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9/23)

1

“아, 내가 데려다줘야 하는데. 내 애인 누가 훔쳐 가면 어떻게 해?”

점심시간 직후, 마무리한 파일을 확인받은 뒤 이른 퇴근을 하려는 순간 여지없이 한의 어리광이 시작됐다.

신우를 뒤에서 끌어안은 한이 인재 때문에 꼼짝도 못 한다며, 자기가 애인하고 못 만난다고 저러는 거라고 날조했지만 그들의 앞에 선 인재는 조금의 타격도 받지 않았다.

“걱정 마. 무거워서 아무도 안 훔쳐 가. 신우, 너 빨리 가. 이틀 동안 수고했어. 가서 쉬어.”

“응. 너도 수고해.”

“그래도 휴대폰은 켜 놔. 지금 난리라 갑자기 연락 갈 수도 있어.”

끝나 가는 작업의 마무리와 현재 진행 중인 공사들, 그리고 새로 들어가는 일들이 동시에 겹쳐 유난히도 바쁜 시기였다. 그래도 할 일이 없는 것보다는 바쁜 게 낫다.

“알았어. 이만 가 볼게.”

마지막 인사 후 신우가 가방을 챙겨 들자, 등에 매달려 있던 한이 드디어 떨어져 나갔다.

“엘리베이터까지 데려다줄게. 아, 집까지 데려다줘야 하는데…….”

“네가 사무실에서 얌전히 일해 주는 게 날 위한 일이야.”

신우가 한을 달래려는 듯 어깨를 툭툭 치자 인재가 지금 말이 아주 마음에 들었는지 흐뭇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그만 퇴근하라는 허락과 같은 그 고갯짓에 신우는 걸음을 뗐다.

“갈게.”

“그래, 가자. 엘리베이터까지만…… 이지만.”

신우의 손에 있던 가방을 빼앗아 든 한이 다른 손으로 신우의 손을 꼭 잡자 신우가 민망한 듯 속삭인다.

“손은 놓고 가. 밖에 사람들 있는데.”

“뭐 어때? 이제 다 아는데.”

“그래도…….”

단순히 아는 거랑 눈앞에 바로 보이는 건 차이가 크다고 하려 했지만 말보다는 늘 그렇듯 한의 행동이 빨랐다. 무작정 손을 잡아당기는 한의 힘에 끌려 복도로 나섰는데 다행히도 다들 자기 일로 바빠 이쪽에 신경을 쓸 겨를은 없어 보였다.

그래도, 누가 보기 전에 빨리 나가야 할 것 같아 걸음을 서둘러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는데 한이 슬쩍 말을 던진다.

“너 면허 안 따? 너 혼자 들어갈 때 버스나 지하철 타고 다니는 거 싫은데.”

“익숙해서 괜찮아. 그리고 오늘은 날씨가 너무 좋아서 버스 타고 천천히 가고 싶어.”

“힘들잖아.”

“출퇴근 시간에 사람 꽉 찬 버스나 지하철에서 치이는 게 힘들지. 이런 시간에는 텅 비어서 느긋하게 거리 구경하면서 갈 수 있어.”

좌석도 널널하고 에어컨도 잘 나오고 운전도 대신해 주고, 라고 신우는 만족스러워했지만 한은 여전히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항상 이런 시간에만 다니는 게 아니잖아. 할아버지가 면허만 따면 차도 사 주신다는데 빨리 따서 나 출퇴근도 시켜 주고 마중도 나오고 해 줘.”

“아냐. 차는 내가 사야지.”

소형이라도, 내가 사는 게 맞다고 신우는 고개를 내저었지만 한은 그 명제에 부정적이었다.

“그게 네 마음대로 되는 게 아냐. 너 차 사면 개들도 태우고 다녀야 되는데 소형차로는 어림없어. 면허도 1종 수동으로 따야 될걸.”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도 그런 말씀을 하신 적이 있기는 했다.

“그 녀석들 태우고 어디 놀러 다니면 재미있긴 하겠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멈춰 선 신우가 한에게 손을 뻗자 한이 가방을 넘겨준다. 그러곤 버튼을 누르며 신우의 기대에 대해 회의적인 답을 내놓는다.

“전혀 재미없어. 그 무서운 얼굴로 창에 매달려서 사람들을 위협한다고. 한 번은 도로에서 옆 차에 탄 애 보고 건너가려고 해서 애 울고 난리 난 적도 있대. 우리 할아버지야 그러면 우리 개가 예쁘니 질투해서 우는 거라고 하시지만…… 누가 봐도 무서워서 우는 거지. 그 녀석들은 위협용이라니까.”

외모만 보자면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사랑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건, 이미 자신이 그 녀석들에게 익숙해진 탓일 것이다.

“생긴 것만 그렇지 다들 순하고 착해.”

“그래, 너는 이상하게 잘 따르더라. 그런데 왜 나만 보면 그렇게 짖어 대나 몰라.”

“네가 괴롭히니까 그렇지.”

처음에는 할아버지 말씀처럼 종이 달라 그런가 했는데 자세히 보니 한이 개들을 너무 괴롭히는 게 문제였다. 나름 예쁘다고 만지는 것 같은데 덩치도 큰 녀석이 개들을 마구 만져 대니 다들 싫어하는 눈치였다.

그래도 가족이라 물지는 않지만 귀찮다고 으르렁댈 때는 꽤 무섭기도 했다.

“내가 이상한 게 아니라 그 녀석들이 이상한 거야. 리더가 너무 풀어 줘서 그런지 짖기도 잘 짖고. 원래 그 녀석들 품종 자체가 잘 안 짖는 종이거든. 그런데 이 녀석들은 사람이라면 신이 나서 짖으면서 달려든다고. 침입자랑 손님을 구분을 못 해.”

“귀엽잖아.”

서서히 올라오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신우가 그렇게 답하자 한이 갑자기 신우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한탄한다.

“아, 큰일 났다. 너, 할아버지랑 오래 있더니 할아버지 닮아 가는 것 같아.”

“그거 아주 좋은데?”

“안 돼, 안 돼. 할아버지 닮은 건 나 하나로 충분해. 너까지 우리 할아버지 닮으면 큰일 나. 우리 어머니랑 아버지도 나 하나만 닮아서 다행이라고 얼마나 안심하고 계시는데.”

다행히 한도 본인이 사고뭉치라는 자각은 있는 듯했다. 고칠 생각은 없겠지만 그래도 알고 있는 게 얼마냐 싶어 고개를 끄덕끄덕하던 사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갈게.”

신우가 들어가 보라는 듯 인사를 건네자 한 역시 신우에게서 떨어져 한 걸음 물러선다.

“그래. 조심해서 가고 도착하면 전화해.”

“응. 너도 일 잘해. 연필 그만 깎고.”

“더 깎을 연필도 없어.”

색연필 한 세트 더 구매했다가는 인재가 자신을 사무실에 묶어 버릴 거라는 한의 말에 미소 지은 신우가 엘리베이터에 올라타자 곧 문이 닫혔다.

닫히는 문틈으로 손을 흔들어 보이자 한 역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젠 이별 인사가 힘들지 않았다.

곧 다시 만날 거라는 걸 아니까.

건물을 나서 버스를 탄 신우는 곧장 아주머니께 메시지를 보냈다. 한이 주문한 대로 쌈밥을 하려면 무슨 재료를 사 가야 하냐고 묻자 아주 자세한 문자가 도착했다.

“머윗잎하고 호박잎, 다슬기랑 버섯들하고 바지락 살, 오징어…….”

하나하나 눈에 익은 단어들을 입으로 확인하던 사이 버스가 멈췄다. 갑작스러운 정차에 살짝 몸이 휘청거려 앞 좌석의 손잡이를 잡고 고개를 들자 치익 하며 버스의 문이 열렸다. 정거장이구나 싶어 다시 몸을 바로 하며 앉는데 버스의 앞쪽 문을 통해 올라서는 커다란 남자에게 시선이 멈췄다.

굉장히 큰 남자였다.

한을 매일 보고 있어 덩치 큰 남자에겐 익숙해졌다 생각했는데 한보다 더 큰 남자였다.

버스 손잡이 봉에 손이 닿는 정도가 아니라 천장에도 머리가 닿을 듯 커다랬다. 놀란 얼굴로 그를 살피는데 남자가 굼뜬 동작으로 올라타 주머니를 뒤적거리는 게 보였다.

2미터는 충분히 넘을 것 같은 키에 엄청난 덩치, 그 덩치를 더 커 보이게 하는 노란색 후드 티에 그의 덩치만큼이나 큰 가방을 멘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본 사람 중 가장 거대했다.

저렇게 큰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그를 바라보는데 버스의 천장이 낮아 몸을 수그린 채 기사님과 대화를 나누던 그가 ‘어? 그렇게 비싸요?’라고 놀라며 천 원짜리 한 장과 동전을 꺼내 현금통에 넣었다. 그러곤 곧 야무지게 지갑을 챙겨 후드 주머니에 넣고는 좁아 보이는 통로를 지나 바로 자신의 앞자리에 털썩 앉았다.

순간 조금 당황했다. 큰 가방 탓에 엉덩이만 살짝 걸친 채로 앉은 모습이 불안하기도 했지만 그 남자가 앞에 앉자 앞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시야를 완전히 가리는 그 덩치에 감탄하던 중 순간 정신이 들었다. 아무리 신기하다고 해도 모르는 사람을 너무 오래 보고 있었다는 생각에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러곤 다시 시선을 내려 쇼핑 목록을 확인하는데 벨 소리가 울려 왔다. 앞에서 나는 소리였다. 그와 동시에 앞에 앉은 남자가 휴대폰을 찾으려 어수선하게 움직였다.

소리의 진원을 찾아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그가 이내 커다란 가방을 벗어 안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휴대폰이 안 보이는지 다급히 가방을 뒤지는 그의 손길에 애꿎은 가방 안의 책들만 바닥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조용하던 버스 안에서 울린 소음에 슬쩍 앞을 살피자 그가 책을 주우려 재빨리 몸을 숙인다. 그 순간 그의 후드 티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다.

왼손으로 가방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책을 주우며 바닥에 떨어진 휴대폰을 보고는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모습에 서둘러 허리를 숙여 휴대폰을 주워 건넸다. 그러자 강아지 같은 눈을 한 남자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우선, 책부터 챙기세요.”

뒤에서 보기 조마조마해 어서 책을 넣으라고 하자 허리를 펴고 앉은 남자가 주섬주섬 책을 가방에 넣는다. 그러곤 곧 휴대폰을 들고 통화 버튼을 누른 뒤 아주 작은 목소리로 응답했다.

‘응. 지금 왔어. 버스 타고 가는 중이야.’, ‘괜찮아. 찾아갈 수 있어. 걱정 마.’와 같은 답들이 줄줄 이어졌다. 그 큰 덩치를 구긴 채 다른 사람들한테 피해가 갈까 조곤조곤 떠드는 모습이 귀여워 웃으며 그를 바라보자 곧 통화를 끝낸 그가 뒤를 돌아보며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시끄럽게 해서.”

“괜찮아요.”

공공장소라도 그 정도로는 미안해할 필요 없다고 답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내릴 역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원래는 한 정거장 정도 더 가야 했지만 장을 봐야 해서 좀 빨리 내릴 생각이었다.

슬슬 내릴 준비를 하기 위해 좌석에서 일어서는데 앞에 앉아 있던 남자도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다 천장의 손잡이에 코를 부딪치곤 일순 ‘으악’하는 소리를 낸다. 진짜 보기 드문 광경에 놀라워하며 그에게 괜찮냐고 묻자 그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한도 그렇지만 평균 이상의 덩치는 역시 살기 힘들구나 하며 버스 단말기에 카드를 찍고 내려서자 코를 연신 매만지던 남자가 사방을 돌아보더니 뒤따라 내린다. 그러고는 종종걸음으로 옆으로 다가서 조심스레 물어 왔다.

“저기, 죄송한데요.”

“네. 말씀하세요.”

“여기 근처에 떡집 없나요? 과일 가게나.”

“마트 안에 다 있어요.”

“아, 다행이다. 오랜만에 와서 어디가 어디인지 전혀 모르겠어서요. 엄마가 꼭 떡이나 과일 사 들고 인사 가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여전히 거북이 등껍질 같은 가방을 멘 채 머리를 긁적거리는 커다란 남자를 목이 꺾여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과일은 마트 안에서 팔고, 떡집은 1층 푸드 코트에 있어요. 거기 떡 맛있어요. 어르신들도 좋아하세요.”

10년 전쯤 한의 할머님 고향에서 떡집을 하시던 분이 연이은 적자로 결국 폐점하고 딸과 함께 살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는 소식에 한의 할아버지께서 곧장 그분을 설득해 시내에 커다란 체인점을 차려 주셨다고 들었다.

그 지점은 지금 딸이 이어받아 운영하고 있지만 감사의 의미로 할아버지 댁 근처의 마트 지점만은 그분께서 머무르며 직접 떡을 만들고 계셔서 가장 평이 좋은 곳이었다.

모든 떡이 맛있지만 특히나 백설기가 맛있어 한이 간혹 퇴근할 때 사 오곤 했다. 그래서 그곳을 소개해 주자 남자가 활짝 웃었다.

“우와, 감사합니다. 오는 내내 떡집이 안 보여서 좀 걱정했는데 다행이네요.”

“저도 마트에 들를 거니까 같이 가세요.”

왠지 내버려 두면 바로 정면에 보이는 입구도 못 찾아 빙빙 돌 것 같은 어리숙한 인상에 먼저 제안하자 그가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바싹 다가왔다.

“제가 오늘 운이 좋네요. 좋은 분 만난 것 같아요.”

덩치는 다소 위협적이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사람을 기분 좋게 만드는 그의 얼굴은 강아지처럼 해맑고 무해했다.

딱 보기에도 순하고 착한 사람인 듯싶었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화사한 분위기에 덩달아 미소 지으며 함께 마트 안으로 들어서자 커다란 자동문을 통과한 그가 신기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와, 진짜 우리 형이 건축법을 개정했나?”

“……네?”

“아, 아니에요. 아무것도. 아, 떡집 저기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것 같은 그 말에 눈을 껌뻑거리던 사이 커다란 남자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어요.”

“다행이네요. 그럼, 조심히 가세요.”

“다음에 또 봬요.”

아이처럼 해맑은 얼굴로 손을 흔든 그가 빠른 걸음으로 떡집으로 향하는 모습에 신우 역시 손을 흔들어 보였다. 그러다 잠시 후 계속해서 이쪽만 보고 걷는 그에게 조심하라고 하려는데 그보다 먼저 그가 가게 문틀에 머리를 찧었다.

층고가 높아 마트 안으로 들어오는 자동문은 2미터 50센치미터였지만 안쪽 가게들의 문은 2미터 정도였다.

대차게 문틀에 머리를 박으며 본인의 키가 2미터가 넘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 그는 잠시 아픈 듯 머리통을 문지르다 이내 다시 이쪽을 보곤 괜찮다는 듯 손을 흔들어 보였다.

조금 불안해 보이는 그 모습에 어서 들어가라는 듯 손짓하자 이번엔 다행히도 그가 허리를 숙여 문을 무사히 통과했다.

그가 안전하게 가게 안으로 들어선 걸 확인한 뒤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설마 하는 생각에 다시 그쪽을 돌아봤다.

점심시간에 한에게 들었던 일화 때문인지 혹시나 그가 한의 동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으나, 너무 안 닮았다. 덩치가 크단 것만 비슷할 뿐 외모나 풍기는 분위기가 상이했다. 무엇보다 한의 막냇동생은 미국에 있어 할머니 제사 때나 잠깐 다녀갈 예정이라 했으니, 아닐 거다.

생각보다 세상에는 큰 사람이 많구나, 하고 의혹을 정리한 신우는 느긋하게 다시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향했다. 장 볼 목록을 확인하며.

“어? 또 만났네요?”

그 남자와 다시 한번 마트 출구에서 마주쳤을 때 신우는 진심으로 그 우연에 놀라워했다.

마트 앞 의자에 앉아 바로 옆에 떡집 로고가 그려진 상자와 정종을 세워 둔 남자는 여전히 커다란 가방을 멘 채 열심히 휴대폰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 네. 또 뵙네요. 그런데 왜 여기에…….”

누굴 기다리는 건가 해 그렇게 묻자 남자가 방싯거리며 대꾸했다.

“아, 집 찾는 중이에요. 항상 아빠, 아니 아버지 차만 타고 와서 버스 타고 온 건 처음이라 좀 헷갈리네요.”

“그럼 좀 헷갈리긴 하죠.”

그럴 수 있다고 웃으며 답하자 그사이 휴대폰을 다시 후드 티의 앞주머니에 넣은 남자가 옆에 있던 작은 박스와 술병이 든 가늘고 긴 쇼핑백을 안으며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러곤 신기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본다.

