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 이불
겨울을 지나 막 봄기운이 들어선 어느 날의 새벽, 설핏 잠에서 깬 신우는 조금 춥다는 느낌에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그리고 막 다른 체온을 찾아 손을 뻗었지만 아무리 더듬어도 그 체온을 찾을 수 없었다.
분명히 한이 들어와서 같이 잤는데…… 차가운 이부자리에서 혼자 자기 싫어서 기다리다 같이 잤는데 왜 자리에 없지, 라는 생각에 설핏 눈을 뜨자 어스레한 빛 아래로 텅 빈 옆자리가 보였다.
옆에 있어야 할 상대의 부재에, 부스스한 얼굴로 몸을 일으킨 뒤 방을 돌아보자 드레스 룸 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러운 그 소리에 반사적으로 시계를 보니 6시가 조금 지난 시간이었다. 어제도 자정이 넘어서야 집에 들어온 한이 몇 시간 자지도 못하고 다시 출근 준비를 하고 있는 듯한 소음에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겨우내 미뤘던 공사들을 일제히 다시 시작한 탓에 최근의 한은 정신없이 바빴다. 사무실에 감금당했던 시절이 그리울 정도로 요 며칠간은 오전에는 양평, 오후에는 수유리, 밤에는 부산까지 가야 하는 전국 일주 강행군이 이어지고 있었다.
어제도 늦게까지 양평에 있다 들어온 터라 피곤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미적미적 자리에서 일어나 드레스 룸으로 가자 넥타이를 매고 있는 한이 보였다.
“나 깨우지.”
자신을 굳이 깨우지 않고 혼자 조용히 준비하고 나가려던 한에게 미안하기도 하고 또 섭섭하기도 해 그렇게 말을 건네자 막 넥타이핀을 꽂던 한이 피로한 기색 하나 없이 환하게 웃어 보였다.
“일어났어?”
“옆에 있던 사람이 없는데 당연히 깨지. 깨웠으면 커피라도 내려 줬을 거 아냐.”
가벼운 아침이라도 챙겨 주고 싶었는데 그것도 어려워진 상황에 조금 아쉬워하자 한이 바로 앞으로 다가와 부스스한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커피는 나가면서 마시면 돼. 그리고 너도 나 기다리느라 못 잤는데 더 자야지. 잠 못 자면 피부 안 좋아져.”
그렇게 말하는 한이야말로 계속 철야 상태였다. 아무리 체력이 좋다고 해도 실내 근무도 아니라 전국 각지를 돌면서 일을 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나보다 네가 걱정이지. 오늘도 현장으로 곧장 가는 거야?”
“응. 잠깐 자리 비우면 개판 되는 거 순식간이거든. 자주 얼굴 보이고 일 잘하시는 분들한테 얼굴 도장도 찍어 둬야 하니 이번 달은 내내 바쁠 거야.”
“주말에도 쉬기 힘들어?”
걱정스럽다는 투로 말을 걸자 한이 어깨를 당겨 끌어안아 줬다.
“자꾸 혼자 둬서 미안해. 적당히 일하고 많이 놀고 싶은데 벌여 놓은 일들이 많아서 마음대로 안 되네. 이번 일들만 정리되면 쉬엄쉬엄 할게.”
“일 때문인데 미안할 거 없어. 쉬지 못하는 네가 걱정이지.”
“난 괜찮아. 재미있어, 아주.”
“그럼 다행이고.”
뭐든 재미만 있으면 피곤한 줄도 모르고 하는 녀석이니 그나마 다행이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자 전신을 꽉 끌어안아 주던 체온이 떨어져 나간다.
“그만 가야겠다. 넌 더 자.”
“오늘도 늦어?”
“나가 봐야 알 것 같은데…… 될 수 있는 한 빨리 돌아올게.”
“차고까지 바래다줄게.”
잠시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 드레스 룸의 불을 끄고 가방을 챙겨 든 한을 따라 방을 나섰다. 그리고 곧 함께 차고 앞에 도착해 차에 올라탄 한에게 인사를 건넸다.
“운전 조심해.”
“응.”
아직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 찬 정원으로 나서는 차를 배웅한 뒤 신우는 길게 하품을 하며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싸늘한 마루와 달리 온기가 도는 방으로 돌아오자마자 곧장 따뜻한 이불 속으로 파고들었다.
자정이 넘는 시간까지 한을 기다리다 함께 잠들고 이른 새벽 출근하는 한을 배웅한 뒤 다시 잠든다. 그러다 오전 8시가 되면 일어나 본채에서 아침 식사를 하고 다시 별채로 돌아와 작업하다 오후에는 일이 없으면 본채에서 시간을 보낸다.
그게 최근 자신의 하루 루틴이었다.
이젠 제법 이 집에도, 그리고 한과의 동거 생활에도 익숙해져 가끔은 다소 지루할 정도로 평화롭고 순조로운 나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평화는 영원할 것 같았다.
그날 오후, 그 평온한 일상 위로 작은 파문이 일기 전까지는.
어두운 새벽, 자정이 넘어서야 겨우 들어온 한을 맞이한 신우는 한이 잘 다녀왔다는 인사도 하기 전에 다급히 말을 던졌다.
“할아버지께서 저녁밥을 남기셨어.”
너무나 진지한 신우의 말에 막 차고에서 마루로 들어서던 한이 멈칫한다.
“……뭐?”
“밥을 두 숟가락이나 남기셨어.”
비장하기까지 한 신우의 표정에 한은 순간 표정 관리를 하지 못한 채 볼을 씰룩거렸다.
차고 앞까지 마중 나와 다급히 건넨다는 말이 할아버지가 식사를 아예 못 하셨다는 것도 아니라, 두 숟가락을 남기셨다는 말이라니.
상황 자체는 황당하지만 그 말을 심각하게 하는 신우는 귀여워 한은 겨우겨우 웃음을 삼키며 작게 대꾸했다.
“……그거…… 참 큰일이네…….”
“한 숟가락도 아니라, 두 숟가락이나 남기셨다고.”
너무나 진지하게, 큰 난리라도 난 듯 신우가 강조하며 반복하는 그 말에 한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느긋하게 되물었다.
“그래서, 걱정돼?”
“응. 고봉밥을 드시던 분이 밥을 남기시니 이상하잖아.”
“다이어트라도 하시나 보지.”
천연덕스러운 한의 중얼거림에 신우는 맥 빠진다는 듯 어깨를 늘어뜨렸다.
“한아…….”
자신의 말을 너무 무시하는 거 아니냐는, 약간의 불만이 담긴 신우의 목소리에 한은 재빨리 두 손을 들어 보였다.
“농담, 농담. 봄이라 입맛이 없으셔서 그럴 거야. 날 따뜻해지면 다들 그러잖아.”
“전에도 그러신 적 있어?”
“나야 잘 모르지. 작년 봄에 5년 만에 들어왔으니까.”
“그전에는?”
그 말에 한은 곰곰이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봤지만 그런 기억은 없다. 워낙에 대식가이신 데다 원체 건강하기도 하시고 무엇보다 음식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신 분이라 음식을 남기신 적은 없다. 물론, 아주머니들이 해 주시는 음식에 한해서지만.
“숙모나 어머니가 해 주시는 음식 외엔 남기신 일이…… 거의 없지, 아마?”
한이 그러고 보니 그건 그렇다고 말을 흐리자 신우가 한층 더 심각해진 얼굴로 읊조렸다.
“그럼 큰일이잖아.”
“워워, 과대망상 금물. 작년 가을에 건강 검진 받으셨을 때 염증 하나 없이 멀쩡하셨잖아. 오히려 네가 식도염 증상이 있었지. 할아버지, 나, 훈이는 완벽하게 깔끔했다고. 윤이 놈이야 원래 위장 장애를 달고 사는 놈이고.”
그러니 걱정할 것 없다고 한은 신우를 다독였지만 신우는 여전히 불안한 얼굴을 한 채였다.
“그렇긴 하지만…….”
“걱정할 거 없어. 우리 할아버지 자기 관리 확실하신 분이니까. 그냥 봄 되니 입맛이 없으신 거야. 매콤한 봄동이나 봄나물 무침 내놓으면 입맛도 돌아오실 거야.”
“그럴까?”
한의 말대로라면 분명 걱정할 게 없겠지만, 그래도 뭔가 마음에 걸린다는 듯 신우가 침울한 표정을 짓자 한이 허리를 숙여 신우와 눈을 맞추며 미소 지었다.
“걱정하지 마. 너도 요즘 통 못 먹었잖아. 나도 그렇고, 윤이도 그렇고. 아, 훈이는 빼고. 다들 그런 시기니까 걱정할 거 없어.”
“넌 양 줄어도 밥은 안 남기잖아. 윤이도 그렇고.”
“뭐, 그렇긴 하지만 할아버지도 이제 연세가 있으시니까. 어디 안 좋으시더라도 우리 할아버지 전화 한 통이면 병원이 통째로 우리 집으로 옮겨 올 테니 걱정 마.”
우리 할아버지가 그런 분이라고 웃으며 막 대청마루를 가로질러 침실로 돌아온 한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곤 조금 섭섭한 듯 신우를 바라본다.
“이제 할아버지 걱정은 그만하고 나 안 반가워해 줄 거야?”
두 팔을 벌린 한의 투정에 신우는 그제야 아직 한에게 잘 다녀왔냐는 인사도 못 했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미안. 잘 다녀왔어?”
“응. 잘 다녀왔어.”
매일같이 반복되는 그 인사와 함께 신우가 한의 허리를 끌어안자 한 역시 신우의 어깨를 안아 토닥여 준다.
안정감을 주는 포옹에 신우는 그대로 한에게 안긴 채 지극히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 갔다.
“공사는?”
“잘 진행되고 있어. 오늘은 일찍 들어오려고 했는데 아저씨들 고생하시는데 그냥 올 수가 없어서 술 한 잔씩 돌리고 왔어. 주말에 돌리려고 밤 막걸리 잔뜩 주문해서 보냈는데 얘기하다 보니 분위기에 쏠려서 오늘 따 버렸거든.”
자재 하나, 마감 하나하나에도 예민해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탓에 그만큼 대접해 드려야 한다는 한의 탄식에 신우가 잘했다는 듯 한의 등을 두드린다.
“너 보니까 좋다. 할아버지 걱정하느라 안절부절못했는데, 너 보니까 안심이 돼.”
“넌 너무 걱정이 많다니까. 그리고 너 우리 할아버지 좋아하는 건 알겠는데 너무 할아버지한테만 신경 쓰지 마. 가끔은 점심때 나와서 같이 밥 먹자고 하고 저녁때도 저녁 사 달라고 나오라고. 그래야 인재도 나 눈치 못 주지.”
“못 줄 리가.”
