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그의 영역 (5/27)

5. 그의 영역

이현의 회사와 정식으로 미팅을 하기로 한 당일, 석희재의 가슴은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그간 회사와 계약을 마치고 프로필 사진을 찍는 등 익숙지 않은 이벤트를 몇 개 겪었지만 ‘신인 배우’로서 완전히 새로운 환경을 접한다는 것에 대한 색다른 흥분은 느끼지 못했다. 아마 유명한 스타인 어머니의 곁에서 간접적으로나마 이미 경험해 보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현과의 깜짝 만남이 준비되어 있던 당일 아침, 출근 시간 직전에 아슬아슬하게 일어나 젖은 머리를 말리는 그를 배웅할 때에는 그 어느 때보다도 떨렸다.

낯선 장소에서 이현과 곧 만난다는 생각에.

그가 저를 어떤 얼굴로 볼지… 그게 참을 수 없이 궁금해서.

이현이 항상 ‘미팅’을 하곤 하는, 그의 회사와 가까운 카페는 석희재 역시 익히 알고 있는 곳이었다. 천장이 높아 개방감이 있는 인테리어의 카페 안. 불투명한 유리로 된 가림막으로 살짝 막혀 있어 프라이버시가 약간이나마 보장되는 4인석의 자리에서 이현은 수백 번이 넘는 계약을 체결했다고 한다. 이 업계 종사자라면 대부분 그 테이블을 스쳐 가지 않았을까, 우스갯소리로 그렇게 말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이현의 직업과 그가 하는 일을 구체적으로 알게 된 후로 가끔 핑계를 만들어 대학로 근처에 오곤 했던 석희재는, 대학로에 올 때마다 꼭 이 카페를 고집했다. 혹시 우연을 가장해 이현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몇 번 정도는 불투명한 유리가 파티션처럼 세워져 있는 구석진 테이블에서 확실히 ‘업계 사람’으로 보이는 사람들을 발견하기도 했다. 한때 이현과 함께 극장에 방문했던 그의 회사 대표를 본 적도 있었다.

하지만 한 번도 이현을 만나는 행운이 따른 적은 없었다.

그래도 이현이 일상생활을 하는 공간에 발을 들이고 그가 일하는 모습을 다른 업계인들을 통해 간접적으로 상상해 본다는 것 자체가 석희재에게는 매우 설레는 경험이었다.

그런데 심지어 이제는 그와 마주 앉아 직접 계약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배우가 되겠다고 결심한 것만으로도 이현과 새로운 접점이 생겼다.

‘연출이 뉴 페이스를 찾고 있는데 다 퇴짜를 놔. 마음에 드는 얼굴이 아무도 없대. 어차피 실력이 고만고만할 거면 얼굴이라도 임팩트 있어야 된다며… 난 정말… 참 당황스러워. 그렇게 잘생긴 애들이 매체로 가지 뭐하러 무대로 와? 하여튼 있는 사람 없는 사람 다 긁어모아서 내가 400명짜리 캐스팅 리스트를 만들었다고…! 말이 돼? 400명이 누구네 개 이름이야! 연출은 한 번 후루룩 넘겨 보고 말걸, 나는 그거 만드느라 집에도 못 가고.’

피디가 되면 덜 바빠질 거라더니, 이현은 막중한 책임감에 오히려 더 쉬지를 못했다. 그리고 그때쯤 이현의 최대 고민이 바로 조연으로 들어갈 뉴 페이스의 캐스팅이었다.

‘어디서 괜찮은 애 하늘에서 뚝 안 떨어지나….’

그렇게 중얼거리던 이현은 그날 밤 드물게 섹스도 보채지 않은 채로 까무룩 잠들었다. 몇 주간 계속된 야근에 시달리다 못해 완전히 소진되어 버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석희재는 침대 머리맡에 스프링 제본이 되어 놓여 있는 번역 초고를 집어 들었다. 이현은 때때로 이처럼 대본을 직접 출력해서 제본해 오곤 했다. 아마도 이게 현재 이현을 괴롭히는 대본일 것이다.

다만 야맹증이 있어 새어 들어오는 가로등 빛만으로는 글을 읽기가 힘든 것이 문제였다. 이현의 것을 마음대로 집에 가져갈 수는 없었기 때문에 석희재는 핸드폰 손전등으로 불을 밝혀 대본을 읽었다. 빛이 새어 나갔는지 이현이 ‘으응….’ 하는 신음을 흘리며 미간을 찌푸렸다.

석희재는 그의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손으로 그의 시야를 조심스레 가려 주었다. 불편한 자세와 좁은 시야로도 석희재는 대본을 꽤 열심히 읽었다. 의외로 재밌어서 그다음 날에는 대형 서점으로 가 동일한 제목의 원서를 구해서 읽어 보기도 했다.

뮤지컬은 낯선 장르였지만 평생 음악과는 친숙했던 석희재는, 어쩌면… 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가 회사에 직접 건넨 첫 번째 제안은 흔쾌히 받아들여졌고, 미팅까지 가는 일은 놀랄 정도로 수월했다. 제 데뷔를 위해서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이 사실이었는지 박 팀장의 추진력은 놀라웠다.

석희재는 상상했다. 하늘에서 괜찮은 애가 뚝 떨어지길 바라긴 했지만 네가 배우 지망생이었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며 놀라는 이현의 얼굴을. 또 ‘네 덕분에 한시름 놨다’고 고마워하는 이현의 목소리를.

그리고 만약 잘 된다면 90일의 연습, 그리고 다시 90일의 공연 기간 내내 이현과 함께 있을 수 있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엿보지 못하고 상상만 한 그의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반대로 혹, 오디션의 결과가 좋지 않고 연출이 저를 떨어뜨린다 해도 석희재는 이현의 공적인 공간에 잠시 머물 수 있었다는 사실을 감사히 여길 것이었다.

그러나 뭔가 잘못되고 있다는 걸 알아챈 건 미팅 자리에서부터였다.

박 팀장을 따라 카페에 들어설 때만 해도 석희재는 이현의 표정을 그리며 드물게 조금 즐거워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분명 놀랄 것이다. 예상도 못 했다는 얼굴을 하고서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겠지. 그다음으로는 금세 ‘일하는 모습’으로 돌아가 계약 내용과 오디션에 관해 설명해 줄 것이다. 그러다 다른 이들 몰래 ‘너, 끝나고 보자.’ 하는 사적인 신호를 보내올지도 모른다. 화가 나 있거나, 황당해하거나, 아니면 반가워해 줄지도….

그 모든 상상이 너무나 즐거웠다.

…모든 게 다 이현을 직접 만나기 전까지만 허락된 망상이었지만 말이다.

카페의 4인용 테이블, 제 맞은편에 앉아 있는 이현의 표정은 제 기대와 전혀 달랐다. 석희재는 감정을 꾹 눌러 담은 이현의 지친 눈가를 바라보았다.

어젯밤, 늦게까지 술자리를 지키던 이현은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밤새 술을 마실 그가 걱정되어 자신 쪽에서 먼저 언제 오느냐고 문자를 보냈다. 구실은 섹스. 이현은 그 미끼를 덥석 물었다. 제가 부르지 않았다면 아마 더 늦게 돌아왔을지도 모른다.

다섯 시간은 잤으려나… 석희재는 걱정을 누르며 그를 살폈다.

지쳐 보여서인지 더 감정을 살피기가 어려웠다.

그리고 자신이 예상했던 이현의 모든 반응 중 적중한 것은 그가 놀랐다는 것, 딱 하나뿐이었다.

게다가 이현은 미팅이 끝나자마자 아무런 말도 없이 깔끔하게 자리를 떠나 버렸다. 석희재라는 신인 배우와는 사적으로 전혀 모른다는 듯이 선을 긋는 태도였다. 몰래 눈초리를 흘기거나 하는 일도 없었다.

미팅이 끝나고 나서 석희재는 얼마간은 이현의 연락을 기다렸다. 꽤 놀랐을 테니 한마디 추궁 정도는 하지 않으려나 싶어서.

그러나 아무리 핸드폰을 뚫어져라 봐도 감감무소식이었다.

“희재야. 집으로 갈 거냐? 태워 줄까.”

묵묵히 핸드폰만 바라보고 있는 석희재에게 박 팀장이 물었다. 그는 선팅을 짙게 한 검은색 카니발의 운전석에 막 올라타는 중이었다.

석희재는 고개를 저었다.

“추운데 대중교통 타려고? 약속 있으면 말해. 거기까지 태워다 줄게.”

“여기서 만나기로 했어요. 가셔도 돼요.”

석희재의 기분이 평소보다 조금 가라앉아 보인다고 생각했는지 박 팀장이 이런저런 말을 주워섬겼다.

“그래. 아무튼 오늘 얘기 잘 돼서 다행이다. 김 실장은 네가 완전히 마음에 든 모양이던데. 그 여자 그냥 기획 실장 아니야. 파워 세거든. 컴퍼니에서 긍정적이면 연출님도 따라가는 부분이 있어.”

“이 PD님은요…?”

“아, 이 PD님? 성실하지. 그런데 그 사람이 캐스팅 권한이 있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앞으로 잘 지내면 좋아. 배우들이 제일 많이 마주치고 제일 많이 커뮤니케이션하게 되는 게 제작 PD거든. 아! 주차권 깜빡했네. 난 사무실 한 번 들렀다 가야겠다.”

“…….”

“그럼 희재야. 친구 잘 만나고 들어가. 피부 상하니까 추운 데 오래 있지 말고. 내일 오전에 피부과 예약 있는 거 꼭 가고. 알았지? 오디션 일정 나오면 연락 줄게.”

박 팀장은 비상등을 켜 놓은 채로 차에서 내려 석희재의 어깨를 툭 치고는 건물 안으로 향했다. 그 건물 어딘가에 이현의 자리가 있는 사무실이 있을 것이다. 박 팀장은 지난 몇 년간 이현 PD와 일적으로 만났다고 말했다. 그가 조금 부러워졌다.

석희재는 무의미하게 건물을 올려다봤다.

찬바람이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러나 잔뜩 날이 선 바람은 결이 좋은 피부에 조금도 생채기를 내지 못하고 그저 뺨을 발갛게 물들일 뿐이었다. 건물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간 석희재는 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대로 가고 싶지 않았다.

***

이현을 사랑하게 되면서 가장 괴로웠던 기억의 순위를 매겨 보자면 아마도 첫해의 여름이 일위를 차지할 것이다. 그다음에도 우열을 매기기 어려운 사건들이 더러 있었지만 석희재는 이현과의 관계의 끈이 끊기는 순간이 가장 두렵고 또 괴로웠다.

그리고 지난 3일은 석희재에게 있어서 그 모든 순위를 뒤집을 만큼 강력한 시기였다.

‘난 같이 일하는 사람하고는 절대 안 자.’

석희재는 한 번도 자신들이 정확히 어떤 관계인지, 이현의 입으로 직접 들은 적이 없었다.

‘오늘 이렇게 만날 줄 알았으면 미리 정리하는 건데.’

아주 좋을 때는 거의 연인이나 가족과도 다름없이 친밀한 시간을 보내면서도 이현은 제게 석희재가 어떤 존재인지 단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다. 확신을 주지도 않았다. 이현에게는 관계를 정의하기 싫어하는 버릇이 있었다. 그와 제대로 엮이려면 공적인 공간으로 침입해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판단했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러나 석희재는 그때 이현의 태도를 통해 질릴 정도로 잘 알아 버렸다. 자신의 존재란 그에게 있어서 아주 잠깐의 생각 정리만으로 완전히 떨쳐 낼 수 있는 인간임을.

한마디 따지지도 못했다. 지금 정말 ‘끝’을 말하고 있는 거냐고.

3년을 만난 정이 그렇게 쉽게 떼어지는 거냐고.

