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 첫 연애 (10/27)

10. 첫 연애

“들어가도 돼?”

석희재는 놀라 아무 대답도 못 했다.

그 반응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현은 잠시 후 고개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섰다. 열린 문틈으로 완전히 몸을 들였을 때 드러난 그의 다른 손에는 믿기지 않게도 작은 꽃다발과 과일 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석희재는 말없이 그가 병실 문을 닫는 것, 문을 여닫기 위해 한 손에 모두 옮겨 들었던 짐을 다시 추스르는 것을 보았다. 꽃다발을 든 손등으로 제 이마를 긁적이는 이현은 꽤 어색해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안 자고 있어서 다행이다.”

“…….”

“오늘 피팅 있었거든. 그게 지금 끝나서….”

피팅이 뭔지도 모르면서 석희재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머쓱하게 침대 옆까지 다가온 이현이 사이드 테이블에 먼저 꽃다발을 올려 두었다. 석희재는 새빨간 장미와 진분홍색 카네이션의 촌스러운 꽃다발 조합을 세세하게 뜯어보았다. 문 닫기 직전의 역 앞 꽃집에서 떨이로 급하게 산 것 같은 조합이었다.

이현은 그 외에도 짐이 많았다. 과일 바구니와 큰 종이 백을 동시에 든 손등에는 핏줄이 솟아 있었다. 짐의 무게 때문에 손바닥에는 빨간 줄이 아프게 그였다. 석희재의 시선은 그런 이현의 손바닥에 오래 머물렀다.

짐을 내려놓을 곳을 찾던 이현은 테이블 위에 과일 바구니를 올려놓으려다 멈칫했다. 먼저 온 손님이 사 온 화려한 수입 과일 바구니가 그 자리를 다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이 사 온 것은 그보다 크기도 훨씬 작았고 내용도 부실했다. 퍽 비교되는 모양새였다.

“이리 줘. 냉장고에 넣어 놓으면 돼.”

석희재는 침대에서 내려와 이현의 손에서 과일 바구니를 빼앗아 들었다.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바구니가 통째로 들어가질 않았다.

“아, 그거 얼린 거라 냉동실에 넣는 게 낫겠다.”

“얼렸다고?”

“응. 아까 사다가, 회사 냉동실에 넣어 놨었어. 네가 좋아하잖아….”

“내가?”

“안 좋아해?”

이현은 왠지 자신이 없어 보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석희재의 귀는 잠시 후 속수무책으로 붉어졌다.

무심한 줄만 알았던 사람이 그런 건 기억하고 있는 게 용했다.

몇 번 꽝꽝 얼어붙은 과일을 먹은 적이 있다. 별미라는 생각은 했지만, 딱히 좋아해서 그랬던 건 아니다. 이현의 집에 보관된 식재료는 지나치게 바쁜 집주인 때문에 존재가 까맣게 잊혀져 썩어 버려지기 일쑤였고, 그게 마음이 쓰였던 석희재는 냉동실에 대부분의 음식을 넣어 놓곤 했다. 귀가가 늦는 이현을 기다리며 냉동실을 뒤지면 먹을 만한 건 과일뿐이었다.

그럴 때 석희재는 저처럼 이현에게 잊혀져 버린 것들을 꺼내 먹었다. 언 과일을 먹고 있으면 이현이 술 냄새를 풍기며 집에 돌아왔다. 이현이 언 과일을 먹고 있는 저를 희한하게 보던 것이 기억이 난다.

“아, 바나나만 얼릴 걸 그랬나? 사과가 얼어 있는 건 좀… 이상하지.”

대답 없이 뒤돌아선 석희재는 냉동실에 과일을 모조리 넣었다. 이상하게 입가에 피식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이상한 표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미소가 가라앉을 때까지 천천히 과일을 전부 다 넣었다.

“왜 왔어?”

석희재는 다시 침착한 얼굴로 뒤돌았다. 이현은 그때까지도 병실 가운데에 서 있었다.

석희재는 왜인지 그가 조금 긴장한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현은 면목 없는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피팅, 오늘 마쳐야 해서.”

“…….”

“밤늦게 미안하다. 어… 많이 피곤한 거 아니면 입어 볼래? 내일 바로 의상팀이 수선해야 하거든.”

이현이 부스럭거리며 종이 가방을 들어 보였다.

방금 전까지 좋았던 기분이 다시 밑바닥으로 추락했다. 눈을 한 번 깜짝이는 찰나에. 깜짝 선물처럼 찾아온 이현의 방문은 지극히 공적인 임무 때문이었다. 그걸 아는 순간 손끝이 차가워졌다. 냉정을 가장할 필요도 없었다.

“피곤해.”

“…….”

“피곤해서 어떡하지. 못하겠는데.”

말끝에 목멘 것처럼 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그게 비참해진 석희재는 입술 안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이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따지지도, 보채지도 않고 그냥 고개를 숙인 채로 서 있을 뿐이었다. 시계는 새벽 2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는 자정이 넘어서야 퇴근해서, 곧바로 집에 가지도 못하고 석희재가 있는 병원으로 왔을 것이다. 시무룩하게 처진 등에는 책임감과 피로가 한 짐이었다.

하. 석희재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스스로가 싫어졌기 때문이다. 이현의 무심함에 상처받는 와중에도 그를 헤아리고 있다는 점이 특히 미련했다. 그를 더 보고 있다간 또다시 들썩이는 마음을 제어하지 못할 테다.

석희재는 고개를 돌렸다. 침대로 완전히 올라가 이불을 덮어썼다.

그제야 이현이 급하게 말을 꺼냈다.

“미안하다. 밤늦게 귀찮게 해서.”

“…….”

“내가 생각이 짧았지. 안 그래도 아픈 사람한테… 미안하다. 내일 올게.”

내일? 석희재는 솔깃했다.

그럼 내일 또 얼굴을 볼 수 있다는 건가.

“간다.”

그렇게 말하고도 이현은 조금 더 기다렸다. 한참 후에야 돌아 나가는 발소리가 들렸다. 걸음걸이가 무척 느렸다. 여러 번 저를 살피는 듯했다. 그의 표정이 궁금해 미칠 것 같았고 또 등 뒤에서 멀어지는 그가 너무나 아쉬웠지만 석희재는 붙잡지 않았다.

‘넌 날 닮았잖아.’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돌았다. 복수까지는 아니더라도, 이게 이현이 강조했던 공사 구분일지도 모른다. 일로 저를 찾아왔으니 자신도 거절할 권리 정도는 있었다. 피팅 때문이 아니라 걱정이 돼서, 얼굴이 보고 싶어서 온 거라고 입바른 말이라도 해 주었다면 미련한 자신은 완전히 넘어가서 아주 기쁘게 그의 청을 들어줬을지도 모르는데.

소득 없이 돌아간 이현이 안쓰러웠다. 또 ‘피팅’을 제때 하지 못하면 그에게 무슨 일이 나는 건 아닌지 궁금하기도 했다. 어쨌든 석희재는 그가 내일 다시 오기를 고대하며 눈을 감았다. 그러나 막 이현을 보고 각성 상태가 되었는지 지독히도 잠이 오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야만 그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억지로 눈을 감고 양을 셌다.

그러나 다음 날, 석희재는 제 생각이 얼마나 짧았는지 알게 됐다.

“희재야. 일어나.”

“으음….”

“희재야. 피디님 오셨어.”

저를 깨운 것은 매니저 박 팀장의 목소리였다. 멍한 정신으로 눈을 뜨자마자 시야 안에 희미한 사람이 보였다. 낯익은 몸과 얼굴이었다. 다름 아닌 이현이 소파에 가지런히 손을 모으고 앉아 있었다.

“지금, 몇 시….”

놀란 석희재는 급하게 한 팔로 바닥을 짚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곱 시 반이야. 좀 이르긴 한데 지금 꼭 하고 가셔야 된대.”

“일곱 시 반이요?”

“어제 늦게 잤어? 얼른 피팅만 끝내고 더 자.”

박 팀장은 그렇게 말하고 이현과 몇 마디 말을 나누더니 문을 닫고 나갔다.

석희재는 아직도 부스스한 눈으로 멍하니 이현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그가 맞았다. 이른 시간인데도 옷차림은 흐트러짐이 없었고 곁에는 어제도 들고 왔던 종이 가방이 놓여 있었다.

“내일 온다는 게.”

“…….”

“이 시간에 온다는 거였어?”

“어, 미안. 너무 이르지. 박 팀장님이 괜찮을 거라고 하셔서.”

이현이 다시 ‘미안’하고 말하면서 짧게 기침을 했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완전히 잠에서 깨자 그의 얼굴이 다시 보였다. 이현의 눈두덩이는 피로 탓인지 살짝 부어 있었고 목소리도 갈라졌다. 어제 병실에서 나간 게 새벽 2시니까 서너 시간이나 잤으려나.

숙면을 방해받은 건 일도 아니었다. 저는 수액이나 맞으면서 컨디션이 회복될 때까지 더 자면 되지만 이현은 바로 출근해야 한다. 다시 속에서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받았다.

“뭐야….”

“음?”

“왜 사람을.”

나쁘게 만들어.

석희재는 뒷말을 삼켰다.

생각이 짧았다. 이현을 이틀 연속 보고 싶다는 마음으로 그를 고되게 만들었다. 아니, 이게 맞는 건지도 모른다. 일로 배우를 대할 때 그가 얼마나 헌신적인지 알게 됐으니.

복잡한 마음으로 자리에서 일어난 석희재는 제게 다가오는 이현을 지나쳐 작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얼굴에 찬물을 끼얹으면서 생각했다. 어머니의 말은 틀렸다고. 복수하고 싶어진다고? 비웃어 주면 통쾌하다고?

전혀 아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힘든 걸 볼 때마다, 나는 내가 더 상처받는 것 같은데….

석희재는 찬물로 눈가를 한참 더 씻어 낸 후에야 고개를 들었다. 냉수에 창백하게 질린 거울 속의 얼굴은 멀끔했다.

막 화장실을 나섰을 때는 물기를 대충 씻어 낸 흰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에 물방울이 매달려 있었다. 이현이 그걸 살피는 것이 시선으로 다 느껴졌다.

“물기 남았….”

“손대지 마.”

고개를 틀어 피하자 이현의 손이 금세 멋쩍어졌다. 꽤나 무례하게 굴었는데도 이현은 당황한 기색도 없이 순순히 물러났다.

그래서 석희재는 결국 묻고 말았다.

“형은 아무렇지도 않아?”

“뭐가?”

“배우가 막 이렇게 제멋대로 굴어도 피디님은… 그냥 그렇게 해? 피디니까?”

“…….”

“자존심도 없어? 항상 이렇게 일해?”

“아니, 자존심 있지.”

이현이 픽 웃었다. 말의 내용과 다르게 전혀 자존심을 내세우는 표정이 아니었다.

“네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배우들한테 다 이러지는 않거든. 내가 그래도 직급이 피딘데 설마 설설 기어 다니겠냐. 나는, 그냥….”

이현이 눈을 내리깔았다. 거기서 석희재는 불현듯 기시감을 느꼈다. 지난 새벽에 저를 찾아왔을 때, 내내 눈을 마주치지 못하던 이현의 표정이 꼭 이랬다.

“그냥… 너한테 좀 미안하고.”

심장이 철렁했다. 어쩌면 그는 어젯밤에도 이 말이 차마 나오지 않아 그렇게 뜸을 들였는지도 모른다.

“촬영 때 약 고마워. 그거 잘 발랐어. 고맙다고 말도 못 했네.”

“…….”

“어제도 그렇게 들이닥치는 게 아니었는데. 내가 경우가 없었다. 너는 당연히 이해해 줄 거라고 나 혼자 생각했나 봐. 쓰러졌다니까 나도 놀라 가지고 마음만 급해서 왔는데. 아, 물론 피팅도 급했지만. 생각해 보니까 내 잘못… 어어, 야.”

석희재는 스르륵 쓰러지듯이 이현에게 기대어 그를 안았다. 불가항력이었다. 이현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깊이 고개를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더 마른 것 같은 등을 양팔로 감아 제 품에 완전히 넣었다. 그렇게 석희재는 이현에게 체중을 완전히 기대며 저보다 작은 이에게 안겼다.

“희재야?”

“…….”

“나 참, 얘 봐라….”

이현은 싫어하거나 밀어내는 기색도 없이 석희재의 등에 손을 얹었다. 조금 빨라진 호흡으로 등이 들썩이는 부분을 손으로 어루만져 주기까지 했다.

석희재는 고개를 아주 조금만 들어서 가까이 있는 이현의 얼굴을 샅샅이 눈으로 훑었다. 약간의 냉정도 가장하지 못하는 감정이 잔뜩 고인 눈과 그 안에 숨은 열기를 이현이 몰라볼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이현은 저를 밀어내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감각 자체를 못 미더워하고 진저리를 치던 그의 차가운 눈이 아직도 선연한데.

분명 뭔가가 변했다. 변화가 있었다.

