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 The Frame (13/23)

외전 : The Frame

“역시, 마음에 안 들어.”

유난히도 습한 수요일 오후, 대치동의 컨벤션 센터를 찾은 한은 팸플릿을 손에 든 채 연신 ‘마음에 안 들어. 예감이 안 좋아.’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가구 박람회 따위 절대 안 간다고 버틴 게 무색하게 갑자기 꼭 참석하고야 말겠다는 한의 변덕에 비교적 입장객이 적은 주중 오후 시간에 맞춰 나온 것까지는 좋은데, 센터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부터 한은 계속해서 투덜거리며 불편한 듯 안경을 치켜올렸다.

갑자기 웬 안경인가 해 한의 옆에서 팸플릿을 돌아보던 신우가 의아한 듯 물었다.

“너, 눈 나빠?”

“아니, 왼쪽 1.5 오른쪽 1.2.”

“그럼 난시 있어?”

“아니.”

“그런데 웬 안경이야? 아까부터 계속 치켜올리던데. 불편하면 벗지?”

날도 더운데 뭐 하러 좋은 눈에 안경을 쓰고 고생하냐고 신우가 이상하다는 듯 보자 한이 딱 잘라 답한다.

“안 벗어.”

“왜?”

“똑똑해 보이잖아.”

어이없는 그 답에 신우뿐 아니라 옆에서 내내 한의 투정을 듣던 인재가 가지가지 한다는 눈빛으로 한을 노려봤다.

“좀 조용히 가라. 온 김에 명함 좀 돌리고 가구 회사에도 얼굴 좀 팔라고. 나야 아는 사람 많다지만 넌 한국 쪽엔 거의 아는 사람도 없잖아.”

정신 좀 차리라는 인재의 잔소리에도 한은 알 바 아니라는 듯 그 말을 무시했다.

“그건 됐고, 나무 이야기 어디야?”

“C-38.”

“좋아. 거기부터 가자고.”

오늘 반드시 원혁의 얼굴을 확인하고야 말겠다는 한의 비장한 태도에 신우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능하면 두 사람이 마주치는 일은 평생 없었으면 했는데 어쩌다 보니 여기까지 끌려와 버렸다.

다행히 평일이라 부스당 인원을 적게 투입했을 거라, 마주칠 가능성은 극히 낮지만 그래도 혹시라도 마주칠 경우 아주 난감한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었다.

만약 마주한 그들이 서로의 체형이나 분위기가 많이 닮았다는 걸 눈치챈다면 원혁에게는 굉장히 미안해질 거고 한에게는 민망해질 거다. 수치심이라는 것에 총량이 있다면 그 순간 자신이 평생 쓸 수치심이라는 걸 전부 소진할 거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될 수 있는 한 그런 최악의 상황은 피하고 싶어 박람회는 포기하려 했는데 인재가 이미 평일 오후 시간을 비워 스케줄을 다 맞춰 놓은 채라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젠 원혁이 오늘 부스에 없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

만약 그가 나와 있다면, 그건 재앙이다.

“여기 가구 괜찮은데?”

무작정 나무 이야기 부스를 찾아 걷던 한이 한 부스 앞에 멈춰 서자 인재와 신우 역시 동시에 걸음을 멈췄다.

“응. 디자이너가 젊은데 감각이 좋아. 유명 디자이너 작품 카피보다는 독창적인 디자인으로 나와서 유행도 안 타고 개성 있어. 보급형이라 가격대도 괜찮고.”

최근 유튜브 채널에서 화제가 돼 대중적으로도 꽤 인지도가 올라갔다는 인재의 설명에 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괜찮네.”

“여긴 내가 디자이너랑 친분이 있어. 한번 미팅 잡아 볼까?”

“그래. 카페나 레스토랑하고 잘 어울리겠네.”

느낌이 좋다고 고개를 끄덕이던 한은 이내 큰 보폭으로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중의 낮 시간이라 박람회에 온 사람들은 대부분이 관계자거나 관련 학과의 학생들이었다.

확실히 주말보다는 차분한 분위기에 느긋하게 내부를 돌아보며 걷는데 한쪽 부스에서 작게 속삭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저 사람 정한 아냐? 그 건축가.”

“그런 것 같아. 엄청 크다, 진짜.”

마치 들으라는 듯 대놓고 수군거리는 그 소리에 신우는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봤다. 파스텔 톤의 심플한 가구들이 진열된 부스 안에 선 두 명의 여자가 한을 보며 떠들고 있었다.

덩치로나 외모로나 워낙에 눈에 띄는 녀석이라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건 당연하지만 다른 분야의 사람들까지 한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걸 보니, 새삼 한이 유명 인사라는 게 실감 났다.

묘한 기분에 괜히 팸플릿을 뒤적거리며 모른 척 걷는데 이상하게 목덜미가 따가웠다. 시선이 모이는 듯한 느낌에 고개를 들고 주변을 돌아보자 한산한 부스 안쪽에 모인 사람들이 슬금슬금 이쪽의 눈치를 살피는 게 보였다.

몇몇은 신기하다는 시선이었고 몇몇은 잔뜩 들뜬 채 고개를 들어 한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목이 집중되는 것을 인재 역시 느꼈는지 작게 혀를 찬다.

“너랑 다니면 이게 싫어. 어딜 가든 마음 편히 돌아볼 수가 없단 말야.”

“하루 이틀 일도 아닌데, 뭐. 신우, 너도 신경 쓰지 마. 내가 워낙에 커서 그래.”

보통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키 덕에 시선을 잡아끄는 것도 맞지만, 사람들이 한을 보고 수군거리는 건 단지 ‘키’ 때문만은 아니었다.

큰 키만큼이나 좋은 덩치에 농구 선수 출신답게 유난히 긴 팔다리, 거기에다 인상 좋은 미형의 얼굴까지. 완벽에 가까운 외형적 조건에 해외에서도 각광 받는 신예 건축가라는 타이틀까지 붙어 있으니 자연히 사람들의 관심을 받을 수밖에 없다.

“사람들이 너 알아보는 것 같아. 네 이름도 알던데?”

“알아보겠지. 이쪽 업계에서 날 못 알아보면 일할 생각 없다는 거니까.”

이탈리아에서 꽤 유명한 가구 디자이너들과도 작업을 했으니 자신을 못 알아보면 문제 있는 거라는 한의 오만한 답변에 신우가 순수하게 탄성을 터뜨렸다.

“너 진짜 유명하구나…….”

알고는 있었지만 이제야 실감 난다는 듯 신우가 눈을 반짝이며 한을 바라보자 무표정한 얼굴로 걷던 한이 쓰게 웃는다.

“……내가 다른 사람한테는 안 이러는데…… 넌 좀 날 알아줬으면 좋겠다. 내가 아직 한국에서 대단한 유명 인사라고는 말 못 하지만 이 업계에서는 레전드까지는 아니라도 영웅 정도는 되거든?”

그런데 이상하게 너한테는 꼴사납게 일일이 자랑하고 으스대야 한다고 한이 한숨을 내뱉자 신우가 무심히 시선을 내린다.

“그런 것 같네……. 아, 저기 가구 예쁘다.”

앤티크 소품들과 가구들이 가득한 부스 앞에서 멈춰 선 신우는 홀린 듯 그 안으로 들어섰다. 신우의 무심한 행보에 한은 재빨리 신우의 어깨로 팔을 뻗었다.

신우를 끌어안으려는 게 분명한 그 행동에 인재가 재빨리 한의 팔을 잡아 말린다.

“여기 너희 둘만 있는 거 아니다.”

내 존재는 잊은 거냐고 인재가 한 소리 하자 한이 너 거기 있었냐는 듯 뻔뻔스러운 눈초리로 인재를 돌아본다. 원래도 좀 이상했지만 신우와 있으면 허용치 이상으로 이상해지는 한에게 인재가 작은 목소리로 잔소리를 했다.

“네 말대로 이 업계에서 너 모르면 간첩이고 여기에 나 아는 사람들도 많아. 너랑 나랑 일하는 데가 어딘지도 다 아니…… 신경 좀 써라.”

둘이 있을 때야 무슨 짓을 하든 알 바 아니지만 공공장소에서는 매너를 지키라는 인재의 당부에 한이 뽀루퉁한 표정을 짓는다.

자기가 왜 다른 사람들을 신경 써야 하냐는 둣 불만 가득한 한의 얼굴에, 하여간 이래서 제 잘난 맛에 사는 놈은 질색이라고 한탄하며 인재가 가장 염려하던 부분을 지적한다.

“내가 혹시나 해서 하는 말인데, 너 나무 이야기 부스 가서 이상한 짓 하지 마.”

“이상한 짓? 무슨 짓?”

“키스를 비롯한 갖가지 애정 행각 말야.”

한을 오래 알아 왔기에 그가 오늘 작정하고 이곳을 찾았다는 사실을 인재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아무래도 디자인과 관련된 업종이다 보니 원래도 옷에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긴 했지만, 오늘따라 최고급 양복에 보기 드문 명품 시계에 가방까지 줄줄이 착용하고 나온 게 너무 티가 나 실소가 나올 정도였다.

“주의해, 너. 네 유명세랑 걸치고 있는 것들로 기선 제압하려는 것까지는 나도 뭐라고 안 하겠는데 쓸데없는 짓 하지 말라고.”

“……키스하지 말라고?”

진짜 안 되는 거냐고 한이 되묻자 인재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진다.

“그걸 말이라고 하냐?”

지금까지 대체 뭘 들은 거냐고 인재가 목소리를 높이자 한이 납득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그럼 키스만 안 하면 되는 거지?”

“키스를 비롯한 갖가지 애정 행각이라고 했냐, 안 했냐?”

“내가 네 말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어?”

“안 들으면 신우한테 네 대학 시절 얘기들 좀 자세히 해 주지, 뭐. 아, 그러고 보니 진성이랑 저번에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쳤다며?”

어느새 그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지 인재가 은근히 돌려 협박하자 한의 얼굴이 험악해진다.

“너, 되게 치사하게 나온다?”

“네가 치사하게 만들잖아. 네가 오늘 얌전히 말 잘 들으면 앞으로도 자주 이런 데 찾아서 같이 다니겠지만 오늘 무슨 짓이라도 하면 다신 같이 안 나온다? 신우, 좋아하는 거 보이지?”

그렇게 말하며 턱으로 인재는 턱짓으로 신우를 가리켰다.

앤티크 가구 부스로 들어가 준비된 팸플릿을 손에 든 채 부스 안을 꼼꼼히 돌아보는 신우의 얼굴에는 생기가 가득했다. 별 내색을 하지 않아 그러려니 했는데 소품 쪽에 꽤 관심이 많은 눈치였다. 인테리어 디자인을 했다니 당연한 일인데도 신우가 뭔가에 홍미를 보이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잔뜩 들뜬 그 얼굴에 한도 덩달아 표정을 풀고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순식간에 기분이 풀린 듯한 그 모습에 인재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한이 인재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준다.

“걱정 마.”

“내가 걱정 안 하게 하려면 악속을 지켜.”

“내가 왜? 너 빼고 우리 둘만 나오면 되지.”

“야, 너…….”

“자자, 릴렉스, 릴렉스. 이런 거 저런 거 너무 걱정하면 위에 안 좋아. 만병의 근원은 스트레스야. 오래 살아야지, 서인재.”

그 모든 스트레스의 근원이 되는 인간의 말에 인재가 발끈하려는 찰나, 한이 인재를 지나 신우가 있는 부스 안으로 재빨리 걸음을 옮긴다.

“뭐 봐?”

부스 안으로 들어선 한이 액자 앞에 선 신우에게 묻자 신우가 작게 중얼거리듯 답한다.

“여기 소품들이 괜찮아서.”

“이런 거 좋아해?”

“응. 심플한 것도 좋지만 좀 화려하고 앤티크한 거 좋아해.”

“고풍스러운 거 좋지.”

검은색의 철제로 제작된 갖가지 소품들 앞에 선 신우는 벽면에 진열된 크고 작은 액자들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집중하고 있는 신우의 옆모습에 무심히 액자를 돌아본 한은 그 안에 든 단란한 가족사진을 보곤 다시 신우를 돌아봤다. 표정의 변화는 없었지만 신우는 그리운 뭔가를 바라보는 듯 아련한 시선으로 액자들에 든 사진들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참 예쁘고 또 슬퍼 보여 한이 잠시 아무 말 없이 신우의 옆얼굴을 응시하자 두 사람을 따라온 인재가 은근슬쩍 두 사람의 뒤로 다가선다. 그러곤 그가 막 말을 걸려던 때 통로를 지나가던 한 여자가 인재를 알아보곤 반색했다.

“어머, 서 팀장님 아니세요?”

반가운 듯 높아진 여자의 음성에 뒤를 돌아본 인재가 여자에게 반가운 듯 인사를 건넸다.

“세진 씨, 오랜만이네요.”

“네, 1년 만인가요? 그런데 여긴 웬일이세요?”

“구경 왔죠. 세진 씨는요?”

“저희 회사도 이번에 부스 참가했어요. 그런데 옆에 분은……?”

세진이 한을 바라보며 묻자 인재가 재빨리 한과 신우를 그녀에게 소개했다.

“저 이직한 건 아시죠? 이쪽은 정한, 건축 디자이너고 이쪽은 연신우 씨, 저희 회사 프리랜서 캐드 디자이너세요. 그리고 이쪽은 이세진 씨. 아이다 가구 영업팀 팀장님.”

“어…… 혹시 그, 건축가 정한 씨, 맞으세요?”

혹시나 하는 얼굴로 세진이 조심스레 묻자 한이 눈초리를 접으며 싱긋 웃어 보였다.

“이 업계에서는 아직 저랑 동명이인을 못 봤으니 그 정한이 맞을 겁니다.”

자연스러운 인사와 함께 한이 손을 내밀자 그 손을 마주 쥔 세진이 환하게 웃는다.

“직접 뵙게 돼 영광입니다. 그런데, 진짜 크시네요.”

흔히 말하면 문짝만 한,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천장에 머리가 닿을 듯한 한의 덩치에 세진이 솔직한 감상을 내뱉자 한이 그런 말 자주 듣는다는 듯 웃어 보인다.

“네. 많이 큽니다.”

“뭐든 크면 좋죠. 사진 보고 너무 잘생겨서 이거 포샵 처리 심하게 한 거 아니냐고 했는데 사진이 안 나온 거였네요.”

“그런 말도 자주 듣습니다. 사진이 제 미모를 다 못 담아서요.”

“아주 뻔뻔해서 좋네요.”

유쾌하게 받아치는 세진과 잠깐 대화를 나누던 한이 마주 쥔 손을 놓자 이번엔 세진이 신우에게 손을 뻗었다.

“만나서 반가워요, 연신우 씨.”

“만나서 반갑습니다.”

가볍게, 극히 의례적인 인사를 나눈 뒤 다시 관심을 돌린 그녀가 인상 좋은 얼굴로 한에게 영업을 시도한다.

“한국에 들어오셨다는 얘기는 들었는데 여기서 직접 만나게 될 줄은 몰랐네요. 오신 김에 저희 부스도 들러 주세요. 출시 예정 상품들도 많이 나왔거든요.”

“잠시 후에 들르죠.”

“꼭 들러 주셔야 해요. 유럽의 장인들과 작업하신 분의 날카로운 평이 필요하거든요.”

“그러죠.”

“그럼, 좀 이따 뵙죠. 서 팀장님도 좀 이따 뵙고요.”

매끄럽게 인사를 마친 그녀가 다시 종종걸음으로 사라지자 인재가 슬쩍 한에게 정보를 일러줬다.

“능력 있는 사람이야. 마케팅 쪽에는 특히 능하니까 알아 두면 좋아. 국내뿐 아니라 해외 원목 업체도 꽤 많이 확보하고 있으니 목조 주택 지을 때도 도움 될 거야. 특이한 가공을 하는 업체들도 많이 알아.”

“나중에 자리 한번 만들어 봐.”

“얼마든지.”

흔쾌히 답하며 팸플릿을 펴곤 그 위에 뭔가를 적어 넣던 인재가 살짝 인상을 쓰며 중얼거린다.

“나무 이야기, 이 옆 라인이네.”

인재의 그 한마디에 신우는 반사적으로 한을 올려다봤다. 그리고 그 말을 내뱉은 인재 역시 아차 한 듯 한을 바라봤다.

동시에 집중된 두 사람의 시선에 한이 환하게 웃는다.

천진하다 싶을 정도로 해사한 그 미소에 인재는 굉장히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한이 저렇게 해맑게 웃을 때는 대부분 안 좋은 생각을 할 때였다. 그리고 그 안 좋은 생각은 보통 아주 못돼먹은 짓을 동반한다.

“야…….”

설마 하는 생각에 인재가 막 한을 부른 순간 한이 시원스러운 걸음으로 신우와 함께 다음 라인으로 넘어간다. 그러곤 아주 발랄한 음성으로 신우에게 묻는다.

“네 의자도 원목으로 만든 거야?”

지나치게 밝은 한의 태도에 신우가 조금 떨떠름한 얼굴로 대꾸한다.

