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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사랑이란 무엇인가 (4/27)
  • 4.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교양 수업의 교수는 다소 시적인 화두를 토론의 주제로 내주었다. 강의 마무리쯤에는 각자의 주관적 이론으로 무장한 목소리들로 강의실이 꽤 수선스러웠다. 석희재의 옆자리에 앉았던 한 학생은 교수가 철학과 소속이니 현학적인 관점으로 접근하는 게 유리할 거라며 참고 서적을 검색하기도 했다.

    각자의 방식으로 사랑의 정의에 다다르는 이들 사이에서 석희재는 단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석희재는 사랑의 정체에 대해 생각했다. 사랑이란 그 감정을 느끼는 자신의 마음일 수도 있으며 감정이 향하는 대상 자체를 지칭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사랑의 정체에 대해 반복해서 생각할수록 그건 아주 모호한 개념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토론을 구경하면서 느끼기에도 보편적으로 느끼는 사랑의 감정이나 그 완성의 형태에 대한 기준은 모두 불분명했다. 연애나 결혼이 사랑의 끝인가? 꼭 보상이 있어야만 하는 것일까?

    백 명의 사람이 있다면 백 가지 사랑이 있었다.

    사랑이란… 이현.

    석희재는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사랑의 가장 확실한 형태는 실재하는 이현의 존재뿐이라고 생각했다.

    수업은 정시를 약간 넘긴 시간에 끝났다. 여기저기 시끄럽게 의자를 끄는 소란 속에서 교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동일한 주제의 에세이를 다음 시간까지 제출하라는 공지사항이었다.

    에세이 과제라. 하지만 자신이 쓸 말이 지나치게 빈약해서 걱정이었다.

    사랑이란 이현이다.

    그 한마디만을 에세이에 적어 낼 수는 없었다. 교수는 애초에 정답이 없는 문제니 자유롭게 답하라고 했지만 최소한의 양식도, 논리도 갖추지 못한 글을 원하지는 않을 것이다.

    참고 서적을 찾아보는 게 좋을지도 모른다.

    자유롭게 담소를 나누며 강의실을 벗어나는 학생들 사이에서 홀로 느리게 문을 빠져나간 석희재는 그늘진 복도를 걸었다. 함께 강의를 들은 일부 학생들은 바깥에서 석희재가 나오기만을 기다리며 삼삼오오 모여 수다를 떨고 있었다. 경쾌하게 재잘대는 높은 목소리에 잠깐 주의를 줄 법한데도, 석희재는 끝까지 고개를 숙이고 눈을 내리깐 채로 복도 끝까지 걸어 나갔다. 그건 주변을 살피며 걷다가 사람들과 눈을 마주치는 걸 껄끄러워하는 석희재만의 습관이었다.

    고개를 들면 항상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게 된다. 그건 사람들이 먼저 저를 관찰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걸 나중에 알았다. 제 외모가 사람들의 주의를 끈다는 것을 깨달았던 순간부터 석희재는 언제나 제 존재감을 최소화하고만 싶어 했다.

    물론 그런 시선을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향적인 석희재에게는 해당되지 않았다. 또 사람들이 제 얼굴에서 저와 지나치게 닮은 누군가를 찾아낼까 봐 시선을 피하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아무튼 우연히 석희재와 마주치게 되면 그날 운이 좋다고 말하는 학생들이 있을 정도로, 입학한 이후로 석희재의 외모는 학교 안에서 빠르게 입소문을 탔다. 훤칠하게 큰 키만으로도 주목을 받을 텐데, 거기에 빛을 매끄럽게 반사하는 짙은 검은색의 머리카락과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강렬한 미모까지 더해져 대부분의 남학생이 적의를 가질 정도였다. 석희재 본인은 자꾸만 시선을 끄는 제 외모가 싫어 덧없이 숨기곤 했지만 독보적인 존재감은 가린다고 가려지지 않았다.

    더해서 얼굴뿐만이 아니라 곧게 선 토르소와 긴 다리 등 몸의 모든 골격이 아름답다는 점, 특히 손이 길고 예쁘다는 점, 심지어 그 손으로 섬세하게 현을 짚어 내는 바이올린 전공이라는 점까지 더해졌을 땐 외모와 합쳐져 가히 폭발적인 시너지가 났다. 입학하고 몇 주 지나지 않아 학교 홍보 팀과 입학처에서 대내외 홍보용의 화보를 찍자며 찾아왔고, 교지에 실린 사진이 퍼진 후에는 신선한 페이스의 일반인 광고 모델을 찾던 에이전시가 연락을 줄 정도였다. 물론 살면서 그런 제안을 수없이 받아 왔던 석희재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모든 CF 제안을 거절했다.

