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분기 (3/27)
  • 3. 분기

    “이번엔 호텔비 내가 낼게.”

    택시에 올라타고 나서 석희재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에 이현은 피식 웃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네.’ 입 밖에 낼까 말까 고민했던 많은 말 중에서 그나마 이현의 마음에 드는 말을 찾았다는 생각에 석희재는 조금은 안도했다.

    두 사람은 일전의 호텔로 향하고 있었다. 밤이 깊어 한적한 도로인 데다 극장과 호텔이 같은 구여서 도착지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이번에는 석희재가 프런트로 향해 체크인을 진행했다.

    “…일박, 하려고 하는데요.”

    “네, 손님. 더블베드, 트윈베드 어떤 방으로 하시겠습니까?”

    석희재는 더블베드와 트윈베드의 차이점을 몰랐다. 물어볼까 말까, 짧은 순간 갈등하던 그는 곧 좋은 답을 찾았다.

    “침대는… 하나짜리로. 조식 포함인가요?”

    “포함해 드릴까요?”

    석희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한 번 와 본 곳이라고 그새 익숙해진 듯했다. 어쩌면 단순히 그때와 다르게 교복 같은 차림이 아니라 그런 것일지도 몰랐다.

    룸 키를 받고 뒤돌자마자 멀리 떨어져 저를 기다리던 이현이 자연스럽게 먼저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나 사실 어제 네 시간밖에 못 자서… 집에 가서 빨리 잠이나 자려고 했는데.”

    엘리베이터에 올라 단둘이 되자마자 이현이 중얼거렸다.

    역시 이 남자는 사적인 대화를 할 수 있는 순간과 아닌 순간을 분명히 구분하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전개가 되어 갈지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희뿌연 안개 속에서 조금씩 가닥을 잡아 가며 석희재는 그의 말에 귀 기울였다.

    “전에 너랑 못 했잖아. 그런 물건을 봤는데 못 넣어 본 게 좀 아쉽기도 하고.”

    “…….”

    다소 노골적인 표현에 석희재의 목덜미가 붉어졌다. 이현이 눈치채기 전에 석희재는 엘리베이터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근데 너 원래는… 여자 만나지?”

    의외의 질문에 다시 그를 내려다보았을 때였다.

    이현의 손이 성큼 다가와 석희재의 뺨과 턱 사이 어딘가를 살짝 쓸었다. 예기치 못한 순간 좁혀진 간격, 그리고 가벼운 스킨십에 심장이 쿵 떨어질 뻔했다.

    “맞네. 여기 파우더 묻어 있어.”

    “…….”

    “립스틱도 조금.”

    석희재의 머릿속에 분장실에서 있었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목덜미에 팔을 두르고 메이크업도 아랑곳 않은 채 마구 제게 키스를 퍼붓던 여자.

    다 그 여자 탓이다. 스태프들에게 오해받은 것은 아무렇지 않았는데 이현이 지적하니 머릿속이 새하얗게 비었다. 미간을 구기며 저도 모르게 손등을 들어 파우더가 묻었다는 부분을 쓸어 낼 때였다.

    “그래서 저번에 나랑 안 했구나.”

    “…그런 건 아냐.”

    “혹시 남자는 처음이야?”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석희재는 이현이 먼저 내리도록 버튼을 눌러 문을 잡아 주었다. 이현은 석희재에게 등을 떠밀리면서도 시선을 놓지 않았다.

    이번에야말로 어떤 분기를 선택해야 옳은 답이 될지 알 수가 없었다.

    실은 그와 그렇게 헤어지고 의미 없는 가정을 여러 번 해 보았었다. 만약 끝까지 갔다면 이현은 과연 만족했을지, 아니면 상대를 만족시킬 만한 테크닉 따위는 모르는 자신에게 실망했을지.

    그러면서 석희재는 게이 동영상 따위를 찾아보기도 했다. 남자끼리의 관계에 관해 공부해 보기 위함이었다. 보통 받는 쪽이 되는 남자는 뒤를 쓴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으면서도 텍스트로 묘사된 관계의 모든 장면이 이현으로 떠올라 쉽게 흥분한 적도 여러 번이었다.

    “난 처음인 사람들 좋아해.”

    이현의 말이 의외였다. 석희재는 자기가 맞는 분기를 찾은 것인지 다시 한번 생각했다.

    “나는 그… 너무 배려하고, 그런 거 안 좋아하거든.”

    “배려?”

    “그냥 내가 알아서 하는 게 좋아.”

    이현은 문 앞에 서서 좀처럼 문을 열 생각을 하지 않는 석희재의 손을 잡고 끌어 직접 룸 키를 도어록에 가져다 댔다. 석희재는 그를 내려다보며 ‘배려는 별로’, ‘알아서 하는 게 좋다’는 이현의 말뜻을 고심했다. 그러나 그건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금세 알 수 있었다.

    “잠… 깐.”

    룸에 들어가자마자 이현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를 벽으로 밀쳐 기대게 만든 이현이 순식간에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것이다.

    석희재는 아직 손에 쥐고 있던 카드키를 꽂으려 등 뒤의 벽을 손으로 더듬었다. 약한 야맹증이 있어 광량이 적은 곳에 빨리 적응하지 못하는 탓에 배로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타인의 손이 어둠 속에서 제 허벅지와 엉덩이를 더듬을 때, 그리고 얼굴이 흰 남자의 뺨과 콧대가 분명한 얼굴 윤곽이 중심에 닿았을 때는 덫에 걸린 동물처럼 옴짝달싹도 할 수 없었다.

    흠칫 놀란 석희재는 잡을 곳도 마땅치 않은 벽을 손가락으로 꽉 쥐며 버텼다. 저번처럼 무리한 오럴이라도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이현은 그저 옷 위로 가만히 숨을 내쉬며 묵직한 흥분이 전해지는 아래의 열기를 뺨으로 비비기만 할 뿐이었다.

    “…불이라도 켜야.”

    잔뜩 갈라진 석희재의 목소리가 허공에 흩어졌다. 석희재는 자신이 내뱉는 호흡이 잔뜩 습기에 절어 있는 것만 같다고 생각했다.

    “안 보는 게 낫지 않아?”

    “…왜?”

    “남자에 익숙하지 않으면… 저번처럼 식을 수도 있고.”

    이현이 아래에서 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짙은 어둠 속, 석희재의 시야에서 유일하게 보이는 것은 반사되는 먼 곳의 빛을 담은 이현의 검은 눈동자뿐이었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이현의 앞볼을 엄지로 쓰다듬었다.

    날카로운 눈매 안, 까만 눈동자는 이토록 순진하기만 한데….

    석희재는 소리 없이 마른침을 삼켰다. 그래도 이현이 가진 의외성이 싫지 않았다.

    그리고 저번에도 이현의 착각처럼 남자가 낯설어서 밀어낸 건 아니다. 처음 만난 사람과 베드 인 하는 것은 제 상식이 아니었을 뿐.

    하지만 석희재는 생각했다. 나이를 먹으면 상식이나 기준이 자연히 바뀌는 때도 오는 것이라고. 게다가 오늘은 처음 만난 것도 아니고, 자신이 먼저 원해서 그를 이 호텔로 데리고 왔다. 마음의 준비는 어느 정도 되어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자가 처음인 상대도 좋다고 말해 주는 그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석희재는 이현의 말에 토를 다는 대신, 순한 양처럼 손에 쥔 카드키만 꼭 쥐었다.

    “벌써 단단해.”

    “…….”

    “내가 싫지는 않은가 봐.”

    “…….”

    “아, 미안. 주제넘었지.”

    석희재의 침묵을 무어라 해석했는지 이현은 멋쩍게 제 말을 수정했다. 그리고 석희재가 무어라 말하기도 전에 그 입을 막아 버리듯이 옷 위로 불룩해진 둔덕을 손으로 쓰다듬고 코끝으로 윤곽을 덧그렸다.

    직접 만져 주는 것이 아닌데도 감질나는 자극에 자꾸만 호흡이 벅찼다. 석희재에게 지금 가장 어렵게 느껴지는 것은 흥분을 얼마나 드러내야 자연스러운 것인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석희재는 떨리는 손을 그의 어깨에 얹었다가, 이내 떼어 내고 대신 문고리를 잡았다.

    석희재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파묻은 이현은 마치 숭배하듯 그 물건을 다루었다. 입을 벌려 옷 위로 가볍게 물거나 일부러 묵직해진 음낭을 얼굴로 받쳐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 제 반응을 유심히 살피는 이현으로부터 차라리 시선을 피하면서, 석희재는 아무래도 오늘 이후로 이 바지는 입을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맨다리를 얽은 천 자락의 감촉만으로도 오늘 일이 떠오를 것만 같았다.

    도무지 더는 이현을 볼 수 없어 천장을 향해 고개를 꺾자 시야가 빙글 도는듯한 현기증마저 찾아왔다.

    “하아, 하아….”

    더 이상 호흡을 억누르기도 어려웠던 석희재는 참다못해 이현을 안아 올리려고 허리를 조금 숙였다. 그러나 두 다리가 그의 무릎 사이에 끼어 있어 하마터면 균형을 잃고 넘어질 뻔했다. 휘청이다 말고 벽을 짚은 석희재를 눈치챘는지 이현이 말을 붙여왔다.

    “아… 미안. 답답하지.”

    “…아냐.”

    “가끔 발로 차는 사람들이 있거든.”

    이현의 말에 석희재는 얕은 충격을 받았다.

    그 이야기를 조금 더 자세히 들어 보고 싶었지만 이현은 더 지체하지 않을 생각인지 석희재의 바지 지퍼를 이로 끌어 내렸다. 벨트와 버클은 석희재가 의식하지 못한 순간 이미 풀린 채였고, 순식간에 벌어진 지퍼 틈으로 이현이 스치듯 키스를 내렸다. 대부분은 속옷 위였지만 일부러 그러는 것인지 가끔 드러난 판판한 아랫배의 살갗에 조금씩 입술이 스치기도 했다. 그때마다 입술이 닿은 곳이 불타는 듯 뜨거웠다.

    한참 감질나게 돋구었던 것과 다르게 입에 머금는 순간은 빠르고 대범했다. 속옷을 내려 드러난 성기를 한 번 길게 핥은 그가 입 안 가득 잔뜩 발기한 끝을 담았다. 그러면서 뒤로 팔을 둘러 석희재의 허리를 끌어안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일부러 숨을 멈추고 목구멍을 열어 한계까지 깊이 머금으려 했다. 호흡이 조금 모자랐지만 그럴수록 좋았다. 그래야 빨리는 쪽이 더 큰 자극을 느끼니까.

    대화는 사라지고 어둠 속에서 귀를 자극하는 질척이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그리고 이현은 석희재의 억누른 호흡을 귀담아들으면서 그가 언제 제 머리채를 잡을지 생각했다. 남자라면 누구나 흥분이 과해지는 순간 억지로 허리 짓을 하려 드니까. 뺨이나 턱을 우악스럽게 잡고 안에 털어 내는 경우도 많았다. 어쩌면 그들은 단순히 사정하며 얻는 쾌감을 위해서가 아니라 한 사람의 인격을 마음껏 깔아뭉개는 느낌을 좋아하는 게 아닐까, 이현은 그런 생각을 해 본 적도 있었다.

