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다음 차례 (8/27)
  • 8. 다음 차례

    석희재에게 있어, 자신이 하는 것은 짝사랑일 뿐이고, 또 자신에게 허락된 지위는 섹스 파트너까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무렇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돌이켜 보면 꽤 괴롭고 힘든 순간들이 있었다.

    이현을 사랑하면서도 석희재는 짝사랑을 그다지 비참한 것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이현과 자신의 마음이 동일한 무게가 아니라거나, 그가 자신을 연애 대상으로는 전혀 고려하지 않는다는 것 따위를 깨달았을 때도 그랬다. 어설픈 밀고 당기기를 시도했다가 연락이 끊겼을 때는 지나치게 앞서 나갔던 제 탓이라며 자책했고, 이현을 보지 못한 사이 7kg이나 빠져서 그의 집을 무작정 찾아갔을 때는…. 너무나 가볍게 ‘자고 가라’ 말하는 그를 보면서도 그저 쫓겨나지 않아 다행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렇게 이현은 가끔 의도치 않게 석희재의 마음에 생채기를 냈지만, 석희재는 그에게 계산된 의도가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를 쉽게 용서하고 또 사랑했다. 첫사랑이었기 때문이다. 사랑에 면역이 없는 심장일지라도 상처 위에는 금세 새살이 돋아났다. 덕분에 석희재는 지치지 않고 이현을 사랑했다.

    그러나 석희재도 간혹 절망감을 느낄 때가 있었다.

    최초의 기억은 2년 전, 이현이 관계 중에 다른 이의 이름을 불렀을 때.

    이현과 처음 만난 후로부터 꼬박 일 년을 채운 겨울의 일로 기억한다. 그날 석희재는 이현의 갑작스러운 호출을 받고 밤늦게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 연락이 온 것은 자정께, 도착한 시간은 새벽 한 시.

    보통 이현은 퇴근 전에 미리 약속을 잡는 것을 선호했는데, 그날은 예고 없이 깊은 밤에 연락이 와 의아하던 참이었다.

    “너는 거친 건 원래 좀 싫어하는 타입인가?”

    현관에 발을 들이고 인사도 하기 전이었다. 이현이 대뜸 그렇게 물었다.

    “그건 왜.”

    역시 석희재는 순순히 대답하는 대신 질문으로 되돌려 줬다. 뒤이어 작은 기침이 터져 나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약한 감기몸살 때문에 어제부터 몸에 열이 있었다.

    집안의 불은 꺼져 있었고 침대 곁의 스탠드 하나만 켜진 상태였다. 석희재가 도착하기 전에 이미 샤워를 마쳤는지, 이현의 머리는 조금 젖어 있었다.

    어두운 방에 들어서면서 석희재는 질문에 대한 답을 생각해 봤다. 정확히 자신의 섹스 타입이 어떤지는 모른다. 이현 말고 다른 상대와의 경험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눈앞에 젖어 있는 이현의 머리카락을 마른 수건으로 부드럽게 비비고 손가락을 넣어 빗겨 주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혹자는 사랑하면 구속하거나 파괴 욕이 든다고도 하던데, 그런 걸로 미루어 봤을 때 자신은 거친 쪽은 아닌 듯했다.

    “콘돔 사 왔어?”

    이현은 대답 대신 석희재의 질문을 또다시 질문으로 되돌려 주었다. 반응은 없고 서로 궁금한 것만 물어 대는 대화에 조금 멍청해지는 기분을 느끼면서, 석희재는 코트 주머니를 뒤졌다.

    “…여기.”

    손에 잡히는 콘돔들을 꺼내 이현이 걸터앉은 침대 옆자리에 차곡차곡 쌓아 놓는 사이, 이현은 제 몸에 걸치고 있던 티셔츠를 훌렁 벗었다. 별로 섹시하지도 않고 유혹적이지도 않은 동작이었으나 석희재의 시선은 그의 마른 몸에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석희재는 낮은 기침을 쿨럭거리며 이현이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이현이 석희재가 늘어놓은 콘돔을 이것저것 들춰 보며 고개를 숙였다. 마른 목과 등 위로 척추가 드러났다.

    ‘추워 보여.’

    바깥의 냉기가 아직 몸에 머물러 있어 코트를 벗지 않은 채였던 석희재는 이현의 곁에 살그머니 붙어 앉았다. 그러고는 그의 여린 목 위로 긴 손을 감싸듯 올려놓았다.

    “이거.”

    그와 동시에 이현이 눈앞에 콘돔을 보여 주며 자세를 바꾸는 바람에 손은 자연스럽게 떨어지고 말았다. 석희재는 이것이 스킨십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가 의도한 건지, 아니면 그저 우연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다음부터 라텍스는 사 오지 마.”

    “그럼?”

    “폴리우레탄이 좋아. 그리고 초박형. 더 얇아서 좋거든…. 알지?”

    “…알았어. 다음에는 그걸로만 사 올게.”

    사실 석희재는 초박형이 뭔지 잘 몰랐다. 게다가 콘돔에도 여러 가지 재질이 있는 줄은 더더욱 알 일이 없었기 때문에 항상 편의점에 구비된 것을 종류별로 하나씩 집어 오곤 했다.

    아무튼 취향을 알려 줘서 고맙다고 생각하면서, 석희재는 이현이 가장 먼저 집어 들고 포장을 벗기는 콘돔 상자를 눈여겨보았다. 저걸 선호하는구나, 하며.

    “오늘은 그냥 없이 할까.”

    이현이 저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석희재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대답했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 그런데 나 감기 기운 있어.”

    “그래?”

    “옮을지도 몰라.”

    “옮겨.”

    이현은 흔쾌하게 말했다.

    “드러누워서 몸살이라고 하고 회사 안 가게….”

    “진짜 상관없어?”

    석희재가 다시 조금 기침하며 물었다. 이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석희재는 더는 토를 달지 않았다. 이러나저러나 자신은 그가 원하는 대로 할 예정이었으니까. 이현이 정말로 감기에 옮아 버린다 해도 말이다. 그게 이현의 선택이라면 자신은 들어줄 것이었다.

    게다가 만약 그렇게 되면… 병문안을 핑계로 죽 따위를 사 들고 그의 집에 또 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나 때문에 걸렸으니까 책임져 주겠다’라고 하면서.

    망상을 하면서 석희재는 바지마저 벗어 내리고 있는 이현을 흘끔댔다. 아마도 그는 바로 관계를 가질 생각인 것 같았다. 이 밤중에 달려와 주었는데 사적인 대화는 일절 없이, 정말로 섹스에 관련된 대화만 몇 마디 나눈 그의 방식이 깔끔하다고 해야 할지… 지나치게 무심하다고 해야 할지.

    석희재는 그저 말없이 이현을 바라보았다. 예상했던 대로 그는 콘돔을 하나 집어 들고는 눈을 마주친 채로 자연스레 석희재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코트 앞자락을 옆으로 젖히고 드러난 셔츠 아래 복근을 어루만지던 이현이 문득 고개를 들었다. 평소처럼 지퍼를 바로 내리고 달려들지 않는 것만이 의아해서 석희재는 의문이 담긴 눈으로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너… 나랑 하는 거 취향에 안 맞지?”

    이현의 물음에 석희재의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현에게 저 말고 섹스 파트너가 몇이나 더 있는지, 과거 만났던 이들은 어떤 타입인지 석희재는 전혀 들은 바가 없었다. 상대한 것은 이현뿐이었던 자신에게서 뭔가 위화감을 느낀 것일까.

    석희재의 조금 크게 뜨인 눈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니, 그게 넌 처음 이미지랑 좀 다르다. 말도 별로 없고, 욕도 안 하고… 내가 다치면 미안해하고. 때리지도 않고.”

    “…….”

    “지나치게 매너가 있어서.”

    석희재는 이현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차렸다.

    처음 기대했던 이미지와 다른 건 당연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이현이 처음 하룻밤 상대로 진짜 만나려 했던 남자는 북창동에서 술에 취한 채 떠들던 그 양아치였으니까.

    모르는 사람이 여러 명에게 강간당할까 봐 오지랖을 부린 덕분에 이현을 만날 수 있었지만, 인제 와서는 조금 헛갈리는 부분이 있었다. 그게 진짜 이현이 원하던 게 아니었을까 하는….

    그러나 석희재는 속으로 그런 생각을 부정했다. 이러나저러나, 자신은 어떻게든 이현을 만나 그를 좋아하게 되었을 것이다. 다소 철없는 환상일지라도 석희재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그리고 그런 그에게 조금이라도 상처가 남는 관계를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고작 그런 것이 석희재가 품은 자그마한 독점욕이었다.

    아무튼 이현의 평가 아닌 평가에 조금 속이 복잡해진 석희재가 물었다.

    “그런 걸… 하는 쪽이 더 많나?”

    “아니? 정상적인 사람 중엔 별로 없지.”

    석희재가 그 말에 안도할 틈도 없이 이현이 콘돔을 뜯으며 중얼거렸다.

    “근데 난 비정상이 꼬이거든. 내가 비정상이라 그런가.”

    “…….”

    “네가 봐도 내가 별로 정상은 아니지?”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 말에 이현은 오히려 약간 황당하다는 듯이 석희재를 올려다보았다.

    “왜긴. 남자 좋아하잖아.”

    “…성소수자가 비정상은 아니잖아?”

    “아, 그래… 네 말 맞다. 당연한 소린데….”

    이현은 왠지 허탈하게 피식 웃으며 말꼬리를 흐렸다.

    “당연한 소리가 왜.”

    “아니. 스트레이트한테 들을 줄은 몰라서.”

    석희재는 자신과 이현이 다른 상식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사실은 고작 스무 살밖에 되지 않아 아직 때 묻지 않은 데다가, 보통 남자들의 세계를 멀리한 채로 자랐기 때문에 할 수 있는 말이었지만, 석희재는 그런 스스로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이현 역시 석희재의 나이를 몰랐기 때문에 그저 그가 편견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 듯했다.

    “내 말은, 일부 남자들 눈에 내가 그렇게 보인다 이거지. 그거 말고도 처음 본 사람한테 쉽게 다리 벌리고, 맞는 거 좋아하고, 남자 좆에 환장하고….”

    이현은 그렇게 말하며 지퍼를 내렸다. 이현의 나지막한 목소리와 함께 들려온 지퍼 소리에 석희재는 그의 손이 닿기 전부터 발기하고 말았다. ‘음….’ 하고 목을 울리며 속옷 위로 키스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이현을 보며 석희재는 눈을 가늘게 떴다.

    흥분하는 와중에도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현은 발언은 자조적인 것을 넘어서 스스로를 깎아내리는 것처럼 들렸다.

    “넌….”

    석희재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왜 그렇게 스스로를 자학하는지 파악하고 싶었던 것인데 이현은 도리어 석희재의 불쾌한 낯이 마음에 든다는 듯 씩 웃었다.

    “그 표정 좋은데.”

    석희재는 예상치 못한 순간 듣게 된 칭찬 아닌 칭찬에 자신이 방금까지 어떤 표정이었는지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손을 들어 턱과 뺨에 가만히 얹어 봐도 제 표정을 스스로 볼 수는 없었다.

    “미안한데, 펠라 생략해도 돼? 빨리 넣고 싶어.”

    이현이 그렇게 말하며 바로 석희재를 밀어 쓰러뜨리고는 그 위로 겹쳐 앉았다. 석희재는 조금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갑작스레 바뀐 자세 때문에 또 기침이 터져 입가를 주먹으로 가릴 뿐이었다.

    “진짜 감기 맞나 봐. 살이 뜨거워.”

    “…….”

    “좀 핼쑥해진 것 같기도 하고… 무리하는 거 아니야?”

    석희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체온이 높아진 것인지, 단단히 발기한 성기를 한두 번 주무르듯이 쓸어 내는 이현의 손이 차갑게 느껴졌다. 반대로 이현은 무척 뜨겁다고 중얼거리면서 입술을 핥았다.

    “뜨거워…. 넣고 싶어.”

    그가 지나치게 성급하게 굴며 아직 적시지도 않은 것을 넣으려 해서 석희재는 몸을 일으켰다. 제 아래에 이현을 반듯하게 눕히며 침대 아래로 손을 뻗었다. 아까 들어오면서 침대 아래에 젤이 굴러다니고 있는 것을 보았었다.

    상체를 낮춰 손을 아래로 뻗자, 이현이 허리에 팔을 둘러 매달린 채로 석희재의 셔츠 단추를 하나씩 풀었다. 그러고는 드러난 건조한 피부를 혀로 핥아 댔다. 마치 자그마한 강아지가 매달려 장난을 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현의 행동이 귀엽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그가 곧 놀리듯이 유두를 핥아서 석희재의 등이 금세 긴장했다.

    “피부가 희어서 그런가 여기도 분홍색이네….”

    석희재는 그의 말을 무시하면서 침대 아래를 더듬었다. 그 순간 젤이 왜 바깥에 나와 침대 밑에 굴러다니고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지난번 관계를 가졌을 때 분명 제가 뒷정리를 하며 서랍 안에 넣어 놓고 갔었다.

    석희재는 더 이상의 생각을 차단했다. 의심해 보았자 추궁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그럴 자격이 없으니까. 게다가 이현이 만약 솔직하게 말해 준다 해도 그가 내뱉은 답을 자신이 감당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고….

    석희재는 손끝에 걸린 튜브를 집어 들고는 허리를 일으켜 손바닥에 쭉 짜냈다. 곧바로 성기에 넓게 문지르자 이현이 손에 깍지를 끼며 얽어 왔다. 그의 손으로 자위를 하는 기분을 느끼며 미간을 찌푸린 석희재는 손에 남은 것을 이현의 구멍 주변에 닦아 내듯 문질렀다. 다소 성마른 애무에도 이현은 애타는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석희재는 이현의 구멍 안에 직접 젤을 약간 짜 넣었다.

    “빨리, 얼른….”

    이현이 목을 끌어당겨서 석희재는 허리를 낮추었다. 애교를 부리듯이 조르며 입술에 꾹 키스하는 행동에 심장이 녹을 것 같았다. 아래 부드러운 곳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자 이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넣어.”

    “풀어 놨어?”

    “응… 아까 샤워하면서. 너 기다리다가.”

    얼굴이 가까워 달콤한 숨이 맡아졌다. 연인 같은 대화를 몇 마디 나눈 것만으로 석희재는 몽롱해졌다. 그의 원대로 입구에 귀두를 맞춘 뒤 지체 없이 밀어 넣었다.

    “으음….”

    이현이 목을 길게 젖히며 신음했다. 사냥당한 초식 동물처럼 맥을 못 추고 늘어지는 허리를 받아안으면서 석희재는 그의 목을 깨물었다.

    언제나 첫 삽입은 빠듯하다. 젤을 아무리 짜 넣어도 그랬다. 그러나 좁은 살 틈으로 성기를 반쯤 억지로 밀어 넣었을 때 석희재는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흡수되지 않은 젤이 맞물린 살 밖으로 질질 밀려 나왔다. 항상 목마른 듯이 석희재의 것을 삼키던 이현이 오늘은 반대로 끙끙대며 힘겨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더 깊이 넣어. 완전히, 다. 이걸로는 모자, 라….”

    석희재의 팔 아래에 갇힌 이현이 말을 느리게 끌며 졸랐다. 석희재는 열에 말라서 조금 부르튼 입술을 핥으며 그의 밑을 바라보았다.

