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5/23)

1

“이건 뭔가 문제가 있는 거야. 어떻게 봐도 부조리해. 근원적인 시스템에 문제가 있는 거라고.”

어느 봄날의 오후, 학교 근처 패스트푸드점에 앉은 정현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미친 사람처럼 내내 궁시렁거렸다.

“이건 확실히 잘못됐어. 이 세상이 아주 잘못되어 가고 있는 거야. 어떻게 저 자식이 나보다 성적이 좋을 수가 있는 건데?”

분통이 터진다는 듯 목소리를 높이는 정현을, 신우가 걱정스레 바라보던 중 갑자기 옆으로 커다란 그림자가 졌다. 그러곤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타고난 지능의 차이지.”

그 말에 고개를 돌린 신우는 햄버거 다섯 개와 음료수 세 잔, 그리고 프렌치프라이 세 개와 치킨 여섯 조각 팩을 사 들고 옆자리에 와 앉는 한을 보곤 그러지 말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한은 그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일반적으로 공부가 유일하게 노력이 재능을 이길 수 있는 분야라고 하긴 하지만 그래도 타고난 머리는 어쩔 수 없으니까.”

결국 자신이 더 머리가 좋아서라는 한의 주장에 정현이 진지한 얼굴로 응답했다.

“닥쳐.”

“난 검증된 이론을 말한 거야.”

“너, 오늘부터 밤길 조심해라. 내가 언젠가 너 죽일 거야. 내가 야구 빠따 들고 뒤에서 대갈통 후려치는 수가 있어.”

“그건 비추할게. 너, 내 주먹 한 방이면 즉사할 수도 있어. 나 반사 신경 죽이는 거 알지?”

태권도, 검도, 합기도에 특공 무술까지 두루두루 섭렵한 뒤 야구에 아이스하키에 농구까지 마스터한 한의 운동 실력은 두말하면 입 아픈 것이긴 했지만, 사실 그보다 더 무서운 건 한의 타고난 반응 속도였다.

예전에, 한의 할아버지의 돈을 쓰던 사업가가 원한을 품고 새벽에 조깅 중이었던 한을 납치하려 한 적이 있는데 뒤에서 갑자기 달려드는 기척에 한이 반사적으로 멈춰 돌려 차기를 하는 바람에 상대의 턱뼈가 부서졌다고 했다. 그걸 보곤 놀라 괜찮냐고 묻는 한에게 또 다른 사람이 달려들었다가 그대로 걷어차여 이번엔 갈비뼈가 나가 뒹굴었고, 그 뒤로 달려든 남자 역시 한의 주먹을 맞고 그대로 뇌진탕을 일으켜 기절했다고 했다.

그야말로 놀라운 반사 신경과 운동 능력이었다. 거기다 동체 시력과 순발력까지 좋으니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정현이 밤에 기습하더라도 그 비슷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을까 하며 신우가 햄버거와 음료를 빤히 보자 도끼눈을 뜬 정현이 받아친다.

“재수 없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너 같은 놈하고 친구를 하고 있는 거야?”

“열등감은 정신을 좀먹는 아귀 같은 거야. 내가 잘난 건 내가 잘난 것뿐이지, 내가 잘나서 네가 못나지는 게 아냐. 넌 그냥 타고나길 못났을 뿐이야.”

잘 나가던 중 나온 악담에 신우가 그만하라는 듯 한을 바라봤지만 역시나 이번에도 한은 ‘내가 뭐 잘못 말했어?’라는 얼굴을 할 뿐이었다.

눈치가 없는 게 아니라 눈치가 없는 척하는 게 분명한 그 얼굴에 신우가 조용히 햄버거 포장을 벗기는 사이 커다란 컵의 음료수를 단숨에 마신 정현이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치킨 팩을 거칠게 뜯는다.

“어떻게 저런 게 전교 3등을 할 수 있지? 작년까지 운동만 하던 새끼가 어떻게 그게 돼? 이게 현실적인 거냐고?”