“우와, 짐 많다. 짐 들어 드릴게요. 주세요.”

상자에 술에, 거북이 등껍질까지 메고도 마트의 쇼핑백을 들어 주겠다는 남자의 과한 친절에 신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괜찮아요.”

오히려 제가 들어 드려야 할 것 같은데요, 라는 말을 삼키며 신우가 부드럽게 거절하자 남자가 안고 있던 술병과 떡 상자를 내려다보더니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건 가벼워요. 짐 너무 많은데 들어 드릴게요. 그거 되게 무거운 것 같은데.”

“괜찮아요. 안 무거워요.”

대부분 채소라 가볍다고 하며 신우가 먼저 걸음을 옮기자 그가 바로 신우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러다 뭔가 생각난 듯 조심스레 묻는다.

“혹시 이 근처에 사세요?”

“네.”

“저기, 그럼 진짜 죄송한데요…… 이 주소 좀 봐 주실 수 있으세요?”

그 말과 함께 걸음을 멈춘 그가 바닥에 병을 내려놓고는 또 커다란 후드 티의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주섬주섬 꺼내 든다. 곰이 털 고르기를 하는 듯한 그 광경에 겨우 웃음을 참고 서 있자 휴대폰을 꺼내 한참 만지작거리던 그가 메시지가 오간 화면을 보여 준다.

거기에는 주소가 하나 적혀 있었다.

“어…… 저희 집 근처인 것 같네요. 저희가 388번지니까, 402번지면 아마 근처일 거예요.”

요즘은 다들 도로명 주소를 쓰긴 하지만 한의 할아버지가 아직 지번 주소를 사용하는 탓에 자신도 388번지라고 외우고 있었다. 402번지면 그 근처일 것이라고 하자 남자가 안도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

또다시 한의 동생이 아닐까 하는 의심이 들었으나 역시나 아니었다. 인상착의는 한의 동생과 많이 비슷하지만 주소가 달랐다.

“아, 다행이다. 혹시나 반대쪽인가 했거든요.”

“저랑 같이 가세요. 저희 집하고 같은 방향이니까요.”

“네, 감사합니다.”

어린아이처럼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를 하는 남자를 보곤 어서 가자는 듯 눈짓하자 다시 술병과 상자를 바리바리 싸 든 남자가 나란히 서서 발을 맞추었다.

옆에 선 그의 커다란 덩치를 보고 있자니, 자꾸만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절대 아니겠지만…… 그래도 혹시나 싶은 마음에 확인하듯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지금 어디 가시는 거예요?”

“본가에요. 인사드리러요. 오랜만에 귀국해서요.”

“……외국에 계시다 오셨어요?”

“네, 미국이요. 로봇 공학 전공이거든요.”

“아…….”

귀국했다는 말에 혹시나 했지만 로봇 공학이라면 역시 아니다. 한의 동생은 분명 기계 공학에서 자동차 공학으로 전과했다고 했다.

그러니 절대 한의 동생은 아니라고 확신한 신우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며 우연한 동행자와 대화를 이어 갔다.

“한국에는 오랜만에 들어오신 거예요?”

“네, 잠깐잠깐 오가기는 했는데 공부도 어렵고 영어도 힘들어서 오래 있지는 못했어요. 사실 집에 오고 싶어서 울기도 많이 울었는데 할아버지가 가서 중간에 돌아오면 호적에서 파 버린다고 하셔서 겨우겨우 참았거든요.”

그것도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야기였다. 바로 몇 초 전의 확신과 달리 또다시 밀려오는 의혹에 신우는 곧바로 옆을 돌아봤다.

아무래도 어설프게 묻는 건 안 될 것 같았다. 차라리 확실하게 이름을 물어보는 게 나을 듯했다.

“저기…….”

이름이 혹시 정훈이냐고 물으려는 순간 바로 앞의 골목길에서 멈춰 섰다.

“아, 여기다! 이 골목 생각나요.”

“아…….”

“감사합니다! 저희 집 이 골목이에요.”

“어? 하지만 더 가야 하는데…….”

388번지까지는 아직 한참 남아 있으니 402번지도 훨씬 더 가야 할 거라고 말하려는데 남자가 자신만만하게 소리친다.

“여기 은행은 기억하거든요. 항상 여기로 올라가서요.”

“아, 그래요?”

그러고 보니 워낙에 골목이 복잡하게 이어져 있으니 그의 집이라는 402번지는 위쪽 동네에 있을 수도 있다. 자신도 이 근처에 대해 다 아는 건 아니라 남자의 말에 수긍한 신우는 어서 가 보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인사에 다시 한번 허리를 꾸벅 숙여 고맙다는 인사를 마친 남자가 부지런히 골목으로 들어섰다. 집을 찾아서인지 가벼워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신우도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역시 집이 다른 걸 보니 한의 동생이 아닌 것 같았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 남자가 신경이 쓰였다. 오늘 유난히 한과 동생 이야기를 많이 해서인지 자꾸 연관지어 생각하게 됐다.

자꾸만 머릿속을 도는 생각에 신우는 서둘러 고개를 내저어 생각을 떨쳐 냈다.

집도 다르고 전공도 다르고, 비슷한 면도 많지만 결정적인 증거들이 다르다. 그러니 한의 동생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머리를 정리한 신우는 부지런히 가던 길을 다시 걸었다.

하지만 우연이 반복되면 운명이라는 말을 실감한 건 바로 그 10분 뒤였다.

“안녕하세요!”

유난히도 화창한 날씨를 만끽하며 걷던 중 울려 온 목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본 신우는 바로 옆의 분식점 안에서 달려 나오다 문틀에 머리를 찧은 남자를 보곤 기겁했다.

쾅 소리가 나도록 머리를 찧고도 슬러시를 손에 들고 웃는 남자의 해맑음도 놀라웠지만 여기서 또 만났다는 건 더 놀라웠다.

“여기서 뭐 하세요?”

“올라가 보니 저희 동네가 아니더라고요. 그래서 다시 내려왔어요.”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그새 여기까지 왔나 하며 신우가 경악한 얼굴을 하자 남자가 빨갛게 부어오른 이마를 한 채 신기한 걸 발견했다는 듯 설명해준다.

“여기가 부채꼴 형태더라고요. 올라갔다 내려오니 이 동넨데 목이 말라서요. 좀 드실래요?”

겨우 두 번 마주친 걸로 살갑게 웃으며 마시던 슬러시까지 건네는 남자의 친근하고도 천진한 태도에 신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그러고 보니 아직 반소매를 입고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서 긴 소매의 후드 티를 입은 그는 유난히도 더워 보였다. 그래서 난 신경 쓰지 말고 어서 마시라고 말하자 왼손으로 박스와 술병을 든 그가 오른손으로 슬러시를 마시며 느긋하게 걸음을 옮겨 간다.

“날씨 진짜 덥네요.”

“네. 아직 초가을이라서요.”

“이럴 줄 알았으면 비행기에서 내려서 옷 갈아입고 오는 건데.”

“공항에서 곧장 오신 거예요?”

“네. 다들 주중이라 바쁘다고 픽업 못 한다고 해서 리무진 타고 시내에서 내려서 버스 타고 온 거거든요. 좀 와 주지.”

그러며 툴툴거리는 얼굴이, 어쩐지 한을 닮은 것 같았다. 점점 쌓여 가는 의혹에 다시 그에게 넌지시 물었다.

“혹시 형 있어요?”

“네, 둘이요.”

“……형들한테도 연락했어요?”

“네. 그런데 바쁘다고 그냥 알아서 오라고 하더라고요.”

“큰형도요?”

한이 전화를 받았다면 분명히 오늘 얘기를 했을 거라는 생각에 단도직입적으로 묻자 그가 시무룩한 얼굴을 한다.

“큰형은 전화번호도 몰라요…….”

그 순간, 의혹은 확신이 되었다.

한의 동생이 맞다.

전공도 주소도 달랐지만, 어떤 팩트를 들이대든 이 이상 확실한 증거는 없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그에게 직접 확인하기로 했다.

“저기, 혹시 형 이름이…….”

정한 아니냐고 물으려는 순간 코너에 있는 파란색 간판을 본 남자가 크게 소리쳤다.

“아! 저거다! 맞아! 저 은행이에요! 제가 아까 잘못 봤나 봐요!”

그 순간 더는 물어볼 것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 골목 안쪽의 집은 딱 한 채뿐이다.

“저기요, 이름이 정…….”

훈이 맞냐고 물으려는데 막 골목길에 들어선 그의 배에서 휴대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걸음을 멈춘 그가 들고 있던 짐을 내려놓고는 주섬주섬 또 앞주머니를 뒤져 휴대폰을 꺼냈다. 그러곤 곧 기쁜 듯 전화를 받았다.

“형, 나 지금 집 앞이야. 다 왔어. 응? 어…… 잘 찾아왔어. 친절한 분 만나서…… 응? 어딘데? 안 보이는데…….”

라는 그의 말이 끝나자마자 시끄러운 경적이 울려 왔다. 요란하게 울려 대는 그 소리에 뒤를 돌아보자 아주 익숙한 차체가 눈에 들어왔다.

이건 확인 사살이다.

기가 막힌 상황에 그대로 굳어 버린 듯 멈춰 서 있자 골목 어귀에서 멈춘 차의 운전석에서 내려선 윤이 다급히 이쪽으로 다가와 옆의 커다란 남자에게 물었다.

“어? 너 뭐야? 큰형한테 연락했어?”

편안한 폴로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윤의 물음에 커다란 남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아니. 나, 큰형 전화번호도 모르는데?”

“그럼 어떻게 신우 형하고 만난 건데? 신우 형, 우리 형이 이 자식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했어요?”

말도 안 되는 윤의 질문에 신우는 난감한 듯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우연히 만났어…….”

“우연히요?”

“버스에서…….”

“버스? 아, 너 버스 타고 온다고 했지? 안 헤맸냐? 지금쯤 반대 방향에서 헤매고 있을 줄 알았는데? 길치 좀 나았냐?”

라는 윤의 물음에 아직 안 나은 것 같다고, 신우가 속으로만 중얼거리던 사이 남자가 신우를 힐끗 보며 답했다.

“이분이 도와주셨어. 그런데 아는 분이야?”

“아, 인사 안 했어? 신우 형, 인사 안 했어요?”

인사야 물론 했지만 아직 통성명은 안 했다. 버스에서 우연히 만난 동승자와 통성명을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우연히 만나서 같이 오긴 했는데…… 누군지는 몰랐어.”

“네? 한이 형이 얘기 안 했어요? 훈이 오늘 들어온다고?”

“……아니……. 내년 봄에나 올 거라고 하던데…….”

작은 속삭임과 같은 답에 윤이 갑자기 분통을 터트린다.

“아, 그 인간 진짜! 이 녀석 이번에 졸업해서 들어온다고 분명히 어제 메시지를 네 번이나 보냈는데, 남의 말을 안 들어, 하여간! 아, 일단 그건 됐고 그런데 어떻게 같이 왔어요? 알아본 거 아니에요, 그래도?”

“……전혀 몰랐어.”

“이렇게 닮았는데요?”

우리 세 형제는 얼굴이 똑 닮았다는 윤의 말에 신우는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라 억지로 웃을 수밖에 없었다.

눈썰미가 없는 편은 아닌데 어떻게 봐도 저 형제는 안 닮았다. 자세히 뜯어보면 전체적인 얼굴의 윤곽이 닮긴 했지만 언뜻 보기엔 형제가 저렇게까지 안 닮을 수 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전혀 닮지 않았다.

정현도 분명 얼굴은 닮았다고 했는데 그건 오래 본 사람의 감상이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는 전혀 혈연관계로 보이지 않는 얼굴이었다.

한은 시원하고 유들유들한 인상의 미남형이지만, 윤이는 신경질적이고 지적인 느낌이 강하고 저 막내는 둥글둥글 그저 착하고 순해 보이기만 했다.

그런데 어떻게 윤은 저렇게 자신 있게 닮았다고 할 수 있는 걸까, 내가 이상한 건가, 의아해하며 그쪽을 보고 있자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건 훈도 마찬가지인지 자신과 윤을 번갈아 본 뒤 윤에게 묻는다.

“그런데, 저분이 누구신데?”

“응? 아, 이쪽은 신우 형. 한이 형 애인.”

길바닥에 짐을 바리바리 들고 선 채 얼결에 한의 애인이라고 소개를 받은 신우는 이러니저러니 해도 윤이 한이 동생이라는 사실을 실감했다.

지난날 한도 대뜸 윤에게 자신을 애인이라고 소개한 전적이 있었다. 한이 특이해서 가능한 일이구나 했는데 그 동생도 마찬가지였다.

수치심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몰라 화끈거리는 얼굴을 숙이자 앞에서 당황한 듯한 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큰형 애인?”

“응. 본가 별채에서 동거 중이야. 그러니, 사실혼이라고 봐야지.”

그 말에 훈은 기함했다.

“큰형 한국에 있어?”

“얼마 전에 들어왔대.”

“나 그런 얘기 못 들었어!”

“그래?”

“그래!”

“내가 말 안 했냐?”

“안 했어!”

억울함이 뚝뚝 묻어나는 훈의 고함에 신우는 아주 중요한 사실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가족들과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는 건, 한만의 독특한 습성이 아니라 이 집안 유전자의 문제인 듯했다. 다만 한이 그 정도가 심해, 다른 사람들이 묻히는 것뿐이지 윤도 필요하지 않은 부가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절대 말을 하지 않는다. 신경질적인 것 같은데 또 의외의 부분에서는 무심하다. 확실히, 저건 유전이라고밖에 설명이 안 된다.

“뭐, 어차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니까. 일단 차에 타. 집까지 꽤 가야 돼. 신우 형, 뭘 이렇게 들고 왔어요? 그냥 배달시키지.”

“안 무거워.”

“주세요. 뒤에 싣게. 훈이 너도 빨리 차에 타.”

들고 있던 봉투를 빼앗아 서둘러 차의 트렁크에 실은 윤은 빠른 걸음으로 운전석으로 향했다. 빠릿한 윤의 움직임에 신우 역시 서둘러 뒷좌석에 타려고 하자 윤이 신우를 만류했다.

“형이 앞에 타세요. 이 자식이 옆에 타면 차 기울어요. 너 중간에 앉아. 그리고 머리 잘 구겨 넣고.”

“응.”

윤의 말대로 조수석에 올라타 안전띠를 매던 신우는 갑자기 차가 출렁하는 느낌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그러자 훈이 낑낑거리며 뒷좌석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윤의 말대로 마치 몸을 차 안으로 구겨 넣는 듯한 그 모습에 눈을 휘둥그레 뜨자 백미러로 뒤에 차가 오나 안 오나 보며 연신 불안해하던 윤이 짜증을 냈다.

“야, 빨리 안 타냐? 이게 곰이야, 사람이야? 그리고 내가 너 후드 티 입지 말랬지? 더 곰 같아 보인다고.”

“차가 너무 작잖아.”

“이 차가 작은 게 아니라, 네가 큰 거야. 네 몸이 들어갈 만한 차가 얼마나 될 것 같아?”

그 말에는 훈도 반박할 수 없는지 겨우 자리를 잡고 앉아 몸을 수그렸다. 그게 또 주인한테 혼난 곰 같아 안쓰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윤이 차를 몰며 혀를 찬다.

“너, 거북이 등껍질 안 내릴래? 여행 가방은 어디 두고 백팩을 메고 왔어?”

“잃어버릴까 봐…….”

“제 가방 잃어버리는 모지리가 어디…… 아, 있지. 내 뒤에.”

신랄한 투로 말을 마치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 윤의 옆모습에 신우가 뒤를 돌아보며 물었다.

“가방 잃어버린 적 있어요?”

“네, 몇 번…….”

어쩐지 가방을 보물처럼 꼭 메고 다니더라니, 그래서 그런 거구나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옆에 앉은 윤이 훈의 말을 정정했다.

“몇 번이 아니라 수십 번이에요. 정신 놓고 다니면서 지갑이며 가방이며 잘 잃어버려요. 제 몸뚱이는 안 잃어버리고 다니는 게 용하죠. 아, 신우 형. 우리 형한테 전화 좀 해 주세요. 전화해서 막냇동생 살아 있다고 좀 전해 주세요.”

“응.”

뭐든 그 자리에서 일을 처리 안 하면 위가 견뎌 내질 못하는 윤의 부탁에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들자 윤이 다시 훈에게 화살을 돌렸다.

“훈이 너 할아버지한테 전화는 드렸어?”

“아까 전화했는데 개들 산책시키는 중이니 귀찮게 전화하지 말고 와서 인사하라셨어.”

