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소공로 99-1
3년 전.
해가 바뀌고 연말의 들뜬 기분도 찬바람이 쓸어 간 지 오래, 그러나 거리에는 여전히 지난 성탄절의 잔해가 남아 있었다. 카페의 창에 걸린 먼지 쌓인 리스, 가로등을 감은 빨간 포인세티아 장식, 그리고 나무를 휘감은 작은 불 전구들… 연말을 맞아 부지런히 장식한 길거리는 고작 수 주만에 수명을 다하고 고루한 분위기를 풍겼다.
석희재는 두툼한 점퍼 안에 몸을 가두고 지퍼를 턱 끝까지 당긴 채로 처음 걸어 보는 낯선 거리를 천천히 배회하고 있었다.
이 근처만 해도 규모 있는 호텔이 여러 개였다. 제가 찾아온 사람이 이 중 어느 호텔로 들어갔는지는 알 길이 없었다. 단서는 시청역과 가깝다는 것뿐.
시청 광장 바로 앞의 플라자 호텔의 로비를 서성이던 석희재는 수십 분 사이 다섯 번이나 눈이 마주친 호텔 직원을 피해 건물의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들어선 호텔의 뒤편은 시청 광장을 마주한 전면의 인상과는 전혀 달랐다. 인도는 좁았고, 그 좁은 인도에마저 음식물 쓰레기통 수십여 개가 빼곡하게 줄지어 서 있었다. 악취를 풍기는 곳을 겨우 벗어나면 이번에는 생소한 단어로 간판을 내건 술집들이 보였다.
석희재는 조금 주저하며 제 바짓단을 내려다보았다. 가운데 부분에 깔끔하게 다린 선이 남아 있는 바지는 교복과 비슷한 색이었다. 순간적으로 자신이 진짜 교복을 입고 나온 건 아닌지 헷갈려서 석희재는 당황했다. 수능도 끝나고 이제 교복은 입을 일이 없어 존재 자체를 잊어버렸는데… 가정부 아주머니가 드라이 맡겼던 것을 찾아와 옷장에 걸어 두었나 보다.
물론 이게 진짜 교복이라 해도 진회색 슬랙스처럼 생긴 바지는 언뜻 보기엔 티가 나지 않았다. 아무도 몰라볼 것이다. 그래도 술집이 즐비한 거리를 돌아다니자 괜히 위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천천히 걷던 석희재의 시선은 ‘노가리 한 사라, 만 원’이라고 쓰인 글자에 닿았다. 색깔 있는 시트지를 잘라 붙인 글자의 뜻이 얼른 와닿지가 않았다. ‘사라’라는 단어가 그릇이라는 것을 문맥으로 겨우 깨달았을 때에, 석희재의 곁으로 가래를 뱉는 취객이 휘청이며 스쳐 지나갔다.
석희재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귀에 꽂은 이어폰에서는 지나치게 큰 음량으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듣기 좋은 연주는 아니었다. 바이올린 연주자가 현을 신경질적으로 그어 댈 때마다 신경이 예민해졌다. 정식 레코딩이 아닌 이 음원은 예전에 석희재가 연주자 앞에서 직접 녹음한 것이었다.
‘수준 낮아.’
평소 같으면 그렇게 일갈하고 미련 없이 꺼 버렸을 테지만 이번에는 고막을 먹먹하게 만드는 소음을 방치했다. 괴로울 때는 왜인지 모르게 스스로를 괴로운 쪽으로 더 몰아가게 된다. 좋은 습관이 아니라는 자각은 있다. 그러나 고칠 의지를 가져 본 적은 없었다.
석희재는 고개를 들었다. 바로 앞의 호텔 건물은 지나치게 가까워 고개를 꽤 높이 들어야 최상층을 볼 수 있었다. 균일한 간격으로 창이 난 호텔 방에는 불이 들어온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었다.
석희재는 왼쪽 위의 창부터 하나씩 짚어 내려갔다. 어디에 ‘그 사람’이 있는지는 모른다. 지금 행동이 아무 의미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석희재는 그냥 그렇게 했다. 가끔 숨으로 하얀 김을 뱉어 내는 것 말고는 미동도 없이.
“어어? 이 새끼 뭐야!”
현을 아프게 당기며 고문하던 바이올린 소음이 순식간에 멀어지고 귓가로 거리의 소음이 쏟아져 들어왔다. 지나가던 취객이 휘두른 팔에 이어폰 줄이 걸려 떨어져 나간 것이었다.
석희재는 눈 밑까지 시뻘겋게 달아오른 남자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다가 몸을 굽혔다. 세찬 힘에 의해 이어폰 줄과 함께 떨어진 핸드폰을 줍기 위해서였다. 고개를 숙이자마자 취한 남자가 삿대질도 모자라 발길질을 하려 했다. 시야 안으로 훅 들어온 남자의 신발은 명품의 카피 제품이었다. 로고가 거꾸로다.
“길 막지 말고 비켜!”
언뜻 보아도 카피의 티가 확연히 나는 신발을 신고 다니는 남자의 얼굴이 궁금해 고개를 들자 그가 무례하게 주먹을 휘둘렀다. 물론 휘청이는 취객의 주먹은 석희재의 근처까지도 오지 못하고 엇나갔다. 우스꽝스럽게 기우뚱거리는 남자를 조금의 감정적 동요도 없이 바라보는 석희재의 고고하고 말간 얼굴에 취객은 도리어 자극을 받은 듯했다. 원래도 석희재의 얼굴은 초라한 남자들의 열등감을 증폭시키는 효과가 있었고, 석희재는 알면서도 방치하는 편이었다.
“이 새끼가? 뭘 봐? 뭘 쳐다보냐고?”
시뻘게진 얼굴의 취객이 석희재의 코앞까지 다가왔다. 드잡이질이라도 하려는 것일까.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순간, 취한 남자를 뒤에서 일행 두 명이 붙잡았다.
“이 새끼가 나 꼬나보는 거 봤어? 어? 봤지! 씨발… 재수 없게.”
“야, 야. 시비 걸지 말고 가. 정신 차려. 시간 다 됐어.”
취한 제 친구를 붙든 일행 중 한 명이 석희재에게 눈짓을 했다. 시비가 붙기 전에 얼른 자리를 피하라는 뜻 같았다.
석희재는 성의 없이 묵례하고 몸을 돌렸다.
일단 그들을 피해 좁은 골목으로 걸어 들어가면서 석희재는 여전히 엉켜 있는 세 남자를 바라보았다. 지금 보니 저를 쳤던 남자 말고도 전부 다 얼큰하게 취해 있었다. 살면서 길거리 취객을 별로 볼 일이 없었던 석희재의 시선은 그 세 남자에게 고정되었다.
“아, 이제 적당히 하고 가자. 몇 번 말해! 약속 시간 됐다니까?”
“아, 그래? 그러면… 가야지! 우리 현이… 현이가 기다리는데.”
“어어? 네가 가긴 뭘 가, 새끼야. 아까 실컷 설명한 거 못 들었냐? 너네는 여기 딱 기다리고 있어. 대놓고 셋이나 가면 도망간다고.”
“걔 존나 밝힌다며. 셋은 싫대? 대물을 세 개나 대령하는데 복인 줄 알 것이지.”
“그러니까 내 말이. 잘 받… 잘 먹겠습니다. 하고 딱 대기 타야지.”
아까 듣던 바이올린 소음만큼이나 듣기 싫은 걸걸한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들에서 나오는 추잡한 대화가 석희재의 귀에는 전혀 재밌게 들리지 않았다. 특히 목소리도 낮추지 않고 상스러운 단어를 쓰는 것이 가장 싫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기가 막하게 위트 있는 농담을 나누었다는 듯이 소리높여 웃었다.
석희재는 희미하게 인상을 쓰고 이어폰을 다시 핸드폰에 연결했다. 하지만 아까 핸드폰을 바닥에 떨어뜨리면서 이어폰 결합부가 망가진 것 같았다. 귀에 꽂고 음악을 재생해 봐도 아무런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물어 달라고 할까. 석희재가 다시 그 남자들을 바라보았을 때였다.
“아무튼 모텔 가서 자리 잡고 전화할 테니까, 그때 와라.”
“갔는데 싫다고 하면?”
“다 내숭이지. 꼴리라고 하는 말이야. 그런 거 다.”
“반항할지도 모르니까 묶어 놓든가.”
“그럼 더 좋아하는 거 아니냐?”
저열한 흥분으로 달아올라 떠드는 남자들의 대화 속 함의를 알아챈 순간, 석희재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한 여자를 동의 없이 여럿이 강간한다는 이야기가 길거리에 쩌렁쩌렁 울리는데도 지나치는 행인들은 무관심해 보였다.
“야, 근데 말은 이렇게 해 놓고 너 혼자만 재미 보는 거 아니지?”
“아아이, 아니라니까! 혼자 먹으면 무슨 맛이냐?”
“야, 믿어 주자. 이 자식이 완전 의리 없는 놈은 아니거든. 예전에도….”