“응. 나무를 통째로 깎아 만든 거야.”

“통째로?”

“응.”

“그럼 상당히 고가일 텐데?”

“그래서 상품 가치는 없다고 했어.”

“아무래도 재료비에 수공비까지 들어가면 고가가 되지. 하지만 그런 건 마케팅에 따라 달라지니까…….”

보급형이 아니라 고급형의 주문 제작 상품이면 충분히 상품 가치가 있다며, 다음 라인으로 들어선 한은 ‘나무 이야기’라고 쓰인 팻말을 확인하곤 걸음을 멈췄다. 그와 함께 신우와 인재 역시 멈춰 섰다.

오늘의 하이라이트가 될 부스 앞에 선 세 사람은 동시에 그 부스 안을 바라봤다. 묘한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에 내부를 훑어보던 신우는 곧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부스 안에 있는 건 처음 보는 남자였다. 다행히도 원혁은 오늘 이 자리에 나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여기네.”

라고 작게 중얼거린 한은 세 부스 정도를 합친 넓은 규모의 내부를 쭈욱 돌아본 뒤 안쪽에 놓인 테이블과 의자에서 시선을 멈췄다. 테이블과 의자들을 주로 만드는 곳인 듯 갖가지 디자인의 원목 의자와 테이블이 놓여 있는데도, 한은 단번에 신우의 의자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거지?”

부스의 왼쪽에 놓인 의자 쪽으로 다가간 한이 정확히 그 의자를 가리키며 묻자 신우가 놀라 되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감이지. 다른 의자들이랑 곡선이나 틀이 다르니까.”

사실 신우 본인도 기억이 가물가물해 저 의자인가, 아니면 이 의자인가 헷갈리던 중이었는데 한은 너무 쉽게 그 의자를 찾아냈다.

그게 신기해 신우가 계속해서 대단하다는 듯 한을 보고 있자 한의 옆으로 다가선 인재가 의자와 테이블을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인다.

“좋네. 유행 안 타는 심플한 디자인에 편하고 아늑해 보여. 원목이 원가 때문에 부담스럽다면 화려한 색상을 입혀서 플라스틱으로 제작해도 될 것 같아.”

입에 발린 말이 아니라 진심으로 마음에 든다는 듯 의자를 살피는 인재와 한의 모습에, 신우가 차마 더 가까이로는 가지 못한 채 거리를 두고 서 있자 부스를 지키던 직원이 한과 인재에게 다가선다.

“올가을에 출시될 의자와 테이블 세트예요. 마음에 드세요?”

싱긋 웃으며 영업용 미소를 짓는 직원에게 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인다.

“네, 좋네요. 가을에 출시되는 건가요? 선주문은 안 받고요?”

“먼저 주문하신 분들이 계셔서 그쪽으로 먼저 수량이 들어가고 정식 출시는 가을부터 할 예정이에요.”

직원의 상세한 설명에 한 걸음 떨어져 테이블을 보던 한은 살짝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얼굴의 한은 이내 위화감이 느껴지던 부분이 뭔지 알아채곤 다시 직원을 돌아봤다.

“그런데 이건 의자가 두 개인 것보다는 하나인 게 나을 것 같은데요? 밸런스가 안 맞아요.”

테이블과 의자의 형태적 조화는 좋았지만 전체적인 균형이 무너진 듯한 느낌에 한이 의자 하나를 치워 보는 게 어떻겠냐고 조언하자 여자가 놀란 듯 눈을 깜빡인다.

“어떻게 아셨어요? 원래 의자 하나와 테이블이 세트였어요. 저희 디자이너한테 왜 의자가 하나냐니까 그런 이미지로 만든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의자는 다른 분이 작업하신 건데, 그분에게서 영감을 받아 제작한 테이블이라네요. 처음엔 테이블에 의자 하나만 뒀는데, 볼 때마다 쓸쓸해 보여서 하나 더 가져다 둔 거예요.”

자세한 여자의 설명에 한은 말없이 신우를 돌아봤다. 하지만 신우는 한의 시선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그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 테이블이 자신을 이미지화한 거라는 건 몰랐다. 자신이 원혁에게도 그렇게나 외로워 보였던 건가 하는 생각에 빠져 멍하니 있는데 직원이 다시 한을 향해 말을 건넨다.

“그러고 보니 저희 디자이너분이랑 닮으신 것 같아요. 키가 이렇게 큰 분들 드문데. 사실 아까 뒷모습만 보고 저희 디자이너가 온 줄 알았어요.”

사심 없이 솔직하게 감상을 내뱉는 직원의 말에 신우의 어깨가 움찔한다. 장본인이 없어 안심하고 있었는데 그렇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저 정도의 덩치는 확실히 드물다. 눈에 띄어도 너무 띄는 징표였다.

“그건, 신기하네요. 배구 선수나 농구 선수가 아닌 이상 저처럼 키가 큰 사람은 드문데 말이죠.”

“그러니까요. 진짜 너무 커서……. 어, 마침 저희 디자이너분이 오시네요.”

디자이너가 왔다는 직원의 말에 신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혹시나 하던 우려가 현실이 된 순간 신우는 삐걱거리는 목을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곧 진한 회색의 티셔츠에 남색 재킷과 같은 색의 슬랙스를 입은 원혁을 발견하곤 입술을 꾹 깨물었다.

아무리 운이 없어도 어떻게 이렇게까지 운이 없을까, 탄식하는 찰나 원혁이 자신을 발견한 듯 손을 들었다.

낭패라는 생각에 서둘러 그에게서 시선을 돌린 신우는 한의 팔을 잡아끌었다.

“아까 다른 부스 들른다고 했지? 의자 봤으니까 가자.”

한시라도 빨리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 한을 잡아끌었지만 한 발 늦었다. 이미 원혁이 바로 몇 걸음 앞까지 다가온 상태였다.

“한아, 그냥…….”

가자고 하려는 순간 한이 부드럽게 그의 팔을 잡고 있던 자신의 손을 풀어냈다. 그러곤 곧 앞으로 다가서서 원혁에게 손을 내민다.

“지난번에 한 번 통화했죠?”

얼굴은 싱글싱글 웃고 있었지만 묘하게 호전적인 한의 말투에 원혁이 잠시 한을 바라보다 그 손을 마주 잡았다.

“……네, 그분이시군요.”

마치 한을 알고 있다는 듯한 원혁의 답에 신우가 둘을 번갈아 보자 한이 천천히 대화를 이어 간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신우가 여기에 자기가 만든 의자가 있다고 해서요. 나무 이야기 디자이너시라고요?”

“네. 지원혁이라고 합니다.”

악수를 끝낸 뒤 원혁이 명함을 꺼내 건네자 한이 그 명함을 받아 들곤 재킷 안주머니에서 마치 준비해 놓은 듯한 은색의 명함 케이스를 꺼내더니 명함을 빼서 건넸다.

“아시 디자인의 정한이라고 합니다”

어쩐지 조금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명함을 받아 든 원혁이 그 이름을 확인한 뒤, 천천히 되새기듯 읊조렸다.

“……정한, 씨군요.”

“가구 박람회라 천천히 돌아보러 왔는데 운이 좋았네요. 꼭 뵙고 싶었거든요.”

말은 반갑다고 하면서 실상 시비를 거는 듯한 한의 말투에 신우는 어쩐지 안절부절못하며 한의 팔을 한 번 더 잡아끌었다.

“한아, 가자.”

“왜? 좀 더 돌아보지. 아, 나무 이야기 가구가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요. 그렇지 않아도 집 가구들을 한 번 바꿀까 했는데 신우와 연이 있으시다니 원혁 씨께 부탁하고 싶네요. 신혼집 가구 디자인도 하시죠?”

기함할 만한 한의 발언에 신우가 놀라 그를 돌아보았다. 순간 한은 그 타이밍을 놓치지 않고 뻔뻔하게 웃으며 신우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러고는 그 손을 가볍게 흔들어 과시한다.

“지금 지내는 별채를 리모델링할 생각인데 네 생각은 어때? 이 김에 침실을 넓히고 작업실은 아예 다른 방으로 옮겨서 넓게 쓰면 좋을 것 같은데. 아! 그리고 네 의자는 정원에 정자를 만들어서 두자. 그리고 별채에도 개들 몇 마리 더 키우려면 개집도 있어야겠네.”

그 말에 신우는 기가 찬다는 얼굴로 한을 바라봤다. 한의 집이니 리모델링을 하든 개축을 하든 한의 마음이긴 하지만 이런 이야기는 처음 듣는다.

무엇보다 그 별채는 한이 귀국하기 직전 한 번 리모델링을 했다고 들었는데 석 달도 안 돼 또 무슨 리모델링인가 싶었다.

어떻게 봐도 원혁 앞에서 과시하는 게 분명한 한의 태도에 신우는 일단 손부터 놓으려 꼼지락거렸다. 그러자 한이 아예 깍지를 끼곤 고개를 돌려 신우와 시선을 맞춘다.

순간 신우는 큰일 났음을 직감했다.

한의 눈빛이 굉장히 불손했다.

금방이라도 일을 칠 게 분명한 그 눈빛에 신우가 한 걸음 물러설 틈도 없이 한이 깍지 낀 손을 들어 올린다. 그러곤 아주 그윽한 시선으로 신우를 응시한 채 속삭인다.

“뭐든 네가 원하는 대로 골라. 우리 둘이 살 집이니까.”

어떻게 들어도 ‘우리 동거해요.’라고 들리는 말과 함께 신우의 손등에 입을 맞춘 한이 싱긋 웃자 북적거리던 부스 안이 일순 고요해졌다.

마치 찬물을 끼얹은 듯 순식간에 얼어 버린 부스의 분위기에 사색이 된 채 곁을 지키던 인재가 재빨리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어 강제로 둘을 갈라놓고는 상황을 정리한다.

“아, 이 두 녀석이…… 지금 같이 살아서요. 아, 전 아시 디자인의 서인재라고 합니다. 그럼, 잘 봤습니다. 나중에…… 아주 나~중에 뵙죠.”

이 어색하고 불편한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인사를 남긴 인재는 한에게 어서 가자며 등을 떠밀었다. 하지만 한은 역시나 꿈쩍할 생각이 없는 듯했다.

“왜? 시간 많은데 천천히 구경하지? 원혁 씨한테 신혼 가구 의뢰도 해야 되는데 왜 벌써 가?”

죽어도 가기 싫다며 버티는 한의 힘에 인재가 이번엔 신우를 바라보며 애원한다.

“신우야, 이 녀석 좀 잡아끌어. 제발 좀 가자, 응?”

내가 도저히 창피해서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다고 인재가 하소연하자 그때까지 굳어 있던 신우가 한의 손을 잡아당긴다.

“가자.”

“왜? 더 안 봐?”

“다 봤어. 가자.”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

그렇게 말한 뒤 한은 다시 원혁을 바라보며 눈웃음을 흘렸다.

“곧 또 뵙죠. 연락드리겠습니다.”

끝까지 태연자약한 한의 태도에 신우는 힘껏 한을 잡아끌었다. 그 힘에 끌려가던 한이 다시 한번 뒤돌았다. 그러곤 거만하게 웃는다. 마치 유치원생이 이겼다고 자랑하는 듯한 그 미소에 원혁은 쓰게 웃고 말았다.

그렇게, 두 시간 정도를 소요하리라 계획하고 나온 박람회 관람은 단 20분 만에 막을 내렸다.

“내가 다시 너희랑 같이 어딜 가나 봐라!”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뒷좌석의 문을 닫은 인재는 야외 주차장에 세워 둔 탓에 타오를 듯 뜨거워진 차 안의 공기에 버럭 고함을 내질렀다.

“왜 이렇게 더워?”

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냐고, 아무 상관도 없는 자신이 왜 가장 수치스러워해야 하냐고, 게다가 또 차는 왜 이리 덥고 지랄이냐고 분노하던 인재가 창문을 내리는 사이 운전석에 올라탄 한은 차창을 모두 내린 채 에어컨을 최대치로 틀었다.

“아, 진짜 날씨 왜 이래? 그러게 내가 실내 주차장에 세우라니까.”

“꽉 찼잖아.”

지하 주차장이 만원이라 돌아 나올 때 졸았냐고 타박하며 한은 느긋하게 휴대폰으로 들을 음악을 고르고 있었다.

태연자약한 한과 넥타이까지 풀며 ‘더워 죽겠네.’라고 내뱉는 인재 사이에서 조수석에 앉은 신우는 그냥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방금 한의 유치한 기 싸움도 기 싸움이지만 한과 원혁이 마주친 순간 느낀 수치심은 감히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었다.

비슷한 키에 비슷한 덩치. 그 부스에 있던 직원의 말대로 뒷모습만 본다면 같은 사람이라고 착각할 정도로 비슷한 체형의 두 사람을 바로 눈앞에서 본 순간 할 수만 있다면 차라리 그 자리에서 기절하고 싶었다.

무지로 인한 소치였다.

진심으로 말하건대 두 사람이 그 정도로 닮았을 줄은 전혀 몰랐었다. 그냥 자신이 덩치가 큰 사람을 좋아한다고 생각했을 뿐 한 자체가 자신의 취향이라고는 예상치 못했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했던 부분을 장본인들 앞에서 적나라하게 들켜 버리다니, 횡액도 이런 횡액이 없다.

“이제 공기 좀 빠졌네. 슬슬 차 빼자. 빨리 나와서 시간이 남는데 어쩔래? 영화나 볼까?”

하필 사람도 없이 한산했던 탓에 시야가 탁 트인 전시장 내에서 커밍아웃을 한 주제에, 한은 아주 태연했다. 태연한 정도가 아니라 앓던 이가 빠진 듯 시원해 죽겠다는 얼굴이었다. 남의 부스에 폭탄을 터트려 놓고는 혼자 즐거워 보이는 그 얼굴에 인재가 버럭 고함을 내지른다.

“네가 지금 영화 볼 때야?”

“어차피 시간 남잖아. 신우야, 뭐 볼래?”

요즘 뭐 하나, 중얼거리며 천천히 차를 몰아 주차장을 빠져나온 한은 스피커에서 나오는 노래를 흥얼거렸다.

어떻게 봐도 이 상황을 즐기는 게 분명한 그 반응에 인재가 앞으로 몸을 숙이며 진지하게 묻는다.

“정한, 너 오늘 그러려고 나온 거지? 신우, 너 말해 봐. 아까 그 남자가 네 그 전 애인 맞지?”

한이야 인재에게 석 달 열흘 잔소리를 들어도 싸다고 생각하지만 갑자기 자신을 항해 날아오는 화살에 신우는 뜨끔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그건 맞다는 의미였다. 그걸 알아챈 인재가 거칠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다.

“미치겠네. 이제 어떻게 얼굴을 들고 다녀? 가구 회사랑도 가끔 일해야 하는데……. 거기랑 꼭 한 번 작업해 보고 싶었는데…….”

누구 때문에 다 망했다고 인재가 한탄하자 한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대꾸했다.

“걱정 마. 윤슬에 쓸 가구는 직접 제작할 거고 어지간한 건 다 수입품으로 할 테니까.”

이탈리아 쪽에 같이 작업했던 가구 디자이너들이 많으니 한이 안심해도 된다고 덧붙이며, 시원하게 뚫린 도로에서 속도를 올리자 인재가 골치 아프다는 듯 머리를 꾹꾹 누른다.

“고급 주택들이야 그렇다지만 일반 주택들까지 일일이 이탈리아 가구를 쓸 수 있어? 앞으로 인테리어 쪽으로도 사업을 확장할 생각이었는데.”

“그럼, 만들면 되지. 그렇지 않아도 정우 씨가 가구랑 침구도 직접 만들고 싶다고 해서 그쪽 라인도 신설할까 생각 중이었어.”

“생산 라인을 만들겠다고?”

“응. 굳이 마음에 드는 가구 고르러 다닐 거 뭐 있어? 우리가 만들면 되지. 그리고 그쪽 판로도 개척하면 좋지.”

“이 자식아, 거기 들어가는 돈이 얼만데?”

요즘 대출도 안 된다고 하려던 인재는 문득 상대가 누군지 되새기곤 말을 멈췄다.

서울 도심 한복판의 고층 빌딩을 대출 하나 없이 현금으로 주고 사는 할아버지를 둔 한 앞에서 돈 걱정은 하는 게 아니라는 걸 깜빡했다.

“그래, 네가 정한이었지. 맞아. 내가 그걸 잠깐 까먹고 있었네.”

다른 건 몰라도 한이 돈 걱정만은 없이 사는 녀석이라는 걸 새삼 깨달은 인재가 질렸다는 듯 중얼거리는 사이 한이 힐끔 옆에 앉은 신우를 쳐다본다. 창가에 붙어 더운 듯 연신 얼굴에 부채질을 하는 그를 보며 한이 은근한 투로 묻는다.

“더워? 에어컨 세게 틀까?”

“아냐. 됐어.”

