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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 아침, 식사가 차려진 방 안은 활기찼다. 새벽 일찍 출근한 한을 제외한 집안사람들이 모여 앉아 식사를 하는데 말 많고 활달한 훈이 있어서인지 다른 때와 달리 환한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따사로운 분위기 속에서도 신우는 앉은 자리가 가시방석이라는 말을 몸소 체험하고 있었다.
“역시, 우리 집 김치가 최고예요. 어떻게 이렇게 맛있지?”
어젯밤 일은 완전히 잊은 듯, 훈은 아주 잘 먹고 잘 웃고 잘 떠들고 있었다. 아침에 일어나는 걸 좀 어려워하긴 했지만 윤이 깨우자 두말 않고 일어나 나왔고 밥도 벌써 두 공기째 비우는 중이었다.
훈이 티를 내지 않는 건 다행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자신은 훈의 얼굴을 보는 게 곤욕이었다. 지난밤의 기억이 너무 강렬했다.
“할아버지, 저 점심에 감자떡 먹고 싶어요.”
“감자떡 좋지. 점심 때 해 놓으라고 하마.”
“우리 집 음식 너무 맛있어요. 아, 신우 형 이거 드세요. 이거 진짜 맛있어요.”
라며 훈이 신우의 앞에 가자미찜을 들이밀었다. 갑작스러운 그 상황에 신우가 ‘응.’이라고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바로 살점을 뜬 훈이 신우의 밥 위로 고기를 얹어 준다.
“많이많이 드세요. 어젯밤에 고생하셨죠? 우리 형 힘이 장난 아니라 상대하기 힘들 거예요. 단백질 많이 드세요.”
그 순간 신우는 막 집어 들던 가자미를 떨어트렸다.
이건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기껏해야 시선을 피하거나 얼굴을 붉히는 정도일 줄 알았는데 훈이 이렇게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예상을 벗어나도 너무 벗어난 상황에 신우가 얼어 있는 사이 얌전히 있던 윤이까지 가세했다.
“형 새벽에 들어왔다면서 했어요? 와, 그 인간 기운도 좋아. 일주일째 철야하면서 힘이 남아돈대요?”
전혀 달갑지 않은 윤의 참견에 그런 거 아니라고 부정하려는 순간, 이번엔 한의 어머니까지 이 이상 상황에 말을 보탰다.
“너, 형한테 그 인간이 뭐야?”
“아, 실수. 난 등에 피멍이 들었는데 자기는 새벽에 들어와서 했다니 열 받잖아요.”
억울하다는 윤이의 중얼거림에 제발 더는 말하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듯 윤을 돌아보자 이번엔 할아버지까지 이 민망한 대화에 끼어드신다.
“뭐, 좋을 때 아니냐. 혼자 허벅지에 바늘 찌르는 것보다야 낫지. 그런 의미에서 너희는 결혼 상대 언제쯤 데리고 올래?”
할아버지까지 이러지 마세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꾹 참으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데 다행히도 어머님께서 대화의 방향을 틀어 주었다.
“아버님, 윤이는 아직 군대도 안 간 애예요. 훈이도 이제 막 사회 초년생이고요. 그러다 덜컥 사고라도 치면 어쩌시려고요?”
“사고야 치면 책임지면 그만이지. 책임도 못 질 사고를 치면 호적에서 다 파 버리면 그만이고.”
“애들한테 이상한 거 가르치지 마세요, 아버님. 아버님이 그러시니까 한이도 일단 뭐든 저지르고 보잖아요.”
“그놈은 날 많이 닮아 어쩔 수 없는 거고.”
그래서 아주 마음에 든다며 흡족해하시는 할아버지의 얼굴에 한이 어머님께서 막 뭐라고 하시려는 순간 훈이 다시 숟가락 위로 반찬을 얹어 준다.
“형, 많이 드세요. 이렇게 못 먹으면 우리 형하고 같이 못 살아요.”
분명, 훈이에게 악의는 없었다. 그건 확실히 알고 있다. 이 녀석은 그냥 착하고 순진한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젠 좀 그만해 줬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히 들었다.
제발 누가 훈이의 관심 좀 다른 쪽으로 돌려 달라고 마음속으로 기도하자 감사하게도 한이 어머님께서 또다시 대화의 방향을 돌려 주셨다.
“그러고 보니, 훈이 너 회사는?”
“응? 어, 다음 주부터 나가요.”
“이 근처라고 했지?”
다행히도 훈이의 출근 문제로 화제가 바뀌어 겨우 다시 젓가락을 움직이는데 훈이가 발랄한 얼굴로 갓김치를 먹으며 답한다.
“연구실은 이 근처라 전 거기로 나가면 돼요. 본사는 좀 먼데 난 어차피 연구원이니까.”
아, 연구실로 들어가는구나 하고 있는데 옆에 있던 윤이 문득 물었다.
“자동차는 뭘 연구하는데? 엔진?”
그 물음에 훈이 뚝 하니 젓가락질을 멈춘다. 그러고는 곧 울 것 같은 얼굴로 윤을 바라본다.
“나 로봇 공학으로 간다고 했잖아.”
“……그랬냐?”
“그래. 자동차 공학과로 가려다 로봇 공학과로 간다고 했잖아!”
그러고 보니 분명히 정현에게 훈의 전공이 자동차 공학과라고 들었는데 처음 만났을 때 훈은 본인이 로봇 공학 전공이라고 했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인가 의아해하며 윤을 바라보자 윤이 느긋하게 뭇국을 마시며 대꾸했다.
“그래? 그럼 그런가 보지, 뭐.”
“형!”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원망스럽다는 듯 바라보는 훈이의 얼굴에도 윤이는 태연했다.
“내 전공 아니잖아. 그래서 로봇 공학과는 뭘 하는데? 트랜스포머 만드냐? 아니면 아이언맨?”
“독거 노인을 위한 간병인 로봇 개발 중이라고 했잖아!”
“아, 그래? 좋은 일 하네.”
알게 뭐냐는 듯 무심하기 짝이 없는 윤의 답에 한의 어머님이 혀를 찼다.
“이러니 내가 너한테 한이랑 똑같다고 하지. 동생 전공도 몰라?”
“저한테 훈이 자동차 공학과로 간다고 전해 주신 거 어머니 같은데요?”
그 말에 어머니마저 입을 다물자 훈이 이번엔 놀란 얼굴로 어머님을 돌아본다.
“엄마도 나 자동차 공학과 간 줄 알았어?”
“……하여간 둘 다 공학이잖아.”
“엄마!”
“자동차나 기계나 로봇이나 만드는 건 마찬가지잖아. 아버님, 저 식사하고 한이네 회사에 좀 나갔다 올게요. 이 자식 아무리 생각해도 괘씸해서 제가 나가 봐야겠어요.”
울상을 한 훈이에게서 일부러 시선을 돌린 어머님의 말씀에 할아버지께서 빠르게 맞장구치셨다.
“그래. 차 내줄 테니 타고 갔다 와라.”
“기사랑 다니는 거 불편해요. 윤이 너 엄마 차 줘. 오늘 나갈 일 없지?”
“엄마 서울 오랜만이라 운전하기 힘들어요. 제가 모셔다드릴게요. 훈이, 너도 형 보러 갈래?”
“어제 봤으니 됐어. 오늘은 만들던 거 마저 만들래. 신우 형, 우리 형 작업실 있죠? 저 거기 좀 써도 돼요? 레고 조립하던 거 있는데.”
“응. 차고에 작업실 있어. 거기 쓰면 돼.”
한이 가끔 모형을 만들거나 이상한 짓을 하는 작업실이라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훈이는 괜찮을 거라는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옆에서 윤이 간섭한다.
“너 또 레고 조립한다고 처박혀서 며칠씩 안 나오지 말고 시간 맞춰서 밥은 먹어.”
“이제 밥은 잘 챙겨 먹어.”
윤의 구박 같은 걱정에 훈이 작게 대꾸하자, 이번엔 할아버지께서 윤이에게 물으신다.
“그러고 보니 윤이 넌 사무실 낼 생각은 없는 거냐?”
“저 아직 군대도 남아 있어요. 그리고 군 문제 아니라도 개인 사무실은 안 낼 거예요. 전 남의 밑에서 일하는 게 편해요.”
“사내가 어찌 그리 패기가 없누? 네가 사람을 부려야지, 남의 밑에서 일하는 걸 좋아해 어쩌려고?”
“전 형하고는 종자가 달라서 월급쟁이가 제일 편합니다. 송충이답게 솔잎만 먹고 안전하게 살려고요. 괜히 다른 잎 욕심내다 소화 불량 걸리긴 싫어요.”
“나중에 사무실 차려 달라고 울지 말고 차려 준다 할 때 잘 생각해. 친구들이나 선배들 모아서 크게 내도 좋고.”
“전 한이 형이 아니라니까요. 저보다 차라리 훈이한테나 투자해 주세요. 훈이는 특허도 많이 딸 텐데, 그거 팔아먹으면 되잖아요. 할아버지께서 투자만 해 주시면 로봇이든 차든 빨리 만들걸요.”
그 말에 훈이 시금치를 입에 문 채 질색한다.
“나도 싫어. 난 연구만 하는 게 좋아.”
고개를 사정없이 흔들면서도 시금치를 우물거리는 훈의 모습에 할아버지께서 잠시 훈이를 바라보다 작게 중얼거리셨다.
“꼭 풀 뜯어 먹는 북극곰 같구나.”
하얀 티를 입으니 진짜 북극곰이야, 라고 할아버지께서 덧붙이시는 말에 순간 웃음이 터져 재빨리 손으로 입을 가리자 이번엔 어머니께서 훈이를 보며 한숨을 내쉰다.
“너, 봄보다 더 컸지?”
어제 한이 했던 것과 비슷한 그 질문에 훈이 입술을 툭 내민 채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조금밖에 안 컸어.”
“조금은 무슨. 서 있으면 동물원에서 옷 입고 쇼하는 곰 같은데. 너 그래서 어디 장가나 가겠니?”
“한이 형도 장가갔다, 뭐.”
‘장가’라는 말에 놀라 숨을 멈춘 채로 있는데 어머님이 아무 거리낌 없이 대화를 이어 갔다.
“큰형은 너보다는 작잖아. 너 이대로 계속 크면 어쩌려고 그래? 첫날밤에 신부 깔아뭉개려고?”
“힘은 나보다 형이 더 세. 어젯밤에 신우 형 죽는 줄 알았단 말야.”
또다시 돌아온 화제에 막 목구멍으로 넘어가려던 밥이 기도에 걸려 버렸다. 순간 참지 못하고 컥 하는 이상한 소리를 내자 옆에서 윤이 물잔을 건네준다.
“형, 물 마셔요.”
목에 가시가 걸린 것 같은 느낌에 서둘러 물을 마시자 할아버지께서 느긋하게 시끌시끌한 아침상 위를 정리해 주신다.
“훈이가 설마 제 각시를 깔아뭉개기야 하겠니? 지가 북극곰이면 어디 가서 팬더라도 찾아오겠지.”
순간 하얀 털옷을 입은 채 귀여운 팬더와 손을 잡고 있는 훈이의 모습이 눈앞에 생생히 떠올라 마시던 물까지 걸려 버렸다. 기도에 걸린 물에 사레가 들려 컥컥거리고 있자 윤이 조용히 잔에 물을 더 채워 주며 대화에 끼었다.
“그거 진짜 어울리겠는데요?”
“내 전공도 모르면서 왜 자꾸 크다고만 뭐라고 해? 한이 형도 나 보자마자 더 컸냐고 밀어 냈단 말야.”
“그러니까 그만 커. 언제까지 크려고 해? 너 지금 2미터 넘지? 형 그거 알아요? 훈이 태어날 때 5.2킬로였던 거? 의사가 이렇게 큰 애 처음 본다고, 이 사이즈면 백일 된 아기 크기라고 난리였대요. 전 그때 기어 다닐 때라 기억 안 나는데 한이 형은 어릴 때지만 하도 충격적이라 생생히 기억한대요. 막냇동생이라고 해서 아버지 손 잡고 보러 갔는데 웬 원숭이들 사이에 백곰 새끼가 누워 있어서 기겁했다고요.”
겨우 사레가 안정되려는데 들려온 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그 이야기에 숨을 꾹 참고 있자 식사를 다 하신 할아버지께서 수저를 내려 두며 윤이의 말에 생생한 증언을 더해 주셨다.
“그뿐이냐? 애가 하도 커서 신생아 요람에 넣으면 다리가 삐져나와서 급히 침대로 옮기고, 기저귀도 작아 발목에 걸려서 신생아실에 2, 3개월 아기용 기저귀 사다 나르느라 네 아비가 고생 많았지. 게다가 먹기는 또 어찌나 많이 먹는지 다른 애들 세 배를 먹질 않나, 선물 들어온 아기 옷들은 아예 들어가지도 않아서 전부 다른 산모들한테 선물로 주고 윤이 옷 입고 퇴원했었지. 뭐, 그 뒤로도 쑥쑥 크더니 다섯 살 때 초등학생 덩치가 되더구나. 그 덩치로 인형 갖고 노는 모양새가 아주 볼만했지.”
빠르게 이어지는 해프닝들에 어제 한이 했던 얘기까지 떠올라 겨우 웃음을 참고 있는데 이번엔 어머님께서 옛날이야기를 풀어놓으신다.
“내가 우리 막내 데리고 다니면서 있었던 일 얘기하자면 끝이 없어. 놀이터나 놀이방에 가면 애들은 다 도망치지, 그래도 혼자 놀겠다고 뭐라도 타고 올라가면 다 떨어지고 부서지고 난리지. 그거 물어 주다 집안 거덜 날 판이었다니까. 거기다 저 덩치로 둔하기는 얼마나 둔한지. 매년 체육 대회마다 전교 꼴찌는 도맡아서 하질 않나, 피구 시작하자마자 선생님이 던져 준 공에 맞아서 웃음거리가 되질 않나. 야구 하라고 보내 놓으니 공 날아오면 도망치질 않나. 대체 이걸 키워서 어따 써 먹나 얼마나 맘고생을 했던지.”
한숨을 토하는 어머님의 옆에서 윤이 말을 더했다.
“그뿐이에요? 이 녀석 중학교 입학했을 때 농구부랑 배구부에서 이 녀석 덩치랑 한이 형 동생이라는 소문 듣고 따라다니다 100미터 25초에 뛰는 거 보고 다들 도망쳤잖아요. 난 아직도 그때 농구부 코치님 얼굴 기억나요. 진짜 못 볼 꼴 봤다는 얼굴로 뒷짐 지고 가시더라고요.”
그건 달리는 게 아니라 굴러가는 거였다고, 훈이와 같은 학교를 다닌 듯한 윤의 증언에 어머님께서 작게 한숨을 내뱉으신다.
“한이 놈은 뭐든 하기만 하면 너무 잘해서 문젠데, 이 녀석은 할 줄 아는 거라고는 레고 조립밖에 없다니까.”
“그거라도 잘하는 게 얼마니. 그것도 못 했으면 털옷 입혀서 동물원에 팔아 버리려고 했는데.”
“할아버지!”
계속해서 이어지는 본인의 흑역사에 훈은 울상을 지었지만, 이야기는 식사를 다하고 차를 마시면서까지도 멈추지 않았다. 어른들은 훈이의 어린 시절과 이런저런 사건 사고 이야기를 꺼내 훈이를 민망하게 했고 처음에는 ‘하지 마.’라며 민망해하던 훈이도 결국엔 자기가 먼저 치부를 밝히며 웃어 댔다.
지나치게 큰 덩치로 놀림 받았던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하면서도 훈이는 즐거워 보였다.
그건, 태어난 후부터 오랜 시간을 함께해 온 가족과만 나눌 수 있는 행복한 이야기였다. 자기는 기억 못 하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고, 그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있는 훈이 부러웠다. 그리고 곁에서 그 이야기를 들을 수 있어서 즐거웠다.
대화에 귀 기울이느라 그 외의 다른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는 전부 잊을 정도로, 즐거운 시간이었다.
“형, 저 어머니 한이 형 회사에 모셔다드리고 올게요.”
