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스 매직 모먼트 1권
1. 연극이 끝난 뒤
지금까지 이현은 바로 이 자리에서 수많은 사람과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었다.
천장이 높아 개방감이 있는 카페의 구석 테이블, 반투명한 가림막으로 살짝 막혀 프라이버시가 약간이나마 보장되는 4인석의 자리.
보통 마주 앉은 상대는 연출가이거나, 음악 감독이거나, 아니면 배우, 혹은 그들의 매니저. 그런 이들과 계약서를 작성하고 스케줄을 조정하는 것이 이현 PD가 이 자리에서 주로 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바로 이 자리에서, 정말 많은 일이 있었다.
곧바로 이현의 머리에 난감했던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작년이 유독 힘들었지.’
말단들부터 월급이 밀려 차비가 없다고 우는 아르바이트생을 달래 주고, 자기 지갑에서 당장의 차비를 위한 현금을 꺼내 주고, 그러다 지금 적선하는 거냐며 흥분한 음향 오퍼에게 얻어맞은 적도 있다.
그보다 더 어려웠던 건 그로부터 몇 시간 지나지 않아 같은 자리에서 이사의 얼굴을 마주했을 때였다. 이사는 밀린 급여를 처리해 주기는커녕 이현의 뺨 위에 든 얼룩덜룩한 붉은 멍을 보면서도 ‘그 새끼 폭행죄로 신고해’ 따위의 소리만 던졌다. 스태프들에게 밀린 월급의 이응 자만 꺼내도 역정을 냈다.
결국 그때 이현은 자기 월급에서 돈을 떼어 스태프들에게 몰래 돈을 쥐여 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현을 때렸던 음향 오퍼는 아직 군대도 다녀오지 않은 스물두 살이었다. 당장 이십만 원이 없으면 생활이 안 되는 사회 초년생을 모른 척할 수 없었다.
제가 생각해도 참 미련한 짓이었다. 결과적으로 그 음향 오퍼는 이현이 내미는 돈을 받으면서도 고마운 줄을 몰랐으니까. 그저 더러운 공연계에 다시는 발붙이지 않겠다고 이현에게 내지르고는 자리를 박차고 나가 버렸다.
그리고 이현은 그 모습에 별로 상처받거나 화나지 않았다.
‘저 친구 똑똑하네.’
그렇게 생각했을 뿐이다.
똑똑한 사람일수록 이 판에서 빨리 빠져나간다.
“이 PD, 무슨 생각해?”
옆자리에서 김 실장이 상완을 툭 치는 감각에 이현은 겨우 정신을 차렸다. 잠깐 사이 딴생각에 지나치게 몰두해 버렸다. 하지만 사실대로 ‘현실 도피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아, 조금 피곤했던 것 같습니다.”
‘피곤했다’는 고백에 맞은편의 남자가 특유의 눈빛으로 이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을 피하기 위해 이현의 눈은 자연히 테이블 위로 어색하게 떨어졌다.
이현은 바로 이 자리에서 공연계의 수많은 관계자를 만났다. 연출가이거나, 음악 감독이거나, 아니면 배우, 혹은 그들의 매니저인 이들을.
그리고 지금 이현은 신인 배우를 데려온 매니저와의 미팅을 위해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런 자리는 아까도 설명했듯이 이현에게 너무나 익숙한 것이었다. 특히 요즘에는 상반기 신작을 위해 스태프를 꾸리고 캐스팅을 하는 시즌이라 미팅이 잦은 편이었다. 덕분에 오늘도 새로운 사람을 만난다는 것에 긴장하기는커녕, 지난밤 모자랐던 잠이 수시로 머리를 멍하게 해 터덜터덜 도착한 차였다.
모든 게 관성이었다. 거기까지는….
그러나 문에서 걸어 들어오는 오늘의 미팅 상대를 보자마자 잠은 완전히 달아났다.
“그러고 보니까 우리가 박 팀장님 얼굴 보고 지낸 지도 오래됐네. 이 PD가 팀장님 자주 봐서 이제 편해졌나 봐. 그렇지 이 PD?”
“아닙니다….”
이현은 제 직속 상사인 김 실장의 뼈있는 말을 힘없이 부정했다. 그 앞에서 박 팀장이라고 불린 남자는 그저 푸근한 인상으로 너털웃음만 지었다.
박 팀장은 이전부터 이현의 회사와 여러 건 계약을 해 왔던 엔터사의 매니지먼트 팀장으로, 이현과는 벌써 4년째 일을 한 사이였다. 이현이 대리였을 때는 그도 대리였는데 연차가 쌓여 이제는 매니저 팀장과 PD가 됐다. 사적인 친분은 없어도 이현은 박 팀장이 재작년에 결혼했다는 것, 최근에는 귀여운 딸을 얻었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그런 건 카톡 프로필 사진만 봐도 다 알게 된다.
박 팀장은 사람 좋게 웃으며 대신 이현의 변을 해 주었다.
“이 PD님도 가끔 피곤하실 때 있고 그런 거죠.”
“그래도 오늘은 뉴 페이스도 있는데 이러면 실례지.”
“그냥 뉴 페이스가 아니죠?”
“아-주 훌륭한 페이스죠.”
주거니 받거니 하는 김 실장과 박 팀장 사이에서 이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뉴 페이스지만… 제게는 뉴 페이스가 아닌데요.’
이현은 떨어뜨렸던 시선을 제 대각선 사선에 위치한 박 팀장을 향해 부자연스럽게 올렸다. 아직 맞은편 남자의 눈을 마주 볼 준비가 안 되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단단히 굳어 버린 이현을 대신해서 유들유들한 성격의 김 실장이 분위기를 풀었다.
“사실 연출님도 고민이 많았어요. 항상 그 배우가 그 배우라는 거예요. 제작사 입장에서는 적당히 티켓 팔아 주는 배우를 쓰는 게 좋거든. 그런데 이번엔 대극장이라 사이즈 차이가 좀 나니까 우리도 지금 젊은 배우들 티켓 파워를 확신할 수가 없는 거야. 연출님도 신선한 페이스가 좋다는데 완전히 무명을 쓰기도 좀 그렇대… 나보고 어쩌라는 건지. 그렇다고 오디션을 열어? 저번에도 그러다 연출님이 한 명도 안 뽑았잖아요. 제작사는 오디션도 돈인데!”
“기억나네요. 그때도 김 실장님이 저희 쪽 신인 좀 써 주셨으면 했는데.”
“그게 제 마음대로 되나요. 최종 결정은 연출부가 하는 건데.”
“에이, 밀어주실 수 있잖아요.”
“절 과대평가하시네요. 아무튼 근데, 오늘은 만나자마자 신뢰감이 팍 드는데요.”
김 실장은 신이 났다. 말수가 확연히 늘어난 게 그 사실을 증명했다.
‘후….’
이현은 소리 나지 않게 한숨을 머금었다가 조용히 뱉었다. 분위기가 안 좋게 흘러가고 있었다.
김 실장은 소위 ‘끼워 팔기’로 들어오는 신인 배우들을 혐오하는 사람이었다. 바로 매체로 갈 만한 깜냥도 안 되는 배우들이 깔짝거리며 공연계에 발을 걸치는 게 눈엣가시라고도 종종 말해 왔다. 그러니 오늘 아침, 박 팀장이 난데없이 신인 한 명을 데려온다는 말에 김 실장의 기분이 가라앉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곰 같은 능구렁이가 또 제작사를 구워삶아 먹으려고 하네?’