제 상식에서는 납득가지 않는 방식으로 우정을 말하는 세 남자를 보던 석희재의 심장이 아까보다 조금 더 빨리 뛰기 시작했다. 마침 ‘의리 있는 놈’이라는 칭호를 얻은 남자가 무리에서 떨어져 이쪽을 향했다. 당사자를 만나러 가는 모양이다.
무의식적으로 그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석희재와 그의 눈이 불시에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석희재는 얼른 그를 등지고 눈을 피했다. 다행스럽게도 막 강간 모의를 마친 남자는 잠시 뒤의 일에 정신이 팔려 무신경했다. 그는 휘파람까지 불며 석희재의 뒤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석희재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그의 뒤를 쫓았다.
“어, 현이 맞지? 너 정확히 어디냐? 무슨 옷 입었어?”
남자가 전화를 들었다. 건들거리는 말투 끝에서 날티가 뚝뚝 떨어졌다.
“아. 횡단보도 앞이라고? 앞에 뭐 보이는데. 청국장집? 여기 청국장집이 있다고?”
남자는 멈춰 서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골목 안쪽에는 간판이 다닥다닥 붙은 술집과 규모가 작은 숙박 시설들이 즐비했다.
“큰길로 나가야 하나?”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오른쪽 골목으로 꺾었다. 시청역 큰길로 나가는 방향이었다.
그 남자의 등을 잠시 바라보던 석희재는 등을 돌려 왼쪽으로 향했다. ‘청국장집이 보이는 횡단보도.’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아까 호텔 주변을 배회하다가 본 기억이 있었다. 플라자 호텔과 웨스틴조선 호텔의 사이. 세입자가 전부 빠진 황폐한 건물과 불 꺼진 양장점이 즐비한 골목 앞에서 분명 ‘청국장’이라고 쓰인 식당을 보았었다. 아름답게 장식한 맞은편의 호텔 로비와 대비되는 풍경이 너무 확연해 기억에 남았던 곳이다.
걸음은 점차 빨라졌다. 샛길을 빠져나가 코너를 돌자마자 바로 횡단보도가 보였다. 기억했던 그대로의 광경이었다.
그리고 ‘현이’를 놓칠세라 뛰어오던 석희재의 걸음은 횡단보도 앞에 다 도달하기 전에 점차 느려졌다.
‘분명히 여기가 맞는데….’
석희재는 조용히 숨을 가다듬으며 횡단보도 앞에 섰다.
여성은 보이지 않았다. 문 닫은 오래된 양장점 앞, 가로등도 없는 곳에 한 남자가 서 있었을 뿐이었다.
호리호리한 체형의 남자가 저를 흘끔거렸다. 잠깐 눈이 마주쳤지만 석희재는 하얀 김을 뱉으며 다시 주변을 돌아보았다. 여자는커녕, 지나치는 이조차 눈에 띄지 않는 쓸쓸한 골목이었다.
침묵 속에서 석희재는 신호등의 파란불을 기다리는 척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잠시 후 횡단보도의 파란불이 켜졌다.
석희재는 건너지 않았다. 제 곁에 선 남자 역시 건너지 않았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그 남자를 보았다. 입까지 가려 두른 머플러 위로 드러난 흰 볼이 찬 바람에 터 있었다. 아마도 한참 바깥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가만히 선 몸은 간헐적으로 부들부들 떨리기도 했다.
왜인지 눈을 떼기가 어려워 석희재는 그 옆모습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남자는 횡단보도에서 몇 걸음 물러나 더 어둑한 곳으로 향했다. 신호등의 파란불이 깜빡거리며 남자의 흰 볼을 묘한 빛으로 물들였다.
신호등이 다시 빨간불로 바뀌었을 때였다. 남자의 핸드폰이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는 남자의 목소리는 생각보다 낮았고, 조금 허스키했다. 수 미터 떨어져 있는데도 귀에 선명히 꽂혔다.
“아까 거기 그대로 있어.”
“…….”
“횡단보도 앞에….”
그 말을 듣는 순간 석희재는 적잖이 당황해서는 제게서 등 돌리고 있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밀회를 들키고 싶지 않다는 듯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남자의 모습을.
‘존나 밝힌다는’, ‘현이’라는 이름의 ‘남자’.
“그럼 내가 지도 찍어서 보낼까?”
석희재는 주머니 안에서 쥐고 있던 핸드폰을 엄지손가락 끝으로 문질러 댔다. 의식하지 못했는데 핸드폰을 쥔 손의 악력이 지나치게 강했다.
마음을 굳히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석희재는 곧 아무런 전화도 걸려 오지 않은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고는 남자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뒤돌아선 남자의 어깨를 톡톡,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아….”
‘현이’가 뒤를 도는 순간 석희재는 그의 손을 핸드폰째로 감쌌다. 날씬한 손가락은 차갑게 곱아 있었고 스치듯 닿은 귓바퀴는 얼음장 같았다.
유일하게 열을 내는 핸드폰을 곧바로 빼앗아 끊어 버리고, 석희재는 남자의 눈을 응시했다.
“많이 기다렸지.”
***
“와.”
남자는 짧은 탄성을 내뱉으며 웃었다.
“사진보다 훨씬 멋있어.”
석희재는 대답 없이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어깨를 톡, 하고 건드렸을 뿐인데 붉게 반짝이는 석류알이 와르르 쏟아지는 것 같았다. 웃음은 남자의 인상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무표정으로 신호등의 파란 불빛을 받고 있을 때와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석희재는 마법 같은 변화가 활짝 피어난 남자의 얼굴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았다.
“설마 했거든. 아까 옆에 와서 설 때….”
“…….”
“그런데 실물하고 사진이 너무 달라서 아닌 줄 알았어. 아, 실물이 훨씬 낫다는 소리야.”
석희재는 계속 침묵했다. 다행히도 눈앞의 남자는 저를 오늘의 약속 상대로 착각해 준 듯했다. 그러나 당장은 가지고 있는 정보량이 너무 적어서 무어라 함부로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게다가 자신을 보자마자 지나치게 반기는 듯한 얼굴도 마음에 걸렸다. 어쩌면 이 남자는 오늘 약속을 애타게 기다렸던 건 아닐까. 저가 헛짚고 훼방을 놓았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석희재는 한 번은 확인해 봤다.
“묶이는 거 좋아해?”
석희재의 물음에 남자의 얼굴에서 희미하게 웃음이 가셨다.
“묶이는 거…? 응. 괜찮아.”
잠시 바닥을 응시하던 석희재는 다시 고개를 들고 물었다.
“그럼 여럿이 하는 건?”
“며, 몇 명이나?”
그 양아치의 일행은 하나, 둘, 셋. 그리고 눈앞의 남자까지 하면 넷이다. 남자 넷이 얽힌 모습을 상상하다 표정을 굳힌 석희재가 대답했다.
“네 명.”
석희재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 순간 저 코너에서 진짜 상대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생각에 조금 초조해졌다.
“네 명은 한 번도 생각 안 해 봤는데….”
“…….”
“꼭 하고 싶어?”
남자의 낯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웃음이 싹 지워진 눈은 아까 무표정으로 맞은편만을 응시하고 있을 때보다도 무기력해 보였다.
역시나 동의는 없었던 거다. 다시 한번 뒤를 흘끔 돌아본 석희재는 말했다.
“자리 옮기자.”
말하는 순간 횡단보도의 신호가 다시 파란불로 바뀌었다. 석희재는 남자의 팔꿈치와 손목 사이를 붙들고는 무작정 횡단보도를 건넜다. 청국장집을 지나 좁은 골목으로 빠져나가자마자 두 사람의 인영은 불쑥 솟은 지하도로의 출입구 뒤로 사라졌다.
석희재는 그때 코너 저편에서 달려오는 누군가의 발소리를 들었다. 타이밍이 꽤 아슬아슬했다. 그렇게 생각하며 몰래 안도하고 있을 때였다. 석희재의 손안에서 진동이 울렸다. 아까 빼앗은 남자의 핸드폰이었다.
흘끗 손안을 내려다본 석희재는 전원 버튼을 길게 눌러서 핸드폰을 아예 꺼 버렸다.
“근데 우리 호텔 가면 안 되나?”
제게 붙들려 따라오던 남자가 물었다. 석희재는 걸음을 멈추었다.
“기다리는데, 저기 호텔 로비가 너무 예쁘더라.”
“…….”
“오늘은 왠지 모텔 가기 싫다. 돈은 내가 낼게.”
석희재는 눈을 들어 남자가 한참을 바라보았다는 호텔 로비로 시선을 주었다. 숨이 막힐 만큼의 화려한 전등 꽃이 시야 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오늘 누군가를 찾기 위해 한참을 서성여도 막상 발을 들일 자신이 나지 않던 호텔 입구였다. 하지만 이런 일에 익숙해 보이는 남자를 따라가면 괜찮을 것 같기도 했다.
게다가 수그린 남자의 볼은 여전히 추워 보였다.
“가자.”