“어머니랑 아버지한테는?”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전화했어. 엄마가 길 잃어버리지 말고 잘 찾아오라고 주소까지 불러 주셨는걸.”

그 말에 막 한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누르려던 신우는 문득 훈이 보여 줬던 주소를 떠올리곤 작게 중얼거렸다.

“그런데, 주소가 달랐는데…….”

그 말에 훈이 여전히 구부정한 자세로 눈만 들어 묻는다.

“아니에요? 엄마가 분명히 402번지라고 했는데…….”

“집은 388번지…… 아…….”

그제야 한이 원래 집은 388번지였는데 옆집, 뒷집, 그러다 이 동네, 옆 동네, 그 옆 동네까지 전부 사서 집을 확장했다고 한 게 떠올랐다. 그러니까 아마…….

“예전 구주소로 366번지부터 419번지까지가 우리 집이에요. 원래 본채가 있던 데가 388번지라 할아버지가 그 주소를 쓰시는 거고요. 그 주소 대면 이 근방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니 어머니가 아마 대강 기억나는 대로 불러 주셨을 거예요.”

“아……. 그렇구나.”

“도로명 주소는 한 집으로 처리돼서 그걸로 알려 주셨으면 금방 알았을 텐데 우리 어머니도 원주에 사신 지 오래돼서 도로명 주소는 잘 못 외우시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그 집에 안 사는 사람들은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인터넷으로 지번 주소 검색을 해 볼걸, 그럼 더 빨리 알아차렸을 텐데 하고 후회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곤 잠시 기다리자 이내 휴대폰에서 유쾌한 한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 집에 도착했어?

“아직. 가는 중이야.”

- 왜? 1시간 전에 나갔잖아?

혹시 가는 길에 무슨 일 있었냐는 한의 걱정에 신우는 서둘러 말을 돌렸다.

“장 좀 보느라. 그보다, 너 동생 온다는 얘기 왜 안 했어?”

- 동생? 누구? 윤이? 윤이는 우리 옆방에 살잖아.

“아니, 윤이 말고 훈이.”

- 훈이 왔대?

역시나였다, 윤의 메시지를 안 본 거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그렇게나 세심한 녀석이 가족들에게는 왜 이럴까 하는 생각에 작게 한숨이 터졌다.

“지금 내 뒤에 있어.”

- 어? 그런 얘긴 못 들었는데…….

“윤이가 어제 메시지 남겼대.”

- 아? 그랬나? 메시지 몇 개 와 있었는데 안 봤어. 어쩔 수 없지, 뭐. 그래서 훈이는 봤어?

“응.”

- 상상하던 대로야?

호기심 가득한 한의 음성에 백미러로 뒷좌석을 가득 채운 훈을 확인한 신우가 작게 대꾸했다.

“너무. 너, 오늘 일찍 못 들어오지?”

- 당연히 못 들어가지. 죽을 시간도 없어. 왜? 벌써 나 보고 싶어?

“그게 아니라, 동생 왔잖아.”

- 오면 온 거지, 뭐. 아, 너 그 녀석 왔다고 저녁 안 싸 오면 안 돼. 나, 너 보고 싶단 말야. 다시 나온다고 해서 들여보낸 건데, 안 나오면 안 돼.

“……그건, 알았어. 쌈밥 재료 다 사 왔으니 이따 갈게.”

- 그럼 됐어. 아, 인재가 또 부른다. 저 자식은 왜 저렇게 날 사랑해? 잠깐 미팅 있으니 그만 끊을게. 이따 보자. 햇살 뜨거우니까 해 지면 나와. 올 때는 할아버지한테 차 내 달라고 하고. 버스 타고 오지 마. 힘들어.

“알아서 할게.”

- 그럼 내가 할아버지한테 전화한다?

“알았어. 버스 안 탈게. 아, 훈이 바꿔 줄까?”

- 살아 있으면 됐어. 끊을게.

매정한 답변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그사이 골목을 지나 집 대문 안으로 들어선 차 안에서 신우가 작게 한숨을 내뱉자 뒤에 있던 훈이 고개를 불쑥 내밀었다.

“그런데, 밖에도 다니세요?”

“……네?”

“우리 형, 애인 생기면 밖에 나가지도 못하게 한다고 했거든요. 그러다 날개옷 입고 도망친다고.”

그 말에 문득 한이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전래 동화가 떠올랐다.

“그거, 선녀와 나무꾼 얘기죠?”

“네. 잘 아시네요?”

눈을 반짝이는 훈의 답에 신우는 처음으로 전래 동화의 유해함을 깨우쳤다. 물론, 이건 아주 특이한 케이스긴 하지만 그 전래 동화가 한에게는 큰 해악이 된 게 분명하다. 자신감만으로 세계를 정복할 것 같은 녀석이 왜 그렇게나 자기 사람은 못 믿을까.

그 사고를 어떻게 바꿔야 하나 고민하던 사이 넓은 정원을 가로지른 차가 본채 앞에서 멈춰 섰다.

“먼저 내리세요. 전 차고에 주차해 놓고 들어갈게요.”

“응. 그래.”

“훈이 너도 내려. 등껍질 잘 챙기고.”

“껍질 아냐…….”

삐친 아이처럼 뾰루퉁하니 답한 뒤 차 문을 열고 낑낑거리며 내리는 모습에 신우는 겨우 웃음을 참으며 먼저 조수석에서 내려 그의 팔을 잡아 주었다. 그러자 그가 눈을 접으며 귀엽게 웃어 보인다.

“고맙습니다.”

역시나 한의 동생이라서인지 웃는 얼굴이 유난히도 해맑다고 떠올린 순간 바로 앞에서 다른 답이 튀어나왔다.

“당연히 고마워해야지. 그리고 너 한 번만 더 그런 티 입으면 죽는다?”

고개를 숙인 채 차에서 힘겹게 내려서는 훈의 모습에 뒤를 돌아보던 윤이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떡하고 술 안 챙기냐?”

모진 그 말투에 훈이 아차 한 듯 재빨리 짐들을 주섬주섬 챙겼다. 그 와중에도 천장에 머리를 부딪치는 훈을 보며 윤이 혀를 찬다.

“아우, 저 모지리.”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한 그 말투에 윤을 바라보자 윤이 다시 자신을 바라본다. 그러곤 훈에게 하는 것과는 달리 예의 바른 말투로 말을 건넨다.

“트렁크에 있는 짐은 제가 들고 들어갈게요. 먼저 들어가 계세요, 날 더운데.”

“아냐, 열어 줘. 내가 가져갈게.”

“형이 무거운 거 들고 다니면 제가 할아버지한테 혼나요. 그냥 들어가세요. 아주머니께 갖다 드리면 되죠?”

유난히도 자신을 아끼는 할아버지의 편애를 윤은 당연한 듯 받아들이며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착한 사람, 좋은 동생, 성실한 가족 그 자체인 윤을 보며 신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고마워.”

“그럼 들어가세요.”

“응.”

탁 하며 뒷좌석의 문까지 닫은 뒤 신우는 짐을 바리바리 싸 든 훈과 함께 천천히 걸음을 옮겨 갔다. 할아버지께서 집 앞이 시끄러운 걸 질색하셔서 진입로에서 본채까지는 조금 걸어가야 하는 거리였다. 햇살이 유난히도 좋은 날이라 느긋한 걸음으로 본채를 향해 가는데 옆에서 걷던 훈이 흘깃 이쪽을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왜요?”

“어? 아뇨. 그냥…….”

살짝 말을 흐리며 머뭇거리는 얼굴에는 나 묻고 싶은 거 엄청 많아요, 라고 쓰여 있었다. 순수한 호기심과 의문으로 가득 차 반짝거리는 그 눈망울에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묻고 싶은 거 있으면 물어봐도 돼요.”

그 말에 그가 반색했다.

“진짜 그래도 돼요?”

“네.”

“아, 먼저 말 낮추세요. 큰형 애인인데…….”

그리고 어떻게 봐도 연장자로 보인다는 훈의 배려에 신우는 조심스레 다시 물었다.

“……그래도 돼요?”

“네. 당연히 그래야죠.”

“그럴게, 그럼.”

살짝 미소 지으며 훈을 돌아본 순간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어쩐지 갑자기 시원하다 했더니 훈이 가을 햇볕을 몸으로 가려 주고 있었다. 일부러 그쪽에 선 건가 의아한 눈빛을 띠자 훈이 배시시 웃었다.

“제가 덩치가 커서 양산용으로는 좋거든요.”

“……안 가려 줘도 되는데…….”

“큰형이 사랑하는 사람이잖아요. 우리 형 집에 사람 데려오는 타입은 아니거든요. 큰형이 집에 데려온 거라면 진짜니까 우리 가족이에요.”

윤이도 그랬지만, 너무나 쉽게 한 치의 거리낌도 없이 모든 걸 받아들이는 훈의 반응이 놀라웠다.

“괜찮아?”

“네?”

“형 애인이 남자인 거…….”

혹시나 해 조심스레 묻자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게 왜요?”

“…….”

“형만 좋으면 됐죠.”

역시나, 형제다. 이런 건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 찰나 그가 순하디순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형 잘 지내요?”

“응. 잘 지내. 일이 좀 바쁜 것 빼고는 괜찮아.”

“아, 역시……. 우리 형이야 어딜 갖다 놔도 잘 지내긴 하겠지만 그래도 좀 걱정은 했거든요. 이렇게 해외에서 장기간 연락이 안 된 건 처음이라서요. 엄마도 많이 걱정했어요. 이탈리아 가서 마피아 여자 건드리다 총 맞아 죽는 거 아니냐고.”

그쪽이 걱정이었던 건가 떠올리자 문득 웃음이 터졌다.

“마피아가 달려오면 그 말발로 꼬셔서 친구가 됐을 것 같은데?”

“하긴, 우리 형이라면 그랬겠죠. 아, 다 왔다. 할아버지!”

커다란 대청마루 앞에 도착하자마자 훈은 신발을 벗고 다다다 안으로 달려들어 갔다. 반가운 이를 만날 생각에 신이 나 꼬리를 흔드는 강아지 같았다. 그 뒷모습이 너무 귀여워 미소 지은 채 대청마루를 지나 그를 따라가는데 안쪽의 문을 열던 훈이 문 앞에서 우뚝 멈춰 서는 게 보였다.

“왜……?”

왜 그러고 있냐는 질문이 끝나기도 전에 바로 앞에서 나지막한 여자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인천에서 걸어왔니? 어떻게 공항에서 여기까지 오는데 5시간이 걸려?”

차분하고 무뚝뚝한, 여자치고는 굉장히 톤이 낮은 그 음성에 훈의 등 뒤에서 고개를 빼 앞을 보자 어떤 여자분이 할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자그마한 체구에 단정한 정장을 곱게 차려입으신, 지긋한 나이의 부인이었다. 고상하고 우아해 보이는 외양에 누구시지, 하며 바라보는데 바로 앞에 서 있던 훈이 툭 하니 들고 있던 짐을 떨어뜨렸다. 그러고는 그대로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엄마!”

짤막한 그 외침에 놀라 눈을 껌뻑거리던 사이, 그의 반도 안 되어 보이는 체구의 여인을 끌어안은 훈이 엉엉 울음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서러움에 찬 그 울음소리에 그녀가 훈이의 어깨를 두드려 준다.

“그래, 엄마다.”

“보고 싶었어, 엄마!”

“그래, 그래.”

품에 쏙 들어오는 여인을 끌어안고 대성통곡을 하는 훈의 모습에, 겨우 그녀가 바로 한의 어머님이라는 사실을 인지했다.

완전히 무방비한 상태에서 닥친 뜻밖의 상황에 어찌할 바를 몰라 그대로 멈춰 서 있자 그녀의 앞에 앉아 찻잔을 기울이시던 할아버지께서 작게 혀를 찼다.

“그 거북이 등딱지는 좀 내려놓고 우는 게 어떻겠니?”

사람 생각하는 건 다 비슷한지, 할아버지도 훈이 메고 있는 커다란 가방을 보시곤 ‘보기만 해도 덥구나.’라며 부채를 손에 드셨다. 그리고 막 부채질을 하시려다 이쪽을 보시곤 반색했다.

“신우도 왔구나. 예 와 앉아라.”

부드러운 할아버지의 음성에 일단 먼저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다녀왔습니다.”

“그래, 날이 덥지? 수정과라도 마실 테냐?”

“아뇨, 괜찮습니다. 윤이 만나서 같이 올라왔어요.”

“아, 그 녀석도 일찍 들어온다고 했지. 어서 앉아라. 천장 안 무너진다.”

물론, 단둘뿐이라면 얼마든지 웃으며 자리를 잡고 앉아 오늘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겠지만 오늘은 평범한 상황이 아니었다. 앉기 전에 먼저 인사를 드릴 분이 있기에 어떻게 해야 하나 갈팡질팡하던 사이 훈을 끌어안고 있던 분이 자신을 보며 눈짓으로 인사를 건네 왔다. 그 시선에 얼결에 고개를 숙여 보이자 훈을 밀어 낸 그녀가 자신에게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새로 들어온 청년인가 봐요. 성진이 졸업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이름이……?”

조심스러운 그녀의 물음에 서둘러 대꾸했다.

“연신우입니다.”

“아, 신우. 신우 씨. 이름도 예쁘네. 우리 아버님 잘 부탁드려요. 까다로우시긴 해도 그만큼 정도 많은 분이니까요.”

친절한 얼굴과 말투로 인사를 건네고는 있지만 그녀는 자신에 대해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할아버지가 의외라는 듯 그녀에게 묻는다.

“한이한테 얘기 못 들었니?”

“네?”

“어허, 그 고약한 놈이 또 얘길 안 했구나.”

혀를 차며 부채를 펄럭이는 할아버지의 태도에 그녀가 영문을 몰라 하며 눈을 동그랗게 뜨자 옆에 앉은 훈이 눈물을 닦아 내며 대신 답했다.

“한이 형 애인이래요.”

“……뭐?”

“별채에서 동거 중이래요. 저도 방금 알았어요.”

역시나 만나자마자 아무런 안전장치도 없이 대번에 터진 애인 소개에 신우가 입을 꾹 다문 순간 쩌렁쩌렁한 노성이 귀를 때렸다.

“뭐라고?”

작은 체구에서 나오는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고함에 놀라 고개를 퍼뜩 들자 그녀가 사나운 시선으로 할아버지를 응시하는 게 보였다.

“아버님, 지금 이건 또 무슨 소리죠?”

“말 그대로지, 무슨 소리는 무슨 소리겠냐?”

“그 녀석이 지금 말 한마디 없이 집에 사람을 들인 거예요?”

“요새 것들이 다 그렇지 않냐. 그놈 못된 성미에 나가서 혼자 살림 안 차린 게 얼마냐? 좋게좋게 넘어가라.”

별것도 아닌 일 갖고 요란 떨지 말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높아진다.

“이게 좋게좋게 넘어갈 일이에요? 상의 한마디 없이 이탈리아로 유학 떠나서 이탈리아 여행 다녀온 수지 엄마한테 소식 듣게 해 사람 민망하게 하더니, 이번엔 돌아와서도 몇 달이 지나도록 연락 한번 없다, 윤이한테 들켜서야 연락을 해 놓곤 이젠 제 마음대로 동거요? 아무리 멋대로라도 정도가 있지! 내, 이 자식을 그냥!”

팔을 걷어붙이며 당장이라도 일어서 한에게 달려갈 것 같은 그녀의 기세에 당황해 할아버지와 그녀를 번갈아 보며 서 있자 할아버지가 그녀를 만류했다.

“어허, 지들이 좋다면 그만 아니냐. 냅둬라. 일 때문에 바쁜 애 괜히 시간 잡아먹지 말고.”

“아버님이 자꾸 그렇게 싸고도시니까 애가 점점 버릇이 없어지잖아요.”

“뭐 어떠냐? 제 일 확실히 하는 놈이니 믿고 맡겨라.”

“믿는 것과는 별개로 괘씸하다고요! 어떻게 다 자기 마음대로예요? 아버님도 그래요. 그런 일이 있으면 곧장 연락이라도 해 주시지, 어떻게 주말마다 통화를 하시면서 한마디도 안 하실 수가 있으세요?”

그간 쌓인 게 많았는지 한 번 터지자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오는 그녀의 불만에 할아버지께서 부채질을 하시며 은근히 시선을 돌리신다.

“나이가 들어 그런지 최근 좀 깜빡깜빡하지 뭐냐. 원래 늙으면 다들 그러는 게야.”

“그 수많은 재산 목록에 은행 잔고를 일 원 단위까지 기억하시는 분이 기억력이 안 좋으시다고요?”

확실히 그 변명은 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쓰게 웃고 있자 헛기침을 하시던 할아버지께서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키신다.