얼마 전의 이현이라면 달갑지 않은 애정이 느껴지는 순간을 아예 차단하려 했을 것이다. 석희재는 치열하게 생각했다. 어떤 스위치가 변화의 불을 켰는지를. 아픈 게 동정심을 자극했나? 혹은 죄책감을 건드렸을 수도 있겠다. 아니면 거짓말쟁이 섹스 파트너에서 이제는 그가 말하는 ‘내 배우’가 되었기 때문에?

“형.”

“…어?”

석희재는 비정상적으로 박동하는 심장을 억누르며 침착하게 물었다.

“영화 봤어?”

“뭐, 영화? 무슨 영화?”

“최근에. 아무거나. 영화 본 적 있어?”

“아니. 본 적 없는데. 그 시간에 잠이나 자겠… 윽.”

바라마지 않던 대답에 석희재는 이현을 한 번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다시 물었다.

“그럼 누가 술 사 준 적 있어?”

“술? 아, 최근에 회사에서….”

“아니, 그거 말고. 배우들이랑.”

“배우들이랑은 없었는데… 읏.”

“그럼 됐어.”

다시금 콱 껴안은 팔에 가슴이 짓눌린 이현이 갑갑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석희재는 아랑곳 않고 더 거세게 그를 껴안았다. 그의 정신없이 바쁜 일과도, 한지우 말마따나 ‘철벽’을 친다는 철저한 공사 구분의 태도도 다 너무나 사랑스러웠다.

짝사랑의 끝은 실연이라고, 거기에 다음 단계 같은 건 없다고 어머니는 딱 잘라 말했다. 하지만 석희재는 그게 유일한 정답이 아니라는 걸 확신했다. 어머니의 인생과 제 인생이 다른 것처럼 사랑의 정의도, 모양도 다를 것이다. 짝사랑에는 단계가 있다. 끝나지 않는 마음이 그걸 증명하고 있었다.

들켰다면 드러내면 된다. 3년간 숨기느라 애썼으니까 3년 정도는 드러내야 균형이 맞지 않을까?

그렇게 석희재는 라이벌의 등장으로 한순간 나약해질 뻔했던 스스로를 추슬렀다. 한지우 쪽이 이현의 취향이라지만, 이현을 더 잘 아는 것은 저니까. 어쩌면 붙어 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포기하기에는 이르다.

“자고 가.”

“뭐?”

“어제 많이 못 잤잖아. 좀 자고 가.”

“말이 돼? 나 출근해야 돼.”

“우리 회사랑 미팅했다고 해.”

순간 이현의 얼굴에 갈등의 빛이 떠올랐다. 틈을 놓치지 않은 석희재는 일부러 처연하게 재촉했다.

“…응?”

“그럼 한 시간, 아니 두 시간만….”

그의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석희재는 곧바로 병실 문을 걸어 잠갔다.

***

이현이 잠든 병실 안은 무척 조용했다. 가끔 창밖에서 나무를 옮겨 타는 새의 날갯짓 소리가 들릴 정도였다. 희미하게 냉장고와 가습기 같은 가전이 돌아가는 백색 소음 안에서, 석희재는 사각사각 과일을 깎고 있었다. 꽤 차분한 칼질이었지만 숨길 수 없이 서툴렀다. 서걱이는 소리마저 잠든 이를 괴롭힐까 봐 석희재는 가끔씩 손을 멈추고 이현의 자는 모양새를 살폈다.

망고 껍질을 벗겨 먹을 수 있는 부분만 예쁘게 발라내고 멜론도 맛없는 흰 부분은 전부 잘라 냈다. 다 깎아 낸 사과는 구형이 아니라 각이 선명히 보일 정도였지만 그래도 먹을 만한 부분이 남아 있었다.

한참 과일을 만지작거린 석희재가 접시 위에 제법 예쁘게 생긴 과일들을 올려놓았을 때는 양이 한 줌도 되지 않았다. 살려 낸 것보다 버린 게 많았다. 게다가 하도 오래 다듬은 탓에 과일이 죄다 손의 온도로 미지근해졌다.

저가 잘라 낸 과일들을 보던 석희재는 마지막으로 가운데에 체리를 올리고 그걸 다시 냉장고에 넣었다.

그는 손을 씻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가만히 의자를 끌어와 바로 곁에서 잠든 이현을 바라보았다. 이현의 입술이 살짝 벌어져 안쪽의 분홍색 틈이 보였다. 끝까지 마지못해 침대에 눕던 것과는 달리 완전히 숙면에 빠졌다는 증거였다. 석희재의 입가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어렸다.

이현은 속이 잔뜩 무른 사람이다.

그러니 3년을 몰래 그의 속살에 파고들며 행복한 짝사랑을 할 수가 있었다. 저가 이 관계에 파동을 일으키지 않았다면 아마도 섹스 파트너라는 관계에 안심해서 계속 곁을 내어 주었을 것이다.

이현을 공략하는 법을 조금은 깨달은 것 같았다. 이현이 뱉는 잔인한 말을 조금만 참으면, 그는 자신이 타인에게 상처 준 것을 못내 후회하면서 도리어 한 걸음 더 물러나 준다.

정말로 달고 무른 사람이다.

- 지이잉, 지이잉.

그때 핸드폰의 진동이 평화로운 정적을 깼다.

침대 시트 위에서 작게 두 번 진동하는 핸드폰의 울림은 둔중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그 짧은 알람에도 이현은 금세 눈을 떴다.

짧은 평화가 아쉽게 깨졌다. 석희재는 이현의 눈꺼풀이 벌어지고 그 안에서 초점이 잡히지 않는 눈동자가 드러나는 것을 가만 지켜보았다. 햇살을 받은 깊은 고동색 눈동자가 안쪽까지 빛났다.

“으음….”

허스키한 목소리로 의미 불명의 신음을 내뱉은 이현은 자신이 어디에서 뭘 하고 있는지 잠시 헤매는 눈치였다. 그 눈동자가 석희재와 마주쳤을 때에야 이현은 현실 감각을 되찾았다.

미간을 구기며 일어난 이현의 뒷머리가 일부 하늘로 솟구쳤다. 석희재는 알려 주지 않고 그것을 감상했다. 이현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채 작은 하품을 했다.

“나 많이 잤어?”

“한 시간 반밖에.”

석희재는 짧게 잤다는 뉘앙스로 말했지만 시간을 들은 이현은 놀라 황급히 일어났다. 잠깐 눈만 감았다 뜬 것 같은데 시간이 그렇게나 지났다.

‘이거 불안해 가지고 잠이 오려나?’

‘아무도 모르는데 뭐.’

‘직장인은 그런 게 있어. 아홉 시부터 여섯 시까지는 뭘 해도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라고. 영혼이 거기 묶여 있는 거야. 회사 책상에….’

그래도 누우니까 너무 좋다, 내심 그렇게 생각하며 이현은 눈을 감았다.

그 뒤는 기억에 없었다. 눈을 감자마자 거짓말처럼 잠에 빠졌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밤 겨우 4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이현은 아직도 졸음이 남은 눈가를 손등으로 세게 문질렀다.

그렇게 말한 주제에 잘도 잤네.

상체를 더 일으키자 가슴팍에서 뭔가 툭 떨어졌다. 이불이었다. 분명 저는 재킷을 벗어 놓은 후 셔츠가 구겨지지 않게 조심스레 눕는 척만 했다. 정말 잠깐 눈만 붙이고 가겠다는 직장인으로서의 마지막 양심으로 이불도 덮지 않았다.

‘희재가 덮어 줬구나.’

석희재는 어느새 일어나서 등을 보이고 있었다. 이현의 눈이 자연히 그 등을 따랐다.

낯선 곳에서 정신없이 졸 만큼 지나치게 긴장이 풀린 데는 아까 석희재의 태도도 한몫했다. 한동안 찬 바람이 쌩쌩 불던 석희재가 자신을 부둥켜안을 때, 저도 모르게 안도감을 느꼈음을 부정할 수가 없었다.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다가온 석희재의 손에는 작은 접시가 들려 있었다.

“나 먹으라고?”

석희재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현이 접시를 받아 들자마자 석희재는 뒤늦게 포크를 찾기 위해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사이에 이현은 벌써 손으로 과일을 몇 개나 집어먹었다.

그러면서 석희재의 훌쩍 큰 뒷모습이 기억하던 것보다 더 날씬하고 길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너 살 빠졌구나.”

돌아와 포크를 건네주는 석희재는 그새 반이 비어 버린 접시에 조금 놀란 눈치였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석희재는 ‘그럴지도’ 하고 중얼거렸다.

“의상도 딱 맞고. 의상팀이 옷 보내면서 조금 작을 수도 있다고 말했거든.”

“…….”

“수선은 안 해도 되겠더라.”

아까 침대에 눕기 전에 이현은 석희재에게 의상 피팅부터 시키고는 그 사진을 의상 팀에게 발송했다. 아침 일찍 방문한 소득이 있었던 셈이다. 덕분에 겨우 늦지 않게 제작 스케줄에 맞출 수 있었다.

이현이 지난 나흘간 연습실에 들락거리며 거의 모든 배우의 의상 피팅을 마칠 때까지 석희재는 단 한 번도 연습실에 나타나지 않았었다. 최근 연습 스케줄의 조정이 많았다는 건 알지만 왠지 그게 자신을 피하는 것 같다는 생각에 의기소침했던 것도 사실이다.

두 사람의 사이를 알 리가 없는 배우와 스태프들은 오며 가며 이현에게 석희재의 안부를 한마디씩 묻곤 했다. 두 사람이 석희재의 데뷔 전부터 알던 사이이고 심지어 이현의 추천으로 석희재가 캐스팅 오디션을 보았다는 소문이 그새 퍼진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제게 석희재의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어쩔 수 없이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불편감이 들었다. 그게 둘 중 누구에게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화제가 궁색한 사이에서 던지는 스몰 토크일 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이현은 석희재의 얼굴을 살폈다. 살이 빠져 음영이 더 드러난 얼굴에는 분위기가 더욱 덧칠되었다. 원래도 기분을 알아맞히기 어려운 알쏭달쏭한 얼굴이었는데… 갈수록 알기가 더 어렵다.

“살 빠진 건 어떻게 알았대.”

석희재가 픽 웃으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말투는 제법 시비조지만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았다. 그 얼굴을 살피며 이현이 말했다.

“그냥 딱 보기에도….”

“칠 키로 빠졌을 때는 몰랐으면서.”

“그런 적이 있었어?”

“모르면 됐어.”

석희재는 과일이나 더 먹으라며 접시를 밀어 주었다. 그러나 도리어 그 손길에 이현은 자신이 환자의 자리를 빼앗고 심지어 환자에게 대접받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다.

이현은 이불을 차곡차곡 접고 침대에서 내려왔다. 석희재의 말 없는 시선이 묵묵히 따라왔다.

“더 안 먹어?”

“너나 먹어. 살 빠진 사람이 먹어라.”

“갈 거야?”

“응. 출근해야지.”

문가 옷걸이로 걸어간 이현이 곱게 걸린 제 재킷을 집어 들 때였다. 뒤에서 기척이 느껴진다 싶더니 이내 석희재가 저를 안아 왔다.

가슴 앞으로 겹친 양팔이 제 몸을 완전히 가두고 있었다.

“아이… 오늘 왜 이러냐.”

이현은 한숨을 쉬면서도 제 등에 달라붙은 석희재를 뿌리치지 못했다.

왜일까. 기분이 상하면 당장 비협조적으로 변하는 석희재와 트러블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 첫 번째 이유였다. 전 섹스 파트너였던 둘 사이에 배우와 피디라는 관계가 끼어든 이후, 이현은 적절한 거리감을 찾느라 헤매고 있었다.

“오늘만 이럴 거 아닌데.”

“나 참….”

“안 갔으면 좋겠다.”

이현은 그저 난감해하며 제 목을 얽어매고 있는 석희재의 손목을 손끝으로 더듬었다. 풀어 달라는 의사 표현이었지만 그건 도리어 석희재에게 퍽 애틋하게 느껴진 모양이었다.

귓가에서 숨만 쉬고 있던 석희재가 용기를 내 고개를 숙이며 이현의 입술을 찾았다. 뺨에 한 번, 입꼬리에 한 번 차례로 부딪친 입술이 더 가까이 다가오며 키스를 시도했다. 그 순간 이현은 별생각 없이 고개를 돌려 주었다. 아무 저항 없이, 그저 몸에 밴 습관으로.

쪽.

선명한 소리를 남기며 입술과 입술이 맞붙는 가벼운 키스를 한 뒤에야 정신이 들었다. 이현은 약한 낭패감을 느꼈다. 선을 그어야 한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스며드는 듯한 스킨십에 자기가 그어 놨던 선조차 잊어버렸다.

이현이 얼떨떨하게 굳어서 어쩔 줄을 모르는 사이 석희재는 이현의 가슴을 느리게 어루만지며 더욱 고개를 깊이 숙였다. 행복감에 취해서 새가 쪼는 듯한 키스를 여러 번 남겼다. 쪽, 쪽 하는 소리가 귀를 어지럽혔다.

