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Snow Dance (22/23)

Snow Dance

“……이제 거의 다 왔어요. 새벽 일찍 나왔더니 길이 안 막혀서 금방 왔어요.”

겨울치고는 유달리 햇살이 좋은 오전, 스키장으로 향하는 차 안에서 한의 어머님과 통화 중이던 신우가 이제 곧 스키장에 도착할 예정이라고 하자 그녀가 반색했다.

- 그래. 요즘 너무 바빴으니 좀 쉬어 가면서 해야지. 날도 좋으니 스키 타기도 좋을 거야. 그럼, 윤이랑 훈이도 같이 가는 거야?

“윤이는 일이 바빠서 못 왔고, 훈이는 스키 못 탄다고 안 왔어요.”

- 그건 잘했네. 그놈은 스키장 가면 굴러 내려와. 스키 태우니 하도 굴러서 보드 태웠더니 그날로 바로 팔이 부러져서 왔더라고. 그래서 그 뒤로 다시는 뭐 안 태우기로 했어.

“어? 팔도 부러졌어요?”

- 나이 많은 나도 어디 안 부러지고 잘 탔는데 그놈은 부러지더라고. 그것도 재주야.

“아…….”

훈이 한의 동생답지 않게 운동을 못 한다는 거야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건 좀 심했다는 생각에 신우가 안타까운 듯 감탄사를 쏟아 내자 뒤에 있던 정현이 앞 좌석으로 쑤욱 몸을 빼며 통화에 끼어든다.

“그래서 대타로 저랑 인재가 따라왔어요, 아줌마.”

경쾌한 정현의 음성에 어머니께서 의외라는 듯 물으신다.

- 어? 정현이도 같이 갔니?

“네. 정현이랑 인재랑 저랑 한이, 넷이요.”

훈이와 윤도 함께 간다고 했을 때는 사내 넷이 주말에 스키장이라니 너무 암울한 거 아니냐고 하더니, 훈이랑 윤이 빠지자 정현은 재빨리 그 자리를 꿰차고 들어왔다.

한은 필요 없으니 꺼지라고 했지만, 이미 45평 콘도에 전일 리프트권을 8장이나 예약해 놨다고 신우가 떠들어 놓은 터라, 정현은 막무가내로 밀고 들어왔다. 그걸로도 모자라 혼자 따라가면 눈꼴시다고 인재까지 끌어들였다.

그 덕에 운전을 하는 한의 심기는 매우 좋지 않았다. 괜히 그게 신경 쓰여 신우가 한의 옆얼굴을 곁눈질하자 어머니가 심각한 어조로 말을 건네신다.

- 그런데, 정현이도 우리 훈이 만큼 운동 못 하는 앤데. 너희 오늘 걔 병원 쫓아다니다 끝나는 거 아니니?

진심으로 오늘 일진을 걱정스러워하시는 어머니의 말씀에 바로 옆에서 고개를 내밀고 통화 내용을 듣고 있던 정현이 볼멘소리를 냈다.

“아줌마, 저 다 들리거든요?”

- 사실이잖아. 정현이 너 높이 올라가지 말고 초보자 코스에서만 타. 회사 다니는 녀석이 괜히 나다니다 어디 다치지 말고. 그러고 보니 훈이 팔 부러졌을 때 넌 꼬리뼈 부서졌던 것 같은데?

그 비극이 벌어진 날 스키장에 동행했던 어머니의 생생한 증언에, 신우가 진짜냐고 정현을 돌아보자 정현이 빽 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아줌마! 그런 옛날얘기를 다 하시면 안 되죠!”

- 그사이 네 운동 신경이 좋아졌을 거라는 생각이 안 드니까 하는 말이지. 하여간 놀러 갔으니 잘 놀다 와. 너무 무리하지 말고. 정현이 넌, 중급자 코스 이상으로는 올라가지 마.

친어머니처럼 하나하나 걱정하고 챙겨 주는 어머니의 당부에 신우는 어느새 해가 떠 환해진 산길을 바라보며 기분 좋게 답했다.

“네, 조심할게요.”

- 여차하면 정현이는 폴 뺏어서 카페에 놔둬. 놀러 갔다 다치지 말고.

“그럴게요.”

- 그럼 끊는다.

짤막한 통화를 끝낸 뒤 휴대폰을 주머니 안에 넣는 사이, 털썩하니 제자리에 앉은 정현이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줌마는 날 너무 많이 아셔. 이래서 어릴 때부터 알아 온 사람들은 안 된다니까.”

왜 어른들은 옛날 일을 안 잊는 거냐는 정현의 토로에 운전석에 앉은 한이 백미러로 정현을 힐끔 보며 빈정거렸다.

“네가 운동 못 하는 건 사실이잖아? 그러고 보니 너 훈이 대타로 눈밭에서 구르기 쇼 보여 주려고 가는 거냐? 스키 타고 어떻게 구르나?”

“나 이제 잘 타. 그리고 훈이랑 날 비교하는 건 너무한 거 아니냐? 훈이보다는 내가 나아.”

“오십 보 백 보야.”

“아, 짜증 나! 훈이를 데려왔어야 내가 좀 나아 보이는데! 훈이는 진짜 왜 안 온 거야? 걔 스키는 못 타도 스키장은 좋아하는데?”

역시나 오래 알아 온 만큼 정현은 훈에 관해서라면 빠삭했다. 정현의 말대로,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훈은 스키나 보드는 못 타도 눈은 좋아하니 따라와 눈썰매라도 타겠다고 했었다. 한이 ‘애들 사이에서 눈썰매 타는 북극곰이 되려고?’라고 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심술이 더덕더덕 붙은 그 말에 결국 훈이는 썰매를 포기하고 주말 출근을 하기로 결정 내렸다. ‘그냥, 연구실이나 갈래.’라고 하던 훈의 안쓰러운 얼굴이 떠올라 신우가 작게 한숨을 내뱉자, 정현이 궁금한 듯 다시 앞으로 몸을 숙인다.

“왜? 또 한이가 훈이 구박해서 못 오게 한 거야?”

“……비슷해.”

“정한, 너 신우랑만 오려고 일부러 훈이 울린 거지?”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정확한 정현의 추리에 한이 혀를 찬다.

“그렇게 잘 알면 좀 빠지지? 대체 너흰 왜 쫓아온 거야?”

“보드 타러 와서 보드는 안 타고 신우 위에만 올라타 있을까 봐 같이 와 준 거잖아. 우리한테 고마워하기나 해.”

“내가 보드를 타든 신우를 타든 네가 알 게 뭔데?”

“난 신우 친구니까. 네 애인 절친한테 좀 잘 보여야겠다는 생각 안 드냐?”

“안 들어, 전혀. 조금도. 손톱만큼도.”

정현과 인재가 이 여행에 낀 게 영 못마땅한 듯 한이 계속해서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하자 샐쭉한 얼굴로 한의 뒤통수를 바라보던 정현이 갑자기 씨익 웃어 보였다.

사악해 보이는 그 미소에 신우가 불안해하며 정현을 돌아보자 정현이 묘한 미소를 띤 채 말을 건넸다.

“신우, 너 스키장 가면 한이 관리 잘해야 된다?”

“……응?”

“이 자식 스키나 보드 타러 가면 사람들이 얘가 안전 요원인 줄 알고 말 걸거든. 사실 옷 보면 딱 아는데 바로 옆에 안전 요원 두고 일부러 여자들이 와서 어디 다쳤어요, 저것 좀 도와주세요, 이러면서 작업 걸어. 내가 방금 고급 코스에서 내려오는 거 분명히 봤는데 초보라며 가르쳐 달라는 사람들도 있더라고.”

“……진짜?”

주로 가족이나 친구 단위로 가는 스키장에서 그런 일도 있냐고, 신우가 못 믿겠다는 얼굴로 되묻자 정현 대신 한이 답한다.

“내가 잘 타니까 그런 거야. 게다가 나 누가 봐도 운동하게 생겼잖아.”

물론, 워낙 몸이 좋다 보니 어떤 운동복을 입든 그 종목 운동선수 같아 보이긴 하겠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일부러 그런 식으로 말을 건다는 건 분명 다른 의도가 있는 거다, 라고 신우도 이번만은 정현의 의견에 동의했다.

인상 좋은 미남에 어딜 가든 혼자만 툭 튀어나올 정도로 키가 크고 몸도 좋으니 여자들이 관심을 갖는 건 이해하지만 그래도 그 장면을 바로 눈앞에서 보게 된다면 기분이 별로일 것 같았다.

갑자기 떠오른 생각에 신우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정현이 옳다구나 하는 얼굴로 신이 나 말을 이어 갔다.

“어디 그뿐인 줄 알아? 너, 얘 도망 못 가게 잘 잡아야 돼. 이 자식, 자기 애인하고 스키장 와서 초급 코스는 재미없어서 못 탄다고 고급 코스에 초보자 데리고 올라가서 ‘자, 그럼 아래서 보자.’ 이러고 내려가는 놈이야. 가르쳐 줄 것도 아니면서 스키장 데려와서 애인 버려두고 혼자 논다니까. 그러다 안전 요원한테 업혀 내려온 애인이 하나 있었지, 아마.”

아주 구체적으로, 정현이 밝힌 과거 한의 만행에 신우는 저게 사실이냐고 묻는 얼굴로 한을 바라봤다. 어이없어하는 그 시선에 한이 난감해하며 정현을 타박했다.

“지금 그 얘기가 여기서 왜 나와?”

“신우 혼자 버려두고 어디 가지 말라고. 너, 스키장에서 차였지, 그때? 그 사람 성질도 장난 아니라고 들었는데.”

그 말에 그때까지 정현에게 강제 연행당해 조용히 뒷좌석에 앉아 졸고 있던 인재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사연을 아는 듯한 그 웃음소리에 신우가 뒤를 돌아보자 인재가 웃음을 꾹 참으며 시선을 피했다. 절대 그 일에 대해 말하지 말라는 한의 무언의 압박을 느낀 듯 인재는 입을 다물려 했지만, 정현은 집요했다.

“인재, 너도 아는 사람이야?”

“……뭐, 조금…….”

“아, 그때 너도 같이 갔다고 하지 않았냐? 예은 씨랑?”

“……그랬지.”

“무슨 일이 있었는데?”

궁금해 죽겠다는 얼굴을 한 정현이 인재의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빨리 얘기하라고 재촉하자 한이 포기한 듯 본인의 입으로 자백하기 시작했다.

“지수 형이 안전 요원한테 업혀 내려와서 내 머리 내려치려고 보드 들어 올리다 미끄러져서 의료 센터에 실려 갔었어. 가벼운 뇌진탕에 손목 인대랑 발목 인대가 늘어나서 전치 4주 나왔고. 그게 끝.”

“으악, 진짜?”

“그럼 가짜겠냐.”

그러니까 진짜 별일 아니었다고 말하며 한은 슬쩍 신우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운전 중이라 신우의 표정을 제대로 읽을 수가 없었다.

여전히 담담하고 차분해 보였지만, 화가 난 건지 아니면 기막혀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그 얼굴에 한이 계속해서 신우를 힐끔거리고 있자 조용히 앉아 있던 인재가 한이 멋대로 각색해 잘라 버린 뒷이야기를 대신 이어 가 줬다.

“야, 어차피 얘기해 줄 거면 그것도 말해 줘야지. 네가 괜찮냐고 의료 센터에 찾아가니까 지수 형이 열 받아서 너한테 휴대폰 집어 던졌다 휴대폰만 박살 난 거. 네가 너무 쉽게 피하니 지수 형이 더 화나서 너 같은 놈이랑 안 사귄다고 헤어지자고 커피 캔까지 집어 던졌는데 네가 그것까지 받아 들고 ‘그래요, 그럼. 이건 잘 마실게요.’하고 다시 보드 타러 가서 그 형 그때 택시 타고 혼자 서울로 올라갔잖아. 그러고도 네가 사과 한마디 안 해서 너 패 준답시고 학교까지 찾아왔는데, 넌 그때 이미 이탈리아로 간 후였고.”

극악무도한 한의 과거사에 신우는 이번엔 진심으로 경악한 얼굴로 한을 바라봤다. 너 진짜 그런 짓까지 한 거냐고 묻는 눈초리에 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여기서 더 말을 해 봐야 괜히 점수만 깎아 먹을 게 분명했고, 방금 인재가 한 말들은 모두 사실이라 변명할 수도 없었다.

유정현, 서인재, 너희 어디 두고 보자고 한이 혀를 찬 순간 정현이 얄미운 투로 한을 더 자극하기 시작했다.

“야…… 그 사람 누군지 진짜 불쌍하다. 어쩌다 저런 걸 만나서.”

“그러니까. 그 형도 화공에서는 성질 장난 아닌 걸로 전설이 된 형인데 아직도 한이 이름만 나오면 치를 떤대.”

“화공? 화학 공학과?”

“응. 우리 학교 막걸리의 제왕. 술 엄청 좋아해. 잘 마시고 좋아하고. 얼굴은 되게 얌전하게 생겼는데 하는 행동들이…… 어?”

이야기를 하던 중 뭔가 떠오른 듯 말을 멈춘 인재가 조수석을 쳐다봤다. 그러고는 곧 ‘아!’라고 감탄사를 내뱉는 순간, 한이 대화를 잘라 냈다.

“야야, 이제 그만. 과거 이야기는 과거로 끝내자고.”

이래서 이 녀석들하고 오기 싫었다고 한이 서둘러 그들의 입을 막으려 하자, 뒤에 있던 인재가 잠시 아무 말 없이 신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한에게 다시 말을 건넸다.

“너, 아직도 지수 형한테 사과 안 했지?”

“연락처도 모르는데, 어떻게 사과를 해? 우연히라도 만나게 되면 그때 제대로 사과해야지. 그런데, 원래 다 그렇게 배우는 거 아니냐? 난 보드 배울 때 그냥 보드 들고 고급 코스 올라가서 타고 내려왔는데? 몇 번 엎어지긴 했지만.”

“그거야 너처럼 전신이 근육인 놈 경우의 얘기고. 그 뒤로 지수 형 스키장 소리만 나와도 발작 일으키는 걸로 유명해. 스키장 가자는 놈 있으면 영원히 인연을 끊어 버린다고 공표했을 정도니까.”

“그래? 안 됐군.”

“너, 그 형 앞에서 그 말 해 봐라. 그 형이 폴로 네 눈 찍어 버릴 테니까.”

넌 그래도 할 말 없다고 인재가 혀를 내두르자 정현이 다시 앞으로 몸을 숙이며 신우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신우야, 너 이런데도 저놈하고 사귀고 싶냐? 정한은 원래 그런 놈이야.”

“……그러게……. 아무리 그래도 고급 코스에 초보자를 두고 온 건 좀…….”

스키장에 가 본 적이 없어서 잘은 모르지만 스키나 보드라는 게 그렇게 쉬운 게 아닐 텐데 초보자를 고급 코스에 내버려 두고 왔다는 건 어떻게 봐도 너무한 일이었다.

‘그러면 안 되는데.’라고 신우가 작게 덧붙이자 막 속도를 올리던 한이 재빨리 그 말에 반박했다.

“너한테는 안 그래. 토 나올 정도로 붙어서 다 가르쳐 줄 테니 걱정 마. 보드 처음이지?”

“스키장 자체가 처음이야.”

“그게 차라리 나아. 보드랑 스키랑 힘이랑 균형점이 완전 다르니까 차라리 아예 모르는 편이 배우기 쉬워. 그리고 넌 운동 신경 좋은 편이니까 금방 배울 거야. 내가 가르쳐 줄게.”

“고급 코스에서?”

또다시 끼어드는 정현의 밉살맞은 물음에 한은 입술을 꾹 악물었다.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려 애를 쓰고 있는데 정현이 다 된 밥에 자꾸 초를 친다.

“……넌 좀 빠져라.”

“하도 황당해서 그렇지. 스키도 아니라 보드 초심자를 어떻게 고급 코스에 데리고 올라갈 생각을 하냐? 보드는 폴도 없는데 그러다 크게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난 그렇게 배웠다니까.”

“보통은 초급 코스에서 타지 않냐, 보드는?”

“보통은 각이 있어야 되니까 초급 코스에서 시작하지. 윤이 놈은 혹시 다칠지도 모른다고 입문자 코스에서 타다 보드가 하도 안 내려가니 결국 초급 코스로 갔으니까.”

“아, 윤이는 보드 잘 타지.”

“그놈은 보통 사람 정도는 되니까.”

너희는 보통 이하고, 라고 정현과 자리에 없는 훈이를 싸잡아 비난하는 한의 조롱에 정현이 뒤에서 으르렁댄다.

“너, 자꾸 재수 없게 굴면 내가 귀를 확 물어뜯어 버리는 수가 있어.”

“나랑 손잡고 황천길 가고 싶으면 물어뜯어. 지금 나 건드리면 우리 넷 다 함께 고 투 더 헬이야.”

“어우, 싫어! 죽어도 너랑 같이 죽기는 싫어!”

언제나처럼 한과 엮이는 걸 질색하는 정현을 돌아보며 신우가 웃자 바로 신우의 뒷자리에 앉은 인재가 오묘한 얼굴로 신우의 옆얼굴을 살핀다. 그 시선에 신우가 할 말 있냐는 듯 인재를 돌아보자 인재가 어색하게 웃으며 시선을 돌린다.