“내 새끼들 오후 산책 시간이 됐구나. 신우야, 나와서 좀 도와라. 이 녀석들이 기운만 넘쳐서 힘에 부치는구나.”

“아……. 저기…….”

산책이야 당연히 돕겠지만 아직 한의 어머님께 정식으로 인사드리지는 못한 상태였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건지 몰라 그녀와 할아버지를 돌아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다녀왔습니다. 어? 할아버지 산책 가세요?”

반가운 음성에 뒤를 돌아보자 할아버지께서 모르는 척 말을 흘리신다.

“오냐. 들어가 봐라. 네 어미 왔다.”

말을 마치신 뒤 시끄럽다는 듯 재빨리 대청마루를 내려가는 할아버지의 모습에 막 마루로 올라서던 윤이 놀란 얼굴을 하곤 다가왔다.

“어? 엄마, 주말에 오신다면서요?”

툇마루를 지나 방 안으로 들어선 윤이 반가운 듯 그렇게 인사를 건네자 당장에 방석이 날아갔다. 순식간에 눈앞을 스친 방석에 놀라 눈을 휘둥그레 뜨자 두 손으로 정확히 방석을 받아 든 윤이 눈을 끔뻑거렸다.

“왜요?”

“왜~요? 왜요가 뭐야? 너, 신우 씨 얘기 왜 안 했어?”

노기를 띤 그 물음에 윤이 이쪽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갸웃한다.

“신우 형요? 형이 왜요?”

“한이랑 동거한다며?”

“아? 아, 뭐…… 별로 중요한 것도 아니잖아요.”

윤에게 그건 꽤 중요한 문제라고 답해 주고 싶은 걸 겨우 참고 기다리자 당장에 그녀가 자신이 떠올린 그 말을 꺼냈다.

“그게 안 중요하면 뭐가 중요한데?”

“프라이버시잖아요. 남의 사생활을 왜 떠벌리고 다녀요?”

어디까지나 그건 형의 개인사일 뿐, 자기 알 바 아니라는 윤의 경악할 만한 발언에 목뒤를 짚은 그녀가 한 번 길게 심호흡을 하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고는 느릿하게 윤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너, 이리 와. 오늘 너희 다 좀 혼나야겠다.”

“전 왜요?”

“너도 똑같아! 이런 중요한 일을 알았으면 엄마한테 재빨리 말을 해야지! 내가 그 자식 소식을 꼭 이런 식으로 알아야 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한의 어머님이 윤의 팔을 잡고 등을 후려쳤다. 매서워 보이는 그 손길에 윤이 억울하다는 듯 소리친다.

“형이 잘못한 거죠! 제가 잘못한 건 아니죠, 그건!”

“너도 똑같아! 그 자식 그런 거 뻔히 알면서 말도 안 하고 모르는 척하면 그만이야?”

다시 한번 울린 철썩하는 소리에 왠지 자신이 아픈 것 같아 몸을 움찔하는데 윤이 재빨리 옆으로 돌아섰다.

“어머니, 아무리 그래도 저랑 형을 동급으로 취급하시면 안 되죠!”

“너도 똑같은 놈이야! 빗자루 어디 있어? 아니, 한이 하키채 어디 있어? 아니, 하키채 말고 죽도! 이 자식 검도 할 때 쓰던 죽도 어디 있어?”

아무래도 체구가 작다 보니 다 큰, 그것도 보통보다도 훨씬 큰 아들들을 때리기 버거운 듯 그녀가 도구를 찾자 윤이 질색하며 도망친다.

“잡으려면 형을 잡아야지! 왜 나한테 그래요?”

대청마루를 가로지른 윤이 정원으로 도망치자 한의 어머니 또한 맨발로 정원으로 내려섰다. 하지만 워낙에 체구 차이가 커 윤이 한 걸음 도망치면 어머님은 두세 걸음 더 따라가야 했다. 거기에 더 약이 오르신 듯 어머님이 아예 입고 계시던 재킷을 벗어 던졌다.

“너, 이리 안 와?”

“엄마, 손 맵다고요!”

그 말과 함께 윤이 또 한 걸음 성큼 뒷걸음질 치자 거리가 더욱 멀어졌다. 도저히 잡히지 않을 듯한 윤의 모습에 더욱더 화가 난 어머님이 18년 된 한의 죽도를 찾는 데는 그다지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이 형이 골프 한다고 안 설쳐서 다행이야.”

야구도 리틀 야구단에서 그만둬서 진짜 다행이고, 라고 윤의 등에 스프레이 타입의 파스를 뿌리던 훈은 작게 중얼거렸다. 상황 파악 못 한 듯 태연한 훈의 말투에 윤은 사나운 눈길로 훈을 노려봤다.

“그게 다행이냐? 너, 지금 내 꼴 안 보이냐?”

“그러게 그렇게 중요한 게 있으면 엄마한테 보고를 했어야지. 엄마 그렇지 않아도 큰형 보는 즉시 반쯤 죽여 놓는다고 화났는데.”

“그럼 형을 잡아야지, 왜 애꿎은 날 잡아? 왜 매일 사고는 형이 치고 맞는 건 내가 맞아야 하는데?”

“그럴 때마다 큰형이 집에 없으니까.”

짧지만 그간의 모든 상황을 깔끔하게 총망라한 훈의 답에 윤이 잇새로 작게 혀를 찼다.

“젠장.”

“그나저나 큰형은 또 안 맞겠다. 엄마 쓰러졌으니.”

창고를 뒤져 죽도를 찾아 윤을 사정없이 때리던 한의 어머님은 몇 분 지나지 않아 결국 진이 빠지셨는지 현기증이 난다며 이불을 깔고 누우셨다. 그러곤 곧 다들 꼴도 보기 싫다고 아들들을 모두 내쫓으셨다. 도저히 자신도 본채에 있을 분위기가 아니라 별채로 넘어오긴 했지만 그래도 한의 어머님이 걱정돼 본채 아주머니께 전화해 보니, 다행히 지금은 일어나 아주머니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라고 하셨다.

하지만 그래도, 한을 때릴 기운은 남아 있지 않으실 거다.

“진짜 더럽게 운도 좋아, 그 인간은. 왜 사고는 형이 쳤는데 매번 우리가 혼나다 엄마가 쓰러지고 나면 돌아오냐고?”

억울해 죽겠다는 듯 윤이 분통을 터트리는 모습에 차마 뭐라고 할 말이 없어 미안한 듯 웃자 신우를 본 윤이 아차 싶은 얼굴로 정색했다.

“아, 형 때문에 저러시는 거 아니에요. 우리 형 때문에 화나셔서 그런 거지.”

“그래도 미안해. 어쨌든 내 일 때문이니까.”

“그동안 쌓인 게 많으셔서 그래요. 한이 형, 매일 사고치고 살살 빠져나가서 엄마가 엄청 약 올라 하셨거든요. 신우 형은 신경 쓸 것 없어요.”

윤이 뭘 말하는지는 알겠지만 조금 전 사태를 직접 본 이상 신경을 안 쓸 수 없었다.

이 모든 상황이 자신 때문인 것 같아, 지금이라도 본채로 가 제대로 어머님께 설명을 드려야 하나 고민하는데 때마침 전화벨이 울렸다. 한인가 싶어 다급히 가방에서 휴대폰을 찾아 화면을 보는데 한이 아니라 정현이었다.

“응. 나.”

- 목소리가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아냐. 그냥 좀 정신이 없어서 그래.”

- 왜? 그 집 개들이 또 사고 쳤어?

차라리 그 녀석들이 산책하다 치킨집을 습격한 거면 낫다. 그럼 할아버지께서 그 집 치킨을 모조리 사는 걸로 정리해 주실 테니까.

“아냐. 훈이 왔어. 한이 어머님이랑.”

마지막 말을 뱉는 순간엔 저도 모르게 맥이 빠진 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려던 게 아니라 아차 하고 있는데 정현이 의아한 듯 물었다.

- 어? 아줌마도 오셨어? 훈이는 오늘 온다는 얘기 들었는데 아줌마는 주말에 오신다더니?

최근 윤과 꽤 자주 연락을 하던 정현은 훈이 온다는 걸 알고 있었다. 역시, 한이만 모른 거다.

“알면 미리 연락 좀 해 주지.”

- 뭘 연락을 해? 옆에 윤이 사는데. 윤이가 얘기 안 해?

“한이한테 메시지 남겼는데 한이가 확인도 안 했나 봐.”

걔 요즘 바쁘니까, 라고 한숨 짓자 정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찼다.

- 윤이 자식도 가끔 보면 참 모자라. 자기 형 성격 뻔히 알면 너한테 얘길 해야지.

친구의 동생을 향한 정현의 가차 없는 평에 그제야 아까 훈이한테 ‘모지리’라고 할 때 윤의 말투가 왜 그렇게 익숙했나 알아챘다.

그래, 딱 정현의 말투였다. 인정사정 안 봐주는, 신랄한 말투 그대로였다.

역시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영향인지 말투 같은 게 비슷하다는 생각에 조금이나마 표정이 풀렸다.

“훈이는 잘 도착했어. 그런데 어머님은 좀…… 안 좋으신 것 같아.”

좀이 아니라 많이 안 좋은 상태였지만 괜히 걱정하게 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적당히 단어를 고르자 정현이 대충 상황을 알겠다는 듯 반응해 온다.

- 아, 걔네 어머니 한이 잡으러 오신 거거든. 저번에 안부 전화 드리니까 나도 가만 안 둔다고 하시던데.

“화 많이 나셨어. 윤이는 죽도로 맞았고.”

- 아, 그럼 또 걔 패다 한이 팰 기운 없으시겠네. 젠장, 정한 맞는 거 구경하러 가려고 했더니.

훈이나 윤이와 같이, 그 새끼 더럽게 운도 좋다는 정현의 반응에 문득 웃음이 터졌다.

“윤이랑 훈이랑 똑같이 말한다, 너?”

- 한두 번 당하냐? 너, 내가 정한 언젠가 죽여 버린다는 말 농담인 줄 알았지?

“그럼?”

농담이 아니었냐고 묻자 정현이 뭔가가 복받치는 듯 강한 어조로 빠르게 말을 쏘아붙였다.

- 나랑 윤이랑 그 새끼 때문에 당한 거 다 읊자면 삼국유사에 조선왕조실록이야. 한이가 사고치고 나면 그거 나중에 전해 들으시고 아주머니 난리 치시다 동생들이랑 나만 혼내고 쓰러지실 때쯤 집에 들어와서 그놈은 맞은 적도 없어. 이상하게 아줌마가 뭐 눈치채시면 그 자식은 훈련이 길어졌다며 늦게 들어와요. 아니면 막 걔 패려고 하면 빗자루가 부러지거나, 그것도 아니면 중요한 손님이 오시거나. 진짜 억세게 운 좋은 새끼라니까.

그 자식이 내 운까지 뺏어 간 게 분명하다고, 흥분한 정현이 씩씩거리며 줄줄이 레퍼토리를 이어 간다.

- 내가 장담하는데 그 자식이 분명히 내 운하고 재능까지 다 가져간 거야. 그 자식은 잊었을지 몰라도 내가 리틀 야구단에 들어가서 공 줍고 있을 때 그 자식은 4번 타자라고 경기 나가서 나한테 물 떠 오라고 했다고. 난 그거 죽을 때까지 못 잊거든? 언젠가, 내가 그 자식 뒤통수치고 말 거야!

지긋지긋하게 나오는 리틀 야구단 이야기에 신우는 저도 모르게 받아쳤다.

“그건 네가 운동을 못 해서 그런 거 아냐?”

순수하게, 진짜 들은 그대로 너무 운동을 못 해서 그런 거 아니냐고 되물은 것뿐인데 그 말이 정현의 자존심을 건든 모양이었다.

- 어? 나 지금 상처받았어. 너 점점 그 자식 닮아 간다? 짜증 나게.

“미안, 미안. 그럼 너도 오늘 올 거야?”

- 아, 오늘은 패스하고 주말에 갈게. 오늘 가면 또 나만 잔소리 들을 텐데 뭐 하러 가? 아줌마 화 많이 나셨지? 그 자식 연락 없었다고.

“그건 괜찮은데……. 한이가 내 얘기 안 했나 봐. 그래서 화 많이 나셨어.”

- 어? 네 얘기 안 했대? 저번에 통화했다며?

“응, 그런데 그 얘기는 안 했나 봐. 아직 모르시더라고.”

- 그건 당연히 화날 만……. 아, 어…… 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너 때문에 화나신 건 아니야. 그건 확실해. 걔네 어머니 이제 그건 포기했어. 그때, 언제더라? 아, 그 자식 군 제대하고 얼마 안 지나서 아주머니랑 아저씨랑 올라오셨을 때 지금 만나는 사람 남자라고 한 적 있거든. 그러고 보니 그때도 좀 약 올라서 그러신 것 같긴 하다. 멀쩡하니 여자애들 잘 사귀던 녀석이 갑자기 남자랑 사귄다니 아줌마 입장에서는 걱정이 돼서 잔소리를 좀 하셨는데, 옆에서 할아버지는 결혼은 여자랑 할 수 있는데 그냥 냅두라고 하시지, 윤이는 ‘나랑 사귈 거 아니니 상관없잖아요.’라고 하지. 아줌마가 너무 화가 나서 한이 자식 패려고 빗자루를 드셨는데 설상가상으로 한 대 패니 빗자루가 부러지는 거야. 그 와중에 한이는 어디 모기가 물었나, 하는 표정으로 버텨서 아줌마 뒤로 넘어가셨거든. 하여간 그 뒤로 한이한테는 아예 손 놓으셨으니 그쪽은 걱정 안 해도 돼.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으니 미성년자랑 기혼자한테만 손대지 말라고 하셨으니까. 걔네 어머니 여장부야. 한 번 한 말은 절대 안 물리셔. 되게 좋으신 분이라니까.

“……그래도 어머니는 걱정되실 테니까…….”

- 너 속 편하라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짜 아줌마 그런 쪽으로는 쿨하신 분이야. 아줌마가 괜찮다고 한 건 그대로 끝이야. 그냥, 한이가 괘씸해서 그런 거야. 그리고 덤으로 한 가지 알려 주자면, 아줌마한테 잘 보이고 싶으면 한이 놈 잡아다 대령해 드려. 그 자식 원 없이 패게 도와드리면 아줌마가 너 업고 다니실 거라고 장담한다.

“설마…… 아들인데 진짜 때리고 싶으시겠어?”

- 내가 장담하는데, 아줌마 소원이 그 자식이 ‘악’ 소리 지르도록 패는 걸 거다. 내 손목을 걸고 맹세한다.

동생들이나 정현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확실히 한이 얄밉기도 하고 또 한이 좀 혼나 봤으면 하는 그 마음도 이해는 가지만 그렇다고 한이 맞는 건 보고 싶지 않다. 마음이 아플 것 같다.

- 아줌마한테 안부 인사나 전해 드려. 그리고 훈이한테도 인사 전해 주고.

“응. 알았어.”

- 그럼, 주말에 보자. 아, 혹시 한이 혼나면 그거 찍어 놔라? 동영상도 좋고 영상 통화로 보여 주면 더더욱 감사하고.

“노력은 해 보겠지만 그럴 정신이 있을지 모르겠다.”

- 너 한이 혼나는 거 싫다고 말리기만 해 봐? 내가 굿해서라도 너 저주할 거야.

귀신같이 자신의 속내를 정확히 알아챈 정현의 말에 신우가 입을 딱 다물자 정현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혀를 찬다.

- 진짜 둘이 가지가지 한다. 너희 둘이 지금 내 앞에서 염장질이냐? 너희 때문에 얼결에 친구의 애인 뺏는 상간남이 돼서 소개팅도 안 들어오는 내 앞에서 연애한다고 자랑해?

“……그건 진짜 미안해.”

- 너 말고 정한이 미안해해야지! 대체 왜 그 자식은 미안하다는 말도 안 하는데!

“내가 한이한테 사과하라고 할게.”

- 됐어. 엎드려 절 받냐? 전혀 안 미안해하는 얼굴로 네가 시키니 한다는 티 팍팍 내면서 사과할 텐데, 그 꼴 보는 게 더 열 받아.

‘어릴 때 엄마가 그 동네로 이사 간다고 했을 때 땅에 드러누워서라도 싫다고 했어야 했는데.’라고 혀를 차던 정현이 그제야 겨우 화를 식힌 듯 마지막 인사를 던졌다.

- 나 이제 사무실 들어가야 돼. 끊는다.

“응. 일 잘해.”

- 그래. 너도 고생해라.

정현의 인사 후로 끊긴 전화에 휴대폰을 옆에 내려 두는데 통화 내용을 들은 듯 윤이 묻는다.

“정현 형이에요?”

“응. 훈이 잘 왔냐고. 안부 전해 달래.”

