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Family Affair Prologue (18/23)

Family Affair

Prologue

시작은 한 통의 전화였다.

일이 몰려, 모처럼 사무실에 출근해서 정신없이 일을 처리하던 중 걸려 온 전화에 신우는 잠시 머뭇거렸다.

화면 위에 ‘강혜진’이라는 이름이 떠 있던 탓이다.

단 한 번 통화한 것뿐이지만 잊을 수 없는 그 이름에 일단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짤막한 인사 후 기다리자 곧 조심스러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안녕하세요? 강혜진인데…… 기억하시나요?

“네. 기억합니다.”

당연히 기억하니 전화를 받은 거라 유한 음성으로 답하자 그녀가 안도한 듯 밝은 음성으로 안부를 묻는다.

-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네. 그런데 무슨 일로……?”

혹시 엄마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싶어 묻자 그녀가 빠르게 답해 온다.

- 특별한 용건이 있어서 한 건 아니에요. 어머니는 잘 계세요. 건강도 많이 회복되셨고 최근 기분도 좋아지셨어요. 잠도 잘 주무시고요.

조용조용하고 상냥한 그녀의 답에 순간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다행이네요.”

- 어머니는 괜찮으시니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잘 지내신다는 것도 전해 드릴 겸,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어서요.

“부탁이라뇨?”

그녀가 나한테 부탁할 일이 뭐가 있을까 싶어 그렇게 묻자 그녀가 침묵한다. 선뜻 말하기 힘든 내용인지 머뭇거리는 듯한 그녀의 태도에 조용히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그녀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 저…… 지난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어머니가 신우 씨를 만나고 싶어 하셔서요. 그리고 아버지도 신우 씨를 한 번 봤으면 하시네요.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그녀의 제안에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그간 그 일을 잊고 있던 건 아니다. 하지만 여전히 답은 나오지 않은 채였다. 한과도 여러 번 대화를 나누고, 수없이 고민했지만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 긴 시간을 뛰어넘어 만난 어머니 앞에서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그리고 자신이 그녀를 제대로 알아볼 수는 있을지, 혹은 그녀 역시 자신을 알아봐 줄지, 그러다 또 괜히 서로에게 상처만 남기는 건 아닐지 이런저런 생각에 머뭇거리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이렇게 흘러 버렸다.

서로를 보자마자 눈물을 흩뿌리며 부둥켜안는 감동적인 모자 상봉은 기대도 하지 않는다. 어린 시절에야 그런 걸 꿈꿨지만, 어느 정도 나이가 들고 보니 친부모자식 간이라도 그 정도로 긴 세월을 보지 못하고 지냈다면 남보다도 더 멀고 어색하게 느껴진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래서, 망설여졌다.

- 아, 지금 당장 만나자는 건 아니에요. 그건 천천히 생각해 주셔도 돼요. 그냥 오랜만이라 잘 지내시나 궁금하기도 했고 어머님도 걱정하셔서 안부차 전화 드린 거예요.

“……전 잘 지내고 있으니 걱정 마시라고 전해 주세요. 어느 때보다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어요.”

- 네, 그러신 것 같아요. 지난번보다 목소리가 좋으세요.

“네. 좋아요.”

- 그럼, 연락 기다릴게요. 건강히 잘 지내세요.

“네, 혜진 씨도 잘 지내세요.”

- 네.

짤막한 통화 후 전화를 끊은 신우는 의자에 기대앉았다.

이제 슬슬 결정을 내려야 할 때가 왔다는 건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생각과 달리 용기가 나지 않아 난감한 듯 길게 숨을 내뱉는데 갑자기 어깨에 힘이 실렸다. 그 힘에 놀라 돌아보자 역시나 한이다.

“웬 한숨이야?”

“어…… 일 다 끝났어?”

새로 맡은 일들이 많아 벌써 일주일째 새벽 퇴근을 하고, 정확히 이틀째 제대로 된 식사를 못 하고 있다며 난리를 치던 그였다. 한창 바쁠 시간대에, 한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라 그렇게 묻자 한이 어깨 위로 얼굴을 묻으며 죽는소리를 한다.

“아니, 영원히 안 끝날 것 같아. 아줌마가 해 주는 밥 먹고 싶어 죽겠어.”

조미료랑 인스턴트는 질색이라는 말을 덧붙이며 어리광을 부리는 그를 신우는 웃으며 바라봤다.

“아주머니한테 도시락이라도 싸 달라고 할까?”

그 말에 한이 금세 되살아났다.

“그럴까? 나 진짜 제대로 된 밥 먹고 싶어. 매끼를 배달 음식으로 때워야 한다니, 이건 인권 유린이야. 이 세상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매일 배달 음식을 먹어야 하냐고.”