***
단순한 허락일 뿐인데 남자는 ‘생일 선물이라도 받은 것 같다’며 좋아했다. 하지만 호텔비도 자기가 낸다고 하지 않았던가. 선물의 의미를 헷갈리고 있는 것 같은 남자에게 나는 당신이 기다리던 남자가 아니라고 말하기가 더더욱 어려워졌다.
“사실 안 나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오늘은 진짜 혼자 있기 싫었어.”
“…….”
“체크인하고 올게. 여기서 잠깐만 기다려.”
로비에 들어서며 남자는 자연스럽게 붙잡힌 팔을 빼냈다. 그때까지 자신이 남자의 팔을 붙들고 있었다는 자각도 없었던 석희재는 속으로만 놀라면서 프런트 쪽으로 앞서 걸어가는 남자를 조용히 따라갔다. 그러나 대리석 바닥에 운동화 밑면이 닿을 때마다 고무 마찰 소리를 내는 것이 부끄러워 곧 발을 멈추었다.
석희재는 무심코 고개를 숙였다. 교복과 비슷한 진회색의 바지 아래 디자인이 단정한 축에 드는 흰색 운동화. 너무 학생티가 나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발끝을 물끄러미 보고 있을 때였다. 맞은편에서 남자가 가벼운 걸음으로 달려왔다. 석희재는 얼른 고개를 들었다.
“방이 남았나 봐. 업그레이드 받았어.”
“…….”
“밤늦게 체크인하면 은근 업그레이드 잘해 주더라. 아무튼 오늘 운 좋네.”
남자는 석희재와 달리 호텔이 익숙한 것처럼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석희재는 잘 닦여 거울처럼 풍경을 반사하는 엘리베이터 문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어색하게 사이를 두고 떨어져 있는 자신과 남자가 보였다.
앞서 정황으로 생각해 보면 이 남자는 남자를 만나는 종류의 사람일 것이다. 식사나 술자리도 거치지 않은 채 호텔로 직행한다는 사실에 조금 놀라긴 했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그건 아주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자신에게 생소한 방식이라고 해서 세상에 그렇게 사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니까. 실제로 자기가 아주 잘 아는 한 사람도 그런 식으로 살고 있지 않은가.
석희재는 남자의 옆모습을 내려다보았다.
그래도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가볍게 원나잇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는….
많이 말랐지만 키는 제법 컸고, 웃을 때와 웃지 않을 때의 인상 차이가 컸다. 날카로운 눈매가 다양한 인상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옆에서 본 콧대와 입술 선이 특히 예뻤고 목이 길었다. 직업과 나이를 추측하기는 어려웠지만 석희재는 문득 아이돌 연습생들이 저렇게 생겼을까, 하고 생각했다. 굳이 질 낮은 남자들과 엮이지 않아도 될 만큼 깨끗하게 잘생긴 얼굴이었다는 뜻이다.
물론 첫인상만으로는 아무것도 판단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석희재는 자꾸 다른 가능성을 찾았다. 제 시선을 느꼈을 텐데도 남자는 엘리베이터의 층수가 떨어지는 과정에 시선을 못 박고 있었다. 그 모습이 괜히 낯을 가리는 것처럼 보여서 더더욱 지금 상황과의 괴리를 느꼈다.
청명한 알림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남자는 시선을 피하고 싶은 것처럼 얼른 안으로 들어갔다. 석희재는 조금 주저하다가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고공으로 붕 뜨는 감각과 함께 창밖의 지면이 멀어졌다.
“내리자. 코너 룸이라니까… 저기 복도 끝인가 봐.”
석희재는 남자를 따라 검붉은 카펫이 깔린 바닥으로 발을 내디뎠다. 긴 복도를 걸어가면서 석희재는 닫힌 문들을 스쳐 지나갔다. 균일한 간격으로 자리한 문들은 굳게 잠겨 안쪽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조금도 짐작할 수 없게 되어 있었다.
‘그녀’를 이런 곳에서 찾을 수 있을 리가.
잠시 까맣게 잊고 있던 원래 목적이 떠올랐다. 고개를 수그리며 자포자기한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석희재는 남자와 방 안에 단둘이 남게 될 순간을 상상했다. 고작 수십 초 후의 상황인데 벌써부터 참을 수 없이 어색했다.
석희재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길거리에서 취객들의 대화를 듣고 난 후 지금까지 흐른 시간은 고작 20여 분. 지나치게 짧은 시간 안에 너무 많은 것이 충동적으로 이루어진 것 같았다.
지금이라도 떠날까, 사실대로 말하고.
하지만 남자에게 핸드폰을 건네주고 껐던 핸드폰을 켜는 순간, 쏟아지는 연락과 함께 무슨 일이 일어나게 될지는 뻔했다. 아까 남자들이 오늘 밤의 기회를 쉽사리 포기할 것 같지 않았다.
그리고 가장 상상하기 싫은 건 지금 저렇게 기분 좋은 얼굴을 하는 남자가 고작 외로움 따위를 달래기 위해 싫은 일을 감수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샤워할래?”
“……?”
“먼저 씻어. 난 씻고 왔어.”
문을 열자마자 남자가 욕실을 가리켰다. 석희재는 아무 저항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거울 속에 약간 넋이 나간 제 얼굴이 보였다. 점퍼 정도는 벗고 들어올 걸 그랬나. 니트와 그 안에 입었던 티셔츠를 벗으니 뒷머리가 부스스 허공으로 떴다.
샤워기에서 쏟아져 나오는 물에 손을 적시며 석희재는 생각했다. 솔직하게 조금 전의 일을 말하고 대화를 해 보자고. 실망할지도 모르지만 혼자 있기 싫다면 곁에 있어 주는 것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다만….
“머리까지 감았구나. 그럴 필요는 없는데.”
“…….”
“어쩐지 오래 씻더라.”
젖은 머리를 하고서 바깥에 나오자마자 남자가 쿡쿡 웃었다. 게다가 가운이 아니라 입고 왔던 교복 바지와 티셔츠를 도로 걸친 것을 가지고도 무어라 했다. 확 붉어진 얼굴로, 석희재는 자신이 촌스러운 짓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무의식적으로 젖은 머리 안으로 손을 넣어 멋쩍게 매만졌을 때, 남자가 갑자기 눈앞까지 다가왔다.
흰 얼굴이 가까워지더니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찬 바람에 묻은 희미한 향수 냄새가 훅 끼쳤다. 한 번도 제 몫의 향수를 가져 본 적이 없는 십 대에게는 어른처럼 느껴지는 향기였다.
“입술이 예뻐서… 키스해 보고 싶었는데.”
“…….”
“혹시 이런 거 싫어?”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촉촉한 입술 안쪽을 살짝만 더듬고 떨어진 혀의 감촉이 선명했다. 분명히 점막과 점막이 닿았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던 키스의 방식에 가슴이 쿵쿵 뛰었다.
석희재는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허락의 반응이 돌아오자 남자는 더 가까이 다가와 양팔을 석희재의 단단한 목 뒤로 둘렀다. 가슴과 배가 거의 맞닿는 위치였다. 긴장해 저도 모르게 훅 숨을 들이켠 석희재에게 남자가 목의 각도를 틀며 입술을 붙였다. 극단적으로 가까워진 시야 때문에 남자의 표정을 확인할 수는 없었으나 그가 눈을 감고 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남자의 키스 방식이 석희재에게는 기묘하게 느껴졌다. 바로 혀를 얽는 대신 콧등과 윗입술의 산, 턱 끝 같은 곳을 제 입술과 코끝으로 긁으며 석희재의 입술을 찾아갔다. 그러고는 ‘예쁜 입술’을 입으로 감상하듯이, 윗입술과 아랫입술을 차례로 음미하듯 천천히 스치고 나서야 아랫입술을 물었다.
도톰한 아랫입술이 압력에 조심스럽게 빨릴 때마다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몸이 순식간에 더워졌다. 팔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석희재는 두 손을 남자의 등허리 위로 가만히 얹어 놓았다. 어딘가를 짚으면 손의 떨림이 가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반대였다. 그의 몸으로 제 긴장이 고스란히 전해질까 봐 석희재는 다시 남자의 몸에서 손을 뗐다.
“음….”
목을 긁는 듯한 허스키한 신음과 함께 남자의 입술이 떨어졌다. 그 사이 석희재는 남자에게 밀려 벽에 등을 기댄 채였다. 등 뒤에 욕실 등의 전원 스위치가 닿아 어느 순간 불이 꺼졌는데 그것조차 느끼지 못했다. 키스의 도중에는.
그렇게 키스가 끝인가 했더니 남자는 한 팔을 석희재의 목에 감고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고는 체취를 들이마시듯 숨을 크게 쉬면서 이마를 비볐다. 지나치게 생생한 접촉에 석희재는 당황해서 숨을 쉬는 것마저 멈추어 버렸다.
경험이 없으니 당연한 것이겠지만 단 한 번도 목덜미에 키스를 받은 적은 없었다. 목덜미를 핥아질 뿐인데 어쩐지 키스보다 야한 느낌이 들었다. 제 목덜미 틈에서 흐트러지는 머리카락이 간지러워 석희재는 고개를 틀며 허공에서 주먹을 쥐었다.