열린 팩 안에서 치킨 한 조각을 꺼내 문 정현이 ‘넌 이해가 가냐?’라고 묻는 말에 신우가 어색하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긍정도 부정도 아닌 애매한 그 표현에 정현이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자 한이 대신 정현의 말에 답한다.

“지극히 현실적인 결론이지. 나의 명석한 두뇌와 내 과외 전쟁에 참전한 최고 수준의 강사들 덕이니까.”

“그보다는 돈의 힘이지.”

“부정은 안 해. 단기간에 그 정도의 성적을 올리려면 돈으로 처바른 단기 집중형 과외가 최고니까.”

운동한다고 아예 공부에서 손을 놓았던 건 아니지만 중상위권에 있던 등수를 단기간에 최상위권으로 끌어올릴 수 있었던 건, 한의 과외에 투입된 고급 인력 덕이었다. 그리고 인력들을 끌어모은 건 할아버지의 자본이었다.

한은 그 사실을 쿨하게 인정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학생들의 성적은 곧 투자에 비례하는 게 정설이다.

“진짜 짜증 나.”

치킨 한 조각을 해치운 정현이 햄버거에 손을 뻗자 그새 햄버거 하나를 다 먹어 치운 한이 새 햄버거의 포장을 풀며 느긋하게 답한다.

“원래 인생은 공평하지 않아. DNA부터 다르잖아.”

그 말에 막 햄버거의 포장을 벗겨 내고 한 입 먹으려던 정현이 못마땅한 눈빛으로 한을 노려본다.

“너 햄버거로 싸대기 한번 맞아 볼래?”

“거절할게. 그보다, 이거 먹고 어쩔래? 곧장 집에 갈 거야?”

“그럼 집에 가지, 어딜 가. 이 시간에?”

이미 오후 8시가 다 됐다고 정현이 투덜거리자 한이 그 답이 마음에 든 듯 고개를 끄덕인다.

“잘됐네. 넌 먼저 가. 신우야, 우린 공원에 좀 들렀다 가자.”

“공원은 왜?”

“몸이 무거워서 좀 뛰게. 계속 앉아 있기만 했더니 몸이 굳은 것 같아.”

공원에 가서 조깅이라도 하려고 하나 싶어 신우가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리자 햄버거를 먹던 정현이 그를 비웃는다.

“달밤에 뒤통수 조심해라. 뭐 날아갈 수 있으니까.”

“맞추면 상 줄게. 너, 야구 했을 때 대단했지? 하도 공을 못 다뤄서 리틀 야구단도 그만뒀잖아. 넌 운동 쪽에는 절대 소질 없다고 감독이 굳이 계속 팀 생활할 거라면 차라리 매니저를 하라고 하지 않았냐?”

처음 듣는 이야기에 신우는 앞에 앉은 정현을 바라봤다. 체구는 작지만 운동 신경은 꽤 좋아 보였는데, 전혀 아니었던 모양이다.

의외라는 듯 신우가 정현을 바라보자, 그 시선을 의식한 정현이 한을 노려보며 중얼거린다.

“난 네가 진짜 싫어, 정한.”

“고마워. 빨리 먹고 나가자.”

네가 날 싫어하든 좋아하든 알 바 아니라며 순식간에 두 번째의 햄버거를 해치운 한이 세 번째 햄버거 포장을 뜯는 모습에 신우가 놀라 묻는다.

“배 안 불러?”

사이즈 업 한 햄버거라 아무리 많이 먹는 사람이라도 보통 두 개면 족할 텐데, 한은 그 햄버거를 세 개째 해치우는 중이었다. 그것도 마치 처음 먹는 사람처럼.

저게 다 어디로 들어가는 걸까, 하는 의문을 신우가 그대로 내뱉자 한이 머쓱해하며 답한다.

“덩치가 있잖아. 그리고 몸뿐 아니라 머리 쓰는 것도 칼로리 소비가 심하더라고. 이렇게 공부하다간 삐쩍 말라 죽을 거야. 고시 공부하는 사람들이 다들 왜 그렇게 다들 말랐나 했더니 공부하느라 말랐나 봐.”

한의 말은 꽤 그럴듯했지만 신우는 아마 그 이유는 다른 데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보다는…… 스트레스 때문일 것 같은데?”