아침 식사 후 별채로 돌아와 막 작업 파일을 열려는데 윤이 외출을 알려 왔다. 이미 식사 중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예상보다 빠른 출발에 서둘러 방을 나가 막 신발을 신으려는 윤에게 말을 걸었다.
“벌써 나가?”
“네.”
“한이한테 전화해 봤어?”
“아뇨.”
“그럼 한이 회사에 없을지도 몰라. 요즘 바빠서.”
“기다리면 오겠죠. 이대로 두면 언제 나타날지 모르니까요.”
“내가 전화해 볼까?”
일단 스케줄은 알고 나가라고 하려는데, 윤이 재빨리 고개를 내젓는다.
“그냥 두세요. 어쩐지 미리 말해 두면 형한테 또 무슨 일이 생길 것 같거든요. 그래서 기습하는 거니까 연락하지 마세요.”
“하지만 그러다 한이 현장 나가 있으면 오래 기다리셔야 하는데.”
“형 빨리 안 들어온다고 하면 어머니 친구분 댁에 가실 테니 걱정 마세요. 우리 어머니도 형한테 하도 당해서 아무 대책 없이 움직이진 않으세요. 고등학교 때 한이 형 농구 관뒀다는 소리 듣고 너무 화나셔서 그날로 쳐들어왔는데 마침 그날이 개교기념일이라 형이랑 할아버지랑 제주도 가서 어머니 혈압 오르신 적 있거든요. 예전에 검도 관뒀을 때는 혼내러 와 보니 외삼촌 할아버지께서 와 계셔서 말도 못 꺼내 보셨고요. 그것도 일주일이나.”
어쩐지 어머님이나 윤이나 훈이나, 한이 더럽게 운 좋다고 화를 내더라니, 어머니가 날 잡으신 날 생기는 구체적인 예시들을 듣고 나니 충분히 이해가 갔다.
“화날 만하시다.”
“네. 그러니까 알리지 마세요. 훈이는 어디 갔어요?”
“작업실에.”
“그 자식, 또 뭐 만들면 정신 빠져서 아침인지 저녁인지도 까먹으니 식사 좀 챙겨 주세요.”
한이도 그랬지만 윤이도 서로를 잘 챙겨 준다는 느낌이었다. 역시 이래서 형제인가 보다 하는 생각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응. 챙겨 줄게.”
“그럼, 다녀올게요.”
짤막한 답을 남긴 뒤 운동화 끈을 모두 맨 윤이 본채로 향했다. 그 모습에 서둘러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운전 조심해.”
“네.”
이제는 제법 친근한, 가족 같은 인사말을 전하며 윤이 돌담 너머로 사라지는 걸 바라보다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그러곤 곧 한에게 간단한 문자를 보냈다.
어머님이 곧 가실 거니 어지간하면 자리에 있으라는 문자였다.
한이 과연 그 말을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현장엔 너 혼자 가라.”
현장에 나가기 위해 가방을 챙겨 왔더니, 갑자기 말이 바뀐 한을 보며 인재는 눈을 껌뻑였다.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방금까지만 해도 빨리 짐 챙겨 오라며 수선을 피우던 녀석이 왜 갑자기 딴소리냐고 인재가 따지자 한이 휴대폰을 흔들어 보인다.
“어머니 오신대.”
그 말에 인재가 ‘아.’라고 납득했다.
대충 얘기 들어 보니 어제 인사도 제대로 못 드리고 아침에도 얼굴을 못 본 모양인데 이 이상 모자 상봉을 막을 수는 없었다.
그랬다간 어머님 혈압이 더 오르실 테니.
“그러면 어쩔 수 없지. 이번엔 사실 해도해도 너무 했으니.”
돌아와서 연락도 안 한 건, 변명의 여지가 없다고 인재가 혀를 차자 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뭐, 이번엔 심하긴 했으니까.”
“웬일로 네가 자기반성을 다 하냐?”
“철들었나 보지.”
“퍽이나.”
“어, 우리 어머니 오셨다.”
인재의 등 뒤 유리 벽 너머를 본 한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자 인재도 놀라 뒤를 돌아봤다. 복도를 걸어오는 낯익은 얼굴을 확인한 인재가 어머님께 인사를 드리려 자세를 바로 하는 사이 한은 사무실 문을 열고 나서 이쪽으로 다가오는 자그마한 부인을 끌어안았다.
“우와, 우리 어머니 더 작아지셨네. 오랜만이에요. 여전히 미인이고 여전히 아담하셔, 우리 윤 여사.”
인상 좋은 얼굴로 웃으며, 능청스럽게 떠드는 소리에 그녀가 기가 막힌다는 듯 한숨을 내쉰다.
“너, 지금 웃음이 나와?”
“당연히 웃음이 나오죠. 제 첫사랑을 다시 만났는데.”
한이 품 안에 안긴 어머니의 어깨를 두드리며 웃자 부인이 그런 한을 매섭게 밀어 낸다.
“어디서 하던 짓을 나한테도 해? 내가 네놈 속을 몰라?”
호된 그 말에도 한은 꿈쩍도 하지 않고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러곤 허리를 숙여 그녀와 눈을 맞췄다.
“왜요? 난 진짜 어머니 보니 좋은데. 어머니도 저 보고 싶어서 오신 거잖아요. 자, 우리 미인 스마일~. 사랑하는 윤 여사님 좀 웃어 주세요.”
녹아들듯 부드러운 한의 미소와 다정하기 짝이 없는 그 목소리에 한바탕할 기세였던 부인의 기세가 순식간에 누그러졌다.
“망할 자식.”
말투는 퉁명스럽지만 목소리에는 전의가 없었다.
이미 한에게 넘어가신 듯한 반응에 부인의 뒤에 서 있던 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쓰게 웃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린 시절부터 떨어져 살다 보니, 확실히 어머니가 한에게 약하다는 걸 윤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게다가 한은 기가 막히게 사람들의 비위를 잘 맞췄다.
한이 저런 식으로 상대가 반박하거나 생각할 틈을 주지 않고 웃으며 애교를 부리면 대부분은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살살 녹아 버린다.
어머니라고 예외는 아닌지라 대강 예상했던 이 상황에 윤은 슬슬 빠져 주기로 했다.
“어머니, 그럼 형이랑 얘기하세요. 전 근처 서점에 가 있을게요.”
이미 이 싸움의 승패는 판가름 난 채였다. 더 볼 것도 없다는 생각에 윤이 이만 돌아가려 하자 한이 윤에게 근처의 서점을 알려 준다.
“옆 건물 지하에 큰 서점 있어. 갔다 그냥 집에 들어가. 어머니는 내가 모시고 들어갈게.”
“알았어.”
“그럼. 자, 들어가세요. 우리 윤 여사, 사무실 구경하셔야죠.”
윤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마친 한이 모친의 어깨를 끌어안은 채 사무실로 향하다, 마침 사무실에서 나오던 인재를 발견하고는 모친에게 소개시켜 줬다.
“어머니, 서인재 기억하죠? 대학 동창이요.”
대학 시절 두어 번인가 본 적이 있기에 인재 역시 반가운 듯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어머니? 오랜만에 뵙네요.”
“그래.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네. 들어가서 이야기하세요. 한아, 난 윤슬 현장 간다.”
“가 봐. 문제 있으면 전화하고.”
“그래. 들어가.”
어쩔 수 없이, 현장에는 혼자 가게 된 인재가 터덜터덜 가방을 들고 사무실을 빠져나가는 모습에 한은 사무실 안쪽에 놓인 푹신한 의자 쪽으로 어머니를 안내했다.
“여기 앉으세요. 커피 드릴까요?”
“그래. 그런데, 여기 벽이 다 이러니?”
“전부 유리 벽이에요. 서로 허물없는 게 좋잖아요.”
모든 벽이 유리로 되어 있어 시야가 환히 트인 사무실의 광경에 그녀가 낮게 혀를 찬다.
“너, 일부러 이런 거지?”
“네?”
“나 올라오면 맞을까 봐.”
이래서는 등짝도 한 대 때릴 수 없다고, 그녀가 낮게 중얼거리자 막 캡슐 머신 앞으로 다가선 한이 웃음을 터트렸다.
“설마요. 어머니가 때리시는 거라면 얼마든지 맞아 드려야죠. 등짝 내드릴까요? 뺨도 내드릴 수 있는데.”
“맘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마.”
“마음에 있는 소리예요. 이번엔 제가 심하긴 했으니까요.”
슬슬 눈웃음을 치며 머신 안에 캡슐을 넣고 버튼을 누른 한이 소형 냉장고에 있던 우유를 꺼내 들자 그녀가 한숨을 토해 낸다.
“알긴 하니 다행이구나.”
“제가 원래 하나에 빠지면 정신이 좀 나가잖아요. 할아버지께서 얘기하시겠거니…… 했다는 건 사실 거짓말이고, 그냥 이런저런 이유로 미룬 거예요. 죄송해요. 미리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다 내린 커피를 어느새 머그에 따라 담고 그 위에 스팀으로 데운 우유를 넣은 한은 잔을 들고 소파 앞으로 다가서 그녀의 앞에 컵을 내려놓았다.
“드세요. 맛있을 거예요. 아, 이건 아버지한테는 비밀이에요. 이건 신우한테만 만들어 주는 건데, 어머니니까 특별. 아버지한테는 안 만들어 드릴 거예요.”
그 컵도 신우 전용 컵이라고 방긋거린 한이 맞은편 자리에 앉자, 그제야 그녀가 오늘 이 사무실까지 찾아온 이유를 떠올린 듯 눈을 부릅떴다.
“그래, 너 말 잘했다. 내가 어제 얼마나 놀랐는 줄 알아? 훈이 온다고 해서 훈이 얼굴도 볼 겸, 너 한 대 때려 주려고 왔는데 이번엔 뭐? 동거?”
진짜 가지가지 한다는 듯 기막혀하는 그녀의 표정에 한이 고개를 갸웃했다.
“신우 마음에 안 드세요?”
“마음에 들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잖아.”
“전 제가 골라 온 사람이면 어머니가 무조건 예뻐해 주실 줄 알았는데요?”
“그러니까, 그런 게 아니라…….”
“착한 애예요. 어머니가 마음에 안 들어 하시면 그거 신경 쓰다 위장병 걸릴지도 몰라요. 마음 약하고 섬세하고 남의 눈치 많이 보는 녀석이라, 제가 그 녀석 잡느라 얼마나 고생했는데요. 이 자식, 내 거다, 이놈은 반드시 잡아야 한다 싶어서 목숨 걸고 잡은 건데, 어머니는 별로세요?”
그녀의 기분을 조심스럽게 살피는 듯한 한의 표정에 그녀의 기세가 좀 더 누그러졌다.
“그런 문제가 아니라니까. 애초에, 네가 본가에서 동거한다는 말 한마디만 했어도 그렇게 놀랄 일 없었잖아. 어떻게 그렇게 중요한 걸 말을 안 해? 바로 한 달 전에 통화를 했는데.”
모든 일에는 절차라는 게 있는 법인데, 중간 과정 다 빼먹고 결과만 통보하면 다냐고, 황당했던 심정을 그녀가 줄줄이 내뱉자 한이 반성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죄송해요. 제가 무심했어요. 다음부터는 안 그럴게요. 그렇지 않아도 신우한테도 혼났어요. 어떻게 그런 얘기를 안 할 수가 있냐고. 앞으로는 꼬박꼬박 전화 드리고 일 생기면 먼저 얘기할게요. 어머니, 아버지 안 놀라시게.”
한이 죽어도 속에 없는 말은 못 하는 대신, 한 번 한 말은 반드시 지킨다는 걸 알기에 그녀도 더는 뭐라 꾸중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런 이성과는 달리 여전히 한이 괘씸한 듯 그녀가 못마땅한 얼굴을 하고 있자 한이 싱긋 웃으며 다시 그녀에게 커피를 권한다.
“드셔 보세요. 제법 괜찮아요. 전 커피까지 잘 내리더라고요.”
한의 권유에 그녀가 드디어 잔을 들고 커피를 한 모금 넘긴다. 그리고 이내 제법 괜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맛은 괜찮구나. 그런데, 그 애 부모님은 아시니?”
“모르세요. 아버지는 돌아가셨고, 어머니는 어릴 때 이혼하셔서 재혼하신 뒤로 연락 안 하고 살았거든요. 하나 있던 동생은 어릴 때 상을 치렀다 하고요.”
한이 짤막하게 신우의 가족 관계를 전하자 그녀가 조금 놀란 얼굴을 한다.
“그럼 가족이 전혀 없어? 고모나, 삼촌이나…….”
“외가랑은 아예 인연이 끊겼다고 들었어요. 어머니가 재혼하신 집에서 애가 있는 줄 몰라서 연락 못 하게 했고, 고모님이랑 할머니는 계신데…… 별로 연락하게 하고 싶지 않아서요.”
“왜? 문제 있는 집이야?”
질 나쁜 가족들이 줄줄이 달려 있을까 걱정하는 그녀의 표정에 한은 쓴웃음을 흘렸다. 그녀가 칭하는 ‘문제’와는 조금 다르지만 확실히 그 가족들에게 문제가 있는 건 사실이다.
“돈이나 뭐 나쁜 쪽으로 문제가 있는 건 아니지만…… 때로는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할 수도 있다는 걸 그 녀석 가족을 보고 느꼈거든요. 차라리 없는 게 편하다, 라고까지는 제가 잘 모르니 말할 수 없지만…… 아무리 가족이라도 그 녀석한테 그렇게 상처 주는 사람은 만나게 하기 싫어서요. 저랑 사귄다는 거 알면 아마 그 고모가 애를 산 채로 난도질할 거라고 하는 녀석도 있고요.”
얼마 전 슬쩍 정현에게 신우가 고모와도 아직 연락하느냐 물었더니 돌아온 말이 그거였다.
‘아서라. 걔 고모, 걔가 남자랑 동거한다는 거 알면 아예 애를 산 채로 토막 낼 거다. 보수적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자기 체면 생각하고 신우 괴롭히는 걸 즐기는 거야. 몇 번 보지는 않았는데 신우 괴롭히면서 스트레스 푸는 거 같더라고. 그게 발로 차고 때리는 것보다 더 질이 나빠. 꼬집고 패면 멍이라도 남지.’
어지간한 사람이라면 직접 만나 10분이면 넘어오게 할 자신이 있어서 혹시라도 신우가 인사라도 드리길 원할까 싶어 물어본 거였는데, 정현의 말을 듣고 나니 10분이 아니라 1분 안에 넘어온다 해도 만나기 싫어졌다.
덤으로 그 번데기 사장으로부터, 신우가 연락을 끊자 그 고모라는 사람이 신우가 갑자기 이사를 하며 아예 연락을 끊었다고, 키워 준 은혜도 저버리는 배은망덕한 녀석이라며 고향에 소문을 내고 다닌다고 들었다. 그걸 듣고 나니 더 정이 떨어져 버렸다.
그런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직접 겪은 적이 없어서 실감하지 못했는데 직접 목격하고 나니 상상 이상으로 불쾌했다. 가족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인연을 끊을 수 없는 존재라는 건 알고 있지만, 만약 신우만 괜찮다면 어지간해서는 안 부딪치고 살았으면 싶었다.
새삼 떠올리자 또 기분이 나빠져 한이 살짝 인상을 썼다. 그러자 그녀가 조심스레 묻는다.
“그 고모라는 사람이, 애를 괴롭히는 거니?”
“비슷해요. 말로 하는 학대도 학대니까요. 저, 사실은 그거 보고 우리 가족한테 진짜 감사했어요. 할아버지랑 어머니랑 아버지랑 우리 숙부들, 고모들, 외갓집 가족들까지. 전 가족이라는 건 전부 우리 집 사람들 같은 줄 알았거든요. 가족이니 무조건 예뻐하고 사랑해 주고, 응원해 주고. 동생들도 샘 한 번 안 내고 싸울지언정 서로에게 실수로라도 나쁜 말은 절대 안 하고요. 우리 가족들이 얼마나 좋은 사람들인지, 그 녀석네 가족 이야기 듣고 알았다면 저 좀 나쁜 놈이죠?”
씁쓸한 미소를 지은 한이 어깨를 으쓱하자 그녀가 쯧쯧거리며 혀를 찬다.
