른 쪽으로 넘어갔다.
이어진 식사 자리는 표면상으로는 화기애애했다고 볼 수 있었다. 서로 한 마디도 나누지 않는 이현과 석희재를 빼면 미묘한 불편함을 감지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식사를 마치고 직원들은 먼저 회사 건물로 향했다. 손을 흔들어 주는 이현 옆에서 석희재는 다시 마스크를 썼다. 술렁이는 마음을 억누르며 일부러 그들에게 눈을 접어 웃어 주었다.
그들의 모습이 빌딩 안으로 완전히 사라진 직후였다. 막 담뱃갑을 찾고 있던 이현의 손목을 강제로 잡고 석희재는 그를 이끌었다.
“야, 어디 가?”
“…….”
“어디 가냐고. 야!”
석희재는 대답하지 못했다. 자신도 잘 몰랐으니까. 딱히 목적지를 정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다른 이들의 시선을 피해야 한다는 생각뿐.
결국 석희재가 도달한 곳은 작은 빌라들 사이, 길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곳이었다.
도착하고 나니 아차 싶었다. 여긴 자신이 이현에게 처음으로 대차게 내쳐진 곳이었다. 낯선 골목들 사이를 헤매던 두 다리가 절대 잊을 수 없는 곳으로 저를 인도했다.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졌다.
“아이구, 힘센 것 좀 봐. 내 손목 봐라.”
이현은 혀를 차면서 셔츠를 걷어 올려 자기 손목을 보여 주었다. 흔적이 쉽게 남는 피부에 네 손가락이 우스울 정도로 선명히 찍혀 있었다. 저러다 금방 가라앉는다는 걸 알면서도 석희재는 멈칫했다. 미안해서 안절부절못했다.
달래 줄까? 사과할까?
잠시 갈등하던 석희재는 곧 마음을 다잡고 신경 쓰이던 것을 기어코 입 밖에 냈다.
“한지우 얘기는 뭐야?”
“선배라고 하랬지.”
이현은 속도 모르고 이 상황에 정정을 해 댄다.
그 말에 석희재가 울컥한 순간,
“…저기. 미안해.”
그가 누그러진 목소리로 대뜸 사과해 왔다.
“갑자기 사람들이랑 나와서 놀랐지. 나가는 길에 딱 걸려서, 너랑 만난다니까 다들 같이 먹으면 안 되냐고. 거절할 명분이 없잖아…. 그래서 그렇게 됐는데?”
말이 끝날 때쯤 이현은 방실방실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따져 묻고 싶은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으나 뻔뻔한 저 얼굴에 아무 말도 못 했다. 그가 웃었기 때문이다.
저 얼굴을 아까처럼 다시 심각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석희재는 팔짱을 낀 채로 숨긴 손가락을 쥐락펴락하면서 갑갑한 속을 참았다. 그러면서도 담배를 문 이현의 통통한 윗입술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당장 키스해 주고 싶기도 하고, 어깨를 잡고 앞뒤로 흔들면서 ‘미안하지도 않으면서 미안한 척하지 마’ 하고 비난하고 싶기도 했다.
“하….”
“너도 담배나 한 대 피워라.”
속이 들끓는 저를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얼굴이 원망스러웠다. 석희재는 거절하고 벽에 등을 붙였다. 그리고 이현이 한 대를 다 피울 때까지 잠자코 기다렸다. 그러면서 생각에 빠졌다.
한지우 일이 별 게 아니라지만 그건 이현에게나 별거 아닌 일이다. 저는 아니었다. 설명이 가능한 일이라면 듣고 싶었다.
“한지우… 선배, 얘기 뭐야.”
다시 그 이름을 꺼내는 자신이 치졸하고 작게 느껴져, 석희재의 목소리는 퍽 작았다.
“아.”
이현은 정말로 별거 아니라는 듯이 수더분히 대답했다.
“뮤지컬 홍보로 누구 하나 예능 내보낸다고…. 너 그 프로 알지? 어지간하지 않으면 완전 먹잇감 돼.”
“예능?”
“응.”
담배를 발로 비벼 끈 이현이 이어 말했다.
“너는 한 마리 참치처럼 회칼로 막 해체당할걸. 별로 득도 없고.”
“…….”
“그냥 나가지 마.”
“…그거 혹시 녹화 가면 형이랑 같이 가는 거야?”
“아니? 홍보 팀이 가겠지. 홍보니까.”
석희재는 그 말에 조금 안도했다. 그러면 갈 필요가 없었다.
사실 퍽 중요한 일도 아니었다. 한지우와 저를 동일 비교 선상에 놓았다는 사실에 잠깐 눈이 돌아간 것뿐.
그리고 오늘의 점심 식사도 의도적인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합석하게 된 거라면 괜찮았다.
하지만 ‘애인이 없다’라고 둘러댔다는 사실에는 조금 응어리가 남았다.
“여기서 키스해도 돼?”
솔직하게 하지 못할 말은 마음속에 덮어두고, 석희재는 대신 다른 것을 물었다.
그러나 그 물음에 이현은 묘한 기대감이 섞인 얼굴을 했다. ‘키스?’ 하고 중얼거리더니 도로 되물었다.
“너 뭐 타고 왔어?”
“나? 택시.”
“아… 혹시 밴 타고 왔나 했네.”
“밴은 왜.”
“비어 있으면.”
이현이 가까이 다가오더니 석희재의 귓가에 속삭였다.
‘밴에서 섹스하는 게 내 소원.’
그러고는 얼른 물러났다. ‘섹스’라는 단어를 발음할 때의 혀의 스침 때문에 귓가가 간지러워졌다. 석희재는 뜨거운 귀를 감싸고 이현을 가늘어진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왜. 네가 애인 생기면 해 보고 싶은 거 물어봤잖아.”
“…….”
“아니거든… 그… 딜도 취급한 거.”
석희재의 차가운 반응에 이현이 변명을 주워섬겼다. 석희재는 예쁘고 밉살스러운 그 입술을 가만히 노려봤다.
***
「나 연습실」오후 1:32
「형은 어디야」오후 1:32
「언제 와?」오후 1:37
한참 만에 열어 본 핸드폰에는 메시지가 여러 개 도착해 있었다. ‘이응이응’으로부터.
털썩. 텅 빈 극장의 1열에 주저앉은 이현은 이내 길게 누워 버렸다. 눕자마자 지금까지 인지하지 못했던 허리에서 뚜둑, 소리가 나 절로 신음이 흘렀다. 손잡이 없는 의자에서는 퀴퀴한 냄새가 났다. 딱히 쾌적하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누우니 좋았다. 이현은 눈을 깜빡거리며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열을 지어 층층이 쌓아 올려진 조명들 중, 딱 한 줄만 낮은 조도로 켜져 있었다.