짤막하게, 정현이 한 말을 그대로 전하자 훈이 눈을 반짝였다.

“우와, 정현 형도 진짜 오랜만이다. 형, 우리 집에 온대요?”

“오늘은 바빠서 못 오고 주말에 온대.”

“바쁜 게 아니라 어머니한테 혼날까 봐 안 오는 거겠죠.”

역시나 윤은 예리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어린 시절부터 알아 온 데다 최근 또 친하게 지내서인지 정현의 속을 훤히 꿰뚫고 있었다.

그리고 그건 훈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하긴, 정현 형 오면 엄마한테 무지 혼나긴 하겠다. 미리 얘기 안 했으니.”

“그러니까, 대체 왜 죄 없는 우리가 잡혀야 하냐고. 악의 축은 한이 형인데. 한이 형만 엄마한테 등짝 몇 대 맞으면 끝인데, 매일 엉뚱한 우리만 혼나잖아.”

“내가 한이 형이면 그냥 몇 대 맞아 줄 텐데.”

생각할수록 억울하다는 윤의 말에 훈이 그렇게 중얼거리며 파스를 다시 구급상자에 챙겨 넣었다. 저 순한 훈이까지 저러는 걸 보니, 가족 사이에서 한의 이미지가 어떤지 대충 알 것 같았다.

모르는 사람들에겐 세상 친절하고 유쾌한 사람이지만 가족과 친한 친구들에게는, 그냥 망나니다. 특히나 어머니에게는 재앙에 가까운 아들인 것 같았다.

“그보다 형, 우리 형한테 전화 좀 해 주세요. 어머니 오셨다고 빨리 들어와서 좀 얻어맞으라고요.”

“아, 맞다. 쌈밥 싸 간다고 했는데…….”

쌈밥은커녕, 당장 달려와 어머니께 싹싹 빌어야 할 것 같은 분위기에 서둘러 다시 휴대폰을 들고 한의 번호를 찾았다. 곧장 통화 버튼을 누르고 잠시 기다리자 한이 전화를 받는다.

- 응. 집에 들어갔어?

“들어는 왔는데…… 너, 오늘 일찍 못 들어와?”

- 어…… 그렇게 날 보고 싶어? 그럼 나 그냥 들어갈까?

신이 난 아이처럼, 일이고 뭐고 팽개치고 달려오겠다는 한의 답에 네가 지금 그럴 때가 아냐, 라는 말이 입가를 맴돌았다.

이럴 때 보면 참 눈치도 없다.

“정리하고 올 수 있으면 빨리 들어와. 너희 어머니 오셨어.”

- 응? 어머니?

“그래, 어머니.”

- 어? 우리 어머니가 아버지 혼자 두고 오실 분이 아닌데? 웬일이시지?

바로 어제 본 사람 이야기를 하듯, 반갑다는 말도 놀랍다는 기색도 없이 그저 아직 때가 아닌데, 하는 반응에 진심으로 궁금해져 그 녀석에게 물었다.

“왜 올라오셨는지, 정말 모르겠어?”

- 서울에 볼일이 있으셨나? 아, 훈이 온다고 해서 올라오셨구나? 훈이가 좀 애 같거든. 아마 들어오기 전에도 어머니한테 전화해서 보고 싶다고 울었을걸.

다른 쪽으로는 무서울 정도로 눈치도 빠르고 예리한 녀석이 가족 일에 관해서는 연신 헛다리만 짚어 대고 있었다. 잘못 짚어도 너무 잘못 짚고 있는 한에게 더는 생각할 여유를 줄 수 없어 서둘러 현실을 알려 줬다.

“너, 내 얘기 안 했다며?”

- 응?

“너랑 나랑 사귄다는 얘기 말야.”

- 그거, 말해야 되는 거야?

당연히 말해야 한다. 물론, 연인과의 일을 부모님한테 일일이 보고하는 자식은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그래도 집에까지 데려와 같이 산다면 말하는 게 맞다.

“그냥 사귀는 거면 몰라도 같이 사는데 어머니께 당연히 말씀드려야지. 아까 마주쳤는데 당황했단 말야. 어머님도 놀라시고. 괜히 윤이는 말씀 안 드렸다고 죽도로 얻어맞아서 등에 피멍 들었어.”

그사이 있었던 일을 말로 내뱉고 나자 윤이에게 미안해 죽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은 이 상황이 재미있다는 듯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 이야, 우리 어머니 기운도 좋으셔. 그 큰놈을 죽도로 팼다고?

“너, 이거 웃을 일이 아냐. 언질이라도 했어야지, 어머니 진짜 화 많이 나셨어.”

- 워워, 릴렉스. 우리 어머니 그런 거 일일이 따지시는 분 아냐. 내가 말도 없이 유학 갔다, 말도 없이 돌아와서 회사까지 차리고는 연락 안 해서 화나신 거야. 우리 어머니도 사소한 일에는 신경 안 쓰셔.

대체 이 문제의 어디가 사소한 건데, 라는 말이 목구멍 위로 치밀어 올랐지만 지금은 일단 그 말을 참아 냈다. 지금 중요한 건 한이 빨리 집으로 돌아와 다른 사람들을 구하는 거다.

“최대한 빨리 들어와. 그리고 나 어머니 오셔서 못 나갈 것 같아. 쌈밥은 해 둘게.”

- 왜?

“너희 어머니 쓰러지셨어.”

- 어? 또?

역시 한두 번이 아니어서인지 ‘또?’라는 한의 질문에 맥 빠진 음성으로 답해 주었다.

“……그래, 또.”

- 아, 그럼 괜히 미적거리다간 더 혼나겠다. 일단 일 정리하고 빨리 들어갈게.

“그래. 최대한 빨리 들어와.”

- 응. 나 본채로 곧장 갈 테니까 너도 본채에 가 있어. 아, 그리고 윤이 소화제 좀 챙겨 줘라. 어머니 오셨으면 아버지한테도 얘기 들어갔을 테니 윤이 오늘 최소 3시간은 잔소리 들을 거야.

그러고 보니 아버지도 계셨다. 그걸 깜빡했다.

자신이 가족이 없다 보니 그런 쪽으로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섬세하지 못했다. 자신의 좁은 시야에 한숨을 내뱉자 한이 즐거운 듯 말을 잇는다.

- 우리 아버지랑 어머니는 일심동체, 바늘과 실, 짚신 한 켤레거든. 어머니 쓰러지셨으면 그대로 아버지 콜이야. 나는 전화 안 받는 거 아시니까 윤이가 쪼일 거야. 그럼 그 자식 또 소화 불량에 위통 일으킬 테니 약 좀 챙겨 줘.

문제는 자기라는 자각은 있는지 그래도 동생 위 챙겨 주라는 말에 웃음이 나왔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형제는 형제구나 싶었다.

물론, 그렇게 동생을 위한다면 애초에 문제를 안 일으키는 게 좋겠지만…….

“알았어. 챙겨 줄게.”

- 고마워. 최대한 빨리 들어갈게. 아, 어머니 핑계로 모처럼 네 얼굴 제대로 볼 수 있겠다. 이건 좋은데?

“너, 지금 그렇게 태연하게 웃을 때가 아냐.”

- 괜찮아, 괜찮아. 그럼 날듯이 들어갈게. 오늘 밤은 풀 코스로 모시겠습니다.

여전히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듯한 한의 반응에 막 뭐라고 하려는데 전화가 뚝 끊겼다.

통화 내용을 거의 들었을 훈이와 윤이 신경 쓰여 얼굴을 손으로 비비고 있자 윤이 대수롭지 않은 듯 말을 던졌다.

“형, 일찍 온대요?”

“응.”

“잘됐네요. 훈이, 너 저쪽 방에 짐 풀어.”

마루에 앉아 바로 뒤쪽의 방을 가리키는 윤의 말에 훈이 눈을 껌뻑인다.

“응?”

“본채에 있을 건 아니잖아. 일단 짐 풀어. 밍기적거리지 말고. 저번처럼 막 늘어놓으면 죽는다? 잠깐 있을 거라도 짐 제대로 정리해.”

“어? 응. 알았어.”

형 말에 따라 훈이 착실하게 자리에서 일어서 마루 한편에 놓은 가방을 짊어지고 움직이자 신우도 가방을 챙겨 일단 방으로 향했다. 겨우 한 시간 사이에 폭풍이 몰아친 듯한 기분에 머리부터 정리하기 위해 막 방문을 열려는데 마루에 앉아 있던 윤의 휴대폰 벨 소리가 울려 왔다. 그 소리에 미닫이문을 열며 그쪽을 돌아보는 순간 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네,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을 시작으로 시작된 통화는, 한의 예언대로 3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래요, 신우 씨. 내가 아까는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인사를 못 했는데, 한이랑 사귄다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흘러 각자 머리를 식힌 후, 본채에 가족들을 모두 모은 한의 어머니는 먼저 신우에게 그렇게 물었다.

단도직입적인 그녀의 질문에 신우가 막 답을 하려는 순간 옆에 같이 무릎 꿇고 앉아 있던 윤이 대신 답해 줬다.

“사귄 지는 얼마 안 됐대요. 알고 지낸 건 고등학교 때부터고.”

아버지와의 마라톤 통화 후 위장약을 먹은 윤이 멀쩡한 얼굴로 그렇게 답하자 그녀가 이를 악물었다.

“넌 입 다물어.”

“신우 형이 답하기 곤란해하니 대신 말한 거잖아요.”

“그렇게 잘 알면서 왜 미리 말 안 했는데?”

“형이 얘기할 줄 알았죠. 형 사생활인데 동생인 제가 떠들고 다닐 수는 없잖아요.”

윤의 말투는 조금 얄미웠지만, 현실적으로는 맞는 말이었다. 아무리 친밀한 형제라 해도 ‘형 남자 애인하고 동거해요.’라고 동생이 먼저 나서서 부모님께 말할 수는 없다.

동생으로서는 그저 본인이 이야기하기를 기다리는 게 맞다. 단, 이 경우엔 그 ‘본인’이 한이라는 게 치명적인 문제였을 뿐이다.

“하여간, 신우 씨. 신우 씨도 지금 상황이 당황스럽겠지만 한이 놈 때문에 조금 문제가 꼬였으니 섭섭하게 생각하지는 말아요. 신우 씨가 마음에 안 든다거나 하는 문제는 아니니 그쪽으로는 신경 쓰지 말고요.”

“네.”

자신의 입장을 배려한 그녀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할아버지께서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는 듯 혀를 차신다.

“뭐 이리 쓸데없이 말이 많으냐? 집안 어른인 내가 허락했으면 된 거지.”

“아버님,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에요. 한이 녀석 하는 짓이 괘씸하잖아요.”

“냅둬라. 자기 보기도 아까워 나한테도 소개해 주기 싫어하던 놈이니 너희한테는 더욱 싫었겠지.”

“아버님!”

“그놈이 그런 건 날 쏙 빼닮아서 말이다. 누가 보기라도 할까 아까워서 그런 게다. 괜히 너희들이 신우 예뻐하기라도 하면 질투 날 테니까.”

그놈도 참 어지간하단 말야, 라고 하시며 할아버지께서는 재미있다는 듯 호쾌하게 웃어 보이셨지만 한의 어머님 입장에서는 웃음이 나오실 리가 없다. 지금 그걸 말씀이라고 하시는 거냐는 듯 할아버지를 원망스러운 눈길로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에도 할아버지께서는 아무렇지 않게 화제를 돌리셨다.

“그나저나 한이 놈은 왜 이렇게 늦어? 신우, 한이한테 전화했니?”

“네. 일찍 들어온다고 했어요. 일이 많아서 정리하느라 조금 늦나 봐요.”

“그래, 그럼 곧 들어오겠지. 우선 저녁이나 먹자. 먼 길 오느라 훈이나 어미나 힘들었을 텐데 식사부터 하고 얘기하자.”

확실히 출출할 시간이라 아주머니께 식사 준비를 부탁하려 막 자리에서 일어서려는데 휴대폰이 울려 왔다. 어른들 앞이라 놀라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보자 인재였다.

일 문제인가 싶어 다시 할아버지를 바라보자 할아버지께서 고개를 끄덕이신다.

“전화 받아라.”

“인재예요. 아주머니께 식사 준비해 달라고 할게요.”

방 안의 사람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서둘러 통화 버튼을 누르며 마루로 나섰다.

“응. 무슨 일 있어?”

- 일은 아니고, 한이가 너한테 전화해야 한다고 해서 대신하는 거야. 혜화동 화랑 디자인을 건축주가 퇴짜 놔서 지금 한이가 설득하는 중이야. 시안 올린 거 열두 개 다 퇴짜 놓고는 열세 번째에 겨우 마음에 든다고 해서 서둘러 작업 들어갔는데 이제 와서 한이가 직접 한 거 아니라고 한이한테 다시 해 달라고 난리야.

퇴근 시간에 들이닥쳐서 꼼짝없이 잡혔다며 인재가 한숨을 내쉬는 소리에 신우가 당황해 되물었다.

“그거, 벌써 공사 들어간 거 아냐? 한이가 그 디자인 마음에 든다고 빨리 진행시킨다고 했던 것 같은데?”

- 내 말이. 성우 형이 디자인한 건데 성우 형도 지금 열 받아서 난리라 일단 성우 형 내보내고 한이가 건축주 잡고 설득하는 중이야. 디자인 잘 빠졌는데 괜히 한이 디자인 아니라고 트집이잖아.

“그건 원래부터 한 팀장님이 하시기로 한 거잖아.”

- 알고 계약했으면서 그러니 더 열 받지. 아시 디자이너가 한이 혼자인 것도 아니고 한이는 원래 주택 전문이라 상업 건물은 디자인 안 한다고 분명히 말했는데도 이제 와 억지를 부리잖아. 이미 땅 다 파 놨는데 어쩌라고.

“큰일이네. 이제 와서 공사 스톱 걸면 손해가 장난 아닐 텐데.”

- 뭐, 그래도 별일은 없을 거야. 한이 놈이 들어갔으니 설득하는 거야 식은 죽 먹기지. 그런데 문제는 그 건축주가 말이 많은 편이야. 그래서 아마 많이 늦어질 거야. 걔네 어머니 올라오셨다며? 동생도 귀국했고.

“응. 지금 한이 기다리고 계셔.”

- 어머니께 죄송하다고 전해 드려. 고객 설득해서 보내고 하던 일 마무리하면 자정쯤 돼야 퇴근할 수 있을 것 같아.

“어쩔 수 없지, 일 때문인데. 지금 너도 퇴근 못 하고 있는 거지?”

- 응. 예은이랑 보기로 했는데 약속 깼어. 이러다 10년 사귀고 결혼 직전에 차이겠어.

대학 시절부터 사귀던, 첫사랑인 동기와 곧 결혼을 앞둔 인재의 한탄에 절로 미소가 흘렀다. 한과는 달리 뭐든 꾸준하고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한결같고 고지식한 인재의 성격이 그대로 보이는 부분이었다.

“날짜는 아직 안 잡았어?”

- 뭐, 예은이는 어차피 결혼식은 형식이니 그냥 빨리 대강 해치우자고 하는데 내 성격에 또 대강은 안 되니 차일피일 미뤄지는 중이야. 일생에 한 번 하는 결혼인데 제대로 해 주고 싶단 말야. 아, 맞다. 그러고 보니 예은이가 결혼 전에 너 보고 싶대.

그 말에 홀로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에 한이 ‘인재 애인이 너 보고 싶대.’라고 했을 때는 좀 껄끄러웠는데 한이나 인재를 통해 듣는 그녀의 인상이 너무 좋았다.

그냥 전해 듣는 얘기만으로도 좋은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어 자신도 만나고 싶었다.

“그래. 시간 날 때 같이 봐. 한이가 재미있는 친구라고 하도 자랑을 해서 꼭 만나고 싶어.”

그 말에 인재가 신이 나 애인 자랑을 해 댔다.

- 뭐, 워낙에 성격이 좋아. 털털하고 대범하고 한편으론 소탈하고. 그리고 아주 재미있어. 아마 너도 좋아할 거야. 예은이 싫어하는 사람은 못 봤거든.

“응. 그럴 것 같아.”

- 아, 슬슬 들어가 봐야겠다. 그럼, 다음에 보자.

“응.”

짧게 마무리된 통화에 주방이 아닌 할아버지의 방문 쪽으로 돌아가 문을 두드렸다. 들어오라는 할아버지의 답에 문만 연 채 인재의 말을 그대로 전했다.

“한이 일찍 오려고 했는데 일이 생겨서 오늘 늦는대요. 퇴근하려는데 혜화동 화랑 건축주가 디자인을 바꾸고 싶다고 사무실로 왔나 봐요. 아무래도 얘기가 길어질 것 같다고 인재가 대신 전화해 줬어요.”