전화를 탁, 소리가 날 정도로 세게 끊어 버리는 김 실장 곁에서 이현은 조용히 냉수만 들이켰었다. 사실 오늘 미팅의 목적은 이미 캐스팅된 다른 주연 배우의 일정 조정이었다. 그 자리에 갑자기 뉴 페이스를 데리고 나타나는 건 뭐랄까, 이현이 느끼기에도 지나치게 뻔뻔하다고 해야 하나….
이현은 박 팀장의 얼굴을 슬쩍 다시 들여다보았다. 사람 좋아 보이는 저 곰같이 푸근한 인상은 어디까지나 겉모습일 뿐이다. 박 팀장 역시 여타 매니저들처럼 우직하고, 뻔뻔하고, 자존심 죽이는 데 일가견이 있는 프로 매니저였다.
저러니까 빨리 승진했지.
그러나 이제 트집 잡고 싶은 쪽은 이현뿐인 것 같았다. ‘끼워 팔기’를 혐오하던 김 실장은 오히려 최근 골머리를 앓던 조연 캐스팅 하나를 해치우게 되어 후련해 보이는 눈치였다. 벌써부터 눈에 호감이 가득했다.
그야 누구든 석희재, 저 남자를 실제로 보게 되면 그 외견에 홀리게 마련이다.
이현은 여전히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석희재와 눈을 마주치는 대신 지나치게 익숙한 그 얼굴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았다.
한번 그 인상이 각인되면 통 잊기 힘든 희소가치 있는 미남임은 분명했다. 서구적으로 음영이 뚜렷하게 진 골격과 도회적으로 창백해 보이는 얼굴빛. 고상하게 긴 눈매에는 사연이 가득했고 특히 옆모습을 볼 때 두드러지는 높은 콧대는 지나치게 입체적이어서 저 혼자 모든 사물과 인물을 배경으로 만들어 버리곤 했다.
하지만 그 얼굴보다도 그를 돋보이게 만드는 건 훌쩍 큰 키와 체격이었다. 조금 전의 김 실장 역시 오종종하고 통통한 몸집의 박 팀장을 따라 들어오는 남자를 보자마자 ‘역시 우라가 다르다’면서 수선을 떨었다.
‘쟤는 연기할 필요도 없네. 그냥 무대에 척척 걸어 올라와서 조명만 딱- 받으면 되겠다.’
이현은 김 실장의 감탄에 대답을 돌려주지는 않았지만 딱히 부정도 하지 않았다. 자신도 저 남자와 첫 대면을 했을 때 그 외모를 응시하는 것만으로 헉헉 숨이 차는 경험을 했었으니까.
“이 PD는 어때?”
또다시 팔의 윗부분을 툭 치는 손길에 이현은 어쩔 수 없이 대답했다.
“…저는 왜.”
“이 PD가 남자 보는 눈이 있잖아.”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리는 말이었다. 게이인 것을 숨기고 사는 이현은 내심 목이 졸리는 기분이 들 정도로 당황하면서, 김 실장이 무슨 의도로 그런 말을 한 것인가 지나치게 깊이 생각했다. 때문에 석희재가 그 말을 듣고 가만히 눈을 내리깐 것은 알아채지 못했다.
“네, 네, 저도… 좋은,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게 다야? 왜 이렇게 미적지근해.”
이현은 ‘화장실 좀요!’라고 외치며 자리를 뜨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이 순간을 무마하고 싶어 충동적으로 굴었다간 더 튀고 만다.
이현은 원래부터 연기가 젬병이었다. 속마음을 숨기는 데는 더더욱 요령이 없었다. 공연계에 들어오고 나서도 ‘마스크가 좋은데, 연기는 생각 없었냐’는 질문을 종종 듣곤 했는데 그때마다 기겁하며 손사래를 친 것이 바로 이 이유 때문이었다.
아무튼 지금은 말 한마디, 시선 처리 한 번 잘못했다가는 이 바닥에서 구르고 구른 김 실장과 박 팀장에게 오늘의 뉴 페이스와 구면이라는 사실을 당장 들킬 것 같았다.
마음의 준비를 할 틈이라도 있었다면….
저 자식이 오늘 만나게 될 거라는 걸 알려 주기라도 했다면!
하지만 원망스러운 속마음과 다르게 이현은 아직 어떻게 처신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한 상황이었다. 심지어 이현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한 마디를 유심히 듣고 있는 석희재가 의식되어 무어라 말하기가 힘들었다.
“아무튼 좋다는 거지?”
“네… 네….”
“이상하네. 너무 미남이라서 낯가리나 봐. 이 PD 미남 좋아하는데.”
“아니… 제가 언제.”
이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로저으며 쇠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김 실장은 자신이 이현을 들었다 놨다 롤러코스터를 태웠다는 자각도 없이 화제를 돌렸다.
“그럼… 연출님 오디션을 한 번 봐야 할 텐데.”
“좋죠. 날짜는 언제로 할까요?”
김 실장의 말에서 ‘오디션’ 소리가 나오자마자 박 팀장이 옳다구나 하고 얼른 미끼를 물었다.
“연습 시작 전이면 언제든지 괜찮아요.”
“이쪽은 신인이라 시간은 무조건 맞춰 드릴 수 있습니다.”
“좋네요. 그런데 우리 당사자 의견도 들어 봐야 되는 거 아닌가?”
김 실장에게 이름을 불린 ‘당사자’의 눈빛이 겨우 이현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희재 씨는 이 공연 하고 싶어요?”
“…….”
“박 팀장님이 등 떠밀어서 뭔지도 모르고 나온 거 아니죠?”
김 실장의 물음에 남자, 석희재의 시선이 한 번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양손을 테이블 위에 가만히 모아 느슨하게 깍지를 끼더니, 등을 좀 더 세우고는 나직한 저음으로 말했다.
“하고 싶습니다.”
“…….”
“정말 하고 싶어서 왔습니다.”
뻔한 말인데도 신뢰감이 있게 들리는 건 저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울리는 듯한 깊이 있는 목소리와 침착한 눈빛 때문이다. 이현은 다시 시선을 떨구면서 과거를 돌이켜 보았다.
저렇게 배우 같은데.
왜 배우 지망생이라고 생각을 못 했을까.
진짜 배우들은 소위 ‘우라’가 다르다. ‘우라’란 아우라를 줄여 부르는 말로 업계에서 은어처럼 쓰고는 하는데, 이현도 PD 일을 통해 진짜 배우들을 여럿 보면서 그 단어가 어느새 입에 붙어 버렸다. 가끔은 외모만 그럭저럭 괜찮은 자신과 진짜 배우들이 근본적으로 어디가 다르기에 그 ‘우라’의 차이가 나타나는 건지 관찰하곤 했다.
그리고 그건 석희재를 보면 알 수 있었다. 그는 행동하는 프레임의 속도가 유별나다. 쓸모없는 움직임은 배제하고, 계산된 블로킹 안에서 일상마저 연기하는 듯한 차분한 호흡, 시선, 그리고 표정까지.
방금도 그러지 않았는가. ‘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기 전에 잠시 아래를 보는 시선 처리와 자세를 고치는 행동 하나로 그는 자기 목소리에 드라마틱한 진실성을 부여했다.