등줄기에 고인 땀이 셔츠에 물드는 것 같아 이현은 불편하게 몸을 틀었다. 답장을 해 줘야 했다.
「나도 극장」오후 1:43
오늘 있을 시츠프로브를 위해 연습실에 더 많은 의자가 필요했다. 연습실에는 기존 배우, 스태프가 쓸 만큼만 의자가 준비되어 있었고, 제작사 창고에 있는 건 수가 애매하게 모자란 데다 접히는 형태가 아니라서 이동이 어려웠다. 극장에는 분명히 여분이 있을 것 같아 남산 쪽에 물어보니 다행히도 접이식 의자가 충분히 있단다. 문제는 당분간 쓸 일이 없어 대극장 오케스트라 피트 안에 처박아 놨다는 거다.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열두 시쯤 사무실에서 나왔다. 오늘 시츠의 콜은 2시. 그 전에 세팅을 마쳐야 했다. 의자를 꺼내 끌차에 올리고 털털 밀면서 연습실까지 몇 번이나 왕복했더니 녹초가 됐다.
평소에는 연습실 창고에 두던 게 왜 하필 피트에 들어가 있나…. 불만을 가져 봤자 의미가 없었다. 이게 다 극장 없는 설움이다.
‘나도 막내 하나만 있었으면.’
이현은 죽어도 제작 팀 신입을 뽑아 주지 않는 회사를 원망했다. 물론 간혹 인턴을 뽑을 때도 있긴 하다. 이현이 제 뼈가 삭진 않을까 걱정을 할 때쯤. 하지만 요즘 어린 친구들은 무척 똑똑해서 약 3개월간의 직업 체험이 끝나면 다시는 업계에 발도 들일 생각을 하지 않고 도망친다. - 3개월보다 짧을 때도 부지기수다. - 아무튼 깔끔하게 미련을 떼어 낸다. 저는 그러지를 못했다.
이현은 길게 한숨 쉬었다. 직함만 피디지 하는 일은 3년 전 막내 때와 다름이 없다. 하긴, 회사가 어디 가서 무시당하지 말라는 의미로 명함을 파 주긴 했지만 진짜 피디다운 일을 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이 열악한 공연계에서 피디라고 허세만 부릴 수 있는 사람이 있는지도 의문이고.
다시금 연달아 진동이 울려 댔다. 짧은 휴식을 방해하는 핸드폰을 더듬거려 찾고는 화면을 보니 연달아 메시지가 도착하고 있었다.
「극장 어디?」오후 1:43
「연습실인데 형 안 보이는데」오후 1:44
「밖에 있어?」오후 1:44
이현은 답을 고민했다. 대극장 쪽이라고 말해 줘도 석희재가 관계자용 출입구를 아는지는 의문이었다. 어차피 곧 연습실에서 마주치게 될 것 같기도 했고.
「연습실로 갈ㄱ…」
그러나 작성하던 것을 다 찍고 보내기도 전에 전화가 걸려 왔다. 성격이 퍽 급하다.
“여보세요.”
- 목소리 왜 그래?
“내 목소리가 왜.”
- 어디야? 극장이야? 올라오는 길에 형네 회사 차 못 봤는데.
대답하면서 이현은 벌써 피식 웃고 있었다. 성격이 급하다고 생각하자마자 쏟아지는 질문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한 번에 하나씩만 물을래?”
- 아… 어디야?
제일 급한 건 그거였나보다. 이현은 피곤한 눈을 비비며 답했다. 대낮인데도 피로가 눈꺼풀을 내리누르는 이유는 이곳이 사위 어둑한 극장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 대극장. 이제 나갈 거야.”
- 대극장?
“여기 피트에 뭐 챙길 게 있어서 왔어.”
- 도와줄까?
“아니, 다 했어.”
네가 있는 연습실 구석에 산처럼 쌓여 있는 접이식 의자가 바로 내가 가져다 놓은 거란다…. 문득 이현은 생각했다. 그 의자를 가서 예쁘게 줄 맞춰 펴 놓고 악보대까지 세팅을 해 놓아야 할 텐데, 하고.
에이. 급하면 알아서들 가져다 쓰겠지 뭐. 이현은 자포자기했다. 가끔 일을 ‘잘’하기보다는 일단 하는 데만 우선하는 저 자신이 싫어질 때가 있다.
하지만 더 열심히 하다 보면 분명히 뼈가 삭는다고. 제명에 못 죽는다.
실제로 연습실에서는 오케스트라 단원들이 속속들이 도착해서 의자를 손수 집어 들고 우왕좌왕 거리며 제자리를 찾아가 악보대를 세팅하고 있을 테다. 그 모습을 보며 연출부들은 ‘제작사가 일을 하다 마네’ 하고 밉살맞은 한 두 마디를 던질 것이 분명했다.
그 모든 상황이 눈에 선명하게 그려졌지만 이현은 알게 뭐냐, 하고 자포자기했다.
- 그럼 이제 와?
이현은 작게 하품했다.
“일 마무리하고 갈게.”
이제 딱히 대극장에 볼일은 없었으나 조금이라도 더 누워 있고 싶었던 이현은 그렇게 답했다.
- 시츠 시작 전에….
“응.”
- 시작 전에 와?
“아마….”
오늘따라 질문이 많다. 이현은 눈을 감았다. 삼십 분, 딱 삼십 분만 쉬다 가자고 정했다.
관객이 아무도 들지 않은, 공연 시간 외의 극장은 아무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만큼 방해받지 않고 휴식을 보장받을 수 있다. 대극장으로 들어오는 관계자 출입구의 열쇠는 이현의 주머니 안에 있었다. 이걸 극장에 반납하기 전까지는 오롯이 제 공간인 셈이다.
이현은 가물가물 감기는 눈꺼풀 위로 시계를 상상했다. 딱 삼십 분 만큼만 시곗바늘을 돌리는 상상을 하고는 얕은 잠이 들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이현은 비현실적인 광경에 몇 번 눈을 깜빡였다.
사위가 깜깜했다. 잠시 후 자신이 어디에 누워 있는지 깨달은 이현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가 부주의하게 극장 의자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너무 놀라 신음 소리도 나지 않았다. 이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가장 당황스러운 점은 조명이 꺼져 있었다는 것이다. 아마도 관리인이 순찰을 돌다가 빈 극장에 조명이 켜진 걸 보고 내린 것 같았다.
“망했네, 몇 시야….”
