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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pilogue (17/23)

Epilogue

푸른 잔디밭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침부터 시작된 폭염에 잔디가 다 말라 죽지나 않을까 하는 걱정을 하며, 무릎 위에서 잠든 한에게 천천히 부채질을 해 주던 신우는 가까워지는 차 소리에 시선을 돌렸다.

윤이가 벌써 돌아왔나, 하며 고개를 빠끔히 빼 그쪽을 보는데 곧 소리가 멎었다.

소음이 그치자 다시 찾아온 고요에 차고 쪽을 보고 있는데 윤이 아닌, 정현이 커다란 수박을 안은 채 터벅터벅 이쪽을 향해 걸어온다.

반가운 그 얼굴에 신우는 환하게 웃으며 그를 맞이했다.

“왔어?”

한이 깰까, 작은 목소리로 그를 반기자 이쪽으로 다가온 정현이 대청마루 위에 수박을 내려놓고는 잠든 한을 보곤 혀를 찬다.

“이 자식은 이 더위에 잘도 자네?”

“요즘 일이 많아서 피곤했나 봐.”

“주말마다 꼬박꼬박 쉬는 새끼가 뭐가 그렇게 피곤해? 주말 출근한 나도 있는데.”

“오늘 출근했어?”

“팀장 새끼 때문에.”

시간 외 근무도 아니고, 아닌 척 사람 불러서 무임금 노동까지 시킨다며 팀장을 욕하던 정현이 구두를 벗고 마루 위로 올라와 털썩하니 주저앉는다.

“아, 덥다. 왜 이렇게 더워.”

“여름이니까. 그런데 웬일이야?”

“일 끝내고 집에 가는데 혼자 밥 먹기 싫어서.”

“연락하고 오지. 우리 나가려고 했는데.”

“이 더위에 잘도 나가겠다. 너 냉방병 걸려서 당분간은 선풍기도 안 켠다는 녀석이 이 뙤약볕에 너랑 외출을 하겠냐?”

미처 예상치 못했던 한의 속내에 신우가 놀라 한을 내려다보자 정현이 신우가 들고 있던 부채를 휙 하니 뺏어 든다.

“이 새끼가 부채질까지 시키냐, 이젠?”

“더워 보여서.”

“더워 뒈지라고 해. 아, 그래도 너희 집은 시원하다. 한옥은 이런 게 좋아. 겨울엔 따뜻하고 여름엔 진짜 시원해.”

집 전체가 황토와 원목으로만 지어진 덕에 한여름에도 콘크리트로 지은 건물보다는 천 배 정도 시원하다며 연신 부럽다고 하던 정현이 한을 힐끔이더니 인상을 쓴다.

“아, 정한. 이거 어떻게 죽여 버리지?”

“왜? 또 무슨 일 있었어?”

“동문회 때 일 때문에 지금 사방이 난리거든? 내가 이 새끼 때문에 쪽팔려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어요.”

얼마 전 동창회에 참석했다 사고를 친 한과 신우 탓에 과거 학교 안에서 돌던 치정극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왔다며 정현이 악에 받친 듯 빠르게 부채를 펄럭거린다. 단단히 화가 난 그 모습에 신우가 민망한 듯 웃는다.

“미안.”

“네가 미안할 게 아니라 저 새끼가 미안해해야지! 아니, 내가 다른 사람이면 말을 안 해! 그런데 왜 내가 정한 따위를 좋아했다는 오해를 받아야 하냐고? 이건 내 인생 최고의 굴욕이자 수치야.”

확실히 잘못은 둘이 했는데 정현이 제일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긴 했다. 그게 미안해 신우가 연신 사과하던 사이 빠르게 부채질을 하던 정현이 다시 한번 잠든 한을 내려다보곤 뭔가 떠오른 듯 ‘음.’이라며 말을 끈다. 그러고는 이내 펄럭거리던 부채를 탁하니 접고선 대청마루에 다리를 쭈욱 뻗고 앉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나도 얼마 전에 기억났는데 너희 둘이 갑자기 멀어진 데에 나도 일조한 것 같긴 해.”