“그런가? 왜 스트레스를 받지? 좋아서 공부하는 걸 텐데. 아니, 좋아하지는 않더라도 원하는 걸 위해서 하는 거라면 재미있을 거 아냐?”

이해가 안 된다는 한의 말에 겨우 화를 가라앉혔던 정현이 다시 눈에 쌍심지를 켰다. 하지만 신우는 한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은 그냥 단순한 거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 해야 하는 일이면 그냥 한다. 해야 하는 일에 그는 하기 싫고 좋고를 따지지 않는다.

그게 한의 최고 장점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넌 속 안 좋아? 통 못 먹네.”

본인이 세 개를 먹는 사이 아직 햄버거 하나를 반도 먹지 못한 신우를 보며 한이 걱정하자 신우가 난감한 얼굴을 한다.

“먹고 있어.”

보통 이 정도로 먹는 게 정상이지만 한과 같이 있다 보니 자신이 깨작거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서둘러 햄버거를 입에 물었다. 그사이 순식간에 세 번째 햄버거를 먹어 치운 한이 음료수를 시원하게 들이키더니 곧 자리에서 일어서며 신우에게 묻는다.

“음료수 더 마실래?”

“됐어.”

신우의 답만 듣고 돌아서는 한의 행태에 조금 전 분통을 터트리느라 음료수를 단번에 마셔 버렸던 정현이 한을 부른다.

“야! 나한테는 물어보지도 않냐?”

“네가 갖다 먹어.”

“싫어. 내 것도 가져와.”

티격태격하는 두 사람의 모습에 음료수를 마시던 신우는 빙그레 웃고 말았다. 어린 시절 늘 집에만 머물렀던 탓에 이 정도로 가까운 죽마고우를 사귀지 못해서인지, 서로를 훤히 들여다보며 소소한 문제로 싸우다가도 금세 웃으며 붙어 다니는 두 사람을 보는 게 즐거웠다.

아무리 싸우고 욕을 해도, 두 사람은 친구였다. 10년, 20년이 지난 뒤에도 언제든 만나 ‘야~ 아직 안 죽었구나?’하고 웃으며 인사할 수 있는 친구였다.

그 관계가 많이 부러웠다. 한이 가진 것 중 가장 부러운 게 그의 단순함이었고 두 번째가 정현이었다.

한이 음료수를 리필하러 간 사이 생각에 잠긴 신우의 표정에 앞에 앉은 정현이 은근히 말을 건다.

“왜 그래?”

“응?”

“갑자기 조용해져서.”

“……그냥…… 생각 좀 하느라…….”

“어디 아픈 거 아냐?”

“아냐. 나 건강해.”

“한이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다든가, 한이 때문에 열 받는다든가, 한이 때문에 화병이 난다든가, 한이 때문에 분노가 솟구친다든가 해서 아픈 게 아니고?”

한이로 시작해서 한이로 끝나는 그 말에 신우가 빙긋 웃자 정현이 테이블 위로 몸을 숙이며 신우의 눈을 들여다본다.

“진짜 어디 안 좋은 거 아니지?”

“응.”

“그럼 다행이고.”

그렇게 말을 마친 정현은 한동안 빤히 신우를 바라보다 슬쩍 카운터 쪽을 돌아봤다. 그러곤 줄을 선 채 기분 나쁜 얼굴로 이쪽을 바라보던 한을 향해 씨익 웃어 보였다. 굉장히 사악하고 불손한 웃음이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지 몰라 신우가 고개를 갸웃하자 정현이 손을 뻗어 신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는다. 그 손길에 신우가 묻는다.

“뭐 묻었어?”

“어, 꽃잎 같은 거.”

“꽃잎? 아직 꽃 안 피었는데…….”

개나리는 피긴 했지만 개나리가 머리에 붙는 일은 거의 없다. 그래서 이 초봄에 웬 꽃잎이냐고, 신우가 의아해하자 정현이 눈을 반달처럼 접으며 웃는다.

“너, 그거 알아?”

“뭘?”

“한이가 왜 너 머리 쓰다듬는 거 좋아하는지.”

