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 트라이앵글 (7/27)
  • 7. 트라이앵글

    오후 2시 출근. 보통 직장인의 출근 시간이라고 생각하면 반차라도 쓴 건가 싶을 만큼 아주 넉넉한 시간이지만 이현은 쉽게 일어나지 못하고 1시부터 알리는 울림을 20분간 무시해 가며 괴로워하고 있었다. 전날, 아니 바로 오늘 아침 7시까지 술자리를 뜨지 못한 탓이다.

    술자리가 그렇게 길어지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이현 역시 무대 감독의 푸념을 듣다가 두세 시쯤 되면 자연스럽게 자리를 뜨려고 했다. 그러나 두 번 이혼을 겪은 - 이현의 판단으로는 ‘이혼당한’ - 무대 감독이 이번에는 저보다 15살 어린 앙상블 유나연에게 추잡스럽게 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은 시간이 지날수록 창백하게 굳어 갔다. 유나연이 집에 가려고 할 때마다 억지로 앉히는 손길은 분명히 강제였다.

    그 둘을 남겨 두고 떠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고 생각한 이현은 어린 앙상블에게 가는 술잔을 차단하면서 끝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이 새끼야. 너는 눈치가 없어. 죽어도 성공은 못 한다. 으이구. 망할 자식.”

    술에 거나하게 취한 무감은 집에 가기 직전 이현 앞에서 손까지 올리려 들며 그렇게 말했다. 물론 이현은 그의 속내를 눈치채지 못한 척 웃기만 했다. 그 앞에서 웃는 자신이 비굴하게 느껴져 담배 생각이 간절했다.

    “PD님. 감사해요….”

    뒤를 돌아보니 유나연이 있었다. 막 라이터를 찾던 이현은 도로 물었다.

    “왜 아직도 안 갔어요.”

    “인사드리고 가려고요.”

    “됐어요.”

    이현은 피곤한 얼굴로 손을 내젓고는 다시 주머니를 뒤졌다. 그 사이 눈앞에 처음 보는 라이터가 내밀어졌다. 고개를 드니 유나연이 내민 것이었다.

    “제가 좀 한심하게 느껴져요.”

    그녀가 내민 라이터를 받아 들고 불을 붙이며 이현은 또다시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까 저에게 욕하는 무감의 앞에서 웃으면서 이현 역시 자신이 한심하고 비굴하다고 생각했다. 무대 감독의 권력을 의식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특히 연출이 일일이 컨트롤하지 않는 앙상블들은 무감과의 관계를 더욱 신경 쓸 수밖에 없을 것이다.

    심지어 기획사와의 관계나 작품 선정에 얽매이는 연출과 달리, 무대 감독들은 국내외 이름난 대극장 뮤지컬을 꽉 잡고 독식하는 것도 가능하다. 기술자에게 다작한다고 무어라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게다가 관객에게 드러나는 일도 없으니 행실이나 실력으로 비판받는 일도 드물다. 무소불위의 권력자나 다름없다.

    “저는 무감님이, 제가 진짜 실력 있고 가능성이 있어서 눈여겨봐 주시는 줄 알았어요. 잠깐이라도 그렇게 착각한 게 너무 쪽팔려요.”

    꽤 가감 없이 말하는 유나연을 향해 이현은 담배를 한 개비 내밀었다. 유나연은 사양하듯 고개를 저었다. 이현은 의아하게 생각하면서도 담배를 도로 거두고 자기 몫의 담배를 깊이 빨았다.

    “실력 있는 거 맞아요. 가능성 있는 것도 맞고요.”

    “…….”

    “그런데 그런 사람이 오늘 일로 더러운 거 밟았다면서 빠져나가면 회사가 너무 손해잖아요.”

    “감사합니다….”

    “당장 연습인데 앙상블을 어디서 구해 와요? 도망가면 큰일인데….”

    감사 인사에 괜히 부끄러워진 이현은 빙빙 돌려 말했다. 그러나 그 속내를 간파한 것처럼 유나연은 그저 웃기만 했다.

    “얼른 가세요.”

    “네, 저 그런데 PD님….”

    “네?”

    유나연이 머뭇거리며 말을 붙여 와서, 막 떠나려던 이현은 다시 뒤돌았다.

    “제 라이터 가져가셨어요.”

    “아… 미안해요.”

    이현은 얼른 주머니를 더듬어 라이터를 꺼내 주었다. 꽤 소중히 다시 챙기는 것을 보면서 이현은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담배 안 피우는 것 같은데 라이터는 들고 다녀요?”

    “이건 굿즈예요.”

    “굿즈?”

    “기념품이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이현을 두고 유나연은 가까운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가면서도 세 번이나 인사를 하는 걸 보니 정말 고마웠던 모양이다.

    택시를 잡기 위해 터덜터덜 대로변으로 나간 이현은 슬슬 몰려오는 끔찍한 사실에 눈가를 손으로 쓸었다.

    ‘아… 두 시간 있다가 출근이야.’

    머리 위로는 햇살이 쨍하게 비치고, 길거리에는 막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바쁘게 걸어 나오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대중교통을 탈 체력도 없는데 두 시간 후에 출근이라니.

    이현은 떨리는 마음으로 김 실장에게 문자를 보냈다.

    「실장님. 무감님하고 술자리가 지금 끝났습니다. 저 혹시 바로 연습실로 출근해도 될까요?」오전 7:31

    답장은 두 시간 후에야 왔다. 이미 집에 도착해 비몽사몽 침대에 누워 있던 이현은 졸린 눈으로 허락의 답장을 보고는 한숨을 쉬며 베개로 파고들었다.

    그렇게 이해심 넓은 상사의 배려로 2시에 출근할 수 있게 됐다. 덕분에 다섯 시간 정도 잘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지만 그렇다고 기상이 쉽지는 않았다. 1시 30분에야 억지로 몸을 벌떡 일으킨 이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욕실로 향했다. 어제 감고 나서 완전히 말리지 않고 잔 탓에 머리가 보기 싫게 뻗쳐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모자를 써야 했다.

    다행히도 오늘은 사무실이 아닌 연습실 출근이었다. 손에 잡히는 대로 편한 옷을 걸치고 택시를 부른 이현은 곧장 문을 빠져나왔다. 자는 사이 비가 왔는지 장독대 위에 물이 고여 있었다.

    “지금 출근하는 거예요?”

    주인집이 말을 걸어와 이현은 ‘네’ 하고 대답했다. 아주머니라고 부르기에는 미안한 나이의 미혼 여성이지만 ‘누나’라고 부르기에도 뭐한 거리감이 있는 관계였다. 막 떠나려는 이현의 등 뒤에서 그녀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요즘에 우리 잘생긴 희재가 통 안 보이네.”

    “아, 희재요….”

    “그래. 둘이 형제같이 친했잖아.”

    “이제는 안 올 거예요.”

    “어머, 진짜?”

    “저 택시가 와서요. 다녀오겠습니다.”

    이현은 억지로 웃는 표정을 만들고는 좁은 길목을 빠져나갔다. ‘둘이 싸웠어? 왜 싸웠대?’ 묻는 목소리가 등을 쿡쿡 찔렀다.

    이 집은 다 좋았다. 위치, 가격, 집의 컨디션, 채광까지 전부… 가능하면 오래 살고 싶었다. 다만 석희재를 우연히 마주친 누님께서 그 뒤로 자꾸만 우연 아닌 우연을 가장해 사적인 공간에 침범하시는 게 큰 문제라면 문제였다. 입주할 때까지만 해도 예상치 못했다. 심할 때는 마당 청소를 한다며 대문 안에 수시로 들어왔고, 자기 컴퓨터가 고장 났으니 이현의 집에서 컴퓨터를 조금 빌려 쓰겠다며 집 문을 따고 들어온 적도 있었다. 집 안에서 석희재와 할 일이라곤 섹스밖에 없는 이현은 미칠 지경이었다.

    반대로 석희재는 타인의 그런 행동에 꽤 익숙해 보였다. 사람들이 억지로 엮이려 들고 간혹 스토커처럼 돌변하는데도 별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석희재와의 관계를 들키고 싶지 않은 이현은 그 모든 게 가시방석처럼 불편하기만 했었다.

    3년간 알고 지내며 둘은 단 한 번도 싸운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이 일로 딱 한 번, 이현은 석희재에게 비난 아닌 비난을 한 적이 있다. ‘너 때문에’ 이런 일까지 생긴다면서.

    ‘생각해 보면 희재 잘못도 아니었는데 말이지.’

    이현은 조금 후회했다. 석희재가 저보다 일곱 살이나 어리다는 것을 뒤늦게 알고 나니 더더욱 그랬다. 우스운 일이다. 이미 끝난 시점에 그런 걸로 후회가 남을 줄이야.

    아무튼 이제는 그런 일도 없을 거라고 생각하니 그나마 나은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은 사 두고 딱 세 번 탄 다음 처박은 채로 3년이 지나 버린 자전거가 기댄 벽을 지나 담쟁이 넝쿨이 자란 전봇대, 군데군데 깨진 붉은 벽돌의 보도블록이 깔린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골목 끝에서 비상등을 깜빡이고 있는 택시에 바로 올랐다.

    이번 주부터 연습이 시작되었고, 언제나 그랬듯이 연습 시즌의 이현은 사무실보다 연습실로 바로 출근하는 일이 잦았다. 사무실의 대표나 이사를 피해 한숨 돌릴 수 있는 것은 좋았지만 연습실에는 또 다른 스트레스가 산재해 있다.

    남산창작센터까지 올라가는 구불구불한 찻길 끄트머리에 목적지가 보였다. 이현은 안까지 들어가 달라고 말한 후, 입구 근처에서 내렸다.

    칙칙한 회색 건물 옆에 민트색 트럭이 와 있는 걸 보니 어떤 배우의 팬이 간식 트럭을 보낸 모양이었다. 이현이 택시에서 내리자 마침 근처에서 담배를 피우던 앙상블 남자 배우 몇이 이현에게 꾸벅 묵례하며 다가왔다. ‘피디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하며 어린 남자애들이 모여들어 이현은 조금 당황했다. 앙상블들의 이름을 아직 다 외우지 못한 탓이다.

    “배우 팬클럽에서 보낸 거래요.”

    “배우 누구요?”

    “석희재라고 신인 배우 있잖아요.”