    최초 석희재의 대한 소문이 막 퍼진 것은 그가 포함된 음대뿐이었으나 점차 건물이 가까운 사회대, 공대, 문과대까지 소문이 퍼졌다. 이제는 일주일에 한 번 1학년 교양 수업 때문에 문과대 건물에 출몰하는 시간이 알려져서, 특정 수업 전후로는 근처에서 그를 기다리는 학생들도 있을 정도였다. 적지 않은 이들이 우연히 그와 엮이는 상상을 했지만 석희재는 도무지 비집고 들어갈 틈을 주지 않았다.

    날씨는 초여름에 접어들었으나 해가 들지 않는 곳은 여전히 봄의 서늘한 기운이 남아 있었다.

    지은 지 40년이 지난 낡은 문과대 건물을 나서며 푸르른 신록의 그늘 아래로 걸음을 내디딘 석희재는 눈을 찌푸렸다. 갑자기 흰 얼굴에 강렬하게 떨어지는 햇빛이 그의 시야를 괴롭혔다.

    “석희재.”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 석희재는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성악 전공의 동기 주성우였다.

    “여기서 수업 있었냐?”

    석희재는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함께 음대 방향으로 발을 옮겼다. 오래전 예원중 시절부터 알고 지내면서 둘은 꽤 가까운 사이였다. 인간관계가 그다지 넓지 않은 석희재와의 연을 놓지 않고 꾸준히 끌고 오는 친구 중 한 명이기도 했다. 입학 전 있었던 사건 때문에 다소 어색한 벽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건 자기만 가진 벽이다.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는 친구는 아직도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석희재는 주성우의 옆얼굴에 시선을 주었다.

    ‘어디까지를 사생활의 영역으로 보장해 줘야 하는 건지.’

    여전히 석희재는 고민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문제는 아직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래서 석희재는 긁어 부스럼인 화제를 꺼내는 대신 침묵을 선택했다.

    “너 바로 수업이야? 아니면 공강이야.”

    “공강.”

    “잘 됐다. 나도 여자 친구 지금 조모임 있다고 그래서. 너랑 시간이나 때워야겠다.”

    의외의 말에 석희재는 내심 놀랐다. 여자 친구가 있는지는 몰랐다.

    그러나 석희재는 대체 언제부터 사귄 거냐고, 이전에 만나던 사람은 어떻게 된 거냐고 캐묻는 대신에 뭔가 더 말하고 싶어 안달인 친구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다 좋은데, 선배가 너무 바빠. 난 틈날 때마다 보고 싶은데 선배는 내가 최우선이 아닌가 봐.”

    “설마.”

    “보통 씨씨면 기대하는 게 있잖아. 근데 만나는 빈도도 너무 뜸하고….”

    듣고 보니 그건 최근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이기도 했다. 석희재는 주성우의 연애사에 조금 관심을 가졌다. 매사 무덤덤한 친구가 귀 기울여 주었기 때문인지 주성우는 현재의 고민거리를 낱낱이 떠들어 댔다.

    지나치게 바쁜 연애 상대, 연애보다 학과 활동이 우선인 여자 친구라… 그건 의외로 공감 가는 면이 있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던 석희재에게 주성우가 물어 왔다.

    “그러고 보니까 넌 연애 안 해? 왜 조용해? 지금 주변에서 널 가만히 놔둘 리가 없는데. 설마 몰래 하고 있는 건 아니지?”

    평소 같으면 이처럼 막 던지는 돌에는 호수의 파문만큼도 반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방금 전 이야기에서 혼자만의 공감대를 형성했던 석희재는 대답을 고민하며 말없이 제 목덜미를 만지작거렸다.

    “어? 있구나. 있을 줄 알았어. 없을 리가 없지. 어떻게 만났어? 우리 학교야?”

    “우리 학교는 아닌데….”

    “학교 밖에서 만났어? 번호 따였어?”

    “내가 땄어.”

    정확히는 딴 게 아니라 훔친 것이나 다름없지만.

    그런데 석희재가 던진 의외의 대답에 흥분했는지 주성우의 목소리가 커졌다. 안 그래도 성악과라 발성이 좋은데 목소리가 지나치게 커서 주의를 끌었다.

    석희재는 가만히 눈살을 찌푸리며 그를 진정시켰다.

    “아직 사귀는 거 아니야.”

    “겸손한 척하기는. 네가 찍으면 다 된 거지! 썸 타는 중이냐?”

    “아냐, 진짜로… 사실 고민이 있는데.”

    “뭔데?”

    눈을 빛내는 주성우는 지나치게 흥미 본위로 접근하고 있었다. 그런 그에게 현재 상황을 떠드는 게 조금 부담스럽기도 했지만 주변에 달리 연애에 대한 조언을 구할 곳도 없었던 석희재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자주 만나고 싶은데 잘 안 만나 줘.”

    “뭐를. 너를?”