일 문제보다 먹는 문제로 꽤 스트레스를 받는 듯한 그 모습에, 신우는 안쓰러운 듯 어깨에 기댄 한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나 이것만 끝나면 퇴근하는데 저녁 싸다 줄까?”

그 물음에 한이 고개를 번쩍 든다.

“진짜?”

“응.”

“해 줘, 해 줘. 아줌마 밥 먹고 싶어. 대체, 왜 내 회사에서 내 마음대로 먹지를 못 하냐고?”

“그건, 네가 한 번 나가면 최소 2시간은 안 들어오기 때문이지.”

마침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던 인재가 툭 던진 답에 한이 인상을 확 찌푸렸다.

“뭐야? 너 나 감시하냐?”

“감시해야지. 회의 도중에 화장실 간다고 나가서 여기 와 있는 놈이니까. 여기가 화장실이냐? 변기 어디 있어?”

“좀 이따 갈 거야. 회의실에서 나와서 이 앞을 딱 지나는데 여길 들르지 않으면 일이 안 풀릴 거라는 계시가 내려왔단 말야.”

누가 들어도 명백한 헛소리를 하며 한이 다시 신우의 목을 끌어안자 인재가 살벌하게 웃는다.

“헛소리하지 말고 빨리 회의실로 돌아와. 제발 오전 내로 미팅 좀 끝내자고. 대체 뭐가 불만이라 보는 족족 기각이야? 그러다 공사 기간 절대로 못 맞춰, 너.”

“그러니까, 내가 OK 사인 날릴 만한 걸 갖고 오라고. 그따위 기획들 들고 오면 내가 오냐~ 하고 받아 줄 줄 알았어? 좀 더 재미있고 창의적인 걸 만들어 봐. 여기저기서 다 본 것 같은 것들 들고 오지 말라고.”

너희가 가져온 것들 다 어디서 봤던 거라는 한의 핀잔에 인재가 도저히 반박할 수는 없는지 이를 악문 채 중얼거린다.

“망할 자식.”

기억력하고 눈만 더럽게 좋아서는, 이라는 인재의 중얼거림에 신우가 서둘러 어깨에 매달린 한의 머리를 떠밀었다.

“그만 가서 일해. 다들 기다리잖아.”

“잠깐만 더. 4시간 13분 만에 얼굴 본 거잖아.”

시계로 시간까지 확인해 가며 불만을 토로하는 한의 어리광에 신우는 조심스레 인재의 안색을 살폈다. 그 시선을 의식한 듯 인재가 고갯짓을 한다.

‘저 녀석 빨리 안 쫓아내면 너도 가만두지 않겠다’라는 의미였다.

“얼굴 봤으니 됐잖아. 좀 있으면 점심시간이니까 그때 봐. 빨리 일해야 빨리 점심 먹으러 가지. 오랜만에 순두부 백반 먹고 싶어.”

그 말에 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아, 그렇구나! 너랑 나가서 먹으면 되지! 알았어. 바람처럼 끝내고 올게. 정확히, 음…… 45분 뒤에 보자고. 45분 안에 회의 끝낼 테니, 너도 일 정리해 놔. 밥 먹고 맛있는 차 마시고, 천천히 산책하면서 오자.”

“그래.”

그러니 어서 가 보라는 듯 신우가 손을 휘휘 내젓자 금세 멀쩡해진 한이 바로 등 뒤에서 떨어졌다.

“정확히 45분이다. 좀 이따 봐.”

“응.”

그러니 이제 제발 좀 가라며 손을 흔들던 신우가 힐끔 인재를 보자 인재가 잘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너 출근하라고 하길 잘했지, 진짜.”

이건 회사에서 애 하나 키우는 기분이라고 혀를 차는 인재를 보며 신우는 걱정스러운 듯 물었다.

“일이 잘 안 풀리는 거야?”

“안 풀린다기보다 그냥 저 녀석이 마음에 안 들어 하는 거야. 최근에 새로 들어간 타운 하우스 건이 성에 안 차는지 계속 연필만 깎아 댔거든. 그제는 우리 사무실에 있는 연필 다 깎아 놓고는 그걸로도 모자라 120피스 색연필을 사다 그것까지 다 깎아 놨더라고. 이러다 이 건물에 있는 연필이란 연필은 죄다 깎을 기세야.”

대체 그 색연필은 어디서 사 온 거야, 라는 인재의 탄식에 신우는 안쓰러운 눈초리로 인재를 바라봤다.

뭔가 생각할 게 있거나 일이 막히면 죽어라 연필만 깎아 대는 게 한의 버릇인데, 한이야 그게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법이라지만 바쁠 때 혼자 그러고 앉아 있는 꼴 보면 보는 사람은 속이 터지기 마련이다.

“걱정 많았겠네. 집에서는 통 볼 시간이 없어서 몰랐는데.”