    그리고 상대를 거기까지 몰아가는 게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특히 눈앞의 남자는 원래는 이성애자라고 하니 조금 더 쓰레기같이 굴어 줄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남자는 아직도 버틸 만하다는 듯이 이현의 몸이나 머리에는 손끝조차 대지 않는다.

    이상하다, 한계일 텐데.

    “우음….”

    이현은 초조해하며 더 깊이 무리해서 그의 것을 빨았다. 가끔 숨이 턱까지 차오를 때는 성기로 뱉어 내고 코로 숨을 쉬며, 묵직하고 탄력 있는 음낭을 입 안에서 굴리기도 했다. 다시 깊이 머금었을 때는 치미는 구토감에 생리적으로 눈물이 고였지만… 어쨌든 그게 좋은 거라고 생각하면서.

    “…억지로, 하지 마.”

    석희재가 팔을 내려 허공을 더듬은 곳에서 나풀나풀 이현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머리채를 잡히는 일은 없었다.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목 안이 상처 나도록 무리해 삼켰다가 컥컥거리는 이현의 정수리 위를, 무게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살그머니 쓰다듬을 뿐이었다.

    “하고 싶은 건 이게 다야?”

    석희재의 물음에 이현은 시무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러면서 결국 석희재가 제 입 안을 배설구처럼 쓰지 않았다는 사실에 아쉬워했다. 상대를 극한의 흥분에 다다르게 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자신감이 한풀 꺾인 것이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석희재는 이현의 겨드랑이 사이로 손을 넣어 그를 억지로 일으켰다. 그러고는 부르트고 터진 이현의 아랫입술을 손가락으로 슬며시 만져 보기만 했다. 얼마나 아팠는지를 가늠하듯이.

    “한 번 빼 주려고 했지. 나 준비할 때 좀 기다리라고… 그럼 저기 누워 있어.”

    “준비….”

    석희재의 눈앞에서 욕실 문이 탁, 닫혔다.

    혼자 남겨진 석희재는 커다란 손으로 눈가를 짚고 한숨을 크게 쉬었다.

    안에서 물소리가 들려왔다. 찾아본 바로는 ‘준비’란 안을 비우고 넓히는 작업을 말하는 것이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또 앞이 괴로울 듯이 팽창했다. 스스로의 뒤를 쑤시느라 젖었던, 붙잡은 손가락 안에 감겨들던 손의 감촉도 떠올랐다.

    “왜 아직도 여기 서 있어?”

    씻고 나온 이현은 가운 차림이었다. 예상치 못한 모습에 석희재는 눈을 내리깔며 시선을 피했다. 괜히 이다음의 장면을 연상시키게 만든 옷차림이 상상을 제어하기 어렵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현은 왠지 조금 넋이 나간 석희재를 침대로 이끌어 왔다.

    “누워.”

    석희재는 이현이 시키는 대로 베개에 기대어 비스듬히 누웠다. 저도 옷을 벗어야 하나 싶어 주섬주섬 셔츠 단추를 풀고 있는데 이현이 성큼 엎드려 다가왔다. 훅 끼치는 보디 샤워의 냄새, 청결한 물의 냄새, 그리고 달콤한 살 냄새.

    갑자기 가까워진 간격에 정신을 못 차리고 그를 올려다보는 사이 스치듯 눈이 마주쳤다. 이현은 피식 웃으면서 석희재의 뒤로 손을 뻗어 마스터 조명을 껐다.

    “어두운 게 낫지?”

    섹스 시의 광량이 밝은 게 좋은지, 아닌지 아직은 알 수 없었지만 석희재는 일단 그렇다고 했다. 사실 신경이 온통 이현의 가운 사이에 꽂혀 있어 제대로 판단하지도 못했다. 그가 몸을 기울여 자연히 벌어진 가운 사이로 맨살이 어른어른 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왠지 대놓고 보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석희재는 또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남자 신음 싫으면 말해.”

    “괜찮아.”

    그의 말에 문득 궁금해졌다.

    이현은 어떤 신음을 낼까.

    그리고 석희재는 그도 흥분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저도 입으로 해 줬어야 했는지도 모른다. 아까 그가 해 주었던 것처럼.

    그러나 석희재가 막 몸을 일으키려고 할 때, 이현은 뒤돌아 등진 채로 석희재의 아랫배 위에 조심스레 앉았다. 방이 어두웠지만 석희재는 이현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 금세 알 수 있었다. 가운 안에서 미세하게 손이 움직이는 걸 보니 또 스스로 뒤를 넓히고 있는 듯했다. 간혹 들리는 젖은 마찰음이 또 상상을 충동질했다.

    가끔 가운이 들춰진 틈으로 엉덩이 밑부분이나 허벅지 안쪽이 보이기도 했지만 결정적인 곳은 보이지 않았다.

    …뒤돌아 앉은 표정이 궁금했다.

    “근데 큰일이네. 너무 커서… 이게 푼다고 들어갈까?”

    “아플 것 같아?”

    “나 딜도도 이만한 건 없는데.”

    “…….”

    “아냐. 적응되겠지 뭐….”

    이현은 좀 망설이는 것 같더니, 이내 석희재의 단단한 허벅지를 더듬어 잡고 허리를 내려앉았다.

    동시에 석희재는 이현의 얼굴을 보지 못한 채로 삽입한다는 사실에 새삼 생소함을 느꼈다.

    어쩌면 불을 끈 것도, 여전히 가운 차림인 것도… 전부 의도한 것인지도 모른다.

    게다가 손을 뻗어도 겨우 등허리 정도나 만질 수 있는 간격이라니. 맞닿은 아래만 연결된 것이 흡사 스스로 움직이는 자위용 기구를 쓰는 것 같았다. 그게 계속 마음에 걸렸다. 미묘하게 불쾌하기도 했다.

    “음….”

    이현이 아주 나지막한 신음을 내뱉었다.

    석희재는 잡념도 잊은 채 뒤로 고개를 젖히는 그의 행동을 뚫어져라 관찰했다. 삽입하는 모습은 여전히 가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지만, 선액으로 미끄러운 귀두 끄트머리가 부드럽고 축축한 입구에 뭉그러지듯 닿는 것이 느껴졌다. 굵기와 강도를 가늠해 보듯 엉덩이골 사이로 미끄러뜨리며 타는 감각에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헉….”

    석희재는 숨을 삼켰다. 이현이 한 손으로 제 기둥을 움켜쥐었기 때문이다. 이현은 지나치게 위를 향한 각도로 발기한 성기를 손으로 잡아, 스스로 맞는 방향을 찾으며 귀두 끝을 안으로 욱여넣었다. 굵은 성기를 안에 조금 넣어 보자마자 무릎으로 받쳐 세운 이현의 다리가 후들거렸다.

    방금 전 이현을 자위용 기구처럼 쓰는 게 불쾌하다고 말했던가?

    그 선비 같은 생각을 비웃듯이 석희재는 말초적인 감각에 아주 쉽게 흥분해 버렸다. 성기를 틈 없이 꽉 무는 내벽과 느리게 미끄러지는 안쪽의 감촉에 저도 모르게 시트를 그러모았다.

    저는 서로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무드 따위가 더 중요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얼마나 동정 같은 생각인지도 곧 깨우쳤다. 심지어 이 직전까지만 해도 하반신에 조종당하는 남자들을 경멸했건만.

    고작 이런 쾌락을 위해서 인간성을 벗어던진다고… 마음으로 비난했는데.

    고작 이 정도의 쾌락 정도가 아니었다. 이런 자극에 중독된다면 저도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추잡한 짓을 일삼을 것이다.

    이현은 최대한 천천히, 천천히 앉았다. 석희재의 허벅지는 힘이 잔뜩 들어가 돌처럼 단단해지고 근육이 갈라진 모양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그걸 받친 이현의 손목이 파들파들 떨렸다.

    “아… 으읏….”

    석희재는 신음을 숨기지 못했다. 사방에서 조이는, 마른 듯 질척이며 미끄러져 들어가는 감각.

    이현의 팔과 다리는 후들거렸으나 이상하게도 그는 저와 달리 여유 있어 보였다. 석희재의 것을 전부 안에 담은 채로 완전히 앉았을 때, 이현은 긴 한숨을 내쉬면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 사이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숨까지 참고 있었다.

    “좋아?”

    “흐… 읏….”

    “신음 참지 마.”

    이현이 높낮이 없이 속삭이며 뒤를 꽉 조였다. 그 순간 전신을 강타하는 소름에 석희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감각의 파고가 무서울 정도로 한계 없이 치솟았다. 시야가 완전히 블랙아웃되고 먹먹한 고막 안으로 제 심장 고동만 쿵쿵 천둥처럼 울려 댔다. 전력 질주라도 한 사람처럼 전신에 피가 돌았다….

    제게 일어난 일을 완전히 인지하지 못한 채로 석희재는 눈만 깜빡였다.

    “아….”

    그리고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들려온 것은 당황한 듯한 이현의 목소리였다.

    “너… 뭐야. 조루야?”

    막 허리를 들어 올리려던 이현이 저를 돌아보고 있었다. 그 실망스러운 눈매에 석희재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아….”

    석희재는 피부 바깥으로 튀어나올 듯 두근거리는 심장을 한 손으로 꾹 누르며 상체를 일으켰다. 당황스러워 말도 나오지 않았다. 안에서 성기가 조금 움직이자마자 맞닿은 내벽에서 액체가 질척하게 휘감겼다. 사정의 흔적이 분명했다.

    삽입하자마자 사정해 버렸다….

    그러나 당황하기도 전, 다시 지끈하게 자극이 왔다. 석희재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그러고는 막 허리를 떼어 내려는 이현의 어깨를 눌러 앉혔다.

    “잠시만.”

    “응?”

    “안 끝났어.”

    석희재는 그대로 이현의 앞가슴을 뒤에서 한 팔로 끌어안았다. 처음은 이현이 이끌었지만 완전히 불이 붙어 쉽사리 흥분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된 건 석희재 쪽이었다.

    그리고 제 안에서 일어나는 감각을 느꼈는지 놀란 이현이 허리를 뒤틀었다.

    “아, 잠깐… 왜 더 커졌어. 헉, 갑자기 너, 넣지마, 이건 무리야… 못해!”

    “…읏… 허리 흔들지 마.”

    “방금 사정했잖아, 왜… 흐읏, 왜 안 죽어?”

    “하아….”

    석희재는 말없이 이현의 한쪽 허벅지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는 그의 목덜미에 입을 맞추면서 위로 치받아 올리듯 삽입했다.

    “아아, 아응, 응… 아아….”

    아래부터 쿵쿵, 꽂히는 감각에 이현의 허리에서 힘이 풀리고 가운이 미끄러져 내려왔다. 다 넣는 것만으로도 거의 한계치까지 벌어지게 만든 성기의 끝이, 가장 느끼는 안쪽을 정신없이 찍어 올렸다. 어느새 땀에 젖은 등과 가슴이 맞닿아 떨어지기 싫은 것처럼 달라붙었다.

