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ilogue
“호텔은 진짜 좋은 것 같아.”
깔끔하게 세탁된 옷으로 갈아입고 나와 호텔 레스토랑에서 조식을 먹던 중 한이 던진 말에 신우는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어제 일이 아주 기뻤는지 한은 별로 안 좋아한다는 빵과 소시지를 잔뜩 집어 와 맛있게 먹고 있었지만, 자신은 허리가 무너질 것 같았다.
한의 말대로 룸서비스를 시켰어야 했나 후회해 봐야 이미 늦은 일이다. 침대에 누워 있다가는 하루 더 연장할 것 같아 서둘러 나온 건데 허리가 좋지 않았다.
그걸로 깨달았다. 선 채로 하는 건 허리와 무릎에 아주 많이 무리가 간다는 사실을.
“여긴 조식이 양식뿐이네. 난 한식이 좋은데. 집에 가서 밥 또 먹어야겠다.”
그렇게 말하며 한이 소시지를 들어 신우의 접시 위에 놓아준다.
“너, 왜 이렇게 못 먹어? 입에 안 맞아?”
보통은 너처럼 아침부터 그렇게 잘 먹지는 않아, 라고 하고 싶었지만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게 식사인 한에게는 의미 없는 말이라 굳이 하지 않기로 했다.
“맛있어. 원래 아침은 안 먹는 편이라 그래.”
“아침은 꼭 먹어야 돼. 한국인은 밥심이야.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연포탕 먹을까? 기력 떨어질 때는 낙지가 좋은데.”
역시나 오늘도 그의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식단 짜기 작업에 돌입한 한을 지켜보던 신우는 ‘낙지’라는 단어에 뭔가 떠오른 듯, 잠시 머뭇거리다 작게 중얼거렸다.
“매운 낙지볶음 먹고 싶어.”
처음으로 신우가 본인의 의사를 밝히자 한이 눈을 반짝거린다.
“오, 낙지볶음 좋다. 청양고추 잔뜩 갈아 넣은 낙지볶음하고 낙지 만두로 하자. 낙지볶음 입가심으로는 낙지 만두가 최고지. 다른 거 먹고 싶은 건 없어?”
이쪽의 제의를 시원스럽고 기분 좋게 받아들이는 한을 보며 신우는 안도한 듯 미소 지었다. 무심히 던진 말임에도 한은 기쁜 듯 자신의 의사를 받아들여 주었다.
그간은 자신의 의견을 내세우면 상대가 괜히 곤란해하거나 자칫 불쾌해할까 봐 쉽사리 말을 내뱉지 못했는데 이렇게 하면 되는 거였다.
“좋아. 그럼 점심은 그렇게 하고…… 저녁은 뭘 먹을까?”
“저녁 식단 정하기 전에, 너 어제 일은 다 끝내고 온 거야?”
“비 와서 중단. 그래도 드론 촬영이랑 측량은 끝냈어.”
“아, 그쪽도 비 많이 내렸어?”
“응. 수도권 남부에 호우 주의보 내렸어. 침수 피해도 있을 거야.”
어젠 정신이 없어 의식하지 못했으나, 우산을 쓰고 걷는데도 흠뻑 젖을 정도였으니 비가 꽤 많이 내리긴 했던 거다. 그러고 보니 발목까지 빗물이 차올랐던 것도 같다. 운동화까지 세탁을 맡길 정도였으니까.
“내가 원래 비 오는 날을 진짜 싫어하는데 어제부로 좋아졌어. 비 오는 날 종종 데이트할까? 젖은 김에 호텔도 오고, 아주 좋은 것 같아. 특히 욕실은, 아주 마음에 들어.”
욕실에서 한 게 아주 마음에 든 것 같은 한의 기색에 신우는 욱신거리는 허리를 의식하며 한의 할아버지와 정현이 한이 멋대로 하게 두지 말라고 한 이유를 다시 한번 처절하게 깨달았다.
적당히 고삐를 쥐어야 할 때는 쥐어야 한다. 안 그러면 어디까지 갈지 모른다.
“뭐 갖고 싶은 거 없어? 먹고 싶은 거나. 여행 가고 싶고 그러지 않아?”
어디 가고 싶다고 하면 거기가 어디든 당장 떠날 듯한 기세였다. 그에 신우는 느긋하게 말을 돌렸다.
“……밥 먹고 집에 가자. 집에 가서 좀 눕고 싶어.”
지금까지는 간신히 버텼지만 이제 슬슬 한계였다. 힘이 전혀 들어가지 않는 허리도 문제지만 엉덩이도 좋지 않았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근 덕에 죽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더 이상 앉아 있는 건 무리였다.
몸 전체가 나른하고 무거워 신우가 맥없는 얼굴을 하고 있자 한이 잔을 내려 두곤 걱정스레 묻는다.
“허리 안 좋아?”
“좀…….”
솔직히 더는 앉아 있기 힘들다고 신우가 답하자 한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선다.
“그럼 가자.”
“괜찮아. 먹던 건 다 먹고 가.”
“어차피 집에 가서 또 먹을 거야. 집 쪽으로는 길 안 막힐 테니까 빨리 들어가서 쉬자.”
어서 일어나라는 듯 재촉하는 한의 손짓에 자리에서 일어서던 신우가 조심스레 묻는다.
“너, 차는?”
그러고 보니 차를 못 본 것 같았다. 설마 길가에 버리고 온 건 아니겠지 걱정하며 묻자 한이 걱정 말라는 듯 손을 내젓는다.
“백화점에 세워 놨어. 차는 나중에 가지러 가면 돼. 할아버지한테 사람 좀 보내 달라고 해도 되고.”
급한 거 아니라며 걸음을 옮기던 한이 슬쩍 손을 잡아 온다. 어차피 짐이라곤 가방뿐이라 다시 룸에 들어갈 것도 없이 곧장 체크 아웃한 뒤 로비를 나와 서자 뜨거운 햇살이 쏟아졌다.
아직 이른 오전 시간임에도 공기도 습하고 뜨겁다.
변덕스러운 날씨에 걸음을 서두르던 중 옆에 선 한이 문득 물어 왔다.
“어제 무슨 일 있었어?”
호텔을 나와 택시 정류장을 향해 걷던 중 한이 던진 질문에 신우가 말없이 한을 돌아본다.
어제부터 궁금했을 텐데 자신이 안정될 때까지 기다려 준 게 뻔히 보여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그냥 이야기하기로 했다.
“어제, 엄마 딸이 찾아왔어.”
“……어머니 딸? 재혼하신 거야?”
“응. 재혼하신 분 딸. 예쁘고 착한 분이셨어.”
담담한 신우의 설명에 한이 갑자기 인상을 확 찌푸린다.