    “어. 바쁜 것 같기도 하고.”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널 깐단 말야? 그냥 튕기는 거 아냐?”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 도무지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의 주성우 앞에서 석희재는 머뭇거리며 물었다. 이런 조언을 구하는 건 생전 처음이라 부끄러웠다.

    “나 좀 진지한데… 데이트 신청 같은 거 어떻게 해?”

    “…….”

    “너는 처음에 고백 어떻게 했어?”

    석희재의 손가락이 제 흰 목을 감쌌다. ‘정말로 그딴 게 고민이란 말이냐?’ 멋쩍게 제 목덜미를 매만지는 석희재를 보며 주성우는 그저 황당하다는 표정이었다.

    ***

    자세하게 이야기해야 제대로 된 조언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석희재는 현재 상황을 상당히 소상히 설명했다. 상대가 남자라는 점만 빼고. 제 이야기를 듣고 난 사람이 연애 조언을 해 주기를 원했지 충격과 편견에 휩싸이는 것을 원하는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석희재의 이야기를 들은 주성우의 얼굴은 점차 심각해졌다. 잤지만, 사귀는 건 아니다. 그 관계의 시작으로 거슬러 올라가 전부 다 듣고 난 주성우는 참담한 표정이었다.

    “그 여자 몇 살이라고?”

    “…스물일곱.”

    주성우는 숫제 머리를 쥐어뜯고 있었다.

    “내 나이는 아직 말 안 했어.”

    겨우 일곱 살 차이인데 그게 저렇게 놀랄 일인가 싶어 석희재의 마음이 불편해졌다.

    “야. 접어라.”

    조언 대신 떨어진 명령과 같은 충고에 석희재는 잔잔한 충격에 휩싸였다. 게다가 가망 없다는 듯 한숨처럼 툭 내뱉은 말투에 기분이 가라앉기까지 했다.

    “그거 연애 아니고, 연애로 발전할 가능성도 없고, 그 여자는 너한테 진짜 요만큼도 이성적인 관심이 없어. 사진 없어? 어떻게 생겼는데 그렇게 콧대 높게 굴어? 연예인급이야? 그러면 인정.”

    “네가 뭔데 인정을 하고 말고야.”

    석희재가 드물게 인상을 쓰자 주성우는 답도 없다는 듯 기가 찬 얼굴이었다. 이어 피식, 비웃음을 섞어 혀를 찼다.

    “야. 너 정신 차리게, 내가 좀 세게 말해 줄까. 그 여자 너 갖고 노는 거야. 정신 차려. 그건 호감도 아니라고. 스물일곱이면 우리 같은 애들은 뭔 생각하는지 빤히 보여. 자기 손바닥 위에서 너 허둥지둥하는 꼴이 재밌어 죽을 지경일걸.”

    “…아냐. 나 아니면… 만족 못 하겠다고 했는데….”

    “와, 뒷골 당긴다. 막 흘리기까지 하네. 그게 진심일 것 같아? 막말로 그런 말 하는 상대가 너 하나겠냐? 네가 착각하고 싶어서 그 말만 기억하는 거 아니고?”

    그 말에 울컥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이유는 주성우의 말이 진실에 가깝기 때문이다. 석희재는 기억하고 있는 희곡의 대본 한 구절을 떠올렸다.

    ‘단 두 마디 말로 모든 남자를 유혹할 수 있어요. 첫째, 당신이 처음이야. 둘째, 내가 해 본 남자들 중에 당신이 제일 커. 그리고 전 아직까지 이 두 가지 말이 서로 모순이라는 걸 알아채는 남자는 한 명도 만나지 못했습니다.’

    이 대사가 끝나면 관객들은 폭소한다. 그 말에 속아 넘어가는 멍청한 남자를 비웃듯이.

    당시에는 저도 함께 웃을 수 있었는데 그 말을 한 상대가 이현이라는 것만으로도 자신은 기꺼이 속아 넘어가고 싶어진다.

    “지금 네가 해야 될 일은 딱 하나밖에 없어. 연락 먼저 끊는 거.”

    “왜 그래야 돼?”

    “네가 오 분 대기조는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 주는 거지. 부르면 달려오는 개보다는 좋은 취급 받아야 될 거 아니냐. 진짜 아주 조금이라도 너한테 마음 있으면 먼저 매달릴걸. 그런 인간들 뻔해… 기 싸움하면서 승기 잡는 건데, 좀 비싸게 굴어야 그쪽도 정신 차리지.”

    그건 엄청난 유혹이었다.

    제가 필요하다고 말하는 이현, 제게 먼저 기대어 오는 이현….

    그렇게 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와 잠시 거리를 둔다는 약간의 손해를 감수하고서 제게 매달려 오는 이현의 반응을 얻어 낼 수 있다면 더 바랄 게 없었다. 연애 경험은 없고 짝사랑의 경험은 더더욱 없었던 석희재에게는 그런 반응마저 간절했다.