“……글쎄?”

“정한이 말야…….”

라고 정현이 운을 띄운 순간 쾅 소리와 함께 테이블이 진동했다. 그 소리에 놀라 신우와 정현이 동시에 옆을 돌아보자 테이블에 음료수를 내려놓은 한이 어깨를 으쓱한다.

“테이블에 발이 걸렸어. 빨리 먹고 가자.”

방금과 달리 상당히 기분이 나빠 보이는 한의 얼굴에 신우가 그사이 무슨 일이 있었나 하며 눈치를 살피자 들고 온 컵의 뚜껑을 열고는 단번에 음료수를 들이켠 한이 삐딱한 자세로 앉아 가게 내부를 돌아본다. 처음 보는 한의 퉁명스러운 태도에 신우는 놀라 눈을 껌뻑거렸다.

그런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정현은 한과 정반대로 갑자기 기분이 좋아진 듯 방긋방긋 웃기 시작했다. 이 상황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그 태도에 신우가 어리둥절한 듯 두 사람을 번갈아 보자 정현 역시 시선을 피한 채 창밖을 내다본다.

알 수 없는 분위기 속에서 신우는 멀뚱대며 먹던 햄버거를 계속해서 오물거렸다.

그때의 신우로서는 그 묘한 분위기의 정체가 뭔지 알 길이 없었다. 그저, 두 사람 사이에 자신이 모를 일이 있었나, 하고 생각할 뿐이었다.

“그 자식 없으니 조용하네.”

가게를 나와 둘이 자주 가는 공원으로 향하며, 한이 툭 내뱉자 신우가 조심스레 한의 눈치를 살피며 묻는다.

“아까, 기분 나쁜 일 있었어?”

“응?”

“기분 안 좋아 보여서.”

조금 겁을 먹은 듯한 신우의 표정에 잠시 신우를 내려다보던 한은 천천히 공원 안을 가로지르며 머리카락을 긁적거렸다.

“아니. 딱히 안 좋지는 않은데…….”

“않은데?”

“……그냥 순간순간 울컥해서. 그런 거 있잖아, 갑자기, 이유도 없이 뭔가 확 치밀어 오르는 느낌 같은 거.”

“수험 스트레스인가?”

“그런가? 난 스트레스 받을 타입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말에는 신우 역시 동의했다. 정현의 말에 따르면, 한은 남한테 스트레스를 주면 줬지 본인은 절대 스트레스를 받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자신이 보기에도 한은 스트레스 받고 살 성격이 아니었다. 좋으면 하고 싫으면 죽어도 안 하는 녀석이라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다.

하지만…….

“최근에 너무 공부만 한 거 아냐? 넌 원래 몸을 많이 움직이는 편인데 갑자기 앉아만 있으니 몸이 스트레스 받은 거 아닐까?”

“농구 할 때처럼은 아니라도 하루에 한 시간 이상은 운동하고 있고, 몸은 충분히 움직이는데 뭐가 문제지? 갑자기 가슴이 찌릿찌릿하고 화가 치밀어 오르는 기분이란 말야.”

한이 자신의 가슴팍을 손으로 누르며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중얼거리자 신우가 걱정스러운 듯 한을 바라본다.

“병원 가 봐.”

“그 정도는 아냐.”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 봐. 심장병이면 위험하니까.”

그 말을 하는 신우의 얼굴이 너무 단호하고 절실해, 한은 그 박력에 밀려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나, 몸은 진짜 건강한데?”

“너처럼 건강한 사람이 더 위험할 수도 있어.”

뭔가 안 좋은 기억이 있는지 거의 매달리는 듯한 신우의 제안에 한은 일단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알았어. 그러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한의 긍정적인 답에 신우가 그제야 겨우 안도한 듯 미소 짓는다. 그 처연한 얼굴에 어쩐지 마음이 아려 와, 한은 손을 뻗어 신우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주었다.

머리카락을 매만지는 손의 온기에 신우는 엷은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아직 3월 말이라 싸늘한 바람이 불어와 몸을 움츠리게 되지만 이럴 때도 한의 손은 따뜻했다. 한겨울에도, 그는 늘 따뜻하기만 했다.