    살갑게 말을 건네는 어린 배우의 말에 멈칫하면서 이현은 트럭을 다시 올려다보았다. 캐스팅 발표 당시 딱 한 장 보도 자료에 넣어서 뿌린 석희재의 사진이 아니나 다를까, 트럭에 박혀 있었다. 출력할 만한 화질이 안 되었는지 사진 크기가 작은데도 픽셀이 깨져 두드러졌다.

    저것조차 릴리스할 만한 공식 사진이 없다 보니 석희재의 회사에서 급하게 찍은 것이었다. 그럴듯한 프로필 사진은 물론, 활동 경력을 아예 찾아볼 수 없는 신인에게 벌써 팬클럽이라니….

    이현은 금세 아연해졌다.

    “그 정돈가….”

    “네? 뭐가요?”

    “그만큼 잘났나 싶어서요.”

    “피디님. 실물 보셨어요? 석희재는 실물이 더 쩔어요.”

    “…….”

    석희재의 미모는 같은 남자들에게도 통하는 모양이었다. 하긴, 저한테만 통할 리가 없었다. 이현은 조금 멋쩍어하면서 트럭에서 간식거리를 받아 들었다. 추로스와 아이스커피였다. 아침을 못 먹었으니 마침 잘된 일이었다.

    그렇게 이현은 앙상블들과 함께 손에 추로스와 커피를 하나씩 들고 연습실로 올라왔다. 7칸의 계단을 오르고, 다시 신발장을 거쳐 다섯 계단을 더 오르면 바로 마룻바닥이 펼쳐진 연습실이다.

    너저분한 신발들을 적당히 정리하면서 운동화를 벗은 이현은 연습실 안쪽으로 조용히 몸을 들이밀었다.

    “…….”

    “…….”

    어떻게 된 게 들어서자마자 석희재와 눈이 마주쳤다.

    한 면이 거울로 쫙 깔린 너른 연습실 구석에 앉아 있던 석희재는 들어서는 이들의 면면을 빠짐없이 살핀 후 가만히 고개를 돌렸다. 작은 움직임인데도 짙은 흑발 때문인지 무척 청아해 보였다.

    ‘그죠. 실물이 더 쩔죠. 피디님?’

    아래서부터 함께 올라온 앙상블이 소곤거렸다. 이현은 고개만 끄덕이며 앙상블들을 원래 자리로 돌려보냈다.

    안쪽에서는 12분가량 되는 짧은 신의 블로킹을 정리 중이었다. ‘이래서 출연이 없는 앙상블들이 바깥에 나와 있었나 보다.’ 하고 생각하면서, 이현은 연습실 벽을 따라 크게 돌아 간이 책상과 의자가 모여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주변을 잠깐 두리번거렸으나 하필 빈자리가 석희재의 옆자리밖에 없었다. 거기 앉을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 석희재는 곁에 올려 두었던 자기 옷을 치워 들어 올리고는 이현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앉으세요.”

    그렇게까지 말하니 굳이 다른 곳에 앉기가 뭐해 이현은 의자에 앉았다.

    그 사이 석희재는 이현의 손에 들린 추로스를 살피고 있었다. 그러더니 이현이 책상 위에 추로스를 올려놓자마자 종이 위를 길고 흰 손가락으로 차분히 짚어 보았다.

    추로스의 맥을 짚어 주는 건가….

    당황한 이현이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따뜻한지 보려고요.”

    너무 당연하게 내뱉는 말에 이현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입을 벌렸다.

    “식으면 별로예요. 따뜻할 때 드세요.”

    “네, 고, 고맙습니다.”

    별말씀을 다 한다는 듯 석희재는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이현 역시 하는 수없이 앞을 바라보며 가만히 추로스를 집어 들었다. 어쩔 수 없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나서 먹을 때에 조금 눈치가 보였다.

    먹으면서 이현은 이렇게 의자가 모자란데, 심지어 앙상블들은 바닥에도 앉아 있는데 왜 이 자리만 공석이었는지를 생각했다. 다들 석희재에게 벽을 느끼나? 전작에서 마주치거나 한 다리 건너 친분이 있는 기존 배우들 사이에 석희재가 쉽게 섞이지 못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현은 다시 한번 주변을 둘러보았다.

    간이 책상 여러 개가 한 줄로 정렬된 가장 가운데는 연출부의 자리로, 제본된 대본과 조연출의 가방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그 옆에 전선이 잔뜩 달린 기계 장치가 있는 자리는 음감의 자리, 그 옆으로 무감, 그리고 원래는 컴퍼니의 자리였을 곳에 주연 배우들 두세 명이 모여 앉아 있었다.

    ‘지우 선배다.’

    이현의 시선은 저도 모르게 한지우에게서 멈추었다. 이현이 직접 짠 연습 스케줄이지만 그 역시 매일, 매시간 달라지는 참여 배우를 전부 외우고 있는 것은 아니었기에 누구를 언제 마주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동시에 석희재는 눈을 내리깐 채로 입술에 설탕이 묻은 것도 모르고 한지우를 흘끔대는 이현을 참아 내는 중이었다. 깊이 눌러쓴 모자챙에 의지하면 자신의 시선을 들키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사실이 그랬다. 이현이 누구를 보든 말든 이 연습실의 그 누구도 관심이 없을 테니까. 석희재를 제외한다면.

    아까 다른 남자들과 잔뜩 얽혀서 올라오는 것부터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입술을 깨문 석희재는 팔짱을 꼈던 팔을 풀면서 앞쪽 책상에 기대며 몸을 기울였다. 그렇게 아주 자연스럽게 한지우 쪽을 건너다보는 이현의 시선을 차단하고는, 괜히 가운데서 동선을 설명하고 있는 연출에게 집중하는 척했다.

    누군가 치졸한 질투라고 말해도 변명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사실이니까.

    얼마 지나지 않아 석희재의 귓가에 이내 다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볼 것이 사라진 이현이 하는 수없이 추로스를 먹는 소리였다.

    그 부스럭대는 조용한 소리가 듣기 좋았다. 기어이 몸을 틀거나 저리 나와 보라고 하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대로 순순히 먹을 것이나 먹는 모습이 사랑스럽기도 했다.

    한결 마음이 편해진 석희재는 턱을 괴고 아까 이현이 바라보던 주연 배우들 무리로 눈을 돌렸다. 개중 가장 신경이 쓰이는 것은 역시 한지우였다.

    연습실의 분위기가 익숙한 듯한 여유로운 자세. 서른여덟이라고는 보이지 않는 젊은 얼굴과 꽤 탄탄한 몸. 게다가 성격도 느긋해 보였고 인간관계도 괜찮은 것 같았다. 앙상블이나 다른 배우들은 연습실에 도착하고 나면 가만히 앉아 있는 그에게 다가와 먼저 인사를 하고는 자리로 돌아가곤 했다. 저번에 이현의 회사 직원들도 그가 가끔씩 사무실에 들러 먹을 것을 사 주고 간다며 칭송하지 않았던가.

    ‘내가 갔을 때는 형이 없었는데….’

    석희재는 그저께의 일을 떠올렸다.

    이현의 회사 직원들과 함께한 회식 자리에서 좋은 팁을 얻었던 석희재는 사실 그제 이현의 사무실에 들렀었다. 백화점 지하에서 고급스러운 마들렌 세트를 세 박스 사 들고서. 한때 이현이 맛있게 먹었던 것을 기억해 내서 정한 메뉴였다.

    그러나 도착한 사무실에 이현은 없었고, 슬쩍 물어보니 다들 이현은 ‘연습실’에 갔다고 말했다.

    ‘피디님은 연습 시작하면 연습실로 출근 많이 하시고요. 공연 기간에는 극장에 계세요.’

    ‘아….’

    ‘피디님 이거 좋아하시겠다. 오면 나눠드릴게요. 그리고 잘 먹을게요!’

    여심을 제대로 저격한 먹을거리를 사 들고 온 석희재에게 쏟아지는 직원들의 평가가 꽤 후했다. 이현을 만나지 못한 것은 뼈저렸지만, 그의 주변인들에게 점수를 딸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다행이다.

    하지만 어쩐지 자신 쪽이 어설프게 느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석희재의 귀에는 여전히 ‘나는 연상이 취향’이라던 이현의 말이 수시로 맴돌았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한쪽 손을 피가 안 통하도록 꽉 쥐었다.

    그러나 너무 진득하게 쳐다본 탓일까.

    결국 한지우와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석희재는 조용히 눈인사하고는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그 뒤로도 한지우가 저를 샅샅이 바라보는 게 느껴졌지만 석희재는 조용히 그 시선을 튕겨 냈다.

    다시 제 곁에 있는 이현의 움직임, 시선, 숨소리에 집중하던 석희재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손은 왜 다쳤어요.”

    석희재의 물음에 이현이 추로스 봉지를 작게 뭉쳐 대던 손을 멈추었다.

    “베인 자국이 많아요.”

    “아, 이건….”

    이현은 석희재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그가 말릴 새도 없이 석희재는 그의 손목을 잡고 뜯어 보았다. 확실히 얇은 종이에 베인 자국이었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며칠 전에 제본하느라고 이렇게 됐어요.”

    “그런 걸 직접 하세요?”

    “급하면 해야죠. 내일 또 해야 돼요.”

    이현은 석희재에게 잡힌 손을 빼고 싶어 하는 것 같았지만 석희재는 양손으로 붙잡은 채로 꼼꼼히 들여다보았다.

    “손 씻을 때마다 아프겠어요.”

    “그 정도야 뭐….”

    이현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하긴, 수긍하면서 석희재는 이현의 묘한 성벽을 떠올렸다. 아픈 것을 좋아하고, 상대가 자신을 상처입힐 정도로 몰아붙이는 것을 선호하고, 종내에는 피를 봐야지만 만족스럽다고 말했던.

    부지불식간에 침대에서의 그를 떠올리게 된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입술부터 핥으며 감질나게 키스하던 방식, 주저 없이 무릎 꿇고 아래를 혀로 애무하던 손짓, 스스로의 몸을 상대가 ‘사용’해 주기를 애원하던 말투.

    석희재는 이현의 손을 책상 위에 가만히 내려놓았다. 끝까지 부드러운 피부의 감촉이 손바닥에 진득하게 달라붙었지만 이 이상은 위험했다.

    자신의 사랑은 플라토닉이 아니었다. 이현에게 제 사랑을 들킴과 동시에 강제로 수절하게 된 지 벌써 3주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제는 손을 잡는 것만으로도 번지는 불길이 고통스러웠다.