    “근데 넌 그런 취급 받고 기분 나쁘지도 않냐?”

    주성우의 말에 석희재는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여 손에 턱을 괸 채로 잠시 생각에 빠졌다.

    기분이 나쁜 적은 없었다.

    기분 나빠 해야 하는 건가….

    “네 몸만 이용하고 버리는 거잖아.”

    “…난 이용 당해도 되는데.”

    석희재의 말에 주성우는 기가 막힌 표정이었다. 자기 대답이 그렇게 이상한가 싶어서 석희재는 다시금 되짚어 보았다. 하지만 그건 진심이었고 자기가 손해 보는 것도 없었다.

    대신 내내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넌 그랬어?”

    “뭐?”

    “몸만 이용당하고, 버려진 기분이었어?”

    조금 시간이 흐르고 나서 석희재의 말을 이해했는지 주성우는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변명도 생각해 내지 못한 표정이었다.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했나.

    하지만 별로 화내고 싶어서 물어본 건 아니었다. 정말로 궁금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들은 이런 경우 화를 내는 건가 싶어서.

    지난겨울, 자신이 이현과 처음 만났을 때 제 어머니가 만나던 상대가 주성우였다. 그때는 그 사실에 마음이 참 힘들었는데 지나고 나니 호텔 방에 찾아가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아무렇지 않다는 말은 아니다. 주성우에게 화를 내야 하는 건지, 아니면 제 아들의 친구와 잔 어머니를 비난해야 하는 건지… 석희재는 아직도 마음의 결정을 내리지 못했으니까.

    아니면 아무것도 판단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무감해진 건지도 모른다.

    “야, 희재야….”

    “아무튼 조언 고마워. 간다.”

    주성우는 자리를 떠나는 석희재를 붙잡지 못했다. 석희재는 그 길로 뒤돌아서면서 이내 제 어머니와 주성우의 일은 까맣게 잊어버렸다.

    약간만 거리를 두면 이현이 먼저 매달려 올지도 모른다는… 그런 약한 가능성에 완전히 매료당한 채로 망상에 빠졌다.

    석희재는 그 뒤로 딱 두 번, 이현의 연락을 거절해 봤다. 첫 번째는 약간의 텀을 두고 석희재 쪽에서 다시 연락을 넣었다. 그 짧은 사이 몸이 달았는지 이현은 평소보다 더 석희재에게 매달려 왔다. 다만 석희재가 꿈꾸는 방식과는 조금 달랐다. 이현이 외로움에 사무쳐 심정적으로 매달려 주길 원했건만, 그저 침대에서 보내는 시간이 더 과격하고 길어졌을 뿐이다.

    그리고 두 번째 연락을 거절했을 때는…

    석희재는 다시는 그때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지옥 같기만 했으니까.

    이전처럼 시간이 안 된다며 거절하고 나서 딱 삼 일 후, 석희재는 다시 이현에게 다시 연락을 해 보았다. 매달려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대답도 주지 않았다. 바빠서 그런 걸 거라며, 석희재는 자기합리화를 했다. 그러고는 지나치게 초조한 티를 내지 않으려 일부러 텀을 두고 자연스럽게 다시 연락을 시도했다. 그러나 그 어떤 방법으로도 이현과 닿을 수가 없었다.

    이현이 감감무소식이자 석희재는 완전히 길을 잃은 미아가 되어 버렸다. 연락을 보채면 그가 질릴까 봐 두려워 마음껏 연락하지도 못했다.

    그렇게 겨울부터 여름까지 반년을 공들인 관계는 석희재가 고작 두 번을 조심스레 밀어 낸 것으로 완전히 원점으로 돌아갔다.

    관계의 종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기다렸지만 석 달이 지나도록 이현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그와 다시 연결되는 방법을 어떻게 해도 알 수 없었던 석희재는 저를 가볍게 충동질한 주성우를 미친 듯이 원망했다. 또, 이대로 관계가 완전히 끝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거의 질식할 뻔했다. 주제도 모르고 그의 마음을 재 본 자신이 멍청이 같았다. 저가 유일하다고 추켜세워 주는 몇 마디 말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다…. 저만한 대용품은 그에게 널렸을지도 모르는데.

    그해 여름은 석희재가 생에 겪은 여름 중 가장 외로운 계절이었다.

    초가을이 될 때쯤에 석희재는 한 번 큰 몸살을 앓았다. 그는 7kg이 내려 야윈 몸으로 이현의 집을 무작정 찾아갔다.

    “갑자기 웬일이야?”