    석희재는 이현에게 빈틈없이 달라붙었다. 아까부터 이렇게 껴안고 싶었다. 피부를 만지고, 숨결을 마시고, 파고든 뒤 말고도 이렇게 전신으로 체온을 느끼면서….

    “헉, 하아….”

    아까의 여유는 완전히 잃어버린 이현이 자꾸 앞으로 쓰러지려고 해서 석희재는 그를 앞으로 조심스레 밀어 눕혔다. 엎드려 축 늘어진 그를 뒤에서 옭아매듯 끌어안으며 다시 깊게 푹, 성기를 꽂았다.

    “흐읏….”

    기진맥진한 이현에게서 작은 신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순간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그의 입술을 찾아 키스했다. 갈증이 났다. 더 파고들고 싶었다.

    그의 귓바퀴를 핥으면서 석희재는 이성을 잃고 발정 난 짐승처럼 허리 짓했다. ‘좋아, 너무 좋아.’ 속으로 수백 번 속삭이면서 이현의 부드러운 목덜미, 턱밑 따위를 핥기도 했다.

    ‘예뻐.’

    “으응, 읏… 아, 아, 아!”

    ‘너무 예뻐….’

    신음하는 이현을 보면서 석희재는 속으로 반복해서 같은 말만을 중얼거렸다. 너무 예쁘다고, 지나치게 좋다고.

    원래 섹스란 이렇게 상대를 사랑스러워 보이게 만드는 것일까?

    “흐읏….”

    그를 한입에 전부 삼켜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든 순간 석희재는 두 번째 사정을 했다. 두 번째는 갑작스러웠던 첫 번째보다 더 길고 집요했다. 울컥울컥 흥분을 쏟아 내면서 석희재는 그를 깊게 끌어안은 채 아주 깊고 연약한 곳에 자신의 것을 파묻었다.

    제 착각인지 몰라도, 체액이 분출될 때마다 이현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려 대는 것 같았다.

    헉, 헉. 숨을 몰아쉬면서 벅찬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사이 이현이 조금 고개를 돌리며 물어 왔다.

    “좋았어?”

    갈라진 목소리였다. 석희재는 조금 부끄러워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너는?”

    “좋은데… 아프다.”

    그 말에 놀란 석희재는 어디가 아프냐고 눈으로만 물었다. 이현은 말없이 제 허리를 가리켰다. 말라서 뼈가 도드라진 장골과 허리에 검붉은 손자국이 나 있었다.

    “힘센 거 자랑해?”

    “…….”

    석희재는 당황해서 말을 잇지 못했다.

    사실 조금 전 제대로 된 삽입 섹스를 처음 하면서 석희재는 어쩌면 섹스가 뭔지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아마도 이다음에는 긴장하지 않고 시작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지만 그건 아무래도 혼자만의 착각이었나 보다.

    “으으… 아.”

    등은 땀으로 잔뜩 젖은 데다 머리가 흐트러진 이현이 힘없이 팔꿈치로 바닥을 짚으며 일어나려 했다. 그 순간 결합부에 아주 약간의 틈이 생기며 덩어리진 타액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아, 너 잠깐….”

    아주 약간 허리가 움직인 것뿐이다. 유혹의 몸짓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석희재는 안에서 한 번 더 흥분했다. 이현은 다시 풀썩 엎드린 채로 비실비실 웃었고, 석희재는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그런 그를 그저 내려다보기만 했다.

    “아… 나 힘든데.”

    “하지, 말까.”

    이현은 대답 대신 석희재의 손을 제 허리로 가져와 잡게 했다. 조금 전 멍이 들어 아프다고 스스로 말했던 곳이었다.

    “하는 데까지 해 봐.”

    땀이 배어 촉촉해진 살갗을 붙잡은 석희재는 부드러운 감촉과 압력을 느끼며 이현의 안으로 다시 파고들었다. 턱 끝에 고였던 땀이 이현의 등 위로 뚝 떨어져, 석희재는 상체를 조금 일으켰다. 등을 직접 닦아 주기 위해 사이드의 휴지를 한 장 뽑았을 때였다.

    “하아….”

    맞붙었던 등이 떨어지자마자 이현이 마치 작정이라도 한 것처럼 일부러 엉덩이를 들어 올리고 허리를 천천히 움직였다. 그러자 석희재의 시야 안에 지금까지는 하반신의 흥분에만 집중해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했던 결합부의 움직임이 보였다. 질척이며 미끄러져 들어가는 부분에서 정액이 밀려 나왔다.

    의식하지 못한 순간 목격하게 된 시각적 자극이 지나치게 강했다. 석희재는 억지로 숨을 억누르며 차분히 심호흡했지만 이상하게도 욕구를 억눌러야 한다고 생각할수록 아래는 팽창했다.

    어느새 크기에 적응한 안은 적당히 힘이 풀려 있었고 이현은 여유를 되찾은 듯했다. 석희재의 시선이 어디에 닿아 있는지 눈치챈 것처럼 일부러 손을 뒤로 뻗어 제 뒤를 벌리기도 했다.

    “더 깊게 넣어줘. 응… 아, 너무 좋아.”

    “읏….”

    “아프게 해 줘.”

    ‘아프게 해 줘’라는 말의 의미를 제대로 깨닫지 못한 채로 석희재는 그의 말에 조종당하듯 가장 깊은 곳에 퍽, 닿도록 깊숙이 꽂아 넣었다. 이현은 기대하던 신음을 들려주었다.

    “보통은 거기까지 안 닿거든.”

    “……?”

    “끝에 닿을 때 조금 더 세게 해 줘.”

    이현이 원하는 대로 해 줄 때마다 그는 허리가 녹을 정도로 듣기 좋은 소리를 흘렸다. 충실하게 그의 요구에 응답한 석희재는 제가 박아 넣는 강도가 얼마나 센지 인지하지 못한 채로 그저 시키는 대로의 행위에 열중했다.

    “더 세게… 응, 읏… 아, 아! 너무 좋아.”

    “헉… 허억….”

    “세게….”

    움직임이 너무 과격해져서 흰빛이었던 이현의 엉덩이 양쪽은 석희재의 치골과 수십 번 부딪치는 사이에 손바닥으로 매섭게 맞은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나 이현은 기꺼이 그 고통을 즐겼다. 살과 살이 맞부딪칠 때 아플 정도로 세게 닿는 것이 너무 좋아서 이제는 흐느끼기까지 했다.

    등 뒤의 남자는 적당히 유도한 것만으로도 이제 만족할 정도의 강도를 되돌려 준다. 허리를 억세게 붙잡은 손과 헉헉거리는 숨소리,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박아 넣는 속도까지… 나름대로 성공적인 수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흐으, 흣… 아! 아아….”

    겨우 바닥을 받치고 있던 팔이 꺾이며 이현의 상체가 앞으로 풀썩 쓰러졌다. 매트리스 위로 이마부터 박으며 엎드린 이현은 어느새 엉덩이만 들어 올린 채였다.

    사실 몸에 조금이라도 기력이 남아 있었다면, 이제 돌아누워 상대를 말리면서 적당히 손이나 입으로 풀어 주는 것으로 끝냈을 것이다. 자신의 몸은 강철로 만든 기계도 아니고 내일은 내일의 일상이 기다리고 있으니까.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말릴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남은 건 남자의 단단한 몸에 깔려 신음하는 것뿐.

    ‘아, 좀 무리한 것 같다.’

    이현은 약간, 아주 약간만 후회했다.

    보통은 닿을까 말까 하는 가장 안쪽의 연약한 곳을 끊임없이 짓뭉개는 감촉이 끈질겼다. 남자의 크기가 지금까지 넣어 봤던 어떤 것보다도 크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객기를 부린 제 탓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이현은 가끔 지나친 자극에 울음을 터뜨리며 몸부림쳤다. 움직일 힘이 남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반응하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을 찔려 몸이 멋대로 반응한 것이었다.

    그래도 이렇게 당할 수 있는 건 아무리 운이 좋아봤자 일 년에 한두 번뿐이다. 이현은 그저 지금을 즐기자고 생각했다.

    남자와의 잠자리에 호기심을 갖는 스트레이트들과의 끝은 대부분 엇비슷했다. 전희 도중에 역시 남자는 역겹다며 발로 차이거나, 두드려 맞거나. 어쩌다가 행위에 들어가게 되더라도 제 소중한 여자 친구에게는 절대 하지 않을 방식으로 실컷 욕구를 풀어 내고 나선 돌변해 버린다. 더러운 것은 이현뿐이고 방금 전 개처럼 달려들었던 것은 진짜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는 듯이. 잠시나마 남자에게 흥분했다는 혐오감, 죄책감 따위를 전부 이현에게 뒤집어씌우고 도망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게 자신이 원나잇 상대로 스트레이트를 선호하는 이유기도 했다. 연애로 연결될 가능성이 희박하니까. 서로 더러운 꼴을 좀 보아야 깔끔하게, 원나잇답게 헤어질 수 있는 거니까.

    쓰레기 같은 취급을 받는 순간을 생각하면 조금 울적하기도 했지만 그런 건 굳이 깊게 생각하지 않으면 된다.

    그리고 지금의 상대 역시 결국 자신을 깔아뭉갤 거라면 욕심껏 원하는 행위를 받아 내는 쪽이 이득이었고.

    “헉….”

    머지않아 이현은 이미 정액으로 가득 찬 배가 한 번 더 부푸는 것을 느꼈다. 남자는 성욕도 강하고, 체력도 있는 데다, 정액의 양도 많은 것 같았다.

    사정의 순간 성기가 꿈틀거렸고, 뱀 머리처럼 제멋대로 고개를 흔들며 배 속을 마구 때렸다. 이현은 또 흑흑 흐느꼈다. 맑은 눈물이 긴 눈매를 타고 떨어졌다.

    ‘아… 잘못 걸린 건지 제대로 고른 건지 모르겠다.’

    등 뒤로 남자의 무거운 육체가 덮쳐 왔다. 손 하나 까딱할 힘도 남지 않은 육체에는 조금 가혹할 정도의 무게였다.

    ‘씻고 자고 싶은데.’

    따뜻한 샤워와 깨끗한 이불이 간절하던 이현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가물가물하는 눈을 감아 버렸다.

    “하아….”

    그리고 그 감은 눈 위로 석희재가 긴 숨을 내뱉으며 아주 느리게 입을 맞췄다.

    그는 힘없이 돌아누운 이현을 끌어안고 뺨과 입술에도 가볍게 키스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인데도 촉촉한 살갗이 부드럽고 창백한 뺨이 예뻐서 도무지 멈출 수가 없었다.

    “…저기.”

    석희재는 반응 없이 축 늘어진 이현의 어깨를 조금 흔들면서 말을 걸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자?”

    긴 눈매에 매달린 눈물을 발견하고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핥는 순간, 심장 고동이 빨라지며 석희재는 다시 한번 발기했다.