‘아까 연출님하고 연락해서 바로 오디션 날짜 잡았어. 프로필 사진 보자마자 마음에 드신 것 같더라. 오디션 잘 보고… 잘됐으면 좋겠다. 너야 뭐, 타고난 게 있으니까 데뷔하면 잘 될 거야.’

진지하게 저를 격려하며 앞으로를 응원해 주는 이현이 너무나 원망스럽고 또 너무나 좋아서… 양립하기 어려운 극단의 감정에 휘말린 석희재는 통제할 수 없는 공포심에 휩싸였다.

심지어 그는 자신이 불러낸 그 짧은 사이에 앞으로 함께 일하며 서로 마주칠 순간까지 이미 그려 본 모양이었다. 아주 냉정한 사람만 발휘할 수 있는 상황 판단력이었다. 그리고 이현은 함께 일하게 될지도 모르는 그 상황을 별로 어색해하지도 않았다. 그 말인즉슨, 그는 결심하면 얼마든지 저를 초면인 사람처럼 대할 수 있다는 소리였다.

지금까지 여러 번의 위기를 겪었지만 그의 입을 통해 직접 듣는 사형선고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짝사랑에 어느 정도 면역이 되어 있다고 자신했던 석희재는… 감정을 들키기 전에 먼저 뒤돌아 버렸다.

어른이란 다 저런 건가.

스물아홉쯤 먹으면 함께 보낸 지난 시간이나 추억 같은 건 과거에 묻어 두고 저렇게 손을 놓아 버릴 수 있는 건가.

자신은 다시는 이현의 집에 발을 들일 수 없다는 상상을 하면 눈앞이 깜깜한데 그는 아닌가 보다. 그 부드러운 입술, 손등, 지치고 힘없는 웃음소리. 고개를 아주 가까이 가져다 대면 맡을 수 있는, 조용히 숨을 들이쉬고 내쉬는 그가 호흡하는 냄새.

그 모든 걸 누릴 수 있던 게 어제가 마지막이었다고 생각하면 숨이 가빠 왔다.

그날은 그해 겨울 중 가장 추운 날이었다.

아침에 차를 타고 오느라 얇은 코트 차림이었던 석희재는 이현에게서 돌아선 후에도 정처 없이 한파 속을 쏘다녔다. 그러고는 심한 독감에 걸렸다. 석희재는 그저 이상하다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다지 추위를 느끼지 못했는데도 앓는 것이 의문이었다.

첫날은 뜨겁게 달아오른 이불 속에서 혼자 쿨럭댔고, 둘째 날에는 열이 크게 올라 응급실까지 갔었다.

석희재가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박 팀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팀장님.”

한창 핸드폰을 들여다보던 박 팀장이 그 부름에 석희재가 깨어난 것을 알았는지 고개를 들었다. 시선이 마주쳤다.

그를 보자마자 석희재는 완전히 쉬어 버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 안 할래요.”

“…….”

“그거… 안 할래요.”

바짝 말라 튼 입술은 조금 말하는 것만으로도 터져서 피가 비쳤다. 박 팀장을 보기 위해 힘겹게 굴린 눈자위가 아플 정도로 뜨거웠다.

“멋대로 굴어서 죄송… 합니다.”

석희재는 그렇게 말하고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후회해 봐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현은 이미 사형선고를 내렸다.

지금 시점에서 석희재가 희망을 가진 한 가지 방법은, 이현의 공적인 영역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소망했던 그 바보 같은 기대감을 던져 버리고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거리감은 좁히지 못해도 되니까. 연인이라는 타이틀을 얻지 못해도 괜찮으니까. 어차피 연애할 시간 따위는 없는 이현의 사생활을 몰래 침범하고 파고들어서… 사랑스러운 그를 끌어안고, 상대는 모르는 혼자만의 연애를 하던 때로 돌아가는 것.

“희재야. 사라 씨가 기대 많이 하셨는데….”

“…….”

“첫 공연 꼭 보러 가겠다고 하시더라고. 너도 바라던 일이잖아. 시간은 좀 걸렸지만 요즘 사라 씨 생각도 조금 바뀐 것 같고….”

석희재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피식, 웃으려 했다. 그러나 마음대로 잘되지 않았다. 뜨거운 숨만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

눈을 감은 석희재의 창백한 얼굴은 이틀 사이 크게 수척해져 있었다. 차갑게 식은땀에 젖어 이마에 달라붙은 검은 머리카락이 유독 그 얼굴을 아파 보이게 만들었다.

“그건 이제 아무래도 상관없는데요.”

“…….”

“안 할래요, 그냥… 없던 일로 해 주세요.”

답지 않게 어린애처럼 막무가내로 요구하는 석희재를 난감한 얼굴로 보던 박 팀장은 더는 설득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혼자 남겨진 병실 안에 차차 어둠이 내렸다.

불도 켜지 않은 채로 석희재는 생각에 몰두했다.

저가 과거로 돌아가고 싶다 한들… 아무 일도 없던 척, 그렇게 이전처럼 굴어 대면 이현은 과연 모른 체하며 속아 넘어가 줄까?

고작 섹스 파트너의 관계를 유지하자고 따 놓은 당상인 배역을 차 버린 자신을 어떻게 생각할까?

자신에게 데뷔의 기회란 이현의 영역으로 들어가게 만들어 주는 도움닫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그렇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현은 특히 배우라는 직업을 가진 인간들에게 환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이미 다 끝났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석희재는 퇴원하는 순간까지 전화 한 통 없던 어머니를 떠올리면서 그럼 그렇지, 중얼거렸다. 이제는 상처받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리고,

“너 설마 나랑 연애 따위가 하고 싶은 건 아니지?”

이현이 물었다. 일그러진 얼굴로.

여전히 독감의 여파가 남아 열감이 있는 이마와 눈자위가 뜨거웠다. 석희재는 내리깔았던 눈을 들고 뜨거운 한숨을 뱉으며 되물었다. 어차피 이현의 질문에 질문으로 대답하는 것이 자신의 버릇이었다.

“그게 왜.”

“…….”

“하고 싶어 하면 안 되는 건가.”

석희재의 말에 이현은 마치 배신당한 것 같은 얼굴을 했으나 석희재는 이상하게 그 얼굴에는 별로 상처받지 않았다. 예상하던 반응이라서 그런 건지….

오히려 그가 조금이라도 감정적으로 나왔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도 모른다.

“난 해 보고 싶은데, 연애.”

이미 끝났다면, 그렇다면 더 잃을 것도 없었다.

그렇게 석희재는 처음으로 자신의 진심을 입 밖에 냈다.

***

‘연애.’ 그 단어를 들은 이현의 얼굴에 잠시 드러났던 당혹스러운 감정. 석희재는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이현의 얼굴을 말 없는 눈으로 살폈다.

그러나 고개를 숙이고 소리 없이 한숨을 뱉은 이현이 다시 고개를 들었을 때는, 얼굴 위에 조금 남아 있던 감정의 파편들을 모두 추스른 상태였다.

“왜 나지?”

이현은 별로 궁금해하는 것 같지도 않은 무감각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고는 석희재를 지나쳐 거실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는 두 사람이 함께 몸을 겹치곤 했던 소파 위에 코트를 벗어 툭, 내려놓고는 안의 재킷을 벗어 그 위로 겹쳐 올려놓았다. 가죽 시계를 풀어 또 아무렇게나 던지는 손길과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에서는 약간의 짜증까지 느껴졌다.

석희재는 눈으로 그것들을 주우며 이현의 물음을 곱씹어 봤다.

‘왜’냐니.

저 역시 마르지 않는 샘처럼 수시로 흘러넘치는 사랑의 기원을 궁금해했던 적이 있다. 그러나 모든 탐구는 실패로 돌아갔다. 애초에 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석희재가 탐구한 타인의 말 중 가장 공감했던 진리 하나는 사랑에는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저 사랑할 만한 사람이니까 사랑에 빠졌다는.

이현은 소파 위에 아무렇게나 털썩 주저앉아 몸을 기댔다. 방금 던져 버린 자기 시계를 깔고 앉은 꼴이 되었지만 의식하지도 못한 것 같았다. 뻑뻑한 눈가를 손으로 문지르며 한숨을 쉬는 이현의 표정이 석희재에게는 낯설었다. 지나치게 시니컬한 태도였다.

“너 학생이라며. 대학 다니잖아.”

그리고 퉁명스러운 말투.

석희재는 그 순간 자신이 예상하지 못한 짝사랑의 다른 시련이 있을까 봐 숨을 죽였다. 연심을 고백한 것만으로도 그는 아주 잔인해졌다.

“주변에 어리고, 예쁘고, 너 좋다는 애들 많을 거 아니야.”

“…….”

“지금 제일 만만한 게 나라서 찔러 보는 거 같은데, 그러지 마. 더 시간 많고 여기저기 놀러 다닐 수 있고… 너랑 수준 맞는 애랑 연애해.”

이현은 피로한 얼굴로 석희재와 눈을 마주쳤다. 그때에 석희재는 이현이 일터에서 습관적으로 웃는 건 저 냉정한 속내를 숨기기 위해서가 아닐까 생각했다. 얇은 속쌍꺼풀이 숨겨진, 웃지 않는 눈이 지나치게 차가웠다.

“내 수준이 뭔데.”

“아무튼 나는 아니야.”

“…….”

“넌 모르겠지만 난 이런 일 처음도 아니거든… 다들 적당히 만나다 보면 착각하게 돼.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으니까 제일 가까운 사람한테 기대는 거지. 편안함을 연애 감정으로 착각하는 거. 나는 별로….”

“착각 같은 거 아냐.”

석희재의 단호한 말에 이현은 ‘그래?’ 하는 표정으로 물끄러미 올려다보기만 했다. 그의 각오나 다짐은 저에게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는 양.

“그리고 난 네가 편했던 적 한 번도 없어.”

“…형이라고 해라. 일곱 살이나 어린 게….”

이현이 울컥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심각한 분위기에 나이로 꼰대 짓 하는 자기 자신이 싫다는 얼굴이었지만 그래도 그냥 넘어갈 수는 없었나 보다.

“내가 솔직히, 두세 살만 차이나도 내가 속 좁게 이럴 생각 없었어. 그런데 일곱 살은 너무 심하잖아.”

“…….”

“너 나랑 처음 만났을 때 막 졸업했던 거 맞지? 잘하는 짓이다. 어린 게 까져 가지고 아주 좋은 거 배웠다!”

점차 톤이 올라가는 이현의 말을 가로막듯 석희재가 나지막이 대꾸했다.

“왜 내 탓이야. 다 누구한테 배운 건데.”

그리고 이현의 얼굴은 반박할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어 버렸다. 제 무덤을 판 게 자기 자신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아 버린 듯하다.

석희재는 그 얼빠진 얼굴마저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면서 이현의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가 굳이 지적하지 않았더라도 어차피 한 번쯤은 정리해야 할 화제였다.

한때 이렇게 부르고 싶다고 꿈꿔 보기도 했고.

그래서 석희재는 태연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형.”

“…….”

“그럼 이제 형이라고 불러도 되는 거지?”

“야….”

그리고 석희재는 이현이 무어라 더 말하기 전에 몸을 돌려 부엌으로 걸어갔다.

“친해 보이고, 뭐 난 좋아.”

이현은 황당한 표정으로 석희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부엌이라도 거실과 거의 연결된 구조였기 때문에 석희재가 뭘 하려는 건지는 너무나 잘 알 수 있었다.

집주인이 돌아오기 전부터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 석희재가 뚜껑을 열자 느리게 끓던 냄비에서 흰 김이 모락모락 쏟아져 나왔다. 덩달아 맛있는 냄새도 함께.

이현은 할 말을 잃은 눈길로 석희재의 옆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느끼면서도 석희재는 태연한 표정으로 간까지 보았다.