“뭐, 걱정보다는 짜증이지. 그래야 생각이 정리되는 건 알겠는데…… 아무리 그래도 비품들을 그렇게 다 깎아 놓으면 속 터진다고. 연필값도 무시 못 해.”

알뜰한 성미대로, 그 연필들 아까워 죽겠다며 고개를 내젓던 인재가 이내 손목시계로 시간을 확인한 뒤 재빨리 돌아섰다.

“나도 들어가 봐야겠다. 이따 보자.”

“응. 일 잘해.”

“너도 수고.”

인재를 마저 보낸 신우는 다시 노트북 하단의 시각을 확인했다.

12시 17분이었다. 한이 45분이라고 한 걸 보니 1시를 얘기한 거구나, 하고 정확히 시간을 인지하곤 다시 빠르게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45분 뒤까지 어떻게든 일을 끝내고 한과 점심을 먹은 뒤 집으로 돌아가 오늘은 그 녀석 소원대로 아주머니께서 해 주시는 밥을 먹게 가져다주고 싶다는 생각에 더욱 손을 빨리 움직였다.

그 순간에는, 방금 왔던 전화에 대한 기억은 깨끗하게 지워진 채였다.

“아~ 좋다. 너 회사에 나오니까 너무 좋아.”

정확히 1시가 되자마자 귀신같이 회의를 끝내고 쫓아온 한은 사무실을 나서며 개운하다는 듯 기지개를 쭈욱 켰다.

어지간히 사무실 안에 앉아 있는 게 좀이 쑤셨는지 건물 밖으로 나서자마자 얼굴빛이 환해졌다. 얼굴색마저 지나치게 솔직한 한을, 신우는 귀엽다는 듯 바라봤다.

“넌 얌전히 있는 건 진짜 못 하는 것 같아.”

“원래 싸돌아다니는 걸 좋아해. 그러고 보니 운동 못 한 지도 꽤 됐네. 수상 스키 타고 싶다. 날도 좋은데 이게 뭐야?”

찬란한 햇빛이 비치는 초가을, 습도도 온도도 딱 좋다며 이런 날씨에 수상 스포츠를 해야 하는데 시간이 없다는 한의 탄식에 신우가 놀라운 듯 되물었다.

“수상 스키도 타?”

그러고 보니 정현에게 얼핏 그런 말을 들은 것 같기는 하지만 본 적이 없어 궁금해하자 한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웨이크보드도 좋아하고 스쿠버 다이빙 자격증도 있고, 겨울엔 보드도 타고. 스카이다이빙도 하는데. 요즘 통 운동을 못 했네.”

“……그거 위험한 거 아냐?”

“안전 장비 착용 잘 하고 준비만 제대로 하면 괜찮아. 위험한 거야 사이클도 위험하고, 수영도 위험하지. 등산도 얼마나 위험한데. 뭐든 준비와 마음가짐의 문제야. 아, 너도 보드 타? 겨울에 보드 타러 갈래?”

확실히 워낙에 운동을 오래 해서인지 한은 운동이라면 뭐든 잘하고, 또 움직이는 걸 좋아했다. 그런 건 배우고 싶은 점이었기에 신우 역시 동참하고 싶었지만 지금은 각오나 다짐보다는 좀 더 현실적인 문제들이 있었다.

“좋긴 한데…… 그럴 시간이 나겠어? 가을부터 공사 들어가면 봄까지 바쁜 거 아냐?”

“시간은 어떻게든 내면 돼. 이렇게 잡혀 있어서야 오던 분도 도망가신다고.”

“오던 분?”

“그분.”

“그분?”

“내 더듬이를 타고 내려오시는 건축의 신.”

그분이 어서 오셔야 한다며 기우제라도 지내는 듯, 그렇지 않아도 긴 팔을 쭈욱 펴는 한의 모습에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신우가 황당해하는 얼굴을 한다.

“그건 뭐야?”

“신내림이 오듯 뭔가 확 하고 오는 게 있어야 하는데 요즘 그런 게 없다고. 그래서 연필만 주야장천 깎아 댔더니 인재가 날 잡아 죽이려고 하잖아. 덕분에 사무실에 잡혀서 밥 먹으러도 못 나가고. 아, 나 진짜 불쌍하지 않냐?”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한은 전혀 불쌍하지 않은 얼굴로 생글생글 웃어 대고 있었다. 하지만 인재에게 들은 게 있어서인지 걱정이 돼 그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진짜, 일이 막힌 거야?”

“문제라기보다는, 이미지가 좀 안 잡힌단 말이지.”

“이미지?”