    이현은 석희재가 절벽 끝에 몰려 있다는 사실도 짐작하지 못한 얼굴로 그렇게 물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석희재는 그가 자신을 반가워하지도 않았지만 내치지도 않았다는 사실에 크게 안도했다.

    석희재는 눈을 감고 천천히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뜨거운 숨이 마른 입술 밖으로 흩어졌다. 이현의 목소리가 갈증으로 죽기 직전 마시는 한 모금의 물 같았다.

    그렇게 석희재는 짝사랑에 완전히 몸을 바치고 순종적으로 길들여졌다.

    이현에게 다시 받아들여지는 과정은 생각보다 쉬웠다.

    그래서 더 허탈하기도 했다.

    석희재는 여름 내내 이현을 그리워하면서 그가 제게 지나치게 냉랭하다고 생각했으나 그것도 자기만의 착각이라는 것을 차차 깨달아 갔다.

    냉랭한 태도라는 것도, 그전에 의도를 전제해야만 성립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만나 이현의 마음을 헤아려 보니 그에게는 석희재와 멀어지고자 하는 의도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이현은 애초부터 석희재에게 하룻밤 상대 이상의 의미 부여를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이는 물론이고 자신의 많은 것을 속여야만 하는 석희재의 말과 행동이 사소하게 어긋나도 눈치채지 못했다.

    ‘내게 무관심했으니까, 그러니까 받아들여진 거야.’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가 자신의 행동에 아주 약간의 관심을 기울이고 관찰했다면 아마 일찌감치 그 속내를 깨닫고 거리를 두었을 것이다.

    애초에 그의 주변에는 어떻게 하면 하룻밤을 엉망으로 놀아 볼 수 있을까 고민하며 추근대는 남자가 한둘이 아니었다. 저 역시 그렇게 여겨졌다면, 그것 역시 어찌 보면 참 다행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석희재는 집에 와서 조금 울었다.

    ‘이왕 여기까지 온 거 자고 가라.’

    그렇게 말하며 이현은 석희재의 손을 안으로 잡아 이끌었다.

    ‘나랑 자고 싶어서 온 거 아니야?’

    그렇게 묻는 그는 모든 게 다 쉬워 보였다.

    이현을 다시 만나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을 건넬까 제대로 된 계획을 세우지 못한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이게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그러나 석희재의 변명이나 연기 따위는 필요가 없었다. 이현은 오랜만이라 그리웠다는, 무심하고도 가벼운 말로 석희재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지난여름 이현의 연락을 내내 갈망하던 석희재의 앞에서 아주 쉽게 옷을 벗었다.

    난 너랑 이런 걸 하고 싶어서 온 게 아니야.

    네 목적은 이것뿐이야?

    하지만 저에게는 따져 물을 자격도 없었다. 좋아하는 이가 원하는 방식대로 응답해 주기 위해 석희재는 자신을 죽이고 충실한 개가 되었다.

    이현과 몸을 섞은 지난 밤을 떠올리며 석희재는 제 손으로 눈을 가렸다. 눈가를 덮은 손바닥에서 뜨거운 습기가 묻어 나왔다.

    아직도 온몸에 이현의 맨몸과 맞부딪쳤던 달콤한 살갗의 느낌이 남아 있었다. 그의 체취도, 손안에서 흩어지는 부드러운 머리카락도….

    그의 앞에서 울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다.

    스무 살 무렵의 첫 연애란 평생 경험하게 될 다른 연애보다는 좀 더 호기롭고 막무가내인 면이 있어도 좋을 것이다. 사랑의 정체가 무엇인지 고찰하기보다 먼저 풍덩 뛰어들어 흠뻑 빠져 경험하고, 그렇게 시행착오를 거치는 것이 그 나이에 훨씬 어울리는 연애일지도.

    그러나 석희재에게 불행, 혹은 행운이었던 점은 그의 첫사랑은 경험보다 성찰의 비중이 더 크다는 것이었다. 이현과 함께 보내는 시간은 지극히 짧은 만큼 달콤했다. 그와 떨어져 혼자 상대를 그리는 시간은 길고도 씁쓸하게 진했다. 심지어 석희재는 학습된 무력감조차 알지 못하는 스무 살이었다. 단 한 번이라도 연애를 해 보고 그 정체를 알았다면, 그 사랑이 끝난 이후 역시 상상해 볼 수 있었을 텐데.

    한 사람의 우주를 들여다보는 과정도, 세상이 다 나를 등진다한들 내 편이 되어 줄 것 같은 사람에게 신뢰를 배우는 것도 다 한때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텐데.

    연애의 끝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그 전과 달라진 자기 자신이 있을 뿐. 그러니 연애는 어쩌면 쌍방의 관계 맺기가 아니라 홀로 하는 자아 성찰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그러나 석희재는 연애의 끝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기에 변하지 않았다. 상처 입고 싶지 않아 한 꺼풀 갑옷을 덧입지도 않았고, 허물을 벗어 내고 탈피하지도 못했다.