“그럼 창문 좀 열어. 에어컨 별로 좋은 거 아니니까. 시간 남았으니 영화 볼래? 아니면 그림이라도 보러 갈까? 올림픽 공원에서 키스 헤링 전시회 하던데. 전시회 별로면 뮤지컬이나 보러 갈까?”

마치 이렇게 시간이 빌 걸 예상하고 있었다는 듯한 한의 반응에 신우는 그제야 미심쩍어하며 한을 돌아봤다.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뭐가?”

“원혁이 보고 일부러 그런 거잖아. 그리고 너 언제 원혁이랑 통화했어? 그렇지 않아도 아시로 계약서가 와서 좀 이상하다 했는데.”

“저번에 나랑 통화했어. 다시는 너한테 연락하지 말라고 했는데 초대장을 보냈길래 싸움에 응해 준 것뿐이야.”

그렇게 다시는 연락하지 말라고 경고했음에도 너한테 초대장을 보낸 건 나에 대한 도전과도 같으니까, 라는 한의 호기로운 말에 신우는 실소했다.

“번호는 어떻게 안 건데?”

원혁이 근무하는 회사가 나무 이야기라는 건 자신도 얼마 전까지 몰랐었다. 그러니 당연히 한도 알았을 리 없다. 한이 아무리 능력이 좋아도 아무 단서 없이 연락처를 알아낼 수는 없다.

아무래도 이상하다는 생각에 신우가 의심스러워하는 눈빛을 보내자 한이 막 1차선으로 들어서며 당연하다는 듯 대꾸한다.

“너한테 문자 보낸 거 봤거든.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 너 팝업 간략히 보기로 해 놓으라고.”

연락처랑 문자 메시지 내용 다 보인다는 한의 당당한 대꾸에 그제야 한이 주의를 줬던 때를 기억해 낸 신우는 본인의 실수를 통감했다.

“휴대폰…….”

자신의 부주의를 탓해 봐도 이미 지난 일이라 신우가 허망하게 중얼거리자 한이 재빨리 그 부분에 대해 사과한다.

“마음대로 휴대폰 본 거 미안해. 바닥에 떨어졌길래 주웠는데 화면이 보였어. 다신 안 볼게. 그러니까, 너도 설정 바꿔 놔. 그리고 내 휴대폰은 언제든 봐도 돼.”

이번에도 언제나처럼 은근슬쩍 자연스럽게 사과하며 상황을 무마하려는 한을 신우가 한숨을 쉬며 바라본다. 그 한숨에 한이 힐끔 신우의 눈치를 살핀다.

“지원혁 씨 연락처 지울게. 이제 다시는 그쪽과 연락할 일 없을 거야. 오늘 확실히 결판냈으니까.”

“결판낼 게 있었어?”

“말했잖아. 내가 직접 연락해서 우리 사귀고 있으니 계약서는 우리 사무실로 보내라고까지 했는데 굳이 초대장을 보냈다는 건 한번 해보자는 의미라고. 그쪽에서 먼저 시비를 거는데 피할 이유가 없지. 뭐, 덕분에 직접 보니 나보다 잘난 건 아니라 다행이지만…… 솔직히 네 취향이 보여서 불쾌하긴 해.”

그쪽으로는 찔리는 바가 있는 터라 신우가 더는 아무 말 못 하고 차창을 연 채 계속 손으로 부채질을 하자 한이 다시 불만을 토로한다.

“뭐, 나 정도로 큰 사람은 드무니까 다행이기는 한데…… 기분이 좀 묘해.”

어쩐지 본인과 덩치가 비슷한 원혁을 보고 나니 영 꺼림칙하다는 한의 중얼거림에 신우가 의아한 듯 한을 돌아본다.

“……감상이 그게 다야?”

“응. 그러니까 너랑은 절대 농구나 배구는 안 보러 갈 거야.”

신기가 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눈치 빠르고 감이 좋은 한이 겨우 자신의 취향을 파악한 정도로 넘어가다니……. 뜻밖의 상황에 신우는 당황했다.

한이라면 원혁을 본 순간, 자신의 취향이 누구에게서 비롯됐는지 알아채고 엄청나게 자신만만해져 으스댈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절대 두 사람을 마주치게 하지 말자고 다짐했을 정도였는데 의외로 한의 반응은 평이했다. 그게 신선했다.

“재미있네…….”

“뭐가?”

“너라면 금방 알아챌 줄 알았는데…… 모른다니 신기해서…….”

“뭘?”

“그런 게 있어.”

“그런 게 뭔데?”

“말 안 해.”

“연신우, 뭔데? 말해 봐.”

신우가 던진 떡밥에 걸려든 한이 집요하게 캐내려 달려들자 신우가 느긋하게 말을 돌린다.

“나 시원한 거 먹고 싶어. 빙수나 아이스크림 같은 거.”

일부러 모른 척 휴대폰을 꺼내 근처에 빙수를 하는 데가 있나 찾자 한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그럼 내가 알아내지, 뭐. 날도 좋은데 한강이나 갈까? 그 주변에 빙수 하는 데 한 군데는 있겠지.”

“그래.”

알아낼 수 있으면 얼마든지 알아내 보라고 생각하며 신우는 무심히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덥기는 하지만 주중 낮 시간에 외출을 한다는 건 나름의 호사라 그냥 이 시간을 즐기기로 했다.

하지만 자신이 한을 너무 우습게 봤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불과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지금 보내 드렸어요.”

- 죄송해요. 제가 실수를 해서.

“미리 확인해 주셨으니 괜찮아요.”

늦은 시각, 작업을 하던 신우는 바닥 재질과 벽지가 다른 것과 바뀌었다는 정우의 연락에 하던 작업을 멈추고 다급히 수정 작업에 들어가야 했다. 그나마 간단한 작업이라 금세 수정을 마무리한 뒤 정우의 컨펌을 기다리고 있자 정우가 빠르게 긍정의 답을 내준다.

- 네, 확인했어요. 밤중에 죄송해요.

“아니에요. 어차피 작업하던 중이었어요. 마무리됐으니 이만 쉬세요.”

- 네. 그럼, 신우 씨도 이만 쉬세요. 오늘 고마워요.

깍듯한 정우의 인사와 함께 통화를 끝낸 신우는 밖에서 들려오는 차 소리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서 대청마루로 나섰다.

광란의 박람회 관람 후 신우는 곧장 집으로 돌아왔지만 한과 인재는 오후 스케줄이 남아 다시 사무실로 돌아갔었다. 일도 일이지만 퇴근 후에 대학 동기 모임까지 있다고 해서 더 늦을 줄 알았는데 의외로 빠른 귀가였다.

반가움에 마루에 선 채 기다리고 서 있자, 이내 차고에서 마당으로 돌아 들어오던 한이 손에 우편물을 든 채 마루 위로 올라선다.

“일찍 왔네? 더 늦을 줄 알았는데.”

“일찍 빠져나왔어. 다들 한 번 술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마시거든. 할아버지는 아직이셔?”

원래는 본채에 있어야 할 시간이지만 할아버지께서 오늘 친구분들과 모임이 있다고 외출을 하셔서 신우도 시간이 난 상태였다. 그래서 한도 굳이 본채에 들르지 않고 곧장 별채로 퇴근을 했고.

“아직이셔. 오늘 늦으신대.”

“술 많이 드시면 안 되는데, 너무 늦으시네.”

“넌 술 안 마셨어?”

“안 마셨어.”

당연하다는 듯한 한의 답에 신우가 놀라 눈을 껌뻑인다.

“……안 마셔도 돼?”

그쪽 계통이 워낙에 술을 많이 마시는 직종이라 신우가 신기한 듯 한을 바라보자 한이 깔끔한 처리법을 알려 준다.

“내일 새벽부터 작업 있다고 했거든. 다음 날 새벽에 일해야 하는데 술 먹이는 놈들은 상종 안 하지.”

그러고 보니 꽤 괜찮은 핑계였다. 그럴싸한 답에 신우가 고개를 끄덕이는데, 갑작스레 한이 입을 맞춰 왔다.

기습 키스에 순간 당황하긴 했지만 이내 웃음이 터졌다.

이젠 이런 것에도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중이었다.

“그래도 밤에는 아직 살 만해서 다행이네. 곧 밤에도 쪄 죽겠지만.”

낮의 살인적인 더위와는 달리 밤공기는 아직 서늘했다. 지금은 그것에 감사해야겠다며 한이 신우의 어깨를 안고는 천천히 툇마루를 가로지른다.

“아, 맞다. 오늘 동문회 알림 왔더라?”

“동문회?”

“응. 졸업하고 번호 한 번 바뀌어서 나한테 온 건 아니고 유민석이라고 고등학교랑 대학교 같이 나온 녀석 있는데, 걔가 받았대.”

“그래?”

그런 걸 하는구나, 라고 신우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고등학교 졸업 이후 휴대폰 번호도 여러 번 바뀌었고 이메일도 바뀌어 몰랐는데 정기적으로 동문회를 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신기하네. 아직 번호가 안 바뀌었다니.”

“그 녀석 어머니가 우리 학교 직원이라 바뀐 연락처를 등록해 놨나 봐.”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며 방으로 들어서는데 한이 가볍게 말을 던진다.

“난 가고 싶은데, 넌?”

“응?”

“이번에는 학교에서 하나 봐. 졸업하고 나서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어서 이번에 가 볼까 하는데, 어때? 정현이도 같이.”

정현의 이름까지 나오자 아득한 기억이 떠올랐다.

벌써 13년 전의 일임에도 한과 함께한 기억만은 아주 선명하게 머릿속에 남은 채였다. 쉬는 시간마다 찾아와 이것저것 챙겨 주던 한과 그 뒤를 따라다니며 시끄럽게 잔소리를 하던 정현.

아주 가끔 힘들거나 다 포기해 버리고 싶을 때 자신을 지탱해 준 건 그때의 기억이었다.

그래서인지, 문득 학교가 보고 싶어졌다.

“학교 보고 싶다.”

방 안으로 들어선 신우가 그리운 듯 중얼거리자 한이 잘 생각했다는 듯 신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그럼, 가자. 아직 연락되는 애들도 있으니까 되는대로 다 연락해서 올해는 참석하라고 하면 꽤 많이 모일 거야. 오랜만에 친구들 얼굴도 보고 좋겠네. 학교 가면 기억도 새록새록 떠오를 거고.”

거기까지 말한 한은 입고 있던 재킷을 벗어 가방과 함께 침대 아래쪽의 베드 벤치 위에 던져두곤 신우의 이마에 입을 맞춘 뒤 신우를 포옥 끌어안았다.

“오후에 뭐 했어?”

“뭐 하긴, 들어와서 할아버지랑 산책하고 할아버지 외출하신 뒤에는 방으로 와서 일하고 있었지.”

하루하루 별다를 바 없는 일상을 읊어 주자 한이 신우의 눈가에 연달아 입을 맞추며 부드럽게 속삭인다.

“아까 내가 눈치 못 챈 게 뭐야?”

“응?”

“그 지원혁이라는 녀석 보고 내가 못 알아챈 게 있다고 했잖아. 그게 뭔데?”

연신 뺨과 눈가에 입을 맞추며 아주 다정하게, 한은 신우를 어르고 있었다. 스스로 알아본다고 하더니 궁금증을 참기 힘든 모양이었다.

“말 안 한다고 했잖아.”

“왜?”

“그럴 만한 이유가 있어. 씻고 나와. 피곤할 텐데 그만 쉬어.”

그 화제를 피하려 신우가 말을 돌리자 한이 웃는다.

이것 봐라, 하는 얼굴이었다.

“일찍 쉬기 싫은데?”

억지를 부리는 듯한 말투와 환하게 웃는 얼굴을 보자니 쉽게 넘어갈 기세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뭔가 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다는 예감에 신우는 한을 슬쩍 밀어 낸 뒤 뒷걸음질 쳤다.

“너 내일도 출근해야 되잖아. 빨리 샤워하고 쉬어. 난 하던 작업 마무리 좀 할게.”

정우의 전화에 잠깐 멈췄던 작업을 끝내야 한다며 신우는 서둘러 작업실 쪽으로 향했지만, 그보다는 한이 빨랐다.

몇 걸음 떼 보지도 못한 채 한에게 잡혀 그대로 침대로 내던져졌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놀라 뭐 하는 거냐고 하려는데 바로 위에서 덮쳐 온 한이 양손으로 옆구리를 간질이기 시작했다.

“자, 얘기해. 그게 뭔데? 어서 내게 말해 봐.”

원체 간지럼을 잘 타는 편인 신우는 옆구리를 간질이는 손길에 질색하며 몸을 뒤틀었지만 힘으로는 한을 당해 낼 수가 없었다.

“그게 뭔지 힌트라도 줘. 얘기할 때까지 안 멈춘다?”

옆구리에서 겨드랑이로 올라온 손길에 신우는 거의 자지러질 듯 웃으며 몸을 피하려 했지만 한은 멈추지 않았다.

“빨리 말해.”

“싫다니까!”

“왜 싫어? 뭐가 싫은데?”

“창피하단 말야!”

“볼 거 안 볼 거 다 본 사이에 뭐가 창피해?”

“그래도 창피해! 그만해. 그만!”

참다못한 신우가 눈물까지 흘리며 몸을 비틀자 한이 움직임을 멈춘다.

“죽어도 말 안 한다, 이거지?”

“말 안 해.”

“좋아. 그럼 어쩔 수 없네.”

드디어 포기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신우는 안도하며 겨우 숨을 골랐다. 하지만 불행히도 한은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럼, 네 몸에 물어볼 수밖에.”

“이제, 얘기할 마음 생겼어?”

삽입을 한 채 움직임을 멈춘 한의 속내는 훤했지만, 불행히도 신우는 지금 그런 걸 따질 여력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아래를 풀어 줄 때부터 일부러 가장 느끼는 부분을 비비고 문지르며 애를 태우더니 삽입한 후에는 감질나게 그 부분만 피하는 몸짓에 미칠 것 같았다.

“빨리…… 움직…… 읏.”

“그러니까 말해. 응?”

신우의 애원에 한은 일부러 신우가 느끼는 부분을 천천히 문지르며 추궁했지만 신우는 완고했다.

“……말 안 해.”

“그래?”

그럼 어쩔 수 없네, 라고 중얼거린 한은 바로 다음 순간 재빨리 허리를 움직여 한곳을 찔러 올렸다. 예리한 그 움직임에 짤막한 비명을 내지른 신우가 더 해 달라는 듯 허리를 흔들자 한이 다시 묻는다.

“자, 그러니까 말해 봐. 응? 왜 그러는데?”

한이 계속해서 애를 태우자 신우도 슬슬 오기가 발동했다. 조금 전까지는 창피해서 말을 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절대 말해 주고 싶지 않았다.

“말…… 안 해. 절대로, 말 안 해.”

“고집 세네, 진짜.”

“너 때문이잖아.”

“……뭐, 고집 센 것도 좋아하니까 어쩔 수 없지.”

아주 예쁜 미소를 지은 채 달콤한 말을 속삭이던 한은 이젠 적당히 포기한 듯 빠르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지금껏 감질나게 괴롭혔던 움직임을 만회하려는 듯 한이 신우의 양쪽 손목을 내리누르며 거칠게 찔러 올리자 신우의 몸이 정신없이 흔들린다. 그리고 곧이어 신우의 입술 사이로 높은 교성이 터져 나왔다.

계속해서 이어지는 자극에 신우가 한의 성기를 조이자 한 역시 나지막한 신음을 토해 냈다.

“이렇게 조이면, 금방 갈 것 같은데…….”

거친 숨과 함께 신우의 귓가에 속삭인 한은 한 번 더 신우가 느끼는 내벽 안쪽을 비비듯 허리를 움직였다.

간질간질하게 애를 태우는 그 감각에 신우가 허리를 비틀며 신음하자 한이 이번엔 더 세게 그 부분을 처올렸다.

“윽!”

조용한 방 안이 신우의 음란한 신음으로 가득 차자 한도 여유를 잃고 성기를 빼낸 뒤, 다시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점점 빨라지는 한의 움직임에 신우 역시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다. 윤활제로 질척거리는 아래쪽에서 울리는 소음과 몸속을 관통하는 저릿한 감각에 의식은 옅어지고 쾌감만이 점점 몸을 지배한 채였다.

과한 쾌감에 이성을 놓은 채 필사적으로 한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흔들던 신우는 그가 안쪽 깊은 곳을 찌르며 허리 짓을 멈춘 순간 마지막 교성과 함께 사정했다.

순식간에 꺼진 열기와 나른한 감각에 신우가 몸에서 힘을 빼고 침대 위로 늘어지자 한이 허리를 숙여 깊이 입을 맞춰 온다.

치열을 가르며 숨을 빨아들이는 깊은 키스에 신우는 스르르 눈을 감은 채 한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한에게 안기는 것도 좋지만 그 후 키스를 나누는 건 더 좋아한다. 딱히 다른 행위를 하지 않아도 그저 피부가 닿아 있기만 해도 안정되고 편안했다.

한에게 사랑받고 있다는 완전한 충족감에 신우는 그대로 스르르 눈을 감은 채 한의 것이 나가길 기다렸다.