    주름이 팽팽하게 벌어져 입구가 매끈해질 정도로 크게 뚫린 밑이 거대한 성기를 힘겹게 삼키고 있었다. 입구 점막이 살짝 밀려나 마찰에 발갛게 달아오른 것이 퍽 아파 보이는데도 이현은 자꾸만 졸라 댔다.

    “이거 다 넣은, 거 아… 하아, 아, 아니잖아.”

    “…아파?”

    “아니, 버틸 만한데…. 응? 뜸 들이지 말고…. 더 깊게 쑤셔 줘.”

    잘못 처신하면 그에게 쉽게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때문에, 석희재는 그의 요구 앞에서 항상 긴장 상태였다. 하지만 본격적인 마찰이 있기도 전에 새빨갛게 부어오른 입구가 영 마음에 걸렸다.

    보채고 있는 그의 요구를 즉시 들어주는 편이 좋다는 것은 알고 있지만….

    “…기다려.”

    “아읏, 진짜.”

    석희재가 통 움직여 주지 않자 이현은 낯을 굳혔다. 웃음기가 싹 사라진 인상이 얼핏 차가워 보여 석희재의 몸이 다시 긴장으로 굳었다.

    오늘 그의 표정 없는 얼굴에 유독 긴장하고 마는 이유는 이현의 얼굴에서 쾌락의 흔적을 확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희게 질려 창백해진 얼굴은 그저 고통을 삼키는 것처럼 보였다.

    역시 지나치게 서둘러 삽입했기 때문이다. 그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응했던 석희재는 약간 후회하고 있었다. 이토록 이현이 아파할 줄 알았다면 안이 녹진하게 녹을 때까지 좀 더 풀어 줬을 것이다.

    석희재가 이현과의 관계에서 배운 것이 한 가지 있다면, 섹스란 그날의 무드와 서로의 컨디션에 따라 한없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이었다. 오늘은 유독 합이 안 맞는 날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석희재가 그런 생각을 하기 무섭게 이현은 이불자락을 쥐고 있던 손을 내려 아래를 스스로 더듬었다. 반 정도가 꽂히고 남은 기둥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읏….”

    이현의 손가락이 핏줄 선 부분을 스치는 바람에 척추가 울렸다. 맞물린 입구를 무심하게 더듬어보는 그 별것 아닌 손짓이 자극적이었다. 자극에 허리가 무너질 것 같아 석희재는 팔을 받친 채로 버텼다.

    “한참 남았잖아. 왜 더 안 넣는데.”

    “…후….”

    “감기 때문에 그런가? 내가 올라가?”

    그의 말대로 감기몸살의 후유증 때문에 안압이 오른 눈가가 뜨거웠다. 석희재는 눈을 깜빡였다. 그러자 눈가로 땀방울이 조금 흘러들어 와 눈이 시린 느낌이 들었다.

    “…너 다칠, 것 같아서.”

    석희재는 밭은 숨을 쉬며 이현의 마른 배를 손바닥으로 조심스럽게 쓸었다.

    제 물건의 길이를 가늠했을 때, 이 날씬한 허리에 잘못 조준을 하면 윗배를 넘어 명치까지 찌를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반을 겨우 삼킨 지금도 석희재는 귀두 끝의 부드러운 내벽이 무언가에 막혀 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왜 저라고 속도를 내고 싶지 않겠는가. 이 다리를 활짝 벌리고 멋대로 허리를 흔들고 싶었다. 현실이 아닌 꿈에 이현이 등장할 때는 그렇게 욕구를 풀었다. 이현을 만난 뒤로 석희재는 사춘기 소년보다도 더 자주 몽정했다.

    지금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본능이 조금 더 컸다면 쉽게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 그의 안이 쉽게 망가지고 만다. 성기를 꽉 쥐어 물고 있는 내벽은 그만큼 연약하고 부드러웠다. 실제로도 피를 본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석희재는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찔러 줘. 여기까지. 제발… 응?”

    이현은 제 윗배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마주친 이현의 눈가가 축축하게 붉어져 있었다. 그 얼굴을 보니 더는 참기 어려워져서 석희재는 목을 젖혀 한 번 천장을 바라보고 긴 한숨을 쉬었다. 열감이 느껴지는 호흡이 흩어졌다.

    “읏….”

    턱 안의 이를 강하게 물면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진입했다. 석희재가 기억하기로는 했던 것 중 가장 느린 삽입이었다.

    상대를 배려하며 삽입하는 건 갈망하는 몸을 대상으로 했을 때는 더더욱 힘든 일이다. 게다가 오늘 그의 안은 유독 좁게 느껴져 길이 없는 안쪽을 무자비하게 짓뭉개며 파고드는 느낌이 났다.

    “하아… 하아….”

    이현 역시 졸라 댄 것치고는 괴로웠는지 진입할 때마다 자꾸만 느린 심호흡을 반복했다. 그가 크게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흉곽이 한계까지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게다가 내쉬는 숨도 고르지 않았다. 크게 들이마신 후 불안정하게 여러 번 끊어 뱉어 냈고, 허벅지는 바들바들 떨리며 경련하고 있었다.

    그렇게 숨도 제대로 못 쉴 정도로 지나치게 벅찬 물건을 아래로 받으며 이현은 ‘좋아’라고 중얼거렸다. 안색은 창백하게 질린 채로. 모순이었다.

    그 얼굴을 보면서 속도를 올릴 수는 없었다.

    “아, 으음… 너무 느려서 미치겠어. 왜 그래, 너, 오늘….”

    이현이 고개를 모로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의 눈가에 눈물이 고여 있다가 톡 떨어졌다.

    안을 밀어내고, 또 밀어내며 깊이 결합했을 때 이현의 호흡은 매우 짧아진 상태였다. 그건 흥분 때문이기도 했지만 안 그래도 마른 허리 안에 꽉 들어찬 장기를 꾸역꾸역 밀어내며 자리 잡은 석희재의 물건 때문이기도 했다.

    석희재는 이현의 마른 배가 조금 볼록해진 것을 손으로 문질러 보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제 거의 다, 들어갔어.”

    “으응… 더어….”

    그리고 완전히 결합해 석희재의 음낭이 그의 축축하게 젖은 입구 밑, 그리고 회음에 맞닿았을 때였다. 섹스 아니고서야 타인의 살갗이 닿을 리 없는 곳끼리 문질러졌을 때, 이현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절정에 올랐다.

    “흐읏….”

    이현이 손으로 제 얼굴을 가리며 신음했다.

    처음 석희재는 그의 흥분을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제 성기로 빠듯하게 채운 그의 복부가 작게 경련하며 바르르 떨리는 것을 보고 역시 무리였나 생각할 뿐이었다.

    “하아… 으, 응.”

    그러나 직후 이현의 내벽이 멋대로 조금씩 들썩이며 아래를 꽉꽉 조여 물었다. 손도 대지 않은 앞에서 정액이 핏, 핏 흘렀다. 이현은 그 느린 진입 끝에 배 안에 타인의 것을 완전히 머금었다는 충족감, 그리고 회음에 와 닿는 묵직한 고환의 느낌에 어이없이 절정에 다다른 것이다.

    완전한 결합만으로 이현이 사정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석희재는 눈앞이 핑글핑글 도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아, 아흑… 으, 응, 좋아….”

    이현은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흐느꼈다. 그리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제 것을 물고 조여 댄 이현 때문에 덩달아 자극받은 석희재는 어쩔 줄 모르고 있었다. 상대의 오르가슴이 주는 심정적 쾌락이 지나치게 컸다. 씨근거리며 흥분을 억누르고 있던 석희재의 가슴팍에 땀이 한 줄기 흘렀다.

    “…좋아, 너무, 좋아.”

    사정의 여운에 잔뜩 젖은 얼굴로 이현이 느리게 손을 들었다. 그러더니 석희재의 가슴과 목덜미, 그리고 흰 뺨을 더듬었다. 그가 좋다고 중얼거리며 제 눈을 바라보는 순간 석희재는 심장이 쿵 떨어지는 기분을 느꼈다. 그가 정말로 자신을 사랑한다는 착각이 들어서….

    석희재는 제 뺨을 더듬던 이현의 손을 마주 잡고 그 손바닥에 깊이 키스했다. 이 느낌만은 중독이다.

    ‘좋아해…. 좋아해.’

    석희재는 입술을 묻은 이현의 손바닥에 대고 소리 없이 중얼거렸다. 이현은 그마저도 자극이 된다는 듯이 어깨를 떨었다.

    “하아….”

    이내 이현이 긴 한숨을 쉬더니 제 얼굴을 세수하듯 양손으로 쓸어내렸다. 첫 사정이 끝나고 겨우 진정이 된 후에도 이현은 간헐적으로 몸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숨을 고르던 이현이 말했다.

    “할 때마다 생각하는데… 네 거, 진짜 토할 정도로 크다.”

    “…….”

    “그냥 삽입만 해도 얻어맞는 것 같아. 안이 아려.”

    이현이 코를 훌쩍여 석희재는 망설이다 물었다.

    “…뺄까.”

    “아니, 그러지 말고. 부탁 하나 있는데….”

    “뭔데?”

    “이다음엔 나 사정하고 있을 때… 가만히 있지 말고 박아 줘.”

    이현의 요구를 들으며 석희재는 그의 얼굴을 가만히 탐색했다. 느린 삽입에도 충분히 좋아하는 것 같았는데 더 요구하는 걸 보니 무언가 모자랐나 싶어서.

    “힘들어서 죽어 버릴 것 같은데 난 그게 좋거든.”

    석희재는 알겠다며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전히 자신의 것은 잔뜩 흥분한 채로 이현의 안에 들어차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이 제 것으로 절정에 오르는 순간을 목격한 흥분이 아직도 몸에 잔열로 남아 있었다. 이현이 신음하며 눈을 조금 찡그리기만 해도 해도 제멋대로 흥분해 그의 안쪽을 때려 댈 정도로 꿈틀거렸다.

    “참지 말고, 해 봐.”

    이현은 나른하게 한숨을 쉬면서 석희재를 충동질했다. 다리를 들어 올려 허리를 꽉 조이고는, 발등으로 석희재의 허벅지를 당기며 허리 짓을 종용했다. 그에게 순순히 이끌리며 석희재는 종마처럼 삽입했다. 꽉 잡는 것만으로 손자국이 남는 마른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는 그 허리를 가차 없이 제 쪽으로 당겼다.

    “아…!”

    이불 위에서 길게 끌려온 이현이 더 깊어진 결합에 신음했다. 잠시 후 석희재는 그를 너무 열망 어린 눈으로 보지 않으려고 체위를 바꾸었다.

    후배위로 삽입한 지 얼마 안 되어, 이내 균형을 잃은 이현의 상체가 침대 앞으로 털썩 떨어졌다. 벌써부터 지쳐 보이는 것이, 역시 오늘 컨디션이 좋지 않은 것은 감기 기운이 있는 석희재 뿐만이 아닌 것 같았다.

    이불자락 위로 이현의 머리카락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었다. 석희재는 그를 따라 살갗을 맞붙이고 길게 누우며 그 등에 무심코 입을 맞추었다. 그 직후 허락받지 못한 애정 표현을 해 댔다는 것을 자각했음은 물론이다.

    “…아아, 아응… 읏, 흐….”

    당황으로 흠칫 몸이 굳었지만, 다행히도 이현은 체중에 짓눌리며 더 깊숙이 삽입된 탓에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석희재는 그가 차라리 정신을 놓기를 바라며 더더욱 가혹하게 삽입했다. 귀두 끝에 겨우 걸리도록 빼내었다가 뿌리 끝까지 처박기를 몇 번 반복하자 이현이 크게 흐느꼈다. 엎드려 막힌 입에서 물기 어린 신음이 흘러나오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렇게 이현의 혼을 쏙 빼 놓고 그의 머리카락을 마음껏 만지며 목덜미를 빨고 있을 때였다.

    “저기….”

    웅얼거리던 이현이 석희재의 손목을 잡고 제 머리카락을 쥐게 했다. 더 쓰다듬어 달라는 것 같은 행동이었지만… 석희재는 그가 뭘 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마, 만지는 것만 하지 말고… 세게… 알지?”

    석희재는 그저 침묵했다.

    이현은 최초에 요구했던 것처럼 섹스 상대가 자신을 망가뜨려 주길 원했다. 그가 원하는 건 분위기를 돋우는 정도의 욕설이나 가볍게 엉덩이를 때리는 정도가 아니었다.

    이현은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뺨을 맞기를 원했다. 관자놀이 부근을 주먹으로 때려도 상관없다고 했다. 조금 놀란듯한 석희재의 표정을 살피며, 상대가 그렇게 해 주지 않으면 자신을 원하는 느낌이 나지 않는다고 변명했다.

    그리고 이현의 연락을 한 번 무시했다가 3개월간 방치당했던 경험이 있는 석희재는 재결합 아닌 재결합을 한 뒤로 이현의 요구에 순순히 응해 주었다. 그에게 쓸모를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더 두려웠기 때문이다. 때문에 석희재는 대체로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는 편이었다. 그러나 폭력을 써 본 적 없는 손은 이현이 보지 않을 때는 자주 머뭇거렸다. 때리기 전에 그의 살갗이 아플까 봐 손바닥으로 맞을 곳을 문질러 주는 것이 석희재의 버릇이었다.

    꽤 애틋한 이유가 담긴 손짓이었지만 이현은 그것을 신호로 받아들였다. 조만간 저에게 떨어질 벌의 신호.

    잔뜩 기대감에 찬 이현은 석희재의 손등이나 손바닥이 닿으면 그 작은 자극만으로도 어깨를 떨었다.

    그러면 석희재는 어쩔 수 없이 손을 들었다. 흰 피부에 자국이 남도록 매섭게 내리치면 그 순간 이현은 정말로 크게 놀랐다. 아프고 서럽다는 듯이 한숨을 쏟으며 몸을 웅크렸다…. 그의 그런 반응에 심장이 떨어질 정도로 놀라 석희재가 그를 안아 주려 하면, 이현은 코를 훔치며 ‘더 세게’ 해 달라고 작게 졸랐던 것이다.

    맞고 나서 아파 괴로워하는 것까지가 이현이 원하는 것이라는 것을 학습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석희재는 그렇게 공들인 애무보다 그가 원하는 성적 학대를 먼저 배웠다.

    ‘이현이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사람의 요구에 응답해 주는 것도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하면서 석희재는 내키지 않는 짓을 반복했다. 그리고 석희재를 고정적인 섹스 파트너로 인지하기 시작한 이현 역시, 제 상대는 좀처럼 천박하게 굴지 않지만 원하는 바를 이야기하면 착실히 시도한다는 것을 깨닫고 점차 상세한 요구를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음… 쌀 때, 머리카락 이렇게. 내가 보내 준 영상 있잖아. 그렇게 해 줘.”

    이렇게 말로 요구할 때도 있었고, 영상을 보낸 적도 있었다.

    석희재는 이현이 얼마 전에 보내 주었던 게이 포르노의 링크를 떠올렸다. 이라는 노골적인 제목의 포르노 클립에서는 순한 양처럼 엎드린 한 남자에게 옷도 다 벗지 않은 남자가 삽입하고 있었다. 마치 지금의 저와 이현처럼.