남자는 가끔 열이 오른 사람처럼 작은 신음을 흘렸다. 목에 닿은 이마가 땀으로 촉촉해졌다. 이상한 기색을 느낀 석희재는 조심스레 물었다.
“으음….”
“왜 그래. 어디… 아파?”
“음….”
남자는 대답 대신 석희재의 쇄골을 대담하게 빨았다.
“읏….”
마음의 준비를 할 틈도 없이 다시 몸이 긴장했다. 석희재는 다시 한번 주먹을 꽉 쥐었다. 겉의 피부만 훑어가며 애를 닳게 하던 방금 전의 키스와는 다르게 쇄골을 빨아들이는 힘이 제법 셌다. 만나자마자 대번에 호텔로 향한 남자의 목적을 머리로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당하자 생각보다도 훨씬 당황스러웠다.
샤워할 때도 다짐했지만 이 이상을 할 생각은 결단코 없었다. 원한다면 이야기를 들어주거나 가만히 안아 줄 생각쯤은 있었지만 진짜 섹스는….
“잠깐만.”
석희재는 당황을 숨기며 여전히 제게 매달려 있는 남자의 어깨를 잡아 떼어 내려 했다. 그러나 고개를 든 남자가 붉어진 눈가로 말했다.
“…괜찮아. 그냥 해. 나 준비하고 왔어.”
남자의 긴 눈매가 기묘한 열기에 붉어져 있었다. 막 욕실에서 나온 석희재를 볼 때만 해도 꽤 산뜻한 얼굴로 웃던 남자다. 누가 그를 이렇게 만들었을까?
“거의 다 풀었거든.”
풀었다고?
그 순간 석희재는 지금까지 존재감이 없던 남자의 다른 팔이 궁금해졌다. 뒷짐을 지듯 스스로의 등 뒤로 돌린 남자의 팔이 규칙적으로, 느리게 움직이고 있었다. 남자의 손이 어디에 꽂혀 있는지 추측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은밀한 곳에서 젖어 질척이는 마찰음이 간헐적으로 들려왔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곳을 상상하는 순간 자제하기 어려운 흥분감이 등줄기를 치고 갔다.
욱신하는 자극이 온 순간 석희재는 낭패감을 느꼈다. 완전히 발기했다.
“그만해.”
“…아!”
남자의 행위라도 멈추게 하려고 억지로 그의 손목을 붙잡았다. 스스로의 뒤를 쑤시던 손가락이 빠지는 순간 남자는 허스키한 신음을 흘렸다. 석희재는 즉시 후회했다. 손목을 잡아 말리는 건 좋은 생각이 아니었다. 빠져나오는 것이 상상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뱉어 내는 신음에 다시 절제하기 어려운 자극이 왔다.
말려야겠다. 이 이상 가다가는….
절로 미간이 찌푸려져 석희재는 호흡을 억눌렀다. 녹진하게 풀려 있을, 지금까지 한 번도 본 적 없는 은밀한 어딘가를 상상하지 않으려고 부러 남자의 눈을 바라보며. 그러고는 반항하듯이 꿈틀거리며 빠져나가려는 남자의 손을 제 손안에서 세게 모아 쥐었다.
그러나 그 손가락이 젖어 있을 줄은 몰랐다. 손바닥 안에서 감겨드는 젖은 손가락의 감촉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손의 감각이 싫을 정도로 섬세하게 전해져 왔다. 검지부터 중지, 약지까지의 세 손가락.
상상하지 않으려 했던 곳의 감촉이 진득하게 손에 달라붙었다.
멈추게 하려고 했다. 원래 의도는 아마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그다음 순간 석희재는 남자에게 달려들어 키스했다. 눈을 감기 직전, 남자가 만족스럽게 웃는 걸 본 것 같았다.
지금까지 입술만 핥으며 저를 충동질하던 남자의 입 안을 삼켰다. 치아 사이로 숨어드는 혀를 쫓아가 억세게 빨고 타액을 삼켰다. 긴장을 들킬까 봐 닿는 것도 꺼리던 남자의 몸을 서툴게 끌어안고 서로의 배를 붙였다. 앞은 이미 숨길 수 없을 정도로 팽팽하게 부풀었다.
“잠깐… 잠깐만.”
“하아, 하아….”
“뭐가 그렇게 급해.”
남자가 석희재의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자기가 충동질해 놓고는 여유를 부린다. 석희재는 숨을 몰아쉬며 그저 남자를 바라보았다.
“넣기 전에 입으로 한 번 빼 줄게.”
어느새 맞은편 벽까지 등이 떠밀린 남자가 귀에 속삭였다. 분명 소리를 들었는데 뇌에 뜻이 곧바로 전달되지 않았다. 다만 귓바퀴를 스친 뜨거운 숨의 흔적만 강렬히 남았을 뿐이다.
벽에 손을 짚고 멍하니 서 있던 석희재는 제 품을 빠져나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남자는 망설임 없이 빠른 손으로 벨트와 지퍼를 툭툭 풀어내더니 속옷 안에 숨은 성기를 꺼냈다.
그러나 실제로 손에 담아 본 크기가 지나치다고 생각했는지 이내 당황한 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봤다.
“어… 너무 큰데.”
“……?”
“하, 할 수 있을까?”
남자는 가장 굵은 부분이 제 손목과 비슷해 보이는 크기를 아쉽다는 듯이 만지작거렸다. 뒤를 쑤신 여파로 일부가 젖어 있는 손가락이 제 것을 자꾸 문지를 때마다 석희재는 헉, 하고 숨을 몰아쉬었다.
평생 남의 손이 닿은 것은 처음이었다. 발기했을 때는 더더욱 없고. 벽을 짚은 손가락이 의미 없이 그러모아졌다. 사정시키기 위한 손짓이 아닌데도 자극이 지나치게 강해 손을 떼어내 버리고 싶었다.
“아냐, 살면서 이런 거 만나는 것도… 한번 해 보고 싶기도 했고…. 그래.”
“읏….”
굳게 결심한 듯한 남자의 입술이 끝에 닿는 순간 무릎이 꺾일 뻔했다. 석희재는 무너지려는 다리에 겨우 힘을 주어 일으켜 세웠다. 쏟아지는 호흡이 저가 듣기에도 지나치게 짐승 같아 제 입을 한 손으로 막으면서 석희재는 시선을 내렸다.
키스 전에 한참 입술을 더듬던 것과 마찬가지로 남자는 미끈거리는 귀두 주변을 예쁜 입술로 덧그리듯 훑고 있었다. 차분하게 내리깐 눈으로 하는 짓이 성기에 입을 맞추는 일이라는 것이 지나치게 언밸런스했다.
“그만, 해.”
석희재는 당장 남자의 작은 머리통을 치워 버리고 싶었다. 그다음에 스스로 자위하며 욕망을 분출해 버리고 싶었다. 타인 앞에서 사정하고 나면 미친 듯이 부끄러워질 거다. 그러나 저 입술이 자기 것을 빠는 걸 방치하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이제 그만….”
“아, 좀 급해? 그럼 빨리할게.”
“읏….”
석희재는 대화를 시도한 것을 후회했다. 남자가 바짝 솟아 물을 흘리는 요도구에 입술을 대고 말하는 바람에 등에 땀이 흘렀다. 심지어 그 직후 남자가 결심한 듯 입을 크게 벌려 제 입 안에 귀두를 머금었던 것이다.
입을 한껏 벌려도 겨우 뭉툭한 귀두만 들어가는 물건을 삼키며 남자는 힘겨워하고 있었다. 하늘로 바짝 발기한 각도는 자꾸 입천장과 목젖을 찔렀다. 간혹 이에 긁히며 뺨을 찌르기도 했다. 그런데도 남자는 치미는 오심을 익숙하게 참으며 턱이 빠지도록 입을 벌리고 목 끝까지 밀어 넣었다. 입 안보다 깊숙한 곳의 점막을 긁으며 성기가 쑥 들어가자 남자의 눈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눈꼬리에 눈물이 맺혔다.
“허억….”
석희재는 쏟아지는 신음을 참지 못했으나 반대로 남자는 신음을 목구멍 안의 좆과 함께 꾸역꾸역 삼켰다. 천천히 미끄러뜨리듯, 깊이, 더 깊이. 호흡이 모자란 지 급히 헐떡이며 자꾸만 들러붙는 축축한 점막과 식도를 따라 아래로 구부러지는 감각이 미칠 듯이 자극적이었다.
문득 석희재는 생각했다. 남자의 목 앞쪽이 기묘할 정도로 불룩하게 솟아올라 있다고. 그 순간 그는 자신이 남자를 고문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눈꼬리에 달린 눈물과 코로 힘겹게 몰아쉬는 호흡, 그리고 가끔 막힌 곳에서 흘러나오는 구역질이 섞인 신음을 보니 더욱 그랬다.