하지만 분명 사정을 했음에도 한은 몸을 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왜 그대로 있냐는 듯 신우가 다시 눈을 뜨곤 한을 바라보자 한이 싱긋 웃는다.

“그래서, 내가 알아야 할 게 뭔데? 응?”

포기를 모르는 한의 집요함에 신우는 일부러 못 들은 척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자면 그만이니 빼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

뭐든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신우가 한의 말을 무시한 채 눈을 감으려 하자 한이 나지막하게 웃음을 흘린다.

질 나쁜 악동 같은 그 웃음소리에 신우는 설마 하며 눈을 떴다. 그러자 바로 눈앞에서 아주 예쁘게 웃고 있는 한의 얼굴이 보였다.

그 표정이 왜인지 불길하다 느낀 순간, 한은 미처 상상치 못한 최악의 말을 내뱉었다.

“그럼 말할 때까지 하지, 뭐.”

“못 일어나겠어?”

오늘따라 유독 상쾌한 기분으로 눈을 떠 기분 좋게 샤워를 하고 나온 한은 침대 위에 늘어진 신우를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가식적인 그 물음에 신우는 이 모든 비극의 원흉인 한을 원망스럽게 바라봤지만 지금은 한과 말싸움을 할 여유가 없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한 아침과 저녁은 본채에서 먹어야 하기에 슬슬 일어나야 했다.

“일어날 수 있어. 가야지.”

아침 식사는 반드시 할아버지와 함께해야 하는 게 예의고, 무엇보다 아침 식사에 빠지면 지난밤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할아버지께서도 알게 될 게 뻔해 신우는 어떻게든 몸을 일으키려 팔에 힘을 줬다.

하지만 의지와 달리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표현 그대로 허리가 나가 버린 느낌이었다. 대학 시절 택배 상하차 아르바이트를 하다 허리를 삐끗해 열흘 넘게 고생한 적이 있는데 딱 그 느낌이었다.

온몸의 근육들이 뇌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립을 주장하며 흐느적거렸다.

침대에서 일어나 앉지도 못한 채 끙끙거리는 신우의 모습에 침대맡에 걸터앉은 한이 무리라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너 못 움직여. 그냥 더 자. 할아버지한테는 내가 말해 둘게.”

“아냐, 일어날 수 있어.”

“못 일어나. 자세 바꿔 가면서 네 번을 했는데 허리가 멀쩡할 리가 없지. 게다가 마지막에는…….”

한이 광란에 가까웠던 어젯밤의 일들을 술술술 풀어내려 하자 온 힘을 다해 손을 움직인 신우가 그의 입을 틀어막았다.

“더 말하지 마.”

“왜?”

“생각만 해도 죽고 싶으니까 말로 하지 마.”

“왜 죽고 싶어? 네가 내 위에 올라타서 움직이다 자지러진 게 뭐가 어때서?”

이 상쾌한 아침부터 음담패설을 내뱉는 한에게 신우가 작게 이를 간다.

“말하지 말라니까.”

“성인들의 섹스 라이프를 창피해할 거 없어. 그나저나 찜질기 좀 가져다줄까? 아니면 욕조에 들어갈래? 아, 본채에 사우나실 있는데 거기로 갈래? 업어다 줄까? 너 지금 허리 나가서 절대 못 움직여.”

확실히 허리는 나갔다. 아니, 허리뿐 아니라 온몸의 관절이 다 나간 것 같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한에게 업혀 본채의 사우나실에 들어가는 건 어젯밤 일을 사방에 광고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물론 이 꼴로 아침 식사 자리에 나가도 눈치 빠른 사람은 다 알아챌 거다.

어떻게 해도 결론이 나지 않는 상황에 신우는 이번만은 한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됐어. 그냥 좀 더 잘래.”

“잘 생각했어. 그럼 나 아침 먹고 올 테니까 쉬고 있어. 괜히 무리해서 돌아다니지 말고.”

“응.”

“어디 안 좋으면 곧장 전화해. 병원에 가야 하니.”

이 꼴로는 강도에게 칼로 찔려도 절대 병원에 갈 수 없다고 말하려다 모든 게 귀찮아져 그냥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어서 가 보라는 그 신호에 한이 신우의 뺨에 입을 맞춘 뒤 침대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걷는다.

이제 좀 조용히 잘 수 있겠다는 생각에 신우가 끙끙거리며 이불 속으로 파고들려는 찰나, 막 문을 밀어 열려던 한이 뭔가 떠오른 듯 딱 하고 손가락을 튕긴다. 그 반응에 신우는 또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한 건데, 라는 듯 한을 바라봤다. 그러자 한이 환하게 웃으며 신우를 돌아본다.

“내가 알아야 한다던 거, 그거지? 네 취향의 근본이 나라는 거.”

“……응?”

“맞지? 덩치 큰 남자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 그냥 날 좋아했던 거지, 그때도?”

아주 정확히 핵심을 찌른 한을 신우가 놀라 바라본다.

“너, 알고 있었어?”

“보자마자 알았지. 그 사람도 나 닮아서 만났던 거 아냐?”

그래서 상대를 처음 보았을 때 기분 좋았다는 한의 고백에 신우가 어이없다는 듯 한을 노려본다.

“너, 다 알면서 일부러…….”

“너한테서 직접 듣고 싶었거든. 그런데 끝까지 말 안 하더라? 너 원래 입 무거운 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은 몰랐어. 뭐, 그런 것도 아주 좋아하지만.”

완전 당했다는 생각에 신우가 부들부들 몸을 떨자 한이 싱긋 웃으며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그럼 푹 쉬고 있어. 아침은 내가 가져올게.”

반짝반짝 윤기가 도는 얼굴로 강아지처럼 선하게 웃어 보인 한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만 내뱉은 뒤 곧장 방을 빠져나갔다.

순식간에 혼자가 된 방 안에서 신우는 다시 침대에 늘어진 채 이를 꾹 악물었다.

한이 다 알고 있었다니 창피해 죽을 것 같았지만 다행히도 그 상황을 이용해 먹은 한에 대한 괘씸함이 수치심을 완전히 덮어 주었다.

확실히 저 녀석은 너무 풀어 두면 안 된다는 걸, 신우는 다시 한번 깨우쳤다. 하지만 슬프게도 그걸 깨우쳐 봤자 변하는 건 없었다.

결국 자신은 늘 한에게 말려들 거라는 걸, 신우는 이미 확신하고 있었다.

지금까지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영원히, 그건 변하지 않을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싫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즐겁게 느껴졌다. 조금 억울하긴 하지만 한과 함께라면 무엇이든 즐겁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르는 건 순식간이었다.

아직은 살 만하다고 자위하던 게 무색하게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순간 무더위와 함께 습기의 침공이 시작되었다.

이러다 볕에 타 죽거나 높은 습도에 익사하거나 하지 않을까 하는 고민을 진지하게 하게 된 주말의 오후, 깔끔한 캐주얼 정장을 차려입은 신우는 본채 대청마루에 앉아 수박화채를 먹으며 할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왜 쫓겨난 거냐? 네가 본채에만 오면 눈을 부라리는 녀석이 여기서 기다리라고 했다니.”

“저도 모르겠어요. 요즘 작업실에 틀어박혀서 뭘 하더니 방 구조를 좀 바꿔야 한다고 해서요.”

“하필 왜 오늘?”

“그러게요.”

오후 3시로 예정된 동문회에 참석하기 위해 겨우 시간을 빼 뒀다던 한은 오늘 오전 갑자기 작업실에서 뭔가를 쿵쾅거리더니 방 구조를 좀 바꿔야 한다며 신우를 본채로 내쫓았다. 대단한 걸 준비하는 듯한 한의 기세에 아무 말 없이 따르긴 했지만 할아버지의 말씀대로 왜 하필 오늘 그 난리를 치는 건가 싶어 조금 이상했다.

“정현이 놈도 같이 간다고?”

“네.”

“그러고 보니 그놈도 한이랑 참 질긴 인연이긴 하구나.”

“어릴 때는 자주 오갔다면서요?”

“어릴 때는 제집처럼 드나들었지. 그 녀석은 여전히 시끄럽지?”

말 많고 시끄럽고 정신 사납다며 노인이 혀를 내두르자 신우는 빙그레 웃으며 그 말에 맞장구쳐 주었다.

“네. 여전해요.”

“한이 놈이랑 집에서 사고 많이 치고 다녔는데 대학 때부터는 뜸하구나.”

“그렇지 않아도 한 번 온다고 했는데 요즘 바쁜가 봐요. 조만간 들른다고 했어요.”

“그래, 한창 바빠야 할 나이들이지.”

오히려 그 나이에 할 일이 없으면 문제인 거라는 할아버지의 말씀에 신우는 천천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어떤 이유든, 할 일이 없는 것보다는 바쁜 쪽이 낫다.

“그럼 오늘은 늦게 오겠구나. 사내자식들 모이면 밤새도록 술이나 퍼마실 테니.”

“그렇진 않을 거예요. 저도 한이도 학교 보러 가는 거라 될 수 있는 한 빨리 돌아오려고요. 한이는 내일 새벽에 나가 봐야 하고요.”

“드디어 땅 파기 시작했다더냐?”

“네, 이미 다 팠대요. 기초 작업 하는 걸 자기가 꼭 확인해야 한다고 당분간은 새벽 출근해야 할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그래? 그럼 우린 어디 제주도나 다녀올까? 휴양지를 가도 좋고.”

“괜찮으시겠어요? 개들은…….”

“사육사들 불러서 맡기면 된다. 오래 나가 있을 것도 아니고, 한 나흘 잡고 겸사겸사 맛집도 돌고 바다 구경도 하고 오면 좋지.”

근래 집에만 있어서 답답했다는 노인의 말에 신우가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 순간이었다.

“신혼 중인 커플을 갈라 두시려고요?”

퉁명스레 내쏘는 목소리에 마당 쪽을 보자 캐주얼 정장을 갖춰 입은 한이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녀석이 마당에 우뚝 선 채 이쪽을 내려다보자 더욱 거대해 보였다.

“네가 바쁘니 나랑 놀러 가는 거 아니냐? 어차피 새벽에 나가서 밤에 들어올 텐데 뭐가 불만이냐?”

“그러니까 더더욱 신우가 집에 있어야죠. 손자는 한 푼이라도 더 벌겠다고 땡볕 아래 나가서 고생하는데 그 손자 놈 애인만 집어 들고 여행 가시는 할아버지가 세상에 어디 있어요?”

“여기 있다, 왜?”

“하여간 안 돼요. 가실 거면 가을에 저랑 같이 가세요. 아무리 할아버지라도 신우랑 단둘이는 어디 못 가세요. 저 달고 가세요.”

지독하게 말 안 듣는 유치원생 같은 한의 반응에도 노인은 쿨하게 응했다.

“내가 너 때문에 이 더위에 집에 처박혀 살아야겠니?”

“휴양지는 더 더워요.”

“그럼 유럽으로 갈까? 신우, 유럽 괜찮겠니? 북유럽 쪽으로 가면 시원하고 좋을 텐데.”

최근 한을 약 올리는 데에 푹 빠진 노인의 도발에, 한이 바로 걸려들었다.

“나이도 있으시면서 유럽까지 비행기 타고 오가실 수 있으세요? 괜히 비행기 안에서 진만 빼지 마시고 가까운 동해나 다녀오세요. 저도 이틀 정도는 어떻게 시간 낼 수 있으니까요”

“네놈하고는 어디 안 간다. 난 조용히 시간을 보내려고 가는 거지 너처럼 여기저기 싸다니려고 가는 게 아냐.”

“조용히 시간 보내실 거면 집이 최곤데 뭐 하러 멀리 가세요?”

“너무 집에만 있으면 질린다니까.”

“그럼 혼자 가세요. 불쌍한 손자 밤마다 허벅지에 송곳 찌르게 하지 마시고.”

그렇지 않아도 바빠 얼굴 보기 힘든데 여기서 더 얼굴을 못 보면 폭발해 버릴 거라고 한은 장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좀 봐 달라는 그 말에도 노인의 의사는 바뀌지 않았다.

“사실은 그러라고 데려가는 건데?”

껄껄거리고 웃으며 부채질을 하는 노인의 모습에 한이 팔짱을 풀고 삐친 듯 눈썹을 찌푸린다.

“할아버지…… 최근 저한테 뭐 기분 상하신 거 있으세요?”

“왜? 내가 기분 상할 만한 일을 벌인 게냐?”

“그런 일 없어요. 딱히 마음에 안 드시는 게 아니라면 요즘 왜 이러세요? 저도 신혼 좀 즐기게 해 달라고요.”

“누가 즐기지 말라디? 내가 너희 방 침대에 가 눕길 하든? 아니면 새벽녘에 신우 불러 이불 빨래를 하라고 하든? 마음껏 즐기라고.”

“할아버지가 자꾸 신우를 옆에 끼고 계시니까 제가 붙어 있을 시간이 줄어들잖아요.”

“내가 이 녀석의 고용주니까.”

바로 고용 계약서까지 쓴 관계라고 노인이 자신 있게 그의 권리를 주장하자, 애초에 그 계약을 성사시킨 한이 할 말을 잃은 듯 고집을 부리기 시작한다.

“자꾸 이러시면 저 본채로 쳐들어오는 수가 있어요. 아예 신혼 방을 할아버지 옆방으로 옮긴다고요. 그럼 밤에 꽤 시끄러우실걸요. 아시다시피 제가 힘이 굉장히 좋거든요.”

유치한 대화 중 터져 나온 한의 음담패설에 신우가 기함할 새도 없이 이번엔 노인이 한술 더 뜬다.

“그래, 옮겨 봐라. 매일 밤 자장가 삼아 네 힘쓰는 소리 한 번 들어 보자.”

“그럼 내일 옮깁니다?”

할아버지의 허락도 떨어졌겠다 당장이라도 진짜 짐을 옮길 것 같은 한의 기세에 신우는 재빨리 일어나 마루에서 내려섰다. 그러곤 한이 더 이상의 폭탄선언을 하기 전에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한아, 가자! 늦겠다. 할아버지, 저희 다녀올게요.”

“그래. 늦어지면 전화하고. 잘 놀다 오너라.”

“갈 때 가더라도 얘기는 마저 하고 가야지. 저희 내일 방 옮겨…….”

역시나 쓸데없이 끈질기고 집념이 강한 한이 이왕 이렇게 된 거 확실히 얘기를 끝내 두자고 물고 늘어지려는 모습에 신우는 재빨리 한의 입을 틀어막았다.

“빨리 가. 제발, 가자”

이를 갈듯 신우가 한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자 한이 눈을 껌뻑인다.

“왜?”

“그냥 좀 가.”

“그냥 가면 뭐 해 줄 건데?”

왜 이 녀석은 이 순간에도 손익을 계산하고 있는 걸까 싶어 한탄스러웠지만, 지금은 이쪽이 급한 터라 신우는 한과 팔짱을 낀 채 대충 답했다.

“뭐든 해 줄 테니 그만 가자고.”

“알았어. 좋아. 할아버지, 저희 다녀올게요. 9시까지는 들어올 거예요. 혼자 계시기 적적하시면 지원이네 할아버지랑 장기라도 두세요.”

바로 1분 전까지만 해도 툴툴거리던 한이 살뜰하게 인사를 건네자 노인도 부채질을 하며 웃어 보인다.

“오냐. 날 더우니 신우 잘 데리고 다녀라.”

“네.”

한이 산뜻하게 태도를 바꾸고 돌아서자 신우 역시 다시 한번 할아버지께 꾸벅 인사를 하곤 급히 걸음을 옮겼다. 일단 별채의 차고로 가야 하기 때문에 급히 돌담을 따라 오른쪽으로 돌며 신우는 찌릿하니 한을 노려봤다.

“너 자꾸 왜 그래?”

“뭐가?”

“진짜 본채로 옮기려고?”

“네가 자꾸 본채에 가 있으니까. 널 위해서 옮기는 거야.”

“네가 본채에 가 있으라며?”

“오늘 말고 평소에도 꿀 발라 놓은 것처럼 계속 본채에 가 있잖아. 종일 할아버지랑 같이 있으면서 내가 와도 할아버지 옆에 붙어 있으니 본채로 아예 방을 옮길 수밖에. 난 집에 오자마자 널 보고 싶다고.”

최근 바빠짐과 동시에 신우가 본채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진 게 한은 영 못마땅했던 모양이었다. 너는 무조건 날 우선으로 둬야 하는 거 아니냐 꿍얼거리는 한의 하소연에 신우도 할 말이 있다는 듯 따지고 들었다.

“5시부터 11시까지는 내 근무 시간이야. 그거 네가 가져온 일이야.”

“그러니까 본채로 옮기자고.”

“말이 되는 소리를 해.”

본채로 옮기는 거야 신우도 찬성이지만 그 방이 하필 할아버지의 바로 옆방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고 신우가 버티자 별채에 다다라 차고로 들어서던 한이 어깨를 으쓱해 보인다.

“그럼 내가 들어오기 전에는 칼같이 별채에 와 있든가.”