“저런, 큰일이라니?”

“아뇨, 그런 건 아닌가 봐요. 그쪽에서 고집을 부려서 한이가 설득 중이래요. 그쪽 고객 설득하고 하던 일 마무리하면 자정이나 돼야 집에 들어올 수 있을 것 같다고 어머니께 죄송하다고 전해 달라고 했대요.”

“뭐, 일 때문이니 어쩔 수 없지. 그럼, 우리 먼저 저녁 하자.”

“네. 그럼 준비할게요.”

일단 말을 전했으니 다시 주방으로 가려는데 어머니의 작은 중얼거림에 들려왔다.

“망할 자식. 그 자식은 대체 왜 나만 오면 일이 생기는 건데?”

아까 윤이와 훈이가, 한이 오늘 분명히 늦을 거라고 했을 때는 설마 했는데 상황이 이쯤 되니 자신 역시 ‘진짜 그 녀석은 무슨 복을 타고난 거야?’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용케 시간을 빼서 온다 했더니, 또 다른 일로 피해 가다니. 솔직히 이젠 좀 얄밉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한의 동생들과 친구들이 딱 이런 기분일까 싶어 조심스레 방 안의 분위기를 살피고 있자 그녀가 길게 심호흡을 한다.

“내가 죽기 전에 한번은 이 자식을 시원하게 패고 죽어야 하는데……. 자정이면 내가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는 시간이잖아. 아니, 그리고 이 자식 아무리 바빠도 나 와 있는 거 알면서 나한테는 전화 한 통을 안 해?”

한아, 분명히 어머니 쓰러지셨다고 말했는데 아직 전화도 안 한 거냐, 하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쯤 되면 무심하다는 말만으로는 설명이 되질 않는다.

“신우한테도 인재가 했다잖니. 일부러 그러는 것도 아니고 일 때문이니 괜히 애 볶지 마라.”

“그러니까, 더 약이 오른다고요! 왜 그 자식은 내가 벼르고 있는 날만 일이 생기냐고요?”

일부러 그러는 게 아닌 게 더 열 받는다는 어머니의 말에 옆에서 훈이 작게 대꾸했다.

“큰형은 운이 좋으니까.”

짧지만 강렬한, 극도로 현실적인 데이터에 기반한 논리적인 훈의 답을 아무도 반박하지 못했다.

한이 지나치게 운이 좋은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어색한 긴장감이 흐르는 방 안의 분위기에 신우가 문을 닫을 타이밍을 놓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서 있자 할아버지께서 깔끔하게 상황을 정리해 주신다.

“다들 저녁이나 먹자.”

늦은 밤, 체할 것 같았던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서 별채로 돌아온 신우는 마루에 앉아 한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 채 여름의 흔적이 가시지 않은 날씨에 대청마루의 문을 열어 놓은 채 모기향을 켜고 조용한 정원을 내다보고 있는데 툇마루 안쪽에서 문득 문 소리가 들려왔다.

늘 혼자 있던 별채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신기한 듯 그쪽을 바라보자 훈이 막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그를 보며 웃자 곧 이쪽으로 다가선 훈이 의아한 듯 묻는다.

“안 주무세요?”

윤이는 별채로 돌아오자마자 온몸이 아프다며 일찍 방에 들어가 숨소리도 내지 않고 자는 중이었지만 훈이는 어쩐지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한이 기다리느라. 넌 안 자? 잠자리 바뀌어서 불편해?”

“전 잠자리는 안 가려요. 시차도 있고 비행기에서 오는 내내 잤더니 잠이 잘 안 와서요.”

“아, 시차…….”

그런 문제가 있었지, 하고 고개를 끄덕이는데 바로 옆에 앉은 훈이 마루 위에 켜 둔 모기향을 보곤 신기한 듯 웃는다.

“아직도 모기향 켜네요, 이 집은.”

“응. 나무가 많으니 모기도 많아서.”

“나무 냄새랑 풀 냄새, 모기향 냄새 맡으니 진짜 집에 온 것 같아요.”

강아지처럼, 눈을 반달처럼 접고 웃으며 고요한 정원에서 들려오는 풀벌레 소리에 ‘아, 이 소리도 오랜만이다.’라고 중얼거리는 모습에 그가 이곳을 아주 그리워했다는 게 느껴졌다.

“집 많이 그리웠구나?”

“네. 유학 가서 처음엔 엄마한테 전화할 때마다 울었거든요. 엄마도 보고 싶고 아빠도 보고 싶고, 엄마가 해 주는 밥도 먹고 싶어서요. 그리고 이 집도 그립더라고요. 전 어릴 때 이사 가서 잘 기억이 안 나는데도 그냥 이 집 냄새가 그리웠어요. 흙냄새랑 나무 냄새 같은 거요. 아, 맞다. 특히 아까시나무 향이요.”

어두운 정원을 바라보며 훈이 중얼거리는 그 말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알 것 같아. 가끔 나가는 거지만 나도 일하러 가면 여기 냄새 그립더라.”

이곳에 있을 때는 모르지만 나가면 이 냄새가 너무 그리워진다. 이렇게 으리으리한 집에서 살아 본 적도 없고, 한옥도 처음이지만 이상하게 이 집에서 나는 냄새들이 너무 정겨웠다.

아파트에서 태어나 자라도 정겹게 느껴지는 건 다 비슷한 것 같다는 생각을 하던 사이 옆에 있던 훈이 궁금한 듯 작게 물어 온다.

“형은 무슨 일 하세요?”

“응? 아, 인테리어 쪽. 캐드 작업.”

“그래서 우리 형 다시 만난 거예요?”

“응, 비슷해.”

확실히 다시 만난 계기는 일 때문이었으니 맞다고 고개를 주억거리자 훈이 커다란 몸을 앞으로 숙이며 방긋 웃는다.

“우리 할아버지 말이 맞나 봐요, 역시.”

“무슨 말?”

“아까 윤이 형이 말할 때 생각났는데 고등학교 졸업식 때 형이 누굴 막 찾는 거예요. 졸업식 끝나고도 계속 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친구들하고 사진 다 찍고도 체육관을 못 나가고 얼쩡거려서 아버지가 끌고 나왔거든요. 겨우 집에 와서 점심 먹는데도 형이 입 꾹 다물고 있으니까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그러시더라고요. 만날 사람은 때가 되면 다시 만나게 돼 있으니 초조해하지 말라고요. 그때는 할아버지가 왜 뜬금없이 저런 말씀을 하시지 했는데, 이젠 알 것 같아요. 그때, 우리 형이 찾던 사람이 형이었죠?”

뜻밖의 이야기에 신우는 멍하니 훈을 바라봤다.

“……아…… 글쎄……. 아버지가 아프셔서 졸업식에 못 가긴 했는데.”

“그럼 맞네요. 그럼 형이 우리 형 첫사랑인 거죠? 우리 형 고등학교 때까지는 운동하느라 연애 경험 없었는데.”

그런 얘기는 얼핏 들었다. 고등학교 2학년까지는 운동하느라 바빴고 고3 때는 공부하느라 정신이 없어서 여자 친구 만날 시간이 없었다고. 어쩌면 그 녀석에게도 자신에게도 서로가 첫사랑이었을지도 모른다고.

훈의 이야기를 들으니 새삼 한이 했던 그 이야기가 실감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두 사람 모두 긴 시간을 돌아 서로를 찾고 있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그래서, 조금 기뻐졌다. 아니, 아주 많이 기뻤다.

“그럼, 나한테도 한이가 첫사랑일 거야.”

“진짜요? 우와, 좋다.”

부럽다는 듯 눈을 반짝이는 훈의 얼굴에 이번엔 자신이 되물었다.

“넌 여자 친구 없어?”

“없어요. 전 아직 첫사랑도 안 해 봤어요. 진짜 진짜 좋은 사람 만날 때까지 기다릴 거거든요.”

“아무도 안 만나고?”

“진짜 좋아하는 사람 만났는데 다른 사람 있으면 안 되잖아요.”

한이 동생답지 않은, 하지만 동시에 너무나 한이 동생답기도 한 그 말에 웃음이 나왔다.

“아까는 몰랐는데 이런 건 확실히 다들 닮은 것 같아. 한이나 윤이나 너나.”

“어떤 거요?”

“로맨스에 약한 거.”

그 말에 훈이 배시시 웃는다.

“할아버지랑 할머니 보고 자라서 우리 사촌들도 거의 비슷해요. 한이 형처럼 원 없이 연애하면서 계속 운명이라고 느껴지는 사람을 찾거나, 아니면 그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거나요. 그래서 다들 결혼도 안 했어요. 한이 형이 장손이긴 하지만 작은아버지 댁에 형보다 나이 많은 형이랑 누나도 있는데 아무도 결혼을 못 하더라고요. 결국 우리 목표는 하나거든요. 진짜 사랑하는 사람 만나는 거.”

아이처럼 말간 얼굴로 동화 같은 이야기를 하는 훈의 얼굴 위로 한이의 얼굴이 얼핏 스치는 듯했다. 언뜻 보기엔 전혀 닮지 않았지만 저런 표정이 닮았다. 그리고 그 느낌이 닮았다. 이렇게 보니 윤의 말대로 아주 많이 닮은 형제였다.

“……부럽다, 그런 거.”

자기도 모르게 나간, 탄식하는 듯한 말에 훈이 눈을 껌뻑인다.

“뭐가요?”

“다른가 싶다가도 또 어딘지 닮은 거. 이런 게 형제구나 싶어서. 몇 년을 떨어져 살아도 가장 근원적인 부분은 닮아 있는 거잖아.”

“형은 형제나 남매 없어요?”

“동생이 있었는데…… 죽었어. 어릴 때. 심장이 약해서.”

이젠 어느 정도 면역이 생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꺼내자 훈이 낭패라는 얼굴을 한다.

“……죄송해요.”

“아냐, 괜찮아. 이젠 편하게 얘기할 수 있어. 오래된 일이기도 하고.”

그건 사실이었다. 여전히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사무치지만 그래도 많아 나아졌다. 그 아이의 얼굴을 보는 것도, 또 그 아이를 떠올리는 것도 그렇게 힘들지는 않다. 어느새 아픔을 삭이고 그 상처를 자신의 일부로 받아들이는 데에 익숙해져 가고 있었다.

그 아픔 때문에 좋았던 기억마저 모두 상처로만 기억하는 건 자신에게 너무 나쁜 짓이라는 걸 깨달은 덕이었다.

추억은 추억으로 남기는 거다. 떠나간 사람들도 자신들이 아픈 기억으로만 남는다면 슬퍼할 거다.

“동생, 보고 싶죠?”

“응. 살아 있었으면 윤이랑 동갑이었을 거라, 윤이 보면 가끔 생각나더라고. 그 애가 다 자라 어른이 되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어떤 성격이고, 지금은 뭘 하고 있을까? 그리고 나랑은 어떤 관계일까, 같은 거.”

그 아이라면 아마 아주 곱게 자라 착한 어른, 좋은 사람이 됐을 거라는 생각에 희미하게나마 그 이미지를 떠올리던 사이 옆에 앉아 있던 훈이 바싹 몸을 기대며 눈을 맞춰 온다. 그러고는 방긋 웃는다.

“형 동생이면 잘 자랐을 거예요. 저 원래 엄청 낯가리는데 이상하게 형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편하더라고요. 그래서 마트까지 쫓아간 거예요. 첫눈에도 되게 친절하고 좋은 느낌이었어요. 아마, 한이 형이 사랑하는 사람이라 그랬나 봐요. 우리 형이 좋아하는 사람이면 무조건 착한 사람일 테니까요.”

그저 자기 형이 좋아한다는 이유만으로, 다른 건 볼 필요도 없다는 그 말이 따뜻한 온기를 품은 채 다가왔다.

따뜻한 봄 햇살 같은 형제들이었다. 만난 지 겨우 몇 시간이 지났을 뿐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훈이 그런 것처럼 자신 역시 그가 한의 동생이라는 사실만으로도 그저 예쁘게만 보였다.

“그러니까, 윤이 형이랑 내가 형 동생 할게요. 한이 형은 성격이 저래서 큰형 같지 않으니까 형이 우리 큰형 해요. 나, 착한 동생 될게요.”

“그럴래?”

“네.”

해가 없는 밤임에도 햇살이 비치는 것 같은 기분에 훈을 보며 환하게 웃는데 멀리서 차 소리가 울려 왔다. 그와 함께 어두운 정원 저편에서 불빛이 비친다.

“어? 형 왔나 봐요.”

“응. 그런가 봐.”

30분 전쯤 퇴근한다고 했으니 슬슬 도착할 시간이 되었겠다 싶어 차고 방향을 돌아보자 차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에 고개를 빼고 복도 너머를 바라보고 있으니 얼마 안 있어 익숙한 인영이 나타났다.

양복 재킷을 손에 들고 긴 복도를 걸어오는 그의 모습에 훈이 반색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형!”

훈이 앞에 서자 시야가 완전 가려졌다. 아까도 느꼈지만 진짜 북극곰만큼이나 컸다. 그 덩치에 새삼 놀라고 있는데, 순식간에 한에게 달려든 훈이 한을 끌어안고 방방 뛰었다. 덩치에 맞지 않는 아이 같은 그 행동에 동생에게 끌어안긴 한이 툭 하니 내뱉었다.

“너, 더 컸냐?”

기가 막힌다는 듯 물으며 방방 뛰는 훈을 멈춰 세운 한은 동생을 야멸차게 밀어 냈다.

“언제까지 크려고 그래?”

나보다 큰 놈들은 질색이라더니 동생도 큰 건 싫은지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내는 한의 말투에 훈이 금세 기가 죽어 어깨를 늘어뜨렸다.

“……조금 컸어……. 조금.”

“조금이 아니겠지. 저번에 봤을 때는 분명히 나보다 좀 작았는데?”

“5년 전이잖아, 그게.”

동생을 만나자마자 자기보다 크다고 타박하는 한의 성미에 신우는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서 한을 만류했다.

“오랜만에 보면서 왜 그래?”

한참은 큰 훈의 뒤에 서서 편을 들자 한이 앞에 선 훈을 재빨리 밀쳐 내더니 방긋 웃으며 다가왔다.

“나와 있었네? 이 자식 때문에 안 보였어.”

“기다린다고 했잖아.”

“그래야지. 훈이 너 그만 들어가서 자. 나도 피곤해서 자야겠다.”

5년 만에 보면서도 냉랭하기 그지없는 형의 태도가 섭섭할 만도 한데 훈은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듯 담담히 돌아섰다.

“알았어. 아, 엄마가 형 가만 안 둔대. 내일 회사에서라도 꼭 전화해.”

“점심시간에 전화 드린다고 해. 나 잔다.”

훈의 말을 대강대강 들어 넘긴 한은 신우의 어깨를 안은 채 서둘러 방으로 들어섰다. 한에게 끌려 얼결에 방으로 들어간 신우는 조금 책망하듯 한을 바라봤다.

“오랜만일 텐데 웃으면서 인사라도 해 주지.”

“멀쩡히 잘 지내는 거 다 아는데, 뭐. 그보다 잘 있었어? 낮에 3시에 헤어지고 12시 넘었으니 하루 만이다. 되게 보고 싶었어.”

동생이고 뭐고 상관없다는 듯 이어지는 포옹에 신우는 당황한 채 눈을 껌뻑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윤이도 훈을 보고는 그다지 살갑게 대하지는 않았다.

오랜만에 만나는 형제라면, 눈물을 펑펑 흘리진 않더라도 서로 끌어안고 어깨라도 두들겨 주며 잘 지냈냐고 묻고 그러는 거 아닌가? 내가 형제가 없어 형제 관계에 환상을 갖고 있는 건가? 진짜 현실의 형제들은 모두 한이네 같은 건가?

머릿속을 떠도는 무수한 의문에 잠시 혼란스러워하는데 한이 머리를 끌어안은 채 이마에 입을 맞춰 왔다.

“아, 너 보니까 좋다. 내일 또 출근하기 싫어서 어떻게 하냐, 나?”

또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런 어리광은 싫지 않아 그에게 안긴 채 언제나처럼 한의 어리광을 받아 주었다.

“일은 해야지. 본채에는 들렀어?”

“이 시간엔 안 들르는 거 알잖아.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지만 우리 어머니도 밤 9시 땡 하면 주무셔.”

“그래도 인사는 드려야지.”

“밤중에 깨우는 거 싫어하셔. 9시 넘으면 그냥 얌전히 방에 가서 자는 게 효도하는 거야. 늦게 들어와서 부스럭거리면 당장에 베개 날아온다고.”

베개가 아니라 하키채나 죽도 아니냐고 하려다 입을 다물자 몸을 끌어안은 팔에서 힘을 빼고 한 걸음 물러선 한이 시선을 맞춰 온다.