“야, 저기….”

석희재가 아주 가까이서 눈을 뜬 채로 이현을 주시했다. 다음 말을 기다리면서도 껴안은 팔을 풀 기색은 없었다. 이현은 마른침만 삼켰다.

“더 심하게 해 달라고 했잖아.”

석희재가 말했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다시 석희재를 돌아보며 ‘뭐?’ 하고 물었다. 입술이 가까워지자마자 그가 반사적으로 키스를 했다. 이현은 깜짝 놀라 다시 정면을 봤다.

“희망도 못 가지게 부숴 달라고 했잖아. 네가 잔인해지면 나도 마음 접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난 분명히 말한 것 같은데.”

“…….”

“왜 자꾸 물러져?”

“그거는.”

변명할 말이 없었다.

이현은 자기가 애초부터 이럴 줄 알고 있었다. 영국인은 원래 매너가 없어서 신사의 나라임을 강조한다고 했던가. 딱 자기 자신을 위한 비유였다. 원래부터 자제심이 부족하고 유혹에 약한 타입이니까, 자기가 정한 규칙을 스스로도 지키지 못할 걸 아니까 선을 그었다.

“처음이 제일 잔인하고 그다음부터 자꾸 쉬워지네. 속을 뻔했다.”

“너 지금 쉽다고 했냐?”

“그래.”

“…….”

“이거 봐. 화도 내다 말잖아.”

“…….”

“너무 좋다, 너.”

다시 푹 기대 오는 석희재 때문에 이현은 말문이 막혔다. 기가 막힌 건 어느새 슬쩍슬쩍 옛날 버릇처럼 ‘너’라고 막 부르고 있는데도 뭐라고 하지 못하는 저 자신이었다.

이현은 스스로의 속물적인 부분을 탓했다. 백수에서 연예인이 됐다고 물러진 건지. 아니면 사람을 무장 해제시키는 저 얼굴 때문인지…. 아무래도 대놓고 애정 공세를 하는 데에 적응이 되지 않아서 그런 것도 있는 것 같고.

이쯤 되면 이해가 되지 않는 건 석희재 쪽이었다. 보통 이 정도 외모에, 집도 넉넉하고 아쉬울 게 없는 사람들, 특히 이십 대 초반 남자들이란 자존심이 제일 중요한 족속이다. 워낙에 아쉬울 게 없으니 자존심이 다치면 금세 손을 턴다.

그걸 예상하고 대차게 깠는데 왜 아직도 제게 매달리고 있는지 이해가 안 됐다.

“왜 나야?”

말을 뱉는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일전에도 꼭 같은 것을 물었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묻는 기분도, 이유도 달랐다.

“좋아하니까… 말고 납득되는 이유가 알고 싶어.”

“…….”

“나랑 하는 섹스가 좋다든지, 남자니까 배려를 덜 해도 돼서 편하다든지… 소문 나는 게 싫어서 입 무거운 사람을 찾는다든지. 아니면.”

거기까지 말하고 이현은 뒤를 돌았다. 껴안았던 팔을 풀고 묵묵한 눈으로 저를 내려다보는 석희재가 거기 있었다.

무언가 깨진 눈이었다. 새가 쪼는 듯한 키스를 하며 행복해하던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우울해진 것에 뜨끔하면서도 이현은 안심했다. 좋은 분위기가 오래갈 리가 없었다. 오래 가면 그게 이상한 것이다.

아무튼 나는 말을 많이 하면 안 된다니까. 입만 열면 이렇게 산통을 깨서.

이현은 멋쩍게 시선을 피하며 들고 있던 재킷을 입었다.

석희재가 물었다.

“좋아한다는 말은 형한테 안 통해?”

“납득이 안 돼.”

“…….”

“왜 나여야만 하는지 잘 이해가 안 돼. 우린 서로 최선의 상대가 아니잖아. 아, 그러니까 내 말은, 서로 섹파로 시작해서 볼 거 못 볼 거 다 본 사이인데 인제 와서 연애를 한다는 게….”

“…….”

“객관적으로도 차이도 나고.”

“차이?”

석희재가 설명을 요구하는 눈을 했다. 제 입으로 낱낱이 말하려니 윗배가 싸하게 아픈 느낌이 들었지만 이현은 솔직히 답해 주었다.

“생각해 봐. 너 어리지, 잘생겼지, 앞으로 돈도 잘 벌 텐데. 지금도 그렇지만 앞으로도 주변에 괜찮은 사람은 발에 차이도록 많아질 거고… 우리가 만약 잘 된다 쳐. 그게 언젠가 끝나면 네 눈에 내가.”

“…….”

“얼마나 하찮아 보이겠어.”

“…….”

“…시간 낭비할 거 없잖아.”

이현은 부러 우습다는 듯 농담조로 말했지만 석희재는 전혀 웃지 않았다.

아. 이 분위기가 아닌가. 이현은 헛기침하며 멋없이 제 말을 주워 담았다.

“아, 알았어. 그렇게 질렸다는 표정 하지 마.”

“…안 질렸어….”

석희재가 목이 멘 소리를 냈다. 가야 하는데, 갈 준비도 모두 마쳤는데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현은 난감해하며 병실 가운데를 느리게 빙빙 돌다가 멀거니 서 있기를 반복했다.

울적한 분위기의 석희재가 제 발목을 잡고 있었다. 석희재는 소파에 앉아서 양손을 모은 채로 바닥을 쏘아보았다. ‘난 그럼 이제 간다, 푹 쉬어. 안녕.’ 하고 모른 척 뒤돌아 도망치면 되는데, 왠지 그러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발이 움직이질 않았다.

겨우 둘 사이 냉랭하던 분위기가 풀렸다. 이대로 나가면 다시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고 까탈스러운 배우 석희재가 저를 사사건건 불편하게 만들 것이다. 분명 그럴 거란 예감이 들었다.

“화가 나는데….”

석희재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이현은 얼른 뒤돌아 석희재의 다음 말에 귀 기울였다.

“화가 나는데, 형한테 화를 낼 수가 없잖아.”

“화 나는 게 있으면 풀어야지. 왜 화가 났어? 근데 마, 말로 해라….”

“왜 화났는지 이유 가르쳐 줘?”

저를 노려보는 석희재의 앞에서 이현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에 형이 물었지. 호텔 같이 갔던 거 나냐고. 그거 나 맞아.”

“뭐! 너 맞았구나. 그런데 왜….”

아니라고 했어?

라고 물으려고 했다.

그러나 바로 뒤이어 나온 말이 이현을 아연실색하게 만들었다.

“우리 자는데 형이 취해서 다른 남자 이름 불렀어.”

“내가?”

이현은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심장이 쿵, 저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완전히 잊었다고 생각한 과거의 그늘이 여전히 저를 사로잡고 있는 건가 싶어서.

제가 누구의 이름을 불렀는지 궁금해졌다. 반면 알고 싶지 않기도 했다. 물을까 말까 갈등하는 사이, 고맙게도 석희재가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정말 화났었는데, 생각해 보니까 나한테는 화낼 자격도 없잖아.”

“…….”

“내가 형 애인도 아닌데 화를 낼 명분이 없었어.”

“…….”

“그런 건 별로야.”

“아, 그러니까 네 말은.”

이현은 놀란 심장을 빠르게 가다듬었다.

조금 빙 돌아간 화법이지만 석희재는 나름대로 이현을 납득시키려고 하는 것 같았다. 왜 저에게 매달리냐는 물음에 대한 답이랄까. 확실히 ‘좋아하니까’ 보다는 납득이 되는 이유였다.

“네가 무시당했다는 기분이 싫은 거지. 그렇지.”

석희재는 대답 없이 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건… 미안하다. 나는 진짜 몰랐어. 내가 그런 줄… 널 무시한 게 아니라.”

“사과 안 해도 돼. 나는 애인도 뭣도 아니잖아.”

그렇게 말하면서 석희재는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자존심이 상한 눈치였다. 짐작하기 쉬운 반응을 보이자 이현은 차라리 안도했다.

이어서 석희재가 말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자격을 줘. 제대로 화낼 수 있게.”

“자, 자격?”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는 순간 석희재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이현은 그다음에 나올 그의 말을 감당할 수 없어서 저도 모르게 뒷걸음질 쳤다. 문을 열고 빠져나갈 때의 석희재의 어이없는 표정이 눈에 선했다.

택시의 문을 닫고 나서도 이현의 당황은 가시지 않은 채였다.

제대로 화낼 수 있게 자격을 달라고.

이현은 석희재의 말을 곱씹었다. 자격을 달라, 자격을…. 간접적으로 말했지만 그게 무슨 말인지는 확실히 알아들었다.

그래서 도망쳤다. 나 회사 늦겠다, 말을 얼버무리며 뒷걸음질 쳤다. 방을 떠나는 저를 붙잡지도 않고 바라보던 석희재의 눈이 여전히 또렷했다.

‘연애해.’

그가 진짜로 요구하고 밀어붙이면 자신은 싫든, 좋든 대답해야만 한다. 무책임하다는 건 알지만 그 상황이 버거워서 자리를 피하고 말았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햇빛이 눈꺼풀을 묵직하게 짓눌렀다. 오전 10시. 한잠 잔 것치고는 그다지 늦지 않은 시간이었다.

‘지금 사무실 들어갑니다.’

메시지를 보내고 나서 아무 생각 없이 택시를 잡았다. 오전부터 많은 일이 있어서 그런지 이제야 일과가 시작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푹 자고 일어나서 여전히 머리에 피가 돌지 않는 느낌도 남아 있었다.

사고는 멈추었다. 저를 바라보던 석희재의 눈만 계속 생각이 났다.

생각해 보니 그의 그런 눈이 무척 익숙하다. 잘생긴 남자들이 으레 그렇듯 아무 의미 없는 눈빛에도 분위기가 묻어나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 안에 담긴 감정이 설마 다른 것이었다면? 오래 묵혀 온 무언의 갈증이었다면?

“늦었습니다.”

일상적이지 않은 상념은 사무실에 들어가자마자 강제로 떨쳤다. 꾸벅, 인사를 하며 들어가자 바쁜 정적 속에서 김 실장이 맞인사를 해 주었다.

“응. 희재 씨 피팅 끝?”

“네. 잘 맞던데요. 사이즈는 괜찮고 의상팀이 색만 더 봐주면 되겠어요.”

“모델 사이즈인데 그게 맞아? 대단하네.”

“아… 그래요?”

“응. 제작 아니고 협찬이라.”

이현은 괜히 귓바퀴를 매만지며 자리에 앉았다. 이제 곧 당장 열한 시에 극장 대관팀과 회의가 있었다. 극장에 일부 공사를 해야 하는데 오늘 도면이 오기로 한 참이다. 그걸 미리 봐 놓아야 했다.

도면을 미리 파악해 공사 가능 여부를 먼저 알아 둔 후, 불가능한 부분이 있어도 어떻게든 극장을 설득해 낼 의무가 있었다. 그게 자신의 일이었다. 도면을 읽는 건 누가 가르쳐 준 적도, 수월하게 하는 요령을 알려 준 적도 없다. 그냥 해야 되니까 꾸역꾸역했고 어느새 몸에 배어 버렸다. 능력이 부족하니 볼 시간이라도 충분히 있으면 좋았겠지만 하루하루 닥치는 일정 속에서 그런 걸 바라는 것도 사치다.

가끔 제 능력 이상의 일에 기력을 쏟느라 소모되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바쁜 직장은 감정적으로 피로한 일에서 도피할 수 있는 수단으로는 최적이었다.

그렇게 눈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 도면을 보는 사이 석희재의 존재감도 희미해졌다.

‘언제까지 이렇게 버틸 수 있을지는 몰라도….’

허우대가 멀쩡하고 겉으로 보이는 성격만은 사교적이어서 그런지 의외로 이현은 알게 모르게 대시를 자주 받는 편이었다. 물론 게이인 걸 숨기고 있으니 보통 그 상대는 여자들이다.

간접적인 호감 표시, 둘만 남았을 때 상대방이 풍기는 부드러운 분위기…. 자신이 딱 한 번의 틈만 보이면 빠르게 눈치를 채고 제게 파고들 준비가 되어 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지만 한때 제 상사인 김 실장과도 그렇게 ‘썸 아닌 썸’을 탔던 적이 있다. 게이인 자신에게는 애초에 성사가 불가능한 사건이었지만.

결국에 사귀지 않아서, 아니, 사귀지 못한 사이라서 얼마나 다행인지. 한 사무실에서 매일 얼굴을 맞대는 관계인데 연애라도 했다가 깨졌다면 그 끝이 너무 끔찍하다.

아무튼 그런 좋은 감정의 불씨가 제 태생적 한계로 성사되지 않을 것을 알기에 이현은 보통 감정적으로 무책임했다. 평소보다 더 둔하게 굴었고 알아채지 못한 척했다. 결정적인 순간에는 항상 이렇게 자리를 피했다.