“너도 어차피 인사하러 들러야 하는데 왜 트집이야?”

“그래도 난 집에 왔을 때 네가 나만 기다리고 있는 게 좋아. 다른 일에 정신이 팔려 있거나 다른 사람하고 있는 거 싫다고.”

듣던 중 황당한 소망에 신우가 얘를 어쩌면 좋지, 하는 눈빛으로 한을 바라본다.

“……너, 진짜 애 같은 거 알지?”

“알아도 어쩔 수 없어. 타고난 게 그 모양이니까. 어렸을 때 밤에 혼자 있기 무서워서 할머니한테 가면 할아버지가 가차 없이 내쫓곤 했는데 이젠 그 이유를 알 것 같아.”

한의 타고난 성정도 성정이지만 온갖 안 좋은 모범은 다 보여 주신 할아버지의 과거사에 신우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타고난 것도 타고난 거지만 성장 환경도 너무 안 좋았다.

“그런 것까지 할아버지 닮지 마.”

할아버지를 무척 좋아하지만 그것과 저건 또 다른 문제인지라 신우가 그 부분은 주의 해달라고 딱 잘라 말하자 한이 그건 어려울 것 같다고 고개를 내젓는다.

“닮고 말고의 문제가 아냐. 그건 그냥 DNA의 문제야. 인간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라고.”

그렇게 답한 한은 먼저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건 뒤 신우에게 어서 타라는 듯 손짓했다. 그 제스처에 어쩔 수 없이 신우가 조수석에 올라타자 한이 안전띠를 매 주며 다정하게 속삭인다.

“그러니까, 나만 생각하고 나만 보살피라고. 다른 사람은 쳐다도 보지 마. 생각도 하지 말고 신경도 쓰지 마”

“할아버지가 남은 아니잖아.”

“남은 아니지만 나도 아니잖아.”

질투심을 활활 불태우는 말과 달리 일부러 쪽 소리를 내며 뺨에 입을 맞추는 한의 애정 표현에 신우는 어이없어하면서도 나지막한 웃음을 흘렸다.

강압적이고 이기적인가 싶으면 또 다정하다. 자신은 유독 다정한 사람에게 약하기에 한이 이렇게 어리광을 부리며 눈웃음을 치면 그 속이 시커먼 걸 알면서도 다 넘어가 주게 된다.

그러고 보면 자신도 어지간히 중증이었다. 늦게 든 바람이 무섭다고 나이 들어 다시 만난 첫사랑이 주는 감각이 너무나 달콤해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상태였다.

근래엔 하루하루가 너무나도 행복해 가끔 무서울 정도였다.

그 정도로 모든 게 완벽했다.

단 한 가지를 제외하곤.

“그런데, 나 진짜 고용 계약서 쓴 거 잘한 거야?”

“응?”

갑작스러운 신우의 물음에 막 차고 문을 열고 차를 빼던 한이 무슨 소리냐고 되묻자 신우가 안전띠를 매만지며 작게 중얼거린다.

“할아버지께서 다 준비해 두셔서 계약서 쓰기는 했는데…… 하는 일도 없이 월급만 받는 기분이라…….”

“하는 일이 왜 없어? 할아버지랑 같이 저녁 먹고 개들 산책시키고 말 상대하고 같이 텔레비전도 보고 하는데. 우리 할아버지는 그런 게 필요하신 분이야. 그래서 인력을 사는 거고.”

“그래도…….”

“우린 가족끼리도 돈거래는 확실히 해. 우리 할아버지 자식들한테도 딱 필요한 만큼만 재산 증여하시고 그 외에 필요한 애들 교육비는 차용증까지 쓰게 하시는 분이야. 공짜로는 절대 뭐 안 주셔.”

“그래도 월급이…….”

과하게 많다고 하려는데 한이 그 말을 막는다.

“그만큼 줄 만하니 주시는 거야. 우리 할아버지는 사과와 감사의 표시는 돈으로 하는 분이야. 물론, 원한도 돈으로 받아 오시고. 그리고 나도 솔직히 네가 할아버지 옆에 있어 줘서 안심하고 일하는 거니까, 편하게 받아.”

“그러면서 본채에 가 있지 말라고 해?”

“그건 나보다 할아버지를 우선순위에 두지 말라는 거지.”

막 대문을 나서 골목으로 차를 몰던 한이 무조건 0번은 자신이어야 한다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역시 어떻게 해도 말이 통하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에 신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느새 골목을 빠져나온 차는 도로로 들어서 익숙한 길을 달리고 있었다.

차로 10분 거리.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모교가 있었다.

정확히 13년 만이었다. 고등학교 졸업 직후 집도 이사를 해 모교와는 멀어졌던 터라 그 근처로 가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모교에 간다고 생각하자 새록새록 옛 기억이 떠올랐다.

겨울, 옥상, 차가운 바람…… 그리고 트레이닝복을 입은 소년…….

집에서 출발한 뒤 10분, 학교의 정문을 통과하자마자 눈에 익은 건물의 외관이 시야에 들어왔다.

학교로 향하는 길가에 있는 건물은 모두 새로 지어 낯선 느낌이었는데 학교 안은 그대로였다. 물론 운동장에 놓인 설비나 원래 있던 체육관 뒤로 작은 체육관이 하나 더 지어진 거나, 본관을 개축해 한 층 더 높아진 것 같은 자잘한 변화는 있었지만 그 형태나 위치는 그대로다.

“학교는 그대로네.”

“내부는 달라졌을걸.”

“그래도 겉은 그대로잖아. 아, 저기 체육관 보인다.”

반가운 마음에 신우가 저 멀리 보이는 체육관 건물을 가리키자 한이 핸들을 꺾어 운동장 안으로 차를 몰았다.

“너희 집 이 근처였지? 아직 그대로 있나?”

“글쎄……. 우리 이사 갈 때쯤 아파트 짓는다고 했던 것 같은데…….”

“동문회 장소는 소체육관인데 우선 별관부터 가 볼까? 아니면 옥상 올라가 볼래? 나 열쇠 딸 수 있는데.”

옥상은 멋대로 올라가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라는 상식적인 생각이 먼저 들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온 학교라서인지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올라가도 될까?”

“이제 학생도 아닌데 알 게 뭐야?”

“학생이 아니니 문제지.”

이젠 교내에서 처벌받는 게 아니라 경찰이 개입할 거라고 신우가 심각하게 중얼거리자 한이 운동장 위에서 차를 세우며 문제없다는 듯 고개를 내젓는다.

“우린 정식으로 학교에 초대받은 졸업생이야. 옥상 출입 금지는 교내 규칙이니 외부인인 우리는 안 지켜도 돼. 무단 침입이 아닌 이상 올라가도 문제없어.”

“잠겨 있는 문을 여는 건?”

“그 안에서 물질적 손해를 끼치지 않는 이상 처벌 이유가 없을걸. 자, 내리자.”

넓은 운동장에 차를 세운 뒤 시동을 끈 한이 먼저 차에서 내려서자 신우 역시 곧장 안전띠를 풀고 차 문을 열었다.

순간 뜨겁고 습한 공기가 피부 위로 달라붙었다. 무서울 정도로 강하게 내리쬐는 햇볕과 후덥지근한 공기에 신우가 무거운 숨을 내뱉자 운전석 쪽에서 보닛을 돌아온 한이 신우의 옆에 서며 걱정스러운 눈길을 보냈다.

“괜찮아? 오늘 너무 더운데?”

“괜찮아. 여름인데 이 정도야 애교지. 지금 더운 것보다 나중에 차에 탔을 때가 더 무서워.”

동문회에 얼마나 머무를지는 모르겠지만 동문회를 마치고 나올 때쯤에는 차 안이 한증막이 되어 있지 않을까 걱정하며 두 사람은 천천히 운동장 너머의 별관 쪽으로 향했다.

교정을 가로지르는 내내 신우는 눈으로 그 안을 샅샅이 훑었다.

모든 것들이 13년 전 마지막으로 본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지은 지 꽤 된 듯한 붉은 벽돌 건물들과 교정에 쭈욱 늘어선 벤치들, 그리고 벤치 위를 덮은 등나무와 건물 바로 앞의 화단을 가득 메운 붉은 장미 덩굴까지. 모든 게 기억하고 있는 그대로였다.

진한 여름의 향이 묻어나는 교정을 신기한 듯 돌아보는 신우의 옆모습에, 한 역시 기분 좋은 듯 사랑스럽다는 시선을 보낸다.

“나, 최근에 안 건데 아무래도 너한테 첫눈에 반했던 것 같아”

“……옥상에서?”

“아니, 처음 본 게 언제인지는 사실 기억이 안 나는데…… 나 네 이름도 알고 있었잖아. 그날 체육관에서 옥상에 있는 널 봤을 때 멀리서도 너라는 걸 알아보고 빨리 잡아 줘야겠다고 생각했던 걸 보니 그전부터 널 알고 주시하고 있었던 것 같아. 솔직히 다른 사람이었다면 번거롭게 거기까지 가진 않았을 거야. 너는 어때?”

뜻밖의 이야기를 꺼내며 그 비슷한 뭔가를 기대하는 듯 반짝거리는 한의 눈빛에 신우는 곤란한 듯 작게 중얼거렸다.

“사실, 난 너한테 별로 관심 없었는데…….”

“뭐?”

“아니, 알고는 있었는데 같은 반인 적도 없고, 또 그땐 다른 일로 머리가 꽉 차서 주변을 둘러볼 여유가 없었어. 네가 옥상에 올라왔을 때도 ‘이 자식은 뭐야? 귀찮게.’라고 생각했던 것 같아.”

처음엔 옥상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랐고, 두 번째로는 얘도 올라왔으니 할 말 없겠지, 라고 생각하고 곧 시선을 돌렸었다.

당시에는 한이 뭘 하든 알 바 아니었으니까.

“와, 매정하네, 연신우. 난 그때 이미 홀려 있었는데, 넌 나한테 관심도 없었다고?”

“……그때는 그랬어. 그런데 네가 내 이름을 부르고 머리를 쓰다듬어 줬을 때 굉장히 기뻤어. 눈물이 날 만큼 행복했던 것 같아.”

“그럼 그때 반한 거야?”

그때 반했다고 말하라고, 거의 강요하는 듯한 한의 물음에 신우는 또 한 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 좋아진 건 그다음에 우리 반에 찾아왔을 때. 다정해서 좋았어.”

주말이지만 동문회 때문인지 별관 문이 열려 있었다. 자연스럽게 문 안으로 들어선 한과 신우는 손님용 슬리퍼로 갈아 신은 뒤 곧장 계단으로 올라갔다.

“난간 바뀌었네. 원래 나무였는데.”

철제 난간에 손을 댄 신우가 그렇게 말하자 한이 복도를 돌아보다 그 말에 맞장구친다.

“시계랑 벽에 걸려 있는 그림도 바뀌었는데? 바닥도 더 좋아졌고. 그래도 건물 안으로 들어오니 시원해서 좋다.”

“그러게. 이상하게 학교 안은 시원하더라.”

“한이 서린 거지.”

갑작스러운 그 말에 신우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껌뻑이자 신우의 옆으로 다가서 목을 끌어안은 한이 계단을 올라가며 으스스한 괴담을 펼쳐 놓는다.

“원래 학교는 무덤가나 전쟁터에 짓는다잖아. 억울한 원혼들이 많이 묻힌 곳에 젊은 애들이 그 기를 밟으라고 그러는 거래. 그래서 학교에 괴담이 많은 거고. 운동장 가운데를 파 보면 거기에 유골 더미가 있다든가, 건물 지하실에 가면 시체가 쌓여 있다든가 하는 거.”

한이 씨익 웃으며 이거 꽤 이름 있는 무당한테 들은 거라고 신빙성을 더하자 신우가 질색한다.

“네가 말하면 진짜 같아.”

“진짜라니까. 이 학교도 깊이 파 보면 뭐가 나올지 몰라.”

그렇지 않아도 서늘한 건물 안에서 한이 계속해서 그럴듯한 이야기를 내뱉자 괜히 신경이 곤두섰다. 복도 안쪽에서 뭔가 튀어나올 것 같다는 생각에 한의 옆에 꼭 붙어 걷고 있는데, 드디어 옥상 문 앞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옥상 문은 잠겨 있었다. 하지만 한은 그 사실에 아랑곳하지 않은 채 주머니에서 클립을 두 개 꺼내 열쇠 구멍에 밀어 넣었다.

“작정하고 나왔구나.”

“여기를 가장 와 보고 싶었거든.”

익숙한 손길로 클립 끝을 열쇠 구멍에 넣은 한이 조심스럽게 손을 움직이자 한순간 탁 하고 잠금쇠가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인데도 잘 되네.”

사실 오랫동안 열쇠를 안 따 봐서 될지 안 될지 불안했다며 엄살을 부린 한이 문을 잡아당기자 확 하고 뜨거운 공기가 몰아친다.

숨 막히는 그 공기에 문밖을 바라보자 익숙한 난간과 그 위로 쳐진 철조망, 그리고 그 너머로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하늘이 보였다.

먼 기억을 떠오르게 하는 옥상 풍경에 신우가 걸음을 내딛자 한이 그 뒤로 따라 선다. 그러곤 작게 중얼거린다.

“그때 알았으면 좋았을걸.”

“응?”

“여기서 널 처음 봤을 때, 그때 너한테 반했다는 걸 알았으면 좋았을 거라고. 그랬으면 더 다정하게 대해 줬을 텐데.”

그 시절이 진심으로 아까운 듯 한은 계속해서 그 이야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정작 신우는 별로 아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몰랐다 해도 그 시절의 한은 충분히 다정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때 그와 나눈 기억은 자신의 안에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때는 그때지. 둘 다 어렸으니까, 잘 모르는 게 당연한 거잖아.”

“그래도 아쉬워, 13년이. 늘 같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그래도 결국 다시 만났잖아.”

“그렇긴 하지.”

어차피 과거의 일이고 이제 와 후회해 봐도 소용없다는 결론을 내리며 대화를 마친 두 사람은 후끈하게 달아오른 옥상을 가로질러 난간 쪽으로 다가섰다. 그러곤 곧 철망을 손에 쥐자 화상을 입을 듯 뜨거운 열기가 느껴졌다.

그날은 굉장히 차가워서 손을 댈 수 없었는데 오늘은 뜨거워서 손을 댈 수가 없다.

아득한 기억에 신우가 작게 중얼거린다.

“그날 11월 8일이었어.”

신우의 뒤에 서서 날짜까지 기억하냐고 물으려던 한은 그날의 의미를 기억해 내곤 입을 다물었다.

11월 8일은 신우의 생일이었다. 그리고 신우의 동생이 죽은 날이기도 했다.

자신에겐 그저 그렇고 그런 11월의 나날 중 하나였지만 신우에겐 의미가 깊은 날이었다. 그러니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을 거다.

“집에 있기 싫어서 새벽에 일찍 나왔는데 여기 서서 아래를 보니까 차라리 떨어져 내릴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죽을 생각은 아니었는데 잠깐 그런 충동이 들었어. 그런데 그때 네가 올라온 거야.”

거기까지 말한 신우는 그윽한 시선으로 한을 바라봤다. 그러곤 다시 말을 이었다.

“그래서 살았어. 넌 언제나 내가 외롭고 힘들다고 생각할 때 나타나 주니까. 이상하게 모든 걸 포기해 버리고 싶었던 순간에는 늘 네가 있더라고.”

“운명이니까.”

그렇게 답하며 한은 바로 신우의 옆에 나란히 섰다. 마치 그날처럼 조용히 다가온 한의 뒤로 서늘한 바람이 불어왔다. 짙은 장미 향과 등나무 꽃의 향이 뒤섞인 바람이었다.

그리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그 바람에 신우가 아련한 눈빛으로 교정을 내려다보고 있자, 신우를 향해 살짝 몸을 숙인 한이 신우의 얼굴을 들여다본다.

그리고 속삭인다.

“연신우, 나랑 평생 살자.”

“……뭐야, 갑자기?”

“프러포즈.”

그 말에 잠시 당황해 눈을 껌뻑이던 신우가 이내 눈을 가늘게 뜨며 웃는다. 행복한 듯 환하게 웃는 그 얼굴은 어떤 말보다도 명확한 긍정의 답이었다.

기다리던 그 답에 허리를 숙인 한은 신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새콤하면서도 달콤한 사탕처럼 녹아드는 키스에 신우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심장이 간질간질한 느낌이었다. 그 감각에 홀린 듯 한과 키스를 하던 신우는 갑자기 울리는 벨 소리에 천천히 입술을 떼곤 주머니에 있던 휴대폰을 찾아 들었다.

“정현이지?”

볼 것도 없다는 듯한 한의 말에 신우는 웃으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응. 어디야?”

기분 좋은 감각에 취한 채 신우가 풀린 음성으로 묻자 수화부에서 고함이 터졌다.

- 어디긴 어디야? 이것들이 아주 쌍으로 약을 처먹었나? 늬들이 지금 제정신이야?