하는 짓이 대놓고 배우였다.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로.
기가 차는구나.
순간 이현은 가슴 밑바닥부터 울컥하는 감정을 느꼈다. ‘말을 안 해 줬으니까 모르지.’ 오늘도 나오기 전에 한마디만 해 주었다면, 그러면 이렇게 당황할 일도 없었을 텐데.
이현은 오늘 아침을 돌이켜 보았다.
‘머리는 말리고 가지.’
‘늦었어. 가면서 마르겠지.’
‘안 춥나.’
‘한두 번인가?’
늦잠 때문에 정신없이 출근 준비를 하는 자신의 뒤에서, 석희재는 침대에 누워 머리 뒤로 손깍지를 낀 채로 느긋하게 저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말할 틈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오늘 미팅은 어디까지나 박 팀장의 독단이었다고, 자신도 너무 갑작스럽게 온 거라고 한대도 변명이 안 된다. 석희재는 연락할 수 있는데도 안 한 거였다.
아무튼 연출가이거나, 음악 감독이거나, 아니면 배우, 혹은 그들의 매니저. 월급이 밀려서 우는 알바생과 느닷없이 주먹질을 하던 음향 오퍼까지…. 수많은 사람을 만났던 이 자리지만 이현은 오늘만큼 당황스러운 상대를 만난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석희재는 이현의 가장 오래된 섹스 파트너였으니까.
***
“진짜로 오디션 보실 거예요.”
끝을 내린 묘하게 무뚝뚝한 이현의 물음에 김 실장이 뒤를 슥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이 PD 오늘 진짜 컨디션 안 좋네. 어제 술 마셨어?”
“네. 2시까지….”
“2시면 빨리 갔네. 어제 조연출이 안 그래도 이 PD 피곤해서 빨리 집에 갔다고 하더라고.”
‘네가 피곤할 이유가 없다’고 은근히 돌려 말하는 김 실장 때문에 이현은 쓰린 속을 몰래 문질렀다. 이 괴물 같은 업계 종사자들은 새벽 2시에 집에 가는 걸 이른 귀가라고 생각한다. 물론 이현도 스물여섯까지는 그 짓이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스물아홉인 지금은 조금 다르다.
게다가 불공평한 점이 하나 있다면, 다른 스태프들은 오후 한두 시가 콜이지만 제작사 직원인 자신은 매일 오전 9시면 출근해야 하는 직장인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눈앞의 김 실장은 서른넷, 그리고 현재까지도 새벽 네다섯 시까지 술을 마시고 다음 날 정시에 멀쩡한 얼굴로 출근하는 괴물 같은 사람이다. 그녀 앞에서 이현의 약한 소리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이 PD, 연출님한테 연락드려서 오디션 날짜 조정해 놔요.”
“알겠습니다.”
석희재를 추천으로 올리겠다는 소리였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김 실장은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를 내며 꼿꼿한 자세로 안쪽의 파티션으로 향했다. 가느다란 힐 끝을 존경의 눈초리로 보던 이현은 이내 제자리로 갔다. 재킷을 벗어 한 번 접은 후 무성의하게 의자 등받이에 걸치는 행동에서 무료함이 묻어났다.
제작사 입장에서는 어쩌면 당연한 선택이었다. 지금의 조연 하나를 뽑기 위해 이현은 노래 경험이 있거나 없는 신인 배우부터 아이돌 그룹 멤버까지 총 400명에 달하는 캐스팅 리스트를 만들었었다. 공연 경험이 있는 배우들은 지난 공연들의 좌석 현황까지 공수해 가며 티켓 파워를 검증하고, 물망에 오른 후보들은 앞뒤로 스케줄을 확인하며 연습 일자를 조정해 보려고 기를 썼다. 그 와중에 연출 컨펌이 늦게 나 삼 일 차이로 놓친 배우도 있었다.
더 이상 캐스팅에 품을 들이고 싶지 않은 상황에서 관계가 좋은 엔터사의 추천 배우, 그것도 등장하면 일단 팬덤을 모을 것은 확실해 보이는 마스크의 신인이 등장했다. 게다가 이현이 알고 있는 연출가의 성향으로 보건대 석희재가 음치라면 넘버를 없애서라도 배역을 주려고 들게 분명했다.
“하….”
한숨만 나왔다.
「연출님. 오늘 XX역 검토하고 있는 배우와 미팅했습니다. 오디션 가능한 시간 알려 주시면 저희가 세팅하고 콜 하겠습니다」오후 3:23
연출에게 문자와 함께 배우 프로필을 보내자 답장은 금세 왔다.
「회사는 마음에 든 거지?」오후 3:31
답이 빠른 걸 보니 연출도 프로필에 혹한 모양이었다. 이현은 점차 수렁으로 빠져 가고 있는 자신의 일과 사생활을 생각하며 답장했다.
「네. 김 실장님 좋아하시네요.」오후 3:32
「할게 그럼」오후 3:32
「토요일도 되나?」오후 3:32
「전달해 보겠습니다.」오후 3:32
「응~ 되면 2시로 해 줘」오후 3:32
지나치게 잘 풀린다.
이현은 모니터 앞에서 이마를 짚은 채로 잠시 고개를 숙였다. 공적인 영역으로 쳐들어온, 가장 들키고 싶지 않은 사생활 때문에 편두통이 오고 있었다.
얼마나 그러고 있었을까. 잠시 후 지나가던 김 실장이 어깨를 툭 치고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다시 자세를 고쳐앉고 나서 이현은 책상 밑에서 가죽 구두를 벗어 두고 사무용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하지만 다리의 피곤함이 영 가시질 않았다.
이현은 핸드폰을 들어 또 다른 사람의 연락처를 눌렀다.
석희재가 캐스팅된다면 앞으로 그와는 수없이 마주칠 것이다. 연습실과 무대, 조명이 닿지 않는 소대나 좁고 기다란 백스테이지의 복도, 비어 있는 극장의 객석 같은 곳에서.
이현은 관계자 외 접근 금지의 은밀한 공간이 사람을 얼마나 두근거리게 하는지 알고 있었다. 또한 자신이 얼마나 자제심이 부족하고 연기력이 형편없는지도. 그런 곳에서, 하물며 석희재 같은 남자가 섹스하자고 손을 뻗으면 자신은 분명히 유혹에 진다.
이현은 스스로를 그다지 자제력 있는 어른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있었다. 스물아홉이란 자기 자신을 객관화해서 보기에는 충분한 나이다. 더 이상 어린 시절의 실수를 반복할 생각은 없었다.
한때 이현은 남자에 미쳐 일도, 삶도, 저 자신도 망치려 들었던 적이 있다. 그때는 어려서 몰랐다 해도 이제는 아니다. 이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의 자신이 일궈 낸 자리를 잃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의 관계를 애매하게 지속한 채로 그것을 일터로 끌고 왔다가는 위험해지기 딱 좋았다.
그리고 이미 알고 있지 않았나. 언젠가 이렇게 끝날 날이 올 거라고.
지금이 그때인지도 모른다.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마음이 무거웠다. 동시에 조금이나마 아쉬운 감정이 든다는 사실에 약간의 좌절도 느꼈다. 마지막에는 후련히 털어 낼 수 있도록, 감정적으로는 얽매이지 말자 그토록 다짐했건만….