    난감했다. 홀로 스스로를 달랠 때도 이런 법이 없었는데… 내심 당황하면서 석희재는 안에 파묻은 채 아주 느린 속도로 허리를 흔들었다. 그러고는 이현을 다시 한번 깨우려 했다.

    “으으….”

    이현에게서 쉰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석희재의 심장은 다시 한번 크게 맥박쳤다. 그러나 이현은 여전히 축 늘어진 채로 부은 눈을 반쯤 감고서 멍하니 있기만 했다. 마치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는 것 같았다.

    이어 검은 동공이 먼저 넘어가고 눈이 다시 스르르 닫혔다.

    그가 거의 기절하듯이 잠들었다는 것을 깨달은 석희재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다가 품속에 꼭 껴안았다.

    ‘따뜻해.’

    섹스에 상식도 도덕도 집어던진 사람들이 왜 머릿속에 그 생각밖에 없는 사람처럼 구는지 알 것 같았다. 전신으로 옮겨 온 체온과, 끈적이며 달라붙은 땀에 젖은 육체의 감촉이 좋았다.

    타인과 깊이 포옹하고 살갗을 빨고 냄새를 맡고.

    또 몸을 겹치고 전신의 체온을 나누는 행위가 너무나도 뿌듯했다.

    석희재는 이현을 조금 들어다가 완전히 품에 겹쳐 안았다. 눈물의 냄새, 부드러운 뺨을 핥으면 느껴지는 짭짤한 소금기. 연약한 목덜미의 감촉. 그리고 도드라진 쇄골과 날개뼈 끝을 바이올린의 현을 짚듯이 가볍게 짚어 냈다. 다시 발기한 지 오래였지만 행위를 더 이어 갈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파고든 안에서 빠져나오고 싶지 않았다.

    석희재는 작은 고양이를 조심스레 팔 안에 가두어 안듯이 그를 온몸으로 덮어 안고 얼굴을 관찰했다. 원근감이 사라질 정도로 가까운 곳에서 스탠드 불빛을 희게 반사하는 뺨의 솜털이 보였다.

    이현을 둘러 안은 손끝에 그의 목덜미가 닿았다. 석희재는 면도된 뒷머리 부분을 손으로 만지작거리다가 이내 잠들었다.

    ***

    먼저 눈을 뜬 것은 이현이었다.

    마침 동틀 녘이었다. 창밖으로 푸르게 번져 오는 하늘빛에 이현은 현재 시간을 가늠했다. 파란 새벽빛 다음에 느낀 것은 물을 잔뜩 먹은 솜처럼 무거운 육체였다. 그리고 그다음으로 인지한 것은….

    옆에 잠들어 있는 남자의 숨소리였다.

    ‘왜 안 갔을까.’

    푸른 여명에 비추면 일부가 새파란 빛으로 반사될 정도로 짙은 색의 검은 머리가 인상 깊었다. 매끄러운 머리카락 아래로 두드러진 눈썹뼈가 보였고, 감은 눈 위로는 숱 많은 속눈썹이 촘촘했다.

    ‘남자가 아래 속눈썹이 이렇게 길어.’

    무언가를 억누른 듯 차분한 분위기지만 하나하나 뜯어 보면 화려한 생김새였다.

    ‘진짜 잘생겼는데, 매너 진짜 없어.’

    힘없이 웃다가 이현은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 여전히 안을 뿌듯하게 채우고 있는 물건의 질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어제 그렇게 했는데 아침이라고 또 발기한 채였다.

    ‘기절하고도 한 건 아니겠지.’

    이현은 곧 생각을 접었다. 그래도 상관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기야, 스트레이트가 흥미로 남자를 찾는 게 다 이런 이유가 아니던가.

    그래서 마음에 드는 거지만….

    지난밤 남자가 저를 두들겨 패는 일은 없었지만 그에 필적하게 온몸의 뼈마디가 쑤셨다. 얽은 다리 사이로 다친 기억 없는 곳이 욱신거리는 건 어제 저 손아귀에 잡혀 멍이 들었기 때문일 거다.

    남자의 품에서 조금 벗어나기 위해 몸을 뒤튼 순간 이현은 ‘힉’ 하고 작은 신음을 흘렸다. 안쪽에서 바늘 여러 개에 찔린 것 같은 찌릿한 자극이 왔기 때문이다.

    이현은 깊이 한숨을 쉬었다. 원래도 살성이 약해 상처가 잘 남는 몸이었다. 아무리 좋은 가죽으로 된 구두를 신어도 매번 발이 까질 정도로. 그리고 그건 안쪽의 피부라고 다를 바 없다. 남자의 손에 붙잡혀 겉으로 드러난 피부도 이렇게 빨갛게 변할 정도인데 훨씬 연약한 내부는 그보다 더 직접적인 마찰에 쓸렸으니 상처가 났을 게 분명했다.

    이현은 울어서 부은 눈을 다시 감았다. 고작 세 시간 기절하듯 선잠에 빠진 게 다라 여전히 피곤했다. 씻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제 어깨와 머리통을 감싸 안은 남자의 긴 팔을 떨쳐 낼 힘도 없었다.

    그래서 다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한 시간 후, 석희재는 미리 맞춰 놓은 알람에 일어났다.

    잠결에 부스스 눈을 뜬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이현의 정수리쯤에 소리 없이 입을 맞추었다. 어릴 때 고양이를 기른 적이 있었는데, 그 고양이는 석희재가 잠에서 깰 때가 되면 어떻게 알았는지 항상 제 앞에서 웅크린 자세로 저를 기다리곤 했다. 그러면 그 털이 보송보송한 앞 통수에 몇 번이나 뽀뽀해 주던 것이 그의 버릇이었다.

    어릴 적의 버릇대로 이현의 이마에 뽀뽀하던 석희재는 잠시 후 완전히 잠을 떨쳐 냈다.

    석희재는 곧 이현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샤워를 하러 들어갔다. 나오기 전에 이번에는 가운을 걸쳤다. 이현의 몸을 닦아 주려고 손수건 크기의 핸드 타월에 따뜻한 물을 묻혀 꼭 짜기도 했다.

    그렇게 욕실에서 나와 누워 있는 이현에게 가까이 가보니 그 역시 물소리에 잠이 깼는지 어느새 일어나서 눈을 깜빡거리고 있었다.

    “지금 몇 시야?”

    이현의 목소리는 완전히 쉬어서 본래 색을 잃어버린 지 오래였다. 심지어 코도 조금 막혀 있는 것 같았다. 안쓰러워하면서 석희재가 대답했다.

    “일곱 시 반.”

    “조식 먹어야 돼.”

    반가운 소리에 석희재는 침대 가에 조심스레 앉았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고도 이현은 일어나질 못했다.

    “조식은 10시 반까지래. 더 자.”

    “안 돼. 출근하기 전에 먹어야지.”

    출근?

    이현의 입에서 나올 거라곤 생각지도 못했던 낯선 단어에 석희재는 내심 굳어 버렸다.

    재킷을 걸치긴 했지만 항상 청바지에 운동화 차림이라 회사원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직장인은 칙칙한 슈트라는 공식이 있는, 아직 사회생활을 해 본 적 없는 석희재에게는 낯선 차림이었던 것이다. 많이 잡아도 군대를 다녀오지 않은 대학교 2, 3학년이라고 생각했는데….

    석희재는 크게 놀란 상태였지만 겉보기로는 눈이 조금 더 뜨이는 것 말고는 달라진 게 없었다. 이현은 그런 석희재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나 좀 일으켜 줘.”

    석희재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이현이 한 손을 뻗었다. 석희재는 그 손목을 잡고 조심스레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현은 완전히 늘어져 성의 없이 질질 끌려오기나 했기 때문에 혹시나 어깨가 탈구 될까 봐 안절부절못하던 석희재는 이내 그의 겨드랑이 안에 손을 넣어 그를 완전히 일으켜 주었다.

    “후….”

    깊이 한숨을 쉰 이현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샤워실로 들어갔다. 석희재의 손에 들린 핸드 타월은 어느새 차게 식어 있었다.

    욕실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들려 석희재는 그 사이 가운을 벗고 옷을 갈아입었다. 지금 시간은 8시. 이현의 출근 시간이 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조식을 먹는다고 했으니 그때 함께 나가면 될 것 같았다.

    이현이 다 씻는 데는 15분도 걸리지 않았다. 샤워를 마친 이현이 나체로 나왔기 때문에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시선을 피했다. 이현은 그런 석희재를 흘끔 보더니 어제 입었던 착장을 그대로 걸치고 핸드폰에 지갑까지 챙겼다. 피곤해 보였지만 동작에 굼뜬 부분이 없었다. 매일 아침 같은 루틴으로 출근 준비를 하는 태가 났다.

    역시 조식 먹고 바로 가려나 보다.

    다시 방으로 돌아와서 그가 출근하기 전까지 함께 쉬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석희재는 이현이 제 짐을 전부 챙기는 것을 보고는 자기도 잊은 것 없이 꼼꼼히 물건들을 챙겼다.

    “아, 너도 조식 먹으려고?”

    신발을 신고 망설임 없이 나가는 이현을 얼른 따라 나가자 이현이 그렇게 물어 왔다. 석희재는 당연한 거 아닌가 싶어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그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조금 이상한 게 있다면 함께 가는 것인데도 이현은 마치 혼자 가는 사람처럼 걸음이 빨랐다는 것이다. 석희재에게 언질 없이 길을 꺾어 프런트로 향하더니 조식은 어디에서 먹는 건지 질문하기도 했다. 석희재는 뒤에서 멀뚱히 걸음을 멈춘 채로 그를 기다려야 했다.

    “조식은 두 분이십니까? 룸 넘버는….”

    룸 넘버를 확인한 직원이 두 사람을 같은 테이블로 안내했다. 그렇게 함께 마주 보고 앉았을 때 석희재는 왜 낯선 기분이 들었는지를 깨달았다.

    낯을 가리는 듯한 이현의 얼굴.

    그는 다시 어제처럼 거리를 두고 있었다.

    무언가를 불편해하는 건 확실한 듯한데, 이현은 접시 위에 음식을 가득 떠 와 부지런히 먹을 뿐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다. 눈이 마주치는 일도 별로 없었다.

    석희재는 두어 번 ‘커피 마실래?’, ‘이거 맛있어’ 따위의 말을 했지만 이현은 어색하게 웃으며 맞장구칠 뿐이었다.

    내가 뭘 잘못했는지… 기분 나쁜 티라도 내면 물어볼 텐데.

    그러나 이현은 그런 걸 물어볼 틈도 주지 않았다. 두 그릇을 빠르게 해치운 다음 의자를 밀어 끌면서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가 새 접시를 담으러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눈치로 알아챈 석희재가 물었다.

    “벌써 가?”

    “아… 응.”

    “출근은 몇 신데?”

    “사실 조금 남았는데… 아….”

    “…….”

    “나 원나잇한 남자랑 밥 먹은 거 처음이라서. 이렇게 어색할 줄 몰랐네.”