한에게야 워낙 막말을 해 대지만 신우에게는 한마디를 해도 늘 조심스러워하던 정현의 호통에 신우는 무슨 큰일이라도 났나 싶어 몸을 굳혔다. 그리고 한 역시 정현의 외침을 들었는지 시끄럽다는 듯 인상을 찡그렸다.

“왜 그래? 유정현 왜 또 지랄이야?”

들으라는 듯 커다란 한의 음성에 정현이 대번에 소리를 내지른다.

- 왜 지랄이냐고? 너희, 지금 아래 봐 봐!

“아래? 왜?”

정현의 말대로 철조망 너머 교정을 내려다본 순간 신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시기 시작했다.

설마, 아니겠지, 그것만은 아니겠지. 아무리 저 위치가 한눈에 옥상이 보이는 곳이라 해도, 그것만은 아니겠지.

설마 그렇게까지 끔찍한 일이 생겼을 리는 없겠지.

눈앞의 현실을 부정하며 신우가 그 더운 날씨에도 얼음처럼 얼어붙은 채 우뚝하니 서 있자 한이 ‘뭐야? 왜?’라고 물으며 신우를 찌른다. 하지만 신우는 아무 반응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의 인생에 남은 수치심은 이미 모두 다 썼다고 여겼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이건 또 다른 의미에서 끔찍하고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 둘이 잘 논다~. 동문회 와서 옥상에서 보란 듯이 키스를 하냐? 너, 입술 안 터졌냐? 오래도 하더라?

정현의 노골적인 이죽거림도 신우의 귀에는 들어오지도 않았다. 지금 신우가 알고 싶은 건 단 하나뿐이었다.

“설마, 다…… 봤어?”

- 그래. 다 봤다. 재선이, 현민이, 진영이, 준환이 전부!

저 아래에서 주먹을 쥐어 보이는 자그마한 정현의 옆으로 이 무더위 속에서 자신처럼 얼어붙어 있는 한 무리의 남자들이 보였다.

신우는 잘 모르지만 정현이 줄줄이 이름을 나열한 걸로 봐선 한이나 정현과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인 듯했다.

이 좋은 날, 오랜만에 학교에 와 추억을 되새길 새도 없이, 충격적인 장면을 목격해 그대로 돌이 된 이들의 얼굴이 멀리서도 또렷하게 보였다.

그들의 얼굴에 새겨진 감정은 경악과 공포였다.

“나, 그냥 떨어져 죽을까?”

- 정한만 밀어 버려. 어차피 얘네 넌 몰라. 한이가 너무 커서 걔만 알아본 거야.

그러니 아직 기회가 있을 때 그 녀석을 세상에서 없애 버리라는 정현의 충고에 한이 재빨리 신우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앗아 든다.

“그렇게 부러우면 너도 하든가.”

- 미쳤냐? 그게 뭐가 부러워서? 너희 그거 공연 음란죄야.

“키스가 뭐가 음란해? 요즘 초등학생도 키스는 해.”

- 어떤 초등학생이 그렇게 진하게 키스하냐? 그리고 거기 문은 어떻게 열고 들어간 거야?

“다 방법이 있지. 하여간 기다려. 같이 가자. 우리도 지금 내려갈 거야.”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다 같이 동문회장으로 가자고 한이 뻔뻔하게 내뱉는 순간 그렇지 않아도 창백한 신우의 얼굴이 완전 사색이 되었다.

저 녀석들이랑 같이 동문회장으로 들어가느니 차라리 여기서 뛰어내리는 편이 낫다는 게 신우의 생각이었다.

- 와, 너 대박이다. 내려와서 우리랑 같이 간다고?

“응.”

- 너 뻔뻔한 줄은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을 몰랐는데……. 와, 진짜 대박!

“내가 뭐 죄지었어? 뭐가 문제야?”

신우의 휴대폰으로 통화를 하던 한은 전혀 문제없다는 얼굴로 대담하게 아래를 향해 손까지 흔들어 보였다. 그 천연덕스러운 꼴에 교정 내로 정현의 고함이 울려 퍼졌다.

“너희 당장 내려와!”

“와, 진짜…… 와…… 미친!”

동문회장에는 발도 들여 보지 못한 채 옥상에서 내려온 두 사람을 끌고 학교 근처의 카페로 들어선 정현은 그의 앞에 놓인 얼음물뿐 아니라 신우의 앞에 놓인 음료수까지 연달아 들이켰다. 하지만 그걸로는 성에 차지 않아 이번엔 한의 컵으로 손을 뻗었다. 순간 한이 그 손을 야무지게 쳐낸다.

“내 거야.”

“네가 지금 내 앞에서 그런 말할 처지냐?”

“아니면?”

“진짜 보자보자하니 가지가지 한다. 너희가 제정신이야? 거기가 어디라고 부둥켜 안고 키스를 해?”

“뭐가 어때서? 애들도 13년 전 소문의 진상을 확인해서 속 시원할 거 아냐?”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느냐는 정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벨 소리가 울려 왔다. 귓가를 후려치는 듯 시끄러운 그 소리에 정현이 서둘러 휴대폰을 꺼내 든다. 그러고는 굉장히 싫다는 얼굴로 화면을 보다 끝내 전화를 받았다.

“응, 나. 아니……. 내가 알 게 뭐야? 그걸 나한테 왜 물어?…… 아, 진짜 모른다니까! 시끄러워! 끊어!”

전화를 받은 지 불과 몇 초 지나지 않아 버럭 화를 내며 전화를 끊은 정현이 다시 한을 노려보며 쏘아붙이려는 순간 또다시 전화가 걸려 왔다. 벨 소리에 다시 액정을 내려다본 정현은 이마를 짚으며 한탄했다.

“입 싼 놈들. 대체 그사이에 몇 명한테 연락을 한 거야?”

질렸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던 정현은 아예 휴대폰 전원을 꺼 버렸다.

“돌겠네, 진짜. 이 정도면 아프리카로 봉사 활동 간 재경이도 다 알겠다. 아니, 그건 그렇다 쳐! 그런데 전화하려면 너한테 하지 왜 나한테 지랄이야?”

정현이 갑자기 분통을 터트리는 모습을 지켜본 신우는 속으로 동창생들이 자기 연락처를 모른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정현이에겐 미안하지만 정현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아, 그건 됐고 빨리 차 마시고 학교로 돌아가자.”

대담하다 못해 미친 것 같은 한의 선언에 정현과 신우가 동시에 소리친다.

“이거 진짜 미친놈 아냐?”

“난 죽어도 안 갈 거야.”

테이블을 내리치는 정현과 사색이 된 채 고개를 내젓는 신우의 이중창에 한은 두 사람이 왜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지금쯤 모인 녀석들이 ‘친구의 유혹’이나 ‘내 남자의 남자’를 신나게 찍고 있을 텐데 가서 얼굴을 내밀자고? 네가 지금 제정신이냐?”

“떠들 거면 우리 앞에서 떠드는 게 낫지. 뒤에서 떠드는 건 좀 불쾌하잖아?”

무슨 소리를 하든 당사자가 알고 있는 편이 낫다는 한을 정현이 잡아먹을 듯 노려본다.

“넌 그럴지 몰라도 난 아냐. 난 절대 거기 못 가.”

“넌 무슨 상관인데?”

“우리 동창들 사이에 무슨 소문이 돌았는지 모르냐?”

버럭 고함을 내지른 정현은 도저히 더는 못 참겠다는 듯 한의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빼앗아 들이켰다. 속이 타는지 컵을 들고 단숨에 음료를 모두 쏟아붓는 정현을 보며 한이 태연하게 답한다.

“나랑 신우랑 연애하는데 네가 끼어들어서 깽판 쳤다는 소문?”

아주 정확한 설명에 신우와 정현은 동시에 한을 돌아보았다. 어떻게 그걸 알고 있었냐고 묻는 듯한 두 사람의 얼굴에 한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얼마 전에 강희 만났거든. 나한테 웃으면서 그 얘기 하더라. 처음에는 나랑 신우랑 사귀는데 네가 끼어들어서 신우를 낚아챘다로 시작해서, 사실은 네가 우리 집에서 보낸 내 감시원인데 내가 신우를 좋아하니 할아버지의 사주를 받아 둘 사이를 갈라놓았다로 발전하더니, 네가 날 미치도록 사랑해서 신우를 빼앗었다로 진화했다던데?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데 그때는 다 믿었다고 강희도 웃더라고.”

아침 드라마와 저녁 드라마를 합쳐 놓은 듯 기괴하다 못해 비상식적인 내용의 소문에 신우는 기겁한 채 정현을 바라봤다.

진짜 저런 소문이 돌았냐고 묻는 눈초리에 정현이 친절하게 답해 준다.

“하나가 빠졌네. 정한이 날 갖고 놀다 신우한테 갈아타서 분노한 내가 신우 꼬셔서 복수했다는 거.”

고등학교 남학생들의 머리에서 나왔다기엔 지나치게 막장 드라마스러운 스토리에 신우는 어지러운 듯 머리를 가볍게 흔들어 정신을 다잡으려 노력했다. 그러나 한과 정현의 관심은 조금 다른 부분에 꽂혀 있었다.

“그건 말도 안 되지. 절대 넌 내 취향 아냐.”

시끄러워, 라는 한의 말에 정현이 웃기지 말라는 듯 받아친다.

“넌 아예 성별부터 아웃이야. 난 여자가 좋다고. 그런데 왜 내가 너희랑 호모 삼각관계에 엮여 있어야 하냐고? 이러다 혼삿길까지 막히게 생겼어.”

“너도 은근히 자의식 과잉이야. 사람들이 관심 있는 건 나지 네가 아냐. 나랑 엮여 있으니 소문이 나는 거지, 너 혼자일 때는 네가 결혼을 하든 뭘 하든 관심 없을걸.”

그러니 전혀 걱정할 것 없다고 아주 산뜻하게 한이 위로해 주자 정현이 입이 아닌 눈빛으로 욕설을 내뱉는다.

차마 언어로는 표현할 수 없는 욕설을 대신하는 신랄한 그 눈빛에 신우가 재빨리 자리를 정리한다.

“그만 집에 가자.”

어차피 음료수도 정현이 다 마셨고 그렇다고 다시 동문회장으로 갈 수도 없으니 지금은 집으로 돌아가는 게 최선이었다.

아니, 그냥 돌아가고 싶었다.

나와서 한 건 아무것도 없는데 너무 피곤했다.

그런 신우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한이 엉뚱한 질문을 던진다.

“동문회 진짜 안 가고?”

분명 방금 가기 싫다고 했는데 자기 좋은 것만 들은 게 분명한 한의 태도에 신우가 이번엔 조금 표현을 바꿨다.

“피곤해. 집에 가고 싶어.”

“그래? 그럼, 가자.”

결정했으니 더 망설일 것 없다는 듯 한이 움직이자 정현이 빈 컵들을 얌전히 쟁반 위에 모으며 따라 일어났다.

“나도 너희 집에 갈 거야.”

“너는 왜?”

“그럼 이 상황에 나 혼자 동문회에 가겠냐? 가면 개떼처럼 나한테 달려들어서 무슨 일이냐고 다들 물어볼 텐데? 나 점심도 못 먹었어. 너희 집 갈 거야. 밥 줘.”

“우리 집에 쌀 맡겨 놨냐?”

“이렇게 된 게 다 너 때문이니까 네가 책임져. 혈압 올랐다 떨어지니 어지러워 죽겠어.”

“알았다, 알았어.”

네 마음대로 하라는 듯 한이 먼저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자 신우와 정현도 얌전히 한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주말임에도 유독 조용한 카페를 가로지르며 신우는 피로에 젖은 긴 숨을 내뱉었다.

롤러코스터 같은 하루였다. 한이 집에 없을 때는 지나치게 평화로워 현실감이 없을 정도인데 한과 함께 다니면 종일 올라갔다 내려갔다 정신이 없다.

시간이 어떻게 가는 줄도 모를 정도로 매시간 시간이 역동적이었다. 혼이 빠질 정도로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웃음이 터졌다.

다 포기해서인지 아니면 너무 어이가 없어 미쳐 버린 건지 이제 그냥 웃게 되었다.

그런데, 그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와, 오랜만에 봐도 여전히 크네.”

어릴 때는 어려서 커 보인 줄 알았는데 다 커서 와도 여전히 이 집은 거대하다며, 막 차고에서 나온 정현이 감탄하자 신우가 되묻는다.

“얼마 만에 온 거야?”

“거의 8년 만일걸. 입대 전에 온 게 마지막일 거야. 내가 군대를 좀 늦게 간 편이라 군대 다녀와서는 곧장 취업 준비하느라 정신없었고, 취업 후에는 저 자식이 유학 가는 바람에 올 일이 없었고.”

“아, 너희 이사 갔다고 했지?”

“응. 나 대학 입학하자마자 판교로 이사 갔잖아. 아버지 회사가 판교로 이전했을 때 가려고 한 건데 나 때문에 늦어졌지, 뭐. 수능 끝나자마자 곧장 이사 갔어. 나만 버리고.”

그래서 이 집 앞을 지나갈 일도 없었다고 이야기한 정현이 곧장 본채의 마루 위에 올라서며 크게 소리쳤다.

“할아버지, 저 왔어요.”

8년 만이라면서도 제집인 양 자연스러운 인사였다. 서둘러 툇마루를 걸어 할아버지의 방으로 향하는 정현의 걸음에 한과 신우도 바로 그 뒤를 따랐다.

오랜만에 와 들뜬 듯 발랄한 걸음으로 툇마루를 지난 정현이 막 문을 밀어 여는 걸 보곤 신우와 한 역시 문으로 다가서는데 뜻밖의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넓은 방 안에 할아버지와 낯선 남자가 다과상을 사이에 둔 채 앉아 있었다. 생소한 광경에 신우는 눈을 껌뻑였다.

할아버지의 비서들이나 집을 자주 오가는 사람들은 제법 아는데 처음 보는 얼굴이었다.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듯한 느낌이라 혹시 면접을 보러 온 건가 하고 있는데 이쪽을 본 남자가 경악한다.

“이게 뭐야?”

남자의 갑작스러운 고함에 신우가 움찔하는 사이 뒤에 서 있던 한도 그를 알아본 듯 아는 체를 한다.

“그러는 너야말로 뭐야? 네가 왜 여기 있어?”

놀란 신우를 먼저 방으로 밀어 넣은 한이 태연하게 묻자 남자 역시 같은 질문을 한에게 되돌려 주었다.

“그러는 형은 왜 여기 있는데?”

“나야 여기 사니까 있지.”

뭘 그리 당연한 걸 묻느냐는 한의 답에 남자가 입을 쩌억 벌린 채 할아버지를 한 번 돌아본다. 그 시선을 받은 할아버지께서 눈을 피하자 다시 한에게로 고개를 돌린 남자가 기가 막힌 듯 되물었다.

“……형이 여기 산다고?”

“응.”

“언제부터?”

“석 달 좀 넘었지?”

넉 달인가, 라며 한이 방으로 들어와 보료를 찾아 깔고 신우를 앉힌다. 바로 그 뒤로 뒤따라온 정현 역시 알아서 보료를 깔고 앉자 남자가 또다시 묻는다.

“한국에 잠깐 들어온 거야? 작업 때문에?”

“아니. 나 귀국했는데?”

몰랐냐는 한의 대꾸에 남자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온다.

“뭐라고?”

방 안을 쩌렁쩌렁하니 울리는 그 엄청난 소리에 신우가 또 움찔하자 바로 신우의 옆에 앉은 정현이 신경질적으로 받아친다.

“아, 시끄러워. 얘는 툭하면 고함이야. 할아버지, 저 밥 먹으러 왔어요. 밥 좀 주세요.”

정현이 남자를 항해 한마디 하곤 다시 노인에게 인사를 건네자 노인이 웃으며 정현을 반겼다.

“오자마자 밥부터 찾는 건 여전하구나.”

그 나이를 먹고 아직도 그러냐는 투에 정현이 삐죽하니 입술을 내민다.

“얘 때문에 뭐 먹지도 못하고 왔어요. 저 배고파요. 밥 좀 주세요.”

“한이가 왜?”

“동문회에서 사고 쳤어요.”

“그래? 아직 저녁때는 아니니 가볍게 간식이나 준비하라고 할까?”

그렇게 될 줄 예상했다는 듯 할아버지께서는 놀라는 기색 없이 상황을 순순히 받아들이셨다. 그사이 얼결에 불청객이 된 남자가 당장의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듯 한과 정현, 그리고 할아버지를 번갈아 보았다. 그러다 최종적으로 신우에게서 시선을 멈춘다.

“잠깐만요, 할아버지. 밥이고 간식이고, 일단 뭐 먹기 전에 이 상황부터 설명해 주셔야겠는데요.”

“뭘?”

“형이 언제 돌아온 건데요?”

“말했지 않니? 넉 달쯤 됐다고.”

“완전히요?”

“그러니 별채까지 리모델링했겠지.”

“그런데 형도 할아버지도 가족한테 그런 얘기를 전혀 안 하신 거예요?”

진지한 남자의 질문에 노인이 한을 돌아본다.

“너, 얘기 안 했니?”