“아니 다행이다.”
“사실, 그래서 연락 못 드린 것도 있어요. 많이 외로워하는 녀석이라, 제가 자꾸 가족 얘기하면 다치게 할까 봐요. 마음 약해요. 여리고 섬세해서 너무 쉽게 다쳐요. 다쳐도 빨리 말을 하면 괜찮은데 입 꾹 다물고 참으니 나중에서야 알게 되면 제가 더 아프고요. 그러니까 어머니가 예뻐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이왕 이렇게 된 거, 친아들처럼 예뻐해 주세요. 착하고 고운 애니까 어머니도 좋아하실 거예요. 우리 집 아들들이랑은 또 완전히 다르니까요.”
늘 싱글거리며 매사 반쯤 농담처럼 말을 던지던 한의 진지한 표정과 말투에 그녀가 당황한 듯 눈을 크게 떴다.
“……그 애한테 그 정도로 진심이니?”
“진심이니 집까지 데려왔죠. 할아버지한테 인사까지 시킨 뒤 헤어지면 저도 호적에서 파일 텐데, 어지간한 각오 없이 그런 짓은 못 하죠.”
집에까지 데려온 아이와 헤어진다면 할아버지께서 당장에 내쫓으실 거라고 한이 웃자 그녀가 한숨을 내쉰다.
“그래, 그렇겠지. 너도 허튼 말은 안 하는 놈이니.”
“그러니까 무조건 좋게 봐 주세요. 우리 어머니, 세상에서 제일 포근하고 따뜻한 분이니 그 녀석도 좋아할 거예요.”
싱글싱글 웃으며 시선을 맞추는 한의 다정한 음성에 그녀가 뭔가 억울하다는 얼굴로 아들을 마주 보았다.
“너, 그렇게 비행기 띄워서 은근슬쩍 넘어가려고 하는 거지?”
“벌충은 할게요. 5년 전 유학 건까지 다요. 제가 좀 어리고 이기적이잖아요. 성질도 급하고.”
“그런 것도 아는 거 보니 사람 되긴 했구나.”
“슬슬 책임감이라는 걸 배워 보려고 노력하는 중이에요. 안 그러면 그 녀석이 절 못 믿어서요. 사실, 그것 때문에도 애먹었어요. 걔가 정현이랑 친구라 저에 대해 너무 잘 알고 있어서, 절 못 믿더라고요. 자꾸 도망가려고 해서 저도 마음 좀 다쳤어요.”
그때 받은 상처가 아직도 쓰리다고 한은 일부러 앓는 소리를 했다. 워낙에 낙천적인 성정이라 마음 상할 일도 없고, 또 상하더라도 마음 다쳤다는 말은 안 하는 성격이란 걸 알기에 꽤 아프긴 했구나 싶어, 그녀가 안쓰럽다는 얼굴로 한숨 짓는다.
“그러게 평소에 잘하지. 나라도 너는 못 믿어.”
“그러니까요.”
그건 스스로도 인정한다며 한이 의자에 기대앉은 채 씁쓸하게 웃자 커피를 한 모금 더 마신 뒤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둔 그녀가 다시 대화를 이었다.
“착한 애 같기는 하더라. 조용하고, 얌전하고. 그 애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아닌데…… 그래도 엄마한테 말은 했어야지. 어젠 진짜 놀랐다고.”
드디어 화가 가라앉았는지 투정을 부리듯 말을 건네는 모친을 보며 한은 시원스레 웃어 보였다.
“들었어요. 윤이 등에 피멍 들었다면서요?”
“그거 네가 맞을 거 대신 맞은 거야.”
“알아요. 그러니 오늘은 저 패셔도 돼요. 이 넓은 등짝 원 없이 내드릴 테니 그만 화 푸세요. 어머니 자꾸 그러시면 신우 눈치 봐요. 어머니도 애들이 눈치 보면 마음 아파하시잖아요. 세상에서 제일 착하고 마음 고운 우리 윤 여사님, 속 썩는 거 싫어요.”
“그 애가 내 눈치 보는 게 싫은 거겠지. 갖다 붙이기는.”
네 속은 뻔하다는 듯 말하면서도 마음이 완전히 풀린 듯 새침한 음성을 내뱉는 그녀를 보며 한이 눈꼬리를 휘며 웃었다.
“그것도 그렇지만, 어머니가 마음 아픈 것도 싫어요.”
살살 사람의 마음을 녹이는 한을 보며, 그녀가 툭 하니 내뱉는다.
“넌 그냥 사기꾼이 체질이야.”
“박수도 잘 맞죠.”
“그래, 그 성격에 박수나 사기꾼 안 된 게 얼마냐 하고 감사해야지. 내가 내 입으로 뱉은 말이 있으니 신우 문제에 대해서는 뭐라고 안 하겠지만, 다른 가족들은 네가 알아서 방어해. 인사라도 하러 들렀다 신우 보고 안 좋은 소리라도 하면 서로 마음 상하니까.”
이 집안 혈통의 특성상 그럴 가능성은 극히 적었지만,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본인도 기분이 안 좋을 것 같다고 그녀가 우려하자 한이 절대 그럴 리 없다는 듯 자신만만하게 미소 지었다.
“우리 가족들이 그럴 리가 없죠. 무엇보다 신우 뒤에는 우리 최종 보스께서 계시다고요. 그분이 눈 부릅뜨고 계신데, 감히 누가 안 좋은 소리를 하겠어요.”
그 말에 잠시 ‘최종 보스’가 무슨 소리인가 하던 여인이 이내 그 말뜻을 알아채곤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아버님이 마음에 들어 하시는 사람을 두고 헛소리할 간 큰 녀석은 너뿐이지. 그런데, 혹시 나 그 애 예전에도 본 적 있니?”
넌지시 건네 오는 그녀의 물음에 한은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어머니는 신우 본 적 없어요.”
“그런데 묘하게 낯이 익단 말야. 내가 아는 사람 같아. 너랑도 알고 정현이도 아는 거면 혹시 동창이야?”
“네, 맞아요. 고등학교 동창이에요.”
“고등학교 때 집에 온 적 없어?”
이상하게 그 느낌이 아주 익숙하다고, 그녀가 의아한 얼굴로 반복해 말하자 한이 재밌다는 듯 웃는다.
“아하~ 그거요? 눈치 못 채셨어요?”
“뭘?”
“그 녀석, 할머니 닮았어요.”
짤막한 그 답에 그녀가 딱, 하는 소리와 함께 손가락을 튕겼다.
“아! 맞다! 맞아! 그런 느낌이야!”
“그래서 할아버지도 예뻐하시는 거예요. 얼굴이 아니라, 분위기가 비슷하죠?”
“그래, 맞아. 어쩐지…… 처음 보는데도 남 같지 않더라니.”
어쩐지, 맞아, 그랬어, 하고 계속해서 고개를 주억거리는 그녀를 보며 한이 슬쩍 몸을 앞으로 숙였다. 그러고는 이미 완전히 마음이 풀린 모친을 향해 은밀한 투로 속삭였다.
“그러니까 친아들처럼 대해 주세요. 그리고 예뻐해 주시는 김에 하나 더 부탁드릴 게 있는데요.”
“뭔데?”
자신의 모친이 돌아가신 할머님을 너무나 좋아하고 친어머니처럼 따랐단 걸 잘 알기에 한은 빙그레 웃으며 그녀에게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게요…….”
“저 왔어요.”
활짝 열린 문틈으로 들려온 그 목소리에 신우가 뒤를 돌아보자 문밖에 선 윤이 보였다.
“어? 일찍 왔네?”
“형이 어머니 알아서 챙기겠다고 해서 일찍 들어왔어요. 이거, 아이스크림이요. 날 더워서 드시라고요.”
사람에게 뭘 먹이는 걸 좋아하는 건 이 집 유전인지 윤이도 들어올 때마다 매번 하나씩 먹을 걸 사 든 채 귀가했다.
그 마음이 고마워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신우는 윤에게 다가가 작은 쇼핑백을 받아 들었다.
“고마워. 마침 목 탔는데, 같이 먹자.”
날이 더우니 윤에게 어서 들어오라고 한 뒤 문을 닫고 에어컨을 틀었다. 그러곤 막 아이스크림 통을 여는데 윤이 묻는다.
“훈이는요?”
“작업실에서 아직 안 나왔어.”
“그럼 또 빠졌나 보네요.”
곰 같은 놈, 이라며 윤이 혀를 차는 소리에 신우는 빙긋 웃으며 쇼핑백에서 숟가락을 꺼내 하나를 윤에게 건넸다.
“훈이도 불러올게. 작업실엔 에어컨도 없어서 엄청 더운데.”
“그냥 두세요. 어차피 지금 뭐 하는 거면 불러도 몰라요. 밥 먹을 때만 챙겨 주세요.”
뭐 하나에 빠지면 정신 못 차리는 건 형제들이 다 똑같다며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손을 내저은 윤은 숟가락을 받아 들었다.
집중력이 좋은 것도 유전이구나 하며 막 아이스크림을 푸려던 신우는, 문득 뭔가 생각난 듯 윤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그런데, 어머니 괜찮으셨어?”
“네?”
“화 많이 나셨던데…….”
혹시 진짜 사무실에서 만나자마자 한이 얻어맞은 건 아닐까 걱정이 돼 묻자 윤이 아이스크림을 퍼내며 무심히 대꾸한다.
“괜찮아요. 우리 어머니 형한테 약하거든요. 한창 화나 있을 때면 막 때리기라도 하는데 한풀 꺾인 뒤에 만나면 형한테 매일 당해요. 형이 웃으면서 ‘아름다운 내 첫사랑 윤 여사님~’ 하면 그대로 넘어가요. 그러다 나중에 또 당했다고 약 올라 하시고요. 그게 지난 20년간 반복됐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아마 지금쯤 한이 형이랑 수다 떨고 웃다 집에 돌아오시는 길에 ‘웃고 있는데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쁘지?’하고 계실걸요.”
왠지 생생히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그 광경에 자기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아…… 한이가 좀 사람 정신없게 만들기는 하지. 그런데 어릴 때부터 그랬어?”
아이스크림을 한 숟가락 뜨며 신기한 듯 묻자 윤이 고개를 끄덕인다.
“네. 그래서 어머니가 한이 형은 한 발자국 잘못 나가면 사기꾼이나 제비가 될 거라고 걱정 많이 하셨어요. 이상하게 형이랑 얘기하다 보면 늘 말려들거든요. 생긴 건 되게 착하고 믿음직스럽게 생겼잖아요, 우리 형.”
“그렇기는 하지.”
나도 자주 말려드니까, 라고 신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윤이 신우가 모르는 과거 이야기를 더해 준다.
“그래서 우리 형은 어릴 때부터 거의 혼나 본 적이 없어요. 끝내주게 운이 좋은 것도 좋은 거지만 한이 형이 앞에서 떠들어 대면 대부분이 정신을 못 차리거든요. 그래서 늘 맞는 건 제 몫이죠. 훈이는 막내라 어머니가 손 안 대시거든요.”
아이스크림을 우물거리며 중얼거리는 말에 문득 어떤 의문이 들었다.
“……그런 거 좀 억울하지 않아? 형하고 동생은 안 혼나는데 너만 혼나는 거.”
“가끔 얄밉기는 하지만…… 훈이는 뭐 워낙에 순하니까 열외고, 어쨌든 형은 따로 자랐으니까요. 할아버지가 잘 키우셨고, 형이 그런 걸로 상처받을 성격은 절대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 어머니 손 없이 자라서 어머니가 유독 약한 것도 있어요. 사실대로 말하자면 형이 같이 자랐으면 형 뒷바라지하느라 어머니 우리한테는 신경 많이 못 썼을 텐데 형은 할아버지가 뒷바라지해 주셔서 어머니 아버지 관심은 항상 우리한테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그런 건 상관없어요. 맞을 때는 억울하고 좀 얄밉기도 하지만 어쨌든 형이니까요. 어차피 저나 훈이가 잘못하면 형도 같이 혼나니까, 그렇게 싫지는 않아요.”
그래 봤자 형이 혼나는 경우는 극히 드물지만, 이라고 한숨을 쉬며 윤이 덧붙인 말에 그들이 참 예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심이나 복잡한 계산 없이, 순수하게 가족, 형제라는 이유만으로 서로를 이해하고 보듬어 주고 또 배려하고 양보하는 그 마음이 예뻤다. 친형제라 해도 분명 서로를 시기하는 마음이 있을 텐데, 형제니까 그조차도 납득해 버린다는 게 보기 좋았다.
“너희 보면 부러워.”
“뭐가요?”
“형제끼리 서로 챙기는 거. 그렇게 오래 떨어져 살았는데도 서로 너무 잘 알고 있고 하나하나 챙겨 주는 거. 한이는 열 살 때부터 떨어져 살았으니 거의 남 같을 텐데도 안 그러잖아.”
따지고 보면 한은 가까이 사는 친구보다도 못한 형이었다. 오래 떨어져 산 것도 있지만, 워낙에 가족에게 무심하다. 그럼에도 그들 사이에서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게 신기해 중얼거리자, 윤이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글쎄요, 어릴 때는 한 달에 한 번씩 올라왔고 방학 때는 본가에 와서 거의 살아서요. 정확히 함께 보낸 시간만 따지자면 다른 형제들이 함께 보낸 시간하고 별다르지 않을걸요. 어차피 한이 형은 같이 살았어도 혼자 바쁜 사람이라 거의 집에서 볼 일 없었을 거고요. 저나 훈이나 대학 다닐 땐 본가에서 지내서 아주 멀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제 친구들은 형이나 동생하고 한집에 살아도 일주일 동안 못 보는 경우도 있다니까요.”
“그래도 아무래도 훈이보다는 좀 멀게 느껴지진 않아? 어색하다거나.”
그 물음에 윤이 심각하게 인상을 쓴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런 건 생각 안 해 봤어요. 백 년을 못 만나도 어쨌든 형제는 형제고, 가족은 가족이라고 어머니 아버지가 늘 그러셨거든요. 거기다 우리 형 성격도 워낙에 뻔뻔하고 거리낌이 없으니까요. 반년 만에 만나서도 고작 한다는 말이 ‘키 컸냐?’ 정도고, 바로 어제 본 듯 구니까 거리감은 거의 못 느꼈어요. 그러고 보니 형이 가족들한테 무심한 게 오히려 도움이 됐을 수도 있겠네요. 형은 늘 똑같으니까, 우리도 늘 평소처럼 했거든요. 애초에 저희 가족들 전부 좀 무심한 편이에요. 서로 어디서 뭘 하든 거의 신경 안 써요. 그래서 가끔 훈이처럼 전공이 로봇 공학에서 자동차 공학으로 바뀌기도 하고요.”
그래도 그건 심했다고 반성하며 윤이 작게 흘리는 웃음에 신우도 그에 동의를 표했다.
“그건 훈이가 섭섭할 만했어.”
그 많은 가족 중 훈의 진짜 전공을 아무도 몰랐다는 사실에 신우가 장난스럽게 질책하자 윤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그 진원지가 어머니라는 것도 확실히 해야죠. 전 어머니가 말해 준 대로 전했어요. 그러고 보니 무심한 건 어머니 쪽 유전 같네요.”
어머니는 절대 인정 안 하시지만, 이라는 윤의 말이 끝나는 순간 밖에서 차 소리가 들려왔다. 바로 근방에서 울려 오는 그 소리에 문 쪽을 바라보자 윤도 놀라 뒤돌았다.
“형 왔나?”
“이 시간에 들어올 리가 없는데…….”
“어머니 모셔다드리려고 들어왔나 봐요. 웬일이지? 어머니, 친구분 댁에 들르신다고 했는데.”
서둘러 숟가락을 내려 둔 윤이 자리에서 일어서는 모습에 신우 역시 그를 따라 방문을 열고 나서자 복도 저 끝에서 걸어오는 한이 보였다. 양복을 입고 가방까지 챙겨 든 한의 모습에 신우가 놀라 눈을 껌뻑이자 한이 반가이 인사를 건넸다.
“어? 차 소리 들었나 보네?”
“너 왜 이렇게 빨리 들어와?”
지나치게 이른 한의 퇴근에 놀란 신우가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냐고 걱정하자, 한이 성큼 신우의 앞으로 다가서며 말한다.