그러면 간접적으로 거절당했다는 것을 눈치챈 상대와의 관계는 주변의 둔한 사람도 알아챌 만큼 경직되곤 한다. 언제나 당당한 김 실장도 당시에는 꽤 자존심에 생채기를 입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인만큼 김 실장은 일부러 이현을 골탕 먹이거나 하는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도 한동안 불편한 티를 좀 내서 손발을 맞추며 일하기가 벅찬 시기가 있었다. 그녀가 이현의 상사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래도 만약 자신이 헤테로였고, 그래서 그녀와 잘될 가능성이 있었고, 또 진짜로 잘되었다고 하더라도 사귀는 건 안 될 말이었다. 그러면 끝나는 순간에는 자신은 이 회사를 떠나야 했을 테다.

어쨌든 보통 그럴 때에 자신이 납작 굽히고 들어가면 대부분 원래의 관계로 회복이 되었다. 어떤 이들은 자존심의 회복을 위해 자신이 새로 만난 인연을 자랑스레 이현에게 일부러 보여 주기도 했다. 김 실장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이현과의 일방적 썸이 불발된 몇 달 후, 김 실장은 에든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 출장을 갔다가 거기서 만난 영국인 연극배우와 연애를 시작했다. 이현은 그 사실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와… 저 봐. 나 같은 일개 부하직원하고는 급이 다른 남자를 낚아 오잖아.’

그 영국인 배우가 또 하필 이현보다 13살 연상이었다. 남의 남자를 보면서 할 생각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그 배우는 이현에게도 무척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내심 침 흘리는 자신을 책망하면서 이현은 김 실장을 축하했고, 부러워했고, 또 마음 헛헛해했다.

부러 연인을 데려와서 제게 소개해 주는 김 실장을 보며 또 그런 생각도 했던 것 같다. 그거 보세요, 실장님. 나는 애초에 당신이 공과 관심을 들일 상대가 아니었잖아요, 라고.

아무튼 시간은 흘러 흘러 지금은 김 실장도 그 배우와 헤어졌고, 김 실장과 부하직원인 이현 사이에 묘한 기류가 있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은 전부 퇴사했을 만큼 오래전의 일이 되었다. 모든 게 잘 봉합되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그렇게 잘….

이번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석희재와 분리되어 사무실에 처박히자 이현은 저 혼자 막무가내로 홀가분해졌다.

그냥 멀리서 거리감을 두면서 석희재가 먼저 지치기를 기다린다.

그러면 시간이 해결해 주겠지.

생각해 보면 이번 역시 일부러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쉽게 풀릴 상황에 가까웠다. 무엇보다도 석희재의 주변에는 조급증에 걸린 사람이 훨씬 많았다. 애정 공세를 퍼부을 준비가 된 이들이 한둘이 아니라는 뜻이다.

보도 자료에 나간 프로필 사진 한 장만으로 연뮤계에 엄청난 페이스의 신인이 하늘에서 뚝 떨어졌다며 벌써 팬 조공이 들어오고 난리인데, 업계인들은 그보다 훨씬 발이 빠르다. 이현도 귀동냥으로 주워듣는 게 있기에 벌써 몇몇 배우와 다른 제작사 대표들이 석희재와 개인적 스킨십을 가지려고 노력 중이라는 걸 알았다. 물론 석희재는 아직 모른다. 그런 건 본인에게 제일 소문이 늦게 들어가기 마련이다.

제가 눈에 찬다면 석희재도 외모를 보는 기준이 그렇게 높은 건 아닐 테고…. 저 덕분에 남자 맛도 알게 되었다면 풀은 더 넓어졌을 테고.

누가 채 가게 될까. 궁금하다, 궁금해.

그렇게 도면을 눈앞에 둔 채 집중 못 하고 다른 생각에 절어 갈 때쯤.

“어, 배우님!”

이현의 귀를 선명하게 파고드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쿠당탕! 의자를 힘차게 밀치고 일어나는 소리도 함께.

“어어어쩐 일로 오셨어요?”

홍보 팀 막내 신아름의 목소리였다. 유독 불안정하고 톤이 높은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별로 흥분하는 일이 없는 막내가 심적으로 무척 흥분했다는 뜻이다.

궁금증에 슬쩍 고개를 튼 이현의 시야 안에, 반쯤 가린 파티션 위로 훌쩍 큰 키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싸구려 백열등의 빛마저 고급스럽게 반사하는 새까만 머리카락이 너무나도 익숙했다.

흐헉.

이현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는데 사레들렸다.

누추한 사무실에 찾아온 것은 석희재였다.

제 뒤를 부랴부랴 따라온 게 분명했다. 불과 한 시간 전에 병원에서 사적으로 만났던 이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에 이현은 턱을 괸 채로 굳어 버렸다.

“가져다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배우님이 직접요? 저, 저, 저 주세요.”

“이 PD님 물건이라 직접 드리고 싶은데요.”

그렇게 말하며 석희재는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살림이 지나치게 많은 난잡하고 정리되지 않은 사무실 안에서 그는 이현을 얼른 찾지 못했다. ‘웬일로 오셨어요!’ 하며 그를 둘러싼 직원들이 한 무더기라 더더욱 그랬다. 보통 배우들이 사무실에 오는 일이 없는지라 이건 직원들에게도 엄청난 이벤트나 다름없었다.

이현은 직원들의 뒷모습에서 ‘석희재다, 석희재야! 사무실에 그가 왔다, 대박!’이라고 속마음으로만 수선을 피우는 흥분을 읽을 수가 있었다. 석희재는 곧 조용히 저를 둘러싸는 군중 사이에 머리만 남기고 폭 파묻혔다.

그사이 신아름은 석희재의 곱고 아름다운 두 손에 계속해서 짐을 들릴 수 없다고 생각했는지 짐을 뺏으려고 안달이었다.

“아니에요. 저 주세요! 이거 의상 맞죠? 그냥 저 주시면 돼요. 무거우니까 저 주세요. 어, 저, 저 그리고.”

그 순간 이현의 등줄기에 소름이 쭈뼛 솟았다. 막내 신아름 덕분에 석희재가 왜 왔는지 안 탓이다.

의상을 병실에 놓고 오다니 정신이 빠진 게 틀림없었다.

“배우님. 서 계시지 말고 안에 들어가 계세요.”

“회의실에 잠깐 앉아 계시면 저희 대표님 모시고 올게요. 인사하고 가세요.”

“차 한 잔 드실래요? 믹스 커피랑 카누밖에 없는데… 괜찮으세요?”

방금 전까지 쥐죽은 듯했던 사무실에 훈훈한 생기가 돌았다. 과연 석희재의 얼굴은 복지 그 자체인 게 틀림이 없다.

그 사이 이현에게는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11시를 10여 분 앞두고 극장 팀이 근처 카페에 도착했다는 연락이었다.

이현은 몸을 낮추고 괜히 고개를 수그리고는 빠른 걸음으로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들키지 않으리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이 보는 눈이 많은 틈에서 석희재가 저를 쉽게 붙잡을 수 없을 거라는 생각 정도는 했다.

“피디님, 어디 가세요.”

그러나 이현의 추측은 산산이 부서졌다.

석희재는 사람들을 부드럽게 밀치고 나와 놀랍도록 빠른 속도로 이현의 앞에 멈춰 섰다. 그대로 지나치려는 이현의 손목을 잡아채기까지 했다. 서슴없는 스킨십에 불에 덴 듯이 놀란 쪽은 이현이었다.

“나, 나, 나는 미팅 가요.”

“진짜예요?”

숨죽인 시선이 제게 모여들었다는 것을 안 이현은 빠르게 석희재를 문밖으로 끄집어냈다.

사무실 문을 닫자마자 석희재가 할 말 많은 얼굴로 저를 내려다봤다.

아까 병실을 도망치기 직전과 별다르지 않은 그의 눈빛을 본 순간 이현은 알아챘다.

이건 시한폭탄이었다.

석희재는 물불 못 가리고 있는 것 같았다.

“나 진짜 미팅 가야 돼요.”

“나도 데려가요.”

“뭐? 무슨 미팅인 줄 알고.”

“카페에서 하는 거 아니에요? 옆 테이블에 앉아 있을게. 나 없는 사람 취급해.”

“진짜 일이야. 못 믿어?”

“믿어. 방해 안 한다니까.”

그때 사무실 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열렸다.

빼꼼 열린 문 사이로 고개를 내민 건 티켓 팀 계약 직원이었다. 바깥의 동향을 살피기 위해 파견된 스파이가 분명했다. 시치미를 떼지만 화장실에 가는 척 나와 본 티가 역력히 났다.

직원은 놀라서 입을 꾹 다문 이현과 덩달아 입을 다문 석희재의 옆을 총총 가로질러 복도 끝 화장실로 향했다.

그녀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이현은 결국 어쩔 수 없이 석희재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이현이 저를 붙잡았다는 사실만으로 석희재는 무척 순순히 이현을 따라왔다.

***

“물을 쓴다고요. 객석에 튀지 않을까요.”

“그 점은 사전 공지를 할 거고요. 제 생각에는 오케스트라 피트가 있으니까 거리 확보는 될 것 같습니다. 정확한 건 테크 리허설을 해 봐야 알겠지만요… 앞 1열에 무릎에 덮을 수 있는 비닐 정도는 제공할 수도 있고요.”

“그래요. 물을 쓰는 게 불가능하지는 않아요. 방수 문제로 바닥 공사는 해야겠지만 습도에는 문제가 없을 겁니다. 내부 시스템이 있어서… 습기가 생기면 배우들은 오히려 좋아하겠네요. 우리 극장은 건조해서 문제잖아요.”

“그렇게 받아들여 주시면 감사합니다.”

“극장 쪽에서도 이런 새로운 시도는 자꾸 해 보는 게 더 좋거든요. 가능성을 보여 준다고나 할까?”

“예… 하하하.”

“저 그런데….”

극장 대관 담당 최양철 과장이 몸을 낮추었다. 그의 목소리가 낮아져 이현도 덩달아 심각해지며 몸을 낮췄다.

“…옆에 계신 분이 기다리시는 것 같은데, 저희 미팅이 너무 길어지는 건 아니죠?”

최양철 과장이 옆 테이블을 흘끔거릴 때 이현은 올 게 왔구나 생각했다. 방해 안 한다는 말은 거짓말이었다. 안 그래도 존재감이 엄청난 녀석이 온몸으로 여길 봐 달라 시위하고 있었다. 최 과장이 신경 쓰는 것도 당연했다.

이현은 괜히 자세를 고쳐앉고 들썩이면서 말을 더듬었다.

“아. 그, 그런 건 아니….”

“배우분 맞으시죠? 혹시 이번에 저희 공연에 나오십니까?”

“네, 그건 맞….”

“진짜 잘생기셨는데… 혹시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어도 될까요?”

최양철 과장이 수줍게 말했다. 이현의 말문이 막혔다.

최양철 과장, 그는 마흔다섯 살 먹은 평범한 공기관 직원이었다. 예술계에 딱히 포부가 있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주어진 일을 열심히 하는 공무원이자, 연예인보다는 칼퇴가 먼저인 직장인. 그래서인지 아무리 유명한 배우를 봐도 가까이서 봐도 반응이 항상 맹숭한 사람이었는데….

석희재가 이 세상에 얼굴로 못 홀리는 사람이 있을까?

이현은 궁금해했다. 동시에 최양철 과장이 이런 사적인 부탁을 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해 잠깐 넋이 빠졌다.

“사… 진이요.”

“네. 우리 딸이 좋아할 것 같아서….”

이현은 이제까지 일부러 보지 않던 옆을 어렵게 바라보았다.

커피를 호록, 마시던 석희재가 차분히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왜 제게 말을 안 걸고 쳐다보기만 하냐는 듯 도리어 이현을 도전적으로 빤히 바라보았다.

인제 와서 ‘모르는 사람이고 왜 쳐다보는지 모르겠어요’ 할 수도 없어서 이현은 어쩔 수 없이 석희재에게 말을 걸었다.

“희…재 씨? 괜찮으시면 사진 한 장만 부탁드려도….”

“…….”

“최양철 과장님이라고, 아트센터 대관 담당 과장님이신데 하, 한 장만 찍어 주세요.”

이현이 말하자 석희재는 한 번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이어 말했다.

“PD님이 저랑 같이 점심 먹어 주시면요.”

***

핸드폰 화면 프레임에 담긴 평범한 중년 남자와 석희재의 투샷을 보면서 이현은 묘한 기분에 시달렸다.

이건 학살이었다.

“음… 한 장 더 찍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이현은 경건하게 각도를 조절했다. 어떻게든 최양철 과장과 석희재의 얼굴 크기 차를 줄이기 위해… 그러나 어떻게 해도 시공간의 왜곡이 일어난 것 같은 부조화는 사라지지 않았다.

체념하고 촬영 버튼을 누르기 직전, 렌즈 너머 석희재가 입꼬리를 끌어당기며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있지도 않은 후광에 눈이 부실 듯했다.