너랑 나랑 같이 눈치 받겠지, 라고 신우가 절대 그럴 리 없으니 꿈 깨라는 듯 웃자 한이 신우가 모르고 있는 일급 기밀을 하나 알려 준다.
“그 자식 날짜 잡혀서 앞으로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바쁠 거야. 당분간 내가 그거 전부 커버해 줘야 하니 밥 먹으러 나간다는 것 정도는 뭐라고 안 할걸.”
뜻밖의 희소식에 신우는 재빨리 고개를 들어 한을 올려다봤다.
“인재, 날짜 잡았대?”
“응. 5월 둘째 주 토요일. 예은이가 5월의 신부, 5월의 신부 부르짖더니 진짜 5월로 잡았더라고. 하필 날짜도 길일로 잡아서 식장 잡기 힘들다고 하길래 할아버지 연줄 통해서 식장까지 잡아 줬거든.”
정식 결혼식장은 아니지만 결혼식 행사가 가능한 대기업의 연수원을 잡아 줬으니 앞으로는 절대 인재가 잔소리 못 할 거라며 한은 만족스러운 듯 웃었다. 그러자 신우 역시 다행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축하한다고 전해 줘, 인재한테.”
예은 씨한테도, 라고 신우가 덧붙이자 가만히 신우를 내려다보던 한이 문득 헛소리를 시작한다.
“그냥, 우리도 결혼할까? 식장 더 좋은 데로 잡을 수도 있는데. 인재네랑 같은 날짜에 어때?”
눈을 반짝이며 당장이라도 식장을 잡을 듯한 한의 기세에 신우는 웃으며 헛소리하지 말라는 말을 돌려 해 줬다.
“절대 사양할게. 난 수치를 아는 인간이거든.”
“이미 할 거 다 한 사이에 수치는 또 뭐야?”
“이미 할 거 다 한 사이에 결혼식은 또 뭐야? 그런 건 아무 의미도 없는 거야.”
“왜 의미가 없어? 사람들 앞에서 나 이 녀석하고 이제 평생 같이 살 거예요, 하고 공표하는 것 자체에 의미가 있는 거라고. 얼굴 널리 널리 알려 두고 딴 놈하고 다니면 내 귀에 곧장 들어오게.”
결혼식의 정의를 알기는 아는데 대단히 잘못된 방향으로 알고 있는 한의 논리에 신우는 실소했다.
“결국 내 얼굴 팔려고 결혼식을 하겠다는 거야?”
“비슷하지. 이왕이면 화려하고 성대하게, 그리고 대담하게 쫘악 퍼트리는 게 좋잖아.”
“너 그러다 진짜 생방송에 나가서 내 사진 전국에 내보내겠다?”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혹시나 하는 생각에 농담을 던지자 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짓궂게 웃어 보인다.
“못 할 것도 없지. 나 한때 진심으로 인터뷰할 때 네 얼굴 다 내보일까 하는 생각도 했었는데? ‘운명의 연인’ 타이틀로 잡지사랑 방송사랑 내 전기문에까지 네 사진 다 실어 놓으면 너 어디 도망 못 갈 테니까. 어딜 가든 알아본 사람들은 ‘정한 애인이다!’ 이럴 거 아냐?”
어쩐지 한이 하니 농담 같지 않은 그 말에 신우는 질색했다.
“내 초상권하고 인권은 어떻게 되는 건데?”
“내 건 다 네 거, 네 것도 다 내 거니까, 네 인권도 내 거, 초상권도 내 거.”
“그럼 네 인권하고 초상권도 다 내 거야?”
“당연한 말씀. 그러니…… 자, 날 가져.”
그 말과 함께 신우를 끌어안은 한이 그대로 침대로 뛰어들었다. 그 힘에 밀려 얼결에 침대에 누운 신우가 간지러운 듯 웃음을 터트리자 한이 뺨과 눈가에 연신 입을 맞춰 왔다. 그러곤 어느새 신우의 티셔츠 안쪽으로 손을 넣어 가슴팍을 더듬거렸다.
은밀하게 피부를 쓸어내린 뒤 유두를 지분거리는 손끝에 신우가 작게 신음을 토해 내자 이번엔 입술을 겹친 채 깊이 숨결을 빨아들인다.
장난 같던 키스 뒤로 이어지는 깊고 농염한 입맞춤에 신우 역시 웃음을 그친 채 한의 목에 팔을 둘러 그를 끌어안았다.
웃음소리가 잦아들자 고요해진 방 안으로 거친 호흡소리와 함께 서로의 입술과 혀에서 나는 질척한 마찰음이 퍼지기 시작했다.
서서히 아랫배 위를 감도는 묵직하고도 뜨거운 감각에 신우가 몸을 비틀며 허리를 들어 올리자 한이 기다렸다는 듯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렸다.
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그 행위에 신우가 유혹하듯 다리를 벌린 채 서서히 허리를 움직이자 한이 다급히 셔츠를 벗어 던졌다.
초조한 듯 빠르게 움직이는 한을 도와 신우가 한의 벨트를 풀어 내리고 바지 지퍼를 내리자 속옷 위로 부풀어 오른 성기의 형태가 적나라하게 보였다.
발기하기 시작한 성기를 보곤 곧장 속옷을 끌어 내리려 들자 한이 웃는다.
“대담해졌다, 너?”
“누구 덕에.”
“더 야해지면 곤란하겠지만…… 아주 고무적이야.”
말과 함께 신우의 이마에 입을 맞춘 한이 사이드 테이블의 서랍에서 서둘러 젤을 꺼내 아래쪽을 풀어 주기 시작했다. 차가운 젤의 감촉에 순간 몸이 떨려 왔지만 시간을 들여 정성껏 아래쪽을 휘저으며, 정확히 자신이 느끼는 부위를 매만져 주는 손길에 신우는 침대 위에 누운 채 낮은 신음을 흘렸다.
여전히 삽입 자체에는 부담이 있지만 그것에도 서서히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뒤로 느끼는 게 익숙해질수록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한에게 안기는 것 자체는 좋았다.
완전히 보호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행복했다.
“이제 됐어. 넣어 줘.”
한의 긴 손가락이 안쪽을 만져 주는 것도 좋지만 그보다는 그를 원하기에 이제 그만 넣어 달라고 애원하자 한이 여전히 아래쪽을 매만지며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린다.
“여기, 완전히 젖었어. 질척거리는데?”
손가락 두 개를 넣어 안쪽을 벌리던 한의 설명에 신우는 재빨리 그의 말을 막았다.
“더 말하지 마.”
신우가 부끄러운 듯 제발 그런 건 중계하지 말라고 하자 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알았어. 넣어 줄게.”
아이를 어르듯 눈가에 입을 맞춘 한이 어느새 콘돔을 꺼내 씌우자 신우가 허리를 들며 다리를 벌렸다.
그와 함께 입구 쪽으로 선단이 와 닿았다. 구멍 위로 생생히 느껴지는 단단한 성기의 감촉에 신우가 작게 숨을 몰아쉬자 곧 성기의 끝이 안으로 파고들기 시작했다.
그 형태까지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느릿한 삽입에 신우는 등을 휘며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충분히 풀어 줬다 해도 여전히 감당하기 힘든 크기였다. 그리고 움직임이 느려 내벽 안을 밀어내는 성기의 형태가 지나치게 생생하게 느껴졌다.
애를 태우려는 듯 감질 나는 한의 움직임에 터져 나가는 신음을 어쩌질 못하고 있자 느릿하게 움직이던 한이 단번에 안쪽 깊은 곳까지 성기를 박아 넣었다.
다소 거칠고 깊은 삽입에 짤막한 비명을 내지른 신우가 몸부림을 치자 한이 걱정스러운 듯 묻는다.
“괜찮아?”
너무 서둘렀다 느낀 한의 물음에 신우가 웃으며 그의 목을 당겨 안았다.
“괜찮아……. 기분 좋아. 그러니 더 세게 안아 줘.”
아직 부족하다는 듯 신우가 헐떡이며 작게 속삭이자 한이 그런 신우가 아주 마음에 드는지 환히 웃어 보였다.
“원하시는 대로.”
“괜찮아?”
한 차례의 관계 후 침대 위에 늘어져 있는 신우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이 걱정하듯 묻자 신우가 나른한 음성으로 답한다.
“좋았어.”
근 일주일 만에 하는 관계라 조금 노곤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신우가 사실대로 기분 좋았다고 하자 한이 그런 신우를 귀엽다는 듯 바라본다.
“연신우 엄청 밝히네? 피곤할까 봐 자주 안 했는데 이젠 매일매일 해야겠는데?”
예전이라면 장난치지 말라며 부끄러워했을 그 말에, 신우는 이젠 제법 의연하게 대처했다.
“그것보다 얼굴 보는 게 좋아. 너 요즘 너무 보기 힘들다고. 한집에 사는 데도 얼굴 보는 시간은 하루에 30분 정도잖아.”
“그건 미안. 일을 너무 무리하게 받았어. 이제부터는 적당히 조절해서 할 거야.”
“미안할 건 아니지만 네가 안 힘들었으면 좋겠어.”
“그래. 앞으로 조심할게. 나도 너 걱정하는 거 싫으니까.”
상냥한 다짐과 함께 눈가에 입을 맞춰 준 한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에 신우는 그를 불렀다.
“왜?”
“물수건 좀. 너 샤워할 기운 없잖아.”
“아냐, 괜찮아. 일어날래.”
“왜?”
“샤워하고 잘래.”
“어? 같이 하자고?”
작년 여름, 비 오는 날 호텔을 다녀온 후로 은근히 같이 샤워하는 걸 즐기게 된 한을 보며 신우는 침대맡에 걸터앉으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하지, 뭐. 넌 샤워 부스에서 난 욕조에서.”
“같이 들어가서 왜 따로 해? 물세도 아끼고 가스비도 아껴야지.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나라에서 그런 낭비는 안 되지.”
“같이 들어가면 너 또 이상한 짓 할 거잖아.”
어서 일어나 욕실로 가야 하는데 마땅히 걸칠 옷이 보이지 않았다. 한은 양복 셔츠에 바지를 그대로 입은 채였지만 자신의 옷은 어디로 갔는지 모조리 사라져 버렸다.
“내 옷 어디 있어?”
“태워 버렸는데?”
눈 뜨면 입고 날아갈까 봐, 라며 한이 웃자 신우가 웃기지 말라는 듯 받아친다.
“장난치지 말고.”
“욕실로 갈 건데, 왜? 볼 거 못 볼 거 다 보고 조금 전까지 맨몸으로 붙어 있었는데 뭐가 부끄러워?”