    영상 속 남자는 - 그러니까 석희재의 역할은 - 키스도, 애무도 없고 그저 욕구를 위해 아래 구멍만 사용한다. 아래 깔린 남자에게 뿌리까지 찔러 넣고, 절정이 가까워질 때는 바텀의 머리채를 잡았다. 그 때문에 내내 엎드려 참던 남자가 아프게 신음하면 조용히 하라는 듯이 관자놀이를 때렸다. 두 사람이 짧게라도 몸을 겹친 것은 짐승처럼 박던 남자가 사정할 때뿐이었다.

    석희재의 머릿속에는 그 노골적인 행위보다, 두 사람이 짧게 몸을 겹쳤을 때…. 그러니까 탑이 사정한 뒤 잠시 여운에 젖어 바텀에게 체중을 기대었을 때 행복한 듯이 탑의 등을 손으로 더듬던 바텀의 손짓이 더 강렬하게 남았다. 그게 퍽 애틋해 보였다.

    자신이라면 안아 주었을 텐데, 영상 속 남자는 사정이 끝나자마자 짧게 겹쳤던 몸을 떼고 즉시 일어났다.

    이현은 지금 그걸 재현하고 싶은 것 같았다.

    “…해 줘?”

    석희재는 갈라진 입술을 핥으며 한 번 더 의사를 확인했다. 오늘 이현은 느린 삽입만으로도 느꼈다. 그러니 꼭 맞아야만 좋은 건 아니라고, 설득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응….”

    이현이 살짝 웃으며 대답했다.

    석희재는 그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차분히 빗었다. 손가락이 유독 길고 커다란 손의 손등으로 그의 관자놀이 부분을 문지르자 이현이 긴 한숨을 쉬었다. 기대감에 살짝 떨리는 호흡을 들으면서 석희재는 그의 옆얼굴에 손을 내리쳤다. 짝, 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나자마자 이현의 허리가 무너졌다.

    “아….”

    “허리 들어.”

    “아파… 흑. 아파….”

    입으로는 아프다고 중얼거리지만 아래는 흥분으로 제멋대로 조여 댄다. 이현이 충동질한 덕에 석희재는 금세 폭력적인 흥분에 도달했다.

    강제로 박고, 머리채를 잡는다. 사랑하고 아끼고 싶다면서도 그가 지시한 행위를 재현하는 건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섹스는 감정을 배제할수록 쉬워진다. 그것 역시 석희재가 이현과의 섹스에서 배운 것 중 하나였다.

    제 밑에서 신음도 없이 밭은 호흡만 힘겹게 내뱉는 이현을 향한 원망을 해소하는 기분으로, 석희재는 허리를 흔들었다. 퍽, 퍽, 깊이 쑤실 때마다 체온에 완전히 녹은 젤이 물처럼 튀었다. 깊이 찌를 때마다 귀두가 이현의 연한 부분에 가로막혀 자극이 엄청났다.

    “으응, 아파… 아파.”

    ‘안을 얻어맞는 것 같다’며 이현이 흐느끼기 시작했다. 석희재는 입술을 깨물며 속도를 올렸다. 그의 허리를 양손으로 잡고 빠른 속도로 삽입했다. 이현은 끊어질 듯한 호흡을 흘리다가 어느 순간 등을 잔뜩 긴장시켰다. 마른 근육이 새겨진 등이 바짝 굳는다. 이현의 두 번째 오르가슴이었다.

    “허억….”

    이현이 헛숨을 흘리며 사정했다. 안달하듯 꽉 조이는 안쪽의 압력에 의해 석희재도 사정이 목전이었다. 석희재는 입술을 깨물면서, 사정할 때 박아 달라던 그의 요청대로 멈추지 않고 속도를 높였다. 동시에 석희재에게도 절정이 찾아왔다. 참지 않고 그의 안에 흥분을 깊이 털어 내면서 석희재는 그의 뒷덜미에 손을 펼쳤다.

    “아…!”

    가느다란 목을 쓰다듬으며 머뭇거리던 것도 잠시, 석희재는 그 목선을 타고 올라 두피를 헤집었다.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함부로 잡아챈 것은 순간이었다.

    형, 형…!

    그 순간 정수리로 찬물을 끼얹은 듯 흥분이 깨어졌다.

    “형…?”

    열 오른 체온이 싸하게 내려가는 것을 느끼며 석희재는 읊조렸다.

    “방금 뭐라고 했어.”

    “아….”

    그걸 의식한 건 석희재만이 아니었다. 석희재의 얼굴을 등지고 있던 이현은 등마저 창백하게 질렸다.

    석희재의 손이 쥐고 있던 이현의 머리카락에서 떨어졌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이 뒤집힌 채로 허공에 남았다.

    그가 원하는 대로 머리채를 잡아 준 순간에, 이현은 다른 이의 이름을 불렀다. 뭉개져 불분명한 발음 안에서 석희재가 확실히 들은 것은 ‘형’뿐이었다.

    “…형이, 누구야?”

    그렇게 물으면서 짝사랑에 면역이 없는 석희재는 제 심장이 아예 작동을 멈춰 버렸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당시의 석희재는 호흡도 잊은 채였다.

    자신의 실수로 판을 깼다는 사실을 알았는지 이현은 함부로 뒤를 돌아보지도 못했다. 석희재는 불규칙하게 뛰는 심장으로 자신이 무슨 짓을 당한 건지 인지해 보려고 노력했다.

    어째서?

    왜 앞에서?

    그게 대체 누구야.

    목을 졸라 버리고 싶어.

    의문을 가진 동시에 자제할 수 없는 증오가 솟구쳤다. 증오는 분명 눈앞의 이현에게 향하고 있었다. 그걸 인지하는 순간 그보다 더 빠르게 절망의 해일이 덮쳐 왔다.

    사랑하는 상대에게 한시라도 미워하는 마음을 품는다는 것이, 처음 사랑을 경험해 본 석희재에게는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미안….”

    벗은 몸이 민망하고 부끄럽다는 듯이 이현은 뒤돌면서 시트로 몸을 가렸다. 하필 사정 직후라 더럽게 허무한 기분이 석희재를 감쌌다. 분노와 욕구를 동시에 충동질 당해, 석희재는 뭐라도 집어던지고 싶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그를 비난하고 싶었다.

    “하….”

    지친 듯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석희재를 보고 이현은 고개도 들지 못했다.

    “그게 누군지 설명하기 싫은 거지.”

    “…….”

    “전 애인이야? 아니면 그냥 나 같은… 잠만 자는 사람?”

    “…미안해.”

    “예의가 아니잖아.”

    이현이 진짜로 미안해하고 있다는 것은 보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이현이 뻔뻔하게 나오지 않고 저토록 죄책감 어린 표정을 하고 있으니 더더욱 화가 났다. 상대를 밝히지 않는 것도 그랬다. 제가 비난당해도 상대는 보호하고 싶은 것 같아서.

    “더 있으면… 심한 말 할 것 같으니까, 갈게.”

    “미안해. 희재야.”

    그 순간 석희재는 멈칫했다.

    그가 저를 ‘희재야’ 하고 불러 주는 일은 좀처럼 없다. 여러 번 함께 밤을 보낼 때까지 이름도 묻지 않았던 이현은 여전히 석희재를 ‘너’라고만 지칭하고 있었다.

    하필 이런 때에.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너무 작고 애처로워서, 자책하지 말라고 끌어안아 주고 싶을 정도였다.

    석희재는 손등으로 지친 눈가를 문지르면서 콘돔을 뺐다. 그 안에 넘치도록 사정한 정액을 보자 제가 더 멍청하게 느껴졌다. 티슈로 대충 질척한 성기를 닦아 낸 후 석희재는 옷을 껴입었다. 애초에 다 벗지 않았기 때문에 옷을 걸치는 것이 빨랐다. 주저 없이 코트까지 전부 걸치는 석희재를 보는 이현은 두려운 얼굴이었다.

    “간다.”

    “희재야….”

    속옷도 입지 않고 추리닝만 급하게 다리에 걸친 이현이 현관까지 석희재를 쫓아 나왔다. 하지만 석희재는 그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등진 채로 문을 보고는 말했다.

    “나오지 마. 춥잖아.”

    감정을 배제한 버석한 목소리에서는 다행히 감정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리고 문이 닫혔다.

    아직도 이현이 바라보고 있을 현관을 등진 채, 석희재는 눈을 한 번 느리게 꾹 감았다 떴다. 그의 얼굴을 피한 것은 아까부터 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투명하게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렀다.

    ‘형’은 누구일까.

    역시 전 애인일까? 이현을 성적으로 완벽히 만족시켜 준.

    그처럼 어설프게 학습해서 재현하는 것이 아닌… 원래 취향이 가혹해서 쉽게 욕을 뱉으며, 이현의 몸을 걸레처럼 굴릴 수 있는 그의 완벽한 또 다른 섹스 파트너?

    석희재는 아까 그의 얼굴을 때렸던 손을 들어 손등으로 눈가를 조용히 찍어 냈다. 그를 때리기 위해 자신이 얼마나 큰 각오를 하는지 이현은 절대 모를 것이다. 어쩌면 자신은 이현이 원하는 상대와 지나치게 멀지도 몰랐다.

    “후….”

    석희재는 한숨 쉬며 눈물을 애써 털었다. 익숙한 골목길을 걸어 나와 택시를 탔다.

    이현을 쉼 없이 사랑하던 석희재가 절망감을 느끼는 것은 그럴 때였다. 이현에게 미운 감정을 느끼는 제 사랑의 한계가 서글플 때.

    제 사랑을 온전하고 지고지순한 것으로 남기고 싶은데도 그것이 이성적으로는 불가능할 때가 있다는 사실에 절망했다. 또한 사랑과 증오를 모두 불러일으키는 주체가 이현이라는 사실에 인지 부조화를 느꼈다.

    한마디로 패닉 상태였다.

    하지만… 이런 꼴을 당해도 좋아하는 마음이 사라지지 않았다.

    석희재는 이현을 좀 더 일찍 만나지 못한 것을 원망했다. 그에게 취향이라는 것이 생기기 전에 첫 연애를 한 사람이 제가 아니라는 사실이 안타까웠다.

    ‘많이 미안해하고 있었는데.’

    게다가 사과를 받아 주지 못하고 떠난 것이 끝내 마음에 걸렸다. 택시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한강 변의 다리와 가로등 불빛을 보면서 석희재는 내내 혼자 잠들 이현만을 상상했다.

    ***

    먼저 연락이 온 것은 이현에게서였다.

    정확히는, 이현의 번호를 통해 다른 사람으로부터.

    - 친구분이시죠? 피디님이 여기로 전화하라고 하셔서요.

    낯선 남자의 목소리와 함께 술집으로 추정되는 곳의 소음이 귓가로 쏟아져 들어왔다. 석희재는 허리를 세워 일으키며 나지막하게 물었다.

    “누구세요.”

    새벽 세 시, 이현의 이름으로 걸려 온 전화.

    그러나 들려온 것은 저가 모르는 낯선 목소리였다. 조금 긴장한 석희재에게 그가 설명했다.

    - 어, 저는 같이 공연하는 배우인데요….

    “네.”

    - 피디님이 너무 취하셔서요. 데려가셔야 할 것 같은데.

    그걸 왜 나에게?

    의문을 가지면서도 석희재는 벌써 코트를 팔에 걸치고 있었다.

    이미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누운 시각이었기 때문에 석희재는 트레이닝복에 티셔츠 따위를 걸친 채였다. 마음이 급해 옷을 다 갈아입지는 못하고 석희재는 그 위에 그대로 코트를 입고 단추를 여몄다. 그리고 집 밖으로 뛰쳐나가 택시를 탔다.

    “혜화역으로 가 주세요.”

    차가 드문 새벽, 석희재를 태운 차는 거침없이 지름길로 달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혜화동로터리가 보였다. 석희재는 이현의 출근길을 눈에 담으며 역을 가리켰다.

    “저기, 1번 출구 앞 횡단보도 앞에 세워 주세요.”

    계산을 마친 후 석희재는 택시의 차 문을 가볍게 밀어 닫았다. 구두 위로 드러난 흰 발목에 새삼 냉기가 느껴졌다.

    깊은 새벽인데도 큰 도로에는 술에 취한 무리가 드문드문 나와 있었다. 석희재는 혹시 그중에 이현이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그들을 하나하나 눈으로 훑었다. 소득은 없었다.

    석희재는 긴 다리를 뻗어 빠르게 1번 출구를 지나 동숭 방향으로 올라갔다. 백여 미터만 걸어가면 전화로 설명받은 술집이 있었다. 간판은 전집이라고 되어 있지만 파는 것은 족발이나 찌개류 등 대중이 없다. 석희재가 그것을 기억하고 있는 이유는 이현이 이곳의 족발이 맛있다고 몇 번 이야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석희재는 이십 년 전 개업하고 한 번도 인테리어를 바꾸지 않은 것 같은 술집 문 앞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생각해 보면 술에 취한 이현을 직접 데리러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이런 건 사귀는 사이에나 하는 거 아닌가.’

    그가 잔뜩 취한 상태로도 저에게 연락해야 한다고 주장했다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니 가만히 가슴이 뛰었다. 어느새 원망은 씻긴 듯 사라져 있었다.

    마음의 준비를 하며 코트 주머니 안에 넣은 주먹을 살짝 쥔 석희재는, 안쪽 카운터에 서 있던 주인과 눈이 마주쳤을 때 짧게 심호흡하고 안으로 들어갔다.

    좁은 가게였으나 곳곳에 나무 파티션이 있어 내부가 한 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 친구분 오셨어요.”

    어딘가에서 석희재를 발견한 누군가가 손을 흔들었다. 석희재는 그곳으로 지체 없이 다가갔다. 자신을 배우라고 소개했던 누군가 - 아마도 저에게 전화를 걸었을 - 남자가 석희재의 얼굴을 표가 나게 흘끔거렸다. 석희재 역시 그를 가만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현 주변의 남자들을 경계하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석희재는 이현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그에게 완전히 기대어 있는 것을 불편한 심경으로 바라보았다.

    “배우세요?”

    같은 테이블에 있던 누군가가 물어 석희재는 대답 대신 고개만 가로저었다. 그러고는 이현을 향해 손을 뻗었다. 말없이 손만 내미는 석희재의 행동에서 불쾌감을 읽었는지 또 다른 누군가가 변명을 했다.

    “피디님은 저희가 먹인 게 아니고요. 아까 가신 무대 감독님이….”

    “2차는 룸으로 가자고 했는데 그게 싫은 사람들은.”

    “야, 조용히 해.”

    석희재는 이현이 의자와 테이블의 좁은 틈을 빠져나오도록 도운 후 이현을 받아 들었다. 축 늘어지는 몸의 무게가 심상치 않았다. 목덜미에 쏟아지는 숨에서 알코올 향이 났다.

    “취하면 버리고 갈 테니까요.”

    석희재와 눈이 마주친 배우 하나가 빙글빙글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서 저희는 부어라 마셔라 연기를 했는데.”

    “PD님은 진짜 마셨다는 얘기….”

    여자들과 더럽게 놀기 위해 자리를 뜬 이들, 거기에 이현이 끌려갈 뻔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인사불성이 되도록 취해 버리면 어차피 버리고 갈 수밖에 없으니 이현은 만취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석희재는 말없이 이현을 고쳐 안았다. 그의 쇄골 위로 이현의 이마가 콩, 닿았다.

    “…그럼 가 보겠습니다.”