“자, 이제 천천히 얼굴 좀 보자. 내일부터는 또 거의 주말부부 수준이잖아.”

“주말부부까지는 아니지.”

일단 한집에서는 살지 않냐는 말에 한이 입술을 삐죽거렸다.

“집에 와도 시간대가 안 맞아서 얼굴 보기 힘드니 그게 주말부부지. 진짜 너 너무 보고 싶었어. 그냥 일 그만두고 집 안에 들어앉을까, 나?”

“그랬다간 인재가 나 죽이려고 할 테니 패스. 그보다, 일은 잘 해결됐어?”

“응. 잘 설득했어. 그쪽도 처음부터 디자인은 굉장히 마음에 들어 했거든. 그냥 기분 문제였던 거지.”

“다행이네. 한 팀장님은 괜찮으셔?”

“그런대로. 성우 형 자존심도 보통이 아니라 비위 맞추느라 힘들었어, 나. 그러니까 빨리 잘했다고 해 줘. 머리 쓰다듬고 칭찬하고 예쁘다고 해 줘. 뽀뽀도 해 주고.”

대뜸 머리를 들이미는 한의 모습에 손을 뻗어 잘했다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이번엔 얼굴을 들이민다.

“자, 이번엔 잘했습니다 뽀뽀.”

이렇게 자꾸 받아 주면 버릇이 나빠지겠지만, 오늘은 한도 많이 피곤했을 거란 생각에 원하는 대로 입을 맞춰 주었다. 그러자 한이 방긋 웃는다.

눈을 접으며 예쁘게 웃는 그 얼굴을 보자, 순간 훈의 웃는 얼굴이 떠올랐다.

확실히, 이렇게 웃는 게 참 닮았다.

그 느낌이 사랑스러워서 그의 눈을 마주 본 채 빙그레 웃어 보이자 이번에는 한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매만져 주었다.

“너 웃는 거 보니 좋다.”

자신이야말로 그가 웃는 게 좋았다. 머리를 쓰다듬는 따뜻한 그 손의 감촉도, 그리고 자신을 불러 주는 그 목소리도, 그리고 그 말투도 좋다. 그가 이렇게 다정하게 대해 주면 심장이 간지러웠다. 매일 이렇게 보면서도, 매일 새롭고 또 매일 조금씩 더 행복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럼 빨리 씻고 나올 테니 기다려.”

재킷과 가방을 챙겨 든 한은 곧장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부산스러운 그의 움직임에 다시 방을 나가 활짝 열린 대청마루의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김에 차고 문과 창문들을 확인한 뒤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확인하고 있는데 금방 샤워를 마친 한이 그대로 침대 위로 뛰어들었다.

아이처럼 침대 위에 드러누워 베개를 끌어안은 한은 아직 머리도 말리지 않은 채였다.

“드디어 침대다.”

“머리 안 말려?”

“귀찮아. 말리고 자도 어차피 내일 아침에 드라이해야 하는 건 마찬가지니 그냥 잘래.”

말리고 자더라도 내일 깨면 어차피 까치집이 돼 있을 게 뻔하긴 하다. 그럼 이만 자자며 신우가 침대에 눕자 한이 리모컨을 들어 조명을 끈다. 순간 덮쳐 온 어둠과 옆에서 느껴지는 한의 숨소리에 신우는 눈을 감고 얇은 이불을 끌어 올렸다.

오늘은 한의 귀가를 지켜볼 수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막 잠을 청하려는데 옆에 누운 한이 뒤척거리더니 갑자기 자신의 몸 위로 무게를 실었다.

그 힘에 눌려 얼결에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뭐야?”

“뭐긴? 할 일 해야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바로 위에서 속삭이는 한을 보자 기가 막혀 헛웃음이 터졌다.

“너 피곤하다며?”

늦은 시간대인지라 사방이 고요했다. 옆방에서 잠든 윤이나 훈이 깰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묻자 한이 슬금슬금 옷자락 안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뺨에 입을 맞춘다.

“피곤하니까 피로 풀어 줘. 우리 일주일 만이야. 한 침대에서 자면서 일주일 동안 안 한다는 건 말도 안 되잖아.”

지난 한 주, 곧 죽어도 주말은 쉰다는 신념까지 깨고 주말 출근을 불사할 정도로 바쁜 한 때문에 함께할 시간이 없었던 건 사실이었다. 그 덕에 간단한 키스 정도가 전부이긴 했지만 그래도 때와 장소는 가리라고 있는 거다.

“옆방에 네 동생들 있어.”

한쪽만이 아니라 양 사이드로 있다고, 아주 작게, 이불을 뒤집어쓴 채 속삭이며 한의 얼굴을 밀어 내려 하자 한이 뻔뻔하게 답한다.

“다 잘 텐데, 뭐.”

“훈이 방금 들어갔잖아. 자더라도 깨면 어떻게 해?”

“괜찮아, 괜찮아. 훈이도 한 번 잠들면 누가 업어 가도 몰라. 아, 애초에 그놈을 업어 갈 사람도 없지만…… 하여간 걱정 말고 우린 할 거 하자고.”

그새 한이 바지를 벗겨 내고 있었다. 그 빠른 손놀림에 기겁하며 그를 밀치려 몸을 바르작거리자 한이 힘을 준 채 몸을 내리눌렀다.

“어어? 나 피곤하다니까. 너 못 만져서 진짜 진짜 피곤해. 그러니까 만지게 해 줘. 너 만지고 나면 피로도 싹 풀릴 거야.”

아주 창의적인 헛소리를 하며 한은 부지런히 무릎에 걸려 있던 바지와 속옷을 끌어 내린 뒤 아래쪽을 만져 오기 시작했다. 작정하고 다리 사이를 더듬는 한의 손길에 재빨리 다리를 오므리려 힘을 줬다.

“너 내일도 일찍 나가야 되잖아. 빨리 자.”

“새벽 5시쯤 일어나서 6시쯤 나가야지. 그러니까 지금 빨리 하면 4시간은 잘 수 있어. 그러니까, 하자고.”

피곤하다며 5년 만에 본 동생도 밀어 낸 녀석이 그런 체력은 어디서 나오는데, 라는 생각을 하는 사이 한의 손이 은근슬쩍 성기를 매만져 왔다. 갑작스러운 자극에 억눌린 신음이 터져 나갔다.

“하지…… 마…….”

한뿐 아니라 이쪽도 오랜만인 건 마찬가지라, 슬쩍 아래쪽을 만져진 것만으로도 몸이 달아올랐다.

이러면 안 된다는 이성과 달리 점점 뜨거워져 가는 몸에 작게 신음을 울리자 한이 귓가에 속삭인다.

“쉿, 옆방에 들려.”

“……그러니까, 하지 말라고…….”

“섰는데, 벌써?”

말과 함께 한이 그를 밀어 내던 자신의 손을 잡아 그의 아래쪽에 가져다 대자 어느새 단단해진 성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천 너머로 생생히 닿아 오는 느낌에 전신이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눈으로 보기도 수없이 봤고 하기도 수없이 했지만 손에 닿는 느낌은 또 달랐다.

“이거, 만져 줘.”

뺨과 눈썹 위로 입을 맞추며 강제로 손을 움직여 슬그머니 성기를 더듬게 하는 한의 손길에 손을 빼려 했지만 그의 힘을 당할 수는 없었다.

“만져 줘. 나도 만져 줄게.”

말과 함께 한이 그의 바지춤을 내리자 이미 단단히 발기한 그의 성기가 손안에서 꿈틀거렸다.

그 적나라한 감촉에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이상하게 갈증이 일었다.

“진짜…… 할 거야?”

“응. 그러니까, 쉿.”

“그치만…….”

뭐라고 반박도 하기 전에 슬쩍 허리를 미는 한의 움직임에 손안에 있던 것이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손안에서 점점 커지는 성기의 부피에 엉덩이 안쪽이 근질거려 왔다.

아직 손도 대지 않은 부분이 저릿해 오는 느낌에 허리를 들썩거리자 한이 싱긋 웃는 게 느껴졌다. 그 음흉하기 짝이 없는 미소에 불만스레 그를 올려다보았더니 한이 자신의 손등 위에 손을 겹치며 그의 성기를 세게 쥐게 한다.

“이거 넣어 줬으면 좋겠지?”

달콤한 목소리였다. 바로 귓가에서 귓불을 핥으며 속삭이는 음성과 손바닥 안에서 느껴지는 델 듯한 뜨거움에 아래쪽이 욱신거렸다.

그래도 안 되는데, 바로 옆방에 사람들이 있는데, 하며 머뭇거리자 또다시 흥분한 듯 거칠어진 음성이 귓가를 간질였다.

“응? 안에 넣고 싶지 않아?”

거친 숨소리와 함께 들려온 선정적인 그 음성에 몸이 오싹해졌다. 살면서 그다지 성욕이 강한 편이라 느낀 적은 없는데, 어느 순간부터인가 이렇게 직접 자극을 당하면 자신도 모르게 허리가 들썩거리며 몸이 뜨거워져 견딜 수가 없었다.

“……해…… 줘…….”

아주 작게, 겨우 목소리를 억누르며 그렇게 속삭이자 한이 짓궂은 투로 다시 물어 왔다.

“응? 잘 안 들리는데?”

이불을 뒤집어쓴 채인 데다 워낙에 사방이 조용해 안 들렸을 리가 없는데도 일부러 반복해 묻는 게 얄미웠다.

왜 이럴 때 유독 짓궂게 구는 건가 싶어 고개를 돌리려 하자 손등을 덮고 있던 한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그와 함께 서둘러 그 녀석의 성기를 놓자 아랫배 쪽에서 느껴지던 성기가 회음부 위를 스쳤다.

예민한 피부 위를 문질러 대는 그것에 헉 하며 숨이 멈췄다.

“너도 오랜만이잖아. 어떻게 해 줄까? 응?”

또 이런 식이다. 계속해서 아래쪽을 찔러 대며 말 안 듣는 아이처럼 하기 힘든 말을 졸라 댄다.

“응?”

장난스러운 그 말투에 아주 작은 목소리가 터졌다.

“……넣…… 어…….”

“응?”

“……넣어…… 줘.”

헐떡거리는 숨을 삼키며 겨우 속삭이자 한이 고개를 갸웃한다.

“잘 안 들리는데?”

“……빨리 넣어 달라고.”

자신이 말해 놓고도 얼굴이 화끈거려 시선을 피하자 곧 한이 이마에 입을 맞춰 준다.

“아, 착하다. 아주 착해졌어.”

“너 할 때는 너무 짓궂게 굴어.”

“다 사랑이야.”

세상에 무슨 사랑이 이렇게 시커머냐고 뭐라고 항변하려는 순간 회음부를 지나 엉덩이 골 사이를 쿡 찌르는 성기의 감촉에 숨을 멈췄다.

혹시 신음이 울릴까 걱정돼 최대한 숨을 참고 있는데 한이 입술을 겹치며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 거 핥아 줄래?”

아래쪽을 지분거리며 나온 한의 말에 기겁했다.

“너, 미…….”

미쳤냐고 소리치려는 순간 한이 입을 틀어막았다.

“쉿. 애들 깰라.”

“…….”

“핥아 줘, 응?”

“……너, 너무 막 나가는 거 아냐?”

초심자에겐 지나치게 빠른 코스에 작게 불만을 토로하자 그가 다시 한번 허리를 움직여 아래를 찔렀다.

그걸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천천히 몸에 불을 붙이는 그 감질나는 움직임에 억울한 눈초리로 한을 올려다보자 그가 아주 예쁘게 웃어 보였다.

“응? 해 줘.”

어리광을 부리듯 눈웃음을 흘리는 그 모습에 어쩔 수 없다는 듯 그에게 거래를 청했다.

“……그럼 빨리 끝낼 거야?”

“응.”

과연 저 말을 믿어도 될까 싶었지만 이미 되돌리기엔 늦은 상태였다. 지금 자신의 선택지는 하나뿐이다.

그걸 인지한 순간 말없이 고개를 끄덕여 긍정의 신호를 보냈다.

한의 말을 믿은 대가가 생각보다 크다는 걸 예상치 못한 채, 그 순간 만용을 부리고 말았다.

이불을 뒤집어쓴 채 한의 위로 거꾸로 올라탄 신우는 한의 성기를 보곤 마른침을 삼켰다.

하겠다고 말은 했지만 막상 하려니 쉽지 않다. 이미 발기한 한의 성기는 너무 크고, 이상할 정도로 뜨거워 차마 입에 넣을 각오가 들지 않았다.

직접 만지고 핥는 것도 처음이라 그 형태도, 그 단단함도 낯설기만 했다.

“이러다 해 뜰 것 같은데.”

기다리다 지치겠다는 한의 중얼거림에 신우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곤 겨우 용기를 내 기둥에 혀끝을 댔다.

살짝 닿은 것뿐임에도 더 꿈틀거리듯 부풀어 오르는 성기에 몸이 화끈거리며 심장이 시끄럽게 쿵쾅거렸다.

아랫배 쪽이 묵직해지며 허리가 들썩거리는 느낌에 입술을 달싹이다 이번엔 성기를 입 안에 넣고 빨아들였다. 순간 이미 다 발기했다고 생각했던 성기가 더 부풀어 올랐다.

그 사실에 놀라면서도 한편으로는 마냥 신기해 다시 한번 선단을 세게 빨자 한이 작게 신음을 내뱉는다.

귀를 울리는 신음과 눈앞에서 맥박치는 성기의 형태에 아래쪽이 쑤셔 대기 시작했다. 자신의 성기 역시 발기해 가는 게 생생히 느껴졌다.

자꾸만 허리는 들썩이고 몸은 너무 뜨거웠다.

어서 하고 싶다는 생각에 성기의 아래쪽을 핥으며 선단 끝을 매만지는데, 엉덩이 위로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윤활제였다.

“잠까…….”

기다리라는 말을 하기도 전에 구멍 입구를 만지작거리던 한이 안쪽 깊은 곳을 손가락으로 쿡 찔러 올린다.

“읏!”

갑작스러운 자극에 놀라 거친 숨을 토해 내는 사이 한이 천천히 손가락을 움직여 내벽을 넓혀 간다.

“여기 이제 잘 벌어지네. 처음엔 너무 좁아서 다칠까 봐 걱정했는데.”

하지 않아도 될 말을 굳이 덧붙이는 한의 심술에 그의 성기에서 입을 떼고 한을 돌아보자 이불 속에서 한이 방긋 웃는다.

이런 상황에서도 너무나 해사한 그 얼굴에 그를 원망하듯 바라본 순간 한이 손가락으로 내벽 안을 세게 휘젓는다. 그와 동시에 발기한 자신의 성기를 쥐곤 선단 끝을 손끝으로 막는다.

“그…… 만……! 읏!”

예상치 못한 상황에 짤막한 교성을 내지르며 몸을 굳히자 한이 느긋하게 자신이 가장 느끼는 부분을 손끝으로 문지른다.

한은 지금 한곳만 집중적으로 비벼 대고 있었다. 세게 찔러 넣지는 않은 채 어느 한곳만을 어중간하게 손끝으로 비벼 대는 감각에 허리가 떨려 왔다.

그렇지 않아도 입 안에서 움찔거리는 살덩이에 흥분한 상태인데 한이 예민한 부분을 손끝으로 짓누르는 한편 사정을 못 하게 성기 끝을 틀어쥐고 있어 미칠 것 같았다.

“한아…… 그만…… 가게 해 줘.”

머릿속이 어질어질한 기분에 이제 하고 싶다고 애원하자 슬슬 안쪽을 문지르던 녀석이 다시 한번 그곳을 쿡 찌른다.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는 듯한 느낌에 높은 신음을 내뱉자 안쪽에 있던 손가락이 또다시 내벽을 누비기 시작했다.

사정도 하지 못하는 상황에 초조한 듯 허리를 흔들었다.

“한아…… 그만…….”

“응?”

“이제…… 넣어 줘.”

“뭘?”

뻔히 알면서 되묻는 그 말에 부아가 치밀었다.

“……너, 자꾸 이럴 거야?”

“뭘 넣어 달라는지 알아야 넣어 주지.”

그렇게 말하며 성기를 꽉 쥔 채 다시 한번 그 부분을 세게 누르는 손길에 짤막한 비명이 터졌다.

한의 손가락에 막힌 선단 끝에서는 쿠퍼액이 흐르고 있었다.

더는 참을 수 없다는 생각에 눈앞에 우뚝 선 그의 성기를 쥔 채 그 끝을 할짝거렸다.

“이거, 넣어 줘.”

말을 마치며 한 번 더 용기를 내 끝부분을 세게 빨아들이자 그제야 한이 시원스러운 음성을 뱉어 냈다.

“아주 착해.”