“집은 사람이 사는 곳이잖아. 그래서 거기 사는 사람들을 봐야 ‘아, 이 사람들은 이렇게 살 테니 이렇게 해 줘야겠구나.’ 하고 디자인하고 공간이 나오는데…… 구체적인 타깃층도 정해 두지 않고 무작정 화려하고 고풍스러운 이탈리아 저택 분위기로 지어 달라 하니. 아니, 한국에 웬 이탈리아 저택이야? 한국의 지형하고 기후는 계산도 안 하고 무조건 이탈리아식 건물로 지으라니 한겨울에 다 얼어 죽을 일 있어?”

한옥이 한옥인 이유가 뭔데, 라고 투덜거리는 한을 신우는 사랑스럽다는 듯 바라보았다.

좋은 것과 싫은 것이 확실한 만큼, 그 이유 역시 명확한 데다 소신이 있어 타인의 말에 쉽게 흔들리지 않고 솔직한 한의 성격이 좋았다. 그의 단순하고 낙천적인 성격 다음으로 좋아하는 부분이 저렇게 뭐든 확실하게 말로 해 준다는 점이었다. 그의 그런 성격은 자신같이 소극적이고 내성적인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된다.

“그럼, 한옥으로 짓고 싶은 거야? 그것도 예쁠 것 같은데?”

“2층으로 지을 거라 한옥은 좀 그렇고…… 한옥의 장점을 가져가야지. 대리석보다는 목재나 황토가 좋으니까. 바닥도 황토로 까는 게 좋고.”

물론 그렇게 되면 공사 비용이 어마어마해지겠지만 대리석이나 황토나 그게 그거라는 생각에 신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지으면 예쁠 거야, 뭐든.”

입에 발린 말이 아닌 진심이 담긴 순수한 칭찬에 한이 기운이 나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뭐, 그렇긴 하지.”

“거기도 빌라처럼 이불 너는 빨래 건조대가 있으면 좋겠다.”

파란 하늘 아래에서 펄럭이는 이불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진다며 웃던 신우가 오늘따라 유난히도 쾌청한 하늘을 눈이 부신 듯 바라보자 한이 바로 옆에서 신우의 어깨를 안았다.

“나도 그거 엄청 좋아해. 나 어릴 때 본채 이불은 전부 이불 홑청이라 그거 일일이 뜯어서 빨아 말렸거든. 햇살 쨍쨍한 날 파란 잔디밭 위에 하얀 이불 홑청이 날리는 거 가만히 보고 있으면 기분 엄청 좋더라고. 뭐, 그거 일일이 뜯고 빨아서 다시 풀 먹이고 바느질해야 하는 사람들은 미치겠지만 보는 사람은 기분 좋지. 이불에서 햇볕 냄새가 나는 것 같아.”

“맞아. 진짜 기분 좋아. 그러고 보니 오늘 빨래하면 딱 좋겠다.”

“그러게……. 아, 갑자기 그러니까 막국수 먹으러 가고 싶다. 전병이랑 감자떡도 먹고 싶고…….”

이불 이야기를 하다 뜬금없이 줄줄이 나오는, 어쩐지 특정 지역을 연상케 하는 한의 발언에 신우가 불안한 듯 한을 돌아보자 역시나 예상한 대로의 말이 이어진다.

“강원도 갈래?”

“…….”

“지금부터 출발하면 가는 데 1시간, 먹고 노는 데 2시간, 오는 데 1시간이면 되니까, 4시면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은데?”

지금 당장이라도 차 끌고 달려나갈 것 같은 한의 기세에 신우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 전에 인재가 너 잡으러 올 것 같은데?”

“그러니까 잡히기 전에 가야지.”

“일 안 하고?”

“오전 회의에 나온 거 다 빠꾸 먹였어. 지금부터 다시 시작하면 내일 오후에나 디자인 나올걸. 그러니까, 그때지 난 프리.”

“그 타운 하우스 디자인은?”

“그러니까 그걸 위해서 내가 잠시 외출을 해야 한다니까. 저 건물 안에 종일 앉아 있어 봐야 아무것도 안 떠오른다고. 뭐든 많이 보고 많이 느끼고 많이 그리는 게 중요한 거야.”

“그건 네 생각이고. 가려면 주말에나 가. 오늘은 안 돼. 다들 머리채 쥐어뜯으면서 야근하는데 대표가 도망가면 어떻게 해?”

그랬다간 인재가 자신을 죽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우가 한을 만류하자 한이 신우의 목을 세게 끌어안는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거 하나, 난 대표 아니다? 투자자는 할아버지지만 난 아시에 속한 디자이너 중 하나일 뿐이야.”

“할아버지가 너 보고 투자하신 거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그래도 내가 대표는 아냐. 전부 공동 대표지. 그래야 책임 떠넘기기 좋거든. 언제 도망칠지 몰라서 일부러 회사에 내 이름 안 붙인 거니까.”

당당하게 자기 변덕은 자기도 감당 못 한다는 한을 보며 신우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네 친구들이랑 선배님들 진짜 착한 사람들 같아. 네 변덕 다 알면서 같이 일하는 거 보면.”