    이현이 몸을 굽히더니 낮은 목소리로 빠르게 속삭였다. 가볍게 물 잔을 쥐었던 석희재의 손은 그대로 멈췄다.

    석희재는 마시려던 것도 잊고 잔을 내려놓았다.

    “먼저 가 볼게.”

    이현은 망설임 없는 걸음으로 조식당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혼자 남겨진 석희재는 생각했다.

    더 있었으면 했는데. 아니, 가 버리게 만든 건 내 존재니까 그럴 일은 없었겠구나.

    말하지. 천천히 먹을 거면.

    내가 피해 줄 수도 있었는데.

    그리고 석희재는 두 번째 만남에서도 이현이 다음 만남을 기약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또, 제 이름조차 묻지 않았다는 것도.

    ***

    그렇게 이현이 떠나간 후로 석희재는 맞은편이 비어 있는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아주 잠깐 더 앉아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시계를 들여다보니 그렇게 혼자 앉아 있던 시간이 한 시간은 훌쩍 넘었다. 아마도 그건 그가 가고 나면 무엇을 할지 미리 생각해 놓지 않았기 때문일 거라고, 그래서 당황해서 그랬던 것뿐이라고… 석희재는 생각했다.

    그리고 그 후로도 하루 스무 시간 정도는 이현에 대해 생각했던 것 같다. 잠들기 위해 눈을 붙여도 꿈에 그가 등장했다는 말이다. 석희재는 그렇게 온종일 남자의 알 수 없는 마음에 관해 탐구했다.

    그리고 탐구의 시간은 속절없이 길어졌다.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건 처음부터 답을 찾을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석희재는 함께 있었던 시간의 모든 분초를 기억나는 대로 되짚었다.

    함께 있던 시간은 짧았지만 그건 석희재가 지금까지 겪었던 모든 만남 중 가장 밀도 있는 만남이었기 때문에 기억할 것이 많았다. 스탠드 조명을 반사하는 귓가의 하얀 솜털, 손에 쥔 피부의 미끄러지는 감촉 같은 것들, 그가 남긴 짤막한 말과 나지막한 웃음소리도 여전히 귀에 떠돌았다.

    그러나 며칠이 지난 후, 석희재는 자기 기억 속 그의 모습이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게 시간의 흐름에 따른 아주 자연스러운 왜곡이라는 것도.

    제 기억의 원형을 보관하고 싶다는 마음에, 석희재는 노트에 이현이 남긴 말들을 순서대로 적었다.

    - 아까 거기 그대로 있어. 횡단보도 앞에.

    - 지도 찍어서 보낼까.

    - 사진보다 멋있어.

    .

    .

    .

    - 힘센 거 자랑해?

    - 하는 데까지 해 봐.

    그리고 섹스 중 이현이 흘렸던 말들을 상기하면서 석희재는 홀로 자위하곤 했다.

    지난날에는 욕구에 도덕성을 갖다 팔아 버린 듯이 구는 이들을 보면서, 또 그런 이들이 자신들의 비틀린 성욕이 정당하다는 듯 구는 것을 보면서 석희재는 그들을 몰래 경멸했었다. 또 본인이 정상에서 벗어나 있는 건지, 혹시 무성애자는 아닌지 의심할 때도 있었다. 그렇게 석희재는 자기 자신을 성적 욕구에 담백한 편이라고 평가해 왔지만 그 모든 건 이현을 알기 전의 이야기였다.

    이미 발기한 것을 손으로 힘주어 주무르며 석희재는 자연스레 이현이 제 것을 입으로 더듬던 모습을 떠올렸다. 어둠 속에서 빛을 반사하는 까만 눈이 저를 올려다보는 순간 바깥으로 신음이 흘렀다.

    이어지는 상상이 현실과 조금 다른 것이 있다면 그때와 달리 자신과 이현은 다정히 마주 보고 있을 때가 많았다는 점이다. 또 이현은 스스로 석희재의 몸체 위에 엎드려 올라와 누운 채로 긴 키스를 해 주곤 했다. 입술을 덧그리는 듯 애타게 만드는, 상대가 저를 덮치도록 유도하는 이현의 키스하는 방식.

    그렇게 혀를 얽는 순간만 떠올려도 전신에 힘이 들어가고 고개를 쳐든 귀두 끝이 판판한 아랫배에 바짝 닿을 정도로 흥분하곤 했다. 도무지 가라앉지 않는 흥분 속에서 네 번, 다섯 번 연달아 사정하고 나면 끈질긴 갈증이 목에 달라붙어 왔다.

    ‘그러고 보니 처음 만난 날, 그날이 생일이라고 했었지.’

    사정 후에도 숨을 몰아쉬며 이현을 떠올리던 석희재는 잠시 후 몸을 일으켜 노트에 이현의 생일을 표시해 놨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에게 섣불리 연락하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왜 조식을 먹고 가지 않았느냐 물어도 이현은 답장을 되돌려주지 않았다. 그런 걸 보면 그는 관계에 있어 깔끔한 성격인 것 같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본인이 추구하는 목적과 부합하는 내용이 아니면 답을 주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학습한 석희재는 고민에 빠졌다.

    탐구가 길어질수록 도리어 해답은 알기 어려워졌다.

    하지만 그 과정이 별로 괴롭지는 않았다.

    이현을 떠올리는 일은 마치 덧없는 공상이 습관화되는 것과 같았다. 괴롭다거나, 행복하다거나 하는 감정의 문제는 뒷전이고, 석희재는 그저 망상에 빠진 어린애처럼 좋은 결과만 상상했다. 이현을 생각하면 기분이 가만히 허공으로 두둥실 들떴다.

    훗날 석희재는 그건 아마 목적이 거세된 채로 사랑이 시작되었기 때문이 아닌가 추측했다. 애초부터 연애라든가, 사랑의 완성 같은 목표를 가지고 그를 갈구하게 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한 번 더 만나고 싶었다.

    조금 더 바란다면, 보고 싶을 때마다 조금 더 거리낌 없이.

    그러니까 결론은, 바라는 것이 소박했기 때문에 짝사랑에 그렇게 쉽게 길들여져 버린 것이라는 뜻이다. 절망스럽게도.

    ***

    뜻밖의 만남이 이루어진 것은 그로부터 3주 후였다.

    놀랍게도 이현에게서 먼저 연락이 왔다.

    「오늘 뭐 해?」 오후 5:35

    진동과 함께 알림이 뜬 화면을 무심코 바라본 석희재는 일단 화면을 덮어 놓았다. 그렇게 한 이유는, 최초에는 그게 이현인 줄 몰랐기 때문이다. 친구들과 흔히 연락을 나누는 메시지 앱이 아니라 문자를 통해 도착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게다가 지금은 눈앞에 손님이 있었다.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던 사람이라도 어쨌든 상대에 대한 예의는 갖춰야 했다.

    “사라 씨가 그러더라고. 자기가 널 화나게 했대. 그날 너무 오래 기다려서 그랬다며? 미안하다. 처음부터 내가 부를걸.”

    어머니의 매니저 중 하나인 박인하 팀장이 사람 좋은 얼굴로 제 비위를 맞춰 주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석희재는 어른들이 때때로 필요에 의해 지나치게 비굴해지는 모습을 보는 게 싫었다. 속을 울렁거리게 만드는 불편감을 숨기면서 그는 박 팀장이 시켜 준 음료로 목을 축였다.

    빨대를 통해 빨아들인 음료가 의외로 맛있어서, 석희재는 연한 갈색으로 섞인 액체를 저도 모르게 바라보았다. 커피에 우유와 시럽을 적당히 넣은 것 같았다. 아직 커피의 쓴맛에 적응하지 못한 석희재가 카페에 오면 마실 수 있는 음료는 한정적이었다. 맛은 있었지만… 제 그런 입맛까지 고려한 매니저의 배려가 가시방석으로 느껴지기만 했다.

    “그… 생각은 있는 거지? 그러니 너도 오늘 나온 거겠지?”

    “…제가 말했던 조건은요?”

    석희재는 불편한 거절을 입에 담는 대신 오래전 결렬된 협상안을 다시 꺼냈다.

    아니나 다를까 매니저의 표정이 난감해진다. 기대도 없었기 때문에 석희재는 별로 실망도 하지 않았다.

    “꼭 그 방법이어야 할까? 아니, 네가 원하면 불가능하진 않은데 시간을 주면 타이밍을 재 봐서… 그렇게 천천히 같이 방법을 찾아보자. 응?”

    타이밍을 재 본다.

    그건 자신의 요구를 받아들이기로 했을 때, 제 어머니의 상품 가치가 최대한 깎여 나가지 않는 때를 찾아보겠다는 말이었다. 예전에는 혹시나 하는 희망도 가졌지만 이제는 그런 때가 절대 오지 않을 거라는 걸 안다. 아마 제 어머니가 죽을 때가 되어서야 가능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바라는 인생을 사는 조건으로 석희재가 요구했던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자신이 그녀의 친아들이라는 것을 당당하게 밝힐 수 있게 해 달라는 것.

    그러나 그때 어머니를 비롯한 사람들의 반응이란….

    자신은 제 친모가 쌓아 온 것들을 망쳐 버리는 천하의 불효자 취급을 당할 뿐이었다. 당시 모자 관계를 대놓고 부정당했다는 사실에 충격받기도 했지만, 그보다도 끝까지 자신의 상처만 생각하며 속 편하게 울어 버릴 수 있는 어머니가 아주 신기했던 기억이 난다.

    아무튼 이것도 벌써 몇 년 전의 이야기였다.

    석희재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 있냐고 물으셨죠. 저는 생각 없어요.”

    “…….”

    “절대 그분처럼 사람들 관심 먹으면서 살지는 않을 거예요.”

    석희재의 말에 매니저는 영 착잡한 얼굴을 하더니 잠시 담배 한 대를 태우고 오겠다고 밖으로 나갔다. 석희재는 그의 뒷모습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저런 실망스러운 제스처마저 저를 압박하기 위한 행동이다. 사실 정말로 실망한다면 표도 낼 수 없다. 지금보다 더 어렸을 때는 그런 걸 알지 못해서 어른들의 감정 표현에 심정적으로 많이 휘둘리기도 했었다.

    “하….”

    석희재는 손끝으로 이마를 가볍게 문질렀다. 정말로 달갑지 않은 제안이었다.

    그러나 어머니는 이런 기회들이 자신의 관심을 붙잡아 놓을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여전히, 아직도. 그녀는 아마도 모든 사람이 저처럼 대중의 관심과 사랑을 갈구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사랑받는 연예인으로서 누리는 많은 혜택에 완전히 적응한 그녀는 제 아들 역시 저와 같은 길을 걸으면 더 행복해지리라고 믿는 듯하다.

    연예계 생활이 마치 ‘다른 차원으로의 신분 상승’쯤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양… 그렇게 오만한 위치에서 제안해 왔다.

    그게 낳은 부모로서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라고 생각하는 걸까.