“너 원래 이렇게 뻔뻔한 애였어?”

“저녁 안 먹었지? 일단 먹고 얘기해.”

석희재가 끓이고 있는 건 부드러운 고기가 큼직하게 들어간 비프 스튜였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식탁 가까이로 걸어갔다. 냄새가 익숙했다. 예전에도 석희재가 집에 많이 남았다며 가져다줘서 그걸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다.

“아, 잠깐… 계속은 무슨.”

“…….”

“그리고 아까는 나랑 자러 왔다며? 이건 뭐야. 완전히 만반의 준비를 하고 왔네?”

석희재는 못 들은 척 찬장에서 그릇을 익숙하게 꺼내 스튜를 담았다.

이현에게는 그와 나란히 앉아 오붓하게 밥을 먹을 생각이 없었기에 석희재가 제 몫까지 퍼담아 맞은편에 앉는다면 안 먹는다고 하려 했다. 점심 이후에 컵라면 하나로 저녁을 때우느라 허기에 혹사당하듯 배가 고팠지만 말이다.

그러나 석희재는 이미 이현의 반응을 짐작하고 있다는 듯 맞은편에 앉는 대신 도로 거실로 나갔다.

침묵이 내려앉은 집 안에 곧 석희재가 튼 TV 소리가 채워졌다. 이현은 얼떨떨해하면서도 의자를 끌어 식탁 앞에 앉았다.

“…….”

배가 고픈 것은 맞는데 이걸 먹어도 되는 건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물론 먹는다고 자신의 결정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것이다.

문제는 석희재가 그걸 여지로 받아들일지, 아닐지에 있었다.

이현은 그릇 옆에 숟가락까지 정갈하게 놓아 준 석희재의 배려를 떨떠름하게 받아들였다. 일전에도 이런 식이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가 무심했던 것인지 아니면 석희재가 아주 잘 숨겼기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맛있다.”

“…….”

“챙겨 준 건 고마워.”

“…많이 먹어.”

석희재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그렇게 말했다.

예전에는 저를 잘 보지 않는 저런 눈이 무심함의 증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자꾸만 자라나는 감정을 들키지 않기 위한 것이었다면?

이현은 아까 저가 코트며 재킷을 툭툭 떨구어 앉을 자리가 모자란 소파 구석에 얌전히 앉아 있는 석희재를 턱을 괸 채로 주시했다. 저조차도 ‘이런 남자랑 평생 한 번이라도 잘 수 있으면 행운아다’라고 생각했던 독보적인 외견. 흰 얼굴 위로 가볍게 흐트러진 먹처럼 짙은 머리카락과 짙고 긴 속눈썹 따위의 장식만으로도 화려한 얼굴이었다.

게다가 이십 대 초반이라고 생각하니 그렇게 보이는 어리고 매끈한 피부.

객관적으로 봐도 제게 목맬 이유가 없었다. 관심을 달라고 하면 가져다 바칠 사람이 줄줄 따를 게 분명했다.

저 나이면 한창 이 사람 저 사람 만나고 놀 때 아닌가.

왜 번지수 잘못 찾고 나한테 저러지.

그냥 한 번 찔러 본 건가. 그러면 진짜 용서 못 할 것 같은데.

아… 나도 그때 갓 졸업한 줄 알았으면 그렇게 안 달려들었지.

밀려오는 수치심에 다시 한번 진득한 자괴감을 느낀 이현은 말없이 그릇을 비웠다.

다 먹었다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석희재는 숟가락이 그릇에 부딪치는 소리로 식사를 마친 것을 알아차렸다. 이현이 물을 마시는 사이 일어나 다가온 석희재가 말없이 빈 그릇을 치워 갔다.

그러고는 이현이 의자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물을 틀고 자연스럽게 설거지를 했다.

이현은 소리 없이 한숨을 쉬며 석희재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반듯하고 처량한 등이 제 시선을 외면하고 있었다.

부디 이대로 나가라는 말만 하지 말아 달라는 듯이.

“나 씻는 동안, 기다리지 말고 가.”

“…….”

“피곤한 건 거짓말 아냐. 진짜 쉬고 싶어.”

이현은 일부러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했다. 석희재가 어떤 기대감에 물이 흐르던 수도를 멈추고 제 목소리에 귀 기울이려 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셔츠 위로 곧게 뻗어 드러난 흰 목이 조금 뒤를 돌아보려는 찰나.

“질척거리지 말고… 그런 거 딱 질색이니까.”

이어진 이현의 말에 석희재는 완전히 뒤를 돌아보지 못하고 멈추었다.

이쯤 독하게 말하면 상대는 보통 화를 낸다. 그리고 아쉬울 게 없는 사람들일수록 자존심에 조금 금이 간 걸로 빠르게 관계를 손절하곤 한다. 저를 쓰레기 취급하는 인간에게 매달리는 건 그 애정이 크든 작든 누구에게나 쉽지 않은 일이다.

이현 역시 여러 번의 반복으로 그걸 알았다. 자존심이란 건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이니 상관없다고 편리하게 생각하면서 스스로 구겨 대고 밟히며 살았지만, 그건 다시 회복되는 게 아니다.

자존심이 상하면 화를 내는 건, 그러니까 아주 건강한 방어기제인 셈이다.

“그게 다야?”

그러나 돌아본 석희재의 눈은 침착했다. 그는 조금도 화내지 않았다.

빛이 담기지 않은 까만 눈은 마치 먹물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아서 이현은 말문이 막혔다.

“할 거면… 좀 더 해 봐.”

“뭐?”

“나도 궁금해. 네가… 형이 나한테 심하게 굴어서, 그래서 상처받으면 언젠가는 싫어지게 될지. 그렇게 완전히 정이 떨어지게 되면… 그러면 그만할 수 있을지.”

“…….”

“그러면 차라리 우리 둘 다한테 해피엔딩일 것 같아.”

석희재의 차분하고 먹먹한 시선을 보면서 이현은 겨우 그때까지 자기가 짐작하지 못했던 한 가지 가정을 떠올렸다.

그가 연애를 상상하기 시작한 것이 비교적 최근의 충동이 아니라 혹시 오래 키워 온 꿈이 아닌가 하는.

그리고 만약 그게 맞다면, 그렇다면 더 개 같은 일이었다. 자신은 모르는 사이에 이 관계의 가해자가 되어 버린 것이니까.

함께 즐기는 줄 알았는데 그동안 저만 즐겼다는 말이다. 자신은 몰랐던 것뿐인데 그가 저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무심한 방관자가 되어 버렸다는 소리다.

자신이 제일 혐오하는 행동이었다.

이현은 입술을 한 번 꽉 깨물었다가 곧 입을 열었다.

“희재야. 한 가지만 말할게.”

“…….”

“우리는 언젠가 자연스럽게, 좋게 끝날 수도 있었는데 네가 망쳤어.”

“…….”

“선은 네가 먼저 넘은 거야. 알지?”

그리고 이현은 대답을 듣기 전에 빠르게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을 닫은 후에는 옷도 벗기 전에 샤워기 수압부터 최대로 올렸다. 바깥에 있는 사람의 인기척도 들리지 않을 정도로. 그가 서성이거나 제 행동에 귀를 기울이거나 하면 마음이 불편할 것 같아서.

‘오늘 제대로 자기는 글렀네.’

양손으로 얼굴을 문지르자 미간과 눈가에 쌓인 피로가 느껴졌다.

이기적으로 구는 건 제 전문이 아니었다. 다른 사람에게 나쁜 말을 뱉으면 입이 써서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내일도 미친 듯이 바쁠 텐데 왜 하필 석희재는 오늘 갑자기 찾아와서 저를 들쑤셔 놓은 걸까.

집과 회사만 반복해도 벅찬 일상에 이벤트가 끼어들 여지는 없다. 그것도 오늘 것은 감정 소모가 있는 이벤트였다.

얽혔던 적도 없이 조용히 멀어지는 게 낫지, 우리가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느냐고 이유를 따져 대는 건 이래서 싫다.

이현은 그가 돌아가면 현관 도어록의 비밀번호부터 바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소리에 섞여 한숨이 흘러나왔다.

***

그리고 며칠 후 이현은 김 실장으로부터 최종적으로 석희재를 캐스팅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었다.

“번복한 건 좀 그렇지만 우리도 그가 아깝기 때문에… 잘됐지 뭐.”

‘그’ 혹은 ‘그녀’라고 인칭대명사를 주로 쓰는 것이 김 실장의 버릇이었다. 별것도 아닌 문장을 곱씹으면서 이현은 그녀의 말버릇 따위를 떠올리고 있는 자신을 인지했다. 머리를 비우려 해도 잘 되지가 않았다.

석희재의 재등장이라.

아주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럴 가능성도 아예 생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이현은 알겠다고 사무적으로 대답했다.

“이 PD는 표정이 왜 그래. 별로 기쁘지가 않아 보여?”

“네? 설마요.”

“이 PD가 좋아하는 미남이 잔뜩 있고 이렇게 회사 복지가 좋은데 왜 그렇게 기운이 없어.”

“아…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저 오해 받습니다.”

이현은 내심 초조해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김 실장이 저를 놀리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무언가의 근거 있는 촉인건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공사 구분을 그렇게 철저하게 했건만 농담으로라도 저런 소리를 듣다니.

정말로 석희재와 엮여서는 안 될 일이다. ‘형’ 소리도 못 하게 해야겠다.

“그럼 우리 이제 상견례 날짜 잡을 수 있나?”

“네. 가능할 것 같습니다.”

“계약서는 다 왔고?”

“배우 세 명 아직 기다리는 중이긴 한데요. 연출님이랑 전작부터 쭉 같이해 오던 배우들이고 벌써 연습 일자까지 조정되어 있어서 확정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응. 이 PD가 연출님이랑 상의해서 공지해 줘요.”

“네.”

김 실장이 떠나자마자 이현은 연출에게 전화를 걸었다. 상견례로 항상 대관하는 장소가 있으니 공연을 하거나 스케줄이 바쁜 주연 배우들과 날짜만 잘 맞추면 될 것 같았다.

전화의 연결음을 들으면서 이현은 책상을 손가락으로 톡톡, 가볍게 건드렸다. ‘이제 겨우 상견례구나.’ 꽤 감동적인 순간인데도 그저 산을 하나 넘었다는 생각뿐, 이현은 별 감흥이 없었다. 인이 박일 정도로 익숙해졌다는 뜻이기도 하다.

‘이런 거에 설레던 때가 분명히 있었는데.’

상견례란 함께 공연을 만들어 가기로 한 배우, 스태프, 컴퍼니가 처음으로 한자리에 모두 모여 인사를 나누는 자리다. 이현 역시 최초에 일을 시작할 때는 그 자리가 가져다주는 기분 좋은 설렘에 함께 들뜨곤 했다. 유명한 배우들을 직접 보거나 사수가 정리해 준 컨택 리스트를 갖게 되면 흥분하기도 했고….

전화는 걸리지 않았다. 바쁜가 보다 생각하면서 이현은 대신 메시지를 남겨 놓았다. 그러고는 주연 배우부터 순서대로 상견례 일정 관련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다.

기계적으로 일을 하던 이현의 손은 [석희재]라는 이름에서 멈추었다.

‘안 한다고 했다가 왜… 아냐. 자의식과잉이다. 날 보려고 다시 들어온 게 아니잖아. 그게 안 됐으니까 배역이라도 건지자 한 거겠지.’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그게 맞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현은 박 팀장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준비되어 있던 내용에 받는 사람 이름만 바꾼 것이었다.

답은 꽤 빨랐다.

「PD님 박 팀장입니다^^ 앞으로 공연 관련 건은 배우하고 직접 소통해 주세요.」오전 10:42

이게 무슨 말인가? 이현이 메시지를 가만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두 번째 메시지가 날아왔다.