인재답지 않은 태도에 신우가 막 왜 그러냐고 물으려는 순간 한이 커브를 돌며 말을 던진다.

“이제 다 왔어. 이 언덕만 올라가면 돼.”

커브가 심한 언덕길에 한이 기어를 바꾸며 상황을 전하자 뒤에 앉은 정현이 손을 번쩍 들며 소리친다.

“드디어 왔다!”

“유정현, 시끄러워. 나랑 죽기 싫다며?”

여기 커브 심하다며 한이 조용하라고 한 소리 하자 얌전히 자리를 잡고 앉은 정현이 목소리를 낮춰 오늘 일정을 묻는다.

“그런데 곧장 콘도 들어갈 수 있어? 체크인 12시나 1시 아냐?”

“스키장에 주차하고 곧장 스키 타다 오후에 체크인할 거야. 콘도 들어가면 괜히 시간만 버려. 오전에 타고 점심 먹으면서 체크인하고 다시 나오면 돼.”

“야간도 탈 거야?”

“봐서. 난 상관없는데 신우는 처음이라 힘들 테니까, 상황 좀 보고.”

“이야, 오래 살다 보니 정한이 남을 배려하는 날도 오네. 자기 타고 싶으면 늬들은 놀든가 말든가 맘대로 하라고 혼자 타러 가는 주제에?”

“그건 여전해. 너희들은 놀든가 자든가 자빠지든가 상관없어.”

“재수 없는 새끼.”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신이 나서 웃는 정현의 목소리에 신우도 어쩐지 조금 들떠 그들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하지만 인재는 그 대화에 끼지 않은 채 계속해서 신우의 뒷모습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짧지만 요란한 여행이 시작되었다.

“너무 조이지 않아?”

스키장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은 후 보드 부츠를 신겨 주던 한의 물음에 신우는 곧장 고개를 끄덕였다.

“괜찮아.”

“오래 신고 있어야 하니 너무 안 조이는 게 좋아. 조인다 싶으면 안쪽 끈을 좀 풀어 줘.”

“알았어.”

“리프트권은 목걸이에 걸고. 혹시 모르니까 휴대폰 꼭 챙겨. 선크림은 발랐어?”

“아직.”

그 말에 한이 챙겨 온 선크림을 가방에서 꺼냈다.

“선크림 잔뜩 발라. 모자 쓰고 고글 써도 타니까. 눈에 반사되는 햇빛이 장난 아냐. 윤이 놈은 처음 스키 탈 때 선크림 바르기 싫다고 그냥 탔다 나중에 이마랑 뺨만 타서 고생했어. 목은 목토시로 꼭 가리고. 아, 그러고 보니 보호대를 안 샀네. 보호대 렌트할까?”

“괜찮아. 너도 같이 갈 거잖아.”

“그래도 엎어지면 다칠 텐데.”

“야! 너희 그만 안 하냐!”

바로 옆에서 스키복을 입고 스키와 폴을 챙기던 정현의 고함에 탈의실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이쪽으로 향했다. 갑작스러운 관심에 신우가 움찔하자 한이 짜증스러운 듯 정현에게 한 소리 한다.

“매너 좀 지켜라, 유정현.”

“꼴 보기 싫으니까 그렇지. 신우가 애냐? 그런 거 일일이 안 챙겨 줘도 다 알아!”

“질투하냐?”

“질투가 아니라 꼴 보기 싫어서 그런다고! 이것들이 왜 밖에 나와서까지 염장질이야?”

“부러우면 너도 연애하라니까. 신우야, 선크림 다 발랐어?”

“응.”

“그럼 모자 쓰자. 고글도 쓰고. 한 번 타고 내려오면 어지럽고 목 탈 수도 있으니까 단 음료 꼭 챙겨 마셔.”

“어? 그래서 여기서 코코아 파는 거야?”

들어오는 길에 본 자판기랑 간이 카페에 코코아가 많아, 애들이 많이 와서 그런가 했더니 다른 이유였던 모양이다.

“보드가 운동량이 꽤 많아. 익숙해지면 금방 내려오는데 처음에는 내려오는 데도 꽤 걸리니까, 힘들면 곧장 얘기해. 이거 체력 진짜 많이 잡아먹어.”

“알았어.”

한의 걱정에 신우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자 옆에서 모자를 쓴 뒤 고글을 목에 걸던 정현이 질렸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내가 저것들하고 여길 오는 게 아니었는데…….”

“그럼, 지금이라도 빠져.”

“싫어. 나도 선크림 줘.”

퉁명스러운 그 말에 신우가 들고 있던 선크림을 정현에게 건네주자 한이 혀를 찬다.

“안 챙겨 왔냐?”

“네가 바리바리 다 챙길 텐데 내가 왜 챙겨? 너, 오늘은 나 네 애인 절친이다? 고로, 오늘내일 넌 내 지갑이야.”

마음껏 써 줄 테니 계산 다 할 각오하라는 그 말에 한이 이번에는 그냥 웃어 버렸다.

“아예 카드를 달라고 하지?”

“그럼 더 좋지. 너 블랙 카드 없냐? 그거 좀 주지? 백화점 가서 한 번 대접 좀 받게.”

“그건 신우한테 줄 거야. 너 줄 건 없어.”

신우를 챙겨 주다 슬슬 본인도 모자를 쓰고 나갈 준비를 하던 한이 흘린 말에 선크림을 다 바른 정현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

“……진짜 있냐?”

“설마 없겠냐? 할아버지가 나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만들어 주신 게 그건데.”

“젠장…… 내가 그 집에서 태어났어야 하는데.”

엄마 아빠에겐 미안하지만 그게 자신의 진심이라는 정현의 중얼거림에 한이 한심하다는 듯 정현을 보다 보드 두 개를 양손에 들고 나선다.

“이제 나가자. 신우 오전에 어느 정도 마스터 하려면 빨리 움직여야 돼. 사람 많아지면 리프트 기다리다 시간 다 가. 인재, 넌 스키지?”

옆에서 어느새 조용히 옷을 다 갈아입고 스키 장비를 챙기던 인재에게 한이 묻자 인재가 고개를 끄덕인다.

“응.”

“고급 코스로 갈 거야?”

“그래야지.”

“정현이 넌?”

“나도 이제 고급 타. 무시하지 마.”

“그래. 20년을 탔는데 그 정도는 타야지. 우리는 초급 코스로 갈 거니까 점심 먹을 때 전화해. 신우야, 가자.”

빨리빨리 움직이자는 한의 말에 불편하고 무거운 부츠를 신은 채 자리에서 일어선 신우가 한의 옆으로 다가서며 손을 뻗었다.

“보드 내가 들게.”

“무거워.”

“그러니까 내가 들어야지. 두 개 들고 다니기 힘들잖아.”

“괜찮아, 이 정도는. 난 들어가면 끌고 다니니까 네 것만 들면 돼. 이거 종일 들고 다니면 팔 저려.”

내일 근육통 온다는 한의 걱정에 바로 뒤에서 따라 나오던 정현이 들고 있던 폴로 한의 등을 쿡 찔러 왔다.

“야, 그렇게 힘 넘치면 내 폴도 들어 줘.”

“싫어.”

“폴 무겁단 말야!”

“이 김에 팔 운동해.”

“정한, 진짜 차별 심하네. 서인재, 정한 회사에서도 저러냐? 신우 가끔 일하러 나간다며?”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상상 이상으로 토 쏠린다며 정현이 인재를 돌아보며 묻자 인재가 포기했다는 듯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말해 뭐 해.”

“아, 정한 존나 쿨가이라고 하더니 그냥 호구잖아. 네 전 애인들이 지금 너 보면 불 뿜겠다.”

차에서부터 계속되는 과거 이야기에 한이 슬쩍 신우의 눈치를 보더니 정현의 말을 쳐냈다.

“어이, 과거 얘기 그만. 남의 현재 애인 앞에서 과거 애인 얘기하는 거 매너 없는 짓인 거 알지?”

그렇게 말하며 한이 턱짓으로 신우를 가리키자 그제야 아차 한 듯 정현이 입을 다물었다. 그 모습에 한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돌아섰다.

“빨리 움직이기나 해.”

이른 시간이라서인지 주말임에도 스키장은 그다지 붐비지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한산하기에 사람들의 이목이 쏠리는 게 더 잘 느껴졌다.

한을 따라 리프트를 타고 초급 코스에 올라온 것까지는 괜찮았는데 한이 무릎을 꿇고 앉아 직접 보드를 부츠에 거는 법을 일일이 설명해 주는 모습에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어 떨어질 줄을 모르고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눈에 띄는 덩치에 선명한 붉은색의 보드복을 걸치고 고글을 낀 한은, 확실히 근사해 보였다. 커다란 키도 키지만 군더더기 없는 근육질 몸에 움직임도 유연하고 느긋해 얼핏 보면 보드 선수처럼 보일 정도니, 이 시간대에 스키를 타러 올 정도의 매니아라면 한을 유심히 쳐다볼 만도 했다.

사람들이 관심 있는 건 한이지, 자신이 아니라는 걸 잘 알지만 익숙지 않은 사람들의 관심은 불편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인 채 한의 머리만 내려다보는데 보드를 장착시켜 준 한이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발 괜찮아?”

“응? 응. 그런데, 넌 안 타?”

“난 좀 이따. 너 일어나는 것부터 보고.”

“아, 일어나야지.”

“보드는 자리에서 일어나는 것만 하면 반은 끝나는 거야.”

“그건 네 기준 아냐?”

이 녀석이라면 진짜 보드에서 서자마자 바로 눈길을 타고 내려갔을 것 같다는 생각에 의심하듯 묻자 한이 웃는다.

“아니, 진짜로 보드는 일어나는 게 반이야. 사실은 별로 강습도 필요 없고. 몸에 균형만 잘 잡으면 돼. 앞으로 탈 때는 무서워하지 않고 무릎 안 굽히는 게 포인트. 먼저 보드 앞을 잡고 누르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 봐.”

자리에서 일어나 한 발 물러서는 한의 설명대로 보드 앞을 누르며 일어나려 해 봤지만 아무래도 내리막길이다 보니 말처럼 쉽지 않았다. 조금 머뭇거리며 힘을 싣지 못하고 있자 한이 ‘겁먹지 말고.’라는 말을 더했다. 그 말에 몇 번이나 몸을 들썩거리다 겨우 일어서자 바로 앞에서 한이 팔을 잡아준다.

“잘했어. 무서워하지 말고 나 잡고 있어.”

“응. 그런데, 너 초급 코스 심심하지 않아?”

바로 옆에 보이는 중급 코스에 이어 위쪽의 고급 코스를 올려다보자 경사가 아찔했다. 저런 각도에서 타던 녀석이 지금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게 재미있을까 걱정하자 한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듯 되묻는다.

“너랑 타려고 왔는데 나 혼자 가서 뭐 하게?”

“그래도 이 코스는 좀 심심하잖아. 난 그냥 강습받으면 되는데…….”

“안 돼. 어떤 놈팡이가 강습을 할 줄 알고? 두 눈 멀쩡히 뜨고 지 애인 딴 놈한테 맡기는 멍청한 놈이 어디 있어?”

“……그래서 그 사람도 고급 코스에 버려두고 간 거야?”

강습받게 하는 건 싫어서? 라는 악의 없는 질문에 한은 가슴을 푹 찔린 듯 인상을 썼다.

“그 얘기는 그만. 내가 그렇게 배워서 정말 다들 그렇게 되는 줄 알았어. 그때는 어렸으니까. 그리고 사실, 나 너 빼고는 운동하러 와서 사람 챙겨 주는 거 엄청 싫어해. 난 운동하러 온 건데 우르르 몰려다니면서 괜히 시간 버리고 누구 기다리고 하는 거 싫어. 그건 가족이나 친구들도 마찬가지라 진짜 타고 싶으면 나 혼자 따로 올 때가 더 많아. 하지만 오늘은 보드 타러 온 게 아니라 너랑 있으려고 온 거니 안 떨어질 거야.”

그놈의 스키장에서 헤어진 전 애인 이야기가 진짜 지겹게도 따라붙는다 싶어 한이 변명 아닌 변명을 늘어놓자 신우가 그제야 설핏 웃으며 짓궂게 되물었다.

“그럼 진짜 나 버리고 가지는 않겠네?”

“당연하지. 너 버리고 갔다 안전 요원이 업고 내려오는 거 보면 내가 빡칠걸. 그러니까 빨리 자력으로 내려갈 수 있게 손잡고 균형 잡아 봐. 무릎 너무 굽히지 말고 뒤꿈치로 몸 지지하고 서. 보드가 완전히 수평이 되게.”

“응.”

한의 양손을 꽉 잡은 채 그의 말대로 움직이기는 했지만 역시나 그것도 쉽지 않았다.

“체중을 뒤로 싣는다고 생각해. 힘을 주는 게 아니라 몸의 각도를 맞춰서 균형을 잡는 거야. 괜히 힘주면 허벅지랑 종아리 난리 나니까.”

“응…….”

세심하게 계속해서 요령을 알려 주는 한의 말을 귀담아들으며 균형을 잡으려던 신우는 한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껴서였다. 아까부터 사람들의 관심이야 실컷 받고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느낌이 달랐다.

약간의 악의가 느껴지는 그 시선에 은근슬쩍 주변을 돌아봤지만 짚이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이쪽을 힐끔거리기는 해도 결국 자기들 보드 타는 데 바빠 정신이 없어 보였다.

“왜? 뭐 있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 채 주변을 돌아보는 신우에게 한이 의아한 듯 묻자 신우가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어…… 아니. 아무것도 아냐.”

“그럼, 자세 다시 잡아 봐.”

“응.”

자신보다 예민한 한이 눈치채지 못할 정도라면 그냥 자신이 예민한 거겠거니 하며 신우는 다시 한의 손을 잡고 자세를 다듬었다.

“아, 잘한다. 좋아. 내 애인답게 운동 신경도 좋아. 사람이면 이 정도는 해야지.”

그놈의 곰하고 치와와는 역시 사람이 아니라고 중얼거리며 앞에서 신우의 자세를 잡아 주던 한이 붙든 손을 놓았다. 순간 균형이 틀어지며 신우가 앞으로 고꾸라지려 하자 한이 재빨리 신우의 허리를 안아 몸을 받아 준다.

“조심, 조심. 앞으로 균형이 쏠리면 무조건 엉덩이를 뒤로 빼서 뒤로 넘어가. 앞으로 넘어지면 큰일 나니까. 그리고 절대 손으로 짚지 말고.”

한은 쉽게 말하지만 과연 그게 제대로 될까 싶어 신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거 어렵다.”

“아직 감이 없어서 그래. 감만 잡으면 괜찮아.”

진짜 강사처럼 그럴듯한 설명을 끝낸 뒤에도, 한은 신우를 끌어안은 팔을 풀지 않았다. 팔만 풀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얼굴까지 비벼 대며 모자 위로 입까지 맞춘다.

적나라한 한의 애정 행각에 옆으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이 날아들자, 신우는 서둘러 한을 밀어 내려 손을 뻗었다.

“이제 괜찮아. 혼자 설 수 있어.”

“잠깐만 이러고 있자. 아, 이래서 애인하고 스키장 와서 가르치는 거구나. 쓰러지려는 거 받아 주는 거 되게 좋네. 합법적으로 공공장소에서 끌어안고 있을 수도 있고.”

강아지처럼 계속해서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좀체 떨어지지 않는 한의 행태에, 신우는 한이 오늘 보드를 가르치는 내내 이러는 거 아닐까, 슬슬 걱정되기 시작했다.

아니, 한이라면 그러고도 남을 것이다. 의외로 스킨십을 굉장히 좋아하는 녀석이었다. 그것도 특히나 공공장소에서 하는 걸.

“한아, 보드 안 탈 거야? 나 이러다 오늘 종일 가도 못 내려갈 것 같은데?”

시원한 소리를 내며 익스트림 코스에서 스키를 타고 내려온 남자가 초급 코스를 지나며 이쪽 상황을 눈여겨보는 듯한 시선에 재빨리 한을 밀어 내자 그제야 한이 떨어지며 방긋 웃는다.

“물론, 타야지. 그럼 이번엔 뒤로 서는 거 해 볼까?”

“나, 아직 앞으로도 못 타는데?”

“뒤로 타면 백 허그잖아.”

자신이 받아 준다며 한껏 팔을 벌린 한을 보며 신우는 기가 막힌 듯 웃었다. 이 녀석 머릿속에는 진짜 뭐가 들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신기하다는 듯 쳐다보자 한이 재빨리 두 손을 들었다.

“미안, 미안. 잘 잡아 줄 테니 천천히 내려와 봐. 그래도 넌 빠른 거야. 정현이는 보드 배운다고 따라왔다가 보드에서 일어나지도 못해서 결국 포기했어. 훈이는 들은 대로 팔 부러졌고.”

“보드 타다 원래 그렇게 많이 다쳐?”

“사소한 부상은 있지만 그 녀석들처럼 부러지거나 하지는 않아. 아주 부주의하거나 그 녀석들 수준의 운동치가 아닌 이상은 어느 정도는 다 타. 쉰 넘으신 우리 숙부도 금방 배우셨어. 걔네가 이상한 거야.”