    저를 낳아 준 친모지만 생각하면 할수록 저와는 정말 안 맞는다는 결론만 났다. 그녀가 무슨 부채감으로 제게 이런 제안들을 하는지 알 것 같아서 더 그렇다. 이해는 가지만 절대 동의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

    ‘내가 언제 이런 걸 바란다고 했어.’

    석희재의 입꼬리가 답지 않게 삐뚜름한 곡선을 그렸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치의 독한 말이 입가에서 맴돌았다. 이제는 절대 입 밖으로 내뱉지 않기로 한 말들.

    - 지이잉.

    그때 엎어 놓은 핸드폰에서 다시 한번 진동이 울렸다. 동시에 유리문 바깥에서 매니저가 마지막 재를 떨고 꽁초를 버리는 것이 보였다.

    「바빠?ㅎㅎ 그럼 나중에 보자~」오후 5:54

    맥락 모를 문자에 잠시 어리둥절하던 석희재는 보낸 이의 이름을 확인해 봤다. 마침 매니저가 성큼성큼 걸어와 석희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희재야. 일단 저녁 먹으러 나가자. 배고프지? 내가 사 줄게.”

    그러나 그다음 순간 매니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뛰쳐나가는 석희재를 황당한 모습으로 바라봐야만 했다.

    ***

    ‘왜 전화를 안 받는 거야.’

    석희재는 카페로부터 최대한 먼 곳으로 마구 뛰어나오며 당장 이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딘가 들어갈 만한 곳이 마땅치 않아 보이자 숨을 몰아쉬면서 도보 옆에 빠듯하게 주차된 차들 사이로 숨어들었다.

    수화연결음이 한계까지 울리던 핸드폰에서는 곧 소리샘으로 연결된다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석희재는 얼른 전화를 꺼 버렸다. 그리고 급한 손으로 다시 한번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세 번 정도 울리다가 끊어지고 말았다.

    이렇게 된다면 상대 쪽에서 일부러 끊었다는 말이 된다.

    헉, 헉….

    아직도 벅찬 호흡을 가라앉히며 석희재는 약한 패닉에 빠진 채로 핸드폰 화면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바보같이.

    제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에게 예의를 차린다고 이현에게 온 연락을 놓쳐 버렸다. 후회스러웠다. 이현이 먼저 연락을 줄 수도 있는 사람이라는 걸 몰랐다. 그 가능성을 알고 있었다면 핸드폰을 단 한 순간도 방치하지 않고, 오는 연락들을 절대 소홀히 하지 않고 기다렸을 것이다.

    석희재는 다급히 이현이 보낸 문자를 확인해 봤다.

    「오늘 뭐 해?」오후 5:35

    「바빠?ㅎㅎ 그럼 나중에 보자~」오후 5:54

    첫 문자와 그다음 문자의 간격은 이십 분 정도였다. 이십 분 동안 내 연락을 기다렸을까? 왜 연락했을까? 오늘 마침 ‘그럴’ 생각이 들어서?

    이현에게 또 다른 원나잇 상대가 아예 없으리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면 아예 새로운 사람을 만날 수도 있을 테고… 저는 모르는 누군가에게 이미 턴이 넘어갔고, 그래서 이현이 제 연락을 안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까지 생각이 미쳤다.

    “씨…발.”

    좌절감에 생전 하지도 않던 욕이 흘러나왔다.

    보도블록의 턱에 아무렇게나 주저앉은 석희재는 다시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았다. 거기 이현이 들어 있는 것도 아닌데 시선이 못 박힌 듯 도무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붙잡고 싶었다. 물론 다시 전화하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이현은 이미 성가시다는 듯 제 전화를 차단해 버렸고, 석희재는 학습을 할 줄 알았다.

    문자를 보내야겠다.

    하지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오랫동안 탐구하며 고심할 때도 좋은 답을 찾지 못했는데 지금처럼 초조한 심정으로는… 심지어 자판 위에 올려 둔 손가락이 미세하게 떨려 댔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바로 곁, 주차된 차의 궁둥이에 팔을 기대고 얼굴을 묻었다. 누가 봐도 절망스러운 기색으로 주저앉아 조금 전의 자신을 저주하고 한탄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이현이 두 번째 문자를 보내기 직전으로라도, 제발.

    그렇게 답도 없는 좌절감에 빠져 있을 때였다.

    으스러지도록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조용히 진동이 울리기 시작했다.

    석희재는 기대 없는 눈길로 기계적으로 화면에 슥 시선을 주었다.

    「이현」

    두 글자 이름을 본 석희재의 심장이 다시 미친 듯이 쿵쾅쿵쾅 뛰었다.

    생각지도 못한 큰 행운을 거머쥔 기분이었다.

    도무지 평정을 가장할 수가 없던 그는 갑자기 벌떡 일어나서 제자리 뛰기를 했다. 막 조깅이라도 끝낸 사람을 가장하지 않고서는 흥분감을 조절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자신이 평생 안 하던 우스운 행동을 하고 있다는 자각도 없었다. 그때는 그만큼 절박했다.

    호흡이 가쁜 채로 석희재는 전화를 받았다.

    - 여보세요?

    “…응.”

    - 밖이야? 어디 가고 있어?“

    “어….”

    숨소리가 섞인 석희재의 짧은 대답과 달리 이현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편안하고 태연했다. 마지막에 그 어색한 분위기에서 함께 아침을 먹은 사이라고는 믿기지 않게, 마치 매일같이 연락하는 친구를 대하는 듯했다.

    하지만 석희재는 그의 친근함에 함부로 속아 들뜨지 않았다. 이현은 거리를 두고 싶은 사람에게 더 살가워지는 묘한 특성이 있다.

    “운동… 운동하느라, 그래서 연락을 못 받았어.”

    - 아… 그랬구나. 난 또.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단어가 귀에 쏙쏙 꽂혔다. ‘난 또….’ 그다음 말이 궁금했다. 나에 대해 무슨 추측을 했길래? 그런 사소한 생각이라도 듣고 싶었다.

    “너는?”

    - 방금까지 미팅했어.

    미팅?

    석희재는 그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남녀가 삼삼오오 모여 상대를 물색하는 행위를 직장인들도 하는 건지 궁금해졌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제게 다시 전화해 줬으니 그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 오늘 뭐 해?

    문자와 같은 내용의 말을 듣자마자 안도감에 다리가 풀릴 뻔했다. 석희재는 간신히 주차된 차를 짚고 일어섰다

    오늘 뭐 해, 라고 묻는 이현의 목소리에서 약간의 쑥스러움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 깔려 있는 함의도.

    아마도 오늘은 이현과 함께 같은 침대에서 잠들게 될 것 같다. 석희재는 제 예감이 틀리지 않으리라 믿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마자 얼른 시계를 살펴보았다. 마침 딱 저녁 식사를 하기 좋은 시간이었다. 석희재는 흥분을 억누른 목소리로 물었다.

    “저녁은… 먹었어?”

    - 저녁? 아니, 아직… 왜?

    왜라니.

    먼저 오늘 뭐 하냐고 물은 건 이현이었다.

    나랑 만날 생각으로 전화한 게 아닌가.

    이현의 물음에 당황하면서 방금 전의 대화를 되짚어 본 석희재는 자신이 너무 많은 사이의 대화를 뛰어넘어 버렸다는 것을 깨달았다.

    “약속 없어. 일찍… 만날 거면 저녁 먹자고.”

    - 네가 사 주는 거야?

    석희재의 말이 끝나자마자 이현은 주저 없이 되물어 왔다. 말끝에 웃음기가 있어서 심장이 쿵 떨어졌다.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자신이 헛들은 게 아니라면 말투에 옅은 애교가 묻어 있었다.

    자신은 한 마디, 한 마디 묻는 게 이토록 힘에 부치는데 이현은 모든 말이 다 쉬워 보였다. 이 템포라면 제정신으로 대화하기란 불가능했다.

    “사 줄게.”

    일단 생각을 더듬거리며 그렇게 대답하는 순간 다시 이현이 물었다.

    - 나 지금 퇴근해도 되거든. 어디쯤인데?

    “삼… 넌?”

    ‘삼성’이라고 곧이곧대로 대답하려다가, 너무 멀리 있는 걸 알면 만나기도 성가셔 할까 봐 이현에게 맞추려는 의도로 그렇게 말했다. 이현은 지금 대학로라고 말했다. 그러면 택시를 잡아탔을 때 사오십 분 정도 걸릴 것 같다.

    “근처야. 조금만 기다려.”

    - 강북이야? 천천히 와.

    석희재는 주저 없이 큰길로 달려나가 지나치는 택시를 잡아탔다.

    그렇게 십오 분쯤 달렸을 때였다. 핸드폰을 쥔 손에서 진동이 느껴지더니 액정에 다시 이현의 이름이 떴다. 오늘 좋은 일이 많이 생긴다고 생각하면서 석희재는 그의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 어떡하지. 나 갑자기 일 생겨서… 저녁은 못 먹을 것 같아.

    “아….”

    십오 분만에 들려온 비보에 석희재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았다.

    택시에 오르면서 최대한 속도를 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에, 택시는 무리해서 차들을 제치며 영동대교를 지나고 있었다. 막 일몰 시간이라 차창 밖에 보이는 한강 색이 짙었다.

    석희재는 아무런 반응도 하지 못한 채로 침묵했다.

    - 늦게 끝나는데… 어쩌지. 미안해.

    이현의 목소리가 시무룩했다. 석희재는 자신이 쓸데없는 걸음을 하고 있다는 사실보다도 어쩌면 오늘 이대로 못 만날 수도 있다는 생각에 크게 허무해졌다.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늦게’면 몇 시.”

    - 열 시는 돼야 할 거 같은데… 씨… 좆같은 회사.

    이현의 나지막한 음성에서 흘러나온 비속어에 석희재는 당황을 추슬렀다.

    어쨌든 현재 이현은 정말로 미안해하고 있었다. 기운 없는 목소리가 그걸 증명했다. 일단, 핑계를 만들어 자기를 떨쳐 내거나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잡은 게 아니라면 괜찮았다. 무엇보다도 오늘은 먼저 연락을 해 주지 않았는가. 그거면 됐다.

    “…피곤하면 안 봐도 돼.”

    - 음, 열 시보다 빨리 끝날 수도 있어.

    “……?”

    석희재는 방금 전 이현의 말을 되짚어 봤다. 착각이 아니라면 자기를 붙잡고 싶어 하는 눈치였다. 마음이 다급해진 석희재는 무리하지 말라는 말과 그러면 어디서 만날 거냐고 보채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갈등했다.

    길어지는 침묵 대신 어떤 말이라도 해 보려고 석희재가 입을 뗀 찰나, 주저하던 이현이 제게 물었다.

    - 그… 호텔 말고 우리 집으로 올래?