「우리 배우가 일 배우면서 하고 싶다네요. 현장도 잘 가르쳐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PD님만 믿습니다^^」오전 10:43

‘이게 웬 수작인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이현은 역시 기계적으로 답을 보냈다.

「알겠습니다. 배우에게 직접 연락할게요. 박 팀장님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오전 10:44

「네 PD님. ^^」오전 10:44

「칼퇴하시고요^ㅁ^」오전 10:44

「피디님도요>ㅁ<」오전 10:44

「>.<」오전 10:44

「^O^」오전 10:44

끝나지 않는 이모티콘 기 싸움에 먼저 핸드폰을 내려놓은 것은 이현 쪽이었다. 화면을 바라보는 얼굴은 피차 무표정일 텐데, 남자 둘이서 의미도 없는 귀여운 이모티콘을 주고받고 있으려니 자기 자신이 조금 한심해졌다.

매니저인 박인하 팀장이나 제작 PD인 이현이나 둘 다 영업과 사교가 반 이상은 먹고 들어가는 직업이라 그런지 이런 몸에 밴 자질구레한 습관이 적지 않았다. 한쪽이 자제하지 않으면 불편한 배려를 주고받다가 끝도 나지 않게 된다.

짧은 한숨을 쉰 이현은 일단은 석희재의 순서를 건너뛰고 모든 배우에게 연락을 돌렸다. 서른 명에 달하는 남녀 앙상블의 가장 막내까지 연락을 주고 나서야 석희재의 개인 연락처에 시선이 갔다. 그에게 연락하기 위해서는 제작 팀 컨택 리스트를 참고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저장된 번호였으니까.

“…….”

잠시 생각에 빠진 채로 입을 가리듯 손으로 턱을 괴고 있던 이현은 석희재의 번호를 편집했다. 초성만 남은 [ㅎㅈ]에서 [석희재]로. 최초에는 자각하지 못했지만, 어쩌면 선을 긋고 나서야 상식적인 관계 맺기가 가능해진 것인지도 모른다.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안녕하세요. 석희재 배우님. 라인 컴퍼니 제작 PD 이현입니다. 뮤지컬 <기적에 관하여> 상견례를 앞두고 연락 드립니다.」오전 11:27

복사한 메시지를 붙여넣기하고 이름만 바꾸어 전송했다. 답변은 금세 왔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꼭 참석하겠습니다.」오전 11:28

‘형’ 소리도 없었고 말도 짧지 않았다. 이현은 조금 안도했다. 저번에 독하게 내지른 말로 확실히 정이 떨어졌는지도 모르겠다. 하긴, 사랑보다는 자존심이 소중할 나이다.

다친 자존심의 후유증은 아주 느리게 온다. 그날은 그렇게 애절한 표정을 지었어도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는 조금씩 마음이 분노로 들끓어 머리가 차가워졌을 것이다. 이현은 석희재가 이십 대 초반의 치기로 그 분노를 키워 저를 형편없이 밟고 싶어 할 만큼 미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편이 깔끔할 테니까.

「네. 좋은 하루 보내세요.」오전 11:30

문자의 마무리는 이현이 했다. 누가 문자의 끝맺음을 하느냐로 박 팀장과 기 싸움을 했던 것과 다르게 석희재에게서 답장은 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질척거리지 말라’는 말은 꽤 유효했던 모양이다. 이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핸드폰을 엎어 두고 책상 위의 난잡한 캘린더를 바라보았다.

이제부터 상견례 장소의 대관 예약, 자리 배치, 간단한 식순까지 준비할 것이 많았다. 개중 가장 신경 써야 할 것은 바로 자리 배치다. 연출, 배우, 스태프들 서로서로가 대부분 익숙한 소극장 연극이라면 부드럽게 친목을 다지는 분위기로 갈 수도 있겠지만 이번에는 장소가 대극장이었다. 상견례나 시파티, 쫑파티 같은 때가 아니면 긴 연습과 공연 기간 내내 서로 얼굴 한 번 마주치지 않는 경우도 허다하게 생기니 아무래도 첫 만남이 중요했다.

게다가 앉는 순서만으로도 실컷 예민해지는 것이 배우라는 족속들이다. 특히 회사가 없거나 회사 파워가 약한 배우들은 조금이라도 푸대접을 받으면 날카로워지는 경우가 허다했고, 한 번 앙심을 품으면 공연이 끝날 때까지 잡음을 만들곤 했다. 특히 함께 더블로 캐스팅된 배우들의 순서를 정하는 데 신경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아무튼 배우들에게 자신이 누군가보다는 우위에 있다는 기분을 느끼게 해 줘야 했다. 그리고 보통 그 바닥을 맡는 것이 피디인 이현이었다.

얼마 후 최저 온도도 영상으로 올라가 기온이 꽤 누그러진 날, <기적에 관하여> 팀의 모든 배우 스태프가 한자리에 모였다. 경력이 긴 주연 배우들은 서로를 반갑게 맞이하며 인사를 나누었고 어린 앙상블들은 잔뜩 긴장한 기색으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이현은 앞으로 연습실로 쓸 너른 홀 안에 의자를 배치하느라 분주히 움직이다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어 보이는 앙상블에게 커피 따위를 챙겨 주며 말을 걸었다. 주차 문제로 도움을 청하는 매니저의 부름에 바깥으로 달려 나가기도 했다.

아직 날이 쌀쌀한데도 점퍼를 챙기지 못하고 가벼운 카디건 차림으로 안팎을 드나들던 이현의 볼은 금세 빨갛게 텄다.

“춥네….”

실내로 돌아온 이현은 정수기 근처에서 몸을 떨며 전에 구비해 둔 핫팩을 찾았으나 이미 남은 게 하나도 없었다. 핫팩은 대부분 배우들의 손에 하나씩 쥐어져 있었다. 그래도 북적이는 실내에 있으니 금방 온기로 괜찮아질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현은 팔짱을 낀 채로 몸을 움츠렸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남는 의자도 없었다.

이미 연출이 가운데서 자기소개와 함께 이야기를 시작한 상태였다. 달변이라 금세 분위기가 그에게 집중됐다.

그리고 가장 뒷줄에서 배우들의 뒷모습을 살펴보던 이현은 아주 익숙한 누군가를 발견했다. 빛을 튕겨 낼 정도로 짙고 까만 머리카락과 흰 목덜미, 고개를 조금 숙이고 있지만 조금도 자세가 흐트러지지 않은 반듯한 등은 분명 석희재의 것이었다.

‘언제 온 거지.’

저토록 눈에 띄는 사람이 들어서는 순간을 보지 못할 정도로 제가 정신이 없었나 생각하면서, 이현은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따랐다.

그나마 한 가지 이현을 안도하게 만든 점은 그가 저에게 쓸모없이 알은척하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현이 골머리를 싸매고 분배한 순대로, 연출에 이어 차례차례 배우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기소개를 했다. 개중에는 이현조차 실물을 처음 보는 매체 배우도 있었고 오래전부터 동경하던 선배 배우도 있었다.

특히 저와 나이 차이가 딱 열 살이 나는 미혼 남자배우를 보는 이현의 눈가가 슬며시 누그러졌다.

연상의, 연륜이 가득한, 자기 자신의 자리가 확고한 남자. 딱 이현이 좋아하는 타입이었다.

‘일터에서 이러면 참 몹쓸 짓이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이현은 입술의 온도보다 따뜻한 물을 조금 머금었다.

활동적인 직업을 가진 데다 남에게 보이는 생활에 익숙해서 그런지 삼십 대 초반처럼 보이는 선배 배우의 얼굴에는 웃을 때만 눈가에 부드럽게 주름이 졌다. 이현은 들고 있던 종이컵을 저도 모르게 조금 씹었다.

하지만 평생 자신과 얽힐 일이 없는 사람들이다. 술자리에서 배우를 이렇게 빤히 감상하듯 바라보면 금세 사심을 들키니 마음껏 볼 수도 없고… 진짜 만약에, 정말 말도 안 되는 확률이지만 제 타입에 딱 들어맞는 어떤 배우가 게이이고, 또 저를 마음에 들어 한다고 해도 이현은 자신의 헤픈 부분을 함부로 들켜서 일을 그르칠 생각이 없었다. 이 업계는 좁다. 특히 제작 PD의 지위까지 얻은 사람은 손에 꼽는다. 길게 갈 신뢰를 싸구려 욕망 때문에 망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 이런 자리에서 조금 보는 것 정도는 상관없겠지.

이현은 그 선배 배우가 조금 더 말을 길게 해 주기를 바라면서, 존재감을 작게 지우고 그를 하염없이 보았다.

PD라는 직업은 이럴 때 좋다. 프로젝트에 필수 불가결한 존재지만 겉으로 그 존재감이 드러나는 법이 없고, 다른 이들이 주목을 받을 때는 한발 물러나 있어야 하니까….

그러나 그때 이현은 찝찝한 시선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저도 모르게 자근대고 있던 종이컵 너머로 딱 한 명이 저를 돌아보고 있었다. 석희재였다.

시선에서 물리적인 힘이 느껴질 정도로 뚫어지게 본 주제에 눈이 마주치자마자 언제 보았냐는 듯이 태연한 얼굴로 다시 고개를 돌린다.

왜 저렇게 쳐다봐.

하필 넋 놓고 있을 때….

그리고 이현은 일터에서 딴짓을 하다 걸린 것 같은 기분에 혼자 찔려서 한동안 움직이질 못했다. 석희재의 반듯한 등이 괜히 자신을 비난하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석희재의 차례가 돌아왔다. 이름도, 경력도 알려지지 않은 신인의 등장에 주변이 조금 술렁였다. 그가 입을 떼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 적지 않은 듯했다. 아무래도 지나치게 잘난 저 외모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석희재가 일어나자마자 연출이 제일 먼저 박수를 쳤다. 연출이 나서서 호들갑을 떠는 모습을 보며 이현은 석희재의 앞날이란 참으로 창창하겠구나, 자연스레 짐작했다. 벌써부터 거리감이 느껴졌다.

“안녕하세요. 이번 공연으로 처음으로 활동을 시작하게 된 신인 배우… 석희재입니다. 아직 배우라고 불리는 것도 어색합니다. 열심히 하겠습니다.”

석희재는 길지 않게 인사를 마치고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박수 소리에 기묘한 웅성거림이 섞여 있었다.

그리고 이현은 그를 보는 사람들, 특히 여자들의 시선에서 따스한 선망의 눈길을 느꼈다. 방금 전 선배 배우를 보던 제 눈길도 저랬을까. 조금 전의 웅성거림은 주목도에 비해 너무 짧게 제 소개를 해 버린 석희재에게 아쉬움을 뱉거나 그의 정체를 궁금해하며 수군대던 이들의 것이었다.

어쨌든 이현은 ‘그럼 그렇지’라고 피식 웃으며 납득했다.

연습이 시작된 후의 광경이 눈에 빤히 보였다. 아니, 연습까지 기다릴 것도 없이 당장 오늘 상견례를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도 그에게 친근하게 말을 걸며 번호를 따 가려는 사람들이 엄청나게 들러붙을 것이다. 그런 걸 멀리서 구경하면서 미래 커플을 점쳐 보는 것도 소소한 재미였다.

석희재는 금세 새로운 사람을 만날 것이다.

연애에 이르기까지 사람을 부추기는 요소란 매일 마주칠 수밖에 없는 환경, 같은 목적을 공유한다는 친밀감, 그리고… 한정된 시간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의외로 매일 만나며 동고동락하는 관계는 드물어진다. 같이 공연을 하면서 커플이 되거나 결혼까지 가는 케이스가 많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또 관계 맺기에 갈증이 난 이들이 석희재를 가만두지 않을 것도 분명해 보였고.