    ***

    저녁 시간이 되자 한 시간의 휴식이 주어졌다. 그리고 이현은 저녁이 다가오기 전에 연습실 인원을 파악해 도시락을 주문했다. 밥차를 부르기 전까지는 계속해서 이런 식으로 저녁을 챙겨야 했다. 번거롭지만 그런 게 이현이 연습 현장에 존재하는 이유였다.

    “현아. 오랜만이다.”

    “선배님.”

    도착한 도시락을 나눠 주던 이현에게 다가온 것은 한지우였다. 이현은 벌떡 일어나면서 모자를 벗었다가, 자기 머리 모양을 보고 웃는 한지우를 보고는 다시 모자를 뒤집어썼다.

    “넌 저녁 안 먹어? 이리와. 저기서 같이 먹어.”

    “아, 다른 분들 다 챙기고요.”

    “알아서 가져가겠지. 유치원생도 아니고.”

    “하하… 그래도 챙겨야 돼요.”

    진짜로 유치원생처럼 배고프다면서 도시락을 두 개, 세 개씩 가져가는 배우도 있기에 적당히 감시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사이 이현의 시선은 책상 앞에 혼자 앉아 있는 석희재에게 무의식적으로 가 닿았다. 상견례 때만 해도 주변에 사람이 들끓었는데 오늘은 왜인지 몰라도 내내 혼자였다.

    “저 친구랑 친해요?”

    “네?”

    갑자기 존대로 질문을 해 오는 한지우 때문에 이현은 약간 놀라면서 되물었다. 한지우의 시선 역시 석희재에게 닿아 있었다.

    생판 남인 타인의 눈에도 사적인 친분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가 싶어서 이현은 조금 불안해졌다.

    “아니, 저 친구가 낯을 가리는 것 같아서. 데려와. 다 같이 밥 먹어요.”

    그렇게 말하며 한지우는 제 몫의 도시락을 들고는 간이 책상으로 향했다.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과 막 혼자 젓가락을 벗기고 있던 석희재를 번갈아 바라보던 이현은 석희재에게 다가갔다.

    “희재야. 선배님이 너 부르신다.”

    이현이 그의 앞에 서자 석희재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나를?”

    “그래. 너 낯 가리는 것 같다고 챙겨 주시는 것 같아….”

    “…….”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 꼰대질하고 그런 거 절대 없으니까. 선배 엄청 좋은 사람이야. 나도 식사 다 나눠 주고 갈게. 가서 앉아 있어.”

    “…….”

    석희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막 포장을 벗기던 도시락을 다시 덮어서 들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현이 시키는 대로 할 모양이었다. 그가 다가가서 한지우에게 먼저 인사를 하는 것까지 보고 난 이현은 조금 안심하면서 다시 제 일을 마치러 갔다.

    도시락은 소불고기와 간장 닭구이 두 가지로, 이현은 처음 나눠 줄 때부터 소불고기가 먹고 싶었다. 그러나 사람 생각은 다 엇비슷한 건지 소불고기가 먼저 동이 났다. 어쩔 수 없이 남은 닭구이 도시락을 들고 이현은 한지우와 석희재가 함께 앉아 있는 책상으로 다가갔다.

    두 사람이 살갑게 이야기를 나누는 것은 어쩐지 잘 예상되지 않았지만…. 역시나 두 사람은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조용히 밥만 먹는 두 사람을 보면서 이현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현이 왔구나. 얼른 앉아.”

    한지우는 제 옆자리의 의자를 끌어당기며 이현이 앉을 자리를 마련해 주었다. 그리고 부지불식간에 타이밍을 놓치게 된 석희재는 밥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어 그 손길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두 분 설마 한마디 말도 안 하고 밥만 드셨어요? 이거 이거, 내가 가운데 껴야겠구만.”

    이현은 웃으면서 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면서 젓가락을 둘로 쪼갰는데 그 손길이 어설퍼 한쪽 젓가락이 짧아졌다. 그러나 이현은 혀를 한 번 차고 그냥 그대로 밥을 먹으려는 것 같았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깔끔하게 둘로 갈라진 제 젓가락을 바라보았다.

    3년간 이현은 석희재와 밥을 먹을 때 한 번도 제 손으로 젓가락을 쪼개 본 적이 없었다. 전부 석희재가 해 주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현을 저렇게 만든 것은 자기 자신인지도 모른다.

    “어? 아니… 우리 후배가 조금 불편해하는 것 같길래.”

    “아, 그랬어요?”

    “괜히 불렀나 봐. 혼자 편하게 먹게 둘걸.”

    “희재야….”

    이현은 석희재를 조금 난감한 목소리로 불렀다. 석희재의 성격이 내향적인 편이라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그래도 대선배 앞에서 적당한 정도의 사회성을 발휘해 주기를 바랐는데.

    그러나 그런 이현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석희재는 더 말이 없어졌다. 자연히 대화는 한지우와 이현 사이에서만 이루어졌다.

    “반찬이 다르네. 이건 무슨 맛이야?”

    “드셔 보실래요? 닭고기 같아요.”

    “이거 괜찮네. 내가 좀 먹어도 돼?”

    “아, 드세요. 저 닭 별로 안 좋아해요.”

    “근데 왜 이걸 가지고 왔어.”

    “불고기 먹고 싶었는데 다 떨어져 가지고….”

    그 말에 석희재의 젓가락질이 다시 한번 멈췄다. 그리고 이현은 석희재가 잔뜩 남은 제 반찬을 일부러 크게 집는 것을 목격했다. ‘혹시 나에게 덜어 주려고 그러나’ 예상한 순간, 한지우가 긴 팔을 뻗으며 자기 반찬을 아예 이현 것과 바꾸었다.

    “현아. 네가 불고기 먹어.”

    “선배. 괜찮으세요?”

    “나 괜찮아. 이럴 줄 알았으면 늦게 가져갈걸. 스태프들이 남는 거 먹는지 몰랐네.”

    이현은 가슴이 뭉클해지는 것을 느꼈다. 언제나처럼 한지우는 스태프들을 위해 진심으로 마음을 썼다. 게다가 그가 준 반찬은 거의 건드리지 않아 깨끗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왜 이 시점에 절로 석희재에게 눈이 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잘 먹었습니다.”

    “아, 다 먹었어요?”

    “네.”

    “빨리 먹었네. 급하게 먹은 거 아니지?”

    “아닙니다. 먹고 계세요. 커피 좀 가져다드릴게요….”

    아까 이현에게 한 소리 들은 것을 의식했는지 석희재는 후식까지 몸소 챙긴다고 자리를 떴다.

    그리고 이현이 눈은 막 연습실을 빠져나가는 석희재의 등에 꽂혔다. 그걸 알아챈 한지우가 바로 물었다.

    “둘이 아는 사이지?”

    “네? 네….”

    “그런 것 같더라고. 저 친구 이 PD 추천으로 일 시작했다는 얘기도 들리고. 진짜예요?”

    “와, 그걸 벌써 선배까지 아세요.”

    “신인 배우한테 사람들이 관심이 많은가 봐.”

    “그런가 봐요.”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이현은 한지우가 전달해 주는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나지막한 목소리도 좋았지만 약간의 유머 감각, 시종 듣는 사람을 배려하는 화술도 기분 좋았다.

    ‘희재도 지우 선배 같은 사람이랑 친해지면 득을 많이 볼 텐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현은 나중에 석희재에게 조금이라도 요령 있게 굴라고 말해 볼까 싶었다. 물론 강요는 아니었다. 그냥 그편이 석희재에게 좋을 것 같아서.

    “현아. 그런데 손은 왜 다쳤어.”

    두 사람이 친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사이 한지우가 조용히 속삭였다. 이현에게 몸을 기울인 그에게서 나는 향수 냄새가 짙었다.

    “아. 이거요? 제본하다가 베어 가지고….”

    “아직도 그거 제작 팀한테 시키는구나. 돈 주고 좀 하라고 하지.”

    “보통 돈 주고 해요. 그런데 이번에 악보가 늦게 나와서, 맡길 시간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악보 제본만 제가 했어요.”

    “그 3공에 O링만 고집하는 음감?”

    “맞아요! 선배도 아시네요?”

    이현은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음악 감독을 흉보려는 것은 아니지만 누군가 자신의 부당한 노고를 알아준다고 생각하니 기뻤다. 한지우가 제 손목을 잡고 이모저모 뜯어보는 사이 이현은 잡힌 손을 빼는 대신 가만히 생각했다.

    깃털보다도 가벼운 마음이 살랑살랑 흔들렸다.

    ‘이런 사람이랑 한 번만 사귀어보면 얼마나 좋을까.

    근데 게이일 리가 없지.

    만에 하나 가능성이 있어도 나를 좋아해 줄 리도 없고….’

    한지우는 스트레이트였다. 그에게는 과거 약혼까지 했던 여자 친구가 있었다. 그리고 오래전 한지우에게 이미 한 번 마음을 줘 봤던 이현은 반하기도 전에 상실감을 먼저 겪었다.

    그는 여자 친구와는 알 수 없는 이유로 파혼을 했고 덕분에 아직까지 싱글이지만, 어쨌든 그가 헤테로인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현은 가능성이 없는 상대를 대상으로 희망을 키우는 것이 얼마나 미련한 일인지 알고 있다.

    “커피 드세요.”

    언제 온 건지 석희재가 커피를 두 사람 앞에 놓아주었다. 한지우는 부드럽게 웃으며 ‘고마워’ 하고 말했다. 이현의 손목을 잡고 있던 그의 손 역시 적당한 타이밍에 떨어져 나갔다.

    이 자리를 어색해하던 석희재가 금세 자리를 뜰 줄 알았는데 그가 가지고 온 커피는 석 잔이었다. 석희재는 제 몫의 커피를 들고는 다시 조용히 곁에 앉았다.

    그러나 이번에 먼저 몸을 일으킨 건 한지우 쪽이었다.

    “연출님 이제 오셨네. 잠깐 인사 좀 하고 올게.”

    그렇게 말하면서 자리에서 일어난 한지우는 휴식 시간이 끝날 때까지 그 자리로 돌아오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오랜 경력의 배우 주변에는 언제나 사람이 많았고 애초에 그가 자신에게 시간을 할당해 줄 이유도 없었다. 한지우가 버리고 간 도시락의 잔해까지 손수 치우고 있던 이현의 곁에서 석희재가 작게 투덜거렸다.

    “자기가 먹은 건 자기가 좀 치우지.”

    “싫으면 놔둬. 내가 하게.”