그럼 그렇게 겁먹을 필요는 없겠다 싶어 신우가 제대로 서자 한 역시 다시 신우의 손을 잡고 자세를 살펴 주었다.

순간 두려움이 사라졌다. 이 녀석이 있으면 구르든 엎어지든 쓰러지든 어떻게든 해 줄 거라는 믿음에 용기를 내 조금씩 보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몇 번을 엎어진 건지 알 수 없었다. 그럴 때마다 한에게 쓸데없는 포옹을 받으며 다시 자세를 잡기를 반복하던 사이 겨우 중턱에 다다를 수 있었다.

이제 조금만 더 가면 된다는 생각에 신중하게 자세를 잡던 신우는 또다시 느껴지는 그 시선에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곤 천천히 주변을 살폈다.

마치 누군가가 노려보는 듯, 강렬한 시선이 느껴져 주변을 돌아봤지만, 역시나 딱히 이쪽을 바라보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보드 면 전체가 눈밭에 닿으면 위험해. 초보들은 그러다 앞으로 고꾸라지는 사람들 많으니까…… 신우야?”

무언가를 찾는 듯 사방을 돌아보는 부산스러운 신우의 시선에 한이 이름을 부르자 신우가 놀라 답한다.

“응? 어? 어…….”

“왜 그래?”

“아니. 아무것도 아냐. 좀 더워서.”

좀 정신이 산만한 것도 있지만 더운 것도 사실이었다. 겨우 그거 내려오는 동안 어찌나 땀이 나는지 안에 입은 티셔츠가 젖고 입 안과 목구멍이 바싹 마른 채였다. 날까지 유난히 좋아 모자는 이미 벗어 주머니에 넣은 지 오래였다.

“아직 좀 남았는데……. 아, 이럴 줄 알았으면 내가 스키 가져올걸. 스키 타면 너 업고 내려갈 수 있는데.”

안고도 갈 수 있다며 한이 눈을 반짝이는 순간 신우는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사양할게. 빨리 내려가자.”

“왜 사양해? 잠깐 기다릴래? 나 스키 빌려 올게. 나 스키 잘 타.”

“노땡큐. 너한테 업혀 내려가면 나도 다시는 스키장 오기 싫어질 거야.”

“어차피 사람들 알아보지도 못해. 다 고글 끼고 모자 써서 못 알아봐.”

“넌 알아볼걸.”

이렇게 키 큰 남자는 드물어도 너무 드물다며, 신우가 확신을 담아 말하자 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 가족끼리 올 때는 날 등대 삼아 모이니까.”

워낙에 큰 녀석이라 사람들 사이에 서 있으면 불쑥 머리가 솟아오르니 ‘등대’라는 표현이 딱이긴 했다. 게다가 한뿐 아니라 한보다 더 큰 훈도 있으니 이 집 가족들은 어딜 나가도 인파 속에서 서로를 잃어버릴 일은 없을 듯했다.

그게 장신 가족들의 장점이구나 하는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사이 한이 다시 손을 잡아 왔다.

자기 보드는 오른발에 건 채 끌고 내려가며 한은 계속해서 신우를 서포트해 주고 있었다. 그게 미안하고 또 고마워 신우도 다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절반 정도 내려왔으니 이제 반 남았다는 생각에 내려가는 데에만 집중하려는데, 이상하게도 아까부터 계속 그 묘한 시선이 사라지질 않았다.

남은 코스를 내려오는 동안뿐만 아니라 음료수를 마시고, 두 번째로 리프트를 타고 올라갔다 내려오는 중에도 계속해서 그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미지의 시선은 세 번째 하강을 마쳤을 때까지도 사라지지 않았다.

“어지럽지 않아?”

슬슬 허기가 질 때 즈음 외부 카페에 자리를 잡고 앉은 한은 걱정스러운 듯 연신 신우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무슨 운동이든 초심자는 꽤 체력이 많이 잡아 먹힌다는 걸 잘 아는 한의 질문에 신우는 천천히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 좀 덥긴 한데 기분 좋아. 재미있어.”

분명히 힘들기는 하지만 재미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처음엔 일어나는 게 반이라는 한의 말대로 보드보다는 엉덩이로 내려오느라 죽을 맛이었지만 어느 정도 균형이 잡히며 엎어지는 횟수가 줄자 슬슬 재미가 붙기 시작했다.

“초보들은 원래 더 힘들어. 일어나다 힘 다 빼거든. 팔이랑 엉덩이는 괜찮아?”

“팔은 괜찮은데 엉덩이는 좀 아프긴 해.”

절대로 손으로 짚지 마라, 앞으로 쏠리면 무조건 엉덩이를 뒤로 빼 주저앉아라, 등등.

내려오는 내내 이어진 한의 당부가 귀에 박힌 채였다. 그의 말대로 행한 덕에 팔은 괜찮았지만 엉덩이는 좀 얼얼했다. 그래도 더 타고 싶다고 하자 한이 다행이라는 듯 미소 지었다.

“내일까지 타면 어지간히는 타게 될 거야.”

“넌 진짜 잘 타더라. 오랜만에 온 거 아냐?”

신우를 서포트하느라 내내 뒤로 내려오면서도 한은 단 한 번도 넘어지지도 부딪치지도 않았다. 엄청난 속도로 갑자기 달려드는 사람까지도 기가 막히게 피하는 한의 반사 신경에 신우는 진심으로 이 녀석은 운동을 계속했어야 한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난 운동 신경이 좋으니까. 거기다 겁도 없어서 스피디한 스포츠에는 강하거든.”

“너 아까 스키 타고 내려오던 사람 피해서 회전하는 거 보고 놀랐어.”

“나 정도로 오래 타면 그 정도는 해야지. 그런데, 이 녀석들은 왜 이렇게 안 와?”

점심 먹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타고 내려온다더니 왜 이리 오래 걸리냐고, 정현과 인재를 기다리던 한은 혀를 찼다. 지금쯤 슬슬 내려왔어야 할 시간이라 신우는 재빨리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전화해 볼게.”

말과 동시에 정현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자 곧 통화가 연결되었다.

- 응. 우리 다 왔어.

“어딘데?”

- 카페 근처.

그 말에 재빨리 주변을 돌아봤지만 인파가 몰린 데다 다들 모자 아래 고글을 끼고 마스크로 입까지 가린 채라 식별이 어려웠다.

아무래도 스키복으로 찾아야 할 것 같아 다시 주변을 천천히 살피는데, 유난히도 눈에 띄는 형광색 상의가 보였다. 인재가 형광색을 입었었지 하는 생각에 그쪽을 향해 손을 들어 보이자 그쪽도 이쪽을 발견한 듯 폴을 든 채 손을 흔들었다.

이미 한과 자신의 보드는 라커 룸에 넣고 신발까지 갈아 신은 후라 인재와 정현만 준비가 되면 되겠다 싶어 전화를 끊고 그들을 기다리는데 한의 등 너머로 특이한 남자가 보였다.

다들 스키복을 입고 장비를 안고 다니는 곳에서 검은색의 하프 코트를 걸치고, 스키는 없이 폴만 손에 든 특이한 차림이었다.

굉장히 이질감이 느껴지는 남자의 차림에 빤히 그를 보고 있던 사이 그 남자가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섰다.

선글라스를 끼고 있어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어쩐지 심상치 않은 남자의 기세에 다급히 한을 부르려는데 막 한의 뒤로 다가선 그가 들고 있던 폴을 높이 들어 올렸다.

그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지만 그래도 설마, 하는 생각에 멈칫한 사이 이를 악다문 그가 갑자기 한의 위로 폴을 내리쳤다.

“한아!”

갑작스러운 상황에 비명을 지르며 자리에서 일어섰지만 그보다는 한이 더 빨랐다. 바로 뒤에서 내리치는 폴을 왼손으로 낚아채듯 잡은 한이 뒤를 돌아보자 남자가 폴을 뒤흔들었다. 그와 동시에 정현과 인재가 이쪽으로 달려왔다.

하지만 말이 달리는 거지 스키 부츠 덕에 그저 빨리 걸어오는 수준인 그들을 보다, 다시 눈앞의 상황을 보자 한이 조금 당황한 표정으로 폴을 내리친 남자를 응시하고 있었다.

“지수 형?”

바로 몇 시간 전 들었던, 도저히 잊으려야 잊을 수 없는 그 이름에 놀라 한과 남자를 번갈아 보는데 한에게 잡힌 폴을 뺏으려 낑낑거리던 남자가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그래, 나다! 너, 이거 놔! 안 놔?”

“갑자기 뒤로 다가와서 사람을 내리치려고 한 주제에 너무 당당하시네요. 이거 폭행 미수예요.”

“폭행 미수고 살인 미수고 놔! 난 널 좀 패야겠어!”

“왜요?”

“왜요? 왜~요? 네가 지금 왜요, 라고 했냐?”

남자는 어떻게든 한이 붙든 폴을 빼앗으려 이리저리 흔들었지만 역시나 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한을 패겠다고 악을 쓰는 그를, 인재가 말렸다.

“지수 형, 그만하세요.”

“뭘 그만해! 내가 아직도 이 새끼 이름만 들어도 자다가 벌떡 일어나는데? 남을 스키장 포비아로 만들어 놓고 지는 와서 신나게 보드 타고 있어? 그것도 애인이랑? 무려 초급 코스에서? 너 초급 코스는 재미없어서 안 탄다며? 그리고 누구 가르치는 것도 질색이라며? 원래 운동은 다 알아서 하는 거라며!”

생각만 해도 분통이 터진다는 듯 남자는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위 개의치 않은 채 빽빽 소리를 내질렀지만, 한은 역시나 태연했다. 심지어 뻔뻔하기까지 했다.

“그건 형 경우고요. 얘는 아니죠. 얘는 내가 가르쳐야죠.”

한아, 그 말은 안 하는 게 좋았을 것 같아, 라고 속으로 떠올린 순간 남자의 기세가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그 말이 그 남자의 분노에 기름을 끼얹은 듯했다.

“네가 사람이냐! 사람이야?”

“직립 보행하고 말도 하니 사람이겠죠. 그런데 형은 웬일이세요? 스키장 포비아라면서 스키장에는 왜 왔어요? 그것도 그 차림으로 폴만 들고.”

“너 때문에 스키고 보드고 못 타서 사원 여행 와서 이러고 앉아 있잖아!”

“요즘도 사원 여행 다니는 회사가 있어요?”

“내 말이! 그것도 열 받아 죽겠는데 내가 왜 여기서 너까지 봐야 하냐고?”

“뭐, 그럼 어쩔 수 없죠. 사회생활은 해야 하니. 그럼 동료들하고 노세요.”

상대가 화를 내든 고함을 치든, 뒤로 넘어가든 완벽한 마이 페이스를 유지하며 자기 멋대로 떠들어 대는 한을 향해 남자가 화가 나 미치겠다는 듯 발을 동동 굴렀다.

“너 지금까지 뭐 들었어? 나 너 때문에 눈만 봐도 치를 떤다니까!”

“그건 죄송해요.”

“죄송하다면 다야?”

“정말로 죄송해요. 전 제가 그렇게 배워서 다 그렇게 배우는 줄 알았어요.”

이런 게 바로 쿨한 거다, 라는 표본을 보여 주듯 빠르게 잘못한 걸 인정하고 사과하는 한의 태도는 제삼자가 보기엔 참 시원시원했지만 사과를 받는 입장에서는 약이 올라 미칠 정도로 얄미웠다.

“너 사과만 하면 끝인 줄 알아?”

“그럼, 어떻게 해 드릴까요?”

“좀 맞아! 한 대, 아니 두 대, 아니다, 세 대 맞아!”

“그건 좀 어렵겠는데요? 전 신우랑 어머니 아니면 등짝 안 내줘서요. 사원 여행 오셨다니 재미있게 놀다 가세요. 신우야, 가자. 빨리 체크인하고 밥 먹어야지. 새벽 일찍 아침 먹고 와서 배고프다.”

“야, 너 지금 네 애인 배고픈 게 문제야?”

“그게 제일 큰 문제죠. 그럼 다음에 뵐게요, 형.”

꽉 붙들고 있던 폴을 놓고 멋대로 대화를 끝낸 한은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 신우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어…… 그치만…….”

“빨리 가서 체크인하고 나와야지.”

별일 없었다는 듯 팔을 잡아끄는 한에게 끌려가면서 뒤를 돌아보자 이를 바득바득 가는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한아, 그래도 제대로 사과하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하려는 순간 바로 뒤에서 ‘지수 형!’이라고 소리치는 인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는 순간 검고 긴 쇳덩이가 보였다.

그건 진짜 찰나에 벌어진 일이었다. 뒤로 다가온 남자가 폴을 들어 올려 한의 등을 내려치려는데, 기가 막히게 그 순간을 포착한 한이 왼팔을 휘둘러 폴을 쳐냈고 그 반동으로 폴이 남자의 이마를 치고, 이마를 맞은 남자가 비명을 내질렀다.

가늠하기로는 겨우 3초 사이에 벌어진 그 상황에 경악하던 사이, 이마를 짚고 아프다며 방방 뛰는 남자를 보며 한이 기가 막힌 듯 중얼거렸다.

“여전히 이상하네, 저 형은.”

“널 만나면 되는 일이 하나도 없어!”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2층 카페로 온 뒤로도 남자는 계속해서 한에 대한 원망을 쏟아 냈다.

본인의 이마를 친 흉기를 옆에 세워 둔 채, 툭 튀어나온 이마를 연신 문지르는 남자의 토로에 한은 자신이 뭐 잘못했냐는 얼굴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 반응에 남자가 다시 폴을 손에 들려 하자 인재가 그를 말린다.

“그러게 왜 그런 짓을 하세요? 한이 반사 신경 괴물이라는 거 알면서. 특히 뒤에서 내리치면 더 짐승같이 반응한다고요.”

워낙에 습격에 민감해 갑자기 뒤에서 공격하면 본의 아니게 상대를 죽일 수도 있다고 인재가 조언하자 그가 황당하다는 얼굴로 중얼거린다.

“내가 저 자식이 반사 신경 괴물인지 짐승인지 어떻게 알아? 겨우 일주일 만났는데.”

일주일이라는 말에 신우가 놀라 한을 돌아보자 한이 시선을 피한다. 한의 연애 기간이 짧다는 거야 익히 들어 잘 알긴 했지만 일주일은 상당히 놀라웠다. 그 짧은 사이에 원한을 이 정도로 쌓게 만든 건 더 대단하고.

대체 너 어떤 인생을 살아온 건데, 라는 신우의 시선에 한이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이자 남자가 나라 잃은 사람처럼 혼이 빠진 얼굴로 중얼거린다.

“사장이 안 오면 자른다고 해도 여기 오는 게 아니었는데.”

이제 슬슬 피멍이 들기 시작한 이마를 한 채 의자 위로 축 늘어진 남자를, 신우는 커피를 홀짝이며 힐끔거렸다. 선글라스를 썼을 때도 꽤 미형이라고 생각했는데 선글라스를 벗자 절로 감탄사가 나올 정도로 예쁜 얼굴이었다.

한이 좋아할 만하다고 내심 생각하고 있는데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러자 그가 살짝 인상을 쓴다.

“그쪽이 한이 현재 애인 맞죠?”

“……네.”

“왜 저런 애를 만나요?”

도저히 이해가 안 간다는 그 물음에 신우가 한을 돌아보자 한이 불만스러운 듯 인상을 구겼다. 왜 여기서 그런 얘기를 하는 거냐고 말하고 싶었지만 본인이 지은 죄가 있어 차마 내뱉지 못해 갑갑하단 얼굴에 신우 역시 곤란한 듯 웃으며 다시 지수를 바라봤다. 난감해하는 게 역력한 신우의 기색에 지수가 앞에 놓인 커피 잔을 들어 올리며 경고하듯 내뱉었다.

“저 자식 나쁜 놈이에요. 거의 횡액 수준이라고요. 자기 멋대로 좋아하다 자기 이상형에 안 맞으면 그냥 아웃이에요. 얼마나 변덕스러운데.”

그러니까, 토네이도, 화산 폭발, 쓰나미인가, 라고 뜨거운 커피를 마시면서도 연신 이죽거리는 지수를 보며 한이 더는 참지 않고 사납게 응대했다.

“형, 말을 좀 가려 하시죠?”

“뭘 가려 해? 넌 나한테 말 가려 했어?”

“제가 형한테 잘못한 건 고급 코스에 형 버려두고 간 거랑 평소에 입 좀 다물고 있어 달라고 한 것밖에는 없는데요?”

“그게 제일 큰 거야. 너, 나 입만 열면 깬다고 말도 못 하게 했잖아!”

“그 얼굴에 그 성격은 사기니까요.”

불쾌한 티를 그대로 드러내며 한이 거칠게 쏘아붙이자 신우는 한이 하는 말을 순간 이해해 버렸다. 남자의 외모는 어지간한 연예인 저리 가라 할 정도로 화려한데 말투가 굉장히 사나웠다. 한이 저런 식의 직설적인 말투를 싫어한다는 걸 잘 알기에 왜 이 사람에게 입을 다물고 있어 달라고 했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그냥 정현을 대하듯 했던 거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놓고 입 다물고 있으라고 한 건 너무한 것 같다고 한을 책망하듯 보자 한이 겸연쩍은 듯 컵을 들어 올리며 말을 돌렸다.