그러니 쓸데없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저런 남자랑 한때 실컷 자 본 걸 인생의 좋은 추억으로 남기자.’

이현은 그렇게 생각하면서 남은 시간을 계산하고 잠시 자리를 떴다.

상견례를 마친 후, 이현의 예상대로 석희재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였다. 몇 살인지, 학생인지, 왜 공연부터 시작하는지, 회사가 어디인지 따위의 신변잡기를 묻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몇몇은 지금부터 뒤풀이를 하러 갈 테니 같이 가자고 제안을 하기도 했다. 한발 늦은 이들은 저 외모에 연기나 성악 전공도 아니면 곧바로 매체로 갈 게 분명한데 왜 커리어를 무대로 시작하는지 궁금해했다. 가히 주목도가 최고였다.

그때였다.

“저기, 우리 같이 일한 적 있지 않아요?”

“아… 네.”

누군가 어깨를 툭 쳐서 돌아본 이현은 아까 저가 오래 훔쳐보았던 배우가 바로 코앞까지 와있는 것을 보고 내심 놀랐다. 그가 긴가민가한 얼굴로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며 이현을 내려다보았다. 키가 훌쩍 큰 얼굴은 가까이서 보니 현실감이 없을 정도로 매끈했다.

‘역시 진짜 배우는 달라….’

이현은 그가 저를 어떻게 기억하는지 의아해하면서 선배 배우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한지우 선배님.’

“서, 선배님. 저 입사한 지 얼마 안 됐을 때 선배님 공연에서 컴퍼니 매니저 한 적이 있습니다.”

“알아요. 내가 제대로 기억했네. 이번에도 컴퍼니 매니저?”

“저 PD 됐어요.”

이현이 웃으며 대답하자 한지우의 입에서 짧은 감탄사가 나왔다.

“이 판이 이렇게 사람이 돌고 돈다니까. 그래서 막내들한테 잘해야 돼.”

“선배님은 항상 친절하셔서….”

한지우는 이현이 최초에 다른 회사에서 소극장 연극을 할 때부터 항상 ‘좋은 선배’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계기는 아주 사소하다. 연습 도중이었고, 다 함께 저녁을 먹으러 구내식당으로 올라가던 중이었다. 연습실에 두고 가면 안 되는 비품들을 정리해 들고 오느라 조금 늦게 도착한 저를 두고 모두 엘리베이터를 타 버렸는데 그 혼자 이현을 발견하고 끝까지 기다려 주었던 것이다.

찰나였지만 저를 보고 버튼을 누르던 손, 가볍게 눈짓하며 얼른 타라고 해 주던 얼굴이 아직도 어른어른했다.

같은 회사 대표나 사수도 저를 돌 보듯 했는데 주연 배우가 챙겨 주었다는 사실에 놀라서….

아마도 그때부터 연상이 좋아진 것 같다. 헤픈 기질이 마구 발동해 매일 밤 잠들기 전마다 그와의 ‘연애’를 상상했다. 한지우는 당시 결혼까지 생각하던 여자 친구가 있었으니 망상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랬다. 당시 섹스 파트너에게 ‘지우 형’이라며, 실제로는 한 번도 불러 보지 못한 이름으로 불렀다가 뺨을 맞은 적도 있었다.

이제는 배우에 대한 환상도 많이 사라졌고 자신은 닳고 닳았는데, 그 혼자만 여전히 좋은 사람으로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근데 나 회사랑 같이 온 게 아니라서… 주차권 어디서 받아야 돼?”

한지우가 약간 난처한 얼굴을 하는 것만으로도 이현은 조금 황송해졌다. 그가 어느새 말을 놓은 것은 눈치채지 못했다.

“제가 가져다 드릴게요. 잠시만 계세요.”

이현은 후다닥 자리를 벗어나며 주차권을 발급받으러 갔다. 배우에게 직접 받으라고 해도 되는 일이지만 자기가 챙겨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현이 떠나간 자리에서 한지우는 조금 무료한 얼굴로 핸드폰을 보며 벽에 기대어 섰다. 다른 이들이 인사를 하며 지나갈 때만 습관처럼 웃어 주고 다른 사람과 별로 어울리지 않는 모습을, 석희재는 멀리서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희재 씨. 그럼 뒤풀이는 안 가요?”

“네. 오늘은 선약이 있어서….”

아직 난처한 얼굴을 일부러 만들어 내지는 못하는 석희재는 그저 눈을 내리깔면서 조용히 거짓말했다. 아쉬운 소리를 한두 마디 듣기는 했지만 애초부터 갈 생각은 없었다.

“선배. 주차권 받아 왔어요.”

“아, 너무 고맙다. 귀찮게 해서 미안해.”

“아니에요. 얼마든지 시키세요. 이런 일 하려고 제가 있는데….”

그보다도 문가에 서 있던 이현의 존재가 아까부터 석희재의 온 신경을 사로잡고 있었다. 오랜만에 이현의 목소리 한 번 들을 수 있을까 싶어서 상견례에 왔건만 컴퍼니 직원들은 대표를 제외하면 단 한 명도 전면으로 나서는 일이 없었다.

제작 PD가 그토록 중요하다면서도 상견례에서 한마디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석희재에게는 이상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석희재의 등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이현에게 친근히 말을 붙였다.

“응, 너 이름이 뭐더라.”

“현이요. 이현입니다. 선배님.”

“그래, 현아. 그럼 수고해.”

석희재가 뒤를 돌아보았을 때, 이현은 허리 숙여 인사하면서 로비까지 선배 배우를 쫓아나가고 있었다.

석희재의 걸음이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나서려 할 때였다.

“희재 씨는 매니저 있어요? 주차권 안 받았으면 내가 받아다 줄까?”

“아니요, 괜찮….”

“이런 거 일일이 부탁하면 컴퍼니가 은근히 성가셔 하거든. 앞으로 연습실 올 때마다 발급받아야 할 텐데 내가 하는 법 알려 줄게.”

컴퍼니가 성가셔 할 거라는 말에 석희재의 걸음이 멈췄다. 조금 갈등하던 석희재가 다시 이현이 있는 곳을 돌아보았을 때 이미 그는 사라지고 없었다.

***

그러고 보니까 희재, 그날 인사도 없이 갔네.

이현은 표정 없는 얼굴로 모니터를 보면서 속으로만 생각했다. 상견례 중간에 저를 빤히 관찰하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한데, 올 때 갈 때 전부 얼굴을 보지 못했다. 같은 자리에 있던 것을 의식은 했으나 그 역시 사적인 친밀감을 유지할 생각은 없었다는 소리다. 다행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현은, 다행스럽게도 금세 태연해진 석희재와 달리 그렇지 못한 자신을 발견했다.

현재 그는 첫 주 연습 스케줄을 채워 넣던 중이었다. 손에 익은 대로 주연 배우들부터 쭉 채워 넣은 스케줄 표에는 석희재의 이름만 빠져 있었다.

그걸 의식하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다지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석희재는 신인인 만큼 컴퍼니 쪽 스케줄에 맞추려 할 테니 일단 임시로 연습 일정을 채우고, 스케줄 표를 보내고, 문제가 없는지 본인에게 확답을 받으면 된다. 이현이 지금까지 수도 없이 반복해 온 과정이었다.

그러나 먼저 연락한다는 것이 왠지 마음에 걸려서 무의식적으로 뒤로 미뤄 두었다.

‘없던 일로 하자고 한 게 누군데 이러고 있는지.’

후, 짧은 한숨을 쉰 이현은 마음을 다잡았다. 파트너 관계를 정리하기로 마음먹으면서 이런 상황을 아예 짐작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다. 다만 다짐했던 것처럼 뻔뻔하게 굴지 못하는 자신의 한계가 싫을 뿐. 애초에 자신의 연기력은 젬병인 걸 알면서도 호기롭게 굴었다.

이현은 책상 구석에 놓여 있는 전용 유선의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귀와 어깨 사이에 수화기를 불편하게 끼운 채로, 출력해 둔 컨택 리스트를 보며 석희재의 번호대로 다이얼을 눌렀다.

그러나 연결음이 열 번이 넘게 이어지도록 석희재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순간 광고 전화라고 오해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으로 다시 전화를 걸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 순간….

- 여보세요.

석희재가 전화를 받았다.

유선 전화를 타고 흘러온 석희재의 목소리는 차분했고 평소보다 더 건조한 결이 느껴졌다. 조금 낯설었다. ‘모르는 이에게 온 전화를 받을 때는 이런 목소리인가….’ 그렇게 생각한 이현이 수화기를 끼운 어깨를 조금 움직인 순간 수화기가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으앗.”

턱, 하고 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책상 유리에 한 번 부딪친 수화기가 책상 아래로 길게 늘어져 대롱거렸다. 무슨 소란인가 싶어 옆 파티션에서 홍보 팀 직원이 길게 목을 빼고 이쪽을 바라보기까지 할 정도였다.

허둥거리며 수화기를 집어 든 이현의 귀로 마침 석희재의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 …전화 끊습니다.

감정을 억눌렀지만 불쾌감이 진득하게 달라붙은 목소리였다.

“자, 잠시만요. 히재 씨. 저 현… 이현입니다.”

‘이연인니다’에 가까운 모자란 발음이었다. 황급히 말하느라 발음을 먹은 바보 같은 말투에 혀를 깨물고 싶었다.

어쨌든 타이밍이 늦지는 않았는지 다행히도 상대는 전화를 끊지 않았다.

“다름이 아니고 연습, 연습 스케줄 좀 상의하려고 연락드렸어요.”

- …….

“지금 통화 괜찮으시죠?”

석희재의 침묵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희재야’에서 ‘희재 씨’로. 또 반말에서 존대가 된 말투를 받아들이는 데 시간이 걸렸을 뿐인지 느리게, 또 편안하게 대답해 왔다.

- 말씀하세요.

그 대답에 안도한 이현은 의자를 당겨 앉으면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그래도 일단 해 보니까 이렇게 쉬운 걸 왜 저도 모르게 주저했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면서.

“연습 일정 먼저 대략적으로 설명드릴게요. 선호하는 시간대, 가능한 시간대 있으면 말씀해 주세요. 최대한 맞춰서 짜 보겠습니다.”

- …….

“연출님께서 희재 씨가 대극장 뮤지컬이 첫 경험이니까, 초반에는 자기 출연 장면이 없을 때도 와서 꼭 참관했으면 좋겠다고 하시던데. 시간은 다 괜찮으세요?”

- 괜찮은지 아닌지는, 일정표를 봐야 알겠는데요.

“네… 그렇죠.”

이현은 한 손으로 전화기를 든 채로 다른 손에 마우스를 쥐었다. 작성 중이던 시트를 확대해 보니 연습 첫날부터 석희재가 맡은 배역의 개인 레슨이 있었다.

첫날 일정을 설명하려고 이현이 입을 뗐을 때였다. 수화기에서 나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그런데 일정 조정할 때는 미팅은 안 하시는지.

“네?”

말끝이 애매한 석희재의 말을 들은 이현의 손이 멈추었다.

- 저는 직접 만나서 설명을 듣는 게 더 빠를 것 같아서요.

“어….”

- 제가 모르는 게 많기도 하고.

“아… 그럼 그렇게, 할까요.”

이현은 뜸을 들이면서 캘린더 쪽으로 눈을 굴렸다. 연습 일정을 조정한다고 배우들과 미팅을 하는 것은 썩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 핑계, 저 핑계 대가며 만남을 피해 봤자 조만간 피하기도 어려울 만큼 자주 마주칠 것이고.

내성을 만드는 게 낫겠지….

그렇게 납득한 이현이 물었다.

“혹시 대학로 근처로 와 주실 수 있습니까?”

이현의 말에 석희재는 흔쾌히 가능하다고 말해 왔다.