어쨌거나 이 관계를 끝내야 하는 이유만 더 분명해졌을 뿐이다.
이현은 타자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후 톡톡, 천천히 글자를 치기 시작했다.
‘오늘… 은 놀랐다… 나 참, 내가 놀란 얘기 해서 뭐하냐. 이거 말고, 음… 우리 얘기 좀 하자. 너… 도 정리할 생각이었지?….’
이현은 잠시 생각에 빠졌다. 저에게 이야기를 안 하고 온 이유도 그래서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석희재의 공사 구분법일지도.
일 이야기를 섹스 파트너에게 시시콜콜 떠들 필요 없다고 생각했다거나.
그래도 언질 정도는 줄 수 있었던 것 아닌가.
이현은 입술을 사리물었다.
지이이잉.
“아!”
순간 갑작스럽게 진동하기 시작한 전화에 이현은 놀라며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하필 책상과 의자 아래로 추락해 발등 위를 찍은 핸드폰 때문에 비명을 삼켰다.
“여, 보세요… 흐….”
- 뭐 해?
수화기 건너편에서 흘러온 목소리는 석희재의 것이었다.
- 지금 나와.
***
석희재는 바로 건물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정말 생각 없는 놈이다.’
석희재는 여기가 일 미터 걸을 때마다 아는 얼굴을 하나씩 만나게 되는 대학로라는 자각이 아예 없는 듯하다. 방금 미팅에서 초면처럼 헤어진 두 사람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으면 어떻게 보이는지도 모르는 것 같고.
이현은 얼얼한 발등을 구두에 억지로 끼워 넣고 석희재에게 다른 장소를 알려 주었다. 건물이 오밀조밀 모인 대학로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연습실로 향하는 주택가 골목은 확실히 인적이 적다.
“잠깐 송백당 좀 다녀오겠습니다.”
“거긴 갑자기 왜?”
“아… 뭘 두고 와서요.”
이현은 사무실을 나서 유동인구가 많은 번화가를 가로질러 바로 연습실 방향으로 향했다. 한참을 걸어 연습실에 다다르기 직전에 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그러자 바로 낯익은 인영이 보였다.
오늘 아침까지만 해도 이런 곳에서 마주 서서 얘기를 나눌 거라고는 생각도 못 한 남자다. 석희재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이현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빨리 왔네.”
이현은 그렇게 말하면서 들어온 골목 뒤쪽을 바라보았다. 지나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안 추워?”
이현의 물음에 석희재는 가만 고개를 저었다. 매니저가 태워 준 차를 타고 와서 날씨 생각을 못 했는지 그가 걸친 옷은 얇은 울 코트 한 장이었다. 드러난 뺨과 목덜미가 희게 질려 추워 보였다.
하지만, 본인이 아니라니 뭐….
이현은 머쓱하게 되물었다.
“왜 안 갔어.”
석희재는 대답 대신 침묵하며 이현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그는 원래도 말수가 많은 편이 아니다. 하지만 말해야 할 때 입을 다무는 타입도 아니었다.
그러나 오늘따라 석희재가 침묵을 고수하는 타이밍은 유독 낯설게 느껴졌다. 그 가라앉은 눈빛의 의중을 도무지 알 수가 없어 이현은 조금 당황스러움을 느꼈다.
석희재는 이현을 불러낸 목적과는 크게 관련 없는 말로 운을 띄웠다.
“오늘 피곤해?”
“좋진 않아.”
오늘만 대체 몇 명에게 피곤하냐는 말을 듣는지.
이현은 눈두덩이를 손으로 쓱 문질렀다. 어제 새벽 2시에, 김 실장 기준으로는 이른 시간에 술자리를 빠져나온 건 집에서 석희재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다. 집에 가자마자 그냥 자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그게 가능했을 리 만무하다. 섹스 파트너가 제집으로 찾아오는 이유란 섹스밖에 없으니까.
생각해 보니 정말로 짓궂은 놈이었다. 미팅을 앞두고 그러고 싶었을까.
이현이 석희재의 심중을 추측하고 있을 때였다. 모자란 잠의 원흉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화나 보여.”
“아니… 아니야.”
티가 났나, 생각하면서도 이현은 고개를 저었다.
오늘 예상치 못한 순간 나타난 석희재 때문에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화낼 일도 아니었다. 일단 그렇게 감정적으로 얽힌 사이도 아니고, 나를 왜 속였느냐며 따질 주제도 아니었고… 더해서.
오늘 이대로 관계를 정리한다면 말이다.
가능한 한 좋게 끝내고 싶었다.
입을 열기는커녕 저만 뚫어져라 관찰하고 있는 석희재 대신, 가벼운 한숨을 쉰 이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박 팀장님은?”
“먼저 가시라고 했어.”
“왜.”
그러니까 왜.
이현은 그게 가장 궁금했다. 오늘 만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이야기하지 않은 것은 그렇다 치자. 그게 섹스 파트너에게 시시콜콜 일 얘기를 하지 않는 나름의 공사 구분이라면 이현은 납득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매니저까지 혼자 돌려보내고 다시 여기를 찾아온 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건물 아래에서 저를 기다리고 있던 것도, 오란다고 순순히 주택가 골목에 순순히 숨어들어 와 기다리고 있던 것도.
그러나 석희재는 여전히 묵묵부답이었다. 왠지 짜증이 나기 시작해 이현은 살짝 날이 선 목소리로 물었다.
“너 배우였어? 왜 숨겼어.”
“숨긴 적 없어.”
석희재는 이현을 빤히 내려다보며 이어 말했다.
“너도 물어본 적 없잖아.”
그 말에 이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직업을… 물어봤어야 했나?
마치 원래 알고 있었어야 한다는 뉘앙스였다.
그 질문에 이현은 우습게도 서러움을 느꼈다. 물어봐도 되는지조차 몰랐다. 워낙에 미스터리 하셔서.
제집에 방문한 석희재에게 샤워는 하고 왔는지, 콘돔은 사 왔는지 같은 것은 수백 번도 더 물었지만 생일이나 직업을 물어볼 생각은 해 본 적이 없었다. 저 과묵한 남자에게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아무런 단서도 흘리지 않았으며 언제나 그런 식으로 선을 그었으니까. 이현 역시 머쓱해하면서도 그런 건 당장의 섹스와는 관련 없는 화제라고 생각하며 그의 사생활을 지켜 주었다.
이현은 멍한 표정으로 찬 바람이 쓸고 지나가 시린 뒷덜미를 매만졌다.
“그럼 너는, 너는 물어봤어?”
“너는 네가 떠들었고.”
석희재는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스스로도 유치한 변명이라고 생각해 시선을 피하는 게 뻔히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석희재는 전혀 주눅 들어 보이지 않았다. 그건 전부 다 저 제왕적 외모 때문이다. 똑같이 서로 말꼬리를 잡아 대고 있는데 외견에서 풍기는 분위기만으로 밀리는 기분에 이현은 금세 서러워졌다.
“…그리고 나 아직 배우 아냐.”
“그럼 뭔데.”
“데뷔를 해야 배우지.”
당연하다는 듯 툭 던지는 말에 이현은 다시 말을 잃었다. 그 말인즉슨 이번 공연 오디션에 붙어야 겨우 배우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럼 지금까지 지망생이었던 거야? 백수였다고?”