    사랑에 있어서 그는, 이현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환상을 가지고 3년을 그대로 스무 살에 머무른 채였다.

    그 때문인지 석희재가 학교에서 종종 귀동냥으로 주워듣곤 하는 다른 친구들의 연애란 제가 겪고 있는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누군가는 제 애인이 들을 줄은 모르고 자기 이야기만 한다며 불만을 털어놓았지만 석희재는 가끔 이현이 묻지 않은 자기 이야기를 꺼내면 그렇게 설렐 수가 없었다.

    또 애인이 외모에 신경을 덜 쓰는 티가 나거나 슬리퍼를 끌면서 데이트를 하러 나오면 실망스럽다는 의견이 주류였지만 석희재는 이현이 가족처럼 허물없는 사이에나 보여 줄 법한 모습으로 집에서 절 기다리고 있으면 행복감에 차올랐다. 이현이 좀처럼 바깥의 사람들에게는 드러내지 않는 그의 속살을 볼 수 있는 거니까.

    그리고 왜 이런 차이가 생기는지 석희재도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이건 혼자 하는 연애이기 때문이다.

    날이 쌀쌀해지기 시작하는 가을의 주말 밤, 이현은 감은 뒤에 다 말리지 않아 머리가 젖은 채로 석희재의 허벅지에 머리를 대고 누워 있었다. 게으르게 누워 뻗은 손에 들린 김 빠진 맥주, 음량을 줄여 놓은 오래된 영화.

    그가 습관처럼 틀어 놓곤 하는 흑백 영화는 석희재가 이 집에 와서 벌써 8회째 보는 것이었다.

    아무래도 이현은 TV를 움직이는 액자 정도로 활용하고 있는 것 같았다. 아니면 저 영화를 지나치게 사랑하거나….

    사실 석희재는 이미 영화의 모든 대사를 외운 상태였다. 이현이 좋아하는 것을 탐구하면 그를 알 수 있을 것만 같아서 그랬다. 석희재는 갈 곳 없는 차고 넘치는 애정을 그렇게 소모시키곤 했다.

    한 번 정도는 이현이 직접 영화에 대해서 말을 꺼내지 않으려나 기대했다. 그러면 좀 더 특별한 대화를 이어 나갈 수 있을 테니까. 그에게 특별한 영화를 석희재 역시 특별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이현의 반응이 궁금했다.

    그러나 이현은 영화에 대한 감상을 늘어놓지 않았다. 어떤 부분이 특히 좋다고 말하거나 특정 대사를 언급한 적도 없었다. 영화로 취미의 일체를 이루고 싶었던 석희재의 기대에 조금도 부응하지 않았다는 소리다.

    그러면 저 영화에는 왜 집착하는 건지… 석희재가 다시 알쏭달쏭한 이현에 대해 홀로 탐구하고 있을 때였다.

    이현이 문득 입을 열었다.

    “올해 명절엔 친척들 안 모인대. 할아버지 요양원에 들어가셨거든. 다행이지 뭐… 나는 공연 때문에 어차피 큰집 못 가니까.”

    석희재는 시선을 내려 이현의 입술을 바라보았다. 맥주로 축인 입술이 살짝 젖어 있었다.

    이현의 집에 가져다 놓고 자고 갈 때마다 입곤 하는 제 몫의 회색 조거 팬츠는 이현의 젖은 머리 때문에 조금씩 진한 색으로 물들어갔다. 꽤 축축했지만 석희재는 내색하지 않았다. 차갑게 식은 습기 너머 그의 두피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좋아서.

    대신 덤덤하게 그의 말을 받았다.

    “연휴에도 계속 일해?”

    “응. 이 업계는 남들 쉴 때가 대목이니까. 밤낮으로 공연이 풀이야. 넌 쉬지? 좋겠다.”

    “…명절에는 한 번도 쉰 적 없어?”

    자기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도로 질문으로 돌려 물으면서, 석희재는 이현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살짝 건드렸다. 격무에 시달리는 그에 대한 안쓰러움이 묻어 있었지만 아마 그는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다.

    “쉰 적… 없지. 월차 한 번 못 썼어.”

    석희재는 이제 월차와 연차의 차이가 무엇인지 안다. 그가 수시로 하는 미팅의 뜻이 직장에서는 어떻게 쓰이는지도. 직장인을 저만의 연인으로 두고 난 뒤로 공부를 꽤 많이 했다.

    “직원이나 스태프나 배우나, 미혼들이 제일 치인다니까. 집에 가서도 그렇지, 공연 팀에서도… 갈 데 없는 거 뻔하니 연휴 내내 일 순위로 불려 나가고.”

