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짝사랑의 단계
짝사랑에도 단계가 있다. 처음 석희재는 그걸 알지 못했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언제나 평행선을 달리기만 하는 관계는 제법 안락하다. 한 발도 더 다가서거나 물러나지 않은 채로 주어진 자리에 서서 거리감을 지키는 관계. 그것을 3년이나 지속하면서 석희재는 그저 제 마음을 숨기는 데에만 점차 유능해졌다.
그런 것 따위를 하면서 ‘짝사랑도 할 만하다’라고 생각했었다. 오만하게.
짝사랑이 비참할 수도 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다. 상처를 방어하기에는 이미 늦은 뒤였다.
도망치듯 촬영장을 떠났으나 일정은 변함없이 굴러갔다. 바로 다음 날부터 다시 연습실에 나가야 했다.
그리고 3일 연속 한지우와 마주쳤다.
보통 짜증 내는 일이 없는 석희재지만 그는 의심스럽게 연출부가 가지고 있는 스케줄 표를 확인해 봤다. 수정이 잦아 최종 버전은 조연출의 개인 노트에서 찾을 수 있었다. 원래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이상하게도 한지우와 제 연습이 자꾸만 겹쳤다.
그렇게 연습실에 앉아 있으면 한지우가 저를 향해 무언가 의도를 숨긴 미소를 보내곤 했다. 마치 비밀을 공유하는 자들의 동맹처럼. 석희재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정하지 못한 채로 힘겹게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그가 엄청나게 불편해진 석희재와 달리, 한지우는 적극적으로 호의를 표시해 댔다. 겉으로는 선배가 후배를 챙겨 주는 광경처럼 보였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이것 좀 볼래요.”
한지우가 내민 핸드폰 화면 안에는 이현과 단둘이 주고받은 메시지가 빼곡했다.
“현이한테 영화 보러 가자고 했는데 이렇게 빼네.”
이현은 거절했다. 분명 거절 문자인데도 마음이 괴로웠다. 석희재는 마른침을 삼키며 사냥당한 사슴처럼 전의를 상실해 한지우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왜 그런 것 같아? 이런 영화는 이 PD 취향 아닌가?”
“…….”
“아니면 시간대가 좀 그런가?”
“네. 너무 늦어서….”
한지우가 예매한 것은 새벽 2시의 심야 영화였다. 저라면 매일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이현에게 절대로 권하지 않았을 시간.
“이 PD 영화 별로 안 좋아해?”
“아니요, 좋아해요. 네, 아니….”
사실을 곧이곧대로 알려 주기 시작한 석희재는 말을 번복했다. 이현은 영화를 좋아한다. 분명한 취향도 있다. 그가 서른 번쯤 돌려 보았다는 영화를 석희재는 대사를 외울 때까지 보았다. 그 공감대를 남에게 공유하고 싶지 않았다.
“피디님은 아침 열 시 출근이니까, 피곤하실 거예요.”
“그래도 내가 공연이 늦게 끝나는데 어떡해. 그리고 영화는….”
“…….”
“밤에 가야 사람도 없고 좋죠. 환한 대낮에 가서 무슨 진전이 있겠어.”
의도가 분명한 한지우의 꾐을 잠자코 들으며, 석희재는 이현의 마지막 대답을 뚫어져라 보았다.
「영화는 됐으니까 다음에 술이나 사 주세요」 오전 12:26
술이 낫나, 영화가 낫나.
둘 다 최악이다.
그리고 석희재의 시선이 닿은 곳을 눈치챈 한지우가 다시 말했다.
“술도 못 마시면서 이런다. 귀엽게 굴기는… 희재 씨가 좀 도와줘요.”
“뭘요?”
“둘만 만나자고 하면 꼭 빼더라고.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이 껴야 좀 안심되나 봐. 낯을 가리나?”
석희재는 생각했다. 제가 낀다면 이현은 차라리 거절할 것이다. 전 섹스 파트너와 업계 선배가 동석한 술자리란 이현에게 가시방석이나 다름없을 테니까.
그리고 석희재의 예상처럼 셋이 함께하는 술자리는 성사되지 않았다. 그게 진짜 이현이 거절해서인지, 아니면 일전 제안부터 한지우가 그저 떠본 것이었는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한지우가 저를 징검다리로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깨달은 석희재는 결국 다시 연습 스케줄을 조정해 한지우를 피해 다니기에 이르렀다.