    석희재는 묵례를 남기고 카운터로 향했다. 술값 중 이현의 부담해야 하는 몫이 얼마인지는 몰라도 아쉬운 소리를 듣게 하기 싫어서 지갑에서 오만 원권 네 장을 꺼냈다. 비틀거리는 이현을 안은 채로 코트에서 지갑을 꺼내고 또 현금을 집어 드는 과정이 꽤 번거로웠다.

    사장님이 그 돈을 받아 들려고 했을 때 뒤에서 따라 나온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안 내셔도 되는데. 1차는 피디님이 쐈거든요.”

    “…그래도 조금만 받으세요.”

    “피디님 친구분이세요?”

    그 말에 석희재는 잠시 망설였다.

    입술을 달싹이던 석희재는 다른 설명을 하는 대신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표정이 안 좋으시더라고요. 그쪽이랑 선약 있으셨던 것 같은데….”

    선약 따위는 없었지만 석희재는 잠자코 들었다.

    “중간에 그래서 무감님이 갈구고. 분위기 되게 별로였어요.”

    “…….”

    “피디님한테 너무 뭐라고 하지 마세요.”

    석희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가게를 나서니 새삼 현실이 생소했다. 언제 어떤 식으로 얼굴을 맞대야 할지 몰랐는데 품에 안고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이렇게 만나고 보니 원망은커녕 품 안의 이현이 고맙고 안쓰럽기만 했다. 양감이 부족할 정도로 마른 몸이 자꾸만 팔 안에서 허물어져서 석희재는 그를 단단히 안았다.

    이현의 집으로 가는 택시를 잡기가 어려웠다. 스쳐 지나가는 택시를 향해 팔을 뻗으면 차가 잠시 멈췄다가도 ‘가회동’이라는 석희재의 말을 듣고는 대꾸 없이 창을 올린 채 떠나 버렸다.

    고집스럽게 장거리 운행 손님을 찾으려는 택시 기사들을 번번이 놓친 후, 석희재는 어쩔 수 없이 이현과 함께 연석에 잠깐 주저앉았다.

    “이리와. 업혀.”

    “…….”

    “업히라고. 걸어가게.”

    석희재는 그의 앞에 쭈그려 앉아 팔을 뻗었다. 제 몸을 제대로 가누지 못하던 이현은 잔뜩 비틀거리다가 석희재의 등에 머리를 박았다. 석희재에게서 저도 모르게 소리 없는 웃음이 터졌다.

    거의 이 주만에 웃어 보는 것이었다.

    이현과 헤어진 게 이 주 전이니까.

    등에 그를 업었다기보다는 얹은 채로, 허벅지에 단단히 힘을 주고 일어선 석희재는 상체를 조금 앞으로 기울였다. 이현은 순하게 제 등에 기대었다.

    “걸어가면 한 이십 분 걸려.”

    “…….”

    “알았지?”

    들으란 사람은 대답도 없는데 석희재는 단단히 확인을 받고는 걸음을 옮겼다.

    석희재는 새벽의 횡단보도를 건넜다. 이현이 들이마시고 내쉬는 숨이 목덜미에 흩어지는 것을 느끼면서 그대로 이화사거리 방향으로 걸어갔다. 창덕궁 돌담길이 나타나는 건 금방이었다.

    “으음….”

    이현은 가는 길에 조금 정신을 차린 듯했다. 오히려 정신을 차리니 꿈지럭거리는 게 더 마음을 간질간질하게 만들어서 석희재는 입가에 퍼지는 미소를 주체하기가 어려웠다.

    “야….”

    “…….”

    “나… 멀미나.”

    석희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작은 심술이지만 그가 제 이름을 불러 줄 때까지 대답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으음… 땅이 흔들려….”

    이현이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석희재는 못 들은 척하면서도 최대한 조심스럽게 걷기 위해 노력했다.

    “희재야. 나 멀미 난다고.”

    석희재는 잠시 걸음을 멈출 뻔했다. 턱에 걸린 듯이 부자연스러운 보폭의 변화를 감지한 이현이 짧게 한숨을 쉬었다.

    “나… 내려 줘.”

    “이제 이름 안 헷갈리네.”

    석희재는 생각보다도 가볍게 말할 수 있는 스스로를 신기해했다. 상처받았었는데, 분명히. 어쩌면 자신은 이현이 저를 불러낸 순간부터 이미 지난 일에 대한 원망을 다 씻었는지도 모른다.

    “화 풀렸어?”

    묻는 이현의 발음은 여전히 불분명했다. 혀가 꼬인 채로 말을 하는 것을 보니 아직 혼자 걸을 순 없겠다 싶었다. 석희재는 그를 다시 한번 든든하게 고쳐 업었다.

    “아니. 아직 안 풀렸어.”

    “…미안.”

    “형이 대체 누구야?”

    “…….”

    “섹파가 나 말고 또 있어?”

    “…….”

    “설명해 주면 화 풀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석희재는 그렇게 말하면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이현의 멀미가 심해지지 않게.

    이어서 내뱉은 이현의 고백은 어느 정도 예상하던 범위의 내용이었다.

    “내가 좋아하던 형이었어. 머리채 잡는 거… 흥분하면 그랬어. 처음에는 아프기만 했는데, 그렇게 하면 진짜로 엄청 흥분했다는 증명인 것 같아서 좋아졌어.”

    “나한테 그걸 똑같이 시킨 거네.”

    “그건 진짜 미안해. 다시는 안 그럴게.”

    “그래. 그런 거 내 취향 아니야.”

    “응. 내가 잘못했어….”

    “내가 안 물어보면 말 안 해 주려고 했어?”

    “그게 아니라, 화났을 땐 변명도 듣기 싫을 때가 있잖아. 그래서 네가 괜찮다고 하면 말하려고 했지.”

    이현이 면목 없어 하며 석희재의 뒷덜미에 이마를 조아렸다. 그게 꼭 머리를 비벼 대는 애교 같아서 석희재는 누그러졌다. 자신이 요구한 적도 없는데 다시는 제 취향을 강요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은 것 역시 좋았다.

    그 와중에 석희재는 한 가지 이상한 점을 짚어 냈다.

    전 애인 같은 게 아니고…. 그냥 좋아하는 형이었다니.

    그럼 섹스 파트너였을까? 사적인 감정과 섹스를 분리하는 데에 익숙해 보이는 이현에게 그런 경험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그럼 좋아하는 형은, 잠만 자는 사람?”

    “…그랬지.”

    “지금도 만나?”

    “…….”

    이현이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석희재의 심장은 철렁 내려앉았다. 그의 무게를 온전히 느낄 수 있어서 행복했던 귀갓길은 곧 번민에 가득 찼다. 복잡해진 심경 때문에 눈에 제대로 들어오는 것이 없었다.

    인도가 끝나고 시야 안에 창덕궁의 입구가 들어왔다. 이쯤 오면 이현의 집이 가까워졌다는 뜻이었다. 포장된 바닥 대신 모래가 얕게 깔린 창덕궁 입구 앞을 지날 때 석희재는 모래 둔덕을 잘못 밟고 몇 번 발을 헛디뎠다. 창덕궁 입구는 가로등이 멀어 사위가 어두워지는 바람에 그랬다기에는… 제가 생각해도 마음이 복잡한 탓이 컸다.

    설상가상으로 석희재의 목덜미에 이현의 따뜻한 숨이 닿는가 싶더니 그가 입술을 붙여 왔다. 석희재의 곧은 등이 긴장에 바로 섰다.

    강아지가 할짝거리듯이 핥거나 빠는 혀의 움직임이 민감한 부위를 자꾸만 자극하고 있었다. 석희재는 그만하라는 뜻으로 흘러내리는 이현을 두어 번 고쳐 업었지만, 그것도 그가 혀를 잘못 깨물기라도 할까 봐 더는 하지 못했다.

    “나 귀찮지.”

    “…….”

    ‘아니’라고 대답하려다가 그건 너무 너그러워 보이나 싶어 ‘조금….’이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그러면 이현이 또 풀 죽을지 모른다. 결국 석희재는 대답을 결정하지 못하고 침묵했다.

    “석희재는 역시 매너 있어.”

    “…무슨 소리야.”

    “다들 내가 이러면 밝힌다면서… 욕부터 했는데.”

    “…….”

    “야. 넌 나를 왜 만나? 나 같은 거 그냥 버려…!”

    이현은 갑자기 목소리를 높였다. 업힌 채로 목을 쳐들어서 순간적으로 석희재까지 휘청거렸다.

    뭐라는 거야.

    석희재는 주정뱅이의 외침을 한 귀로 흘렸다.

    “내가 어떻게… 어떻게 너 같은 사람 이름을 헷갈릴 수가 있냐? 멍청하고, 취향도 변태 새끼 같고. 그리고 너는 잘생겼잖아. 엄청… 잘나고 똑똑하고 예쁘고 돈 잘 버는 사람 많이 만날 수 있잖아. 나 말고 많지? 사실… 주변에 자 달라는 사람 엄청 많지? 그러면 나 같은 거에 시간 낭비 안 해도 되잖아…. 그래서 내가 미안해서… 나 너무 미안해. 씨발… 내가 주제도 모르고.”

    “…….”

    “너한테 한심한 짓 할 때마다 죽고 싶어….”

    “시끄러워.”

    석희재는 더는 듣기 싫어 그의 말을 잘랐다.

    그의 집 근처에 다 와서도 석희재는 조금 더 걸었다. 일부러 멀리 있는 편의점 근처까지 걸어갔다가 다시 돌아왔다.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현은 울고 있었다.

    ***

    그리고 아마도 그때쯤이었을 것이다. 이현이 제 주변에서 여전히 추근대던 과거의 섹스 파트너들을 아예 정리하기 시작한 것은.

    또한 석희재는 짐작했다. 이현 역시 지난 사랑으로부터 큰 상처를 입었으리라는 것을. 그의 짝사랑은 결국 실패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할 때의 이현에게는 지난 사랑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석희재는 쓸데없이 감정을 흘리거나 다정해지지 않는 거리감을 배웠다. 이현이 이 관계에서 안심할 수 있도록. 그리고 이현은 자신이 만나 본 사람 중 가장 잘생기고 매너 있는, 대체 왜 저를 만나는지 이해할 수 없는 파트너에게 매너를 지키려고 나름대로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마도 그런 사람이었기에 더 사랑할 수 있었다고, 석희재는 생각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이현의 주변 관계를 경계하면서 제 차례가 오기를 기다렸다. 만약 그가 그 ‘형’ 다음에 마음에 품는 사람이 있다면 그게 바로 저여야만 한다고 간절히 바라고, 또 믿으면서.

    “지우… 형.”

    그러나 술에 취한 채 또 다른 ‘형’의 이름을 부르는 이현을 보는 순간 석희재의 마음속에서 무언가가 산산이 부서져 조각났다.

    “형.”

    짧게 비웃듯이 말을 내뱉은 석희재는 허탈하게 웃었다.

    “나는 3년이나 곁에서 맴돌았는데….”

    “…….”

    “얼마 보지도 못한 사람한테 금세 마음을 줘.”

    석희재는 술에 취한 이현의 뺨을 더듬었다.

    가엽고 원망스러운 나의 사랑.

    “마음은 그렇게 쉽게 주지 마요….”

    수그린 이마가 이현의 가슴에 닿았다. 잠시 후 이현의 가슴은 그의 눈물로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

    석희재가 감감무소식이다. 이상할 정도로.

    ‘그날 그게 희재가 아니었나.’

    이현은 아리송한 기분에 휩싸여 그날의 기억을 더듬으려 노력했다.

    ‘아닌데, 분명히 거긴… 석희재 말고 또 누가.’

    만취한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는 혼자 호텔이었다. 집과 사뭇 다른 새하얀 시트와 머리가 푹 꺼지는 푹신한 베개 위에서 눈을 떴을 때 얼마나 아연한 기분이었던지.

    상황은 낯설었지만 장소는 아주 익숙했다. ‘또 코너 룸이구나’ 할 정도로 구조마저 눈에 익어 있었다. 석희재와 함께 밥 먹듯 드나들던 곳이니 당연하다. 그리고 호텔로 가는 목적이란 단 한 가지, 섹스뿐이다.

    저질렀나? 저질러 버렸구나.

    이현은 잠에서 덜 깬 채로 망연자실했다. 적당히 거리감을 유지하며 공사 구분을 철저히 좀 해 보겠다고 다짐한 것이 우습게, 몸은 왜 그렇게 쉬운지. 최초의 마음가짐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 스스로를 보자마자 미친 듯이 탈력감이 들었다.

    나란 놈은 왜 이럴까? 아무리 필름이 끊겨도 그렇지. 이현은 심한 자책감에 시달렸다.

    게다가 뇌도 알코올에 푹 절어 버려 호텔까지 오게 된 경위가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완전히 필름이 끊긴 거다. 술자리에서 이미 한계였던 것은 기억이 난다. 순식간에 만취해 버렸다.

    그러나 잠시 후 이현은 몇 가지 낯선 점을 깨달았다. 일단 첫째로, 방에 석희재가 없었다. 생각해 보면 관계 후에 혼자가 된 기억이 별로 없다. 아니, 아예 없었나? 욕실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리지 않아 의아해하던 이현은 잠시 뒤에 방 안에 저 외의 타인의 흔적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알아챘다.

    두 번째로는 몸에 석희재의 버릇 같은 흔적이 남아 있지 않았다는 점이다. 몸에 으레 남곤 하는 손자국이 없었던 것이다. 석희재는 손이 크고 악력이 강해서 딱히 상대를 상처입히려는 목적이 아닌데도 관계를 하고 나면 허리나 허벅지에 울긋불긋한 자국이 남고는 했다. 이현의 살성이 무르고 약한 것도 한몫할 것이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불긋한 자국 없이 피부가 깨끗했다.

    출근을 위해 기계적으로 씻은 후 옷을 걸쳐 입고 나오면서 이현은 결국 이 애매한 상황에 대해 결론을 내리는 일에 실패했다. 미스터리만 가득했다. 옷을 완전히 벗고 자는 버릇은 없으니 누가 벗겼다는 말이고, 뒤에 둔통이 어느 정도 남은 것을 보면 삽입이 있었다는 이야기인데….

    회사에 온 뒤 지난 술자리의 일을 짚어 보았다. 지난밤 술자리에 있던 모두가 입을 모아 말하기를 ‘한지우 선배가 피디님을 끝까지 챙겼다’ 했다. 마지막 의식 끝자락에 남은 누군가의 얼굴도 한지우였다.

    ‘설마 지우 선배와…?’

    하하하, 말도 안 돼.

    이현은 스스로의 상상력을 조소했다. 전혀 웃어넘길 기분이 아닌데도. 말도 안 되는 가능성에 급격히 초조한 생각이 들었던 탓이다.

    그날 함께 있던 것은 분명히 석희재였다.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그 미스터리를 풀어 줄 단 한 사람, 석희재는 완전히 침묵이었다.

    결국 그날로부터 3일째 되는 날에 이현은 떠보듯이 지질한 문자를 하나 보냈다.

    「나 그날 숙취 때문에 죽는 줄..」오후 2:45

    그러나 보기 좋게 씹혀 버렸다. 하긴, 이런 말을 3일이나 지나서 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었다. 생각해 보니 제가 메시지를 보낸 목적도 불분명했다. 답지 않게 용건이 없었다. 수다를 떨자는 거냐, 아니면 징징대는 거냐?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졌다.