“이 나라에 나만 한 건축 디자이너가 또 없거든.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레전드까지는 아니라도 영웅쯤은 돼. 그리고 곧 전설이 되겠지.”

자신만만하다 못해 건방져 보이는 한의 태도에 신우가 웃으며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 사이 순두부 백반 가게 앞에 도착했다.

“아, 오랜만이다~ 여기. 밥 먹자, 밥.”

낡고 허름한, 구석진 골목 안쪽에 위치한 작은 백반집 앞에 선 한은 굶주린 아이처럼 재빨리 문을 열고 들어서 안쪽에서 바삐 움직이는 아주머니들을 향해 소리쳤다.

“이모, 저희 순두부 백반 두 개요! 특별히 맛있게!”

분주한 가게 안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유쾌한 한의 음성에 바삐 테이블을 세팅하시던 아주머니가 반가이 한을 맞이해 주었다.

“아이구, 우리 조카 오랜만이네. 와서 앉아.”

“바빠서 사무실 밖으로도 못 나왔어요. 덕분에 여기 순두부 먹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요.”

커다란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어리광을 부리는 한이 자리를 잡고 앉으며 너스레를 떨자 금세 이쪽으로 다가온 인상 좋은 아주머니가 원형의 은색 테이블 위로 물수건 두 개를 내려놓으며 말을 건넨다.

“그러고 보니 우리 조카 살이 쪽 빠졌네. 내가 순두부 잔뜩 넣어 줄게.”

“밥도 많이요.”

“그래, 이 인분으로 쏜다, 내가. 여기 얌전한 총각도 오랜만이네?”

한에 이어 신우를 향한 아주머니의 친근한 인사말에 신우 역시 어색하게 웃으며 인사를 받았다.

“네. 오랜만에 뵙네요.”

“자주 좀 와. 얌전한 총각도 내가 고기 듬뿍 넣어서 줄게. 왜 이렇게 다들 말랐어?”

가훈이 ‘맛있는 것만 먹고 살기’인 듯한 그 집에서 몇 개월 지낸 덕에 신우로서는 생애 최고 몸무게를 갱신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말랐다는 말에 신우가 웃자 한이 대신해서 답해준다.

“지금 열심히 찌우는 중이에요. 그래도 많이 찌지 않았어요, 저번보다?”

“응, 그래 보이긴 하네. 잠깐만 기다려. 맛있게 해 줄게.”

“네.”

명쾌하게 대화를 끝내고 종종걸음으로 주방으로 향하는 아주머니를 보던 한이 물수건의 비닐을 뜯어 신우에게 하나 건네준 뒤 본인도 손을 닦으며 무심히 말을 던진다.

“그런데 아까 전화는 뭐야?”

“응?”

“아까 통화하고 한숨 쉬었잖아.”

그 아까가 언제를 말하는 건가, 하고 떠올리던 신우가 강혜진 씨와 한 통화를 기억해 내곤 ‘아.’라고 짤막한 감탄사를 내뱉었다.

그 소리에 한이 의심스럽다는 듯 몸을 앞으로 숙인다.

“뭐야, 너? 나 바쁜 사이에 바람피우는 거야? 여자 목소리 같던데.”

어떻게 목소리까지 들은 건지, 심통 난 아이처럼 뾰로통해진 한의 얼굴에 신우는 살며시 미소 지어 보였다.

“질투해?”

“당연하지. 누구야? 내가 만나서 해결할 테니 이름만 대. 물론, 누구라도 나보다는 못 하겠지만 하여간 내가 확인은 해야지.”

유치하기 짝이 없는 한의 억지도 이젠 익숙해진 채라, 신우는 아무렇지 않게 웃으며 통화 상대가 누군지 알려 줬다.

“엄마 딸이야.”

지난번에 얘기한, 이라는 신우의 답에 혼자 전의를 불태우던 한이 의외라는 듯 빠르게 되물었다.

“그 사람이 또 왜?”

“엄마 잘 지내신다고 전해 주고 건강하냐고 안부 묻더라고.”

“내장 달라고 전화한 게 아니고?”

“내장이 아니라 장기라고 해 줘. 그리고 그런 거 아냐.”

여전히 그 사람들에게 어떤 흑심이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는 한을 겨우 안심시켜 주자 물수건을 옆에 툭 던진 한이 시선을 맞추며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다행이고. 어머니는 잘 지내신대?”

“응. 건강도 좋아지셨고 괜찮으시대. 그래서 한 번 봤으면 한다고 연락했더라고.”

“그럼 만나지?”

간단하고 쉽게 내려지는 한의 결론에 신우는 조금 망설였다.

“……그건 아직 잘 모르겠어.”

“왜?”

“……막상 만났는데…… 너무 낯설까 봐 걱정 돼. 엄마가 나한테 실망하면 어쩌나 싶기도 하고…….”