며칠 후 한지우가 따로 술자리를 만들어 이현을 불렀다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석희재는 거기에 자기가 억지로라도 끼는 게 나았을지 아주 조금 후회했다.
한지우가 스태프들, 특히 이현과 친목을 쌓아 가는 모습을 보는 게 지극히 불편하다고, 다 솔직히 말할 수도 없었다. 답답한 마음에 매니저인 박 팀장에게만 ‘한지우가 불편하다’라고 솔직하게 털어놓자,
“아, 그 사람 때문에 네가 바꿔 달라고 한 거였구나. 그런 거면… 우리가 바꿔도 소용없을걸. 한지우도 스케줄을 엄청 바꿔 댄다더라고.”
박 팀장은 그렇게 말해 왔다.
“그 선배가요?”
“응. 제작사에 서로 부딪치지 않게 해 달라고 요청드려 볼 수는 있는데 그걸 대놓고 말하는 순간 좀 곤란해지지. 배우들끼리 기 싸움한다는 식으로 얘기가 퍼질 수도 있으니까. 혹시 몰라. 한지우 쪽에 귀에 들어가면 우리가 골치 아파져. 네가 후배잖아.”
그렇게 이현을 더 자주 만날 수 있다는 꿈에 부풀어 발을 들였던 현장은 점차 생지옥이 되어 갔다. 한지우는 피하는 보람도 없이 뻔뻔히 석희재의 연습 일정에 맞춰 나타났다. 그것도 싫었지만 가끔 이현이 연습실에 들를 때면 당연한 듯이 그에게 먼저 다가가는 한지우를 보는 건 더 싫었다.
이현의 다음 차례가 한지우라면 저는 어떻게 되는 것인지 몰라서 더욱 갑갑했다. 2순위로 밀려나게 되는 건지, 아니면 3년간 저라는 섹스 파트너에 충실했던 것처럼 이다음에는 한지우에게 충실해지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깊이 생각한 적도 없다. 생각하면 아프니까.
석희재는 이현을 피해 다니는 와중에도 그를 보고 싶은 마음을 감출 수가 없어서 멀리서 잠깐씩 훔쳐보기만 했다. 숨어도 의미가 없을 만큼의 존재감을 가진 외모지만 이상하게도 이현은 제 시선을 눈치 못 챘다. 그게 무관심 때문이라는 것을 추측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어쨌든 가슴 아픈 짝사랑의 진리에도 굴하지 않고 훔쳐보며 얻은 소득 한 가지는, 이현의 입술 수포가 빠른 처치 덕분에 더 퍼지지 않고 빨리 나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알고 싶지 않았던 다른 한 가지. 이현은 마주치는 모든 이들에게 적절한 친절과 살가운 행동을 베푼다. 마치 저와 처음 만났을 때처럼. 제 존재가 특별해서 웃어 준 게 아니었다. 그냥, 그는 낯선 이들에게 모두 친절하다.
저와의 처음이 이현에게는 별로 특별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사실이 가슴 아팠다.
누구나 저처럼 이현에게 쉽게 사랑에 빠질 수 있다.
‘너 설마 나랑 연애 따위가 하고 싶은 건 아니지?’
그 친절한 얼굴을 볼 때면 자동적으로 제게 질린 얼굴로 일갈하던 이현의 차가운 얼굴도 떠올랐다. 그 변화를 만들어 낸 게 저인지 3년의 시간인지도 종잡을 수 없었다.
내 짝사랑은 어느 순간부터 망가졌을까….
고백할 때를 놓친 감정이 채 준비되지 않은 상태로 터져 나왔을 때부터?
선을 긋는 이현의 영역으로 함부로 침범해 들어갔을 때?
그 모든 일을 일으킨 주체도 다 저였으니 남을 탓할 수도 없었다
짝사랑의 다음 단계는 함께 하는 사랑이 아니다. 멋대로 정의한 그 진화 과정 안에는 초라한 희망만이 가득하다. 현실적인 짝사랑의 다음 단계는 짝사랑을 들키는 것일 뿐이다. 그리고 그 두 가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들키지 않은 짝사랑과 들킨 짝사랑.