    이현의 머릿속에는 그 문자를 보자마자 ‘뭐야?’ 하고 차가운 얼굴로 흥, 넘겨 버리는 석희재의 얼굴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뭐, 그런 적은 없지만 그런 표정이 잘 어울리는 얼굴이긴 하다.

    석희재로부터의 침묵이나 거절에 익숙지 않았기 때문에 이현은 무의식적으로 그것을 ‘더는 대화를 원치 않는다는’ 비언어적 태도로 인식하고 말았다. 석희재가 아니면 한지우일지도 모른다는 공포감 때문에 더는 적극적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한 번 정도는 마주칠 일이 있겠지.’

    이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연습실 같은 곳에서 자연스레 석희재와 마주치면 일 이야기라도 하지 않을까 싶었건만, 하필 연습실에 이현이 가는 날과 석희재가 오는 날이 겹치지를 않았다. 하루는 미리 스케줄을 체크하고 살짝 벼르면서 갔더니 석희재가 다른 스케줄 때문에 연습 일을 바꾸었다거나 하기까지 했다.

    “왜 갑자기 오늘 연습 안 나온대요?”

    “아, 촬영 잡혔다는데요.”

    도착한 연습실에 석희재는 없고 대신 조연출이 소식을 전해 왔다. 마치 저가 키운 자식을 자랑하는 듯한 뿌듯한 얼굴로.

    “촬영? 무슨 촬영?”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무슨 CF 촬영한다고….”

    “예?”

    아직 데뷔도 안 한 무명의 배우가 CF 촬영을? 이현은 얼떨떨하게 반응하며 물러났다. 물론 인지도가 없어도 이미지만 맞으면 찍게 되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 소속사의 힘이 받쳐 줄 때의 이야기다.

    그 소속사가 그 정도였나?

    물론 얼굴은 그 정도이기는 한데….

    석희재의 친모가 누구인지, 그가 연예계에 발을 들이는 것을 조건으로 친모에게 어떤 것들을 받아 내기로 했는지 모르는 이현은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그리고 허무하게 일주일이 지나가 버린 현재, 이현은 다소 가라앉은 눈으로 핸드폰 화면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결국 이렇게 제가 먼저 연락할 일이 생기게 됐다. ‘일’을 명분으로.

    그는 오늘 아침 홍보 포스터 촬영의 일정을 받은 참이다. 총 3일간 진행되는 포스터 촬영 일정 안에서 배우들과 정해진 콜 시간을 조율하는 것이 이현의 일이었다. 암묵적으로 연차 순대로 세워 신인 배우들은 꼭두새벽에, 선배 배우들은 늦은 시간으로 배치한다. 그것도 개인의 선호 차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지지만 말이다.

    바쁘게 연락이 오가던 중에 이현은 석희재에게만 메시지를 보내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일하며 배우와 특별한 트러블을 만든 적이 없어서 몰랐다. 배우 본인과 문제를 겪을 때 일하기가 얼마나 어려워지는지.

    그사이 작은 진동과 함께 한지우의 매니저에게서 답장이 도착했다.

    「콜 시간 확인했어요~ 근데 그날 전체 배우 콜도 알려 주실 수 있나요~?」오후 1:17

    그건 좀 그런데.

    이현은 턱을 쓰다듬었다. 배치 순서를 그대로 보여 주는 건 다른 배우들에게 실례가 될 수 있다. 이현이 거절하자마자 매니저에게 다시 연락이 왔다.

    「피디님 지우형님 연차가 얼만데 편한 시간에 골라갈수도 있는거 되게 까다롭게 구시네요^^ 위아래로 다 동료고 후배인데 못 볼게 멉니까? 저희가 스케줄표를 모 안 좋게 이용한다던가요?? 엄청 선 그으시네,,」오후 1:24

    “이 인간 또 이러네.”

    이현은 짜증을 내면서도 최대한 맞춰 줄 테니까 진짜 원하는 걸 말하라고 예의 있게 돌려 말했다. 한지우의 매니저는 좋게 말하면 매니저의 표본이고 나쁘게 말하면 말이 안 통하는 인간이다. 무식할 정도로 회사에 충성하고, 의견을 들어줄 때까지 고집을 부린다. 적당히 타협하는 게 나았다.

    그리고 한지우의 매니저에게 답장을 보내면서 이현은 생각했다. 매니저와 소통하는 것은 얼마나 편리한 일인지를. 매니저가 중간에 끼게 되면 배우는 언제까지 좋은 사람으로만 남을 수 있다. 아무리 까탈을 부려도 매니저 선에서 걸러지고, 대신 매니저가 진상을 부리면 대부분 매니저의 인간성을 탓한다. 매니저는 배우가 쓰는 방패인 것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적지 않은 경험을 하면서 이현은 매니저의 진상이란 보통 배우의 진상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전체 배우의 콜을 요구한 것도 한지우라는 이야기고, 고집을 부리고 있는 것도 한지우라는 얘기였다. 이현은 씁쓸함을 감추며 생각했다.

    좋은 모습만 생각하자.

    「됐습니다^^ 피디님. 주실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오후 1:40

    잠시 후 도착한 문자로 한지우 매니저와 아웅다웅하던 것은 의외로 시시하게 끝났다. 이현은 한지우가 마음을 바꿨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이제 남은 것은… 석희재 단 한 명.

    ‘희재도 매니저 쓰면 얼마나 좋아.’

    이현은 이마를 짚으며 손가락 사이로 머리카락을 미끄러뜨렸다. 한숨 대신 취한 제스처였다. 만약 그랬다면 지금 괜히 손가락이 머뭇거릴 이유도 없었을 것이다.

    ***

    촬영 당일. 이현은 사람이 싹 빠진 사무실에서 느지막이 스튜디오로 향했다. 원래는 딱히 용건이 없으면 갈 생각이 별로 없었다. 포스터 촬영은 완전히 홍보 팀의 영역이기도 하고….

    또 오늘은 석희재가 촬영을 오는 날이니까.

    ‘피디님, 촬영장 오실 거면 사무실에 있는 짐 몇 가지만 옮겨다 주실래요? 홍보 팀이 지금 전부 다 현장에 나와 있어서 부탁할 사람이 없어요.’

    하지만 피디가 되어서 현장을 완전히 나 몰라라 하는 것도 마음에 걸렸기 때문에 이현은 결국 사무실을 나섰다.

    홍보 포스터가 촬영될 장소는 논현동의 한 스튜디오였다. 눈에 익은 주소를 대충 보자마자 그곳까지 가는 길이 머리에 그려졌다. 밉살맞은 스튜디오 주인의 얼굴도.

    “아니, 종신 계약도 아니고 맨날 조 실장이랑만 하나….”

    이현은 작게 구시렁대며 차를 몰았다.

    한 작가와 오래 일하는 게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공연용 포스터를 꾸준히 찍는 사진작가가 몇 없기도 하고, 회사가 함께 작업해 본 사진작가의 풀 역시 손에 꼽을 정도니까. 게다가 거의 인맥으로 돌아가는 판이라 관계가 있는 작가들에게 돌아가면서 일을 주곤 한다. 그마저도 올해는 그중에 단 한 명, 조 실장과 계속 진행 중이다.

    이번 촬영을 진행할 조 실장은 이현이 좋아하는 작가는 아니었다. 자신의 호오가 계약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강한 사람에게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강한 전형적인 타입이라 막내 때부터 구른 이현은 조 실장에게 볼꼴 못 볼 꼴을 다 보았다. 이현이 피디가 되고 나서 가진 술자리에서는 뭐라고 했더라. 자기가 예술가적 기질이 강해서 조금 다혈질이고 뭐? 예민하다고? 웃기는 말이다. 그 기질이 왜 어린 막내들에게만 발동하는지 모를 일이고.

    “네, 이현입니다. 아! 아름아. 나? 지금 막 출발했는데. 한 이십 분 후에 도착할 것 같아. 아…. 옷걸이? 옷걸이라고? 그게 사무실에 있나? 벌써 출발했으니까, 그냥 중간에 사서 갈게.”

    운전 중, 울 것 같은 목소리로 전화를 걸어온 것은 홍보 팀 막내 신아름이었다. 근처에 살 곳이 없어서 세탁소를 다 돌았는데 구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 진이 다 빠진 목소리를 듣자 저도 막내일 때 어려운 심부름 때문에 고역을 겪던 것이 기억이 났다.

    “빈손으로 들어가면 팀장님이 뭐라고 하니까 들어가지 말고, 스튜디오 바깥에서 기다려. 나랑 같이 들어가.”

    아름은 살았다는 듯이 울먹였다. 이현은 근처 마트에 들러 옷걸이를 잔뜩 사서 다시 차에 싣고 출발했다. 그 외에도 차의 조수석과 트렁크에는 홍보 팀이 부탁한 자잘한 짐들이 놓여 있었다. 케이터링 용으로 쓸 것들이 모자라다며 가져다 달라는 종이컵과 빨대, 압정, 소도구 몇 가지 등등….

    얼마 지나지 않아 이현은 논현동의 한 골목길에 주차를 마쳤다. 양손에 짐을 들고 가자 스튜디오 건물 바깥에 여자아이 하나가 멀거니 서서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현이 옷걸이가 든 비닐봉지를 들어 보이자 얼굴에 곧장 화색이 돌았다.

    “오래 기다렸어?”

    “아뇨, 별로 안 기다렸어요. 피디님 진짜 엄청 빨리 오셨어요.”

    “자, 이거 가지고, 너 먼저 들어가. 난 담배 한 대만….”

    “감사합니다!”

    신아름은 날 듯이 지하로 뛰어 들어갔다.

    흡연할 만한 곳으로 이동하니 주변 골목에 여기저기 빽빽하게 세워진 차들이 눈에 띄었다. 억 소리 나는 수입차부터 골목 주차가 용하다 싶은 밴까지…. 오늘 밴을 끌고 올 만한 배우가 있었나? 빠른 속도로 사라진 담배를 발로 비벼 끄며 이현은 자리를 떴다. 이 부근에는 촬영 스튜디오가 많으니 다른 곳에 방문한 연예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지하 스튜디오로 천천히 내려가자 마침 세트를 바꾸는 중인지 내부가 소란했다. 가장 먼저 이현을 발견한 홍보 팀 직원들이 그의 손에서 요청한 짐들을 받아 갔다.

    “피디님 진짜 빨리 오셨네요!”

    “부탁하신 거 다 챙겨 왔어요. 여기 종이컵이랑, 빨대랑….”

    “피디님도 가서 간식 좀 드세요. 먹을 거 많더라.”

    “네, 감사해요.”

    커피만 한 잔 타 오면서 슬쩍 들여다본 바깥쪽 휴게실에는 대표와 김 실장, 그리고 모르는 얼굴들이 앉아 있었다. 아마도 투자자들일 것이다. 대표에게 눈도장을 찍으면서 이현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오길 잘했네.’

    그리고 다시 촬영 스튜디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이현은 안쪽의 긴 소파에 앉아 있는 사람과 대번에 눈이 마주쳤다. 피할 새도 없이.

    손에 촬영 큐시트를 쥔 채로 저를 차분하게 올려다보고 있는 것은 석희재였다. 눈가가 전에 없이 날카로웠다. 왜인지 조금 달라진 인상에 절로 발이 멈출 즈음, 검은 앞치마를 한 여자가 다가와 석희재의 머리카락에 스프레이를 뿌렸다.

    아, 화장을 했구나.

    그래서 달라 보였나 보다. 이현은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쓸데없이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쩌다 보니 공교롭게 석희재의 촬영 직전에 도착하게 됐다.

    고개를 드니 다시 눈이 마주쳤다. 인사를 해야겠다는데 겨우 생각이 미쳤다.

    ‘안녕….’

    소리 없이 한 손을 들어 흔들어 보였다. 그러나 그 손을 까딱하기도 전에 석희재의 고개가 돌아갔다.

    ‘피했어?’

    명백한 무시였다.

    말을 붙여볼 새도 없이 스튜디오 한가운데서 석희재를 부르는 소리가 났다.

    “다음! 우리 잘생긴 석희재 씨 들어오세요.”

    조 실장이었다. 석희재가 제 키보다 한참 낮은 소파에서 긴 다리를 펴며 일어났다. 각종 조명 기구와 반사판, 전기 코드가 어지러이 얽힌 바닥을 지나가는 석희재의 곁으로 분장과 헤어 각각 두 명이 얼른 따라붙었다. 앞머리에 꽂힌 핀을 빼내고 붓으로 얼굴을 털어 준다.

    더는 손댈 데가 없어 보이는 외양인데도 얼굴을 건드리는 손들이 떨어지지를 않는다. 배우들 곁을 맴도는 스태프들을 오래 보아 온 이현은 저게 어떤 의미의 제스처인지 알고 있었다.

    ‘사심 가득하네.’

    가만히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무렵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다시금 들려왔다.

    “앞 사람들 찍은 것 좀 볼래요?”

    우와, 닭살 돋았어. 이현은 팔에 소름이 돋아 몸을 움츠리며 확인차 소매를 걷었다. 진짜로 도돌도돌 살갗이 쫙 일어나 있었다. 다 조 실장의 가식적인 목소리 때문이다. 조 실장이 사람 가려 대하는 것이 <지킬 앤 하이드>급이라는 걸 알고는 있지만 저런 말투로 말하는 건 정말이지 적응이 안 됐다.

    하지만 석희재는 조금 다른 모양이다….

    조 실장이 제 옆으로 손수 의자까지 내어 주면서 모니터 화면을 보여 주자 석희재가 고분고분 거기 앉았다.

    ‘여기도 사심이 있는 사람이…?’

    이현은 또 혼자서만 고요히 생각했다. 자리를 모니터로부터 교묘하게 멀리 내준 덕분에 석희재는 화면을 보려고 조 실장 쪽으로 몸을 기울이게 되는 구조였다. 마흔 살 먹은 능구렁이 게이가 고의로 저렇게 두었을 게 분명하다. 거기까지 안 가도, 조 실장이 배우에게 모니터를 허락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런데 다른 배우들 것까지 보여 주다니.

    “아까 홍보 팀이 붙여 놓은 컨셉들은 봤지? 그런 거에 얽매일 필요 없고, 그냥 프로필만 무조건 예쁘게 찍자. 오늘 내가 인생 사진 찍어 줄게.”

    은근슬쩍 말도 놔? 이현은 석희재의 표정이 궁금해졌다.

    그 순간 조 실장이 석희재의 어깨에 다정한 척 팔을 걸쳤고 그다음부터는 거의 속살거리는 음량으로 이야기를 해서 무어라고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검은 반팔 티 아래로 드러난 조 실장의 팔이 거슬렸다. 태닝해서 까맣게 태운 덕에 조 실장이 공들여 키웠을 법한 근육이 조명 아래 반질거렸다.

    남자 밝힌다는 건 저런 사람한테 붙어야 하는 말이지….

    ‘이 PD 미남 좋아하잖아’라고. 석희재 앞에서 저를 놀리듯 말했던 상사의 말이 다시 한번 가슴에 와 박혔다. 아무래도 저는 그때 무척 억울했던 모양이다.

    아이러니한 일이다. 그들은 진짜가 아니라고 생각해서 놀리는 것이겠지만 자신은 정말로 남자를 좋아하는 사람이 맞았으니까.

    반대로 조 실장에게는 아무도 그런 말을 하지 않는다.