어설프고 경험이 없을지언정 상대를 아프게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만은 알고 있었던 석희재는 그 순간 본능적으로 허리를 뒤로 물렸다. 죽을 만큼 좋았고, 그래서 잠시 이성이 마비되었지만 남자의 괴로운 얼굴을 보니 어렵게 정신이 들었던 것이다.
쿨럭, 컥….
급하게 빼면서 목젖을 잘못 건드려 남자는 심하게 사레가 들렸다. 석희재는 거의 창백해져서 골이 흔들릴 정도로 기침하는 남자의 뺨을 손으로 더듬었다.
“아프지. 그러니까 이런 거….”
석희재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숨을 정신없이 몰아쉬던 남자가 빨개진 얼굴을 하고 석희재의 성기를 제 손으로 덥석 쥐어 잡았다. 손가락으로 전부 감기지 않는 굵고 긴 성기에 자극을 주려 위아래로 주무르면서 다시 그것을 입에 넣으려 했다.
“하아… 가만있어 봐. 다 삼킬 수 있으니까.”
충혈되어 붉어진 눈에 눈물이 고이는데도 남자는 멈추려 하지 않았다. 성기에 이가 닿지 않도록 입을 크게 벌려 안에 문 채로, 다시금 꿀꺽꿀꺽 목 안으로 삼키려 했다. 그러나 한 번 자극당한 목 안이 아프고 간지러웠는지 눈물의 양이 많아졌다. 뺨을 타고 주룩 흘렀다.
석희재는 이해 불가한 남자의 행위를 보고 말이 없어졌다. 그에게 남자의 이런 행동은 일부러 자신에게 벌을 주려는 행위처럼 느껴지기만 할 뿐이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조금 전까지 미친 듯이 뇌를 달구었던 흥분이 천천히 가셨다.
“하아, 하악….”
남자가 숨을 쉬기 위해 잠시 입을 떼자 길게 이어진 타액이 입술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제야 발견한 것인데, 남자의 입꼬리 한쪽이 찢어져 살짝 피가 비치고 있었다.
석희재는 몸을 굽혀 남자의 눈물이 묻은 뺨과 입술을 손등으로 닦아 주었다. 그리고 겨우 호흡을 가다듬은 남자가 다시 제게 달려들 때, 그의 턱을 아프지 않게 잡아 일으켜 세우며 키스해 줬다.
굳이 키스를 택한 이유는 그래야 멈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그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내내 무릎을 꿇고 있던 남자는 어느새 저항 없이 석희재에게 딸려와 안겨 있었다. 비록 태어나서 겨우 두 번째 하는 키스일지라도, 석희재는 자신이 상처입힌 남자의 입 안을 부드럽게 위로하는 데 집중했다.
한참 후 입술이 떨어졌을 때 남자의 얼굴은 다른 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자기 거 물었던 입술에 키스하는 거 조금 그렇지 않나.”
남자가 툭 던진 말은 묘하게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들렸다.
“듣고 보니 그렇네.”
“맛없지.”
“…그렇게는… 생각 안 해 봤는데.”
석희재는 남자의 몸을 양팔로 깊이 끌어안은 채로 그를 내려다봤다. 눈을 피하던 남자는 지친 기색으로 침대에 가서 눕자고 했다. 석희재는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었다. 하지만 그가 다시 제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으려 들었을 때는 만류하며 대신 꽉 끌어안았다.
그렇게 한 번 흥분이 가라앉자 남자는 다시 달려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천장을 바라보며 깊이 한숨을 쉴 뿐이었다. 아무래도 자신이 거절당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도 너무 밝히는 놈은 취향이 아니구나.”
“…….”
“미안.”
사과해야 할 일이 아닌데 남자는 사과를 한다.
석희재는 그보다도 다른 부분에 놀랐다. 밝혔다니, 어디가. 그는 과하게 큰 성기를 감당하느라 괴로워했을 뿐이다.
“비싸게 굴어야 좋은 거 알고는 있는데, 얼굴 보자마자 너무 놀라서… 깜빡했다. 생일이라고, 하늘에서 선물을 뚝 떨궈 준 줄 알았다니까.”
“생일이었어?”
다시금 의외의 부분에서 놀라버린 석희재는 아까보다 크게 뜨인 눈으로 물었다.
“…응. 되게 별로지?”
“…….”
“애인도 없고, 친구도 없고 이런 날 모르는 남자랑 자고.”
“…….”
“나도 내가 이런 어른이 될 줄 몰랐어.”
말없이 천장을 보고 있는 남자가 조금 안쓰럽게 보여서 석희재는 그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에 안아 주었다. 못 이기는 척 이끌리던 남자는 금세 몸을 돌리고 석희재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오늘 본 남자의 행동을 통틀어 가장 사랑스러운 몸짓이었다.
“넌 말이 별로 없어서 좋다.”
“…….”
“이상한 말 하면서 식게 만드는 애들 많거든.”
“이상한 말?”
“그냥… 상스러운 말 있잖아. 싸 보이는 말.”
석희재는 머릿속으로 ‘씨발, 존나’ 따위의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진짜 말이 없는 편인가 생각해 봤다. 아주 그렇지는 않다고 생각했지만 왠지 남자의 기대에 부응해 줘야 할 것 같았다.
“말이 없으니까 나는 비참해질 일도 없고….”
그의 말에 무어라 반응해야 할지 몰라 석희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을 택했다.
“아, 망했어. 잠 온다.”
남자는 약한 짜증을 내며 중얼거렸다. 분에 넘치게 잘생긴 남자를, 그것도 생일에 만났는데 이대로 자면 억울하다면서.
석희재는 피식 웃으며 중얼거렸다.
“그럼 자.”
무의식적으로 입꼬리를 당겼던 석희재는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오늘은 웃을 기분이 전혀 아니었다. 심지어 해결해야 할 문제는 아직도 처리하지 못한 채 뒤로 미뤄 두었을 뿐이다. 그 우울감은 마음 한편에 여전히 묵직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그 모든 일을 남자와 호텔 방에 들어온 순간부터 까맣게 잊어버렸다. 게다가 웃기까지.
“알람 맞춰야 되는데….”
“알람?”
“조식… 꼭 먹어야 돼… 비싼 호텔 왔으니까.”
석희재는 다시금 입술 바깥으로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며 중얼거렸다. ‘내가 깨워 줄게.’
그 말에 안심했는지 남자는 그대로 석희재의 팔에 머리를 댄 채로 금세 잠에 빠졌다.
정신없이 잠든 얼굴이 왜인지 지쳐 보였다. 석희재는 저 때문에 찢어진 남자의 입술을 손끝으로 조심스레 건드려 보았다. 그러다 제 팔에 기대고 있던 남자의 머리통을 가만히 들어 도로 침대 위에 살며시 내려 두고는 천천히 일어났다.
그러고는 옷장으로 걸어가 외투 주머니에서 꺼내 온 남자의 핸드폰을 켰다. 잠든 남자의 손가락을 가져다 지문 잠금을 풀자 아니나 다를까, 부재중 통화와 문자가 잔뜩 쌓여 있었다.
그 흔적을 전부 지워 버리고 상대의 번호를 아예 차단해 버렸다. 동의도 없이 윤간을 모의하려 했던 인간과 다시 만날 가능성은 아예 없는 게 나았다. 게다가 그는 ‘생일에 모르는 남자’와 자는 자신을 자책했다. 이렇게 해 두면 어차피 스쳐 갈 인연이었던 쓰레기들과는 다시 엮일 일이 없을 게 분명했다.
대신 석희재는 남자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찍었다.
통화 버튼을 누르자 뚜르르 울리는 연결음 소리와 함께 외투 속에서도 희미한 진동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대로 전화를 끊은 석희재는 방 안의 모든 불을 끄고 다시 침대로 돌아왔다.
그리고는 남자의 곁에 소리도 나지 않게 가만히 누웠다.
“…….”
편히 눕자 지금까지 자각하지 못했던 피로가 몰려왔다. 하루 종일 찬바람을 맞고 돌아다녀 지쳤던 몸이 금세 노곤해졌다.
깜깜한 방, 창밖에는 여전히 화려한 밤의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석희재는 금빛 전구들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그리고 수 시간 전 그 아래에서 일어났던 일을 찬찬히 되새겼다.
잠드는 것은 금방이었다.
그리고 다음 날, 석희재는 혼자 눈을 떴다.
이미 오래전 사람이 떠난 옆자리에는 조금의 온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
“결제는 완료된 상태니 바로 체크아웃하셔도 됩니다.”
프런트의 설명을 들은 석희재는 잠시 말없이 있다가 그대로 뒤돌았다.
석희재는 잠귀가 예민한 편이라 알람 소리, 혹은 핸드폰의 작은 진동조차 놓친 적이 없었다. 그런 자신이 눈을 뜨기도 전에 사라졌다는 건 동이 트기도 전에 호텔을 빠져나갔다는 말이었다. 자신을 깨우지 않기 위해 일부러 조심스레 움직이면서.
기분이 미묘했다. 조식을 먹겠다던 사람은 조식은커녕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말끔히 사라져 버렸다. 방에는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았다. 나올 때 이미 충분히 확인해 본 참이다. 명함이나 짧은 인사가 적힌 메모 하나 없었다.