이 세상에는 그 두 감정을 명명하는 단어가 각기 달리 존재해야만 했다. 단어는 사람의 의식을 만든다. 그 두 가지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알기만 했더라면, 세상이 단어로 그걸 경고해 주었더라면 자신은 섣불리 그다음 단계로 옮겨 가려고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짝사랑에는 이골이 났다고 자만하며 자신은 어떤 상황에서든 버틸 수 있다고 마음먹는 순진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지이잉.
광고 문자가 하나 도착했다.
석희재는 기계적으로 화면을 본 후 엎어 놓았다. 현재 그는 어두운 동굴 같은 제 방에 파묻혀 있었다.
쾌적한 삶을 위한 공간이 100제곱 미터 정도 주어진다면 지금 석희재에게 필요한 공간은 10제곱 미터도 안 되었다. 그는 무기력에 빠진 판다처럼 이불에 파묻힌 채로 시간을 죽이기만 했다.
밤낮이 바뀌어서인지 자고 일어나면 광고 문자나 메일 따위가 잔뜩 와 있었다. 제게 연락을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아니, 있었다. 연예계 데뷔를 했다는 것을 어떻게 건너 건너 들었는지 ‘오랜만이다, 잘 지내? 연락 좀 하고 살자.’ 따위의 메시지를 적어 보내는 이들이 수없이 많았다. 중학교, 고등학교 동창들도 있었고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사람들도 많았다. 아마도 대학 교양 수업을 같이 들었던 조원들이겠거니, 석희재는 짐작했다.
거기에다가 번호를 주고받은 기억이 없는 사진작가 조 실장, 연출부의 누군가, 최근 꾸준히 출석하고 있는 피부과와 PT 숍의 스태프들까지…. 그저 친절하다고만 생각했던 이들이 공적인 이야기 외에 자꾸 사적인 화제를 섞어 말을 걸어 댔다. 그게 조금씩 불편해지던 차였다.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우유를 좋아한다, 시력이 나쁘다 등 별것도 아닌 공통점을 유별난 것처럼 강조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틈만 나면 사적인 만남을 권유해 왔다. 칼국수를 좋아한다고 말하면 ‘어디 맛있는 집 있는데 같이 가자’라고 권하는 식이다. 돌려서 거절하기도 지쳤다.
어느 순간부터 그래서 전부 답을 하지 않았다. 석희재는 자신이 인간관계가 좁은 이유를 새삼 깨닫는 중이었다. 자신은 타인과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싶은데 남들은 그렇지가 않은 것 같다. 다들 틈만 보이면 파고들려 했고, 가벼운 연락을 만남으로 가져가려고 하니 피로도가 상당히 높았다.
아예 무시해 버리는 것은 극단적인 방법이었으나 이러지 않으면 대화가 끝도 없이 이어지니 어쩔 수 없었다. 그 모든 ‘찔러 보기’에 석희재는 화도 나지 않았다. 그저 귀찮고 무기력하기만 했다.
그들에게 진짜로 화도 낼 수 없는 이유는 이현에게 같은 방식으로 집착하고 있는 제 모습이 거울처럼 비춰 보였기 때문이다.
틈만 나면 파고들려 하고, 가벼운 연락은 만남으로 가져가려 하고.
별것도 아닌 공통점에 행복해진 적도 여러 번이다. 저녁에 샤워하는 습관이 같다고 좋아했고 자기도 좋아하는 비프 스튜를 잘 먹어서 입맛이 같은 것 같다고 또 좋아했다.
하나같이 제가 아는 감정이었다. 그래서 약간의 관심이라도 흘려 주기를 바라는 그 수많은 연락에 석희재는 전부 무응답으로 일관했다.
지이잉.
그때, 다시 한번 짧은 진동음과 함께 핸드폰의 화면이 어둠 속에서 점멸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눈을 찌푸린 채로 화면을 바라보니 제게 도착한 것은 매니저 박 팀장의 문자였다.
「희재야! 피부과 예약 말도 없이 안 갔다며.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내가 재예약 잡았으니까 이번엔 늦지 마라」오전 11:14
석희재는 대답하는 대신 화면을 엎어 놓고 다시 이불 속으로 파고들어 갔다.
내가 원하는 사람에게만 관심을 받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덧없는 희망에 석희재는 피식 웃었다.
세상에 제 관심을 갈구하는 이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그중 이현이 없다는 사실이 불가해하기만 했다.