장소는 회사 근처의 카페, 시간은 5시 반. 미팅은 아마 길어도 30분을 넘기지 않을 것이었다. 짧은 미팅인데 괜한 걸음 하는 게 아닌지 재차 묻는 이현에게 석희재는 크게 부담스러운 일도 아니니 괜찮다고 거듭 강조했다.

- 그럼 그날 뵙겠습니다.

석희재는 깍듯하게 말하며 먼저 전화를 끊었다.

조금이라도 사적인 이야기를 들먹이며 질척거릴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것과 달리 아주 깔끔한 인사였다. 이현은 괜히 귓불을 매만지면서 일정이 빠듯한 탁상용 캘린더에 방금 새로 추가된 일정을 짧게 적어넣었다.

5:30/미팅, 석희재

***

“이 PD 왜 그래? 무슨 문제 있어?”

평소와 별다를 것 없는 오후, 예리하게 부하 직원의 얼굴을 살핀 김 실장의 물음이 들려왔다. 이현은 무너져 있는 허리를 일으킬 생각도 하지 않은 채 중얼거렸다.

“악보 최종이 첫 연습 전에 안 나오겠는데요….”

“또? 음악 감독은 뭐라고 해요?”

“잠수 탔어요.”

‘저런.’ 김 실장이 예상했다는 듯이 혀를 찼다. 예술병이 도진 스태프와 일정 사이에서 항상 고통받는 것은 그 사이에서 조율을 맡은 이현뿐이다.

이현은 답이 없는 음악 감독을 계속 쪼는 대신 조감독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그중 이현의 또래인 조감독 하나가 다행히 금세 전화를 받았다.

현재 음감님이 첫 연습을 앞두고 많이 예민하다든가, 악보는 못 나와도 MR이 녹음된 파일은 줄 수 있다든가 등등, 많은 변명이 있었지만 그 어느 것도 절망적인 상황에서 이현을 구제해 주지는 않았다.

첫 연습 전에 악보 최종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는 것은 악보 제본을 임시로 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까탈이 굉장한 음악 감독은 절대 무선 제본된 악보를 쓰지 않았다. 3공 바인더 링에 D링 아닌 O링만을 고집하는 예술가였다…. 게다가 이번 공연의 악보는 총 325장에 육박했다.

예견된 단순노동에 짧은 한숨을 쉰 이현은 일단 시간을 확인했다. 석희재와의 미팅이 5분도 남지 않았다.

“잠시 미팅 좀 하고 오겠습니다.”

이현은 마치 도피하듯 사무실을 나섰다. 퇴근 시간 30분 전이지만 그 시간에 퇴근할 수 있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사무실 안의 공기가 갑갑했다.

빠르게 회사 빌딩을 나선 이현은 익숙한 방향으로 향했다. 회사와 백 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이현이 미팅을 위해 애용하곤 하는 카페가 있다.

그 카페에서 이현은 수많은 배우와 스태프들, 공연계의 관계자들을 만났다. 가장 많은 쓰임은 계약 미팅, 일정 조정 같은 것들이었다. 그밖에도 페이 문제로 실랑이를 벌인 적도 있으며, 어떤 배우의 스토커나 다를 바 없는 진상 기자에게 배우 연락처를 넘겨 달라는 협박을 받은 적도 있었다. 가장 뼈 아팠던 건 급여가 미지급된 계약직 스태프에게 주먹질을 당한 것이다.

이 카페의 주인에게 볼꼴, 못 볼꼴 다 보였지만 이현은 그런 과거를 그다지 수치스럽게 느끼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카페의 사장은 여기에 거액을 투자해 준 이현의 회사 대표와 불륜 관계인 데다가 그 적절치 못한 만남을 자신에게 몇 번이고 들켰으니까. 심지어 대표는 본부인에게서 본 열일곱 살짜리 친딸을 이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으로 쓰고 있기까지 했다.

‘말세다. 말세야.’

어떤 날에는 하루 다섯 번을 오기도 하는 엄청난 단골인 이현이 카페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사장이 눈인사를 건넸다. 이현 역시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가벼운 미소를 짓고 고개를 숙인 채 안으로 들어섰다.

세상천지에 죄짓고 사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자신이 보인 부끄러운 꼴은 그저 남의 분노를 받아넘기다 어쩔 수 없이 당한 것들뿐이다. 그러니 그런 걸로 수치스러워할 이유는 없었다.

‘아… 저 녀석한테는 좀 다른가.’

이현은 먼저 와서 앉아 있던 석희재를 금세 발견해 냈다.

좋아한다고 고백해서 이현을 감정의 비의도적 가해자로 만든 남자.

석희재는 출입문을 등지고 앉아 있었다. 아마도 지나치게 눈에 띄는 외모를 가져 주변의 시선이 성가신 사람의 무의식적인 버릇일 것이다.

하지만 넓고 판판한 등, 그리고 평범한 의자가 퍽 낮게 느껴질 정도로 긴 다리는 지나치게 돋보여… 이미 주변의 새삼스러운 주목을 끌었다. 이미 그를 흘끔대는 알바생이나 손님이 적지 않았다. 그나마 좀 나은 건 밀랍 인형처럼 깨끗한 목덜미를 오늘은 머플러로 가리고 있다는 것 정도였다.

가까이 다가가면서 이현은 저도 모르게 목 뒤를 만지작거렸다. 항상 집안에서만 만나서 저 외모의 파괴력을 느낄 새가 별로 없었는데 바깥에 나오니 새삼스럽게 의식이 됐다.

이현이 가까이 다가가자 석희재가 고개를 돌렸다. 착각이겠지만, 마치 발걸음 소리로 다가오는 이를 알아챈 듯이.

“빨리 오셨네요. 기다리셨어요?”

이현은 습관처럼 오른손을 내밀었다. 내어놓고도 이현은 속으로만 ‘아차’ 했다. 미팅 상대에게 악수를 청하는 기계적인 버릇이 석희재에게까지 나와 버렸다.

괜히 부끄러워져 다시 손을 거두려는데 석희재가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그 손을 맞잡아 왔다.

“도착한 지 얼마 안 됐어요. 반갑습니다.”

머리 위의 카페 조명을 받아 명암이 뚜렷하게 진 석희재의 얼굴은 제 착각인지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마디가 굵지 않은 희고 긴 손가락이 이현의 손바닥 전체를 쉽게 쥐어 감았다. 차지도, 따뜻하지도 않은 딱 기분 좋은 체온이다. 그리고 이현의 손을 크게 쥔 석희재의 손이 손목 안쪽을 쓸면서 부드럽게 떨어져 나갔다. 예민한 부분을 스치는 건조한 손의 질감에 괜히 소름이 돋았다.

일부러 이러는 건가, 아니면 내가 착각을 한 건가?

멀뚱멀뚱한 얼굴로 이현은 어리둥절해졌다. 석희재가 제게 고백을 하고 난 뒤로 강제 수절한 기간이 일주일이 넘었다. 바로 이곳에서 이루어진 신인 배우 미팅 날 석희재를 면전에서 맞닥뜨린 이후까지 합치면 이 주도 넘었고.

고작 이 주 동안 타인과의 스킨십이 없었다고 이러는 것인가.

이현은 자책했다.

헤픈 자식.

고작 악수로 왠지 넋이 빠진 이현은 멍하니 테이블을 돌았다. 덤덤한 얼굴로 석희재의 맞은편으로 걸어가다 말고 테이블 다리에 운동화 끝이 걸려 앞으로 엎어질 뻔했다.

“읏….”

우당탕, 소리를 낼지언정 책상을 짚고 바로 일어서서 꼴사납게 엎어지는 꼴은 면했다. 그러나 탁자 다리에 세게 부딪친 정강이가 욱신거렸다. 입술을 깨물면서 괜찮은 척 억지로 허리를 펴자 석희재가 조금 크게 뜨인 눈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매우 쪽팔린 기분이 들었다. 이현은 입술을 말아 꾹 다물면서 통증을 죽이려고 애쓰며 의자를 끌고 태연히 자리에 앉았다. 석희재는 괜찮냐고 묻고 싶은 것 같았지만 노력하는 이현의 표정을 보며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저 역시 제자리에 앉았다.

여전히 저릿한 정강이가 제 몸에서 없는 부위라고 최면을 걸면서 이현은 수첩을 펼쳤다.

“그… 처음이라서 잘 모르겠다고 하셨지만, 어렵지는 않거든요. 이야기가 길지 않을 겁니다. 길어도 삼십 분?”

이현은 헛기침하고 나서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석희재는 언제나처럼 관찰하는 듯한 눈으로 유심히 이현을 바라볼 뿐이었다.

“한 번 패턴을 알고 계시면 매주 일정은 비슷하기 때문에, 첫 주 일정이 계속 반복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개인 연습에서 런 비중이 늘어날 거고요… 그런데 뭐… 불편한 것 있으세요?”

석희재가 저를 지나치게 뚫어져라 바라보는 바람에 이현은 저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석희재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표정으로 조금 눈을 내리깔더니 말했다.

“저는 명함 안 주세요?”

명함을… 줘야 하는 거였나?

“아… 드릴까요?”

이현은 의문에 휩싸인 채로 은색의 얇은 스테인리스 명함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냈다. 그러고는 석희재의 앞에 바로 보이도록 반듯하게 내밀었다.

그걸 받아 든 석희재가 말했다.

“명함을 안 주셔서, 그때는… 그 번호가 회사 번호인지 몰랐어요.”

얼마 전의 전화 통화를 말하는 거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였다.

“네… 죄송합니다.”

“매니저 박 팀장님이 원래 신인 배우한테는 컴퍼니가 조금 소홀할 수도 있다고… 제가 먼저 잘 챙기지 않으면 안 된다고 조언해 주셨는데 진짜인가 봐요.”

“그런 거 아닙니다. 혹시나 그렇게 느끼셨으면 죄송해요.”

“오늘도 제가 미팅 요청 안 했으면 전화로 대강 메꾸려고 하셨던 거죠.”

아, 역시 복수하는구나.

이현은 왠지 혼나는 기분을 느끼면서 쩔쩔맸다. 역시 까인 뒤로 앙금이 남은 게 틀림없었다.

그리고 석희재의 사적인 복수심을 차치하더라도 이현에게는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석희재는 신인이지만 그의 회사는 결코 작지 않다는 점이다. 뮤지컬이나 연극은 그 회사에서 배우를 돌리는 극히 일부의 판일 뿐이고, 영화나 드라마 등 매체 쪽의 파워는 비할 바 없이 강력했다. 이현의 회사처럼 약소한 공연 기획사가 덤빌 덩치가 아니었다.

게다가 당장 이번 뮤지컬의 주연 중 한 명도 같은 회사이니 까딱 잘못 처신했다가는 주연과 신인을 차별하고 있다는 말이 들어가기가 쉬웠다.

거기까지 생각이 닿은 이현은 묵묵히 ‘오해하게 해서 미안해요’ 하고 중얼거렸다. 공사 구분을 하려던 것은 좋은데… 잘못하면 스스로 가시밭길을 깐 것이나 다름없게 될 터였다.

그리고 이현의 굳은 낯을 본 석희재는 가만히 그 얼굴을 보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역시 무얼 생각하는지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커피 리필 좀 해 드릴까요?”

마침 말을 걸어온 것은 카페 알바생이었다. 고맙게도 침묵을 깨 준 풋풋한 알바생의 뺨에는 살짝 홍조가 피어올라 있었다.

“여기 단골이시죠?”

“네? 아, 네… 엄청 자주 오죠.”

“아뇨, 아뇨. PD님 말고요.”

그 말에 이현과 석희재의 눈이 마주쳤다.