이현은 주머니를 더듬어 가며 핸드폰을 찾았다. 액정에서 쏟아져 나오는 빛이 망막을 눈부시게 찔러 댔다. 오후 3시 5분. 이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시츠가 시작된 지 한 시간여. 이 정도면 대강 일이나 미팅을 하다가 잠깐 자리를 비웠다고 둘러댈 수 있는 정도였다.
극장을 빠져나와 문을 잠그고 사무실에 키를 반납하러 갔다. 그러고는 적응되지 않는 햇빛 샤워를 받으며 무기력하게 연습실로 향했다. 가는 길에 석희재가 저를 재차 찾았다는 것이 기억이 났다. 시작 전에 그토록 보채더니, 그사이 도착한 메시지는 없었다.
시츠 전에 할 말이라도 있었나….
이현은 뒤늦게 혀를 찼다.
도착한 연습실 건물 주변에는 평소보다 훨씬 많은 차량이 주차되어 있었다. 미리 연습 스케줄이 돌았는지 간식 차도 세 대나 와 있었는데, 그중 하나에는 석희재 이름이 달려 있었다. 이현은 굳이 석희재의 간식 차로 가서 커피를 한 잔 받았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연습실 안으로 들어갔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을 때에 평소와 같은 MR이 아니라 진짜 악기의 소리가 들려왔다. 악보를 넘기는 소리와 음악감독의 육성도 섞여 있었다. 이현은 시야가 가려진 계단을 올라가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고 안쪽을 살폈다. 늦게 왔으니 가능한 조용한 들어가리라 생각하면서.
그때 오케스트라의 연주가 뚝 끊겼다. 침묵 직후, 강렬하게 현을 긁는 바이올린 연주가 들려왔다. 악기 한 대가 이토록 강렬할 수도 있구나, 그런 감상이 절로 드는 도입부였다.
가장 생소한 점은….
‘희재?’
그 악기를 연주하는 주체가 석희재라는 점이었다.
이현은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잊고서 파티션 뒤에 몸을 반쯤 숨긴 채로 얼어붙었다. 언제나 분위기가 차분히 가라앉았던 것이 믿기지 않게 역동적인 연주였다. 현을 단단히 짚은 손가락의 마디에 선명히 선 가는 뼈와 힘줄이 뚜렷했다.
감은 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 다문 입술은 전부 제가 아는 이의 모습인데 너무나 낯선 조합이라 쉬이 믿어지지 않았다.
수 분 후 석희재는 악기를 거두고 자리에 앉았다. 제 몫의 넘버를 마친 배우처럼. 그러고는 별로 주목받을 만한 일은 아니었다는 듯이 무심한 얼굴로 악보를 넘겼다.
이현은 여전히 얼떨떨한 채로 서서 안을 바라보고 있었다. 충격받은 것은 저뿐인지 다른 배우들도 이어지는 다른 넘버에 집중했다.
속성 과외라도 받은 건가?
하지만 아무리 악기에 무지한 저라도 방금 전에 본 석희재의 연주가 하루 이틀 배워서 흉내 낼 수 있는 점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이현은 조용히 연습실을 크게 돌아 배우 열의 가장 뒷자리로 갔다. 어딘가 남은 의자가 있으면 앉아서 감상하고 싶었지만 몇 개 남은 의자는 전부 오케스트라 쪽에 있었다.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며 굳이 가로질러 가서 의자를 가져올 생각은 없었기에 이현은 벽에 기대어 섰다. 한 모금도 마시지 않은 얼음이 담긴 컵 표면에서 물방울이 떨어졌다.
이현은 석희재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셔츠를 입은 너른 어깨가 작은 간이 의자에 기대고 있었다. 걷어붙인 소매 아래의 저 단단한 팔이 악기를 든다는 것은 상상도 못 했다.
저런 재주가 있으면서…. 보통 몰두한 게 아닌 것 같은데.
어떻게 한 번을 제 얘기를 안 했을까.
이현은 단순한 궁금증에 휩싸였다.
‘난 연상이 좋아. 우리 우습다. 서로 취향도 아닌데 이러고 있네.’
‘너도 다녀 봐서 알잖아. 원래 회사는 다 개 같아.’
‘클래식은 잘 모르지…. 솔직히 관심 없어.’
무의식적으로 내뱉었던 제 발언 하나하나가 석희재를 입 다물게 한 줄은 꿈에도 모르고.
이현은 사귀는 사이인데 서로 참 아는 게 없다는 생각 반, 어떻게 제 얘기를 저렇게 안 할 수가 있나 신기한 마음 반으로 석희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때였다. 마치 그 시선을 물리적으로 느낀 듯, 석희재가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앉은 채로 고개를 돌리자 또렷한 선의 콧대가 드러났다. 뒤를 응시한 석희재는 이현의 존재를 눈으로 더듬듯 확인하고는 다시 조용히 앞을 보았다.
전체 넘버를 따라가는 도중 석희재는 두 번 정도 더 일어났다. 제 몫의 넘버가 오면 목소리 대신 악기로 노래했다. 그쯤 되니 이현도 연출의 의도를 알 수 있었다. 덜 가다듬어진 노래나 연기 대신 확실한 특기로 임팩트를 주는 쪽을 택한 것이다. 저는 모르는 석희재를 남들은 미리 알고 있다는 것은 이현에게 묘한 씁쓸함을 가져다주었다.
아무튼 그의 첫 등장에 관객들은 충격받고 또 매료될 것이다. 방금 전 제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 시츠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쪽은 이현이었다. 얼른 그에게 자신이 방금 본 것에 관해 묻고 싶어졌다.
6시. 저녁 휴식시간이 되자마자 석희재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이현을 한 번 쓱 바라본 후 저를 따라오라는 듯이 먼저 바깥으로 향했다. 이현은 얼음이 다 녹은 컵을 들고 그 뒤를 따라갔다.
“현아! 오랜만에 보네.”
“네? 에이. 저번 주에도 봤는데요,”
이현은 제 팔을 붙잡는 한지우에게 웃으며 묵례하고는 그 자리를 매끄럽게 빠져나갔다.
계단을 뛰어 내려가자 저 멀리 존재감 거대한 밴 뒤로 쏙 들어가는 석희재의 뒷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현도 가볍게 달려가 차 뒤로 돌았다.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석희재가 이현을 돌아봤다.
석희재의 딱딱한 얼굴에는 약한 긴장이 서려 있었다.
“너 뭐냐?”
이현은 성큼 다가가 히죽대며 석희재의 팔을 툭 쳤다. 그제야 석희재의 입가에서 긴장이 깨어지고 천천히 미소가 돌았다.
“형 안 오는 줄 알았어.”
“아… 바빴어. 원래 피디님은 일이 많아.”
“어련히.”
뻔뻔하게 얼버무리자 석희재는 언제나 그랬듯 선선히 속아 주었다.