“형 동료들한테 안 가 봐도 돼요?”

“다들 스키 타고 보드 타는데 나 혼자 가서 뭐 하라고?”

“타 보세요. 처음부터 배우면 괜찮을 거예요.”

“싫어! 안 타!”

“그럼 어쩔 수 없죠. 저흰 이만 일어납니다. 슬슬 밥 먹으러 가야 해서요.”

이쯤이면 할 만큼 했다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선 한이 신우에게 고갯짓을 한다. 그만 가자는 그 신호에 신우 역시 어색하게나마 인사를 하곤 자리에서 일어서자 인재와 정현도 몸을 일으켰다. 이쪽 일행이 모두 자리에서 일어서자 혼자 테이블에 남은 지수가 작게 쫑알거렸다.

“그래, 존나 처먹고 배 터져 죽어라, 씨발.”

가감 없이 내뱉은 거친 욕설에 신우가 움찔하자 한이 기겁하며 신우의 귀를 틀어막는다.

“형, 나이 들었으면 이제 말버릇 좀 고치세요. 얘 귀 썩어요.”

“나 원래 이런 거 몰랐어?”

“몰랐으니 만났죠.”

알면 만났겠냐는 한의 명료한 답에 지수의 얼굴이 다시 일그러지려 하자 인재가 서둘러 한의 어깨를 밀친다.

“그만 가. 너, 잘한 거 하나도 없어. 형, 나중에 봬요.”

“안 봐. 내가 왜 널 봐? 너 보면 정한 생각나서 혈압 치솟는데!”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야야, 가자.”

양쪽을 다 아는 인재가 이제 그만하라며 한의 등을 떠밀자 한이 그제야 신우의 귀를 막은 손을 놓고는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겨우 자리를 정리하고 한 걸음을 옮기려던 순간 한이 뭔가 떠오른 듯 뒤돌더니 지수를 불렀다.

“그런데, 형.”

“왜?”

“그 폴 누구 거예요? 스키 안 탄다면서요?”

그의 의자 옆에 기대 놓은 검은색의 쇠막대기 같은 폴을 가리키며 한이 그렇게 묻자 남자가 퉁명스럽게 대꾸한다.

“내가 알 게 뭐야?”

“……알아야 할걸요. 그거 어디서 가져오신 건데요?”

“서 있는 거 아무거나…… 아…….”

되는대로 뱉어 내다 뒤늦게 한이 하는 말의 의미를 깨달은 듯 남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그 얼굴로 알 수 있었다. 지금 저 남자가 본 적도 없는 사람의 폴을 훔쳐 온 거라는 걸.

애초에 열 받는다고 남의 걸 마음대로 가져다 쓸 생각을 한 것도 이상했지만 그걸 전혀 의식 못 하고 있다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고서야 깨달았다는 건 더 이상했다.

극단적이고 종잡을 수 없는 남자의 행동에 한을 제외한 일행이 당황해 입을 꾹 다물고 있자 한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찬다.

“그거나 주인한테 돌려주러 가시죠.”

“어떻게 해? 큰일 났다! 나 절도했어! 아, 씨발! 이것도 다 정한 너 때문이야!”

“형, 말은 바로 하죠. 그거 훔친 것도 형이고 저 패려고 폴 휘두르다 자기 이마 찍은 것도 형이에요. 그거 대여한 거면 그 사람이 업체에 물어 줘야 하는데 빨리 주인이나 찾아 줘요.”

한심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한의 눈빛에 지수가 재빨리 폴을 챙겨 들고 카페 문으로 달려가다 선글라스와 커피를 두고 간 걸 깨닫고는 되돌아왔다. 그러곤 다시 허둥거리며 카페를 나서는 모습에 한이 작게 중얼거린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지수 때문에 시간을 꽤 잡아먹은 탓에 콘도에 체크인을 했을 때는 오후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주말이라 사람들도 많아 체크인 시간도 꽤 걸린 데다 중간에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 보니 이미 다들 녹초가 된 채였다.

“아, 이제 나이 들었나 봐. 고작 그거 탔다고 힘들어.”

겉옷만 벗어 베란다에 걸어 둔 정현은 밥 먹을 기운도 없다며 그대로 소파 위에 널브러졌다. 그 옆에서 재킷을 벗어 걸던 한은 신우의 안색을 살폈다.

“넌 괜찮아?”

언뜻 듣기엔 오랜만에 몸을 움직였으니 피곤하지 않느냐는 물음이었지만 신우는 그 물음의 의미가 내포하는 바가 전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조심스러운 한의 말투와 표정에서, 그 물음이 몸이 괜찮냐는 게 아니라 방금 그 인상 강한 남자를 본 기분이 괜찮냐고 묻는 거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시원하게 대꾸했다.

“괜찮아.”

신우의 답에 눈치 없는 정현이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난 전혀 안 괜찮아. 차라리 오후에 쉬고 사람 빠지는 야간에 타자. 새벽 5시에 일어나서 나왔더니 죽겠다. 햇살까지 너무 좋아서 더 피곤해.”

오늘도 결국 3시간 자고 나왔다며 정현이 죽는소리를 하자 그 밑에 널브러진 인재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에는 좀 쉬고 차라리 정빙 끝나고 7시쯤 나가자. 좀 자고. 나도 피곤해.”

인재 역시 피곤한 듯 정현의 의견에 동의를 표했다. 다들 피곤해하는 분위기에 한도 납득한 듯 그 의견을 수렴했다.

“그래, 그럼. 그런데 너희 왜 다 눕는 건데? 밥 먹으러 안 가?”

“시켜. 피곤해. 아니면 싸 온 음식 하든가.”

손을 휘휘 내저으며 아예 텔레비전까지 틀고 소파에 눕는 정현을 보곤 한은 한숨을 토해 냈다.

“겨우 그거 타고?”

“우린 너 같은 괴물이 아니거든.”

“콘도 음식점 음식 맛없어.”

오기 전 이미 맛집 레이더를 가동해 근처의 닭갈비집과 갈비탕집을 찍어 둔 한이 예상에서 벗어난 일정에 조금 인상을 쓰자 배가 고프다며 올라오면서 사 온 빵을 뜯던 정현이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럼 포장해 와. 상태 괜찮은 신우랑 너랑 둘이 가서 사 오면 되겠네.”

“요리는 그 가게에서 먹어야 맛있어. 오는 사이 식으면 맛 버린다고.”

“우린 너처럼 먹는 데 목숨 건 사람들이 아니라 먹고 안 죽을 정도면 돼. 대강 빵으로 요기하고 있을 테니 가서 사 와. 신우야, 넌 괜찮지?”

널찍한 소파에 누워 뒹굴거리던 정현이 표적을 신우로 바꾸자 신우가 모자에 눌린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괜찮아. 그럼 갈비탕 포장해 올까? 나도 그거 먹고 싶었는데.”

“그럼 갈비탕 사다 줘. 정한, 네 소원대로 너희 둘이 오붓하게 차로 데이트하라고 보내 주는 거니 고맙게 여기고 다녀와. 우린 뒹굴거리고 있을 테니.”

말과 함께 한을 향해 정현이 묘한 시선을 던졌다. 어서 가라고 떠미는 듯한 그 눈빛에 순간 뭔가를 알아차린 한이 슬쩍 정현을 바라보다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뭐, 나도 여기 밥 먹기는 싫으니까. 신우야, 나가자. 여기서 가게 안 멀어.”

벗어 둔 재킷을 다시 걸친 한이 차 키와 지갑을 챙겨 들고 나서자 신우도 그대로 한을 따라 넓은 콘도를 빠져나갔다. 금방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긴 뒤 두 사람이 곧 문을 닫고 사라지자 소파 위에서 뒹굴며 빵을 뜯어 먹던 정현이 소파 바깥쪽으로 뒹굴뒹굴 굴러가 아래에 누워 있는 인재를 불렀다.

“야.”

“왜?”

“아까 그 사람, 그거 맞지?”

“뭐가?”

“나 보는 순간 눈치 깠어. 너 올 때 차 안에서 그 사람 얘기하다 흠칫한 것도 그래서 그런 거 아냐?”

정확한 단어는 하나도 없이, 애매하게 흘리는 말이었지만 종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인재는 그 말을 귀신같이 알아들었다.

“……뭐…… 그런 거지.”

“이야, 그 사람한테는 진짜 한이가 재앙 덩어리네. 나라면 되게 열 받았을 거야.”

“그래서 내가 빨리 끌고 온 거야. 원래 성격도 괴팍한 사람인데 괜히 그것까지 알면 한이 죽일 것 같아서.”

“한이 죽이려다 자기가 죽는 게 아니라? 아까 보니 엄청 덤벙대던데?”

“좀…… 그렇긴 하지.”

그나마 지수를 몇 번 봤던 인재가 순순히 그가 좀 이상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자 정현이 시끌시끌한 화면을 한 번 보곤 다시 인재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한이 자식도 방금 그 형 보고 눈치챈 것 같지? 계속 신우 눈치 보는 꼴이?”

“그렇게 빤히 보이는데 설마 모르겠냐? 나, 사실은 아까 차 안에서 지수 형 얘기한 직후부터 멘탈 붕괴 왔어. 내가 신우를 몰랐을 때는 몰랐는데 알고 보니 한이 자식 지난 과거가 다 보이잖아.”

어떻게 보면 진짜 악질이라고 인재가 혀를 차자 정현이 낄낄거리며 웃었다.

“넌 지금에나 알았지, 난 옛날부터 알았어.”

인재야 그전에는 신우를 본 적이 없어 몰랐겠지만, 신우와 한, 둘 다를 오래 알아 온 정현은 사실 아주 오래전부터, 지금 인재의 정신을 붕괴시킨 그 사실을 눈치채고 있었다. 처음에는 설마설마 했지만 그게 두 번이 되고 세 번이 되자 너무 티가 나 저게 진짜 모르고 하는 짓인가 의심했을 정도로 말이다.

“넌 그렇게 잘 알면서 왜 그동안 말을 안 한 건데? 네가 미리만 알려 줬어도 중간에 있는 피해자들이 줄었을 거 아냐?”

“말하면 뭘 해? 본인이 자각이 없는데.”

“그래도, 알았으면 제대로 된 상대한테 빨리 찾아갔을 거 아냐? 괜히 여기저기 안 쑤시고. 한이도 신우 빨리 만났으면 더 빨리 사람 됐을 거고.”

한의 성격상 이 사실을 더 빨리 자각했다면 전국 팔도가 아니라 전 세계를 뒤져서라도 당장에 신우를 찾아냈을 게 뻔하다는 생각에 인재가 두 사람 모두와 연락 주고받았으면서 왜 그냥 뒀냐고 묻자 정현이 턱을 괴며 이번엔 진지한 투로 답해 주었다.

“그 자식 하는 꼴을 다 봤으니까 안 알려 준 거지. 두 놈 사귄다고 할 때 내가 결사반대했다는 소리 못 들었냐? 정한 변덕에, 다른 애인들한테 하는 꼴을 내가 다 봤는데 그렇지 않아도 상처 많은 애랑 잘해 보라는 말이 나오겠냐고? 그 자식 패턴으로 봐서는 신우랑도 얼마 사귀다 ‘아, 이제 질렸다. 그럼 안녕.’ 이럴 것 같았거든.”

“그래도, 한이 헤어질 때 매너는 좋잖아.”

“그건 겉보기만 그런 거지. 대학 동기면 네가 더 잘 알 거 아냐? 정한, 자기 이상형 라인에 조금이라도 걸리면 일단 가서 작업 걸고 하나라도 눈 밖에 나면 아웃, 외치는 거. 정한의 이상형 자체가 신우이긴 하지만 그 놈 변덕을 믿을 수가 있어야 말이지.”

“뭐, 그렇게 볼 수도 있긴 하네…….”

지금이야 어느 정도 나이도 들고 철도 들었다지만 예전 정한의 그 급작스러운 변덕이라면 믿지 못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인재가 순순히 납득했다. 그러자 다시 소파 안쪽으로 뒹굴 몸을 굴린 정현이 킥킥거리며 웃는다.

“하여간 정한 웃겨. 답지 않게 순정파란 말야.”

“어떻게 보면 무섭지. 그렇게 티가 나는데 어떻게 그걸 모를 수가 있냐?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박수 정한이.”

인재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지만 정현의 생각은 달랐다.

“의식하지 못한 첫사랑이라니까. 아마 신우는 그 사람 직접 보고도 눈치 못 챘을걸.”

“설마…….”

신우도 꽤 예민한 편이라 눈치챘을 거라고 인재는 확신했지만, 정현은 이번에도 역시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원래 자기 일은 모르는 거라니까. 이런 건 원래 본인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빨리 눈치채는 법이야. 걔네 고등학교 때 이미 사귄다는 소문 다 났었어. 걔네 둘만 모르고 있었지.”

“뭐…… 그때는 설마 그런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테니까. 나름 순수하기도 했을 거고.”

“너무 순수했지. 아, 지금 생각하니 진짜 웃기네. 걔네 그때 누가 봐도 사귀는 거였는데 말야.”

“웃긴 것보다 지수 형이 눈치채지 못하기를 빌어라. 그 형이 이 사실을 알면 이번엔 폴로 기관총 만들어서 나타날 것 같아.”

“결자해지. 자업자득. 폴로 기관총이 아니라 대포를 만들어 갖고 와도 한이가 감당해야지. 그러게 누가 그렇게 사람을 열 받게 하래?”

“하긴…… 자기가 판 무덤이니 어쩌겠어.”

뭐든 지가 알아서 하겠지 하며 한숨을 내쉰 뒤 인재는 다시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듯 묻는다.

“그런데 왜 둘이 보낸 거야? 걔들도 피곤할 텐데. 한이, 신우가 먹자고 하면 배달 음식도 잘 먹어.”

신우가 먹자고만 하면, 한이 배달 음식 정도가 아니라 땅에 떨어진 음식도 먹을 거라는 건 정현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먹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한이 삐쳤을 거거든. 그래서 나가서 얘기하라고 보낸 거야.”

“……한이가? 신우가 아니라?”

“신우는 안 삐쳐. 걔는 생각과 달리 진짜로 쿨해. 네가 몰라서 그렇지 정한이 아니라 연신우가 진짜 쿨의 대명사라고. 걔는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다, 하는 쪽이라 뭐든 포기가 빠르고 진짜 뒤끝 없어. 워낙 많이 포기하면서 살아서 빨리 포기할수록 빨리 편해진다는 걸 잘 아니 뭐든 쉽게 손에서 놓는 편인데…… 정한은 아니란 말이지.”

“무슨 소리야?”

“그냥 그렇고 그렇단 소리. 빵이나 먹고 기다려.”

더는 말할 수 없다는 듯 말을 마친 정현이 소파 위에 있던 봉투에서 새 빵을 꺼내 던져 주자 인재가 미심쩍다는 얼굴을 한 채 일단 빵을 받아 들고는 봉투를 뜯는다. 그리고 곧 빵을 입에 문 채 텔레비전으로 시선을 돌리던 인재가 불안한 듯 다시 물었다.

“설마, 둘이 싸우는 건 아니겠지?”

혹시나 하는 인재의 걱정에 정현이 말 같지도 않은 소리 말라는 듯 코웃음을 친다.

“걔네 둘이 잘도 싸우겠다.”

“……하긴.”

“정한은 연신우가 죽으라면 죽을 수도 있는 놈이니 걱정 마. 한이네 할아버지, 할머니가 에취 하시면 안방에서 대문까지 날아가시는 분인데, 한이가 그거 그대로 닮았으니까. 신우가 메주는 팥으로 쑤는 거라고 우기면 진짜 팥으로 메주 쑬걸.”

“야야, 그 얘기 들으니 한이가 갑자기 팥으로 메주 쑤겠다고 식품학과 들어가는 게 상상되잖아. 그렇지 않아도 그 자식이 언제 사무실 때려치울지 몰라서 불안한데 불길한 소리 하지 마.”

“걱정 마. 그 녀석, 사무실은 안 때려치워. 신우가 거기서 일 받고 있으니까.”

정곡을 찌르는 정현의 지적에 인재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한 얼굴로 정현을 돌아봤다.

“……그런 거냐?”

“그런 거지. 그러니 신우가 네 고용 보험이려니 해.”

“앞으로 몰아 줘야겠군.”

뜻밖의 순간 깊은 깨달음을 얻은 인재의 다짐에 정현이 낄낄거리며 다음 대화를 이어 갔다. 요즘 일 더럽게 많다, 라고 툴툴거리거나 사람 좀 소개해 줘라, 애걸하는 등등 일상적인 대화를 주고받던 중 한순간 콘도 안이 고요해졌다.

체력이 방전된 끝에 두 사람 모두 기절하듯 잠든 듯했다.

콘도를 나와 차에 올라탄 뒤 오전에 올라왔던 커브가 심한 언덕길을 내려가며 한은 계속해서 신우의 눈치를 살폈다.

지수를 만난 이후부터 신우는 급격하게 말이 줄어든 채였다. 원래도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보드를 탈 때까지만 해도 기분 좋은 듯 이것저것 재잘거리고, 엎어지면서도 웃던 녀석이 입을 꾹 다문 모습이 신경 쓰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가 계속 눈치를 보고 있자 조수석에 앉아 메마른 겨울 풍경을 내다보던 신우가 마침내 입을 연다.