“응?”

“전에 한이랑 얘기한 적 있는데…… 내가 왜 너한테 못되게 굴었냐고 하니까 너랑 나랑 하도 붙어 다녀서 화나서 그랬다잖아. 그때는 그건 또 무슨 중2 감성이냐고 비웃었는데 그때 내가 일부러 그랬던 것 같아. 한이가 하도 얄밉게 굴어서 엿 먹으라고 일부러 너랑 딱 붙어 있고 독서실도 같이 가자고 하고, 점심시간마다 한이보다 먼저 너희 반에 찾아가고 그랬거든.”

이젠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오래전 이야기에 신우는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랬어?”

“아, 오해하지 마. 너도 좋아하니까 그런 거였어. 한이 엿 먹이려는 생각으로만 너랑 같이 다녔던 건 아냐.”

혹시나 자신이 오해할까 정현이 변명을 더하는 모습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단지 그런 이유였다면 지금까지 인연이 이어지지도 않았을 거다. 분명 그때 정현이 보인 감정은 호감이었다. 그게 너무나 생생히 보였기에 오해할 이유가 없었다.

“그때 내가 보기엔 확실히 이 새끼가 널 좋아했거든. 그래서 좀 놀려 주려고 그런 건데, 그렇게 자극을 주니 토라져 버리더라고. 워낙에 단순한 놈이라 화나면 더 불타오를 줄 알았는데, 의외긴 했어. 단순한 놈이 네 문제에는 좀 복잡해지나 봐.”

“애 같잖아.”

“그렇긴 하지. 이 자식은 너무 곱게 자랐어. 확실히 이 녀석에게는 시련이 필요해.”

“진짜, 너무 쉽게 사는 것 같긴 하지?”

빙긋 웃으며 신우가 그건 동의한다고 고개를 끄덕인 순간, 곤히 누워 자던 한이 인상을 쓰며 몸을 뒤척거렸다. 말소리에 깨는 건가 싶어 아래를 내려다보자 조용히 자던 녀석이 천천히 눈을 뜬다. 그리고 곧 시선이 마주치자 아이처럼 해맑게 웃는다.

본인이 한 말 그대로 산들산들한 그 눈웃음에 신우 역시 웃으며 그를 마주 보자 한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다. 신우의 얼굴을 만지려는 듯한 그 손길에 정현이 재빨리 부채로 한의 손을 내리쳤다.

따악 하는 그 야멸찬 소음과 손등을 타고 흐르는 통증에 잠에서 깨자마자 테러를 당한 한이 벌떡 일어나 앉는다. 그걸 본 정현이 다시 부채를 펴 들고는 독살 맞게 내뱉는다.

“어디서 염장질이야?”

그제야 정현의 존재를 알아챈 한이 ‘그럼 그렇지’ 하는 얼굴로 인상을 찌푸린다.

“뭐야? 너, 왜 남의 집에 함부로 와?”

“대문을 열어 줬으니 들어왔지. 그런데, 윤이는 어디 갔냐?”

“출근 전에 여기저기 인사한다고 나갔어.”

“다들 출근 준비에, 주말 출근까지 불사해 가며 미친 듯이 일하는데 넌 팔자 좋다?”

“난 실리적이고 효율적인 사람이야. 안 풀리는데 괜히 나가서 시간만 버리지 않는다고. 뭐든 될 때 몰아서 하는 게 최고야.”

“그냥 남을 잘 부려 먹는 거겠지. 너 말고 다른 사람들도 다 주말에 쉬냐?”

“요즘도 주말 출근하는 회사가 있냐?”

요즘이 어떤 세상인데, 라는 한의 말에 정현은 바로 그 회사가 바로 내 회사예요, 라고 말하는 대신 더욱 빠르게 부채를 부쳤다.