    미간을 찡그리며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석희재는 피식 웃었다. 이현 본인은 모르겠지만 그는 화를 내도 도무지 위압감이 없다. 직접 말하면 진짜 화낼지도 모르지만.

    “넌 아무 데도 안 가?”

    “…….”

    이현이 고개를 들며 다시 물었다.

    석희재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어렸을 때는 친가에 간 적이 있지만 제가 초대받은 손님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아버지에게 가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그 후로 친척 집에는 한 번도 가지 않았다.

    그리고 외가에서는 저라는 존재가 있는 줄을 아예 모른다.

    “가… 명절 당일에, 하루만.”

    석희재는 무난한 거짓말을 입에 올렸다. 그 대답에 이현은 조금의 의심도 갖지 않고 TV로 느리게 시선을 돌렸다.

    “깔끔하고 좋네.”

    이걸로 이 화제의 대화는 끝이었다.

    석희재는 약간의 아쉬움과 허무함을 느꼈다.

    오늘처럼 이현이 제게 질문을 하는 경우는 아주 드물었다. 이현의 사소한 것을 시시콜콜 알아내고 잊기 전에 기록해서 두 번 다시 잊지 않는 자신과 달리, 그는 석희재가 내뱉은 작은 정보들이 서로 아귀가 맞지 않고 빈틈이 보여도 쉽게 알아채지 못했다.

    타인에게 쓸 에너지가 없는 사람의 전형이다.

    그리고 그에게 거짓말을 할 때마다 석희재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허무함에 시달렸다. 저에게도 어머니가 있다고, 아마 당신도 이름을 알아들으면 단박에 알아차릴 만큼 유명한…. 하지만 지워진 존재나 마찬가지인 자신은 친가나 외가에도 찾아가 봤자 환영받지 못하기 때문에 십 대 때는 줄곧 명절에 혼자였다고.

    그가 드물게 질문을 해 주었는데도 자신은 사실을 대답할 수 없다는 점이 갑갑했다.

    “그럼 우리 집에 와.”

    이현이 상체를 일으키며 말했다. 덤덤한 말투에 석희재는 조용히 되물었다.

    “…연휴에?”

    “응. 나도 사무실 안 나가고 극장에만 있어도 되니까… 대표님도 휴가고. 평소보단 널널해.”

    “…….”

    “와 주라. 응?”

    그가 제 마음을 헤아려서 이런 말을 한 게 아닌 것을 안다. 연휴 같은 때면 초성으로 저장된 많은 파트너 중에 누군가를 일부러 골라 만나는 것도 번거롭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석희재가 가장 외로울 때 곁에 있어 준 것도 이현뿐이었다.

    이현은 맥주가 얼마 남지 않아 가벼워진 캔을 바닥에 내려놓고 석희재에게 달라붙어 왔다. 티셔츠 아래로 손을 미끄러뜨리며 맨살을 더듬었다.

    눈을 감고 제멋대로의 애무를 시작하는 이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면서 석희재는 소파에 등을 기대었다.

    “음….”

    상체를 천천히 더듬어 석희재의 입술까지 올라온 이현이 목 안에서 소리를 울리며 키스를 시도해 왔다. 석희재는 자연스럽게 그의 목덜미를 쓰다듬으며 눈을 감았다. 목덜미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이현이 키스만으로 벌써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그 입술을 혀끝으로 조금 핥았을 때 석희재는 다시 눈을 떴다.

    이현은 컨디션이 떨어지면 입술로 먼저 반응이 나타난다. 감기에 걸리거나 몸살이 나면 입술 표면으로 열이 올라와 부르트는 것이다.

    조심스럽게 맛본 윗입술에서 철분의 맛이 났다. 석희재는 키스를 멈추고 입을 열었다.

    “입술에….”

    “아, 입술 텄지. 역겨우면 하지 말까.”

    강도 높은 섹스를 좋아하는 주제에 키스는 연인처럼 하는 것을 좋아하는 이현이 얼른 고개를 뒤로 빼며 말했다.

    아프지 않냐고 물어보려던 것이지만 그의 반응에 석희재는 말을 삼켰다.

    이현은 쓸데없이 다정한 것을 경계한다. 그와 안정감을 유지하려면 언제나 적정거리를 유지해야 한다.

    지난여름 3개월의 공백 역시 그랬다. 석희재는 관계 중 가끔 쓸데없이 그를 배려했던 것이 문제였을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강도가 올라가는 이현의 요구와는 반대되게 언제나 일정 선을 넘지 않으려고 해서….

    그 때문에 이현은 자신을 다른 수많은 파트너보다 훌륭하다고 판단했지만, 붙잡아 관계를 이어 나갈 만큼 유용하다고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니 그대로 자신을 잃어도 상관없다고 결론을 내린 것이고….

    그 뒤로 석희재는 이현의 요구를 거스른 적이 없었다.