“나도 빨리 운전 배워야겠다.”

뜬금없는 운전 타령에 한은 부드럽게 코너를 돌며 되물었다.

“갑자기 왜?”

“먼 데 가거나 여행 갈 때 번갈아 가며 운전하면 좋잖아. 너 안 피곤해? 어제도 자정 넘어서 들어왔잖아.”

“괜찮아. 난 체력 하나는 끝내주니까.”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귀찮거나 피곤할 때 있잖아. 너 너무 피곤해서 운전하기 힘들 때 내가 대신 운전해 주고 술 마시면 대리운전도 해 주고 싶으니까, 면허 빨리 따 볼게.”

확실히 그건 나쁜 이야기는 아니었다. 한의 입장에서야 신우가 출퇴근도 시켜 주고 술 마실 때 데리러 와 준다면 이 이상 좋을 수가 없다. 무엇보다 가끔 외출을 하거나 회사에 나올 때 버스를 타고 다니는 게 마음에 걸렸는데 운전을 직접 한다면 안심이 된다.

하지만, 지금은 그보다는 좀 더 중요한 문제가 있었다.

“……그거 말고 하고 싶은 말 없어?”

“응?”

“지수 형 얘기. 묻고 싶은 거 없어?”

은근한 투로, 한은 내내 마음에 걸렸던 이야기를 꺼냈지만 신우는 대수롭지 않은 듯 웃어넘겼다.

“벌써 다 들은 것 같은데 더 들어야 할 거 있어? 고급 코스에 버리고 온 거랑 입 열지 말라고 한 것 말고 또 잘못한 거 있어?”

“그게 아니라…… 그 형 보고 기분 안 상했냐고.”

그 말에 신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왜 내가 기분이 상해?”

“내 전 애인 보는 거 기분 별로잖아.”

직접적인 한의 언급에 그제야 신우는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좋지는 않은데…… 이미 과거 얘기잖아. 과거는 신경 안 써. 너도 내 전 애인 만났잖아. 그리고 무엇보다 그분 느낌이 좋아. 정현이 닮아서 편하더라고. 그래서 별로 마음 안 쓰여.”

지나치게 시원하고 담담한 그 답에 한은 묘한 얼굴로 웃었다. 씁쓸해 보이기도 하고 조금 당황하기도 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거 기분 이상하다.”

“왜?”

“아까 지수 형 만났을 때 네가 괜히 기분 상하거나 내 과거 알고 실망할까 봐 심장 떨려서 땀 삐질삐질 흘렸는데, 또 막상 이렇게 별거 아니라고 반응하니 기분이 좀 이상해. 질투도 안 하나 싶어서, 좀 그래. 진짜 딜레마다. 네가 기분 상하는 건 싫은데, 질투는 좀 해 줬으면 좋겠다니. 난 네 전 애인 만났을 때 엄청 활활 타올랐으니까.”

그 가구 박람회에서 어떻게든 근사해 보이려 과하게 꾸미고, 필요도 없는 안경까지 쓴 채 생고생을 하던 한이 떠올라, 신우가 작게 웃음을 흘렸다.

“질투 안 해. 이미 과거 일이잖아. 지금 네가 그 사람한테 흔들리는 거라면 질투하겠지만, 이미 옛날에 정리된 사람한테 왜 질투를 해? 아니면, 지금 그 사람 보니 흔들려?”

말의 내용 자체는 심각했지만 신우의 목소리는 적당히 가볍고 유쾌했다. 절대 그럴 리 없다는 확신을 담은 채, 짓궂은 장난을 치는 듯한 그 목소리에 한도 조금 긴장을 풀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설마. 지수 형한테는 진짜 미안하지만…… 형이 그때 헤어지자고 안 했으면 내가 헤어지자고 했을 거야.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딱 일주일 사귀어 보고 세상에 이렇게 이상한 인간도 있구나 싶었거든.”

“왜? 그렇게 미인인데?”

“성격이 좀 이상해. 그리고 난 그런 성격 별로야. 네 말대로 정현이 닮아서 피곤해.”

그런 타입은 친구로 지내는 게 그나마 좋다고 한이 덧붙인 순간 신우는 눈을 껌뻑이며 한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그럼 사귄 건 어떻게 사귄 건데. 알고 사귄 거 아냐?”

사귈 정도였으면 어느 정도 상대에 대해 아니까 사귄 거 아니었나 해 신우가 연애 과정에 대해 묻자, 언덕길을 다 내려와 우회전을 하던 한이 작게 중얼거렸다.

“잘 알던 사람은 아냐. 그냥…….”

거기까지 말한 뒤 한은 말을 흐렸다. 애매하게 끊어진 답에 ‘그냥’ 어떻게 알게 된 거냐고 묻듯 신우가 빤히 한을 바라보자 한이 입술을 달싹거린다. 말을 하긴 해야 하는데 말하기 곤란한 듯 망설이는 모습이었다.

그답지 않게 미적거리는 모습에 뭔가 있구나 싶어 신우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한이 이번에도 애매하게 말을 얼버무렸다.

“그냥 우연히 만난 거야. 졸업 논문 주제를 건축물 내부의 하자 보수로 잡았는데 건물 내의 결로 현상하고 곰팡이 문제 때문에, 곰팡이를 없앨 수 있는 천연 화학 물질에 대해 화공과 교수님 도움을 받았거든. 논문이 잘 통과돼서 교수님께 감사 인사하러 갔는데 지수 형이 거기 있더라고. 그때 본 옆모습이 마음에 들어서 사귀게 됐어. 이상하게, 그 옆모습이 끌리더라고.”

은근히, 마지막 말을 강조한 한은 한적한 시골길을 느릿하게 달리며 슬쩍 신우를 돌아봤다. 순간 신우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확실히 분위기 있더라. 처음 봤을 때는 되게 놀랐어. 엄청 미인이라서.”

그 미인이 폴을 들고 널 내리치는 바람에 더 놀라긴 했지만, 이라는 말은 생략했지만 한은 그 말을 잘 알아들었다.

“그 형, 그 성격은 진짜 사기야. 입 여는 순간 깨잖아. 그리고 이건 확실히 말해 두겠는데 그 형보다 네가 더 예뻐. 나한테는 네가 천 배는 더 예뻐.”

부드럽게 핸들을 돌리며 한이 진지하게 내뱉는 말에 신우가 간지럽다는 듯 받아쳤다.

“그거 너무한 콩깍지 아냐? 나도 거울은 보고 사는데?”

“내 미적 기준 꽤 높아. 난 뭐든 최고 아니면 상대 안 하는 사람이라고.”

“말만이라도 고마워.”

“말만이 아냐. 내 눈엔 네가 제일 예뻐 보여.”

“나한테도 네가 제일 예뻐. 그리고…….”

거기서 잠시 말을 끊은 신우는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하나 망설이다, 용기를 낸 듯 입을 열었다.

“질투 안 한다고 섭섭한 건 알겠는데 그건 알아줬으면 좋겠다. 질투가 안 나는 게 아니라, 널 믿어서 그런 거라는 거. 네가 날 사랑한다는 걸 믿어. 너, 내가 떠밀어도 바람 안 피울 거잖아? 나랑 죽을 때까지 함께할 거 아니었어?”

잔잔한 미소를 띤 채, 신우가 작게 속삭이는 그 말에 굳어져 있던 한의 얼굴이 스르르 풀려 갔다.

“연신우, 너 많이 컸다? 헤어질 때 힘들까 봐 언제든 도망칠 준비하고 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반가운 변화라며 왼손으로 핸들을 쥔 한이 오른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신우가 눈을 가늘게 뜬 채 웃는다.

“솔직히 그때는 너 못 믿었어. 네 변덕, 연애 편력, 정현이한테 모두 전해 들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믿어.”

“뭐, 내가 좀 믿음직하긴 하지.”

이제 완전히 기분이 풀린 듯 한은 평소의 모습대로 자신감에 가득 차 자기 잘났다고 떠들어 대고 있었다. 지나치게 빠른 회복에 신우는 그를 조금 놀려 주기로 했다.

“누가 네가 믿음직하대? 너 때문이 아니라 할아버지 때문에 믿어 주는 거야.”

“뭐야? 믿으려면 날 보고 믿어야지 왜 할아버지를 보고 믿어?”

“너보다야 할아버지가 더 믿음직하시잖아. 게다가 나 가끔 할아버지 뵈면 가슴 두근두근하거든.”

창밖을 바라보며, 신우가 슬슬 약을 올리자 한이 재빨리 그 두근거림의 원인을 정의 내려 줬다.

“그건 무서워서 그런 거야.”

“아니, 진짜 두근두근해.”

신우의 말투는 더없이 가볍고 장난스러웠기에 한도 금방 장난이란 것을 알아챘지만, 그래도 어쩐지 기분이 좋지 않아 조금 투덜거리듯 말을 내뱉었다.

“너, 자꾸 그럼 나 상처받아? 나, 우리 할아버지는 못 이긴단 말야. 약 주자마자 병 주는 거야?”

아니라는 걸 알아도 기분 상한다는 한의 투정에 시트에 깊게 기대앉은 신우가 한을 돌아보며 부드럽게 그를 얼렀다.

“할아버지 뵈면, 네가 미래에 저런 모습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두근두근해. 아, 얘도 이렇게 멋있게 늙겠지, 그런 생각 하니까 계속 두근거려. 지금 할아버지 보면서 두근거리는 거 보면, 나 그 나이 돼서도 너한테 설렐 것 같아.”

환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이어지는 신우의 고백에 한 역시 환하게 웃으며 오른손을 뻗어 다시 신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주었다.

“연신우 씨 엄청 긍정적이 되셨네? 아주 좋아, 예뻐.”

“긍정의 힘을 믿기로 했으니까.”

“아주 바람직해. 예쁜 말 했으니 나도 좋은 거 하나 알려 줄까?”

“뭘?”

아직 자신이 모르는 또 이상한 사건이 남았나 하며 신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내비게이션이 목적지 도착을 알려 왔다. 바로 저 앞에 보이는 커다란 간판을 확인한 신우가 다시 한을 돌아보자 깜빡이를 켠 채 속도를 줄이던 한이 말을 이었다.

“지수 형, 아까 봤지?”

“응.”

“내가 왜 그 사람하고 사귀었을까 잘 생각해 봐. 그럼 답이 나올 거야.”

그렇게 말해 봤자 두 사람의 연애 과정이나 관계를 모르는 신우가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리 없다.

의도를 알 수 없는 한의 말에 신우가 막 그게 무슨 소리냐고 물으려는데 가게 주차장에 차를 세운 한이 시동을 껐다. 그러곤 싱긋 웃는 얼굴로 신우를 돌아보며 진지하게 말을 건넸다.

“아까 말했잖아.”

“아…….”

아까 한 말이라면 옆모습이 예뻐서 사귀었다는 말인 걸까, 하고 떠올려 봐도 여전히 모르겠다.

옆모습이 뭐 어땠다는 걸까, 하고 고민하는데 한이 안전띠를 풀며 옜다 하는 투로 말을 던진다.

“좋아. 그래도 모르겠다면 파격적인 힌트를 하나 더 줄게. 내가 그 형 본 게 공과대 건물 난간 쪽이었어.”

“난간?”

“응. 겨울, 난간. 잘 생각해 봐. 내리자”

영문 모를 그 단어들을 신우가 머릿속에 되새기던 사이 차에서 내린 한이 신우에게 고갯짓했다. 어서 내리라는 그 신호에 신우 역시 서둘러 안전띠를 풀고는 차에서 내려섰다.

그렇게 가게에서 음식을 포장해 다시 콘도로 돌아온 뒤까지 계속 생각해 봤지만 한이 던진 수수께끼의 답은 나오지 않았다.

갈비탕 6인분을 포장해 콘도로 돌아갔을 때, 정현과 인재는 숙면을 취하고 있었다. 아무리 벨을 눌러도 문을 열어 주지 않아, 결국 기다리다 폭발한 한이 주먹으로 문을 두드리고 나서야 비로소 잠에서 깬 인재가 문을 열었다. 그렇게 힘겹게 식사를 마친 뒤 예정대로 적당한 시간에 나가 각자에게 맞는 코스로 가 다시 한바탕 보드와 스키를 탔다.

신우도 제법 익숙해진 상태라 아까보다는 수월하게 보드를 탔고 한은 신우의 속도에 맞춰 타며 계속해서 함께 올라갔다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그렇게 몇 번인가 코스를 반복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밤 10시가 훌쩍 지나 있었다.

슬슬 마무리를 할 때였다.

“밥 먹자, 밥. 배고프다.”

먼저 내려와 기다리던 정현이 신우와 한을 보자마자 던진 말이 그거였다. 어지간히 허기가 지는지 어서 가자고 닦달하는 그 모습에 신우의 보드를 들고 자신의 보드는 한 발에 걸친 채 타고 있던 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슬슬 배고플 시간이긴 한데. 그 전에 정해 두고 가자. 야간 스키 타고 내일 오전까지 쉬다 그냥 올라갈래? 아니면 오늘은 그만 쉬고 내일 오전에 체크아웃하면서 한 번 더 타고 갈래?”

체력과 이런저런 사정을 감안해 스케줄을 짜려는 한을 보며 정현이 폴에 기대선 채 짜증을 낸다.

“너 진짜 독하다. 친구들끼리 왔으면 밤에는 술 좀 마시고 치킨도 시켜 먹고 수다도 떨고 해야지. 진짜 딱 보드만 타러 온 거야?”

“난 그런 거 싫어한다고 했잖아. 보드 타러 왔으면 보드 타는 거고, 스키 타러 왔으면 스키 타는 거지. 보드 타러 와서 보드 위에 발만 걸치고 술 마시고 놀고 흥청망청하는 거 싫어. 그러다 시간만 버리고 올라가는 건 더 싫고. 애초에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온 거면 몰라도 난 신우랑 보드 타러 왔으니까 그 스케줄대로 움직일 거야.”

그러니 너희는 그냥 너희가 알아서 하라는 그 말에 정현이 심통을 부렸다.

“아, 더럽게 까칠한 새끼. 알았어. 그럼 오늘은 가서 쉬고 내일 오전에 한 번 더 타자. 난 이미 방전됐어. 신우, 너도 힘들지?”

“응. 배도 고파.”

신우도 지친 듯 그렇게 답하자 자기 보드도 마저 풀어 두 팔에 안아 든 한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그럼, 집에서 바비큐 싸 왔으니 그거랑 맥주 마시고. 인재는?”

“인재는 예은 씨 전화 받다가 아예 장비 챙겨서 들어갔어. 아마 콘도에 가 있을걸.”

여기 와서도 연애질이라며 정현은 인재의 행동을 상당히 불만스러워했지만 한은 간단히 그 말을 무시했다.

“그럼, 우리도 그만 들어가자. 지하에서 맥주랑 안주 좀 사고. 너무 취하면 내일 못 타니까, 맥주만.”

“맥주 말고, 그냥 밥 먹고 사우나나 가는 건 어때? 근육 땡겨.”

건물 안으로 들어와 한이 짐을 넣어 둔 사물함을 여는 사이 장비를 내려 둔 정현이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주무르며 사우나 얘기를 꺼내자 막 가방과 신발을 꺼내던 한이 고개를 내젓는다.

“여기 사우나 10시면 닫아. 그리고 24시간 해도 안 돼. 어딜 사우나에를 가? 신우, 너 사우나는 절대 안 돼. 뜨거운 물 틀고 욕조에 들어가.”

장비 걸이에 두 개의 보드를 나란히 건 한이 던진 말에 신우는 이상하다는 듯 한을 바라봤다.

“왜? 너, 사우나 싫어해?”

본채 사우나 룸은 자주 들어가면서 왜, 라는 생각에 신우가 어리둥절해하며 묻자 한이 뭘 그렇게 당연한 걸 묻느냐는 얼굴을 했다.

“싫어하는 게 아니라 안 돼. 그냥, 무조건 안 돼. 다 벗고 있는 데에 왜 들어가려고 해?”

말도 안 되는 한의 억지에 스키와 폴을 본인 사물함 안에 넣고 부츠의 끈을 풀던 정현이 퉁명스레 말을 던졌다.

“웃긴다, 너. 지는 다니면서 신우는 다니지 말라고?”

“나도 요즘은 안 가. 집에 사우나 있는데 뭐 하러 여러 사람 쓰는 데를 가?”

부츠를 벗고 운동화를 신는 한의 앞에서 막 부츠를 벗어 던진 정현이 놀란 얼굴을 했다.

“너희 집에 사우나 있어?”

“본채에. 할아버지가 만드셨지.”

그 말에 다시 운동화를 찾아 신던 정현이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나 너희 집 근처로 이사 가야겠어.”

“오기만 해 봐.”

이사 오면 시도 때도 없이 집에 찾아올 텐데 절대 문 안 열어 줄 거라며 짐을 정리한 한이 먼저 라커 룸을 나서자 신우와 정현이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사우나 좀 쓰면 덧나냐?”

“사우나를 쓰는 게 문제가 아니라 네가 우리 집을 네 집처럼 오가는 게 문제인 거지.”