어둠 속에서 거침없이 안쪽을 찔러 오는 성기에 신우의 입술 사이로 높은 신음이 터졌다.

여전히 이불을 뒤집어쓴 채였지만 더 이상 자제해야 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그런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다.

가장 예민한 부분을 선단으로 찌르듯 짓누르며 깊은 안쪽을 쳐올리는 힘에 아랫배가 울리며 내벽이 진동하고 있었다.

“거기, 좋아…….”

마치 아랫배까지 밀려들며 커다란 성기가 내벽 전체를 문지르는 느낌에 어딘지도 모른 채 좋다고 더 움직여 달라는 듯 그의 어깨를 안자 그가 한 번 더 세게 내벽을 처올린다.

원래도 힘이 좋은 녀석이라 한이 한 번씩 깊이 들어올 때마다 몸이 부서져 내릴 것 같았다. 그 감각이 괴롭기보단 좋았다.

안겨 있는 것도 이렇게 피부를 맞대는 것도, 그의 호흡을 바로 귓가에서 느끼는 것도 좋다.

맞닿은 피부에서 전해져 오는 충족감에 그의 품에 안긴 채 숨을 헐떡이자 한이 갑자기 움직임을 멈춘다. 그러곤 내벽 안쪽을 선단으로 비벼 대며 느긋하게 묻는다.

“어떻게 해 줄까? 응?”

마치 어린아이를 달래듯 상냥한 그 목소리에 자기도 모르게 조르는 것처럼 그의 아랫배에 성기를 비벼 대며 속삭였다.

“거기, 찔러 줘.”

아주 작은 칭얼거림이었지만 그걸 알아들은 한이 기다렸다는 듯 허리를 세게 움직인다. 그 움직임에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신음을 터트리자 한이 다시 한번 속삭인다.

“여기?”

“응. 거기…… 좋아.”

더 해 달라는 듯 매달려 허리를 흔들자 한이 웃으며 다시 그 부분을 쳐올렸다.

“너 이럴 때는 착해서 좋아. 아주 예뻐.”

“으응.”

“그렇게 말만 하면 돼. 원하는 대로 다 해 줄 테니까.”

그 말과 함께 다시 거칠게 몰아치는 듯한 움직임이 계속되었다. 그 힘에 밀려 계속해서 몸이 밀려 올라갔지만 한의 팔이 허리를 붙들듯 안아 몸을 지탱해 주었다.

흔들리는 몸을 잡아 주는 그 단단한 팔에 정신을 놓은 채 그에게 몸을 맡겼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그 팔에 기대 있으면 안전하리란 생각에 완전히 자신을 방기하고 있었다.

더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저 그의 팔에 안긴 채 쉼 없이 흔들리며 교성을 내지르던 사이 한이 문득 움직임을 멈춘다.

거의 절정에 다다른 상황에서 갑자기 그의 움직임이 멈춰 당황해하고 있는데 한이 덮고 있던 이불을 밀어 냈다. 그러곤 삽입한 그대로 자세를 바꿔 눕더니 자신을 그의 위에 앉혔다.

“자, 이번엔 네가 움직여 봐.”

멍한 채라, 순간 그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되물었다.

“……응?”

“네가 위에서 움직여 봐. 깊이 들어갈 거야.”

“……뭐를……?”

“이렇게.”

말이 끝나기 무섭게 누운 자세 그대로 한이 허리를 쳐올린 순간 그의 성기가 아주 깊은 곳까지 박혀 왔다.

아랫배 속을 깊이 파고드는 감각에 짤막한 비명을 내지르자 한이 느긋하게 말을 건넨다.

“허리 움직여 봐. 네가 좋은 대로 하면 돼. 난 가만히 있을 테니까.”

엉덩이를 찰싹 친 한의 무리한 요구에, 그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라 고개를 내저었다.

“못 해…….”

“괜찮아. 네가 더 느끼는 체위야.”

“하지만…….”

“괜찮아. 천천히 해 봐. 기분 좋아지는 부분을 찾으면서.”

한의 감질나는 움직임에 다시 몸이 달아올랐다.

어서 빨리 더 깊은 곳을 찔러 줬으면 하는 바람에 한의 어깨를 손으로 짚은 채 수치심을 참으며 천천히 허리를 들어 올렸다. 그러곤 천천히 다시 내려앉은 순간 저도 모르게 작은 비명을 터뜨렸다.

조금 전보다도 더 깊이 박혀 오는 성기가 점점 부피를 더해 가는 게 느껴졌다. 그 열기도, 단단함도 너무나 생생했다.

“아…….”

“좋아?”

“응.”

“그럼 더 움직여 봐. 깊으니 좋지?”

“응.”

“그래, 그럼 조금만 더.”

다정한 그 음성에 다시 한번 허리를 들었다 내려앉자 한의 성기 끝이 아까 그가 계속 괴롭혔던 곳을 스쳤다. 순간 전율 같은 쾌감이 일었다. 높이 신음하며 다급히 허리를 움직이자 한이 손을 뻗어 유두를 세게 꼬집는다.

“윽.”

“소리 내도 돼. 크게.”

등줄기를 쓸어내리며 속삭이는 그 말에 이내 마음껏 허리를 움직이며 교성을 내질렀다. 의식은 완전히 사라진 뒤였다. 그렇게 한참 한의 위에 앉아 거친 숨을 내쉬며 정신없이 움직이던 어느 순간이었다.

질척거리는 소리와 난잡한 신음만이 가득하던 방 안에 아주 작은 소리가 울려 왔다.

통통 하고 나무와 유리로 된 미닫이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움직임을 멈추자 복도 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넘어왔다.

“저기, 형.”

머뭇거리는 듯 조심스러운 그 음성에 순식간에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하시는 중에 죄송한데요, 저 아직 안 자거든요. 조금만 조용히 해 주시면 좋겠는데요…….”

그 말에 숨을 멈췄다.

잊고 있었다. 막상 하다 보니 정신이 나가, 잊고 말았다.

바로 옆방에 윤이와 훈이가 있다는 걸.

“하지 말라는 건 아니고요, 조금만 조용히 해 주세요. 소리 다 들리니까, 아주 조금만요. 그럼 계속하세요.”

아주 예의 바르게 벽간 소음 문제에 대해 항의한 훈은 다시 조용히 발걸음을 옮겨 문 너머로 사라져 갔다.

커다란 덩치가 멀어져 가는 둔탁한 발걸음 소리에 말없이 한을 바라보자 한이 문 쪽을 바라보며 혀를 찬다.

“저 자식은 이 시간까지 잠도 안 자고 뭐 하는 거야?”

“…….”

“네 신음 듣는 건 좋지만 양쪽에 순진한 총각들이 있으니 조금만 조용히 하자.”

“…….”

“자, 그럼 다시 시작.”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다시 움직여 보라는 듯 자신의 엉덩이를 툭툭 건드리는 한을 보며, 아주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사람이 경악하면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모른다는 걸.

“화났어?”

“…….”

“연신우 씨, 화났어요?”

신우에게 밀쳐진 뒤 왜 그러냐고 치근덕거리다 어깨를 걷어차여 침대에서 떨어진 한은, 샤워 후 침대에 앉아 신우의 어깨를 콕콕 찔러 대고 있었다. 하지만 공황 상태에 빠진 신우는 그의 말에 답할 여유가 없었다.

그저 이불을 돌돌 만 채 침대에 누워 묵언 시위를 계속할 뿐이다.

“어? 진짜 화났어?”

“…….”

“미안해, 미안. 나도 깜빡했어. 이제 얼굴 좀 보여 주지?”

“…….”

“아래도 닦아야 하잖아.”

말과 함께 은근히 엉덩이 골 사이를 매만지는 한의 손길에 신우는 기겁하며 재빨리 몸을 굴려 침대 끝으로 도망쳤다.

이불을 둘둘 만 채 굴러다니는 신우의 모습에 한이 시원스레 웃는다.

“너 번데기 같아. 아니, 누에고친가?”

속 모르는 한의 장난스러운 태도에 결국 신우가 이불에서 고개를 빼고 그를 흘겨보았다.

“너, 지금 웃음이 나와?”

“응.”

“……너무 뻔뻔한 거 아냐?”

“뭐가?”

“훈이가 다 들었잖아.”

“그게 뭐? 미성년자도 아니고, 나이 들 만큼 든 성인 남잔데.”

“그래도 그 소리를 다 들은 거잖아.”

“우리가 불륜 관계도 아니고, 너나 나나 둘 중 하나가 미성년자인 것도 아니잖아. 성인 남자 둘이 사귀는 관계라 할 거 한 건데, 그게 뭐?”

한의 주장은 확실히 논리적이었다.

하지만 논리적이라고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인간 사회에서는 때로는 논리보다는 감정과 윤리가 더 우선하기도 한다.

“내일 훈이 얼굴을 어떻게 봐?”

“왜?”

여전히 분위기 파악 못 하는 한의 물음에 신우가 그걸 질문이라고 하냐는 듯 찌릿 바라보자 한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 녀석도 그런 건 신경 안 써. 그런 데로는 다들 담백하니 걱정 안 해도 돼.”

“너, 네가 평소에 집에 없다고 너무 말 막 하는 거 아냐?”

“그럼 나랑 출근할래?”

전혀 긴장감 없는 한의 태도에 신우가 울상을 하자 한이 재빨리 말을 정정해 주었다.

“아, 농담. 농담. 괜히 가을볕에 얼굴 탈 필요 없지. 걱정 마. 진짜 훈이는 괜찮아. 괜히 내 동생이겠어?”

자기 동생은 자기가 잘 안다며, 한은 아주 자신 있게 아무 문제 없다고 단언했지만 신우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5년이나 얼굴도 못 본 형의 의견 따위는 전혀 믿음이 가질 않는다.

아니, 그 전에 훈이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자신이었다. 창피하고 속이 타고 황당해 다시 돌아누우며 길게 한숨을 내뱉자 한이 달래듯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괜찮아. 괜찮아.”

“……전혀 안 괜찮아.”

훈이 문을 두드린 순간만 떠올리면 이불이 아니라 침대까지 걷어차고 싶은 심정에 신우가 그대로 꼼짝 않고 누워 있자 한이 슬금슬금 신우의 위로 몸을 기대며 신우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그러곤 조금 낮아진, 은밀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그런데…… 어쩌냐? 네가 이렇게 토라진 거 보니 난 기분 좋은데?”

엉뚱한 말에 신우가 그건 또 무슨 소리냐는 얼굴로 한을 돌아보자 한이 눈을 가늘게 뜨며 싱긋 웃는다.

“너 나한테 화내는 일도 없는데, 화내고 토라지고 걷어차기까지 했잖아. 그거 되게 기분 좋은데? 그러니까 이제 자주 걷어차도 돼. 다 맞아 줄게. 따귀 때리고 싶으면 얼굴도 대 줄까? 쌍코피 흘리게 때려도 되는데.”

조금 능글맞지만 진짜 기쁜 듯 들뜬 한의 속삭임에 신우는 순간 너무 어이가 없어 웃고 말았다.

“내가 널 때릴 것 같아?”

“그러진 않겠지만…… 때려도 상관없어. 내 덩치에 네가 몇 대 친다고 아프지도 않을 테고. 아프면 좀 어때? 네가 때리는 건데.”

그렇게 말한 한이 쪽 하는 소리가 날 정도로 짙게 이마에 입을 맞추자 슬그머니 신우의 표정이 풀렸다. 창피하고 기가 막힌 건 여전하지만 이렇게 달래 주면 더 화를 낼 수도 없다. 이 녀석은 자신이 잠깐이라도 우울해하거나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는다.

간질거리는 한의 애정 표현에 침대에 누워 한을 바라보자 마지막으로 입술에 한 번 더 입을 맞춘 한이 바로 옆에 비스듬히 누워 베개를 베곤 이쪽을 빤히 응시했다. 그러고는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아직도 화났어? 그럼 진짜 한 대 팰래?”

“화난 거 아냐.”

“그럼?”

“창피해서 그렇지.”

“그럼 창피한 만큼 때려.”

진짜 때리라며 뺨을 들이미는 한을 보며 신우는 결국 돌돌 만 이불을 풀었다. 그러곤 무심히 내뱉었다.

“나보다 어머니한테 좀 맞아 주지? 어머님 소원이 너 시원하게 패는 거라며?”

오늘 들었던 이야기를 그대로 한에게 전해 주자 한이 의외라는 듯 눈을 껌뻑인다.

“어머니가 그래? 나 시원하게 패는 게 소원이라고?”

“응. 너 이런 날은 꼭 바빠서 슬슬 피해 나간다고.”

그건 한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우리 어머니가 나 때문에 마음고생 많이 하셨지. 어릴 때부터 떨어져 살아서 걱정은 많으신데 난 원래 연락을 잘 안 하는 데다 하도 이거저거 손대다 얼마 못 가서 때려치우니 못 미더워하셨어. 분명히 저번 주에 통화할 때는 검도 대회 나간다던 놈이 그다음 주에 통화하면 아이스 하키 하고 있으니까.”

한이 어린 시절부터 싫증을 잘 내 자주 뭘 하다 때려치웠다는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그의 입으로 다시 들으니 어머니의 분노가 절실히 이해되었다. 바로 저번 주까지 죽도 들고 있던 녀석이 다음 주에는 갑자기 하키채를 들고 집에 들어온다면 아무리 속 좋은 사람이라도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다.

“알면 좀 잘해. 너희 어머니, 너 걱정 많이 하시던데. 왜 전화 자주 안 해?”

“살아 있으니까. 주말마다 우리 할아버지한테 세계 각지에 있는 자식들이 전화해서 온갖 소식 다 전하는데, 뭐. 일 있으면 곧장 귀에 들어오는데 뭘 걱정을 해?”

“그래도, 전화는 좀 드려.”

아무리 그래도 너는 심하다고 조금 주제넘은 간섭을 하자 한이 잠시 자신의 눈을 바라보다 이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오케이. 알았어. 부모님한테 한 달에 한 번은 전화 드릴게.”

“보름에 한 번.”

워낙에 바빠 주말마다 하는 건 무리인 것을 알고 보름에 한 번이라고 못을 박자 한이 순순히 답해 왔다.

“좋아. 보름에 한 번. 전화도 잘 받고 잘 드릴게. 무슨 일 생겨도 꼭 전화하고. 필요한 보고도 꼭 할게.”

“그래. 그리고 아무리 바빠도 석 달에 한 번은 찾아봬.”

“그건 걱정 마. 나랑 동생들 다 돌아왔으니 이제 우리 집 엄청 시끄러워질 거야. 나 없는 동안은 할아버지가 귀찮아서 할머니 제사 때만 다들 불렀는데 장손인 내가 돌아왔으니까 명절에 제삿날에 할머니, 할아버지 생신에 가족들 생일까지 따지면 일 년 내내 정신없을걸? 물론, 넌 나랑 할아버지 생일만 챙기면 돼. 다른 가족들 생일은 김 비서님이 다 알아서 챙기시니까.”

그 말에 신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가족이라고 했으니 한 해 내내 시끌벅적한 것도 당연하긴 하다. 지금까지가 너무 조용했던 거다. 그러고 보니 한이 돌아왔다는 소식을 전하지 않은 게 그런 이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돌아왔다고 하면 여기저기 인사 다니고 전화해야 하니까, 그게 번거롭고 싫었던 게 아닐까, 하고 생각하는데 한이 빙긋 웃는다.

“너 지금 내가 귀찮아서 일부러 말 안 했을 거라고 생각했지?”

“응.”

“반은 맞아. 나 돌아왔다고 보고하면 우리 부모님부터 동생들에 숙부들, 고모들, 사촌 형, 누나, 동생들에 외가에도 인사 가고 해야 하니까. 거기 다 돌면 최소 한 달이야. 한둘이라야 상대를 하지. 인사 다니다 사업은 시작도 못 한다고.”

“그럼 반은?”

“반은 그냥 그럴 필요를 못 느낀 거지. 난 하나에 빠지면 정신 못 차리니까.”

그건 익히 알던 바라 놀라울 건 없었다.

다만…….

“그 성격은 좀 고쳐.”

“……노력해 볼게.”

“그래. 노력하는 게 어디야?”

한치고는 기특한 답에 만족하며 편안히 베개에 기대자, 한이 리모컨을 들어 방의 조명을 끈다.

“자, 그럼 이만 자자.”

“아, 나 샤워…….”

“내일 해.”

샤워를 하긴 해야겠지만 조금 귀찮기도 하고 또 많이 졸리기도 했다. 그러니 아침에 일어나 샤워하기로 하곤 한의 품으로 파고들자 슬그머니 이불을 끌어 올린 한이 어깨를 안아 준다.

몸을 감싸 오는 그의 체온과 함께 급격히 졸음이 쏟아졌다.

그리고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잠에 빠져들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