이현의 물음에 석희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저 분위기, 저 껍데기를 가지고 백수였다니….
이현은 평소 성실한 사람을 이상형으로 꼽았다. 제 섹스 파트너가 바깥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물어본 적은 없지만 벗어 놓은 옷가지는 물론 지갑이나 시계 같은 소품들도 죄다 값어치가 있는 것이기에 건실한 직장인이겠거니 혼자 환상을 품었다.
그런데 백수라고….
3년간 꾸준히 만났던 사람의 민낯을 보는 기분이었다.
그간 이현은 석희재가 관계를 유지하는 방식에 천천히 적응해 왔다. 섹스 파트너의 침대 외적인 생활에 관심을 기울인다거나 시시콜콜 일상을 나누는 일은 되도록 피하면서. 그게 파트너와의 관계를 오래 유지하는 비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결국 석희재가 맞았다. 이현 역시 종내에는 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안정적으로 관계를 이어 올 수 있었다고 인정하게 됐다.
그래서 이현은 석희재가 저렇게 대놓고 제 직업을 물어본 적은 있냐고 추궁할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못했다. 코너를 돈 차량이 빵! 경적을 울리면서 제 앞으로 튀어나온 것과 비슷한 강도의 충격이었다.
‘근데 어차피 백수였잖아…?’
그동안엔 물어봐도 딱히 대답할 말이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제 무관심 덕에 상대의 사회적 체면을 챙겨 준 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물론 이현 역시도 이것이 변명에 불과하다는 자각은 있었다. 새삼 돌이켜 보니 3년 동안 꾸준히 만났는데 아는 게 이렇게 없다는 건, 말 안 해 준 사람 탓만을 할 수만은 없었다. 어느 순간 저 역시 석희재에 대해 알고 싶은 마음을 싹 접어 버렸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게 바로 끌리는 상대를 만나도 연애로 진전시키지 않는 이유였다.
현재 이현은 절대 연애가 불가능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아침 9시에 출근하는 건 여느 직장인들과 같지만 저녁 11시 이전에 퇴근하는 경우는 절대 없다는 점이 조금 다르려나.
8시간 정해진 시간만큼의 업무와 칼퇴라는 것은 공연계에서는 꿈도 꾸지 못한다. 저라고 왜 누군가에게 의지하고 싶지 않을까. 한 사람을 사랑하게 되면서 느끼는 충족감을 이현도 무척 그리워했었다.
다만 현재의 자신은 연애할 자격이 없다. 그럴만한 시간과 여유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사람이 그립다고 무리해서 시작한 짧은 만남은 전부 다 엉망진창의 엔딩을 맞으며 박살이 났다. 그 덕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결론이다.
침묵 속에서 이현은 헛기침했다.
“흠, 야… 아무튼 아… 백수… 그거는, 내가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한 건 아니고.”
“…….”
“뭐 지금부터 열심히 하면 되지. 힘내라. 사람마다 때가 있잖아?”
그러자 석희재는 해석하기 어려운 표정으로 이현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서른이 다 되도록 직업이 없던 사람의 아픈 곳을 찌른 것 같아 이현은 조금 죄책감이 들었다.
그의 눈을 피하며 이현은 다시 물었다.
“혹시 나한테 또 말 안 한 거 있어?”
“…….”
“있으면 말해 봐. 오늘처럼 놀라기 싫어서 그래.”
이현의 추궁에 석희재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생일…?”
이라고 말했다. 이현은 절로 미간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무슨 소리야. 그거야말로 서로 물어볼 이유도, 대답할 이유도 없는 화제였다.
그때 석희재가 주머니에 찔러 넣었던 손을 꺼내 입 앞에 주먹을 가져다 대고는 살짝 기침했다. 이현은 문득 오늘 추위가 길거리에서 이야기를 나눌 만한 정도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어딘가 들어가는 게 나았을까 생각하던 이현은 금세 정신을 차렸다.
애초 할 이야기란 하나밖에 없다. 그러니 대강 길에서 보자고 한 거였는데.
“추운데 얼른 들어가.”
이현은 그래도 조금 전 황당했던 기분을 조금 누그러뜨린 채로 나지막하게 말했다.
“할 말 있으면 나중에 전화로 하든가.”
그래도 3년이나 살 붙이고 같은 침대에서 잠든 사인데 지금 이 자리에서 대번에 끝내는 것도 무정하다. 제 생각일 뿐이라 해도… 이현은 역시 따로 시간을 내서 석희재와 정리를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너 미남 좋아해?”
뜬금없이 치고 들어오는 석희재의 말에 이현은 떠나려던 발을 멈추었다. 눈썹을 치켜올리며 석희재를 노려보았다.
“뭐?”
석희재는 원래도 자기가 듣기 싫은 소리에 도리어 공격을 해 오는 성가신 버릇이 있었다. 이렇게 나오시겠다?
“얼굴을 얼마나 밝히면.”
“아니… 아니거든.”
픽 웃는 석희재의 차분한 말 밑에는 지루한 비아냥이 숨어 있었다. 울컥하는 기분에 이현은 주먹을 꽉 쥔 채로 대답했다.
“되게 유명한가 봐. 소문이 파다하네.”
다소 무례한 화법에 뒤늦게 피가 식는 기분이었다.
그가 무슨 추측을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아서, 이현은 표정 없는 얼굴로 석희재를 마주 보았다.
“아니라니까.”
이현의 목소리 색이 변했다고 느꼈는지 석희재는 말을 멈췄다.
“뭐 착각하나 본데, 난 같이 일하는 사람하고는 절대 안 자.”
“…….”
“내 행실이 워낙 그랬으니까 네가 착각한 것도 당연한데, 김 실장님 말은 다 농담이고. 아무튼 그러니까….”
이런 비난을 석희재에게까지 듣고 싶지 않았다.
“아니다.”
눈가가 뜨끈해지는 기분에 이현은 입술을 깨물며 고개를 숙였다. 이어서 말을 명료하게 끝맺는 대신 한숨을 숨기지 않고 내뱉었다. 좋게 끝내고 싶다고 생각한 지 1분도 안 돼서 비틀려 버린 계획을 한탄하면서.
결국 이렇게 끝이구나.
이현은 다시 고개를 똑바로 들었다.
“그리고 그건 너도 마찬가지야.”
“…….”
“오늘 이렇게 만날 줄 알았으면 미리 정리하는 건데.”
그 순간 이현은 생각했다. 오늘따라 석희재가 저를 바라보는 눈빛이 왜인지 지나치게 관찰하는 느낌이라고. 타고난 눈빛 때문인지 원래도 사람을 깊이 응시하는 느낌이 있었지만 오늘은 유독 그랬다.
그래서 눈을 마주치고 싶지가 않았다.
이현은 자신 없이 고개를 떨구며 중얼거렸다.
“아까 연출님하고 연락해서 바로 오디션 날짜 잡았다. 프로필 사진 보자마자 마음에 드신 것 같더라. 오디션 잘 보고… 잘됐으면 좋겠다. 너야 뭐, 타고난 게 있으니까 데뷔하면 잘될 거야.”
“…….”
“너 데뷔하면 네가 남자 만났던 거, 나랑 관계 있었던 거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그러니까 너도 나랑 있었던 일은 비밀로….”