그래서 아직 용기가 안 나, 라고 신우가 시선을 내리며 작게 중얼거리자 한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럴 수도 있지. 사람마다 다른 거니까. 우리 어머니는 몇 년 안 보고 지냈어도 일단 나 보면 화부터 내실걸.”

그러고 보니 벌써 5년째 못 봤다고 한은 숫자를 세듯 손가락을 접었다. 그러다 ‘5년이 아니라, 6년째인가?’ 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한을 신우가 이번만은 한심한 듯 바라보았다.

“그건 네가 혼날 짓을 해서 그런 거잖아.”

아무 말 없이 갑자기 이탈리아로 날아갔다 5년 만에 돌아와서는 돌아왔다는 전화 한 통을 안 해 집안을 뒤집어 놓고도, 한은 여전히 그게 뭐가 문제인지 모르는 듯했다.

아무리 뻔뻔하다 해도 저렇게 살아도 되는 건가 걱정하던 사이 식사가 나왔다. 먹음직한 요리의 등장에 한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진다.

“와, 잘 먹을게요. 사무실에 감금당한 동안 이 집 순두부 먹고 싶어서 미치는 줄 알았어요. 여기 진짜 무슨 약 탄 건 아니죠?”

“이모 손약을 탔지. 많이들 먹어.”

아직도 뚝배기 안에서 보글보글 끓고 있는 순두부찌개와 갖가지 밑반찬, 그리고 공깃밥을 내려놓으신 아주머니가 막 들어온 손님을 보곤 그쪽으로 향하자 한이 가득 찬 고봉밥을 먼저 퍼먹기 시작했다.

“우리 이모들 음식 솜씨 너무 좋다니까.”

“남들한테는 그렇게 잘하면서 가족들한테는 왜 그래? 어머니 걱정 안 하셔?”

“응? 아, 뭐 괜찮아. 나 이런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 그러고 보니 어머니 화 많이 나셨는데 올라오시면 나 보자마자 빗자루 드시는 거 아닌가 몰라.”

“……빗자루?”

“아, 자주는 아닌데…… 뭐, 보면 알 거야. 어머니는 엄청 과묵하신 대신 한번 삐끗하면, 그러니까 임계점을 넘으면 등부터 후려치시거든. 뭐, 보통 아들 셋 키운 집에서는 다들 그러니까. 훈이랑 윤이가 나 대신 많이 맞았지.”

어머니 입장에서는 분노가 끓어오를 일을 너무 별일 아니라는 듯 말하는 한의 태도에 신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을 놀라울 정도로 가족들에게 무심했다.

“용케 동생들 이름은 기억하는구나.”

“어…… 이름은 기억하는데…… 그러고 보니 훈이 얼굴은 잘 기억 안 나네.”

농담이 아니라 진심으로 동생 인상이 희미하다는 그 말에 신우가 숟가락으로 순두부찌개를 한 숟가락 뜨며 조심스레 조언했다.

“동생들한테 잘해 줘.”

언제나와 같은 신우의 충고에 한이 이번에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노력해 볼게. 잘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노력해 보겠다는 게 어딘가 싶었다. 한에게는 장족의 발전이다.

“훈이 보고 싶다. 윤이도 착하고 재미있는데 훈이는 엄청 순하다며?”

“아, 그 자식은 그냥 곰이야, 백곰. 흰 털옷 입혀서 북극곰 무리에 섞어 놓으면 못 찾을걸. 순하기도 엄청 순해서 어릴 때부터 말썽 한번 부린 적 없어. 내가 사고 치면 윤이는 위 부여잡고 잔소리하고, 그 녀석은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울기만 했으니까. 그 자식이 나랑 4살 차이인데 5살 때부터 덩치가 비슷했거든. 상상이 가? 10살짜리 덩치를 한 유치원생이 쭈그리고 앉아서 우는 거?”

자신도 큰 편이었는데 그 자식은 사람 수준이 아니라며, 미취학 아동의 키가 뭐 그러냐고 한이 시원하게 웃는 모습에 신우는 신기하다는 얼굴을 했다.

“그렇게 커?”

“응. 아마 지금은 나보다 클걸? 마지막에 봤을 때는 나랑 비슷했는데 그 녀석 그때도 계속 성장 중이었거든. 어지간하면 어머니가 그 자식 병원에 데려가서 성장판을 막아 버린다고 했겠어.”

“진짜?”

“응. 나만 해도 초등학교 5학년 때 키가 180이었거든. 자기보다 크다고 아버지가 엄청 싫어하셨지. 그때 훈이도 180 찍었을걸. 그래서 마트 같은 데 가서 훈이가 엄마한테 장난감 사 달라고 조르다 어머니한테 혼나면 다들 신기하다는 듯 구경했어. 우리 어머니가 원래 손으로 등짝만 때리다가, 손목 인대가 늘어난 뒤로는 빗자루 드셨거든. 이제 덩치 감당 안 된다고 마대나 빗자루로 두들겨 패는 게 보통이었어. 뭐, 훈이야 장난감 사 달라고 조르던 거 빼면 맞을 일도 없었지만.”