아니, 속아 주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제 말은 일단 믿어 버리는 건지도….
그제야 시츠 전에 귀찮을 정도로 언제 오느냐고 보채며 메시지를 보냈던 의도가 읽혔다. 아마도 보여 주고 싶었나 보다. 약속한 콜 시간을 넘겨 한 시간이 꼬박 지날 때까지 얼마나 애가 탔을까. 첫 넘버가 다가오기 직전까지 보이지 않는 저를 보며 허무함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그 사이 꽤 애가 탔을 텐데도 지금 석희재는 미소 짓고 있었다. 왜 늦게 왔는지 책망 한 마디도 하지 않는다. 제 마음 앓이는 전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는 듯이.
이현은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물었다.
“그걸 보여 주고 싶었어?”
석희재는 말없이 고개를 한 번 느리게 끄덕였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로 밴에 기대어 묻는다.
“조금은 반했어?”
대놓고 물으면 솔직해질 수밖에 없는데.
이현은 훅,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머리가 짧게 허공에 떴다가 가라앉았다.
“어. 죽여 주게 섹시하더라.”
석희재가 주먹을 입가에 가져다 대고 쿡쿡 웃는다. 뭔가를 참는 웃음이었다. 이현의 미간이 구겨졌다. 내가 밝히는 게 잘못인가. 하지만 원래 제 취향이 그랬다. 자신은 속물이라 남들에게 주목받는 사람에게 약했다. 기왕이면 유명한 사람, 남들이 탐내는 사람에게 깔려 보는 게 소원이었다. 물론 그런 사람들 중에 저와 만나 주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기에 전부 다 망상에 그쳤지만….
“비웃지 마. 농담 아니니까.”
“…진짜 기뻐서 웃는 건데.”
“아, 그래?”
이현은 비장한 얼굴을 한 채 가볍게 주먹을 쥐고 까맣게 선팅된 밴의 창을 콩콩 두드렸다.
“그럼 지금 콜?”
이현을 내려다보던 석희재의 눈빛이 변했다.
***
혹시나 누군가 보는 이가 있을까 봐 신중하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석희재는 밴의 문을 열었다. 냉큼 올라탄 이현이 안을 들여다보며 감탄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더니 석희재가 제대로 다리를 올리기도 전에 옷자락을 확 잡아당겼다.
“읏, 형!”
석희재는 이현에게 셔츠 깃을 잡혀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 어찌나 세게 당겼는지 목덜미가 컥, 소리가 나도록 조이고 앞 단추가 터졌다.
이현은 튕겨 나간 단추를 보고는 멋쩍게 웃었다.
“얼른 이리와.”
등 뒤로 문이 다 닫히기도 전에 이현이 품 안에 안겨 들며 닿는 곳 아무 데나 키스를 해 왔다. 입술이 잠깐 떨어지는 사이에는 스스로 옷을 벗고 있었다. 벌써 상반신을 벗고 피부를 드러낸 이현이 곧바로 석희재의 바지 버클을 풀었다.
“급해?”
석희재는 마른침을 삼켰다.
“으응… 희재야.”
대답 대신 조르듯이 부르는 이름은 관계 중의 신음을 연상케 했다. 노린 행동인 줄을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흥분하고 만다. 이현은 옷을 벗다 말고 다시 달려들어 석희재의 벌어진 셔츠 안쪽 목덜미에 새처럼 입술을 비벼 댔다.
귀여운 애무도 잠시, 갑작스러운 상황에 다소 소극적인 석희재를 밀어 눕힌 이현은 그 위에 보란 듯이 올라탔다. 그러면서 일부러 석희재의 바지 가운데를 무릎으로 지그시 눌러 댔다. 벌써 질량감을 가지고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 것을 아프지 않게, 그러나 적당한 체중을 실어 자극했다.
아무튼 흥분시키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다. 식은땀이 나도록 짜릿했다. 이현이 보여 주는 적극성에 석희재는 입술을 부질없이 깨물었다.
“내가… 그렇게 괜찮았어?”
형이 이렇게 안달 낼 정도로?
이현은 섣불리 대답하지 않았다. 석희재가 기억하기를, 이현이 이런 조급한 반응을 보였던 적은 이번까지 딱 두 번이다. 영화관에서 대형 스크린에 뜬 제 얼굴을 보았을 때, 그리고 다른 이들의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였을 때. 당시 이현은 수많은 사람이 주목하는 남자가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이 섹스를 보챘다.
이렇게 알기 쉬운 사람이 있을까?
문제는 그마저도 사랑스럽다는 것이다. 석희재는 이현의 초점이 흐릿한 눈과 벌써 흥분으로 달아올라 붉어진 눈꼬리를 깊이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그 눈이 잘 드러나도록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귀 뒤로 넘겨 주었다.
“음….”
이현은 고개를 흔들어 그 손길을 털어 냈다. 잔뜩 흥분한 지점에서 애틋한 애무를 시도하는 석희재의 방식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이.
그러고는 그 품에서 쉽게 벗어났다. 석희재가 비어 버린 팔 때문에 허무함을 느낄 찰나, 아래로 고개를 내렸다.
“어. 존나 꼴렸어.”
“…….”
“네 걸 당장 빨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할 만큼.”
그러면서 이현은 주저 없이 석희재의 발기한 성기를 꺼냈다. 능숙하게 손안에 가득 잡은 채로 위아래로 주무르고는 망설임 없이 입에 담았다.
“읏….”
그의 머리카락을 소중히 쓰다듬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이현의 뒤통수를 꾹 누르려다가 애써 펼쳤다.
“우리가, 아무… 사이 아니었어도?”
“…….”
“모르는 사이였어도 나랑 자고 싶었을 거란 소리야?”
석희재가 물었다. 그게 무척 궁금했다. 서로 모르는 완벽한 타인이었더라도 이현이 저를 유혹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지가….
그러나 이현의 내리깐 눈은 잠시 후 저가 몸 안에 담을 물건을 핥는 데에만 잔뜩 집중하고 있었다. 내 목소리가 들리긴 하나. 석희재가 의문을 가질 때였다.
이현이 뻐근한 턱을 손으로 쓸며 말했다. 목소리가 흥분으로 허스키했다.
“저 자식 어린 게 제법 섹시하네.”
“…….”
“그러고 집에 가서 자위했겠지.”
이현이 다시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이현의 취향은 훨씬 무르익은 나이의 연상들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도 그의 취향에서 한참 벗어난 연하인 제 모습이 성적으로 어필했다는 사실에 심장이 뛰었다.
“…읏. 입에 대고 말하지… 마.”