“어머니 모셔다드리는 김에 퇴근했어. 어머니 내일 가신다고 해서. 밥 한 끼도 같이 못 먹고 보내 드리면 안 되잖아. 대신 주말에 출근해야 돼.”
“아…… 내일 내려가시는 거야?”
“응. 아버지 혼자 계시니까. 그래서 어머니가 오늘 점심 해 주신대.”
그 말에 놀란 듯 윤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머니가? 웬일이래?”
“신우 밥 먹여 주신다고.”
순간 윤이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어머니를 어떻게 녹인 거야? 어머니, 할아버지가 들어가지 말란다고 본가에 오면 주방 근처로도 안 가시는데.”
“잘. 신우야, 들어가자. 오늘도 덥다.”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방으로 향하는 한의 뒷모습에 윤에게 좀 이따 보자는 인사를 한 뒤 한의 뒤를 따랐다.
확실히 아직은 더운 공기에 에어컨을 켜 둔 방으로 들어서 문을 닫았다. 그러곤 막 한을 부르려는 순간 이쪽을 돌아본 한이 빙긋 웃어 보인다.
“이제 화 풀렸어?”
“……응?”
“새벽 일. 완전히 풀렸냐고.”
그 일이 신경 쓰이긴 했는지, 자신의 눈치를 살피는 한의 기색에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화난 거 아니라니까.”
“아침에 훈이가 밥상에서 이상한 소리 했다며? 어머니가 훈이랑 윤이 방 옮겨 주라고 하시더라. 순진한 총각들 밤잠 설치게 하지 말라고.”
순간 잠시 잊고 있던 아침의 그 민망한 대화가 떠올라 얼굴이 화끈거렸다.
“어머니가 그 얘기도 하셨어?”
“응. 훈이도 여기서 회사 다녀야 해서 짐 들어와야 하는데 애 잡지 말라고. 마침 할아버지도 혼자 지내시기 적적해하시니, 훈이는 본채로 보내려고. 그 자식은 길치에 면허도 없어서 대중교통 이용해야 하니까.”
“훈이, 면허 없어?”
자신도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한이는 고등학교 졸업도 전에 운전면허를 땄고 윤이도 벌써 운전을 하고 다녀서, 훈이도 당연히 면허가 있을 줄 알았는데 아직 운전면허가 없다니 의외였다. 요즘은 거의 의무적으로 따지 않나 하는 생각에 고개를 갸웃하자 한이 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 녀석 완전 운동치라 방향 감각, 반사 신경이 제로야. 그 녀석이 따면 운전면허가 아니라 살인 면허라고 어머니가 아예 못 따게 하셨거든. 평생 운전은 꿈도 꾸지 말라고. 그 자식, 세발자전거도 제대로 못 탔으니까.”
대체 그런 건 누굴 닮았는지 모르겠다며 미소 지은 한이 재킷을 벗어 던지고는 넥타이를 풀어 내렸다. 옷부터 갈아입으려는 듯한 모습에 그의 옷을 정리하며 조심스레 물었다.
“어머니, 화 안 내셨어? 뭐라고 안 하셔?”
“화? 왜?”
넥타이를 풀어 던진 한은 이어서 셔츠의 단추를 풀며 전혀 모르겠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일부러 그러는 건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지, 속내 모를 얼굴에 신우는 어머니께서 화를 내실 이유를 다시 한번 정리해 줬다.
“내 얘기 안 했잖아.”
“아, 그거? 괜찮아. 잘못했다고 했고 어머니도 납득하셨어. 우리 어머니 그런 사소한 문제는 신경 안 쓰셔.”
“하지만 어제 화 많이 나셨던데. 아침에도 그렇고.”
“얼굴 보고 제대로 사죄하면 그대로 받아들이시니 괜찮아. 뭐, 약간 약은 올라서 쌓아 두시긴 하시겠지만…… 그건 내가 그동안 해 온 게 있으니 어쩔 수 없는 거라 패스.”
“잘못한 거 알긴 알아?”
“그 정도 양심은 있으니까. 그리고 좋은 소식 하나. 어머니가 너 마음에 든대. 우리 어머니 주방 들어가는 거 엄청 싫어하시는데 너 밥 먹여 주고 싶다고 모처럼 들어가신 거야.”
뜻밖의 말에 절로 얼굴이 환해졌다. 딱히 꺼리시는 눈치는 아니셨지만 어제오늘 내내 기분이 안 좋아 보이셔서 걱정했는데, 일단 마음에 안 드신 건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다행이다. 난 나 때문에 화나셨을까 봐 걱정했는데.”
순간 안도의 한숨을 흘리며 어깨를 늘어뜨리자 한이 손끝으로 이마를 툭 친다.
“그런 상상하지 말랬지? 넌 너무 사고방식이 비관적이야. 우리 어머니, 아들들이 사랑하는 사람이면 무조건 예뻐해 주실 분이야. 어제는 내가 하도 멋대로 굴어서 그동안 쌓인 게 폭발해 화나신 거지, 너 때문이 아냐. 무슨 일만 생기면 네 탓이라고 생각하는 버릇은 좀 고쳐.”
마치 짜기라도 한 듯 한은 어제 정현이 했던 말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자신이 너무 걱정이 많고 비관적이라고 지적했지만 이번만은 절대 자신이 예민한 게 아니었다.
“이런 상황이라면 내가 아닌 누구라도 마찬가지일걸. 제대로 인사도 안 드리고 떡하니 본가에 와서 살았으니까. 나도 경솔했어.”
아무리 할아버지께서 허락하셨다 해도, 한에게 가족이 할아버지뿐인 것도 아니고 멀쩡히 부모님이 살아 계신데 본가에 들어와 사는 거라면 인사까지는 아니라도 언질 정도는 했어야 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그런 걸 보고할 가족들이 없다 보니 거기까지 생각하지 못했던 거다.
이래서 가정 환경이나 가정 교육이 중요한 건가, 하는 생각을 하자 조금 기분이 처졌다. 그러자 여지없이 한이 이마를 콩 박아 왔다.
“너 또 이상한 생각하지?”
“…….”
“네가 잘못한 게 아니라 내가 잘못한 거야. 너 데리고 온 것도 나고 어머니한테 보고 안 한 것도 나니까. 그때 난 너한테 미쳐서 가족들 챙길 여력도 없었고. 내가 입 닫고 있는 이상 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어. 네가 본 적도 없는 우리 어머니한테 전화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자상한 한의 위로에 신우는 그제야 납득한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렇지.”
이번 건은 한 본인이 말하지 않는 이상은 자신도 동생인 윤이도 언급할 수 없는 문제이긴 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이나마 마음이 가벼워졌다. 안도감에 겨우 표정을 풀자 한이 포옥 어깨를 끌어안아 줬다.
“너, 너무 소심해. 좀 대범하게 넘어갈 건 넘어가고 무시할 건 무시해야지. 이렇게 걱정이 많아서 어떻게 하냐?”
몸을 꼭 끌어안은 채 머리카락에 입을 맞추며 속삭이는 한의 음성에 신우가 이번엔 조금 억울한 듯 중얼거렸다.
“……내가 좀 비관적인 건 사실이지만 이번엔 진짜 그럴 만한 상황이었어.”
“그럴 만한 상황도 대충 넘기면 되는 거야. 이젠 너도 대범해지도록 노력해 봐. 바로 네 뒤에 나랑 할아버지가 있는데 뭐가 걱정이야? 아, 그 정신없는 개새끼들도 있고.”
무시무시한 얼굴을 하고 사람이라면 무조건 좋아 날뛰는 늑대개들과 그들을 늘 앞에서 이끄는 할아버지, 게다가 그 무서운 녀석들을 장난감 다루듯 하는 한이 바로 뒤에 서 있는 모습을 상상하자, 진짜 마음이 든든해졌다.
“그 얘기 들으니까 되게 든든하긴 하다.”
“든든한 정도가 아니지. 우리 할아버지랑 나, 둘만 있어도 세상에 무서울 거 하나도 없어. 그러니까 좀 자신감을 가지라고.”
그 말과 함께 다시 한번 이마에 입술을 댄 한이 그제야 떨어져 나간다.
“옷 갈아입고 나올게.”
다시 재킷과 넥타이를 받아 든 한이 드레스 룸으로 향해 가는 모습에 한의 가방을 책상 옆에 놓으며 벽 너머에 있는 그에게 물었다.
“더운데 마실 것 좀 줄까?”
“응. 수정과.”
마침 오전에 수정과를 잔뜩 가져다 놓았던 걸 떠올린 신우는 먹던 아이스크림 통을 들곤 방을 나섰다.
마음도 발걸음도 더없이 가벼웠다.
“아, 가을은 가을이다. 공기가 확실히 건조해졌어.”
신우와 동생들과 함께 느긋하게 정원을 가로지르던 한은 찌뿌듯한 듯 팔을 쭈욱 뻗었다. 몸을 쭈욱 펴자 정말이지 풍채가 대문짝만 했다. 한의 덩치에 새삼 놀라워하던 신우는 천천히 윤과 훈을 돌아봤다.
자신이 작은 키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한이네 삼 형제와 서 있으니 유난히도 작아진 느낌이 들었다. 키뿐 아니라 덩치도 작아 보여 심각하게 운동이라도 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한이 훈에게 말을 던진다.
“훈이, 너 CPA는 땄냐?”
“응?”
“들어온 거면 다 이수하고 CPA까지 딴 거 아냐? 아니지. 미국에서 CPA 딴 거면 뭐 하러 한국에 들어온 거야?”
한국에서는 그 라이선스 소용없다고 한이 한마디 하자 옆에서 주변을 돌아보며 걷던 훈이 뚝 하니 걸음을 멈춘다. 그러고는 아주 억울해하는 얼굴로 한을 바라봤다.
“내가 CPA를 왜 따?”
“너 회계학과잖아.”
그렇게나 수없이, 정현이 동생이 회계학과고 네 동생은 자동차 공학과라고 알려 줬음에도 역시나 한에게는 소귀에 경 읽기였다. 물론, 그것도 잘못된 정보이기는 했지만 이쪽은 비슷한 공학이기라도 하지 그쪽은 아예 종류가 다르다.
이젠 자신이 다 민망하고 창피해 시선을 돌리고 얼굴을 가리자 훈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회계학과가 왜 유학을 가?”
“아, 하긴. 그럼 유학은 왜 간 건데? MBA 따러 갔냐? 경력이 돼?”
MBA에 필요한 경력이 2년인가, 3년인가, 라고 한이 숫자를 세며 신우를 끌어안으려 팔을 뻗자, 신우가 재빨리 한의 손을 피해 옆으로 비껴 섰다. 순간 한은 불만스러운 듯 신우를 바라봤지만 신우는 모른 척 시선을 피한 채였다.
한은 수치를 모르니 상관없겠지만, 신우로서는 동생들 앞에서의 애정 행각은 될 수 있는 한 피하고 싶었다. 더군다나 오늘 새벽 그런 일이 있고 난 후라 훈이 앞에서는 특히나 더 피하고 싶어 한과 거리를 벌린 순간 훈이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내가 MBA를 왜 따? 나 로봇 공학과라니까!”
“로봇? 아, 그래? 잘됐네.”
“엄마도 나 자동차 공학과인 줄 알고 윤이 형도 그렇고! 나 보면 크다고 구박만 하고 왜 다들 내 전공도 모르는 건데!”
막내에게 왜 이리도 관심이 없냐고 훈이 억울함을 호소해도 한은 네가 주판을 튕기든 조립을 하든 알게 뭐냐는 듯 돌아서 신우에게 손짓했다.
“이리 와.”
조금 짜증스러운 얼굴을 한 한이 다시 손을 뻗으려 하자 신우는 재빨리 옆으로 물러섰다. 살살 빠져나가는 그 모습에 화가 났는지 한이 바로 앞에서 감정을 토로하는 훈을 걷어차고는 재빨리 신우의 목을 끌어안았다.
“너, 자꾸 날 피해? 난 너 보고 싶어서 주말 출근도 불사할 각오로 달려왔는데?”
목을 끌어안은 채 바싹 붙어 속삭이는 그 말에 신우는 빠르게 훈과 윤을 돌아보곤 한을 밀어 내려 손을 뻗었다.
“동생들 있잖아.”
“얘들이 뭐? 모처럼 일찍 퇴근한 날 너랑 딱 붙어 지내려고 하는데 왜 피해? 뭐야? 너, 벌써 나한테 애정이 식은 거야?”
“그게 아니라…….”
“나 상처받았어. 너 요즘 나보다 우리 할아버지랑 동생들을 더 좋아하는 것 같아. 이래서 너한테 우리 가족 소개해 주기 싫었다고.”
갑작스러운 고백에 신우가 그게 진짜냐는 듯 한을 바라본 순간, 훈이 발을 동동 구르며 외쳤다.
“이제 잊지 마! 나 로봇 공학과인 거.”
“아, 알았어. 알았어. 그래서 엔진 뭐 만드냐?”
“로봇! 로봇! 엔진 아니라니까!”
이젠 좀 알아 달라고 훈이 소리를 내지르자 훈의 옆에 선 윤이 한에게 말을 걸었다.
“형, 쟤 그만 놀려. 자꾸 그러면 아버지한테 전화해서 또 운다.”
“뭐가 이렇게 시끄러워.”
막 본채에 도착한 순간 들려온 음성에 고개를 돌리자 외출복을 차려입으신 할아버지가 보였다. 반가운 얼굴에 재빨리 한을 밀어 낸 신우는 할아버지께 한달음에 다가서며 물었다.
“외출하세요?”
“그래. 오랜만에 고향 친구가 같이 점심이나 하자고 해서 말이다.”
오전에 차를 마실 때만 해도 없었던 스케줄에 신우가 그러시냐고 답하려는 순간 한이 팔짱을 끼며 불만을 토해 냈다.
“할아버지 너무 치사하신 거 아니에요? 어머니 요리 먹기 싫다고 혼자 도망치시다니.”
“도망이라니? 내가 왜 내 집에서 도망을 가?”
“어머니 주방에 들어가신 거 보고 나가시는 거 맞잖아요. 날씨 더우면 잘 안 움직이시는 분이 갑자기 웬 외출이에요? 그것도 사육사도 안 불러 두시고.”
사육사 외엔 산책이나 밥을 주는 것도 다른 사람에게 잘 맡기지 않는, 당신께서 자식처럼 아끼시는 정신 나간 개들을 두고 어딜 가시냐고 한이 따지듯 묻자 할아버지가 당당히 진실을 밝혔다.
“난 미각이 없는 훈이랑 달리 맛있는 거 아니면 안 먹는다.”
“어머니 요리 괜찮으신 편이에요. 할아버지께서 너무 가리시는 거예요.”
“내가 이 나이 돼서까지 남의 눈치 보면서 먹기 싫은 음식을 먹어야겠니?”
“할아버지는 원래 남의 눈치 안 보셨잖아요. 제가 외삼촌 할아버지께 들은 얘기 다 읊어 드려요?”
“됐다. 하여간, 난 안 먹는다.”
지나치게 단호한 그 답에 한도 더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언제 들어오시는데요?”
“때 되면 들어오겠지. 네 어미가 상다리 휘어지게 차리고 있으니 가서 돕기나 해.”
“그럴게요. 그런데, 개들은요?”
“내가 늦어지면 너희들이 산책 좀 시켜라. 쓸모도 없는 덩치 셋이 굴러다니느니 그 녀석들 끌고 산책이나 하렴.”
그렇게라도 밥값을 하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한이 어깨를 으쓱한다.
“뭐, 저야 재밌어서 좋지만 그 녀석들이 제 말을 안 들을 텐데요?”
“신우 말이면 들을 거다.”
“이 날씨에 신우를 밖에 내보내는 건 안 되죠. 윤이랑 훈이랑 어떻게 해 볼게요.”
“그래라. 그 녀석들이 훈이는 아주 좋아할 거다. 북극곰 닮아서.”
훈이를 보면 그 녀석들도 고향의 향취를 느낄 거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훈이 또 입술을 삐쭉 내밀었다. 왜 나한테만 그러는 거냐고 훈이 불만을 토해 내는 사이 느린 속도로 정원을 가로지른 차가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차를 본 한은 곧 뒷좌석의 문을 열어 할아버지께 타기를 권했다.