이제 와 뭐 거리낄 게 있냐는 말에 신우가 막 반박하려는데 저 멀리서 탕 하고 문 열리는 소리와 함께 쿵쿵거리며 바닥이 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둔한 걸음 소리는 분명히 훈의 것이었다. 마치 온몸으로 굴러오는 듯 둔탁한 그 소음에 신우가 ‘훈이 왔나 봐.’라고 말하는 순간 갑자기 쾅 하며 방문이 열렸다.
“형! 할아버지가 밥 남기…….”
문이 열리는 순간 짐승 같은 반사 속도로 신우의 나신 위에 이불을 뒤집어씌운 한이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넌 노크도 할 줄 모르냐?”
“어? 어…….”
“앞발 뒀다 어디 쓰려고? 아껴뒀다 구워 먹으려고?”
“앞발 아냐!”
“그럼 그게 앞발이지 손이냐? 파랑 마늘 들고 동굴에나 들어가!”
“파랑 쑥이야!”
“하여간! 할 말 있으면 나가서 기다려.”
“마루 추워!”
“그럼 윤이 방, 아니 응접실에 가 있어. 좀 이따 갈 테니까.”
“알았다, 뭐.”
투덜거리면서도 결국 훈이 얌전히 방을 나서자 이불을 뒤집어쓴 신우가 작은 목소리로 정정했다.
“……마늘과 쑥이야.”
훈에게 알몸을 다 보일 뻔했다는 충격도 잠시 단군 신화에는 거론도 되지 않는 파 타령을 해 대는 형제의 대화에 신우가 주섬주섬 이불을 끌어 내리며 짚어 주자 한이 살짝 인상을 쓰다 알 게 뭐냐는 듯 곧 고개를 내젓는다.
“파든 마늘이든, 하여간 저놈이 잘못한 거야. 남의 신혼방에 왜 노크도 없이 들어와?”
“급한 일인가 보지. 일단 씻자. 훈이 기다리겠다.”
대강이라도 샤워를 한 뒤에 나가야 할 것 같아 신우가 이불을 돌돌 만 채 침대에서 일어서자, 한이 이 상황이 아주 못마땅한 듯 삐죽거린다.
“아무래도 저 녀석들 빨리 장가보내서 내보내야겠어. 내일부터 어머니한테 선 자리 알아보라고 해야지.”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저 자식들이 자꾸 오가며 방해하잖아. 우리 할아버지 하나도 감당하기 힘든데 저 녀석들까지 가세해서 난리를 치는 통에 아주 피곤하다고. 애초에 이 별채는 할아버지가 나 혼자 살라고 주신 건데 군식구들이 너무 많아.”
곱게 자란 외동아들 같은 그 말본새에 설핏 웃음이 나왔다.
“너 그러다 윤이랑 훈이가 결혼해서 아내랑 애들까지 데리고 와 옆방에서 살면 어쩌려고?”
“그럼 진짜 내쫓아야지. 영원히 본가에서 아웃.”
“네 마음대로?”
“내 마음대로. 난 장손이니 그래도 돼.”
자기 필요할 때만 ‘장손’이라고 우겨 대는 염치없는 한의 태도에 신우는 재빨리 타박하듯 말을 던졌다.
“쓸데없는 소리 말고 샤워나 해.”
“할아버지께서 오늘 밥을 두 숟가락이나 남기셨다면서요?”
샤워를 한 뒤 응접실에 들어선 순간, 먼저 응접실로 와 있던 훈이 곰손으로 탄 차를 내주며 던진 말에 신우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응. 딱 두 숟가락 남기셨어.”
“우와, 그거 큰일이잖아요. 병원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렇지? 그거 아무래도 이상하지?”
테이블을 사이에 둔 채 마주 앉아 진지한 얼굴로 헛소리를 해 대는 두 사람을, 한은 울지도 웃지도 못하는 묘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최근 두 사람이 좀 붙어 다닌다 싶더니 갈수록 신우가 훈을 닮아 가고 있었다.
단순하고 쓸데없이 걱정이 많은 게 똑 닮았다.
“참…… 뭐라고 해야 할지…….”
난감하다는 얼굴을 한 한이 앞에 놓인 연잎차를 들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자 훈이 두 주먹을 꽉 쥐며 목소리를 높였다.
“할아버지가 밥을 두 숟가락이나 남기셨다고! 이게 얼마나 큰일인 줄 알아? 형은 할아버지 걱정도 안 돼?”
“……그보다는…… 다른 고민이 되는데…….”
느긋하게 차를 한 모금 마신 한이 던진 말에 이번엔 신우가 놀라 묻는다.
“왜? 또 무슨 일 있어?”
“똑같은 녀석 둘이 마주 앉아서 말도 안 되는 일로 걱정을 하고 있는데 왜 한 놈은 깨물어 주고 싶게 귀엽고, 한 놈은 저 마당에서 굴려 버리고 싶을까, 하는 거.”
앞의 말에서는 신우를 지그시 응시하다, 뒷말을 할 때는 살벌하게 웃으며 훈을 바라보는 한의 시선에 신우와 훈은 동시에 부루퉁한 얼굴을 했다.
“너, 너무 쉽게 생각하는 거 아냐?”
이미 한 번 무시당했지만 훈이라는 지원군을 얻은 신우가 다시 한번 용기를 내 본인 주장의 타당성을 피력하자 한이 아까와 같은 반응을 해 온다.
“우리 할아버지는 내가 잘 알아. 건강 검진 꼬박꼬박 잘 받으시고 건강 관리도 잘하셔. 나이가 있으시니 기력이 쇠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운동도 매일 적당히 하시고 음식도 좋은 것들로, 딱 필요한 만큼만 가려 드시는데 뭐가 걱정이야? 하고 싶은 건 뭐든 다 하시고 먹고 싶으신 건 뭐든 다 드시면서 스트레스 없이 사는 분이니 걱정하지 마. 그냥 봄 좀 타시는 거야.”
“그러니까, 봄 타시는 게 걱정이라고. 네 말대로 그렇게 정정하신 분이 봄을 탄다니 이상하잖아.”
신우의 그 말에 한이 찻잔을 든 채 멈칫했다.
듣고 보니, 그도 그렇다.
하지만…….
“……우리 할아버지도 봄은 좀 타셔. 자, 그 얘기는 여기서 그만. 만약에 계속 그러시면 방법을 찾자고. 겨우 한 끼에 두 숟가락 남기신 것 때문에 이러는 거 웃긴다고. 이제 다들 들어가서 자. 지금 새벽 2시야.”
한이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이라고 턱으로 시계를 가리키자 그제야 현재 시각을 확인한 신우가 아차 한 듯 한을 돌아본다.
“아, 너무 늦었다. 너 또 새벽에 나가?”
“아니. 내일…… 이 아니라 오늘은 정상 출근. 오후에는 양평에 가야 하지만 오전에는 사무실로 나갈 거야. 그러니까 5시간은 잘 수 있어.”
“그럼 빨리 가서 자자. 훈이도 가서 쉬어.”
“네. 할아버지 내일도 잘 못 드시면 전화해 주세요.”
“그래. 전화해 줄게.”
아무리 그래도 역시 걱정된다며 시무룩한 얼굴을 한 훈이 자리에서 일어서 가방을 챙겨 들고 나서자 한과 신우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싸늘한 마루를 걸어 방으로 돌아왔다. 기온이 뚝 떨어졌음을 느끼며 서둘러 방문을 열려 손을 뻗던 신우는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한에게 물었다.
“진짜 할아버지 괜찮으신 거겠지?”
“벌어지지도 않은 일에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 우리 할아버지 봄 오면 좀 그러셔.”
“왜 그러시는데?”
역시 한은 뭔가 알고 있구나 하는 느낌이 들어 신우가 문 앞에 선 채 한에게 답을 재촉하는 눈빛을 보내자 한이 신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냥 좀 그런 거야. 나중에 말해 줄게.”
“뭔데?”
“좀 나중에. 할아버지가 파고들기를 원하시면 말해 주겠는데, 할아버지가 건드리지 않았으면 하는 부분이니까 지금은 패스. 사람마다 하나씩 그런 거 있잖아. 아, 이건 아무도 아는 척하지 말아 줬으면 좋겠다 하는 거.”
지나치게 추상적인 답에도 신우는 그 말의 의미를 대강 알 것 같았다. 너무 아프고 아려서 꺼내 놓기도, 누군가한테 위로받기도 힘든 그런 문제를,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
자신에겐 동생의 일이 그러했고 엄마에겐 자신의 문제가 그러했다.
“……많이 안 좋으신 거야?”
“안 좋다고 할 정도는 아니고……. 식사량까지 준 건 처음이지만 잠깐이니까 그냥 조용히 있어. 괜히 신경 쓰면 할아버지도 불편해하셔.”
거듭된 한의 당부에 신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그럴게. 그런데 왜 훈이한테는 말 안 한 거야? 걱정할 텐데.”
“그 자식은 아직 그런 건 잘 몰라. 덩치는 저 모양이라도 대가족에서 막내라고 사랑만 받고 곱게 커서, 어떤 상처는 건드려도 되고 어떤 상처는 건드리면 안 되는지, 아직 잘 몰라. 아픈 사람 보면 무조건 약 발라 주고 붕대 매 주려고 하지.”
동생에 대한 한의 정확한 평에 신우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아무리 무심해도 형은 형인지, 한은 그의 동생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때로는 호의에 의한 관심도 버거운 사람들이 있다는 걸,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훈이 그런 타입인가 싶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말고, 이제 그만 자자.”
“응.”
방문이 꽉 닫힌 걸 확인한 뒤 신우가 침대로 올라가 눕자 바로 옆에 누운 한이 팔을 뻗어 팔베개해 주었다. 그러고는 리모컨을 들어 조명을 끄다 문득 웃음을 흘렸다. 그 웃음소리에 신우가 왜 웃냐는 듯 한을 바라보자 한이 이불을 끌어 올리며 말한다.
“신기해서. 나, 원래 옆에 사람 있으면 못 자거든. 어릴 때부터 혼자 자 버릇한 데다 아버지 어머니 분가하신 뒤로는 이 큰집에서 할아버지랑 단둘이 살았으니까. 넓은 방, 넓은 침대에서 조용하게만 지내서 옆에서 누가 숨 쉬는 소리만 들려도 잠을 못 잤는데…… 지금은 혼자서는 못 자겠어. 네가 옆에 없으면 되게 시려, 허전하고. 진짜 이상하지?”
어둠 속에서 울려 오는 한의 중얼거림에 신우 역시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혼자 산 지 너무 오래돼서 다른 사람하고는 못 살 줄 알았거든. 그래서, 미래에도 난 항상 혼자 있을 줄 알았어. 누군가랑 함께 있는 내 모습이 잘 상상이 안 됐거든. 그런데, 지금은 혼자 있는 게 상상이 안 돼. 그것도 이상하지?”