“얼굴도 몸도 저렇게 완벽한데 거기마저 이상형일 리가 없다고 딜도는 좀 작은 걸 골랐을지도….”
이현은 저만 웃긴 농담을 하고는 쿡쿡 웃었다. 받아들일 때를 대비해 일부러 성기를 타액으로 흠뻑 적셔 대는 바람에 입술이 반질거렸다.
여전히 적응되지 않는 이현의 대담한 농담을 들으면서 석희재는 몸을 조금 일으켜 위쪽 수납장 안에서 젤을 꺼냈다. 손을 잘못 더듬어 콘돔 박스도 함께 후드득 떨어졌다. 하늘에서 떨어지는 콘돔이 석희재에 머리에 맞고는 튕겨 나갔다.
무릎걸음으로 일어나 막 하의를 벗어 내리던 이현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넌 뭘 그런 걸 밴에 넣고 다녀?”
그 말에 석희재가 약간 붉어진 낯으로 말했다.
“형이 소원이라며….”
“뭐?”
“여기서 하는 거 소원이라며.”
석희재의 목소리가 작았다. 수납장을 탁, 밀어젖히는 손길에서 당혹과 수줍음이 읽혔다. 소원을 들어주려고 멀끔한 밴 안에 콘돔과 젤을 박 팀장 몰래 주섬주섬 챙겨 넣었을 석희재를 상상하니 웃음이 나서, 이현은 폭소를 터뜨렸다.
소리 내어 웃던 이현은 잠시 후 억지로 웃음을 삼켰다. 무드가 깨졌다고 생각했는지, 석희재가 다소 시무룩한 얼굴로 맥없이 귀만 붉히고 있었던 것이다.
이현은 석희재에게 가까이 다가가 젤을 빼앗아 들고는 입을 맞췄다. 풋풋한 입맞춤 한 번에 숱 많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며 눈을 내리깔았다.
석희재가 바이올린을 연주한다는 것은 자신만 몰랐지만….
이런 표정을 숱하게 본 것은 저뿐일 것이다.
그러면 됐지 뭐.
이현은 콘돔을 이로 뜯었다. 익숙하게 끄트머리의 공기를 빼내고 석희재의 성기에 조심스레 씌웠다. 그는 이제 이현에게 배운 대로 이현이 선호하는 재질의 초박형 콘돔을 산다.
콘돔은 길이가 모자라 뿌리 끝에 닿기는커녕 중간쯤에서 살짝 말렸다. 간단한 작업을 끝낸 이현은 석희재에게 안겨 들어 목덜미에 팔을 감고 일부러 강하게 끌어당겼다. 석희재는 제 목덜미에 갑자기 매달린 타인의 체중 때문에 앞으로 엎어지듯 무너졌다. 겨우 바닥을 팔꿈치로 받쳐 이현을 깔고 누르는 것을 막았다.
의자 사이 공간에 함께 구르게 되면서 충격이 둔부에 먼저 닿았다. 이대로라면 의자 손잡이에 분명 등을 박게 된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직후, 등줄기를 때리는 통증 대신 아주 둔탁한 충격만이 닿았다. 이현의 등을 석희재의 손이 넓게 받치고 있었다.
“윽….”
“괜찮아?”
대신 손등을 찍힌 석희재는 대답 없이 이현의 입술을 물었다.
반들거리는 젖은 입술을 부드럽게 마찰하고는 주저 없이 혀를 섞었다. 동시에 맞닿은 아래로 바짝 선 성기가 닿았다. 이현은 일부러 허리를 뒤틀며 벗다 만 바지를 발목 밖으로 털어 냈다. 덕분에 스치듯 회음과 성기가 미끄러지며 닿았고, 그때마다 석희재가 미간을 구기며 목 안으로 신음을 흘렸다.
그 표정이 좋아서 일부러 허리를 흔들며 안달 나게 했다. 젖어 미끈거리는 귀두가 입구를 여러 번 스치고 지나갔다.
삽입을 방해받자 석희재가 입술을 떼고 이현을 노려보았다. 매섭게 집중한 표정이다. 이현은 눈을 마주치고 말했다.
“박아 줘.”
“…….”
“응? 손가락으로는 얕아서, 흣… 안 돼. 네 걸로….”
이현은 스스로의 뒤를 휘젓던 손가락을 빼고 복부에 닿도록 바짝 선 석희재의 성기를 길게 훑었다. 어느새 젤로 젖은 손바닥의 감촉을 느낀 석희재가 잠시 혼란스러운 눈을 했다. 그러고는 갈라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궁금해.”
“뭐가?”
“왜 형만 항상 여유가 있는지….”
“…아….”
제대로 입구에 닿도록 조준한 끝이 점막을 밀고 들어오며 잔뜩 짓눌렀다. 압력에 의해 약하게 밀려나기를 잠시, 한 번 제대로 각도를 맞추고 진입한 성기는 단번에 길을 내며 쑥 들어왔다.
“하아….”
이현은 짧아진 호흡을 가다듬었다. 상체를 조금 들고는 의미 없이 아래를 바라보려 했다.
“아…!”
그러나 곧 고개도 들 수 없을 정도로 강하게 안겼다. 너른 등판에 짓눌려 숨도 쉴 수 없었다. 동시에 뒤가 허전해졌다. 쑥 뽑혀 나가 짧은 비명을 지른 순간 다시금 퍽, 박혔다. 대번에 안쪽 깊은 곳에 닿아 오는 자극에 이현의 허벅지 안쪽이 가늘게 떨렸다.
“나만, 헉… 제정신이 아닌 것 같아. 항상.”
“하아, 으응… 희재야.”
“읏, 정신 차려보면 내가 끌려… 가, 고 있고.”
초반인데 삽입이 꽤 깊었다. 진저리치게 좋아서 이현은 도리질을 쳤다. 맨다리를 당겨 석희재의 허리에 감았다. 그러고는 느낄 때마다 일부러 다리를 조여 댔다.
아직 옷을 갖춰 입은 석희재와 달리 이현은 나신이었다. 퍽, 퍽, 안에 깊게 꽂힐 때마다 마른 허리가 비틀리며 더욱 밑을 조였다. 겉으로만 보면 누가 봐도 여유를 잃고 정신없이 당하는 쪽은 이현인데도 석희재는 그렇게 말한다. 제가 끌려가고 있다고.
왜 그렇게 말하지.
나도 미치게 좋은데… 이만큼 환상적인 섹스가 어딨다고.
이현은 벌어진 입으로 헐떡이며 석희재의 등을 끌어안았다. 아래가 철퍽 맞부딪칠 때마다 일부러 그 등을 손톱으로 긁어 보았다. 손톱이 짧은 데다 석희재가 셔츠를 입고 있어 생채기는 낼 수 없었지만 그래도.