얼마 전에는 바보 같은 생각도 했다. 한지우와 만나도 좋으니까, 이현이 저보고 ‘두 번째’의 위치만 허락해 주기라도 한다면 순종하겠다고.
하지만 이현은 제게 아무것도 정해 주지 않았다. 그때마다 감히 연애를 바라냐던 그의 차가운 말도 떠올랐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는 기적 같은 일이 내게도 벌어질까.
석희재는 제가 한 생각이 마치 상투적인 노래 가사의 한 마디 같다며 또 쿡쿡 웃었다.
그러나 애써 웃은 것도 잠시, 불시에 한지우와 이현의 모습이 그려졌다. 서로 얼마나 진심이든, 혹은 아니든 그들이 가진 쌍방의 관심은 불씨만 붙여 주면 화르르 타오를 것이 분명했다.
‘형. 그거 알아? 한지우가 형 헤프게 웃는다고 했다.
진짜 별로지. 뭐 표현을 그렇게 해.
마음에 안 들어.
너무 무례하잖아.
형도 형한테 그런 표현 쓰는 사람한테 정 주지 마….’
나는 너 웃는 게 제일 예쁘던데.
차라리 진심의 무게를 저울로 달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러면 내 마음이 더 진실되고, 무겁다는 걸 이현이 알아줄지도 모르는데.
***
“도련님. 주무세요?”
매일 방문해 가사를 도와주는 이모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직 안 가셨나, 석희재는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으로 들어오는 빛은 석양에 가까워 보였다. 벌써 퇴근하셨어야 할 시간이다.
“아….”
몸을 일으키던 중 상체가 휘청했다. 고개가 푹 꺾여 팔꿈치로 받쳐야 했다. 잠깐 고개를 숙인 채로 석희재는 이상하게 바닥이 기운다고 생각했다. 바닥 수평이 맞지 않고 빙 도는 기분이 들었다. 짧은 현기증이었다.
문 바깥에서 들려 오는 이모님의 목소리는 이명과 섞여 아주 멀리서 윙윙거리는 느낌이었다.
“반찬이 하나도 안 줄어서… 벌써 삼 일째 새로 한 걸 다 버리려니 조금 아까워서요. 바깥에서 드시고 오셨어요? 그런데 경비가 나가는 모습도 못 봤다고 하셔서요. 도련님?”
“…먹을게요. 제가 알아서.”
웅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었는지 문이 열렸다.
아주 천천히, 또 조심스럽게 벌어지는 문의 틈.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녀는 안으로 황급히 걸어 들어왔다. 눈이 휘둥그레 커져 있었다.
“어디 아프세요? 아이구, 열 있으시네! 병원 가 보셔야겠어요.”
“그렇게, 아프진 않은데요.”
“박 팀장님이 도련님 이상하다고 한번 들어가 보라 하셔서 들어왔어요. 참견해 보길 잘했네요. 지금 전화 좀 할게요. 얼른 차 타고 병원 가셔요.”
그제야 석희재는 며칠간 먹은 게 별로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깊은 밤 냉장고를 열었다 닫았다 하며 우유 약간, 초콜릿 몇 조각을 먹었을 뿐이다. 손끝으로 더듬어 본 입술은 완전히 메말라 있었다. 위가 급격하게 조이는 듯한 극심한 허기를 느낀 순간, 석희재는 그대로 침대에 스르르 쓰러졌다. 이모님의 새된 비명 소리가 들렸다.
손목이 툭 떨어지는 순간 이모님이 ‘이걸 어쩌냐’며 우셨던 기억이 난다. 전부 다 듣고 있고 의식도 멀쩡한데 도무지 반응할 기력이 없었다.
뒤이어 연락을 받은 매니저가 달려와 그를 업고 뛸 때에야 석희재는 자기가 비정상적인 상태에 빠져 있다는 것을 알았다. 제 마음을 챙기지 못할 만큼의 깊은 사랑에 소리 없이 빠진 것처럼, 몸을 돌보지 못할 만큼의 깊은 우울에 소리 없이 잠식당하고 있었다. 그걸 저조차도 몰랐다.
석희재는 그날 바로 강제로 입원당했다. 이현에게 방치당한 채로 혼자 앓다 7kg이 빠졌을 때와 다르게, 이제 회사에 소속되자 그들은 석희재가 제 몸을 마음껏 망칠 권리마저 주지 않았다. 제 몸이 제 개인의 것이 아니라 회사의 공공재라는 사실이 새삼 와닿는 순간이었다.