그러다 아예 짐 풀 것 같다며 서둘러 걸음을 옮기던 한은 지하로 향하는 에스컬레이터에 올라탔다. 바로 그 뒤로 신우와 정현이 에스컬레이터에 타는 걸 본 한은 지하 표지판을 살피다 왼쪽을 가리켰다.

“저기에 마트 있다.”

“와, 늦게까지 하네?”

닫았으면 편의점 가려고 했는데, 라는 정현의 말에 한이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서며 받아친다.

“야간 개장하잖아.”

“아, 맞다.”

어쩐지 라며 정현이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서 왼쪽 길로 향하자 신우와 한 역시 정현의 뒤를 따랐다.

스키 시즌이라서인지 지하 상점가는 늦은 시간임에도 꽤 붐볐다. 노래방뿐 아니라 게임 센터와 치킨 가게 등등. 사람들이 꽉 들어찬 상가를 지난 세 사람은 마트로 들어가 바구니를 챙겨 들었다. 그러곤 곧장 냉장고 앞으로 가 맥주들을 쭈욱 훑었다.

“맥주, 캔으로 살까? 병으로 살까?”

사람 수가 있으니 병이 나을까, 하고 정현이 묻자 한이 딱 잘라 답한다.

“캔.”

“안 말 거야?”

“안 말아. 그냥 캔으로 사.”

소맥을 말려는 게 분명해 한이 단호히 답하며 냉장고를 열자 정현이 입술을 삐죽인다. 대충 소주를 넣어 말려고 했는데 망했다는 의미였다.

그걸 눈치챈 신우가 웃으며 냉장고 안을 살피다 한에게 한쪽 칸을 가리켰다.

“여기, 지역 맥주가 많네?”

“요즘은 지역마다 나오니까. 대형 마트에도 다 들어오긴 하는데…… 그래도 온 김에 종류별로 마셔 볼까? 에일류라 가벼울 거야.”

제주도 맥주는 많이 마셔 봤지만 강원도 맥주는 처음이라 신우가 좋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한이 진짜 맥주를 종류별로 골라 바구니에 담았다. 그러곤 곧 돌아서려는데 정현이 한의 팔을 잡아 말린다.

“야야, 그럴 거면 차라리 맥주 말고 막걸리 마시자. 막걸리는 대형 마트에도 잘 안 들어오잖아.”

최근 막걸리에 맛을 들인 정현이 맥주 칸 옆의 막걸리를 가리킨 순간, 바로 뒤에서 빽 하는 높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짜 술 안 마신다니까!”

고요한 마트 안에 퍼지는 높은 목소리에 세 사람이 동시에 뒤를 돌아보자 바로 뒤에서 휴대폰을 든 채 이쪽 냉장고를 향해 오는 지수가 보였다.

연이은 우연에 얼떨떨한 얼굴을 한 세 사람이 그를 쳐다보았다가 곧장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동시에 그가 든 바구니 안에서 굴러다니는 소주병까지 보고 말았다.

술을 안 마신다는 조금 전 말과 전혀 다른 광경에 세 사람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자, 지수가 어서 비키라는 듯 고갯짓을 한다.

“아…… 어? 아냐, 아냐. 잠깐 누가 스쳐 가서……. 아냐, 아냐. 네가 술 못 마시게 하라고 해서 다들 난 안 먹여. 나 진짜 금주령 걸렸단 말야. 안 마셔, 안 마셔! 진짜 안 마셔!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다 야간 스키 타러 가서 나 혼자 있는데 마시긴 뭘 마셔? 내가 아무리 술을 좋아해도 놀러 와서 혼자 소주 빨고 있겠냐?”

빨 것 같다, 라고 지수를 제외한 세 사람은 동시에 떠올렸다. 이미 바구니에 소주를 세 병이나 넣고도 태연하게 냉장고에서 지역 막걸리를 종류별로 꺼내 넣는 지수는, 말과 행동이 완벽하게 다른 유형의 사람이었다.

“아, 진짜 아니라니까. 술 마시면 내가 윤지수가 아니라 윤개수다!”

당당하게 막걸리를 바구니에 넣은 그가 패기 넘치게 소리치는 말에 옆에 있던 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윤개수 맞는 것 같은데…….”

나름 작게 한다고 한 말이었지만 마트 안이 텅 빈 탓에 그 소리는 꽤 크게 울려 왔다. 신우가 당황해 왜 그러냐고 한을 올려다본 순간 지수가 당황해 한을 돌아보며 고개를 사정없이 내저었다.

“아냐, 아냐! 모르는 사람이야! 아니라니까! 아, 진짜 아냐! 나 술 안 마셔! 안 마신다고! 야…… 아, 안 돼! 오지 마! 오지 마! 우리 회사 여행에 네가 왜…… 어? 야!”

갑자기 찾아든 정적에 휴대폰을 내려다보던 지수가 순식간에 하얗게 질린 얼굴로 작게 읊조렸다.

“씨발, 난 죽었다.”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지만 상대가 술을 마시지 말라고 한 거면 그 술병만 다시 냉장고에 넣으면 될 텐데, 라고 신우는 떠올렸다. 하지만 정작 지수 본인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야, 너 때문에 얘가 알았잖아! 어쩔 거야?”

너 때문에 다 망했다는 지수의 원망에 한은 침착하게 현 상황을 완벽하게 타개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럼, 다시 넣으세요.”

“안 돼! 나 일주일이나 술 못 마셨단 말야! 안 되겠다. 가자, 너희 방 어디야?”

“우리 방은 왜요?”

“너 때문에 걸렸으니까 네가 책임지라고. 얘 지금 내려온대. 술 마시다 걸리면 나 죽어. 야, 빨리 가. 빨리.”

“그럼 술을 안 마시면 되잖아요.”

“겨우 여기까지 도망 왔는데 어떻게 술을 안 마셔? 이 자식이 회사에까지 금주령 걸어 놔서 아무도 나한테는 술을 안 준단 말야!”

다급히, 마치 사고를 쳐 놓고 주인에게 들킬까 낑낑거리는 강아지처럼 안달하던 지수가 한의 등을 떠밀자 한이 그제야 알겠다는 듯 중얼거린다.

“……역시 사장이 오라고 해서 온 게 아니라 술 마시러 온 거군요.”

“씨발, 알 게 뭐야? 빨리 가! 빨리! 나 걸리면 죽어!”

지수는 나름 온 힘을 다해 밀었지만 불행히도 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힘을 주는 것도 아닌 그냥 그대로 서 있는 것뿐이었지만 마치 벽을 미는 듯 한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그런 한을 지수가 원망스럽다는 듯 바라보자 한이 지수에게 모두가 행복할 수 있는 최선의 절충안을 제시했다.

“형이 지금 하실 일은 술병 들고 우리 방으로 도망가는 게 아니라, 그 술병을 모조리 냉장고에 넣어 두고 얌전히 짐 싸서 서울로 올라가는 거예요.”

그럼 모든 게 해결된다며 한이 어서 술병을 도로 넣으라는 듯 오른손 검지로 냉장고를 가리키자 입을 꾹 다문 지수가 잠시 한을 빤히 응시하더니, 이내 다시 물어 왔다.

“너, 나한테 잘못했냐, 안 했냐?”

“…….”

“나한테 미안하냐, 안 미안하냐?”

“……그건 6년 전 일이고 지금 이 문제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데요?”

“너한테는 6년 전 일이라도 나한테는 어제 일처럼 생생해. 그러니까 나한테 미안하면 사죄의 뜻으로 방 빌려줘. 빨리 가, 빨리!”

이거고 저거고 상관없으니 좀 살려 달라고 지수가 낑낑거리며 한을 밀자 한이 슬쩍 신우를 돌아보았다. 그러고는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더니 이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뭐…… 그때는 제가 좀 심하긴 했으니까…… 가죠.”

“키야~ 이 맛이야~.”

살려 달라며 기어이 일행을 따라 콘도로 온 지수가 방에 들어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은 술병을 따는 거였다.

술 때문에 도망 오고도 술을 마시며 환하게 웃는 그 얼굴에 냉장고에 있던 바비큐를 꺼내던 한이 뭐 저런 게 다 있나, 하는 얼굴로 지수를 쳐다본다.

“선배가 이러니까 아까 전화하던 사람이 술을 못 마시게 하는 거예요.”

“그 자식은 그냥 내가 한다면 다 싫어하는 거야. 야, 야, 그러지 말고 같이 마시자. 술은 같이 마셔야 맛이지~. 앉아, 앉아. 인재야, 이리 와. 그리고 거기 쪼끄만 애랑 얌전한 애도.”

술잔을 든 채 손을 까닥여 일행을 부르는 지수는 딱 50대 아저씨 같았다. 얼굴은 상큼한 미인이지만 하는 짓은 어지간한 아저씨보다 더 아저씨 같았다.

저런 게 진짜 깼다고, 떠올리며 한은 인상을 썼다.

“빈속에 술 먹이지 마세요. 저흰 아직 저녁 전이에요. 신우야, 샤워하고 나와. 근육 뭉쳤을 수도 있으니까 욕조에 들어가.”

“아냐. 나도 도와줄게. 먹고 하지, 뭐.”

한이 중간중간 계속해서 먹여 댄 덕에 그렇게 배가 고프지는 않았다. 그러니 느긋하게 식사 준비나 돕겠다며 신우가 주방으로 다가가자 한이 고개를 내젓는다.

“요리는 인재랑 내가 할 거야. 정현이 넌 짐 좀 정리하고 신우 넌 씻고 나와. 여행 와서 애인한테 요리시키면 우리 할아버지한테 혼나.”

그 말에 어쩔까 잠시 망설이던 신우가 곧 고개를 끄덕이자 식탁에서 술을 마시던 지수가 짓궂게 말을 던진다.

“야, 좋을~ 때다~. 부럽다, 커플.”

“조용히 하고 술이나 드세요. 안 그러면 내쫓을 겁니다.”

“아, 알았다, 알았어. 불청객은 닥치고 술이나 마실게.”

한이 뭐라고 구박을 하든 술만 있으면 행복하다는 듯 웃고 있는 지수를, 신우는 신기하다는 듯 바라봤다. 첫인상도 괴상했지만, 그 뒤로는 더욱 기이한 남자였다. 다른 건 둘째치고라도 오래전 만났던 남자를 폴로 내리치는 것도, 또 급한 사정이 있다며 그 남자의 방까지 쫓아와서는 혼자 앉아 술을 마시는 것도, 자신으로서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라 지수가 진심으로 신기해 보였다.

저런 사람이 실제로 있구나 하는 얼굴로 신우가 빤히 지수를 바라보고 있자, 옷을 갈아입고 주방으로 온 인재가 신우에게 어서 들어가 보라는 듯 고갯짓을 했다. 그 신호에 신우가 침실 쪽으로 사라지자 느긋하게 술잔을 비우던 지수가 냉장고에서 재료를 꺼내는 한에게 말을 걸어 왔다.

“너 쟤한테는 존나 잘해 준다? 나랑 올 때는 내 가방도 안 들어 주던 놈이 아까 보니 내내 쟤 보드 들고 다니던데?”

“선배야 보드 하나가 아니라 열 개를 들어도 될 정도로 튼튼하니까요.”

비꼬는 듯한 그 말에도 지수는 좋다며 낄낄거리고 웃었다.

“내가 좀 강골이긴 하지. 그런데 어떻게 만난 거야? 되게 얌전하네? 어떻게 딱 네 취향으로 찍어 낸 애를 찾아냈냐?”

낮에 길길이 날뛰던 기세는 어디 가고 적당히 술이 들어가자 기분이 풀린 듯 지수는 친한 후배를 대하듯 한과 대화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지수와 달리 인재는 전혀 편하지 않았다. 모르면 행복했을 사실을 알아 버린 이상 도저히 마음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대로 있어도 되는 건가 하며 막 상추를 씻던 인재가 한을 힐긋 돌아보자 한이 느긋하게 답한다.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지난봄에 다시 만났고요.”

“아하, 그래? 어쩐지 스스럼없더라.”

“형만큼 스스럼없으려고요. 남의 방에 무작정 밀고 들어와서 너무 편한 거 아니에요? 막말로 우리가 잘 알고 지내던 선후배 관계도 아니고, 일주일 사귀다 헤어진 관곈데 자세가 너무 편하시네요.”

의자 등받이에 기대앉아 왼쪽 팔은 등받이에 걸치고 오른손으로는 술잔을 쥔 채 오른쪽 다리를 접어 의자 위에 올린, 지수의 과하게 편안한 자세를 한이 지적하자 지수가 손을 휘휘 내젓는다.

“에이, 뭘 쪼잔하게 그런 걸 따지고 그래? 좋은 게 좋은 거지. 술 한 잔에 다 풀어지는 게 인생사로다~.”

막걸리 잔을 든 채 당장이라도 누울 것 같은 그의 모습에 한은 긴 숨을 내뱉었다.

“……여전히 이상하고 여전히 아저씨 같으시네요.”

역시 빨리 헤어지길 잘했어요, 라는 말이 입가에서 간질간질 맴돌았지만 애써 그 말을 참아 낸 한은 콘도에 있던 그릇들을 일일이 끓는 물에 넣어 소독하기 시작했다. 그 사이 방에서 짐 정리를 끝낸 정현이 슬그머니 주방으로 들어와 지수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아까는 인사도 제대로 못 드렸는데, 한이 친구 유정현이라고 합니다.”

생글생글 웃으며 정현이 연장자에 대한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네자 그가 환하게 웃으며 손을 까닥인다.

“아, 그래. 쪼끄만 애. 한이 친구답지 않게 착하네?”

“네. 저놈보다야 착하죠. 그런데 진짜…….”

라고 말을 흐린 정현이 지수의 옆모습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미인이시네요. 특히…… 옆모습이…….”

‘옆모습’을 유독 강조하는 정현의 말투에 인재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너 샤워 안 해도 돼?”

“어? 안 도와줘도 돼? 나 도와주러 온 건데?”

“여긴 우리 둘이면 돼. 빨리 씻고 나와. 나와서 교대해.”

“어라? 그래? 난 도와주려고 했는데…… 둘이서 충분하다니, 그럼 나 씻고 나올게. 좀 이따 봐.”

손을 흔드는 정현의 입가에 걸린 사악한 미소에 인재는 순간 당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쩐지 갑자기 나타나 지수를 보고 인사를 하더라니 일하기 싫어서 빠져나갈 길을 모색한 거다. 한 덕에 오래 알고 지내기는 했지만 정현이 정확히 어떤 성격인지 몰랐는데 이제는 확실히 알 것 같았다.

앞으로 정현과 엮이는 건 조심해야겠다고 떠올린 인재는 이를 악문 채 쌈 채소들을 씻어 바구니에 담았다. 그런 인재를 옆에서 유심히 지켜보던 한은 이해가 안 간다는 듯 그에게 대놓고 물었다.

“너, 유정현한테 약점 잡힌 거 있냐?”

“아니.”

“그런데 왜 그냥 들어가래?”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라는 생각에 인재가 불만스러운 듯 한을 돌아보자 한이 어깨를 으쓱한다. 분명히 인재가 왜 그랬는지는 알고 있지만 그게 나랑 무슨 상관이냐는 그 뻔뻔한 제스처에 인재가 뒤에 앉은 지수를 신경 쓰며 작게 물었다.

“그러는 넌 왜 안 잡았는데?”

“네가 저놈 일까지 다 할 거니까.”

라고 말하며 한은 양상추와 오렌지, 그리고 자른 과일이 담긴 팩을 인재에게 건넸다. 그건, 샐러드를 하라는 의미였다.

“너, 나중에 나 좀 보자.”

“얼마든지.”

씨익 웃으며 과일을 건넨 한은 수저를 끓는 물에 넣고는 오븐을 확인했다. 사정 다 알면서 모른 척하는 게 분명한 한의 태도에 인재는 내가 다시 이 자식들하고 어디 오나 봐라, 하고 후회했다.

하지만 후회는 후회고 일단 일은 해야 했기에 한이 건넨 양상추를 물에 담그곤 부지런히 손을 움직였다.

그렇게 아주 요란하고 피곤한 밤이 시작되었다.

오븐에서 꺼낸 바비큐와 간장에 재운 닭 날개 구이, 그리고 소시지와 간단한 과일 샐러드에 쌈 채소들을 늘어놓은 테이블은 꽤 그럴듯해 보였다. 식사를 겸해 그간 바빠 못 했던 이야기들을 하려 아예 거실 쪽에 음식을 차려 놓고 바닥에 둘러앉은 다섯 사람은 각자 손에 맥주 캔을 든 채 천천히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분위기 자체는 좋았다. 예상하지 못한 불청객이 한 명 끼긴 했지만 모인 이들 모두 적당히 눈치 있고 적당히 사회성 있는 사람들이라 초면이라도 별문제 없이 즐거운 분위기 속에서 술자리가 이어졌다.

문제는 정현의 이상한 태도였다. 맥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누다가도 정현은 이따금 지수와 신우를 힐끔거렸고, 그럴 때마다 인재는 제발 그만하라는 얼굴로 정현을 노려봐야 했다.

“술, 진짜 잘 드시네요.”

지수가 혼자 세 번째 막걸리병을 비웠을 때 신우는 진심으로 감탄한 듯 그렇게 중얼거렸다. 막걸리 세 잔이면 쓰러지는 신우에게 지금의 지수는 누구보다 위대해 보였다.