“무슨 일로 찾아왔는데? 뭐, 너는 내 골수, 이런 거야? 미리 말해 두는데, 그런 거라면 절대 주지 마. 골수도 간도 신장도 안 돼. 네 몸에 상처 나는 거 싫으니까.”
내 거니까 허락받아, 라고 한이 덧붙이는 말에 신우는 낮게 웃음을 흘렸다.
“아냐, 그런 거. 그냥 미안하다고 했어. 그리고 엄마가 많이 아프시다고 얘기해 줬어. 엄마도 힘들었나 봐.”
“……많이 안 좋으시대?”
“몸은 괜찮으신데 마음이 아프신가 봐. 난 엄마가 나 완전히 잊었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봐. 그래서 솔직히 기분 좋아졌어.”
그간 쌓여 있던 앙금이 조금이나마 풀린 듯 훨씬 편해진 신우의 얼굴에 한이 신우의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뭐, 그건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뭐 주지는 마. 줄 거면 나 줘.”
“주긴 뭘 줘?”
“간하고 신장하고 골수. 아, 각막도.”
“아무나 막 줘, 그런걸?”
“아무나라니? 난 너 아프면 심장도 떼어 줄 수 있어.”
“심장을 어떻게 떼어 줘? 그럼 네가 죽는데.”
“말이 그렇다는 거지. 하여간 뭐 달라면 주지 마. 돈은 줘도 장기는 안 돼.”
갑자기 찾아와 뭐 달라고 하는 인간들 질색이라며 한이 구시렁거리는 사이 신우의 눈에 멈춰 선 택시가 보였다. 하지만 횡단보도만 건너면 백화점이라 그냥 차 갖고 가자고 하려는데 한이 신우의 손을 잡고 택시로 가 먼저 신우를 밀어 넣는다.
“그냥 차 가져가지?”
“더워서 안 돼. 그리고 너 지금 몸도 안 좋고. 아저씨, 연희동이요.”
신우를 밀어 넣고 옆자리에 올라탄 한은 재빨리 목적지를 알리곤 시트에 기대앉았다. 그런데 무릎이 앞 좌석에 부딪혔다. 어쩐지 머리도 아슬아슬했다. 조금만 허리를 펴면 차체 천장에 정수리가 닿을 것 같았다.
중형차인데도 한에게는 이 택시가 너무 좁아 보였다. 어색한 광경에 신우가 웃자 등을 더 시트에 붙이던 한이 머쓱한 듯 말을 돌린다.
“그래서 어머니 뵙기로 한 거야?”
“어…… 그건 좀 나중에. 서로 좀 좋아지면 웃으면서 보게.”
“뭐, 잘된 일이긴 한데…… 양심에 찔려서 미리 말하자면 나 네 얘기 대강 들었어. 정현이가 얘기해 주더라. 정현이는 그 번데기 사장한테 들었대.”
뜻밖의 고백에 조용히 창밖을 내다보던 신우가 한을 돌아보자 그가 은근슬쩍 신우의 손을 잡으며 달래듯 말을 잇는다.
“동생 얘기도 알고 부모님 일도 알아. 그리고 아버지 돌아가신 것도 들었어. 내가 더 알아야 할 거 있어?”
살짝 고개를 숙인 한이 눈을 마주하며 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하라는 듯 바라보자 신우가 고개를 내젓는다.
“거기까지 알면 다 아는 거야. 내 인생 단조로워. 별거 없어.”
“그 정도면 별거지만…… 하여간 더 말할 거 있으면 다 얘기해. 그리고 궁금하면 내 얘기도 물어봐. 뭐든 말해 줄게.”
“네 얘기는 거의 다 알아. 정현이한테 많이 들었어.”
“유정현이 나에 대해 다 아는 건 아닌걸. 아, 나 이번 건 적당히 마무리되면 잠깐 이탈리아 갔다 올까? 내가 작업한 건물들도 보고 여행도 하고. 완전히 일 끝나면 한 달 정도 잡고 유럽 성 투어도 하고.”
“일부터 하고. 너 이제 본격적으로 바빠질 거잖아.”
“그렇기는 하지만…… 시간이야 내면 되지. 그리고 내가 지금 계획 중인 게 있는데…… 아니다. 그건 나중에 보여 줄게.”
“뭔데?”
“나중에 보면 알아. 그런데 몇 년 걸릴 수도 있어.”
“몇 년?”
“넉넉잡아 5년?”
5년이라는 긴 시간을 약속하는 한의 말에 신우는 별다른 토를 달지 않고 부드럽게 웃으며 답해 주었다.
“그래, 기다려 줄게.”
의외로 빠른 그 답에 한이 신우의 손을 세게 잡아 온다. 그러곤 기분 좋은 듯 중얼거렸다.
“우리 신우, 많이 착해졌네?”
“뭐야, 그건.”
“착해졌어. 말도 잘 듣고.”
마주 잡았던 손에 깍지를 끼며 꽉 쥐어 오는 손길에서 묘하게 성적인 느낌이 묻어나 신우는 조금 붉어진 얼굴을 옆으로 돌렸다. 부끄러워하는 신우의 옆모습을 바라보던 한은 휴대폰을 꺼내 들고 빠르게 버튼을 누르기 시작했다.
들뜨는 마음을 진정시키려 분주히 사람들이 움직이는 창밖을 내다보던 신우는 가볍게 울린 메시지 알림음에 서둘러 가방을 뒤져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 별생각 없이 꺼내 든 휴대폰 액정을 확인한 순간 가뜩이나 붉은 기가 돌던 신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빨갛게 물들어 간다.
[하고 싶어.]
그 메시지 하나에 신우는 어찌할 바를 모르며 빨개진 얼굴로 액정 화면을 노려봤다. 앞에 택시 기사가 버젓이 타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손을 마주 잡은 걸로도 모자라, 태연하게 이런 문자를 보내는 한의 신경 줄에 감탄밖에 나오질 않았다.
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얼굴이 두껍지 못하기에 그 메시지를 못 본 척 화면을 껐다. 그러자 잠시 후 또 메시지 알림음이 울린다.
지레 찔려 앞에 앉은 기사의 눈치를 살핀 신우는 일부러 시선을 다른 곳으로 돌린 채 휴대폰을 들어 메시지를 확인했다.
[답 없으면 여기서 키스한다?]
기가 막힌 말에 신우가 한마디 하려다 기사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왼손으로 부지런히 메시지를 쓰기 시작했다.
[내려서 얘기해.]
짤막한 메시지를 작성한 뒤 전송 버튼을 누르자 한의 휴대폰이 울린다.
같은 차를 타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에 신우는 실소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백화점 들러서 차를 갖고 가자고 우길 걸 그랬다 싶어 혀를 차는 사이, 잠시 후 또 메시지 알림음이 울린다.