    이현의 말에 석희재는 왜인지 울컥한 얼굴로 쓰레기를 전부 제가 집어 들고 쓰레기봉투에 버렸다. 그러고는 뒷정리를 하는 이현을 도우며 그에게 분리수거 하는 법을 배우기도 했다. 이내 냉정한 얼굴로 이현에게 배운 것을 읊으면서 다른 배우와 스태프들에게 분리수거 하는 법을 일러 주었는데, 이현은 좀 황당하긴 했지만 말릴 이유도 없어서 석희재가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그대로 놔두었다.

    그리고 연습실 가장 안쪽 탕비실로 들어가 하루 만에 거덜 난 커피와 녹차, 자몽청 따위를 채우고 있던 이현의 뒤로 석희재가 또 따라 들어왔다.

    “너 왜 그래?”

    이현의 물음에 석희재는 대답 없이 미닫이문을 닫아 버렸다. 그러고는 주변에 찐득하게 들러붙은 자몽청을 물티슈로 말없이 닦기 시작했다.

    “너 이런 거 안 해도 돼. 가서 앉아.”

    “그럼 형은 해도 되나.”

    “아니, 나는 이게 일이고 배우들은 아니니까지… 가서 쉬어.”

    이현이 가라는 데도 석희재는 끝내 정수기 주변을 깨끗이 닦고 쓰레기통까지 비웠다. 해 본 적도 없을 텐데 눈치만으로 이현이 해야 하는 일들을 잘도 찾아서 능숙하게 했다.

    그러고는 이현이 나가려고 발을 돌린 순간, 석희재는 밖에 내다 버릴 쓰레기를 꽉 묶어서 문가에 턱, 던져 버렸다. 마치 나가는 길을 차단하듯 툭 놓인 쓰레기가 묘했다. 게다가 어찌나 매듭을 꽉 묶었는지 거기에 분풀이를 한 것 같기도 했다.

    수상한 기색에 이현이 고개를 들자 아니나 다를까 석희재가 대뜸 물어 왔다.

    “형.”

    “……?”

    “요즘 누구랑 자.”

    요즘 누구랑 자.

    여러 가지 함의가 내포되어 있는 말에 이현은 말을 잃고 고개를 들었다.

    “누, 누구랑….”

    “말했잖아. 3일 이상 쉰 적 없다고. 누구 있을 거 아냐.”

    “어….”

    상상 속에서의 자신은 ‘누구랑 자냐고? 어디서 그런 말을 하냐.’라고 제법 사납게 대꾸하고 있었지만 어디까지나 상상일 뿐, 당황에 휩싸인 그는 불분명한 발음으로 어눌한 단어를 읊을 뿐이었다. 그리고 그를 그렇게 만든 이유는 눈앞의 석희재였다.

    바로 석희재의 표정 때문에.

    석희재는 원래도 굳이 가식적인 표정을 덧그려 주변인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는 배려 따위는 모르는 인물이었지만, 자기 자신에게만 집중하는 분위기에서 나오는 본래의 평온한 무표정과 지금의 무표정은 그 분위기가 완연히 달랐다.

    그래서일 것이다. 너한테 그런 걸 물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냐고 받아치는 대신 왜 그렇게 화가 났냐고 물어보고 싶어진 것은.

    “너 뭐 때문에 화났냐.”

    “내가 화난 걸로 보여?”

    석희재가 대답 대신 질문으로 돌리자 이현은 도로 아리송해졌다. 새파랗게 날이 선 공기에 베일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놓고서, 저토록 형형한 눈빛을 하고는 화가 난 게 아니라고?

    그리고 이현은 기시감을 느꼈다. 그는 얼마 전에도 꼭 이런 느낌을 받았다. 길을 걷다 모퉁이에서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차체를 맞닥뜨린 것만 같은. 지나치게 잘 알고 있는, 내게 아주 익숙한 골목길에서 예상치 못한 위협을 마주친 것 같은 순간 말이다.

    “난 화난 게 아닌데.”

    “그럼 뭐야.”

    “맞혀 봐.”

    저를 노려보는 석희재의 눈이 깊었다. 이현은 갑자기 팔의 상완이 오싹하며 소름이 돋아 뒷걸음질 쳤다. 물리적인 거리를 확보했는데도 석희재의 돌발 행동에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여기가 탕비실이라서? 문 하나를 열면 바깥에 공적인 관계로 엮인 사람들이 가득해서?

    그것만은 아니었다. 얼마 지내지 않아 이현은 이 당황이 어디서 기인하는 것인지 어렵지 않게 찾아냈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석희재가 이럴 수 있다는 걸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받은 충격이었다. 석희재와 함께 지나치게 편안한 시간을 보낸 지난 3년, 자신은 저도 모르게 그의 반응을 한정 짓고 있었다.

    석희재가 가장 반갑지 않은 형태로 관계를 절단 냈음에도 불구하고 이현은 아직도 석희재를 조금은 믿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자신이 그어 놓은 선을 넘지 않을 거라고.

    “혹시 만나는 사람 없어?”

    “…….”

    “형은… 삼일을 못 버티잖아.”

    “…….”

    “딱히 없으면 날 이용해도 되는데.”

    석희재는 그렇게 속삭이며 딱 멀어진 그만큼 다가왔다. 어깨를 짚은 석희재의 손끝이 이현의 맨 목덜미에 살짝 닿았다. 흠칫 긴장하며 드러난 목을 더듬듯 만지더니 방금 전 소름이 돋았던 팔까지 자연스레 쓸고 내려왔다. 그가 만지는 것은 제 맨살이 아니라 옷감일 뿐인데도 이현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석희재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이현은 그가 방금 더듬었던 제 목덜미에 키스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아….”

    “뒤에 휴지통 있어. 더 가지 말라고.”

    가볍게 저를 끌어당긴 석희재의 손길에 이현은 저도 모르게 뒤를 돌아보았다. 석희재의 말은 사실이었다. 제 뒤꿈치로 찰 뻔했던 휴지통을 보자마자 이현의 귓가에 석희재의 숨이 닿았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였다.

    “나, 나와.”

    이현은 석희재를 가볍게 밀어 떼어 냈다. 들러붙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그는 깔끔히 물러났다. 분명히 어떤 함의를 섞어 건드렸으면서 차라리 거부하기를 기다렸다는 듯이 물러나는 걸음이 묘하게만 느껴졌다.

    “하….”

    석희재는 길고 낮게 한숨을 쉬었다. 거둬들인 흰 손을 제 눈자위에 가져가 꾹 눌러 댄다….

    그 손가락 안으로 언뜻 보이는 내리깐 눈가가 붉었다. 겨우 석희재의 상태를 관찰한 이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말했다.

    “말하면 네가 알아?”

    상대는 없다. 언제나 그렇듯이 공연 오픈 전에는 일과 사람에 치여 죽을 지경이고 집에서는 잠만 자기 바쁘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그에게 섣부른 희망을 줄 것만 같다.

    그래서 이현은 거짓말을 했다.

    “너도 알잖아. 나는 그런 상대는, 모르는 사람 위주로만 찾는 거….”

    말하면서도 이현은 제 연기력이 형편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 단순한 문장에 석희재의 눈이 변했다.

    “그새 찾았다고?”

    “그래.”

    그제야 이현은 깨달았다. 지금 드러나는 것이 진짜 분노의 일면이다. 아주 닮은 두 가지를 구분하기 어려울 때 진짜를 보고 나면 차이가 명확해지는 것처럼, 이제야 석희재의 감정이 확실히 느껴졌다. 방금 전까지 석희재는 그 자신이 주장했던 대로 화가 났던 게 아니다.

    그건 성욕이었구나.

    이현은 석희재가 이십 대 초반이라는 것을 새삼스레 기억해 냈다. 그제야 아까의 상황이 이해가 됐다. 계산하지 못한 말을 내뱉은 것도, 교통사고처럼 돌발적인 행동을 했던 것도 성욕이라 생각하면 이해가 됐다. 단둘이 밀실에 남고 나니 충동적으로 ‘그럴 기분이’ 되었던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이용해 달라고’ 부탁을 하다니.

    그건 참 석희재다웠다.

    “되게 쉽게 주네.”

    석희재는 짓씹듯 내뱉고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 반응에 이현은 조금 안심했다. 머리가 차가워짐과 동시에 안정을 찾았다. 석희재가 화를 내니 도리어 상황을 해석하기 쉬워지는 건 왜일까.

    바닥에 쓰러진 쓰레기봉투를 주워 들면서 이현은 다른 손으로 석희재를 밀었다.

    “그래. 나 쉬워. 너한테도 그랬잖아.”

    그 말에 석희재는 기습적인 두통이 찾아온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거봐. 듣기 싫을 거면서 왜 물어보냐.”

    “…….”

    “나와. 나가게.”

    석희재는 무게가 없는 사람처럼 밀려났다. 미닫이문을 열고 나가자 바깥은 익숙한 일터였다. 방금 전 탕비실의 공기가 도리어 어색할 정도로.

    야외의 쓰레기소각장에 쓰레기를 버리러 가면서 이현은 아직도 목덜미에 남은 듯한 감촉을 떠올렸다. 드러난 맨 살갗을 일부라도 만져 보고 싶어 어쩔 줄 모르는 손짓이었다. 그 간절함이 남은 듯 아직도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그런 식으로 만지면서 ‘이용’해 달라고? 이현은 피식 웃었다.

    보통 제가 상대해 왔던 남자들은 그런 상황에서는 억지로 제 입을 틀어막고 엎드리게 만들었다. 일단 바지부터 벗긴 다음 박아 주면 다리에 힘이 풀려 버리고 마는 저를 아니까. 일터에서 들키고 싶지 않아 스스로 소리를 참아 낼 자신을 아니까. 그래서 다들 항상 그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자신을 굴복시키곤 했다.

    ‘그런 반면에 어린애는 다루기 쉽구나.’

    밀리면 얌전히 밀려나던 석희재를 떠올리면서 이현은 저가 일곱 살이나 많은 것, 그리고 그런 저에게 많은 선행 학습이 있었던 것을 다행으로 여겼다.

    그나저나 석희재는 나이답지 않게 꽤 차분하고 냉정하게 제 사랑을 설득하는 타입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갑자기 그를 부채질한 게 뭘까.

    그러면서 이현은 무의식적으로 석희재의 표정을 떠올렸다. 순간 자신을 오싹하게 만들었던 눈빛을 말이다.

    아주 지독하게도 그건 이현이 가장 좋아하는 종류의 감정이었다. 상대를 망치고 싶어 하는, 혹은 삼키고 싶어 하는, 분노와도 닮은 성욕. 상대가 제게 오랜 짝사랑을 고백한 어린애만 아니라면 아주 쉽게 몸을 던지고 싶어질 만큼.