“알아.”
석희재는 말을 끊어 내듯이 대답했다.
왠지 그 짧은 대답이 유독 무겁게 가슴에 앉아 이현은 고개를 들었다. 마주치지 않으려 했던 석희재의 눈이 거기 있었다.
아까 이현이 도착하자마자 석희재는 물었다. 피곤하냐고, 또 화났느냐고.
하지만 이번엔 이현이 묻고 싶었다.
‘화나 보여.’
석희재의 검은 눈은 이현을 보는 대신 바닥을 쏘아보고 있었다.
“다 알겠다고.”
***
“왜 빈손으로 와?”
“예?”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들리는 김 실장의 물음에 이현은 어리둥절해하며 되물었다.
“송백당에 뭐 가지러 갔었다며.”
“아…! 가져, 가져다가 저기 주고 왔….”
“아아.”
이현의 말을 이쪽 연습실에 있는 물건을 다른 연습실에 가져다주었다는 말로 찰떡같이 이해한 김 실장은 다시 파티션 안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이현은 방금 전 당황한 나머지 지나치게 말을 더듬은 자신의 말을 자근자근 곱씹으며 자리에 앉았다. ‘진짜 모자라 보이게 말했다.’ 자조하면서. 김 실장은 부하 직원을 일일이 컨트롤하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눈치가 빨라 가끔 이렇게 심장을 덜컹하게 만들 때가 있었다.
애초에 송백당에 간 것부터 굳이 핑계를 만들었던 것이니 할 말이 곤궁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보다도….
‘다 알겠다고.’
그 한마디를 던지고는 휙 뒤돌아 찬 바람만 남기고 떠난 석희재의 뒷모습이, 사무실로 돌아오는 내내 머릿속을 꽉 메워 마음을 수선하게 만들었다. 어떤 핑계를 대고 사무실을 나섰는지도 순간적으로 잊어버렸을 만큼.
이현은 피로한 눈가를 꾹꾹 눌렀다. 서로를 잇던 관계의 끈이 출렁이는 순간은 언제나 벅차다. 지금까지의 안정적인 상태를 들쑤셔 뒤틀어 놓기 때문이다.
“이야… 그나저나 얘는 나이도 어리네.”
“군대는 언제 가려나. 늦게 갔으면 좋겠다.”
“어차피 군대 걱정 할 때쯤에는 우리 것이 아니야~.”
“하긴. 금방 매체 타겠죠.”
건너편에서 김 실장과 마케팅 팀 최 대리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들려왔다. 누구 얘기를 하나 궁금해서 이현이 시선을 주었을 때였다. 김 실장과 바로 눈이 마주쳤다.
“이 PD도 스물두 살 때는 이뻤겠지?”
김 실장이 입꼬리를 아래로 당기며 안쓰럽기 그지없다는 표정을 했다. 그 옆에서 최 대리가 괜히 편을 들어줬다.
“그 나이는 다 예쁘지 않아요? 저도 예뻤는데.”
“그건 그래. 하지만 세월이 원망스럽다. 이 PD 신입 때만 해도 얼마나 반짝반짝했는데. 지금은 좀 쩔었어.”
부정할 수 없는 말에 이현은 ‘하하’ 하고 경직된 웃음을 흘렸다. 일하다 보면 하루에도 수십 번씩 짓게 되는 의미 없는 웃음소리였다.
스물두 살 때라. 정작 당시에는 몰랐지만 여기저기서 꽤 관심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특히 육체에 쏟아지는 관심이 지대했는데… 그땐 제 외모에 자각이 없었던 게 한이 될 정도로.
“근데 누가 군대를 가요?”
이현은 바퀴 의자를 돌려 앉으며 물었다. 연기과를 졸업해 극장 공연으로 커리어를 시작하는 배우들은 대체로 군필자가 많은 편이었다. 드물게 들리는 군대 얘기에 호기심을 보이자, 김 실장이 턱으로 이현의 책상머리를 가리키며 말했다.
“자기 프로필 대충 봤구나. 아까 걔.”
아까 걔?
“스물둘에 아직 미필이래. 어리다 어려.”
설마.
이현은 흔들리는 눈동자로 책상 위를 더듬었다. 출력한 프로필 파일이 얼른 손에 잡히지 않아서 아까 핸드폰으로 연출에게 전달했던 문서를 뒤져 다시 열었다.
거기에는 석희재의 생년월일이 쓰여 있었다.
여섯 자리 생년을 가리키는 숫자의 앞자리마저 생소한 일곱 살 연하.
이현은 보고도 믿기지 않는 숫자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나한테 숨기는 거 또 있어?’
‘…생일?’
미간 사이를 슬쩍 찌푸리며 짓던 그 복잡미묘한 표정의 의미가 이 때문이었나.
나이가 아니라 생일이라고 했다. 단어를 굳이 교묘하게 틀어 순간적으로 ‘서로 기억해 주고 축하해 줄 만한 기념일’ 따위를 떠올리게 만든 건 계산된 수작이 틀림없었다. 그 자리에서 제대로 ‘나이’라고 말했다면 뒷감당을 할 자신이 없으니 애매하게 속이고 꽁무니를 뺀 것이다.
이현은 하도 기가 막힌 나머지 잠깐 숨 쉬는 법까지 잊고 말았다.
“실장님… 이 프로필 진짜예요?”
“뭘 그렇게 놀래? 하긴 외모가 너무 완성형이긴 했어. 데뷔 전에는 좀 덜 다듬어진 풋풋한 부분이 있게 마련인데.”
이현은 이제 손까지 부들부들 떨면서 핸드폰을 다시 들여다봤다. 그 와중에 실수로 자판을 잘못 눌러서 연출에게 [ㅑㅂㅅ] 라는 의미 불명의 문자를 찍어 보내기도 했다. 연출님과의 일대일 채팅방에!
칼 같은 답이 날아왔다.
「뭐야 이 피디 나 욕한 거야?」오후 4:17
「아니에요;;; 잘못 눌렀습니다」오후 4:17
「병신이라고 쓰려던 거 아니야?」오후 4:18
「아니에요 ㅠ」오후 4:18
「해석해 볼게. 야, 병신. 이거 맞지?」오후 4:18
‘연출의 글’을 써 달라고 독촉하면 일주일씩 잠적하는 연출이 오늘따라 칼답을 보낸다.
이현은 한 번 깊이 숨을 내뱉고 곧바로 연출에게 전화를 걸었다. 정말로 아무 의미 없는 문자였다고, 손이 떨려서 그랬다고, 저는 연출님을 정말로 존경한다고 비굴하게 사죄했다. 이미 통화 중반쯤부터 연출이 저를 놀려 먹고 있는 것을 눈치챘지만 이현은 그냥 힘없는 말투로 ‘아니에요, 아닙니다.’ 하고 기계처럼 빌었다.
전화를 끊고 난 이현은 다시 연락처를 뒤쳐 ‘ㅎㅈ’를 찾았다. 그리고는 이번에는 분노를 되살려 한 글자씩 감정을 담았다.
‘야…!!!!!!!!! 너, 나이를 속여도… 정도가 있지… 너… 나랑 동갑… 이라며…!!!!!!!!’
느낌표 하나마다 감정을 담아 연타하며 자판을 찍어 누르던 이현은 잠깐 생각하다가 깊이 한숨을 쉬었다.