과거 3년간, 그저 이현을 우연히 마주치기 위해 석희재가 이곳을 무수히 드나들었다는 것을 알 리 없는 이현의 눈에는 그저 의문이 떠올라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알바생은 석희재에게 한 번 말을 걸어 볼 요량으로 그나마 편하게 여기는 이현이 있을 때 이 테이블로 찾아온 게 틀림없었고.

그 모든 걸 눈치챈 석희재는 ‘감사합니다’라는 짧은 대답으로 무어라 더 말을 붙이고 싶어 하는 알바생을 얼른 물러나게 했다. 아쉬움이 남은 듯한 알바생이 테이블을 떠나자 두 사람 사이에는 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저녁 시간이 됐네요.”

먼저 입을 연 것은 석희재였다.

“아… 벌써 그렇게 됐나요.”

이현은 내용도, 영혼도 없는 무난한 대답을 했다. 그러면서 살짝, 아주 살짝 의심했다. 이건 혹시 같이 저녁을 먹자는 수작인가, 하고.

그러고 보니 애초에 이 시간으로 약속을 잡은 것도 석희재였다.

석희재가 물을 때까지는 저녁 생각이 없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인지하지 못했던 허기가 느껴졌다. 이현은 저도 모르게 납작한 배에 손을 올려 문질렀다.

아무리 그래도 같이 저녁까지 먹을 생각은 없었다.

“희재 씨는 미팅 마치면 얼른 들어가서 식사하세요. 제가 빨리 설명 끝낼게요.”

“이 근처에서 먹고 갈까 하는데….”

“대학로 맛있는 집 추천해 드릴까요?”

“네. PD님이 좋아하시는 곳으로 알려 주세요.”

“저야 뭐 다 잘 먹죠… 미팅 끝나고 회사로 가세요? 회사가 강남이죠?”

“회사 안 들어가요. 약속도 없습니다. 시간 많아요.”

“…네, 그러세요.”

아무리 생각해도 석희재는 저에게 은근슬쩍 사적인 만남의 연장을 요구하고 있었다. 이현의 낯이 살짝 굳었을 때였다.

석희재가 대놓고 물어 왔다.

“PD님은 저녁 안 드세요?”

놀랍지도 않아서 이현은 그저 피식 웃었다.

“왜 제 저녁을 희재 씨가 챙겨요.”

그렇게 말하며 이현은 고개를 들었다.

지난번 이렇게 말했을 때, 석희재는 제법 상처받은 얼굴을 했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석희재는 가면이 조금도 깨어지지 않은 표정으로 태연하게 답했다.

“챙겨 주고 싶어서요.”

“…….”

“PD님은 제 첫사랑이랑 닮았거든요.”

훅 들어온 공격에 이현은 굳어 버리고 말았다.

“야….”

그리고 그 여파로 이현은 저도 모르게 자신이 세운 공과 사의 벽을 허물어 버렸다. ‘희재 씨’보다 훨씬 짧은 호칭을 내뱉은 다음 저 스스로 놀라 황급히 말을 주워 담으려 해 보아도 이미 늦은 일이었다.

“아니, 저기….”

이현은 낭패감이 서린 얼굴을 했다.

여러 번 말했듯이 그는 연기에 소질이 없었다. 당황스러운 말을 듣고도 태연한 척하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힘들었다. 이현은 눈을 내리깔고 얌전히 물을 마시는 석희재를 조용히 노려보았다. 저를 뒤흔들어 대는 것만이 목적이었다는 양, 그는 제 반응에 별다른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사람을… 그런 식으로 꼬셔요?”

이현이 떨떠름한 목소리로 묻자 석희재가 눈을 들었다. 내리깔았을 때는 촘촘하던 속눈썹이 깊은 눈매를 만들어 냈다. 그저 눈을 마주치는 것인데도 마치 CF의 한 장면 같았다. 눈앞에 앉아 있는 사람의 외모는 가히 비현실적이어서 석희재가 아니라 화면을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껍데기란 대체 무엇이길래. 이현은 잠시 제 안에 치밀었던 억하심정이 사르르 수그러드는 것을 느꼈다.

“별로, 그런 의도는 아니었는데요.”

“…….”

“아무튼, 그래요.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의미 부여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죠…?”

“네.”

짧게 대답한 석희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는 어렸을 때부터 돌봐 주시던 유모… 아니, 이모님이 계셨는데, 그래선지 그 나이쯤 되는 아주머니들 보면 기분이 이상해요. 혼자 식당에서 밥 먹고 계신 것만 봐도 마음이 불편하고 그래요. 챙겨 드리고 싶고.”

“…….”

“PD님도 그런 기분 아시죠.”

알다마다. 이현은 공감하면서도 그저 입을 다물었다. 저와 관계없는 완벽한 타인인데도 초라한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마음이 쓰이는 존재가 저 역시 없지 않았다.

그나저나 석희재가 이렇게 감성적인 녀석이었나.

생각해 보면 그는 이현에게 자신의 가족 이야기를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역시 있는 집 자식이었구나.’

이현의 신경은 석희재가 의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곳에 쏠렸다. ‘유모’라니. 이현의 생활양식 안에서는 다소 거리감이 느껴지는 단어였다. 그 단어를 곱씹으며 이현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석희재는 공적으로 만난 사람에게도 이렇게 금세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는 녀석이었다.

“제가 잔정이 많아요.”

마지막으로 마음에 두지 말라는 듯이 가볍게 농담조로 덧붙이는 말까지.

한 번 이현을 똑바로 응시한 눈이 다시 아래를 향했다. 식은 차를 소리 없이 마시는 석희재를 보면서 이현은 여전히 어안이 벙벙하기만 했다.

물론 자신이 석희재를 완벽히 안다고도 할 수 없지만, 지난 3년을 곁에서 지켜보면서 그가 조금은 무덤덤하고 조금은 시니컬한 면이 있다고만 판단해 왔다. 확실히 오늘의 석희재는 적응이 되지 않는다. 때로 대담하고, 방심한 순간 인간적인 모습을 드러내는 게.

“그래요….”

석희재가 본인의 사적인 이야기를 할수록 자신은 석희재를 모른다는 사실만 깨우치게 된다. 새삼 과거 3년, 살을 섞으며 한 침대에 붙어 지낸 시간이 얼마나 허무한 것이었는지 느껴졌다.

“알았으니까 다음엔 어디 가서….”

이현은 하던 말을 접었다. ‘어디 가서 그런 소리 쉽게 하지 말라’는 말을 덧붙이려다 만 것이다. 석희재 정도의 외모라면 저 비슷한 이야기만 해도 친밀감, 혹은 사심으로 오해를 하고 싶어 안달 난 사람들이 달려들 것 같아서 충고를 하려던 건데.

그러나 그게 곧 자신이 원하는 일이었다. 애정 공세를 받은 석희재가 제게서 눈을 돌려 주는 것 말이다. 게다가 이건 자신이 오지랖을 부릴 영역도 아니고.

“…어디 가시게요?”

그러나 이현의 말을 완전히 잘못 알아들은 석희재가 도로 물었다.

“네? 뭐가요.”

“어디 가신다면서요. 저녁….”

“아, 그 말이 아니라.”

그 순간 두 사람 사이로 가까이 걸어오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폭은 시원시원하게 넓으나 소리는 가벼운, 여성의 걸음이었다.

“이 PD! 미팅한다더니 그게 희재 씨였어?”

이현은 성큼 다가온 김 실장을 올려다보았다. 석희재 역시 그녀를 기억해 냈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

“희재 씨. 웬일로 대학로까지 왔어요. 집 멀잖아.”

“전 괜찮습니다.”

“저녁 약속 있어요? 온 김에 저녁 먹고 가.”

이럴 줄 알았다. 김 실장을 보았을 때부터 예감하던 사실이 들어맞았다. 시원시원한 화법으로 사람을 끌어들이는 김 실장의 뒤에서 이현은 주섬주섬 테이블 위 명함 지갑과 수첩을 챙겼다. 제대로 한 이야기도 없는데 이대로 미팅이 쫑나게 생겼다.

하지만 석희재 입장에서도 직급이 더 높은 사람과 관계를 풀어 가는 편이 훨씬 나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이현은 슬금슬금 일어날 준비를 했다. 꼭 해야 할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면 전화로 해도 될 것이고.

그런데 마침 눈이 마주친 김 실장이 말을 걸어왔다.

“이 PD. 우리 희재 씨 저녁 좀 거하게 사 주자. 우리 잘 가는 일식집 있지. 거기 룸 잡아 줘요.”

“아, 네. 전화하겠습니다… 두 명 자리로요?”

“무슨 소리야?”

김 실장이 이현의 작은 배포를 지적하듯 반문했다.

“희재 씨 여기까지 왔는데 우리 직원들 한번 인사시켜 줘야지. 제일 큰 방으로 잡아요!”

***

대체로 공연 기획사는 여초 직장이다. 대극장 뮤지컬을 꾸준히 올릴 수 있는 국내 기획사는 고작 다섯 손가락을 못 넘기는데, 그마저도 직원이 서른 안팎을 넘지 않는다. 게다가 제작 팀 일부를 빼면 대부분이 여자다. 특히 극장에 굳이 나가지 않는 사무직일수록 남자의 그림자도 보기가 쉽지 않다.

최초 이현의 연락을 받았을 때 대표로 전화를 받아 든 회계 팀 대리는 한숨을 쉬고는 ‘일도 바빠 죽겠는데 뜬금없이 회식이냐’며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이럴 바엔 그냥 돈으로 달라, 회식 때문에 퇴근이 한 시간 늦어지면 누가 책임질 거냐, 대표님 그사이에 들어오셨다가 컨펌 놓치면 실장님이 책임지냐, 등등의 아우성과 함께 컵라면으로 대충 때우겠다는 누군가의 목소리도 들려왔다.

이현은 쩔쩔매며 ‘30분만 앉았다가 가요’ 하고 어렵게 설득했다. 저한테 악감정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닌 것은 안다.

‘그냥 만만해서 그러지 뭐….’

그러나 막상 일식집의 가장 안쪽, 커다란 룸에 하나씩 들어서던 직원들은 식사 자리에 와 있는 신인 배우를 보고 한 명씩 뺨을 감싸거나 입을 틀어막았다. 이현의 귀에 소리 없는 비명이 들렸다. 다들 열광적인 반응을 보인 것과는 다르게 석희재의 옆자리에 앉는 것은 왜인지 부끄러워하고 사양하는 바람에 모두가 착석하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그리고 이현은 테이블의 가장 끝, 남는 자리에 앉았다.

“이 PD님. 이러기 있어요. 배우분 와 있다고 말은 해 줘야지.”

속삭이듯 말하며 마케팅 팀 차장이 이현의 팔뚝을 아프지 않게 찰싹 때렸다.

“그럼 내가 립글로스라도 바르고 왔지.”

“헉… 제가 생각이 짧았네요.”

면목 없이 얻어맞은 팔뚝을 쓰다듬고 있을 때 대각선 맞은편에 앉은 석희재와 눈이 마주쳤다.

이현은 먼저 시선을 피했다. 같이 저녁을 먹는 건 그렇게 사양하고 싶었는데 결과적으로 한자리에서 저녁을 먹게 됐다. 우리 직원들이랑 다 같이 회식하자는 김 실장의 갑작스러운 제안이 부담스러울 만한데도 석희재는 무슨 생각인지 거절도 하지 않고 자연스레 섞여 들었다.

“배우님은 원래 공연을 좋아하셨어요?”

코스의 시작으로 차왕무시와 작은 도미 조각이 서빙되는 사이, 볼이 발그레한 티켓 팀 직원이 질문을 던졌다. 그 질문에 석희재는 막 입으로 가져가던 도미를 내려놓았다. 이현이 보기에 저건 ‘배우님’이라는 단어가 어색한 나머지 하던 일을 잊은 것이었다.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닌데… 좋아하는 사람이 관심이 많은 것 같아서 따라서 좋아하게 됐어요.”