“날 더우니 오래 걷지 마시고 곧장 실내로 들어가세요. 나가실 거면 꼭 모자 쓰시고요. 그리고 가게에서 에어컨 너무 켜면 온도 높이라고 하세요. 요즘 가게들 에어컨 너무 틀어 대요.”
“니 할애비 어디 가서 할 말 못 하는 사람 아니다. 너나 걱정해.”
“날이 하도 더우니 그렇죠. 덥다고 얼음물 막 드시지 마시고요. 이런 날씨에 덥다고 얼음물 드시면 속 버려요. 형, 우리 할아버지 내리실 때 꼭 모자 챙겨 드리세요. 그리고 차 에어컨도 약하게 틀어 주세요.”
할아버지에 이어 운전석에 앉은 비서를 향한 한의 당부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덥다.”
한의 말이 길어지자 할아버지께서 어서 차 문이나 닫으라는 듯 말을 끊었다. 그러자 한이 서둘러 차 문을 닫았다.
“다녀오세요.”
한의 인사와 함께 동시에 윤과 훈, 그리고 신우까지 ‘다녀오세요.’라고 인사를 하자 곧 차가 멀어져 갔다.
올 때와 마찬가지로 느릿하게 정원을 가로지른 차가 대문을 빠져나가자, 한이 돌아서 본채 대청마루 위로 올라선 다음 주방을 향해 소리친다.
“어머니, 저희 왔어요. 뭐 도와드려요?”
우렁찬 그 음성에 안쪽에서 시원스러운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응. 거기 마루에 상 좀 펴.”
“훈이 너 상 꺼내서 펴. 그리고 윤이 너 들어가서 그릇 내와.”
그 말에 훈이 즉각 반발한다.
“나도 주방 갈래.”
“얼마 전에 주방 그릇 다 바꿨어. 새 그릇 깨지 말고 상이나 꺼내. 주방 옆 창고에 있어. 신우야, 넌 컵하고 물 좀 내줘.”
빠르게 동생들에게 지시를 내린 한이 주방으로 들어서는 모습에 훈은 투덜거리면서도 주방 옆의 창고로 향했다. 모두가 제 할 일을 찾아 움직이는 모습에 한을 따라 주방으로 들어선 신우는 그 안의 광경에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언제나 보던 주방 안에서 그저 다른 사람이 요리를 하는 것뿐인데 그 느낌이 상이했다.
주방의 분위기까지 달라진 느낌이었다.
“와, 우리 어머니 고생하시네. 이 더위에 요리를 다 하시고.”
한이 실실 웃으며 어머니의 뒤에 가 서자 그녀가 찌개의 불을 끄며 돌아서 압력 밥솥을 열고 막 다 된 듯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을 펐다.
“고마운 줄 알면 효도해. 빨리 그릇 내가. 그리고 할아버지께 식사하시라고 하고.”
“할아버지 피난 가셨어요.”
“피난?”
“어머니 요리 입에 안 맞으신다고 나가셨어요. 친구분하고 점심 하실 건가 봐요.”
그런 말을 어머니께 직접 해도 되나 싶어 신우는 당황한 얼굴로 한을 돌아봤지만 밥을 푸시던 어머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만 설레설레 내저으실 뿐이었다.
“하여간, 우리 아버님 알아줘야 돼. 진짜 입맛 까다로우셔.”
“그래서 좋잖아요. 며느리들 요리 못 한다고 주방 근처로 얼씬도 못 하게 하는 시아버지가 세상에 또 어디 있겠어요? 덕분에 제사상에 올라가는 음식들도 전부 아버지랑 고모들하고 숙부님들이 하시잖아요.”
너희 어머니 드실 음식이니 아들이랑 딸이 직접 해야 한다고, 며느리들 모조리 내쫓으시고 자식들만 부리시는 할아버지의 독특한 사고방식을 언급하며 한이 작은 소반에 밥그릇과 수저를 올려 두자 어머니께서 한숨을 섞어 대꾸하신다.
“그건 그렇지만…… 그래도 가끔 섭섭하단 말야. 내가 그렇게 요리를 못 하는 건 아닌데.”
“우리 어머니 요리 솜씨야 가정식으로는 최고죠. 할아버지가 워낙에 최고만 찾으시잖아요. 막내 숙모, 직업이 한식 연구가인데도 우리 할아버지한테는 요리 못 한다고 구박받는 거 보세요. 할아버지 입맛 맞추는 사람은 우리나라에 몇 안 돼요.”
“뭐, 그건 그렇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선 모자는 전혀 위화감이 없어 보였다. 오늘 오전까지만 해도 한이를 보면 가만 안 두겠다고 벼르시던 어머님도, 또 어쨌든 건강히 살아 계시기만 하면 된다며 부모님께 무심하던 한이도.
5년 만의 상봉임에도 지나치게 자연스러운 분위기에 멍하니 그쪽을 바라보고 있자 한이 밥그릇과 수저를 놓은 소반 위에 다 끓은 김치찌개를 얹었다. 그러고는 마루 쪽으로 돌아서며 고갯짓한다.
“신우야, 물.”
“아, 응.”
멀뚱히 서서는 자신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생각에 서둘러 늘 물을 올려 두는 작은 소반에 물통과 잔을 챙겨 마루로 나서자 빠릿한 윤이 이미 상 위에 반찬들을 가지런히 정리해 놓았다. 그 깔끔한 모습에 상 옆에 소반을 내려놓고 물잔을 놓은 뒤 자리를 잡고 앉자 한이 찌개와 밥이 놓인 소반을 들고나와 그릇들을 상 위에 올렸다.
상이 구색을 갖춰 감에 따라 대청마루 위로 맛있는 냄새가 퍼지기 시작했다. 식욕을 자극하는 고소하고 새콤하고 약간은 맵기도 한 그 냄새에 감탄하는 사이 옆에 자리를 잡으신 어머니께서 먼저 수저를 드신다.
“먹자.”
“엄마, 고기 없어? 나 갈비찜 먹고 싶은데.”
숟가락을 든 훈이 아이처럼 고기를 찾자 어머니께서 매섭게 말을 잘라 내신다.
“고기 없어. 신우 나물 좋아한다고 해서 나물하고 김치찌개만 한 거야.”
“어? 내가 좋아하는 건?”
“넌 그만 좀 처먹어. 여기서 얼마나 더 크려고 그래?”
어떻게 들으면 야박하기까지 한 어머니의 잔소리에 훈이 곧 시무룩한 얼굴로 나물에 손을 댄다. 어머니의 두 배는 되는 덩치를 하고도 어머니께 혼이 나자 곧장 풀이 죽은 그 모습이 귀여우면서도 또 걱정이 돼 슬쩍 훈이의 안색을 살피는데 어머니께서 이쪽을 돌아보신다.
“신우, 어서 먹어라. 입맛에 맞으려나 모르겠네.”
“냄새부터 너무 좋은데요. 맛있을 것 같아요.”
“다행이네. 한이가 너 김치찌개 좋아한다고 해서 해 봤는데.”
찌개를 작은 앞 접시에 담아 주시는 어머님의 말씀에 고사리를 입에 잔뜩 문 훈이 방실방실 웃으며 말을 더한다.
“김치찌개는 우리 엄마 김치찌개가 최고예요. 우리 엄마 다른 요리는 못 해도 김치찌개는 진짜 잘하거든요. 저, 미국 가서 초반엔 엄마가 해 주는 김치찌개 먹고 싶어서 막 울기도 했어요.”
“그 덩치로 툭하면 우는 게 자랑이니? 다 큰 놈이 어딜 엄마 보고 싶다고 울어? 지가 공부하고 싶어서 갔으면서.”
타박하듯 말을 던지시면서도 기분 좋은 미소를 지으신 어머니께서 건네는 접시를 받아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마시자 알싸한 맛이 입 안에 퍼졌다. 약간 텁텁하면서도 얼큰한 맛이었다. 늘 따로 육수를 내 깔끔하고 군더더기 없는 맛을 내시는 아주머니표 김치찌개와는 다른, 진짜 집에서 엄마가 끓여 준 것 같은 맛이었다.
그 맛이 묘하게 혀끝에서 울려 멍하니 숟가락을 응시하자 한이 이쪽을 빤히 바라본다.
“왜? 입에 안 맞아? 우리 어머니 김치찌개는 진짜 잘 끓이시는데?”
“어? 아냐. 맛있어. 맛있어요, 진짜. 그냥…… 좀 다른 생각이 나서요.”
어설픈 그 변명에 어머니까지 염려스러워하시는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았다.
“왜? 좀 짜니? 내가 물을 적게 넣었나?”
“아니에요. 딱 좋아요. 그냥…… 진짜 엄마가 끓여 준 맛이라서 좀 놀랐어요.”
아주 어릴 때 먹었던, 엄마가 떠나기 전에 끓여 줬던 그 맛이 떠올라 솔직한 감상을 내뱉자 순간 밥상 위의 분위기가 싸아하니 가라앉았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화기애애하던 대청마루 위가 순식간에 어두워진 것 같은 느낌에, 당황해 입을 다물자 다행히도 어머니께서 빠르게 대화를 이어 가신다.
“그럼 다행이네. 솔직히 난 이 정도면 꽤 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아버님은 성의 없다고 하시더라고. 찌개 하나도 육수 안 내리면 싫어하시니까. 그 육수도 뒷맛이 깨끗하고 맑으면서 진해야 한다니까.”
어머님의 말씀에 다시 밝아진 분위기에 재빨리 웃으며 대화가 끊기지 않게 말을 이었다.
“워낙 맛에 민감하시더라고요.”
“그게 바로 사람 괴롭히는 거야. 우리 아버님처럼 우리나라에서 알아주는 사람들만 골라 쓸 정도로 여유 있는 거 아니면 그냥 적당히 둔하고 적당히 잘 먹는 게 좋아. 한이, 저놈도 그래서 걱정이라니까. 스무 살 때부터 전국 각지에 맛집 찾아다닌 놈이야, 저놈이. 어느 날 갑자기 원주에 와서 재워 달라고 해서 무슨 일인가 했더니 가족 보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 알탕 먹으러 왔다고 해서 어찌나 당황했던지.”
그 버릇은 지금도 그대로예요, 라고 말하고 싶은 걸 참으며 웃자 한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반박한다.
“어머니,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전 할아버지만큼은 아니에요. 라면도 그 자체의 맛으로는 인정한다고요. 다만 뭐든 맛은 있어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네 미래가 할아버지라고 하는 거야. 지금도 그런데 나중에 나이 들면 얼마나 까다로워지려고?”
“뭐…… 그건 그러네요. 할아버지는 제 최종 진화판이니까.”
선택의 여지도 없이 이미 정해져 있는 듯한 한의 미래에 웃으며 콩나물을 집자 어머니가 이번엔 들기름에 볶은 취나물을 앞으로 밀어 주신다.
“취나물 싫어하니? 취나물이 오늘 좋던데.”
“아니에요. 좋아해요.”
“그럼 더 먹어. 왜 이렇게 말랐니? 우리 집 녀석들은 쓸데없이 덩치만 커서 문젠데, 신우는 너무 말랐네.”
이 집으로 옮겨 와 살이 많이 찐 건데도 여전히 말랐다는 게 사람들의 평이었다. 하지만 체질적으로 이 이상은 찌기 힘들 것 같아 고민하는데 한이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것도 제가 많이 찌워 놓은 거예요. 이 녀석 잘 안 먹어요. 어머니가 잔소리 좀 해 주세요.”
“왜? 입은 안 짧은 것 같던데.”
“아…… 원래 양이 적어요. 안 먹는 게 아니라…….”
자신의 식사량은 분명 적정량이었다. 식탐이 없어 많이 먹는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소식을 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한이나 할아버님이 워낙에 대식가다 보니 상대적으로 적게 먹는 걸로 보일 뿐이다. 그러니 자꾸 그런 말 하지 말라고 한을 원망하듯 바라보자 한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저 녀석은 날 얼마나 살찌워야 만족하려는 걸까, 걱정하며 다시 숟가락을 움직이자 어머니가 빈 접시에 찌개를 더 퍼 주었다.
“너무 많이 먹는 것도 안 좋은데 너무 적게 먹어도 안 좋아. 양은 먹으면 느는 거야. 일부러 다이어트하고 그러는 거 아니지? 요즘은 남자애들도 다이어트한다며?”
그 물음에 서둘러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런 건. 원래 잘 안 찌는 체질이에요.”
“그럼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잘 먹어. 체력이 있어야 뭘 하지. 내가 할 말은 아니지만 한이 놈은 체력하고 힘만 넘쳐서 사람 여기저기 끌고 다니는 거 너무 좋아해. 쟤랑 놀아 주려면 체력도 좋아야 돼.”
그 이야기에 갑자기 아침에 자신을 수치스럽게 했던 그 대화가 떠올라 먹던 찌개가 목에 걸렸다. 목구멍에 칼칼한 게 걸려 콜록거리고 있자 어머니가 재빨리 물을 챙겨 주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한이 웃으며 어머니를 만류한다.
“신우는 부끄러움이 많아요. 우리 집은 밥 먹으면서 별 얘기 다 하는데 신우는 아직 거기에 안 익숙하니까 약하게 해 주세요.”
“이제 가족인데 뭘 그런 걸 창피해해?”
“신우는 우리랑 다르다니까요. 이것도 엄청 좋아진 거예요.”
“뭐, 사람이 하루아침에 바뀌는 건 아니니까. 그나저나 아버님 나가셨으면 개들은 어쩌니?”
“저랑 윤이랑 훈이가 산책시킬 거예요. 밥 먹고 그 녀석들 산책시키고 재워야죠. 오늘은 뒤뜰에다가 풀어 놓고 뛰게 하려고요. 날 더우니 멀리는 안 나갈 거예요.”
“그래라, 그럼. 그나저나 왜 이렇게 덥니?”
“늦더위에요. 곧 가시겠죠. 그러고 보니 인재 이 자식은 왜 전화를 안 해? 현장 나가서.”
보고할 시간이 지났다며 한이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꺼내 액정을 확인하자 어머니가 한을 나무랐다.
“그냥 둬. 이 더위에 현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얼마나 힘들겠어?”
“그래서 천창 다 덮어 놓고 내부 작업하라고 했어요. 음료랑 냉풍기도 다 준비해 줬고요. 저 부려 먹는 만큼 대우 잘하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가족들한테 좀 그렇게 해 보지?”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지만 여전히 쌓인 게 많으신 듯한 어머니의 타박에 한은 가볍게 웃음을 흘렸다. 대충 웃음으로 무마하려는 게 분명했지만, 그 미소에 전염된 듯 윤이와 훈이가 덩달아 낄낄거리고 있자 어머니도 결국엔 그냥 웃어 버리신다.
그 분위기에 신우도 따라 웃고 말았다.
아직은 여름의 기운이 남아 뜨거운 볕이 마루 안 깊숙이까지 스며드는 어느 가을의 오후였다.
“이 녀석들은, 절대 늑대개가 아니야. 뭔가가 섞인 거야, 분명.”
식사를 마친 뒤 개들을 정원에 풀어 놓은 한은 저것들이 진짜 늑대개가 맞냐고 연신 한탄했다.
풀어놓자마자 사방에서 짖고 뛰다 아무것도 없는 데서 걸려 혼자 엎어지질 않나, 리드줄에 감겨 빙빙 돌질 않나, 어떻게 봐도 ‘늑대개’라는 이름에서 오는 위엄이나 위용은 없는 녀석들이었다.
어떻게 저렇게 정신이 없을 수가 있냐고 한심하다는 듯 개들을 바라보는 한의 눈빛에 신우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상성이 안 맞는구나 하며 한 녀석의 털을 만져 주자 곧장 녀석이 신우의 다리에 몸을 비벼 댔다.
“아무리 봐도 우리 할아버지 사기당하신 거야. 사를로스 울프 독은 원래 안 짖는다고. 그런데 이 녀석들은 뭐 이렇게 사람만 보면 좋다고 비명을 지르면서 날뛰다 못해 비비기까지 해? 늑대개는 원래 사람 좀 경계하고 으르렁대야 하는 거 아냐?”