짜증이 났다는 의미였다.

“역시, 너희 사귄다고 했을 때 더 반대했어야 돼.”

“네가 우리 보호자냐? 무슨 반대를 하고 말고를 해? 네가 나 키웠어?”

“난 너희 사이의 가교였어. 자꾸 이딴 식으로 나오면 신우한테 네 과거사 다 까발리는 수가 있어.”

“이미 다 깐 거 알아.”

“다는 아냐.”

바빠서 미처 다 말 못 한 데이터들이 있다는 정현의 협박에 한이 눈을 가늘게 뜨고 노려보자, 정현이 부채를 펄럭이며 이죽거리듯 말을 이어 간다.

“네가 여름에 사귄 여자가 몇 명이었지? 일곱 명이었나, 여덟 명이었나?”

아니지, 남자도 있었으니 열 명쯤이었나, 라며 정현이 노래하듯 음률에 맞춰 중얼거리자 한이 버럭 소리를 내지른다.

“야!”

“수박 잘라 와. 방금 냉장고에서 꺼내 온 거니까 시원할 거야.”

“잘라 온다, 와!”

“수정과도 갖고 와. 날씨 진짜 덥다. 앞으로 얼마나 더우려고 이래?”

며칠 전까지는 미친 듯이 비만 내리더니 비가 그치자마자 햇볕이 미쳤다며 정현이 말을 돌리는 모습에 한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옆에 놓인 수박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선다.

“수정과에 얼음도 하나 띄워라.”

점점 늘어 가는 주문에 한은 불만스러운 듯 정현을 째려봤다가, 신우와 눈이 마주치자 재빨리 수박을 들고 주방 쪽으로 향했다. 이내 둘만 남은 대청마루 위에서 신우가 방금 한 말이 무슨 뜻이냐는 듯 정현을 바라보자 정현이 어깨를 으쓱한다.

“너, 이미 다 아는 얘기들이야. 내가 다 말했잖아.”

“아, 그거?”

“응. 쟤 의외로 멍청해. 내 성격에 그걸 다 말 안 했을 줄 알았나?”

“별로 상관없는데…… 괜히 신경 쓰네.”

“뭐, 나름대로의 배려라고 생각해. 저 자식, 자기 과거든 뭐든 당당한 놈인데 네가 자기 안 믿어 줄까 꽤 걱정하니까. 사실, 저놈을 누가 믿어? 20년 넘게 알고 지낸 나도 저놈 변덕은 못 믿는데.”

“그렇긴 하지.”

그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라 신우 역시 동의한다는 듯 웃으며 다시 정원을 내다봤다. 시간이 갈수록 햇살은 더욱 강해졌고 그와 함께 공기도 뜨거워졌지만, 신기하게도 그 무더위 속에서도 산들거리는 바람이 일고 있었다.

산들산들, 하늘하늘, 꽃잎을 춤추게 하는 여린 바람이었다. 포근하고 상냥한 그 바람에 문득 한이 자기 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때는 인연이 아니었던 것 같아.”

맥락 없이 나온 이야기에 정현이 신우를 돌아본다.

“응?”

“아까 한이도 그 얘기를 했는데…… 고등학교 때는 둘 다 너무 어렸고, 그때의 한이라면 더 못 미더웠을 테니…… 아마 안 좋게 끝났을 것 같아. 그때 깊어졌더라면 그 녀석 변덕을 내가 감당하지 못해서 많이 다쳤을 거야. 말없이 사라져 놓고 이탈리아 가 있더라, 하는 소식 듣거나, 이탈리아에서 돌아와서도 전화 한 통 없이 회사 차린 뒤에야 알았다면 많이 충격받았을 테고.”

“아, 그건 진짜 심하긴 했지. 쟤는 너무 즉흥적이야. 그러고 보니 저 녀석 집에 전화는 했냐?”