듣기만 해도 신기하고 재미있는 한의 가족 이야기에 신우는 눈을 반짝였다.

“재미있었을 것 같아. 동생들하고 지내는 거.”

“별로 그렇지도 않았어. 난 그때도 지금하고 비슷해서 매일 밖으로 도느라 바빴으니까. 아, 그런 건 있었다. 나랑 훈이랑 같이 다니면 친구냐고 물어봤어, 사람들이. 그러면 그 녀석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형이라고 울먹거리는데 그거 진짜 웃겼지. 하얀 백곰 같은 녀석이 눈물 뚝뚝 흘리는 거 제법 귀엽더라고. 그리고 식당 같은 데 가면 놀이방 있잖아. 애가 거기 들어가고 싶어 하는데 키 제한 때문에 못 들어가서 엄청 울었거든. 한번은 옛날에 그거 있지? 말 타는 거. 거기에 타고 싶어서 꼬깃꼬깃 모아 둔 용돈 들고 갔는데 주인 아저씨가 넌 커서 안 된다고 하니까 애가 그 자리에서 서럽게 우는 거야. 그때 같이 나간 어머니가 왜 안 되냐고 우리 애가 덩치는 이래도 유치원생이라고 우겨서 겨우 태웠는데 걔가 타자마자 고장났다니까. 마침 마트 앞을 지나가시던 우리 할아버지가 그거 보시고 어머니한테 ‘아가, 네 아들 덩치를 생각해야지.’ 하시고는 그래도 안타까우셨는지 아예 그 기계를 사 버리셨어. 마트 앞에 있던 걸 세 개 다. 그래서 원 없이 타게 해 주시더라고. 물론, 결국 일주일 만에 셋 다 박살 났지만.”

마치 눈앞에서 보는 듯 생생하게 떠오르는 장면에 신우는 차마 더는 숟가락을 움직이지 못한 채 웃음을 터트렸다.

“얘기 들으니까 진짜 훈이 보고 싶다.”

“할머니 제사 때 볼 수 있을 거야.”

“할머니 제사가 언젠데?”

“4월. 아직 멀었지만 그때는 올걸. 아, 그 자식이 올해 졸업이랬나? 내년이 졸업이랬나? 하여간 학기 중이라도 당일치기로 왔다 갈 거야. 안 그러면 유학 지원 끊기니까.”

“빨리 봤으면 좋겠다…….”

겪어 본 적도, 다른 데서 들어 본 적도 없는, 유쾌하고 즐거운 가족들 간의 분위기에 신우가 부럽다는 듯 웃으며 다시 숟가락을 움직이자 이번엔 한이 숟가락을 멈춘다. 그러곤 묻는다.

“이제 기분 좀 좋아졌어?”

“……응?”

“아까 기분 별로였잖아. 조금 우울해한다고 내 더듬이가 찌릿찌릿하더라고. 그러니 빨리 가서 너 위로해 주고 맛있는 거 먹여 주고 웃게 해 주라고.”

진짜 신내림이라도 받은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정확하고 예리한 그의 감에 신우의 손이 멈칫한다. 기분이 나쁘거나 슬프거나 우울한 건 아니지만 아까 기분은 조금 그랬었다.

“슬픈 건 아니고…… 그냥…… 엄마가 만나고 싶다는데 용기가 안 나는 게 마음에 걸려서 그런 것뿐이야. 만나고는 싶은데…….”

뭔지 모를 복잡한 감정에 신우가 차마 뒷말을 잇지 못하고 있자 한이 정확히 신우의 감정을 표현해 준다.

“무서워?”

정곡을 찌르는 그 답에 순간, 아 그런 거구나 하고, 신우는 빠르게 수긍했다.

“맞아. 무서워. 응, 무서운 것 같아, 조금.”

맞아, 그런 거야, 라고 신우가 자신의 감정을 솔직히 말하자 한이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천천히 생각하고 결정해. 그리고 그렇게 무서우면 내가 같이 가 줄게. 혼자 고민하지 말고 뭐든 좋으니까 나한테 얘기해.”

“응. 그럴게.”

“자, 그럼 어서 밥 먹고 맛있는 차 마시러 가자. 커피 같은 거 말고 시원하고 깔끔한 거 마시고 싶어.”

“그래. 아, 난 오전에 일 다 끝나서 퇴근할 건데, 진짜 저녁 싸다 줄까?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그 말에 한의 눈이 반짝인다.

“진짜?”

“응. 뭐 먹고 싶어?”