이쯤 되니 앞에서 운전하던 기사도 무슨 일인가 힐끔거리며 백미러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른 아침에 남자 둘이 호텔에서 택시를 잡아탄 것도 이상한데 출근 시간에 오피스들이 즐비한 곳도 아닌 주택가로 가자고 하질 않나, 차에 타고 잠시 수다를 떨다 갑자기 입을 다물더니 양쪽 휴대폰이 번갈아 울려 대질 않나. 거기다 더해 둘이 손을 꼭 마주 잡고 있는 꼴이 영 미심쩍은지 계속해서 백미러를 흘끔거리는 기사의 뒷모습에 신우는 슬그머니 한에게 잡힌 오른손을 빼려 했다.
하지만 역시나 그건 무리였다. 신우가 손목을 비틀며 손을 빼려 하자 한이 더 세게 손을 잡아 온다.
지나치게 대범한 그 행동에 신우는 항의하듯 한을 돌아봤지만 한은 일부러 창밖을 바라보며 모르는 척하고 있었다.
[아직 더 가야 되잖아. 손 놔.]
힐끔힐끔 기사의 눈치를 살피며 신우가 메시지를 보내자 다시 한의 휴대폰이 울린다. 오른손으로 휴대폰을 든 채 메시지를 확인한 한은 아주 불쾌한 듯 오른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신우를 노려보았다.
굉장히 기분이 나빠 보이는 그 얼굴에 신우가 조금 기가 죽어 한의 눈치를 살피자 한이 다시 손가락을 움직여 버튼을 누른다. 빠른 그 손놀림에 감탄할 새도 없이 다시 오른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이 울린다.
한의 기분이 몹시 좋지 않은 듯해 조심스레 휴대폰 화면을 확인하자 짤막한 메시지가 떠 있었다.
[손 빼면 진짜 키스해 버린다.]
협박성이 짙은 그 문자에 신우는 기가 막힌 듯 한의 옆모습을 바라봤다. 하지만 한은 여전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든지 해 보라는 듯 얄미울 정도로 당당한 그 모습에 신우는 은근슬쩍 앞을 돌아봤다.
출근 시간이라 길이 꽉 막힌 채였다. 차의 속도가 느려서인지 기사도 계속 뒤를 의식하고 있었다. 한도 아마 그걸 느끼고 있을 것이다.
설마, 진짜 여기서 키스를 하지는 않겠지 싶어 다시 한번 손목을 비틀자 갑자기 쑥 하니 손이 빠진다. 꽤 실랑이를 할 각오를 하고 한 일이었는데, 너무 쉽게 빠졌다. 그게 이상했다.
한이 작정하고 잡으면 절대 자신은 그를 이길 수 없다.
순간, 설마 하는 생각에 옆을 돌아보자 바로 한이 웃고 있는 게 보였다.
불길한 그의 미소에 아차 싶었지만 이미 늦은 때였다.
피하거나 다른 방어를 할 틈도 없이 바로 한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엔 패닉 상태였다.
“대중교통이란 건 참 좋은 것 같아.”
집 앞에 도착해 택시에서 내려서던 한이 뻔뻔스레 중얼거리는 사이 신우는 도망치듯 대문으로 향했다.
당황한 듯 삐걱거리며 잔뜩 긴장된 신우의 뒷모습에 기사에게서 카드를 받아 들고 신우의 뒤를 따르던 한이 속없는 소리를 내뱉는다.
“우리 자주 나오자.”
“…….”
“그냥 다시 출근할까? 너도 출근할래?”
“…….”
“다음에는 지하철도 타 보자. 이거 되게 좋은 것 같아.”
대체 이게 누구한테 좋은 거냐고 묻고 싶은 걸 꾹 참고 서둘러 대문의 벨을 누른 신우는 초조한 듯 문을 바라봤다.
택시는 이미 떠났지만 한시라도 빨리 저 안으로 숨어 버리고 싶었다. 그래서 어서 문이 열리기만을 간절히 기다리는데 인터폰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신우 씨? 일찍 왔네. 어서 들어와요.
정겨운 인사와 함께 열리는 문을 보곤 재빨리 집 안으로 들어선 신우는 빠른 걸음으로 넓은 정원을 가로질렀다.
우선 할아버지께 인사를 드려야 한다는 생각에 부지런히 본채 쪽으로 걸음을 옮겨 가자 한이 바로 뒤로 따라붙으며 느긋하게 말을 건다.
“인사만 드리고 별채로 가자.”
너무나 자연스럽게 옆으로 다가와 어깨를 끌어안는 한을 신우가 원망하는 시선으로 바라본다.
“너, 다시는 그러지 마.”
“뭘?”
“키스한 거.”
“왜?”
“밖이었잖아.”
“차 안이잖아.”
순간 신우는 ‘그래, 너 말 잘했다.’는 얼굴로 한을 바라봤다.
“앞에 기사님이 계셨잖아.”
“못 보셨어.”
“어쨌든.”
“원래 그런 데서 스킨십하고 몰래 키스하고 그러는 거 아냐?”
“누가 그래?”
“애정 표현은 확실하게 해야지. 키스하고 싶으면 하고 손잡고 싶으면 잡고. 표현 안 하면 모르잖아.”
확실히 애정 표현은 중요하긴 하다고 신우도 인정했다. 하지만 그것도 때와 장소를 가려야 한다.
“사람 있는 데서는 안 하는 게 예의야.”
“그렇다면 우리가 집에서 안 나가면 되겠네.”
방금 같이 지하철 타고 출퇴근하자던 녀석의 빠른 태세 전환에 신우가 걱정스러운 듯 한을 바라보자 본채에 다 닿은 한이 본채 안쪽을 향해 소리친다.
“할아버지, 저희 왔어요.”
귀가를 알리는 그 소리에 본채 안쪽에 계시던 아주머니가 종종걸음으로 마중을 나왔다.
“할아버지 주무셔. 새벽에 개들 산책시키고 고단하셨는지 11시까지 주무신다고 하셨어.”
“그래요?”
“인사는 그때 드리고. 아침은 먹었어?”
“대강 먹었어요. 부족하면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리고 저희 점심 낙지볶음하고 만두 해 주세요. 낙지볶음은 아주 맵게.”
신우가 한 말 그대로 점심 메뉴를, 한이 그대로 요청하자 아주머니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맛있게 해 줄게.”
“그럼 저흰 이따 11시 넘어서 올게요. 신우야, 우린 별채로 가자.”