    한 번도 조 실장이 스스로 말을 한 적은 없었지만 조 실장은 스스로가 게이임을 숨기지 않았고, 모두가 그걸 알았다. 또 조 실장도 모두가 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당당하고 거침이 없었다. 일터에서 본인의 성 지향성을 드러내길 원치 않는 이현과는 정반대의 성향인 것이다.

    이현은 가늘게 떠 제법 날카로운 인상이 된 눈을 분장 스태프들에게 돌렸다. 석희재에게 끝까지 따라붙던 얼굴이 뽀얀 분장 팀 남자도 게이일 게 분명했다. 조 실장은 자신이 촬영을 맡게 되면 분장, 세트, 소품, 조명까지 전부 다 자신의 인맥으로 채우고는 했으니까. 조 실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아무튼 배우보다 화장을 진하게 하고 온 어린 분장 스태프들이 조금 떨어진 곳에서 사심을 담아 석희재를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눈을 뗄 줄을 몰랐다.

    이현은 나지막이 한숨을 쉬었다. 어쩌다 늑대 소굴에 어린 양을 던진 듯하다.

    아니지. 제 발로 들어왔으니 내가 떠민 것은 아닌데… 그나저나 내가 왜 이런 걱정을?

    이현은 정신을 다잡았다. 생각해 보면 석희재는 남자와 잘 수 있는 사람이니까 어쩌면 유혹 가득한 환경이 마음에 들지도. 또, 어리니까… 더더욱.

    이현은 커피가 담긴 종이컵을 이로 자근자근 물었다.

    “가운데 들어가 서 볼래요? 어, 거기. 그렇지. 그 자리. 조명 한 번만 테스트해 볼게요.”

    조 실장의 목소리가 아주 사근사근했다. 이현은 혼자 울컥했다. 석희재에게 ‘속지 마!’라고 외치고 싶었다.

    아직 이현에게 직급이 없을 때의 이야기다. 조 실장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 입사 후 처음 방문한 촬영장에서 이현은 공기 취급을 받았다. 그리고 촬영 둘째 날 아침, 조 실장은 이현과 마주치자마자 눈도 마주치지 않고 대뜸 ‘아, 또 왔어!’라고 신경질적으로 외쳤었다.

    지나치던 다른 직원은 영문을 모른 채로 ‘그러네요, 여길 또 와 버렸네요. 재촬영 없게 열심히 합시다!’라고 대꾸했지만… 이현은 그게 자기한테 한 말이라는 걸 알았다.

    내가 또 와서 그렇게 신경질이 났나.

    가면 안 되나. 난 일하러 간 건데….

    잠을 자려고 누우면 그 신경질적으로 외치던 목소리가 여러 번 떠올라 잠자리를 한참 뒤척였다. 사람의 일방적인 화풀이 대상이 된다는 것은 이현을 괴롭게 했다. 아무튼 조 실장의 질 낮은 따돌림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그건 그 뒤로도 이현이 촬영장을 꺼리는 이유가 되었다. 직급이 생기고 그의 태도가 제법 변하기 전에는 그의 앞에서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몰라 기가 죽기도 했다.

    이현은 무의식적으로 스튜디오 안을 한 바퀴 쭉 둘러보았다. 막 생각난 사람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다들 잘생긴 신인 배우의 얼굴을 보고 싶어 난리인데, 역시 구경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을 홍보 팀 막내 신아름이 보이지 않았다. 스튜디오에 한 발도 들이지 않는 막내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조 실장의 오늘 타깃은 신아름이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런 음습한 조 실장이 석희재에게 징그럽게 살가워지는 걸 보니 사람이 조금 우스워지려 했다. 이 바닥이 원래 그렇고 조 실장이 원래 그런 사람인 걸 알지만 살짝 현타가 왔다 이 말이다.

    석희재는 대어처럼 보였나 보지? 아니면 남자로 보이든가.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현은 조용히 뒤로 물러나 아까 석희재가 앉았던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주변에 사람들이 금방 꼬일 줄은 알았지만 남녀 안 가리고 통할 줄은 몰랐네.’

    석희재의 희소한 미모에 익숙해진 나머지 저도 모르게 저평가 해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커피는 그사이 식어 미지근해졌다. 머신에서 뽑은 맛없는 커피를 홀짝이며 이현은 눈앞의 상황을 관람했다.

    오늘 현장에서 만나면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제가 너무 순진했다. 배우가 틈을 주지 않으면 그런 순간은 허락되지 않는다. 많은 스태프가 연예인 주변을 맴돌다가도, 그들의 지인이 될 수 없다는 것을 포기하고 물러나는 지점이었다.

    석희재는 아무래도 공사 구분을 하기로 마음먹은 모양이다.

    팡! 플래시가 터졌다. 멀리 떨어진 이현마저 눈을 깜빡일 만큼의 강렬한 빛이.

    그러나 모니터 속 석희재는 담담히 렌즈를 바라보고 있었다.

    “테스트에서 바로 A컷이네. 역시 사람은 얼굴이 다야.”

    조 실장의 속물 같은 말에 이현은 속없이 픽 웃어 버리고 말았다. 우습게도 공감이 가서.

    그리고 첫 번째 세트의 슛이 시작되었다. 사위가 순간적으로 번쩍이며 플래시가 터졌다.

    이현은 보이지 않는 석희재 쪽을 바라보았다. 세트 주변을 사람들이 틈 없이 둘러싸고 있었다. 매체 배우나 아이돌이 캐스팅 중 있으면 더러 벌어지는 풍경이다. 마음 놓고 구경하는 것이 허락된 환경이니 이참에 보자고 다들 몰려드는 것이다. 여기저기 핸드폰을 들고 촬영하는 이들도 많았다.

    이현은 사람들의 틈 사이로 석희재를 보려고 시도해 봤다. 그러나 가까이 가지도 않고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낄 노력도 하지 않은 채로 멀거니 앉기만 했으니 본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이리저리 고개를 움직여 봐도 석희재는 보이지 않고 사람의 장벽과 높이 쳐든 작은 화면들만 가득했다.

    이현은 손바닥으로 턱을 괴었다. 새삼스레 생각에 빠진 얼굴로.

    어차피 저 안에 있는 것은 자신이 아는 얼굴일 것이다. 눈 감고 그려도 익숙한… 3년간이나 살을 맞대고 지낸 아주 친숙한 얼굴.

    그러니 안 봐도 상관없는데.

    하지만 그렇게는 납득되지 않는 불편한 감정이 이현의 밑바닥 속마음을 들쑤셨다. 기묘한 거리감, 탈력감, 아주 약한 수준의 질투, 배우와 스태프의 차이에서 오는 열등감 같은 것이 서로의 색을 잃을 정도로 뒤섞였다.

    모든 것이 지나치게 희미해 무엇하나 분명히 건져 낼 수 있는 감정이 없었다. 그저 이현이 느낄 수 있는 것은 약한 복통뿐이었다.

    ***

    석희재는 조명 빛이 그렇게 밝은지는 처음 알았다. 또, 그렇게 뜨거운지도.

    “사진 너무 잘 나왔다. 살릴 게 너무 많아서 어떡하니? 못 산다…. 이러면 보정도 한참 해야 되잖아. 내가 잘 찍기도 했지만… 팀장님, 좋으시죠? 쓸 거 많아서.”

    조 실장이 끊임없이 말하는 와중에 석희재는 세트장 바깥으로 빠져나왔다. 그 순간 누군가 말도 없이 목덜미에 맺힌 땀을 티슈로 쓸어 갔다. 목을 감싸며 불현듯 돌아보니 한 남자가 얼어 버린 채로 석희재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분장 스태프였다.

    ‘왠지 소름이 돋아서.’

    …라고 솔직히 말하기도 전에, 눈이 마주친 것만으로 볼을 붉힌 분장 스태프는 티슈를 버리고 오겠다며 후다닥 도망을 가 버렸다.

    아무튼 석희재는 조명이 그렇게 밝은지, 또 그게 얼마나 제 눈을 멀게 하는지 몰랐다. 때문에 이현을 놓치고 말았다. 분명히 저쪽 소파 끝에 앉아 있는 걸 보았는데 지금은 보이질 않았다.

    마침 두 번째 세트는 구조물의 위치를 바꿔야 한다며 잠시 휴식 시간이 주어졌다. 이현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하고는 말없이 발을 옮기는 석희재의 팔을 붙잡은 것은 조 실장이었다.

    “희재 씨 이리 와서 자기 찍은 것 좀 봐요. 희재 씨네 매니저 어디 갔어? 한번 오시라고 해 봐. 이거 어때? 포털 프로필 사진으로 딱이지. 응? 배우들 내 사진 많이 걸어. 아니면 희재 씨가 마음에 드는 거 해도 되고.”

    석희재는 모니터 쪽으로 물끄러미 시선을 주었다. 화면 안에는 거의 엇비슷한 구도의 제 얼굴이 잔뜩 박혀 있었다. 1mm 달라진 얼굴의 각도나 눈을 내리까는 등의 작은 차이마저 놓치지 않겠다는 집착이 프레임에서 보였다. 다른 배우들은 반신이나 전신도 많이 찍은 것 같은데 유독 제 것은 클로즈업이었다. 카메라를 통해 낯선 이와 눈을 마주치는 기분이 이상하게도 께름칙하다 느꼈는데 그저 기분 탓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얼굴 안의 모든 골격과 살결을 핥듯이 담아낸 사진을 보고 석희재는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왜 마음에 안 들어? 이거 다른 배우들은 돈 주고 의뢰해. 희재 씨는 처음이니까 내가 호의로 주는 거다?”

    조 실장의 말을 흘려들으며 석희재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에 스프레이를 뿌린다고 헤어 스태프가 다가왔다. 다른 배우들은 이 정도로 밀착해서 봐주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너무 가까워진 타인과의 간격이 미묘했다. 석희재는 몸을 물리면서 어렵게 고개를 돌렸다.

    “화장실 좀 다녀오겠습니다.”

    짧게 말을 끝내자마자 낯 모르는 사람이 화장실은 저쪽이라며 친절하게 알려 주었다. 석희재는 새삼 이현이 존재하고, 배우가 절대다수인 연습실 환경이 얼마나 편한 것이었는지 깨달았다. 사방에서 달라붙는 시선들을 도무지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시선을 떨치며 스튜디오를 빠져나온 석희재는, 우연한 곳에서 이현을 발견했다.

    “어….”

    어둑한 곳에서 눈이 마주치자 이현이 멋쩍은 소리를 내며 입으로 가져가던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는 케이터링의 가장 끝쪽, 정수기 뒤에 숨어서 간식을 축내고 있었다.

    그 궁상맞은 위치 선정에 석희재는 이현에게 냉정하게 굴려던 것도 잊어버렸다. 그저 한숨이 탁, 터졌다. 소리는 없었지만 이현마저 석희재의 한심스러운 시선을 느낀 듯했다.

    “왜 거기 그러고 있는데.”

    “도움도 안 되는데 너무 많이 먹는 것 같아서….”

    이현이 들고 있는 접시 위에는 아니나 다를까 먹을 것이 수북했다. 미니 버거 세 개, 샌드위치, 케이크 한 조각, 과일 컵까지.

    “그런 걸 눈치… 보세요? 피디님?”

    지나가는 이의 기척을 느낀 석희재가 급히 말을 높였다. 하지만 이현은 석희재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실실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석희재의 마음이 풀렸다고 착각한 듯했다.

    아주 쉽게만 생각하지. 석희재는 마음의 방패를 치듯 팔짱을 꼈다.

    동시에 그런 스스로가 우습게 느껴졌다. 아까 이현을 무시한 것은 계산된 행동이 아니었다. 그저 이현을 보고 있자면 마음이 괴로워져 자연히 나온 행동이었다.

    석희재가 생각하기에 섹스 중 다른 남자의 이름을 부른 건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니었다. 취한 채로 다다른 흥분에서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그 상대와의 섹스를 꿈꾸었다는 이야기니까.

    자신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것 따위를 곱씹을 때마다 마음에 생채기가 났다.

    ‘너무 밝혀. 밝히고, 예의 없어. 무례한 짓이었어.’

    석희재는 제 상처를 달래기 위해 이현을 탓해 보았다. 하지만….

    ‘그런 사람인 줄 알고 만난 것도 너지. 술에 취한 사람한테 무슨 예의를 바라는 거야. 형한테 매력적인 남자가 못 되는 너 자신을 탓해.’

    이현을 대신해 그를 변명해 주는 것도 저 자신이었다.

    아무튼 이현의 가벼움이 무서워서 석희재는 그를 피했다. 저는 가슴이 아파 울었는데 ‘숙취 운운’ 하며 그날 일을 아무렇지 않게 언급하는 게 미워서 답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은?

    여전히 두 가지 마음이 공존했다. 그의 자존심을 할퀴어 생채기 내고 싶은 마음과 정수기 뒤에 숨어서 선 채로 음식을 먹는 그가 안쓰러워 미칠 것 같은 마음이.

    “촬영 끝났어?”

    석희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세트 바꾼대.”

    “아… 그래? 아무튼 잘 만났다. 나 물어보고 싶은 거 있었는데.”

    이현이 손끝에 묻은 과일즙을 바지에 털며 석희재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본다.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 단속하는 행동이었다. 저를 앞에 두고도 저 정도의 정신을 챙기고 있다는 점이 부럽고 또 신경질이 났다.

    주변에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이현이 슬쩍 다가왔다. 그러나 석희재는 속으로 그가 더는 가까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피부의 윤기와 머리카락의 하늘거림, 그리고 섬유유연제 냄새나 체취 따위를 맡을 수 있는 거리가 되면 아주 약간 품었던 증오조차 멍청하게 잊어버릴 것 같아서.

    “뭔데.”

    “그 호텔… 그거 너 맞지.”

    그러나 그날의 기억을 소환하는 미운 입에 석희재는 입술을 비틀었다. 미운 감정을 살리려고 노력하지 않아도 원망이 불쑥 솟아났다.

    그렇지. 그렇지만 그날 형 눈앞에 있던 건 내가 아니었지.

    “아냐.”

    “뭐?”

    제 이름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부른 것은 이현 본인이었다. 그가 원하는 대답을 해 주었더니 도리어 이현은 크게 놀랐다.

    “아, 아니지. 거길 아는 게 너 말고 또 누….”

    “깜빡했나 본데, 처음에 거기 가자고 한 게 형이야.”

    “아….”

    “왜 나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는데….”

    석희재는 눈을 내리깔았다. 눈에 보이게 동요하는 이현을 보면 볼수록 약한 통쾌함과 조절 불가능한 자기 파괴 욕구가 동시에 들었다.

    “안 잔다며. 다른 사람이랑.”

    “…….”

    “그 호텔 또 갔나 보네. 만나는 사람 없다는 건 거짓말이었어?”

    이현이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아주 약간의 통쾌함… 그리고 그보다 훨씬 크고 진득한 후회가 달라붙었다.

    석희재는 입술 안쪽을 깨물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이현의 얼굴, 그 낯에 드러나는 감정을 세세하게 읽을 줄 알았다. 그러도록 훈련되었다.

    기실 이현의 표정은 제 말에 충격받았다기보다는, 제가 누구와 원나잇을 했는지 정말로 몰라서 헤매는 얼굴에 가까웠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노려보는 얼굴이 되어 그를 쏘아보고 있었다. 반대로 이현은 누가 봐도 한눈에 알 정도로 창백해진 채로 얼빠진 얼굴이다.

    “아, 그렇지.”