이현은 마음속으로만 외쳤다.

‘그만해! 그만하란 말이야!’

석희재의 얼굴은 지나치게 작고 입체적이어서 위에서 바로 내리꽂는 무자비한 백열등 조명 아래서도 조각상 같았다. 반면 곁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서 있는 최양철 과장의 평범하기 이루 말할 데 없는 이목구비는 말린 오징어로 보였다. 얼굴의 면적은 두 배로 큰데 어깨는 석희재가 더 넓다. 인체 균형이 완전히 어그러져 다른 종족처럼 보일 지경이었다.

이대로라면 평생을 제 외모에 한 치 성찰도 없이 살았을 최양철 과장이 자신의 외모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만다. 방금 이현 역시 아무 생각 없이 대면해 오던 사람의 외모를 다시금 자각한 것처럼. 물론 그런 비극이 일어난다고 한들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니었다. 석희재의 잘못은 더더욱 아니고.

“아, 안 흔들리고 잘 나온 것 같아요.”

“그래요?”

촬영을 마친 이현은 핸드폰을 싱글벙글한 얼굴의 주인에게 건네주었다. ‘우리 딸한테 연예인하고 사진 찍었다고 자랑해야지.’ 하며 핸드폰을 받아 든 최양철 과장은 바로 결과물을 확인했다. 미소 지은 그의 얼굴에 미세하게 금이 갔다. 이현은 그의 심정이 공감되어 마른침을 삼켰다.

“가요. PD님.”

컵을 정리하고 온 석희재가 제 곁에 바짝 붙어 섰다. 이현은 그 옆에 선 제 얼굴이 어떻게 보일까 걱정하면서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떨어져 섰다. 하지만 그때마다 석희재가 제 속도 모르고 찰싹 붙었다.

“차장님.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흠흠, 저… 저기.”

“예?”

“저, 배우분 사진만 한 장 따로 찍어 주시면 안 됩니까?”

이현은 ‘아….’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받아 든 과장의 핸드폰 안에 투샷은 이미 삭제된 채였다. 그래, 지구상에서 없애 버리고 싶었겠지. 이현은 깊이 이해하는 심정으로 최 과장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결국 석희재는 최양철 과장의 핸드폰으로 제 셀카를 한 장 찍어 넘겼다. 셀카를 찍는 폼은 태어나서 한 번도 안 해 본 행동을 하는 것처럼 어색했는데도 결과물만은 끝내줬다. 사진작가 조 실장이 석희재의 촬영을 마친 후 자신의 마스터피스였다며 그토록 자화자찬했건만 실은 그의 능력 덕이 아니라 재료가 좋았던 것이다.

만족한 최양철 과장이 떠난 후 이현은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 팬서비스는 안 해도 돼.”

이현의 말에 석희재는 대답이 없었다.

아직 제가 배우라는 자각이 없는가 싶어, 이현은 그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말을 덧붙였다.

“자꾸 해 주면 부탁하는 사람들만 늘어나거든. 저기 좀 봐라. 이제 카페 직원들도 죄다 찍어 달라고 하겠다.”

그의 말이 사실이었다. 석희재가 누군가에게 사진을 찍어 주는 걸 눈여겨보고 있었는지 카운터 근처에 삼삼오오 모인 알바생들이 자꾸만 이쪽을 흘끔거렸다. 핸드폰 카메라를 켜 놓고 있는 걸 보니 틈만 보이면 당장 부탁할 기세다.

“사적으로 찍힌 사진 너무 많이 돌아다니면 회사도 안 좋아해. 얼굴은… 뭐 막 찍어도 잘 나오니까 다행이지만 어쩌다 회사가 컨트롤하기 어려운 사진이 찍힐 수도 있고.”

“예를 들면?”

“뭐, 장소가 논란이 된다거나. 찍히면 안 되는 게 찍힌다든가.”

“…….”

“일단 나가자.”

이현이 석희재의 등을 떠밀며 빠르게 카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가 가려는 곳은 카페와 몇백 미터 떨어지지 않은 대학로 작은 골목길 안의 삼계탕집이었다.

회벽을 바른 높은 담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바깥에서는 쉽게 상상할 수 없던 풍경이 펼쳐진다. 한옥을 개조해 식당으로 꾸민 곳이라 정원 주변을 대청마루가 둘러싸고 있었다. 비가 오면 한결 운치가 더하다.

이현은 뒤를 흘끔 바라보았다. 묵묵히 저를 따라오던 석희재가 정원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이모. 혹시 룸 있을까요? 예약은 안 했는데.”

“이 피디! 오랜만에 왔네. 지금 점심이라 자리 꽉 찼는데. 우리 식구들 먹는 자리라도 내줘?”

“그러면 감사하죠.”

이현은 익숙한 단골처럼 마루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고는 미닫이문을 연 채로 석희재에게 먼저 들어가라고 턱짓을 했다.

“삼계탕 먹지?”

그렇게 묻자 석희재가 안쪽에 앉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모. 삼계탕 하나, 반계탕 하나 주세요.”

이현은 주문을 마친 후 미닫이문을 닫고 들어갔다. 물수건으로 손을 닦고 있으려니 석희재가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또 할 말 많은 표정이었다.

왜 저렇게 볼까. 의견도 묻지 않고 점심 메뉴를 정해 버려서? 하지만 이현이 알기로 이 근처에 외부의 시야에서 차단되어 점심을 먹을 수 있는 식당은 무척 한정적이었다.

이십 대 초반이 오기에는 너무 토속적인가. 하긴 선호할 것 같지 않기는 하다.

“왜. 삼계탕 싫어?”

“아니.”

“아니긴 뭐가 아니야. 얼굴에 불만이 가득한데… 파스타 먹고 싶냐?”

“내가 언제….”

“대학생들은 그런 거 좋아하지 않나.”

석희재는 ‘뭐…?’ 라고 하며 말문이 턱 막힌 표정을 지었다.

숟가락을 세팅하며 이현은 아직도 적응되지 않는 석희재의 진짜 나이를 떠올렸다. 그가 저보다 7살 연하라는 걸 알자마자 많은 게 어려워졌다. 원래 알던 이와 완전히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석희재가 저와 동갑내기의 속 모를 직장인, 스트레이트면서도 남자를 성욕 해소용 섹스 파트너로 쓰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때와 지금은 확실히 천지 차이로 다른 사람이었다.

저에게 감정적으로 시큰둥한 나쁜 남자인 줄만 알았을 때 이현은 도리어 마음을 놓고 석희재에게 많은 것을 털어놓았다. 사 형제 중 막내로 자란 이현은 편해진 상대에게 저도 모르게 막내처럼 구는 습관이 있었다. 한 번 풀어지면 정도를 모르고 기대어 버리려 한다. 그런 저를 아니까 겨우 단속하지만… 생각처럼은 잘되지 않았다. 남들이 저와 깊은 관계가 되자마자 빨리 질리는 이유고, 저 역시 스스로의 성격 중에서 이 부분을 가장 싫어했다.

그 모든 과거를 조용한 저만의 흑역사로 묻어 버리고 싶은데….

석희재는 제가 징징거릴 만한 상대로 부적절했다는 사실을 깨닫자마자 이현이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자기혐오였다. 그 심정적 거리감이 아직도 존재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라.”

석희재가 미간을 구기며 뒤늦게 반론을 폈다.

“응?”

“왜 반계탕 먹어.”

“뭐?”

“내가 그거 먹을게. 형이 한 마리 다 먹어.”

석희재는 직후 미닫이문이 열리고 들어온 이모님께 말했다. ‘반계탕은 여기. 삼계탕은 피디님 주세요.’ 이현은 됐다고 손사래를 치다가 뜨거운 국물이 손가락에 튀어 이모님에게 한 소리를 들었다. 말릴 새도 없이 석희재는 벌써 반계탕 뚝배기에 숟가락을 담그고 있었다.

저보다 한창때의, 잘 먹을 나이의 연하에게 배려받는 기분이 묘했다. 멋쩍어진 이현은 말없이 뜨거운 국물을 한 숟가락 먹었다.

반 이상 먹어 갈 때쯤, 묵묵히 그릇을 비우던 석희재가 숟가락을 먼저 내려놨다.

“배불러?”

“그냥, 입맛에 안 맞아서….”

“그래? 여기 잘하는 덴데.”

‘역시 학생에게는 지나치게 토속적인 메뉴였던가’, 하고 생각할 때 석희재가 툭 내뱉었다.

“싱거워.”

“…….”

그 말에 잠시 말이 없던 이현은 잠시 후 소금과 후추통을 들어 석희재의 그릇 안에 탈탈 털어 넣어 주었다. 뽀얀 국물에 이제야 들어가는 간을 보면서 석희재도 아무 말이 없었다.

당연히 넣어 먹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생각이 짧았다. 이 왕자님은 제 돈 주고 삼계탕 한 번 안 사 먹어 본 게 분명했다.

“세상에 얼마나 곱게 살았으면….”

“…….”

“반이나 먹은 게 신기하다. 어떻게 소금도 안 넣고 먹어?”

“…….”

“먹어 봐. 이제 맛있지?”

“그만해.”

고개를 숙인 석희재의 귀가 조금 붉어져 있어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이현은 아무 맛도 안 나는 삼계탕을 저 초연한 표정으로 미련하게 먹고 있던 석희재를 생각하며 피식피식 웃었다.

이럴 때 어린 티가 나는구나.

그리고 이제 이현의 웃는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쪽은 석희재였다.

“옛날 생각나.”

석희재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현은 석희재가 어릴 때 먹은 추억의 삼계탕이라도 생각하고 있는 건가 추측했다.

그러나 이어진 말은 전혀 다른 맥락이었다.

“원래 이렇게 같이 자주 먹었잖아.”

“응? 우리 여기 처음 오는데….”

고개를 가로저은 석희재가 얼굴을 들었다.

그 까맣고 먹먹한 눈과 마주쳤을 때 이현은 애써 모른 척하려던 진심을 다시 한번 정면으로 마주 보고 말았다.

“우리 이렇게 되기 전에 둘이 같이 자주 밥 먹었잖아.”

“…….”

“형 늦게 퇴근하면 편의점에서 도시락 사 먹고. 나는 맥주 마시고.”

“…….”

“편의점에 도시락 종류가 그렇게 많은 줄은 처음 알았어. 형은 매번 불고기 들어간 것만 먹었지만…. 근데 나도 먹어 봤는데 맛없더라.”

“…….”

“그리고 쉬는 날 주말에 같이 늦게 일어나면 배달 음식 시켜 먹고. 우리 자주 그랬잖아.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서.”

그때 생각나고 좋다고.

석희재가 나직하게 하는 말에 이현은 무어라 할 말이 없어졌다. 그가 갑자기 진지해졌기 때문만은 아니다. 3년간 누적시킨 일상의 기억들이 저에게도 스며들어 온 탓이다.

많이 가까운 사이였다. 몸의 거리만큼이나. 고작 섹스 파트너지만 제 일상을 그만큼 깊이 공유한 사람도 없었다. 그러니 석희재가 제 일터에 뚜벅뚜벅 침입했을 때도 당황한 와중에 말로 잘 풀어서 헤어지자고 생각했던 거다.

그리고 당연히 이 관계를 끝내야 한다고 생각했던 이유는, 석희재도 그러기를 원하고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기 때문인데.

“나 다시 돌아가고 싶어, 그때로.”

“…….”

“형이랑 연애하고 싶어.”

그가 다시 조용히 청해 왔다.

이현은 속으로 탄식했다. 답할 것이 두려워서 속수무책으로 피하던 질문이 결국 나와 버렸다. 어쩌면 저도 눈치채고 있었던 순서다. 꼭 이럴 것만 같아서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밀실로 그를 이끌지 않았나.

“연애한다고 전이랑 크게 변하는 것도 없잖아.”

“그건… 그런 건 제대로 된 연애가 아냐.”

“제대로 된 연애가 뭔지 모르겠는데, 난.”

석희재가 픽 웃었다. 또 그 표정이다. 일견 비웃는 듯하지만 사실은 별로 기분이 나빠 보이지도 않는 묘한 얼굴. 반쯤의 체념과 반쯤의 냉소가 뒤섞인 듯한.

“귀찮게 안 할게. 형은 의무도 책임도 지지 마.”

“…….”

“난 아무것도 요구 안 할 거야. 애인이니까 이래라저래라 하는 일 없을 거야. 얼마나 바쁜지 알아. 예전하고 똑같은 사이여도 상관없어.”

“…….”

“그냥 애인 자리만 나한테 줘.”

이현이 대답하지 않자 침묵이 이어졌다.

석희재는 조바심을 숨긴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다. 등을 벽에 기댄 채로 느긋한 척 앉아 있지만 저를 관찰하는 눈에서 다 티가 났다. 마음 졸이는 모습이 지나치게 잘 보였다.

이현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그게 무슨 의미가….”

“의미 있어. 적어도 다른 놈 만나지는 않을 거 아냐.”