그 말과 동시에 한이 리드를 채우려던 녀석이 으르렁댄다. 기가 막힌 그 타이밍에 신우는 웃음을 터트렸다.
“으르렁대네.”
너한테만, 이라고 신우가 덧붙이자 한이 이를 드러낸 늑대개들을 보고도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얼굴로 개의 목덜미를 쥐곤 리드를 건다.
“그래 봤자지. 뒤뜰에 이 녀석들 풀장 있지?”
“응. 날 더우니 거기로 데려가. 한 바퀴 돌고 풀어 놓으면 거기서 알아서 놀 거야.”
“팔자 좋은 놈들. 개 주제에 웬 풀장이야?”
“물에서 노는 거 보면 귀여워.”
“무서운 거겠지.”
그 말에는 신우도 아니라고 할 수 없었다. 성격은 거의 애완견 수준이지만 생김새는 늑대에 가깝다 보니 좋아서 날뛰는 것도 무섭기는 하다. 그래도 나한테는 귀여워 보여, 라고 변명하듯 덧붙인 신우가 한이를 워낙에 싫어해 슬금슬금 피하는 녀석을 잡아 리드를 걸어 주는데 한이 옆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긴, 완전 북극의 눈물이군.”
뜬금없는 북극 타령에 막 리드를 채운 신우는 고개를 들어 한이 쳐다보는 쪽을 바라봤다. 바로 그 다음 순간 그 말뜻을 이해하곤 웃지 않으려 입술을 꾹 다물었다.
“내가 얼마 전에 북극곰과 늑대개의 종을 초월한 우정이라는 사진을 봤는데 딱 저 광경이었어. 그냥 둘이 북극으로 가라.”
하얀 티셔츠에 편안한 조거 팬츠를 입고는 회색 빛깔의 커다란 늑대개의 목을 쓰다듬어 주는 훈이의 모습은, 딱 한이 말한 그대로였다. 그 광경 자체로도 재미있는데 개들도 이상하게 훈이에게는 순종적이었다. 한이는 대놓고 싫어하고, 윤이에겐 별 관심이 없는데, 훈이에게는 상냥하다.
훈이 마음에 든 듯 얌전히 리드를 걸고 그의 주변을 돌며 몸을 비비적대는 개들을 보던 한이 할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반복했다.
“개나 사람이나 역시 동향 생물을 보면 애정을 느끼나 봐.”
“훈이가 순해서 그런 거야.”
“아냐, 그냥 만만해서 그런 거야.”
자기가 다가서면 으르렁대면서 훈이에게는 먼저 다가가 꼬리를 흔들어 대는 개들에게 꽤 빈정이 상했는지 한은 개들의 견성까지 날조하고 있었다.
“그러니까, 애들 괴롭히지 말라고 했잖아.”
“난 괴롭힌 적 없어. 예뻐해 준 거지.”
한이 질투에 불타 개와 훈이에 대한 모함을 계속하는 사이 개들의 목줄 위로 모두 리드가 채워졌다.
“이 녀석들 산책시키고 올게.”
“같이 가.”
“더워, 그냥 있어. 금방 올 테니. 어머니, 저희 이 정신 나간 녀석들 산책시키고 올게요.”
리드 두 개를 쥔 한이 그렇게 소리치자 한이에게 잡힌 개들이 싫어 죽겠다는 듯 몸을 뒤틀었다. 훈이가 리드를 쥔 개들은 좋아서 벌써 펄쩍펄쩍 뛰며 빨리 나가자고 꼬리를 흔드는 반면 한이에게 잡힌 녀석들만 얼굴에 다 드러날 정도로 인상을 쓰고 있었다.
노골적인 그 표정에 괜히 자신이 미안해져 안쓰럽다는 듯 한에게 잡힌 녀석들을 바라보고 있는데 주방에 들어가셨던 어머니가 다과상을 들고나왔다.
“날 더우니 너무 오래 있지 마. 그 녀석들 기절하면 양동이로 물 날라다 끼얹어야 돼.”
“할아버지가 아예 뒤뜰에 땅 파 주셨어요. 거기 처박으면 돼요.”
“아, 그거 좋네. 어서 가 봐.”
“네.”
한이 먼저 개들을 끌고 나서자 훈이와 윤 역시 각자 맡은 개들을 끌고 정원을 돌아 뒤뜰로 향했다. 보통 집 안에서 산책할 때는 리드를 안 하고 풀어 두는데 할아버지께서 사육사나 자신이 아닌 사람들에게 개들을 맡긴 건 처음이라 돌발 사태를 막기 위해 리드를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차도 없는 정원이라 그냥 풀어 두면 알아서 마음껏 뛰어다니겠지만 집 안이 워낙에 넓다 보니 다른 곳으로 새 버릴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그리고 장담하건대 한이 쫓아가면 분명 두세 마리는 별채로 도망갈 거다.
“우리는 차나 마시자.”
“네.”
마루 위에 다과상을 내려놓으신 어머님의 말에 서둘러 다시 마루 위로 올라가 앉자 상 위에 놓인 색색의 한과와 매실차가 보였다. 맛도 맛이지만 보기에도 먹음직스러운 한과의 빛깔에 적당히 식힌 매실차를 한 모금 마시자 바로 앞에 앉아 있던 한의 어머님이 묘한 시선을 보내 왔다. 그 눈빛에 눈을 들어 시선을 마주하자 어머님이 인상 좋은 미소를 지으신다.
“한이 얘기 듣고 역시나 했는데 보면 볼수록 닮았네.”
“네?”
“돌아가신 한이 할머님하고 닮았어. 얼굴이 아니라 분위기가. 한이 녀석 어릴 때부터 꼭 자기는 할아버지처럼 돼서 할머니 같은 사람이랑 결혼한다고 했거든. 보통 아들들은 엄마랑 결혼한다고 하는데 그 녀석은 할머니 할아버지를 보고 자라서 그러더라고. 그러고 보면 복 터진 놈이지. 이미 태어나면서 인생의 목표를 반은 이룬 셈이니까. 그 녀석, 할아버지 복사판이지?”
자연스러운 그 농담에 웃으며 천천히 대꾸했다.
“네. 진짜 그래요.”
“저게 커서 뭐가 되려나 걱정했는데 그래도 다행이지. 사기꾼이나 박수 안 된 게.”
“한이는, 어릴 때도 그랬나 봐요?”
“응. 어찌나 눈치 빠르고 감이 좋은지. 난 아버님이 신점을 너무 좋아하셔서 애가 신들린 줄 알고 놀랐다니까. 귀신이야, 귀신. 뭘 숨길 수가 없어. 한번은 지네 아빠랑 싸우고 한 이틀 말을 안 했더니 아침 밥상 앞에서 ‘이제 그만 좀 하시죠?’ 하는 거야. 말 안 한 지 딱 이틀 된 거 안다고 적당히 하라고 아버님이랑 어머님 앞에서 그 얘기 하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 그래서 그때부터는 싸우지도 못했어. 한이한테 들키면 아버님 귀에 들어가고 그럼 괜히 그 사람만 불려 가서 혼나니까.”
듣는 것만으로도 그 상황이 생생히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한의 성격상 어떤 식으로 얘기를 하고 어떻게 반응했을지 눈에 훤히 보이는 듯해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이가 사람을 좋아해서 그래요. 다정한 녀석이라 늘 사람들을 살펴보고 보살펴 주니까요.”
“그게 잠깐이라 문제지. 내 배로 낳은 새끼지만 애가 너무 변덕스러워. 어릴 때부터 예쁨만 받고 자라서 무서운 것도 모르고. 황제상이니 뭐니 하는 건 모르겠지만 하여간 좋은 팔자로 타고나서 저렇게 제 마음대로 사니 애가 철이 덜 들어서 걱정했는데…… 그래도 오늘 보고 안심했다. 사무실이든 주차장이든 잡히기만 하면 몇 대 패 주려고 찾아간 건데 우리 장남이 철들었어. 네 덕인 것 같아서 좋아.”
갑작스러운 그 얘기에 조금 당황해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는다.
“아까 사무실에 갔더니 자기가 먼저 잘못했다고 하더라고. 전에는 뭐라고 해도 ‘그게 왜요?’라면서 전혀 모르겠다는 듯 쳐다봐서 복장 터졌는데 이젠 자기가 잘못한 건 알더라고. 속에 없는 말은 못 하는 놈이라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 안 하면 절대 잘못했다는 말은 안 하는데, 자기 입으로 잘못했다는 거 보니 드디어 철 좀 드는구나 싶었지. 그리고 네 얘기 하면서 너한테 밥 좀 먹여 달라고 하는데도 놀랐고.”
그 말에는 신우도 놀랐다.
“……한이가 부탁드린 거예요?”
“응. 그 녀석,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따라 좋은 것만 먹고 자라서 내가 한 반찬 영 안 좋아했거든. 뭐, 내가 어지간해서는 주방에 안 들어가기도 했지만 아버님 닮아 미식가라 입맛에 안 맞으면 차라리 굶고 말지 맛없는 요리는 안 먹는 녀석인데 내가 한 김치찌개는 가끔 생각난다고 너 먹여 주고 싶었대. 너, 엄마가 해 준 밥 먹어 본 적 없을 거라고.”
부드러운 시선으로 이쪽을 바라보며 속삭이는 그 말에 순간 ‘아.’라는 작은 감탄사가 터졌다. 그다지 생각해 본 적 없었는데, 아니 늘 그래 왔기에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문득 떠올려 보니 누군가 자신을 위해 식사를 차려 준 게 언젠지 까마득했다. 어머니와 함께 살 때도 어머니와 아버지는 신영이의 간병에 매달려 늘 밥은 알아서 차려 먹어야 했다.
그래서, 의식하지도 못했다. 마지막으로 누군가 나를 위해 밥을 해 준 게 언제인지, 엄마가 해 주는 밥이 어떤 건지도 기억하지 못했다.
그게 그립다는 감각도 잘 떠올리지 못했다.
애초에 그걸 느껴 본 적이 없어서…….
“한이한테 얘기 들었어. 엄마 보고 싶지?”
갑자기 바뀐 화제에 놀라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가 천천히 말을 이어 간다.
“저 무정한 녀석도 가끔 내가 한 밥 먹고 싶다고 할 정도니 정 많은 사람은 사무칠 정도로 그리웠을 거야. 나도 가끔 우리 엄마가 해 주는 김치전 먹고 싶어서 달려갈 때 있으니까.”
나지막하고 상냥한 그녀의 위로에 뭔가 말을 하고 싶었지만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좀 서글펐다.
“자식들은 아프고 서러울 때만 엄마 찾지만, 엄마는 자기 자식 못 잊어. 어떻게 해도 그게 안 지워져. 뭐, 요즘엔 안 그런 사람들도 있는 것 같지만 마음에 병이 생길 정도였다면 어머니가 널 끔찍하게 사랑하시는 거야. 아마 자기 심장을 떼어 놓고 온 기분이겠지. 나도, 분가하는데 한이 놈이 자기는 여기서 할아버지랑 살 거라고 걱정 말고 가 보시라고 하는데 그게 너무 얄미워서 어디 네 맘대로 해 보라고 홧김에 본가에 떼어 놓고 나갔었거든. 그런데 이 집 밖으로 나가자마자 눈에 밟히더라고. 한이 놈이야 어디서든 어떻게든 잘 살 녀석이고, 우리 아버님도 한이한테 극진하신 걸 아는데도 걱정되고, 볼 때마다 애가 쑥쑥 크는데 그게 또 가슴 아프더라고. 나 없는 데서 애가 저렇게 자랐구나 하니 저 뻔뻔한 놈이 좀 안쓰럽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죽 잘 맞는 할아버지랑 둘이 손잡고 자기 하고 싶은 거 다 하면서 편하게 사는 놈인데도 이상하게 그렇더라고. 내가 그 정도였으니 네 어머니는 너 보면 더 가슴 아릴 거야. 잘 자라 준 게 대견하고 고맙고 예쁘면서도 또 미안하고 안쓰럽고.”
낭랑하게 이어지는 어머니의 말씀에, 왜 그녀가 굳이 자신과 단둘이 남아 차를 마시고 있는 건지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엄마의 연락을 받고도 차마 만날 용기가 나질 않아 망설이고 있다는 걸, 한이 이야기한 거다. 그래서, 용기를 내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자신에게 ‘엄마’의 이야기를 해 주시고 싶으셨던 것 같다.
“한이 놈은 네가 괜히 우울해하는 거 싫으니 안 만났으면 하는 눈친데, 내가 네 엄마면 너 많이 보고 싶을 것 같아서 얘기하는 거야. 한이 같은 놈도 자식이랍시고 걱정되는데, 이렇게 예쁘고 고운 아이 두고 가신 거면 어머니가 많이 애타실 거야. 아마, 넌 몰라도 몇 번 너 보러 오셨을 수도 있어. 미안해서 말은 못 걸고 아주 멀리서 보기만 하셨겠지.”
미처 생각지 못했던 그 가능성에 울컥하니 감정이 솟구쳤다.
그런 건, 생각하지 못했다. 자신의 감정에만 빠져서 그녀를 그리워만 했기에 그녀가 몰래 자신을 찾아왔을 가능성에 대해선 아예 생각하지도 못했다.
자신의 좁은 시야를 반성하는 사이 한과를 작은 접시에 담아 건네신 어머님이 자연스럽게 말을 돌리신다.
“그리고 이 김에 확실히 말해 두겠는데, 한이 놈이 집에까지 데리고 온 거면 평생 갈 테니 이젠 너도 우리 가족이야. 그러니까 앞으로 너도 우리 애들처럼 대할 거야. 한이가 잘못하면 이젠 네가 대신 혼나는 거야. 자기 동생 등에 피멍 드는 건 눈 하나 깜빡 안 해도 너 혼낸다면 그 녀석도 정신 좀 차리겠지.”
따뜻한 그녀의 제안에 우울하던 상념이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살아온 환경도 성격도 전혀 다르기에 진짜 친가족처럼 지낸다는 건 불가능할 수도 있지만 저렇게 말해 준다는 게 고마웠다.
동시에 어쩌면 이 사람들과는 진짜 가족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감사합니다.”
“그 인사는 한 번만 하자. 나 그런 거 듣는 거 간지러워.”
듣던 대로 화통한 그 말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네.”
“‘네, 어머니.’”
라고 어서 따라 해 보라는 듯한 어조에 어색한 투로 그 말을 그대로 따라 했다.
“네…… 어머니.”
‘어머니’라는 단어가 입에 익지 않아 자신 없게 중얼거리자 그것만으로도 기쁘신지 어머니가 환하게 웃어 보이신다.
한이와, 그리고 훈이와 윤이와도 닮은 어머니의 미소에 덩달아 미소 짓던 순간 휴대폰이 울려 왔다. 그 소리에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자 한의 이름이 떠 있었다.
“한이에요.”
“받아 봐.”
“네. 응. 왜?”
- 지금 뒤뜰로 나와 봐.
갑작스러운 그 말 뒤로 훈인지 윤인지 모를 누군가의 비명과 함께 첨벙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놀라 서둘러 되물었다.
“왜? 무슨 일 있어?”
- 응. 일단 와 봐.
다급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한이 전화를 뚝 끊었다. 다음 순간 비명이 신경 쓰여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 잠깐 나가 볼게요. 한이가 뒤뜰로 나오래요.”
“왜? 개들이 사고 쳤대?”
“모르겠어요. 그냥 나오라고만 해서요.”
“가 보자.”
자신과 마찬가지로 불안하신 듯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는 어머니와 함께 마루 아래로 내려서 본채를 돌아 빠르게 뒤뜰로 달려갔다.
워낙 덩치가 있는 녀석들이다 보니 혹시 초보들이 데리고 나갔다 사고가 난 건가 걱정돼 다급히 뒤뜰로 들어서는데, 순간 촤악 하고 시원한 물줄기가 날아들었다.
그에 놀랄 새도 없이 사방에서 터진 물줄기 위로 색색의 빛이 일렁이는 게 선명히 시야에 박혀 왔다. 무지개였다. 신기한 광경에 그 자리에 멈춰서자 바로 뒤에서 따라오던 어머니가 고함을 쳤다.