“좋은 현상이지. 나한테는 네가 제일 좋은 이불이니까.”
“이불?”
“응, 내 이불. 난로, 담요…… 이불…… 햇살, 온기…… 또 봄…….”
바로 옆에서 울리던 한의 목소리가 한순간 뚝하니 끊겼다. 침대에 눕자마자 순식간에 잠이 든 듯 점점 잦아드는 그의 음성에 신우 역시 스르르 눈을 감은 채 덮쳐 오는 수마에 몸을 맡겼다.
그렇게 하루가 마무리되고 있었다.
“찬이 입에 안 맞으세요?”
매콤한 봄동 겉절이에 갈치구이와 연포탕. 나름 엄선한 아침 밥상에서도 밥을 세 숟가락이나 남기신 할아버지를 보고, 신우는 진지한 얼굴로 걱정을 내뱉었다.
어제의 두 숟가락에 이어 오늘은 세 숟가락이라니, 신우가 진짜 괜찮으신 거냐고 묻듯 노인을 바라보자 노인이 느릿하게 답한다.
“봄이라 입맛이 없구나.”
“……그럼 과일이라도 준비해 드릴까요?”
“됐다. 이럴 때도 있는 거지. 어서 먹어라.”
“저도 다 먹었어요. 그럼 차 준비해 올게요.”
“그래.”
슬슬 상을 치우려 허리를 숙이던 신우는 상 위를 보곤 문득 움직임을 멈췄다.
밥뿐 아니라 상 위의 반찬들도 조금씩 남은 채였다. 딱 먹을 만큼만, 정확히 2인분의 요리들이 담긴 접시들만 상에 올리시고, 접시는 늘 깨끗하게 비우시는 게 신조이신 분이 오늘은 찬까지 남기셨다.
그게 못내 걱정스러웠지만 어제 한이 한 이야기가 있기에 조용히 상을 물린 뒤 차를 내렸다.
얼마 전 절에서 받아 온 커다란 연꽃을 담은 수반 위로 따뜻한 물을 부어 다과상에 놓은 뒤 찻잔과 한과를 담아 마루로 나서자 훤히 열린 마루에 걸터앉아 정원을 내다보시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햇살이 좋았다. 그늘진 곳 하나 없이 널찍한 정원을 가득 채우는 그 따사로운 햇살에 다과상을 마루의 턱에 내고 옆으로 가 앉자 할아버지께서 무심히 말을 건네신다.
“향이 좋구나.”
“네. 연꽃 향이 좋아요.”
“봄에 마시기 좋은 차지.”
“네. 어느새 봄이네요.”
바로 2주 전만 해도 마당에 눈이 가득 쌓여 있었는데 어느새 눈은 모두 녹아 사라지고 넓은 마당 위로 푸른 잔디가 돋아나고 있었다.
완연한 봄이었다.
따뜻한 볕이 좋아 손을 뻗어 햇살을 받고 있는데, 바로 옆에서 작은 음성이 울려 왔다.
“이렇게 날이 좋은데도 소소리바람이 이는구나.”
“……네?”
소소리바람이 뭔지 몰라 눈을 껌뻑거리며 되묻자 할아버지께서 느긋하게 말을 돌리신다.
“한이 놈이 요즘 바쁘지?”
“네. 공사들이 동시에 재개돼서요.”
“그게 아니라 일을 무리해 받은 게지. 그 녀석 도망치기 전에 그 녀석 친구들이 닥치는 대로 일 받아 둔 거 아니냐?”
역시나 한을 너무나 잘 아시는 할아버지께서는 그 친구들의 습성에 대해서도 훤히 꿰뚫고 계셨다.
“사실은, 좀 그런 것 같아요. 이번 일만 정리되면 좀 줄인다고 하더라고요. 아, 그리고 인재 곧 결혼한대요. 5월 둘째 주로 날짜 잡았대요.”
“들었다. 10년 넘게 사귀더니 드디어 하는구나.”
“네.”
“잘 살게다, 그놈은.”
“그럴 거예요. 성실하고 한결같으니까요.”
대학 시절 만나 10년이 넘도록 함께해 온 두 사람이니 결혼 후에도 잘 살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인재 말로는 이젠 거의 의리와 동지애로 사귀는 거라고 하지만, 그만큼 한결같고 믿음직한 사람들이라 서로를 잘 지탱해 줄 것 같았다.
참 예쁜 커플이라는 생각을 하며 적당히 우려 낸 찻물을 차포로 떠 할아버지의 찻잔을 먼저 채운 뒤 자신의 잔을 채웠다.
연한 노란빛에 은은한 연꽃향을 내뿜는 차는 먹음직스러웠지만 할아버지께서는 차에도 별 관심이 없어 보이셨다.
한도 그렇지만 할아버지 역시 식후의 차 한 잔에 굉장히 큰 의미를 부여하시는 분인데, 오늘은 좀 달랐다.
평소와 달리 무심한 그 태도에 가만히 할아버지의 옆모습을 바라보고 있자, 한순간 어떤 느낌이 왔다.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따사로운 햇살 아래서도 이상하게 추워 보이시는 그분의 어깨 위로 내려앉은 건 외로움이었다. 그리고 이 세상이 없는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었다.
한이 자세히 설명해 주지는 않았지만, 이제야 어제오늘 있던 이상 상황의 원인이 뭔지 알 것 같았다.
갈 곳 없는 그분의 연심은 아프지만 동시에 너무나 소중한 것이기에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되는 거였다. 절대 아는 척해서도 안 된다.
그래서, 그저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분의 옆자리에 앉아, 공기처럼 조용히…….
종일 본채를 지키고 있다 늦은 밤이 돼서야 별채로 돌아와 마루로 올라서던 신우는 갑자기 울려 온 벨 소리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응.”
- 오늘 뭐 했어?
종일 기다렸던 반가운 목소리에 기쁘게 통화를 시작했다.
“빈둥빈둥했어. 오전에 하던 작업이 다 마무리돼서 할아버지랑 맛있는 밥 먹고 개들 산책도 시키고, 차도 마시고. 넌 뭐 했어?”
- 사무실에서 일하다 오후에 양평에 내려왔는데…….
라며 말을 끄는데…… 그 기색이 이상하다. 한답지 않다.
“그런데?”
- 성우 형이 사장님하고 대작하다 취해서 못 움직이고 있어. 아무래도 오늘 여기서 자고 내일 아침 공사 상황까지 보고 올라가야 할 것 같아.
그 말에 휴대폰으로 시각을 확인하자 벌써 10시 반이 훌쩍 넘은 시간대였다.
아직 양평이라면 거기서 자는 게 낫다.
“그래, 괜히 밤 운전하지 말고 거기서 자고 내일 와.”
- 택시라도 타고 가려고 했는데 성우 형이 사람 애먹이네. 피곤한 상태에서 마셔서 그런지 완전히 갔어. 어지간하면 떼어 놓고 가고 싶은데 토하고 난리라 남한테 맡길 수도 없어서.
민폐도 이런 민폐가 없다며 한은 작게 혀를 찼다. 걱정과 짜증이 골고루 밴 그 소리에 신우는 막 마루로 올라서 문을 닫으며 한에게 걱정 말라는 듯 대꾸했다.
“난 괜찮으니 한 팀장님 잘 보살펴 드려. 그러다 사고라도 나면 큰일이니까.”
막 마루를 지나 방으로 들어서며 성우의 곁을 잘 챙기라고 단단히 당부하자 한이 푸욱 하니 한숨을 내쉰다.
- 나 외박 싫은데.
“일이잖아.”
- 그래도 싫다고.
내가 내 집 두고 왜 밖에서 자야 하냐고 툴툴거리는 음성을 들으며 신우가 침대맡으로 가 털썩 앉자 한이 잠시 후 다시 물어 왔다.
- 할아버지, 오늘은 괜찮았어?
“응, 조금 식사량이 준 것 빼고는 괜찮았어.”
- 오늘도 잘 못 드셔?
“조금. 차도 통 안 드시고.”
- 아…… 이번엔 좀 오래가네.
말로는 괜찮다고 하면서도 나름 걱정은 하고 있었던 듯 가라앉은 한의 목소리에, 신우가 잠시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물었다.
“할아버지, 할머니 때문에 그러시는 거지?”
- ……알았어?
“응. 아까 낮에 소소리바람이 인다고 하셔서 검색해 봤어. 처음에는 그 말이 뭔지 몰라서 잘 못 알아들었는데 그게 뭔지 아니까…… 알겠더라.”
‘이른 봄 살 속으로 파고드는 차고 매서운 바람.’
처음에는 아직 날이 추워서 그러신 건가 했지만 이내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할아버지께서 이른 건 피부가 아닌 가슴속으로 파고드는 소소리바람이었다.
- 할아버지가 소소리바람이 스민다고 하셔?
“응. 좀 외로워 보이셨어.”
좀이 아니라 사실은 아주 많이 외로워 보이셨지만, 한이 걱정할까 살짝 정도를 줄여 말하자 한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걱정을 내뱉는다.
- 그러실 거야. 곧 할머니 제사거든. 그래서 매년 이맘때쯤이 되면 좀 우울해하시는 편이야. 아직도 혼자 주무시는 데에 익숙해지지 않으신다고.
“진짜 외로우신 거구나…….”
- 뭐…… 그래도 식사량이 주는 일은 없었는데……. 이번엔 좀 세게 오셨나 보네. 훈이랑 윤이는 아직이야?
“둘 다 철야래.”
윤이도 윤이지만 훈이의 경우는 오늘뿐 아니라 이번 주 내내 연구실에서 못 나올 것 같다고 했다. 그 정도로 바쁜 시기였다.
- 이상하게, 이럴 때는 꼭 다들 바쁘단 말야.
“그러고 보니, 너 할아버지 뵌 지도 꽤 되지 않았어?”
- 어…… 저번 주말에 뵙고 못 뵀지.
오늘이 목요일이니까 나흘째인 셈이다.
퇴근 시간이 어지간히 늦어야 인사라도 드리지, 자정 넘어 퇴근하는 게 일상이다 보니 일찍 주무시는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릴 틈이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외박이니 내일 아침에도 뵐 가능성이 없다.
- 내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빨리 들어가야겠다. 일단 내가 할아버지 좀 봬야겠어.
“그래. 너랑은 잘 맞으시니까 너 보면 기분 좋아지실 것 같아.”
- 이천 땅 걸고 오랜만에 바둑이라도 둬야지. 내가 너무 바빴어, 그동안. 너무 신경을 못 썼네. 할아버지한테.
“바빠서 그런 거잖아. 나가서 노는 것도 아니고 일하느라 그런 거니까 너무 자책은 하지 마.”