“그동안 못 마신 복수지. 그 자식이 술을 못 마시게 해서 일주일이나 금주했단 말야. 거기다 회사 사람들한테도 협박해 놔서 못 마시게 하고 친구들도 다 내 전화는 안 받아서 술은 입에도 못 댔어.”

‘그 녀석’이라고만 했지만 그 어감이 묘하다고, 신우는 생각했다. 짜증스러운 듯한 말투에서도 애정이 묻어나는 느낌에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애인…… 이요?”

“응. 겁나 잔소리 많고 시끄러워. 나 술 마시는 거 싫어해서 손도 못 대게 한다니까?”

“그럴 만하죠.”

한이 그 이름도 얼굴도 모를 남자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다고 고개를 끄덕이자 지수가 한을 걷어찬다.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보면 알죠. 그 사람한테 잘하세요. 형이랑 사귀는 거 보니 그 사람 생불인 모양인데, 그런 사람 드물어요.”

“네가 그런 말 할 처지냐? 날 그렇게 물 먹여 놓고?”

“그래서 헤어진 거잖아요. 전 입으로는 술 안 마신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손으로는 술 고르는 사람하고는 만나고 싶지 않거든요. 누군지 몰라도 형 애인은 열반에 백 번은 다녀왔을 겁니다.”

아마 죽으면 몸 안에서 사리가 몇천 개는 쏟아질 거라는 한의 장담에 지수가 인상을 찌푸렸다.

“네 애인이 예뻐서 내가 좋은 마음으로 옛날 일 용서해 주려고 했는데, 자꾸 내 신경 건드려라?”

“애초에 그 얘기를 갖고 사과니 뭐니 하는 게 웃긴 거죠. 몇 년 전 일인데, 그게.”

“몇 년 지났다고 있던 일이 없던 일이 되냐? 내가 네 애인 익스트림 코스에 데려가서 혼자 두고 내려와 볼까?”

“신우야 제가 데리고 내려오면 되지만 형은 어떻게 내려오려고요? 이번엔 정비차 타고 내려오시려고요?”

“아악! 말하지 마! 나의 흑역사를 밝히지 마!”

묘하게 친근한 분위기로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을, 신우는 담담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하지만 표정과는 달리 기분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아까까지는 괜찮았는데 친한 친구처럼 편안히 서로를 대하는 두 사람을 보고 있자니 조금 기분이 어수선해졌다. 표면적으로는 말싸움을 하는 것 같아 보였지만, 지수는 짜증을 내면서도 유쾌하게 대화를 이끌었고 한도 유난히 시비조로 말하고 심술을 부리면서도 내내 웃고 있었다,

그걸로 두 사람이 사귀었을 때의 분위기를 대강 알 것 같았다. 겨우 일주일이었다지만 아마 사귈 때도 이런 식이었을 거다.

서로 할 말 다 하고, 때리고 걷어차기도 하고, 그러면서도 배시시 웃으며 사랑스러운 듯 바라보고.

자신과의 연애와는 또 다른 그 느낌에 신우가 뭔가 울컥하는 기분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자 한이 고개를 들어 이쪽을 바라본다. 자신의 표정을 살피는 듯한 그 눈빛에 신우가 어색한 얼굴로 웃으며 다시 고개를 숙이자 한이 순간 아차 한 얼굴을 한다.

이게 아닌데, 라는 듯 표정을 굳힌 한은 그 순간 재빨리 말을 돌렸다.

“그런데 형 슬슬 안 가 봐도 돼요? 애인이 저랑 같이 있는 거 알면 나중에 더 화내지 않겠어요?”

한이 이제 그만 가라는 말을 돌려 하자 이번엔 소주병의 뚜껑을 딴 지수가 소주잔에 술을 따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너랑 있는 게 왜?”

“저 나름 전 애인이잖아요. 애인이 화낼 것 같은데요?”

“그게 왜?”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단숨에 잔을 비운 지수가 되묻자 한이 잠시 말을 끊었다 이었다.

“……애인이 되게 무신경한 모양이군요.”

“그거 신경 써야 하는 거냐?”

“……보통은 신경 쓰죠.”

그렇게 작게 중얼거리며, 한은 다시 신우를 돌아보았다. 안절부절못하며 초조한 듯 이쪽을 살피는 그 시선에, 신우는 한이 지금 상당히 자신에게 미안해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안타까운 모습이긴 했으나, 좀 미안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원혁과 한을 마주치게 만들기는 했지만 이렇게 한 방 안에 앉아 같이 술을 마시게 하지는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조금 부아가 치미는 듯해 다 마신 캔을 내려놓고 열심히 혼자 술을 마시고 있던 지수에게 말을 걸었다.

“저도 한 잔 주세요.”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듯 굴려 했지만 그래도 조금 입매가 떨리는 느낌이었다. 모르긴 해도 지금 자신의 미소가 상당히 부자연스러웠을 거라는 생각을 하며 손을 뻗자 그가 반색하며 빈 소주잔 중 하나를 건넸다.

“와, 너도 술 마셔?”

“네.”

“너 같은 애는 술도 안 마실 줄 알았는데. 잘됐다. 마시자, 마셔. 술은 같이 마셔야지.”

소주병을 소중히 끌어안고 있던 그가 신우를 보며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웃었다. 그러곤 곧 잔에 한가득 소주를 따라 준다.

“자, 짠! 너희는 안 마시냐?”

지수가 술병을 흔들며 맥주 캔을 손에 든 세 명에게 묻자 정현이 캔을 내려 두곤 재빨리 소주잔을 들어 올린다.

“저도 주세요.”

“너 마음에 든다. 아까부터 이상하게 마음에 들었다니까, 너.”

역시 사람은 첫 느낌이 중요한 거라는 지수의 말에 한은 왜 지수가 정현을 마음에 들어 하는 건지 정확한 이유를 알려 줬다.

“둘이 동족이니까요.”

“동족? 얘도 술 좋아해?”

“술 쪽 말고 성격이요.”

둘 다 아주 오묘하게 지랄이라고, 한이 말이 아닌 표정으로 의중을 내비치자 지수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린다.

“너, 아까부터 자꾸 성격, 성격 하는데 내 성격이 어때서?”

“아주 이상하죠. 형하고 사귀기로 하고 딱 한 시간 만에 후회했으니까요.”

맥주를 다 마신 뒤 빈 캔을 구겨 쓰레기통에 넣은 한이 던진 폭탄에 지수가 술잔을 들려다 다시 내려놓는다.

“아, 갑자기 술맛 떨어지네? 멀쩡히 담배 피우고 있던 사람한테 달려와서 ‘나랑 사귀어 볼래요?’한 놈이 누군데?”

“저였죠.”

“그래, 너야. 네가 먼저 고백했어. 난 그때 그냥 거기에 서서 담배만 피우고 있었을 뿐이라고.”

그래서 네가 나한테는 횡액 덩어리인 거라고, 지수가 소리치자 한이 뻔뻔하게 받아친다.

“어쨌든 형도 오케이 했잖아요.”

“그건 네가 하도 박력 있게 달려드니까 그랬지. 너 그때 나한테 뭐라고 했는 줄 알아? 내가 기가 막혀서 이건 또 웬 미친놈인가 싶어 보고 있는데 절실하게 그랬잖아. 지금 놓치면 평생 후회할 것 같아서 그런다고. 내가 그 말에 넘어가서 너한테 그 수모를 다 당하고 결국 스키장까지 와서 안전 요원한테 업혀 간 거잖아!”

이번 이야기는 좀 강했다. 아니, 아주 강했다.

차갑고 날카로운 뭔가가, 그래, 딱 폴 같은 게 가슴을 후려치고 지나가는 느낌에 신우는 자신의 얼굴이 딱딱하게 경직되는 것을 느꼈다. 표정 관리가 되지 않고 있었다. 그게 생생히 느껴져 일부러 시선을 피하려 단숨에 소주를 넘기자 입 안으로 독하고 쓴맛이 퍼졌다.

이상하게 오늘따라 술맛이 쓰다는 생각에 살짝 인상을 쓰자 순식간에 거실 안의 분위기가 조용해졌다. 갑자기 가라앉은 그 분위기에 아차 싶어 억지로 웃으며 고개를 들자 한이 이쪽을 보곤 다시 지수를 돌아봤다.

그러고는 천천히 그에게 말을 건넸다.

“뭐, 이제야 하는 얘기지만…… 아니, 저도 얼마 전에 안 건데 그때 선배 옆모습이 참 예뻤어요. 담배는 좀 깼는데, 난간에 기대서서 커피 마시면서 웃는 옆모습이 굉장히 예뻐 보였거든요. 이마에서 코로 흐르는 선이나 입술이, 제 첫사랑하고 똑 닮았더라고요.”

아주 구체적인 한의 묘사에 순간 뭔가가 신우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왜 그 사람하고 사귀었을까 잘 생각해 봐.’

겨울, 난간, 그리고 커피.

그제야 한이 하려고 했던 말이 뭔지, 왜 지수를 보고 생각해 보라고 한 건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동시에 이 사람을 이 콘도 안에 초대한 이유 역시 알 것 같았다.

자신이 한을 닮은 남자를 찾고 끌렸던 것처럼, 한 역시 자신을 닮은 사람을 찾고 있었다는 걸 말해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물론, 방식은 과격하고 이기적이었지만 그가 뭘 말하고 싶어 한 건지 정확히 이해가 갔다.

그런 거였구나, 라고 드디어 한이 낸 수수께끼를 푼 순간 인재와 정현이 일 났다는 얼굴로 이마를 짚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사이 비워진 잔에 다시 술을 따르던 지수가 한과 자신을 번갈아 보다 갑자기 뚝하고 동작을 멈췄다.

“……아…… 어…… 그러니까…… 내가 네 첫사랑을 닮았다고?”

얼떨떨한 얼굴을 한 지수가 한에게 그렇게 묻자 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옆모습이 완전히 똑같아요. 그때는 저도 의식하지 못했는데 첫사랑을 다시 만나 보니 제가 만난 사람들이 다 그 사람을 닮았더라고요. 어떤 사람은 목소리가, 어떤 사람은 말투가, 어떤 사람은 눈빛이, 그리고 어떤 사람은 옆모습이요. 그때 난간에 기대 커피를 마시는 형 옆모습이 진짜 그 녀석하고 너무 닮았었거든요. 그래서, 처음엔 그 녀석인 줄 알고 놀라서 달려갔던 것 같아요. 아, 이번에는 놓치지 말아야지, 이번에야말로 꼭 잡아야지, 하고.”

말은 지수에게 하고 있지만 한의 시선은 흔들림 없이 신우를 향한 채였다. 그 시선에서 그가 이르는 ‘첫사랑’이 누구인지가 너무나 명백하게 보여 신우는 민망한 듯 살짝 고개를 숙였다. 누구라도 눈치챌 수밖에 없는, 당황스러울 정도로 노골적인 그 표현에 지수가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소주병을 내려 두곤 다시 신우를 바라봤다.

“내가, 얘랑 닮았다고?”

손가락으로 본인과 신우를 번갈아 가리킨 지수의 물음에 이마를 짚고 있던 인재가 이젠 될 대로 되라는 얼굴로 솔직하게 답했다.

“똑같아요, 옆모습은. 진짜 놀랄 정도로 닮았는데, 모르셨어요?”

“내가 내 옆모습을 봤어야 알지! 난 사진도 잘 안 찍는 사람이야!”

확실히 그건 그렇다고, 정현과 인재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의 옆모습을 찍어서 두고두고 보는 사람이 아닌 이상, 정면 얼굴은 자주 봐도 옆모습은 볼 일이 거의 없으니, 잘 모를 만도 하다. 아마 그래서 신우도 눈치채지 못했을 거다.

“그러니까…… 지금 내가 얘랑 옆모습이 닮아서 네가 담배 잘 피우고 있는 나한테 와서 수작을 걸었고 난 호구처럼 거기 넘어가 사귀었는데…… 내가 쟤랑은 성격이 전혀 달라서 일주일 뒤에 날 스키장에 데리고 와서 고급 코스에 버리고 갔다는 거야?”

마치 말 안 듣는 애를 오지에 갖다 버리듯 일부러 스키장까지 와서 그러고 간 거냐는 지수의 물음에 한이 다시 지수를 보며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그건 확실히 해 두죠. 형이 얘를 닮아서 사귀자고 한 건 맞고, 성격이 완전히 달라서 실망한 것도 맞지만, 그래서 스키장에 버리고 간 건 아니에요. 전 원래 스키장에서는 혼자 놀아요. 운동하러 왔으면 운동만 하고 가거든요. 그건 확실히 정정.”

“그게 그거잖아!”

“전혀 다르죠.”

결과는 마찬가지지만 하여간 전혀 의도한 바는 아니었다고 한은 확실히 못을 박았다. 그러나 지수에겐 그게 그거나 마찬가지였다.

“아무래도 너 오늘 좀 맞자! 너 나한테 좀 맞아야겠어!”

옷소매를 걷어 올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지수가 재빨리 테이블을 지나 한에게 달려들자 그 순간 서로를 바라본 인재와 정현이 한의 옆으로 달려가 한의 양팔을 각각 잡았다.

“뭐야? 너희?”

양쪽에서 온 힘을 다해 어깨를 잡아 누르는 친우들의 모습에 놀란 한이 두 사람을 돌아보자 정현이 한의 팔을 끌어안은 채 지수를 재촉했다.

“저희가 잡아 드릴 테니 때리세요. 이 자식은 좀 맞아야 돼요. 아무리 생각해도 얘가 잘못한 거예요.”

“형, 빨리 때리세요!”

한이 마음만 먹으면 두 사람을 밀쳐 내는 건 일도 아니라는 걸 알기에 인재가 다급히, 어서 때리라고 소리치자 지수가 한의 뒤로 와 소매를 걷어 올린 채 오른손을 턴다.

“오냐. 그래, 내 온 힘을 다해 스매싱을 날려 주마.”

살벌한 지수의 음성과 황당한 상황에도, 이번만은 신우도 도저히 지수를 말릴 수 없었다.

어떤 이유든 그 이야기를 지수의 앞에서 한 건 한이 경솔했다. 아무래도 자신의 기분이 안 좋은 걸 알고는 풀어 주려 일부러 그런 것 같은데…… 그래도 지수에겐 무례한 짓이었다.

아무리 호인이라도 상처가 됐을 수도 있는 말이라 그냥 맞아 주라는 듯 한을 바라보자 한도 그 정도는 각오한 듯 별 반항 없이 순순히 등을 내주었다. 오늘 밤 맞아 죽을 각오까지도 한 듯한 비장한 그 얼굴에 신우가 안쓰러운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 사이 한의 바로 뒤에 선 지수가 어깨를 풀며 팔을 붕붕 휘둘렀다.

“간다!”

그 말과 동시에 살짝 점프까지 한 지수가 스매싱하듯 팔을 휘두르는 모습에 신우는 아프겠다, 라는 생각을 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예감대로 바로 다음 순간 따악 하는 소음이 울려 왔다. 마치 뼈와 뼈가 부딪치는 듯한 그 딱딱한 소리에 움찔한 순간 바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한이 아닌 지수의 비명이.

“인대가 늘어난 모양이네요.”

한의 등을 후려친 뒤 바닥을 뒹굴며 비명을 내지르던 지수의 손목을 살펴본 한의 진단은 아주 단순했다.

손목 염좌.

기가 막힌 상황에 지수는 넋이 나간 얼굴로 한이 테이핑을 해 준 본인의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인대가 늘어났다고?”

“일단은요. 하지만 뼈에 금이 갔을 수도 있으니 일단 병원에 가 보세요. 뭐, 뼈에 금까지 갔을 리는 없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왜 내가 치고 내가 아파야 하는데?”

“그러게 평소에 운동 좀 하지 그랬어요? 형, 운동 전혀 안 하죠?”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네가 이상한 거잖아! 어떻게 사람을 때렸는데 바위를 친 것 같냐고! 네가 사람이야?”

“전 온몸이 다 근육이라서요. 거기다 강골이라 농구 할 때는 달려드는 놈이 오히려 튕겨 나갔으니까요. 어떻게 하실래요? 방에 가서 자고 내일 오전에 병원에 가실래요? 아니면 통증 심해질 수도 있으니 곧장 스키장 의료실에라도 가 보실래요? 스키 타다 다쳤다고 하면 봐 줄걸요.”

“둘 다 싫어!”

부상이 많던 선수 시절의 기억을 살려 꼼꼼하게 테이핑을 해 준 한이 구급상자를 정리해 들고 침실로 들어가자 소파에 드러누운 지수가 억울해 죽겠다는 듯 몸부림을 쳤다. 약이 잔뜩 오른 어린아이처럼 발버둥을 치는 그 모습에 신우가 괜히 미안해져 그에게 조심스레 말을 건넸다.

“인대라도 다친 건 다친 거니 조심하세요. 거기다 오른손이니까…….”

술잔을 드는 걸로 봐서 분명히 오른손잡이인데 불편하겠다 싶어 신우가 걱정하자 그제서야 본인이 다친 손이 오른손이라는 사실을 인지한 지수가 비명을 내질렀다.

“으악! 그러고 보니 오른손! 젠장! 연말 결산해야 하는데!”

이거 어쩔 거냐고 누운 채 발을 구르는 그를 보다 슬슬 시계를 확인해 보니 새벽 2시가 다 되어 가고 있었다.