    그러나 잠깐 들었던 그 생각을 던져 버리듯, 이현은 소각장의 커다란 쓰레기통 안에 가볍게 쓰레기를 던져 넣었다.

    ***

    석희재는 이현이 나가고 나서 한참 후에야 움직였다. 함께 있던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흥분을 식힐 시간이 필요했다. 열 오른 눈자위 주변이 지나치게 뜨거웠다.

    차라리 모르면 이렇게 갈망하지도 않았을 텐데. 그가 가까이에 앉는 것만으로 은은히 풍기는 익숙한 샤워젤의 냄새, 체취와 섬유유연제가 섞인 향기. 손끝에 달라붙는 손목의 감촉… 석희재는 자신의 사랑이 플라토닉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차라리 그 몸의 맛을 몰랐더라면.

    개중 자신을 가장 괴롭히는 것은 붓기가 남은 이현의 눈두덩이였다. 그건 분명 많이 자지 못했을 때의 얼굴이었다.

    ‘너도 알잖아. 나는 그런 상대는, 모르는 사람 위주로만 찾는 거….’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이현의 잠이 모자란 이유가 뭔지 제 눈으로 보기 전엔 믿고 싶지도 않았다. 머리는 정리되지 않았지만 이젠 나가야 했다. 석희재는 머릿속에서 이현과 정체불명의 누군가를 떨쳐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리고 석희재가 다시 탕비실에서 나왔을 때 그는 한 손에 녹차를 들고 있었다. 저가 언제 들어갔는지 눈여겨본 사람도 없을 테지만 혹시나의 상황까지 가정한 것이다. 석희재는 스스로의 그런 성격을 좋아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조심성이 있고 생각이 많은 성격 말이다.

    누군가는 사랑을 사고라고 했다. 바보 같은 실수를 연발하거나 저답지 않은 일을 저질러야 사랑이라는 비일상적인 이벤트가 일어날 수 있다고. 그러나 석희재는 충동적인 짓을 저지르면 그 순간의 자신을 두고두고 후회하곤 했다. 그리고 조금 전 그를 몰아세우고 답지 않게 본심을 드러낸 부분도 마찬가지로 아마 내도록 후회할 것을 알았다.

    하지만 그런 조심성 많은 제 성격이 이현에게 가는 길을 가로막았을지도 모른다. 그러니 이제는 익숙해져야 했다. 이런 비일상적인 사건과 충돌에.

    이현의 벽을 부수려면 지금까지 했던 것처럼 그의 방식을 존중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단단히 마음을 다잡은 석희재는 낮에 앉았던 구석 자리에 조용히 앉았다. 저녁 연습 첫신을 위한 필요 배역들이 이미 연출 주변에 모여 있었다.

    사실 오늘 석희재의 역할은 배우가 아닌 참관인이다. 그가 맡은 배역의 연습 장면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출석 도장을 찍은 이유는 초반에는 연습에 꾸준히 나와서 분위기를 익히고 어떤 식으로 현장이 돌아가는지를 알아 두라는 연출의 조언을 꼬박 따르기 위함이었다. 덩달아 이현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그것도 좋았고.

    석희재는 연출의 말을 듣고 있는 한지우를 관찰했다. 동시에 녹차를 입가에 가져갔지만 뜨거워서 마실 수가 없었다. 김을 쐬면서 식기를 기다리며 석희재는 상상해 보았다.

    한지우와는 가능성이 있을까?

    저 남자가 방금 자신이 이현에게 했던 것처럼 굴면 이현은 승낙해 줬을까?

    이현이 이런 석희재의 머릿속을 훔쳐본다면 아마 그 상상력에 크게 놀랄지도 모른다.

    ‘선배 그런 사람 아니거든.’

    ‘그런 사람이 뭔데.’

    ‘나 같은 애랑 막…. 아, 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선배 여자 친구 있어.’

    제 앞에서 한지우를 변호하는 이현이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그러고는 일터에 있는 사람이랑 안 만난다고, 선배까지 이상한 사람으로 몰지 말라고 하겠지. 뻔했다.

    그러나 한지우는 겉보기만큼 좋은 어른이 아니었다. 질투심만으로 그렇게 판단한 것은 아니다. ‘연상 취향’이라는 이현의 시선이 항상 그에게 닿아 있기 때문도 아니다. 이현보다 훨씬 어른이면서 그는 어른다운 배려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오라 가라 해 놓고 인사도 무시하고, 밥 먹을 때도 저에게 말 한마디 걸지 않던 선배 배우는 이현이 오니 보란 듯 저들만 아는 화제를 꺼냈다. 눈에 보이게 사적인 이야기를 하며 한 사람에게만 다정하게 굴었다. 피디에게 잘 보이려고? 앙상블이나 신인들이야 PD가 저들 윗사람처럼 보인다지만 한지우 급이 그렇게 생각할 리가 없었다.

    석희재는 궁금했다. 제 눈에 뭔가가 씐 건지. 아니면 한지우가 진짜 여우 같은 놈인 건지.

    그날의 연습은 9시에 마쳤다. 석희재는 대본을 챙겨 연출에게 인사를 하러 다가갔다. 그는 반갑게 석희재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과묵하고 성실한 신인을 칭찬했다.

    “가까이서 보니까 어때.”

    “아직 낯설지만 금세 익숙해질 것 같습니다.”

    “그래. 지금은 그래도 연습 초반이라 일찍 마치거든. 점점 더 길어질 거야.”

    “네….”

    저에게는 꽤나 관대한 연출의 귀띔을 듣던 석희재의 뒤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날아왔다.

    “현아. 너도 술 마시러 갈래?”

    멀지 않은 곳에서 들리는 목소리, 그 내용에 석희재의 발이 묶였다.

    화자는 한지우였다. 그리고 그 말을 들은 당사자는….

    “선배. 제가 오늘 무감님이랑 아침까지 술 먹느라 조금….”

    “아, 그랬어?”

    석희재는 거절의 뜻을 내비치는 이현의 말을 몰래 듣고 크게 안도했다.

    무대 감독은 아침까지 이어진 술자리의 여파로 연습이 끝나기 한 시간 전에야 얼굴을 비추었다. 동시에 어제 이현의 잠이 모자랐던 사실을 간접적으로 깨닫게 된 석희재의 마음은 누그러졌다.

    “이 피디님 체력 대단하네. 얼른 들어가서 쉬어.”

    그리고 의외로 한지우는 깔끔하게 물러났다. 설득 한마디 던지는 법 없이 그렇게 끝내 버리고 떠나려 했다.

    반대로 한지우의 등에 오래 머무르는 이현의 시선이 불길했다. 석희재는 연출에게 인사를 건넨 후 얼른 이현에게 다가갔다. 무어라 말 붙일지 정하지도 못했지만 그 시선을 차단해야만 한다는 일념으로.

    그러나 그보다 이현의 목소리가 한지우에게 닿는 것이 더 빨랐다.

    “선배. 저 그럼 한 시간만 있다가 일어나도 돼요?”

    돌아서는 한지우와 눈이 마주친 것은 석희재였다.

    제자리에 발이 묶여 버린 석희재를 스친 한지우의 눈이 이현에게 향하더니 ‘그럼’ 하고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

    석희재는 결이 불분명한 탁자의 무늬를 관찰하고 있었다.

    캄포, 티크, 편백, 느티나무…. 알고 있는 원목의 종류를 떠올리며 이건 무슨 나무일까 생각하는 와중에 탁자의 모서리 끝에서 표면이 들뜬 부분을 발견했다. 석희재는 손가락을 가져가 조심스럽게 그곳을 꾹 눌러 보았다. 싸구려 테이블은 원목이 아니라 나뭇결무늬의 시트지를 붙인 것이었다.

    한술 더 떠서 탁자 위에는 김칫국이나 탕 따위가 말라붙은 자국이 비쳐 보였다. 머리 위에 달린 누런 할로겐 조명이 흔들릴 때마다 음식물의 자국이 테두리를 그렸다. 아까 알바생이 행주로 닦아 내는 걸 분명 보았는데도 이렇다. 닦아도 잘 지워지지 않을 만큼 묵었다는 증명일 것이다.

    석희재는 탁자에 올려 두었던 팔꿈치를 거두면서 탁자와 조금 거리를 두고 떨어져 앉았다. 머리 위의 조명에서 얼굴이 멀어지자 우뚝한 콧날이 뚜렷한 명암을 그렸다. 그렇게 테이블에서 조금 멀어진 채로 석희재는 팔짱을 끼고 작은 나무 그릇에 담긴 뻥튀기도 의심스럽게 바라보았다. 이런 가게에서 마른안주 따위를 담는 그릇을 매일 물로 세척할 리가 없었다.

    “희재 씨도 맥주 마셔요?”

    맞은편에 앉은 여자 앙상블이 말을 걸었다. 몸에 달라붙는 디자인의 니트마저 낙낙하게 주름이 생길 정도로 마른 몸매의 여자였다.

    이름이, 뭐였더라….

    석희재는 길게 이어 붙인 테이블을 둘러보았다. 아직 주문이 끝나지 않았지만 대부분 맥주 안주를 고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석희재의 귀에 멀리서 말하는 이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는 레몬 생맥주요. 700잔으로….’

    “네. 레몬 생맥주로… 700잔에 주세요.”

    “700잔이라는 게 있어요? 아, 진짜 있네. 여기 와 보셨어요?”

    석희재는 대답 대신 침묵했다. 맥주잔 중에 700잔이라는 게 어디에나 있는 건지, 드문 건지도 몰랐다. 그저 이현이 자연스럽게 시키기에 따라 한 것뿐이다.

    “지우 선배도 그걸로 일단 주세요.”

    “근데 선배는 어디 가셨지?”

    “잠깐 전화 한 통만 하고 오신대요.”

    “그걸로 시키면 돼요?”

    “네. 예전에 그거 드시는 거 봤어요.”