할아버지가 주무시니 더 볼일 없다는 듯 휙 하니 돌아선 한은 재촉하듯 신우의 어깨를 잡아끌었다. 아주머니께 묵례로 인사를 마친 신우는 그 힘에 끌려 쓸데없이 넓은 정원을 가로질렀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임에도 피부가 아플 정도로 강렬한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 탓인지 어제 내린 비는 이미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그 정신없이 쏟아지던 장대비가 아주 작은 물기도 남기지 않았다는 사실에 놀라워하며 걸음을 서두르는데 역시나 허리와 다리가 좋지 않다. 방금까지는 한의 돌발 키스에 정신이 팔려 잊고 있었는데 몸이 묵직했다.
“다리 아파?”
“살짝 뻐근하긴 한데 괜찮아.”
솔직히 그다지 좋지 않았지만 어차피 조금만 더 가면 별채라 괜찮은 척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자신의 상태가 안 좋다는 걸 알아챘는지 바로 옆에서 걷고 있던 한이 의외의 말을 건넨다.
“업어 줄까?”
너무 엉뚱한 제안에 신우는 실소했다.
“나이가 몇인데 업어?”
“업는 데 나이가 어디 있어? 아니면 안아 줄까? 원한다면 어깨에 둘러업는 선택지도 있어.”
그럼 거꾸로 매달린 채 배가 눌려 불편하긴 하겠지만, 이라는 한의 쓸데없이 구체적인 설명에 신우가 정중히 그 제안을 거절한다.
“고맙지만 셋 다 사양할게.”
아무리 이 집이 텅 비어 보는 사람들이 없다고 해도 이 나이에 다른 남자의 등에 업힐 수는 없다고 신우는 한을 밀어 냈지만, 한은 신우의 말은 전혀 듣지 않고 있었다.
“알았어. 자, 업혀, 업혀.”
돌아선 한이 어서 업히라고 등을 대자 신우는 고개를 세차게 내저었다.
“됐어. 조금만 더 가면 돼.”
의외로 강한 신우의 반발에 한이 신우를 돌아보다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곤 다시 돌아서 두 팔을 벌린다.
“알았어. 그럼 안겨.”
“그것도 거절할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뭐 어때?”
“보는 사람이 있든 없든 괜찮아. 그냥 내가 알아서 갈게.”
이렇게 실랑이할 시간에 벌써 별채에 도착했겠다 싶어 신우가 한을 지나쳐 걷자 한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인다.
“알았어.”
“알아주니 고마워.”
그러니 어서 가자고 고갯짓을 하는데 그대로 한이 신우에게 다가서 신우의 허리를 안아 어깨에 둘러업었다.
순식간에 거꾸로가 된 세상에 신우는 그답지 않게 높은 비명을 내질렀다.
“한아!”
“알았으니 내 마음대로 할게.”
“내려 줘!”
“응. 별채에 도착하면 내려 줄게. 아, 그런데 왜 이렇게 가벼워? 너, 잘 좀 먹어야겠다.”
“네가 힘이 센 거야. 내려놔. 배 아파.”
“조금만 더 가면 돼.”
신우를 어깨에 둘러업고도 한은 아무렇지 않은 듯 빠른 걸음으로 별채로 향했다. 다리가 땅에 닿지 않은 덕에 다리는 확실히 덜 아팠지만 대신 배가 눌리고 허리와 등이 아팠다.
걷는 것보다 지금이 더 좋지 않은 것 같은 기분에 신우가 한 번 더 한에게 내려 줄 것을 요청했다.
“한아, 어지러워.”
“이제 다 왔어.”
성큼성큼 큰 보폭으로 어느새 별채에 도착한 한은 허리를 숙여 신우를 마루 위에 가볍게 내려놓았다. 그제야 겨우 제대로 된 세상을 마주한 신우는 어지러운 듯 살짝 고개를 흔들었다. 그 모습을 보던 한이 바로 신우의 앞에서 허리를 숙이며 신우와 눈을 맞춘다.
“자, 안아다 줬으니까 감사의 인사를 해야지?”
부탁도 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떠메고 와서는 감사의 인사를 하라니 옥장판 강매도 아니고 이건 무슨 매너인가 하는 생각에 신우는 기가 찬 듯 웃었다.
“정확히 말하면 이건 떠메고 온 거지.”
“어쨌든. 다리와 허리가 아픈 널 위해서 힘을 썼으니 감사의 표현을 해 줘야지. 뭐든 표현하지 않으면 모르잖아.”
그 다리와 허리가 아픈 것도 누구 때문이더라, 하는 얼굴로 신우가 빤히 보자 한이 그 표정을 기가 막히게 알아채곤 재빨리 말을 돌린다.
“키스해 줘.”
신우의 바로 앞에 앉은 채 어서 키스해 달라고 보채는 한의 모습에 신우는 탄식했다.
“……진짜 나 완전 속은 기분이야.”
무슨 일에든 자신만만하고 시원시원하고 성격 좋고, 뒤끝 없이 쿨한 인간.
그게 신우가 생각하는 정한이었다. 그래서 가끔 무서울 정도였는데 지금 자신의 앞에 있는 정한은 자신이 알던 것과는 달리 아주 어리고 유치했다.
“난 네가 이런 성격인지 몰랐어.”
“뭐가?”
“절대 안 질척거릴 줄 알았거든.”
“나, 질척거리는 거 아주 좋아해. 질척질척하고 구질구질하게 구는 것도 좋아. 원래 사랑이란 건 구질구질하고 유치한 거야.”
키스해 줄 때까지 그 자리에 앉아서 버틸 것 같은 한의 기세에 신우가 한숨을 내쉬며 마지못한 듯 가볍게 입을 맞추자 한이 환하게 웃는다.
어린 강아지처럼 눈웃음을 치는 얼굴에 신우 역시 기분이 좋아져 웃자 이번엔 한이 입을 맞춰 왔다.
장난 같은, 기분 좋고 상냥한 입맞춤에 신우가 고개를 숙이고 있자 다시 한번 입술이 겹친다.
느긋하게 마루에 앉아 장난치듯 서로 계속해서 입술을 겹치다 또 그러고 있는 게 너무 우스워 웃음을 흘리는데 문득 귀에 익은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들 논다.”
그 소리에 신우와 한이 동시에 소리가 난 방향을 바라보자 돌담길이 끝나는 곳에 선 인재가 팔짱을 낀 채 다 썩어 들어가는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몰라도 조금 전의 장면을 다 본 게 분명한 반응에 신우는 난감한 듯 입술을 뻐끔거렸다. 하지만 한은 역시나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너, 왜 남의 집에 연락도 없이 와?”
조금 신경질적인 한의 말투에도 인재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이쪽으로 다가서며 대꾸했다.
“오늘 빌라 건 세부 계약 확인하고 프레젠테이션 해야 하는데 네가 전화를 아예 안 받으니 직접 올 수밖에.”
“그걸 내가 왜 알아야 되는데?”