어젯밤 꽤 친근하게 사적인 이야기를 풀어 내던 남자의 작별 인사법이라기에는 지나치게 정이 없었다.
가만, ‘원나잇스탠드’라는 건 전부 이런 건가.
걸음을 멈춘 채 석희재는 생각했다. 그리고 남자가 거부한 건 자기 자신이 아니라 하룻밤만 품을 빌린 잘 모르는 낯선 남자에 불과하다고, 그렇게 결론지었다.
어쨌든 원나잇으로 사람을 만나는 건 나쁜 버릇이다. 남자가 평소에도 하룻밤 만남을 일삼아 왔다면, 그렇게 만난 모두가 친절한 상대일 리 없으니 쉽게 정을 붙이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게 맞는 행동이고, 남자는 제대로 처신했을 뿐이다. 석희재는 멈췄던 발걸음을 다시 부지런히 옮겼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 가끔 아주 괜찮은 상대를 만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심장이 녹도록 다정하거나, 지나치게 마음에 드는 섹스를 했거나, 아니면 어제 저에게 말했듯 드물게 취향인 얼굴을 만났을 경우… 다시 놓치고 싶지 않은 인연을 만나는 경우가 있었을지 모른다.
그때에도 이토록 미련 없이 떠났을까?
석희재의 걸음은 다시 느려지기 시작했다. 남자와 끝까지 가지 않은 것에 대해서는 일말의 후회도 없지만 혹시 자기가 더 마음에 들게 행동했다면 또 만나자고 했을지가 궁금했다. 어제는 그냥 침대에 눕게 되자 많이 실망하는 눈치였다. 생일에 호텔까지 와서 아무런 수확이 없었으니 그냥 돈을 날렸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래도… 못 해.’
가능성이 지나치게 적은 이야기였다. 석희재는 빈 주먹을 꽉 쥐며 초조한 마음으로 어젯밤을 떠올렸다. 저 역시 그저 막연하게 때가 되면 사랑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눌 거라고 상상해 본 적은 있었지만, 실제로 체험한 감각은 그보다 더 노골적인 것이었다. 흥분의 강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상대를 끌어안기 위해 손을 얹는 것만으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다 들킬까 봐 두려웠다.
눈치채지 못한 사이 또다시 느려진 걸음으로 걷던 석희재는 무의식이 이끈 곳에서 발을 멈추었다. 아침 햇살이 쏟아지는 곳에 ‘소공로 99-1’이라는 푸른 팻말이 붙어 있었다.
석희재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한참 충전하지 않은 핸드폰의 배터리는 고작 10프로 정도가 남아 있었다. 조금 고민하다가 그는 남자에게 문자를 보냈다.
「왜 그냥 갔어?」
하지만 갈등하던 그는 문자를 보내는 대신 완전히 지워 버렸다. 이유를 묻는 것은 옳지 않아 보였다.
잘 생각해 보면 남자는 저에게 같이 호텔을 나서자는 말을 한 적도 없었다. 부스스한 눈을 뜨고 같이 조식을 먹고, 조금 더 이야기를 나누다가 사이좋게 헤어지는 것은 저만의 상상이었다.
「왜 조식 안 먹고 갔어?」
그래서 대신 이렇게 썼다. 남자는 제 말로 조식은 꼭 먹어야겠다고 말했었다. 이 정도는 궁금해해도 무례한 게 아닐 것 같았다.
석희재는 전송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하필이면 배터리가 다 되어 전화가 꺼져 버렸다. 석희재는 그사이 답장이 왔을까 봐 마음 졸였다. 그리고 도착한 집에는 말도 없이 아버지가 와 있었다. 눈으로 외박의 이유를 묻는 아버지를 무시한 채로, 석희재는 아무 말도 없이 제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충전하면서 얼른 핸드폰을 다시 켜 보았지만 저에게 도착한 메시지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루, 이틀을 더 기다려도 마찬가지였다.
남자는 제게 답장하지 않았다.
설명할 수 없는 허무함을 느끼면서도 석희재는 이게 맞는 거라고 애써 생각했다. 이건 그 남자가 원나잇스탠드로 만난 사람들과 더 깊은 인연을 맺지 않는다는 증거니까. 저가 아니더라도 남자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지 않을 테니까.
후에 알았는데, 꽤나 낭만적인 이름이라고 생각하던 ‘소공로’라는 곳은 흔히 ‘북창동’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추잡한 방식으로 성매매가 이루어지던 룸살롱이 즐비한 거리의 옛 지명. 무관심하게 지나치던 행인들이 왜 술 취한 남자들의 반 범죄나 다름없는 말에 반응하지 않았는지도 뒤늦게 추측했다.
누군가에게는 낭만이지만 누군가에게는 싸구려 하룻밤일 뿐이다. 석희재가 그 사실을 완전히 받아들이는 데에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
멀리 오케스트라 피트에서 현을 맞춰 보는 소리가 들렸다.
무대 상수의 소대로부터 반 층을 내려온 곳에 위치한 분장실은 무대와 가장 가까워 드레스를 입는 여성 연주자들, 혹은 배우들이 애용하는 곳이다. 그건 오늘도 크게 다를 바 없어서, 잠시 후에 있을 공연의 주역이 이곳을 배정받았다.
그리고 석희재는 주인 없이 비어 있는 분장실 안을 무료한 얼굴로 지키고 있었다.
조명이 들어온 거울 앞의 메이크업 박스, 여자가 애용하는 퍼 코트, 일상복으로는 입을 일 없는 디자인의 드레스들, 문가에 주르륵 늘어놓은 엇비슷한 디자인의 신발들.
석희재는 손목시계를 들여다보았다. 현재 시간은 다섯 시. 콜이 두 시였으니 지금까지 3시간을 기약도 없이 기다린 셈이다. 무책임한 사람이라는 것은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이제 정말 화가 나려고 했다. 게다가 곧 여섯 시부터 마지막 리허설이 시작될 텐데 그러면 얼굴도 보지 못한 채로 돌아갈 가능성이 컸다.
자신이 그토록 애타게 찾을 때는 반응도 하지 않았으면서 본인이 원할 때만 명령하듯 사람을 불러낸다. 가장 싫은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를 기대하면서 찾아온 자기 자신이지만.
여섯 시가 되면 그냥 돌아가자고, 그렇게 생각하면서 석희재는 시계만 노려보았다. 문득 바라본 분장실의 거울 안에는 자신이 싫어하는 종류의 제 표정이 보였다. 무뚝뚝하고 정이 없는 얼굴.
여섯 시였다.
석희재는 분침과 시침이 정확히 만나는 순간 일어났다. 분장실 한구석에 충전하고 있던 핸드폰을 챙기고는 앉아 있던 접이식 의자를 차곡차곡 접어 벽에 기대 놓았다.
그리고 옷걸이에 걸린 재킷을 빼서 걸칠 때였다. 계단을 빠르게 걸어 내려오는 발소리, 이어 보통 사람보다 톤이 높은 목소리가 들렸다.
“희재야!”
소란스럽게 문이 열리고 들어선 것은 천이 자르르 떨어지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였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잘 관리한 늘씬한 몸에 소녀처럼 결 좋은 머리를 찰랑이는 여자가 활짝 웃는 얼굴로 달려들었다.
그러고는 저보다 훌쩍 키가 큰 남자의 목덜미에 양팔로 매달려 반짝이는 글로스를 바른 입술은 아랑곳 않고 석희재의 뺨 양쪽에 번갈아 입을 맞췄다. 쪽, 쪽 소리가 크게 나도록 과장해서.
석희재는 제게 몸무게를 거의 지탱한 여자를 받아 든 채로 열려 있는 분장실 문 너머를 바라보았다. 문가에 모여들어 안을 훔쳐보고 있는 사람이 얼추 봐도 일곱 명이 넘었다. 여자는 자유로운 미혼이다. 그리고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저와 나이 차이가 얼마 나지 않는 연하 애인이 있었다. 자신이 그 연하남과 비슷한 오해를 받는다고 해도 할 말 없는 상황이었다.
한숨을 쉬면서 석희재는 분장실의 문을 닫았다. 제게 달라붙은 여자가 휘청이면서도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으려고 애를 쓰는 바람에 거추장스럽게 여자를 목에 매단 채로 문까지 가야 했다.
탁, 문이 닫히자마자 석희재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막 가려고 했어.”
여자가 싫어하는 정 없는 목소리였다. ‘희재 화났어?’ 여자의 목소리에 석희재는 대답할 가치도 없다는 듯이 조금 전 바닥에 떨어뜨렸던 재킷을 걸쳤다.
“얼굴 보자마자 가는 게 어딨어.”
“나 세 시간 기다렸어.”
“팀장님 밖에 와 계시단 말야… 커피 한 잔 마시고 가지.”
“무슨 팀장님?”
석희재는 안 그래도 표정이 없던 얼굴을 확 굳히며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긴 누구야. 우리 회사 매니지먼트 팀 팀장님이지. 왜 저번에 말했잖아.”