그렇게 한 번 혼절했다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안락한 공간이었다. 병실이 아니라 호텔 실내로 착각할 법한 VIP 룸은 어머니가 주로 쉬고 가는 곳이라 했다. 석희재는 가물가물한 정신으로 이것도 특혜인가,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다시 한숨 자고 일어나니 각종 영양제를 칵테일처럼 믹스한 수액이 팔의 정맥에 꽂혀 있었다.
“희재야. 무슨 걱정 있지?”
“…….”
“사람들하고 문제야? 힘들어?”
“…….”
“대체 무슨 일이냐, 희재야. 피부과는 중요한 거 아니니 그냥 안 갔나 보다 했지. 난 또 너 술독에 빠졌나 했다. 그런데 친구들 만난 것도 아니고 집 안에만 있었어?”
“…….”
박 팀장은 정신이 들기 전부터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눈을 뜬 순간부터 대체 무슨 일로 그랬느냐는 질문을 여러 가지로 다양하게 물어 왔다. 거의 죽을 각오로 식사를 거부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그는 전에 없이 추궁했다.
“약이라도 처방해 줄까?”
“약이요?”
“우울증 약. 회사랑 연결된 곳 소개해 줄 수 있는데. 사라 씨도 다니는 곳이고.”
됐어요, 하고 고개를 저으려다가 석희재는 문득 궁금해졌다. 우울증을 치료하면 자신은 정상이 되는지. 몸과 마음이 상쾌해져서 툭툭 털고 일어나면 저를 괴롭혔던 사랑의 감정도 조금은 가시는 건지.
그럼 잊게 되나?
괴로운 감정을 도려 내면 사랑은 어떤 형태로 남나?
그런 건 조금 궁금했다.
“약 먹는 거 나쁜 거 아니야. 감기 걸리면 심해지지 말라고 초기에 약 쓰는 것처럼 우울증도 방치하지 말고 빨리 약 먹어서 치료하는 거니까. 특히 연예인들은 아프다고 쉬고, 티 내고 그럴 수가 없으니까….”
“들켰어요.”
박 팀장의 걱정이 길어질까 봐 석희재는 단순명료하게 제 상태를 말했다. 박 팀장의 눈이 화등잔만 해졌다.
“뭐?”
“짝사랑하던 걸 들켜서… 고백했어요. 거절당했고요.”
“네가?”
“예. 제가요.”
“야… 너. 고작 그런 일로.”
순간 석희재는 박 팀장의 얼굴에서 그늘이 사르르 거둬지는 것을 목격했다. 그는 허탈한 듯 픽 웃기까지 했다. 석희재는 말없이 까만 눈을 들어 박 팀장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난 또 별건 줄 알고. 진짜 심각한 줄 알았네.”
“…심각했는데….”
“아, 녀석아. 그거 말고! 진짜 죽네 사네 하는 문제인지 알았다고.”
그는 차라리 후련하다는 듯이 껄껄 웃기까지 했다. 의자에 등을 탁 기댄 그의 자세에서 진짜로 마음을 놓았다는 티가 났다.
그리고 석희재는 그의 반응에 혼란을 겪었다. 고작 짝사랑으로 죽네 사네 하는 사람은 저 말고는 없는 건가. 그게 진짜 이상한 건가… 다른 사람들은 그럼 더 쉽게 사랑하나?
“좋을 때다. 공연하다 만난 사람이지? 안 그래도 네가 딱 연습 들어가고부터 이상하더라니까. 연애 시동 거는 애들은 촉이 온단 말이지. 연락도 회사 안 거치고 사적으로 하려고 하고. 평생 안 끼던 술자리에도 다 불려 나가고….”
“…티 났어요?”
“정신없지?”
“뭐가요?”
“주변에 예쁜 여자들도 많고 대시도 많이 받고. 막 눈 돌아가지? 근데 넌 어쩌다 콧대 높은 여자애한테 꽂혔냐. 아무튼 그것도 한 때니까 즐겨. 소문만 안 나게.”
“…….”
그 말을 듣자마자 석희재는 그에게 제 고민을 털어놓기를 포기했다. 아무래도 박 팀장은 그가 만나 온 수많은 연예인의 패턴으로 저를 해석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인간관계가 좁았던 내성적인 자신이 처음으로 ‘다른 부류’의 인간들을 만나 쉽게 홀렸고, 쉽게 빠진 만큼 금방 빠져나올 거라고….