그래서 그가 좋았다. 그의 따뜻함이 좋았다.

그게 비록 잠깐의 변덕이라 해도 좋을 정도로, 그 순간의 정한은 자신에게 너무 좋은 사람이었다.

“이 나라의 건축법에는 확실히 문제가 있어.”

이제 막 4월로 들어선 금요일 오후, 얼마 전 정현이 했던 말을 그대로 단어만 바꿔 반복하는 한을 보며 신우는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그리고 바로 그 말을 했던 정현은 그때의 한처럼 얄밉게 받아쳤다.

“이 나라의 건축법이 아니라, 너한테 문제가 있다는 생각은 안 드냐?”

“아냐. 이건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획일적이고 꽉 막힌 법규의 문제야. 몰지각하고 세련되지 못했어. 국가가 소수자들을 배려할 생각이 전혀 없다는 의미야.”

“네가 그런 말 하니까 되게 웃기는데?”

“내 이마를 봐.”

또다시 싸우는 한과 정현의 대화를 듣고 있던 신우는 한의 말에 빨갛게 부어오른 한의 이마를 보곤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을 꾹 악물었다.

한과 함께 다니면서 표준 사이즈 이상의 사람들이 겪는 애환을 여러 번 보긴 했지만 이렇게 대놓고 가게 입구에 이마를 찧는 걸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얼마나 제대로 박았는지 한의 이마가 심하게 부어오른 탓에 대놓고 웃기도 미안했다.

“법적으로 문은 무조건 2미터가 넘게 만들게 해야 한다고. 버스의 높이도 높이고 택시도 소형은 안 돼. 건물의 층고도 이젠 2미터 50센티미터 이상으로 지정해야 돼. 이건 키 큰 소수자를 탄압하는 거야.”

슬슬 날이 따뜻해진 오후, 학교를 마치고 나와 근처의 분식점으로 들어서다 벌어진 해프닝에 신우는 천장이 낮은 분식점 안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앉은 한을 바라봤다. 키도 키지만 덩치 자체가 너무 커서 성인이 초등학생 의자에 앉은 것 같은 위화감이 드는 광경이었다.

“너무 커도 사는 게 힘들구나…….”

“내 말이 그 말이야. 옷도 사이즈가 나오는 브랜드가 정해져 있다고. 학교 운동복 같은 건, 아예 따로 맞춰야 한다니까. 교복도 그렇고.”

“힘들겠네…….”

최근 옷 기장이나 사이즈가 많이 커지긴 했지만 그것도 185센티미터까지 수용 가능하지, 190센티미터를 넘으면 대중적인 브랜드로는 옷을 사기 힘들다.

몇몇 해외 브랜드에서나 간신히 기장과 어깨에 맞는 사이즈를 구할 수 있는 정도라 한이 입는 브랜드는 몇 군데로 정해져 있었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소수의 장신들을 위해 난 건축과에 가기로 했어.”

막 나온 튀김을 젓가락으로 들어 올리며 한이 내던진 폭탄 발언에 신우와 정현은 동시에 눈을 껌뻑였다.

“건축과?”

“건축과에 가서 내가 건축법을 개정할 거야. 모든 문은 2미터 이상으로 설계하도록. 그리고 아파트랑 다른 건물들도 마찬가지야. 층고는 최소한 2미터 50은 돼야 해.”

그 정도는 돼야 본인에게 여유롭고 편안한 공간이 된다는 한의 주장에 튀김을 포크로 푹 찍어 올린 정현이 비아냥거린다.

“미친 새끼. 건축과 가서 건축법 개정하면 다음은 의상학과 가서 기본 기장을 바꾸시려고?”

네 변덕에 잘도 건축을 하겠다, 라며 정현이 비웃자 네가 아직 뭘 모른다는 듯 한이 고개를 내젓는다.

“아니지. 그 뒤로는 국회에 가야지.”

법은 국회에서 제정하니까, 라는 한의 진지한 언사에 정현이 질렸다는 듯 중얼거린다.

“지랄도 골고루 한다.”