    이현은 제 뒷머리를 매만지며 맥없이 납득했다. 반박도 하지 않고.

    “당연히 너라고 생각해서.”

    “…….”

    “미안하다.”

    그가 사과하며 저를 물끄러미 올려보았을 때 석희재는 주먹을 꽉 쥐었다. 목구멍에서 무언가 울컥 치받는 느낌을 받았다.

    제 애무를 받으면서도 다른 사람의 이름을 불렀으면서. 그런데도 같이 간 것은 저라고 믿고 싶어 하는 그의 물음이 그저 기만 같기만 했다. 심지어 날이 선 오해에 스스로를 보호하지도 않는다.

    납득이 빠르네.

    그럼 나 말고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맞구나.

    누가 떠올랐어?

    나 다음으로는 누구를 후보로 올렸는데.

    석희재는 혀끝의 칼을 숨겼다.

    만약 이현의 입에서 ‘지우 형’이라는 단어가 나오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상처받을 사람은 저란 것을 알기 때문이다.

    물론 이현에게 다른 상대가 없을 거라고 믿고 있었고, 다른 상대를 만나지 않기를 가장 바라고 있으면서…. 석희재는 제 마음과 정반대되는 방향의 결과로 내달리려는 스스로를 이해하지 못했다.

    “오해해서 미안. 나는 그냥, 아니다. 네가 아니라면 아닌 거겠지. 아….”

    이현은 신음 같은 한숨을 내쉬며 마른 손바닥으로 제 이마부터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끝이 약간 떨리는 것 같았다.

    석희재는 타는 듯한 갈증으로 그의 당혹을 모두 시선으로 핥아 내렸다. 이건 지나치게 모순적인 감정이었다. 그가 저런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게 만들고, 저런 대답을 하도록 몰아붙인 것은 저 자신이면서도 왜 이현이 원망스러워지는지. 또 자신이 만들어 낸 그의 감정의 진폭은 왜 이토록 달콤한지….

    저 때문에 조금이나마 흔들리는 이현의 모습이 무척 좋았다.

    “그럼 그날 누가 나 데려다줬는지 혹시 알아?”

    그의 질문에 석희재는 수 초 후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현의 얼굴에서 한 번 더 변화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싶어 택한 행동이었다. 그러나 그는 짧은 한숨을 끝으로 ‘알았다’ 하고는 갈무리해 버렸을 뿐이다.

    그런데 바로 그 직후에 이현이 석희재의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큰 보폭으로 한 걸음, 두 걸음. 공기의 이동이 느껴질 정도로 빠르게 다가와 제게 밀착했기에 석희재는 눈이 휘둥그레 커졌다.

    얼어붙은 채로 그를 내려다보던 석희재는 심지어 이현이 저에게 팔을 뻗기까지 할 때는 심장이 멎는 것처럼 놀라 버렸다. 그가 한 팔을 크게 돌려 저의 허리를 감싸듯이 안았기 때문이다. 코끝으로 샴푸 향이 훅 끼쳤다.

    “혀….”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감격하여 마른 목으로 갈라지는 소리를 냈다. 이현을 마주 껴안아 주려던 석희재의 팔은 그 직후 이현의 입에서 나온 말 때문에 덧없이 멈춰 버리고 말았다.

    “희재, 여기 있어요. 잠깐 연습 스케줄 얘기 좀 하느라.”

    이현이 양팔로 저를 힘 있게 돌려세웠다. 촬영장 입구에서 보이는 각도로 저를 밀어내며.

    석희재는 눈을 깜빡이며 앞을 바라보았다. 촬영장의 철문이 비스듬히 열린 채였다. 그리고 그 앞에는 머리가 덥수룩한 어시 하나가 카메라를 든 채 서 있었다.

    이현은 이걸 먼저 알고 가까이 다가왔을 뿐이다…. 석희재는 멋쩍은 손을 어쩌지 못하고 어색하게 내렸다. 그러고는 촬영장 입구에 서서 저를 기다리는 어시스턴트에게 시선을 주었다.

    온 신경이 이현에게 가 있던 저와는 달리 이현은 사방을 살필 만한 이성 정도는 있었다는 그 간극조차 비참했다.

    “세트 완료됐거든요. 지금 바로 들어가심 돼요.”

    “네….”

    피로에 절어도 말간 얼굴의 이현과 다르게, 진짜 피로와 수염이 덕지덕지 붙은 개운치 못한 어시의 얼굴을 보니 갑자기 현실로 확 머리채를 잡혀 끌려 나온 기분이었다.

    석희재는 상황을 파악한 후 가라앉은 기분으로 이현을 내려다보았다. 이현은 어시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제가 너무 오래 붙잡았나 봐요.”

    “아, 실장님이 좀 찾으시긴 했는데… 괜찮습니다. 가시죠.”

    “가. 희재야.”

    그때 석희재는 이현의 입술에 달라붙은 작은 각질을 발견했다. 그게 무엇인지는 아주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이현은 특히 입술과 같은 점막 부위가 예민해서 피로가 심해지면 입술로 표가 나고는 했다. 지금도 작은 수포가 터져 말라붙은 각질이 보였다.

    안 그래도 피로하고 고민 많을 사람을 괴롭혔다. 석희재는 금세 후회했다.

    혹시 수포가 생길 정도로 그를 피곤하게 만든 것이 저의 연락 두절 때문이 아닌가 하는 간절한 의심도 들었다.

    “그럼 촬영 잘하고.”

    그러나 이현은 석희재의 등을 툭툭 건드리며 산뜻하게 격려할 뿐이었다. 여전히 얼굴은 체한 사람처럼 창백한데 어떻게 저렇게나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비스듬히 열린 문, 환하게 밝혀진 조명 기구 아래 수많은 스태프가 저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현의 힘 있는 손에 밀려 석희재는 어쩔 수 없이 촬영장 안으로 향했다. 설핏 뒤를 돌아보니 이현은 벌써 등을 돌리고 정수기로 걸어가고 있었다. 감정을 뚝 덜어 낸 뒷모습에 작게 안달이 나는 쪽은 결국 저였다.

    ***

    촬영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석희재는 이현을 시선으로 감독하며 눈을 떼지 않았다.

    그가 다시 스튜디오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습, 먹다 만 접시를 한 손에 들고 소파에 걸친 채로 음식을 우물거리는 모습을 놓치지 않고 보았다.

    촬영장에서 PD라는 직책을 가진 사람은 딱히 할 일이 없는 모양이다. 이현은 가끔 오고 가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 외에는 별다른 일도 안 했다. 소품을 찾아 주거나 전기 코드의 정리를 하는 등의 군심부름을 할 때 빼고는 그저 시간을 축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저 말고 이 자리를 지킬 이유는 없어 보였다.

    ‘나 때문에, 내가 신경 쓰여서 있는 거면 좋겠는데….’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내리까는 순간 차르르르 셔터가 연사로 넘어가는 소리가 귀에 요란하게 꽂혔다. 조 실장은 아까부터 ‘너무 잘한다’를 연발해 댔다. 지나치게 칭찬이 헤픈 사람 같다고, 석희재는 생각했다.

    사실 석희재는 별다른 포즈를 잡지도 않았다. 세트에 기대어 서라면 그렇게 했고, 위를 보라면 또 그렇게 했다. 의자에 앉아 보라면 앉았고, 걸어가다가 뒤를 보라고 하면 그렇게 했다. 석희재도 저가 가진 레퍼토리가 형편없이 적다는 것은 알았다. 다만 촬영에 있어서 뛰어난 재능과 끼를 발휘하는 배우는 의외로 몇 없다는 것, 그저 가진 본판이 다른 모든 것보다 중요하다는 것은 몰랐다.

    석희재의 머릿속은 금세 다시 이현으로 가득 찼다.

    ‘당연히 너라고 생각해서. 미안하다.’

    원하던 방식으로 작게 애도 먹였고 사과도 받았으나 개운치가 않았다.

    반대로 왜 그렇게 쉽게 인정했는지도 이해가 안 됐다.

    생각해 보면 아무도 이현을 더럽다고 비난할 수 없었다. 제가 그래서도 안 되었다. 이현은 석희재와 처음 자고 1년이 되기 전에 핸드폰에 저장되어 있던 ‘간헐적 섹스 파트너’들의 번호를 전부 다 차단했다. 그건 어쩌면 석희재의 감정에 대해서는 선을 지키면서 그 꾸준한 관계에 대해 예의를 지키려던 그만의 의식인지도 모른다.

    석희재는 한때 짝사랑의 고통에 무뎌지기 위해서 일부러 이현의 밤 상대들을 상상해 보곤 했다. 지금까지 자 본 남자가 100명이 넘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식으로 제가 할 수 있는 끔찍한 상상 중 최대치를 불려 망상하면서 스스로를 고문해 댔다. 아픈 부분을 일부러 손톱으로 짓누르며 통증에 둔해지려는 것처럼.

    그러나 그가 잠들었을 때 핸드폰을 몰래 확인해 본 결과, 이현이 차단한 초성 번호는 15개도 되지 않았다. 나중에 설핏 추궁하니 그마저도 일회성 만남이 대부분이었다고 했다. 개중 두 번 이상 잔 남자는 다섯 손가락으로 꼽는다고 했고.

    ‘다들 나한테 매력을 못 느끼더라고.’

    ‘…….’

    ‘원나잇이 두 번째, 세 번째가 되려면 연애 감정 이상의 뭔가가 필요한가 봐. 어떻게 보면 연애보다 더 어려운 것 같기도 하고.’

    그의 고백을 들으며 석희재는 심장이 뜨끔했었다.

    우연 같은 두 번째, 세 번째를 만들어 내기 위해 수면 아래서 발버둥 쳤던 스스로의 모습이 생각난 탓이다.

    아무튼 석희재는 이현을 놓친 그 남자들의 멍청함을 제 행운이라 여겼다.

    결과적으로 이현은 지난 3년간 원나잇 상대를 구한 적도 없고 그러려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석희재가 그랬듯이 이현 역시 제 몸을 오롯이 석희재에게만 열어 보였다. 그것이 그저 현 상황에 안주하려는 게으름에서 발로한 것일지라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스스로를 믿지 못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자지 않았냐는 석희재의 말에 아주 쉽게 수긍하면서 ‘내가 그렇지 뭐’라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자기 자신의 주관보다도 타인의 모욕을 더 쉽게 납득하다니.

    그런 이현을 보자 석희재는 이상하게도….

    “촬영은 여기까지!”

    “수고하셨습니다!”

    여기저기서 인사치레와 함께 박수가 쏟아져 나왔다. 박수를 받을 만큼의 일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석희재 홀로 정신이 멍했다.

    “이거 A컷 다 골라서 보정하려면 일주일도 더 걸리겠는데? 워낙 많아서.”

    “안 돼요. 일주일은 너무 오래 걸려요. 저희 사진 내일 당장 필요한데…. 보도 자료도 뿌려야 하고.”

    “그럼 지금 마음에 드는 거 몇 컷만 뽑아 봐. 그것만 일단 샘플로 보내 주게. 그리고 희재 씨는 나랑 기념사진 한 장 찍자.”

    석희재가 넋을 놓은 사이에 조명 일부가 꺼지고 조 실장이 세트 안으로 걸어 들어왔다. 그가 제 허리에 팔을 두를 때 석희재는 흠칫하면서도 앞을 보았다.

    조 실장의 핸드폰, 기념용 폴라로이드, 어시가 든 촬영용 DSLR, 홍보 팀장의 핸드폰 등등 10개도 넘는 카메라에 모두 차례로 시선을 주어야 했다. 출력된 폴라로이드를 마구 흔들던 조 실장은 석희재가 웃지도 않았다고 투덜거렸다. ‘브이’라도 하라고 채근해 대서 그다음에는 검지와 중지가 다 펴지지도 않은 어색한 브이를 무표정으로 그렸다.

    석희재는 세트를 빠져나가며 인상이 불분명한 이들에게 꾸벅, 꾸벅 인사를 건넸다. 직후 제 옷이 걸려 있는 분장실로 가서 의상을 벗었다. ‘어디 가세요?’ 이름을 모르는 누군가가 친근하게 물었다.

    “잠깐 밖에요.”

    “좀 이따 대표님 오실 텐데. 인사하고 가세요.”

    “아, 다시 올 거예요. 잠깐만 나갔다 오겠습니다.”

    석희재가 스튜디오를 빠져나가 찾은 곳은 약국이었다. 입술 수포가 나면 이현이 항상 바르곤 하는 항생제 연고가 하나 있다. 그가 가기 전에 이거라도 손에 쥐여 주면 마음이 좀 나을 것 같았다.

    그리고 바람같이 연고를 사 들고 다시 스튜디오로 돌아왔을 때 석희재가 목격한 풍경이란.

    “현아. 나 커피 좀 사다 줄래?”

    “뭐 드시고 싶은데요?”

    “차가운 거 아무거나. 음… 현이가 잘 마시는 거.”

    “예? 제가 잘 먹는 거요?”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은 채로 이현을 심부름꾼으로 부리는 한지우와 그게 당연하다는 듯이 받아들이는 이현의 모습이었다.

    문가에 우두커니 굳어서 선 석희재는 한지우와 불시에 눈이 마주쳤다. 착각이겠지만, 왜인지 그가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한지우는 가벼운 미소와 함께 석희재에게 눈인사를 건네더니 이내 이현의 목에 팔을 감았다.

    “아니다. 우리 같이 나갔다 오자.”

    휙, 곁을 스쳐 지나가는 한지우의 향수 냄새 때문에 이현의 샴푸 향이 맡아지질 않았다.

    “나 우리 후배 촬영하는 거 보고 싶어서 왔는데, 벌써 끝났다네. 왜 그렇게 빨리 끝냈어요?”

    의미 모를 말을 내뱉은 한지우는 석희재의 대답도 듣지 않고 그대로 이현을 데리고 나가 버렸다.

    ***

    메이크업을 지워 낸 얼굴에서 물이 뚝뚝 흘렀다. 석희재는 거울 속의 제 얼굴을 무감정하게 바라보았다.

    조금 전, 얼굴에 바른 화장품의 텁텁한 느낌이 싫어 씻고 가고 싶다고 했더니 분장 스태프는 난색을 표하며 클렌징 폼이 없다고 말했다.

    “컴퍼니 쪽에 얘기하면 사다 주실 텐데. 물어볼까요?”

    그 말에 석희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스태프가 말하는 ‘컴퍼니’가 누군지 알 것 같아서.

    안 그래도 촬영장에 있던 내내 그림자처럼 숨어 군심부름이나 하던 이현을 저마저 성가시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조금 전 한지우가 이현을 손끝으로 부리던 모습이 잔상처럼 남아 더 그랬다.

    한지우는 배우의 지위를 휘두르는 데 익숙해 보인다. 십수 년을 타인의 시선 속에서 살며 관심과 보살핌을 받는 것을 당연하게 여기던 제 어머니와 비슷한 느낌을 풍겼다. 제가 본 것만 해도 몇 번 인지… 한지우는 ‘주차권, 커피, 의자’ 따위의 단어 단위로 떨어지는 명령을 스태프들에게 자주 해 댔다. 그런데도 이현은 불편해하지 않았다. 설마 이현에게 함부로 굴까 싶어 한지우를 견제하는 눈으로 보고 있자면 오히려 그 곁에서 인사라도 나눌 수 있을까 얼쩡거리는 이현의 모습만 실컷 보게 됐다.