어쨌든 이 사람도 일행과 함께 온 걸 텐데 말도 없이 여기에서 이러고 있어도 되나 싶어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동료분들께 연락 안 드려도 돼요? 걱정하실 것 같은데요.”

“알 게 뭐야? 술도 못 마시게 하고 자기들끼리 신나게 스키 타러 간 새끼들인데.”

“그래도 전화는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사원 여행인데 무단 이탈자가 나와도 되는 거냐고 묻자, 불현듯 뭔가 떠올랐는지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 보니 왜 그놈들 나한테 전화도 안 하지? 이 자식들 봐라? 날 찾지도 않아? 내 전화기. 전화기 어디 있어?”

“여기요.”

어느새 방에서 나온 한이 내민 휴대폰에 지수가 놀라 눈을 껌뻑인다.

“이걸 왜 네가 갖고 있어?”

“코트에서 떨어졌길래 챙겨 놨어요. 전화하세요.”

코트는 여기 있는데 왜 방에서, 라는 생각에 신우가 한을 바라보자 한이 모른 척 시선을 피한다. 그러곤 엉망이 된 테이블 위를 치우기 시작했다.

“야, 슬슬 잘 준비해. 벌써 2시야. 안 치우고 자면 내일 아침에 시간만 더 버려.”

진짜 일어나자마자 보드를 타러 나가려는 듯 한이 테이블 위를 치우라고 재촉하자 옆에 있던 인재와 정현이 주섬주섬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과 함께 신우 역시 빈 접시와 컵들을 정리하고 있는데, 문득 초인종 소리가 울려 왔다.

새벽 2시에 울리는 소리에 콘도 안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는 얼굴로 서로를 돌아보던 중 한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섰다.

“내가 열게.”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그 태도에 신우가 묻는다.

“뭐 시켰어?”

“시키긴 했지……. 받는 게 아니라, 보내는 거…….”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을 흘리며 현관으로 간 한은 곧 문을 열곤 바깥에 선 사람과 대화를 나눴다. 이 시간에 음식을 배달시켰을 리는 없기에 무슨 일인가 의아해하며 신우가 현관 쪽을 바라보던 사이 상대와 대화를 마친 듯, 한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리고 그 틈으로 검은색의 롱코트를 걸친 남자가 들어섰다.

한만큼이나 큰 키에 스키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정장 코트를 걸친 남자의 등장에 당황해할 틈도 없이 거실 안으로 들어온 남자가 다 치우지 못한 테이블을 보곤 인상을 찌푸렸다.

“결국…… 마셨군.”

굉장히 불쾌해하는 기색이 역력한, 박력 있는 남자의 중얼거림에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지수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려 가기 시작했다. 귀신이라도 본 듯 파랗게 질린 그 얼굴에 신우는 본능적으로 저 남자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아무래도 그 문제의 연인이 진짜 찾아온 모양이었다.

묘한 분위기에 방 안의 사람들이 그 남자와 지수를 번갈아 보자 지수가 사정없이 고개를 내저으며 빽빽 소리를 내질렀다.

“아냐! 아냐! 술 마신 게 아니라…….”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아니라고 소리치는 지수를 보며 신우는 ‘그건 진짜 아니에요.’라고 속으로 안타까워했다. 차라리 사실대로 말하는 게 나을 거라고 마음속으로 지수에게 충고하던 사이 한이 남자의 옆에서 미안한 듯 변명을 대신해 줬다.

“죄송합니다. 오랜만에 봬서 저희가 무리하게 술자리에 초대했습니다. 못 마신다고 하는 걸 억지로 같이 마시자고 했는데, 지금 술 마시면 안 된다는 걸 몰랐습니다.”

그럴듯한 한의 변명에 지수가 이번엔 목이 떨어져라 고개를 끄덕였다. 절대 자기가 잘못한 게 아니라고 주장하는 듯한 그 모습에 남자가 코웃음을 친다.

“저 녀석이 마시자고 한 게 아니라요?”

“우연히 마트에서 만나 저희가 초대했습니다. 다른 동료분들은 자리에 없다고 하시길래 같이 식사도 할 겸 해서요.”

한은 최선을 다해 지수를 비호했지만, 불행히도 남자는 한의 말을 전혀 믿지 않았다.

“좋은 후배군요. 대강 사정은 눈에 보이지만 그렇다니 그렇다고 믿어 드리죠. 일어나, 윤지수.”

낮은, 조금 화가 난 듯한 남자의 목소리에 지수가 남자의 눈치를 살피다 붕대를 맨 오른손을 들어 보였다.

“나 다쳤어.”

“……그래서?”

“아프단 말야. 인대 늘어났대. 뼈에 금 갔을지도 몰라.”

남자와 조금 거리를 둔 채 지수가 강아지처럼 눈을 축 늘어뜨리며 어리광을 부리듯 말하자 남자가 기가 찬다는 듯 웃으면서도 목소리에서 힘을 뺐다.

“망할 자식. 옷부터 입어. 지금 서울로 갈 테니.”

“지금?”

“너 때문에 잠깐 시간 내서 내려온 거야. 다시 올라가서 사무실 들어가야 돼. 자세한 얘기는 차 안에서 들을 테니 빨리 움직여.”

말투는 냉랭하지만 남자의 표정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귀엽다는 듯 지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타인이 보기엔 그 감정이 확연히 보였지만 불행히도 지수는 눈치가 굉장히 없는 듯했다.

“화났어?”

“술 처마시고 또 사고 친 건 아니니 됐어. 빨리 나와.”

턱짓을 하며 남자가 조금 누그러진 목소리로 그렇게 이르자 지수가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의자 위에 걸어 놓은 코트를 걸쳐 입었다. 그 모습을 확인한 남자가 다시 한을 바라보며 살짝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연락 주셔서 감사합니다. 만약 이 녀석이 또 술 마시고 사고 치면 연락 부탁드립니다. 눈만 떼면 말썽이라서요.”

“저희가 먼저 실수한걸요. 다음에 만나게 되면 절대 술은 안 먹이겠습니다.”

차분한 한의 답에 남자가 용건이 다 끝난 듯 마지막 인사를 남겼다.

“그럼, 이만.”

우아하기 그지없는 태도로, 예의 바르게 인사를 마친 그가 먼저 돌아서자 코트를 걸쳐 입은 지수가 폴짝거리며 달려가 남자와 팔짱을 끼곤 손을 흔들어 보였다.

“나중에 보자~.”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진 듯 방글방글 웃음을 흘리는 지수의 인사에 남아 있던 네 사람은 동시에 ‘안녕히 가세요.’라고 인사를 받아 줬다. 그러자 남자와 지수가 곧 현관문 밖으로 나서며 탕 하며 현관문이 닫혔다.

그와 동시에 거실 안으로 적막이 감돌았다. 드디어 고요해진 분위기에 그들을 배웅한 한이 문을 잠근 뒤 다시 거실로 들어서자 인재가 한에게 물었다.

“네가 저 사람 부른 거야? 어떻게?”

“휴대폰이 떨어졌는데 전화가 왔길래 슬쩍 안방으로 가서 대신 전화 받았지. 안 그러면 내일 집에 갈 때까지 옆에 붙어서 책임지라고 난리쳤을걸. 저 형 성격이면 서울 가서도 자기 애인한테 혼 안 나게 거짓말해 달라고 끌고 갔을 거야.”

확실히 그랬을 것 같다. 지수를 겨우 몇 시간 본 것만으로도 그러고도 남을 사람이라는 게 파악이 되었다.

“……저 형, 원래 성격이 그랬냐?”

“원래 뻔뻔하고 제멋대로야. 저 사람 애인은 생불이 아니면 불가능해.”

자신으로서도 감당이 안 될 지경이었다고 한이 혀를 내두르자 인재가 길게 한숨을 내쉰다.

“세상에 너보다 뻔뻔한 사람이 존재는 하는구나.”

“난 민폐는 안 끼쳐. 빨리 치우고 자자.”

한도 본인이 뻔뻔하다는 자각은 있는지 굳이 그 명제를 부정하지 않은 채 다시 부지런히 테이블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 움직임에 멈춰 있던 인재와 정현, 그리고 신우도 서둘러 그릇들을 정리하고 쓰레기들을 분리했다.

그렇게 요란하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그렇게 닮았어?”

거실을 정리한 뒤 침실로 들어왔을 때, 침대맡에 앉아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신우가 대뜸 묻자 한이 진짜 몰랐냐는 듯 되묻는다.

“몰랐어?”

“전혀.”

너무 미인이라 자기랑 닮았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신우가 강하게 부정하자 한이 어느 정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하긴, 자기 옆모습은 볼 일 없으니까. 그런데, 진짜 ‘옆모습’은 되게 닮았어. 나도 저 형 다시 보고 깜짝 놀랄 정도였으니까, 아마 정현이랑 인재도 단숨에 알아봤을걸. 아, 인재는 차에서 지수 형 얘기 나왔을 때부터 눈치챘을 거야. 지수 형 몇 번 봤으니까. 오래전 일이니 자세히는 아니라도 그 느낌은 기억했을걸.”

그래서 스키장에 도착한 뒤로 인재의 태도가 좀 이상했구나 싶어 신우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들은 훨씬 전부터 알아차렸다는데, 정작 당사자들은 서로를 닮은 사람을 찾아다니면서도 그 취향이 누구에게서 기인한 건지 왜 몰랐을까 싶어 웃음이 났다. 그러자 한이 바로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이래서 자각 못 한 첫사랑이 더 무서운 건가 봐. 모든 기준이 한 사람에게 맞춰지거든. 그러면서도 내가 누굴 찾는지도 모르고.”

“그러게.”

서로 아주 긴 시간을 돌아왔다는 생각에 신우가 옆에 앉은 한을 그리운 듯 바라보자 한 역시 지그시 신우의 눈을 들여다봤다. 그리고 조금 짓궂은 어조로 신우에게 물었다.

“너, 아까 좀 질투했지?”

역시나 기가 차게 그 순간을 포착한 한의 예리한 감에 신우도 솔직하게 답했다.

“응. 솔직히…… 기분 안 좋았어.”

“근데 어쩌냐? 난 기분 되게 좋았는데?”

쓸데없이 솔직한 한의 말에 신우는 살짝 표정을 굳혔다.

“그래서, 또 그럴 거야?”

“설마. 한 번 한 건 두 번 안 먹히지. 그리고 그 형 데려온 건 네가 그 형 보고 알았으면 해서 데려온 거야. 난간, 겨울, 커피, 그리고 옆얼굴. 그 정도면 힌트 충분하지 않아?”

질투하라고 데려온 게 아니라고, 한은 변명했지만 신우는 그 말을 믿기 어려웠다. 미안하지만 한에게 그런 의도가 전혀 없었다고 보기는 힘들었다. 적어도 자신에 관한 문제에 있어 세심한 한이 그런 상황을 예상치 못했을 리가 없다.

“그렇게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해도 나 아까 좀 마음 안 좋았어. 너랑 그 사람이랑 어떻게 사귄 건지 빤히 보여서 우울했다고.”

사귄 시간은 겨우 일주일뿐이었다지만 앉아서 티격태격하는 모습이 너무나 다정해 보였다고 신우가 그제야 불만을 쏟아 내자 한이 눈을 휘며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뭐, 그때도 어지간히 싸웠지. 지수 형 성격이 완전 애라 재미는 있었어. 하지만 사랑은 안 되더라. 가슴 한복판이 차가워서 진짜 애인이라기보다는 동네 친구 같았어. 딱 정현이랑 같이 있을 때의 기분이랄까? 무신경하기도 하고 성격이 워낙에 호탕하니까.”

이번 말에는 신우도 동의했다. 확실히 그런 느낌의 사람이었다. 말은 거칠지만 유쾌하고 통이 큰 사람 같았다. 뭐든 쉽게 쉽게 넘어가고 지나가면 신경 안 쓰고 술잔만 쥐여 주면 세상사 시름 하나 없는, 그런 성격인 듯 보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 형 앞에서 그런 얘기한 건 네가 잘못한 거야.”

“알아. 그래서 맞아 주고 애인까지 불러 줬잖아. 나중에 제대로 사과도 할 거야. 나도 그러면 안 된다는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아까 네 표정이 꼭 울 것 같아서 앞뒤 잴 여유가 없었어. 일단 벌여 놓고 봐야 했으니까. 그건 나도 반성.”

한이 선서하듯 오른손을 들어 보이며 잘못했다고 시인하자 신우가 신기한 듯 한을 들여다본다.

“너도 그런 실수를 해?”

“물론이지. 난 잘난 사람이지 완벽한 사람은 아냐. 실수도 하고 나쁜 짓도 많이 해. 특히 너랑 관련된 일이라면 괜히 조바심 내다 더 많이 실수한다고.”

진심이 담긴 그의 사과에 신우도 아주 잠깐 느꼈던 섭섭함과 질투는 조용히 묻기로 했다. 하지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히 해 둬야 할 것 같았다.

“이거 하나는 약속해 줘. 오다가다 네 전 애인들 만나는 건 어쩔 수 없는데 내 앞에서 너무 친하게 지내지는 마. 그럼 기분 안 좋을 것 같아.”

“앞으로는 절대 안 그래. 마주치면 개 닭 보듯 지나갈게.”

“그건 또 예의가 아니잖아. 너 그런 식으로 사람 무시하고 지나가면 상대가 상처받아.”

“알았어. 그럼 미안한 얼굴은 하고 지나갈게.”

아무래도 그게 최선이다 싶어 한이 절충안을 제시하자 그제야 신우도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이제 자자. 내일도 한 번 더 타려면 일찍 자야지.”

오늘은 아침부터 너무 피곤하고 이상한 일들이 많았다며 신우가 재빨리 침대 위로 올라가 베개를 베고 눕자, 바로 옆으로 다가와 누운 한이 신우의 어깨를 쿡 찌른다.

“그냥 자게?”

“응. 다른 건 꿈도 꾸지 마. 옆방에 인재랑 정현이 있어.”

두꺼운 이불을 끌어 올리며 옆으로 돌아누운 신우가 단호히 말하자 옆에서 같이 이불을 나눠 덮던 한이 생뚱맞은 질문을 던졌다.

“신경 써야 되냐?”

“당연히 신경 써야지. 그리고 나 오늘 피곤해.”

“맞다. 너 엉덩이는 괜찮아? 멍 안 들었어?”

그러면서 은근히 이불 속에서 엉덩이를 더듬는 손을, 신우가 툭 하고 쳐냈다.

“괜찮으니 걱정 말고 손은 치워.”

“알았어, 알았어. 그럼 그냥 안고만 잘게.”

말한 그대로 어깨와 허리를 끌어안는 한의 팔심에 신우도 저항 없이 한의 품에 안겨 들었다. 그러곤 곧 등 뒤에서 자신을 감싸 오는 기분 좋은 체온에 스르르 눈을 감자 한이 어깨에 턱을 댄 채 기대 왔다. 묵직한 무게감과 피부에 맞닿는 온기에 취해 의식을 놓으려는 순간 한이 문득 몸을 일으켰다.

“불 꺼야지.”

“응.”

손을 뻗어 사이드 테이블 위에서 조명 리모컨을 찾은 한이 막 방의 조명을 끈 순간, 창 너머를 본 신우가 놀란 듯 중얼거렸다.

“……눈 온다.”

그 말에 한 역시 놀라 창밖을 내다보았다.

“눈 온다는 말 없었는데?”

살랑살랑 춤을 추듯 내려앉는 새하얀 눈송이들을 보던 한은 이내 침대에서 내려서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곤 뚫어져라 창밖을 보다 이내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송이야. 내일까지는 안 내리겠다.”

올라가는 길이 걱정이었던 듯 길은 안 막히겠다고 한이 안도하며 말하자 신우도 침대에서 내려서 그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바로 한의 옆에 선 채 눈이 내리는 스키장의 풍경을 바라봤다.

검은 하늘 아래에서 가로등과 야간 조명의 불빛을 받아 반짝거리는 눈송이들은 눈이 아니라 빛 송이 같았다.

어둠 속에서 별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경이로운 풍경에 신우는 환하게 미소 지었다. 그 단아한 옆모습을 바라보던 한은 생생하게 떠오르는 어떤 기억에 아릿한 기분을 느꼈다.

어두운 새벽하늘 아래 옥상 난간에 기대선, 너무나 추워 보였던 한 소년의 모습이 다시 시야를 가득 채워 온다. 그 처연한 옆모습이 가슴속에 시리게 박혀 그 모습만을 찾아다녔던 것 같다.

그래서, 그 소년을 닮은 사람들을 만나 수없이 연애를 해 봤지만 그럼에도 늘 마음 한구석은 시렸던 것 같다.

아무리 닮았어도 그들은 그 소년이 아니기에, 허한 가슴을 채워 줄 수 없었다.

“다행이다.”

갑작스러운 한의 중얼거림에 신우가 옆을 돌아보며 물었다.

“뭐가?”

“너랑 다시 만나서.”

“뭐야? 갑자기?”

“그냥.”

사랑스럽다는 생각에 한은 충동적으로 신우의 머리를 끌어안고 이마에 입을 맞춰 주었다.

다행이었다.

신우도 자신도 평생 시린 가슴을 품고 살지 않게 돼서…….

- Snow Dance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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