“…….”

“나 가지고 만족을 못 하겠다, 그래서 다른 남자가 필요하다…. 만약 다른 놈이 되어 달라면 돼 줄게. 네가 해 달라는 건 다 해 줄게. 그러니까 성욕은 나한테만 풀어. 나 원래도 시키는 대로 잘했잖아. 원하는 체위나 도구 있으면… 읍.”

이현은 우당탕 몸을 일으켜 식탁 너머 석희재의 입을 틀어막았다.

“어… 어, 어린 게 못하는 말이 없다. 고고공공장소에서!”

석희재는 쉽사리 이현의 손을 털어 내고는 또 픽 웃었다. ‘삼계탕집이 공공장소야?’ 단어로 꼬투리를 잡는 바람에 이현의 귀가 빨개졌다.

그래도 석희재의 입을 틀어막은 것을 후회하지 않은 이유는 마침 미닫이문이 열렸기 때문이다. 삼계탕을 다 마시고 나면 주는 인삼주가 들어왔다.

만약 제때 말리지 못했다면 이모님이 석희재의 되바라진 말을 들었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벌렁거려 이현은 이모님이 나갈 때까지 석상처럼 굳어 있었다. 그러나 긴장한 건 이현뿐인지 그의 앞에서 석희재는 여유롭게 인삼주를 마셨다.

“가게 좋다. 술도 주고.”

“…….”

이현은 사무실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술에는 손대지 않았다. 석희재는 이현의 것도 자기가 마셔도 되냐고 물었고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딱 두 잔의 술인데 도수가 은근히 있어서 그런지. 석희재의 입술과 눈가가 금방 붉어졌다.

“대답은 최대한 빨리해 줘.”

“…느리게 하면 어떻게 되냐?”

“형이 제일 무서워하는 일이 생길 거야.”

눈자위가 붉어진 석희재가 하는 협박에서 꽤 진심이 느껴졌기에 이현은 어렵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도 사무실이고 미팅이고 막무가내로 따라온 석희재가 본격적으로 마음을 먹는다면 얼마나 번거로워질지 짐작이 됐다. 상사인 김 실장이 저를 불편하게 했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것이다. 김 실장은 적어도 일이 우선인 사람이었다. 하지만 석희재도 그런지는 모르겠다. 거절당했다는 앙심이 악의로 자라나면 감당할 수 없을 게 분명했다.

“내가 24시간 정도는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은데.”

“뭐? 너무 빠른데….”

석희재는 ‘애인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한지우를 잔뜩 의식하느라 초조한 상태였다. 그런 그의 속내를 알 리가 없는 이현은 생각보다 빠른 데드라인에 반쯤 헐떡이며 답했다. 24시간이라니 생각만 해도 숨이 찼다. 이런 중대한 결정을 쫓기듯 할 수는 없었다.

이현이 말을 흐리자 석희재가 벌떡 일어나 식탁을 빙 돌았다. 그러더니 이현의 곁에 털썩 주저앉았다. 앉으며 비틀거리는 모양새가 벌써 이상했다. 설마 인삼주 두 잔에 취했나? 생각하자마자 아프게 턱을 쥐어 왔다.

“그럼 키스 한 번만 하자.”

“지, 지금?”

“대답도 잘 해 주고, 밥도 잘 먹고. 예뻐서 못 참겠어.”

“뭐?”

“키스 한 번에 24시간씩 대답 미루게 해 줄게.”

이현의 뒷덜미를 어루만지듯 쥔 손에 힘이 들어가 있었다. 힘을 조절 못 하는 걸 보니 정말로 술기운이 빠르게 올랐나 보다. 아니, 조금 회까닥 돌아 버린 것 같기도.

나 너무 오래 참았어.

형이 자꾸 착하게 굴어서 이제 못 참겠어.

키스해 주면, 그러면 나도 조금 인내심이 생겨….

중얼거리는 석희재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 이현은 힘없이 벽으로 밀렸다. 문이 열려도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몰래 입술이 꾹 눌리는 입맞춤을 당했다. 몸은 석희재에게 깔려 완전히 구겨지고 뒷머리는 벽에 눌렸다.

입술을 할짝이는 혀와 쪽쪽거리며 위아래 입술을 빨아들이는 작은 압력.

잠시 후 쿵, 하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이현은 석희재의 기다란 몸에 납작 깔리고 말았다. 한 번 거부도 하지 못한 채로 긴 키스가 이어졌다. 소리 없이 살해당하는 듯한 기분이라고, 이현은 생각했다.

오랜만에 마음에 쏙 드는 키스를 한 이현은 누그러졌다. 사람을 찍어 누르듯이 몰아붙이는 방식도 좋았고, 키스 후에 오래 음미하듯 입술을 문 채로 가슴을 맞대고 있는 것도 좋았다. 상대가 누구든 체온을 나눈다는 것은 안온한 기분을 준다. 이현은 자신이 왜 사람과 살을 맞대는 것을 좋아하는지, 석희재라는 고정적인 파트너를 자의로 버린 후 이성적인 뇌와 달리 몸은 얼마나 외로웠는지를 절절히 체감하는 중이었다. 고작 키스일 뿐인데, 그걸로 느껴지는 생동하는 맥박의 두근거림과 근육, 그 아래 뼈의 움직임까지 모두 다 지나치게 좋았다.

이현은 제 위에 길게 누운 석희재의 등을 저도 모르게 어루만졌다. 가끔은 머리카락도. 자각은 없었지만 그 손길에는 충만한 몸의 교류를 나눈 직후의 애정이 깃들어 있었다.

‘가만, 나랑 처음 만났을 때 스무 살이었지.

설마 이렇게 키스하는 방식도 내가 가르친 건가?

어쩌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방법으로, 딱 그렇게 길들여져서….’

불현듯 깨달은 사실에 골몰하고 있을 때였다. 이현은 턱 가까이 쏟아지는 석희재의 호흡이 다소 불안하다고 느껴졌다.

“나… 울렁거려.”

“응?”

석희재가 힘겹게 숨과 함께 말을 쏟아 냈다. 고개를 비튼 이현은 석희재의 낯이 눈에 띄게 창백해졌다는 것을 알았다.

“어디 아파? 왜 그래?”

“토할 것 같아….”

석희재는 드물게 미간을 왈칵 일그러뜨렸다. 아픈 사람 특유의 짜증이 묻어 있었다.

약간 멍한 얼굴로 허겁지겁 몸을 일으킨 이현은 석희재에게 물을 먹였다. 그러고는 축 늘어진 석희재의 얼굴을 제 허벅지에 기대게 한 후 박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눌린 뒷머리와 구겨진 옷자락을 정리한 건 그다음이었다. 허벅지를 베고 누운 석희재의 감은 눈에 푸른 핏줄이 비쳐 보였다.

배우가 아프다는 소식에 박 팀장은 혼비백산해서 단숨에 대학로까지 달려왔다. 그러고는 물었다. 병원에 있어야 할 애가 왜 여기 있느냐고. 그 물음에 이현은 제가 놓고 온 의상을 떠올리며 다 제 탓이라 고백했다. 박 팀장은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희재가 3일 동안 아무것도 안 먹었어요. 어제 급하게 수액만 좀 맞았는데…. 오늘 미음부터 천천히 먹이려고 했거든요.”

“아….”

“그런데 삼계탕을 먹었나 봐요? 혹시 이건 술입니까?”

이현의 눈길은 갈 곳을 모르고 헤맸다. 어쩐지, 주량에 한참 못 미치는 인삼주 두 잔에 폭주하던 이유가 있었다. 제대로 된 음식을 섭취할 때가 아닌데 빈속에 찐한 보양식은 물론, 술까지 털어 넣었다. 알코올이 빨리 흡수된 것도 당연했다.

“죄송합….”

“피디님은 아무것도 몰라. 내가 먹고 싶다고 했어.”

이현의 말을 자르며 석희재가 대답했다. 여전히 맥도 못 추고 벽에 기대어 있는 주제에 눈빛이 형형했다. 박 팀장은 한숨을 쉬며 석희재를 부축했다.

“다시 병원에 가야겠네요. 이렇게 됐으니까 연습 스케줄 좀 잘 부탁드립니다. 며칠 더 쉬어야 될지도 모르겠어요.”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연출부에 잘 말씀드리겠습니다.”

“그럼 들어가세요. 피디님.”

석희재는 차 안에 들어갈 때까지 이현을 향한 고집스러운 시선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이현은 좁은 골목을 빠져나가는 차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터덜터덜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다소 황당한 방식으로 마무리한 키스 때문에 입맛이 썼다.

빌딩의 주차장 방면으로 들어가 담배를 입에 무니 그사이 문자가 와 있다. 석희재였다.

「지금부터 카운트다운.」오후 1:19

참나, 소리 없이 혀를 차는 이현의 입에서 헛바람이 빠져나왔다. 비틀거리며 끌려간 주제에 너는 지금 이게 중요하다 이거지.

이현은 다시 한번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며 어이없이 웃었다. 제가 알던 과묵하고 침착한 남자의 내면에서 진짜 석희재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모르는 사람을 알아가는 기분이 생소하지만 싫지는 않았다.

***

「48시간 후」오후 1:20

석희재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놀랍게도 이현으로부터였다.

답이 즉시 도착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별것 아닌 내용도 여러 번 곱씹게 된다. 그는 키스 한 번의 대가를 악착같이 받아 갔다. 그래도 좋았다. 이 짧은 단어가 주는 기대감이 너무나도 달콤했다.

“희재야.”

병원을 향해 운전 중인 박 팀장이 입을 열었다.

“네?”

“그래도 제작사가 신경을 쓰나 보다. 이 PD님이 너를 챙겨 주시네.”

“그래요?”

석희재는 표정 관리를 하기 위해 의자에 더 깊숙이 몸을 묻었다. 여전히 속이 울렁거렸고 불규칙하게 흔들리는 차체가 역한 속을 더 돋웠지만 그래도 몰래 들떴다. 진짜로 이현이 저를 특별 취급해 주는 건지 궁금했다. 진짜라면 더 구체적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저 식당이… 좋은 데예요?”

“그게 무슨 소리야?”

“피디님이 친한 사람만 데리고 가는….”

박 팀장은 웃음을 터뜨리며 석희재의 말을 잘랐다. 석희재는 금세 무안해졌다.

“에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보통 잘 안 저래.”

“보통은 어떤데요.”

“계약서 쓸 때 한 번 보고, 시파티 때 보고, 쫑파티 때 보고. 끝!”

석희재는 시파티는 뭘까, 하고 생소한 단어를 곱씹었다. 쫑파티의 앞에 붙었으니 ‘시작하는 파티’쯤이려나 하고 추측을 했다.

“병문안도 와 주셨는데 감사하네. 다음번에 언제 시간 되시냐고 물어봐. 우리가 한 끼 대접하게.”

“꼭 물어볼게요.”

차는 머지않아 병원에 도착했다. 석희재는 주차장에 내려 엘리베이터를 타고 아늑하게 꾸며진 병실로 다시 돌아갔다.

떠났을 때와 다름없이 병실 안에는 습도 조절을 위한 가습기가 돌아가고 있었고 가전의 백색 소음이 들릴 정도로 무척 조용했다. 석희재는 옷을 갈아입은 후 침대에 누워 짧은 진찰을 받았다. 뒤집힌 속을 가라앉히기 위해 약을 처방받고 팔에는 빠른 회복을 위한 수액이 다시 꽂혔다.

석희재는 순식간에 부자유스러워진 오른팔을 잠시 쥐었다가 놓았다가를 반복했다.

48시간의 기한이 되기 전에 빨리 털고 일어나야 한다. 넋 놓고 기다리기만 할 생각은 없었다. 긍정적인 대답을 끌어낼 수 있는 모든 공세를 다 하고 싶었다.

만약 거절할 눈치면 데드라인 직전에 키스라도 해서 억지로 24시간을 다시 미루기라도 해야 했다.

‘그런 일은 없었으면 좋겠는데.’

키스를 떠올리자 자연히 키스 한 번으로 흐물흐물 녹던 이현이 머릿속에 꽉 찼다. 어떤 방식으로 공략해야 할지 알 것 같았다. 역시 이현은 몸의 공격에 약하다.

“그럼 쉬어라, 희재야. 지루해도 조금 참아.”

박 팀장은 그렇게 말하고 막 문을 나서려 했다. 석희재는 나직한 목소리로 박 팀장을 불러세웠다.

“팀장님.”

“어?”

“아파서 좋겠다고 하셨잖아요.”

“아, 그랬나? 그래, 그랬지.”

어머니가 병문안을 와줬다는 사실에 박 팀장이 그렇게 말했었다. 그때 그의 목소리에는 모자간의 정을 고파 하는 석희재를 향한 위로와 안쓰러움의 색이 묻어 있었다. 그러나 타인의 동정을 알아채도 아무렇지도 않을 정도로, 어머니의 방문은 기실 석희재에게 그다지 큰 의미가 되지 못했다.