폭탄을 넘기는 듯한 노인의 태연한 물음에 한이 모른 척 그 폭탄을 다시 노인에게 넘긴다.

“할아버지가 하신 거 아니었어요? 전 할아버지가 하셨을 줄 알았는데요.”

“이런…… 의사소통에 좀 문제가 있었구나.”

서로에게 책임을 넘기는 동시에 그 누구에게도 책임이 없다는 듯 결론 짓는 한과 노인의 대화에 남자가 주먹을 꽉 쥐며 호통을 친다.

“그런 문제가 아니잖아요! 할아버지는 그렇다 쳐도 형은 왜 집에 전화 한 통을 안 한 건데? 왔으면 최소한 집에 들르거나 전화라도 했어야지!”

한과의 관계를 짐작하게 하는 그 말에 그제야 남자를 세세히 뜯어본 신우는 커다란 덩치와 묘하게 닮은 얼굴을 통해 그가 한의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아챘다.

그와 동시에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을 눈치채 버렸다.

“너, 귀국했다고 부모님께 연락 안 드렸어?”

설마, 설마 하는 마음에 신우가 그렇게 묻자 한이 눈을 껌뻑이며 시선을 피한다.

“……깜빡했어.”

“그게 깜빡할 일이야?”

“뭐, 하여간 알았으면 됐잖아. 그런데, 윤이 넌 웬일이냐?”

문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저희 시원한 매실차 좀 주세요, 하고 주방에다 소리친 한이 그의 동생을 향해 묻자 윤이 오만상을 찌푸린 채 한에게 대꾸한다.

“알았으면 된 게 아니지. 할아버지도 그래요. 주말마다 아버지가 안부 전화하시는데 어떻게 그 얘기를 안 하실 수가 있어요?”

주말마다라면 벌써 통화를 16번은 했을 텐데 한 번도 한이 귀국했다는 소식을 언급 안 한 건가 싶어 이번엔 신우가 노인을 바라보았다. 이목이 쏠리자 노인이 더운 듯 리모컨을 찾는다.

“나이가 드니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말이다. 오늘, 날이 참 덥구나. 리모컨이 어디 있더라…….”

화제를 돌리려는 할아버지의 말투나 움직임은 한과 똑같았다. 손발이 척척 맞다 못해 하는 생각이나 행동까지 똑 닮은 조손의 모습에 신우는 뭐라고 하지도 못한 채 멍하니 두 사람을 번갈아 봤다.

이 정도로 상식에서 벗어나면 지적도 할 수 없다.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나 난감해하던 중 혼자 씩씩거리던 윤이 겨우 화를 삭인 듯 한에게 말을 던진다.

“당장 집에 전화 드려.”

“땀 좀 식히고.”

“형이 지금 여유 부릴 때야?”

“아, 맞다. 인사해. 신우야, 이쪽은 내 동생 정윤. 네가 회계사 시험 준비한댔나?”

“무슨 소리야? 나 로스쿨 얼마 전에 졸업했거든?”

4월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는 소식도 못 들었냐고, 내가 분명히 할아버지께도 전화 드렸는데 어떻게 그걸 모르냐고 윤이 버럭 화를 내자 한이 고개를 갸웃하며 인상을 쓴다.

“아, 네가 법대였나? 그럼 훈이가 회계학과?”

“훈이 기계 공학과야! 남들 일은 그렇게 잘 기억하면서 동생들은 뭐 하는지도 몰라?”

“어, 그럼 회계학과는 누구지?”

아리송하다는 듯 한이 인상을 쓰고 있자 신우가 작게 문제의 회계학과 학생을 알려 준다.

“정현이 동생이 회계학과야.”

“아, 맞다. 정민이가 회계학과였지. 하여간, 인사해. 여긴 내 동생, 변호사…… 시험 통과했으니 변호사겠지? 뭐, 직업이 뭐든 하여간 내 동생이고 이쪽은 연신우, 동거 중인 내 애인.”

이어지는 한의 돌발 발언에 신우가 제발 상황 좀 보고 폭탄을 터트리라고 한의 옆구리를 쿡 찔렀지만 되레 윤은 아무렇지 않게 그 말을 넘겼다.

“동거고 애인이고 제발 집에 전화 좀 해!”

“인사부터 해. 앞으로 계속 볼 텐데 일단 가족끼리 인사는 해야지.”

일단 눈앞에 있는 것부터 해치우는 성정 그대로 한이 인사 먼저 하라고 하자 윤이 인상을 쓴 채로도 고개를 숙여 신우에게 인사를 건넨다.

“안녕하세요? 저보다 나이 많으실 테니 그냥 형이라고 부를게요. 자, 인사했어. 됐지? 그럼 빨리 전화해.”

“알았다. 신우, 너도 인사해.”

굉장히 무시무시한 대화가 오간 것 같은데 이상할 정도로 평온한 형제의 태도에 신우는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가 뭐야? 그냥 편하게 지내.”

말을 마친 한이 곧장 어딘가로 전화를 걸자 윤이 명치를 꾹꾹 누른다. 그 모습이 하도 처량해 보여 신우는 조심스레 그에게 물었다.

“속 안 좋으세요?”

“신경 쓰지 마세요. 형 만나면 늘 이러니까…….”

형이 주는 스트레스가 변호사 시험이 주는 스트레스를 능가한다며 명치를 꾹 누르는 윤을 신우가 걱정스레 바라보자 옆에서 상황을 관전하며 앉아 있던 정현이 두 사람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워낙에 예민해서 그래. 쟤 수능 볼 때 위염으로 병원에 실려 간 놈이야. 그래서 재수했거든. 변호사 시험은 어떻게 통과했나 몰라.”

“한 번에 합격했어. 바로 올해.”

그 말에 신우가 대단하다는 듯 윤을 바라본다. 하지만 정현은 별로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이었다.

“오, 웬일이냐? 그럼 이제 개업하는 거냐?”

한이 이탈리아로 날아간 5년 사이 별 교류가 없었던 탓에 네 소식은 못 들었다며 정현이 되묻자 윤이 차를 벌컥벌컥 마시며 짜증스레 답한다.

“취직.”

“군대는?”

“경력 쌓고 내년에 법무관으로 들어갈 거야.”

“미뤄도 돼?”

“만 30세까지만 가면 돼. 빨리 가는 것도 좋지만 난 자리 잡고 가려고.”

군 법무관으로 가면 그것도 다 경력으로 쳐 준다며 설명을 마친 윤이 다시 한을 돌아본다.

“들어가게 된 로펌이 마침 본가 근처라 1년간 여기서 출퇴근해도 되냐고 부탁드리러 왔더니…… 5년 전에 인사 한마디 없이 이탈리아로 간 형이 있네.”

돌아왔다는 말도 없이, 라며 윤은 잡아먹을 듯 한을 노려봤다. 그사이 신우는 두 번째 충격적인 사실을 눈치채 버렸다.

한은 유학 갈 때조차 집에 안 알리고 갔던 거다.

“떠날 때 아무 말 없이 떠난 건 이미 지난 일이니 그렇다 쳐도 어떻게 돌아와서도 집에 전화 한 통 안 할 수가 있어? 누가 찾아가서 직접 인사하래? 최소한 전화는 해야 할 거 아니냐고.”

“내 말이. 정한, 진짜 제멋대로야. 자기만 좋으면 다 되는 줄 안다니까.”

방금 시끄럽다느니 뭐라느니 티격태격하던 정현이 어느새 윤과 의기투합해 한을 험담하기 시작했다. 그사이 계속해서 통화를 시도하던 한이 휴대폰을 내려놓는다.

“어머니, 아버지, 다 전화 안 받으시네. 훈이는 아예 정지 상태고. 걔 번호 바뀌었냐?”

메신저 창에도 안 보이는 것 같네, 라고 한이 느긋하게 중얼거리자 윤이 기가 찬다는 듯 받아친다.

“……걔 지금 유학 갔어, 형.”

“아, 그래? 어디로?”

“미국”

“개나 소나 다 미국이네. 좀 시야를 넓혀 봐. 이 세상에 유학 갈 나라가 미국뿐이냐?”

“그래도 걔는 인사는 하고 갔어. 주말마다 꼬박꼬박 전화하고.”

“혼자 간 거면 울면서 전화하는 거 아냐?”

“울긴 해, 가끔.”

한의 동생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신경질적인 윤과 혼자 유학 가 울면서 전화한다는 미지의 막냇동생 이야기에 신우는 천천히 형제를 번갈아 봤다.

분명히 외모는 많이 닮았다. 자세히 뜯어보면 이목구비나 눈매가 비슷하다. 하지만 분위기는 너무 달라 전혀 한의 동생 같지 않았다.

한의 동생이리면 딱 한처럼 자유분방하고 다들 자기 마음대로 산다고 할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니었다.

“야, 신우 놀란다. 네 동생이 너무 너 안 닮아서 놀랐나 봐.”

대화를 나누던 사이 아주머니께서 가져다준 매실차를 받아 마시며 정현이 낄낄거리며 웃자 한이 신우에게 친절하게 설명해 준다.

“내가 안 닮았다고 했잖아. 그나저나 윤이 너 별채에 오는 건 안 돼. 거긴 내 신혼집이야.”

동생 앞에서 당당하게 신혼이니 뭐니 하는 한의 허벅지를 신우가 꾸욱 찔렀지만 윤은 이번에도 그 말에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런 게 어디 있어? 여기가 형 집이야?”

“별채는 내 집이야. 할아버지, 이 녀석 집에 들이지 마세요. 얘 들어오면 시끄러워요.”

한의 억지에 노인이 부채질을 하며 말을 끈다.

“글쎄……. 뭐, 집에 사람 느는 것도 나쁘진 않지. 어차피 1년이니.”

전혀 앞뒤가 안 맞는 조부의 말에 한이 인상을 썼다.

“20년 전에 자식이고 손자고 다 귀찮고 시끄럽다고 쫓아내신 분이 누구신데요?”

“집도 넓으니 상관없지 않겠니. 윤이 넌 별채로 들어가라. 난 혼자 쓰는 게 편하니까…… 한이랑 신우 옆방 쓰면 되겠네.”

갑자기 떨어진 불똥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동시에 노인을 쳐다본다.

“할아버지, 그건 아니죠!”

“여긴 내 집이다.”

“다른 별채 비어 있잖아요! 신혼집에 어딜 동생을 들여요? 그것도 바로 옆방에!”

“내 맘이다. 억울하면 방 빼든가.”

“할아버지!”

“그럼, 이사는 언제 들어올 테냐? 윤이 오면 신우도 적적하진 않겠구나. 저놈이 저래 봬도 한이보다는 싹싹하니 잘 지내 보거라. 윤이 너도 신우한테 깍듯하게 잘하고. 뭐 걱정할 건 없겠지만.”

말도 안 되는 폭탄을 던져 놓은 뒤에도 노인은 날이 참 덥다며 부채질만 연신 해 댔다. 그 태도에 한은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매실차를 들이켰고 신우는 이 당혹스러운 상황에 뭐라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만 달싹였다.

하지만 이 방 안에서 유일한 외부자인 정현은 이 상황을 두 팔 벌려 반겼다.

“잘됐네, 뭐. 할아버지 말씀대로 신우도 적적하지 않아서 좋고 윤이도 몸 편해서 좋고. 나도 주말마다 놀러 올게. 아, 이번에 휴가 같이 갈까? 신우야, 너 수영할 줄 알지?”

혼자 신이 난 듯한 정현의 물음에 신우가 고개를 내젓는다.

“오래 안 해서 지금은 못 해…….”

“그럼 다시 배워. 여름에 한 나흘 시간 내서 수상 스키나 타러 가자. 강원도 쪽에 리조트 많잖아. 제트 스키도 타고. 할아버지도 같이 가세요. 가서 바비큐 파티도 하고 놀다 오자. 윤이 수상 스키랑 웨이크보드 잘 타.”

“어? 글쎄…….”

한의 심기가 몹시 불편한 듯해 신우가 말끝을 흐리자 부채질을 하던 노인이 재빨리 화답했다.

“뭐 시간 끌 거 있나. 다음 주 주말에 시간 내라. 윤이 너도 시간 괜찮지?”

“네, 전 괜찮아요.”

“그럼 리조트 잡으라고 해 둬야겠다.”

그렇지 않아도 심심했는데 잘됐다며 노인이 반색하자 한이 그 말에 토를 달았다.

“할아버지 저 바빠요.”

“그럼, 넌 빠져. 신우, 윤이, 정현이. 이렇게 가면 되지. 가서 느긋하게 바람이나 쐬고 오자꾸나.”

“신우는 못 가요. 나만 두고 어딜 가요?”

“그런 걸 두고 요즘 세상에는 의부증이라고 한단다.”

“할아버지께서 저한테 이러시면 안 되죠. 할머니 도망가실까 봐 결혼하고 친정에도 못 가게 하셨잖아요. 저 외삼촌 할아버지한테 다 들었어요.”

할머니 기일마다 오시는 외삼촌 할아버지께서 너를 보면 네 할아비 젊은 시절이 생각나 분통이 터진다며, 할아버지를 대신해 밤새도록 원망과 화풀이를 대신 받아야 했던 기억을 떠올린 한이 분한 듯 비밀을 폭로하자 노인이 그런 한을 비웃는다.

“그건 그 시절의 얘기지. 요즘 같은 때 그러면 범죄야. 젊은 녀석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가야지. 벌써 꼰대 기질이 있어.”

“뭐, 그건 자주 듣는 말이긴 한데…… 하여간 신우는 안 돼요. 할아버지 자꾸 이러시면 일이고 뭐고 다 집어치우고 저도 들어앉을 겁니다.”

한이 또다시 애처럼 억지를 부리자, 정현은 하루 사이에 별꼴 다 본다는 듯 인상을 썼고 신우는 그런 한이 창피한 나머지 푹 고개를 숙였다. 오직 윤만이 냉정하고 침착했다.

“형, 제발 그 10분의 1이라도 집에 신경을 써 주는 건 어때?”

“집이야 네가 잘 챙기잖아.”

“장남은 형이잖아.”

“아버지랑 어머니도 난 포기하셨을걸.”

“그게 자랑은 아니지.”

“천성이라니까. 천성을 바꾸는 건 불가능하다고. 하여간 휴가는 안 돼. 절대로 안 돼. 신우야, 우리는 건너가자. 옷 좀 갈아입어야겠다. 할아버지, 저희 별채에 다녀올게요”

더 있다가는 여름휴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이민 얘기까지 나올 것 같은 기세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선 한이 신우에게 어서 따라오라는 듯 눈짓한다. 그 신호에 잠시 눈치를 살피던 신우가 천천히 일어서 한을 따라 나섰다.

그렇지 않아도 가시방석이었던 터라 도망치듯 본채를 나와 돌담을 따라 걷자 앞서가던 한이 옷자락을 펄럭거리며 심통이 난 듯 툴툴거린다.

“진짜 할아버지는 왜 저러시는 거야?”

“네가 반응하니 재미있어하시는 거야. 그보다, 동생은 괜찮은 거야?”

“안 괜찮아. 못 들어오게 할 거야.”

“아니, 그거 말고…… 내 얘기 그렇게 막 해도 되냐고.”

“아, 그건 괜찮아. 그 녀석은 그쪽으로는 엄청 쿨해. 내가 처음 남자랑 사귄다고 했을 때도 자기 일 아닌데 알 게 뭐냐고 했어. 저 녀석은 일단 자기가 남한테 피해 주는 것만 아니면 진짜 전혀 관심 없거든.”

“되게 섬세한 것 같던데…….”

“섬세하다기보다는 신경질적인 쪽인데, 쟤도 좀 이상해. 큰일에는 무덤덤한데 자잘한 거엔 신경을 많이 쓰는 편이야. 예를 들어, 뭐 중요한 약속이 있어 나갔다가 차 사고가 났다? 그럼 보통 약속이나 자기 몸, 차부터 걱정할 텐데 뒤차들이 경적 울릴까 봐 조마조마해하는 타입이야. 남한테 피해 주는 걸 죽도록 싫어하거든.”

거기까지 말한 한은 문득 뭔가 생각났는지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그 자식이 고등학교 때 맹장이 터진 적이 있는데 그때도 어머니 걱정시키기 싫어서 참고 참다가 자기 발로 응급실로 걸어간 놈이야. 복막염이 되기 직전이었다는데 목욕재계하고 속옷까지 갈아입고 혼자 택시 타고 병원 간 거 보면, 성격 알겠지?”

형은 무신경의 극치인 데 반해 동생은 말 그대로 섬세함의 극치였다. 다시 생각해도 한의 동생이라고는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그 소심함에 신우는 새삼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 속내를 알아챘는지 한이 신우의 머리를 끌어안으며 잔소리를 더한다.

“형제라고 다 똑같은 건 아냐. 외모는 닮을 수 있어도 성격은 다 달라.”

“부모님도 그러셔?”

“아니. 우리 부모님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상식적인 분들이야. 다른 사촌들도 그렇고.”

“그럼, 넌 확실히 할아버지를 닮은 거구나.”