“너 보고 맡긴 고객들이니 일단 네가 얼굴은 비쳐야 할 거 아냐? 너희 할아버지 지인분이시라며?”
“할아버지 지인이신 건 맞지만 내가 꼭 얼굴 보일 필요는 없어. 네가 알아서 해.”
“알아서 못 해. 한두 푼 들어가는 공사도 아니고 우리 사무실 작업 중 가장 큰 건인데 대표인 네가 얼굴 보여야지. 연애야 사생활이니 뭐라고 안 하겠지만 일은 제대로 해야 할 거 아냐? 그리고 너 어제 영민이 길에 버리고 갔다며?”
어느새 두 사람 바로 앞까지 다가선 인재가 신경질적인 손길로 은테의 안경을 올리는 순간 신우가 놀라 한을 바라본다. 저게 무슨 소리냐는 얼굴에 한이 금시초문이라는 듯 어깨를 으쓱한다.
“택시 부르라고 버스 정류장에 내려 준 거야. 버린 건 아냐.”
확실히 버린 건 아니었다. 소나기가 내리고 기온이 뚝 떨어진, 심지어 타지였지만 요즘은 버스 정류장에 지붕도 있고 히터도 있고 에어컨도 있으니까.
하지만…….
“한아…….”
그 빗속에 사람을 낯선 길에 두고 온 거냐고 신우가 한숨을 내뱉자 인재가 친절하게 사정을 설명해 준다.
“네가 친절하게 버스 정류장에 버려서 택시를 불렀는데 폭우 덕에 택시가 오는 데 오래 걸려서 몸살로 뻗었대.”
“뭘 그 정도로 뻗어?”
“그 폭우 속에 애를 버리고 온 놈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
“그 자식이 무슨 미취학 아동이야? 휴대폰 없어? 손가락 부러졌대? 그 나이면 해외에 갖다 놔도 알아서 한국 돌아올 나이야.”
“너야 해외가 아니라 우주에 갖다 놔도 사기 쳐서 지구로 돌아오겠지만 모든 사람이 너처럼 요령이 좋진 않아. 하여간 오전에는 프레젠테이션 있으니 나와서 인사하고 계약 내용 확인하고 고객분과 점심 식사까지 한 뒤에 오후에는 사무실로 출근해서 밀린 서류 처리해.”
“우리 사무실 전부 전자 결재잖아.”
“아닌 것도 있어.”
“아닌 게 뭔데?”
“나한테 있어. 그러니까 그냥 출근해.”
절대 네가 재택근무하게 두지 않겠다는 듯 인재가 강경하게 버티고 서 있자 한이 작게 혀를 찬다.
“귀찮게.”
진짜 나가고 싶지 않다는 한의 투덜거림에 인재의 눈이 번뜩인다.
“너 지금 귀찮다고 했냐?”
한바탕 잔소리를 퍼부을 것 같은 인재의 기색에 두 사람의 눈치를 살피던 신우가 대화에 끼어들었다.
“출근해, 한아. 중요한 미팅이잖아.”
“나 없어도 되는 일이야.”
“어차피 나도 일해야 해. 좀 쉬다가 할아버지 깨시면 인사드리고 일할 거야.”
어제 하루를 날린 탓에 오늘부터는 좀 과하게 일을 해야 한다고, 신우가 조금의 과장을 담아 한을 설득하자 한이 불만스러운 얼굴을 한다.
“오늘은 종일 옆에 붙어서 안 떨어지려고 했는데.”
“앞으로 지긋지긋하게 보게 될 테니 출근해.”
“종일 봐도 안 지긋지긋해.”
“그럼 더 애틋하게 나가서 일해.”
한의 억지에도 신우가 물러서지 않고 웃으며 대꾸하자 한이 작게 혀를 찬다. 안 먹혔다는 의미다.
“들었지? 빨리 준비해.”
신우의 지원을 받은 인재의 마지막 한 방에 한이 못마땅한 얼굴로 신우를 바라본다. 섭섭함과 심술이 묻은 그 얼굴에 신우가 어서 가라는 듯 고갯짓하자 결국 한이 ‘알았어, 간다, 가,’라고 중얼거리며 마루 위로 올라선다.
“준비할 테니까 기다려.”
“11시 미팅이야. 빨리해!”
“알았다고.”
투덜거리며 대청마루를 가로지르는 한을 본 신우가 막 인재에게 올라오라고 하려는데 갑자기 인재의 화살이 신우에게 돌아간다.
“그리고 신우 씨, 저번에 부탁드린 작업 아직 안 왔다던데 언제까지 되나요?”
갑작스러운 인재의 지적에 그제야 신우는 자신도 한과 같이 땡땡이를 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작업은 다 했는데 정신이 없어 마무리하는 걸 깜빡했다.
“오전에 보내 드릴게요. 작업은 다 끝났어요.”
“빨리 보내 주세요. 한이랑 둘이 연애하는 건 좋은데, 일은 제대로 해 주셔야죠. 둘이 같이 놀면 저희 회사 피해가 막심합니다. 놀 거면 한 사람만 놀아 주시면 감사하겠네요.”
뜨끔한 인재의 지적에 신우의 고개가 다시 아래로 향하자 막 툇마루로 들어서려던 한이 삐죽하니 고개만 내민 채 인재에게 소리친다.
“넌 왜 신우한테 시비야?”
“시비가 아니라 사실을 말하는 거야. 지금 미친 듯이 일 들어와서 정신을 못 차릴 정도로 바쁜데 제일 손 빠른 신우 씨가 손 놓고 있으면 정우 씨 일하는 속도로는 맡은 일 절반도 처리 못 해.”
“신우 우리 회사 직원 아냐. 그만 볶아.”
“아시 전용 프리로 일하면 절반은 우리 회사 직원이야. 내가 출근하라고까지는 안 하겠는데요, 신우 씨. 제발 한이한테 휩쓸려서 같이 놀지 말아요. 쟤 요즘 완전 정신 나갔다고요. 신우 씨가 뭐라고 하고 좀 야단도 치고 하세요. 남의 말은 전혀 안 듣는 녀석이지만 신우 씨 말이라면 들을 테니까요.”
말투는 호통을 치는 듯 따끔했지만 말의 내용은 그런 느낌이 아니었다. 애정과 걱정이 담긴 인재의 목소리에 신우는 겸연쩍은 듯 웃었다.
“죄송해요. 주의할게요.”
예의 바른 신우의 답에 툇마루에서 고개만 빼고 서 있던 한이 재빨리 호칭을 정리해 준다.
“야, 동갑끼리 무슨 존대야? 그냥 말 놔. 앞으로 평생 볼 텐데 볼 때마다 누구 씨, 누구 씨 할 거야?”
평생이라는 말에 인재와 신우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봤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위화감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흐르던 중, 뭔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인 인재가 먼저 입을 연다.