대신 석희재는 조금 다른 것을 떠올렸다. 창백한 제 낯빛을 보고 벼락같이 몸을 일으키던 이현의 모습. 순식간에 걱정 어린 색으로 변하던 눈빛 같은 것들 말이다.

병원으로 떠날 때 자신은 이현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이현도 마찬가지였다.

“가끔 아픈 것도 좋네요.”

박 팀장은 ‘싱거운 녀석’ 하고 중얼거리더니 병실을 나섰다.

이현의 관심이 그게 ‘신인 배우 석희재’에게 국한된 것이라도 싫지 않았다. 병문안 역시 사적인 관심이 아니라 제작사의 입장일 뿐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분명히 무언가가 변하고 있다. 카운트다운 이후의 답이 그걸 증명해 줄 것이었다.

***

다음 날.

이현은 회색 콘크리트로 덮인 차도 가를 느리게 걸어 올라가고 있었다. 주차를 저 아래에 한 탓이다. 남산창작센터로 향하는 오르막길은 이미 먼저 온 차들로 빼곡했다. 인도가 따로 없는 길이라 최대한 도롯가에 붙어 걸어가고 있지만 주차된 차들 때문에 그마저도 여의치가 않았다.

연습이 한창으로 치달을수록 근처 주차난은 심각해진다. 개별 연습 비중이 큰 연습 초반과 달리 런 스루가 잦아질수록 배우들의 콜이 같은 시간대에 집중되기 때문이다.

연습실 입구가 가까워지기 전에 이현은 멈춰 섰다.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빼고 시계를 확인했다. 2시부터 런 스루가 시작인데 이미 15분가량이 지났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연습실을 가로지르는 대신 조금 더 농땡이나 피우자는 생각이 들었다. 한번 들어가면 적당한 때 나오기도 눈치가 보여 두세 시간씩 붙잡혀 있기 일쑤니.

마음을 정한 이현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때 연습실 입구에서 누군가 계단을 느긋하게 걸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자연히 입구로 향한 시선이 나오던 사람과 딱 마주쳤다.

“어?”

모습을 드러낸 사람이 무척 반갑다는 듯 부드럽게 웃었다.

“오늘 PD님 안 오는 줄 알았는데.”

한지우였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었다. 공지를 대충 봤나 보다 하며. 오늘은 수선한 의상 피팅이 예정된 날이었다. 이현 입장에서는 오기 싫어도 와야 하는 날이었다.

가까이 다가온 그가 자연스럽게 어깨에 팔을 둘러와서 이현은 그가 어딜 가는지도 모르면서 붙들려 갔다.

“의상 피팅 있잖아요.”

“그랬나?”

“네, 그리고 첫 런이라고 해서 보러 왔죠.”

“런 오늘 처음 아닌데? 어제부터 했어.”

의아하다는 목소리와 함께 걸음이 뚝 멈췄다. 그리고 지그시 내려다보는 얼굴.

이현은 저도 모르게 소리 없는 마른침을 삼켰다. 저도 키가 큰 편이라 누군가를 이렇게 확실히 올려다볼 일은 별로 없었다. 드문 상황이 가져다주는 어색한 설렘을 모른 척하며 이현은 얼른 시선을 돌렸다.

“아, 제 말은 선배가 오늘 첫 런 스루 아닌… 아닌가?”

이현은 기억 속의 불확실한 이번 주 연습 스케줄을 떠올렸다. 눈치를 보며 묻자 그가 시원스레 대답했다.

“맞아.”

“아, 역시.”

“나 보러 왔다는 소리야?”

“그럼요.”

이 피디… 아부 티 나게 해. 한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렇게 말해도 뭐 없어.”

딱 잘라 말하는 투에 농담조가 확실해서 이현은 금세 유쾌한 기분이 됐다.

한지우는 보조개가 패도록 씩 웃고는 손가락으로 저 멀리 어디를 가리켰다. 카페가 딸린 극장 쪽이었다. 천천히 걸어가면 왕복 15분 정도로 적당히 거리가 있는 곳이었다.

“커피 사 줄게.”

“뭐 없다고 하시고선.”

“난 아부에 약하거든.”

그리고 유명한 배우들에게 약한 이현은 웃으며 그를 따랐다.

PD가 되어 좋은 점 하나는 간혹 연예인들과 이토록 허물없는 사이가 된다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이런 인맥이 무수히 많고 한때의 친분이라 하더라도.

오늘처럼 가까이서 한지우를 올려다보지 않더라도 그의 키가 저보다 크다는 것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그를 진짜로는 알지 못해도 포털에 이름만 치면 세세한 신체 조건 정도는 금세 알아낼 수 있으니까. 하지만 그다지 사적인 교류가 없는 사이에도 어색하지 않게 윤활유를 칠하는 유머 감각이 있다거나, 아부에 약하다고 대뜸 고백하거나 하는 점은 이렇게 직접 만나지 않으면 몰랐을 것이다. 이현은 한때 동경하던 배우와 한 걸음 가까워진 기분에 살짝 들떴다.

“근데 선배 그럼 런 들어간 거 아니었어요? 아니면 밤으로 밀렸어요?”

“음.”

맞다는 건지, 아니라는 건지 애매하게 끄는 대답만 돌아왔다. 대답은 한 템포 늦게 돌아왔다. 카페에 들어가서 커피 주문을 마치고, 음료를 받은 후에야.

“나 1막에 별로 안 나와.”

휘핑이 잔뜩 올라간 음료를 빨대로 휘저으며 한지우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네? 그럼 그냥 나오셨어요?”

“어. 왜 놀래?”

“연출님이 찾으시지 않을까요? 얼른 들어가셔야죠.”

“안 끊고 갔을 때 정확히 42분에 첫 등장이야. 그런데 오늘 첫 런이라 분명히 엄청 끊어 가.”

“아니, 선배님….”

간도 크게 런 중에 뛰쳐나왔다는 한지우를 보는 이현의 말문이 막혔다. 그 얼굴을 본 한지우가 뻔뻔하게 말했다.

“걱정 마. 나 프로거든?”

“프로니까 열심히… 하셔야죠?”

얼빠진 얼굴로 하는 말에 한지우가 불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이 PD도 일 안 하고 나랑 놀고 있잖아.”

“저는….”

“알겠어. 간 작은 우리 이 PD 때문에 얼른 들어가야겠다.”

그건 말뿐이었다. 한지우는 느긋했다. 다시 연습실로 들어갈 때까지 초조한 건 이현뿐인 듯했다. 등장할 때가 됐는데 사라져 버린 배우를 찾아 헤매는 연출부를 생각하면 식은땀이 났다.

“선배, 42분 지났어요.”

“알어, 알어. 담배 한 대만.”

그 사이 이현은 한지우 몰래 시계를 여덟 번이나 봤다. 이현은 저만 아는 한지우의 프로필에 ‘대범하고 약간 또라이’라고 몰래 추가해 넣었다.

그가 드디어 연습실로 발을 옮길 때에 이현은 크게 안도했다.

두 사람은 함께 신발이 가득 놓인 현관을 통과했다. 나란히 신을 벗어 놓으며 한지우는 슬리퍼로 갈아 신었고 이현은 맨발이었다. 반 층 정도의 계단을 올라가며 한지우는 이현의 등을 먼저 떠밀었다.

그리고 한창 연습 중인 동선 안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 이현은 거기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못한 이와 눈이 딱 마주쳤다.

‘벌써 퇴원했나? 어려서 그런지 회복이 빠르네.’

이현은 반가움에 슬쩍 미소 지었다. 연출부 데스크 끝쪽 가장자리에 앉아 있는 것은 석희재였다. 거리는 꽤 멀었지만 이현은 그의 얼굴이 반가움으로 물드는 것을 보았다.

그러나 직후, 방금 본 게 착각이었나 싶을 정도로 석희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 들었다.

“봐. 아직 내 차례 아니지?”

마침 계단을 끝까지 올라와 뒤에서 어깨를 턱 붙잡은 한지우가 귓가에 소곤거렸다. 저음의 목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꽂혔다. 한지우가 씩 웃고 동선 가운데로 파고드는 것과 저쪽 멀리서 석희재가 의자를 밀며 일어나는 건 거의 동시였다.

***

내도록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입구 차단막 뒤에서 얼굴을 내민 이현, 그리고 그 뒤에서 보란 듯 나타난 한지우를 보는 순간 누가 등줄기에 찬물을 뿌린 듯했다. 기다리는 순간마저도 기분 좋게 만들던 설렘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화장실 가려구? 조금 이따 가요.’

옆자리에 앉아 있던 다른 배우가 악보로 입을 가리고 속삭였다. 갑자기 벌떡 일어난 이유를 좀 다르게 해석한 모양이다.

석희재는 절로 꽉 쥐어지는 주먹을 주머니에 숨기며 입술을 사리물었다.

기세 좋게 꽝! 볼륨이 올라간 음악 소리와 함께 앙상블이 쏟아져 들어가며 군무가 시작되었다. 나무 바닥을 쾅쾅 울리는 열 맞춘 발소리가 뇌를 흔들어 대는 기분이었다.

맥없이 도로 주저앉기 싫었던 석희재는 근처의 탕비실로 홱 들어갔다. 그러고는 정수기에서 찬물을 받아 마셨다.

꼼꼼하게 확인해 본 배우 공지사항 단톡방에는 오늘 마침 두 번째 의상 피팅이 있을 거라고 쓰여 있었다. 그건 저번처럼 이현이 연습실에 찾아온다는 소리였다. 타이밍이 무척 좋다고 생각했다. 48시간 동안 얌전히 앉아 답만 기다릴 생각은 없었다. 연습을 너무 많이 빠졌으니 빨리 복귀하는 편이 제게도 좋을 것 같았다.

오늘 오후 2시의 콜을 고대하며 한숨 푹 자고 일어나니 아침에는 몸이 거짓말처럼 가벼웠다. 더 안 쉬어도 될 것 같다고 말하고는 바로 퇴원 수속을 밟았다. 병실을 나설 때는 이현이 병문안을 위해 들고 왔던 촌스러운 조합의 꽃다발을 살뜰히 챙겨 나오기도 했다. 그건 지금 석희재의 방에 거꾸로 걸려 곱게 말려지는 중이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아주 오랫동안 거기 걸려 있을 예정이었다.

그렇게 연습실에 오는 길에 꽃집을 발견했을 때, 석희재는 충동적으로 매니저에게 차를 세워 달라고 말했다.

이어 꽃집에서 나온 석희재의 손에는 겹꽃이 풍성한 수입 장미와 작약으로 이루어진 세련된 꽃다발이 하나 들려 있었다. 언뜻 보기에도 값비싸 보이는 꽃다발을 보고 박 팀장은 ‘웨딩용 같다’라며 놀려 댔지만 석희재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현도 그렇게 생각해 줬으면 좋겠다고 내심 바라기도 했다.

바깥에 주차된 전용 밴 안에는 꽃다발이 곱게 놓여 있었다. 그걸 어떻게 건네줄지 진지하게 생각하기도 전에….

이현은 한지우와 함께 등장했다.

석희재는 신경을 긁는 사실을 또 하나 떠올렸다. 한지우는 거의 한 시간도 전부터 연습실에서 보이지 않았다.

‘의상 피팅은 언제 시작해요?’

이현이 언제 오나 기다리던 석희재가 스치듯 물었을 때였다. 앙상블 중 누군가가 답해 주었다.

‘중간중간 런 안 들어갈 때. 짬 순서대로 하니까 우린 저녁 먹을 때 할 수도 있고요.’

‘중간중간… 그럼 PD님은 언제 오세요?’

‘런 시작할 때 오시지 않을까? 원래 그러거든.’

런이 시작된 지도 한 시간이 지났다.

둘이 얼마나 오래 같이 있었을까? 만반의 준비를 다했다고 생각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곳에 틈이 있었다. 이현을 어디 가둬 놓지라도 않으면 계속해서 존재할 틈이다.

석희재는 찬물을 벌컥 들이켠 후 입술에 매달린 물방울을 손등으로 쓱 닦았다. 그러고는 그 자리에 한동안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화는 나는데 어디에다가 이 화를 발산해야 할지 몰라 사고가 정지한 채였다.

“희재야.”

뒤에서 문을 밀며 들어온 것은 이현의 목소리였다. 석희재는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후….”

마음을 다스리는 심호흡을 하고 표정 관리를 하며 뒤돌았을 때였다. 이현의 손에 들린 테이크아웃 용의 잔이 한지우가 들고 들어온 것과 같은 거라는 사실을 알자마자 다시 뒷골이 땅겼다.

“벌써 퇴원했구나? 이제 괜찮아?”

“…….”

“오늘 너 연습 일도 아니던데. 참관하러 온 거야?”

탕비실 문을 밀어 닫으며 이현은 아무렇지 않게 제게 말을 걸고 있었다.