“공연 내내 부딪치면 껄끄럽기야 하겠지만 또 공연이 좋은 게 그거거든. 끝나면 다시 볼 일이 없어. 조금만 버텨 봐.”
박 팀장은 시원스레 고민을 마무리 지어 버렸다. 기간 제한. 그것이 다른 의미로 석희재를 안달 나게 만드는 단어인 줄은 모르고.
아무튼 박 팀장은 한결 후련한 얼굴로 ‘좀 더 쉬라’고 말하면서 병실을 떠났다. 석희재는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가 이내 말없이 돌아누웠다.
해가 진 후에는 의외의 손님이 찾아왔다.
“희재야?”
문이 살짝 열린 틈으로 가는 목소리가 새어 들어왔다. 석희재는 별로 놀라지도 않았다. 복도 멀리서부터 들려오던 불안한 발소리를 통해 미리 방문자의 정체를 예감한 탓이다.
“희재야, 나왔어.”
선글라스를 낀 작은 얼굴이 문틈으로 드러나고 이어서 하늘거리는 긴 원피스 자락 아래로 여린 발목이 들어왔다. 발이 훤히 드러나도록 끈으로만 만들어진 샌들의 굽은, 지면에 닿는 부분이 손톱만큼은 될까 싶게 가늘고 뾰족한 굽을 가지고 있었다. 예민하게 귀를 괴롭혀 대던 불안한 발걸음의 정체가 저것이었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그런 거 신고 다니니까 넘어질 뻔하지.”
석희재는 제 어머니를 표정 없는 얼굴로 바라보며 툭, 내뱉었다. 그러나 그녀는 그것마저 아들의 관심과 걱정이라 해석한 모양이었다.
“걱정해서 그랬구나? 다 알어.”
“…….”
“아우, 오늘 많이 걸었다. 병원 복도가 왜 이렇게 기니? 주차장도 멀고.”
그녀는 문을 닫고는 나긋나긋 걸어와 석희재의 침대 옆에 수입 과일이 꽃처럼 장식된 바구니를 올려 두었다. 어찌나 큰 걸 사 왔는지 내려놓는 팔이 휘청했다.
“과일 안 먹어요.”
“너 먹으라고 사 온 줄 아니? 빈손으로 오면 병원에서 흉보니까 그렇지.”
“…….”
석희재는 말없이 그녀를 쏘아보며 후회했다. ‘과일 안 먹어요’라니. 혹시나 제 말이 어리광처럼 들렸을까 봐, 그게 싫었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제 어머니에게.
고개를 들었을 때, 막 선글라스를 벗고 소파에 앉은 그녀는 활짝 웃고 있었다.
“아들… 차였다며?”
그 말을 듣자마자 석희재는 입술을 씹으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박 팀장이 제 얘기를 흘린 게 틀림없다. 남의 사적인 문제로 이야기꽃을 피우는 두 사람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차여서 밥도 안 먹고 그렇게 시위를 했어? 내 아들 너무 귀여워.”
“재밌어?”
“어. 너무 재밌어. 세상에 내 자식 차인 얘기가 이렇게 재밌을 줄은 나도 몰랐어. 얘기해 봐. 어떤 여자애야?”
석희재는 장난기 가득한 제 어머니를 말없이 이글이글한 눈으로 잠깐만 노려보았다. 몰입도 걱정도 없이 그저 가십을 소비하듯 즐거워하는 그녀가 좋은 상담 상대로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갑갑했기에, 또 박 팀장보다는 나을 것 같아 결국 털어놓고 말았다. 아주 간략하게.
“3년 몰래 좋아했고, 아직도 좋아하는데… 고백하니까 나한테 감정 없대. 공사 구분 확실히 하고 싶대. 거기까진 참을 만했는데 이제 다른 남자 사귈지도 몰라.”
“어머, 어머….”
“걔가 자기 집에 다른 남자 들이는 거 상상도 하기 싫고 나랑 했던 거 둘이 할 거 생각하면 미칠 것 같아. 그냥… 안 보고 싶어. 몰랐으면 좋겠어.”
“세상에… 근데 계속 마주쳐야 하는 거지? 같은 공연 팀이라며.”