“그럼 말 놓을까요? 그게 서로 편할 것 같긴 한데.”
“네, 그러세요.”
“좋아. 그럼, 말 놓을게. 그리고 앞으로는 급한 일 생기면 너한테 연락할게. 저 자식, 툭하면 연락 안 받으니까.”
“그래.”
처음엔 차갑고 매서운 인상이라 친해지기 힘들 거라 생각했는데 알고 지낼수록 괜찮은 친구라는 느낌이 드는 사람이었다, 서인재는.
한처럼 화려하거나 눈에 띄는 타입은 아니지만 차분하고 정갈하다. 신경질적인 구석이 보이긴 했지만 한과 같이 일하려면 그 정도의 예민함은 미덕이다.
아무리 봐도 한은 너무 불안하다.
“잠깐! 너희 둘이 친해졌다고 내 욕 하지 마.”
두 사람이 눈빛으로 서로를 안쓰럽게 보고 있다는 걸 눈치챈 듯 한은 재빨리 불만을 토해 냈다. 순간 ‘드럽게 눈치 빠른 새끼’라고 입 안으로 중얼거린 인재가 한을 재촉한다.
“빨리 준비해. 미팅 11시라고 했다.”
벌써 9시라고 인재가 차고 있던 손목시계를 두드리자 더는 미적거릴 수 없는지 한이 툇마루로 향한다. 마루 위를 울리는 발걸음 소리에 혀를 차며 고개를 내젓던 인재는 잠시 후 뭔가 생각난 듯 가방을 뒤져 서류 봉투를 하나 꺼내 들었다. 그러곤 신우에게 봉투를 건넸다.
“이거, 어제 오후에 왔어. 네 이름으로 왔길래 일단 내가 받아 놨어.”
그 말에 서류 봉투를 받아 든 신우가 의아한 듯 고개를 기울인다.
“회사에 내 이름으로?”
“응. 회사로 와서 한이 통해 전해 주려고 했는데 저놈이 출근을 해야 말이지.”
참 고생이 많은 인재의 탄식에 겸연쩍은 듯 웃음을 흘린 신우는 새하얀 서류 봉투 위에 적힌 발송인의 이름을 확인했다.
[나무 이야기]
봉투 위에 프린트된 이름을 봐도 짚이는 바가 없다. 하지만 수신인은 분명 자신의 이름이 맞아, 봉투를 열어 안을 확인하자 안쪽에 든 계약서가 보였다.
“아…….”
그러고 보니 원혁이 계약서를 우편으로 보냈다고 했다. 그런데 어떻게 이걸 아시로 보낸 건가 해 뚫어져라 계약서를 바라보고 있자, 계약서 안에서 카드 한 장이 떨어져 내렸다.
“나무 이야기랑 일했어? 여기 가구 꽤 괜찮은데.”
“같이 일한 건 아니고…… 그냥 아는 사람이 있는데…… 대학교 때 내가 만들었던 의자를 팔고 싶다고 해서.”
“의자?”
“응. 내가 그 사람 일을 도와줬던 건데 의자를 팔려면 계약이 필요하다고 해서 한 거야.”
“가구 디자인도 해?”
“아니. 원래 인테리어 쪽이야. 그 사람이 가구 디자인 전공이라 작업을 보조했던 것뿐이야.”
가족이 쓰는 가구를 만드는 작업이 좋았던 것뿐이라 답하고, 무릎 위에 떨어진 카드를 손에 든 신우는 그 내용을 확인했다.
카드의 앞면에는 ‘한국 가구 박람회’라는 글자가 큼지막하게 인쇄되어 있었고 그 아래 빈 공간에는 펜으로 쓴 짤막한 메시지가 적혀 있었다.
[네 의자도 나올 거야. 구경 와.]
분명 원혁의 글씨였다. 자신이 연락을 받지 않으니 서류 봉투에 같이 넣어 보낸 모양이었다.
“아, 나무 이야기도 이번에 박람회에 나오는구나. 잘됐네. 그렇지 않아도 나무 이야기 가구 좀 보려고 했는데, 네 의자도 나오는 거면 같이 가자. 이번 주 주말부터 시작인데…… 이번 주는 바쁘고 다음 주는 어때?”
“어, 글쎄…….”
자신도 오랜만에 그 의자를 보고 싶긴 했지만 과연 한이 얌전히 가라고 해 줄지는 의문이었다. 이야기를 꺼내는 즉시 안 된다고 하거나 본인도 데려가라고 할 게 뻔해 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이는데 바로 뒤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왔다.
“뭐야? 너희 둘이 어디를 가?”
어느새 깔끔한 여름 양복을 걸친 채 머리까지 정돈하고 나온 한이 심술이 잔뜩 묻어나는 음성으로 묻자 인재가 한을 돌아보며 마침 잘됐다는 듯 말을 건넨다.
“너도 같이 가는 거야. 나무 이야기 가구 박람회에 나가나 봐. 여기 가구 괜찮아.”
“가구 박람회?”
“응. 나무 이야기는 작년까지는 참가하지 않았거든. 여기가 주문 생산만 하는 데라 고가이긴 한데 나무질이나 디자인이 좋아. 나무 의자인데도 폭신한 느낌이야. 그렇지 않아도 한 번 같이 일했으면 했는데 이 김에 가서 보지, 뭐.”
인재의 제안에 신우의 뒤로 다가온 한이 신우가 들고 있던 초대장을 뺏어 든다. 그러곤 역시나 그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한 뒤 신우를 한 번 바라보다 다시 신우가 들고 있는 계약서를 내려다본다. 그러더니 잠시 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안 돼. 안 가. 신우, 너도 가지 마.”
너무나 예상했던 그 반응에 신우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안 이랬으면 섭섭했을 거다.
“내 의자 보고 싶다며?”
“나도 의자는 보고 싶지만 가는 건 안 돼.”
“……나도 굳이 가고 싶은 건 아닌데…….”
“그럼, 가지 마. 의자만 받아 오면 되니까. 너랑 그 자식 부딪치는 거 싫어.”
계속되는 두 사람의 대화에 가만히 둘을 지켜보던 인재가 이상하다는 듯 묻는다.
“자기가 디자인한 의자가 나오는데 왜 안 가? 일 때문에라도 가 보는 게 보통인데 자기 작품이 나오면…….”
이런 이벤트가 흔한 것도 아니고 아주 드문 케이스인데 왜 가면 안 되냐고 하려다 신우와 한 사이의 미묘한 분위기를 눈치챈 듯 인재가 말을 멈춘다.
대학 때 같이 작업을 했다는 거나, 가지 말라는 한의 태도나, 여러모로 봤을 때…….
“혹시, 전 애인……?”
