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푸른 잔디 위로 뜨거운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무서울 정도로 강하게 내리쬐는 그 빛에 문을 열어 둔 채 대청마루에 앉아 부채를 펄럭거리던 한이 못마땅해하는 얼굴로 혀를 찬다.
“왜 이렇게 더운 거야? 어느 정도껏 해야 나가든가 말든가 하지.”
짜증이 잔뜩 밴 한의 말투에 그의 옆에서 다리를 쭉 뻗은 채 앉아 햇살 가득한 정원을 바라보던 신우가 고개를 갸웃한다.
“그럼 나가자. 날 좀 더우면 어때?”
자기는 상관없다는 신우의 답에 한은 그건 안 된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저었다. 기본적으로 아웃도어 체질인 자신이야 이 정도 날씨는 외출하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지만, 신우에게는 가혹한 날씨다. 외출이라고 해 봤자 차를 타고 나가 또 에어컨을 심하게 틀어 둔 쇼핑몰이나 음식점들을 순회하는 거겠지만 그건 그것대로 몸에 좋지 않았다.
그렇지 않아도 며칠간 출근했던 신우가 사무실 내의 지나친 냉방 탓에 냉방병에 걸려 콜록거리는 걸 본 다음이라 이 무더위에도 에어컨의 제습 기능만 가동할 뿐, 냉풍 기능은 쓰지 않고 있었다. 더워서 못 참게 되면 그저 지금처럼 문을 연 채 대청마루에 앉아 연신 부채질만 해 댈 뿐이다.
“더워서 귀찮아. 아, 더우니 졸리다. 나 누울래.”
펄럭거리던 부채를 접고는 옆에 앉은 신우의 무릎을 베고 누운 한은 자연스레 손에 들고 있던 부채를 신우에게 넘겨주었다.
“부채질해 줘. 더워.”
“너, 의외로 더위 많이 탄다?”
“뜨거운 남자라 그래. 난 심장도 몸도 불타오른다고, 늘.”
장난스러운 한의 말에 신우가 웃는다. 하늘거리듯 기분 좋은 미소에 한 역시 기분 좋은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작게 속삭인다.
“산들산들해.”
“응?”
뜬금없는 그 말에 신우가 되묻자 한이 미소를 머금은 채 속삭이듯 말을 이어 간다.
“산들바람이라는 말 예쁘지 않아? 시냇물이 졸졸졸 흐르는 냇가에서 바람이 물결을 따라 불며 하늘하늘 꽃잎을 흔드는 것 같잖아.”
그린 듯 생생한 한의 설명에 신우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답해 주었다.
“진짜, 그런 것 같다.”
“너 같아. 산들산들, 하늘하늘. 기분 좋아.”
녹아들듯 나른한 한의 미소에 신우는 사랑스럽다는 눈길로 한을 내려다보며 부채로 그의 머리카락 위를 부쳐 주었다.
살랑살랑거리는 그 바람에 한이 조용히 눈을 감고 있다 한순간 툭 하니 내뱉는다.
“아, 진짜 억울해.”
“뭐가?”
“너, 고등학교 때 진짜 예뻤는데. 진짜 하늘하늘하고 살랑살랑한 느낌이었는데. 그때 왜 심술부렸을까? 안 그랬으면 13년 동안 쭈욱 함께할 수 있었을 텐데.”
괜히 자존심 내세우며 오기 부리다 13년을 손해 봤다는 한의 투덜거림에 신우는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띠었다. 늘 자신만만하게 후회하는 일 따위 없다고 밝히던 녀석이 아주 간혹 이런 말을 내뱉을 때면 신기한 기분이 들곤 했다. 그리고 조금 귀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게 이제 후회돼?”
“응. 아주 많이 후회돼. 계속 같이 있었으면 내가 예뻐해 주고, 지켜 주고 아껴 줬을 텐데.”
“그러게 왜 심술부렸어?”
“내 말이…….”
한탄하듯 내뱉던 한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진다. 그러곤 이내 미동도 하지 않는다.
기습적인 적막에 신우가 아래를 내려다보자 한은 이미 잠든 채였다. 지나치게 빠른 숙면에 신우는 확인하듯 한에게 물었다.
“한아, 자?”
“…….”
“진짜 자?”
혹시나 해 다시 한번 물었지만 여전히 답이 없다. 그건 진짜 잠들었다는 의미였다.
어떻게 이 무더위 속에서 순식간에 잠들 수 있나 하는 생각에 신기한 듯 가만히 그를 바라보고 있자 한이 곤히 숨을 내쉰다. 평온한 숨결에 그가 깰까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 보니 최근 꽤 바빴다. 어떻게든 주말 출근은 하지 않겠다고 머리에 띠 두르고 투쟁할 기세로 수선을 피워 겨우 주말에는 쉬게 되었지만 대신 주중에는 너무 바빴다. 한집에서 살고 한 사무실에서 일을 하면서도 식사 시간 외에는 얼굴 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사실 오늘 외출을 취소한 게 싫지 않았다. 단둘이 조용한 공간에서 시간을 보내고 싶었다.
더위 때문인지 바빠서인지, 봄보다는 야위어 좀 더 윤곽이 뚜렷해진 한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부채질을 하던 신우는 허리를 숙여 그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