“쌈밥.”

조금의 고민도 없이 던져지는 한의 답에 신우가 역시나 하며 웃자 한이 메뉴에 옵션을 더했다.

“호박잎하고 머윗잎하고 양배추 먹고 싶어. 해물 쌈장이랑.”

“그렇게 말씀드리면 될까?”

“응. 그거랑 매운 낙지볶음도.”

“그걸 다 먹을 수…… 아, 먹겠구나.”

나이가 들어 식사량이 많이 줄었다는 한이 먹는 한 끼 기준이 보통 3, 4인분 정도였다. 그 정도 식사량이라면 저런 풀떼기 따위는 아무리 먹어도 과식할 일 없다.

“다른 사람들도 있으니까 넉넉하게 싸 달라고 할게.”

“안 돼. 나 1인분, 너 1인분. 그러니까 정확히 3인분.”

“사무실 사람들도 다 야근하잖아.”

“그 녀석들은 좋아하는 배달 음식이나 먹으라고 해.”

식사 따위 대충 때워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녀석들에게 아주머니 음식을 나눌 수 없다는 한의 말에 신우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확실히 한이 유별나긴 하다.

“너랑 할아버지, 그런 건 진짜 똑같아.”

“인생을 즐길 줄 아는 분이시니까.”

“할아버지는 뭐 좋아하셔?”

“응?”

“요리.”

그러고 보니 할아버지께서 특별히 선호한다는 음식은 못 들어 본 것 같다며 묻자 한이 밥을 한 숟가락 크게 뜨며 고개를 갸웃했다.

“딱히 좋아하시는 건 없고 그냥 맛있는 음식이라면 다 좋아하셔. 아, 특히 좋아하시는 건 딱 하나 있다. 묵사발.”

“묵사발?”

“할아버지가 할머니 손에는 물도 못 묻히게 하셔서 주방으로는 얼씬도 못 하시긴 했는데, 그래도 가끔 여름에 묵사발을 만들면 그건 맛있게 드셨던 것 같아. 우리한테는 전혀 안 나눠 주셨거든.”

그럼 엄청 좋아하시는 거라는 한의 말에 신우는 ‘묵사발’이라고 입 안으로 중얼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해서 단어를 되새기는 듯한 그 모습에 한이 묻는다.

“그런데 그건 왜?”

“배워 보려고. 할아버지가 계속 맛있는 거 사 주셔서 나도 대접해 드리고 싶은데…… 아주머니가 요리를 너무 잘하셔서 다른 요리는 감히 명함도 못 내밀겠더라고. 그래서 딱 하나만 하게.”

묵사발 정도라면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하자 한이 말도 안 된다는 듯 받아친다.

“네가 왜 할아버지가 좋아하시는 걸 해 줘? 내가 좋아하는 걸 해 줘야지.”

“넌 뭐든 잘 먹잖아.”

“그런 거 말고. 나 해물 수제비 좋아해.”

“해물 수제비 잘하는 데 있잖아. 저번에 간 데.”

“아니, 네가 해 줘야지. 왜 내 애인이 우리 할아버지를 챙기는데? 그건 언어도단이야. 넌 나만 챙기고 내가 먹는 것만 해 주면 돼! 우리 할아버지가 얼마나 잘 챙겨 드시는데. 전국 각지에 있는 산해진미는 다 드시는 분이야. 갑자기 영덕 대게가 먹고 싶어지면 그대로 새벽이든 대낮이든 차 타고 영덕까지 가셔서 막 잡아 온 게 드시는 분이라고. 그러니까 할아버지는 걱정할 것 없어. 일하느라 사무실에서 빠져나오지도 못하는 날 걱정해야지. 나도 묵사발 해 줘! 나도 묵사발 좋아해.”

쌈밥에서 해물 수제비를 거쳐 이젠 묵사발을 해 달라는 한을 보며 신우는 조금 질린다는 얼굴을 했다.

“……너, 이럴 때 보면 진짜 애 같아…….”

“난 원래 애야. 평생 안 클 거야. 그러니까 묵사발 해다 줘.”

“쌈밥 먹고 싶다며?”

“그건 방금 얘기고. 묵사발 해 줘.”

아이처럼 억지를 쓰는 한을 보며 신우는 졌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처음에는 멋있고 쿨하다고만 생각했는데 사귀면 사귈수록 어리고 유치한 면모들이 보였다. 하지만 그게 싫지는 않다. 환상이 깨져 실망할 만도 한데 어린아이 같은 그의 모습도 사랑스럽고 그저 반짝거리며 빛이 나는 듯했다.

이대로 영원히 멈춰 있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지금의 그도 마음에 들었다.

‘행복하다’라는 말을 머리가 아닌, 자신의 심장이 느끼고 있었다.

가슴 안에 햇살이 머무르는 기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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