석희재는 가라앉은 눈으로 이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갸름한 턱이 약간의 붓기 없이 날카로운 걸 보니 어제는 다행히 잘 잔 모양이었다. 연습실에 오는 날이라 그런지 어제처럼 슈트는 아니고 청바지를 걸쳤다.

석희재는 고개를 수그렸다. 그가 친근하게 뱉는 말들에 특별한 의미가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이건 그저 이현 특유의 수더분한 사교성일 뿐이다. 그는 거리감이 있는 관계에서도 이 정도의 질문을 쉽게 할 수 있다.

“아니. 형 보러 왔어.”

“아.”

결국 일부러 관계를 상기시켜 공기를 불편하게 만드는 건 항상 제 쪽이다. 순식간에 쿡 찔러 들어간 애정의 표현법에 이현은 작은 침을 맞은 듯이 굳어 버렸다.

그가 보이는 반응에 석희재는 차라리 안도했다. 이현에게는 마음을 놓을 틈을 주면 안 된다.

“한지우가 커피 사 줬어?”

“누가 듣는다. 선배라고 해.”

이현의 얼굴에서 삽시간에 웃음이 사라지고 엄격해졌다. 속에 숨은 얇은 쌍꺼풀이 드러나지 않는 긴 눈은 웃음을 지우면 빠르게 싸늘해진다. 물론 석희재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그거 줘 봐.”

“너도 마실래? 근데 벌써 찬 거 먹어도 돼… 아!”

한 입 달라는 말로 이해하고 순순히 컵을 빼앗긴 이현은 깜짝 놀랐다. 석희재가 안의 내용물을 일말의 주저도 없이 음식물 쓰레기통 안에 콸콸 흘려 버렸기 때문이다. 이어서 석희재는 군더더기 없는 동작으로 단 몇 초만에 홀더를 벗겨 재활용 통 안에 던지고 컵은 뚜껑을 분리해 분리수거 통 안에 넣었다.

“많이 남았는데, 왜 버려!”

“조용히 해. 바깥에 소리 들려.”

당당한 석희재의 태도에 이현의 입이 어이없다는 듯 벌어졌다.

***

두 사람은 앙상블 두 명이 연습실 끝에서부터 끝으로 옮기는 대도구 대용의 파티션 뒤에 몸을 숨겨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어설픈 탈출이었다. 연출님은 런 도중에 오며 가며 부산스럽게 구는 걸 싫어한다는 이현의 주장과, 나는 오늘 연습하는 날도 아니니 상관없다는 석희재의 주장을 절충한 안이었다.

그러나 막상 바깥으로 나간 석희재는 갈 곳을 몰라 헤맸다. 그러다 녹음이 우거진 연습실 뒤편의 그늘로 들어섰다.

“여긴 사람 많이 와. 저 안쪽으로 들어가자.”

오고 가는 이들의 눈을 피해 적당한 곳으로 석희재를 이끈 것은 이곳 지리에 익숙한 이현 쪽이었다.

단둘이 되자마자 이현은 담배에 불을 붙였다. 희미하게 인상을 찌푸리며 석희재는 확인부터 했다.

“언제 왔어. 연습실.”

“2시 조금 넘어서.”

제 추측이 맞았다. 이현이 이곳에 도착한 직후 연습실로 들어오기도 전에 한지우가 그를 낚아챈 거였다. 눈 뜨고 인터셉트를 허용했다는 사실이 기가 막혔다.

“둘이 뭐 했어.”

“하긴 뭘 해.”

무심하게 답하는 이현이 담배를 아까보다 깊이 빨아들였다. 귀찮다는 듯한 그 모습이 석희재의 가슴을 따끔따끔 쑤셨다.

물론 석희재는 이현의 흡연 사실에 한 번도 불만을 가진 적 없었다. 담배를 문 입술이나 마디가 곧은 손가락이 섹시하다고 생각한 적이 더 많았다. 하지만 지금만큼은 매캐한 흰 연기가 짜증이 났다. 초조함이 위장을 태울 듯 꽉 들어차서 그런지도 모른다.

질투심을 폭발시킬 대상을 찾지 못한 석희재는 금세 곤두섰다. 그런 석희재에게 이현이 또 한 번 찬물을 끼얹었다.

“너무 예민하게 굴지 마.”

“뭐?”

그 말이 역린을 건드렸다. 석희재는 더는 차분함을 유지하지 못하고 황당함을 그대로 드러냈다. 확 굳어 버린 석희재의 얼굴을 슬쩍 바라본 이현이 얼버무렸다.

“아니, 그렇잖아. 진짜 별거 아닌데.”

“…….”

“미팅 많으면 하루에 네 번, 다섯 번도 하고, 만나는 사람도 많은데 그걸 단속하면….”

“…….”

“성가셔서 연애를 어떻게 해.”

“…성가시다고?”

석희재의 눈앞이 깜깜해졌다.

“별거 아니라고?”

“그래. 이 앞에서 만나서, 인사 나누고 커피 사 주신다고 하길래 따라갔어. 뭐 큰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사람 몰지 마.”

이현이 투덜거렸다.

퓨즈가 나간 듯 사고가 멈춘 직후, 석희재의 머릿속은 다시 어렵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위화감이 들었다. 이현은 뭔가 착각하고 있었다.

그제야 석희재는 이현이 가진 것과 저가 가진 정보량에 큰 차이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다다랐다.

‘이 PD 애인 있어?’

애초에 제게 물은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지금 이현은 아무것도 모르는 게 분명했다. 한지우를 상대로 경계심이 전혀 없었다. 연애 확답까지 앞으로 만 하루를 남겨 놓은 저보다 친절한 선배 한지우 앞에서 마음을 더 놓고 있을지도 모른다.

한지우 그 여우 같은 자식이 이현 앞에서는 흑심을 완전히 숨겨 온 것이다.

낭패감이 들었다. 석희재는 이현의 뒷주머니로 손을 뻗었다.

“어어?”

“나도 담배 줘.”

이현은 석희재의 얼굴을 살피면서도 순순히 불을 붙여 주었다. 처음에는 불이 잘 붙지 않았다. 석희재는 라이터의 불꽃이 닿았을 때 빨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았다. 이현은 이제 재미있어하면서 석희재가 첫 한 모금을 마시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와. 제법 마시네.”

“…….”

“처음은 아닌가 봐?”

처음이다. 하지만 석희재는 곧이곧대로 사실을 말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비흡연자로 살아온 이유는 어려서가 아니라 그냥, 냄새나는 연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호오의 문제인데 이현은 나이 탓으로 여길 것 같았다. 어리다고 여겨지는 건 싫었다.

깊이 빨아들인 직후 뇌에 산소가 모자란 듯 머리가 띵했다. 내뱉는 숨에 흰 연기가 섞여 나왔다.

한지우 여우 같은 자식.

젠틀한 선배인 척 가면을 쓰고 있다 이거지.

그렇다면 이현에게 저만 질투에 사리 분별 못 하는 놈으로 보이는 게 당연했다. 속이 까맣게 탔다.

형은 한지우가 얼마나 교활한 놈인지 알아?

그 자식 파혼한 이유가 뭐 때문인지 아느냐고!

형한테 안 그래도 흑심이 잔뜩 있는데….

하지만 그렇게 흉을 보며 한지우의 실체를 함부로 드러낼 수도 없었다. 사실대로 이야기한 순간 이현이 보일 반응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기 때문이다. ‘나한테 흑심이 있다고?’ 하며 오히려 수줍게 눈을 빛낼지도 모르겠다. 영문을 모르는 이현을 싸늘하게 바라보는 석희재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현을 마음 깊이 좋아하지만 그 가벼운 몸에는 신뢰가 없다.

안 그래도 제 충실한 애무를 받다가 술기운에 ‘지우 형’ 타령을 해 댔던 이현이다. 한지우가 스트레이트라고 생각하니 미련을 곱게 접은 듯한데, 이 상황에서 두 사람이 서로에게 성적으로 흥미가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의도치 않은 불꽃이 일지도 몰랐다. 석희재는 큐피드가 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미치겠네. 석희재가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꽉 쥐듯이 쓸어 넘겼다.

역시 애인 확답을 빨리 받아 내야겠다. 꾸물거릴 틈이 없었다.

“하긴, 네가 의심하는 것도 당연하지. 내가… 워낙, 좀 그러니까.”

이현의 말투에는 자조가 섞여 있었다. 그 말에 석희재는 뜨끔하고 말았다. 이현을 신뢰하지 못하는 마음이 1%라면, 한지우에 대한 불신이 99%인데 또 핀트가 엇나갔다.

속이 상한 석희재는 담배를 바닥에 홱 던져 버리고 되물었다.

“그러긴 뭐가 그래?”

“꽁초 그냥 버리면 안 된다? 어쩌다 사진이라도 찍혀 봐. 인터넷에 글 올라가.”

이현이 발끝으로 자연스레 담뱃불을 비벼 끄고는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소각장에다 던지고 왔다. 이현의 행동을 본 석희재의 얼굴이 부끄러움으로 벌게졌다.

“아무튼 같이 일하는 사람하고 안 잔다는 건 진짜야. 너 때문에 그 상황이 한 번 깨졌더라도, 그리고 지우 선배가 아무리 내 타입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는 표현이 불시에 나오는 바람에 석희재는 표정 관리를 못 했다. 일그러진 입술을 보고 아차, 했던 이현이 얼른 말을 덧붙였다.

“순간의 쾌락을 위해서 뒷감당 안 되는 일을 벌이는 사람은 아니거든?”

“그럼 배우 스태프로 안 만났으면 잤을 거라는 소리야?”

“…지우 선배를 원나잇으로? 와… 아니. 음?”

이현이 허공에 눈을 굴리다 석희재의 노려보는 시선을 뒤늦게 감지하곤 시치미를 뗐다. 조금 대답의 텀이 늦어진 것만으로도 석희재는 전신의 피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넘긴다고 무방비하게 넘어가 줄 이현이 눈앞에 그려졌다.

석희재의 야차 같은 얼굴을 본 이현은 상상도 못 하냐는 듯 도리어 억울해했다.

석희재는 이를 까득 물면서 시간을 확인했다.

“21시간 남았어.”

“아, 알아.”

“못 기다려.”

그리고 석희재는 이현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가까이 주차해 놓은 밴으로 향해 차문을 열었다. 그 안에 먼저 억지로 이현을 밀어 넣고 뒤이어 탔다. 석희재는 차체가 흔들리도록 문을 쾅 닫았다.

이런 기분으로 고백하고 싶지 않았는데.

석희재는 좌석에 올려 두었던 꽃다발을 쥐어 이현 앞에 불쑥 내밀었다. 박 팀장이 웨딩용이라고 놀려 먹던 화려한 꽃다발을.

당황한 이현의 얼굴에 혼란이 가득했다.

“이 밴 네 거였냐?”

“지금 밴이 중요해! 정말 넌 해도 해도 너무한다.”

“아니, 밴 처음 타 봐서….”

“나랑 연애해요. 피디님.”

“야, 잠깐!”

“지금 대답 안 하면 나 이 공연 그만둔다.”

“이성적으로 좀 생각해.”

“3년 동안 지나치게 이성적이었어, 나.”

“…….”

“진짜야. 그만둬도 아쉬울 거 하나도 없어.”

이렇게 반 협박식으로 대답을 받아 내고 싶지 않았는데….

그때였다. 꽃다발에 파묻힌 이현의 입가가 살짝 허물어졌다.

미소일까, 아니면 비웃음? 석희재는 극도로 긴장한 상태였다. 그의 표정이 만들어 내는 변화에 지나치게 집중한 나머지 이현의 반응을 제대로 알아채지 못했다.

“이판사판이네, 이거 아주.”

정수리와 이마 사이 어디쯤에 꿍, 눌리는 듯한 생경한 통증이 다가왔다. 석희재는 ‘아….’ 하고 갈라진 신음을 냈다.

이현이 제게 꿀밤을 먹였다는 사실은 뒤늦게 알아챘다.

충격은 느리고 잔잔하게 왔다. 석희재의 검은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석희재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떨리는 손길로 제 이마를 더듬을 때였다.

이현이 툭 말을 내뱉었다.

“그래, 해.”

“…….”

“하자고, 연애.”

조금 허스키한 목소리가 귓가에 왕왕 울렸다. 음성으로 된 신호가 고막을 타고 뇌에 꽂혔다. 이 목소리는 이현의 것이다. 그리고 그 단어의 의미는….

마비된 뇌가 언어의 뜻을 파악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약 5초 뒤, 석희재는 거의 덮치듯 그를 끌어안았다. 윽, 하는 소리가 났다. 이현이 뒤통수를 차체에 부딪친 것 같았다.

가슴팍 사이에서 18만 원짜리 꽃다발이 허무하게 구겨졌다. 겹잎이 풍성한 수입 장미와 작약, 디디스쿠스, 리시안서스 그리고 또 이름 모를 꽃들이 짓이겨지는 풀 향이 코끝에 확 끼쳤다. 맞닿은 입술 사이에서 작은 꽃의 수술이 알알이 씹혔다.

첫 연애의 시작이었다.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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