그러고는 쓰던 것을 다 지워 버렸다.
사실 석희재가 스스로 이현에게 ‘우린 동갑’이라고 말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메시지를 보내면 석희재가 뭐라고 답할지 벌써부터 예상이 됐다. 이번에도 ‘물어본 적도 없잖아’라고 하면 또 말문이 막힐 테다.
이렇게 한심할 수가.
과묵하고 미스터리한 남자인 줄 알았더니 군대도 안 갔다 온 일곱 살 연하였다. 어린애에게 놀아났다.
창백해진 얼굴을 가리는 이현의 양손이 가늘게 떨렸다.
‘그래, 호구 잡힌 세월이 한두 해도 아니고. 금전적, 물질적 손해를 입은 것도 아니고… 이미 지난 일. 그냥 떨쳐 내자.’
이현은 소리 없이 심호흡하며 흥분을 가라앉혔다.
하지만 일곱 살이나 어린놈이 여태까지 ‘너, 너’ 하면서 잘도 천연덕스럽게 말을 놨다고 생각하니 다시 잔잔한 억울함이 밀려왔다. 석희재와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의 일이 감은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첫 만남부터 자연스레 말을 놓길래 당연히 동갑이라고 생각했지.
간혹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저도 모르게 내뱉던 자신과 다르게 개인 신상을 절대 말하지 않은 것은 말할 수 없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아까만 해도 ‘이십 대 후반까지 배우 지망생이라니, 희재 너도 나이 먹을 때까지 참 안 풀려 고생이었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에, 누가 누굴 걱정한 거냐. 녀석은 앞날이 창창한 스물두 살인데….
그 순간 끔찍한 사실을 하나 퍼뜩 떠올린 이현은 숨을 훅 들이켜다 혼자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이 계산대로라면.
‘처음 잤을 때는 대체 몇 살이었다는 거야.’
“이 PD 왜 그래?”
이현은 감당할 수 없는 사실에 손을 떨며 이마를 짚었다. 그러고는 소리 없이 쓰러져 책상 유리판에 가만히 쿵, 이마를 박았다.
“실장님? 이 PD가 과로로 쓰러졌나 봐요. 격무에 시달리다 못해….”
“뭐어? 저런 나약한… 머리에 찬물 뿌려!”
진짜로 물이라도 뿌려 주면 정신이 깰지도. 뺨을 댄 유리판이 따뜻해질 때까지 기다리던 이현은 잠시 후 그냥 스스로 일어났다.
눈앞에 김 실장이 다가와 있었다.
“이 PD. 이번 공연 배우 상견례 일정이랑 제작 바이블은 어떻게 되고 있어?”
태연하게 업무 관련 질문을 하는 김 실장의 의도가 읽혔다. 어딜 감히 책상에 엎드리냐는.
이현은 얼른 정신을 다잡았다.
“저 바이블은… 가이드만 잡아 놨고.”
이현은 큼, 하고 목을 가다듬으며 말을 이었다.
“상견례는 주연 배우들 일정 몇 명만 더 확인하면 픽스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의… 잡을까요?”
“퀵하게 끝내자. 내일 10시 어때.”
이현은 얼른 파티션을 확인해 봤다. 브로드웨이에서 찍은 폴라로이드 사진, 인상 깊었던 공연의 티켓 몇 장, 어떤 배우의 팬이 준 드라이플라워 사이로 매일의 스케줄을 적을 수 있는 주간 달력이 보였다. 내일 11시는 의상 팀 계약, 12시에는 언론사 문화부 기자의 점심 접대.
“10시, 전 괜찮습니다.”
“좋아. 이 PD가 공유 스케줄에 올려 줘요.”
이현은 오늘 남은 일정을 빠르게 확인했다. 내일 오전 10시에 회의를 하려면 오늘은 자동 야근이다. 다른 감상에 빠질 틈이 없었다.
스케줄 정리를 하는 사이 석희재가 안겨다 준 충격도 가셨다. ‘ㅎㅈ’에게 메시지를 보내려다 만 핸드폰 화면은 이미 김 실장이 다가와 말을 걸었을 때부터 화면을 꺼서 그대로 엎어 놓은 상태였다.
이현은 의자를 끌어당겨 앉고 다시 모니터를 바라보았다. 작성 중이던 제작 팀 컨택 리스트의 빈 셀에서 커서가 깜빡이고 있었다.
대극장 신작 뮤지컬의 오픈 4개월 전, 잠깐의 패닉에 빠지는 것도 허락되지 않는 시기였다.
***
이현이 석희재를 다시 떠올린 건 그로부터 3일 후였다.
잠들기 직전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는, 거의 유일할지 모르는 사적 시간에. 내일은 또 회사에서 어떤 엿 같은 일이 생기려나 싶어 습관적으로 찾아본 별자리 운세에서 ‘연애운 최고조, 흘린 인연도 다시 보자’라는 글귀를 본 직후였다.
이현은 핸드폰을 엎어 놓고 다시 천장을 바라보았다. 강한 빛의 여파로 시야는 아까보다도 깜깜했다.
흘린 인연이라.
운명이라고 생각한 강렬한 인연도 끝나고 나면 아무것도 아니었는데, 깜빡 잊고 흘릴 정도의 인연을 굳이 붙잡을 필요가 있을까. 그러기에는 열정도 시간도 모자란데.
왠지 차게 느껴지는 이불자락을 부스럭거리면서 이현은 옆으로 돌아누웠다. 씁쓸했다. 마음은 아닌데 몸이 버릇처럼 온기를 찾는다는 것이.
원래대로라면 오늘쯤 석희재가 찾아와 자연스럽게 제 옆자리에 누웠을 것이다. 말없이 서로의 옷을 벗기고, 가볍게 시작한 키스가 서로의 정신과 육체를 한계까지 몰아붙이는 섹스가 되고, 지쳐서 곤한 잠에 빠질 수밖에 없는 정사 후에는 땀에 가볍게 젖은 맨살을 감으며 끌어안은 채 잠드는….
“하아….”
그런 상상을 할수록 사람의 체온이 절실해졌다. 자신이 남자 없이는 못 사는 놈이라는 걸 그동안 너무 쉽게 잊고 살았다. 너무나도 궁합이 잘 맞았던 섹스 파트너 때문이다. 결핍을 느낄 새도 없이 석희재가 그 자리를 항상 채워 주었다.
이현은 베개에 고개를 파묻었다.
물론 저부터도 연락하지 않았지만… 지난 3일간 석희재에게서도 연락이 없었다. 이대로 신경을 끊는 게 최선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이현은 석희재에 대한 생각을 쉽사리 떨쳐 내지 못했다.
‘한 번은 사과해야 되는 거 아닌가. 적어도 한 번은 형이라고 해야 할 거 아냐. 3년을 속였는데, 양심이 있다면….’
이번에는 다시 반대쪽으로 돌아누우며 이현은 생각했다.
정말 이대로 끝인가.
‘알겠다고’ 한 말은 문자 그대로 ‘Understand’의 의미였나보다. 우리 둘 사이의 부적절한 과거는 너와 나의 미래를 위해 비밀에 부치자는, 이현의 다소 찌질한 부탁이 구차하고 성가셔 화를 낸 게 아니라… 말 그대로 ‘알아들었다고’.