“안 한다고 했잖아.”
석희재는 목소리를 높이지 않으려고 애써 억누른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이 화를 내면 여자는 진심으로 상처받는다. 지금보다 더 철이 없을 때는 여자를 상처 주고 싶어서 일부러 아픈 말을 던진 적도 있으나, 그러면 결국 죄책감에 잠 못 이루는 건 자신이었다. 석희재는 이미 오래전에 자기 자신을 위해서라도 여자를 상처 주지 않기로 결심했었다.
“넌 차암 이상하다. 다들 기회가 없어서 안달하는데 너는 왜 그러니? 하여튼 성격 이상해.”
“…….”
“왜. 나랑 이상한 소문 날까 봐서 그래?”
그런 걸 걱정하는 건 본인이면서.
석희재는 여자를 노려보지 않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더 말싸움할 필요도 없었다. 이미 오래전에 끝난 이야기였으니까.
자신의 입장은 충분히 설명했고 여자가 걱정하는 것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그래도 그 조건에 응하고 싶은 생각은 절대 없었다.
“아무튼 이번엔 다른 거야. 그냥 데뷔하라는 게 아니라 거기도 플랜이 있더라구. 어떤 거냐면….”
“…그래서 오늘 만나자고 한 이유가 이거였어?”
“응, 희재야. 아무튼 팀장님 만나고 가? 나는 지금 바로 리허설 가야 돼. 난 분명히 얘기했다?”
때마침 분장실 문을 두드리는 노크 소리가 들렸다. ‘기다리셨죠.’ 여자가 활짝 웃으며 문을 열자 스태프 몇이 얼른 따라붙었다. 공연용의 신발을 신은 여자의 손을 잡아 계단을 오르는 것을 도와주고, 긴 드레스 자락이 구겨지지 않게 펼치기도 했다.
그리고 석희재는 완전히 망연해 있었다.
매니지먼트 팀 팀장을 만나라는 말만 남기고 저렇게 산뜻하게 떠날 수 있는 것은 정말로 그 이유가 전부라는 증명이었으니까.
하지만 자신은 적어도 몇 주 전의 일을 사과하기 위해 부른 거라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렇게 믿었는데….
그녀는 언제나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제멋대로다. 누구는 활동한 지 수십 년이 넘어도 여전히 소녀 같은 감성을 유지하는 것이 그녀의 최고 강점이라고 말하지만, 그건 그로 인해 희생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모르고 하는 말일 뿐이다.
하지만 이건 석희재도 여전히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한 명의 예술가로 사는 것이 더 가치 있다면 누군가의 사소한 피해는 감수해야 하는 것이 맞는지, 그게 정말 합리적인지.
멀리 무대 위에서 박수 소리가 들려왔다. 막 리허설을 시작하며 오케스트라를 향해 인사를 건네는 그녀에게 쏟아지는 박수일 터였다. 석희재는 이기적이지 못했다. 가치 있는 인생을 사는 그녀에게 자신을 위해서 희생하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자신도 어머니가 원하는 대로는 살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고 자기 자신을 지킬 방법은 그것밖에 몰랐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한 번 꽉 쥐었다가 놓은 석희재는 후, 한숨을 쉬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뒤를 돌아보니 분장실 앞을 지키고 있는 사람은 어느새 열댓 명으로 늘어나 있었다. 자신을 온통 흘끔대는 것이 무슨 상상을 했는지 뻔했다.
석희재는 아무런 변명도 하지 않고 분장실을 나섰다.
“저기 얼굴에… 뭐 묻으셨어요.”
검은 옷을 걸친 여자 스태프가 건네준 두루마리 휴지를 건네주었다. 말없이 새빨갛게 물든 귀를 한 채로 석희재는 여자의 입술이 닿았던 뺨을 아무 곳이나 북북 닦았다.
그러고는 다시 반 계단을 내려가 회색 카펫이 깔린 긴 복도를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복도를 빠르게 지나치는, 스태프도 아니고 연주자도 아닌 울적한 얼굴의 훤칠한 남자에게 가끔 의아한 눈길들이 스쳤다.
석희재가 회색 철문을 열고 1층 로비로 나가는 데는 30초도 걸리지 않았다.
공연은 보고 가려고 했는데 그럴 마음도 사라져 버렸다. 석희재는 반질반질한 대리석 바닥 위에 서서 운전기사를 부르기 위해 핸드폰을 들었다.
그렇게 통화연결음이 들리는 핸드폰을 귀에 댄 채로 로비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공연을 보러 온 사람들이 하나, 둘 무리 지어 로비로 들어서는 것이 들어섰다. 그러고 보니 공연까지 한 시간도 남지 않은 시각이었다. 공연을 할 때의 극장보다 하지 않을 때의 극장이 더 익숙한 석희재는 회전문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들의 면면을 무심결에 눈에 담았다.
- 네, 전화 받았습니다.
그러나 기사가 전화를 받은 순간 석희재의 시야 안으로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이루어진 우연한 만남.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전화를 그대로 끊어 버렸다.
중년의 나이 지긋한 남자와 함께 로비로 들어선 것은 몇 주 전의 그 남자였다. 자신의 하룻밤을 빌리고 신기루처럼 사라져 버린 남자.
막 2층으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오르고 있는 남자와 자신의 거리는 고작 50여 미터였다. 석희재는 저도 모르게 들뜬 마음으로 남자의 뒤를 쫓았다. 처음 든 감정은 단순하게 반갑다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얼른 에스컬레이터까지 쫓아가 발을 걸친 후 석희재는 초조하게 손잡이를 두드렸다.
뭐라고 말을 하지.
그러나 불현듯 떠오른 그다음의 상황이 갑작스러운 흥분을 가로막았다. 빠르게 치솟았던 심장 박동수는 마치 찬물을 뒤집어쓴 듯 다시 얌전해졌다.
문자에도 답장하지 않았는데… 이런 곳에서 반가워할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극장 입구와 매표소 앞은 아래층보다 훨씬 붐비고 있었다. 천천히 걸어가면서 석희재는 이현의 등을 주시했다. 그리고 그 곁의 중년 남자를 훑어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현은 마치 자신을 처음 보았을 때 그랬던 것처럼 사교적인 낯으로 중년 남자를 대하고 있었다. 처음으로 든 생각은 ‘누구에게나 저렇게 웃어 주는 거였구나’, 그리고 그다음으로 찾아온 의심은 ‘잘 수만 있다면 나이도 가리지 않는 건가’, 라는 의문.
잠시 후 중년 남자가 화장실로 걸음을 옮겼다.
지금밖에 기회가 없다고 생각한 석희재는 빠르게 걸어 이현의 뒤로 다가섰다. 그리고는 처음 만났을 때처럼 손가락 하나로 그의 어깨를 톡톡 건드렸다.
“또 만났네.”
휙 고개를 돌려 저를 돌아본 남자의 얼굴이 이상하게 미칠 듯이 반가웠다.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은 여러 번 상상 위로 덧그린 것보다 더 희고 어려 보였다. 그러나 그 순간 노골적으로 드러난 굳은 표정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 전신을 뒤덮었다. 석희재는 치밀어 오르는 낯선 감정을 꾹 삼켰다.
우연인 척하자. 우연이 맞으니까.
“아, 안녕… 너도 공연 보러 왔어?”
다시 만나기를 조금이라도 기대했던 척은 하지도 말자.
그런다고 좋아할 것 같지도 않으니까.
그렇게 생각하면서 석희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공연은 보고 갈 이유가 생겼다.
“되게 우연이네… 이런 데 취미 있나 봐.”
당황을 갈무리하고 자연스럽게 스몰 토크를 건네는 이현의 말투는 사회인답게 제법 살가웠다. 그러나 석희재가 보기에 그의 행동은 영 뻣뻣하고 어색한 데가 있었다. 사근사근한 말투 한 겹 아래 숨긴, 알 수 없는 거리감. 눈앞에 서 있는 저보다도 스치는 타인들에게 분주히 시선을 흘리는 것도 그렇고 팔짱을 낀 채로 두어 걸음 간격을 유지하는 것도 그렇고.
처음 만난 날, 흙 밑에 묻어 둔 보석함을 찾아낸 것 같은 눈으로 저를 보던 때와는 전혀 다른 태도였다.
“취미….”
일단 이현의 물음에 성실하게 대답하고 싶어서 석희재는 차분히 제 생각을 짚어 보았다.
취미는 아니다. 클래식은 좋아서 스스로 찾아 듣는 게 아니라 그저 일상일 뿐이니까.
하지만 어쩌면 관심이 있다고 말하는 게 유리할지도 모른다.
석희재는 무슨 대답을 해야 할지를 고심했다. 이현의 가벼운 질문에 대한 모든 대답이 마치 그의 호감을 얻거나, 혹은 그다음 단계로의 진행을 결정하는 분기점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석희재가 뜸을 들이며 대답을 주저할 때에 별안간 이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가는 목의 목울대가 꿀꺽 오르내리는 것을 본 석희재는 눈앞의 초식동물 같은 남자를 빤히 관찰했다. 겁을 주려던 것이 아닌데 왜 겁을 먹었는지 궁금해하며.