    이현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한지우와는 특별한 친분이 있어 보이지 않았는데 주문 내용을 알고 있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그리고 메뉴판도 보지 않고 자연스럽게 주문하는 모습에도 의문이 들었다. 이현은 이곳에 자주 와 봤다는 소리인 걸까. 그럴지도 모른다. 일 년 내내 공연의 연습 장소로 대관을 해 주고 있는 남산창작센터가 지척이었다. 함께 술을 마시러 간다는 사람들을 따라 석희재는 알지 못하는 뒷길을 따라 내려오니 명동이 지척이었고, 한지우를 비롯해 이 근방에 익숙해 보이는 이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이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석희재는 다시 이현 쪽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자신은 테이블의 가장 끄트머리 탁자에 앉아 있었다. 이현은 석희재의 맞은편 방향 끝쪽. 그나마 석희재는 그의 얼굴을 확인할 수 있는 곳에 앉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같은 줄에 앉았다면 이렇게 얼굴을 확인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선배. 저도 한 시간만 있다가 일어나도 돼요?’

    아까의 상황을 떠올리면서 석희재는 마른 입술의 표면을 조금 깨물었다. 낮에 연습실로 막 출근할 때는 제대로 잠도 자지 못한 얼굴이었으면서, 굳이 피곤한 자리에 자처해서 끼는 그의 태도 때문에 마음이 상했다.

    이현은 잠이 부족하면 금방 얼굴에 티가 난다. 원래 날렵했던 얼굴이 붓기로 조금 통통해지고 눈두덩이는 다홍색으로 붉어진다.

    그렇게 피곤하면, 집에 가서 잠이나 자지.

    원망하면서도 석희재는 이현을 따라왔다. 설마 한지우와 둘이서 술잔을 기울일까 안달을 냈던 자신을 비웃듯이 한지우는 여기저기에 태연하게 말을 붙였다.

    ‘술 한잔하고 갈래?’

    그렇게 꽃에 꼬인 벌처럼 몰려든 인원은 열 명이 훌쩍 넘었다.

    “희재 씨는 우리 공연 팀하고 술 마시는 거 처음이에요?”

    다시 맞은편의 여자가 자연스럽게 말을 붙여 왔다. 이름이 생각났다. 유나연.

    “네. 나연… 씨는요?”

    호칭을 어색해하면서 되묻자 붙임성 좋은 유나연이 웃으며 대답했다.

    “나연 씨가 뭐예요. 그냥 누나라고 해요. 내가 두 살 많더라!”

    “네….”

    유나연은 소극장 연극배우 출신이고, 스물다섯 살이다. 뇌에 입력했던 정보가 자동으로 떠올랐다.

    공연에 캐스팅된 후 석희재는 상견례 때 보았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포털에 검색해 가며 이름과 나이를 모두 외우려고 노력했다. 이현의 추천으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됐다고 말했으니 그에게 누를 끼치기 싫었던 것이다.

    “연습보다 술 푸는 시간이 긴 건 연극만 그런 줄 알았더니 뮤지컬도 매한가지네. 난 대극장은 좀 다를 줄 알았거든요.”

    “어떻게 달라요?”

    “시스템이 좀 있을 줄 알았어요. 아직까지 제가 느낀 점은 소극장은 매일 똑같은 사람들이랑 술을 마시고 대극장은 매일 다른 사람들이랑 술 마신다는 점…? 저는 어제도 붙잡혀서 진짜 죽을 뻔했어요. 아침 일곱 시까지 술을 마시는 거예요. 세상에… 맞다. 어제 이 PD님도 계셨는데.”

    유나연의 말을 들으면서 석희재는 이현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항상 이런 데서 술을 마셔요?”

    “이런 데?”

    유나연이 되물어서 석희재는 그녀와 눈을 마주치고 찬찬히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호프집, 같은.”

    “어제는 순댓국집이었어요.”

    90년대부터 영업을 해 온 것만 같은 어둑한 호프집 속 조명의 조도는 구역마다 제각각이다. 야맹증이 심한 석희재에게 그 낮은 조도는 자신을 숨기는 참호처럼 느껴졌다. 티슈 갑이나 작은 초에 덕지덕지 달라붙은 끈적한 먼지를 덜 드러나게 해 주어 어쩌면 다행이었다.

    게다가 석희재가 앉은 쪽 조명이 지나치게 어두워서인지, 이현은 테이블 끄트머리에서 느껴지는 시선을 의식하지 못한 듯했다. 그는 호프집에 입장한 뒤로 한 번도 이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덕분에 석희재는 도리어 마음 놓고 이현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이현을 살피던 석희재의 눈살이 슬그머니 찌푸려졌다. 이현이 거리낌 없이 안 씻은 나무 그릇에 들어가 있는 뻥튀기를 집어 먹었던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연습실로 출근한 거라면 오늘 하루 종일 그가 먹은 것은 간식 차에서 받은 추로스와 도시락 하나뿐이었다. 먹고 사는 게 너무 부실했다.

    석희재는 가슴에 돌덩어리가 얹힌 기분을 느꼈다. 이현을 가까이서 지켜보고 그의 영역에 들어가 그와 같은 것을 보고 느끼고 싶었다고 다짐했을 때 이런 것들은 예상하지 못했다. 실행한 지 고작 몇 주만에 석희재는 제 환상이 너무 컸다는 것, 또 이현의 일상이 그다지 아름답지 않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의 일상은 시트지를 바른 싸구려 탁자와 조미료가 잔뜩 들어간 눅눅한 튀김 안주, 설거지 따위는 하지 않는 그릇에 담긴 뻥튀기 같은 것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직함만 그럴듯한 피디일 뿐이다. 연습실에서 그가 하는 일이라곤 쓰레기를 치우거나 남의 한 끼를 챙기는 데 시간을 모조리 소비하는 타인의 뒤치다꺼리뿐이었다.

    이현의 평범한 일상을 살해한 것들의 정체를 보면서 석희재는 술로 입술을 축였다. 좋아하는 사람의 인생이 별 볼 일 없다는 사실에 마음이 쓰렸다.

    “현아. 내 거 뭐 시켰어?”

    낮은 목소리가 선명하게 귀에 꽂혔다. 마침 한지우가 바깥의 찬 바람을 몰면서 들어오고 있었다.

    잠깐 통화를 한다더니 그는 이십 분이나 자리를 비웠다. 외투도 입지 않고 가벼운 차림으로 나갔다 들어왔으면서 팔까지 걷어붙인 채였다.

    몸에 열이 많은 체질인가.

    “선배 추우시죠?”

    “어. 아직 쌀쌀하다.”

    옆자리에 한지우가 앉자마자 이현은 자연스럽게 자리를 터 주었다. 두 사람이 나란히 앉은 것도, 부족한 자리에 비집고 들어온 탓에 간격이 좁아 몸이 붙어 있는 것도 마음에 걸렸다. 순간 아예 이현 쪽으로 몸이 돌아가 있던 석희재와 한지우의 눈이 마주쳤다.

    그는 자연스럽게 미소만 보이고 말았지만 석희재는 그대로 몸이 굳었다.

    “우리 자리가 좀 멀죠?”

    유나연이 말했다. 자세를 지적받았다는 생각에 석희재는 그녀를 마주 보며 똑바로 자세를 고쳐앉았다.

    “사실 나는 어제 너무 시달려서 일부러 끝에 앉았어요. 그냥 없는 사람처럼 있다가 1차만 하고 가려고요.”

    “그럼 그냥 집에 가서 쉬는 게 낫지 않아요?”

    이현한테 하고 싶은 말이 툭 튀어나왔다. 유나연은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한지우 선배가 직접 오라고 했잖아요. 집에 갈 때 눈도장이라도 찍으려고요.”

    “…….”

    “사실 중학생 때부터 좋아했어요. 선배님이랑 같은 공연 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친해지는 건 별로 바라지도 않으니까 공연 끝날 때쯤엔 내 이름이라도 외워 주셨으면 좋겠다.”

    석희재는 질투심으로 들썩이는 마음을 애써 눌렀다. 모두가 선망하는 좋은 사람을 저 혼자 삐뚤어진 시선으로 보고 있으려니 마음이 불편했다. 누군가가 ‘한지우가 왜 싫으냐’라고 물으면 변명도 댈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 무료하고 재미없는 술자리에서 석희재가 한 일이란 한지우가 싫은 이유를 자꾸만 늘려 가는 것이었다.

    이현은 스스로 약속한 한 시간이 지나도 일어나지 않았다. 이현과 한지우는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다정히 하는지 몰라도 술자리의 큰 화제에 끼지 않았다. 둘이 마주 보고서 저들만 나직하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현의 목소리에 예민한 석희재조차 아무것도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한지우는 신뢰감 가득한 눈으로 이현의 이야기를 듣는 데 집중했다. 그가 독점하고 있는 이현의 시간을 단 1분 만이라도 얻기를 간절히 원했던 석희재는, 그 답답한 광경에서 차라리 시선을 돌리며 한숨을 쉬었다.

    저런 건 보기 싫었는데. 그렇다고 오지도 않은 상황을 상상하니 그게 더 싫었다.

    석희재는 마조히스트가 된 기분을 느끼면서 오 분에 한 번씩 그들을 바라보는 저를 증오했다. 어느새 아예 한지우 쪽으로 몸을 틀어 버린 이현은 이제 뒤통수만 보였다. 볼 수 있는 건 한지우의 얼굴뿐이었다. 여우 같은 한지우에게 이미 제 집요한 시선을 들켰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했지만 가는 시선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술은 왜 저렇게 많이 먹이는 거야.’

    둘의 앞에는 어느새 맥주잔 대신 초록 병이 놓여 있었다. 앉은 지 두 시간도 되지 않아 빈 소주병이 세 개로 늘어났다.

    석희재는 갈등하다가 초조하게 문자를 한 통 보냈다.

    「술너무 만ㅇ히먹지마」오후 7:04

    테이블 아래 숨겨서 찍느라고 오타 가득한 문자를 고치려고 하면 누군가 석희재에게 잔을 주며 그의 주의를 끌었다. 가끔씩 유나연이나 다른 사람이 말하는 화제에 고개를 끄덕이며 응답도 해 주어야 했다. 어쩔 수 없이 오타투성이 문자를 발송하고 나서 이현을 바라보았지만 그는 핸드폰을 엎어 둔 채로 진동도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다.

    석희재는 언제 이현이 집에 갈까, 그냥 그것만 생각했다.

    그러다 한지우와 이현, 두 사람이 의자를 밀고 함께 일어났다. 그걸 알아챈 건 석희재 뿐이었다. 아무도 그들에게 집중하지 않았다. 사람 많은 테이블은 화장실에 가거나 담배를 태우려 일어나는 사람들 때문에 수시로 빈자리가 생기곤 했다.

    일어나는 이현의 손에는 담뱃갑이 들려 있었다. 이현이 일어나면서 테이블을 짚으며 휘청였고,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뻔했다.