- 이렇게 바빠서 매일 늦다 어느 날 갑자기 너무너무 보고 싶은데 못 보게 되면 큰일이잖아. 부모님께는 죄송하지만 나 부모님보다 할아버지 못 보면 더 많이 슬플 거야.
한의 부모님께서 들으신다면 굉장히 섭섭해하실 이야기였지만, 그 마음은 충분히 이해가 갔다.
한에게 할아버지는 부모님이자 삶의 멘토고, 가장 가까운 친구이자 형제이기도 했다. 한에게 있어서는 마치 본인의 일부 같은 분이시니 당연한 일이다.
“그러니까 일 쉬엄쉬엄해.”
- 그래야지. 이러다 진짜 할아버지랑 너랑 손잡고 나 버리고 도망치면 안 되니까. 너, 할아버지가 어디 여행 가자고 해도 가면 안 돼. 우리 할아버지 갑자기 심술 도지면 너만 데리고 6개월 코스 크루즈 여행에 가시고도 남으실 분이야.
조금 무거웠던 분위기를 가볍게 하려는 듯 던지는 그 말에 이쪽도 가벼운 농담으로 받아쳤다.
“크루즈 여행이면 꼭 가야지. 그걸 왜 거절해? 평생 한 번 해 볼까, 말까 한 건데.”
- 가기만 해 봐. 나도 회사 때려치우고 따라갈 테니까.
“진짜?”
- 진짜. 그리고 나 가면 내 뒤에 인재 따라오는 거 알지? 그 자식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헬리콥터라도 동원해서 쫓아올걸?
“인재라면 진짜 할 것 같아…….”
- 그러니까 얌전히 집에서 기다리세요~.
“알았으니 그만 쉬어. 오늘은 조금이라도 더 자고 출근해야지.”
집에 못 오는 대신 그만큼 잘 시간은 늘어 다행이었다. 오늘도 몇 시간 못 자고 나간 터라 어서 쉬라고 하자 한이 또 쓸데없는 고집을 부려 온다.
- 아직 시간 있잖아. 어차피 집에도 못 가는데 통화라도 하자. 아, 우리 영상 통화할까?
“그만 잠이나 자.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서 일하고 빨리 들어와서 진짜 얼굴 보여 줘.”
헛소리하지 말고 자라는 그 말에 한도 이번엔 순순히 수긍했다.
- 그래. 나도 네 진짜 얼굴 보는 게 더 좋아.
“그래. 그럼, 잘 자.”
- 너도.
마지막 인사를 마친 뒤 전화를 끊고는 그대로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어쩐지 몰려드는 피로감에 이대로 잠을 청할까 하는데 이상하게 뭔가가 마음에 걸렸다.
“소소리바람…….”
오후 내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 그 단어를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 문득 한기가 느껴졌다. 그 단어가 정말로 찬바람을 몰고 온 듯한 느낌에 서둘러 이불 속으로 파고 들었지만 그럼에도 피부 위가 차다.
문을 닫고 보일러를 켜고 이불을 덮고 겹겹이 옷을 껴입고 있는데도 옷자락 사이로 스며드는 한기를 어쩔 수 없었다.
겨울에도 이렇게 춥다고 느껴 본 적이 없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시리다. 몸이 아닌 가슴이 시린 느낌이었다.
그건 아마…….
순간 불현듯 떠오른 생각에 눈을 번쩍 떴다. 그러고는 망설임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양치와 세수를 한 뒤 아예 잠옷으로 갈아입고 그 위에 커다란 겨울용 야상 재킷을 걸친 신우는 부지런한 걸음으로 어둠이 자욱하게 깔린 정원을 가로질렀다.
초봄의 밤은 겨울의 낮과 다르지 않다. 여전히 하얀 입김이 나올 정도로 싸늘한 날씨에 몸을 웅크린 채 돌담을 따라 빠르게 걸음을 옮기기를 수 분. 오래 걸리지 않아 도착한 본채에서 막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할아버지 방 쪽이 환하게 밝혀진 게 보였다.
보통은 이 시간이면 주무실 때이지만 오늘은 쉬이 잠자리에도 눕지 못하시는 듯했다. 예상한 대로라 마루의 문을 닫은 뒤 할아버지의 방 앞으로 다가가 문을 두드렸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최대한 목소리를 낮춘 채 그렇게 말하자 곧 방 안에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넘어왔다.
“그래.”
들어와도 된다는 답에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서자 방 안에 홀로 앉으셔서 바둑판을 내려다보시는 할아버지가 보였다.
“뭐 하세요?”
“바둑 둔다.”
옆에 책을 내려 두신 채 바둑알을 쥐고 계시기는 하지만 정작 바둑판 위에는 세 개의 돌만 덩그러니 보일 뿐이었다. 그다지 손을 많이 움직이신다는 인상은 없었다. 그래서 겉옷을 벗어 들고 자리를 잡고 앉으며 은근히 말을 흘렸다.
“한이가 오늘 외박한다고 해서요. 저 여기서 재워 주시면 안 돼요?”
그 말에 바둑판을 내려다보시던 할아버지께서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신다.
“여기서?”
“네. 혼자 자려니까 갑자기 무서워서요. 혼자 지내기엔 별채가 너무 넓어요.”
“윤이랑 훈이는?”
“둘 다 오늘 못 들어온대요.”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그 별채에서도 좋다고 혼자 지내던 한이 녀석이 이상한 거니.”
“그러니까요.”
고등학교 때부터라지만 혼자서 그 넓은 별채를 썼다니, 강심장을 넘어서 그 정도면 아예 감정이 메마른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집이 너무 커서 무서운 것도 무서운 거지만 그 안은 너무 외롭다.
“그만 치우자.”
“네. 이불 꺼내 드릴까요?”
“그래.”
바둑판과 바둑통을 옆으로 치운 뒤 장을 열어 가장 위에 있던 할아버지의 이불과 그 옆의 장에 있던 예비용 이불을 꺼내 방 안에 나란히 깔았다. 그러곤 예비용 이불 위에 앉자 할아버지께서 곧장 자리에 누우신다.
“불 끌까요?”
“그래.”
나지막한 그 답에 자리에서 일어나 불을 끄고 다시 이불보 위에 눕자 방 안으로 깊은 어둠과 함께 고요가 가라앉았다. 하지만 딱 잠들기 좋은 그 조건에도 쉽사리 눈이 감기지 않았다.
이상하게 맑은 정신에 가만히 천장을 바라보고 있자 할아버지께서도 그걸 눈치채셨는지 문득 말을 건네신다.
“잠이 안 오니?”
“……네, 조금요.”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보구나.”
“아뇨, 그게 아니라…….”
“……아니라?”
“그냥…… 소소리바람이라는 말이 자꾸 떠올라서요.”
사실대로, 잠을 확 깨게 했던 그 단어를 그대로 말하자 할아버지께서 조금 미안하신 듯 작게 물으신다.
“그 말이 마음에 걸린 거냐?”
“아뇨, 마음에 걸린 게 아니라…… 한이 전화 받고 눕는데 갑자기 추워지더라고요. 그때 갑자기 그 말이 떠올랐어요.”
“……그랬니?”
“네. 그러면서 할아버지 생각이 났어요. 전 이제 겨우 10개월 정도 같이 있었는데도 겨우 하루 그 녀석이 옆에 없다고 이렇게 추운데…… 할아버지는 어떠실까 해서요.”
어둠 탓에 용기가 생겨서인지 솔직하게, 방금 머릿속을 스쳐 간 것들을 그대로 말로 내뱉자 할아버지께서 알겠다는 듯 웃으신다.
“내가 걱정돼서 온 게로구나.”
“제가 무서워서 온 거예요. 한이 없이 자려니 너무 무섭고 추워서요.”
분명 그런 이유도 있었기에 담담한 목소리로 답하자 다시 침묵이 내려앉는다. 그렇게 아주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뒤 할아버지께서 다시 물으신다.
“……한이 할머니 얘기가 듣고 싶으냐?”
“할아버지께서 괜찮으시면요.”
“고운 사람이었지. 곱고 순하고, 착한 사람이었다.”
“한이도 그렇게 말했어요. 아주 곱고 아름다운 분이셨다고.”
“너무 고와서 일찍 간 거지. 사실은 지상에 내려온 선녀라 하늘이 질투해 빨리 데려가신 거야.”
‘선녀’라는 말에서 이분이 돌아가신 그분을 얼마나 어여삐 여기셨는지 알 것 같았다. 그래서 그분을 잃으신 뒤 자신의 반쪽이 떨어져 나간 것 같은 고통을 느끼고 계시다는 것도 알 것 같았다.
“……많이 그리우세요?”
“35년을 부대끼며 살았으니 그리울 수밖에. 그 뒤로 22년을 혼자 잤지만 여전히 익숙해지질 않는구나. 특히나, 봄에는 힘들어…….”
그리움에 사무친 그 속삭임에 문득 심장이 내려앉았다. 이분이 많이 힘들어하시는구나 하는 생각을 떠올리니 조금 불안해졌다.
“전 할아버지가 저희랑 오래오래 같이 계셨으면 좋겠어요.”
“그건 걱정 마라. 한이 녀석이 투덜거리지 않던? 그놈보다 내가 더 오래 살 것 같다고.”
“오래 사셨으면 해서 그런 거예요. 저도 그렇고요.”
“그래, 오래 살아야지. 아직 세상에 먹을 게 얼마나 많은데.”
“네. 맛있는 거 많이 드시고, 좋은 거 많이 보시고 저 많이 예뻐해 주시면서 저랑 오래오래 같이 있어 주세요.”
어둠 속에서 고개를 돌려 눈만 감고 계신 할아버지에게 솔직한 진심을 전하자 할아버지께서 설핏 웃으시는 게 보였다.
“네가 날 많이 걱정한 모양이구나. 나도 나이가 들었나 보다. 평생 그런 티는 안 내고 살았는데.”
“……티가 난 게 아니라, 그냥 보였어요. 눈빛이 많이 외로워 보이셨거든요.”
“외로워 보여도 그리 걱정할 건 없다. 한이 놈이 굳이 아는 체 안 하는 건 괜찮을 걸 알아서 그런 거니까. 누구나 하나씩 아픈 기억은 갖고 사는 게 당연한 거야. 사랑하는 사람들과 죽음까지 함께할 수는 없으니까. 누군가는 먼저 가기 마련이니, 거기에도 익숙해져야지. 그게 부모든 형제든 자식이든, 가슴에 품은 사람이든. 다들 그렇게 아픔을 삭이고 사는 거다.”