설마 하는 인재의 물음에 신우가 쓰게 웃는다. 긍정의 반응에 인재가 눈을 휘둥그레 뜬다.
“와, 그렇다는 건 전 애인하고 같이 만든 가구라는 거잖아? 그것도, 의자면 책상이나 테이블하고 세트 아냐?”
인재가 무의식중에 내뱉은 그 말에 한의 눈이 순간 크게 떠진다. 그리고 신우 역시 그제야 그 의미를 깨닫고는 당황했다.
사실, 그때 식탁은 원혁이 만들었다.
묘한 기분에 신우가 한의 안색을 살피자 한이 비장한 얼굴로 선언한다.
“나, 가구 디자인으로 전향해야겠어.”
갑작스러운 한의 선언에 인재가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린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아니, 가구도 만들어야겠어. 윤슬 가구들 내가 직접 만들 거야.”
“시간 남아도냐?”
온몸으로 ‘이거, 미친 새끼 아냐?’라고 표현하는 인재를 보고도 한은 완고했다.
“만들 거야. 목공소도 터 놨겠다, 그 집에 어울리는 가구 직접 내가 디자인할래.”
“벌써 더위 먹었냐?”
“하여간 할 거야. 신우 너도 같이 만드는 거야.”
갑자기 자신에게 날아온 화살에 신우는 고개를 내저으며 마루에서 일어섰다.
“난 지금 하는 일도 충분히 많아서 사양할게. 나도 옷 갈아입고 일해야겠다. 아, 일이 아주 바쁘네…….”
“나랑은 안 만들겠다고?”
또 시작된 한의 억지에 신우는 귀찮다는 듯 손을 설레설레 내저었다.
“하던 일이나 제대로 할래. 빨리 가 봐. 길 막힐 수도 있잖아.”
신우가 인재를 바라보며 어서 이 녀석 좀 데려가 달라고 애원하는 듯한 시선을 보내자 그 눈빛을 기가 막히게 알아챈 인재가 한을 재촉한다.
“야, 빨리 움직여. 차는 내 차 타고 가자. 가서 준비도 해야지.”
더는 머뭇거릴 시간이 없다며 인재가 앞서자 마루 아래로 내려선 한이 신발장을 열어 구두를 찾아 신는다.
“신우, 넌 돌아와서 얘기해. 서인재, 서류는 다 챙겼어?”
“꼼꼼하게 다 챙겼으니까 걱정하지 마. 네 정신만 챙기면 돼.”
“내 정신은 늘 완벽하게 준비돼 있어.”
거기까지 말한 뒤 다시 양복 매무새를 다듬으며 신우를 본 한이 마루 위에 서 있던 신우에게 손짓을 한다. 가까이 오라는 그 손짓에 신우가 허리만 숙여 한을 바라보자 한이 입을 맞춘다.
“갔다 올게. 얌전히 쉬고 있어.”
갑작스러운 그 키스에 신우가 놀라며 한의 뒤에 선 인재의 눈치를 살폈다. 직접 말로 하지는 않았지만 인재의 얼굴에는 ‘지랄한다’라고 쓰여 있었다.
오늘 하루 평생 느낄 수치심을 다 느낀 듯했다.
그럼 이제 더 창피할 일은 없겠지, 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한 뒤 신우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빨리 가. 늦겠다.”
“나 그럼 점심 취소인데……. 아주머니께 내 거 낙지 만두 남겨 달라고 해.”
“알았어.”
꼭 그렇게 전할 테니 이제 제발 좀 가라고 신우가 고갯짓을 하자 인재가 그 대화에 끼어든다.
“낙지 만두? 그거 나도 좀 얻어먹어도 되냐? 나 낙지 만두 좋아하는데.”
“안 돼. 너 줄 건 없어.”
“치사하게. 밥 좀 먹여 주면 어디가 덧나냐?”
“많이 덧나. 신우야, 너무 일하지 말고 쉬다 해. 일 안 급해.”
쉬엄쉬엄하라는 한의 걱정에 인재가 한의 말을 정정했다.
“아니, 급해. 최대한 빨리 넘겨줘.”
“빨리 처리할게. 그러니, 제발 좀 가.”
뭐든 상관없으니 이제 제발 나가 보라는 듯 신우가 손을 훠이훠이 내젓자 한이 못내 아쉬운 듯 걸음을 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인재 역시 한의 옆에서 걸음을 옮기며 신우에게 손을 흔들어 인사를 건넨다.
“나중에 봐.”
“그래.”
드디어 별채를 떠나는 두 사람을 배웅하려는 듯 신우는 잠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햇살이 너무 강했지만 아직 방으로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햇살이, 그리고 풀 냄새와 멀리서 풍겨 오는 아까시나무 꽃의 향이 향기로웠다.
그 초여름의 풍경과 너무나 잘 어울리는 한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신우는 두 사람이 저 멀리 돌담길 너머로 사라지고 나서야 마루 위에 내려 둔 서류와 카드를 챙겨 들었다.
“일하자.”
“신우 씨, 아니 신우 좋아 보이더라.”
대문을 빠져나가는 차 안에서, 운전석에 앉아 있던 인재가 그렇게 말을 던지자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훑어보던 한이 고개를 끄덕인다.
“응. 좋아졌어. 지금도 좋아지고 있는 중이고. 앞으로는 더 좋아질 거고.”
“사실 아까 좀 놀랐어. 네가 평생 볼 거라는 말을 할 줄은 몰랐거든.”
“왜? 너도 나 평생 볼 거고, 나랑 걔는 평생 같이 있을 건데?”
“그래서 놀랐다고. 나도 예은이한테 청혼할 때 평생 보자고 할까?”
“아서라. 뭐든 케이스 바이 케이스인 거 몰라? 파혼당하기 싫으면 제대로 해.”
“뭐…… 슬슬 하긴 해야지. 예은이네서 은근히 서두르는 기색이니.”
“빨리 해. 같이 사는 거 아주 좋아. 아침에 저 녀석 얼굴 보면 눈이 번쩍 떠지거든. 종일 붙어 있어도 안 질려. 너무 좋아.”
입가에 미소를 단 채 동거의 즐거움에 대해 일장 연설을 하는 한을 힐끔 본 인재가 질렸다는 듯 고개를 설레설레 내젓는다.
“난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가 그럴 줄은 몰랐다. 너, 누구랑 같이 못 산다고 했잖아. 저 넓은 집에서 혼자 자라서 누가 옆에서 버석거리거나 옆방에서 시끄럽게 구는 거 질색이라고.”
“신우는 괜찮아. 버석거리면 더 좋지.”
신우는 뭐든 예외라는 한의 말에 인재가 기가 찬다는 듯 받아친다.
“그렇게 좋냐?”
“응. 좋아.”