방 천장보다 낮은 차체의 차고가 눈에 보이는 게 황홀했다. 새 차 특유의 가죽 시트 냄새도 좋았다. 무엇보다도 호화로운 밴 안에서 밴의 소유주가 저를 꿰뚫고 있다는 게 가장 좋았다.
잔뜩 흥분한 이현의 눈에서 초점이 나갔다. 벌어진 입술을 적시며 투명한 침이 고였다.
“흣… 으응, 윽, 흐흑… 희재야. 응….”
아래가 잔뜩 풀려도 언제나 석희재의 것은 안을 빠듯하게 채운다. 안이 너무 풀렸다고 욕을 하거나, 헤프게 굴지 말라며 엉덩이를 때리는 일도 없다.
그래도 이현은 석희재가 자신을 때려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으으… 희재야. 응….”
상상만 해도 좋아서 지나친 흥분에 눈에 생리적인 눈물이 고였다. 이현은 석희재의 손을 찾아 잡았다. 엉덩이를 맞으면 통증 때문에 깜짝 놀라 안을 더 조이게 된다. 이현은 잡은 손을 제 벗은 둔부로 가져가려 했다. 거길 쓰다듬다가 때려 주기를 원했다.
그러나 석희재는 맞잡은 손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현의 손가락 사이로 제 곧은 손가락을 차례차례 얽으며 다정하게 깍지를 꼈다. 마주 본 눈동자는 석희재 역시 미친 듯이 흥분했음을 알려 주고 있었다. 이성을 잃도록 몰입한 상태에서도 그는 아까보다 다정히 키스한다. 이름을 여러 번 부르고 잡은 손가락 마디마디에 입을 맞춘다.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는 듯이….
“…현아.”
“아, 읏… 흐윽.”
“현아, 현아….”
석희재가 귓바퀴를 깨물고 핥으며 속삭이는 이름이 마치 타인의 것 같았다. 이현은 자꾸만 힘이 풀리는 동공으로 차체의 천장을 바라보았다. 다정한 손길과 음성, 조금도 틈이 벌어지지 않는 깊은 포옹으로 연결된 상체와는 달리, 아래는 녹은 젤이 튈 정도로 격렬한 삽입이 이어졌다. 오목하게 파인 등과 쇄골에 땀이 고였다. 이현은 거의 풀린 혀로 석희재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어느새 석희재의 허리를 옭맨 허벅지는 경련으로 벌벌 떨리고 있었다. 절정이 목전이었으나 뒤를 조일 여유도 없었다. 그저 제게 올라탄 석희재에게 정신없이 몰아붙여졌다.
“헉… 하윽.”
어느 순간 목 뒤로 넣어 받친 석희재의 큰 손이 콱, 목덜미를 잡았다. 손끝에서마저도 흥분이 느껴졌다. 사정한 것이다.
멍하니 눈을 깜빡이면서 이현은 내부가 젖어 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잠시 후, 제 손으로 석희재에게 콘돔을 씌워 주었던 것을 떠올렸다. 스스로가 원망스러워졌다. 안에 쌌다면 더 완벽한 섹스가 되었을 텐데…, 하고.
“형….”
석희재가 퍽 애틋한 목소리로 저를 부르며 입술을 비벼 댔다. 땀이 촉촉하게 배어난 관자놀이에 수없이 입을 맞추었다.
“으….”
다정한 후희에 몸을 맡기고 있던 이현이 신음과 함께 허리를 일으켰다. 석희재는 아쉬운 눈을 하면서도 순순히 물러났다. 그때까지 파묻고 있던 밑에서 조심스레 성기를 빼냈다. 누워 있을 때와 각도가 달라져 그 행위에도 자극이 왔다. 석희재는 나직한 신음을 흘리는 이현을 주의 깊게 살피더니 느리게 뒤돌아 앉았다.
석희재가 콘돔을 빼서 버리는 동안 이현은 가죽 시트를 손가락으로 짚었다. 손가락이 달달 떨리고 있었다. 허리도 후들거렸다.
“좀 누워 있을래?”
다시 말끔한 꼴로 가까이 다가온 석희재가 이마에 쪽, 입을 맞추며 물었다. 바닥에서 나눈 한 번의 섹스로 몸이 축났다는 기분이 드는 자신과 달리 과연 이십 대 초반은 팔팔했다.
이현이 힘없이 올려다보자 석희재는 차의 뒷좌석 쪽을 가리켰다.
“안에 누워 있을 수 있어. 온열 시트도 있고….”
“와….”
거절할 이유가 없어 이현은 뒷좌석으로 향했다.
작은 커튼을 손으로 젖히자 안에는 석희재가 말한 것처럼 정갈한 쥐색 시트가 덮인 간이침대가 있었다.
“우와…!”
가죽 시트가 땀에 젖을까 봐 함부로 등을 기대지도 못했던 이현은 맥없는 비명을 지르며 침대 위에 풀썩 누웠다. 그 모습에 소리 없이 웃던 석희재가 곁에 다가와 따라 누웠다.
“여기 누워서 했으면 좋았잖아….”
석희재가 미련 아닌 미련을 내뱉었다. 바닥에 누워서 하는 바람에 이현의 허리가 아프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워 한 말이었다.
그 말에 이현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까 단추가 뜯어지도록 멱살을 잡고 끌어당긴 것을 탓하는 것으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단추 내가 꿰매 줄게.”
“뭐?”
“나 바느질 잘해.”
석희재는 동문서답에 어리둥절해졌다가 금세 호기심을 보였다. 진짜 바느질도 할 수 있느냐고 재차 물었다.
이현은 베개를 끌어와 이리저리 방향을 바꿔 누워 보며 편한 위치를 찾았다. 금세 석희재가 등에 달라붙었다. 그러고는 더는 움직이지 못하게 뒤에서 깊이 포옹해 온다. 아직 벗은 몸에 촉촉하게 땀이 남아 있어 조금 꺼려지는데 석희재는 제 옷이 더럽혀져도 아무렇지도 않은가보다.
이현은 하지 말라고 말리는 대신 그냥 그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게 놔두었다.
“귀엽다.”
석희재가 이현의 뒷머리를 만지작댔다. 바닥에 마구 쓸려 뻗친 모양이 된 게 그의 눈에는 제법 인상적으로 보였나 보다. 이현은 눈만 굴려 ‘이게?’ 하고 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석희재는 목덜미에 수시로 키스를 해 댔다. 땀에 젖어 체취가 풍기는 부분에 코를 박거나 혀를 할짝였다.
‘더 하고 싶은가보다.’