누구나 그렇게 살고, 거기에 익숙해져야 한다는 건, 누구보다도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이미 너무 어린 시절에 그 사실을 깨우쳤기에 그게 슬프다, 괴롭다, 불공평하다 느낀 적도 없었다. 누군가를 떠나보내고 홀로 남는 건 자신에게는 일상이었기에 그걸 삭이는 법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동안 너무나 많이 잃었기에 더는 잃고 싶지 않기도 했다.
“그래도 전 이젠 안 그랬으면 좋겠어요. 사람을 보내는 게 저한테는 너무 힘들어서, 이젠 안 보냈으면 좋겠어요. 그냥, 계속 같이 있고 싶어요.”
“……그래, 나도 그랬으면 좋겠구나.”
부드러운 긍정의 답에 애달픈 시선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할아버지께서 다시 말을 건네신다.
“이만 자자.”
“네. 안녕히 주무세요.”
“그래.”
그 말과 함께 눈을 감자 수마가 몰아쳤다. 방금 잠이 오지 않는다고 한 게 거짓말인 듯 순식간에 몰려든 졸음에 의식이 사라졌다.
그렇게 정신없이 잠에 빠져 있던 어느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또 그 녀석들이 새벽에 철창을 뚫고 나왔나 했다.
작게 울려 오는 신음에, 설핏 잠에서 깨 눈을 뜬 신우는 천천히 눈을 껌뻑였다.
아무리 힘이 좋아도 그렇지 어떻게 철장을 뚫고 나온 걸까 하는 생각에 일단 이 녀석들을 잡아 다시 가둬야겠다는 일념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데, 이상하게 소리가 가깝다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바로 옆에서 들리는 것 같은…….
“할아버지?”
옆에서 들려오는 그 신음에 이불을 박차고 일어나 불을 켠 뒤 할아버지의 옆으로 달려가 이마를 짚자 손바닥 위로 후끈한 열기가 느껴졌다.
고열이다. 게다가 숨소리도 거칠고 의식도 없으신 듯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일어나 보세요.”
계속해서 어깨를 흔들어 봐도 통 정신을 차리지 못하시는 모습에 덜컥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다 무슨 일이라도 생기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순간 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갑자기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먼 기억에 정신이 아득해지려는 순간 재빨리 의식을 부여잡았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고 있다. 아버지가 쓰러지실 때마다 119에 전화해 구급차를 불렀다. 이렇게 멍하니 앉아서 정신을 놓고 있어서는 안 된다.
1분 1초가 급하다. 위급 상황에서의 시간은 금이 아니라 생명이다.
이미 경험으로 알고 있는 사실을 되새기며 재빨리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그러곤 휴대폰의 주소록을 뒤져 저장해 둔 주치의 선생님의 번호를 찾았다.
그 뒤로는 뭘 어떻게 했는지 기억이 희미했다. 냉장고를 뒤져 얼음 팩을 찾아 수건으로 싸 할아버지 이마의 열을 식혀 드리다 급히 달려온 응급차가 집 안으로 들어 올 수 있도록 대문을 열어 준 것밖에는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마치 군데군데 기억이 뚝 끊어져 나간 듯, 혼란스러운 기분이었다.
“독감이야.”
전화 한 통에, 한이 말하던 대로 즉석에서 수술까지도 가능한 의료 버스를 몰고 정원까지 달려오신 주치의 선생님의 말씀에 순간 헉 하는 소리가 터져 나갔다.
“독감이요?”
겨우 주사를 맞고 편히 잠드신 할아버지께서 깨실까, 마루에 나와 선 채 그렇게 되묻자 지긋한 나이의 의사 선생님께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래. 어르신 기운도 좋으시지. 젊은 애들도 위가 뒤집혀 토하다 병원에 실려 와 며칠을 시름시름 앓는데, 겨우 식사량이 주셨다고?”
올봄 유행하는 독감의 자각 증상 중 하나가 위경련으로, 독감 환자 중 멀쩡한 성인 남자들도 토하거나 위장 장애 및 통증을 호소해 병원을 찾는다는데 독감에 걸린 노인이 겨우 밥만 조금 남겼다는 데에 의사 선생님은 경탄을 금치 못하고 계셨다.
물론 그것도 대단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느긋할 수는 없었다.
“그럼 이제 괜찮으신 거예요?”
“워낙에 건강체니 걱정 안 해도 돼. 주사 맞고 수액 다 맞으시면 멀쩡해지실 거야. 그래도 혹시 모르니 간호사도 남아 있을 거고. 간호사한테 방 하나 내주면 고맙겠네.”
“네, 본채에 빈 방 있어요.”
“그래. 네가 수고했다. 많이 놀랐지? 새벽에.”
“조금요.”
“저 어르신은 진짜 운도 좋지. 이렇게 아프신 날, 바로 옆에 사람이 있다니. 늦게 발견했으면 위험했을 텐데 진짜 신기한 분이야.”
역시 될 사람은 뭘 해도 되고, 살 사람은 어떻게든 사는구나, 라고 말씀하시던 선생님은 곧 왕진 가방을 챙겨 드신 뒤 마루에서 내려갔다. 그 모습에 서둘러 그분을 따라나서자 그가 정원 한복판에 위풍당당하게 선 의료 버스 쪽으로 다가가며 주의 사항을 알려 준다.
“위가 안 좋으실 테니 식사는 부드러운 죽 종류로 준비해 드리고 약은 잘 챙겨 드시게 해.”
“네. 그럴게요.”
“그럼, 이제 너도 좀 자 둬. 그럼 오후에 다시 보자.”
차에 올라타신 선생님께서 건넨 인사에 서둘러 고개를 숙여 보였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조심해서 가세요.”
“그래, 그래. 추우니 어서 들어가.”
괜히 감기 걸리지 말라고 덧붙이시며 선생님이 차 문을 닫으시자 곧 버스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어둠 속을 가르는 하얀 버스가 멀리로 사라지는 모습을 확인하고 다시 돌아서 본채로 향해 가는데 버스가 사라진 쪽에서 빠르게 달려오는 차 소리가 들려왔다.
슬슬 한이 도착할 시간이라 뒤를 돌아보니 아니나 다를까 한의 벤틀리가 보였다. 어지간해서는 과속을 안 하는 녀석이 급한 듯 정원을 빠르게 가로지르는 모습에 걸음을 멈춘 채 기다리고 있자 무서운 속도로 달려온 차가 본채 앞에서 정차했다. 그리고 곧 운전석의 문이 열리며 하얗게 질린 녀석이 차에서 뛰어내렸다.
“할아버지는?”
“주사 맞고 수액 맞으시면서 주무셔.”
“열은?”
“많이 내리셨어. 독감이래.”
“아, 어쩐지. 우리 할아버지가 밥을 남기실 분이 아닌데…….”
그제야 식욕 부진의 원인을 독감으로 돌린 한이 그나마 안심했다는 듯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그래도 네가 할아버지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 큰일 날 뻔했는데.”
“나도 신기 생겼나 봐, 이제.”
너 닮아서, 라고 웃으며 말하자 한이 그제야 겨우 표정을 풀고 웃는다.
“그러고 보니 그럴지도 모르겠네? 내 신기가 너한테 갔나?”
“그럼 좋지. 어서 들어가 봐. 열도 거의 내렸고 이젠 숨소리도 괜찮으셔.”
제법 안정된 상태에 너무 걱정 말라고 하며 마루 위로 올라서자 한 역시 서둘러 본채 안으로 들어서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오른 듯 이쪽을 돌아본다.
“어머니랑 아버지한테는?”
“새벽이라 연락 안 드렸어. 아침에 할아버지 일어나시고 괜찮으시면 전화 드리는 게 나을 것 같아서. 괜히 걱정만 하실 테니.”
“잘했어.”
고맙다는 듯 신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은 한은 급히 방 안으로 들어서 할아버지의 옆을 지키고 있던 간호사에게 말을 건넸다.
“옆방에서 쉬세요. 저희가 있을게요.”
“네? 하지만…….”
“새벽에 나오시느라 고생하셨는데 쉬세요. 신우야, 옆방으로 안내해 드려.”
“응.”
한의 말대로 그녀를 옆방으로 안내해 차를 내준 뒤 다시 방으로 돌아오자 한이 그치고는 드물게도 심각한 얼굴로 할아버지의 옆에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대수롭지 않은 척해도 계속 마음이 쓰였던 거구나 싶어 조용히 한의 옆자리에 앉자 한이 이쪽을 돌아보며 미안한 듯 웃어 보였다.
“새벽에 고생했어. 많이 놀랐지?”
“괜찮아. 아버지 쓰러지시는 거 자주 봐서 그런지 처음엔 놀랐는데 곧 괜찮아졌어.”
어릴 때부터 환자가 있는 집에서 자라다 보니 그런 쪽으로는 이골이 났다고 웃자 한이 길게 한숨을 내쉰다.
“나 너 업고 다녀야겠다. 진짜 큰일 날 뻔했어. 다들 집을 비운 날이었는데.”
“나 있었잖아.”
라고 말하며 한의 손을 잡자 한이 손을 꼭 마주 쥐어 왔다. 평소 열기가 느껴질 정도로 뜨거웠던 손이 차게 식은 걸로, 이 녀석이 얼마나 놀라고 걱정하고 있었는지가 느껴졌다. 그래서 그를 위로하듯 그 손을 부드럽게 쥐고 있자, 문득 한이 웃는다.
“왜?”
“소소리바람. 얼마나 허하시길래 그러시나 했는데…… 진짜 몸살이었다니 좀 웃겨서.”
위경련과 함께 지독한 몸살 기운을 동반하는 독감에 걸리셨으니 당연히 으슬으슬했을 거라고 한이 가볍게 던져 오는 말에 신우도 맞장구쳐 주었다.
“그러게.”
늘 누군가의 품에서 잠들다, 혼자 잠드는 밤이 얼마나 춥고 외로운지를 알아 버렸기에 그게 단지 몸살 탓이 아니라는 걸 알지만, 더는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게 싫어 그렇게 농담으로 넘겼다.
아마 한도 자신과 비슷한 생각일 거다. 다만 더는 걱정하고 마음 졸이기 싫어 화제를 전환한 것뿐이라는 게 느껴졌다.
그의 부재에 자신이 허함을 느꼈듯, 그 역시 마찬가지였을 테니까. 그래서 그 쓸쓸함을 이해할 테니까.
조용히 손을 맞잡은 채 체온을 전하던 사이, 창 너머로 서서히 여명이 들기 시작했다. 해가 뜨기 직전인, 하루 중 가장 추운 시간대였지만 이상하게 어젯밤처럼 한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마주 쥔 손에서 느껴지는 그의 체온이 이불처럼 포근히 전신을 덮어 주는 듯했다.
- 아버님이 독감에 걸리셨다고?
“네.”
이제 열도 완전히 내려 편안히 잠든 할아버지 곁을 지키다, 적당한 시간에 마루로 나와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자 어머니도 적지 않게 놀라신 듯 목소리를 높이셨다.