신랄한 정현의 말과 표정에도 한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어디서 개가 짖나 하는 얼굴로 정현을 무시한 채 신우를 돌아보며 제 이마를 가리킬 뿐이다.

“아직도 많이 부었어?”

“아직 좀 빨개. 그런데…… 진짜 혹이 이렇게 나네…….”

멍도 멍이지만 마치 만화에서처럼 불룩하니 솟은 혹에 신우는 겨우 웃음을 삼켰다. 그리고 손을 뻗어 한의 이마를 만져 주자 한이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네 손 차가워서 기분 좋아.”

분식점 안에서 갑자기 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두 사람의 모습에 막 보글보글 끓기 시작한 떡볶이를 뒤적거리고 있던 정현이 인상을 팍 찌푸린다.

“야, 여기 우리 학교 학생들 많은 데거든?”

그러니 그만하라는 정현의 말에 한이 뭘 그리 당연한 소리를 하냐는 얼굴로 정현을 바라본다.

“방과 후에 학교 앞이니 학생이야 당연히 많겠지. 그게 뭐?”

“그러니까 애정 행각 그만하라고. 너희 둘이 사귀냐?”

재수 없다는 듯 툭 뱉은 정현의 말에 한이 어이없다는 듯 받아친다.

“남자랑 남자가 어떻게 사귀어?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연애는 남녀가 하는 거야.”

“남자랑 남자도 연애를 하지만…… 하여간 아니라면 좀 떨어져. 너희 가끔 연애하는 것 같아 꼴 보기 싫어.”

“어딜 봐서 이게 연애야?”

“누가 봐도…….”

연애라고 하려던 정현은 순간 말을 멈춘 채 신우를 돌아봤다. 그러곤 사악해 보이는 미소를 띤 채 신우에게 말을 건넨다.

“아, 맞다. 저번에 얘기했던 그 영화 개봉했더라?”

“……응?”

“저번에 네가 보고 싶다고 한 거, 저번 주에 개봉했던데 오늘 보러 갈래?”

“아, 지금쯤 한댔지? 보고 싶기는 한데 교복 입고 가도 되나?”

“15세 이상이니까 상관없을걸. 밥 먹고 보러 가자. 늦게 들어가도 되지?”

“응.”

“그럼 가서 상영 시간 보고 시간 있으면 게임 센터 가서 놀다 가자.”

계속되는 두 사람의 대화에 한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묻는다.

“무슨 영화?”

“신우랑 나랑 구정 때 영화 보러 갔는데 그때 광고 보고 신우가 보고 싶다고 한 영화가 이번에 개봉했거든.”

“둘이 영화를 봤다고?”

나 빼고, 라는 한의 물음에 정현이 어깨를 으쓱한다.

“너, 그때 가족들 와서 못 빠져나온다고 했잖아. 그래서 우리 둘이 점심 먹고 영화 보고 피시방 들렀다 저녁까지 먹고 들어갔지. 그날 재밌었는데.”

모처럼 귀염성 있는 얼굴로 방긋방긋 웃으며 신우에게 공감을 구하는 정현의 반응에 신우는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날 재밌었어.”

너무나 순순한 그 답에 튀김을 다 먹은 한이 신우를 한 번 보더니 다시 정현을 돌아보며 볼멘소리를 낸다.

“그럼 나도 갈래.”

“너, 오늘 밤에도 과외 있지 않냐? 두 타임 뛰어야 한다며?”

마치 노리고 있었다는 듯 정현이 재빨리 받아치자 한이 미간을 좁힌다. 비교적 취약한 수학과 암기 과목들을 따라잡기 위해 방과 후에는 두 타임, 주말에는 종일 과외가 잡혀 있었다.

자신의 스케줄을 빤히 알면서 일부러 신우와 약속 잡은 게 분명한 정현의 속내에 한은 불만에 찬 눈빛으로 정현을 노려봤다. 하지만 정현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과외로 바쁘신 분은 빠지고, 과외도 안 하는 우리는 같이 공부하자. 나 다음 주부터 독서실 갈 건데 신우 너도 같이 갈래? 학교 근처에 괜찮은 데 알아 놨어. 시설도 좋고 근처에 먹을 데도 많아서 괜찮더라고. 엄마가 아예 거기다 짐 갖다 놓고 공부하고 자다 새벽에 들어와서 아침 먹고 학교 가래.”