    드르륵, 의자가 밀리는 소리에 유나연이 저를 바라보았다. 조금 놀란 얼굴로.

    “…….”

    석희재는 그 시선을 모른 척하면서, 일어나는 대신 가까스로 술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귓가에 한지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취했어? 괜찮아?”

    “너무… 갑자기 일어났나 봐요. 괜찮아요.”

    “바람 좀 쐴까.”

    “네….”

    한지우는 혀가 꼬인 이현을 부축해 바깥으로 나갔다. 갑자기 속에 쏟아 넣은 술 때문에 엉망으로 취해 고개가 푹 꺾이는 와중에도 이현은 죄송하다는 말을 연발했다. 그의 허리에 닿은 한지우의 핏줄 선 손이 미친 듯이 신경 쓰였다.

    굳은 얼굴로 더러운 탁자를 내려다보던 석희재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고 말았다.

    ***

    이현은 두둥실 떠오르는 맨홀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취했는지 잘 생각이 나질 않았다. 자꾸 휘청이며 뒷걸음질을 치다가 담벼락에 어깨가 닿았다. 마침 벽에는 가두 부착된 연극의 포스터가 잔뜩 붙어 있었다.

    “불붙여 줄까?”

    한지우의 손이 얼굴 앞으로 다가와 이현은 눈을 끔벅거렸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은 언제 그랬는지 몰라도 입에 담배를 문 채였다.

    한지우는 이현의 입술에 떨어질 듯이 위태롭게 걸려 있던 담배를 수거해 갔다. 그러더니 이현의 필터가 축축한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직접 담배를 빨아들이며 불을 붙여 주었다. 끄트머리가 새빨갛게 빛나는 담배 끝에서 흰 아지랑이가 피어올랐다.

    다시 제 입술에 걸리는 담배를 보면서 이현은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지나치게 친절하신 선배님.

    “하아….”

    이현은 한숨을 쉬면서 일단 벽에 기대어 주저앉았다. 한지우는 그런 이현을 흘끔 내려다보더니 선 채로 제 몫의 담배를 피울 뿐이었다. 함께 바깥에 나온 목적은 정말로 그것뿐이라는 듯이.

    질척거리기는커녕 깔끔한 뒷모습에 이현은 어지러운 고개를 가로저어 흔들었다.

    한지우는 기억해 주고 있었다. 오래전 이현이 신입이었을 때를.

    ‘배우나 매니저나… 제작 팀 남자 막내들한테 좀 막하는 게 있지.’

    한지우는 이현이 어떤 취급을 받으며 버텼는지 다 알고 있다는 것처럼 그렇게 말해 주었다.

    ‘그래서 마음이 쓰이더라고.’

    “선배. 너무 감사해요. 선배는 진짜 고마운 사람이에요…. 진짜… 선배님 같은 배우는 없어요. 다들 얼굴에 분칠한 사람 믿지 말라고… 다아… 그럿케 말하지만….”

    아니, 내가 무슨 소리를.

    취하기는 했지만 아직 이성이 완전히 날아가지는 않은 이현은 스스로 말을 멈추었다. 혀가 꼬인 채로 이현이 횡설수설 내뱉은 말에 한지우는 그저 픽, 하고 웃더니 담배를 바닥에 던졌다. 불씨가 남은 꽁초가 짓밟히는 것을, 이현은 잠자코 바라보았다.

    다시 한지우의 손이 다가왔다.

    “재 떨어진다.”

    그러더니 빨지 않고 그저 타들어 가 긴 재가 남은 담배를 다시 입술에서 꺼내 털어 주었다.

    “그냥 버릴까?”

    “음… 네.”

    이현은 다시 주머니를 더듬으며 새것을 꺼내려고 했다. 그 손목을 잡아 온 것은 한지우였다.

    “너 진짜 많이 취했구나.”

    “네….”

    “이제 집에 들어가야겠네. 얼른 가서 자.”

    얼른 들어가서 잠이나 자라는 말에 이현은 안도했다. 왜 안도감부터 찾아오는 건지는 모를 일이다. 이현은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유 없이 친절하게 구는 상황을 두려워했다. 지나치게 다정한 선배님의 행동에 아주 약간 겁을 먹었지만…. 역시 그건 자의식과잉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말 그대로 어릴 때 고생했던 제작 팀 막내를 기억하고 마음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러자 그를 너무 귀찮게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현은 고개를 조아리며 그에게 사과하려고 했다.

    “왜. 너도 라이터 없어?”

    그 말에 이현은 제 품을 뒤졌다. 라이터가 있는지, 없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방금 전 불은 어떻게 붙였더라? 아. 선배가 해 줬지….

    하지만 술에 취한 머리로도 한지우가 한 말의 맥락이 이상하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이현은 양 손목이 붙잡힌 채로 한지우에게 끌려 일어났다. 갑자기 시야가 바뀌어 휘청하다가 이현은 한지우의 가슴팍에 이마를 부딪쳤다. 갑자기 가까워진 거리에 놀라 제 두 다리로 서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어제 무리한 데다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해 간의 해독 작용이 유독 느린 느낌이었다.

    “라이터 가져가. 뒷주머니에 있어.”

    이현은 한지우의 어깨 너머로 낯익은 사람이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가로등 불빛을 반사하는 흰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석희재였다.

    “현아. 정신 차려. 두 발로 서야지.”

    “네. 저 잘… 서 있는데요….”

    “너희 집 어디야. 내가 데려다줄까?”

    “…….”

    이현은 몸을 가누지 못하고 흐느적거렸다. 붙어 있는 두 사람을 보면서 석희재는 자신의 추측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한지우는 자신이 만지고 싶은 부분만 만진다. 옷 소매 틈으로 드러난 이현의 손목, 견갑골 아래 예쁜 선으로 떨어지는 탄탄하고 날씬한 허리, 그리고 부드러운 귓불 같은 곳들 말이다.

    그 몸을 만지고 싶은 흑심을 숨기면서 터치하게 되는 부분들이 어디인지, 석희재는 지나치게 잘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짝사랑을 숨길 때의 자신이 소극적으로 만져 보곤 했던 위치가 바로 그런 곳들이기 때문이다. 대놓고 음심을 드러낼 수 없는 상황에서 성적인 함의를 숨겨 가며 적당히 그를 느낄 수 있는 몸의 위치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런 행동을 3년이나 지속해 온 석희재는 너무나도 쉽게 한지우의 속셈을 알아챘다.

    “라이터 가져가라니깐.”

    “…….”

    “너도 취했니?”

    한지우가 다시금 물었다.

    그리고 그 물음은 바깥으로 나왔으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저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석희재가, 지금이라도 변명을 할 수 있게 틈을 주는 것 같기도 했다.

    석희재는 저를 자극하면서도 도망칠 수 있도록 틈을 주는 그의 태도가 묘하다고 생각했다. 당장 행동의 의미를 해석하는 것만으로도 벅찬 석희재에게 그보다 앞서 몇 수를 파악하고 받아치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를 이기고 싶기에 더욱 그랬다.

    석희재에게 대답이 없자 한지우는 이현의 귀에 속삭였다.

    “현아, 집에 가자.”

    석희재는 다른 건 몰라도 한 가지만은 분명하게 알았다. 여기서 자신이 조금이라도 감정적으로 나서면 저 여우 같은 남자는 제 속내를 당장 알아챌 거라는 것을.

    어쩌면 이 모든 게 저를 떠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집… 집이요? 네. 저 집에 가야겠어요….”

    “응. 우리 집으로 갈래? 여기서 가까워.”

    석희재는 작게 떨리는 주먹을 꽉 쥐었다. 품은 마음을 들키면 무조건 불리한 상황에서 게임을 시작하게 된다. 이현과의 관계를 통해 배운 것은 그런 것뿐이다. 섣불리 마음을 드러냈다가 거절당한 후유증은 아직도 석희재의 마음에 짙게 남아 있었다.

    “어, 선배 여기 계셨네요? 이 PD님 많이 취하셨어요?”

    석희재의 뒤에서 문이 벌컥 열리고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막 화장실로 향하던 누군가가 눈앞의 한지우에게 묻는다.

    “응. 얘 보내고 나도 가야 될 것 같은데. 안에 말 좀 해 주라. 나 이제 간다고.”

    “아. 벌써 가시게요?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이름 모를 누군가가 인사를 하며 화장실로 사라지자 다시 셋만 남겨졌다.

    석희재는 이게 진짜 자신이 바라던 상황인지 생각해 봤다.

    마음을 숨기며 과거의 안일한 관계에 머물러 있었다면 오늘쯤 이현과 호텔에서 만나 언제나 그랬듯이 그를 끌어안고 제 품에서 잠들게 해 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술자리에서 그가 누구와 다정히 말을 섞었는지 따위는 모르고, 한지우 같은 놈이 그 몸을 어떻게 더듬었는지도 모른 채.

    이현과 보내던 변화도, 희망도 없던 과거의 안온한 일상.

    거기 머물러 있고 싶지는 않았다. 이제는 돌아갈 수도 없었다. 그러면 자신이 할 수 있는 행동이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더 이상 마음을 들키는 걸 두려워하지는 말자. 그게 누구든….’

    “현아.”

    한지우는 다시 이현을 추슬러 안았다. 그리고 그가 다시 한번 이현의 귀에 ‘우리 집에 가자’ 하고 속삭였을 때, 석희재는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그에게 불쑥 다가갔다.

    술에 취한 이현이 아무렇게나 긍정해 버리기 전에, 석희재는 한지우의 어깨에 손을 얹고 억지로 돌렸다. 적어도 감정적으로는 굴지 말자 생각했건만 손아귀의 힘을 조절할 수가 없었다.

    “…제가 형 집 알아요.”

    이성을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에너지 소모가 극심했다.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는 데는 이골이 났다고 생각했는데 질투심을 숨기는 건 그보다도 힘든 일이었다.

    “제가 데려다 드릴게요.”

    그러나 돌아본 한지우의 얼굴에서 불쾌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오히려 ‘그럼 그렇지’에 가까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제 패를 먼저 보이고 말았다는 생각에 석희재는 울컥한 감정을 삼켰다.

    “후배님이 이 PD를 잘 따르네.”

    “…….”

    “술 취한 사람 데려다주려면 고생인데. 잘 부탁해요.”

    한지우는 제 품의 이현을 석희재에게 넘겼다.