격세유전이라더니, 할아버지의 유전자가 너무 강력한 듯했다.

“난 할아버지 복사판이라고 했잖아. 할아버지가 무슨 말씀만 하시면 집안이 뒤집히는데 난 그게 다 이해가 되거든. 할아버지는 확실히 재미있어. 과감하고 대범하고 스케일도 크고.”

“……네 동생이 위염에 걸린 이유를 알 것 같아.”

이런 형 아래에 저런 동생이라니, 순간 윤이 아주 가엾다는 생각이 들었다. 보통 성격이라도 이런 형이 있다면 위가 헐어 버릴 텐데, 그 정도로 세심한 성격이라면 위가 남아날 리가 없다. 어쩌면 한과 같이 자라지 않은 건 윤에게는 천운이었을지도 모른다.

“윤이가 세 살 아래라고 했지?”

“응.”

“신영이가 안 죽었으면 딱 그 나이였을 텐데.”

딱 신영과 동갑이었다. 어쩐지 그리운 느낌에 신우는 본채 쪽을 돌아봤다.

그러고 보니 신영도 섬세한 아이였다. 조용하고 사랑스럽고 약한 아이. 윤처럼 크고 건장하진 않았지만 아마 그 아이가 자랐다면 딱 저 나이가 되어 지금쯤 대학을 졸업해 직장인이 되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니 어쩐지 윤에게 친근감이 느껴졌다.

덩치가 크든 작든 동생이라는 건 형에게는 지켜 줘야 하는 애틋한 존재였다. 하지만 자신은 그런 동생을 지켜 주지 못했다. 그래서 떠올릴 때마다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별채에 다다라 본채 쪽을 돌아보는 신우의 쓸쓸한 옆모습에 한은 막 신발을 벗으려는 그의 팔을 잡아 말렸다.

“잠깐.”

“왜?”

“여기서부터는 눈 가리고 가야 돼.”

“왜?”

“내가 널 위해 만든 게 있거든.”

“……아까 그거 하느라 늦은 거야?”

“응.”

“그냥 보면 안 돼?”

“안 돼. 원래는 밤에 늦게 와서 불을 켰을 때 감동받게 해 주려고 했는데 일찍 돌아왔으니 눈 가리고 가야 돼.”

대체 뭐길래 그러나 싶어 순순히 그러마 하고 고개를 끄덕이자 한이 바로 옆으로 다가와 눈을 가린다. 그러곤 다치지 않게 허리를 안아 조심조심 이끌었다.

“뭔데 그래?”

“직접 봐.”

부드럽게 허리를 잡아끄는 한을 따라 걷다 어느 지점에서 걸음을 멈추자, 스르르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문틀 위에서 문이 미끄러지는 기분 좋은 그 소리에 다음을 기다리고 있자 잠시 후 한이 속삭였다.

“그대로 앞으로.”

한의 말대로 천천히 방으로 들어서 걸음을 옮기던 중 이쯤이면 되지 않았나 싶어 물었다.

“뭔데 그래? 이제 봐도 되잖아.”

“잠깐만. 이제 다 왔어.”

“여기 침대 앞 아냐?”

베드 벤치의 프레임이 오른쪽 손등을 스친 걸로 봐선 침대 옆의 사이드 테이블이 있는 방향이었다. 대체 여기에 뭐가 있는 거냐고 신우가 의아해하자 한이 재미있다는 듯 웃는다.

“잘 아네?”

“그 정도는 알아.”

“자. 다 왔어. 이제 눈을 뜨는 거야. 하나. 둘, 셋.”

셋이라는 소리와 함께 신우의 눈을 가리고 있던 커다란 손이 떨어져 나갔다. 순간 눈썹이 파르르 떨려 왔다.

가벼운 긴장감과 함께 드는 기대감에 눈을 감은 채 긴 한숨을 내뱉은 신우는 천천히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곧 시야가 환해짐과 동시에 바로 눈앞에 보인 풍경에 신우는 감탄사를 토해 냈다.

“아…….”

“마음에 들어?”

놀란 듯 벽면에 줄줄이 걸린 액자들을 바라보던 신우는 일순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듯 입술을 달싹거렸다.

“……이거 어떻게…….”

“네가 관심 있게 보길래 이름 외워 뒀다 따로 주문한 거야. 한옥집에 이런 앤티크 스타일도 잘 어울리는데?”

검은색의 철제로 만든, 텅 비어 있던 벽면을 가득 채운 각종 크기의 액자들은 대부분이 빈 채였다. 그중 사진이 끼워진 건 네 개에 불과했다.

하나는 신우의 가족사진이었고, 다른 한 장은 여인의 머리카락을 빗겨 주는 할아버지의 사진이었다. 또 하나는 고등학교 시절 찍은 신우와 정현의 사진이었고 마지막 한 장은 한과 할아버지의 사진이었다.

하나같이 따뜻하고 정겨워 보이는 사진들이었다.

“생각해 보니까 너랑 나랑 같이 찍은 사진이 없더라고. 그래서 다른 액자들은 비워 놨어. 빈 액자들은 하나씩 채워 가면 돼. 급할 거 없으니까 매년 한 장씩, 꼬박꼬박 채워 넣자.”

아직 빈 액자가 많아 어떻게 보면 외롭고 허전해 보이는 벽면이었지만 그 위를 채운 단 네 장의 사진만으로도 방 안이 꽉 차는 듯했다.

마음을 따뜻하게 만드는 풍경에 다시 사진을 하나씩 돌아보던 신우는 한 장의 사진에서 시선을 멈췄다.

“이분이 할머니셔?”

“응.”

“돌아가실 때, 그 사진이야?”

한이 흘리듯 했던 이야기를 떠올린 신우가 사진 속의 고운 여인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묻자 한이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이거 찍고 나서 잠이 드셨는데, 못 일어나셨어. 그런데도 할아버지는 계속해서 할머니 머리를 빗겨 드리고 계시더라고. 모르셨을 리가 없는데 할머니를 놓고 싶지 않으셨나 봐.”

차분한 한의 음성을 들으며 신우는 넋이 나간 듯 그 사진을 바라보았다.

찬란한 햇빛 아래에 앉은 두 사람의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다워 어쩐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평화롭고 포근한 정경임에도 가슴을 시리게 하는 애틋함이 묻어나는 사진이었다.

그건, 끝나지 않는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일 거다. 수십 년이 지나고, 사랑하던 사람이 떠나가고…… 그렇게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아도 이렇게 남아 있는 것이 있다. 사진으로든 기억으로든.

그 사람이, 그리고 가슴 저몄던 사랑이 존재했다는 것만은 어떤 형태로든 분명히 남아 있다.

슬프면서도 행복한 묘한 감상에 젖어 가만히 그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자 한이 뒤에서 어깨를 안아 준다.

“30년 뒤, 40년 뒤에, 우리도 이렇게 있자. 물론, 죽는 건 안 되지만…… 저렇게 같이 있자.”

“……고마워.”

“고마우면 같이 있어 줘. 평생, 죽는 그 날까지.”

한의 다정한 속삭임에 신우는 조용히 미래를 떠올려 보았다.

자신에게 미래라는 건 믿을 수 없고, 불투명한, 약속만으로는 장담할 수 없는 꿈이자 허상이었지만…… 이제는 그 풍경 속에 한이 자리하고 있었다.

저 푸르른 녹음 속에서, 조용한 마루 위에 한과 함께 앉아 있는 광경이 바로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

이 벽면의 빈 액자 속에는 그 사랑스러운 풍경들이 차곡차곡 담길 것이다.

“정 씨, 연 씨! 우리 방 보러 왔다.”

꼭 그런 미래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고 있는데, 방 밖에서 정현의 외침이 들려왔다. 놀란 신우가 뒤를 돌아보자 한 역시 이를 악문 채 문 쪽을 돌아본다.

“정 씨, 빨리 방 보여 달라고. 아. 별채 다시 봐도 진짜 넓네. 나도 아예 여기서 하숙할까?”

정현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한이 짜증 난 듯 문을 열자 바로 문 앞에 선 두 사람이 한에게 손을 들어 인사해 보인다.

그 해맑은 얼굴에 한이 단호하게 소리친다.

“꺼져.”

“무슨 소리야? 방 크기를 봐야 윤이도 짐을 정리하지. 방 어디 쓰면 되냐?”

문턱에 발을 걸친 채 여기저기를 둘러보던 정현이 뻔뻔스레 ‘저쪽인가?’라고 바로 옆방을 가리키자 한이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정현과 윤을 번갈아 흘겼다.

“너희 둘이 언제부터 그렇게 친했는데? 만나기만 하면 못 잡아먹어 안달이더니.”

“오늘부터 절친 먹기로 했어. 너 까려고.”

너 잘 걸렸다는 듯 웃는 정현의 얼굴에 한은 입술을 꾹 다문 채 그 옆에 선 윤을 돌아봤다. 윤은 그사이 마루에 발을 쿵쿵 굴러 보고 천장을 확인한 뒤 문틀까지 두드리며 ‘와, 아직도 멀쩡하네? 리모델링했어?’라고 중얼거리고 있었다.

이미 이사를 확정 지은 듯한 그 모습에 한이 짤막하게 말을 던진다.

“둘 다 꺼져.”

그 말과 함께 재빨리 미닫이문을 닫은 한은 윤과 정현이 들어오지 못하게 아예 문고리를 걸어 잠갔다. 노골적인 문전 박대에 정현이 문을 세차게 두드린다.

“야! 문 열어!”

예상한 대로 정현이 수선을 피우자 한은 아예 창문까지 전부 다 닫아 잠그곤 블라인드와 커튼까지 내려 방을 폐쇄했다.

“방 보고 싶다는데 들어오게 하지.”

“안 돼. 그냥 두면 진짜 들어올 거야, 저 녀석들.”

이 무더위에 방문을 모두 닫으니 숨통이 턱 막혀 오는 듯했다. 신우가 답답하다며 손으로 부채질을 하자 한이 리모컨을 들어 에어컨을 가동한다.

“시끄러운 자식들. 윤이 자식은 혼자 자취 잘하다가 왜 본가로 들어온다고 난리야?”

“집 있는데 괜히 자취할 거 없잖아.”

신우가 침대 위에 앉으며 집도 넓은데 뭐가 문제냐는 듯 말하자 한이 그 옆으로 와 다리를 꼬고 앉는다.

“귀찮아. 여긴 내 영역이라고. 누가 들어오는 거 싫어.”

“그러지 말고 동생한테 잘해 줘. 곧 결혼하거나 취직해 바빠지면 잘해 줄 기회도 없을 거야.”

처음 본 거였지만 어쩐지 신영이도 떠오르고 또 윤 자체도 인상이 좋아 신우는 이미 그를 마음에 들어 한 채였다. 물론, 한집에서 사는 건 또 다른 문제겠지만 그것도 익숙해지면 좋아질 거다.

그간 이별이 힘들어 아예 타인과의 관계를 피한 채 살아왔는데 지금은 조금 용기가 생겨서인지 새로운 사람들을 삶에 받아들이고 싶었다.

그리고 그게 한의 가족이라면 더더욱 거부할 이유가 없다.

그런 신우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듯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한이 묻는다.

“잘해 주면 뭐 해 줄 건데.”

“네 동생한테 잘하는 건데 내가 왜 뭘 해 줘야 하는데?”

“기브 앤 테이크는 정확히 해야지. 이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그럼 뭘 원하는데?”

“이왕 이렇게 된 거 저녁 먹을 때까지 방에 있을까?”

한이 음흉한 눈길을 보내며 슬금슬금 신우의 셔츠 속으로 손을 넣자 신우가 그 손을 밀어 낸다.

“정현이랑 네 동생 지금 바로 문밖에 있어.”

“괜찮아. 못 들어와.”

“그런 문제가 아냐.”

소리가 새어 나가면 어쩔 거냐는 신우의 걱정에 한이 입을 맞춘 뒤 속삭인다.

“소리가 신경 쓰이면 소리를 안 내면 되잖아.”

그대로 부드럽게 신우를 침대에 눕힌 한은 신우의 눈가와 이마에 입을 맞추며 신우의 긴장을 풀어 주려 했다.

장난스럽고 가벼운, 하지만 한없이 상냥한 그 키스에 지그시 눈을 감은 신우가 낮은 웃음을 흘리자 한 역시 간지러운 듯 웃으며 신우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또다시 느릿하게 신우의 셔츠 자락 안으로 손을 넣었다.

그 순간이었다.

“이것들이 대낮부터 뭐 하는 거야? 문 열어! 안 열어?”

잠깐 조용해져서 돌아갔나 했더니 이젠 아예 쾅쾅거리며 방문을 걷어차는 소리에 한은 화를 참지 못하고 주먹을 세게 쥐었다.

“저 자식…….”

나지막한 한의 중얼거림을 들었는지 문밖에 선 정현이 유쾌한 목소리로 소리친다.

“날도 더운데 방 안에 처박혀서 뭐 하는 거야? 손님 접대나 해, 정한! 아이스커피 좀 내와! 그리고 먹을 것도!”

그간 한에게 쌓인 감정을 이번에 제대로 갚아 주려는 듯 정현은 문을 쿵쿵 내리치며 거리낌 없이 한을 도발해 댔다.

나올 때까지 문을 두드릴 것 같은 정현의 기세에 신우는 허탈한 듯 웃음을 흘렸다. 한과의 관계를 대놓고 반대하는 사람이 없어 이게 웬일인가 싶었는데 대놓고 방해하는 사람들은 많을 듯했다.

“문 열어 줘. 문 안 열어 주면 창문 깨고 들어올 것 같아, 정현이.”

“저 자식은 대체 왜 저러는 거야? 나한테 무슨 억하심정이 있어서.”

“……많을걸…….”

이미 정현에게 들은 바가 있기에 신우는 이 현실을 겸허하게 받아들였다. 이런 형 아래서 자란 동생도 안쓰러웠지만 이런 친구와 23년을 알고 지낸 정현도 안된 건 마찬가지였다.

23년간 소소한 데서 쌓인 감정만도 엄청날 텐데, 특히 오늘 원치 않게 동창들 사이에서 사랑과 복수의 아이콘이 되었을 테니 당장 이 침대에 올라와 눕는다 해도 이해할 수 있다.

“야! 문 열고 빨리 나와! 안 나오면 나올 때까지 두드린다?”

쿵쾅거리며 집요하게 문을 두드리는 정현의 집념에 한이 설마 하는 얼굴로 헛소리를 지껄이기 시작했다.

“저 자식, 혹시 진짜 날 사랑하나?”

그런 게 아니라면 이렇게까지 난리를 치며 방해할 리 없다고 진지하게 고민하는 한의 얼굴에 신우는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너 절대로 그 말 정현이 앞에서 하지 마. 정현이가 너 물어 죽일지도 몰라.”

힘이나 주먹으로는 안 되니 있는 힘을 다해 물어뜯을지도 모른다고, 신우가 충고하자 한도 결국 포기하고 침대맡에 앉아 길게 한숨 짓는다.

그 와중에도 울려 대는 정현의 고함에 한이 고개를 들고 신우에게 이민 의사를 묻는다.

“우리, 이탈리아 갈래? 아니면 독일? 프랑스? 미국도 좋고. 아예 이민 가자. 가서 다시는 오지 말자.”

“갑자기 왜?”

“아는 사람 없는 데로 도망치자고. 내 더듬이가 그러는데 저것들이 앞으로 계속해서 우리를 방해할 거래.”

그 더듬이, 성능 한번 끝내준다고 말하려다 신우는 말을 바꿨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문이나 열어.”

“그럼 키스 한 번만 더.”

오른손 검지를 들어 올리며 애원하는 한에게 신우는 이번에도 져 버리고 말았다.

이렇게 자꾸 오냐오냐하면 안 된다는 걸 머리로는 아는데 한이 뭔가를 바라면 다 들어주고 싶어지는 게 문제다.

너무 무르다.

그걸 잘 알지만 그래도 마음이 가는 걸 막을 수는 없어, 순순히 한의 입술에 입을 맞댔다. 그러곤 어설프게나마 한의 입술을 빨아들이는데 그새를 못 참고 정현이 고함을 내지른다.

“너희 진짜 뭐 하는 거야? 빨리 문 열어! 안 그러면 문 부순다!”

쿵쾅거리는 소음과 함께 방을 울리는 고함에 끝내 신우는 한과 입술을 겹친 채 환하게 웃고 말았다. 햇살보다도 환하고 유쾌한 신우의 웃음소리가 방 안을 채우자 한도 신우를 따라 웃음을 터뜨렸다.

그 따사로운 분위기 속에서, 언젠가 저 액자 안에 담길 사진 속의 자신도 오늘처럼 웃고 있었으면 좋겠다고 신우는 떠올렸다.

아니, 먼 미래의 어느 날, 분명 자신은 저 액자들을 들여다보며 오늘 일을 떠올리곤 웃을 것이다.

눈을 감고 떠올린 미래의 액자에는 많은 이들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 따사롭고 아름다운 사람들이 지금 자신의 곁에 있었다.

- 외전 : The Frame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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