“어, 그래도 되는 거야?”

“응. 원래 2학기부터 그러려고 했는데 안 되겠어. 집에서는 집중이 안 돼.”

그 말에 잠시 고민하던 신우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야 그럼 좋지.”

“그럼 같이 등록하자.”

“그래.”

한을 무시한 채 신우와 정현이 둘만의 대화를 계속하자, 가스레인지의 불을 줄인 한이 신경질적인 투로 툴툴거린다.

“무슨 공부를 독서실에서 살면서 해? 집에서 하면 되지.”

“그 큰 별채를 통째로 혼자 쓰는 놈은 모르지. 막 공부하려는데 뭐 먹어라, 잠깐 나와 봐라, 텔레비전에서 뭐 한다, 소리 들리면 집중력 깨진다고.”

“그럼 우리 집으로 와.”

“싫어. 너희 집 가면 먹기만 해. 너희 집 아줌마 요리 너무 잘하셔.”

“그러니까 와서 먹고 하라고.”

“됐네요. 너나 실컷 드시고 공부하셔.”

한의 제의를 딱 잘라 거절한 정현은 재빨리 계란에 손을 뻗었다.

“계란 내가 찜!”

환하게 웃으며 계란을 접시로 옮기는 정현과 달리 한의 기분은 땅으로 꺼져 들어가는 듯 갑자기 말수가 줄어들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 앞에 놓인 김밥을 뒤적거리는 한의 모습에 신우가 이상하다는 듯 한을 바라봤다.

“왜? 입맛 없어?”

“아니.”

“그럼?”

“뭔가 막 울컥울컥하고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아서. 체했나?”

그렇게 말하며 한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놓고 가슴을 두드리자 신우가 걱정스러운 듯 말을 잇는다.

“그럼 먹지 마. 체할 수도 있어.”

“……소화기 문제는 아닌 것 같은데…….”

아무래도 여기가 이상하다며, 한이 명치가 아닌 명치 위쪽의 가슴을 누르자 앞에 앉아 있던 정현이 물을 마시며 가소롭다는 듯 웃는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 웃음이 거슬린 듯 한이 왜 웃냐며 정현을 바라보자, 정현이 떡볶이를 덜며 밉살스러운 투로 이죽거린다.

“질풍노도의 시기라 그런가 보지. 갑자기 막 욱하고 화나고 이유 없이 감정이 치밀어 오르고, 감정 기복도 심하고 구르는 낙엽만 봐도 눈물이 나는 게 사춘기잖아.”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으며 정현이 피식피식 웃는데도 한은 진지하게 그 말을 받아들였다.

“……그런가?”

“그래. 원래 다 그런 거야. 막 울컥울컥하고 짜증 나고.”

정현은 그걸 믿으면 바보지, 라는 생각에 깐족거리며 말을 이었지만 정말 한은 그걸로 납득했다.

“아, 그런 거였어? 하긴, 난 운동하느라 사춘기도 대충 지나갔으니 그럴 수도 있겠네.”

좀 늦은 사춘기일 수도 있겠다는, 너무나 낙천적이고도 빠른 한의 수긍에 이죽거리던 정현이 도리어 당황해 눈을 껌뻑였다.

“야, 너…….”

설마 그걸 진짜 믿는 거냐고 하려던 정현은 뭐 문제 있냐는 듯 그를 응시하는 한과 신우를 보곤 말을 멈췄다.

말해 봐야 입만 아프다. 저 상태면 이쪽이 구구절절 설명해 줘도 절대 모를 거다.

그냥 스스로 깨닫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아니다. 그냥, 먹자. 아, 떡볶이 맛있네.”

정현은 국어책을 읽는 듯 어색한 말투로 말을 마친 뒤 다시 먹는 데 집중했다.

어차피 언젠가는 알게 될 일이다.

모르면 모르는 대로 어쩔 수 없는 일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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