    “난 피곤하면 입술에 열이 올라서 꼭 터지더라고… 싫지?”

    상관없어.

    석희재는 속으로만 대답하면서 다시 그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입술이 맞닿기 전까지 내려다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맞댄다. 눈을 감고 입술로 상대방의 윤곽을 덧그리듯이 키스하는 방식은 이현에게 배운 것이다.

    축축하고 따뜻한 혀와 만났다가 입 안에 머물렀다. 부르튼 입술, 약간 헤진 입천장과 혓바늘이 돋은 혀. 이것도 피로가 남기고 간 흔적인지 아니면 저 말고 다른 남자의 것을 물어 상처가 난 것인지… 캐물을 수 없는 망상에 조용히 속이 끓었다.

    파인애플이라도 먹었나 보지.

    그렇게 생각하면서 석희재는 쓸데없는 질투심을 차단했다. 제 마음을 들끓게 만드는 질투와 집착이 이현과의 관계를 이어 가는 데 있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래도 이 정도는 물어도 될지 모른다.

    “넌 남자만 만나?”

    “응.”

    “이렇게만?”

    그 말의 속뜻은 쭉 연애하지 않고 이렇게 섹스 파트너만 두었냐는 뜻이었다. 만약 그렇다 하더라도, 그가 공평하게 아무에게도 마음을 주지 않으면 차라리 나을 것 같았다.

    “‘이렇게’가 뭔데?”

    그러나 이현은 버릇처럼 눈웃음을 치며 제 허리를 감싸 안았다.

    꼭 이럴 때만.

    불리함을 느끼거나 대답하기 싫을 때 질문에서 빠져나가는 그의 요령이었다. 석희재는 모른 척 그의 허리를 으스러질 듯 감싸 안았다. 꽉 끌어안은 몸 위로 고개를 숙였다.

    “나도 연애하고 싶지.”

    안긴 채로 나직하게 중얼거리는 이현의 목소리에는 무성의한 바람이 담겨 있었다. 제 품에 안겨 연애에 대한 소망을 말하는 이현 때문에, 석희재의 심장이 조금씩 뛰었다.

    “근데 너도 알다시피 나는 상황이 이러니까….”

    “…….”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어야겠지. 예를 들면 나이가 많다거나. 엄청 의지 되고, 잘난 사람. 내가 한심한 짓 해도 품어 줄 수 있는 사람. 여유롭고, 사회적 지위도 있고… 나이 차는 한 열 살? 뭐 그런 사람 만나면.”

    그중 제가 해당되는 건 몇 개 없었다. ‘이해심이 많음, 어떤 한심한 짓을 해도 품어 줄 수 있음.’ 하지만 애초에 이현이 하는 행동 중 제게 한심하게 느껴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저와는 완전히 동떨어진 그의 이상형 때문에 초조한 마음을 숨기며 석희재는 이현을 품에서 조금 떨어뜨린 채로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이현이 젖은 머리를 긁적이며 중얼거렸다.

    “그리고… 남들이 잘났다고 하는 사람? 나도 몰랐는데 내가 속물이라 이름 발에 혹하더라. 배우도 잘하는 사람보단 그냥 유명한 사람이 멋져 보이고….”

    “…….”

    “그렇게 보지 마. 그런 사람들은 어차피 나한테 관심 없는 거 알아. 희망 사항도 못 말해?”

    “뭐라고 한 적 없는데.”

    사랑받고 싶다는 소망은 전혀 한심한 일이 아니었다. 석희재는 진정 그렇게 믿었다.

    “아무튼 난 대체로 연상이 이상형이야.”

    “…….”

    “너는?”

    그 물음에 석희재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도 연상이 좋아.”

    그러나 이현이 불시에 품 안에서 웃음을 터뜨렸다.

    “우리 진짜 웃기다. 어쩌다 취향 아닌 사람끼리 만나서 뒹굴고 있지?”

    “…….”

    이름값이 높은, 유명인. 여유롭고 사회적 지위가 있는… 잘난 사람.

    석희재는 그 기준에 완전히 부합하는 사람을 하나 알고 있었다.

    바로 제 어머니 같은 사람.

    그리고 3년 후, 이현의 사생활을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게 잠식해서 그의 일상에 스며든 석희재에게는 또 다른 소망이 생겼다. 그의 집안, 항상 만나곤 하는 호텔, 침대 위뿐만이 아니라 일하는 그의 모습을 같이 지켜보며 점차 서로의 생활이 겹치는 영역을 늘려 갈 수 있다면?

    절대로 어머니 같은 삶을 살지 않겠다고 말했던 것이 무색하게, 그때까지도 끈질기게 끈을 놓지 않았던 매니지먼트 팀에게 먼저 연락한 것은 석희재 본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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