그 말에 석희재는 다시 눈을 들어 어머니를 노려보았다. 앞으로 몸을 쭉 기울인 그녀는 완전히 몰입한 얼굴이었다. 별로 말한 정보도 없는데 박 팀장은 그 사소한 것까지 다 일러바쳤다.
“아무튼, 짝사랑은 신물 나게 해 봐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아닌가 봐. 더 힘든 게 있는 줄은 몰랐어.”
거기까지 말하고 석희재는 슬쩍 제 어머니에게 시선을 주었다. 항상 궁금하던 이다음 단계를, 먼저 거쳐 간 이들은 어떤 방식으로 감당했는지가 궁금해서.
“저기… 짝사랑을 들키면, 그다음은 어떻게 돼?”
석희재는 입에 붙지 않는 ‘엄마’ 대신 그녀를 항상 ‘저기’라고 불렀다. 그리고 그녀는 그 성의 없는 호칭에도 별로 개의치 않는 것 같았다. 아니, 그걸 눈치챈 적이 있는지나 모르겠다.
“버텨? 아니면 잊어?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하는 건지….”
그리고 아들의 물음에 어머니는 픽 웃었다. 다리를 꼬고 한 손을 턱에 괸 채로.
석희재가 그런 그녀에게서 제대로 된 조언을 얻을 수 있을지 의문스러워 할 때였다.
“바보구나. 짝사랑에 다음이 어딨니? 그건 실연이지.”
“뭐? 아….”
석희재는 충격받았다.
“실연?”
“그래. 넌 차인 거야. 끝난 거고, 그냥 실연당한 거야. 짝사랑이 힘든 게 아니라 실연당했으니까 힘들지.”
“…….”
“아이구, 불쌍하네. 미련이 철철 넘쳐서. 어떻게든 끝났다고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 ‘다음’ 타령이나 하고 있고.”
그 말은 사실이었고 또 정곡을 찔러 대서 더 아팠다. 석희재는 울컥했다.
“그럼 어떻게 해.”
석희재는 이불보를 저도 모르게 꽉 쥐었다.
“좋아하는 마음이 안 가시는데 그럼 어떻게 하냐고.”
“성공해.”
너무나 명료해서 냉정하게까지 들리는 대답이었다. 석희재는 미간을 구겼다. 그녀가 제 고민을 잘 파악하고 있는 건지 의심스러웠다.
“성공해서, 제일 높은 데까지 올라가. 그 사람이 내가 대어를 놓쳤구나, 하고 아까워하도록.”
“…….”
“높은 데 올라가면 세상이 달리 보이지. 그럼 달라진 시각으로 객관적으로 그 사람을 볼 수 있어. 잘 해체해 보면 네가 그만한 감정을 투자할 만한 사람도 아니었을걸. 그리고 한번 다시 만나 봐. 찰 때는 그렇게 차갑더니 성공하고 나면 갑자기 공손해지는 태도가 참 우스워. 콩고물이라도 떨어질까 싶어 얼쩡거리는 그 사람을 보면 없던 정도 다 떨어지지. 그때 신나게 비웃어 주면 돼.”
“…….”
“난 그렇게 복수했다? 진짜 통쾌했어.”
그녀는 깔깔 웃었다. 그걸 보는 석희재의 표정이 멍해졌다. 실연을 복수로 대갚음했다는 어머니의 방식은 석희재에게는 다소 충격이었기 때문이다. 그 시선을 눈치챈 그녀가 말했다.
“왜? 너도 복수하게 될걸.”
“…….”
“넌 나 닮아서 뒤끝이 길어.”
석희재는 그 말을 쉽게 믿을 수 없었다.
물론 어렸을 적, 특히 사춘기 시절에는 어머니와 저 사이에 닮은 점을 굳이 찾아보기도 했었다. 진짜 친모라면 저렇게 무관심할 수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하지만 적지 않은 사색의 시간을 투자했는데도 닮은 점은 찾을 수가 없었고, 결국 석희재는 어머니와 저는 완전히 다른 인류라는 결론을 내렸었다.
그랬던 그녀가 ‘사랑에 있어서 너와 나는 판박이일 것’이라고 장담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니, 수긍하고 싶지 않다는 쪽에 가까울 것이다. 자신이 이현을 비웃고 복수하게 되는 미래라니.