“이게 무슨 짓이야, 너희!”
“어? 어머니도 오셨네?”
“오고 말고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왜 스프링클러를 다 틀어 놨어?”
“훈이가 애들 풀장에 물 채운다고 설치다 스프링클러를 잘못 틀어서 다 젖었거든요. 저희만 젖으면 억울해서 신우도 젖으라고요.”
그 말에 겨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옷이 흠뻑 젖은 채였다. 당황스러운 상황에 몸을 내려다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앞을 보자 개들이 노는 풀장 근처에 있는 한이와 훈이도, 그리고 윤이도 이미 흠뻑 젖은 채였다.
“빨리 물이나 꺼. 이 낮에 스프링클러를 왜 틀어? 어차피 다 날아갈 거.”
“그냥 장난이에요, 장난. 그리고 너무 덥잖아요. 어머니도 오세요. 이 녀석들 풀장 끝내줘요.”
한이 그렇게 말하며 서서히 물이 차기 시작한 커다란 풀장을 가리키자 어머니도 놀라신다.
“진짜 제대로네.”
“그러니까요. 우리가 들어가서 놀아도 되겠어요. 훈이는 튜브 찾아 달라는데요?”
“저 깊이에 웬 튜브야? 그 자식 허리까지도 안 오겠구만.”
“그러니까요. 신우야, 들어가자.”
어서 저 풀장에 들어가서 놀자는 한의 말에 어이가 없어 되물었다.
“저기에 들어가자고?”
“물놀이. 우리 여름에 바다도 못 갔잖아.”
뒤뜰에 스프링클러를 모조리 틀어 놓고는 이제 아예 물속에 들어가서 놀자는 한의 말에 어머니는 옷이 젖을까 거리를 유지하며 질색했다.
“아우, 정신없어. 스프링클러 좀 꺼.”
“좀만 더 식히고요.”
절대 끌 생각이 없어 보이는 한의 태도에 어머님이 결국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으며 뒤로 물러서신다. 그사이 한이 다급히 손을 까닥였다.
“신우야, 빨리 와.”
한의 부름에 마치 예닐곱 아이들처럼 신이 난 형제들을 돌아보자 갑자기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어릴 때도 이렇게 놀아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괜히 심장이 두근두근해 뭘 어떻게 해야 하지, 하고 고민하고 있는데 갑자기 한의 등 뒤에서 거센 물줄기가 날아들었다.
촤악 하며 시원스레 한의 머리와 등에 퍼부어진 그 물줄기에 한이 뒤를 돌아보자 저쪽에서 호스를 손에 든 윤이 싱긋 웃어 보인다.
“어제 대신 맞은 복수.”
웨스턴 무비의 한 장면처럼 호스의 끝을 총구처럼 하늘로 들어 올리곤 후 부는 윤의 모습에 한이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넌 오늘 죽었어. 신우야, 양동이 어디 있어?”
“양동이는 갑자기 왜?”
“저 녀석에게는 시련이 부족해. 인생의 쓴맛을 제대로 보여 줘야지.”
아예 양동이에 물을 퍼 물 폭탄을 맞게 해 주겠다는 한의 말에 진짜 양동이를 찾아 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사이 한의 어머니가 돌아서며 마지막으로 한 번 더 당부를 남겼다.
“스프링클러는 꺼 놓고 놀아.”
더 있다가는 당신에게도 물줄기가 쏟아질까 서둘러 어머니가 자리를 피하자 한이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양동이를 찾는다. 그사이 사면에서 쏟아지는 물에 빠르게 풀장이 채워지자 그 안에 있던 훈이 어느새 무릎까지 찬 물속에서 찰박거리며 풀장 안을 뛰어다닌다. 신이 난 개들과 함께 허리를 굽혀 물을 튀기는 그 모습에 한이 크게 소리쳤다.
“곰이 개 사냥한다!”
그새를 못 참고 놀려 대는 소리에 훈이가 이번엔 참지 않고 촤악 하고 물을 튀겼다. 그 물줄기에 맞은 한이 어느새 뒤뜰 구석에 있던 호스를 찾아 들고는 물을 튼다.
그건 풀장을 만들기 전에 개들에게 물을 주거나 목욕을 시키기 위해 설치해 뒀던 호스였다. 이러다 뒤뜰이 물바다가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는데 호스를 든 한이 윤이에게 물을 쏘자 윤이 이번엔 자신 쪽으로 호스를 돌렸다. 뒤이어 차가운 물줄기가 어깨 쪽을 스쳤다. 물이 굉장히 시원했다.
“신우한테 보복을 하다니! 야, 저기 총 하나 더 있어. 협공하자.”
그 말에 옆을 보니 진짜 호스가 두 개 더 있었다. 어떻게 할까 잠시 망설이는 사이 윤이 질색하며 도망쳤다.
“치사하게! 둘이서 같이 공격하냐?”
“억울하면 너도 애인 데려와!”
기가 막힐 정도로 정확한 조준으로 윤이의 얼굴을 향해서만 물을 뿌려 대는 한의 심술에 윤이 호스를 든 채 건물 뒤쪽으로 도망치자 한이 준족답게 빠르게 동생의 뒤를 쫓는다. 사방에서 스프링클러가 돌아가고 개들은 넓은 풀장 안에서 짖어 대고 여기저기서 물줄기가 터져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그 난장판 안에서 뭘 해야 할지 몰라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 있는데 뒤에서 훈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우 형.”
“응?”
그 부름에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자 또다시 물줄기가 쏟아졌다. 어느새 풀장에서 나온 훈이 남아 있던 호스를 들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당황해 허둥지둥하는데 윤이를 따라가던 한이 돌아서 다시 이쪽으로 달려왔다.
“곰 잡자, 곰!”
어느새 한에게 쫓기던 윤까지 합세해 훈이에게 달려드는 모습에 신우는 서둘러 마지막 남아 있던 호스를 들어 이쪽으로 달려드는 한을 향해 물을 틀었다.
신우가 훈의 편이 돼 함께 그쪽을 공격하자 한이 황당하다는 얼굴로 호스를 마구 흔들어 댄다.
“어? 연신우, 지금 날 공격했다 이거지? 좋았어. 너, 나 잠깐 사격하고 양궁도 한 거 모르지? 하도 지루해서 금방 관뒀지만 나 사격도 잘했어.”
대체 넌 안 해 본 게 뭐냐고 하려는데 순간 얼굴로 물줄기가 쏟아져 재빨리 다시 호스를 들고 한에게 물을 퍼부었다. 하지만 그 상황에서도 방향 감각도 없고 순발력도 없는 훈이는 여전히 달려오는 형들을 조준하지 못한 채 허공을 향해 물을 내쏘고 있었다.
이러다 밀리겠다는 생각에 이번엔 윤이에게 물을 퍼붓는데, 풀장에 있던 녀석들이 이쪽이 더 재미있어 보이는지 수영장 밖으로 뛰쳐나왔다. 그러곤 곧 물총 싸움에 끼어들었다.
신이 난 듯 사방에서 짖어 대며 달려드는 녀석들의 모습에 다들 기겁하며 이번엔 호스를 버려두고 뒤뜰 안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마치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다들 옷이 흠뻑 젖고 개들의 앞발에 허벅지를 다치면서도 연신 웃고 있었다.
그 환한 웃음소리 위로 쏟아지는 빛에 사방으로 퍼진 물방울들이 색색의 빛을 내며 반짝거린다.
웃음소리가, 그리고 색색의 빛이 너무나 찬란하게 가슴속을 물들였다.
“그 녀석들 왜 이렇게 억세? 힘만 센 줄 알았더니 고집도 장난 아니네.”
한참 동안 뒤뜰 여기저기를 뛰어다니다 사방에서 달려드는 녀석들을 겨우 제압해 목욕까지 시킨 뒤 별채로 돌아왔을 때는 오후 5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해가 강해 금세 옷이 마르겠거니 했지만, 그 녀석들을 목욕시키느라 다시 넷 모두 흠뻑 젖어 버렸다.
젖은 옷 위로 개털까지 달라붙어 훈이와 윤이는 급한 대로 본채의 욕실로 달려갔고 한과 신우는 별채로 돌아와 서둘러 욕실로 들어선 채였다.
피부 위에 달라붙는 옷자락에 재빨리 옷을 벗는데 상의를 벗은 신우를 보더니 한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너 얼굴 다 탔다. 선크림도 안 바르고 나가서 팔도 다 그을리고.”
“나보다 네가 더 탔는데?”
그간 사무실에 붙들려 해를 못 본 터라 하얗기만 하던 한의 얼굴과 목이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피부가 쓰릴 것 같다는 생각에 도리어 신우가 한을 걱정하자 한이 대수롭지 않은 듯 젖은 옷을 훌훌 벗어 던진다.
“난 원래 잘 타는 체질이야. 야구 했을 때는 완전히 새까맸어. 그 후로는 거의 실내 운동만 했지만.”
상의에 이어 하의와 속옷까지 다 벗은 한이 먼저 샤워 부스로 들어가는 모습에 신우가 갈아입을 옷을 꺼내려 욕실 밖으로 나가려 하자 한이 신우의 손목을 잡아당겼다. 갑작스러운 그 힘에 놀라 신우가 눈을 껌뻑거리자 한이 신우를 안고는 가볍게 입술을 겹친다.
부드럽게 입술을 빨아들이는 짧은 키스 후, 한은 손을 뻗어 신우의 젖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줬다.
“오늘, 재미있었어?”
“응.”
“그런 것 같았어. 너 오늘 아주 많이 웃었으니까. 사실은, 네가 훈이랑 우리 어머니 좋아할 것 같아서 소개해 주고 싶지 않았는데…… 막상 웃는 거 보니까 좋긴 하다.”
눈가에 입을 맞춘 한이 속삭인 말에 신우는 설마 하는 얼굴을 했다.
지금까지 그런 이야기를 몇 번 듣긴 했지만 그래도 설마 했다.
“너, 설마 진짜 그래서 어머니께 말 안 한 거야?”
“한 20% 정도는. 우리 어머니랑 훈이는 어디 가나 사랑받는 타입이거든. 특히 훈이는 사람들이 다 귀여워해. 거기다 그 녀석 덩치까지 크니 네가 나보다 더 좋아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 보여 주기 싫었어.”
자신이 덩치 큰 남자에게 약하다는 걸 잘 아는 한의 투정에 신우는 어이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이럴 때면 외모와 달리 너무 유치해 보인다.
“훈이는 그냥 동생같이 귀여운 거야. 사랑스러운 거라고.”
“북극곰처럼?”
“조금은…….”
장난스러운 한의 말에 신우는 순순히 그 말을 인정했다.
한의 표현이 짓궂기는 하지만 분명 둥글고 커다란 덩치에 그렇게 순한 눈매를 지닌 사람은 누구에게나 사랑받기 마련이었다. 작은 강아지나 고양이처럼, 모든 사람이 포근하고 무해하다고 느끼는 존재였다, 훈이는.
그리고 어머니 역시 누구라도 좋아할 수밖에 없는 분이셨다. 한의 가족들을 보니 한이 저 이상 성격에도 왜 이렇게나 잘 자란 건지 알 것 같았다. 가끔 도가 지나치긴 하지만 이 끝없는 낙천성의 뒤에는 사랑스러운 가족들이 있었던 거다.
“너, 오늘 어머니한테 내 얘기 했다며? 나 어머니가 해 주신 밥 먹여 주고 싶다고.”
“아…… 어머니가 다 말씀하셨어?”
“응.”
“기분 상했어?”
조심스러운 그 물음에 고개를 내저으며 한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의 품에 안겼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기댄 채 속삭였다.
“아니. 어머니가 좋은 얘기 많이 해 주셨어. 고마워. 어머니들은 확실히 다르더라.”
“그럼 다행이고. 우리 어머니 진짜 좋은 분이시거든. 난 그런 건 잘 모르니까 너한테 뭐라고 말해 줄 수가 없어서 어머니한테 도와 달라고 했어. 그리고 진짜로 너한테 어머니가 해 준 밥 꼭 먹여 주고 싶기도 했고. 우리 집 아주머니 음식 솜씨가 국내 최고이긴 하지만 어머니가 해 주는 거랑은 또 다르잖아. 너한테 맛있는 요리보다 따뜻한 밥 먹이고 싶었어.”
한이 머리를 보듬으며 바로 위에서 속삭여 오는 그 말에 신우는 더욱 그의 허리를 세게 끌어안았다.
“고마워. 진짜 고마워. 그리고 사랑해.”
이 녀석을 만나게 돼서 다행이라고, 지난날 이 녀석의 손을 붙잡길 잘했다고 떠올리던 사이 천천히 맨등을 쓰다듬어 주던 한이 귓가에 속삭였다.
“고마우면 뭐 해 줄 건데?”
역시나 이런 때를 놓치지 않는 한의 기가 막힌 기회주의에 신우는 고개를 들어 그와 시선을 맞췄다.
“뭘 해 줬으면 좋겠는데?”
“새벽에 하던 거, 이어서.”
살살 눈웃음을 흘린 한이 기다렸다는 듯 바라던 바를 내뱉자 신우는 그를 더욱 세게 끌어안았다. 그리고 그의 어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좋아.”
빠르고 명확한 그 답에 한이 조금 놀라 신우의 머리통을 내려다본다. 그러곤 곧 아주 마음에 든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갈수록 예쁜 짓만 해서 어쩌냐, 우리 신우.”
간지러운 그 말에 신우 역시 한의 가슴에 얼굴을 묻은 채 가슴에서 이르는 대로 솔직한 말을 쏟아 냈다.
“나도 너 예뻐. 그래서 네가 원하는 건 다 들어주고 싶어.”
낮고 조용한 속삭임과 함께 상냥한 손길이 머리 위에 더해졌다. 그 손길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아무리 우울하고 슬퍼도 한의 손이 닿으면 한순간에 기분이 좋아진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 같다. 그가 손을 뻗어 주면 눈앞을 가리던 막막하던 어둠이 가시며,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마치 그의 손을 통해 그의 자신감과 낙천성이 전염된 듯 자신도 대범해진다.
깊은 애정과 믿음, 자신이 가져 본 적 없던 자신감과 평온함, 그리고 가족들까지. 한에게는 너무 많은 걸 받았다.
무엇으로도 환산할 수 없는, 오로지 애정으로만 가득 찬 순수한 호의였다, 그건.
그래서 그만큼 돌려주고 싶었다.
그래 봐야 그가 자신에게 준 것의 반의반도 돌려줄 수 없겠지만, 대신 그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주고, 자신이 가진 모든 것들을 그에게 주고 싶었다.
그 탓에 가끔 한이 너무 기어오른다 해도, 말이다.
미지근한 물로 같이 샤워를 한 뒤 수건을 뒤집어쓴 채 ‘내가 닦아 줄게.’ ‘내가 할래.’라고 잠시 실랑이하다 나온 방 안에서 둘 다 옷을 꺼낼 생각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갔다. 그러곤 감기에라도 걸릴까 에어컨의 온도를 올린 뒤 마음껏 서로의 몸을 만지고 키스를 나눴다.
훈이와 윤이는 아예 본채에 있다 저녁까지 먹는다고 했으니 눈치 볼 것도 없었다.
그래서 아주 느긋하게 몸을 겹치며, 피부가 맞닿는 순간의 따뜻함을, 그리고 그 체온이 주는 안정감을 즐겼다.
삽입당할 때의 쾌감보다는 한이 자신을 만질 때마다 벅차오르는 가슴의 울림이 더 크게 느껴졌다.
한의 손길이, 그리고 입술이 조심스레 자신의 피부를 스칠 때마다 그가 얼마나 자신을 사랑하고 원하고 있는지를 깨닫기에 그의 호흡 하나에도 심장이 떨려 왔다.
그리고 다시 한번 깨닫게 되었다.
타인과 체온을 나눌 때 사람은 가장 편안하고 행복해진다는 사실을.
노곤함에 아주 잠깐 잠을 잔 듯했다. 침대에서 서로 애무를 하다 사정한 뒤 다시 샤워를 하고 나왔다, 피곤해서 그대로 깜빡 잠이 들었던 것 같다.
아주 잠깐 존 것 같은데 갑자기 방 안에서 위잉거리는 소리가 울려 왔다.