순수한 애정 표현을 곡해한 이현은 뒤로 손을 뻗었다. 언제 옷은 또 챙겨 입었는지, 손에 당장 잡히는 게 없었다. 납작한 복부와 바지 지퍼 부근을 더듬거리다가 손등에 바지 안의 굵은 기둥이 스쳤다. 그것이 힘을 잃지 않고 단단한 것을 알아챈 이현은 제 추측이 맞다고 생각했다.
“조금만 쉬다가 하자. 나 너무 느껴서… 바로 넣으면 금방 가.”
“응?”
“기승위로 해 줄게.”
“…….”
석희재는 말이 없었다. 그 침묵을 그가 저의 제안을 받아들인 것이라고 해석한 이현은 하아, 하고 깊이 숨을 내쉬며 제법 감촉이 좋은 베개에 뺨을 기대었다. 누운 자리가 쾌적해 안락한 기분이 들었다.
헛바람이 빠지는 듯한 소리로 픽 웃은 석희재가 다시 등 뒤에서 몸을 조심스럽게 안아 왔다. 머리카락을 손가락을 빗어 내리고 여린 귓불을 손가락 사이에 넣고 매만졌다. 몸에서 도무지 손을 뗄 줄 모르는 그 때문에 결국 이현은 돌아누웠다.
턱을 괴고는 지긋이 눈을 바라보았다. 석희재가 부드럽게 웃었다.
그 직후 이현은 석희재의 바지 지퍼를 내리고는 그 위에 올라탔다. 빳빳이 선 성기를 망설임 없이 뒤로 품었다. 누운 채로 올려다보는 석희재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이현은 안을 가득 채우는 질량감에 낮게 신음했다. 열기가 남아 뜨끈한 안쪽으로 꽉 조여 물었다.
“…형…!”
무언가 항변하려던 석희재도 이현의 페이스에 말려들고 말았다. 어깨에 매달려 일부러 신음 소리를 귓가에 내면서 허리를 흔드는 모습에 결국 백기를 든 것이다. 처음에는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마른 허리를 손으로 조심스레 받쳐 들더니, 어느새 양손으로 꽉 붙잡고는 허리를 쳐올렸다. 이제 겨우 버티는 쪽은 이현이었다. 다리에 힘이 풀린 채로 석희재의 목에 매달려 있었다.
“윽, 형… 형.”
“으음… 하아, 하읏! 응, 응… 희재야. 희재야.”
두 번째 사정은 첫 번째보다 훨씬 빠르고 급했다. 석희재가 눈을 내리깔며 제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절정을 직감한 이현은 그가 제 내부에 분출해 주기를 기대했다. 젊어서 그런지 몰라도 석희재는 항상 정액 양이 많았다. 예전에는 체질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어려서’라고 생각하면 전부 다 이해가 되었다. 아무튼 약간의 틈도 없이 맞물린 안쪽에 사정하면 당장 미쳐 버릴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가득 채워지는 기분에 운 적도 있다.
“안에다가, 흐응… 안에다 해 줘. 응?”
“흣….”
그러나 석희재는 사정 직전에 성기를 쑥 빼냈다. 허무하게 벌어진 안쪽이 갑작스러운 마찰에 파르르 떨며 조여들었다.
“헉, 허억….”
석희재는 바깥에 사정했다. 꼬리뼈 언저리에 적지 않은 양의 액체가 튀는 것이 느껴졌다. 이내 골 사이로 후드득 타고 흘렀다. 체온과 비슷한 데도 왜인지 닿은 부분이 불에 데는 듯했다.
“안에, 하지….”
석희재는 대답 대신 거친 신음을 내뱉으며 눈을 맞추고, 큰 손으로 이현의 앞을 만져 주었다. 어쩔 수 없이 그의 배에 사정하면서 이현은 그의 품에 허물어졌다.
“하아, 하아….”
“형, 으음….”
신음마저 모조리 삼켜 버리겠다는 듯이 깊은 키스가 이어졌다. 동시에 석희재가 정액으로 젖은 귀두를 입구에 두어 번 아쉬운 듯 문질러 댔다. 당장이라도 다시 넣고 싶은 것처럼. 실제로 두어 번은 아쉽게 넣었다가 빼내기도 했다.
“하고 싶으면서….”
“…응?”
“안에 싸고 싶으면서.”
“아….”
석희재가 뺨을 붉혔다.
“형 퇴근 전까지 불편할까 봐.”
그 대답에 이번에 말문이 막힌 쪽은 이현이었다.
지나치게 몰두한 나머지 순간적으로 자신이 연습실에서 뛰쳐나왔다는 사실을 잊었던 것이다. 석희재나 저나 둘 다 저녁 시츠 때는 연습실로 복귀해야 했다.
멋쩍어진 이현은 제 머리카락을 만지작댔다.
“나보고 여유가 어쩌고 하더니.”
석희재의 입술을 검지로 쿡 찌르자 그가 장난치는 강아지처럼 손가락을 입술로 물려고 시도했다. 이현은 쿡쿡 웃으며 손가락을 이리저리 피했다.
“너도 챙길 건 다 챙기네.”
“…그런 거 아냐.”
“그럼?”
“배려야.”
“흥.”
결국 이현의 손가락을 무는 데 성공한 석희재가 올려다본 채로 말했다.
“나는… 항상 형을 생각하니까.”
“아으.”
간지러운 말에는 면역이 없는 이현은 얼떨떨하게 손을 물렸다.
“진짜 소름 돋는다. 나 닭살 돋았어. 여기 봐.”
이현이 가리킨 제 팔뚝에는 진짜로 오돌오돌 작게 피부가 일어나 있었다. 평범한 애정 표현에 거리감을 느끼는 이현을 물끄러미 보면서 석희재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둘은 다시 몸을 포갠 채로 섹스의 여운 속에 잠겼다. 석희재는 지겹지도 않은지 이현의 몸 여기저기를 만지작댔고, 그제야 이현은 이게 별달리 뜻 있는 유혹이 아니라 그저 석희재의 버릇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과묵한 성격과는 다르게 제법 애교 있는 후희였다.
옷이 더럽혀져서 어떡하냐는 이현의 질문에 석희재는 밴 안쪽에 걸려 있는 옷가지들과 간이 다리미를 보여 주었다. 그것 말고도 밴 안에는 작은 냉장고는 물론, 따뜻한 물수건을 소독해 보관하는 온열기도 있었다. 덕분에 몸을 쾌적하게 닦았다. 연예인들이 밴을 필요에 따라 개조해 다닌다는 이야기는 들어 보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환기를 위해 창 대신 선루프를 열자 바깥 공기가 들어왔다. 밴 바로 위로 드리워진 초록색 나뭇가지가 가끔 한들한들 흔들렸다. 묘하게 운치가 있었다.