- 오래 살고 볼 일이네, 진짜. 평생 감기 한 번 안 앓으시던 분인데.
“봄이라 기운이 좀 빠지셨나 봐요. 게다가 이번 감기가 독하대요.”
- 아, 그래. 이번에 독하긴 하더라. 고모네 진석이 녀석은 패혈증으로까지 가서 병원에 입원했다니……. 하여간, 네가 고생했다. 조금만 더 고생해. 지금 준비해서 올라갈 테니.
“아, 아니에요. 그냥 제가 있을게요. 일도 다 끝나서 시간 괜찮아요.”
- 아니야. 평생 아픈 거 모르시던 양반이 독감이라니 어서 가 봐야지. 어차피 다음 주에 어머님 제사도 있으니 겸사겸사 올라가야겠다. 버스 시간 알아보고 다시 전화할게. 그때까지만 고생해. 그럼 끊는다.
말과 함께 전화가 뚝 끊겼다. 지금 준비해 출발하시면 오전 중에 도착하실 것 같다는 생각에 어머님이 지내실 방을 어디로 해야 하나 고민하는데 문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한은 다시 출근한 후니 윤일 것이다. 예상보다 빠른 귀가에 마루의 문을 열고 밖을 바라보자 윤의 차가 일정한 속도로 진입로를 달리는 게 보였다. 한처럼 빠르게 질주해 바로 마당 안으로 들어오는 게 아니라 다급한 상황에서도 서두르지 않고 정확히 정해진 속도로 길을 따라 차고로 향해 가는 차를 보곤 역시 윤이답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차의 왼쪽이 유난히 기울어진 게 보였다. 그걸로 훈이도 함께라는 걸 알아 버렸다.
“진짜 기우는구나…….”
훈이 타면 차가 기운다고 윤이 말하는 걸 여러 번 들었지만 그걸 직접 보는 건 처음이었다.
완전히 왼쪽으로 기운 차체에, 신기한 듯 그쪽을 바라보고 있던 사이 차고 앞에 도착한 차가 멈췄다. 그러곤 곧 조수석 문이 열리더니 차 안에서 훈이 내려서는 게 보였다.
오늘도 여전히 거북이 등껍질 같은 커다란 가방을 멘 훈은 그 커다란 덩치로 다다다 이쪽으로 달려들었다.
“할아버지는요?”
“괜찮으셔. 지금 주무시니까 조용히…….”
들어가라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쿵쾅거리며 마루로 올라선 훈은 ‘할아버지!’라고 목 놓아 부르며 툇마루를 내달렸다.
이러다 할아버지가 깨실까 걱정돼 마루의 문을 닫고 훈을 말리려 따라갔는데 그보다 빨리 쾅 하며 박력 있게 문이 열리는 소리가 소란스럽게 났다. 그리고 바로 그 뒤로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안 죽었다.”
방으로 들어와 대성통곡하는 훈이 부담스러우셨는지 할아버지께서는 좀 떨어지라는 듯 말을 건넸지만 훈은 그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엉엉 울며 누워 계신 할아버지 위를 덮칠 뿐이었다.
커다란 덩치로 할아버지의 위로 쓰러져 우는 훈의 모습에 서둘러 그쪽으로 다가가자 할아버지께서 훈이를 밀어 내시며 자신에게 당부했다.
“신우야, 경찰 불러라. 곰이 사람을 덮치는구나…….”
이제 제법 기운이 나시는지 농을 치시는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훈이의 옆에 앉으며 물었다.
“좀 괜찮으세요?”
“등딱지까지 메고 할아비를 압사시키려는 이놈만 없으면 괜찮다.”
다른 때라면 곰 아니라고 방방 뛰었을 훈이도 오늘만은 순순히 몸을 일으켜 앉으며 얌전히 가방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 모습을 보며 할아버지께 대강 상황을 설명해 드렸다.
“독감이래요. 열이 많이 오르셨어요. 오후에 이 박사님이 한 번 더 들르신다고 하셨어요.”
독감 진단에 할아버지께서 긴 숨을 내뱉으신다.
“나도 늙었구나. 독감에 다 걸리고. 어디서 산삼이라도 구해 먹어야겠어.”
“그렇지 않아도 한이가 구하고 있어요. 전국 팔도 다 뒤져서 제일 큰 뿌리로 찾아온대요.”
갑자기 산삼을 구해 봐야겠다고 하더니 차라리 우리가 가서 캐 올까, 라며 눈을 반짝거리는 모습에 기가 막히기는 했지만 어쨌든 찾아온다고는 했다.
“찾을 거면 오늘 안에 찾아오라고 해라.”
“네, 그렇게 전할게요.”
평소와 같은 할아버지의 말투와 표정에 안도하며 대화를 나누던 사이 다시 쾅 하고 문이 열렸다. 이번엔 윤이었다.
“할아버지 괜찮으세요?”
“오냐. 안 죽었다.”
“그러게 독감 예방 주사 맞으시라니까요. 아무리 건강하셔도 나이가 있는데 예방 주사를 하나도 안 맞으시니 그렇죠. 무지성 안티 백서도 아니고! 나이 들면 면역력 떨어진다고요. 건강을 과신하지 마세요.”
재킷 단추를 풀고 자리에 앉으면서, 윤은 너무나 그다운 잔소리를 줄줄이 내뱉었다. 본인은 이미 독감이며 뭐며 예방 주사란 예방 주사는 다 맞은 듯한 그 태도에 역시 윤이라는 생각이 들어 웃고 있자, 잔소리를 끝낸 윤이 이번엔 염려 가득한 목소리로 안부를 물었다.
“이젠 진짜 괜찮으세요? 열 굉장히 높았다는데.”
“괜찮다. 그보다 배가 고프구나.”
아침 식사 시간이 지난 후라 슬슬 출출할 때이긴 해 식사를 준비해 드릴까 하던 중 윤이 먼저 말을 끊었다.
“그래도 밥은 안 돼요. 싫으셔도 죽 드세요. 저희도 죽 먹을 테니.”
“집에 사람이 느니 잔소리만 많아지는구나.”
내가 이래서 자식들도 전부 쫓아낸 건데, 라는 할아버지의 말에 서둘러 윤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할아버지 지금 밥 드시면 안 돼요. 이번 독감은 위장 장애가 따라온대요. 이 박사님이 괜찮다고 하실 때까지는 죽 드셔야 돼요.”
“그래, 그래. 아픈 놈이 죄지.”
체념하신 듯한 할아버지의 목소리에 윤이 그제야 안심한 듯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한이 형이 지금 고모들이랑 숙부들한테 전부 연락하고 있어요. 다음 주에 할머니 제사니 주말에 다들 오라고 호출했대요.”
“뭐 큰일이라고 다 연락을 해? 시끄러워지기만 하게.”
“별로 믿음은 안 가지만 어쨌든 형이 장손이잖아요. 형이 하는 대로 두세요. 그보다 뭐 필요하신 건 없으세요? 뭐 갖다드려요?”
“필요한 건 없고 너희가 좀 나가 줬으면 좋겠구나……. 신우는 그만 나가 쉬고. 너희들은 회사에 가든 방에 가든 어디든 나가라. 노곤한데 시끄러워서 잘 수가 없다.”
열은 다 내렸다지만 겨우 정신을 차리신 분 옆에서 너무 시끄럽게 떠들었다 싶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저흰 마루에 있을게요.”
해가 뜬 후라 창으로 드는 햇살을 가리려 발을 내리고 보일러 온도를 조절했다. 그다음 문을 살짝 열어 두고 방을 나서자 그 뒤로 윤이와 훈이 따라나선다.
서서히 해가 들기 시작한 툇마루를 지나 막 대청마루로 나와 테이블 앞에 앉는데 바로 맞은편에 앉던 윤이 작게 숨을 내뱉는다.
“진짜 수명 줄어든 기분이에요. 할아버지가 고열이라니…… 연락받고 깜짝 놀랐다니까요.”
“다들 놀라더라. 그런데, 넌 사무실 안 나가 봐도 돼?”
“재판 없어서 오후에 나가도 돼요.”
“훈이 넌?”
“전 오늘 오프요. 그냥 주말까지 쉰다고 했어요.”
집에 사람이 많아지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있는 것보다는 여럿이 있는 게 마음이 편안해 안도한 듯 고개를 끄덕이자 윤이 다시 묻는다.
“어제 형이 할아버지 방에서 잤다면서요?”
“응. 혼자 자기 무서워서.”
“고마워요. 큰일 날 뻔했는데.”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조곤조곤하게 말을 건네는 윤의 음성과 표정에는 할아버지에 대한 걱정이 한가득 묻어 있었다. 역시나 다들 걱정하고 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는데 훈이 신기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와, 평생 안 아프시던 우리 할아버지가 아픈 날 신우 형이 옆에서 자다니. 형, 신기 있어요?”
새벽에 한과 했던 것과 비슷한 그 대화 내용에 웃음이 터졌다.
“설마. 그냥 운이었던 거지.”
“그 운이 대단한 거죠. 우리 할아버지나 한이 형을 보세요. 그 두 사람은 엎어져도 금밭에 엎어진대요.”
“그건 좋네.”
한이나 할아버지라면 진짜 엎어졌는데 눈앞에 금덩이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웃으며 편히 몸을 폈다.
그간 의식하지 못했는데 자신도 모르게 목과 어깨에 힘을 주고 있었던 모양이다. 할아버지께서 의식을 찾으시고 훈이와 윤이까지 오자 남아 있던 불안이 가셔서인지 자연스럽게 등과 목이 펴지고 어깨에서 힘이 빠졌다.
나른하게 늘어지는 몸을 쭈욱 펴며 문밖을 내다보자 어느덧 높아진 햇살이 정원 깊숙이까지 들고 있었다.
오늘은 어제보다 더 따뜻할 것 같았다.
“날씨 좋다. 문 열까요?”
훈이의 물음에 해가 깊이 드니 공기가 좀 차도 괜찮을 것 같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곧 문 앞으로 간 훈이 문을 열고는 마루 끝에 걸터앉았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정원을 바라보던 훈이 자그마한 목소리로 오래전 이야기를 꺼냈다.
“할아버지 아프시니까 할머니 생각난다. 할머니 아프실 때 항상 이렇게 문 열어 두고 우린 마루에 앉아 있었는데.”
그리운 듯 훈이 읊조리는 이야기에 윤 역시 기억난다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지.”
“나 그거 생각나.”
“뭐?”
“할머니 오전에 햇살 보러 나오시면 할아버지가 할머니 머리 빗겨 드리던 거.”
“아아……. 그랬지…….”