“와, 정말요?”

“뭐야, 뭐야. 얼굴도 비현실적인데 성격도 로맨틱해.”

“좋아하던 사람이면 여자 친구?”

“여자 친구가 공연을 좋아해요?”

석희재의 대답 하나에 질문이 마구 쏟아졌다. 석희재는 덤덤한 한마디로 모두의 기대를 빗나가는 대답을 했다.

“짝사랑이었어요.”

짝사랑. 듣고 있으려니 괜히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 같아서 이현은 조그만 달걀찜 그릇에 코를 박았다.

짝사랑이라… 그건 이현에게는 ‘사랑의 실패자’나 다름없는 타이틀이었다. 가히 트라우마급의 단어였다.

그러나 다른 이들의 반응은 달랐다. 마치 방청객 같은 호응이 쏟아져 나왔던 것이다.

“뭐야아… 이 얼굴로 어떻게 짝사랑을 해요?”

“그런데 너무 멋있다.”

“나는 가슴 아퍼. 그래서 결국 못 이뤄졌다는 거잖아.”

“그래서 배우 하시게 된 거예요?”

“유명해지고 나서 보자. 그땐 후회해도 늦었어. 뭐 이런 건가?”

석희재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희미한 미소만 입술에 올렸을 뿐이다. 그러나 타인들의 추측과 해석 사이에서 제법 그럴듯한 스토리가 만들어졌다.

“배우는 이현 PD님 추천으로 하게 된 거예요.”

석희재의 갑작스러운 발표에 여기저기서 네? 예? 진짜요? 하는 다양한 반응과 함께 없는 사람처럼 구석에서 조용히 밥을 먹던 이현에게로 시선이 쏟아졌다. 이현은 괜히 의자를 다시 고쳐 당겨 앉으면서 어쩔 줄을 몰랐다.

개중 김 실장의 시선이 가장 따가웠다.

“뭐야. 둘이 아는 사이였어? 감쪽같이 속았네.”

“아… 그렇게 친한 건 아니고.”

이현은 당황스러움을 감추지 못하고 어리바리하게 대답했다.

“아는 사이인데 미팅한다고 자리 비웠다 이거지~ 딱 걸렸어.”

그때였다. 석희재가 이현에게 모여드는 시선을 차단하듯이 말했다.

“사실 어릴 때부터 제안은 많이 받았는데 연예인으로 살 생각은 없었어요. 그런데 형이 애정 가지고 일하는 걸 쭉 지켜보니까 좋아 보여서, 그래서 생각을 바꾸게 됐어요.”

“와, 이런 얼굴 인재가 평범한 삶을 살려고 했단 말이야? 말도 안 되지. 이 PD가 큰일 했네.”

김 실장은 드물게 진심으로 감탄한 표정을 지었다.

“그럼 한 번 안 한다고 했을 때 이 PD가 설득해서 다시 하게 된 거 맞아요?”

석희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PD 제대로 한 건 했어?”

김 실장의 말에 이어 직원들이 박수갈채를 보냈다. 마치 베스트 PD상이라도 수상한 기분이었다. 이현은 어설프게 웃으면서 이게 자신에게 잘된 일인지, 아닌지 고민했다. 안 그래도 이런 면에서 성능이 느린 뇌가 낮은 효율을 자랑하며 삐걱이고 있었다.

“이 PD님 미남 좋아하잖아요. 진짜로 주변에 잘생긴 남자 수집하나 봐.”

아까 립글로스로 저를 타박했던 차장이 귓가에 속삭이는 바람에 컥, 하고 사레가 들릴 뻔했다. 얇게 저민 복어를 먹으면서 이현은 여기에 독이 들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먹고 쓰러진다면 이 상황에서 탈출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실없는 상상을 하며.

“아무튼 희재 씨. 가끔 사무실에 놀러 와요. 난 우리 직원들 이렇게 활기 넘치는 거 면접 이후로 처음 본다.”

김 실장의 말에 석희재가 확답을 받아 내듯이 다시 물었다.

“목적 없이 들르는 것도 괜찮아요?”

그 물음에 직원들이 여기저기서 재빨리 대답했다.

“네. 오늘도 지우 선배님이 컵라면 세 박스 사서 놓고 가셨는데.”

“지우 선배님은 진짜 자주 오세요.”

“잘 챙겨 주시기도 하고.”

아, 한지우 선배님.

그렇게 낮게 읊조린 석희재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식사에 집중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는 한 시간 반 동안 이어졌다. 아까는 삼십 분만에 들어가게 해 달라더니 다들 후식을 먹고도 일어날 줄을 몰랐다. 실장의 허락 아래 생맥주도 한 잔씩 마신 직원들은 기분 좋게 들뜬 상태로 이제 음주 야근을 해 보자며 사이좋게 사무실로 돌아갔다. 길목에서 소리 높여 인사하는 목소리들이 맑았다.

남은 것은 다시 김 실장과 석희재, 그리고 이현 세 사람이었다.

약간 지친 표정의 김 실장이 물었다.

“이 PD도 사무실 들어가야 돼?”

“네, 마무리할 게 좀 있습니다.”

“그래? 아까 무감님이 부르셔서. 연습실 회전 무대 들이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인가 봐. 자꾸 이 PD 좀 데리고 오라는데….”

이현은 난감하게 웃었다. 저를 부르는 이유는 하나밖에 없었다. 컴퍼니 쪽에 쌓인 불만을 털어놓고 스트레스를 풀어 낼 만한 만만한 사람이 저밖에 없어서다.

“오늘 자기는 안 데리고 갈게. 피곤할 텐데 오늘은 빨리 마치고 얼른 가서 자.”

“실장님….”

방패를 해 주겠다는 김 실장의 말에 감동받은 이현의 목소리가 조금 떨려 나왔다. 김 실장은 ‘연습 들어가면 그땐 다 자기 몫이야’ 하고 엄포를 놓고는 바람같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것은 석희재와 이현, 두 사람이었다.

이현은 실장이 타고 떠나간 택시의 뒤를 바라보다가 겨우 석희재를 향해 몸을 돌렸다.

“뭐 타고 가요. 택시?”

“…….”

“택시 잡는 거 보고 갈게요.”

바닥을 응시한 채로 말하는 이현의 얼굴에는 하루 종일 누적된 피로가 내려앉아 있었다. 석희재는 그 얼굴이 매우 익숙하다고 생각했다. 길게 빠진 눈초리 끝에 살짝 붉은 붓기가 어린, 마른 뺨과 목선이 날카로운 궤적을 그리는 얼굴.

그의 집에 가서 먼저 기다리고 있으면 이현은 항상 이런 얼굴로 퇴근하곤 했다.

익숙한 얼굴을 보니 다시금 꾹 눌러 참고 있던 사랑하는 감정이 솟아났다.

그러나 단둘이 되고 싶어 이 시간까지 기다린 것을 알면서도 이현은 모른 척 땅만 응시하고 있었다.

“보통 배우한테는 다 그렇게 하세요?”

“뭐가요?”

“택시 잡는 거, 봐주신다면서요.”

“아… 네. 그래요. 그러니까.”

이현의 목울대가 한 번 울컥 넘어갔다.

“의미 부여는 하지 말고요.”

그렇게 말하며 이현은 웃었다. 그러더니 손등으로 제 눈가를 꾹꾹 눌러 댔다.

“솔직히 아직 어려워.”

갑자기 먼저 장벽을 깨며 반말을 던지는 이현 때문에 석희재의 심장에는 불규칙한 파동이 일었다.

“어디까지 냉정해지고 얼마나 선을 그어야 맞는 건지 아직 잘 모르겠어. 너한테 선 긋는다고 다른 배우들한테 하는 만큼도 안 해 주면 그것도 우습잖아. 의식이 과한 거지.”

“…….”

“잘해 주면 내… 섹스 파트너였던 사람이 착각할 것 같고, 못해 주면 내 배우가 서운해할 것 같고 그래.”

내 배우.

석희재는 그 단어가 참 마음에 든다고 생각했다.

“너도 알겠지만 나 이런 거 진짜 못해. 선 긋는 거. 공사 구분하는 거.”

“…….”

“그래서 애초에 일하는 사람이랑 안 엮이려는 거야.”

밤바람이 찼다. 석희재는 내내 주머니 안에서 따뜻하게 달궈 놓은 손으로 그의 발간 뺨을 감싸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이현이 꽤 날카로운 눈초리로 석희재를 응시했다.

“근데 너 아까 그런 얘기는 왜 했어.”

“무슨 얘기.”

“내 추천으로 들어갔다 어쨌다… 거짓말이잖아.”

“그럼 정말로 완전히 몰랐던 사람인 척하게? 형은 거짓말도 못 하잖아.”

석희재의 말이 분하게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는지 이현은 그저 한숨 쉬며 고개를 돌렸다. 어설프게 남인 척 연기하느니, 적당한 교류를 가졌던 형 동생 사이로 보이는 게 낫다. 항상 무언가 어설픈 이현을 위해서도 그게 나았다.

“그리고 형 때문에 시작한 건 맞아.”

두 사람의 곁으로 빈 택시가 수도 없이 지나갔다. 그러나 이현은 석희재를 강제로 택시에 태울 생각이 없어 보였다. 두 사람 사이에 아직 남은 대화가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현은 무겁게 한숨을 쉬었다.

“설마… 아니지?”

“왜 아니라고 생각해.”

“나를 얼마나 못된 놈으로 만들어야 속이 풀리겠냐?”

그 말에 석희재는 말없이 고개만 가로저었다.

“형은 한 번도 나빴던 적 없어.”

“…….”

“나는 형이 있어서 행복했어.”

그리고 석희재는 이현의 옷 앞섶을 조심스레 여며 주었다. 그 희고 긴 손가락이 조그맣게 떨렸다. 아마 이현도 눈치챘을 것이다.

거절당할까 봐 두려워서 떨린 것이 아니었다. 작은 환희, 환희였다. 짝사랑을 숨기느라 자제하던 배려들을 조금 드러낸 것만으로 석희재는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사랑을 들키는 것은 자유의 또 다른 이름인지도 모른다. 해방감이 느리게 석희재의 전신을 감쌌다.

“사실 형 집까지 데려다주고 싶은데.”

그렇게 말하면서 이현을 응시하던 눈을 뗀 석희재는 멀리서 다가오는 빈 차의 빨간 불빛에 손을 뻗었다.

“먼저 갈게.”

“…….”

“내가 언제 형이 배웅해 주는 택시를 타 보겠어.”

석희재는 택시에 올라타 문을 닫았다. 그러고는 창밖에서 저를 바라보고 있는 이현에게서 먼저 고개를 돌렸다.

차가 출발했다.

석희재는 가슴께의 옷자락을 짚으며 떨리는 흉곽을 부질없이 꾹, 꾹 눌러 댔다.

내 배우.

별것도 아닌 그 단어에 너무나 심장이 뛰어서 석희재는 한참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노력해야 했다.

이게 맞는 길인지 여전히 갈피는 잡히지 않았다. 관심을 끌고 주목받는 인생에 대한 각오도 준비되지 않았다.

그러나 헤매는 사이 자신은 이현의 영역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한 번쯤 그를 우연히라도 마주치기를 바라며 수없이 드나들었던 카페에서 그와 제대로 미팅을 했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와 사적인 관계가 있다는 것도 알렸다. 이제 숨어서만 만나는 관계가 아니었다. 공개되는 순간 이현과 자신은 단단히 엮인 사이가 된다.

그리고 석희재는 이현을 믿고 있었다. 그의 위악보다 저의 사랑이 더 강할 거라고.

상처받고 상처받아도 끝내 이기는 것은 자신이 될 것이다.

<2권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