    그런 이현을 볼 때면 분노가 꿈틀거렸다. 치졸한 질투? 피해 의식? 열등감? 무어라고 이름 붙여도 좋았다. 그 모든 게 다 맞으니까.

    어쨌든 석희재는 이현의 그런 모습이 우습게 보이려 할 때마다 의식적으로 자기 사고를 차단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비웃는 것은 첫사랑이자 짝사랑의 경건함 안에서는 허용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무튼 분장 팀이 가르쳐 준 대로 핸드크림을 얼굴에 발라 화장품을 녹인 뒤 휴지로 닦고, 뜨거운 물로 씻어 냈다. 티슈로 닦아 내도 잔여물이 묻어 나는 게 눈에 보여 같은 과정을 한 번 더 반복했다.

    그만큼 잘나가는 배우가 되면 되는 건가.

    나도 한지우처럼 재수 없게 형을 손가락으로 부리면… 나한테도 그렇게 해 주나.

    콧등이 시큰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울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도 석희재는 감정이 가실 때까지 오랫동안 허리를 굽히고 얼굴을 물줄기에 씻었다.

    “후배님도 마셔요.”

    요란한 물소리가 뚝 멈추고 들려온 것은 익숙한 목소리였다. 또, 익숙한 향수의 잔향.

    석희재는 고개를 들었다.

    거울 안에 저 말고 한 명이 더 서 있었다. 한지우였다.

    “수건 가져다 달라고 할까?”

    석희재의 셔츠 앞자락이 턱에서 떨어지는 물로 젖고 있었다. 한지우의 말에 석희재는 ‘괜찮습니다’ 하고 가볍게 만류한 후 티슈를 뽑아 들었다. 그러고는 세면대 옆에 놓인 테이크아웃 잔과, 그가 멋대로 잠가 버린 수도를 번갈아 보았다.

    “핸드크림으로 닦았어? 아, 나도 그거 해 봐서 아는데. 피부에 안 좋아.”

    “…….”

    “우리 후배도 메이크업 싫어하는구나. 근데 여기서 아무리 닦아 봐야 집에 가서 씻는 게 나아요. 공연 오픈하면 분장실에 쓰는 거 놔두고 다녀.”

    한지우는 성악과 출신이라고 했다. 연습이 겹칠 때가 많아 그의 노래를 들을 일이 적지 않았는데 그에 대한 호감이 없는 상태로도 인정할 수밖에 없는 실력이었다. 과연 성대로 돈을 버는 사람답게 매끄러운 울림을 가진 목소리였다. 아마 저 말고는 대부분 매력적이라고 느낄 만큼.

    석희재는 그 목소리가 이현의 귀에는 어떻게 들릴지를 상상해 봤다. 아까 사이좋게 이현의 목덜미에 크게 팔을 감고 바깥으로 나가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숨소리가 들릴 정도로 아주 가까운 곳에서 속삭였으니 이현은 혼자 오들오들 떨었을지도 모르겠다. 특히 청각적 자극에 약한 타입이니까….

    석희재는 입술 안쪽을 티 나지 않게 깨물었다. 피 맛이 났다.

    신경 써 주는 척하기는.

    속마음과 다르게 석희재는 고분고분 눈을 깔았다. 굳이 감정을 드러내고 갈등을 일으키는 건 제 성향과 맞지 않았다. 이현이 어떤 면에서든 매력을 느꼈을 그의 외모에 더 눈을 두고 싶지 않기도 했고. 석희재는 자기 안에 있는지도 몰랐던 추한 감정들을 자세히 들여다볼 생각이 없었다.

    그러나 한지우는 여전히 타일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버티고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저는 이제 촬영도 다 끝났고 가 보려고 합니다. 선배님은….”

    “아, 나도 좀 이따 메이크업 받아야지.”

    “촬영 열심히 하세요.”

    “한 한 시간… 남았네.”

    어쩌라는 말인가? 한 시간 동안 여기저기 시비나 걸고 다니라지. 석희재는 조금 삐뚤어진 마음을 가졌다.

    그는 아직 주머니에 들어있는 연고를 매만졌다. 이걸 이현에게 주고 가능하면 같이 나갈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까 약간의 실랑이가 있었으니 오해를 풀어 주고도 싶었다. 눈앞의 한지우 때문에 괜히 초조해져서 그러는 것도 사실이었다. 솔직하게 말해 줄까 싶다. 형이 술에 취해 다른 남자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일부러 그런 게 아닌 건 안다…. 그냥 솔직하게 ‘질투가 났었다’라고 고백하면 이현도 받아들여 줄 것 같았다.

    그러니까 오늘 같은 날은 현장 일을 핑계로 일찍 퇴근해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리고 오늘 처음으로 밴을 타고 왔으니까 거기에 이현을 태워 주고 싶기도 했다. 바로 퇴근한다면 함께 집에 가도 좋고… 가서 같이 저녁을 먹고 푹 쉬면 꽤 의미 있는 하루가 될 것 같았다.

    제 사고회로가 그린 듯한 ‘을’의 입장이라는 생각에는 도달하지 못한 채로 석희재는 덧없는 계획을 꾸몄다.

    “커피 감사합니다. 잘 마실게요.”

    석희재가 고개를 숙이고 세면대와 한지우의 사이를 빠져나가려고 할 때였다.

    “응. 현이가 그러던데 이거 좋아한다고 하더라고. 샷 추가했어.”

    이현의 이름이 발목을 붙잡았다.

    석희재는 멈추어 서서 한지우를 돌아보았다.

    “형이요….”

    불편한 무언가가 저를 찔러 댔다. 아무래도 그냥 던진 말만은 아닌 것 같다는 의심이 들었다.

    이현의 화제를 던지면 제가 지나치지 못할 것을 아는 것처럼.

    석희재는 한지우와 눈을 마주쳤다. 그는 팔짱을 낀 채 빙글빙글 웃는 얼굴로 비스듬히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그런데 둘이 싸웠어?”

    ‘둘이 친하구나?’도 아니고 ‘둘이 싸웠어?’라니.

    서로 커피 취향까지 꿰고 있다는 정보 뒤에 이어진 대사가 영 종잡을 수 없는 방향이었다. 몇 수 앞을 내다보고 말을 던지는지 모를 늙은 여우다.

    “…형한테 화 안 내요. 전.”

    “그래? 근데 현이가 왜 그러지.”

    “…….”

    “현이 괴롭히지 마. 안 그래도 힘든 애를….”

    들을수록 기가 찼다. 농담조로 가볍게 내뱉는 말이 속을 긁었다.

    그의 말이 한없이 피상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뱃속에 불이 붙는 이유는, 역시 질투다. 한지우가 제멋대로 이현을 제 사람처럼 여기기 때문이다. 알면 얼마나 안다고. 자신은 3년 내내 이현의 고충을 가장 가까이서 본 사람이었다. 고작 수년 전에 공연 하나, 그리고 이번에 하나를 함께 하는 주제에, 게다가 현장의 스태프들을 동료가 아니라 심부름꾼 취급을 해 대는 남자가 저런 말을 하니 우스웠다.

    석희재는 최대한의 인내심을 발휘했다. 자존심이 남아 있어 겨우 ‘형이 뭐라고 했는데요’라고 묻지 않을 수 있었다. 그래서….

    “형을 그렇게 잘 아세요?”

    그렇게 말하고 말았다. 스스로가 생각해도 말이 시비조였다. 그러나 제 어조를 후회할 틈도 없이 한지우가 반응했다.

    “뭐?”

    그는 아주 잠깐 의외라는 표정을 짓더니 이내 크게 웃었다. 말 그대로 폭소였다. 화장실 바깥까지 웃음이 굴러 나가고 있었다. 그 모습이 진짜로 유쾌해 보여 석희재는 기분이 상했다.

    “너 현이 진짜 좋아하는구나? 둘이 친했다며? 설마 친형제야? 아니, 친형제들도 이러진 않지.”

    “…….”

    “엄마 오리 따라다니는 새끼 오리, 그런 건가? 와, 이거 생각지도 못한 장벽이 있었네.”

    “무슨 말씀 하시는 건지 잘….”

    석희재는 순식간에 코너에 몰린 기분이 되었다. ‘진짜 좋아하는구나’라고 정확하게 찌르는 게 특히 당황스러웠다. 그가 말한 게 형제애라 하더라도 말이다. 도를 지나친 애정이 남의 눈에도 보이는 건가 생각하면 제정신이 아니게 될 것 같았다. 장벽은 또 뭐고?

    웃음을 멈춘 한지우가 벽에서 등을 뗐다.

    “그날 회식 끝나고 현이 술에 떡 됐을 때….”

    가는 눈초리가 석희재를 바라보았다.

    “아니다.”

    왜 말을 하다 마는지.

    그것조차 도발일 가능성임을 알면서도 석희재는 초조해졌다.

    그리고 석희재의 꾹 다문 입술을 보자마자 한지우는 보란 듯이 그 화제를 털어 버렸다.

    “아무튼 네 말은 이해했어. 현이… 모르지, 난. 그럼 현이를 제일 잘 아는 건 너라는 말이지?”

    “…….”

    “잘됐네. 그럼 우리 후배한테 물어야겠다. 걔가 은근히 철벽이 있어서.”

    ‘철벽’이라는 단어가 가진 함의가 의문스러웠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호흡도 멈춘 채로 여유로운 한지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 PD 지금 애인 있어?”

    ***

    눈도 깜빡이지 않는 석희재의 앞에서 한지우는 대담하게 물었다.

    이현에게 지금 애인이 있냐고.

    아무리 가벼운 흥미라도 상대가 있는 사람을 건드리는 것은 취향이 아니라면서.

    ‘애가 웃음은 헤픈데 은근히 선 긋기를 한다니까….’

    ‘…….’

    ‘특히 사생활 같은 건 절대 틈이 없네.’

    석희재는 어렵게 입술을 뗐다. 목이 건조해서 갈라지는 목소리가 나왔다.

    ‘나… 남자잖아요.’

    당신은 이성애자가 아니냐는, 한때 결혼까지 약속했던 여자가 있지 않았느냐는 말이 그렇게 나왔다. 긴 문장으로 따지기에는 당혹감이 너무나 커서 그 짧은 말을 하는데도 말을 더듬었다.

    한지우는 그 질문에는 대답할 필요를 못 느낀다는 듯이 픽 웃기만 했다.

    ‘그래서 있어, 없어? 그것만 알려 주면 돼.’

    거기에 차마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곧이곧대로 대답하기도 싫었다.

    그래서 물었다. 진심이냐고.

    한지우는 그 말에 또 크게 웃었다.

    ‘여기서 어린 티가 나네. 진심을 전제하는 게, 음. 당연하지. 나도 그럴 때가 있었어요.’

    ‘…….’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풋풋하다는 소립니다.’

    그리고 한지우는 석희재의 어깨를 툭 치고는 먼저 화장실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겨진 채로 석희재는 패닉에 빠졌다.

    화장실에 잠깐 서 있는 사이 그는 오만 가능성을 다 생각해 보았다. 가장 최악은 진심도 아닌 한지우가 접근해서 이현의 마음을 제멋대로 휘젓고 몸만 취할 가능성이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질투 때문에 머리에 피가 몰렸다. 아니, 두 사람의 마음이 통해서 진실된 연애를 하는 쪽이 더 최악일 것 같다. 전자라면 차라리 상처받은 이현을 위로해 줄 기회라도 있을 테니까. 그 곁에 오래오래 남는 건 또 자신이 될 테니까….

    다른 사람에게 눈길을 주는 이현을 그저 원망만 할 때가 차라리 마음이 편했다. 삼각관계에서 저만 빠지면 온전히 이루어질 두 사람을 알면서도 이대로 방치해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그보다 배는 더 괴로웠다.

    ‘형, 제발 자지 마. 틈도 주지 마.’

    석희재는 믿고 싶었다. 이현의 신념을.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제발.’

    그는 함께 일하는 사람과 절대 자지 않는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그 법칙은 저 때문에 최초로 깨졌다. 이현은 은근히 자기주장이 약해서 저처럼 막무가내의 인간을 만나면 휘둘려 버리고 만다. 한지우도 예외일 수 있었다.

    ***

    석희재는 충혈된 눈가를 소매로 쓱 훔치고 한참 후에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촬영장에 남아 있던 제 소지품을 챙기고 스튜디오에 남은 이들에게 돌아다니며 인사했다. 마침 찾아온 제작사 대표와 투자자들, 홍보 팀이 불러온 몇몇 기자들에게 사진을 찍힌 뒤에도 괜히 몇 바퀴를 더 돌았다.

    미처 들어가 보지 못한 분장실 문 안쪽으로부터 익숙한 웃음소리가 굴러 나왔다. 아까 저도 실컷 들었던 한지우의 웃음소리였다.

    석희재는 쉽사리 촬영장을 떠나지 못하고 그 안을 몇 바퀴나 돌며 세상 모든 스태프에게 전부 다 인사했다. 그 덕에 행실 좋은 신인이라고 칭찬만 여러 번 들었다.

    아무튼 그랬는데도 끝까지 이현과 마주칠 수가 없었다. 그 말은, 저 문 닫힌 분장실 안에 그가 있을 가능성이 높다는 말이었다.

    문을 두드리고 마지막 인사를 건넨 뒤 떠날까,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두 사람을 볼 자신이 없어 그냥 포기했다. 저 자신을 스트레스에 강한 성격이라고 판단했는데 이미 역치를 넘은 모양이다.

    석희재는 심적으로 지나치게 지쳐 버려 그냥 아무것도 보지 못한 척 도피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내몰렸다.

    혼자 하는 사랑에 겨우 익숙해졌다. 웬만한 상처에는 생채기도 나지 않을 거라며, 단련한 심장을 안고 그 사랑을 쟁취하기 위해 뛰어들었다. 그러나 거기에 저와 달리 무장한 연적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차라리 헛된 꿈은 꾸지 말고,

    혼자 하는 연애에 푹 젖어서,

    그렇게 이현의 세계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꿈을 꿀 때가 좋았는지도 모른다.

    “저 팀장님.”

    “어머, 희재 씨?”

    석희재는 근처에 서 있던 홍보 팀장에게 조심스레 부탁했다. 벌써 마른 입술이 텁텁했다.

    “이것 좀… 이거 제작 팀 이현 피디님이 사다 달라고 한 건데 전해 주세요.”

    “이게 뭐예요. 약?”

    홍보 팀장은 알았다고 웃고는 바로 분장실로 들어갔다. 문이 열리는 순간, 아까 자신이 분장을 받던 자리에 앉은 한지우가 뒤를 돌았다. 그렇게 갈망하던 이현의 모습은 보이지도 않았다.

    석희재는 황급히 뒤돌아 촬영장을 빠져나갔다.

    “피디님? 누가 다쳤어요? 이것 좀 전해 달라던데.”

    연고를 받자마자 이현은 제 것이 아닌 줄 알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저가 입술 수포에 주로 바르는 약이라는 걸 알자마자 그는 아연해졌다. 언뜻 들여다본 거울 속 제 입술 끄트머리에 작은 각질이 달라붙어 있었다.

    “아….”

    있는지도 몰랐던 피로의 흔적이었다. 저도 모르는 제 상태를, 석희재가 먼저 알아본 게 틀림없었다.

    이현은 분장실을 뛰쳐나갔다. 그러나 그는 막 떠나는 밴의 꽁무니만 보았을 뿐이다. 고작 수십 초의 차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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