먼 과거를 떠올린 듯 윤이 아련한 음성으로 답하는 순간 방 안에 있던 사진 중 한 장이 떠올랐다. 마루에 앉은 할머님과 그 뒤에서 머리를 빗겨 주시는 할아버지, 그리고 그들을 감싼 나른한 햇살.
그 평화로운 광경을 떠올리며 조용히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자 훈이 옆으로 돌아앉아 문틀에 기대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그때 그랬는데. 할머니가 ‘아파서 죄송해요.’ 하면 할아버지가 ‘당신 아프니 머리 빗겨 줄 수 있어서 난 좋아요.’하시던 거. 그거 되게 예뻤는데.”
“워낙에 금실이 좋으셨잖아. 덕분에 숙부랑 고모들은 방치. 아버지도 방치. 또 우리도 안중에 없으셨고.”
“그래서 막내 숙부가 되게 불만 많았는데. 매일 투덜거리셨던 거 기억난다. 그리고 우리 할머니, 진짜 요리 못 하셨던 것도.”
요리 이야기에 문득 윤이 웃음을 터트렸다.
“특히 그 묵사발이 최고였지. 달고 짜고 느끼하고. 그래서 안 먹으려고 해도 할아버지한테 혼날까 봐 다들 한 번에 마시고 도망 나가고.”
그래서 그 뒤로 묵사발을 안 먹는다는 윤의 중얼거림에 신우는 눈을 껌뻑였다. 자신이 아는 것과는 상당히 이야기가 달랐다.
아니, 결과는 비슷하지만 전개가 상이했다.
“할머니, 묵사발 잘하신 거 아냐?”
“누가 그래요?”
“한이가.”
그 말에 윤이 혀를 찬다.
“그거 우리 형이 형 놀린 거예요. 절대 아니에요. 진짜 못하셨어요. 그런데 할아버지가 맛있다, 맛있다 하시니 자꾸 해 주셔서 나중에는 할아버지한테 다 드리고 우린 전부 도망 나갔어요. 그래서 할아버지도 할머니 가신 뒤엔 다시는 묵사발 안 드세요. 그때 하도 드셔서 질리신다고.”
“……그런 거였어?”
“그런 거예요. 사랑이 넘치니 그걸 먹었지, 우리 할머니 진짜 요리 못 하셨어요. 할아버지가 할머니 주방에 얼씬도 못 하게 하신 데는 분명 그런 이유도 있을걸요. 요리를 너무 못 하셔서.”
자신이 들으며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그 이야기에 당황해 윤이를 한 번 보고 다시 훈이를 보자 훈이가 윤이 말이 맞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역시 한에게 당한 건가 하며 어이없다는 생각에 웃고 있는데, 방 안에서 작은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네 할머니 욕하려면 제삿날 상 앞에서 해. 뒤에서 떠들지 말고.”
그 말에 셋이 동시에 입을 딱 다물자 다시 마루 위가 고요해졌다. 괜히 찔려 다들 입을 다문 채 눈치만 보던 사이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다시 방 너머에서 들려왔다.
“오늘은 오리 백숙이 먹고 싶구나.”
뜬금없이 나온 그 말에 윤이 표정을 풀고 웃었다.
“할아버지 다 나으셨네요. 먹는 거 찾으시는 거 보니.”
“아주머니께 말할게요.”
당분간 죽만 드시라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백숙은 괜찮을 거라는 생각에 그렇게 답하곤 곧장 주방으로 가 말을 전했다. 그러곤 다시 돌아와 할아버지의 방을 슬쩍 들여다보자 편안하게 누워 계신 할아버지의 입매가 올라가 있는 게 보였다.
햇살 같은 그 미소에 드디어 완전히 마음이 놓였다. 오늘은 어제처럼 외로워 보이지 않으셨다.
이른 봄날의 작은 소동은 그렇게 조용하게 마무리되었다.
정오 즈음 도착하신 한의 어머니와 바통 터치를 한 신우는 일단 별채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었다. 세수도 못 한 채 하루를 보낸 터라 뜨거운 물에 몸을 녹이고 나와 방을 정리한 뒤, 따뜻한 햇살이 들어오게 창을 활짝 열었다. 그러곤 곧 마루로 나와 이번엔 마루의 문을 활짝 열었다.
그러곤 잠시 마루에 앉아 있는데 정남향으로 난 문을 향해 쏟아지는 찬란한 봄 햇살에 갑자기 노곤함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어제는 거의 자지 못했다. 대략 11시쯤 잠들어 새벽 2시에 깨어나 전화를 하고 난리를 쳤으니, 졸린 것도 당연했다. 바싹 긴장하고 있을 때는 의식하지 못했지만 슬슬 긴장이 풀려서인지 쏟아져 오는 졸음에 햇살 아래에 누워 잠시 잠을 청했다.
잠깐만 잘 심산이었다.
아주 잠깐만…….
“……우, 신우야. 여기서 자면 감기 걸려.”
나지막하게 속삭이며 어깨를 흔드는 힘에 튕기듯 의식이 깨었다. 기분 좋은 음성과 그 이상으로 다정한 그 손길에 어렵사리 눈을 뜨자 한이 옆에 앉아 어깨를 흔들고 있었다.
“들어가서 자지, 왜 여기서 자?”
아이를 어르는 듯 나지막한 한의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린 신우는 부스스한 꼴로 자리에서 일어나 앉았다.
“……들어왔어?”
“오늘은 핑계 대고 일찍 퇴근했어. 왜 여기서 자고 있어? 방 놔두고.”
그러고 보니 아직도 해가 높다. 퇴근할 시간이 아닌데 아무래도 급히 들어온 듯했다.
“아무리 따뜻해도 아직 봄이라 마루에서 자면 감기 걸려. 들어가서 자.”
“괜찮아. 이제 다 깼어. 너무 따뜻해서 잠깐 존 거야.”
“존 것치고는 너무 푹 자던데?”
“햇살이 기분 좋아서.”
해가 높아진 대신 빛이 깊이 들지는 않았지만 여전히 마루의 절반까지는 햇살이 가득 차오른 채였다. 딱 그 햇살 아래서 자고 있었기에 솔직히 약간 덥기까지 했다.
바삭하니 전신이 마른 듯한 기분에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자 옆에서 가만히 자신을 들여다보던 한이 뭔가를 결심한 듯 재킷을 벗더니 곧 자신의 어깨를 내리눌렀다.
“좋아. 그럼, 더 자자. 나도 피곤하다.”
“왜? 침대에 가서 자지.”
“햇살이 좋아서. 여기서 자자. 옷 덮고.”
그 말과 함께 힘을 주어 몸을 눕힌 한이 벗어 놓은 재킷을 위에 덮어 주었다. 살짝 두꺼운 원단의, 방금까지 한이 입고 있던 재킷에는 그의 체향과 온기가 남아 있었다.
그 푸근함에 조용히 재킷을 덮고 누워 있자 한이 팔베개를 해 주며 본인은 가방을 베고 옆에 누웠다.
“할아버지 뵙고 왔어?”
“응. 이제 다 나으셔서 개 산책시킨다고 하시는 거 말리고 왔어. 대신 윤이랑 훈이가 개들 데리고 중노동 중.”
“다행이다.”
“응. 다행이지.”
이제 다시 모든 게 괜찮아졌다는 생각에 한의 팔에 기대 편안히 숨을 내쉬는데 나란히 누워 있던 한이 정원을 내다보며 문득 중얼거린다.
“해 진짜 좋네……. 아직 3월인데 5월 같아. 아…… 이불 빨래하고 싶다.”
“갑자기 이불은 왜?”
“그냥. 날씨가 너무 좋잖아. 나, 내일이랑 모레 둘 다 오프인데 이불이나 빨까? 대야 놓고 정원에서 빨아서 널자. 오랜만에 빨래걸이 쓰겠네.”
겨우내 건조기에 말렸던 이불들을 이제 햇살 아래에 말리자는 그 말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넓고 푸른 정원 위로 새하얀 이불이 휘날리는 광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그러자. 이불 말리기 좋은 날씨니까.”
“딱 좋지. 곰팡이, 진드기, 각종 세균, 먼지들까지 모두 살균하자고. 우리 신우 아프면 안 되니까 깨끗하게 빨아서 널어 줄게.”
매트리스도 말릴까, 하는 한의 말에 온 집안 이불에 베개에 매트리스까지 꺼내 정원에 펼쳐 놓은 장면이 떠올랐다.
“누가 보면 이사하는 줄 알겠다.”
“가끔 그렇게 해 줘야 돼. 걔네한테도 일광욕이 최고니까. 아, 우리 신우도 햇살에 좀 말려야겠다.”
팔베개를 한 채 느긋하게 한이 중얼거리는 말을 듣다 문득 빨랫줄에 매달린 자신이 상상돼 신우는 황당하다는 얼굴로 한을 돌아봤다.
“나를 왜 말려?”
“네가 내 이불이니까.”
눈가에 입을 맞추며 간질이듯 속삭이는 그 말에 그제 밤 한이 잠들기 전에 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담요, 이불, 햇살, 온기…… 그리고 봄…….
“아…….”
그 단순한 단어들의 나열에 순간 어젯밤 느낀 그 한기의 정체를 눈치챘다.
혼자 침대에 누워 있을 때 바람이 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던 건 늘 자신을 덮어 주던 이불이 없던 탓이었다. 몸이 아닌 가슴을 덮어 주는 이불이.
“그럼 너도 일광욕 많이 해야겠다.”
“응?”
“너도 내 이불이니까. 바싹 말려서 오래오래 써야지.”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이불을 잃으면 가슴속으로 스며드는 한기 탓에 감기에 걸릴지 모르니까, 아주 소중히 아끼겠다고 다짐하며 가만히 한의 얼굴을 바라보자 한이 웃으며 스르르 눈을 감는다.
“그래, 그러니까 나란히 잘 말리자.”
보송보송하게, 라는 한마디를 덧붙인 한은 이내 잠든 듯 곤한 숨을 내쉬었다. 지나치게 빠른 그의 숙면에 조금 당황하기는 했지만 최근 한의 스케줄을 생각하면 못 자는 게 오히려 이상하긴 하다.
그래서 최대한 조용히, 잠든 그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그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그러곤 곧 가장 편안한 자세로 누워 눈을 감자 순식간에 수마가 몰려왔다.
나른하게 늘어지는 몸과 도저히 저항할 수 없는 졸음에 몸을 맡긴 순간 따뜻한 바람이 불었다.
마른 나뭇가지들을 흔들며 향긋한 풀 내음을 품고 불어오는 바람에 빙그레 미소가 지어졌다.
이제 봄이었다.
따사로운 봄볕이 세상 무엇보다 따뜻한 이불 위로 가라앉고 있었다.
- 햇살 이불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