    풀썩, 하고 익숙한 무게와 냄새가 품 안에 떨어졌다. 저도 모르게 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석희재는 가게로 들어가는 한지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지나치게 쉽게 이현을 놓아주었고, 또 깔끔하게 떠났다. 방금 전까지 모든 것은 질투심을 조절하지 못한 석희재의 망상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그리고 이현을 받아 들고나서야 안 것인데 그 사이에 이현은 인사불성인 상태였다. 아까부터 한지우의 말은 들리지 않았을 게 뻔했다. 그런데도 ‘집에 가자’ 하고 꼬여 댄 것은 석희재를 자극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대체 왜?

    머리가 복잡해진 채로 석희재는 그저 품 안의 이현을 꼭 끌어안았다.

    덫에 걸린 기분이었지만 어쨌든 만취한 이현을 전리품으로 얻었다.

    사랑은 자신을 지나치게 단순한 사람으로 만든다. 한지우의 의도 따위를 계산하려던 생각은 어느 순간 날아가 버렸다.

    석희재는 이현을 부축한 채로 누가 볼 새라 골목을 빠져나갔다.

    그 뒤로 술자리에 남은 사람들은 인사도 없이 사라진 석희재와 이현이 어디로 갔는지 간혹 궁금해했다. 그러나 많은 인원이 함께하는 술자리에서 사람이 실종되는 일은 아주 흔한 것이라 곧 잊혀졌다.

    “지우 선배. 이 PD님 가셨어요?”

    “글쎄. 그런가 봐.”

    한지우는 애매한 대답을 흘리며 그저 웃기만 했다. 두 사람이 사라진 것은 곧 잊혀졌다.

    동시에 큰길로 나간 석희재는 약간 초조한 마음으로 택시에 오르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밀폐된 공간에 들어오자 이현의 숨에서 나는 알코올 냄새가 한층 더 짙게 느껴졌다.

    “소공동으로 가 주세요.”

    택시가 출발했다. 허락된 시간이 길지 않았다. 이현이 술에서 깨기 전에, 그 마법 같은 시간이 풀리기 전에 석희재는 그를 사랑해 주고 싶었다.

    ***

    사랑하는 마음을 숨기지 않아도 되는 자유.

    지난 3년간 버틸 수 있던 이유는 바로 그 제한된 자유의 시간이 갈증 난 목을 축이듯 찾아오기 때문이었다.

    자신이 하는 것은 짝사랑일 뿐이고, 또 자신에게 허락된 지위는 섹스 파트너까지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과정이 아무렇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돌이켜 보면 꽤 괴롭고 힘든 순간들이 있었다.

    아무튼 제 위치를 정확히 파악한 이후, 석희재는 그를 사랑하는 마음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것은 이현이 잠들거나 취했을 때만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유….

    그 사랑할 자유를 한시적으로 얻은 순간, 석희재가 하고 싶은 일이란 단순했다.

    처음에는 잠든 이현을 마음껏 바라보는 것으로 시작했다.

    “호텔 로비 앞에 내려 주세요.”

    택시비를 치른 후 석희재는 축 늘어진 이현을 안아서 꺼내는 데 애를 먹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기사와 호텔 로비 앞의 보이에게 도움을 받고 나서야 겨우 그를 업어들 수 있었다.

    “감사합니다.”

    “시간이 늦지도 않은데 뭔 술을 이렇게 마셨대.”

    그렇게 말한 기사는 다시 택시를 몰고 사라졌다.

    이현을 받쳐 들면서 석희재의 속에서는 다시금 울컥 분노가 치밀었다. 작정하고 이만큼 술을 먹인 한지우에 대한 증오, 그다음으로는 그 여우 같은 남자에게 쉽게 경계를 풀고 술을 받아 마신 이현에 대한 원망.

    그러나 편하게 등 위로 늘어진 이현의 무게와 체온을 느끼다 보면 원망도 사그라들었다. 목덜미를 간지럽히는 작은 숨마저 사랑스러웠다.

    이현이 편하게 기댈 수 있도록 허리를 앞으로 기울인 채로 석희재는 체크인 절차를 마쳤다.

    “업그레이드해 드렸어요. 코너 룸으로 찾아가시면 됩니다.”

    늦은 시간 체크인을 하는 바람에 방이 남아서인지 쉽게 업그레이드를 받았다. 엘리베이터를 오르는 동안 석희재는 이현을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룸 업그레이드를 받았다며 좋아하던 이현의 얼굴이 아직도 선했다.

    게다가 지금부터 그를 위한 배려를 숨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만으로 석희재는 금세 차분히 행복해졌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석희재는 여기가 처음 이현과 만났을 때 왔던 곳의 구조와 동일하다는 것을 알아챘다. 그러자 훨씬 기분이 나아졌다. 한지우에게 슬쩍 고마운 마음이 들 만큼.

    침대 위에 조심스럽게 이현을 눕힌 후에 석희재는 그의 모자를 벗겼다. 축 늘어진 머리카락이 살랑거리며 모습을 드러냈다.

    “으음….”

    이현이 신음하며 고개를 옆으로 힘없이 떨구었다.

    그의 반응에 잠시 손을 멈췄던 석희재는 이현이 움직이지 않자 그의 점퍼와 안의 티셔츠도 벗겨 냈다. 건조대에 걸려 있던 것을 그냥 주워 입고 나왔는지 한나절이 지났는데도 옷에는 조금 접힌 자국이 남아 있었다. 아마 건조대에는 이 주 정도 걸려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의 집에 드나들지 못하게 된 지 꽤 시간이 지났지만 석희재는 여전히 그의 일상을 쉽게 그려 낼 수가 있었다.

    “현아….”

    한지우가 부르던 방식이 탐이 나서 석희재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몰래 이름을 부르며 그의 목덜미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는 것만으로도 전신에 충족감이 가득해졌다.

    혀를 내어 부드럽게 살갗의 맛을 보던 석희재는 조금 더 입술을 내려 셔츠를 입으면 보이지 않을 쇄골 가까이를 욕심내어 빨았다. 이현이 신음하며 조금 몸을 틀었다.

    “응….”

    “…….”

    석희재는 하던 행동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다시 그의 눈치를 보았다. 이현이 깨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한 후에야 제 옷을 벗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명도 전부 껐다. 그 후에 다시 쇄골을 집착적으로 물고 빨았다. 어두워서 잘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만하면 흔적이 남았을 게 분명했다. 눈을 가늘게 뜨자 흰 피부 아래로 점점이 실핏줄이 터진 흔적이 보였다.

    이현과 침대 위에 함께 눕는 사람이 누구든 이걸 봤으면 했다.

    그리고 이내 어두운 방에서 스스로 옷을 벗고 나신이 된 석희재는 이현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그에게 깊게 키스했다. 여전히 숨에서는 알코올 향이 나는데도 입술과 혀가 달았다.

    “후….”

    이미 아까부터 흥분해 단단해진 아래가 배에 닿도록 고개를 쳐들었지만, 그래도 석희재는 인내심을 가지고 이현의 몸을 꼼꼼히 애무했다. 마치 ‘연인’처럼. 머리카락을 꼼꼼히 손가락으로 빗겨 주고 어깨와 가슴, 허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끊이지 않는 키스는 물론이었다. 이마, 눈썹, 눈두덩, 뺨에 촉, 촉 하고 애정 어린 짧은 키스를 남겼다. 허락되지 않았던 방식으로 사랑해 줄 수 있는 것은 이럴 때뿐이니까.

    “현아.”

    “…응….”

    신음이 꼭 대답하는 것같이 들려 석희재는 쿡쿡 웃었다. 현아, 현아. 이름을 부르면서 그의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만지는 사이 이현이 눈을 가늘게 떴다.

    알아챈 걸까? 하지만 정신이 든 것 같진 않았다.

    정처 없이 헤매는 눈길은 여전히 멍했다.

    “현아.”

    석희재의 말에 이현은 눈을 끔벅거리다가 스스로 다리를 벌렸다. 그러더니 석희재가 잠시 움찔한 틈을 타 중얼거렸다.

    “빨리 넣어 줘….”

    그 말에 석희재는 아래가 부풀어 아플 정도로 조이는 듯한 느낌에 미간을 구겼다. 낮부터 수시로 충동질 당했던 욕망에 다시금 쉽게 불이 붙었다.

    ‘너무 오래 참았어.’

    평소의 이현과는 달리 굼뜬 행동, 쉰 목소리. 유혹이라기에는 어수룩해 보였지만 스물둘 석희재에게는 그 상대가 이현이라는 것만으로 최고의 자극제나 다름없었다.

    성기를 스스로 주무르면서 쿠퍼 액으로 귀두를 적신 석희재는 입술을 핥으며 이현의 아래에 앞머리를 맞췄다. 수백 번도 더 반복된 행위지만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흥분했다. 이현이 아니었다면 저에게 이 정도의 욕구가 있는지도 모른 채 살았을 것이다. 석희재는 제 물건을 꽉 조이는 그의 압력을 기대하면서 낮게 신음했다.

    “으응, 흐으….”

    쑤셔박히는 아래가 벅찼는지 이현은 크게 숨을 들이쉬며 심호흡하려고 노력했다. 이것 역시 석희재와의 관계에서 익숙해진 습관이었다. 석희재는 마치 고백 전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에 어쩔 줄을 몰랐다.

    성기를 쥔 채로 앞을 파묻었다가 빼고, 다시 조금 더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천천히 진입하면서 석희재는 다른 이의 흔적이 남았는지 아래를 집요하게 관찰했다. 뻐근하게 벌어진 입구 주변에 달리 찢어진 상처나 맞은 흔적은 없었다.

    최근 이현이 몸을 준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별로 이현을 만족시키지 못한 것은 분명해 보였다. 이현의 만족스러운 섹스 기준은 약간 특이하니까…. 석희재는 조금 안도했다.

    “안아 줘.”

    “…….”

    “안아 줘. 현아.”

    석희재는 음성 없이 호흡으로만 속삭이면서 이현의 팔을 제 목에 걸쳤다. 허술하게 걸쳐 놓았지만 그게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이현은 매달려 왔다. 아마도 지독하게 벌어진 아래 때문에 본능적으로 버티기 위해서겠지만.

    그래도 석희재는 이대로면 행복해서 죽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를 끌어안았다. 완전한 결합, 따뜻하게 맞닿는 가슴. 석희재는 깊이 한숨 쉬며 그에게 키스했다.

    그때였다.

    “형….”

    이현이 내뱉은 말에 석희재의 몸이 굳었다.

    누구를 부르는 것인지 알기 위해 귀 기울였을 때 이현은 다시 불분명하게 웅얼거렸다. ‘지우 형’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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