익숙한 프린터 소리에 눈을 뜨고 주변을 돌아보자 파티션 너머의 책상 앞에 앉아 프린트된 종이와 화면을 심각한 얼굴로 번갈아 살피는 한이 보였다. 여기저기 바삐 손을 움직이는 그 모습에 일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일어나 앉자 한이 그제야 이쪽을 돌아봤다.
“일어났어?”
“응.”
“딱 맞춰서 깼네. 좀 이따 저녁 먹으러 오래. 할아버지는 어머니 상 피해서 저녁도 친구분들하고 드시고 들어오신대.”
“어머니 좀 섭섭하긴 하시겠다.”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는 상황이라 애매하게 말을 흐리며 몸을 일으키자 한이 노트북을 끄곤 출력된 종이를 몇 장 손에 든 채 이쪽으로 걸어왔다.
“괜찮아. 우리 어머니도 그 부분은 포기하셨어. 우리 막내 숙모가 우리나라 안에서 열 손가락 안에 꼽히는 요리 연구가신데 우리 할아버지한테는 명함도 못 내밀어. 한 번은 오셔서 자신만만하게 토란탕 끓여 내셨는데 할아버지께서 한 숟가락 뜨시고 나가셨거든. 그리고 막내 삼촌 불러서 다시는 막내 숙모 주방에 들어가지 못하게 하라고 하셨지. 뭐, 그 덕에 막내 숙모가 반드시 할아버지가 인정하게 만들겠다고 이를 갈면서 요리에 매진하고 계신다고 듣기는 했어.”
“어…… 요리 연구가신데도 맛없다고 하신 거야?”
“응. 우리 막내 숙모 텔레비전에도 자주 나오시고 강의도 다니시고 유명해. 한식 포럼 같은 데도 나가시고. 그런데 우리 할아버지 수준에는 아니란 말이지. 우리 할아버지가 제일 중시하시는 게 손맛이거든. 그건 진짜 타고나는 거라 공부한다고 되는 게 아니니까.”
확실히 요리는 타고난 재능과 센스라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그래도 요리 연구가의 요리까지 퇴짜를 놓으시다니 무섭다는 생각이 들었다.
“할아버지께 어설프게 요리해 드리면 안 되겠다.”
나름 묵사발 레시피도 찾아보고, 묵을 맛있게 하는 법까지 알아보고 있었는데 기가 죽어 작게 중얼거리자 침대맡에 앉은 한이 신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러니까, 넌 나 먹일 생각만 하라고.”
“그래도, 한 번은 맛있는 식사 대접해 드리고 싶었는데.”
“또 모르지. 네가 하는 거라면 맛있게 드실지. 우리 할아버지 편애 심하니까. 그보다, 이거 봐. 뭐가 마음에 들어?”
이중에 골라 보라며 한이 건넨 것들은 인화지에 프린트된 사진들이었다. 흠뻑 젖은 채로도 웃으며 개를 씻기는 자신과 훈이, 윤이의 모습과 개들에게 쫓겨 달리는 모습, 그리고 물기를 터는 개들 덕에 얼굴을 가리고 있는 모습들이 여러 장의 사진에 빼곡히 담겨 있었다.
“이걸 언제 찍은 거야?”
“너희 이 녀석들 씻기느라 정신없을 때. 너 예쁘게 나와서 액자에 넣으려고 뽑았는데 이 뒤에 못생긴 녀석들이 걸리네. 포토샵으로 잘라 내려고 했는데 그럼 완전히 구도가 틀어져서 말야.”
여기서부터 이렇게, 라며 개들을 씻기고 있는 훈이와 윤이 서 있는 곳을 손끝으로 내리긋는 한의 손가락을 툭 밀어 냈다.
“왜 잘라? 예쁘게 나왔는데.”
“제대로 장비 갖춰서 찍었으면 더 잘 나왔을 텐데……. 아무래도 카메라 다시 사야겠어. 휴대폰 카메라가 쓸 만해서 정리했는데 그래도 카메라는 확실히 다르지. 난, 이게 좋은데 어때?”
라며 한이 가리킨 사진은 가장 위에 있던, 개를 목욕시키는 사진이었다. 그 안에는 커다란 개들에게 일일이 비누칠을 하느라 온몸에 거품을 단 채 웃고 있는 세 사람이 찍혀 있었다.
자신도 그 사진이 마음에 들었다.
“나도 이거 좋아.”
“오케이. 그럼 이걸로 한다. 아, 드디어 우리 사진 컬렉션 하나 더 채워지네?”
벽면을 가득 채운 액자들을 바라본 한이 흘린 말에 신우 역시 천천히 그쪽을 돌아봤다.
처음엔 네 장이었던 사진이 이젠 일곱 장으로 늘어 있었다. 여름에 놀러 왔던 정현이 찍어 준 한이 자신의 다리를 베고 잠든 모습과 가까운 공원에 갔을 때 자전거를 타다 찍은 사진, 그리고 할아버지와 함께 개들을 산책시키는 사진, 이렇게 세 장의 사진이 벽면에 더 추가된 채였다. 그리고 방금 한 장이 더 늘었다.
한의 동생들과 함께하는.
사진이 하나 늘어날 때마다 추억이 하나 늘고, 그와 함께 그 추억을 공유하는 사람 역시 늘어가고 있었다.
“예쁘다. 나 이거 전송해 줘.”
“왜?”
“휴대폰 대기 화면으로 쓰게.”
“안 돼. 네 대기 화면은 나랑 찍은 걸 써야지. 왜 내 동생들이랑 찍은 걸 써? 내가 끝내주게 잘 나온 사진 보내 줄 테니 대기 화면으로 저장해서 꼭 갖고 다녀. 딴 놈들이 작업 못 걸게. 작업 걸면 ‘이게 내 애인이에요.’ 하고 보여 줘.”
“보여 주면?”
뭐가 달라지냐는 말에 한이 자신만만하게 대꾸한다.
“내 사진 보면 다들 쫄아서 작업 못 걸 테니까. 나처럼 멋진 남자가 애인인데 누가 작업을 걸겠어?”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래도 본인 입으로 저런 말을 하다니 참 뻔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짜, 뻔뻔해도 너무 뻔뻔하다.
“너, 그 자신감은 진짜 대단해…….”
“난 멋진 남자니까. 그럼 이걸로 건다. 그리고 이제 일어나야 돼. 너 김치찜 좋아한다니까 어머니가 아까 나가서 돼지고기 사다가 묵은지 꺼내서 김치찜 하셨어. 그거 다 먹어야 돼. 낮에 많이 놀아서 힘들 거라고 한 솥 끓이셨으니까.”
“아, 그렇지 않아도 배고팠는데 잘됐다. 밥도 두 공기 먹을게.”
“너 요즘 너무 예뻐.”
순순한 그 답에 한이 이마에 입을 맞춰 오자 신우는 순간 뭔가 떠오른 듯 고개를 들어 한에게 말을 걸었다.
“내 휴대폰 좀.”
“왜?”
“전화할 데가 있어서.”
충전하느라 테이블 위에 둔 신우의 휴대폰을 찾아 든 한이 신우에게 건네주자, 신우가 옆에 있어 달라는 듯 한의 손을 꼭 쥔 채 주소록에서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누구?”
작은 목소리로 한이 그렇게 묻는 순간, 신우는 한에게 답하는 대신 휴대폰에 대고 말을 건넸다.
“여보세요?”
- 네, 신우 씨.
“갑자기 전화 드려서 죄송합니다. 지금 통화 괜찮으세요?”
예의 바른 신우의 목소리와 말투에서 한은 상대가 누군지 알아채곤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그대로 말없이 마주 잡은 신우의 손을 세게 쥐었다.
걱정 말고 용기를 내라고 말하는 것 같은 그 손힘에 신우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이젠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시선을 마주하거나 손을 잡기만 해도 서로의 생각이나 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네, 괜찮아요. 방금 집에 들어온 길이에요. 그런데 무슨 일 있으세요?
“저, 주말에 어머니를 뵐 수 있을까 해서요”
머릿속에 담아 둔 말을 차분히 뱉어 낸 순간 휴대폰 너머에서 팔짝 뛰는 듯 경쾌한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아, 네! 네! 좋아요! 아니, 될 거예요! 아니, 돼요! 고마워요. 진짜 고마워요, 신우 씨.
너무 기뻐하면서도 동시에 당장이라도 울 것 같은 그녀의 목소리에 안도와 함께 죄책감이 스쳤다. 지금 강혜진 씨의 반응만 봐도 어머니가 얼마나 자신을 보고 싶어 했는지 알 것 같아 마음이 놓이는 한편 그간 그녀 역시 애를 태운 듯한 느낌에 진즉에 이러지 못한 게 후회되기도 했다.
좀 더 빨리 용기를 내 볼 걸 그랬다. 하루라도 더 빨리, 전화를 할 걸 그랬다.
- 주말 언제면 될까요? 토요일, 일요일?
자신의 마음이 변하기 전에 확답을 받아 놓으려는 듯 답을 재촉하는 그녀의 음성에 한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토요일은 안 돼. 일요일. 나 토요일에는 출근해야 돼.”
오늘 일찍 돌아와 일이 밀린 덕에 이번 주 토요일은 출근해야 한다는 한의 설명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요일이 좋을 것 같아요. 시간은…….”
이라고 말을 끌고 있자 한이 그의 휴대폰을 들고 빠르게 뭔가를 적어 보여 줬다.
[일요일 정오, 논현동 청원. 네 이름으로 예약.]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한이 고른 곳이라면 조용하게 이야기하기 좋은 곳일 듯해 그대로 말을 전했다.
“일요일 정오에 논현동에 있는 ‘청원’에서 뵐 수 있을까요? 제 이름으로 예약돼 있을 거예요.”
- 네. 논현동 청원이요?
“네.”
- 그럼 어머니께 이대로 전할게요. 어머니 오늘부터 못 주무시겠네요. 아니다, 예쁘게 보여야 한다고 어떻게든 주무시겠다. 요새 통 못 드셨는데 이 소식 들으시면 좋은 얼굴 보여야 한다고 식사도 잘하실 거예요. 고마워요, 신우 씨. 용기 내기 힘들었을 텐데.
“아니에요. 제가 죄송하죠. 제가 먼저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 신우 씨 입장에서는 만날 용기 내기 힘드셨다는 거 알아요. 사실 이제야 연락하고 찾는 저희가 미웠을 수도 있는데…… 고마워요. 사실은 올해 안에 뵐 수만 있어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고마워요.
“저야말로 먼저 연락해 주셔서 고마웠어요. 그 말 꼭 하고 싶었어요.”
- 그렇게 생각해 주셨다니 더 감사하네요. 그럼, 주말에 뵐게요. 어머니 놀라실 테니 직접 가서 전해 드려야겠어요.
“네. 그럼 일요일에 뵐게요.”
짤막한 통화를 끝낸 뒤 휴대폰을 이불 위에 내려놓자 한이 꼭 쥔 손을 흔들며 기분 좋게 웃어 보인다.
“큰 결심 했네.”
“응. 무서워서 그냥 멈춰 있기만 하기엔 너무 시간이 아까워. 너한테는 어느 날 갑자기 소중한 사람들을 못 볼 수 있다고 잘하라고 해 놓고, 정작 내가 그 생각을 못 한 것 같아. 이대로 어영부영 시간 보내다 어느 순간 또 연락이 끊기거나 엄마를 다시 만날 수 없게 되면 평생 후회할 테니까.”
“그래, 잘 생각했어. 뭐든 벌여 놓고 보는 거야.”
“이번엔 동의.”
“좋아. 그럼 일어나. 밥 먹고 엄마 오셨으니 한 판 해야 돼.”
먼저 일어선 한이 부드럽게 손목을 잡고 끌어 주자 신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한 판? 뭘 하는데?”
“고스톱.”
의외의 답에, 막 침대 아래로 내려서 옷매무새를 다듬던 신우가 놀라 되물었다.
“어머니 고스톱 치셔?”
우아한 귀부인 같은 어머니의 뜻밖의 취미에 놀라워하자 한이 낄낄거리며 웃는다.
“응. 되게 좋아해. 그러니까 오늘은 무조건 잃어 주기. 아마, 할아버지도 안 계시니 주무시기 전까지 치실 거야.”
“나 고스톱 못 치는데?”
“그러니까 무조건 잃어 주라고. 오늘은 대출혈 서비스. 시계 풀 각오로 하는 거야. 우리 윤 여사님, 고스톱에서 따면 엄청 기분 좋아지시거든.”
“열심히 해 볼게.”
고개를 끄덕이며 할 수 있는 데까지 해 보겠다고 비장한 다짐을 반복하던 신우는 서둘러 머리카락을 정돈한 뒤 한과 함께 방을 나섰다.
순간 붉은 노을이 가득 든 하늘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해가 저물고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일곱 시까지 해가 짱짱했는데, 이제 진짜 가을이네.”
7시가 되기도 전에 어둑해진 하늘에 마루 아래로 내려선 신우가 그렇게 중얼거리자 신우의 옆으로 다가선 한이 신우의 목을 끌어안으며 속삭인다.
“좋잖아. 너랑 보내는 가을은 처음이니까.”
“아……. 그런가?”
“응. 겨울, 봄, 여름은 같이 보냈는데 가을은 처음이야.”
그러고 보니 그렇다. 고2 겨울에 만나 겨울과 봄을 함께 보내고 여름 즈음에 틀어졌었다. 그리고 다시 만난 건 올해 봄이었다. 그러니까 한과 함께하는 가을은 이게 처음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 가을이 유독 특별하게 느껴졌다.
“처음으로 같이 보내는 가을이니 특별하게 보내야지. 코스모스 피면 잠깐이라도 어디 놀러 가자. 곧 추석 때니 우리 가족들 몰려오면 불꽃놀이도 하고.”
“집에서 불꽃놀이도 해?”
“뭐, 폭죽도 터트리고 불꽃도 쏘고 하지. 구정에 모이면 연도 날려. 이 집에서야 무슨 짓을 해도 옆집에서 고소할 일이 없으니까 다들 본가에만 오면 난리거든. 밤새 술 마시고 떠들고 새벽에 폭죽을 터트려도 옆집에는 안 들리니까.”
거의 두 동네를 통째로 샀으니 그럴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좋다. 남의 눈치 안 보는 거.”
“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봐야지. 우리 가족들 다 모이면 서른 명이 넘어서 정신이 없거든. 할머니 돌아가시기 전에는 고모들 두 분 빼고는 숙부들에 사촌들도 다 같이 살아서 어쩔 수 없이 넓힌 거야. 사내자식들이 많아서 하도 사방에서 시끄럽다고 클레임 들어오니까 할아버지께서 그 소리 듣기 싫다고 공원처럼 집을 넓히신 거거든.”
그건 진짜 할아버지답다는 생각이 들어 신우는 작게 웃음을 흘렸다.
“할아버지 진짜 대단하셔.”
“응. 대단한 분이지. 그렇다고 너무 좋아하지는 마. 너, 우리 가족들 너무 좋아해. 너 자꾸 그러면 나 상처받는다?”
“네 가족이니까 좋아하는 거잖아.”
아니라면 이렇게 좋아할 일도, 아니 애초에 마주칠 일도 없었다고 솔직하게 말하자 한이 기특하다는 듯 신우의 머리를 마구 흐트러트린다.
“점점 착하고 예쁜 짓만 해, 연신우. 너무 예뻐, 너.”
그렇게 대화를 나누며 걷던 사이 해가 완전히 버렸다. 그 짧은 사이에 하늘이 어두워지며 넓은 정원 위로 삭막한 어둠이 가라앉았지만 그 어둠은 전혀 무섭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 집 안을 돌아다니다 어둠을 만나면 미아가 된 듯한 기분에 바짝 긴장했지만 지금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이 집에 익숙해지기도 했고, 또 한과 함께 있기 때문이라는 이유도 있지만, 그보다는 이 길 끝에 아주 포근하고 편안한 곳이 있다는 걸 알게 된 탓이었다. 그 사실을 떠올리는 순간 저 멀리로 본채에서 흐르는 환한 빛이 보였다.
그건 따뜻하고 포근한, 가족의 빛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