“…너는?”
그래서 석희재는 대답하는 대신 질문으로 되돌려 줬다. 순간 이현은 질색이라는 듯이 인상을 찌푸리며 손을 내저었다. 거리감을 재는 사이에 이현이 드러낸 인간적인 표정에 겨우 조금 마음이 놓였다.
“난 관계자 초대야.”
이현이 벌써 지루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관계있어?”
“……?”
석희재는 바로 뒤, 포토월에 인쇄된 붉은 드레스의 여자를 가리키며 물었다. 그러나 이현은 질문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듯 저를 바라볼 뿐이었다. 자기가 또 이상한 질문을 한 건가 싶었던 석희재는 괜히 헛기침했다.
“아, 그런데 나 대표님이랑 같이 와서. 나중에 연락할게.”
잠깐 대화의 틈새가 생기자마자 이현은 이때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그 사이로 쏙 빠져나갔다. 그러고는 왠지 허둥거리는 낯으로 어색하게 석희재를 등졌다. 한두 걸음 가다 아차, 싶었는지 뒤돌아 손을 가볍게 흔든 게 전부였다.
빠른 걸음으로 매표소 창구로 향하는 이현을 보면서 석희재는 그의 말을 곱씹었다.
‘나중에 연락한다’라.
석희재는 이현이 쉽게 거짓말을 하는 사람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단지 그가 말한 ‘나중’이란 기약 없는 나중일 뿐.
공연이 시작되기 전, 석희재는 매표소 기획사 창구로 다가갔다. 아까 이현이 표를 받아간 곳이었다.
“저 유보석 주세요. 비어 있으면.”
“아, 공연 보시게요?”
종종 마주칠 일이 있어 석희재를 알고 있는 기획사의 직원이 좌석 현황을 살펴보더니 다시 물어왔다.
“홀드 한 네 좌석 다 남아 있긴 한데. 어느 쪽으로 드릴까요? 중간에 가실 거면 복도 쪽이 낫겠죠?”
“혹시 이현이란 남자가 어디 앉았는지 알아요?”
“죄송하지만 그건 고객 개인정보라….”
난감해하는 직원의 얼굴에 석희재는 다시 물었다.
“그럼 관계자 초대석은 어디에요?”
“유보석 옆으로 쭉- 한 줄 다.”
“알겠어요. 그럼 네 자리 다 주세요.”
그 말이 떨어지자마자 티켓 매니저가 곧바로 방금 뽑은 티켓 네 장을 석희재에게 건넸다. 국회의원이나 극장장, 시장 등 불시에 방문 가능성이 있는 VIP를 위해 항상 빈자리로 남겨 놓는 유보석 네 자리가 전부 석희재의 손에 떨어졌다.
석희재는 마지막 입장 안내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다가 관객 대부분의 착석이 끝난 후에야 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무거운 나무 문이 등 뒤에서 소리 없이 닫히자마자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극장 샹들리에의 조명이 하나, 둘 꺼지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지겹게 오르내려 이미 그 계단의 간격도 전부 다 알고 있는 석희재는, 천천히 저를 덮치는 어둠도 아랑곳하지 않고 붉은 카펫이 깔린 계단을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내려갔다. 간혹 그 실루엣을 목격한 이들은 그를 몰래 방문한 연예인인가 생각하기도 했다.
금세 유보석을 찾은 석희재는 시트에 깊게 몸을 묻기도 전에 이현을 찾아냈다.
기대하지 않았건만 운이 좋다. 이현은 유보석 바로 옆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로 그의 옆에 앉을 수도 있었지만 석희재는 한 좌석 틈을 두고 떨어져 앉았다.
음악 감독에게 핀 조명이 떨어지고, 뒤돌아 관객을 향해 인사하는 음감을 향해 높은 홀을 꽉 메우는 박수 소리가 울렸다. 공연의 시작이었다. 옆 옆자리에서 이현이 자세를 고쳐앉는 기척이 느껴졌다.
무대에 쏟아진 조명에 집중하면 극장 안에 모인 이들은 아주 가까이 밀착한 채로도 서로를 의식하지 못하는 완전한 타인이 된다. 그 기묘한 세뇌를 다행스레 여기면서 석희재는 흥미 없는 무대 대신 몰래 이현의 자취를 더듬었다.
팔걸이에 올린 흰 손등, 좁은 좌석을 불편해하며 작게 뒤척이는 몸짓, 의미 없이 까닥이는 손가락, 오래 참다가 겨우 터져 나온 듯한 작은 헛기침 소리. 그리고 ‘죄송합니다’라고 음성 없이 속삭이는 말.
그리고 석희재는 아까 기침 소리가 났을 때부터 저도 모르게 옆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대 조명을 반사하는 흰 뺨을 보고 있자니 기시감이 느껴졌다. 횡단보도 앞에 나란히 서 있을 때에도 꼭 이런 각도로 그를 살펴보았던 것 같다.
지금부터 15분간 휴식 시간이 있겠습니다. 자리에 계신 관객분들은….
시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갔다.
인터미션이 되자마자 이현이 ‘대표님’이라 부른 남자는 홀연히 자리를 떠났고, 혼자 남겨진 이현은 무료한 자세로 좌석에 기대앉아 핸드폰을 뒤지고 있었다. 화면을 아무렇게나 스크롤 하는 손길이 성의 없어 보였다.
석희재는 한 좌석 옆으로 옮겨 앉으며 일부러 그의 귓가에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오늘 끝나고 뭐 해.”
“으앗! 씨… 아, 깜짝이야.”
소스라치게 놀라며 핸드폰을 떨어뜨린 이현이 겨우 욕을 삼키며 등을 곧추세웠다. 그렇게 화들짝 놀란 것치고 제게 말을 건 것이 석희재라는 사실은 전혀 의외롭지 않은 듯했다. 도리어 언제고 이렇게 말을 걸어올 것을 짐작한 눈치였다.
“아… 오늘 끝나고?”
“…….”
“집에 갈 건데.”
“1층 로비에서 기다릴게.”
“기다린다고?”
이현은 왜냐고도 묻지 않았다.
석희재는 고개만 끄덕이고 깔끔히 물러났다.
그리고 이현은 제 옆자리에서 일어난 석희재가 고작 한 칸을 옮겨 앉는 것을 보고 또 한 번 놀란 것 같았다. 내밀한 밤 사정을 공유한 상대가 바로 근처에 앉아 있는 것이 마음에 걸렸는지, 2부가 시작되고도 한동안 석희재를 의식하느라고 공연에 집중하지 못하는 듯했다.
1부에서 저가 그랬던 것처럼 2부에서는 이현이 저를 흘끔대고 있었다. 그러자 자연히 그의 시야 안에 담길 만한 부분들을 점검하게 된다.
석희재는 팔걸이에 손을 가지런히 올려 두고 시선은 무대에만 고정했다. 그러다가 석희재는 그의 시선이 닿는 제 뺨과 입가가 가끔 경련하듯 떨리는 것을 숨기기 위해 커다란 손으로 뺨과 턱을 한 번에 괴었다.
사람들의 시선에는 익숙한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하필 오늘따라 태연한 척이 왜 이리도 어려운지 의아해하면서.
***
석희재는 공연이 끝나기 전에 극장에서 빠져나왔다. 아무래도 ‘대표님’의 눈을 의식하는 것 같은 이현을 위해서였다.
그러고는 1층 로비, 관계자들이 퇴근하는 출입구 앞에 우두커니 서서 이현을 기다렸다.
석희재는 이제 이현과 다시 마주했을 때 무슨 이야기를 건넬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았다. 한두 마디 말로는 ‘나중의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걸 어렴풋이 깨달았기 때문이다.
대신 아까 느끼기로는 이현은 정수리부터 발끝까지 석희재의 육체를 다시 꼼꼼히 파악하려는 것 같았다. 제가 심각한 자의식과잉이 아니라면, 아마도.
한 무리의 사람들이 로비로 쏟아져 나왔다가 회전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석희재는 그 사람들 틈에서 어렵지 않게 이현을 발견했다. 이현은 대표와, 또 다른 관계자들과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로비를 빠져나갔다. 석희재는 시종 웃는 낯으로 저보다 높은 연배의 사람들과 자연스럽게 대화하는 이현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아까 나올 때 한 번 눈길이 스친 것 같았는데.
그러나 석희재의 기대와 달리 이현은 그대로 로비를 완전히 벗어나 버렸다. 작은 뒤통수가 계단 아래로 총총 걸어 내려가 이내 사라졌다.
석희재는 서 있던 곳에서 십오 분 정도를 더 기다렸다.
그리고 로비가 완전히 텅 비었을 때, 석희재는 캄캄한 바깥에서 계단을 걸어 올라오는 한 남자를 발견했다. 회색 계단을 오르던 남자의 전신이 금세 드러났다. 이현은 ‘추워.’ 작게 중얼거리며 회전문을 밀고 다시 로비 안으로 들어왔다. 석희재의 앞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