    ***

    이현은 넉넉잡아 열한 시까지 제집으로 오면 된다고 했다. 갑자기 시간이 넉넉해져서 석희재는 도로 택시를 돌려 집으로 갔다. 온몸을 구석구석 깨끗이 씻고 거울을 보며 신경 써서 옷을 오래 골랐다. 어린 티가 나지 않았으면 했다. 직장인들이 입는 옷을 참고해 옷장을 뒤지기도 했다. 잘 다려진 셔츠에 구두를 신자 너무 멋을 냈다는 기분도 들었지만 그래도 오랜만의 만남인데 아무렇게나 주워 입고 나가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데이트 준비를 마친 후 석희재는 이현이 자취한다는 동네로 향했다. 겨우 세 번째 만남인데 제게 주소를 주는 이현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혼란스러워하면서.

    조금 더 기대를 해 봐도 되는 것인지, 아니면 누구에게나 이렇게 쉽게 집 주소를 알려 주는 건지 아직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도착한 곳은 낮은 건물과 빌라들, 한옥이 드문드문 섞인 곳이었다. 이현이 일한다는 대학로로부터 차로 십 분 안쪽이 걸리는 동네였다.

    이미 열 시도 되기 전에 이현의 동네에 도착한 석희재는 그의 집 근처 카페에서 이현을 기다렸다. 한옥을 개조한 카페는 분위기 있었다. 어쩌면 이현 역시 주말에는 여기에 방문해서 커피를 마시곤 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주변 풍경이 새롭게 보였다.

    기다리는 한 시간은 눈 깜짝할 새 흘러갔다.

    “저녁 먹었어?”

    차가운 바깥바람을 몰고 들어온 이현이 들어오자마자 선 채로 물었다. 아까 제가 물었던 것을 그대로 다시 물어봐 주는 이현 때문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오랜만에 보는 흰 얼굴이 진귀했다.

    “…너는?”

    “난 먹고 왔어. 우리 집으로 갈까?”

    혹시나 함께 늦은 저녁을 먹을 수 있을지 기대하며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석희재는 조금 실망했다. 하지만 그의 집을 구경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자 아무래도 괜찮아졌다.

    이현은 카페 맞은편에 한 번 앉지도 않고 그대로 도로 카페를 나섰다. 석희재는 조용히 의자를 정리하고 그를 따라갔다.

    이현의 집은 개조한 한옥의 1층이었다. 집의 구조가 제법 특이했다. 대문 안쪽 마당에 들어서며 여기저기를 둘러보자 이현이 위층에는 주인이 산다고 말해 주었다.

    그리고 이현은 집에 들어가 현관문을 닫자마자 곧바로 욕실에 들어가서 옷을 벗었다. 손님을 데리고 온 것치고는 꽤 무방비한 행동이었다. 석희재는 바닥에 나풀나풀 떨어진 이현의 옷을 주워 구겨지지 않게 탁탁 털어 소파에 걸쳐 두었다.

    빠르게 씻은 이현은 다시 나올 때는 수건 한 장만 허리에 걸친 채였다.

    “왜 서 있어?”

    “…….”

    항상 떠올리며 자위하곤 하던 상대의 나체를 이렇게 갑자기 형광등 불빛 아래에서 볼 거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석희재는 약한 충격에 휩싸여 눈도 피하지 못하고 그저 이현을 뚫어져라 바라보기만 했다.

    “아… 내가 손님 대접이 좀 그렇지. 아무거나 꺼내 마셔도 돼. 먹을 건 없지만….”

    “…….”

    “오늘 진짜 회사에서 좆같은 일 있었어. 나만 동네북이야… 차장 새끼 죽여 버리고 싶어. 너무 스트레스받더라고.”

    “……?”

    “네가 도와줄 거지?”

    스트레스와 섹스의 상관관계를 아직 파악하지 못한 석희재의 귀에 이현의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오늘도 네 마음대로 해도 돼.”

    이현은 일부러 석희재의 귓바퀴에 입술을 붙이고 중얼거렸다. 등줄기에 벼락처럼 짜릿함이 내리꽂혔다. 석희재는 주먹을 꽉 쥐었다.

    “음….”

    석희재의 단단한 목덜미를 양팔로 감싸 안은 이현이 셔츠 사이 드러난 목덜미에 키스했다. 입술보다 혀가 먼저 닿는 감촉에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신음할 뻔했다.

    가슴팍을 더듬고 훑던 이현의 머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뜨거운 물에 달궈져 분홍색으로 물든 무릎이 주저 없이 바닥에 닿았다. 자신을 보호할 것 한 장도 걸치지 않은 무방비한 상태로 또다시 제 앞에 무릎 꿇는다.

    그리고 석희재는, 오늘은 저번과 달리 붙잡을 벽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이현을 떠올리며 게이 동영상을 몇 개 찾아보았었다. 흥분 앞에서 무력해지는 자신이 싫어 참고 겸, 연습 겸. 그러나 그 어떤 동영상들과 비교해서도 이현은 유독 구강성교를 좋아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가 만족하기만 한다면 사실 자신은 섹스의 형태는 어떤 것이든 상관없었다. 빳빳이 발기한 성기를 빨면서 질척하게 만든 이현이 빨리 제게 넣어 달라고 보챘다. 석희재는 그에게 이끌려 소파에 넘어지듯 누웠다.

    “읏….”

    다리가 엉키지 않는 게 최선이었다. 이현의 다리를 깔고 눕지 않으려고 몸을 틀다 석희재의 엉치뼈가 소파 위에 꽤 아프게 부딪쳤다. 하지만 석희재는 표 내지 않았다.

    지난밤과 달리 노골적인 형광등이 이현의 몸을 샅샅이 비추고 있었다. 스스로 뒤를 쑤시고 푸는 손가락도, 석희재의 아랫배를 핥는 분홍색 혀의 말캉거리는 질감도 너무나 또렷했다. 이대로라면 제 흥분도 역력하게 들킬 것이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이번에도 이현이 후배위를 자처했다는 점이었다.

    “아, 너무 좋아….”

    소파를 그러쥔 이현의 손안에서 뿌드득, 하는 마찰음이 났다. 엉덩이를 높이 쳐든 그의 어깨가 파들파들 떨렸다. 뿌리 끝까지 먹어 치우고서도 안이 움찔거렸다.

    석희재는 눈도 깜빡거리지 않고 그의 몸 선을 눈으로 샅샅이 핥았다. 옴폭 팬 등줄기 위로 척주 기립근이 서는 모습과 약해 보이는 목덜미가 수그러드는 움직임을. 자위하며 상상한 것보다 더한 시각적 자극이 코앞에 펼쳐져 있었다. 지금 거울을 본다면 제 눈은 추할 정도로 충혈되어 있을지도 모른다.

    “책임져. 너랑 했는데 어떻게 다른 남자 걸로 만족하라고….”

    붉은 눈으로 저를 돌아보며 중얼거리는 그 말에 완전히 핀트가 나갔다. 성욕, 질투심, 독점욕 같은 것이 뒤섞였다. 저를 흥분시킨 게 책임지라는 말이었나, 아니면 다른 남자라는 말이었나… 석희재는 알 수 없었다. 왠지 그에게 조종당한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지만 멈출 수도 없었다.

    ***

    결국에는 피를 보고 말았다. 석희재는 알아채지 못했던 일이다.

    세 번째 사정 후, 안이 너무 가득 찼다며 스스로 정액을 긁어 내던 이현의 뒤에서 흘러내리는 것들에 피가 섞여 있어 그제야 알았다. 이현은 관계 도중에 때려도 된다고, 발로 밟아도 된다고 석희재에게 몇 번이나 ‘빌 듯이’ 말했었다. 그래도 석희재가 손을 쓰지 않자 제발 맞고 싶다고 엉엉 울어 댔다.

    그런 이현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내심 있게 행동했다고 생각한 자신이 결국 그에게 상처를 냈다는 사실에 석희재는 적잖이 충격받았다.

    약한 패닉에 빠져 표정이 굳은 석희재의 앞에서 이현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중얼거렸다.

    “왜 갑자기 매너 챙기는 거야.”

    “…다른 사람은 때려?”

    “응.”

    이현은 조금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설명했다.

    “근데 차라리 네가 나아. 좆 작은 애들이 머리채 잡고 허리만 흔들어 대면 좋긴 한데… 좋은데 기분 나쁘거든? 현타도 오고… 근데 넌 이게 크니까 적당히 해도 두드려 맞는 것 같고 좋다.”

    그렇게 말하는 이현은 정말 만족한 것 같았다. 스트레스가 풀렸다며 온몸으로 기분이 좋은 티를 냈다. 석희재는 당혹스러운 마음에 으레 할 법한 평범한 대답도 못 하고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아무래도 이현의 성 취향이 생각보다 특이한 것 같은데, 남자들끼리는 이게 보통인지 집에 가서 찾아봐야 할 것 같았다.

    기분 좋아진 이현은 석희재의 품에 달라붙어 팔에 머리를 기대어 오기도 했다. 팔 안쪽을 간지럽히며 부스스 흩어지는 머리카락에 한없이 마음이 누그러졌다.

    석희재는 이 틈을 타 내내 궁금하던 것을 물어보았다.

    “근데 내 전화번호 저장했어?”

    오늘 제게 전화했다는 것은 처음 만난 날 연락했던 제 번호가 남아 있었다는 뜻이다. 역시 그날 다른 남자의 번호를 모두 지우고 제 것만 남겨 두길 잘했다. 비록 조식을 왜 안 먹고 갔느냐고 물어본 문자는 무시당했지만… 그래도 인제 와서는 보내 놓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로 저를 분명히 기억했을 테니까.

    “내 이름 모르잖아.”

    약간의 원망을 담아 그렇게 묻자 이현은 웃기만 했다. 석희재는 마침 누군가와 메시지를 나누고 있던 그의 핸드폰을 빼앗았다. 연락처를 뒤져 보니 제 번호는 ‘0120’ 숫자로 적혀져 있었다.

    이현의 생일이다. 이름 대신 숫자였다. 그는 아무래도 자신과 잔 남자를 당시 만났던 날짜로 저장하는 것 같다.

    이러고도 이름은 끝까지 안 물어볼 셈인지.

    울컥한 석희재는 중얼거렸다.

    “희재야.”

    “어?”

    “석희재.”

    이현은 말없이 저장된 연락처의 이름을 [ㅎㅈ]라고 바꾸었다. 석희재를 심란하게 만든 것은, 연락처 중 저 말고도 자음 초성으로만 적힌 번호들이 더러 보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날 헤어지면서 이현은 그렇게 말했다.

    “가끔 만나자.”

    첫 번째, 두 번째 만남의 끝과는 달리 완벽한 진전이었다.

    그 말에서 석희재는 희망을 봤다.

    “귀찮게는 안 할게.”

    그렇게 말한 이현은 바래다주지는 못하겠다면서 현관까지만 나와 웃으며 석희재에게 손을 흔들었다. 어색한 얼굴로 도망치던 지난날과 달리 확실히 제게 너그러웠다.

    피가 났는데… 그게 좋았던 건가.

    그나저나 가끔이라.

    ‘가끔’. 석희재에게 지금 가장 어려운 건 그 애매한 단어의 정확한 빈도를 알아내는 것이었다.