“응. 어머니한테 한 시간 동안 혼나던데?”

“아줌마 아저씨도 무슨 죄인가 몰라. 세상에 그런 분들 또 없거든. 과보호도 아니고 자식들 편애도 없이, 공평하게 애들 잘 키우셨어. 집이 이렇게 잘 사는데 학교에서 티도 안 내고. 세상에 한이 부모님 같은 분들 없어. 그런 분들이 저런 아들 둬서 무슨 고생이야? 저건 아들이 아니라, 웬수야. 아무리 잘났어도 저런 아들 낳을까 봐 무섭다.”

“그러신 것 같더라. 윤이도 착하고.”

“훈이가 더 착해. 윤이는 시끄럽고 까다롭고 예민한데 훈이는 진짜 담담한 게 곰이야. 귀여워.”

“훈이도 한이 닮았어?”

“형제니까 닮았지. 그런데 덩치가 무지 커. 문제는 그 덩치에 운동은 더럽게 못 한다는 거지. 몸치야. 그냥 굴러다니는 곰이라고 생각하면 돼.”

“보고 싶다.”

“곧 보게 될걸. 슬슬 돌아올 때 됐다고 하더라. 이번에 학사만 따고 한국에 들어온대. 군대도 이미 다녀왔으니 아예 대학원까지 마치고 오면 좋은데 혼자 살기 싫다니, 뭐…….”

“그러고 보니, 기계 공학과라고 했나?”

“응. 그런데 유학 가서는 자동차 공학 쪽으로 팠나 봐. 아무래도 한국 와서 다시 대학원 진학하거나 취직할 모양인데…… 일단 귀국하는 건 맞아.”

“다들 돌아오네.”

“응.”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아?”

어느새 자른 수박과 수정과를 올린 다과상을 들고 온 한이 상을 내려놓으며 끼어들자 정현이 상이 놓인 쪽으로 돌아앉으며 태연하게 답해 준다.

“너 욕했어. 가족한테 연락도 없이 유학 갔다 돌아온 개새끼라고. 너희 아버지랑 어머니 혈압 때문에 안 실려 가셨냐?”

정현의 반쯤은 진심을 담은 농담에 얼음을 띄운 수정과를 한 모금 마시던 한이 걱정 말라는 듯 답한다.

“아니, 별로. 그냥 그러려니 하시던데?”

“너희 아버지 어머니는 몸에 사리가 한 백 개는 박혀 있을 거야.”

“이젠 포기하실 때도 됐지. 나, 하나에 파고들면 눈에 보이는 게 없다는 거 아시니까.”

“봐. 넌 좀 봐야 돼. 한 군데 파고들어도 옆도 보고 뒤도 좀 봐.”

“그건, 타고난 기질이라 어쩔 수 없어.”

그러니 다른 사람들이 포기하는 쪽이 현명한 거라고 한이 어깨를 으쓱하자 정현이 한의 어깨를 부채로 내리친다. 탁 하는 요란한 소리에 한이 곧장 정현을 노려봤지만 정현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채 수박을 손에 들었다.

그러자 한도 수박을 들어 신우의 손에 쥐여 주었다.

그 모습에 정현이 대번에 짜증을 토해 냈다.

“와…… 진짜 꼴 보기 싫어.”

“그럼 우리 집에 오지를 마.”

“싫어. 올 거야.”

“그럼 더 꼴 보기 싫은 걸 보여 줄까?”

“염병…….”

티격태격 싸우는 강아지들 같은 두 사람의 대화에 신우는 웃으며 수박을 한 입 베었다. 그러곤 무심히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마침 잔디밭 위에 아지랑이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아지랑이 아래로는 푸르른 잎들이 피어난 채였다.

피지 못한 채 죽은 줄 알았던 그 꽃 역시, 아지랑이 사이에서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다.

- Summer Garden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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