그리고 어머니는 한 시간 정도를 더 머물다 돌아갔다. 석희재는 그녀가 떠나기 전에 몇 번이나 그렇게 복수해 봤냐고 물었다. 돌아온 대답은 의외였다.
“음… 내 평생 나를 찬 사람은 딱 한 명이었는데.”
“…….”
“실은 다시 만나 보지 말걸. 그런 생각도 자주 했어. 환상이 벗겨지고 난 뒤에 본 사람의 민낯이란 참 찌질하거든.”
다시 혼자 남은 병실에는 열대의 과일 향이 떠돌았다. 잘 후숙되어 완전히 농익은 향이 코를 찔렀다. 여전히 식욕은 들지 않았다.
자기 전에 박 팀장이 전화를 걸었다. 컨디션이 어떤지 궁금해 전화한 모양이었다.
대화 도중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 어머니 왔다 가셨다며? 좋겠다, 희재.
‘…….’
- 아픈 보람이 있었네.
글쎄요.
석희재는 수긍하지는 않았지만 딱히 부정하지도 않으며 전화를 끊었다.
이제 정말 자야 하는데 낮에 많이 자 두어서 그런지 잠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눈으로 먼 미래를 상상해 보았다. 한지우만큼 나이를 먹은 자신과, 그런 저보다 나이를 더 많이 먹어서 초라하게 마른 몸으로 제 주변을 떠도는 이현을.
그때에도 그는 피디일까? 아니, 나이로 따지면 제작사 이사나 대표급은 되었을 것이다. 연습실을 드나들다 보면 업계의 흉흉한 이야기를 종종 주워듣는다. 잘나가는 공연 제작자들은 사실상 빚잔치를 벌이며 서로가 가진 빚을 경쟁하고 있다고. 또 제작사들이 투자를 받고도 원금을 회수하지 못하거나, 빚더미를 끌어안은 대표가 전 재산을 담보 잡힌다는 이야기도 끊임없이 들려왔다. 이현이 만약 그렇게까지 내몰린다면….
나이 먹은 이현이 기울어져 가는 회사 재정, 사람이 들지 않는 공연장을 보며 한숨을 푹푹 쉬다 저를 찾아오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당연히 육체의 매력은 젊었을 때보다 한참 떨어지고 어쩌면 머리에는 한두 가닥 새치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보통은 연예인만큼 외모에 투자하지 않으니 아무리 지금의 모습이 봐줄 만하더라도 그 역시 빠르게 볼품이 없어져 저와 나이 차는 훨씬 더 있어 보일 것이다.
굳이 봐줄 만한 데를 찾자면 맑고 검은 눈이나 갓난아기 배냇머리처럼 보송보송하던 속 머리칼 정도일까.
그렇게 가치가 떨어진 이현이 뒤늦게 저를 찾아온다. 마치 모르는 사람인 양 선을 긋는 저를 보고 이현은 무너진 얼굴이다.
희재야. 흑… 우리 옛정을 생각해서라도….
그러면 빌어 봐요.
비, 빌라고? 무릎이라도 꿇을까?
네. 꿇어 보세요.
석희재는 혼자서 싸구려 대본을 썼다. 그가 제 앞에서 무릎 꿇고 비참함에 울며불며 한 번만 도와 달라고 비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러면 그다음에 자신은 즉시 후회하면서, 여전히 솟구치는 사랑을 어쩔 줄 몰라 그의 깡마른 몸을 부둥켜안고 일으킨다. 그리고 너무 오래 참은 그의 입술을 갈구한다. 저도 모르게 마치 짐승이 달려드는 것처럼 갈증 난 키스를 하고 만다…. 그러면 이현은 당황하면서도 저를 마주 안고, 뜨거운 입술을 열어 준다.
아, 글렀다.
자신은 그렇게라도 이현이 저를 찾아와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게 석희재가 행복한 망상에 젖어 있을 때였다.
사람이 찾아올 리 없는 깊은 새벽 시간, 복도 저 끝에서부터 발소리가 들려왔다. 아주 침착하고 느린 발소리였다.
석희재는 훈련된 개처럼 그 발소리에 반응했다. 금세 제 주인을 알아차렸다. 왜냐면 항상 기다리던 소리였으니까. 무척 익숙했다.
다만 그가 이 시간에 찾아왔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희재야.”
문이 열리고 그 틈으로 얼굴을 내민 것은, 짐작하던 것처럼 이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