    잠깐 멈추었던 발걸음이 뒤돌아섰다. 이현의 집 닫힌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

    그 후로 이현이 원하는 빈도를 파악하기 위해서 석희재는 그의 연락을 성실히 기다렸다. 살면서 저보다 중한 것이 있는 사람을 기다리는 건 석희재가 평생 반복해 온 일이었다. 이현을 기다리는 것이 별로 어렵지 않았던 이유는 그렇게 어머니에게 단련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세상은 모성애에 대한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편견일 뿐인 환상을 주입받으면서 자식을 최우선으로 두는 어머니를 열망하는 것이 더 괴로웠다. 도리어 아무것도 약속해 주지 않는 이현 쪽이 훨씬 친절한 경우였다.

    그리고 이현은 그 간격이 빠르면 2주, 혹은 멀면 한 달 간격으로 연락을 해 왔다.

    그 사이 석희재는 이현에 대해서 몇 가지 귀중한 정보를 알아냈다.

    첫째는 그가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 회사에 대한 정보였다. 석희재는 어머니의 공연장에서 우연히 이현을 만난 날을 기억해 낸 후, 그날 초대권으로 참석한 단체들의 명단을 받았다. ‘이현’이라는 개인의 정보에는 까다롭게 굴던 티켓 팀이었지만 마케팅 용도로 기록하는 초대권 명단 정도는 쉽게 공유해 줄 수 있는지 흔쾌히 명단을 넘겼다.

    석희재는 넘겨받은 초대 명단을 샅샅이 훑어보았다. 각종 통신사와 포인트 제휴 업체, 이벤트 상품권 명단 한참 아래에 연주자와 스태프들이 사용한 사적인 초대권 항목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을 제외하고 나니 공연 기획사 이름으로 보이는 사명이 보였다. 총 3개였다. 한 곳은 선정릉, 나머지 두 곳은 대학로.

    대학로에서 일한다는 이현의 정보를 통해 대표의 나이대를 추정하자 최종적으로 회사를 추려낼 수 있었다. <라인 컴퍼니>. 홈페이지에는 간략한 조직도와 위치도 적혀 있었다.

    이걸로 딱히 뭘 하고 싶어서 알아낸 건 아니었다. 알아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순수하게 기뻤다. 약속도 정하지 않고 불쑥 찾아가는 일은 없을 테지만 그냥, 원할 때면 언제든 닿을 수 있다는 게 좋았다.

    그리고 두 번째. 이현은 빚지는 것을 싫어한다.

    석희재와 다섯 번째로 잤을 때, 이현은 저가 호텔비를 내고 싶어 했다. 그러나 공연 기획사 직원의 월급을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석희재는 호텔에서의 일박이 그의 월급 10분의 1을 차지할 거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짐작했다.

    그래서 저가 내려 했건만… 이현은 끈질기게 만류했다.

    “저번에 네가 한 번 냈잖아.”

    “너도 냈잖아.”

    “아무튼 이번에는 내 차례야.”

    방값은 돌아가면서 지불해야 한다는 이현의 주장에 깔끔히 물러나면서 석희재는 그가 어떤 연애를 해 왔을까 상상했다. 저보다 일곱 살이나 많은 남자는 가끔 석희재가 깜짝 놀랄 정도로 살갑고 애교 있는 면을 보여 주곤 했다. - 나중에 알았는데 그는 사 형제 중 막내였다. - 그러나 그게 일방적인 의존이나 어리광으로 이어지는 경우는 전무했다.

    어른이라 그런 것인지, 아니면 제게 선을 긋고 있는 것인지….

    “넌 저런 데는 좀 그렇지?”

    이현이 손으로 가리킨 곳에는 MOTEL이라는 네온사인이 빛나고 있었다.

    석희재는 제게 묻는 이현의 얼굴을 그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직장인인 이현을 의식해 일부러 신경 쓰고 있는 옷차림, 대학에 입학하며 선물 받은 시계와 로고가 드러나지 않는 명품 가방.

    하지만 이런 것들이 그의 눈에 호감으로 가 닿는 게 아니라면? 어쩌면 이현은 그저 부담만 느끼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상관없는데.”

    석희재는 그렇게 말하며 눈을 내리깔았다.

    아니, 저는 상관없었지만 이현이 저런 곳에 드나드는 것은 싫었다. 더해서 이현이 다른 남자들과 싸구려 모텔에서 뒹굴었을 것을 상상하면… 제게 이런 면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가슴 밑바닥이 뜨겁게 달구어졌다.

    “솔직히 말하면, 한 번도 안 가봤어.”

    석희재는 무뚝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역시….”

    수긍하는 이현을 향해 석희재는 말했다.

    “그러니까 나랑 저런데 갈 생각은 하지도 마.”

    마주치는 눈길에 웃음기가 없는 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이현은 그저 고개를 끄덕였다.

    석희재는 이현의 원나잇 상대들 수준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먼저 호텔을 가자고 이끈 것은 이현이다. 그렇게 자신과 만나는 매일을 생일처럼 여겨 줬으면 했다. 자신은 이미 그러하니까.

    그 뒤로 이현은 자신이 비용을 내야 할 때는 석희재를 제집으로 불렀다. 석희재에게는 훨씬 더 좋은 일이었다.

    물론 빚을 만들지 않으려는 건 관계를 좁힐 생각이 없다는 뜻이라는 것을 모를 때의 생각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현은 사람과 만나 목적 없이 시간을 죽이는 것을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석희재와 만날 때면 무조건 침대로 직행하는 것을 선호했다는 말이다. 몇 번 저녁을 함께 먹거나 늦은 밤 술잔을 기울일 때도 있었지만 그건 딱히 석희재와 시간을 보내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저 배를 채우기 위해서였다.

    공연이 시작되면 그는 특히 바빠져서 끼니를 놓치는 일이 허다했다. 하루 종일 먹은 게 팬들이 보내 준 조공 도시락 하나라는 소리에 석희재는 인터넷에서 조공 도시락의 생긴 모습을 검색해 보기도 했다.

    그래서 석희재가 이현과 함께 밥을 가장 많이 먹게 된 곳은 그의 집 근처 편의점이었다. 야외 테이블에 미지근하게 데운 김밥, 빵, 컵라면, 맥주 한 캔을 늘어놓고 무기력한 표정으로 김밥을 씹는 이현의 얼굴에는 사람과 교류하고 싶지 않다는 티가 역력했다.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를 알아가는 일 자체가 그의 에너지를 앗아 가는 행위라는 건 석희재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지난주엔 미안.”

    제 몫의 식은 맥주를 들고 있던 석희재에게 이현이 말했다. 석희재는 천천히 고개를 들고 그의 무기력한 얼굴을 살폈다.

    지난주 이현은 석희재에게 먼저 만나자고 연락을 했다가 당일 퇴근 직전 약속을 깨 버렸다. 이유가 몹시 궁금했지만 석희재는 보채지 않았다. 그가 성가셔 할까 봐.

    그리고 지금, 그때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석희재는 그가 죄책감 느끼지 않도록, 저는 그 일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굴었다.

    “뭐가.”

    “갑자기 약속 깨서.”

    “…….”

    “그날 갑자기 장례식에 가야 됐거든.”

    처음 듣는 얘기에 석희재는 이현을 바라보았다.

    “첫 직장 대표님이었는데… 돌아가셨어.”

    “…….”

    “업계 들어와서 벌써 두 번째야. 아니 네 번째. 두 명은 자살, 두 명은 과로사.”

    “…….”

    “과로사로 죽은 사람은 나랑 동갑이었는데… 하, 말해 뭐해. 기운 빠지지? 미안.”

    석희재는 그때 확신했다. 이현이 원래부터 사람을 사귀는 걸 싫어하는 성격은 아니었을 거라는 걸.

    그는 가끔 놀라울 정도로 친근하게 굴었고 무엇보다도 사람의 손길을 좋아했다. 하지만 그런 이현이 천성을 억누를 정도로 그의 회사는 모든 에너지를 고갈해 가는 곳이었던 것이다.

    힘들고 지칠 때마다 더 몰아붙여 주기를 원하는 이현은 그날도 지쳐 손 하나 까딱하지 않을 때까지 석희재를 충동질했다. 이현은 그의 몸이 고장 날까 봐 노심초사 걱정하는 석희재를 부추기고 조종하는 법을 너무나 잘 알았다. 그의 몸에는 또 다시 온몸에 씹고 물어뜯긴 자국과 빨갛게 살이 부어오른 흔적이 남았다. 그리고 또다시 피를 봤다.

    관계가 끝난 후, 눈물이 묻어 잔뜩 부은 눈을 한 이현의 모습.

    그 초점 없는 눈이 석희재의 가슴을 철렁하게 만들었다. 물론 엉망인 얼굴과 달리 이현은 무척 만족하고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이현을 소중히 보살피고 싶은 마음이 오늘도 성욕에 꺾이고 말았다는 사실은 석희재의 마음에 생채기를 남겼다.

    석희재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넌 연애 안 해?”

    “연애?”

    이현이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석희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힘들 때 보듬어 주고, 지쳤을 때 기대게 해 주고, 남들은 성가셔 할 만한 사소한 이야기들도 깊은 이해심으로 들어주는… 그런 상대를 원하지 않느냐고.

    “하고 싶은데 내가 연애할 시간이 없어.”

    “…….”

    “난 자격이 안 돼… 받고만 싶지 남한테 줄 게 없어.”

    그렇게 말하면서 이현은 엎드린 채로 제 팔에 얼굴을 묻고 한숨을 쉬었다.

    석희재는 그의 옆에 가만히 따라 누웠다. 찢어진 뒤를 살펴 약을 발라 주고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연인도 아닌 상대에게 그가 어디까지 허락하고, 어디까지 바라는지 알 수가 없어 쉽게 손을 대지 못했다.

    대신 석희재가 택한 것은 그를 뒤에서부터 끌어안는 것이었다. 흥분한 척 발기된 것을 문지르면 이현은 쉽사리 제게 몸을 맡겼다. 그를 안심하게 만드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렇게 다시 안을 것처럼 이현을 품에 끌어안은 채로 석희재는 가만히 숨만 쉬었다.

    이현이 뒤를 돌아보며 피식 웃었다. 석희재의 뺨을 손가락으로 건들며 묻는다.

    “왜 그런 거 물어봐? 내가 연애하자고 할까 봐 무서워?”

    “…….”

    “나 주제 파악 잘한다. 걱정하지 마.”

    “…….”

    “연애… 피디 되면 할 수 있으려나… 그럼 극장 당직은 안 서도 되는데….”

    “지금은 뭔데.”

    “지금은 그냥 사원이지.”

    “피디는 몇 살에 되는데?”

    “몰라. 그 전에 죽으면 못해.”

    “…….”

    “과로사로 죽는 게 더 빠를 수도 있어….”

    숨이 막힌다며 손으로 제 얼굴을 감싸고 약하게 징징거리는 이현을 보면서 석희재는 자꾸 욕심을 키웠다.

    줄 게 없어서 연애를 못 한다는 이현의 속마음이 너무나 사랑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또, 제게 몸이라도 내어 주는 그가 고마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부정할 수 없이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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