“이런 것도 있어.”
석희재가 리모컨 버튼을 누르자 의자 앞쪽으로 조명이 붙은 제법 큰 거울이 솟아올랐다.
“가끔 메이크업 고칠 때 필요하대.”
“와….”
“쓸 일이 있을지는 모르겠는데, 누가 강력 추천해서….”
“그리고 또 형이 좋아할 만한 게, 아. 이것도 있는데….”
그쯤, 이현은 석희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십 대 초반에 이런 걸 누리면 들뜨게 된다. 보통은 그렇다. 하지만 석희재에게서 그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들뜨기는커녕 이런 것들이 아주 익숙해 보였다.
“너 혹시 어릴 때 아역 배우… 그런 거 했었어?”
“아니.”
이현의 맥락 없는 물음에 석희재는 고개를 저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저렇게 차분한 이유는 그냥 성격 탓인가? 하지만 그 정도로는 납득이 어려웠다.
보통 연예계라는 별세계와 연결 고리가 생기면 소위 ‘뽕을 맞는다’. 저는 남들과 조금 다르고, 남들은 보지 못하는 세계를 안다는 착각에 빠지는 것이다. 그건 이현 역시 마찬가지로, 이 일을 시작할 때쯤 제 취향의 배우들을 백스테이지에서 몰래 훔쳐보며 엄청나게 들떴던 기억이 있다. 막내로 현장에서 구르고 구박받아도 그 뽕이 이 고된 업계를 미련스레 버티게 해 주었다.
그러나 석희재는 일개 스태프도 아니고 연예인이 된 장본인이다. 단독으로 찍은 CF가 매체를 타고 TV며 영화관 여기저기서 흘러나오는 데다 본인 몫의 밴까지 갖고 있었다. 척 보기에도 대여가 아닌, 석희재만을 위해 뽑은 새 차였다. 회사에서 엄청난 투자를 하고 있다는 소리다. 연예인 병에 걸리지 않는 것이 이상했다.
이현은 다른 가능성을 짐작해 보았다. 바이올린을 능숙하게 턱에 괴고 활을 잡던 모습이 다시금 떠올랐다.
“아니면 엄청 유명한 연주자였나…?”
“그 정도는 절대 아냐.”
석희재는 겸양을 떨었다. 이현은 믿지 않았다.
“막 신동이라고 어린 나이에 해외 공연하면서 전세기 타고 다니고 그랬던 거 아냐?”
“절대 아니거든.”
“전공한 건 맞지?”
“맞는데, 연주회 같은 건 해 본 적도 없어.”
“너 그럼 대학도 그런 거야? 악기과, 그런 거….”
음대에 대한 지식이 전무한 이현이 애매한 어휘를 사용해 물었다. 석희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바이올린 전공이야.”
“와, 재밌어?”
그 말에 석희재는 잠시 골똘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러더니 가볍게 답했다.
“이제 안 하려고.”
“왜?”
“탑 아니면 의미도 없고….”
이현은 한숨을 탁, 터뜨렸다. 악기는 잘 몰라도 그 정도 실력이 되려면 적지 않은 시간을 투자했을 텐데 그만둔다는 것이 아쉬웠다.
“잘하던데… 계속하지.”
“그래 보여?”
“응.”
“업으로 할 생각은 없었는데….”
“아깝다.”
“뭐가 아까워. 형 앞에서 써먹으면 되지.”
“아무튼 수상해. 수상해….”
석희재가 유명 연예인을 친모로 두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이현은 제 나름대로 이런저런 상상의 나래를 펼쳤다. 그러면서 ‘네가 정 밝히지 않으니 내가 집에 가서 네 과거를 인터넷으로 샅샅이 찾아보겠다’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혹시라도 아역 배우나 연주자의 커리어가 검색에 걸려 나오면 마음의 준비를 하는 게 좋을 거라며 위협도 되지 않는 소리를 했다.
석희재는 그저 이현이 제게 관심을 보여 주는 것이 좋아서 다시 제 연인을 꼭 끌어안고 여기저기에 입을 맞췄다.
그때, 작은 진동이 멀리서 희미하게 울렸다. 석희재가 고개를 들고 말했다.
“형 핸드폰인가 봐.”
“응?”
“내 건 여기 있는데.”
그 말대로였다. 아마도 문 가까운 의자 사이에 벗어 놓았던 바지 주머니에 들어 있는 것 같았다.
진동이 다시 한번 들렸다. 말릴 새도 없이 석희재가 얼른 벌떡 일어나 이현에게 핸드폰을 가져다주었다.
“고마워.”
가볍게 미소 지어 주자 석희재도 따라 웃는다. 그러더니 다시 이현을 제 품에 안았다.
‘하아… 분위기 좋았는데.’
이런 때에 걸려 온 연락 따위는 모른 척하고 싶었지만 혹시 일이 관련된 것일 수도 있었다. 아예 무시하는 것은 마음에 걸린다.
이현은 석희재를 끌어안은 채로 그의 등 뒤로 팔을 둘러 핸드폰의 잠금을 풀었다.
방금 전 도착한 메시지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현아. 어디야? 저녁도 안 먹구.」오후 6:13
「형이 네 도시락 챙겨 놨다.」오후 6:13
「저녁 시츠 때 숨어서 먹어^^」오후 6:16
다정한 배려에 절로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누구야?”
이현이 웃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따라 웃는 얼굴이 된 석희재가 물었다. 어깨에 턱을 기대며 커다란 강아지처럼 기대어 온다.
그 얼굴을 흘끔 바라 본 이현은 잠시 망설였다.
굳이 솔직히 말해서 분위기를 깰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상하게 지우 선배한테만 민감하게 구니까….’
그래서 이현은 선의의 거짓말을 했다.
“어. 연출부.”
“형 빨리 들어오래?”
“시츠 전에만 들어가면 돼.”
“응….”
석희재가 이현의 가슴에 파고들며 고개를 기댔다. 이현은 핸드폰을 툭 던져 버리고 석희재를 마주 끌어안았다.
낯설고도 익숙한 기분.
이전에도 이런 식으로 안아 본 적이 있었나? 3년간 충분히 익숙해진 체온인데도 ‘연인’이라는 이름은 종종 이 관계를 전혀 색다른 것으로 느끼게 만들었다. 그러나 무엇이 어떻게 변했는지, 이현은 그 미묘한 차이까지는 짚어 내지 못했다. 무의식적으로 다정함을 표현하는 제 사소한 손길에 석희재가 얼마나 행복해하는지도.
그래도… 싫은 건 아냐.
이현은 그렇게 생각하고 호흡을 크게 들이켰다. 안온한 체취가 마음에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