바라마지 않던 대로 선을 그어 줄 테니 이제는 접점 없던 사람처럼 스쳐 가자고.
“하….”
이현은 석희재와 수없이 마주칠 백스테이지를 상상해 보았다. 그와 남이 되는 것은 저 역시 원하던 결말이었다.
아주 오래전, 석희재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기다리고 준비하던 끝이기도 했다.
이현은 그럭저럭 이 부자연스러운 끝을 받아들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부자연스럽다? 이현은 스스로의 생각에 딴지를 걸었다. 사실 자신은 판단할 수 없었다. 지금까지 관계를 가졌던 남자들과의 끝은 전부 깔끔하지가 못했다. 제 쪽에서 미련을 가지고 질질 끌려다니거나, 폭행, 협박, 감금, 스토킹을 당한 적도 많았다…. 세간의 상식으로 생각해 보면 그게 더 부자연스러운 끝이었다. 아름다운 이별은 제 사주팔자에 존재하지 않는가보다 체념한 지 오래지만, 아무튼 비정상적인 이별을 겪을 확률이 높다고 ‘정상’과 ‘비정상’을 헷갈려서는 안 된다.
말로 해서 통한 상대가 처음이라 좀 놀랐을 뿐이다. 이현은 그렇게 여겼다.
‘나도 무난한 이별 한 번 겪어 보는구나.’
안도한 이현은 깜빡거리는 눈을 감았다. 그러다 스스로를 비웃었다. ‘이별’이라는 단어를 붙일 만큼 거창한 사이도 아니었다. 이전까지는 나이도, 직업도, 사는 곳도 제대로 몰랐으니.
곧 잠이 쏟아졌다.
***
“희재, 안 한대.”
이현은 굼뜨게 대답했다. 희재라는 이름이 김 실장의 입에서 나왔다는 게 여전히 낯설어서.
“…네?”
“연출님한테 직접 사과드렸나 봐.”
이현이 더 자세한 설명을 요구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김 실장이 이어 말했다.
“오디션 보기 전날 박 팀장이 연락 왔었어. 아무래도 희재는 공연 못 들어갈 것 같다고. 내가 그럼 컴퍼니 측에서 연출님한테 전달하고 마무리 짓겠다고 했더니… 그것도 경우가 아닌 것 같다고 직접 연출님 뵈러 갔었대.”
“아….”
“처세 잘했지. 그런데 웃긴 게 연출님이 실물 보고 진짜 쓰고 싶어졌다고 그러는 거 있지. 그 양반 성격에 신인 배우 제대로 날 잡아 타박 줄 줄 알았는데. 아무래도 희재 걔는 예쁨 받고 살 팔잔가 봐.”
김 실장의 말을 듣던 이현은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설마, 하는 가능성이 떠올랐지만 일을 복잡하게 만들고 싶지 않은 무의식이 사고를 차단했다.
“이유가 뭐래요?”
“뭐, 학교 졸업도 해야 하고.”
“아, 학교요….”
적응 안 되는 단어에 이현은 어두운 낯으로 중얼거렸다.
“아무튼 걔는 캐스팅 리스트에 계속 가지고 있어. 언젠가 때 되면 우리가 제일 먼저 낚아채 오게.”
“알겠습니다.”
이현은 무감각한 기분으로 배우 컨택 리스트에 임시로 써넣었던 석희재와 그 매니저의 연락처를 지웠다. 다른 것보다도 또다시 공석이 될 조연 캐스팅 때문에 한숨이 나왔다.
그리고 그날도 이현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자정에 가까운 시간에 퇴근했다.
문을 열고 현관에 발을 들인 순간 이현은 아주 익숙한 감각을 알아차렸다. 불이 켜져 있는 거실, 스피커에서 흘러나오는 누군가의 음악 취향, 문 쪽을 바라본 채로 현관 한편에 가지런히 놓인 운동화.
그다음으로는… 아니나 다를까. 집에 들어온 사람을 맞이하기 위해 거실로 걸어 나오는 사람의 기척이 느껴졌다.
“후….”
이현은 인사 대신 고개를 숙이고 한숨을 쉬었다.
별로 놀랍지도 않았다. 왜인지는 몰라도 자신은 이렇게 될 것을 예상했던 듯하다.
침묵하고 있던 석희재의 시선이 이현의 울컥이는 목울대에 한 번 닿았다가, 다문 입술에 한 번, 마지막으로 눈에 한 번 닿는 것이 느껴졌다. 저 관찰하는 시선만으로 피부 아래 숨긴 감정을 다 들킨 것 같았다.
이렇게 준비 없이 마주쳤을 때 왜 냉정하게 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자신은 연기에 젬병인데.
그래서 이현은 무감정한 태도를 연기하는 것을 포기하고 지친 기색을 그대로 드러냈다.
“왜 왔어?”
기시감이 들었다. 최근 자신은 석희재를 상대로 항상 같은 것을 묻고 있었다.
왜.
또다시 그 ‘왜’가 궁금했다.
물으면서도 갑갑한 이유는 석희재를 대상으로 이랬던 경험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왜’라고 물을 이유도 없었다. 그가 집에 찾아오는 이유는 단 한 가지. 자신과 몸을 섞기 위해서였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희재야. 나 진짜 피곤해.”
“…그래 보여.”
“씻고 올 테니까 그사이에 나갔으면 좋겠다.”
이현은 코트만 벗어 두고 옷을 다 걸친 채로 욕실로 향했다. 부자연스럽다는 것은 알지만 도망치고 싶었다. 그렇게 저를 응시하던 석희재를 등지자마자 그가 물음을 던졌다.
“왜 오늘은 가라고 해?”
“…….”
“한 번도 싫다고 한 적 없잖아.”
그 말에 이현은 걸음을 멈추었다. 뒤를 돌아섰다.
“너 섹스 좋아하잖아.”
눈이 마주친 순간 석희재가 나지막이 말했다. 덤덤한 말투지만 미처 눈을 마주 보지 못하고 내리깔면서.
이번에는 이현 쪽에서 마치 도망치는 듯한 석희재의 시선을 샅샅이 쏘아보았다. 석희재는 다소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난 그거 하러 온 건데.”
이현은 도로 석희재에게 다가갔다. 알면서도 미끼를 물었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더 이상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무감정을 연기하는 데에도 기력이 필요하다. 이현은 너무 지쳐 있었고 감정적인 밀고 당기기 같은 건 체질적으로 할 수가 없는 성격이었다. 한계였다.
“아. 그래. 공사 구분. 내가 그거 하자고 했지.”
“…….”
“그래서 내 얘기 듣고 한 짓이 그거야?”
“…….”
“너 배역 깠다며.”
고작 나랑 자고 싶어서 그걸 발로 찼어?
이현은 목을 치고 올라오는 그다음 물음을 겨우 삼켰다.
석희재, 너 왜 절실해 보이냐.
끝인 줄 알았는데 끝이 아니었다. 이별은 다시 부자연스러운 모양으로 변형되어 가고 있었다. 지금까지 너무나 잘 안다고 생각했던 석희재의 예상치 못한 모습.
자신은 언제부터 속고 있던 것일까? 그리고 이 관계는 언제부터 변해 가고 있던 것일까.
그 순간 이현은 일그러진 얼굴로 묻고 말았다.
“너 설마 나랑 연애 따위가 하고 싶은 건 아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