“너희 둘 꼴 보기 싫어서 나도 빨리 결혼해야겠다. 그나저나 우리 동기들 알면 다들 놀라 나가떨어지겠는데? 넌 평생 변덕만 부리다 끝날 거라고 장담했었는데.”
“왜 그렇게들 남의 인생에 관심이 많아?”
“네가 재미있는 캐릭터니까. 나중에 예은이랑 신우랑 같이 식사하자. 예은이한테도 슬쩍 얘기했는데 만나 보고 싶다더라. 네 목에 쇠줄 감아 놓은 사람이라니 궁금해 죽으려고 하던데?”
“예은이라면 괜찮지. 날 잡아서 연락해.”
“그런데, 너희 부모님은 괜찮으시겠냐? 네 동생들이야 너한테 찍소리 못 하니 그렇다 쳐도 부모님들은 좀 당황해하실 것 같은데.”
“괜찮아. 우리 할아버지 선에서 정리될 거야. 안 그러면 천천히 정리해 나가야지. 일단 믿게 해 드리면 되니까.”
“잘해라. 괜히 신파 드라마 찍지 말고.”
“우리 부모님이 그러실 분들은 아니지.”
그렇게 쉽게 지나갈 문제가 아닌 것 같기는 했지만, 한이라면 알아서 잘하겠거니 하고 인재는 적당히 화제를 돌렸다.
“하여간, 너나 신우나 좋아 보여서 다행이다. 한동안 신경질만 부리고 다니더니 이제 좀 사람 같아 보이네. 이 김에 일도 제대로 해 줬으면 더 바랄 게 없겠어.”
“걱정 마. 일은 놀랄 정도로 제대로 해 줄 테니까.”
“그래, 그런 의미에서 나도 저녁 먹여 줘.”
“안 돼. 예은이랑 먹어.”
“나도 사람 밥 좀 먹자.”
“주말에 먹으러 와. 오늘은 할아버지랑 신우랑 셋이 오붓하게 밥 먹을 거야.”
“주말에는 와도 돼?”
“주말은 개방이야.”
“그럼, 나 감자전 먹고 싶어. 너희 집 아주머니 음식 진짜 잘하셔. 5년 전 먹었던 그 맛이 아직도 생각나.”
“우리 할아버지가 워낙에 미식가잖아.”
뭐든 최고를 추구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나 먹는 데에 유독 집착하시는 분이라 본가를 거친 요리 연구가와 요리사만 해도 엄청났다. 한 역시 그 기질을 그대로 물려받아 ‘오늘 뭘 먹어야 잘 먹었다고 소문이 날까?’ 고민하는 게 이 집안의 가풍이 될 전망이었다.
“너희 집은 그런 게 좋다니까. 뭐든 최고라 가는 보람이 있어.”
“사람이 최고니까.”
자신감이 넘치다 못해 오만하기까지 한 한의 답에 막 골목을 빠져나와 도로로 차를 몰던 인재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이렇게 재수가 없어야 정한이지.”
“사람은 잘 안 바뀌니까.”
“그래,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날 받아 놨나 걱정되더라.”
“그건 진짜 두고 보면 알겠네. 어차피 평생 볼 테니 변하는지 안 변하는지, 갑자기 변하면 죽는 건지.”
거기까지 말한 한은 문득 자신이 한 말의 의미를 되새기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띠었다. 그러곤 작게 중얼거린다.
“그래, 평생 보면 알겠지…….”
이제 자신의 입에서 너무나 쉽게 나오는 ‘평생’이라는 단어에 한은 나른한 미소를 지었다.
출근은 전혀 달갑지 않지만 오늘만은 이 출근길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미팅 후 고객과의 점심 식사까지 완벽하게 마치고 겨우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태양이 가장 뜨거운 시간이었다.
아슬아슬하게 법망에 걸리지 않을 정도로 짙게 한 썬팅도 여름 햇살엔 속수무책이었다. 에어컨에서 나오는 찬 바람과 창밖에서 뚫고 들어오는 햇살이 전쟁을 벌이는 것을 몸소 느끼며,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온 한은 오늘은 별채의 차고에 차를 세우곤 마당을 돌아 마루 쪽으로 향했다.
보기만 해도 눈이 시원해지는 푸른 잔디가 잔뜩 갈린 마당을 지나 마루로 향하던 한은 대청마루 위에 누워 있는 신우를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뭘 했는지 바짓단은 접어 올린 채였고 셔츠 자락도 살짝 젖어 있었다.
“뭘 한 거야?”
이불 빨래라도 한 건가 했지만 세탁기 두고 그런 걸 할 리가 없다. 그렇다고 물장난을 쳤을 리도 없고.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마루로 올라가 신우의 옆에 앉은 한은 세상모르고 잠든 신우를 지그시 내려다봤다.
편안해 보이는 얼굴과 숨소리. 자신이 가까이 오는데도 마음 편히 잠든 그 모습에 자신 역시 평온해졌다.
신우를 둘러싼 서늘한 기운이 이 강렬한 볕에 한풀 꺾인 느낌이었다.
더는 신우가 춥고 외로워 보이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한여름에도 신우는 늘 추워 보였다. 그 차가움은 싸늘하고 건조한 것보다는 서늘하고 습한 느낌에 가까웠다. 그래서 볼 때마다 따뜻하게 해 주고 싶었다. 습기 찬 우울이 밴 피부 위로 볕을 쬐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웃어 주었으면 했다.
괜한 심술을 부려 13년이라는 시간을 날리긴 했지만 결국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왔다.
“……악연이 아니라, 인연인 거지.”
인재가 보낸 메일 안에서 신우의 이름을 본 순간 떠올린 질문의 답은 그때 이미 나와 있었다. 이 녀석과 자신은 어떻게든 다시 만날 운명이었던 것 같다는, 그런 확신이 들었다.
그리고 그런 걸 두고 바로 인연이라고 했다.
어디를 헤매건 결국엔 돌고 돌아 제자리를 찾는 운명.
잠든 신우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자신도 나른해지는 듯해 가방과 재킷을 옆으로 밀어 둔 채 넥타이를 풀고 신우의 옆에 누웠다. 그러곤 조심스레 신우의 머리 아래로 팔을 넣어 팔베개를 해 준 순간 몸을 뒤척인 신우가 품으로 파고들어 온다.
따뜻한 햇볕과 팔을 통해 전해지는 신우의 체온에 스르르 입매가 풀렸다.
모든 게 따스하고 기분 좋고 사랑스러웠다.
가슴속을 술렁이게 하는 그 온기에 절로 눈이 감긴다.
나른하고 피곤하지만 그 이상의 행복이 있었다. 신우도 지금 이런 기분이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늘 이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일었다.
매일이 오늘처럼, 행복하고 평화롭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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